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손원평 작 (마지막 화)

호수 | 2021.10.07 12:13:03 댓글: 4 조회: 1379 추천: 0
분류연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11548
73.
내 몸이 곤이를 밀쳐 내는 순간 철사의 칼이 내 가슴 안으로 사정없이 파고 들었다. 곤이가 철사를 향해 악마라고 소리쳤다. 철사가 칼을 빼냈다. 빨간 액체가 따뜻하고 끈적한 육신의 정수가 몸 밖으로 빨르게 빠져 나갔다. 잠깐 정신을 잃었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곤이가 나를 끌어안고 있다.
- 죽지 마. 뭐든 해 줄게. 뭐든 ... ...
곤이가 울먹인다. 어쩐 일인지 그 애는 피투성이다. 얼핏 철사가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때 왜 그런 말이 튀여 나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간신히 속삭였을 뿐이다.
- 네가 상처 입힌 사람들에게 사과해. 진심으로. 네가 날개를 찢은 나비나 모르고 밟은 벌레들에게도.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러 온 건데 곤이더러 사과하라고 한다. 그런데도 곤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 그럴게. 그럴게. 그러니까 제발 좀 ... ...
나를 부둥켜안은 곤이의 몸이 앞뒤로 흔들린다. 어느 순간 그 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눈이 천천히 감겼다. 깊은 물에 몸을 맡긴 것처럼 온몸이 노곤했다. 이제 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지내던 태고의 곳으로 간다. 머릿속에서는 영화를 튼 것처럼 아득한 한 장면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눈이 내리던 날. 그러니까 내 생일날. 피로 눈을 물들인 엄마가 쓰러져 있다. 할멈이 보인다. 표정이 맹수처럼 사납다. 유리창 너머로 나를 향해 외친다. 가. 가. 저리 비켜! 그런 말은 보통 싫다는 뜻이다. 도라가 곤이에게 외친것처럼, 꺼져 버리라는 뜻이다. 왜지, 왜 나한테 가라고 하지. 피가 튄다. 할멈의 피다. 눈앞이 붉어진다. 할멈은 아팠을까. 지금의 나처럼 그러면서도 그 아픔을 겪는 게 내가 아니고 자신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가 ... ...

톡. 내 얼굴 위에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뜨겁다. 델 만큼. 그 순간 가슴 한가운데서 뭔가가 탁, 하고 터졌다. 이상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아니. 밀려드는 게 아니라 밀려 나갔다. 몸속 어딘가에 존재하던 둑이 터졌다. 울컥. 내 안의 무언가가 영원히 부서졌다.
- 느껴져.
내가 속삭였다. 그것이 이름이 슬플인지 기쁨인지 외로움인지 아픔인지. 아니면 두려움이었는지 환희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무언가를 느꼈을 뿐이다. 구역질이 났다. 떨쳐 내고 싶은 역겨움이 밀려왔다. 그런데도 멋진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 천천히 눈이 감겼다. 울고 있는 곤이가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비로소 나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은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사실 내 이야기의 끝은 여기다.


74.
그리니까 여기서 부터는 일종의 후일담이다.

내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내 몸을 부여잡고 울고 있는 곤이를 내려다보았다. 머리통의 땜빵이 별 모양이었다. 그걸 보고 한 번도 웃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하하. 소리 내 웃었다. 내 기억은 거기까지다.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 현실은 병원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깨다 잠들다 하길 반복했다. 내가 완전히 회복해서 다시 걷게 되기까지는 몇 달가량 걸렸다.
누워 있는 동안 같은 꿈을 자주 꿨다. 운동회가 한창인 운동장이다. 흙먼지가 피어오리는 태양 아래 나와 곤이가 서있다. 무척 뜨겁다. 앞에서 달리기 시합이 펼쳐지고 있다. 곤이가 씩 웃으며 내 손에 뭔가를 쥐여 준다. 손을 펼치자. 반투명한 구슬이 손바닥 위를 도르르 구른다. 중간에 웃는 표정 같은 둥근 선이 붉은색으로 그어져 있다. 구슬을 굴리자 붉은 선이 방향을 바꾸며 울었다 웃었다 한다. 자두맛 사탕이다.
사탕을 입 안에 넣는다. 달콤하고 새콤하다. 침이 고인다. 혀로 사탕을 굴린다. 이따금씩 사탕이 이빨과 부딪혀 딱딱 소리를 낸다. 갑자기 혀가 저릿하다. 짭짜름하고 시큰하다. 비리기도 하고 쓰기도 하다. 그 사이로 다디단 향이 올라와 나는 정신없이 코를 킁킁댄다.
탕, 어딘선가 출발 신호가 공기를 울린다. 우리는 지면을 밀어 내며 달리기 시작한다. 시합이 아니라. 그저 달리기다. 우린 그냥 몸이 공기를 가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눈을 떴을 때 내 앞엔 심 박사가 있었다. 그가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내가 정신을 잃은 직후 윤 교수가 경찰들과 함께 들이 닥쳤다. 우리 힘으로 모든 걸 제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면 멋졌겠지만 어른들의 눈에 우린 아직 애들을 뿐이었나 보다. 도라가 담임에게 연락을 취했고 몇몇 아이들이 찐빵과 곤이의 관계를 말하면서, 경찰이 찐빵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 뒤 철사가 있는 곳까지 오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철사는 곤이의 칼에 찔렸다. 하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는 상태였고 나보다 먼저 회복해서 지금은 재판을 앞두고 있다. 그가 저질른 일들은 하도 엄청나서 여기서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그는 자기가 치르게 될 대가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알고서도 시종일관 미소를 띤 채였다고 한다. 그의 마음속은, 아닌 대체 인간이란 건 어떻게 설계된 걸까. 그가 다른 표정을 지을 수있는 날이, 그런 기회가 그의 인생에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곤이가 철사를 찌른 것은 아마도 정당방위로 인정될 거라고 했다. 곤이는 심리 치료를 받고 있고, 아직 나를 만날 준비가 안 되었다고 했다. 윤 교수는 학교에 휴직계를 내고 오직 곤이만을 위해서 살아 보는 것으로 삶을 바꾸어 보겠다고 했다. 곤이는 제 아빠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는 않았다. 하지만 윤 교수는 계속해서 애쓰겠노라고 했다.
심 박사는 내가 없을 때 도라가 몇 차례 다녀 갔었다며 그애가 남긴 카드를 전해 주었다. 글자를 싫어하는 도라답게 카드를 열자 메모 대신 사진만 한 장들어 있었다. 사진 속에서 도라가 달리고 있다. 두 다리가 공중에 떠 있는게 꼭 하늘을 나는 것 같다. 도라는 육상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갔다. 전학을 가자마자 구 대회에서 2등을 했다. 증발했다던 꿈을 되찾은 모양이다. 또라이. 도라의 엄마 아빠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웃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 표정이 다양해졌구나.
문득 심 박사가 내게 말했다. 나는 그 끔찍한 밤에 있었던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몸과 마음에 갑자기 일어난 이상한 변화를.
- 완전히 회복되면 MRI를 찍어 보자. 임상 검사도 전부 다시 해 보고. 네 머리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확인해 볼 때가 된 것 같구나. 사실 말이다. 난 네 병명을 늘 의심했었단다. 나도 한때 의사이긴 했지만, 의사들은 라벨 붙이는 걸 좋아하지. 그래야 특이한 현상이나 사람도 받아들일 수 있거든. 그게 명확하고 유용할 때도 물론많고. 그렇지만 말이야, 사람의 머리란 생각보다 묘한 놈이거든. 그리고 난 여전히, 가슴이 머리를 지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어쩌면 넌 그냥 남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란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야.
박사가 웃었다.
- 자란다는 건, 변한다는 뜻인가요.
- 아마도 그렇겠지, 나쁜 방향으로든 좋은 방향으로든,
나는 곤이와 도라와 함께 보낸 지난 몇 계절을 짧게 회상했다. 그리고 곤이가 변하게 될 방향이 후자이기를 바랐다. 그 전에 ' 좋은 방향 ' 이 어떤 건지부터 고민해야겠지만.

심 박사는 어딜 좀 다녀와야겟다며 병실을 나섰다. 병실에서 나가기 직전 심 박사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 난 선물이 뭔지 미리 말해 주는 사람을 무척 싫어한단다. 하지만 어떨 때는, 그러니까 지금 같은 경우엔 입이 근질거려 참기가 힘들구나. 힌트만 주마. 조금 후 누군가를 만나게 될 거다. 네가 많이 놀랐으면 좋겠구나.
그러면서 그는 곤이가 내게 남긴 편지를 전해 주었다.
- 나가시면 볼게요.
심 박사가 병실을 나가고 나서 봉투를 열었다. 흰 종이가 사각으로 접혀 있었다. 천천히 종이를 펼쳤다. 그 안에 꾹꾹 눌러쓴 뭉툭한 글자가 몇 개 적혀 있었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
진심.
진심, 이라는 단어 뒤에 찍힌 마침표를 한동안 바라봤다. 그 마침표가 곤이의 삶을 바꾸기를 바랐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러기를 바랐다. 진심. 으로.


75.
문이 열렸다. 심 박사였다. 휠체어를 밀고 있다. 거기 앉은 사람이 나를 향해 환히 미소를 짓는다. 낯익은 미소다. 태어난 순간부터 쭉 보아 왔던 미소였으니까.
- 엄마.
라고 말하는 순간 엄마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내 볼을 쓰다듬고 머리칼을 매만지며 엄마는 내내 울었다. 나는 울진 않았다. 아직 그 정도로 감정이 발달되진 않은 건지, 아니면 엄마를 보고 울기엔 이미 머리가 너무 커 버린건지.
나는 우는 엄마의 눈물을 닦고 엄마를 안아 주었다. 이상하게 그러면 그럴수록 엄마는 더 울었다.
내가 누워 있는 동안 거짓말처럼 엄마가 깨어났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무언가를 엄마가 해낸 거다. 그런데 엄마는 다르게 말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무언가를 내가 해냈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를 더 설명하고 싶은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어디서 부터 얘기하면 좋을까. 갑자기 뺨이 뜨겁다. 엄마가 뭔가를 닦아 준다. 눈물이다. 어느새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 내가 운다. 그런데 또 웃는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 끝--------
추천 (0) 선물 (0명)
IP: ♡.179.♡.193
루갈 (♡.101.♡.80) - 2021/10/09 19:40:01

다보느라 에휴
고생 햇습니다

호수 (♡.179.♡.193) - 2021/10/10 06:48:16

ㅎㅎㅎ 수고하셨습다^^

내사랑이다 (♡.50.♡.207) - 2021/10/27 13:53:13

잘보고갑니다

호수 (♡.36.♡.204) - 2021/10/28 04:59:35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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