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绝代双骄 05

3학년2반 | 2022.02.12 08:34:31 댓글: 0 조회: 369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8310
구사일생(九死一生)
이때 애교있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 그의 온몸은 상하가 모두 남자
야.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지."
순간, 소어아와 강옥랑은 심장이 얼어 붙는 듯했다.
이런 애교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소미미 밖에 없었
다.
소어아는 완전히 맥이 빠졌다. 몸을 돌리려는데 무엇인가 뾰쪽
하고 차가운 것이 그의 목에 닿았다.
소미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냐, 움직이지도 말고 돌아서지도 마라."
그녀는 또 넋을 잃고 멍하니 서있는 강옥랑에게 손짓을 하며 말
했다.
"옥랑, 너도 이쪽으로 와......음, 그래야 착하지. 등을 그와
마주대라."
소어아는 강옥랑이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길 바랐다. 그래야 그
사이에 품속에서 오독천수를 꺼낼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놈의 강옥랑은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애원에 가까
운 표정으로 얌전히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소어아가 그에게
눈짓을 했지만 그는 못 본 모양이었다.
(이 자식 놀라서 혼이 빠져나갔구나.)
소어아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소미미가 칼을 목에 들이대
고 있는데 어찌 함부로 경거망동을 한단 말인가.
그는 실망하지 않고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가 오독천수를
꺼낼 수만 있다면 소미미도 마지막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돌연 그녀가 손을 뻗치더니 소어아의 품을 뒤지는 것이
아닌가!
"이 자식! 오독천수라! 하하하, 내가 살펴보길 잘 했구나. 큰일
날뻔 했는 걸."
소어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내가 죽는구나."
"괜찮아. 너무 비참하게 생각지는 말아라. 금방 너를 죽이지는
않을 테니."
그녀는 소어아와 강옥랑의 손을 포개며 말을 계속했다.
"너희들은 좋은 친구이니 우선 손이나 잡으시지......."
소어아는 강옥랑의 손에 온통 식은 땀이 배어 있는 것을 느꼈
다. 그것은 자기도 마찬가지였다. '철컥' 하는 소리가 나면서 두
사람의 손에 검고 무거운 수갑이 채워졌다.
"너희들은 정말로 좋은 친구야.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으니."
소어아가 쓴웃음을 띠우면서 말했다.
"지금 난 이왕이면 그가 여자이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걸."
"하하! 나는 너를 좋아해. 이런 상황에서 너 같은 말을 하는 사
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겠어? 그리고 사실 말이지만 이 수갑은
한쌍의 남녀를 위해 준비된 것이야."
소미미는 소어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 수갑의 이름을 알아? 이것은 정쇠(情釗)라고 하지. 이 정쇠
는 영원히 어느 누구도 열지 못 해."
"정쇠라...... 나와 당신을 같이 채워 놓는 게 어떻겠소?"
그녀는 이번에는 강옥랑의 얼굴을 만지면서 입을 열었다.
"착한 애야. 무서워 마라. 떨지도 말고, 네가 아니었다면 나도
여기에 이런 좋은 데가 있는지 몰랐을 거야. 정말 고맙다."
강옥랑이 말했다.
"당신...... 당신...... 어떻게 여기에 왔죠?"
"왜? 궁금한가?"
"궁금하오."
소미미는 웃음을 지어가며 비꼬았다.
"영리한 애들아. 너희들이 왜 갑자기 병신이 됐지. 생각을 해
봐. 너희들이 나를 그토록 좋게 대했는데 내가 어찌 너희들을 버
리겠어! 꼭 찾아서 은혜에 보답해야 도리가 아니겠어?"
"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질식해 죽은 것으로 알았을 텐
데......."
"내 눈으로 확인을 해야지! 너희처럼 총명한 아이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 모르고서야 내가 어찌 두 다리를 쭉 뻗고 잠을 잘
수 있고 또 밥을 먹을 수가 있겠어?"
그녀는 장탄식을 한 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때, 나는 너희가 밑에 숨어있다는 걸 알았지만 들어 가지를
못 했지. 만약 내려갔다가는 너희들에게 죽을지도 몰랐으니까. 그
때 그냥 내려갔다면 너희들은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기분 좋게
날 대하지는 않았을 거야."
소어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결국 당신이 우리를 이렇게 후대하니 정말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오."
"아까도 말했지만 난 네가 좋아. 그러니 이대로 질식해 죽게 할
수는 없지."
"그럼 어떻게 죽이겠단 말이오. 이제보니 숨막혀 죽지 않는 것
도 불행이고, 거기다 또 여인이 좋아한다면 정말 불행인 셈이군."
소미미는 킬킬거리며 웃더니 지껄였다.
"그 말 참 재미있는데, 정말 재미있어.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그 얘기를 해주지. 여자에게 미움을 받아야 좋은 것이고, 질식해
죽어야 행운이라고."
그녀는 깔깔거리고 한참을 웃어대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정말 빨리 보고 싶군.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
을지. 그들은 아마 나를 미쳤다고 할 거야."
"그렇다면 당신은 미친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소어아는 일부러 소미미를 격노케 하려고 하였다. 그는 현재 어
떤 방법으로 달아나야 할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
고 이대로 체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소미미가 화를 내
어야만 사정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소미미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고, 소어아의 말을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오로지 집안에만 집중되어 있
다.
그녀는 마치 질투심에 찬 마누라가 남편의 주머니를 뒤지는 것
처럼 각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동안을 돌아다니던 그녀는 얼굴에 생기를 띠고 돌아왔다. 그
녀의 손에는 노란색의 책이 한 진 쥐어져 있었다. 그 책은 쇠로
만든 방에서 소어아와 강옥랑이 본 최고의 무공이 기록된 책이었
다. 바로 그 다섯 고수들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책이었던 것이
다.
그녀는 책을 품속에 안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녀는
연신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보배야 보배! 이제 내가 무엇이 두렵겠어? 앞으로 누가 무림
제일의 고수가 될지 알아? 그것은 바로 나야......."
강옥랑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책을 바라보면서 시기와 분노가
가득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소미미는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마땅히 너희들에게 감사를 드려야지. 너희들이 없었다면
내가 이것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가볍게 몸을 놀려 회랑을 돌며 춤을 추다가는 다시 남은
방들을 살펴보기 위해 달려갔다.
잠시 후, 눈빛을 반짝이며 돌아온 그녀는 소어아와 강옥랑을 바
라보며 좋아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진귀한 것들이 가득하구나. 난 복이 많은 여자야."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는 더욱 교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얘들아, 내가 왜 지금까지 너희들을 살려 둔 지 아느냐?"
소어아의 눈은 아까부터 흙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 한 것 같았다. 강옥랑은 안색이 창백해지며 벌벌 떨
뿐 입을 열지도 못 했다.
"사실 나 혼자서 이런 곳을 보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어. 그래서
너희들을 살려둔 거야. 하지만 이젠 너희들이 할 바는 다 한 것
같아."
강옥랑은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소미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얘야, 울지 마라. 너희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지는 않을 테니.
반드시 너희들이 재미있게 죽을 수 있도록 하지. 너희들은 나에게
행운을 주었으니 말이야."
강옥랑은 돌연 꿇어 앉아 떨리는 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부탁입니다. 저를 살려 주십시오. 만약 살려만 준다면 한
평생 당신의 노예가 되겠소. 무엇이든 할 테니......."
"미안하지만 그 말을 들어줄 수가 없는 걸. 하지만 네가 원하는
대로 죽을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어주지."
그녀는 소어아를 바라보았다.
"소어아야, 들었느냐?"
소어아의 눈은 여전히 그 흙담을 향해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오직 신음 소리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음."
"한 가지 신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말해 줄까? 너희
들은 어떻게 죽고 싶지?"
"음."
갑자기 소미미는 음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지껄였다.
"내가 너희들을 물어 죽인다면 어떻겠어?"
그녀는 가느다랗고 매끄러운 손을 내밀어 소어아의 목을 어루만
졌다.
"내가 이곳을 물면 어떻게 될까?"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고 웃으며 소어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소어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역시 신음소리만 낼 뿐이
었다.
"음."
그는 소미미는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흙벽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소미미는 소어아의 행동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흙담에 네가 도망칠 구멍이라도 뚫렸느냐?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이제 곧 죽을 사람인데 무얼 생각하든 당신이 무슨 상관
이오?"
"듣고 싶은 걸."
"당신은 이미 내 목숨의 주인이 됐소. 그런데 나의 의견을 들어
볼 필요가 있겠소?"
"너의 주인으로서는 들어볼 필요가 없겠지. 그러나 하나의 여인
으로선 들어 봐야지. 내가 호기심 많은 여자라는 것을 잊지 마
라."
"그럴 필요가 없소. 빨리 나를 죽이시오."
"네가 말을 하지 않으면 나는 너를 이 세상에서 가장 악독하게
죽이겠다."
"좋소, 당신이 듣고 싶다니 말을 하겠오."
그는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이제까지 보아 온 모든 벽 속에는 틀림없이 무엇인가 있었다는
거요. 당신은 이미 열려있는 여섯 개의 방을 보았으니 그 내용은
알 테고 저 나무벽 역시 뒤에는 이 아미산을 날려버릴 만큼의 화
약이 들어있소."
"그래? 그런데 난 왜 나무벽 뒤의 화약을 발견하지 못 했지?"
"한심하군. 그래서야 눈앞에 있는 보물도 제대로 찾아낼 수 있
겠소? 나 역시 당신처럼 그 곳으로 나왔지만 이미 그것을 발견했
소."
"그래서."
"그렇다면 자연 저 흙벽 뒤에도 결코 비어있는 것이 아닐 것이
오. 당신은 저 흙벽 뒤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궁금하지 않소?"
소미미의 눈이 밝아졌다.
"그래. 그 속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녀는 사방을 돌면서 중얼거렸다.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토제 기관이 없군. 그러나 위의 줄은 아
직 건드리지 않았는데."
소미미는 자기 말에 자신을 갖고 말했다.
"저걸 당겨 보아라."
"정말 당겨도 될까요?"
소어아의 말에 소미미가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만약 이 흙담을 열어보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잠이 들겠어?"
소어아는 싫은 척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매우 기뻤다. 사실 그
역시 그 흙담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일이 벌어
져도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여하간 죽을 목숨
인데 그 속에 요괴가 있으면 또 어떠랴 하는 배짱도 생겼다. 그래
서 수작을 부려 소미미를 농락한 것이었다. 천하에 호기심 없는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 줄은 매우 높이 매달려 있어서 잡기가 무척 힘들었다. 탁자
두 개를 쌓고 올라서서 줄을 잡은 소어아와 강옥랑은 줄에 매달려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뒤따라서 '우르릉' 하는 소리가 나더니 마치 산이 무너지듯 흙
담이 터져 버렸다. 그 속에는 격류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소미미는 깜짝 놀라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쥐를
본 아가씨처럼 급히 하나의 기관에 뛰어올랐다. 그러나 물살은 모
든 것을 집어삼켜버릴 듯 너무나 거셌고 금방이라도 그 기관을 넘
어버릴 기세였다. 그녀는 급히 달아나려는 생각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유일한 탈출구였던 지하도는 이미 물이 차 버리고
말았다.
소미미의 모습을 바라보는 강옥랑의 얼굴에는 음침한 미소가 떠
올랐다.
"저 여우가 물의 성질을 모르는군. 좋아 좋아."
소어아도 크게 웃었다.
"잘 됐어!"
강옥랑은 소어아의 말에 고개를 돌리면서 걱정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수영을 할 수 있소?"
소어아는 다한다는 듯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는 나의 이름을 잊었는가? 천하에 수영을 못 하는 고기도 있
어?"
"좋아요."
물은 계속 밀어 닥쳐서 집안을 물바다로 만들었다.
소미미는 비단 수영을 하지 못 할 뿐더러 물을 두려워하고 있었
다. 격류가 기관을 삼키게 되자 그녀는 물살에 밀려나가 결국 꿀
꺽꿀꺽 물을 마시며 허부적거리게 되었다.
강옥랑이 작은 소리로 중얼댔다.
"수영을 못 한다 해도 당황하지 않으면 가라 앉지는 않을 텐데.
더구나 그녀는 무공을 익혔기 때문에 가라앉는다 해도 저렇게 물
을 마시지는 않을 거야. 물을 두어 모금 마시고 저렇게 당황하여
인사불성이 되면 재주가 아무리 비상해도 소용없지."
소미미는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채 악을 썼다.
"정말 내가 죽는 꼴을 보겠느냐......? 나 좀 살려......."
강옥랑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죽는 것을 볼 수야 없죠. 우선 무림계의 비록을 나에게
주시오. 그러면 살려 주겠소."
소미미는 그의 말을 듣자 즉시 책을 꺼내며 소리쳤다.
"빨리! 빨리! 구해 줘!"
그 순간 그녀는 또 한 모금의 물을 마셔 버렸다.
강옥랑은 급히 책을 받았다. 그리고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내가 정말 너를 구할 줄 알았느냐?"
소미미는 애원했다.
"제발......부탁이야......."
강옥랑은 크게 웃었다.
"나는 여기서 네가 물을 마시는 것을 봐야겠어. 한 모금 한 모
금......네가 죽을 때쯤이면 배가 퉁퉁 부어서 보기 좋을 것이
다."
"너 이......개새끼!"
"욕해라. 나를 때려도 좋아...... 재주가 있다면 이쪽으로 와
보시지?"
강옥랑은 물 속에 잠겨가는 소미미의 머리를 보며 여전히 놀려
댔다.
"금후 천하 제일의 고수는 과연 누가 될 것인지 소미미, 너는
아느냐?......말해 두지만 그것은 나야. 강옥랑이야."
이때 옆에서 소어아가 한마디 내뱉았다.
"그렇게 될까?"
강옥랑은 소어아의 말에 금새 비굴한 태도를 보이며 고개를 숙
였다.
"그야 물론 강형이지요."
"글쎄, 그 누구도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거야. 유일한 출구가 물
에 잠겼으니 우리가 물고기가 아닌 이상 여기서 죽는 수밖에 더
있겠어?"
강옥랑은 그제서야 놀라면서 소어아의 손을 잡고 물었다.
"당신......빨리 수를 생각 해야지요?"
"난 벌써 생각을 해봤어. 금(金), 은(銀), 동(銅), 철(鐵), 석
(石), 유리(琉璃), 모두가 죽는 길이야."
"그럼?"
"마지막 남은 것은 저 나무 기관이야."
"우리가 바로 그 나무 벽에서 나온 것이 아니오? 게다가 거기엔
폭약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그건 거짓말이었어. 나는 흙벽을 보면서 줄곧 생각을 해봤지.
생각해 봐. 흙벽을 움직이는 줄은 분명히 천장에 있었지. 그건 함
부로 건드리면 위험하기 때문이야. 나는 위험한 상황이 벌어져야
소미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줄을 만지게 되도
록 유도했지. 그건 목숨을 건 도박이었어. 그러나 만약 폭약 역시
위험한 것이 틀림없다면 왜 손쉽게 만질 수 있는 곳에 기관을 만
들어 놨겠어. 이런 간단한 생각도 할 수가 없어?"
"그렇군요. 내가 왜 진작 생각을 못 했지!"
"우리는 나무 벽을 지나오면서 일부만 건드린 것에 지나지 않
아. 이 바보야. 저 뒤에 아무 것도 없다면 왜 나무기관을 만들어
놨겠어. 그러니 아직 저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는 셈이지."
"아! 당신 같은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을 것이오."
강옥랑과 소어아는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가 나무 기관을 돌렸
다. 그 바람에 강옥랑의 손에 있던 횃불마져 꺼져 사방은 칠흙 같
은 어둠이 되어 버렸다.
어둠 속에서 '끼리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어아와 강옥랑은
나무 벽 뒤에 제발 나가는 문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 뿐이었지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었다. 이때 갑자기 물살이
거세지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소어아와 강옥랑은 영문도 모르
는 채 소용돌이에 휘말려 허부적거리다가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
았다.
소어아는 강옥랑이 몸을 뒤척이는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여전
히 어두웠으나 왼쪽 위에서 희미하게나마 빛이 비춰들고 있었다.
차차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고 정신이 맑아지자 그는 자신과 강
옥랑이 지하의 천연동굴에 누워있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나무 벽
뒤로 난 출구로 물살과 함께 휩쓸려 나왔고 그 출구는 이 천연동
굴과 연결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소어아가 몸을 일으키자 그 바람에 수갑에 연결되어 있었던 강
옥랑이 신음하며 깨어났다. 소어아는 그제서야 손목에 수갑이 채
워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어나라. 우리가 정쇠(情釗)로 묶였으니 정사(情死)가 될 뻔
했구나."
강옥랑은 정신이 돌아오자 탄성을 발하며 웃음을 지었다.
"진정 우리가 살아난 것입니까?"
"그래 살았으니 밥 먹을 생각도 해야지."
소어아와 강옥랑은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쪽으로 걷기 시작
했다. 천연동굴의 바닥으로부터 비스듬히 윗쪽으로 계단이 있었
다. 계단을 거의 다 올라왔을 무렵 위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놀랐다. 그들은 발걸음을 죽이고 서서히 출구
로 다가갔다. 출구는 석판으로 덮혀 있었으나 양쪽이 약간 열려
있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은 작은 암자였다. 몇몇 개의 불상들이 주위에 늘어서 있었
고 그들의 머리 위에도 불상이 놓여 있는 듯 싶었다.
작은 사찰의 불상 밑에 세상에서 가장 신비스럽고 기이한 지하
궁궐이 있다는 걸 어느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제단 앞으로는 탁자가 하나 보였는데 그 위에는 촛불이 켜져 있
었으며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불상에 가려 전신은 보이지 않았
지만 새까맣고 털이 덥수룩한 다리를 탁자 아래로 비스듬히 뻗고
있는 것이 아마 의자에 앉아 있는 듯했다.
탁자 위에는 술과 닭고기, 향기로운 곱창과 건두부, 땅콩 등이
있었다.
소어아는 술과 안주의 향기에 고약한 발냄새가 같이 풍겨오자
처음에는 무슨 냄새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상 위에 걸
게 차려져 있는 음식을 보게 되자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
가고 싶었다. 그러나 탁자 곁에 서 있는 몇 사람을 보자 그 생각
이 싹 달아났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을 뿐더러 숨소리 조차 죽였
다.
문 가장 가까이에는 배가 나온 중년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아
마도 불공을 드리러 온 상인인 것 같았다.
그의 곁에는 매우 건장한 사내가 서 있었는데 그의 종자인 듯했
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별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소어아를 놀
라게 한 사람은 다른 세 사람이었다.
그 세 사람은 사람을 병아리로 취급하는 왕일조, 천남검객 손천
남, 그리고 은창세가의 구청파가 아닌가!
그들 세 사람은 강호에 쟁쟁한 이름을 날리는 고수들이었다. 그
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만면에 두려운 기색
을 나타내고 있었다.
탁자에 앉아 있는 사나이가 그 세 사람을 그토록 두려워하게 하
는 것으로 보였다.
이때 한쌍의 털이 난 손이 탁자 위에 내려졌다. 그의 왼손은 두
개의 손가락만 남아 있었다.
그는 닭다리를 뜯으며 입을 열었다.
"이리 와!"
그 상인은 혈색이 사라진 채 한 발 한 발 탁자로 다가서면서 떨
리는 소리로 말했다.
"소인 왕백만이 노형께 인사드립니다."
그 사람이 크게 웃어 제꼈다.
"난 네 아들이 바로 성내의 거부인 왕능천이라는 것을 알고 있
다."
그는 강한 사천말을 쓰고 있었고 말을 우물거리는 것은 닭다리
를 씹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왕백만은 땅에 꿇어 앉아서 울상이 되었다.
"소인은 사람을 보내서 곧 몸값을 치루도록 하겠습니다......."
"개소리! 누가 네 아들의 돈을 받겠다는 거냐? 네가 귀신같이
도박을 잘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도박을 한판 벌이자는 거야."
왕백만은 숨을 내쉬면서 일어섰다. 그는 안도의 빛을 보였다.
"도박을 하시겠다면 상대해 드리죠. 다만 여기에는 도구가 없으
니 제가 성내로 돌아가서 곧 준비하겠습니다......."
그 사나이는 탁자를 '꽝' 하고 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필요었다. 나는 너와 동전으로 도박을 하겠다. 간단하게 말이
야."
왕백만이 물었다.
"그럼 무엇을 걸고 도박을 하시겠습니까? 저에겐 지금 돈이 많
지 않은데."
"너의 다리와 손을 도박에 걸어라."
왕백만이 몸에 힘이 빠져 다시 주저앉은 채 이를 악물면서 말했
다.
"만약......."
"내가 진다면 손을 잘라서 너에게 주겠다."
"이건......이거......."
"왜? 나의 손은 너의 사지 보다 훨씬 귀중해!"
"소인은......소인은 안 하겠소."
"안 하면 안 되지."
왕백만은 큰 마음을 먹고 큰소리로 외쳤다.
"세상에 강간이 있을 수는 있어도 강제로 도박을 한다는 말은
없소."
"나는 다른 나쁜 일들은 하지 않아. 그러나 도박 만큼은 강제로
라도 하고 말지. 너도 한평생 도박을 많이 했다니 오늘 나 악도귀
를 만난 것은 행운이야."
왕백만의 눈이 대문짝하게 떠졌다.
"당신......당신이 헌원이오?......."
"내가 바로 헌원삼광인데 너도 아느냐?"
왕백만의 얼굴은 울상이 되다 못 해 사색이 되었다.
"도박을 하는 사람은 모두 당신의 명성을 들어 익히 알고 있
소...... 난 도박을 할 때도 사람을 속인 적은 없는데 하느님이
어째서 당신을 만나게 했을까!"
헌원삼광이 크게 웃으면서 동전을 허공에 던졌다.
"나를 만났으면 하느님께 감사를 해야지 왜 원망을 하나!"
동전은 허공에서 빙그르 돌다가 탁자 위에 떨어졌다. 헌원삼광
은 그것을 손으로 덮으며 말했다.
"앞면이냐 뒷면이냐? 빨리 말 해!"
소어아는 놀라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앞의 사나이는
십대악인 중의 악도귀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어아는 방금 동전이 통보가 윗쪽으로 떨어진 것을 보
았고 왕백만도 필시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이 악도귀가 필시
질 것이라 생각했다.
왕백만은 입술이 하얗게 변해 몇 번 입을 딸싹거리다가 머뭇거
리기만 하고 있었다. 헌원삼광도 손등에 혈관이 튀는 것으로 보아
약간 긴장을 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빨리 말하지 않으면 네가 지는 셈이야!"
왕백만의 입이 드디어 떨어졌다.
"......통보......통보! 앞 면이오!"
그러자 헌원삼광은 손을 들며 크게 웃었다.
"넌 졌다!"
왕백만의 눈이 감겼다. 소어아는 크게 놀랐다.
분명히 통보가 위쪽인 것을 보았는데 지금은 거꾸로 뒤집혀 있
었다. 헌원삼광이 일부러 통보를 보게 한 후 손으로 덮을 때 바꾸
었던 모양이었다.
엄격히 말해서 이런 수법은 결코 속임수가 아니었다. 왕백만이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왕백만은 이미 바닥에 주저앉아 넋을 잃고 있었다. '탕' 하는
소리가 나면서 단도가 그의 발앞에 던져졌다.
헌원삼광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졌다. 한 쪽의 다리와 하나의 팔을 쳐라."
"제발......제발 부탁이오."
"무슨 소리냐!"
"소인......소인은 성내 열일곱 집의 전당포를 모두 당신에게
양도하겠소...... 그리고 성북의 쌀집 세 개를 모두 드릴 테니 용
서하시오."
헌원삼광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너 이 못난 짐승아. 내가 정말 너의 돼지 같은 다리가 필요한
줄 알았느냐? 나도 비록 악인이지만 네가 가난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정말 못 봐 주겠어!"
그는 탁자를 치면서 더욱 언성을 높였다.
"전당포와 쌀집을 받을 테니 너는 빨리 가서 양도문서를 써놔
라. 나중에 가지러 갈 테니, 네가 설마 나를 속이지는 않겠지?"
"네......네......."
그는 옆에 있는 종자조차 거들떠보지 않고 급히 꽁무니가 빠져
라 하고 달아났다.
그가 사라지자 그와 같이 왔던 하인이 꿇어 앉으며 말했다.
"소인은 하인이니 설마 저와 도박을 하시진 않겠죠. 제발 소인
을 용서하십시오."
"아니지. 나의 별명이 '사람을 만나면 도박을 한다.'는 뜻인 줄
을 모르느냐? 난 황제를 만나도 도박을 할 것이고 거지를 만나도
도박을 할 거야."
그 사람은 마음을 크게 먹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무슨 도박을?"
"나는 너의 몸에 있는 단추를 가지고 도박을 하겠다. 네가 지면
너의 코를 짜르고 내가 지면 열일곱 집의 전당포와 세 개의 쌀집
을 모두 너에게 주지."
그 사람은 안색이 변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코에 손이 갔
다.
헌원삼광이 다시 말했다.
"생각을 해 봐. 네 힘으로는 한평생 이렇게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할 거야...... 거절할 생각은 마라. 수틀리면 너의 눈을 파버리
겠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넌 옷차림이 괴이한 편이다. 그런 옷
종류엔 단추가 없을 리가 없는데 하나도 보이지가 않아. 하지만
난 네 옷 어딘가에 반드시 단추가 있을 거라는 것에 내기를 걸겠
다."
그러자 겁에 질려 있던 하인은 얼굴에 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소인은 어릴 때부터 단추를 삼키는 버릇이 있어서 어머님은 옷
을 만들 때 종래 단추를 쓰지 않고 끈만 썼지요. 커서도 버릇이
돼서!"
도박 귀신 헌원삼광
그 하인은 일어서서 자기의 옷을 손으로 비비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소인은 겉옷이나 속옷이나 모두 하나의 단추도 없습니
다."
헌원삼광은 놀라고 말았다. 왕일조 등은 웃고 싶었지만 웃을 수
가 없었다. 소어아도 터져나오는 웃음을 꾹꾹 눌러 참았다.
헌원삼광은 한참 동안 놀란 표정을 짓더니 돌연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넌 운이 좋구나. 돌아가서 주인 노릇 할 준비나 해라."
그 사람은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를 한 뒤 웃으며 말했다.
"소인은 장대립이라 합니다. 금후 노인장께서 성내로 오실 기회
가 있으시면 저의 점포에도 꼭 들려주십시오. 제가 융숭한 대접을
하겠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서 일일이 인사를 하더니 급히 가버렸다.
헌원삼광은 백만장자가 됐다가 순식간에 그것을 다 잃고 말았으
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껄껄거리며 웃기만 했다. 웃음을 멈추자
그의 눈길은 구청파의 몸으로 옮겨졌다.
"구 공자...... 흐흐 구 공자는 풍류의 일들을 모두 잘 아니 도
박도 잘 하겠지. 방법은 네가 골라 봐라. 어느 것이나 들어 줄 테
니!"
구청파는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 말대로 내가 도박에 능통하다면 당신이 과연 이길 수 있
겠소?"
"날 무시하는 거냐! 나는 여섯 살 때부터 도박을 시작했고 어떤
방법으로 하는 도박이든 너보다는 강할 거야."
"좋소! 내 옷소매 안에는 몇 개의 자금정이 있는데 그것이 홀수
겠소 짝수겠소?"
헌원삼광은 닭다리를 뜯어 먹으면서 입을 삐죽거렸다.
"잠깐, 우선 내기할 물건을 말해야지, 너의 마누라가 소주(蘇
州) 제일의 미인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구청파는 안색이 돌변했다.
"당신...... 당신은 어쩌자는 거요?"
"네가 지면 네 마누라를 나에게 양보해야 해. 내가 지면 나도
내 마누라를 너에게 주겠어...... 난 너에게 세 명의 마누라를 주
지."
"당신......당신 미쳤소?"
"난 멀쩡한데!"
"안 되오......그건 절대로 안 되오."
구청파는 분노에 가득차 소리쳤다. 그러나 헌원삼광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짧게 말했다.
"꼭 해야 돼!"
구청파는 온 몸을 떨고 있었다. 그가 만약 마누라를 잃고 만다
면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는가!
그는 명문 귀족 출신인데 어찌 그런 망신을 당할 수 있단 말인
가!
헌원삼광은 아랑곳 없다는 듯 유유자적했다.
"그럼 이제 내가 한 번 맞춰보지. 네가 가지고 있는 자금성
은......."
구청파가 돌연 소리쳐 그의 말을 막았다.
"잠깐!"
"무엇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당신은 왜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과 도박을 하자는 거요"
"관계가 있든 없든 상관없어. 난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도박을
해."
"그러나 당신이 도박을 하자고 해도 못 할 사람이 있소."
"어, 그런 사람이 있어?"
"물론 있지!"
"그게 어떤 사람이냐?"
"죽은 사람이오."
말을 마친 구청파는 손을 들어 자기의 천영으로 찔러 갔다.
세상에는 자살을 해버릴 망정 명예를 지키려는 사람도 있는 것
이다.
헌원삼광은 놀라면서 닭다리를 집어 던졌다. 그는 망연히 구청
파의 시체를 쳐다보았다.
이때 소어아는 왕일조와 손남천이 서로 눈짓을 하는 것을 보았
다. 구청파의 죽음이 그들에게는 싸울 의지를 불러 일으켜 준 셈
이었다.
돌연 두 사람은 몸을 날려서 현원삼광에게 달려들었다.
이 두 사람의 몸은 날카롭고 악독하게 헌원삼광을 향해 지쳐들
어갔다. 그 살기 등등한 목숨을 건 일격은 세상 어느 누구라도 피
할 수 없을 정도로 필사적이었고 신속했다. 그러나 순간 헌원삼광
의 우뢰와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왕일조와 손남천이 튕겨져 날아
갔다.
그는 단 일격에 두 명의 무림 고수들을 격퇴했던 것이다.
손남천은 마치 줄이 끊어진 연처럼 창 밖으로 멀리 날아가 떨어
져버렸다.
왕일조는 간신히 공중에서 몸을 몇 번 회전한 뒤 바닥에 내려섰
으나 그의 얼굴은 극도로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헌원삼광은 크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좋아, 너는 그런대로 재주가 있구나!"
"흥!"
왕일조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손을 바르르 떨었다. 헌원삼광은
위기를 모면한 사람 같지 않게 여유가 있었다.
"이제 도박을 하겠느냐?"
왕일조는 이를 악물면서 소리쳤다.
"합시다!"
"이번 도박은 그 손남천의 갈비뼈가 완전히 다 부러졌나 부러지
지 않았나를 맞추는 거다. 만약에 하나라도 부러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내가 진 것이니 이 목을 너에게 바치겠어."
"음."
왕일조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헌원삼광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또 하나는 나의 일장을 맞은 네가 지금 죽지 않는다면 날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
왕일조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는 입가에 일그러진 웃음을
띠우며 짧게 말했다.
"내가 졌소."
그는 이 말을 간신히 한 후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윽고 그 탁자 아래의 흙 묻은 발이 서서히 이동하더니 그의
등이 드러났다.
그는 다 떨어진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고, 몸이 거대하고 키가
컸으며 한쪽 어깨가 보통 사람 두 배 정도로 넓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재미 없는 걸. 사람은 죽이지 않으려 했는데 이 자식들이 날
죽이려 했으니 하는 수 없었지."
그는 술단지를 어깨에 들쳐 메고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소어아는 그제서야 숨을 돌리며 혀를 내밀었다.
"이 도박꾼은 과연 무섭군."
강옥랑이 말을 받았다.
"빨리 달아나요."
두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위를 덮고 있는 석판을 들고 빠져 나
왔다.
소어아는 바깥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상으로 달려가더니 닭다리
를 뜯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악도귀의 얼굴을 보지 못 했어! 그는 생긴
모양도 필시 괴상하겠지?"
강옥랑은 겁에 질려 소어아를 보며 애걸했다.
"제발 부탁이니 빨리 갑시다."
소어아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그 도박꾼을 쫓아 가자는 거냐?"
강옥랑은 탄식을 했다. 소어아에게는 말이 제대로 통하질 않았
다.
소어아는 기름을 질질 흘리면서 닭다리를 뜯더니 강옥랑을 보면
서 말했다.
"빨리 먹어라. 왜 안 먹지?"
"이런 참혹한 시체들을 보면서도 음식을 먹을 수가 있나요?"
"아 그래서 안 먹어? 너는 사람을 몇이나 죽이고도 눈 한번 깜
짝 안하더니 시체를 보고는 오히려......."
이때 돌연 강옥랑은 얼굴이 굳어지며 문쪽을 바라본 채 꼼짝하
지 않았다. 소어아는 그의 눈길을 따라 입에 닭고기를 문 채로 고
개를 돌렸다. 견인취도(見人就賭)악도귀(惡賭鬼) 헌원삼광이 거기
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솥의 바닥같이 시커멓고 온통 수염이 돋아나 있었
다. 눈썹은 솔잎 같았고 눈은 부리부리한 것이 왕방울 같았는데
왼 쪽 눈이 검은 안대로 가려져 있었다. 그는 무서우면서도 신비
스러운 매력을 지닌 인상이었다.
그의 외눈이 소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어아는 히쭉 웃으면서 어물쩡거렸다.
"닭은 맛이 좋은데 안타깝게도 술이 없군요?"
순간, 헌원삼광의 눈이 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큰 술단지
를 소어아에게 건네주며 말을 걸어왔다.
"이 술은 독하다!"
"네? 독해요?"
소어아는 술단지를 통채로 들고 "꿀꺽 꿀꺽" 소리를 내면서 열
모금 이상이나 내쳐 마셨다. 그러더니 소매로 입을 쓱 닦으면서
지껄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약한 술을 독하다 하니 나를 어린애로 취급하나 보오!"
헌원삼광이 크게 박장대소했다.
"넌 그럼 어린애가 아니란 말이야?"
"늙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리지도 않소!"
"너 이 자식, 재미있는데. 어디서 왔느냐?"
"어디서 왔느냐고? 창문으로 기어들어 왔죠."
헌원삼광이 또 물었다.
"창문으로 들어와 나의 닭을 훔치다니 간이 크구나."
"죽은 사람도 창문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데, 산 사람이 어째서
창문에서 들어오지 못 하겠소."
헌원삼광은 이제까지의 안색을 무섭게 바꾸면서 진지하게 물었
다.
"너 벌써 왔었구나!"
소어아는 히쭉 웃으면서 눈을 크게 떴다.
"왜? 난 올 곳이 못 돼오?"
"여긴 무슨 볼 일이 있어 왔느냐?"
"사람을 찾아서 도박을 하려고 왔지요."
헌원삼광이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본 후 크게 웃었다.
"녀석! 재미있어. 확실히 재미있는데......."
그는 소어아가 들고 있던 술단지를 빼앗아서 꼴깍 꼴깍 열댓 모
금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소어아도 질세라 다시 그의 수중에서 단지를 빼앗더니 열 모금
을 마신 뒤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술은 같이 마셔야 맛이 나는 법이지요."
"허허, 이 자식이 날 두려워 하지 않는구나."
"나는 물건도 걸 것이 없고 마누라도 없소. 기껏해야 이 목을
당신에게 줄 텐데 무엇이 두렵겠소!"
"목을 걸고 도박을 하겠느냐?"
"왜 못 하오? 다만...... 난 당신의 목이 필요치는 않소. 너무
커서 주머니에 넣을 수도 없고 손에 들면 너무 무거울 테니."
이때 한 사람이 느긋이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은 나에게 필요 하지!"
헌원삼광은 미친 듯이 웃다가 마치 남에게 뒤통수라도 맞은 듯
돌연 멈추었다. 소어아도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 말소리는 나지막하나 기세가 당당하여 듣는 사람을 위압하는
힘이 서려 있었다.
헌원삼광은 감히 고개를 돌리지 못 했다.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도 일세의 무림고
수이다. 곧 이제까지의 장난기 섞인 말을 걷어 치우고 점잖게 입
을 열었다.
"누가 헌원삼광의 목이 필요하단 말인가? 정말 영웅이라면 헌원
삼광이 목을 주어도 아깝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서서히 말했다.
"헌원삼광은 과연 호기가 구름과 같소. 정녕 통쾌하오!"
하나의 파란 옷을 입은 도인이 말소리를 따라서 천천히 걸어 들
어 왔다. 그의 검은 이미 오른손에 의해 약간 검집을 떠나 있었
다.
헌원삼광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온 사람은 아미장문인가."
소어아는 물론 이 파란 옷의 도인이 신석도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헌원삼광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는데 어찌 그를
알 수 있었단 말인가! 이 악도귀는 등에도 눈이 달려있단 말인가?
신석도장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소. 귀하께선 어떻게 나라는 것을 아셨소?"
"일문 일파의 종주장문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당당한 검기(劍
氣)가 있겠오!"
"헌원선생, 과연 훌륭하오!"
헌원삼광이 돌연 웃음을 멈추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벌써 검을 뽑는 것은 일파 장문
의 신분을 더럽히는 행위가 아닌지요?"
신석도장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음산한 미소를 떠올릴
뿐이었다.
"이름이 천하에 알려진 현원선생을 대하려니 각별이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렇다면 도장께선 필시 나의 목이 필요하신 모양이군요."
"여기는 아미성지이니 사람을 죽인 자는 죽어야 하오."
"헌원삼광은 미친 듯이 껄껄 웃어댔다.
"살인한 사람은 죽는다! 도장께선 날더러 죽으란 말이군요."
"나는 남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 아니오. 오직 산을 보호하는 책
임이 있으니 이행을 해야하오!"
헌원삼광의 눈빛이 독사 같이 변했다.
"좋아, 다만......나의 목은 여기 있지만 도장께선 가질 수가
없을거요."
"헌원선생은 도박을 좋아해서 많은 사람들의 목을 빼앗았으니
이번에는 당신의 목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도 괜찮을 거요."
"그렇다면 도장께선 나와 도박을 하자는 말씀이군요?"
"바로 그렇소!"
소어아는 신석도장의 가냘픈 몸매를 보더니 다시 검을 잡고 있
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약해 보이는 사람이 헌원삼광을 몸도 돌아서지 못 하게
하다니 이 얼마나 위대한 위풍인가!
소어아는 생각했다.
(난 천하에서 가장 영리한 사람이야. 하지만 남을 두렵게 하지
는 못 하지. 그렇게 보면 사람은 역시 무술을 잘 연마하는 것이
좋아. 그렇지 않고선 한평생 이토록 위풍이 당당하게 될 생각은
말아야지!)
이 무림명가(武林名家)의 위풍은 충분히 남에게 부러움을 사고
도 남을만 했다.
신석도장의 대답을 듣자 헌원삼광은 다시 웃음을 거두면서 무거
운 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도박을 할 것인지?"
"당신과 나는 모두 무림의 사람이니 도박을 하려면 자연히 무술
로써 해야지요!"
"힘껏 싸우는 것도 도박하는 것이오?"
"목숨으로 도박을 하는 것은 천하에 다시 비할 것이 없오. 그런
데 왜 도박이 아니오!"
"좋아, 당신은 무엇으로 나의 목과 바꿀 생각이지!"
"물론 나의 목이오."
"안 되오. 그런 도박은 너무 당신에게만 유리하오."
"난 여섯 살 때 집을 떠난 후, 오늘날 칠대검파(七大劍派) 중의
하나인 아미의 장문이 될 때까지 제자를 이천칠백삼십이 명이나
두었소. 그리고 장문동부가 가는 곳에는 비단 제자들이 명령을 들
을 뿐만 아니라, 다른 파의 제자들도 체면을 세워주고 있소."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무서운 소리로 계속했다.
"이런 목이 당신의 목보다 못 하겠소?"
"당신 목은 좋지만 나에겐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그러나 당신
이 나의 목을 치면 비단 아미성지의 위풍을 세우는 것만 아니고
당신 일신의 이름도 높일 수 있는 것이오!"
헌원삼광도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크게 말했다.
"이렇게 보면 나의 손해가 너무 크니 이런 도박은 하지 않겠
소!"
"귀하께선 도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오."
"그런 말은 내가 남에게 많이 해보기는 했지만 듣기는 처음이
오. 그러나 당신은 나의 목이 필요하지만 난 당신의 것이 필요 없
으니 이대로 가야겠소."
"그렇게 될까?"
"그럼 가질 못 한단 말이오?"
신석도장이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쩌자는 거요?"
"당신이 당신의 목에 상당하는 다른 물건을 내놓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내기를 하지 않겠소."
신석도장은 씁쓸히 웃으며 물었다.
"그럼 무슨 물건이 나의 목에 상당하겠오?"
"그런 물건은 정말로 많지 않소. 그러나 당신의 몸에 하나가 있
기는 있지요."
신석도장이 몸을 약간 움직였다.
"그게 뭐요?"
"그것은 바로 당신의 장문동부요!"
"장문동부?"
"그렇소, 당신이 이기면 나의 목을 마음대로 치시오. 그러나 내
가 당신을 이기면 아미장위를 나에게 양도해야 하오."
신석도장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그것 외에는......."
"그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소!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편리를 줄
수는 있오."
"그건 또 무엇이오?"
"난 당신에게 세 번의 공격기회를 주겠오. 당신이 세 검으로 나
를 다치게 할 수 있으면 당신이 이기는 것이고, 나의 양발이 땅을
떠나서 한발이라도 움직인다면 내가 지는 것이오."
소어아는 그가 이토록 교만한 도박 방법을 쓸줄은 몰랐다. 아무
리 생각해봐도 이런 도박 방법은 조금도 승산이 없었다. 신석도장
은 일파의 장문이고 검법은 아미산을 십여 년간 지켰기 때문에 빠
져나가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소어아는 의아했다.
(악도귀야! 네가 미친 게 아니냐?)
신석도장은 아무소리 않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묵묵히 물었
다.
"반격하지는 않겠소?"
헌원삼광은 여전히 오만무도했다.
"물론 반격을 아니하지요!"
그러자 이때 신석도장은 비록 의아한 가운데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말했다.
"좋아, 도박을 해봅시다."
헌원삼광이 말했다.
"당신의 동부는 어디에 있소?"
"동부는 나의 허리에 있오. 소시주(小施主)가 꺼내서 좀 보여
드리시오."
그는 이때 내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만약 손을 움직
여 동부를 꺼낸다면 기세가 약해질 염려가 있어 소어아에게 부탁
을 하였다.
더군다나 그가 잠시라도 검에서 손을 뗀다면 헌원삼광이 즉각
고개를 돌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황에 변화가 생길 염려가 있
었다.
헌원삼광이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입을 열었다.
"신석도장, 이 자식은 매우 교활한데 믿을 수 있겠소?"
신석도장은 정색을 했다.
"이분 소시주는 비록 나이가 어려도 금후에 필시 무림을 빛낼
사람이오. 그가 이룰 일을 방해할 사람이 없을 텐데 어찌 동패(銅
牌)에 신경을 쓰겠오?"
소어아는 참을 수 없어서 크게 웃으면서 참견했다.
"내가 도장을 위해 몸을 약간 움직이는 건 그리 힘든 일이 아닙
니다. 너무 칭찬은 마십시오."
그는 신석도장의 뒤로 가서 그의 허리에 있는 동부를 꺼냈다.
신석도장이 가라앉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시주는 잘 보관해야 하오."
"도장, 안심하십시오. 내가 그에게 보여줄 필요도 없겠죠? 하여
튼 그의 것이 될 리가 없으니까요."
헌원삼광이 한마디 했다.
"칭찬 몇 마디를 듣고 나를 무시하는 거냐?"
"당신은 질 터이니 내가 욕하나마나 상관이 없소."
"하지만 넌 실망할 거야."
신석도장이 소리쳤다.
"귀하께서 준비는 되셨나요?"
"이미 준비되어 있었소."
"그렇다면 내가 손을 쓰겠소!"
이 말이 끝나자 마자 사방의 공기는 얼어붙는 듯했다. 심지어
호흡소리까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각 사람이 유일하
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심장소리 뿐이었다.
'착' 하는 소리가 나면서 신석도장의 긴 검이 검집을 떠났다.
헌원삼광은 여전히 등을 그에게 향하고 움직이질 않았다.
신석도장은 호흡을 가다듬어 내력을 상승시키며 검을 쳐들었다.
그러자 돌연 검빛이 녹색으로 변했고 순간 그는 일검을 찔러 들어
갔다.
검은 바로 헌원삼광의 양허리간에 등뼈에 있는 명문혈을 향해
찔러들어 갔다. 헌원삼광의 온몸의 중심이었다.
그 일검은 헌원삼광을 해치기 위함이 아니라 다만 발을 움직이
게 하고자 함이었다.
소어아는 암암리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명가가 손을 쓰는 것은 과연 틀리는구나. 만약 피할 수 있는데
도 일검으로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소인의 행위이지!)
헌원삼광은 허리를 굽히며 몸을 틀었다. 그러자 그 일검은 그의
허리를 스치며 지나가게 되었다.
순간 신석도장은 번개같이 팔을 돌려서 검을 찌르는 수법에서
자르는 수법으로 전환시켜 헌원삼광의 복부를 향했다.
그 두 수법이 촌각의 머뭇거림도 없이 이어졌기 때문에 소어아
는 헌원삼광이 두번째 검은 절대 피하지 못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 헌원삼광의 허리가 마치 활처럼 뒤로 휘었고 그 일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는 것이 아닌가! 신석도장의 두번째 검
은 그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신석도장은 미소를 지으면서 검을 돌리더니 갑자기 헌원삼광의
왼쪽다리 무릎을 향했다.
이 세 번의 공격은 삽시간에 이루어졌다. 신석도장은 마치 미리
계산에 있었다는 듯 검의 초식을 전개하였다.
헌원삼광은 두번째 검까지는 묘하게 피했지만 이번 만큼은 어쩔
수 없이 발을 떼거나 아니면 왼쪽 다리가 짤릴 것 같았다.
소어아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악도귀야, 악도귀! 이번엔 너도 어쩔 수 없겠구나.)
그러나 그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헌원삼광은 마치 고무줄처럼
뒤로 젖혀졌던 몸을 튕겼다. 그는 그 탄력으로 허리를 앞으로 굽
히면서 신석도장의 팔을 물어버렸다. 신석도장은 칼을 손에서 떨
어뜨리고 말았다.
헌원삼광이 크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졌소!"
소어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신석도장은 안색이 사색이 되
어 한참 동안이나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이거......이거 무슨 수법이지. 천하에 어느 문(門) 어느 파
(派)의 무술이지?"
헌원삼광은 만면에 득의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수법은 죽은 것이고, 사람은 산 것이오. 산 사람이 왜 굳이 수
법에 매달리겠소!"
"그러나 당신은 절대로 반격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소. 나는 손으로 반격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 입은 말하지
않았소!"
신석도장은 헌원삼광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사실이 그랬던 것
이다. 그는 힘없이 시인했다.
"그래, 내가 졌소......."
헌원삼광은 소어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동부(銅符)를 가지고 와!"
그러나 소어아는 동부를 만지작거리며 담담히 말했다.
"이 동부는 아직 당신 것이 아니오."
"너 이 자식아, 어쩔 셈이냐?"
"당신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도박을 하는 사람이 아니오? 이제
나와 도박을 해보시지. 당신이 이기면 물론 동부가 당신의 것이고
나 역시 당신의 것이오. 그러나 당신이 지면 동부를 나에게 주어
야 하오."
"너도 도박이 하고 싶으냐?"
"음."
"내가 이기면 뭘 얻게 되지?"
"이익이 많죠!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말이오. 당신이 할 일
이 없으면 내가 사람을 찾아서 도박을 하게 해주고, 당신이 술이
없을 때에는 내가 술을 갖다 대령하겠소."
"나와 같은 사람은 너 같이 유별난 시종이 있는 게 어울리지."
"그럼 하는 거요?"
"너는 어떤 방식으로 도박을 하겠느냐?"
"어떤 방법이라도 좋소. 당신 마음대로 합시다."
헌원삼광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재미있어, 확실히 재미있어......."
소어아를 유심히 쳐다보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던 헌원삼광은
큰소리로 말했다.
"좋아, 나는 네가 너의 몸에 상처가 몇 군데 있는지 네 자신도
모르고 있다는 데 내기를 걸겠다."
강옥랑은 생각했다.
(소어아, 너는 이제 죽었다)
소어아는 얼굴에만 상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몸에도 온통 상처
투성이었다. 그가 어릴 때 호랑이나 살쾡이, 늑대들이 몸에 남겨
놓은 걸작들이었다. 그리고 칼자국도 끼어 있었다.
소어아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정말 내 몸의 상처로 도박을 하시겠소?"
"물론 정말이지."
"좋아요, 내몸의 상처는 모두 백 개가 있소."
헌원삼광은 웃음을 거두며 이맛살을 찡그렸다.
"꼭 백 개?"
"그렇소. 일백 개요."
그가 매우 자신이 있다는 듯 당당히 이야기하자 헌원삼광은 안
색이 변했고 강옥랑도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이 자식은 정말 자기 몸의 상처의 수를 알고 있는 것일까?)
"좋아, 옷을 벗어라. 내가 세어보겠다."
소어아는 옷을 벗었다.
헌원삼광은 죽 훑어보다가 크게 웃으면서 잘라 말했다.
"구십 일...... 너의 몸에는 아흔 한 개의 상처야. 넌 졌어!"
"뭐, 아흔 하나......그렇지 않을 걸!"
그는 말을 하면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신석도장의 칼을 들더니
몸에다 아홉 번의 칼질을 했다. 비록 심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금
방 피가 흘러내려 선혈이 낭자했다.
헌원삼광은 의아한 듯 소어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게 뭐야?"
소어아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진 것이오."
"개소리, 너......."
소어아는 킬킬거렸다.
"아흔 하나의 옛 상처자국과 아홉 개의 새로운 것을 합치면 백
개니 당신이 진 것이오."
헌원삼광은 크게 분노했다.
"그렇게 할 수도 있나!"
"왜 안 된다는 거요? 당신은 오직 내 몸의 상처 자국만을 말했
지 새 것인지 옛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잖소?"
헌원삼광은 할 말을 잊었는지 잠시 아무말도 못 했다. 그러나
그도 화통한 면은 갖추고 있었다.
"재미있어, 너 이 자식, 과연 재미있는데......좋아, 내가 졌
다."
그는 신석도장에게 손짓을 하면서 웃었다.
"자, 빨리 새로운 장문인에게 인사를 하시오."
신석도장의 얼굴엔 암담한 기색만 감돌 뿐이었다.
"아마파는 날이 갈수록 융성해지고 바로 당신과 같은 소년 영웅
이 필요할 때요. 내가 물러서야겠오."
소어아는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당신은 정말 날더러 아미장문을 하란 말이오?"
신석도장은 비록 암담한 중이었으나 담담하고 위풍있게 말했다.
"동부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다행한 일이오. 빈도(貧道)
는......."
그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소어아는 탁자 위에 가만히 장
문동부를 올려 놓았다. 소어아는 웃으면서 신석도장을 바라보았
다.
"아미장문이 되면 염불도 해야 하지않소. 제발 부탁이오. 난 견
디지 못 하니 나를 괴롭히지 마시오. 이것은 가지고 가시오."
신석도장은 기쁘고도 놀랐다.
"그러나...... 그러나 귀하...... 귀하의 이런 은혜를 빈도가
어찌......."
그는 말을 잇지 못 했다. 너무나도 감격했던 것 같다.
"그건 아무짓도 아니오. 나의 앞길이 멀고 험한데 내가 이런 작
은 동패(銅牌)가 눈에 보이겠소? 이 말은 당신이 한 것이 아니
오?"
신석도장은 그 동부를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나서 소어아를
얼마 동안 바라본 후 예를 갖추어 포권의 예를 했다.
"정 그렇다면...... 그럼 빈도는 물러 가겠소."
헤어질 수 없는 사이
신석도장은 재빨리 신형을 날려 고개도 돌리지 않고 사라져 버
렸다.
헌원삼광은 사라져가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욕을 해댔다.
"저 자식은 정말 양심도 없는 걸. 너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가잖아?"
그러나 소어아가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채며 한마디 했다.
"큰 은혜는 오히려 함부로 치하하기가 힘든 법이오."
그는 말을 하면서 속옷을 찢어 어깨의 상처를 싸맸다. 한 손이
여전히 강옥랑과 함께 수갑에 채워져 있어 불편했다.
헌원삼광은 술단지를 들어 몇 모금 들이키더니 입을 열었다.
"넌 재주가 좋은 놈인데 그 수갑만은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
지?"
"이 수갑을 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주 천재에 가까운
사람일 것이오."
헌원삼광은 칼을 들고 수갑을 향해 내리쳤다. '챙' 하는 소리가
나며 불빛이 번쩍했다. 그러나 칼만 두 동강으로 부러지고 말았
다.
강옥랑은 탄식을 했고 소어아는 빙그레 웃었다.
"봐요. 나와 그는 이렇게 떨어질 수 없는 사이란 말이오."
"그렇지도 않지. 네가 그와 같이 있기 싫다면 내가 그의 손을
자를 수도 있는 것이니까."
강옥랑은 안색이 금방 창백해졌다. 그러나 소어아는 담담히 웃
음을 띠우며 말할 뿐이었다.
"비록 그의 손을 자른다 해도 수갑은 여전히 남아있게 되니 그
냥 그를 내 곁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욱 좋겠소."
헌원삼광이 강옥랑의 눈을 바라보면서 서서히 입을 뗐다.
"네가 그의 손을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 그가 너의 손을 자를 날
이 있을 거야."
"그건 안심하십시오. 그는 그럴만한 재주가 없소."
"너 이 자식! 정말 재미있는데. 너와 같이 좀 있고 싶지만 네
몸 옆에 이 험악한 자식이 있어서 구역질이 나는군."
그는 소어아의 어깨를 툭치며 얘기를 시작했는데 이미 문밖에서
마지막 말을 맺었다.
"금후에 네가 혼자 있게 되면 우리 재미있게 한 잔 하자!"
소어아가 달려나갔지만 이미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질 않았
다.
산을 내려가는 길은 그다지 험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저물어가
는 석양빛을 받으며 총총히 산을 내려왔다.
강옥랑은 종래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돌연 웃으면서 입을 열었
다.
"형님은 어디로 갈 거요?"
"넌 어디로 갈 것인가?"
"동생은 자연히 형님을 따라야지요."
"사실 난 뚜렷이 갈 곳이 없어. 그냥 여기저기를 구경하자는 거
지."
강옥랑의 얼굴에는 기쁜 빛이 나타났다.
"그럼 우선 무한으로 갑시다. 집에 가면 혹 이 수갑을 풀 수 있
는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소어아는 별 생각없이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
그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참, 너 혹시 은자를 가진 것이 있느냐? 옷을 좀 사야겠는
데......그리고 적당한 천을 찾아서 손을 덮어야겠다. 남들에게
오해받지 않도록."
"저도 지금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누굴 좀 속여야겠군."
이때 앞에서 한 사람이 손에 큰 보따리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
다. 그는 소어아와 강옥랑을 보더니 돌연 보따리를 놓고 인사를
한 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잽싸게 사라져버렸다. 소어아와 강옥랑
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뭘까?"
강옥랑은 재빨리 다가가 보따리를 풀어보았다. 그 보따리 속에
는 네 벌의 새옷이 들어 있었다.
강옥랑이 놀라 입을 열었다.
"이거......이거 누가 보내 온 것이지?"
소어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거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로군."
두 사람은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들은 우선 옷을 갈아 입었다. 성내에는 불빛이 하나 하나 늘어
갔다. 두 사람은 자주빛 옷을 손에 감아 수갑을 감추고 큰 걸음으
로 거리를 걸어갔다. 둘은 배가 고파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배
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소어아는 걸어가면서 중얼거렸다.
"옷을 갖고 왔다면 은도 좀 가져 와야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음식점 종업원 같은 사나이가 하나 앞에서
달려오더니 인사를 했다.
"강 선생이십니까? 한 손님이 오백 냥의 은을 소인에게 전하도
록 하시면서 아울러 술과 안주를 대접하도록 분부했습니다."
소어아와 강옥랑은 너무나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강옥랑이 무
거운 소리로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의 성이 뭐지?"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어떻게 생겼소?"
"우리 점포에는 왕래하는 손님이 워낙 많아서 기억이 잘 안 나
는군요."
그는 계속 인사를 하면서 연방 웃었다. 그리고 무엇을 물어 봐
도 그저 '잘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술과 안주는 매우 성찬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소어아는 낄낄거리며 중얼거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이 사람은 우리 뱃속의 회충인데. 우리
가 무엇이 필요한지 그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말야."
그는 당장 기뻤지만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해지기 시작했
다. 더군다나 지금 상황은 황우, 백양과 같이 다닐 때의 상황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온 지 불과 한 시간도 안
되는데 도대체 누가 알았단 말인가? 그리고 이토록 친절을 베풀어
주는 사람의 속셈은 무엇일까? 또 그가 정말 좋은 마음을 가졌다
면 왜 얼굴을 드러내지 않을까?
밤이 깊어지자 두 사람은 한 방에서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소어아는 빙그레 웃었다. 또 무슨 장난을 할 것만 같았다.
"너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느냐?"
"형님은 책을 보고 싶은 게 아니오?"
"너는 정말 똑똑하구나."
강옥랑은 품속에서 소미미에게서 빼앗은 책을 꺼냈다. 소어아는
혼자 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 함께 책을 펼쳤다.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물론 무술의 깊은 도리였다. 두 사람
은 알지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 탄식을 했다. 그러나 속
으로는 책을 혼자 삼키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소어아는 한
시간 이상이나 본 후 다시 하품을 하더니 책을 덮었다.
"이 책은 보기 어려우니 먼저 자야 겠다. 너는?"
강옥랑도 길게 하품을 했다.
"저도 자고 싶습니다."
두 사람은 한 시간 이상을 잠잠히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등을 맞댄 채 눈을 크게 뜨고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
다. 누가 그들에게 책에서 본 무공을 연구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모두 죽어도 아니라고 할 것이다.
이튿날 저녁, 밥을 먹은 후 소어아가 먼저 중얼거리기 시작했
다.
"보기 어려운 책은 보지 않는 게 났지?"
"눈만 피곤해질 뿐이죠."
"맞았어. 빨리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좋겠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로 내색이 없었다.
소어아는 이런 일이 재미가 있을 뿐 아니라 자극제가 되었다.
수시로, 심지어는 밥 먹고 대변 볼 시간에도 상대방을 암살자처럼
경계해야 하는 이런 나날이 그에게는 신나는 일로 느껴지는 것이
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 경계하며 사흘을 보냈다. 그러나 겉으로
는 매우 태평한 시간이었다.
이 삼일 동안 소어아는 누군가가 쑥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 속셈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들에게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부족한 게
있으면 곧 누군가 나타나 가져다 주었다.
두 사람은 민강을 따라서 서주까지 왔다.
소어아는 흘러내리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기쁜듯이 소리쳤다.
"우리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어때?"
"잘 됐어요. 나도 배를 타고 싶었는데."
새로 단장된 배 한 척이 저쪽 강변으로부터 올라왔다. 두 사람
이 막 부르려 하는데 배에서 모자를 쓴 사공이 먼저 손을 들면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이 강(江) 선생 인가요? 어떤 이가 손님에게 이 배를 전
세 주었어요."
소어아와 강옥랑은 서로 마주 바라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저 사람도 내 뱃 속의 회충이군!"
그는 이 배를 누가 전세냈는가를 아예 묻지도 않았다. 물으나
마나 대답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배에는 백발의 사공 외에 열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아름다운 큰 눈을 들어 소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소어아를 바라보는 모습은 교태 어려 보였다. 그렇지만
소어아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는 아름다운 여자만 보면 골치가
아파왔다.
밤이 되자 강옥랑은 빙긋빙긋 웃으면서 수작을 걸어왔다.
"그 분 사(史)아가씨는 형님에게 반한 것 같아요."
소어아는 하품을 길게 하고는 먼 곳을 응시하였다.
"네가 나보다 잘생겼으니 너한테 반한 거야. 넌 항상 나와 함께
있는 몸만 아니라면 가서 놀고 싶을 걸."
강옥랑은 얼굴이 붉어졌다.
"제가......제게 그런 뜻은 없어요."
"그만둬. 네가 관심이 없다면 왜 묻지도 않은 그녀 얘기를 꺼내
지? 그리고 넌 벌써 그녀의 성까지 알고 있구나."
"난 다만 우연히 들은 것 뿐이오."
"창피해 하긴!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냐!"
소어아는 옷가지를 들어 눈을 가리고는 잠을 자려는지 몸을 뱃
전에 기댔다. 강옥랑은 눈치를 슬슬 살펴가며 또 수작을 걸어왔
다.
"형님, 책 보시지 않겠어요?"
"글쎄, 굳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피곤하게 그럴 필요가 있을까.
너는?"
"형님이 보시지 않으면 저도 보지 않겠어요."
두 사람은 같이 뱃전에 누워 잠을 청했다. 강옥랑은 실눈을 뜨
고 소어아를 살폈다. 얼마 지나자 소어아는 코를 골면서 잠이 들
었다.
강옥랑은 살며시 책을 품속에서 꺼내어 조용히 몇 장을 넘겼다.
그리고 막 한 곳을 보려고 하는데 소어아가 돌연 몸을 뒤척이며
팔다리를 강옥랑의 몸에 돌리더니 잠꼬대를 했다. 강옥랑은 이가
갈렸으나 그를 깨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가 몸을 돌리고
손을 치우기만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소어아는 돼지처럼 잠에 빠져 있어 움직일 기미조차 보
이지 않았다.
강옥랑은 안색이 창백해져갔다. 눈에서는 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는 어떻게 할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가 옷가지 밑에서 하나
의 식도를 꺼내어 소어아의 목을 겨누었다.
바로 이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일면서 두 개의 연자알이 창밖
에서 날아와 하나는 '땅' 하며 식도에 적중했고 또 하나는 강옥랑
의 팔을 때렸다. 그 힘과 정확도로 보아 대단한 고수가 발사한 암
기임에 틀림없었다.
강옥랑은 이를 악물면서 아픔을 참았고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송
글송글 맺혀 흘렀다.
소어아는 그 바람에 잠이 깼는지 웅얼거렸다.
"무슨 일이야! 누가 종을 치고 있어?"
강옥랑은 급히 식도를 감추면서 말했다.
"아무 일도 없어요."
다행히 소어아는 더이상 묻지 많고 다시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옥랑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 두 개의 연자알은 누가 던진 것일까? 분명 암기의 명수인
것 같은데...... 그 백발의 사공이? 아니면 그의 딸일까? 그렇다
면 그들은 왜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까? 이 소어아와는 모르는 사
이인 것 같은데 왜 그를 보호하는 걸까?)
그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다. 아침
이 되자 강옥랑은 소어아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
다. 그는 잠을 늦게 잔데다가 긴장을 해서인지 몸이 찌부둥하고
머리가 무거웠다.
"잘잤나?"
강옥랑은 억지 웃음을 보였다.
"네. 날이 밝아질 때까지 잤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자. 너무 오래 자면 좋지 않아요."
"네네, 일어 나야지요."
그는 비록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소어아를 씹
어먹고 싶었다. 뱃머리로 나가자 소어아는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했다. 강옥랑은 그것을 보자 정말 그를 당장이라도 물 속으로 밀
어넣고 싶었다.
이때 아가씨가 어느틈에 왔는지 세숫물을 들고 앞에 서 있었는
데 얼굴은 여전히 애교어린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강옥랑은 세수대야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
다. 손은 하얗고 가냘폈다. 암기를 발사할 수 있는 손 같지는 않
았다.
그러나 고생하는 뱃사공의 딸이 어찌 저리 고운 손을 가질 수
있겠는가?
소어아는 매우 기분이 좋은 듯했다. 세수를 끝내고 한꺼번에 네
그릇의 죽과 네 개의 날달걀을 마셔 버렸다.
소어아는 백발의 사공에게 웃으면서 말을 건냈다.
"노인장, 당신의 존함이 어떻게 되오?"
"나의 성은 사씨요......허허 남들은 나를 그저 사노두라고 부
르죠......허허 그러나 나의 손녀는 이름이 있죠. 콜록...... 그
녀의 이름은 사운고요."
노인은 이 말을 하며 손녀를 쳐다보고는 웃으며 타일렀다.
"운고, 연자씨를 너무 많이 먹지 마라. 너무 많이 먹으면 배가
아파요."
강옥랑은 놀라면서 고개를 돌렸다. 운고의 희고 가냘픈 손에는
과연 많은 연자씨가 들려져 있었다. 그녀는 연자씨를 입에 넣으면
서 그를 향해 웃었다.
강옥랑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돌리자 소어아가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부채질을 하고 있
었는데 바로 무공비록이었다. 어느틈엔가 그는 강옥랑의 품에서
그것을 꺼낸 것이었다.
그는 천하무림 사람들이 온갖 힘을 다하여도 얻지 못 할 귀한
책을 소어아가 부채로 쓰는 것을 보자 순간 안색이 변하며 분기가
치솟아올랐다.
그때 하나의 커다란 배가 앞쪽에서 나타났다. 사노인은 배를 약
간 선회시키며 큰배의 옆을 피해 지나갔다.
이때 소어아가 놀라면서 소리쳤다.
"앗, 이걸 어쩌지? 빠져 버렸어!"
그는 수중에 들고있던 무림비급을 강물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견직으로 만든 그 책은 곧 물을 먹고 가라앉아 버렸다.
소어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거......이 거 어떡하지?"
강옥랑은 불같이 속이 끓어올랐으나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몸밖의 물건이니 잃어도 무방하오."
그는 필시 소어아가 일부러 그 책을 빠뜨린 것임을 짐작했다.
소어아는 이미 그 책을 외우고 있었고 일이 이쯤되면 강옥랑도 그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늘은 맑고 강물은 금빛 찬란했다. 장강 양안의 풍물은 한 폭
의 아름다운 그림과도 같았다.
"배는 천천히 가도 무방하오. 우리는 급하지 않소."
소어아가 풍광에 도취된 듯 연신 감탄을 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망나니들
운한을 지난 뒤 배가 경우에 이르자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
하고 사노인은 닻을 내리고 배를 멈췄다.
소어아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지금부터 잠자리에 드는 것은 너무 이르지 않소?"
그러나 사노인은 그저 배에서 쓰는 도구들을 갈무리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쪽에 섰던 운고가 사뿐히 걸어 오면서 대신 대답하였다.
"앞이 바로 무협이에요. 워낙 물살이 거세 밤이 되면 그 누구도
건너가질 못 하죠. 그래서 오늘은 일찍 쉬고 내일 아침 해가 뜨면
떠날거예요."
"아! 저기가 바로 천하에서 가장 험준한 무산십이봉이오? 정말
늘 보고 싶었소."
사운고는 애교있게 웃으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저기는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아요. 그리고 눈에 띄는 사람은
반드시 그 목숨을 빼앗고 마는 도적들이 있죠."
새벽이 되자 사노인은 배의 닻을 걷어 올렸다. 운고는 어제까지
와는 달리 파란색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 모습이 무척 청초하고
아롬다왔다.
사노인은 흰 수염을 바람에 나부끼며 천천히 배를 몰아 나갔다.
무협으로 들어서자 돌연 강은 급류가 되고 과연 험준한 무산십
이봉의 위용이 드러났다. 그리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거칠
고 굵은 선은 남아의 기개가 살아 숨쉬는 듯 하였다.
이때 갑자기 고요한 산 속에서 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
자 급류를 타고 십여 척의 쾌속선이 양쪽에서 밀려 나오기 시작했
다. 배마다 여섯, 일곱 명의 노랑색 천을 머리에 두른 사나이들이
나타났는데, 각자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은 긴
대나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기괴한 소릴 지르면서 달려 왔는
데 그 기세가 꽤 험상궂게 보였다.
운고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그들이 왔네요?"
사노인은 미리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히 소녀의 말을 받았
다.
"그들이 올 줄 알았어!"
그의 행동이 매우 침착한 것을 보고 소어아는 속으로 탄복을 금
치 못 했다.
소어아는 하늘도 땅도 두려워 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이런 급
류에서 물에 대한 성질을 잘 아는 도적들을 만나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왔던 두 척의 배가 쏜살같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배에는
칼을 든 사나이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운고가 가볍게 웃으면서 여자답지 않게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연자 맛이나 좀 보아라!"
그녀의 손이 들리자 소어아 일행이 탄 배로 뛰어오르려던 두 사
나이가 즉각 소리를 지르면서 얼굴을 감싸쥐었다. 피가 손가락 사
이를 비집고 흘러 내려왔다.
한 사나이가 소리쳤다.
"조심해라! 암기다."
운고는 여전히 큰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연자를 더 먹겠오? 내 한 단지를 드리겠소."
그녀의 희고 가냘픈 두 손이 다시 들리자 수중에서 연자가 비오
듯이 쏟아졌다. 그 연자는 보통 연자가 아니고 철연자였다.
배위의 사나이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나 뒤이
어 나머지 배들이 몰려들자 사운고는 자신의 연자만으로는 그들을
다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이때 안색을 움직이지 않던 사노두가 갑자기 하늘을 향해 소리
를 높이 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사람의 귀를 찢어놓을 정
도였다.
그리고는 소리와 함께 수중의 긴 대나무가 움직였다. 그가 대나
무를 한 번 휘두르자 앞에 달려오던 세 사람이 그 대나무에 맞아
강변의 절벽에까지 날아가서 박살이 났다.
피가 튀면서 시체가 강물로 떨어졌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육박해 들어왔다. 사노인은 대나무로 그의 배를 뚫어 버렸다. 처
참한 비명소리와 함께 피투성이의 시체가 대나무에 꿰어 공중에
들려졌다. 이것을 본 남은 사나이들은 겁에 질려 모두들 감히 다
시 달려들 생각을 못 했다.
이 늙은 사노두에게 이런 무공이 있는 것을 보자 소어아와 강옥
랑은 감탄을 발하며 놀랐다.
이러는 동안 그들의 배는 쾌선에 완전히 포위되어 버렸다. 그러
자 이제까지 겁에 질려 있던 사나이들은 용기를 얻었다는 듯 이상
한 소리를 지르면서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배를 뒤집으려는 심
산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때 황색옷을 입은 사나이 하나가 수염을 휘날리
며 바위 틈에서 뛰어 나와 우렁차게 소리쳤다.
"멈추어라! 빨리 멈추어라!"
그러자 수십 명의 사나이들은 즉각 동작을 멈추고 물러섰다.
황색옷의 사나이는 바위 위에 우뚝 서서 수중의 사나이들 중 지
휘자인 듯한 대한(大漢)을 불러 일곱 여덟 번 따귀를 후려치더니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너희 병신 자식들아, 눈이 멀었나? 배에 계신 분이 감히 누구
인 줄 알고 손을 쓰는 거냐!"
사노두는 급류하는 강 한가운데에서 배를 멈췄다.
운고가 눈을 번쩍 뜨며 큰소리로 호통쳤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
지 여자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당신의 분부가 없었다면 저 사람들이 어찌 손을 쓰겠소."
노란 황색을 입은 사나이는 예를 갖추어 읍을 하더니 대답했다.
"저는 정말 사노선배와 아가씨가 배에 계신 걸 몰랐습니다. 그
렇지 않으면 어찌 감히 손을 쓰겠습니까. 이 장강의 사람 중에 누
가 사노선배의 후배가 아닌 이가 있습니까?"
그러나 사노두는 싸늘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았다.
"너무 그럴 필요는 없어, 부끄럽소. 난 이미 소용이 었는 늙은
이오. 이 장강은 당신들의 천하야. 당신들이 내 목숨을 필요로 한
다면 가져가시오!"
황색옷의 사나이는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
"후배 황화봉이 정말로 죽일 놈입니다. 이 녀석들이 눈이 멀었
지요. 우린 정말 사노선배께서 장강에 나타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걸 알았다면 우리가 어찌 이렇게 무례를 범했겠습니까?"
"후배가 그렇게 말을 하니 이 노인은 이만 가겠네. 아! 인간사
가 일장춘몽이거늘......"
사노두는 말을 마치자 긴 대나무로 배를 움직였다. 배는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갔다.
황화봉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사노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이상한데, 이 노괴물이 어찌 여기에 왔을까?......."
아까 황화봉에게 따귀를 몇 번 맞은 사나이는 뻘겋게 부은 얼굴
을 감싸쥐고는 물었다.
"이거...... 저 노인이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네가 무엇을 알겠냐만, 이십 년 전엔 비단 장강 일대가 모두
그의 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하 서른 여섯 개 수로의 영웅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 했었지. 우리의 명이 더 길어졌다고 생각하면
돼. 그렇지 않고 이십 년 전에 이러한 일이 벌어졌었더라면 이 일
대의 강물은 핏빛으로 물들었을 거야. 아! 앞으로 그를 다시는 만
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다시는 그
괴물을 만나지 않는다면 좋겠어. 도대체 왜 이런 괴물을 만나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강바람이 옷섶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배는 이미 무협을 지난 뒤
였다.
강옥랑은 옷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흰 수염을 나부끼는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참을 수 없는 듯 입을 열었다.
"노선배께서...... 옛날에 천하를 진동시킨......."
사 노인이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
"입을 다무시오."
강옥랑은 그의 말이 떨어지자 즉각 고개를 떨구었다.
"네!"
소어아는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 노인, 난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오. 하지만 필시 위대한 사
람이라고 믿고 싶소. 그런데 그린 사람이 배를 몰아주니 정말 감
사할 뿐더러 어찌할 바를 모르겠군요."
그가 아직도 사 노인이라 부르는 소릴 들은 강옥랑은 자기가 겁
을 먹고 눈빛이 흐려졌다.
그러나 그 사 노인은 오히려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나에게 감사하지 마오. 또 감사할 필요도 없오."
"그러면 내가 누구에게 감사를 드려야 하오? 혹시 누가 당신에
게 나를 보호하여 강을 건네 주도록 부탁이라도 했소? 당신은 나
이도 많으니 거짓말을 안 하겠죠"
사 노인은 허리를 굽히더니 계속해서 몇 번 기침을 했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시인하는 것이오?"
사 노인의 안색이 돌연 어두워졌다.
"아! 너는 작은 나이에 벌써부터 입을 그토록 잘 놀리니 크면
어떻게 되겠나."
"그것은 나의 일이니 당신과는 상관이 없소. 그리고 당신이 나
를 구해주었다고 해서 내가 당신을 두려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소.
당신을 만나지 못 했다 해도 난 죽지 않았을 것이오. 더구나 나는
당신에게 바래다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소."
사 노인이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너털 웃음을 지었다.
"너 같은 아이는 처음 보는구나!"
"나 같은 사람은 천하에 단 하나밖에 없을 거요."
그리고 나서 그는 고개를 돌려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노인은 필시 내력이 있을 텐데 지금은 나의 뱃사람이 되어
서 나를 전송하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또 그 미지의 인물은 도
처에서 나를 도와주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소어아는 정말 이 사람이 누구인지 왜 자기를 도와주는 지를 몰
랐다. 배가 무창으로 들어섰다. 넓은 장강 하류가 저편으로 망막
한 대양이 드러났다. 소어아는 뱃전에 서서 포구에 배를 대는 사
노인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사 노인, 고맙소. 당신은 약간 이상스러운 면이 있긴 해도 좋
은 사람인 것 같소. 난 당신을 결코 잊지는 않겠소."
"좋아. 가봐라. 네가 죽지 않는다면......."
소어아는 웃으면서 손짓으로 그의 말을 막고 천천히 입을 열었
다.
"나에게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이나 당신의 이름을 말할 필요는
없소. 난 당신을 찾아가지는 않을 거요. 또 당신의 이름을 빌려
남을 놀라게 하고 싶지도 않소......."
곁에 있던 운고는 입술을 깨물면서 섭섭해 했다.
"세상에 가장 무정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당신일 거예요."
"정말? 너무 영광인데!"
"당신...... 당신......."
소어아와 강옥랑은 배를 내렸다. 사노인은 묵묵히 배를 저어 되
돌아가고 사운고는 멀어져 가는 소어아를 바라보며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부두는 배를 타고 내리는 각양 각색의 사람들로 매우 복잡했다.
염소 냄새와 닭 냄새, 음식 냄새와 차의 향기가 뒤섞여 있었고 남
자들의 술 냄새와 여인들의 머릿기름 향기로 뒤범벅이 되어 부두
의 독특한 냄새로 가득했다.
소어아는 사람들의 행렬에 끼어 이쪽 저쪽의 복잡한 곳을 두리
번거렸다. 그는 이렇게 번화한 거리를 와본 일이 없었다. 그는 흥
분에 가득차 이것 저것을 살피며 탄성을 질렀다.
강옥랑은 목을 쭉 빼고 사방을 살폈다.
이때 시끄럽고 복잡한 사람들 틈에서 강옥랑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형...... 강옥랑......."
강옥랑은 그 목소리를 듣자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다.
"아하! 이게 얼마만이오......."
강옥랑이 사람 사이를 헤치며 큰 걸음으로 나아가자 소어아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부두 가까이에 세 채의 화려한 마차가 서 있었고 몇 명의 금의
소년들이 손짓을 하고 있었다.
강옥랑은 기쁨에 가득찬 소리를 지르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
몇 명의 소년들도 웃으면서 마차에서 내려섰는데 모두 허리에 검
을 차고 있었다.
"이게 얼마 만이오. 강 공자! 이 일 년간 도대체 어디에 가 있
었소. 아마도 절세미녀를 만나 풍류여행이라도 떠났던 모양이구
려."
소어아는 싸늘한 눈초리로 그들이 떠들어대는 것을 보고 있었
고, 그들은 그를 상관하지도 않았다.
얼굴이 창백하고 녹색옷을 입은 한 소년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소어아를 바라보았다. 마치 개를 보듯 거만한 표정이었다.
"강형, 이 사람은 누구요?"
"이 친구? 아, 이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풍류를 즐길 줄 알고
가장 영리한 사람이며 어떤 여자라도 한 번 보면 미친다는 사람이
야. 그런것 같애?"
소년들은 일제히 웃어 버렸다. 소어아는 강옥랑이 갑자기 말투
까지 바꾸며 천대했으나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네 친구면 소개를 시켜줘야지!"
강옥랑은 눈알을 굴리면서 건들거렸다.
"인사 시켜주는 것도 좋지."
그는 녹색옷의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은 바로 형주총진장군의 공자이신 백능소 백 소협이야.
남들은 녹포영검객이라 부르지. 그의 삼십육로회풍검은 신출귀몰
하지."
소어아의 입가엔 알 수 없는 웃음이 번져갔다.
"과연 사람과 이름이 같군. 아름다운데."
백능소가 기분이 좋아 웃는 동안 소어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백 공자, 당신의 분을 빌려 나도 좀 멋을 낼 수 없을까요?"
백능소는 웃음을 돌연 그치고 안색이 붉어졌다.
소어아는 크게 웃으면서 다른 키가 큰 사람을 가리켰는데 그는
몸에 분홍색 옷을 걸치고 있었다.
"이 분은 누구지?"
"이 분은 강남제일가표국인 금사표국 총표두의 공자 이명생이
지. 남들은 홍삼금도라고 부르는데 그의 자금도에는 적이 없지."
소어아는 손벽을 치면서 말했다.
"과연 용모가 당당하고 위엄이 있군."
이명생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거드름을 피우려고 할 때 역시
소어아의 말이 이어졌다.
"난 이분 이 공자께서 돼지를 죽이는 사람인줄 알았지."
이명생의 부리부리한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 얼굴이 깨끗하고 분을 더욱 짙게 바른 사나이가 껄껄대며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그는 말을 할 때 엉덩이까지 흔들어 마치
여자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화석향이라 하오. 남들은 아버님을 옥면신판이라 부르지.
강호에 다니면서 아버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강옥랑이 그의 말에 덧붙여 입을 열었다.
"옥면심판인 송 대협은 무술이 뛰어날 뿐더러 지략이 출중한 사
람이지.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어. 어머니도 옛날에 강호에서
이름을 날렸던 협녀야. 그래서 이 사람은 어머니의 성을 땄지."
화석향은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입술을 씰룩였다.
"어머님 자랑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머님은 정말 훌륭한 여자
요."
그는 소어아가 자기에게선 결점을 찾지 못 하는 줄 알고 매우
의기양양해 했다.
소어아는 그를 한참 바라본 후 돌연 고개를 저었다.
"안타까운데."
"무엇이 안타깝다는 거요."
"화공자께서 무대 공연을 하지 않은 것은 일대의 손실이오."
화석향은 입을 찡그리며 다시 웃지를 못 했다.
또 마르고 키가 크며 작대기처럼 새긴 소년은 경연상구소의 하
관군으로 그는 바로 경공이 강남에서 제일인자인 귀영자 하무쌍의
아들이었다.
그는 강옥랑이 소어아에게 자기의 신분을 이야기하자 무슨 봉변
을 당할까 우려해서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며 딴전
을 피웠다.
마지막 소년은 작고 통통하게 생긴 사람으로 웃으면 두 눈에 빛
이 반짝였다. 이 다섯 사람 중에서 무술이 가장 뛰어난 듯 보였
다.
강옥랑이 그를 소개할 때 만큼은 정중히 예를 갖췄다.
"이분이 매추호 형이지. 지금 공동 장문인 일범대사 관산문의
제자이고, 그의 무술은 말할 필요도 없을 거야."
매추호는 크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과분한 칭찬이오. 감당치 못 하오!"
소어아는 무엇인가 시비를 하고 싶었지만 그의 눈에 악의가 없
고 기품이 온후한 것을 보고는 인사를 했다.
"많이 들었소."
하지만 그는 말을 마치자 눈을 돌려버렸다. 이 몇 명의 유명한
아버지를 둔 망나니 자식들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이 몇몇 사람들이 소어아를 쳐다보는 눈은 금방이라도 불이 터
질것만 같았다.
그때 돌연 한 애교있는 목소리가 험악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강옥랑! 난 당신이 어디가서 귀신이라도 된줄 알았어."
그들 곁에 다가오는 마차에서 한 소녀가 창밖으로 목을 내밀고
웃고 있었다. 그녀가 눈가에 눈웃음치는 것으로 보아 내력이 깊은
탕녀와 같아 보였다.
그 소녀의 모습은 꽤 아름다운 편이었으나 소어아는 그 방탕한
교태에서 구역질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나 강옥랑은 그녀를 보자
즉시 안색에 화기가 돌았다.
"손 소매,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서방질을 했느냐?"
손 소매는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양팔을 벌려 달려와서 강옥랑
의 품속에 안겼다.
"아! 이 못난 사람! 어디에 갔었어? 보고싶어 죽을뻔 했는데."
백능소는 손벽을 치면서 크게 웃더니 한마디 던졌다.
"우리의 옥랑형은 과연 풍류재가야......."
손 소매는 고개를 들어서 애교있는 목소리로 투정했다.
"봐요, 난 그간에 많이 말랐어......."
강옥랑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내가 왔으니 이제 더욱 마르게 될 걸."
손 소매는 허리를 흔들면서 애교를 떨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음탕스러운 표정이었다.
"음 싫어."
소년들은 박수를 쳤고 소어아는 탄식을 했다. 그가 만약 식사를
했다면 토했을 것이다.
손 소매가 소어아를 몇 번 보더니 큰소리로 물었다.
"어이! 당신은 누구지요? 그렇게 못마땅한 얼굴로 서 있으면서
왜 굳이 가질않고 있는 거요?"
"내가 갈 수만 있다면 왜 이렇게 있겠어!"
소어아는 차창에 기대어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손 소
매는 강옥랑의 품속에 묻혀 있었다. 소어아는 그녀의 화장품 냄새
가 역겨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참고 있었다.
화석향과 백능소도 자기의 마차를 타고 왔었지만 이때에는 모두
한차에 타고 서로 떠들어댔다.
(이놈은 악당이긴 하지만 저속하고 천박하게 되기엔 너무 꾀가
많은 놈이다. 하지만 지금 하는 꼬라지는 정말 목불인견이구나.)
소어아는 강옥랑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강옥랑은 추잡한 미소를 짓고 얼이 빠져 있어도 한쌍의 눈만은
빛을 내고 있었다.
그가 이처럼 저속한 행동을 하는 것은 다만 필요해서 하는 일일
뿐이었다. 그가 만약 저속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런 망나
니들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소어아는 강옥랑의 행동이 기가 막혀 웃어버렸다.
홍삼금기 이명생은 의기양양하게 채찍질을 하며 말을 몰았다.
한 길의 사람들은 마차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멀리서부터 피
해버렸다. 여자들은 더욱 무서워 했다.
손 소매는 마차 속에서 키들거리며 마치 흥분제를 먹인 암탉처
럼 계속 히죽거리며 웃었다.
소어아는 여전히 쓴웃음을 띠었다. 이것들이 바로 다음 세대의
무림인들인가?
손 소매의 눈이 정염으로 불탔다.
"오늘 난 정말 기분이 좋은데 다만 안타까운 것은......."
화석향이 눈을 한 번 찡긋하며 뒷말을 이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불청객이 하나 생겼다는 것이지? 그렇지?"
"그래요. 난 이렇게 구역질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
"아니, 본적이 있을 걸? 지난 번 우리가 춘향원에서 본 그 아가
씨가 삼백 근 가량의 엉덩이를 흔들면서 바라지도 않던 능 소형의
품 속에 뛰어 든 것이 이분과 비슷하지 않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크게 웃어 제꼈다. 그러나
소어아가 누구 보다도 재미있게 웃는 것을 보자 그들은 일제히 웃
음을 그쳤다.
손 소매가 다시 말을 걸어 왔다.
"정말 이상한데, 이 사람은 대체 그 비위가 어떻길래 여기에 계
속 앉아있지? 내가 그라면 벌써 한 손을 자르고 더 이상 여기서
지체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소어아는 점잖게 말을 받아 넘겼다.
"이 분 강공자도 다를 것이 없소. 그는 돼지 소굴에서 삼 년을
살 용의는 있어도 손을 짜르지는 못 할 거요."
마차 안에 있던 눈들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금방이라도 불이
튈 것 같았다. 그러나 소어아는 태연자약했다. 그는 그들이 다만
조롱만을 할 뿐 손을 쓸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강옥
랑이 그의 손목과 연결되어 있는 한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 손을
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강옥랑은 소어아의 재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에 함부로 모험을 할 수가 없었다.
소어아가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하긴 지금도 돼지우리에 있는 것이지."
손 소매 등 마차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져
갔다. 그러나 강옥랑과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감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강옥랑은 온통 물 속에다 몸을 담구고 눈을 감은 채 입 속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소어아는 통 밖에서 한 손은 통에 걸치고 매우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총진의 아들 녹포미검색 백능소는 맞은 편에 앉아서 탁자 위로
두 다리를 걸치고 의자를 흔들흔들 하면서 말을 건넸다.
"옥랑 형, 나의 목욕통이 어떻소?"
강옥랑은 눈을 감은 채 말을 받았다.
"정말 좋군."
"이 목욕통은 우리 집 늙은이의 부하가 동영에서 가지고 온 것
인데 풍여(風呂)라고 부르는 것이오. 동영 사람들은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은 무덤덤한 편이나 단 한 가지 목욕하는 것은 매우 중요
하게 생각한다오. 목욕하는 것이 그들의 최대 행복이지."
강옥랑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자 애교있는 웃음 소리와 함께
두 명의 아름다운 소녀가 신도 신지 않은 채 요염한 모습으로 수
건을 가지고 와서는 그의 몸을 닦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손으로
그의 붉은 육체를 어루만지자 온 몸이 나른해져 왔다.
강옥랑은 혈색이 붉어졌다.
"이거...... 이거."
백능소가 뒤에서 소리쳤다.
"이것도 동영의 습성이지. 여자가 등을 닦아 주지 않으면 그건
목욕이 아니지."
소녀들은 그에게 흰색의 옷을 입혔다. 강옥랑은 기분이 매우 좋
은 듯 연신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길게 허리를 편 후 농담을 걸었
다.
"이렇게 목욕을 한다면 난 매일이라도 하겠소. 몸이 너무 가쁜
한데. 체중이 열 근쯤 줄어든 것 같군."
"난 열 근쯤 무거워진 것 같은데."
소어아의 투정 섞인 말이었다.
"미안해. 여기 주인은 당신을 초대할 뜻이 없는 모양이야. 목욕
을 하고 싶으면 밖에 나가서 하지. 내가 같이 가줄지는 모르겠지
만."
"목욕을 하고 싶으면 손을 자르고 나가서 해야한단 말이지?"
"알고 있군."
"하지만 난 목욕을 하지 않아도 파렴치한 자식들 보다는 깨끗하
지."
백능소는 소어아의 말에 분노했다.
"누구를 말하는 거야?"
"당신이 비겁하고 파렴치한 사람인가?"
"개소리!"
"만약 아니라면 난 딴 사람을 욕하는 것인데 왜 당신이 화를 내
지?"
이때 애교있는 손 소매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강옥랑, 목욕탕에서 죽었어요? 빨리 나오지 않고 뭘해요. 어서
나와서 식사를 해요. 화석향이 옥루동에서 준비를 하고 있어요."
"옥루동! 장사의 그 준루동 분점인가?"
"그래요."
"아! 옥루동이라. 군침이 넘어 가는 걸."
옥루동의 '밀즙화퇴'는 정말 유명했다. 사람들은 유쾌한 듯 탁
자에 둘러 앉아 음식을 들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매우 불쾌했다. 그가 젓가락을 내밀자 백능소
가 음식그릇을 치워버렸다.
화석향이 곁에 앉아 있다가 한마디 거들었다.
"난 당신은 초대하지 않았소."
"뭘 먹고 싶으면 손을 자르고 나가야 한단 말이지?"
백능소가 다시 크게 웃어제꼈다.
"당신은 정말 영리하군!"
소어아는 그들이 유쾌히 먹고 마시는 것을 보며 얼굴에는 웃음
을 띠고 있었지만 배 속에서는 밥벌레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화석향이 그를 바라보면서 빈정댔다.
"내가 당신이라면 상 밑에 들어가 보겠어......상 밑에는 어쩌
면 고기덩어리가 몇 점이라도 떨어져 있을 런지 몰라. 여기 앉아
서 군침만 삼킬 필요가 있겠어?"
그러나 소어아 성질에 그 말을 듣고 고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내가 만약 불남불녀처럼 생겼다면 오줌통에 들어가 빠져 죽어
버리겠어. 창피스럽게 살지는 않겠어!"
화석향이 상을 치며 노했다. 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당신 누구를 욕하는 거요?"
"당신이 불남불녀란 말이오? 그렇지 않다면......."
이때 돌연 층계를 밟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몇 명의 사람
들이 큰 걸음으로 이층으로 올라왔다.
그 사람들은 모두 사오십 세의 나이로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
었으며 위엄있는 모습으로 보아서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화석향, 이명생, 하관군...... 이 망나니 자식들은 이 몇 사람
을 보자 모두 황급히 일어서면서 고개를 숙여 얌전하게 예를 차렸
다.
"스승님."
"아버지."
소어아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음, 그들의 어른들이 왔구나, 정말 큰일났군.)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들의 제자나 자식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히려 소어아의 앞에 다가와 공경히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강어, 강 소협이 아니신지요?"
이렇게 되자 소어아는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눈을 깜박거
리며 대답했다.
"바로 그렇소."
앞에 있던 반백 수염의 중년 사나이가 손짓을 하면서 소리쳤다.
"종업원, 빨리 술과 안주를 차려와라. 내가 강 소협을 대접해야
하니까."
화석향, 백능소 등은 모두 넋을 잃고 말았다.
소어아는 그 반백의 수염에 눈이 맑은 중년 사나이가 바로 화석
향의 아버지인 옥면신판이라는 것을 알았다.
비단 옥면신판만이 아니었다. 귀영자 하무쌍, 금사 이적도 모두
와 있었다. 이 성내의 무림대가들은 모두 온 것이었다.
소어아는 한 상의 밀즙화퇴를 다 먹어치운 후 배가 부르자 슬슬
농을 걸기 시작했다.
"자식들은 나를 개똥으로 취급하는데 아버지들은 이처럼 후대하
니 어떻게 된 일인지 말 좀 해줄 수 없겠소?"
옥면신판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자식들의 무례한 행동을 강 소협은 용서하오!"
그 말에 이어 마르고도 긴 얼굴에 안색이 새파란 귀영자 하무쌍
이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한 무림 선배님의 부탁으로 강 소협에게 주인의 의무
를 다하는 거요."
"그가 도대체 누구요?"
옥면신판이 그 말을 받았다.
"강 소협은 정말 모르오?"
"내가 아는 것은 그도 코가 하나고 눈이 두 개라는 것뿐이오."
옥면신판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분 선배는 우리에게 비밀을 지키라고 하셨소. 그것은 강 소
협의 보답이 있을 것을 우려해서요."
"안심 하시오. 난 보은을 모르오. 복수라면 가능하지만, 복수도
너무 복잡해서 그만 두기로 했소."
"강호의 사람들 누구나가 강 소협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다면
고금 이래의 새로운 풍토가 개척되어 정말 복된 사회가 될 것이
오......."
"이제 그가 누구인지 말을 할 수 있겠소?"
"아미장문, 신석도장이오."
소어아는 상을 치며 중얼거렸다.
"알고보니 그 사람이로군..... 그 사람이 나를 잊지 않
고......."
그는 강옥랑의 손을 치면서 빙그레 웃었다.
"이것을 생각 못 했지?"
"네."
"재미있어. 아미장문이 나의 보호인이라, 하하......."
수일 동안의 의혹을 모두 알게 되었다. 양껏 마시고 싫도록 먹
었다. 옥면신판, 귀영자 등도 함께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으나
그 누구도 젓가락을 들지는 않았다.
강남대협(江南大俠)
소어아는 젓가락을 놓고 배를 매만졌다.
"배야, 배야, 오랫만에 너를 만족하게 해주었구나."
옥면신판이 물었다.
"더 안 드시겠소?"
"너무 먹어서 목구멍까지 찼소."
"과일을 조금 더 먹는 것은 어떻소?"
"먹고 싶지만 배가 환영하지 않을 것 같소."
옥면신판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난 일단 신석도장의 부탁을 어기지 않고 의무를 다한
것이오."
소어아는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당신의 말 중에는 다른 할 말이 숨어있는 것 같은데......."
옥면신판이 갑자기 안색을 바꾸며 싸늘하게 말했다.
"신석도장이 부탁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다했소.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당신의 목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방 안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러나 소어
아는 조금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나의 목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영광이오. 누가 나
의 목을 필요로 하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당신은 그가 하나의 코와 두 개의 눈이 있다는 것만 알면 되
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강옥랑 등 망나니들은 모두 희색이 만면했
고, 귀영자 등 사람들은 살기가 감돌았다.
소어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 정말 당신들에게 목을 바치게 되겠군...... 밀즙화퇴 한
그릇에 나의 목을 주는 것은 너무 값이 싼데......."
금사 이적이 '창'하는 소리를 내면서 허리의 자금도를 꺼내 들
었다.
"내가 부끄럽게도 어린 놈에게 손을 쓰게 되는구나."
"그럴 필요 없소. 당신 칼이 잘 드는지 모르겠구려. 그 칼이 단
한번에 목을 날릴만 하다면 빌리고 싶소."
금사 이적은 미친 듯이 웃었다.
"죽기 전까지도 농담하는 것을 보니 아주 간이 큰놈이구나. 좋
아, 칼을 빌려주지."
그는 손을 쳐들어 자금도를 탁자에 박아버렸다.
소어아가 손을 내밀어 칼을 잡으려 하자 방 안에 있던 시선들이
그의 손에 집중됐다.
옥면신판은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품속에서 판관필을
꺼내 그 교묘한 무기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손가락으로 칼을 만지작거릴 뿐 뽑지는 않았
다.
옥면신판이 기다리다 못해 입을 열었다.
"왜 뽑지 않지? 넌 칼을 뽑아서 나를 찌를 수도 있고 또 강옥랑
의 목에 대어 우리를 협박할 수도 있을 텐데......."
그는 크게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너는 절대로 자살할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
이적이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칼을 뽑지 못 하지? 칼을 뽑게 되면 더욱 비참하게 죽게 된
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지?"
소어아의 손은 식은땀이 축축히 흐르고 있었다.
옥면신판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을 뱉았
다.
"더 이상 마음 졸이지 않고 빨리 죽게 해주마."
그의 판관필이 소어아의 '천돌혈'을 향했다. 천돌혈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죽음의 혈로 보통 사람의 주먹에 얻어 맞아도 치료
하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더군다나 이 점혈의 명가가 수중의 순강
판관필로 점하게 되면 일격에 목숨을 잃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
다.
소선녀, 모용구매 등은 소어아에게 미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
다. 그래서 소어아는 그들의 감정을 이용하여 기지로서 그들의 손
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무결공자, 소미미 등도 보통 사람과는 틀리게 이상한 괴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소어아가 어려움 속에서도 그 괴벽을 이용
하여 살아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옥면신판은 기지와 무술은 비록 그 사람들보다 뒤떨
어졌지만 소어아를 죽이려는 마음 이외에는 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소어아는 오히려 마땅히 쓸 계책이 없었다. 번쩍번쩍 빛
나는 판관필이 그의 목을 향해 지쳐들어왔다. 소어아는 그것을 보
면서 만약 운좋게 첫번째 공격을 피한다 해도 두번째는 시원하게
날아와 목에 적중 하겠구나 하고 망연히 서 있었다.
판관필이 막 그의 목을 찌르려는 순간, '딩'하는 소리가 나면서
하나의 술잔이 창밖에서 날아 들어와 판관필을 때렸다.
옥면신판은 크게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무서운 소리로 소
리쳤다.
"누구냐?"
교교히 떠오른 달빛을 등에 받으며 맞은 편 건물 지붕에 한 사
람이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사람은 머리가 헝크러져 있었으며 손에는 큰 술단지를 들고
있었지만 그 기상은 늠름하였다. 그는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에 커다란 술단지가 그의 얼굴을 가려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
다.
그러나 소어아는 빙긋이 웃음을 띠웠다.
(이 사람이 왔으니 재미있어 지겠는데.)
돌연 옥면신판이 술잔을 하나 집더니 그 사람의 가슴을 향해 날
렸다. 그는 어느 누구든 그 술잔에 맞으면 몸에 구멍이 날 것으로
자신하였다. 그러나 술잔은 그 사람의 몸에 맞자 '쨍'하는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아무 요동이 없었다.
옥면신판은 안색이 파리하게 변해갔다. 옥루동 안에 있던 사람
들은 모두 긴장을 하며 검을 빼들고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이때 귀영자 하무쌍의 몸이 어느 사이엔가 허공을 날라가고 있
었다. 이 사람은 경공이 강남제일(江南第一) 이라 하더니 과연 보
통이 아니었다.
그가 공중에서 손을 휘젓자 날카로운 빛을 번쩍이며 수십 개의
암기가 날았다. 그러자 맞은 편 사람은 돌연 웃으면서 입 속에서
무엇인가 은빛의 물건을 내뱉었다. 그것은 난무하는 암기들을 쳐
내며 하무쌍의 몸을 쫓았다.
이에 놀란 귀영자 하무쌍은 날아가던 몸을 뒤로 젖히며 급히 방
향을 틀다가 '펑'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 은빛은 그제서야 사방으로 번져 튀었다. 옥면신판은 술냄새
가 풍기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오직 한 모
금의 술이었다.
그가 한 모금의 술로 하무쌍을 격퇴시키자 사람들은 모두 안색
이 변했다. 그러나 백능소 등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들은 즉각 칼
을 휘두르며 달려들려고 했다.
이때 '퍼버벅' 하는 소리가 나면서 창을 넘어서던 사람들이 얼
굴을 감싸쥐고 쓰러졌다. 모두 따귀를 얻어맞은 것이었다.
맞은 편 건물 지붕에 있던 그는 언제 움직였는지 이미 하무쌍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왼손에는 여전히 술단지를 들고
오른손엔 몇 자루의 칼을 쥐고 있었다. 그 칼들은 바로 백능소 등
창을 넘어 몸을 날리던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 사
람의 손에 칼이 넘어갔는지 어느 누구도 알지를 못 했다.
강옥랑은 이 사람을 보자 얼굴에 조금의 혈색도 남지 않고 백지
장 같이 하얗게 변했다.
'꿀꺽꿀꺽' 몇 모금의 술을 마신 그 사나이는 큰 칼로 탁자를
치면서 입을 열었다.
"아비가 왔으면 술과 안주를 준비해야지!"
이적 등 사람들은 이런 모욕을 당하자 입술을 깨물며 안색이 창
백해졌다. 게다가 방금 그들의 아들들이나 제자가 바로 그에게 봉
변을 당하지 않았는가. 옥루동 안은 무서운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
다. 하지만 옥면신판은 계산이 빨랐다. 이 사람의 내력을 알기 전
에 자기 일행이 실수를 저지를까봐 불쑥 앞으로 나서며 예를 올렸
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뉘시오? 왜 무단히 사람을 해치는 거요?"
그 사람은 힐끗 쳐다보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듯 말했다.
"당신은 뭐야?"
"나는 소자춘이오. 강호사람들은 나에게 옥면신판이라 부르오."
"옥면신판! 멋있는 이름인데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군."
그는 웃음소리와 함께 수중에 있던 검들을 소자춘에게 넘겨 주
었다. 그런데 옥면신판이 칼을 받으려 손을 내밀다 보니 어느새
자기의 수중에 있던 판관필이 상대방의 손에 들어가 있는게 아닌
가?
그 사람은 술단지를 상에 놓고 싸늘하게 웃으면서 또 입을 열었
다.
"내가 이야기 하나 해줄 테니 들어보겠나?"
옥면신판은 입술까지 하얗게 질리었다.
"나...... 소인......."
"옛날에 병신이 하나 있었어. 어디서 화살을 구해왔는지 그것으
로 순조롭게 많은 참새들을 잡을 수가 있었지. 그런데 남들이 그
에게 칭찬을 하자 그가 무어라고 했는지 알아?"
사람들은 그가 돌연 옛이야기를 하자 무슨 의도인지 판단을 하
기가 어려워 장단을 맞출 수도 없었다.
"활이 자기 이름 만큼 예쁘면 더 많은 참새를 잡을 수가 있다는
거야. 그래서 그는 활에다가 이것저것을 조각했지...... 그후 어
떻게 됐는지 알아?"
"그후 그는 이름을 더 날렸겠죠."
그 사람은 피식 웃고는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틀렸어...... 그후 그가 다시 참새를 쏘게 되자 조각이 되어
있어서 약해진 활은 부러지고 말았어."
그는 그 이야기를 마치며 양손을 들었다. 순간, 수중의 판관필
이네 토막으로 부러져 땅에 떨어졌다.
그것을 본 옥면신판은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다 못해 푸르죽죽
해졌다. 병신 취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목숨처럼 아끼던 판관필
을 잃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무공을 생각하자 어쩔 도리가 없어
이를 악물고 모욕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금사이적은 더 이상 못 보겠다는 듯 칼자루에 손을 얹으
며 앞으로 나섰다.
이때 강옥랑이 재빨리 그의 소매를 끌어당기더니 몇 마디 귓속
말을 건넸다.
이적은 즉각 안색이 변하며 더듬거렸다.
"당신...... 당신이 바로 악도귀(惡賭鬼) 헌원삼광이오?"
헌원삼광은 싸늘하게 웃으며 아무소리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는 탁자에 박혀있던 자금도를 뽑더니 옆에 있던 굵은 양초가 켜져
있는 탁자를 내리찍었다. 그런데 아무 변화가 없었다. 다만 허공
을 가르는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한 번 났을 뿐이었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쉴 즈음
탁자 위의 양초가 서서히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이어 촛대
와 탁자까지 반 토막이 되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이것을 본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흙색이 되어 버렸다.
"아비가 왔는데 아직까지 술상을 준비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넋이 빠진 듯 멍하니 서서 두 토막이 난 탁자
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이적이 탁자를 치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왜 술을 올리지 않느냐?"
종업원들은 이적의 말이 떨어지자 큰소리로 '네'하면서 부산히
달려내려갔다.
잠시 후 탁자에는 술과 안주가 차려졌다. 소자춘, 이적 등은 술
병을 잡고 헌원삼광 앞으로 다가섰다.
헌원삼광은 눈알을 부라렸다.
"누가 너희더러 술을 따르라고 했느냐?"
그는 술병을 들더니 소어아와 강옥랑에게 각각 한 잔씩을 주었
다. 소어아는 웃는 표정으로 술을 받았으나 강옥랑은 놀란 얼굴이
었다.
헌원삼광이 술잔을 들고 한마디 했다.
"마셔!"
소어아는 단숨에 마셔 버렸다. 강옥랑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술잔을 놓자 헌원삼광이 그를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너는 이 술이 무슨 술인지 아느냐?"
강옥랑은 어물거렸다.
"전...... 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도박의 술이라 하지. 누구든 나의 술을 마시면 나와 도
박을 해야 돼."
강옥랑은 놀란 나머지 술잔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러나 제가......."
"왜 도박을 하기 싫은가?"
"하죠...... 하죠...... 해야지요......."
그는 혀까지 굳어 말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좋아, 나는 너의 팔을 도박에 걸겠다."
강옥랑은 양다리의 힘이 빠지면서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주
저 앉았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소어아는 웃으면서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뭐가 두려우냐? 반드시 진다는 보장은 없어."
"난...... 제가......."
헌원삼광은 눈알을 부라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똑바로 앉아서 말해라. 무슨 도박을 하겠느냐?"
강옥랑은 겁에 질려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소자춘
등을 바라보았지만 그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강옥랑은 완전히 눈에 빛을 잃었다.
"선배...... 선배께서......."
이때 하나의 사람이 창문을 통해서 날아 들어왔다.
"헌원 선생께서 도박을 하고 싶다면 제가 해드리겠소. 이런 아
이들과 하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겠소?"
소어아가 고개를 돌려보니 하나의 파란옷을 입은 수사(秀士)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왔다.
그 사람은 매우 훤칠한 풍모에 이미 중년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여전히 여자들이 항거할 수 없는 매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소어아는 강호에 발을 디딘 후 무
결공자 외에 이토록 멋있는 사람을 아직 본 적이 없었다.
옥면신판은 그가 온 것을 보자 한숨을 내쉬면서 기쁜 표정을 감
추지 못 했다. 그리고 강옥랑은 기뻐서 날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헌원삼광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그의 몸을 훑었다.
"너는 누구냐?"
"저는 강별학이오."
헌원삼광의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당신이 연남천(燕南天) 후의 강호 일인자란 사람인가?"
"그건 친구들의 말일 뿐이오. 제가 무슨 자격으로......."
헌원삼광은 강옥랑을 가리키면서 재차 물었다.
"저놈이 당신의 아들이오?"
"그렇소."
헌원삼광은 고개를 저으면서 탄식 비슷한 소리를 냈다.
"아들과 아버지......."
그러더니 다시 탁자를 치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저놈이 당신의 아들이니까 당신이 대신 나와 도박을 하겠다는
거요?"
"헌원 선생께서 흥미가 있다면 해 보겠소."
"당신과 도박을 하는 것도 기쁜 일이오."
"헌원 선생은 어떻게 도박을 하겠소?"
헌원삼광이 약간 생각을 하더니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과 나, 두 사람 중 누가 지든 간에 상대방에게 처분을 맡
깁시다."
이번 말이 나오자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강호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때에 따라 생명도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검으로 먹고 살겠는가. 그래
서 목숨을 걸고 도박하는 일도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상대방의 처분에 맡긴다'는 말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내기에 진다면 상대방이 어떤 수치스러운
요구를 하더라도 그것을 참아 낼 수밖에 없으며 죽음보다 더한 고
통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설사 자신이 수치를 이기지 못 해
자살을 하려고 해도 강호의 도리상 그 요구는 이행을 한 후 자살
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강별학이 절대로 승락하지 못 할 것으로 생각했
다. 그러나 그는 담담히 웃으면서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게 해도 좋소. 그럼 어떤 방법으로 내기를 할지 말씀하시
오."
헌원삼광은 그가 이토록 쉽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
치 못 했다. 술 병을 들어 몇 모금 마신 후 입을 쓰윽 문질렀다.
"좋아, 강 대협은 과연 틀리군. 당신이 결정하시오."
"헌원 선생, 너무 칭찬마오......."
"도박의 방법은 당신이 결정하시오. 이것은 나의 규칙이오!"
"정 그렇다면 그 뜻에 따르겠소."
그는 실내를 살펴보더니 국이 남아있는 그릇 하나를 가져와 탁
자 한가운데 놓았다. 헌원삼광이 이상한 듯 물었다.
"이건 또 뭐야?"
"탁자를 두들겨서 이 그릇의 국을 튀게 하거나 그릇을 떨어뜨리
는 사람이 진 것으로 하겠소."
헌원삼광이 크게 웃었다.
"이건 쉬운데!"
그는 손을 내밀어서 탁자를 가볍게 한 번 쳤다. 물론 그릇의 국
물은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이런 방법은 내년까지 해도 결판이 나질 않을 거요. 당신은 나
를 희롱할 셈인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오. 이렇게......."
강별학은 이런 말을 하며 상을 지그시 내려쳤다. 순간 그 딱딱
한 나무 탁자가 그의 손 밑에서 마치 두부처럼 뚫려버렸다.
그의 손은 탁자를 뚫었지만 탁자 위에 그 국이 담아있는 그릇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강별학은 미소를 띠우면서 말했다.
"단 일장으로 탁자를 뚫어야 하오. 두 사람이 모두 그릇을 넘어
뜨리지 않으면 탁자에 난 손자국이 적은 사람이 진 것이오."
사람들은 모두 이런 장력에 놀라 버렸다. 모두가 탄성을 발했고
소어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이런 장력을 일찍이 본 적이 없
었다.
헌원삼광은 안색이 변해서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중얼거렸다.
"이런 방법은 정말 보지를 못 했는데."
"나는 이미 한 번을 내리쳤으니 이제 헌원 선생의 차례요."
"나 악도귀는 평생 작고 큰 도박을 천 번 만 번을 했으나 종래
도박을 하기도 전에 진 것을 승인한 적은 없었소......."
그는 돌연 하던 말을 멈추고 눈을 들어 강별학을 바라보며 체념
하듯 말했다.
"이번에...... 나의 장력은 탁자를 뚫을 순 있어도 그릇에서 국
물이 튀지 않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안도의 빛을
띠었다.
소어아가 한 걸음 나서며 헌원삼광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 당신이 진짜 졌소?"
"지면 진 것이지 가짜 진짜도 있나?"
그는 씁쓸한 웃음을 띠우고 재차 입을 열었다.
"이제 당신은 날 어쩔 셈이오. 말하시오."
강별학은 앞으로 다가와 술병과 잔을 들어 올렸다.
"제가 헌원 선생에게 한 잔 드리겠소."
헌원삼광은 술을 받아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리고는 술잔을 탁
자에 '탁'소리가 나게 놓더니 무서운 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헌원삼광의 행사는 당신에게 달려있소. 어서 말하시
오."
강별학의 비밀
강별학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제가 헌원 선생께 요구한 일은 헌원 선생께서 이미 이행하셨
소! 헌원 선생께선 진 조건을 완전히 치루었는데 왜 아직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헌원삼광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잠시 동안 머뭇거리더니 엉거
주춤 하게 입을 열었다.
"당......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계시는 것이오?"
"패하는 자는 어떤 처벌이라도 받겠다는 것이 우리의 내기가 아
니었오? 내가 헌원 선생께 주는 벌은 바로 그 한 잔의 술을 마시
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헌원 선생께서 이미 그 술을 마셨으니 우
리의 약속도 끝나지 않았소?"
헌원삼광은 한참 동안이나 넋을 잃고 있더니 조용히 뇌이었다.
"나를 죽인다면 강호의 사람들이 필시 당신을 존경할 것이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나에게 강호의 희물을 구해오라 해도 나는 구
해올 수밖에 없었는데, 하지만......."
헌원삼광은 길게 한숨을 토해낸 후 쓰디쓰게 미소를 지으며 다
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나에게 주는 벌칙이 기껏해야 한 잔의 술을 마시게 하
는 것이라니......."
"내가 돈만 많았다면 더욱 많은 술을 권할 텐데......."
헌원삼광은 술병을 들어 단숨에 모두 마셔 버린 후 입을 닦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앙천대소했다.
"좋소! 과연 강 대협 답군요! 나 헌원삼광은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누구에게 굴복하거나 누구를 존경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 만
큼은 강 대협에게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소!"
말을 마치자 그는 소어아의 앞으로 걸어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
다.
"이 녀석아, 이젠 네 일에 더 이상 참견할 수가 없구나. 그러나
강 대협께서 이곳에 계시니 저 녀석들이 감히 너를 더 이상 괴롭
히지는 못 할 것이다. 그럼 나는 이만 가야겠다...... 잘 있거
라!"
그의 입에서 '잘 있거라'라는 말이 떨어질 즈음엔 그의 몸은 이
미 창문밖으로 나가 있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
고 말았다.
이때 달은 이미 중천에 떠올라 있었고, 창문 밖에서는 차가운
밤 바람이 쌀쌀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강별학은 헌원삼광이 사라진 어둠 속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더니
중얼거렸다.
"과연 사내 대장부다운 인물이로구나!"
옥면신판 소자춘이 웃음 띤 얼굴로 한 걸음 나섰다.
"저 사람은 십대악인에 속하는 사람인데 강형께서 왜 이 기회에
그를 없애지 않았습니까? 이 기회가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그는 강별학을 형이라고 불렀지만 표정은 제자가 스승을 대하는
것보다 더욱 공손했다.
강별학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저토록 영웅다운 인물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소? 소형께서는
어찌 함부로 없애 버린다는 말을 하시오! 더군다나 그 사람은 도
박을 즐기는 것 외에는 별로 나쁜 짓을 한 적도 없지 않소?"
소자춘은 이러한 핀잔 섞인 말을 듣자 즉시 고개를 숙이며 얼굴
을 붉혔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또한 그런 내기에 지고도 깨끗이 승복하는 그런 성미가 이 세
상에 몇이나 있겠소?"
이 때 소어아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헌원삼광이 당신의 말을 듣지 못 한 것이 매우 애석하군. 만약
그가 그 말을 들었다면 감격하여 눈물마저 흘렸을 것이오."
강별학은 이 말을 듣고는 그에게 눈길을 돌려 위아래로 훑어보
더니 불쑥 물었다.
"공자도 나의 이 못된 자식의 친구요?"
"친구라는 말이 실로 저로서는 감당하기 어렵군요."
"나의 자식이 너무 못돼먹었으니 공자께서 많이 보살펴 주셨으
리라고 생각하오."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의 그 못됐다고 하는 자식을 보살펴 주기는 커녕 당
신의 그 못됐다고 하는 자식이 도리어 저를 너무나도 잘 보살펴
주어서 죽을 지경이오. 만약 제가 명이 길지 않았다면 당신의 그
못됐다고 하는 자식 덕분에 목이 벌써 달아났을 것이오."
강별학은 강옥랑에게 눈길을 돌려 험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네가 또 무슨 되지 못 한 짓이라도 했단 말이냐?"
"제가 어찌 허튼 일을 저지르겠습니까?"
입으로는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몸은 떨고 있었다.
강별학은 여전히 대노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네 얼굴을 보니 이미 좋지 않은 짓을 범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번에 집에 돌아가면 오랫동안 근신하도록 해라. 잘못을 저질렀다
고 생각되면 기꺼이 그 벌을 받는 것이 사내 대장부로서 행해야
하는 도리다. 알겠느냐!"
강옥랑은 고개를 더욱 더 낮게 숙이고 또한 더욱 더 떨리는 음
성으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소어아는 보라는 듯이 수갑을 찬 손을 쳐들며 입을 열었다.
"그가 반성을 하는 동안 나도 반성을 좀 해야 되겠소."
이때 강별학의 눈길이 그들 손에 차고 있는 정쇄(情鎖:수갑)에
머물렀다.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까짓 사파(邪派)의 물건쯤은 내가 충분히 열 자신이 있으니
나를 따라 오너라......."
"저도 당신을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이곳에 계신 분
들이 모두 저의 생명을 노리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강별학은 잔뜩 눈썹을 찌푸렸다.
"누가 너의 생명을 노리고 있단 말이냐?"
"여기있는 강호에 이름을 날리는 영웅호걸들이지요. 칠팔 명이
나 되는 영웅들이 나 하나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니 저에게 이보다 더욱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강별학은 사방을 두루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소자춘, 이적 등은 심지어 귀 밑까지 빨갛게 붉히고 있었
다.
강별학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내가 보충해 주마."
이때 창 밖 먼 곳의 어둠 속에서 갑자기 한 곡조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강 대협은 수단이 높아 사탕 속에 독약을 넣네. 먹을 때는 달
콤하기 짝이 없지만 뱃속에 들어가면 불 같이 타오르니 이 보다
더욱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천하의 영웅들이 모두 그에게 속고
있으니......."
이적이 대노하여 외쳤다.
"누구냐? 감히 강 대협을 모욕하다니. 빨리 추격합시다......."
강별학은 전혀 표정이 변하지 않고 다만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
를 말렸다.
"사람이 유명해지면 욕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오. 불행하게도
내가 유명해졌으니 욕을 먹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그러니
굳이 우리가 쫓아 갈 필요조차 없지 않겠소?"
"나 소어아는 누구에게도 탄복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 만큼은 당
신에게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강별학이 살고 있는 곳은 너무 초라해서 친히 방문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결코 믿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집은 귀산(龜山) 아래
자리잡고 있는 매우 큰 장원이었다. 그러나 그 장원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려진 듯이 보였다.
강별학은 바로 그 속에 있는 한 낡아빠진 집을 자기의 거처로
삼고 있었다.
집안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장식품은 아무 것도 없었
다. 심지어 표국에서 심부름 하는 심부름꾼의 집도 이것보다는 나
을 정도였다.
집안의 하인도 단지 한 명 뿐으로 귀도 먹고 말도 못 하는 벙어
리 늙은이가 고작이었다.
장원에 들어서자 소어아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별학은 그의 놀라는 표정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
다.
"이 집은 원래 나의 친구인 제갈운(諸葛雲)이란 사람의 것이었
는데 그가 다른 곳에 이사를 가면서 이 집을 나에게 넘겨 주었지.
애석하게도 내가 이 집의 옛모습을 유지하지 못 하고 있으니 친구
를 대할 면목이 없는 걸."
"하지만 당신의 명성과 지위면 충분히 이 장원을 더욱 빛낼 수
있지 않겠소?"
"강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대개 돈벌이를 할 줄 모른다. 나
도 그 예를 깨뜨리지 못 했지. 만약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명예
롭지 않은 뇌물을 받는다면 지하에 계신 부모님을 대할 면목이 없
지 않겠나?"
"그러나 강 대협의 친구들이......."
"물론 친구들 중에서 이 집을 꾸며 주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
유 없이 남의 호의를 받을 수 없기에 사양했지. 더군다나 나는 이
미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서 이것을 도리어 낙이라고 생각하고 있
다."
소어아의 입에서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천하에 이름을 떨친 강남 대협이 이토록 검약한 생활을 하고
있다니. 당신 만큼 이름을 떨친 사람들 중에서 이토록 검소한 생
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 무림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
오."
강별학은 고개를 돌리며 정색을 했다.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검약한 생활에서 낭비하는
생활로 빠지기는 쉬워도, 낭비하는 생활에서 검약한 생활로 들어
가기는 힘들다고 했지! 나는 단 한 번도 그 말을 잊은 적이 없
어."
"당신은 실로 진실한 군자이군요."
잠시 후 밥상이 올라왔다. 그것 또한 반찬이 서너 가지 밖에 되
지 않는 초라한 밥상이었다. 밥상을 올리고 밥을 담는 것도 모두
강남무림을 영도하는 맹주인 강별학이 친히 하는 일이었다. 이러
한 생활과 그의 높은 명성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식사를 하던 중 강별학은 눈빛을 반짝이며 소어아를 잠시 동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보면 볼수록 고인이 된 나의 은형 한 분과 매우 닮
았다고 생각되는구나."
"그분은 누구입니까?"
강별학은 한숨을 내쉬더니 잠시 옛날의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그는 강호 역사상 가장 친절하고 품위가 있으며 또한 매력이
있다고 소문난 미남자였지. 내가 내 아들의 이름을 '옥랑'이라고
지어준 것도 바로 그 분을 기념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었어."
"강 대협은 제가 친절하고 품위가 있고 또한 매력있는 미남자로
보입니까? 만약 당신 눈에 제가 그렇게 보인다면 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전부 친절하고 품위가 있는 미남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
오."
"너는 친절하지도 않고 고귀한 품위도 없을런지 몰라. 그러나
너에겐 확실히 사람을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만은 틀림
었는 사실이다. 특히 네가 웃을 때 그 미소를 보고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소녀는 없을 것이야."
소어아는 껄껄 웃었다.
"나도 제발 당신이 말한 것처럼 미남이고 매력있는 남자이길 바
라오. 또 당신이 말한 그 사람의 아들이였었으면 얼마나 좋았겠
소. 그러나 애석하게도 저의 아버님은 저 처럼 총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절대로 미남자라고는 할 수 없소. 더구
나 그는 지금쯤 의자에 앉아 담배나 피우며 졸고 있을 것이오."
식사를 마치자 강별학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우고 입을 열
었다.
"피곤할 테니 이제 그만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그리고 곧 강철
을 나무처럼 벨 수 있는 보검을 구해 너희 정쇄를 풀어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있거라."
강옥랑과 소어아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 일어서서 나왔다.
소어아와 강옥랑이 복도를 걷자 곧 내려앉을 것처럼 삐그덕거리
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창 밖에서는 나무잎사귀를 스
치는 바람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와 음침하고 황폐한 장원의 분위기
를 더욱 고조시켰다.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제아무리 배짱이 좋은 사람이라도 이곳에서 살게 된다면 미치
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군."
강옥랑이 말했다.
"걱정마! 너는 이곳에서 십 년을 살 필요가 없으니까."
소어아는 웃으며 말을 받았다.
"말을 할 줄 아는군. 아버지 앞에선 한마디도 않더니. 나는 네
가 갑자기 벙어리가 된 줄 알았지."
"우리 아버지 앞에서 너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몇 안
될 것이다."
소어아는 어두컴컴한 뒷뜰을 바라보며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너는 뒷뜰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느냐?"
"한 번 있었지."
"이곳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살았는데 단 한 번 밖에 들어가지
않았단 말이야?"
"그런 곳엔 귀신도 들어갈 용기가 안 날 걸."
강옥랑은 복도 끝의 한 방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밝혔다.
소어아는 사방을 한 번 둘러본 후 말했다.
"이것이 너의 침실이냐?"
방에는 작은 의자 두어 개와 침대 하나가 있을 뿐 간소했고 벽
에도 별 장식품 없이 몇 가지 무기가 걸려 있었을 뿐이었다.
강옥랑은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 년 동안이나 떠나 있다가 다시 이 침대를 보니 감회가 새로
워지는군."
소어아는 웃으며 말했다.
"너의 그 친구들을 보아서는 네가 이 침대 위에 점잖게 누워 있
을 수 있다고 믿을 수가 없는 걸. 네가 정말로 이런 쓸쓸함을 견
딜 수 있단 말이냐?"
강옥랑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야밤에 도망나가면 될 게 아니오?"
"명성있는 집안의 자식들은 대개가 야밤에 도망가는 버릇이 있
지. 하지만 너의 아버지는 남과 틀려. 네가 어떻게 너의 아버지를
속인단 말이냐?"
강옥랑은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너는 내가 왜 이 방을 택했는지 아느냐?"
"글쎄."
"그 이유는 이 방이 나의 아버지의 침실과 거리가 가장 멀기 때
문이야. 또한 창문도 많고...... 이곳은 원래 일하는 사람들이 쓰
는 방인데 내가 먼저 차지했지."
침실에 들어온 후 소어아와 강옥랑은 피곤했는지 자리에 눕자마
자 골아 떨어졌다. 그들은 이제 서로 감시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너무 고단했던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자국 소리는 문앞에 멈추어 잠시 동안 망서리는 듯하더니 이
윽고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방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은 가만
히 문을 열고 잠시 동안 안을 살피더니 다시 문을 닫았다. 그 발
자국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가 그 황막한 뒷뜰로 사라져갔다.
그때 소어아는 갑자기 눈을 뜨더니 머리카락 사이에서 가느다란
구리철사를 꺼냈다. 그는 그 구리철사를 정쇠의 자그마한 구멍 속
에 집어 넣고 좌우로 가볍게 돌렸다. '철커덕'하는 소리가 들렸
다.
소어아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웃음이 번져나왔다. 그는 오랫동
안 자유를 잃었던 손을 잠시 흔들더니 갑자기 강옥랑의 수혈(睡
穴)을 점했다. 강옥랑은 더욱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소어아는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고 속삭이듯 중얼
거렸다.
"너는 네 자신이 매우 총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더없는 바
보다. 너는 줄곧 내가 이 정쇠를 풀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흥!
내가 어디서 자랐는데 이까짓 정쇠 하나를 못 푼단 말이냐?"
악인곡(惡人谷)에는 가장 뛰어난 강도가 있는 것처럼 당연히 가
장 뛰어난 절도 전문가도 있었다. 가장 뛰어난 절도 전문가에게는
이 세상에서 열지 못 하는 자물쇠가 없다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
다. 소어아는 여덟 살 때부터 이미 이 탁월한 선배로부터 모든 자
물쇠를 여는 재주를 배웠다.
그는 창문으로 빠져 나갔다.
그리고는 그 귀신마저 가기 두려워한다는 뒷뜰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가 바람에 따라 흔들거리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하늘에는 별빛이 반짝거리고 있었지만 아름답다기 보다는
도리어 이 뒷뜰을 더욱 더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싸이게
했다.
바람이 불었으나 소어아의 등에서는 식은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
다.
바람을 타고 썩은 냄새가 풍겨왔다. 이 뒷뜰은 마치 늪지 같은
비릿한 죽음의 냄새가 가득차 있었다.
소어아는 숨소리를 죽이고 몸을 낮게 하여 뜰의 구석구석을 뒤
졌다. 그러나 뒤뜰은 단지 썩은 나무와 황폐한 정자만 있을 뿐이
었다.
한 차례의 스산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그는 등골이 오싹해져
옴을 금치 못 했고 갑자기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건지 혹은 무
엇을 찾고 있는지조차 잊게 되었다.
바로 그때 십여 장쯤 거리에 있는 건물의 창문 안에서 불빛이
밝혀지며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소어아는 급히 땅바닥에 엎드려 몸을 숨겼다. 소어아는 땅바닥
에 엎드린 채 감히 숨조차 크게 쉬지 못 했다.
그 사람은 손에 등불을 하나 들고 있었는데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놀랍게도 그는 다름 아닌 강별학이었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더니 문을 잠그고 뜰밖으로 나갔다.
불빛이 사라지자 뜰은 다시 어둠과 고요한 정적으로 뒤덮였다.
소어아는 잠시 동안 기다려 봤지만 아무런 기척도 없자 살며시
일어나 그 건물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불빛이 밝혀졌던 방문 앞에 도착하자 그는 비로소 그 방이 꽃을
기르는 화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래 전에는 이 방에 필시 많은 꽃이 만발했었겠지만 소어아가
지금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꽃향기가 아니라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썩은 냄새뿐이었다.
소어아는 구리철사를 꺼내 문을 열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선 후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어 방을 밝혔다.
방 안에는 거미줄이 가득차 있었고, 구석마다 깨진 화분과 마른
잎사귀 그리고 숯이 쌓여 있을 뿐 그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강별학은 이렇게 음산한 야밤에 아무 것도 없는 이 방에 무엇때
문에 왔단 말인가?)
밤바람이 찢겨진 문풍지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 바람은 마치 귀
신의 차디찬 손이 소어아의 등을 매만지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소어아는 빨리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지만 이상한 호기
심이 그의 발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런 곳이라면 비밀을
숨기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 그는 다시 사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방 안은
온통 먼지로 덮혀있어 마치 오랫동안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던 곳
같았다. 그러나 강별학이 조금 전에 분명히 이곳에 들어왔지 않았
는가! 그렇다면 먼지 위에 어떤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왜 아
무런 흔적도 없을까?
소어아는 즉시 바닥의 먼지를 만져보았다. 놀랍게도 그 먼지는
정교한 인조였고 바닥에 단단히 접착되어 있었다.
소어아는 곧 이 방 안에 어떤 숨겨진 비밀이 있을 것이라고 생
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이상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실망한 나머지 위를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천장에는 거미줄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 한
거미줄은 바람이 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
다.
그는 즉시 몸을 날려 그 거미줄을 잡아 당겼다. 놀랍게도 그 거
미줄은 철사로 만든 것이었다!
'끼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마루의 일부분이 열리며 불빛에 계
단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소어아는 많은 교묘한 비밀기관의 장치를 보아왔지만 이토록 신
비스럽고도 교묘한 장치는 처음보았다. 그가 더욱 예상하지 못한
점은 그 아래 있는 것이 비밀통로가 아니고 하나의 서재였다는 점
이다.
창문이 없을 뿐 그곳은 매우 평범한 서재였다. 서재의 좌우에는
책이 가득 찬 책장이 놓여 있었고 가운데는 돌로 만든 큰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 책상 위에는 문방사우와 등잔이 갖춰져 있었다.
소어아는 우선 자세히 책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 많은 책들이 쌓여 있었고
그 책 위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강별학이 이곳에 온 목적은 물론 책을 보자는 것은 아닐 것이
다. 그렇다면 책 위에 먼지가 가득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이곳에...... 바로 이곳에 깨끗한 책 한 권이 놓여 있군.)
그는 책을 뽑아들자 책 한 가운데가 조금 패여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책을 펼치자 속의 빈 부분에 인피가면(人皮假面) 몇 장과 작은
병이 서너 개 들어 있었다. 변장할 때 쓰는 도구였다.
잠시 후 그는 또다른 책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그 속에는 몇 개
의 작은 나무병이 들어 있었는데, 병 속에 든 것은 놀랍게도 매우
구하기 힘든 진귀한 독약이었다.
다음에 그가 발견한 것은 액수가 엄청난 장부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매우 긴 명단이었다. 그는 그 명단을 일일이 읽기가 귀찮아
그저 이름 아래 가로로 적은 글자만 훑어보았다. 가로로 써있는
글자는 소림(小林), 무당(武當) 등 무림 명문정파(名門正派)의 이
름이었다. 어쩌면 이곳에 씌여진 이름들이 바로 강별학이 각 문파
(門派)에 보낸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다.
이때 그는 책상 옆에 작은 상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상 위
에는 각양각색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는 뭔가 원하는 것을 알아냈다는 듯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띠우
며 그 상 위에서 한 뭉치의 종이를 줏어들었다. 그 종이가 비록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는 않았지만 바로 그가 찾고자 하는 물건이
었던 것이다. 그 종이는 매우 얇고 가벼운 반면 매우 질긴 것이었
다. 그런 종이는 특수한 것이라 소어아도 단 한 번 밖에 본적이
없었다. 그는 그 종이의 냄새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와
똑 같은 종이를 먹은 적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 한 뭉치의 종이는 바로 그가 철심난에게 얻은 '연남천 장보
도(燕南天藏寶圖)'와 같은 종이었다. 때문에 그는 죽어도 잊을 리
가 없었다.
그는 손에 먼지를 묻혀 가볍게 그 맨 윗장의 종이에다 문질러봤
다. 이에 따라 종이 위에는 그림의 흔적이 나타났다. 과연 그 보
물이 숨긴 장소를 가리키는 지도였다.
그 보물지도는 진짜 같이 보이기 위하여 석판으로 그려졌기 때
문에 윗장에 그려진 그림이 아래장까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강별
학이 그 마지막 보물지도를 그린 후 다시 그 종이를 쓴 적이 없었
기 때문에 소어아가 만지자 즉시 그 흔적이 나타났던 것이다.
소어아는 긴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예상대로 보물지도를 위조한 자는 바로 그였구나! 천하의 영웅
들을 서로 죽이고 죽는 처지에 놓이게 한 자가 바로 그였다니! 그
러나 나는 벌써부터 당신이 무서운 야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토록 인자스럽고 의리있는 척
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 당신은 천하의 영웅호걸들을 모두
속이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 굴복하지 않는 자는 계책으
로 모조리 죽이려고...... 아! 아! 참으로 악독하구나!)
그는 다시 모든 물건을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갖다 놓으며 중얼
거렸다.
"당신이 만약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당신이 무얼하든 내가 참
견하지 않았겠지. 왜 하필이면 나를 속여가지고 지금까지 이 고생
을 시키냔 말이다! 내가 너의 버릇을 고쳐주지 않는다면 내 자신
을 대할 면목이 없지!"
이렇게 중얼거린 그는 등불을 끈 후 서재에서 나와 모든 장치를
원상복귀시켰다.
소어아는 또다시 창문을 이용하여 강옥랑의 침실로 살며시 들어
갔다.
강옥랑은 머리를 베개 속에 파묻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소어아는 살며시 침대에 올라가서 다시 정쇠를 자기 손에다 채
운 후 편안히 잠을 청했다.
그러나 그가 눈을 완전히 감기도 전에 갑자기 방 안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깜짝 놀란 소어아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사방을 살펴보았
다. 한 사람이 웃음띤 얼굴로 침대 옆에 서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
다. 번쩍거리는 불빛이 그의 창백하고도 음침한 웃음띤 얼굴을 더
욱 음산하게 보이게 했다. 그런데 소어아가 더욱 놀란 것은 그 사
람이 다름아닌 강옥랑이었던 까닭이다.
분명히 강옥랑은 그의 옆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침대 옆에 서있게 된 것일까?
소어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침대에 누운 사람을 바라보았
다. 침대에 누운 사람도 고개를 들며 웃음띤 얼굴로 소어아를 바
라보았다.
그는 바로 그 귀먹은 벙어리 늙은이었다.
소어아는 한참이나 넋을 잃고 있다가 갑작스레 너털웃음을 터뜨
렸다.
"나는 분명히 강별학이 보통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
면서도 어찌 그를 얕봤단 말이냐?"
강옥랑은 차디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웃음이 나오느냐? 내가 보기엔 너는 지금 통곡해야할
입장에 놓여 있는 것 같은데......."
"울려고 해도 눈물이 나오질 않으니 웃을 수밖에 없지."
이때 강별학이 밖에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는 웃음띤 얼굴
로 소어아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그토록 중대한 비밀을 발견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빨
리 도망가야 할 것이 원칙인데, 아무 소리없이 다시 돌아오다니
너의 배짱도 알아주어야 되겠구나!"
"분명히 내가 당신의 비밀을 발견할 줄 알면서도 아무소리 없이
내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내가 내 자신의 손을 다시 정쇠에 채
우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당신도 확실히 보통은 넘는군요!"
"이토록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를 속일 수 있을 뿐만 아니
라 대담하게도 내 비밀마저 캐낼 수 있었으니 실로 감탄하지 아니
할 수 없구나!"
"당신은 천하의 사람들을 모두 당신이 자비스럽고도 의리있는
영웅이라고 믿게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존경할 수 있게 하다니 참으로 일대의 호걸이라 아니할 수 없군
요!"
강별학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너의 재능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너는 왜 하필이면 나와
맞서려고 한단 말이냐? 네가 오늘 그 비밀을 알았으니 설사 너를
아끼는 마음이 있다 해도 절대로 살려두지는 못 하겠어!"
소어아도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나도 당신의 재능에 매우 탄복하고 당신의 대사가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왜 하필이면 그 쓸데없는 보물지도를 만들어서 나
를 골탕 먹인단 말이오?"
강별학은 표정이 갑자기 돌변하며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네가 어떻게 그 보물지도가 나와 관계가 있는 것을 알았느냐?"
"만약 그 보물지도만 없었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오고,
또 무엇 때문에 고생해서 당신의 비밀을 캐내려고 한단 말이오?
당신이 나만 건드리지 않았다면 그 비밀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
단 말이오!"
강별학은 강옥랑을 한 번 바라본 후 다시 소어아에게 물었다.
"넌 언제부터 그 보물지도가 나와 관계가 있다고 느꼈느냐?"
소어아는 빙그레 웃더니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의 그 못됐다는 자식 몸에도 보물지도가 있는 것을 발
견하자 즉시 어디서 얻은 것이냐고 물었죠. 그가 말하기를 당신의
서재에서 훔쳤다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나는 이미 당신을 의심하
기 시작했죠! 그 원인은 그토록 중요한 지도를 함부로 서재에 두
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오."
"매우 옳은 판단이구나."
"나는 그후 이 못됐다는 자식의 부친이 대협객이란 말을 들었
죠.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죠. 용(龍)은 용을 낳고 호랑이는
절대로 개새끼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이오. 일대의 대협객께서 어찌
이런 비굴하고 염치가 었는 아들을 낳을까 하고 재삼 의심했죠."
강별학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욕 한 번 잘 하는구나. 죽기 전에 실컷 해두어라."
"그후 내가 당신이 이러한 집에서 살고 있는 것과 자신이 밥상
을 올리는 것, 일하는 사람이라고는 벙어리이면서도 귀먹은 노인
한 명밖에 없는 것을 봤을 때 나는 또 이런 생각을 했소. 이 사람
은 성인이 아니면 필시 내가 난생 처음으로 본 간사스럽고도 악독
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이오. 그 원인은 그 두 가지 종류의 사람
외에는 절대로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던 까
닭이오."
강별학은 여전히 웃음띤 얼굴을 했다.
"나는 당연히 성인이 되지 못 하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비밀을 캐내기로 작정했었소."
"너는 정말 너무나도 총명하구나. 그러나 그 총명한 것이 너로
서는 더없는 불행이야......."
소어아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천생이 총명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오?"
강별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야. 그 점은 내가 매우 동정하는 바이다."
"내가 만약 조금만 모자랐다면 아마 바보인 척을 했을 것이오."
"이미 너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지."
소어아는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내 생각엔 당신이 나를 죽일 시각이 다가왔다고 느껴지는데
요."
강별학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일 정도로 잔인하지는 못 해."
"그래요? 그렇다면 다른 더욱 악랄한 방법이 있는 모양이지요?"
강별학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또 웃었다.
"오늘밤에 나를 해치고자 하는 사람은 너 하나만이 아니다."
"또 누가 당신을 해치려고 하오?"
"어젯밤 내 침실에 몰래 들어온 자가 있었다. 그는 방에다 마취
향기를 뿌리고 창문을 열고 들어왔지. 그의 목적은 분명히 나를
죽이려는 것이었어. 그러나 애석하게도 어젯밤 나는 그 방에서 자
지를 않았지."
"어젯밤 당신은 나와 함께 신탄구에 있는 여관에서 자고 있었
소...... 당신은 어떻게 그 일을 알아냈소?"
"내가 오늘 돌아오자 그 방에는 아직도 마취 향기가 남아 있었
고 창가에는 발자국의 흔적이 있었지. 이로 보면 어제 나를 살해
하고자 했던 사람은 살인에 능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가 만약 살인의 능수라면 오늘밤 절대로 오지는 않을 것인
데......."
"그렇지. 하지만 그는 살인의 능수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 분명
히 다시 올 것이다."
"당신은 나를 당신의 방에서 자게하여 대신 죽게 할 작정이군
요. 이 기회에 나를 죽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마저 잡을
수 있겠죠. 또 그를 죽일 때 나를 위하여 복수한다는 명분도 세울
수 있고, 게다가 다른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반드시 당신의
인덕을 칭찬할 테니 당신으로서는 일거양득이 아니라 일거다득이
군요."
강별학은 껄껄 웃었다.
"너같이 총명한 아이와 이야기를 하면 참으로 간단해서 좋구나.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있으니 말이
다."
소어아는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암살자
소어아는 결국 강별학의 침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가 정쇠를 열자 그의 몸에 있는 패유, 심유(心兪), 독유(督
兪), 남유(南兪), 간유(肝兪), 담유(膽兪), 비유(脾兪), 삼초유
(三焦兪) 등 여덟 군데의 혈도를 즉시 강별학이 점하고 말았다.
강별학은 그를 이불로 눈만 겨우 나올 정도로 덮어버리고 나갔다.
그는 침상에 누워 눈을 멀건히 뜬채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
었다.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어 결국 아무 생각
도 하지 않고 머리 속으로 양(羊)을 세어보기로 했다. 한마 리,
두 마리, 세 마리.......
그는 이 방법으로 잠을 청하려 했다. 잠이 들면 죽든 살든 걱정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팔천육백칠십사 마리
를 셀 때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 했다.
그는 양떼를 세는 한편 머리 속으로 도화의 생각을 떠올렸다.
도화의 그 밝고 사과 같은 얼굴이 생각나자 즉시 철심난의 생각도
떠올랐다.
그는 인간의 연상력이 얼마나 묘한가 하는 것을 새삼 느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그 사람들의 얼굴은 더욱 더 선명하
게 그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철심난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혹시 그 친절하고도 품위가 있
는 고귀한 무결공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이니 참으로 가련하구
나.)
소어아는 눈을 감고 억지로 그녀의 생각을 버리려했다. 그렇지
만 철심난의 모습은 더욱 더 확실하게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
녀는 눈 같이 하얀 옷을 입고 햇빛 아래 서 있었다.
그것이 바로 소어아가 처음 그녀를 본 모습이었다.
만약 그가 철심난을 만나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 보물지도를 가
지지 못 했을 테고, 만약 그 보물지도만 없었다면 그는 절대로 이
곳까지 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또다시 양떼를 세어 보기로 했다...... 팔천육백칠십오 팔
천육백칠십육...... 그러나 한 마리 한 마리의 양들의 머리가 모
두 철심난의 머리로 변했다.
이때 창틈으로 그윽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그리고는 창문밖에서
가벼운 소리가 들려왔다.
소어아는 즉시 숨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드디어 왔구나! 강별학의 예감이 과연 맞았구나...... 아아,
나는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못 하니 숨을 멈춘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때 창문이 가볍게 열리더니 한 사람의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 사람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두 자루의 유엽도를 한 자
루는 허리에 차고 한 자루는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행동이 매우
민첩했으며 배짱도 또한 여간이 아니었다.
흑의인이 고개를 침대쪽으로 돌리자 달빛에 그 얼굴이 드러났
다. 소어아는 마침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얼굴
을 본 순간 소어아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배짱좋은 자객은 다름아닌 철심난이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이토록 우연한 일도 있을까? 혹시 소어아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는 확실히 보았다. 그 자객은 실로 틀림없
이 철심난이었다.
그녀는 방에 들어서자 침대 위에 한 사람이 누워있는 것을 발견
했다. 그녀는 손에 쥔 칼을 다시 한 번 굳게 꼬나잡고는 몸을 날
려 침대 위에 누워있는 사람의 목을 향하여 찔러갔다.
소어아의 마음 속은 더없이 쓰디썼다. 한마디 말도 하지 못 하
고 자기가 철심난의 손에 죽다니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
다.
강별학 부자는 이때 문밖에서 방 안을 엿보고 있었다. 그들은
자객이 암살에 성공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은 달려들어갈
준비를 완전히 갖추고 있었다. 소어아의 목은 떨어지기 일보 직전
의 위기일발에 놓여 있었다.
바로 이때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철심난의 손에
쥐어져 있던 유엽도가 두 동강으로 부러졌다.
강별학 부자와 소어아는 모두 깜짝 놀랐다.
(누가 이러한 위력의 무공을 지니고 있을까?)
철심난은 얼굴색이 변하며 재빨리 뒤로 두 걸음 물러서 도망갈
길을 찾았다.
이때 창문 밖에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날아 들어왔다. 그의 모
습은 마치 바람에 실려 온 구름 같았다.
달빛이 희미하게 창문 안을 비추었다. 그 사람은 몸에 백의를
걸치고 있었고 얼굴에는 평화스러운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그 사
람은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신과도 같았고,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
까지 형용하기조차 어려운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강별학은 자신도 모르게 그 소년의 고귀한 품위에 빠져 넋을 잃
고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림에 이
러한 소년이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소어아는 즉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소년은 바로
무결공자였다.
철심난은 더욱 놀라 다시 뒤로 두 발걸음을 물러선 후 거의 울
부짖음에 가까운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었군요.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왔죠?"
무결공자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제 소저가 고생 끝에 그 미혼약 '계명오고 반온향'을 얻어
온 후부터 나는 이미 의심을 했소. 그래서 이 며칠 동안을 줄곧
소저의 뒤를 쫓았던 것이오."
철심난은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공자께선 왜 저를 뒤쫓고, 왜 저의 일을 방해하십니까?"
무결공자는 여전히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강호의 사람들이 모두 강 대협을 인덕이 높은 영웅이라 하는데
소저가 설사 그에게 불만을 느낀다 해도 그를 죽인다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을까요?"
철심난은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음...... 공자가 뭘 안단 말이오? 그는 저의...... 저의 아버
님을 살해했단 말입니다."
이때 강별학은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방의 불을 켜며 놀라움이 가득찬 표정을 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두 분은 뉘시오? 누구이신데 이렇게 늦은 밤에 제 집에 찾아와
소란을 피우십니까?"
화무결과 철심난은 너무나 깜짝 놀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먼저
화무결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저의 이름은 화무결이라 합니다.
당신의 존성대명은......?"
"저는 강별학이라 하오."
순간, 철심난이 눈을 부릅뜨며 울부짓는 음성으로 외쳤다.
"당신이 우리 아버님을 살해하지 않았소? 나의 아버님은 분명히
이곳에 온다는 암호를 남겼었소. 그러나 그후 아무런 소식도 없었
으니 당신이 살해한 것이 아니면 뭐요!"
"저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소저의 아버님께서 나의 손에 죽었단 말이오. 아마도 소저가 오해
를 하셨나 보오...... 도대체 소저의 아버지가 누구신데 그러시
오?"
철심난은 큰소리로 외쳤다.
"내 아버님은 바로 광사(狂獅) 철전(鐵戰)이오!"
강별학의 만면에는 희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바로 철 소저이셨군요. 하지만 나의 지위와 명성을 걸고 철 대
협이 확실히 이곳에 오지 않았다고 보증하겠소. 소저는 곰곰이 생
각해보시오. 내가 만약 정말 철 대협을 살해했다면 그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이었겠소? 그토록 엄청난 일은 설사 내가 감추려 했다고
해도 필히 세상에 알려졌을 것이오. 더군다나 내가 정말 그런 일
을 했다면 오히려 알리려고 했을 일이지 감추려고 들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의 말은 틀림었는 사실이었다. 광사 철전은 십대악인 중에 한
명이기 때문에 강호엔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많은 사람들은 매우 통쾌하게 여겼을 것이고 그를
죽인 사람을 오히려 칭찬하고 존경했을 터인데 왜 그것을 숨길 필
요가 있었겠는가.
강별학의 이 말은 철심난을 모욕하는 것도 되었지만 일리가 없
는 말은 아니었다.
철심난은 그녀의 아버지와 같이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
는 강별학을 살해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자기의 부친이 돌
아가셨는지조차 확실히 모르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 강별학은 맹세할 수 있소."
그녀는 강별학의 확신에 찬 이러한 말을 듣자 적지 않게 화가
났지만 뭐라고 할 말은 없었다.
철심난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의아심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이 강별학이라면 저 침대에 누운 사람은 누구요?"
강별학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여자는 생기기는 얌전하게 생겼는데 성격이 너무 급하구나.
이제서야 침대에 누운 사람을 물으니 말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침대로 다가가 소어아를 깨우면서 말했
다.
"이 사람은 내 옛친구의 아들인데 오늘 모처럼 먼곳에서 찾아왔
기에 나의 침대를 그에게 빌려주었소. 얘야 빨리 일어나서 화 공
자님을 뵈어라."
그는 이렇게 말하며 소어아를 깨우는 동시에 소어아를 점했던
혈도를 풀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소어아의 사혈을 노리
고 있었다. 소어아가 자기에 대해서 불리한 말을 한마디만 하면
즉시 그의 목숨을 빼앗을 작정이었다.
무결공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젊은 사람은 잠을 깊게 자기 마련이니 각하께서는 그를 굳이
깨우지 마십시오."
이때 소어아가 얼굴을 베개 속에 파묻으며 중얼거리듯 입을 열
었다.
"나는 벌써부터 깨어 있었소. 단지 나는 여자와 이야기하고 싶
지 않기에 지금까지 자는 척 했을 뿐이오."
강별학은 일부로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실례의 말이냐?"
"강호의 사람 중에 그 누가 아저씨가 인자스럽고도 의리가 있는
분인줄을 모릅니까? 하지만 이들은 아저씨를 살인범으로 몰아넣고
있으니 이런 사람과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강별학은 소어아가 갑자기 자기를 위에 변명하는 것을 보자 실
로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어아가 지금 진퇴양난에 빠졌다는 것을 강별학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강별학보다 무결공자를 더 무
서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별학이 어찌 알겠는가!
이때 철심난이 갑자기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한 걸음 나서
며 외쳤다.
"당...... 당신은......."
그러나 그녀는 무결공자를 한 번 바라본 후 갑자기 웃으며 부드
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저의 아버님을 살해하지 않았다니 우리는 이만 가보겠
습니다."
강별학은 또다시 멈칫했다.
(이 여자의 태도가 왜 갑자기 백팔십도로 변했을까?)
그가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어아가 비록 음성을 낮추
면서 말했지만 철심난은 한시도 그를 잊은 적이 없었기에 즉시 그
의 음성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놀라움과 기쁨이 실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무
결공자가 소어아를 발견하면 즉시 목숨을 빼앗을 것을 잘 알고 있
었기 때문에 화무결보고 어서 가자고 한 것이었다.
이때 강별학이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화공자께서 모처럼 저의 집에 오셨는데 이대로 가신단 말이
오......."
화무결도 웃음띤 얼굴로 대답했다.
"저도 오래 전부터 강 대협의 높은 명성을 들어왔기 때문에 많
은 가르침을 받고 싶소. 단지......."
소어아는 그가 갑자기 갈 생각을 고치려는 것을 보자 다급한 나
머지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이 정말 저의 아저씨를 뵙고 싶다면 내일 아침 찾아올 것
이지 밤늦게 창문으로 뛰어들어온 것이 무슨 체통이오?"
화무결의 표정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변하면서 낮은 음성으로 물
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철심난은 재빨리 그의 옷소매를 힘껏 잡아 당겼다.
"그가 누구든 간에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어요? 빨리 가세요."
그녀는 화무결을 완전히 창문밖으로 끌어낸 후 그제서야 조금
안심을 했다. 그러나 이때 그녀의 눈앞에 뭔가 번쩍하더니 화무결
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철심난은 놀라 두리번거리며 방 안을
바라보니 그는 이미 소어아가 누워있는 침대 앞에 서있는 것이 아
닌가!
소어아는 머리를 베개 속에다 파묻고 속으로 자신을 탓하고 있
었다. 강별학은 화무결이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는 어리둥절해 있
었다.
이때 화무결은 무서운 표정으로 또박또박 물었다.
"이 사람의 이름은 혹시 강어가 아닙니까?"
강별학은 멈칫하며 억지 웃음을 웃어보였다.
"공자께서는 그를 알고 계시오?"
화무결은 긴 한숨을 내쉬며 웃음띤 얼굴로 대답은 않고 중얼거
렸다.
"기쁘다, 참으로 기쁘군. 당신이 아직도 안 죽었으니 말이야."
강별학은 그가 이토록 기뻐하는 것을 보자 그가 기뻐하는 이유
가 소어아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소어아의 친한 친구인 줄로 알았다. 그래서 그는 창졸간에
불쑥 이런 말을 한마디 던졌다.
"소어아는 당연히 죽을 수 없소. 누가 그를 해친다면 제가 가만
놓아 두지는 않을 거요."
그러나 그는 이것이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화무결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강변학에게 말했다.
"당신이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고요?"
강별학이 그제서야 그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며 속으
로 의아해 하고 있을 때 소어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등 뒤로
숨으면서 웃음띤 얼굴로 화무결에게 말했다.
"누가 강 대협의 조카를 죽이려고 들어? 그런 사람은 실로 어딘
가 조금 모자라는 사람일 거야."
화무결은 여유있는 음성으로 받아넘겼다.
"저는 강 대협을 매우 존경하지만 이 자를 필히 죽여야 하기에
실례를 범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강별학은 다시 멈칫하며 물었다.
"공자...... 공자께서 왜 이 애를 죽이려고 하시오?"
"저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강별학은 화무결을 바라보고 또다시 소어아를 바라보았다.
(나는 끝내 이 녀석에게 당하고 말았구나!)
그는 이미 소어아가 자기의 조카라고 큰소리를 쳐 놓았기 때문
에 그의 신분과 지위로 보아 절대로 자기의 조카가 자기 앞에서
남에게 죽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소어아는 고민이 가득한 강별학의 표정을 보자 마음 속은 더없
이 기뻤지만 겉으로는 수심이 가득찬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 화무결이 저를 죽이게 가만 놓아 두십시오. 이 사람의
무공은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아저씨는 절대로 그를 이길 수 없어
요. 그러니 어서 피하십시오. 강호의 사람들은 아저씨를 비웃지
않고 이해해 주실 것입니다."
그는 일부러 비웃음이란 말을 크게 하였다. 그 이유는 강별학이
만약 자신이 화무결에개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는다면 그가
고생끝에 얻은 '강남 대협'이란 명예가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별학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러나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
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화공자께서는 정히 저를 괴롭히겠습니까?"
"귀하께서는 심사숙고한 후 행동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나로서는 단지......."
이때 강옥랑이 갑자기 배를 안고 들어왔다. 그는 얼굴색이 매우
창백했고 몸을 계속 떨며 소어아를 가리켰다.
"저...... 저놈이 가지고 온 술 속에 독약이 들어 있습니다!"
강별학은 이 말을 듣고 즉시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두 눈
을 부릅뜨고 사나운 음성으로 외쳤다.
"우리 부자는 너를 나쁘게 대하지 않았는데 너...... 너는 왜
우리를 해치려는 것이냐!...... 어쩐지 네가 한 방울도 안 마신다
했지. 너는 그 술 속에다 독약을 탔었구나!"
이 변화는 화무결의 예상 밖이었을 뿐만 아니라 소어아마저 넋
을 잃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즉시 깨달았다.
(과연 그 애비에 그 아들이로구나. 이런 계책을 생각해내다니
너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야!)
그 계책은 실로 고명한 것이었다. 이제 강별학 부자는 당연히
화무결을 막을 필요가 없었다.
강별학은 돌연 품에서 한 자루의 보검을 뽑아들고는 대노한 음
성으로 외쳤다.
"나는 너를 친자식보다 더욱 귀여워해 주었는데 너는 기껏 이
보검 한 자루로 인하여 나를 죽이려 하다니, 너....... 너 같이
은혜를 모르는 놈을 이 세상에 살게 한다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
을 해치겠느냐! 아무리 내가 너를 아낀다해도 세상사람들을 위하
여 어쩔 수 없구나!"
그는 손에 쥐고 있는 단검으로 소어아의 가슴을 향하여 찔러갔
다.
그러나 그의 검이 소어아의 몸에 닿기도 전에 화무결이 이미 그
의 손목을 잡았다.
화무결의 이 일초는 실로 번개 같은 속도로 이루어진 것이라 강
별학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왜 자기의
손목을 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공자께서는 왜 나를 막는단 말이오?"
그의 음성은 떨렸다.
"저는 제 손으로 이놈을 죽여야 하기에...... 죄송하게 됐습니
다."
이때 갑자기 강옥랑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것을 본 강별학도 즉시 배를 움켜잡고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저...... 저는"
그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뒤로 몇 발걸음을 물러서더니 의자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화무결은 이 광경을 보고 품에서 자그마한 옥병을 꺼내어 강별
학의 손에 쥐어주면서 말했다.
"이것은 선자향과 소여단이오. 선자향을 피우고 소여단을 복용
하면 모든 독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독을 제거해 드렸
으면 좋겠지만 이 놈이 도망갈까 두려우니 강 대협께서 친히 쓰십
시오."
그는 강별학과 말을 하는 중에도 눈만은 한시도 소어아의 몸에
서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이미 몇 번이나 소어아의 속임수
에 넘어갔었기 때문에 이번 만큼은 또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다.
소어아도 이번 만큼은 도망갈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태연하게
대위에서 좌상을 하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이들의 하는 수작
을 보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내가 아직까지 죽지 않은 것이 당신으로서는 크게 기뻐해야 할
일이겠군."
"그렇소. 당신이 아직 죽지 않은 것은 실로 나의 더없는 기쁨이
오."
"남들이 우리의 이런 대화를 들으면 필시 당신이 나의 부인이라
고 착각하겠소. 당신이 남장을 한 여자라고 생각하겠지. 그렇지
않다면 내가 죽지 않았다해서 당신이 기뻐할 이유가 없지 않소?"
이러한 말을 듣고서도 화무결은 조금도 노하지 않고 여전히 웃
음을 지었다.
"하지만 내가 당신을 죽이면 그들은 자기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
수 있을 것이오."
"당신은 이번에 나를 꼭 죽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소?"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인다면 즉시 좌우 양팔 심팔혈을 점하겠
소."
이때 창문밖에서 철심난이 갑자기 남은 한 자루의 유엽도를 휘
둘러 바람소리를 냈다.
이 소리를 들은 소어아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서는 나를 죽이지 않았으면 하오."
"어디서든 좋소. 나는 장소의 제한을 받지는 않아."
"내가 혼자 나가게 놓아둘 용의가 있소?"
화무결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오?"
"쓸데없는 걱정마시오. 나는 단지 당신에게 업혀 나가는 것을
원치 않을 뿐이오."
소어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강별학을 바라보았다. 만약 다른 사
람이라면 지금쯤 필시 큰소리로 그의 비밀을 말했겠지만 소어아는
그것이 헛수고일 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설사 화무결이 강별학의 음모를 믿는다 해도 역시 소어아를 죽
이는 일과는 관계가 없으며 더군다나 화무결은 절대로 그의 말을
믿을 까닭이 있었다.
그 방의 창문은 구식이라 창들이 극히 낮았다.
소어아는 의젓하게 창문을 넘어 나갔다.
그는 창문을 넘어 밖으로 나가자 철심난을 볼 수 있었다. 철심
난도 유심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동자 속에 얼
마나 깊고 복잡한 정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 했
다.
밤바람 속에 싸늘한 한기가 느껴져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소어아는 앞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단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화무결이 가까운 거리에서 자기를 따르고
있다는 것과 자기가 아무리 원해도 절대로 도망갈 기회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철심난의 몸옆을 스쳐 지나가는 찰나 돌연 칼빛이 번쩍거
리더니 유엽도가 소어아의 몸 뒤를 향하여 휘둘러졌다.
소어아는 이 일격이 화무결을 향하는 것임을 당연히 알 수 있었
다. 화무결이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해도 이 갑작스러
운 공격에 우선은 피해야 할 것은 분명했다. 철심난의 도법도 고
수급에 속하는 편이었다.
칼빛이 번쩍거리자 소어아는 즉시 몸을 날려 앞으로 달려나갔
다.
이때 철심난의 외침소리가 소어아의 귓가에 들려왔다.
"받아요......."
그녀는 일격이 실패하자 즉시 유엽도를 소어아에게 던져 주었
다. 소어아가 그 유엽도를 잡을 수만 있다면 다시금 아미산에서
자살을 기도하는 장면을 되풀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
문이었다.
하지만 그 나머지 한 자루의 유엽도는 다른 한 자루와 마찬가지
로 화무결의 지풍에 의해 허공에서 두 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화무결은 소어아의 몸 뒤에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도망가려 하오?"
그의 음성은 역시 조용하였고 얼굴에는 평화스러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아무일도 발생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또한 자기에게 칼을 휘둘렀던 철심난은 상관하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철심난을 봤다면 아마 그녀는 그를 대할 면목이 없었
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생동안 단 한번도 여인의 마음을 상하
게 한 적이 없었고 더욱이 철심난에게는 더했다.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며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몇 발걸음을 더 걷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입을 열
었다.
"당신은 참으로 여자들에게는 잘 해주는군!"
"그것은 내가 어릴 때부터 지니고 있는 습관이오."
"만약 철심난이 매우 추악한 여자였다면 그래도 당신은 잘 해주
었겠소?"
"여자라면 나에게는 추악하나 예쁘나 마찬가지요."
소어아는 웃었다.
"나는 아주 추악한 여자 한 명을 데려와서 당신이 어떻게 대해
주나 한 번 보고싶군!"
"애석하게도 당신에게 그런 기회가 없을 것 같소!"
소어아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소. 당신은
어찌 사람을 죽일 때도 태연하게 그와 잡담을 나눌 수 있단 말이
오?"
"잡담을 나누는 것과 살인하는 것과는 완전히......."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화무결 대신 말을 이었다.
"완전히 관계가 없단 말이오?"
"그렇소. 나 개인은 당신과 잡담을 하고 싶소. 하지만 내가 받
은 명령은 당신을 죽이라는 것이오. 이것은 두 가지의 별개의 일
일 뿐 아무런 관계도 없소."
"당신이 어떻게 두 가지 일을 나눌 수 있는지 궁금하군."
"그것은 내가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이오."
소어아는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은 실로 말 잘 듣는 아이로군."
화무결은 웃었다.
"아직도 더 가야겠소?"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웃음을 약간 거두었다.
"당신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지 내가 당신을 죽이려는 것은
아니지 않소. 그러니 내 의견을 들어볼 필요가 없지 않소?"
"그렇다면...... 여기서 멈추시오!"
소어아가 사방을 바라보니 희미한 별빛 아래 먼 곳에 있는 거대
한 고목은 그저 웅장하게만 보였고, 가까운 곳에 있는 버드나무는
이미 시들어 가고 있었다.
가을은 벌써 깊어갔다.
소어아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강남에 가을이 왜 이토록 빨리 왔을까? 아! 나 강어
도 왜 이토록 일찍 죽어야 하나......."
화무결 등 사람들이 멀리 사라지자 강옥랑은 바닥에서 일어났
다.
강별학도 그제서야 편안한 자세로 앉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임기응변의 지혜가 나보다 나은 줄을 미처 몰랐구나!"
강옥랑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제가 어찌 아버님을 따르겠습니까? 저는 단지......."
강별학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나는 너의 아버지다. 그러니 내 앞에선 자신을 숨기기 않아도
된다. 설사 너의 지혜가 나보다 뛰어나다 해도 내가 너를 어쩔 수
있느냐?"
"네, 알겠습니다."
강별학은 화무결이 그에게 준 옥병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선자향, 소녀단...... 그 화무결이란 자가 이화궁의 제자인줄
은 미처 몰랐구나! 이 자가 강호에 나타났으니 조심을 해야겠군."
"무공은 매우 뛰어났지만 아직까진 아무런 강호 경험도 없는 것
같던데 무엇을 두려워 하십니까?"
"높은 지혜를 지닌 사람은 바보 같은 법이다. 그 자가 바로 그
런 사람이니 함부로 부딪치지 말아라."
"그 철 소저란 아가씨는 확실히 강호 경험이 없어요. 그녀의 아
버지가 정말 왔었습니까? 아버님께선 정말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
까?"
강별학은 차디찬 웃음을 지으며 강옥랑을 힐끔 쳐다 보았다.
"나는 정말 광사 철전을 본 적이 없어. 그러나 그 여자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더구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아버님께서도 정말로 그의 부친
을 보지 못 했다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것은 바로 광사 철전이 이곳에 왔지만 다른 모습으로 변장하
여 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일시 소홀했던 탓으로 알아
차리지 못 했지."
"그...... 그러나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의 부친이 이곳에 온
후 다시 나가지는 않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 지금쯤 그는 아마 아직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강옥랑은 깜짝 놀랐다.
"여기에 있단 말입니까?"
강별학은 냉소를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엔 우리 둘 외에 또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강옥랑은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님의 말씀은 그 귀먹은 벙어리 늙은이를 말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그를 시험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아버님께서
살며시 그의 몸 뒤로 다가가서 큰 징을 요란하게 울렸을 때 그는
눈조차 한번도 깜박거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의 앞에 있었기 때
문에 확실히 그를 볼 수 있었다구요."
"침착한 사람은 설사 산이 눈앞에서 무너진다해도 눈 하나 깜박
거리지 않는단 말이다."
강옥랑은 이 말을 듣고 즉시 음성을 낮추었다.
"아버님께서는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 줄 알고 계십니까? 혹 그
가 벌써 도망간 것은 아닐까요?"
강별학은 도리어 음성을 높였다.
"그는 우리가 자기를 의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늙은
이만 발견하면 즉시 죽여라. '백 명의 착한 사람들 속에 한 명의
적이 있다면 설사 백 명을 다 죽인다해도 한 명의 적을 놓치지 말
라'는 말을 절대로 잊지 마라!"
강옥랑은 자기 부친이 갑자기 음성을 높인 것을 보고 속으로 크
게 이상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는 곧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버님은 일부러 크게 말씀을 하시는구나. 만약 그가 겁을 먹
고 도망간다면 자기가 광사 철전이라고 밝히는 것이겠지! 또한 우
리가 그때 쫓아간다 해도 절대로 늦지는 않을 것이다.)
이때 강별학이 갑작스레 문을 열었다.
유랑강호(流浪江湖)
복도 끝에는 낡고 자그마한 방이 하나 있었다. 그 방 한가운데
는 난로에 불이 피워져 있었고 한 주전자의 물이 올려져 있었다.
그 귀먹은 벙어리 노인은 불가에 주저앉아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이
더없이 안온해 보이기도 했고 쓸쓸하게 보이기도 했다.
강별학이 거친 음성으로 소리를 쳤다.
"이 빌어먹을 늙은이, 연극 한 번 잘 하는구나! 흥, 그러나 이
제 너의 정체를 알았으니 죽일 수밖에 없다."
그가 노인에게 다가가 손바닥으로 노인의 머리를 치려는 순간이
었다.
마침 이때 노인은 고개를 쳐들더니 웃음띤 얼굴로 물주전자를
가리켰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물이 이미 끓었습니다. 제가 즉시 차를 올리겠습니다."
강별학의 손은 힘없이 그의 어깨에 살며시 내려왔다. 만약 이
노인이 자기의 말을 들었다면 웃는 모습이 이토록 다정하고 천진
할 수 있을까? 그는 끝내 이 노인을 죽이지 못 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도 이토록 매우 다정한 웃음
을 웃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소어아 같은.......
한편, 소어아는 달빛에 드러난 화무결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
다. 실로 조금도 나무랄데 없는 준수한 얼굴이었다. 또한 천하의
소녀들이 꿈 속에서 그리는 연인의 얼굴이 바로 이 모습일 것이
다.
소어아는 그를 바라보다가 불쑥 말을 던졌다.
"당신의 그 무결이란 이름이 당신에게 더없이 어울린다는 것을
알고 있소? 당신은 실로 남을 부러워 할 필요가 있는 것이 하나도
없소. 당신은 명성이 가장 높고 가장 고귀한 무림성지의 출신일
뿐만 아니라 젊고 준수한 용모도 가졌으며 뛰어난 무공도 지니고
있으니 말이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당신은 무공으로 강호의 모든 사람들을 굴복시킬 수 있고 용모
와 품위로 천하의 모든 여성을 반하게 할 수 있으니 실로 나무랄
곳이 없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웃음띤 얼굴로 또 말
을 이어갔다.
"누가 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
면 나는 서슴지 않고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대답할 것이오."
화무결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칭찬해 주어서 고맙소."
"그러나 당신에게도 하나의 결점이 있음을 나는 비로소 발견한
것 같소."
"그래요?"
"그것은 바로 감정이란 것이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 하는데 당신에게는 그것이 없소. 난 당신의 몸
속에 흐르는 피가 아주 차가울 것이라 생각하오."
화무결은 이러한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입가에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래요?"
소어아는 그의 이러한 대답에 불만을 느낀 듯 큰소리로 외쳤다.
"왜? 틀렸다고 생각하오? 당신은 사랑이 무엇인지, 또한 원한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 당신은 사랑과 원한의 맛을 본 적이 있소?"
그는 이렇게 말하는 한편 화무결을 향하여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아마 걱정을 해본 적도 없을 것이오. 노(老), 병(病),
사(死), 가난, 실망, 슬픔, 수치, 분노...... 이 모든 것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 기쁨의 진미를 알 수 있을 까닭이 없지."
이렇게 말한 그는 긴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진실한 사랑과 원한을 느껴보지 못 한 이상 고통과 기쁨도 없
겠지...... 다른 사람들은 혹시 당신의 생활을 부러워할지 몰라도
나는 당신의 삶이 하나도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오."
화무결은 한참이나 묵묵히 서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조금
도 변하지 않았고 더없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한참 후 그는 담
담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당신의 말이 옳을 지도 모르오. 아마 어렸을 때 부터의
환경이 나를 이러한 성품으로 만들었을 것이오."
"옳은 말이오. 이화궁에서나 당신 같은 인물을 만들 수 있을 거
요. 그들은 당신으로 하여금 어느 사람을 대하든지 매우 공손하고
예의가 밝게 하였고, 어느 여성을 막론하고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
하게 했겠지만, 당신은 아마 진심으로 그들을 존경하고 그녀들을
좋아해서 취한 행동은 아닐 것이오."
소어아는 자기의 현재 처지도 망각했는지 눈을 힘없이 땅에 떨
어뜨리고 또 말했다.
"아마 당신은 누구를 죽이려 한다고 해도 진심으로 그가 죽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오."
화무결의 입에서 드디어 한숨이 섞여 나왔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미 다했으니 나를 죽이려거든 죽이시
오. 당신이 몇 초 내로 나를 죽일 수 있나 두고 봅시다. 무기를
사용하겠소?"
"나는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소."
화무결의 음성은 훨씬 부드러워졌다.
"당신이 만약 무기를 사용하기 원한다면 무기가 있는 곳까지 가
는 것도 좋소."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양어깨를 슬쩍 올려 보이
며 입을 삐죽거렸다.
"당신은 내가 무기가 있다해도 당신의 적수가 되지 못 하는 것
을 알면서도 나에게 무기를 찾을 시간을 주겠다는 거요? 분명히
나를 죽이려 하면서도 나에게 이토록 친절하게 대해주다니......
만약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나를 놀린다고 생각하겠지만 거
짓말이라고는 조금도 할 줄 모르는 당신이니 나로서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을 뿐이오."
"사실 당신보다 나를 더 이해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소."
"물론 나만큼 이해해 줄 사람을 다시 찾기는 힘들 거요."
"옳은 말이오."
소어아는 마른 입술을 적셔가며 말했다.
"나는 무기를 쓰지 않겠소. 어서 공격하시오."
화무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을 바람에 낙엽은 휘날리고 있었고 별빛은 더욱 높아 보였다.
그리고 대지는 쌀쌀한 기운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는 한숨섞인 말을 터뜨렸다.
"이러한 날씨에......."
소어아가 그의 말을 이었다.
"이런 날씨라면 사람을 죽이기에 가장 좋은 날씨가 아니오?"
이때 갑자기 철심난의 차디찬 음성이 들려왔다.
"이런 날씨라면 단지 추위만을 느낄 뿐이에요."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녀는 몸에 실오라기 한가
닥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달빛이 그녀의 나체를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육체는 마치 상아를 깍아놓은 듯 희고 아름다왔다.
이 세상에 여인의 육체보다 더 아름답고 더 눈부신 것은 없으리
라.
순간 소어아와 화무결은 숨이 멎는 듯했다. 그렇게 침착하고 조
용하던 화무결도 이때 만큼은 허둥대며 어찌 할 바를 몰라했다.
화무결은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 소저가......."
철심난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예쁘게 보이나요?"
그녀의 출렁거리는 젖가슴이 별빛 아래 매우 창백하게 보였다.
화무결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
으로 말했다.
"소...... 소저는...... 소저는 왜......."
그가 눈을 감자 철심난은 재빠른 속도로 다가가 그의 몸을 덮치
며 그를 굳게 껴안았다.
화무결은 차갑고도 부드러운 철심난의 두팔이 자기의 몸을 껴안
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가슴이 쿵쿵거리며 터질 듯한 흥분과 함께
온 몸이 마비되는 듯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이런 일을 당했기에 숨이 막혀 기절할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전연 생각이 떠오르지 않고 그저 아
득하기만 했다.
이때 철심난은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이 목석 같은 사람아, 왜...... 왜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느
냔 말이야?"
소어아는 너무나도 깜짝 놀란 나머지 두 눈만 휘둥그렇게 뜨고
그저 넋을 잃고 서있었다.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본 철심난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목
이 메인 음성으로 소리쳤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당신은 왜 도망가지를 않는단
말예요?"
이 말을 들은 소어아의 눈에선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것은 그가 난생 처음으로 흘린 눈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의
두 뺨으로 흘러내리는 이 눈물은 철심난의 희생에 감격해서인지,
슬퍼서인지, 분노에서인지 아니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서인지
알 수는 없었다.
화무결은 감히 철심난의 몸에 손을 대지 못 했기에 그녀의 몸뚱
아리를 뿌리치지 못 했다. 그의 이마에서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려 옷깃을 흥건히 적셨다. 생각다 못한 그는 철심난에게 애
원하기 시작하였다.
"제발...... 제발 부탁이니 이 팔 좀 풀어주시오."
철심난의 얼굴도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
로 소어아를 바라보며 다시 외쳤다.
"당...... 당신이 정히 가지 않는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죽어
버리겠어요."
"나...... 나......."
소어아는 한참이나 '나'라고 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
을지 전연 모르고 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두 뺨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철심
난을 뒤돌아보았다. 그 무고하고 순결한 육체, 눈물로 가득찬 그
녀의 얼굴, 소어아는 평생 동안 오늘밤의 광경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짐승 같이 울부짖는 소리를 발하며 미친 듯이 앞을 향하여
달려갔다.
별빛도 점점 사라져갔고 대지에는 더욱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
다.
소어아는 마치 쫓기는 짐승처럼 차가운 밤하늘 아래를 미친 듯
이 달리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는지도 몰랐고 또한 어디로 달려가
고 있는지도 몰랐다.
마침내 그는 눈물마저 말라 버렸다. 그의 마음은 더없이 착잡했
고 난생 처음으로 격심한 고통을 느꼈다. 또한 난생 처음으로 쓰
라린 괴로움과 아픔을 느꼈다.
가을의 들판, 이미 무르익은 벼들이 새벽바람 속에서 파도같이
밀리고 있었다.
소어아는 무작정 들판으로 달려들어가 새벽하늘 아래 그대로 쓰
러졌다.
그는 논의 진흙 속에 파묻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벼이삭사이로
별빛은 더욱 희미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가슴이 터질 듯 아픈 나머지 힘껏 입술을 깨물었고 입속에
피가 가득찼다. 그러나 그는 전연 고통을 느끼지 못 했다. 마음의
고통이 육체의 고통보다 몇십 배 몇백 배 이상으로 견디기 어려웠
던 까닭이었다.
그는 속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너도 인간이냐? 너는 너 자신의 도취에 빠져 자신이 훌륭하고
잘났다고 자만했고 모든 사람을 너보다 못 하다고 무시했다. 하지
만 남이 너를 죽이려 하자 맞서기는 커녕 도망갈 재주도 없었으니
뭐가 어떻게 잘났단 말이냐?....... 너는 모든 여성을 존중하지
않았다. 특히 철심난을 대할 때 더욱 그랬다. 오로지 그녀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는 더욱 더 그녀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녀는
너를 구하기 위해 여자로서 가장 아끼는 육체마저 버렸다. 그 희
생을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는가! 너는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총
명한 사람이라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남에게 쫓겨 신세가 실로 개
같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됐다. 겨우 철심난의 희생으로 도망칠 수
있었지만 힘이 없으니 일생 동안 쫓겨다니는 수밖에 또 있겠는가!
너는 일생동안 줄곧 남이 구해 주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가련한 놈
이다. 너는..... 그저 자신의 지혜와 운만을 믿었다. 노력이 없는
지혜를 지닌자는 지혜를 지니지 않은 자와 다를 바 없는 줄을 모
르고 그저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었으니....... 너는 악인곡 사람
들이 모두 너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부모님이
장난꾸러기 아들을 대하듯 너를 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어아는 진흙 속에 파묻혀 이런저런 생각을 되풀이 했다. 날이
훤히 밝아왔으나 그는 온갖 상념 속에 파묻혀 일어날 줄을 몰랐
다.
(이젠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태어나서 한 번은 좋
은 일은 고사하고 되지 못한 장난만 밥먹듯이 일삼았으니......
더구나 이제는 목숨마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아! 언제나 다시
철심난을 만나볼 수 있을지.......)
그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어느샌가 잠이 들었고 차가운 한기
에 눈을 떴을 때는 벌써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침내 소어아는 일어났다. 몸과 얼굴에는 진흙을 가득 묻힌 채
땅바닥에서 일어난 그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불빛을 발견하고는 그
곳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여인숙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안에서는
징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으며 빨간 종이로 만든 등불이 바람을
따라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것은 강호를 돌아다니는 곡마단의 표
시였다.
소어아는 자신도 모르게 구경꾼들 속으로 끼어 들었다. 모여 있
던 사람들은 그의 몸에 진흙이 가득 묻어 있는 것을 보자 욕을 퍼
부으며 급히 옆으로 물러섰다. 소어아는 맨 앞자리까지 걸어가 그
곳에 주저 앉았다.
무대에서는 빨간 옷차림에 양쪽으로 머리를 딴 큰 눈을 가진 소
녀가 밧줄 위를 걸어다니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징을 울리며
재주넘기를 하고 있었다.
소어아는 비록 맨 앞에 앉았지만 눈 앞에서 무슨 재주를 부리고
있는 지 전혀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너무나도 쓸쓸
해서 남들 사이에 끼어든 것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사람들의 박수 소리와 동전이 땅
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곡예사들도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빨간 옷차림의 소녀는 마치 공주처럼 아무일도 하지 않고 물
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소어아를 잠시 바라보
더니 갑자기 품에서 동전을 꺼내어 소어아의 앞에다 던져 주고는
돌아섰다. 소어아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기에 돈을 준 것도 몰
랐다.
곡예단도 떠나가기 시작했다. 홍의 소녀는 하늘을 바라보는 척
하며 소어아의 옆을 지나치다가 발로 가볍게 동전을 소어아에게
밀어주었다.
어른들은 웃으며 오늘 번 돈으로 얼마 만큼의 고기를 살 수 있
고 얼마만큼 술을 받을 수 있나 서로 얘기하고 있었다.
내일은...... 내일은 또다른 날이다. 그들은 내일을 걱정하지
않았다. 설사 내일이 큰 불행이 닥쳐와도, 설사 내일은 먹을 쌀이
없다해도 걱정하지 않고 오늘 만큼은 즐기는 것이 그들의 인생이
었다. 이 얼마나 호탕한 사람들인가. 소어아가 지금 가장 바라는
생활이 바로 이런 내일을 약속하지 않는 생활이었다.
그는 동전을 줍고는 그들 뒤를 따라갔다. 얼마 안 가서 강물이
그들의 앞을 가로 막았다. 강가에는 배 한 척이 매여 있었는데 이
것이 바로 그들의 집이었다. 이 유랑하는 사람들은 이런 부초같은
생활을 해왔던 것이다.
푸른색 옷차림의 노인이 집을 배에다 옮기는 것을 지휘하고 있
었다. 그는 나이가 비록 육십이 넘는 것 같았지만 몸은 젊은이처
럼 건장했다. 그의 생활은 비록 천할지 몰라도 웬지 얼굴에는 형
용하기 어려운 위엄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자가 필시 이 곡예단
의 단장(團長)인 듯했다.
소어아는 돌연 그의 앞으로 달려가 공손하게 큰 절을 하며 예를
갖추었다.
"할아버님, 저도 데리고 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노인은 소어아를 잠시 동안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곡예사의 길은 험하고 고생스러운 것이란다. 또한 재주도 있어
야 한단 말이다."
"고생은 이미 각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는 무슨 재주로 관중들에게 나서겠단 말이냐?"
소어아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노인을 보며 천진스럽게
대답했다.
"재주 넘기요."
"재주 넘기? 곡예사라면 그 누가 재주넘기를 못 한단 말이냐?
재주 넘기는 가장 간단하고 가장 관중들의 흥미를 끌지 못 하는
것이야. 야독자, 네가 몇 번 넘어봐라."
노인의 말이 떨어지자 한 눈썹이 짙은 건장한 소년이 웃음띤 얼
굴로 걸어 나와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단숨에 대여섯 번을 넘었
다.
소어아는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당신은 최대한으로 몇 번이나 할 수 있지요?"
그 야독자란 소년이 말했다.
"약 이삼십 번은 거뜬히 하죠."
"나는 일이백 번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노인은 소어아의 말을 듣고 또 웃었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조금 전과는 달리 매우 진지해 보였다.
"그래? 단숨에 팔십 번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젊었을 때
본 적이 있지. 그가 바로 이씨 곡예단의 단장(團長)이었는데, 그
가 칼을 맞아 부상을 입은 후 그런 재주를 지닌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어. 그런데 네가 정말로 그렇게 많이 넘을 수 있단 말이냐?"
"네. 저는 백육십 번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노인은 껄껄 웃었다.
"백 육십 번이 아니라 팔십 번만 넘을 수 있다면 충분히 곡예사
가 될 자격이 있지. 우리의 생활은 비록 부유하진 못 해도 고기와
술은 있으니 즐겁게 살 수는 있단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어아는 이미 재주 넘기를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약을 먹고 자랐기 때문에 몸이 실로 무쇠와도
같았다. 그의 무공은 절정고수라 할 수는 없었지만 재주넘기만은
더없이 쉬운 일이었다.
그가 서른 번을 넘자 사람들이 사방을 둘러 쌓기 시작했고, 육
십번을 넘었을 때는 박수 갈채를 보냈다. 팔십 번을 넘어 서자 놀
래 박수 갈채 마저 잊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홍의 소녀는 남들보다 더욱 놀랐고 흥겨운 나머지 눈에서 밝
은 빛이 새어나왔다.
소어아는 백여 번을 넘고서야 몸을 멈추었다.
"이만하면 되겠습니까?"
"하하, 충분하다 충분해. 야독자를 따라가서 세수하고 옷을 갈
입어라. 우리 야식을 하자꾸나. 지금부터 너는 우리 해(海)씨
곡예단에 가입한 것이다."
소어아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고개를 숙여 슬픔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양친께서 돌아 가신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저는 삼 년 동안 상
을 치르겠다고 맹세를 했지요. 그래서 저...... 저는 삼 년 내로
절대로 세수할 수 없습니다."
노인의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불쌍한 아이, 너는 참으로 효자로구나...... 내가 데리고 있는
애들은 모두 나를 아버지라 부르니 너도 앞으로 그렇게 불러라."
그날부터 소어아는 해가반(海家班)에 가입했고 매일 같이 재주
넘기를 하며 나날을 보냈다.
그는 비로소 이 곡예단의 곡예사들이 거의 다 단장의 자식 혹은
조카들임을 알았다. 그 야독자란 소년은 그의 여섯째 아들이었고
실력 또한 가장 좋은 자였다.
그 홍의 소녀는 곡예단의 주인공이었고 이름은 해홍주(海紅珠)
였다. 단장이 오십 살 되던 생일 날에 낳은 딸이었다.
소어아는 재주 넘기 외에는 아무 일에도 참견하지 않았고, 매일
같이 밥먹을 시간엔 밥을 먹고 잠잘 때면 잠을 자고 재주넘기 할
때는 재주넘기를 할 뿐 그저 멍하니 한 구석에 앉아 있을 뿐이었
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을 때, 무공 중에서도 가장
신비하고 아는 사람이 드문 요점(要點)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이미 무공비급을 완전히 외우고 있었다. 자신이 남에게 쫓
겨다니는 것이 오직 무공이 약해서라고 생각한 그는 밤마다 남들
이 잘 때를 이용하여 살며시 강가에 올라가 인기척 없는 곳을 찾
아 철저히 무공을 연마하곤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수상하면서
도 바보같다고 느꼈지만 그의 재주넘기가 많은 손님을 끌었고 번
돈 또한 나눠달라고 하지도 않았기에, 그의 게으름 마저도 용서할
수 있었다.
남들은 모두 그를 해소매(바보라는 뜻)라 불렀다.
곡예단은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기에 양자강(楊子江) 이쪽 끝에
서 저쪽 끝으로, 대륙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
러 다녔다. 소어아는 도대체 자기가 어느 곳을 경유했는지 조차
모르며 날을 보냈다.
세월은 유수 같았다. 어느덧 적지 않은 나날이 흘렀다.
어느날, 소어아는 배끝에 앉아 발을 씻고 있었다. 그때 그의 몸
뒤에서 자그마한 하얀 손이 귤 하나를 내밀어 주었다. 그는 귤을
받아 들고는 돌아 보지도 않은 채 먹기 시작했다.
해홍주는 그의 몸 뒤에서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그가 돌아다 보
지 않자 그의 옆에 앉아 강물 속에다 발을 담구었다.
그녀가 희고 작은 발로 물을 튕겨 소어아의 온 몸을 적시게 했
지만 소어아는 꼼짝 않을 뿐만 아니라 입도 열지 않았다.
해홍주는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
다.
"당신은 정말 무뚝뚝하군요."
"저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말할 줄 모른다고요? 그럼 당신이 벙어리란 말예요?"
소어아는 이야기하기 싫은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인지 음성이 매
우 차가웠다.
"저는 소저와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해홍주의 음성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당신이 자격이 없다니요. 누가 그런 말을 해요?"
그녀는 아름다운 눈동자를 들어 소어아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바보 같다고 하지만 나는 당신이
매우 총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당신은 총명할 뿐만
아니라 남보다도 더욱 총명하죠, 그렇죠?"
소어아로서는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바로 남이 자기에게 총명하
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이때 강가에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을 발견한 소어
아는 즉시 혼이 빠진 듯 멍하니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강가의 푸른 잔디밭을 거닐며 얘기의 꽃을 피우고 있었
다. 마침 이때는 봄날씨라 천지에 그윽한 향기가 가득차 있었다.
그들은 화려하고도 경쾌한 봄옷을 걸치고 있었고 웃음띤 얼굴이
더 없이 명랑하고도 즐겁게 보였다. 봄바람은 살며시 그들의 몸을
스쳐지나 갔고 햇빛이 부드럽게 그들을 비춰주었다. 그들은 젊음
은 더없이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봄마저 그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찾아온 것 같았고 또한 그들이 있기에 봄이 더욱 더 자기의 빛을
발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화무결, 철심난, 모용구매 그리고 강옥랑이었다.
강옥랑도 그들과 같이 있는 것을 보자 소어아로서는 놀라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들은 화무결을 둘러싸고 그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
는 이들의 주인공이었다. 철심난도 웃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한 빛이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은 소어아로 하여금 더욱 불행을 느끼게 했
고, 그들의 즐거움은 더욱 소어아의 비참함을 드러냈으며 그들의
기쁨은 소어아의 한없는 슬픔으로 바뀌고 있었다.
소어아의 마음은 불같이 타올랐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질투의
고통을 느껴졌다. 그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파왔다.
해홍주는 그의 표정을 보고는 강가에 있는 그들을 잠시 바라보
았다. 그녀는 곧 소어아의 고통을 알아 차린 것 같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매우 많은 비밀을 지니고 있는 것 같군요. 그렇죠?"
소어아는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못 했다.
그는 푸른색 옷차림의 백능소가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백능소는 인사를 하며 뭔가 쫑알거리고 있었다.
이상하다. 화무결이 어찌 저런 무식하고도 속된 녀석과 어울릴
수 있단 말인가?...... 아 그렇군, 화무결이 원래부터 아무 사람
이나 상대할 수 있게 자랐다는 것을 내가 깜박 잊었구나. 그는 아
무에게도 진실하게 대하지 않으니 상대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겠
지.)
해홍주는 그가 응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입술을 깨물며 다시 물
었다.
"저들을 아시죠?...... 당신도 원래는 저들과 어울려 다녔죠?
그렇죠? 나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어요. 당신은 절대로 우리 같이
천한 사람들이 아니예요."
소어아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 한 듯 점점 뒤로 물러서더니 선
창 뒤로 숨어들었다. 철심난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
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는 그를 알아본 것도 아니었고 관심을
가진것도 아니었다. 그 누가 이런 더럽고 천한 소년을 주의해 보
겠는가?
그러나 소어아는 그녀를 무관심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
미 많이 성장하여 마치 갓피어난 장미꽃처럼 고귀하고 아름다웠
다. 한편, 모용구매는 더욱 더 가냘퍼져서 마치 국화와 같았다.
그녀는 장미처럼 아름답지는 못 했지만 다른 한가닥의 그윽한 품
위를 풍기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옛날보다 커졌고 옛날과 같은
예리한 빛을 찾아 볼 수는 없었다. 대신 까닭 모를 애수에 잠겨
있었다.
해홍주는 살며시 소어아의 앞으로 다가섰다. 어느덧 그녀의 눈
동자 속에도 모용구매와 같은 애수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그 눈
동자로 소어아를 바라보며 말을 했다.
"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당신이 나에게 무관심한 이유를 알았어
요. 나는 당신과 말할 자격도 없겠죠. 그렇죠? 내가 어떻게 저 아
가씨들과 비교가 되겠어요? 그녀들은 저토록 고귀하고 나는 이토
록 천한데 말입니다......."
봄바람이 포근히 불어 오고 있었지만 선창 뒤는 매우 서늘하고
어두웠다.
소어아는 갑자기 그녀를 껴안더니 뜨거운 입술로 그녀의 입술
위를 덮쳤다. 그의 피는 이미 들끓고 있었고 더 이상 억제할 수가
없었다.
순간 해홍주는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눈
을 감았다. 아련한 상태에서, 그녀는 자신이 뜨거운 불길 속에 뛰
어들어간 것같이 온 몸이 타오르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마저 완전히 녹아버린 것같이 느껴졌다.
강가에 있던 사람들이 얘기를 나누며 점점 멀어져 갔다.
소어아는 갑자기 그녀를 밀어내며 배에서 뛰어내렸다.
해홍주는 혼이 빠진 듯 멍하니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봄바
람이 몹시 불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아름다운 꿈이 깨질까봐 감히 눈뜰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눈에서는 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다시 밤이 찾아왔다. 초롱불이 밝혀지고 사람들이 하나 둘 모
이기 시작했다. 단장은 자기의 그 특이한 우렁찬 음성으로 손님을
끌고 있었다.
인간은 순간적으로 변할 수 있지만 생활만은 절대로 순간적으로
변할 수 없었다. 천한 사람들은 자기의 천한 생활을 계속하지 않
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고 운명이었다. 또한 이것이
바로 운명의 비극이었다.
해홍주는 또 다시 밧줄 위로 올라섰고 허수아비처럼 밧줄 위에
서 거닐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웃음소리 박수소리는 이미 그녀와는 멀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달콤한 다른 세상으로 한없이 날아가고 있
었다. 그곳은 일 년 열두 달 영원히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천한 웃음을 억지로 짜낼 필요도 없는
곳이었다.
소어아는 한 구석에 주저 앉아 있었다. 그의 마음도 머나 먼 곳
에 있었고 눈앞의 일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이 때,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며 해홍주가 높은 밧
줄 위에서 떨어졌다.
단장, 야독자 등이 이 광경을 보자 얼굴색이 변했다. 그러나 단
장은 역시 억지로 웃음을 짜낼 수밖에 없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때가 있듯이 사람이라면 그 누구
에게도 실수가 있는 법입니다...... 얘야, 어서 일어나서 어른들
에게 다시금 실력을 보여주어라."
사람들의 비명은 이미 비웃음으로 변해 있었다. 관중들의 야유
소리가 여기 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뭐 또 볼 것이 있나? 저 계집아이가 정신이 없는 것을 보니 낭
군을 생각하고 있었나 본데 어서 낭군이나 찾아가라고 해라."
"이봐 아가씨! 그 낭군은 누구야? 혹시 나 아닌가?"
사람들은 더욱 흥겹게 웃었고 또한 더욱 천한 말들을 지껄였다.
소어아의 피가 또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때 사람 중에서 한 명의 녹의 소년이 뛰어나왔다. 그는 다름
아닌 바로 백능소였다. 그는 차디 찬 눈동자로 사방을 한 번 둘러
보더니 말했다.
"누가 또다시 이 소녀에게 무례를 범한다면 내가 당장 그의 혀
를 뽑아 놓겠다!"
다른 한 사람이 그의 뒤를 따라 나와 사나운 음성으로 외쳤다.
"나는 그의 눈을 파 놓겠다!"
그 자는 다른 아닌 홍삼금도 이명생이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장내는 즉시 조용해졌다. 악인은 언제나 두려
움을 받는 존재였다. 단장은 급히 달려가 절을 했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능소는 거드름을 부렸다.
"별 것 아니오."
그는 품에서 큰 은덩어리를 꺼내어 땅에다 던지며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당신들은 오늘도 수고만 한 모양인데 이 돈으로 술이
나 받으시오."
이명생도 큰소리로 말하며 한 걸음 나섰다.
"이 돈이면 열 항아리의 술을 받을 수 있소. 우리 형님께서 왜
이렇게 많은 돈을 주는지 알고 있겠지?"
이 말을 들은 단장은 얼굴색이 크게 변했지만 즉시 웃음띤 얼굴
로 바꾸었다.
"얘야, 빨리 와서 어른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올려라."
해홍주의 얼굴은 불같이 타올랐다. 그러나 할 수 없이 걸어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단장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호통을 쳤다.
"목소리가 그렇게 작아서야 누가 알아 듣겠냐?"
백능소는 오만불순한 얼굴에 한가닥의 웃음이 떠오르며 음성이
부드러워졌다.
"괜찮다, 괜찮아. 아가씨들은 얌전한 맛이 있어야지."
이명생도 옆에서 껄껄 웃었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야."
그는 갑자기 해홍주의 손을 잡아 당겼다.
"우리 형님이 너를 좋아하니 따라가서 술이나 권해 드려라."
이 말을 들은 해홍주는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고,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단장은 억지로 웃음을 자아냈다.
"우리 이 아이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이삼 년이 지난 후 공자님
을 모시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이명생은 괴상한 웃음을 터뜨렸다.
"뭐? 이삼 년 후에 말이냐? 우리 형님은 조금도 기다릴 수 없단
말이다."
이 때 야독자가 참다 못 해 달려와 큰소리로 외쳤다.
"그 손을 놓아라!"
그러나 그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명생에게 얻어 맞고 바닥
에 쓰러졌다.
이명생은 야독자에게 일격을 가한 후 사나운 음성으로 입을 열
었다.
"좋게 말할 때 고분고분 들어라. 안 그러면 재미없어!"
백능소는 빙긋빙긋 웃고 있었다.
"순순히 따라오지 그래."
그는 갑자기 양손을 내밀어 해홍주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해홍
주는 놀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 때 한 사람이 성큼성큼 다가오며 거칠게 외쳤다.
"누가 감히 이 소녀를 데려 간단 말이냐?"
그 목소리를 듣자 해홍주의 눈에서는 즉시 빛이 솟아났다. 소어
아가 나타난 것이었다! 이제 해홍주는 죽으라 해도 서슴지 않고
죽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이명생은 짙은 눈썹을 치켜 세우며 껄껄 웃었다.
"이 더러운 자식,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그는 소어아의 얼굴을 향하여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소어아의 몸에 닿기도 전에 나꾸어 잡히고 말았고 곧 '우두둑'하
는 소리와 함께 부러지고 말았다. 그는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주
저앉았다.
소어아는 사나운 음성으로 외쳤다.
"꺼져라!"
그는 손을 번쩍 들어 이명생의 그 몇백 근이나 되는 몸뚱아리를
십여장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 일격은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해
도 중상을 입히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다시금 놀라움의 비명을 질렀고, 백능소는 얼굴색이
크게 변하며 장검을 빼어들고는 소어아의 가슴을 향하여 일격을
가했다.
소어아는 몸을 약간 비틀며 달려 들어가 백능소의 가슴을 향하
여 일격을 가했다. 그의 이 일격은 결코 전력을 다 한 것이 아니
었지만 백능소는 비명 소리를 지르며 입에서 검붉은 피를 뿜어냈
다. 그는 힘없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푸른색의 옷 위에 빨간 피가
번졌다.
사람들은 사방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큰일 났다. 사람이 죽었다."
소어아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자기의 무공이 이토록 진전된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람들의 비명이 그에게 정신이 들
게 했다.
그는 자기가 다시는 해씨 곡예단에 숨어 있을 수가 없게 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망서리지 않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해홍주는 그가 달려가는 것을 보자 급히 쫓아가며 울부짖는 음
성으로 외쳤다.
"나 좀 기다려요......."
그러나 소어아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 어둠 속으로 사
라졌다.
해홍주는 비틀거리며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의 눈은
눈물로 가득찼다. 그녀는 목을 놓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는 갔어요...... 그는 영원히 내곁에 돌아오지 않을 거예
요."
단장은 급히 달려와 해홍주를 부축했다. 그의 수많은 인생의 경
험이 쌓인 늙은 얼굴에는 많고 많은 복잡한 감정이 드러나고 있었
다. 그것은 놀라움이고 기쁨이며 또한 적지 않은 슬픔이기도 했
다.
그는 자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원래부터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어떻게 그를 붙잡아 둘 수 있겠
니......."
해홍주는 계속 울부짖었다.
"그러나 저...... 저는 그를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제발
부탁이니 아버님이 그를 좀 찾아 주세요......."
단장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로서는 참는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사람은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붙잡아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를
잊어라. 다시 그를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니 말이다."
해홍주는 아버지의 말을 듣자 숨마져 제대로 쉬지 못 하고 비통
하게 가슴을 쥐어 뜯었다. 영원히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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