绝代双骄 01

3학년2반 | 2022.02.12 08:28:54 댓글: 0 조회: 559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8304
절대쌍교
제 1 권
고 룡 지음

연인(戀人)들의 도피(逃避)
태양이 멀리 지평선으로 내려앉으며 뜨거운 여름날의 대기(大
氣)가 서서히 붉은 기운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망막한 자갈투성이의 황원(荒原)은 한 길이 넘는
잡풀들만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가끔씩 바람이 불 때마다 외
롭고도 스산한 바람소리가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잡풀들을 파도가
치듯 흔들며 지나가 이 고적한 벌판의 황량함을 더해 주는 듯했
다. 오직 예전엔 상인들의 교역로(交易路)로 사람들의 왕래가 빈
번했으나 지금은 버려져 황폐해진 구도(舊道)가 황원의 완만한 기
복을 따라 이어져 있어 사람의 흔적을 엿볼 수 있게 할 뿐이다.
길은 이미 군데군데 잡초들이 자라고 빗물에 패여 인간사의 허망
한 서글픔을 느끼게 하는 듯 했다.
그런데 이때 이 무인(無人)의 망막한 벌판끝에서 하나의 마차가
급히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두쌍의 말이 끄는 꽤 커다란 마차였으나 별 장식도 없이
낡아빠진 것이었고 더위에도 불구하고 마차의 문은 굳게 닫혀 있
었다.
마부석에는 한 사나이가 얼굴에 흐르는 땀을 가끔씩 옷소매로
훔쳐가며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이 사나이는 오랜 피로에 지친
듯 했고 허름한 옷에 길의 먼지를 뒤집어 써 초라한 행색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세가 늠름했으며 이목구비가 더
할 나위 없이 수려했다. 굳건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엿보이는 깊
고 사려깊은 눈동자와 사나이의 곧은 기개를 나타내는 듯한 콧날,
그리고 지그시 다문 입술은 영웅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사실 이 황폐한 구도를 총총히 말을 몰고 있는 이 초라한 사나
이는 의형(義兄) 연남천과 함께 강호 최고의 호걸로 칭송받는 풍
류공자 강풍이었다.
강호는 넓고 거기엔 많은 호걸들과 기인(奇人)들이 있었으며 보
는 이의 가슴을 혼들어 놓는 풍모로 절세가인(絶世佳人)이라 불리
우는 이도 꽤 있었다.
그러나 이 옥랑(玉郞) 강풍(强風)과 연남천(燕南天)만큼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호걸은 없을 것이다.
팔척(尺) 거구의 일대 영웅 신검(伸劍) 연남천! 기이한 행동으
로 사람들을 종종 놀라게도 하나 성품이 호방하고 기개가 드높기
가 이를 데 없었다. 드물게 보는 곱슬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불
길이 치솟는 듯한 두 눈을 빛내며 검을 잡고 서 있으면 그 강인한
인상과 호연지기(浩然之氣)에 압도되어 그 어떤 적이라도 간담이
서늘해지고야 마는 것이다.
문무쌍전(文武雙全)의 의기남아 가인(佳人) 강풍! 일대 부호세
가의 장손으로 그 넓은 집안의 포석(鋪石)을 모두 금은보화로 바
꾸어 깔아 놓는다 해도 축이 나지 않을 정도의 부자였다.
그는 이미 어린 나이에 그 훤칠하고도 의젓한 풍모로 뭇소녀들
의 애모의 대상이 되었으며 많은 가객(歌客)들의 노래가 되었다.
두뇌 또한 영민하여 시문(詩文)에 능했고 고문(古文)에 통달하였
으나 품성이 타고난 풍류객이라 입신출세를 사양하고 강호의 생활
을 즐겼다.
이들 둘, 적의 목을 취하기를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듯 하는
절세의 무사(武士) 연남천과 한 번 짓는 웃음에 춘풍만화(春風滿
花)를 무색케 하는 귀공자 강풍은 장벽호(長碧湖)에서 처음 만났
다.몇 명 서동(書重)과 뱃놀이를 나왔던 옥랑과 작은 배에 혼자
걸터앉아 말술을 잔술 들이키듯 하고 있던 연남천은 첫 대면에 서
로의 성품과 호기에 반해 의기투합했다.
서로 잔을 권하여 통음일취(痛欲一醉)하고 벗이 되니, 술잔에
닭의 피를 섞어 나누어 마시고 의형제를 맺었다. 그 후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같은 육친(肉親)이라도 나누기 어려운
깊고 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두 호걸의 뜨겁고도 아름다운 우정은 또 하나의 강호
의 얘깃거리가 되었으며 혹 어느 집 형제간에 불화라도 있게 되면
어른들은 이렇게 타이르곤 했던 것이다.
"얘야! 넌 옥랑과 연 대협을 모르느냐? 형제간의 우애는 그래야
하느니라."
그러나 그들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진정한 이유는
단지 불세출의 무공이나 걸출한 외모, 둘 사이의 막역한 우정 때
문만이 아니었다.
둘은 다 의사(義士)였고 행동에 있어 항상 사(詐)를 버리고 정
(正)을 취했다. 연남천은 검을 사용함에 있어 꼭 의(義)와 도리를
따졌으며, 강풍은 비록 거부(巨富)였으나 소탈하여 씀씀이를 자제
할 줄 알았고 또한 뛰어난 풍모에도 불구하고 여인을 대함에 있어
절도가 있었다.
이렇게 옥랑 강풍과 연남천은 강호의 호걸들 중에서도 가장 절
정의 인물로 사람들의 흠모와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이 쌍벽을 이루는 두 호걸 중 부호세가 출신, 천하
제일의 미남자인 강풍이 초라한 차림으로 이런 곳에 나타난 것이
다. 칠월 염천의 뜨거운 태양열이 미처 식지도 않은 석양무렵, 강
풍과 말은 모두 더위에 지쳐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쉬지않고 채찍을 후려치며 말을 몰았다. 마차는 나는 듯이
잡초가 우거진 길을 달렸다.
그런데 이때 돌연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닭의 울음소리가 들
려왔다.
황혼 무렵, 아무도 지나지 않는 황폐한 길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은 분명 기이한 일이었다.
강풍은 그 소리를 듣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길옆의 고목이 다
된 버드나무가지 위에 수탉 한 마리가 마치 못으로 박아놓은 것처
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크고 화려한 벼슬과 온갖
찬란한 색채가 섞여있는 현란한 깃털은 석양빛을 받아 반짝이고
수탉의 눈동자는 극악(極惡)한 독기(毒氣)가 서려있는 듯 기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강풍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더니 돌연 말고삐를 나
꿔채 마차를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마차 안에서 부드러운 목소리
가 새어나왔다.
"무슨 일이 있나요?"
"아니오! 아무 일도 없소. 단지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오."
강풍이 방향을 바꾸어 말머리를 돌리자 마치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수탉이 다시 한 번 찢어질 듯이
울었다.
강풍이 다시 급히 말을 몰아 한 사십장(四十丈)정도 갔을 무렵,
길 가운데를 무엇인가가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거기엔 뜻밖
에도 살이 뒤룩뒤룩하게 찐 거대한 돼지 한 마리가 비스듬히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강풍은 그것을 발견하자 재빨리 말고삐를 당겨 다시 마차를 멈
췄다. 자세히 바라보니 길에 누워있는 돼지는 방금 씻은 것같이
지푸라기 하나 묻어있지 않고 깨끗했다. 빽빽하게 나 있는 털이
석양빛에 반사되어 마치 금사(金絲)로 짜 놓은 양탄자처럼 찬란하
게 번쩍이고 있었다. 굳게 닫혀있는 마차의 문 안에서 또 다시 말
소리가 들려왔다.
"또 길을 잘못 들었나요?"
강풍은 비오듯이 흘러내리는 비지땀을 미처 닦아낼 겨를도 없는
듯 더듬거렸다.
"나는..... 나는......"
그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
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저롤 속이려고 하십니까? 저도 다 알고 있
답니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오?"
"조금 전에 들린 닭 울음소리는...... 십이성상(十二星象)이에
요. 당신은 제가 걱정할까봐 저를 속이시는 군요."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십이성상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지? 게다가 당신과 난 이렇게 비밀리에 길을 떠나왔는데 그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당신은 안심하고 있어도 되오. 모
든 일은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날 이후...... 어떠한 위험과 난
관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해도 힘을 합하여 물리치기로 약속하
지 않았나요?"
"그렇지만 당신은 지금......."
"괜찮아요. 저는 조금도 불편하지 않으니까요."
"좋소! 당신, 마차에서 내려 걸을 수 있겠소? 벌써부터 이상한
징조가 나타났으니 마차를 버리고 황야(荒野)를 가로질러 갑시
다."
"무엇 때문에 마차를 버리려고 하세요? 그들이 우리를 쫓고 있
다면 마차를 버리고 맨몸으로 가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더 나을 거예요, 그리고 십이성상의 흉명(囚名)이 아무
리 사납다고 해도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나는 오직 당신이......."
마차 안의 목소리가 여전히 부드럽게 들려왔다.
"안심하세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 걸요."
그러자 강풍은 홀연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더니 다정하게 말했
다.
"좋소. 당신 말대로 하지. 아!...... 당신을 만나고 또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으니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오."
그가 미소를 짓자 석양의 찬란한 빛마저도 그 앞에서는 빛을 잃
는 듯했다.
마차 안의 여인이 수줍어 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행복한 것은 오히려 저예요. 강호의 얼마나 많은 소녀들이 저
를 흠모하고 질투하고 있는지......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들
은 정말......"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무슨 불길한 징조라도 느낀
듯 네 필의 말이 고개를 길게 뽑으며 울부짖었다.
한가닥의 세찬 바람이 불어오자 길가에 누워있던 돼지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먼 곳에서는 닭의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무성한 잡초가 바람에 마구 흔들거렸다. 석양빛조차 스러지는 듯
싸늘한 느낌이 주위에 감돌았다.
강풍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었다.
"그들이 나타난 모양이요!"
돌연 마차 뒤에서 '낄낄낄'하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
다.
"그렇구 말구, 우리들은 벌써부터 이미 와 있었지."
강풍은 그 소리를 듣자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요?"
마차 뒤에서 칠팔 명의 기괴한 사나이들이 나타났다.
맨 앞의 사람은 다섯 자도 될까말까 한 왜소한 키에 마치 고목
나무가지처럼 바짝 마른 체구로 불같이 붉은 옷을 입고 있었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은 키가 아홉 자나 됨직한 우람한 체구의 거
한(巨漢)으로 황색 옷을 입고 황관(黃冠)을 쓰고 있었다. 얼굴에
는 전혀 표정이 나타나 있지않은 것이 쇠보다 더 단단해 보였다.
뒤따라 다가오는 네 사람은 괴상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옷은 대여섯 가지의 무늬가 서로 다르고 색깔도 틀린 비단을 이어
만든 것이어서 그 모습이 마치 연극에 나오는 부잣집 사람들의 옷
을 주워입은 거지 차림의 광대들 같았다.
가장 뒤에 쳐져 있는 사나이는 앞에 있는 여섯 사람을 모두 합
친 것보다도 더 무거워 보였다. 어찌나 뚱뚱한지 의복 한 벌 해입
기도 수월치 않을 것 같았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쉬지 않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휴 더워! 정말 쩌 죽기 딱 알맞은 날씨로군."
강풍은 애써 평정을 되찾으며 마차에서 내려서 공손히 읍하며
입을 열었다.
"노형들은 십이성상중의 사진객과흑면군(黑面君)이 아니신지
요?"
홍의인(紅衣人)이 껄껄 웃었다.
"강 공자(江公子)의 말씀은 감당하기 어렵소. 우리는 그저 닭이
나 돼지에 불과하오, 사진객이니 흑면군이니 하는 듣기 좋은 이름
은 강호의 사람들이 임의로 갖다붙인 것에 불과하니 우리들에겐
당치도 않은 이름이오."
"귀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든 바로 틀림......."
홍의인은 강풍의 말을 끊었다.
"난 붉은 닭 계관(鷄冠)이오. 저 누런 놈은 계흉(鷄胞)이고 찢
같이 화려한 것들은 계미(鷄尾)지."
"여러분들께선 무슨 가르치심이 있으신지요?"
홍의 계관(紅衣鷄冠)이 말을 받았다.
"듣자 하니 강 공자께서 좋은 신부(新婦)를 얻었다고 하더군.
우리 형제들은 도대체 어떤 절세미녀가 강호에 이름도 드높은 옥
랑(玉郞)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을 참을 길
이 없어 온 것이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웃었다.
"더우기 우리는 공자에게 얻을 물건도 있고."
"귀하께서 필요하시다는 물건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홍의 계관은 빙긋빙긋거리며 말을 이었다.
"허! 아주 귀한 물건이지. 그렇지 않다면 우리 형님께서 이 염
천 무더위에 예까지 납시겠소?"
흑면군이 가쁜 숨을 '헉, 헉' 몰아쉬며 다가오더니 '히히히' 하
고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만일 좋은 물건이 아니라면 집에 편히 누워있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오겠나?"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급작스레 길을 떠나오는 바람에 아무 것
도 지닌 것이 없으니 정말 여러분들께 죄송스럽군요."
"하하! 공자가 우리와 농을 하고 하고픈 게로군. 아하! 그러고
보니 전장(田莊)에서 바꿔온 명주(明株)자루는 공자의 물건이 아
닌 모양이지? 그럼 우리가 보관하였다가 주인을 찾아주었으면 하
는데 공자의 의견은 어떤가? 흐흐흐! 공자는 우리를 무시하는군.
자네는 우리 십이성상이 헛탕치는 일을 했다고 들어본 적이 있는
가? 순순히 물건을 내놓게."
홍의 계관이 낄낄거리며 야유하듯 말하자 강풍도 따라서 한바탕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는 그들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나타나 있었다.
"하하하, 좋습니다! 좋아요! 여러분들은 이미 모든 것을 자세히
알고 오셨군요. 저도 십이성상이 결코 가볍게는 움직이지 않는다
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움직였다 하면 절대로 빈
손으로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
나....... "
"그러나 어쨌단 말인가? 설마 응락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겠
지?"
"만약에 내가 응낙하지 않는다면?"
강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홍의인의 몸이 돌연 앞으로 쏠렸
다. 계관인(鷄冠人)의 솜씨는 번개같이 빨랐다. 그의 손에 은빛이
번쩍이는 기형(奇形)의 무기가 쥐어지는 순간, 낫 같기도 하고 집
게 같기도 한 그 괴상한 무기가 무섭고 빠르게 강풍을 향해 날아
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칠함(七合)의 괴이한 공격을 가한
것이다. 마치 수탉이 쌀알을 쪼아먹는 것같이 강풍의 수족 중 소
음경(少陰經), 중추(中樞), 신장(伸藏), 영허(靈墟), 보랑(步廊)
등의 급소를 민첩하게 공격해왔다.
강풍은 재빠르게 몸을 날려 허공에서 한바퀴 맴돌아 가까스로
칠합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밑에서는 네쌍의 계조염이 기다리
고 있었다.
계관(鷄冠)이 움직이면 그 네 사람의 화의 계미(花衣鷄尾)들이
조화를 이루며 네쌍의 계조염도를 절묘하게 움직였다. 이것이 바
로 강호에서는 보기 힘들다는 외문공부(外門功夫)로서 한 개의 쪼
아대는 부리와 네 개의 발톱이 어울려 물샐틈 없는 공격과 방어를
이뤄내는 실로 미묘한 수법이었다.
강풍 역시 예사 인물은 아니었으나 다섯 가지의 외문(外門) 무
기가 교묘한 조화로 공격해오자 일장도 펼쳐보지 못 한 채 전력을
다해 몸을 지키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흑면군이 히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강 공자, 섭섭해 말게. 가인박명(佳人簿命)이라 하지 않았나.
하하! 우린 계집이 아니니까 자네 용모에 홀려 손에 사정을 두게
되지는 않을 걸세. 아무래도 자네 그 고운 얼굴이 오늘밤엔 들개
위장 속에 들어가게 되겠는 걸, 자! 그건 그렇고 난 마차 안에 있
는 미녀나 좀 감상해 볼까?"
"서라!"
강풍은 호통을 내지르며 마차로 달려가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
의 공격을 도저히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흑면군은 여유만만하게
만면에 괴상한 웃음을 띠우고 낄낄거리며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막 문을 잡아다니려는 순간 돌연 마차의 문이 열리더니
눈같이 희고 보드라운 손이 뻗쳐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손에는
한송이의 매화꽃이 쥐어져 있었다.
검은색의 매화!
무더운 여름에 매화꽃이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인데, 더우
기 검은 빛깔의 매화라니! 눈같이 흰 손에 검은 매화, 정말로 기
묘한 신비감을 느끼게 했다.
마차 안에서 나지막하나 단호한 목소리가 추호의 동요도 없이
한자 한 자 또박 또박 흘러나왔다.
"너희들은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고 있느냐?"
돌연 흑면군의 얼굴은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흙빛이 되었다. 문
을 열려고 내밀었던 손은 마치 얼어버린 듯 멈추어져 있었다. 계
미(鷄尾)인들의 무기도 모두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강호에 명성
을 떨치는 흉악한 도적들이 마치 마법(廢法)에라도 걸린 듯 꼼짝
못하고 서있었다.
흑면군이 더듬더듬 거렸다.
"수옥곡(繡玉谷) 이화궁(移花宮)!"
"너의 안력(眼力)도 쓸만은 하구나."
"저는...... 저는...... 보잘 것 없는 놈입니다."
"너희들은 이 무례의 대가가 무엇인지 아느냐?"
"소인은...... 소인은....... "
"죽기가 싫다면 빨리 없어지지 않고 무얼 꾸물거리고 있느냐?"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흥, 황, 화, 흑 등 모두가 나는 듯
이 빠르게 달아나버렸다. 흑면군은 아까같이 걸음걸이를 어기적어
기적 거리지도 않았다. 그 육중하고 비대한 몸집의 움직임이 그렇
게 빠르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
강풍이 마차로 다가섰다.
"당신, 아무 일도 없소?"
"저는 단지 손을 한 번 흔들었을 뿐인 걸요?"
"당신이 궁중에서 흑옥매화(黑玉梅花)를 가지고 나오다니 정말
뜻밖이오. 그리고 십이성상이 그녀들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다
니......"
"이것만 보더라도 그녀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당신도
아셨을 겁니다. 빨리 길을 떠나는 것이 좋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별로 두려울 것이 없지만 만약에....... "
그러나 이때 '쉭! 쉭! 쉭!' 하고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도망갔던
십이성상이 다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흑면군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제길! 우리들이 하마터면 속을 뻔했어!"
그 소리를 들었는지 마차 안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정말 죽음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구나?"
"네가 정말 이화궁의 사람이라면 우리를 그렇게 호락호락 살려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난 이화궁의 수하들이 살려보낸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인정을 베풀어 고이 돌려보냈거늘 감히 다시 나
타나다니....... "
"허튼 수작!"
사내는 외치며 일장(一章)을 내려쳤다. 순간 마차의 문짝이 그
의 일격에 산산조각이 나며 부쉬지자 안에 타고있던 여인의 모습
이 보였다.
그녀는 비록 머리카락이 흩어져있고 얼굴에는 병색이 나타나 있
었지만 뛰어난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다. 깃털로 그려넣은 듯한
눈썹, 완곡하지만 날씬하게 빼어난 콧날, 붉은 풀잎을 문 듯한 입
술이 조화되어 한 번 바라보게 되면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더
우기 정감(情感)이 가득차 있는 촉촉한 두 눈동자에는 지혜가 깃
들어 있어보였다. 마치 깊은 호수의 잔잔한 룰같이 맑고 그윽했
다. 다만 그녀의 배가 불룩하게 나와있어 만삭의 무거운 몸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뭔가 했더니 배불뚝이 할망구 같은 년이었구만. 난 또 뭐라구,
네가 무슨 이화궁의......."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한가닥 바람이 일었고, 흑면군은
얼떨떨해하는 순간 '짝! 짝! 짝!' 연거퍼 그녀에게 몇 대의 따귀
를 얻어맞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전혀 움직인 것 같지 않
았다.
"배불뚝이 할망구가 어째?"
흑면군은 도저히 화를 누를 길이 없다는 듯 미친 듯이 노호(怒
號)하며 일장을 내리쳤다. 몸은 비록 육중하고 둔했지만 그의 일
격은 매우 사납고 날카로웠다.
그 여인은 만면에 잔잔한 미소를 띠우고 가볍게 손을 쳐들더니
손가락을 한 번 튕겨냈다. 그녀가 무슨 수법을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를 향하던 흑면군의 장력이 그녀가 가볍게 튕겨낸
힘에 의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되돌아와 도리어 그의 어깨를 후
려치고 말았다. 일격으로 마차의 문을 부숴버린 막강한 힘이 자기
의 어깨에 적중하자 흑면군은 아픔을 이기지 못 하고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계관(鷄冠), 계미(鷄尾) 등은 뛰어들려고 하다가는 어리둥절해
진듯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
보았다.
"내가 방금 쓴 수법이 어떤 것인지는 너희들도 알겠지?"
흑면군이 겁먹은 듯 더듬거렸다.
"이화접옥(移花接玉), 신귀막적(伸鬼幕敵)......"
"그것을 안다면 내가 누구라는 것도 짐작이 갈 터인데...... "
"소, 소인..... 소인이 죽을 죄를...... 소인이 정말 죽을 죄
를......"
그는 말을 미처 끝맺지도 않고 손을 쳐들더니 자기의 따귀를 철
썩! 철썩! 십여 차례나 내리쳤다. 그의 가뜩이나 시커먼 얼굴은
더욱 검붉게 되었다.
여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탄식하듯이 중얼거렸다.
"나는 아이를 위하여 덕을 쌓고 싶다. 너희들은 빨리 돌아가거
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번에는 정말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지
삽시간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한 그림자가 은밀
히 그들의 뒤를 따르는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를 못 했다.
강풍은 그들이 사라져버리자 마음이 놓인 듯 길게 한숨을 내쉬
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다행이었소, 당신의 수법에 그들이 놀라 달아나버렸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때 갑자기 그녀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식은 땀을 홀리는 것이 아마도 견디기 어려운 통증이 오
는 모양이었다.
강풍은 크게 놀라서 물었다.
"어찌된 일이오?"
"아...... 아..... 아마 태기(腦氣)가 동했나 봐요. 아마
도..... 아마도...... 지금 곧......."
강풍은 그녀의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 당황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하! 이걸 어쩌면 좋지?"
"빨리 마차를 길옆에 대 놓으세요......빨리요!"
강풍은 황급히 마차를 길옆의 잡초 사이로 끌고 들어갔다. 말들
은 쉬지않고 울어댔고 강풍은 구술 같은 비지땀을 흘리며 여인을
마차 안으로 안아다 눕힌 다음 부숴진 문에 장삼을 벗어 막아놓았
다.
"여보, 저는 정말 무서워요...... 정말 무서워 죽을 것 같아
요......."
"괜찮아...... 뭐 무서울 것이 있단 말이오? 안심하도록 해요.
아무일도 없을 테니까."
"그래도 저는 두려워요. 여보, 저의 손을 꼭 붙잡아 주세
요......아주 꽉 잡아 주세요....... "
얼마 후 마차 안에서는 어린아기의 맑은 울음소리가 울려나왔고
강풍이 미친 듯이 기쁨에 들떠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두 명이야...... 쌍둥이란 말이야...... 하하하."
또다시 차를 두어 잔 마실만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온몸이 땀
에 젖은 강풍이 만면에 흥분한 기색을 띠우고 마차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는 마차 밖으로 나온 순간 놀라움에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그 자리에 굳어진 듯 서버렸다.
그곳에는 얼마 전에 '어마 뜨거라, 하고 도주했던 흑면군(黑面
君),사진객 등이 얼음같이 차가운 눈초리로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강풍은 진정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안색이 변
해갔다.
"너희들......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또 이곳에 왔느냐?"
계관인(鷄冠人)이 괴이한 웃음을 띠우며 먼저 입을 열었다.
"공자(公子)님, 놀라셨지요?"
"너희들은 정말 죽음을 원하는가?"
이번에는 흑면군이 기분 나쁜 웃음을 웃으며 나섰다.
"죽음이라 흐흐흐....... "
"보아하니 너희들은 정말 고루하고 과문(寡聞)한 놈들이로구나!
수옥곡(繡玉谷) 이화궁(移花宮)의 무서움을 설마 너희들이 모르지
는 않을 터인데."
흑면군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대노하며 소리쳤다.
"야 이 강가놈아! 또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려고 하는 거야? 그
년이 누군가를 내가 모를 것 같으냐? 이화궁의 두 룬 궁주(宮主)
께서는 지금 너희 두 년놈의 목을 기다리고 계시지 우리들의 목숨
이 아니란 말이다."
땀방울이 쉬지않고 강풍의 우뚝 솟은 콧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초조함에 바짝바짝 입술이 타서 몇 번이고 입술을 적시고
나서야 방성대소하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보아하니 너희들은 정말로 미친 놈들이로구나! 이화궁
의 궁주가 나의 목숨을 달랜다구? 지금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구인지는 너희들도 알겠지?"
계관인이 차디찬 어조로 대꾸했다.
"지금 마차 안에 있는 것은 이화궁의 화노(花奴) 계집애지. 이
화궁을 몰래 도망쳐 나온 반도(叛徒)이고."
강풍은 그의 말을 듣고는 가슴이 아연해졌다. 억지로라도 웃음
을 지으려고 해보았으나 마른 침만 삼키게 될 뿐이었다.
흑면군은 놀리듯 껄껄 웃으며 말했다.
"강 공자께서는 놀라신 것 같군요? 공자께선 어떻게 우리들이
그런 사실을 알았는지 묻지 않으시렵니까? 히히힛!"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강풍이 집까지 버리고 은밀히 도피
행각을 벌인 것은 바로 이화궁의 두 궁주의 추혼독수(追魂盡手)를
수십 수백 회(回)의 싸움을 치뤄온 흉도들은 사람이 목숨을 버리
고 달려들면 누구도 그 날카로운 예봉을 꺾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어 강풍의 도광(刀光)만을 주시하고 주위를 맴돌 뿐 공격하지는
못 했다.
강풍은 왼손의 쾌도와 오른손의 장력(章力)으로 번갈아가며 사
나운 공격을 퍼부었다. 흑면군은 미친 듯이 웃어젖히며 그의 주위
를 맴돌았다. 황의인도 남은 한 자루의 쾌도로 불시에 한 번씩 공
격을 가해 빠져나가지 못 하게 견제했다. 네쌍의 계조렴은 살수를
가하지는 못 했지만 수비만은 철통같이 하고 있어서 강풍으로선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돌연 홍의 계관이 붉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강탁(蒙隊)을 번쩍였
다. 그러면서 신속한 동작으로 강풍의 요혈(要穴)만을 노리고 덤
벼들었다. 강풍은 비록 목숨을 내던지고 공격했지만 거미줄에 걸
린 날벌레마냥 아무리 발버둥쳐 보아도 빠져나갈 도리가 없었다.
저녁 노을도 스러져가며 사방에 어둠의 장막이 내려 덮이기 시
작했다.
강풍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경심동혼(驚心動魂)의 악전고
투에도 불구하고 적으로 하여금 오직 비웃음과 조롱만을 받았을
뿐 아무런 결실도 얻을 수 없었다.
마차 안에서 신음하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랑(玉郞)..... 조심하셔야 해요. 단지 조심만 하면 됩니다.
저들이 결코 당신의 적수는 되지 못 하니까요."
흑면군은 그 목소리를 듣자 돌연 마차 앞으로 다가가더니 문을
가려 놓았던 장삼을 걷어 던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사납게
웃어젖히며 중얼댔다.
"음! 쌍둥이를 낳다니 저놈은 복도 많은 놈인 걸!"
너이 악독한 도적놈아, 비켜서지 못 하느냐?"
강풍이 다급하게 외치며 고개를 돌린 순간 예리한 칼날이 지쳐
들어왔다. 그의 몸은 찢기고 찔려 선혈이 낭자했다.
여인은 두 어린 아이를 꼭 껴안으며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이 지독한 도둑놈아!...... 너는...... 너는......."
흑면군은 앙천대소하며 느물거렸다.
"미인 아줌마, 안심하시지. 지금 내가 너를 어쩌지는 않을 테니
까. 네 몸이 좋아지면 그때 가서...... 하하하......"
그 소리를 들은 강풍은 안간힘을 다하여 호통을 쳤다.
"이 검은 돼지야! 만약 네가 그녀에게 감히 손만 댄다
면......."
그러자 흑면군은 보라는 듯이 여인의 얼굴에 손을 갖다대며 이
죽거렸다.
"내가 네 계집을 좀 만지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어디 말씀
좀 해보시지?"
그것을 본 강풍이 미친 듯이 부르짖으며 죽을 힘을 다해 그를
향해 달려들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쾌도(快刀), 첨탁(尖隊), 이조
(利爪) 등이 곧 틈을 타고 그의 앞가슴, 어깨 등에 곧 무수한 혈
구(血口)를 뚫었다.
"여보, 침착하세요!"
흑면군이 큰소리로 웃었다.
"너의 옥랑(玉郞)은 이제 마치 옥귀(玉鬼)처럼 돼 버렸구나 하
하하!"
강풍은 온통 선혈이 낭자하여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이 놈아, 내가 귀신이 돼서라도 너를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
다."
분노에 가득찬 외침! 득의 만만한 웃음소리! 비참한 절규!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 등이 한데 어울려 그 일대에는 아무리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가슴이 섬짓할 비참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인(女人)들의 한(恨)
강풍의 몸과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선혈이 낭자했다.
여인은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면서 울부짖었다.
"나마저 죽이거라!"
그녀는 돌연 갓난아기를 놓아버리고는 흑면군을 향하여 덮쳐갔
다. 그녀의 열 손가락은 흑면군의 목줄기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
나 흑면군은 살짝 뿌리치며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년아! 그 날뛰던 실력은 어디로 갔느냐? 불쌍한 계집, 내가
네 새낭군이라도 될 듯 싶어서 손에 사정을 두는 것이냐?"
그의 이러한 비웃음과 독설이 그치기도 전에 여인은 또다시 그
에게로 덮쳐갔다. 흑면군도 또한 다시 가볍게 손을 올려 뿌리치려
고 했다. 그러나 흑면군은 잘못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모든 기
력을 다하여 그에게 덤벼들며 목을 깨물어버렸다.
흑면군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분수처럼 솟구치는 붉은
피가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에 묻어 주르륵 흘러내렸다.
흑면군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에게 일권(一
卷)을 가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은 허공을 한 바퀴 돌아 세차게
마차에 부딪치고는 땅바닥에 굴러 떨어져버렸다.
그녀는 다시 일어서지를 못 하고 다만 고개를 들어 처연한 시선
으로 강풍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심한 고통을 참느라 호흡을 조
절하며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옥랑(玉郞), 저를 상관하지 마시고 어서 가셔요. 저만 죽는다
면 궁주 자매는 당신을 잘 대해줄 것입니다......."
강풍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울부짖는 음성으로 외쳤
다.
"여보, 죽어서는 아니 되오!"
그는 말과 동시에 그녀의 곁으로 달려갔다.
도(刀), 조(爪), 탁(啄)이 일제히 그를 향해 덮쳐왔으나 옥랑은
전연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몸은 무기들이 발산하는 충격
으로 인하여 피가 솟구치곤 했다. 사력을 다한 그는 겨우 그 공격
망을 뚫고 나가기는 했으나 그녀의 곁까지 완전히 가지 못 하고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여인은 안타까운 비명을 터뜨리며 있는 기력을 다하여 그에게
다가가려 애썼다. 그도 또한 손발을 버둥거리며 필사적으로 그녀
에게 다가가려 했다. 지금의 그들로서는 오직 함께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소망이었다.
그들이 서로 상대방의 손을 잡을 만큼 가까와졌을 즈음 흑면군
은 전신을 날려오면서 그들의 손을 으깨어질 만큼 힘껏 밟아버렸
다.
여인은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외쳤다.
"너 이놈! 참으로 악독하구나!"
"흥! 이제야 비로소 내가 악독하다는 것을 알았느냐?"
강풍은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며 흑면군을 바라보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모두 당신에게 줄 테니 제발 우리를
같이 죽게 해주시오."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늦었다. 너희들도 나를 괴롭힐 때는 아
마 재미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니 나도 너희들을 그냥 죽이기는
억울해.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고, 죽여도 함께 죽게 하지
는 않다!"
흑면군은 잔인한 웃음을 띠우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여인은
물었다.
"왜?...... 무엇 때문에 무슨 원한이 있어 네가 우리를 이렇게
하는 것이냐?"
"그 이유는..... 내가 어떤 사람에게 너희들을 함께 죽게 하지
는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강풍이 물었다.
"누구요?...... 그 사람이 누구냔 말이오?"
"천천히 생각해 보아라."
이때 그 황의(黃衣)의 계흉이 다가서며 표정없는 얼굴로 차디차
게 한마디를 내뱉았다.
"어린 것들도 살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옳은 말이다."
황의인은 칼을 비껴세우고 마차로 다가가더니 두 어린아기를 향
해 힘껏 내리쳤다.
이것을 본 강풍은 비명을 질렀고 그의 처는 소리마저 내지 못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번개 같은 속도로 내리쳐가던 칼
이 갑자기 '쨍그랑' 하고 허공에서 두 동강으로 끊어져버린 것이
다.
황의인은 깜짝 놀란 나머지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선 후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 누구냐?"
하지만 거기엔 그들과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강풍 내외 이외에
는 아무도 없었다.
흑면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무언가 짐작이 간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게 맡겨라!"
한마디를 내뱉은 그는 강풍의 칼을 주워들었다. 그는 짐승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마차 속을 향하여 번개 같은 속도로 내리쳐갔다.
그의 칼이 반쯤 내려갔을 때 '쨍' 하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
다.
칼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날이 적지않게 무뎌져 있었다.
"과연 암습하는 자가 있군."
홍의인이 스산하게 지껄였다. 흑면군도 더 이상 유유자적할 수
는 없었다.
"이 암기(暗器)는 보이지가 않을 정도니 매우 작은 것이다. 그
런데도 우리들의 칼을 끓을 수 있다니 그 수법과 팔 힘이 얼마나
고 강한가."
악도(惡徒)들은 섬짓하여 망연히 서있었다.
죽음에 직면한 강풍도 놀라움에 두 눈을 휘등그렇게 뜨고 잠시
망연해 있더니 무엇인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는 듯 갑자기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 필시 그가 왔을 것이다......."
흑면군이 물었다.
"누구?...... 혹시 연남천(燕南天)이 왔단 말이냐?"
그때 마치 이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
다.
"연남천? 연남천이 뭐 그리 대수로운 놈이냐?"
깜찍하고 활발한 음성이 마치 철들지 않은 천진난만한 어린애의
목소리 같았다. 인기척 없는 황막한 곳에서 문득 이런 목소리를
들으니 더욱 놀라울 뿐이었다.
강풍 부부는 비록 그 얼굴을 보지는 않았지만 누가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흉도들은 호기심과 두려움이 교
차된 표정으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 뒤에는 한길이 넘는 큰 잡초가 바람부는 대로 파도 같이
밀리고 있었다. 그 잡초 속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얼핏얼핏 보였
다.
그것은 한 여인의 모습이 아닌가!
한 차례의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먼 곳에 있던 그 인영(人影)이
움직이는 듯 싶더니 어느새 그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모두 그 여자가 십칠팔 세 정도의 아름답고도 깜찍한 소
녀라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 지금 나타난 사람은 적어
도 스물 대여섯 살은 됨직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몸에는 비단옷이 걸쳐 있었는데 긴 치마가 땅에 끌릴 정
도였고 치렁치렁한 머리가 어깨를 덮고 있는 모양은 마치 구름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눈동자는 재기에 가득차 있었으나 어
린아이 같은 천진스러움과 함께 고집과 까다로움을 동시에 나타내
고 있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그녀를 한 번만 본다면 곧 그녀가 매우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속마음을 가늠하
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이 절세미인은 애석하게도 천생(天生)불구였다. 그녀의 기다란
옷소매와 치마도 그녀의 왼팔과 왼발의 불구를 가리지는 못 했다.
그녀를 본 흑면군은 존경과 두려움이 동시에 교차했지만 놀라움
과 당황함은 도리어 많이 가시어진 표정이었다. 그는 공손히 물어
보았다.
"혹시 이화궁의 둘째 궁주님이 아니십니까?"
"너는 나를 아느냐?"
"연성궁주(憐星宮主)님의 높으신 존함을 천하에 그 누가 모르겠
습니까!"
"너도 꽤나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구나."
"별말씀 다하십니다."
연성궁주는 눈을 깜박거리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너는 내가 무섭지 않은 모양이지?"
"소인은 단지......"
우물쭈물 하면서 흑면군은 몸을 구부렸다.
"넌 그토록 나쁜 일을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무서워하지
않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구나. 내가 지금 너희들의 생명을 앗
아가고자 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게로구나."
흑면군은 이 말을 듣자 얼굴색이 크게 변하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궁주님께선 농담을 하시는 것이겠지요?"
"농담, 너희들이 나의 궁녀(宮女)를 상해(傷害)한 것을 생각하
면 너희들을 그저 죽이는 것도 가볍게 처분하는 것인데 어찌 너희
와 농담을 하겠느냐?"
"하...... 하지만 이것은 요월궁주(逃月宮主)님께서......."
그러나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저 한 차례의 바람소리
가 들렸을 뿐인데 흑면군은 십여장(掌)의 따귀를 맞았다. 이 수법
은 그가 강풍의 부인에게 당한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번 것은 더욱 강했다. 십여장(掌)의 따귀를 맞은 그의 입 안에는
온통 피가 가득차 더 이상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연성궁주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옷자락이 바람에 날릴
뿐 의젓한 그녀의 모습은 전혀 움직인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나타났던 웃음은 이미 찾아 볼 길이 없었고 차디찬
음성이 그 웃음을 대신했다.
"너희들이 감히 함부로 언니의 이름을 입에 담는구나."
닭벼슬, 닭가슴, 그리고 닭 꼬리는 모두 놀라서 얼굴색은 새파
랗게 질려 넋을 잃고 서있었다. 그러던 중 닭벼슬이 먼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 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요......"
그는 '월'자를 채 입밖에 내기도 전에 안면에 똑같이 십여 대의
따귀를 맞았다. 그의 작은 몸집은 그 힘을 감당하지 못 하고 날아
갈 뻔했다.
연성궁주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다. 내가 너희의 생명을 앗아갈 것이라고 분명히 말해주
었다. 그래도 믿지 않겠단 말이냐?...... 아이......."
하고 말한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황의인의 거대한 몸
을 한바퀴 돌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저 눈앞이 한 번 번쩍거린
것을 느꼈을 뿐인데 황의인이 땅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어떤 권법
이나 검초를 사용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뼈가 삭은 것처럼 흐물흐
물 쓰러지고 만 것이다.
화의인(花衣人) 중의 한 명이 살며시 그에게 다가가 몸을 숙여
잠시 동안 살펴 보더니 갑자기 울부짖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죽었다. 둘째 형이 죽었다......"
다시 연성궁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믿겠지?"
이 소리를 들은 화의인이 외쳤다.
"너 이년......참으로 악독하구나!"
"그 천박한 놈의 목숨이 뭐 그리 대수롭단 말이냐? 너희들은 악
행과 살인이 적지 않았으니 이제 죽어도 억울할 것은 없을 것이
다."
닭벼슬이란 홍의인의 눈에는 악독한 살기가 가득찼다. 그가 돌
연 손짓을 하자 화의인들은 즉시 연성궁주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
다.
연성궁주의 가냘픈 몸매가 계조엽의 빛 속에서 한 바퀴 돌았다.
순간 세 명의 화의인들이 처참한 비명과 함께 쓰러졌고 나머지 한
명은 재빨리 뒤로 물러 섰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의 손에는
무기가 들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연성궁주가 어떻게 자기의 일격을 피했고 또 어떻게 자기
의 형제들을 쓰러뜨리고 자기의 무기를 빼앗아갔는지 전혀 알 수
가 없었다. 마치 영문도 모를 꿈을 꾸고 막 잠에서 깨어난 것 같
았다.
연성궁주가 긴 옷소매를 뿌리치자 일곱 자루의 계조염이 일제히
땅바닥에 우수수 떨어지는 한편 한 자루는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그녀는 그것을 잠시 동안 바라보더니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
다.
"원래 한쌍의 닭발이로구나. 맛이 어떨런지?"
그녀는 조그만 입을 열어 그 계조염을 살짝 물어 뜯었다. 쇠가
빠그라지는 소리가 들리며 그 강철로 만든, 무예계 사람들이 이름
만 들어도 벌벌떠는 외문병기(外門兵器)가 끊어졌다.
흑면군과 홍의 계관은 나이도 별로 많지 않은 이 여인의 공력이
이토록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연성궁주는 머리를 저으며,
"이 닭다리는 영 맛이 없구나!"
하고는 입에 물고있는 칼조각을 가볍게 내뱉었다. 은빛이 반짝
거리자 그 남은 한 명의 화의인이 비명을 지르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땅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새빨간 피가 그의 손가락 사이
에서 흘러 나왔다. 잠시 후 그는 몇 번 몸을 꿈틀거리더니 잠잠해
졌다.
그의 손바닥이 스르르 얼굴에서 내려졌다. 저녁노을에 비친 그
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얼굴뼈가 산산조각이 나 바스러진
것이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흑면군은 무릎을 털썩 꿇었다.
"궁주님, 제발.....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연성궁주는 그에게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도리어 살짝 미소를 띤
얼굴로 닭벼슬을 향하여 입을 열었다.
"네가 보기엔 나의 무공이 어떠냐?"
"궁..... 궁주님의 무공은 저...... 아니 소인이 난생 처음으로
본 뛰어난 것입니다....... 소인은 꿈 속에서도 이 세상에 그토록
뛰어난 무공을 지닌 사람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해보지 못 했습니
다."
"그래? 그런데 넌 별로 나의 무공을 무서워하는 것 같지 않구
나,그렇지?"
닭벼슬은 그야말로 난생 처음으로 남에게 이토록 아기달래듯한
심문을 받았다. 그렇지만 지금 그로서는 순순히 대답하는 것 외에
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섭습니다......, 매우 매우 무섭습니다!"
"이상하구나. 그렇다면 왜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를 않지?"
닭벼슬은 이 말이 떨어지자 비로소 자신이 서 있음을 깨닫고는
곧 무릎을 꿇었다.
"궁주님! 살려주십시오......."
연성궁주는 잠시 동안 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살려주는 것은 간단하나 먼저 나를 한 대씩 쳐야한다."
닭벼슬이 입을 열었다.
"소인이 어찌 감히......."
흑면군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소인들이 어찌 감히 궁주님에게 무례를 범하겠습니까?"
연성궁주는 두 눈을 부릅떴다.
"너희들이 정녕 죽고 싶단 말이지?"
닭벼슬과 흑면군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이 말을 많이 들어
왔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말에 대해서 대답을 해 본 일이 없었
다. 피를 봄으로 대답을 대신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똑같은 말을 듣고도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묻는 자가 연성궁주인 까닭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소인은 살고 싶습니다."
"살고 싶다면 어서 공격을 해라."
그들은 더 이상 머뭇거릴 수도 없었다. 서로 한번씩 얼굴을 쳐
다보더니 드디어 연성궁주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흠, 그래야지. 너희들은 안심하고 힘껏 손을 써라. 있는 힘을
다해서 말이다. 힘차게 치면 살려줄 것이고 만약 약하게 친다
면......흥!"
닭벼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기가 이렇게 말한 이상 전력을 다해 일격을 가해보자. 만약
성공한다면 다행한 일이고 설사 성공하지 못 한다 하더라도 살려
준다고 했으니 약속은 지키겠지.)
이 생각은 흑면군도 마찬가지였다.
(네 자신이 택한 것이니 나를 탓하지 마라. 네가 설사 강철로
만든 몸이라고 해도 나의 일격을 견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겨우 생긴 살 기회를 놓칠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그들
은 역시 쓰디쓴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네! 그럼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연성궁주는 차갑게 내뱉았다.
"빨리 공격하지 않고 뭘 망설이느냐?"
흑면군은 재빨리 허공에다 몸을 솟구쳐 쌍권을 연거푸 퍼부었
다. 거센 권풍(拳風)은 몇 백근(百斤)이 넘는 그의 몸의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뻗어나갔다.
그의 쌍권은 매우 민첩했고 정신을 흐트러놓을 듯 방향을 종잡
을 수없이 이리저리 진행되더니 마지막에 가서야 연성궁주의 가슴
을 노리며 덮쳐갔다.
이것이 바로 그의 무공의 절정인 신저화상(伸錯化象)이었다. 그
위력 아래서 적지 않은 무예계의 인물들이 죽어갔다.
닭벼슬이란 홍의인도 몸을 허공에 솟구쳐 계취탁을 빗방울 같이
날려 연성궁주의 앞가슴에 위치한 여덟군데 혈도(穴道)를 향하여
점(點)해 나갔다.
이것은 물론 그의 필사적인 일격이었다. 이 일격의 이름은 신계
제성(晨鷄啼星)이라 하고 들리는 말에 위무표국의 팔대표사가 동
시에 이 일격아래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과연 힘을 다하는구나!"
하고 말한 그녀가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나비가 날개짓을 하듯
한번 흔들자 한줄기 바람이 난무하는 계취탁과 권풍 속으로 들어
가 지그시 두사람의 힘을 압도했다. 이렇게 되자 닭벼슬과 흑면군
의 전력을 다한 일격은 갑자기 방향을 잃고 그들의 조종을 듣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사방으로 나르던 계취탁이 말을 꿰뚫었고 흑면군의 권풍
은 마차를 넘어뜨리고 말았다. 먼지가 뽀얗게 이는 가운데 사람과
말의 끔찍스런 비명소리가 벌판을 가로질렀다.
연성궁주는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
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흑면군은 이미 땅바닥에 쓰러졌
고 닭벼슬의 몸은 여덟 자밖에 있는 잡초 속에 굴러떨어져 있었
다.
잡초 속에서 잠시 동안 신음소리가 들리더니 조금 후엔 그것마
저 사그라들었다.
흑면군의 가슴에는 닭벼슬의 무기인 계취탁이 꽂혀 있었다. 그
는 이를 악물고 그 계취탁을 뽑았다. 그러자 무기가 꽂혔던 자리
에서 붉은 피가 샘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너...... 너......"
"나는 너희들을 해치지 않았다. 아, 친구끼리 무엇하러 치고 박
고 했느냐?"
흑면군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입술을 부
르르 떨며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단 한마디도 새
어 나오지는 못 했다. 수백 명을 잡초를 베듯 해친 그도 결국은
무참히 최후를 마친 것이다.
연성궁주는 나동그라진 시체를 내려다봤다.
"너희들이 만약 나를 죽일 마음만 먹지 않았어도..... 보다 좀
가볍게 손을 썼다면 혹시 살아있을 지도 모르지..... 나는 분명히
너희들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렇지?"
그녀의 이같은 중얼거림에 대한 대답은 조용한 침묵 뿐이었다.
강풍 부부는 필사적으로 마차 안을 향해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손이 막 아기들의 몸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어떤 손이 재빨리 아이들을 나꿔챘다. 손은 백옥같이 희고 기다
란 아름다운 손이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긴 하얀 소매가 손등까
지 내려와 있었다. 손은 옷소매보다 더욱 하얗게 보였다.
"아아! 아이들을..... 그 아이들을 나에게 주십시오......."
강풍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여인도 애원했다.
"둘째 궁주님 제발, 부탁이니 그 아이들을 돌려 주십시오."
연성궁주는 웃었다.
"월노(月奴), 네가 이미 강풍의 아이를 낳은 줄은 미처 몰랐구
나."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처량함과 원망스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화월노(花月奴)란 강풍의 아내를 말했다.
"궁주님! 제가 궁주님을 대할 면목이 없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 하지만......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부디 아
이들을 살려주십시오."
연성궁주는 한동안 그 아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이! 귀여운 아이...... 만약 내 아이였다면......"
그녀는 갑자기 강풍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원망과 슬픔이 가득차 있었다. 한참이나 강풍을 바라본 그녀는 드
디어 입을 열었다.
"강풍,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죠?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아무런 별다른 이유가 없소. 굳이 이유가 있다면 내가 이 여인
을 사랑했던 까닭이오."
"저 여자를 사랑한다고..... 나의 언니가 어디로 보아서 저 여
자보다 못 하단 말예요? 당신이 부상을 입고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언니는 당신을 구해왔을 뿐만 아니라 있는 정성을 다하여 당신
을 보살폈어요. 언니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남을 그토록 친절하
게 대해준 적이 없었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정말 지나칠
정도로 잘해 주었는데 당...... 당신은..... 하녀와 도망을 하다
니...... 당신도 사람입니까?"
강풍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응답했다.
"저는 진심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러나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당신 언니는 도대체 살과 피를 가진
사람입니까? 그녀는 한 덩어리 불이고 한 개의 얼음이고 한 자루
의 보검이고 심지어 마귀(廢鬼)나 신(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
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하고 말한 그는 자기의 처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를 향한 그
의 눈길은 부드러워졌고, 천천히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따뜻하고 정감있
는.....이 여인은 나에게 잘 대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저의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이 여인만이 나의 속마음을 사랑
하고 나의 영혼을 사랑했습니다. 남들과 같이 나의 얼굴만 사랑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연성궁주의 손바닥이 강풍의 따귀를 후려쳤다.
"그만..... 그만!"
"당신은 단지 이 여자가 당신을 이해해주는 것만 알지 내가 당
신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몰라요. 당...... 당신이 설사
추남(醜男)이 된다해도 나는 역시...... 역시......."
그녀의 음성이 점점 작아지더니 끝내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
았다.
화월노는 눈을 크게 떴다.
"둘째 궁주님도 이..... 이 사람을......."
"내가 이 사람을 이해해 줄 수가 없단 말이냐?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 된단 말이냐?...... 내가 불구이기 때문에 그를 사
랑하지 말란 법이라도 있느냐?...... 불구자도 사람이다. 불구가
된 여자도 여자란 말이다!"
그녀는 잠깐 사이에 사람이 변한 것 같았다. 조금 전만 하더라
도 그녀는 남의 생사를 쥐고 혼들 수 있는 초인간이었으나 지금은
오직 한 여인에 불과했다. 그것도 연약하고 가련한 여자였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주르르 흐르기 시작했
다.
무예계의 신화(伸話)같이 전해지는 그녀도 따뜻한 인간의 눈물
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강풍과 화월노는 그녀의 얼굴에 흐
르는 눈물을 보며 멍하니 한참이나 입을 열줄 몰랐다.
이윽고 화월노는 슬픔에 잠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둘째 궁주님, 저는 이미 살 가망이 없으니 이...... 이 사람은
지금부터 궁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을 구해주십
시오. 궁주님 외에는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연성궁주의 몸은 떨렸다. '지금부터 이 사람은 궁주님의 것입니
다'라는 말이 화살같이 그녀의 마음을 찔렀던 것이다.
강풍은 갑자기 신음과 같은 웃음을 토해냈다. 그 웃음소리는 통
곡하는 것보다도 더욱 처량하고 더욱 비참했다.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화월노를 바라보며 외쳤다.
"나를 살린다고...... 나를 살려서 어쩌겠다고...... 당신이 죽
는다면 내가 어떻게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소! 월노,
당신은 아직도 나를 이해하지 못 하는군요."
화월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이를 악물고 억지로 참고 있었다.
"저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이해하고 말고요. 하지만 당신이 만
약 죽는다면 이 아이들은 누가 보살피겠습니까?...... 누가 보살
핀단 말예요?"
그녀는 울음에 북받친 음성을 강풍의 손을 굳게 꼭 잡으며 억눌
렀다.
"이것은 우리의 죄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자식들에게 고생
을 남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죽음으로써 그 의무(義務)를
져버리려 하지 마십시오."
강풍의 비참한 웃음소리는 이미 그쳐 있었으나 그는 이를 악물
고 있었다.
화월노는 떨리는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살아 있는 것에 얼마나 고난(苦難)이 많은가를 알고 때로
는 죽는 것이 위로가 되는 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발 부탁
이니...... 아이들을 위하여 악착같이 살아 주십시오."
강풍의 얼굴은 눈물로 번들거렸다.
"내가 꼭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당신없이...... 마음에
슬픔만을 지닌 채......."
화월노가 말했다.
"둘째 궁주님, 무슨 일이 있다 해도 궁주님은 이 사람을 꼭 살
려주셔야 합니다. 만약 궁주님이 진심으로 이 사람을 사랑한다면
궁주님의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는 없을 것입니다."
연성궁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나는 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단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별안간 어디선가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틀렸다. 너는 그 자를 살려낼 수 없다. 이 세상에 그를 살려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들려온 목소리는 너무나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 속에는 차가
움과 무정함이 섞여 있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몸이 오싹함을
느끼게 하는 한편 또다른 한가닥의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어 포근한 감을 느끼게도 하였기 때문이다.
강풍의 몸은 추풍(秋風)속의 낙엽(落葉)같이 벌벌 떨려왔다. 연
성궁주의 얼굴도 순간적으로 창백해졌다.
한가닥의 백의 인영(白衣人影)이 거의 스러져가는 석양의 빛을
따라 그들 앞에 났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그녀의 옷자락. 그녀는 마치 바람을 타고 세
상에 온 선녀같았다. 그녀의 백의(白衣)는 함박 쌓인 심산의 눈보
다 더욱 눈이 부셨고 긴 머리카락은 밤을 맞은 장강의 깊은 물처
럼 검게 윤이 났다. 그 살결은 마치 동짓달 만월처럼 투명하고 청
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의 용모는 실로 선녀(仙女)라고
해도 과분한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더없이 아름다우면서
도 기이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그것은 그녀의 몸에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혼을 빼앗아갈 만한 마력(廢力)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연성궁주는 고개를 숙였다. 앵두 같은 입술을 한참 깨물고 있던
그녀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언니, 언니....... 오셨군요."
요월궁주가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내가 올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단 말이냐?"
연성궁주는 고개를 더욱 낮게 숙였다.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그리 일찍 온 것은 아니야. 하지만 내가 듣지 않았어도 좋을
말들을 이미 모두 다 들어버렸다."
강풍은 문득 무엇인가 생각난 듯 큰소리로 외쳤다.
"당...... 당신은..... 벌써 왔었군요. 그 닭벼슬과 흑면군이
다시 돌아올 용기가 있었던 것은 당신을 만났던 까닭이죠? 당신은
모든 비밀을 그들에게 말했지요, 그렇지요? 당...... 당신은 왜
이렇게 비열해야 하고 왜 이렇게 악독해야만 합니까?"
"나는 악독한 사람을 상대하게 되면 그보다 열 배 이상으로 악
독하게 대해왔다."
이번에는 화월노가 입을 열었다.
"큰궁주님, 이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이니 이.......이 분을 탓하
지 마십시오."
요월궁주의 음성이 한 자루의 예리한 칼처럼 변했다.
"너...... 네년이 그래도 말할 용기가 있느냐?"
화월노는 안간힘을 써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저...... 저......."
"이젠 네가 나를 보았으니 죽을 때도 되었구나."
화월노는 두눈을 감은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궁주님,"
강풍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이 년이 당신 보고 죽으라는 데 그래 당신은 이년에게 감사하
다고 한단 말이오?"
화월노의 입가에는 한가닥의 처량한 웃음이 소리없이 떠오를 뿐
이었다.
"제가 먼저 죽는다면 당신과 아이들이 죽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니 고통을 적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이것은 바로 궁주
님이 저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인데 제가 당연히 감사하다고 인사
를 올려야죠."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두 눈을 뜨고 강풍과 두 아기를 잠시 동
안 바라보았다. 그저 한 번 바라보는 것이었지만 그 속의 정(情)
은 바다같이 깊었다.
강풍은 가슴이 메일 듯한 고통을 참아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월노! 죽어서는 안 되오....... "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저승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
다."
그녀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영원히 그 눈을 뜰 수 없게 감았던
것이다.
강풍은 있는 기력을 다했다.
"월노!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나도 당신과 함께 가겠소......."
이렇게 외친 그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갑자기 몸을 날
려 월노를 향해 덮쳐갔다. 그러나 그가 몸을 날리는 순간 한가닥
의 거센 바람이 부딪쳐왔고 그는 다시 그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요월궁주가 말했다.
"얌전하게 누워 있어라!"
"나는 단 한번도 남에게 애원한 적이 없는데 이번 만큼은 당신
에게 애원하겠소. 제발..... 제발...... 제발 부탁이니 저 여인과
함께 죽게 해주십시오!"
"너는 저 여자의 손가락 하나도 만질 생각을 마라!"
강풍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만약 눈초리로 사
람을 죽일 수 있다면 그녀는 벌써 백 번 이상 죽었을 것이다. 그
러나 요월궁주는 그저 조용히 서있었다.
강풍은 갑자기 미친 듯이 껄껄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연성궁가 가벼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웃음이 나와요? 당신에게 무슨 웃을 만한 일이 있단 말
이오?"
"너희들은 모든 것이 너희 마음대로 된다고 생각하지만 난 죽기
만 하면 곧 월노와 함께 있을 수 있다. 너희들이 어쩔 수 없단 말
이다."
그는 땅바닥에 몸을 몇 번 굴렸다. 그의 웃음소리는 점점 작아
졌고, 끝내는 완전히 사라졌다.
연성궁주는 가벼운 비명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강풍의 몸을 뒤집
었다. 한 자루의 단도가 그의 가슴에 꽂혀있는 것이 보였다.
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달빛이 조용히 대지에 뿌려지고 있었다.
연성궁주는 그 자리에 꿇어앉아 목석(木石)같이 꼼짝도 하지 않
았다. 여름철의 시원한 밤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허탈하게 입을 열었다.
"죽었어요...... 그는 드디어 자기의 소원대로 죽었습니다. 우
리는 뭐죠?"
그녀는 불쑥 일어나 요월궁주의 앞에 다가서며 울부짖었다.
"우리는...... 우리는 뭐죠? 이들은 모두 자기의 소원대로 됐는
데 우리는 뭐죠?"
요월궁주는 눈앞에 벌어진 일들에도 아무런 감정의 움직임이 없
는 듯 냉정했다.
"입 닥쳐 !"
"닥치지 못 해요. 언니가 이렇게 해서 얻은 것이 뭐죠?
언......언니는 단지 그들을 더욱 사랑하게 했고 더욱 언니를 원
망하게 했을 뿐이에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에는 불똥이 튀었다.
연성궁주는 뒤로 몇 발걸음을 물러선 후 뺨을 쓰다듬으며 떨었
다.
"언...... 언...이 언니."
"너는 단지 그들이 나에게 지닌 원한만을 알 뿐, 내가 그들에게
얼마만한 원한을 품고 있는 지는 모르고 있다. 아아! 가슴에서 피
가 솟구쳐나오는 것 같구나."
그녀는 갑자기 자기의 옷소매를 걷어을렸다.
"이것을 봐라!"
달빛 아래 그녀의 백옥(白玉)같이 흰 팔이 나타났다. 그 팔에는
빨간 핏자국이 가득차 있었다.
연성궁주는 섬짓하여 물었다.
"이...... 이것은......."
"모두가 바늘로 찌른 자국이다. 그들이 떠난 후 나는 너무나도
한(恨)스러운 나머지 바늘로 내 살을 찔렀다. 매일같이 내 육체에
고통을 주어야 마음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너는 알고 있느냐...... 너는 알고 있느냔 말이다......."
그녀의 차갑고도 얼음 같던 음성이 갑자기 떨리는 소리로 변했
다.
연성궁주는 그녀의 팔목에 아롱진 핏자국을 보고 한참 동안 서
있다가 결국 눈물이 가득찬 얼굴로 언니의 품에 안겼다.
"그럴 줄이야...... 언니도 그토록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줄이
야."
요월궁주는 동생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하늘에 떠있는 달을 바라
보았다.
"나도 사람이다...... 나도 사람이기에 고통을 겪어야 했고 또
한 모든 사람들과 같이 원한을 느끼고 질투해야 했던 것이다."
달빛이 굳게 껴안은 두 자매를 비추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은 그녀들은 무예계를 주름잡고 천하에 이름을 떨
치는 여마두(女廢頭)가 아니고 아프기만 하면서도 지워지지 않는
애정으로 괴로워하는 불쌍하고도 평범한 여인들이었다.
"언니...... 언니...... 나는 이제야 비로소......."
이때 요월궁주는 갑자기 그녀를 밀어 제쳤다. 연성궁주는 몇 자
(尺)밖으로 밀려 나서야 겨우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
나 그녀는 그리 언짢은 표정이 아니었다.
"이십여 년 동안 언니는 처음으로 저를 안았습니다. 언니가 저
를 뿌리쳤지만 저는 이미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요월궁주는 더 이상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차갑게 내뱉
었다.
"어서 죽여라!"
"죽여요?...... 누구를 죽이라는 말입니까?"
"저 아기들을 죽여라!"
"아기요?...... 그들은 이제야 비로소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벌
써.......벌써........."
"나는 그들의 아기를 살려 둘 수 없다! 만약 죽여 없애지 않는
다면 그들이 바로 강풍과 그 못된 년의 아기라고 생각할 때마다
고통을 느낄 것이다. 나는 평생 동안 그런 고통을 느끼며 살아갈
순 없다."
"하지만 저는......."
"왜? 네가 할 수 없단 말이냐? 좋다! 그럼 내가 하겠다."
그녀는 긴 옷소매를 번쩍 들었다. 땅바닥에 놓여있는 긴 칼을
움켜쥔 그녀의 눈에 달빛에 반사된 칼날이 은빛을 번쩍거리며 비
쳐왔다. 칼이 번개 같은 속도로 달게 잠을 자고 있는 두 아기를
향하여 내리쳐졌다.
연성궁주는 급작스레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칼끝은
한 아기의 얼굴을 스쳐지나가 작지 않은 상처를 내었다. 아기는
아픔을 참지 못 하여 자지러지는 듯한 울음을 터뜨렸다.
요월궁주는 동생의 행동에 대노했다.
"네가 감히 나를 막으려는 것이냐!"
"저...... 저는......."
"놓아라! 너는 내가 언제 하고자 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언니, 저는 언니를 막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그들을 죽
이는 것보다 더욱 좋은 방법이 생각났기에 이렇게 한 것입니다."
요월궁주는 잠시 동안 망설이더니 물었다.
"무슨 방법이냐?"
"언니는 그 못된 년에게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품고 있죠?"
"흥! 그년에겐 그럴 자격도 없다."
"강풍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
는 이 아기들을 죽인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애들은
지금 무엇이 고통인 줄도 모르고 있는데 말입니다."
요월궁주의 눈에서 빛이 번쩍했다.
"이 애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
"이 애들을 평생 동안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우
리의 한을 푸는 것이 아니겠어요? 강풍과 그 못된 계집은 이미 죽
었지만 그들을 편안히 잠잘 수 없게 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위로
가 될 것입니다."
요월궁주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왜 갑자기 마음이 변했느냐?"
"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에게 한없는 원한을 품
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심지어 언니보다 더욱 깊게 말입니
다!"
요월궁주는 그녀의 말을 믿었던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좋다! 무슨 방법으로 그들을 평생 동안 고통 속에서 지내게 할
수 있단 말이냐?"
"지금 강풍이 쌍둥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우리
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요월궁주는 그녀가 무슨 까닭에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아기들 자신도 모르고 있어요."
"필요없는 잔소리는 하지 말아라."
"그 천하제일 검객이란 연남천(燕南天)은 강풍의 친한 친구입니
다. 원래 이 길에서 강풍을 마중하기로 약조가 돼 있었죠. 그렇지
않았다면 강풍이 굳이 이 길을 택할 리는 없었습니다."
"너는 어디서 그렇게 많은 소식을 탐지(探知)했단 말이냐, 놀랍
구나?"
"하지만 연남천이 늦었던 것이에요."
"그가 아마 온다해도 한 구의 시체만 더할 뿐이다."
"그는 얼마 있으면 이곳에 올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 두 아
기중 한 명만을 데려가고 나머지 한 명을 이곳에 남겨놓는다면 연
남천은 남겨놓은 아기를 데려갈 것이에요. 그는 당연히 자기 의제
의 아들을 키울 테고 자기 일생 동안 배운 무공을 그 아기에게 전
수(傳授)하겠지요. 그리고 그 아기가 크게 되면 자기의 부모를 위
하여 원수를 갚고자 할 것은 불을 보는 것 같이 뻔한 일입니다."
"옳은 판단이다."
"그리고 복수의 대상은 바로 이화궁이 되는 것이지요."
요월궁주의 눈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옳은 말이다."
"그때쯤은 우리가 데리고 간 아기도 성장할 테고 물론 그도 뛰
어난 무공을 지니게 되겠죠. 그는 만약 적이 우리를 해치려 한다
면 당연히 나서게 될 것이어요. 그들은 서로가 형제인 줄 모를 테
고 세상사람들도 아무도 모르고 있으니 그들은 필사적인 싸움을
하게 되겠죠. 이렇게 되면......"
"그들이 이 세상에 같이 살 수 없는 원수 사이가 된다는 말인
가?"
"바로 그래요. 그땐 동생이 형을 죽이려 하고 형도 물론 동생을
죽이려 할 테니 말입니다."
요월궁주의 얼굴에는 드디어 한가닥의 미소가 나타났다.
"그것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겠구나!"
"이 애들을 지금 그냥 죽이는 것보다 더욱 잔인하게 우리 가슴
속의 울분을 풀 수 있어요."
"누가 누구를 죽이든 살아남은 애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면 그의
얼굴에 그려지는 표정이 가관이겠지."
"우리의 회한을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겁니다."
요월궁주의 태도가 갑자기 또다시 변했다.
"하지만 누가 이 비밀을 그들에게 말한다면......."
"세상에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
아요?"
요월궁주는 차디찬 음성으로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너를 제외하고 말이다."
연성궁주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저요? 이 모든 것이 제가 생각해낸 것인데 어찌 제가 그들에게
얘기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언니도...... 아시겠지만 제 마음
은......."
요월궁주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야. 온 천하에 아마 너만이 이런 괴상한 방법을 생각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생각해낸 이상 그들에게 이 비밀을 얘
기하지야 않겠지."
상처입은 아이는 어느덧 울음을 그쳤다. 그는 마치 이같은 뼈에
사무친 원한과 악독하고 놀라운 계책에 놀라 넋을 잃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한쌍의 순진하고 두려움으로 가득찬 눈은 장차의 재
난(災難)과 고통과 일생의 불행을 예측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요월궁주는 고개 숙여 그들을 잠시 동안 쳐다보더니 중얼거렸
다.
"십수 년...... 최소한 십수 년을 기다려야 한단 말이
지......."
"적지 않은 세월이지만 보복만 할 수만 있다면 그 십수 년이 뭐
가 그리 대수롭단 말입니까?"
요월궁주가 장탄식을 했다.
"이 뼈에 사무친 원한 외엔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나를 그토
록 오랜 세월동안 기다리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검 연남천(神劍 燕南天)
깨끗한 석판길, 간소한 집, 그리고 순박한 사람들.......
한 작고 평범한 마을, 한여름이었지만 작열한다기 보다는 오히
려 나른한 볕이 이 마을의 유일한 주점인 태백거(太白居)의 지붕
을 비추고 있었다.
주점은 영업이 잘 되지 않았던지 비스듬히 모자를 쓴 종업원이
상위에 엎드려 졸고 있었고, 오직 한 사람의 손님만이 앉아 있었
다.
그러나 그는 벌로 환영받을 만한 종류의 손님은 아니었다. 그는
이삼 일간이나 계속 술을 마시러 왔다. 그러나 가장 싼 술만 주문
했을 뿐 아니라 안주는 한 번도 시키질 않았다.
그는 여덟 자(尺)의 거구를 벽에 기대어 양 다리를 쭉 뻗고 자
고 있었는데 양 발의 짚신이 다 닿아서 두 개의 큰 구멍이 나 있
었다.
탁자의 술주전자는 벌써부터 비어 있었고 파리가 그의 두 검은
눈썹과 튀어나온 볼, 그의 얼굴 전체에 돋아난 수염에 앉았다 날
아가곤 하였다. 그는 이따금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가느다란 큰 손
으로 얼굴을 긁었다. 다른 한손으로는 녹이 슬어서 거의 썩으려하
는 철검을 잡고 있었는데 깊은 잠에 취한 듯 보였다.
때는 정오를 지난 지 얼마 안 되었다. 조용한 마을에 돌연 몇
필의 말이 달려와 주점 앞에서 일제히 멈추었다. 몇 명의 금의(錦
衣) 사나이가 일시에 그 작은 주점으로 들이닥쳤다. 주점은 갑작
스런 손님으로 활기를 띠었다.
앞장선 사나이는 허리에 꽤 좋은 검을 차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온통 곰보였다. 그는 주점에 들어서자 큰소리로 웃으면서 입을 열
었다.
"태백거(太白居)! 이 낡은 집도 태백거(太白居)라 할 수 있는
가?"
그의 뒤로 둥근 얼굴에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와 비록 검은 차고
있었어도 포목점의 주인 같아 보이는 사나이가 웃으며 말을 받았
다.
"뇌노대(雷老大), 당신 말은 옳지 않소. 이태백(李太白)은 몇
귀(句) 시(詩)는 잘 썼소. 그러나 돈도 세력도 없는 그에겐 아마
이런 곳이 가장 잘 어울렸을 것이오."
뇌노대는 고개를 들고 크게 웃더니 말했다.
"하하! 애석하게도 이태백은 죽은 지 오래됐어. 살아 있다면 술
이나 대접할 수 있는데...... 어 이 술파는 놈아, 빨리 좋은 술과
안주를 올려라."
몇 잔의 술이 돌아가자 그들의 떠드는 소리와 웃음 소리는 더욱
커졌다. 아까부터 구석에 앉아있던 사나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허리를 펴더니 드디어는 앉아서 중얼거렸다.
"난 구린내는 못 맡고 저속한 것은 참지 못 해......."
그는 돌연 상을 치면서 언성을 높였다.
"빨리 술을 갖고와. 속기(俗氣)를 좀 풀어야지."
그가 벼락같이 큰소리를 지르자 몇 명의 금의(錦衣) 사나이들이
놀라 손에 든 술잔을 떨어뜨렸다.
뇌노대(雷老大)는 안색이 싹 변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다른
사람들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 끌며 만류했다.
"총표두가 곧 올 텐데 말썽을 일으킬 필요가 있겠소?"
뇌노대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다시 앉아서 술을 한 잔 마
셨다.
"손노삼(孫老三), 노총(老總)이 말한 곳이 바로 여긴가? 확실한
가?"
손노삼은 웃으며 대답했다.
"틀림이 없소. 전이(錢二)도 들었을 것이오."
얼굴이 둥근 사나이는 웃으면서 잘라 말했다.
"그렇지. 바로 여기요. 노총(老總)이 이번에 이곳에 오는 것은
한 분의 대영웅을 만나기 위해서라 하였소. 그리고 우리더러 우선
물을 가지고 이곳에서 기다리라는 것이었오."
뇌노대가 말했다.
"자네는 노총(老總)이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있나?"
전이(錢二)는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작은 소리로 이름을 말했
다.
뇌노대는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였구나. 그가 여기에 온다고?"
"그가 오지 않으면 노총(老總)이 어찌 이런 곳까지 오겠소?"
그 사람들은 곧 얘기에 빠져들어갔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돌
리며 입가에서는 쉬지않고 말이 오갔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의 검엔 신선(伸仙)도 죽어나갈 것이라
고 하더군. 그 검은 강철을 자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검빛이 한
밤중의 불빛보다 더욱 환하다지."
"음! 그렇겠지. 만일 그런 보검이 없었다면 어찌 그 짧은 시간
에 음산(陰山) 악당놈들의 목을 모두 절단냈겠나!"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오자 그들은 각기 자기 허리에서 검을 끌
어 내렸다. 어떤 사람은 검을 꺼내어 옷으로 닦아내기도 하였다.
뇌노대의 웃음소리가 다시 커졌다.
"내 검도 상당히 좋지만 그의 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그렇지만 않았다면 난 벌써 이름을 날렸을 거야."
전이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지도 않죠. 검만으로 명성을 얻게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
른 건 집어 치우고라도 그 사람은 경공(輕功)만으로도...... 흐!
북경성(北京城)이 아무리 높다해도 그가 발을 내딛으며 넘어갈 수
가 있다지."
뇌노대가 혀를 내두른다. 믿지 못 하겠다는 눈치다.
"정말이야?"
"정말이고 말고. 내 들은 말인데, 그 당시만 해도 분명 날저물
녁에는 북경성(北京城)에서 술을 마셨다는데 날이 밝자 이미 음산
(陰山)에 와 있었다는 거요. 음산(陰散)의 악마들은 칼빛만 보고
도 목이 다 날아갔지...... 흐! 그 검빛이 마치 하늘에서 번쩍거
리는 번개 같아서 음산(陰山) 몇 백 리 밖에서도 보였다는 거야."
그때 구석의 그 초라한 옷차림의 사나이가 옷자락으로 낡은 검
을 두세 번 닦고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크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
다.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소리야!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 또 그런 칼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뇌노대는 안색이 변하면서 상을 집고 벌떡 일어섰다.
"네놈은 웬 개소리냐? 뜨거운 맛을 보겠는가?"
초라한 옷차림의 사나이는 들은 적도 하지 않고 여전히 녹슨 검
을 닦으면서 술을 마실 뿐이었다.
뇌노대가 분기가 탱중해 그를 향해 달려가려 하자 전이가 그를
막고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큰걸음으로 그 초라한 사나이에게
다가가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친구, 보아하니 검을 연마하는 사람 같은데 귀를 더욱 열심히
연마한 모양이구려. 워낙 귀가 단단해져서 남의 말이 잘 먹히지
않는 모양이오. 친구는 우리가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오?"
초라한 옷차림의 사나이는 허리를 펴며 빙그레 웃었다.
"누구요?"
"연 대협(燕大俠>, 연남천(燕南天), 연신검(燕伸劍)이오......
하하! 친구, 당신이 정말 검을 연마하는 사람이라면 이 이름을 듣
고는 그럴만 하다고 수긍하겠지요?"
그러나 그는 웃음마저도 서두고 시큰둥하게 물었을 뿐이다.
"연남천?...... 연남천이 누구요?"
전이는 베를 잡고 한바탕 크게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
"당신은 연 대협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 했다는 것이오? 하하!
그러면서도 겸을 연마한다는 거요?"
"그렇다면 당신은 필시 그이를 알겠군요?"
"이거...... 흐흐...... 하하하......."
초라한 옷차림의 사나이가 또 물었다.
"그는 어떻게 생겼소? 또 그 검은......."
뇌노대가 결국 참견하려는지 t딱' 하고 술상을 치며 소리쳤다.
"우리는 비록 그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당신 같은 비렁뱅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소. 그의 검 또한 당신 것처럼 썩은 나무토
막 같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나 그 초라한 옷차림의 사나이는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
이 태연했다.
"당신도 보표인 것 같은데 눈이 그렇게 밝지 않아서야 쓰겠소?
내 비록 행색은 초라하나 그러나 이 검은, 이 검은......."
뇌노대가 비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썩은 검이 무슨 신물(伸物)이라도 된단 말이오?"
그는 자기의 검을 내려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이 검은 바로 철강도 자를 수 있는 명검이오."
이 말이 나오자 사람들은 모두 앙천대소하며 배꼽을 잡고 웃어
제꼈다.
뇌노대는 킬킬거리며 말했다.
"당신의 검이 철강을 흙 짜르듯이 할 수 있다면 고주망태가 되
도록 술을 사드리겠소. 그리고......."
그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그 초라한 사나이는 자리를 박
차고 벌떡 일어섰다.
"좋아, 검을 뽑아 시험해 보시지!"
그가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어서 있는 모습을 보니 여덟
자(尺)의 거구가 정말 놀랍도록 커보였다. 뇌노대의 몸도 작은 편
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도 놀라서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손
노삼도 뚱뚱하지만 그의 거대한 몸과 비교하면 어린애에 불과했
다. 그는 살이 많이 찐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골격이 크고 어깨가
넓었다. 그리고 한쌍의 손을 내리니 무릎밑까지 내려왔다.
이때 언제 들어왔는지 안색이 창백한 파란 모자를 쓴 소년 하나
가 이들을 보면서 벽에 기대어 웃고 있었다.
뇌노대는 결국 그의 강철검을 뽑아 가슴을 펴면서 소리쳤다.
"좋아! 해보지."
"자, 한번 힘껏 공격해 보시오."
"조심하시오. 다치고 나를 원망은 마시고."
뇌노대는 팔을 흔들면서 강검으로 공격해갔다.
그 초라한 옷차림의 사나이는 왼손으로는 술잔을 들고 오른손으
로는 녹슨 검을 들더니 대응했다..탕' 하는 소리가 울리자 뇌노대
는 다시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그의 수중에 있는 장검은 이미
반쪽밖에 없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자기의 눈을 믿지 못
할 정도였다.
그 사나이는 녹슨 검을 만지면서 크게 웃었다.
"어때?"
뇌노대(雷老大)는 혀를 내밀고 맥없이 대답했다.
"좋은...... 좋은 검이오. 과연 좋은 검이오."
"이런 좋은 검이 나의 손에서 썩고 있소."
자조하는 듯한 사나이의 말에 뇌노대의 눈이 돌연 생기를 띠었
다.
"친구...... 친구께서...... 그 검을 팔 용의가 없으신지?"
"팔고는 싶으나 살 사람이 없어서......."
"나...... 내가 사드리겠소, 어떻소?"
초라한 옷차림의 사나이는 아래위로 뇌노대를 몇 번 뚫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영웅기세를 보니 이 보검에 어울릴 것 같소. 다만 당신
이 이 보검에다 값을 좀 쳐주셔야겠소."
"그건 좋지요. 물론 그래야죠."
그는 동료들과 한 구석으로 물러가서는 한동안을 수근대더니 각
기 주머니에서 은전을 꺼냈다.
그 초라한 옷차림의 사나이는 술상에 다시 앉아 술만 퍼 마시고
있었다.
얼마 후 뇌노대가 걸어와 말했다.
"오백 냥(兩)으로......."
"얼마요?"
그 사나이의 대답이 시원치 않자 뇌노대는 급히 웃으며 다시 흥
정했다.
"일천 냥(兩)으로는 되겠는지. 친구...... 사실, 우리 네 사람
이 주머니를 모두 털어도 이것 밖엔 없소."
초라한 옷차림의 사나이는 한참 침울한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검은 본래 무가(無價)의 보물이오, 그러나 옛말에 '보물은
영웅에게 수여 된다'는 말이 있소...."좋소. 천 냥(兩)으로 팔겠
소."
뇌노대는 그가 이토록 통쾌하게 대답을 할줄은 몰랐다. 그가 다
시 생각을 바꿀까 두려워서 재빨리 많은 은전을 두 손으로 넘겨주
었다.
"여기에 있으니 세어 보시오."
"셀 필요는 없겠지, 틀림 없겠지...... 자 보검이 여기있소. 보
검은 덕자(德者)만이 어울리오. 당신도 앞으로는 조심하여야 하
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무기도 폐물이 될 수 있으니......."
"네 ! 네......."
양손으로 검을 받아든 뇌노대는 마치 보물이라도 얻은 것처럼
매우 기뻐했다.
그 초라한 옷차림의 사나이는 주머니에서 하나의 은전을 꺼내어
'탕' 하며 상위에 놓았다. 그는 길게 허리를 편후 하품을 하고는
일어섰다.
"나는 가겠오. 여기의 계산은 모두 내가 하지요."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큰걸음으로 걸어나갔다. 이때 안색이
창백한 그 소년도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따라나갔다.
뇌노대는 너무 기뻐서 자기의 생일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전
이도 기쁨을 감추지 못 하고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뇌노대가 이런 검을 얻었으니 정말 영광인데. 금후의 강
호는 우리 뇌노대의 천하일 것이오."
"별말씀, 이건 모두 여러분들의 덕택이야...... 하하, 나 뇌노
대가 이런 명검을 만나는 걸 보니 운이 아주 좋은 놈이야!"
"뇌노대는 이제 이 명검이 있으니 연남천(燕南天)도 실색할 것
이고 우리 표국의 총표두도 함부로 못 할 거야."
뇌노대는 곰보가 꽃이 필 정도로 웃었다.
"금후에 내가 정말 그렇게 된다면야 여러 친구들을 잊을 수야
있겠어?"
그는 손에 그 검을 들고는 앉지도 서지도 못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마치 검을 입에 물면 녹을까 걱정이고 어깨위에
올려 놓으면 떨어질까 걱정하는 꼴이었다.
"하하하! 여러분들은 무슨 일로 그토록 기분이 좋으십니까?"
웃음소리와 함께 키가 작고 눈동자가 불덩어리 같은 금의 사나
이가 큰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는 몸이 작았으나 정기가 돌았으며 한 걸음을 움직이는 데에
도 위엄이 드러났다. 이 사람은 한눈에도 평상시에 명령을 많이
하는 사람 같았다.
전이를 위시한 몇 사람은 모두 달려와서 공손히 읍하며 예를 올
렸다.
"총표두......."
몇 사람은 곧 이곳의 경과를 샅샅이 보고했다.
그 총표두는 눈을 움직이면서 차분히 말했다.
"정말이냐? 그건 정말로 기뻐해야할 일인데, 천운(天運)이군."
뇌노대는 웃으며 달려왔다가 머뭇거렸다. 그는 보검을 얻었으니
신분이 이제까지와는 달라졌다고 생각하는지 뒤로 물러났다.
"총(總)...... 심(沈)형의 말이 맞소. 이건 오로지 제가 운이
좋았을 뿐이오."
그는 칭호까지도 변경하여 불렀다. 심 총표두는 아무 것도 모르
는 것처럼 미소를 띠울 뿐이었다.
"사실 말이지만 이런 좋은 검은 나도 처음 보는 것이니 뇌형께
서 선을 좀 보여주시는 것이 어떻겠소?"
"그런 것쯤이야 좋습니다. 심형(沈兄)이 직접 시험해보면 아실
거요."
심 총표두가 말했다.
"전형(錢兄)의 검을 좀 빌립시다."
전이는 검을 들고 옷소매를 거둔 뒤 미소지으며 말했다.
"뇌형, 조심하오."
뇌노대는 총표두가 검을 때자 그 초라한 옷차림의 사나이와 같
은 자세를 취했다. 그가 막 왼손으로 술잔을 들고 술을 마시려 하
는데 검빛이 갑자기 번뜩이자 술을 마실 틈도 없이 황급히 한손으
로 막아냈다.
'탕, 탕, 쨍, 퍽' 하는 소리가 나면서 과연 검이 두 토막으로
갈라져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심 총표두 수중의 검은 아니었다.
뇌노대의 그 '보검'이었다.
첫번째의 소리는 양검이 부딪치는 소리였고, 두번째는 검이 땅
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세번째의 소리는 술잔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였으며, 네번째 소리는 뇌노대가 땅에 쓰러지는 소리였
다.
이렇게 되자 뇌노대의 안색이 크게 변한 것은 몰론이고 다른 사
람들도 모두 멍하니 서서 소리도 내지 못 했다.
심 총표두는 수중의 장검을 거두며 싸늘하게 웃었다.
"이것이 보검인가?"
"그러나 조금 전엔 분명히..... 분명히......."
"자네는 분명히 남에게 속은 게로군."
뇌노대는 돌연 날뛰면서 큰소리쳤다.
"내가 그 녀석을 찾아서......."
심 총표두가 소리쳤다.
"잠깐!"
뇌노대는 싸늘한 총표두의 말에 얌전히 걸음을 멈추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총...... 총표두께서 무슨 분부라도?"
"그 사람의 생김새가 어떻던가?"
"무뢰한인데 가난하고 키가 좀 큰 사람이었소이다."
심 총표두는 한동안 침울한 표정으로 생각하다가 돌연 안색이
변하면서 말했다.
"그 사람의 눈썹이 특히 검지 않던가? 골격이 특별나게 크지?
눈을 반쯤만 뜨고 반은 감고 있어 마치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사
람 같지 않았나?"
"그렇소. 총표두께서는 그를 알고 있나요?"
심 총표두는 그를 바라본 후 다시 전이를 힐끗 보더니 하늘을
향해 길게 탄식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나를 다년간 쫓아 다녔어도 모두 눈이 멀었어!"
여러 사람들은 서로 바라 보면서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그가 누구지요?"
심 총표두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가 바로 강호제일 신검(江湖第-伸劍)이에. 내가 오늘 바로
그분을 만나 뵙기 위해 온 것이야."
주점을 나선 그 초라한 사나이는 유유히 길을 따라 걷고 있었고
그의 뒤를 창백한 청의 소년(靑衣少年)이 총총히 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길모퉁이를 돌자 소년이 禁아 달려가서 작은 소리로 말했
다.
"연 큰아버지 이신지요?"
연남천은 걸어가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너는 강이제(江二弟)의 심부름으로 왔는가?"
"소인이 바로 강이야(江二野)의 서동(書重) 강금(江琴)입니다."
연남천이 돌연 고개를 돌려서 무서운 소리로 말했다.
"너는 어찌 지금에야 오느냐?"
그의 눈빛은 마치 공중에서 내려온 번개와 같았다. 강금은 자기
도 모르게 소름이 끼쳐서 손을 내리며 말했다.
"소인...... 소인은 행적이 남의 눈에 될까 걱정이 되어서 밤에
만 다녔습니다. 그리고...... 소인은 비록 어릴 때부터 공자(公
子)님을 따라다녔지만 경공은 매우 가련하죠."
"너희 집 공자가 일 년 만에야 보낸 전서구(傳書鴻)에는 여기서
기다리라고만 하고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필시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이냐?"
"말씀대로 저희 집 공자께서는 일 년 이상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아오셔서 집안 사람들을 모두 분산시키고 저만
남게 했어요. 그리고는 저더러 여기서 나으리를 만나 뵈오라 했
죠. 말씀인즉 이쪽 폐허가 된 길로 오시면 나으리를 만날 수가 있
고, 자세한 사정은 만나서 이야기를 하시겠다는 거예요. 보아하니
저희 집 공자님은 무슨 큰 위험을 피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어! 그런 일이 있었다구! 왜 일찍 나에게 알리지 않았을까? 둘
째가 하는 일은 항상 이렇다니까. 우리 형제가 대체 뭘 두려워하
겠어?"
"큰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너희 집 공자는 출발한 지 얼마나 되었지?"
"시간으로 보아서는 이미 장도에 올랐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씨마님의 몸이 무거운지라......."
"아씨마님?"
"예! 저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오나 공자님은 만삭의 아씨마님과
함께 오셨습니다."
"어허! 도대체 모를 일이다. 그나저나 네놈은 더 일찍 왔어야
했다. 만일에......."
이때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 대협...... 연 대협(燕大俠)......"
몇 사람이 급히 달려왔다. 앞장 선 사람은 신법이 날씬하고 가
벼운 것이 심 총표두였다.
연남천은 약간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무거운 소리로 말했다.
"오신 사람은 위원(威遠), 진원(鎭遠), 영원(寧遠) 삼대표국의
총표두인 비화만천(飛花萬天) 낙지무성(落地無聲) 심경홍(沈輕班)
이 아니십니까?"
심경홍은 공손히 인사를 한 후 입을 열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바로 소인이 그렇습니다. 후배들
이 사람을 볼 줄 몰라 연 대협을 몰라 뵙고......."
연남천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혹 보표를 해달라고 날 찾은 것은 아니겠지?"
심경홍이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후배가 감히...... 다만 후배는 선배께서 여기에 계신 것을 알
게 되어 십이성상을 부근에 요청했습니다. 선배님께서 한번만 발
걸음을 하셔서 분부를 하신다면 십이성상이 제아무리 욕심이 있어
도 표국의 물건들을 찬탈할 마음은 감히 못 먹을 것이라 생각되었
기 때문입니다."
"네가 보표할 힘이 없다면 그 물건을 왜 받았나?"
"후배가 죽일 놈입니다. 다만 선배께서......."
"십이성상은 그 행적이 남의 눈에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
렇지 않다면 내가 벌써 그들을 제거했을 게야. 이 일로 자네를 돕
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선배,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가 없네. 난 자네를 돕고는 싶어. 그러나 따로 급
한일이 있어. 또 그 일은 결코 지연되어서는 안 될 일이야."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심경홍이 황급히 말했다.
"선배님, 잠깐."
손짓을 하니 전이가 상자를 하나 가지고 왔는데, 그 속에는 황
금이 가득히 담겨 있었다. 심경홍은 다시 공손히 인사를 하면서
말했다.
"후배들은 벌써부터 선배께서 씀씀이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
습니다. 그래서......."
연남천은 하늘을 향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심경홍, 네가 설사 천하의 모든 황금을 가지고 온다 해도 나는
내 둘째 동생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어!"
손을 내밀어서 강금의 어깨를 치며 소리쳤다.
"내가 먼저 갈 테니 뒤따라 오너라!"
말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몸은 십장(丈) 밖으로 날아갔다.
심경홍은 즉각 안색이 변했다. 전이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정말 이상하군. 남을 속여 은 천 냥을 약탈하더니
이번에는 거액의 황금을 갖다 주어도 마다하니......."
적수섬마(赤手殲魔)
망막한 황혼 무렵, 연남천(燕南天)의 몸은 육안으로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길가에 자란 무성한 잡초는 바람이 불어 서걱거리며 외로운 소
리를 내고 있었고 하늘에는 휘영청 달이 떠올라 처연하고도 교교
한 빛을 더해주고 있었다.
연남천은 달려가며 중얼거렸다.
"이상한데, 둘째 동생이 길에 있을 탠데 왜 안 보이지......."
이때였다. 앞에서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
다.
달빛 아래서 제비 한 마리가 날고 있었고 그 뒤를 독수리가 쫓
고 있었다. 그 제비는 이미 극도의 피로와 공포에 지친 듯 속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너도 악한 인간들 같이 약한 것을 괴롭히고 핍박하는구나!)
연남천은 독수리를 향해 번개와 같이 몸을 날렸다.
독수리는 날개를 뻗치면서 교묘히 피해버렸다. 그리고는 바람을
일으키며 선회하더니 제비를 낚아 챘다. 독수리가 날개를 퍼덕이
며 더욱 높이 떠오르는 순간 연남천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네놈이 나의 손에서 빠져나갈 것 같으냐!"
그의 몸이 다시 솟구치자 한가닥 날카로운 장풍이 독수리를 향
해 뻗쳤으며 독수리는 공중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내며 추락했
다.
연남천은 껄껄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동생 풍아! 내가 적수공원으로 독수리를 잡는 것이 보이지 않
느냐!"
그는 신형을 두어 바퀴 틀어 돌리며 떨어지는 독수리를 받아 그
날카로운 발톱에서 제비를 구출했다.
그러나 제비는 이미 깊은 상처를 입은 듯 날개만 퍼득거릴 뿐
날지를 못 했다.
연남천은 땅에 사뿐히 내려앉아 곧 품속에서 약을 꺼내 제비의
상처에 발랐다.
차 한 잔 마실만한 시간이 지났을까, 제비가 점차 움직이려고
했다.
연남천은 미소를 지었다.
"제비야, 너는 이미 나에게 많은 시간을 지체하게 했으니 날을
수 있다면 빨리 날아라."
제비는 마치 그의 말을 알아 들은 듯 양날개를 퍼득거리더니 드
디어는 공중으로 떠올랐다. 제비는 연남천의 주위를 한바퀴 돌더
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연남천은 미소를 띠우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황금 만 냥도 나를 붙잡아 둘 수 없었는데 네가 나를 멈추게
했구나."
그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얼마나 갔을까. 멀리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생이 혹시 아기를 낳은 것이 아닐까?"
그는 몸을 가다듬고 더욱 급히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
다.
드디어는 많은 시체들이 널부러지고, 핏물이 땅을 적셔 시커멓
게 굳은 그 비참한 광경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연남천은 숨이 막히도록 놀라 우뚝 멈춰섰다. 그의 마음은 매우
산란해 지고 있었다.
연남천을 떠나 보낸 심경홍은 멍하니 서있기만 할 뿐 움직일줄
몰랐다.
전이가 입을 열었다.
"총표두는 그 십이성상과 언제 약속했소?"
"오늘 황혼 때."
전이는 안색이 변하면서 말을 더듬거렸다.
"오늘밤...... 어디서?"
"이 마을 어귀."
"그...... 그들 중에 누가......."
"흑면(黑面), 사진, 헌과(獻菓), 영객(迎客) 등이 올 것이네."
"그렇다면.......그렇다면 십이성상 중 닭, 돼지, 원숭이, 개가
같이 손을 쓴단 말이오?"
"그렇지."
전이는 떨리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총표두, 이 일은.....우리로는 다만...... 다만......."
"너희들은 모두 이곳을 떠나거라."
"총표두, 당신은......."
"표주는 의리로 나를 대했는데 심경홍(沈郭虹)이 보답을 하지
않고서야 되겠느냐? 너희들......"
갑자기 말을 멈춘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큰걸음으로 걸어가
기 시작했다.
"총표두......."
전이가 소리치며 쫓는 듯하다가 멈추어섰다.
그때 옷깃을 여미며 뇌노대가 소리쳤다.
"자네들은 어찌할 셈인가?"
전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를 따라간다는 것은 싸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목을 늘어
뜨려 죽기 위해서네."
뇌노대는 안색을 변하더니 욕설을 퍼부었다.
"짐승 같은 놈들, 너희들은 겁장이 개처럼 입으로 짖기만 할 뿐
이다. 나 뇌소호(雷潚虎)는 너희들 같이 의리없는 행동은 할 수
없다!"
전이가 망연히 말을 받았다.
"좋아 좋아. 나는 짐승이고 자네는 의사(義士)네."
뇌소호는 땅바닥에 가래침을 뱉고는 총표두를 쫓아갔다.
심경홍은 서서히 황혼의 황야로 발걸음을 때고 있었다. 그는 뒤
쫓는 발걸음 소리를 듣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뇌소호(雷嘯虎)인가?"
"예, 총표두 접니다."
"난 자네 한 사람은 올 것으로 알고 있었네."
"총표두, 당신의 그 말에 뇌소호는 죽어도 한이 없겠소. 나 뇌
소호는 모자라고 천박한 놈이지만 의리를 저버리는 짐승은 아니
오. 하지만 총표두, 당신은...... 이번에......."
"자네는 내가 왜 사람들을 부르지 않았는지 이상히 생각되지 않
는가?"
"........"
"십이성상의 무술은 괴이하고도 몹시 고강하네. 그들을 이길 사
람이 얼마 없어. 내가 그들을 부르면 아니올 수는 없을 거네. 그
러나 내가 어찌 그들을 승산 없는 싸움으로 몰아 죽게 하겠나?"
"총표두는 과연 총표두요. 나 뇌소호는 총표두와 같은 무술이
있다해도 삼대표국에의 총표두는 하지 못 할 것이오. 나......"
뇌소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길게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
카롭고 요사스런 울음소리였다. 삽시간에 근처 마을에 있던 개들
이 짖는 소리가 일시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뇌소호는 보통일에 그리 겁을 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
금 그의 몸은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심경홍이 동요하지 않음을
보자 용기를 내어 웃으며 말했다.
"십이성상은 과연 요기(城氣)가 넘치는군....."
"십이성상은 항상 이상한 짓을 해서 우선 적의 기선을 제압하고
공포를 주려하지. 우리가 무서워 한다면 큰 손해가 있을 것이네."
"난 두렵지 않소."
그는 입으로는 이렇게 말을 하였으나 몸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월야(月夜)의 황야, 길게 내어빼는 요괴스런 울음소리는 사람의
혼을 빼놓을 듯 했다.
심경홍은 양손을 쥐고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십이성상은 어디에 있오? 낙양(洛陽) 심경홍이 여기 만나러 왔
소!"
그는 몸이 작았다. 그러나 공력이 실린 그의 말소리는 멀리까지
번질만큼 우렁찼다.
삭막한 황혼에 돌연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보기에는 한 사람이 말위에 앉아있는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원
숭이 한 마리가 하얗게 이를 드러낸 흉악스러운 개 위에 타고 있
었다. 개는 호랑이 만큼이나 큰 것이 몸집이 보통 개의 두 배 이
상은 됐고, 원숭이의 불같은 눈은 요기(城氣)로 형형한 불빛을 내
고 있었다.
심경홍은 자세를 똑바로 하고 온몸에 공력을. 돋구어 긴장하며
기다렸다.
원숭이와 개가 삼사장 밖까지 다가왔다. 돌연 원숭이가 '지'하
는 소리를 내면서 복숭아 한 개를 그의 앞에 던졌다.
심경홍은 싸늘하게 웃었다.
"손님을 잘 맞이하는군. 그러나 내가 만나러 온 것은 십이성상
이지 이런 미물들이 아니오!"
그 원숭이는 마치 그의 말을 알아 들었다는 듯이 개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원숭이가 다가와 수중의 수건을 펴 보이자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당신이 이것을 먹는다면 만나러 오는 사람이 있으리!"
심경홍은 다시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십이성상은 과연 괴이한 일로 사람을 미혹하려 하는군. 하지만
나 심경홍이 담이 작다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는 복숭아를 집으려고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뇌소호는 이것
을 보자 먼저 달려들어 집어 들고는 급히 씨까지 먹어버렸다. 그
리고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돈 안내고 뭘 먹을 기회가 그리 흔한 것은 아니오."
돌연 음산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 그래서 삼원표국이 대하(大河) 양쪽에서 이름을 떨칠 수
있군. 그것은 표국 안에 두 명의 담력이 센 사나이가 있었기 때문
이야."
천천히 일곱 여덟 개의 사람 그림자가 웃음소리에 따라 나타났
다.
심경홍은 체구가 작은 편이었는데 이때 앞장 서 나온 사람은 심
경홍보다 더욱 몸이 가늘었고 몸에는 금빛 찬란한 옷을 걸치고 있
었다. 양볼이 매우 넓었고 두 눈은 불같은 붉은빛이었다. 커다란
입은 거의 귀밑까지 찢어져 있었는데 그런 모습이 마치 원숭이를
연상케 했다.
나머지 일곱 사람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오직 한쌍의 빛나는 눈만 드러낸 채 두 사람을 쏘아보고
있었다.
심경홍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온 사람이 필시......."
그 금빛 옷을 입은 사람이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대답했다.
"우리의 모양을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구태여 말을 할 필요가
있겠소?"
"내가 이상히 여기는 것은 오기로 한 사람들 중 흑면군(黑面君)
과 사진객이 없다는 것이오."
금원성(金須星)이 조소하듯 말했다.
"그들 두 사람은 다른 장사를 하러 갔지. 당신을 죽이기에 여기
있는 사람들의 힘이 모자랄 것 같소?"
"심경홍은 오늘 살아 돌아갈 생각이 없소. 그러나 흑면군과 사
진객 뿐만 아니라 다른 나머지 십이성상의 진면목까지 다 볼 수
없는 것이 섭섭할 뿐이오. 유감스럽소이다."
금원성(金復星)은 크게 웃었다.
"당신 담력이 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제보니 말솜씨도 괜찮
군. 그러나 당신은 고생하여 총표두의 자리에 올랐을 텐데 이대로
죽으면 아깝지 않겠소?"
"심경홍이 오늘 온 것은 당신과 입씨름하자는 것이 아니오."
"싸우겠소?"
"그렇소! 내가 만약 이긴다면 당신들은 우리 물건을 포기하시
오."
"당신이 지면 어쩌겠소? 물건을 곱게 양손으로 바치겠소?"
"하하! 그 물건들은 이미 부총표두 쌍편(雙斂) 송덕양(宋德翁)
이 급히 수송했소.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당신들의 눈길을 유인하
기 위해서요."
금원성은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고 이때 뒤에 서있던 한 흑
구성(黑拘星)이 작은 곽을 건냈다.
금원성은 곽을 받아 열며 음산하게 말했다.
"이게 무엇인지 보시오!"
곽 속에 든 것은 바로 쌍편 송덕양의 목이었다.
심경홍은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소리쳤다.
"네가...... 네가......."
금원성은 점점 음산하고 괴기스럽게 웃었다.
"십이성상이 그렇게 쉽게 남의 꾀에 넘어갈 사람이라면 강호에
어찌 이름을 높이 떨쳤겠소, 그 물건들은 이미 우리의 손에 있소.
이번에 여기까지 온 것은...... 당신의 목을 가져가려는 것이오."
그는 손을 저으면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덤벼라!"
순간 원숭이가 길길이 날뛰면서 심경홍에게 달려들었다. 원숭이
의 손은 번개같이 심경홍의 양눈을 목표로 달려들었다.
한편, 거대한 개는 뇌소호에게 덤벼들었다. 개는 매우 민첩하게
공격했고, 뇌소호는 미처 피하지 못 하고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개는 날카로운 이빨을 내밀면서 그의 목을 향했다.
뇌소호는 온갖 힘을 다하여 개의 턱을 가까스로 잡았다. 개와
뇌소호는 서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뒹굴었다. 개는 무섭게 으르렁
거렸고 뇌소호도 계속 소리를 질렀다. 그도 마치 맹수로 변한 것
같았다.
심경홍은 몸을 피하며 몇 번을 공격했으나 원숭이는 여전히 날
뛰면서 한쌍의 금빛 손을 내밀고 시종 심경홍의 양눈에서 석촌
(寸)의 거리를 유지했다.
금원성은 야유하는 듯한 웃음을 홀리면서 입을 열었다.
"삼원표국의 남아들이 두 마리의 짐승도 이기지 못 할 줄은 미
처 몰랐는데 !"
그때, 심경홍이 전광 석화와 같이 손을 내뻗치면서 아홉 자(尺)
의 긴 채찍을 손에 쥐고 흔들었다. 원숭이는 즉각 뒤로 물러섰다.
심경홍이 소리쳤다.
"어디로 달아나느냐?"
수십 점의 빛이 번쩍이며 은빛 암기들이 원숭이를 향했다.
원숭이가 아무리 영민하다 해도 짐승인데 어찌 대하(大河) 양쪽
에서 가장 저명한 표객이 발사한 암기를 피할 수 있으랴!
은빛이 희어지며 원숭이가 드디어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여덟 개의 그림자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금원성이 큰소리쳤다.
"좋아, 비화만천(飛花漫天)이군. 과연 좋아."
여덟 개의 그림자가 일제히 심경홍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그는 재빨리 땅으로 뒹굴며 채찍으로 둥근 은빛을 그려 몸을 보
호했다. 그러나 금원흑구(金疲黑狗)가 선수를 쳤으니 그가 어찌
피할 수 있었으랴! 그의 몸에는 몇 군데의 혈구가 나고 말았다.
바로 이때, 넓이 몇 장에 거센 바람을 뿌리며 우뢰치는 듯한 소
리가 들리며 청천 벽력같이 한 사람이 공중에서 내려섰다. 모두
황망히 놀래어 멈추어 서버렸다. 여덟 척(尺)은 충분히 되는 거
한,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한쌍의 눈에서는 충혈된 빨간 빛이
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울분에 찬 표정을 보고는 모두들 소
름이 쭉 끼쳤다.
사나이의 등에는 갓난아기가 하나 업혀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심경홍은 이 거한을 보자 기뻐서 소리쳤다.
"연 대협(燕大俠)께서 오셨군요!"
금원성은 안색이 변하며 물었다.
"귀하는 연남천이 아니신지?"
"십이성상, 너희들은 오늘 죽는다."
금원성이 말을 받았다.
"십이성상과 당신은 아무런 원한이 없소, 그런데 당신이
왜......."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남천은 이미 몸을 날렸다.
한 명의 흑구가 놀란 나머지 양손을 동시에 뻗쳐 급히 공격했
다. 펑펑!하며 두 주먹이 연남천의 가슴에 적중했다. 그러나 연남
천은 끄떡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흑구성의 양팔이 모두 부러
져버렸다. 처참한 비명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 연남천은 어느 사
이에 그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흑구는 급히 발을 차 올렸다. 이 초식은 바로 북파(北派)의 무
영퇴(無影腰)였다. 정말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이 무영의 발도 연남천에게 잡히고 말
았다. 그리고는 그가 어떻게 손을 썼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돌
연 벼락 같은 소리가 나더니 흑구성(黑狗星)이 두 동강이 되어 버
렸다.
솟구치는 선혈이 연남천의 옷과 얼굴을 적셨다.
이 광경을 본 흑구(黑狗)들은 일시에 눈에 독을 품고 한꺼번에
달려 들었다.
이 일곱 흑구들은 개개인으로는 결코 일류의 고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마치 짐승을 찾는 사냥개처럼 목숨을 걸고 집요
하게 달려들었기 때문에 강호의 인물들이 모두 꺼려하는 바였다.
심경홍이 날카롭게 외쳤다.
"연 대협, 조심하시오."
연남천은 이미 호랑이가 염소틈에 뛰어들 듯 지쳐들어가며 계속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연이어 비명소리가 울려퍼지며 흑구성(黑狗星)중의 세놈
이 바닥에 쓰러졌고 이미 시체가 된 또 한 명이 그의 양손에 들려
있었다. 분노에 몸을 떠는 연남천 수중의 시체는 우두둑우두둑하
며 뼈가 바스라지는 소리가 나더니 두 토막이 되어버렸다.
한 흑구는 더 이상의 싸움을 포기하고 급히 달아나려 했다.
연남천은 미친 듯이 웃으면서 수중의 시체 한쪽을 던졌다. 그
시체는 달아나던 흑구의 등에 맞았다. 그는 처참한 비명소리를 내
면서 몇 걸음을 계속 달렸다. 그러나 상반신은 이미 뒤로 기울어
있었다. 이 사람의 몸도 두 동강으로 갈라졌던 것이다.
이 때 남은 한 흑구가 틈을 타서 돌연 그의 등에 업힌 갓난아기
에게로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아기를 빼앗아서 인질로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연남천은 마치 등에도 눈이 있는 듯 호통쳤다.
"멈추어라."
그가 놀라서 멈칫거리는 순간 연남천은 수중에 남은 반 토막의
시체를 그를 향해 던졌다. 날카롭게 뼈가 튀어나온 시체가 그의
몸에 박혀 버렸다.
심경홍은 온몸에 소름이 짝 끼쳤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처참한 싸움이었다. 금원성(金復星)도 비록 잔악한 살인마이긴 했
지만 이때에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연남천은 금원성을 뚫어질 듯 쳐다보며 소리쳤다.
"이젠 네 차례다!"
금원성은 안색이 흙빛이 되면서 더듬거렸다.
"당신...... 당신은 무엇 때문에...."
"네가 그 이유를 묻는 것이냐? 너는 강풍(江楓)이 나와 어떤 관
계인지를 모르느냐?"
"그...... 그 돼지가 혹시......."
"내가 산채로 네 놈의 염통을 꺼내겠다."
말을 끝내고는 철장(鐵掌)으로 금원성의 앞가슴을 향했다. 그러
나 금원성은 움직이지도 반격하지도 않았다. 연남천은 손에다 힘
을 주었다. 열 손가락이 모두 금원성의 가슴을 뚫고 들어가기 시
작했다. 금원성은 여전히 똑바로 서서 아무소리도 내지 않았다.
연남천이 또 소리쳤다.
"네 녀석은 비록 몸이 작아도 사나이는 사나이로구나! 만약에
평시라면 너를 용서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오늘은......."
금원성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비록 덩치가 커도 대장부는 못 되오."
그가 이런 말을 하자 연남천은 의아했다.
"내 평생 천하에 이름을 떨치면서 비록 많은 사람이 나를 욕해
도 본래 선과 악이 공존할 수 없으므로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왔
다. 그러나 너의 그 말은 무슨 뜻으로 하는 것이냐?"
"시비(是非)도 불명, 원한도 불명한데 무슨 대장부요?"
"내가?"
"당신이 시비(是非)를 분명히 하는 사람이라면 나를 죽이지 말
아야 하오."
"왜?"
"당신은 왜 나를 죽이려는 거요?"
"내 둘째 동생 강풍(江楓)......"
금원성은 다시 큰소리로 잘라 말했다.
"그럼 맞았오. 당신이 다른 일로 나를 죽인다면 나는 할 말이
없소. 그러나 만약에 강풍 때문에 나를 죽인다면 당신은 옳고 그
름을 가리지 못 하는 사람이오."
연남천이 소리쳤다.
"너희 십이성상은 나의 둘째 동생 강풍에게 손을 쓰지 않았단
말이냐?"
"그렇소. 십이성상은 강풍에게 손을 썼소. 그러나 십이성상이
강도라는 것은 당신도 아는 사실이오. 강도가 사람의 재산을 뺏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무슨 큰 원수가 되는 것도 아니오. 그 보다는
십이성상을 강풍에게 손을 쓰도록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 복수해
야 할 상대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
그는 아주 기운있게 이야기했다. 연남천은 비록 끝까지 화가 나
있었지만 순간 그의 말을 듣고는 아연해 있었다.
금원성은 미친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그 진짜 원흉을 알고 있소? 비록 십이성상을 모조리 죽
인다해도 강풍을 위해서 복수한 것은 못 되오."
연남천은 돌연 크게 소리쳤다.
"그 강금(江琴)이란 녀석? 내 동생의 행적은 그 작은 녀석밖에
모르는데."
금원성은 싸늘하게 웃었다.
"알고보니 당신은 사지는 발달했어도 두뇌는 간단하오. 강금이
란 놈은 강 공자가 재산을 처분한 막대한 금은보화가 탐이 났소.
하지만 자기 힘으로는 그것을 뺏을 수가 없는지라 은 삼천 냥의
보수로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오."
"이놈...... 이놈이...... 그 짐승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느
냐?"
연남천은 다시 고개를 돌려서 소리쳤다.
"심경홍, 너는 그 놈이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심경홍은 연남천이 자기에 대해서는 악의(怒意)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목소리를 듣자 몸이 떨려왔다.
"저는...... 저는 유의하지 못 했습니다."
연남천은 한손으로 금원성을 들고 소리쳤다.
"너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금원성은 안색도 변하지 않고 천천히 대답했다.
"내가 모른다면 이런 말도 하지 않았을 거요."
"그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봐라r
금원성은 몸이 비록 그에게 들려 있어도 표정은 여전히 침착했
다.
"내가 말을 하지 않으면 어쩌겠소?"
연남천은 그의 웃는 얼굴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면서 서서히 말
했다.
"네가 말을 하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굴복하겠다."
그 어두운 목소리에는 깊고 무서운 한이 실려 있었다. 금원성은
그가 강금의 행방을 알기 전에는 자기를 죽이지 못 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순간 그가 이런 말을 하니 오히려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내가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소?"
"네가 말을 한다면 너의 한쌍의 눈을 파 버리겠다."
심경홍은 크게 놀라서 혼자 생각했다.
(이 연남천은 어찌 이토록 세상을 모를까? 말을 하면 눈을 파버
린다고 하니 금원성은 절대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생각이 가시기도 전에 금원성이 길게 탄식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비록 눈은 없어도 살 수만 있으면 되오."
"말해 보아라!"
"내가 설사 말을 한다해도 당신은 가지 못 할 곳이오."
연남천이 대노하여 다그쳤다.
"온 천하에 내가 가지 못 할 곳은 없어!"
"그 강금(江琴)은 바보가 아닌 이상 당신의 원한을 사는 것과
비록 주인을 판 대가라 하나 십이성상의 은을 가지고 있는 것이
두렵지 않겠소?"
"음 계속 말해라."
"그가 간이 그렇게 커진 것은 필시 피할 곳이 있어서일 것이오.
그 은을 갖고 노자삼아 가는 곳은 십이성상조차도 접근을 못 하는
곳이오."
연남천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내보였
다.
"이화궁?"
"이화궁(移花宮)만이 금지구역은 아니오."
"그 외에 어디가 또 있지?"
"곤륜산(嵬奇山) 악인곡(惡人谷)......."
그는 이 말을 하자 옆에 서있던 심경홍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큰소리로 말했다.
"연 대협,...... 당신...... 그곳에 가서는 안 되오!"
연남천이 무섭게 금원성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네가 한 말이 사실이지?"
"나는 할말을 했을 뿐이오. 믿고 안 믿고는 당신에게 달려 있
소."
심경홍이 떨리는 목소리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악인곡(惡人谷)은 천하의 악한들만 모이는 곳이오. 세상에
피할 곳 없는 지독한 악당들이 모두 거기에 모였소. 모두 강호에
깊은 원한을 맺은 사람들 뿐이오. 어느 누구도 악인곡에는 한 발
도 접근을 못 하오. 곤륜칠검(嵬奇七劍), 소림사신승(少林四神僧)
강남검객(江南劍客), 풍소우(風嘯兩)도 모두 감히......"
연남천이 무거운 소리로 그의 다음 말을 막았다.
"연남천은 소림신승(少林伸僧)도 아니고 강남검객(江南劍客)도
아니지......."
심경홍이 다시 말했다.
"연 대협, 당신이 당대 무술의 왕이라 하지만 그러나 그 악인곡
은...... 그 곡(谷)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악인이 있는지조차
모르오."
"난 두렵지 않다."
심경홍은 소리쳤다.
"하지만 이건 금원성이 당신을 속이려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
오. 만약 당신이 악인곡에 가서......."
그는 죽는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한 것이나 진배가 없었다.
연남천은 비웃는 듯한 미소를 흘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악인곡이 비록 불바다라 해도 나의 목숨을 앗아가지는 못 할
것이야."
"그러나...... 그러나......"
"나는 이미 결정 했으니 아무말 말게."
심경홍은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자 탄식을 하면서
아무말도 하지 못 했다.
금원성도 탄식을 했다.
"좋아! 과연 연남천은 시대의 영웅이야! 악인곡에까지 쳐들어간
다니. 당신은 이번에 가서 돌아오지 못 한다 해도 온 천하의 존경
을 계속 받을 것이오."
연남천이 웃으며 담담히 말을 받았다.
"더 할 말이 남았는가?"
"없소. 나의 눈을 파 가시오."
비참한 소리가 나면서 금원성의 반짝반짝 빛이 나던 눈은 두 개
의 피구멍이 되어 버렸다. 연남천은 그를 심경홍에게 내맡기고 한
마디 했다.
"이 사람을 너에게 맡기겠다."
그는 홀연히 사라져갔다. 두 사람과 함께 삭막하고 처참한 광경
이 뒤에 남겨졌다. 토막난 시체들, 뇌소호와 개도 이미 절명해
버렸다.
심경홍이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눈길을 들어 금원성에게로 돌리
면서 입을 열었다.
"너 금원성은 비록 일평생 동안 영리했지만 오늘은 진정 못난
짓을 했어 !"
금원성은 고통을 참으면서 품속에서 약을 꺼내어 눈 속에 넣고
있었다.
"못난 짓이라고?"
"연남천은 당신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넘겨주었소. 그러
나 내가 용서할 것 같은가? 잠시 동안 약을 쓰는 것이 무슨 소용
이 있겠나."
"소용이 있지. 난 죽지를 잖아."
"누가 당신을 구한단 말이야?"
"나 자신이지 !"
"심모(沈某)는 당신이 어떻게 자신을 구하나 봐야겠군......"
심경홍의 손은 이미 금원성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금원성이 큰소리를 쳤다.
"그 물건들을 찾고 싶지 않나?"
이 말에 심경홍은 즉각 손을 멈추었다.
금원성이 이를 악물며 크게 웃었다.
"당신은 날 죽일 수가 없어. 당신은 그 물건들이 필요하지 않
소?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는 나 혼자만이 알고 있지."
심경홍은 결국 손을 거두었다. 그는 길게 탄식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겼소이다."
그 물건들은 삼원표국의 운명을 좌우하였다. 그는 은호가 큰 삼
원표주에게 누를 끼칠 수가 없었다.
금원성의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싸늘한 밤공기를 타고 퍼져나갔
다.
"누구든지 나를 쉽게 죽일순 없어!"
밤이 점점 깊어지면서 마을의 등롱이 하나 둘 줄어들고 있었다.
태백거(太白居)의 술꾼들도 서로 부축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종업원이 눈을 비비면서 막 문을 닫으려는 때였다.
길 끝에서 하나의 큰 마차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 마차는 말이
끄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끌고 있었다. 바로 남의 은 천 냥을 속
여 빼앗은 그 사나이었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온 빛에 비친 그 사나이는 전신이 피범벅이
었다. 종업원은 놀래서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나이는 마차를 주점
문 앞까지 끌고 왔다. 네 필의 말이 끄는 커다란 마차를 그는 아
주 손쉽게 끌고 온 것이다.
연남천은 마차를 벽에 대자 품속에 깊이 잠든 갓난아기를 안고
큰걸음으로 성큼성큼 주점 안으로 들어섰다. 종업원은 용기를 내
어 웃으며 맞이했다.
"나...... 나으리 무슨 술을 드릴까요?"
"누가 술이 필요하다고 했나?"
"나으리, 술이...... 술이 필요치 않으면 무엇이 필요하신지?"
"죽!"
종업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 여기엔...... 죽은 팔지 않습니다.
"연남천이 탕하며 탁자를 친 후 큰소리로 말했다.
"우선 죽을 가져오고 또 술도 가지고 와!"
종업원은 그의 위세에 눌려 총총히 주방으로 들어가 음식을 준
비해 왔다.
어린아기는 죽을 먹은 뒤 더욱 깊은 잠에 빠졌다. 연남천은 계
속 술을 마시면서 눈동자를 번뜩였고 그 살기에 종업원은 감히 그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 했다.
잠깐 사이. 연남천은 열일곱 사발의 독한 술을 마셔버렸다.
그는 몇 개의 은전을 꺼내어 상 위에 놓고 큰소리로 말했다.
"물건 좀 사와라."
"나으리, 무엇을 사다 드릴까요?"
"관! 제일 좋은 관 두짝!"
그 종업원은 황당해서 입을 벌리고 한참 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연남천이 상을 치자 은전들이 그의 품속으로 떨어졌다. 연남천
은 격하게 소리쳤다.
"관, 두 개의 제일 좋은 관, 그리고, 말을 몇 필 구해오너라.
들었느냐?"
"네...... 네...... 네......."
"들었으면 빨리 가지 않고."
그 종업원은 귀신이라도 본듯 급히 달아난다. 연남천이 스물여
덟 사발의 술을 더 마셨을 때 그가 얌전히 관을 운반해 왔다.
연남천은 눈에 핏발이 선채 마차 속에서 강풍과 월노(月奴)의
시체를 꺼내서는 염을 해 입관시켰다.
그리고는 그 붉은 피가 묻은 손으로 관에다 못을 박았다. 그 못
은 마치 두부 속에 박히는 것처럼 유연하게 들어갔다.
이 일을 끝내고 연남천은 계속 일곱 잔의 술을 연거퍼 마셨다.
그는 비록 눈물을 홀리지는 않았으나 표정은 매우 슬프고 비통한
듯 처량해 보였다.
손에 든 마지막 잔을 비우자 그는 멍하니 반 시간쯤 서있었다.
종업원도 서있어야만 했다.
연남천은 조용히 혼자 중얼거렸다.
"동생, 너는 나와같이 너의 원수가 죽는 것을 보아야 해."
석양이 태원(太原)에서 가장 큰 간판의 금빛 찬란한 세 글자를
비추고 있었다.
천리향(千里香)!
산서(山西) 최고의 향료상으로 회귀하고 고급스러운 향료들이
취급되었는데 결코 질낮은 재료가 섞이는 일이 없어 신용과 명성
이 자자했다.
일몰 후 점포의 몇몇 종업원들이 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한 채
의 마차가 거리를 가로질러 달려와서 천리향으로 들이닥쳤다.
종업원들이 모두 놀라서 달려왔다. 그러나 한 사나이가 내려서
몇 번 손을 휘젓자 그들은 약간의 통증을 느끼며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지력(指力)을 이용해 혈맥을 압도한 것이었다. 그들
은 그 사나이가 귀하고 값비싼 향료들을 모두 두 개의 관 속으로
옮겨 넣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사나이는 떠나면서 소리쳤다.
"반 시간 후면 자연히 너희들의 혈맥이 풀릴 것이다. 향료의 값
은 후일 갚아주마."
오후, 참외 밭에선 무르익는 과일향이 물씬 풍겨왔다. 한 농가
의 부인이 참외밭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옷섶을 헤치고 농익은 젖가슴을 드러내어 품속의 어린애
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나무 그늘을 스치는 나른한 바람이 불
었고 그녀는 잠이 들것만 같았다.
이러는 동안 그녀는 누군가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인기척을
느꼈다. 그녀는 평시에도 많은 사람에게 젖을 내보이지만 자식을
기르는 부인이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때 그녀는 잠잠히
서있는 사람의 기색에 살며시 감았던 눈을 떴다. 나무 옆 언덕 길
로 한 낯선 사내가 서서 자기의 젖가슴을 보고 있지 않은가!
초췌한 얼굴에 초라한 차림이었으나 오히려 매우 위엄을 띠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사나이는 갓난아기를 품속에 안고 있었다.
부인은 이상히 여겼으나 상관않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때 그
사나이의 품속에 있던 갓난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소리
를 듣고는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사나이가
그녀의 젖가슴을 보는 눈이 애걸하는 듯 한 호소의 눈이라는 것을
느끼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애기 어머니가 안 계신가요?"
그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없소."
부인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기가 배가 고픈 모양이에요."
"그렇소."
부인은 자기 품속의 갓난아기를 바라본 후 돌연 웃으면서 말했
다.
"그 아기를 주세요. 젖을 먹여 드릴 테니. 젖이 많이 불어서 이
아기가 다 먹지는 못 할 거예요."
그 사나이의 위엄있는 얼굴에 기쁜 표정이 역력했다.
"감사하오!"
그리고는 아기를 살며시 건네주었다.
이 갓난아기는 출생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갸름한 얼굴에
는 칼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부인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어린애를 키울땐 조심을 해야 해요. 이 애의 엄마는 어째서 아
기를 남자에게 맡겼을까요?"
사나이는 암담히 말했다.
"어머니가 죽었오!"
부인은 놀라면서 어린애의 얼굴을 다독거렸다.
"이토록 어려서 어머니를 잃다니...... 가엾기도 하지."
사나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운을 안고 태어나 이미 많은 학살과 고통을 만났고 그의 일생
이 고통스런 재난에 처할 이 아기...... 그렇지만 지금 그 작은
얼굴에는 오직 행복한 미소만이 가득히 차 있었다.
악인(惡人)들의 계곡(溪谷)
화전하의 흐르는 물이 칠월의 태양 아래서 빛을 내고 있었다.
물을 따라 상류로 오르면 강줄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동쪽에서
흐르는 물이 옥룡합십하(玉龍合十河)이다. 물은 급히 흐르고 지세
가 험준하다.
옥룡합심하를 따라서 상류로 올라가면 바로 천하의 유명한 협객
들이 다수 배출된 신비스러운 전설의 고장인 곤륜산구(嵬甫山區)
이다. 거기엔 옥룡봉(玉龍峯)이 우람한 산맥에 이어 우뚝 서있었
다.
비록 여름철이기는 하지만 그 옥룡봉 아래는 산맥을 굽이 돌아
흘러내린 구름자락으로 어둡고 스산했고 한낮인데도 나뭇잎에는
구름 이슬이 맺혀 있었다.
연남천은 드디어 옥룡봉까지 왔다. 마차는 험준한 산길을 어렵
게 나아가고 있었다.
거대한 산 그림자가 무겁게 마차에 드리워졌다.
연남천은 왼손으로는 말고삐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어린아기를
안고 있었다. 마차 속의 관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겨나왔다.
어린아기는 깊이 잠들어있다. 이 작은 아기는 피곤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연남천은 가련한 눈으로 아기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얘야, 네 어미의 젖은 미처 빨아보지도 못 하고 이렇게.......
?"
돌연히 그는 마차를 멈추면서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바로 그가 마차를 떠나는 순간 두두둑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
며 몇십 개의 길이가 다른 가지각색의 암기가 일제히 그가 앉았던
의자에 적중했다. 그가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몸에 수많은 구
멍이 뚫렸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다치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오직 품속의 어린아기가 상처를 입을까봐서였다.
그는 몸을 회전하며 다시 마차 위에 내려와 섰다.
산맥의 그림자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나왔다.
"훌륭한 솜씨요."
연남천이 노하며 소리쳤다.
"암기를 쓴 사람은......."
'누구'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말(馬)이 울부짖었다. 다시 날
아온 몇 개의 암기가 말에 적중한 것이었다.
연남천은 번개 같이 손을 휘둘러 말을 맨 줄을 끊어 말이 앞으
로 달려가게 했다. 마차가 뒤집혀 아이가 다칠지도 모르는 일이었
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아기를 마차 속에 넣었다. 그와 거의 같은 시각에 다
시 수십 개의 은빛이 발해지며 암기들이 그의 몸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재빨리 허공을 향해 치솟았다. '크크크'하는 바람소리가
계속 울렸다. 수십 개의 암기는 모두 그의 발밑으로 우수수 떨어
졌다.
그러나 그의 몸이 공중에 떠있는 동안에도 일곱, 여덟 개의 검
빛이 마치 하늘가의 무지개처럼 난무하며 전후 좌우로 공격해왔
다.
연남천의 몸은 이미 검망에 포위되었다. 일곱, 여덟 개의 검빛
은 극히 정묘하게 몸의 각 부분을 노렸다. 하나의 검을 피할 수
있다해도 또다른 검을 피하지는 못 할 것이었다.
그러나 연남천은 당대의 최고 고수이다. 몸이 비록 공중에 떠
있어도 힘이 분산되지는 않았다. 그가 양팔을 뻗히자 몸은 돌연
위로 일곱 자(尺)를 치솟았다. 검들은 그의 발을 스치며 허공에
원을 그렸다.
'탕탕'하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려퍼지면서 일곱, 여덟 개의
검이 부딪혀 불빛이 튀었다. 검빛은 합해졌다가 즉시 분산하여 사
방으로 갈라졌다.
운무(雲霧) 속이라 자세하게 볼 수는 없었으나 이 사람들 중에
네 사람은 도인(道人)인 것 같았다.
연남천은 가볍게 마차 위에 내려서더니 숨도 가다듬지 않은 채
달려가 양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한 명의 도인(道人)에게 일격을
가했다.
그는 이 몇 사람이 아무말도 하지 않고 독수를 가했으므로 양손
에다 극도의 공력을 주어 공격했다. 상당히 무서운 일격이었다.
그 도인(道人)은 옷자락과 수염이 장풍(掌風)에 의해서 날리자
몸의 중심을 잃고 흔들거렸다. 그는 크게 놀라 다시 검으로 공격
을 시도했다.
그는 이런 무서운 장풍(掌風) 아래서도 검을 다시 휘두를 수 있
는 공력으로 보아 필시 최소한도 이삼십 년은 검을 수련한 자세였
다.
그는 검으로 상대방을 다치게는 하지 못 했어도 스스로를 가까
스로 보호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검세는 완전히 발휘되지
못했고 손에 뻐근한 통증을 느끼며 검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좋아."
검을 빼앗아든 연남천은 이미 우편에 있던 사람에게 칼을 뻗쳐
들어갔다.
연남천은 흔히 사람들이 일컫기를 제일명검(第一名劍)이라고 하
는 사람이다. 단 한 번의 검을 휘둘렀으나 상당한 위력이 감추어
져 있었다.
그 사람은 검을 들어 막으려 하다가 검세에 눌려 뒤로 물러서면
서 막을 생각을 포기했다.
그러나 연남천의 검빛은 멈추지 않고 기묘하게 변화하며 그를
찢었다. 그 사람은 놀라며 온갖 힘을 다하여 막았다.
'탁'하는 소리가 일면서 두 검이 서로 부딪혔다. 순간 그 사람
의 검은 두 동강이 나버렸고 몸은 땅에 쓰러져 몇 번 뒹굴었다.
연남천이 다시 소리를 치면서 검을 내려치자 하늘이 진동했다.
그때 온통 은빛이 난무하면서 뒤따라 '창'하며 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세 명의 파란옷의 도인(道人)이 즉시 꿇어앉아서 세 개의 검을
합세하여 쓰러진 사람을 위해 연남천의 일검을 막은 것이다. 그
사람은 이미 졸도해 있었다.
연남천이 무서운 소리로 호통쳤다.
"검을 받은 것은 사취(四鷲)아니면 삼응(三鷹)이군!"
그 도인이 말했다.
"사취(四鷲)도 귀하에게는 안 되오......."
"그렇다면 곤륜칠검(崑崙七劍)외에 누가 내 검을 받을 수 있겠
소?"
"천하에 연남천, 연 대협 외에는 이렇게 우리 세 사람이 단 하
나의 검을 막게끔은 하지 못 할 것이오."
"그러나 곤륜칠검이 왜 나에게 독수를 가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
소."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악인곡(惡人谷)으로 가는 사람을 막
기 위해서요. 그런데 연 대협께서 올줄은 몰랐소이다."
"당신들은 나를 그 사람으로 오해한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어찌 연 대협에게 손을 쓰겠소?"
연남천은 그제서야 긴 검을 거두어 들였다. 그가 검을 거두자
세명의 도인은 수중의 검을 모두 땅에 떨어뜨리고 고통스러운 표
정으로 팔을 움켜쥐었다.
연남천이 말했다.
"당신들이 막는 사람은 누구요?"
곤륜도인(梵奇道人)이 말했다.
"사마연(司馬姻)이오"'
"그 천장검(穿腸劍) 사마연(司馬姻)인가?"
"바로 그 흉악한 도적놈이지요."
"그 악적(惡賊)이 여기에 왔다는 말이오?"
"천중팔의(川中八義)가 계속해서 그를 여기까지 추적해왔소. 이
세 분이 바로 천중팔의(川中八義) 중에 대의사(大義士) 양평(楊
平),삼의사(三義士) 해장파(海長派) 칠의사(七義士), 해금파(海金
波)요."
천중팔의(川中八義)는 강호에서도 유명하다. 연남천이 바라보니
이 세 사람은 과연 영기(英氣)있게 생겼다.
그 해금파(海金波) 팔의사(八義士)의 첫번째 사람인 양평(楊平)
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각지고 다부진 얼굴에 매우 정강한 표
정이었다. 그는 포권의 예를 하면서 입을 열었다.
"후배들이 그 악적을 화전하까지 와서 놓쳐버렸소. 만약에 그가
악인곡(惡人谷)까지 달아나 버리면 우리로선 커다란 유감이오. 그
래서 네 분의 도장(道長)을 요청해서 여기서 지키고 있었는
데......그런데...... 연 대협을 만날 줄이야."
해장파(海長波)는 쓴 웃음을 띠우면서 말했다.
"후배들은 선배의 용모가 그 놈과는 다른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 자는 평시에 얼굴을 잘 고쳐 변장하기 때문에 급한 마음에 미
처 확인도 못 하고 무례히 손을 쓰게 된 것입니다."
연남천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래서 당신들이 대뜸 살수를 써 공격을 했군. 그들을 상대하
려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
곤륜사자(嵬甫四子)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그나저나 연 대협은 무슨 일로 여기에 오셨는지요?"
"나도 악인곡으로 가는 중이었소."
곤륜사자(島甫四予)와 천중삼의(川中三義)는 동시에 놀라면서
입을 모았다.
"연 대협께서도 악인곡으로 가신다고요?"
"내 비록 악인곡으로 가지만 원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찾으러 가는 것이외다."
장익자(藏異子)가 말했다.
"그러나 그 악인곡엔......."
"내 손에 죽어야 할 놈이 거기 있소. 그 놈은 내 의제 강풍 내
외를 살해한 원수요. 어찌 내가 의제와의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
소. 악인곡이 끓는 기름 가마솥이라도 나는 가야 하오."
장익자가 다시 말했다.
"연 대협이 천하호걸이라는 건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오. 하
지만 그 악인곡엔 수많은 악당들이 운집하였고 그들의 무술은 기
괴하고 고강하기 이를 데 없소. 그들을 단신으로 상대할 수는 없
는 일이오, 연 대협, 생각을 돌이키시오."
연남천은 번뜩이는 눈을 들어 멀리 산곡을 바라보면서 무거운
소리로 말했다.
"사나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남이 못 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죽
어도 유감이 없는 것이오."
곤륜사자(寫奇四子)등은 서로 바라보면서 부끄러운 빛을 드러냈
다.
양평(楊乎)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는 이 이십 년 동안 강호에서 가장
악한 열 명의 악인 중에 적어도 네 명이 이미 곡으로 들어갔다 하
오."
해장파도 한마디 거든다.
"네 명 뿐만 아닐 걸......혈수(血手) 두살(柱殺), 소이장도(笑
楹藏刀) 소미타, 합합아(合合兒), 불남불녀(不南不女) 도교교(屠
嬌嬌), 불홀인두(不唵人頭)' 이대취(李大暗)......."
양평이 물었다.
"그 사람 고기를 즐기는 악마를 말하는 것이오?"
해장파가 대답했다.
"바로 그자요. 남들이 그를 불흘인두(不唵人頭)라 부르는 것은
그가 사람의 머리 외에는 뭐든지 다 먹는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땐가 그 말을 듣고는 오히려 크게 웃어버렸고 후로는 사람의
머리도 먹는다는 것이오."
연남천이 노했다.
"그런 악당의 목숨을 어찌 그대로 붙여 둘 수 있겠소."
"들리는 말에는 그자가 남자답게 생겼으며 문무쌍전이라오. 사
람을 먹는 것 외엔 오히려 많은 재주가 있다고도 하오."
"식인귀가 몇 가지 재주가 있다 하여도 무슨 소용이 있겠소."
해장파는 쓴 웃음을 보이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삼상무림맹주(三湘武林盟主)이신 애재여명(愛才如命)
철무쌍(鐵無雙) 철 대협(鐵大俠)은 어찌된 일인지 그의 재능을 인
정하여 자기의 외동딸을 그에게 시집보냈었소, 사람을 만들어보려
했던 것이오."
연남천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철무쌍(鐵無雙) 애재여명(愛才如命)은 과연 명불허전이군."
"그러나 이대취는 본성을 버리지 못 하고 신혼 삼일만에 자기
신부를 끓여 먹어 버렸다오."
"정말 악적이로구나."
"철 대협(鐵大俠)은 그제서야 정말 화가 나서 문하생 열여덟 명
을 거느리고 그를 죽인다고 맹세를 했으나 이대취는 기회를 이용
하여 몰래 악인곡(惡人谷)으로 달아나 버렸소."
양평이 따라서 탄식을 했다.
"철 대협은 자기 딸의 비참한 죽음을 드러나게 할 수도 없었소.
그래서 그는 다만 딸이 병에 걸려 죽었다고 했소, 만약에 우리가
철 대협과 막역한 친구사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 내막을 알 수나
있었겠소."
연남천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눈치였다.
"그래서 강호에 이 일이 알려지지 않았군. 그러나 철무쌍은 영
웅인데 그 악적이 악인곡에 있는 것을 그냥 보기만 하고 있었겠
소?"
해장파가 그 말을 받아 대답했다.
"철 대협은 싸우고 싶었지만 제자들도 만류하는 데다 철 부인
(鐵夫人)이 꿇어앉아서 애걸을 하기 때문에......."
연남천의 입가에서는 다시 긴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딸을 잃어버렸으니 남편까지도 위험에 봉착하도록 할
수는 없었겠지, 여자들은 남자가 옳은 죽음을 택하기 보다는 굴욕
의 삶을 살기 바라지, 영웅은 마누라를 얻지 않는 것이 영리한 처
신이야!"
해장파가 말했다.
"이 네 사람 외에 경공(輕功)이 신출귀몰하고 항상 정면으로 적
과 대응하지 않고 몰래 독수를 가하는 음구유(陰九幽)도 이 곡으
로 달아났다고 들었소."
연남천이 그 말을 받았다.
"어! 반인반귀(半人半鬼) 음구유(陰九幽)도 곡 안에 있어? 그는
소림속가제자(小林俗家弟子) 이대원(率大元)을 암살한 뒤 이미 소
림호법장로(小林護法長老)들의 손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하던데."
"그렇소. 강호에는 그런 말도 떠돌고 있소. 그러나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의 말로는 소림호법이 이 반인반귀의 악마를 음명곡(陰
冥谷)에 가두어 두었지만 그만 달아나 버렸다고 하오. 이일로 소
림파의 명성을 꺾일 염려가 있어 소림제자(小林弟子)들은 종래 이
야기를 하지 않지요."
"옛날 한때 무림을 영도하던 소림파(小林派)도 점점 석양을 걷
는 것은 제자들이 너무 체면을 생각하기 때문이야."
연남천의 말을 장익자(藏異子)가 받았다.
"일파(一派)의 명예를 계속 보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곤륜파(島甫派)도 석양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회한 때문이었다.
양평(楊平)이 다시 말했다.
"이 몇 사람은 모두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오. 더우기 그 불
남불녀(不南不女) 도교교(屠嬌嬌)는 계책이 많을 뿐더러 얼굴을
가리는 변장술도 신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오. 이 사람이
곡으로 달아난 것은 원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원인이 있다
하오."
해장파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그 놈은 변장술은 매우 뛰어나서 악인곡에까지 달아나
지 않아도 남이 그를 잡지는 못 할 텐데...... 남들은 아무도 그
의 본 모습을 모르지."
연남천이 말했다.
"그 놈이 어떤 이유로 악인곡을 갔던 간에 또 변장술이 아무리
교묘해도 악인곡엔 내 손에 죽어야 할 놈들 뿐이니 상관이 없소.
그 놈이 개구리나 염소로 변한다면 모를까 인두겁을 쓰고 있는 이
상......."
양평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죠. 연 대협께서는 혼자 곡에 들어 가시니 그가 어떤 수단
도 쓰지는 못 할 것이오. 그러나...... 다만......."
연남천은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말했다.
"여러분들의 말은 나에게 도움이 많았오, 그러나 어떻든 나는
꼭 가야만 하오....... 그럼 이만 작별하겠소."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모았다.
"연 대협,...... 당신......."
그러나 연남천은 그들을 보지도 않고 큰 마차를 끌고는 성큼성
큼 걸어갔는데 속력이 말보다도 빠른 것 같았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킬
뿐 아무말도 못 했다.
장익자(藏異子)가 드디어 탄식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남들은 연남천의 무술이 천하에서 가장 고강하다고 하지만 나
는 그리 깊이 믿지는 못 했소. 그러나 오늘 이렇게 보니..... 아
아......"
양평도 안색이 움직이더니 말했다.
"무술이 비록 높아도 존경심을 갖게 하지는 못하지. 제자가 탄
복하는 것은 그의 호기(毫氣)와 의리(義理)요."
해장파는 연남천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다시 우리와 만날 수 있을 런지......"
앞으로 나아갈수록 산길은 더욱 험준해졌다. 연남천은 여전히
큰마차를 끌고 나는 듯이 걸어갔다.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
다.
날이 저물었고 구름과 안개 속에서 간간이 등불이 보였다. 그것
은 청등으로 산과 들 사이의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에 교묘히 놓
여 있었다. 이런 음침한 산곡에 불이 있으니 마치 귀화(鬼火)같았
다.
한 청등 불빛 아래에는 비석처럼 생긴 돌이 있었고 거기엔 두
줄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입곡(入谷)하면 하늘에 오는 것과 같다. 이쪽으로 가시오.'
두 줄의 글씨 밑에 하나의 화살표가 구부러진 산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그 길은 네 개의 산으로 통하는 산골짜
기로 향하고 있었다.
연남천은 그 글을 보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간이 큰 악당 놈들이군. 입곡의 길을 광명정대하게 가리키다
니. 거기에 가는 사람 중에 너희를 절단낼 사람은 없는 줄로 아느
냐?"
곤륜산(崑崙山)의 산세는 험악했으나 그 길은 교묘히 산을 지나
갔다.
악인곡은 여러 산을 돌아 깊숙이 감싸인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입곡의 도로는 위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어서 연남천은 마차를 끌 필요가 없었다. 마차는 언덕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산길은 굽이쳐 일장(丈)밖을 바라볼 수 없
었다.
얼마를 내려왔을까, 돌연 눈앞이 훤해지면서 밝은 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용감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였으나 천하에서 가장 신비
스럽고 가장 위험한 악인곡을 마주보게되자 기묘한 느낌을 받았
다.
강호(江湖)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악인곡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음산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악인곡에는 휘
황한 불빛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불빛은 악인곡의 신
비스러움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괴이함을 더해주는 듯
했다.
불빛 아래 다시 하나의 비석(碑石)이 길가에 놓여 있었다.
'입곡 입곡(入谷 入谷) 영불위노(永不爲奴)'
이 비석을 지나자 도로가 평평해지더니 불빛아래서 마치 거울처
럼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악인곡'은 보기에는 여느 산마을처럼 많은 집들이 불빛아래 조
용하고 평화스럽기만 했다. 이런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마을에 그
토록 많은 함정과 살인의 독수가 감추어져 있단 말인가?
연남천의 큰 마차를 끄는 손에는 땀이 축축했다.
길 양편으로는 가지런한 집들이 깔끔하게 늘어서 있었고 창문은
닫혀 있었으나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 때 두 사람이 길 위에 나타났다. 연남천은 암암리에 공력을
끌어올리며 대전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걸어오던 두 사람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화려한 옷을 입는 그들은 연남천 옆을
그냥 무심히 지나갔다. 짧은 시간에 지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
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를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연남천의 뇌리 속에는 서서히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평생을 흉계와 싸움터의 혈전으로 보냈
고 갖은 사지(死地)를 드나들었으나 이렇게 마음이 혼란스러운 적
은 없었다.
마차 속에서 어린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연남천은 숨을
깊이 들어 마신 뒤 마음을 안정했다.
이때 앞 건물의 문이 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문 안에서 술
안주 냄새가 흘러나왔다. 연남천은 주저하지 않고 큰걸음으로 성
큼성큼 걸어서 그집으로 들어갔다.
우아한 청내에 대여섯의 탁자가 놓여있었고, 그중 두 개의 상에
서 몇 사람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단아하면서도
우아한 장식의 주점이었다.
연남천은 갓난아기를 안고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보
통 주점과 별다름이 없이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앉아 조용히 담소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산으로 달아난 흉악범
같지가 않았다. 연남천은 더욱 의구심이 커갔다.
돌연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내실에서 걸어나왔다. 이 사람은
키가 작고 뚱뚱하며 시종 웃는 얼굴이었는데 술집의 주인인 모양
이었다.
연남천은 침착을 유지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 둥근 얼굴의 남자는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형씨, 먼 데서 오느라 수고 많았소."
연남천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둥근 얼굴의 남자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삼년 전 형씨가 천중당문(天中唐門)과 원한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언젠가는 이곳으로 올 줄 알았소. 그런데 오늘에야 형씨를
만나게 되는구려."
연남천은 이 사람이 자기를 천장검(穿腸劍) 사마연(司馬姻)으로
착각하는 것을 알아채고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냥 앉아 있었다.
그 둥근 얼굴의 남자가 손을 흔들자 녹색옷을 입은 소녀 하나가
사뿐사뿐 걸어와 연남천을 바라보며 조그만 입을 열어 말했다.
"안녕하세요?"
"흠, 좋아."
그 둥근 얼굴의 남자는 다시 한 번 크게 웃으며 말했다.
"사마(司馬) 선생이 먼 길을 오시느라고 피곤해서 별로 이야기
할 기분이 아닌 모양이다. 빨리 사마(司馬) 선생에게 따뜻한 술을
대접하고 이 아기에게 먹일 죽을 쑤어와라."
소녀는 애교있게 웃으면서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 참 귀여운 아이군요."
눈길을 다시 연남천으로 옮기더니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나갔
다.
연남천은 그 둥근 얼굴의 사나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 놈이 혹시 소리장도(笑裡藏刀) 소미타(小彌陀)가 아닐까?
이녀석은 이름처럼 잘 웃어제끼고 아이에 대해서도 친절하구나.
그 누가 이 놈이 하룻밤 사이에 은사의 집안을 모두 도륙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랴! 그의 사매(師妹)가 자기 더러 '돼지'라고 부른
단 한가지 때문에.......)
연남천이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청의 소녀가 다시 제비처
럼 사뿐사뿐 나아왔는데 그녀의 손에 든 쟁반에는 술과 안주가 들
려있었다. 술의 독특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그 둥근 얼굴의 남자는 계속 벙실벙실 웃으면서 말했다.
"형씨께선 먼 길을 오시느라고 필시 배가 고프실 것이오. 우선
허기를 면하시고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러나 연남천은 수저를 들지 않고 앉아 있었다.
"남들은 필시 내가 여기서 고생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평화로운 마을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과 즐겁게 살고 있소. 당신
도 이곳이 마음에 들거요. 어서 한 잔 드시오. 이곳의 술은 천하
의 미주(美酒)라 임금님도 맛보지 못 했을 것이오. 아! 그리고
참!"
그 둥근 얼굴의 사나이가 말을 이었다.
"이 안주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 형씨께서는 짐작할 수 있겠소?"
그제서야 연남천이 조용히 입을 열고 물었다.
"누구요?"
"형씨께서는 옛날 개방(汚灣) 중에서 천홀성(天唵星)이라는 사
람이 있었음을 아시오? 반 시간만에 그들의 칠대장노(七大長老)를
죽이고......."
그는 '탕!' 하고 상을 치고 크게 웃으면서 소리치듯 말했다.
"그는 정말 대영웅이며 대호걸이지, 히히! 안주를 만드는 사람
이 바로 그 사람이오."
연남천은 매우 놀랐다. 그러나 안색을 바꾸지 않고 담담한 표정
을 짓고 있었다.
"오, 그래요?"
"사마(司馬) 형은 과연 고수요. 잘 알게 되기 전에는 젓가락도
움직이지 않는구료. 하지만 사마형, 당신이 이미 오기 전부터 우
리는 벌써 사마형을 친구처럼 생각하고 있었소. 우리를 믿어도 좋
을게요."
얘기가 이렇게 무르익자 그 둥근 얼굴의 사나이는 젓가락을 들
고 모든 안주를 한번씩 맛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오...... 이제 사마형도 마음을 놓으시오."
연남천은 생각했다.
(그들이 나를 사마연으로 알고있으니 나에게는 좋은 기회다. 이
기회에 우선 그 악적 강금(江琴)의 행방을 확실히 알고 난 뒤 손
을 써도 늦지는 않겠지. 지금 내가 이 음식을 먹지 않으면 의심을
살테고, 더군다나 그들이 나를 사마연으로 취급하니 설마 독약을
넣지는 않았겠지.)
연남천은 철혈이 왕성한 남자이며 기지도 어느 누구보다 처지지
않았다. 이런 계산을 하자 역시 먹는 것이 좋겠다고 느낀 그는 젓
가락을 움직이면서 말했다.
"좋소!"
안주들은 정말 맛이 좋았다. 연남천은 몇 그릇의 요리를 깨끗하
게 먹어치웠다. 배불리 먹고 그 힘으로 손을 쓰자고 생각을 하자
식욕이 더욱 오르는 듯 했다.
그 둥근 얼굴의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천홀성(天吃星)의 솜씨가 어떻소?"
연남천은 입을 닦으면서 말했다.
"아주 좋소!"
"이 작은 친구의 죽도 곧 나올 것이오."
"빠를수록 좋소!"
"이 작은 친구가 죽을 다 먹은 뒤에 당신이 손을 써도 늦지는
않을 것이오."
연남천은 뜻밖의 말에 안색이 돌연 변하면서 말했다.
"너......너 뭐라고 했지?"
그 둥근 얼굴의 남자는 파안대소했다.
"연 대협의 이름은 천하에 알려져 있고 또 행색도 기이하기 때
문에 눈이 멀었다해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오. 하하! 지금까지 내
가 일부러 착각한 듯 행동을 한 것은 우선 당신을 안심하게 하려
는 계교였소. 그렇지 않고서야 연 대협이 어찌 안심하고 천홀성이
독문 미약(迷藥)으로 배합한 술과 안주를 먹겠소? 하하......"
"간악한 놈!"
연남천은 분노가 탱중하여 소리치며 탁자를 발로차 날렸다.
합합아(哈哈兒)는 살짝 몸을 굽혔다. 그리고는 재빨리 일장(丈)
밖으로 나가면서 크게 웃었다.
"연 대협께서는 손을 쓰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약성(藥
性)이 빨리 움직이니 하하하하!"
연남천은 우선은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자 그가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몰래 진기를 움직여보니 과연 공력이 모아지지
가 않았다.
그는 분기가 탱중하여 손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합합
아는 웃기만 할 뿐 피하지도 않았다.
연남천은 철장으로 장풍을 일으켜 공격하려 하였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서 사지에서 힘이 빠져나가 비틀거렸다.
그의 귓전에 합합아의 비웃는 웃음소리와 갓난아기의 울음소리
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차츰 몽롱해지는 가운데 그 소리들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는 결국 아무 것도 듣지 못 하게 되었다.
독계(毒計)!
등불 하나가 연남천의 얼굴을 비췄다.
연남천은 현기증을 느끼며 차츰 의식이 돌아왔다. 머리가 깨지
도록 아팠고 목에서는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한참만에야 그는
겨우 눈을 떴다.
합합아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 좋아. 연 대협이 이제야 겨우 깨어났군. 여기 몇 분 친
구들이 오셨는데 모두 천하제일신군을 보고싶어 하는군요."
연남천은 크고 작은 몇 개의 인영(人影)을 보았다. 그러나 눈앞
의 등불빛 때문에 이 사람들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는 없었다.
합합아는 계속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연 대협께서는 이 친구들을 아시는지? 하하하! 제가 소개해 드
리지. 이분이 바로 혈수(血手) 두살(桂殺)이오."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십 년 전에 두모(柱某)는 이미 연 대협을 한번 뵌 적이 있
소. 그러나 그땐 경황이 없어 연 대협과 자웅(雌雄)을 가려보지는
못했소."
이 사람의 몸은 가늘고 길었다. 몸에는 하얀 옷을 걸쳤고 두 손
을 옷 소매에 넣고 있었는데 안색이 창백해서 투명할 정도였다.
연남천은 머리가 깨지는 듯한 아픔을 참으면서 냉소했다.
"그때 너는 남천 대협(南天大俠) 노중도(路仲道)의 손에서 요행
히 벗어났지. 만약 나에게까지 차례가 왔었다면 어찌 오늘날까지
네가 살아있을 수 있겠느냐?"
두살은 안색도 변하지 않고 차갑게 내뱉았다.
"흥, 나는 오늘날까지 살아있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것이오,
그러나 당신은 지금 죽을 것이오."
합합아가 크게 웃으면서 말참견을 했다.
"연 대협은 죽기 전에도 이렇게 웃음을 띠울 수가 있군. 그건
나 합합아와 비슷한 점이오. 하하! 이분은 바로 불홀인두 이대취
인데 들어본 적이 있소?"
하나의 괄괄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연 대협의 고명은 오래 전부터 들어 왔소. 당신 고기는 필시
소고기 같이 천천히 먹어야 맛을 알 수가 있을 것이오. 잠시 후에
나는 맛을 봐야겠소."
합합아가 이대취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이대취는 그저 먹을 생각밖에 안 하는군. 천하에 이름 난 연
대협을 초면에 꼭 그리 대해야겠소? 좀 사양을 해야지 보자마자
먹겠다는 말부터 해야겠소?"
이대취는 눈을 치뜨고 그 말을 받았다.
"고기가 맛이 있다는 것이 바로 나 이대취가 가장 찬양하는 말
이야. 당신들 같이 돼지고기 밖에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 무얼 안
다는 거요?"
합합아는 머리를 뒤로 제치고 웃었다.
"사실 돼지는 더러워서 사람 고기보다는 못 할 거야. 나 합합아
도 연 대협의 고기가 어떤가 맛좀 봐야겠군. 하하, 연 대협의 고
기가 너무 딱딱할까 그게 걱정인데 하하하......."
"모르는 소리. 굳은 고기는 굳은 고기대로 맛이 있고 연한 고기
는 연한 고기대로의 맛이 있지. 또 중의 고기는 중의 고기냄새가
있고, 여중의 고기도 여중의 맛이 있지."
가날픈 여인의 목소리가 이 사이를 뚫고 흘러나왔다.
"중의 고기도 먹어 봤는가?"
이대취는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입맛을 다셨다.
"흐, 많이 먹어 봤지만 가장 좋았던 건 오대산(五臺山) 철견(鐵
肩)이야. 얼마나 맛있었던 지 나는 삼일 동안 아껴 먹었어. 역시
명인의 고기는 향기로와!"
그 애교있는 소리가 다시 말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먹었소?"
"헤아릴 수도 없지!"
"그중 누구 고기가 제일 맛있었지?"
"가장 연하고 향기로왔던 것은 내 마누라였지. 그녀의 고기
는...... 하하!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돌아."
합합아가 크게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됐어, 됐어, 그만해. 연 대협이 화난 모양이다......."
이대취가 돼지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연 대협을 화내게 해선 안 돼. 화를 내면 고기가 쉬어. 이건
내가 오랜 경험에서 얻은 결론이니 여러분들은 모르겠지."
합합아가 다시 말했다.
"이분이 바로 불남불녀(不南不女) 도교교(屠嬌嬌)요."
그 애교있는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연 대협에게 안주를 갖다주고 술도 따라주었으니 벌써 나를 알
고 있을 거야. 굳이 너의 소개가 필요하겠어?"
연남천은 속으로 깜짝 놀라서 생각했다.
(알고보니 그 녹색 소녀가 바로 도교교였군. 이 악마는 이름을
날린 지 이십 년이나 되었는데 아직 열 예닐곱 살 소녀로 분장해
도 깜쪽 같다니.)
이대취가 사람을 먹는다는 것보다는 이 도교교의 변장술이 더욱
그를 놀라게했다.
돌연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합합아, 왜 이리 시간을 끌지? 너는 이 곡증의 사람을 일일이
다 소개할 작정이냐?"
그 목소리에는 양기가 전혀 없었으며 마치 중한 병을 앓는 환자
같기도 하고, 죽은 사람이 관 속에서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하였
다.
연남천까지도 들으면서 소름이 끼쳤다.
(반인반귀(半人半嵬) 음구유(陰九幽)가 아닐까?)
음구유가 다시 말했다.
"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남천은 하나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
다. 그 손은 얼음보다 차가왔다. 연남천은 몸이 싸늘해왔다.
이대취가 이 모양을 보고 큰소리를 쳤다.
"음구유, 손을 치워라. 그 귀신 같은 손으로 만지면 그게 목구
멍으로 넘어가겠냐?"
음구유가 손을 멈추고 말했다.
"네가 죽여도 괜찮지만 빨리 서둘러라."
혈수 두살이 돌연 소리쳤다.
"이것들 봐! 우선 물어볼 말이나 묻고 손을 써도 늦지 않잖아."
그러자 도교교가 입을 열었다.
"그래, 연남천, 너는 무슨 일로 여기에 왔지? 우릴 찾아 왔느
냐?"
연남천은 비웃었다.
"내가 산골짜기에 처박힌 귀신 같은 놈들을 보자고 여기까지 왔
겠느냐?"
"그럼 누구를 찾으러 온 게냐?"
"강금(江琴)!"
"강금? 누가 이런 이름을 들어본적 있나?"
두살의 불음에 주위의 악인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모르
겠다는 표정들이다. 합함아가 입을 열었다.
"하하! 악인곡엔 그런 이름없는 필부(匹夫)는 없다."
"그 자식은 이름은 없어도 너희들 못지 않은 악당이다. 그 놈을
내준다면 너희들은 놓아주겠다."
"묘하군 묘해. 여러분은 연 대협의 말을 들었는가? 연 대협께서
우리를 용서한다하니 감사 드려야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껄껄, 히히, 하하, 여러 가지 웃음소리가
일시에 들려왔다.
연남천이 무거운 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그렇게 우스운가?"
도교교가 치치하고 괴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지금 열세 줄의 밧줄에 묶여 있고 또 두 노대(桂老大)
에 의해 네군데나 혈(穴)을 눌렸는데 목숨을 구걸하지는 못 할 망
정 우리를 용서하겠다니 세상에 이보다더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
는가?"
"흥!"
도교교의 말이 계속됐다.
"그러나 내가 말해두지. 곡중에는 확실히 강금(江琴)이라는 사
람이 없어. 당신은 필시 남에게 속아 여기까지 죽으러 온 것이야.
하하! 여기가 어떤 곳이라고. 연남천은 덩치 큰 어린애야."
돌연 연남천이 소리쳤다.
"못된 녀석!"
이 갑작스런 소리는 마치 벼락치듯 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래는 가운데 도교교가 말했다.
"야단났어. 이 자가 다시 기운을 차리는 걸 보니 노대(老大)의
점혈(點穴) 수법을 알아낸 것이 아닐까?"
연남천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잘 알아 맞추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돌연 몸을 일으켜 세우며 양팔을 벌리자 열
세 줄의 밧줄이 일제히 끓어졌다. 음구유가 먼저 소리쳤다.
"야단났다. 귀신이 혼을 되찾았어."
그는 말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미 십여장(丈) 밖으
로 달아나 있었다. 이 사람의 경공은 과연 일품이었다.
'쿵쾅!' 하는 소리가 나면서 뒤로 물러서던 합합아의 몸이 상에
부딪치면서 바닥에 몇 번 뒹굴었다. 그는 마룻바닥을 열고는 지하
미로를 찾아 급히 사라져갔다.
도교교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의기남아는 여자와 싸우지를 않는다 했으니 어디 봅시다."
도교교는 말이 끝나자 옷을 벗어 맨살을 들어낸 채로 덤벼들었
다. 연남천이 당황하자 그녀는 옷을 그의 얼굴에 던지고는 바람처
럼 달아나버렸다.
이대취는 크게 앙천대소하면서 말했다.
"연남천, 나와 오늘 한 번 붙어봅시다."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으나 주위를 살피던 그는 두살의 몸 뒤를
돌아 내빼며 말했다.
"두 노대(柱老大)가 가장 무술이 고강하니 먼저 해보시오."
사실 연남천은 간신히 일어서긴 했어도 미처 진기(眞氣)를 집중
시키지는 못 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다 함께 손을 쓴다면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음구유, 도교교, 합합아, 이대취
등은 모두 지레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버렸고 두살 혼자만 남았다.
연남천은 진기(眞氣)를 집중하면서 살의가 가득한 무서운 눈초
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손을 쓰지는 않았으나 날카롭고 냉
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왜 달아나지 않지?"
"나는 평생 적을 맞이해서 달아나 본적이 없소!"
"네가 감히 나와 싸우겠는가?"
"그렇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몸을 날려왔다. 그의 양소매에선 두
개의 붉은 물건이 내밀렸다.
추혼혈수(追魂血手)였다.
연남천은 조급한 순간에도 파안대소했다.
"잘 왔어 !"
그는 양손을 들어 재빨리 반격하려 했다.
두살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혈수(血手)는 악명높은 것
이었다. 그가 손에 끼고 있는 것은 백 가지 독으로 만든 한쌍의
장갑이었다.
이 장갑에는 가시가 많았고 조금이라도 긁히면 반 시간도 살 생
각을 해서는 안 되었다. 더구나 이때의 연남천은 적수공권이었으
니 죽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연남천의 양주먹은 분명히 혈장(血掌)에게로 향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중간에 와서 방향이 바꿔져 있었다.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마치 길을 가다 구덩이에 발을 혓딛었을
때처럼 마음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바로 이때, 그의 양팔이 잡혔고 소리도 지르기 전에 '뚝' 하는
소리가 났다. 그의 오른팔이 부러지고 만 것이다.
연남천은 넘어지는 그를 잡아 일으키며 무서운 소리로 말했다.
"곡중에 강금이라는 사람이 있느냐?"
두살은 너무 아파서 이를 악물며 간신히 대답했다.
"없다면 없는 줄 아시오!"
"그럼 아기는 어디에 있느냐?"
"모......모르니 날 죽이시오."
"너도 사나이니 너의 한 목숨을 살려주겠다!"
연남천은 손을 들어 두살을 던져버렸다.
두살은 과연 무림의 고수였다. 뼈가 부러진 고통 중에서도 공중
에서 몸을 훌쩍 뒤짚으며 똑바로 내려섰다.
그의 하얀 옷은 이미 붉은 핏빛이었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 팔
을 잡고 소리쳤다.
"당신은 나를 용서했지만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내가 누구에게 용서를 빌어 본적이 있을 것 같나!"
"좋소!"
두살은 원한 맺힌 한마디를 남기고 몸을 돌려 사라져버렸다.
연남천은 그의 등뒤에 대고 무섭게 소리쳤다.
"우선 내 아이를 돌려줘. 그렇지 않으면 난 이 산곡을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의 목소리가 그치자 사방은 조용해졌다.
연남천은 크게 노해 있었다. 한발에 탁자를 부숴버린 뒤 벽에다
구멍을 내버렸다. 밖으로 나오면서 기둥을 치자 집은 완전히 무너
져버렸다.
그러나 악인곡의 사람은 그 누구도 고개를 내밀지 않았다.
"좋아, 너희들이 언제까지 피하나 보자!"
밖으로 뛰어나온 그는 몸을 돌리며 옆집의 문을 걷어찼다. 문짝
이 날아가고 집 안에 있던 두 사람이 그를 보고는 놀라 달아났다.
연남천이 소리쳤다.
"어딜!"
급히 앞으로 달려가면서 두 사람의 등을 움켜 잡았다.
연남천이 소리치면서 한 사람을 벽에 집어던졌다. 하얀 벽에 머
리가 터져 피와 골수가 튀었다.
다른 한 사람은 너무나 겁에 질려 발에 힘이 빠져 후들거렸다.
그는 급히 달아나려고 했지만 혼비백산해서 움직이질 못 하고
땅에 풀썩 쓰러졌다. 연남천이 이번에는 그를 잡아 당겨 올리며
말했다.
"이놈아! 네 친구를 따라가야지!"
그 사람은 돌연 큰소리로 말했다.
"잠깐, 내가 할 말이 있소."
그는 이 사람이 어린아기의 행방을 말할 줄 알고 즉각 손을 멈
추었다.
"우리는 당신과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왜 살수를 쓰는 거요?"
"악인곡에는 악당들 뿐이니 모두 죽어도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
다."
"그렇소. 나 만춘류(萬春流)도 옛날에는 악인이었소. 그러나 벌
써부터 마음을 잡았는데 왜 나를 죽이려는 거요...... 왜 나를 죽
이는 거요?"
연남천은 그의 눈물 섞인 말에 손을 멈추고 한동안 서있었다.
(악인곡에도 마음을 고치는 사람이 있겠지)
그는 잡았던 손을 스르르 놓으며 소리쳤다.
"가라!"
그 사람은 일어나자 고개도 돌리지 않고 총총히 달아났다.
연남천은 그가 달아나는 것을 보며 길게 탄식했다.
(무고한 사람을 죽여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연남천아 연남
천, 너의 둘째 동생에겐 단 하나의 아이가 남았다. 네가 정신을
차리고 대책을 생각하지 않으면 둘째 동생은 대도 잇지 못 한다.
그때에는 네가 악인곡을 쑥밭으로 만들어도 무슨 소용이 있겠
어.......)
이런 생각으로 화가 차츰 풀려갔다.
그가 눈을 돌리자 문이 부줘진 집의 내부가 보였다.
그곳은 매우 넓었다. 사방에 가지 각색의 약초가 벽에 걸리거나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연남천은 강호에서 오랫동안 유랑했기 때
문에 견식이 풍부하며 의학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많았다. 시간이
있으면 산에서 약초를 찾아 독분(毒分)을 치료하는 약을 만들곤
했다.
그는 호기심에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난로불이 크게 타오르고 있었으며 동으로 만든 주전자엔 무엇인
가 끓고 있었다. 기묘한 모양의 솥도 있었는데 짙은 약향기가 풍
겼다. 이 집의 약초는 희귀한 것인지 그는 그중 두세 가지 밖에
그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제서야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알고보니 그 만춘류(萬春流)는 의술이 뛰어난 모양이구나. 그
를 죽이지 않은 게 다행이다. 그가 만약에 마음을 고치지 않았다
면 어찌 이렇게 의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으랴?"
안에서는 짙은 약향기가 풍기는 수증기가 퍼져 신비스런 분위기
를 내고 밖으론 달빛이 고요했다.
이때 한 사람이 달빛에 비치며 걸어 오는데 키가 크고 마른 흑
의인(黑衣人)이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집안의 수증기 속으로
걸어들어왔다. 그의 발걸음은 고양이보다도 가볍고 민첩했다.
연남천은 침착히 그를 주시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흑의인은 연남천 앞에 우뚝 섰다. 그의 눈에서는 교활한
빛이 흘러나왔고 입가에는 애매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포권의 예를 하고 웃으며 말했다.
"연 대협, 안녕 하시오?"
"흠!"
"제가 바로 천장검(穿腸劍) 사마연 (司馬煙)이오."
연남천은 그제서야 약간 놀라면서 말했다.
"음, 너로구나. 너도 왔군."
사마연은 껄껄 웃었다.
"연 대협께서 당도하기 전에 제가 이미 도착했었소."
연남천은 돌연 무거운 소리로 말했다.
"넌 뭘 믿고 여길 왔느냐. 내가 너를 죽이지 못 한다고 생각하
느냐?"
"두 나라가 싸워도 사절(使節)을 죽이지는 않는 법이오."
연남천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냐?"
"내가 은 것은 연 대협과 흥정할 것이 있어서요."
"무엇이냐? 아기에 관해서냐?"
"그렇소!"
연남천은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아기는 어디 있느냐?"
사마연은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빙긋빙긋 웃으면서 연남천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연남천은 이를 악물면서 드디어는 손을 놓았
다.
사마연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만약에 그들이 아기를 돌려주면 어떻게 하시겠소?"
"......."
"이곳을 곧 떠나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소?"
연남천은 생각지도 않고 소리쳤다.
"아기를 위해서 하겠네 !"
"정말이오?"
연남천이 분노하며 소리쳤다.
"난 한 번 한 말을 절대 땅에 떨어뜨리지 않아!"
"좋소! 그럼 연 대협은 날 따라 오시오."
두 사람 중 하나는 앞에 하나는 뒤에 서서 걸어나갔다. 밤은 조
용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사마연은 긴 거리를 지나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집 앞에 당도했다. 문이 반쯤 열린 채 안에서 불빛이 새어나
오고 있었다.
사마연이 입을 열었다.
"아기가 여기 있으니 연 대협께서는 아기를 안고 곧 들어오신
길로 돌아가시오. 마차는 산곡의 입구에 대기하고 있을 것이오."
연남천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무 의심 없이 즉각 집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방 한가운데에는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아기는 그
위에 뉘여 있었다.
연남천은 한 걸음에 달려가서 아기를 안으며 기쁨에 찬 탄성을
발했다.
"아기야, 고생했다!"
그러나 그는 안색이 변하더니 그 아기를 내팽개쳐 버렸다.
"이..... 이 녀석들이 헝겊 인형을 가지고 나를....."
그 순간 사방에서 수백 개의 암기들이 비수처럼 공기를 찢으며
지쳐들어왔다.
연남천은 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공중으로 치솟아올랐다. 그는
단숨에 지붕에 구멍을 뚫고 나온 것이다.
집 주위에서 여러 그림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리기 시작했
다.
연남천은 소리를 치면서 공중에서 몇 장을 펼쳐냈다.
'펑, 푹!'하는 소리가 잇따라 일어나면서 피가 사방으로 튀겼
다.
곧 몇 사람이 죽어 넘어졌고 몇은 여전히 달아났다.
연남천은 길 한가운데 내려섰다. 그는 무서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까짓 암수를 쓴다고 내가 당할 것 같으냐? 나를 죽이려면 나
와서 싸워보자!"
"싸워보자......싸워보자..... 싸워보자......"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먼 산정의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 올 뿐
악인곡은 다시금 무인지경의 정적에 잠겨들었다.
그는 초조함과 울분으로 가득차 주위를 둘러보며 걸었다.
곡안에 있던 등불은 어느 틈엔지 모두 꺼져 있었다. 달빛이 있
어도 곡안은 무겁게 어두웠다.
이때 하나의 칼빛이 집 모서리에서 공기를 찢으며 내리쳐왔다.
그 칼은 한눈에 보아도 명가(名家)가 배출한 것이었다. 재빠르
고 예리하기가 아주 정확하게 연남천을 두 동강이로 낼 기세였다.
그러나 마치 칼바람에 밀리기라도 한 듯 가볍게 연남천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순간 그는 이미 그 사람의 팔을 붙잡았다.
"나와. 물어 볼 게 있다."
그는 말과 동시에 팔을 왈칵 잡아당겼다. 그런데 너무 쉽사리
끌리는 것이 아닌가? 칼을 쥔 팔만이 덜렁 딸려왔다. 그 사람은
자신의 팔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정말 지독한 놈이었다. 그는 아무소리도 내지 않았던 것이다.
연남천은 놀랍고 애가 타고 분노해서 잡았던 팔을 집어던져 버
리면서 집 모서리를 돌았다. 그러나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을 수
가 없었다.
연남천은 미친 것처럼 하나하나씩 집을 차례로 뚫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를 악물었고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좋아 숨어라. 너희들이 언제까지 숨어있나 보자!"
그는 몇 개의 의자를 들고는 거리 가운데로 나와 앉았다.
그는 분노에 차 거칠게 소리쳤다.
"악인곡에 있는 놈들이 귀신이라면 연천남은 귀신을 잡는 사람
이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까짓 갓난 아기가 뭐 그리 대단한가? 필요하면 주겠다!"
연남천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재빨리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
갔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 비쳤다. 무엇인가를 던지는
데 보기에 어린애를 싼 보퉁이 같았다. 연남천은 급히 신형을 날
려 낚아챘다가는 곧 다시 되돌려 던져버렸다. 손에 닿는 감각이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보퉁이가 다시 날아 가서 벽에 부딪
쳤다. 순간 '쿵'하며 벽을 반이나 폭파시켰다.
그 보퉁이는 화약을 싸맨 것이었다. 연남천이 조금만 동작이 늦
었다면 지금쯤은 벌써 산산조각이 됐을 것이다. 연남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바닥은 온통 땀투성이었다.
독계(毒計)! 연이어 계속되는 독계였다. 비록 영웅일지라도 조
금만 소홀히 하면 여기서 죽고 말 것이다.
연남천은 벌써 몇 개의 난관을 지났다. 그러나 그가 앞으로 얼
마나 더 버틸 수 있으랴!
이런 생각을 하자 그의 가슴은 무거웠다.
(나도 암암리에 그들을 찾아야겠다.)
연남천은 정신을 차리고 주저없이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악
인곡의 도당들이 그를 암살하지 못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연남천은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어 마치 뱀이나 고양이 같이 은
밀히 나아갔다. 그러나 연남천은 아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집집마다 다 텅텅 비어 있었으며 모두들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묘연했다.
연남천은 각 집을 샅샅히 뒤졌다. 그때서야 그는 악인곡이 매우
큰 마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밤. 매우 조용했다. 악인곡은 하나의 무덤 같았다. 스산한 바람
만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이때 바람 속에서 나즈막한 소리가 언
듯언듯 들렸는데 사람의 말소리 같다.
연남천은 숨을 죽이면서 다가갔다. 과연 가벼운 말소리가 어느
집 안에서 들려왔다. 한 사람이 말했다.
"소도(小屠)는 과연 재주가 좋아. 아이를 고이 잠들게 했으니
말이야."
비록 웃지는 않았어도 합합아의 목소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또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이 어린아기를 인질로 했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돌연 도교교가 말을 끊었다.
"이대취는 무얼하나?"
이대취가 가볍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 여자의 피부를 보고 있자니 옛날 마누라 생각이 나서."
"그러나 이 시체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어!"
"그래도 보관만 잘 하면 먹을 수가 있어."
"좋아, 그녀를 먹어도 좋아, 이건 필시 연남천 의제의 마누라
야, 그녀를 먹고 우리 두 노대를 위해서 복수한 셈치자."
이대취의 침이 고인 목소리가 들렸다.
"우선 이 향료를 제거하고 다음은......."
밖에서 이 소리를 듣던 연남천은 극도로 화가 나서 온 몸의 피
가 거꾸로 역류하는 듯 했다. 그는 큰소리를 내지르며 번개같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집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사람들이 쏜살같이 달아났
다. 그 와중에 이대취만이 버티고 서있었다. 그는 눈을 돌려 연남
천을 쳐다보고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좋아. 너에게 주지."
그가 관을 연남천을 향해 던지자 향료와 시체가 바닥에 나뒹굴
었다. 그 틈에 그는 몸을 밖으로 날렸다.
어둠 속에서 합합아의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연남천, 당신이 과연 우리를 찾았군. 그러나 아기가 우
리의 손에 있다는 걸 잊지 마오. 당신이 쫓아오면 흥! 하하!"
연남천은 이 소리를 듣고 맥이 빠졌다. 자기가 더 참지 못 해
일을 그르쳤으므로 통분에 입술을 깨물며 자책했다.
달빛이 비춰 들어와서 바닥의 시체를 비췄다. 창백하고 부어오
른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가 달빛에 비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공
포를 자아냈다.
연남천이 담담히 말했다.
"동생, 미안하구나. 나...... 나...... 난 비단 네 아이도 돌보
지 못하고 심지어는...... 심지어는 네 처의 시체까지!......."
그의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가지 못 했다.
그는 관을 바로하고 양손으로 시체를 잡아 조심스레 관 속에 넣
었다. 그는 눈물이 앞을 가려 시체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는 쓸쓸히 눈물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편히 쉬오!"
싸늘한 달, 차가운 관, 깊은 어두움, 무서운 시체.......
이 시체가 갑자기 연남천의 품에서 일어섰다.
펑! 펑! 펑! 펑! 네 번 소리가 나면서 이 시체의 손이 일제히
연남천의 혈도에 적중했다.
연남천이 천하의 영웅, 천하무적이라 해도 또 아무리 경험이 많
고 영민하다 해도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는 소리도 지르지 못 한 채 왼쪽 어깨의 중부(中府), 오른팔
의 영허(靈墟), 앞가슴의 거궐(巨闕), 배의 중문(仲門) 등 네혈
(穴)을 맞았다.
이 일대의 영웅은 드디어 쓰러지고 말았다.
그 시체는 일어서서 껄껄 앙천대소하며 말했다.
"연남천아, 연남천! 오늘에야 지호가 어떤 것인지 알겠지!"
이렇게 웃으면서 인면피를 벗고 눈길을 그의 얼굴에 돌렸는데
바로 도교교였다.
연남천은 자기가 혼자서 왔으므로 도교교가 필시 변장수법을 못
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시체로 분장하여서 그를 속였던 것
이다.
돌연 빛이 밝아졌다.
합합아, 이대취, 음구유, 사마연 등 모두가 의기양양하게 나타
났다.
합합아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연남천, 너는 정말 네 힘으로 우리를 찾은 줄 알았느냐? 하하!
그것 또한 우리의 계책이었어!"
이대취도 징그럽게 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연남천! 넌 우리가 정말로 너를 두려워 하고 있는 것으로 알았
겠지. 그건 네가 달아나지 앓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싸움을 피한 것이다."
연남천은 탄식을 하면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는 자기가 이번
만큼은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음구유가 말했다.
"너희들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그가 일어나길 기다려?"
"빨리 시작해 !"
합합아가 나섰다.
"내가 손을 쓰지 !"
도교교가 그를 막았다.
"잠깐! 내가 가장 공이 많으니 내가 먼저 손을 써야지!"
음구유는 음산한 목소리로 한 걸음 나섰다.
"애초의 나의 말을 들었으면 그는 벌써 죽었을 거야. 내가 손을
쓰지."
이대취가 눈을 흘겼다.
"너희들은 사람을 제대로 죽일 줄 몰라. 잘못 죽이면 먹을 수
없게 돼. 내가 죽여야지."
이들은 서로 다투면서 손을 쓰려했다. 그들은 각기 천하제일검
객(天下第一劍客)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물에서 빠져나온 한 마리 물고기
합합아는 쓰러져 있는 연남천을 내려다 보며 곰곰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돌연 크게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 그렇게 다툴 필요가 없소. 내게 좋은 해결방법이 있으
니까."
도교교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하하, 우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고 게다가 아주 재미있는 방
법이지."
음구유도 참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답답하게 굴지말고 빨리 말을 해봐."
"우리가 만약 연 대협을 단번에 죽여버리면 여기까지 어렵게 찾
아준 성의를 무시하는 거야. 그러나 연 대협이 천천히 죽음을 음
미하게 하면 좀더 오랜 교제를 나눌 수 있지 않겠어?"
도교교가 애교있게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그 생각도 괜찮은데."
"우리 번갈아가면서 손을 쓰자구. 만약 연 대협을 죽게 만드는
사람은 모두에게 벌을 받아야 하고."
음구유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릎을 쳤다.
"재미있어. 과연 묘책이야. 난 음풍수혼수(陰風授魂手)의 맛을
보여주고 싶은데 아마 이것을 한 번 맛보면 세상에 태어난 게 후
회될 거야."
도교교가 나섰다.
"내 소혼미인공(銀魂美人功) 맛도 당신보다 뒤떨어지지는 않을
텐데."
이대취도 그냥 빠질 수 없었다.
"나의 괄골도(割骨刀)는 두부나 베는 건줄 아나?"
도교교는 서두르는 이대취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달랬다.
"두노대(桂老大)를 청해 와야해. 그의 혈수찬심(血手鑽心)과 우
리 합합아의 벌수세뇌(伐體洗腦), 이 두 개의 맛은 견디기 어렵
지."
합합아는 크게 만족해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하, 그렇다면 누가 먼저 손을 써야 하지?"
도교교가 애교있게 웃었다.
"네가 생각해낸 것이니 네가 먼저 손을 쓰거라."
"좋아!"
합합아는 손을 내밀어 연남천의 머리를 향했다.
한식경이 지났다. 밤은 더욱 깊어갔고 밤바람이 처량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연남천의 부러지고 터진 상처에서는 피가 쉬지않고 흘렀고 그
모습은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합합아가 연남천의 몸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하하, 이제 이형(李兄)차례야."
이대취는 손을 저으며 점잖을 뺐다.
"싫어. 난 손을 쓰지 않겠어."
"그럼 지게 되는 거야."
"이 사람은 지금 다 죽어 간다고. 금방 태어난 어린아기가 때려
도 죽을 거야. 왜 꼭 날더러 손을 쓰라는 거야?"
이대취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이었다.
음구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어."
이대취는 고개를 돌려 음구유를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넌 손을 쓰고도 그를 죽지않게 할 수 있단 말이냐?"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
"좋아! 좋아! 정 그렇다면 네가 한 번 해봐."
"내 차례가 되면 시키지 않아도 해."
음구유의 말에 이대취는 다시 노했다.
"이놈이 자기 차례까지 오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
합합아는 다시 웃으면서 그들의 싸움을 말렸다.
"두 분은 진정하시오. 우선 의사를 찾아서 연남천을 얼마나 더
때려도 되는지 감정해 봐야지."
이대취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찾으러 가지."
잠시 후 그는 만춘류(萬春流)를 데리고 왔다. 그는 야윈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그저 묵묵히 들어왔다. 이대취는 필시
그간의 사정을 말했을 것이다. 그는 약간 고개를 끄덕이면서 죽어
가는 연남천의 옆에 앉았다.
반 시간이 넘도록 그는 연남천을 위아래로 자세히 진단했다. 그
러나 그의 손은 연남천의 피부에 닿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대취가 참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어떻소?"
"이 사람의 폐경(肺經), 비경(婢經), 심경(心經), 심포낙경(心
包絡經), 삼조경, 단경, 간경(肝經)이 모두 파괴되었소. 그런데도
지금까지 살아있다니 기적이오."
이대취는 음구유를 보며 웃었다.
"자, 내 말이 맞지?"
"음구유가 소리쳤다.
"그게 확실한 소리야?"
만춘류가 조용히 대답했다.
"무술은 당신보다 못 하지만 의술은 내가 나을 거요."
음구유는 입을 찡그리며 비웃었다.
"의술이라! 당신이 그 잘난 그 의술로 개봉성(開封城)에서 하룻
밤 사이에 구십칠 명이나 즉사시켰소?"
만춘류는 싸늘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난 비록 사람을 많이 죽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요 몇 년 사이엔
많은 목숨을 구했오. 당신이 처음 왔을 때만 해도 그렇소. 만약
내가 여기에 있지 않았다면 당신은 오늘날까지 살아있을 수도 없
었을 것이오."
음구유의 두 눈에선 불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는 입곡할 당시에 확실히 죽음 직전의 부상
을 입고 있었고 만춘류가 그를 치료해주었던 것이다.
합합아가 즉각 웃으면서 나섰다.
"만신의(萬伸醫)의 눈으로 진찰한 것이니 틀림이 없을 거요. 정
그렇다면 너나 나나 승부를 가리지 못 하니 우리 모두 한꺼번에
손을 써서 연남천을 죽여 버립시다."
만춘류는 무거운 소리로 그 말을 막았다.
"잠깐. 난 여러분께서 그의 목숨을 살려 주었으면 하오."
음구유가 노하여 말했다.
"너...... 너는 그를 구하겠다는 것이냐?"
만춘류는 안색도 변하지 않고 서서히 말을 계속했다.
"상처가 이렇게 심한데도 목숨이 붙어있는 사람은 평생에 보지
를 못 했소. 이 사람은 서른 군데가 넘게 상처를 입었소. 나는 약
초를 사용해 그 반웅을 시험해 볼 것이오. 성공한다면 여러분들에
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음구유는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당신이 시험에 성공하면 연남천이 살아날 게 아니오?
그의 상처가 완쾌되면 그땐 우리가 당신 치료를 받게 될 것이오."
만춘류는 담담히 말했다.
"이 사람은 목숨을 구해도 병신이 아니면 백치가 될 것이오. 그
를 죽이고자 하면 수시로 손을 쓸 수 있는데 왜 성급하게만 구는
지 모르겠구려."
음구유는 아무소리도 하지 않는다. 사마연은 합합아를 바라보고
합합아는 도교교를 바라보았다. 도교교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만신의가 말한대로 합시다."
이때 이대취가 소리쳤다.
"안 돼, 이 자식은 내 반찬이야, 난......."
합합아가 웃으면서 나섰다.
"곡중에는 죽은 사람이 많소. 그것이나 먹지 왜 꼭 이 사람을
먹으려고 하오?"
이대취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벌써 말했잖아. 명인의 고기는 맛이 틀리다고. 그 놈들
열이라도 하나의 연남천보다 못 해. 너희들 중 그 누구라도 그를
빼앗아가려한다면 난 서슴지 않고 싸우겠다!"
합합아는 어깨를 한 번 움찔하더니 다시 도교교를 바라보았다.
도교교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하며 만춘류를 바라보았다. 그
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만신의, 별도리가 없으니 날 원망은 마시오."
만춘류는 싸늘하게 말했다.
"이 사람 몸의 상처는 삼십여 종 약초의 효능을 알 수 있게 하
오. 그 약초들은 어쩌면 장차 여러분들의 목숨을 구할 지도 모르
오."
침묵을 지키던 사마연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우리들의 목숨이 이형(手兄)의 찬거리보다는 중요
한 것 같소."
이대취가 다시 노해 소리쳤다.
"너는 뭔데 그렇게 말이 많아?"
사마연은 화를 내지 잖고 미소를 보이면서 말했다.
"내말은 장차 그 약조가 가장 많이 필요한 사람이 이형(李兄)일
것이라는 말이오."
도교교가 말했다.
"그 말은 맞지."
아대취는 한마디 더 하려고 입을 열려다가 분위기가 이상한 것
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모두가 싸늘한 눈초리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런 싸늘한 눈
초리를 대하고도 화를 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대취는 하는 수 없이 길게 탄식을 하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좋아. 너희들 말을 듣지 아! 삶은 고기가 날아가는 구나."
도교교가 웃으며 말했다.
"만신의, 무얼 기다리는 거요? 이 연남천은 껍데기까지 당신 것
이오."
만춘류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내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감사하오."
그는 품속에서 몇 알의 약을 꺼내자 연남천의 입 속에 넣어 삼
키게 했다.
돌연 어린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대취가 표정을 바꾸어 웃으며 말했다.
"맞았어 ! 그 아기가 있었지!"
합합아는 음구유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째?"
음구유는 음산하게 그 말을 받았다.
"이형이 이미 먹기를 기다리는 것 같군."
이대취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기의 고기는 양은 얼마 안 되어도 맛은 괜찮지."
그가 입맛을 다시며 달려가려 하는 순간 도교교가 손을 저으며
그를 막았다.
"잠깐!"
이대취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또 무슨 일이야?"
"그 어린애도 죽여서는 안 돼!"
"너 이 여우, 어째 나를 자꾸 괴롭히려는 거지?"
합합아가 또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소도(小屠)의 잘못이오. 이 아이는 살아도 후한이 될
뿐이니 이형의 배 속에 넣어 주는 것이 깨끗할 것이오."
도교교는 그 말엔 대답도 하지 않고 반문했다.
"내가 여러분들깨 물어 보겠는데,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아시오?"
이대취가 말했다.
"엉뚱하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하시오. 대답을 한다고 어린아기의 몸
에서 고기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흥!"
합합아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천하에 가장 악한 사람은 소도(小屠)지."
도교교가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과한 말씀, 과한 말씀이오. 그러나......"
그의 다음 말이 나오기 전에 이대취가 이미 노하며 말했다.
"흥! 불남불녀를 할 줄 알아서 천하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란 말
이야? 흥! 저년, 아니 저놈....... 하여튼 저 녀석은 사람 고기도
먹질 못 한단 말이야."
합합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그렇다면 이형이 바로 천하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겠
군."
이번에는 도교교가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가장 악한 사람이 못 된다는 말은 사실이오. 하지만 사람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인가? 난 옛날에
노새마차꾼 하나가 사람 고기를 한 번에 몇 근씩이나 먹는 것을
보았어."
이대취는 노하여 말했다.
"그럼 천하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 누구지?"
"하하......맞았어. 음노구!"
합합아의 말에 도교교가 다시 말했다.
"음노구는 확실히 음독하지, 하지만 그는 흉악함이 얼굴에 너무
잘 드러나서 사람들은 그를 보자마자 경계하고 말아. 그래서 나쁜
짓을 할 기회가 적지."
"그렇다면 그도 아니지."
합합아의 말이다. 도교교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 아니지. 그렇지 않다면 그가 소이장도 합합아의 재주를
배워 써먹겠어? 입으론 형님이라 부르면서 품속에선 칼을 꺼내
고......"
"소이장도......하하......소도(小屠)가 나를 말하는군."
도교교는 합합아의 말에 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그렇지. 합합아는 호인 같이 보여서 어느 누구도 그가 악인이
라는 것을 잘 몰라. 그가 누굴 속여서 종으로 팔아먹어도 그 사람
은 아마 자기가 팔렸다는 사실도 눈치 못 첼 거야."
합합아는 손벽을 치면서 크게 웃더니 말했다.
"하하! 그래? 내가 정말 천하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라면 기분
좋은 일이지. 하지만 난 두 노대만 보면 무서워 해. 그는 나보다
더 악당이지."
음구유가 갑자기 싸늘하게 말했다.
"그 놈은 살인밖에 또 뭐 할 줄 아는 게 있어?"
도교교가 말한다.
"그렇지! 이번만 해도 우린 멀쩡한테 두 노대는 다치고 말았어.
그가 만약 가장 악한 사람이었다면 우릴 방패로 먼저 달아났어야
할 텐데."
합합아는 사마연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맞았어. 사형이 있지, 하하 '천장독엽검(穿腸毒葉劍)살인여도
산(殺人如揭山)' 강호에서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어?"
사마연이 미소를 띠어 보이면서 말했다.
"나도 강호에는 약간의 악명이 있지만 '십대악인(十大惡人)' 앞
에선 안 됩니다."
도교교가 말했다.
"그렇지. 십대악인 중에 우리말고 나머지 다섯은?"
사마연이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보기론 그 다섯 사람이 여러분들보다 특별히 더 악독한
것은 아니오."
"더욱이 그 광사 철전은 엄격히 말해서 십대악인(十大惡人) 속
에 끼지도 못 하지."
도교교가 말했다.
"광사는 한번 미쳐 돌아가면 자기 아들과도 칼부림을 해. 하지
만 항상 정신이 나가있는 것은 아니거든."
합합아도 이들 속에 다시 끼어들었다.
"광사는 안 돼. 그 미사인불배명 소미미는 어떨지? 어떤 효자라
해도 그녀에게 반하기만 하면 어머니도 팔아버리게 될 거야."
도교교가 빠질 수 없다.
"소미미의 유혹은 대단하지. 하지만 몇몇 멍청한 남자들을 꼬셔
서 일을 저질러봐야 얼마나 대단하겠어? 게다가 이대취가 본다면
반하긴 커녕 당장 삶아먹어 버릴 거야."
함합아가 급히 말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천하에서 가장 악한 사람은 도대
체 누구지. 절간의 중이란 말인가?"
도교교의 애교있는 목소리가 또 나왔다.
"우리들은 모두 비슷 비슷해서 누가 더 흉악하거나 더 악독하다
고 판단하기가 힘들어."
이대취가 나섰다.
"흥! 여태껏 헛튼 수작만 부리고 있었군."
도교교는 그를 상관하지도 않고 계속 말했다.
"지금은 비록 없지만 곧 생기게 되겠지."
이 말이 나오자 모두들 의아해하며 물어보았다.
"그게 누군데?"
도교교는 눈알을 굴리면서 서서히 말했다.
"바로 울고 있는 저 아기야."
이 말에 모든 사람이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대취가 제일 먼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 아기가 천하에서 가장 흉악한 사람이라고 하하, 히히, 흐흐
피이 !"
도교교는 그를 상관않고 계속 말했다.
"이 어린아기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 믿을 거야. 우리가 까마
귀를 하얀 색이라 말한다고 해도 그가 아니라고 하겠어?"
"흥! 또, 헛 수작."
"어릴 때부터 우리를 따라다닌다면 보는 것이 모두 우리가 하는
일이고, 듣는 것이 모두 우리가 하는 말이니 크면 어떤 사람이 되
겠어?"
이대취는 내뱉듯 말했다.
"그야 물론 나쁜 놈이 되겠지."
도교교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쁜 놈일 뿐더러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이지. 생각을 좀 해
봐. 그가 만일 여기에서 모든 악한들의 행동을 배운다면 세상에
또 누가 그보다 더 악독하겠어?"
"그런 사람은 아마 귀신도 두려워 할 거야."
합합아의 말을 도교교가 받았다.
"바로 그거야. 귀신도 무서워할 사람이 강호에 나가면 어떻겠
어?"
합합아는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
"하하! 천하가 온통 진동하겠지."
"바로 천하를 흔드는 일이지. 우린 여기에 쫓겨 와서부터는 화
풀이 할 곳도 없었어. 이 아기는 하늘에서 주신 구세주야."
여기까지 듣고있던 음구유는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군."
합합아는 더욱 크게 웃으면서 손뼉을 쳤다.
"하하! 소도(小屠)외에 또 누가 이런 묘안을 생각해 낼 수 있겠
어?"
이대취는 입술을 깨물면서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돌연 입
을 열었다.
"그래도 문제점은 있지."
도교교가 말을 받았다.
"왜?"
"그렇게 하면 악당이 되기는 되겠지, 하지만 무엇보다 가슴에
분노가 있어야 지독한 악당이 될 수 있는 거야. 한쪽 다리를 잘라
버리는 게 어때? 한평생 불편하게 지내도록 하면 남에게 분노도
품게 되지 않겠어?"
합합아가 말했다.
"그것도 그것도 일리가 있지."
도교교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일리는 무슨 일리야? 이대취가 아기다리라도 먹으려고 하는 소
리지."
이대취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욕설을 내뿜었다.
"야! 이 남자도 여자도 암놈도 숫놈도 아닌 노새야. 난 별 인간
을 다 먹어 봤지만 불남불녀의 괴물은 먹어보지 못 했다. 언젠가
는 너를 먹을 날이 있을 거다."
"나를 먹겠다고? 먹고 중독되지는 않을까?"
그래서 악인곡에는 어린아기가 하나 생겼고, 모두들 '소어아(小
魚兒)'라고 불렀다.
확실히 그는 그물에서 빠져 나온 한 마리 고기였다.
과연 콩 심은데 콩이 날까?
소어아(小魚兒)는 점점 커갔다.
소어아와 가장 친한 사람은 두(桂)백부 . 소(笑)백부 . 음(陰)
아저씨 . 이(李)아저씨 . 만(萬)아저씨 그리고 한 명의 아가씨,
아니! 도 고모(屠姑母)이다.
소어아는 이런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커갔다. 그는 이 사람들
집을 한 달씩 돌아다니며 지냈다. 일월은 두 백부, 이월은 소 백
부, 삼월은 음 숙부.......
두 백부(柱伯父)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규칙이 엄했다. 팔이
끊겨진 두 백부의 얼굴은 종래 웃음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
다.
무술을 익히다가도 조금이라도 행동이 느리거나 틀리면 얻어 맞
아야 했다. 소어아는 그 집에 있는 동안 내내 엉덩이가 부어 올라
있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웬만큼 얻어맞고는 표
시도 나지 않았다.
소어아는 소 백부(笑伯父)와 같이 있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아니..... 여하간 가장 많이 웃었다. 이분 소 백부는 항상 웃고
있을 뿐 아니라 그도 따라 웃게 한다. 가장 어려운 것은 엉덩이가
퉁퉁 부어 오르도록 얻어 맞을 때도 꼭 웃어야 하는 점이다.
소어아는 음 숙부(陰叔父)와 같이 있는 시간이 가장 무섭다. 이
분 음 숙부의 몸은 육칠 월에도 한기가 돌아 그의 옆에 있으면 추
위를 느꼈다. 소어아는 소 백부와 한 달간 있으면 너무 웃어서 뺨
이 아플 정도이고, 음 숙부와 같이 있을 땐 표정이 석상같이 굳어
버렸다. 아무리 기쁜 일이 있더라도 음 숙부를 보면 웃음이 나오
지를 않았다.
소어아는 이 숙부(李叔父)와 같이 있을 때 가장 괴롭다. 이분
이아저씨는 그의 몸에서 꽁꽁 냄새만 맡고 있으니 지겨울 정도이
다.
소어아는 도 고모와 같이 있을 때 가장 헷갈린다. 이분 도 고모
는 돌연 남자가 되었다가 돌연 여자로 변하기에 그는 이 도 고모
가 도대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장 특이한 것은 만 숙부(萬叔父)와 같이 있는 것이다. 만 숙
부는 비록 웃음을 짓는 일은 없어도 두 백부보다는 화기가 있다.
말을 붙이기에도 그렇게 거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분 만 숙부는
자꾸 소어아에게 수백 가지 약을 먹인다. 그리고 소어아를 약물에
하루 종일 담가 놓기도 한다. 이건 견디기가 어렵다.
만 숙부의 집에는 '약단지, 숙부도 있다. 이분 약단지 숙부님은
나무 인형처럼 앉아서 움직이지도 않고 하루 종일 약만 계속 먹는
다. 그는 약을 소어아보다 열 배 이상이나 먹는다. 소어아는 약이
매우 쓰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를 동정했다.
이분 약단지 숙부는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종래 말을
하지 않고 심지어는 눈도 뜨지를 않는다.
그밖에 많은 숙부와 백부가 있는데 그 중 한 아저씨는 흙으로
장난감을 만들어 주곤 했다.
소어아는 그를 매우 좋아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소어아는 사방으로 그를 찾아보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어딜 갔나
물어보기도 했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도 고모에게
물어보니 도 고모는 이 숙부의 배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숙부의 배 속에 있어."
한 사람이 이 숙부의 배 속에 있다니 소어아는 이해하지를 못했
다.
사실 이 숙부도 한 번 없어지고 말았다. 그날 이 숙부는 큰소리
를 질렀다.
"난 숨이 막혀. 난 견디지 못 하겠어!"
그리고 그는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반 달이 지난 후 그는 곡외에서 돌아왔다. 온몸이 상처
투성이었고 살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도 고모는 오히려 그를 보고 비웃으면서 말했다.
"여기서 나가지 말랬더니 말을 듣지 않고. 곡속에 있으면 남들
이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지. 그 누구도 감히 들어오지는 못 하
니까."
소어아가 다섯 살도 안 된 어느 날 두살은 그를 한 낯선 방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엔 개가 한 마리 있었다. 두살은 그에게 칼을
주었다.
소어아는 이상히 여겨 물어보았다.
"칼?......무엇에 쓰는 거야?"
"살인용이지. 개를 죽일 수도 있어!"
"반찬을 자를 수도 있고 그렇죠?"
"이것은 식칼이 아니야."
"난 이 칼이 필요없으니 식칼을 줘요."
"잔소리 하지 말고 이 개를 빨리 죽여라!"
"개가 만일 말을 듣지 않으면 엉덩이를 때려주지 왜 죽이려는
거죠?"
두살이 노하여 말했다.
"죽이라면 죽이지 말이 많구나,"
소어아는 훌쩍였다.
"난.....싫어......."
"못 하겠느냐? 좋아!"
돌연 방을 나와서는 '찰칵' 하면서 문을 잠구어버렸다.
소어아는 큰소리로 말했다.
"두 백부, 날 내보내줘......난 나갈래요!"
"개를 죽여야 나을 수 있어."
"난 죽이지 못 해요. 난 이기지 못 해요......."
"네가 이기지 못 하면 그놈이 너를 죽이도록 기다려야지."
소어아가 소리를 지르며 울어도, 눈이 부어도, 목소리가 터져도
그를 상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살은 가버린 것 같았다.
얼마가 지나자 소어아는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소어아는 그 개를 바라보았다. 그 개도 소어아를 쳐다보았다.
이 개는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그 인상이 매우 흉해서 소어아는
저절로 무서워졌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있었다. 한참 후 그의 뱃속에서 '꼬르
륵'하는 소리가 나자 그 개도 켕켕 짖기 시작했다. 그는 저녁밥을
먹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배가 고파 죽겠는데 혹시 이 개도 배가 고픈 것이 아닐까?)
소어아가 말했다.
"작은 개야, 짖지 마라. 나도 굶었어."
그 개는 더욱 무섭게 짖으면서 시벌건 혀를 소어아에게 내밀었
다.
소어아는 무서워서 칼을 꼭 잡으며 말했다.
"작은 개야, 난 배가 고프긴 하지만 널 잡아먹을 생각이 없어.
너도 날 먹을 생각을 하면 안 돼."
그러나 그 개는 '컴'하고 짖더니 달려들었다.
소어아는 다시 큰소리쳤다.
"나의 고기는 맛이 없다......맛이 없다......."
두살은 어디로 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문밖에서 모든 것을 듣
고 있었다. 갑자기 아무소리도 나지 않았다.
차 한 잔 마신 시간이 지나자 두살은 서서히 문을 열었다.
소어아는 손에 칼을 움켜쥐고 땅을 개처럼 기고 있었다. 그는
온몸이 피투성이었고 개도 피투성이었다 .다만 그는 살아있고 개
는 이미 죽어 있었다.
두살은 그를 안아 일으키며 물었다.
"너는 몇 번이나 찔렀느냐?"
"열 번........스무 번 난 모르겠어."
"넌 본래 개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잖아?"
"하지만 그가 나를 먹으려고 하니 난...... 난 다만......."
"바로 그거야. 네가 개를 죽이지 않으면 개는 너를 먹으려 한
다. 이 도리를 이제 알겠지?"
소어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응!"
"네가 만약에 선수를 쳤다면 이렇게 부상 당하지는 않았을 거
야...... 꼭 먼저 손을 써야 했는데 왜 기다린 거지? 너는 개보다
못해."
"다음..... 다음에는........ 알겠어요."
"알면 됐어. 그러나 기억해 두어야 해. 세상사람들은 모두 개와
같으니 네가 남들보다 먼저 손을 써야 해. 그래야 안전하다는 거
야. 알았지?"
"응, 알았어."
"방금 개를 죽인 기분을 나에게 말해봐라."
"잘 모르겠어요."
"너는 이 일을 잊을 수 있겠느냐?"
"영원히 잊지 못 할 거예요."
두살은 그를 흐뭇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올랐다.
소어아는 만춘류에게 반 달 동안 치료를 받은 뒤에야 걸음을 걸
을 수가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본래 몇 개의 상처가 있었는데 이
번 일로 몸에 또 상처가 생겼다.
며칠 후, 두살은 다시 그를 그 방에 가두었는데 이번에도 한마
리의 개가 있었다. 지난 번과 다른 것은 개가 더 컸다는 사실이
다.
두살이 말했다.
"그 칼은 여전히 갖고 있겠지?"
소어아는 겁에 질려 오직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는 안색이 새하
얗게 변해서 말도 하지 못 했다.
두살이 눈치를 살펴가며 말했다.
"좋아! 이 개를 죽여라!"
"그러나 이 개는......너무......너무 커요."
"무서우냐?"
"무......무서워요."
"병신 같으니라구!"
돌연 몸을 돌려 나가더니 문을 잠구어버렸다.
한참 후 방 안에서 돌연 개가 무섭게 짖더니 이내 소리가 사라
졌다. 두살이 문을 살짝 열어보니 개는 죽었고 소어아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몸이 피투성이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서있을 수 있었다.
그는 비록 눈에 눈물은 고여 있어도 입술을 깨물며 큰소리로 말
했다.
"내가 또 개를 죽였어요. 열일곱 칼에......."
"두려우냐?"
"지금은 개가 죽었으니 물론 두렵지는 않아요. 그러나 조금 전
엔......."
"넌 두렵던 그렇지 않던 간에 빨리 손을 써서 그 개를 죽여야
했어. 그 개는 네가 두려워하던 간에 아니던 간에 널 먹어 버릴
테니까. 이런 간단한 도리도 모른단 말이냐?"
"알겠어요."
"다칠까봐 겁이 났냐?"
"네. 그래서 손을 못 쓴 거예요."
"이미 죽어서 시체가 되면 두려워한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소어아는 주먹을 불끈 쥐며 힘차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않겠어요."
소어아를 바라보는 두살의 입가엔 또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엔 소어아의 상처가 빨리 쾌유되었다. 그러나 그가 회복되
자 두살은 다시 그를 방 속에 가두었고, 그 속에 개도 더욱 크고
사나운 놈으로 집어 넣었다. 그러나 소어아의 상처는 갈수록 가벼
워졌고 더욱 빨리 쾌유되었다.
이렇게 하기를 여섯번째였다.
두살이 문을 열었다.
두살이 방 속에 넣은 것은 개가 아니었다. 이번엔 작은 늑대였
다. 그래서 소어아는 다시 자리에 눕게 되었고 계속해서 약을 먹
어야만 했다.
어느 날 합합아가 왔는데 소어아는 웃고 싶었으나 웃음이 나오
지를 않았다.
"소 백부, 화내지 말아요."
"무슨 화를 낸단 말이냐?"
"난 정말 웃고 싶지만 다만...... 웃게 되면 온 몸이 아파서 웃
지를 못 해요."
합합아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병신 녀석! 말해두지만 내가 항상 좋아서 웃는 줄 아니? 난 아
플수록 더 웃지 !"
소어아는 눈을 깜박이면서 물었다.
"뭐요?"
"웃음은 좋은 약이기도 하고 좋은 무기야...이. 가장 좋은 무기
야. 난 이보다 좋은 무기를 본 적이 없어."
"무기......웃음도 늑대를 죽일 수 있나요?"
"하하, 늑대를 죽일 수 있을 뿐더러 사람도 죽일 수 있어!"
소어아는 잠시 생각을 한 후 말했다.
"난 모르겠어요."
"넌 왜 번번히 부상을 입는지 아느냐?"
"몰라요. 그러나 이미 두려워하지는 않아요. 정말 두려워하지
않아요."
"너는 왜 단칼에 죽이지를 못 하지?"
"그건 나의 무술이........."
"그건 너의 무술 때문이 아니야. 너는 웃음이 없기 때문이야.
그개도 늑대들도 말을 하지는 못 해요. 그러나 눈치는 있어. 네가
방을 들어설 때 네 딱딱한 표정을 보고는 너를 경계하게 되는 거
지. 그래서 비록 선수를 친다해도 소용이 없는 거야."
소어아는 그제야 무엇인가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
했다.
"맞았어요!"
"그러니 다음에 방에 들어설 때는 개든지 늑대든지 심지어는 호
랑이도 무방해. 너의 얼굴에 웃음을 띠워야 나쁜 뜻이 없는 줄 안
다고......."
"내가 몰래 한칼로 그들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죠?"
"맞았어! 너를 경계하지 않고 너를 친구로 취급한다면 단칼에
죽일 수가 있어. 이 도리는 간단하지만 가장 실용적이야."
"그럼 앞으로는 다치지도 않겠네요?"
"그렇지, 개든 늑대든 사람이든 절대로 그에게 악의가 없는 사
람을 다치게 하지는 않아. 쉬지 않고 웃기만 하면 칼이 그 몸에
들어 갈 때까지 너는 다치지 않을 거야."
"그러나......그러나 그건 영웅이 아니야........."
"병신! 네가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무슨 수단을 쓰던 그를 죽
여야 돼."
"알겠어요! 알겠어요!"
"하하! 그래야 똑똑한 애지."
합합아의 독특한 웃음소리가 언제까지 사라질줄 몰랐다.
소어아는 과연 다시는 다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섯 마리의 개와 네 마리의 늑대를 죽였고, 두 마리
의 살쾡이와 한 마리의 작은 호랑이를 죽였다. 그러나 그의 몸의
상처는 합해서 스무 개 정도에 불과했다.
이때 그의 나이가 여섯 살이었다.
그 한해 동안 악인곡에는 네 사람의 식구가 늘었다. 그러나 소
어아는 그들에 대해서 전혀 홍미가 없었다. 자기가 그들보다 강하
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는 도교교에게 물어보았다.
"도 고모, 남들은 고모가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사람이라고 하
는데 정말 그래요?"
도교교는 작은 소어아를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 그 사람 말 한 번 잘했다."
"고모는 이상한 물건들이 많죠?"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만약에 고모를 위해 사용한다면 나 한테도 좀 줄 수 있어요?"
"뭘 하려고?"
"내가 보기엔 이 숙부가 고모를 괴롭히는 데 고모는 아무런 수
없으니......."
도교교가 웃음띤 얼굴로 그의 말을 막았다.
"그 사람을 대항할 방법이라도 있느냐?"
소어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무슨 방법인데?"
"고모는 약만 주면 돼요. 그런 약은 만 아저씨에겐 없고 고모는
필시 있을 거야."
"너 이자식! 나를 어지럽게 하는구나. 좋아, 무슨 약이냐? 말해
봐라."
"냄새나는 약, 고약할수록 좋아."
도교교는 잠시 넋을 잃고 그를 한참 바라본 후 돌연 크게 웃으
며 말했다.
"녀석 같으니, 남들은 속여도 나를 속이지는 못 해. 이대취가
냄새 맡는 것이 싫으니까 그 냄새를 맡게하려고? 날 끌어들여 이
대취의 방패막이를 만들고..삐. 나에겐 잘 보이고, 일거양득이
네?"
소어아의 안색이 변하면서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도 고모는 과연 영리해!"
"너도 나쁜 편은 아니야!"
"그러나 나는 고모와 비하면......"
"소어(小魚)야, 너도 생각을 해봐라. 네가 지금 몇 살이냐? 네
가 내 나이가 되면 굉장할 거야........ 귀여운 얘야, 헛되이 너
를 귀여워 해준 것은 아니었구나. 이제야 보람을 느끼는데."
"그 약은......."
"약은 물론 있지. 토할 정도로 냄새가 날 거야!"
이대취는 다시는 소어아의 몸에서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그는
약 반 시간 동안이나 토했으며 하루 동안 밥을 못 먹었다.
이튿날 그는 소어아를 잡고 말했다.
"이 자식아, 그 약을 도교교가 너에게 주었느냐?"
소어아는 빙그레 웃을 뿐 말이 없었다.
이대취가 말했다.
"좋아! 이 자식아! 나는 너를 먹지도 때리지도 않을 테다. 그러
나 네가 도교교를 괴롭힌다면 나도 줄 것이 있다."
소어아는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물론 정말이지."
황혼이 질 무렵 소어아와 도교교는 함께 밥을 먹고 있었다. 소
어아는 계속 상 위의 고기를 도교교의 그릇에 놓아주면서 말했다.
"맛이 좋지요? 많이 잡수세요."
"녀석, 너는 알랑거리기도 잘 하는구나!"
"고모가 날 잘 대해주니 난 잘 모셔야지."
"넌 왜 안 먹니?"
"먹기가 아까워서."
"바보 같은 녀석, 별로 특별한 것도 아닌데."
"그러나 이 고기는 특별해요."
"왜?"
"이 고기는 이 숙부가 줘서 가져왔는데 듣기엔......"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도교교는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말을 더듬거렸다.
"이거........ 이것이 바로 어제 그가 죽인......."
"그런 것 같애요."
"너...... 너 이자식......."
도교교는 더 말을 하지 못 하고 먹은 것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족히 반 시간 동안은 토했으며 하루 동안 아무 것도 먹
지를 못 했다.
두살이 살고 있는 곳은 악인곡의 측면으로 집 뒤는 바로 산이었
다. 그의 집은 침실조차도 아무 장식이 없었으며 악인곡에서도 가
장 초라한 집이었다. 소어아는 그의 집에서 지낼 때 가장 불편을
느꼈다. 더군다나 그의 집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맹수들이 있지 않
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날 소어아는 다시 차례가 되어 두살의 집으로 갔다.
두살은 한참 동안 집 한쪽 구석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
다.
몸에 입은 하얀 옷이 마치 눈이 쌓인 것 같았다.
그러다가 두살은 한참 동안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더니 돌연 입
을 열었다.
"듣자니 너에게 작은 상자가 있다던데?"
소어아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응."
"그 상자 속에 들은 것이 갈수록 많아진다고 들었다."
"응."
"무슨 물건들인지 말해봐."
소어아는 계속된 질문에 고개도 들지 못 하고 말했다.
"매우 냄새가 나는 약과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한 방망이, 사람의
뼈를 물로 녹일 수 있는 약 한 병......"
"그 물건들은 모두 도교교와 이대취가 주더냐"
"응."
"들리는 말에 그들은 너에게 골탕을 많이 먹었다고 하더구나.
너는 도교교의 물건으로는 이대취를 괴롭히고, 이대취의 물건으로
는 도교교를 괴롭혔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응."
"너는 그들이 화가 나서 너를 죽이지는 않을까 걱정되지 않느
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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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난 두려워하지 않아요. 내가 괴롭힐수록 그들은 더욱
뻐했어요. 더우기 도 고모는 때때로 일부러 나에게 당하기도 해
요."
둘은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불쑥 일어서며 말
했다.
"날 따라와,"
소어아는 그 무서운 방까지 가기도 전에 표호하는 짐승의 울음
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호랑이군요?"
"흥!"
두살은 콧방귀를 뀌더니 문을 열며 소리쳤다.
"빨리 들어가라."
소어아는 칼을 뽑아들고 들어 갔다. 두살은 역시 밖에서 지킬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어아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호랑
이의 표호 소리가 끊겼다.
잠시 후 소어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백부! 문 열어요!"
"벌써 해치웠냐?"
"이건 모두 두 백부님이 가르치신 재주예요."
두살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는 '홍' 하는 소리를 내더니 곧
문을 약간 열어보았다.
그러자 호랑이가 번개같이 달려나오는 것이 아닌가! 두살은 예
상치 못 한 일에 크게 놀랐고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호랑이에게
어깨를 물리고 말았다.
그 호랑이는 오랫동안 굶주렸기 때문에 피비린내를 맡자 성질이
더욱 포악해져서 매우 거세게 달려들었다. 온통 피비린내가 풍기
며 사람과 호랑이가 같이 굴렀다.
그러나 혈수(血手) 두살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급히 몸을 날
려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그는 그 급한 순간에도 소리를 쳤다.
"소어아는 다치지 않았느냐?"
맹호가 죽지 않았으니 자연 소어아가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다.
그러나 소어아의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소어아는 다치지 않았어요. 저는 여기에 있어요."
두살이 고개를 돌려보니 소어아가 문설주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입에는 사과를 문채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두살은 기뻐해야 할지 노해야 할지를 몰라 정신이 분
산되는 순간, 맹호의 등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소어아가 가볍게
소리쳤다.
"두 백부, 조심해요!"
그 맹호는 다시 둘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전과 경우가 달랐다. 두살은 날쌔게 호랑
이 배밑으로 빠져 나오며 오른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순간, 처절한 맹호의 울부짖음이 울려퍼지며 피가 사방으로 튀
겼다. 맹호는 순식간에 쓰러져버렸고 움직이지 않았다.
사방의 벽은 피로 얼룩졌다. 두살의 오른팔은 피범벅이 되어있
었다.
그는 오른팔이 연남천에 의해 부러진 후 강철로 의수를 만들어
끼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호랑이의 배를 꿰뚫었던 것이다.
소어아는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혀를 내밀었다.
"정말 무서운데요. 난 백부님이 죽는 줄 알았어요."
두살은 땅에 가볍게 내려서며 그를 주시했다. 그러나 화를 내지
도 않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하게 말할 뿐이었다.
"내려와라."
소어아는 양손으로 문을 잡고 내려왔다.
"호랑이가 비록 사납다고 해도 백부님이 더 용맹스럽지!"
"호랑이를 죽이라고 했는데 왜 죽이지 않았지?"
말을 하고 있는 그의 얼굴은 반쪽은 피투성이었고 반쪽은 창백
했다.
그러나 소어아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 듯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
다.
"난 백부님이 호랑이를 죽이는 재주가 보고 싶었어요."
"네가 날 해칠 생각이냐?"
그의 왼쪽 얼굴에 묻은 호랑이의 피는 이미 자주색으로 변했으
며 오른쪽 얼굴은 시퍼런 색깔이었다. 지옥에서 온 귀신도 놀라
달아날 얼굴이었다.
"소어아가 어찌 두 백부님을 해치겠어요? 백부님은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아오기도 했는데 죽이질 못 하겠어요? 이 도리를 소어아는
벌써 알고 있었어요."
두살은 이 조그마한 꼬마의 말에 그저 그를 바라보면서 한참 동
안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는 결국 아무말도 하지 못 했다.
여름이다.
정오의 양광(陽光)이 악인곡을 비추고 있을 때였다.
바로 이때 곡외에서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의 몸 몇 백장 뒤까
지도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뒤에 귀신이라도
따라오는지 꽁무니가 빠지게 급히 달렸다.
그의 경공은 악한 편이 아니었으나 다만 기력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 며칠 동안의 피로로 지친 듯 했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그는
추남은 아니었으나 지나치게 큰 코하며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었
다.
그의 몸에 걸친 화려한 옷은 꽤 고급품이었다. 그러나 형편없이
더럽게 때가 끼고 군데군데 찢겨 있었다.
땀방울이 그의 코를 거쳐서 입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그것도 느끼지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악인곡의 집들이 손
에 잡힐 듯한 거리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
췄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던 그는 긴장이 되는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또다시 걸음을 옮겼다.
돌연 왼쪽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
"어이 !"
별로 큰소리가 아니었지만 이 사람은 깜짝 놀랐다.
그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저쪽 어두운 곳에 몇 개의 의자가
놓여 있고 약 십삼사 세의 소년이 그 위에 누워있는 게 아닌가!
그 소년은 웃도리를 입지 않고 있었다. 몸에는 많은 칼자국이
나있었고 얼굴에도 칼자국이 눈에서부터 시작하여 입 근처까지 그
어져 있었다. 그의 검은 머리는 제대로 빗지도 않은 채 뒤로 한
번 질끈 묶여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년은 기이하고 강렬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의 얼굴의 칼자국도 강직한 인상을 줄뿐 아무런
혐오감을 주지 않았다. 이 장난스러운 표정의 소년이 사람에게 주
는 첫 인상은 미소년, 그것도 절정의 미소년이었다.
소년은 손짓을 하려다가 귀찮아서 그냥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고 있소? 이리 오시오."
사나이는 천천히 걸어오면서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웃으며 말
했다.
"안녕 하시오?"
"나를 아시오?"
"아...... 아니오."
"당신이 나를 모른다면서 왜 인사를 하죠?"
"이건...... 이건......."
그는 평소에 자기의 말재주가 꽤 좋다고 자랑을 해왔다. 그러나
이때에는 목이 꽉 막혔다.
소년이 '하하' 하고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의 이름은 소어아요, 당신은?"
그 사나이는 가슴을 펴보이면서 말했다.
"나는 살호태세(殺虎太厥) 파촉동(巳蜀東)이오."
"살호태세(殺虎太歲)....... 음, 이름은 좋은데. 당신 호랑이를
몇마리나 잡아본 경험이 있소?"
파촉동은 다시 놀라면서 말했다.
"그건..... 그건........."
"난 호랑이를 여러 마리 잡았지만 살호태세라고 하지는 못 했
소. 당신은 보아하니 호랑이를 한 마리도 죽이지 못 한 것 같은데
살호태세라니 말이 되는 소리요?"
파촉동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여기가 악인곡만 아니었으면
그는 벌써 소어아의 목을 쳤을 것이다.
소어아는 여전히 누운 채 입만 놀렸다.
"당신이 그렇게 허둥대며 오는 것으로 보아 당신이 피하는 사람
은 필시 상당히 무서운 사람이겠군요. 어떤 사람인지 나에게 말해
주겠소?"
파촉동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피하는 사람은 하나 둘이 아니오, 그중에 강남쌍검(江南
雙劍) 정가형제(丁家兄弟)가 있고, 병호(病虎) 상풍(常風)이 있
고, 강북일조룡(江北幹龍) 전팔(田八)이 있으며......"
"허! 그런 조무래기들 때문에 도망을 다닌단 말이오?"
파촉동은 기가 찼다. 그러나 뭐라 할 수도 없어 그냥 한마디 내
뱉았다.
"당신 지나치게 자신만만한데."
"댁은 너무 겸손하군요."
파촉동은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이 사람들은 비록 대단치 않아도 그중 한 사람은 보는 사람마
다 골치를 않는 인물이오."
"무슨 귀신이라도 되오? 대체 누군데 그러시오?"
"소선녀(小仙女) 장청이오."
"소선녀..... 이름을 들으니 미인일 것 같은데. 또 남들이 좋아
해야 할 것 같은데 어찌 골치를 않게 한단 말이오?"
"그 계집애는 생김새는 괜찮지만 마음쓰는 것과 수단이 지독하
오. 수많은 강호의 고수들이 그녀의 손에 죽었소."
"어! 그런 사람이 있어?"
"내 육형제가 하루밤 사이에 모조리 그녀에게 당했소. 호림칠태
세(虎林七太歲)중 나 혼자만 남았오."
"그런 사람이 있다니 정말 보고 싶군."
"그녀를 보게되면 지금 한 말을 후회하게 될 거요."
"그건 그렇고, 그들은 왜 당신을 쫓아다니지?"
"당신은 묻는 게 너무 많은데?"
"이건 규칙이오."
파촉동은 규칙이라는 말에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한참
바라본 후 드디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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