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손원평 작 (9)

호수 | 2021.09.16 18:00:54 댓글: 0 조회: 937 추천: 0
분류연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04380


26.
빗줄기가 창문에 길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봄비다. 엄마는 비를 좋아했다. 비 냄새가 좋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빗소릴 들을 수도, 비 낸새를 맡을 수도 없다. 비 냄새라니, 그래 봣자 사실은 마른 아스팔트 위로 피어오르는 무리린내였을 거다. 엄마 옆에 가만히 앉아 손을 잡았다. 피부가 많이 거칠어 졌다. 어마의 뺨과 손등에 장미 향 로션을 발리주었다. 병실에서 나와 식당에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열리는 순간,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괴물과 만나게 한 사람. 내 삶에 그 아이를 끌어들인 남자.

은빛 머리의 중년 남자였다. 깔끔하게 차려 입었지만 어깨가 처져 있었고 탁한 눈엔 물기가 많았다. 표정이 밝았다면 꽤 잘생긴 얼굴이라고 할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핼쑥하고 어두웠다.
나를 본 순간 남자의 눈동자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머잖아 그를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에감이 들었다. 나에게 예감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건 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예감을 ' 느낀' 건 아니니까.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예감이라는게 ' 그냥 문뜩 느껴지는' 건 아니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들은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조건과 결과로 나뉘어 차곡차곡 쌓인다. 그러다 보면 비슷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 무의식적으로 결과를 예측하게 된다. 그러니까 예감이란, 사실은 매우 인과적인 데이터다. 과일을 갈면 주스가 될 것을 아는 것처럼. 남자가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나에게 그런 ' 예감' 을 주었다.
그 뒤로도 병원에 갈 때면 남자를 자주 마주쳤다. 식당에 서건 복도에서건 시선을 의식하고 돌아보면 언제나 그가 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관찰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책방으로 나를 직접 찾아왔을 때도 아무렇지 않은 듯 인사를 건넸다.
- 어서 오세요.
남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서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는 철학 서가를 지나쳐 문학 코너에 한동안 머문 뒤 책 한 권을 빼 카운터로 왔다.
얼굴 가득 미소가 담겨 있었지만, 남자는 왠지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런 건 어딘가 ' 불안한' 거라고 엄마가 말했었다. 그는 책을 내밀며 가격을 물었다.
- 백만원요.
- 생각보다 비싸구나.
남자가 책을 앞뒤로 뒤적였다.
-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니? 초판본도 아닌데. 어차피 번역이여서 초판본이라고 해도 별 의미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책의 제목은 ' 데미안' 이었다.
- 어쨌든 백만원이에요
그건 엄마의 책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엄마의 책장에 꽂혀 있던 책.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한 책. 팔지 않을 책이었다. 하필 그걸 고르다니 용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남자가 숨을 들이켰다. 면도한 지 며칠이 지났는지 수염이 삐죽히 자라나 있었다.
- 먼저 내 소개를 해야겠구나. 나는 윤권호라고 한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가르치고 있지. 인터넷어도 검색하면 나온단다. 자랑하려는게 아니라 신원이 보장된 사람이라는걸 말하려는 거다.
- 올굴은 알아요. 병원에서 몇 번 마주쳤잖아요.
남자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 기억해 주니 고맙구나. 네 보호자라는 심 박사도 만나봤다. 너한테 일어난 안타까운 사건에 대해서도 들었지. 네가 기특한 아이라는 것도. 심 박사가 너와 직접 얘기해 보라고 해서 찾아왔단다. 난 너한테 부탁을 하려고 온 거거든.
- 뭔데요?
그는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
-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 ...
- 부탁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그 부탁을 말씀하시면 돼요.
- 듣던 대로 넌 참, 명료하구나.
남자가 잠깐 웃었다.
- 넌 엄마가 편찮으니지? 나는 아내가 아파서 누워 있단다. 아내는 곧 떠날 거다. 어쩌면 며칠 안에 ... ...
남자의 등이 새우처럼 천천히 앞으로 말렸다.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 네게 부탁하려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내 아내를 마나러 나랑 같이 가 줬으면 좋겠다는 거다. 두 번째는 ... ...
그가 다시 심호흡을 했다.
- 아내 앞에서 우리 아들인 것처럼 행동해 줄 수 있겠니?
어려울 건 없을 거야. 내가 해 달라는 말을 몇 마디 해 주면 된다.
흔한 부탁은 아니었다. 자주 들어 보지 못한 건. 이상한거다. 이유를 물었다. 남자는 일어서서 책방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어떤 말이든 꺼내려면 시간이 좀 필요한 사람인 것 같았다.
- 우린 십삼 년 전에 아들을 잃어버렸단다.
남자가 운을 뗐다.
- 그 애를 찾으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소용없었지. 우린 부유했고 난 유학을 다녀와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됐다. 아내도 커리어가 훌륭했고, 나도 아내도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이를 잃고는 모든 게 달라졌단다. 우리 관계는 어그러졌고 아내는 병들었지. 나에게도 쉽지 않은 세월이었어. 네게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 ...
- 그래서요?
남자의 말이 너무 길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내가 물었다.
- 그런데 얼마 전에 전화를 한 통 받았단다. 아들일지도 모르는 아이가 있다고. 그래서 난 그 애를 만나러 갔지 ... ...
남자는 말을 멈추고 입술을 한참 동안 꽉 깨물었다.
- 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을 만나기를 바란다. 아내가 꿈꾸었던 아들을 말이야.
남자는 '꿈꾸었던' 에 힘을 주었다.
- 찾은 아들은 꿈꾸었던 모습이 아닌가요.
- 그것까진 말하기 힘들구나. 아니, 설명하기가 어려워.
그가 고개를 숙였다.
- 그러면 왜 저죠?
- 이사진을 보렴.
그가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실종 아동을 찾는 전단지 였다. 서너 살가량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의 사진 옆으로, 최근 모습 추정 사진이 있었다. 글쎄, 나와 닮았다면 닮았다고 볼수 있을것 같았다. 구체적인 생김새보다는 분위기가.
- 찾은 아들이 이렇게 안 생겼나요?
이해가 가지 않아 재차 물었다.
- 아니, 이 사진과 비슷하단다. 그러니까, 너와도 조금은 닮았다고 볼 수있겠지. 하지만 그 앤 지금 자기 엄마를 볼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다. 제발 부탁이다. 한 번만 도와 다오 ... ... 네 엄마의 병실을 더 좋은 곳으로 옮겨 주마. 간병인도 쓸수 있게 해 주고. 그거 말고도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가능한 들어주마.
남자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쉽게 그의 직업과 가족관계,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었다. ' 딱히 해가 되지 않는다면 도와주는 편이 좋다.' 할멈의 조언이 떠올랐다. 다음 날 그가 찾아왔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곤이를 먼저 알았더라면 그런 선택을 하진 않았을 거다. 그 선택으로 인해 나는 내 의도와 상관없이 곤이에게서 뭔가를 영원히 빼앗아 버린 거였으니까.

27.
갖가지 꽃이 병실을 장식하고 있다. 여기저거 켜 놓은 밝은 전구들이 따뜻하게 빛난다. 엄마가 있는 6인실과는 차원이 달랐다. 병실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 본 호텔 방 같았다. 아줌마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인 듯했다. 꽃향기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벽지까지 꽃무늬라 눈도 어질어질했다. 병원에 꽃을 들이는 건 원칙적으로 금지 됐다고 들었는데, 허용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저씨가 내 팔에 손을 두른 채 천천히 침대 앞으로 다가 갔다. 꽃에 둘러싸인 아줌마는 벌써부터 관 속에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서 본 아줌마의 얼굴은 영화에서 본 시한부 환자의 얼굴과 비슷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도 얼굴에 내려앉은 재빛 그늘을 지우진 못했다. 그녀가 나를 향해 나뭇가지 같은 손을 뻗었다. 뺨에 손이 닿았다.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손이었다.
- 너구나, 너야, 이수야, 우리 아들. 내 귀여운 아들, 왜 이제야 왔니 ... ...
아줌마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 몸으로 그렇게 울 힘이 남아 있다는게 의아했다. 그녀가 몸을 들썩일 때마다, 몸이 가루가 돼서 사라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미안하다. 난 엄만 말이야, 너랑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았어. 정말로. 밥도 먹고, 여행도 가고, 네가 커 가는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지 ... ... 그런데 사는 게 생각처럼 되지 않았구나. 그런데도 이렇게 잘 자라 주었네 , 고마워.
아줌마는 고맙다는 말을, 미안하다는 말고 번갈아 열 번쯤 하며 또 울었다. 그러더니 애써 웃음을 지었다. 거기 있는 삼십 분 내내 아줌마는 내 손을 잡고 뺨을 쓰다듬엤다. 얼마 안 남은 삶의 기운을 모두 나한테 쏟아붓는 것 같았다. 나는 많은 말을 하진 않았다. 아줌마가 잠깐 말을 멈추었을 때 아저씨가 눈짓을 주었고, 그때 미리 정해진 말을 했을 뿐이다. 좋으 가정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랐고, 이제 아빠의 곁에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그러고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기력이 다했는지 아줌마의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 안아 봐도 되겠니.
그게 아줌마가 내게 던진 마지막 말이었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아상한 두 팔이 내 등을 꽉 안았다. 단단한 덫에 걸린 것처럼.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심장 고동이 내게 전해져 왔다. 몹시 뜨거웠다. 곧 아줌마의 팔이 힘없이 풀렸다. 잠이 든 거라고, 곁에 있던 간호사가 말했다.

28.
아줌마는 한때 잘나가는 기자였다고 한다. 기지 넘치는 글을 써내고, 남들은 좀처럼 던지지 않는 용감한 질문으로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던 당차고 활기찬 기자. 다만 일이 바빠서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는 게 늘 마음에 결렸다.
그날, 아줌마는 모처럼 휴가를 내고 아이와 둘이 놀이동산에 갔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에 아이를 안고 올라탔다. 햇살이 따뜻한, 즐거운 소풍이었다. 아줌마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줌마는 한 번 더 타자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내려와 전화를 받았다. 짧은 통화였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자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손을 놓은 기억조차 없었다.
시시티브이가 지금처럼 모든 곳에 설치되어 있던 때도 아니고 그나마도 사각지대가 많았다. 오랜 수사에도 아이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다. 부부는 아이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희망은 차츰 희미해져 갔다. 살아 있기만을, 이왕이면 좋은 집에 있기를 기도 했지만 밤이건 낮이건 끔찍한 상상에 시달려야 했다. 아줌마는 스스로를 끝없이 책망했고 그녀가 좇던 성공이 한낱 허울 좋은 신기루였음을 깨달았다.
그런 생각이 서서히 아줌마를 병들게 했다. 아저시는 아이를 잃어버린 데 아내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자신도 외로운 사람이었기에 아내마저 잃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든 아줌마에게 언젠가 아들이 돌아올 거라는 말은 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나를 만나기 얼마 전 아저씨, 그러니까 윤 교수는 어느 보호 시설에서 연락을 받았다.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듣고 그곳을 방문한 그는 십삼 년 만에 자신의 아들을 다시 만났다. 하지만 아들은 당장 엄마를 만날 수 없는 처지였다. 왜냐하면 그 애가 바로, 곤이였기 때문이다.

29.
정말로 남아 있던 얼마 안 되는 힘을 내게 다 써 버렸던걸까. 내가 다녀간 날 아줌마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며칠후에 숨을 거두었다. 아줌마의 죽음을 알리는 윤교수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그렇게 전할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나같이 뭔가가 고장 난 사람이나 죽기 전에 이마 그사람을 마음에서 떠나 보낸 사람들만이 그럴 수 있다. 아저씨는 후자였다.
내가 왜 장례식에 갔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그러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했다. 어쩌면 아줌마가 나를 너무 꽉 안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줌마의 장례식은 내가 알던 할멈의 장례식 풍경과는 몹시 달랐다. 합동 장례식으로 어수선한 외중에도 그때 할멈의 여정 앞엔 나뿐이었다. 한데 아줌마의 장례식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의 친목회를 연상시켰다. 사람들은 모두 말끔했고 잘 차려 입었다. 모두들 '교양' 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직업과 말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서로를 부르는 호칭에서 교수, 닥터, 이사, 대표 따위의 단어가 자주 들렸다. 영정 사진 속의 아줌마는 딴사람 같았다. 입술은 붉고 머리숱이 많고 볼에 살이 통통하고 눈빛은 촛불을 컨듯 밝다. 그런데 아줌마 얼굴이 너무 젊다. 기껏해야 삼십 대 초반의 사진을 영정으로 쓴 이유는 뭘까. 아저씨가 내 의문을 눈치챈 듯 말했다.
- 그 애를 잃어버리기 전의 사진이란다. 그 뒤로는,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을 한 장도 찾을수 없더구나. 아내도 저 사진을 원했다.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죽기 전에 아줌마는 그렇게 바라던 소망을 이뤘다. 아들을 만나는 것. 적오도 그렇게 알고 갔다. 진실을 알았더라면 그녀는 조금 더 불행했을까.
그것으로 내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발걸음을 돌리는데 갑자기 공기가 서늘해졌다. 그 공기는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엄청난 힘을 가진 침묵의 습격을 받은 것처럼,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혹은 벌린 상태로 말을 멈췄다. 그들의 시선은 약속이나 한 듯 한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그 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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