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화적편 16

3학년2반 | 2022.01.13 07:39:47 댓글: 0 조회: 291 추천: 0
분류연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1936
6 꺽정이와 두령 여섯과
모두 합하여 일곱 사람이 마산리서 관군 5백여 명을 대항하고 무사히들 청석골
로 돌아온 뒤 승전을 축하하기 위하여 대연을 배설학자고 여러 두령이 공론들
하는 것을 꺽정이가 처음에는 “승전이 무슨 놈의 승전이냐. 간신히 목숨들 도
망한 것을 승전이라구 잔칠 하잔 말이냐. 창피스럽다. 그 따위 소리 하지들 마
라.” 하고 꾸지람으로 내리눌렀었다. 다른 두령들은 감히 다시 개구를 못하였으
그중의 오가는 자기가 먼저 큰잔치를 하자고 발론을 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두
령들이 대장의 허락을 받으라고 내세우는 까닭에 꺽정이를 따로 와서 보고 “대
장께선 마산리 쌈이 승전이 아니라구 잔치를 말리신다지요? 홑일굽 분이 배루
치면 칠칠이 사십구 칠십 배가 훨씬 넘는 대적과 접전해서 그 기세를 꺾구 용맹
이 무쌍하다는 오위부장을 한칼에 벤 것이 어째 승전이 아닐까요. 우리는 훌륭
한 승전으루 알지만 대장 말씀을 좇자서 승전이 아니라구 하구요, 그러구라두
우리 도중의 우두머리 일굽 부이 사지에 들어갔다가 무사히들 나오신 것이 도중
의 막대한 경사가 아닌가요. 이런 경사에 왜 잔치를 못하게 하실까요. 대장께서
정히 도중 잔치를 못하게 하신다면 내가 좀 주제넘지만 수양딸에게 물려주려구
아껴둔 사천으루 일굽분을 위해서 한번 위로연을 떡벌어지게 차릴 테요. 이건
허락하시겠지요?” 하고 수다를 떨었다. 오가가 일자 상처한 후로 수다도 잘 떨
지 않고 너스레도 잘 놓지 않고 혼감과 수선도 잘 부리지 아니하여 걸의 딴사람
같이 되었었는데 이날 수다가 의외라 “나는 오두령 수다가 다 없어진 줄 알았
더니 그래두 좀 남았구려.” 하고 꺽정이가 웃었다. “오십여 년 동안 떨 대루
다 떨구 조금 남은 수다는 속에 간직해 두었다가 저 세상으루 가지구 가려구 생
각했더니 저 세상에 가선 그나마 떨지 못할 것 같아서 이 세상에서 마저 떨어버
리구 갈 작정이오.” “저 세상에 갈 날을 언제루 받아놨소?” “갈 날을 내손
으루 받지 않아서 똑똑힌 모르지만 그다지 멀진 않겠지요.” “저 세상에 가면
마누라님을 다시 만나볼 줄루 아우?” “마누라쟁이를 꼭 다시 만나볼 줄만 알
면이야 지금 당장이라두 이 세상을 하직하구 가지요. 가다뿐이오.” “죽은 마누
라 생각 고만하구 젊은 첩이나 하나 얻을 생각하우. 내가 얻어주리까? 소원만
말하우. 양첩이 좋소? 기생첩이 좋소?” “그런 심려는 두었다 하시구 도중 잔
치나 어른 허락해 주시우.” “도망질해 와서 잔치했다면 청문이 사나워서 말라
구 했더니 오두령 청으루 허락하겠소.” 꺽정이가 마침내 대연을 배설하라고 명
령을 내리어서 두령으로부터 졸개까지 다들 좋아하였다. 돼지 잡고 소 잡고 떡
만들고 술 걸러서 도중 상하가 사흘 동안 연일 진탕 먹고 즐겁게 놀았다. 잔치
끝날은 한통속으로 지내는 근처 사람들까지 청하여 먹이었는데 그때 송도 김천
만이가 들어와서 경군이 청석골을 치러 내려온다는 주워 들은 소문을 전하여 꺽
정이가 진적한 조정 소식을 알려고 잔치 끝난 뒤 곧 황천왕동이를 서우로 올려
보냈다. 서울의 연락 맺고 지내던 곳이 거진 다 끊이었으나 남대문 밖에서 객주
하던 치선이 김선달은 서림이와 동치로 객주를 떠엎고 아직 윤영부사댁 도차지
손동지의 작은집에서 곁방살이를 하는데 곁방살이하는 중이라도 서로 연신을 끊
지 말자고 그 처남 된다는 사람을 전위해 보내서 기별한 일이 있는 까닭에 황천
왕동이가 서울 가서 조정 소식을 물어보려고 장대고 가는 사람은 곧 김치선이었
다. 황천왕동이가 서울 오는 길에 혜음령 고갯길을 돋우밟아서 마루턱까지 거
의 다 올라왔을 때 보행인 하나가 마루턱에 서서 내려다 보며 “청석골서 오십
니까?” 하고 알은 체하여 황천왕동이가 혜음령패의 망꾼이 보행인으로 가리고
나섰거니 짐작하고 선뜻 “그래.” 대답한 뒤 그 사람 앞에 올라와서 이목을 살
펴보니 당초에 낮모를 사람이라 황천왕동이가 그제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댁이 누구요?” 하고 곱지 않은 말씨로 물었다.
낯모르는 사람이 알은 체하는데 황천왕동이도 속이 좀 떨떠름하였지만 그 사
람은 섣불리 말 한마디 붙였다가 경치는 줄 알고 겁이 났던지 슬금슬금 뒤로 물
러섰다. “댁이 대체 누구요?” 황천왕동이가 재차 물어도 그 사람은 얼른 누구
라고 대지 않고 서슴는 말로 “서울 김선달 아시지요?” 하고 물었다. 김선달이
란 치선이 맣인 듯 황천왕동이는 속으로 짐작하면서도 짐짓 “서울 허구많은 김
선달에 어떤 김선달 말이오?” 하고 채치니 그 사람이 그제는 “남대문 밖에서
객주하던 치선이 김선달 말입니다.” 하고 똑똑히 명토를 박아서 말하였다. “김
선달 알구 모르는 건 왜 묻소?” “녜, 그이가 내 매형입니다.” “매형이라니?
” “누님의 남편이에요.” “녜, 그렇소.” 황천왕동이의 말소리가 비로소 부드
러워졌다. “내가 칠팔 일 전에 한번 갔었지요. 그때 마산리들 가시구 안 기시든
구먼요.” “다녀가셨단 말은 들었소. 그런데 전에 김선달 객주에서 나를 봤습디
까? 나는 본 생각이 안 나는데.” “전에 뵈인 일은 없지만 어림에 그런 듯해서
여쭤봤지요.” “어림잡는 재주가 용하구려.” “축지법 아신단 선성을 높이 들
었는데 지금 고갯길을 올라오는 걸음이 여느 사람 나려가는 걸음보다 더 빠르신
걸 보구 어림이 났습니다.” “그렇소. 그래 지금 어딜 가시는 길이오?” “매형
의 글월을 가지구 또 청석골을 가는 길입니다.” “나는 당신의 매형님을 만나
러 서울로 가는 길이오.” “지금 서울 가셔두 매형을 만나보시기 어려울걸요.”
“어째서 어렵소?” “그 동안 서울서 야단이 났습니다.” “무슨 야단이오?”
“청석골과 연락이 있을 듯한 사람들을 형조에서 잡느라구 지금 한참 야단입니
다.” “잡으면 형조보다두 포청에서 잡겠지?” “아니오. 형조에서 잡습니다.
들리는 말은 상감 처분이 형조루 나렸답디다. 우리 매형두 요전에 포청에서 잡
으려구 하던 것은 그동안 손동지의 힘으루 그럭저럭 어떻게 묵주머니가 되었는
데 새판으루 형조에서 이름을 지적하구 잡으려구 해서 그래 몸을 피했는걸요.”
“당신 매형님을 만나볼 수 없으면 나는 서울 가두 소용없소. 당신에게 서울 소
문이나 좀더 들읍시다. 경군이 청석골을 치러 나려온단 소문이 있으니 그런 소
문이 서울두 있습디까?” “순경사들이 오늘 떠난다더니 오늘은 어째서 못 떠나
구 내일 떠난답디다.” “순경사가 무어요?” “그 동안 황해도, 강원도 순경사
가 났습니다.” “순경사가 경군을 거느리구 나려올 사람이오?” “녜.” “내괴
이 고개 주인들이 눈에 뜨이지 않더라니, 요새 풍색이 좋지 않아서 꿈쩍들 못하
구 들어앉았는 모양이로군.” “황해도, 강원도에는 어디든지 다 그럴걸요.” “
나는 한 시각이라두 빨리 도루 가야겠소. 당신이 맡아가지구 오는 편지를 내가
가지구 먼저 갈 테니 당신은 뒤에 찬찬히 오시우.” “그럼 나는 청석골까지 가
지 않구 서울루 도루 가랍니다.” “편지 전하는 것 외에 다른 부탁은 받은 것
없소?” “녜, 다른 부탁은 받은 것 업습니다.” “그렇거든 편지만 나를 주구
돌아가시구려.” 황천왕동이가 혜음령에서 우연히 김치선의 처남을 만나서 청석
골로 전하러 오는 편지를 중간에서 받아가지고 그날 해 진 뒤에 돌아왔다. 여러
두령이 저녁밥들을 먹고 꺽정이 사랑에 모여 앉았다가 황천왕동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웬일이오?” “웬일인가?” “웬일이냐?” 모두 웬일이냐고 물었
다. 황천왕동아가 꺽정이를 보고 중로에서 돌아온 곡절을 말하고 품에 지니고
온 편지를 드리니 꺽정이가 받아서 옆에 앉은 이봉학이를 주고 읽으라고 하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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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소식은 달리도 들으셨으려니와 가는 아이의 구전으로 자세히 들으실
듯 모두 줄이오며.” 이봉학이가 편지 비두에 적힌 사연을 읽은 뒤 황천왕동이
를 바라보고 “서울 소식 이야기할 사람을 서울루 돌려보내구 왔네그려.” 하고
한마디 말하자 다른 두령 오륙 인이 그 뒤를 이어서 “편지 가지구 오는 놈을
여기까지 왔다 가랬으면 낭패 없을 겐데 중간에서 보낸 게 잘못일세.” “중간
에서 보낼라면 서울 이야기나 다 듣구 보낼 게지.” 황천왕동이를 책망하는 사
람도 있고 “김선달이 처남인지 첩처남인지 보낼 떼 서울 이야기를 가서 자세히
하라구 이러 보냈을 텐테 그 자식이 와서 이야기할 생각 않구 그대루 간 겔세그
려.” “고놈의 자식이 다리품 팔기가 싫어서 가라니까 웬 떡이냐 하구 간 모양
이오.” 김치선이의 처남을 욕하는 사람도 있고 또 “치선이두 치선이지, 지금
우리가 서울 소식을 어디서 들으리라구 ‘달리두 들으셨으려니와’가 다 무어
야.” “우리가 달리 들을 데 없는 걸 그 사람이야 알 까닭 있소.” “그러구 편
지를 안하면 모를까 이왕 할 바엔 대강은 편지에 적구 자세한 건 편지 가지구
가는 사람에게 들으라구 해야지 그러 덮어놓구 줄인단 말인가. 그렇게 줄일라거
든 숫제 편지를 하지 말구 사람만 보냈으면 좋을 것 아닌가.” 김치선이를 탓하
는 사람도 있었다. 여럿이 게가끔 지껄이는 통에 이봉학이가 편지를 읽지는 못
하고 혼자 보기만 하여 꺽정이가 여러 두령더러 지껄이지들 말라고 소리지르고
이봉학이를 돌아보며 “그 아래 적힌 사연이 다 무언가 어서 읽어보게.” 하고
편지 읽기를 재촉하였다. “좌포청 사건이 생긴 뒤 제가 손동지에게 통심정을
다하고 그의 힘을 보는 중이온데 어젯밤 그의 소실이 집에서 약주를 먹는 중에
동지가 저를 보고 너의 상전댁이 이번에는 뿌리빠지리라 웃음의 말씀을 하옵기
저 역시 웃으며 그것이 무슨 말씀인가 묻사온즉 좌포장댁 청직 한 사람이 무슨
청할 일이 있어 석후에 찾아와서 담화하던 끝에 서림이 이야기 났었는데 그 사
람의 말이 저의 주인 영감께서 서림의 지혜 많은 것을 신통히 보시고 특별 고호
하시므로 이번 순경사 나가서 쓸 계책까지 서림을 데리고 의논하시고 또 서림을
황해도 순경사에게 딸려보내실 의향이 계시다 하더라, 서림이 황해도 순경사를
따라가면 더 말할 것 없고 설사 따라가지 않더라도 아무개의 모사가 아무개 잡
을 계책을 내어 바쳤으니 그 계책이 범연하랴. 아무개가 이번에는 마산리에서와
같이 도망도 못하고 잡힐 터이니 두고 보라. 손동지의 말이 이러하더이다. 저의
생각에도,” “서림이란 놈이 제 요공하려구 우리를 잡으러 나온다. 그놈 참 죽
일 놈이다.” 하고 꺽정이가 별안간 볼멘소리를 하는 바람에 이봉학이는 편지
읽던 것을 그치고 “그놈이 우리를 잡으려구 하거나 안하거나 우리가 그놈을 잡
아 없애야지 후환이 없겠소.” 하고 말하였다. 곽오주가 이봉학이의 말끝을 달아
서 “잡아 없애야지, 그놈의 불여우을 세상에 남겨두면 사람의 오장 깡그리 다
빼먹구 말 게요.” 하고 말을 그만 그쳤으면 좋을 것을 짓궂이 “대장 형님, 불
여우한테 속은 게 인제 분하지요.” 하고 꺽정이를 오금박다가 “아가릴 찢어놓
기 전에 가만히 닥치구 있거라.” 꺽정이의 호령을 듣고 목을 음충맞게 움츠러
뜨리며 픽 웃었다. 곽오주의 웃는 꼴이 꺽정이 눈에 거슬려서 “꼴 보기 싫다.
여기 앉았지 말구 나가거라.” “밖에 동댕이치기 전에 냉큼 못 일어서겠느냐.”
하고 연거푸 천둥같이 호령하는데도 곽오주는 꿈질거리고 있는 것을 박유복이가
쫓아가서 등을 밀어서 밖으로 내쫓았다.
9
꺽정이는 서림이가 조정에 귀순한 줄을 안 뒤에도 서림이에 대하여 아직 용서
성이 많았었다. 서림이가 마산리 모임을 고발한 것은 용서하기 어려운 죄나 약
한 위인이 혹독한 단련을 받고 본의 아닌 소리를 지껄였거니, 서림이가 처자를
그대로 두지 않고 꾀바르게 빼간 것은 괘씸한 짓이나 저의 죄를 처자에게 연좌
쓸까 겁내기도 용혹무괴한 일이거니, 꺽정이가 이렇게 너그럽게 생각한 것은 서
림이를 자기의 제갈량으로 알아서 아니 들은 말이 없고 아니 쓴 계교가 없도록
종시 신임하였으므로 서림이 제 비록 조정에 귀순하였을지라도 자기의 은의는
잊지 아니하려니 믿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자기 잡을 계책을 내고 자기 잡으려
는 관군을 따라온다니, 이것은 분명 자기를 잡아서 저의 공명을 삼자는 것이라
꺽정이가 통분하기 짝이 없어하는 판에 눈치코치 모르는 곽오주가 분을 더 돋워
서 분이 꼭뒤까지 났었다. 아랫입술로 윗입술을 더받쳐서 입술 위아래 수염이
꺼칠하게 일어나고 숨쉬는 소리까지 씨근씨근하는 것 같았다. 다른 두령은 다들
입을 함봉하고 앉았는데 오가가 출반좌하고 좌중을 돌아보며 “오주는 서림이더
러 사람 아니구 불여우라구 하지만 오주 저두 사람은 아니야. 미련은 곰새끼구
우악은 억대우구, 오주가 우멍한 눈을 끔벅끔벅하는 걸 보면 나는 언제든지 탑
고개에서 뜸베질당하던 생각이 나네. 사람 치구 그 따위 무지하구 미욱하구 용
통하구 데퉁궂구 열퉁적구 별미없구 변모없는 위인을 우리 사위 양반은 무엇에
반했는지 처음부터 이날 이때까지 꼭 데리구 들어온 자식 두남두듯 속살루 은근
히 두남두느라구 애를 부둥부둥 쓸 때가 많으니 그게 아마 전생에 오주의 빚을
지구 이생에 와서 갚는 모양이야.” 하고 너덕거리었다. 오가의 너덕거리는 말도
우스운데다가 이봉학이가 오가더러 “오주가 웬 직함이 그렇게 많소.” 하고 실
없은 말을 정당한 말 묻듯 하는 것이 우스워서 여러 두령들이 혹은 소리내고 혹
은 소리없이 웃는 중에 꺽정이도 숨을 한번 크게 쉬고 나서 손으로 수염을 쓰다
듬기 시작하였다. 화가 나거나 분이 날 때는 수염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 꺽정
이의 버릇이라 수염을 쓰다듬는 것이 곧 분이 가라앉은 표적이었다.
황천왕동이는 아직 저녁밥을 먹지 못한 까닭에 꺽정이를 보고 “가서 밥 좀
먹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꺽정이가 고개를 끄덕이었다. 황천왕동이가 밖
으로 나간 뒤 얼마 아니 있다가 곽오주가 들어와서 두 팔 짚고 엉거주춤하고 엎
드려서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고 꺽정이를 바라보며 “대장 형님, 날 들어오라구
부르셨소?” 하고 물었다. “나는 부른 일 없다.” “모두 여기서 여러 이야기들
하는데 나 혼자 등 너머루 넘어갈라니까 걸음이 안 걸립디다. 그래 치운 밖에서
몸이 꽁꽁 얼었소. 천왕동이 형님이 나와서 하는 소리가, 대장 형님이 굵은 지겟
작대기 같은 매를 해가지구 들어오라신다구 합디다. 고만 들어오라구 부르시는
데 거짓말을 보태서 날 놀리는 줄 알았더니 백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구먼
요.”
곽오주의 주워 지껄이는 말을 꺽정이는 듣는 체 만 체하는데 오가가 너털웃음
을 웃으며 “여게 오주, 자네가 지레짐작한 것만두 매는 좀 맞아야겠네. 어서 가
서 작대기 한 개 가지구 오게. 내가 대장 몸받아서 때려줌세.” 하고 말하니 “
내 대신 작대기 가지구 와서 맞아보구려.” 하고 곽오주가 대꾸하였다. “저것
봐. 둘러쒸울 줄까지 아네. 자네 재주가 점점 느네그려.” “그 동안 좀 조신하
더니만 요새 왜 또 희룽희룽하우.” 곽오주의 말을 오두령이 받기 전에 꺽정이
가 곽오주를 보고 “지껄이는 소리 듣기 싫다. 네 자리에 가서 아가리 가만히
닥치구 앉았거라.”하고 소리질러서 곽오주는 얼른 녜 대답하고 먼저 앉았던 자
리에 가서 다시 앉았다.
곽오주가 그럭저럭 꺽정이의 용서를 받은 뒤 오가가 이봉학이를 보고 “곽두
령의 훼방이 인제 끝이 났으니 치선이의 편지두 마저 끝을 내시는 게 어떻소.
편지 끝에 또 무슨 말이 있나 들어봅시다.” 하고 말하니 이봉학이가 “끝에는
별말 없습디다.” 하고 대답하며 옆에 접어놓았던 편지를 다시 펼쳐 들고 먼저
읽다 그친 구절에서부터 내리읽었다. “저의 생각에도 서림이와 같은 도중 내정
과 산중 지리를 잘 아는 자가 순경사를 도우면 큰일이올 듯 염려 적지 않사외
다. 조변석개하는 조정 일이 오래 갈 리 없사오므로 순경사는 불과 몇 달 안에
소환되올 듯 그 동안 어디로든지 피신들 하심이 득책아니오리까. 염려되는 맘에
말이 넘난 데까지 미쳤사외다. 제가 처자들 몸붙여 있는 방에 와보온즉 마침 처
남아이 와서 있삽기 한번 걸음 더하라 이르옵고 등하에 수자 적사오며 내내 첨
위의 천금귀체를 만만 보중하심을 축수 바라나이다.” “편지가 어느 날 난 게
요. 연월일두 좀 보시우.” 하는 오가의 말에 “경신 납월 초삼일야라구 했으니
까 바루 어젯밤에 쓴 것이오.” 하고 이봉학이는 대답하였다. 꺽정이가 이봉학이
의 접어 주는 편지를 받아서 머리맡 손궤 위에 놓아두고 여러 두령들을 둘러보
며 “김치선이는 지금 이리저리 피신해 다닌단 사람이 우리게 기별해 줄 걸 잊
지 않았으니 고마운 사람이다. 아니 김치선이는 의리가 있는 사람이다.” 하고
김치선이를 의리 있다고 칭찬하는 말에 서림이는 의리 없는 놈이라고 타매하는
뜻이 나타났다. 이봉학이가 꺽정이의 말뜻을 받아서 “서림이 같은 의리 없는
놈이 천하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니 다른 두령들이 그 뒤에 연달아
서 서림이를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제각기 한두 마치씩 말하였다. 이때까지 서
림이 말을 몹시 안하던 오가가 천참만륙하여 마땅한 놈이라고 큰소리로 떠들 뿐
아니라 여럿이 떠들 때 흔히 잠자코 듣기만 하는 박유복이와 서림이 위인을 잘
알지 못하는 이춘동이까지 다 말참례를 한몫 들었다. 그런데 말 한마디라도 지
독하게 모지락스럽게 해붙일 듯한 배돌석이가 평일의 박유복이 대번을 보는지
잠자코 듣기만 하더니 여럿의 떠드는 것이 한거품 꺼진 뒤에 비로소 꺽정이를
보고 “서림이놈을 속히 잡아 죽일 도릴 생각해야지 죽이느니 살리느니 헛소리
만 해서 무어 합니까. 우리가 백날 입으루 죽인다구 서림이놈이 죽습니까. 그러
구 여기 있는 서림이놈의 자식은 지금 당장이라두 죽여버립시다.”하고 말하는
것을 꺽정이는 듣고 한참 있다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내 말이 어디가 그릅
니까?” “서림이 자식은 아직 볼모루 두구 그놈의 애두 태워 주려니와 이 다음
그놈을 잡는 날 그놈 보는 데서 죽일 테다.” 곽오주가 별안간 손뼉을 딱 치고
“대장 형님 소견이 내 비위에 꼭 맞소.”하고 소리를 지르니 박유복이가 눈을
흘기었다. 여러 두령중의 한온이는 임진대적을 하기는 고사하고 구경조차 한 일
이 없는 사람이라 위험한 일을 겪어보고 싶은 맘도 바이 없진 아니하나 안전한
것을 좋게 여기는 맘이 더하여서 김치선이 충고대로 피신들 하기를 바라는데 피
신하자는 의론이 나지 않는 게 답답하여 “김치선이의 말이 유리한 말인 듯한데
어떻게 생가하십니까?” 하고 꺽정이의 의향을 물으니 꺽정이는 마치 시침 떼듯
“무어가?” 하고 되물었다. “피신을 하란 말이 유리한 말이 아닐까요?” “피
신할라니 할 데가 있어야지.” “광복산은 여기와 어떤가요?” “강원도에두 순
경사가 났다니까 광복 있는 아이들을 다 이리 오라구 해야겠다.” “광복은 그
렇겠구먼요. 평안도에두 피난처를 여러 군데 만들어 두셨다지요?” “우리 도중
상하 다솔이 지금 평안도를 갈라다간 길에서 낭패보게.” “그럼 순경사가 나오
면 어떻게 하실랍니까?” “어떻게 하긴 무얼 어떻게. 접전하는 게지.” “접전
하면 승산이 있을까요?” “승부는 접전을 해봐야 알지 그걸 어떻게 미리 알 수
있나.” 꺽정이는 한온이를 미경사 소년으로 알아서 묻는 말을 일일이 대답하여
주는데, 그 대답이 다 수월스러웠다.
한온이와 꺽정이의 문답이 끝난 뒤 박유복이가 꺽정이 나중 말의 말끝을 달아
서 “접전해서 이길 건 미리 알 수 없지만 이기두룩 준비는 미리 해야 하지 않
습니까?” 하고 말하는데 박유복이의 의사는 그럴 리가 만무하지만 언뜻 듣기에
흡사 꺽정이의 말을 책잡는 것 같아서 꺽정이는 미간을 잠깐 찌푸렸다가 다시
펴고 “준빌 누가 안한달세 말이지.” 하고 박유복이의 말을 대답한 뒤 곧 이어
서 “준비할 것이나 잘 생각해서 이야기들 해봐라.” 하고 여러 두령들을 둘러
보았다. 여러 두령이 다 각각 생각나는 대로 말한 것을 대강 추려보면, 군량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고 군기를 조수하여 만일 파손된 것이 있거든 속히
수보하고 탑고개 길목 지키는 것과 두령들 매일 행순하는 것을 중지하고 사산
파수꾼 수효를 곱절로 늘려서 안팎 장등에 겹파수를 보이고 광복산 졸개도 소환
하려니와 탑고개, 양짓말 등지에 나가 사는 두목과 졸개들도 거두어들이고 그리
하고 당보수를 멀리 내보내고 기외에 이목을 널리 늘어놓아서 관군의 동정을 일
일이 알아들이자는 말들이었다. 꺽정이가 여러 두령들의 말하는 것을 다 듣고
나서 이봉학이를 돌아보며 “모든 준비를 하나가 맡아 시켜야 일이 구김이 없을
테니 자네 맡아 시키게.” 하고 말을 이르니 이봉학이가 녜 대답한 뒤 “지금
말들 한 여러 가지 준비두 다 긴요하지만 제 생각엔 서울 소식을 더 좀 자세히
알아보는 게 제일 긴요할 것 같습니다. 순경사가 어떤 위인인지 경군이 얼마나
내려오는지 서림이가 과연 순경사를 따라오는지 안 오는지 다 알구 앉았으면 좋
겠구, 또 좌포장이 서림이 데리구 계책을 의논했다구 손동지더러 이야기한 좌포
장집 청지기는 그 계책이 어떤 것인지까지 혹 알는지 모르니 그걸 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 계책을 대강만이라두 우리가 미리 알면 방비하는 데 힘이
여간 덜리지 않을 겝니다.” 하고 말하였다. “글쎄, 알아보는 게 좋지만 치선이
가 숨어 다녀서 만나보기가 어렵다니 어디루 알아보나?” “다른 사람은 몰라두
한두령이 가면 설마 그것쯤 못 알아오겠습니까?” 꺽정이가 고개를 돌려서 한온
이를 바라보며 “너 서울 가서 알아올 수 있겠니?” 하고 묻는 말끝에 “다른
건 알 수 있겠지만 좌포장이 서가 데리구 이야기한 걸 알아낼 수 있을까?” 하
고 미심쩍게 여기는 말을 더 붙이었다.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알아낼 길을 찾
으면 혹시 있을는지 모르지요.” “그럼 서울 한번 갔다 오너라.” “순경사가
금명간 떠난다구 하더라는데 서울 간 동안에 여길 와서 에워싸서 들어올 길이
끊어지면 어떻게 하나요?” “아무리 철통같이 에워싸기루 우리 드나들 길이야
없으랴. 그런 염려 마라.” “그럼 내일 곧 떠날까요?” “그래 봐라.” 꺽정이
는 대답을 한마디 말로 그치고 이봉학이가 그 뒤를 받아서 “지금 일이 벌써 급
했네. 내일 첫새벽 떠나게. 자네 서울 다녀오는 것이 하루 이르면 하루 이가 있
을 테구 한 시각 빠르면 한 시각 이가 있을 테니 한 시각이라두 빨리 가구 빨리
오두룩 하게.” 하고 여러 말을 하였다. “요새 서울이 살얼음판이라는데 오래
있기두 재미 없으니까 알아볼 것 대강 알아보구 곧 오지요.” “서림이 일은 아
무쭈룩 자세히 알아가지구 오게.” “알아보는 데 날짜가 많이 걸리더라두 자세
히 알아가지구 올까요?” “자네가 서울 가면 빨리 알구 자세히 알 길이 있을
겔세.” “글쎄요.” “자네 가는데 무얼 타구 가려나?” “교군 타구 가겠세요.
” “복색은 어떻게 할라나?” “복색을 어떻게 하다니요?” “상복으루 갈라느
냐, 화복하구 갈라느냐 묻는 말일세.” “상제 복색이 좋지요.” “그럼 교군은
소교를 꾸미래야겠구 교군꾼은 교군 잘 하구 발 잘 맞는 아이들루 두 패를 뽑으
라구 하겠네. 그러구 교구꾼 외에 다른 하인은 데리구 가지 말게. 그래야 길이
빠르네.” 이때 윗간 방문이 열리며 밥 먹으로 갔던 황천왕동이가 들어왔다.
12
꺽정이가 황천왕동이 들어와 앉는 것을 보더니 눈살이 당장 곱지 않아지며 “
밥 먹구 곧 오지 않구 무어 했느냐? 밥 먹으러 간 제가 언제냐. ” 하고 꾸짖는
데 황천왕동이는 대답을 못하고 머리 뒤만 긁적긁적하였다. 오가가 황천왕동이
를 바라보고 웃으면서 “대장 말씀에 왜 대답을 못하나. 밥 먹구 나서 어린 놈
재롱 보느라구 좀 늦었습니다구 대답하지. ” 하고 농담을 걸어서 황천왕동이도
역시 농으로 “귀뚜리 영신이요, 어찌 그리 용하게 아우. ” 하고 대거리하였다.
꾸지람을 듣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농지거리하는 것이 꺽정이 비위에 거슬렸다.
“밥 먹구 무어 했느냐? 자빠져 자다가 왔느냐? ” “잠깐 누웠다 일어난다는
것이 잠이 깜박 들었었세요. ” “무엇이 어째? 우리가 지금 사생 결단할 일을
앞에 놓구 의론하는데 너는 혼자 가서 자빠져 잤단 말이냐. ” 꺽정이는 언성을
높이고 “어젯밤에 어린 것이 자지 않구 보채서 잠을 못 자구 오늘 길을 걸어서
피곤한데다가 배고픈 끝에 밥 한 그릇을 먹었더니 온몸이 나른해서 갱길 할 수
가 없습디다. 그래 잠깐 누웠었습니다. ” 황천왕동이는 발명을 부산히 하였다.
그러나 꺽정이가 황천왕동이의 발명을 세워 주지 않고 “지금 네 모가지에 칼이
들어간다면 식곤증 난다구 누워 있지 못하겠지. 도중 일을 네 일루 안 알기에
맘을 태평 먹는 것 아니냐. ” 하고 인정 없이 꾸짖었다. 꺽정이의 꾸지람이 끝
난 뒤 한온이가 꺽정이를 보고 “제게 더 부탁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 하고
물으니 꺽정이는 더 부탁할 말이 있거든 말하란 눈치로 이봉학이를 돌아보았다.
“다른 거 없네. 그저 서림이 뒤만 잘 캐어보구 오게. ” 하고 이봉학이 말한 뒤
에 박유복이가 “서림이 타구 간 얼룩말이 어떻게 되었나 치선이 보거든 한번
물어보게. 요전 왔던 치선이 처남더러 물으니까 모르겠다구 하데. ” 하고 말하
였다. 오가가 박유복이를 돌아보며 “자네는 그 말이 그렇게두 아까운가? ” 하
고 핀잔 주듯 말하여 박유복이는 남의 속 모르는 말 하지 말라고 고개를 가로
흔들었는데, 이것을 오가는 그 말이 아깝지 않단 뜻으로 빗알았다. “그럼 왜 말
이야길 지재지삼 하나? ”“대장 형님이 그 말을 얻어가지구 오셨을 때 하두 좋
아하시던 게라 도루 찾을 수 있으면 찾을라구 그러우. ” “얼룩이 대신 황부루
가 생겨서 대장 타실 말이 있는데 무얼 그러나. ” “두 마리 말구 이십 마리
이백 마리라두 좋지. 그렇지만 얼룩이는 벌써 속공돼서 지금쯤 사복에 들어가
매었을지두 모르는 걸 물어보면 무어 하나. ” “그래두 혹시를 몰라서 물어보
란 말이지요. ” 박유복이의 맘이 충직한 것을 꺽정이는 새삼스럽게 느껴서 박
유복이더러 “네 맘은 무던한 맘이나 말은 오두령 말이 옳다. 얼룩이는 다시 찾
기 틀린 걸 물어보면 무어 하느냐. ” 말하고 나서 곧 “여보 오두령, 서가놈 맘
이 유복이 맘의 반의반만 해두 훌륭한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겠지. ” 말하고 서
글프게 웃었다. 한온이가 다시 꺽정이를 보고 “제게 다른 말씀 하실 것 없으면
저는 일찍 가서 자겠습니다. ” 하고 말하니 꺽정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라. ” 하고 허락하였다. “내일 식전 기침하시기 전에 떠나기 쉬우니까 지금 아
주 하직하구 가겠습니다. ” “첫닭울이에 떠나더라두 우리가 일어나서 떠나는
걸 볼 테니 하직이구 작별이구 다 고만두구 그대루 가거라. ” 한온이가 꺽정이
사랑에서 나와서 작은 첩의 집으로 자러 오는 길에 큰집에 들러서 서울 가는 것
을 말하고 큰집 앞 초막의 개미치를 불러내서 데리고 왔다. 권개미치는 서림이
의 편지를 맡아가지고 왔을 때 청석골 와서 살 허락을 얻고 처자를 끌고 와서
다시 한온이 집 그늘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한온이가 방에 들어앉아서 밖에
세운 개미치를 내다보며 “내가 내일 서울을 갈 텐데 서울 가서 뉘 집으루 들어
가는 게 좋을까? ” 하고 물었다. “글쎄올시다. ” “덕신이 집이 어떨까? ”
“덕신이 부모는 댁 음덕을 잊지 못하겠습지요만 덕신이놈이 믿지 못할 놈입니
다. ” “문성이는? ” “문성이는 말씀두 맙시오. 그놈이 최가의 집에 댁 대령
하는 놈입니다. ” “집이 협착해서 가서 있긴 좀 비편하지만 만손이게루 가는
수밖에 없군. ” “부모 자식 다 미덥기가 만손이 집이 제일입니다. ” “치운데
오래 섯지 말구 가게. ” “내일 어느때 떠나실 텝니까? ” “첫새벽 떠날 텔세.
” “새벽에 오겠습니다. 안녕히 주뭅시오. ” 개미치가 나간 뒤에 한온이는 바
로 자리에 누웠다.
13
이튿날 새벽에 한온이가 자릿조반을 먹는 체 만 체하고 두패 교군을 타고 청
석골서 떠나서 송도 김천만이 집에 와서 아침밥을 시켜 먹고 장단읍에 와서 중
화를 하는 중에 복색이 선명하고 인물이 끼끗한 군사들이 객주집 앞으로 지나가
는 것을 보고 경군인 줄 알 뿐 아니라 순경사가 거느리고 오는 경군이려니까지
짐작하며 객주 주인을 불러들여서 점심밥을 재촉한 끝에 “문앞으루 군사들이
많이 지나가니 이 골에 무슨 일이 있나? ” 하고 물어보았다. “그게 경군입니
다. ” “글쎄 경군이 어째 내려왔나? ” “황해도 순경사 행차가 지금 읍에서
중화하는 중입니다. ” "옳지, 내가 송도서 들으니까 황해도와 강원도에 순경사
가 났다든군, 서울서 어제 떠난 모양일세그려." "어제 파주읍에 숙소했답니다." "
오늘은 송도 가서 잘 모양이군." "녜, 송도가 숙소참이랍디다." 한온이가 속으로
'내일은 청석골서 야단이 나겠다.' 하고 생각하며 "경군이 대체 몇명이라든가?"
"오십 명이랍디다." 한온이가 또 속으로 '오십 명쯤 가지구는 청석골을 감히 범
접할 생읠 못할 텐데 송도서 발병해서 합세할 작정인가?' 하고 생각하며 "향자
에 관군 오백여 명이 평산 땅에서 적당 일굽 명하구 접전해서 참혹히 패진을 당
했다는데 오십 명 가지구 적당 한 명하구나 접전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말이
올시다. 청석골 근처에 가서 어리대다가는 몰사 죽엄이나 당하지 별조 없을 겝
니다." "청석골 적당이 여기두 혹 더러 오나?" "서울 왕래 혜음령 왕래에 늘 지
나다닙지요." "지나다니는 줄 알며 관가에서 가만 놔둔단 말인가?" "관가에 고발
할 놈두 없지만 관가에 입문되기루 어쩌겠습니까. 섣불리 그 사람네를 건드렸다
가 무슨 일이 나라구요. 황해도 봉산전 등내가 어째 그 사람네 치부에 올랐든지
신연 맞아 내려가는 길에 임진나루서 죽을 욕을 봤습니다. 그 사람네가 하러 들
면 송도 유수나 황해 감사는 욕을 못 뵈일 줄 압니까. 그러니 각골 원님들이 그
사람네를 왕신처럼 끄리는 게 당연한 일입지요." "그러면 청석골 적당이 드러내
놓구 다녀두 잡질 않겠네그려." "그 사람네가 어디 드러내놓구야 다니나요. 암행
어사 다니듯 하지요. 만일 출도할 일이 있으면 드러내놓겠지요." "그러면 각골
수령들은 적당 어사가 출도 않는 것만 다행으루 여기는 모양인가?" "꼭 그렇지
요. 올 여름에 파주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청석골 두령 중에 축지법하는 두령
하나가 서울 왕래를 자주 하는데 한번 서울 가는 길에 파주읍에 와서 점심 요기
하는 것을 얼굴 아는 사령이 보구 관가에 쫓아들어가서 목사 사또께 밀고를 했
더랍니다. 그때 목사 사또 말씀이 '너는 보구 못본 체하구 나는 듣구 못들은 체
하자. 그래야 파주가 조용하다' 그러셨답니다. 그 말씀이 퍼져나와서 관장은 듣
구두 못들은 체 관차는 보구두 못본 체란 말이 인근읍에서까지 동요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백성들이야 알구두 모르는 체할밖에 있습니까. 저두 십년
하방의 눈치꾸레기루 사람을 알아내는 것이 임진 사궁만 못지않지만 그저 알구
두 모른 체하구 지냅니다." 한온이가 경군 수효를 우선 좀 알고 싶어서 말을 묻
기 시작하였다가 주인이 수문수답을 잘하는 바람에 여러 말을 묻게 되었으나 아
닌보살하고 말 묻기가 낯간지러울 때 많았는데 주인의 알고도 모른 체한단 말을
듣고는 낯뿐 아니라 오장까지도 간질간질하여 말을 더 물을 뱃심이 없어져서 "
하여튼지 세상은 말세가 다 되었네." 하고 거짓 한숨을 한번 길게 쉬고 나서 "부
질없는 이야기에 길 늦겠네. 내가 길이 바쁘니 점심 곧 먹두룩 좀 해주게." 하고
말하여 객주 주인을 내보냈다. 한온이가 장단서 점심 먹고 떠날 때 일력은 파주
읍에 와서자면 마침맞겠으나 한 시각이라도 빨리 가고 빨리 오란 이봉학이의 부
탁을 생각하고 내일 길을 단 십리라도 더 줄이려고 교군꾼들을 자주 쉬이지 못
하고 오래 쉬지 못하도록 들몰았다. 교군은 가볍고 교군꾼들은 세차서 소교가
나는 듯하였다. 겨울 짧은 해에 하루에 일백사십 리나 길을 와서 혜음령 못미처
혜음령패 괴수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늦은 아침때 반갑고도 서먹서먹
한 서울을 들어왔다.
남소문 안에 사는 강만손이는 늙은 부모와 저의 내외와 아들 남매와 조자손
삼대 여섯 식구가 안방.건넌방 방 둘 있는 집에서 살았다. 안방에 젊은 내외 건
넌방에 늙은이 양주와 손자 남매, 방 둘이 그 식구에 꼭 알맞았다. 이 집에 한온
이가 와서 묵자면 두 방에 거처하는 식구를 한 방으로 몰아야 할 터이고 그리하
고 또 교군꾼들을 재울 방은 달리 구처하여야 할 터이라 모두가 비편하였다. 한
온이가 비편한 줄 알면서 와서 묵으려고 작정한 것은 오로지 사람들이 미더운
까닭이었다. 만손이의 늙은 어미는 한온이 조모가 계집아이로 부리던 사람이요,
만손이의 안해는 한온이 어머니가 손때 먹여 기른 계집아이로 한온이 어머니 초
상에 거상을 자원하여 입었었다. 한온이가 지각난 뒤로 만손이의 안해를 특별히
생각하여 집을 사주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대주고 만손이를 남부사령으로 구실
까지 붙여 주었다. 한온이 탄 소교가 강만손이 집 마당에 들어와서 놓일 때 만
손이 안해가 헛간에 쌓인 장작을 부엌으로 안아 나르다가 교군꾼의 쉬소리를 듣
고 안았던 장작개비를 내던지고 쫓아와서 소교 안을 들여다보며 "아이구 상제
님!" 하고 소리치고는 "집안에 아무 연고 없나?" 한온이의 묻는 말도 대답 못하
고 어린 듯 취한 듯 정신 놓고 섰었다. 건넌방의 늙은이 양주가 방안에서 며느
리 소리치는 것을 듣고 방문 열고 마당에 놓인 소교를 보고 두 늙은이 다같이
진동걸음을 쳐서 나올 때 만손이 안해는 비로소 정신을 차려서 "어머님, 상제님
을 안방으루 뫼시구 들어오세요." 하고 말하며 곧 먼저 안방에 들어가서 방안에
지저분하게 벌여놓인 것을 거듬거듬하여 치우고 시조부모 제사때나 내어 까는
돗자리를 꺼내다가 아랫목에 깔아놓았다. 한온이를 두 늙은이가 안방으로 뫼셔
들여다가 아랫목 돗자리 위에 앉힌 뒤 바깥늙은이는 다시 윗목에 내려가서 한온
이에게 절을 하였다. "늙은이가 절이 무어요. 망령이구려." "그게 무슨 말씀입니
까? 여러 날 못 뵈어두 절을 해야 할 텐데 못 뵈인 지가 벌써 몇 달입니까. 구
월.시월.동지.섣달, 달수루 넉 달입니다." "이리 와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아니
오. 여기 앉았겠습니다." "그러지 말구 가까이 와서 앉으우." "아니올시다." 하고
바깥늙은이는 윗목에 앉아 있으려고 하다가 상제님이 가까이 오라시는데 안 오
는 건 되려 도리도 아니고 또 인정도 아니라고 안늙은이에게 사설을 듣고 아랫
목에 와서 한온이 앉은 자리에서 모를 꺽고 앉았다. 안늙은이는 처음부터 한온
이 옆에 와 붙어 앉아온 한온이의 한 손을 두 송으로 잔뜩 붙잡고 있다가 “상
제님, 웬일이시우?” 하고 묻고 한온이가 미처 대담할 사이도 없이 곧 뒤를 이
어서 “이렇게 뵈입는 것을 나는 죽기 전 다시 못 뵈일 줄 알았지.” 하고 질금
질금 울고 눈물을 씻느라고 비로소 한온이의 손을 놓았다. 이 동안 만손이 안해
는 한구석에 가 비켜서서 한온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입가
에는 웃음이 떠돌았다. 반가운 말을 억제 말고 맘대로 하라면 미친 사람같이 웃
다 울다 울다 웃다 웃음과 울음이 종작없을을 것이다. 안늙은이가 며느리를 돌
아보며 “이애, 너는 그러고 섰지 말고 얼른 나가서 점심 진지를 지어라.” 하고
이르는데 한온이가 시장하지 않다고 점심은 고만두고 교군꾼들이나 어디좀 들여
앉히라고 말하니 “우선 건넌방에 좀 들어앉힙지요.” 하고 바깥늙은이가 일어
서려고 하는 것을 안늙은이가 가만히 앉았으라고 말하고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며 “여보 대감네, 저 건넌방으로들 들어가시우.” 하고 소리쳤다. 만손이의
아들 놈이가 밖에 놀러나갔다가 들어와서 한온이를 보고 “아이구 상제님 오셨
네!” 하고 절을 너푼 하니 벌써부터 저의 어미 치마꼬리에 와 붙어 섰던 만손
이의 딸 이뿐이도 제풀에 나와서 절 한번 납신 하였다. 안늙은이가 놈이를 보고
“너 얼른 마을에 가서 네 아비더러 노늘 일찍 나오라고 하고 일찍 못 나오겠거
든 잠깐 다녀가라고 해라.” 하고 이르고 또 “마을에 가서 상제님 오셨다고 떠
들진 마라.” 하고 이르니 놈이가 녜 녜 대답하며 바로 뛰어 나갔다.
만손이의 안해가 밖으로 나가서 오래 들어오지 아니하더니 그동안에 국수를
사다가 장국을 말아서 들여왔다. 한온이가 상을 받으며 “점심은 안 먹어두 시
장치 않을 텐데 장국은 왜 끓였어.” 하고 말하니 만손이 안해는 시아비 앞을
막아서지 않으려고 상머리에서 뒤로 물러서며 “저녁때가 상기 멀었는데 요기를
좀 하셔야지요.” 하고 대답한 뒤 “편육도 없고 김치맛도 좋지 않아요. 그러나
마 오래간만에 제 손으로 끓여 드리는 장국이니 좀 많이 잡수세요.” 하고 권하
는데 말은 차치하고 말소리까지 디정하였다. 한온이가 식성이 온면을 즈기기도
하지만 며느리가 정답게 권하는 외에 시어미 늙은이가 무작정 강권하여 국수 한
그릇을 거의다 먹어갈 때 놈이가 들어왔다. “아비가 못 온다느냐?” 하는 할미
묻는 말에 “같이 나왔세요.” 하고 손자가 대답하였다. 한온이가 놈이더러 “어
디?” 하고 묻자 곧 만손이의 헛기침 소리가 방문 밖에서 났다. 한온이가 상을
밀쳐서 물리고 방문을 내다보니 뜨에 섰던 만손이가 하정배를 깍듯이 하였다.
“방으루 들어오게. 어서 들어와.” 한온이의 재촉을 받고 만손이는 방에 들어와
서 두 손길 맞잡고 섯는 것을 한온이가 또 앉으라고 권하여 윗목에 쪼그리고
앉았다. “요새 오부에 일이 많은가?” “네, 요새 좀 분주합니다.” “오늘은
못 들어오겠다고 아주 말하고 나왔습니다.” “잘했네.” “이 험난한 때 무슨
일루 행차하셨습니까?” “내 이야기는 차차 하구 서울 이야기를 먼저 좀 듣세.
요새 서울이 시끄럽다지?” “네 대단 시그럽습니다. 위의 처분이 깁셔서 형조
에서 자꾸 사람을 잡습니다. 잡혀갔다 곧 도루 놓여나온 사람은 말 말구 지금
잡혀 갇힌 사람만 수십 명이랍니다.” “잡혀 갇힌 사람 중에 우리 친한 사람두
많겠지?” “댁에서 서울 떠나신 뒤루 저는 예전 알던 사람과 일체 상종을 안해
서 누가 어떻게 된 것을 통히 모릅니다. 일전에 덕신이가 와서 하루를 같이 자
는데 몇 사람 이야기만 대강 들었습니다.” “덕신이가 왜 제 집을 두구 자네게
와 잤어?” “저희 집에 들어가면 잡힌다구 하룻밤만 재워달라구 하니 인정에
어떻합니까. 놈이 어미를 건너방으루 보내구 이 방에서 재워 보냈습니다.” “덕
신이 어른은 어떻게 됐다던가?” “어떻게 된 셈인지 저의 부모는 집에 있어두
상관이 없다구 합디다.” “덕신이가 그래 잡히지 않았나?” “시골루 내뺀다구
했는데 잡히지 않았을 겝니다.” “덕신이게 뉘 이야길 들었나?” “댁의 서사
보던 최서방하구 호상이 호불이 형제하구 문성이하구 녹쇠하구 함께들 잡혀갔다
구 이야길 합디다. 녹쇠 같은 것이 다 잡혀갔으니 저두 구실을 다니지 않았더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아니 최가가 잡혔어? 그놈이 좌포청에 일긴이라는데 어
째 잡혔을까?” “최서방이 무슨 수루 포청에 일긴이 되겠습니까. 한껏해야 포
교들에게 술잔 값이나 뺏겼겠습지요. 설혹 포청에 긴한 줄을 대구 있었기루 형
조 일에 그 줄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포도대장이 주선해 주면 놓여나올 수
야 있겠지.” “포도대장이 주선해 주었으면 곧 놓여나왔지 전옥에까지 들어갈
리 있습니까. 최서방 호성이 호불이 문성이 족쇠 다 지금 전옥에 가서 갇혀 있
답니다.” “하여튼 그놈이 포청 세를 믿구 우리 빕 팔구 세간 팔구 빚 투심 한
걸 죄다 집어먹었네.” “댁 재산을 그놈이 다 집어 먹었세요? 저런 죽일 놈 보
게. 저는 그걸 모르구 그놈을 가엾게 여겼습니다그려. 그놈 원악도 귀신 될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지금 전옥게 갇힌 놈들은 대개 다 원악도루 가리라고 합디다.”
“그놈도 원악도루 가게 된단 말만 들어두 내 속이 좀 시원할 것 같애.” 하고
한온이가 속이 참으로 시원한 거같이 숨을 길게 내쉬는 것을 만손이 아비가 보
고 “상제님 기신 데 호걸이 많다니 그런 놈은 진작 죽여 없애게 하시지 왜 이
때껏 가만두셨습니까? ” 하고 물었다.
16
“근일 도중 공사가 다단한데 내 사사를 말할 수가 없어서 아직 책장을 덮어
두었었소.” “상제님이 할아버님 성정을 닮으셨더면 그런 놈은 벌써 어떻게 든
지 요정냈지 이때까지 가만두지 않으셨을게요. 할아버님 성정 참 무서우셨습니
다. 한번 어떤 놈이 댁에 들어올 상목을 반 동인 가 한 동 떼어먹구 어디루 도
망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놈의 종 적을 질지이심하게 찾아서 함경도 영흥 땅
으로 도망한 걸 아시구 사람들을 쫓아보내서 그놈을 용흥강 물귀신을 만드셨지
요. 사람들 보낼 때 부비가 너무 과다하게 들어서 첨지 영감이 고만두시면 좋을
듯이 말씀을 여쭈니까 소견 없는 자식이라고 꾸중하시구 나중에 타이르시는 말
씀이, 분풀이두 해야 하지만 이루 말하더라두 장래 몇 백 동이가 될는지 모른다
고 하십디다. 장래 몇 백 동이란, 그런 놈을 그렇게 본보길 내야 다른 놈들이 떼
어먹을 생의를 못한 단 말씀이오.” 만송이의 아비가 케케묵은 옜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아서 한온이는 듣기 싫증이 났다. 만손이가 한온이의 눈치이를 살피고 아
비의 옛야기가 또 나오기 전에 “서울 빚은 최가가 다 추심했답니까?” 하고 묻
고 “다 추심했는지 어쨌는지 그것두 난 모르지, 빚문서를 통히 최가에게 맡겼
었으니까. ” 하고 한온이가 대답하여 만손이 아비의 말참례로 중단되었던 한온
이와 만손이 둘의 수작이 다시 계속되었다. “최가가 댁의 덕택을 골수에 사무
치두룩 입은 놈이 댁을 배반하하다니 세상 인심 참말루 믿을 수 없습니다.” “
그래 내가 서울 올 때 덕신이게루 갈까 문성이게루 갈까 망설이다가 아무리 생
각해두 자네네 식구만큼 미덥지가 못해서 비편스러운 걸 불계하구 자네 집으로
왔네.”“제 집을 방이 누추하구 음식이 맛깔적지 않아서 잠시라두 와서 기시기
가 불편하시지만 제 집을 두구 다른 데루 가셨더면 저의는 섭섭할 뻔했습니다.
” “내가 비편하다는 건 와서 있을 방이 없단 말일세. 나 하나만 같으면 오히
려두 모르지만 교군꾼들이 있으니 자네 집에 어디 재울방이 있나. 이웃집으로
보내주게.” “지가 명년 봄에 며느라를 보려구 건넌방 모퉁이에 방한칸을 들였
습니다. 도배 장판만은 아직 안했어두 아쉰 대루 거처할 만합니다. 교군꾼들을
그 방에 재웁지요.” “그러면 잘됐내. 그러구 나는 건넌방을 내주게.” “저의
식구가 건넌방에 가서 잘 테니 이 방에 기십시오. 이방이 건넌방보다는 좀 걔끗
합니다.” “깨끗지 않아두 좋으니 건너방을 날 주게.” “그러실 것 없습니다.
” “아니야. 지금 곧 교군들은 새 방으루 보내구 우리 단둘이 건넌방에 가서
조용히 이야기 좀 하세.” 만손이 어비가 바로 골이나 나는 것처럼 곤댓짓을 하
며“이 늙은 것들이 이야기를 좀 들으면 어떻습니까.“ 하고 한온이의 말을 탄
하여 ”놈이 할멈이 말을 낼까봐 말 안 들려주려구 그러네. ” 하고 한온이는
웃었다. 만손이가 저의 안해더러 “건넌방을 가서 정하게 치워 놓게.” 하고 이
르니 “건넌방에 교군꾼들이 들어앉았소. ” 하고 그 안해가 대답하였다. “새
방을 교군꾼들 들어앉게 해주구 건넌방을 치우게그려.” “어떻게 들어앉게 해
주란 말이오.” “바닥에 좀두둑하게 깔구 화루를 해놓으면 되지 않나.” “그걸
내가 어떻게 하우, 당신이 해줘야지.” “아이 밥병신 같으니.” 하고 만손이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며 “자네는 나와서 화롯불이나 해놓게.” 하고 말하여 만
손이 안해도 그 남편 뒤를 따라나갔다. 만손이 아비는 한온이가 조부의 이야기
를 귀담아 듣지 않는 것이 맘에 섭섭하든지 “인제 이 늙은것이 죽으면 선대 적
이야기두 들으실 데가 별루 없으리다.” “그럼, 그런 이야기 들을 데가 다시는
없구말구.” 하고 한온이가 대답한즉 만손이 아비가 또다시 한온이 조부의 행호
시령 하던 이야기를 깨내더니, 늙은이가 입심도 좋아서 그칠 줄을 모르고 지껄
였다. 한온이가 졸음이 와서 정신이 가물가물하여 이야기 소리가 멀리서 나는
것 같이 들리다가 나중에는 아주 안 들릴 때까지 있었다. 만손이 어미가 한온의
곤한 모양을 보고 자기 영감더러 이야기 고만 두었다. 한온이는 지난 밤에 잠을
잘못 잤다고 팽계하고 만손이 어미가 갖다 주는 목침을 베고 누워서 바로 혼곤
히 잠이 들었다.
17
도회청에 난데없는 불이 붙어서 붉은 불길이 용솟음을 치는데 불을 잡는 사람
도 없고 구경하는 사람도 없다. 사람이라고는 씨도 없더니 별안간 꺽정이 한사
람이 땅에서 솟아나듯 나서는데 얼굴과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보기가 끔찍하였
다. 한온이가 소스라쳐 잠을 깨었다. 방안에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몸에는 정한 이
불이 덮이었다. 방안 사람 나가는 것도 모르고 이불을 덮어주는 것도 몰랐으니
잠시일망정 잠이 곤히 들었던 모양이다. 꿈속에 본 광경이 생시 일 아닌 것만은
다행이나 헛꿈이 아니고 전조인 듯 생각이 들었다. 이번 순경사 손에 그런 일을
것인데 청석골 앉아서 대항하는 건 공연한 객기다. 객기인 줄 번연히 알며 객기
부리는 사람들 따라서 신명을 그르치면 그런 원통할 데가 어디 있을까. 자기는
다른 두령과 달라서 우선 청석골을 간 것이 잠시 피신길이고 또 같은 두령이로
되 예날곱 사람처럼 사생동고할 의리가 없는 터인즉 함께 몰사죽엄을 당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이왕 서울 온 길에 눌러 있고 다시 가지 말까? 그런 신의 없
는짓은 할 수가 없다. 그뿐 아니라 집안 식구가 다 청석골 있는데 혼자 빠질 수
도 없다. 사명맡은 대로 서림이 뒤를 속히 알아 가지고 가서 대항 말고 피신하
자고 주장하다가 주장이 서지 않거든 아주 여럿에게 공언하고 식구를 끌고 나오
겠다. 한온이가 잠이 깬 뒤에 얼마 동안 이런 생각을 하고 누웠다가 갑자기 이
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 앉아서 “만송이?” 하고 부르니 만손이가 건넌방에서
녜 대답하고 곧 건너왔다. “지금 해가 어떻게 됐나?” “승석때가 거의 다 되
었습니다.” "이리 와 앉아서 내 이야기 좀 듣게. “하고 한온이가 무릎 밑을 가
리키니 만손이는 한온이 할 이야기가 밀담인 줄 짐작하고 선뜻 가까이 와서 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편히 앉게.“ ”네.“ ”내가 이번 오긴 서림이의 뒤
를 파보러 왔네.” “서림이란 이요, 청석골 두령으루 조정에 귀순한 사람 말씀
이지요?” “그래, 서림이의 뒤를 잘 알자면 남대문 밖에서 객주하던 치선이 김
선달을 만난봐야겠는데.” “김선달을 지가 가서 불러올까요?" "어디 가서 불러
온단 말인가?" "지가 김선달을 만나봐야겠는데, ” “김선달 불러올까요?" "어
서 가서 불러온딘 말인가?” “지가 김선달객주를 전에 가본 일은 없지만 남내
문 밖에 나가서 물으면 알겠습지요." "이 사람이 참말 우복동 속에서 살다가 아
온 것 같애. 김치선이가 서림이 동티루 객주를 못하구 지금 피신해 다니네." ”
피신해 가 있는 곳을 대강 짐작하십니까?" "난 몰라." "그럼 어떻게 만나십니
까?" "영부사댁 도차지 손동지가 치선이 숨어 있는 데를 안다니까 손동지에게
말을 들여보내서 물어볼 생각일세." "남이 피신해서 숨어 잇는 곳을 잘 알기루서
니 여간 믿는 처지에야 모른다구 떼기가 쉽니 일러주기가 쉽습니까?" "그렇기에
손동지에게 다리 놓을 사람을 지금 자네하구 의논해 보잔 말일세." "제 주제에
무슨 좋은 생각이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전갈이나 편지 심부름을 해드릴 테니
상제님께서 그러럴 만한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지금 생각하는 사람은
덕신이 어른일세. 덕신이 어른이 손동지를 아는지 모르나 영부사댁 차지 하나하
구 절친하게 지낸는 건 내가 잘 아니까 덕신이 어른더러 그차지를 다리 놓구 물
어보라면 어떨까?" "그럼 덕신이 어른을 내일 가 불러오겠습니다." "내일 가서
불러올 게 아니라 지금 곧 가서 이야기하구 속히 알아보라구 부탁하게." "상제님
께서 보시구 부탁하시지요." "자네가 가서 내 말루 부탁하게그려.“그럼 지금 곧
가서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만손이가 나간 뒤 한온이는 다시 누웠는데 만손이
어미가 건넌방에 있다가 건너와서 청석골서 지내는 형편을 묻는데 미주알고주알
다 캐어물어서 묻는 말을 이루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해가 져서 어둡기 시작할
때 만손이가 돌아와서 “덕신이 어른더러 다 이야기하구 부탁했습니다.” 하고
말하여 “대답이 무어라든가?” 하고 한온이가 물었다. “그만 일은 물어봐 달
랄 수 있다구 대답합디다." "속히 회답을 듣게 해달라구 말했나?” 덕신이 어른
이 곧 와서 보일 것인데 오을 영부사댁에 가서 차지를 보구 부탁해 두구 내일
아침에 아주 회답을 들어가지구 와 보입는다구 합디다." "잘됐네. “ 일이 이렇
게 요량한 대로 다 되면 내일 낮에 김치선이를 만나서 서림이 이야기를 듣고 저
녁때라고 곧 도로 떠나가려고 한온이는 속으로 작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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