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金庸 白马啸西风 1

3학년2반 | 2022.01.13 07:49:28 댓글: 0 조회: 652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1940

백마소서풍(白馬嘯西風)

一.사막의 추격자들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회강(回疆)의 광활한사막에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두필의 말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선두에서 달리는 우뚝한 다리와 긴 몸통의 백마위에는 칠팔 세 가량의
어린소녀를 품에 안은 젊은 부인이 타고있었다. 그뒤를 따르는 홍색말에는
후리후리한 키에 수척한 몸을 한 남자가 엎드려 있었다.
그사내의 등에는 긴 화살이 꽂혀 있는데, 그의 등에서 말등으로, 다시 땅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선혈은 모래위에 붉은 한 줄
내지 못했다. 화살을 뽑아내면 그나마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즉사하게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누군들 죽지 않으랴? 죽음 앞에선 당해낼 장사가 옵는 법.
그러나 누가 앞에 가고 있는 아내와 아직도 어린 딸아이를 돌봐 줄 것인가?
뒤에는 흉악하고 잔인무도한 적들이 바짝 쫓아오고 있는데...
그를 태운 홍마는 이미 수십리를 달려온터라 몹시 지친데다가 목숨을 걸고
휘둘러대는 주인의 채찍질에 헐떡대기조차 힘들었다. 게거품을 한가득물고
달리다가 갑자기 앞다리의 맥이 탁풀리며 땅으로 거꾸러졌다. 사내가 있는 힘을
다해 채찍을 들어 몇대를 내리치자 말은 애처롭게 울며 몸을 축 늘어뜨리더니 곧
죽고만다.앞서가던 젊은 부인이 말울음 소리를 듣고 돌아보니 말이 거꾸러져 죽어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외쳤다.

"어, 어찌된 일이에요?"

사내는 대답을 하지않고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그들 뒤 불과 몇리 밖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쫓아오고 있는 무리들을 보았다.
부인은 참지 못하고 말을 돌려 남편 곁으로 달려왓다. 그리고는 문득 그의 등에
꽂힌 화살과 등을 흥건히적시고 있는 낭자한 선혈을 발견했다. 그녀는 대경실색하여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어 했다. 이를본 어린딸도 놀란 나머지 소리친다.

"아, 아버지, 등에 화살이 꽂혀 있어요."
"괜찮다! 걱정하지 말아라!"

사내는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날려 사뿐히 아내 뒤에 올라탔다. 비록 중상은
입었으나 몸은 여전히 민첩하고 능숙했다. 그의 젊은 아내는 그를 바라보는데,
얼굴 가득히 걱정과 애통해 하는 마음이 역력했다. 그년의 목소리는 쩔리고 있었다.

"여보,여..."

사내는 아내의 애타는 마음에는 아랑곳 않는다는 듯이 양 다리로 말을 박차며
고삐를 힘껏 잡아당겼다. 백마는 이들셋을 태운체 나는 듯이 앞으로 질주한다.
이 백마가 비록 명마라고는 하나 쉴 새 없이 긴거리를 달린데다가 이번에는
사내까지 태우고 달리니 결국 얼마 안 가 지치고 말았다. 백마는 자신에게 주인의
생사가 걸린것을 아는듯, 채찍없이도 힘껏 달려오긴 했으나, 수십 리를 더 달려가자
마침내 그 속도가 점차로 누려지기 시작했다.
뒤에 쫓아오는 적은 한 보 한 보 바짝 다가 오고 있었는대, 이는 말이 조금이라도
지치면 바로 다른말로 바꿔 타려는 계산이었다. 이들은 기필코 그들을 잡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사내가 고개를 돌리니 끝없이 이어진 황사 가운데 적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니는
듯하더니만, 잠시 후엔 얼굴의 윤곽까지도 뚜렷이 알수 있을 정도로 가까와지고
있었다. 이를 본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홍매, 당시한테 부탁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소?"

젊은 부인은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다정하게 웃는다.

"평생 제가 당신의 말에 거역한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요?"
"좋소. 그렇다면 당신은 수아를 데리고 이자리를 피해 우리 부부의 단 한점인
혈육과 고창미궁(高昌迷宮)의 지도를 보전해 주시오"

명령을 내리듯 사내의 목소리는 매우 강경하였다.
남편의 이말을 들은 아내는 몹시놀라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여보, 제발 그지도를 그들에게 넘겨 주고 패배를 시인해요.
당신... 당신 몸이 우리에겐 훨씬 소중해요"

고개를 숙여 아내의 볼에 입맞춤한 사내는 어조를 바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우리 두 사람은 무수한 위기를 겪어 왔소. 이번에도 혹시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오. 허나 여량삼걸(呂梁三傑)은 지도만 원하는게 아니오. 그들은, 그들은
당신도 노리고 있단 말이오. 알아 듣겠소?"
"그들, 그들이 혹시 동문의 정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을지 몰라요. 제가 그들에게
간청해 볼께요."

사내의 음성이 격해진다.

"설마 우리 부부가 그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애원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이 말로는 도저히 우리 세 사람이 이 넓은 사막을 빠져나갈 수 없소. 빨리가시오"

이렇게 크게 소리지르며 사내는 몸을 솟구쳐 말에서 뛰어내리고 만다.
부인은 말을 진정시키며 손을 내밀어 남편을 잡으려 하나, 남편의 성난 얼굴이
보일뿐이요, 잇달아 남편이 격한 음성으로 외치는 것만이 들릴뿐이다.

"빨리 가시오."

지금껏 남편에게 순종할 줄만 알았던 그녀로서는 거역할 방법이 없었다.
어쩔수 없이 말을 박차고 앞을 향해 달려가나 마음은 차가운 얼음과 같았다.
아니, 마음뿐 아니라 전신의 피가 꽁꽁 얼어붇는 듯했다.
뒤를 추격하던 무리는 사내가 말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는 일제히 큰소리로
환호하기 시작했다.

"백마 이삼(白馬李三)이 거꾸러졌다. 백마이삼이 거꾸러졌다!"

십여 인이 말에서 뛰어내려 사내를 포위하고 나머지 사십여 명은 계속 백마를
쫓는다.
그들은 사내가 쓰러져 있는곳에 이르렀다. 그는 몸을 오그려뜨이고 땅에 엎어져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모습으로 보아 이미 죽은 듯했다. 무리 중 한명이 코웃음을
치며 긴창을 똑바로 하여 그의 오른쪽 어깨를 찔렀다. 창을 몸에서 빼내자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지만 백마 이삼은 여전히 꿈쩍도 않는다. 두목인듯한, 수염이
꼬불꼬불한 사내가 말한다.

"이미 죽었는데 뭘 두려워하고 있는게냐? 어서 그의 몸을 뒤져라."

두목의 명령에 두 사람이 말에서 내렸다. 이 두 사람이 그의 몸을 뒤집는 찰라,
흰빛을 번득이며 이삼의 장도가 공중을 가르는가 싶더니 이미 두사람의 몸은 땅에
쓰러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은 줄 알았던 이삼이 뜻밖의 반격을 해오자 이들은 흠칫놀라
뒤로 물러난다.

"이삼, 너는 정말 강한 사내로구나!"

꼬불꼬불한 수염의 사내는 안영도(雁영刀)를 이삼의 정수리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이삼이 칼을 들어 그를 막긴 했으나 양 어께에 중상을 입은데다 팔꿈치에도 힘이
빠져 뒤로 성큼 삼보 물러나며 웩! 하고는 선혈을 뿜어냈다. 이를 본 무리들은
말을 탄채 그를 에워아고는 창칼을 겨누고 동시에 그를 향해 달려들어 찔러 죽이고
말았다.
백마이삼, 일대의 영웅은 죽음에 직면해서 까지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을 뿐더러
마침내는 최후의 일각까지도 두 명의 강적을 쓰러뜨렸던 것이다
그의 젊은 아내는 멀리서 남편의 노호하는 소리가 들리자 실로 칼로 베이듯 마음이
아팠다.

(그가 이미 죽었는데 나 혼자 살아 남아 무엇하리!)

그녀는 품에서 양모로 짠 손수건을 꺼내 딸의 옷속에 집어넣어 주며 말햇다.

"수아야, 이제부턴 네가 모든일을 알아서 해야 한다."

채찍을 휘둘러 말 엉덩이를 후려치는데 몸은 이미 안장에서 뛰어내려 땅을 딛고
서 있었다. 안장이 가벼워진 백마가 딸을 태운 채 바람처럼 달려가는 것을 보고
그녀는 다소 마음이 놓였다.

(백마의 다리 힘은 천하에 둘도 없는데다 수아의 몸 또한 가벼위, 이번에는
그들도 더 이상은 쫓지 못하리라!)

딸이 엄마를 부르는 애절한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뒤로부터 말발굽 소리는 점차
가까와 지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

(신령이시여. 원컨대 수아를 보살피사 좋은 남편을 만나게 해주시옵고, 비록
살면서 좌절되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

그녀가 복장을 가지런히 하고 머리를 매만지는 동안 순식간에 수십 필의 말이
앞뒤를 다투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선두에 선이는 여랑삼걸 중 둘째인 사중준
(史仲俊)이었다.
여랑삼걸은 결의형제를 맺은 사이로 청째는 신도진관서(神刀震關西) 곽원룡
(藿元龍)으로 백마이삼을 죽인 꼬불꼬불한 수염을 한 사내요, 둘째인 매화창
(梅花槍) 사중준은 키가 크고 후리후리한 사내이다. 그리고 세째인 청강검(菁강劍)
진달해(陳達海)는 체구는 작지만 용감하고 민첩한 사내로, 원래는 요동의 마적
출신인데 후에 산서에 머물다가 곽, 사 두 사람과 의기가 상통해 산서성의 태곡현
(太谷懸)에서 진위표국(晋威표局)을 개설했던 것이다.
사중준과 백마 이삼의 처 상관홍(上官虹)은 원래 동문 사형제로 두 사람은 어려서
부터 함께 무예를 배웠던 사이였다. 사중준이 심중에 줄곧 이 아리땁고 마음씨고운
사매를 사랑했고 사부 또한 묵인하던 터라, 동문의 사형제들은 진작부터 그들
두사람을 아직 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인 부부로 여겼다. 허나 어찌 알았으랴!
상관홍이 우연히 백마이삼을 만나 정이 싹터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엔 그와
함께 달아나 버렸던 것이다. 사중준은 상심한 나머지 큰 병을 얻었고 성격 또한
변해 버렸으나, 사매에 대한 그의 정만은 여전하여 지금껏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홀로 지내왔던 것이다.
헤어진 지 십 년만에 뜻밖에도 여랑삼걸과 이삼 부부가 마침내 감양(감양)에서
부딪혀 한 장의 지도를 쟁탈하기 위해 다투기 시작했다. 그들 육십여 인은 이삼
부부를 포위해 공격하며 감양에서 회강까지 쫓아왔는데, 그중 사중준은 질투와
원한이 겹친데다 성격마저 잔인한지라, 몰래 이삼의 등에 화살을 쏘았던것도 바로
그였다.
이삼이 마침내 광활한사막 한복판에서 목숨을 잃었고, 말을타고 달려오던 사중준은
상관홍이 대사막에 홀로 외롭게 서있는 것을 보고는 문득 양심에 가책을 받아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그녀의 남편을 죽였으니 이후로는 내가 그녀에게 극진히 대해 줘야지.)

광활한 사막에 세풍이 불어와 그녀의 옷자락이 나부끼는 모습은 사부의 연무장에서
그녀를 보았던 십 년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상관홍의 무기는 한쌍의 비수로,
한자루는 금으로, 한 자루는 은으로 되어있어, 강호에서는 '금은소검 삼낭자
(金銀小劍三娘子)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다. 지금 그녀는 수중에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듯하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숭준의 심중은 돌연 기대에 부풀어올라 명치가 후끈하며 창백한 얼굴에 홍조를
띠기 시작 한다. 그는 얼른 말에서 내리며 부른다.

"사매 !"
"이삼은 죽었어요?"

상관홍의 말에 사준중은 고개를 끄덕인다.

"사매, 우리가 헤어진지 어언 십년, 나는 언제나 그대만을 생각했었지."
"정말이에요? 당신은 또 나를 속이고 있는건 아니겠지요?"

하며 말하는 상관홍의 미소에 사준중의 가슴은 걷잡을수 없이 두근대기 시작한다.
저 웃음 띤 얼굴, 저처럼 뽀로퉁해 있는 모습은 십년전의 그 모습과 꼭같은
것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는 그의 음성은 부드럽기만 했다.

"사매, 이후로 나는 늘 그대와 함께 하며 영원히 편히 살게 해주겠소"

상관홍의 눈에서 홀연 광채가 나며 외친다.

"사가, 당신은 참으로 내게 잘해 주는군요."

그와 동시에 양팔을 벌리며 그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사준중은 몹시 기뻐 어쩔줄
몰라 하며 손을 내밀어 그녀를 덥석안았다. 곽원룡과 진달해는 서로 마주보며 웃을
뿐이었다.

(둘째가 십 년을 상사병으로 앓더니, 오늘에야 마침내 그 뜻을 이루는 구나!)

사준중은 상관홍의 몸에서 풍기는 그윽한 향기를 맡으면서 갈피를 잡을수 없었는데,
상관홍의 양팔이 더욱 자기를 죄어오는 것을 느끼니 꿈인가 생시인가 더욱 믿기지
않앙싶다. 그런데 문득 복부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무엇인가 예리한 물체가 몸에
꽂히는 것 같았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상관홍을 밀어내려 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그녀의 두팔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꽉 껴안고 놓지 않았다. 마친내
두사람은 함께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워낙 급작스레 일어난 일이어서 곽원룡과 진달해는 몹시 놀랄뿐이었다. 급히
말에서 내려 그를 구하러 달려가 상관홍의 몸을 뒤집었다. 그녀의 가습엔 선혈이
낭자한데 금자루 비수가 꽂혀 있고 다른 은자루 비수가 사중준의 복부에 꽂혀
있었다. 처음부터 금은소검 삼낭자는 남편을 따라 죽기로 결심하고는 옷 속에
쌍검을 몰래 감춰놓고 하나는 밖으로, 다른 하나는 자신을 향하게 해놓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준중이 그녀를 안자 두사람이 동시에 검에 찔렸던 것이다.
상관홍은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졌지만, 사중준은 단번에 죽지 못한 채, 사매의
손에 죽게 됨을 생각하니 비통하기 그지 없었다. 게다가 몸의 상처가 더욱 견딜수
없었다.

"세째는 빨리 나를 죽여다오. 제발 더 고통을 받지 않도록..."

진달해는 그의 상처가 극심해 치유할수 없는걸 알고는 큰형을 처다보았다.
곽원룡은 아무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달해는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아 사준중의
심장을 겨누고 힘껏 찔렀다.
곽원룡이 그를 보며 탄식한다.

"금은소검 삼낭자가 필경 이렇듯 지독한 여자인 줄은 몰랐구나."

바로 이때, 부하 하나가 급히 말을 몰고 달려와 보고했다.

"백마이삼의 시체를 아무리 뒤져 봐도 지도는 없었습니다."

곽원룡이 상관홍을 가리키며 말한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상관홍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샅샅이 뒤져 보아도 상관홍의 몸에서는 은냥 몇푼과 몇 가지
갈아입을 의복을 제외하고는 다른 것은 없었다. 곽원룡과 진달해는 실망스럽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여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감양에서 회강까지 시종 이삼
부부를 지켜보며 바짝 쫓아 왔는데, 그들은 수십인의 눈을 피해 지도가 중도에서
다른 사람에게 건네진다는 것은 결코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그들 부부는
지도를 지키기 위해 생명마저 버렸으니 절대 아무에게나 건네 주었을 리가 만무한
일이었다. 진달해가 다시 한번 상관홍의 보따리를 샅샅이 살피던중 계집아이의
속바지가 보였다. 그러자 문득 집히는 데가 있었다.

"큰형, 빨리 계집아이를 쫓아요!"
"어? 음, 서두를 것 없다. 조그만 계집아이가 이 넓은 사막에서 어디로 도망가겠나?"

곽원룡은 왼팔을 들어 명령했다.

"두 사람은 남아 둘째를 안장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나를 따르도록 하라"

그가 채찍을 들어 선두로 달려가자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함성 소리가
이어지며 백여 필의 말이 따라간다.
그 소녀는 달린 지 이미 오랜지라 이즈음에는 이십여 리 밖에 있었다. 허나 워낙
끝없이 펼쳐진 평탄한 사막에서는 십여 리가 한눈에 들어오므로 소녀가 비록 이미
멀찌감치 달아났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잡히게 될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과연 주위가 어둑어둑해지는 해질무렵이 되자 진달헤가 별안간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저기 앞에 있다!"

멀리 지평선을 딸라 까만 점 하나가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백마가
제아무리 신준하다 하나 아침붜 저녁까지 쉬지 않고 달린 터라 마침내는 지쳐 버린
것이다. 이에 반해 곽원룡과 진달해는 쉴새 없이 생기있는 말로 바꿔타며 바짝
쫓으니 점점 그 거리가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이문수는 몹시 지친 채 백마등에 엎어져 깊이 잠등어 있었다. 그녀는 하루종일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한데다 먹지도 못한채 대사막의 강렬한 태양 아래 입술만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백마는 대단히 총명하여 뒤에 쫓아오는 적이 어린 주인에거 해롭다는 것을 알아
치가 붉게 타는 석양이 되도록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있는데, 돌연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앞발을 들며 우는데 공포의 빛이 역력 하였다.
곽원룡과 진달해는 모두 무공이 깊이 통달한지라 장거리를 질주하면서도 느끼질
못했으나, 두사람 다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가빠지며 견딜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곽원룡이 먼저 말을 꺼냈다.

"세째, 뭔가 좀 이상한 것 같다!"

진달해가 사방을 둘러보며 주위를 살피니 누렇고 물기 머금은 안개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누언 구름 가운데 끊임없이 보라색이 번쩍이는 것이 그 신기하고
아름다움은 실로 지금껏 보지 못했던 바이었다.
그러나 누런 구름이 급속히 커져, 채 한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하늘의 절반을
가려 버렸다. 이들 무리들 또한 비오듯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 거리자 진달해가
초초한 듯 말을 건넨다.

"큰형님, 아무래도 굉장한 모래바람이 불것 같습니다."
"그래, 우선 그 계집아이를 붙잡고나서 피할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

곽원룡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입과 코 전체 에 모래가 불어닥쳐 나머지
말을 채 마칠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사막의 사풍은 순식간에 땅 전체를 휩쓸어 버리는 것이었다. 칠팔 명이 태풍에
날려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를 본 곽원룡이 고함을 지르듯 외쳤다.

"다 내려서 빙 둘러싸라!"

이들 무리는 사풍에 맞서기 위해 백여 필의 말을 끌어다 커다란 원을 만들어서는
사람과 말이 동시에 엎드렸다.
이들이 비록 사람과 말 다 충분히 많다 하나 끝없이 펼쳐진 사막 가운데에 하늘을
가리고 땅을 뒤덮는 엄청난 사풍 앞에서는 망망대해에 떠있는 일엽편주와 같아서
손을 볼 도리가 없었다.
사풍이 거세질수록 사람과 말 위의 황사는 더욱 두텁게 쌓여만갔다.
곽원룡과 진달해처럼 무엇 하나 두려워 하지 않는 억센 사나이들조차도 이
어마어마한 바람의 기세에는 전율할 따름 이었다. 두사람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공연히 고창미궁을 찾아서 이 사막까지 쫓아와서는 도리어 이곳에 묻히게
되는구나.)

이 엄청난 바람이 일으키는 소리는 무수한 악귀가 동시에 기세를 떨치는듯 했다.
대사막의 사풍이 밤새 불더니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차차 가라 앉기
시작하였다.
곽원룡과 진달해가 몸을 일으켜 사람과 말을 점검해보니 두 명의 동료와 다섯 필의
말이 죽어 있었다. 허나 사람들 모두가 이 엄청난 사풍에 날려가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버티느라 피로하고 지친데다가 더욱 곤란한 것은 백마를 탄 소녀가
도데체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큰 사풍에 사막 어느구석에
파묻혔을게 틀림없겠지만, 무공을 갖춘 억센 사내들조차도 견뎌내지 못하고 있는
판국에 하물며 가냘픈 소녀임에야.
그들은 사막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지어 먹었다. 그리고 한참을 쉰 후에야 곽원룡이
영을 내렸다.

"누구든지 백마와 계집아이의 종적을 발견하는 자에게는 황금 오십 냥의 상금을
주겠다."

그를 따라 회강까지 온 이들은 다 진섬감량(晋陝甘凉) 일대의 강호인물들로서
천리를 마다 많고 온 것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인데 오십냥의 황금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망망한 사막으로 뿔뿔히 흩어져 떠났다.

(백마,계집아이,황금 오십냥!)

사람들의 심중마다 모두 이 세가지 생각만이 꽉 들어차 있었다. 어떤 이는 곧장
서쪽으로 향하고, 어떤이는 서북, 또 다른 이는 서남으로 향하는데 어두워질 무렵에
징서 육십 리에서 만나기로 약정이 되어 있었다.
양두사(兩頭蛇)정동(丁同)은 튼튼한 말을 몰아 서북방으로 달렸다. 그는
진위표국에서 이미 십 칠년간 몸 담고 있는 자로 무공은 대단하다고 볼수 없으나
수완있고 노련하여 실로 여량삼걸의 부하중 가장 두두러진 자였다. 그가 단숨에
이십여 리를 달리니 여러 동료들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지라 망망한 사막
한가운데서 돌연 두려워 졌다.사구 쪽으로 말을 몰아가는데 서북방저편에 짙은
초록색이 눈에 띄었다. 몇구루의 버드나무가 우뚝 높이 솟아 있었다.

(이 넓은 녹지대엔 필시 샘이 있을 터이니 다른사람들이 없다면 동지들을 불러
쉬어야지.)

그를 태운 말도 수초를 보더니 정동이 채찍을 재촉 하기도 전에 미친듯이 달려간다.
십여 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가니 오아시스는 끝을 찾을수 없을 만큼 넓은데다,
들은 온통 소와 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쪽에는 천막이 세워져 있는데
육칠 백 채나 될 성싶었다.
정동은 이 모든 광경이 뜻밖인지라 매우 놀랐다. 그가 회강에온 이후 본 사람들이
기껏해야 삼사십을 넘지 않았고 이러한 대부족은 처음 이었다. 천막의 양식을 보아
하니 카자흐족이 분명하였다.
예로부터 카자흐인을 잘 표현하는말로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오고 있었다.

'한명의 카자흐인이 백명의 겁장이를 당할수 있고 백명의 카자흐인 이면 회강을
누빌수 있다.'

정동은 일찌기 이런말을 들은적이 있었으므로 깊이 생각했다.

(카자흐족의 부락에서는 조심해서 행동해야지.)

그때 동북쪽 산기슭 모퉁이에 따로 떨어져 있는 초라한 천막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 천막은 흙담에 지붕은 풀로 엮어 덮었는데 그양식이 한인 벽돌집과 흡사하나
단지 좀 누추해 보였다.

(우선 이 집을 좀 살펴보자.)

정동은 이 조그만 집으로 말을 몰아갔다. 정동은 곁눈질로 대충 살펴보니 그집
뒤편에 백마가 매어져 있었다. 튼튼한 다리에 긴 갈기가 틀림없는 백마 이삼의
말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를질렀다.

"백마, 백마가 여기 있다!"

그는 말에서 얼른 내려서는 장화통에서 끝이 예리한 단도를 꺼냈다. 단도를
왼쪽소매속에 숨기고 살금살금 그 집 뒤편으로 가 창문으로 머리를 디밀어 내부를
살피려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백마가 히이잉... 하며 길게 울어대었다. 백마가 그의
침입을 알아 첸 듯하였다.

(저런 못된 짐승 같으니라구...!)

정동이 노하여 속으로 꾸짖고 마음을 가다듬어 다시한번 살피려 하는데 창 안에서
또다른 얼굴이 동시에 내밀어질 줄이야! 정동의 코가 그의 코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얼굴에 주름이 많고 날카로운 눈빛을 띤 사람이었다. 정동이 몹시 놀라
뒷걸음질 치려하는데 노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뜻밖에도 한어였다.

"누구시오? 여기서 뭘 하고 있는게요?"

정동이 놀란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하고는 웃음을 띄우며 대답했다.

"성은 정이라 하며 이름자는 종이라 하옵는데, 이곳에 와 본의 아니게 노인장을
놀라게 했습니다.노인장의 함자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소생은 계라 하오."

정동은 여전히 웃음을 띤 채 말을 잇는다.

"계노인장,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서 동향인을 만나니 실로 육친을 대한듯 합니다.
소생 감히 차 한 잔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몇이 함께 왔소?"
"저 혼자 뿐입니다."

계노인이 흥! 하는게 믿을수 없다는 눈치다. 노인의 냉랭한 안광이 정동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자 정동은 안절부절 못한 채 단지로 억지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한사람은 차가운 시선으로 흙어보고 있고, 한 사람은 웃고는있으나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이한 장면이었다. 계노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차를 들고 싶다면 창문으로 기웃거리지 말고 대문으로 정정당당 들어오시오!"
"네, 네!"

정동이 예의 그 웃음을 띠며 문앞으로 돌아 들어 왔다.정동이 의자에 앉아 사방을
살피는데 차를 받쳐든 한 소녀가 후당에서 들어왔다, 두사람의 눈이 부딪치자
소녀가 몹시 놀라 헉! 하며 차잔을 땅에 떨어뜨렸다. 찻잔은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뒹굴었다.
정동은 기분이 몹시 유쾨해졌다. 이 아이가 바로 곽원룡이 많은 상금을 걸고
찾으려는 소녀임에 틀림없었다. 그가 백마를 발견한 후, 그소녀가 이집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은 했으나 돌연 눈앞에 나타나자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어젯밤 늦게 거대한 사풍에 말 위에서 정신을 잃고 인사불성이 된 이문수는 수초의
냄새를 따라 사풍을 무릅쓰고 초원으로 달려온 백마에 실려 있었다. 한인복장을 한
소녀가 말 등에 엎어져 있는 것을 본 계노인은 급히 소녀를 집으로 안고 들어왔다.
이문수가 깨어나더니 부모를 찾으며 통곡했다. 계노인은 아이가 순진하고 사랑스러워
가여운 마음을 금할수 없어, 어떻게 이 사막에 오게 되었으며, 부모는 누구인지를
물어 보았다. 이문수는 아버지는 백마이삼이며 어머니는 이름은 잘모르고 얼핏
그들을 쫓아오던 나쁜 사람들이 멀리서 삼낭자라 부르는 것을 들었다고 대답하며,
회강에 와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계노인이 낮은 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백마이삼,백마이삼, 그는 강남에서 횡행하던 협객인데 어쩌다 회강에까지 오게
되었단 말인가?"

그는 이문수에게 죽 한 접시를 배불리 먹이고는 재웠다. 허나 노인의 심중에는
십년이 훨씬지난 여러가지 옛일이 떠올라 엎치락 뒤치락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에야 깨어난 이문수는 일어나자마자 할아버지에게 자기를 데리고 아빠,
엄마를 찾으러 가자고 졸랐다. 바로 그때에 양두사 정동이 창밖에서 두리번거리며
내부를 엿보려 하다가 계노인에게 들켰던 것이다.
이문수가 들고 있던 찾잔을 떨어뜨리는 것을 본 계노인이 소녀에게 달려가자 그녀는
얼른 그의 품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할아버지,저...저 사람이 바로 우릴 쫓던 나쁜 사람이에요."

게노인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를 다독 거렸다.

"떨지 말아라. 아가, 무서워할것 없어요.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란다."
"아니에요. 맞아요. 바로 그들이에요. 그들 수십 명이 우릴 쫓아와 엄마, 아빠를
잡아 갔는걸요."

이렇게 울먹이는 이문수를 보며 계노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백마이삼이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고, 도데체 누구와 어쩌다 원한이 맺혔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개입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정동이 슬쩍 계노인을 가늠질해 보니 머리가 온통 백발에다 허리와 등이 고양이처럼
굽어 매우 노쇄한 듯하나 체구는 당당했다.

(저 늙어빠진 영감이 구십은 족히 되었을 터이니 만일 집안에 아무도 없다면 그를
일격에 때려눕힌 다음 저계집아이와 백마를 끌고 가버려야 겠다.)

정동은 느닷없이 오른쪽 귀에 대고 뭔가 열심히 귀기울이는 척한다.

"누가 왔다."

그러더니 소리를 지르며 잽싸게 창문쪽으로 달려갔다.
계노인은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으나 정동의 말을 듣고는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보고는 말했다.

"도데체 누가 왔단 말인가?"

홀연 정동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바람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계노인이 비록 늙어 뼈만 앙상하나 몸놀림이 민첩해 정동의 손바닥과 그의
머리 꼭대기의 간격이 몇치에 지나지 않음에도 그의 장풍을 피해 몸을 살짝 날렸다.
그리고는 정동의 오른팔목을 움켜쥐고 꼼짝못하게 했다. 결사적으로 빠져나가려
몸부림치던 정동은 왼소을 소매 속에 넣에 감춰두었던 비수를 꺼냈다. 흰 빛이
번쩍이며 쉬!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비수는 계노인의 등에 꽂히고 말았다.
계노인의 몸에 칼이 꽂히는 것을 본 이문수는 할아버지를 크게 부르며 부모에게서
이 년간 배운 무공으로 몸을 위로 솟구쳐 작은 두 주먹으로 정동의 허리를 내려쳤다.
이때 계노인이 왼쪽팔꿈치로 정동의 가슴을 내려치니 그힘이 워낙 강한지라 정동은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땅에 쓰러진 정동은 입에서 피를
뿜어내더니 곧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문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할...할아버지 등에..."

계노인은 아이의 두눈에 눈물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는 생각했다.

(마음이 착한 아이로구나.)

"할아버지, 상처가...제가 칼을 빼드릴까요?"

하고 이문수가 말하며 손을 뻗어 칼을 쥐려 하는데, 계노인이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상관하지 말아라."

그는 탁자에 기대어 몸을 일으키고는 부들부들 떨며 실내쪽으로 향하더니 탁 하며
문을 닫았다. 이문수는 할아버지가 갑자기 화를 내자 놀란데다 땅에 쓰러져있는
정동의 몸이 오그라드는 것을 보고는 그가 다시 일어나 자기를 해치려 들것만같아
빨리 밖으로 도망 치고싶었다.그러나 계노인이 중상을 입은데다 돌봐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것을 생각하니 차마 그냥 내버려 둘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곰곰히 생각하다 방문 앞에 가 몇 번을 두드렸지만 방안에서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많이 편찮으세요?"
"썩 가거라, 썩 가! 시끄럽게 굴지 말고!"

계노인의 거친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이문수는 겁에 질려 감히 다시 외치지도
못하고 떨며 바닥에 앉아 머리를 감싸고 슬프게 울기 시작 했다. 그러자 갑자기
삐꺽 하며 문이 열리더니 게노인이 양손으로 부드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 듬으며
나지막히 말했다.

"자, 뚝 그쳐야지. 이 할아버지의 상처는 대단하진 않단다. 울지말아라."

이문구가 고개를 들어 노인의 미소를 보고는 기쁜나머지 울다가 웃는다. 그모습을
보고 계노인도 따라 빙그레 웃었다.

"울다가 웃다니, 부끄럽지도 않니?"

이문수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노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이는 노인의 몸에서 부모의 훈훈한 온기를 느낄수 있었다.
계노인은 미간을 찡그리더니 정동의 시신을 살피며 생각한다.

(그는 나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어째서 느닷없이 내게 잔인한 짓을 했단 말인가?)

"할아버지, 등의 상처는 좀 나아졌어요?"

계노인이 이미 긴 두루마리로 갈아입고 있어 상처는 보이지 않지만 이문수는
여전히 걱정 스러웠다.
노인은 이문수가 다시 이일을 들추자, 칼에 찔린 것이 치욕적인 것처럼 또 화나는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 역시 거칠었다.

"왜 이리 귀찮게 구는 게냐?"

이때 백마가 천천히 숨을 내쉬며 길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노인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만 나뭇간에 가서 노란색 염료가 든 통을 들고 왔다. 이는
방목하는 사람들이 각집의 소와 양이 뒤섞이지 않도록 가축의 몸에 표시하는데
쓰는것으로 웬만큼 세월이 흐를때까지는 탈색이 되지 않았다, 그는 백마를
끌고와서는 솔로 머리부터 꼬리까지 전부 노란색으로 문지르고는 카자흐인의
천막에가서 카자흐족의 사내아이 옷을 얻어와 이문수에게 갈아 입혔다.
총명한 이문수가 물었다.

"할아버지, 나쁜사람들이 저를 알아채지 못하게 하여는거지요?"

계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할아버지는 늙었구나. 아, 방금도 칼에 찔리고 말았으니..."

계노인은 정동의 시체를 묻고 그가 타고온 말또한 죽였다. 실한 올 남김없이
흔적을 없애 버린후에야 대문앞에 앉아 한자루의 장검을 맷돌에다 가는데 손으로
잡을수 없을 만큼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곽원룡과 진달해가 거느린 강도들은 아무런 수확도 없이 헛되이 시간만 보내게
되자 이날 저녁 쯤 오아시스를 발견하고는 닥치는 데로 약탈을 했다. 카자흐인이
용감하고 무예가 뛰어나 싸움에 능하다 하나 부족중에 건장한 남자 들은 다
이리때를 사냥하러 막북쪽으로 떠나 천막에 남은 자들은 다노인과 어린이,
부녀자들로 막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이일대에는 여태 도적이라곤
없었으므로 이들 중원에서 온 강도들의 공격에 전혀 손 쓸방법이 없었다. 결국
일곱명의 카자흐 남자가 피살되고 다섯명의 부녀가 잡혀가고 말았다. 이 무리들은
계노인의 집에도 침입했으나 이들중 어느누구도 노인과 카자흐 소년에 대해 의심을
갖는자는 없었다.
이문수의 눈에서 번쩍이는 원한의 빛을 눈여겨 보는자는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늘 차고 다니던 검이 과원룡의 허리에 걸려 있는 것을, 어머니의
금은 소검이 진달해의 허리띠에 꽂혀 있는것을 똑똑하 보았다. 이것들은 그녀의
부모가 결코 몸에서 떼어 놓지 않던 무기이므로 비록 그녀의 나이가 적다하나
부모의 신변에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것을 추측 할수 있었다.
나흘째 되던 날 카자흐족의 남자들이 북방에서 한짐가득 이리 시체를 끌고
돌아오자마자 대오를 지어 한인 강도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망망한 사막중에
그들의 자취는 찾을길 없고 오직 끌려갔던 다섯명의 부녀자만 찾아냈을 뿐이었다.
허나 이들은 다섯구의 시신으로 전신이 발가 벗겨진 채 참혹하게 사막 한복판에
버려져 있었다. 그들은 또한 백마 이삼과 금은 소검 삼낭자의 시신도 찾아내 함께
갖고 돌아왔다.
이문수가 부모의 시신으로 달려들며 슬프게 통곡하자 한 카자흐인이 그녀의
다리를 세게 차며 거친 소리로 욕했다.

"천벌받아 마땅한 한인 강도들!"

그러나 계노인은 그 카자흐인과 다투지 않고 잠자코 이문수를 안고 집으로 돌아
왔다. 이문수의 어린 가슴속에도 여러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왜 이렇게 나쁜사람이 많은것일까? 어째서 모든 사람이 날 욕하는 걸까?)

한밤중에 이문수가 꿈속에서 울다 깨어 눈을 뜨니 침대옆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놀라 소리 지르며 일어나자 노인이 애정이 넘치는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오 쓰다 듬었다.

"겁내지 말아라. 나다, 할아버지야."

이문수는 꿰어 놓은 진주가 풀어진듯 눈물을 흘리며 노인의 품에 엎드려 그의
앞자락 전체를 져셔 버렸다.

"아가, 이제 네게 아빠, 엄마가 계시지 않으니 내가 너의 친할아버지가 돼주마.
나와 함께 살자꾸나. 이 할아버지가 너를 잘 돌봐 줄수 있을게야"

이문수가 울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아빠, 엄마를 죽인 나쁜사람과 또 그녀를
걷어찼던 나쁜 카자흐 남자가 생각났다. 아까 발로 채인것이 하도 심해 허리가
많이 부어 있었다.

"할아버지, 왜 모두나를 욕할까요? 나는 아무런 나쁜일도 하지 않았는데?"

계노인은 한숨 지으며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자는 언제나 나쁜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지."

그는 항아리 에서 양젖을 떠다 주고는 이불을 잘덮어 주며 계속 말을 잇는다.

"수아, 아까 너를 찬 사람은 바로 소로극(蘇魯克)이란 사람인데 정직하고 좋은
사람이란다."

이문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참으로 의아해 하더니 물었다.

"그...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니요?"

계노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란다. 그도 너와 똑같이 하룻밤사이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사람을 잃었단다. 하나는 그의 부인이요, 또하나는 큰아들이지.
모두 저 극악무도한 강도들에게 죽음을 당했지. 그래서 그는 한인은 모두
악인이라고 여기고 카자흐 말로 너를 욕했던 거란다. 천벌을 받을 한인강도라고,
그를 원망하지 말아라.
그의 가슴속의 비통함은 너와 똑같단다. 아니지. 그사나이는 나이가 들었으니
가슴속의 비통함은 너보다 더욱 많고 더욱 깊을 게야."

그녀는 본래 덥수룩한 수염을 한 그 카자흐인을 원망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험상궂은 모습이 무서웠을 뿐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 아저씨의 두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으면서도 가까스로 참고 있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녀는 왜 어른의
슬픔이 아이의 슬픔보다 더깊고 큰것인지, 계노인이 말한것을 이해할순 없었으나
그수염이 많이난 아저씨가 불쌍해 견딜수가 없었다.
이때 창밖에서 기묘하고 아름다운 새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나는 소리이나
매우 분명하고 또렸이 들리는 것이 소녀의 노래처럼 감미로우면서도 처량하고
맑고도 부드러웠다.
울음 소리가 점차 멀어지더니 마침내는 희미해지며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픈
가슴에 위안을 얻었는지 넋을 잃고 황홀해 했다.

"할아버지, 저 새의 노래 정말 듣기 좋죠?"
"그래, 정말 좋구나. 바로 천영죠(天鈴鳥)인데, 하늘나라의 은방울 소리 같구나.
저새는 밤에만 노래 부를뿐 낮에는 잠만 잔단다.
어떤이는 저새가 하늘의 별이 떨어져 변한것이라하고 또 어느 카자흐 인은
말하기를, 초원에서 가장 예쁘고 가장 노래를 잘 부르는 소녀가 죽은 후에
변한 거라고 한단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녀를 사랑해 주지 않자 상심한
나머지 죽은 것이라고."

"제일 예쁘고 노래 또한 가장 잘 부르는데 왜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이문수는 갸우뚱거린다.
계노인 또한 넋나간 표정으로 길게 탄식했다.

"세상에는 너같은 아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단다."

다시 멀리 초원에서 천영조의 노래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二. 소년과 소녀

이문수는 노인의 집에서 양을 치고 밥을 짖는 것을 도우며 마치 친할아버지와
찬손녀 처럼 오손도손 살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겨울도 지나 이문수는 카자흐 말과
초원에서의 여러가지 일을 배우며 조용하고도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계노인은 향기로우면서도 독한 술을 담글 줄 알았는데 카자흐 족의 남자들은
그 독한 미주를 가장 즐겨 마셨다. 계노인은 또 소와 양, 말의 질병을 고칠줄
알았는데 카자흐인이 고치지 못한 가축도 왕왕 그가 낫게 해주었다. 소와 양, 말은
카자흐인에게 있어서는 생명처럼 귀중한 것이어서, 한인을 싫어하는 그들이지만
그가 담근 미주와 가축을 바꾸기도 하고, 그를 청해 가축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도
했다.
어느날 밤, 이문수가 또 천영조의 노래를 듣고 있는데 점차 그 노래소리는
희미해지며 바람소리 속에 파묻혀 전혀 들리지 않게되었다. 이문수는 노인이
깰까봐 조용히 옷을 입고는 살금 살금 집밖으로 나가 백마를 멀리 끌어내어 말에
올라타 노래소리를 쫓아갔다. 초원의 밤하늘은 아득히 높은 쪽빛을 띠고 있었다.
별들은 반짝이고 풀과 꽃들은 제각기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천영조의 노래소리는 매우 맑고도 부드러우면서 우아 하였다.
이문수의 마음 또한 즐거운 나머지 말에서 내려, 백마는 제마음대로 풀을 뜯게
하고는 풀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노래에 푹 젓어 있었다.
날개를 퍼득이는 소리가 들려 이문수는 넙죽 엎드려 그곳을 보니 담황색의 아주
작은 새 한마리가 바닥에서 뭔가 열심히 쪼아 먹고 있다. 새는 몇번 바닥을 쪼더니
먹을걸 찾아 다시 날개를 퍼득이며 앞으로 날아간다.
천영조가 신나게 쪼아 먹고 있는데 갑자기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빛을 띤
물체가 천영조를 덮쳐버린다.
풀밭사이에서 한 카자흐 소년이 의기양양해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야, 잡았다. 잡았어!"

그는 겉옷속에 천영조를 감싸고 있었다.놀라서 우짖는 새소리가 겉옷 밖으로
구슬프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문수는 한편 놀랍고 한편 분한 마음에 어쩔줄 몰라
했다.

"너 도데체 뭐하고 있는 거니?"
"천영조 잡았다. 왜? 너도 잡으려고?"
"잡는다고? 그새가 마음껏 즐겁게 노래하도록 두는게 좋잖아?"

여전히 소냔은 기분이 좋아 웃고 있다.

"잡아서 놀 거야."

오른손을 빼 손을 내미는데 그속에 담황색의 새를 움켜쥐고 있었다.

"놓아줘, 가엾지도 않니?"
"내가 보리를 뿌려놓고 이새를 이리로 유인 했던 거야. 누가 이 새더러 내 보리를
먹으라고 했나? 하하하?"

'함정'이라는것이 무엇인지 세상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이문수는 몸이 떨려왔다.
사람들은 새가 보리를 먹을줄 미리 알고 보리를 뿌려놓고 죽음의 길로 이끄는 것이다.
'사람은 재물 때문에 죽고 새는 먹는것으로 죽는다.' 라는 수천년 내려온 속담을
알진 못하지만 이문수는 책략의 무서움과 유혹을 이겨내기 힘들다는 것을 어렴픗이
감지 할수 있었다.
소년이 천영조를 가지고 장난하자 새는 아픔을 못이겨 울었다.
이문수는 도져히 참을수가 없었다.

"그 새 내게 줄래?"
"그럼, 넌 내게 뭘줄건데?"

이문수는 품안에 손을 넣어 더듬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자 난처해 하며 이리저리
궁리했다.

"나중에 몸에 달고 다닐수있는 아주 예쁜 염낭 주머니를 만들어줄께."
"지금이 아니면 안돼. 나중에 네가 약속을 안지키면 어떻게해."

이문수는 흥분하여 얼굴이 붉어진다.

"네게 준다고 했으면 틀림없이 줄거야. 난 꼭 약속을 지켜."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믿을수 없어"

문득 달빛에 이문수의 왼쪽 팔목에 옥팔찌가 투명한 빛을 내며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이걸 줘."

올팔찌는 지금남아있는 유일한 엄마의 유품인지라 차마 줄수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가엾은 천영조를 보니 견딜수 없어 마침내 옥팔찌를 떼어 주고 말았다.

"자, 가져!"

소년은 설마 옥팔찌를 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다가 옥팔찌를 받아 저윽이 놀라며
소녀에게 다짐 시킨다.

"너 이다음에 달라고 그럼 안돼!"
"절대 안그럴 거야!"

그제서야 소년은 천영조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이문수가 두손으로 새를 잡으니
손안에 새의 연약하고도 부드러운 몸뚱이와 빠르고도 약하게 뛰는 심장의 고동을
느낄수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새의 목덜미를 가볍게 어루만지더니 양손을
활짝 폈다.

"훨훨 날아라! 다음에는 조심해서 부디 다시는 사람에게 잡히지 말아라!"

천영조는 날개를 활짝펴고는 마음껏 날개짓하며 풀숲으로 날아가 버렸다. 소년이
이문수의 하는양을 보고는 이상해 하며 물었다.

"어째서 새를 놔줬지? 옥팔찌로 바꿨으면서?"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소녀가 다시 돌려 달랄까봐 두려워 팔찌를 꼭 움켜쥔다.

"천영조가 다시 자유롭게 날며 노래부를 수 있으면 되잖아?"

소년이 거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묻는다.

"넌 누구니?"
"난 이문수야. 넌?"
"난 소보(蘇普)라고 해."

소보는 이문수보다 두살 가량 나이가 들어 보였고 키가 훨씬 컸으며 늠름한 체구의
소년이었다.

"넌 힘이 쎄구나, 그렇지?"

이문수의 말에 소보는 몹시 기분이 좋아 어깨를 으시댔다. 그는 허리에서 단검을
끄내 보였다.

"지난 달에 내가 이칼로 이리 한마리를 베어 거의 죽일 뻔했는데 아깝게도 도망쳐
버렸어."
"너, 대단하구나!"

이문수가 몹시 놀라워 했더니 소보는 더욱 의기양양해진다.

"두 마리의 이리가 한밤중에 우리집 양을 훔치러 왔었는데, 마침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 내가 칼을 뽑나들고 쫓아 갔지. 큰놈이 횟불을 보고는 도망치자 내가 단칼에
다른놈을 베어 버렸지."
"그럼 네가 벤것은 작은 놈이었겠구나?"

하는 이문수의 물음에 소보는 약간 기가 꺾여 고개를 끄덕이며 기어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하지만 그큰놈이 도망가지만 않았다면 내손에 죽었을 꺼야."

그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스스로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이문수는 전혀 의심의
빛을 보이지 않는다.

"연약한 양을 죽이는 못된 이리는 죽어 마땅해. 이다음에 이리를 죽이거든 내게도
좀 보여 줄래?"
"좋아! 내가 이리를 죽이거든 가죽을 벗겨 네게 줄께."
"고마워. 그럼 할아버지께 이리가죽으로 된 깔개를 만들어 드려야지. 할아버지 걸
내게 주셨으니까."
"안돼! 내가 네게 준것은 너만 써야 돼. 넌 할아버지것을 도로 돌려주면 되잖아."
"그래도 좋지, 뭐."

하며 이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이 지난뒤 이문수는 조그만 염낭을 만들어 맥당을 가득 채워서는 소보에게
주었다. 이 선물은 소년으로서는 매우 뜻밖의 것이었는데 새를 옥팔찌와 바꾼것으로
이미 실속을 차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카자흐인은 천성이 정직하여 그는 받은
이상 응당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룻밤을 꼬박세워 초원에서 두마리
천영조를 잡아 다음낭 이문수에게 건네 주었다.
그러나 소년의 이런 선심을 쓴 행동은 엉뚱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이문수는 입이
아프도록 자기가 기뻐하는 바는 천영조가 자유롭게 지내는 것이지 그것을 잡아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누누이 설명 하였다. 그제서야 소년은 이문수의 말을
이해할수 있었으나 마음 한편에서는 소녀의 착한 마음이 조금은 어리 석고
가소롭다고 느껴졌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문수는 부모님의 꿈을 점점 덜꾸게 되고 그녀의 베갯머리의
눈물 자국도 점차 희미해져갔다. 그리하여 그녀의 얼굴은 웃음을 띄고 있을때가
많아지고 입에서는 노래소리가 흘러나오곤 했다.
그녀가 소보와 함께 양을 치고 있을때면 초원에서는 연가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는데
이문수는 이런 끈끈한 정취가 담긴 노래를 자주 귀기울여 들으니 나중엔 저절로
흥얼 거리게 되었다. 물론 그녀는 노래 속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한남자가 한 아가씨로 인해 이처럼 흔들릴까? 왜 아가씨는 남자의 마음에 들려 하는
걸까? 왜 사랑하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까?
왜 아리따운 몸매는 남자로 하여근 온밤을 잠 못들게 하는 걸까?
단지 그녀는 열심히 귀기울였다가 따라 부를 따름이었다.
그녀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저소녀의 노래소리는 정말 곱구나! 초원의 천영조와 어찌 저리같을까!"

추운 겨울이 되어 천영조가 남쪽의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 버리자 초원에는
이문수의 노래 소리만이 들리게 되었다.

아, 사랑하는 양치기 소년이여,
묻건대 몇 살이신지요?
당신이 한밤중에 사막을 홀로 걸을 때
나와 벗함이 어떠하신지요.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면 누군들 너와 벗하고 싶은 마음이 안들까?)

노랫소리는 계속 들린다.

아, 사랑하는 그대여 화내지 마세요.
누가 좋고 나쁨은 단번에 알기 어려우니
고비 사막이 와원으로 변해서야
좋은 사람과 함께 있을수 있는것을.

이 노래를 듣는 사람이면 누구나 제아무리 냉혹하고 메마른 가슴이라도 한 송이
꽃이 피듯 환해지고 따뜻해 졌다.

(좋은 사람과 함께 있다면 고비 사막도 자연 화원이 될터이니 누군들 네게 화를
내리오?)

늙은이는 젊음을 되찾고 젊은이의 가슴에는 기쁨이 넘쳤다. 그러나 이러한 연가를
부르는 당사자 이문수는 오히려 노래속에 담긴뜻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의 노래를 가장 많이 듣는 사람은 소보 였는데 그역시 이런 초원에 떠도는
연가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두사람은 눈쌓인 언덕에서 무서운 이리와
맞부딪히고 말았다.
이러한 이리의 출연은 매우 급작스러운 것이었는데 그때 소보와 이문수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낮은 언덕에 앉아 초원에 흩어져 풀을 뜯고 있는 양떼를 지켜보고
있었다.
늘 그랬던것처럼 이문수는 그에게 고사(古事)를 얘기 해주고 있었는데 이러한
고사는 대두분 예전에 엄마에게 들었던 곳이거나 어떤것은 계노인 에게서 들은
것이고, 또 그녀 자신이 직접 꾸며낸 이야기도 있었다. 소보가 가장 가장 듣기 좋아
하는것은 계노인의 아슬아슬한 모험 이야기 였다. 이문수가 지어낸 유치한
여성고사를 가장 지루해 했는데 이제는 아슬아슬한 고사도 반복해 여러번 듣다보니
긴장감이 없어 그는 인내심을 갖고 듣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어느날 별안간 이문수가 아! 하며 뒤로 벌렁 넘어지는데 회색 털의 큰이리
한놈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그녀의 목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이리가 뒤에서 전혀 소리없이 달려들었으므로 두 아이는 아무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이문수는 예전에 엄마에게서 무공을 배웠던 덕택으로 무의식중에
허리를 비껴 흉악한 이리가 구녀의 목을 깨물려는 것을 피할수 있었다. 소보는
이리의 덩치가 엄청난데 놀란 나머지 다리에 힘이빠지며 꼼짝도 할수 없었지만 즉시,

(그녀를 구해야만 한다.)

라고 생각하며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이리의 등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허나
이리의 뼈가 워낙 딱딱해 단도는 잔등을 미끄러져 껍질만이 약간 벗겨졌을 뿐이다.
이리는 위험을 느끼고 이문수를 놓아주고 입을 짝 벌리며 몸을 솟구쳐 양다리로
소보의 어깨 위에 올라타 그의 얼굴을 물어 뜯으려 했다.
소보가 몹시놀라 뒤로 넘어지니 이리는 잽싸게 양 다리로 소보를 꼼짝 못하게
누르고는 흉악한 이빨을 번쩍이며 소보의 빰에 들이댔다. 이문수는 너무나
무서웠지만 용기를 내어 이리의 꼬리를 있는 힘껏 마구 뒤로 잡아당겼다. 회색 털의
이리는 그녀가 잡아당기자 뒤로 한걸음 끌려갔으나 위낙 배가 고팠으므로 두 발을
땅레 딱 버티고는 이문수가 아무리 잡아끌어도 꼼짝도 하지 안고 소보를 꽉 물었다.
소보가 크게 외치는데 이 흉악한 이리는 이미 그의 왼쪽 어깨를 물고 있었다.
이문수는 놀라 울음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젖먹던 힘까지 내어 잡아 끌었다.
이리가 아픔을 참지 못해 비명을 자르며 소보의 어깨를 물던 이빨을 빼냈다. 소보가
얼결에 칼을 뽑아 이리의 복부 가장 약한 곳을 찌르자 이리는 미친듯이 펄쩍
뛰어오르면서 눈위를 대굴대굴 그르더니 머리를 쳐들고 죽고 말았다.
소보는 결사적으로 싸우다 몸을 일으켜보니 거대한 이리가 눈 위에 죽어 있었다.
소보는 너무나 놀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비로서 기뻐 소리를 질러댔다.

"내가 이 커다란 이리를 죽였다. 내가 없앴어!"

손을 내밀어 이문수를 부축하는 소보의 얼굴은 놀람과 자부심으로 반짝거렸다.
의기양양하게 들뜬 목소리로 소보는 그녀에게 말했다.

"수야, 봐, 봐, 내가 이놈을 죽였어!"

너무 기쁜나머지 어깨에 선혈이 낭자했지만 전혀 통증을 느끼질못했다. 이문수가
그의 양가죽옷의 옷고름에 피가 잔득 묻어 있는것을 보고는 급히 옷을 벗기고
그녀의 손수건으로 그의 상처를 압박해 피를 멈추게 하려 했으나 피는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아파요?"

만약 소보가 혼자였다면 진작부터 아픔을 못이겨 대성 통곡했겠지만 지금 그는
영웅심에 불타 열심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괜찮아!"

문득 그들 뒤편에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보, 너 뭘하고 있는게냐?"

둘이 뒤를 돌아보니 덥수룩한 수염의 사내가 말을 탄채로 보고 있었다.

"아빠, 보세요. 제가 이 큰이리를 잡았어요."

소보의 말을 들은 사내는 몹시 기쁜 표정으로 말에서 내렸다. 문득 아이의 얼굴이
피로 물들어 있는것을 보고는 다시 이문수의 얼굴을 훑어보며 물었다.

"이리에게 물렸느냐?"
"제가 여기서 수아가 들려주는 고사를 듣고 있는데 별안간 이놈이 수아를 물려고
덤벼..."

돌연 사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개를 돌려 차가운 시선으로 이문수를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너는 바로 천벌을 받아 마땅한 한인 계집아이가 아니냐?"

이문수는 그녀가 바로 그녀를 걷어찼던 소로극이라는 것을 알아 챘다. 계노인이
들려줬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아내와 큰아들이 하룻밤사이에 한인 강도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그가
그토록 한인을 증오하는 거란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에 젖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아빠와 엄마도 그 강도가 해친걸요.)

이문수가 채 말을 내뱉기도 전에 돌연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소보의 얼굴에
한줄기 붉은 흔적이 보였다. 그의 아버지가 채찍을 휘두른것이다.
소로극은 몹시 화를 내며 외친다.

"내가 자자손손 한인을 증오해야 한다고 그토록 일렀건만 도리어 한인계집과
어울려 놀며 그계집을 위해 목숨을 걸다니!"

쉭! 하며 거듭 아들을 내리쳤다.
소보는 아버지의 채찍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채 멍하니 그의 곁에서 있는
이문수를 바라봤다.

"저 아이가 천벌을 받아 마땅할 한인이란 말인가요?"
"그럼 아니란 말이냐? 대답을 해라!"

으르렁 대며 소로극은 채찍을 돌려 이문수의 얼굴을 후려 갈겼다.
이문수는 놀라 뒤로 물러나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소보는 이리에게 물린 부상이
워낙 중한 데다 채찍마저 맞으니 더 지탱하지 못하고 휘청 하더니 땅에 거꾸러지고
말았다.
소로극은 아들이 쓰러지는것을 보고는 놀라 급히 말에서 내려 아들을 안아 말등에
걸쳐놓고 새끼줄을 동그랗게 만들어 이리의 목에 매달고는 말을 박차더니 달려간다.
소로극은 십여장을 단숨에 달리고 나서 고개를 돌려 악독한 표정으로 이문수를
바라보는데, 그눈빛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듯 했다.

"다음에 내 손에 잡히는 날엔 가만 두지 않을테다."

이문수는 그의 무서운 눈빛은 두렵지가 않았으나 소보가 이제부터는 그녀와 찬구도
하지 않을 뿐더러 다시는 그녀의 노래를 들으러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허전했다. 삭풍이 더욱 차가와 견디기 힘든데다 채찍에 맞은 얼굴의 상처도 더욱
고통이 심해져 갔다.
그녀가 망연히 망때를 몰아 집에 돌아오니 계노인은 아이의 옷에 낭자한 선혈과
얼굴에 부어오른 채찍 자국을 보고는 크게 놀라 어쩐 일이냐고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문수는 담담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조심하지 않아 넘어 졌어요."

물론 계노인은 이말을 믿지 않았다. 재차 다그치자 이문수는 똑같은 대답만
할뿐이었다. 틈을 주지않고 계속 물어대자 마침내 왕! 하며 울기 시작하더니
한마디도 하려 들지 않는다.
그날 밤, 이문수는 열이 몹시나며 빰은 타오르는듯이 붉어지더니 헛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회색 이리!"
"소보,소보, 빨리 날 살려줘!"
"천벌을 받을 한인."

계노인은 이러한 말을 듣고 대충 짐작은 갔으나 마음은 몹시 초조하였다, 다행이도
날이 밝아올 무렵 열이 가라 앉고 푹 잠이들었다.
이렇듯 일개월 동안 앓다가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날 즈음에는 추위는 이미 끝나
있었다. 철산을 덮고 있던 눈이 녹아 그물이 작은 시내를 이뤄 초원으로 흘러
내렸고 들판에는 새싹이 하나씩 돋아나고 있었다.
이날, 이문수는 일어나자마자 대문을 열어 젖히고 양떼를 몰아 방목하려고 하는데,
문득 문밖에 깔개를 만들수잇는 가죽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이리 가죽의
덜빛을 보니 그 날 그녀를 물려 했던 회색빛 이리임에 분명했다. 몸을 숙여
이리가죽의 복부에 칼자국이 나있는것을 확인한 이문수의 가슴은 두근 거렸다.
소보가 결국 자기를 잊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했던 약속을 잊지않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분명 그는 한밤중에 몰래 찾아와 그녀의 문앞에 이리 가죽을
놓고 갔을 것이다. 그녀는 계노인에게도 말하지않고 이리가죽을 자기방에 갖다
놓고는 양을 몰아 늘 소보와 만나던 곳으로 가 그를 기다렸다.
허나 해가 서산에 기울때까지 기다려 봐도 소보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은 왠
청년이 소보네 양을 방목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생각 했다.

(소보는 상처가 아직 다낫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아땋게 그는 내게 이리
가죽을 보냈을까?)

소보네 천막에 찾아가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소로극의 채찍이 생각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한밤중에 마침내 그녀는 용기를 내어 소보의 천막 뒤편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왜
자기가 이곳엘 찾아왔는지 알수 없었다.

('이리 가죽 고마웠어' 라는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그의 상처가 다 나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녀 자신도 자기의 마음을 설명할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도 몰래 천막 뒤에 살짝
숨었다. 소보네의 양지키는 개는 소보와 친한 그녀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 몸을
몇번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더니만 전혀 짖지 않은채 가번린다.
천막에서는 아직도 불빛이 새어 나오는데 소로극의 거친 목소리가 매우크게 울리고
있었다.

"네 이리 가죽을 어느 아가씨에게 주었니? 이놈아, 어리다 해도 맨 처음 잡은
짐승의 가죽은 네가 가장 아끼는 아가씨에게 준다는 건 알겠지?"

그가 한마디 한마디 소리를 지를 때마다 이문수의 가슴은 더욱세 차게 뛰었다.
그녀는 소보가 카자흐인의 풍습에 대한 고사를 얘기해줄때 어느 청년이든 자기가
첫번째로 잡은 짐승은 가장 그가 귀히 여기며 사랑하는 여인에게 애정의 표시로
주게 되어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때 소로극이 큰소리로 묻는 것을 들으니
작은 빰이 점점 붉게 물들며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낄수 있었다. 그들 두사람이 비록
나이가 아직 어려 진정한 애정이 무엇인지 알지못하나 어느새 첫사랑의 감미로움과
괴로움을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 뭐라고 하는 천한것, 천벌을 받아 마땅한 한인 계집에게 줬음이 분명하렸다.
어떠냐? 말하지 않겠다면 이 애비의 맛을 좀 봐야 겠구나."

카자흐인은 소로극을 포함해서 본래부터 채찍으로야 강인한 남자로 키울수 있고,
아들을 가르키는데 온건한 방법은 전혀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것 같았다. 그의
조부가 채찍을 썼듯이 그의 부친 역시 그 자신을 채찍으로 다스렸고, 그자신 또한
이처럼 채찍을 들어 아들을 때리니 부자간의 애정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약해지는
모양인가 보다. 사나이와 사나이가 대할때 벗과 육친의 관계라면 주먹이나 채찍을
쓰고, 적이라면 단도나 장검을 쓰는것이다. 그러나 이문수로서는 그녀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심한 말조차 한마디 한적이 없었으며 단지 얼굴에 웃음이
적어지고 애무만 적어져도 그녀로서는 매우 가슴 아픈 징벌이었다.
채찍 소리가 날때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맞는 것처럼 고통 스러웠다.

(소보의 아버지는 나를 몹시 미워하기에 자기가 낳은 아들을 이렇게 지독하게
때릴수 있는거야. 이러다간 죽을지도 몰라.)

"그래! 대답을 않는구나! 끝내 대답않겠단 말이지? 분명 그 한인계집에게 주었겠지."

채찍은 쉬지않고 그를 내려치고 있는데 소보는 처음엔 이를 악물고 참더니만
마침내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아빠, 제발 때리지 마세요. 제발, 아파요! 아파요!"
"그렇다면 말을 해라. 이리 가죽을 그 계집에게 주었냐? 네 엄마와 형이 한인
강도에게 죽음을 당한걸 모른단 말이냐? 사람들은 카자흐 제일의 용사라 일컫거는
아내와 큰아들이 한인 강도에 의해 죽음을 당하다니, 도데체 너는 이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 왜 하필 그날 내가 집을 비웠을까? 왜 결국 강도 떼를 잡지 못해 네
엄마와 형의 철천지한을 끝내 풀지 못했을까?"

이때 소로극의 채찍은 이미 아들을 훈계하기 위한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의
미칠듯한 분노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적을 향해 내려치듯
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놈의 강도는 나와 더불어 떳떳하게 겨루지 않지? 말해봐! 이 카자흐
제일의 용사인 소로극이 겨우 한인 좀도둑 몇놈을 처치할수 없단 말인가..."

곽원룡과 진달해 일당에게 무참히 죽은 아들은 그가 가장 아끼던 장남이며,
치욕스럽게 죽음을 당한 아내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사랑하는 반려자였던 것이다.
이문수는 소보가 매맞는 것도 안됐지만 소로극의 이런 울음 섞인 고함소리를 들으니
그도 애처롭게 느껴졌다.

(이처럼 지독히 때리는걸보니 영원히 소보를 미워하겠구나. 그는 이제 아들을 잃은
셈이고, 소보는 또한 아버지를 잃은 셈이니, 이 모든일은 바로 천벌을 받아 마땅한
나 한인 계집으로 인한것이다.)

문득 그녀는 자신도 불쌍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차마 소보가 이렇듯 비명을
질러대는 것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불 밑에 감춰뒀던
이리가죽을 꺼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집은 소보의 천막과 2리가량 떨어져
있었으나 그녀에게는 소보의 울음 소리와 소로극의 채찍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무리 이 이리 가죽이 귀중하다하나 자신은 그것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느꼈다.

(내가 이 이리 가죽을 받는다면 소보는 그의 아버지에게 맞아죽을게 분명해. 오직
카자흐족의 여자만이 이것을 받을수 있는거야.
카자흐족의 소녀중 누가 가장 예쁘지? 내 비록 이리가죽을 좋아하지만, 더우기
이것은 소보가 자기 생명을 돌보지않고 나를 구하기 위해 때려잡은 이리이고 소보가
내게 준 것이지만 안돼! 그의 아버지가 그를 때려 죽일지도 몰라...)

다음날 아침 소로극이 핏발 선 눈으로 천막을 나서는데 차이고(車爾庫)가 산가
(山歌)를 크게 흥얼대며 오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슬쩍 돌리며 소로극을
쳐다보았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에는 미소를 담고 있고 눈에는 친근감을 띠고
있었다. 차이고 또한 카자흐족의 출중한 용사이며 천리 밖의 사람들도 그의 야생마
길들이는 솜씨에 탄복하고 있었다. 달리기 역시 당해낼 자가 없어 1리 내에서는
제아무리 준마라 해도 그를 따를수 없었다.
소로극과 차이고는 지금까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소로극의 명성이 높은 것과
그의 칼쓰는 솜씨며 모든것이 천하무적이므로 차이고는 몰래 속으로 질시해 왔던
것이다. 그는 소로극보다 여섯 살아래였다. 한번은 두사람이 칼로 겨뤘는데
차이고가 져서 어깨에 깊은 상처가 남았었다.

"오늘은 내가 졌지만 오년후 십년후에 두고보자!"
"이십년후에 다시 한번 붙는다면 그때엔 결코 무사하지 않으리!"

이런 말을 두 사람은 주고 받은 것이다.
그러나 오늘, 차이고의 웃음에는 전혀 적의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소로극의 가슴속에 노여움이 아직 남아있었으므로 사나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차이고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소형, 아들 하나는 잘뒀소. 사람 보는 눈이 있던데!"
"소보 말인가?"

그는 손을 뻗어 칼자루에 갖다댔는데 눈이 살기 등등하다.

(내 아들이 이리 가죽을 한인에게 준걸갖고 비웃고 있구나.)

차이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소보가 아니면, 또 다른 아들이 있던가?"

여전히 미소를 띤채 말을 이었다.

"물론 소보지. 그아이의 용모, 재능 모두 출중해. 그 애는 참 좋다네."

아버지 된 입장에서 주위사이 아들 칭찬하는걸 들으니 저절로 기분이 좋았으나,
늘 그와 입씨름하던 버릇이 있어 곱지 않게 말이 나갔다.

"아들 하나 못 낳는 주제에!"

차이고는 여전히 화내는 기색이 없다.

"내딸 아만(阿曼)도 훌륭하다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당신 아들이 내 딸에게
반할수 있단 말인가?"

소로극은 체! 하며 말했다.

"말 같지 않은소리, 도데체 누가 내아들이 자네딸을 좋아 한다고해?"

차이고가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좋아, 나와 함께 가세. 내가 보여 줄게 하니 있으니."

소로극은 갈피를 잡지 못한채 차이고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갔다.

"소보가 전에 커다란 이리를 잡았다던데, 어린 아이가 대단해.
장래 아버지처럼 되겠는 걸. 아버지가 영웅이니까."

소로극은 아무 소리 없이 속으로 그가 필시 무슨 함정을 꾸며 놓고 그를 올가미에
걸리게 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조심 해야지.)

삼리 가량 떨어진 곳에 차이고의 천막이 있었다. 소로극은 멀리서 커다란 이리
가죽이 천막 밖에 걸려있는 것이 보여 급히 몇걸음 다가가 보니 아뿔사, 소보가
때려잡은 그 회색이리가 아닌가. 이는 아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잡은 야수임에
분명했다. 그는 마음속이 혼란 해져 기쁘기도 하고 알수 없기도 했다.

(어떻게 된 노릇인가. 어젯밤 그토록 때렸는데 이리가죽을 아만에게 줬지, 한인
계집에게 주지 않았다고 왜 말하지 않았을까. 낯 간지러워 차마 말못했나 보군.
죽일놈, 만일 제 어미가 살아 있다면 내게 충고했을 텐데. 아들도 엄마에겐 말을
했을지도 몰라...)

차이고가 억센 손으로 그의 어깨를 탁 치며 말했다.

"술이나 한잔 함세."

차이고의 천막은 매우 정결했고 사방에는 울긋불긋한 양모 담요가 걸려 있었다.
날씬한 몸매의 한소녀가 술과 음료를 받쳐들고 나왔다. 차이고가 빙그래 웃는다.

"아만, 소보의 부친이시다. 무섭지 않느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이분은 몹시
거친분인데!"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만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는데 그 또한 아름다웠다. 눈을
반짝이며 웃는 모습이 마치 전혀 무섭지 않다고 말하는 듯했다. 소로극이 갑자기
하하하! 하며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차형, 일찌기 사람들이 댁의 따님이 초원에 핀 한떨기 꽃 같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니 실감할수 있겠는걸. 정말 아름답군!"

십여년을 으르렁대던 두사내가 갑자기 친밀해져 권커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소로극은 마침내 몹시 취해 정신없이 말등에 업혀 집에 돌아왔다.
며칠이 흐른뒤, 차이고가 두 장의 정교한 양모 담요를 소로극에게 가져왔다.

"아만이 짠 것인데, 한장은 아버지 것이요. 한장은 아이것 이랍니다."

한장의 담요에는 한 장부가 긴칼로 표범을 베고 있었고 멀리 표범 한마이는 꼬리를
감추며 도망가는 모습이었고, 다른 한장의 담요에는 소년이 커다란 이리를 찔러
죽이는 광경이었다. 그 두사람이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되 모두 위풍당당하며 늠름
하였다. 소로극이 이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칭찬을 멈추지 않는다.

"정말 훌륭한 솜씨야. 훌륭해!"

원래 회강에는 표범이 거의 없었는데 어느 해인가 두마리가 나타나 사람과 가축을
해치려 들었다. 소로극이 용맹스럽게도 설산(雪山)으로 들어가 큰놈을 베어 죽였고,
다른 한놈은 부상을 입은 채 멀리 숨어 버렸다. 지금 아만이 짠담요에 그가 평생을
두고 가장 자랑하는 영웅적 행적이 그려져 있으니 기분이 좋을수밖에.
이번에 대취하여 말등에 엎혀 집에 돌아간 이는 차이고 였다. 소로극은 아들에게
그를 모시고 가게 했는데 차이고의 천막 안에 자기의 이리 가죽이 있는것을 본
소보는 몹시 놀랐다. 아만이 얼굴을 붉히며 그에게 고마와하는 것을 보고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길이 없었다. 소보는 낮은 소리로 저 혼자 몇마디
중얼거리면서도 왜 자기의 가죽을 아만이 갖게 됐는데 차마 물을수 없었다. 다음날
그는 일어나자마자 이문수를 만나 어찌된 경위인가를 물으려고 이리를 죽였던
그언덕으로 달려갔지만 이문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틀을 기다려 봤지만 헛수고 였다. 사흘째 되던날, 그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계노인 집에 갔다. 이문수가 문을 열어 주다 그를 보더니만 탁! 문을 닫아 버렸다.

"이젠 널 보고 싶지 않아."

소보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여 집으로 돌아 왔지만 마음은
몹시 서운하였다.

(아, 한인 아가씨의 마음엔 뭐가 들었는지 도대체 모르겠구나!)

그는 물론 알리가 없는 것이다.
이문수가 문뒤에 숨어 얼굴을 가리고 얼마나 오래도록 흐느꼈는지를. 그녀는 얼마나
다시 소보와 함께 놀며, 고사를 들려주고 싶었는지 몰랐다. 허나 그의 아버지에게
발각되는 날엔 그 무서운 채찍으로 그가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루하루 세월이 흐름에따라 세 아이는 몰라볼만큼 부쩍 자랐다.
초원의 한 떨기 꽃은 더욱 예뻐졌으며 이리를 죽였던 소년은 영준한 청년으로
변모했다. 그 초원의 천영조도 여전히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했으나 그녀는
이따금밖에 노래부르지 않게 되었으며 그것도 한밤중에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때에 소보가 이리를 처치하던 언덕 위에서 혼자 부를 따름이었다. 그녀는
단 하루도 어릴적 동무를 잊어 본적이 없었다. 늘 그가 아만과 나란히 말을 타고
노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그들 두사람이 서로 정감 어린 노래를 부르는걸 듣고 있었다.
이러한 노래의 숨겨진 뜻을 어릴 적엔 전혀 이해할수 없었으나 지금 이문수는 이미
모든것을 알아들을수 있었다. 만일 그녀가 여전히 모르고 있다면 어찌 상심에
휩싸여 괴로워하겠으며, 많은 불면의 밤들로 뒤척일수 있겠는가? 알수 없었던
일들을 이젠 분명히 알게 되었지만 어릴적의 아무것도 모르던 철부지 그시절로는
다시는 돌 갈수 없는 것이다.
봄이 한창인 어느날밤, 이문수는 백마를 타고 홀로 그 옛의 언덕으로 갔다.
그녀는 언덕 위에 우뚝 서서 멀리 카차흐인 천막가운데 피워놓은 커다란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노래와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크게,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원래
이 날은 카자흐인의 명절로서 청년 남녀가 모닥불가에 모여서 춤도추고 노래도
부르며 즐기는 날이었다.

(그와 그녀는 오늘 틀림없이 몹시 즐거울꺼야. 이처럼 떠들썩하고 이렇듯
좋아하는데.)

그러나 이러한 이문수의 추측은 빗나가 있었다.이때 소보와 아만은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다. 도리어 무척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모닥불 옆에서 소보는
조금은 여워었지만 후리후리한 키의 청년과 씨름을 하고 있는 참이었다. 이는
축제중 가장 중요한 행사로서 씨름의 우승자 에게는 세가지 상품이 주어지게 된다.
준마 한필, 살찐 소한마리, 곱게짠 담요 한장. 소보는 이미 네명을 차례로 누르고
있었는데 이 호리호리한 청년은 상사아(桑斯兒)라고 했다. 그는 소보의 친한
벗이지만 씨름에서는 승패를 갈라야 했다.
그 또한 마음속으로 줄곧 아만을 사랑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 나긋나긋한 몸매,
훌륭히 수놓는 솜씨, 누군들 사랑하지 않으랴?
상사아는 소보와 아만이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왔다는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 또한 굳세고 도도한 청년이었다. 그는 줄곧 속으로 생각해 왔다.

(만일 내가 공개시합에서 소보를 누른다면 아만이 나를 좋아 하게될꺼야.)

그래서 삼년 동안 열심히 씨름과 칼쓰는 법을 익혔던 것이다. 그의 사부는 바로
아만의 부친 차이고였다.
소보의 무공은 그의 아버지가 지도해준것이다.
두청년이 한데 엉켜 싸웠다. 돌연 상사아가 어깨에 한대 얻어맞고는 비틀비틀거리며
넘어지려다 오른발을 걸자 소보도 함께 넘어졌다. 두 사람이 동시에 벌떡 일어나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몸을 좌우로 빙빙 돌며 상대방의 빈틈을 찾는데 누구도 먼저
공격하질 못했다.
소로극은 앞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손에 땀을 쥐고 소리만 질러댔다. 차이고의
심정은 한층 복잡 미묘햇다. 그는 상사아가 이긴다 해도 딸은 여전히 소보를 좋아
할뿐더러 이후 훨씬 그를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허나 상사아는 그의
제자로 이 씨름은 그자신과 카자흐 제일의 용사인 소로극의 시합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는 멀리 수천리 까지 알려질것이다.
물론 암나은 오랬동안 슬픔에 잠기겟지. 하지만 이 일에 대해서만은 생각말자.
그는 여전히 자기의 제자가 이겨주길 바라고 있었다. 비록 소보가 훌륭한 소년이고
그를 매우 좋아하고는 있었지만.
모닥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두청년에게 힘내라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이는
매우 팽팽한 대결이었는데, 건장한 체격에 힘쎈 소보와 민첩한 상사아중 누가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수 없었다.
상사아는 동에서 번쩍 하는가 하면 서로 획 피해 소보가 수차 손을 뻗어 그를
꺾으려 했으나 번번이 놓치고 만다. 청년 남녀가 한꺼번에 질러대는 응원의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소보, 빨리 빨리!"
"상사아, 공격해. 피하지만 말고."

함성은 멀리멀리 퍼져나가 이문수도 사람들이 '소보, 소보' 라고 질러대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왜 사람들이 소보를 왜칠까?)

마침내 백마를 타고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아름드리 나무뒤에 숨어서 소보가 상사아와 격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과 지켜보던
사람들이 몹시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문득 그녀는 불가에
앉아 있는 아만을 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은 걱정과 흥분으로 번쩍이고 있었고 눈물이
반짝 거리는데 풀이 죽었다 기뻐했다 하고 있었다. 이문수는 이처럼 가까이 그녀를
본적이 없었다.

(그녀는 소보를 이토록 좋아 하고 있구나.)

갑자기 사람들이 와! 하며 소리를 질렀다. 소보와 상사아가 동시에 쓰러졌던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에워싸고 보는 바람에 이문수는 땅에서 뒹굴며
싸우는 두사람의 상황이 어떠한지 알길이 없었다. 단지 사람들의 고함소리로 보아
소보가 위에서 누르고 있다가 다시 상사아 밑에 깔린 것을 알수 있었다. 두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이문수는 한층 초초해져 손바닥이 모두 땀으로 축축해졌다.
별안간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뚝그치며 힘을 겨루던 두 사람의 거친 호흡소리만
들리는데 한사람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이 환호하며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소보, 소보!"

아만이 사람들 틈을 헤치고 나가 소보의 손을 잡았다. 이문수는 한편으론
기쁘기도 하고 다른 한편 처량했다. 그녀는 말을 돌려 천천히 그자리를 떠나가는데
사람들은 모두 소보를 에워싸고 누구 하나 그녀를 눈여겨 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고삐도 쥐지 않은채 백마가 가는데로 사막을 천천히 걸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그녀는 문득 백마가 초원의 끝까지 온것을 알았다. 여기서
더 가면 고비 사막이었다. 그녀는 낮은 소리로 꾸짖었다.

"어쩌라구 여기까지 날 끌고 왔니?"

바로 이때,사막에 네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 두대가 나타나더니 그뒤를 이어 또
두대가 보였다. 달빛아래 어렴풋이 보니 승객은 한인 복장을 하고 있었고, 손에는
장도를 움켜쥐고 있었다.
이문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인 강도 일리는 없을 텐데?)

이렇게 의아해 하고 있는데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백마, 백마!"

라고 소리치며 말을 몰아 달려왔다.

"서라! 그 자리에 서!"
"빨리 달려라!"

이문수는 말을 몰아 급히 돌아가려 하는데 말발굽 소리를 요란스레 내며 몇마리의
말이 앞을 가로막았다. 동남북 삼면이 다 적이니 생각해볼 여유도없이 그녀는
서쪽으로 말을 마구 몰았다. 그러나 서쪽엔 영원히 끝이 보이지 않는 고비사막이
아닌가.
그녀는 어릴적에 소보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고비 사막엔 귀신이 있어 사막에
들어 가기만 하면 아무도 살아 나올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귀신으로 변해도
나올수가 없다. 고비 사막을 들어 서기만 하면 계속 그자리를 뱅글뱅글 돌게 되는데
끊임없이 걷다보면 별안간 사막 중에 발자취를 발견하고는 이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사막을 빠져 나갈줄 알고 미친듯이 기뻐하지만 이 발자취는 자기가 남긴
것이며 걷고 또 걸어도 사막 안에 있는 것이었다.
이문수는 언젠가 계노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대사막이 이처럼 무서운지, 일단
들어가면 다시는 못 빠져 나오는가를. 이문수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계노인은
갑자기 얼굴 근육에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하더니 극도의 공포의 빛을 나타내며
창밖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마치 귀신을 눈앞에서 본 듯했다. 이문수는 지금껏
계노인이 이토록 두려워 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다시 물어볼 엄두도 못내고
속으로 정말 이었구나 하며 계노인도 이런 귀신들을 보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녀는 백마를 탄채 미친듯 달렸지만 앞에 펼쳐진 것은 황사뿐으로 영원히 헤매는
귀신이 문득 생각이 나 점점 더 두려워지는데 뒤에서는 여전히 강도들이 그녀를
바짝 쫓아오고 잇었다. 그녀는 아빠, 엄마를 상기하고 소보의 엄마와 형을 생각하니
만일 저 강도들에게 붙잡히면 틀림없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것이며 죽어도 몹시
참혹하게 죽을 것이라는것을 알았다. 그러나 사막으로 들어가면 영원히 안식을
얻을수 없는 귀신이 될것이 뻔했다. 그녀는 백마를 멈춰 더이상 도망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카자흐인의 천막과 푸른 초원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두명의 강도는 뒤로쳐져 잇었지만 여전히 다섯명의 강도는 고함을
지르며 바짝 쫓아 오고 있었다.
이문수는 거칠지만 희열과 흥분에 차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백마다, 틀림없는 백마야! 잡아라! 잡아!"

순간 그동안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원한이 돌연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아빠와 엄마는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어. 이제 내가 그들을 이 고비 사막으로
유인해 그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죽는다면 이는 한 생명을 다섯명의 강도와 바꾸는
셈이다. 반대로...반대로... 살아서 무슨 낙이 있단 말인가.)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 백마를 재촉해 서쪽으로 질주해 갔다. 이들은 곽원룡과
진달해의 표국의 졸개들인데 백마이삼 부부를 쫓아 회강까지와 이삼 부부를 죽였지만
그 소녀의 행방을 지금껏 알길이 없었다. 그들은 이삼이 고창미궁의 지도를
얻었으이라 확신했는데 이삼부부의 몸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지도를 찾지
못하자 분명 그 소녀가 가졌으리라고 생각했다. 고창미궁에 감춰진 엄청난 보물을
진위 표국에 관계된 사람들은 누구도 결코 채념할 수가 없었다. 바로 이 일대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이유도 그 소녀를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에서 였던
것이다. 십년간 이들은 이곳에서 무술로 초원의 유목민들을 못살게 굴며 살인, 방화,
강간, 강탈... 등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동안 이들은 끝까지 소녀를 찾으리라 작심하고 초원 주위를 안뒤진 곳이 없었다.
단지 이소녀가 이미 오래 전에 죽어 흔적조차 찾을수 없게 된것은 아닐까 우려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초원에서 강도짓이나 하며 떠도는 생활이 훨씬 그들의 생리에
맞았으므로 구태여 중원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 그들은 여럿이 모여 고창미궁의 진보에 대해 얘기하다 얘기 끝에 백마
이삼의 딸을 들먹인 적이 있었다. 이 소녀가 죽지 않았다면 성장해서 알아보기
힘들겠지만 백마는 그대로 일것이므로,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수 있을것이다.
허나 말의 수명은 사람보다 훨씬 짧은 법인데. 만약 백마가 죽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아무도 기대를 갖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백마가 눈앞에 보이는데, 틀림 없는 바로 그 백마가 아닌가!

三.사부를 만나다.

이 백마는 이미 나이가 들어 힘도 예전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평범한 말은
따를수 없었다. 동이 틀 무렵에는 마침내 다섯명의 강도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뿐더러 말발굽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문수는 사막에 발자국이 남아
그들이 당장은 쫓아오지 못한다 해도 결국은 발자국을 추적해 따라 올것이 분명하니
잠시도 멈출수가 없었다.
십여리를 더 달리니 이미 해는 중천에 떴다. 모래 언덕을 몇번넘자 돌연 서북방
쪽으로 초목이 무성한 구릉이 보였다. 사막 한가운데서 이렇듯 초목을 보게 되니
마치 무릉도원에 이른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사막의 모래언덕은 기복이 심해 커다란
모래언덕이 이 구릉을 막아버려 멀리에서는 전혀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문수는
몹시 놀라,

(귀신이 사는 산일리는 없을텐데, 사막 한가운데 이렇듯 산이 많단 말인가?
이런곳이 있다는 얘긴 들어 본 적도 없는데.)

하다가 생각을 고쳐 먹었다.

(귀신이 있는 곳이라면 더욱 잘됐지, 뭐. 이 다섯 명의 흉한들을 이리로 유인
해야지.)

백마는 걸음이 매우 빠른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산기슭에 다다라 계곡으로
들어섰다. 산 사이로 작은 냇물이 흐르고 있는데 그를 본 백마는 냇가로 마구
달렸다. 이문수도 말에서 내려 맑은 물을 손으로 떠 모래와 먼지로 더럽혀진 얼굴을
씻고는 몇 모금 마셔 보니 그 물맛은 감미로울뿐만 아니라 시원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통수에 뭔가 딱딱한 물체가 닿는가 하더니 쉰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도데체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이문수는 크게놀라 몸을 돌리려 하는데 다시 그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난 네 뒤통수에 지팡이를 겨누고 있으니 만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즉시
죽을줄 알아라."

이문수는 이 딱딱한 물체가 좀더 그에게 다가오는걸 느끼고는 앞이 아득하여
꼼짝도 할수 없었다.

(이 자가 말할줄 아는걸 보니 귀신은 아닌가 보다. 나보고 여기서 뭘 하느냐고
물은걸로 미루어 이곳에 살던 사람인가 보다. 그렇다면 강도는 아니겠구나.)

다시 그 목소리가 들린다.

"내 물음에 왜 대답을 않는거냐?"
"나쁜 사람들이 나를 쫓아와서 이곳으로 도망쳐 온거예요."
"나쁜 사람들이라니?"
"강도떼예요."
"강도?이름이 뭔데?"
"저는몰라요. 예전엔 표국에 있던 자들인데 회강에 와서는 강도짓을 하고 있어요."
"넌 누구냐? 부친은 누구고, 사부는 또 누구지?"
"전이문수라고 하고요, 제 아버지는 백마이삼이고 어머니는 금은 소검 삼낭자예요.
사부는 없어요."

뒤에서 '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금은소검 삼낭자가 백마이삼에게 시집갔다고 하더니, 그들이 네부모란 말이냐?"
"두분다 저강도들에게 죽음을 당하셨어요. 그런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 하고
있어요."

그 사람은 뭔가 생각하는듯 다시 '음' 했다.

"일어나라!"

이문수가 몸을 일으켰다.

"돌아서라."

이문수는 조금씩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 노인은 목장(목장)의 날카로운 끝을
이문수의 뒤통수에서 떼내는데 단숨에 떼지 않고 슬쩍슬쩍 위협하더니만 이번엔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그러나 목숨을 노리고 있는게 아니라 단지 겨누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문수가 그를 슬쩍 훔쳐보니 거칠고 냉혹한 목소리만 듣고는 틀림없이
흉폭한 사람일거라 생각했는데 눈앞에 딱버티고 서 있는 사람은 이미 노쇠하여
바싹 마른데다 수심에 가득찬 눈과 고생을 많이격은 듯한 얼굴을 한 한인 복장의
노인이었다. 의관은 이미 낡을대로 낡아 있어 어쩐지 속은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게다가 곱슬머리인지라 그리 한인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할아버지,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는지요. 그리고 여기가 어디쯤인지요?

이문수의 용모가 빼어나게 예쁜것을 본 노인 또한 뜻밖인지라 당황했으나 여전히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이름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 나도 모른다."

이렇게 두사람이 대화를 시작했는데 멀리서 말발굽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이문수는 깜짝 놀랐다.

"강도가 오고있어요. 할아버지, 빨리 숨어야돼요."
"숨어? 뭣하러?"
"저 강도들은 매우 난폭한 자들이에요. 할아버지도 죽일지도 몰라요."
"너는 전혀 나를 알지도 못하는데 어째서 내가 죽고 사는 문제에 왈가왈부하는
게냐?"

있는동안 말발굽 소리는 점점 가까와 지고 있었다. 이문수는 자기 목을 겨누고
있는 노인의 날카로운 지팡이도 두려워 하지않고 그의 팔을 잡으며 애원했다.

"할아버지 함께 도망쳐요. 이제 더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어요."

노인은 이문수의 손을 밀쳐내려 했으나 그의 미약한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문수가 기이하게 여기며 물었다.

"어디 아프세요? 제가 부축해 드릴테니 말에 오르세요."

두손으로 그의 허리를 받쳐 안장에 올려놓았다. 노인의 몸은 몹시 여위어서 비록
남자라고는 하나 팽팽한 젊음을 가진 이문수보다는 무겁지 않았고 안장 위에서
휘청대는 모습이 언제라도 떨어질듯 하였다. 이문수도 잽싸게 말에 올라 노인뒷편에
앉아서는 산 깊숙이 말을 몰았다.
두사람이 잠시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에 다섯마리의 말은 산계곡까지 이미
달려왔으므로 다섯강도들의 호흡소리마저 희미하게들려올 지경이다.
노인이 돌연 고개를 돌리며 고함을 질렀다.

"넌 저들과 한통속이지. 너희들이 간계를 써서 나를속이려고."

이문수는 병색이 완연하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사납게 일그러지며 매서운 눈빛으로
자기를 쏘아보자 두려운 한편 몹시 당황하여 답변했다.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나는 할아버지를 오늘 처음으로 보았는데 뭣하러
속이려 들겠어요?"
"너 나를 속여 너를 고창미궁으로..."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던 노인은 채말을 끝맺지도 않고 입을 다물었다.
'고창미궁' 이란 네 글자, 이문수가 어릴때 부모와 함께 회강으로 도망할때
소근대며 하는 말중에 몇번이나 튀어나왔던 것을 들은적이 있으나 당시엔 그뜻을
몰랐을 뿐더러 결코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헌데 지금 십년이 지나 이 노인의
입에서 또 그말을 들으니 잠깐 갈피를 못잡고 언젠가 누군가 말하는 것을 들은적이
있었던것 같아 뭐가 뭔지 종잡을수없어 물었다.

"고창미궁? 그게뭔데요?"
"너 정말 고창미궁이 무엇인지 모른단 말이냐?"

이문수는 고개를 좌우로 설래설래 흔들었다.

"몰라요. 아! 그래 그건..."

노인이 급히 다그쳐 묻는다.

"그래 뭐냐?"
"제가 어렸을 적에 엄마 아빠와 회강 으로 도망치면서 그들이 '고창미궁' 이라고
하는걸 들은 적이 있어요. 이주 좋은 곳인가 보죠?"

노인이 대경 실색한다.

"네 부모가 또 뭐라고 말했었지? 날 속일 생각일랑 말고."
"저도 아빠 엄마가 하신말씀을 하나라도 더 기억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들은 거라곤 좋다는말 한마디 뿐이에요. 다시는 두분의 목소리를 들을수조차
없답니다. 할아버지, 저는 아빠 엄마가 다시 살아나서 딱 한번만 볼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만 한답니다. 아! 아빠 엄마가 살아만 계신다면
날마다 날 욕하고 때려도 좋으련만. 그러나 그들은 영원히 날 때릴수가 없게
되었는걸요. 영원히!"

처량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던 이문수는 돌연 소로극이 소보를 무섭게 때리던 채찍
소리와 분노의 질책소리가 귀에 들리는듯 했다.
노인이 안색을 약간 부드럽게 풀며 '음'하더니 돌연 큰소리로 물었다.

"넌 시집 갔느냐?"

이문수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이 몇년간 누구와 함께 살았느냐?"
"계노인과 함께 살았어요."
"계노인이라고? 그는 나이가 어떻게 되지? 생김새는?"

이문수는 백마에게 속삭였다.

"착하지, 강도가 쫓아오니 빨리 달려라."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 어쩌자구 왜 이런 쓸대없는 일을 묻고있담?"

그러나 노인의 얼굴에 의심하는 빛이 역력했으므로 결국 대답하고 말았다.

"계노인은 팔십세 가량 되셨는데 백발에다 얼굴은 온통 주름투성이시지만 저를 잘
돌봐 주셨어요."
"회강에서 또 어떤 한인을 알았지? 계노인의 집에 또 누구 없었나?"
"계노인의 집에 다른사람은 없었어요. 카자흐인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한인이라니요. 당치 않아요."

백마는 두사람이나 태우고 달리다 보니 자연 그걸음이 빠를수 없어 뒤의 강도 들은
점점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핑! 핑! 하며 화살이 연이어 몸 바로 곁으로 스쳐
날아갔다. 강도들은 그녀를 산채로 잡을 작정이니 결코 그녀를 죽이려고 쏘는게
아니라 단지 위협을 줘 말을 멈추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저악독한 다섯명의 도적과 죽을 결심을 했으니 이 할아버지라도 살아
도망하도록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말에서 펄쩍 뛰어내리며 말의 엉덩이를 힘껏 때렸다.

"백마, 백마! 할아버지를 태우고 빨리 달려라!"

이문수의 외치는 소리를 들은 노인은 그녀의 마음이 이처럼 착할줄 생각도
못하다가 자기 혼자 피신시키려는 걸 보고 놀라 잠시 주저하다 낮은 소리로 말했다.

"찔리지 않게 조심하고 내 손의 침을 받아라."

이문수는 고개를 숙여 그의 오른손의 두손가락 사이에 있는 가느다란 침을 손을
내밀어 집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다.

"이 침의 끝에는 극독이 묻혀있으니 강도들이 너를 붙잡으려 할때 살짝 그의 몸에
찌르면 즉사 할것이다."

이문수는 방금 전에도 그의 수중에 침이 끼워 있는것을 봤으나 그때는 전혀 주의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려 해도 이미 독침은 자기의
손에 놓여져 있지 않은가. 이렇게 이문수가 놀라 어찌할바 몰라하는 새에 노인은
말을 재촉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적들이 다가와 이문수를 가운데 놓고 첩첩 에워쌌다. 다섯 명의 강도는 이처럼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고는 누구도 늙은이를 쫓아갈 생각을 버린것 같았다.
강도들이 다투어 말에서 내리는데 얼굴에는 모두 징그러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문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할길 없었으나 분주히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할아버지가 이독침 이면 능히 사람의 목숨을 끊어놓을수 있다 했으나 이처럼
작은침 하나로 눈앞의 흉악하고 난폭한 사내들을 어찌 당해내랴 싶었다.
또 한사람은 죽일수 있다 해도 여전히 넷이 남았으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수 없었다.
아니면 이 일침이 스스로를 찌른다면 저 강도들에게 당할 능욕은 피할수 있지
않겠는가?
그때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예쁜 계집아이구나!"

뒤이어 두 사내가 그녀를 덮치려 달려들었다.
왼편에 있던 사내가 일격을 가하자 다른남자는 땅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나와 다툴 셈이냐?"

성난 소리로 말하며 이문수의 허리를 껴안으려 들었다. 이문수는 당황한 중에도
그의 오른팔에 침을 찌르며 큰소리로 외쳤다.

"악독한 강도야, 물러서라!"

그사내는 멍청한 얼굴로 그녀를 처다보더니만 꼼짝도 않는다. 땅에 엎어져 있던
사내가 양손을 뻗어 이문수의 다리를 껴않고 있는 힘껏 잡아당겨 그녀를 땅바닥에
쓰러뜨리려 했다. 이문수는 왼손으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땅을 지탱하고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 그의 가슴에 침을 찔렀다. 사내는 하하하 크게 소리내어 웃더니만
갑자기 웃음소리가 멈추며 크게 입을 벌리며 온몸이 굳어지며 꿈쩍도 않았다.
이문수는 몸을 벌떡일으켜 잽싸게 말에올라타고는 산둥으로 도망쳤다. 나머지
세명의 강도는 두사람이 돌연 몸이 굳어진것을 보고는 이문수에게 혈도를
맞은것으로 여기고는 이 소녀의 무공이 뛰어난 것으로 짐작하여 감히 쫓으려 들지
않았다.
세사람중 어느누구도 혈도를 풀줄 아는 이는 없었다. 의원에게 두동료를
데려가려고 어께에 매려다 그들은 흠찝 놀랐다. 그들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몸은 차디 차기만 했다. 나머지 세사람은 너무나 급작스레 일어난 일이었으므로
한참을 멍하니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중 성이 송(宋)이라 하는 이가 비교적
침착하여 두사람의 의복을 헤쳐보았다. 한 사람의 팔뚝에 커다란 검은 점이 있는데
그점을 유심히 보니 매우 작은 바늘자국이 나있었다. 다른한사람에게도 가슴에
큰점이 있었다.그는 금새 짐작할수 있었다.

(저 계집이 독침으로 찔렀구나!)

성이 전(全)인 사내도 짐작할수 있었다.

"떨것 없다. 우리가 멀리서 거리를 두고 공격해 저 계집의 접근을 피하면 돼."

성이 운(雲)인 사내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계집의 수작을 알았는데 뭘 망설이는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그들 삼인은 서둘러 추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편으론
이리저리 의논을 하면서 한편으론 동료의 죽음을 생각하며 계곡으로 들어간다.
이문수는 침이 이토록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된데에 놀라 기쁨을 억제할수 없었으나
나머지 삼인이 이 모든걸 알고 미리 자기가 독침을 못 쓰도록 계책을 세우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말을 급히 몰며 도망치고 있는데 홀연 왼쪽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이쪽이야!"

그 노인의 음성이었다. 이문수가 급히 말에서 내려서 주위를 살펴보니 그 목소리는
동굴에서 들리는 듯했다. 소리나는 방향으로 달려가자 노인이 동굴입구에 서있었다.

"어찌 됐나?"
"제...제가 두사람...두명의 강도를 찌르고는 도망왔어요."
"잘했다. 들어가자."

노인을 따라 동굴로 들어가니 동굴은 매우 깊은듯했다. 이문수는 노인의 뒤를 바짝
쫓아 갔는데 들어갈수록 동굴은 좁아졌다.
수십장을 가자 갑자기 탁 트인곳이 나타났는데 일이 백명은 능히 수용할 만했다.
노인이 이문수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가 좁은 입구쪽을 막고 있으면 저 강도들도 감히 들어설 생각을 못할 게다.
이곳은 한사람이 막으면 만사람도 들어올수 없는 곳이야."

이문수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도 빠져 나갈수 없게 되잖아요. 이 동굴안에 다른 통로가
있나요?"
"통로가 있긴 하나 산밖으로 나갈수 없단다."

이문수는 문득 방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할아버지, 강도 둘이 저한테 찔리더니만 꼼짝도 못하던데 정말 죽은 걸까요?"

노인은 거드름을 피우며 대답했다.

"내 독침을 당해낼 자가 어디 있단 말이냐?"

이문수는 자기손에 있던 독침을 노인에게 건네주려 했다. 노인은 손을 내밀어
받으려고 하더니만 돌연 손을 움추렸다.

"땅에 내려놓아라."

이문수는 노인의 말대로 독침을 땅에 내려놓았다.

"뒤로 삼보 물러나라."

이문수는 영문을 모르는채 뒤로 물러났다. 노인이 그제서야 몸을 구부려 독침을
집어 들더니만 침통 속에 넣었다. 이문수는 그제서야 노인이 원래 의심이 많고
신중한 성격으로, 자기가 독침으로 그를 해칠까봐 방비 했다는것을 알았다.
노인이 물었다.

"넌 지금껏 나를 만난적이 없을텐데, 어째서 내게 말을 내줘 혼자 도망치게 했지?"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보기에 편찮으신 것 같은데 강도들이 해칠까봐
두려웠나봐요."

노인이 몸을 가리며 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내 몸에, 내 몸에..."

여기까지 말하더니 갑자기 얼굴 근육이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는데 몹시 고통스러운
듯했다. 이마에 콩알만한 땀이 흘러내리다가 이윽고 큰소리로 신음하며 땅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이문수가 두려워 어찌할바를 몰라하는데 그는 몸이 활처럼 휘며 수족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문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등이 아프세요?"

하며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더니만 그의 팔 다리 등의 관절을 주무르기도 하고
두들겼다. 노인의 고통이 점점 덜한듯 싶더니 고개를 끄떡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얼마 안있어 고통이 완전이 사라진듯 몸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몰라요."
"나는 한인으로 성은 화(華)에 이름은 휘(輝)라 한다. 강남인이 '일지진강남
(一指震江南)이라 일컫는 이가 바로 나다."
"아, 화 할아버지군요."
"넌 내 이름자를 들어 본적이 없단 말이냐?"

하는데 미혹스럼기도 하고 실망한 눈치였다. 스스로 일지진강남화휘의 명성이
강남북에 자자하여 무림중에 모르는이가 없다고 여겼는데 지금 이문수의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아빠와 엄마는 틀림없이 할아버지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제가
회강에 왔을때 제 나이 겨우 여덟이었으니 뭔들 알겠어요?"

노인의 안색이 조금 밝아진다.

"맞아. 그랬을거야. 너..."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누군가 동굴밖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여기 숨어 있을거야. 계집의 독침을 조심해라."

하며 삼인이 한보한보 걸음을 옮기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화휘가 급히 독침을
꺼내 나무 지팡이 끝에 꽂고는 그녀에게 건네주더니 입구쪽을 가리키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들의 등을 찔러라. 절대로 성급하게 앞가슴을
찔러서는 안된다."

이문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입구가 이렇게 좁으니 그들이 들어올때를 노려 그의 앞가슴을 찌르면 훨씬
쉬울텐데.)

화휘는 그녀가 주저하며 미심쩍어 하는걸 보고는 말했다.

"생사 존망이 이 일각에 달렸는데 어째서 내 말을 듣지 않는 게냐?"

말하는 은성은 나지막 했으나 말투는 몹시 엄했다. 바로 이때 입구 쪽에서
번쩍이는 장도를 뽑아들고 쉴새없이 휘두르며 강도들이 오는데 상대의 기습으로부터
얼굴과 가슴 전면을 방어하기위한 몸짓 이었다. 곧이어 검은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기어들어오고 있는데 운씨 성을 가진 강도 였다.
이문수는 화휘의 말대로 한쪽구석에 바짝붙어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화휘가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 수중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느냐?"

하고 아무것도 없는 손을 펴보인다. 강도는 재빨리 몸을 피하면서 칼을 들었다.
언제 쓸지 모르는 암기에 대항하기 위해 온신경을 집중해 그를 노려 봤다. 화휘가
외쳤다.

"찔러라!"

이문수가 지팡이를 번쩍 치켜올려 그 끝을 그의 등을 향해 내려치니 독침은 이미
그의 근육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운가는 단지 벌에 쏘인 것처럼 등에 미미한 통증을
느꼈을 뿐이었는데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이미 몸이
굳어지고 있었다.
그 뒤를 바짝 따라오던 강도들은 동료가 독침을 맞고 죽는것을 보더니만 화휘의
손에서 발사된 것인 줄 알고 혼비 백산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 없이 도망갔다.
화휘가 탄식하며 말했다.

"만일 무공을 잃어버리지만 않았다면 저런 좀도둑 다섯쯤이야 식은죽 먹기 일텐데!"

이문수는 속으로 그의 별명 '일지진강남'이 무공이 뛰어나기에 붙여진 것일 텐데,
좀도둑 다섯을 보고도 무공을 전혀 펼쳐보이지 않은게 의아했다.

"할아버지, 몸이 불편하셔서 무공을 쓰지 않으신거죠, 그렇죠?"
"그렇지 않다. 그런게 아냐. 나는 굳게 맹세했다. 생사가달린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함부로 무공을 펼쳐보이지 않겠다고."

이문수는 노인의 말을 들으면서 노인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방금은 분명히 '이미 무공을 잃었다.'고 말하더니 다시 얼버무리려 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다시말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 않으려고 하니
애써 물어볼수도 없는 것이다.
화휘도 자기의 말에 모순이 있다는걸 알아채고는 말꼬리를 돌렸다.

"내가 네게 그의 뒤를 찌르라고 했는데 그 이유를 알겠느냐? 그가 동굴로 쳐들어
오면서 잔뜩 긴장을 하고 막으려는 것은 앞의 적인 것이다. 너는 전혀 무공을
익힌바 없는데 그의 정면을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그의 온신경을
나를 막는데 기울이도록 한 다음, 네가 그의 등을 찌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었느니라."

이문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의 계책은 정말 훌륭했어요."

강호에서는 화휘의 화려한 경력을 안다면 이 같은 좀도둑 하나 처치하는 것쯤은
그야말로 식은죽 먹기라는 것은 능히 알수 있는 일이었다.
얼마후 화휘는 품에서 음식을 꺼내 이문수에게 건네 줬다.

"먹어둬라. 두명의 좀도적이 두번다시 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할게다. 허나 우리
또한 이곳을 나갈수 없으니 계책을 생각해 보자꾸나. 반드시 일거에 두명을 죽여야
한다. 만일 한사람만 죽인다면 나머지 한사람이 반드시 도망가 보고를 해서
대부대를 이끌고 올테니, 그땐 정말 속수 무책이다."

이문수는 그의 생각의 주도 면밀함과 지모의 풍부함을 보니 자신은 결코 그와 같은
고명한 방법을 생각해 낼것 같지가 않았다. 음식을 배불리먹고 벽에 기대어 쉴
따름이었다.
겨우 한시름 놓고 있던 이문수는 문득 뭔가 태우는 듯한 냄새를 맡았다. 이어
기침이 나왔다.

"저런 못된 좀도둑이 연기를 피우는구나! 빨리 동굴 입구를 막아야 겠다."

이문수는 땅에서 모래와 돌맹이를 집어 입구를 틀어 막았는데 다행히도 입구가
좁았으므로 한번막자 동굴안으로 스며드는 연기가 현격히 줄어 들었다. 게다가
동굴내부가 넓었으므로 안으로 들어온 연기도 동굴 뒤쪽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처럼 서로 한참을 대치하는 동안 동굴안으로 비쳐드는 햇빛이 점점 많아지며
내부가 환해지는걸보니 정오인 듯싶었다. 이때 화휘가 아! 하며 땅에 꺼꾸러 졌다.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 한것이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욱 고통이 심한듯
손발이 미친듯이 비틀려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없었다. 이문수는 황망히 안마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후 화휘는 통증이 많이 가신듯이 탄식했다.

"소저, 소... 이번에는 다시는 못 일어날까 두렵소."

이문수는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절대 그런 생각마세요. 오늘 강적을 만나 신경을 너무써서 그런것이니 좀 쉬시면
나아지실 거예요."

화휘는 이문수의 말에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냐.아냐! 난 죽을꺼야. 내가 사실대로 말해주마. 난 혈도에... 독침을 맞았단다."
"아 독침을 맞았군요. 언제일이죠? 오늘 맞았나요?"
"아냐, 맞은지 십이년 째야."
"이렇게 무서운 독침이었나요?"
"똑같은 거지. 단지 내가 운공으로 막아내고 있기 때문에 독성이 비교적 천천히
발작해서 후에 해독약을 복용하고 십 이년을 살수 있었던 게야. 허나 더이상
지탱할수가 없게 되었구나. 독침을 몸에 꽂고 살아온 십이년, 매일 세 차례의
큰고통을 겪어야만 했단다. 그런데 오늘 해약을 먹지 않았으니 지난 십이년간 겪은
아픔을 다합한것보다 더욱 견딜수가 없구나!"

이문수는 돌로 가슴을 얻어맞은듯이 마음이 아팠다. 십년전 자기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악당들의 손에 잃었건만 이후 점차 그 아픔은 줄어 갔던 것이다.
이 십년간 언제나 괴로웠다고 할수 있는가? 아니다. 즐겁게 보낸적도 있지 않은가.
십 칠팔세의 꽃다운 아가씨가 아무리 적막하고 마음이 아팠다 한들 기뻐서 웃고
즐거웠던 때 또한 적지 않았던 것이다.
노인은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 전신의 고통을 참고 있었다.

"할아버지, 독침을 뽑아내면 좋아질지도 몰라요."

노인은 이문수에게 벌컥 화를 내며 꾸짖었다.

"쓸데없는 소리! 누가 모른다던? 이 산중에 나홀로 있는데 누가있어 침을 뽑아
준단 말이냐? 산에 들어왔던 사람치고 좋은 마음씨를 가진자는 하나도 없었어.
흥, 흥..."

이문수는 문득 의심스런 생각이 들었다.

(이노인은 어째서 밖으로 나가 치료를 받지 않는걸까? 산중에서 혼자 이십이년을
지내다니, 무슨 사연이 있는걸까?)

노인은 여전히 자기에 대해 의심하고 경계하는 빛을 보이고 있었다. 허나 그가
괴로워하는 걸 보니 참으로 안됐다.

"할아버지, 제가 한번 해볼께요. 안심하세요. 절대 해치지 않을테니."

화휘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는데 심중에 온갖 생각이 왔다 갔다 해서 어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듯했다.
이문수가 지팡이 끝의 독침을 뽑아 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제가 할아버지 등의 상처를 살펴 보게 해주세요. 만일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미를
느끼신다면 이 독침으로 저를 찌르시면 될것아니에요!"
"좋아!"

노인은 옷을 풀어 헤치고 등을 드러냈다. 이문수는 노인의 등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등에는 검게 얼룩진 수천 수백개의 흉터가 있었다.

"그 동안 온갖 수단을 다해 독침을 파내려 했지만 실패했단다."
"그 독침은 어디에 꽂혀 있지요?"
"모두 세개 인데 하나는 백호혈(魄戶穴)에, 하나는 지실혈(志室穴)에, 하나는
지양혈(至陽穴)이란다."

노인은 이문수에게 위치를 말해 주면서 손으로 독침이 꽂힌 자리를 가리켰다.
허나 워낙 시일이 오래 지난데다 온등에 흉터 투성인지라 바늘 구멍 자국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이문수는 놀라서 물었다.

"모두 세개 라구요? 아까는 한개라고 하셨잖아요?"
"아까는 네가 내 독침을 뺨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구태여 진실을 말할 필요가
있느냐?"

이문수는 노인의 성격이 워낙 의심이 많은것을 알고는, 독침을 맞은후 무공을
완전히 잃어버려서 혹시 자신을 해치지나 않을까 꺼려하여 독침 수조차도 줄여
말했음이 틀림없다고 짐작했다. 그녀는 사실 남을 속이고 의심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사람을 일단 구해놓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이해하기
힘든점이 하나 둘이 아니지만 어찌 해야 그의 살속 깊숙이 꽂혀 있는 독침을 빼낼수
있을까 하는 궁리에만 몰두 하였다.
화휘가 물었다.

"찾았느냐?"
"바늘끝을 찾아내진 못했어요. 어떻게 빼내야 하는지 말씀해 주세요."
"날카로운 도구로 살을 도려내야 찾을수 있을게야. 독침이 속으로 몇치나 파고
들어 갔으니 찾기가 퍽 힘들게야."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음성은 이미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어떻하죠 단검이 없는데요."
"나도 없는데."

하며 문득 땅에 떨어져 있는 장도를 가리키며 말한다.

"저걸 쓰면 되겠군!"

그 장도는 푸른 빛으로 빛나고 끝이 매우 예리해 보였는데 운씨성을 가진 강도
옆에 놓여 있었다. 사람은 이미 죽었으되 칼은 여전히 남아 있는걸 보니 두려움을
금할수 없었다.
이문수는 장도로 그의 등을 도려내다가 머뭇머뭇 주저했다. 노인은 제멋대로
이문수의 속을 헤아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소저, 만일 독침을 빼내 주기만 한다면 많은 금은보화를 주겠소. 절대 속이는게
아니오. 진짜 막대한 금은 보화를 주겠소."
"저는 금은보화도, 고맙다는 말도 다 필요 없어요. 오직 할아버지의 고통을
없앨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좋아 그렇다면 빨리 시작하지."

이문수는 장도를 들고 강도의 의복을 찢어다가 몇개의 조각을 만들어서 지혈을
시키고 상처를 싸맬 준비를 했다.

"할아버지, 제가 할수 있는데 까지 할테니 조금만 참으세요."

이를 악물고 노인이 가리킨 백호혈에 칼을 대고 자르기 시작했다.
칼이 살속으로 들어가 선혈이 뿜어 나왔지만 화휘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찾았느냐?"

십 이년간 아픔을 참는데 습관이 되어서 예리한 칼이 살을 베어도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문수가 머리에서 비녀를빼 상처를 더듬으니 마침내 매우 가는
독침 하나를 찾아 낼수 있었다.
그녀는 엄지와 검지를 상처속에 집어 넣어 독침 끝을 잡으려 하는데 애써
잡아당겨도 손끝이 미끄러워 독침을 뽑아낼 수가 없었다. 번번이 실패하다
네번째에서야 독침을 뽑아내었다. 화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졸도 하고 말았다.

(졸도 했으니 차라리 아픔을 달 느끼겠구나.)

살을 헤집어 나머지 두개의 독침도 모두 뽑아내었다. 그런후 천천히 상처를 싸매
주었다.
얼마 안 있어 노인이 서서히 깨어났다. 눈을 번쩍 뜨더니 그는 면전에 놓인
세 개의 독침을 보며 원한에 사무친듯 말했다.

"몹쓸 침, 망할 놈의 침! 이것들이 내 살에 박힌지 십 이년만에 오늘에야 비로소
빼내었구나!"
"이소저, 내목숨을 구해줬는데 아무것도 보답할게 없으니 이 독침 세게를 그대에게
드리겠소. 이 독침은 비록 내몸에 십이년간 박혀 있었지만 그 독성은 여전히 남아
있소."

이문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 필요 없어요."

화휘는 기이해 하며 말했다.

"독침의 위력을 그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도 그러는가. 이독침 하나만
지니고 있으면 어느 누구도 감히 그대를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게요."

이문수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전 다른 사람이 절 두려워 하는걸 원치 않아요."

그러면서 속으로 혼자 중얼 거렸다.

(다른 사람이 날 좋아하기만 한다면 이 독침은 아무 쓸모가 없는걸.)

독침을 빼낸후 화휘는 출혈이 심해 몹시 몸이 허약한 상태 였지만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으므로 한시간 이상을 잤다. 꿈결에 누군가 마구 저주해대는 소리를 듣고는
놀라 일어나 보니 송씨성을 가진 강도가 동굴 밖에서 온갖 욕설을 마구 해대고
있었다. 자기는 들어오진 못하고 화휘와 이문수의 화를 돋궈 나오게 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화휘는 듣자듣자하니 도저히 끓어 오르는 화를 참을수가 없어
벌떡 일어서며 말한다.

"내 몸을 괴롭히던 독침도 이미 제거한 마당에 독지진천남(獨指震天南)이 저런
조무래기 도적둘을 두려워 할수 있는가?"

그러나 몸이 나아졌다고 해도 힘은 아직 부족해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독침이 워낙 체내에 오래 박혀 있어서 삼사개월 내에는 무공을 되찾기 힘들것
같구나."

그러나 밖에서 '늙어빠진 놈' 운운하는 욕설이 들리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

"도대체 이 모욕을 어찌 수개월 동안 참고 저것들을 없앤단 말인가?"

(저것들이 만일 끝내 동굴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다가 자기들 근거지로 돌아
가서는 패거리를 끌고오는 날엔 큰일이 아닌가. 도데체 이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다 문득 마음속에 정한바가 있는듯이 말했다.

"이소저, 내가 지금 그대에게 간단한 무공 한가지를 가르쳐 줄터이니 나가서
저 두 좀도적을 수습 하시오."
"얼마나 걸려야 배울수 있나요? 시간이 없잖아요?"

화휘는 깊이 생각하는듯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만약 그대에게 독지점혈(獨指點穴), 도법, 검법을 가르쳐 주려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반년은 걸려야 이룰수 있으니 지금으로선 어림없는 일이지. 무기 하나만
있다면 일이 초(招)로도 문제없이 해치울수 있을텐데. 이 동굴중에 어디서 무기를
얻을수 있단 말인가?"

하며 고개를 들더니 문득 얼굴에 기쁜 빛을 띠었다.

"옳지. 저기 저 조롱박 두개만 따오너라. 긴 등나무를 이어서 유성추(流星鎚)를
연습하자꾸나."

이문수가 칼로 조롱박 두개를 베어 갖고 왔다.

"좋아 칼로 조롱박에 구멍을 하나 내라. 그 안을 모래로 가득 채운 다음
그 구멍을 막도록 해라."

이문수는 노인이 시키는대로 움직였다. 두개의 조롱박에 모래를 가득 채우니
가가의 무게가 칠팔 근이나 나가서 유성추로 쓸만 했다. 화휘는 그걸 손에 쥐고
말했다.

"우선 성월쟁휘(星月爭煇) 일초를 네게 가르쳐 주겠다."

하며 조롱박 유성추를 들고 천천히 자세를 취한다.
이 성월쟁휘 일초는, 죄추로는 적의가슴과 복부를 나누는 상곡혈(商曲穴)을 치며,
우추는 늘어뜨렸다가 거둬 들이며 등의 영태혈(靈谷穴)을 치는것이다. 비록
단 일초라지만 그 안에 손동작과 안력, 추를 움직이는 법, 혈도를 알아내는 법 등
각종 법문을 포함하고 있었다. 좌우로 적을 피하며 방어하는 그 힘을 이용해
반격하는 것으로 이문수는 한 시간여 동안 충분히 배운후 마침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출추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겸손하게 말했다.

"제가 워낙 아둔해여 이토록 오래걸리게 되었습니다!"
"원 천만에. 오히려 대단히 총명한 편이다. 너는 절대로 성월쟁휘이 일초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된다. 보기엔 간단해 보일지 모르나 그면화는 가히 놀랄 만하며
그위력이 대단해 보통사람은 열흘 걸려 이것을 익힌다 해도 너만큼 하지는
못할것이다. 이로써 무림의 고수와 대결하기엔 역부족이나 좀도적 두명쯤이야 누워
떡먹기다. 잠깐 쉰 연후에 나가 저것들을 해치우도록 해라."

이문수가 화휘의 설명을 듣고 놀라 물었다.

"겨우 이 일초로 저들과 싸운단 말이에요?"

화휘는 웃으며 대답했다.

"비록 지금 내가 일초만 네게 가르쳤디만 너는 이미 내제자가 된셈이다.
일지진천남의 제자가 좀도적 두명과 맞붙는데 어찌 이초를 쓸수 있겠는가? 사부의
명예를 손상시킬수야 없지 않겠는가?"

이문수도 그의 말을 인정했다.

"그렇죠."
"어째서 사부에게 예를 올리 생각을 않는가?"

이문수는 누구도 사부로 섬길 생각이 없었으므로 머뭇머뭇거리며 대답을 않고
있었다. 그러나 노인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역력한것으로 보아 몹시 상심하는
듯했다. 그녀는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절을 했다.

"사부."

화휘는 기쁜한편 마음이 무척 무거워서 침통해 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후에 이처럼 총명하고 지혜로운 제자를 얻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이문수는 그의 말에 쓸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혼자 생각했다.

(이세상에서 계노인 말고는 단 한명의 육친도 없으니 무공을 배우건 말건 내게
달라질건 아무것도 없어. 그냥 그뿐이다. 그러나 사부가 있으면 누구도 해하려고
덤비진 않겠지.)

"날이 어두워지려 하니 유성추를 들고 떠나라. 넓은 곳으로 가서 두명의
얼간이들을 해치우도록 해라."

이렇게 말하던 노인은 이문수가 두려움에 떠는것을 보고는 노하여 말했다.

"내 무공을 믿지도 않으면서 무엇하러 내게 사부로 예를 올렸느냐? 왕년에
민북쌍웅(민북쌍웅)이 이 성월쟁휘 일초에 목숨을 잃었거늘 저 좀도적 둘이
민북쌍웅보다 낫단 말이냐?"

이문수가 민북쌍웅의 무공이 어떠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단지 그가 발끈 화를
내는 걸 보고는 동굴의 입구를 막았던 돌덩이를 치웠다. 오른손엔 조롱박 유성추를
들로 왼손으론 땅에서 독침 한개를 주워 들며 벼락 같이 소리질렀다.

"죽어 마땅한 악당아, 독침이 나가신다!"

송가와 전가 두 도적은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다가 '독침이 나가신다!'라는 말에
혼비 백산하여 급히 뒷걸음질 쳤다. 송가는 문득 만일 그녀가 독침을 쏘려 했다면
결코 자기들주위를 환기 시킬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소리를 질렀으니
독침은 쓰지 않으리라 짐작 했으나, 문앞에서 세 명의 동료가 차례로 독침에 쓰러진
것을 보았으니 두렵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문수는 천천히 그 뒤를 쫓으면서도 속으로는 몹시 두려웠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벌벌 떨며 겁내면서도 마침내 십여장의 좁은 통로를 지나 왔다.
전씨가 힐끗 고개를 돌려보니 이문수가 왼손을 날렸다. 그는 순간 당황하여
넘어지고 말았다. 그가 나동그라 지는걸 본 송가는 그가 독침에 맞은것으로
생각하고는 나는 듯이 달려 동굴을 빠져 나갔다. 전가도 따라 마구 달려 동굴을
벗어났다. 두 사람은 장도로 몸을 막으며 그 중 하나가 말했다.

"여기서 저것과 붙자!"
"안돼. 너무 빤히 드러나는걸."

이때 산에는 석양이 금빛으로 찬연히 빛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햇빛에 눈이
부실까봐 조금씩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돌렸다.
갑자기 동굴에서 가는 목소리가 울렸다.

"독침이 왔다."

두 사람이 놀라 잠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사이 동굴에서 두개의 조롱박이
보이더니 곧이어 이문수가 뛰쳐 나왔다. 두 사람은 일시적으로 놀랐으나 그녀의
수중에 든것이 두개의 말라비틀어진 조롱박인 것을 보고는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 여전히 공포의 빛이 있는걸 감출수 없었다.
이문수 또한 가슴이 쿵쿵거려 진정 할수가 없었다. 오직 일초의 무공을 배웠을
뿐인데 이 일초로 과연 도적들을 당해 낼수있을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비록
어릴적에 부모에게서 약간의 무예를 배운적이 있다고는 하나 깡그리 잊어버린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흉악해 보이는 강도와 막상 대하려니 두렵기 그지
없었다. 만일 싸우지 않고 허장 허세로 저들을 쫓을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큰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이 달아나지 않는다면 나의 사부 일지진강남이 나오실 게다! 그 분이
독침으로 사람을 죽이기란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과 마찬가지 인데 감히
그분과 대적하려 하다니 정말 간덩이가 부은것들 이구나!"

이 두강도도 일지진강남의 명성을 들은적이 있는것도 같았다. 그들은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저 계집을 잡아다가 곽, 진두목에게 보인다면 틀림없이 엄청난 상금을 줄텐데
무슨 진강남인지 진강북인지 알게 뭐람.)

이문수는 몹시 놀라 당황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공격할땐 성월쟁휘를 어떻게 써야 하는 걸까?)

화휘가 그토록 세심히 신경을 써가며 어떻게 초식을 쓰며 혈도를 때리는지
가르쳤건만 두 사람이 한꺼번에 덤빌때는 어떻게 대적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을 빠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문수는 크게 당황하여 어쩔줄 몰라하며 우선 우측으로 삼 척을 뛰어올랐다.
우측에 있던 자는 전가인데 먼저 선수를 쳐 도망가려하니 이문수는 앞뒤 가릴
경황없이 조롱박을 휘두르며 성월쟁휘 초식의 반을 겨우 펼쳤을 뿐인데, 죄추가
그의 가슴에 있는 상곡혈에 명중했다. 우추는 그의 장도에 부딪쳐 쏴! 하며
조롱박이 갈라지더니 황사가 온통 쏟아지며 날린다.
송가는 앞으로 내딛으려 하는데 뜻밖에도 조롱박속에서 많은 황사가 날라와
그 먼지가 눈에 들어가니 눈을 비비느라 정신을 못차렸다. 이문수는 남은추로
공격을 했으나 우추가 깨진고로 상대적으로 그 힘이 감소돼 그의 등을 명중시키기는
했으나 영태혈에는 이르지 못했다. 허나 칠팔 근이나 되는 추가 그의 몸을 치니
몸의 균형을 못잡고 눈도 못뜬채 앞으로 쓰러지면서 이문수의 어깨를 움켜잡는다.
이문수는 당황하여 아야! 하고 외치며 급히 왼손을 뻗어 그를 밀쳤다. 그녀는
너무나 급한 나머지 수중에 독침을 갖고 있다는것 잃어 버렸던 것이다. 그녀가
밀쳐냄과 동시에 독침이 그의 복부 깊숙이 박히니 송가는 양 어깨를 부를 떨며
곧 죽고말았다.
강도는 죽었으나 그의 팔은 여전히 그녀를 꽉 껴안은 채 바싹 조이고 있었다.
그녀는 있는힘을 다해 떼내려 했으나 아무리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화휘가
탄식하며 말했다.

죄다 엉망진창이구나!"

하며 발을 들어 송가의 꼬리뼈를 걷어차니 시체는 양 어깨를 풀며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만다.
이문수는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채 고개를 돌려 전가를 보니 반듯하게 땅에
누워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눈을 부릅뜬채 꼼짝도 않는것이 아까 모래를 가득
채운 조롱박에 혈도를 맞아 죽은 것이다. 이문수는 하룻 사이에 연이어 다섯사람을
살해한 것이니 아무리 부모의 원수를 갚고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하지만
아직도 어리기만 한 여자로서 견디어 내기 힘든 일이었다. 부들부들떨며 두구의
시체를 바라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화휘가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 우는 게냐? 사부가 네게 가르쳐준 성월쟁휘 일 초가 효험이 있었느냐?"

이문수는 오열하며 대답했다.

"제...제가 또 사람을 죽이고 말았어요."
"그깟 좀도적 몇 쯤 죽인게 뭐 그리 대수냐? 내가 무공을 회복한 후에 모든걸 네게
전수해 주마. 이 대사를 이룬후 중원으로 돌아가 사도가 함께 천하를 누비면
그 누가 맞서리오? 자, 이리 오너라. 내집으로 가 쉬며 따뜻한 차나 마시자꾸나."

하며 이문수를 끌고 왼편 숲속으로 들어갔다. 흰 자작나무가 쭉늘어서 있는길을
지나 몇리를 가니 초가집 한 채가 나타났다. 이문수가 그를따라 집안에 들어서니
장식은 별다르게 눈에 띠진 않으나 정결하였다. 또 한분의 목판 대련이 걸려 있는데
목판 마다 일곱자가 세겨져 있었다. 상련에는 '백수상지유안검'(白首相知猶按劍)
이라고 씌어 있었고, 하란에는 '주문조달소탄관'(朱門早達笑彈冠)이라 씌어 있다.
그녀는 회강에 온 이후 여지껏 대련을 본적도 없는데다 그때 이후 글을 배워 본적이
없었다. 어릴적에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 있어 다행히도 어렵지 않개 열네자를
읽을수는 있었으나 뜻은 전혀 알수가 없었다.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댔다.

"백수상지유안검..."

그것을 들은 화휘가 놀라 물었다.

"이 시를 읽은 적이 있느냐?"
"아니요. 이 열네 자는 무엇을 뜻하나요?"

화휘는 풀어서 설명해 줬다.

"이는 왕유(王維)의 시귀절 이란다. 상련은, 만일 네게 지기(지기)도 결코 그를
믿어서는 안 된다. 그가 언제 어디서 너를 해할지 모르는 일이니 그가 네게 올때면
칼을 차고 있는 편이 좋다 라는 뜻인데, 이 두귀절의 시 중 앞의 귀절은 인정이란
파도처럼 뒤집히게 마련이란 것을 말해주지. 뒷귀절은 만일 너의 오랜벗이 뜻을
이뤄 입신출세를 해 혹 그가 널 끌어올려 주지 않을까 기대한다면 그의 비웃음을
살 뿐이라는것을 알려주지."

이문수는 노인이 언제 어디서나 그녀를 의심하고 경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의 몸에 독침을 뺨내주고 나서야 그녀가 결코 자기를 해치려 들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이 대련을 대하니 그가 주위 사람은 물론이요 친한
벗조차 꺼려 한다는 걸 알수 있었다. 평생 얼마나 상처를 입었으며 분노하고
좌절했는지를 미뤄 짐작할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차를 끓이러 갔다.
두 사람 각자 뜨거운 차를 마시고 나니 정신이 반짝 들며 개운 해졌다.
이문수가 말을 꺼낸다.

"사부님, 저는 돌아가야 겠어요."

화휘가 놀라며 얼굴에는 실망의 빛을 역력히 드러냈다.

"가겠다구? 내게 무예를 배우지 않겠단 말이냐?"
"그게 아니에요! 어젯밤 내내 돌아가지 않았으니 할아버지께선 틀림없이 몹시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할아버지께 말씀드린 연후에 돌아와 무예를 배우겠어요."

화휘가 발끈 화를 내더니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한다.

"네가 만일 오늘 일을 그에게 말한다면 앞으로 다시는 날 못 볼줄 알아라."

이문수는 놀라 펄쩍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께 말씀드릴수 없다구요? 할...할아버지께선 나 때문에 몹시 마음 아파
하고 계실텐데요."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된다. 당장 맹세를 해라. 오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아니면 넌 이 산을 나갈수 없을줄 알아라."

그는 방끈화를 내더니 등의 상처가 갑자기 쑤시는듯 윽! 하며 기절하고 말았다.
이문수는 얼른 그를 부축하며 이마 위에 차가운 물 몇방울을 떨어 뜨렸다. 얼마 후
회휘가 서서히 깨어나더니 이문수가 눈앞에 있는걸 보고는 놀라 말했다.

"아니, 아직도 가지 않았단 말이냐?"

이문수는 도리어 반문했다.

"등이 많이 아프세요?"
"좋아졌어. 그런데 가겠다고 하더니 어째서 아직 떠나지 않았지?"

이문수는 혼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사부가 이렇듯 중상을 입었는데 내가 보살피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

"사부께서 이렇듯 편찮으신데 제가 며칠간 이곳에 머물며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화휘는 몹시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초가집에서 쉬며 하룻밤을 묵었다. 이문수는 마른풀로 침상을
만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하룻밤을 푹 쉰 탓인지 화휘는 원기를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아침 식사후 화휘는 무공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공의 기본부터 가르치며 그는 말했다.

"이미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으니 무공을 연마하기엔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허나 우선 제자의 자질이 총명하며, 훌륭한 스승이 명석한 제자를 거두었는데 무얼
두려워 하리오? 오년 후엔 가히 적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듯 칠팔 일을 연마하니 이문수의 무예 기량이 급속히 향상되었고 화휘의 상처
또한 어느정도 회복되어 이문수는 사부에게 예를 올리고 백마를 타고 집으로 행했다.
화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맹새하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노인에게 돌아가서는 화휘와 그밖의 모든 일들을 하나도 얘기 하지
않았다. 단지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헤매다 가까스로 상인들을 만나 목말라
죽지 않을수 있었다고 설명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보름하고 열흘이 흘렀다. 이문수는 화휘의 처소로 길을 떠날때면 도중에
강도를 만날까 두려워 언제나 카자흐족의 남장을 하고 다녔다. 화휘의 집에서 며칠
머무르는 동안 화휘는 전력을 다해 무공을 가르쳤다. 이문수 또한 의지할 곳이
하나 없었으므로 온 정성을 다해 무예를 익혔다. 명석한 제자에 훌륭한 스승을
만난것이니 과연 그 진도는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바였다.
이렇듯 반 년을 보냈는데 화휘는 늘 이문수를 칭찬했다.

"지금의 네 실력으로도 이미 강호의 일류고수라 할수 있다. 만일 중원으로
돌아간다면 한번의 출수로 곧 천하에 그명성을 날릴 것이다."

그러나 이문수는 조금도 중원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강호에 명성을 날리는
일보다는 부모님의 원수인 강도와 대결해 그들을 꺽기 위해서는 보다 열심히
무예를 연마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속 깊숙한 곳에는 또다른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공을 잘 닦은 후면 소보를 얻을 수 있을꺼야.)

그러나 이 생각은 여러번 되풀이 할수가 없었다. 그 일을 떠올릴때 마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으니까. 비록 자주 생각할순 없었지만 그녀의 가슴속 깊이
묻어 둔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계노인의 집에 머무는 날은 날이 갈수록 적어지고
사부의 집에서 머무는 알은 점차 늘어만 갔다. 계노인은 처음 한두 번 그녀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묻다가 그녀가 대답하지 않으려는 걸 보고는 어릴적부터 고집이
세다는걸 알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어느날 이문수가 백마를 타고 계노인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하늘을 보니
붉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북풍이 점점 거세지는데 저쪽을 바라보니 큰눈을
동반한 바람인 듯싶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말을 몰아갔다. 유목민들도 양때를 몰아
급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하늘을 보니 까마귀도 한마리 보이지 않는다. 거의
집에 닿아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는데 문득 다그닥 다그닥! 하며 한마리의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문수는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코앞에 큰눈보라가 일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이가 집을 나선담?)

먼 거리였지만 나긋나긋한 몸매, 아름다운 얼굴이 분명 아만이었다. 이문수는
그녀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싶지 않아 말을 돌려 나지막한 언덕의 남쪽으로 가 나무
뒤에 말을 세웠다. 그런데 아만도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언덕
기슭에 닿자마자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아만은 급히 말에서 내렸는데 한남자가
그녀를 향해 달려와 두 사람은 서로를 포옹하며 희희낙락 한다. 남자가 말을 꺼냈다.

"큰 눈보라가 있을 터인데 어쩌자구 왔어?"

하는 소리는 소보의 음성이 틀림 없었다. 아만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바보, 눈보라가 치는 줄 뻔히 알면서 어쩌자구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는거지?"

소보도 따라 웃었다.

"우리 두 사람이 매일 이곳에서 만나는 일은 세끼 밥 먹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야. 알겠니?"

이들 두사람은 어께를 나란히 하고 언덕 위에 앉아 소근소근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들 두 사람이 하는 말이 어떤때는 매우 분명하게 드리리다가도 아주 낮은 소리로
변하면 한 마디도 알아들을수 없었다. 별안간 그들 두사람이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했는지 둘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허나 이문수는 그들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한 소년과
한 소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는 듯이 보였다. 소년은 소보이며 소녀는
물론 자기 자신인 것이다. 그들이 옛날 이야기를 할적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이미 잊은지 오래이나 십 년전의 정경이 마치 눈앞에 펼쳐진 듯 선명하기만 했다.
닭털 같은 눈송이가 펄펄 내려 세 필의 말과 세 사람의 몸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보와 아만 두 사람은 이야기에 빠져 들어 전혀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고, 이문수
역시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눈이 그들의 머리위에 쌓여 세 사람의 머리를
하얗게 만들고 있었다.
별안간 가지 위에서 와르르 소리가 나 소보와 아만이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우박이 떨어진다! 빨리 돌아가자!"

하며 두 사람은 급히 말에 올랐다.
이문수는 두사람의 외침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가락만한 우박이 머리,
얼굴, 손을 가릴것 없이 떨어지는데 너무나 아파 말안장의 담요를 머리위에 뒤집어
쓰고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 올수 있었다.
집 앞에 당도하니 기둥에 두 필의 말이 묶여 있는데 그 중 한필은 아만의 것이었다.
이문수는 몹시 놀라 생각햇다.

(그들이 어째서 우리 집엘 왔담?)

우박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백마를 끌고 후문으로 들어가는데 소보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우박이 이처럼 퍼부으니 잠깐만 머물까 합니다."

계노인이 말했다.

"평소 그토록 청해도 오지 않더니 오늘에야 왔구려. 내 따뜻한 차한잔 대접 하리다."

진위표국의 일천 호걸이 이일대의 초원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며 지나간 후부터
카자흐인의 한인에 대한 증오는 대단한 것이었다. 계노인은 이곳에서 머문지 오래고
카자흐인은 본래 손님에게 잘 대해 주는 성품을 지녔기에 추방당하지 않을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후 그들이 그를 대할때는 그 간격이 현격히 소원해져 있었다.
소보와 아만의 집이 멀리 이사했기에 눈보라를 피해 이곳을 찾아온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십 년이 지나도 결코 계노인의 집을 올리가 만무한 것이다.
계노인이 화덕 쪽으로 가다 이문수가 얼굴을 온통 빨갛게 물들인 채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아...너 돌아 왔..."

하는데 이문수가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입을 막고는 그의 귀에대고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제발 제가 여기 있다는걸 그들이 모르게 하세요."

계노인은 뭔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여준다.
잠시후에 계노인은 양에서짠 우유와 죽, 홍차를 손님에게 대접 했다. 이문수는
불가에 앉아 소보와 아만이 웃으며 떠드는 소리를 조용히 귀 기울이며 듣고 있었다.
그러나 더이상 자신의 마음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내 그를 만나 몇 마디의 말이라도 건네 봐야겠다.)

그러나 소보의 아버지가 꾸짖던 음성과 채찍소리가 떠올랐다. 십여년간 그녀의
가슴속에 채찍소리가 울리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계노인은 화덕가로 돌아와 우유를 섞은 홍차를 이문수에게 건네주는데 그 눈에는
자애로운 사랑의 빛을 가득 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산지 십년, 이들은
친 할아버지와 친손녀처럼 서로 걱정해주고 보듬으며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가슴 깊은 곳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길이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비록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혈육의 끈근한 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문수가 돌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옷은 갈아 입지 않겠어요. 카자흐족 남자로 가장해서 빙설을 피해 여기로
온 것처럼 할테니 절대로 아는체 마세요."

하더니 계노인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후문으로 곧장 나가 백마를 끌고는 온
천지를 가득 덮으며 내리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초연히 사라진다.
그녀는 곧장 수 리를 걷고 나서야 말에 올라타고는 빙그르 말머리를 돌려 앞을
향해 질주했다. 하늘을 보니 검은 구름이 머리를 짓누를 것만 같았다. 그녀는
회강에서 십여년을 사는 동안 이같이 야릇한 하늘을 본적이 없었으므로 두려워
견딜수가 없었다. 문앞에 도착해 그녀는 문을 두드리며 카자흐어로 말했다.

"실례합니다. 여보세요!"

계노인이 문을 열어주며 역시 카자흐어로 소리내어 묻는다.

"형제여 무슨 일이십니까?"
"눈보라가 지독합니다. 노인장, 잠시만 댁에서 피할수 있겠는지요."
"물론 입니다. 어서 들어오시오! 길 떠나는 사람이 짐을 짊어지고 다닐수는 없는
일이지요. 이미 두 분의 형제가 피해 이곳에 머물고 있답니다. 어서 들어 오시지요!"

하고 말하면서 이문수를 맞아 들였다.

"형제는 어딜 가시는 길이었읍니까?"
"흑석위자(黑石圍子)에 가려고 합니다.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하며 이문수는 속으로 생각한다.

(할아버지 연기가 정말 훌륭한데, 진짜 같잖아, 조금도 어색해 하는 구석이 없구나.)

계노인은 놀라는 척하며 말했다.

"저런, 흑석위자에 가시려구요? 날씨가 이토록 험악한데, 오늘은 아무래도 가기
힘들겠는데요. 제 집에서 하룻밤 머물고 내일 떠나도록 하시죠. 만일 길을 잃게되면
큰일입니다."
"폐를 끼치게 돼 송구스럽습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몸에 잔뜩 쌓인 눈을 털어냈다. 소보와 아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불가에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소보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형제여, 저희도 눈보라를 피해 이곳으로 왔답니다. 이리로 오셔서 함께 몸을
녹이시죠!"
"네, 고맙습니다."

하며 그의 곁으로 가 앉았다. 아만도 웃음을 띤채 인사를 했다. 소보와 그녀가
팔구 년을 못본 새 이문수는 꼬마아이에서 소녀로 변한데다 남장까지 했으니
소보가 어찌 알아 볼수 있으리오.
계노인이 음식을 내오니 이문수는 그 음식을 들면서 그들의 성명을 물었다.
자기는 아사탁(阿斯托)이며, 여기사 이백여리 떨어진 카자흐 부락인이라 꾸며댔다.
소보는 창문으로 가 하늘을 살펴보진 않았으나 벽을 흔들어대는 바람소리만
들어봐도 밖이 어떠하다는 걸 미뤄 짐작 할수 있었다. 아만이 조심스레 말했다.

"예전에 바람레 집이 날라갈 수도 있다고 말한적이 있었지?"
"그게 아니라 눈이 워낙 많이 내리니 지붕이 견뎌내지 못할까 걱정이야. 아무래도
내가 지붕에 올라가 눈을 좀 쓸어내야 겠어"
"그러나 바람에 날아갈지도 몰라."

소보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눈속에 푹 빨질 지경인걸. 땅에 떨어져도 죽진 않아."

이문수의 찻잔을 든 손이 거의 눈에 띠지 않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속은 복잡 하기 그지 없었다. 도데체 어찌해야 좋은가. 어릴적 동무가 바로
자기 옆에 앉아 있는데 정말로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고
있는지 도대체 알길이 없었다. 그가 이미 자기를 깡그리 잊어버렸는지, 그렇지
않다면 심중에는 결코 잊지 않고 있으나 아만이 알게 될까봐 그러는건지.
밖이 어두워지는 걸 보니 이문수가 자리에 앉은 지도 오래된듯 했다.
소보와 아만은 손을 꼭 잡은 채 소근 거리고 있었다.
옆의 사람이 듣건 말건 전혀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라 오짇 연인끼리 감미로운
정담에 빠져 있는데 불빛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며 두 사람의 얼굴을 비쳐 주고
있었다.
이문수는 홀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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