圆月弯刀 1

3학년2반 | 2022.02.09 08:14:05 댓글: 0 조회: 461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7528
원월만도 圓月彎刀

1977

고룡(古龍, 1938-1985)

서장

달(月)!

달은 둥글 때와 이지러질 때가 있다.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둥근 달이다. 이 이야기는 바로 달이 둥근 어느 밤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날 밤의 달은 신비할 정도로 아름답고 처절하도록 미려했으며 사람의 심금을 산산조각 낼만큼 애처로웠다. 우리가 말하려는 이야기 역시 신비하고 아름다워 혼백을 끌어당기는 흡인력과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오랜 전설에 의하면 둥근 달이 떠오를 때면 요정이 달빛을 타고 나타난다고 한다. 꽃나무의 요정, 옥석(玉石)의 요정, 심지어 지하의 유령(幽靈)과 여우의 요정까지 나타나 달을 향해 경배하며 둥근 달의 정기를 흡수한다고 한다. 때로는 요정들이 인간으로 둔갑하여 상상도 못할 이상한 일들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런 일들은 사람을 감동시키기도 하고 공포를 심어주기도 하며 환희를 주는가 하면 환상을 품게 만들기도 한다. 비록 요정을 보진 못했지만 사람들은 그것들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못한다.

칼(刀)!

칼은 곧은 것도 있고 휘어진 것도 있다. 우리가 말하려는 칼은 1자루의 휘어진 칼이다. 청청(青青)의 눈썹처럼 휘어진 칼. 그 휘어진 만도(彎刀)는 본래 청청(青青)의 것이었다. 청청(青青)은 그날 밤의 그 둥근 달처럼 신비한 미모를 지닌 여자애였다. 칼은 살인하는 병기였고, 청청(青青)의 만도(彎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칼이 1번 번득이기만 하면 재앙이 뿌려지곤 했다. 그 누구도 그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칼빛과 동시에 이미 칼날이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번뜩이는 칼빛을 본 순간 이미 칼은 당신의 몸에 떨어진 것이다. 하늘에는 둥근 달 1조각, 땅에는 휘어진 칼 1자루. 그것들이 동시에 출현할 때는 재앙이 내리거나 정의의 심판이 행해졌다. 이번에 출현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청청(青青)의 만도(彎刀)는 비 개인 후의 푸른 산처럼, 파릇파릇 돋아나는 봄날의 버들잎처럼, 연인의 눈망울에 비친 호숫물처럼 푸르기만 할 뿐이다. 청청(青青)의 만도(彎刀)에는 깨알처럼 작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小樓一夜聽春雨 (소루일야청춘우) 작은 누각의 밤, 봄비 소리 듣다



1. 알몸의 여자

안개 자욱한 이른 새벽. 정붕(丁鵬)은 침실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새벽 안개가 신선한 새벽 공기를 따라 밀려와 그의 얼굴을 어루만져주었다. 그의 얼굴은 청수하고 신체는 매우 건강했다. 웃을 때는 순진하고 치기 어린 웃음이 떠오르곤 했다. 그러나 정붕(丁鵬)은 이미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지난 3개월 동안 그는 연속해서 강호에서 유명한 검객 3명을 격패(擊敗)시켰다. 햇빛과 수분이 초목의 싹을 틔우고 무성하게 자라게 하듯이, 그의 승리와 성공은 1명의 사내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어주었다.

지금 그는 진정한 남자가 되어 있었고 자기 자신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생일은 3월이었고 그는 만 20세가 되었다. 그는 지난 3월 자기의 생일날 천외유성(天外流星)이라는 1초(一招)의 검법을 사용해서 보정부(保定府)의 명(名)검객 사정(史定)을 격패(擊敗)시켰다. 사정(史定)은 북파(北派) 청평검법(靑萍劍法)의 고수였지만 그의 1초(一招)를 막아내지 못하고 패배당하고 말았다. 정붕(丁鵬)은 그 승리를 자기의 생일 기념으로 삼았다. 4월에는 화산검파(華山劍派)의 수제자 추풍검(追風劍) 갈기(葛奇)를 역시 천외유성(天外流星) 1초(一招)를 사용해서 격패(擊敗)시켰다.

갈기(葛奇)는 화산검파(華山劍派)의 수제자답게 검법이 쾌속하고 기이했으며 악독하고 교만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러나 갈기(葛奇)는 그 1전(一戰)에서 패배한 뒤에 정붕(丁鵬)의 검법에 탄복한 나머지 여러 사람의 앞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앞으로 10년 동안 검술을 배우고 익힌다고 해도 절대로 정(丁)소협의 그 1초(一招)를 피할 수 없을 것이오.”

5월에 정붕(丁鵬)은 철검(鐵劍)문(鐵劍門)의 장문인(掌門人) 숭산(嵩山)검객(嵩陽劍客) 곽정평(郭正平)을 격패(擊敗)시켰다. 곽정평(郭正平) 역시 천외유성(天外流星) 1초(一招)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곽정평(郭正平)은 검술 시합에서 패배한 직후에 싸움을 관전하던 사람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丁)소협의 검법은 영양의 머리에서 뿔이 났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종적을 찾을 수 없었소. 내가 장담하는데 앞으로 1년 이내에 정(丁)소협은 반드시 강호에 명성을 날리게 될 것이며 크게 두각을 나타내게 될 것이오.”

철검(鐵劍)문(鐵劍門)은 강호에서 역사가 아주 오래 된 문파(門派)였다. 곽정평(郭正平)은 1파(一派)의 장문인(掌門人)의 신분인데도 그와 같은 말로 정붕(丁鵬)을 칭찬한 것이었다.

지금도 정붕(丁鵬)은 곽정평(郭正平)의 그 칭찬하던 말을 생각하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흥분을 느끼곤 했다.

“나는 기필코 강호에 명성을 날리고 크게 두각을 나타내고야 말겠다.”

그는 지난 13년 동안 뼈를 깎는 고통으로 검법을 연마했었다. 매일 7시진 이상 검법을 연마했으며 손바닥에 굳은 살이 박혔다가 벗겨진 것도 수10번이나 되었다. 엄동설한에는 밤중에도 얼음을 깨고 강물 속에 들어가 정신통일을 했고, 졸음이 올 때마다 눈덩이를 바짓가랭이 속에 집어넣어 정신을 진작시켰는데, 이런 각고의 노력은 다른 사람이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고생을 1것은 오로지 강호에 명성을 날리고 크게 두각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의 부친은 이름도 없는 표사(鏢師)였는데 우연히 1쪽밖에 없는 검보(劍譜)를 얻게 되었다. 그 1쪽으로 이루어진 종이에는 바로 그 천외유성(天外流星) 1초(一招)가 기록되어 있었다. - 하늘 밖에서 날아든 유성은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그것이 나타나는 순간의 광채와 속도는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검법을 얻을 당시에 그의 부친은 이미 늙어 기력이 쇠잔하고 정신이 맑지 않았고 동작이 굼떠서 그 천외유성(天外流星)을 익힐 수가 없었다. 그는 검보(劍譜)를 자기의 아들에게 전해주었다. 그가 죽을 때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얘야, 너는 반드시 이 1초(一招)의 검법을 익혀서 강호에 이름을 날리고 크게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 그리하여 나와 같은 이름도 없는 표사(鏢師)에게 너와 같은 훌륭한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온 천하에 널리 알려야 한다. 그래야 이 애비의 가슴에 맺힌 한이 풀어질 것이다.”

그 유언을 생각하기만 하면 정붕(丁鵬)은 뜨거운 피가 끓어올랐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금의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눈물이란 사내 대장부가 흘리는 것이 아니고 약자가 흘리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정붕(丁鵬)은 새벽의 공기를 폐부 가득히 들이켰다. 그리고나서 침대 머리맡에 놀아둔 그의 검을 집어 들었다. 오늘 그는 또 다시 그 검법을 사용해서 또 1번의 승리를 쟁취해야 했다. 오늘 그가 승리한다면 비로소 진정한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사정(史定), 갈기(葛奇), 곽정평(郭正平) 3사람이 강호의 명협(名俠)인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의 이 1전(一戰)과 비교한다면 앞의 3사람과 겨룬 것은 전초전에 불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오늘의 상대는 바로 유약송(柳若松)이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만천하에 떨치고 있고, 세한(歲寒)3우(三友) 중의 1사람인 청송검객(青松劍客) 유약송(柳若松)이기 때문이었다. 유약송(柳若松)은 만송산장(萬松山莊)의 주인이었고, 무당파(武當派)의 장문인(掌門人) 천일(天一)진인(眞人)의 속가(俗家)제자였다.

유약송(柳若松)이라는 3글자는 오래 전부터 무림에서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었으며 유약송(柳若松)의 이름을 모르는 강호인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정붕(丁鵬)은 오늘 그 유약송(柳若松)을 격패(擊敗)시켜야 하는 것이다. 정붕(丁鵬)은 가장 정당한 방법으로 유약송(柳若松)이라는 선배 고수에게 검법을 가르침 받기를 요청했기 때문에 유약송(柳若松)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만약 정붕(丁鵬)이 유약송(柳若松)을 격패(擊敗)시키기만 한다면 정붕(丁鵬)은 강호의 진정한 명가고수(名家高手)의 반열에 성큼 진입하게 되는 것이었다. 결전을 할 시간과 장소는 모두 유약송(柳若松)이 결정한 것이었다.

-6월 15일 오시(午時) 만송산장(萬松山莊).

오늘의 이 1전(一戰)은 정붕(丁鵬)의 한평생 명운(命運)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어젯밤 깨끗이 세탁해서 창문가에 걸어 놓은 옷은 물기가 빠져 있었다. 완전히 마르진 않았지만 몸에 걸치면 곧 마를 것이다. 이것은 그의 1벌밖에 없는 외출복이었다. 노모께서 그가 집을 떠날 때 정성껏 지어주신 옷이었다. 그 옷은 이미 색깔이 바래져 있었다. 그러나 깨끗하게 세탁하면 외출하기에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는 옷을 입고 남색 베로 만든 전대를 꺼냈다. 전대 안에는 1조각의 은자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 이 작은 객점의 방값을 치루고 나면 겨우 수10문(文)의 잔돈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평소에 그는 방세를 물지 않는 곳에서 잠을 자곤 했었다. 사당 안이나 숲속의 풀밭이 그의 침대였다. 오늘의 1전(一戰)을 위해서 그는 돈을 아끼지 않고 이 작은 객점으로 들어와 충분한 수면을 취했던 것이다. 그래야 1전(一戰)에서 체력을 보존하여 승리할 가능성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객점의 방값을 치르고나서 그는 모질게 마음을 먹고 나머지 돈으로 반 근의 절인 쇠고기와 몇 조각의 마른 두부 조각, 그리고 1봉지의 땅콩과 5개의 속이 빈 만두를 샀다. 이제 남은 돈은 동전 1닢 뿐이었다. 그는 남아 있는 1닢의 동전을 상의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런 음식은 그에게는 극히 호화스럽고 사치스런 낭비였다. 평소에 그는 3개의 딱딱한 개떡을 먹고 하루를 보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낭비를 하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기로 했다. 오늘 그는 유약송(柳若松)과 겨루어 이길 수 있는 체력이 필요했다.

오늘의 승리만 쟁취하면 모든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명성이란 사람에게 재물과 지위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명성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가난과 굶주림을 참고 견디는 것이리라. 정오가 되려면 아직 2시진이 남아 있었다. 그는 조용한 곳을 찾아서 이 음식을 즐기기로 했다. 그는 만송산장(萬松山莊) 부근의 산기슭에서 적당한 계곡물과 풀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방에는 꽃나무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높푸른 하늘엔 새털구름이 떠가고 태양은 동쪽 하늘 위로 찬란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진주처럼 영롱한 이슬방울이 파란 나뭇잎과 풀잎 위에 맺혀 있었다. 그는 보드라운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쇠고기를 1조각 찢어 입에 넣자 구수한 고기 냄새가 입안 가득 맴돌았다. 날아오를 것처럼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이때 1명의 젊은 여자가 사냥꾼에게 쫒기는 어린 양처럼 가냘픈 자태로 허겁지겁 그의 은밀한 공간으로 달려 들어왔다. 이 여자는 놀랍게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였다.

날씬한 몸매, 봉긋한 유방, 버들가지처럼 가느다란 허리, 매혹적인 곡선을 그리는 허벅지, 펑퍼짐한 엉덩이, 부드러우면서 감미로운 살결, 가을 호수처럼 해맑고 서글서글하면서도 사람의 혼백을 송두리째 빨아당기는 눈동자… 정붕(丁鵬)은 숨이 탁 막히고 심장이 평소보다 3배나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직까지 여자와 깊은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었다. 그의 고향에 여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여자에 관한 생각을 억제하려고 노력해 왔었다.

명성을 날리기 전까지 그는 결코 여자 때문에 정신이 산만해져서는 안 되었다. 여자에게 체력을 소모해서도 안 되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젊고 아름다운 알몸의 여자가 예고없이 뛰어든 것이었다. 눈처럼 흰 살결과 봉긋한 유방, 길쭉하고 매끄러운 다리… 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러나 그 여인은 한들거리며 다가서더니 그의 팔을 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저를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녀는 그토록 가깝게 다가왔고, 그녀의 숨소리는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정붕(丁鵬)은 입안이 말라 1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부끄러워하는 것을 눈치 채자 얼굴을 붉히며 한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한손으로 치부를 가리면서 부끄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 당신의 옷을 벗어서 내가 몸을 가릴 수 있게 해주실 수 있나요?”

그에게 단 1벌 뿐인 옷이었지만 그는 선뜻 상의를 벗어주었다.

여자는 그의 옷을 걸친 후에 약간 마음이 진정되는지 한숨을 곱게 내쉬고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고마와요.”

정붕(丁鵬) 역시 마음을 진정하고 대꾸했다.

“별 말씀을요. 그런데 당신은 쫓기고 있나요?”

그 여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붕(丁鵬)은 물었다.

“이곳은 외진 곳이라 누구도 당신을 발견하기 힘들 것이오. 누가 쫒아온다 해도 당신은 겁낼 필요가 없소.”

그는 남자였다. 태어날 때부터 여인을 보호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여자는 절세의 미녀가 아닌가? 그는 장담했다.

“나와 1자루의 검이 있는 이상 당신은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

그 여자는 안심하는 표정으로 나직히 1마디 했다.

“고마와요.”

정붕(丁鵬)은 묻고 싶었다.

“당신은 어째서 쫓기고 있소? 누가 당신을 뒤쫓고 있는 것이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본 순간,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옷을 받아서 몸에 걸쳤지만 상의만으로는 매혹적인 몸매를 전부 가릴 수는 없었다. 정붕(丁鵬)의 가슴은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그녀의 눈길이 그가 들고 있는 1조각의 쇠고기에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1끼는 그에게 마지막 식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 음식은 깨끗한 것이니 좀 드십시오.”

그 여자는 말했다.

“고마와요.”

“사양 말고 드십시오.”

여자는 정말 사양하지 않았다. 뜻박에도 이 아름다운 여자는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웠다. 그녀는 오랫동안 굶주린 듯했다. 정붕(丁鵬)은 그녀가 겪은 비참한 일들을 상상해 보았다.

(이 연약한 여자는 1떼의 악인들에게 옷을 홀딱 벗기우고 감금되어 굶주리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간신히 탈출했을 것이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그녀는 이미 그의 음식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쇠고기와 마른 두부 뿐 아니라 만두까지 모조리 먹고 이제 겨우 열 몇 알의 땅콩만 남아 있었다. 그녀가 생각해도 미안했던지 살그머니 땅콩을 정붕(丁鵬)에게 밀며 나직히 말했다.

“이거 잡수세요.”

정붕(丁鵬)은 울어도 시원치 않을 판이었으나 자기도 모르게 빙그레 웃고 있었다. 여자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더니 수줍게 웃어 보였다. 웃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만드는 법이다. 격의가 없어진 그녀는 자기가 겪은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정붕(丁鵬)이 상상했던 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정말 인질로 잡혀 지하실에 알몸으로 갇혀 며칠 동안 굶주리고 있다가 탈출한 것이었다.

“당신을 만난 것은 저의 행운이에요.”

정붕(丁鵬)은 손으로 칼자루를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그들은 어디에 있소? 내가 그들을 혼내주겠소.”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갈 수가 없어요.”

“그건 어째서요?”

여자는 말했다.

“그 이유는 말할 수 없어요. 그러나 나중에 반드시 알려 드릴게요.”

정붕(丁鵬)은 더 묻기 거북했다. 여자는 말을 이었다.

“이제 나는 1사람만 찾아내면 안심할 수 있어요.”

정붕(丁鵬)은 궁금해졌다.

“당신은 누굴 찾으려고 하는지요?”

“저의 집안 어른이죠. 그 분은 이미 70세가 넘었지만 여전히 붉은 옷만 입는답니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당신은 지금 저를 대신해서 그를 찾아줄 수 없나요?”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1전(一戰)은 이제 1시진도 남지 않았다. 그는 1전(一戰)을 준비해야 하는데 어찌 낯선 여자를 위해 그 노인을 찾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아름답고 연약해 보이는 여자 앞에서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것은 용기가 필요하고 얼굴이 두꺼워야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은 많은 어려움을 겪은 후에야 거절하는 법을 알게 되는 법이다. 정붕(丁鵬)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었다.

“그 노인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군요?”

여자는 눈빛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 분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그를 찾아주실 거예요?”

“가까운 곳에 계시다면 찾아드릴 수도 있겠지요. 나에겐 급한 일이 있어서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답니다.”

그 여자는 와락 달려들어 그를 포옹하며 소리쳤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나는 영원히 당신을 잊지 못할 거예요.”

정붕(丁鵬)은 속으로 자기 역시 이 여자를 영원히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말을 계속했다.

“개울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원지가 나오는데, 거기서 매우 오래되고 이상하게 생긴 나무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날씨가 좋을 때면 그는 그 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죠. 오늘은 날씨가 매우 쾌청하군요. 당신은 그를 만나면 반드시 먼저 그가 두고 있는 바둑판을 엎어버려야 해요. 그래야 그는 당신의 말을 듣고 당신을 따라올 거예요.”

바둑에 미친 사람은 바둑이 끝날 때까지 다른 일을 돌보지 않는 법이다.

“나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그를 찾아내든 못하든 반드시 빨리 돌아와야 해요.”

개울물은 아주 맑았다. 정붕(丁鵬)은 개울물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빨리 갔다가 돌아와야 했다. 그에게는 중요한 볼일이 남아 있지 않은가? 해는 점차 높이 솟아올랐다. 그는 문득 허기를 느꼈다. 그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1전(一戰)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바보처럼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처음 만난 여자를 위해서 붉은 옷을 입은 늙은이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면 그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유일한 진실은 그 여자가 무척 아름답다는 점이었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여자 앞에서 거절할 수 있는 남자는 틀림없이 많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그는 오래 가지 않아도 되었다. 개울이 시작되는 지점에는 오래 된 나무가 1그루 서 있었고, 그 밑에서 2사람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1사람은 당연히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정붕(丁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성큼성큼 다가가 손을 뻗쳐서 그들이 두고 있는 바둑판을 뒤엎으려고 했다. 그러나 뜻박에도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발밑이 푹 꺼지며 그는 구덩이 속에 빠지고 말았다. 구멍은 깊지 않았으나 구멍 속에는 올가미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의 한쪽 발은 즉시 올가미에 걸리고 말았다. 올가미에 걸리자마자 땅바닥을 향해 굽혀져 있던 나뭇가지가 퉁겨지듯 하늘로 솟아올랐다. 불행하게도 올가미는 그 나뭇가지에 연결되어 있었다.

정붕(丁鵬)은 올가미에 걸려 거꾸로 매달리게 되었는데 가장 불행한 사태는 옆으로 뻗쳐나온 나뭇가지 하나가 공교롭게도 그의 허리에 있는 혈도를 찔렀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온몸의 맥이 탁 풀려 올가미에 걸린 채 대롱대롱 나무에 매달리고 말았다. 이것은 혹시 그 여자가 일부러 설치한 함정이었을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녀와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어째서 그녀가 그를 해치려고 하겠는가? 나무 밑의 2사람은 숫제 그를 보지도 못한 양 바둑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바둑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 사람들 같았다.

바둑에 미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방해하는 것을 싫어하기 마련이었다. 그들이 이런 함정을 만든 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방해받기 싫어서였으며, 정붕(丁鵬)을 상대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그 여자는 이와 같은 함정을 생각 못했을지도 모른다. 정붕(丁鵬)은 이런 생각이 들자 약간 마음이 편해져서 화를 참고 입을 열었다.

“2분 노선생께서는 수고스럽겠지만 저를 풀어주시구려.”

그러나 2노인은 숫제 듣지 못했는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정붕(丁鵬)이 몇 번 불렀으나 2노인은 여전히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정붕(丁鵬)은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것 보시오!”

그런데 그의 입이 크게 벌어진 순간 1가지 물건이 날아들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부드럽고 끈적끈적한 물건이었다. 아마도 진흙덩이 같았다. 그 물건은 맞은편의 나뭇가지에서 날아든 것이었다. 1마리의 붉은 옷을 입은 원숭이가 그 나뭇가지에 앉아 그를 향해 입을 벌리고 웃고 있었다. 정붕(丁鵬)은 화가 나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1개의 흙구덩이와 1줄기의 올가미, 1그루의 나무는 10여 년간 무공을 익힌 그를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1줌의 진흙덩이는 그를 벙어리로 만들어 놓았다. 정붕(丁鵬)은 자기가 어쩌면 이렇게 쓸모가 없는지 자기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치밀한 계산 하에 만들어진 듯했다. 탁월한 두뇌와 오랜 경험을 보태지 않으면 이와 같이 정확한 계산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붉은 옷을 입은 홍포노인은 나이가 아주 많은지 머리카락과 수염이 온통 백발이었다. 그러나 얼굴은 붉게 윤기가 감돌아 마치 어린애의 피부 같았고, 몸이 아주 뚱뚱했다. 다른 1명의 노인은 아주 왜소하고 비쩍 말랐으며 얼굴 표정이 음침했다.

검은 베로 만들어진 장포를 걸치고 있어서 얼핏 보면 바람에 메말라버린 무화과를 연상시켰다. 2노인은 정신을 집중해서 바둑을 두면서 오래 생각한 후에야 1번 바둑알을 놓는 것이었다. 해는 점점 높이 솟아 올랐고 급기야는 서쪽으로 기울어 갔다. 이미 정오를 지난 것이었다. 이번 일만 없었다면 정붕(丁鵬)은 이미 유약송(柳若松)을 격패(擊敗)시키고 강호에 명성을 드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애처롭게도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바둑을 언제쯤이나 끝날까? 언제나 그를 풀어줄까? 생긴대로 논다는 속담이 맞는 것 같았다.

그 흑포노인은 외모에 어울리게 성격도 음침했다. 한참 장고한 끝에야 천천히 바둑알을 놓곤 했다. 그는 불리한지 시간이 흐를수록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고 있었다.


2. 운우지락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1판의 바둑이 끝났다. 홍포노인의 승리였다. 흑포노인이 1판 더 두자고 했으나 홍포노인은 대꾸도 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흑포노인은 소리치며 그를 뒤쫓아갔다.

“이봐, 그냥 갈 거야? 1판 더 두자고.”

그러나 홍포노인은 걸음을 빨리해서 나는 듯이 멀어져 갔다. 흑포노인은 기를 쓰고 그 뒤를 따라갔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의 모습은 정붕(丁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맞은편의 나뭇가지 위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원숭이 녀석도 끽끽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황량한 산속은 어느새 어두컴컴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1사람이 이런 외진 곳에 거꾸로 매달려 있건만 그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산 채로 매달려 죽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정붕(丁鵬)은 머리가 몽롱해졌다. 몸이 으스스 떨리고 배가 고팠다. 그는 스스로를 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돼지처럼 미련하고 재수 없는 놈아.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더란 말이냐? 따귀를 100대 맞아도 부족할 놈이야. 너는…)

그는 그 여자의 이름도 모르면서 자기의 모든 음식과 재산을 그녀에게 주고 만 셈이었다. 재산을 주었을 뿐 아니라 이제는 목숨까지 잃게 생겼다. 그는 자기자신이 미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에라, 이 병신같은 놈아, 너 같은 멍청이가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오랏줄이 끊어지며 그는 허공에서 아래로 뚝 떨어졌다.

조금 전에 나뭇가지에 찔려 막혔던 혈도는 그 바람에 저절로 풀렸다. 이것은 교묘하게 안배한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 같았다. 그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은 그에게 쓴맛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고 죽일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과 그는 아무런 감정도 원한도 없는데 왜 이런 식으로 그를 다스리려고 할까? 그는 더 생각해봐야 해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1번째 일은 원숭이가 입속에 던져 넣은 진흙덩어리를 뱉어내는 것이었다.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그는 먼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소리쳐 물었다.

“누구요? 썩 나서지 못하겠소?”

그러나 대답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급히 그 여자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곳에 그녀는 없었다. 그는 가슴속의 울화를 삭히며 만송산장(萬松山莊)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왜 이리 늦었느냐고 묻는다면 다른 핑계를 대야 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런 어처구니 없고 해괴한 일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송산장(萬松山莊)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으리으리했다. 문지기도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있었다.

정붕(丁鵬)은 자기의 이름과 찾아온 목적을 말하고 유약송(柳若松)에게 통지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정붕(丁鵬)의 윗통을 벗은 모습과 진흙투성이의 얼굴을 본 문지기는 히죽거리며 말했다.

“정붕(丁鵬) 소협, 너무 늦으셨군요. 우리 나으리는 저녁 때까지 기다리시다가 다른 약속이 있어서 멀리 나가셨지요. 떠나시기 전에 저에게 이렇게 분부하셨답니다. 혹시 정붕(丁鵬) 소협이 온다면 1달 후에 다시 와서 겨루자고 하셨답니다. 7월 15일 오시(午時)에 다시 오십시오.”

문지기는 그를 안으로 청할 생각도 하지 않고 문전박대하는 것이었다.

정붕(丁鵬)은 속으로 화가 나서 생각했다.

(내가 다음에 너의 주인을 격패(擊敗)시킨 후에도 그렇게 히죽거리는지 어디 두고 보자.)

정붕(丁鵬)은 만송산장(萬松山莊)에서 물러나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앞으로 남은 1달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에게는 이제 1닢의 동전밖에 남지 않았다. 그 돈이면 딱딱한 개떡 1개는 사 먹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당장의 배고픔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동전 1닢은 상의 주머니에 넣어둔 것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녀가 마지막 남은 동전까지 가져가버린 셈이었다. 정붕(丁鵬)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껄껄 웃어버렸다. 밤. 한여름 밤의 보름달이 대지를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그윽한 꽃향기가 밤바람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쟁반같이 둥근달이 마치 둥근 월병(月甁)처럼 생겼다고 정붕(丁鵬)은 생각했다. 정붕(丁鵬) 역시 아취를 아는 젊은이였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나 배가 고프게 되면 모든 사물이 음식으로 보이는 법이다. 정붕(丁鵬)은 그 여자를 만났던 그곳으로 되돌아 왔다.

그는 강도질을 할 수도 없었고 자기의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반드시 옳은 방법으로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어쩌면 상의 주머니에 있던 동전이 그 여자에게 옷을 건네주는 동안에 땅바닥에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1닢의 동전을 찾지 못했으나 1알의 땅콩을 찾을 수는 있었다. 그는 땅콩을 집어 들고 막 입에 털어 넣으려고 했다. 바로 그때 뭔가 와락 뛰어나와 그의 손을 건드렸고, 그 바람에 마지막 남은 땅콩 1알은 어디론가 튕겨져 나가 찾을 길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에 정붕(丁鵬)은 자기가 재수없다고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기쁨에 넘쳐 펄쩍 뛰다시피 일어섰다.

“당신이구려!”

희망 찬 미래를 산산조각내고 인생 자체를 뒤죽박죽 만들어버린 그 소녀가 또 정붕(丁鵬)의 면전에 나타난 것이다. 정붕(丁鵬)은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은은한 달빛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낮보다 몇 배로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비록 이번이 2번째 만남에 불과했지만 정붕(丁鵬)은 마치 오래 전부터 사귀어 온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졌다.

소녀도 무척 기쁜지 정붕(丁鵬)의 손을 꼭 쥔 채 놓으려 하지 않았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줄 알았어요.”

이것은 서로가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말인지라 2사람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발출되었다.

그리고 2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밝게 웃었다.

소녀는 정붕(丁鵬)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는 당신과 헤어진 후 줄곧 만약 다시 만나게 되면 이것만은 꼭 물어볼 거라고 다짐했어요.”

“그게 뭔데요?”

“당신의 이름을 묻는 것 말이에요.”

정붕(丁鵬)의 입가엔 또 웃음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우연히도 자기 역시 그녀와 똑같은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가소(可笑)라고 했다.

“이름이 가소(可笑)라고요?”

“그래요.”

“가소롭다는 가소(可笑)말입니까?”

“그렇다니까요.”

“그 정말 이상한 이름이네요.”

“이상할 뿐 아니라 이름 그대로 우습기까지 하지요.”

“성은 뭡니까?”

“이(李)가예요.”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내가 가소로운 사람이라 생각지 않는데 부모님께서 왜 하필 이런 놀림감으로 딱 좋은 이름을 지어주셨는지 모르겠어요.”

정붕(丁鵬)은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내가 듣기엔 좋은 이름인데요 뭘.”

“이름 때문에 놀림당하는 고통은 당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해요. 그러나 나도 이젠 이 이름이 좋아요.”

이렇게 말하며 해맑게 웃는 이가소(李可笑)의 모습은 1송이 아름다운 장미 같았다.

정붕(丁鵬)도 그녀에게 꾸밈없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가소(可笑) 역시 나직히 따라 웃었다. 이 날의 재수 없었던 기억이 그 한바탕의 웃음으로 깡그리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1가지 일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배고픔이었다. 가소(可笑)는 아직도 정붕(丁鵬)의 상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그녀의 몸매를 완전히 가릴 수 없었다. 달빛이 그녀의 옷으로 가릴 수 없는 부분을 비춰주자 성적 매력이 물씬 풍겨 나왔다. 가소(可笑)는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째서 그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을 찾아가게 했느냐고 묻고 싶을 거예요. 그리고 어째서 당신을 기다리지 않고 반나절 동안 어디로 갔었는지 알고 싶을 거예요. 그렇죠?”

“그 말이 맞소.”

“그러나 당신은 묻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 거예요.”

“그건 왜 그렇소?”

“당신이 물어봐도 내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다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당신은 모르고 있는 편이 좋아요. 1사람이 너무 많은 일들을 알고 있으면 번뇌가 그만큼 많아지거든요. 나는 당신에게 더 많은 번뇌를 안겨주고 싶지 않군요.”

그녀의 손은 부드럽고 윤택했으며, 그녀의 눈동자는 부드럽고 간곡했다.

정붕(丁鵬)은 그녀의 눈동자가 진실되다고 느꼈다. 정붕(丁鵬)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역시 그녀의 손을 힘껏 움켜쥐며 대답했다.

“나는 더 묻지 않겠소.”

가소(可笑)는 방긋 웃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또 다시 나를 위해 1가지 일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걸요.”

“무슨 일을 해달라는 것이오?”

“이 개울물을 따라 하류 쪽으로 내려가면 지붕에 푸른 기와를 얹은 조그만 누각이 있을 거예요.”

“나보고 그곳으로 가라는 것이오?”

“나는 당신이 그곳으로 가 주기를 바래요.”

“음.”

“당신이 그곳에 가면 어떤 사람이 당신을 그 집의 주인에게 안내할 거예요. 그 주인이 하는 말을 당신은 반드시 잘 들어야 해요. 주인은 당신에게 무슨 일을 해달라고 할 거예요.”

“음.”

“당신은 나를 믿어야 해요. 약속하는데, 절대로 당신을 해롭게 하진 않을 거예요.”

“나는 당신을 믿소.”

가소(可笑)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 정말 가시겠어요?”

물론 가면 안 되었다. 아침에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다가 죽을 뻔 하지 않았던가? 이번 일은 더욱 황당한데 그가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붕(丁鵬)은 그녀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지난번에는 개울을 따라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는데 이번에는 개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갔다. 지난번에는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을 찾아갔는데 이번에는 푸른 기와를 얹은 작은 누각이었다. 지난번에는 거꾸로 매달려 고생을 했는데 이번에는 무슨 일을 당해야 할까? 지난번보다 훨씬 재수 없는 일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는 그 작은 누각을 볼 수 있었다. 달빛 아래의 그 작은 누각은 고즈넉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나이 어린 소녀였다.

그 소녀는 곧잘 웃었는데 그때마다 두 뺨에 보조개가 폭 파이곤 했다. 야밤에 상의를 벗은 사내가 문을 두드렸는데도 그 소녀는 조금도 놀란 빛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키득거리며 웃었다.

“누굴 찾아 오셨나요?”

“이 집의 주인을 찾아왔소.”

그 소녀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제가 안내해드리죠.”

그 소녀는 정붕(丁鵬)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겨 놓았다. 옛친구라도 되는 양 아주 자연스럽고 친밀하게 손을 잡아 끄는 것이었다. 누상(樓上)의 방은 아주 화려했다. 침대 앞에는 주렴이 드리워져 있었고 주인은 주렴 건너편에 있었다.

이것은 그녀가 일부러 신비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밤중에 여인이 낯선 사내를 만났는데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이미 잠옷을 입고 잠을 잘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붕(丁鵬)은 세상 물정은 잘 몰랐지만 그 점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주인이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목이 쉰 듯했으나 상당히 음성이 간드러지고 감미로왔기 때문이었다.

“누가 당신보고 나를 찾아가라고 하던가요?”

정붕(丁鵬)은 대답했다.

“이(李)씨 성을 지닌 소저였지요.”

“그녀는 당신과 어떤 사이인가요?”

“친구 사이지요.”

“그녀는 당신에게 무슨 말을 했나요?”

“그녀는 당신이 시키는대로 해야 한다고 했지요.”

“당신은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나요?”

“나는 그녀가 결코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소.”

“내가 당신에게 무슨 일을 시키든지 당신을 할 각오가 되어 있나요?”

“그렇소. 주인께서는 그녀의 친구이니 나 또한 주인을 믿소.”

“내가 당신에게 뭘 시킬는지 알고나 있나요?”

“모르지요.”

“무척 위험한 일이에요.”

정붕(丁鵬)은 흠칫하며 물었다.

“위험하다고요? 그것은 어떤 일입니까?”

“나는 당신을 1대야의 뜨거운 물속에 집어 넣고 1자루의 커다란 솔로 당신의 몸에 묻은 먼지를 모조리 씻겨주겠어요. 그리고 당신이 1번도 입어보지 못한 옷을 입히고 1켤레의 신발 속에 당신의 발을 집어 넣고, 당신을 의자에 눌러 앉히고 몇 시진 동안 끓이고 끓인 고깃국을 당신의 뱃속에 가득 채워서 당신이 걸음도 걷지 못하게 만들겠어요. 호호호…”

“하하하…”

정붕(丁鵬)은 따라 웃었다. 그는 이미 그녀의 음성을 알아들은 것이었다. 1사람이 킥킥 웃으며 주렴을 들추고 걸어 나왔다. 바로 가소(可笑)였다.

정붕(丁鵬)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당신에게 잘못한 일이 없는데 당신은 왜 나를 놀리는 것이오?”

가소(可笑)는 생글거리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누가 당신보고 그토록 말을 잘 들으라고 했어요? 내가 당신을 해치지 않으면 누가 해치겠어요?”

정붕(丁鵬)은 빙그레 웃었다.

“솔직히 말하는데 그런 일들을 나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소.”

“그럼 당신은 뭘 두려워하나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술을 마시는 것이오. 만약 당신이 몇 근의 해묵은 좋은 술을 나에게 퍼 먹인다면 그것이야말로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결과가 될 것이오.”

“그럼 나는 당신을 괴롭혀 주겠어요.”

정붕(丁鵬)은 뜨거운 물로 목욕을 했다. 온몸의 때를 말끔히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단지 허리띠만은 바꾸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머리가 어지러운 사람에게 이렇게 좋은 술과 맛있는 음식은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 걸음도 옮겨 놓지 못할 정도로 배불리 먹고 마셨다. 가소(可笑)는 방긋 웃었다.

“이제 당신은 나에게 너무 잘 대해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을 거예요. 왜냐하면 나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에게 나는 오히려 해를 끼치고 싶은 생각이 드니까요.”

정붕(丁鵬)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내가 당신에게 잘 해준 것은 별로 없소. 나는 다만 당신에게 허름한 상의를 벗어주었을 뿐이고, 약간의 차가운 쇠고기와 식은 만두를 대접했을 뿐이오.”

가소(可笑)는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옷과 양식을 저에게 주신 거예요.”

그녀의 눈동자에는 부드러운 정과 고마움이 가득 차 있었다.

“만약 그 누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었다면 당신은 그에게 어떻게 대하겠어요?”

정붕(丁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문득 인생이란 그래도 살 가치가 있고 따뜻한 정이 넘치고 있다고 느꼈다. 가소(可笑)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그 누가 모든 것을 나에게 주었다면 나는 오직 1가지 방법으로 그를 대할 수밖에 없어요.”

“무슨 방법이오?”

“나 역시도 나의 모든 것을 그에게 드리는 거예요.”


그녀는 정말 그녀의 모든 것을 그에게 주었다. 새벽에 정붕(丁鵬)이 잠에서 깨어 보니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아기 비둘기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모습으로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곤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그녀의 새카만 머리카락과 눈처럼 하얀 목덜미가 시야에 들어오자 정붕(丁鵬)은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행복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 아름다운 여인은 이미 완전히 그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만족했을 뿐 아니라 자랑스러웠다. 그는 이제부터 진정한 남자가 된 것이었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그녀는 정겨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만약 내게 명성이 있고 돈이 있다면, 당신을 데리고 천하를 두루 구경하고 다니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도록 만들고 싶소.”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아,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없는 가난뱅이에 불과하구려.”

가소(可笑)는 방긋 웃었다.

“나는 당신같은 가난뱅이를 제일 좋아해요.”

정붕(丁鵬)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 내가 깜빡 잊었구려. 당신에게 줄 1가지 물건이 있소.”

그는 침대 아래의 옷자락 속에서 허리띠를 찾아냈다.

“이 허리띠를 당신에게 주겠소.”

정붕(丁鵬)의 안색은 진지하고 엄숙했다. 가소(可笑)는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저에게 주시는 것이라면 나는 반드시 잘 보존하겠어요.”

정붕(丁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당신이 잘 보존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고, 가위로 자르기를 원하오.”

가소(可笑)는 무척 말을 잘 들었다. 그녀는 허리띠를 가위로 잘랐다. 그 속에는 1장의 누렇게 빛이 바랜 종이쪽지가 들어 있었다. 앞면에는 간단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뒷면에는 깨알같은 글씨가 가득 적혀 있었다. 그녀는 맨 윗줄의 글을 읽어 보았다.

-이 1초(一招)는 내 평생의 비결이다.

상대방의 검법을 깨뜨리는 것이 마치 파죽(破竹)과 같으리라. 청평(青萍), 화산(華山), 숭산(嵩山), 공동(崆峒), 무당(武當), 황산(黃山), 점창(點蒼) 등의 검법도 이 1초(一招)와 마주치면 반드시 깨지게 되리라.

그녀는 더 읽지 않고 웃으며 물었다.

“이 1초(一招)의 검법은 정말로 그렇게도 무서운가요?”

정붕(丁鵬)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처음에는 자신이 없었으며 고수를 찾아가 겨루어 보는 수밖에 없었소. 그러나 나는 이미 청평(青萍)과 화산(華山)과 숭산(嵩山)의 검법이 나의 이 1초(一招)와 마주치면 두부가 칼에 잘리듯이 전혀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했소.”

그는 흥분된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나중에 내가 유약송(柳若松)을 격패(擊敗)하면 나는 그보다도 더 유명한 사람을 찾아갈 것이오. 그리하여 언젠가 강호의 모든 검객들을 내 앞에 무릎 끓리겠소. 나는 신검산장(神劍山莊)의 3(三)소야(少爺)처럼 유명해지고야 말겠소.”

가소(可笑)는 뜻밖에도 그 종이쪽지를 그에게 되돌려주었다.

“이것은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니 나는 가지지 않을래요.”

“나는 가장 소중한 물건이기에 당신에게 선물하는 것인데, 당신은 어째서 마다하는 것이오?”

가소(可笑)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나는 여자예요. 나는 결코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는 검객들과 고하를 가름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들을 이기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당신이 나를 소중히 여겨주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해요.”

그녀는 그를 얼싸안고 귀엣말로 속삭였다.

“나는 다만 당신이라는 사람을 가지고 싶을 뿐이에요.”


세월은 하루 하루 흘러갔다. 정붕(丁鵬)은 유약송(柳若松)과의 약속을 잊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가소(可笑)는 잊지 않고 있었다.

“당신은 유약송(柳若松)과 겨루기로 하지 않았나요?”

“그 날이 되면 나는 그를 찾아갈 것이오.”

“오늘이 벌써 7월 8일이에요. 며칠 동안 당신은 검을 연마하도록 하세요. 그런데 당신이 나를 보기만 하면 그… 그 생각이 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큰일이지요.”

정붕(丁鵬)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지금도 그 생각이 나는 걸?”

정붕(丁鵬)은 와락 그녀를 끌어안고 침대 위에 쓰러뜨렸다.

“아… 당신은 그저 틈만 있으면…”

가소(可笑)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그녀는 웃으면 보조개가 들어가는 그 하녀를 데리고 소루(小樓)에서 떠나고 없었다.

베개 위엔 1통의 서찰이 놓여 있었다.

-며칠 동안 검을 잘 연마하시고 체력을 길러서 7월 15일 유약송(柳若松)과의 검술 겨루기에 대비하세요. 그 후에 다시 만나요.

정붕(丁鵬)은 그녀의 배려에 마음속으로 감격했다. 이별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녀를 다음에 기쁜 마음으로 만나기 위해서라도 정붕(丁鵬)은 더욱 열심히 검법을 연습하고 체력을 길러야 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이 1전(一戰)에서 그는 패배하면 안 되었다. 그는 자기의 체력이 예전보다 더욱 좋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를 알고 나야 비로소 진정한 남자가 되는 법이었다. 이것은 마치 대지(大地)가 빗물이라는 자양분을 섭취한 이후에야 더욱 성숙해지고 비옥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7월 15일이 되었다. 그의 정신과 체력은 모두 절정에 도달해 있었고, 그는 필승의 자신을 가질 수 있었다.


3. 미인계

7월 15일.

이른 아침. 날씨는 무척 맑았고 햇살은 찬란했다. 정붕(丁鵬)의 심정 역시 오늘의 날씨처럼 맑았다. 정신이 포만(飽滿)해지고 활력이 넘쳐서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떠받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송산장(萬松山莊)의 그 빈정거리기 잘하는 문지기는 그를 발견하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이 옷차림이 선명하고 신수가 훤해진 젊은이가 지난 달에 왔던 가난뱅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을 보자 정붕(丁鵬)은 더욱 유쾌했다. 그날의 울분을 이제야 조금 풀었다는 심정이었다.

나중에 유약송(柳若松)을 격퇴한 후에 이 문지기의 얼굴 표정은 더욱 사람을 유쾌하게 만들리라. 정붕(丁鵬)이 마음속으로 유일하게 미안하게 여기는 사람은 유약송(柳若松)이었다. 아무런 감정이나 원한이 없건만 오랫동안 유약송(柳若松)이 쌓아온 명성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약송(柳若松)이 강호에서 무척 협명이 높을 뿐 아니라 인간성이 좋은 군자라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유약송(柳若松)은 훤칠하고 비쩍 말랐으며 준수했다. 외모가 정결하고 옷차림이 매우 단정했으며 예의를 잘 지켰다.

무척 교양이 있어 보이고 무척 품위 있어 보이는 중년의 사내였다. 대다수 여자들에게 이와 같은 남자는 젊은 녀석들보다 더욱 매력이 있었다. 그는 절대로 지난 달의 일을 들먹이지 않았고, 또 정붕(丁鵬)이 오늘 너무 일찍이 왔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정붕(丁鵬)은 그가 군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태도는 무척 온건했으며 행동은 날렵했고 손가락은 길면서도 힘이 있었다. 정붕(丁鵬)은 그가 강적이며 결코 강호에서 헛되이 명성을 얻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모래를 깐 연무장(鍊武場)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양쪽에 놓여 있는 병가 위에는 각색의 시퍼런 날을 번뜩이는 무기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에는 6, 7개의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들어진 의자가 놓여 있었다. 유약송(柳若松)은 설명했다.

“몇 분의 친구들이 정(丁)소협의 검법을 오래 전부터 흠모하여 구경하고 싶어하였소. 그들을 초청했으니 정(丁)소협은 나무라지 말기 바라오.”

정붕(丁鵬)은 물론 나무라지 않았다.

1사람이 명성을 떨치게 될 적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보아주기를 바라는 것이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쁜 법이다. 그러나 그는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어떤 사람들인가요?”

유약송(柳若松)은 대답했다.

“1분은 무림의 선배 점창산(點蒼山)의 종(鐘)노선생이지요.”

정붕(丁鵬)은 그 말을 받았다.

“풍운검객(風雲劍客) 종전(鐘展)이군요!”

유약송(柳若松)은 미소를 띄웠다.

“정(丁)소협도 그분 노선생을 알고 있었구려.”

정붕(丁鵬)은 물론 알고 있었다. 종전(鐘展)의 정직함과 그의 검법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와서 이 1전(一戰)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정붕(丁鵬)에게는 행운이었다. 유약송(柳若松)은 다시 말했다.

“매화(梅花)노인과 묵죽(墨竹)자(墨竹子)도 오셨소. 강호에서 우리 3사람을 세한(歲寒)3우(三友)라고 일컫는데,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과찬이지요.”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또 1분의 사(謝)선생은 강호에서 명성이 그렇게 큰 편이 못되지요. 왜냐하면 그는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는 빙그레 웃고 1마디를 덧붙였다.

“신검산장(神劍山莊)의 사람들은 좀처럼 강호에서 돌아다니지 않지요.”

정붕(丁鵬)은 얼굴 표정이 움직였다.

“신검산장(神劍山莊)이라고요? 그 사(謝)선생은 신검산장(神劍山莊) 사람인가요?”

유약송(柳若松)은 담담히 말했다.

“그렇소.”

정붕(丁鵬)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검을 익히는 젊은이에게 있어서 신검산장(神劍山莊)이라는 4글자는 가슴을 뛰게 하는 힘이 있었다. 신검산장(神劍山莊)은 취운봉(翠雲峰) 아래 녹수호(綠水湖)가에 살고 있는 사(謝)씨 가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사(謝)씨 집안의 3(三)소야(少爺) 사효봉(謝曉峰)은 신검(神劍)이고 검신(劍神)이었다.

오늘 이곳을 찾아온 사(謝)선생은 혹시 그가 아닐까? 1번째로 도착한 사람은 점창파(點蒼派)의 종전(鐘展)이었다. 풍운검객(風雲劍客)은 명성을 떨친지 무척 오래 되어 유약송(柳若松)마저도 그를 노선생이라 불렀다. 그는 보기에 그렇게 늙어 보이지 않았고 머리카락도 새까맸다. 1쌍의 눈동자는 형형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청평(青萍)과 화산(華山), 숭산(嵩山) 3대(三大) 고수를 격퇴시킨 젊은 검객에게 예를 차리지 않았고 매우 거만했다. 정붕(丁鵬)은 속으로 불쾌했다. 나중에서야 정붕(丁鵬)은 그가 누구에게도 친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謝)선생이 도착하기 전에 세한(歲寒)3우(三友) 가운데 매화(梅畵)와 묵죽(墨竹)이 왔다. 그들 2사람을 보자 정붕(丁鵬)은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들 2사람 가운데 1사람은 붉은 장삼에 은빛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얼굴빛은 불그레했다. 그리고 1사람은 얼굴이 음침하고 대나무처럼 비쩍 말랐다. 틀림없이 그날 개울 수원지의 오래 된 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던 2사람이었다. 그들 2사람은 정붕(丁鵬)이라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는 듯이 행동했다. 정붕(丁鵬)은 매화(梅花)노인에게 1마디 묻고 싶었다.

“당신은 어째서 붉은 옷의 원숭이를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매화(梅花)노인은 숫제 그 일을 모르는 듯이 행동했지만 정붕(丁鵬)은 그 일을 잊을 수 없었다.

가소(可笑)는 어째서 그들 2사람을 찾아가라고 했을까? 그녀와 이들 2사람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는 후회했다. 어째서 그 일을 똑똑히 물어보지 않았을까, 어째서 가소(可笑)에게 그 일에 대해 묻지 않겠다고 약속했을까? 그가 여러 가지 생각에 골몰해 있는 동안에 신검산장(神劍山莊)의 사(謝)선생이 도달했다. 사(謝)선생은 둥근 얼굴에 땅딸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 피어 있어 무척 온화해 보였다. 얼핏 보기에는 장사치 같았다. 저 사(謝)선생은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謝)씨 집안의 3(三)소야(少爺) 사효봉(謝曉峰)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심지어 점창파(點蒼派)의 종전(鐘展)까지도 그에게 윗자리를 권했다. 그는 한사코 마다했다. 자기는 신검산장(神劍山莊)의 1개 관사(管事 사무장)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명성을 떨친 영웅호걸들 앞에서는 공손하게 가장 아랫자리에 앉는 것만 해도 광영이라고 겸손해 했다.

신검산장(神劍山莊)에서 아무렇게 1사람이 나선 것에 불과한데도 강호에서는 이와 같이 존경하고 있었다. 정붕(丁鵬)의 가슴은 다시 뛰었고 피는 다시 뜨거워졌다. 그는 언젠가 신검산장(神劍山莊)으로 가서 그 천하무쌍의 명협(名俠) 사효봉(謝曉峰)을 찾아 뵙고 검법을 가르침 받겠다고 결심했다. 그의 검 아래 진다고 해도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1전(一戰)에서는 패배할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유약송(柳若松)을 바라보았다.

“후배 정붕(丁鵬)은 선배님이 검법을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유(柳)선배님께서는 손에 사정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종전(鐘展)이 퉁명스레 1마디 했다.

“자네는 1가지 일을 영원히 명심하도록 하게.”

정붕(丁鵬)은 공손히 대답했다.

“네.”

종전(鐘展)은 얼굴을 굳히고 냉랭히 말했다.

“검이란 본래 무정한 물건이네. 검이 일단 검집에서 뽑히면 결코 사정을 둘 수 없는 것일세.”

2명의 자색 옷을 입은 동자가 화려한 검갑(劍匣)을 받쳐들고 유약송(柳若松)의 등뒤에 시립해 섰다. 유약송(柳若松)은 검갑의 뚜껑을 열고 검을 꺼내더니 검을 뽑아들었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이 검집에서 뽑히자 용트림과 같은 소리가 났다. 사(謝)선생은 빙긋 웃었다.

“훌륭한 검이오.”

정말 1자루의 훌륭한 검이었다. 검의 광채가 어른거리는 가운데 싸늘한 검기가 사람들의 미간으로 들이닥쳤다. 유약송(柳若松)이 1자루의 검을 손에 들자 그 자태는 아주 우아하고 여유가 있었다. 정붕(丁鵬)은 바짝 검자루를 움켜 쥐었다. 손가락 마디는 힘을 주는 바람에 하얗게 변했으며 손바닥에는 땀이 맺혔다.

그의 검은 1자루의 청강검(青鋼劍)에 불과했으며 절대로 유약송(柳若松)의 손에 들린 이기(利器)에 비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의 그 1초(一招) 천외유성(天外流星)이 반드시 유약송(柳若松)의 무당(武當) 직계 검법을 깨뜨릴 수 있다고 믿었지만 여전히 긴장되었다. 유약송(柳若松)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보냈다.

“우리 집에는 1자루의 검이 있는데 대단한 신병이기(神兵利器)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쓸만한데, 정(丁)소협이 원하시면 사람을 시켜 가져오겠소.”

그는 선배 명가의 신분으로 공평한 비무를 원했던 것이었다.

정붕(丁鵬)은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이 후배는 이 검을 사용하지요. 이것은 선친의 유물이니 이 후배는 함부로 버릴 수 없군요.”

유약송(柳若松)은 물었다.

“정(丁)소협의 검법 역시 가전의 무학이오?”

정붕(丁鵬)은 공손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종전(鐘展)은 갑자기 불쑥 물었다.

“자네는 태호(太湖) 정(丁)씨 집안의 자제인가?”

정붕(丁鵬)은 대답했다.

“이 후배는 기북(冀北) 사람입니다.”

종전(鐘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 참 이상하군…”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강호의 소문에 정(丁)소협의 검법이 기이하고 가장 솜씨 있는 1초(一招)는, 유성이 하늘 밖에서 날아든 것처럼 신기묘절(神奇妙絶)하다고 하더군. 나는 검법을 50년 배웠지만 기북(冀北)에 정(丁)씨 집안이 있고 그토록 정묘한 가전의 검법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네.”

사(謝)선생이 입을 열었다.

“그것은 이상할 것이 없지요. 강호에는 남에게 알려지기 싫어하는 이인들이 얼마든지 있소. 종(鐘)노선생께서 견문이 넓으시지만 모든 사람을 다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요.”

종전(鐘展)은 입을 다물었다.

유약송(柳若松)은 검을 옆으로 1번 휘두르며 가슴 앞에 수평으로 세우더니 입을 열었다.

“자!”

정오의 햇살은 따가웠다. 모래를 깐 땅바닥은 빛나는 햇살을 받아 모래알들이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검의 광채는 더욱 눈부셨다. 정붕(丁鵬)의 검이 어느덧 뻗쳐 나갔다. 그의 검법은 천외유성(天外流星)이라는 초식(招式) 외에는 모두 가전의 검법이었고 평범했다. 무척 흔한 검법이었다. 무당(武當)의 검법은 무림을 이끄는 내가(內家)정종(正宗)이었다. 경(輕), 령(靈), 현(玄), 묘(妙)의 비결이 깃들어 있었다.

유약송(柳若松)의 손에서 펼쳐지자 흐르고 움직이는 것이 예측을 불허했다. 그는 다만 도(挑), 삭(削), 자(刺), 3글자의 비결을 구사했지만 검은 날렵하고 몸뚱이는 검을 따라 움직여 어느덧 정붕(丁鵬)을 숨돌릴 기회도 없이 몰아세웠다. 모두들 강호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이 젊은 검객에 대해 약간 실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붕(丁鵬)은 자신이 있었다. 그는 이미 유약송(柳若松)의 검법 가운데 3곳의 빈틈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1초(一招)의 천외유성(天外流星)을 펼치면 유약송(柳若松)의 검법을 깨뜨리는 것은 날이 예리한 칼로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본래 유약송(柳若松)에게 몇 수를 양보해주고 싶었으나, 뜻밖에도 이 선배 검객은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정붕(丁鵬)의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검법이 갑자기 변했고 1자루의 평범한 청강검(青鋼劍)은 갑자기 1가닥 눈부신 광채를 내뿜는 유성으로 화한 것 같았다. 하늘 밖에서 날아드는 유성은 방어할 수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약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유약송(柳若松)은 반드시 그 1검(一劍) 아래 상처를 입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빗나갔다. 창! 하는 소리가 나면서 별똥과 같은 광채가 사방으로 튀었다. 유약송(柳若松)은 놀랍게도 천외유성(天外流星)을 받아내었다. 그는 무당파(武當派) 천일(天一)진인(眞人)의 유일한 속가(俗家)제자였고 내공의 심후함은 정붕(丁鵬)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2자루의 검이 서로 마주치자 정붕(丁鵬)은 충격을 받고 하마터면 뒤로 쓰러질 뻔했다. 그의 검은 이미 1곳에 날이 빠지고 손아귀도 충격을 받고 찢어졌으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싸우려 했다.

조금 전에는 틀림없이 자기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다고 여겼다. 그 천외유성(天外流星)은 본래 필승의 1초(一招)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약송(柳若松)은 껑충 뛰어 물러나더니 검을 거두고 매우 이상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종전(鐘展)은 입을 열었다.

“그는 아직 지지 않았소. 계속 겨루도록 하시오.”

그는 확실히 정직한 사람이었다. 바로 이 1마디를 듣자 그에 대한 정붕(丁鵬)의 혐오감이 감격으로 바뀌었다. 유약송(柳若松)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그는 아직 지지 않았소.”

그는 정붕(丁鵬)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금 전에 소협이 펼친 그 1초(一招)가 바로 소협이 숭양(嵩陽) 곽정평(郭正平)을 격패(擊敗)시킨 초식(招式)인가?”

정붕(丁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유약송(柳若松)은 다시 물었다.

“소협이 사정(史定)과 갈기(葛奇), 2분을 격패시켰을 때 펼친 것도 바로 그 1초(一招)인가?”

정붕(丁鵬)은 시인했다.

“그렇소.”

유약송(柳若松)은 다시 다짐을 받으려는듯 물었다.

“그것이 정말 자네의 가전 검법인가?”

정붕(丁鵬)은 대답했다.

“그렇소.”

유약송(柳若松)은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영존은 어느 분이신가?”

정붕(丁鵬)은 솔직히 대답했다.

“선친께서는 8년 전에 이미 작고하셨소.”

그는 선친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았다. 유약송(柳若松) 역시 다시 묻지 않았으나 그의 안색은 더욱 이상해졌다. 갑자기 그는 몸을 돌리고 그 사(謝)선생에게 물었다.

“조금 전 정(丁)소협이 펼친 그 1검(一劍)을 사(謝)선생께서 똑똑히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사(謝)선생은 그 말을 받았다.

“그와 같이 고절하고 정묘한 검법을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소. 하지만 다행히 똑똑히 보기는 했소.”

유약송(柳若松)은 다시 물었다.

“사(謝)선생은 그 1검(一劍)이 어떻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사(謝)선생은 대답했다.

“그 1검(一劍)은 매섭고 이상야릇하여 옛날 절대기협(絶代奇俠) 연(燕)13(十三)의 탈명(奪命)13식(十三式)과 비슷한 위력을 갖춘 것 같았소. 애석한 것은 공력이 아직 부족하여 그 위력을 완전하게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은 그저 내 멋대로 지껄인 것이며 검법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소.”

그는 물론 제멋대로 이야기 1것이 아니었다.

신검산장(神劍山莊)의 사람이 어찌 검법을 모르겠는가? 30년 전 연(燕)13(十三)은 천하를 주름잡았으며 크고 작은 싸움을 100여 번이나 치르었으며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천하에서는 유일하게 사(謝)씨 집안의 3(三)소야(少爺)와 승부를 가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그와 사효봉(謝曉峰)은 나중에 승부를 가졌을까?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는 아직까지도 수수께끼였다. 지금 그 고독한 검객은 이미 세상을 등졌지만 그의 명성과 그의 검법은 아직도 무림의 전설로 남아 있었다.

사(謝)선생이 정붕(丁鵬)의 그 1검(一劍)을 연(燕)13(十三)의 탈명(奪命)13식(十三式)과 함께 논한 것은 실로 정붕(丁鵬)의 광영이었다. 유약송(柳若松)은 미소를 지었다.

“사(謝)선생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불초는 정말 너무 지나친 사랑을 받는 것 같아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군요.”

정붕(丁鵬)은 어리둥절해졌다. 모든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졌다. 지나친 사랑을 받았다는 말은 정붕(丁鵬)이 해야 하는데 어째서 그가 한다는 말인가? 종전(鐘展)은 냉랭히 입을 열었다.

“사(謝)선생이 정붕(丁鵬)의 검법을 칭찬하는데,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오?”

유약송(柳若松)은 정색하고 대답했다.

“조금은 관계가 있지요.”

종전(鐘展)은 냉소했다.

“허 참… 별 소리를 다하시는군.”

유약송(柳若松)은 얼른 입을 열었다.

“강호의 모든 사람들은 선배님의 견문이 넓어서 옛날 <병기보(兵器譜)>를 지었던 백효생(百曉生)과 막상막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

종전(鐘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나는 백효생(百曉生)처럼 깊고 넓지 못하지만, 천하 각문 각파의 검법을 모조리 구경한 것은 사실이오.”

유약송(柳若松)은 물었다.

“선배님께서는 일찍이 정(丁)소협이 방금 펼쳐낸 그 1초(一招)를 보신 적이 있으셨는지요?”

종전(鐘展)은 대답했다.

“본 적이 없소.”

유약송(柳若松)은 사(謝)선생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謝)선생은 어떠신지요?”

사(謝)선생은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언제나 두문불출하여 바깥 세상의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라서 그런 검법을 구경한 적이 없소.”

유약송(柳若松)은 담담히 웃었다.

“2분께서 그 1검(一劍)을 보지 못한 것은, 그 1초(一招)를 불초가 창출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 1마디는 실로 무척 놀라웠다. 가장 놀란 사람은 물론 정붕(丁鵬)이었다. 그는 펄쩍 뛰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뭐라고 했지요?”

유약송(柳若松)은 태연히 대답했다.

“내 말을 정(丁)소협은 똑똑히 들었을 것이오.”

정붕(丁鵬)은 뜨거운 피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당신은… 당신은 증거가 있소?”

유약송(柳若松)은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동자에게 분부했다.

“부인에게 내 검보(劍譜)를 가져오라고 전해라.”

검법을 배우는 남자에게는 절대 다른 사람과 함께 누릴 수 없고 또 절대로 남들이 침범할 수 없는 2가지가 있었다. 바로 그의 검보(劍譜)와 그의 아내였다. 유약송(柳若松)은 남자이고 검을 익혔다. 그는 검보(劍譜)와 처를 똑같이 아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처에게 자기의 검보(劍譜)를 가져오라고 했으니, 이로 미루어볼 때, 그가 이번 일의 처리에 지극히 신중을 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누구도 더 말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무슨 말을 할 수 없었다. 검보(劍譜)를 유(柳)부인이 직접 가지고 왔다. 검보(劍譜)는 밀봉된 상자 안에 들어 있었고 그 위에는 봉인까지 되어 있었다. 유(柳)부인은 얼굴에 망사를 쓰고 있었다. 1겹의 엷은 망사가 그녀의 이목구비를 가리고 있었으나 결코 그녀의 절대(絶代)적인 풍화(風華)는 가리지는 못했다.

유(柳)부인은 본래 강호에서 유명한 미녀였고 또한 명문세가 출신이었다. 아름답다는 명성이 자자했을 뿐 아니라 현숙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낯선 사람들에게 진면목을 보여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검보(劍譜)는 종전(鐘展)과 사(謝)선생에게 건네졌다. 사(謝)선생의 신분과 종전(鐘展)의 정직함은 결코 남들의 의심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의심하는 사람도 없었다. 밀봉된 상자가 열렸다. 검보(劍譜)는 하얀 비단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무척 얇은 편이었다. 이것은 무당(武當)의 검보(劍譜)가 아니었다. 이것은 유약송(柳若松)이 스스로 창안한 청송검보(靑松劍譜)였다.

무당(武當)의 검법은 박대(搏大)하고 정심(精深)했다. 유약송(柳若松)이 혼자서 창출한 검법은 20초(招)에 불과했다.

“마지막 1쪽에 그 1초(一招)가 실려 있지요.”

사(謝)선생과 종전(鐘展)은 즉시 검보(劍譜)를 뒤적여 마지막 1장을 펼쳤다. 그들의 신분과 지위로는 남의 검보(劍譜)를 훔쳐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증거였다. 정붕(丁鵬)과 유약송(柳若松)의 한평생 신의와 명예가 달려있으니 그들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겨우 몇 번 눈길을 주었을 뿐이었으나 얼굴색은 이미 변하고 있었다. 이윽고 유약송(柳若松)은 물었다…

“조금 전에 정(丁)소협이 펼친 그 1초(一招)를 2분은 똑똑히 보았는지요?”

2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보았소.”

유약송(柳若松)은 다시 물었다.

“조금 전에 정(丁)소협은 그 초식(招式)을 펼쳐서 사정(史定)과 갈기(葛奇), 그리고 곽정평(郭正平)을 격퇴시켰다고 했는데 2분께서도 똑똑히 들으셨는지요?”

2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유약송(柳若松)은 다시 질문했다.

“그 1검(一劍)의 초식(招式)과 변화의 정묘함은 바로 이 검보(劍譜)에 있는 무당(武當)송하풍(松下風)이라는 1초(一招)와 완전히 똑같은 것이겠지요?”

2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유약송(柳若松)은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불초와 정(丁)소협은 오늘 처음 만나는 것이오…”

그 점에 있어서 종전(鐘展)과 사(謝)선생은 단정을 지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제히 정붕(丁鵬)에게 물었다.

“정(丁)소협, 그렇소?”

정붕(丁鵬)은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유약송(柳若松)은 다시 물었다.

“1초(一招)를 펼치는 것을 보고 이 검보(劍譜)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2사람은 똑같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불가능하오.”

정붕(丁鵬)이 펼친 그 1검(一劍)을 본 사람이라 해도 절대적으로 그 1검(一劍)의 정묘함을 터득할 수는 없었다.

유약송(柳若松)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나는 더 할 말이 없군요.”

정붕(丁鵬)은 더욱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젊은 애에 불과했다. 그는 순박한 시골에서 자랐고 고향을 떠나 온지 겨우 3달밖에 되지 않았다. 강호의 술수와 음모를 그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는 자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몸뚱이가 땅속의 시커멓고 깊은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고 그물에 꼭 묶인 듯했다.

그는 발버둥치고 싶었으나 그 조여 오고 압박해 오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고함을 지르고 싶었으나 고함도 나오지 않았다. 모든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고 찬란했던 희망은 이미 1조각의 어둠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는 실로 어떻게 해야 좋은지 몰랐다. 종전(鐘展)은 유약송(柳若松)에게 묻고 있었다.

“당신이 1초(一招)의 검법을 창출했다면 어째서 여지껏 펼쳐 보이지 않았소?”

유약송(柳若松)은 대답했다.

“나는 무당(武當)의 문하생인 것을 영광으로 알고 있소. 이 1초(一招)는 내가 그저 우연히 창안한 것이며 그저 생각나는대로 기록한 것이오. 일시적인 흥취에 불과하지요. 무당파(武當派)의 검법은 박대정심해서 이미 내가 한평생 쓰고도 남을만하니까 나는 다른 문파(門派)의 검법을 펼칠 필요가 없었으며 스스로 문파(門派)를 세우겠다는 야심도 없었소.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이 검보(劍譜)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오.”

사(謝)선생은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말씀을 하셨소. 천일(天一)진인(眞人)께서는 당신과 같은 제자를 둔 데 대해서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오.”

종전(鐘展)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1초(一招)가 당신이 스스로 창안한 검법이라면, 정붕(丁鵬)은 또 어디서 배웠단 말이오?”

유약송(柳若松)은 점잔게 말했다.

“그 점을 나 역시 정(丁)소협에게 물어보려던 참이었지요…”

그는 정붕(丁鵬)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의 태도는 여전히 온화했다.

“그 1초(一招)는 도대체 자네의 가전의 검법인가, 아닌가?”

정붕(丁鵬)은 고개를 숙였다.

“아니오.”

유약송(柳若松)은 다그치듯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어디서 배운 것인가?”

정붕(丁鵬)은 대답했다.

“선친께서 우연히 1장의 검보(劍譜)를 발견하셨는데 거기에 바로 이 1초(一招)의 천외유성(天外流星)이 있었소.”

“그것은 누구의 검보(劍譜)였는가?”

정붕(丁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오.”

그는 정말 몰랐다. 검보(劍譜)에는 성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 자신도 검보(劍譜)가 누구의 것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유약송(柳若松)의 말을 부인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유약송(柳若松)은 한숨을 내쉬었다.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거짓말부터 배웠군.”

정붕(丁鵬)은 얼른 그 말을 받았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소.”

유약송(柳若松)은 다그쳤다.

“그렇다면 그 1장의 검보(劍譜)는 어디에 있는가? 1번 보여주겠나?”

정붕(丁鵬)은 말을 더듬었다.

“그건…”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그는 그 1장의 검보(劍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 1장의 검보(劍譜)를 가소(可笑)에게 넘겨주었는데 가소(可笑)는 다시 그에게 되돌려주었으나 나중에 다시 그녀가 갈무리하게 했던 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그에게 바쳤고 그 역시 모든 것을 그녀에게 주었던 것이다. 유약송(柳若松)은 냉랭히 그를 바라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아직 젊어. 아직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나는 결코 자네를 괴롭히고 싶지 않네. 다만 자네가 나에게 1가지 약속을 한다면 나는 그 1장 검보(劍譜)에 대해 따지지 않기로 하겠네.”

정붕(丁鵬)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자기 말을 믿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경멸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약송(柳若松)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한평생 검을 쓰지 않고 강호에서 활동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나는 자네를 보내주겠네…”

그의 표정은 무척 엄숙하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훗날 자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자네가 어디로 도망치든지 나는 끝까지 달려가 자네의 목숨을 빼앗고 말 것이네.”

검술에서 남보다 뛰어나겠다고 결심한 젊은이가 한평생 다시 검을 사용할 수 없고 한평생 강호에서 활약할 수 없다면 그의 한평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정붕(丁鵬)은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갑자기 추위를 느꼈다.

갑자기 일진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그의 옷자락을 펄럭였고 유(柳)부인의 얼굴에 가려놓은 면사(面紗)를 들추었기 때문이었다. 찬란했던 햇살도 이미 검은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정붕(丁鵬)은 갑자기 자기의 몸뚱이가 얼음과 같이 차가워지고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다시 자기의 온 몸뚱아리가 화염 속에서 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비통함과 분노는 마치 화염처럼 그의 발끝에서 그의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 그의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었고 그의 눈동자를 시뻘겋게 충혈되도록 만들었다.

그 면사가 바람에 펄럭이는 순간에 그는 유(柳)부인의 참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유(柳)부인은 놀랍게도 바로 가소(可笑)였다. 이제 모든 사실은 명백해졌다. 그는 이번 일의 진상이 그토록 비열하고 잔혹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는 갑자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는 마치 야수가 죽기 전에 길게 울부짖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그렇구려. 원래 당신이었구려.”

모든 사람들은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약송(柳若松)은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그녀를 아는가?”

정붕(丁鵬)은 차갑게 대답했다.

“나는 물론 그녀를 알고 있소. 나는 그녀와 살을 섞은 사이인데, 내가 그녀를 모른다면 누가 안단 말이오?”

유약송(柳若松)은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자네는 그녀가 누구인지 아는가? 감히 그 따위 헛소리를 하다니,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정붕(丁鵬)은 대답했다.

“그녀는 이가소(李可笑)라고 하지요.”

유약송(柳若松)은 얼굴을 굳히고 냉랭히 호통쳤다.

“이런 고얀 놈을 보았나? 무슨 터무니없는 망발이냐?”


4. 망우초(忘优草)

정붕(丁鵬)은 모든 진상을 밝혀야 했다. 그녀가 벌거숭이가 되어 그의 가슴속으로 뛰어들었던 일, 그가 그녀를 위해서 매화(梅花)노인을 찾아갔다가 나무에 거꾸로 매달리게 된 일, 그녀가 모든 것을 그에게 주었고 그 역시 모든 것을 그녀에게 주었던 일들을 털어놓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말할 수 없었다. 이번 일은 너무나 황당하고 너무나 신빙성이 없었다. 그가 말을 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그를 음란하고 변태적인 미치광이로 여길 것이었다.

이와 같은 미치광이에 대해서는 아무리 잔혹한 방법을 쓴다고 해도 말릴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미치광이가 산채로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목매달아 죽는 꼴을 목격하기도 했었다. 이제서야 그는 자기가 빠진 그 시커먼 구덩이가 함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1쌍의 군자와 숙녀는 비단 그의 검보(劍譜)를 가지려고 했을 뿐 아니라 철저하게 그를 망쳐 놓았다. 그는 지금쯤 강호에 명성을 떨쳐야 했고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정붕(丁鵬)은 갑자기 온힘을 다해서 유(柳)부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완전히 끝난 것이고 철저하게 그녀의 손에 의해 망가진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없애고 싶었다.

“너를 죽이고 말겠다!”

그러나 애석하게 유(柳)부인과 같은 명문 숙녀는 결코 그런 무명소졸이 망치거나 없앨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순간, 2자루의 검이 그를 향해 찔러왔다. 매화(梅花)노인은 날카롭게 호통을 버럭 내질렀다.

“내가 줄곧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은 유약송(柳若松)이 나의 형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참을 수 없다.”

유약송(柳若松)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본래 자네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네. 당신은 어째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가?”

천둥 번개가 우르릉, 꽝, 하고 치면서 폭우가 쏟아졌다. 검의 광채와 번갯불이 서로 엉켜서 허공을 후비고 정붕(丁鵬)의 옷자락은 이미 선혈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의 눈동자도 붉어졌다. 그는 모든 것을 돌보지 않았다. 사(謝)선생은 저지하지 않았고 종전(鐘展)도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 다시는 이 일에 상관하고 싶지 않았고 이 젊은이가 동정할만한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신분이 있고 지위가 있고 또 명성이 있는 무림세가의 자제였다면, 누가 나서서 그의 변명을 들어 보려고 했으리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아무것도 없는 가난뱅이에 지나지 않았다. 검의 광채가 번쩍하면서 그의 어깻죽지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이미 미쳐 있었고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으며 이성이 마비되었다.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1사람이 이와 같은 상태에 놓이면 오히려 살아야겠다는 본능이 생기고 사람들에게 난도질을 당해서 죽고 싶지는 않은 법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이미 죽음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돌아서려고 했으나 때는 늦어 있었다. 매화(梅花), 청송(青松)의 2자루 검은 독사처럼 집요하게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그가 이미 그들의 음모를 발견했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그가 살아남아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으리라. 모든 사람들은 그가 마땅히 죄값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를 죽이는 것은 천리에 순응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유약송(柳若松)이 치명적인 1검(一劍)을 찔러내었다. 그 1검(一劍)은 정붕(丁鵬)의 목줄기를 파고들었다.

꽝! 별안간 천둥소리가 울려퍼지고 번갯불이 번쩍거렸다. 연무장의 1그루 커다란 나무가 벼락을 맞아 2쪽으로 쪼개져 나갔다. 번갯불, 천둥, 그리고 번갯불에 의해서 일어난 화염. 거대한 나무통이 화염 속에서 쪼개져 옆으로 쓰러졌다. 우지직…! 이것은 하늘과 땅의 위세이며 하늘과 땅의 노여움이었다. 대자연의 분노 앞에 누구든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앗!”

놀람에 찬 외침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모든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고 유약송(柳若松) 역시 뒤로 물러섰다. 오직 정붕(丁鵬)만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는 가운데가 쪼개진 나무 몸통의 한복판을 뚫고 나갔으며 벼락에 의해 치솟는 화염 한복판을 뚫고 나갔다. 그는 자기가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목적이 없었으며 방향도 가늠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이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모든 힘을 다하여 도망쳤다. 기운이 다하게 되었을 때 그는 산 개울 옆에 쓰러지고 말았다. 폭우 속에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일은 유약송(柳若松)과 가소(可笑)에 대한 원한이 아니었고 그 자신의 비통함도 아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선친이 돌아가실 때 그를 바라보던 그 1쌍의 눈동자였다. 그 1쌍의 눈동자에는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기의 아들이 반드시 유명하게 되고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는 그의 아들이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었다.


7월 15일.

밤.

휘영청 밝은 달.

비는 이미 멎어 있었고 둥근 달이 이미 솟아올랐다. 오늘 밤의 달은 더욱 아름다웠다.

신비할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처량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사람의 마음을 산산조각낼 만큼 아름다웠다. 정붕(丁鵬)은 두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쟁반같이 둥근 달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으려는 사람들은 그를 찾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이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하늘의 뜻일까? 폭풍우는 산홍수(山洪水)를 이끌어내고 산홍수(山洪水)의 거친 물줄기가 이 산길 속으로 흘러들어 그의 몸뚱이 역시 이곳까지 떠내려온 것이었다. 이곳은 그가 쓰러진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개울 속에서 일어나자 그는 하나의 무척 깊은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면은 모두 산이고 나무였다. 그리고 비가 온 후의 산골짜기는 습기차고 싱그러워 마치 갓 목욕을 한 처녀 같았다. 처녀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신비감을 간직하고 있는 법이었다. 이 동굴은 마치 처녀의 질구처럼 깊고 어두웠으며 신비한 내력으로 충만해 있었다. 정붕(丁鵬)은 마치 신비한 힘에 이끌리듯 자기도 모르게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달빛은 바깥에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동굴의 사면 벽에는 놀랍게도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계(天界)의 그림인가? 거대하고도 화려한 궁전에 금창(金戈)을 들고 금빛의 갑옷을 입은 무사들, 머리를 높다랗게 땋아 올리고 우의(羽衣)를 입은 궁녀들, 인간 세상에서 보지 못하는 진기한 보석들과 신선한 꽃, 그리고 향긋한 과일들이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천신(天神)처럼 위풍당당하고 건장했으며 여인들은 선녀처럼 고귀하고 아름다웠다. 정붕(丁鵬)은 넋을 잃고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든 희망은 이미 깨지고 휘황하게 밝았던 앞날의 희망은 이미 1조각의 어둠으로 변한 상태였다.

인간 세상에서 기만을 당하고 모욕당했을 뿐만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해 이미 막다른 길로 쫓겨서 떨어진 것이었다. 이 인간 세상에서 그에게는 앞날이 없었고 미래도 없었으며 남에 의해서 철저하게 망쳐지고 말았다. 그가 당한 억울한 일은 한평생 씻어낼 수 없었다. 그는 한평생 영원히 남보다 뛰어날 수 있는 날을 가질 수 없었다. 살아간다 해도 그를 기만하고 모욕하고 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사람들이 의기양양해서 우쭐대며 위세를 떨치는 모습을 보아야 할 것이었다. 그가 살아 있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 세상에서 당한 억울한 일을 오직 하늘로 올라가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갑자기 죽고 싶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정말 이와 같이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고 훨씬 통쾌했다. 기만. 처음으로 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기만을 당한 것이었다. 이것은 충분히 1젊은이로 하여금 살아남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그는 문득 자기의 손에 아직도 자기의 검이 꼭 쥐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1자루의 검은 그에게 명성과 광영을 안겨주지 못했으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는 검을 쳐들고 칼날로 자기의 목줄기를 끊으려고 했다. 뜻밖에도 바로 이때, 갑자기 일진의 바람이 불어왔고 바람속에 어떤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하나의 희미한 그림자였는데 향기를 풍기며 그의 앞으로 날아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려져 있던 검도 사라지고 없었다. 정붕(丁鵬)은 어리둥절해졌다. 1줄기의 차가운 한기가 발밑에서부터 치솟아 올랐고 갑자기 온몸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설마하니 이곳에 귀신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 동굴은 본래 무척 신비했었는데 이제는 마치 도깨비의 그림자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사람이 죽기로 결심한 이상 어찌 귀신을 겁내겠는가? 귀신이라는 것은 단지 죽은 사람의 불과할 뿐이다. 검이 없다 해도 그는 죽을 수 있었다. 정붕(丁鵬)이 한스럽게 여기는 것은 사람들이 그를 기만했을 뿐 아니라, 그가 죽으려고 할 때 귀신마저도 그를 희롱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빨을 깨물고 전신의 힘을 다해 자기의 머리를 석벽 쪽으로 부딪혀 갔다.

사람이 그를 못살게 굴었든 귀신이 그를 희롱했든, 이 빚은 그가 죽은 이후에 반드시 치루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그의 머리는 석벽에 부딪히지 않았다. 다시 일진의 바람이 불어왔고 석벽 앞에 갑자기 1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머리는 그만 그 사람의 몸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는 놀라 뒤로 물러섰으며 끝내 그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머리를 높게 틀어 올리고 우의를 걸친 절세의 미녀였다. 바로 벽화에 그려져 있는 선녀와 똑같았다. 설마하니 그녀는 바로 벽화에서 걸어나온 것일까?

그녀의 왼손에는 생화가 가득 담긴 대바구니가 들려 있었고 오른손에는 1자루의 검이 들려 있었다. 바로 정붕(丁鵬)의 검이었다. 그녀는 정붕(丁鵬)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 웃음은 싱그러우면서도 달콤하고 부드러웠으며 순결하면서 고귀했다. 그녀는 보기에 결코 무섭지가 않았다. 정붕(丁鵬)은 물었다.

“당신은 사람이오, 귀신이오?”

이 1마디의 질문은 무척 가소로웠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리라. 그녀는 다시 웃었다. 눈동자에도 웃음이 번졌다. 갑자기 그녀는 되물었다.

“당신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나요?”

정붕(丁鵬)은 대답했다.

“7월 15일이오.”

마치 벽화에서 걸어나온 듯한 절색의 아리따운 미녀는 물었다.

“당신은 7월 15일이 어떤 날인지 아세요?”

정붕(丁鵬)은 끝내 생각해 냈다. 오늘은 중원(中元), 귀신들의 명절이었다. 오늘은 귀문관(鬼門關)이 열리는 날이었다. 오늘 밤에 유명지부(幽冥地府)의 뭇 귀신들이 모두 다 인간 세상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정붕(丁鵬)은 자기도 모르게 놀라서 음성을 높였다.

“당신은 귀신이오?”

그 아리따운 여인은 방긋 웃었다.

“당신이 보기에 내가 귀신 같은가요?”

그녀는 귀신 같지 않았다. 정붕(丁鵬)은 참을 수 없어서 다시 물었다.

“당신은 하늘의 선녀요?”

그 아리따운 여인은 더욱 부드럽게 웃었다.

“나 역시도 당신이 나를 하늘의 선녀쯤으로 알고 있기를 바래요. 그러나 나는 감히 거짓말을 할 수 없네요. 왜냐하면 내가 하늘의 선녀라고 사칭한다면 혀를 뽑히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거예요.”

정붕(丁鵬)은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당신은 결코 사람이 아닐 것이오.”

아리따운 여인은 대답했다.

“나는 물론 사람이 아니에요.”

정붕(丁鵬)은 자기도 모르게 2걸음 물러섰다.

“당신은… 당신은 무엇이오?”

그 아리따운 여인은 순순히 대답했다.

“나는 여우예요.”

정붕(丁鵬)은 그 말을 되씹었다.

“여우?”

그 아리따운 여인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설마하니 당신은 1번도 이 세상에 여우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나요.”

정붕(丁鵬)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여우의 전설은 너무도 많았다. 어떤 전설은 무척 아름다웠고 어떤 전설은 무시무시했다.

여우가 만약 당신을 좋아하게 된다면 당신이 이 세상의 모든 광명과 재부를 가지도록 해줄 수도 있었다. 즉 당신에게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행운을 안겨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을 홀려서 혼이 나가고 뼈마디가 흩어지도록 만들어 당신을 산 채로 죽게 만들 수도 있다. 여우는 사람으로 둔갑할 뿐 아니라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하기를 좋아한다는 전설은 널리 퍼져 있었다. 정붕(丁鵬)은 놀란 표정으로 눈앞에 서 있는 아리따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마르기 시작하던 옷자락이 다시 식은땀에 흠뻑 젖고 말았다.

그는 정말로 여우를 만난 것일까? 달빛이 비쳐들어 그녀의 얼굴을 비쳐 주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창백했다. 투명할 정도로 창백했다. 오직 1번도 햇살을 보지 못한 사람만이 그녀와 같은 안색을 지닐 수 있는 것이었다. 여우는 물론 햇살을 볼 수 없었다. 정붕(丁鵬)은 갑자기 웃었다. 그 아리따운 여인 역시 약간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호선(狐仙)을 만난 사람이 웃다니… 그녀는 참을 수 없다는듯 물었다.

“당신은 이번 일이 무척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나요?”

정붕(丁鵬)은 천천히 대답했다.

“이런 일은 결코 우스꽝스럽지 않소. 그러나 당신은 나를 놀라게 할 수는 없을 것이오.”

“음!”

정붕(丁鵬)은 힘주어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근본적으로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오. 당신이 귀신이든 호선(狐仙)이든 나는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소.”

그 아리따운 여인은 물었다.

“모든 사람들은 귀호(鬼狐)를 무서워하는데 어째서 당신만은 두려워하지 않나요?”

정붕(丁鵬)은 쉽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나는 죽을 몸이기 때문이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당신이 귀신이라면, 내가 죽은 후에 나 또한 귀신이 될 것인데 어째서 당신을 두려워하겠소.”

그 아리따운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사람이 죽은 이후에는 정말 아무것도 더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지요.”

정붕(丁鵬)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 없는 말이오.”

그 아리따운 여인은 그 말을 받아 물었다.

“그러나 당신이라는 사람은 나이가 무척 젊은데 어째서 죽으려고 하는가요?”

정붕(丁鵬)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나이가 젊은 사람도 때로는 죽고 싶지요.”

아리따운 여인은 다시 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죽고 싶나요?”

정붕(丁鵬)은 고개를 힘주어 끄덕였다.

“정말이오.”

아리따운 여인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반드시 죽어야 하나요?”

정붕(丁鵬)은 천천히 힘주어 대답했다.

“반드시 죽어야 하오.”

아리따운 여인은 갑자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당신은 1가지 사실을 잊고 있군요.”

정붕(丁鵬)은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무엇을 잊었다는 것이오?”

아리따운 여인은 대답했다.

“당신은 아직까지 죽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사람이라는 사실이에요.”

정붕(丁鵬)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리따운 여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나는 여우예요. 호선(狐仙)이란 말이에요. 나에게는 법력(法力)이 있지만 당신에게는 없어요. 내가 만약 당신이 죽지 못하도록 막는다면 당신은 절대로 죽을 수 없어요. 그러나…”

정붕(丁鵬)은 그 말에 얼른 물었다.

“그러나 어떻다는 것이오?”

그 아리따운 여인은 다소곳이 말했다.

“그러나 당신이 나에게 무슨 일로 당신이 반드시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준다면 문제는 달라져요.”

정붕(丁鵬)은 성을 내며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어째서 당신에게 알려주어야 하오? 당신의 무엇을 믿고 내가 당신에게 말해준다는 것이오?”

그는 그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가슴속에 비통함과 분노가 가득찼다. 더 생각하기도 싫었다.

“나는 결코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겠소. 당신은 나를 어떻게 하겠소?”

죽음보다 더 큰일은 있을 수 없었다. 1사람이 이미 죽기를 결심했다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두려워하겠는가. 그 아리따운 여인은 놀랍다는듯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방긋이 웃었다.

“이제서야 나는 당신이 정말로 죽고 싶어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군요.”

정붕(丁鵬)은 무뚝뚝하게 응수했다.

“나는 본래 그랬었소.”

그 아리따운 여인은 갑자기 질문을 던져왔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나요?”

정붕(丁鵬)은 되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내 이름을 묻는 것이오?”

아리따운 여인은 대답했다.

“당신이 죽고나서 귀신이 되었을 적에 우리는 바로 이웃이 되는 거예요. 어쩌면 종종 만나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니 나는 물론 당신의 이름을 알아야지요.”

정붕(丁鵬)은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먼저 당신의 이름을 나에게 알려주지 않소. 여우라고 해도 이름이 있을 것이 아니오?”

그 아리따운 여인은 방긋 웃었다.

“물론 나에게도 이름이 있지요. 알려드리지요…”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청청(青青)이라고 해요.”

청청(青青)은 몸에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옷은 마치 봄철의 맑디 맑은 하늘과 맑은 호숫물을 연상시켰다. 호숫물 속에는 먼 산들이 거꾸로 비춰지고 있는데 그 모습은 신비하면서도 몽롱했다. 청청(青青)의 허리는 가냘프고 부드러운 것이 마치 봄바람속의 수양버들과 같았다. 청청(青青)의 허리에는 푸른 허리띠가 둘러져 있었는데 허리띠에는 비스듬히 1자루의 칼이 꽂혀 있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칼이었다. 청청(青青)의 만도(彎刀)는 순은으로 된 칼집 안에 들어 있었고, 칼자루 위에는 1알의 광택이 나는 명주(明珠)가 박혀 있었다. 청청(青青)의 눈동자는 명주 구슬의 빛보다 더욱 아름답고 부드러웠다. 정붕(丁鵬)은 조금도 그녀가 두렵지 않았다. 그녀가 사람이든 여우든 두렵지 않았다. 청청(青青)이 사람이라면 물론 미녀에 속했다. 만약 청청(青青)이 여우라면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선량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우이니 결코 그 어떤 사람도 해치지 않을 것이었다. 그 만도(彎刀)는 결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칼 같지 않았다.

정붕(丁鵬)은 불쑥 물었다.

“당신도 칼을 쓰시오?”

청청(青青)은 되물었다.

“나라고 칼을 쓸 수 없나요?”

정붕(丁鵬)은 다시 물었다.

“당신은 사람을 죽인 적이 있소?”

청청(青青)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칼을 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람을 죽인다는 법은 없어요.”

정붕(丁鵬)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라고 해도 반드시 칼을 사용한다는 법은 없지요.”

이제서야 그는 어떤 사람들은 칼을 사용하지 않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 칼을 쓰는 것보다 더욱 잔혹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청(青青)은 물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을 만났었나요?”

정붕(丁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청청(青青)은 다소곳이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이겠군요?”

정붕(丁鵬)은 쓰디쓰게 웃었다.

“나는 오히려 그가 칼을 써서 나를 죽여주기를 바랬었소.”

청청(青青)은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당신은 당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해줄 수 없나요? 그래서 내가 당신이 반드시 죽어야 할 일인지 알게 해줄 수 없나요?”

이번 일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말한다 해도 믿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청청(青青)은 사람이 아니고 여우였다. 여우는 사람보다 더욱 총명했다. 틀림없이 그가 말한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정붕(丁鵬)은 결코 그녀가 자기를 비아냥거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끝내 그는 그가 겪은 일들을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마음속에 남에게 말 못할 사정을 털어 놓게 된다면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시원하리라. 정붕(丁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어찌 죽지 않을 수 있겠소.”

청청(青青)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역시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그렇네요.”

정붕(丁鵬)은 물었다.

“이제 나는 죽을 수 있겠소?”

청청(青青)은 대답했다.

“죽도록 하세요.”

그가 죽어 마땅하다고 인정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했다. 정붕(丁鵬)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그만 가보시오.”

청청(青青)은 되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가라고 하지요?”

정붕(丁鵬)은 덤덤히 대답했다.

“사람이 죽을 때 그 모양은 결코 곱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서 나를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오?”

청청(青青)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하지만 죽음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당신은 마땅히 비교적 보기 좋은 방법을 택해야 해요.”

정붕(丁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으면 죽는 것이오. 어떻게 죽는다고 해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내가 어째서 보기 좋은 방법을 택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오?”

청청(青青)은 말했다.

“나를 위해서예요.”

정붕(丁鵬)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을 위해서라니?”

청청(青青)은 다소곳이 말했다.

“나는 1번도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그러니 부탁이에요. 곱게 죽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실 수 없나요?”

정붕(丁鵬)은 웃었다.

이와 같이 황당한 요구를 해올 줄은 생각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어떻게 죽은들 무슨 상관이겠소.”

청청(青青)은 방긋 웃었다.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군요.”

정붕(丁鵬)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어떤 방법으로 죽는 것이 보기 좋을는지 모르겠구려.”

청청(青青)은 선뜻 대답했다.

“나는 알고 있어요.”

정붕(丁鵬)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당신이 나에게 어떻게 죽으라고 한다면 내가 그대의 말을 따르리다.”

청청(青青)은 설명하듯 말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수곡(憂愁谷)이라는 곳이 있어요. 골짜기 안에는 1그루의 망우초(忘优草)라는 것이 있는데, 1잎의 망우초(忘优草) 잎사귀를 먹기만 한다면 모든 시름과 번뇌를 깡그리 잊어버릴 수 있어요.”

그녀는 정붕(丁鵬)을 1번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우매하니, 그 누가 있어 모든 시름과 번뇌를 깡그리 잊을 수 있겠어요.”

정붕(丁鵬)은 대답했다.

“오직 죽은 사람밖에 없겠지요.”

청청(青青)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 당신의 말이 맞았어요. 오직 죽은 사람만이 번뇌를 떨쳐버릴 수 있는 거예요.”

정붕(丁鵬)은 물었다.

“그와 같이 죽는 모습은 정말로 보기 좋은가요?”

청청(青青)은 선뜻 대답했다.

“제가 아는 한, 하늘 위에서나 이 땅위 에서나 그것은 가장 보기 좋은 방법 중 하나예요.”

정붕(丁鵬)은 물었다.

“그곳은 이곳에서 먼가요?”

청청(青青)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멀지 않아요.”

청청(青青)은 몸을 돌리더니 천천히 동굴 안의 가장 컴컴한 곳으로 걸어갔다. 끝이 없는 어둠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정붕(丁鵬)은 청청(青青)을 볼 수 없었고 그녀의 발걸음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향기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동굴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다. 그 역시도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 없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향기는 더욱 짙어졌다. 그녀의 향기 외에 꽃향기가 섞여 있었다. 그녀가 풍기는 향기보다 꽃향기는 무척 용렬하고 속된 것 같았다.

(그녀는 정말로 여우일까?)

정붕(丁鵬)은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아직 젊었다.

만약 그녀가 사람이라면…

(나는 곧 죽을 사람이다. 그녀가 사람이라도 좋고 여우라도 좋다.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정붕(丁鵬)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는 그 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우수곡(憂愁谷)에도 꽃이 있소?”

청청(青青)은 앞에서 걸어가면서 대답했다.

“물론 있지요. 어떠한 꽃이든 다 있어요. 나는 당신이 1번도 그토록 많은 꽃을 본 적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그녀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마치 먼 산 저쪽에서 불어오는 봄바람 같았다.

“나는 당신이 1번도 그토록 많은 꽃을 본 적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과장도 하지 않았다. 우수곡(憂愁谷)은 확실히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다. 달빛 아래서는 더욱 아름다웠다. 꿈결처럼 아름다웠다. 끝없는 어둠속에서 걸어나와 갑자기 이와 같이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되자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정붕(丁鵬)은 참을 수 없어 물었다.

“이것은 꿈은 아니겠지요?”

청청(青青)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아니에요.”

정붕(丁鵬)은 여전히 의아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을 어째서 우수곡(憂愁谷)이라고 부르는지요?”

청청(青青)은 설명했다.

“이곳은 사람과 신의 세계가 맞닿는 곳이에요. 사람들이 함부로 이곳에 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신도 함부로 이곳에 올 수 없어요.”

정붕(丁鵬)은 의아한 것이 많았다.

“어째서요?”

청청(青青)은 여전히 고분고분 대답해주었다.

“왜냐하면 신이 이곳에 이르게 된다면 사람으로 되고, 사람이 이곳에 이르게 된다면 귀신으로 변하기 때문이에요.”

정붕(丁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오직 다 죽어가는 사람이나 이미 사람으로 변한 신만이 올 수 있겠구려.”

청청(青青)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요.”

정붕(丁鵬)은 얼른 그 말을 받았다.

“그래서 이곳을 우수곡(憂愁谷)이라고 하는 것이오?”

청청(青青)은 간단히 대답했다.

“그래요…”

그녀는 1마디를 덧붙였다.

“신이든 사람이든 이곳에 이르면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되어요. 오직 우리와 같이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고 도깨비도 아니고 신선도 아닌 여우만이 이곳에서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거예요.”

그녀가 말하는 것은 너무나 희한하고 너무나 신비했다. 그러나 정붕(丁鵬)은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은 정말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발자취는 이곳까지 미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이곳에서 죽을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정붕(丁鵬)은 저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것이 혹시 망우초(忘优草)가 아니오?”

청청(青青)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청청(青青)은 멀리 있는 1조각의 바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1조각의 벽과 같은 바위는 마치 고독한 거인처럼 달빛 아래 우뚝 솟아 있었다. 암석 위에는 꽃이 없었다. 암석 위에는 다만 1포기의 파란 풀이 자라나 있었는데 꽃보다도 아름다웠고 비취보다도 파랬다. 정붕(丁鵬)은 다시 물었다.

“저것이 바로 망우초(忘优草)요?”

청청(青青)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녀는 그를 데리고 그 암석 쪽으로 걸어갔다.

“망우초(忘优草)의 잎사귀는 매년 1번만 자라고 매번 3잎밖에 피지 않아요. 만약 당신이 조금이라도 늦게 왔다면 그 잎사귀들은 시들어 버렸을 거예요.”

정붕(丁鵬)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것은 1그루의 독초에 불과한데 그토록 진귀하다니…”

청청(青青)은 그 말을 바로잡았다.

“저것은 독초가 아니고 망우초(忘优草)예요. 우수를 잊어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정붕(丁鵬)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정붕(丁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바로 이때 1조각의 검은 그림자가 날아들어 달빛을 가렸다. 1조각의 검은 구름 같았다. 그것은 검은 구름이 아니라 1마리의 독수리였다. 검은색의 독수리였다. 독수리는 달빛 아래 맴돌았다. 백옥과 같은 암석 위에서 맴도는 모습이 마치 1조각의 검은 구름 같았다. 청청(青青)의 창백한 얼굴에 즉시 이상한 표정이 떠오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이곳에 망우초(忘优草)를 찾으려고 온 사람은 당신 1사람만이 아닌 것 같군요.”

정붕(丁鵬)은 허공을 맴도는 독수리를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저것이 신이오?”

청청(青青)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것은 1마리의 독수리에 불과해요.”

정붕(丁鵬)은 물었다.

“독수리가 어째서 이 망우초(忘优草)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오. 독수리에게도 우수와 번뇌가 있다는 것이오?”

청청(青青)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그 1마리의 독수리는 갑자기 유성처럼 바위 위의 망우초(忘优草)를 향해 내리꽂히듯 날아들었다. 독수리의 움직임은 어떤 사람보다도 빠르고 정확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청청(青青)의 동작은 더욱 빨랐다. 그녀는 가볍게 호통쳤다.

“가거라!”

호통소리가 나자마자 그녀의 몸뚱이는 마치 흐르는 구름처럼 두둥실 떠올라 사뿐히 암석 위로 올라섰다. 그녀의 소맷자락이 마치 흐르는 구름처럼 휘둘러지게 되었는데 바로 독수리의 눈을 노리고 있었다. 독수리는 길게 울음소리를 내며 유성같이 날아갔고 순식간에 저 멀리 있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둥근 달은 다시 그 고결한 빛을 되찾았다. 그녀는 달빛을 받으며 바위 위에 서서 옷자락을 펄럭이고 있었는데 정말 하늘의 선녀 같았다. 정붕(丁鵬)은 속으로 탄식했다.

만약 그에게 그녀와 같은 신법이 있다면 어찌 유약송(柳若松)을 두려워하겠으며 굳이 죽어야 하겠는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의 그런 신법은 결코 사람이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문득 청청(青青)이 그를 향해 손짓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당신은 올라올 수 없나요?”

“시험해 보리다.”

거울처럼 매끄러운 암석 위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매끄러웠다. 그는 사실 올라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시험해 보아야 했다. 그녀가 사람이든 여우든, 그녀는 여자였다. 그는 그녀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1번 시험해보고 다시 시험을 해보았다. 온몸은 이미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푸른 멍이 들었다. 그녀는 여유있게 바위 위에 서서 그가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1번 붙잡아주지도 않았고 붙잡아줄 뜻도 없는 것 같았다.

“무엇이든 당신이 손에 넣고자 하는 것은 자기의 재간에 의지해야 돼요. 재간이 없는 사람은 훌륭하게 삶을 꾸려갈 수 없으며 죽는 것도 곱게 죽을 수 없는 거예요.”

그는 이빨을 깨물고 다시 위로 뛰어 올랐다.

이번에 그는 거의 성공했다. 바위 위의 평평한 곳으로 올라설 뻔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독수리가 되날아왔고 2날개에 바람을 싣고 세차게 바람을 밀어 보냈다. 그는 다시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번에 그는 더욱 참담하게 떨어졌다. 높이 기어오르면 오를수록 더 참담하게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현기증이 나는 가운데 그는 독수리가 냉소를 띄우고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너같은 사람도 망우초(忘优草)를 찾아올 자격이 있느냐?”


5. 여우와의 결혼

그것은 다만 1마리의 독수리에 불과했고 신이 아니었다. 독수리는 냉소를 할 수 없었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말을 1사람은 바로 독수리의 등에 타고 있는 1사람이었다. 독수리는 맴을 돌고 있었으나 사람은 이미 뛰어내렸다. 두둥실 암석 위에 내려섰다. 사람은 결코 그와 같이 경쾌하고 절묘한 신법을 지닐 수 없었다. 달빛은 교결했고 그 사람의 몸체 역시 금빛을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의 몸에는 금사(金絲)로 짠 장포(長袍)가 걸쳐져 있었는데 3자 길이였다. 이 사람은 키가 겨우 3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3자 길이의 장포를 몸에 걸치자 아랫자락이 땅바닥에 끌렸다. 그런데 그의 수염은 그 금포(金袍)보다 더욱 길었다. 그런데 그의 검(劍)은 그의 수염보다도 더욱 길었다. 3자 키의 사람이 등뒤에 4자 길이의 검을 매고 있었고 황금으로 만들어진 검집은 이미 땅에 끌리고 있었다. 이 사람은 사람 같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는 숫제 사람이 아니라 신인지도 몰랐다. 이곳에는 본래 사람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인간 세상에서 이미 발 붙일 곳이 없어진 사람이 어떻게 이곳으로 올 수 있겠는가.

사람보다 못한 사람이 또 어떻게 신호(神狐)와 싸워서 자기의 강함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정붕(丁鵬)은 갑자기 무척 후회했다. 그는 숫제 이곳으로 오지 말았어야 했다. 금색의 장포. 금색의 수염. 금색의 검. 모두 금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이 노인의 키는 4자도 되지 않았으나 그의 표정과 그의 기개는 그야말로 키가 10장(丈)이나 되는 커다란 거인 같았다. 그는 불쑥 물었다.

“조금 전 내 아들을 놀라게 해서 쫓아버린 것이 바로 너냐?”

그는 청청(青青)에게 묻고 있었으나 청청(青青)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 세상에 마치 그가 눈여겨 볼만한 사람이 숫제 없는 듯한 태도였다.

“당신의 아들이라고요…?”

청청(青青)은 웃었다.

“저 새가 당신의 아들이란 말이에요?”

그 노인은 대답했다.

“그것은 새가 아니라 독수리다. 신응(神鷹)으로 독수리 가운데 신이다.”

그의 표정은 무척 엄숙하고 신중했다. 그는 결코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농담을 하는 것도 아닌 듯했다. 청청(青青)은 그러나 웃고 있었다.

“독수리는 새이고 당신 아들은 새이니, 설마하니 당신 역시 1마리의 새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노인은 노했다.

그의 머리는 이미 빠져 반쯤 대머리가 되어 있었는데 그가 성을 내자 대머리 위에 남아 있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모조리 곤두서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기공(氣功)을 절정의 경지에 이르도록 연마했다면 성이 났을 때 머리카락이 쓰고 있는 관(冠) 위로 뻗쳐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천하에 그 어느 누구도 그런 경지에 이를 정도의 기공을 연성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공력은 결코 어떤 사람이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청청(青青)은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우였다. 전설에 의하면 여우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노인의 노여움은 재빨리 가라앉았고 그의 입에서는 차가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네가 내 독수리를 놀라게 해서 쫓아 보낸 것을 보면, 너의 공력도 약하지 않은 것 같구나.”

청청(青青)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오!”

노인은 차갑게 내뱉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너를 죽이지 않겠다…”

그는 오만하게 말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내가 죽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없다. 이제는 겨우 2사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청청(青青)은 약간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아이쿠!”

노인은 물었다.

“왜 그리 놀라는 거냐?”

청청(青青)은 대답했다.

“당신이 정말로 나를 죽이고자 할 때는 여전히 나를 죽일 수 있다고 하길래 그랬지요. 허튼 소리 같이 들리니까요.”

노인은 다시 물었다.

“그게 어째서 허튼 소리냐?”

청청(青青)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나를 죽일 수는 없을 걸요. 왜냐하면 나는 숫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노인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너는 도대체 어떤 물건이냐?”

청청(青青)은 순순히 대답했다.

“나는 어떤 물건이 아니라 여우예요.”

노인은 냉소했다.

“호귀(狐鬼) 따위는 더욱 이 어르신께서 검을 뽑을 가치가 없다.”

그의 기염은 아주 대단했고 담력 또한 엄청나게 큰 편이었다. 그는 놀랍게도 청청(青青) 쪽을 1번 바라보지도 않고 두 손으로 뒷짐을 진 채 그 망우초(忘优草) 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런 사람도 어떤 잊어버려야 할 우수와 번뇌가 있는 것일까. 청청(青青)은 갑자기 그의 앞을 막았다.

“당신은 그 망우초(忘优草)를 건드릴 수 없어요. 손을 대는 것조차도 안 되어요.”

“어째서?”

이제 그녀는 바로 그의 앞에 있었다. 그 노인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이때 그는 그녀의 허리에 매여 있는 그 1자루의 칼을 보았다. 그 1자루의 휘어진 칼이었다. 청청(青青)의 만도(彎刀)는 둥근 달빛 아래 번쩍번쩍 은빛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노인은 갑자기 까마귀 발톱 같은 손을 내밀었다.

“이리 내놓아라.”

청청(青青)은 물었다.

“무엇을 내놓으라는 거지요.”

노인은 대답했다.

“너의 칼.”

청청(青青)은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어째서 내 칼을 당신에게 주어야 하나요?”

노인은 대답했다.

“왜냐하면 내가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청청(青青)은 대수롭지 않게 그 말을 받아 넘겼다.

“당신은 보았잖아요.”

노인은 약간 언성을 높였다.

“나는 너의 칼을 보자는 것이지 칼집을 보자는 것이 아니다.”

청청(青青)은 냉담하게 거절했다.

“내 당신에게 경고하는데 칼집만 보는 것이 좋아요. 결코 이 칼을 보아서는 안 돼요.”

노인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째서?”

청청(青青)은 냉정히 대답했다.

“왜냐하면 이 칼은 절대로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냐하면 칼을 보는 사람들은 이 칼 아래에 죽게 되거든요.”

그 노인은 갑자기 고개를 똑바로 들고 그녀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면서도 아름다웠으며 처절하면서도 요염하고 신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떤 사내들도 1번만 쳐다보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노인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의 동공이 갑자기 수축 되었고 그의 눈동자에는 공포스럽기 이를 데 없는 빛이 떠올랐다.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너였구나!”

설마하니 노인은 옛날에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단 말인가?

설마하니 그는 예전부터 청청(青青)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노인은 갑자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너는 너무 젊다.”

청청(青青) 역시 약간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혹시 당신은 나를 무척 닮은 사람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노인은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너를 모른다. 다만 그 칼을 알 뿐이다. 내가 결코 잘못 보았을 리가 없다. 나는 결코…”

그는 청청(青青)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칼에는 7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느냐?”

청청(青青)은 되물었다.

“어떤 7자 말인가요?”

노인은 천천히 읊듯이 말했다

“小樓一夜聽春雨 (소루일야청춘우) 작은 누각의 밤, 봄비 소리 듣다”

그것은 1수의 매우 아름다운 시였다.

육유(陸游, 1125-1210)의 시이다. 전문은 아래.

臨安 (임안) 서울 땅 임안(臨安)

春雨 (춘우) 봄비 내리다.

初霽 (초제) 비 그치다.



世味年來薄似紗 (세미연래박사사) 세밑이 가고 새해가 오는 느낌 희박하드니

誰令騎馬客京華 (수령기마객경(客卿)화) 누군가 명령을 전하길래 번잡한 서울로 말을 타고 왔다

小樓一夜聽春雨 (서루일야청춘우) (도시의 객이 되어) 작은 누각의 밤, 봄비 소리 듣다가

(한숨을 쉬었드니 1마디가 절로 나온다)

深巷明朝賣杏花 (심항명조매행화) 골목 끝자락여도 내일이면 살구꽃 내통하듯 피겠지?

矮紙斜行閒作草 (왜지사행한작초) (그러면서 편지는 헛소리로 채워지다) 좁아터져버린 여백에 풀 한 포기 그려넣는다



晴窗細乳戲分茶 (청창세유희분다) (경치에 흠뻑 빠져) 창을 앞에 두고 거품이 나는 줄도 모르고 차를 뒤적이다

素衣莫起風塵歎 (소의막기풍진탄) (이제 예순 둘) 소의(素衣) 신분이 겨우 됐으니 벼슬 내려오면 무조건 거절하는 거야

猶及清明可到家 (유급청명가도가) (그렇게 버티다보면 아무리 못해도) 청명(淸明)까진 고향집으로 가겠지



사랑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사람의 마음이 감동되도록 아름다웠다. 정붕(丁鵬) 역시 그 시를 읽어본 적이 있었다. 매번 그가 그 시를 읽거나 그 시를 읊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가벼운 수심이 솟아오르곤 했다. 일종의 가벼운 애수,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청청(青青)과 그 노인의 반응은 달랐다. 그 7자를 말하게 되었을 때 노인의 손은 떨리고 있었고 안색도 변했다.
그 7자를 듣자마자 청청(青青)의 안색도 변했고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꽃바구니를 내던지고 칼자루를 쥐었다. 그 휘어진 칼자루를 말이다. 청청(青青)의 만도(彎刀)는 칼자루마저도 휘어져 있었다. 싱그러운 생화들이 가득 담긴 꽃바구니는 바위 위를 굴러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고 생화들은 산산이 흩어져 비처럼 우수수 쏟아졌다. 꽃비였다. 봄비는 아니었다. 이곳에는 봄비가 없었다. 오직 달이 있을 뿐이었다. 둥근 달이었다. 둥근 달 아래 그와 같이 아름다운 싯귀를 듣고나서 그들은 어째서 그토록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청청(青青)의 손은 그 만도(彎刀)의 휘어진 칼자루를 꼭 쥐었다. 노인은 그녀의 손을 노려보았다. 노인은 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만약에 칼 위에 그 7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결코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노인의 눈동자에 서려 있는 빛은 이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놀람, 의아함, 기쁨, 공포… 그는 갑자기 앙천대소했다. 미친 듯한 웃음이었다.

“하하하, 과연 그 1자루의 칼이었구나.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 내가 드디어 그 칼을 찾아내었구나.”

광소 소리와 더불어 그의 검이 어느덧 검집에서 뽑혀졌다.

3자밖에 되지 않는 키에 4자 길이의 검을 지닌 노인이었지만 그 1자루의 검을 손에 꼭 쥐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의 손은 결코 가소롭지 않았다. 그 1자루의 검이 검집에서 뽑혀지게 되었을 때 그 어떤 사람도 그를 우습게 볼 수 없었다. 그 1자루의 검이 등뒤에서 뽑혀지게 되었을 때 1줄기의 사람을 핍박하는 검기가 대뜸 미간으로 뻗쳐 왔다. 바위 아래에 있던 정붕(丁鵬)마저도 그 1가닥의 검기, 싸늘한 검기를 느낄 수 있었고 그 싸늘한 검기에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가 다시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온 하늘에는 검의 광채가 춤추듯이 어울려지고 청청(青青)은 이미 그 검광 아래에 뒤덮여 있었다. 검기는 허공을 가르고 있었고 검기는 휙휙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노인의 음성은 검풍이 휙휙 거리는 속에서도 여전히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1자 1자 또렷이 말하고 있었다.

“너는 그래도 칼을 뽑지 않느냐?”

청청(青青)은 아직 칼을 뽑지 않고 있었다. 청청(青青)의 만도(彎刀)는 여전히 그 휘어진 칼집 속에 들어 있었다. 노인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죽어라!”

호통소리는 벽력처럼 울려퍼지고 검의 광채는 번갯불처럼 번쩍였다. 설사 번갯불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밝지는 못하고 그렇게 빠르지는 못하리라. 검의 광채가 번쩍하게 되었을 때 청청(青青)의 몸이 바위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1송이의 생화가 갑자기 시들어 꼭지에서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10장(丈)이나 높은 바위 위에서 그녀는 땅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푹 쓰러지고 말았다. 노인은 결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노인 역시 10장(丈)이나 높은 바위에서 아래로 뛰어 내렸다.

마치 1잎의 낙엽처럼 가볍게 천천히 두둥실 아래로 내려섰다. 노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고 검은 이미 검집에서 뽑혀져 있었다. 노인의 손에 들린 칼날은 청청(青青)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이 1검(一劍)은 절대적으로 치명적인 1검(一劍)이었다. 정확하고 악독하고 신속하고 무자비했다. 정붕(丁鵬)은 이 인간 세상에 그와 같은 검법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 노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었다. 살신(殺神)! 청청(青青)은 바로 그의 옆에 쓰러져 있었고 청청(青青)은 이미 그 1검(一劍)을 받아내거나 피할 능력이 없었다.

그 1검(一劍)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정붕(丁鵬)은 갑자기 달려들어 자기의 몸으로 청청(青青)의 몸을 덮었다. 청청(青青)이 사람이든 여우든 그에게 잘 대해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어떻게 청청(青青)이 다른 사람의 검 아래 죽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 그가 다른 사람의 검 아래 죽는 것도 상관없었다. 이미 죽으려고 작정한 이상 어떻게 죽든 상관이 없었다. 그는 청청(青青)의 몸을 덮었다. 그는 청청(青青)을 대신해서 그 1검(一劍)을 맞으려고 했다. 검의 광채가 번쩍, 그의 등을 찔러 들어왔다. 그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진정한 고통은 고통의 느낌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그저 춥기만 했다.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한기가 갑자기 그의 등줄기로 파고들어 그의 뼛속으로 찔러 들어왔다. 바로 이때 그는 청청(青青)이 그녀의 칼을 뽑아든 것을 보았다. 청청(青青)의 만도(彎刀)는 푸르스름했다. 청청(青青)의 칼빛을 발견했을 때 정붕(丁鵬)의 눈은 이미 감기고 있었다. 그는 청청(青青)의 만도(彎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악!”

그는 다만 그 노인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런 후에 그는 어둠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어둠은 밑바닥이 깊어 보이지 않았고 영원히 끝이 없는 어둠이었다. 어둠속에 갑자기 빛이 보였다. 달빛이었다. 둥근 달이었다. 정붕(丁鵬)은 눈을 떴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듯한 쟁반같이 둥근 달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달빛보다도 아름다운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하늘이든 땅이든 그와 같이 아름다운 눈동자는 다시 볼 수 없으리라. 그는 여전히 청청(青青)의 곁에 있었다. 그가 살아있든 죽어있든 혹은 하늘에 있든 땅위에 있든, 청청(青青)은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다. 청청(青青)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붕(丁鵬)은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나는 망우초(忘优草)가 필요 없을 것 같소. 그러나 나는 이렇게 죽는 것이 더욱 좋다고 생각하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에 묻은 눈물자국을 가볍게 훔쳐주었다.

“나는 내가 죽을 때 내 옆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줄 줄은 생각 못했소.”

그 말을 들은 청청(青青)의 안색이 변했고 몸마저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불쑥 물었다.

“내가 정말로 눈물을 흘리고 있나요?”

정붕(丁鵬)은 대답했다.

“당신은 정말 눈물을 흘리고 있소.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소.”

청청(青青)의 안색은 더욱 이상하게 변했다. 말할 수 없이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는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지극히 무서운 일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토록 무서워하는 가운데 희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은 무척 이상한 반응이었다. 정붕(丁鵬)은 그녀가 어째서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참을 수 없어 물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죽는 것이고, 당신은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렸으니…”

청청(青青)은 갑자기 그의 말을 가로챘다.

“당신은 죽지 않았어요. 또 죽지도 않을 거예요.”

정붕(丁鵬)은 의아하게 여겼다.

“어째서?”

청청(青青)은 고즈넉이 대답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1번 죽었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이곳에 온 이상 다시는 죽지 않아요.”

정붕(丁鵬)은 그제서야 이곳이 그 아름다운 우수곡(憂愁谷)이 아님을 알았다. 이곳은 더욱 아름다운 곳이었다. 둥근 달은 창 밖에 솟아 있었고 방안에는 싱싱한 생화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는데 침대 머리맡에는 커다란 명주가 박혀 있었다. 명주 구슬의 광채는 달빛보다 더욱 고결하고 밝았다.

그는 마치 자기가 예전에 와본 적이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정말 왔었다면 틀림없이 꿈속이었으리라. 인간 세상엔 이토록 아름다운 궁실(宮室)이 있을 수 없었고 이토록 아름다운 명주 구슬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곳이 어디지요?”

청청(青青)은 고개를 숙이고 나직히 대답했다.

“이곳은 우리 집이에요.”

정붕(丁鵬)은 어째서 이곳이 눈에 익은지 깨달았다. 그는 정말 이곳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림속에서 본 것이었다. 동굴의 사면 벽에는 그림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그려진 세상은 인간 세상이 아니라 천계(天界)였다.

그는 물어보았다.

“이곳엔 당신 혼자 뿐이오?”

청청(青青)은 대답하지 않았다. 드리워진 주렴의 조그만 문밖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정신을 차렸느냐?”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1자루의 용두(龍頭)괴장(拐杖)으로 주렴을 젖히고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체구는 매우 우람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부티가 났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허옇게 세어 있었으니 허리는 똑바르고 1쌍의 눈동자에 형형한 안광이 감돌고 있었다. 청청(青青)은 고개를 숙이고 몸을 일으키며 공손하게 불렀다.

“할머니.”

이 할머니는 바로 청청(青青)의 조모였다.

아름답고 젊은 호녀(狐女)는 좌절감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젊은이를 그녀의 호혈(狐穴)로 데리고 들어와, 그녀의 엄하고 무서우며 괴팍한 조모를 만나게 된 것이니… 이와 같은 일은 오직 신비한 전설에서만 일어날 수 있었는데 정붕(丁鵬)은 놀랍게도 정말 만난 것이었다. 이후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 그녀들은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정붕(丁鵬)은 예측할 수 없었다. 노파는 냉랭히 그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도 마땅히 이곳에 사람이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네. 우리들은 사람이 아니라 여우일세.”

정붕(丁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노파는 엄하게 말했다.

“자네는 이곳에 사람이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정붕(丁鵬)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노파는 물었다.

“자네는 이미 이곳에 와 있는데 후회하지 않는가?”

정붕(丁鵬)은 힘주어 말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인데 무엇을 후회하겠는가.

그가 이 세상에 남아 있으면 오직 남에게 멸시를 당하고 남에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쓸 뿐인데 그가 어째서 또 다른 세상으로 올 수 없다는 말인가. 그녀들은 비록 여우지만 군자를 자처하는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좋았다. 노파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만약 우리가 자네보고 여기에 남아 있으라고 한다면 자네는 기꺼이 남아 있겠는가?”

정붕(丁鵬)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기꺼이 남아 있겠습니다.”

노파는 다시 물었다.

“자네는 이미 인간 세상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꼈는가?”

정붕(丁鵬)은 솔직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노파는 그 이유를 물었다.

“어째서?”

정붕(丁鵬)은 말을 약간 더듬거렸다.

“저는… 저는 밖에 피붙이도 없을 뿐 아니라 친구도 없습니다. 설사 제가 시궁창에 쓰러져 죽는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나의 시체를 거두어주지 않을 것이며 나를 위해서 1방울의 눈물도 흘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말을 하면 말을 할수록 마음속으로 괴로워서 목이 메이게 되었다. 노파의 눈길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자네는 청청(青青)을 위해서 그 1검(一劍)을 몸으로 받았는데 스스로 원해서 한 일인가?”

정붕(丁鵬)은 솔직히 말했다.

“나는 물론 제가 원해서 그렇게 한 일이지요. 그녀가 지금이라도 나보고 그녀를 위해 죽으라고 하면 나는 여전히 죽을 수 있습니다.”

노파는 다시 그 이유를 물었다.

“어째서?”

정붕(丁鵬)은 멍한 시선으로 방의 한쪽을 응시했다.

“나도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죽은 후에 그녀는 적어도 저를 위해서 눈물을 흘려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노파의 눈동자에 갑자기 기이한 빛이 서렸다. 그녀는 갑자기 청청(青青)에게 물었다.

“너는 이미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렸느냐?”

청청(青青)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백한 얼굴에 엷은 홍조가 떠올랐다. 노파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정붕(丁鵬)을 바라보았다. 역시 오랫동안 뜯어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점점 부드러워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것이 인연인가… 아니면 업보인가…”

그녀는 되풀이해서 그 2마디를 되뇌이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녀 자신도 그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미 저 애를 위해서 1번 죽었고 저 애 역시 자네를 위해서 눈물을 흘린 바 있네.”

정붕(丁鵬)은 여전히 자기가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노파는 그가 더 입을 열지 못하도록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자네는 나를 따라오게.”

정붕(丁鵬)은 몸을 일으켰다. 그제서야 그는 상처가 이미 싸매져 있고 깨끗하고 하얀 무명베에서 맑고 그윽한 약 향기가 풍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1검(一劍)은 절대적으로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어날 수 있었고 그 어떤 고통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그 노파를 따라서 그 주렴이 드리워진 그 조그만 문을 나섰다. 그리고는 참을 수 없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청청(青青) 역시 몰래 그를 훔쳐보고 있었다. 눈동자에 서린 빛이 이상했다. 부끄러워하는 것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었다. 밖은 화원이었다. 아주 커다란 화원이었다. 둥근 달은 높다랗게 걸려 있었고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7월에 피어야 할 꽃들이 이곳에 모두 피어 있었다. 그것도 한창 화사하게 피고 있었다. 7월에 피지 말아야 할 꽃들도 이곳에 있었으며 역시 활짝 피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꽃밭 사이의 소로길에는 수정같이 윤기가 돌고 옥과 같은 둥근 자갈들이 깔려 있었고 그 소로길의 막다른 곳에는 1채의 소루(小樓)가 있었다. 노파는 정붕(丁鵬)을 데리고 그 소루(小樓)로 올라섰다. 소루(小樓) 위는 아늑하고 화려했다. 1청의인(靑衣人)이 두 손으로 뒷짐을 진 채 벽에 걸려있는 화폭(畵幅)의 글자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화폭에는 겨우 7자가 쓰여 있었다. 그 글씨는 무척 힘차면서도 수려했다.

-小樓一夜聽春雨 (소루일야청춘우) 작은 누각의 밤, 봄비 소리 듣다!

그 청의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노파의 눈길이 더욱 온화하고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그 청의인이 몸을 돌리게 되었을 때 정붕(丁鵬)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남자는 청청(青青)과 아주 흡사하게 생겼다. 그의 눈썹, 그의 입, 그의 코, 그의 표정은 완전히 청청(青青)의 것과 일치했다. 정붕(丁鵬)은 생각했다.

(이 사람이 청청(青青)의 부친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청청(青青)의 오라비일 것이다.)

그 사람은 청청(青青)의 오라비가 되기에는 나이가 좀 많은 것 같았다. 그러나 청청(青青)의 아버지가 되기에는 나이가 좀 적은 것 같았다.

그 사람의 안색은 투명할 정도로 창백했다. 그는 노파를 보더니 담담히 웃었다.

“어떻소?”

노파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역시 어찌 할 바를 모르겠군요. 역시 당신이 결정하세요.”

청의인은 웃었다.

“나는 당신이 틀림없이 이번 일을 나에게로 미룰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노파 역시 웃었다.

“내가 당신에게 미루지 않고 누구에게 미루겠어요.”

그들의 웃음띤 얼굴엔 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들의 태도로 볼 때, 모자 같지도 않았고 조손(祖孫)같지도 않았다. 정붕(丁鵬)은 더욱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파는 다시 더욱 그를 놀라게 하는 말을 했다.

“당신은 청청(青青)의 할아버지이고 1집안의 가장이니, 이번 일은 마땅히 당신이 결정해야 해요.”

이 청의인은 바로 청청(青青)의 조부였다. 그는 기껏해야 중년에 가까운 사내로 보였을 뿐이었다. 그가 이 노파의 남편이라니… 청의인은 정붕(丁鵬)을 바라보았다. 그가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알아차린듯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우리가 여우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네. 자네는 이곳에서 그 무엇을 보든지 너무 이상하게 생각 말고 놀라지도 말게나…”

그는 더욱 온화하고 유쾌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들은 사람들이 꿈에도 생각 못하는 신통력을 약간 가지고 있다네.”

정붕(丁鵬) 역시 미소지었다. 그는 이미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습관이 된 것 같았다. 그는 이 여우들이 결코 전설에서 들은 것처럼 무섭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이 비록 여우이기는 하나 그들에게도 인성(人性)이 있었고 오히려 대다수의 사람들보다도 온화하고 선량했다. 청의인은 그의 태도에 무척 만족스러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본래 청청(青青)이 사람에게 시집갈 줄은 전혀 생각 못했네. 그러나 자네가 이미 그 애를 위해서 1번 죽었고, 그 애 역시 자네를 위해서 눈물을 흘렸지 않은가…”

그의 웃음은 더욱 온화해졌다.

“자네도 알다시피 여우는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네. 여우의 눈물은 피보다도 더욱 귀하다네. 그 애가 자네를 위해서 눈물을 흘린 것은, 그 애가 이미 자네에 대해서 참된 정을 느꼈다는 증거일세. 자네가 그 애를 만나게 된 것도 자네들 사이에 인연이 있는 것임을 나타낸 것일세.”

인간 세상이든 여우의 세상이든 참된 정과 연분이라는 것은 억지로 구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청의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자네들의 그런 연분을 떼어 놓고 싶지 않네.”

노파는 옆에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청청(青青)이 그에게 시집가는 것을 허락하신 거예요?”

청의인은 미소를 띄웠다.

“나는 허락하겠소.”

정붕(丁鵬)은 여지껏 입을 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큰 혼란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가 여우의 세상으로 들어올 줄은 생각도 못했고 자기가 호녀(狐女)를 아내로 삼을 줄은 더더욱 생각 못했던 것이다.

- 사람이 여우를 아내로 삼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생기게 될까?

- 사람이 여우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 여우는 신통력으로 사람을 도와줄 수 있을까?

이와 같은 문제들을 그는 1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숫제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는 다만 자기의 운명이 이때부터 바뀌게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장래의 운명이 어떤 모양으로 변하든 그는 숫제 그 누구를 원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죽어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또 1가지 가장 중요한 점은 청청(青青)이 그에게 정말 참된 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정붕(丁鵬)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혼란 속에서 청의인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네가 우리들의 손녀 사위가 된 이후에는 사람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누리게 될 것일세. 이곳은 언제나 자유스럽지만 우리에게도 1가지 금례(禁例)가 있다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가 우리 집의 사위가 된 후에는, 다시는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일세…”

이어 그는 정붕(丁鵬)을 바라보았다.

“우리들은 자네가 이미 인간 세상을 혐오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네를 거두어 들였네.”

그는 정중하게 다시 1마디를 덧붙였다.

“자네가 영원히 우리들의 금례(禁例)를 어기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이제 자네는 바로 우리 집안의 사위일세.”

인간 세상에 그에게는 피붙이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 그는 오직 남에게 능멸을 당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호녀(狐女)는 그에게 사랑을 느낀 것이었다.

“약속하지요.”

정붕(丁鵬)은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약속합니다.”

노파 역시 웃으며 다가와 그를 얼싸안았다.

“우리들은 자네에게 줄 물건이 없네. 이것으로 우리가 자네에게 주는 정례(訂禮)로 삼도록 하지.”

그녀는 그에게 1자루의 휘어진 칼을 주었다. 청청(青青)의 만도(彎刀)였다. 청청(青青)의 만도(彎刀)는 칼날 역시 시퍼랬는데 멀리 보이는 산처럼 푸르고 봄날의 나무처럼 푸르렀으며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눈동자에 비친 호수처럼 푸르렀다. 청청(青青)의 만도(彎刀)에는 과연 7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小樓一夜聽春雨 (소루일야청춘우) 작은 누각의 밤, 봄비 소리 듣다!


그곳은 유곡(幽谷)이었다. 고즈넉하고 깊은 산골짜기였다. 사면은 모두 기어오를 수 없는 절벽이었다. 숫제 나갈 길이 없는 것 같았다.

설사 길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 출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산골짜기는 그렇게 넓지 않았다. 비록 정원과 궁실이 있었고 정자와 누각이 있었지만… 청청(青青)의 부모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 여우도 죽는 것일까?

청청(青青)에겐 영악한 하녀가 있었다. 이름은 희아(喜兒)라고 했다. 희아(喜兒)는 언제나 웃기를 좋아했다. 웃을 때는 뺨에 깊은 보조개가 파이곤 했다.

- 희아(喜兒) 역시 여우일까?

그들에게는 8명의 충성스러운 하인들이 있었다. 모두 백발이 성성했지만은 체력만큼은 아직 왕성한 것 같았다.

- 그들은 모두 여우일까?

산골짜기에는 오직 그들만이 있었고 외부 사람들의 발자취가 이곳까지 미친 적이 없었다. 산골짜기 안의 세월은 편안하고 인간 세상보다 훨씬 평화스럽고 조용했다… 이제 정붕(丁鵬)은 이미 산골짜기의 생활에 습관이 들었다. 그 만도(彎刀)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데도 습관이 되었다. 잠잘 때 외에는 언제나 그 만도(彎刀)를 자기의 허리띠에 푹 꽂아 놓곤 했다. 1조각의 황금과 백옥으로 만들어진 허리띠였다. 그러나 그는 이 만도(彎刀)가 허리띠보다 더욱 진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신혼(新婚) 이튿날 청청(青青)은 그에게 말했었다.

“할머니는 틀림없이 당신을 좋아했을 거예요. 그래서 이 칼을 당신에게 준거예요. 당신은 반드시 특별히 아껴야 해요.”

그 역시 그날 청청(青青)이 우수곡(憂愁谷)에서 그 신비한 땅딸한 노인에게 하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 1칼은 절대 봐서는 아니 되어요. 이 칼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칼 아래 죽게 되어요.”

그 땅딸한 노인은 물론 그 칼 아래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 그는 사람인가? 귀신인가? 아니면 여우인가?

- 그가 어떻게 칼에 小樓一夜聽春雨 (소루일야청춘우) 작은 누각의 밤, 봄비 소리 듣다 라는 7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 이 칼은 도대체 어떤 신비한 내력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들을 정붕(丁鵬)은 결코 묻지 않았다. 그러나 청청(青青)은 언제나 그에게 정색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떤 일들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아요. 알게 된다면 반드시 재앙이 생기게 마련이에요.”

그는 이 칼을 보았을 뿐 아니라 이미 이 칼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이제 무척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날 그는 이 칼을 청청(青青)에게 되돌려주려고 했다. 청청(青青)은 무척 이상하게 생각했다.

“당신은 어째서 이 칼을 마다하는 거지요?”

정붕(丁鵬)은 나직히 말했다.

“왜냐하면 내가 가져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이오…”

그는 다시 1마디 덧붙였다.

“이 칼이 내 손에 쥐어져 있어 봤자 무용지물이기 때문이오.”

청청(青青)은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렇지요?”

정붕(丁鵬)은 솔직히 대답했다.

“왜냐하면 나는 숫제 당신들의 도법(刀法)을 모르기 때문이오.”

청청(青青)은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만약 당신이 배우겠다면 제가 당신에게 그 도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사실 그녀는 그 도법을 그에게 전수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도법을 알게 된다면 큰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이 도법은 사람들에게 무궁한 힘을 안겨주지만, 또한 사람들에게 불길함과 재앙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도법을 그에게 가르쳐주었다. 왜냐하면 1번도 그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1번도 그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우이긴 하지만 인간 세상의 아내들보다 더욱 현숙하고 슬기롭고 온화하며 부드러웠다. 그 누구든 이와 같은 아내를 가지게 된다면 마땅히 만족함을 느껴야 하리라. 이 도법은 결코 인간 세상의 도법이 아니었고 이 도법의 변화와 위력은 사람이 상상도 못할 지경이었다. 정붕(丁鵬)은 자기가 이와 같이 신비하고 이와 같이 정묘한 도법을 연마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연마했다. 청청(青青)조차도 그가 무공을 익히는데 있어서 천재라는 것을 인정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이와 같은 도법을 연마하는데 꼬박 7년이 걸렸는데, 정붕(丁鵬)은 겨우 3년만에 연마했기 때문이었다.


6. 여우굴 탈출

산골짜기의 생활은 편안하고 조용할 뿐 아니라 사시사철 지지 않는 향긋한 꽃이 피어 있었고 언제라도 딸 수 있는 신선한 과일이 있었다. 인간 세상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희귀한 동물들도 이곳에서는 1푼의 가치조차 없는 것 같았다. 소루(小樓)의 아래쪽에는 지하실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천축에서 가지고 온 비단, 페르시아에서 가지고 온 보석, 그리고 각양각색의 꿈에도 생각 못할 기묘한 골동품이나 보석들, 명주고옥(明珠古玉) 등이 있었다.

청청(青青)은 온유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현숙하고 슬기롭고 알뜰하게 남편에게 순종했다. 정붕(丁鵬)은 마땅히 매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점점 수척해졌다. 몸이 수척해졌을 뿐 아니라 얼굴빛도 초조해졌다. 침묵에 빠져서 좀처럼 말하지 않았고 우울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더군다나 그는 가끔 악몽을 꾸어 가위에 눌리곤 했다. 그는 악몽을 꿀 때마다 갑자기 침대 위에서 벌떡 뛰어 일어났고 그때마다 그의 온몸은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청청(青青)은 그에게 꿈의 내용을 여러 번 물어 보았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나는 꿈에 선친을 보았소. 그 어르신은 1쌍의 손으로 나를 목졸라 죽이려고 했소.”

청청(青青)은 다시 물었다.

“그분이 어째서 당신을 목졸라 죽이려고 했나요?”

정붕(丁鵬)의 표정은 슬펐다.

“그 어르신은 내가 불효하다고 했으며 못난 놈이라고 하셨소…”

그는 고통스럽게 다시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그 어르신이 임종시에 남긴 유언을 깡그리 잊어버렸기 때문이오.”

청청(青青)은 달래듯 말했다.

“기실 당신은 잊지 않았어요.”

정붕(丁鵬)은 고개를 끄떡였다.

“잊지 않았소…”

그는 다시 1마디를 덧붙였다.

“사실 나는 한시도 그 말씀을 잊은 적이 없소.”

청청(青青)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 어르신은 임종시에 당신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하셨나요?”

정붕(丁鵬)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1자 1자 뚜렷이 말했다.

“남보다 뛰어난 검객이 되어 그분 어르신의 체면을 세워 달라고 했소.”

청청(青青)은 물론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청청(青青)은 그가 꾸는 악몽이 그런 종류 뿐 아니라, 또 다른 악몽은 더욱 두렵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정붕(丁鵬)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감히 말할 수 없었다. 꿈속에서 여우의 굴 속에 빠진 것이었다.

그의 아내와 그의 장인, 그리고 장모님이 모두 1떼의 여우로 변해서 그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 1조각씩 씹어 삼키는 꿈이었다. 그는 그들이 여우라는 사실을 잊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부드러운 명주구슬의 광채가 청청(青青)의 창백하고도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어주었고 그녀의 뺨에는 이미 눈물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뜻을 알고 있어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어느 날엔가 당신이 떠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당신은 절대로 이곳에서 한평생을 보낼 수 없어요. 이와 같은 세월을 당신은 견뎌내지 못할 거예요.”

정붕(丁鵬)은 부인하지 않았다. 지금 유약송(柳若松)이나 종전(鐘展), 홍매(紅梅) 및 묵죽(墨竹) 같은 사람들은 그의 무공과 도법을 일격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허리띠에 꾹 찔러져 있는 1자루의 칼로 강호를 종횡하고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미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는 이런 일을 떠올리면 온몸의 피가 치솟아 올랐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미래를 위해서 분투할 권리가 있었다. 그 누구라도 이런 처지에서는 정붕(丁鵬)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정붕(丁鵬)은 차분히 말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당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결코 나를 놓아 보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소.”

청청(青青)은 고개를 숙이고 망설이며 그의 마음을 떠보려는 듯 물었다.

“당신은 혼자 떠나고 싶은 것이 아닌가요?”

정붕(丁鵬)은 힘주어 말했다.

“나는 물론 당신을 데려갈 작정이오.”

청청(青青)은 눈을 빛냈다. 그녀는 힘주어 그의 손을 잡았다.

“정말로 나를 데려가 주시겠어요?”

정붕(丁鵬)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우리들은 이미 부부지간이오. 내가 어디를 가든 당신을 곁에 두어야 할 것이 아니겠소.”

청청(青青)은 다시 물었다.

“그 말이 진정인가요?”

정붕(丁鵬)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청청(青青)은 입술을 깨물고 끝내 결심을 내린 듯 말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떠나겠다면 우리 함께 가도록 해요.”

정붕(丁鵬)은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간다는 말이오?”

청청(青青)은 대답했다.

“내가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지요…”

그녀는 그를 얼싸안았다.

“당신이 나에게 진심으로 대하기만 한다면 당신을 위해 죽는다 해도 나는 기꺼이 응할 거예요.”

떠나려면 물론 계획을 세워야 했다. 2사람은 은밀하게 상의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청청(青青)의 조부였다.

“그 어르신의 신통력은 대단해요.”

정붕(丁鵬)은 그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신기한 도법을 연마했던 것이다. 청청(青青)은 그러나 강조했다.

“당신의 도법은 그 어르신 면전에서는 1초(一招)도 펼칠 수 없을 거예요. 그 어르신이 손만 뻗친다면 당신은 쓰러지게 되어 있어요.”

정붕(丁鵬)은 믿고 싶지 않았다.

청청(青青)은 살그머니 말했다.

“그래서 우리들이 떠나려면 반드시 그 어르신이 계시지 않을 때 살그머니 떠나야 해요.”

정붕(丁鵬)은 걱정스러운듯 말했다.

“그 어르신은 1번도 출타를 1적이 없는 것 같더구려.”

청청(青青)은 그 말을 받았다.

“그러나 매년 15일 저녁에 그 어르신은 자기 자신을 자기의 그 조그만 방안에 가두어 두어요. 그리고 몇 시진 동안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상관하지 않아요.”

정붕(丁鵬)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르신이 우리가 떠나간 것을 알게 된다면 뒤쫓아 올 것이오.”

청청(青青)은 자신있게 말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정붕(丁鵬)은 그 이유를 물었다.

“그건 어째서?”

청청(青青)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 어르신은 이미 결코 이 골짜기에서 1걸음도 나가지 않겠다고 무거운 맹세를 했기 때문이에요.”

정붕(丁鵬)은 말했다.

“그러나 그대의 할머니도 결코 만만한 분은 아니오.”

청청(青青)은 자신있게 말했다.

“나에게는 할머니를 상대할 방법이 있어요.”

정붕(丁鵬)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떤 방법이오?”

청청(青青)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 어르신은 보기에 무척 엄격한 것 같지만 사실은 마음이 여려요. 뿐만 아니라…”

그녀는 갑자기 이 일과는 상관이 없는 말을 물었다.

“당신은 우리 부모님이 어떻게 세상을 떠나셨는지 아세요?”

정붕(丁鵬)은 몰랐다. 그는 1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고 그들 역시 1번도 들먹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비밀임에 틀림없었다. 청청(青青)의 얼굴에 슬픔이 떠올랐다.

“우리 어머님 역시 사람이었어요. 당신처럼 말이에요. 언제나 우리 아버님이 그 분을 데리고 이곳에서 떠나주기를 바랬지요…”

그녀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2살이 되기 전에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그러나 나는 그 어르신이 예전에 강호에서 1분의 지극히 유명한 협녀였고 유명한 미녀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 이와 같이 평범하고 담백한 생활에 그녀는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던 거예요.”

정붕(丁鵬)은 물었다.

“당신의 선친은 그녀를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었소?”

청청(青青)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선친께서는 그녀에게 응낙했어요. 그러나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한사코 반대하셨어요. 그들은 2번이나 떠났지만 실패했어요. 그래서 저의 어머니는…”

그녀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정붕(丁鵬)은 이미 그 결과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자결했으리라. 청청(青青)은 다시 말을 이었다.

“저의 어머님이 세상을 떠난 지 몇 달 뒤에 아버님마저도 몸저 누워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지요…”

그들은 여우이고 신통한 법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어떤 병은 치료할 수 없었다.

마음의 병은 특히 그러했다. 이 점은 정붕(丁鵬)도 상상할 수 있었다. 청청(青青)은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일을 우리 할머니는 1번도 들먹이지 않았지만 할머니께서 마음속으로 무척 괴로워하시지요. 내가 그 일을 들먹이면 할머니는 반드시 우리를 보내주실 거예요.”

이미 말년을 맞이한 노인은 차마 그녀의 손녀 부부가 윗대와 똑같은 비참한 운명의 길을 걷도록 하지는 못하리라. 청청(青青)이 그 일을 이야기한 것은 그녀와 정붕(丁鵬)이라는 부부지간에도 그녀의 부모와 똑같은 깊은 정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었다.

정붕(丁鵬)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희망이 있구려.”

청청(青青)은 걱정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최소한 8개의 문제가 있어요.”

정붕(丁鵬)은 의아한 얼굴빛이 되었다.

“8개의 문제라니?”

청청(青青)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지도 많지도 않게 8개예요.”

정붕(丁鵬)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틀림없이 그 8명의 충성심이 강한 하인들일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말이 적었다. 그리고 정붕(丁鵬)과 상당한 간격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과도 가까이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았고 그들 주인의 손자 사위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들 모두 마음속에 깊은 고통을 갈무리하고 있는 것 같았고 무척 커다란 비밀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정붕(丁鵬)은 은근히 걱정이 되어서 물었다.

“설마하니 그들 역시 상대하기 어렵단 말이오?”

청청(青青)은 신중해졌다.

“당신은 절대로 그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되어요. 그들에게는 저의 할아버지와 같은 신통력이 없지만, 그들이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강호에서는 절정의 고수가 될 거예요…”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강호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협사들과 검객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요.”

정붕(丁鵬)은 호기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당신은 누구를 보았었소?”

청청(青青)은 솔직히 대답했다.

“당신이 말하는 홍매(紅梅)와 묵죽(墨竹)을 나는 모두 본 적이 있어요.”

정붕(丁鵬)은 다시 물었다.

“그들 2사람도 그들에게 견줄 수 없다는 것이오?”

청청(青青)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도 10초(招) 안에 홍매(紅梅)와 묵죽(墨竹)을 격퇴시킬 수 있어요.”

정붕(丁鵬)은 눈살을 찌푸렸다.

홍매(紅梅)와 묵죽(墨竹)은 강호에서 일류 고수였다. 10초(招) 안에 그들 2사람을 격퇴시킨다면 실로 불가사의한 실력이었다. 그러나 정붕(丁鵬)은 믿었다. 청청(青青)은 다소곳이 말했다.

“다행히 매년 7월 15일이 되면 그들은 무척 많은 술을 마시게 되어요.”

정붕(丁鵬)은 물었다.

“혹시 취하도록 마시는 것이 아니오?”

“때로는 취하고 때로는 취하지 않아요. 그들의 주량은 무척 대단하니까요…”

그녀는 방그레 웃었다.

“그러나 저에게는 아무리 주량이 대단한 사람이 마신다 해도 반드시 취하게 하는 술이 있어요.”

정붕(丁鵬)은 그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우연히 그런 술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오?”

청청(青青)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찾아낼 수 있었어요.”

정붕(丁鵬)의 눈동자는 다시 빛을 발했다.

“오늘이 무슨 날이오?”

청청(青青)은 대답했다.

“6월 그믐이에요.”

다시 15일만 기다리면 7월 15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반달을 보내고 나면 정붕(丁鵬)이 이곳에 온지도 꼬박 4년이 되는 셈이었다. 정붕(丁鵬)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세월은 빠르구려. 눈깜짝할 사이에 4년이 흘러가고 말았소. 하지만 내가 4년을 더 살 수 있을 줄은 옛날에는 생각 못했었지.”

청청(青青)은 가볍게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여전히 살아남을 거예요. 앞으로 몇 번의 4년을 살아남을지 몰라요.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는 한 당신은 죽을 수가 없으며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나도 죽을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있고서야 내가 있는 것이고, 내가 있게 된다면 바로 당신이 있기 때문이에요.”

7월 15일. 밤. 둥근 달이 떠올랐다. 정붕(丁鵬)은 청청(青青)을 믿었다. 그는 8명의 입이 무겁고 충성스러운 노인들이 틀림없이 취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과연 그들은 취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취한 사람은 청청(青青)의 조모였다. 오늘 그녀는 누구보다도 무거운 시름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들과 함께 술을 마셨고 그 누구보다도 빨리 술을 마셨으며 그 누구보다도 많이 마셨다. 그래서 그녀는 먼저 취하고 만 것이었다. 그들은 그래도 여전히 마시고 있었다. 부어라 마셔라 1마디도 말하지 않고 끊임없이 마셔대고 있었다. 그들은 취한 후에야 술마시기를 멈출 것 같았다. 이제 그들은 모두 취하고 말았다. 소루(小樓)의 옆에 있는 이 1칸은 궁전보다 더 화려한 화청이었다.

이제는 겨우 2사람만이 맑은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이 산골짜기에서 오직 그들 2사람만이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정붕(丁鵬)은 청청(青青)을 바라보았고 청청(青青) 역시 정붕(丁鵬)을 바라보았다. 정붕(丁鵬)의 눈동자는 희열과 흥분으로 가득차 있었다. 청청(青青)의 표정은 무척 복잡했다. 이곳은 그녀의 집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자라났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이제 그녀는 떠나려 하고 있었다. 전혀 낯선 세상으로 가서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다시 돌아올 수도 없었다.

그녀의 마음이 심란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정붕(丁鵬)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당신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소. 나도 당신이 이곳을 떠나는 것을 아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이오.”

청청(青青)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나는 사실 이곳에서 떠나는 것이 약간 아쉽기는 해요. 그러나 나는 당신 곁을 떠날 수가 없어요.”

청청(青青)은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정말로 나를 데리고 떠나고 싶나요?”

정붕(丁鵬)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정말이오.”

청청(青青)은 다시 말했다.

“당신의 뜻을 바꾸려면 아직도 늦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 혼자 떠나도록 해줄 수 있어요.”

정붕(丁鵬)은 힘주어 말했다.

“내가 말한 바 있지만 내가 어디로 가면 당신도 그 어디로 가야 하오. 또 내가 있으면 당신도 있어야 하는 것이오.”

청청(青青)은 다짐을 받으려는 듯 다시 물었다.

“당신은 후회하지 않나요?”

정붕(丁鵬)은 되물었다.

“내가 어째서 후회한다는 것이오?”

청청(青青)은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는 이별의 애수가 서려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부드러운 정과 감미로움이 서려 있었다.

여인이 바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한평생을 의지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녀는 여인이었다. 여호(女狐)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그녀는 엄하고 매섭지만 자상하기 이를 데 없는 할머니를 보지 않고 떠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참을 수 없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주름살이 잡혀 있는 할머니의 얼굴에 입맞춤했다. 이번에 헤어지면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붕(丁鵬)마저도 마음속이 시큰해졌다.

“자, 이제 그만하구려. 그들이 깨어나기 전에 떠나야 하오.”

청청(青青)은 그 말을 얼른 받았다.

“그들은 결코 깨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이 술은 우리 할아버지의 비방으로 빚어진 것이라 설사 신선이 마셨다 해도 6시진 후에야 깨어날 수 있어요.”

정붕(丁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6시진이라면 충분하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1사람이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맞았다. 6시진이면 충분하다.”

사람들마다 웃을 줄을 알고 있다. 매일 모든 사람들은 웃고 있으며 곳곳에서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붕(丁鵬)은 1번도 그런 웃음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는 심지어 이 세상에 그런 웃음소리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 웃음소리는 매우 높으면서 우렁찼다. 마치 수100 수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일시에 웃음을 터뜨리는 것 같았다. 웃음소리는 갑자기 동쪽에서 들려왔다가 갑자기 서쪽에서 들려오는 것이 마치 사면 팔방에서 사람들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1사람이 터뜨린 것이었다. 정붕(丁鵬)은 그 사람을 볼 수 있었다. 1명의 지극히 깡마른 사람이었다. 바람에 비쩍 마른 검은 대추와 같은 흑포(黑袍) 노인이었다. 문 입구에는 본래 사람이 없었다.

절대적으로 사람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흑포(黑袍)노인은 이때 똑바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정붕(丁鵬)이 장님이 아니고 시력이 잘못된 것도 아니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노인이 언제 나타났는지 보지 못했다. 그가 어느 곳에서 이곳으로 달려왔는지도 보지 못했다. 그는 땅에서 솟아 오른 듯 홀연히 나타났다. 그 웃음소리는 아직 멎지 않고 있었다. 탁자 위의 술잔과 쟁반들, 그리고 사발들이 그 웃음소리에 진동되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들썩거렸고 어떤 것들은 충격을 받아 산산 조각이 났다.

정붕(丁鵬)은 고막이 얼얼해지는 충격을 받았고 머리속도 진동을 받아 갈라질 것만 같았다. 그 노인의 웃음소리를 멈추게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무슨 일을 시킨다 해도 기꺼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사람의 웃음소리가 이토록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일찍이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청청(青青)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눈에는 공포의 빛이 가득차 있었다. 그러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왜 웃는 거지요?”

그녀의 음성은 뾰족하고 가늘었으나 1대의 침처럼 웃음 속을 뚫고 들어갔다. 그 흑포(黑袍)의 노인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8마리의 조그만 여우들은 모두 솜씨를 가지고 있고 특히 저 암여우는 녹녹하게 볼 인물이 아니지. 그들을 모조리 처치한다는 것은 수월한 노릇이 아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누가 나를 대신해서 그들을 나가떨어지게 만들었으니 내 부담이 훨씬 줄어들었다.”

청청(青青)은 안색이 변해서 매섭게 호통쳤다.

“당신은 누구예요? 어쩌자는 거예요?”

흑포(黑袍) 노인의 웃음소리는 끝내 멎었다. 차갑디 차가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나는 너희들의 여우 가죽을 홀랑 벗겨 내 손자의 옷을 만들어주겠다.”

청청(青青)은 냉소하며 갑자기 정붕(丁鵬)의 허리춤에 꽂혀져 있는 만도(彎刀)를 뽑아 들었다. 청청(青青)의 칼빛은 휘어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마치 초승달 같았는데 갑자기 1가닥의 허공을 가로지르는 무지개로 화했다. 정붕(丁鵬)은 그 1칼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그 1칼을 막아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생각은 틀렸다. 노인의 기다란 소맷자락이 뻗쳐나더니 마치 1송이의 검은 구름처럼 갑자기 그 1가닥의 허공을 가로지르는 무지갯빛을 휘감아 버리는 것이었다.

청청(青青)은 허공에서 재주를 넘으며 충격을 받은 나머지 3장(丈) 밖으로 날아가게 되었고 땅바닥에 내려서게 되었을 때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흑포(黑袍)의 노인은 냉소했다.

“네까짓 조그만한 여우가 얄팍한 도행(道行)을 믿고 덤벼들다니, 아직 멀었다.”

청청(青青)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으나 1걸음 2걸음 뒤로 물러섰다. 뒤에는 하나의 문이 있었다. 흑포(黑袍)의 노인은 냉랭히 입을 열었다.

“너는 가서 늙은 여우를 불러올 생각이냐? 설마하니 너는 오늘이 7월 15일이고 달이 둥글게 되는 자정에는 음양교태(陰陽交泰)하는 시각이며, 그가 내공을 연마하는데 있어서 가장 힘겨울 때인 줄을 잊었더란 말이냐? 그의 앞에서 너의 가죽을 벗긴다 해도 그는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가 일단 주화입마(走火入魔) 된다면 영겁으로 떨어져 다시는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청청(青青)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완전히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그들이 도망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흑포(黑袍)노인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정붕(丁鵬)을 노려보았다.

“너는 사람이지 여우가 아니로구나.”

정붕(丁鵬)은 부인할 수 없었다. 흑포(黑袍)노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여우만 죽이지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그는 손을 내저었다.

“너는 가거라. 빨리 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내가 뜻을 바꾸기 전에 말이다.”

정붕(丁鵬)은 어리둥절해졌다. 이 노인이 자기를 놓아주다니, 전혀 생각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사람이지 여우가 아니었다. 이것은 호겁(狐劫)이니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지금 그는 한창 젊은 나이이고, 배운 무공으로 이미 충분히 강호를 주름잡을 수 있고 무림을 굽어볼 수 있었다. 그가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즉시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어서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호령할 수 있을 터였다. 이제 이 노인이 그를 놓아준다니 그는 물론 떠나야 했다. 흑포(黑袍) 노인은 냉랭히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어째서 가지 않느냐? 너는 설마하니 그들과 함께 죽고 싶다는 것이냐?”

정붕(丁鵬)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소.”

그는 갑자기 훌쩍 앞으로 달려나가 청청(青青)의 앞을 가로막았다.

“만약에 당신이 그녀를 죽이고자 한다면 먼저 나를 죽여야 할 것이오.”

청청(青青)의 몸뚱이는 이미 맥이 빠져 있었다. 그녀의 몸뚱이는 정붕(丁鵬)의 품안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웃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희열로 가득차 있었고 놀람과 고마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뿐만 아니라 1가닥 너무나 짙어서 풀기 어려운 부드러운 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당신은 진정, 기꺼이 나와 함께 죽겠나요?”

정붕(丁鵬)은 힘주어 말했다.

“내 말한 바 있지만 내가 있으면 바로 당신이 있고, 당신이 어디로 가든 나는 당신과 함께 할 것이오. 당신이 지옥으로 간다면 나 역시 당신을 따라 지옥으로 갈 것이오.”

흑포(黑袍)노인은 매섭게 다그치듯 물었다.

“너는 정말로 그녀와 더불어 죽겠다는 것이냐?”

정붕(丁鵬)은 힘주어 대답했다.

“정말이오.”

흑포(黑袍)노인은 냉소했다.

“네가 죽겠다면 그거야 수월한 노릇이지.”

정붕(丁鵬)은 맞섰다.

“아마 그렇게 수월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는 청청(青青)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눕혀 놓고 냅다 흑포(黑袍)노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모든 힘을 다해서 그 흑포(黑袍)노인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는 이미 4년 전의 정붕(丁鵬)이 아니었다. 그의 신법은 날렵하면서도 정묘하고 신기할 정도였다. 그의 손 씀씀이는 정확하고 신속했다. 그의 무공은 이미 무림의 어느 명가(名家)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이 노인이 어떠한 사람이든, 귀신이든, 여우든, 지금의 정붕(丁鵬)을 죽인다는 것은 결코 수월한 노릇이 아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붕(丁鵬)의 몸뚱이가 막 떠오르게 되었을 때 그는 1송이의 검은 구름과 같은 것이 맞은편에서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그는 피하려고 했으나 피할 수 없었다. 그런 후에 그는 끝없이 펼쳐져 있는 어둠 속으로 떨어졌는데 그 어둠은 영원히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 갑자기 빛이 나타났다. 달빛이었다. 둥근 달이었다. 정붕(丁鵬)은 눈을 떴다. 그러자 쟁반같이 둥근 달을 볼 수 있었고, 청청(青青)의 달빛보다도 더욱 부드러운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하늘에서나 땅위에서나 그처럼 부드러운 눈동자는 찾아볼 수 없으리라. 청청(青青)은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다. 그가 죽든 살아 있든, 그가 하늘에 있든 땅위에 있든, 청청(青青)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청청(青青)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 눈동자와 둥근달, 이런 광경은 정붕(丁鵬)이 지난번 그 금포에 금빛 수염을 기른 땅딸한 노인의 검 아래에 기절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되었을 때와 똑같았다. 그러나 지난번에 그는 죽지 않았었다. 이번에는? 이번에도 그는 죽지 않았다. 청청(青青)도 죽지 않았다. 그 무서운 흑포(黑袍)노인은 어째서 그들을 놓아준 것일까? 혹시 그들의 참된 정에 감동했기 때문일까? 그들의 너무나 순수한 정 때문일까? 정붕(丁鵬)은 나직히 물었다.

“나는 정말 죽지 않았소?”

청청(青青)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살아 있는데 당신이 어떻게 죽겠어요. 당신이 죽게 된다면 내가 또 어떻게 살아 있겠어요.”

그녀의 눈동자에 서려있는 눈물은 바로 환희의 눈물이었다.

“우리들이 함께 있기만 한다면 우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영원토록 함께 있게 될 거예요.”

정붕(丁鵬)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구려.”

청청(青青)은 물었다.

“어떤 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거예요?”

정붕(丁鵬)은 나직히 말했다.

“나는 그 흑포(黑袍)를 입은 노괴물이 어째서 우리를 놓아주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구려.”

청청(青青)은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노괴물은 진짜 노괴물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정붕(丁鵬)은 의아하게 물었다.

“그는 누구요?”

청청(青青)은 다소곳이 말했다.

“그분은 바로 우리 할아버지예요.”

정붕(丁鵬)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청청(青青)은 다시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당신이 떠날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우리 일거일동을 그는 모두 파악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는 우리 할머니와 내기를 한 거예요.”

정붕(丁鵬)은 호기심을 느꼈다.

“그분들은 무슨 내기를 했소?”

청청(青青)은 대답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나에게 잘 대해주고 당신이 나를 위해서 죽을 수 있을 때, 그 어르신은 우리들을 놓아 보내주기로 1거예요.”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 일은 그저 하나의 시험에 불과했다. 정붕(丁鵬)이 청청(青青)에 대해서 진정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본 것이었다. 만약에 정붕(丁鵬)이 위기에 처한 그녀를 버렸다면 정붕(丁鵬)은 지금쯤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을 것이었다. 청청(青青)은 그의 손을 잡았다. 정붕(丁鵬)의 손에서는 여전히 땀이 솟아나고 있었다. 식은땀이었다. 청청(青青)은 부드러운 어조로 달래듯 말했다.

“이제서야 그분들은 당신이 결코 나를 속이지 않았다는 것을 믿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된 거예요. 그래서 그분들은 내가 당신을 따라 떠나도록 허락해주신 거예요.”

정붕(丁鵬)은 눈을 비볐다.

“이곳은 어디요?”

청청(青青)은 간단히 대답했다.

“이곳은 인간 세상이에요.”

정붕(丁鵬)은 눈을 크게 떴다.

“우리들은 정말로 다시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온 것이오?”

청청(青青)은 눈에 희열의 빛을 띄우고 대답했다.

“정말이에요.”

정붕(丁鵬)은 인간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본래 인간 세상을 혐오해서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서야 그는 생명이 그토록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축하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둥근 달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밤 하늘은 점차 여명의 빛으로 물들고, 멀리서 점점 인기척이 나고 있었다. 갓난 아기가 우는 소리, 어머니의 꾸지람 소리, 두레박이 깊은 우물 속으로 떨어져서는 물을 길어 올리는 소리, 국자가 쇠솥 안에서 딸그락거리는 소리, 아내가 남편에게 빨리 일어나 일하러 나가라고 재촉하는 소리, 남편이 침대 아래에서 신발을 찾아 신는 소리, 젊은 부부들이 서로 사랑하는 소리, 늙은 부부가 입씨름하는 소리, 거기다가 닭우는 소리와 개짖는 소리… 이와 같은 소리에는 생명의 약동이 충만했고 사랑이 가득했다. 이와 같은 소리를 정붕(丁鵬)은 어떤 것은 들을 수 있었고 어떤 것은 들을 수 없었다. 귀로 듣지 못해도 마음속으로는 호응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런 소리들은 본래 그에게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고향에서, 이른 아침에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옷을 입혀주었을 때부터 이와 같은 소리를 들어온 것이었다. 정붕(丁鵬)은 불쑥 입을 열었다.

“나는 반드시 먼저 우리 어머님을 만나보아야 되겠소.”

그 1마디를 내뱉는 순간에 그는 갑자기 생각하지 않아야 할 일을 떠올렸다.

- 그녀는 여우다.

- 어떻게 여우 아내를 데리고 가서 연로하고 고집스러운 어머니에게 인사를 시킬 수 있겠는가.

- 그러나 어떻게 그녀를 데려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청청(青青)은 이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 여느 사람들보다 예민한 관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게 틀림이 없었다. 그녀는 1가지 물었다.

“당신은 나를 데려갈 수 없나요?”

정붕(丁鵬)은 대답했다.

“나는 반드시 당신을 데려가겠소.”

그녀의 그에 대한 참된 정을 떠올리고, 그녀가 그를 위해서 치른 희생을 상기하자 그는 그만 참을 수 없어 그녀를 얼싸 안았다.

“내 말한 바 있지만 내가 어디로 가든지 반드시 당신을 데리고 가겠소.”

청청(青青)은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눈동자는 감격과 부드러운 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물론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 봐야지요.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은 보고 싶지 않아요. 이후에 당신이 어떤 사람과 만나게 된다고 해도 나는 얼굴을 내밀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어요.”

정붕(丁鵬)은 물었다.

“그건 무엇 때문이오?”

청청(青青)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무엇 때문인지 잘 아시잖아요?”

정붕(丁鵬)은 그 말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결코…”

청청(青青)은 얼른 그 말을 가로챘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여우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여우이니, 사람들과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정붕(丁鵬)은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대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나는 결코 당신에게 강요하지 않겠소.”

청청(青青)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때로 나는 반드시 당신에게 강요해야 해요. 당신은 반드시 내 말을 잘 들어야 해요…”

그녀는 정붕(丁鵬)이 입을 열지 못하도록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어머님을 만난 후에 무엇을 할 참인가요?”

정붕(丁鵬)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피는 이미 끓고 있었고 웅심(雄心)이 가득차 있었다. 그가 할 일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청청(青青)은 짐작한 듯이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어요. 당신은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돼야 하고 화풀이도 해야 할 거예요.”

정붕(丁鵬)은 긍정했다. 그가 받은 억울함은 반드시 씻어내야 했고 그가 받은 모욕은 반드시 갚아주어야 했다. 그런 일들을 그는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청청(青青)은 다소곳이 말했다.

“우리가 떠날 무렵에 할아버지께서는 부탁하셨지요. 당신이 명성을 얻고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면, 몇 가지 일을 당신은 반드시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거라고 당부하셨어요.”

정붕(丁鵬)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오? 말해보시오.”

청청(青青)은 다소곳이 말했다.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당신은 절대로 손을 써서는 아니 되고 당신이 손을 쓸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손을 써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녀는 다시 덧붙여 말했다.

“당신이 처음으로 손을 쓰게 되었을 때 반드시 무척 훌륭한 대상을 골라야 해요. 당신이 그를 택해 격퇴시킬 수만 있으면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게 될 것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다시는 다른 사람을 찾아가 원한을 맺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할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고 명성이 아무리 쟁쟁해도 당신의 원수가 너무나 많으면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 의해 핍박을 받게 된다고 했어요.”

정붕(丁鵬)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어른신의 뜻을 이해할 수 있소. 나는 반드시 그 어르신의 말씀대로 하겠소.”

청청(青青)은 당부하듯 말했다.

“그래서 당신이 손을 쓰게 될 때, 너무 무자비해서도 못쓰며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지 않아야 해요.”

그녀는 무척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 진정으로 당신을 존경토록 만들려고 한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물러설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어야 하는 거예요.”

정붕(丁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청청(青青)은 다시 입을 열었다.

“또 1가지 더욱 중요한 일이 있어요.”

정붕(丁鵬)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오?”

청청(青青)의 만도(彎刀)는 아직도 그의 허리춤에 꽂혀 있었다. 청청(青青)은 정색하고 입을 열었다.

“이것은 우리 할머니가 당신에게 드린 거예요.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께서도 당신이 가지고 나오도록 허락하신 거예요. 그러나 당신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로 이 칼을 써서는 아니 되어요…”

그녀의 표정은 더욱 신중해졌다.

“만약 당신이 이 칼을 사용한다면 반드시 상대방이 이 칼 아래에 죽도록 만들어야 하고, 칼이 칼집에서 뽑혀지면 결코 상대방의 목숨을 살려주어서는 아니 되어요.”

정붕(丁鵬)은 확실히 해두려는 듯 물었다.

“상대방이 반드시 내가 죽여야 할 사람이 아니고, 상대방이 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지 않는 한, 나는 결코 이 칼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청청(青青)은 그 말을 얼른 받았다.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어요…”

그녀는 방그레 웃었다.

“그러나 당신은 안심하세요. 당신의 지금 무공으로 당신이 어떤 칼을 쓴다 해도 틀림없이 천하무적이에요.”

붉은 해가 동녘 하늘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햇살은 인간 세상의 비단으로 수놓은 듯한 대지를 환히 비쳐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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