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血剑 2-2

3학년2반 | 2022.01.15 07:45:28 댓글: 0 조회: 307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2434

* 제 2 권 *

- 2 - 남장여인(男裝女人)

[나는 그대와 갈 수 없으니, 여기서 작별이네. 하낭자, 부디 몸 조심하고 돈을 벌면 어머님께 비석이나 세워 드리게.]
그는 몸을 일으켜 두 손을 모아 절을 하고는 길을 떠났다. 최희민 또한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원승지는 그들이 산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숙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청청은 뾰로통하니 입이 한껏 나와 있었다.
[왜 쫓아가서 손 좀 흔들지 그래요?]
원승지는 이 갑작스런 말에 몹시 당황하였다. 그녀가 대체 왜 그러는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청청의 목소리엔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그렇게 미련이 남고 이별하기가 섭섭하면 얼른 따라가 보세요.] 다분히 비꼬는 말투였다. 원승지는 그제서야 그녀가 무엇을 때문에 토라져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아주 어렸을 때 일인데, 내가 큰 위험을 당한 적이 있었거든. 그때 그녀의 어머니가 나를 도와주셨더랬어. 그냥 그런 사이일 뿐이야. 그후 우린 같이 자라왔구.......]
청청은 더욱 화를 내며 돌을 접어들더니 계단을 향해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돌이 부딪칠 적마다 불꽃이 이리저리 튀었다.
[그럼 혼담까지 오고간 사이겠군요? 그리고 아까 오행진을 쳐부술 때 하필이면 왜 다른 무기도 아닌 그녀의 옥비녀를 쓰셨죠? 내겐 비녀가 없는 줄 알고 그랬어요?]
그녀는 자기의 머리에서 옥비녀를 뽑아 분지른 다음 땅에다 팽개치고는 발로 질끈질끈 밟아 대었다. 원승지는 그녀가 일부러 소동을 부리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하고 있을 때는 말도 잘하고 웃기도 잘 하면서 왜 나만 보면 얼굴을 찌푸리죠?]
원승지는 그 말에 대답하기가 무척 난감했다.
[내가 언제 얼굴을 찌푸렸어?]
원승지의 말이 변명으로 들렸는지 그녀는 계속 말을 했다.
[그녀의 어머니라? 좋지! 원형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구해도 주고 귀여워해 줬으니까. 난 불행하게도 그런 어머니마저 없는 사람이에요.]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꺼내던 그녀는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원승지는 계속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화만 내지 말고, 앞으로의 일이나 상의해 보자.] 원승지의 말을 듣고 청청의 창백한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뭘 상의해요? 원형은 당신 동생 소혜나 찾아다니고 나같이 불쌍한 여자는 방방곡곡 헤매면 될 뿐인데요.]
원승지는 속으로 계속 어떻게 이 아가씨를 안심시킬까 하고 생각하였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청청은 그가 아무말도 하지 않자 유골을 담은 단지를 안고 벌떡 일어나 휭하니 앞으로 걸어갔다.
[어딜 가지?]
[무슨 상관이에요?]
청청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원승지는 할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청청은 끝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원승지는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계속 놀려댔으나 그녀는 통 입을 열지 않았다.
금화성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우선 숙소부터 정하였다. 청청은 시장에 가서 남자 옷을 한 벌 사 들고 와 남장을 하였다. 원승지는 그녀가 급히 나오느라 수중에 돈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주머니에 얼마의 돈을 슬쩍 넣어 두었다. 그런데 청청은 돌아오자마자 입을 삐죽거리면서 그가 넣어 주었던 돈을 고스란히 내놓았다. 그날 밤, 그러니까 그녀는 밖으로 나가 남몰래 한탕을 한 것이었다. 한 부잣집에 들어가 5백여 냥을 자기 주머니에 넣었던 것이다.
다음 날, 금화성에는 이 소문이 쫙 퍼졌다. 원승지는 이미 그녀가 한 짓으로 추측하고 은연중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아직도 그녀가 화를 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숙제 거리였다. 듣기 좋은 말로 애원해 볼까? 그렇게 하면 뭔가 어색할 것이다. 아니면 그녀를 버리고 돌보지 말까? 하지만 처녀를 이 강호에서 혼자 나다니게 한다는 것도 그렇다. 그는 아무리 생각을 해봤지만 방법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하룻밤을 더 묵고 금화성을 떠나 다시 의무로 갔다. 청청은 조용히 앞장을 서고 원승지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30여리를 까지 가자 갑자기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두 사람은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5리도 채 못 가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 원승지는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으나, 청청은 귀찮다며 한사코 쓰지 않았다. 그리고는 경공(輕功)을 써 계속 내달렸다. 부근에는 집도 절도 없었다. 원승지는 서둘러 그녀를 뒤쫓아가 우산을 건네주었으나 그녀는 이번에도 우산을 받지 않았다.
[청청, 우리는 형제지간이야. 의형제를 맺을 때 앞으로 생사를 같이하자고 했으면서 왜 이럴 땐 형의 말을 듣지 않는 거지?]
청청이 그 말에 기분이 좀 누그러졌는지 픽 웃었다.
[내게 무턱대고 화를 내지 말라고 한다면 싫어요. 단, 한가지 저의 소원을 들어주시기만 하면 돼요.]
[그럼, 어서 말해 봐. 한가지가 아니고 열 가지라도 괜찮아.] [좋아요. 오늘부터 원형은 그 아가씨와 그녀의 어머니를 절대로 만나선 안돼요. 만약 내 말을 들어준다면 화낸 것을 사과하겠어요.] 원승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혜 모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훗날 언제고 보답해야 하는데 갑자기 모르는 척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그렇다고 고개를 내저을 수도 없어 원승지는 아무말도 못한 채 한동안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청청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난 원형이 여전히 그 소혜 동생을 잊지 못하는 줄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싸늘하게 몸을 돌리더니 휭하니 앞으로 달려갔다.
[청청, 청청!]
청청은 부르는 소리도 못들은 척 계속 모퉁이를 달렸다. 그러다 정자를 발견하고는 그 안으로 쑥 들어갔다. 원승지가 따라 들어갔을 때 그녀의 옷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날씨가 더운데다 옷이 얇아 빗물이 옷속까지 스며들었으니 아주 보기 흉했다. 청청은 창피해 하면서도 여전히 울적한 얼굴로 정자 기둥에 기대어 서 있다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날 놀렸어! 날 놀렸다구요!]
원승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내가 언제 놀렸지?)
그리고는 자기의 웃옷을 벗어 그녀에게 입혔다. 그는 우산이 있었기에 옷이 많이 젖지 않았었다.
(도대체 청청이 무엇을 원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어.
소혜 동생은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았는데 왜 만나선 안된다는 거지? 소혜가 금을 받고자 하여 어머니를 죽게 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소혜를 탓할 수만도 없잖아.)
그는 여칠선생 등 강적과의 싸움은 그래도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아가씨의 변덕을 받아들이는 일은 정말 힘들다고 느꼈다.
청청은 자기 어머니의 죽음을 되새기면서 계속 울어댔다. 얼마 후, 비는 그쳤으나 청청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울면서 그녀는 슬며시 원승지를 훔쳐보다가 원승지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더욱 목소리를 높여 크게 울었다.
(그래, 네 눈물샘이 얼마나 깊은지 두고 보자!)
원승지는 마음을 굳히면서 그녀를 외면했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발 하나가 들어섰다. 자세히 보니 그는 젊은 농부였다.
노파를 부축하면서 들어온 것이었다. 노파는 병에 걸렸는지 계속 쿨룩거렸다.
농부는 아들이었다. 노파는 계속해서 뭐라고 묻고 있었다.
청청은 사람들이 들어오자 그제서야 울음을 그쳤다.
(이 방법을 써 봐야 겠다!)
무언가 생각한 원승지가 속으로 싱긋 웃었다. 얼마 안 있어 두 모자가 나간 뒤, 청청이 비가 그친 것을 보고 막 나가려 했을 때 원승지가 갑자기 외쳤다.
[아야! 아이구, 아야!]
청청은 깜짝 놀라서 뒤돌아 보았다. 원승지가 배를 움켜잡고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이때 원승지는 혼원공을 사용해 이마에서 콩알만한 땀방울을 흘려 내리게 하였다. 청청이 놀라서 물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원승지는 대답 대신 손의 혈을 막아 버렸다. 청청이 그의 손을 만져 보니 얼음장같이 차가운 것을 알고는 더욱 놀라와 했다.
[왜 그래요! 대체 왜 그러는 거에요!]
원승지는 신음 소리까지 내었다. 그러자 청청이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청청, 아무래도 쉽게 나아질 병 같지 않으니 내 걱정 말고 혼자 가요.] [왜 갑자기 아픈거에요?]
청청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난 어릴 때부터 병을 갖고 있었는데, 그 병은 남이 화내는 것을 보면 발병하곤 해요. 만약 나에게 누가 화를 내면 마음이 급해지면서 곧 슬퍼지게 되고 또 배가 아프게 돼! 아이구, 아야! 아파 죽겠네. 게다가 너의 다섯 할아버지와 결투를 해서 많은 힘을 소비했으니....... 난, 난.......] 청청은 다급해 졌는지 두 손으로 그를 끌어안고는 가슴을 열심히 문질렀다.
원승지는 그녀에게 안기며 몹시 부끄러워했다.
청청이 흐느끼면서 중얼거렸다.
[승지형, 내가 잘못했어. 화내지 않을게.]
원승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계속 아픈 척하지 않으면 그녀는 나를 경박하다고 하겠지?) 이왕 시작해 버린 일을 중도에서 그만 둘 수가 없어 머리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난 살아나지 못할 거야 내가 죽거들랑 내 시신을 잘 좀 묻어 줘. 그리고 나의 사형에게도 알려주고.......]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그럴 듯하게 연극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웃음이 나와 참으려니 힘이 들었다.
[죽으면 안돼요. 원형은 몰라요. 나는 화난 척했을 뿐이에요. 나는......, 나는 원형을 좋아해요. 만약 원형이 이렇게 죽어 버린다면 나도 따라 죽을 거에요!]
(아, 날 사랑하고 있었구나!)
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여자로서의 온순함을 느꼈다. 그것은 표현할 수 없이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청청은 그가 정말 죽는 줄 알고 그를 더욱 힘있게 껴안았다.
[형, 죽으면 안돼요!]
원승지는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며 솜처럼 푹식푹신한 그녀의 가슴에 몸을 파묻었다. 그러자 그 동안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가 일부러 화를 내 본 건데 정말 인줄 알았어요?] 마침내 원승지는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아프다고 한 것도 사실은 거짓말이야. 정말인 줄 알았어?] 청청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는 이를 악물고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는 상기된 얼굴을 감싸안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아깐 날 좋아한다면서, 내가 없으면 자기도 못한다 해 놓고 왜 또 저러는 거지?)
원승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뺨을 어루만지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청청은 한편으로는 당황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어 벌써 안소혜에 대한 질투심을 잊어버렸다. 두 사람은 서로 부끄러워하며 가는 도중 내내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간혹 눈이 마주치게 되면 얼굴이 빨개져서 동시에 곧 머리를 돌려 마주침을 피했다. 그러나 둘은 속으론 행복해 했다. 그래서 그 몇 십리길을 마치 구름 위에서 걷는 것처럼 가볍게 걸었다.
이날 밤, 그들은 의무에 도착하여 청청이 먼저 숙소를 찾아 들어갔다. 원승지도 따라 들어갔다. 그러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뻔뻔스럽게 왜 사람을 쫓아다녀요? 귀찮게스리.]
원승지는 뺨을 만지면서 말했다.
[배아픈 것은 가짜였지만 여기 아픈 것은 진짜야.]
청청이 겸연쩍은 듯이 웃었다.
[만약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면 날 때려요.]
두 사람은 이제 전처럼 사이가 좋아졌다. 저녁식사 후, 그들은 몇 마디 얘기를 주고받은 다음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 날, 길을 떠나면서 청청은 그가 어떻게 자기 아버지의 유골을 보았느냐고 물어 왔다. 원승지는 상세하게, 그가 어떻게 승냥이를 길들였고 또 어떻게 동굴에 들어가 유골을 보고, 어떻게 대철합(大鐵盖)을 발견하고, 어떻게 지도를 발견하고, 또 장춘구와 대머리가 밤을 이용해 쳐들어왔다가 그들이 오히려 당했다는 것까지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청청은 소름이 끼치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장춘구는 넷째 할아버지의 제자이며 참으로 악독한 사람이에요. 또 대머리는 둘째 할아버지의 제자구요. 다섯 할아버지들은 매년 정월 16일이면 몇 명의 제자들을 시켜 뭔가 찾아오라고 하셨죠. 누구를 찾는 것인지, 무엇을 찾는 건지 모두가 행동이 이상했어요. 물로 나에겐 한 번도 알리지 않았어요. 다만 돌아온 사람마다 모두 실망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아마 못 찾았었나봐요. 지금 생각하니 바로 아버지의 행방을 찾고 있었던 거에요.]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저 세상 사람이 돼서도 계략을 써 사람을 죽이셨다니 참으로 훌륭하시군요.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원형이 온가 형제들을 혼내주는 것을 보고 무척 기뻐하셨을 거에요. 하지만 엄마가 두 눈으로 직접 보셨으니....... 지금쯤 엄마는 아버지를 만나 모두 말씀드렸겠죠? 참, 아버지의 필적 좀 보여 주세요.]
원승지는 지도를 꺼내 그녀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것은 아버지의 유품이니 당연히 청청이 가져가야지.] 청청은 필적을 보면서 다시 상심하는 듯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기뻐했다. 송강에 이르자 청청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형, 우리 남경(南京)에 가서 형의 사부님을 만나 뵌 후에 보물을 찾아 나섭시다.]
원승지는 이상하여 물어 보았다.
[무슨 보물?]
청청이 대답했다.
[아버지가 이 지도를 <증보지도>라 칭했잖아요.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보물을 얻는 사람은 어머니에게 금 10만냥을 주라고 하셨어요. 어머니 말씀으로는 이는 궁전의 물건인데, 그 안에 금은보화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대요.] [그건 그렇지만 우린 직책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야 돼.] 그의 마음은 온통 사부님을 만난 후 곧 아버지를 위해 복수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청청이 다시 입을 떼었다.
[지도가 있으니까 보물을 찾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을거에요.] 원승지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에게 이 많은 돈이 무슨 소용 있겠어? 청청 당부하겠는데 제발 돈에 너무 집착하지마.]
이 말에 청청은 토라져 저녁밥을 먹지 않았다.
다음 날, 길을 떠날 때 청청이 말했다.
[난 단지 츰왕의 황금 2천냥을 가진 것뿐인데 이렇게 호들갑떠니....... 당신의 큰 사형으로 하여금 직접 찾아오라고 해요. 그런데 츰왕은 왜 그렇게 인색하지 모르겠어.]
원승지가 대답했다.
[츰왕이 어떻게 인색했어? 난 그를 만나 봤어. 그는 정의를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어. 그는 천하의 백성을 위해 고통을 참으며 절약하는, 참으로 훌륭한 대장부야. 이 2천냥의 황금도 정당한 곳에다 써야 하는 것이니 잃으면 안돼.]
청청은 그 말을 받았다.
[그래요. 만약 우리가 츰왕에게 황금 20만냥, 심지어 2백만냥 또는 3백만냥을 바친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 말이 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원승지는 좋아서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청청, 난 참으로 어리석었어. 청청이 나를 각성케 해주었어.] 그러자 청청이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말했다.
[원형이 후에 날 욕하지만 않으면 돼요.]
원승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 우리가 엄청나다는 금은보화를 찾아 츰왕에게 바치면 고통받는 많은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구제될까.]
두 사람은 길가에서 지도를 꺼내 자세히 살펴봤다. 그들은 지도 가운데의 빨간 동그라미를 주시했는데, 그 옆에는 <위국공관청(魏國公官廳)>이라 주를 달아 놓았다. 두 사람은 또다시 주의 깊게 보면서, [보물은 위국공관청의 방 아래쪽에 있어!]
[만약 남경에 가서 위국공관청을 찾기만 하면 방법이 생길거에요. 위국공관청은 서달대장군의 호에요. 그는 이 나라의 제일가는 공신이기 때문에 찾기도 쉬울거에요.]
원승지는 그녀의 말에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대장군의 공청은 너무 커서 경비도 엄할 뿐 아니라 들어가더라도 그걸 파헤쳐야 하니, 참으로 힘든 일이야.]
그러자 청청은, [지금 아무리 궁리해 봐도 소용이 없으니 남경으로 간 후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해요.]
며칠 후, 원승지와 청청은 남경에 도착해서 공청을 찾아갔다. 그곳은 돌로 쌓은 성으로, 천하제일의 웅장한 모습이었다. 옛 태조가 여기에서 개국하여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곳엔 많은 백성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참으로 태평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며 비록 난세를 만났었으나 당대의 휘황찬란함을 잃지 아니했다. 두 사람은 숙소를 정한 뒤 큰 사형이 말한 주소로 사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부재중이라 수소문을 해서 사부 목인청이 안경공청으로 간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안경공청 어디로 갔는지는 남경의 연락 담당자조차 알지를 못했다. 이로 인해 원승지의 얼굴엔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이를 간파한 청청은 심부름꾼을 불러 위국공관청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 심부름꾼은 모른다며 남경의 어디에 위국공관청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청청은 어리둥절해 하면서 물었다.
[위국공은 이 나라의 제일가는 공신인데, 어째서 공청이 없지?] 심부름꾼은, [있다면 혼자 가서 찾아보세요. 전 남경에서 태어나 40년 동안 살았는데도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어요.]
라고 말하곤 투덜거리며 나갔다.
두 사람은 남경에서 7, 8일을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원승지는 안경공청으로 가 사부를 찾겠다고 하자 청청은, [우린 이미 남경에 있으니 아무래도 정확하게 찬찬히 살펴야 되지 않겠어요?]
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또 5, 6일 간을 찾아 보았다. 어떤 사람은 서달대장군의 자손은 영락황제때 정국공으로 책봉되어, 듣기에는 지금 북경에 살고 있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대장군이 돌아가신 후 중산왕이라 책봉되었고, 현재 남경종산에 중산왕묘가 있다고도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그가 수비공청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위국공청이란 데는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수비공에 가서 조사해 보았는데, 지도 위에 그려진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이날 밤, 원승지와 청청은 배 한 척을 빌려 진회하에서 뱃놀이를 했다.
원승지가 입을 열었다.
[청청의 아버지는 이 지도를 얻었지만 보물은 찾지 못했어. 그러니 이 일은 참으로 추측할 수 없는 일이야.]
청청은 원승지의 그 말에 대해, [아버지는 분명히 정확하게 기록했을 거에요. 아무래도 금은보화가 적은 수량이 아니니 당연히 쉽게 얻을 순 없었겠죠.]
라고 했다. 원승지는 아쉬움이 남긴 했으나, [내일 한 번 더 찾아보고, 만약 아무런 실마리도 찾지 못하면 그냥 떠나지.]
라고 말했다. 그러나 청청의 생각은 달랐다.
[3일간 더 찾아봐요.]
원승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아, 청청 말대로 하지. 3일도 좋고 5일도 좋아. 내가 보물 찾는걸 싫어하는 줄 아나 보지?]
호수에는 노래 소리가 잔잔히 들려 왔고, 물결 속에선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오는 듯했다. 이러한 훌륭한 풍경은 원승지는 물론 청청 역시 난생 처음이었다. 그녀는 술을 조금 마셨는데 얼굴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른 배에서 들려 오는 노래 소리를 듣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형, 우리도 아가씨를 불러 노래 들으면서 마시죠?]
원승지는 청청의 그 같은 주문을 듣고 어이없이 하는데 뱃사공이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여기에 온 신사분들 중 아가씨를 부르지 않은 손임은 한 사람도 없어요.] 원승지는 손을 내저었다.
[필요없어! 필요없어!]
그러나 청청은 웃으면서 물었다.
[유명한 아가씨는 누구죠?]
그러자 뱃사공이 말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아가씨로 말할 것 같으면 복옥경, 유유시, 동소완, 이항군이라든가......? 모두 다 미녀이면서 시도 잘 짓고, 노래도 잘 부릅죠.] 청청이, [그럼 그중 유유시, 동소완을 불러 주게.]
라고 청하자 뱃사공은 혀를 내밀며 말한다.
[이 신사분은 아마 남경엔 처음 오셨나 보죠? 이들 유명한 아가씨가 사귄 분들은 왕손이나 저명한 선비들이어서, 장사치들은 금과 은을 산더미처럼 갖다 준다 해도 만나 줄 간데 어떻게 맘대로 불러와요?]
그러면서 뱃사공은 다시 물어 왔다.
[여기도 아름다운 아가씨가 많이 있는데 둘 불러 드릴까요?] [좋아요. 불러 주세요.]
청청이 말했다. 잠시 후 한 척의 배가 다가왔다. 거기엔 두 명의 아가씨가 타고 있었는데 이쪽 배로 건너와서는 원승지와 청청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었다. 원승지는 마지못해 일어나서 인사치레를 하였으나 창피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청청은 앉아서 머리만 끄덕거렸다. 이들 두 아가씨 중 한 명은 피리를 들어 <절귀령>을 불렀는데 참으로 듣기 좋았다.
또 아가씨는 청청에게, [도련님, 우리 둘이 합창해서 괘지아(掛枝兒)를 불러 드릴테니 피리를 부실래요?]
라고 물어 왔다. 그라자 청청은 <좋다!> 고 말했다. 그들이 놀이에 넋을 읽고 있는데 문득 한 척의 배가 그들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한 사람이 하하 웃으면서, [좋아, 좋아!]
라고 하는 소리와 함께 3명이 이들의 배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청청은 사람들이 와서 소란을 피우자 화가 난 그들을 쏘아 보았다. 올라온 사람을 보니 3명 중 한 사람은 부채를 가지고 있었으며,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나이는 30여세로, 가느다란 눈과 눈썹과 함께 얼굴 색깔은 두 아가씨보다도 훨씬 하얘 보였다. 뒤에는 두 명의 하인이 있었는데, 등뒤엔 빨간 글씨로 <총독부> 라고 쓰여 있었다. 원승지는 일어나 두 손을 모으며 예의를 갖추었고, 두 아가씨도 절을 하였는데, 청청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 사람은 웃으면서, [미안하오, 미안하오.]
라며 선실로 걸어 들어가 거만을 부리며 앉았다.
원승지는 그에게 예를 갖추면서 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그 사람이 대답하기도 전에 한 아가씨가 말했다.
[이분은 봉양총독부의 마도령입니다. 진회하의 유명한 공자님이시죠.] 마공자는 원승지와는 수인사도 하지 않고 호색한 눈빛으로 청청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고는 말했다.
[당신, 어느 극단에 있소? 피리를 아주 잘 불던데 왜 나를 뒷바라지하지 않지? 하하.]
청청은 그가 자신을 극단 단원으로 취급한 것에 대해 격분하여 싸우려 했다. 그러자 원승지가 청청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내 동생이오. 우린 남경에 친구를 찾고 있는 중이이죠.] 마공자는 또 웃으면서, [어떤 친구를 찾아요? 오늘 나를 만나 나와 친구로 사귄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데.......]
라고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자 원승지도 언짢았는지 되물었다.
[귀하는 총독부에서 무슨 일을 하시오?]
그는 웃음을 띠면서 대답했다.
[총독 마대감님이 내 숙부요.]
이때 마공자가 타고 왔던 배에 있던 비단옷을 입고, 콧수염을 기른 사람이 이쪽 배로 건너오면서 물었다.
[공자님, 그분의 피리소리가 좋으세요?]
원승지는 차림새로 보아 그가 마공자 신변을 돌보는 사람임을 알아차렸다.
[양경정, 이들과 얘기해 봐요.]
마공자는 그렇게 말했다. 자칭 양경정이라는 사람은 네네, 하면서 원승지와 청청에게 말했다.
[마공자님은 봉양총독부 대감의 친조카일세. 친구로 사귄 것은 대단한 일이야. 그는 한꺼번에 천금도 주는 분으로, 인색한 분이 아니야. 만약 누가 이 분과 사귀게 된다면 그건 정말로 고맙게 여겨야 한다. 마대감님은 이 조카를 제일 귀여워하시며 자기 친자식보다 더 잘대 해 주셔. 만약 그와 사귈 생각이 있다면 마공자님의 댁으로 갑시다.]
원승지는 그 말에 청청이 화를 낼까 봐 조바심했는데, 청청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우리 강변으로 나갑시다.]
라고 마하는 것이 아닌가. 이 같은 반응을 보고 마공자는 크게 기뻐하며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하였는데, 청청은 그를 피해 노래 부르던 아가씨를 그쪽으로 대령한 것이었다. 원승지는 놀라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청청은 일어서면서 마공자를 보고, [이 아가씨들과 뱃사공에게 은 5냥을 주고 싶은데.......] 하자 마공자는 급히 말했다.
[당연히 내가 내야지. 내일 와서 받아 가요.]
청청이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주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하인은 이미 은 5냥을 책상 위에다 놓았다. 잠시 후, 배는 강변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청청이 말했다.
[아, 중요한 것을 놔두고 왔어요. 가지고 올께요.]
라고 했다. 그러자 마공자는, [내가 하인을 시켜서 가져오라고 하겠소. 그런데 아우는 어디에 사시죠?] 라고 물어 왔다.
청청이 대답했다.
[난 태평문 부주산에 있는 절을 빌어 살지요. 그런데 이 물건을 잊어버리면 안돼요.]
라고 말하자 양경정은 마공자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를 따라가요. 이 자를 놓치지 말고.......]
마공자는 청청을 향해, [그럼 친구, 우리 함께 갑시다.]
라며 그녀의 어깨를 껴안으려 했다.
청청은 살짝 옆으로 피하면서 말했다.
[아뇨, 당신은 오지 말아요.]
마공자는 정신없이 양경정에게 말했다.
[경정, 만약 이 자가 여자 옷을 입으면 어느 여자도 그의 미모를 따라가진 못할 거야. 천하에 이렇게 예쁜 남자가 있다니....... 오늘 내가 이 자를 만난 건 참으로 조상께서 은혜를 베푼거야.]
라며 새삼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청청은, [형, 우리 갑시다.]
라고 하며 원승지의 손을 잡고 가 버렸다. 마공자가 눈짓을 하니까 4명이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앞질러 가면서 청청과 얘기를 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그들의 얘기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청청과 원승지는 위국공관청을 찾기 위해 성내를 쏘다녔기 때문에 길엔 익숙해져 있었다. 원승지는 그녀가 산길로 가는 것을 보자 그녀가 그들을 살해하려는 저의가 있음을 눈치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다급해진 원승지는, [청동생, 우리 마공자와의 장난은 이제 그만두고 여숙으로 돌아갑시다.] 며 만류했다. 그러나 청청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혼자 가세요.]
그러자 뒤따라 오던 마공자는 기뻐서, [그래요, 당신 혼자 돌아가세요.]
라며 얼른 끼어 들었다.
원승지는 한숨을 지며 중얼거렸다.
(내가 여숙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은 부주산의 절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 사람들은 곧 죽을 줄도 모르고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군.) 그가 중얼거리는 사이, 어느새 이들은 공동묘지에 도착했다. 이때 마공자가 헐떡이며 말했다.
[다 왔나요?]
청청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미 도착했어요.]
마공자는 깜짝 놀라며, 속으로 <이 묘지에서 뭘하지?>라고 자문했다. 양경정은 일이 좀 이상하게 돼 간다고 느꼈다. 그러나 자기편엔 4명이 있고 무예가 뛰어나 이들 둘과 싸워 봤자 별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젊은이, 장난 그만하고 모두 함께 공자님댁으로 가 술 한잔 마시면서 노래나 몇 곡 부르는게 어때?]
이에 청청은 코웃음을 쳤다.
이때 원승지가 소리쳤다.
[어서 달아나요, 화내지 않고 지내면 이런 일은 흔치 않을거야.] 그러나 상황을 모르는 마공자는, [이봐, 힘들어 죽겠어. 나 좀 도와 주시오.]
하며 청청 쪽으로 가서 오른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안으려했다. 청청은 몸을 돌려 원승지에게, [형, 저게 뭐에요?]
라고 물어 보면서 동쪽을 가리켰다. 원승지가 후다닥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순간 등뒤에선 <쏴∼> 소리가 남과 동시에 마공자의 머리는 이미 땅에 굴러 떨어져 내려왔고 거기선 선혈이 벌겋게 흘러내렸다. 양경정과 두 하인은 놀라서 넋을 잃었으나 청청은 한꺼번에 한 명씩 차례로 그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다. 원승지는 한 사람을 죽인 이상 나머지를 살려 놔 봤자 후환을 남기는 일이라 믿어 그녀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청청은 칼을 마공자의 옷깃에다 닦고나서 <하하!> 하고 웃었다.
원승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런 사람은 한 번 혼내 주고 교육을 시키면 되는데, 나무 한 것 같지 않아?]
청청은 눈을 크게 뜨면서 조용히 말했다.
[난 화를 풀지 못하겠어. 우리가 호수에서 피리를 불면서 재미있게 노는데 이 자들이 와서 다 망쳤으니....... 죽일 놈이죠.]
원승지는 속으로, 단지 소란을 피우고 기분을 좀 망쳤을 뿐인지 죽일 정도는 아니었어,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공자는 세력을 빙자하여 사람을 놀려 나쁜 짓도 많이 했으니 그녀가 아무나 살인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나쁜 사람은 죽여도 되니까 죽였다 치고, 앞으로 아무나 죽인다면 그땐 정말 끝장이야!]
청청은 혀를 낼름거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시체를 풀밭으로 밀어 넣은 후 숙소로 돌아가려 할 때, 원승지가 갑자기 그녀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누가 온다!]
하며 급히 무덤 뒤로 몸을 숨겼다.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동, 서쪽에서 누가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무덤 뒤에서 지켜보니 양쪽엔 약 10명의 패거리들이 등불을 밝혀 들고 서 있었다. 쌍방이 갈수록 가까워지자 동쪽 사람들은 손뼉을 세 번 친 후, 잠시 있다가 두 번을 또 쳤다. 서쪽 사람들도 세 번을 치고, 따라서 두 번을 치더니 함께 모여 한 무덤 앞에서 합류했다. 둘이 앉아 있는 곳과 그들과의 거리가 있어 무슨 만을 하는 건지 들을 수 없었다. 청청은 호기심이 발동하여 앞으로 가려고 했는데 원승지가 그녀를 제지했다. 그러면서 원승지는 손으로 그녀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였다. 한참 동안 있는데 강한 바람이 불어와 사방에서 소리가 나며 무덤 옆의 나뭇가지들이 흔들거렸다. 원승지는 청청의 팔을 잡고 경공을 써 그 사람들이 있는 무덤 가까이 까지 갔다. 다행히 바람소리가 그치지 않아 무리들은 그들이 와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청청은 속으로, <그는 역시 기개가 있는 군자이구나. 그러나 너무 융통성이 없다.> 고 단정했다. 이때 이들은 그 무리들과 아주 가깝게 있어서 목소리가 좀 쉰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귀 파(派)의 여러 형님들께서는 먼길을 오셔서 또 우릴 도와주시겠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옆의 다른 사람이 말했다.
[사부님께서 한달 동안 병고에 시달려 일어나시지 못하기 때문에 만숙부를 모시고 우리 12제자들이 왔습니다. 민선생님에게 힘이 되어 주려고요.] 목소리가 쉰 사람이 말했다.
[용대감님의 병이 빠른 시일 안에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이 일이 끝나면 운남으로 가서 용대감을 찾아뵙겠습니다. 취풍검 만사형의 검술은 천하에 이름이 난 분이신지라 우리는 만사형께 행차하신데 대해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옆의 목소리가 가느다란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정청파는 민선생에게 아무런 힘이 될 수 없을까 봐 걱정이 되네요.]
원승지는 잠시 놀랬다. 왜냐하면 전에 사부님이 천하의 검술법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아미, 곤륜, 화산, 정청 등이 무림의 4대 검술파라고 말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4파의 인재들은 모두 무술에 뛰어났고 각기 검술에도 독특한 자기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 기타 소림, 무당 등은 학술적 체계는 있었지만 검술에는 앞의 4파에 이르지 못했다.
(이 만씨라는 사람은 자칭 취풍검이라 하고, 또한 정청파의 고수라 하니 필시 검술은 뛰어날 것이다. 그런 그가 천리 길 이곳까지 온 것은 무엇 때문일까?)
두 사람이 몇 마디 인사말을 주고받는데 멀리서 한 사람이 손뼉을 쳤다. 이들도 역시 손바닥을 쳐서 대답하였다.
잠시 후, 세 무리의 사람이 왔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한 무리는 산시성의 도대산 청량사(淸凉寺)의 스님들이었는데 십력대사(十力大師)가 지휘해 왔다. 또 한 무리는 절민지방 해안의 해적들로 27도의 총맹주인 정기운(鄭起雲)이 이끌고 왔다. 나머지 한 무리는 섬서지방 태백산 태백파의 3형제들이었는데, 이들 사병광 사병문, 여강삼 등은 3영웅이라 불렀다.
원승지는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히 여겼다. 이들은 무림에서는 제일가는 사람들인데 어째서 갑자기 이 남경 땅에 모이게 된 것일까? 그는 민선생이라는 자가 계속 감사하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필경 그가 사람들을 초청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청ㅊ은 벌써 이들의 행동이 수상함을 깨닫고 원승지에게 물어보려했지만 이들의 무술이 보통이 아닌 것을 보고 만약 조금만 소리를 내도 저들에게 발각될 염려가 있기에 숨을 죽이고 관망하기로 했다.
민이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사형, 사형들께서는 천리를 마다 않고 이렇게 와 주신데 대해 저 민자화는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가 엎드려 절하였다.
사람들이 말했다.
[민형, 이러지 마시오!]
[우리가 무엇을 했다고 그러시오?]
[노상에서 다른 사형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칼을 뽑아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요.]
잠시 후 민자화가 입을 열었다.
[며칠 내에 곤륜파의 장심일과 아미파, 화산파의 몇몇 사형들도 도착할 것입니다.]
누군가 물었다.
[화산파에서도 오나요? 그렇다면 참으로 기쁘군요. 헌데 누구의 제자가 오지요?]
원승지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알고 싶었는데 과연 누굴까?)
[신권무적 문하의 몇몇 사형들입니다.]
원승지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둘째 사형의 제자들이겠군.)
그가 또 물었다.
[민형께서는 귀대감 부부와 교분이 있으신지요? 그렇다면 그 부부의 도움만 있다면 간사한 초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민자화가 말했다.
[귀씨 부부 같은 분들과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의 큰 제자 매검화와는 좀 알고 있을 뿐입니다만.......]
누군가 또 물었다.
[매검화? 그렇다면 산동의 일검부칠웅 <무영자> 말입니까?] [맞습니다.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때 원승지는 화산파도 참여한다는 말을 듣고 이 일을 필시 정당한 일일터이니 인연이 닿으면 도와주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또 민자화의 말이 들려왔다.
[선형이 살해당하고, 형제들이 10여년간 살해범을 찾아다녔지만 누가 그를 죽였는지 알 수 없었소. 그런데 다행히도 태백산의 사곤중이 제게 알려 줬습니다. 형을 살해한 범인은 바로 초씨였다고요. 만일 선형의 원한을 갚을 수 없다면 나는 사람도 아니오!]
말투는 분노에 가득찼으나 <탁!> 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마도 무기로 힘차게 친 것 같았다.
한 사람이 물었다.
[초공례(焦公禮)는 강호에서 유명한 사람이고 금룡방은 지금까지 명성이 나쁘지 않았는데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야 했겠습니까? 사곤중은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었답니까?]
사뭇 의심스러웠다.
민자화는 사씨 형제가 대답하기도 전에 말했다.
[사곤중은 선형께서 산동에서 겪으신 곤경을 우리들에게 자세히 얘기해 주었고 또 증거도 있으니 십력대사께선 의심치 마십시오.] 이번엔 다른이가 말했다.
[초공례는 남경에서 수십 년을 살았기 때문에 기반도 단단하고 아는 사람도 많습니다. 비록 금룡방의 무술이 뛰어나다고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지방의 무뢰한일 줄 모르니 이번 행동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민자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맞습니다. 저 혼자로서는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초청한 것입니다. 내일 오후에 대공방에서 주연을 마련할 것이니 모두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뭘 그렇게까지.......]
민자화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 많은 분들이 오셔서 상대방의 눈에 띈지도 모르니 제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내일 여러분들이 저의 집으로 오셔서 문 앞에 있는 하인에게 오른손의 중지와 약지, 새끼손가락을 들어 신호하시면서 조용히 <강호의 기개로 칼을 뽑아 도와주겠소> 라고 하십시오. 이는 금룡방과 구별하는 신호입니다.] 무리들은 모두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믿었다. 도와주려고 사방에서 모여들었으나 서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같은 신호로 상대방의 신분을 밝히고자 했다. 무리들은 또 이자성, 장헌충 등이 관군과 싸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사람들이 돌아가자 원승지와 청청은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청청은 너무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어서 발이 저릴 정도였다.
[원형, 우리도 내일 놀러 갑시다.]
[구경가는 것은 좋지만 내 말을 들어야 해. 소란을 피우면 절대 안돼!] [누가 소란을 피운다고 했어요? 내가 만약 장난을 친다면 형하고 치지 다른 사람하고는 치지는 않아요.]
다음 날, 마공자가 피실되었다는 소문이 남경에 쫙 깔렸다. 원승지와 청청은 하루종일 여숙에 있었다. 이윽고 밤이 되자 마치 거리의 선비들처럼 차려입고 대공방으로 갔다. 커다란 등이 다린 큰 집으로 손님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들어갔다. 집은 꽤 컸으나 벽은 오래되었고, 계단은 군데군데 깨져 있었으며, 대문은 새로 수리한 듯했으나 여전히 퇴색한 모습이었다. 원승지와 청청은 대문 앞으로 다가가 세 손가락을 내밀면서 말했다.
[강호의 기개로 칼을 뽑아 도와주겠소.]
장삼을 입은 사나이가 계속 인사를 했고 그 옆의 거한이 그들을 안내했다.
차를 대접하면서 그들의 이름을 물었다. 원승지와 청청은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일러주었다.
그는 말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두 분의 명성이 자자한지라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청청은 속으로 비웃었다.
(이 이름은 나도 오늘 처음 들어 보는데 네가 많이 들어봤다고?) 점점 손님이 많아지자 그는 속으로 이 두 사람은 젊으니 반드시 사부가 따라올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실례하오.]
라고 말하고는 다른 사람을 시중하러 갔다. 원승지와 청청은 연회가 열리자 한쪽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런데 그들 옆에 선도파(仙都派)의 제자들이 동석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술이 한창 돌아가자 민자화는 술상마다 다니며 인사를 했다. 그가 이쪽으로 다가왔을 때 자세히 보니 약 30대의 사람으로 손에 힘줄이 튀어 나왔으며, 걸음걸이로 보아 무술이 굉장히 뛰어날 것 같았다. 그의 눈은 빨갛게 충혈돼 있었는데 아마도 사형의 죽음으로 연일 울었던 탓이리라.
(이 사람은 형제간의 정이 매우 두터워 정말 존경할 만 하다. 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초청한 것으로 보아 금룡방의 세력 또한 적지 않을 것 같다.) 민자화는 계속 절을 하며 술을 권했다. 술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모두 후배인지라 그에게 연상 굽실거렸다. 민자화가 술을 청한 후 정좌하자 한 제자가 급히 달려와서 귓속말로 몇 마디 속삭였다. 그러자 그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뛰어 나갔다가 잠시 후, 점잖은 세 사람과 함께 들어왔다. 원승지는 민자화의 기색으로 보아 이들의 세력이 적지 않음을 알고 자세히 쳐다보았다. 제일 먼저 들어온 자는 학자풍의 옷을 입었으며 등뒤엔 장검을 차고 있었다. 눈은 위로 치켜 올라 있었고 걸음걸이는 거만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두 번째는 거한이었으나 상당히 성실해 보였다. 세 번째는 23세 가량의 여자였는데 미인이었다.
민자화가 크게 말했다.
[매형께서는 이렇게 제 시간에 오신 것에 대하여 정말 감사 드립니다.] 그러자 그 선비가 말했다.
[민형의 일인데 제가 안 올리 있습니까.]
원승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하, 이 사람이 둘째 사형의 제자 매검화구나. 그런데 왜 이렇게 오만하게 굴까?)
이럴 때 매검화가 말했다.
[나는 당신을 도와주기 위해 두 명을 더 데리고 왔소. 이는 나의 셋째 사제 유배생과 나의 사매 손중군이오.]
[전부터 오정수(五丁手) 유배생과 손중군의 명성은 들은 바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는 그녀의 별명을 부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녀의 별명이 <비천마녀(飛天魔女)>인데 별로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민자화는 십력대사, 태백삼영, 정기운, 만리풍 등을 차례로 소개했고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한창 술이 돌아가고 있을 때 하인 하나가 빨간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와서 민자화에게 주었다. 민은 곧 얼굴색이 변했지만 그걸 감추려고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초영감은 참으로 대단해. 우리가 찾기도 전에 먼저 오시다니. 매형, 당신들이 도착하자 그도 역시 곧바로 소식을 전해 왔어요.]
매검화는 초청장을 받아 읽었다. 거기엔 <초공례 올림>이라고 쓰여 있었다.
다음 안을 보니 민자화, 십력대사, 태백삼영 등의 이름과 함께 여기에 모인 고을의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죄다 적어 놓았다. 게다가 매검화의 이름까지 적어 놓았는데 먹물도 채 마르지 않았다. 초청장에는 적혀 있는 명단의 사람들을 내일 오후 자기 집의 다과연에 초청한다는 내용이었다.
매검화는 초청장을 탁자 위로 내던졌다.
[초영감의 소식통은 대단하군. 우리의 무예가 비록 보잘 것이긴 하지만 그와는 한 번 겨뤄 봐야겠군.]
민자화가 말했다.
[초청장을 가지고 온 사람은 어디있지? 들어오라고 해라.] 하인이 나가자 사람들은 술 마시기를 멈추고 문 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곧 하인과 함께 들어온 사람은 긴 옷을 입은 30세 가량의 사내였다.
[저희 사부님께서 여러분들이 남경에 오셨으니 내일 집으로 오셔서 얘기나 나누자고 하시며, 모셔 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매검화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초영감이 잔치를 열겠다고?]
이어 초청장을 가져온 사람에게 말했다.
[어이, 자네 이름이 뭐지?]
그는 무례한 말을 듣고도 공손하게 대답했다.
[나입여입니다.]
[초영감이 우리를 초청하다니 무슨 흉계가 있는 것은 아닌가?] [사부님께서 여러분을 초대하시는 것은 여러분들과 얘기를 나누고자 하심입니다.]
[흥, 말은 그럴 듯하군. 옛날에 초공례가 민대형의 대형 민대감을 살해할 대 너도 그 자리에 있었느냐?]
[사부님이 여러분을 초청하는 것은 한편으로 선배님들에게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며, 한편으론 민대감께 사죄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민대감께서 아량을 베푸시어 이번 일을 성사시켜 주셨으면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매검화가 계속 말을 이었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용서를 빌면 다 되는 줄 알아?] [이번 일엔 사부님께서 말 못할 사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 명문대파의 명성에 누를 끼칠까 봐, 그래서.......]
손중군이 그 소리에 별안간 소리쳤다.
[허튼 소리 하지마! 사형이 물으신 것은 네가 그 현장에 있었느냐 하는 점이야!]
나입여가 대답했다.
[저는 그때 아직 어려서 사부님을 모시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부님은 정직한 사람인지라 아무나 죽이진 않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민대감은 마땅히 죽어야만 했다는 것이냐?] 그녀는 갑자기 비호처럼 달려나가 칼로 나입여의 가슴을 쳤다. 깜짝 놀란 나입여는 <철문살>을 사용하여 간신히 그녀의 일격을 막아냈다.
원승지가 속으로 외쳤다.
(아니, 오른손도 피해야지......)
그에게 말해 주기도 전에 나입여가 <아!> 하고 소리쳤다. 동시에 그의 팔이 잘려 나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일어섰다. 나입여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기절은 하지 않았다. 그는 왼쪽 소매 옷을 찢어서 오른쪽 어깨를 싸매고 땅에 떨어져 나간 팔을 주웠다. 그리고는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보고 한동안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손중군은 칼에 묻은 피를 닦아 낸 후 칼집에 넣고 무표정하게 자리에 가 앉았다. 그의 칼 솜씨는 훌륭한 것이었으나 아무도 그녀를 칭찬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상대방이 누구이든 초청장을 전하러 온 사람인데 이처럼 가혹하게 한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민자화조차도 너무 놀라서 칭찬하는 것을 잊어 버렸는데 이것이 손중군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민자화가 말했다.
[이 사람이 이렇게 흉포한 것을 보면 그의 사부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내일 어떻게 하면 좋겠소?]
만리풍이 대답했다.
[당연히 가야지요. 가지 않으면 우릴 업신 여길 거야.] 그러자 정기운이 말했다.
[우리가 오늘 밤 먼저 사람을 보내서 초가 어떤 사람을 초청하였으며, 금룡방이 어떠한 계략을 꾸며 놓고 있으며, 술과 음식에 독을 넣는지 미리 알아보는게 좋을 것 같군요.]
민자화가 대답했다.
[그 말이 맞아요. 내 생각엔 그들이 엄하게 경계를 할 터이니 몇몇 사형들이 다녀 오셔야겠어요.]
만리풍이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민자화는 술 한잔을 따라 그에게 주면서 말했다.
[내가 한잔 올려 성공을 축수하겠소.]
연회가 끝나자 참석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원승지는 손짓으로 청청을 불러 만리풍의 뒤를 따르자고 했다. 이때는 이미 초경 때인지라 그는 여숙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그를 따라갔다. 그는 길 모퉁이를 7, 8번 돌아 어떤 큰 집에 다다르자 재 빨리 숨어 들어갔다.
원승지는 그의 동작을 보고 감탄했다.
(과연 <취풍검>이라 할 만해.)
두 사람도 그를 따라 들어갔다. 한 방에서 불빛이 새어나와 문틈 사이로 들여다보니 방안엔 3명이 있었다. 그 중에 50대 노인이 있었는데 얼굴은 달아올라 있었다. 주름 많은 이마를 찡그리고 있는 눈매로 보아 아마도 걱정스러운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입여는 어떤가?]
[나형은 몇 번이나 기절을 했는데 지금은 출혈을 멈추었어요.] 원승지는 둘의 대화를 엿듣고 그 노인이 바로 초공례임을 알았다.
다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사부님, 우리편을 몇 명 풀어 집 주위를 순찰시킵시다. 저들이 와서 엿볼까 두렵습니다.]
그러자 초공례는 탄식했다.
[엿보나마나 마찬가지야. 난 결정했다. 내일 오전 너희들은 사모님, 사매, 사제들을 서주의 외가로 모셔라.]
[사부님, 상대방이 비록 강하지만 낙심하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편은 남경에 있는 사람만도 2천여 명인데, 모두 함께 한 목숨 바쳐 싸우면 상대는 적수가 안되겠지요?]
초공례는 또 다시 탄식했다.
[민이 초청한 사람들은 모두 무술이 뛰어난 자들인데, 만일 우리 사형들이 그들과 맞서게 된다면 그것은 헛된 죽음일 뿐이야. 어이! 내가 죽은 후 사모님을 잘 모시게. 사매와 사제를 너희에게 맡기겠다.]
그는 눈물까지 흘렸다.
[사부님,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사부님의 무술 역시 강남 제일의 위력인데요, 설사 승리하지 못한다하더라도 결코 패배당하진 않을 거에요. 저희는 나형을 제외하고는 아직 24명이 남았어요.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사부님은 항상 각지를 유람하시면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는데, 민의 친구가 많다고 하더라도 사부님의 친구들을 당하겠어요?]
[당시 나의 성격이 강하고 난폭하여 이번에 이런 난처한 일을 당하게 된 것이야. 자네들에게도 살인은 당연한 일일 터이지만 이것으로 모든 게 끝장이야.]
원승지와 청청은 매우 슬퍼하며 생각했다.
(초공례는 그리 악질적인 사람은 아니구나. 자신의 실수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구나.)
잠시 후, 한 제자가 말했다.
[사부님!]
[무슨 일이냐?]
[사부께서 그들과 싸우고 싶지 않으시다면 잠시 피신해 계시면 되잖아요.
대장부는.......]
[안돼. 당대의 영웅이신 사부님께서 그들을 두려워할까 봐 그래?] [영웅은 무슨 영웅,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아. 그러나 피하려고 해도 할 수 없어. 금룡방의 맹주가 훌쩍 떠난다면 나머지 형제들은 어떻게 살라고? 내일 아침 모두 이곳을 떠나라. 나 혼자 그들과 대항하겠다.......] 두 제자는 재빨리 입을 모았다.
[저희들은 사부님과 함께 여기에 남겠습니다.]
초공례가 화를 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부의 말을 거역할 셈인가? 너희는 사모님을 도와서 옷을 챙겨라. 그리고 너무 많이 가지고 갈 필요는 없다. 빨리 떠나야 해.] 두 사람은 <네.> 하고 대답했으나 몸을 움직이진 않았다. 초공례가 말했다.
[좋아, 가서 모두 모이라고 해.]
두 사람은 문을 열고 나갔다. 이때 맞은 편 쪽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원승지와 청청은 급히 벽쪽으로 숨었다. 한 명은 만리풍이었고 또 한 명은 손중군이었다. 원승지는 전에 그녀가 한 짓이 너무 괘씸하여 벌을 주려 했었다.
[청청, 넌 움직이지 마. 여기 있어!]
청청은 몸을 천천히 움직이면서 말했다.
[움직이면 안돼요?]
원승지는 미소를 짓고, 만리풍과 손중군이 안으로 들어가는 군간 손중군의 옆을 슬쩍 지나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았다. 손중군은 초공례에게 정신이 팔려 이어서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원승지는 청청에게로 돌아왔다.
청청은 그가 손중군의 칼을 훔치는 것을 보고 그리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청청에게 그것을 주며 말했다.
[가지고 있어.]
두 사람은 문틈으로 방안을 엿보았다. 계속해서 20여명이 들어왔는데, 가장 늙은이가 4, 50세 가량이었고, 가장 젊은 사람이 16, 7세 정도였다. 아마 모두 초공례의 제지인 듯 싶었다. 그들은 초에게 절을 하고 서 있었는데 모두 분노하는 기색이었다. 초가 입을 열었다.
[난 어릴 때 숲에서 자랐지. 이제 숨길 필요도 없게 되었다.] 원승지는 제자들이 놀라는 것을 보고 그들이 자기 사부의 과거를 모르고 있었구나 하고 여겼다. 초공례가 한숨을 내쉬었다.
[원수들이 찾아 올 것이니 그들과의 과거 일을 말해 주겠다. 당시 나는 쌍룡강에 있었다. 그런데 산동으로 관인의 임무를 부여받으러 가려면 쌍룡강을 경유해야 하는데 마침 돈이 떨어진 친구들이 숲속에서 강도질을 하자고 모의했다. 탐관오리를 만나면 아주 좋아했지. 그들은 은도 많이 가지고 있어서 1백명의 행인들을 강탈하는 것 보다 나았다. 그런데 소문을 듣자하니 관인들을 호위하는 사람은 무공이 뛰어난 자들이었는데 그때 그 자가 바로 산동 길남의 운송사업계 두목인 민자엽, 바로 민자화의 형이었지.......] 원승지와 청청은 놀랐다.
(쌍방의 오해는 이렇게 시작되었구나. 초공례는 강탈하려고 하고 민자엽은 그를 호위하려고 하니, 이렇게 두 사람이 싸우다 민자엽이 살해되었구나.) 원승지는 초의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로 만리풍과 손중군의 행동을 살폈다.
손중군은 이때 허리를 만져보고, 칼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걸 만리풍에게 알렸다. 두 사람은 급히 월장해서 돌아갔다.
원승지는 속으로 웃으면서 초의 말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민자엽은 이 지방에선 유명한 사람이며 선도파의 두목이었다.] 원승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아! 민씨 형제는 원래 선도파였구나. 사부님의 말씀으로는 선도파가 무당파의 방계였다고 하셨다. 장문인은 원래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여 여러 문파와 왕래가 있었기 때문에 민자화는 이렇게 많은 사람을 초청할 수 있었던 것이로구나.)
[나는 그것을 듣고 함부로 그와 대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행동을 살펴보러 그의 여숙으로 갔다가 우연히 그의 추행을 듣게 되었다. 민자엽이 호색한 사람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 당시 구도래(具道來)의 둘째 딸에게 눈독을 들이면서 계책을 꾸미고 있었다. 그는 몰래 비호성채로 장두목을 찾아갔다. 장두목의 계책은 부하들이 구도래를 약탈하는 도중 민자엽이 나타나 그들을 도와주는 척한다. 그러나 힘이 딸려 구해 내지 못하고 재물까지 약탈당한 채 구씨 가족은 몰살당한다. 살아남은 둘째 딸을 유괴한다.
그때 민자엽이 다시 나타나 둘째 딸을 구하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아가씨는 집도 없고 의탁할 친척도 없으니 자연히 그에게 시집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두목은 민자엽에게 잘 보이려고 했고 또 돈에 눈이 멀어 계책에 협조하기로 해다. 그런데 나는 두 사람의 계략을 모두 다 들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형제들을 이끌고 비호성채에 매복하였었다. 시간이 되자 구도래 가족 일행이 나타났다. 그 당시 우리들은 비록 가난해서 나쁜 짓을 하기는 했지만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떳떳했다. 민자엽이 이렇게 비열한 자인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는 명문파의 제자였고 이름도 꽤 날리는 사람이었는데 이런 일을 꾸미다니....... 장두목이 부하를 이끌고 나타나 그들 일행을 위협하자 민자엽이 짐짓 그들을 도와주는 척하더군. 이에 나는 너무 화가나 나도 모르게 뛰어나갔다. 민자엽은 무술이 우수해 나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그의 계략을 모두 털어놓자 화가 난 그가 분노한 틈을 이용, 내리친 칼을 피하지 못해 결국 내 칼에 맞아 죽었다.]
[사부님, 그는 죽어 마땅해요. 우린 겁낼 필요가 없어요. 내일 그들이 오면 일일이 말해 줘요. 비록 민자화가 복수하려해도 다른 사람은 그를 도와주려 하지 않을 거에요.]
원승지도 생각했다.
(맞아. 만일 초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림에는 의리가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이 받아들여질 것이야.)
초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민이란 자를 죽인 후, 화를 일으킨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선도파의 대표적 고수이니, 그의 사부 황옥도인은 나를 용서 할 수 없을 것이며 부하들을 풀어 복수하려 할 것이고, 그러면 나는 그들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나의 부하가 장두목을 잡아 그로 하여금 민자엽의 악행을 낱낱이 쓰게 하였다. 구도래는 내게 감사의 뜻으로 2천냥의 은을 주려고 했다. 나는 원래 그의 돈을 훔치려 했지만, 그들을 도왔으니 그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편지를 썼다. 그는 이 사건을 명확하게 적어서 두 호송인을 증인으로 삼았다. 그 후, 나는 형제들과 헤어져 그의 편지를 갖고 선도산의 용호관을 찾아가 황옥도인을 만났다. 그때 선도파에서 소식을 듣고, 내가 산으로 올라가기도 전에 나를 제지했다. 그래서 내게 변명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싸우려고만 하였다. 그때 다행히 한 협객이 나타나 나를 도와주었다. 그래서 나는 산으로 올라가 황옥도인을 만날 수 있었다. 황옥도인을 만나 전후 사정을 다 털어놨더니 그는 아량이 넓은지라 부하로 하여금 내게 도전하지 말라고 명했다. 또한 선도파의 명성을 위해 이 일을 퍼뜨리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후, 난 이 사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속사정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당시 민자엽의 동생인 민자화는 아직 어려서 속사정을 몰랐고, 선도파의 사람은 아무도 그에게 그 일을 알려주지 않았다.] 한 제자가 물었다.
[사부님 그럼 편지는 아직 가지고 계십니까?]
그러자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것이 나의 잘못이었지. 작년 가을, 나의 친구 사씨 형제가 인편에 민자엽의 동생이 이미 무술을 다 배워 하산하여 복수하겠다는 소식을 내게 알려 왔지. 그들은 나의 절친한 친구였는데 비록 십여년간 만나지 못했지만 젊었을 때 생사를 같이한 사이인지라 그 친구를 찾아갔지.]
한 제자가 끼어 들었다.
[사부님께서 작년 12월에 섬서로 가신 것이 바로 그 일 때문이셨군요.] [그래. 난 섬서 태백산의 사씨 형제들에게로 갔었지. 내 생각엔 날이 추운 12월인지라 사씨 형제가 집에 있을 줄 알았었지. 그런데 그들은 집에 없고 요동으로 큰 사업을 하러 갔다고 하더군. 난 그곳에서 10여일을 기다렸는데, 그제서야 사병광, 사병운 형제가 돌아와 해후를 했지. 내가 민자화의 원한을 죄다 얘기했더니 사씨 큰형은 가슴을 치면서 아무일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더군.
그리하여 난 구도래와 장두목의 편지를 그들에게 주었지. 그들은 이 편지를 민자화에게 보이면 그는 창피해서 날 찾아와 더 이상 퍼뜨리지 말라고 애걸을 할 터인데 복수는 무슨 복수냐고 말하더군. 그들은 내게 잘해 주었으며, 나도 할 일이 없어 매일 사냥이나 하며 지냈지. 또 그들은 요동에서 가져온 인삼, 담배를 내게 주더군. 하루는 셋이서 술을 마시며 잡담을 하는데 사씨 큰형이 갑자기 대명(大明)의 시대는 지나갔는데, 왜 아직도 명조(明朝)에 충성하여 개국공신이 되지 않느냐고 말하더군. 나는 츰왕에게 의지하여 한 번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이 좋다고 했지. 그러자 그는 하하 웃으면서, <이자성은 산적인데 어떻게 크게 성공하겠는가?> 하면서 청나라 병사가 수일내로 쳐들어 올 것이라고 하더군. 만약 내가 그들에게 충성을 바친다면 그들 형제가 구영감에게 어떻게 면목이 설 것인가 하더군. 난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이렇게 훌륭한 명나라 사람이 적에게 충성을 다 하다니, 그럼 매국노가 아니겠는가. 죽은 후에 어떻게 조상을 만나 뵙겠나?>고 했지.]
원승지는 속으로, 초는 비록 강도 출신이면서도 사리는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초는 계속했다.
[그때 우리는 욕설을 퍼부으며 결국 싸우게 되었었지. 다음 날, 사씨 형제는 내게 사과를 하며 자기가 과음한 탓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다고 했어.
우리는 10여년을 사귀어 온 친구인지라 싸운 후에도 아무런 일이 없었지. 그들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그 이일은 다시 거론하지 않기로 했었지.
나는 거기서 10여일을 더 머물다가 남경으로 돌아왔어. 누군들 사씨 형제가 양심없는 사람인 줄 알았겠는가? 그들은 민자화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서 모함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모아 반 년 동안이나 계획하였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며, 사씨와 민자화에게 진실을 설명해 준 줄로만 알았었지. 그런데 사씨 형제는 편지를 민자화에게 보이지 않았던 거야.
세월이 흘러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무인들 중에서 대부분은 죽고 행방도 묘연하니 내가 아무리 민자화를 만나 설명해도 믿지 않을 것이야. 참으로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어. 사씨 형제와는 오랜 친구인데 이렇게 배신을 하다니....... 지금 상황으로는 날 죽일 듯한데, 내가 사씨에게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러는 것일까?]
제자들은 그의 말을 듣고 사씨 형제를 죽여야 한다고 결심했다. 초공례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럼 나가 봐. 오늘 밤, 내가 한 말은 한 마디도 밖으로 퍼뜨리셔는 안돼.
난 황옥도인 앞에서 이 일을 퍼뜨리지 않겠다고 맹세했어. 우린 한 집안이니까 무방하지만 신용을 잃어서는 안돼. 내가 죽은 후, 아무도 복수란 말을 해선 안돼. 누구든 복수를 한다고 하면 그건 나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니 반드시 기억해 두어라. 자, 사제와 사매를 불러 오너라.] 모든 제자들은 분노한 기색을 띠면서 나갔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16, 7세의 소녀와 7, 8세의 남자아이가 들어왔다.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라고 부르며 초에게로 달려갔다. 초는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계속 울었고 남자아이는 누나가 왜 슬퍼하는지 알 수 없어 했다.
초가 물었다.
[어머님 옷을 다 챙겨 놓았느냐?]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이 자랄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면서 농사나 짓거라. 절대로 과거시험을 봐서도 안되며, 무술을 배워서도 안된다.]
소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동생은 무술을 배워야 해요. 무술을 배운 후 아버지의 원수를 복수하도록 할 거에요.]
[복수란 말은 이제 하지 말아라. 무림의 세계에서는 원한이 끊일 새 없단다.
평범한 농민이 되어 오래오래 살아야지. 너의 동생은 무술을 배울 소질이 없어, 무술을 배워 봤자 나의 절반도 못 미칠게야. 이 아버지를 봐라. 결국 이렇게 당하지 않니? 너를 시집 못 보낸 것이 한이 된다. 내가 죽은 후에 금룡방의 일은 모두 부맹주 고숙부의 말씀에 따르도록 해라. 모두에게 그렇게 알려라.]
[그럼 지금 사람을 보내 고숙부를 모셔 오라고 할까요?] [여태까지 내 말뜻을 못 알아 들었구나. 고숙부가 오면 그의 난폭한 성격으로 어디 가만히 있겠느냐? 그러면 죄없는 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된다. 내가 살아 남는다 하더라도 많은 형제들이 날 위해 희생당하는 것을 원치 않아. 어서 가거라.]
그는 아들을 안고 입을 맞추며 말했다.
[얘야, 누나 말 잘 들어야 한다.]
[아버지, 그런데 왜 우세요?]
초는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언제 울었어?]
그는 아이를 내려놓고 그의 머리를 만지면서 섭섭한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소녀는 울면서 동생을 잡고 나가려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정말 죽음 외엔 방법이 없으시나요?]
[여러 방법을 다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도 죽음은 원치 않아. 이 세상에서 단 한사람만이 나를 구할 수 있지. 그러나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게야.] 그러자 소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버지, 그가 누구시죠? 그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는 하씨 성의 금사랑군이지.]
원승지와 청청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초가 계속 말했다.
[그는 매우 훌륭한 사람으로, 내가 왜 민자엽을 죽였는지 자세히 알고 있어. 당시 선도파의 사형이 나를 해치려 할 때 나를 구해 준 분이다. 그리고 황옥도인이 계시는데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단다. 아마 돌아가셨을게야.
금사랑군 역시 10년 전에 만난 사람이기 때문에 어디에 계시는지 몰라. 나는 은혜를 보답하지도 못했지만 그 분들만 살아 계신다면.......] 소녀는 나갔다. 원승지는 청청에게 그녀를 쫓아가자고 했다. 정원으로 나오자 아무도 없었다. 원승지는 비호처럼 몸을 날려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아가씨, 아버지를 구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녀는 너무 놀라 검을 빼면서 말했다.
[누구시죠?]
[만일 아버지를 구하고 싶으면 날 따라오시오.]
그리고는 그는 휙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뒤로 청청이 벽을 타고 나갔다. 소녀는 원승지의 몸놀림이 뛰어난 것을 보고 따라 나갔다. 한참 따라 가려니까 문득 의심스러웠다. 발길을 돌려 돌아가려 하자, 누군가 그녀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동시에 손의 힘이 빠져 들었던 칼을 원승지에게 빼앗겼다. 소녀는 칼도 빼앗기고 길도 막혀 버렸으니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원승지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겁내지 마시오. 해치려는 것이 아니고 도와주려는 것이니까.] 그가 칼을 돌려주자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원승지가 말했다.
[지금 아버지는 위험에 처해 계신데, 그를 구할 생각은 없습니까?] 소녀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를 구하실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아가씨, 아버지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오. 자기가 죽더라도 다른 사람은 조금도 희생 시키려하지 않으시니. 나는 아가씨 아버지를 도와주고 싶소.] 소녀는 그의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구나 하고 기뻐하며 무릎을 꿇어 그에게 절했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소. 이 일이 성공할지는 나로서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아가씨, 당신의 집으로 나를 안내해 주겠소? 아버지에게 전해 드릴 것이 있으니까.]
소녀가 물었다.
[성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아버지 좀 살려 주세요.......]
[이름은 나중에 알려주기로 하고, 아버지가 내 편지를 보시면 죽으려는 생각을 고치실 거요. 자, 시간이 없으니 서두릅시다.]
그녀는 기뻐하며 말했다.
[따라 오세요.]
그는 소녀의 안내를 받아 서재로 들어갔다. 원승지는 붓을 들어 편지를 써서 봉투에 넣은 뒤에 소녀에게 건네 주었다.
[이 편지를 아버지에게 갖다 드리세요. 그러나 한가지 약속하시오.]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나의 생김새를 아버지께 말하지 마시오. 마약 아가씨가 말해 버리면 나는 아버지를 도울 수 없게 되오.]
그녀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내일 점심 때 수서문의 행룡여숙으로 나를 찾아 오시오. 아버지의 일을 상의하려고 하니. 그러나 이것은 절대 비밀이오.]
소녀는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아버지 방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저에요. 문 열어 주세요.]
방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너무 놀라 창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니 초공례가 무표정하게 앉아 술을 마시려 하고 있었다.
[아버지, 이 편지를 좀 보세요.]
초는 아무 말없이 편지를 뜯어 보다가 갑자기 크게 놀라며 쨍그렁하고 술잔을 떨어뜨렸다. 그 소녀도 놀라서 편지를 보니 글씨는 한 자도 안 쓰여 있고 한 자루의 칼만 그려져 있었다. 칼은 꾸불꾸불하여 마치 뱀과도 같았다. 칼 끝은 뱀의 머리와 같았으며, 뱀의 혀처럼 끝이 갈라져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점차 기뻐하시기에 그녀는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물어 보았다.
[아버지, 이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그 분만 오시면 나는 살아날 수 있을 거야. 그 분을 만나 뵈었냐?] [누구요?]
[이 그름을 그린 사람 말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저더러 내일 찾아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오라고 하시진 않더냐?]
[아니오.]
[그 분은 성품이 기괴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명을 따라야 해. 내일 혼자 찾아가거라. 만약 네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했을 거다.]
소녀는 놀라며 이제서야 아까의 술잔에 독이 들어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과연 그의 무술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아버지가 안심하는 것을 보고 무척 기뻤다. 가장이 가족들에게 떠나라고 했지만 그들은 원하지 않았었다. 이제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자 몹시 기뻤다.

x x x x
원승지와 청청이 여숙에 도착하자 그녀가 웃었다.
[검은 무슨 뜻으로 그린 거에요?]
[초공례는 이 세상에서 자기를 구할 사람은 네 아버지라고 하시지 않았니? 내가 그린 검은 바로 너의 아버지가 쓰시던 금사검이야.] 청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왜 그를 도와주려고 하죠?]
[그는 나쁜 사람이 아냐.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이렇게 곤경에 처해 있는데 어떻게 못 본 척 하겠어? 또한 그는 네 아버지의 친구이신데.......]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음, 난 상공이 그의 딸이 예쁜 것을 보고 그녀의 비위를 맞춰 주기 위해선 줄 알았지요.]
원승지는 화를 내면서 말했다.
[나를 뭘로 취급하는 거야?]
[아이, 화내지 마세요. 그럼 왜 여숙으로 오라고 했어요?] [넌 참으로 질투심이 많구나. 잔소리 말고 잠자코 따라와.] 그들은 대공방 민자회의 집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월담하여 들어가 동정을 살폈다. 원승지가 소근거렸다.
[방안에 몇 사람이 있는지 모르지만 일단 발각되면 우리의 계획은 끝장이야.]
[그녀를 도우려고 그러죠? 난 못해요. 당신을 잡아가라고 소리 지를 거에요.]
원승지는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둘은 한 부하를 잡아 사씨 형제의 처소를 알아냈다. 그리고 원승지는 그가 발설하지 못하도록 급소를 눌러 숲속에다 숨겨 놓았다. 그들은 사씨의 방을 찾아 들어갔다. 사씨 형제는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려했다. 그러나 그전에 원승지가 그들의 급소를 눌러 버렸다. 원승지는 불을 켜서 청청과 함께 침대, 베개, 가방 등을 뒤져보았다. 거기엔 옷과 돈, 칼 뿐이었다. 다시 찾아보려는데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와서 원승지는 급히 불을 껐다.
그리고 사씨의 가슴을 만져보니 편지등이 있어 그것을 꺼내 청청에게 주었다.
[찾았어.]
[가요. 사람이 오고 있어요.]
원승지는 잠시 멈추어 사씨 형제의 칼을 꺼내 책상 위에다 놓고 <동생 초공례 올림> 이라고 섰다. 밖에서 <누구시오?> 라고 외치는 소리와 동시에 그들은 창 밖으로 뛰어 나갔다. 밖에서도 오가는 사람들이 있어 잠시 벽에 기대 있었다.
[이게 뭐죠?]
청청이 벽 아래를 가리켜서 만져보니 거기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하나하나 더듬어 보니 첫 번째 <제(第)>자였고, 다음은 <사(賜)>, <공(公)>, <국(國)>자, 마지막은 <위(魏)>자였다. 이것을 붙여보면 <위국공사제(魏國公賜第)>란 말이었다. 10여일 동안 찾았으나 못 찾았던 위국공청이 바로 적의 본거지였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서장군의 자손들이 이 집을 팔았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무도 이 집의 옛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을 것 같았다. 원승지는 속으로 기뻐했는데 갑자기 목이 간지러워 얼른 보니 청청이 호호하며 바람을 일으켰던 것이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빨리 나가자!]
그들이 여숙에 도착한 것은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원승지는 편지를 꺼내어 누렇게 색이 바랜 글씨를 보았다. 과연 장두목과 구도래의 편지였다.
[드디어 그녀를 돕게 되었군!]
[그녀라니?]
[초공례의 큰 딸 말이야.]
원승지는 웃으며 아무 말도 않더니 한참 편지를 보다가 말했다.
[초공례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어. 만약 그가 사적으로 악행을 저질렀다면 난 그를 도와주지 않았을 거야. 강호의 선배에게까지 죄를 지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 더구나 사형의 제자도 끼어 있는데.]
[그 비천마녀 참 예쁘죠?]
[그녀는 너무 악랄해. 이유없이 남의 팔을 잘라내다니.......] 원승지가 말했다.
[사형만 아니었더라면 그를 교육시켜 주려했는데. 소녀를 이곳에 오라고 한 것은 남의 눈을 피하려고 한 것이야. 오해받는 것이 싫어서.] 그는 다른 편지를 보더니 화를 버럭 냈다.
[이것 봐!]
청청은 그가 이처럼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 내용은 청나라 왕의 서기가 보낸 것이다, 그들이 초공례를 죽이고 금룡방을 빼앗으면 먼저 강남에 군사를 보내 내통하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편지 끝에는 날인이 되어 있었는데 <대청(大淸) 예친왕>이었다. 청청도 화가 나서 편지를 찢어버릴려고 했으나 원승지가 극구 말렸다.
[이것은 좋은 증거가 될거야. 사씨가 왜 이 편지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겠어?]
[네, 민자화를 협박하려는 것이겠죠?]
[그래. 난 본래 초공례만 살려주고 손떼려 하였는데, 그 안에 이렇게 큰 계책이 꾸며져 있었는지 누가 알았겠니? 나는 잘잘못을 분명히 밝히겠어.] 청청은 그 말을 듣고 그가 존경스러워졌다.
[당연히 그래야죠. 사부님께 알리더라도 상공보고 잘했다고 하실 거에요.] [알았어. 자, 그만 자. 난 그놈들을 어떻게 처치할까 궁리를 해봐야 겠어.] 다음 날, 일어나서 원승지는 운동을 해보니 자신의 기량이 늘어난 것을 깨닫고 기뻐했다. 식당에 빵과 콩국이 있는 것이 보였다.
청청이 웃으며 말했다.
[운동 다 하셨어요?]
[일찍 일어났군.]
아침을 마치자 하인이 들어왔다.
[누가 찾아 오셨습니다.]
바로 초공례의 딸이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인사했다. 원승지도 인사를 하며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소녀는 그가 자기의 손을 잡자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은인인지라 뿌리치지 못했으나 잠시 후 손을 뺐다.
청청이 소녀에게 물었다.
[아가씨, 이름이 뭐죠?]
[원아(媛兒)라고 합니다. 두분께서는?]
[이 분은 무서운 사람이에요. 나보고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 직접 물어 보도록 하세요.]
소녀는 그것이 농담인 줄 알았다.
[두 분께서는 저의 아버님의 목숨을 구해 주셨으니 뭐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분은 덕망이 높으시고 우리는 그를 무척 존경하니 후배로서 마땅히 그 분을 도와주어야죠.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가씨는 아버지에게 내일 계획대로 연회를 열라고 하세요. 여기 이 두 개의 보따리를 아버님께 전해 주시고, 급할 때 대중 앞에서 풀라고 하세요. 도움이 될 것이오. 이는 중요한 물건이지 조심하시오.]
원아가 받아 보니 하나는 길쭉하고 무거웠고 다른 하나는 가벼웠다. 그녀는 그들에게 사의를 표하고 나갔다.
원승지가 청청에게 말했다.
[우리가 따라가야 되지 않을까?]
그들은 원아가 아직도 객실에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왜 집으로 곧장 가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주인을 불러 주세요]
원아가 하인에게 말했다. 이때 원승지가 속삭였다.
[무슨 소리지?]
[무슨 암호 같은데요.]
하인은 그녀의 말을 듣고 놀라 주인을 찾아왔다. 그는 소녀를 보고 인사를 했다.
[아가씨, 무슨 명령이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원아가 대답했다.
[나는 초공례 사람이에요. 우리 집에 가서 내가 중요한 일이 있으니 무사들을 이리로 보내라고 전해 주세요.]
주인은 그 말을 듣고 놀라 직접 달려갔다. 얼마 안 있어 20여명이 와서 원아에게 다가갔다.
원승지가 말했다.
[금룡방의 세력이 이렇게 크니 우리는 따라갈 필요가 없겠군.]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누다가 초의 집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니 손님들이 계속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원승지와 청청도 그들과 함께 들어갔다. 문 앞에서 초와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는 그들이 어느 사부의 제자이려니 생각하고 관심을 쏟지 않았다. 손님들이 다 모이자 연회가 시작되었는데 민자화 집의 연회와는 비교도 안되었다. 상과 의자는 온통 빨간색 천으로 깔았으며, 남경의 유명한 요리사를 불러다 많은 음식을 만들었다. 민자화는 십력대사, 정기운, 곤륜파의 정상일, 매검화, 만리풍, 손중군 등과 함께 앉아 있었다. 초가 직접 그들에게 술을 권했다. 매검화는 술을 마시지 않고 민자화의 표정만 살펴보았다.
이때 민자화가 갑자기 술잔을 던졌다.
[초씨, 오늘 무림의 많은 친구들이 모였으니 이제 우리의 원한을 풀어 봅시다. 얘기 좀 해 보시오.]
이에 초가 아무말도 못하자 그의 큰 제자 오평이 일어나 말을 이었다.
[민대감, 당신의 형이 색정을 누르지 못하고 무림의 도리를 어지럽혀 우리 사부께서.......]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엇이 날아와 식탁에 박혔다. 그가 고개를 숙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것은 손중군이 던진 것으로 오평도 화가 나서 칼을 뽑았다.
[그래, 너는 나사형의 팔을 잘랐지?]
오평은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그때 초공례가 막아서며 말했다.
[귀빈들 앞에서 이 무슨 추태냐?]
그는 손중군에게 웃으며 말했다.
[손낭자는 화산파의 선배이시니 그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민자화는 화를 내면서 젓가락을 초공례의 눈을 향해 던졌다.
[오늘 너와 한 번 겨루어 봐야겠다.]
초공례 역시 젓가락을 들어 자기에게 날아오는 것을 받아 번듯하게 식탁에 올려 놓으면서 말했다.
[민대감, 노여움을 푸시고 우리 천천히 얘기해 봅시다. 얘들아, 민대감께 새 젓가락을 갖다 올려라.]
민자화는 초의 솜씨에 놀랐다.
(우리 형이 당할 만 하군.)
매검화는 민자화가 당하는 것을 보고 손을 내밀어 초의 등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초맹주님, 참 훌륭하십니다. 우리 얘기 좀 할까요?] 초는 그가 고의로 친 것을 알고 재빨리 피했다. 매검화가 의자를 집어 들자 <탁!> 소리가 나면서 그것이 부러졌다. 초는 상대방이 칼을 빼고 싸우려고 하자 자기 제자들이 이에 응하는 모습을 보고는 금사랑군이 나타나지 않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딸에게 눈짓을 하였다. 원아는 보따리를 안고 벌써부터 쩔쩔매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눈짓을 보고 얼른 커다란 보따리를 풀어 그에게 주었다. 그 보따리 안엔 칼이 있었다. 초공례가 그 검을 받고 영문을 몰라하는 찰나에 손중군이 자기의 칼임을 보고 달려가 빼앗았다.
[어디 한 번 겨뤄 보자. 뻔뻔스럽게 남의 칼을 훔치다니. 이러고도 영웅 행세를 해?]
초공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리둥절했다. 손중군은 날카로운 칼을 번뜩이며 그의 가슴을 겨누었다.
원승지의 계획으로는 초공례로 하여금 손중군의 칼을 돌려주게 하면 그녀가 어젯밤 자기를 살려주었다는 것을 알게 해서 마음속으로 감사해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오늘 적당한 시간에 와해될 줄로 알았는데 그녀가 이렇게 야만스럽게 나오다니!
초는 상대방이 찌르려고 하는 것을 보고 급히 뒤로 물러섰다. 한 제자가 즉시 그의 절철도를 던져 주었다. 초는 칼을 받아 쥐고도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손중군은 실패하자 <행운유수>로 그의 목을 찌르려 했다. 초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절철도를 휘두르면서 <장공낙연>으로 막아냈다. 손중군의 칼이 그에 의해 떨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위로 올라와 상대방의 하복부를 찔렀다. 그 속도는 너무나 빨라서 초공례는 견디지 못하고 몸을 날려 뛰었는데, 쫘악 하면서 옷자락이 찢겨 나갔다. 그는 속으로 아찔했다. 그때 그는 문득 칼집에 태백삼영이 사기쳐서 잃어버린 두 장의 편지가 들어 있음을 보았다. 이때 손중군은 그의 제자 둘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다. 두 제자는 그녀가 사형의 팔을 자른 것에 분개해서 그녀에게 대들었지만 그녀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들이 밀리고 있을 때 초는 편지를 손에 넣고 크게 외쳤다.
[멈추시오! 멈추시오! 할 말이 있소!]
두 제자는 사부의 말을 듣고 물러섰는데 그중 하나가 손중군의 칼을 맞고 뒤로 쓰러지며 피를 토해냈다. 초는 손중군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제발 멈추시오!]
사람들은 점점 조용해지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민형은 내가 그의 형을 살해했다고 하는데 그건 사실입니다. 그의 형 민자엽는 내가 죽였습니다.]
방안이 더욱 조용해졌다. 민자화가 소리쳤다.
[사람을 죽였으니 마땅히 목숨을 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도 따라서 소리쳤다.
[사람을 죽였으니 목숨을 버려라.]
[초공례, 자살하라!]
초는 그들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여기 두 장의 편지가 있습니다. 덕망 높으신 선배님들, 좀 봐 주십시오. 만약 선배님들께서 편지를 보신 후에도 저보고 죽어 마땅하다고 하시면 여기서 자결하겠습니다.]
사람들이 편지를 보려고 몰려왔다.
그러자 초공례는, [민형, 세 사람을 추천해 주시오.]
그러자 민자화는 편지 내용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다고 멈추었다.
[그럼 십력대사, 정기운, 매검화로 정합시다.]
세 사람이 편지를 받아들자 태백삼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제일 먼저 읽어본 십력대사가 말하였다.
[제가 보기엔 이 일은 없었던 걸로 하여 화해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는 무림에서도 훌륭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이라 전에는 그의 말에 모두 따랐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말하자 방 안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민자화가 편지를 받아 읽어보니 장두목의 편지는 도무지 비논리적이며 글씨고 많이 틀려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런데 구두래의 감사편지를 펼쳐보니 그 내용 전개가 논리정연하고 문장도 수려하여 한 번만 읽고도 미안한 마음과 슬픔을 가눌 길 없어 그만 주저앉아 눈물을 쏟고 말았다. 갑자기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많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친 셈이었다.
[태백삼영이 나에게 형을 죽인 자는 금룡방의 초공례라고 했다. 내가 여러 사형들을 초청하여 나를 도와 복수하고자 했으나 모두 핑계를 대고 도와주지 않았다. 수운대사는 사부를 찾은 후에 그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했다. 여러 사형들은 나와 우의가 돈독한데도 어째서 그랬는지 몰랐다. 단지 동현 사제만이 나와 함께 갔다. 우리 선도파는 사람이 많고 세력이 큰데 이런 큰 일을 당했는데도 나설 사람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외부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원인은 내 형이 옛날에 이런 부끄러운 짓을 했기 때문이다. 여러 사형들은 이런 진상을 알고 도와주려고 하지 않고 내 체면을 생각하여 그냥 거절할 수가 없어서 오래 전에 실종된 사부에게로 전가했구나. 나이 어린 동현 사제만이 진상을 몰랐었구나.]
갑자기 매검화가 소리쳤다.
[편지는 가짜야! 누굴 속이려고 그래?]
그는 편지를 빼앗아 찢어 버렸다. 초는 그녀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편지를 찢을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따라서 매우 화가 나서 얼굴이 시퍼렇게 되었다.
[매씨, 이제 자네 체면을 버린 모양이지?]
[도대체 누구 체면을 버렸다는 것이오? 남의 형을 죽이고 전혀 통하지 않는 편지 몇 통을 위조하여 죽은 자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니 말이야!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마음대로 거짓말을 해? 이런 편지는 나도 쓸 수 있어. 지금 당장 써 볼까? 당신이 십력대사에게 누명을 씌우고 있는 것이야.
가령 정도주가 민대감의 형을 살해했다고 하는 이런 편지는 나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단 말이다!]
십력대사와 정기운은 원래 민자화가 불리하다고 생각하였으나 매검화의 말을 들은 후엔 주저하게 되었다. 이 편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증명할 수가 없어서였다.
오평은 사부님이 이렇게 우롱 당하는 것을 보고 얼굴을 붉히면서 뛰어나와 매검화에게 달려들었다. 매검화는 몸을 피해 칼을 빼앗았다. 두 칼의 섬광이 번쩍 비치더니 비명과 동시에 오평의 칼이 멀리 떨어져 나갔다. 매검화의 칼 끝이 그의 목 앞으로 갔다.
[무릎 꿇어. 그러면 너의 개 같은 목숨을 살려주지.] 오평은 몇 발짝 물러났으나 칼 끝은 계속 그의 목 앞에 있었다.
매검화는 웃으면서 말했다.
[무릎을 꿇지 않으면 찌르겠다!]
오평이 이에 맞섰다.
[찌르고 싶으면 찔러라! 잔소리 말고.]
초의 제자들이 모두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초공례는 의자 위로 올라가 크게 외쳤다.
[여러분, 멈추시오! 날 보시오.]
하고 말하면서 큰 칼을 그의 몸에 갖다 댔다.
[모든 일은 끝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오늘 민자엽을 죽인 죄로 내 목숨을 바치겠다. 제자들이여, 어서 물러나거라!]
제자들은 그의 말에 따라 물러서면서 그들의 사부를 가엾게 바라보았다. 이때 초원아(焦媛兒)가 급히 나서며 말했다.
[아버지, 잠깐 기다려 주세요. 그 편지 어디 있습니까? 그는 아버님을 구하러 오겠다고 했어요.]
초공례는 품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사람들에게 흔들어 보였다. 사람들은 거기에 괴상한 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뜻은 이해하지 못했다.
[금사대형, 당신은 한 발 늦었소.]
초공례는 큰 칼로 자기를 향해 찔렀다.
순간, <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칼에 무엇인가 부딪치는가 싶더니 칼은 <쨍그랑!> 하며 땅에 떨어졌다. 초공례 곁에는 한 사람이 늘어났다. 사람들은 눈썹이 짙고 큰 눈에 까무잡잡한 20세 전후의 젊은이를 보았지만 어떻게 해서 왔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젊은이가 바로 원승지였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두통의 편지를 보고는 초공례가 더 이상 칼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으며 그가 스스로 나설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둘째 사형의 제자와 불화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 계속

원제: 벽혈검(碧血劍) / 김용(金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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