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血剑 4-5

3학년2반 | 2022.01.18 07:56:57 댓글: 0 조회: 323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3098

* 제 4 권 *

- 5 - 천하평정(天下平定)

두 사람이 떠난 지 얼마 안되어 북경성 안의 영웅호걸들은 일제히 집합하여 원승지의 하달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승지는 사전에 이미 계획을 세워 누가 방화를 하고 누가 접응을 할 것인지에 대하여 아주 치밀하게 배치를 해 놓았다.
츰군이 어떻게 공격하며 명군이 어떻게 수비하고 있는지는 곳곳에 있는 탐자들에 의해 쉬임없이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얼마 후, 남자 한 명이 편지 한통을 가져왔다.
그것은 바로 이암이 사람을 시켜 성안으로 들여보낸 것이었다.
그는 총군이 이미 성 밖에 도착한 것이었다.
원승지는 크게 기뻐하며 곧 사람들을 곳곳에 파견하여 일을 거행토록 했다.
황혼 무렵, 사람들은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성의 한가한 무리와 어린아이들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구승(朝求升), 모구합(暮求合), 근래빈한난존활(近來貧漢難存活), 조조개문배츰왕(早早開門拜闖王), 관교대소도환열(管敎大小都歡悅)!]

## 츰왕(闖王;틈왕)이란 표기가 맞는지 의문이 드는군요.

성안의 관병들은 이미 어수선해 있었고 각자의 살아남을 궁리만 할 뿐 아무도 간섭하는 자가 없었다. 더욱이 이런 노래를 듣고는 마음이 더욱 산란해지기만 했다.
다음날, 3월 18일이 되었다.
원승지와 청청, 하척수, 정청죽, 사천광 등은 명군으로 가장하여 모두 성꼭대기로 올라가 사태를 살폈다.
검은 옷에 검은 갑옷을 입은 수십만의 의군이 마치 까마귀 구름처럼 들을 뒤덮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
포화와 화살이 끊임없이 성안을 향하여 날아들었다.
일찍이 진세(陣勢)가 혼란해져 있던 수군의 힘으로 어찌 적의 기세를 당해 낼 수 있으랴?
갑자기 강풍이 일더니 황사가 하늘을 뒤덮고 날이 어두워졌다.
뇌성이 진동하고, 우박을 동반한 폭우가 퍼붓기 시작하자 성 안팍할 것없이 온통 수라장이 되었다. 군사들의 옷과 신발은 삽시간에 비에 젖어 버렸다.
청청은 이러한 천지대변의 상황을 보고 마음속에 두려움이 꿈뜰 거렸다.
원승지 등은 성을 내려와 무리들에게 성 안 곳곳에 불을 놓고 관병을 살해할 것을 지시했다.
거리 곳곳에서 유랑자들이 기회를 틈타 강탈하고 백성들의 울음소리와 비명소리가 하늘을 뒤덮었다.
싸움이 치열해가고 있을 때, 갑자기 일대의 관병이 금의태감을 받들고 호령하며 나타나는 것이었다.
원승지는 멀리 불빛 속에서 그것이 조화순임을 알았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다.
[나를 따르라. 저 간신배를 처치하자!]
철나한과 하척수가 군중을 해치며 달려나갔다.
조화순은 사태가 불리함을 보고 말머리를 돌려 도망하려 했다.
원승자가 한 걸음 앞으로 가 그를 막아서며 말했다.
[어디로 가려는 거냐?]
조화순이 말했다.
[황...... 황상께서 소인에게 명...... 명하여 장의문을 수비하라고 하셔서.......]
원승지가 말했다.
[좋다, 장의문으로 가 보자!]
무리들이 조화순을 앞세워 성 꼭대기로 다다랐다.
멀리 성 밖에는 커다란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깃발 밑에는 전립을 쓴 사람이 검은 얼룩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이리저리 달리며 지휘하고 있었다.
바로 츰왕 이자성이었다.
원승지가 소리쳤다.
[빨리 성문을 열어 츰왕을 영접하여라!]
하면서 손에 힘을 가하니 조화순은 아파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의 목숨이 원승지의 손아귀에 달려 있는데 어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눈앞의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보고는 생각을 바꾸어 새 주인을 영접하여 부귀영화를 누릴까 하여 곧 장의문을 활짝 열도록 명령했다.
성 밖의 츰군이 우뢰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돌진해 왔다.
검은 갑옷을 입은 군사들이 천 혹은 만 명쯤일까? 성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원승지는 성 위에서 츰군이 마치 한 마리의 흑룡처럼 꿈틀거리 입성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위세는 그야말로 당당하였다.
원승지는 일행들을 이끌고 내성으로 퇴진하는 패병들을 쫓고 있었다.
내성에는 수비병이 제법 있었고 거기에 외(外)성에서 후퇴하여 온 패병까지 합하여 겹겹이 성머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때 날은 이미 어두워 있었고 외성의 츰군들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원승지 일행등도 처소로 돌아왔다.
성 주변의 징과 북소리, 함성소리가 하나가 되어 어마어마한 소리가 되어 성안에 들려 왔다.
총병의 장관 중에 어떤 자는 도주해 버렸고 어떤 자는 끝까지 싸우고 있었으나 누구하나 그들을 돌보는 이 없었다.
원승지의 일행들도 숙소로 돌아와 피묻은 옷을 벗어버리고 식사를 마친 다음 옥상에 서서 바라보았다.
성 안 곳곳의 불빛만이 보일 뿐이었다.
원승지가 기뻐하며 말했다.
[내일 새벽이면 내(內)는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츰왕이 치국하게 되면 공의가 행해질 것이다. 이때부터 천하의 백성들은 배부르게 따뜻한 옷을 입으며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으리라. 오늘밤이 바로 원수의 마지막 순간이로구나.]
무리들은 원승지가 원수 숭정을 살해하러 가는 것을 알고 모두가 함께 입궁하기를 원했으나 원승지는 만류했다.
[각자 피곤한 하루였소. 오늘밤은 푹 쉬도록 하시오. 내일 새벽이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소이다. 병마가 혼란해 있을 이때에 황궁의 경비는 반드시 소홀할 것이고 멍청한 임금 하나 살해하기란 단지 한손으로도 충분하오. 그러니 나혼자 처리하는 것이 좋겠소.]
일행들은 그의 말에 수긍하며 생각했다.
지금같은 정세 하에 황제의 시위들은 겁에 질려 도망갔을 것이고, 절세의 무공을 자랑하는 원승지는 홀로 남아 있는 임금을 쉽게 살해할 것이라고.
원승지는 청청에게 촛불을 밝히도록 하고 <선군고병부상서계료독사원>이란 영패를 쓰고 영위를 안배했다.
이제 숭정의 목을 베어 올 때만 기다렸다가 부친께 제사를 지낸 후 성 꼭대기로 가져다 높이 걸어 놓으면 내성의 수비군들은 자연 해체될 것이다.
그는 가죽 주머니를 가져다가 숭정의 머리를 담을 준비를 한 다음 허리부분에 1척 길이의 예리한 칼을 숨겨 놓고는 황궁으로 달려갔다.
불빛은 밝아 사방은 대낮처럼 환했다. 해체된 패잔병들은 곳곳을 다니며 기회를 틈타 도적질을 일삼았다.
원승지는 길거리에서 몇 명의 부녀자들이 대성통곡을 하며 칠팔 명의 관병에게 이끌려가는 것을 보고 혼자 어찌할 바를 모를 아구를 생각해냈다. 또한 그녀가 자기에 대한 사랑이 그토록 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으로서는 보답할 수 없는 것을 깨닫자 갑자기 마음속에서 근심과 고통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그가 궁 문을 들어섰을 때 수문의 위병과 궁감은 벌써 도주해 버린지 오래였고 황궁에는 냉기만이 가득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만일 숭정이 숨어 버렸다면 어딜가서 찾는담. 그렇다면 낭패인데.......)
그리고는 곧 건청궁으로 달려갔다.
문 앞에 도착하자 한 여인의 울음소리가 서글프게 들려 올 뿐이었다.
원승지는 문 곁으로 몸을 피하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바로 숭정이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원승지는 숭정황제가 안에 살아있기 때문에 안심이었다.
황후 복장을 한 여인이 울면서 말했다.
[16년 동안 폐하께서는 한 번도 신첩의 말을 듣지 않으셨소이다. 오늘날 사태가 이 지경에 달했으니 폐하와 함께 죽음을 당한다 해도 여한이 없소이다.]
숭정은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렸다.
황후는 한참 울다가 얼굴을 가리고 뛰어나가 버렸다.
원승지가 정장 뛰어들어 해치우려 할 때 갑자기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소녀 하나가 검을 들고 숭정 앞으로 뛰어나와 말했다.
[아바마마, 사태가 위급하오니 어서 궁을 빠져 나가세요.] 바로 장평공주 아구였다.
그녀는 몸을 돌려 한 명의 태감에게 일렀다.
[왕상공, 폐하를 잘 모셔주시오.]
왕승은이라 불리는 그 태감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예. 공주전하, 함께 가시지요.]
아구가 말했다.
[아니오. 난 아직 궁에 더 머물러야 하오.]
왕승은이 말했다.
[내성은 곧 함락됩니다. 공주님께서 궁에 머물러 계시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아구가 말했다.
[난 기다려야 할 사람이 있소.]
숭정은 얼굴색이 변하여지며 말했다.
[네가 원숭환의 아들을 기다리려는 거냐?]
아구의 얼굴이 잠시 긴장되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예. 소녀 오늘 폐하께 작별을 고합니다.]
숭정이 말했다.
[무엇 때문에 그를 기다린다는 말이냐?]
아구가 침울하게 대답하였다.
[그는 꼭 돌아온다고 저와 약조를 했었습니다.]
숭정이 노하여 부르르 떨며 외쳤다.
[칼을 이리 다오.]
그는 아구의 손에 들려있던 금사보검을 빼앗아 긴 한숨을 한 번 쉬더니 말했다.
[아이야, 네가 어쩌다가 우리 왕실에 태어났느냐.......] 하며 갑자기 손에 든 검을 내리치지, 빛이 번뜩함과 동시에 보검은 그녀의 머리끝에서 똑바로 갈라졌다.
아구가 놀라 소리치며 몸을 휘청거렸다.
원승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숭정이 자기의 친딸을 살해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는 숭정과 공주에게 약간의 거리가 있었으므로 급히 몸을 날려 구하러 뛰어들었다.
그가 반쯤 날아갔을 때 아구는 이미 쓰러져 있었다.
숭정이 검을 들어 다시 내려치려 할 때 원승지가 왼손으로 그의 오른 팔목을 힘차게 치자 숭정은 곧 칼을 놓쳐 버렸고 금사검은 곧장 날아 올랐다.
원승지는 왼손을 돌려 이미 숭정의 팔목을 잡고 있었고 오른손으로는 떨어져 내려오는 보검을 잡았다.
그가 아구를 보니 그녀는 피웅덩이 가운데 기절해 있었다. 왼팔은 이미 잘리어 나간 뒤였다.
원승지가 크게 노하여 소리쳤다.
[이 극악무도한 임금아! 이제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죽여 버리는구나. 나의 부친을 살해하고 또 너의 친딸까지 살해하다니.......
내가 오늘에서야 너를 죽여 주겠다!]
숭정은 원승지인 것을 보고 탄식하며 말했다.
[자, 나를 죽여라.]
말을 마치고 눈을 감은 채 죽기를 기다렸다.
두 명의 태감이 달려들어 구하려했으나 원승지가 휘두르는 밤에 멀리 나가 떨어졌다.
원승지가 검을 들어 숭정의 머리를 내려치려 할 때였다.
혼절했던 아구가 몽롱한 상태에서도 몸을 일으켜 숭정의 앞을 가로 막았다.
[아바마마를 죽이지 마세요. 제발.......]
얼굴 가득히 애절한 빛을 띠고 원승지를 바라보더니 말도 마치지 못한 채 다시 쓰러져 버렸다.
원승지는 그녀의 잘린 팔에서 피가 용솟음 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여 왼손으로 숭정을 밀쳐내고는 아구를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왼쪽어깨와 등골 몇 군데의 혈맥용도를 격타했다.
피가 조금 멎자 가슴에서 금창약을 꺼내어 상처에 바르고는 옷깃을 찢어 꽁꽁 감아 주었다.
아구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왕승은 등 몇 명의 태감이 숭정을 부축해 일으키고는 급히 궁전을 내려갔다.
원승지가 소리쳤다.
[어디를 가려느냐?]
아구를 내려놓고 그들을 뒤쫓으려 할 때 아구는 오른손으로 그의 목을 휘어 감은 채 울부짖었다.
[아바마마를 해치지 마세요.]
원승지는 생각했다.
(머지않아 성이 정복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숭정은 목숨을 잃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리되면 비록 내 손으로는 아닐지라도 자연히 부친의 원수를 갚게 될 것이고 아구의 마음도 상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아구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곳곳에 난리가 난 것을 보고 원승지는 중상을 입은 그녀를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놓아두면 생명을 잃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녀를 자기의 처소로 데려다가 살려놓는게 급선무라고 느꼈다.
그녀를 안고 궁을 나섰을 때는 이미 삼경을 지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불빛으로 하늘의 절반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곳곳에서는 울음소리와 함성이 그치지 않았다.
정조자호문에 도착하자 무리들은 모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청은 그가 또 여자를 안고 돌아온 것을 보고 몹시 못마땅해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구였다.
그녀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다그치듯 물었다.
[황제의 머리는?]
원승지는 <그를 죽이지 않았소.>라고 잘라 말하고는 초원아를 바라보고 말했다.
[초아가씨, 부탁컨대 정성껏 그녀를 돌봐 주시오.]
[네에.]
초원아가 대답하고 아구를 안고서 내실로 들어갔다.
청청이 다시 물었다.
[왜 죽이지 않았죠?]
원승지가 머뭇거리더니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죽이지 말아 달라고 그녀가 애원했어.]
청청이 화가 나서 말했다.
[그녀? 그녀가 누구길래 당신이 그녀의 말을 듣는 거죠?] 원승지가 미쳐 대답도 하기 전에 하척수가 말했다.
[아이, 어쩌나, 어쩌나, 이 일을! 이렇게 아름다운 공주가 어쩌다가 한쪽 팔을 잃었담? 사부님, 그녀가 그린 초상화는요? 가지고 나오셨나요?]
원승지가 계속 눈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척수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원승지와 청청의 얼굴색이 싸늘하게 굳은 것을 보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청청이 물었다.
[무슨 공주? 무슨 초상?]
하척수가 웃으며 말했다.
[이 공주님이 그림을 잘 그리신답니다. 나도 그녀가 그린 자화상 한 폭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잘 그렸더군요.]
청청이 눈을 부릅뜨고는, [정말이오?]
하면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척수가 안타까운 눈초리로 원승지를 바라보며, [사부님, 공주를 구하러 가겠습니다.]
하는 말을 마치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원승지는 방으로 돌아가서 잠시 눈을 붙혔다. 동이 틀 무렵쯤 홍승해가 급히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상공! 사채주가 태감 왕상은을 붙잡고 이미 선무문을 쳐부셨습니다.]
원승지는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아니, 의병이 성으로 들어왔다고?]
홍승해가 대답했다.
[유종민 장군이 이미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습니다.]
원승지가 기뻐서 외쳤다.
[우리도 빨리 가서 그들을 맞이하자. 어서 빨리!]
두 사람이 방을 나오자 하척수가 그를 뒤쫓으려 말했다.
[사부님, 안심하십시오. 우리가 그들을 돌보겠습니다.] 원승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 돌아오지 않은 정청죽과 사천광, 철나한을 제외하고 벙어리와 호계남, 홍승해만을 데리고서 대명문을 향해 나섰다.
하늘엔 먹구름이 몰려들고 땅에는 시체가 즐비하며 패잔병들은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정양문, 제화문, 동직문 모두 다 점거했어요!>라고 외치며 달려가고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패잔병들이 점점 적어졌다. 백성들은 대문만다 <영창원년대순왕만만세(永昌元年大順王萬萬歲)>라고 쓴 황색 종이를 붙여 놓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문 앞에 술을 내어놓고 의병들을 격려하기까지 하였다.
원승지는 호계남에게 말했다.
[민심이 이러한데 츰왕이 어떻게 성공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다시 조금 더 걸어가자니 수백 명의 사람들이 마구 달려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선두에 선 사람은 바로 사천광과 철나한이었다. 두 사람은 무리들을 이끌고 북경성 내에서 명군을 죽이러 다니다가 원승지를 보자 환호성을 치며 달려온 것이다.
철나한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츰왕이 곧 올 것입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앞쪽에서 여러 필의 말이 달려와 멈춰섰다.
그 중 한 명은 <대순제장군이(大順制將軍李)>라고 쓴 큰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청색 옷을 입은 이암이 말을 몰아 달려왔다.
원승지는 너무 기뻐 말 앞으로 달려가서 소리쳤다.
[형님!]
이암은 놀랜 듯 멍청이 원승지를 보다가 급히 말에서 내려섰다. 그는 몹시 기뻐 어쩔 줄을 몰라하며 말했다.
[아우의 공이 참으로 크오.]
원승지가 말했다.
[츰왕의 방사가 도처에 깔려 있어서 명군이 추풍에 낙엽처럼 쓰러져 가는데 소인이 무슨 공을 세웠겠습니까?]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침 예전 성봉장에서 본 적이 있는 유방량과 전견수 등이 도착해서 모두들 기뻐하며 회포를 풀었다.
그때 갑자기 호각소리가 들리면서 사람들이 큰 소리로 환호하기 시작하였다.
[대왕이 오셨다! 대왕이 오셨다!]
원승지등은 한쪽으로 비껴서서 백 필의 말을 앞에 세우고 위엄당당하게 검은 말을 타고 나타나는 이자성을 보았다.
이암이 앞으로 나아가 이자성에게 뭐라고 몇 마디 하자 이자성이 웃으며 원승지를 향해 말했다.
[참으로 기쁘오. 원형제, 이쪽으로 오시지요.]
원승지에게 오라는 손짓을 하였다.
원승지가 앞에 가 서자 이자성이 웃으며 말하였다.
[원형제, 당신은 큰 공을 세웠소. 그런데 아직까지 말이 없소?]
그러면서 그는 땅으로 내려서더니 타고 있던 마을 즉시 원승지게 주었다. 원승지는 허리를 굽히며 감사해 하였다.
이자성이 성문으로 오르면서 성 밖쪽을 바라보니 수만의 장병들이 사방에서 몰려 들었다.
성 안으로 들어오는 장병들을 보니 저도 모르게 득의만만해졌다.
츰군은 대왕을 향해 천지가 떠나갈 듯 환호하였다. 이자성은 화살 주머니에서 화살 3개를 꺼내어 활시위를 당기며 장병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들은 들으시오. 입성 후에 어떤 사람이라도 선량한 백성을 해치거나 간음하고 약탈하는 경우에는 단칼에 목을 베어 버리겠소.]
그러자 10여만 장병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환호했다.
[대왕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대왕만세! 대왕만세! 대왕만세!]
원승지도 그러한 이자성의 위풍있는 자태를 보고 마음속으로부터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와 커다란 소리로 목청껏 외쳤다.
[대왕만세! 대왕만세! 대왕만세!]
이자성은 군중에 싸인 채 승천문을 향해 걸어갔다. 가는 도중에 그는 고개를 돌려 원승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아버님의 뜻을 이었고, 나는 하늘의 뜻을 거행했소!] 그러면서 활을 당겨 쏘았다. 화살은 씨익 소리를 내며 날아가 현관의 중간에 있는 <천>자 밑에 박혔다. 이런 그의 위력을 보고 군중들은 다시 한 번 함성을 질렀다. 덕성문에 이르자 태감 왕덕화가 삼백여명의 태감들을 이끌고 엎드려 츰왕 이자성을 맞아들였다.
이자성이 원승지를 향해 갑자기 물었다.
[작년 협서에서 나를 만났을 때 오늘의 이 영광이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소?]
원승지가 대답했다.
[대왕이 대업을 이루시리라는 것은 천하의 백성들이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 줄 예측하지 못한 것 뿐이지요.]
그러자 이자성은 기쁜 나머지 손뼉을 치며 웃어제꼈다.
그때 어떤 사람이 황급히 달려와 이자성에게 보고했다.
[대왕! 어떤 태감이 말하기를 숭정이 매산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자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원승지에게 말했다.
[당신이 빨리 가서 잡아 오시오.]
원승지는 <예!> 하고 대답한 뒤 호계남 등을 이끌고 매산으로 급히 향했다.
매산은 그저 작은 구릉에 불과했다. 군중들은 원승지의 뒤를 따라 산을 올랐다. 올라
보니 커다란 나무 밑에 두 사람이 매달려 죽은 채 바람부는 방향대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흰색과 남색으로 된 짧은 옷 위에 검은 색의 띠를 두르고, 흰색의 비단조끼와 흰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의 왼발은 벗겨진 채였고, 오른발은 비단 버선에 빨간 색의 궁중 신발을 신고 있었다.
원승지가 다가가 그의 머리카락을 헤치고 얼굴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그는 바로 숭정황제였다.
그의 옷 앞에는 이렇게 혈서로 쓰여 있었다.
<경이 등극한지 17년이 되었다. 그 동안 외적의 침입이 4차례나 있었고, 도적들이 일어나 경성까지 쳐들어왔다.
경이 덕이 없어 백성들이 굶주린 것은 하늘의 천벌을 받았음이다. 경이 죽음에 이르매 지하에 계신 선조들에게 대할 면목이 없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려 사죄를 받으려 한다.
도적들은 나의 시체를 찢어 없앨 땐 백성 중의 한 사람도 다침이 없게 하라.>
원승지는 그 혈서를 읽자 만감이 교차하였다. 20년 동안 벼루어온 원수의 비참한 최후를 보니 기뻐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측은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원승지는 혈서의 내용에 슬픔이 맺혀 속으로 답하였다.
(참으로 당신의 말은 사탕처럼 달콤하오. 무슨 면목으로 백성의 한 사람도 다치지 말란 말을 하오. 조금 일찍 그렇게 백성을 사랑했더라면 천하가 오늘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오.) 홍승해가 말했다.
[원상공, 저쪽에 매달린 사람은 태감입니다.]
원승지가 말했다.
[숭정이 죽을 때 오직 이 태감 한 사람만이 옆에서 보좌를 했군. 빨리 시체를 거두어 다른 사람으로부터 보호해야겠소.] 원승지는 보고를 하러 돌아왔다. 이자성은 이미 황궁으로 들어가 있었다. 문을 지키던 츰군이 원승지를 알아보고 궁으로 인도했다.
이자성은 용좌에 앉아 있었고 10여명의 장성들이 그를 호위하고 있었는데 의관이 허술한 소년 하나가 그 아래 서 있었다.
이자성은 원승지를 보더니 물었다.
[황제는? 그를 데리고 와라!]
[숭정은 자결했습니다.]
원승지가 대답했다.
이자성은 잠시 멍해 있더니 숭정의 유서를 받아 보았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소년이 갑자기 엎드려 통곡을 했는데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다.
이자성이 원승지를 향하여 말했다.
[저 아이가 태자이다.]
원승지는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이어 이자성이 태자에게 물었다.
[너의 집안이 왜 천하를 잃었는지 너는 아느냐?]
태자가 대답했다.
[간신 온체인과 주연유 등을 부왕께서 신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자성이 웃었다.
[조그만 아이가 사실을 알기는 아는구나.]
그는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너의 부왕은 우유부단하고 사리판단이 흐렸다. 천하백성들은 가난에 봅시 허덕거렸다. 오늘 너의 부왕이 처참하게 죽었지만 그가 17년 재위한 동안 천하백성들중, 그렇게 죽어간 사람은 수천만에 이르렀고 그 상황은 더욱 처참하였다.]
태자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있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도 빨리 죽여 주시오.]
원승지는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걱정하는 마음이 앞섰다.
이자성이 다시 태자를 향해 말했다.
[너는 아직 어린애이고 죄도 짓지도 않았는데 내가 어찌 함부로 널 죽인단 말이냐?]
그러자 태자가 말했다.
[그럼 몇 가지 청할 것이 있사옵니다.]
[한번 말해 보아라.]
[제발 우리 조상의 묘를 그대로 보존해 주시고 우리 부모의 시체를 잘 매장해 주십시오.]
이자성이 대답했다.
[당연한 일을 가지고 왜 내게 부탁을 하는 것이지?]
태자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을 해치지 말아 주십시오.]
이자성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바로 백성이었고, 우리 백성들이 경성을 공격했는데 어찌 백성을 해치겠느냐?]
태자가 말했다.
[그럼 당신은 백성을 죽이지 않는단 말씁입니까?]
이자성은 갑자기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열어 보였다. 그의 가슴은 어깨에서 온통 채찍 자국이어서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이자성이 말했다.
[나는 본래 선량한 백성이었는데 탐관오리의 횡포와 매질을 견디다 못해 결국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흥! 너희 부자는 모두 인자하고 덕이 있는 체하며 말로만 백성을 사랑하고 있구나! 하지만 우리 군 어느 한사람이라도 너희 고초를 안 겪은 사람이 있는 줄 아느냐?]
태자는 조용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자성은 옷을 바로 입으며 말했다.
[가거라. 네가 태자인 점을 고려하여 왕에 봉해 주겠다. 그리고 너로 하여금 백성들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알게 해주겠다. 너를 무슨 왕에 봉할까? 음, 너의 부친이 강산을 내 손에 넘겨 주었으니 너를 송왕에 봉해 주겠다.]
태감 조화순이 옆에 서 있다가 끼어 들었다.
[빨리 황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감사의 표시를 하시오.] 태자는 노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손을 휘둘렀다.
딱 소리가 나더니, 조화순의 뺨에 5개의 손가락 자국이 붉은 줄을 그었다.
이자성이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런 불충불의한 간신은 때려야 한다. 이봐라! 저놈을 데려가 없애버려라.]
그 소리를 듣고 조화순은 놀라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그가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땅에 닿게 조아리는 바람에 그의 이마는 온통 피범벅이 되었다.
이자성은 계속 그를 발로 걷어차며 말했다.
[썩 꺼져 버려! 만일 다시 네 얼굴을 보게 된다면 그땐 끝장을 내주겠다!]
태자도 그의 뒤를 따라 고개를 꼿꼿이 들고 걸어 나갔다.
이자성이 원승지에게 말했다.
[저 어린애는 도무지 굽히려 들지 않아. 난 그런 애를 좋아하거든.]
원승지가 <그렇군요.>하고 대답했다.
승상 우금성이 말했다.
[주상의 큰 업적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명조가 이미 민심을 잃었지만 저 태자는 저렇듯 꼿꼿하니 아마도 대왕에게 끝내 귀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 이 다음에 그의 이름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습니다. 만일 지금 제거하지 않는다면 후환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이자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변했다.
[맞는 말이다. 그 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라.]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송헌책을 보며 말했다.
[듣기로는 황제에게 공주도 한 명 있다 했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도리가 없구나.]
원승지가 얼른 대답했다.
[황제께서 그녀의 한쪽 어깨를 베어 버리셨으므로 제가 그 공주를 집에서 치료해 주고 있습니다. 그녀의 상처가 아물면 데리고 나와 대왕을 뵙도록 하겠습니다.]
이자성이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놀랍소. 당신의 공이 거기까지 미치다니! 당신에게 상으로 무엇을 줄까 궁리하던 참이었는데 그 공주를 당신에게 주겠소.]
원승지는 급히 대답하였다.
[아니오, 아닙니다. 그... 그 태자를...... 대왕께서, 그의 생명을 살려 주시길 간청하옵니다.]
우금성이 웃으며 물었다.
[원형제, 무엇이라고요? 참으로 영웅은 소년이라더니, 유장군 등의 공로가 크다 하나 대왕은 그들에게 그저 몇 명의 궁녀를 상으로 내렸을 뿐이오. 당신은 아직 부마가 되지도 않았는데 처남부터 생각한단 말이오?]
원승지는 그의 말에 가시가 있는 것을 알고 몹시 불쾌하여 <태자가 그렇게 어린아이인데 어찌 그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이자성이 다시 말을 이었다.
[원형제, 나는 무관을 9품으로 나누었소. 유종민은 일품이고 당신의 이형제 이암은 이품장군이오. 당신은 삼품장군에 봉하겠소.]
원승지는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황공하옵니다. 소인은 대왕을 위해 죽음을 무릅 쓸 수 있사오나 관직은 원하지 않습니다.]
우금성이 웃으며 말했다.
[원형제는 칠성무림 맹주인데 이 삼품장군의 관직이 너무 낮다고 여기시오? 대왕의 통치 아래에서 토지를 가진 백성이 군신보다 못할 것이 없소. 무슨 칠성맹주나 팔성맹주와 같은 그런 칭호는 오늘 이후로 모두 금할 것이오.]
이자성은 우금성의 말이 너무 심한 것을 듣고는 원승지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음을 띤 채 말했다.
[당신의 나이가 그렇게 어림에도 불구하고 공로는 적지 않으니 앞으로 나를 따라 준다면 승진할 기회가 있지 않겠소?] 이에 원승지가 대답했다.
[소인은 직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한낮 시골뜨기이므로 절대로 관직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자성이 <하하하!> 웃었다.
[나도 한낮 평범한 시골사람이 아니던가요? 그런데도 황제까지 되지 않았소?]
원승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물러났다.

x x x x

원승지가 막 호동에 들어서니 병사들의 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지르며 욕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어서 수십 명의 츰군이 손에 칼을 든 채 급히 달려나왔다.
원승지는 속으로 <이렇게 많은 츰군이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지?> 하고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하여 문에 다다랐다. 하척수가 갈고리를 휘두르며 아직 집안에 남아 있는 십수명의 츰군을 마구 죽이고 있었다.
원승지가 소리쳤다.
[그만 두시오. 칼을 거두시오. 모두 우리의 한민족이오!] 하척수가 소리를 질렀다.
[사부님.]
츰군은 이틈을 타서 벌떼처럼 도망쳐 나갔다. 한 명의 병사가 원승지 앞에 와서 그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당신...... 당신도 우리 대왕의 부하가 아닙니까?]
원승지가 대답했다.
[그렇소. 여러분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 병사는 씩씩 거리며 외쳤다.
[오해? 흥! 보시오. 당신의 동료가 이렇게 많은 우리형제들을 죽였소!]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땅에 있는 7, 8구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러자 철나한이 튀어나오며 욕을 해댔다.
[개자식들, 너희들 한 번 들어봐라. 창을 들고 금은을 내놓지 않으면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하더니 하소저를 보자마자 미쳐 날뛰었지? 그리고는 그녀를 반역자라 하면서 끌고 가려고 했지? 망할 놈들, 너희와 명조와 관병이 무슨 차이가 있느냔 말이냐?] 그는 주먹을 휘둘러 그 병사를 쓰러뜨렸다.
원승지가 안으로 들어서니 정청죽과 호계남 등이 분을 못이기면서 방금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말했다. 츰군이 입성한 후에 그들은 민가를 점령하고 간음하고 약탈하는 등 무슨 짓이든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것이었다.
원승지가 저으기 놀라면서 말했다.
[이와 같으면 민심을 크게 잃을 것이오. 나는 대왕께서 성 위에 화살 3개를 쏘면서 살인과 약탈을 엄히 경계한다고 정하신 것을 직접 보았소. 내가 당장 가서 대왕께 아뢰올 것이오.] 정청죽이 멀리서 말했다.
[맹주, 츰왕의 부하들 중에는 도적출신이 많은데 그들이 처음으로 이곳 경성에 와서 보니 별천지인지라 그리된 것일지도 모르오. 며칠만 더 기다려 보았다가 그때가서 대왕께 진언하는 것이 어떻겠소?]
원승지가 대답했다.
[안됩니다. 며칠이 지나면 북경성 안의 백성들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백성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격이오. 어찌 더 기다릴 수 있겠소?]
막 말을 마칠 때 밖에서 별안간 함성 소리가 진동했다.
원승지 일행은 깜짝 놀라 문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는 무수한 사람과 말들이 정조자호동 출구를 에워싸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까 철나한에게 쫓겨난 병사가 말 위에서 손에 칼을 든 채 소리쳤다.
[원승지, 권장군이 당신에게 전하라고 했소.]
원승지가 물었다.
[정말 권장군의 분부더냐?]
다른 한 명의 군인이 영전을 꺼내 놓았다.
[여기 권장군의 영전이 있소.]
원승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만약 가지 않는다면 형제간의 의를 상할 것이니 권장군을 보고 그의 부대가 더 이상 난동을 부리지 말도록 전해야겠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좋아. 내가 너희와 함께 같이 가겠다.]
그러자 그 병사가 소리쳤다.
[묶어라.]
칠팔 명의 병사가 앞으로 몰려나와 밧줄을 꺼내어 묶으려 했다. 원승지는 담담한 표정을 지을 뿐 저항하지 않았고, 도리어 손을 뒤로 내주며 묶기 편하게 해주었다.
철나한, 사천광 등이 일제히 나섰다.
[누구를 감히?]
그리고는 그들을 공격하자 원승지가 말했다.
[여러분들, 가만히 계시오. 내가 권장군을 직접 보고 얘기하겠소.]
그 병사는 하척수를 아구로 오인하였는지 하척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여자는 숭정황제의 공주로 한 손이 잘렸소. 권장군께서 원하실 것이니 그녀를 데리고 가겠소.]
병사들이 우르르 하척수를 향하여 달려들었다.
하척수는 쇠갈고리를 휘둘러 그들을 저지하면서 웃으며 말했다.
[권장군이 나를 무엇하러?]
그 병사가 말했다.
[북경을 치는데 권장군의 공로가 가장 컸소. 그러니 숭정의 공주는 당연히 권장군의 소유가 되는 것이오. 좋은 말로 할 때에 빨리와서 남은 일생의 부귀를 누림이 좋겠지.......]
하척수가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그럴 듯한데.... 만일 내가 안가겠다면?]
그 병사가 말했다.
[어디 이런 말 많은 것이 있나? 데려갓!]
하척수가 소리쳤다.
[사부님, 그 권장군이 나를 빼앗아다가 후실로 삼으려는 모양인데 가야 되겠어요? 대답을 해주세요.]
원승지가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그저 몇 병의 병사가 하척수를 끌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하척수는 교만하게 웃으며 반항하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그녀를 끌던 병졸들이 하늘을 본 채 드러눕더니 움직거리다 죽어버렸다. 원래 하척수의 옷 위에는 독약이 발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 병사는 놀라서 소리쳤다.
[의군에 저항하니 저것들을 죽여라!]
병졸들이 칼을 뽑아들며 철나한 등을 향해 목을 치려 하였다.
일이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그들이 손을 묶인 채 가만 있겠는가? 칼을 빼앗아 들고 쳐들어가니 일대 격투가 벌어졌다. 츰군과 이들은 한데 섞여져서 호동에서 앞으로 나갈 수도, 후퇴할 수도 없었다.
원승지가 소리쳤다.
[너희는 가서 권장군에게 보고하라. 그리고 우리 모두 대왕 앞에 나가서 시비를 가려보자!]
그러면서 양 어깨를 한 번 움찔하니 그의 손목을 묶었던 끈이 잘려 나갔다. 그가 몸을 일으켜 세워 두손으로 2명의 장교를 잡고 막아선 다음 외쳤다.
[장교들은 남아 있고 사병들은 모두 진영으로 돌아가시오.] 병사들은 장교가 잡힌 것을 보고는 감히 싸우지 못하고 물러갔다.
원승지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흔들더니 호계남과 홍승해로 하여금 두 명의 장교를 끌도록 하고 이자성에게로 갔다.
궁으로 들어가니 대전에서는 연회가 성대히 베풀어지고 이자성은 장군들과 흥겹게 대작하고 있었다. 이미 약간 술이 취한 이자성은 원승지를 보고 말했다.
[잘왔소. 원승지, 당신도 와서 한잔 받으시오.]
원승지는 <예!> 라고 말한다음 이자성에게 가서 술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이자성 좌측에 앉아있던 장군 한 명이 일어나 말했다.
[원승지, 너 간덩이 큰 녀석, 누구의 힘을 믿고 감히 내 부하를 죽였지?]
온 얼굴에 수염 투성이고 자태가 거칠고 호탕한 걸 보니 권장군 유종민인 듯했다.
원승지가 물었다.
[이 분이 권장군이십니까?]
그 사람이 말했다.
[그렇다. 대왕이 너에게 고작 작은 장군에 봉했을 뿐인데 나를 우러러 보지 않고 감히 내 부하를 죽여?]
그는 칼집에 손을 가져가 반쯤 칼을 빼다가 도로 집어 넣었다.
순식간에 연회장의 수백 사람이 조용해졌다.
원승지가 말했다.
[대왕이 입성할 때 누구든 백성을 살해하거나 약탈하고 간음할 때는 목을 치겠다는 명령이 있었소. 나는 본군의 병사가 백성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 막았을 뿐, 고의가 아니었으니 권장군은 이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유종민이 비웃으며 말했다.
[이제 천하는 대왕의 세상이다. 우리는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이 강산을 쳐서 얻었는데 우리의 맘대로 할 수 없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너 혼자 백성 운운하며 민심을 수습하려하는 저의는 무엇이냐?]
원승지가 말했다.
[대왕께서는 아까 말씀하시길 자신도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유종민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대왕이 강산을 칠 땐 백성이었지만 오늘은 천하를 얻었고 용좌에 앉았으니 천하를 명할 수 있는데 어찌 아직도 백성이란 말이냐? 이 애숭이가 아직 뭘 모르고 지껄이는군.]
이자성이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그만들 하시오. 모두 내 형제니 그런 작은 일로 서로의 기분을 상하지 마시오. 자, 와서 한잔씩 하시오. 종민, 당신은 원승지가 공주를 얻은 것에 대하여 화풀이를 하는 모양인데 황궁안에는 미녀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맘대로 고르시구려.] 유종민이 말했다.
[대왕! 그렇지만 숭정이 공주는 한 명뿐입니다.]
이자성은 원승지를 향하여 말했다.
[그가 당신의 공주를 저렇게 원하니 내 얼굴을 봐서 그에게 양보해 주시오. 두 사람 다 신하이니 사이가 좋아야 할 것 아니겠소?]
원승지는 그 말을 듣자 놀라서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는 손에 힘이 풀려 들고 있던 컵이 땅바닥에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나게 되었다.
이자성이 노라며 말했다.
[그대가 허락하지 않을 셈이라면 내게 화가지 낼 건 없지 않소.]
원승지가 놀라 급히 허리를 굽혔다.
[소인이 감히 어떻게.......]
갑자기 대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몇 명의 병사가 여자 한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녀는 이자성을 향하여 끊임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난 후 일어섰다.
촛불이 그녀의 얼굴에 비치자 사람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원승지는 무공을 닦아 정신이 극히 안정되어 있는지라 아구와 동침할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범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여자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동하며 <천하에 이런 미모의 여인이 있다니>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눈빛을 굴리며 무리들을 한 사람씩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게 될ㄸ마다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모두들 전신이 따뜻한 물속에 잠긴 것 처럼 포근하고 편안한 마음이 되는가 하면 앉아 있는 자리가 갑자기 붕붕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녀(賤女) 진원원이 대왕을 뵙고 만수무강을 비옵니다.] 이자성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여자로고!]
유종민이 이어 말했다.
[대왕, 그 숭정공주는 원하지 않을테니 저 여자나 제가 하사해 주십시오.]
우금성이 말을 가로챈 듯 급히 말했다.
[유장군, 진원원은 진수산 해관의 총병관 오삼계의 애첩으로 천하의 제일미인(第一美人)이라 칭하오. 대왕께서 특별히 불렀는데 어찌 감히 당신이 넘보는 것이오?]
유종민이 이자성이 원한다는 말을 듣고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눈을 돌려 진원원을 보더니 한숨을 쉬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순간, 연회장은 무서우리 만큼 고요해졌다.
갑자기 쨍그렁하면서 어떤 사람이 컵을 땅에 떨어뜨렸다. 연회장을 맴돌던 정적이 깨졌다. 이어서 쨍그렁, 쨍그렁하면서 두 사람이 연이어 컵을 떨어뜨렸다.
원승지가 컵을 깨뜨릴 때 이자성은 진노하였는데 이대는 사람들마다 모두 진원원의 미모에 홀려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돌연히 바로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장군 한 명이 <허허>하는 신음소리를 내더니 탁자 밑으로 기어가 진원원의 다리를 안았다.
진원원은 비명을 지르며 피했다.
또 다른 쪽에 있던 장군은 <아이구 더워, 아이구 더워!> 하면선 윗도리를 풀어 제꼈고, 또 어떤 장군은 <미녀 아가씨, 당신이 내 손에 든 이 술잔을 마셔 준다면 죽어도 좋겠소!> 하며 술잔을 들어 진원원의 입술에 갖다 대었다.
일시에 모두들 마음이 부풀어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웠던 장수의 기백은 물거품처럼 부서진 듯하였다.
한결같이 진원원의 미색에 빠져 버린 것이었다.
원승지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며 그곳을 빠져 나오려는데 갑자기 이암이 <대왕 앞에서 너무 무례하지 않소!> 하며 큰 소리를 내질렀다.
한 장수가 <하하> 크게 웃었다.
[이렇게 손톱 하나로 미인의 하얀 뺨을 만지는 것 가지고 너무 그럴 건 없지 않소!]
그는 손톱을 내밀며 한발한발 진원원에게 다가갔다.
이자성이 말했다.
[저 여인을 후궁으로 보내고, 송헌책 네가 병사를 데리고 지키도록 해라!]
송헌책이 대답하고 진원원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니 수십 명의 군관들은 일시에 벌떼처럼 몰려가서 한 번더 보려고 다투었다. 드디어 그림자까지도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서야 안타까운 듯이 서서히 돌아와 앉았다.
어떤 사람은 코를 연신 벌름거리면서 <미인의 향기는 맡아봐도, 맡아봐도 향기롭네 그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설령 사람을 잡아먹는 요괴라해도 한 번 안아보기나 하고 잡혀 먹혔으면 좋겠군.> 하고 말했다.
이자성은 한잔 한잔 술을 들이키면서 얼굴에는 즐거운 빛이 역력한 채 사람들의 이러한 추태에 대해서도 마음에 별 거리낌없는 듯 했다.
이암이 몇 발짝 앞으로 나서더니 말했다.
[대왕, 오삼계는 산해관(山海關)을 점령하고 있으며 그의 병사가 4만입니다. 또 요민족이 8만이며 모두 싸움을 좋아합니다.
대왕께서는 이미 사람을 파견하시어 항복을 요청하셨으니 그의 애첩을 다시 돌려 주시는 것이 이로울 것입니다.]
그때 유종민이 냉소하였다.
[오삼계 4만 군대가 무엇이 그리 두렵소? 북경성 안에 숭정의 관병이 10만이 넘고 거기에 우리까지 합하면 두려울 것이 무엇이란 말이오?]
그의 말에 이자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삼계의 사소한 일은 마음 쓰지 마시오. 그가 투항하면 그것은 좋은 일이고, 투항하지 않으면 뺏으면 될 거 아니오? 오삼계가 설마 손전정이나 주우길보다 강하다고야 볼 수 없지 않소?] 이암이 말했다.
[대왕께서는 이미 북경을 얻으셨다고는 하나 아직 강남을 점령한 것이 아니.......]
이자성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자, 모두들 술이나 더 마십시다. 지금은 국가의 대사를 논할 시각이 아니오. 자, 마십시다!]
이암은 그저 <예!>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물러선 다음 원승지 옆에 앉아 낮은 소리로 말했다.
[모든 일체를 조심하시오. 특히 권장군을 조심하시오.] 원승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성이 몇 잔의 술을 더 마신 다음 큰소리로 외쳤다.
[자, 이제 돌아갑시다. 하하! 하하!]
그리고 나는 듯이 일어나더니 탁자를 발로 걷어차며 들어갔고, 나머지 사람들도 해산했다.
원승지는 이암을 따라 나온 뒤, 문 밖에서 호계남과 홍승해를 만나 두 명의 장교를 풀어주라고 분부했다.
네 사람이 막 모퉁이를 돌아설 때 수십 명의 츰군이 커다란 저택에서 약탈을 하며 두 명의 부녀자를 끌고 나오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두 부녀자는 울부짖으며 따라가지 않으려 몸부림 치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이암은 너무 화가 나서 상관을 불러 물으니 츰군들은 장군이 오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부녀자와 재물을 팽개친 채 도망쳐 버렸다.
다시 다른 길로 접어드니, 군사들의 환소성과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범벅이 되어들려왔다.
거리거리, 골목골목마다 츰군들이 뛰어다니며 어떤 사람은 재물을 등에지고, 어떤 사람은 부녀자를 보란 듯이 안고 다녔다.
이암은 참을 수 없고 어쩔 수도 없어 그저 한숨만 지을 뿐이었다.
원승지는 이자성이 천하를 얻기만 하면 그때부턴 태평성대요, 백성들은 생활이 안정되고 굶주림에서 벗어나리라 생각했었다.
오늘, 이자성과 유종민의 언행과 천지에서 약탈하는 군사들을 보니 숭정시대보다 나아진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바라던 꿈은 물거품처럼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다시 몇 발짝을 걷다보니 땅바닥엔 몇 구의 시체가 있었는데 2명의 여자가 발가벗겨져 온 몸이 드러난 채로 죽어 있었다. 난자당한 시체들의 상처에선 아직도 피가 멈추질 않고 있었다.
원승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암의 손을 잡고 외쳤다.
[형님, 형님이 말씀하시던 <츰왕은 백성을 위하여 원망하고 백성을 위하여 화를 낸다...>는 것이 이것입니까?]
그리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원승지 답지 않은 처절한 모습이었다.
이암도 분을 막을 길이 없었다.
[내가 곧 가서 대왕을 만나 뵙고 즉시 약탈을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려 달라고 해야겠다.]
그는 원승지를 끌고 황궁으로 돌아와 친위대 병사에게 급한 일이 있어 츰왕을 뵙겠다고 말했다.
병사가 보고하러 들어갔다. 조금 지난 후 나와서 말했다.
[제장군, 대왕은 이미 잠드셨습니다. 누구라도 감히 깨울 수 없습니다. 내일 다시 오시지요.]
이암이 말했다.
[난 대왕 옆에 수년 간이나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 뵙기를 청하면 대왕은 한밤중에라도 일어나 만나 주었다. 네가 가서 다시 아뢰어라.]
그 병사는 다시 들어가 잠시 후 돌아올 때는 샛노란 얼굴이 되어 두려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왕은 몹시 노하시어 소인이 다시 한 번 더 간다면 제 목을 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암이 말했다.
[좋다. 내가 여기서 기다릴테니 대왕이 깨시면 내게 알려 주도록 해라.]
그리고선 원승지를 향해 말했다.
[원형제, 먼저 돌아가 쉬시오.]
[저도 여기에 형님과 함께 있겠습니다.]
호계남과 홍승해는 청청이 걱정되어 먼저 돌려 보냈다.
날이 밝아서야 병사가 나와 <대왕을 만나 보십시오.> 라고 말하면서 두 사람을 어떤 방으로 안내하였다.
그리고 2시간 쯤 지나고 정오가 되었다. 이자성은 시종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초조해 했다.
해가 뉘엿뉘엿 서편으로 넘어가고 미시(未時;15∼17시)가 되려 하는 때에 송헌책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물었다.

[이장군, 원장군! 두 분이 어쩐 일로 여기 계시오?]
이암이 대답했다.
[우리는 대왕을 뵈러 왔소. 병사가 나와 알현(謁見)하라고 하여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기다렸으나 대왕께선 아직 나오시지 않으십니다.]
송헌책이 한숨을 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늘 오후 대왕이 소집하는 장군회의가 있었는데 두 분을 여기서 기다리게 하셨단 말이오?]
이암이 놀라서 물었다.
[무엇이라고?]
송헌책이 말했다.
[우금성이 계속 대왕 앞에서 당신을 모함하고, 또 나를 헐뜯는 말을 했답니다.]
이암이 화가 나서 말했다.
[당신과 나, 두 사람 옳은 길을 가고 또한 행동도 그릇됨이 없었는데 무슨 험담을 할 게 있단 말이오?]
송헌책이 대답했다.
[대왕이 하남에 있을 적에 인심이 흉흉하여 그때 내가 한 가지 계략으로 <십팔해아주신기(十八咳兒主神器)>라는 말을 만들어 세상에 퍼뜨렸지요. 十八子 (18명의 어린애)를 합치면 <李>자가 되는데 다시 말하면 대왕이 당연히 천하를 얻을 것이라는 뜻이지요. 무식하고 배움이 없는 백성이 들으면 천운은 대왕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으니 백성들도 모두 이 말을 따르게 되어 우리의 기세는 불이 붙기 시작했지요. 이장군은 또 기억나는 것이 있으시오?]
이암이 대답했다.
[왜 기억을 못하겠소? 내가 동요를 만들었고 당신이 그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동요시킨 그것도 공로가 아니겠소?]
송헌책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우금성이 대왕에게 모함하기를 그 <십팔해아주신기>라는 말은 대왕을 가리킨 것이 아니고 이장군을 가리킨다는 것이라고 했답니다.]
이암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는 역대의 황제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 그의 보좌를 뺏으려 한다는 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고조, 명태조 등이 수하의 사람들을 그렇게 죽인 것도 그들이 자신의 지위를 뺏을 까봐 겁이 나서 취한 행동들이었다.
만일 이자성이 그 말을 믿는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노릇이었으므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저... 저... 저...>라고만 하고 있었다.
송헌책이 말했다.
[대왕은 총명하시어 필히 믿지 않으실 것이니 걱정은 마십시오 그러나 오늘 장군회의에서 유장곤, 장장군, 곡장군, 라장군 등이 모두 입을 모아 제장군이 청렴결백함을 스스로 드러내고 칭찬하면서도 그들의 부하가 민가의 백성들에게 은 몇 냥 빌리거나, 아낙네들과 몇 마디 나눈 것을 가지고 제장군의 부하가 너무 간섭한다고들 하였습니다. 또한 우금성이 덧붙여 말하기를 제장군은 청렴결백함을 드러내 놓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라 민심을 수습해 큰 뜻을 이루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암은 기가 막혀 말을 못하고 얼굴이 창백해져 텅 소리를 내며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송헌책이 말했다.
[내가 제장군을 위해 몇 마디 말을 했더니 장군들이 모두 나를 욕하기를 사람 같지도 않다느니, 귀신같다느니,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한다느니 해서 화가 난 김에 튀쳐 나왔습니다. 친위대병사가 두 분이 여기 있다고 일러주길래 와보았습니다. 대왕께서 지금 불쾌해 하시니 기다리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암이 그의 손을 마주잡고 말했다.
[송군사의 은혜에 어찌 감사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송헌책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우리가 비록 북경을 얻었지만 강남은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오삼계도 아직 항복하지 않았소. 만주의 달자들도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니 불안한 상태입니다. 오늘 장군회의에서는 제장군을 헐뜯는 일 외에 그저 어떻게 하면 투항한 명조 부호들의 재물을 약탈해 낼까 하는 것뿐이니 대사를 이루려는 사람들의 시야가 너무 좁을 따름입니다.]
세 사람은 한숨을 쉬면서 궁을 나와서 헤어졌다.
원승지는 송헌책의 말을 듣고 비록 그가 세 척도 안되는 키에 원숭이처럼 흉칙하게는 생겼지만 말하는 것을 보아 식견이 높다고 여기면서 이암에게 말했다.
[형님, 그 송군사가 실로 인재인 것 같군요.]
[그는 지혜롭고 계략에 뛰어남이 실로 존경할 만하오. 대왕은 지금 우금성의 말만 듣고 송군사의 말은 무시하나 본데, 사실 대왕의 많은 공략 적전이 모두 송군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오.] 두 사람은 묵묵히 손을 잡고 수백 보를 걸어 나갔다. 그러다가 이암이 먼저 말했다.
[아우, 대왕은 이미 의심의 눈길로 나를 보지만, 신하는 무릇 충성해야 하고 친구는 무릇 의리가 있어야 하니 나는 대왕의 대업이 실패한다 할지라도 입을 다물고 무슨 말도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아우는 조정의 일에 상관말고 미리 화를 피하도록 하시오.]
원승지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관직을 맡을 인재가 아닙니다. 형님께서 예전에 말하시길, 일을 치룬 후엔 형님과 저 산속에 은거하며 음주장담을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사직하지 않으시고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십니까?]
이암이 대답했다.
[대왕은 앞으로 많은 일들을 해야만 하고, 강남을 평정한 다음 천하가 통일이 되면 그때 나도 돌아가겠소. 대왕께서 예전에 나를 믿어 주셨는데, 그의 앞날에 위험이 첩첩이 쌓은 것을 보고 어찌 죽음으로서 그 은혜를 갚지 않을 수 있겠소?]
두 사람은 다시 손을 잡고 한참을 걸었다. 그때 서북쪽에 불길이 하늘로 찌르는 것이 보였는데 츰군이 민가를 또 방화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암과 원승지는 요사이 이런 꼴을 수도 없이 보았으므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중에 작은 골목 안에서 어떤 사람이 호금을 타는 소리와 늙은이의 노래 부르는 소리가 갑자기 들려 왔다.
<관직이 없는 것이 이리 편한 것을. 임금과 호랑이를 보좌하는 것은 옛부터 이르기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세 번 죽었다 깨어남처럼 쉽지 않다 했거늘......>
골목에서 한 눈 먼 늙은이가 천천히 걸어나오면서 호금을 타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노래가 계속 이어졌다.
<자서의 공이 크니 오왕이 시기하고, 문종은 오를 멸하고 몸이 두쪽났네. 안타깝다! 회음에서 당하니, 무묘명만 남았구나. 누구의 공이 서장군을 따라갈꼬? 신기묘출하는 유백온도 다른 방법이 없고, 명조태조 황제된 후 문무공신 모두 죽였구나. 이런고로 머리 돌려 죽음에서 도망쳐라. 급히 머리 돌려 죽음에서 도망쳐라.......>
이암은 여기까지 들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명조의 개국공신 서달, 유기 등이 모두 태조에게 죽음을 당했다. 저 맹인은 이미 시대의 변천을 알고 있구나. 그렇지 않으면 어찌 저런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맹인의 옷은 남루하였다. 그는 사실 노래를 불러 먹고 사는 노인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세상이 어수선해져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돈을 내고 노래를 들었을까?
맹인은 계속 노래를 불렀다.
<...... 군왕은 명령을 내려 신하를 잡아 병사들로 둘러싸이게 하고 끈으로 꽁꽁 묶어 몸과 마음을 두렵게 만든다네. 미워할 수도 없고 그저 바다 속에, 우물 속에 몸을 던질 수 밖에. 후회해도 늦었으니 죽이고 명예 뺏고. 오늘의 한줄기 영웅혼신. 어제의 만리장성.......>
그는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이암과 원승지의 옆을 지나 또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노래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처량함만 더해갔다.

x x x x

원승지가 마음이 울적해진 채 돌아오니 대청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가 그를 보더니 급히 달려왔다.
[작은 사부님, 돌아오셨군요.]
자세히 보니 옷은 남루하고 뒤에는 긴 칼을 찼는데 바로 최추산의 조카 최희민이었다.
원승지도 기뻐하며 물었다.
[당신도 오셨군요. 어쩐 일입니까?]
최희민은 몸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어 양손으로 받쳐 올렸다.
원승지가 겉봉을 보니 <자유제제자(字諭諸弟子)>라고 씌여 있는데 분명 사부님의 필적이었다. 그는 우선 두 손을 모아 경의를 표한 다음 겸손하게 받아 펴 보니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화산파는 역대 이래로 조정관직에 동요되지 않았다. 오늘에 이르러 츰왕의 대업이 이룩되었고 오파의 제자의 공도 이루어졌으니 물러나와 사월 보름저녁에 모두 화산의 봉에서 모이기 바란다.......>
아래에는 <청(淸)>이라는 서명이 쓰여 있었다.
원승지가 말했다.
[4월 보름이면 앞으로 한 달도 채 못 남았으니 출발하도록 합시다.]
최희민이 대답했다.
[그래요. 저의 삼촌과 안대낭과, 소혜도 모두 가려고 하고 있어요.]
원승지는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청청이 안보여서 초원아에게 물었다.
[청청은 어디갔지?]
[한참동안 보이지 않았어요. 제가 가서 찾아볼께요.] [아니, 내가 가서 찾아보지.]
원승지는 청청의 방 밖에서 문을 몇 번 두드리며 <청청, 나야.
나, 나라니까> 하고 말했으나 방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조금있다 다시 두드렸으나 역시 반응이 없었다.
원승지가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방안에는 그녀의 옷과 장검도,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유해관 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먼 길을 떠난 모양이었다. 원승지는 다급해져서 여기저기 찾아보니 그녀의 배게 밑에 쪽지 한 장이 있었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미 금지옥엽(金枝玉葉)이 있는데, 왜 나 같은 사람을 원하겠어요?>
원승지는 한참을 멍청히 서 있었다. 마음이 몹시 심난해서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처럼 성심성의껏 그녀를 대하는데 그녀는 항상 좁은 소견으로 나를 의심하는구나. 사내 대장부하는 일이 광명을 쫓는 길이라 해도 마음의 안정을 구하고자 함은 변함없는데. 우리는 매일 강호에서 생사를 같이 했는데 어떻게 사사건건 의심을 한단 말인가? 청청, 너는 정말 나의 마음을 모르는구나.)
마음이 여기까지 이르니 무척 울적해졌다.
(그녀에게 지난번에 화가 나서 나갔을 때 서양병에게 붙들려 위험에 처했었다. 이번에도 이렇듯 병사들이 천지에 깔렸는데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원승지가 침대 위에 앉아 울음을 쏟아내려고 할 때 초원아가 조용히 방으로 들어오니 넋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는 그를 보고는 깜짝 놀랬다.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방안으로 뛰어들며 서로 위로의 말과 함께 한마디씩 의견을 내놓았다.
초원아는 아직 어리긴해도 사리에 밝은지라 단호하게 말했다.
[원상공, 서둘러도 소용이 없어요. 하아가씨의 무예가 뛰어나니 누구도 감히 그녀를 넘보지 못할거에요. 그러니 이렇게 해요.
당신의 집회 일자가 가까워졌으니 벙어리, 삼촌, 하언니 등과 함께 먼저 화산으로 가세요. 저는 여기 남아서 아구를 지키고, 사천광, 철나한, 호계남 사숙등과 우리 금룡방 사람들은 나가서 하아가씨를 찾겠어요. 강호에 알려서 칠성의 호걸들에게 도움을 청해 찾아 볼게요. 찾은 후에는 곧 그녀를 데리고 화산의 집회에 참석하겠어요.]
원승지는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초아가씨의 생각이 옳으니 그렇게 합시다. 정청죽 방주와 초아가씨는 공주를 북경으로부터 멀리 피신시키도록 하시오. 척수는 아직 정식으로 우리 파에 속하지 않았으니 내가 사부님을 만나 말씀드리겠소. 그러니 이번에는 화산에 갈 필요가 없겠소.] 하척수는 같이 따라가겠노라고 애원하고 싶었으나 갑자기 청청이 자기를 의심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번 원승지와 동행하는 것이 타당치 않을 것이라 여겨 그냥 미소만 머금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당신이 나를 안 데리고 간다면 나 혼자 가겠어요> 하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오독교 교주를 해온 터라 요즘 시국이 비록 위험에 처해 있긴 해도 아직도 아성(牙城)이 다 가시지 않았다. 그녀라면 능히 원승지의 분부도 개의치 않고 혼자 무슨 일이든 행할 수 있으리라. 그녀는 그저 화산에서 행해지는 사부들의 제사에만 관심이 있었다.
원승지는 모든 일을 다 생각한 후에 다음날 츰왕과 의형 이암을 찾아가 작별하였다.
이자성은 그를 만류치 못하고 많은 상을 내려 주었다.
원승지가 받지 않으려 하자 이암이 눈으로 받으라는 표시를 했으므로 원승지는 감사를 표시하며 받는 도리 밖에 없었다.
이암이 궁 문까지 나와 배웅하며 탄식하였다.
[아우, 공을 세우고 물러나니 참으로 좋긴 하지만.......] 그의 얼굴 빛은 침통해 있었다.
원승지가 대답했다.
[형님, 몸조심하십시오. 만일 위기에 처할 땐 소제 비록 만리 밖에 있지만 소식만 주시면 밤에라도 달려오겠습니다.]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였다.
그날 오후, 원승지와 벙어리, 최추산, 최희민, 안대낭, 안소혜, 홍승해 등 여섯 사람은 서쪽을 향해 화산으로 출발하였다.

- 계속
원제: 벽혈검(碧血劍) / 김용(金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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