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손원평 작 (22)

호수 | 2021.10.07 09:48:50 댓글: 2 조회: 947 추천: 0
분류연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11486

나는 했던 말을 반복했다.
- 곤이랑 전 나갈 거예요. 풀어 줘요.
- 곤이 너 어쩔래? 친구 따라 갈래?
곤이가 입술을 깨무는 가 싶더니 씩 웃으며 미소를 떠올렸다.
- 미쳤어요, 내가 저 병신을 따라가게.
- 오케이. 하긴 친구라는 게 끈끈해 봐야 얼마나 끈끈하겠어. 그냥 말일 뿐이지. 의미 없는 단어가 세상에 워낙 많아요.
철사는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몸을 굽혔다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얇고 뾰족한 칼이었다. 칼날에 빛이 닿을 때 마다 은빛 섬광이 날카롭게 번득여 눈이 부셨다.
- 이거 보여 준 적 있지. 언젠간 쓸 일이 있을거라고도. 곤이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철사가 칼끝으로 곤이를 겨눴다.
- 어디 써 봐라.
곤이가 침을 삼켰다. 숨이 가빠졌는지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했다.
- 저런 저런, 쫄았구나. 처름이니까 끝까지 갈 건 없고, 적당히 겁 좀 주면서 놀아 보라는 뜻이야.
철사가 씩 웃으며 천천히 모자를 벗었다. 순간 많이 본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 얼굴이 누구의 것인제 떠올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나 미술 시간에 교과서에서 본 수많은 미의 상징들, 그것과 똑 닮은 모습이 철사의 얼굴 안에 펼쳐져 있었다. 피부는 세하얗고 입술은 장밋빛이었다. 옅은 갈색에 가까운 머리칼과 직선으로 뻗은 정교한 눈썹, 깊고 투명한 눈, 신은 이상한 곳에 천사의 얼굴을 주셨다.

69.
철사는 곤이의 소년원 선배였다. 곤이와 먼발치에서 몇번 마주치기도 했다. 철사가 저지를 짓과 그의 일화들은 너무 자극적이고 위험해서 비공식적인 경로로만 회자되었다. 그가 철사라고 불리게 된 경위도, 벙행에 쓰인 도구가 철사 였다는 식의 무수한 소문만 떠돌았다. 이따금 곤이는 소년원에서 들은 철사의 얘기를 위인의 일대기를 전하듯 장횡하게 늘어놓곤 했다.
철서는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 일을 배우거나 사회에 섞이는 것 따윈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겐 독자적으로 설계한 세상이 있었다. 남들은 가 보지 못한 정점에 이르는것. 내겐 와닿지 않았지만 그 이상한 세계에 매료된 아이들이 철사 밑으로 모였고 곤이도 그중 하나였다.
- 철사 형은 말이야, 우리나라도 총기 사용이 허가돼서 미국이나 노르웨이처럼 총기 난사 같은 게 가끔씩 일어나야 한대. 그래야 쓸데없는 사람들을 한번에 다 쓸어버린다고, 멋지지 않냐? 그 형은 진짜 강해.
- 그게 강한 거라고 생각해?
- 당연하지. 그 형은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아. 너처럼,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곤이가 그렇게 말했었다. 내게 모든 걸 털어놓던 하여름 날에.

70.
지금 내 앞에 선 곤이의 손에 칼이 들려 있다. 바로 옆에 선 것처럼 숨소리가 크다. 곤이는 뭘 하려는 걸까. 무엇을 증명하고 싶은 걸까. 흔들리는 눈동자가 커다란 구슬처럼 번들거렸다.
- 한 가지만 묻자. 이게 네 진심이야?
내가 조용히 물었다. 하지만 곤이의 특기는 말허리를 자르는거다. 말을 맺기도 전 내 옆구리에 곤이의 발길질이 가해졌다. 강한 충격에 나는 창문에 부딪혀 넘어졌다. 옆에 놓인 유리 잔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몇 살에 절도를 시작했는지. 언제 여자와 놀아 봤는지, 무슨 일로 소년원에 갔는지 따위를 자랑 거리로 삼는 아이들이 있다. 그런 유의 조직에서 인정받으려면 그럴듯한 무용담, 혹은 훈장이 필요하다. 곤이가 아이들에게 맞으면서 버틴 것도 그런 통과의 의례 때문일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게 모두 약하다는 중거라고 생각한다. 강한 것을 동경하며 생기는 나약함의 표현.
내가 아는 곤이는 단지 철이 덜 든 열일곱의 남자아이일 뿐이었다. 약해 빠진 주제에 강한 척 하는 , 물러 터진 놈.
- 정말 이게 네 진심이냐고.
다시 한번 물었다. 곤이가 숨을 씨근 댔다.
-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입 닫아.
-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곤아.
- 닥치라고 새끼야.
- 넌 그럴 수 없는 애야.
- 썅
그 애가 소리쳤다. 어느새 말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벽에 박힌 못에 찔렸는지 내 다리에서 피가 흘렀다. 그걸 본 곤이가 어린아이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래, 곤이는 그런 놈이다. 피 한 방울에 눈물을 찍어 내고 남이 아파하는걸 보면서 저도 아픈 애다.
- 말했잖아. 넌 그럴 수 없는 애라고.
곤이가 등을 돌린다. 팔꿈치를 접어 눈을 가리고 있는데 몸이 떨린다.
- 그게 너야. 고작 그게 너라고.
내가 말했다.
- 좋겠다 ... ... 존나 좋겠다. 아무것도 못 느껴서.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 ...
울음에 섞여 곤이가 웅얼댔다.
- 가자
내가 손을 내 밀었다.
- 이런데 있지 말고 가자.
- 너나 가. 새끼야 난 너같은 놈 몰라.
간신히 울음을 걷어 낸 곤이가 욕을 해 대기 사작했다. 마치 그게 유일한 살길이라는 듯이. 짖어 대듯이 욕을 했다.
- 그만.
철사가 손을 들어 곤이를 저지했다.
- 풋내기 장난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그가 몸을 내게 틀었다.
- 데려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런데 그냥은 안 되지.대단한 우정 같은데. 그렇다면 친구를 위해서 너도 뭔가 보여 줘여 하지 않겠어?
철사가 자신의 턱을 천천히 문질렀다. 곤이의 얼굴이 조금씩 하얘져 갔다.
- 그러니까. 뭘 할 수 있니. 곤이를 위해서 말이야?
부드러운 말투였다. 웃음 땐 얼굴로 문장 끝을 나긋이 올리면서 말하는 것. 그런 게 친절한 거라고 배웠다. 하지만 저것이 친절을 베푸는게 아니란걸 알고 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 뭐든지 다요.
내 말이 의외 였는지 철사는 눈을 크게 뜬 채 호오, 하고 바람 소리를 냈다.
- 뭐든지 다?
- 네
- 죽을지도 모르는데?
씨발, 곤이가 조그맣게 뇌까렸다. 철사는 흥미롭다는 듯 자세를 고체 앉았다.
- 그럼 한번 견뎌봐. 이런 놈 때문에 네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보고 싶다.
철사가 미소 지었다.
- 버티지 못해도 자책하진 마라, 너도 보톤의 인간이라는 종거일 분이니까.
곤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철사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나는 눈을 감지 않고 내게 다가온 현실을 바라 보았다.

71.
나중에 사람들은 내게 왜 그랬냐고, 왜 끝까지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제일 쉬인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형광등을 껏다 켰다. 하듯 정신이 들었다 나갔다. 하길 반복했다. 정신이 들때면 고통의 강도가 세졌다. 사람의 몸이 왜 이런 감각을 견디도록 설계됐는지 의아해질 정도로, 의식이 왜 아직도 꺼지지 않는지 불합리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아팠다.
가끔씩 곤이가 보였다. 희미하게 혹은 또렷하게. 머리가 오류를 일으킨 모양이 었다. 곤이가 두려워하는게 보였다. 공포에 질렸다는 게 어떤 걸 뜻하는지 조금쯤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산소가 전혀 없는 곳에서 필사적으로 숨을 쉬어야 하는 기분. 곤이가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곤이의 얼굴이 흐려졌다. 내 시야가 흐릿해질 줄 알았는데 아니였다. 곤이의 뺨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애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만두라고 , 제발 그만 두라고 차라리 자기한테 그러라고, 쉬지 않고 외쳤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그러기엔 이미 힘이 달렸다.

72.
불과 몇 달 전의 기억이 아련하게 머릿속을 오갔다. 나비의 날개를 찢던날, 곤이가 내게 무언가를 가르치려다가 실패한 그날, 어스름이 내리던 무렵, 바닥에 짓이겨진 나비의 잔해를 닦아 내며 곤이는 몹시 울었다.
- 두려움도 아픔도 죄책감도 다 못 느꼈으며 좋겠어 ... ...
눈물 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조금 생각한 후에 입을 열었다.
-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야. 그러기엔 넌 너무 감정이 풍부하거든. 넌 차라리 화가나 음악가가 되는 편이 더 어울릴걸.
곤이가 웃었다. 물기 어른 웃음을.
고통을 내지르는 숨소리가 모두 허연 입김으로 나오는 지금과는 달리 한여름 이었다. 그때는 , 그때 우리는 여름의 정점에 있었다. 여름, 과연 그런 때가 있기나 했던 걸까. 모든 게 푸르고 무성하고 절정이었던 때가, 우리가 함께 경험한 게 정말로, 진짜였을까.
곤이는 내게 자주 물었었다. 두려움을 모른다는 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게 어떤 느낌이냐고, 내가 설명하느라 늘 애를 먹어도 언제나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내게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처음엔 할멈을 찌른 남자의 마음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점차 다른 쪽으로 옮겨 갔다.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척하는 사람들,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엇었다.

심 박사를 찾아간 어느 날이었다. 텔려비전 화면 속에서 폭격에 두 다리와 한 쪽 귀를 잃은 소년이 울고 있다. 지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관한 뉴스다. 화면을 보고 있는 심 박사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내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자 다정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내 시선은 미소 띤 박사의 얼굴 뒤로 떠오른 소년에게 향해 있었다. 나 같은 천치도 안다. 그 아이가 아파하고 있다는 걸. 끔찍하고 불행한 일로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묻지 않았다. 왜 웃고 있느냐고, 누군가는 저렇게 아파하고 있는데 , 그 모습을 등지고 어떻게 당신은 웃을 수 있느냐고.
비슷한 모습을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채널을 무심히 돌리던 엄마나 할멈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멀리 있는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니라고,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러면 엄마와 할멈을 빤히 바라보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그날의 사람들은? 그들은 눈앞에서 그일을 목도했다. 멀리 있는 불행이라는 핑계를 댈수 없는 거리였다. 당시 성가대원 중 한 사람이 했던 인터뷰가 뇌리에 떠다녔다. 남자의 기세가 너무 격렬해.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했다고.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곤이의 몸에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명치끝에서 부터 올라오는 굵고 진한 소리였다. 녹슨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같기도 했고 짐승의 울부짖음 같기도 했다. 그 애는 왜 그렇게도 소질 없는 걸 하려고 드는 걸까. ' 한신한 녀석' 이라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철사가 곤이를 빤히 쳐다봤다.
- 고작 그 정도란 말이지. 알겠어. 그럼 네 선택에 후회마라.
철사가 곤이의 옆에 놓인 걸 낚아챘다. 아까 곤이에게 건넸던 칼이다. 손쓸틈도 없이 철사가 곤이의 턱 밑에 그걸 가져다 댔다. 하지만 그는 곤이를 다치게 할 수 없었다. 그 칼을 받은 건 내 쪽이었으니까. 나는 죽어 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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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이다 (♡.50.♡.207) - 2021/10/27 13:53:00

잘보고갑니다

호수 (♡.36.♡.204) - 2021/10/28 04:59:06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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