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서울의 만가 1

3학년2반 | 2022.01.31 07:40:32 댓글: 0 조회: 651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058
서울의 만가

- 김성종 저



사라진 소녀

책가방을 어깨에 걸친 한 떼의 소녀들이 참새 떼처럼 재잘거리며 밖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기쁨에 넘친 얼굴들이었다.
교문 앞은 작열하는 태양빛 속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그들의 신선하고 건강한 웃음으로 하여 한동안 시끌벅적했다.
"아저씨, 안녕."
소녀들은 평소와는 달리 낭랑한 목소리로 수위 아저씨에게 인사를 보냈다.
수위 역시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은 채 소녀들에게 일일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제 막 길고 긴 여름방학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 년 중 가장 큰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학생 들에게 빠짐없이 골고루 돌아가고 있었다.
학생들의 얼굴에 기쁨이 넘쳐 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한 떼의 소녀들 가운데서 유난히 뛰어나 보이는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조숙한 몸매에 얼굴은 우윳빛처럼 희었고 티없이 맑은 까만 눈동자는 흡사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열여섯 살의 중학교 3학년 학생치고는 몸가짐도 단정해 보였다.
길 가던 남자들이,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홀린 듯이 그녀의 미모를 훔쳐보며 지나갔다.
사춘기의 소녀는 그것을 의식했는지 낯선 남자들과 시선이 부딪칠 때마다 살짝 볼을 붉히면서 얼굴을 돌리곤 했다.
"장미야!"
맨 뒤에서 따라오던 소녀가 그녀를 불렀다.
장미는 뒤돌아서서 동희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장미와는 달리 동희는 몸집도 조그마했고 얼굴도 별로 예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웃을 때면 볼우물이 지는 것이 꽤 귀염성이 있는 소녀였다.
그들은 제일 친한 사이로 방학 때 함께 지낼 계획까지 짜놓고 있었다.
그 계획이란 동희네 외가가 있는 제주도에 약 일 주일 정도의 예정으로 함께 놀러 간다는 내용이었다.
장미는 그것을 위해 이미 부모를 졸라 허락을 받아 놓고 있는 터였다.
소녀들은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여름방학으로 한 달 동안 헤어져 있는 것이 섭섭한 일부 소녀들은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학교 앞에 있는 제과점으로 몰려들어가 가지고 있는 돈들을 털어 내어 팥빙수나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손을 맞잡고 길을 건너간 장미와 동희도 버스 정류장 쪽으로 가는 대신 주춤하고 서서 제과점 쪽을 바라보았다.
장미가 먼저 멈춰 서서 그쪽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동희도 자연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장미는 녹색 물방울 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눈에 띄게 환한 모습이었다.
반면 동희는 밤색 체크 무늬의 남방에 진 스커트 차림이어서 별로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무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소녀들의 스커트 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면서 하얀 종아리가 드러났다.
"아이, 더워! 얘, 우리도 팥빙수 하나씩 먹고 가자."
장미의 말에 동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나는 아이스크림 먹을래."
그들은 뛰다시피 제과점 쪽으로 걸어갔다.
제과점 안은 소녀들로 와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는 계곡의 물소리처럼 신선하고 끊임이 없었다.
장미와 동희는 겨우 빈자리를 찾아 앉아 팥빙수와 아이스크림을 시켰다.
조금 후에 먹음직스럽게 생긴 팥빙수와 아이스크림이 날라져 왔다.
장미와 동희는 왕성한 식욕을 보이면서 각자 자기 몫을 먹기 시작했다.
장미는 한동안 정신없이 먹다 말고 책가방 속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돈을 헤아려 보았다.
그리고 나서 눈을 반짝이며,
"얘, 우리 영화 보러 갈래? 내가 보여 줄게."
하고 물었다.
"무슨 영화?"
동희가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휴지로 닦아 내며 물었다.
"지바고."
"닥터 지바고 말이야?"
"응."
그 영화는 재수입되어 지금 M극장에서 재상영되고 있었고, 학생들이 관람해도 좋다는 허가가 나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 그거 보고 싶었는데……."
동희는 발을 굴렀다.
"그럼 보러 가자 얘."
"오늘은 안 돼. 이따가 사촌 언니 약혼식에 가봐야 해."
"그럼 할 수 없지 뭐. 혼자 가서 볼 수밖에 없지 뭐."
장미가 조금 실망이 섞인 표정으로 말하자 동희는 눈을 크게 떴다.
"혼자 영화를 보러 간다는 거야? 그건 말도 안 돼."
"왜 안 되니?"
장미에게는 좀 엉뚱한 데가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동희는 걱정스럽기도 하고 속도 상했다.
"여자가 어떻게 혼자 영화를 보러 가니? 남자라면 또 몰라도. 그러지 말고 내일 나하고 함께 보러 가자 얘."
"넌 내일 교회에 가야 하지 않아."
"오전에 교회에 갔다 와서 오후에 극장에 가면 되잖아."
"아이,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그들은 그 문제로 옥신각신하다가 다음 날 오후에 만나 영화를 보기로 하고 다시 먹는 데 열중했다.
그들이 제과점을 나온 것은 그곳에 들어간 지 반 시간쯤 지나서였다.
그들이 제과점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몇 걸음 옮겨 놓았을 때,
"학생들, 나 좀 봐요."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 왔다.
그들이 돌아보니 남루한 차림의 중년 여인 한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다.
새까맣게 탄 얼굴하며 보따리를 들고 있는 것 등이 첫눈에도 시골에서 올라온 아낙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다 그녀는 등에다 아기까지 업고 있었다.
아기는 쉰 목소리로 울어대고 있었다.
"학생들, 여기가 어디쯤 되는지 봐줄래요?"
아낙은 꼬깃꼬깃 접은 종이 쪽지를 장미에게 내밀었다.
장미와 동희는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그 닳아 빠진 종이 쪽지를 펴보았다.
거기에는 주소와 전화 번호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
"새벽에 서울에 도착했는디…… 여지껏 이 주소를 못 찾아 가지고 이러고 헤매고 있어라우. 학생들, 어쩌면 좋지?"
아낙의 눈에 눈물이 어리는 것을 보고 학생들은 당황했다.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측은해 보였다.
감상적이고 동정심이 많은 소녀들이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강한 호소력을 그녀는 지니고 있었다.
"불쌍하다 얘."
동희가 귀에 대고 재빨리 속삭였다.
"거기에 뭐라고 주소를 쓴 모양인디…… 글을 읽을 줄 알아야제. 아기는 이렇게 보채쌌고, 아무리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물어 봐도 주소를 못 찾겠어. 학생들이 주소를 좀 찾아 주면 참말로 고맙겠는디……."
그녀는 끝내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기까지 하면서 하소연하듯 소녀들을 바라보았다.
착한 소녀들은 누가 강제로 붙잡은 것도 아닌데 차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도와 달라고 손을 내민 불쌍한 사람을 외면한다는 것은 그녀들의 여린 감정으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아낙의 등에 업힌 아기가 숨이 넘어갈 듯 울어댔다.
아기는 온통 땀투성이였다.
아기의 얼굴은 뜨거운 햇볕에 빨갛게 익어 있었다.
"어떡하지?"
장미는 난처한 표정으로 동희를 바라보았다.
동희 역시 난감한 표정이었다.
"글쎄, 어떡하지."
"여기가 어디쯤이지?"
그들은 종이 쪽지에 연필로 끄적거려 놓은 주소를 들여다보았다.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어."
나이 어린 소녀들이 드넓은 서울의 구석진 동네를 알 리 없었다.
아낙은 자기를 도와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마침내 발견했다고 생각했는지 더욱 애처로운 모습으로 소녀들에게 사정을 호소해 왔다.
"이건 전화 번호예요?"
장미가 마침내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쪽지에는 주소와 함께 전화 번호가 적혀 있었다.
"동생네 전화 번호인디…… 내가 전화를 걸 줄 알아야제. 아까 딴 사람한테 부탁해 전화를 걸어 봉께 아무도 전화를 안 받더래. 안 받을 리가 없는디…… 어디 잠깐 나간 모양이여."
아낙은 전라도에서 새벽에 상경했는데, 나와 있기로 한 동생이 나오지 않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됐다고 한숨을 내쉬며 또 눈물을 찔끔거리는 것이었다.
장미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이미 오후 두 시가 지나고 있었다.
새벽에 도착해서 그때부터 주소를 찾아 헤매다녔다면 무척 오랫동안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전화를 걸어 드릴게요."
"아이구, 고마워라! 이런 고마울 데가……. 돈은 여기 있응께……."
아낙이 꼬깃꼬깃 접혀진 지폐를 꺼내 주는 것을 마다하고 장미는 부근에 있는 공중 전화 부스로 달려갔다.
동희와 아낙도 그 뒤를 따라갔다.
공중 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간 장미는 쪽지에 적힌 대로 다이얼을 돌려 보았다.
다르르 하고 신호가 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찰칵 하고 신호가 떨어지면서,
"여보세요."
하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잠깐 기다리세요."
장미는 아낙에게 빨리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아낙은 부스 안으로 허겁지겁 달려들어와 장미로부터 수화기를 받아 들었는데 그것을 다른 손에 바꾸어 들면서 거꾸로 쥐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것을 보고 장미와 동희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아줌마, 그렇게 들면 안 돼요. 거꾸로 드셨어요."
장미가 수화기를 바로 들려 주자 아낙은 목에 힘줄을 세우며 악을 써댔다.
"옥녀냐? 니 왜 안 나왔냐? …… 뭐라고? …… 아이고, 말도 마라. 내가 느그 집을 찾을라고 새벽부터 지금까지 헤매다녀도 못 찾았어! 뭐라고? 저런! 영등포에서 내려야 하는 것을…… 나는 그것도 모르고 서울역에서 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 아이고, 말도 마라. 애기는 울어쌌제 설사는 자꼬 하제……. 난 전화도 할 줄 몰라 착한 학생들이 전화를 걸어 줘서 이렇게 전화를 건 것이제. …… 어디라고? 아이고, 난 몰라. …… 니가 나와…… 기다리고 있을게 니가 나와! …… 집이 비어서 안 된다고? 그럼 어짜지? …… 나는 니가 말하는 거 통 모르겄다. …… 영등포에서 내려서 …… 뭐라고? 어디? …… 아이고, 난 모르겄다. 잠깐 기다려, 학생들한테 전화를 받아 보라고 할게."
아낙은 수화기에서 입을 떼고 장미를 흘끔 바라보았다.
"어디로 오라고 말하는디 나는 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네. 미안하지만 학생이 좀 받아 볼랑가."
장미는 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아, 학생이에요? 언니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우리 언니는 시골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서울 지리를 통 몰라요. 영등포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서울역에서 내렸지 뭐예요. 그래서 서로 못 만났어요. 학생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전화가 끊어졌다.
통화 시간이 다 지나갔던 것이다.
장미는 동전을 모두 써버렸기 때문에 동희가 대신 동전을 내주었다.
장미는 동전을 집어 넣고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조금 전의 그 여자가 다시 전화를 받았다.
"학생, 정말 고맙고 미안해요. 내가 지금 나가야 하는데 집이 비어서 나갈 수가 없어요. 내가 위치를 가르쳐 줄 테니까 우리 언니한테 잘 좀 가르쳐 줘요. 정말 미안해요."
"괜찮아요, 말씀해 보세요."
장미는 재빨리 볼펜과 메모지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상대방 여자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무척 아름다운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있는 데가 어디지요?"
"마포예요."
"영등포 로터리 알아요?"
"네, 알아요."
"거기서 택시를 내리면 H은행이 있어요. 그 은행 맞은편에 보면 길이 하나 있어요 그 길로 쭉 오면, 한 백 미터쯤 쭉 오면 세탁소가 하나 있어요. 그 세탁소를 끼고 오른쪽으로 골목이 하나 나 있어요. 그 골목으로 쭉 오면 담배 가게가 하나 있어요. 그 담배 가게를 끼고 이번에는 왼쪽으로 돌아야 해요. 왼쪽으로 계속 오면 여관 간판이 하나 붙어 있을 거예요. 남일이라는 여관이에요. 그 바로 옆집이에요. 파란 대문 집이에요. 찾기가 아주 쉬워요. 언니한테 잘 좀 가르쳐 주세요."
"네, 알겠어요."
장미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상대방 여자가 다시 말을 걸어 왔다.
"참, 학생은 고등학생이에요?"
"아니에요, 중학생이에요."
"아, 그래. 그런데 말하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 어른스럽지? 어느 학교에 다녀요?"
"K여중 3학년이에요."
"아, 그래. K여중이면 좋은 학교지. 참, 오늘 방학하지 않았나?"
"네, 맞아요."
"그러면 학생, 내 하나 부탁할 게 있는데 들어줘요. 우리 언니는 아무리 가르쳐 줘도 혼자서는 여기에 찾아오지 못할 거예요. 틀림없이 또 헤매다닐 거예요. 내가 마중 나가야 하는데 지금은 집이 비어서 그럴 수가 없어서 그러니까 수고스럽지만 학생이 좀 우리 언니를 데려다 줄 수 없을까? 택시 타고 오면 금방이니까 그렇게 좀 해줄 수 없겠어요? 그렇게만 해주면 내가 수고비는 충분히 주겠어요. 이만 원 줄 테니까 그렇게 해줘요. 아니 삼만 원 주겠어요. 학생, 꼭 그렇게 해줘요. 부탁이에요! 아기가 몹시 아픈 모양인데 부탁해요."
장미는 당황했다.
그녀는 구원을 청하듯 동희를 쳐다보고 나서,
"네, 알았어요."
하고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은 시골 아주머니를 안내해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마음 속으로는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친절을 베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에 전화 저쪽의 여인이 먼저 그것을 요구하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꼭 좀 부탁해요!"
전화 저쪽의 여인은 다시 한 번 당부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장미는 여인의 삼만 원을 주겠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마치 이쪽을 어린애로 알고 돈으로 꾀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그러나 시골 아낙의 초라한 몰골을 보니 그런 마음은 도로 쑥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아낙의 피로에 지친 두 눈은 호소하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낙의 두 눈은 여느 시골 여자들처럼 더없이 선한 빛을 띠고 있었다.
장미는 메모지에 적은 내용을 아낙에게 보이며 전화를 통해 들은 대로 그녀에게 동생의 집을 찾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아낙은 장미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이고, 난 무슨 이야기인지 통 모르겠네. 어디가 어딘지 정신이 엇갈려서……."
말도 말라는 듯이 그녀는 손을 휘휘 내젓기까지 했다.
사실 그녀가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장미가 보기에도 아낙의 동생이 설명해 준 내용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미 자신도 알아들은 척하긴 했지만 그 집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낙의 동생은 찾기 쉽다고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쪽에서 본 사정이고 처음 찾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곳이 찾기 쉬운 곳일 것 같지는 않았다.
장미는 난감한 표정으로 동희를 바라보았다.
동희 역시 난처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자꾸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장미는 동희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귀엣말로 속삭였다.
"어떡하지?"
"글쎄, 난 약혼식에 가봐야 해."
두 소녀는 약속이나 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난처할 때면 하는 버릇이었다.
"좀 데려다 달래. 저 아줌마 동생이라는 여자가 전화를 받았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쪽으로 오라고 하지 그랬어. 아니면 중간쯤에서 만나기로 하든가 말이야."
"그렇게 할 수가 없대. 집이 비어서 나올 수가 없대."
장미는 돈 이야기를 할까말까 망설였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삼만 원이라는 돈이 결코 적지 않은 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그녀는 용돈이 궁했다.
집이 가난해서 라기보다는 부모가 일 주일마다 주는 용돈이 그녀의 씀씀이에 비해 너무 적었던 것이다.
"아줌마를 데려다 주면 삼만 원을 주겠대. 아줌마 동생이 전화로 그랬어."
동희는 놀란 듯이 장미를 쳐다보았다.
장미는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함께 가자 얘."
"난 안 돼. 언니 약혼식에 가봐야 해."
동희는 단호하게 머리를 내저었다.
"택시 타고 빨리 갔다 오면 되잖아. 영등포니까 얼마 안 걸려."
장미는 어떻게 해서든 친구와 함께 가고 싶었다.
혼자서는 어쩐지 내키지가 않았다.
그러나 동희는 함께 갈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지금도 늦었단 말이야. 빨리 가봐야 해."
"그럼 난 어쩌지? 혼자 갈 수도 없고……."
"혼자 가도 되잖아."
"난 자신이 없단 말이야. 너하고 함께 가면 몰라도……."
소녀들이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아낙이 울상을 한 채 다가왔다.
"학생들, 나 좀 데려다 줘요. 나 좀 데려다 주면 우리 동생이 섭섭하게 하지는 않을 거야. 길 잃은 사람 길 좀 안내해 주는 것도 얼마나 좋은 일이우. 미안하지만 그렇게 좀 해줘요."
그러자 안 되겠다 싶었는지 동희가 나섰다.
"전 언니 약혼식에 가야 하기 때문에 안 되고요, 제 친구한테 부탁해 보세요."
장미는 야속한 듯 동희를 쳐다보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좋아, 나 혼자 갔다 오겠어. 아줌마, 가요. 모셔다 드릴게요."
"아이구, 이런 고마울 데가……. 학생은 생긴 것도 곱지만 심성은 더 곱구만. 학생은 천당 갈 거유."
장미는 손을 들어 택시를 불렀다.
지나가던 택시가 끼익 소리를 내며 급정거했다.
장미는 시골 아낙을 뒷자리에 태우고 자신은 앞자리에 올랐다.
"미안해. 잘 다녀와."
동희가 문을 잡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일 봐!"
차가 앞으로 미끄러져 갔다.
장미가 뒤돌아보니 동희는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오랜 이별이나 되는 것처럼.
"어디 갈 겁니까?"
운전사가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영등포 로터리에서 내려 주세요."
장미는 익숙하게 말했다.
"학생, 정말 고마워요. 세상에 이리 고마울 데가 어디 있을까. 뭘로 이 은혜를 갚을까잉?"
시골 아낙은 입에 침이 마르게 장미를 칭찬했다.
장미는 그녀의 칭찬이 듣기에 좋았다.
자신의 행위는 참 보람 있는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기까지 했다.
운전사도 사정을 알았던지,
"학생, 참 좋은 일 하는군."
하고 칭찬해 주었다.
그 운전사는 꽤 늙어 보였다.
살기가 어려운지 꾀죄죄한 몰골에 몹시 말라 보였다.
거기다 안경까지 끼고 있었다.
얼마 후 택시는 영등포 로터리에 닿았다.
장미와 아낙은 로터리 한쪽에 내려섰다.
장미는 주머니를 털어 택시비를 지불했다.
"차비는 아주머니가 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학생이 안내해 준 것만도 고마울 텐데 차비까지 내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아이고, 말씀 안 해도 다 알고 있어라. 내가 돈을 가진 게 없응께 그러제 왜 그러것소. 이따가 동생 만나서 차비 다 계산해 줄 것인께 걱정하지 말고 가시요. 이렇게 고마운 학생한테 차비만 주겄소."
"그야 그래야지요."
운전사는 끄덕하고 나서 장미를 다시 한 번 눈여겨보았다.
그녀의 미모에 찬탄의 눈길을 보내고 나서,
"나중에 크면 좋은 처녀가 되겠구나."
하고 중얼거리면서 역 쪽으로 차를 몰았다.
"여그가 어딩가?"
아낙은 행여 떨어질세라 장미 곁에 바싹 따라붙어 걸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영등포예요."
"아이고, 여그가 말로만 듣던 영등포구만. 워메, 무슨 차가 이렇게 많고 무슨 사람도 이렇게 많당가이."
장미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H은행을 찾았다.
"서울은 어디를 가나 사람도 많고 차도 많아요."
"워메, 이 사람들이 다 뭘 묵고 살까이?"
"그래도 굶는 사람은 없나 봐요. 아, 저기 있구나."
장미는 H은행 건물을 손으로 가리켰다.
"벌써 찾았어?"
"아니에요, 이제부터 찾아야 해요."
"이렇게 복잡한 디서 어떻게 살까이?"
"살다 보면 그렇지도 않아요."
장미는 제법 어른스럽게 말했다.
마침내 은행 앞에 이르렀다.
맞은편을 보니 과연 길이 하나 있었다.
차가 한 대 드나들 수 있는 너비의 골목이었다.
그들은 길을 건너 갔다.
골목으로 들어서니 여관이며 여인숙 간판이 즐비했다.
어딘지 지저분하고 불결한 느낌이 드는 골목이었다.
장미는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며 골목 안으로 계속 걸음을 옮겨 놓았다.
골목 안 그늘진 곳 여기저기에 젊은 여자들이 허벅지를 드러내 놓고 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들의 대부분은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고 가슴이 깊이 패고 팔이 없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한마디로 자극적인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장미는 어린 마음에도 뭔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불안한 눈으로 골목을 살폈다.
그때 호들갑 떠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머, 언니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젊은 여인 하나가 시골 아낙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껴안고 발을 굴렀다.
"아이구, 두번 다시 서울에 안 올란다. 이 학생이 없었으면 너도 못 만나고 갈 뻔했다."
"올 시간이 됐는데도 안 오기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참이에요."
목소리가 아름다운 그 젊은 여인은 노리끼리한 눈으로 장미를 바라보았다.
"이 학생이 아까 전화 건 학생인가? 어머! 예쁘기도 해라. 정말 고마워요."
어깨를 잡고 흔드는 그녀가 장미는 어쩐지 싫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얼굴이 부은 듯 누르께하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것하며 눈까지 노리끼리한 것이 사납고 징그러워 보였다.
"자, 집에 가서 좀 쉬었다가 가요. 수박 사다가 얼음에 재어 놨으니까 그것 좀 들고 가요."
"아니에요, 그냥 갈래요."
장미는 뒤로 몸을 뺐다.
그러자 젊은 여인이 냉큼 그녀의 책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면 안 되지. 아까 내가 전화로 말한 것도 있고 하니까 그것도 받을 겸 잠깐 우리 집에 들렀다 가요."
"학생이 그냥 가믄 안 되지. 이리 고마운 학생을 그냥 보내면 안 되여. 차비도 학생이 냈으니까 동생이 다 계산해서 줘야 히여. 참말로 이 학생이 없었으믄 나는 오도가도 못 했을 판이랑께."
시골 아낙이 당연하다는 듯 동생을 거들고 나왔다.
"가방 이리 주세요. 그냥 가겠어요."
장미는 가방을 도로 뺏으려고 했지만 젊은 여인은 이미 저만치 가고 있었다.
장미는 울상이 되어 잔 걸음으로 그 여인을 따라갔다.
"가방 이리 주세요."
"그러지 말고 잠깐 들렀다 가요. 너무 고마워서 그러니까 잠깐 땀좀 식혔다 가요. 그리고 돈도 받아 가야지.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니까 학생한테 삼만 원을 주겠어. 얼마 안 되지만 받아 가요."
"돈은 안 주셔도 괜찮아요."
"무슨 소리! 우리 언니를 여기까지 데려다 줬는데. 그리고 약속은 약속이야.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야.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나는 제일 싫어해요."
장미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삼만 원이라는 금액이 갑자기 그녀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다.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으면 삼만 원이 생긴다.
그 돈은 바캉스 비용에 보태 써야지.
장미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시골 아낙네의 모습을 한 채 갖은 궁상을 다 떨었던 그 아주머니는 언제 그랬느냐 싶게 눈을 반짝이며 따라오고 있었다.
길가에 앉아 있는 여자들에게 눈을 흘기기도 하고 살짝 웃어 보이기도 하는 것이 그녀들과 잘 아는 사이인 듯했다.
그러다가 장미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재빨리 눈을 아래로 내리뜨면서 부지런히 따라붙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장미는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사태를 간파하기에는 그녀는 세상을 너무 몰랐고 너무 어렸다.
공교롭게도 그때 소나기까지 내렸다.
쾌청하던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번개와 천둥이 치면서 소나기가 쏴아 하고 쏟아졌다.
"학생, 빨리 와!"
앞서 가던 젊은 여인이 장미를 손짓해 불렀다.
장미는 비를 맞지 않으려고 냅다 뛰었다.
젊은 여인은 어느 낡은 회색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장미도 허둥지둥 그녀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것은 내부 구조가 이상하게 생긴 우중충한 건물이었다.
어두운 복도를 따라가면서 보니 양쪽으로 조그만 방들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그 안에서 거의 반라에 가까운 젊은 여자들이 혼자 벌렁 누워 있거나 남자들과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장미가 주춤하자 뒤따라온 아낙이 그녀의 등을 밀었다.
"어서 들어가. 여긴 여러 집이 사는갑다."
그들은 좁은 계단을 밟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 층에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삼 층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장미는 불안했다.
그래서 주춤거리는데 뒤에서 아낙이 등을 떠밀면서 '아따, 뭐가 이리 높다냐.
이렇게 높은 디서 어떻게 사냐?' 어쩌고 했다.
"다 왔어요."
아낙의 동생이라는 여인은 삼 층의 한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삼층의 맨 구석진 방이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좁은 방 안은 창문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
"좀 더울 거야. 선풍기를 틀어 줄게 앉아요."
젊은 여인은 전등을 켜고 나서 밖으로 잽싸게 나가더니 선풍기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장미는 집에까지 따라 들어온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녀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바닥에는 비닐 장판이 깔려 있었다.
한쪽에는 땟국이 흐르는 이부자리가 놓여 있었고 벽에는 웬 서양 여자의 알몸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거울이 한 개 걸려 있었고 판자로 가로지른 선반 위에는 빨간 비닐 가방이 한 개 놓여 있었다.
벽에는 싸구려로 보이는 여자의 옷가지가 몇 벌 걸려 있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요, 앉아."
젊은 여인이 어깨를 찍어누르듯이 누르는 바람에 장미는 엉거주춤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학생, 편히 앉아. 다 엄마 같고 언니 같응께 마음 푹 놓고 쉬었다 가라고. 시원한 것 좀 빨리 가져와 봐!"
"네, 잠깐 기다리세요."
젊은 여인은 시골 아낙에게 눈짓을 보낸 다음 재빨리 밖으로 사라졌다.
그동안 시골 아낙은 장미에게 동생 자랑을 늘어놓았다.
"내 동생은 이래봬도 돈이 참 많다고. 시골에 사논 논만도 스무 마지기가 넘고 소가 쉰 마리나 된다고. 이번에 건물 하나 샀다고 하던디 이 건물인갑다. 동생은 이렇게 건물도 사고 잘 사는디 나는 언제 한 번 이렇게 살까잉."
그녀는 아기를 앞으로 끌어안더니 말라붙은 젖을 꺼내 아기 입에 물렸다.
아기는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다가 미친 듯 젖을 빨아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금 후에는 젖이 나오지 않는지 칭얼거렸다.
그때 젊은 여인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두 개의 사기그릇이 놓여 있었다.
사기그릇 속에는 얼음 조각과 함께 수박 조각들이 떠 있었다.
"자, 시원하게 마셔요."
젊은 여인이 그릇 하나를 들어 장미 앞에 내려놓았다.
"언니도 좀 드세요."
"젖이 안 나와서 애기가 울어쌌는데 이걸 좀 먹여야겠다."
아낙이 숟가락으로 얼음물을 떠서 아기 입에 흘려 넣어 주자 아기는 울음을 뚝 그치고 그것을 받아 먹었다.
"어서 먹으라니까!"
젊은 여인이 재촉하는 바람에 장미는 마지못해 숟가락으로 수박 조각을 떠먹기 시작했다.
"참 곱기도 하다. 학생 이름이 뭐지?"
"장미예요."
"장미? 이름도 참 곱다. 아빠는 뭘 하시지?"
"대학교수세요."
"형제는 몇이나 되고?"
"저 혼자예요."
"오, 외동딸이군. 그럼 부모님 귀여움을 독차지하겠군."
"그렇지도 않아요."
"자, 이거 받아요. 약속대로 돈을 줘야지."
젊은 여인은 만 원짜리 세 장을 장미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장미는 그 돈을 집어 여인에게 돌려주었다.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받아요. 어른이 주는 거니까 받아도 괜찮아. 우리 언니를 여기까지 데려다 줘서 정말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 자, 사양하지 말고 받아요. 어서!"
"학생, 받아요."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하면서 그녀는 그 돈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자, 이거 남기지 말고 다 마셔요."
젊은 여인이 이번에는 사기그릇을 들어 장미의 입에다 갖다 댔다.
"제가 먹겠어요."
장미는 그릇을 받아 들고 가만히 숨을 몰아쉬었다.
사실 그녀는 그것이 먹기 싫었다.
그러나 성의를 생각해서 먹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빨리 먹어치워야만 그곳에서 빨리 나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장미는 그릇을 입에다 대고 얼음물을 꿀꺽꿀꺽 마시다가 그릇을 내려놓고 숟가락으로 수박 조각을 떠먹었다.
그렇게 반쯤 먹고 난 그녀는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못 먹겠어요."
그녀는 그릇을 내려놓다 말고 하품을 했다.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하품을 참으려고 하는데 또 하품이 나왔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눈이 자꾸만 감겨 왔다.
"학생, 피로한 모양이지? 괜찮으니까 좀 누웠다 가요."
젊은 여인이 그렇게 말하면서 이부자리를 폈다.
"아, 아니에요. 가야 해요."
장미는 손을 내저으면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무릎에 힘이 없어 일어서지지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좀 누웠다 가라니까."
이번에는 아낙이 장미의 어깨를 잡아 앉혔다.
"안 돼요, 가야 해요."
장미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시야가 침침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골 아낙과 젊은 여인이 소리 없이 웃고 있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고 이를 악물어 보았다.
그러나 소용 없는 짓이었다.
"자, 그러지 말고 누워요. 천하 없는 장사라도 눕지 않고는 못 배기지."
젊은 여인은 장미의 어깨를 잡아 이부자리 위에 눕혔다.
눕혔다기보다는 어깨를 밀었다는 것이 옳았다.
장미는 이부자리 위에 힘없이 쓰러졌다.
"가야 해요……. 우리 집에…… 가야 해요……. 우리 집에……."
장미의 입에서는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림이 흘러나오다가 그것마저 뚝 그치고 말았다.
그녀의 눈은 거의 감겨 있었고, 그녀는 손끝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흐릿하게 두 여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가 사라졌는데 그것은 늙은 악귀처럼 무시무시해 보였다.
"아줌마, 정말 재주 좋아."
"아이고, 말도 마. 요걸 꼬셔 오느라고 얼마나 애먹었다고."
"이런 애는 부르는 게 값이야."
"그걸 말이라고 해? 이렇게 싱싱하고 예쁜 것을 어디서 구해?"
두 여인의 말소리가 마치 솔바람처럼 장미의 귓가를 간지럽히다가 멀리 사라져 갔다.
2.
무서운 밤 캄캄하다…… 보이는 것은 캄캄한 어둠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왜 이렇게 어두울까…… 너무 어두워 무섭다…… 이상하다…… 이렇게 어두운 밤은 처음이다……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려 온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소리…… 천둥 치는 소리…… 여자의 비명소리…… 왜 이렇게 어두울까…… 또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 온다…… 여기가 어디일까…… 우리 집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밤이라 해도 내 방은 이렇게 어둡지 않다…… 이렇게 퀴퀴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무섭다…… 오싹 소름이 돋는다…… 울고 싶다…… 엄마를 부르고 싶다…… 아빠를 부르고 싶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얼어붙은 듯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꿈이 아닐까…….
그녀는 주먹을 쥐어 보고 엉덩이를 꼬집어 본다.
아프다.
꿈은 아니다.
바로 곁에서 남자의 상스러운 욕설이 들려 온다.
벽에 무엇이 부딪치는지 쿵 하는 소리도 들려 온다.
소녀는 튕기듯 일어나 앉는다.
머리가 빠개질 듯 아프다.
소녀는 벽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다.
아, 너무 어둡다.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줌이 마렵다.
이상한 냄새가 난다.
여기는 내 방이 아니야.
내 방은 이렇지 않아.
그렇다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그녀는 생각을 더듬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떤 시골 아낙을 안내해주던 일, 어느 우중충한 건물 속에 들어가 얼음물에 잰 수박을 억지로 먹던 일, 삼만 원의 돈을 사례비로 받던 것 등이 생각났다.
마지막으로 집으로 가겠다고 일어서다가 이부자리 위에 힘없이 쓰러지던 일도 어렴풋이 생각났다.
그 이상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그 집에 누워 있었단 말인가.
집에도 가지 못하고 여태까지 그 집에 있었단 말인가! 한참 벽을 더듬어 문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찾았다.
손잡이가 만져졌다.
손잡이를 잡아 비틀며 문을 밀기도 하고 당겨 보기도 했다.
그러나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갇혔다는 생각에 소녀는 겁이 덜컥 났다.
그녀는 정신없이 문을 두드려댔다.
울음을 터뜨리며 문을 흔들고 때렸다.
한참 있자 문고리를 벗기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동시에 방 안에 불이 들어왔다.
침침한 불빛이었다.
"왜 그래?"
험상궂게 생긴 젊은 남자가 소녀를 쏘아보면서 거칠게 물었다.
소녀는 방구석에 내팽개쳐 있는 책가방을 들고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
출입구를 가로막고 선 사내는 비키려고 하지 않았다.
"비켜 주세요. 나갈 거예요."
소녀는 울면서 말했다.
"어디를 나간다는 거야?"
사내가 눈을 부라렸다.
"우리 집에 갈 거예요."
"집에 간다고? 누구 맘대로 간다는 거야?"
사내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났다.
나이는 서른이 넘은 성싶었고 험상궂은 인상에 어울리게 몸집이 우람해 보였다.
한쪽 뺨에는 길게 찢어진 흉터까지 있었다.
콧잔등은 움푹 꺼져 있었고 눈매는 가늘면서 날카로워 보였다.
소녀는 사내와 아무 말도 나누고 싶지가 않았다.
그에게 할 이야기도 없었고 그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어깨를 밀치면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가긴 어디를 간다는 거야?"
남자는 위협적으로 말했다.
"비켜 주세요. 우리 집에 갈 거예요."
장미는 훌쩍훌쩍 울었다.
사내는 눈을 부라리다가 장미의 가슴팍을 떼밀었다.
장미는 그만 힘없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나간다는 거야? 여기 일단 들어오면 죽기 전에는 나갈 수 없어. 까불지 말고 가만 있어."
소녀는 가방을 다시 챙겨 들고 허둥지둥 일어났다.
그녀는 사내가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내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여기서 나갈 수 없단 말인가.
우리 집에 가겠다는데 왜 안 된다는 것인가.
"아저씨, 집에 갈래요. 비켜 주세요."
사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넌 내가 돈 주고 샀으니까 여기서 함부로 나갈 수 없어. 도망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 도망치다가 잡히면 맞아 죽을 줄 알아."
"아저씨, 보내 주세요. 집에서 엄마가 기다려요."
장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이제 너한테 엄마 같은 건 없어. 우는 모습이 더 예쁘긴 하지만 지금은 밤도 깊었고 다른 사람들 잠도 자야 하니까 시끄럽게 굴지 말고 얌전히 있어."
"왜 집에 갈 수 없다는 거예요? 저는 나쁜 일 한 거 없어요. 어떤 아줌마가……."
사내는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들을 필요 없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다 알아, 다 알고 있어."
장미는 아까 낮에 수박을 준 그 여자를 생각했다.
"주인 아줌마 불러 주세요. 아줌마는 잘 알 거예요."
이 남자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래서 나를 무턱대고 못 나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남자는 술에 취해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줌마는 지금 자고 있어. 할 이야기가 있으면 나한테 해."
"화장실에 갈 거예요."
사내는 턱으로 구석에 있는 요강을 가리켰다.
"저기다 눠."
장미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을 가둬 놓고 못 나가게 하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저씨, 집에 보내 주세요."
"안 된다니까!"
사내는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이어서 문고리 걸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뒤이어 방 안의 불이 꺼졌다.
"문 열어 주세요."
소녀는 공포에 질려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엉엉 소리 내어 울면서 한참 동안 정신없이 문을 두드려댔다.
나중에는 손이 아파 더 이상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급한 대로 요강에다 소변을 보았다.
소변을 보면서도 그녀는 울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현대 문명사회에서 사람을 이렇게 가두어 놓고 어쩌자는 것인가.
혹시 돈을 노린 유괴가 아닐까.
그 밖에는 다른 이유란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땀과 눈물에 범벅이 된 채로 한참 동안 정신없이 울었다.
온갖 무지개빛 꿈과 행복이 하룻밤 새에 무참히 깨어지고 자신은 영영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캄캄한 동굴 속에 갇혀 짐승 같은 생활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몰고 온 공포와 절망감에 그녀는 몸둘 바를 몰랐다.
실컷 울고 난 소녀는 울고만 있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문 쪽으로 기어가 이번에는 온몸으로 문을 밀어붙였다.
몇 번 그렇게 어깨가 으스러지게 밀어붙이자 문이 떨어져 나갈 듯 흔들렸다.
그러자 다시 문이 열리면서 방 안에 불이 들어왔다.
아까의 그 사내가 다짜고짜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소녀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소녀는 그만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가만 있으라는데 왜 지랄이야? 죽고 싶어!"
소녀는 상대방이 너무 무서워 울 수도 없었다.
너무 세게 얻어 맞았기 때문에 얼얼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따귀를 얻어맞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때 젊은 여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아까 낮에 보았던 그 시골 여인의 동생 된다는 여자였다.
그녀를 보자 장미는 구세주를 만난 듯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아줌마, 저 집에 갈래요. 이 아저씨 무서워 죽겠어요. 집에 가겠 다는데 저를 여기다 가두어 놓고 때리지 않아요."
장미는 가방을 들고 문 쪽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노란 여인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소녀를 노려보았다.
"아니, 이 애가 날 언제 봤다고 이래? 나 참 기가 막혀서……."
장미는 그만 주춤하고 서버렸다.
모든 것이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가방 거기 놔두고 얌전히 잠이나 자고 있어. 시끄럽게 처울지 말고 말이야. 정말 시끄럽게 굴면 깡패를 들여보낼 거야."
노란 여인은 무섭게 눈을 굴리며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소녀는 그만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아줌마, 왜 그러세요? 저 집에 갈 거예요. 집에 가겠다는데 왜 못 가게 하는 거예요?"
"흥, 누구 맘대로 집에 가겠다는 거야? 미안하지만 이 집에 들어온 이상은 맘대로 나갈 수 없어."
그녀는 소녀의 어깨를 안쪽으로 툭 쳤다.
소녀는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뒷걸음질쳤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노란 여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갈 수 없다는 거예요? 이유가 뭐예요? 제가 뭐 잘못한 게 있나요?"
그녀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집을 찾지 못해 쩔쩔매는 시골 여인을 끝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는 것뿐이었다.
소녀는 노란 여인에게서 받았던 돈을 돌려주기 위해 주머니를 뒤져 보았지만 그 돈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왜 갈 수 없는지 말해 줄까?"
노란 여인은 야릇한 미소를 띠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사이를 틈타 장미는 재빨리 밖으로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채 빠져 나가기도 전에 사내의 우악스런 손길이 그녀의 덜미를 낚아챘다.
"요것이 어디를 가려고 그래?"
장미는 방구석에 도로 처박혔다.
"여기서 나가 봐야 아래층에 또 문이 있기 때문에 나갈 수가 없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내 말이나 잘 들어."
노란 여인은 담배를 꼬나물며 말했다.
장미가 보내 달라고 애걸했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여기가 어떤 덴지 모르지? 여기는 사창가야. 사창가가 뭐하는 곳이냐고? 남자들한테 돈 받고 몸을 파는 곳이야. 뭐 그렇게 놀랄 것 없어. 너 같은 애들이 이 근방에는 득실득실하니까. 처음에는 다들 울고불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얌전해져. 넌 내가 산 거야. 아까 그 애기 업은 아줌마한테 이십만 원이나 주고 샀단 말이야. 넌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예쁘고 해서 비싸게 주고 샀단 말이야. 비싸게 주고 산 애를 내가 내보낼 것 같니? 바보 같은 생각일랑 하지도 마."
장미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럼 그 아줌마는…… 시골에서 올라온 게 아니었나요?"
소녀는 숨넘어가는 소리로 물었다.
"그건 다 거짓말이었어. 너를 데려다가 팔아먹을려고 그랬던 거야. 그렇게 해서 팔려 온 애가 어디 한두 명인 줄 아니? 그 아줌마는 그런 식으로 해서 큰 돈을 벌었다는 걸 알아야 해."
소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노란 여인의 말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가려거든 부지런히 돈을 벌어서 빚을 갚으란 말이야. 난 너를 사느라고 이십만 원이나 들었으니까. 여기서 돈 버는 방법은 아주 간단해. 남자 손님을 받으면 되는 거야. 넌 예쁘니까 손님들이 많이 찾을 거야. 손님들하고 놀아 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비로소 장미는 노란 여인이 하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완강히 머리를 흔들었다.
"싫어요! 그럴 수 없어요! 엄마한테 전화 걸어서 이십만 원 가져 오게 하겠어요! 당장 가져 오게 하겠어요!"
"안 돼, 그건 안 돼. 내 입장이 거북해지니까 그건 안 돼. 네 엄마가 여기에 오면 나를 가만 놔둘 줄 아니? 그건 안 돼. 넌 손님을 받아서 빚을 갚아야 해."
"싫어요! 그럴 수 없어요! 전 아줌마한테 빚진 일 없어요!"
"내가 너를 이십만 원 주고 샀어."
노란 여인은 이십만 원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젊은 남자 두 명이 문 앞에 나타났다.
두 명 다 술에 취해 있었고 인상이 험악했다.
"아다라시가 왔다고 해서 구경하러 왔지."
말대가리처럼 생긴 자가 문턱에 턱 하니 걸터앉으며 말했다.
노란 여인이 아니꼽다는 듯 눈을 홀기자 쥐새끼처럼 생긴 자가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우리 왕초가 괜찮으면 사겠대."
"안 팔아!"
여인은 앙칼지게 쏘아붙이며 머리를 흔들었다.
"안 판다구? 흥, 웃기는군. 왕초 말씀을 그렇게 함부로 꺾으면 재미없을 텐데……."
말대가리가 이죽거렸다.
"예쁜 애들 겨우 마련해 놓으면 쏙쏙 빼가구……. 우린 어떻게 장사하란 말이야!"
"넘겨줘. 또 구하면 될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 너무 예쁜 애는 우리 차지가 안 된다고 했잖아."
콧잔등이 움푹 꺼진 사내의 말이었다.
그와 노란 여인은 부부 사이인 듯했다.
"어디 좀 봅시다. 그렇게 쭈그리고 있으면 보이나. 좀 세워 봅시다."
쥐새끼처럼 생긴 자가 장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콧잔등이 움푹 꺼진 사내가 장미에게 다가와 그녀를 뒤에서 끌어 안고 일으켜 세웠다.
소녀는 사내의 손에서 빠져 나가려고 몸부림 쳤다.
"야, 최곤데!"
말대가리가 군침을 흘리며 탄성을 질렀다.
"왔다군! 됐어!"
쥐새끼가 손가락을 퉁겼다.
"바로 왕초가 찾던 애야. 몇 살이지?"
"열여섯이야."
"열여섯이면…… 중 3인가?"
그러는데 여인이 방바닥을 주먹으로 치면서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네 장 내놔! 네 장 아니면 안 팔아!"
"다시 한 번 물건을 봅시다. 뒤로 돌려 봐요."
장미는 뒤로 돌려졌다.
"음, 몸은 다 컸군. 저만하면 왔다야. 세 장 주지."
쥐새끼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수표 세 장을 꺼내 여인 앞에 던졌다.
"안 돼, 한 장 더 내놔!"
여인은 수표를 걷어치우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 아줌마 정말 왜 이러지? 이야기 다 듣고 왔는데 왜 이래? 한 장 주고 사서 세 장에 팔면 됐지 뭘 그래?"
말대가리가 정색하고 말하자 그녀는 수그러들었다.
장미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녀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그들은 어린 소녀를 놓고 물건을 흥정하듯 돈을 주고받았고, 장미는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눈을 뜨고 보면서도 아무 힘도 쓸 수가 없었다.
"야, 이리 나와."
쥐새끼처럼 생긴 자가 턱짓으로 장미를 불렀다.
"따라가. 넌 이제 여기 있을 필요 없어. 이분들이 널 샀으니까 이 분들을 따라가. 나한테 보내 달라고 말해 봤자 소용없어."
소녀는 흐느껴 울면서 안 가겠다고 버텼다.
그러자 콧잔등이 꺼진 사내가 그녀를 문 쪽으로 밀어붙였다.
"이거 정말 아다라신가? 손 대지 않았지?"
쥐새끼가 노란 여인과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손 댄 건 따귀 하나 때린 것뿐이야."
"만일 아다라시가 아니면 왕초가 가만 안 둘 거야."
"깨끗해. 보면 몰라? 어제 들어온 그대로 입고 있는 거야."
사내는 장미를 밖으로 밀어냈다.
장미는 울면서 책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젊은 남자 두 명이 그녀를 앞뒤에서 감싸듯이 하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도중에 앞서 가던 자가 멈춰 서서 장미를 노려보며 주의를 주었다.
"만일 도중에 도망치든가 소리치든가 하면 이걸로 얼굴을 그어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눈앞에 흔들어대는 것을 보니 날이 시퍼런 면도칼이었다.
장미는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뒤에 서 있던 자가 그녀의 허리를 쿡 찔렀다.
"여기도 있다는 걸 잊지 마."
장미는 걸음을 옮기기는 했지만 제정신으로 걸어가는 게 아니었다.밖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골목에는 차가 한 대 대기하고 있었다.
침침한 가로등 불빛이 마치 빗물을 타고 차 위로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장미는 혹시나 해서 차 넘버를 머리 속에 새겨 넣었다.
먼저 쥐새끼가 뒷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말대가리가 장미의 손에서 책가방을 빼앗더니 그녀를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말대가리는 책가방을 길바닥에다 내던져 버린 다음 뒤따라 차에 올랐다.
"안 돼요! 가방 주세요!"
장미의 애처로운 부르짖음은 부르릉 하는 엔진소리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운전석에는 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뒷좌석에서 두 남자 사이에 끼여 앉은 장미는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아저씨, 부탁이에요. 집에 보내 주세요……. 부탁이에요, 보내 주세요……."
장미의 울음 섞인 호소에 그들은 잠자코 웃기만 했다.
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다가 장미가 더욱 거세게 나오자 그 중의 한 명이 팔꿈치로 그녀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장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면서 입에서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얌전히 있으란 말이야."
위협적인 한마디에 장미는 더 이상 보내 달라고 애걸하지 않았다.
다시 얻어맞을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갑자기 차 안에 음악이 울려 퍼졌다.
템포가 빠른 팝송이었다.
그들은 음악에 맞춰 어깨를 흔들어댔다.
차는 비를 헤치며 한참을 달려갔다.
한 명이 장미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밑으로 숙이게 했기 때문에 차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녀는 감도 잡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녀를 아예 그들의 무릎 위에 엎어 뉘었다.
도착할 때까지 그렇게 누워 있으라는 말에 그녀는 구역질이 나는 것을 참으며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엄습하고 있는 공포를 감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대로 가다가는 곧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차는 숲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차에서 끌어내려졌다.
비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후려쳤다.
비바람에 나뭇가지가 부러질 듯 휘어진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
저만치 아래로는 시커먼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호화로운 별장이었다.
별장 안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노랫소리와 함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마치 무슨 잔칫집 같은 분위기였다.
별장은 이 층이었는데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담쟁이덩굴이 전면을 뒤덮다시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은 지 꽤 오래 된 것 같았다.
소녀는 떠밀려 안으로 들어가 거실에 세워졌다.
거실에서 떠들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데리고 왔습니다."
쥐새끼같이 생긴 자가 거구의 사나이를 향해 허리를 굽혀 보였다.
"음……."
ㄷ자형의 긴 소파 중앙에 앉아 있던 거구의 사나이는 탁자 위에 벗어 놓아 두었던 안경을 집어 들더니 그것을 코 위에 걸치고 장미를 바라보았다.
"이 앤가?"
"네."
"몇 살이지?"
"열여섯 살이랍니다. 중 3이라고 합니다."
"음, 됐어. 좋아!"
거구의 사나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훈도시만 찬 채 홀랑 벗고 있었다.
레슬러처럼 비대한 몸집의 사나이였다.
거대하게 튀어나온 배는 자기 무게에 못 이겨 밑으로 축 처져 있었다.
그는 멋지게 기른 콧수염 한쪽을 손가락으로 비비면서 장미의 몸을 뜯어보고 있었다.
눈이 너무 작아 감정이 엿보이지 않는 돌대가리 같은 인상이었다.
그의 겨드랑이 속에 인형같이 생긴 조그만 여자가 장식품처럼 끼여 있었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 양 옆으로 몇 쌍의 남녀들이 더 있었다.
그들은 거의 벗고 있었다.
수치심 같은 것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이 보였고 눈들은 꿈꾸고 있는 듯 게슴츠레한 빛이었다.
탁자 위에는 양주병들이 놓여 있었고 주사기와 약병 같은 것들도 뒹굴고 있었다.
"한 대 놔줘, 꼼짝 못 하게 말이야."
훈도시의 사내가 한마디 하자 장미를 데려온 두 명의 남자가 그녀를 양쪽에서 붙잡았다.
앙탈하는 그녀를 깔고 앉아 한 놈이 어깻죽지를 잡아 찢었다.
녹색 물방울 무늬의 옷이 찢겨져 나가면서 우윳빛 하얀 살결이 드러났다.
살 속으로 주사 바늘이 뚫고 들어갔다.
소녀의 입이 벌어지면서 가는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3.
기다리는 밤 양미화는 안절부절못한 채 거실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현관 쪽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벽시계를 올려다보기도 하고,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기도 하면서 몹시 초조하고 불안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딸 장미는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전화 연락도 없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무슨 사고가 났음이 틀림없다고 그녀는 직감했지만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몰라 무작정 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장미가 전화 한 통화 없이 늦도록 귀가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해 어미 된 입장에서 자못 노여움을 품었지만 지금은 오로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마음뿐이었다.
양미화와 그녀의 남편 김종화에게 있어서 장미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다.
그녀는 장미 하나만을 낳고 어쩔 수 없이 일찍 단산했던 것이다.
그들 부부는 물론 자식을 하나 더 바랐지만 장미를 낳고 나서 왠지 더 이상 임신이 되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병원에 가서 진찰해 보니 자궁에 근종이 생겨 자궁을 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뿐인 딸에 대한 사랑은 어머니보다도 아버지 쪽이 더 지극해서 거의 병적일 정도의 애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가정 생활은 장미 중심으로 꾸며졌고, 그녀의 미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한 투자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때로는 남편의 그와 같은 병적인 애정에 미화는 질투를 느끼기도 했고, 그것 때문에 말다툼을 벌이는 일도 없지 않았다.
밖에 나가 장미를 기다리던 양은화가 비에 후줄근히 젖은 모습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미화의 동생으로 방학을 맞아 형부가 없는 동안 언니네 집에 놀러 와 있었다.
"비가 굉장히 와요. 바람도 세차게 불고 있어서 우산도 소용이 없어요."
은화는 비에 젖은 머리를 타월로 닦으며 언니의 안색을 살폈다.
미화는 비바람 치는 창 밖 어둠 속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귀여운 딸이 저 어둠 속 어디선가 울부짖고 있다고 생각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언니, 형부한테 연락하세요."
"안 돼, 좀더 기다려 보고 나서……."
미화는 머리를 흔들었다.
김종화는 곤충학자였다.
그는 방학을 이용해 곤충 채집을 위해 울릉도에 가 있었다.
그가 숙소로 정해 놓은 여관의 전화 번호를 미화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라도 남편과의 연락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능한 한 남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마음놓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장미가 지금 이 시간까지 아무 연락 없이 집에 안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면 남편은 모든 일을 팽개치고 달려올 것이다.
미화는 남편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았다.
장미는 돌아올 것이다.
별일 없이.
"아무래도 이상해요.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겠어요."
은화가 다시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대학 3학년 학생이었다.
그다지 눈에 띄는 미모는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데가 있는 아가씨였다.
"아침까지 기다려 봤다가 그때까지도 안 돌아오면 경찰에 신고해야겠어."
미화는 법석을 떠는 것이 싫었다.
주위 사람들이 걱정해 주는 척하면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몰려드는 것이 못마땅했다.
조용히, 될 수 있으면 조용히 해결하고 싶었다.
"전화라도 걸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장미가 그 정도는 알 텐데……."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보죠."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전화를 걸 수 없으니까 연락이 없는 거겠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연락이 없을 수 있어요?"
미화는 전화를 걸 수 없는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유괴되었을 경우이다.
그녀는 그전에도 그런 경우를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장미가 너무 예쁘다 보니 혹시 나쁜 사람들한테 유괴되지나 않을까 항상 불안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괴되었다면 범인으로부터 흥정을 위해 협박 전화라도 걸려 와야 이야기가 된다.
그런 전화도 전혀 없지 않은가.
두 번째는 교통사고를 당했을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이라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다면 직접 집에 연락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병원이나 가해자 측에서 조금만 신경을 써준다면 얼마든지 집에 연락을 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장미의 소지품 중에는 학생증도 있을 것이고, 노트 같은 것에는 학교명과 학년, 그리고 이름도 적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고 학교로 연락하면 된다.
학교에서는 즉시 집으로 연락해 줄 것이다.
세 번째는 장미 스스로 가출했을 경우이다.
사춘기의 소녀이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장미의 가출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미가 가출할 만한 이유는 없다.
그 애는 행복한 가정에서 풍요롭게 자란 티없이 맑고 명랑한 소녀이다.
가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미화가 불안을 이기지 못해 그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었다.
불길한 전화일 것만 같아 미화가 머뭇거리고 있자 은화가 냉큼 전화통 앞으로 달려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전화를 받고 난 그녀는 수화기를 언니에게 넘겼다.
"장미 담임 선생님이에요."
미화는 두어 시간 전에 장미 담임 선생님 댁에 전화를 걸었는데 그는 마침 집에 없었다.
이제야 집에 돌아온 모양이다.
그를 집에 한 번 초대한 적도 있고 학교에도 두어 번 찾아갔기 때문에 미화는 강기수 선생을 잘 알고 있었다.
"전화를 하셨다구요? 웬일이십니까?"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하는 것이 많이 취한 모양이었다.
"저기…… 좀 난처한 일이 생겨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밤 늦게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무슨 일입니까? 장미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장미가 아직까지 집에 안 들어왔어요. 전화 연락도 없고요."
"네에? 아니, 그럴 수가…… !"
강 교사는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그는 장미를 유난히 귀여워하고 있었다.
그 도가 지나칠 정도여서 미화는 조금은 불안해 하고 있었다.
"언제 학교에서 나갔나요?"
미화는 침착하려고 애쓰면서 조용히 물었다.
"오전 수업만 하고 모두 보냈습니다. 장미는 저한테 따로 와서 인사하고 갔습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걱정되시겠군요."
"친구들한테 알아보고 싶은데 전화 번호를 몰라서 못 알아보고 있어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혀 꼬부라진 소리는 정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강 교사는 꽤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영어교사로 아직 총각인 데다 미남이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 매우 인기가 좋았다.
"뭐 별일은 없을 겁니다. 경찰에는 연락하셨습니까?"
"아직 안 했어요. 좀더 기다려 보고 나서 하려구요."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지 이십 분쯤 지나 강 교사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꽤 흥분해 있었다.
"장미와 마지막으로 헤어진 학생을 찾았습니다!"
"어떤 학생인가요?"
"마동희라는 학생인데 장미와 단짝입니다."
동희라면 미화도 잘 알고 있는 학생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착실한 데다 장미와 친하고 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집에도 몇 번 온 적이 있는 학생으로, 이번 방학 때 장미가 그 애의 외가가 있는 제주도로 놀러 가겠다고 하도 졸라대서 허락해 주기까지 했다.
"동희라면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그 애한테 연락해 보고 싶었는데 전화 번호를 몰라서 전화를 못 걸고 있던 참이에요."
"동희하고 장미는 학교 앞에 있는 제과점에서 빙수를 하나씩 먹고 헤어졌답니다. 오늘 오후에 만나 영화 보러 가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답니다. 닥터 지바고를 보기로 했다는군요. 그때가 오후 한 시경이었다고 합니다."
"동희하고 집이 같은 방향인데 왜 거기서 헤어졌지요?"
동희가 집에 놀러 왔을 때 그녀는 잘 됐다 싶어 너희들 둘은 언제나 꼭 붙어다녀야 한다고 신신 당부했었다.
함께 다니면 유괴범들의 접근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동희는 사촌 언니의 약혼식에 가봐야 했답니다. 그런데 동희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제과점을 나와 집에 가려고 하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다가와서는 시골에서 올라왔는데 동생 집을 못 찾아 그런다면서 집을 좀 찾아 달라고 하더랍니다. 아기까지 업고 있는 아주머니가 불쌍해서 장미가 그만 혼자서 그 여자를 안내해 주기로 한 모양입니다. 함께 가고 싶었지만 동희는 약혼식장에 가봐야 했기 때문에 장미가 그 여자와 함께 택시를 타고 가는 것을 보기만 했답니다."
가슴에 무엇인가 쿵 하고 부딪치는 것 같은 충격을 느끼고 미화는 비틀했다.
"동희 말로는 틀림없는 시골 여자였답니다. 여자가 눈물까지 흘리면서 도와 달라고 하는 바람에 그만 마음이 약한 장미가 뿌리치지를 못하고 안내해 준 모양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라니요?"
미화는 숨이 가쁘게 물었다.
"아직 확실한 건 잘 모르겠지만…… 그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동희를 만나 봐야겠습니다."
"유괴된 거예요. 그 순진한 것이……."
급기야 그녀는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어린애라면 몰라도 장미같이 다 큰 애를 어떻게 유괴하겠습니까?"
"아니에요, 유괴된 게 틀림없어요! 요새 세상이 어떤 세상이라고 그 어리석은 것이 모르는 사람을 따라나서요. 지가 서울 지리를 얼마나 안다고 생판 모르는 사람을 안내하느냐 말이에요."
"사모님, 진정하십시오. 이럴수록 냉정하셔야 합니다. 날이 새는 대로 동희를 데리고 댁으로 가겠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미화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언니, 왜 그래? 뭐라고 그래?"
은화가 놀라서 언니의 손을 움켜잡고 물었다.
"그 바보 같은 것이 어떤 여자를 따라갔대."
"따라가다니? 왜?"
은화가 눈이 휘둥그래졌다.
미화는 강 교사한테서 들은 내용을 울며 이야기했다.
그러고 나서,
"장미는 유괴된 게 틀림없어. 그 여자한테 속아서 간 거야."
라고 말했다.
그녀의 직감력은 확실히 놀라운 데가 있었다.
그녀는 강 교사한테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딸이 유괴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 확실한 사실은 아니었다.
사실이라면 믿을 만한 증거가 필요했다.
"언니, 너무 비약해서 생각하지 마세요."
"비약이 아니야. 나한테는 직감적으로 오는 게 있어."
"장미가 어떤 애라고 유괴를 당해요? 그런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마세요."
"아니야, 아니야."
그녀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강기수는 동희를 데리고 새벽같이 달려왔다.
동희는 마치 자신에게 책임이라도 있는 듯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장미네 아파트로 들어섰다.
무엇보다도 급한 것이 동희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었다.
동희는 훌쩍훌쩍 울면서 어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이야기 사이사이에 미화와 강 교사가 질문을 던졌고, 그러면 그녀는 자기가 아는 한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 그리고 그 여자 동생이 언니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면 삼만 원을 주겠다고 했대요. 집이 비어서 나갈 수가 없으니까 꼭 좀 데려다 달라고 신신 당부했나 봐요."
돈 이야기가 나오자 미화와 강 교사는 아연 실색했다.
그것은 유괴의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 아주머니는 장미가 아무리 지리를 설명해 줘도 자기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고 하면서 장미한테 매달렸어요."
"장미는 어느 쪽으로 갔지?"
"영등포 쪽으로 갔어요. 그 집이 영등포에 있다고 했어요. 장미가 아주머니한테 설명해 주는 것을 들었는데…… 영등포 로터리에서 차를 내려가지고 H은행 쪽으로 가라고 했어요. 거기서 뭐라고 했는데 잘 기억이 안 나요. 영등포 로터리 부근에서 얼마 멀지 않은 것 같았어요."
장미가 시골 아낙에게 설명해 준 지리를 동희도 곁에서 들었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을 그대로 기억해 주기만 한다면 그 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동희는 그것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세탁소, 담배 가게, 여관 등을 더듬다가 그녀는 입을 다물어 버리곤 했다.
그런 이름들이 방향도 없이 들먹여졌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로서는 더욱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미화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소리를 죽여 가며 흐느꼈다.
그것을 보고 은화도 동희도 따라 울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강 교사뿐이었다.
그는 그래도 남자였기 때문에 얼굴빛만 창백할 뿐 눈물까지 흘리지는 않았다.
그는 약간 뚱뚱한 체격에 둥그스름한 얼굴을 한 스물아홉 살의 청년이었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코가 뭉툭한 것이 남성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미화는 오랫동안 흐느끼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내 울음을 그치고 나서 강 교사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여자가 우리 장미를 유괴했다고 보지 않으세요?"
"네, 저도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하지만 아직은 단정을 내리기가 어렵군요. 지금 경찰에 신고하시겠습니까?"
"신고하기 전에 먼저 장미 아빠한테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네, 그렇게 하십시오."
미화는 사색이 되어 울릉도로 장거리 전화를 부탁했다.
전화를 부탁한 지 십 분쯤 되어 울릉도가 나왔다.
"여보세요, 거기 갈매기 여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거기 서울 손님들 중에 김종화 씨 좀 부탁하겠어요."
"잠깐 기다리세요."
잠시 후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김종화와 함께 울릉도에 간 일행 중의 한 사람인 듯했다.
"김 박사님은 아침 일찍 나가셨는데요."
상대방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아마 저녁때나 돼서야 돌아오실 겁니다."
"급히 좀 연락할 수 없을까요? 집에 무슨 일이 생겨서 그러는데요?"
"뭐라고 말씀 드릴까요?"
"별로 좋지 않은 일이에요. 연락이 닿는 대로 급히 집으로 전화를 걸어 주었으면 해요."
"알겠습니다. 저는 지금 몸이 좋지 않아서 누워 있는 상태입니다. 하여간 사람을 사서라도 연락을 취해 보겠습니다. 아마 빨리는 안 될 겁니다."
다음에 미화가 취한 행동은 보다 능동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동생에게 집을 맡기고 직접 차를 몰아 영등포로 나갔다.
강 교사와 동희가 그녀와 동행했다.
영등포 로터리에서 차를 내린 그들은 H은행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뿐 더 이상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실례합니다. 어제 혹시 이런 학생 보지 못했나요?"
미화는 아무 세탁소나 들러 장미의 사진을 내보였다.
담배 가게 주인한테도 여관 주인한테도 똑같은 질문과 함께 사진을 보여 주었다.
소득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로터리 부근을 배회하면서 딸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강 교사와 동희도 열심히 그녀를 따라다녔다.
어제에 이어 그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오전 내내 돌아다녔다.
밤을 꼬박 지샌 데다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돌아다닌터라 미화의 몰골은 말이 아니게 초라했다.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변해 버린 데 대해 그녀는 사뭇 놀랐다.
그러나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미화는 한 시쯤에 집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전화를 걸자마자 형부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었다고 은화가 숨가쁘게 말했다.
"이야기 했니?"
"네, 이야기 했어요."
"그랬더니?"
"언니가 들어오는 대로 전화를 걸어 달래요."
"그리고?"
"그러고는 아무 말씀 않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럴 것이다 라고 미화는 생각했다.
남편은 충격적인 일 앞에서는 의외로 담담하다.
놀라울 정도로 침착한 모습을 보여 준다.
결코 놀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담담하게 사태에 대처한다.
급히 집으로 돌아간 미화는 울릉도의 갈매기 여관으로 전화를 부탁했다.
잠시 후에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때까지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예요."
미화는 그 말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손으로 틀어막고 가만히 있었다.
"처제가 한 말 정말이야?"
김종화는 또박또박 끊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어제 학교에 가서는…… 아직……."
그녀는 급기야 흐느끼기 시작했다.
"울지 말고 똑똑히 말해 봐. 어떻게 된 거야?"
"유괴된 것 같아요."
"협박 전화가 걸려 왔나?"
"아니오, 아직 그런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어요."
"그럼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녀는 자신이 유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대강 설명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난 김종화는,
"유괴라고 단정하지 마."
하고 말했다.
"경찰엔 연락했나?"
"아직 안 했어요. 당신한테 연락하고 나서 하려고 아직 안 했어요."
"당장 신고해. 나는 지금 갈 수 없어."
"왜요?"
"일기가 나빠 배가 뜰 수 없어."
그는 차갑게 말했다.
마치 남의 일이기나 한 것처럼.
"그럼 언제 오시나요?"
"아직은 알 수 없어. 배가 뜨게 되면 연락하겠어. 저녁때 다시 전화 걸어 줘."
미화는 혼자 고도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녀의 집은 S경찰서 관할이었다.
미화와 강 교사는 동희를 데리고 경찰서를 찾아갔다.
동희를 데리고 간 것은 어제의 일을 보다 상세히 설명해 주기 위해서였다.
경찰서는 거의 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신고해 놓고 가십시오."
제복 차림의 순경이 남의 급한 마음은 아랑곳없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는 더워 죽겠다는 듯이 수건으로 연방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고 있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는데도 실내는 몹시 무더웠다.
4.
돌아오지 않는 소녀 끝없는 기다림은 침묵을 몰고 온다.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쓸모 없는 짓인가를 자각한 그들은 벌써부터 침묵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입을 다문 채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다림은 고통이었다.
무서운 고통이었다.
무거운 침묵으로 집 안에는 질식할 것 같은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모두가 기침소리 하나 내는 것까지 삼가고 있었다.
형사가 찾아온 것은 오후 네 시경이었다.
그 형사는 파출소에서 나온 듯싶은 정복 순경의 안내를 받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말없이 그 형사를 맞았다.
그는 집 안의 분위기가 너무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비탄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는 상당히 망설이는 눈치를 보였다.
나이는 마흔 안팎으로 보이는 사나이였는데, 그가 형사라는 것은 명함을 받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그는 형사 같지 않은 아주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라고 할까.
하여간 그 형사의 모습은 그달그달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직장인 같지가 않았다.
뿌리 없이 직업도 없이 대도시의 골목을 흘러다니는 많은 실직자들 가운데 한 사람 정도라고 하면 옳은 표현일까.
아무튼 차림새나 몰골이 그 정도로 초라해 보였고 몹시 피로에 젖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를 맞은 사람들은 그의 초라한 몰골을 보고는 그만 적지 않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의 차림새나 생김새로 보아 형사 같지도 않을 뿐 아니라 도저히 사건을 해결할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모두가 한결같이 도대체 이런 사람이 어떻게 장미를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한심스럽게 생각했던 것이다.
양미화는 형사가 준 명함을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S경찰서 수사과 형사 여봉우’라고 되어 있었다.
여봉우는 수사과 형사계 소속으로 강력사건을 맡고 있었다.
그의 동료들은 그의 이름에서 ‘봉’자를 빼고 그를 ‘여우’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여우 같은 사나이였다.
일단 수사에 임해서는 여우같이 민첩하고 교묘한 데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수사에 임해서는 여우 같은 솜씨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참다운 실력을 모르는 피해자측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만을 보고는 경찰의 처사에 적이 실망하고 내심 분노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분노를 느낀 것은 신고한 지 두 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야, 그것도 형사라고 보낸 것이 너무도 볼품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경찰의 처사를 너무도 성의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형사다운 날카로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피곤에 젖은 듯한 선량한 두 눈이 거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양미화의 얼굴 위에 멎었다.
"김장미 양의 어머니 되십니까?"
부드러운 눈빛이라고 생각했는데 속을 꿰뚫어보는 것같이 깊은 투시력이 느껴졌다.
양미화는 너무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손으로 문지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건 경위를 대충 묻고 나서 미화의 답변에 귀를 기울였다.
"장미 양은…… 과거에 외박 같은 걸 한 적이 없습니까?"
마치 담소하듯이 조용한 목소리였다.
"없어요."
미화는 가까스로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과거에 가출한 적은 없습니까?"
"없어요!"
미화가 갑자기 격하게 말했기 때문에 모두가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원망스러운 눈으로 형사를 쏘아보았다.
충혈된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막 넘쳐흐르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형사의 얼굴에는 전혀 표정이 없었다.
앙상한 턱에는 수염이 거뭇거뭇 자라 있었다.
"우리 애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 가출 같은 거 할 애가 아니에요."
벽 한쪽에는 장식장이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 장미의 모습을 찍은 사진 액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것은 책 한 권 크기의 액자였고 사진은 컬러로 찍은 것이었다.
여 형사의 눈이 그 사진 위에 한참 머물렀다.
표정이 없던 그의 얼굴에 동요가 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워낙 순간적으로 일었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액자 속의 소녀는 미소를 띤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모습으로 서 있었는데 너무도 예쁜 그 모습에 형사는 그만 현기증을 느낀 것 같았다.
"이 학생이 장미 양입니까?"
형사는 손을 뻗어 액자를 집어 들며 물었다.
장미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아주 예쁘게 생겼군요."
형사는 무심코 한 말인 것 같았는데 그 말을 들은 미화는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격하게 어깨를 떨어대는 그녀를 말리려다가 그녀의 동생인 은화도 끝내 흐느끼고 말았다.
장미의 친구인 동희는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장미의 담인 교사인 강기수도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여 형사는 장미의 사진을 도로 제자리에 올려놓은 다음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여자들이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여자들의 울음이 거의 가라앉을 때쯤 강 교사가 입을 열었다.
그는 자기 소개를 한 다음 장미가 얼마나 우수한 학생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1등’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왔다.
학교 공부는 물론 다방면에 걸쳐 다재 다능한 수재라고 그는 거침없이 말했다.
학교와 집에서 잘 밀어 주기만 하면 무한히 뻗어 나갈 수 있는 소녀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그 말 끝에 경찰이 책임지고 어떻게든 하루빨리 장미를 찾아내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가 그런 말을 하는 동안 장미의 어머니는 더욱 비통하게 흐느껴 울었다.
형사는 여자들의 울음소리에 질린 듯 소파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그리고 베란다에 서서 비 오는 것을 보고 있다가 울음소리가 그치자 그제서야 거실로 도로 들어왔다.
"이 학생이 어제 장미 양과 마지막까지 함께 있다가 헤어졌던 마동희 양입니다. 장미하고는 단짝이지요."
강 교사가 말했다.
형사의 부드러운 시선이 동희의 얼굴에 머물렀다.
동희는 재빨리 눈물을 훔치며 몸을 도사렸다.
"그게 정말인가?"
형사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네, 저하고 함께 있다가 헤어졌어요."
"어떻게 헤어졌는지 좀 자세히 말해 볼까?"
동희는 더듬거리며 어제 있었던 일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형사는 짧게 묻고 길게 들었다.
가능한 한 상대방으로 하여금 많은 말을 할 수 있게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동희가 이야기하는 동안 고개를 숙인 채 수첩에다 무엇인가 열심히 적었다.
바로 그 점이 그를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가 보기보다는 성실한 형사라는 인상을 심어 준 것 같았다.
"장미가 타고 간 택시 번호를 혹시 기억하고 있니?"
동희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대강만이라도 기억할 수 없어?"
모두가 안타까운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시원치가 않았다.
"번호를 눈여겨보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겠어요."
사실 어제 장미가 그 시골 아주머니와 함께 택시를 타고 떠날 때 동희는 장미한테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느라고 자동차 번호 같은 것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좋아. 그럼 택시 색깔은 기억하고 있겠지?"
"네, 기억하고 있어요. 초록색 택시였어요."
동희는 처음으로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운전사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힘없이 중얼거리고 나서 열심히 머리를 쥐어짰다.
답답할 정도로 자신의 관찰력이 둔하다는 사실에 그녀는 어쩔 줄을 몰랐다.
"서두르지 말고 잘 한번 생각해 봐. 그 운전사의 특징 같은 게 있을 것 아니야. 안경를 꼈다든지 이빨이 빠졌다든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동희는 소리쳤다.
"이제 기억나요! 안경을 끼고 있었어요!"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왔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나, 적은 사람이었나?"
형사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물었다.
"나이가 많아 보였어요."
이 정도라면 그 운전사를 찾을 수 있겠다고 형사는 생각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 운전사를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괴된 게 틀림없죠?"
미화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끼여들었다.
그러나 형사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유괴된 게 틀림없어요. 애가 너무 예쁘다 보니까 이런 일이 일어 난 거예요. 그 애를 기르면서 한시도 마음이 놓일 때가 없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못생긴 애를 낳을걸……."
형사는 생긴 모습까지 조절해 가면서 애를 낳을 수 있게 되면 정말 큰일이라는 생각을 했고, 미화는 또 울었다.
"아직 뭐라고 단정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 동안 협박 전화 같은 걸 받으셨나요?"
"받지 못했어요."
바로 그때였다.
마치 그들의 말소리를 엿듣기나 한 듯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미화는 울음을 그치고 재빨리 수화기를 움켜쥐었다.
"여보세요!"
"엄마…… 저예요…… 장미예요."
그 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아득히 들려 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는 금방 꺼져 가는 생명처럼 약하디약하게 들려 왔다.
"장미야! 거기 어디니? 왜 집에 안 들어오는 거니?"
미화가 발작적으로 외치는 바람에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장미야! 장미야! 거기 어디니? 말해 봐! 거기 어디냔 말이야?"
장미의 어머니는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나 들려 오는 소리는 장미의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는 흐느낌뿐이었다.
"엄마…… 엄마…… 난 집에 갈 수 없어…… 집에 갈 수 없어…… 엄마가 보고 싶어…… 엄마…… 나 기다리지 마…… 엄마…… 잘 있어…… 무서워…… 엄마…… 나를 데려가 줘…… 무서워 죽겠어…… 엄마…… 나를 구해 줘…… 엄마……."
"장미야! 장미야! 그게 무슨 소리니? 어디 있는지 알아야 구해 줄 거 아니야? 지금 있는 데가 어디니? 말해 봐, 거기가 어디야?"
전화 끊어지는 소리가 찰칵 하고 들려 왔다.
미화는 미친 듯 딸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다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까무러쳤다.
S경찰서 형사 2반은 강력사건만을 맡기 때문에 강력반이라고도 불린다.
강력반 구성원은 모두 열 명인데 하나같이 베테랑 형사들이다.
여봉우 형사가 장미 실종사건에 대해 첫번째 보고를 올린 것은 그날 오후 여섯 시경이었다.
여섯 시경이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모든 형사들이 돌아와 그날 하루의 수사 결과를 보고한다.
"…… 여러 가지 점으로 비추어 볼 때 아마도 유괴된 것 같습니다. 그 학생이 걸어 온 전화 내용으로 보아 어디에 억류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형사계장이,
"큰일 났군, 큰일 났어."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인데요."
형사 2반 반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강력반은 지금 관내에서 두 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한 바람에 반원 전원이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고 있는 판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채 해결도 되기 전에 이번에는 유괴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 었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나? 도대체 왜 이 모양이지? 왜 자꾸만 이런 사건이 발생하는 거지?"
계장이 투덜거렸고 반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문질러댔다.
나머지 형사들은 벙어리라도 된 듯 피곤한 표정으로 담배 연기만 뿜어대고 있었다.
"바로 이 학생입니다."
여 형사는 봉투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계장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장미네 집 장식장에 놓여 있던 사진이었는데 여 형사가 장미의 어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빌려 온 것이었다.
그는 사진을 여러 장 뽑기 위해 필름도 빌려 왔다.
"야아, 예쁘게 생겼군. 크면 정말 최고의 미인이 되겠는데!"
계장의 말에 모두가 그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미인이라는 한마디에 모두가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 한마디는 피로가 풀리는 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말 예쁘군요."
반장도 사진을 보고는 똑같은 말을 했다.
사진이 한 바퀴 도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사진의 주인공이 밉상이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텐데 예쁘다 보니 그것을 한참씩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래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집안이지?"
반장이 물었다.
"장미 양 아버지는 대학교수랍니다. 지금 울릉도에 가 있는데 날씨 때문에 배가 뜨지 않아 못 오고 있답니다."
여 형사는 사건 경위에 대해 동희에게서 들은 바대로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반장이,
"낚시에 걸렸군. 쯧쯧……."
하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낚싯밥이 요새 유행이야."
나이 든 형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죠?"
여 형사는 그 늙은 형사와 반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바로 그 시골 아낙한테 속아서 끌려간 거야. 요새 그런 사건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나 봐. 반반한 애들을 그런 식으로 꾀어다가 시장에 내놓고 팔아먹는 거야. 물건처럼 말이야."
반장은 이미 사건 내용을 파악해 버린 듯 거침없이 말했다.
여 형사는 사창가의 인육 시장을 생각했다.
그곳이야말로 가장 접근하기 싫은 곳이었다.
"그렇게 끌려간 애들은 찾기가 여려운가요?"
"거의 불가능해. 제발로 도망쳐서 돌아오기 전에는 말이야. 그렇다고 경찰이 무한정 그 애들만을 찾아다닐 수도 없는 일 아니야. 강력사건이 계속 빈발하고 있는데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아까운 앤데……."
한 바퀴 돈 사진을 계장이 다시 한 번 들여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아깝습니다."
여 형사는 가슴이 저려 오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아까워도 하는 수 없지."
반장이 체념조로 말했다.
"그래도 찾는 데까지는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여 형사는 계장과 반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반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그래? 인원이 없어. 거기에 매달릴 인원이 없어."
그것은 사실이었다.
형사들은 벌써 일 주일이 넘게 집에도 못 들어가고 있는 판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머지 형사들은 관심이 없다는 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서 여 형사는 거부의 뜻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여 형사는 왠지 그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저 혼자라도 맡아 보겠습니다. 모두 바쁠 테니까 그렇다면 제가 혼자서 장미 양을 찾아보겠습니다."
"우리 팀에서는 한 명도 차출할 수 없어."
반장이 딱 잘라 말했다.
아무도 그 일을 맡겠다고 자진해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여 형사가 초조해 하는 걸 보니까 그 애한테 단단히 반한 모양이지?"
짓궂은 형사 하나가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모두가 킬킬거리고 웃었다.
그러나 여봉우는 아무 표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한 사람만 차출해 주십시오."
"한 사람이면 되겠나?"
계장이 넌지시 물어 왔다.
"네, 한 사람만 붙여 주십시오."
"그렇다면 수사계에 의뢰해 봐야겠군."
수사계 직원들은 벌금형 정도의 사소한 사건들을 처리한다.
소재 수사를 하기도 하고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기도 한다.
그들이라고 한가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정작 여 형사와 함께 일하게 된 사람은 조사계 직원이었다.
수사계에서 마땅히 차출할 사람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조사계에서 한 명을 빼낸 것이다.
조사계는 고소나 고발 사건 따위를 처리하는 부서였다.
"안녕하십니까? 조사계의 지치수입니다."
함께 일하게 될 조사계 직원이 꾸벅 하고 고개를 숙이기에 보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주 젊은 친구였다.
"어? 처음 보는데……."
"네, 어제 처음 이곳으로 왔습니다."
지치수는 그 동안 파출소에만 근무하다가 본서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키가 크고 몸집도 좋아 보였다.
얼굴은 둥그스름한 것이 무골 호인 같은 인상이었다.
꽤나 애를 먹이겠구나 하고 여 형사는 생각했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을 고쳐 먹었다.
"아주 젊어 보이는데…… 결혼은 했나?"
"아직 못 했습니다."
그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몇 살이지?"
"서른한 살입니다."
"고생깨나 할 텐데 괜찮겠어?"
"네,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치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우선 택시 회사들을 뒤져야 해."
여 형사는 앞으로 수사해야 할 사건에 대해 조사계 직원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밤이 되어서도 비는 여전히 내렸다.
대충 설명을 끝낸 여 형사는 지치수를 데리고 경찰서를 나와 가까운 설렁탕집으로 향했다.
설렁탕을 먹으면서 여 형사는 앞으로 조사해야 할 부분에 대해 젊은 형사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이 사진을 보라구. 우리가 이제부터 찾아야 할 소녀야."
여 형사가 꺼내 준 사진을 들여다본 지치수는 눈을 크게 떴다.
"귀엽게 생겼군요."
"음, 그래. 아주 예쁘게 생긴 학생이야. 지금 중학교 3학년 학생이야. K여중에 다니고 있지. 그 애 아버지는 대학교수야. S대 교수라는데 곤충학자래. 지금 울릉도에 가 있는데 날씨 때문에 배가 뜨지 못해 못 돌아오고 있나 봐."
"이런 애를 유괴하다니 나쁜 놈들 같으니!"
지치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보기보다는 다혈질인 것 같았다.
"이건 그 사진 필름이야. 식사 끝나는 대로 그 필름을 사진관에 맡겨. 한 스무 장 뽑아 달라고 해."
"스무 장이나요?"
여 형사는 답답한 듯 젊은 형사를 바라보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5.
어두운 거리
"빌어먹을, 웬 비가 이렇게……."
여우는 투덜거리며 건널목에 서서 로터리를 바라보았다.
비가 오는 바람에 교통 체증이 말이 아니었다.
로터리에는 차들이 빽빽히 들어차 도대체 움직이려고 들지를 않고 있었다.
베이지색의 신형 국산차가 아슬아슬하게 다른 차들을 스치면서 그가 서 있는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건널목을 숫제 가로막아 버린다.
운전석에는 선글라스를 낀 젊은 여자가 껌을 짝짝 씹으며 앉아 있다.
부메랑 스타일의 퍼머 머리가 흡사 까치집 같다.
담배를 꼬나물더니 라이터를 찰칵 켜서 불을 붙인다.
‘건방진 년, 비 오는 날 선글라스는 왜 끼고 있지?’ 얼굴이 반반하게 생긴 것 하며 거기서 풍기는 것으로 보아 요정의 접대부 같다.
피땀 흘려 돈을 벌기보다는 웃음과 몸을 팔아 팁을 우려 내려는 젊은 여자들이 독버섯처럼 늘어나고 있었다.
밤의 꽃들은 낮에 운전을 배우고, 그리하여 팁을 모아 자가용을 사고, 출세한 양 한껏 멋을 부리며 차를 몰고 다닌다.
그는 구토를 느끼며 미간을 찌푸린다.
아내의 찌들린 얼굴이 떠오른다.
아이들의 못생긴 얼굴이 보인다.
그는 건널목에 들어찬 차들 사이를 누비며 길을 건너갔다.
길을 건너서 왼쪽 편으로 조금 걸어가자 H은행 영등포 지점이 있었다.
장미의 친구인 마동희 양을 통해 얻어들은 지점이었다.
이 지점에서 동희 양의 기억력은 단절되고 말았다.
어디로 갔을까.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선은 자연 사창가 쪽으로 향했다.
그는 다시 길을 건너갔다.
사창가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은 상당히 드넓다.
그리고 음습한 곰팡이처럼 퍼져 나가고 있기 때문에 그 지역에 대해 선을 긋기가 매우 모호하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처마가 낮은 블록 집들이 이마를 맞대고 골목 위로 빗물을 흘려 내리고 있었다.
마치 불쌍한 창녀들의 눈물 같은 빗물을…….
비가 오기 때문인지 골목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커브를 돌자 미니 스커트 차림의 아가씨가 비닐 우산을 받쳐 든 채 처마 밑에 서 있었다.
열댓 살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앳된 얼굴이 짙은 화장으로 얼룩져 있다.
빨간 티셔츠 위로 가슴이 불룩하게 솟아 있다.
"아저씨, 놀다 가세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 그에게 다가선다.
아침부터 사창가에 들어선 남자라면 그 목적이 물어 보나마나 뻔하다.
어린 창녀는 그의 팔짱을 끼었다.
"놀다 가세요. 잘 해드릴게요."
어린것이 무얼 잘 해주겠다는 것인지.
그가 머리를 흔들어도 어린 창녀는 팔을 놓지 않는다.
"놀다 가세요. 싸게 해드릴게요."
그를 가진 돈이 별로 없는 실업자쯤으로 짐작한 모양이다.
싸게 해주겠다니 말이다.
"얼마?"
"오천 원만 내세요."
"좋아."
"이리 따라오세요."
그는 어린 창녀를 따라 꼬불꼬불 이어진 좁은 골목길을 걸어갔다.
그녀는 어느 블록 집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방들이 다닥다닥 붙은 집이었다.
둘이 누우면 딱 알맞을 것 같은 좁은 방 안에 들어가자 그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화대 주세요."
창녀가 손을 내밀었다.
조그만 손이었다.
그 손에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쥐어 주자 그녀는 잽싸게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더니 훌렁훌렁 옷을 벗었다.
조금도 스스럼없이 그렇게 옷을 모두 벗은 다음 그를 빤히 쳐다본다.
그는 벽에 기대앉아 멍하니 그녀의 벌거벗은 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의 나체를 보고서도 조금도 흥분을 못 느끼는 자신이 왠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흥분을 느끼기는커녕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보세요?"
그녀가 허리를 틀면서 한쪽 다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그가 멍청하게 쳐다보기만 하자 짜증스럽다는 듯이 그를 재촉했다.
"아이, 빨리 벗으세요. 시간 없어요."
"됐어, 옷을 도로 입어."
"왜요?"
그녀는 요 위에 벌렁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옷을 도로 입으라니까."
"싫어요, 더워요."
"그럼 할 수 없지."
그는 담배를 피워 물면서 창녀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앳된 얼굴과는 반대로 그녀의 몸은 시들어 있었다.
마치 피다 말고 비에 젖어 떨어진 꽃송이처럼.
"저도 담배 한 대 줘요."
"담배도 피우나?"
"전 골초예요."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담배 한 개비를 그녀의 두꺼운 입술 사이에 꽂아 주고 불까지 붙여 주었다.
어린 창녀는 천장을 향해 기분좋게 담배연기를 뿜어 올렸다.
언뜻 보기에 그녀는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 둔감하거나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우리 속에 갇힌 돼지처럼.
그러나 가만 보니 그게 아니었다.
둔감한 것 같기도 하고 무관심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한 그런 표정은 자포자기와 체념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안 할 거예요?"
그녀가 한쪽 무릎을 세우며 물었다.
나이가 어린 탓인지 그녀의 음모는 조금밖에 자라 있지 않았다.
"음, 하고 싶지 않아."
"참 이상하다. 그럼 왜 들어왔어요?"
그녀가 몸을 엎드렸다.
둥그스름한 엉덩이가 보기 좋았다.
"뭐 하나 알아볼 게 있어서 왔어."
그는 품속에서 사진을 꺼내 그녀에게 보였다.
"이 학생 본 적 없어?"
사진을 받아 든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어머나, 참 예쁘다!"
"그래, 아주 예뻐. 본 적 없어?"
"아뇨."
그녀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머리를 흔들었다.
"나도 한번 이만큼 예뻐 봤으면 좋겠다. 이 아가씨 누구예요? 아저씨 딸이에요?"
"아니, 어느 귀한 집 딸인데 이곳으로 붙잡혀 왔다는 말을 듣고 찾으러 온 거야. 난 형사야."
"어머나!"
그녀가 상체를 일으키려는 것을 여우는 어깨를 눌러 제지했다.
"그대로 가만 누워 있어."
그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너 이름이 뭐지?"
"명자요."
"성은?"
"서가요."
어느새 그녀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이 학생의 이름은 장미야. 김장미. 지금 중학교 3학년생이야. 이런 데서 인생을 망치면 되겠어? 찾을 수 있게 협조해 줘."
"몰라요, 제가 어떻게……."
그녀는 완강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의심스럽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아저씨, 정말 형사예요?"
몰골이 초라한 것이 아무리 봐도 형사 같지가 않은 모양이다.
"믿지 않아도 좋아."
"어디, 증명 좀 봐요."
그녀가 턱을 내밀었다.
"너한테까지 그런 걸 보이고 싶지는 않아."
"피이, 형사도 아니면서 형사라고……."
"어떻게 하면 이 학생을 찾을 수 있을까?"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러지 말고 도와 줘."
"모르는 걸 어떻게 도와 줘요?"
"정말 그럴 거야?"
부드럽던 눈빛이 갑자기 차갑게 변했다.
어린 창녀는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정말 몰라요."
"그럼 알아볼 수는 있겠지?"
"제가 어떻게……."
"수소문해서 알아보란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들을 꾀어 가지고 데리고 오는 아주머니가 있다고 들었어. 장미도 그 여자 손에 걸려서 이곳에 끌려왔단 말이야."
"이 골목에 들어온 게 틀림없어요?"
"이 골목인지 저 골목인지는 몰라도 하여간 이 일대 어딘가에 끌려 온 것은 분명해."
"그래 가지고는 못 찾아요. 몸 파는 아가씨가 어디 한둘인가요, 뭐? 일단 여기 들어오면 찾는 건 불가능해요."
그녀는 어림없는 소리 하지도 말라는 듯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웃기지 마,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어. 사람이 사는 곳에서 왜 사람을 못 찾아내? 명자가 협조만 해주면 찾아낼 수 있어."
"전 자신 없어요."
"만일 명자가 협조만 해주면…… 명자를 여기서 빼내 주겠어."
그녀는 발딱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정말이에요?"
"정말이야."
"하긴 형사 아저씨라면 저 같은 거 충분히 빼내 줄 수 있어요. 정말 아저씨, 형사세요?"
그는 하는 수 없이 명함을 한 장 꺼내 주었다.
"내 이름은 여봉우야. 좋은 소식 있으면 이리로 전화해 줘."
"저는 전화하기 힘들어요. 할 수도 있지만 아저씨가 자꾸 와줘요."
"알았어. 이 사진은 네가 가지고 있어. 이 사진이 있어야 장미를 찾을 거 아니야."
"그런데 뭘 어떻게 알아보죠?"
"장미가 있는 곳을 알아내면 더욱 좋고…… 그렇지 못하면 장미를 본 사람이 있는지, 그리고 누가 데려 왔는지…… 하여간 장미에 관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좋아."
"알았어요. 알아보긴 하지만 너무 기대를 걸지는 마세요. 아마 요렇게 예쁜 애라면 아마 이미 여기에는 없을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지?"
"요렇게 예쁘고 나이 어린 애는 최고로 인기가 있어요. 그래서 다른 데로 금방 팔려 가요.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데로 팔려 가요."
"그런 데가 어디지?"
"어딘지는 잘 모르지만, 하여간 그런다고 들었어요."
"잘 좀 부탁해."
용건을 끝낸 형사는 갑자기 휭 하니 나가 버렸다.
그곳을 나온 여우는 큰 길가로 나오지 않고 한참 동안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어느 창녀에게 걸렸는데, 그녀는 꽤나 나이 들어 보이는 창녀였다.
그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어느 컴컴한 집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녀의 이름은 이순이라고 했다.
본명은 아니겠지만 그는 그 이름을 기억해 두기로 하고 한 시간쯤 지나 그 집을 나왔다.
마지막으로 그가 포섭한 창녀의 이름은 김수경이라고 했다.
그녀는 스물 서너 살쯤 된 창녀였다.
그녀에게도 물론 장미의 사진과 자신의 명함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7월 23일은 날씨가 더욱 나빴다.
태풍 주의보까지 내려 모든 배들의 운항이 중지되었다.
비바람이 몹시 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 택시를 가지고 있는 유기태는 나갈까말까 망설이다가 아침 열 시가 지나서야 집을 나섰다.
그는 쉰세 살로 일곱 식구의 가장이었다.
일곱 식구 모두가 그의 택시 한 대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 사이가 나쁜 노모를 모시고 있었고, 딸만 넷을 두고 있었다.
큰딸은 스물다섯 살로 혼기를 놓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노모와 아내는 아침에도 다투었다.
노모는 말이 많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버릇이 있었고, 아내는 성질이 괄괄해서 시어머니의 말을 다소곳이 들어주려고 들지를 않았다.
그러니 하루에도 몇 번씩 두 사람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말다툼을 벌일 때마다 그는 귀를 막고 도망치고 싶었다.
처음에는 아내를 나무라기도 하면서 싸움을 말리기도 했지만 하도 자주 다투다 보니 이젠 진력이 나서 싸울 테면 얼마든지 싸워 보라는 식으로 내버려두고 있었다.
하지만 싸우는 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는다는 것도 보통 고역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열 시가 지나서 택시를 몰고 나온 것도 그러한 고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노모와 아내가 아침부터 싸우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비바람이 치는데 굳이 차를 몰고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하루쯤 푹 쉬고 싶었던 것이다.
오래 전부터 그는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거기다 눈까지 더욱 나빠져 이제는 안경도 꽤 도수 높은 것을 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도수 높은 것을 끼다 보니 안경알도 그만큼 두꺼워지고, 그래서 안경을 낀 얼굴 모습이 찌그러져 보였다.
이래저래 그의 앞날에는 희망적이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비탈길을 천천히 내려가 오른쪽으로 차를 돌렸다.
이런 날은 사고 없이 무사히 귀가하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괜히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다.
여관 앞에서 그는 최초의 손님을 태웠다.
젊은 남녀 한 쌍이었는데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머리 모양이며 옷차림이 비슷해 보였다.
이른바 펑크족이라는 것들인 모양이다.
여관에서 늘어지게 자고 나서 이제야 일어났는지 둘이서 번갈아 가며 하품을 해댄다.
계집애는 차에 오르자마자 남자의 품에 안겨 버린다.
운전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식이다.
‘빌어먹을 것들, 아침부터 재수 없게…….’ 그는 라디오의 볼륨을 크게 틀었다.
눈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윈도 와이퍼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면서 바쁘게 빗물을 훑어 내고 있었지만 워낙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어서 미처 깨끗이 닦아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항상 가는 퇴계로 5가에 있는 기사식당에 들른 것은 열두 시 십 분경이었다.
아침을 뜨는 둥 마는 둥 했기 때문에 일찍 배가 고팠던 것이다.
식당 안은 이미 반쯤 자리가 차 있었다.
비 때문에 일찍들 식당을 찾은 것 같았다.
그는 몇몇 아는 운전사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자리에 앉았다.
아는 사람이라면 자연 그들과 합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맞은편에는 삼십대 운전사 두 명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식사를 하다 말고 열심히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예쁘지?"
"음, 예쁜데……."
그들의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자니 유기태는 호기심이 동했다.
"뭔데 그래?"
그가 고개를 앞으로 빼면서 종이를 들여다보려고 하자 상대방이 그것을 내주면서 말했다.
"보고 반하지 마세요."
그것은 경찰에서 배포한 수배 전단으로 가운데에 앳된 소녀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삼십 대의 젊은 운전사들이 감탄할 정도로 그 소녀는 아주 예뻐 보였다.
문득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확실히 감이 잡히지는 않았다.
그는 사진 밑에 나열되어 있는 글귀를 읽었다.
<위 사진의 소녀는 K여중 3학년에 재학중인 김장미 양으로 지난 7월 20일 실종되었습니다.
지난 7월 20일 오후 한 시경 김장미 양을 영등포 로터리 쪽으로 태워다 준 운전기사를 찾습니다.
그때 김장미양은 시골에서 올라온 낯선 여인(아기를 데리고 있었음)과 동행이었다고 합니다.
김장미 양을 태워다 준 운전기사 분은 다음 연락처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락처는 S경찰서 수사과 형사계 형사 여봉우였다.
이름 옆에 전화 번호가 적혀 있었다.
유기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침을 삼키고 나서 안경을 벗어 닦았다.
당황할 때면 하는 버릇이었다.
"이 종이, 내가 가져도 되지?"
"필요하시면 가지세요."
"사실은…… 내가 이 학생을 태워다 주었지."
운전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그는 여러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데 대해 기분이 좋아졌다.
"어떤 아낙네가 시골에서 올라왔는데 집을 못 찾았나 봐. 그래서 그 학생보고 집을 찾아 달라고 매달린 모양이야. 하필 내 차를 탔는데 정말 예쁘게 생긴 애였어. 이 담에 크면 정말 좋은 처녀가 되겠더라구. 그런데 이 학생이 실종되었다니 참 이상한데……."
그는 안경을 도로 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신고하실 겁니까?"
젊은 운전사가 잔에 소주를 따르며 물었다.
"신고해야지."
그는 시래깃국에다 밥을 말았다.
된장을 풀어 끓인 시래깃국을 그는 좋아했다.
"신고하지 마세요. 신고하면 오라 가라 귀찮다구요. 뭐하러 신고합니까? 장사 다 할려구요? 그렇다고 경찰이 일당을 주는 줄 압니까. 하루 종일 앉혀 놓고 진이나 빼지요."
저만치서 뚱뚱한 기사가 왕방울 눈을 굴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맞는 말이에요. 신고하지 마세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젊은 기사가 맞장구를 쳤다.
유기태는 식사하는 동안 경찰에 신고하는 문제를 놓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식사를 끝냈을 때까지도 그는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식사를 끝낸 다음 한 시간쯤 차를 몰고 다니다가 그는 마침내 신촌 로터리 부근에 있는 공중 전화 부스 옆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부스 안으로 들어가 S경찰서 수사과로 전화를 걸었다.
여봉우 형사는 자리에 없었다.
"김장미 양을 태워다 준 택시 운전사를 찾는다고 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제가 바로 그 운전사입니다."
"아, 그러세요? 마침 담당자가 모두 나가고 없군요. 존함하고 연락 전화 번호를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두 시간 후에 제가 다시 전화를 걸겠습니다."
"그러시지 말고……."
그는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두 시간 동안 그는 또 그 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어야 했다.
원래 소심한 사람이기 때문에 별 대단치 않은 문제를 놓고도 심각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결국 두 시간쯤 지나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S경찰서 수사과로 전화를 걸어 여봉우 형사를 찾았다.
"네, 제가 여봉우입니다."
매우 부드러운 목소리가 대답해 왔다.
유기태는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김장미 양의 실종사건에 자신이 관계가 있다고 혐의를 받으면 어쩌나 싶어 더럭 겁이 났던 것이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쪽에서 가만 있자 상대방은 거듭해서 불렀다.
"저기…… 저는…… 택시 기사인데요…… 김장미 양에 관한 전단을 보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아, 아까 전화를 거신 분인가요?"
"네, 그런데요."
"그러니까 지난 20일에 장미 양을 직접 태워다 준 운전기사 분이십니까?"
"그, 그렇습니다."
"그럼 대단히 미안합니다만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없을까요? 운전하시는 분을 오래 붙잡아 두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꼭 좀 만나 뵙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대방은 형사답지 않게 아주 공손히, 그리고 정중하게 부탁을 해왔다.
"전화로 말씀드리면 안 되나요?"
"전화로는 좀 곤란합니다. 잠깐이면 되니까 시간을 좀 내주십시오."
"그 학생이 정말 실종됐나요?"
"네, 그날 바로 실종됐습니다. 그 아이는 대학교수의 따님으로 정말 아까운 소녀입니다. 그 학생을 찾는 데 협조해 주십시오."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긴 침묵은 아니었다.
6.
미행 여봉우와 유기태는 S경찰서 부근에 있는 다방에서 만났다.
개인 택시 운전사 유 씨가 다방 앞에 차를 세워 놓고 안으로 들어가니 여 형사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알아보고 손을 들면서 일어섰다.
"오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수인사가 끝난 후 여우가 먼저 장미 양이 실종된 경위를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유 씨는 크게 끄덕이면서 비로소 사정을 정확히 파악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시골 아낙네가 그 학생을 유괴했군요?"
"전후 사정으로 봐서 그렇게 생각됩니다만, 아직은 확정적으로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어쩐지 그 여편네가 유난히 호들갑을 떨더라구요. 옷 입은 것이라든지 말하는 것이라든지 행동 거지가 영락없이 시골에서 갓 올라온 여편네 같더라구요. 나 참, 그런 줄 알았으면 그 여편네를……."
유 씨는 사뭇 분개해서 말했다.
"처음부터 이야기해 주십시오. 언제 어디서 그들을 태웠고 어디서 그들을 내려 주었는지 자세히 좀 말씀해 주십시오. 아, 그럴 게 아니라 아예 저하고 함께 현장으로 갑시다."
형사가 가자는데 못 가겠다고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택시비나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유 씨는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K여중 앞까지는 사뭇 먼 거리였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걸려서야 그들은 거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 씨는 장미와 시골 아낙네를 태웠던 장소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곳에다 차를 세운 다음 그는 입을 열었다.
"바로 여기서 차를 세웠지요. 여학생이 손을 들기에 차를 세웠습니다. 학생이 두 명이었는데, 그 예쁘게 생긴 학생만 차에 탔지요. 그보다 먼저 뒷자리에 그 시골 아낙네를 태우더군요. 그 여편네는 등에 아기를 업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를 태우고 나서 학생은 앞자리에 타더군요. 하도 예쁘게 생겨서 자꾸만 그 학생을 쳐다봤지요. 어디로 갈 거냐고 하니까 학생이 영등포 로터리로 가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거기까지 태워다 줬습니다."
"자, 그럼 영등포 로터리로 갑시다."
차가 달리는 동안 유 씨는 장미의 미모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늘어놓았다.
"지금까지 많은 학생들을 봤지만 그렇게 잘생긴 애는 처음 봤습니다. 솔직히 말해 차비도 받기 싫더라구요. 그대로 크면 참 좋은 처녀가 되겠던데……. 그런 어린 학생을 유괴하다니, 그런 년은 잡아서 죽여야 합니다. 착한 학생의 마음을 이용해서 유괴하는 그런 년은 악질 중의 악질입니다. 보십시오, 사람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남한테 해를 끼치는 인간은 좀 솎아 내야 합니다."
"가는 동안 차 속에서 무슨 말들을 주고받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여자가 호들갑을 떨었지요. 학생한테 고맙다고 하면서 학생을 잔뜩 추켜세웠지요. 그래서 무슨 일로 그러는지 들어 보았지요. 그 여자가 이야기를 해주기에 들어 보니까 정말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어디 말이 그렇지 쉬운 일입니까? 그래서 그 학생한테 참 좋은 일을 한다고 말해 주었지요."
"장미 양은 뭐라고 하던가요?"
"하도 칭찬을 하니까 쑥스러워하더군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영등포 로터리에 도착하니까 학생이 주머니를 털어 택시비를 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안내해 준 것만도 고마운데 차비는 아주머니가 내셔야지 학생이 내게 해서 되겠느냐. 그랬더니 그 여자 하는 말이 자기는 돈 가진 게 없으니까 이따가 동생 만나서 학생한테 차비를 다 계산해 주겠다는 거였습니다. 차비만 주겠느냐 하는 것이 그 학생한테 수고비라도 줄 것같이 말했습니다."
"그 밖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나요?"
"뭐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그들이 탄 택시는 영등포 로터리에 도착했다.
차는 로터리를 왼쪽으로 돌아가다가 길 한쪽에 섰다.
"다 왔습니다."
유 씨가 말했다.
"여기서 내렸나요?"
"네, 여기서 모두 내렸습니다."
"내려서 어디로 갔나요?"
"저쪽으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유 씨는 길 건너편을 가리켰다.
"길을 건너서 어느 쪽으로 갔습니까?"
"거기까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여우는 유 씨의 이름과 주소, 전화 번호 및 자동차 번호를 적은 다음 택시비로 만 원을 꺼내 주었다.
안 받으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손에 쥐어 준 다음,
"연락할 일이 있으면 이쪽으로 해주십시오."
하고 명함 한 장을 꺼내 주고 나서 차에서 내렸다.
길을 건너갔다.
어제 갔던 방향에서 그렇게 틀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H은행 영등포 지점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장미를 태워 주었던 택시 기사를 찾아내면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못했다.
여우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는 우연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바로 개인 택시 운전사 유기태의 경우가 그랬다.
그날 그에게 부닥친 그 우연은 정말 너무도 얄궂은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피했어야 옳았다.
아니, 상식적으로 거기에 대처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그 자신도 자신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형사와 헤어진 그는 손님을 한 명 태우고 종로로 향했다.
종로에서 그 손님을 내려 준 후 이번에는 다른 손님을 태우고 성북동 쪽으로 향했다.
성북동에서 새로 탄 손님은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자고 했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여느 때보다 빨리 저물고 있었다.
새 손님을 태우고 막 출발하려는데 앞을 가로질러 가는 사람이 있었다.
"어?"
하면서 그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여인의 뒤에 매달린 아기가 떨어질 듯 대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나치는 것을 얼핏 보았지만 바로 그 여자, 장미라는 여학생을 유괴한 여자, 형사가 찾고 있는 그 여자 같았다.
"손님, 미안합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가게 됐습니다."
그는 손님을 내리게 한 다음 차를 앞으로 빼서 길 한쪽에 세웠다.
엔진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얼굴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지하도 입구에 서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아기를 업고 있는 뒷모습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누가 보아도 시골에서 갓 올라온 여인 같았다.
한 손에는 보따리까지 들고 있었다.
그는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녀 앞으로 돌아갔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환히 비췄다.
불빛에 드러난 그 얼굴은 분명히 며칠 전 그의 택시를 타고 여학생과 함께 영등포 로터리에서 내렸던 그 시골 아낙네였다.
‘옳지, 됐다! 요년, 어디 보자!’ 그는 눈을 빛내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얼른 주위를 살폈다.
길 건너편에 경찰 패트롤 카가 경광등을 번쩍이면서 서 있었다.
그는 길을 건너가려다가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뒤로 물러섰다.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 여자를 보게 되다니 정말 뜻밖이었다.
우연치고는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께서 일부러 그녀에게 벌을 주기 위해 나를 이리 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마 또 어린 여자를 낚으려고 터미널에 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은 한 명도 낚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날이 저물었는데도 저러고 있는 거겠지.
그는 멋대로 생각하면서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아낙네가 여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소녀에게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지하도에서 나오던 소녀는 멈춰 서서 시골 아낙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소녀는 머리를 흔들며 그녀 앞을 지나쳐 갔다.
아낙네가 지하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길가에 주차해 놓은 택시가 마음에 걸렸지만 우물쭈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아낙네를 따라 그도 지하도를 내려갔다.
길 건너편으로 나온 아낙은 좌우를 둘러보다가 갑자기 빈 택시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그 초라한 몰골에 영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지하도로 해서 길을 건너갈 시간이 없었다.
유기태는 위험을 무릅쓰고 차도를 건너뛰었다.
달려오던 차들이 급정거를 했다.
운전사들이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자신의 택시에 급히 올라탔다.
엔진을 건 다음 급히 좌회전했다.
오른쪽에서 달려오던 차와 아슬아슬하게 충돌을 면했다.
경찰 패트롤 카의 순경들은 다행히 그의 교통 위반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딴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낙이 탄 택시는 매우 거칠게 달려갔다.
아마도 젊은 운전사인 듯 했다.
요새 젊은 애들은 마구잡이로 차를 몰아댄다.
그러나 노련한 그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 차를 따라갈 수가 있었다.
얼마든지 달려 봐라, 지옥에까지 따라갈 테다.
유기태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앞을 노려보았다.
차를 몰면서 그는 계속 중얼거리는 소리로 욕을 해댔다.
마귀 같은 년, 저런 것은 사람이랄 수도 없으니까 아예 이 사회에서 제거해 버려야한다.
그대로 두면 사람들에게 해만 끼치고 쌀만 축낸다.
마귀 같은 년…….
그는 계기판을 힐끗 보았다.
기름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주유소를 들를 시간이 없었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
가다가 안 되면 다른 차로 바꿔 타더라도.
그는 자신의 과단성에 뒤늦게 놀랐다.
이렇게 단호하게 대처하는 자신의 태도에 그 자신이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앞의 신호등이 붉은 색깔로 변하는 것을 보고 그는 재빨리 주유소로 차를 몰았다.
기름을 채워 가지고 나오자 신호가 막 바뀌어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얼마 후 아낙이 탄 택시는 영등포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로터리로 가지 않고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낙은 차를 내렸다.
유기태도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차문을 잠근 다음 그녀 뒤를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녀는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거나 하지 않고 그녀는 곧장 걸어갔다.
아기를 업은 여자치고는 걸음걸이가 상당히 빨랐다.
그녀는 정육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거기서 고기를 사려는 것 같았다.
그녀가 고기를 사는 동안 기태는 과일 가게를 기웃거렸다.
다시 아낙이 움직였다.
그는 다시 미행을 시작했다.
아낙은 시장을 빠져 나오더니 길을 건너갔다.
그녀가 길을 건너 골목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는 길을 건넜다.
좁은 골목을 얼마쯤 걸어가다가 아낙은 어느 집 앞에서 멈춰 섰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초인종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유기태는 멈출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인 채 그 집 앞을 그대로 지나쳤다.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유기태는 발길을 돌렸다.
아낙이 들어간 집 앞을 지나치면서 문패를 보려고 했지만 어두워서 읽을 수가 없었다.
집은 조그마했고, 안에서는 아기의 자지러지는 울음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그는 라이터 불을 켜서 문패를 비춰 보았다.
한병수라는 이름의 문패가 걸려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그는 생각해 보았다.
여봉우 형사한테 연락을 취해 주기만 하면 된다.
아니면 내가 직접 잡아다가 넘겨 줄까.
그렇게 하면 뭔가 보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도 뒤로 미루었다.
좀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일단 아낙의 집을 알아 뒀으니까 언제라도 행동을 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병수는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면서 아내의 화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의 밤마다 아내는 화장을 짙게 하고 밖으로 나간다.
거의가 안 들어올 때가 많지만 늦게라도 들어오는 날에는 술에 곤드레가 되어 돌아온다.
그럴 때는 그에게 온갖 푸념과 욕설을 퍼부어대다가 잠이 든다.
그는 그런 아내가 무섭다.
그는 아내가 자기를 버릴까 봐 그것을 제일 무서워한다.
언젠가는 아내가 자기를 버리고 도망칠 것만 같아 그는 항상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그는 도저히 아내 없이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우선 무엇보다도 남들처럼 두 발로 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다리에 이상을 느낀 것은 결혼하고 나서 두 해쯤 지나서였다.
다리에서 힘이 풀리면서 걸음을 옮기기가 점점 어려워지더니 얼마 후에는 일어서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자 완전히 앉은뱅이가 되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면서 진찰을 받아 보았지만 무슨 병명인지 정확히 아는 의사가 없었다.
병명을 알지도 못한 채 치료하니 나을 턱이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증조부 때에 할머니가 갑자기 두 다리를 쓰지 못했다고 했다.
유전이라고 생각하자 모골이 다 송연해졌다.
아내는 결혼 이듬해에 딸을 하나 낳았는데 자연 그는 딸애의 다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딸애는 아무 이상 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아주 예쁜 딸이었다.
그런데 그 딸이 여고에 입학하던 해에, 그러니까 사 년 전 여름 딸애가 갑자기 주저앉고 말았다.
눈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가산을 다 탕진하면서까지 치료를 해보았지만 소용 없는 짓이었다.
딸애는 유전병이라는 것을 알고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더니 마침내 동맥을 끊어 자살하고 말았다.
이미 그가 앉은뱅이가 되었을 때부터 집안은 풍비박산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지금까지 오로지 아내에게 의지하면서 질질 끌어 왔으니 마치 살얼음 위를 걸어왔다고 할 수 있었다.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면서 그는 그의 남성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니 아내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그녀의 동정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내가 볼 때는 그는 한 마리의 처치 곤란한 벌레에 불과했다.
빨리 죽어 없어져야 할 벌레였지만 그는 끈질기게 살아서 집 안에 뒹굴고 있었다.
아내가 남자를 찾아 밤 나들이를 간다는 것쯤이야 이미 눈치로 때려잡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거야 그녀에게는 중요한 일일 테니 아무래도 좋았다.
다만 아내가 다른 남자한테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자기를 버리고 도망쳐 버릴까 봐 그것이 그는 제일 두려웠다.
그는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아내의 화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만일 아내가 자기를 버리면 그는 그때부터 거리에 나가 무릎으로 걸으면서 구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요? 화장하는 거 첨 봤어요?"
아내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그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면서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아내가 이상한 생활을 시작한 것은 딸애가 죽고 나서 일 년쯤 지나서였다.
아내는 어디서 주워 오는지 갓난아기들을 잘도 주워 오곤 했다.
지금 우유를 먹이고 있는 아기만 해도 여섯 번째 아기였다.
그는 아내가 어디서 아기를 데려오는지 알고 싶었지만 그녀가 버럭 화를 내면서 그런 건 알아서 뭐 할 거냐고 하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내는 점심때쯤 일어나 가난한 시골 여자처럼 아주 초라하게 차려 입고는 아기를 들쳐 업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녁때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그녀가 아기를 업고 나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는 지는 정말 알 도리가 없었다.
하여간 돈벌이를 해오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아기가 심한 병에 걸려 위독해지면 아내는 새 아기로 바꿔 오곤 했다.
어떤 때는 아기가 집 안에서 죽기도 했다.
"우유 먹였으면 멍청하게 앉아 있지 말고 밥상이나 치워요!"
그는 밥상을 밀고 부엌 쪽으로 갔다.
집안일은 모두 그의 차지였다.
그 동안 그는 앉아서 움직이는 데 꽤 숙달이 되어 있었다.
그는 아내 대신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집을 지켰다.
아내는 그를 믿고 외출하는 것이었다.
화장으로 얼굴을 허옇게 만들고 난 오지애는 백을 들고 일어섰다.
아홉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젊은 애들처럼 꼭 끼는 바지에 빨간 블라우스 차림으로 그녀는 외출했다.
그녀는 지금 마흔두 살이었고 병신 남편은 마흔여섯이었다.
그녀의 생존 목적은 오직 하나, 즉 육체가 쇠잔해지기 전에 그것을 실컷 불태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거의 매일 밤마다 부나비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멋지고 힘센 남자를 찾아다니곤 했다.
영등포 로터리로 걸어 나온 그녀는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자주 가는 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문 앞에 있던 우람한 젊은이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아주 화끈하게 차리셨는데요? 잘해 봐요."
"잘해 볼게요."
그녀는 요염하게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홀에는 수많은 남녀들이 끌어안고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적으로 볼 때 열이 오르기 시작할 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웬 나이 든 사람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오늘은 새파랗게 젊은 애숭이가 아니면 춤을 안 춘다 라고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그런 애송이가 쉽게 걸릴 리가 없었다.
그녀는 웨이터의 손에 오천 원권 한 장을 쥐여 주면서 귀에다 입을 갖대 댔다.
"젊은 애 하나 붙여 줘요. 잘 좀 부탁해요."
웨이터는 웃으며 물러갔다.
"실례합니다."
웬 남자가 다가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힐끗 보니 안경까지 낀 나이 든 남자였다.
오늘은 늙은이들만 이렇게 걸린담.
그녀는 상대방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실례합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동행이 있어요."
점퍼 차림의 꾀죄죄한 몰골이 도무지 이런 홀에는 어울려 보이지가 않았다.
"동행이 없는 줄 아는데……."
그 말에 그녀는 눈을 치뜨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동행이 있다는데 왜 그래요?"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남자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를 쏘아보았다.
"거기 앉지 마세요!"
"나를 모르겠습니까? 나는 부인을 잘 알겠는데……."
지애는 상대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영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아니, 어디서 한 번쯤 본 것도 같은 얼굴이었다.
"모르겠어요."
안경은 웃으며 앞으로 상체를 기울여 그녀를 들여다보듯이 쳐다보았다.
"모르겠지요. 하지만 나는 부인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말하는 것이 몹시 능글맞다.
"당신 도대체 누구예요? 난 당신 같은 사람 몰라요. 웨이터! 이 사람 좀 끌어내요. 무슨 남자가 이렇게 추근거려?"
웨이터가 다가와 남자의 팔을 잡아 끌었다.
남자는 일어나지 않으려고 버티었다.
"이거 봐요, 나도 엄연히 입장료 주고 들어왔다구!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왜 이래? 이거 놔!"
그는 웨이터의 손을 뿌리치고 나서 오지애를 쏘아보았다.
"며칠 전에 K여중 앞에서 예쁜 여학생하고 함께 택시 타고 간 거 기억 안 나요?"
비로소 오지애의 안색이 굳어졌다.
"무슨 말 하는 거예요?"
그녀는 처음에는 잡아떼려고 해보았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녀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택시 운전사요. 그날 그 예쁜 여학생하고 부인은 내 택시를 타고 갔지요. 이제 기억이 납니까?"
오지애의 얼굴 위로 경련이 스쳐 갔다.
7.
거래
"흥!"
그녀는 입술을 뒤틀며 코웃음쳤다.
얼굴은 이그러져 있었고 두 눈은 불안과 초조로 번득이고 있었다.
"내 참 기가 막혀서…….무슨 말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여기는 번지수가 틀리니까 다른 데 가서 그런 말 하세요. 살다 보니까 별 희한한 말 다 듣겠네!"
"시치미 떼지 말아요!"
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쏘아보는 눈이 심상치가 않았다.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사람을 잘못 봤어요. 그러니까 다른 데 가서 말하세요."
"잘못 보지 않았어요! 당신은 그때 그 여학생하고 택시를 타고 갔던 사람이 분명해요! 아기까지 업고 말이오!"
"나 참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네! 웨이터, 이 사람 좀 어떻게 해줘요!"
웨이터가 그 남자의 팔을 잡아 끌었다.
유기태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웨이터의 억센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돈 내고 들어왔는데 왜 이래요? 나도 엄연히 돈 내고 들어온 손님이라고! 이거 놔!"
"돈 내고 들어왔으면 얌전히 있을 일이지 왜 모르는 여자한테 추근거려요? 당신 같은 손님은 필요 없으니까 나가요!"
너무 초라하게 생긴 사람이었기 때문에 웨이터도 그를 손님으로 대우하려 들지를 않았다.
유기태도 깐깐한 사람이었다.
그는 웨이터에게 끌려가면서도 오지애를 향해 쏘아붙였다.
"당신, 그렇게 잡아떼도 소용 없어요! 내가 전화 한 통화만 걸면 당장 형사들이 달려올 거야! 도망쳐도 소용 없어! 당신 집도 다 알고 있어! 지금 형사들이 눈을 뒤집고 그 학생을 찾고 있다는 걸 알란 말이야!"
밖으로 끌려 나온 유기태는 가지 않고 그대로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두고보자고 벼르면서 점퍼 속에 두 손을 찌른 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한편 오지애는 불안한 나머지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 초라한 남자가 그때 택시를 몰았던 그 운전사가 분명한 것 같았다.
웨이터에게 끌려 나가긴 했지만 틀림없이 가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잘못 걸렸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미끈하게 생긴 젊은 남자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한 번 추실까요?"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그 젊은 남자를 따라 플로어로 나갔다.
그 남자의 몸에서는 향수 냄새가 났다.
그는 아주 세련된 매너로 그녀를 잘 리드해 나갔다.
때때로 그녀의 몸에 자극을 가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그녀를 매끄럽게 이끌어 나갔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녀는 금방 그런 자극에 몸을 내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런 마음이 일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 일기는커녕 자꾸만 바깥 쪽에 신경이 쓰여 제대로 스텝을 밟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남자의 품에서 빠져 나와 자리로 돌아왔다.
남자가 쫓아와 부드러운 말씨로 함께 밖에 나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마침내 그녀는 발작적으로 일어나 출구 쪽으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밖에 나가니 아니나다를까 아까의 그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발견하고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앞장서서 흐느적흐느적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그녀가 따라오는가 안 따라오는가 흘끔흘끔 뒤돌아보는 것이 여간 불쾌하지가 않았다.
오지애는 도망쳐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내가 그녀의 집까지 알고 있다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따라가고 있었다.
우선 급한 것은 사내가 과연 그녀의 집을 알고 있는지, 그것을 알아내는 일이었다.
"저, 여보세요!"
골목으로 들어서는 사내 뒤를 바싹 따르며 오지애는 다급하게 불렀다.
사내가 뒤돌아보았다.
그의 태도에는 느긋함이 배어 있었다.
자신은 초조해 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그런 태도였다.
"왜 그러죠?"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묻는다.
"저 좀 봐요."
"아까는 나한테 창피까지 주면서 잡아떼더니 웬일이죠?"
능청을 떠는 그를 오지애는 저주스런 눈길로 쏘아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는 거요? 내가 말을 잘못했나?"
유기태는 흐물흐물 웃으면서 턱을 치켜들고 그녀를 쳐다본다.
오지애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부드럽게 고쳤다.
방법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까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랬어요. 사람들이 있는 데서 그러시면 어떡해요?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조용한 데로 가요. 조용한 데로 가서 말씀해 보세요."
"조용한 데로 가자고? 이거 봐요, 난 당신을 발견하는 대로 경찰에 연락하기로 되어 있어. 이거 봐, 당신 유괴범이지? 그 여학생을 유괴했지?"
유기태는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면서 날카롭게 추궁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알지도 못하면서 생사람 잡을 소리 하지 마세요!"
오지애는 정색을 하고 항변했지만 그것이 먹혀 들어갈 리 없었다.
"생사람 잡는다고? 흥, 기가 막히군. 그럼 당장 경찰에 가서 따지자구. 지금 경찰이 당신을 찾느라고 혈안이 돼 있어."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은 금방 핼쑥해졌다.
그녀는 상대방을 노려보다가 은근히 말했다.
"난 도무지 아저씨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좋아요. 경찰에 가는 건 가는 거고, 여기서 이렇게 비 맞을 게 아니라 우리 일단 조용한 데로 가서 이야기해요. 아저씨가 무언가 오해를 하셔도 단단히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내가 오해를 했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말아요.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나는 못 속여요. 비록 내가 눈이 나쁘긴 하지만 당신 정도 못 알아보지는 않아요. 아까 초저녁에 당신이 초라한 시골 아낙네 차림으로 등에 아기를 업고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어정거리는 걸 봤다구! 이래도 잡아뗄 셈이오?"
오지애의 얼굴에 경련이 스쳐 갔다.
"하여간 좋아요.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조용한 데로 가서 이야기 좀 해요."
유기태는 고개를 흔들었다.
"조용한 데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거야? 바로 경찰서로 직행하자면 몰라도……."
오지애는 곱게 눈을 흘겼다.
"제 이야기를 들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런 말씀 하실 수 있어요. 일방적으로 그렇게 단정을 내릴 수 있어요?"
"일방적으로 단정을 내렸다구?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에 하는 말이야!"
오지애는 상대방이 말로만 그러지 실제로 그녀를 당장 경찰서로 끌고 가지 않는 데 대해 무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 가능성을 붙들고 늘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은 가난한 운전사이다.
유혹에 안 넘어갈 리가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의 그런 생각은 적중했다.
조용한 데로 갈 이유가 없다고 버티던 유기태는 마침내 슬그머니 못 이기는 체하고 그녀의 요구에 응할 뜻을 비췄다.
"정 그렇다면 좋아. 하지만 긴 시간은 낼 수 없어. 우선 내 차를 주차장에 갖다 놓고 갑시다."
차를 세워 둔 곳까지 가는 동안 오지애는 다정하게 굴었다.
한 우산 밑에서 걸어가니 기회가 아주 좋았다.
얼마쯤 걸어가다가 그녀는 마침내 슬며시 사내의 팔짱을 끼었다.
"어, 이거 왜 이래? 팔 빼라구!"
유기태가 짐짓 눈을 부라렸지만 그녀는 눈웃음을 치면서 더욱 팔을 꼭 끼었다.
"아이, 이렇게 가면 비도 안 맞고 좋지 않아요."
마침내 택시를 세워 둔 곳까지 다다른 그들은 비를 피해 차 속으로 들어갔다.
"차 속이 조용해서 좋네요. 우리 드라이브나 해요. 차비는 제가 듬뿍 드릴게요. 드라이브하다가 어디 조용한 데 있으면 들어가기로 해요."
그러는데 교통순경이 다가왔다.
교통순경은 불법 주차를 했으니 딱지를 떼겠다고 하면서 운전면허증의 제시를 요구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한번 봐달라고 매달렸을 것이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순순히 면허증을 제시했고 순경이 떼어 주는 딱지를 받았다.
"시내로 들어가지 말고 변두리로 나가요."
오지애의 말에 그는 발끈했다.
"당신이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그는 김포 쪽으로 차를 몰았다.
급히 달려가야 할 일도 없었으므로 느릿느릿 차를 운전해 나갔다.
"그럼 저를 터미널에서부터 미행하셨나요?"
차가 김포가도로 들어섰을 때 오지애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제 인정하나? 인정하지 않으면 파출소 앞에다 차를 댈 거야."
정말로 그는 파출소 앞에다 택시를 잠깐 정차시켰다.
오지애는 얼굴빛이 파래졌다.
"인정해요. 아저씨, 봐주세요."
차가 앞으로 굴러갔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터미널에서부터 당신을 미행해 왔어."
"그럼 우리 집에도 오셨겠네요?"
"물론 갔었지. 문패의 이름이 한병수라고 되어 있던데, 그게 당신 남편 이름인가?"
"아니에요, 집 주인 이름이에요. 저는 그 집에서 셋방을 살고 있어요."
"그렇게 거짓말 해도 소용없어! 다 알고 있는데 왜 거짓말 하는 거야?"
운전사는 완전히 반말로 위엄 있게 말했다.
"당신 같은 여자는 이 사회의 암이야. 도려 내지 않으면 안 돼."
그가 위엄 있게 나올수록 오지애는 저자세로 나왔다.
그녀는 부인한다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내의 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빨리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용서를 빌었다.
한번만 봐준다면 무슨 요구든지 들어주겠다고 나왔다.
자신의 불행한 인생을 한탄하면서 눈물을 짓기도 하고 사내에게 교태를 부리기도 하면서 상대방의 약한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 학생은 외동딸이야. 형사 말로는 대학교수의 딸이래. 그런 어린 학생을 유괴해다가 뭘 했지? 형사 말로는 팔아먹었을 거라고 하던데 그게 정말인가?"
"그건 잘 모르겠어요."
"모르다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정말 몰라요. 어떻게 됐느냐 하면……."
그녀는 그럴 듯하게 꾸며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넷이나 되는데 남편이 앓아 눕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많은 빚을 걸머지게 됐다.
그 빚을 갚을 길이 없게 되자 빚쟁이가 어린 여학생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열 명만 데리고 오면 빚을 갚은 걸로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럴 듯하게 꾸며댔다.
"그 빚쟁이가 어린 학생들을 어디다 써먹을려고 하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몇 명을 데려다 줬지?"
"두 명 데려다 줬어요. 제가 나쁜 짓을 했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경찰에 붙잡히면 아이들하고 남편을 돌볼 사람이 없어요. 제발 한 번만 봐주시면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겠어요. 맹세코 하지 않겠어요. 한 번만 봐주시면 제가 섭섭하지 않게 해드리겠어요."
차는 김포가도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길로 들어섰다.
그는 차를 길 한쪽에 세웠다.
저만치 여관의 불빛이 보였다.
"섭섭하지 않게 해주겠다는 건 뭐지? 어떻게 섭섭하지 않게 해 주겠다는 거야?"
그에게도 어느 정도의 양심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거품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지금 이 여자로부터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꼭 끼는 바지에 감싸인 여인의 하체와 앞을 열어 젖힌 빨간 블라우스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보일 듯 말 듯한 젖가슴이 자꾸만 눈앞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 그는 여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요구하시는 대로 드리겠어요. 돈도 좋고 몸도 좋아요. 뭐든지 드리겠어요."
여인을 쏘아보는 사내의 두 눈이 쥐새끼처럼 반짝였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군. 난 말이야……."
"그럴 게 아니라 우리 저기 들어가서 이야기 해요."
오지애는 여관 간판의 불빛을 가리켰다.
"여관에 들어가자는 거야?"
"뭐 어때요? 저기 들어가서 한잔 하면서 이야기 해요. 사실 나는 병신 남편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밤이면 괴로워요. 오늘 밤도 그래서 홀에 갔던 거예요."
"나도 늙어서 별수없을걸."
하면서 유기태는 여관 쪽으로 차를 몰았다.
이윽고 그들은 여관 앞에 차를 주차시킨 후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보이가 그들을 방으로 안내했다.
유기태는 침대를 싫어했기 때문에 한실을 달라고 했다.
오지애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보이에게 만 원짜리 한 장을 주면서 맥주와 안주를 좀 사오라고 일렀다.
그들이 여관에 들어서자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하듯 비가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했다.
방으로 들어간 유기태는 오지애가 펴주는 이부자리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안마해 드릴게요."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그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하였다.
그는 기지개를 쭉 켜면서 눈을 스르르 감았다.
이렇게 스릴이 있고 통쾌감을 느끼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여자한테 이렇게 대접을 받아 보기는 난생 처음인 듯했다.
그는 남자처럼 우락부락한 아내를 생각했다.
아내를 여자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내의 괄괄한 성격에 눌려 지내온 그는 여자의 상냥한 미소와 나긋나긋한 손길이 항상 그립던 터였다.
보이가 술과 안주를 가져오자 오지애는 문을 안으로 걸어 잠궜다.그리고 아예 블라우스를 벗어 버렸다.
위에 걸친 옷을 벗으니 브래지어만을 걸친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십대 여인치고는 가무잡잡한 피부에 아직도 윤기가 흐르고 있었고 젖무덤이 풍만해 보였다.
그녀의 도발적인 태도에 유기태는 그만 황홀했다.
그녀가 권하는 대로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면서도 정신은 온통 그녀의 젖무덤에 쏠리고 있었다.
"더운데 옷 벗으세요."
유기태의 얼굴에 취기가 감도는 것을 보고 그녀는 더욱 대담하게 나왔다.
위에 걸친 점퍼를 벗긴 다음 바지까지 빼냈다.
결국 그는 러닝 셔츠와 팬티 바람으로 앉아 술을 마셨다.
그야말로 상상만 하던 광경을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연출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현실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오지애는 이윽고 상체를 안겨 왔다.
그의 손이 자연 브래지어 속으로 들어갔다.
손바닥 가득히 잡히는 젖가슴이 따뜻했다.
"용서해 주시는 거죠?"
오지애는 요염한 눈길로 남자를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그녀의 한 손은 부지런히 남자의 중요한 부위를 애무하고 있었다.
"용서해 달라고? 용서해 주지.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앞으로 하는 걸 봐서 용서해 주겠어."
그의 머릿속은 교활한 계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쾌락과 돈을 함께 얻고 싶었다.
"아이, 잘 해드릴게요."
그녀는 스스로 브래지어를 벗었다.
그리고 바지도 벗어 버렸다.
사내는 땀에 젖은 삼각 팬티가 허벅지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것을 뚫어지게 쏘아보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요 위에 눕히고 거기에 손을 갖다 댔다.
그는 갑자기 급해졌다.
허둥대는 그를 여자가 도와 줬다.
위치가 바뀌어 이번에는 그가 요 위에 눕혀졌다.
그의 빈약한 몸뚱이가 드러나고, 여자의 두 손이 어지럽게 그 몸을 어루만져 나갔다.
"몸으로 때우면 안 돼요?"
남자의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다 그녀는 거래 조건을 디밀었다.
그는 술에 취했으면서도 한 발짝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끈질긴 근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일단 대답을 보류한 채 그녀의 육체를 탐하는 데 열중했다.
허덕이면서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 그녀의 몸 속을 헤엄쳐 가다가 이윽고 만족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수건에 물을 적셔 가지고 나와 그의 땀에 젖은 몸을 닦아 주면서 속삭이는 소리로 물었다.
"좋았어요?"
"음, 좋았어."
그는 천장을 향해 담배연기를 기분좋게 내뿜었다.
"하지만 말이야,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 돼!"
그녀의 안색이 확 변했다.
"더 이상 필요하신 게 뭐예요?"
"그걸 꼭 이야기해야 하나? 알아서 할 일이지. 난 궁하단 말이야!"
"그럼 우리 솔직히 이야기 해요. 얼마면 되겠어요?"
"알아서 주라고."
그는 액수를 말하지 않으려고 했고, 오지애는 그것을 들어야겠다고 기를 쓰고 나왔다.
마침내 그는 마지못하는 척 그 액수를 제시했다.
"내가 지금 딱 이백이 필요한데 말이야……."
"이백이나요?"
그녀는 펄쩍 뛰었다.
"응, 이백이 필요해."
그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무섭게 그를 쏘아보았다.
"너무 많아요. 그만한 돈이 없어요!"
"없으면 마련해야지."
몇 번 애걸해도 안 되자 오지애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좋아요, 그걸로 딱 끝나는 거예요? 나중에 귀찮게 굴지 말아요. 만일 귀찮게 굴면 나한테도 생각이 있어요."
"알았어. 그것으로 딱 그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감옥에 가는 것 보다야 이백을 내는 게 낫지."
"당신…… 그러고 보니까 악질이군요?"
"피차 일반이지 뭐."
"지금은 돈이 없어요. 가서 가져 와야 해요."
유기태는 그것 때문에 내일 또 이 여자를 만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거래일수록 빨리 끝내는 게 좋다고 생각한 그는 그녀를 따라가서 돈을 받아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서 가져올 게 아니라 함께 가도록 하지. 우리 거래가 끝나면 나도 집에 가봐야 하니까 말이야."
"좋아요."
그녀는 의외로 선선히 응했다.
밖에는 여전히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지애는 집으로 가지 않고 영등포 로터리 쪽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쪽으로 가야 돈을 둘러댈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유기태는 영등포 로터리 부근에 있는 어두운 골목에다 차를 주차시켰다.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세요."
오지애는 이렇게 말한 다음 차에서 내려 어둠 속으로 급히 사라져 갔다.
유기태는 불을 모두 끈 다음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상체를 눕혔다.
눈을 감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이백만 원이라는 거금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이백만 원이 생기면 무얼 할까.
아내에게는 비밀로 할 셈이었다.
멋진 데 써야겠는데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그는 얼핏 잠이 들었다.
그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인기척을 느끼고서였다.
상체를 급히 일으키는데 어둠 속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 왔다.
"기사 양반, 갑시다. 불을 켜지 말고 그대로 갑시다."
바로 옆 자리에 남자 손님이 앉아 있었다.
"가지 않습니다."
"잔소리 말고 가!"
이번에는 뒤쪽에서 역시 날카로운 남자 목소리가 들려 왔다.
유기태는 의자를 바로 하고 불을 켜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목덜미에 차가운 감촉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칼일 것이라고 그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불을 켜지 마. 그리고 허튼 수작 하지 말고 차를 돌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목을 잘라 버린다."
뒷문이 열리더니 또 한 사람이 올라타는 것 같았다.
"이 영감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어 놔요."
그것은 오지애의 목소리였다.
8.
살인 아침 아홉 시가 조금 지난 S경찰서 수사과는 흡사 장터처럼 붐비고 시끄럽다.
어느 경찰서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S경찰서 수사과의 아침 분위기는 그 정도가 심하다.
서울 시내 경찰서 중에서 대소 사건의 발생률이 가장 높기 때문일까.
아마 그렇게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수사과 중에서도 형사계 쪽이 제일 시끄럽다.
형사들은 으레 전화기에다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기 일쑤이고 피의자를 상대로 이야기할 때에도 고함을 지르고 책상을 주먹으로 치기가 다반사이다.
그러니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함을 지르고 주먹으로 책상을 치는 그 자체는 얼른 보기에 경찰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짓일는지 몰라도 폭주하는 사건에 시달리고 있는 형사들한테는 그것이야말로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형사들이라고 모두 고함을 질러대는 것은 아니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될수록 조용조용히 이야기하려고 애쓰는 형사도 없지 않다.
여봉우가 바로 그런 타입의 형사였다.
그날 아침, 그러니까 7월 24일 아침 여우는 부근 다방에서 배달되어 온 커피를 마시면서 그날 해야 할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그 자신만은 조용함을 유지하는 데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밖에는 어제에 이어 여전히 비바람이 치고 있었다.
이런 날 밖에 나가 싸돌아다니기는 정말 싫다.
이런 날에는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실컷 낮잠이나 자고 싶다.
"안녕하십니까?"
조사계의 지치수가 다가와 고개를 꾸벅했다.
"아, 왔나. 커피 한잔 하지."
"마셨습니다. 오늘 할 일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십시오."
여우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 사이로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바람이 더욱 거세어지는 모양이야. 날씨가 이래서야 어디 돌아다닐 수 있겠나."
"그래도 가만 있을 수 있습니까."
지 형사는 의욕에 차 있는 듯이 보였다.
그는 형사계 일을 도와 주게 된 것을 몹시 기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기태 씨한테 전화를 걸어 주겠나? 아직 일 나가지 않았을 거야. 집으로 전화를 걸어 봐."
"뭐라고 할까요?"
"시간 좀 내달라고 해. 여기 와서 유괴범의 몽타주를 작성하는 데 좀 협조해 달라고 해. 동희 양한테도 연락을 취하고 말이야."
지 형사는 수화기를 집어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가 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신호가 떨어지면서 ‘여보세요!’ 하고 다급하게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거기 개인 택시 운전하는 유기태 씨 댁입니까?"
"네, 그런데요. 어디신가요?"
"여긴 경찰입니다. 유 기사님 좀 바꿔 주시겠습니까?"
"무슨 일로 그러시는데요?"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물어 온다.
"아, 별일은 아니고 뭐 좀 부탁하려고 그럽니다. 계시면 좀 바꿔 주십시오."
"지금 안 계셔요."
"벌써 일 나가셨나요?"
"아니에요, 어제 나가셔서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여인의 목소리가 걱정에 가득 차 있는 듯이 들려 왔다.
"실례지만 유 기사님하고 어떻게 되십니까?"
"전 안사람 돼요."
"아, 사모님 되시는군요. 지금 유 기사님하고 연락이 좀 됐으면 좋겠는데……. 몇 시쯤 들어오신다고 연락이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저도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일 나가서 안 들어오신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어요. 늦어도 밤 열한 시까지는 꼭꼭 들어오셨어요. 그런데 엊저녁에는 들어오시지도 않고 전화 연락도 없었어요. 무슨 사고가 난 것만 같아 걱정이 돼서 죽겠어요. 더구나 날씨까지 나쁜데……."
비로소 그녀의 목소리가 걱정에 가득 차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 형사는 남의 걱정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것은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연락이 오거든 S경찰서 형사계로 전화를 좀 급히 부탁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지 형사 아니면 여 형사를 찾으면 됩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데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어제 일 나가서 아직 안 들어왔답니다. 부인이 전화를 받았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고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여우는 입에 대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미묘한 시선을 지 형사에게 던졌다.
"어제 일 나간 사람이 아직 안 들어왔단 말이지? 연락도 없고?"
"네, 그렇답니다."
지 형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디 멀리 간 모양이군."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답니다."
여우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곳은 주택가로부터 좀 떨어져 있는 버려진 공터였다.
공터는 꽤 넓었고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여기저기에 쓰레기 더미도 보였다.
청소차가 오지 않거나 하면 질이 좋지 않은 주민들이 더러 거기에다 쓰레기를 갖다 버리곤 해서 그렇게 쓰레기가 여기저기에 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애초에 그곳은 공장터였다.
그것을 말해 주는 듯 지금도 공장 건물이 흉한 몰골로 한쪽에 서 있었다.
건물의 유리창은 모두 깨어져 있었고 천장도 뻥 뚫려 있었다.
그나마 한쪽 벽은 무너져서 마치 폭격에 부서진 것처럼 보였다.
그 공장이 도산한 것은 십 년 전이었다.
빚쟁이들이 몰려들고 소송이 붙더니 결국은 끝없는 말썽의 소지로 지금까지 적합한 임자를 찾지 못한 채 내버려져 있었다.
십 년 동안 그렇게 방치되어 있는 바람에 낮에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밤에는 불량배들의 온상이 되어 더러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곤 했다.
지난 봄에만 해도 어떤 여학생이 강간 살해된 시체로 건물 안에서 발견되는 바람에,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건물을 빨리 철거하라고 구청에 몰려가는 소동이 일기도 했었다.
그 일로 당분간 불량배들은 그곳에 얼씬하지도 않았는데 날씨가 더워지면서 그들은 다시 슬금슬금 그곳에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날씨가 좋았다면 아침부터 아이들이 그곳에 몰려왔을 것이다.
방학중이라 아이들은 눈만 뜨면 놀기부터 했다.
그리고 그곳은 아이들이 병정놀이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러나 7월 24일 아침은 비바람이 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 근방에는 얼씬도 하지 않은 채 모두 집 안에 틀어박혀 만화를 보던가 텔레비전을 보던가 했다.
우중충한 공장 건물과 잡초투성이의 빈 터는 비바람 속에 한층 더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무너진 담벽이 더욱 그곳을 스산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아침 나절 내내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오후 한 시쯤 되었을 때 한 사람이 그쪽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나이 든 노인 거지였다.
노인은 찌그러진 우산으로 겨우 비바람을 가리면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노인의 한쪽 어깨에는 해진 여행가방이 하나 걸려 있었다.
모자 밑으로 드러난 머리칼은 온통 잿빛이었고 어깨는 구부러져 있었다.
걸음걸이는 불안해 보였다.
노인은 변이 마려웠다.
아까부터 적당한 곳을 찾았지만 안심하고 바지를 끌어내릴 수 있는 곳이 보이지 않던 차에, 마침내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걸음을 옮긴 것이다.
마당을 가로질러 건물 쪽으로 다가간 그는 주춤했다.
건물 안에 웬 택시가 한 대 서 있었던 것이다.
개인 택시였는데 택시 문은 모두 열려 있었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의 상태가 좋고 깨끗한 것으로 보아 오래 전에 그곳에 버려진 차는 아닌 것 같았다.
차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다 말고 노인은 주춤했다.
차 뒤 어둠침침한 곳에 누군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노인은 멈칫했다가 주머니에서 돋보기 안경을 꺼내 썼다.
그리고 가까이 접근해 보았다.
그 사람은 천장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뜬 채 누워 있었다.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인생의 온갖 풍상을 겪어 온 노인은 그것을 보고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는 주춤하다가 ‘여보시오!’ 하고 상대방을 불러 보았다.
대답이 없자 그는 발로 그 사람의 허벅지를 차보았다.
허벅지는 이미 경직된 느낌이었고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죽은 모양이야. 쯧쯧……."
노인은 중얼거리면서 혀를 차다가 침을 뱉고는 돌아섰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 그는 낯선 시체가 별로 무섭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상하게도 그 주검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쯧쯧, 안됐어. 하지만 누구나 다 죽게 마련이니까 애통해 할 것은 없지……."
그는 중얼거리면서 시체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 바지를 내리고 쭈그리고 앉았다.
끙끙 힘을 주면서 변을 보고 난 그는 이윽고 바지를 끌어올리고 나서 차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차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그는 차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안경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알이 깨어지고 한쪽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그것을 도로 바닥에다 버리고 운전석 한쪽에 달려 있는 돈주머니를 발견하고는 그 속으로 손을 디밀어 보았다.
지폐는 잡히지 않고 그 대신 동전이 한 주먹 잡혔다.
그는 그것들을 모두 꺼내 자신의 여행가방 속에다 쓸어 넣었다.
더 이상 가져갈 만한 것이 보이지 않자 그는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여기 이렇게 누워 있으면 어떡하나. 가족들이 기다릴 텐데……."
마치 살아 있는 사람한테 말하듯 중얼거리면서 그는 죽은 사람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주머니 속에서는 다행히 지폐가 몇 장 나와 주었다.
만 원짜리 다섯 장과 천 원짜리 열 장이었다.
노인으로서는 횡재나 다름없었다.
우선 그는 자장면을 한 그릇 사먹고 싶었다.
그는 몹시 시장하던 참이었다.
그곳을 빠져 나온 그는 시장 쪽으로 걸어가다가 도중에 중년의 남자를 만났다.
점퍼 차림의 그 중년은 사람이 좋아 보였다.
머리에는 민방위 마크가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곁을 지나치다 말고 노인은 중년을 불러 세웠다.
"나 좀 봅시다."
"네, 무슨 일입니까?"
중년이 웃으며 우산을 뒤로 젖혔다.
"사람이 죽었어. 사람이……."
"어디에 말입니까?"
"저기…… 저기에 죽어 있어. 한번 가보라구요."
중년 사내는 동 직원이었다.
그는 정색을 하고 노인을 바라보다가 급히 공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몽타주 작성 전문요원은 장미의 친구인 동희를 통해서 대충 유괴범의 얼굴 모습을 맞추어 보았다.
동희는 아침 나절 내내 그 일 때문에 경찰서에 붙잡혀 있었다.
목격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정확한 몽타주를 만들 수가 있다.
전문요원은 동희의 조언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또 한 사람의 목격자가 있다는데 그는 오후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구내 전화로 지치수를 불렀다.
"그 사람 아직 안 왔나요?"
"아직 연락이 안 됐습니다. 지금 행방을 찾고 있는 중이니까 좀 기다려 주십시오."
여우는 지 형사에게 다시 유 씨 집에 전화를 걸어 보라고 지시를 했다.
전화를 걸어 보고 난 지 형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집에도 안 들어왔고 연락도 없답니다."
"이상하군."
여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왔다갔다하다가 수화기를 집어 들고 시경상황실을 불렀다.
"어제부터 오늘 이 시간 사이에 발생한 자동차 사고를 알려 줘요. 찾고 있는 차는 개인 택시로 운전사의 이름은 유기태…… 차 번호는 서울 3바 527X번…… 어제 나가서 아직 소식이 없어요."
전화를 받은 여직원은 상냥했다.
전화를 끊고 삼 분쯤 기다리고 있자 전화벨이 울렸다.
"사고 차 중에 그런 차는 없습니다."
"그럼 수배를 부탁해요."
수배를 부탁한 지 삼십 분이 못 돼 시경 상황실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아까 부탁하신 택시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운전기사는 피살됐답니다. 조금 전에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어느 관할이지요?"
여우는 조용히 물었다.
얼굴은 창백했다.
"K서입니다."
"고맙소."
여우는 지 형사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뒤를 지 형사가 허둥지둥 따랐다.
여우와 지 형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관할서의 수사진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아는 얼굴도 몇 있었다.
여우는 시체를 덮은 가마니를 들춰 보았다.
피살자는 유기태가 틀림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안면이 있는 관할서의 형사반장이 손을 내밀면서 어쩐 일로 이곳까지 왔느냐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가 필요로 한 인물이었습니다. 아침에 집으로 연락했더니 어제 일 나가서 아직 안 들어왔다는 거였습니다. 상황실에 수배를 부탁해 놨었지요."
"그랬었군."
형사반장은 끄덕이고 나서 무슨 사건에 관계된 인물이냐고 물어 왔다.
여우는 대충 아는 대로 설명해 주었다.
"…… 그러니까 유괴범의 얼굴을 알고 있는 중요한 증인인 셈이죠. 몽타주를 만들려고 찾았는데 이렇게 당하고 말았군요. 피살입니까?"
"피살이야. 여기저기 상처가 많은데 특히 머리를 심하게 얻어 맞았어. 그게 치명적이었던 것 같아. 몽둥이 같은 것으로 후려친 모양이야. 발자국을 보니까 한 놈의 소행이 아니고 두 명 이상의 소행인 것 같아. 돈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걸 보니까 강도 같기도 한데…… 여 형사 말을 들으니까 달리 생각되기도 하는군."
여봉우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지금으로서는 어느 쪽으로도 단정을 내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택시 강도한테 당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유괴범한테 살해됐을 수도 있다.
"그 유괴범한테 살해된 게 아닐까요?"
지 형사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어 왔다.
"글쎄, 뭐가 뭔지 모르겠어. 여자의 솜씨는 아닐 테고, 그 여자의 부탁을 받고 남자들이 그를 해치웠는지도 모르지. 만일 유괴범의 짓이라면 그 일당한테 당한 거야. 하지만 유 씨가 어떻게 그들을 만나게 됐는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남아. 유 씨는 유괴범의 거처를 모르고 있었거든."
"그들이 유 씨를 찾아내서 죽인 게 아닐까요?"
"글쎄,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유 씨가 피살된 시간은 대략 7월 23일 밤 열한 시에서 24일 새벽 두 시 사이로 밝혀졌다.
여우는 유류품들을 살펴보았다.
그 중에서 시선을 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주차 위반으로 교통순경으로부터 받은 딱지였다.
그는 그것을 주의깊게 들여다보았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여우와 지 형사는 어젯밤 유기태한테 딱지를 떼어 준 교통순경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는 어제 그 자리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데리고 부근 다방으로 들어갔다.
그 순경은 노란 비옷을 벗은 다음 따끈한 우유를 한 잔 청했다.
그는 서른쯤 되어 보였고 뚱뚱했다.
"어제 이 딱지를 떼인 운전기사가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살해됐죠."
"그래요?"
교통순경은 놀란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럴 줄 알았으면 딱지를 떼지 말 걸 그랬는데요."
순경은 후회하는 표정으로 말하면서 우유 잔을 내려놓았다.
"그때 시간이 10시 20분이라고 적혀 있는데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순경은 자기가 뗀 딱지를 들여다보면서 끄덕였다.
"기억납니까?"
"네, 기억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 주차해 있었나요?"
"저쪽 시장통 입구에 주차해 있었습니다. 아마 한 서너 시간 정도는 주차해 놨을 겁니다. 제가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면허증 제시를 요구하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순순히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면허증 제시를 요구하면 으레 한 번 봐달라고 사정사정하게 마련인데 그 기사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순순히 면허증을 내보이고 딱지를 받기에 참 별난 기사도 다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 사람은 혼자였나요?"
"아닙니다, 어떤 중년 여자하고 동행이었습니다."
형사들은 긴장했다.
"그 여자의 인상 착의를 기억할 수 있어요?"
"글쎄, 어두워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한참 생각해 보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얼굴은 잘 기억하지 못하겠고 옷차림은 기억이 납니다. 위에 빨간 블라우스를 입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밑에는 바지 같은 걸 입었던 것 같아요."
"그 여자는 택시 손님이었나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어디선가 함께 다정하게 우산을 쓰고 나타났으니까요. 차에 탈 때에도 운전석 옆에 다정하게 붙어 앉았습니다. 여자 얼굴이 광대뼈가 좀 튀어나온 것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유기태는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에 손님이 아닌 웬 중년 여인을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갔다.
어디로 갔던 것일까? 그리고 그 여인은 누구일까?
"마동희가 말한 그 유괴범의 인상하고 비슷한 데가 있는데요. 그 여자도 광대뼈가 튀어나왔다고 했습니다."
다방을 나와 교통순경과 헤어져 저녁 식사를 하러 가면서 지 형사가 말했다.
여우는 잠자코 생각에 잠겨 걸었다.
그는 유기태한테 혹시 내연 관계의 여인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 생각 끝에 그는 지 형사에게 말했다.
"유 씨한테 혹시 내연 관계의 여자가 있었는지 알아봐."
그들은 냉면집으로 들어갔다.
날씨 때문인지 식당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들은 냉면을 먹기 시작했다.
지 형사는 맛있게 식사를 했지만 여우는 입맛이 떨어져 냉면이 잘 씹히지가 않았다.
"내일부터 바빠지겠는데. 우선 시장을 중심으로 탐문수사를 벌일 필요가 있어. 서너 시간 주차를 해놨다니까 아마 한 일곱 시경으로 잡으면 될 거야. 유 씨는 그 시간에 거기다가 차를 주차시켜 놓고 어디에 갔다가 열 시가 지나서야 웬 중년 여인을 데리고 나타나서 차에 탔어. 서너 시간 동안 그는 어디에 갔다 왔을까? 러시 아워에 보통 때에도 복잡한 곳에 장시간 차를 주차시켜 놓는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지. 더구나 택시 기사가 말이야. 장사도 안 하고 그는 도대체 어디에 갔다 왔을까? 아마 아주 다급한 일이 아니고는 그럴 수가 없을 거야. 그리고 그는 여자를 차에 태우고 어디에 갔을까."
9.
수사 유괴사건의 유력한 증인이 살해됨으로써 사건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경찰이 먼저 밝혀야 할 것은 유기태의 피살이 과연 유괴사건과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관계가 있다면 단일 사건으로 취급하여 수사진을 보강한 다음 적극적인 수사를 벌여야 한다.
그리고 관계가 없는 별개의 사건이라면, 이를테면 우연히 택시 강도를 당해 피살된 것이라면 거기에 대한 수사는 다른 팀에 의해 따로 진행되어야 한다.
여봉우는 두 개의 사건이 관계가 있다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아직 희박했다.
그 근거를 찾기 위해 그는 서울 시내 전 숙박업소를 뒤질 필요성을 느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유기태가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에 빨간 블라우스 차림의 여인을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교통순경의 증언 때문이었다.
유기태는 7월 23일, 초저녁에 교통이 복잡한 시장통 입구에 택시를 주차시켜 놓고 어디엔가 갔었다.
불법주차를 발견한 교통순경은 운전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열 시가 훨씬 지나서야 나타났다.
그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빨간 블라우스를 야하게 차려 입은 웬 중년 여인과 동행이었다.
한 우산 밑에서 다정하게 팔짱까지 끼고 나타난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는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교통순경이 딱지를 떼겠다고 했지만 운전사는 잘 봐달라고 사정하는 법도 없이 순순히 면허증을 내놓았다.
그리고 딱지를 받고 나서 그 여인을 태우고 어디에 갔을까.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을 시간이다.
밤…… 어둠…… 억수같은 비…… 그리고 야한 차림의 여인…… 여관…… 불륜의 관계…….
이러한 상상은 아주 기초적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여인과 함께 사라진 그는 그날 밤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피살체로 발견되었다.
그가 살해된 시간은 7월 24일 새벽 한 시경으로 밝혀졌다.
그가 살해된 시간에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던 사람은 바로 그 빨간 블라우스 차림의 여인이다.
그 빨간 블라우스가 어쩌면 가능성을 보여 줄지도 모른다.
"이봐, 그런 막막한 일을 가지고 서울 시내를 뒤진다는 건 욕먹기 딱 알맞아. 강력사건이 폭주하고 있는 판에 빨간 옷을 입은 여자와 안경 낀 남자가 지난 밤에 투숙한 적이 있느냐 없느냐 따위를 알아봐 달라는 것은 좀 미안하지 않아?"
시경에 수사 의뢰를 하고 싶다는 여우의 말을 듣고 그 이유란 것을 들어 보고 나서 형사계장이 보여 준 반응이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여우를 째려보고 있었다.
한마디로 귀찮게 굴지 말라는 표정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괴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이건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유괴범이 살인까지 한 겁니다."
형사계장은 담배연기 사이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담배를 비벼 끄면서,
"가능성이 있어?"
하고 물었다.
"네,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우는 끄덕였다.
"잠깐 기다려. 과장한테 보고 해야지."
계장은 십 분 만에 돌아왔다.
그리고 잠자코 수화기를 들더니 시경을 불렀다.
7월 25일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날씨가 맑았다.
바람도 자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오후가 되자 불볕 더위가 몰려왔다.
여우는 영등포 로터리 부근에 있는 시장통을 뒤지고 있었다.
유기태가 시장통 입구에다 택시를 장시간 주차시켜 놓고 어딘가에 다녀왔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서 그 일대를 대상으로 혼자 탐문수사를 벌이고 있었다.
오후 다섯 시가 넘도록 돌아다녀 보았지만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는 오지애의 집 부근까지 접근했지만 결국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다섯 시 반이 지났을 때 무전기에서 호출음이 들렸다.
그는 즉시 공중 전화로 달려가 본서로 전화를 걸었다.
지치수가 전화를 받았다.
"아, 제가 불렀습니다. 유기태의 여자 관계를 조사해 봤더니 그는 너무 깨끗합니다. 내연 관계에 있는 여자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음, 깨끗한 게 아니라 여자가 상대를 안 해주었겠지."
"아,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시경에서 전화가 온 모양입니다."
잠시 후 지 형사는 꽤 흥분해서 말했다.
"그 여자와 유기태가 투숙했던 여관을 발견한 모양입니다."
밤 사이에 시내 모든 파출소에 하달된 명령은 관할 구역 내의 모든 숙박업소를 체크하여 23일 밤에 빨간 블라우스 차림의 중년 여인과 오십대의 안경 낀 남자가 투숙한 일이 없는지를 조사하여 25일 오후 다섯 시까지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삼십 분쯤 지나 여우는 김포가도 쪽에 면한 한 파출소에 도착했다.
명령을 성실히 수행하여 얻은 것을 보고해 준 사람은 그 파출소의 나이 어린 순경이었다.
그 순경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지치수가 달려들어왔다.
그들은 순경을 따라 거기서 한참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여관을 찾아갔다.
그 여관은 주택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들판에 서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안 된 듯 깨끗해 보였다.
"보이가 다행히 그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여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순경이 말했다.
보이는 스무 살 안팎의 앳되게 보이는 청년이었다.
"23일 밤, 그날 밤은 비가 많이 왔었지. 그날 밤 분명히 빨간 블라우스를 입은 중년 여인하고 안경 낀 늙은 남자하고 이 여관에 투숙했었나?"
"틀림없습니다."
보이는 겁먹은 얼굴로,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사람들이 여기에 온 것은 몇 시쯤이었지?"
"그날 밤 열 한 시쯤이었습니다."
보이는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로 그때 방영되고 있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들먹였다.
그는 그 드라마를 빼놓지 않고 매일 본다고 말했다.
"그 남자는 택시 기사였습니다."
"어떻게 그걸 알지? 숙박 카드에 운전기사라고 기재했나?"
"아닙니다. 주무실 손님들이 아니라서 숙박부는 적지 않았습니다. 여자 손님이 돈 만 원을 주면서 술을 사오라고 해서 밖에 나갔다 오면서 요 앞에 주차해 있는 택시를 보고 운전기사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들었던 방을 좀 보여 주겠나?"
그 방은 이층에 있는 한실이었다.
방 안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 방에서 무엇을 했지?"
"글쎄요, 뻔하죠 뭐. 술 마시면서……."
보이는 말하기 거북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들은 여기에 얼마나 있었나?"
"그렇게 오래 있지 않았어요. 한 시간 남짓 있다가 나갔습니다."
"함께 택시를 타고 갔나?"
"네, 함께 가는 걸 봤습니다."
"그 여자를 보면 기억할 수 있겠나?"
"네, 어느 정도는……."
"그 남자는? 택시 번호를 기억하나?"
"모릅니다. 하지만 남자 얼굴은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우는 마지막으로 유기태의 사진을 내보였다.
"네, 이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술값도 여관비도 여자가 냈으며 남자는 여자에게 몹시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고 보이는 덧붙여 말했다.
"유기태 씨는 택시 강도한테 당한 게 아니야."
이것은 여관을 나서면서 여우가 지 형사한테 한 말이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여인의 몽타주를 만들기 위해 보이를 데리고 본서로 돌아왔다.
교통순경은 그 여인에 대한 기억이 분명하지 않았으므로 보이의 진술을 토대로 몽타주가 만들어졌다.
그 몽타주는 장미의 친구 동희의 진술을 근거로 만들어졌던 몽타주와 비교되었다.
두 개의 몽타주에 나타난 인상의 특징은 놀랍도록 닮은 데가 많았다.
광대뼈가 튀어나온 것이랄지 하관이 쪽 빠진 것이랄지 눈이 가느스름한 것 등이 모두 비슷해 보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헤어 스타일이었다.
동희가 말한 그녀의 헤어 스타일은 머리를 뒤로 동여맨 것이었고 보이가 증언한 헤어 스타일은 달달 볶은 머리를 풀어헤친 것이었다.
"유기태 씨는 바로 이 유괴범한테 당한 겁니다!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계장에게 두 장의 몽타주를 내보이면서 여우는 단언했다.
"여자 힘으로 남자를 그렇게 때려 죽일 수 있을까? 현장에는 두 명 이상의 소행으로 보이는 발자국들이 있었다는데…… ?"
"공범들이 있겠죠. 유괴를 전문적으로 하는 조직이라면 틀림없이 공범이 있을 겁니다."
"그 여자를 수배해!"
단순 유괴사건은 이로써 살인사건으로 발전했다.
사건은 즉시 상부에 보고되었고, 위에서는 극비리에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사건을 해결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피살체가 발견되었으니 기자들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7월 24일 석간 일부와 25일 조간 신문에는 개인 택시 운전기사 유기태가 피살체로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짤막한 2단 기사로 보도되었다.
그와 함께 경찰은 택시 강도를 당해 피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는 말도 덧붙여 있었다.
사실 경찰은 사건을 비밀리에 해결하기 위해 기자들에게 유 씨가 택시 강도에게 당한 것 같다고 연막전술을 펴지 않을 수 없었다.
택시 기사가 강도에게 살해되는 예는 가끔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기자들은 유 씨의 죽음에 대해 더 이상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곧 여봉우를 중심으로 수사진이 편성되었다.
형사 2반, 즉 강력 사건 전담반인 강력반은 현재 다른 사건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별로 바쁘지 않은 부서의 형사들을 끌어모아 수사팀을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팀워크인만큼 기름을 바른 것처럼 매끈하게 돌아갈 리 만무했다.
인원은 여봉우까지 합쳐 모두 열 명이었다.
여우는 임시 반장으로 팀을 지휘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별로 기분도 내키지 않았고 사건을 쉽게 해결할 것 같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명령을 수행한다는 마음으로 기계적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본부는 유괴된 김장미 양의 집 부근에 있는 파출소에 설치되었다.
최초의 수사 회의는 25일 밤 아홉 시 삼십 분경에 열렸다.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파출소 한쪽에 낡아 빠진 헌 책상 두어 개를 들여놓고 전화도 한 대 더 들여놓았다.
강력사건에 대한 수사 경험이 전혀 없는 아홉 명의 얌전한 수사요원들을 둘러보면서 여우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니 범인을 잡기는커녕 오히려 쫓아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는 집에 들어갈 생각들 하지 말아요."
그의 엄포에 아홉 명의 사나이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켰다.
그는 사건에 대해 소상하게 설명해 준 다음 그간의 수사 결과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그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는 무표정했던 수사요원들의 눈에 호기심 어린 빛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두 가지의 몽타주를 돌렸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그 두 장의 몽타주는 사실은 한 인물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바로 그 여자가 장미 양을 유괴한 범인이자 유기태 씨 살해에 관계된 가장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우리가 맡고 있는 사건은 표면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유괴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살인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건은 한 인물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따로따로 분리해서 수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여자, 이 독거미 같은 여자를 체포하기만 하면 두 가지 사건은 동시에 해결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이 거미를 체포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겁니다."
그는 몽타주의 여인을 가리켜 ‘거미’라고 불렀다.
그 말은 매우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았고, 그때부터 수사요원들은 그녀를 거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임시 수사반장은 계속해서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보다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즉 유괴된 장미 양을 하루 빨리 찾아내는 일입니다. 내 생각에는 장미 양은 인신매매 조직에 넘겨진 것 같습니다. 잘 알겠지만 그런 조직은 거의가 점조직이기 때문에 수사하는 데 애를 먹습니다. 장미 양이 실종된 지 벌써 엿새째입니다. 이미 그 소녀는 악의 소굴 속에 갇혀서 몸을 팔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그 소녀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도 하루빨리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는 복사한 장미 양의 사진을 돌렸다.
사진을 받아 든 사나이들의 눈이 일순 번쩍 빛났고, 조금 후에는 애석한 표정이 되어 다시 한 번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예쁜 소녀군요. 이런 애를 유괴해다 팔아먹다니……."
다혈질로 보이는 젊은 요원이 분함을 이기지 못해 말했다.
다른 요원들의 얼굴에도 그런 빛이 나타나고 있었다.
여우는 네 명을 골랐다.
"당신들은 이제부터 장미 양을 찾아내는 데 주력해요. 장미 양의 집에는 하루도 거르지 말고 매일 들르도록 해요. 그쪽으로 장미 양한테서 전화가 걸려 올지도 모르니까. 실제로 유괴된 다음 날인가 장미 양한테서 전화가 걸려 온 일이 있어요. 엄마를 부르며 울다가 전화를 끊었다는데……. 어딘가 살아 있다면 다시 전화가 걸려 올 가능성도 있어요. 그리고 범인한테서도 전화가 걸려 올지도 몰라요. 돈을 요구하는 전화가 걸려 올지도 모르니까 장미 양의 집에는 매일 한 번씩이라도 꼭 들르도록 해요. 필요하면 한 사람씩 교대로 그 집에 상주하고 있어도 좋아요. 장미 양은 영등포 사창가 부근에서 사라졌으니까 사창가를 중심으로 탐문수사를 벌이도록 해요. 필요하면 아예 사창가에서 창녀와 살림을 차려도 좋아요."
그 말에 형사들은 처음으로 웃었다.
그러나 여우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창녀와 살림을 차리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그만큼 열성을 보이지 않으면 정보를 얻어내기가 어려워요. 창녀들이란 모든 남자들을 도둑놈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입을 열지 않아요. 그들의 입을 열게 하려면 그들과 가까워져야 하고 그럴려면 아예 사창가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
"그러다 성병이라도 걸리면 어떡하죠?"
누군가가 짓궂게 그런 질문을 던졌고, 그 바람에 모두가 긴장을 풀고 한바탕 웃어젖혔다.
그러나 여우는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았다.
"성병에 걸려서라도 정보를 얻어내야 해요. 정보원들을 최대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해 봐요. 특히 사창가에는 범법자들이 우글거리니까 전과자들을 이용해서 접근을 시도해 봐요."
여우는 지치수를 제외한 나머지 다른 네 명에게는 거미를 추적하라고 지시했다.
"내 생각에는 거미 역시 사창가를 중심으로 탐문수사를 벌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 여자가 장미를 데리고 사라진 곳이 영등포 로터리 사창가 쪽이니까 그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볼 수 있어요. 내 생각에는 거미가 아무래도 영등포 일대에서 암약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 이유로는 거미는 유 씨가 살해되던 날 밤 영등포 로터리 부근에 있는 시장통 입구에서 유 씨와 함께 택시에 올랐다는 사실을 들 수가 있어요. 거미는 그러니까 장미와 함께 로터리 부근에서 차를 내려 사라졌고, 23일 밤에는 유 씨와 함께 로터리 부근에서 택시를 타고 사라졌어요. 거미는 로터리 부근에 두 번 등장하고 있어요. 이 사실에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만일 거미가 그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면 수사 범위는 그만큼 좁혀질 수가 있어요. 일차로 영등포 일대 사창가를 뒤지도록 해요. 사창가는 물론 인신매매 조직에도 손을 대야 할 겁니다. 그들은 점조직이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려울 테니까 역시 전과자를 상대로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사람으로는 인원이 너무 적지 않습니까?"
나이 든 형사 하나가 볼멘 목소리로 물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건에 열 명의 인원으로 뛴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군요. 이 이상의 인원은 도저히 안 됩니다. 죽으나 사나 우리는 이 인원으로 이번 사건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침묵이 흘렀다.
웃음은 사라지고 실내에는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여우는 지 형사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중간 역할은 지 형사가 할 겁니다. 지 형사는 나와 함께 제3조가 되어 움직일 겁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두 사건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는 사건인 만큼 거미를 찾는 팀이라 해도 거미를 추적하면서 동시에 장미 양한테도 신경을 써주기 바랍니다. 참, 생각이 나서 하는 말인데 거미 팀은 사창가 외에도 여학교 앞이나 역, 또는 버스 터미널 같은 곳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겁니다. 거미가 갈 만한 곳은 바로 그런 곳들이니까요. 거미는 그런 곳에서 먹이를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많아요."
"그건 시간이 좀 지나야 하지 않을까요? 거미도 지금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숨어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더구나 지금은 방학이라 학교 앞에 가봐야 학생들도 없을 거고……."
이 말을 한 사람은 아까 볼멘 소리로 인원 부족을 따지던 나이 든 형사였다.
여우는 머리를 흔들었다.
"난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거미는 오히려 안심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자기는 지금 완전히 경찰 수사망 밖에 있다고 자신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만일 그렇다면 거미는 숨어 있지 않고 그전처럼 활동을 계속할 겁니다."
"거미는 왜 유 씨를 죽였을까요?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을까요?"
젊은 형사가 당연히 있어야 할 질문을 뒤늦게 던져 왔다.
"난 그런 질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여우는 그 젊은 형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그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을까 하는 점을 검토해 봅시다. 유 씨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지난 7월 20일 오후 한 시경에 거미와 장미 양을 영등포 로터리까지 태워다 줬다고 했어요. 그 이상의 말이 없었던 것으로 보면 유 씨가 거미의 거처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어요. 또한 거미 역시 유 씨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개인 택시 운전사라는 것 정도였을 겁니다. 굳이 알려고 했다면 자동차 넘버 정도는 외어 둘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 이상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나중에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됐어요.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 주소도 모르고 약속도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만났을까요? 나는 여기서 유 씨가 택시 운전사라는 사실에 유의하고 싶어요. 택시 운전사라면 서울 시내를 쳇바퀴 돌듯 하루 종일 돌아다닐 것은 뻔하지 않아요.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거미를 발견하지 않았나 생각돼요. 거미를 발견한 그는 그 여자를 끌고 바로 경찰에 가지 않고 그 여자와 흥정을 벌였을지도 모릅니다. 유괴 사실을 고발하겠다고 협박하면서 무언가 요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급해진 여자는 그를 여관으로 유인해서 술을 사주고 아마 몸까지 주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 여자를 물고 늘어졌을 것이고, 위협을 느낀 거미는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그렇게 무리한 생각은 아닐 겁니다."
"혹시 유 씨는 거미와 공범 관계에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들 내부의 어떤 문제로 해서 유 씨를 제거한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아도 그 점을 검토해 봤습니다. 그는 일곱 식구의 가장으로 온 식구가 그의 택시 한 대에 목줄을 걸어 왔어요. 그는 쉰네 살에 이십 년 넘게 택시만 몰아 왔어요. 그는 고지식하고 착실하기 짝이 없는 모범 운전사였습니다. 그는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병원에도 제대로 한번 가보지 못할 정도로 생활에 쪼들리고 있었어요. 그에게는 딸만 넷이 있는데, 큰딸은 지금 스물다섯 살로 그는 생전에 큰딸이 혼기를 놓칠까 봐 꽤 걱정하고 있었음이 밝혀졌어요. 그런 인물이 어린 여학생을 유괴하는 조직의 일원일 수 있을까요?"
그는 사나이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이의를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했다.
"수사에 임하는 데 있어서 가능한 한 비밀을 유지해 주기 바랍니다. 냄새를 맡으면 거미가 숨어 버릴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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