천지꽃과 진달래 - 허성운

나나 | 2022.03.20 09:48:05 댓글: 0 조회: 3796 추천: 3
분류일반 https://life.moyiza.kr/crcncolumn/4357288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는 것은 꽃이 아니다. 매서운 칼바람에도 찢겨지지 않고 얇은 꽃잎을 터뜨리는 것은 꽃의 힘이다. 바위 틈 낭떠러지에도 군데군데 무리지어 자라는 것은 단단한 씨앗을 터뜨리기 위한 꽃의 힘이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세월 비축한 꽃의 힘은 굳센 바위의 틈새를 깨뜨리어 버린다.

어릴 때 천지꽃이라 불러 왔던 이 꽃 이름을 오늘날에 와서 사람들은 진달래라 부른다. 진달래광장, 진달래마을, 진달래국수 이름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만 천지꽃이란 옛말은 연변의 각종 행사와 의전은 물론 여러 언론에서도 그 자취가 사라진지도 오래되어 이젠 두 눈에 비비고 샅샅이 찾아보아도 좀처럼 보기 힘든 고어로 되어버렸다. 거기에 더 안타까운 것은 천지꽃에 대한 리해는 고작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라는 중국 어느 로시인의 옛 시구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우리의 천지꽃이 지니고 있는 력사와 문화의 가치 그리고 미래비전에 대하여 처음부터 지금까지 종래로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표준어라는 잣대로 우리 문화와 력사가 스며있는 향토 말을 무시하고 몰아내고 깨끗이 숙청하였다. 지난 세기 80년대 이전에는 평양 말을 기준으로 수많은 조선말규범집을 내왔다. 90년대에 들어와 한국 드라마와 노래방 기계를 걸머쥐고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한국말 앞에 우리는 올바른 해결책 마련하지 못하고 줄곧 수수방관하여 왔다. 그 사이 일부 학자들은 노루 꼬리 같은 막대기로 연변과 함경도 방언을 제멋대로 들쑤셔 놓았다. 이를테면 연변과 함경도에서 습관적으로 쓰이는 말 “일없다”란 말을 중국말 메이써(沒事)에서 비롯된 것으로 착각하고 한국식으로 “괜찮다”로 바꾸어 써야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물론 필자는 여기에서 진달래란 표준어에 대해 의론하고 싶지 않다. 다만 천지꽃은 "天指花"로 오랜 고서에도 기록되어 있다는 점과 진달래를 닮은 철쭉꽃 이름도 천지꽃 소리와 근접되어 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사실 연변과 함경도 지역에서 쓰이는 천지꽃은 재가승과 련관되어 있다. 재가승은 전통적으로 그 어느 편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모든 곳에 속해 있었다. 물고 물리는 피의 살육전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 두만강 류역에 오랜 세월 두고 서로 다른 세력들이 판 가리 싸움으로 찢겨지어 나간 자리에 스며들어 갈라진 틈을 메워가는 다시 말해 벽돌 같은 조각들을 시멘트로 접착시키는 그 과정에 재가승 이라는 존재가 들어 있다. 그들은 집에 부처님을 모시고 천지꽃 나뭇잎을 건조하여 가루를 내어 향을 피웠다고 전하고 있다. 장백산 일대 천지꽃 향을 재가승들은 "安楚香"이라 부르고 한편 제사용으로도 썼다. 여기에서 "安楚" (alcun)은 금나라시기 여진어로 "爱申"으로도 해석이 가능하여 함경도와 연변일대에 보존되어 있는 안신제 장례풍속과도 류사한 양상을 띠고 있다.

연변과 함경도 지역의 천지꽃은 다른 지역과 달리 양력 4월 말 5월 초 피여 나는 꽃이다. 진분홍 색소를 한껏 빨아들인 해면같이 산은 산마다 진분홍빛을 간직해 두었다가 음력 사월초파일에 맞추어 일시에 눈부시게 그 빛깔을 내뿜는다. 그 속에서 베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짜면 진분홍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았던 그 옛날 천지꽃은 부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꽃을 뿌려 그 발길을 영화롭게 한다는 산화공덕이란 말과 일맥상통된다.

봄이면 두만강 굽이굽이 산 능선을 따라 진분홍빛으로 물들어 놓은 천지꽃은 재가승과 함경도 화전민들의 섞임과 공존의 세월을 거듭하면서 화전을 일구던 불씨처럼 타올라 천불붙이 천불을 점화시키고 훗날 수많은 백성들이 연변에로 이주하는 서막을 열어놓았다.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가 천지꽃을 멀리했어도 천지꽃은 외로운 것이 아니다. 천지꽃 이름을 올바르게 부르지 못한 우리가 오히려 외로워지고 있다는 점을 우리 자신이 스스로 뼈저리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 우리 혀끝에서 저도 모르게 튕겨 나오는 사투리 말로 우리는 언어교류에서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때로 따돌림까지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끝까지 천지꽃이란 이름을 버릴 수 없는 까닭은 천지꽃이 우리 오랜 영혼의 향기 특유의 문화유전자가 들어있는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머나먼 이국 타향에서 잔디 깎는 그 향긋한 풀냄새가 풍겨올 때에도 천지꽃 향기를 상상하게 되며 고향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달랠 수가 있다. 삶의 넓이와 두께 그 틈새로 스며드는 천지꽃이란 말 향기는 선인들의 체취를 싣고 우리 마음 깊숙한 곳으로 배달되어 온다.

천지꽃에 대한 깨달음은 철두철미하게 우리 안에서 무르익어 터져 나올 때에야 만이 그 자체의 역동적인 힘을 내재하게 된다. 자신의 유전자가 스며있는 향토 말을 버리고 무작정 세간에 류행하는 말만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냉수 한바가지를 퍼붓고 우리 모두가 정신을 차릴 때가 왔다고 말하고 싶다.

그 동안 우리는 여러 모로 성장하여 왔다. 이제 천지꽃을 보는 우리의 안목도 그만큼 성장할 때가 되였다.
저자: 칼럼리스트 허성운

추천 (3) 선물 (0명)
IP: ♡.123.♡.37
728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너의향기^
2005-10-25
29
16924
나나
2023-05-13
0
3530
나나
2023-02-15
2
4909
선휘서원
2022-10-16
2
4819
선휘서원
2022-10-15
0
4083
선휘서원
2022-10-07
1
3275
선휘서원
2022-10-05
0
3171
선휘서원
2022-10-04
0
4651
선휘서원
2022-10-03
0
4213
선휘서원
2022-10-03
0
3626
선휘서원
2022-10-02
0
2510
선휘서원
2022-10-02
0
3022
선휘서원
2022-10-01
0
3068
선휘서원
2022-10-01
0
3079
나나
2022-03-20
3
3796
나나
2022-01-14
2
4804
선휘서원
2019-02-22
0
7440
선휘서원
2019-02-21
0
4502
선휘서원
2019-02-18
0
4251
선휘서원
2019-02-16
0
4182
선휘서원
2019-02-14
0
3772
선휘서원
2019-02-12
0
3881
선휘서원
2019-02-10
0
3847
선휘서원
2019-02-08
0
4115
선휘서원
2019-02-02
0
7700
선휘서원
2019-01-30
0
3073
선휘서원
2019-01-29
0
2288
선휘서원
2019-01-27
0
2951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