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손원평 작 (17)

호수 | 2021.09.30 20:54:59 댓글: 0 조회: 466 추천: 0
분류연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09680


5 3.
엄마가 눈을 떴다. 누워 지낸 지 아홉 달 만에. 병원에선 그렇게까지 희소식은 아니라고 했다. 말 그대로 눈꺼풀을 여닫는 것 뿐이지 깨여난 게 아니라고, 소변 통에 소변이 차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여전히 소변 줄을 꽂고 두어 시간 마다 자세를 바꿔 줘야 했다. 그래도 잠에서 깨면 엄마는 천장을 보고 눈을 끔벅였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는 어지러운 벽지 무늬 속에서도 별자리를 찾아내는 사람이었다.저거 봐. 국자 모양이 꼭 북두칠성 같아. 카시오페이아도 있네. 저건 큰곰자리. 우리 작은 곰자리도 찾아 볼까 별자리 운운할 바엔 물 떠 놓고 달님한테 빌어라! 할멈의 괄괄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오래간만에 찾은 할멈의 납골 묘 앞엔 잡초가 무성했다. 두 여자의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왠지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했다.
책방에 손님이 끊긴 지 꽤 됐다. 방과 후면 어김없이 카운터를 지켰지만, 매출은 이미 의미가 없었다. 심 박사의 호의로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었다. 무엇보다 두 여자가 없는 책방은 무덤 같았다. 책의 무덤. 잊혀진 글자들의 무덤. 그때쯤 결심했던 것 같다. 이제 그만 이 공간을 접을 때가 된 것 같다고.
심 박사를 찾아가 책방을 정리하고, 짐을 줄여 단출한 고시원 방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심 박사는 오래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유를 믇는 대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서부 담당 교사는 3학년 담임을 맡은 국어 선생님이었다. 내가 교무실에 갔을 때 선생님은 교감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담임을 맡은 반이 계속 모이고사 꼴등인데 어떡할 거냐고 교감이 채근했다. 얼굴이 붉어져 자리로 돌아온 선생님에게 나는 도서실에 책을 기증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라고 했다.
복도가 쥐 죽은 듯했다. 중간고사가 코앞이라 아이들도 야자 시간에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아침 일찍 체육관 구석에 가져다 놓았던 책 상자를 들고 도서실로 향했다.
문은 쉽게 열렸다. 동시에 경쾌한 기합 소리가 귀를 때렸다. 핫핫핫핫. 서가 사이로 다가갔다. 여자아이의 옆모습이 보인다. 한 발은 앞에 다른 발은 뒤에 놓은 채 발의 방향을 앞뒤로 바꾸며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다. 제자리 뛰기지만 앞뒤로 교차하는 보폭이 꽤 넓다. 코에 땀이 맺혀 있고 머리가 나풀거린다. 눈이 마주쳤다. 그 애다.

- 안녕.
이럴 땐 먼저 말을 거는 게 예의다. 도라가 동작을 머췄다.
- 책 기중하려고.
묻지 않은 말을 하곤 박스를 열었다. 도라가 입을 뗐다.
- 정리는 도서부원들이 하겠지. 거기 놔둬.
- 넌 도서부 아니야?
- 난 육상부.
- 우리 학교에 육상부가 있었나?
- 있어. 담당 교사도 없고 회원은 나뿐이지만.
- 아
열다 만 박스를 구석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 근데 이 많은 책은 어디서 난 거야?
책방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증하려는 건 대부분 참고 서였다. 참고서도 유행이 있어서 유명한 수험서가 아닌 이상 철이 지나면 쉽게 팔리지 않았다.
- 근데 너 있잖아.
내가 물었다.
- 왜 여기서 운동해? 체육관 놔두고
도리는 뒷짐을 지고 걷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 체육관에서 하면 너무 티 나. 여기가 제일 조용해. 어차피 애들 잘 오지도 않잖아. 기초 체력을 잘 다져야 잘 달릴수 있거든.
좋아하는 걸 말할 때 사람들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빛낸다. 도라가 그랬다.
- 달려서 뭐하려고?
의미를 담은 질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도라의 눈빛이 확 꺼졌다.
- 너 방금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질문 한 거 알아? 그런 말은 엄마 아빠한테 듣는 걸로 족해.
- 미안. 비난한 게 아니고 목적을 물은 거야. 네가 달리려는 목적.
도라가 흠, 학 한숨을 쉬었다.
- 나한테 그건 있지. 살아서 뭐하려고, 하는 질문이랑 비슷해. 넌 무슨 목적이 있어서 사니? 솔직히 그냥 살잖아. 살다가 좋은 일 있으면 웃고 나쁜 일 있으면 울고, 달리기도 마친가지야. 1등하면 좋고 아니면 아쉽겠지. 실력 없으면 자책하고 후회도 하겠지. 그래도 그냥 달리는 거야. 그냥!
처음엔 안 그러더니 끝날 땐 목소리가 높아져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렸다. 진정하라는 의미로.
- 부모님도 그 말에 설득됐니?
- 아니, 비웃지 뭐, 뛰어서 뭐하냐고. 어차피 어른 되면 신호등 바뀌기 전에 뛰는 거 말고 평생 달릴 일 없다고. 웃기지 않아? 우사인 볼트도 아닌데. 달려서 뭐하냐는 거야.
도라의 입가가 축 처졌다.
- 그럼 부모님은 네가 뭘 하길 바라셔?
- 몰라. 전엔 그렇게 운동이 하고 싶으면 그나마 돈이 되는 골프를 하래. 그러더니 이젠 그런 것도 없어. 그냥 어디가서 부끄러운 자식만 되지 말라. 자기네들 맘대로 낳아 놓고 왜 자기들이 정한 미션을 내가 수행해야 되는데? 후회할거라고 자꾸 협박하는데 후회를 해도 내가 하는 거잖아. 이름대로 가는 수밖에. 이름은 이도라라고 지어 놨으니까 또라이 돼야지. 뭐.
실컷 쏟아 내고 나니 기분이 풀렸는지 도라가 방긋 웃었다. 도서실에서 나오기 전에 도라가 책방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위치를 알려 주며 왜 묻느냐고 물었다.
- 여기서 못하게 하면 거기 가서 운동하려고.
도라가 말했다.

54.
내 모의고사 성적은 늘 중간이 었다. 수리 영역이 제일 할 만했고 과탐, 사탐도 어는 정도는 나왔다. 문제는 언어 영역이었다. 원 속뜻이 그렇게 많고 의미는 그렇게도 다양한지. 작가의 의도는 왜 그렇게 꽁꽁 숨은 건지. 내가 예상한 행간의 의미는 늘 틀렸다.
어쩌면 언에를 이해하는 건 상대의 표정이나 감정을 알아채는 것과 비슷한지도 몰랐다. 편도체가 작으면 대개 지능이 떨어진다고 하는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기본적인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우니 추리력도 떨어지고 지능도 낮아진다는 거다. 언어 영역 성적표에 적힌 숫자는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내가 제일 잘하고 싶은 걸 가장 못하고 있었으니까.
책방 정리는 더뎠다. 할 일이라곤 책을 처분하는 것뿐이 었지만 작업이 만만찮았다. 책을 한 권씩 꺼내 하나하나 사진을 찍었다. 중고 사이트에 올리려면 상태 파악이 중요했다. 책방에 이렇게 많은 책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칸칸이 꽂혀 있던 이 많은 생각들. 이야기들. 연구들. 한 번도 보지 못한 숱한 저자들을 떠올렸다. 갑자기 그들이 나와는 너무도 멀리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해 보는 생각이었다. 그 전까지 그들과 가깝다고 생각했다. 비누나 수건처럼,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그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있었다. 어쩌면 영원히 닿을수 없을 곳에.
- 안녕.
어깨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찬물이라도 맞은 듯, 안녕한마디에 심장이 서늘해졌다. 도라였다.
- 한번 와 봤어. 그래도 되지?
- 아마 그럴걸. 이미 그랬고.
내가 답했다.
- 손님이 주인에게 방문해도 되겠느냐고 묻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 인기가 많아서 예약을 해야 하는 식당이라면 몰라도 보다시피 여긴 그런 곳은 아니니까.
말해 놓고 보니 연기 없는 가게라고 자백한 것 같아 실수인가 싶었다. 도라는 뭐가 우스운지 까르르 웃었다. 수백 개의 작은 얼음 조각이 바닥에 흩어지는 것 같은 웃음이다. 아직도 입가에 미소를 남겨 놓은 도라가 책들을 할일없이 뒤적였다.
- 근데 가게 문 연지 얼마 안 된 거야? 책들이 아직 정리가 안 됐네?
- 폐업 준비 중이야. 폐업에 준비라는 말을 쓰니까 좀 그렇지만.
- 유감, 단골 될 기횔 잃었네.
처음에 도라는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다른 걸 했다. 예를 들면 말하고 나서 볼을 불룩하게 만듥 푸, 소리를 내며 한 번에 숨을 토하는 거라든지, 운동화 앞코로 바닥을 콩콩콩, 세 번 찧는 것 따위. 그러다 때가 됐는지 운을 뗐다.
- 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게 사실이야?
전에 곤이가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이다.
- 꼭 그런건 아니지만 일반적인 기준에선. 아마도.
- 신기하다. 그런 건 ARS 성금 모으는 다큐에나 등장하는 줄 알았는데, 아. 이렇게 말해서 미안.
- 아니 상관없어
도라가 짧게 숨을 끊어 쉬었다.
- 있지, 네가 저번에 나보고 왜 달리느냐고 물었잖아. 그때 내가 화낸 거. 좀 미안해서, 그말 하려고 왔어. 사실 부모님 말고 나한테 왜 달리려는 건지 물어본 사람은 네가 처음이라.
- 아.
- 그래서 말인데. 나도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질문 하나. 그럼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어?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런 질문을 받아 보는 게 처음이 었다. 그래서 곧이곧대로 답했다.
- 모르겠어. 아무도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본 적이 없거든.
- 그게 꼭 누가 물어야 아는 거야? 너 혼자 생각해 본 적없어?
- 나한텐 어려운 질문이라.
내가 머뭇거렸다. 하지만 도라는 나한테 설명을 더 요구하는 대신 거기서 교집합을 발견해 냈다.
- 나도 비슷해. 지금은 꿈이 증발한 생태. 육상은 부모님이 하도 반대하셔서 ... ... 울적한 공통점이네.
도라가 무릎을 구부렸다 폈다 했다. 뛰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지 틈만 나면 몸을 움직였다. 교복 치마가 가볍게 나풀거렸다. 시선을 거두고 다시 정리를 시작했다.
- 되게 소중하게 다루네. 책 좋아하나 보다?
- 응 곧 혜여질 거라 인사하는 거야.
볼 풍선을 만들고 있던 도라가 또 푸, 하는 소릴 냈다.
- 난 책 같은 건 별로, 글자는 재미없어. 제자리에 박혀있기만 하잖아. 난 움직이는 게 좋아.
도라가 손가락으로 서가의 책들을 빠르게 훑었다. 투두둑, 빗소리 같은 게 났다.
- 그래도 헌책은 좀 낫네. 종이 냄새도 더 생생해. 낙엽냄새 같기도 하고 .
- 간다.
답할 틈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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