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손원평 작 (16)

호수 | 2021.09.29 20:33:09 댓글: 0 조회: 714 추천: 0
분류연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09285


3부


49.
도라는 곤이의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아이였다. 곤이가 고통, 죄책감, 아픔이 뭔지 알려 주려 했다면 도라는 내게 꽃과 향기, 바람과 꿈을 가르쳐 주었다. 그건 처음 듣는 노래 같았다. 도라는 누구나 알고 있는 노래를 전혀 다를 방식으로 바꿔 부를 줄 아는 아이였다.

50.
개학이었다. 교정의 풍경응 비슷한 듯 달라져 있었다. 짙은 나뭇잎들이 더더욱 짙어져 있는 정도의 변화. 그런데 냄새가 달랐다. 아이들에게서 나는 냄새가 계절이 무르익은 만큼 전해져 있었다. 여름은 힘을 다해 가고 있었다. 나비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췄고 죽은 매미들이 길 위를 뒹굴었다.
이른 가을이 오면서 내게도 묘한 변화가 생겼다. 설명하기 힘든, 변화라고 하기도 힘든 변화들. 알고 있던 것들이 다르게 보이고 쉽게 쓰이던 단어들이 혀끝에서 꺼끌꺼끌 하게 맴돌았다.
텔레비전에서 데뷔 삽 년 만에 처음으로 1위를 한 5인조 걸그릅의 수상 소감을 보고 있던 그 일요일 오후도 그랬다.짧은 치마에 가슴을 겨우 가린 탑을 입은 내 또래의 여자애들이 부둥켜안고 방방 뛰었다. 리더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의 매니저와 사장, 기획사 직원들과 스타일리스트, 팬클럽의 이름을 달달 외운 돗 속사포로 뱉어 내더니 울먹이며 익숙한 대사를 읊었다.
-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정말 사라해요. 아름다운 밤입니다!
가요 프로를 즐겨보던 엄마 덕에 수없이 봐 온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의문이 들었다. 사랑이라는 말이 저렇게 흔하게 쓰여도 되는 걸까.
사랑을 얻기 위해 애쓰다 결국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등정하는 괴테나 세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떠올려 봤다. 사랑이 변했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집착하거나 학대를 가한다는 뉴스도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용서한 이들의 이야기도.

그러니까 내가 이해하는 한 사랑이라는 건 어떤 극한의 개념이었다.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간신히 단어 안에 가둬 놓은 것, 그런데 그 단어가 너무 자주 쓰이고 있었다. 그저 기분이 좀 좋다거나 고맙다는 뜻으로 아무렇지 않게들 사랑을 입 밖에 냈다.
이런 얘길 곤이에게 털어놓자 곤이는 대수롭잫다는 돗 흥, 소리를 냈다.
- 너 지금 나한테 사랑이 뭐냐고 묻는거냐?
- 개념을 정의 내려 달라는 게 아니고, 그냥 네 생각을 묻는거야.
- 내가 알 거 같냐. 나도 몰라. 그 점에선 너랑 나랑 비슷할지도 모르겠네.
곤이가 낄낄대더니 눈을 치켜 떴다. 표정이 금세 바뀌는게 곤이의 특징이었다.
- 아니다. 넌 할머니랑 엄마가 있었잖아. 그 여자들한테 사랑 많이 받았을 거 아냐. 왜 나한테 묻냐.
말투가 거칠어졌다. 곤이는 제 머리카락을 목 뒤에서 부터 머르 꼭지까지 몇 번 헝클어 뜨렸다.
- 사랑 따위 내가 알게 뭐냐. 해 보고 싶네. 이왕이면 남녀 간의 사랑.
곤이가 펜을 잡더니 뚜껑을 빠르게 열었다. 닫았다 했다.펜이 뚜껑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길 반복했다.
- 그런건 밤마다 하잖아. 너
- 이 새끼가 농담도 할 줄아네. 많이 늘었다. 너? 그게 남녀간의 사랑이야. 혼자하는 사랑이지.
곤이가 내 뒤통수를 가볍게 쳤다. 아프지는 않았다. 곤이가 내 얼굴 가까이 자기 얼굴을 들이 밀었다.
- 너, 남녀 간의 사랑이 뭔지 알기나 해?
- 그 목적이 뭔지는 알아.
- 그래 뭔데?
곤이의 눈가에 웃음이 어렸다.
- 번식을 위한 과정. 이기적인 유전자가 유도하는 본능적인 ... ...
말을 채 맺기도 전헤 곤이가 또 뒤통수에 꿀밤을 먹였다. 이번엔 좀 아팠다.
- 무식한 새끼, 넌 말이야. 너무 많이 알아서 무식해. 자.이제부터 형이 하 는 말을 잘 들어라.
- 생일은 내가 더 빠른데.
- 짜식이 실없는 유머만 는다?
- 유머아닌데. 난 단지 사실을 말한 것 ... ...
- 닥쳐, 새끼야.
웃으면서 또 꿀밤 한대. 이번엔 피해서 안 맞았다.
- 어쭈? 제법인데?
- 말하려던 거나 계속해 줄래
크험, 곤이가 헛기침을 했다.
- 난 사랑이 실없는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도 무슨 대단하고 영원한 것처럼 말하는 게 꼴같잖아. 난 그런 물렁한 거 말고 강한 게 좋다.
- 강한 거
- 그래 강한 거. 센 거. 상처받고 아파하는 거 말고 차라리 내가 상처주는 쪽을 택하는 거. 철사 형처럼.
철사 형. 이미 몇 차례 들은 적이 있지만, 그 이름에 잘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몸이 좀 움츠러 들었다. 왠지 더 듣고 싶지 않은 얘기가 펼펴질 것 같았다.
- 그 형은 강해. 정말로. 난 그렇게 되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곤이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빛이 일었다.


어쨌든 곤이에게서 이런 종류의 답을 얻기란 힘들어 보였다. 그렇다고 심 박사에게 묻자니 어쩐지 밑도 끝도 없을것 같았다.
언젠가 공을 들여'愛‘를 쓰고 있는 할멈에게 엄마가 물은 적이 있다.
- 근데 엄마, 그거 뭇는 뜻인지 알고나 쓰는 거야?
할멈이 도끼눈을 떴다.
- 그럼!
그러더니 낮게 읊조렸다.
- 사랑.
- 그게 뭔데?
엄마가 짓궂게 물었다.
- 예 쁜의 발견.
愛의 윗부분을 쓴 할멈이 가운데 마음 심(心)자를 써 내려가며 말을 이었다.
- 이점들이 우리 셋이다. 이 점은 내 거, 요건 너, 이건 쟤!
그렇게 해서 우리 가족을 나타내는 점이 세개 박힌 애가 완성됐다. 그때까진 예쁨을 발견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런데 얼마 전 부터 떠오르는 얼굴이 있기는 했다.


51.
이도라. 내가 아는 이도라를 머릿속으로 그려 봤다. 달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한 마리의 가젤 내지는 얼룩말, 아니, 그것도 적합한 비유가 아니다 . 걘 그냥 이도라였다. 달리는 이도라. 바닥에 놓이는 은테 안경. 공기를 휘저으며 단번에 쭉 나아가는 마른 팔고 다리. 안경알이 반사해 내는 빛, 궤적을 남기며 날리는 흙먼지. 질주가 끝나자마자 안경을 잡아 단숨에 코 위에 얹는 흰 손가락. 그게 내가 이도라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52.
입학 식 날, 강당에서 지루하게 식이 진행되는 동안 멀찍이 서 있던 나는 슬쩍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복도 끝에 여자아이가 하나 서 있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발끝을 바닥을 탁탁 찧는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팔과 다리를 쭉 뻗어 몸을 푼다. 그러곤 제자리에서 콩콩콩 뛰더니, 복도를 맹렬하게 가로질러 달린다. 숨을 할딱거리며 달리던 그 애가 내 앞에 우뚝 멈추고 섰고,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적어도 오 초쯤. 그 애가 도라였다.
광 없는 은회색 빛의 도톰한 안경테. 그 안의 동그란 안경알, 안경알은 얇고 흠집이 많아서 햇빛을 거의 그대로 반사해 냈다. 그래서 표정이 잘 안 보였다. 도라는 조금 달랐다. 다른 애들처럼 시시콜콜한 일에 소란스럽게 반응하지 않았다. 차분하다 못해 가끔은 아주 늙은 여자 같았다. 단순히 그 애가 조숙했다거나 정신적으로 성숙했다는 말은 아니다. 걘 그냥 남들과 좀 달랐다.
4월 초 까지 도라는 자주 수업에 빠졌다. 어쩌다 학교엘 나와도 보충 수업이나 야자는 하지 않고 바로 집에 갔다. 그래서 도라는 학기초에 곤이와 나 사이에 일어난 소동도 볼 기회가 없었다. 사실 그 애는 주변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언제나 구석 자리에 앉아 아어폰만 꽃고 있었다. 육상부가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준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결국 전학을 가지 않았다. 그 뒤로 도라가 말하는 걸 거의 본적이 없었다. 수업 중엔 창밖의 운동장만 내다보았다. 우리에 갇힌 표법처럼.
딱 한 번 안경을 끼지 않은 도라를 본 적이 있었다. 봄 운동회 때였다. 도라는 반 대표로 200미터 경주에 나갔다. 작고 말랐기 때문에 척 봤을 때 운동을 잘할 것 같다는 인상은 아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애는 출발선 앞에 서 있었고 그게 바로 내 앞이었다.
제자리에. 도라는 안경을 휙 벗어 놓고 땅을 짚었다. 준비. 그때 도라의 눈을 봤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 숱 많은 속눈썹 동공이 연갈색 빛을 뿜어낸다. 출발 도라가 달린다. 가늘고 튼튼한 다리가 땅을 박차고 흙먼지를 피우며 멀어져 갔다. 그누구보다도 빨리. 바람 같은 움직임이었다. 힘차고 가벼운 바람.순식간에 도라가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에 왔다. 결승을 통과하고 나서 멈추기 직전 내 앞에 놓인 안경을 줍고 얼굴에 얹었다. 신비한 눈이 안경뒤로 사라졌다.
도라 주변엔 늘 친구들이 있었고 같이 급식을 먹는 무리도 있었다. 하지만 그 무리는 일정하지 않았다. 외톨이는 아니었지만 특별히 친한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누구와 집에 가건 누구랑 밥을 먹건 크게 신경쓰지도 않는 것 같았다. 때로는 혼자 다녔다. 그러면서도 왕따를 당하거나 겉돌지 않았다. 그저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아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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