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손원평 작 (8)

호수 | 2021.09.16 16:43:40 댓글: 0 조회: 829 추천: 0
분류연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04353

22.
심 박사의 제안을 수락했다. 여러모로 내게 위험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더 이상 곤난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고 일상은 지속되었다. 나는 매출액을 늘려 보라는 말을 지키기 위해 매일 상태가 좋은 인기 도서나 공무원 수험서 따위를 검색하고 물량을 확보하며 시간을 보냈다. 추운 날씨엔 손님의 발길이 뚝 끊겨 온종일 입 한번 뻥긋하지 않는 날도 있었다. 어쩌다 물을 마시기 위해 입을 열면 단내가 코로 훅 올라왔다.
책상 구석에 세워 둔 작은 액자 속의 우리 셋은 변함이 없었다. 웃고 있는 모녀와 표정없는 나. 이따금씩 엄마와 할멈이 여행을 간 건 아닐까 하는 헛된 공상을 하곤 했다. 물론 결코 끝날 수 없는 여행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내 세계의 전부였다. 하지만 할멈과 엄마의 부재로 알게 된 건 새상에 다른 사람도 존재한다는 거였다. 한 명씩 천천히,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에 등장한다. 그 첫번째가 심 박사였다. 박사는 가끔씩 책방에 들러 빵을 놓고 가거나 내 어깨를 꽉 잡으며 힘내라고 얘기했다. 힘이 빠지지도 않았는데.
매서웠던 바람은 조금씩 기운을 잃어 갔다. 설이 다가오고 벨런타인데이가 지나고 사람들의 코트가 얇아지고 중학교를 졸업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느 연일 1,2월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다는 푸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3월이 되었다. 유치원생은 초등학생이 되고 초등학생은 중학생이 되는 때였다. 나도, 고등학생이 되기 위해 새로운 학교로 갔다. 다시 선생님과 이이들을 매일 만나야 했다.
그러자, 조금씩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23.
새로 다니게 될 학교는 지은지 이십 년쯤 된 남녀 공학 고등학교였다. 상위권 대학 진학률이 그다지 높진 않았지만 특별히 아이들이 드세다거나 안 좋다는 소문이 있는 곳도 아니였다.
심 박시가 입학식에 함께 가 준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나는 흔해 빠진 입학식 풍경을 멀찌감치서 홀로 구경했다. 건물은 붉은색이었는데, 최근에 내부를 새로 꾸민 탓에 건물 전체에 페인트 냄새며 건축 자재 냄새가 들어차 있었다. 교복이 아직 몸에 맞지 않고 뻣뻣했다.
학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다음 날 나는 담임에게 불려 갔다. 올해로 부임한 지 이 년째가 되는 여자 선생님으로 나보다 고작 열 살 정도 많아 보였다. 담당 과목은 화학이었다. 담임은 상담실의 낡은 보라색 소파에 몸을 던지듯 털썩 앉았고 그 충격만큼의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주먹손을 쥐며 콜록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캐햄, 하고 헛기침을 했다. 여기서는 선생님이지만 어쩌면 집에선 귀염받는 막내딸쯤 될지 모른다. 줄기차게 이어지던 캐햄 소리가 거슬릴 때쯤 담임이 경쾌하게 운을 뗐다.
- 힘들었지? 내가 뭘 도와야 할까?
담임은 내가 겪은 일을 대강 알고 있었다. 유족들의 심리 상담사와 변호사가 학교에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담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 괜찮아요.
라고 말했다.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담임은 입꼬리를 양쪽으로 바짝 당긴 채 눈썹을 위로 살짝 올렸다.

이튿날 종례 시간에 일이 터졌다. 담임은 그사이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느라 고생한 것 같았지만, 누구도 그런 모습에 감동하지 않았다. 그녀가 수고스럽게 외원 아이들의 이름은, 누구야 조용히 해, 누구야 좀 앉아 줄래, 따위로밖에 쓰이지 않았으니까. 학생들의 주목을 이끌어 내는 데 소질이 없는 사람인건 분명했다. 삼 초에 한 번씩 헛기침을 하는게 습관인지 중간중간 캐햄, 소리가 이어졌다.
- 자 그리고,
갑자기 담임이 톤을 높였다.
- 우리 반 친구가 아주 마음 아픈 일을 겪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가족을 잃은 친구가 있어. 모두들 그 친구에게 격려의 박수를 쳐 주자. 선윤재 일어나.
단임이 시키는 대로 했다.
윤재야, 힘내라.
담임은 먼저 그렇게 말하더니 양팔을 높이 들어 박수를 쳤다. 예능 프로에서 본, 녹화 현장 뒤에서 방청객의 박수를 유되하는 에프디 같았다.
아이들의 반응은 미적지근 했다. 여기저기서 치는 둥 마는 둥 박수 시늉만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개중 성의껏 치는 아이들이 몇 있어서 그나마 박수 소리가 들리기는 했다. 박수는 짧게 사그라들었다. 그 뒤를 이은 건 정적에 가까운 고요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수십 개의 눈동자였다.
전날 담임이 내게 뭘 도와줄까 물었을 때 괜찮다고 말한건 잘못된 답이었다.
- 신경 꺼 주시는게 돕는 거예요.
라고 말했어야 맞다.

24.
나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검색 창에 '크리' 라고 치기만 해도 자동 완성으로 크리스마스이브 살인, 크리스마스이브 사건 따위의 말이 떴고, 모친과 조모를 잃은 16세 선모 군에 관한 기사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찍힌 내 사진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지만 너무나 조악한 수준이라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복도 멀리에서 나를 가르키거나 내가 지나갈 때 공공연히 수군대는 아이들도 있었고, 급식 시간에 일부러 내 옆에 와서 앉거나 말을 걸어 주는 아이들도 있었다. 수업 중에 고개를 돌리면 영락없이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어느 날 한 아이가 모두 궁금해하는 걸 입 밖으로 냈다. 점심을 먹고 교실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복도 창밖으로 작은 그림자가 일렁이는 게 보였다. 나뭇가지가 창문에 닿았다 떨어졌다 하고 있었다. 나뭇가지 끝엔 조그마한 개나리 순이 돋아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나뭇가지를 반대 방향으로 틀어 주었다. 꽃이 해볕을 받아야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갑자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 야 엄마가 눈앞에서 죽었을 때 기분이 어땠냐?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몸집이 작은 아이 였다.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들에게 말대답을 자주 하고 자기의 행동으로 좌중에 어떤 분위기가 생겨나길 바라는 아이, 그런 아이들은 어딜가나 있다.
- 엄마가 안 죽었어. 죽은 건 할머니야.
내가 답하자 그 애의 입에서 호오, 하는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주변을 훑으며 눈이 마주친 몇몇과 낄낄대기도 했다.
- 아 그래? 미안. 다시 물어볼게. 할머니가 눈앞에서 죽는 걸 본 기분은.?
그 애가 다시 물었다. 주변에서 여자아이들이 어우 야, 뭐야, 하면서 야유했다.
- 왜 그래, 너희도 다 알고 싶잖아.
그 아이가 양쪽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어깨를 들썩하며 말했다. 조금 전보다 목소리의 크기가 줄어 있었다.
- 알고 싶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아다. 다들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창문을 닫고 교실로 들어갔다. 주변은 금세 다시 소란해졌지만 일 분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25.
그 일로 나는 좀 유명해졌는데, 물론 일반적인 기준에서 볼때 별로 좋지는 않은 유명세였다. 내가 복도를 지나갈 때면 아이들은 바다가 갈라지듯 양옆으로 비켜섰다. 곳곳에서 쑥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쟤야, 쟤. 생긴 건 평범하네, 따위의 말들. 나를 보러 1학년 복도까지 찾아온 2학년이나 3학년생도 있었다. 살인 현장을 직접 본 아이. 그것도 가족이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는 걸 본 아이. 그런데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는 아이.
곧 소문은 크기를 불러 나갔다.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나와 한 반이었다거나 나의 기행을 직접 목도했다는 증언들이 잇따랐다. 모든 소문이 그렇듯이 한껏 과장되어 있었다. 이이큐가 20이라거나, 가까이 가면 칼로 찌를지도 모른다거나. 심지어 엄마와 할머니를 죽인 게 나라는 말까지 나 돌았다.
엄마는 늘 집단생활에는 희생양이 필요하다고 얘기를 했었다. 엄마가 내게 그 지독한 교육을 시킨 것도, 내가 그 희생양이 될 확율이 매우 높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할멈이 사라진 지금 엄마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아이들은 내가 어떤 얘기에도 반응하지 않는다는걸 금세 눈치챘고, 그러자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나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짓궃은 농담을 퍼부었다. 더 이상 경우의 수를 늘려 가며 예상되는 대화를 만들어줄 엄마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교사 회의에서도 내 얘기가 나왔다. 내가 퇴는 행동을 한것도 아닌데 나의 존재 자체로 교실 분위기가 어수선 해진다고 학부모들이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선생님들은 나의 상태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 후 학교로 찾아온 심 박사는 담임과 긴 면담을 했고, 그날 저녁 우리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짜장면이 다 없어져 갈때쯤 심 박사는 본론을 꺼냈다. 빙빙 돌려 말했지만, 요약하자면 학교라는 공간이 내게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 학교를 그만두라는 말인가요?
심 박사가 고개를 저었다.
- 아무도 너에게 그러라고 할 수 없지, 내 말은,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 이런 식의 대우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거다.
- 전 별로 상관없어요. 제가 어떤 상태인지 아시잖아요. 엄마한테 들으셨다면,
- 엄마도 네가 이렇게 지내는 걸 원하지는 않았을 거다.
- 엄만 제가 정상적으로 살길 원하셨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가끔 헷갈리긴 하지만.
- 바꾸어 말하면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 평범 ... ...
내가 중얼거렸다.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남들과 같은 것. 굴곡 없이 흔한 것. 평범하게 학교 다니고 평범하게 졸업해서 운이 좋으면 대학에도 가고,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을 얻고 맘에 드는 여자와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 ... 그런것. 튀지 말라는 말고 일맥상통 하는 것.
-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걸 바란단다. 그러다 안 되면 평범하을 바라지. 그게 기본적인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말이다. 평범하다는 건 사실 가장 이루기 어려운 가치란다.
생각해 보면 할멈이 엄마에게 바란 것도 평범하이었을지 모른겠다. 엄마도 그러지 못했으니까. 박사의 말대로 평범하다는 건 까다로운 단어다. 모두들 ' 평범' 이라는 말을 하찮게 여기고 쉽게 입에 올리지만 거기에 담긴 평탄함을 충족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게는 더욱 어려운 일일 거다. 나는 평범함을 타고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비범하지도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평범해지는 것에.
- 학교는 게속 다닐래요.
그게 그날의 결론이었다. 심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 문제는 ' 어떻게' 겠지. 내가 해 줄수 있는 조언은 이거다. 머리라는 건 쓰면 쓸수록 좋아진단다. 나쁘게 쓰면 나쁜머리가 좋아지고 좋게 쓰면 좋게 발달되지. 네가 특정 부분에서 남들보다 취약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연습을 하면 어느 정도 달라질 수도 있을 거야.
- 연습은 충분히 하고 있어요. 에를 들면 이렇게.
나는 입꼬리를 양쪽으로 쓱 올렸다. 하지만 내 미소가 다른 사람들의 미소와 다르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 엄마에게 말씀드려 보렴.
- 뭘요?
- 네가 고등학생이 되었고 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고 말이다. 엄마가 좋아하실 거다.
- 그러필욘 없어요. 엄만 아무것도 듣지 못하니까요.
심 박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도, 그건 반박할수 없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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