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비련의 화인 1

3학년2반 | 2022.01.30 07:52:47 댓글: 0 조회: 689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5943

비련의 화인 - 김성종



----- 차 례 -----

작가 소개
1. 아이가 없어졌다
2.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3. 아이를 돌려주세요
4. 목격자를 찾아라
5. 얼굴이 까만 아이
6. 일억 원이 필요하다
7. 전화가 걸려 온 지점
8. 어디서 만날까요
9. 일억 원이 날아갔다
10. 선택이 잘못되었다
11. 중대한 과실
12. 코브라파를 잡아라
13. 그는 왜 살해되었나
14. 정보가 새고 있다
15. 과거의 애인
16. 스승과 제자
17. 길고 어두운 터널
18. 사랑의 미로
19. 낙화
20. 알리바이를 대시오
21. 네가 범인이다!
22. 아빠의 눈물
23. 혈액형
24. 혈액형을 찾아라
25. 불임 환자
26. 숫자의 비밀
27. 마지막 얼굴


작가 소개

1941년 전남 구례 출생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1971년 현대문학 시 소설 추천 완료
1974년 한국일보 최후의 증인으로 장편소설 당선
작품으로 <최후의 증인>, <여명의 눈동자>, <Z의
비밀>, <안개 속으로 지다>, <제5열>,
<국제열차살인사건> 등 다수


1. 아이가 없어졌다

그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바람까지 심하게 불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는 혼자서
비바람을 헤치고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아빠에게 학교까지 차를 태워 달라고 졸랐다. 아이의
아빠는 그렇지 않아도 귀여운 딸을 비바람 속으로
걸어가게 내버려둘 생각이 아니었다.
"암, 데려다 주고말고."
아빠의 허락에 딸아이는 좋아서 깡충깡충 뛰었다.
미모의 아내가 곁에서 그것을 지켜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도 아내 못지않게 미남이었다. 178센티미터의
큰 키에 단단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딸아이는 이제 여덟 살, 국민학교 1학년이었다.
그리고 아빠보다는 엄마를 많이 닮은 편으로 인형처럼
예뻤다.
아이의 부모가 결혼한 것은 구 년 전이었다. 그리고
일 년쯤 지나 첫딸을 얻었다. 지금의 아이가 바로 그
첫딸이었다.
그 뒤에는 자식이 없었다. 그들은 아이 하나를 더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웬일인지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무남 독녀 외딸로
무럭무럭 자라나 어느새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딸 하나밖에 없었지만 아이의 부모는 매우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 남자는 서른여덟,
여자는 서른세 살이었다. 연애 결혼이 아닌 맞선을
보고 결혼한 사이였지만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금실이 좋았다.
여자는 아파트 창가에 서서 남편이 모는 자가용이
비바람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가 다니고 있는 국민학교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이는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영리하고 명랑한 아이였다. 차가 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서자 아이는 아빠의 뺨에 입을 맞춘 다음 차에서 내려
학교 안으로 뛰어갔다.
그는 아이가 넘어질까 봐 차창을 열고, "조심해!"
하고 소리쳤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노란 우비를 입은
딸아이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다가 그는
이윽고 차를 회전시켜 회사 쪽으로 달려갔다.
누가 보기에도 행복한 가정이었다. 아들이 하나쯤
더 있으면야 금상 첨화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들
하나 없다는 것이 불행의 씨가 될 수는 없었다.
문제는 다른 데서 터졌다.
십 년 가까운 그의 운전 솜씨는 탁월했다. 차창에
부딪히는 빗물을 닦아 내는 와이퍼 소리가 꽤
요란스러웠다.
그는 FM 채널에 주파수를 맞춰 놓고 라디오
스위치를 틀었다. 조용한 음악이 차내에 퍼지자
마음이 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 후, 그의 차는 이십오 층짜리 거대한 잿빛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집어 넣은 다음
지하실에서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십 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사무실은 이십 층에 있었다.
세종로 거리를 굽어보며 솟아 있는 이십 오 층짜리
잿빛 건물은 대 종합상사의 본사 빌딩이었다.
그는 제양 상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국제부 부장이라는 중요한 자리를 맡고 있었다. 그
자리는 가장 핵심적인 자리로서 장래가 약속된,
누구나 탐을 내는 직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이사 자리에 내정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출세 가도를 머릿속에 훤히 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이미 약속된 것이나
다름없는 길이었다. 흐르는 세월이 그 모든 것을
보장해 준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별다른 사건만
없다면 말이다.
아침 나절을 간부 회의다 뭐다 해서 바쁘게 보낸
그는 열두 시 조금 전에 점심 약속이 있다고 하면서
외출했다.

오후 들어 비바람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홍상파가 회사에 돌아온 것은 세 시가 지나서였다.
그의 머리며 옷은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어휴, 어떻게 바람이 불던지 우산도 소용 없어."
하고 말하면서 그는 회전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비에 젖은 머리칼을 닦았다.
그때 전화를 받고 있던 차장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에 댁에서 전화가 왔던데요. 급히 전화를
걸어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말이야?"
그는 차장을 힐끗 쳐다본 다음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었다.
"네, 사모님한테서 전화 왔었습니다. 들어오시면
바로 집으로 전화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차장이라는 사람은 몹시 마른 체격이었다.
홍상파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무슨 일로 그러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은 안 하시고
집으로 급히 전화 걸어 달라고만
하셨습니다."홍상파는 허공을 향해 한숨처럼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다음 수화기를 집어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가 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신호가
떨어지면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보세요."
아내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매끄럽다.
"음, 나야. 전화 걸었다고?"
"네……."
아내의 숨결이 이상할 정도로 거칠게 들려 왔다.
"청미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요. 열두 시에
학교가 파했는데 지금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아내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하고 있었다.
그는 손목시계를 힐끗 들여다보았다. 세 시 십오
분이었다.
"그래서 전화 건 거야?"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되물었다.
"네, 걱정이 돼서 전화 걸었어요. 학교가 파한 지
세 시간이 지났는데도 애가 아직 안 돌아오고
있잖아요."
"학교에도 알아봤어?"
"네, 전화 걸어 봤어요. 담임 선생님도 모르겠대요.
이렇게 비바람이 치는데 어딜 갔는지 모르겠어요.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집에 오다가 친구 집에 들렀겠지. 좀 기다려 봐."
"그럴 애가 아니란 말이에요.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어디 가면 전화라도 할 텐데 전화도
없어요."그의 외동딸 청미는 매우 똑똑한 아이였다.
회사에 있는 그에게도 곧잘 전화를 걸어 어리광을
부리곤 했다. 그도 그의 아내도 그 외동딸을 끔찍이도
사랑하고 있었다.
"좀 기다려 봐, 어디 놀러 갔을 거야."
그는 아내에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알았어요."
아내는 갑자기 기운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청미 돌아오면 바로 전화해 줘."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비바람치는 창 밖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석간 신문을 펴들었다. ‘호우
주의보’라는 검은 판의 백색 글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대강 신문을 훑어본 다음 두어 군데 전화를
걸고 나서 사장의 부름을 받고 사장실로 갔다.
그가 자리로 다시 돌아온 것은 네 시경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주위를 둘러보며 집에서
전화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집에서 걸려 온 전화가
없었다고 하자 그는 급히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 안 왔어?"
"안 왔어요."
그의 아내는 거의 우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거 이상하군. 여기저기 좀 알아보지 그래."
"그렇지 않아도 알아봤어요. 친구들 집에 다 전화
걸어 봐도 오지 않았대요."
"어떻게 된 일이지?"
"가슴이 떨려 죽겠어요."
실제로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요. 혹시 무슨 사고나 안
났는지……."
"쓸데없는 소리!"
그는 노기 어린 소리로 말했다.
"어떡해요?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더 기다려 봐,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당신 좀 빨리 오세요."
"이따가 봐서.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래."
"아이가 없어졌는데 약속 같은 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없어지긴 뭐가 없어져! 쓸데없는 소리 작작 해."
그들은 언성을 높여 말했다.
"네 시란 말이에요! 네 시가 지났어요!"
"알아, 나도 알아!"
"날 저물면 어떡해요?"
"아직 시간은 있어. 다시 전화할게 기다리고 있어."
"빨리 집에 들어오세요."
그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사실 그는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온 바이어들을 접대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때부터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네 시 삼십 분에 다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 안 왔어요!"
그의 아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삼십 분만 더 기다려 봐, 다섯 시까지 말이야."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차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니야."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애가 아직 집에 안 돌아왔대."
"학교에서 말입니까?"
"학교에서는 열두 시에 파했다는데 아직까지 집에
안 돌아왔다는 거야."
직원들이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자신의 초조한 모습을 감추려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 일 학년 아닙니까?"
"음, 일 학년이지."
"어디 친구 집에 갔겠죠, 뭐."
차장은 그를 안심시키는 쪽으로 말하고 있었다.
"친구들 집에 모두 알아봤다는데 안 왔다는 거야.
학교에도 알아봤대."
"돌아올 겁니다. 저의 집 애도 한번은 학교에 가서
밤늦게 집에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친구 집에 가서
저녁까지 얻어먹고 TV의 만화까지 다 보고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은 새로 사귄 친구 집에
느닷없이 놀러 가는 수가 많기 때문에 부모로서도
아이가 제 발로 돌아오기 전에는 찾기가
어렵지요.""글쎄, 그랬으면 좋으련만……."
그는 다섯 시까지 아무 일도 못한 채 아내의 전화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다섯 시가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아이가 돌아왔다는 반가운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그가 전화를 걸자 그의 아내는 마침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알았어. 내 지금 갈게."
그는 전화를 끊고 저고리를 입었다.
"학교 간 애가 다섯 시간이 지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은 확실히 좀 이상해."그는 중얼거리면서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네, 어서 가보십시오. 걱정되시겠습니다."
차장이 근심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따라
일어섰다.
상파는 저녁의 중요한 약속에 차질이 없도록
차장에게 몇 가지 지시 사항을 일러 준 다음 급히
국제부 사무실을 나갔다.
상파와 통화를 끝낸 송묘임은 안절부절못하며 집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그녀는
초췌해져 있었다.
딸아이가 빨리 집에 돌아오지 않는 데 대해
처음에는 혹시나 했지만 지금은 거의 하나의 확신처럼
불길한 예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168센티미터의 늘씬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윤곽은 갸름하면서도 선이 뚜렷해서 얼른
보기에도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 약간 도톰한 입술과
앞으로 불룩 솟은 가슴, 그리고 까맣고 강렬한 눈빛이
몸 전체에 도발적인 분위기를 이루어 놓고 있었다.
그녀는 청바지에 빨간 티셔츠의 수수한 차림이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 매력적인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초인종 소리에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누구세요?"
그녀는 숨가쁘게 물었다.
"응, 나야."
딸 아닌 남편의 목소리에 그녀는 맥이 탁 풀리면서
문고리를 벗겨주었다.
문이 열리면서 습기 찬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남편의 큰 몸뚱이가 출입구를 막아섰다.
"아직 안 왔어?"
남편도 숨이 차 있었다.
"안 왔어요."
그녀는 힘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때르릉!"
바로 그때 전화벨 소리가 들려 왔다.
"전화 왔어!"
남편의 외침을 들으며 그녀는 거실로 뛰어들었다.
뒤이어 상파도 구두를 벗고 아내 뒤를 따랐다.
"때르르르릉!"
그녀는 넘어질 듯하면서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전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 여보세요!"
"……."
"여보세요!"
그녀는 상대방을 부른 다음 거친 숨결을 손으로
막았다.
그러나 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녀가 재차 숨가쁘게 불러대자 그제서야 흐흐흐
하는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기분 나쁜 웃음
소리였다.
"여보세요! 어디에다 전화 걸었어요?"
"흐흐흐…… 청미 집에다 걸었지."
남자 목소리였다.
"뭐라구요? 다, 당신 누구예요!"
"거기 청미 집 맞지?"
느리터분한 목소리였다.
"네, 맞아요. 당신은 누구예요? 우리 청미는
어딨어요?""으흐흐흐흐……."
뒤이어 찰칵 하고 전화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묘임은 수화기에다 대고 소리소리 지르다가 소파
위로 쓰러졌다.
"아니, 무슨 전화야?"
상파는 아내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채 숨만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반듯이 누인 다음 젖은 수건을 이마
위에 올려놓았다. 엽차를 입에 흘려 넣어 주고 한참
기다리자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아내의 팔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해 봐. 무슨
전화였어?"그는 험악한 눈초리로 아내를 노려보았다.
"어, 어떤 남자가 청미 집이냐고 물었어요.
그렇다고 하니까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어요."아내를 노려보던 그의 험한 눈초리가
갑자기 뿌옇게 흐려졌다.
"다른 말은 없었어?"
"없었어요. 유괴범이 틀림없어요."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아내가 울고 있는 동안 그는 일어서서 바지에 두
손을 찌른 채 실내를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벽에 걸려
있는 사진 액자 앞에 멈춰 섰다.
그것은 딸아이의 사진이었다.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늘인 귀여운 딸아이가 활짝 웃고 있었다. 얼굴만 크게
클로즈업해서 찍은 사진이었다. 일 년 전 여름 휴가
때 제주도에 놀러 가서 그가 찍어 준 사진이었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아내를 쏘아보았다.
"그만 울어! 울고 있는다고 애가 나타나!"
그 말에 그녀의 울음소리가 차츰 작아졌다.
"경찰에 연락해."
그녀가 고개를 쳐들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당신이 연락하세요."
그는 어금니를 깨물면서 전화기 쪽으로 접근했다.
바로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때르릉!"
아내가 수화기를 집으려는 것을 그는 황급히
말렸다.
"가만 둬!"
"때르르르릉!"
그는 전화기를 노려보다가 가만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주 점잖은 목소리로 상대방을
불렀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
그러나 상대방은 대답이 없었다.
"여보세요!"
그가 세 번째로 거칠게 부르자 그제서야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2.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그것은 마치 한밤중 고요한 시간에 무엇인가를
사각사각 갉아먹는 음침하고 기분 나쁜 쥐 소리 같은
것이었다. 홍상파는 부르르 떨면서 수화기를 꽉
움켜쥐고 큰 소리로 상대방을 불렀다.
"여보세요,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당신 도대체
누굽니까?"
"흐흐흐…… 청미가 보고 싶지 않나? 흐흐흐……."
"뭐라구! 우리 청미를 어떻게 했지?"
그는 침착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당신이 청미 애비인가?"
"그렇다! 우리 애는 어딨지?"
"내가 데리고 있지. 내가 잘 데리고 있단 말이야.
흐흐흐……."
"이 나쁜 놈! 어린애를 데려다가 어쩌자는 거야?
우리 애한테 손만 대면 넌 죽는다!"
"어디 죽여 보시지."
"애를 돌려보내!"
"돌려보내라구? 그거야 어렵지 않지. 하지만
맨입으로 되나."
"이 개자식! 짐승만도 못한 자식! 아이를 유괴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 줄이나 알아?
""흐흐흐…… 기고만장해 있군. 얼마 안 있어 코가
납작해질걸?"
곧 이어 찰칵 하고 전화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절박한 외침이 집 안을 울린 뒤 죽음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홍상파는 하얗게 굳은 얼굴로 허공을 쏘아보며 앉아
있었고, 그의 아내 묘임은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유괴당한 게 틀림없어."
한참 만에 남자가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마 그런 말을 아내에게 한다는 것이 괴롭다는 듯이.
"그럼 어떡해요?"
여자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소파를
주먹으로 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남편이
말려도 듣지 않고 딸애의 이름을 부르면서 격렬하게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갑자기 울음을 그치면서
남편에게 물었다.
"그럼 유괴범이 전화 건 거예요?"
"그런 것 같아."
담배에 불을 붙이는 그의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놈이 뭐라고 그래요?"
"자기가 청미를 데리고 있는데…… 내가
돌려보내라니까 맨입으로는 안 된다는 거야.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어. 뻔해, 돈을 노린 유괴야.""돈이
문제예요? 애를 찾아야지!"
"돈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꺼내지도 않았어. 그 전에
전화를 끊었어."
"당신이 욕을 해대니까 그렇지요!"
"그런 놈한테 그럼 점잖게 이야기하란 말이야?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인데?"
"아무리 치가 떨려도 아이를 찾는 게 급선무예요.
아이를 찾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 하겠어요."
그녀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때 또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울음을 그치고 냉큼 손을 뻗었다. 남편이
받지 말라고 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 여보세요!"
"흐흐흐……."
속을 갉아 내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아저씨, 전 청미 엄마예요. 요구하시는 대로 돈은
드릴 테니까 우리 청미를 돌려주세요. 부탁이에요,
우리 청미만 돌려주시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어요.
아저씨, 부탁이에요!"그녀는 거의 울면서 애걸했고,
그것을 바라보는 남편의 얼굴에는 경련이 일고
있었다.
"경찰에 연락했지?"
느슨한 목소리가 물었다.
"아, 아니에요! 경찰에 연락하지 않았어요.
맹세코!"맥을 놓은 것 같은 한숨 소리가 들려 왔다.
이윽고,"경찰에 연락하면 이 애는 살아 돌아갈 수
없어."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네, 잘 알겠어요. 경찰에는 절대 연락하지
않겠어요. 아저씨, 우리 청미는 어떻게
있나요?"그녀는 거의 숨넘어가는 소리로 물었다.
"잘 있어, 아주 잘 있어."
"아저씨, 요구하는 대로 들어드릴 테니까 그 애를
돌려주세요. 그애는 우리 집안의 유일한 혈육이에요.
부탁이에요, 돌려주세요!"
"외동딸이라면 그만큼 값이 많이 나가겠군.
흐흐흐……."
그 다음 말은 들려 오지 않았다. 상대방이 전화를
끊었던 것이다.
밤이 되자 비바람이 더욱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릴 때마다 그들은 겁에
질린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곤 했다.
분노와 증오로 이글거리던 홍상파의 눈빛도 어둠이
내리면서부터는 공포의 빛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어린 딸을 어쩌면 영영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얼어붙게 만든 것 같았다.
어둠과 사나운 날씨가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을 더욱 애타게 만들었다.
청미는 겁이 유난히도 많은 아이였다. 아이의
부모는 청미를 위해 방을 곱게 꾸며 주고 거기서
자도록 유도했지만 겁이 많은 아이는 한사코 부모의
품을 떠나려 들지를 않았다. 아이는 엄마보다도
아빠의 품에 안겨 자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런 아이가 낯선 남자에게 끌려갔으니, 아이를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마치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홍상파와 송묘임은 저녁 식사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은 채 범인으로부터 전화가 다시 걸려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범인으로부터는 좀처럼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다.
상파와 묘임은 아이가 유괴된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는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상파는 경찰에 즉시 신고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묘임은 경찰을 끌어들이면 절대 안
된다고 고집을 피웠다.
묘임의 주장인즉 만일 경찰에 신고하면 범인이
틀림없이 아이를 죽일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범인의 협박을 믿고 있었고, 그래서 한사코 경찰에
알리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홍상파는 그러한 아내를 설득시키기 위해 참을성
있게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냉정해지지 않으면 안 돼.
감정이 앞서면 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어. 침착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결국 범인에게 농락당하고 말아."
창문이 떨어져 나갈 듯 덜컹거렸다.
그는 두려운 눈으로 어둠 속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유괴 사건의 경우 으레 경찰에 연락하지 않고
범인과 직접 협상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아.
아이의 생명도 잃고 돈도 잃고 그래. 처음부터 경찰의
협조를 얻는 게 가장 빨리 애를 찾는 길이야.
경찰밖에는 기댈 데가 없어. 섣불리 범인과 직접
접촉하다가는 정말로 큰 비극을 맛보게 돼.""안 돼요!
경찰에 연락하면 아이는 영영 집에 못 돌아갈 거라고
했어요.""그건 협박이야, 청미는 살아 있어! 살아
있을 때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돼. 시간을 끌면
끌수록 인질을 데리고 있는 게 위험하고 귀찮아서
인질을 살해하게 된단 말이야!"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몸서리를 치면서 벌떡 일어섰다.
"청미가 죽으면 안 돼요! 청미가 죽으면 나도 죽을
거예요!"
그녀는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디 가는 거야!"
그는 허둥지둥 아내 뒤를 따라 나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그와 아내 사이를 차단시켰다.
그는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이미
하강하고 있었다.
그는 계단을 정신없이 뛰어내려갔다. 팔 층에서 일
층까지 뛰어내려가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리는 것
같았다.
아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경비원이
저쪽으로 뛰어가더라고 손으로 가리키자 그는
그쪽으로 달려가 보았다.
비바람에 눈을 잘 뜰 수가 없었다. 급히
내려오느라고 미처 우산을 가져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몸은 금방 비에 젖었다.
그의 아내는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큰길 가 가로등
밑에 서서 울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그
모습은 더없이 가련해 보였다.
그는 가만히 아내 곁으로 다가가서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전화가 왔을지도 몰라. 자, 들어가자구."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먼저 들어가세요. 청미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청미는 오지 않아!"
그는 안타까운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 말에
묘임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청미가 왜 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청미는 오지 않아, 청미는 유괴됐어. 유괴범이
그냥 그 애를 돌려보낼 리 없지 않아."
"그 애는 올 거예요."
"자, 그러지 말고 들어가자구. 당신이 이러면 애를
찾을 수 없어. 냉정하게 대처해야만 청미를 찾을 수
있어."
그는 아내를 안다시피 하고 걸어갔다.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그들을 행인들이 이상한 듯 바라보곤 했지만
그들은 상관하지 않고 걸어갔다.
"내 말 잘 들어 봐. 경찰을 개입시키지 않고 우리가
직접 접촉했을 경우 범인과의 연락은 그것으로
끝날지도 몰라. 십중 팔구 그렇게 되고 말아. 일단
범인은 돈을 챙기고 나면 다시는 연락을 취하지 않을
거란 말이야. 만일 돈을 챙기고도 아이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무슨 수로 아이를 찾지? 범인이 전화라도 걸어
오지 않으면 아이를 찾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말아.""돈을 받고도 아이를 안 보내 주는 수가
있나요?"
"있고말고! 얼마든지 있지. 영원히 미궁으로 빠진
유괴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그녀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청미가 오는 것만 같아요."
"돌아보지 마. 내가 잘 아는 사람 중에 경찰 간부가
한 명 있으니까 그 사람한테 은밀히 상의해 봐야겠어.
괜찮겠지?"그녀는 아까와는 달리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찬성하지도 않았다.
"떠든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니야. 소문내지
말고 조용히 해결해야 해. 소문내서 될 일은 하나도
없어."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팔 층으로 올라왔다.
집 안에는 그의 장모와 처남, 그리고 처제가 와
있었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것이었다.
"아니, 문까지 열어 놓고 어디들 갔다오는
거니?"장모가 뛰어나오며 물었다. 그리고 딸의 몰골을
보더니 그녀를 붙잡고 울었다.
처제도 따라 울었지만 처남만은 남자라 그런지
울지는 않았다. 처남은 신문기자였다. 처제는 언니
뺨치는 미인으로 의상실을 경영하고 있었다.
송태하는 판단이 빠르고 과격한 젊은이었다. 아직
미혼인 그는 일에 몹시 열심이어서, 남들이 볼 때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를 두고 기자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상의고 뭐고 할 것 없어요.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해야 합니다."그는 누이와 매형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범인이 알면 청미한테 해를 끼칠 텐데."
처제 지회의 말이었다. 그녀는 언니와는 달리 매우
냉철한 데가 있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범인이 알게 경찰을
동원하는 줄 알아? 범인이 전혀 눈치를 못 채게 해야
해. 감쪽같이 말이야."여자들은 모두 경찰에 신고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지만 태하의 단호한 말에 더 이상
반대하고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 경찰에 전화 걸겠습니다. 신문에 내는 것은
일이 돼가는 것을 봐서 결정하죠."
태하가 수화기를 집어 드는 것을 보고 상파가
말했다.
"경찰 계통에 잘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한테
부탁해 봐야겠어."태하는 매형을 돌아보았다.
"어떤 사람인데요?"
"대학 동기인데 고시에 패스해서 지금 시경에
근무하고 있지. 나하고는 친한 사이니까 내가
부탁하면 성의껏 해줄 거야.""저도 아는 형사들이
있긴 한데, 그러시다면 매형께서 부탁해
보시죠."태하는 사회부 기자로 경찰 출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방면에는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매형의 의견을 존중해서 수화기를 그에게
건넸다.
상파는 먼저 친구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친구의 부인과도 잘 알고 있었다. 부인의 말이,
비상이 걸려 남편은 오늘 밤 집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는 이번에는 시경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다행히 친구는 자리에 있었다.
"어, 이 시간에 웬일이야?"
굵은 목소리가 활기 있게 들려 왔다.
"집에 전화 걸었더니 오늘 밤 비상이라 하더군."
"응, 비상이라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어. 호우 주의보가 내렸거든.""알고 있어."
"거기 어디야?"
"집이야."
"제수씨도 잘 있고?"
그들은 상대방 아내를 언제나 제수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번만은 상파는 그런 농담에 끼여들지를
않았다.
눈치를 채고 친구가 조금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난처한 일이 생겼어. 도움이 필요해."
"무슨 일인데?"
"우리집 애가 없어졌어."
"애라니, 딸애 말이야?"
"응, 청미가 없어졌어. 유괴당한 것 같아.
범인한테서 전화가 왔었어.""뭐라구?"
"조용히 해결했으면 좋겠어."
"알았어. 내 지금 바로 가지."
"비상인데 바쁘지 않나?"
"괜찮아."

곽명구는 중키의 사나이였다. 일찍 고시에 패스한
그는 경찰에 투신, 남들보다 먼저 출세 가도에
들어서서 열심히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그런만큼 그는
언제나 패기 만만했다.
경찰 패트롤 카를 타고 달려온 그는 전투복
차림으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에 있는 사람들과
수인사를 나눈 뒤 그는 상파로부터 사건 내용을
귀담아들었다.
"나한테 연락하기 잘했어."
이야기를 듣고 난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묘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빠른 시간내에 찾아
드리겠습니다!"그는 아주 자신 있게 그녀를 위로했다.
시간은 자정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나는 강력 사건 담당이 아니지만, 실력 있는
형사를 보내겠어. 이 사건만 전담할 수 있게 말이야.
조만간 해결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곽명구는
상파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난 애가 다칠까 봐 걱정이야."
"걱정되겠지. 하지만 어떡하나? 참고 기다려야지.
유괴 사건은 범죄 사건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사건이야."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란 눈으로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다른 분은 받지 말고 청미 엄마나 아빠가
받으십시오. 집 안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인상을
줘서는 안 되니까요.""제가 받겠어요."
묘임이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오래 기다렸지? 흐흐흐……."
음탕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아저씨, 제발 요구대로 들어줄 테니까 우리 청미를
보내 주세요.아저씨, 요구하는 게 뭐예요?""목소리가
예쁘군."
"아저씨, 우리 청미 해치지는 말아 주세요.
부탁이에요! 아저씨, 원하시는 게 뭐예요?""당신이
필요해. 오늘 밤 어때?"
"좋아요, 어디든지 가겠어요. 요구하는 대로
드리겠어요.""몸도 주겠다 이 말이지?"
"청미만 돌려보낸다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흐흐흐…… 좋아. 그럼 말이야, P호텔 나이트
클럽으로 나와. 한 시 정각에 우리 만나는 거야.
알았지?"
"네, 나가겠어요."
"물론 혼자 나오는 거야. 사람들을 달고 나오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나 그렇게 어리숙한 사람
아니야. 알겠지?""네, 알았어요. 우리 청미도 데리고
나오시는 거죠?"
"이따가 봐서……."
그리고는 전화는 끊어졌다.
"뭐래?"
상파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범인과의 통화 내용을
이야기했다.
"개 같은 자식! 장난 치는 거야!"
태하가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장난이더라도 난 가겠어요. 아무도 따라오지
마세요."
"바보 같은 소리!"
상파가 외쳤다.
"그럼 가지 말란 말이에요?"
그녀는 벌써 일어서고 있었다.
"혼자 가면 안 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그래?"
"가보십시오."
곽명구가 그녀를 지지하고 나왔다.
"허탕치더라도 한번 가보십시오. 단번에 범인과
접촉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놈은 수없이 골탕을
먹일 겁니다. 그걸 각오하고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위험은 없을 겁니다."
"저 혼자 가겠어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건 안 돼!"
상파가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곽명구는 손을 흔들어 그를 제지했다.
"혼자서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나도 생각이 있어서
그러니까 혼자 가시게 내버려둬."


3. 아이를 돌려주세요

송묘임은 약속 시간 삼십 분 전에 P호텔 나이트
클럽에 도착했다. 남편이 차로 데려다 주겠다는 것을
한사코 뿌리치고 일부러 택시를 타고 달려왔던
것이다.
나이트 클럽 안으로 들어서면서 그녀는 문득 범인과
자신은 서로 얼굴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처지에 더구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에서 어떻게 상대방을 알아본다는
것인가.
범인이 만나자고 하면서 이쪽의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어떤 표시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애초부터 만날 의사도 없으면서 이쪽을
농락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닐까. 혹은 떠보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닐까. 그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혹시
범인이 내 얼굴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클럽 안으로 들어서면서 그녀는 소름 끼치는 전율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공포가 갑자기 그녀를 정신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이트 클럽은 지하에 자리잡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간 그녀는 입구에서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머뭇거렸다. 그러자 매끈하게 생긴 웨이터가
다가왔다.
"혼자 오셨습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 머리를 가만히 흔들었다.
"손님 찾으십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터는 아니꼽다는 듯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본 다음 들어가 버렸다.
먼저 그녀를 후려친 것은 한증막 같은 열기였다.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실내에 꽉
들어찬 사람들이 뿜어 내는 열기를 식히기에는 그것은
너무 미약한 것 같았다.
열기와 함께 탁한 공기가 밀려왔다. 사람을
질식시킬 것 같은 탁한 공기였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춤추고 있었다. 그리고 애써서 번 돈을
날리고 있었다. 마치 휴지처럼.
밴드는 디스코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귀청을
찢을 듯 요란한 음악이었다. 그것은 음악이라기보다
숫제 폭력이었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현란한 조명에
그녀는 현기증이 일었다.
그곳은 완전한 별세계였다. 나이트 클럽에 처음
와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곳 나이트 클럽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확실히 이방 지대였다.
자신은 유괴된 아이를 찾기 위해 나이트 클럽에 온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시고 춤추고 떠들어대고
있다. 남의 비극이야 알 바 아니라는 듯이.
그녀는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자신의 모습이 잘 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중간쯤
되는 자리에 앉았다. 손수건을 꺼내 머리에 묻은
빗방울을 닦아 냈다.
웨이터가 다가왔다. 그녀는 맥주를 시켰다.
웨이터가 맥주와 안주를 가져 왔다.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실내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딸애를 찾고
있었다. 범인이 혹시 딸애를 데리고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열심히 청미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딸애가 보일 리 없었다. 범인이 그렇게 순순히
딸애를 돌려보낼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 줄 알면서도 그녀는 부지런히 딸애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자식을 찾고 싶은 모정이 그녀를
그렇게 어리석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하긴
그녀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런
경우를 당하면 모두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새벽 한 시가 지나고, 한 시 삼십 분이 지났다.
그녀는 술에는 손도 대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그녀 쪽으로 힐끔힐끔 시선을 던지는 젊은
남자가 한 명 있었다. 그 역시 혼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무더운 날씨인데도 정장 차림이었고
외모가 미끈했다. 서른 서넛쯤 되어 보였다.
그는 주위를 휘 둘러본 다음 일어서서 화장실로
갔다. 소변을 보고 나온 그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여자 혼자 앉아 있는 곳으로 갔다. 두 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한번 추실까요?"
그녀는 흠칫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악마처럼 보였다. 그녀는 바르르 떨었다.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번 추실까요?"
남자가 다시 한 번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소리지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
눌렀다. 청미를 먼저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를
제지했던 것이다. 이 사내의 말을 듣지 않으면 청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공포감을 밀어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밴드는
마침 블루스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내를 따라 플로어로 나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물이 넘쳐흐르던 그녀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사내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왔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바르르 떨었다. 이윽고 그들은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남자가 미소 띤 얼굴로 징그럽게 말했다. 그녀는
공포와 증오에 찬 눈으로 사내를 쏘아보았다.
"울고 계시더군요."
"……."
"혼자 오셨습니까?"
"……."
"왜 그렇게 노려보십니까? 저도 혼자 왔습니다."
"우리 청미는 어딨어요?"
"네?"
남자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여자,
머리가 좀 돈 것 같은데? 재수 없군.
그는 스텝을 멈추고 그녀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흥분하기 시작하던 그의 몸은 급속도로 식어 갔다.
그가 플로어를 떠나려는 순간 묘임의 손이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필사적으로 움켜잡았기 때문인지
남자는 그녀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좀 도와 주세요! 이놈이 우리 애를 유괴했어요,
유괴범이란 말이에요!"
모든 것이 일순 정지하는 듯했다. 춤추던 사람들도,
음악도 멎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그녀의
목소리가 깼다.
"좀 도와 주세요! 이놈은 유괴범이에요, 우리 애를
유괴했어요!"플로어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잽싸게 흩어졌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일어섰다.
"이년이 미쳤나!"
당황한 남자는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는 여자의
손을 비틀었다. 그러나 어떻게나 억세게 쥐고 있는지
좀처럼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이거 놔! 난 유괴범이 아니야!"
그때 남자 몇 사람이 맥주병을 들고 플로어로
접근했다. 유괴범을 때려잡을 듯이 살기 등등한
모습으로.
"저 새끼, 잡아!"
"저런 새끼는 죽여야 해!"
그제서야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고
남자는 여자의 복부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묘임은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면서 뒤로 나동그라졌다.
"저 새끼 죽여!"
플로어로 의자가 날아왔다. 맥주병을 깨어 든
사내들이 우 하니 몰려들었다. 술기운에다 잔인한
군중 심리까지 가미되어 모두가 살기 등등했다.
사정을 따지려 들기보다는 감정을 폭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는 듯 플로어를 포위하고 접근해
왔다.
"난 유괴범이 아니란 말이오! 난 부산에서 출장 온
사람이오!"플로어 위의 젊은 사내는 악을 써댔지만
그것은 그에 대한 적의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플로어에서 빠져 나가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깨진 병 끝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기
때문에번번이 뒤로 물러서곤 했다.
"죽여라!"
마침내 고함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그에게 덮쳐
들었다.
그는 손과 발을 몇 번 놀리다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 위로 사람들의 손과 발이, 그리고 깨진
병이 난무했다. 비명소리도 잠깐이었다.
제물을 깔아 놓고 잔인한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 때
갑자기 호각소리가 들렸다. 출입구 쪽에서 경찰관들이
몰려 들어오고 있었다.
미친 듯 몸부림치던 사람들은 일시에 물거품처럼
꺼지고 플로어 위에는 피투성이 남자만 남았다. 그는
마치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빨리 병원으로 운반해!"
누군가가 경찰관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경찰관 몇 명이 피투성이가 된 남자를 들고 밖으로
급히 나갔다.
묘임은 그런 소동을 지켜보면서 넋 나간 사람처럼
멀거니 서 있었다. 그녀 곁에는 어느새 왔는지
홍상파와 송태하가 역시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었다.
상파의 친구인 경찰 간부 곽명구는 혼란에 빠진
실내를 정리하느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청미, 청미를 찾아야 해요."
묘임이 중얼거리자 태하가 누이 곁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 사람……틀림없이 범인인가요?"
"범인이 틀림없어."
그녀는 여전히 넋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사람이 뭐라고 그랬어?"
이번에는 홍상파가 물었다.
"도, 도망치려고 그랬어요. 청미가 어디 있느냐고
하니까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어요."그때 점퍼
차림의 뚱뚱한 중년 사나이가 묘임의 앞을
가로막았다.
"경찰입니다. 잠깐 좀 보실까요?"
그는 땀을 몹시 흘리고 있었다. 뚱뚱해서 그런 것
같았다. 조용한 눈길로 묘임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소란스러운 실내 분위기와는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
옆에는 조그만 사나이가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그
사람 역시 형사인 듯했다.
상파와 태하가 따라붙으려고 하는 것을 제지하고
그들은 묘임을 데리고 술병 등을 쌓아 두는 후미진
곳으로 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들은 곽명구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형사들이었다.

P호텔 나이트 클럽에서 낯선 여인에게 접근하려다가
유괴범으로 몰려 봉변을 당한 남자는 이름이
김인수라고 했다. 그는 중태에 빠져 무려 수십
바늘이나 꿰매야 했는데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의식을 회복한 그는 첫 마디가 이랬다.
"난 부산에서 출장 온 사람입니다. 그 여자는 미친
여자였습니다."그의 말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유괴범으로부터 집으로 다시 전화가 걸려 왔기
때문이었다. 아침 여덟 시경이었다.
범인은 상파가 전화를 받자,"흐흐흐, 청미 엄마를
바꾸시지."
하고 말했다. 그것은 무엇인가 사각사각 갉아먹는
음침하고 기분 나쁜 쥐 소리 같은 것이었다.
"나하고 이야기 합시다! 요구하는 대로 해줄 테니
제발 우리 애를 돌려보내 주시오!""바꾸라면 바꿔.
당신 마누라를 바꿔!"
상파는 입술을 깨물며 아내에게 수화기를 돌렸다.
묘임은 급히 수화기를 받아들고 상대방을 불렀다.
"여, 여보세요!"
"당신은 약속을 어겼어. 고약한 것!"
그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기분 나쁜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내가 혼자 나오라고 했는데 당신은 사람들을
주렁주렁 달고 나왔어. 그리고 나이트 클럽을
엉망으로 만들었어. 생사람을 유괴범으로
몰아세우면서 말이야. 이래 가지고서야 어디 협상이
되겠어? 이제 당신의 귀여운 딸은 영영 못 돌아가게
됐으니까 그렇게 알라구.""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약속을 깬 게 아니었어요. 저는 혼자
나갔는데 다른 사람들이 저 몰래 따라왔었나 봐요.
선생님, 부탁이에요. 우리 청미를 돌려보내
주세요!"그녀는 거의 울부짖는 소리로 말했다.
웃음소리가 작아지는 듯하더니 이윽고 전화가
끊어졌다. 그녀는 수화기를 동댕이치면서 목놓아
울었다. 아무도 그녀의 울음을 말리려 하지 않았다.
뚱뚱한 형사는 도청 장치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서
떼어 냈다. 도청 장치는 밤 사이에 설치된 것이었다.
그는 녹음 테이프를 뒤로 돌렸다가 다시 앞으로
전진시켰다.
범인과의 대화 내용이 다시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흘러 나왔다. 그
바람에 묘임의 울음소리는 쑥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대화 내용을 모두 듣고 난 뚱뚱한 형사는 스톱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묘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사모님께서는 어젯밤 큰 실수를 하셨군요.
생사람이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죽지 않았기
다행이지…….""그 사람이 위자료 청구를 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다만 얼마라도 내놓으셔야 할
겁니다."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작은 형사가 말했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해요. 위자료를
달라고 하면 드리겠어요."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형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청미를 찾아
주세요!"형사들의 얼굴에 곤혹스런 표정이 나타났다.
"우리 청미를 빨리 찾아 주세요!"
하룻밤 사이에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퀭한 눈에는 밤새 한잠도 못 잔 탓으로
핏발이 서 있었고 고운 피부는 꺼칠해져 있었다.
시선은 가끔씩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형사들은 그녀의 시선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그녀 못지않게 상파 역시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센데다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를 않았으니 초췌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 부부를 그런 모습으로 만든
것은 사랑하는 딸애를 유괴당한 데서 오는 심리적인
충격이었다.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그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겨우 두 사람이 이 사건을 맡는다는
말입니까?"한쪽에서 말없이 줄담배만 태우고 있던
태하가 형사들을 쏘아보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형사들은 그러한 그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수사 인원을 많이 투입해서 좀 적극적으로
수사해야 할 거 아닙니까?""인원이 많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닙니다. 오히려 혼란이 야기될 우려가 있지요.
필요하다면 인원 요청을 하겠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부탁을 받고 왔을 따름입니다. 언제라도……."뚱뚱한
형사는 말끝을 흐리면서 상파를 힐끗 쳐다보았다.
상파는 당황해서 그 시선을 피했다. 그들은 그의
구인 곽명구의 부탁을 받고 특별히 파견된 수사
요원들이었다.
곽이 보낸 사람들이니 우수한 요원들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성미 급한 그의 처남이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한 것이다.
"자넨 좀 가만 있어."
상파가 주의를 주자 태하는 말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마 신문사에 가는 모양이었다.
상파는 회사에 전화를 걸고, 일이 있어 출근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아직도 청미가 안 돌아왔습니까?"
이명길 차장이 근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직 안 돌아왔어."
"큰일났군요."
상파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범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뚱뚱한 형사
조태가 물었다.
"범인이 구체적으로 얼마를 내라고 액수를 말하지는
않았나요?""말 안했습니다."
상파가 대답했다.
"그거 이상하군, 전화를 걸어 올 때는 액수부터
말하는데……."조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직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돈이 필요하다는 뜻을
비치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얼마를 내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수사상 가장 기본적인 것이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마시고 협조해 주십시오. 아무리 청미
양의 부모이지만 두 분께서는 우리의 일차 조사
대상이 됩니다. 물론 형식적인 것이지만 그렇게 알고
대답해 주십시오.""그거야 당연하지요."
상파는 심문에 응할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묘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조금 전에 범인이 밖에서 전화 걸어 온 거
들으셨잖아요.""네, 들었습니다. 그건 분명히 범인이
걸어 온 전화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도 녹음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두 분을 제쳐놓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분은 청미 양의 부모이자 그 애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으니까요. 형식적인 것이긴 하지만 혹시
참고될 만한 그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당신은 가만 있어. 이분들이 하자는 대로
해."
상파는 정색을 하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상파는 뚱뚱한 형사가 자기를 심문할 줄 알았다.
그러나 뚱뚱한 형사는 작은 형사에게 눈짓을 보낸
다음 묘임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방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상파의 물음에 작은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의 한쪽 벽에는 서가가 놓여 있었고, 서가에는
각종 교양 서적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책이 많군요."
작은 형사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많기는요, 너무 바빠서 신간 서적을 사볼 시간이
없습니다. 책을 못 읽으니까 자꾸만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만 같고……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피차 일반이군요. 우리는 사건이 터지면
집에 들어갈 시간도 없습니다."허걸은 아직 마흔이 채
안 돼 보이는 것이 상파와 연배인 듯했다. 키는
작지만 단단하고 야무진 인상이 빈틈없어 보였다.
조태가 거친 인상이라면 그는 단정한 학자
타입이었다.
그는 소파에 앉고 상파는 책상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상파가 담배를 권하자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안 피웁니다. 혹시 범인 목소리를 전에 어디서
들은 적이 있습니까?""없습니다."
"누구와 비슷하다거나 그런 것도 없습니까?"
"처음 듣는 목소리입니다."
허걸은 볼펜을 집어 흔들었다.
"왜 선생님 따님이 유괴당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상파가 미처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가
다시 물었다.
"다시 말해 범인은 왜 하필 선생님 따님을
유괴했을까요? 다른 아이들도 많은데
말입니다.""글쎄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 이유를 생각해 보시지 않았나요?"
"그럴 틈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부자신가요?"
너무 직선적인 질문에 상파는 멀거니 형사를
바라보았다.
"부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먹고 살 만은 합니다."


4. 목격자를 찾아라

조그만 수사관은 무엇을 찾을 듯 깊숙한 눈길로
상파를 바라보았다.
상파는 담배꽁초를 비벼 끄고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부자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왜 하필
선생님 따님을 유괴했을까요? 돈이 필요하다면 부잣집
자식을 유괴할 게 아닙니까?""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는 노골적으로 얼굴에 불만을 나타내며 대꾸했다.
똑같은 질문에는 똑같은 대답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 허걸을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체구가 작은 형사의 얼굴빛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상하군요."
"저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편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괴범은 반드시 돈 많은 집 자식들만
유괴하지는 않습니다. 유괴하기 쉬운 대상을 골라
범행한 다음 돈을 요구하기도 하지요. 웬만큼 사는
부모라면 자식을 찾기 위해 거액을 마련하는 것이야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집을 팔거나
빚이라도 내서 아이를 찾으려 들 겁니다. 그런
점에서는 재벌급 인사의 자식보다는 평범한 집 자식이
오히려 범행 대상으로 안성맞춤일지 모르지요. 재벌
집안 자식을 건드렸다가는 신문에 대서 특필되는 등
해서 오히려 시끄러워지기만 할 거고, 결국 돈 한푼
받아 내지도 못한 채 실패로 돌아갈 공산이 크지요.
이건 범인이 돈을 노렸을 경우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다르지요."형사는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반응을
기대하는 듯 말을 중단하고 상파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일순 두 사람의 시선이 차갑게 부딪쳤다.
먼저 시선을 돌린 사람은 상파였다. 그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에는 비가 뿌리고 있었다. 장마가 시작되고
있었다. 어제 같은 호우는 아니었지만 질펀하게
내리는 비였다.
잘생긴 그의 옆얼굴 모습이 흡사 조각 같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할 듯하다가 도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형사는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꼿꼿한 자세로
이야기했다. 그의 그런 자세는 상대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기에 족했다.
"돈을 노리지 않은 경우라면…… 변태 성욕자의
짓이거나 원한 관계일 수도 있죠. 나이 어린 소녀만을
노리는 유괴범이 있는데…… 그런 경우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상파는 얼굴을 홱 돌려 형사를
바라보았다. 부릅뜬 두 눈에는 공포와 증오와 경악의
빛이 서로 엇갈리고 있었다.
"혹시 누구한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습니까?""없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지도 않은 일로 해서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상파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원한을 살 만한 일은 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담배꽁초를 비벼 끈 다음 숨을 깊이 들이켰다.
그리고 두려운 눈빛으로 허걸을 바라보았다.
"만일 변태 성욕자의 짓이라면 어떡하지요?"
"글쎄요……."
처음으로 형사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렇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지요. 내 생각에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변태 성욕자의 경우 야욕을
달성하는 게 목적이니까 전화를 걸어 온다든가 하는
짓은 하지 않지요. 하지만 범인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그것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돈을 노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은 수사를 혼돈시키기 위한
위장일 수도 있으니까요."그때 형사는 상대방 남자의
눈에 눈물이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는데 이윽고 눈에 가득 찬 눈물이
볼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한동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겪고 있을 심적 고통을 생각하니 허걸은
공연히 그를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가장 기본적인 조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형식적인 것이라 해도.
"한 가지만 더 물어 보겠습니다. 어제 일정을 대강
말씀해 주시겠습니까?"그제서야 홍상파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어제 집을 나선 것은 여덟 시경이었습니다.
보통때는 일곱 시 반에 집을 나서서 여덟 시면 회사에
출근하는데 어제는 비바람이 심하고해서 삼십 분쯤
늦게 출근했습니다. 출근하면서 우리집 딸애를 학교
앞에 내려 주었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오 분
거리밖에 안 되기 때문에 평소에는 걸어서 학교에
가는데 어제는 비바람이 몹시 심해 제가 차에 태워다
준 겁니다. 그러니까 그 애는 여느때보다 삼십 분
일찍 학교에 간 셈이지요. 차 타고 가느라고 일찍 간
겁니다.""저도 그 날 아침 비를 흠뻑 맞았지요.
모처럼 택시를 타려 해도 차가 오지 않는 바람에,
버스 정류장까지 나가느라고 온통 빗물을
뒤집어썼지요."허걸은 수첩에다 요점을 적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상파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이십 분 내지 삼십 분 걸리는데
어제는 교통이 혼잡해서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아홉 시경에 회사에
도착했습니다. 회사에 출근하면 제일 먼저 간부
회의에 참석합니다. 간부 회의가 끝난 것은 열 시
조금 지나서였습니다. 열두 시경까지 회사일을 보다가
바이어와 점심 약속이 있어서 S호텔에서 식사를
하면서 상담을 했습니다. 상대방은 마크 스코트라는
미국인 신발 장수로 신발 회사 부사장이었습니다.
소피아라는 여비서를 데리고 왔는데, 신발을
주문했습니다. 거기서는 인건비가 비싸니까 여기서
주문대로 만들어 주면 전량 수입하겠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운동화 십 만 켤레였는데 우리
쪽에서는 저와 김덕기 상무가 나갔습니다. 회사에
돌아온 것은 세 시경이었고, 그때서야 사고가 난 줄
알았습니다. 다섯 시까지 회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집사람 독촉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지요."그는 비교적
소상히 자신의 행적을 이야기했다. 허걸은 더 이상
물을 것이 없었다.
"상담은 잘 됐나요?"
"네,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거의 된 거나
마찬가집니다. 별다른 사고가 없다면…….""회사일도
바쁘실 텐데 회사에도 못 나가고 어떡하죠?"허걸은
처음으로 걱정스런 얼굴이 되어 물었다.
"회사일이 문젭니까. 우리 애를 찾지 못하면 내
인생도 끝입니다."홍상파는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비참하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충혈된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허걸은 그를 외면했다. 남자의 눈물을 차마 직시할
수가 없었다. 딸을 찾지 못하면 자신의 인생도
끝장이라는 그의 말을 그는 실감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자식을 둔 부모들의 똑같은 심정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불행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내
왔습니다. 너무나 행복하게 살아온 셈이지요. 호사
다마라고, 그래서 아마 마가 낀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군요. 아이를 유괴해
가다니……."비참하게 일그러져 있던 그의 얼굴이
서서히 증오의 빛으로 변해 갔다. 그는 갑자기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만일 경찰이 찾지 못하면 내 손으로 찾아낼
겁니다. 십 년이 걸리든 이십 년이 걸리든 기어코
찾아내고야 말 겁니다. 만일 그 동안 우리 딸아이한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난 유괴범을 찾아내어 복수를
할겁니다."감정을 억제하며 조용히 흘러 나오는
말이었기 때문에 더욱 극하게 들려 왔다.
허걸은 수첩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이는 우리가 곧
찾아내겠습니다."
안방에서는 조태가 송묘임을 상대로 거의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좀더 날카롭게
캐묻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집을 지키고
있었던만큼 이번 사건에 대해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처음 그는 이렇게 물었다.
"아이를 못 찾을 경우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말에 그녀는 충혈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잔인하시군요. 우리 청미를 찾지 못하면 저는
살아갈 수 없어요. 청미가 죽으면 저도 죽을
거예요."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그녀의 미모에 내심 감탄하면서도 그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청미와 헤어진 것이 몇 시였습니까?"
"어제 아침 여덟 시경이었어요. 언제나 여덟 시
반에 집을 나서는데 어제는 비바람이 몹시 불어서
아빠 차를 타고 가느라고 좀 일찍 나갔어요.""그게
마지막이었나요?"
"그 뒤로는 보지 못했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아이의 옷차림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겉에는 노란 비옷을 입었어요. 청바지에 남색
티셔츠를 입었고 머리는 양쪽으로 땋어요.""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처음이에요.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뚱뚱한 형사의 조그만 눈이 더욱 작아졌다.
"미안한 질문이지만…… 왜 딸아이 하나만
두셨나요?"그것은 예상 못한 질문이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한동안 입술을 깨물며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 후 그녀는 그를 외면한 채 말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왜 그런지 둘째 아이가
생기지 않아요."그 점에 대해서 더 자세히 묻는다는
건 너무 실례되는 일이다. 조태는 방향을 돌렸다.
"청미를 학교에 보내고 나서 어디서 무슨 일을
하셨나요? 그러니까 여덟 시부터겠군요.""쭉 집에
있었어요. 세 식구뿐이니까 언제나 저 혼자 집에 남게
돼요.""집에서 한 발짝도 밖에 안 나가셨어요?"
주저하는 빛이 그녀의 얼굴에 나타났다.
"집안 청소를 하고 나서…… 이웃집에 놀러
갔어요.""그게 몇 시쯤이었나요?"
"아홉 시 반쯤이에요."
"몇 호에 놀러 가셨나요?"
그녀는 위를 힐끗 쳐다보았다.
"12층 5호에 놀러 갔어요."
"그 집 사모님하고 가까운가요?"
그녀는 시선을 떨어뜨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뭘 하셨나요?"
"그냥 앉아서 잡담했어요."
"몇 시까지 거기에 계셨나요?"
"열두 시까지 거기에 있었어요. 청미가 열두 시
조금 지나 집에 돌아오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집에
돌아왔어요.""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셨나요?"
"한 시까지 기다려도 아이가 돌아오지 않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돌아오겠거니 하고 두
시까지 기다려 봤어요. 두 시, 세 시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같은 반 아이들은 모두 집에
돌아와 있었는데 유독 우리 청미만 돌아오지
않았어요. 학교에 전활 걸어 보았더니 그 애 담임
선생님 말이 열두 시에 수업을 끝내고 모두 집에
돌려보냈다는 거였어요. 나중에 학교까지 가보았어요.
혹시나 해서 화장실까지 뒤져 봤어요. 그 애는
없었어요."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말끝을 잇지
못했다.
뚱뚱한 형사는 오른손으로 턱을 받치면서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 여자의 말은 모두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그는 일단 그렇게 생각해 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수사관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일단 의심해 볼 필요는 있는 것이다.
아무리 유괴된 아이의 엄마라 하더라도 그녀의 말을
모두 믿어서는 안 된다. 청미는 수업이 끝나자 바로
집으로 돌아온 게 아닐까. 집에서 증발된 게 아닐까.
그는 다시 묘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깨를
떨면서 가늘게 흐느끼고 있었다.
"왜 따님이 유괴당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범인은 돈이 필요한 모양이에요. 그런데 어젯밤
일로 범인은 다시는 우리 애를 보지 못할 거라고
했어요. 그놈이 우리 애를 해쳤을지도 몰라요."그녀의
어깨가 격하게 흔들렸다.
"유괴범들이 으레 하는 수작입니다. 너무 그렇게
절망적으로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대처해야 합니다. 돈을 노린 것이라면 범인은 돈을
받아 내기 위해 몇 번 시도를 해올 겁니다. 단번에
포기하고 인질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헌데 왜
하필 따님을 유괴했을까요? 저는 그 점이 납득이 안
갑니다.""저도 그건 모르겠어요. 많고 많은 아이들
중에 왜 하필 우리 애를 유괴해 갔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깊은 원한을 풀려고 그런 짓을 자행할
수도 있지요."그 말뜻을 알아차리고 그녀는
발작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저희는 누구한테 원한 산 일 없어요. 그이나 저나
그런 일 없어요. 결혼해서 그이는 직장에 나가고 저는
집안일 돌보고…… 그런 일밖에 없었어요.""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두 분 사이는 어떠십니까? 무슨
문제는 없습니까?""아빠하고 말인가요?"
"네, 청미 아빠하고 말입니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요. 탈이라면
서로를 너무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는 점일 거예요.
우리는 한쪽이 없으면 아마 혼자서는 못 살아갈
거예요.""두 분은 연애 결혼 하셨나요?"
"아뇨, 중매 결혼 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연애 결혼
이상으로…….""알겠습니다. 청미와 아빠 사이는
어땠습니까?""그 애는 저보다 아빠를 더 따랐어요.
아빠도 그 애를 끔찍이 사랑했고요. 하루에도 서너
번씩 집으로 전화를 걸어 그 애가 잘 있는지 확인할
정도였어요."조태는 자신의 불룩한 배 위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그의 두 손은 살이 쪄서 아이들처럼
통통했다. 그는 두 손을 서로 만지작거리면서
상대방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 부인께서는 아빠가 청미를 너무 끔찍이
사랑하는 것을 보고 질투를 느끼신 게
아닙니까?"그녀의 안색이 하얗게 굳어 갔다.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머리가 흔들렸다.
"세상에…… 어쩌면 그런 말씀을……."
그녀는 원망 어린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조태는 통통한 두 손으로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미안합니다."
조태는 일어서서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허걸이 상파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조태는 허걸 옆에 다가앉으며 귓속말로 지시를
내렸다. 허걸은 끄덕이고 일어섰다. 아파트를 나온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십이 층으로 올라갔다.
조태는 청미의 방으로 들어갔다. 깔끔하게 정리된
어린 소녀의 방이 그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방 안은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한쪽에는 침대가
놓여 있었고, 창가에는 책상이 있었다. 벽지는 각종
동물 그림들로 채워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인형이며
장난감, 그리고 저금통 따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위쪽 벽에는 소녀의 사진들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액자는 모두 세 개였다. 하나는 엄마 아빠와 함께
아빠의 품에 안겨 찍은 것이었고, 두 번째 것은
유치원 졸업식 때 찍은 것, 나머지 하나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모습이었다.
귀엽고 예쁘게 생긴 소녀였다. 아빠보다는 엄마를
많이 닮은 얼굴이었다. 이렇게 예쁘다면 문제가 좀
있겠는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범인이 만일 흉악한
놈이라면 이렇게 예쁜 소녀를 가만 둘 리 없다.
요즈음에는 나이 어린 소녀를 능욕하는 사건이
유난히도 빈발하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웃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그의 시선을 자꾸만 끌었다. 소녀의 웃음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 올 것만 같았다.
책상 옆에는 자그마한 책장이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국민학교 1학년 학생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거의가 동화와
동시집들이었고, 만화도 몇 권 있었다.
그는 의자를 끌어내어 그 위에 엉덩이를
올려놓았다. 의자가 작아서 엉덩이 한쪽 부분만
지탱할 수 있었다. 의자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삐걱거렸다.
그는 책장에서 만화를 한 권 빼내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한두 장 넘기던 손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만화의 재미에 빨려 들어갔다.
중간쯤 보았을 때 문이 열리고 허걸이 들어왔다.
그런 줄도 모르고 조태는 만화에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 허걸은 한심하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다녀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음, 어떻게 됐어?"
조태는 만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청미 엄마가 어제 열두 시경까지 그 집에서 지낸
건 사실입니다. 뭘 하면서 보냈는지도 밝혀
냈습니다."그는 밖으로 말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말했다.
"뭘 했대?"
"동네 여자들 세 명하고 비디오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란 것이 섹스
필름이었습니다."비로소 조태는 고개를 돌려 후배
형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술 한쪽을 밀어
올리면서 야릇하게 웃었다.
"어떤 섹스 필름이야?"
"그거야 뭐 뻔한 거 아닙니까."
조태는 어금니를 딱딱 마주쳤다. 그리고 두 손을
벌려 보이며 일어섰다.
"여편네들이 대낮에 집 안에 둘러앉아 섹스 영화를
감상했단 말이지? 그거 정말 근사한
이야긴데.""한심합니다. 남편은 밖에서 뼈빠지게
일하고 있을 때 그런 것이나 감상하고
있다니…….""그것도 공부를 못한 여자들이라면
모르지. 거의가 대학 교육을 받았다는 여자들이 그런
것으로 여가 선용을 한단 말이야. 하긴 뭐, 그런 걸
많이 봐 둬야 밤에 남편을 근사하게 위로할 거
아닌가."그들은 함께 상파의 집을 나섰다. 청미가
다니는 학교까지 걸어가 보기 위해서였다.
"엄마가 섹스 필름을 감상하고 있을 때 아이가
유괴당한 거군.""그렇죠."
"홍 씨한테는 비밀로 해둬. 그걸 알면 마누라를
가만두겠어? 나 같으면 작살을 내겠어."허걸은 미소를
짓다가 말았다.
보통 걸음으로 걸었는데 학교까지는 꼭 오 분
걸렸다. 학교는 아파트 단지 맞은편에 위치해 있었다.
"오 분이 문제의 시간이군."
"네, 학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오 분
사이에 유괴당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친구
집이나 어디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면 말입니다."그들은 우산 밑에 나란히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오 분이 문제군. 이 일대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데 어떻게 눈에 띄지 않고 유괴를 하지?""수백
명의 어린이들이 한꺼번에 몰려 나왔을지도
모르죠.""그렇지, 그러니까 유괴가 더욱 어려웠을
거란 말이야. 왜 하필 그런 시간을 택해서 유괴를
했을까?"허걸은 우산을 높이 쳐들었다. 조태는
거구였기 때문에 우산을 높이 쳐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이 보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데려간 것이
아닐까요? 1학년 정도의 어린이라면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데려갈 수 있지 않습니까? 범인이
어린이와 아는 사이라면 더욱 그게 가능할
겁니다."조태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은 어땠습니까?"
"이상 없어. 홍 씨는?"
"마찬가집니다."
그들은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목격자가 있을 거야. 그 목격자를 찾아야 해."


5. 얼굴이 까만 아이

청미의 담임인 예쁘게 생긴 여선생은 형사들을
대하자마자 눈물부터 쏟았다. 눈치를 챈 다른
여선생들도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닦아 냈다.
담임 선생은 청미를 몹시 예뻐했던 것 같았다.
그녀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청미를 칭찬하더니 다시
울기 시작했다. 교장을 비롯해서 여러 선생들이 그들
주위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형사들은 그녀를 데리고
숙직실로 자리를 옮겼다.
담임 교사 박선희는 스물다섯 살의 처녀였다.
그녀는 교사가 된 지 사 년 만에 처음으로 1학년
담임을 맡은 것인데 하필 자기 반 아이가 유괴되는
바람에 그야말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학교가 파한 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녀가
책임질 일은 못 되지만 아무튼 담임 교사로서
책임감을 안 느낄 수 없었다.
"어제 청미 양이 분명히 학교에 왔었나요?"
"네, 틀림없이 왔어요."
"정확히 몇 시에 수업이 끝났나요?"
"열두 시에 끝났어요."
"그때까지 청미는 학교에 있었나요?"
"네, 있었어요."
그녀는 틀림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수업이 끝나자 바로 집으로 돌아갔나요?"
"네, 주의깊게 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걸로 알고
있어요. 학교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두 명의 형사는 순서 같은 것도 없이 닥치는 대로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당황하고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자기가
아는 한 성실히 대답해 주었다.
"어제 열두 시경엔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많은 엄마들이 아이들 마중을 나왔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네, 우산을 들고 학교까지 찾아온 엄마들이
많았어요."
"빗속으로 어린아이들이 집에 가기 위해 몰려
나갔는데…… 혹시 따라 나가 보시지 않았나요?"
1학년 담임이면 걱정이 되어서라도 차도까지 따라
나가 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거기에 대해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 차도까지 따라 나가 길을 건네
주는데 어제는 마침 때맞춰 전화가 걸려 왔어요. 좀
긴 통화였어요. 전화를 받고 나서 나가 보니까 이미
아이들은 학교 밖으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어요."
그것이 큰 실책이었다는 듯 그녀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청미의 성격은 어떻습니까?"
"더없이 명랑하고 활달해서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아요."
"그렇다면 어제 집에 돌아갈 때 혼자 가진
않았겠군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함께 간 아이를
찾았는데 그런 아이가 없어요. 몇 번이고 물어
보았는데 집에 갈 때 청미를 본 아이가 없어요. 참
이상해요. 비가 많이 오고 그래서 집에 돌아가느라고
정신들이 없었나 봐요."
"청미 부모 중 누가 학교에 찾아오나요?"
"그야 물론 청미 어머니께서 찾아오시지요."
"자주 찾아오는 편입니까?"
"네, 자주 찾아오시는 편이에요. 한 달에 두어 번은
찾아오세요. 다른 어머니에 비해 좀 극성인 편이에요.
청미를 무척이나 사랑하시니까 그러신 거겠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청미 엄마는 어제 마중을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청미가 비옷에 우산을 가지고 갔다고
하지만 어린애가 비바람 속을 걸어오는데 마중을
나가지 않았다.
섹스 필름에 몰두하다 보니까 우산 들고 나가는
것이 귀찮아졌거나 아니면 깜박 잊었겠지.
"아시겠지만 학교에서 청미네 아파트까지는 걸어서
오 분밖에 안 걸립니다. 만일 청미가 집으로 곧장
갔다면 그 오 분 사이에 유괴당한 겁니다."
오 분이라는 시간은 유괴를 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시간이다. 물건을 차에 싣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어린애라 하지만 사람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끌고
가는 것인데 그것을 오 분 사이에 해치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박선희는 오 분이라는 말에 새삼 놀라는 듯했다.
그녀로서는 그렇게 구체적인 시간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오 분이라는 시간은 매우 짧죠.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목격자가 있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는 학교에서 빠져 나오는 어린이들도 많았고
학교 앞에는 행인들도 많은 편 아닙니까?"
"네, 그래요. 하지만 우리 반 아이들한테 물어
봤더니 청미를 본 아이가 없대요."
"저희들이 학생들을 모아 놓고 물어 보면 안
되겠습니까?"
박 선생은 당연히 그래야 되겠지만 일단 교장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교장은 그것을 쾌히 허락해 주었다. 자기 학교
학생이 유괴당한 마당에 그만한 편리쯤 봐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낯선 어른들이 들어서자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일제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 여러분……."
박 선생은 아이들의 주의를 자기 쪽으로 유도했다.
"내 말 잘 들어야 해요. 여러분, 홍청미가 누구죠?"
"내 짝이에요."
남자 아이가 한 손을 높이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
아이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네, 청미는 우리 1학년 5반의 착한 어린이죠?"
"네!"
아이들은 병아리 같은 입으로 일제히 대답했다.
"청미는 여러분의 친구지요?"
"네!"
"그런데 청미가 오늘 학교에 안 나왔어요. 어제
집에 들어오지 않았대요. 청미가 어디 갔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어요. 청미 엄마 아빠는 지금 몹시 걱정하고
계셔요. 여러분, 우리 청미를 찾아야 할까요, 찾지
말아야 할까요?"
"찾아야 해요!"
아이들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청미를 찾아야 하지요. 자, 그럼 지금부터
여기 계신 아저씨들의 말을 잘 듣고 바른 대로 대답해
주어야 해요. 여기 계신 아저씨들은 청미를 찾기 위해
애쓰시는 경찰 아저씨들이에요. 자, 우리 애쓰시는
아저씨들을 위해 박수 한번 쳐요."
아이들은 웃으며 힘껏 박수를 쳤다. 짓궂은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기까지 했다. 조태가 눈짓을
하자 허걸이 교단 위로 올라섰다.
수십 개의 천진스런 까만 눈동자들을 대하자 젊은
형사는 당황했다. 너무도 맑고 투명한 빛에 그는
자신의 오염된 육체가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착한 어린이들이기 때문에 바른 대로
대답해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바른 대로
대답해 주면 우리는 청미를 빨리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여러분들이 숨기거나 틀리게 대답하면
청미를 찾기가 어려워집니다."
"틀리게 대답하면 잡아가나요?"
청미의 짝이라는 아이가 당돌하게 물었다. 아이들은
긴장한 눈으로 형사를 바라보았다. 허걸은 대답하기가
난처했다.
"1학년 5반에는 모두가 착한 어린이만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을 거예요. 학생 이름은 뭐지요?"
청미의 짝은 발딱 일어섰다. 영양 과다로 몸뚱이가
비만해진 아이였다.
"고릴라!"
누군가가 소리치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까르르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청미의 짝은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흔들었다. 고릴라는 그의 별명인 것
같았다.
박 선생이 나서서 아이들을 나무랐다. 장난해서는
안 되며 진지하게 아저씨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주의를 주자 아이들은 잠잠해졌다.
"학생 이름은 뭐지요?"
"김철호입니다."
비만아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철호는 어제 집에 갈 때 청미하고 함께 가지
않았나요?"
"아뇨."
아이는 단호하게 머리를 저었다.
"그러면 함께 가지는 않았어도 청미가 집에 가는
것은 봤겠지요?"
"네, 봤어요."
아이의 대답이 갑자기 작아졌다. 별로 자신이 없는
듯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미는 누구와 함께 가던가요?"
거기서 비만아는 대답이 막혔다.
"정말 봤나요?"
철호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아까는 봤다고 대답하지 않았나요?"
아이의 자세가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깨물었다. 얼굴이 붉어지면서 입술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잘 모르겠어요."
아이는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네, 수고했어요. 자리에 앉아 주세요."
철호는 자리에 털썩 앉더니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분하다는 표정이었다. 시끄럽던 실내는
어느새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져 있었다.
아이들은 낯선 아저씨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허걸은 아이들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여러분들 가운데 어제 학교 공부를 끝내고 집에
돌아갈 때 청미하고 함께 간 사람 있으면 손을 들어
보세요."
그는 똑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고 기다려 보았다.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아무도 손을 들려고 하지
않았다.
허걸은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도 없나요?"
그는 아이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입을 다문 채 하나같이 빤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거짓의 그림자 같은 것은 비치지
않았다.
"그럼 집에 갈 때 청미를 본 사람도 없나요?"
아이들은 역시 대답이 없다.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고 있다.
시야에 들어오는 수십 개의 얼굴들 가운데 얼핏
눈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는 지나치다가 그쪽을
주시했다. 여럿 가운데서 그 얼굴을 찾는 데는 육감
같은 것이 필요했다.
그 얼굴은 다른 빛나는 얼굴들에 가리워 빛을 잃은
채 가만히 날개를 접고 있었다. 남자아이였는데
유난히 작고 초라한 차림이었다. 얼굴은 까맣게 타
있었고 머리칼은 윤기를 잃어 누르스름했다.
얼른 보기에도 몹시 가난한 집 아이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아이에게서 취할 점이 있다면 유난히 큰
두 눈이었다. 다른 아이들의 눈이 천진스럽다면 그
아이의 눈은 지혜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다른
아이들과는 그 점에서 어쩐지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허걸은 그 아이로부터 얼른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청미와 제일 친한 친구는 누군가요?"
"저요!"
한 아이가 손을 들자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나왔다.
그 아이들도 어제 집에 갈 때 청미를 보지 못했다고
단언했다. 허걸은 얼굴이 까만 아이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 아이는 그의 시선을 피해 딴 곳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처럼 떠들거나 하지 않고
무성한 그늘에 묻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주눅이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어제 청미가 누구하고 함께 걸어가는 걸 본
사람 있나요?"
같은 내용의 물음을 조금씩 표현을 바꾸어 가며
되풀이해서 물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보았다고
말하는 어린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교단을 내려온 허걸은 담임 선생을 한쪽으로
불러 얼굴이 까만 어린이에 대해 물어 보았다. 박
선생은 아이가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이 반에서 제일 가난한 집 아이예요. 불쌍한
아이예요. 하지만 공부는 제일 잘해요."
"얼굴 표정이 어둡고 말이 통 없군요."
"네, 본래 그래요. 통 말이 없고 조용하기만 해요.
다른 애들에 비해 아주 어른스러워요. 그런데 왜
그러시는데요?"
박 선생은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아, 아닙니다. 마음에 걸려서 좀 물어 본
것뿐입니다."
"그 애는 고아예요."
"그래요?"
"외할머니 밑에서 살고 있는데…… 그 할머니는
시장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고 있어요."
그 소년의 이름은 최민기라 했다. 민기의 아버지는
아이들 셋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다.
원래 소년의 아버지는 농부였는데 머슴살이 끝에
마련한 서너 마지기의 논밭을 가지고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 어느 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논밭을 팔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어찌어찌해서 구청 청소부로 취직이 되었다.
청소부 생활 삼 년째 접어든 어느 겨울날 새벽,
그는 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차에 치여 죽은
것인데 사고 차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유족들에게는 보상금 한푼 전해지지 않았다. 그때
민기의 어머니는 임신 7개월의 몸이었다.
겨울이 다 갈 무렵 그녀는 아이를 낳았는데
딸이었다. 핏덩이를 어느 집 앞에 버리고 돌아온
그녀는 한 달 가까이 실성해서 돌아다니다가 남편처럼
차에 깔려 죽었다.
시골에서 딸네 집에 얹혀 살던 민기의 외할머니는
서울로 올라와 자신의 불운을 탓하며 딸이 남기고 간
자식들을 거두어 콩나물 장사를 시작했다.
"아들만 셋인데 민기가 막내예요."
"그 아이를 숙직실로 좀 불러 주시겠습니까?"
숙직실로 가서 기다리고 있자 박 선생이 최민기를
데리고 들어왔다. 아이는 큰 눈에 두려움을 가득 담고
있었다.
허걸은 아이의 앙상한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공부를 잘한다지?"
"……."
소년의 큰 눈에 의혹의 빛이 서렸다.
"이름이 뭐지?"
"최민기예요."
소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청미하고 친하니?"
소년은 얼른 대답하려 들지를 않았다. 허걸이
되풀이해서 묻자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박 선생은
의외라는 듯 소년을 바라보았다.
"정말 청미하고 친하니?"
"네……."
형사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허걸은
자신의 육감이 적중한 데 대해 내심 만족했다.
"청미하고 어떻게 친하니?"
담임 선생은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복해서
물었다. 민기는 공부를 잘하지만 성격이 너무
내성적이고 생긴 것이나 차림새가 너무 초라했기
때문에 아이들의 업신여김을 받아 외토리로 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청미와 친하다니 담임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청미가 연필도 주고…… 지우개도 주고……
색종이도 주고 그랬어요."
"그래? 넌 무얼 줬지?"
민기는 고개를 힘없이 저었다.
"음, 그래. 좋아. 너 청미 보고 싶겠구나?"
소년은 끄덕였다.
"청미 어디 간 줄 모르니?"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대답하는 것이 아주
간단했다. 끄덕이거나 고개를 젓는 것으로 모든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어제 집에 갈 때 청미를 봤지?"
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서서 묵묵히 구경만
하고 있던 조태의 조그만 눈이 반짝 하고 빛났다.
"청미를 봤지?"
"민기야, 아저씨가 묻는 말에 바른 대로
대답해야지."
박 선생이 재촉했다.
민기는 두려운 눈으로 아저씨들을 쳐다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허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실마리가 풀리려나 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함께 집에 갔니?"
민기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어디서 청미를 봤지?"
"저어기서요."
소년은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거긴 학교 후문이에요."
박 선생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들은 민기를 데리고 학교 후문 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 박 선생이 이런 말을 했다.
"민기는 집이 후문 쪽에 있기 때문에 그쪽으로
다녀요. 이 학교는 아파트 입주자 자녀들이
대부분이에요. 고급 맨션이기 때문에 대개 중류
이상이에요. 그 애들은 아파트가 정문 쪽에 있기
때문에 정문으로만 다녀요. 반면 가난한 아이들은
후문으로 다녀요. 그 애들은 아파트에 살지 않고 후문
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빈촌에 살고 있어요."
그러면서 박 선생은 어제 학교가 파한 후 왜 청미가
후문 쪽에 있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윽고 그들은 학교 후문 쪽에 다다랐다.
그 일대는 신개발 지역이었기 때문에 후문 쪽으로는
아직 집들이 들어서 있지 않았다. 여기저기 아파트
신축 공사가 시작되고 있을 뿐으로, 멀리 보이는
마을까지 이어져 있는 길은 온통 수렁이었다. 학교의
앞과 뒤가 너무도 대조적인 것에 허걸은 놀랐다.
"여기서 청미를 봤단 말이지?"
민기는 더욱 작게 오므라드는 것 같았다.
"청미 집은 저쪽인데 왜 여길 왔지?"
박 선생이 따지듯 물었다. 소년은 겁먹은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내가 우산이 없으니까 여기까지 같이 온 거예요."
"아, 그러니까 여기까지 우산을 쓰고 함께 왔다 이
말이지? 네가 우산이 없으니까 우산을 받쳐 준
거구나?"
허걸은 반색을 하고 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청미는 정말 착한 애구나. 그런데 아까 교실에서
물었을 때 왜 청미를 봤다는 말을 안 했지?"
"……."
민기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왜 그랬지?"
박 선생이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민기는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입을 한층 더 꼭 오므리는
것 같았다.
"누가 말하지 말라고 했니?"
소년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
허걸은 거기에 대한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했다.
민기 자신도 그 이유를 뚜렷이 모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워낙 내성적이고 주눅이 들어 있는 판에 자기가
청미를 봤다고 말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받는
것을 자청할 리가 있겠는가. 그럴 바에는 언제나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는 편이 편하지 않겠는가.
"어디서 헤어졌지?"
"여기서요."


6. 일억 원이 필요하다

최민기로부터는 그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후문까지 청미와 함께 우산을 쓰고 와서 거기서
헤어졌다는 것이 그의 말의 전부였다. 거기서 청미와
헤어져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허걸이 왜 청미가 집에까지 바래다 주지 않았느냐고
묻자 민기는 길이 나쁜데다 집에까지 같이 가는 게
싫었기 때문에 자기가 한사코 반대했다고 대답했다.
왜 집에까지 같이 가는 게 싫으냐고 추궁하자
소년은 머리를 떨구었다. 그리고 기어들어갈 듯 작은
소리로 창피해서 그랬다는 거였다. 움막이나 다름없는
집을 청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
말끝에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허걸은 가슴이 찡해 왔다. 순진한 동심의 세계에
못이라도 박은 것 같아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청미는 돌아올까요?"
형사들이 돌아가려고 하자 민기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가 그렇게 적극적인 질문을 던지기는 처음이었다.
큰 눈에 가득한 두려운 빛을 보고 그가 얼마나 청미를
걱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아오고말고."
허걸은 끄덕이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민기에게 잔뜩 기대를 걸었던 형사들은 실망이
컸다.
학교를 나온 그들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조태가
대식가인데 반해 허걸은 매우 절제해 가면서 먹는
편이었다.
"민기라는 아이 영리하게 생겼지요?"
"응."
조태는 갈비탕 그릇 위에 얼굴을 숙인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아이가 마지막 목격자인 셈인 것 같습니다.
다른 애들이 청미를 보지 못한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청미가 후문에서 민기와 헤어져
정문으로 돌아왔을 때 다른 아이들은 이미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없을 때였습니다. 청미는 혼자서
타박타박 집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그리고 도중에
유괴당한 겁니다."
조태는 국물을 후루룩 소리나게 마신 다음 얼굴을
쳐들었다. 그의 두꺼운 입술은 국물로 지저분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휴지로 입가를 닦아낸 다음,
"민기라는 애 집을 한번 찾아가 봐."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허걸은 미처 거기까지 생각 못 했기 때문에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하고 절반쯤 남은 식사를
외면했다.
"함께 안 가보시겠습니까?"
"난 제양 상사에 다녀오겠어."
제양 상사라면 청미 양의 아버지가 근무하는
곳이다.
조태와 헤어진 허걸은 다시 학교 안으로 들어가
청미의 담임 선생인 박선희로부터 민기네 집 주소를
알아내어 후문으로 빠져 나왔다. 토요일이라 민기는
이미 집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학교 후문을 나선 지 몇 걸음 되지도 않아 그의
구두는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흙이 구두 속으로 밀려
들어가는 것을 가까스로 피하면서 그는 힘들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 길을 걷는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것은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고
있었다.
문득 민기는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오갈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그 아이는 아마 모르면 몰라도 이런
길을 걷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오가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고통스럽기만 하던
진흙탕 길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이십 분쯤 걸려 마을 어귀에 닿을 수가 있었다.
구멍가게에서 아이들에게 줄 과자를 사면서 민기네
집을 묻자 가겟집 아이가 쪼르르 달려나와 앞장서서
그를 안내했다.
아이는 오 분쯤 오르막길을 달려 올라가다가
움막처럼 보이는 집을 가리켰다.
"저 집이에요."
아이가 그 집을 향해 뛰어가려는 것을 허걸은
말렸다. 아이를 돌려 보낸 다음 부근을 둘러보았다.
한눈에 빈민촌임을 알 수 있었다.
시멘트 블록과 토벽으로 엉성하게 급조한 듯한
담장에 붙은 대문은 머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고,
마당이라고는 없는, 그리고 결코 허가를 받아 지은 것
같지 않은 게딱지 같은 집들이 언덕배기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런 중에서도 민기네 집은 눈에 띄게 초라해
보였다. 토벽으로 둘레를 치고 그 위에 슬레이트를
얹었는데 한쪽 벽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기울어져
있었고 한편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해 가마니가 쳐져
있었다.
그 집의 처마 밑에 옹송그리고 서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감자를 정신없이 먹고 있던 민기가 허걸을
발견하고는 입놀림을 멈추었다.
아이는 의혹과 두려움이 엇갈리는 눈으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나는 길에 들렀지."
허걸은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으며 다가가 과자
봉지를 내밀었다.
"자, 이거 먹어라."
아이는 얼른 받으려 들지 않았다. 무슨 이상한
물건이나 되는 듯이 경계의 눈초리로 그것을
쳐다보다가 허걸이 억지로 손에 쥐어 주자 그제서야
마지못해 받아 들었다. 다른 한 손에는 먹다 만
감자가 들려 있었다.
허걸이 웃으며 그것을 보자 아이는 부끄러운 듯
손을 뒤로 감추었다.
"안에 누가 있니?"
허걸은 집 안을 기웃거리며 물었다. 집 안이래야
출입구가 바로 부엌이었고 거기에 딸린 방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방 안은 어두웠고, 어두운 거기에서
신음소리 같은 것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안에 외할머니가 계신다고 아이가 말했다.
"시장에 안 나가셨니?"
민기의 할머니는 외손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시장에서 콩나물 장사를 한다고 들었다.
민기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파서 안 나가셨어요."
"어디가 아프시니?"
"머리가 아프시대요."
"병원에 가봤니?"
"아니오."
"약은?"
아이는 죄 지은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안에서 기침소리가 들려 왔다. 기침소리는 한참
동안 계속되다가 신음소리로 바뀌었다.
허걸은 부엌을 지나 방 앞으로 다가섰다. 방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고개를 디밀고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운 방 아랫목에 노파가 누워 있었다. 노파는
고열로 신음하고 있었다. 어두운 빛으로도 노파의
머리가 잿빛임을 알 수 있었다.
직업적인 본능 탓으로 그는 그 속에서도 청미의
흔적을 발견하려고 재빨리 눈을 굴렸다. 그러나
청미의 것으로 보이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양 상사의 김덕기 상무는 막 외출하려던 참에
형사의 방문을 받았다.
김 상무는 사십대 초반의 골격이 크고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사나이였다. 갑작스런 형사의 방문에
처음에는 놀란 듯하다가 용건을 알고는 다소 표정이
누그러졌다.
조태는 호화롭게 꾸며진 상무실이 눈에 거슬리는 듯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대형 소파에 몸을 묻었다.
"아직 아이를 못 찾았는가요?"
김 상무가 담배를 권하며 물었다.
"네, 아직 못 찾았습니다."
"그것 참 큰일인데. 하필 홍 부장한테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이거 야단입니다."
여직원이 차를 날라 왔다.
조태는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
"홍 부장에 대해 좀 알아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 그래요? 홍 부장이야 우리 회사의 최고 엘리트
간부지요. 홍 부장이 맡고 있는 국제부는 우리 회사의
노른자위지요. 그의 실력은 모두가 알아주는 바이고,
아직 마흔도 안 된 나이에 이사 자리를 넘보고 있을
정도입니다. 실력도 있고 야심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동시에 우리
회사의 불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일에 전념할
수 없음으로써 야기되는 우리 회사의 손실은 자못
큽니다. 그만큼 그의 비중은 큽니다."
뚱뚱한 형사는 그 말에는 흥미가 없는 듯 찻잔을
입으로 가져 갔다. 그리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홍상파 씨의 어제
행적입니다."
홍 부장이 실력파니 어쩌니 하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고 그 작은 눈은 말하고 있었다.
"홍 부장이 조사를 받아야 하나요? 자기 딸이
유괴당했는데 왜 그 사람이……."
김 상무의 말을 조태의 입이 막았다.
"모든 사람들이 조사의 대상이 됩니다. 유괴된
아이의 어머니까지도 물론 조사를 받게 됩니다.
예외라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친척 친지 모두가
조사 대상이 됩니다. 우리는 상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는 남은 커피를 마신 다음 빈 찻잔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김 상무는 말보다도 제스처가 먼저 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 하루를 홍 부장이 어떻게 보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만, 어제 점심때 홍 부장과 저는 외국
바이어와 함께 S호텔에서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비즈니스 관계로 식사를 한 거죠."
"그때가 정확히 몇 시였나요?"
뚱뚱한 형사의 눈초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김 상무는 공연스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니까 여기서 함께 나간 게……열두
시경이었습니다. 딴 데 들르지 않고 바로 S호텔로
갔지요. 거기서 바이어와 식사를 하고 회사로 돌아온
게 세 시경이었습니다."
"두 분이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행동을 같이
했나요? 회사에 돌아올 때까지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함께 나갔다 함께 돌아왔습니다.
화장실 갈 때 외에는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김 상무는 약간 멋쩍은 듯
웃었다.
조태는 바이어에 대해서 물었다. 김 상무는
바이어의 이름이 마크 스코트라는 것, 그리고
미국인으로 신발 회사 부사장이며 소피아라는 예쁜
여비서를 데리고 온 것 등을 이야기했다.
거기에 덧붙여 비즈니스 내용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했다. 그의 증언은 홍 부장의 이야기와 완전히
일치했다.
조태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만큼 형식적인 수사를
끝낸 담담한 마음으로 일어섰다.
"실례 많았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김 상무는 심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조태는 그를 외면한 채 대답했다.
"현재로써는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답답하다는 듯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잘 부탁하겠습니다."
김 상무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조태 역시 무겁게 인사를 받았다.
"홍 부장…… 당분간 못 나오겠지요?"
"딸을 찾기 전에는 그러겠지요."
조태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나서 상무실을 나왔다.
어쩐지 기분 나쁜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태하 기자는 무거운 걸음으로 병원 문을
들어섰다. 그는 모든 것이 못마땅하고, 그래서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감정이 폭발할 것 같은 그런 기분에
싸여 있었다.
쉬지 않고 내리는 비가 우선 그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또한 그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있었다. 거기다 누이의 딸이
유괴되었으니 마음이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놈이 무슨 이유로 그 어린것을 유괴해
갔는지는 모르지만 생각 같아서는 그 유괴범을 직접
잡아 요절을 내고 싶었다. 범죄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범죄가 유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귀여운 자식을 잃은 부모는 반 미쳐 버리고 가정은
풍비 박산이 되고 만다. 그러한 사람들의 가정을 그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적지 않게 보아 왔다. 그런데
이제 그의 누이가 그렇게 되려 하고 있었다.
그가 누이 집에 들렀을 때 그의 누이는 식음을
전폐한 채 누워 있었고 매형은 회사에도 출근하지
않고 범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이도 매형도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태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어젯밤 나이트 클럽에서
누이 때문에 유괴범으로 몰려 봉변을 당한 김인수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오는 길이었다.
그는 중상을 입고 입원해 있었다. 누이가 중상을
입힌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누이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만큼 책임을 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매형의
부탁을 받고 피해자에게 얼마간의 치료비와 위자료를
전해 주기 위해 병원을 방문한 것이다.

홍상파의 아파트에는 이미 허걸이 돌아와 있었다.
조태는 그를 데리고 서재로 들어갔다.
"어떻게 됐어?"
허걸은 머리를 흔들었다.
"방 안에는 민기의 외할머니가 누워 있었습니다.
몹시 아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약값 하라고 있는
거 다 털어 주고 왔습니다."
"그뿐이야?"
조태가 실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그뿐입니다."
"난 제양 상사의 김덕기 상무라는 사람을 만나
보았지. 홍상파 씨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야.
두 사람이 마크 스코트라는 미국인 바이어하고 식사를
한 건 틀림없어. 시간도 일치해. 범인한테서는 전화가
없었나?"
"없었습니다."
"인원을 더 보충해야겠어.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아."
조태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거실 쪽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려 왔다.
형사들은 발작적으로 일어나 거실로 뛰어나갔다.
이미 홍상파가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허걸도
도청용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흐흐흐흐……."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려 왔다.
"여, 여보세요! 여보세요!"
홍상파는 다급하게 상대방을 불렀다. 옆에서 조태가
그의 어깨를 치면서 흥분하지 말라고 일렀다.
상파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상대방을
불렀다.
"여보세요."
"흐흐흐…… 당신은 누구지?"
"청미 아버지입니다."
"내가 누군지 알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 청미는 잘 있습니까?"
"잘 있다마다, 흐흐흐……."
"왜 우리 청미를 데리고 있는 겁니까? 제발
돌려보내 주십시오. 요구하는 대로 해드릴 테니까 그
애를 돌려보내 주시오."
"나도 어린애를 데리고 있는 게 귀찮아. 빨리
돌려보내고 싶은데 당신들이 그것을 지연시키고 있단
말이야. 당신들이 협조만 하면 당장이라도 보내 줄 수
있어."
"제발 부탁합니다.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아이를
보내 주십시오. 필요한 게 뭡니까? 돈입니까?"
"흐흐흐……잘 아는군. 난 돈이 필요해. 그렇다고
많은 돈이 필요한 게 아니야. 일억 정도면 돼.
되겠나?"
상파는 눈을 크게 뜨고 형사들을 바라보았다.
형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딸이 필요한가, 아니면 일억이 필요한가?"
범인은 느리터분한 목소리로 조롱하듯 물었다.
"우리 집에는 그만한 돈이 없습니다. 오천 정도라면
어떻게 해보겠습니다만……."
"이거 봐요, 돈의 액수는 내가 정하는 거야. 액수를
놓고 줄다리기 하겠다는 건가? 일억 정도면 싸다는 걸
알라구."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화하지 않으려다 한 거야. 정 그렇다면 흥정은
그만두지. 청미는 영영 돌아가지 못할 거야."
"여, 여보세요! 잠깐만!"
상파는 전화를 끊으려는 상대방을 다급하게
붙들었다.
"좋습니다, 마련하겠습니다."
"흐흐흐…… 진작 그럴 것이지. 돈이야 있다가도
없는 거고 없다가도 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지. 청미는 당신한테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딸 아닌가. 일억 따위가 아깝다고
생각하면 안 돼. 알겠나?"
"네,네. 알겠습니다."
상파는 수화기에다 대고 머리를 조아렸다.
범인은 계속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걸 어떻게 전달받느냐 하는 거야.
지금 당신 집에는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을 거고 이
전화도 도청당하고 있을 테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형사들은 모두
돌아갔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그 정도도 모르는 바본 줄 아나?
갑자기 형사들이 철수할 이유라도 생겼나?"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겠지. 형사들은 범인을
잡는 게 목적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쓸데없는 짓은
그만하라고 해요. 난 절대 잡힐 놈이 아니야. 아무리
지랄해도 나만은 잡지 못해. 왜 그런 줄 알아? 난
투명 인간이거든. 하하하하……."
처음 들어 보는 너털웃음이었다.
"일억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이렇게 해주면 좋겠어.
모두 만 원짜리 새 지폐로 준비해 줘. 백만 원 묶음
백 개면 일억이야. 그걸 검정색 007가방 속에 넣어서
가져 와야 해. 새 돈이면 모두 그 속에 들어갈 수
있어."
"알겠습니다. 몇 시에 어디로 갈까요?"
"먼저 돈을 준비해. 시간과 장소는 다음에 알려
주겠어."
"우리 아이 목소리라도 한번 듣게 해주십시오."
"그건 곤란해."
전화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상파는 이미
끊어진 전화에다 대고 상대방을 부르다가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조태가 녹음 테이프를 틀자 범인과 상파의 대화가
다시 재생되어 흘러 나왔다.
거실로 나온 송묘임은 벽에 기대 앉더니 허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머리칼은 수세미처럼 헝클어져
있었고 옷 매무새도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이윽고 녹음소리가 멎자 그녀가,
"투명 인간……."
하고 중얼거렸다.
조태는 허걸을 가까이 불렀다. 그리고 아무도 듣지
못하게 귀엣말로 지시를 내렸다.
"전화국에 가봐. 이번엔 통화가 꽤 길었으니까
어디서 걸려 온 건지 대강 알 수 있을지도 몰라."
허걸은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범인과 단독으로 만나겠습니다. 요구한 대로 돈을
주고 아이를 찾겠습니다."
상파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뚱뚱한 형사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경찰이 끼여들면 또 수포로 돌아가니까 이번에는
모른 체해 주십시오. 경찰은 범인을 체포하는 게
급하겠지만 저는 우리 아이를 찾아야 합니다."
형사의 조그만 두 눈이 상파를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우리보고 모른 체하라는 겁니까? 그건 직무 유기에
해당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는 모른 체할 수
없습니다."
"제발 방해하지 마십시오!"
상파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7. 전화가 걸려 온 지점

전화국의 젊은 기사는 시내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이 지점에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그곳은 서울의 동남쪽 주택 밀집 지역이었다.
기사는 거기에다 연필로 막연히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면서 자기의 임무는 이제 끝났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디라고 정확히 알아낼 수는 없나요?"
허걸은 안타깝게 물었다. 기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통화 시간이 십 분이나 이십
분 정도라면 몰라도 아까 그 전화는 삼 분이 채 못
됐습니다. 그래 가지고서는 대강 어느 지역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지 정확한 지점을 알아내기는
불가능합니다."
"지금 표시한 지점은 반경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대강 이 지점에서 걸려
왔을 거라고 짐작이 될 뿐이지 그 지점이 반경 몇
킬로미터 이내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현대 과학도 별수없군요."
허걸은 실망한 빛으로 말했다.
"머지않아 알 수 있게 될 겁니다. 통신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고 있으니까요."
"제발 그렇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계속 좀
부탁합니다."
"염려 마십시오. 이십사 시간 교대로 지키고
있으니까요."
"여기에도 곧 수사 요원이 배치될 겁니다."
홍상파의 집으로 돌아온 허걸은 조태에게 지도를
펴보이면서 결과를 보고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조태는 전화가 걸려 온 지점에다
볼펜으로 ①이라고 표기했다.
"이걸 가지고서야 어디 찾을 수 있겠나."
"몇 번만 더 전화가 오면 어느 지역인지 감이 잡힐
겁니다."
"그 사이에 일이 끝장나 버릴지도 모르지. 홍 씨가
범인과 단독으로 협상을 하겠다고 야단이란 말이야."
"당연한 이야기죠."
"막무가내야. 우리에게 적극 협조하려는 마음이
없어. 우리를 오히려 방해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부부가 다 마찬가지야. 우리를 믿지 못하겠다는
거야."
조태는 몹시 불쾌한 표정이었다.
"자식을 찾고 싶은 생각에서 그런 거겠죠. 범인과
단독으로 협상하도록 내버려둬 보죠. 그리고 뒤를
미행해 보죠."
"본인이 그렇게 나오니 우리도 별수없지."
그들은 홍상파의 서재에 단둘이 앉아 있었다.

한편 홍상파는 범인의 요구대로 일억을 준비하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토요일 오후라 은행 문이 모두
닫혔기 때문에 일시에 거금을, 그것도 새 돈으로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월요일까지 일억을 준비하는 것을 미루었다.
이제 청미가 유괴된 지 이틀째 밤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실성한 송묘임은 딸의 이름을 부르며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그녀를
말리느라고 애를 먹어야 했다.
묘임의 동생 태하도 이틀이 지나도록 조카가
돌아오지 않자 범인과 단독 협상을 벌이겠다는 매형의
고집에 마지못해 동조하고 나섰다. 모든 것은 경찰에
위임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다른 길을 모색하고 나선 것이다.
"범인과 단독으로 협상해서 성공한 예가 없잖아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한 사례는 극히 적습니다.
거의가 실패로 끝나게 마련입니다. 돈만 뺏기고
아이는 못 찾는 경우가 많은데, 그 경우 아이는 십중
팔구 이미 죽어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튼 한번
해보죠."
"협상에 성공하려면 범인과의 약속을 지켜야 해.
만에 하나라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어. 그렇게 되면 아이의 생명이 위험해. 난
단독으로 범인을 만날 거야."
"그건 위험한데요."
"위험해도 할 수 없어. 지금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야. 범인은 나 이외에 그 누구도 만나지 않을
거야."
"그건 사실입니다. 일 대 일로 만나려고 들 겁니다.
돈과 아이를 맞바꿔야 합니다. 아이도 데리고 나오지
않았는데 돈을 건네 줘서는 안 됩니다."
"그건 그렇지 않아. 범인이 청미를 데리고 나오지
않을 공산이 크다고 봐. 눈에 띄기 때문이야. 일단
돈을 받은 다음 아이가 어디 있으니까 데리고 가라고
할 가능성이 많아. 그런 경우에는 먼저 돈을 내줄
수밖에 없어. 칼자루는 그쪽에서 쥐고 있으니까 놈이
하자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어. 놈은 일억에서 한
푼도 깎지 않았어. 조그만 것 하나라도 양보할 놈이
아니야."
"듣고 보니 그렇군요."
J일보 사회부 기자인 송태하는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욕이라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가만 있자니 미칠
지경이었다.
다른 사건도 아닌 유괴 사건인만큼 수사는 극비리에
비공개로 진행되고 있었다. 자나깨나 쉬쉬하면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선에서 다년간 뛰고 있는 사건 기자로서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날카로운 센스와 민첩한
대응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일선 수사관이
지니고 있는 것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거기에다 그는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무슨 일에나
일단 손을 대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근성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번 사건을 대하고 처음부터 당황하고
말았다. 사건을 취재하는 입장이 아닌 피해자의
입장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 나가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마치 캄캄한 어둠을 대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하필 누님의 딸을 유괴했을까. 돈 때문일까.
일억을 요구한 걸 보니 돈을 노린 유괴일 가능성이
높다. 누님 부부는 남에게 원한 살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금품을 노린 유괴임이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왜 하필 누님의 딸을 택했을까.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까. 범인은 적당한 대상을 찾아
학교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때 청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청미에게 적당한 구실을 붙여 그
애를 차에 태우고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태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신의 상상을 스스로
부인했다. 아무런 증거가 없는 이상 상상만 가지고는
안 된다. 납득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경찰은 전화국에 수사 요원 두 명을 상주시켰다.
홍상파의 집에도 두 명을 상주시켰다. 그리고
수사용으로 전화 한 대를 따로 가설했다.
홍상파의 아파트 건물 일 층 한 칸이 마침 비어
있었다. 경찰은 그곳을 빌려 거기에다 수사본부를
차렸다. 삼십 평 남짓한 아파트였기 때문에
수사본부로 사용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즉시 세
대의 전화가 설치되고 도청 장치도 연결되었다.
토요일이 지나고 일요일이 되었다. 토요일 밤새
범인의 전화를 기다렸지만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조태와 허걸은 일요일 오후가 되자 범인이 전화를
걸어 온 곳으로 추정되는 제1지점으로 가보았다.
택시로 홍상파의 집으로부터 사십 분쯤 걸리는
곳이었는데, 거대한 아파트군과 상가가 뒤엉켜
신시가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입을 쩍 벌린 채
거리를 바라보다가 서로 마주보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7월 18일 월요일.
장마는 계속되고 있었다. 며칠째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딸을 잃은 지 나흘째를 맞이한 송묘임은 아침부터
눈물을 흘리며 창가에 앉아 있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그녀는 몰라볼 정도로 무섭게 말라 있었다.
그런 면에서는 홍상파도 마찬가지였다. 삼 일 밤을
꼬박 지샌 그는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턱은
온통 수염으로 덮여 있었다. 충혈된 두 눈은 불안과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몸을 생각해서 식사를 조금씩 했기
때문에 묘임처럼 무섭게 마른 모습은 아니었다.
아침 아홉 시에 그는 혼자 집을 나섰다. 그에게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형사 두 명이 그를 미행했다.
상파는 먼저 백화점에 들러 검정색 007가방을 하나
구입했다. 다음에는 그것을 들고 거래 은행을
찾아갔다. 그는 삼억 가까운 돈을 예치해 두고
있었다. 그 돈은 봉급을 저축해서 만든 돈이
아니었다. 봉급 가지고 그만한 돈을 저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유산이 조금 있었다.
집안이 부유한 아내도 시집을 오면서 얼마간의 돈을
가져 왔었다. 이재에 밝은 그는 그 돈을 모두
부동산에 투자했다. 그리고 부동산 값이 치솟았을 때
그것을 모두 처분했다. 삼억은 그렇게 해서 만든
돈이었다.
그는 그 돈을 세 개 은행에 분산시켜 예치해 두고
있었다. 두 은행에서는 각각 삼천만 원씩을, 그리고
나머지 은행에서는 사천만 원을 인출했다. 은행
대리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모두 만 원짜리 새 돈으로
인출했다.
범인의 말대로 만 원짜리 백 묶음은 007가방 속에
빈틈없이 들어찼다. 그것을 들고 그는 진땀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를 미행했던 형사들이 수사본부로 돌아와
보고했다.
"홍 씨는 일억 원을 인출했습니다. 그 사람은 세 개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했는데 예금액이 삼억 가량
되었습니다. 일억은 모두 만 원짜리 새 지폐로
007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왔습니다."
"범인이 시킨 대로 움직이고 있군."
조태는 불쾌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범인은 홍 씨의 재정 상태를 아는 놈이 아닐까요?
일억을 요구한 걸 보면, 그리고 홍 씨가 서슴없이
일억을 준비한 걸 보면 뭔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허걸은 문득 생각난 바를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까 그렇군."
그들은 즉시 홍상파를 수사본부로 불러들였다.
"은행에서 일억을 인출하셨더군요?"
"네, 그랬습니다."
그는 노골적으로 얼굴에 불만을 나타냈다. 형사들이
자신의 뒤를 미행한 사실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뭘 하려고 찾으셨나요?"
"범인에게 줄 돈입니다."
그는 차갑게 내뱉었다. 조태는 차가운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정말 범인과 단독으로 만날 생각이십니까?"
"내 딸애를 찾을 수 있는 길이라면 무슨 짓이든지
할 겁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조태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
"제발 방해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딸애를 찾아야
합니다. 당신들은 범인을 잡는 게 보다 큰
목적이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범인을 잡건
말건 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딸애만 찾으면
됩니다!"
그는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조태도 거기에 맞서
소리쳤다.
"범인을 잡는 게 우리 목적이 아니에요! 우리
목적도 아이를 찾는 겁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아이가 안 들어온 지 사흘이 지났어요. 당신들은
도대체 그 동안 무얼 했습니까. 아직 단서조차 못
잡았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 난 당신들한테 모든 걸
맡겨둘 수 없어요. 믿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수사본부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수사관들은 모욕을 느낀 듯 상기된 표정들이었다.
조태도 허걸도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경우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화를 낸다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미안합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어쩔 수
없군요. 조금만 더 기다려 달랄 수밖에 없습니다.
수사진도 강화되고 있으니 우리를 믿고 협조해
주십시오. 우리를 통하지 않고 범인과 만나는 것은
재고해 주십시오. 범인을 만나도 좋으니 반드시
우리와 사전 협의를 거쳐 만나도록 해주십시오.
부탁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습니다. 제발 범인과 만나는 데 방해하지 마십시오.
부탁합니다!"
"안 됩니다!"
"나는 만날 겁니다. 누구도 내 행동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내 자식을 구하기 위해 범인을
만나겠다는데 도대체 누가 막는단 말입니까!"
"그야 강제로 막을 수는 없지요. 그러니까 협조를
부탁하는 겁니다. 이 사건은 피해자 쪽과 경찰이 잘
협조해야만 해결될 수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따로따로 놀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됩니다. 아이를
구하고 싶은 심정은 선생이나 우리나 다
마찬가집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나 홍상파는 고개를 완강히 내저었다. 범인과
단독으로 협상을 벌이겠다는 그의 결심은 누구도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경찰도 나중에는 그의
마음을 돌리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아니 포기한
척했는지도 모른다.
"좋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한번 시도해 보십시오.
그 대신 이걸 아셔야 합니다. 범인이 돈만 받고
아이를 안 돌려보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돈만 날리게 되는 셈이지요."
"돈을 바라고 한 짓이라면, 돈을 받고 나서 아이를
안 돌려보낼 리 있겠습니까?"
"그러는 수가 많습니다. 귀찮아서 아이를 죽여 놓고
흥정을 해오는 수가 있으니까요. 또 자기의 얼굴을
알고 있는 아이를 살려보낸다는 게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아이를 죽입니다. 부모는 그걸 모르고 돈을
갖다 바치는 경우가 많지요."
조태는 상대방이 충격을 받을 줄 알면서도 잔인하게
말했다.
상파는 조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당신은 잔인한 사람이군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 말로 나를 막으려고 하겠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리고 내 딸애는 죽지
않았습니다!"
충혈된 그의 두 눈에 눈물이 번졌다. 그것을 보고
조태는 기분이 착잡했다.
"미안합니다. 그런 것을 노려서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미안합니다."
조태가 물러나고 이번에는 허걸이 나섰다.
"실례지만 홍 선생께서는 저금액이 얼마나 됩니까?"
"오늘 찾은 것까지 합해서 삼억 가량 됩니다."
"많은 돈이군요."
"많은 돈은 아닙니다."
"요즘의 돈 가치로 따져서 그렇겠지요.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 볼 때는 큰 돈입니다. 홍 선생한테
그만한 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누굽니까?"
"우리 집사람 외에는 없습니다."
"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해 보나마나 집사람하고 나하고 두 사람밖에
모릅니다."
"혹시 사모님께서 다른 사람한테 자랑삼아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여자들은 흔히 그러는 수가
많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집사람은 그런 이야기 절대 하지
않습니다. 장모님한테도 그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 정
못 믿으시겠다면 한번 알아보십시오."
"그럴까요."
허걸은 송묘임을 전화로 불러냈다.
그녀는 모기소리 같은 작은 소리로 부인했다.
남편하고 자기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허걸은 전화를 끊고 상파를 바라보았다.
"사모님께서도 같은 대답을 하시는군요."
"글쎄, 그렇다니까요."
"범인은 일억을 요구했습니다. 어쩐지 홍 선생 댁에
그만한 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짓 같기에
그런 겁니다. 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만한 사람을 내가 알고 있다면 왜 이러고
있겠습니까. 당장 달려가서 죽여 버리든가 하지요."
그때 도청용 수화기의 벨이 울렸다. 대기하고 있던
형사가 재빨리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그는 벨
소리가 그치는 것을 기다려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홍상파의 집에 전화가 걸려 올 때마다 이와 같은
행동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나 거의가 범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전화였고, 그때마다 수사관들은
맥이 빠지곤 했다.
그러나 이번의 전화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범인에게서 온 전화였다. 수화기를 귀에 댄 형사는
긴장한 표정으로 신호를 보냈다. 사람들은 그쪽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도청은 한 사람만 할 수 있었다. 조금 후
도청을 끝낸 형사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놈이 홍 선생을 찾았습니다. 들어 보시죠."
이윽고 녹음기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려 왔다. 벨
소리가 뚝 그치고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여보세요!"
그것은 묘임의 목소리였다.
"흐흐흐흐…… 내가 누군지 알고 있지?"
"네, 알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 떨리고
있었다.
"내 전화 많이 기다렸지?"
범인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능글맞았다.
"네, 기다렸어요. 선생님 원하시는 대로 해드릴
테니까 제발 우리 청미를 돌려보내 주세요."
"선생님이라고? 그렇게 징그러운 소리 좀
작작했으면 좋겠어. 나는 선생님이 아니야, 당신의
사위란 말이야. 흐흐흐흐……."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울먹이면서도 범인의 그 말을
받아넘기고 있었다.
"네, 사위라 해도 좋아요. 우리 청미만 무사하면
아무래도 좋아요. 우리 청미 잘 있나요?"
"잘 있고말고. 밤마다 내가 안고 자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그 애 목소리만이라도 한번 듣게 해주세요."
"그럴 수는 없어. 그 애를 전화 있는 데까지 데려올
수 없어."
"그럼 녹음이라도 해서 들려 주실 수 있지 않아요?"
"이봐요, 장모님. 장모님은 참 한가한 말씀만
하시는군요. 내가 그렇게 한가한 놈인 줄 아십니까?
난 바쁜 몸이에요. 시간 날 때 들려줄 테니까 너무
그렇게 조르지 말아요. 이 든든한 사위가 잘 데리고
있는데 뭘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바라시는 돈은 준비가 다 됐어요. 시간과 장소만
말씀해 주세요. 지금 바로 나가겠어요."
"당신은 안 돼. 당신은 방정맞아 안 돼. 장인
어른을 바꿔요."
"지금 안 계세요."
"어디 가셨나?"
"요 앞에 잠깐 나가셨어요."
"한 시에 다시 전화 걸 테니까 꼼짝 말고 있으라고
해."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죽일 놈!"
홍상파는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 시까지는 아직 삼십여 분이 남아 있었다.
"통화가 꽤 길었지?"
그렇게 말하면서 조태는 전화국에 대기하고 있는
형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 전화는 제1지점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걸려
왔습니다."
"얼마나 떨어졌나?"
"2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입니다."
조태는 자세히 위치를 확인하고 나서 벽에 걸린
시내 지도 위에 ②라고 표기했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듯 지도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 동안 허걸은 녹음된 통화 내용을 되풀이해서
듣고 있었다.
"그 새끼는 돌아다니면서 전화를 거나 봐."
조태가 투덜거렸다.
"이제 겨우 두 번째 체크 아닙니까. 더 기다려보면
통계가 나오겠죠."


8. 어디서 만날까요

한 시 정각. 마침내 전화벨이 울렸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전화기
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하지만 전화가 걸려 오기를
기다리던 홍상파는 막상 전화벨이 울리자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지 않고 무서운 눈으로 전화기를
노려보기만 했다.
세 번째 울릴 때까지도 그대로 노려보고만 있자
그의 아내가 참다 못해 전화기로 달려들었다.
그제서야 상파는 움직였다.
"가만 있어, 내가 받을 거야."
그는 거칠게 묘임을 밀어붙이고 수화기를 낚아챘다.
전화벨이 네 번 울리고 났을 때였다.
먼저 한숨소리가 들려 왔다.
"여보세요."
상파는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무진 애를 쓰면서
상대방을 불렀다. 그러나 목소리는 벌써부터 떨리고
있었다.
"왜 전화를 빨리 받지 않는 거지?"
"미, 미안합니다."
상대는 틀림없는 범인의 소리였다.
"청미 아버지인가?"
"네네, 그렇습니다."
"전화를 빨리 받지 않은 게 수상해.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게 아니야?"
"아,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것은 모두 준비해 놨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언제라도
뛰어나가겠습니다."
"흐흐흐흐……."
한밤중 고요한 시간에 무엇인가를 사각사각
갉아먹는 음침하고 기분 나쁜 쥐 소리 같은 웃음소리.
"흐흐흐…… 일억을 준비했단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새 돈으로 준비해 놨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지금 당장 뛰어나가겠습니다."
"지금 당장 뛰어나오겠다고?"
"네네, 지금 당장……."
"그렇게 서둘 필요는 없어. 서로간에 실수가 없어야
하니까 서둘러서는 안 되지. 신중을 기해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지 않나?"
"그,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봐요, 장인 어른. 난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단
말이야. 여러 가지를 말이야. 돈 일억을 먹는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당신이 그렇게
어수룩하게 돈을 내놓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까지도
생각하고 있단 말이야. 그리고 당신 마음대로
움직이기가 곤란하다는 것도 다 알고 있어. 이 전화는
물론 도청당하고 있겠지. 당신이 나를 만나러 나오면
경찰이 틀림없이 당신을 미행할 거란 말이야. 당신이
나하고 아무리 단독으로 협상을 벌이려 해도 경찰이
방해를 놓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 당신이
경찰과 협조를 하든 안 하든 경찰이 당신 뒤를 미행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그런 마당에 내가 어떻게
마음놓고 당신을 만날 수 있겠나. 장인 어른, 그렇게
생각 안 하슈?"
"그, 그렇게 생각합니다."
"흐흐흐…… 내가 당신의 사위가 됐다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나?"
"아닙니다."
"흐흐흐…… 불쾌하게 생각하면 안 되지. 나만한
사윗감이 그렇게 흔한 게 아니야. 아주 귀하지. 이런
사위를 위해 일억쯤 쓰는 것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구. 안 그래, 장인 어른?"
"그렇습니다."
홍상파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범인은
홍상파의 간장을 녹이는 것은 물론 조롱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홍상파는 화를 내지 않고 인내할 수
있는 한 인내하고 있었다.
하긴 참을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이쪽에서 화를
내어 범인을 노하게 하는 날에는 아이에게 화가
미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일억을 어떻게 전해 받느냐
하는 문제를 이야기해 볼까? 일억 수송 작전이라고
부르는 게 어떨까. 경찰관 제씨들도 잘 들어 두슈.
돈은 007가방 속에 넣었겠지?"
"네, 넣었습니다. 검정 가방입니다."
"좋아."
그때 삑삑 소리에 이어 전화가 끊어졌다. 공중
전화의 통화 시간이 끝난 것이 틀림없었다.
홍상파는 수화기를 내려놓은 다음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범인의 전화가 끊기는 것과 동시에 조태는
전화국으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
"어느 지점인가?"
"1도 아니고 2도 아닙니다."
"그럼 어디란 말이야?"
"북쪽인데요."
그는 전화가 걸려 온 북쪽 지점에다 ③을 표기했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 봤나."
지도를 바라보며 그가 투덜거리자 허걸은 떫은 감을
씹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한 군데 처박혀 있지 않나 보죠? 돌아다니다가
생각나면 전화를 거나 봐요."
"일부러 그러는지도 모르지."
조태는 1지점과 2지점, 그리고 3지점을 선으로
연결해 보았다. 삼각형이 되었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틀렸어."
"전화를 더 기다려 보죠, 말하다가 끊겼으니까요."
그러나 범인으로부터는 바로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어쩐 일인지
범인은 전화를 쉬이 걸어 주지 않았다.

범인의 전화가 다시 걸려 온 것은 오후 다섯
시경이었다.
이번에도 홍상파가 전화를 받았다.
"공중 전화니까 용건만 말하겠다."
범인은 매우 사무적으로 말했다. 아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말씀하십시오."
"여섯 시 정각에 종로에 있는 보신각 뒤로 나와라.
뒷골목에 목마라는 다방이 하나 있을 거다. 거기서
만나는 거다."
"우리 청미는……."
범인은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번 전화는 통화 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어디서 걸려 왔는지 대강만이라도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여섯 시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홍상파는 일억이 든 돈가방을 들고 아파트를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에서 내렸을 때
거기에는 형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이 없다는 홍상파를 끌다시피 하고
수사본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우리와 협조할 수 없겠습니까?"
조태는 조그만 눈을 더욱 조그맣게 뜨고 물었다.
"협조하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이해하십시오."
홍상파의 태도는 단호해서 누가 뭐래도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좋습니다. 그 가방 속의 돈을 좀 꺼내
놓으실까요?"
"돈을 말입니까?"
홍상파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네, 돈 말입니다."
"왜 그러시죠?"
"번호를 체크해 두려고 그럽니다. 그건 괜찮겠죠?"
그것까지 마다할 수 없는 일이라 상파는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열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빨리 해주십시오."
"새 돈이라 일련 번호로 되어 있을 겁니다."
조태는 책상 위에다 돈다발을 쏟아 놓았다. 백만
원짜리 백 다발이 책상 위에 널리자 형사들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들은 얼이 빠진 듯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한 다발씩 집어들고 번호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다발마다 일련 번호로 되어 있어서 작업은 십 분도 채
안 걸렸다. 돈은 도로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허걸은 딸을 찾기 위해 일억이라는 거금을 미련
없이 내던지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싶었다. 귀여운 딸과 비교할 때 일억이라는 거금은
한낱 휴지 조각에 불과한 것일까.
그에게는 결혼 십 년에 아직까지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홍상파의 행동에 대해 미묘한 감정을
느끼는지도 몰랐다.
홍상파는 가방을 들고 나가려다 말고 돌아섰다.
그리고 형사들을 둘러보면서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제발 제 뒤를 미행하지 마십시오. 부탁합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미행하지 않을 겁니다."
조태도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상파보다 한 발 앞서 수사관들은 이미
종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조태가 보낸 수사관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상파는 수사본부를 나와 자가용에
가방을 싣고 혼자 종로로 향했다.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될수록 천천히 차를 몰았다.
백미러로 뒤를 자주 살폈다.
그러나 차들이 많아 어느 차가 미행차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뚱뚱한 형사가 미행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조태와 허걸은 상파의 차가 사라지자 택시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 그들말고도 두 명의 수사관이 함께
동승했다. 먼저 출발한 여섯 명과 함께 모두 열 명이
접선 현장에 출동하는 셈이었다.
홍상파는 약속 시간 십오 분 전에 주차장에 차를
몰아넣고 보신각 뒤로 돌아갔다. 다방 목마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간판이 눈에 띈 순간 그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다방은 이 층에 있었다. 계단을 오르기 전에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너 번 유심히 주위를 살폈지만
미행자는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가 다방 안으로
들어섰다.
조그만 다방이었다. 손님이 별로 없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만져 보았다. 안주머니에 넣어둔 칼이
만져졌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준비한 것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칼을 품에 간직하는 것을 보고 하얗게
질린 표정을 했지만 달려들어 빼앗지는 않았다.
커피가 왔다. 그는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고 다방
안에 앉아 있는 손님들을 한 사람씩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범인으로
짐작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범인이 약속 장소에 바로 나올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기다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다방 안에는 두 명의 수사관이 손님으로 위장해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머지 수사관들은 밖에
잠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완벽하게 위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마침내 여섯 시가 되었다. 홍상파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출입구를 응시하고 있었다. 돈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두 손으로 그것을 누르고 있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아가씨가 한 사람
들어왔다. 그녀는 역시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쪽으로 활짝 웃으며 걸어갔다.
조금 후에 중년의 여인이 들어섰다.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고 진하게 화장한 그녀는 두 명의 여인들
쪽으로 깔깔거리며 다가갔다.
여섯 시 오 분이 되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상파는 카운터를 노려보았다. 카운터 아가씨가 전화를
받더니 수화기를 쳐들며,
"홍상파 씨 계세요?"
하고 물었다.
상파는 손을 쳐들며 튕기듯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수화기를 낚아채듯 거머쥐자 아가씨가
눈을 흘겼다.
"전화 바꿨습니다."
"홍 선생이오?"
"네, 그렇습니다."
"음, 약속대로 나왔군. 돈은 가지고 나왔겠지?"
"네, 가지고 나왔습니다. 왜 안 오십니까?"
"능청떨지 마! 경찰이 쫙 깔렸는데 어떻게 들어가?"
"안심해도 됩니다. 방해하지 않기로 그 사람들하고
약속했습니다."
"바보 같으니! 경찰의 약속을 믿는단 말이지? 당신
눈에는 형사들이 안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훤히
보여."
상파는 주위를 재빨리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당신은 그야말로 장님이군. 아니면 경찰과 협조가
잘 되고 있든가."
"아닙니다, 난 혼자서 나왔습니다!"
"지금 바로 다방을 나와서 지하철을 타고 시청
앞으로 와요. D빌딩 지하에 가면 중국 음식점이
있는데 거기서 자장면을 시켜 먹으라구. 저녁을
든든히 먹어 두는 게 좋을 거야. 미행을 따돌려!
미행이 있는 한 나는 안 나타날 거다."
전화는 냉정하게 끊어졌다. 상파는 다방을 나와
골목을 걸어갔다.
퇴근 무렵이라 관철동 일대는 사람들로 몹시 붐비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청계천 쪽으로 걸어가면서 미행이 있나
없나 살폈다. 커브 길을 돌고 나서 뛰다시피 걸었다.
서너 번 그렇게 하고 나자 미행자가 눈에 띄었다.
확인된 미행자는 한 명이었다.
청계천으로 나온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얼마쯤
달리다가 내렸다. 다른 택시로 바꾸어 타고 종로로
돌아왔다. 지하도 입구에 서서 주위를 살폈지만
미행자는 보이지 않았다. 미행자를 드디어 따돌렸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지하도로 내려가 차표를 산 다음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서성이면서 주위를 살폈지만 미행자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시청 앞으로
갔다. 돈 가방이 꽤 무거웠다.
D빌딩이라면 잘 알고 있었다. 빌딩 지하로 내려가자
과연 중국 음식점이 하나 있었다. 범인이 시킨 대로
자장면을 하나 주문했다. 그리고 억지로 그것을
뱃속에 채워 넣었다.
식당 안에는 손님이 댓 명 정도 앉아 있었다.
자장면을 다 먹고 나서 입술을 훔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카운터의 사나이가 홍상파를 찾았고, 그는
급히 뛰어가 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식사 끝냈나?"
"네, 지금 막 끝냈습니다."
"그 집 자장면 맛있지?"
"네,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벌써 한숨을 내쉬면 어떡 하나, 아직
멀었는데……."
범인은 여유 있게 나오고 있었다. 골탕 먹일 대로
먹이고 나서 접선할 모양이었다.
"제발 만나 주십시오."
"나도 만나고 싶어. 하지만 미행자가 아직 있단
말이야."
"없습니다. 따돌렸습니다."
"아니야, 있어! 당신은 서툴러서 완전히 따돌리지
못했어. 미행자가 나 여기 있다 하고 자기를 보이면서
미행하는 줄 아나?"
"그럼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지금 거기를 나와 다시 지하철을 타고 청량리로
가는 거야. C극장 옆에 보면 당구장이 하나 있다.
당구장이 하나뿐이니까 찾기 쉬워. 당구장에 가서
당구를 치고 있어."
"거기서 만나는 겁니까?"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알았습니다."
그는 가방을 들고 중국집을 나왔다.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을 타기 전에 미행인이 있는가 살폈다.
그러나 미행은 없었다. 그는 마침내 미행을 완전히
따돌렸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미행은 처음부터
떨어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그가 청량리행
전철에 오르는 것을 보고 미행자는 즉시 무전 연락을
취했다.
종로에서 무전 연락을 받은 수사관 두 명은
대기하고 있다가 상파가 탄 전철에 올랐다.
조태와 허걸은 다음 전철로 청량리에 갔다.
"서울 시내를 헤매게 할 작정인가 보지?"
"놈은 안전하다고 생각되기 전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매우 신중한 놈인 것 같아."
"잘못하다가 홍 씨를 놓치겠는데요."
그들은 홍상파가 기를 쓰고 미행을 따돌리려고 하는
것을 보고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홍상파는 C극장을 향해 길을 건너갔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돈 가방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길을 건넌 다음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극장 옆에
과연 당구장이 하나 있었다. 당구장은 이 층에
있었다. 그는 이 층으로 올라갔다. 당구 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려 오고 있었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뿌연 담배 연기 속에서
큐를 든 젊은이들이 부유 동물처럼 흐느적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손님은 거의가 젊은이들이었다. 다섯
개의 대 중에 한 개만 비어 있었다. 그는 돈 가방을
들고 의자에 앉아 땀을 닦았다.
실내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새로 들어온 그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한숨 놓으면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여종업원이 그에게 다가와 누구와 만날 약속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니."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그러면 다른 손님과
한 게임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지."
당구장에 들어와 멍청히 앉아 있는 것도 말이
아니었다. 사실 그의 당구 실력은 뛰어났다. 그러나
당구장 출입을 끊은 지도 수년이나 되었다.
장발의 젊은이가 다가와 고개를 꾸벅 했다.
이야기를 해보니 서로 비슷한 실력인 것 같았다.
"내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젊은이의 제의였다. 가냘픈 몸매에 여자처럼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것이, 그리고 섬세한 몸가짐 등이
역겨움을 자아내게 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이런 류의
젊은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었다.
꼴도 보기 싫었지만 안 할 수도 없어 한 게임에
오천 원씩 걸자는 제안에 좋다고 끄덕였다.
게임을 하는 동안 신경은 의자 위에 올려놓은 돈
가방과 출입구, 그리고 전화기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그러니 게임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가방을 들고 카운터로 갔다. 여자
종업원에게 가방을 맡기며,
"잘 좀 봐줘요. 그리고 홍상파를 찾는 전화가 걸려
오면 좀 바꿔 줘요."
하고 말했다.
예쁘게 생긴 여자 종업원은 메모지에다 홍상파라고
적은 다음 가방을 책상 안쪽에다 내려놓았다.
게임을 시작한 지 삼십 분쯤 지났을 때 마침내 그를
찾는 전화가 걸려 왔다. 범인의 전화였다.
"지금 뭘 하고 있지?"
"당구를 치고 있습니다."
"음, 좋아. 지금 바로 그곳을 나와 다시 지하철을
탄다."
상파의 입에서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종로에 있는 S호텔에 박철민이라는 이름으로
투숙해. 빨리 움직여, 그리로 찾아가겠다."
그가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전화는 끊어졌다.
그는 한숨을 내쉰 다음 구역질나는 젊은이에게
게임비를 내주었다. 카운터로 가서 요금을 지불하고
가방을 달라고 했다.
"이거죠?"
종업원이 검정 007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끄덕이며 가방을 받아 들고 당구장을 나왔다.


9. 일억 원이 날아갔다

"당구장에서 당구를 치다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종로 쪽으로 향했습니다."
미행 형사는 무전기에다 대고 부지런히 보고했다.
"돈 가방은 어떻게 됐나?"
조태는 우산 밑에 서서 물었다. 허걸이 옆에서
우산을 받쳐 주고 있었다.
"돈 가방은 그대로 들고 있습니다. 접선에 실패한
것 같습니다."
"당구는 누구와 쳤나?"
"어떤 청년입니다. 신변을 확보해 놨습니다."
"연행하도록 해."
조태와 허걸은 다시 지하철을 타고 종로 쪽으로
향했다.
"범인은 전화로 홍상파를 조종하고 있어."
"골탕먹일 셈인가 보죠?"
"그러면서 기회를 노리겠지."
종로 2가에서 지하철을 내린 그들은 무전 보고를
받고 뛰다시피 걸어갔다. S호텔 앞에는 이미 본부
요원 두 명이 대기하고 있다가 그들을 맞았다.
"홍상파는 박철민이라는 이름으로 805호실에
투숙했습니다."
조태와 허걸은 팔 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홍상파가 투숙한 방의 맞은편 방에
잠복했다. 팔 층 비상구에도 수사 요원들이 잠복했다.
일부는 청소부들이 사용하는 방에 잠복했다.
수사 요원들의 부탁을 받은 여자 청소부들은
805호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기다리다 지친 홍상파는 텔레비전 스위치를 틀었다.
호텔 방에 들어온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범인으로부터는 아무 연락도 오지 않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머리가 벗겨진 중년 사내가
나타나더니 어색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자주 보는
코미디언이었다. 이번에는 여자 코미디언이 나타났다.
그는 텔레비전을 끄고 창가로 다가갔다. 빗물이
유리창에 부딪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차량의
불빛들이 어지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증오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처음 보는 낯선 얼굴 같았다. 그는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창가에서 돌아섰다. 그의 시선은 침대
위에 놓여 있는 돈 가방에 머물렀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깜짝 놀라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그것은 살아 있는 괴물이나 되는 것처럼
몸부림치며 울어댔다. 그는 살금살금 다가가
발작적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렇게도 기다리던 범인의 목소리였다.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기다리고 있다고? 우리들의 거래는 끝났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렇게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경찰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경찰은
없습니다. 염려하지 말고 이리 오십시오. 돈을
드리겠습니다."
"돈을 주겠다고? 흐흐흐……. 돈은 이미 내 손에
들어와 있어. 당신에게 감사하려고 전화를 건 거야."
"뭐라고?"
상파는 침대 위의 돈 가방을 바라보았다.
"돈은 이미 내 손에 들어와 있다니까. 믿지
못하겠으면 지금 바로 가방을 열어 봐."
상파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가방을 끌어당겼다.
비로소 가방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가방을
열어젖혔다. 안에는 돈 다발 대신 신문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
"이럴 수가……."
그는 수화기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이봐!"
"확인했나? 흐흐흐흐……."
"바꿔치기했군. 어디서 바꿔치기했지? 약속대로
우리 청미를 돌려보내."
"청미는 집에 가고 싶지 않대. 나하고 살고 싶다는
거야. 그러니 난들 어떡하겠나. 부모보다 내가
좋다는데 어떡하겠나."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청미는 잊는 게 좋아."
"약속하고 다르잖아!"
"약속? 꽤나 순진하시군."
"이 개자식! 청미를 돌려보내!"
상파는 온몸을 떨며 소리쳤다.
그러나 범인은 아주 유쾌한 듯 웃어젖혔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그런 다음 전화는 끊어졌다.
상파는 몸을 떨며 한동안 서 있다가 신문지로
채워진 가방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호텔의 전화 교환실에서 범인과 홍상파의 통화
내용을 도청한 수사관은 즉시 그 내용을 조태에게
보고했다. 조태는 소스라치게 놀라 허걸을
바라보았다.
"돈은 이미 뺏긴 모양이야."
"어떻게 된 일입니까?"
허걸 역시 놀라서 물었다.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바꿔치기당한 모양이야."
그들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통화 내용을 도청한
수사관을 만났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미행조는 홍상파를 따라 지하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잠시 후 밖에 나갔던 수사관이 뛰어들어와
보고했다.
"홍상파는 다시 청량리행 지하철을 탔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미행은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일억의 돈이 들어 있는 가방이 범인의
손으로 넘어가 버린 모양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통화 내용대로라면 홍상파 자신도 뒤늦게야 돈
가방이 없어진 것을 안 것 같았다. 그럴 수가 있을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멀거니 서로를
쳐다보다가 조태 일행은 호텔 밖으로 나왔다.

홍상파는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길을 건너갈 때도
뛰어갔다. 우산 같은 것은 이미 던져 버리고 없었다.
그는 당구장 계단을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올라갔다. 돈 가방이 바꿔치기당한 것을 발견한
순간 그는 직감적으로 당구장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가 돈 가방에서 손을 놓은 것은 당구장에서밖에
없었다. 당구장에서 당구를 칠 때 가방을 카운터에
맡긴 것이 화근이었다. 다방에서도, 중국
음식점에서도 가방은 잠시도 그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카운터에는
아까의 그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종업원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누구와 즐겁게 웃으며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다섯 대의 당구대는 손님들로 모두 차
있었다.
상파는 그녀가 통화를 끝낼 때까지 옆에서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상파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머, 그랬었구나. 얘, 난 까맣게 모르고
있었어. 정말이야. 한번 보고 싶다, 얘. 미남이니?
……어머, 뒤로 호박씨 깐다는 말이 맞구나. 고
기집애 학교 다닐 때도 그랬어. 약혼식 했으면 곧
결혼식하겠구나. 난 누가 데려가지……. 싫다,얘!……
아이, 싫어! ……넌 좋겠다, 얘. 사람도 있고 돈도
있고. 난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어떡하지?
……지겨워 죽겠어. 밤낮 딱딱 소리 듣는 거지 뭐.
딱딱딱딱…… 딱따구리처럼 말이야."
그녀는 까르르 웃고 나서 ‘안녕’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비로소 상파를 올려다보았다. 상파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보고 그녀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아가씨, 나 알겠지요?"
심각한 질문에 그녀는 눈을 깜박거리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까 오셨던 손님……."
"그래, 맞아요. 아까 여기서 어떤 청년하고 당구를
쳤지. 그런데……."
하면서 그는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아까 내가 가방을 내달라고 하니까 이 가방을
내줬지요?"
"네, 그런 것 같아요."
처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흉물스러운 것이나
되는 것처럼 가방을 쳐다보았다. 상파는 헛기침을
토했다.
"그런데 가방이 바뀌었어, 이건 내 가방이 아니야!"
"어머 그래요?"
그녀는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잠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상파는 가방을 열어젖혔다.
"이 가방 속에는 보다시피 신문지만 잔뜩 들어 있단
말이야."
그는 거칠어진 숨결을 가라앉히려고 숨을 몰아
쉬었다. 빗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바닥으로
훔치고 나서 그는 말을 이었다.
"내 가방 속에는 돈이 가득 들어 있었어. 아가씨는
내가 가방을 달라고 했을 때 가방을 바꾸어서 내준
거요. 그러니까 다른 가방을 내준거란 말이오."
그는 허리를 굽혀 책상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미니
스커트 밖으로 드러난 처녀의 허연 허벅지가 그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녀는 황급히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어떻게 된 거지?"
상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가방 하나는 다른 손님이 가져 가셨는데요."
"뭐라고? 언제 가져 갔어? 누가 가져 갔어?"
처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면서 얼른 대답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가 재차 다그쳐 묻자
겨우 얼어붙은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나가고 나서 조금 후에 가져 갔어요."
그녀는 두 개의 가방을 책상 밑 양쪽에 놓아
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상파가 먼저 가방 하나를 들고
나갔기 때문에 자연 나머지는 그 사람이 가져 갔다고
했다.
"그게 바로 내 가방이야! 아가씨는 잘못 내준
거야!"
그는 가방을 들어 바닥에다 내동댕이쳤다.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가방 속에 들어 있던
신문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카운터 쪽으로 쏠렸고,
그들 중 몇 명이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슬금슬금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검은 얼굴에 빨간 티셔츠 차림의 뚱뚱한 사내가
껌을 짝짝 씹으며 처녀와 상파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삼십대 중반의 건달같이 생겨먹은 자였다.
처녀가 그 자에게 자초 지종을 이야기하는 동안
상파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빨아댔다.
"그러니까 비슷하게 생긴 검은 가방 두 개를 맡아
놨는데 그것이 서로 바뀌어 나갔다 이 말이지?"
"네……."
처녀는 모기소리만하게 대답했다.
"바보 같으니, 확인하고 내주지 않고 그렇게 함부로
내주면 어떡해!"
사내가 면박을 주자 여자 종업원은 금방 울상이
되었다.
"확인하고 내줬어요."
"분명히 확인하고 내줬어?"
"네, 그래요. 확인하고 내줬어요."
"확인하고 내줬다면 너한테 잘못이 없지."
얼굴이 검은 사내는 상파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를 아래 위로 훑어보며,
"확인하고 내줬다는데요."
하고 말했다.
"당신이 끼여들 일이 아니오. 난 이 아가씨하고
말하고 있는 거요."
상파는 손가락으로 처녀를 가리켰다.
"난 이 집 주인입니다. 쓸데없이 참견하는 게
아닙니다."
사내가 당당히 말했다.
"가방을 내준 건 당신이 아니고 이 아가씨요."
"확인하고 내줬다는데 뭐가 잘못입니까?"
"확인 안 했어요."
"어머나, 제가 확인했잖아요! 가방을 달라고
하시기에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이거냐고 물으니까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셨잖아요. 그 이상 제가
어떻게 확인하나요."
처녀는 그때까지의 소극적인 자세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상파는 주먹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나는 이 밑에 내 가방만 있는 줄 알았고, 그래서
아가씨가 가방을 내주기에 자세히 보지도 않고 들고
간 거요!"
"그건 손님 잘못입니다. 자기 가방은 자기가 잘
챙겨야지 확인도 하지 않고 가져 갔다는 건
어디까지나 손님 잘못입니다."
하고 주인 사내가 말했다.
"비슷한 가방이 또 있는 줄은 몰랐죠."
상파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가방을 발로 찼다.
"내 가방하고 이것하고는 너무 비슷해요. 색깔도
그렇고 크기도 그렇고 무게까지도 비슷했어요. 다른
게 있다면 내부 색깔이 다르고 철재 부분이 조금
차이가 나요."
"가방이 바뀐 걸 알면 그 사람도 자기 가방을
찾으러 오겠지요."
상파는 고개를 저었다.
"내 가방 속에는 돈이 많이 들어 있어요."
"얼마나 들어 있나요?"
검은 사내가 물었다.
"일억이오."
"네? 뭐라구요?"
사내가 놀라서 다시 물었다.
"일억이 들어 있단 말이오! 백만 원짜리 백 다발이
들어 있어요!"
사내는 물론 주위에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실내는 한동안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한참 후 주인 사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맡겨 두고 당구를 치셨나요?"
"그러니까 여기에 맡겨 뒀던 거 아니오!"
상파는 처녀를 바라보았다.
"내 가방을 가지고 간 사람 기억할 수 있나?"
"글쎄요, 자세히 보지를 않아서……."
그녀는 우물쭈물했다.
"이럴 수가……."
상파는 처녀를 쏘아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자주 오는 손님 아니야?"
주인 사내가 그녀를 흘기며 물었다.
"아니에요, 처음 보는 손님이었어요."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대로 대충 말해 봐요."
상파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글쎄, 자세히 보지 않아서……."
"아는 대로 이야기해 보란 말이야!"
주인 사내가 옆에서 소리를 꽥 질렀다.
처녀는 더듬거리며 상파의 가방을 가지고 간 사람의
인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안경 낀 남자였는데…… 키가 작은 것 같았어요.
위에 잠바를 입고……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잘
기억이 안 나요. 턱이 좀 뾰족한 것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손을 내밀면서 가방을 달라고 하기에
무심코 내줬어요."
그녀의 설명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인상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나이는 몇 살쯤 되었지?"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여기에 들어온 건 언제였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저씨보다는 먼저
들어와서 가방을 맡겼어요."
"여기서 당구를 쳤나요?"
"네, 어떤 청년하고 쳤는데……."
처녀는 실내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그 청년도 나갔어요."
하고 말했다.
"그 사람하고 함께 나갔나?"
"아니에요, 그 사람이 나가고 나서 좀 있다가
나갔어요."
"그럼 같은 일행이 아니었단 말이지?"
"네, 같은 일행이 아니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단정하지?"
"그 사람은 혼자 들어왔어요. 그리고 함께 당구 칠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하기에 청년을 소개해 준
거예요."
"그 청년은 여기 자주 오나요?"
"아니에요, 처음 보는 손님이었어요."
"그 청년 인상을 말해 봐요."
"중키에…… 미남이었어요. 머리는 장발이고 위에는
체크 무늬 남방을 입고 있었어요. 얼굴은 긴 편이었고
눈이 컸어요."
"둘이서 짜고 계획적으로 내 돈을 훔쳐 간 거야."
상파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좀 기다려 보시죠. 혹시 가방을 가지고 올지
압니까?"
거액을 잃어버린 손님에게 안됐다 싶었는지 주인
사내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상파는 머리를 흔들었다.
"올 리가 없지요."
그때 문이 열리면서 두 사람이 들어섰다. 조태와
허걸이었다.
그들을 보자 상파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머리를 또
흔들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조태가 단도 직입적으로 물었다.
상파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형사들을 볼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놈이 가방을 가져 갔습니다. 여기서 바꿔치기해
갔습니다."
형사들은 무서운 눈으로 상파를 노려보았다.
"그러기에 뭐랬습니까? 우리와 협조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돈만 날린 셈이군요.
이럴 줄 알고 뒤를 따라다녔는데 놈이 여기서
바꿔치기해 갈 줄이야 상상도 못 했지."
조태는 분노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허걸은 냉담한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상파를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실내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경찰입니다. 여기서 거액 도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잠시 조사할 일이 있으니 한 분도
나가지 말고 기다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허걸은 창문을 열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밖에 대기하고 있던
수사관들이 당구장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그들은 신속히 일을 처리했다. 먼저 범인과 관련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대를 걸지 않았다. 범인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그때까지 그곳에 남아 있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그들은 범인의 인상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범인의 인상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여자 종업원 외에는 없었다. 여자 종업원의
기억이란 것도 신통치가 못했다.
수사관들은 마지막으로 한 사람씩 조사해 나갔다.
신분증을 조사하고 이름과 주소 및 직업을 확인한
다음 한 사람씩 밖으로 내보냈다. 얼마 후에
당구장에는 수사관들과, 그리고 주인 사내와 여자
종업원 만이 남게 되었다.
"두 사람 연행해."
조태는 성난 얼굴로 주인 사내와 여자 종업원을
바라보았다.
주인 사내는 장사를 못 하게 된 것을 항의했고 여자
종업원은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나 그들은 수사본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10. 선택이 잘못되었다

당구장 주인과 여자 종업원은 무슨 범인이나 되는
것처럼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수사본부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집중적인 조사를 받았지만 범인과 한패이거나
결탁한 것 같은 혐의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주인 사내의 목소리는 전문가에 의해 이미 녹음되어
있는 범인의 목소리와 비교 분석되었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자, 다시 한 번 질문에 대답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허걸은 지친 표정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여자
종업원을 바라보며 기계적으로 말했다.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맥이 빠진
모습들이었다. 벌써 똑같은 질문과 답변을 다섯
번이나 되풀이하고 있었다. 시계는 이미 7월 19일
새벽 두 시 십육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의미한 반복이라고 생각하면서 허걸은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밤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어젯밤
뛰어다닐 때까지만 해도 비가 뿌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어 있었다. 오랜만에 장마가
걷히는 모양이었다.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고 그는 생각했다. 오늘부터는
뜨거운 햇볕 속을 걸어다녀야 한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정체 불명의 범인을 찾기 위해.
그는 바지에 두 손을 찌른 채 처녀 주위를
맴돌았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그는 꾹 참았다.
담배를 끊은 지 석 달이 넘은 것 같았다. 이제 완전히
끊은 것 같다고 생각되면 다시 담배가 피우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돈 가방을 가져 간 사람을 X라고 부르지. 그리고
그것을 잃은 사람을 Y라고 부르지. 그렇게 부르는 게
간단해서 좋겠어. 먼저 X와 Y중 당구장에 누가 먼저
들어왔지?"
"X가 먼저 들어왔어요."
그녀는 지친 목소리로 조그맣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겁에 질려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시간이 흐르고 똑같은
질문이 반복되자 지금은 그저 지친 표정일 뿐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온 게 몇 시쯤이었지?"
"일곱 시 이십 분경이었어요."
시간이 비교적 정확한 것은 당구장에 들어오는
손님들의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을 일일이 체크해 놓고
있기 때문이었다.
"Y가 들어온 것은 몇 시였지?"
"여덟 시경이었어요."
"그럼 X보다 사십 분쯤 늦게 들어왔군."
"네, 그래요."
방 안에는 두 사람만 있었다.
"X가 당구장에 들어와서 한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이야기해 봐요."
"먼저 안에 들어와서 가방부터 맡겼어요."
"신문지가 잔뜩 들어 있는 가방을 말이지?"
"네, 저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몰랐어요."
"물론 그랬을 테지. 그 사람이 한 말을 한 마디도
빼놓지 말고 말해 봐요. 뭐라고 말하면서 가방을
맡겼지? 귀중한 거니까 잘 보관해 달라고 말했나?"
그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다행히도 그녀의
기억력은 보통 수준을 넘어 조금 비상한 데가 있었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특별한 말 없이 그냥 좀
맡아 달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함께 당구 칠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했어요."
허걸은 책상 앞으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두 손을 깍지 낀 채 올려놓았다.
"가방을 받아서 왼쪽에 내려놓았나 오른쪽에
내려놓았나? 기억할 수 있겠어?"
여러 번 반복된 질문 중에서 이 부분만은 처음으로
물어 본 것이었다. 그 전까지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아 미처 물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자신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까지는 기억할 수 없어요. 그런데 얼마 있다가
그 사람이 돌아와서는 가방을 내달라고 했어요.
가방을 내주자 그것을 열고 무엇을 꺼내는 것
같았어요."
"무엇을 꺼냈나?"
"무엇인지는 모르겠어요. 보지를 않았기 때문에."
"방금 가방을 열고 무엇을 꺼냈다고 하지 않았어?"
"네, 하지만 확실히 본 게 아니고 그냥 그렇게
느꼈을 뿐이에요. 보지 않아도 옆에서 일어나는 일은
느낌으로 알 수 있잖아요."
"그런 다음 어떻게 했지?"
"가방을 다시 부탁한다고 해서 책상 밑에 도로
내려놓았어요. 그런데……."
그녀는 예쁜 얼굴을 조금 찌푸리면서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무엇인가 짚이는 것이 있는데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허걸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제 생각이 나요. 두 번째 가방을 내려놓았을
때는 처음과는 달리 반대쪽에 내려놓았던 것 같아요.
그래요, 확실히 오른쪽에 내려놓았어요!"
갑작스럽게 터진 그녀의 생기 있는 목소리에 허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랬지? 처음에는 왼쪽에 가방을 내려놓았다가
두 번째에는 오른쪽에 내려놓은 이유가 뭐지? 무심코
그러지는 않았을 텐데? 사람이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이 붙어 왼쪽 공간을 이용하는 습관이
붙으면 항상 왼쪽만 사용하게 되거든. 그렇지 않나?"
"네, 그래요."
"쇼핑백 같은 것은 어느 쪽에 내려놓지? 물론
당구장에 있는 미스황 책상을 두고 하는 말이야."
"왼쪽에 내려놓아요."
"그래서 처음 가방을 맡았을 때 왼쪽에 내려놓은
거군. 그거야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손이 가니까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 두 번째에는 왜 반대쪽에
가방을 내려놓았을까?"
"생각이 나요."
그녀는 두 눈을 깜박거리면서 아랫입술을 빨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오른쪽으로 가방을 내리면서 미안하다고
하기에 얼결에 받아서 그대로 내려놓았어요. 그
사람이 왼쪽으로 내렸다면 왼쪽에 놓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중요할 수도 있지. 돈 가방이 바꿔치기 됐으니까.
일억이나 들어 있는 돈 가방이 말이야."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허걸은 두 손으로 턱을 받쳤다. 그리고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범인은 왜 가방의 위치를
변경시켰을까.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었을까. 아니면
의미가 있는 짓이었을까. 신문지만 잔뜩 들어 있는
가방에서 무엇을 꺼냈을까.
아마 아무것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눈을 현혹시키기 위한 그의 가장이었을
것이다. 가방을 한 번은 왼쪽에 또 한 번은 오른쪽에
놓음으로써 가방의 위치에 대한 그녀의 기억력을
혼란시키려고 했을 것이 틀림없다.
홍상파가 당구장에 들어갔을 때 범인은 이미 먼저
와서 당구를 치고 있었다. 그는 홍상파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홍상파가 가방을
카운터에 맡길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거기에 대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홍상파는 가방을 카운터에
맡겼다. 홍상파로서는 일억이나 들어 있는 돈 가방을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당구장 아무데나 놓아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을 예상하고 범인은 바꿔치기할
계획으로 아예 가방 색깔까지 지정해서 돈을 담아
가지고 나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단 홍상파를
밖으로 불러내려면 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놈은 당구를 치다 말고 밖으로 나가
홍상파에게 전화를 걸어 종로에 있는 S호텔에
투숙하라고 지시를 내린 다음 당구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홍상파가 지시대로 가방을 가지고 당구장을
떠나자 오 분 후에 진짜 돈 가방을 들고 도망친
것이다. 그야말로 얼굴도 보이지 않고 교묘하게
일억의 거금을 챙겨 줄행랑을 친 것이다.
교활한 놈 같으니!
그런데 의문이 하나 있다. 당구장 주변에
수사관들이 깔려 있었을 텐데 범인이 과연 그 시간에
전화를 걸기 위해 밖으로 빠져 나갈 수 있을까.
그것은 잠복하고 있는 수사관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키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할 수 있다.
홍상파에게 달리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공범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X는 당구를 치다 말고 도중에 혹시 밖에 나갔다
오지 않았나?"
"아뇨, 그런 적은 없었어요."
그녀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공범이 있었다는 말인가. 허걸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공범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범인의
목소리는 언제나 동일 인물의 목소리였다. 하긴
공범이 있더라고 한 놈만 목소리를 사용하고 다른
놈은 끝까지 자기 목소리를 숨길 수도 있다.
허걸은 손가락을 세웠다.
"혹시 당구장 안에 공중 전화가 설치되어 있나?"
"네, 구석 쪽에 하나 있어요."
그러면 그렇지 하고 허걸은 생각했다. 그는
그녀에게 당구장 내부를 그리게 한 다음 공중 전화가
설치되어 있는 위치를 확인했다.
또 한 대의 전화는 카운터 책상 위에 놓여 있는데
두 전화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공범이 없다면 범인은
당구장 안에 있는 공중 전화로 홍상파를 부른 게
틀림없다.
그런 줄도 모르고 홍상파는 범인이 밖에서 전화를
걸어 온 줄로 알고 놈의 지시대로 움직였던 것이다.
이런저런 것들을 따져 볼 때 범인은 여간 교활하고
대담한 놈이 아니다.
"당구장 안에는 언제나 음악을 틀어 놓나?"
"네, 유선 방송을 이용하고 있어요."
"그럼 어제 저녁에도 음악을 틀어 놓았겠군?"
"네, 그랬어요."
허걸은 다시 일어나 실내를 맴돌았다.
"미스 황이 걸려 온 전화를 받아 Y에게 전해
주었지?"
"네, Y가 자기 이름을 가르쳐 주면서 자기를 찾는
전화가 오면 바꿔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메모지에다
Y의 이름을 적어 놓았더랬어요."
"Y를 찾는 전화가 걸려 왔을 때 그 전화가 아주
가깝게 들리지 않았나? 마치 옆에서 거는 것처럼
말이야."
그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거기까지
기억해 내라는 것은 무리일 것이라고 허걸은
생각했다.
"X는 당구장 안에 있는 공중 전화를 사용해서 Y를
찾았을 가능성이 커."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허걸은 그 방을 나와 다른 방으로 건너갔다. 그
방에서는 조태가 홍상파를 상대하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 담배 연기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홍상파는
피곤에 지친 눈으로 허걸을 바라보았다.
"홍 선생, 한 가지만 물어 봅시다. 당구장에서
범인의 전화를 받았을 때 혹시 다른 목소리가
아니던가요? 공범이 있나 해서 물어 보는 겁니다."
"언제나 듣던 그놈 목소리였습니다."
아무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홍상파가 대답했다.
그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전화 목소리가 가깝게 들리지 않았나요?
옆에서 거는 것처럼 아주 가깝게 말입니다."
"네, 아주 가깝게 들렸습니다."
"배경에 음악소리는 없었나요?"
"있었습니다."
"그 음악소리는 당구장에서 나는 소리였을 겁니다."
순간 홍상파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조태의
조그만 눈이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범인은 당구장 안에 있는 공중 전화를 이용해서 홍
선생을 불렀던 것입니다. 공범이 없이 혼자라면 그
가능성이 제일 큽니다. 홍 선생은 그런 줄도 모르고
범인이 밖에서 전화를 건 줄 알았겠죠?"
"네, 그렇습니다."
"범인은 당구장 안에서 홍 선생의 움직임을 낱낱이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밖에 수사관들이 잠복하고
있는데 전화를 걸러 일부러 밖에 나갔겠습니까?
그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놈은 당구장 안에 있는
공중전화로 홍 선생을 불러냈던 겁니다. 그런 점에서
놈은 교활하기도 하고 대담하기도 합니다."
홍상파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거기서 혹시 안면이 있는 사람을 보지는
않았나요?"
조태가 두 눈을 날카롭게 치뜨며 물었다.
"보지 못했습니다."
홍상파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허걸은 다시 황미숙이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그것을 감췄다. 여자의 본능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허걸은 메모를 해가며 다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X가 당구장을 나간 것이 몇 시쯤이었지?"
"여덟 시 사십 분이 지나서였어요."
"나갈 때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해 봐요."
그녀는 지치지 않고 물어대는 젊은 형사를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먼저 Y가 가방을 가지고 나갔기 때문에 책상
밑에는 가방이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건 당연히 X의 것인 줄 알고 내주었어요."
"그랬을 테지. X는 아무 말 않고 그걸 들고 밖으로
나갔나?"
"아가씨, 가방을 좀 내주실까 하고 말했어요. 그때
저는 전화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가방을 내주었어요. 물론 곁눈질로는
보고 있었지요. 그는 가방을 받고 나서 ‘자,
수고해요’ 하면서 돌아서서 나갔어요."
허걸은 볼펜 끝으로 책상을 똑똑 두드렸다.
"자, 그럼 X의 인상 착의를 말해 주세요. 아가씨가
유일한 목격자니까 나는 기대를 많이 걸고 있어요."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세 번이나……."
그녀가 항의하듯 말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해 줘요. 여러 번 말하다가
보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는 법이니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해 봐요."
그녀는 밑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기계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키가 작은 사람이었어요. 나이는 젊은 편인데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서른 살에서 마흔 살 사이쯤
되었을 거예요. 검은 테 안경을 끼고 있었고…… 잠바
차림이었어요. 베이지색 잠바였어요. 바지는 검정색
같았어요. 그리고 턱이 뾰족했어요.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마른 인상이었고 얼굴빛이 검었어요."
그녀는 다 말한 듯 입을 다물었다.
"머리 스타일은?"
"기름으로 발라붙인 모양이었어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녀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싫어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X를 눈여겨보지
않았군. 미남이었다면 자세히 보아 두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 이유도 있었어요."
"돈이 많은 인상이었나 아니면 가난해 보이는
인상이었나?"
"가난해 보이는 인상이었어요."
"눈은 어떻게 생겼지?"
"음침한 빛이었어요. 눈이 움푹 들어가 있었어요."
"무슨 특징 같은 것은 없었나? 지금까지 특징을
말하지 않았는데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봐요.
틀림없이 특징이 있을 테니까."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무엇이라도 생각해 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허걸은 팔짱을 낀 채
기다렸다.
한참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가방을 받을 때 보니까 누런 금반지를 끼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에도 금을 해 박은 것 같았어요."
허걸은 급히 메모했다.
"어느 이에다 금을 입혔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말할 때 얼핏 보니까 입
속에서 금니가 반짝거리는 것 같았어요."
허걸은 생각에 잠겼다.
중요한 점이 하나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은 즉 두
개의 가방 중 범인이 먼저 가방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가방을 먼저 선택해서 들고
간 사람은 홍상파라는 사실이었다. 범인은 단지 뒤에
남은 가방을 들고 갔을 뿐이다.
그는 두 사람의 움직임을 스크린을 보듯 눈앞에
그려 보았다.
범인이 먼저 가방을 들고 당구장 안으로 들어온다.
종업원 아가씨가 가방을 받아 왼쪽에 내려놓는다.
조금 후에 범인이 카운터에 다가와 가방을 달라고
한다. 황미숙은 귀찮은 기색으로 가방을 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범인은 가방을 열어 무엇을 꺼내는 척하다가 도로
가방을 내려놓는데 이번에는 반대쪽인 오른쪽에
내려놓으려고 한다. 미숙이 그것을 받아 그대로
오른쪽에 내려놓는다.
얼마 후 홍상파가 가방을 들고 들어선다. 그도
가방을 미숙에게 맡긴다. 그녀는 가방을 받아 왼쪽에
내려놓는다. 그쪽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여덟 시 사십 분경에 범인은 실내에 있는 공중
전화를 통해 홍상파를 찾는다. 미숙이 전화를 받아
홍상파에게 수화기를 건네 준다. 범인과 통화하고 난
홍상파는 카운터로 가서 가방을 찾아 들고 밖으로
나간다. 그것이 범인이 갖다 놓은 가방인 줄도
모르고……. 그리고 조금 후에 범인은 일억이 들어
있는 가방을 들고 유유히 사라진다.
홍상파는 왜 가방을 잘못 가져 갔을까. 범인은
홍상파가 가방을 잘못 가져 갈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런 예상은 적중률이 거의 희박한
것이다. 가능성이 희박한 도박을 할 리 있는가.
홍상파는 왜 먼저 나가면서 가방을 잘못 들고
갔을까. 이건 백 퍼센트 그의 잘못이다. 그로 하여금
잘못에 빠지게 한 함정을 범인이 만들어 놓았던 게
아닐까. 그 함정이란 어떤 것일까.
그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황미숙을 쏘아보았다.
"미스 황, 나한테 뭐 숨긴 거 있지?"
갑자기 날카롭게 추궁하는 바람에 그녀는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숨기지 말고 털어놔 봐요. 돈 일억이 문제가
아니야, 아이가 유괴됐단 말이야!"
그 말에 그녀는 더욱 놀라는 얼굴이 되었다.
아직까지 그녀는 유괴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에 물기가 번지는가 싶더니
눈물이 마구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자, 울지 말고 이야기해 봐요. 다 용서할 테니까
이야기해 봐요."
한참 만에 그녀는 눈물을 삼키면서 입을 열었다.
"X와 Y가 함께 당구장에 있을 때였어요. 물론 그
사람들은 서로 다른 당구대에서 다른 사람들하고
당구를 치고 있었는데…… 당구를 치다 말고 X가
카운터로 와서 하는 말이, 자기 가방을 잘 봐달라는
거였어요. 그러면서 그는 자기 가방을 가리켜
보였어요. 왼쪽에 있는 Y의 가방이었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X의 말대로 그의 가방인 줄로만 알았어요.
서로 가방이 비슷하고 그 전에 X가 가방을 들었다
놨다 했기 때문에 저는 생각이 엇갈렸어요. 귀찮기도
하고 해서 알았다고 하고 돌려보냈어요. 그리고 나서
Y가 나갈 때 오른쪽에 있는 X의 가방을 내주었어요.
그분이 조금만 주의해서 봤더라면 자기 가방이 아니란
것을 알았을 텐데…… 그분은 제가 내준 대로 그
가방을 가지고 나가 버린 거예요. 제가 가방을
내주면서 이거냐고 하니까 그분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것을 들고 갔어요. 죄송해요, 모든 게
제 잘못이었어요."
그녀는 비로소 속이 뚫리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껴 울었다.
허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왜 그걸 이제야 털어놓지?"
하고 물었다.
"책임이 두려웠어요. 그런 돈은 평생을 가도 변상할
수 없어요."
"아가씨는 하나도 잘못이 없어요. 아가씨는 한 푼도
변상하지 않아도 돼요."
허걸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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