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손원평 작 (13)

호수 | 2021.09.27 18:04:24 댓글: 2 조회: 789 추천: 0
분류연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08379

40.
- 씨바,되게 에술적이네. 다 가려 놔서 볼 것도 없다.
전에 사간 잡지를 카운터 위로 툭, 내려놓으며 곤이가 툴툴댔다. 말투와 행동은 비슷했지만 전보다 힘이 약해져 있었다. 책을 바닥에 던지지 않고 카운터에 올려놓은 것, 데시벨이 낮아진 목소리 따위. 반대로 어깨는 지난번 보다 조금 더 펴져 있었다.
왠지는 모르겠다. 어찌 됐든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곤이의 방문 내지는 습격을 자주 받았다. 거의 매일 저녁 녀석은 가게에 들렸다. 머무는 시간은 대중없었다 의미없는 말을 몇마디 던지고 휙 나가는 때도 있었고 조용히 책을 구경하거나 캔 음료를 훌쩍일 때도 있었다. 어쩌면 내가 그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기 때문에 더 자주 드나드는 건지도 몰랐다.
- 맘에 안들었다니 유감이다. 하지만 규정상 환불은 안돼. 하자가 있는 책이면 몰라도. 이렇게 사 간지 오래된 경우엔 더 그렇고.
곤이가 크게 흥. 소리를 냈다.
- 누가 환불해 달랬냐. 집에 놔두기 뭐하니까 그냥 다시 가져온거다. 빌려 본 값 낸 셈 치지 뭐
- 나름 고전이다. 마니아도 있을걸.
- 나 고전 읽은거냐. 독서 목록에 포함시켜야 겠네
제 말이 우스웠는지 곤이가 피식, 하고 웃었다. 하지만 내가 따라 웃지 않자 금세 정색하며 표정을 지웠다. 그런 말에 되웃어 주는 건 내겐 힘든 일에 속한다. 억지로 한다고 하더라도 입꼬리를 올리는 게 전부다. 억지웃음인게 너무 티가 나서 오히려 상대를 비웃는다고 오해받을 수도 있는 웃음.
초등학교 때부터 냉정하고 무미건조한 아이로 평가받은 것도 대부분 웃는 것 때문이었다.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웃는게 사외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던 엄마 조차 매번 설명을 하다 지쳐 버릴 정도 였으니까, 결국 엄마는 딴 방법을 생각했다. 딴짓을 하는 척한다든지 상대의 말을 못들은 척 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대부분 타이밍을 놓쳤고 한참의 침묵이 있는 뒤에야 간신히 할 말을 찾곤 했다. 지금 곤이 앞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고전에 대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 1995년에 만들어 진 거니까 잡지로 치면 할아버지지, 어렵게 구한 거야, 남들은 인정 안 할지도 모르는데, 진정한 고전이긴 해
- 그럼 다른책도 한번 추천해 줘 봐라. 고전으로,
- ' 그런' 종류의 고전?
- 그래, 네가 말한 ' 진정한' 고전,
고전은 은말한 곳에 놓는 법이다. 곤이를 구석의 서가로 안내했다. 가장 안쪽에 있는, 먼지 쌓인 서가의 귀퉁이에서 나는 그 책을 뽑아 들었다. 구한말에 찍힌 외설 사진들이었다. 양반과 기생이 껴안고 여러 가지 체위를 보인다. 과감하게 찍혀서 아주 노골적이다. 더러는 성기가 노출된 모습도 찍혀있다. 흑백 사진인 데다 한복을 입고 있다는 게 요즘과 다를 뿐.
곤이는 구석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책을 건네받았다. 페이지를 넘기자 마자 그애의 입이 떡 벌어졌다.
- 대박 우리 조상들한테 이렇게 대견한 구석이 있었냐.
- 대견하다는 말은 너보다 어린 사람한테 쓰는 말이야.
진심인데, 너는 활자를 좀 더 읽어야 될 필요가 있겠다.
- 지랄
그렇게 말하면서 곤이는 페이지를 넘겼다. 한 장 한장 유심이 보며 규칙적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몸이 근질거리는지 어깨를 으쓱하더니 가부좌한 다리도 좌우로 들썩였다.
- 얼마냐.
- 비싸, 아주. 특별판이거든. 복사본이긴 해도 소장 가치가 있지.
- 이거 찾는 사람도 있냐.
- 진정한 고전을 아는 사람들이 찾겠지. 얼마 없어서 진짜 수집가 아니면 안 팔거야.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서 봐라.
곤이는 책을 탁 덮고는 주변의 책들을 뒤적였다.[펜트하우스] [허슬러] [플에이보이] [선데이 서울 ] 귀하고 비싼것들이었다.
- 이런 건 누가 공수해 왔냐.
- 엄마
- 엄마가 센스 있으시네.
말해 놓고 곤이는 덧붙였다.
- 칭찬이다. 장사 수완이 있으시다고.

41.
그 말은 틀렸다. 엄마는 장사 수완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이었다. 나와 관계 된 일들이 아니면 엄마는 오로지 낭만과 기분을 쫓아 대부분의 일을 결정하는 사람이었고, 헌 책방을 차린 것 부터가 그 증거였다. 가게를 연 초반에 엄마는 어떤 책들로 책방을 꾸며야 할지 고민했다. 특별한 테마가 떠오르진 않았나 보다. 그저 다른 헌 책방들처럼 여러 가지 기술 서적, 학술 서적이나 문제집, 어린이책, 문학책 따위로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기로 했다. 그러고 나서도 돈이 조금 남자 엄마는 그 돈으로 헌 책방 안에 작은 커피 머신을 들여 놓겠다고 했다. 책과 향긋한 커피 향,딱이었다. 엄마 생각엔.
- 커피 머신은 얼어죽을.
콧방귀 뀐 건 할멈이었다. 할멈은 짧은 말 몇마디로 엄마를 발끈하게 하는 데 아주 소질이 있었다. 엄마는 자신의 고상한 취미가 조롱 섞인 언어로 재단된 것에 분노했다. 할멈은 눈도 깜짝 안하고 나지막이 덧붙였다.
- 야한 책이나 가져다 놔라.
엄마가 입을 떡 벌린 채 흥흥,소리만 내자 할멈은 설득의 기술을 발휘했다.
- 김홍도 그림도 춘화가 제일 멋지더라. 지나면 다 고전이다. 자극적일수록 더 가치 있는 고전이 되지. 그런 책부터 구해
그러곤 수미 쌍관으로 마무리 했다.
- 커피 머신은 얼어죽을.
엄마는 며칠을 골똘히 고민하더니 할멈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엄마는 인터넷을 뒤져 철 지난 잡지를 팔겠다는 사람들을 수소문했고, 용산역에서 처음으로 한 남자와 직거래를 했다. 양이 많아서 나와 할멈도 따라 갔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여자 둘에 청소년 하나인 우리의 조합에 놀라는 듯 하더니 엄머에게 돈을 건네 받고 쌩하니 사라졌다. 잡지는 논근으로 묶여 있어 표지가 그대로 보였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은 우리 셋과 우리 앞에 놓인 잡지 뭉치에 자주 눈길을 줬다.
- 그럴 만도 하지. 다 벗은 여자가 노끈에 묶여 있으니.
할멈이 혀를 차다 엄마의 원성을 들었다.
- 엄마가 시켜서 하는 거니까 공범 아닌 척 하지마!
그 뒤로 몇 차례 직거래가 성사됐고, 그러다 보면 곤이에게 보여 준 것 같은 희귀 자료도 건지곤 했다. 그렇게 몇번이나 발품을 판 끝에 할멈의 ' 고전 컬렉션' 이 완성되었다.
불행히 이 경우엔 혜안이 빗나갔다. 가끔씩 성인 잡지 코너에서 아저씨들이 책을 뒤적이는 몸습을 본 적은 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엄마의 20대 시절처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에로 비디오를 직접 구입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은밀한 짓은 온갖 경로로 집에서 아무도 모르게 해결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 2010년대 후번에 헌책방에서까지 야한 책을, 그것도 여주 주인 앞에서 내놓는 게 얘사로운 일은 아닌거다. 어느 중고 레코드 가게 시장이 인테리어를 한다며 몇권을 사간 걸 제외하곤, 그쪽 세계의 고전들은 단 한권도 팔리지 않았고 곧 구석에 처박혔다. 날권으로 당당하게 산 사람은 곤이가 처음이었다.

42.
그날 곤이는' 고전' 이라는 걸 핑계 삼아 몇 권의 책을 더 사 갔다. 대여는 안되느냐고 묻길래 나는 여기는 책을 파는 곳이지 빌려주는 곳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 알았다,꼴통아, 어차피 보고 다시 돌려줄 거야. 집에 보관하긴 뭐하잖냐.
욕은 여전했지만 확실히 전보다 부드러운 어조였다. 며칠 뒤 곤이는 또다시 책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돌려줄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곤이는 받아 새끼야, 하며 고집을 부렸다.
- 옛날 거라 심히 보수적이더라. 내 취향이랑은 너무 거리가 멀어.
더 이상 실랑이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책들을 받았다. 그런데 중간에 몇 페이지가 떨어지고 없었다. 가운데가 오려진 페이지도 있었다. 미처 찢지 않은 표제가 눈에 띄었다. 브록 실즈, 곤이가 제발 저린지 나를 쏘아보았다.
- 이거 되게 구하기 힘든 거였는데. 리즈 시절 브룩 실즈가 실린 잡지 중에 책장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게 얼마 없거든.
- 그 여자 사진 더 없냐.
- 보여 줄까.
카운터에 있는 컴퓨터를 켰다.' 브록 실즈 리즈 시절' 이라고 치고 이미지 검색을 클릭했다. 브록 실즈가 쏟아져 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젊음의 장점에 이를 때까지의 모습들이. 곤이가 연신 감탄했다.
-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생길수가 있냐.
입을 헤벌리고 사진을 한 장씩 넘기던 곤이가 갑자기 엑, 소리를 냈다.
- 뭐야, 이 사진은.
' 브록 실즈 최근' 이라는 제목이 달린 사진이었다. 오십이 넘어 주름이 가득한 얼굴이 모니터를 채웠다. 젋음은 사그라들었지만 젊었을 때의 미모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곤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 나 지금 진심 충격받은 거 아냐? 환성이 완전히 깨졌어. 차라리 보지 말걸 ... ...
- 원해서 변한 건 아니니 그러지 마라. 세울은 그 누구도 비껴갈수 없고 살다 보면 별 희한한 일들을 다 겪에 돼.
- 누군 몰라? 넌 무슨. 말 한마디 한마디가 노인네 같냐.
- 미안하다고 해야 되는 거니.
- 아, 진짜, 왜 이렇게 ... ... 왜 이런 식으로 변한 거야 ... ... 왜 보여 줬어 새끼야 이게 다 너때문이잖아.
그날 곤이는 브룩 실즈와 나에게 번갈아 화만 잔뜩 내다 아무것도 사지 않고 그냥 갔다.

그러더니 이틀 만에 다시 나타났다.
- 궁금해서 그러는데.
- 뭐.
- 나 요 며칠 동안 브룩 실즈 사진 계속 봤다. 옛날 시진 말고 요새 얼굴들.
- 그 얘기 하려고 온거?
- 요새 너 좀 까분다.
- 의도는 아닌데. 그렇게 생각됐다면 유감이고.
- 어쨌든 브룩 실즈 사진을 보니까.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거야.
- 어떤?
- 운명과 시간.
- 네 입에서 나온 말치곤 새롭다.
- 넌 새끼야. 단순한 말도 존나 재수없게 하는 거 아냐?
- 모른다.
- 잘났다.
- 고맙다.
갑자기 곤이가 웃었다. 하하하하하 . 숨 한 번에 다섯 개의 하가 분절되어 들어 있었다. 여기서 웃음이 나오는 포인트가 대체 뭐지. 화제를 돌렸다.
- 침팬지나 고릴라도 웃는 거 알아?
- 뭐, 그렇다 치고
- 그럼 인간의 웃음과 다른 점은?
- 알 게 뭐야. 어차피 잘난 척 하려는 거면 그냥 말해라.
- 사람은 숨 안에 웃음이 실려 있는데 유인원은 내쉬는 숨에 한 번씩 밖에 못웃어. 복식 호흡하듯이 하,하,하,하,하 하고 말이야.
- 복근 생기겠네.
곤이가 그렇게 말하고 또 웃었다. 어번엔 키드드득, 하고. 그러고선 웃음을 진정시키듯 숨을 한번 들이쉰 뒤 길게 내뱉었다. 휴우.
뭔가가 달라진 것 같았다. 조금 전과는 무언가가.
- 근데 운명과 시간이라니. 무슨 얘긴데?
내가 물었다. 곤이랑은 이런 식의 대화가 처음이라 좀 낯설었지만 그만 두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 말로 하긴 힘든데 ... ... 그러니까, 브룩 실즈는 젊었을때 알고 있었을까? 늙을 거라고. 지금이랑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이 들어 있을 거라는거. 늙는단 거, 변한다는 거, 알고 있어도 잘 상상하진 못하잖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지금 길 가다 보는 이상한 사람들, 그러니까 뭐 지하철 안에서 혼자 중얼대는 노숙자 아줌마라든가, 무슨 일을 겪은 건지 다리가 양쪽 다 없어서 배로 땅을 밀면서 구걸하는 사람들 ... ... 그런 사람들도 젊었을 때는 전혀 다른 모스일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
- 싯다르타도 너랑 비슷한 고만을 하다가 왕궁을 나왔대.
- 시 ... ... 누구지? 많이 들어봤는데.
이 대목에서 말문이 막혔다. 간신히 곤이의 신경을 돋우지 않을만한 답을 생각해 냈다.
- 있어, 좀 유명해.
- 어쨌든.
성공했는지 별 반응이 없다. 곤이가 먼 곳을 봤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 그러니까 너랑 나도 언젠가는,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 될수도 있겠지
- 그럴거야, 어떤 방향이든 그게 인생이니까.
- 잘 나가다 또 재수 없네. 그래 봐야 너나 나나 살라온 횟수도 같거든.
- 햇수야. 횟수 아니고.
곤이가 손바닥을 올렸다가 내렸다, 확 그냥 이라고 말하면서.
- 이상하게 이제 더 이상 그런 옛날 잡지 보기 싫다. 즐겁지 않아. 아름다운 것들이 시들어 가는 상상이 돼서. 너같은 새낀 영영 이해 못 하겠지만.
- 브룩 실즈한테 흥이가 떨어졌다니, 너한테 도움이 될 다른 책을 추천해 줄 수은 있다.
- 줘 봐
곤이가 싱겁게 대꾸했다. 나는 외국 작가가 쓴 [ 사랑의 기술] 을 추천해 줬다. 제목을 본 곤이는 묘한 미소를 짓고는 돌아갔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다시 찾아와서 이딴 개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역정을 내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의미 없는 추천은 아니었다.



추천 (0) 선물 (0명)
IP: ♡.179.♡.193
토마토국밥 (♡.15.♡.73) - 2021/09/29 16:47:47

잘 보고 갑니다

호수 (♡.179.♡.193) - 2021/09/29 17:19:37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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