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소봉전기(5)-古龙

핸디맨남자 | 2021.10.30 05:25:17 댓글: 2 조회: 568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19063

3. 대붕금왕의 원한과 복수

복도는 음산하고 어두웠다. 오랫동안 햇빛을 받지 못한 듯했다. 긴 복도 끝에는 아주 큰 문이 있었는데, 문 위에는 금테가 반짝거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

그들은 이 문을 열고 곧 대금붕왕을 볼 수가 있었다.

대금붕왕은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으로 세상의 풍상을 다 겪고 난 뒤의 고요함과 존엄함이 배어 있는 듯했다.

그는 유수처럼 빨리 흘러가는 세월 때문에 큰 뜻을 헛되이 소비하고 위축되고 쪼글쪼글해, 마치 한 송이의 아름다운 맨드라미가 성난 서풍 속에서 시들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큰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의자에는 무늬가 있는 비단 깔개가 덮여있어 그를 높은 산 구름 속에 있는 한 그루의 늙은 고송(枯松) 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육소봉은 그의 눈 속에 아직 형형한 빛이 있어 실망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의 태도는 존엄과 고귀함이 서려 있었다.

귀가 크고 다리가 긴 사냥개는 먼저 돌아와서는 그의 다리 아래에 웅크리고 있었다.

단봉공주는 살며시 걸어 나가서는, 마치 이번 여행에 대해서 조용히 설명하는 것처럼 그의 발아래 엎드렸다.

대금붕왕의 빛나는 눈동자는 계속 육소봉을 응시하더니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젊은이, 이리로 오게나."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힘이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은 꼭 명령을 하는 것 같아 육소봉은 앞으로 가지 않았다.

육소봉은 습관적으로 명령에 따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이 노인 맞은편의 멀리 떨어진 의자에 가 앉아버렸다.

방안의 불빛은 어두워지고 대금붕왕의 눈은 더욱 빛났다. 무서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육소봉이요?"

육소봉은 조용히 대답했다.

", 상관단봉이 아니라 육소봉입니다."

그는 벌써 공주의 성()이 상관인 것을 알고 있었다(옛날에 그들의 왕족은 모두가 성이 상관이었고, 모두가 이 성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대금붕왕은 갑자기 크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과연 육소봉이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걸 보니 우리들이 잘 찾은 것 같군."

육소봉이 말했다.

"나도 내가 잘 찾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화만루를 찾고 있소?"

육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금붕왕이 말했다.

"그는 잘 있어요. 나의 일에 대답만 해주면 언제라도 그를 볼 수가 있어요." "당신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일입니까?"

대금붕왕은 이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손에 들려 있는 아주 이상하게 생긴 반지를 쳐다보았다. 나이가 든 얼굴 위에는 갑자기 이상한 광채가 떠올랐는데,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왕조는 아주 오래된 왕조입니다. 당신들의 이 왕조가 있기도 전에 우리 왕조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힘이 있었고, 자신의 성씨와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나타나 있었다.

육소봉은 이 늙은 노인의 자긍심을 무너뜨리고 싶지가 않아서 아무 말도하지 않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대금붕왕은 말했다.

"지금 우리들의 왕조는 이미 몰락했지만, 우리에게는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들 중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으면 우리들의 왕조는 결코 소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자부심이 가득할 뿐만 아니라,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육소봉은 이 노인이 정말로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을만한 곳이 있다고 느꼈다. 그는 적어도 쉽게 다른 사람에게 공격을 당할 사람은 아닌 있었다.

육소봉은 항상 이런 사람들을 존경해 왔고, 그들의 용기와 신념을 존경했다.

대금붕왕이 말했다.

"우리 왕조는 아주 먼 곳에서 세워졌었지요. 모두가 편안하고 풍족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논밭에서 생산되는 것도 많고 깊은 산 속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금은보화가 많이 있었습니다."

육소봉이 물었다.

"그런데 당신들은 왜 중원까지 오게 된 겁니까?"

대금붕왕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나타나고 눈에는 침통한 증오가 서렸다.

"우리들의 그 풍족하고 넉넉한 것이 이웃 나라의 탐욕을 야기 시켰습니다.

코작족의 정예부대와 연합을 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했습니다."

그는 가만히 말을 이어갔다.

"벌써 오십 년 전의 일이어서 내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선왕께서는 줄곧 문치만을 중요시하셔서, 당연히 그들의 사납고 야만적인 기병에게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라의 운명과 같이하기로 결정을 하셨습니다."

육소봉이 말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을 중원으로 도망가게 한 것이군요?"

대금붕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후일의 중흥을 도모하기 위해서 작은 힘이라도 보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나를 피신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고의 재물을 사등분하여 그의 네 명의 심복에게 나누어주고는 나를 데리고 중원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감격 어린 표정이 나타났다.

"그중의 한 분이 나의 외삼촌인 상관근(上官謹)입니다. 그는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오셔서는 그가 가지고 온 일부 재산으로 이곳에다 논밭과 집을 사셨습니다. 우리 가족이 지금까지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분 덕택입니다. 나는 그가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육소봉이 말했다.

"나머지 세 사람은요?"

대금붕왕의 감격은 분노로 바뀌었다.

"내가 부왕을 떠나던 그날부터 나는 그들을 다시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육소봉은 이 일의 사정을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즉시 물었다.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지요?"

대금붕왕은 손을 움켜쥐고는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상관목(上官木), 평독학(平獨鶴), 엄립본(嚴立本)."

"그 세 사람의 이름을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당신은 그들을 한 번쯤은 보았을 것입니다."

"?"

"그들은 중원에 오고 나서, 이름과 성을 바꿔 버렸습니다. 일 년 전에야 나는 겨우 그들의 소재를 알아냈습니다."

그는 갑자기 그의 딸을 향해 손짓을 했다. 단봉공주는 그가 앉아 있는 뒤로 가서는 단단하고 오래된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거기서 세 권의 화집을 꺼냈다.

대금붕왕은 원한에 차서 말했다.

"여기 그려져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세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이 그중에 두 사람은 안다고 생각됩니다."

각 화집 앞에는 두 개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는데, 하나는 젊은 모습이고, 하나는 늙은 모습이었다.(두 얼굴이 모두 한사람인 것이다.)

단봉공주는 첫 번째 책을 열면서 말했다.

"위에 있는 모습은 그가 궁을 떠날 때의 모습이고, 아래 그림은 우리가 일 년 전에 알아낸 그의 현재의 모습입니다."

둥근 얼굴 가득 웃음기가 퍼져 온화하고 선량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코는 아주 큰 매부리코였다.

육소봉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사람은 관중(關中--섬서성 위하유역 일대) 보석염가인 염철산(閻鐵珊)인 것 같은데요."

대금붕왕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맞아요, 지금은 염철산이지만 그때의 엄립본이지요. 나는 지금 그가 아직 죽지 않은 것을 하늘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그려져 있는 사람은 광대뼈가 높이 솟아 있고, 눈이 사납게 생기고 눈빛이 날카로워서 아주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육소봉은 이 사람을 보더니 얼굴색이 변했다.

대금붕왕이 말했다.

"이 사람이 바로 평독학입니다. 지금의 이름은 독고일학이고, 청의루의 우두머리이기도 합니다."

육소봉은 소름이 끼치는 듯한 표정으로 한동안 멍하니 있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사람도 알아요. 그러나 그가 청의루의 우두머리인지는 몰랐어요."

그는 한숨을 길게 쉬고는 또 말했다.

"나는 그가 아미검파(峨嵋劍派)의 장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대금붕왕은 한스럽게 말했다.

"그는 신분을 속이기가 아주 좋았어요. 세상 사람들은 공정하고 엄격한 아미검파의 두목이, 바로 고국을 배반한 난신적자(亂臣賊子)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것입니다."

세 번째 그려져 있는 사람은 몸이 야위고 작았으며, 쓸쓸하고, 깨끗하고 정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육소봉은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곽휴!"

대금붕왕이 말했다.

"맞아요, 곽휴. 상관목의 지금의 이름이 바로 곽휴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곽휴가 갑부이고 괴팍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오십년 전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나타나서는 갑자기 천하제일의 갑부로 변하였습니다. 당신을 제외하고는 강호에서 그가 어떻게 그렇게 방대한 재산을 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육소봉의 얼굴색이 하얗게 변하면서 천천히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의자에 앉았다.

대금붕왕은 그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을 했다.

"당신은 이미 우리들이 당신에게 해달라고 할 일이 무엇인지 아셨을 것입니다."

육소봉은 오랫동안 침묵하고는 한숨을 길게 쉬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대금붕왕은 양손을 움켜쥐고는 힘껏 의자를 치면서 무섭게 말했다.

"나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정의입니다!"

육소봉이 말했다.

"정의가 곧 복수입니까?"

대금붕왕은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입을 다물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대신해서 복수하기를 원하십니까?"

대금붕왕은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더니 갑자기 한숨을 길게 쉬고는 침울하게 말했다.

"그들은 이미 모두가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들이고, 나도 또한 늙었는데 내가 가서 그들을 죽여야 하는 건가요?"

그는 자기가 한 이 말을 부정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법을 어기고도 법의 제재를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행동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육소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대금붕왕은 또 무섭게 말했다.

"첫 번째로 나는 그들이 금붕왕조로부터 가져간 재산들을 금붕왕조에 돌려주어 부흥의 기초가 되게 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이 요구는 아주 타당한 말이었다.

"두 번째로 나는 그들이 직접 선왕의 영전 앞에서 자기의 잘못들을 참회해서, 선왕이 하늘에서나마 얼마간의 위안을 얻을 수 있게 되길 요구합니다."

육소봉은 조용히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두 가지 요구는 아주 정의로운 것이군요."

대금붕왕은 즉시 말했다.

"나는 당신이 아주 정의로운 젊은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런 부탁을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육소봉은 다시 오랫동안 생각을 하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단지 이 두 가지 일이 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걱정입니다."

대금붕왕이 말했다.

"만약 당신도 하지 못한다면 누가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육소봉이 말했다.

"아마 누구도 할 수 없을 테지요."

그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들 세 사람은 이미 세상에 명성을 날리고 있는 인물들이고, 만약 사실이 이러하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옛날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명성과 지위와 재산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일을 그들이 좋아할 리가 없지요."

대금붕왕의 기분은 더 침울해졌다.

"나도 그들이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육소봉이 말했다.

"더군다나 재력과 세력이 가공할 정도일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아주 높은 무공을 쌓았어요."

대금붕왕이 말했다.

"선왕께서는 그들이 금붕왕조의 가장 뛰어난 고수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런 중요한 일을 맡기셨어요!"

육소봉이 말했다.

"오십 년 동안 그들은 언제라도 당신이 그들을 찾아서 복수할 것을 생각하고는 그들의 무공을 그렇게 발전시켰겠지요?"

그는 한숨을 쉬고는 이어서 말을 했다.

"나는 세상에서 무공이 최고봉에 다다른 사람이 대여섯 명 있다고 말해왔는데, 곽휴와 독고일학이 그중에 포함됩니다."

단봉공주는 놀라서 물어보았다.

"다른 서너 사람은 누구인가요?"

육소봉이 말했다.

"소림주지인 대비선사(大悲禪師)는 가장 나이가 많은 도인으로 내외공이 모두 입신이 경지에 다다른 분입니다. 검법의 날카롭고 영묘하기로는 바다를 날아다니는 듯한 백운성주(白雲城主) 엽고성(葉孤城)과 만매산장(萬梅山莊)의 서문취설을 따를 자가 없지요."

단봉공주는 그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당신은요?"

육소봉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듯 하고 있었다.

대금붕왕이 또 한숨을 쉬고는 침통하게 말했다.

"나는 이번 일이 어렵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당신에게 강요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당신은 생각을 충분히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의 눈에는 비분이 가득 차 있었고 양손을 꽉 움켜쥐고는 무섭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과 목숨을 걸고 싸울 것입니다. 우리들이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다면 그들과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육소봉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대금붕왕은 아무 말도 않고 오랫동안 있더니 억지로 웃으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육공자는 우리들의 귀한 손님이신데, 왜 술을 아직 가지고 오지 않는 거냐?"

단봉공주는 머리를 숙이고 말을 했다.

"사람을 시켜 준비시키겠습니다."

대금붕왕이 말했다.

"가장 좋은 페르시아산 포도주를 가지고 오고, 화공자도 오시라고 하여라."

"."

대금붕왕은 육소봉을 보고는 믿음직스럽고, 흐뭇한 마음이 들어 이렇게 말하였다.

"어쨌든, 당신은 이미 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금붕왕조의 후손은 지금까지 어떠한 일도 친구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육소봉은 조용히 단봉공주가 높은 술잔에 술을 따르는 것을 보고 있었고, 화만루는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힘껏 악수를 하였다.

이것이면 충분했다. 술은 세 잔뿐이었다.

대금붕왕은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만, 오늘은 전례를 깨뜨리고 두 분과 한잔 마시겠습니다."

단봉공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대신 마시겠어요. 다리를 잊지 마세요."

대금붕왕은 눈을 뜨고는 마침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 나는 마시지 않겠어. 사람들이 좋은 술을 마시는 것을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지. 좋은 술은 원래 사람들에게 기력과 힘을 주는 것이니까."

단봉공주는 미소를 지으며 육소봉에게 변명을 하였다.

"아버님은 조금이라도 술을 드시면 양다리가 부어올라서 걷기가 힘들어집니다. 두 분께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육소봉은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단봉공주는 몸을 돌려 그의 아버지를 등 뒤에 두고는, 육소봉에게 은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육소봉은 이해할 수가 없는 은밀함이었다.

단봉공주는 웃으며 술잔을 들고는 말했다.

"이것은 아버님께서 창고에 오랫동안 저장하신 페르시아산 포도주입니다. 두 분의 입맛에 맞으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자기가 먼저 한 잔을 마시고는 또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정말 좋은 술입니다."

주인이 자기의 술을 여러 차례 칭찬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단봉공주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육소봉은 이상하다고 느꼈다. 갑자기 그가 마신 것이 술이 아니라 색깔 있는 설탕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단봉공주의 뜻을 알아챘는데, 화만루가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하는 것이 걱정이 되었다.

화만루는 미소를 지으며 술을 마시고는 말했다.

"정말로 좋은 술이군요!"

육소봉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지금껏 이렇게 좋은 술은 마셔보지 못했어요!"

대금붕왕은 처음으로 즐거운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정말로 구하기 힘든 좋은 술입니다. 당신들 두 분 같은 젊은이만이 마실 자격이 있는 그런 술입니다."

육소봉은 재빨리 술을 마시고는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좋은 술을 공짜로 마실 수는 없습니다."

대금붕왕은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하시는 말뜻은....."

육소봉은 크게 한 번 숨을 쉬고는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도 정의입니다. 당신을 대신해서 최선을 다해 찾아오겠습니다!"

대금붕왕은 갑자기 일어나서는 비틀거리며 그의 앞으로 왔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는데, 눈에는 감동의 눈물이 글썽거리고 목소리는 어느새 흐느껴 울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 말만을 했는데, 몇 번이나 말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단봉공주는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다 몸을 돌려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한참이 지나 대금붕왕이 비교적 평정을 되찾았을 때 입을 열었다.

"독고방과 독고일학은 같은 독고 씨지만, 그들의 원한은 바다같이 깊습니다. 유여한의 반쪽 얼굴도 염철산이 없앤 것입니다. 소추우는 유여한의 둘도 없는 친구로서, 당신이 우리를 위해 이 일을 할 때에 그들 세 사람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당신과 함께 할 것입니다."

육소봉이 말했다.

"그들은 여기 남아 있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대금붕왕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죠?"

"나는 그들이 무림의 최고 고수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독고일학과 곽휴와 맞선다면 그들은 목숨을 잃고 말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은 그럼 다른 도움이 필요하지 않나요?"

"당연히 필요하지요!"

그는 가만히 화만루의 어깨를 치고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들은 원래 오랜 동료입니다."

대금붕왕은 못 믿겠다는 듯이 화만루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 장님이 유여한, 소추우, 독고방과 같은 고수들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마 누구도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육소봉이 이어서 말했다.

"그 외에도 나는 두 세 사람을 더 찾으러 가야 합니다!"

"누구를 찾아야 하나요?"

"먼저 주정을 찾아야 합니다."

"주정?"

그는 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육소봉은 웃으며 말했다.

"주정은 고수는 아니지만, 지금은 아주 필요한 사람입니다."

대금붕왕은 그의 다음 설명을 기다렸다.

"당신이 그들을 찾았다면, 그들 또한 당신을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그들을 찾아 결판을 내려야 한다면 그들이 먼저 손을 써서 당신을 죽여 입을 막으려 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두렵지 않아요!"

"당신이 두렵지 않아도, 나는 두렵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정을 찾는 것인데, 그는 이곳을 누구도 쳐들어올 수 없는 성루로 바꿀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책략을 짤 수 있다는 것입니까?"

"손을 쓰기만 하면 그는 사람을 무는 의자도 만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대금붕왕은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당신 주위엔 정말로 이상한 친구들이 많군요."

"지금 나는 단지 내가 이번 일을 하는 데 한 사람만 도와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도 매우쓸모 있는 사람입니까?"

"그가 손을 쓰기만 하면 이번 일은 거의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서문취설입니다."

복도는 더욱 음침하고 어두워졌다. 벌써 늦은 오후인 것이다.

단봉공주는 머리를 숙이고 있어 까만 머리가 샘물처럼 그녀의 어깨를 덮고 있었다.

"조금 전의 일은 어떻게 감사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의일이라는 것은 그 술을 말하는 것입니까?"

단봉공주의 얼굴은 붉어졌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했다.

"당신도 보셨겠지만, 아버님은 지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게다가 공격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분이라 나는 사실은 그가 알지 못하길 바랐던 것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단봉공주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이곳에는 아버님이 생활하시는 응접실과 침실을 제외하고, 다른 방들은 모두가 비어 있습니다. 그 오랜 세월 묻어 두었던 술조차도 계속해서 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고개는 더 떨구어졌다.

"우리 집에는 돈을 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이 집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들은 당신을 찾는 것 같은 다른 일들을 해야 했었습니다. 심지어는 어머님께서 제게 남겨주신 진주조차도 모두 저당 잡히고 말았습니다."

육소봉이 말했다.

"나는 원래 당신네 사정을 잘 몰랐었는데, 그 술이 내게 많은 일을 알려주는군요."

단봉공주가 머리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우리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대답을 하신 것인가요?"

육소봉이 말했다.

"그가 이미 나를 친구로 대해 주었는데, 다른 일로 나를 협박하지는 않겠지요!"

단봉공주는 아름다운 눈동자에 감격 어린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떨어트리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전부 잘못 보았나 봐요. 나는 당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절대로 마음을 쓰지 않을 사람으로 보였었지요!"

화만루는 줄곧 미소를 지으며 듣기만 하고 말은 별로 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람은 보기에는 추악하고 억세지만, 실제로 마음은 한없이 부드럽다고."

단봉공주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을 했다.

"당신도 틀렸어요!"

"?"

"그는 언뜻 보기에 억세기는 하지만, 하나도 추하지는 않았어요."

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은 붉어졌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방안이 아주 누추할 텐데. 두 분께서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육소봉은 가볍게 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아마 우리들이 여기서 저녁을 먹겠다고 대답하는 것이 잘못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당신이 우리를 위해 남겨주신 네 덩이의 금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세요."

"그때 당신들은 이미 곽노인이 당신들이 찾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당신이 말하고 나서야, 우리들도 알았습니다."

육소봉의 표정이 아주 엄숙하게 변하면서 말했다.

"당신들은 독고일학이 청의루의 두목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이것은 강호의 가장 큰 비밀일 텐데요!"

단봉공주는 주저하며 대답했다.

"유여한이 원래는 그의 가장 유능한 신임 받는 사람이었어요. 옛날의 그 풍채 당당한 옥면낭군이 오늘날 이렇게 변한 것이 그 때문입니다."

육소봉은 많은 일들이 이해가 된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렸다.

단봉공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이 많으면 옛부터 한이 많다더니, 그는 상처가 아주 깊은 사람이지요!"

방은 컸는데도 침상 하나와 작은 탁자 등 몇 개의 오래된 의자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른 장식품이 없었다.

화만루는 의자에 앉았다. 그는 보이지는 않지만, 의자가 거기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육소봉이 그를 보고는 물었다.

"잘못 앉은 적이 없나?"

"자네는 내가 잘못 앉기를 바라는 건가?"

"나는 자네가 앉을 때마다 여인의 몸에 앉게 되기를 바란다네."

"그런 경험은 나보다 자네가 더 풍부할 텐데."

"그런 경험이 나처럼 많이 있었다면, 아마 속지는 않았을 텐데!"

"누구에게 속았다는거야?"

"벌써 상관비연을 잊은 건가?"

"나는 속지 않았다네. 내가 스스로 온 것이지."

육소봉이 놀라서 물었다.

"스스로 원해서 왔다고? 왜지?"

"요즈음 생활이 너무 평범했기 때문에 위험하고 흥미로운 일을 하려고 생각했지!"

"자네는 거짓말하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속은 것에 지나지 않을 거야!"

"그녀는 거짓말을 하는 소녀이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진실만을 말했네."

"그녀가 벌써 이 일을 자네에게 알려주었나?"

화만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녀는 자네 같은 사람에게 부탁하는 좋은 방법은 바로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나 보군."

"아마 그렇겠지."

"그녀의 목적은 자네를 오게 하는 것이었고, 자네가 왔으니 그녀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군."

"자네는 나를 화나게 하려는 마음이 있나?"

"자네는 화가 나지 않나?"

"내가 왜 화가 나나? 그들은 마차로 나를 맞으러 왔고, 귀한 손님처럼 나를 대해 주는데. 이곳의 바람은 부드럽고 날씨는 따뜻하여 정원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네, 더군다나 자네까지 왔고. 내가 정말로 그녀에게 속았다 해도 원망할 것이 없지 않은가."

육소봉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자네를 화나게 하는 일은 정말 쉽지가 않아."

화만루가 갑자기 물었다.

"자네는 정말로 서문취설을 찾아갈 생각인가?"

"!"

"자네는 그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손을 쓸 것이라고 생각하나?"

"나도 세상의 어떤 일보다 그를 움직이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알아. 그러나 한번 시도해 보는 것이지."

"그런 다음에는?"

"지금 나는 다른 것은 생각해 보지 못했어. 바깥에 나가서 걸어 다니면서 구경할 생각뿐이네."

"무엇을 찾으려는 건가?"

"아마 내가 가장 보고 싶은 것은 상관비연이야."

화만루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웃음 속에는 약간의 걱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자네는 그녀를 찾지 못할 것이네!"

"?"

"내가 여기에 오고 난 후 다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거든. 여기를 떠난 것 같아."

육소봉은 걱정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화만루는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여자 같아."

방 안은 어두워졌고, 화만루 혼자 거기에 앉아 있었다. 아주 즐겁고 평안해 보였다.

그는 언제나 즐겁고 만족해 있다. 어떤 장소에 있든지 그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이곳의 춘삼월의 황혼을 즐기고 있다.

갑자기 그는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사람들은 벌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는데, 독고방과 소추우 그 두 사람이었다.

독고방의 걸음이 하도 빨라서 걸음소리는 한 사람이 걷는 것 같았다.

화만루는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은 앉으시지요. 여기에 아직 몇 개의 의자가 더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이 온 까닭도 묻지 않았고, 그들이 누구인지도 묻지 않았다. 누가 방안에 들어오든지 그는 똑같이 환영하고 자기가 가진 기쁨을 이 사람들과 나눌 것이다.

독고방은 얼굴이 굳어지며 쌀쌀맞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우리가 두 사람인 것을 알았어요? 당신 정말로 장님 입니까?"

그는 사람들이 자기의 발자국소리를 절대로 들을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의 경공에 항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그는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다.

화만루는 여전히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때로는 나 자신도 내가 정말 장님인지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눈이 있더라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말로 장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추우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종류의 사람도 정말로 장님이라는 것을 당신은 잊었군요."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요?"

"죽은 사람이지요."

"당신은 죽은 사람들이 진짜 장님이라는 걸 어떻게 아나요? 아마 죽은 사람도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우리들은 모두 아직 죽지 않았으니, 죽은 사람이 느끼는 것을 어떻게 알겠어요?"

독고방이 말했다.

"아마 당신은 아주 빨리 알게 될 것입니다!"

소추우는 여유있게 말했다.

"우리들은 당신을 알지는 못하지만 당신에게 원한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당신을 죽이러 왔습니다!"

화만루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고, 즐겁지 않은 표정도 아니었다. 여전히 그는 미소 지으며 가만히 말했다.

"사실은 나도 일찍부터 두 분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독고방이 말했다.

"당신은 우리들이 당신을 죽이러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육소봉은 바보는 아닙니다. 그러나 때때로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는 허풍선이입니다."

독고방이 비웃었다.

"누구라도 자기가 장님보다 못하다고 여겨지길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두 분같이 고수이신 분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두 분은 당연히 나를 찾아오셔서 이 장님과 한 번 겨루어 보려 하실 테지요!"

그의 기분은 여전히 평안한 것같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강호의 호걸들이 참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말투이지요!"

독고방이 말했다.

"당신은요?"

"나는 호걸이 아닙니다. 단지 장님일 뿐입니다."

독고방은 웃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경이로운 표정이 서려 있었다. 이 장님은 정말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소추우가 말했다.

"당신은 우리들이 올 것을 알고 여기서 우리를 기다렸나요?"

"장님이 어떻게 여기에 올 수 있겠습니까?"

독고방이 갑자기 무섭게 소리쳤다.

"죽어라!"

그는 손을 뻗어 번쩍이는 창으로 독사처럼 화만루의 목을 향해 찔렀다.

장을 끊는 검도 공격을 시작했다.

그의 손은 아주 느려서 바람소리가 나지 않았다. 장님은 볼 수가 없으나 칼이 다가올 때 내는 바람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이 칼은 어떤 소리도 내지 않으니, 정말로 장님의 장을 끊어 놓을 수 있는 칼인 것이다.

하물며 독사같이 날렵한 창이 앞에서 공격을 하고 있음에랴. 설사 창이 맞추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칼은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추우의 생각은 틀렸다.

이 장님은 귀를 이용해서 들을 뿐만 아니라, 아주 신기하고 신비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치명적인 것은 창이 아니라 칼인 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볼 수는 없었지만, 이 칼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칼을 찌르지를 못했다. 그가 갑자기 몸을 돌려서 창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갈 때 그의 손은 탁, 소리를 내며 칼을 잡아버린 것이다.

, 소리가 나면서 한 자루의 잘 다듬어진 칼은 세 조각으로 끊어져 버렸다. 다른 사람의 장을 끊지도 못하고, 칼은 끊어져 버린 것이다.

가장 긴 조각이 아직 화만루의 손에 잡혀 있었는데, 그는 손을 돌리자 창이 칼끝을 감아버렸다.

화만루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소선생에게 죄를 지을 생각은 없었는데요. 소 선생의 그 칼은 장님에겐 좀 잔인한 것이 아니었나요. 나는 소 선생이 칼을 휘두를 때는 다른 사람에게 도망갈 길을 남겨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꽃밭의 꽃나무는 열매가 아주 많은데, 지금은 많은 꽃가지들이 꺾여있었다.

육소봉은 그제야 단봉공주가 가지고 왔던 그 꽃들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알 수가 있었다.

이때 그는 어떤 어린 소녀를 발견하였다. 그 소녀는 상관설아였다.

상관설아는 꽃밭에 서 있었다. 옅은 석양이 그녀의 비단같이 매끄러운 머리칼을 비쳐주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얌전해 보여서 어떤 거짓말도 할 것 같지가 않았다.

육소봉은 다가가서 웃으며 말했다.

"여보세요, 사촌 언니."

상관설아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여보세요, 사촌 동생."

육소봉이 말했다.

"안녕?"

"좋지가 않아요."

"왜 좋지 않아?"

"걱정이 있어요. 걱정이 아주 많아요."

육소봉은 그녀의 눈 속에 정말로 근심이 가득한 것을 느꼈다. 그녀의 웃는 얼굴도 모두가 억지로 그러는 것 같았다.

"무슨 걱정이 있어?"

"나는 언니를 걱정하고 있어요."

"언니라면? 상관비연?"

상관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왜 그녀를 걱정하는데?"

"언니가 갑자기 사라졌거든요."

"언제 사라졌지?"

"화만루가 여기 오던 그 날요. 우리가 당신을 찾아가던 그 날요."

"걱정이 되면, 왜 나가서 언니를 찾아보지 않는 거지?"

"그녀가 여기서 우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고 했기 때문이지요."

"너는 그녀가 하는 말을 모두 다 믿니?"

"당연히 믿지요."

육소봉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녀가 나가지 않았다면, 왜 갑자기 보이지 않는 걸까?"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지금 찾고 있는 중이에요."

"여기 꽃밭에서 찾는다고?""!"

"그녀가 만약 여기 꽃밭에 숨었다면, 며칠이나 숨어 있었다는 거냐?"

"나는 그녀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시체를 찾는 거예요."

육소봉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녀의 시체라고?"

"나는 그녀가 벌써 죽었다고 생각돼요. 시체는 여기 꽃밭에 묻혀 있을 거예요!"

"여기는 너희 집인데 누가 그녀를 죽인다는 거지?"

"여기에는 우리 집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있어요."

"다른 어떤 사람들?"

"예를 들어 당신의 친구인 화만루 같은 사람이죠."

"너는 화만루가 그녀를 죽였을 거라 생각하는 거니?"

"어째서 아니죠? 누구나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늙은 할아버지 왕도 가능한 일이지요!"

"늙은 할아버지 왕이 그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왜 그랬을까?"

"나도 왜 그런지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찾고 있는 것이지요!"

육소봉은 한숨을 가볍게 쉬고는 말했다.

"너는 생각하는 것이 너무 많아. 겨우 열두 살짜리 소녀가 그렇게 많은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어!"

상관설아는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었다.

"내가 열두 살이라고 누가 그러던가요?"

"너의 사촌언니가 말해 주었지."

"당신은 그녀의 말은 믿으면서, 내 말은 왜 믿지 않는 거죠?"

"왜냐하면....."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거짓말하게 생겼나요?"

육소봉은 웃었다.

"적어도 너는 절대로 스무 살 난 여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상관설아는 또 그를 오랫동안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의 가장 큰 병은 자기가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믿어야 될 것은 믿지 않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은 오히려 믿고 그러죠."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그림자는 꽃밭 속으로 사라졌다.

어둠이 깔리고 있었고, 마지막 태양 빛도 이미 보이지 않았다. 대지에는 천천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이제는 아름다운 꽃들도 제 색깔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육소봉은 안개처럼 넓게 퍼진 저녁을 마주 대하고는, 이곳이 안개속인 것처럼 느꼈다. 사람들도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저녁 빛이 더욱 짙어지고, 방안에는 등불 하나 없다.

육소봉이 들어왔을 때 화만루는 여전히 창가에 앉아, 창 밖에서 불어 들어오는 봄바람과 봄바람이 싣고 오는 향기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생명력을 느낄 수가 있다.

육소봉이 물었다.

"그들이 왔었나?"

"누가 왔었냐고?"

"독고방과 소추우."

"자네는 그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나?"

육소봉은 웃으며 말했다.

"유여한은 그런 일로 자네를 죽이러 올 사람이 아니지만, 저들은 자네를 죽이지도 못할 것인데."

화만루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는 모두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군."

"내가 알지 못했으면 왜 조금 전에 슬그머니 나갔겠나?"

"자네는 그럼 일부러 그들의 감정을 자극시켜 오게 하고는, 슬그머니 나가버려 그들이 나를 죽일 기회를 준 것인가?"

그는 한숨을 쉬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 같은 친구는 정말로 찾기 힘들 거야."

"상관비연은 찾아보았나?"

"그녀의 동생도 그녀를 찾지 못했는데, 내가 어찌 찾을 수 있겠는가?"

화만루의 온화한 얼굴에 일말의 근심이 서렸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소녀에 대해 그는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심상치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이런 감정이 사람의 마음에 생기면, 모래알 중의 진주처럼 어떠한 사람이라도 한눈에 알아챌 수 있는 있었다.

육소봉은 당연히 알아채고는 일부러 물었다.

"자네는 그녀의 동생을 본 적이 있나?"

"본 적 없네."

"자네의 운수는 아직은 괜찮은 것이네. 적어도 나의 운수보다는 좋은 거야."

"그녀의 동생은 트집을 잡아 소란을 피우는 아이인가?"

"트집을 잡아 소란을 피울 뿐만 아니라 요물이야. 거짓말을 해서 죽은 사람이라도 속여 넘길 것이고, 의심병까지 들었어."

"어린아이도 의심병이 생길 수 있나?"

"그녀의 의심하는 것은 할머니보다 더 심해. 그녀는 심지어 그녀의 언니가 벌써 다른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자네와 대금붕왕을 살인마로 의심하고 있던걸."

그는 원래 화만루를 즐겁게 할 생각이어서, 자기 자신이 크게 웃어 버렸다. 그러나 화만루는 조금도 즐거워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육소봉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이 익살맞지 않나?"

"익살맞지 않아."

"상관비연은 어린 소녀에 불과해, 기껏해야 거짓말이나 하는 열여덟, 아홉의 소녀인데, 누군들 거짓말을 하지 않나? 다른 사람들이 왜 이런 소녀를 죽이겠는가? 그리고 누가 그런 악랄한 수단을 쓰겠는가?"

화만루는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 나는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네."

"뭘 바라는데?"

화만루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들이 오늘 저녁에는 가짜 술을 사용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네."

화만루가 이 말을 하는 것이 이상했다. 그는 원래가 술 마시기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육소봉은 갑자기 그의 웃는 얼굴이 신비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이곳에 오기만 하면 모두가 즉시 약간은 신비로워지고 약간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육소봉은 눈을 깜빡이며, 일부러 신비한 말투를 써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어."

화만루가 즉시 물었다.

"어떤 걸 바라는데?"

육소봉이 말했다.

"나는 그들이 오늘 저녁 우리를 청해서 우리가 먹는 것이 사람고기로 만든 만두가 아니고, 마시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술이 아니기 만을 바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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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37.♡.155
내사랑이다 (♡.50.♡.207) - 2021/11/02 18:40:05

잘보고갑니다

서초 (♡.2.♡.162) - 2021/11/05 16:12:05

잘 보고 갑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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