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绝代双骄 07

3학년2반 | 2022.02.13 07:13:50 댓글: 0 조회: 330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8496
어긋난 계획(計劃)
강별학은 대노한 음성으로 호통쳐 물었다.
"철노영웅이 만약 자살한 것이 아니라면 내가 죽이기라도 했단
말이오? 흥, 만약 그를 죽이려고 했다면 벌써 죽였지 무엇하러 지
금까지 기다렸겠오?"
유령 같은 사나이도 지지 않고 마주 받았다.
"철무쌍이 만약 자살할 마음이 있었다면 아마 지금까지 기다리
지 않고 벌써 자살했을 것이오....... 그는 조금 전까지도 죽으려
고 하지를 않았었는데 모든 진상이 밝혀지기 일보 직전인 지금 무
엇때문에 자살하겠소!"
강별학은 안색이 점점 굳어져갔다. 그렇다고 그대로 물러설 그
가 아니었다.
"철노영웅이 만약 자살한 것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그를 반격
할 여유도 주지 않고 죽일 수 있단 말이오? 철노영응은 이렇게 죽
음으로써라도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당신은 그의
명예를 더럽힐 작정이오?"
"만약 정면에서 그를 죽이려 했다면 철노영웅은 분명히 반격할
여유가 있었을 것이오. 그러나 갑자기 엄습을 받으면......."
강별학은 큰소리로 소리치며 유령 같은 사내의 말허리를 잘랐
다.
"그러면 나 강별학이 그를 암습했단 말이오?"
"당신은 이미 철노영웅이 당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
문에 설사 암습을 한다 해도 절대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오."
"그럼 나 강별학이 아니라면 화공자께서 암습이라도 했단 말이
오?"
"암습한 사람은 철노영웅님과 매우 가까운 자임에 틀림없소. 철
노영웅님은 꿈에도 그가 암습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당
하고 만 것이오!"
이때 갑자기 녹의 소년이 큰소리로 외치며 그 둘의 대화 속으로
끼어들었다.
"누가 감히 나의 스승님을 죽였나? 나와서 나까지 죽여 봐라!"
유령 같은 사나이는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냉소를 터뜨렸다.
"너의 스승님을 죽인 자는 바로 너다!"
이 말이 떨어지자 녹의 소년은 깜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
다.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느냐? 산 같이 높고 바다 같이 깊은 은
혜를 입은 내가 어찌 스승님을 죽일 수 있겠느냐? 너...... 너는
혹시 미친 것이 아니냐?"
"흥! 스승은 어버이와 같다고 했거늘 은혜를 보답하기는 커녕
어찌 양심과 도덕을 버리고 강별학과 내통을 한단 말이냐! 너는
진상이 완전히 밝혀지려고 하자 사람들이 너를 주의하지 않는 틈
을 타 악독하게도 너의 스승의 목에 칼을 꽂았다. 너는 아무도 본
자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내가 있다는 것을 잊었느냐?"
녹의 소년은 격하게 소리쳤다.
"너는 도대체 무얼 하는 자냐? 너는 누군데 나에게 억울한 누명
을 씌우려 하는 것이냐!"
"증거가 필요하단 말이겠구나?"
"그럼 증거를 내놓을 수 있단 말이냐?"
"다른 사람은 증거를 내놓을 수 없을지 몰라도 나는 증거를 내
놓을 수 있다. 오호춘반관 식당에서 술에다 독을 놓아 조 총표두
를 해치려 했던 자가 바로 너라는 것을 나는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 말을 들은 녹의 소년은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역시 큰소리로 소리쳤다.
"개나발 불지 마라! 나의 스승님이 조 총표두를 모셔 온 것은
삼상연표 사이를 화해시키려는 것이었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술
에 독을 타서 조 총표두를 해치려 했겠느냐!"
"그것은 네가 강옥랑의 명령을 받고 그들이 화해를 하지 못하도
록 방해하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너의 스승님의 명성에 오점을 주
려는 계책이었다."
녹의 소년은 안색이 하얗게 되어 더듬거렸다.
"너...... 너...... 네가 하는 말을 믿어 줄 사람이 있을 줄로
아느냐?"
"네가 그것을 부인하겠단 말이냐? 난 그날 네가 강옥랑과 그 악
독한 계책을 상의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단 말이다!"
"네가 어떻게 친히 목격할 수 있었단 말이냐...... 함부로 사람
을 모독하다니 나는 너를 가만히 놓아 둘 수가 없구나!"
그는 기압을 지르며 공격을 퍼부으려 하였다. 바로 그때 그 유
령같은 사나이는 얼굴을 덮은 대나무 바구니를 슬쩍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를 똑똑히 보아라!"
불빛 아래 비친 그의 얼굴은 때가 끼어 더러웠고 산발한 머리는
유령의 형색이 다분히 섞여 있었다.
녹의 소년은 그 모습을 보자 공격을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뒤로
서너 발자국 물러섰다. 그는 겁에 질려 더듬거렸다.
"너...... 너......."
그 유령 같은 사나이는 또박또박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바로 그날 너와 강옥랑에게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귀신이
다. 너희들은 나의 입을 막기 위해서 나를 죽였지만 나는 곱게 눈
을 감을 수 없었기에 이렇게 귀신이 되어 너희들의 악독한 계책을
폭로하고 너희들의 생명을 빼앗아가고자 온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녹의 소년은 미친 듯한 비명을 지
르며 도망치려 하였다.
"귀신이다...... 귀신이다...... 정말 귀신이 나왔다!"
순간 검광이 번쩍하며 그 녹의 소년은 대청 문에 당도하기도 전
에 쓰러졌다. 한 자루의 장검이 그의 등에 박혔다.
녹의 소년은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나동그라지고
만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장검이 강별학의 손에서 날아간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든 눈길이 강별학에게 집중했다.
그러나 강별학은 태연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이 자는 정신착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곳을 벗어나게 한다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소. 불초로서는 그를 없애지 않을
수가 없군요."
유령 같은 사나이는 그의 말에 즉각 반격하고 나셨다.
"강별학! 너는 입을 막기 위해서 그를 죽인 것이다. 너 같이 사
악한 놈은 언젠가는 천벌을 받아 죽을 것이다."
강별학은 입가에 조소를 띠우며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남에게 얼굴을 내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그런 말
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이 한마디는 그 유령 같은 사나이에게 큰 약점이 아닐 수 없었
다. 그가 화무결 앞에 어찌 자신의 얼굴을 내밀 수 있단 말인가!
강별학은 여전히 태연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내 대장부는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오. 당
신이 말한 것들은 모두 무예계의 중대사이니 당연히 당신의 신분
을 밝혀야 하지 않겠소?"
유령 같은 사나이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더니 갑자
기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한 말들은 조금도 거짓이 없는 진실이오. 이 진실과 내가
얼굴을 내미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소?"
강별학은 의기양양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이 사람은 자기가 한 말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하면서 어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기를 꺼린단
말이오?"
소어아는 사방을 둘러 보았다. 과연 사람들의 눈동자 속엔 모두
의아심이 가득했다.
강별학은 다시 큰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녀석은 자신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감히 얼굴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오. 그의 목적은 분명 무예계를 혼잡하게 만들 속셈일
것임에 틀림없소."
강별학은 모든 사람의 얼굴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화무결에
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화공자께서는 이들의 내력을 혹 짐작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화무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의아심이 가득찬 음성으로
되물었다.
"이들이라니오?"
"이 녀석과 그 가마를 든 일꾼은 한패일 것입니다. 불초는 내내
유심히 그를 주의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가마를 든 그 일꾼이 정
말 저 녀석이 말한대로 내 아들 옥랑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의 말은 오직 대의를 위하고 조금도 개인의 사정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투였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아들의 경거망동한 행동일
지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순식간에 많은 일들이 변화무상(變化無常)하게 발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강별학과 유령 같은 사
나이만을 주시했을 뿐 그 가마를 드는 일꾼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
다.
강별학의 입에서 그 일꾼이 거론되자 사람들은 비로소 화다닥
놀라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일꾼 뿐만 아니라 다른 가마
를 드는 일꾼들과 단씨 부녀가 타고있는 가마마저 종적을 감추었
다.
소어아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두뇌가 영민함에도 경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큰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강별학이 대노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그 일꾼이 어디로 갔느냐?"
줄곧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나구가 불쑥 나서며 끼어들었다.
"단 어른께서 몸이 허약하시기 때문에 충격을 받을 것 같다고
먼저 가자고 그들에게 분부했었습니다."
나삼이 웃음띤 얼굴로 그의 말을 받았다.
"뚱뚱한 사람은 확실히 충격을 감당할만한 힘이 없습니다. 만약
충격을 받으면 중풍에 걸릴 위험이 있지요."
"아니! 두 분께서는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셨으면서도 그 일꾼을
그냥 보냈다는 말씀입니까? 이 일이 확실하게 밝혀지기 전까지는
불초도 용의자입니다."
강별학의 말은 교묘하게 진실을 가장한 것이었다. 소어아는 참
다못해 큰소리로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너 여우 같은 놈아, 연극을 하는 데는 정말 귀신 뺨을 칠 정도
구나!"
그러나 강별학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 일꾼이 당신과 한패가 아니라고 누가 보장할 수가 있겠소?
당신들이 일부러 짜고 나 강별학을 함정에 밀어 넣을 속셈이 아니
었소? 당신은 왜 그들이 가도록 가만히 놓아 두었소?"
소어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람들도 소어아 말에 대해서 적잖이 의아심을 품은 눈치였다.
소어아는 강별학이 손쉽게 상대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새
삼스레 다시 한 번 느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고강한 무공보다는 지혜로운 말이 더 위력이
있었다. 또한 한마디 말이 무공의 격투보다 더욱 더 위험천만 했
다. 강별학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소어아를 사지에 몰아
넣고 있었다.
사태는 급속도로 소어아에게 불리하게 되어 그는 완전히 거짓말
쟁이로 몰리게 되고 말았다. 비록 강변학이 저지른 악독한 일들을
알고 있었지만 증거를 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당하고 만
것이었다. 소어아는 창문을 향해 몸을 날리려 하다가 문득 멈춰서
고 말았다. 화무결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별학은 뻔뻔스런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일꾼은 도망가게 할 수 있었지만 귀하께서는 아마도 도망가
지 못할 것이오. 귀하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것
은 혹 무슨 큰 죄라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오?"
소어아는 빠져나가기 위해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그러나 전
혀 좋은 계책이 생각나지를 않았다.
이때 화무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친구 스스로가 얼굴을 내미는 것이 힘이 든다면 불초가 대신
수고해 줄 수도 있소."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앉아
서 당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화무결! 난 본시 당신이 매우 총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소.
그러나 이렇게 강별학에게 개처럼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보니 정
녕 부끄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소?"
화무결은 그런 말을 듣고도 전혀 화를 내지 않고 그저 미소만
띠울 뿐이었다.
"친구가 만약 나를 화나게 할 속셈이라면 그것은 헛된 수작이
오."
"흥, 화를 낼 줄 모르는 인간도 인간이오? 당신은 그것이 무슨
자랑인 줄 아시오?"
"나도 화낼 줄 모르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당신 같은 사람은
나를 화나게 할 자격이 없소."
강별학이 이때 웃음띤 얼굴로 끼어들었다.
"화공자께서는 비록 나이는 젊지만 수양이 노화순청의 경지를
이루었소. 그를 화나게 하려면......."
소어아는 큰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를 화나게 하려면 철심난을 빼앗아 오는 것 외에는 없다 그
런 말씀이오?"
과연 화무결은 얼굴색이 변해 심각해졌다.
"이 일은 그녀와는 관계가 없으니 당신이 그녀의 이름을 꺼내지
마시오."
"철심난이 당신의 것도 아닌데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그
녀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거요?"
무슨 영문에서인지 철심난에 대한 화무결의 태도에 소어아는 갑
자기 뜨거운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화무결
을 화나게 하고 싶었고, 도저히 화무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와 당당히 피튀기는 격투를 하고
싶었다. 설혹 격투를 하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가슴에 가득찬 울
분을 터뜨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는 최근 두세 해 동안 강한 이성으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 피가 끓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
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참았다가는 가슴이 터져 살 수 없
을 것 같이 느껴졌던 것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껄껄 웃으며 큰소리로 말을 이었다.
"화무결! 내가 너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겠다. 철심난에게
는 오래 전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그녀가 이미 그에
게 마음을 바친 이상 네가 아무리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 보려 해
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설혹 네가 그녀를 억지로 처로 맞이한다
해도 그녀의 마음은 역시 그 사람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순간 화무결의 쌍장이 뿜어졌고 소어아는 미친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몸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순간 소어아가 서 있던 자리의 뒤
쪽 벽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구멍이 나고 말았다. 만약 조금만
늦었어도 소어아의 가슴은 난파당한 배처럼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
을 것이었다.
몸을 솟구친 소어아는 높이가 넉장은 족히 되는 천장까지 날아
올랐다.
그는 손바닥으로 기둥을 잡고 있었지만 몸이 바람 속의 낙엽처
럼 좌우로 흔들거렸다. 아래서 볼 땐 마치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만 같았다.
그러나 강별학은 그것이 바로 경신술에서 가장 뛰어난 신법이라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은 곧 떨어질 것처럼 흔들거리고
있었지만 사실은 흔들거릴 때마다 무서운 살수를 내뿜고 있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섣불리 몸을 솟구쳤다가는 곧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나 진배가 없었다.
화무결은 몸을 솟구칠 뜻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잠
잠히 서서 자기의 발끝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은 너무도 태평하여 마치 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사
람들은 그가 일격을 펼쳐 낸 후 갑자기 죽은 듯 조용해진 것을 보
자 모두 의아심이 생겼다. 그러나 더욱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소
어아가 왜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도망가지를 않는가 하는 점이
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화무결이 완전히 정신통일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지도 듣지도 않는 듯 했지만 사
실은 모든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화무결의 눈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비록 유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감히 도망갈
수가 없었다.
떠들썩하던 대청안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1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 긴장된 분위기는 더욱 더 짙어
지기만 했다.
소어아는 위에서 계속 흔들거리고 있었다. 대청안에 있던 사람
들은 처음엔 그저 불안함과 어지러움을 느끼다가 나중에는 대청안
의 등불이 소어아의 몸과 함께 흔들리는 것 같이 느껴졌고 심지어
는 대청마저 흔들거리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뱃속의 창자가 입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화무결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강별학만은 여전히 태연
한 표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화무결은 그 모습이 마치 거세게 휘몰아치는 파도 속에 우뚝 솟
아 오른 바위와도 같이 보였다. 그의 자세는 비단 듬직했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무척 안정된 기분을 들게 해주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몸에서는 강렬한 살기가 스며 나오고 있어 강별학 외에는 그
누구도 근접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마치 이러한 상황을 영원히 유지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움직임은 당연히 정체보다 오래 유지될 수는 없었다. 강
별학도 물론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한가닥의 미
소가 점점 번져나오고 있었다.
밤은 매우 깊어갔고 여름철 밤바람이 차지는 않았으나 대청에
있는 사람들은 무언가에 눌려 절로 떨려왔다.
이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대청으로 갑자기 한 마리의 제비
가 날아 들어왔다.
대청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소어아와 화무결이 어떤 동작도 취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제비는 돌연 바
닥으로 떨어져버렸다. 아마도 무형의 살기를 견뎌내지 못한 것 같
았다.
떨어진 제비의 그림자가 화무결의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순간이
었다. 갑자기 소어아의 몸이 팽이 같이 돌며 덮쳐 내려갔다. 보기
엔 마치 그가 수십 개의 손발이라도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이 광
경을 본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수십 개의 손발을 가진 천신이 내
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화무결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허공에서 돌고 있던 소어아는 기압 소리를 내며 삽시간에 십육
초의 장(掌)과 팔 초의 발 공격을 펼쳐냈다.
그의 이 재빠른 공격은 격렬한 위세를 지니고 있었고 허초도 실
초로 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단 일 초만 맞아도 도저히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입을 벌린 채 눈부시다는 감정만 느꼈을 뿐이었
다. 만약 공격을 받은 사람이 화무결이 아니고 그들이었다면 그들
은 막기는 커녕 어디로 피해야 좋을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화무결은 달랐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고 오른손을 내
밀어 가볍게 저었다. 그의 이 일 초는 보기엔 공격의 초식 같지도
않았고 방위의 초식 같지도 않았다.
그의 일 초는 실로 비파를 퉁기는 듯했다. 부드러운 그의 손길
엔 조금의 살기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일 초가 뻗쳐나
오자 소어아의 거센 공격은 완전히 무형으로 사라져갔다.
'짝! 짝' 하는 소리가 연거퍼 들려오며 소어아의 왼손은 자기의
오른손을 쳤고, 오른손은 왼손을 쳤다. 그리고 왼발은 오른발을
차고 오른발은 왼발을 차고 있었다.
그의 필살의 공세가 오히려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것이었다. 결
국 그는 자신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본 강별학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멋집니다! 아주 멋진 이화접옥이군요!"
화무결은 엷은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당신의 무공의 뛰어남은 실로 무예계의 일류 고수라 할 수 있
고 또한 내력의 두터움 역시 예상밖이었소. 하지만 내력이 두터우
면 두터울수록 부상 또한 더욱 더 심할 것이오."
그는 소어아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이때 대청안에 갑자기 한가닥의 거센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갑
자기 모든 등불이 꺼졌고 또한 수십 개의 강인한 암기가 흩뿌려지
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암기는 강별학과 화무결을 향하고 있었
다. 그 암기는 순식간에 등불을 일제히 모두 꺼뜨렸을 뿐만 아니
라 그 수법과 힘이 고수의 솜씨였다.
그러나 그 암기가 강별학과 화무결을 해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가볍게 몸을 날려 재빨리 그 암기를 피했다.
대청안은 매우 혼잡스러워졌다.
이때 나구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러분들!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마시오!"
뒤따라 나삼의 음성도 들려왔다.
"그 녀석이 이 기회에 도망을 가버리면 큰일이니까 말입니다!"
이 말들은 본시 강별학이 하고 싶던 말이었다. 강별학은 감탄하
며 생각을 했다.
(이 나씨 형제들은 과연 쓸만한 사람들이로구나!)
다시 나구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밖으로 나가서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막을 테니 너는 빨
리 가서 불을 밝혀라!"
나삼의 음성이 뒤따라 들려왔다.
"알았어! 어서 가봐!"
곧이어 불빛이 번쩍거리더니 그는 이미 부싯돌을 밝혔다. 그리
고는 재빨리 유령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흔적
도 없었다.
강별학은 얼굴색이 변하며 재빨리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러나 창밖에는 막막한 어둠 뿐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삼은 안타까움이 가득찬 표정으로 땅을 차며 소리쳤다.
"그 녀석이 참으로 빨리도 도망쳤군요. 자 빨리 쫓아갑시다!"
이때 화무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설사 쫓아간다 해도 그를 잡을 수는 없을 것이오."
강별학이 눈썹을 잔뜩 치켜 세우며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도망가게 이대로 놓아 두잔 말입니까?"
나삼이 끼어들었다.
"저의 형님이 아마도 그를 쫓아간 모양인데 잡을 수 있을런지
모르겠군요!"
화무결은 여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잡지 못할 겁니다!"
나삼은 놀라움이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왜요?"
"암암리에 암기를 퍼부은 그 사람은 상당한 무공을 지니고 있습
니다. 우리는 창졸간에 암습을 받아 그에게 시간의 여유를 주었으
니 아마 그를 따라 잡지는 못할 것입니다!"
나삼은 쓰디쓴 표정을 지으며 업을 열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화 공자님 앞에서도 사람을 구해 갈 수 있을
정도니 저의 형님의 실력으로는 당연히 따라 갈 수가 없겠죠."
강별학이 다시 끼어들었다.
"불초는 차라리 댁의 형님께서 그 사람을 따라 가지 못하기를
바라오. 혼자 힘으로 모험을 하면 신변에 위험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이 되오."
"마땅히 그 자를 잡아 강 대협의 더럽혀진 명성을 씻어 드려야
하는데 그를 놓쳐버린다면 큰 과오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탓하지 않고 도리어 저의 형님의 신변을 걱정해
주시니 강 대협은 진정 의기남아 이십니다."
강별학은 약간 우쭐한 기분에 느긋이 입을 놀렸다.
"옳고 그른 것은 당연히 강호에서 판가름 해줄 것입니다. 불초
가 마음에 걸리는 일을 하지 않은 이상 남이 어떻게 나를 비판하
든 간에 나는 추호도 그것에 관계하지 않습니다."
나삼이 또 나섰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천하에 이름을 떨친 사람은 당연히 모함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강 대협님의 명성은 해와 달 같이 밝고
눈부시니 설사 모해의 음모가 있다 해도 결코 강호에 속한 사람들
은 그것을 믿지 않을 겁니다!"
강별학의 눈에선 빛이 번쩍거렸다. 매우 기분이 좋은 표정이었
다.
"바로 그런 까닭에 그 녀석은 절대 이대로 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의 목적이 나를 쓰러뜨리려는 것이니 멀지 않은 장래에 아마 또
나를 찾아올 것이오......."
화무결은 웃음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가 오면 강 대협께서는 절대로 그를 도망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강별학은 또박또박 말했다.
"그때가 오면 불초는 그가 어떻게 생긴 놈인가 보고 싶군요."
불빛이 꺼지자 소어아는 자기를 구하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로 이때 어느 사람이 그를 안더니
창문을 뚫고 나갔던 것이었다. 그 사람의 경공술은 정히 무예계에
서 손꼽힐 정도였고 가볍게 몸을 몇 번 솟구치더니 이미 십여장
밖으로 가 있었다. 소어아는 희미하게 대청에서 외치는 나구의 목
소리를 들었다.
"여러분들, 제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마시오."
그들은 순식간에 소란한 장원을 벗어났다.
조금 전 소어아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만약 지금 자기를
안고 있는 사람이 구해 주지 않았다면 소어아는 절대로 도망 나오
지 못했을 것이다.
소어아는 일생 동안 실로 적만 있고 친구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이며 왜 자기를 구했단 말인가?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구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발을 멈추지 않고 응답했다.
"음."
소어아는 그의 겨드랑 밑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소어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별로 좋은 사람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나를 구했습니까?"
그 사람은 웃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별로 나쁘지도 않던데!"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소!"
"하지만 나는 당신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어디 한 번 알아 맞춰 보시오."
"당신은 물론 남자일 테고......."
"그렇소."
"목소리를 들어 보니까 나이가 별로 많은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다고 적지도 않지."
소어아가 말했다.
"당신은 신석도장은 아닐 테고......."
"그렇소."
"당신이 만약 신석도장이라면 절대로 자신을 알아 맞춰 보라고
는 하지 않을 것이오. 속세를 떠난 사람이 일부러 신비한 척 하지
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소어아는 그가 자신을 구해 주었는데도 오히려 심사를 슬슬 긁
었다. 많은 말을 하게 하여 누구인지를 파악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옳은 말이오."
소어아는 여전히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생각을
하다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헌원삼광이오?"
"하하, 나는 그 도박쟁이를 모르오."
소어아는 참다 못해 드디어 큰소리로 외치다시피 말했다.
"당신은 도대체 사람이오, 귀신이오?"
그 사람은 여전히 웃을 뿐 별로 말이 없었다.
"당신은 평생 동안 생각을 해도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내지 못할
것이오."
"빨리 밝히지 않는다면 당신을 욕하겠소!"
"욕하시오. 나는 남의 욕을 듣는 게 취미니까."
"내가 못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당신이 정 말하지 않는
다면 혈도를 점하고 묶어 놓은 후 얼굴을 똑똑히 보겠소."
그의 말은 협박에 가까왔다. 한편 그는 손을 그 사람의 요안혈
에 갖다 댔다.
"내가 당신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누가 구해 달라고 했소? 비록 나를 구했지만 혹시 나를 이용하
고자 해서인줄도 모르고, 나를 더욱 더 불행하게 만들런지도 모르
오."
"당신은, 과연 상대하기가 매우 어렵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보아 왔지만 당신 같이 상대하기 힘든 사람은 처음이
오......."
그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 한 집의 창문으로 날아 들어가 소어아
를 바닥에다 내려놓았다. 방 안에는 등불이 밝혀져 있었고 소어아
는 비로소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바로 그 신비한 나구였다.
나구는 웃음띤 얼굴로 소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겠지?"
소어아는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혼
자서 중얼거렸다.
"당신이었다니...... 어떻게 당신이?"
"평생 동안 생각해도 나일 것이라고 알아 맞추지는 못했을 것이
오."
"조금 전 분명히 당신이 대청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떻
게 된 영문이오?"
"그것은 나삼이 혼자서 두 사람의 음성으로 말한 것이오. 그러
니 다른 사람들도 당신을 구한 자가 나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겠지."
소어아는 그제서야 희색이 돌았다.
"과연 교묘한 계책이군요. 나마저 속였으니 그들은 당연히 생각
지 못하겠지요!"
"그 여우 같은 강별학을 속이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
오."
소어아는 유심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소. 강별학을 속이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오. 그러나
그를 속일 수 있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불초의 성은 나라고 하고 이름은 구라 하오."
소어아는 냉소를 터뜨렸다.
"비록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나를 속일 생각
은 마시오. 당신은 필시 깊은 내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나는 벌
써 알고 있었오. 당신들이 일부러 바보인 척 하고 이름을 감춘 것
은 뭔가 음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오."
나구는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 제꼈다.
"형씨께서도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있으니 형씨께서도 무슨 놀
라운 음모를 품고 있단 말이오?"
순간 소어아는 멈칫하더니 빙그레 웃었다.
"좋소. 당신은 언변도 꽤 유창하군. 내가 더 이상 당신에게 캐
묻지 않으면 되지 않겠소? 그러나 당신이 누구든 간에 또한 무슨
음모를 품고 있든 간에 언젠가는 그것을 알 날이 있을 것이오."
"형씨께서는 불초가 아무런 음모를 품고있지 않다는 것을 언젠
가는 알 날이 있을 것이오."
소어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또 물었다.
"나는 당신과 친척도 아니며, 알지도 못하는데 당신은 무엇 때
문에 나를 구했소?"
"불초는 오직 형씨께서 당하고만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 드린 것이오."
그의 말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당신이 나의 실력이 보통이 아닌 것을 보고 나를 이용
하기 위하여......."
나구는 껄껄 웃으며 그의 말을 도중에서 가로챘다.
"형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좋은 사람을 의심하는 것이오."
"당신이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면 이 천하에 나쁜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이오...... 솔직히 털어 놓아 보시오. 위험을 무릅
쓰고 나를 구한 목적을 말입니다."
"음......."
"사람과 사람 사이란 원래부터 서로 이용하는 것 뿐이오. 당신
은 나를 이용하려고 하지만 내가 당신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소? 만약 나에게 부탁이 있으면 말씀해 보시오. 절대로
당신을 탓하지 않을 테니까."
"형씨께서는 과연 호탕한 사람이오. 불초로서는 참으로 탄복할
수밖에 없소이다 그려."
그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더니 소어아를 유심히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불초는 형씨가 오직 강별학의 가면을 벗기고자 하는 것을 알았
소. 불초 또한 벌써부터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소어아는 그의 말을 급히 가로챘다.
"그래서 나를 구해 왔다는 말이오?"
나구는 또 다시 웃음띤 얼굴로 바꾸었다.
"형씨께서 만약 불초와 손을 잡는다면 강별학이 제아무리 교활
하다 해도 아마 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그는 멈칫멈칫 말을 하면서도 유심히 소어아를 바라보았다. 소
어아도 그자 못지 않게 유심히 바라보았다. 결국 소어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분명히 철무쌍과 조향영을 도와주고 있으면서도 암암리
에 강별학과 내통하고 또한 당신은 분명히 강별학과 내통했었는데
또 나와 손을 잡겠다하니 그것은 무엇 때문이오?"
나구는 살이 찐 아래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불초가 형씨와 손을 잡겠다는 것은 완전히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데, 형씨께서는 불초의 말을 못믿겠단 말이오?"
"좋소. 당신이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정말로 강별학
의 가면을 벗기고 싶다면 나는 당신과 손을 잡겠소. 그 일에 대해
서는 끝까지 당신의 힘이 되어 드리겠오."
나구는 크게 기뻐했다.
"장부 일언 중천금이니 부디 약속을 지키기 바라오."
"당신과 손바닥을 맞부딪치는 것으로 맹세하고 싶지만 손이 아
파서 그렇게 할 수도 없군요."
그의 말에는 다분히 농담기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결코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용구매와의 재회(再會)
그 방은 자그마한 다락방이었다.
소어아는 비로소 사방을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장식이 매우 아
름다웠고 두터운 양탄자에는 아름다운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괴이하고도 진귀한 골동품들이 놓여 있었고, 벽에도
세련된 장식품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작
은 칼이나 백옥으로 만들어진 작은 사람이나 말, 추악한 악마와
아름다운 선녀의 그림 등 방 안은 온통 신비함과 괴이함 속에 파
묻혀 있었다.
나구는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방이 어떻습니까?"
"그것 보다도 도대체 누구의 집이길래 당신이 이렇게 함부로 들
어 옵니까?"
"이곳은 바로 나의 집이오."
소어아는 깜짝 놀랐다.
"당신 집이라고? 강별학에게 들킬 것이 두렵지도 않소?"
"마음을 놓으셔도 됩니다. 불초의 거처는 아무도 모릅니다."
"당신은 실로 철저한 준비를 했군요. 이런 집까지 마련했으
니......."
그는 다시금 사방을 살펴보더니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들 같은 두 남자가 이렇게 집을 장식하다니 참 알 수 없는
일이오."
"비록 불초 형제의 소유이긴 하지만 이 모든 장식은 우리 형제
가 한 것이 아닙니다!"
"아! 그래요."
나구는 신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만약 이곳을 장식한 분을 본다면 아마 크게 흥미를 느낄 것입
니다."
"어째서요?"
"절세 미녀인 까닭이오."
소어아는 껄껄 웃었다.
"미인?...... 나는 미인을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프오!"
"형씨가 비록 미색을 좋아 하지 않는다 해도 그녀는...... 그녀
는 다른 여인들과 다릅니다. 그녀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형용하
기 어려운 신비한 마력 같은 것을 지니고 있소. 그러니 형씨의 마
음에 들지도 모르지요."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괜히 보고 싶어 지는군."
나구는 방울이 달린 줄을 잡아 당기며 말을 계속했다.
"형씨께서는 즉시 그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아담하게 방을 장식할 수 있는 여인이라면 분명히 남과
다른 기질이 있겠구나......."
소어아는 문득 생각이 난듯 나구에게 물었다.
"강별학은 아직도 그 낡아 빠진 집에서 살고 있습니까?"
"장소는 비록 그곳이지만 집은 전과 같이 낡아 빠진 것이 아니
오."
"그는 남이 집을 가꾸어 주는 것이 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모르는 말씀이오. 지금은 마음이 달라졌어요. 이번엔 화
무결이 그를 위해 수리한 것입니다. 또한 화무결도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소어아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화무결이 그와 같은 사람과 어울리다니 참으로 안타깝소."
"강별학이 겉으로는 그토록 인자하고 어질게 행동하니 그 누가
사귀려 하지 않겠습니까? 화무결은 무공이 비록 고강하고 뛰어나
긴 하지만 아무래도 아직 젊고 어리석으니......."
소어아는 냉소하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화무결은 총명함을 마음 속 깊이 감추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어리석게 보일지도 모르오. 그러나 당신이 만약 그가 젊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의 어리석음이오."
나구의 눈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형씨는 화무결과 깊게 아는 사이오?"
"이런 말을 들어 봤소? 자기가 가장 깊이 아는 자가 흔히 자기
최대의 원수라는 것을 말이오!"
이렇게 말한 그는 갑자기 등줄기에 한기가 느껴져 자기도 모르
게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한
여인이 유령 같이 그의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여인은 과연 양귀비를 무색케 할 정도의 절색이었다. 그녀는
눈썹을 약간 찌푸리고 있었지만 큰 눈동자 속에는 흡사 안개가 가
득차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분명히 소어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소어아를 보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또한 그녀의 눈동자는 애수에 젖어 있는
듯도 했고 마치 꿈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를 바라본 소어아는 멍해지는 것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놀
랍게도 다름 아닌 모용구매였던 것이다.
나구는 보지 못한 듯 웃음띤 얼굴로 말을 시작했다.
"이분 몽소저(夢小姐)가 바로 이곳을 장식한 아가씨입니다."
소어아는 의아심이 불 같이 일어났다.
"몽소저?"
"불초가 이 여자를 처음 발견했을 때도 이 여자는 바로 이런 모
습이었소. 혼자서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었지요. 나를 따라 오지
않겠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저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군
요. 그래서 불초가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역시 웃으며 고개
를 끄덕일 뿐이었소. 꿈을 꾸고 있는 사람 같기에 그녀를 몽소저
라 부르게 된 것이오."
소어아는 그녀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지를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몰아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몽소저...... 꽤나 쓸만한 이름이군요."
나구는 잠시 동안 그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 아가씨를 아십니까?"
"당신이 보기엔 이 아가씨가 나를 아는 것 같소?"
나구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소어아를 향해 다시 물었다.
"물론 이 아가씨를 모르겠죠. 그런데...... 이 아가씨가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면 어떻하겠소. 나에게 이 아가씨를 주기라도 하겠단
말이오?"
"불초와 손을 잡은 이상, 불초의 물건은 바로 형씨의 물건이오.
더욱이 저희 형제는 늙고 뚱뚱하고 게으릅니다. 늙고 뚱뚱하고 게
으른 것이 호색의 최대 적이라는 것을 아시오?"
소어아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당신이 그토록 호방하니 나로서는 사양할 수가 없군요."
이때 갑자기 한 차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창문 밖에서 들려왔
다. 한 사람이 창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름 아닌 나삼이었다.
나구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어떻게 벌써 왔느냐? 그 강별학이란 녀석이 나를 의심하지는
않더냐?"
나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당연히 우리가 한 짓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지."
나구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단 한 명 밖에 없는 증인이 그에게 당했으니 이제는 마음을 푹
놓고 있겠구나."
소어아가 그들 이야기 속으로 끼어들었다.
"증인은 녹의 소년 말고 또 하나가 있소."
나구와 나삼이 서로 바라보더니 동시에 입을 열었다.
"또 누가 있단 말이오?"
"그의 아들 강옥랑이 있다는 것을 잊었소?"
나구가 그의 말에 응답했다.
"그러나 강옥랑이 어떻게 자기 애비의 음모를 탄로 시키겠오?"
소어아는 천천히 대답했다.
"나에겐 혹시 방법이 있을런지도 모르오."
소어아는 의자에서 내려와 두텁고도 부드러운 양탄자 위에 드러
눕더니 시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잠겨 중얼거렸다.
"포근한 태양, 넓은 대초원...... 이 양탄자는 마치 초원의 잔
디같이 부드럽고 포근하구나. 이 위에서 한 삼 일 동안은 잘 수
있다면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군."
"졸리다면 얼마든지 마음놓고 주무시오. 이곳에서는 절대로 형
씨를 귀찮게 할 사람이 없을 테니까."
소어아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대낮인 것 같았다. 그러나 창문에 두꺼운 주렴이 덮혀 있었
기 때문에 창틈으로 강한 햇살이 몇 줄기 뻗쳐 들어올 뿐 다락방
안은 어두웠다.
눈을 뜬 소어아는 휑한 방구석에서 모용구매가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마치 방금 와서 앉은 것 같기도 했고 어젯밤부터 줄곧
그렇게 앉아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희미한 광선 아래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밝고 애수에 쌓인 눈,
길고 부드러운 손, 투명할 정도로 희고 고은 발...... 이 모든 것
은 속세의 사람이 결코 지닐 수 없는 기이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소어아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
다.
이때 벙어리처럼 있던 모용구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는 어디서 당신을 뵌 것 같아요. 당신을 알 것 같아요."
소어아는 깜짝 놀랐다.
"나를 안다구요?"
"네!"
"소저는 어디서 나를 봤는지 기억하겠습니까?"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
뿐이에요."
소어아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저, 소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모용구매는 양손으로 머리를 휘감으며 괴로운 듯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그것을 생각하기만 하면 머리가 아파와요."
"그렇다면 생각하지 말아요."
"당......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나요?"
소어아는 웃음띤 얼굴로 동그랗게 뜬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
다.
"나도 확실히 생각이 안 나는군요. 내가 아는 것은 오직 당신이
전보다 몇십 배나 더욱 아름다워졌다는 것 뿐이오."
공기 중에 가끔씩 은은한 모용구매의 체취가 풍겨왔다.
소어아는 그녀의 투명하고 고운 발을 바라보자 그날 본 그녀의
나체가 생각났다. 그는 갑자기 알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떻든 간에...... 당신은 자신의 과거를 알아야 하지 않겠
소?"
모용구매가 말을 받았다.
"나의 과거를 생각나게 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죽어도 한이 없
겠어요."
"소저는 정말 어떤 희생이든 각오하겠습니까?"
"네."
"좋아요! 그럼 우선 옷을 다 벗으시오. 내가 방법이 있으니 말
이오."
모용구매는 떨리는 음성으로 우물거렸다.
"발...... 발가벗으라고요?"
"소저는 필시 무서운 일을 당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오. 그
일이 아직도 소저의 몸에서 악마 같이 떠나려 하지 않는 까닭에
과거를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모용구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저가 과거를 기억하려면 우선 몸에 붙어 있는 악마를 쫓아
버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선 몸에 걸친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을
완전히 없애버려야 해요."
모용구매는 그의 말에 완전히 넋을 잃은 듯 그저 고개만 끄덕였
다.
소어아는 킬킬거리며 재미난다는 듯 계속 말했다.
"옷은 사람에게 가장 거추장스러운 물건이오. 당신이 우선 발가
벗어야지만 내가 악마를 쫓아 버릴 수 있소. 매우 간단한 일이니
소저는 바로 알아들었을 것이오. 그렇죠?"
"하지만...... 하지만......."
이때 소어아의 손은 이미 그녀의 발을 쓰다듬고 있었다.
"틀림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모용구매가 몸을 일으
켰다. 그녀는 날카로운 빛이 번쩍거리는 단검을 손에 쥐고 있었
다. 그 단검의 끝은 바로 소어아의 목구멍을 향하고 있었다.
소어아는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어물거렸다.
"왜 이러십니까? 나는 단지 소저를 도와 드리려는 것뿐인데요."
"어떤 사람이 누구를 막론하고 내 몸에 손을 대기만 하면 즉시
이 칼로 그를 죽이라고 했어요."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나씨 형제들이 당신을 건드리지 않았다 싶었지."
"지금 무어라고 했지요?"
"아니오, 아무 것도 아니오, 그 사람은 당신이 과거를 생각해내
는 걸 원치 않았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이오."
이 말을 듣자 모용구매는 손을 천천히 내렸다.
"왜 나를 속이려 했을까요?"
"소저는 그를 압니까?"
"모르겠어요."
"그러나 소저는 나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소저는 왜 나를 믿지
않고 그를 믿으려 합니까?"
모용구매는 고개를 숙이며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그녀가 손
에 쥐고 있던 단검은 어느 사이엔가 양탄자 위에 떨어져 있었다.
소어아는 그녀를 잡아 당겨 포옹했다. 모용구매는 전혀 반항하
지 않았다. 소어아는 서서히 그녀의 옷을 벗겼다.
이때 갑자기 차디찬 음성이 들려왔다.
"안 돼!"
소어아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창문의 주렴 뒤에서 한가닥의 은
실이 뻗어 들어와 그의 손에 감겼다. 동시에 작은 인영이 주렴으
로 가린 창문 밖에서 날아 들어오더니 소어아를 향하여 덮쳐왔다.
소어아는 곤두박질을 하며 그 은실을 잡아 당겼다. 그러나 그 길
고 가는 은실은 끊어지지가 않았다.
소어아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검은빛이 번쩍거리
는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도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단지
한쌍의 검은색이 많고 흰색이 적은 눈동자가 드러나 있을 뿐이었
다. 그 눈동자는 마치 귀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괴함
과 공포를 느끼게 했다.
소어아는 놀라움이 가득찬 눈빛으로 그를 향해 물었다.
"당신은 흑 지주가 아니오!"
흑 지주는 소어아의 외침소리를 듣자 재빨리 펼쳤던 신형을 억
지로 멈추었다.
"너는 누군데 나를 안단 말이냐?"
"흑 노제, 벌써 이 형님을 잊었단 말이냐?"
흑 지주는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너로구나! 그런데 어떻게 이 모양이 됐느냐!"
소어아는 긴장을 풀며 낄낄거렸다.
"너도 진실한 얼굴로 남을 대하지 않는데 나라고 변장을 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
흑 지주는 소어아를 유심히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
었다.
"이토록 비겁한 짓을 하다가 들켰는데도 낄낄거리며 말 할 수
있다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이 천하에 너밖에 없을
것이다."
소어아의 얼굴에는 여전히 장난기 섞인 웃음이 번져 나오고 있
었다.
"그것이 어째서 비겁한 일이라 할 수 있는가? 젊고 튼튼한 사내
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짓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정신도 멀쩡하지 않은 사람을 가지고 어찌 그렇게 비겁
한 짓을 할 수 있느냐 말이다."
"그녀를 해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도리어 그녀를 위한 것인데
뭐가 어쨌단 말이냐. 그녀가 싫은 사람에게도 이렇게 할 수 있다
고 생각하느냐?"
흑 지주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소어아는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일은 그리 대단스러운 것도 아닌데 뭘 그래. 마음이 올바르
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나쁘게만 보지만 나 같은 사람은 그렇다고
보지 않아."
"그런 개나발 같은 소리가 너의 입에서 나오는 데도 그리 싫게
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하군."
"그 원인은 내가 전혀 미워할 만한 사람이 못되는 까닭이야."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을 끊고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 흑 지주가
다시 한숨 섞인 한마디를 했다.
"네가 도대체 악인인지 호인인지를 네 자신은 알고 있느냐?"
"나는 물론 나쁜 사람이라 할 수 없어. 적어도 나는 고의로 나
쁜 짓을 하려고 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너는......."
이때 갑자기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흑 지주의 몸이 번쩍거리더니 또다시 두터운 주렴이 덮혀 있는
창문밖으로 날아갔고, 그가 쥐고 있던 은실도 그를 따라 밖으로
날아갔다.
소어아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긴장을 하고 귀를 기울였다.
그 사람은 방 안의 소리를 엿듣는지 가만히 있다가 끝내는 그대로
물러갔다.
창문에 덮힌 주렴을 걷은 소어아는 이미 흑 지주를 찾을 길이
없었다.
창 밖의 햇빛은 서서히 황혼 빛을 드리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밝은 낮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소어아는 혼잣말을 했다.
"아직도 대낮인데 그 흑 지주는 전혀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마음
대로 다닐 수 있구나. 무예계의 인물들이 그를 괴물로 취급하는
것이 역시 허위는 아니었구나!"
이때 모용구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그가 매우 이상하다고 느껴집니까?"
소어아는 밖을 이리저리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단검을 준 자가 바로 그 자인가요?"
"네!"
"그는 자주 소저를 만나러 옵니까?"
"네."
"남에게 들키는 것을 두려워 하지는 않습니까?"
모용구매는 입술을 깨물며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
었다.
"여기 주인인 두 분도 막연히 누군가 나타난다는 것을 눈치챘지
만 아무리 찾아도 그의 그림조차 볼 수가 없었어요. 그는 꼭 내가
혼자 있을 때만 여기를 옵니다."
소어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가 당신을 자주 찾아오고 이 부근에 있다니...... 혹시 그도
나씨 형제란 작자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단 말인가? 이들 형제는
그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하니 도대체 어떤 신분
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는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다락 안을 두
바퀴나 돌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든 그는 모용구매가 아직도 나체
로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젊은 육체는 마치 비단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고, 길고
탄력있는 양다리가 날씬하게 뻗쳐 있었으며 부드러운 그녀의 가슴
이 산같이 솟구쳐 있었다. 옷을 입고 있을 때의 모용구매는 매우
가냘퍼 보였지만 옷을 벗은 그녀는 사람을 질식하게 할 정도로 성
숙한 매력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공기중에는 사람을 미치게 할 듯한 열력이 흘러 다녔다. 소어아
는 자신도 모르게 이마에서 땀이 흘러 내려왔으며 목이 타는 듯한
감을 느꼈다. 그는 참다 못해 외쳤다.
"어서 옷을 입어요!"
모용구매는 멍청히 그를 향하여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며 부드
럽게 말했다.
"당신은 내 몸 속에 있는 악마를 쫓아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소어아는 여전히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의 몸엔 아무런 악마도 없소. 내가 소저를 속이려고 지어
낸 거짓말이오."
"아닙니다. 그 악마가 제 몸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어요. 그는 지금 내 몸에서 움직이고 있어요. 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창백했던 그녀의 두 뺨은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고, 눈에는 괴이
한 빛이 번쩍였다.
소어아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며 여전히 큰소리로 외쳤
다.
"쓸데없는 잠꼬대 같은 말은 하지 말고 어서 옷을 입어라. 그렇
지 않는다면......."
"옷을 못입겠어요. 나는 당신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
그녀는 갑자기 소어아에게 덮쳐 양팔과 다리로 그의 몸을 감았
다. 둘은 양탄자 위로 쓰러졌다.
그녀의 몸은 화산 같이 뜨거워졌고, 그녀의 혀는 거칠게 소어아
의 얼굴을 핥았다. 또한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가슴이 계
속 고동을 치고 있었다.
"그...... 그 악마의 움직임은 참으로 참지 못 하겠어요.
당...... 당신은 왜 나를 도와주지 않아요?"
소어아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옳은 말이야. 너의 몸엔 정말 악마가 있단다. 그 악마는 이미
너의 몸에 십 년 동안이나 숨어 있었지. 지금 드디어 움직인 것이
야. 모든 여자는 그 악마를 지니고 있고 모든 남성들도 그렇지.
하지만 나는......."
소어아는 갑자기 모용구매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겨 그녀를 방바
닥에 깔아 눕혔다. 그러더니 재빨리 바닥에 깔려 있는 양탄자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모용구매는 놀라움에 가득차 울부짖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당...... 당신 왜 이러죠?"
소어아는 몸을 일으키며 길게 숨을 돌렸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의 악마가 있소. 또한 자신만이 그 악마
를 쫓을 수 있지요. 그것은 다른 사람이 절대로 도와줄 수 없는
것이오......."
모용구매는 큰소리로 그의 말을 막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저는 이해 못 하겠어요. 나를 제발 놓아 주
세요. 어서 놓아 달란 말예요!"
소어아는 웃음띤 얼굴로 그녀를 잠시 동안 바라보더니 손을 들
어 상 위에 놓여 있던 식은 엽차를 그녀의 머리에 부었다.
"기억해 두어라. 여자 아이는 함부로 옷을 벗는 것이 아니란다.
적어도 남자가 벗기는 것을 기다려야지. 다음에 또 이러면 거꾸로
매달아 놓고 엉덩이를 때리겠다!"
모용구매는 그가 부은 식은 엽차를 뒤집어 쓰자 드디어 정신을
되찾고 큰소리로 외쳤다.
"너 이 악마 같은 놈, 빨리 나를 놓아 주지 못 하겠느냐."
소어아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문을 열고는 '퉁! 퉁!
퉁!' 하고 걸어 내려갔다.
소어아는 아래층을 한 바퀴 돌았지만 그저 멍청하게 생긴 시녀
를 하나 보았을 뿐이지 나구와 나삼 형제는 찾지 못했다.
그는 그 멍청한 시녀를 붙잡고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여인! 여인이다! 헛수작을 할 때는 너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
고, 좋게 대할 때는 너에게 악마라고 욕을 한다. 그것이 바로 여
인이다."
소어아는 그녀의 몸을 돌리게 하여 그녀의 둥굴고도 큰 엉덩이
에다 가벼운 일장을 가했다. 그런 후 그는 태연하게 걸어 나갔다.
그 멍청한 시녀는 그의 행동에 넋은 잃은 듯 그가 문을 나선 후에
야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터뜨렸다.
소어아는 주방으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얼굴을 다른 모양으로
변장했다. 그리고 나서는 의젓하게 거리로 나섰다.
그 집은 놀랍게도 성의 가장 번잡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소
어아는 새옷을 사서 갈아 입은 후 술집으로 가 마음껏 마셨다. 그
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띤 얼굴을 지었다.
"날은 또 저물었구나. 이젠 내가 활동할 시간이야."
날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소어아는 '경여당' 약국으로 들어가 한 바퀴 돌더니 한 알의 자
금정을 사들고 나왔다.
약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단 한 명
도 없었다.
본시 소어아는 약국에 혹시 무슨 변화라도 일어났나 하고 찾아
갔었지만 약국은 보통 때와 똑 같이 조용하고 평화스럽기만 했다.
소어아는 교외로 달려 나갔다. 원래 그는 단합비의 집으로 가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많은 무예계의 인물들이 성을 나와 교외로
나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뒤를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그들
은 아마도 철무쌍의 빈소가 차려진 천향당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애재여명 철무쌍은 수십 년 동안 강호에서 이름을 떨친 영웅이
었고 그의 보살핌을 받은 자들이나 그의 인품을 존경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영전이나 위로해 주고자 이렇게 찾아가
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은 사실 억울한 것이었지만 그 죽음의 내막에 의심을
품은 자는 별로 많지 않았다. 어쨌거나 철무쌍의 죽음은 무예계의
큰일이었기 때문에 명복을 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할지라도 구경하
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지영장은 등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고 그토록 큰 장원이었지만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장원 대문밖에도 수많은 수레와 말이 매어져 있었다.
소어아는 재빠른 속도로 그곳을 지나갔다. 그때 그의 귀에는 한
가닥의 우렁찬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선녀의 연지마 앵도의 울
음소리 같았다.
(혹시 소선녀 장청이 온 것이 아닐까?)
발걸음을 멈춘 그의 입가에는 한가닥의 미소가 번져갔다.
(이 이 년 동안 그녀는 어떻게 지내 왔을까? 아직도 옛날처럼
붉은 옷을 입고 말을 탄 채 종횡무진하며 채찍으로 사람들을 혼내
주고 있을까?)
그는 그 깜찍하고도 흉악하고, 앙큼하고도 아름다운 소선녀를
보고 싶었다.
(그녀도 그동안 많이 자라겠지. 옛날보다 좀 철이 들었을 거
야?)
그는 뜰로 들어가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아 보았다.
(그녀가 왔다면 꼭 눈에 띌 것인데 왜 아직도 그녀를 찾을 수가
없을까? 그녀 같은 사람은 십여 만 명이나 되는 사람 속에서도 한
눈으로 찾아 낼 수 있을 텐데.......)
소어아는 뜰 안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소선녀는 차림새가 한덩어리의 불과 같은데, 어찌 그 눈부신
빛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앵도의 울음소리를 잘못 들은
모양이군.)
소어아는 이런 생각을 하며 실망을 금치 못했다.
십대악인(十大惡人)
철무쌍의 관(棺)은 대청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조향영은 슬픔
이 가득찬 표정으로 그 옆에 서 있었고 상복을 걸치고 있는 것이
마치 철무쌍의 아들 같았다.
명복을 빌려고 찾아온 손님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무엇인가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사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철무쌍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
며 슬퍼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철무쌍의 영
전에 큰 절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으로 철무쌍에게 명복을
빌어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겉치레에 불과했다.
소어아는 그 광경을 보자 마음 속에서부터 서글픔이 우러나왔
다.
이때 장원 밖에서 갑자기 한 차례의 소란이 일어나더니 사람들
의 음성이 들려왔다.
"강 대협님께서도 오셨군요!"
"강 대협님께선 원래부터 인자하고 어지신 분이라 꼭 오시리라
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뜰에 모였던 사람들은 즉시 양쪽으로 나누어져 한가운데로 길을
만들어 주었고 제각기 굽신거리며 절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머
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도 있었다.
강별학은 심각한 표정으로 철무쌍의 영전을 향하여 곧장 걸어갔
다. 그는 공손히 큰절을 세 번 한 후 슬픔에 잠긴 음성으로 엄숙
히 입을 열었다.
"철노영웅님! 저는 비록 노영웅님과 맞섰지만 그것은 오직 무예
계의 도의(道義)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돌아가신 영이나마 지금은
저의 애닯은 심정을 알아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비록 철노영웅님
의 몸은 이승에서 떠났지만 영혼은 남아 저와 함께 무예계의 정의
를 지켜주십시오. 제사날이 되면 저는 필히 천하 무예계의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여 철노영웅님의 영전에 명복을 빌겠습니다."
그 말은 누가 들어도 인자스럽고도 공명정대한 대협으로서 조금
도 손색이 없는 말들이었다. 뜰에 모인 호걸들은 감탄을 발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그러나 소어아만은 구역질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정말 고양이가 쥐의 죽음을 슬퍼하는 격이군. 남의 눈앞에서
인자한 척 되지 못한 소리나 하고.......)
이때 갑자기 한 사람의 냉소가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흥, 이것은 정말 고양이가 쥐의 죽음을 슬퍼하는 격으로 일부
러 인자한 척하는 것이로군. 남을 죽이고 이제와서 슬퍼하는 척하
다니 참으로 가소롭다."
그 음성은 매우 날카로왔고 여자의 음성임에 틀림이 없었다.
대청에 모여있던 호걸들은 얼굴색이 일제히 변하며 음성이 들려
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명의 흑의를 걸친 여인과 고귀한
옷차림을 하고 준수하게 생긴 소년이 걸어 들어왔다. 그 흑의 여
인은 큰 밀집모자를 눈썹까지 눌러 쓰고 있었다.
많은 호걸들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추호도 두려움
이 없는 듯 오히려 빛이 도사린 큰 눈동자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녀 옆에 서 있는 소년은 마치 소녀 같았고, 사람들이 그를 바
라보자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져 고개도 들지 못했다.
소어아는 첫눈에 그들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놀라움
과 기쁨이 교차되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과연 그녀가 왔구나. 아직도 옛날 성질이 그대로 남아있구나.
화가 나기만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 성질 말이다.)
이때 여러 명의 사람들이 달려나와 그 흑의 여인을 가리키며 심
한 욕설을 퍼부었다.
"넌 어디서 온 계집년이냐? 강 대협님에게 이런 실례를 범하다
니."
흑의 여인도 만만치 않게 대꾸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너희들이 무슨 자격으로 참견한단 말이
냐?"
이때 수염이 긴 한 명의 대한이 노여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호통
쳤다.
"네 년은 이곳이 어딘줄 알고 감히 함부로 떠드느냐? 무례하구
나!"
그 흑의 여인은 냉소를 지으며 여전히 차디찬 음성으로 말을 받
았다.
"그래서 어쩔 셈이냐?"
"강 대협님은 마음이 넓어서 너 같은 어리석은 계집년을 용인하
겠지만 노부는 네 년을 용서하지 못하겠다!"
그는 갑자기 한쌍의 큰 손바닥을 내밀어 그 흑의 여인을 향하여
덮쳐갔다. 그러나 흑의 연인은 여전히 냉소를 지으며 꼼짝하지 않
았다. 이때 그녀의 옆에 수줍은 듯이 서 있던 소년이 갑자기 손을
내밀어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수염이 긴 대한은 그 소년이 가볍게 내민 일격에 나는 듯 튕겨
져 나갔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얼굴색이 일제히 변했고, 몇몇
사람은 기압을 지르며 그 소년을 향해 덮쳐갔다.
소년은 그들이 덮쳐오는 것을 보자 재빨리 방어태세를 취했다.
그가 취한 그 신형(身形)은 마치 산악같이 튼튼했고, 내력 또한
가득 차 보였다. 가만히 서 있을 땐 마치 수줍은 소녀 같았지만,
격투가 시작되자 그는 일대명사(一代名師) 같은 기세를 지니고 있
었다. 대청 안의 호걸들은 그의 이러한 방어태세에 두 눈을 휘둥
그렇게 뜨며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 흑의 소녀는 여전히 냉소를 지었다.
"마음껏 손을 쓰시오. 뒷책임은 내가 질 테니."
그 소년은 흑의 여인의 말이 떨어지자 왼발을 앞으로 내미는 동
시에 오른손을 들어 번개 같이 일장을 뿜어냈다. 맨 앞에 서있던
한 사나이가 그의 일격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때 갑자기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잠깐만, 멈추시오!"
강별학은 웃음띤 얼굴로 그 소년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는 공
손히 읍을 했다.
"형씨께서는 매우 멋진 실력을 지니셨군요. 혹시 강남(江南) 고
가신권(顧家神拳)의 문하생이 아니십니까?"
순간 그 소년의 얼굴은 또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선 후 수줍음이 가득찬 음성으로 모기소리만 하게 말
했다.
"네! 그렇습니다."
강별학은 턱밑의 수염을 한번 슬쩍 쓰다듬었다.
"만약 불초가 틀리게 보지 않았다면 형씨께서는 바로 그 옥면신
권(玉面神拳) 고인옥(顧人玉)공자님이겠군요?"
소어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강별학은 정말 날카로운 안력을 가졌구나.)
이때 그 흑의 여인은 고인옥의 손을 잡아 당기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저런 놈팽이와 가깝게 지낼 필요가 없소. 빨리 갑시
다!"
순간 두 가닥의 인영이 허공에 솟구쳐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날아
갔다. 검은 옷이 허공에 휘날리자 그 흑의 여인의 검은 옷 속에
얼핏 불 같이 빨간옷이 드러나 보였다.
대청에 모여있던 호걸들은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여기저기
에서 소선녀가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
강별학은 그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두 분께서는 제발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저의 마음을 표시할
수 있게 말이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장원 밖으로 나가버렸다. 한가닥의 휘파람
소리가 나자 한 마리의 붉은 색 연지마가 달려와 그들을 싣고는
나는 듯이 사라져갔다.
강별학은 사라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떨떠름한 표정
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름있는 집안의 제자라 신수(身手)가 과연 보통이 아니구나."
이때 한 사나이가 큰소리로 말하며 나섰다.
"설사 이름있는 집안의 제자라 해도 저렇게 오만불손해서야 되
겠습니까?"
강별학은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을 받았다.
"젊은 나이에 그토록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당연히 오
만하게되기 마련인데 어찌 그들을 탓할 수 있겠오?"
말을 마친 그는 사방을 향해 읍을 했다. 대청에 있던 모든 사람
들은 더욱 더 그에게 칭찬을 금치 못했다.
이 광경을 본 소어아는 구역질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한 명의 불량하게 생긴 사내가 손에 긴 대나무 만장을 들
고 빠른 속도로 달려 들어왔다. 대나무에는 흰 헝겊이 하나 달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날듯한 글씨체로 몇 자가 적혀 있었다.
'作活着 我難受(당신이 살아있을 때 나는 괴로움을 느꼈습니
다.) 作死了 我傷心(당신이 죽은 지금 나는 슬픔을 느낍니다.)'
그 글자들은 웅장함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명가의 글씨 같
았다. 그러나 그 문장은 매우 조리가 없어서 어색함을 느끼게 했
다.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그 문장을 보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만장의 위 아래에 쓰여진 사람의 이름을 보자 그들은 심장이 얼어
붙은 듯하여 얼굴색마저 변했다.
'장인 어른에게(老丈人千古)'
'사위 이대취 올림'
'이대취' 이 세 글자에 마치 무슨 마력이라도 있는 듯 대청에
있는 모든 호걸들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심지어 소어아
마저 깜짝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자세히 그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정말 이대취의 필
적인 듯 보였다.
(이대취가 악인곡에서 나왔단 말인까? 그가 언제 거기서 나왔을
까? 그가 지금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강별학은 즉시 그 불량배 같은 사내의 앞을 막아 서며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것을 누가 보내드냐?"
그 불량배 같은 사내는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너무나 깜깜한 밤이었기에 그를 확실하게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거대한 몸집이었고 시체처럼 싸늘한 기운을 풍
겨 온 몸이 전율해 오는 것을 느꼈을 뿐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대청에 있는 호걸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
는 한 노인이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말했다.
"맞다. 이대취가 바로 그렇게 생겼다."
강별학도 입을 열었다.
"너에게 이 기(旗)를 가져가란 말 외에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나?"
그 불량배 같은 사내는 우물쭈물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또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장인이 비록 자기를 죽이려고 했
었지만 장인을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그의 장인을 죽인 자는 몸을 깨끗이 씻고 기다리라고 했습니
다. 저는 궁금증을 참다 못하여 왜 몸을 깨끗이 씻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큰 입을 벌리고 웃더니 그냥 떠나갔습니
다."
강별학은 거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희어졌다. 그는 침통한 표정
으로 입을 열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 불량배 같은 사람이 그의 뒤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어르신네께서도 그가 말한 뜻을 모르신단 말입니까? 어르신네
께서도......."
대청에 모인 호걸들은 일제히 소동을 일으켰다.
"십대악인은 무예계에서 사라진 지 꽤 오래 되었소. 그러나 이
번에 이대취가 다시 나타났으니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나타날지
모르오."
"이대취 외에 도박쟁이인 헌원삼광도 나타났으니, 설사 나머지
악인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골치를 꽤나 썩을 겁니다. 이 일
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사람들이 놀라움과 두려움이 가득차 떠드는 사이 그 불량배 같
은 사내는 슬그머니 빠져 나갔다. 그러나 소어아는 줄곧 그를 주
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 그의 뒤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장원을 벗어나와 적지 않은 길을 걸었다. 얼마를 걸었을
까,
그 불량배 같은 사내가 갑자기 몸을 돌리며 웃음띤 얼굴로 소어
아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겨우 세 냥의 은을 사례로 받았을 뿐인데, 당신은 그것을
뺐으려고 따라온 것입니까?"
"너는 도대체 누구이며 무슨 목적으로 이대취의 이름을 팔아 그
만장을 들고 왔느냐?"
그의 말을 들은 그 불량배는 얼굴색이 갑자기 크게 변했고, 눈
에서 한가닥의 날카로운 빛이 솟구쳐 나왔다. 그의 눈빛은 강별학
보다 더욱 음침했고 헌원삼광보다 더욱 예리했다. 그러나 순간 그
는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 빛이 이미 사라지고 없었
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세 냥의 은을 주길래 그를 대신하여 깃발
을 가져간 것뿐이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소어아는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떻게 내가 미행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소? 분명히 뛰
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는데 누구를 속이려는 것이오?"
그 불량배 같은 사내는 결국 '껄껄'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
러나 곧 다시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요? 만약 내가 무공을 지니
고 있다면 벌써 강도질을 했지 무엇 때문에 얻어먹고 살아야 한단
말이오?"
소어아가 재빨리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이 부인한다 해도 나는 진실을 밝히게 할 수 있소!"
그는 빠른 속도로 그 불량배 같은 사내에게 달려가 일격을 뿜어
냈다. 그 불량배 같은 사내는 정말 무공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소어아의 일격을 맞자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
다.
소어아는 그가 속임수를 쓸까봐 한참이나 기다렸다. 그 사내는
여전히 땅바닥에 쓰러진 채 꼼짝하지 않았다.
소어아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그의 가슴을 만저보았다. 그의 가
슴은 얼음장 같이 차가왔고 숨이 이미 끊어진 것 같았다.
소어아는 그가 이렇게 맥없이 죽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이유없이 사람을 하나 죽였기 때문에 마음이 괴로왔다. 그는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나를 탓하지 마라. 너를 죽인 이상 당연히 상을 치루어 줄테니
고히 눈을 감기 바란다."
그는 그 불량배 같은 사내의 시체를 어깨에 메고 성안으로 향하
여 걸어갔다.
약 한 잔의 차가 식을 시간을 걸었을 때였다. 갑자기 목언저리
가 축축해오며 지린내가 풍겼다.
소어아는 깜짝 놀라며 이상한 생각이 들어 혼잣말을 했다.
"죽은 사람이 어찌 오줌을 쌀 수가 있단 말이냐?"
그는 시체를 던져버렸다. 그 순간 죽은 듯 차디차던 시체가 신
형을 돌리며 땅 위에 사뿐히 내려 서는 것이 아닌가!
그 시체는 껄껄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오늘은 비록 내가 너에게 오줌 맛을 보여 주었지만 다음에 또
나를 건드린다면 똥맛을 보여줄 테다."
말을 마친 그는 허공에 곤두박질을 하더니 몇 장 밖으로 날아갔
다. 그리고 거기서 또다시 몸을 번쩍거리더니 이미 소어아의 시야
에서 사라졌다.
그 사람의 경신술은 강별학이나 화무결에 못지 않았다. 소어아
는 이미 그의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큰 골탕을 먹은 소어아는 노여움에 질식
할 것만 같았다. 그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당연
히 그를 찾아서 화풀이를 할 수도 없었다.
그 사람은 경신술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공(氣功) 노화순청
(爐火純靑)의 경지에 이른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렇
게 감쪽 같이 죽은 사람의 흉내를 낼 수 있단 말인가!
한참이나 노여움에 넋을 잃고 있던 소어아는 갑자기 껄껄 웃더
니 뇌까렸다.
"그가 나에게 골탕만 먹이고 사라진 것이 다행이다. 만약 그가
나를 죽일려고 했다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가 만무하다.
다행히 아직까지 살아 있음을 기뻐해야지 어째서 이렇게 화를 내
고 있단 말이냐?"
그는 허탈한 듯 껄껄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성내는 가장 번화한 곳이어서 길가에 불빛이 환하게 밝혀져 있
었다.
소어아는 또다시 옷 한 벌을 사서 갈아 입었다. 그리고 나서 그
는 성내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그는 마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마차는 두필의 말이 끌고 있었고, 마차 또한 눈이 부실 정도
로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 소어아는 그 마차를 주시 하였다.
그 마차는 큰 객잔(客棧) 앞에서 멈추었다.
깨끗한 옷을 입은 일꾼들이 객잔 안에서 급히 달려나와 마차문
을 열고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섰다.
잠시 후 마차 속에서 또 두 사람이 내려 섰다.
왼쪽에 있는 사람은 매우 창백하고 몸집이 작았다. 마치 거센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그러한 신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침착했으며 매우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그가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은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배합으로 고상함이 깃들어 있었다.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은 비교적 몸집이 거대했고 의기양
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그의 눈빛에는 사람을 질식시킬 것
같은 날카로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서히 객잔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의 풍모는 조금도
꾸밈이 없으면서도 세련되고 더욱이 위풍당당했다.
(이 두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데 이토록 기세가 당당하단 말이
냐.......)
그들의 자태는 실로 남이 흉내내려 해도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것이라 소어아로선 감탄을 아니할 수가 없었다.
소어아의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또한 그들이 무엇
때문에 왔는지는 더더욱 모르는구나! 어쨌든간 이 지방에 필시 큰
일이 발생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소어아는 한참을 돌아다닌 후 자신도 모르게 나구의 집에 이르
렀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다락으로 올라가지 않고 대청에 한동안 앉
아 있었다.
그 두 명의 멍청이 같은 시녀들은 그가 앉아 있는 것을 보자 마
치 귀신이라도 본득 먼곳으로 피해버렸다.
밤이 깊어갔다. 소어아는 몸을 일으켜 나가려고 하였다. 이때
다락 위에서 한 차례의 놀라움에 가득찬 외침소리가 들려오더니
나구와 나삼이 일제히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왔다.
소어아는 그들이 뛰어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도 놀랄 일이 있소?"
나구와 나삼은 그를 보자 놀라며 뒤로 두 발짝 물러섰다. 그들
은 두 눈을 부릅뜨고 소어아를 한참이나 노려봤다.
얼마를 그렇게 하고 있다가 나구는 짐작이 가는지 웃음띤 표정
으로 읍을 하며 입을 열었다.
"형씨는 참으로 뛰어난 변장술을 지니고 있군요. 천하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나삼도 웃음띤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형씨께서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희들은 정말 형씨를 몰
라봤을 것입니다!"
"두 분께서는 어디에 외출을 했었습니까? 언제 돌아 왔지요?"
나구가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답했다.
"오늘 강별학은 귀한 손님이 찾아와 피로연을 차렸습니다. 저희
형제도 그곳에 손님으로 초대되어 다녀오느라 이렇게 늦었습니
다."
나삼이 그의 말을 받았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참으로 죄송합니다."
그들 형제는 방금 다락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입을 열
지 않았다.
소어아는 더욱이 자기가 먼저 그 말을 꺼낼 수 없었기에 그저
웃음띤 얼굴로 계속 말을 이었다.
"귀한 손님이라구요? 그것이 누구입니까?"
나구가 응답했다.
"그 두 사람은 무예계에 매우 명성을 떨치는 호걸들이고, 또한
모두 '구수장(九秀莊)' 모용가문의 사위들이죠. 한 분은 '남궁세
가(南宮世家)'의 후세인 남궁유(南宮柳)이고, 또 한 분은 양광(兩
廣) 지방 무림의 맹주(盟主)인 진검(秦劍)입니다."
나삼이 그의 말을 다시 받았다.
"이들 명문 출신 공자들은 무예계의 귀족을 자칭하고, 평상시엔
눈이 머리 위에 달린 듯 오만불손하지요. 보통 사람은 눈여겨 보
지도 않는 그들이 오늘 갑자기 강별학을 찾아왔으니, 강별학으로
서 어찌 그들을 후하게 대접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즉시 두 눈을 반짝였다.
"모용가문의 사위라구요! 참으로 묘한 일이군요."
나구가 말을 이었다.
"형씨께서는 혹시 그들을 알고 있습니까?"
소어아가 입을 열었다.
"아니오. 하지만 방금 그들을 본 것 같습니다...... 그들은 혹
시 한 명은 얼굴이 창백하고 옷차림이 매우 고상하며, 또다른 한
명은 의기양양한 태도에 날카로운 눈빛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닙
니까?"
나구가 웃음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들입니다!"
나삼도 끼어들었다.
"비단 그 두 사람 뿐만 아니라 모용가문의 다른 여섯 명의 사위
들도 며칠 내로 이곳에 온다 합니다."
소어아는 눈동자를 굴리며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
을 열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다 모이는지 두 분께서는 알고 계
십니까?"
"듣자니 모용가문의 막내 소저가 실종됐다고 합니다. 그 소저가
화무결과 함께 다닌 적이 있다기에 소식을 알아보려고 찾아온 것
이라 하더군요."
소어아는 그제서야 껄껄 웃었다.
"틀림없군요. 나는 벌써부터 그들이 그 일 때문에 찾아온 것이
라 알고 있었습니다."
나구가 그에게 물었다.
"혹시 그 소저를 알고 있습니까?"
소어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본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구가 그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다그쳐 물었다.
"형씨께서는 그 소저의 행방을 알고 있습니까?"
소어아는 전혀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 정색을 했다.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소? 두 분은 내가 남의 집의 아가씨를
숨기기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요?"
나구는 자기의 실언을 사과하려는지 손바닥을 몇 번 비볐다.
"불초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다만......."
나삼이 눈치를 살피다가 그의 말을 받았다.
"다만 십 팔 구세의 아가씨가 왜 실종됐으며, 어째서 남에게 숨
겨졌나 의심할 뿐입니다. 더욱이 모용가문의 아가씨들은 모두 뛰
어난 무공과 훌륭한 지혜를 지니고 있는데 말입니다. 제가 보기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겁니다."
"혹시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갔을런지도 모르고, 또한 누
군가에게 정조를 빼앗겼는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이렇게 말한 소어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깔깔 거리며 말을 이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군요!"
나삼과 나구는 서로 마주보더니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희 형제는 뭐가 재미있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한참 웃던 소어아는 웃음을 그치고 입을 열었다.
"천천히 알게 될 것이오."
이때 나구가 웃음띤 얼굴로 다락을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
"형씨께서는 어디에 갔다 오셨습니까?"
"나는 매우 많은 재미있는 일들을 보았고, 또한 많은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중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그는 자기가 그 불량배 같은 사내에게 당한 일을 이야기를 했
다. 그는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고 도리어 매우 재미있게 그 얘기
를 했다.
나구와 나심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엔 흥겨운 듯 웃었지
만 점점 얼굴색이 변해갔다.
소어아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들은 서로 바라보며 살며시 눈짓을
하더니 나구가 먼저 말했다.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습디까?"
"그는 불량배의 표본이었소.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불량배 말입니다. 하지만 누구를 막론하고 유심히 살펴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게 되는 것이 바로 무서운 점입니다. 남의 주의를 끌
지않는 사람은 나쁜 일을 하기가 매우 쉬우니 말이오."
나구와 나삼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갑자기 나구가 방으로
들어갔다. 소어아는 한 차례의 서랍을 여는 소리를 들었고 이어서
종이 펼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잠시 후 나구가 방에서 걸어나왔다. 그의 손에는 색이 바랜 종
이 한장이 들려 있었다.
이 종이는 비단 노랗게 변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낡아서 귀퉁
이가 닳아버리고 없었다. 나구는 그것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듯
조심스럽게 받쳐들고 나왔다.
그는 상 위에다 그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친 다음 소어아의 시선
을 몸으로 막았다.
소어아는 그의 행동을 보자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 종이는 설사 땅에 떨어진다 해도 찢어질 리가 없고, 또 뺏
는 사람도 없을 텐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이오?"
나구가 정색을 했다.
"이 종이는 오래 되어 곧 헤어질 것 같지만 무예계 인물들이 매
우 간절히 얻고 싶어하는 물건입니다. 이 물건을 뺏을 사람이 없
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혹시 보물지도가 아니오? 만약 그것이
보물지도라면 나는 별로 볼 생각이 없소."
나구는 웃음띤 표정을 지었다.
"사람을 골탕먹이려는 보물지도는 확실히 적지 않습니다. 만장
의 보물지도 중에도 아마 한 장의 진짜가 없을 겁니다. 형씨께서
도 혹시 보물지도로 골탕을 먹은 적이 있습니까?"
나삼이 그의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지도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소어아가 그의 말을 가로채며 물었다.
"당신이 그 종이를 가지고 나온 것은 나에게 보여줄 목적이 아
니였소? 그런데 왜 나의 눈을 가로 막는 것이요?"
"저희 형제는 이 그림을 보물 같이 여겨왔지만 형씨를 남이라
생각하지 않기에 이것을 내놓은 것입니다. 다만...... 다만 형씨
께서는 이 그림을 본 후 절대로 남에게 비밀을 누설시키지 않겠다
고 약속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소어아는 그의 말을 듣자 더욱 더 호기심이 갔지만 일부러 자리
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며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두 분이 만약 나를 믿지 못 하신다면 나는 그 그림를 보지않겠
습니다."
나삼이 겸연쩍은 듯 낄낄 웃었다.
"저희 형제가 형씨를 믿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겠습니까?"
"그럼 우선 그 종이 위에 그려진 것이 무엇인지 먼저 나에게 얘
기해 주시오, 그리고 난 후 볼 것인지 보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합
시다."
나구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이 그림 위에 그려져 있는 것은 십대악인의 모습입니다."
소어아는 크게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음띤 얼굴을 했다.
"비록 십대악인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 이름은 많이 들어보
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뭐가 볼 게 있다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
을 빼앗으려고 한단 말입니까?"
나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형씨께서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그 십대악인은 제각기
귀신도 놀랄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고, 그들의 악독한 짓에 피해를
본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나삼이 그의 말을 이었다.
"그들은 종적이 일정치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제각기 변장술에
능숙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심지어 그들에게 해침을 당하고도
그들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수를 하려
고 해도 누구에게 복수를 해야할지 몰랐죠......."
소어아가 웃음띤 얼굴로 그의 말을 중도에서 잘랐다.
"이제 알겠오. 무예계의 사람들이 이 그림을 빼앗고자 하는 이
유는 진짜 얼굴을 알기 위해서 이군요?"
나삼이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소어아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들과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두 분은 왜 나에게 그 그림
을 보여주려는 것이오?"
나구의 입가에 신비한 웃음이 떠올랐다.
"형씨께서는 정말 그들과 아무런 원한이 없단 말이오?"
소어아는 눈을 굴리며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은 그 불량배 같은 사나이도 십대악인 중의 한 명이란
말이오?"
나구는 그의 말에는 응답하지 않고 몸을 비켜서 그림이 소어아
의 눈에 드러나게 했다.
노란색으로 바랜 종이 위엔 많은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
데, 매우 인상이 뚜렷했고 마치 산 사람들 같아 보였다.
그 중 한 명은 백설 같이 흰옷을 걸치고 있었고 얼굴도 매우 창
백한 것이 다름아닌 혈수 두살이었다.
두살 옆에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고 있는 자가 있었는데 물론
소리장도 소미타(笑裏藏刀 小彌陀) 합합아(哈哈兒)였다. 그 다음
은 얼굴에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사인불배명(迷死人不賠命)
소미미였고 손에 사람의 머리통을 들고 있으며 쓰디쓴 표정을 짓
고 있는 자는 불흘인두(不吃人頭) 이대취였다.
또 한 사람은 안개 속에 파묻혀 형체가 불분명했는데, 반인반귀
(半人半鬼) 음구유(陰九幽)를 나타낸 것 같았다. 그 옆으로 있는
자는 몸뚱아리 하나에 두 개의 머리가 달려 있었는데, 왼쪽의 머
리는 소녀였고 오른쪽의 머리는 미남자였다. 그는 당연히 불남불
녀(不男不女) 도교교(屠嬌嬌)였다.
그는 그 그림이 실제의 얼굴과 흡사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표정
까지 똑같은 것을 보고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비록 낡은 옷을 걸치고는 있었지만 패기가 충전한 표정을
하고 있는 악도귀 헌원삼광도 볼 수가 있었다. 그 옆에는 얼굴에
잔뜩 수염이 나있고 살기가 가득찬 표정에 굶주린 늑대와 같은 눈
빛을 지닌 사람이 있었다. 그는 손에 길고 큰 칼을 쥐고 있었고
칼 끝은 붉은 피가 물들어 있었다.
소어아는 일부러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이 흉악하게 생긴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구가 곧 그의 말에 응답했다.
"그는 광사 철전입니다."
나삼은 웃음띤 얼굴로 그의 말을 이었다.
"이자는 생김새가 비록 흉악하지만 사실 십대악인 중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이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절대
로 사람을 해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만약 남이 그를 건드리면 어떻게 됩니까?"
나삼이 그의 말에 또 응답했다.
"건드린 자 뿐만 아니라 건드린 자의 가족을 완전히 몰살하기
전엔 절대로 손을 떼지 않습니다."
소어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사람을 선량한 사람이라 한다면 나는 성인축에 들겠는
걸!"
껄껄 웃고 있었지만 그는 마음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철심난을
생각하고 있었다.
철심난이 생각나자 갑자기 그의 가슴엔 한 차례의 통증이 일어
났다. 그는 급히 입을 열어 자기의 생각을 쫓으려 했다.
"이 두 사람은 누구요?"
그 두 사람은 쌍둥이였다. 그들은 모두 피골이 상접했고 이마가
튀어나왔으며, 한 사람은 손에 주판을 들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장부를 들고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벼락부자 같았지만 생김새
는 마치 지옥에서 금방 도망나온 악귀 같았다. 나구는 웃음띤 얼
굴로 설명했다.
"이들 형제는 쌍둥이일 뿐만 아니라 단 한시도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십대악인은 사실은 열 한 사람 입니다. 그
원인은 무예계에서 이들 형제를 한 사람으로 취급했던 까닭이지
요."
나삼도 웃음띤 얼굴로 그의 말을 받았다.
"이들 형제의 성은 사마(司馬)이고 칭호는 한 명은 변명점변의
이고, 또다른 한 명은 녕사불흘휴(寧死不吃休 : 죽어도 손해 볼
수 없다)라 합니다. 이들의 칭호만 듣고도 어떤 사람인가를 아시
겠지요?"
나구가 다시금 말을 받았다.
"십대악인은 비록 무예계에 널리 이름을 떨쳤지만 대부분 재산
을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 형제는 한 나라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갑부입니다."
소어아는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한 명은 이득을 보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또 한 명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니 당연히 부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어쩐지 그들의 손에 주판과 장부가 쥐어져있다 했지요."
나삼은 그림 위의 다른 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성격은 그들 형제와는 전혀 반대입니다. 이
자는 남을 해치는 것이 취미이고, 그저 상대에게 골탕만 먹일수
있다면 그 자신의 이득은 추호도 따지지 않습니다."
나구가 웃음띤 얼굴로 나삼의 말을 받았다.
"심지어 어떤 땐 그 자신도 많은 손해를 볼 뿐만 아니라 골탕을
먹는 적도 있죠. 그러나 그는 일이 그 지경이 되어도 그저 남이
약올라 하기만 하면 그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말 이상한 괴벽을 갖고 있는 사람이군요. 그는......."
소어아는 갑자기 놀라움에 소리를 질렀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죽은 흉내를 낸 불량배입니다!"
종이에 그려져있는 사람들은 어떤 자는 앉아 있었고 어떤 자는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만은 유독 그림의 구석에 쭈그리고 앉
아 있었다. 손으로는 발가락 사이를 파고 있었고 오른손은 코에
대고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림 위의 다른 사람들은 이름을 널리
떨친 사람들다운 패기가 도사리고 있었지만, 오직 이 자만은 조금
의 패기도 없어 보였고 오히려 비웃음이 도사린 얼굴이 시정잡배
의 표정이었다.
소어아의 말을 들은 나구는 눈을 빛내며 즉각 반응했다.
"틀림없습니까?"
"틀림없이 이자입니다. 비록 변장을 하고 있었지만 이 표정, 이
웃음...... 절대로 틀림없습니다."
"불초는 형씨의 이야기를 듣자 필시 그 불량배 같은 사람이 이
자일 것이라 알아차렸습니다."
"그의 이름이 뭔지 알고 있습니까?"
"그자의 성은 백(白)가고 자신에게 백개심(白開心)이란 이름을
지었습니다."
나삼이 그의 말을 받았다.
"무예계에서도 그에게 칭호를 주었지요. 손인불이기(損人不利己
: 자신의 이득을 보지 않고 남에게 골탕을 먹인다) 백개심이라고
말입니다."
소어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더없이 적당한 이름이군요. 남의 이름을 내걸고 만장을 들고
온 것이나, 죽은 시늉을 하고 사람을 속인 것이나 남을 골탕먹였
을 뿐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득도 없으니 말입니다."
나구가 그의 말을 받았다.
"강호에는 각양각색의 잡종들이 많이 있지만 이득을 얻지 않고
남을 해치는 자는 아마 그자 뿐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희 형제
는......."
소어아는 갑자기 나구의 말을 가로챘다.
"두 분께서는 제 말을 듣자마자 즉시 그를 생각해낸 것으로 보
아 혹시 그와 매우 친한 사이가 아닙니까?"
나구는 자기의 아래턱을 쓰다듬었다.
"저희 형제는 비록 잘나지는 못 했지만, 그런 사람과 어울릴 만
큼 못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보기에 두 분은 십대악인에 속하는 다른 사람들과도 매우
친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 분이 어째서 그들에 대해
서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고, 또한 이 그림이 두 분의 손에 들어
왔습니까?"
이 말을 들은 나구는 얼굴색이 크게 변했지만 나삼은 호탕한 웃
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형씨에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의 형제는 십대악인과
뼈에 사무친 원한이 있습니다. 저희들의 부모님이 바로 그 놈들의
손에 죽었지요."
이말은 실로 소어아에게 의외였다. 그는 정말 놀랐다.
"네!...... 그러셨습니까."
"우리 형제는 복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찾아다니다가 이 그림을 구했고, 그들의 성격까지도 알아낸 것입
니다."
"그렇다면 두 분은 왜 이 그림을 공개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
들도 십대악인에게 원한이 있으니 필히 그들을 찾아내 죽이려 할
텐데 말입니다. 두 분은 어째서 그들의 비밀을 지켜주는 것입니
까?"
나구는 음침한 웃음을 지었다.
"형씨께서는 기쁨이 있을때 남에게 나누어 줍니까?"
"그것이 무슨 말이오?"
"우리 형제가 복수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렸는지
아시오? 우리는 매일 같이 꿈속에서조차 원수를 죽이는 생각을 하
며 그 기쁨을 맛보고 있지요. 그런데 어찌 다른 사람들 손에 그들
이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소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나구는 조심스럽게 그 그림을 접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다시 백개심을 만나게 되면 제발 죽이지 말고 저희들에
게 넘겨주십시오."
나삼이 그의 말을 이어 받았다.
"만약 그의 행방을 알아내 주신다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소어아의 눈에서는 날카로운 빛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좋습니다. 백개심을 두 분에게 넘겨주는 대신 두 분은 강옥랑
을 나에게 양보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은 그의 손가락 하나도 건
드리지 못하게 말입니다."
"하하, 그야 물론이죠."
"애비가 손님을 초대하면 아들이 당연히 나오기 마련이니 필시
그를 봤겠군요?"
나구가 의아심이 가득찬 음성으로 그의 말에 응답했다.
"그 점이 좀 수상했었습니다. 오늘 강옥랑은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껄껄 웃었다.
"그놈이 얼굴조차 내밀지 못했단 말이오? 그렇다면 남궁유 같은
인물이 찾아갔는데도 그의 애비가 그에게 사귀라고 하지 않았단
말씀이군요?"
나구는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아마도 그놈이 그때 너무 놀라 앓아누운 모양입니다."
소어아는 다락으로 눈길을 돌렸다.
"자기가 죽인 사람이 자기 앞에 다시 나타나면 그 누구라도 놀
라서 정신착란증에 걸릴 겁니다."
그의 말 속에는 당연히 다른 뜻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나구
형제는 그 말이 다락에 있는 소녀와 관계 있다고는 생각지를 못했
다.
다만 소어아가 다락을 바라보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웃음
띤 얼굴을 했다.
"밤이 깊었으니 형씨께서도 졸리시겠군요?"
"그래요. 한잠 자야 되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껄껄 웃으며 밖을 향하여 걸어 나갔다.
백개심(白開心)의 농간(弄奸)
나구 형제는 소어아가 밖을 향하는 것을 보자 당황하여 입을 열
었다.
"형씨, 형씨께서는 오늘밤 여기서 주무시지 않겠습니까?"
소어아는 문 앞에 당도하여 뒤로 돌아서며 싱긋 웃었다.
"그 위엔 거미가 있어 잠이 잘 오지 않을 것 같군요. 그러니 내
일 오지요. 만약 강옥랑의 소식을 들으면 저에게 연락해주는 것을
잊지 마십시요."
그는 말을 마치자 성큼성큼 걸어나가버렸다.
나구는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거미? 거미...... 네가 보기엔 저 녀석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
하지 않느냐?"
나삼이 그의 말에 응답했다.
"좌우지간 매우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잘못하다가는 그를
이용하기는 커녕 도리어 우리가 이용만 당하고 말지도 모르니까
요."
"저 녀석이 설혹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두 나쁜 생각만
하고 있다 할지라도 설마 우리보다 더 하겠느냐?"
"하하, 천하에 악인이 많다 하지만 과연 우리를 따를 수 있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이오?"
밤은 점점 깊어 갔다. 길거리는 사람의 종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한적했고 소어아는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한참을 돌아다닌 그는 다시 나구 형제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등불이 완전히 꺼진 것을 확인한 후 지붕 위로 몸을 솟구쳐 올라
가더니 어둠침침한 곳에 몸을 숨겼다.
하늘에는 달빛이 영롱했고 별빛이 반짝거리고 있었으며, 대지는
더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지붕 위에 숨어 있는 소어아는 다락의 창문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락의 창문은 반쯤 열려있었고 그 사이로 넋을 잃고 멍
하니 앉아 있는 모용구매의 모습이 보였다.
차를 두어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 돌연 옷자락이 바람에 스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흑의인이 소어아가 숨어 있는 이층집
지붕 위로 사뿐히 올라섰다. 그리고는 그도 지붕 위에 몸을 눕히
고 모용구매가 있는 다락을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소어아는 속으로 웃었다.
(과연 내 예측대로 왔구나!)
그는 조용히 엎드려 뭔가를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 모용구매
바라볼 뿐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
다.
평상시에는 그토록 예리하던 눈빛이 지금은 마치 안개가 덮힌
듯 애수에 젖은 눈동자 같았다. 별빛 아래 그의 모습은 더없이 쓸
쓸하게만 보였다.
이때 소어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토록 별빛 찬란한 밤에 너는 무얼하러 여기 왔느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흑 지주는 이미 그의 앞에 우뚝 서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넌 누구냐?"
"여기 있을 사람이 나 밖에 또 누가 있느냐?"
흑 지주의 눈빛이 칼날 같이 날카로와졌다. 한참 동안 소어아를
노려보던 그는 맥이 풀린 듯 입을 열었다.
"또 너로구나!"
"너와 그녀 사이는 다섯 장에 불과한데 왜 달려가서 만나지 않
느냐?"
"난...... 나는 그녀 때문에 온 것이 아니야!"
그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음성은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늦은 야밤을 무
릅쓰고 왔느냐?"
"물론 그 나씨 형제 때문이지."
"그래?"
"그들 형제는 신분이 확실치 않을 뿐만 아니라 행동 또한 수상
했어. 내가 십 개월 이상이나 그들의 뒤를 밟은 것은 그들의 비밀
을 캐내려는 것이야!"
소어아는 그의 말에 관심이 없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그것이 너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냐?"
"흑 지주가 남의 일에 참견을 잘한다는 것은 이미 천하에 알려
진 사실이 아니냐?"
"저 나구 형제의 일이 네가 참견할 정도의 가치가 있단 말이
지?"
"그들 형제의 목적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말한다면 너는 아마 놀
라 까무러칠 걸."
"그래?"
"그들 형제는 강호의 흑백양도를 막론하고 선량한 사람이든 악
한 사람이든 모두를 해치려고 하고 있어. 그들은 천하 무예계의
인물들이 서로 혈투를 벌이게 하는 것이 목적이야. 그래야만 그들
이 그 틈을 타서 이익을 볼 수 있으니까. 지금까지만 해도 그들에
게 당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그래!"
"너는 이 개월 전 발해방과 황해방 사이에 크나큰 싸움이 벌어
졌던 일을 알고 있느냐? 일 개월 전 노산방과 쾌도문의 격투는?
피비린내 나는 대혈전은 모두 그들 형제가 일으킨 것이다."
"너는 왜 그들을 없애지 않았지?"
"우선 증거를 내놓을 수가 없었고, 또 사실 그들이 해친 자들도
결코 좋은 놈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냥 지켜보기만 할
뿐이야."
"너는 그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처음에 나는 그들이 십대악인이 아닌가 했어. 하지만 나중
엔......."
흑 지주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나중엔 어떻게 됐단 말이냐?"
소어아는 다그쳐 물었다.
흑 지주는 그의 재촉을 받자 그제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십대악인을 상세히 조사한 후에야 십대악인 중엔 그들 두 사람
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
"그렇다면 확실히 너는 저 소녀를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니
겠구나?"
흑 지주는 한참이나 망서리더니 우물거렸다.
"완전히...... 관련이 없다고 할 수도 없지!"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느냐?"
"몰라. 나는 다만 그녀가 불쌍한 소녀라는 것을 알 뿐이다. 악
당들의 손에 빠져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보호하겠단 말인가?"
"......."
"그렇다면 왜 그녀를 구해내지 않지?"
빛이 도사렸던 흑 지주의 눈은 이 말이 떨어지자 갑자기 암담해
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태연한 척하고 한바탕 호탕하게 웃었
다.
"하하하, 만약 그녀를 구해낸다면 데리고 다니기라도 하란 말인
가?"
"그녀가 따라다니는 것이 뭐가 나쁘냐?"
흑 지주는 이 말을 듣자 침울하게 말했다.
"너는 내가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나는 일정한 거
처도 없고, 한 끼니를 먹고 나면 또 한 끼니를 어디서 먹어야 될
지도 모르는 팔자야. 비록 오늘밤은 살고 있지만 내일은 햇살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고 게다가 죽고 나서도 어디에 파묻힐지조차
몰라. 그런 내가 어떻게 그녀를 데리고 다닐 수 있단 말이냐?"
"그러나 너의 실력으로 편안히 살 수도 있잖아?"
"나는 이미 이러한 생활을 선택했으니 이대로 지낼 수밖에 없
어. 지금은 심지어 고치려해도 고칠 수가 없구나...... 설사 내
자신이 이런 생활을 계속하고 싶지 않다해도 이젠 다른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울부짖는 음성으로 원망
스러운 듯 말했다.
"이런 내가 어찌 그녀와 함께 지낼 수 있단 말이냐?"
"하지만 네가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가 너를 좋아한다면 설사
생활이 좀 고생스럽다 하더라도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 되겠느
냐!"
소어아의 이런 말을 듣자 흑 지주는 처량한 눈빛을 하며 스스로
에게 타이르듯 말을 했다.
"누가 저 여인을 좋아한다고 했느냐? 나 같은 사람은 아무도 좋
아할 자격이 없다! 설사......."
소어아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넌 그녀를 좋아하면서도 왜 마음 속 깊이 감춘단 말인가?"
흑 지주는 그의 시선을 바라볼 용기가 없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나불대지 마라."
"나는 이제껏 네가 냉혈동물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이
제야 비로소 네가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구나!"
흑 지주는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어린 나이에 네가 뭐 안다고 떠드느냐? 입 닥쳐라."
"왜 그렇게 화를 내지? 너의 진심을 좀 말했다 해서 그렇게 역
정을 낼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
흑 지주는 한참이나 그를 노려보더니 껄껄 웃으며 그의 손을 잡
아 당겼다.
"며칠 전, 친구를 한 명 새로 사귀었는데 그는 오늘밤 나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시간이 됐으니 같이 가보는 것이
어떻겠나?"
"좋다! 너의 친구가 될 자격이 있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아마 매
우 재미있는 녀석일 것이다."
두 사람은 허공에다 몸을 솟구쳐 지붕 위에서 내려오더니 달려
가기 시작했다.
소어아는 흑 지주의 뒤를 바싹 쫓아 한참을 달렸다.
흑 지주는 고개를 돌리며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동안 무공이 상당히 발전했구나."
"너도 칭찬하는 말을 다 할줄 아는구나."
흑 지주는 그의 비웃음에 대꾸하지 않고 화제를 바꾸었다.
"이번에 사귄 그 친구는 문학적으로나 무공으로나 일가를 이루
고 있다. 너도 아마 그를 만나면 좋아하게 될 거야."
"그래? 이름이 꽤 알려진 인물인 모양이지?"
"그의 성은 고가고 이름은 월언이라 한다. 비록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유명한 사람들보다 몇십 배 몇백 배 이상의 실력을 지니
고 있지."
그들이 말을 주고 받는 동안 이미 성을 벗어났다. 얼마를 더 달
려가자 앞으로 울창한 수풀이 드러났다. 그 수풀 속에 희미한 불
빛이 얼핏 보였으며 가까이 다가간 소어아는 그 불빛이 황폐되어
버린 사당에서 흘러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 당도한 그들은 향긋한 고기향내를 맡을 수가 있었다.
소어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너의 친구는 비단 문학과 무술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요리도 잘하는 모양이다."
"강호를 방랑하는 사람들이 가끔 배불리 먹는 것 외에 또 무슨
낙이 있겠나?"
그들은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사당의 마당 한 가운데는 한 뭉
치의 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위에 큰 냄비 하나가 놓여 있었다.
고기향기는 바로 그 냄비 속에서 풍겨나오는 것이었고, 냄비 옆에
는 그릇과 젓가락들이 모두 준비되어 있었으며 술도 놓여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은 보이지를 않았다.
흑 지주는 사방을 두루 둘러보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고아우!... 고아우! 친구를 하나 소개해 주겠다. 빨리 나와 인
사를 나누어라!"
소어아는 그의 말을 듣자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
(보아하니 이 자는 형님을 하고 싶어하는 성질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구나.)
흑 지주가 한참을 외쳤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는 사당밖으로 나가 고월언을 한참이나 찾아 헤맸다. 그러나 한참
후 그는 사당 안으로 다시 들어오며 미안한 듯한 얼굴로 소어아에
게 말을 던졌다.
"고아우는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라서 한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
있는 성질이 아니야. 아마 어디 놀러나간 모양이다. 그러니 우리
가 먼저 먹고 보자꾸나!"
소어아는 벌써부터 젓가락을 들고 있었으며 그의 말을 듣자 웃
음띤 얼굴로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오랜만에 내 맘에 드는 말을 했구나!"
그는 흑 지주와 함께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더니 바로 젓가락을 놓아버
렸다. 흑 지주는 코까지 두건을 걷어올리고 이미 십여 토막의 고
기를 먹고 그릇에 담긴 술을 따라 마셨다.
그는 그제서야 소어아가 고기를 먹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
고 웃으며 말했다.
"고기가 연하고 맛도 좋은데 왜 먹지 않는 거지?"
소어아는 씹고있던 고기를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이 고기는 먹을 것이 못 돼!"
이 말을 들은 흑 지주는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급히 물었
다.
"어째서 먹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냐?"
"너는 이 고기가 무슨 고기인줄 아느냐?"
"무슨 고기냐? 사람의 고기라도 된단 말이냐?"
"그렇다. 바로 사람의 고기다!"
이 말을 들은 흑 지주는 놀라운 비명을 지르며 입에 들었던 고
기를 재빨리 내뱉었다.
"뭐라고 했지?"
"내 말은 이 고기가 사람의 고기라는 말이다. 절대로 틀리지 않
을 거다!"
"네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세 살 때부터 사람의 고기를 맛보았으니 그 맛을 모를 리가 없
지!"
흑 지주는 또 한 번 놀랐다.
"네가 세 살 때부터 사람의 고기를 먹었단 말이냐?"
"솔직히 말해 주지. 나는 악인곡에서 자랐어. 그렇기 때문에 이
것이 사람의 고기라는 것을 알 수 있지. 만약 이 고기가 금방 죽
은 사람의 몸에서 잘라낸 것이 아니라면 내가 내 코를 먹겠다!"
이렇게 말한 소어아는 흑 지주가 먹었던 고기들을 모두 토하기
를 기다렸다. 그러나 흑 지주는 토하기는 커녕 도리어 껄껄 웃었
다.
"그렇다면 이 고기를 삶은 자는 이대취 아닌가?"
"혹시 그럴지도 모르지."
"응! 그래! 고월(古月)을 합하면 호(胡)자가 되고...... 고월언
(古月言)은 호설(胡說 : 개나발)이 되겠구나! 그는 벌써부터 나에
게 자기가 개나발을 불고 있다고 가르쳐 주었는데,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 점을 발견했구나!"
"구역질이 나지 않느냐?"
"이미 먹은 이상 구역질이 난다고 토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그래도 웃음이 나오나?"
"이대취와 같은 사람을 친구로 사귄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야.
좋든 나쁘든 그래도 그는 강호에 이름을 떨친 사람이었으니 말이
다. 더욱이 그와 같은 인물도 드물지 않느냐?"
소어아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녀석은 정말 호탕하구나. 절대로 구역질나게 연극하지 않으
니 말이다.)
"그러나 그 호설 선생은 이대취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이대취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냐?"
"또하나 그럴만한 사람이 있다. 이대취를 흉내내어 너로 하여금
사람의 고기를 먹게하고 오직 토하는 것을 볼 목적으로 말이다.
그는 너를 골탕 먹이고 흥겨움을 느끼려는 것이지......."
소어아는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다시 낮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
다.
"혹시 너를 토하게 할 목적 외에 또다른 음모가 있을런지도 모
른다!"
이때 흑 지주는 재빨리 코까지 올렸던 두건을 내리며 차디찬 음
성으로 외쳤다.
"밖에 계신 친구! 이곳까지 왔는데 왜 들어오지 않는 것이오?"
소어아의 귀도 밝았지만 흑 지주 귀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그의 말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사당 밖에서 이미 한 인영(人
影)이 날아 들어왔다.
번쩍거리는 불빛이 그 사람의 날씬한 몸매를 비추었다. 그 사람
은 불 같이 빨간 옷을 걸치고 있었고, 날카로운 빛이 반짝거리는
두 눈에는 살기가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놀랍게도 소선녀였다.
깊은 밤, 소선녀가 이토록 황막한 사당을 찾아오자 소어아로서
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태연하게 앉아 있
었다.
흑 지주는 젊은 여자가 달려들어올 것이라곤 생각지 못한 듯 너
무나 깜짝 놀라 넋을 잃고 있었다.
그녀는 장검을 번쩍거리더니 검끝으로 냄비를 젖혀 올려 땅바닥
에 내팽개쳤다. 고기가 땅바닥에 흩어지며 그 속에서 금비녀가 하
나 나타났다.
그 비녀를 본 소선녀는 즉시 놀라움의 비명을 터뜨렸다. 그러자
사당 밖에서 또 한 인영(人影)이 황급히 날아 들어왔다. 그는 다
름아닌 고인옥이었다.
소선녀는 그의 품으로 달려 들어가 울부짖는 음성으로 더듬거렸
다.
"완아의 금비녀가...... 완아의 금비녀가 냄비 속에 있다."
고인옥은 큰 눈을 부릅뜨고 소어아를 노려보며 사나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 너도 사람이라 할 수 있느냐?"
소어아는 그들이 자기를 알아 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태
연하게 웃음띤 얼굴로 말을 받았다.
"나도 당신들과 똑같이 생겼는데 왜 사람이라 할 수가 없소?"
"저 냄비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소어아는 계집애 같이 수줍음을 타는 고인옥이 이토록 흉악하게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가 극도로 화가 나 있는 것으로 보아 다
만 살해된 자가 그들과 매우 친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그들이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왔는지, 또 어떻
게 냄비 속에 금비녀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슴속에 가득한 의아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보기엔 저 냄비 속에 뭐가 들었을 것 같소?"
고인옥은 이 말을 듣자 얼굴색이 빨갛게 타올랐으며 전혀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갑자기 한 가닥의 음성이 들려왔다.
"세상에서 먹을 수 있는 고기 종류가 매우 많은데 두 분께서는
왜 하필이면 사람의 고기를 즐깁니까? 동류끼리 이렇게 잡아 먹으
면 두 분이 짐승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음성은 분명히 사람을 욕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더러운 말을
쓰지 않고 매우 평온한 감이 깃들어 있어 마치 다정한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두 사람이 천천히 사당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눈에는 비록 노
여움이 가득찼으나 표정은 여전히 태연한 것이 바로 그 남궁유와
진검이었다.
소어아는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비록 나보고 사람을 먹는다고 탓하지만 어떻게 내가 이곳에서
사람 고기를 먹고 있는 것을 알았소? 혹시 누구에게 밀고를 받은
것이 아니오?"
진검이 그의 말에 응답하기도 전에 소선녀가 이미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당연히 밀고한 자가 있었지! 이런 하늘이 용서치 못할 일을 저
지르고 있으니 그 누가 너희들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이냐!"
남궁유가 뒤를 이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완아 같은 총명하고 귀여운 소녀를 이렇게 하다니 참으로 유감
이오."
일이 이쯤 되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평온한 음성으로 말할 수가
있었다.
소선녀는 더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런 놈들과 무슨 말이 더 필요 하겠습니까?......."
남궁유가 그녀를 말리며 차분히 말했다.
"일이 이쯤 되었는데 두 분께서는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소어아가 대답했다.
"일이 이쯤되었으니 말하는 것과 안하는 것이 별 차이가 없겠군
요."
이때 흑 지주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사나운 음성으로 소리쳤
다.
"불초는 아직도 할 말이 있소이다......."
갑자기 진검의 눈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그러더니 의아심이 가
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댁은 혹시 흑 지주가 아닙니까?"
흑 지주는 급히 응답했다.
"바로 내가 흑 지주요."
진검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강호의 소문은 결코 믿을 것이 못되는군요. 흑 지주
가 당신 같은 인물일줄이야 미처 몰랐소."
"강호의 소문도 비록 믿을 것이 못되지만 밀고자의 말은 더욱
믿을 것이 못됩니다. 내 말을 한 번 들어 보십시오. 우리가 만약
친히 고기를 삶은 자라면 어떻게 냄비 속에 금비녀가 들어있는 것
을 모르고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진검과 남궁유는 서로 잠시 바라보더니 먼저 남궁
유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댁의 말씀은 다른 사람이 죄를 뒤집어 씌운 것이라는 뜻입니
까?"
"당연히 그렇소!"
남궁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씀이군요."
이때 소선녀가 발을 굴리며 끼어들었다.
"남궁 오빠! 설사 오빠는 이 자들을 놓아준다 해도 저는 이 자
들을 놓아줄 수가 없어요. 그 밀고한 자가 정말로 이들이 사람을
죽이고 고기를 삶은 것을 보고 알려줬을 가능성이 없단 말입니
까?"
남궁유는 여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의 말에 응답
했다.
"당연히 그럴 가능성도 있지."
소선녀가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완아를 이렇게 했으니 구매(九妹)도 당연히...... 당연
히......."
그녀의 음성은 갑자기 신음소리로 변했고 더이상 말을 잇지도
못했다.
진검은 날카로운 눈으로 소어아와 흑 지주를 바라보며 말을 걸
어왔다.
"이 일은 비로 석연찮은 점이 없지는 않으나 두 분이 무죄란 증
거를 내놓지 못한다면 우리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소."
흑 지주는 그의 말에 냉소를 터뜨렸다.
"흥! 귀하의 말씀은 참으로 겸손하군요. 우리를 데려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귀하께서도 우리에게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소선녀가 또 노여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이 금비녀가 증거가 아니란 말인가? 너희들이 이래도 잡아뗄
속셈이냐?"
흑 지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찰나 소어아
가 껄껄 웃으며 불쑥 끼어들었다.
"내가 언제 잡아 뗀 적이 있느냐?"
일검을 뿜어내려던 소선녀는 그의 말을 듣자 멈칫하며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다그쳐 물었다.
"그럼 네가 시인하겠단 말이지?"
"사람 고기를 먹는 것은 그리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흑 지주는 소어아의 말을 듣자 마치 말채찍에라도 일격을 맞은
듯 깜짝 놀라며 소어아에게 외쳤다.
"넌 지금 뭐라고 했지?"
소어아는 그의 말에는 대꾸도 않은 채 웃음띤 얼굴로 소선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저가 말한 그 구매란 소저는 눈이 크고 얼굴이 창백하며 나
이는 약 십팔구 세 되는 녹색 옷을 걸친 소녀가 아니오?"
이 말을 들은 소선녀는 떨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 했다.
"네...... 네...... 네가 그녀를 어떻게 했지?"
소어아는 깔깔 웃었다.
"하하! 내가 그녀를 어떻게 했는지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이 말을 들은 흑 지주는 크게 당황했다.
"네 녀석이 미쳤느냐? 함부로 거짓말을 지껄이니 말이다."
"그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이
지?"
소어아는 도리어 흑 지주를 나무랐다. 남궁유와 진검이 아무리
침착한 사람들이라 해도 이 말을 듣고는 얼굴색이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선녀는 더욱 팔짝 팔짝 뛰며 슬픔이 가득 찬 음성으로 대들
듯 말했다.
"오빠들도 들었죠...... 그 자신도 시인했어요!"
그녀는 울부짖으면서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독사 같은 일검이
뿜어 나왔다. 그녀의 옆에 있던 고인옥은 더욱 대노하여 대갈일성
을 치면서 삼 초의 권법을 악랄하게 뿜어냈다.
그 삼 초의 권법과 일 초의 검법은 모두 소어아의 급소를 향하
고 있었다.
검은 번개 같았고 권(拳)은 우뢰 같았다.
소어아는 실로 절대절명의 위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목숨이 경각지간에 달린 순간이었다.
소어아의 계책(計策)
만약 이 년 전이었다면 소어아는 결코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
다.
그러나 지금의 소어아는 옛날의 소어아가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 소선녀가 뻗어낸 일검이 한가닥의 거센 힘에 말
려, 고인옥을 향해 뿜어졌다. 고인옥은 깜짝 놀라 권초를 재빨리
거두며 후퇴했지만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이미 옷자락이 검에 스
쳐 찢겨지고 말았다.
소어아는 권풍으로 마치 이화궁의 이화접목과 같이 상대방의 공
격 방향을 바꾸어버린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엄밀히 이화접목과
는 차이점이 있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식별하기는 지극히 어려웠
다.
고인옥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며 외쳤다.
"이화접목? 너는 이화궁의 문하생인가?"
소어아는 그들의 말에는 응답하지 않고 흑 지주의 몸 뒤로 숨으
며 껄껄 웃었다.
"나는 비록 고기는 먹었지만 주범이 아닌데 왜 나만 못살게 구
는 것이냐?"
고인옥과 소선녀는 그가 선기를 차지하고도 공격을 계속 하지
않고 도리어 숨어드는 것을 보자 의아심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극도로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그 까닭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이 펴낸 초식은 더욱 악독해졌다. 그러나 이번에 그들에게
공격을 당한 자는 흑 지주였다.
흑 지주는 억울하고도 분했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 변명할
수도 없었고 또 변명할 여지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냥 그들
과 맞설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검빛이 번쩍거리며 권영이 휘날렸고 소선녀와 고인옥
이 십여 초를 뿜어냈다. 그러나 흑 지주도 물러서지 않고 삼장을
반격했다.
소어아는 여전히 흑 지주의 뒤에 숨어서 흑 지주가 소선녀와 고
인옥의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웃음띤 얼굴로 말하곤 했다.
"맞다. 그렇게 해야지. 그들과 싸우는 것이 무서울 게 뭐가 있
단 말이냐?"
그의 말은 오히려 흑 지주는 더욱 대노하게 했고 흑 지주는 눈
을 굴리며 소어아를 쏘아 보았다. 하지만 소어아는 마치 그림자처
럼 그의 몸에 찰싹 붙어 박수를 치며 계속 부화를 돋굴 뿐이었다.
"멋지다! 그 일권은 과연 보통이 아니로구나. 고가신권은 과연
명불허전이다. 이봐! 흑 지주야 내가 보기엔 네가 지겠는데?"
소선녀와 고인옥은 너무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제 정신을 차리
지 못하고 소어아에게 선기를 빼앗기기 까지 했었다.
그러나 십여 초를 겨룬 지금 그들은 완전히 정신을 가다듬었고
공격도 자유자재로 가할 수가 있었다.
고인옥은 비록 권법이 고강했지만 강호경험이 적었고, 반대로
소선녀는 남에게 시비거는 것이 취미었기에 유연하게 모든 상황에
대처했다. 그녀는 검을 자유자재로 휘둘러 신속하고도 악독한 초
식을 뿜어내며 고인옥의 권법 중에 빈틈을 보충했고, 고인옥의 착
실한 초식은 그녀의 검법 중에 거세지 못 한 점을 보충했다.
그들은 모두 무예계의 정종 무학을 익혀왔던 까닭에 따로 손발
을 맞춰 본 적이 없었지만 협공의 배합이 잘 되었다.
흑 지주도 무예계에 이름을 떨친 사람이었지만 공력은 그의 특
기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절묘하게 공격에 흑 지주는 점점 감당
해내기 어려운 감을 느꼈다.
더군다나 소어아는, 겉으로는 그를 도와 주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암암리에 그를 골탕먹여 더욱 더 힘이 빠지게 만들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남궁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과연 인옥은 천생이 무공을 연마할 소질을 지니고 있군."
진검도 입을 열었다.
"그러나 청매도 그에 못지 않게 뛰어납니다. 오히려 그보다 한
수 위인 듯합니다."
남궁유가 그의 말을 다시 받았다.
"그것은 자네가 잘못 본 것이네! 인옥은 가정교육이 매우 엄격
했던 까닭에 이같은 싸움을 할 기회가 없었네. 그래서 약하게 보
이는 것뿐이라네. 만약 그를 강호에서 이 삼 년 동안만 경력을 쌓
게 한다면 그의 명성은 청매보다 더욱 알려질 것이네."
"형님께서는 사람을 보는 눈이 각별하니 그 말씀이 옳겠지요.
형님의 지명을 받는 인물은 즉시 이름을 떨치게 되곤 했으니 말입
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주의해야 할 자는 흑 지주가 아니고 저 얼
굴이 누런 소년이라네. 저자는 예삿 인물이 아닐세. 내가 틀리게
보지 않았다면 필시 유명한 인물이 변장한 것 같네."
이 남궁 공자의 사람을 보는 눈은 강남 무예계에서 백여 년이나
이름을 날린 가문의 후세다웠다.
그들이 이렇게 말을 주고 받고 있는 동안 싸움의 승부는 이미
확실하게 판명되어 갔다.
흑 지주는 신법으로 보아 소선녀와 고인옥이 제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쉽사리 이기지 못할 상대였다. 그러나 소어아가 줄
곧 흑 지주의 몸 뒤에 붙여 다니면서 그의 정신을 흐트러 놓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뛰어난 신법을 완전히 펼쳐내지를 못했다. 흑
지주는 점점 곤경에 처했다.
소어아는 일부러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야! 당당한 흑 지주가 오늘 어린 아이들에게 패배의 고
배를 마셔야 되나 보군!"
사실 소선녀와 고인옥도 무예계에 이름이 알려진 인물들이었고
결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소어아는 흑 지주를 화나게 하려 한
것이었다.
흑 지주는 성질이 매우 거칠었기 때문에 그의 목적을 알면서도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몸은 노여움이 가득찬 음성으
로 소리쳤다.
"미친 놈아,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냐?"
소어아는 뒤에서 살며시 말했다.
"도망가면 되지 않겠나?"
이 말을 듣는 흑 지주는 더욱 대노하여 노여움이 외쳤다.
"개나발 불지 마라! 나 흑 지주가 삼십육계를 칠 인물로 밖에
보이지 않느냐?"
"흑 지주가 무예계에 이름을 떨친 것은 원래 괴이한 신법 때문
이 아니냐? 그런데 너는 왜 그 특기를 쓰지 않고 상대와 힘과 힘
의 결투를 한단 말이냐? 내가 보기엔 도리어 네가 미친 것 같구
나!"
흑 지주는 여전히 더러운 욕을 내뱉고 있었지만 어쩐지 소어아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소어아와 말을 주
고받는데 정신이 팔려 하마터면 일검을 맞을 뻔 하기도 했다.
소어아는 여전히 빈정거렸다.
"넌 이곳에서 도망하면 무예계의 인물들이 너를 비웃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에, 만약 네가 이곳에서 빠져나간다면 도리어
너에게 감탄할 것이다."
흑 지주는 이 말을 듣자 잠시 동안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결단
을 내린 듯 힘주어 소리쳤다.
"좋다!"
그의 '좋다'란 말이 떨어지자 소어아는 그의 몸 뒤에서 달려나
와 단옥분금(斷玉分金)이란 일초를 쌍장 좌우로 나누며 뿜어냈다.
순간적으로 소어아의 공격을 받은 고인옥과 소선녀는 미처 생각
지 못한 의외의 공격에 뒤로 서너 걸음 밀려 나갔다.
바로 이때 흑 지주의 옷소매 속에서 한줄기의 은빛 찬란한 실이
뻗어나와 사당 밖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늙은 나무가지에 감겼다.
동시에 그의 몸도 그것을 따라 날아갔다.
소어아도 이미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따라 함
께 날아갈 수가 있었다.
흑 지주는 고목 위에 가볍게 올라서더니 한줄기의 찬란한 은실
을 다른 나무로 뻗쳐내며 동시에 다시 몸을 날렸다.
그들은 순식간에 수십 장 밖으로 달아났고 다시금 몸을 번쩍거
리더니 어느새 어둠침침한 밤하늘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다만
멀리서 메아리처럼 소어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들이 만약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면 내일 밤 삼경쯤 그곳에
다시 찾아오거라!"
흑 지주는 쉬지 않고 몸을 날리다가 성벽 아래에 도착해서야 비
로소 멈추어 섰다.
소어아는 박수를 치며 찬사를 보냈다.
"아! 흑 지주, 참으로 훌륭하구나. 과연 번개 같은 속도였어.
그 은실의 경공은 천하무쌍이군 그래. 마치 구름 위를 나르는 것
같았어!"
그러나 흑 지주는 얼굴을 울그락불그락하며 대노했다.
"흥! 아무리 아첨을 한다 해도 나는 너를 용서할 수가 없다."
"그래? 사실 나는 네 화를 풀어주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
었는데."
"잔소리 말고 내 물음에 대답이나 해라.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한 짓이 아닌데 왜 그 죄를 뒤집어 썼지? 나마저 끌고 들어가서
말이다. 또 왜 너는 같이 맞서지는 못할망정 뒤에 숨어서 오히려
나를 골탕먹이고 힘을 빼놓았느냔 말이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더욱 분노가 일어난 듯 음성을 높였다.
"그것은 어쨌든 좋다. 너는 왜 나를 이렇게 도망하게 했지? 나
의 명예가 훼손되게 말이다."
소어아는 흑 지주가 화가나서 펄펄 뛰는 모습을 보면서도 여전
히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연히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야."
흑 지주는 갑자기 그의 멱살을 잡으며 살기가 가득찬 표정을 지
었다.
"뭐라구? 당장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면 너를 죽여버리고 말
테다."
그러나 소어아는 히죽이 웃었다.
"야! 이 멍청아, 아직도 모르고 있느냐? 나는 너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야."
그의 이러한 말을 들은 흑 지주는 순간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골탕먹이기 위해서였다구?"
"너 흑 지주는 이미 무예계에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그렇기 때
문에 네가 이대취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고기를 먹는다고 소문이
나면 앞으로 무예계를 돌아다니다가 어려워질게야."
이 말을 들은 흑 지주는 대노했다.
"이런 사악한 자식, 너는 왜 나의 명성을 더럽혔느냐?"
"그래야만 너를 이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너무 억울
하다고만 생각지 말아라. 사실 그래도 나는 네가 쓸만하다고 생각
했기에 너를 이용하려고 한 것이다."
흑 지주는 사나운 음성으로 외쳤다.
"이렇게 나의 명성을 더럽혔으니 지금 내가 너를 죽일 터인데
네가 어찌 나를 이용할 수가 있단 말이냐?"
"만약 멍청한 사람이 이렇게 당한다면 당연히 나를 원수처럼 여
기고 이를 부드득 갈며 죽이려 하겠지. 그러나 내가 아는 흑 지주
는 이처럼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면 오히려 호탕하고 쾌
활해지지."
흑 지주는 기가막힌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이 도대체 무슨 목적에서인지
어디 한 번 말해 보아라."
"보통 때 같으면 남궁유와 진검 같은 오만불손한 사람들이 결코
나를 만나 줄 리가 만무해. 그러나 내일밤 삼경에는 어김없이 그
자리에 나올 것이다."
"질질 끌지 말고 할 말을 어서 해라."
"우선 내 말을 잘 들어. 그 호설이란 작자가 사람을 죽여 너에
게 먹게 하고는 남에게 밀고한 목적이 뭐겠나?"
"당연히 나를 골탕먹이고 즐기려는 수작이겠지."
"그렇게 전문적으로 남에게 화만 안겨 주는 작자를 어떻게 상대
해야 되지?"
흑 지주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 놈이 내 손에 걸리기만 하면 당장 요절을 내버리겠다."
"남에게 골탕을 먹이는 사람이 그 호설이란 작자만 있는 것은
아니야. 그 호설이란 작자보다 더 악독하고 앙큼한 놈도 있지. 너
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상대할 작정이냐?"
"잡히기만 하면 갈기 갈기 찢어 죽이겠다."
"찢어 죽이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 값싼 대가야. 그를 죽이는 것
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너는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냐?"
소어아는 또박또박 그러나 확신에 차서 말했다.
"강별학!"
흑 지주는 그의 말을 듣자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
"뭐? 강 대협이 어찌 그런 일을 한단 말이냐?"
소어아는 그를 유심히 바라 보며 심각한 음성으로 말을 건냈다.
"내 말을 믿지 못 하겠단 말이냐?"
"네 녀석이 이토록 앙큼하고 교활한데 이 세상에서 누가 너를
믿을 수 있단 말이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다만 나 흑 지주가 왜 하필이면 너를 믿는지 모르겠다."
소어아는 흑 지주의 말을 듣자 크게 기뻐하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는 과연 보통 사람과 다르구나! 난 벌써부터 네가 내 말을
믿어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흑 지주의 얼굴에 한가닥의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너를 믿는다. 넌 비록 나쁜 녀석이긴 하지만 위선자는 아
니기 때문이다."
"아! 네 눈은 정말 정확하구나. 가장 나쁜 사람은 바로 위선자
다. 그러나 이 세상엔 위선자가 너무 많아. 강별학은 그 중에서도
둘째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위선자이지!"
"그러면 이제 너는 어떻게 그와 상대하겠다는 것인지 말해보아
라."
소어아의 눈에서 빛이 번쩍이며 입을 열었다.
"눈에는 눈, 코에는 코, 이에는 이, 나는 그가 흔히 쓰고 있는
방법으로 그를 상대할 작정이다. 그가 남에게 화를 안겨 준 만큼
나도 그에게 화를 안겨줄 작정이야!"
"무슨 방법으로 그에게 화를 안겨 줄 것인지 얘기해 보아라."
소어아는 찬찬히 그를 바라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
다.
"너는 나구 형제의 다락방에 있는 아가씨가 누구인지 아느냐?"
흑 지주는 모용구매의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침울해졌다.
"내가 벌써 이야기하지 않았나! 모른다고 말이다."
소어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얘기를 똑똑히 들어라! 그녀는 바로 모용 집안의 아홉째 소
저이다!"
이 말을 듣자 흑 지주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뭐라고? 모용구매라고?"
"그렇다. 남궁유와 진검 그리고 소선녀 등이 찾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녀인 것이다. 그들이 만약 누군가가 그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면 반드시 혈전을 벌이지 않겠느냐?"
흑 지주의 눈에서 갑자기 빛이 반짝였다. 이미 소어아의 생각을
파악한 것 같았다.
"그러면 너는 그것을 강별학에게 덮어 씌울 작정이란 말이지?"
"그렇지. 그렇게 해서 누명을 쓰는 것이 얼마나 억울한 것인지
맛을 보여줄 작정이다."
"하지만 강별학 같이 지모가 있는 사람이 과연 너에게 당할까?"
"그 강별학이란 작자는 비록 여우 같이 교활하지만 네가 나를
도와만 준다면 내게 그가 걸려들게 할 방법이 있다."
"네가 나를 이미 여기까지 끌고 들어왔는데 설사 네가 밉다고
해서 너를 도와 주지 않을 수 있느냐?"
결국 그것은 승낙의 말이었다. 소어아는 매우 기뻤다.
"그렇다. 네가 만약 당하고 있는 억울함을 씻고 싶다면 내 계획
대로 행동해라! 하지만 안심해도 된다. 이 일은 절대로 너의 양심
에 가책을 받을 그런 일이 아니니 말이다."
그는 갑자기 흑 지주를 끌고 허공에 몸을 솟구치며 한마디를 더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행동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은 박쥐같이 성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흑 지주는 부지런히 달리면서도 무슨 생각에 곰곰이 잠겨있는
듯 하더니 돌연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호설이란 놈이 나에게 화를 안겨줘서 무슨
이익을 봤는지 모르겠는 걸?"
소어아는 흑 지주를 바라보며 웃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한 그 호설이란 놈은 아마 백개심일 것이다. 그는 '손
인불이기'란 칭호를 받고 있는데, 그저 남이 골탕먹는 것을 보는
것이 그의 취미란다."
흑 지주는 이 말을 듣자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이 세상에 그런 괴상한 취미를 가진 작자도 있단 말이냐?"
"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지. 그는 모용집안의 사위들이 모용
구매를 찾으러 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완아란 소저를 잡아
와 삶아 놓은 것은 모용집안의 사위들로 하여금 모용구매가 이미
남의 배 속에 들어가 있다고 믿게 하려는 수작이지. 그들이 슬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저지른 짓일거다."
"하지만 나는......."
"처음에는 자기가 이대취로 변장하려 했겠지. 그런 와중에 너를
알게 되자 너마저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야. 모용집안 사람들
을 골탕 먹였을 뿐 아니라 너까지도 골탕을 먹였으니 그 계획의
치밀함이 과연 십대악인답다. 굉장한 놈이야."
흑 지주는 이 말을 듣자 이를 갈듯 말했다.
"그토록 나쁜 놈을 칭찬하고 있다니 너도 참 어지간하구나!"
"만약 그의 그런 묘한 계획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내 계획을
세울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세상에는 백개심이란 작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너같은 사
람이 있으니...... 너희들이 서로 머리를 쓰는 바람에 당한 놈은
나 흑 지주뿐이군!"
"하하, 오늘밤 내가 없었다면 너의 입장은 아마 더 비참했을 것
이다. 그 당시의 상황은 너에게 백 개의 입이 있다 해도 변명할
수 없었던 것이니 말이다."
"어쨌든 간에 부인했어야 옳지 않았겠나?"
"그렇다고 나는 자인하지도 않았어. 내가 언제 모용구매를 먹었
다고 했느냐? 단지 그녀를 어떻게 했는지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
했지. 그리 대수롭지도 않은 일인데 뭘 두려워 하느냐?"
흑 지주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박장대소 했다.
"맞다! 그 당시 너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지. 하지만 그렇게
말한 것은 먹었다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
"교묘한 것이 바로 그것이야."
말을 주고 받는 동안 그들은 구양 형제의 집에 도착했다. 거리
의 등불은 모두 이미 꺼져 있었고 다만 다락방 속에서만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모용구매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아마 자신도 모르게 잠든 것 같았다.
소어아가 입을 열었다.
"저 소녀는 너의 말을 가장 잘 듣는다. 네가 칼을 가지고 있으
라 하자 그녀는 그렇게 했고, 자신에게 손을 대는 사람을 죽이라
고 하자 정말 그렇게 했다. 그러니 네가 그녀에게 쪽지 한 장을
써 달라고 그래라."
흑 지주는 의아심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쪽지를 쓰게 하라는 것이냐?"
"네가 이렇게 쓰라고 해. '만약 제 생명을 구하고 싶으면 은 팔
십만 냥을 약속된 장소에 갖다 놓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는 남의 배 속에 들어갈 것입니다. 부디 그들의 말을 따라 주십
시오!' 알아 들었느냐?"
"뭐? 팔십만 냥이나?"
"팔십만 냥이란 돈은 비록 적지 않지만 남궁유와 진검 같은 집
안에서는 그리 대수로운 것도 아니야. 다른 사람은 하루 안으로
그 많은 은을 준비할 수 없지만 그들은 아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해 주리라 생각하느냐?"
"오늘밤 그 일로 그들은 반드시 우리가 완아를 죽여 자기들을
위협한 것이라 생각할거야. 일이 우연히 이렇게 됐으니 그들에게
는 의심할 여지도 없겠지."
그는 말을 잠시 중단하더니 웃음띤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더군다나 쪽지는 틀림없는 모용구의 필적이니...... 그리고 문
제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꼭 적어야 한다. 필히 팔십만 냥의
은이어야 되고 금이나 보물 같은 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 말이다."
흑 지주는 잠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드디어 한숨을 내쉬며 결
정을 내렸다.
"좋다...... 그런데 왜 꼭 은이어야 되는지 모르겠구나!"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야."
"편지를 전한 후 또 무슨 할 일이 있느냐?"
"그저 편지만 전하고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발생하기를 고대하면
돼!"
"그때 가서 정말 은을 받아 갈 작정이냐?"
"은을 받으러 갈 자는 바로 내가 골탕먹일 상대야!"
"그런데...... 진검과 남궁유가 네가 없는 것을 보고 의심하지
는 않을까?"
"진검과 남궁유가 내가 누군인지 어떻게 안단 말이냐? 그들은
단지 나의 이 노란 얼굴을 보았을 뿐이야. 또한 나의 그 일 초의
무공을 보고 나를 이화궁의 제자가 변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야. 하지만 그 진짜 이화궁의 제자는 지금 바로 강별학
과 같이 있으니 얘기가 재미있게 됐지."
흑 지주는 잠시 동안 생각해 보더니 드디어 결정을 내린 듯 말
했다.
"너의 일거일동은 모두 뜻을 품고 있구나. 만약 너 같은 놈이
세상에 몇 명만 더 있다면 다른 사람은 마음놓고 살 수 없을 것이
다."
이 말을 들은 소어아는 껄껄 웃었다.
"하지만 마음놓아도 된다. 나 같은 놈은 이 세상에 둘도 없으니
말이다."
날이 무렵 경여당의 대리주인은 소어아에게 침대 위에서 끌려
내려왔고, 삼소저에게 편지 한 장을 전해 주러갔다.
날이 밝았을 때 소어아는 이미 약방의 종업원 모습으로 돌아 갔
고, 경여당 뒤뜰에 있는 그의 방에서 잠에 빠졌다.
얼마 후 삼소저가 그를 찾아 왔다.
이번에는 창문을 통해서 그를 부르지 않고 직접 방으로 들어왔
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잠에 골아 떨어져 있는 소어아를 끌어 내
리면서 기쁨과 원망이 엇갈리는 음성으로 발을 구르듯 말했다.
"이틀 동안 어디 갔었어요? 내가 얼마나 걱정 했다고요."
소어아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정말로 나를 걱정했다면 나를 좀 도와 주시오."
삼소저는 그윽한 음성으로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하라는 일을 내가 언제 복종하지 않은 적이 있어요?"
"그러나 이번 일은 조금도 남에게 누설해서는 안되오."
"나를 믿지 못한단 말예요?"
소어아는 즉시 웃음띤 얼굴로 표정을 바꾸었다.
"난 당신을 믿소. 그런데 한 가지 물어 볼 말이 있소. 당신은
혹 이 이틀 동안 강옥랑을 봤소?"
"못봤는데요."
소어아는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매우 중대한 일이니 자세히 생각해 보시오. 강별학의 주위에
강옥랑이 변장한 사람이 없는가 말이오."
삼소저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자신만만하
게 대답했다.
"절대로 그럴 가능성이 없어요. 이 이틀동안 강옥랑은 절대로
이곳에 있지 않았어요."
소어아는 그제서야 숨을 돌리며 가벼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마음을 놓았소. 여자들의 직감은 정확하고 틀리는 법
이 드무니 당신이 이토록 확신할 수 있는 이상 강옥랑은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오."
삼소저는 또다시 그윽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를 이곳까지 부른 것은 다만 그것을 물어보기 위해서
입니까?"
"그것은 당신이 그와 큰 관련이 있기 때문이오."
이러한 소어아의 말을 들은 삼소저는 못마땅한 듯 탁한 음성으
로 말했다.
"말씀을 삼가하십시요. 내가 그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예요?"
소어아는 정색을 했다.
"당신집안의 표은을 바로 그가 강탈한 것임을 알고 있소!"
"정말이에요?"
"그가 이 이틀 동안 갑자기 사라진 것은 나를 피하기 위해서이
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바로 강탈한 표은을 옮기기 위해서 일
것이오. 내가 알고 있는 비밀이 의외로 많다고 생각한 까닭이지
요."
삼소저는 두 눈을 깜박거렸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그들은 왜 그렇게 당신을 두려워합니
까?"
"엄격히 말한다면 그들도 지금까지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
소."
삼소저는 또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당신이 누구든 나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소어아는 그녀가 말을 계속할까 봐 급히 가로챘다.
"내 생각대로 그가 이곳에 있지 않다면 계획이 일단 성공했다고
볼 수 있소. 당신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가 그가 만약 다시 돌아
오면 즉시 나에게 알려주시오."
"당신은 도대체 무슨 계획을 세웠습니까? 왜 그가 이곳에 있지
않아야 됩니까?"
소어아는 그녀의 손을 쥐어 잡고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했다.
"당신도 차차 알게 될 것이오. 다만 지금은 내게 물어보지 마십
시오."
이 세상에서 여자의 입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
로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남자의 부드러운 말일 것이다. 과연 삼
소저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윽한 음성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
다.
"당...... 당신은 나에게 다른 하실 말씀은 없어요?"
"오늘밤 자정 때 당신집 뒷문밖에서 나를 기다려 주시오."
이 말을 들은 삼소저의 눈에서 즉시 기쁜 빛이 솟아 나왔다. 떨
리는 음성으로 그녀는 입을 열었다.
"오늘밤...... 뒷문에서 말입니까?"
"그렇소. 부디 잊지 않기를 바라오. 제발 제 시간에 나와주시
오."
삼소저의 웃음은 매우 아름다웠다.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설사 하늘이 두 조각 난다해도 꼭 시
간을 맞추어 나가겠어요."
그녀의 눈동자 속엔 낭만적이며 아름다운 환상이 가득 담겨 있
었다.
밤의 약속은 실로 꿈 많은 소녀에게 신비하고도 달콤한 것이었
다. 세상에 이보다 더욱 그녀들을 흥분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소어아는 성내를 왔다갔다하며 돌아다니다가 성의 동쪽 한 구석
에 자리잡고 있는 작고 초라한 식당앞에 도착하자 비로소 들어가
식사를 했다.
그 식당 이름은 사향관(思鄕관)이었다.
그 안으로 들어간 소어아는 한 그릇의 국수와 네 개의 계란을
먹었다. 그 식당의 주인은 삼 년 이상이나 목욕을 하지 않는 것
같이 지저분했다. 소어아는 그를 불러 문방사우와 칠팔십장의 종
이를 사오라고 했다.
그는 종이 위에다 주먹만한 큰 글자를 내려 쓰기 시작했다.
"개심이란 친구! 오늘밤 술시에 성의 동쪽에 위치한 사향관이란
식당에서 이씨란 친구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설사 가고 싶지 않
아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칠팔 십장을 썼다. 그리고 그는 불량배 같은 두 명
의 사내를 구하여 그 종이를 성 안의 눈에 띠는 곳에 붙이라고 분
부했다.
식당의 주인장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든지 가까이 다가와 물었
다.
"손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무리 봐도 이해하지 못하겠군
요?"
소어아는 그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알아야 할 사람은 당연히 알고, 몰라야 할 사람은 당연히 모르
는 일이오."
주인은 머리를 긁으며 계면쩍어 했다.
"누가 알아야 할 사람입니까?"
그러나 소어아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직 의미 모를
미소를 남긴 채 그 식당을 나왔다.
식당에서 나온 소어아는 옷가게를 찾아가 한 벌의 중고품인 검
은 옷을 산 후 잡화상에 가서 석고와 묵과 쇠가죽으로 된 주머니
를 샀다.
그리고 난 후 그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객관에 투숙했다.
거울있는 방을 찾아 들어간 그는 옷을 훌렁 벗어 던진 채 마음
껏 잠을 잤다.
그가 다시금 깨어났을 때는 날이 이미 저물 무렵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소어아는 거울을 바라보며 여자 같이 한참이나
화장을 했다. 그리고는 낮에 산 검은 옷을 몸에 걸쳤다.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은 소어아였다는 흔적은 눈씻고 찾아보아
도 찾을 수 없었고 이대취와 똑같았다.
한참이나 찬찬히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본 소어아는 매우 만족
한 듯 껄껄 웃으며 뇌까렸다.
"비록 완전히 똑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밤인데다가 그 백개심
이란 작자가 필시 이십여년 동안이나 이대취를 만나지 못했을 테
니 충분히 그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본래부터 키가 작지 않았고 또한 이년 동안 단련을 기울여
왔으므로 사지가 잘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비단 변장한 그의
얼굴이 이대취와 매우 닮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몸집도 그 웅장
한 체격을 지닌 이대취와 별 차이가 없었다. 설사 매일 같이 이대
취와 만난 사람이라 해도 주의하지 않는다면 알아차리지 못 할 정
도였다.
그는 벗어 놓은 옷을 한 뭉치로 꾸려 이불 속에 집어 넣고 밖에
서 보기에는 침대 위에 여전히 사람이 누워있는 것 같이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 후 그는 왼손으로 편지 한 장을 썼다. 그 편지는 강별학에
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편지 봉투에다 이런 말을 덧붙였다.
"강별학께서 친히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보아서는 안됩니다."
소어아는 그 편지를 품에 넣고 웃음띤 얼굴로 중얼거렸다.
"강옥랑이 오늘밤 안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강별학이 설사 여
우라 해도 이 편지를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설사
편지 내용을 믿지 않는다해도 삼경이 되면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알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하고 찾아갈 것이다!"
그는 흥분이 가득찬 웃음을 지으며 창문으로 해서 밖으로 빠져
나갔다.
소어아가 다시 사향관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
었다.
저녁 식사시간이었지만 사향관 안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심
지어 그 주인장마저 어디론가 해방을 감추었고, 단지 한 명의 손
님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사람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 쓴 모자 위에 진주가
하나 박혀 있는 것이 마치 큰 갑부인 듯 보였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불량배 같았고 마치 남에게 잡힐까봐 두려
워하는 도둑처럼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소어아는 그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껄껄 웃으며 말을 걸었다.
"네 녀석이 과연 와 주었구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 했는데 너는
여전히 이씨란 친구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시간을 맞추어 왔구
나!"
그는 사향관이 떠나갈듯 큰소리로 말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
대취의 옆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이대취의 표정과 태도를 모방하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두 눈을 부릅뜨고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누구냐? 나는 너를 모르겠다!"
"나를 속일 셈이냐? 네가 비록 옷은 사람답게 입었다만 그 비적
같이 생긴 모습은 여전히 나타나 있다."
그 사람은 비로소 껄껄 웃으며 반가와했다.
"네놈 같이 사람고기만 먹는 녀석이 오랫만에 이 형님을 만났는
데 좀 겸손하면 배라도 아프단 말인가?"
소어아는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상 위에는 젓가락과 술잔 등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한
가운데는 한 사라의 불고기가 놓여져 있었다. 그 불고기를 본 소
어아는 눈썹을 찡그렸다.
"네 녀석은 정말 형편없이 가난한가 보구나! 우리가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초라하게 차렸으니 말이다. 빨리 주인장을 불러
오너라. 오늘밤 마음껏 먹고 마셔야 하지 않겠나!"
"그는 올 수가 없어."
"왜? 그가 어디에 있는데?"
백개심은 웃음띤 얼굴로 불고기를 가리켰다.
"바로 이 사라 속에 있다."
그 말을 들은 소어아는 속으로는 깜짝 놀랐으나 겉으로는 여전
히 표정을 바꾸지 않고 껄껄 웃었다.
"하하! 네 놈은 아직도 이 형님의 애호(愛好)를 기억하고 있었
구나! 그러나 그 주인장은 몇 년이나 목욕을 하지 않았던 것 같던
데 고기가 썩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이 씻은 후 요리한 것이니 안심하고 먹
어 두어라!"
그는 소어아에게 가득히 술 한 잔을 따라 부었다.
소어아는 웃음띤 얼굴로 술을 따르는 그를 바라보았다.
"네 녀석은 참으로 효성이 지극하구나!"
소어아는 하는 수없이 한 토막의 고기를 집어 먹었다. 그러나
입 안에 넣고 두어 번을 씹은 그는 즉시 그 고기를 뱉으며 두 눈
을 부릅떴다. 그러더니 대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이것이 무슨 놈의 사람고기냐? 네 녀석이 감히 내 입을 속이려
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했느냐?"
백개심은 껄껄 웃는 한편 박수를 치며 찬사를 보냈다.
"네 놈의 입은 그래도 쓸만하구나. 이 고기가 즉시 사람고기가
아니란 것을 알아챘으니 말이다. 그러나 네 놈도 생각해 보아라.
내가 미쳤다고 사람을 죽여가면서 너에게 요리를 해준단 말이냐?"
물론 그는 이 방법으로 자기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정말 이대
취인지 여부를 가리고자 한 것이었다.
이 점을 알아 차린 소어아는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지만 겉으
로는 여전히 두 눈을 부릅뜨고 대노한 표정을 나타냈다.
"왜? 나에게 효도하면 누가 너를 잡아먹기라도 한단 말이냐? 그
주인장은 비록 더럽기는 했지만 매우 튼튼해서 내가 벌써부터 요
리를 할려고 찍어 놓고 있었는데 너는 그를 어디에다 숨겼느냐?"
"그놈은 아마 지금쯤 고향에 도착했을 것이다. 지금 이 점포의
주인은 나라네. 하하, 그 바보 같은 녀석은 내가 준 은색을 칠한
납을 받고 매우 기뻐하며 이 점포를 내게 양도했지. 내가 자기에
게 당한 줄 알고 말이야."
소어아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 초라한 식당은 너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는데, 너는 왜 그를
완전히 망하게 속이고 또한 노부로 하여금 그의 맛좋은 고기를 놓
치게 했느냐 말이다! 너의 그 이득을 상관하지 않고 남을 골탕먹
이는 나쁜 버릇을 아직도 고치지 못 했구나!"
"그것은 나의 타고난 성격인 까닭에 고칠 수 없지만 너는 그 사
람 고기를 먹는 나쁜 버릇을 왜 고칠 수 없단 말이냐? 그나저나
오랫동안 악인곡에 숨어 있다가 뭣하러 갑자기 밖으로 나왔느냐?"
소어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대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너는 우선 내 물음에 대답해라. 네가 내 이름으로 철무쌍 그
늙은이에게 깃발을 보내고 또한 내 이름으로 남의 집 시녀를 삶아
먹은 것은 도대체 무슨 목적이냐?"
백개심은 흠칫하며 놀랐다.
"네가 어떻게 그것을 다 알았지?"
"흥! 나를 속이려면 너는 아직 몇 년을 더 배워야 하느니라."
"그 녀석들이 할 일 없이 빌빌 대는 것이 보기에 하도 안타까워
일부러 그들에게 할 일을 마련해 준 것뿐이다. 또 사람의 고기를
삶아 가지고 먹을 사람을 초청한 후, 그들에게 밀고한 것은 그들
양쪽으로 하여금 큰 결투를 벌리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래야지
만 내가 기쁨을 느끼니 말이다. 네 녀석도 솔직히 말해 보아라.
내가 치룬 이번 계획이 치밀하지 않았느냐?"
"흥! 다만 그 진가란 놈과 남궁이란 놈들이 매우 어리석다고 생
각할 뿐이다. 그들은 나이도 어리지 않은데 어째서 정체도 모르는
사람의 밀고를 함부로 믿는단 말이냐? 만약 내가 그들이었다면 우
선 그 밀고자를 잡아 놓고 다른 사람이 사람고기를 먹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물어 보겠다."
"그래서 편지를 써 보냈지. 무엇하러 내 자신이 직접갈 필요가
있단 말이냐?"
"누가 보낸 지도 모르는 편지를 그들이 함부로 믿어 줄 수 있겠
느냐?"
"설사 믿지 않는다고 할 망정 그래도 확인하러 가지는 않겠어?"
소어아는 무릎을 탁 쳤다. 이대취가 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바로 그것이다. 내가 바로 너에게 그 말을 듣고 싶었단
다......."
백개심은 눈알을 굴렸다.
"너는 또 무슨 못된 계획을 짜고 있느냐? 설마 나를 골탕먹일
계획은 아니겠지?"
"쓸데없는 생각은 말아라! 네가 비록 나의 이름을 남용했지만
나는 너에게 벌을 줄 생각은 없다. 그저 네가 다시 한 번 진씨란
놈과 남궁이란 놈에게 편지를 띄워 준다면 말이다! 너의 첫번째
편지가 그럴듯 하게 됐으니 그들은 당연히 너의 두번째 편지도 믿
을 것이다."
"어떠한 내용의 편지를 띄우라는 말이냐?"
"당연히 남을 골탕먹이는 편지지!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써 줄
리 만무하지 않는가?"
"남에게 골탕먹이는 일이라면 무조건 할 수 있지! 그런데 네가
골탕을 먹이고자 하는 상대는 누구냐?"
"잔말말고 그들보고 오늘밤 삼경 때 단합비의 장원뒷뜰에 있는
손님방으로 가보라고 해라! 그곳에 그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물건
이 있다고 말이다. 다만 꼭 오늘밤 삼경이라야 된다고 말해라. 너
무 일러도 아니 되고 늦어도 아니 된다고 말이다. 골탕먹는 사람
이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너도 차차 알게 될 것이다."
"만약 내가 그 편지를 쓰지 못하겠다면?"
소어아는 냉소를 터뜨렸다.
"쓸 것이라 믿는다. 너는 남에게 골탕을 먹일 수 있는 일을 보
고도 하지 못한다면 잠도 못이루는 사실을 내가 잘 알고 있으니
까. 더군다나 네가 그 편지를 쓰지 않는다면 쓰게 할 방법이 따로
있단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강별학에게 주고자 하는 편지를 품
에서 꺼내면서 재빨리 일장을 뿜어 장풍으로 등불을 껐다.
백개심은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
로 물었다.
"너는 무엇을 하려는 속셈이냐?"
여인(女人)의 마음
소어아는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를 잡으려는 놈들이 왔으니 빨리 도망갈 준비를 하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창문 밖에서는 달빛을 받은 칼날
빛이 번쩍거리며 한 사람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이씨란 놈과 백씨란 놈은 들어라! 너희들은 하늘이 용서할 수
없는 많은 죄를 지었으니 도망갈 생각을 버리고 어서 나와서 죽음
을 받아라!"
어둠에 잠긴 밤하늘 속에서 많은 인영(人影)이 번쩍거리는 것으
로 보아 사향관 식당은 물샐 틈없이 완전히 포위된 것이 틀림없었
다.
이때 또다른 사람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대취! 듣자니 당신은 이미 자신의 죄를 깨닫고 선한 사람이
되고자 무척이나 노력했다 하더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
서 나와 자수를 하시오. 나는 내 명망으로 절대로 당신의 생명을
해치지 않을 것을 보증하겠소."
백개심은 의아심이 가득찬 음성으로 말했다.
"이상하다! 이 놈들이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
지?"
소어아는 속삭이듯 작은 음성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지금 그 인자하고도 어진 것처럼 말하는 자는 필시 강별학일
것이다."
"그런 것 같다!"
"그가 위치한 쪽으로 뚫고 나가자!"
백개심은 또다시 놀랐다.
"무공이 가장 뛰어난 그가 있는 쪽으로 뚫고 나가자고? 너 혹시
미친 것은 아니겠지?"
"나도 생각이 있어서 하는 말이니 걱정 말고 따라 오너라?"
이때 밖에서 또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이 정히 우리의 충고를 듣지 않겠다면 우리가 들어가겠
다."
사실 밖에 있는 이들은 십대악인에 대하여 매우 두려워하고 있
었기 때문에 함부로 집안으로 달려 들어오지는 못했다.
이때 소어아가 불쑥 몸을 일으키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대취가 나갈 터이니 기다려라!"
그는 의자를 들어 동쪽에 있는 창 밖으로 던지는 한편 몸은 서
쪽에 있는 창문을 향하여 솟구쳐나갔다.
의자가 날아가자 동쪽 문 밖에서는 한차례의 소란이 일어나며
몇 자루의 칼이 빛을 뿜어냈다. 그들의 칼은 일제히 의자에 적중
했다.
한편 창문 밖으로 뚫고 나간 소어아에게도 두 자루의 칼이 격해
왔다.
소어아는 크게 기압을 지르면서 발을 날려 왼쪽에서 날아오는
한 자루의 칼을 가볍게 걷어차는 동시에 오른쪽에 있는 사람의 머
리 위로 날아가며 그의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그 사람은 비명 소
리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그가 행한 이 일 초의 원앙 쌍비각은 원래 그리 뛰어난 무공의
초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초식을 약간 변화시킨 것으로도
두 명의 고수를 가볍게 물리친 것이었다.
그가 지하궁궐에서 얻은 무공비급은 천하 각문 각파 무공의 정
밀함을 모두 갖춘 것이었다. 그것을 연마한 자는 어느 문파의 초
식을 막론하고 모두 그것을 신기할 정도로 응용할 수 있었다. 또
한 상대방은 그가 뿜어 낸 초식이 어느 문파의 무공인지를 알 수
가 없었다.
한 사람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씨란 놈은 과연 보통이 아니니 여러분들은 각별히 조심하
십시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퍽'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뒤따라 한 차례의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말을 하던 자가 백개심에게 일격을 맞은 모양이었다.
소어아는 북파의 원앙 쌍비각으로 두 사람을 쓰러뜨린 다음 즉
시 남파의 충천포란 일 초를 뿜어내 한 명의 대한을 허공에 날려
버렸다.
이때 갑자기 눈앞에 날카로운 검빛이 번쩍거리더니 신속하고도
악독한 일검이 그에게 덮쳐왔다.
"이대취! 너의 무공이 비록 매우 깊고 웅후하지만 오늘은 이곳
에서 살아 나갈 생각을 하지 말아라!"
말을 하는 순간 그는 이미 전광석화와 같이 여덟 검을 뿜어냈
다. 더욱이 그 검식은 매초마다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소어아는 바라보지 않고도 이 자가 강별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소어아는 공격해 들어오는 여덟 검을 피할 뿐 반격하지는 않고
다만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너의 아들과 표은의 행방을 알고 싶지 않느냐?"
순간 강별학은 검세를 늦추며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어왔
다.
"너 지금 뭐라고 했느냐?"
소어아는 편지를 강별학의 검끝에다 끼워주며 한마디를 던졌다.
"이 편지나 보고 말해라."
강별학은 어찌해야 좋을지 잠시 갈림길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
가 잠시 정신이 흐트러진 사이에 소어아는 이미 그의 옆을 빠져
달려나갔다.
백개심도 기압소리를 지르며 그를 따라갔다.
강별학은 두 눈을 빤히 뜨고도 그들이 도망가게끔 놓아 둔 셈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 달려 왔을 땐 소어아와 백개심은 이미 사
라지고 종적을 감춘 후였다.
소어아와 백개심은 무성한 수풀 속으로 달려 들어가서야 발을
멈추었다.
백개심은 소어아를 노려보며 차디찬 웃음을 띠운 얼굴로 물었
다.
"그 놈들이 어떻게 우리의 행방을 알았을까?"
"당연히 밀고한 자가 있겠지!"
"밀고한 자는 아마 네 자신일 것이다."
"만약 밀고한 자가 나라면 내가 무엇하러 너를 도망 나오게끔
도와 주었겠느냐?"
백개심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너 말고 또 누가 우리가 만나는 장소를 알고 있지?"
"다른 사람들도 장님은 아닐 텐데 내가 붙인 종이 위에 그토록
큰 글자를 보지 못한단 말이냐?"
백개심은 여전히 냉소를 터뜨렸다.
"네가 쓴 그 말들을 누가 해독할 수 있단 말이냐?"
"당연히 해독할 사람이 있지!"
백개심의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그것이 누구냐? 혹시 우리의 옛친구들 중에 이 성 안에 당도한
사람이 있단 말이냐?"
소어아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드디어 입술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주지. 성안에 나구와 나심이란 두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우리를 못살게 굴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네. 그들은
우리의 일에 대해 매우 정확하게 알고 있지."
"그 놈들은 어떻게 생겼는데?"
"뚱뚱하고 키가 크며, 똑같이 생긴 쌍둥이야!"
"삐쩍 마른 쌍둥이는 알지만 뚱뚱한 쌍둥이는 모르겠는
데......."
"넌 그들을 모르지만 그들은 너를 알고 있지."
"그들이 밀고할 것을 알면서도 너는 왜 그 종이를 부쳤지?"
백개심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대취로 변장한 소어아
는 여전히 태연했다.
"내가 그렇게 한 목적은 바로 그들로 하여금 밀고하게 하려는
것이였지. 그래야지만 그 편지를 강별학에게 전해 줄 수 있거든.
만약 다른 방법으로 편지를 전해 준다면 그는 그 편지를 중요시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이대취가 친히 그에게 전해 준 것
이니 그 무게가 당연히 다르겠지!"
"어떻게 강별학이 꼭 올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지?"
"그는 대협객 흉내를 내고 있어. 그런데 십대악인이 성 안에 있
다는 것을 듣고도 어찌 상관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하지만 그가
오게 되더라도 필시 우리를 놓아줄 것임을 나는 아울러 자신할 수
있었지."
백개심은 한참이나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결국 한숨을 길게 쉬
며 입을 열었다.
"네가 모든 것을 그렇게 치밀하게 계산했으니 아마 진짜 이대취
도 너보다는 못 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소어아는 멈칫함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즉
시 껄껄 웃었다.
"무슨 놈이 진짜 이대취란 말이냐? 그렇다면 내가 가짜란 말인
가?"
"하하! 이대취의 모습과 태도를 똑같이 흉내내서 심지어 나마저
탄복하게 만드는구나. 네가 내 앞에서 죽는 것을 보고 싶진 않지
만, 애석하게도 너는 이미 내 앞에서 죽어야 할 몸이야!"
"어째서 내가 네 앞에서 죽어야 한단 말이냐?"
백개심은 괴상한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마신 술은 이미 나의 독문(獨門)인 수정단장산(水晶斷腸
散)을 넣은 것이다. 원래 너는 반 시간 정도를 더 살 수 있었는데
조금전 한바탕 날뛰었으니 아마 이젠 죽을 때가 됐을 걸!"
소어아는 대노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네 놈은 참으로 지독한 악당이로구나! 네 놈은 그 목숨을 부지
할 것으로 아느냐?"
그는 백개심에게 덮쳐 가려 했으나 몸을 솟구치자마자 '쿵' 하
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얼굴색이 점점 창백해졌으며 배 속을
칼로 도려내는 듯 하여 배를 움켜쥐고 뒹굴었다.
"난...... 난...... 난 이제 죽겠구나......."
백개심은 좋아 죽겠다는 듯 손발을 흔들며 껄껄 웃었다.
"이젠 십대악인이 결코 상대하기 쉬운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
겠지."
"그러나...... 그러나...... 너는 어떻게 내가...... 내가 이대
취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 나의 변장술에 뭐 잘못된 점이 있다
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좋아, 내가 솔직히 말해 주지. 네가 영문도 모르고 죽은 귀신
이 되지 않게 말이다."
소어아는 신음을 발했다.
"제발 부탁이니 어서 말해 봐라."
"넌 이대취의 일거일동을 그토록 똑같이 흉내내는 것을 보니 필
시 너는 그를 알겠구나. 그렇지?"
소어아는 아픔을 참지 못하여 온몸을 벌벌 떨며 대답했다.
"그...... 그래......."
"너는 그에게 나에 관한 말을 들은 적이 있느냐?"
"없...... 없어."
"그것은 나와 그가 깊은 원한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그는 내
이름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그런 그가 어찌 나를 친구로
생각하여 한 상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단 말이냐?"
그는 껄껄 웃으며 잠시 동안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너는 십대악인이 모두 악인이기 때문에 서로 통하는 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친구라 했겠지만 십대악인 중에서도 서로 깊은
원한을 지니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겠지. 바로 그 한
가지 실책이 너의 생명을 잃는 치명적인 타격이 된 거야!"
"너는 애초부터 내가 이대취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구나. 그
런데 너는 왜......."
"흠, 어르신네가 줄곧 모르는 척한 것은 다만 너의 목적을 알고
싶었던 것이야. 또 너와 장난을 치고 싶기도 했지. 이제 그 장난
에 어르신네가 지쳤으니 너를 죽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
"비록 오늘 네 손에서 목숨을 잃지만 너도 한 가지의 일
을......."
그는 음성이 점점 작아졌고 거의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백개심은 그의 마지막 하는 말에 관심을 느낀 듯 다그쳐 물었
다.
"무슨 일이냐? 어서 말해 보아라!"
소어아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방울방울 솟아났다.
"너...... 너......."
그는 있는 힘을 다했지만 음성이 여전히 모기 울음소리 같았다.
백개심은 참다 못하여 그에게 다가서 고개를 숙이며 크게 소리
쳤다.
"크게 말해라! 어르신네께서 듣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자 소어아는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네가 밥통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번개같이 신속한 속도로 백개심의 몸에 있는 십여 곳
의 혈도를 점했다. 백개심은 외침소리에 놀라 멈칫하는 순간 이미
땅바닥에 쓰러졌다.
소어아는 재빨리 땅바닥에서 일어나 호탕스러운 웃음을 터뜨렸
다.
"네가 비록 여우 같이 교활하고 영악하지만 나에게 걸린 이상
피할 수는 없지. 이제 어르신네가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았겠지?"
쓰러진 백개심은 두 눈을 부릅뜨고 소어아를 노려보았다. 그는
실로 이 세상에 십대악인보다 더욱 영악하고 교활한 사람이 있으
리라고는 이제껏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소어아는 웃는 얼굴로 다가섰다.
"비록 그 술 속에 독이 있는지의 여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십대악인을 상대할 때는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그 술을 삼키지는 않고 혓바닥 밑에 감추고 있다가 고기를
뱉을 때 함께 뱉았던 것이야!"
백개심은 놀라움이 가득찬 표정으로 말했다.
"내...... 내가 왜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흥, 사람을 속이는 실력은 어르신네가 다섯 살 때부터 터득했
어. 비단 작은 한 잔의 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큰 오리알을 입에
다 감춘다해도 너는 발견할 수 없어!"
백개심은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 넋이 빠진 표정을 했다.
"너...... 너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
"하하, 너도 이젠 어르신네를 무서워하는 모양이구나. 사실 어
르신네는 누가 봐도 무서워하는 존재이지. 네가 만약 어르신네가
구인지를 알고 싶다면 얌전하게 나를 위하여 일을 끝내라. 그러
면 혹시 너에게 말해 줄지도 모르니까."
백개심은 이 귀신보다 더욱 무서운 자가 자기를 죽일 마음이 없
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크게 기쁜 나머지 금새 굽신거렸다.
"네 네, 소인은 즉시 편지를 쓰도록 하죠."
"이제야 '어르신네'에서 '소인'으로 변했구나. 하하하...... 그
러나 난 좀 조치를 취해놔야 되겠다."
그는 조금 전부터 한 뭉치의 진흙을 쥐고 있었다. 그는 백개심
의 입을 벌려 힘껏 그 진흙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백개심은 한 덩이의 진득하고 축축하며 구린내도 곁들어 있는
물체가 목구멍을 통해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놀라
움을 금치 못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떠듬떠듬 물었다.
"이것은...... 이것은 무엇이오?"
"너에게 너의 독문인 수정단장산이 있는 것처럼 나도 내 독문인
'흑살최명환'이 있다."
순간 백개심의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흑살최명환이라고요? 난...... 나는 한번도 그런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당연히 들은 적이 없겠지. 그것은 내가 심혈을 기울여 오랫동
안 연구한 끝에 요즘에 와서 완성한 약이야. 그 독을 고칠 수 있
는 약초는 없어. 복용 일곱 시간 후엔 온몸이 검게 변하고 또 반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썩기 시작하다가 끝내는 검고 구린내가 나
는 물로 변하여 죽고 마는 것이지."
그가 아무렇게나 줏어대는 말들은 마치 정말인 것 같았다.
이 말을 들은 백개심의 이마에서는 식은 땀이 뚝뚝 떨어졌다.
"물론 나만은 그 독문의 해독약을 지니고 있지!"
"당신과 나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제발 부탁하겠소. 그 해독
약을......."
소어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채며 나무
라듯 말했다.
"일곱 시간내로 내가 말한 대로 일을 하고는 이곳에 와서 기다
려라. 내가 너를 다시 살리러 올 테니까."
그는 백개심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러나 백개심은 여전히 힘없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마치
일어날 힘도 없는 것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여전히 두려워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 당신이 약속을 잊지는 않겠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가서 편지를 써라! 시간이 모
자랄지도 모른다."
백개심은 그의 말이 떨어지자 재빠른 동작으로 땅바닥에서 일어
나 꼬리에 불이 붙은 짐승처럼 나는 듯 사라졌다.
멀리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어아는 껄껄 웃었
다.
"모든 사람이 무서워하는 십대악인도 쉽게 속임수에 넘어가는구
나."
자정이 되기 바로 직전에 소어아는 다시 그 다락방으로 갔다.
그러나 나구와 나삼은 그의 예측대로 그곳에 있지 않았다.
모용구매는 양탄자 위에 앉아 있었는데, 흙으로 만든 장난감 아
이를 안은 채 낮은 음성으로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
"귀여운 아기야, 어서 잠을 자라. 창 밖엔 날이 이미 어두워졌
고 작은 새들도 벌써 집으로 돌아갔다. 까마귀도 휴식을 취한단
다......."
소어아는 웃음띤 얼굴로 그녀의 노래를 이었다.
"날이 밝고 태양이 나오면 또다른 꽃이 향기롭고, 새가 울 날
이......."
모용구매는 노랫소리를 그치고 한참이나 망연히 소어아를 바라
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소어아는 웃음띤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벌써 잊었나요...... 내가 바로 어젯밤 당신에게 어떻게 악마
를 제거할 수 있나를 가르쳐 준 사람이오."
"아, 당신이로군요. 그런데 왜 당신 모습이 달라졌죠?"
소어아는 일부러 살며시 말했다.
"나는 당신 몸 속에 있는 악마가 나를 알아차릴까봐 일부러 이
렇게 변장한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남에게 나를 보았다고 말하
지 마십시오."
모용구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 악마는 매우 매우 무서운 존재이니 절대로 들켜
서는 안 되죠. 안 되고 말고요."
"당신은 알 것입니다. 당신은 총명한 소녀이니까 말입니다."
모용구매는 흰 이를 드러내며 방긋이 웃었다.
"내가 정말 총명합니까?"
애수에 잠긴 듯한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이러한 미소가 나타나
자 마치 음산한 날씨에 햇빛이 갑작스레 비치는 것 같았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소어아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고, 더 이상
그녀를 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나는 당신을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고 싶소. 그곳에서 아
주 실력이 뛰어난 사람을 만날 것이오. 그 분은 당신 몸 속에 있
는 악마를 내쫓아 줄 것이오."
무슨 영문인지 모용구매는 그의 말을 매우 잘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밖으로 걸어 나가려 했다. 두세 발자국을
걸어가던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며 갑자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되죠?"
"훗날 당신은 아마도 나를 만나기가 매우 힘들 것이오."
모용구매는 이 말을 듣자 즉각 걸음을 멈추었다.
"만약 훗날 당신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나는 그곳으로 떠나가
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을 듣자 소어아는 당황해서 이맛살을 찌푸리며 조급히
말했다.
"만약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악마가 사라진다면 당신 자신도
나를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당신
곁에서 다정하게 당신을 보살펴 줄 것입니다."
모용구매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악마가 내 몸 속에 있게 하겠어요."
소어아는 그녀의 이같은 말을 듣게 되자 알 수 없는 울고 싶은
충동이 울컥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즉시 머리를 세
차게 흔들며 그런 감상을 털어버리려고 하며 모용구매를 타일렀
다.
"바보 같이 무슨 말을 하고 있소. 당신은 평생 동안 이렇게 살
고 싶단 말이오?"
모용구매는 찬찬히 그를 뜯어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이대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요. 더군다나 당신이
매일처럼 내곁에 있어 준다면 당신도 역시 내 마음 속에 있는 악
마를 쫓아낼 수 있죠? 그렇죠?"
"당신이 이렇게 말을 듣지 않고서야 내가 어찌 매일같이 당신을
찾아오겠소?"
모용구매는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가는 것을 꼭 원한다면 당신의 말에 따르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소어아는 끝내 참지 못하여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당신이 내가 오늘밤 한 말들을 기억한다면, 훗날 나는 다
시 당신을 찾아가겠소......."
소어아와 모용구매가 단합비의 장원 뒷문에 도착했을 땐 삼소저
가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밤은 매우 추웠다. 그러나 그녀는 얇고 부드러운 분홍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는 허리를 졸라매며 밥을 굶
을 수도 있는데 추위 정도야 견딜 수 없겠는가!
그녀는 자꾸 가슴이 울렁거리며 떨려옴을 느꼈다. 비록 날씨가
추워 몸은 벌벌 떨고 있었지만 가슴 저 깊은 곳에서는 따뜻하고
포근한 것이 올라와 삼소저를 감싸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가 난생
처음으로 남자와 가진 약속이었다.
멀리서부터 소어아를 발견한 그녀는 기쁨이 가득찬 마음을 안고
소어아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소어아 앞에 가까이 당도한 그녀는
소어아 뒤에 또 한 사람이 따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너무나 기쁜 나머지 터져버릴 것 같던 마음은 차츰차츰
사라져갔다. 그녀는 입술을 힘껏 깨물며 입을 열었다.
"당신...... 당신은 혼자 오는 것이 아니었군요?"
소어아는 정말 그녀의 마음을 몰라서인지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낄낄거리며 삼소저를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혼자 온다고 했었소?"
삼소저는 그제서야 비로소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놀
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외쳤다.
"당신...... 당신은 누구요?"
"방금 나를 알아봤는데 지금은 왜 나를 몰라 본단 말이오?"
삼소저는 그의 음성을 듣고 조금 마음이 놓였지만 여전히 의심
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조금 전에 나는 다만 느낌으로...... 느낌으로 당신이 왔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의 얼굴은......."
소어아는 음성을 낮추었다.
"나는 한 가지 일을 비밀리에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변
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러니 당신은 절대로 남에게 이 비밀
을 탄로시켜서는 안 되오. 이 비밀은 오직 당신 혼자 만이 알고
있으니 말이오."
그는 비밀리에 처리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소
녀들은 사랑하는 남자의 비밀을 캐물어 보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삼소저의 얼굴에는 다시 화색이 돌았다.
(이이는 나를 진심으로 대해 주는 것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남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나에게만 가르쳐 준단 말인가!)
그녀도 음성을 낮추고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마세요. 절대로 남에겐 비밀을 알리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 일은 아직도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조금 필요하오."
삼소저는 다그쳐 물었다.
"제가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없겠어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까 하기도 했었는데...... 만약 당신이
협조해 준다면 다른 사람보다 몇십 배 몇백 배나 좋지요."
"내가 벌써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일이라면 어떠한 것을
막론하고 모두 들어준다고 말입니다."
소어아는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사실 그 일은 별로 힘든 것은 아니오. 다만 이 사람을 당신이
데리고 있다가 삼경이 될 무렵 그를 강별학의 방으로 살며시 데려
다가 은밀한 곳에 숨겨 놓으면 됩니다."
삼소저는 조금도 망서리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그런 일은 제가 능히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은 추
호도 하실 필요 없어요."
그러나 소어아는 여전히 정색을 하고 신중을 기했다.
"하지만 두 가지의 일을 꼭 기억해야 하오. 첫째는 절대로 남에
게 들켜서는 안 되고, 둘째는 꼭 삼경이 될 때 이 사람을 숨겨 놓
아야 합니다. 너무 일러서도 아니 되고 더욱이 늦어서도 안 됩니
다."
"걱정마세요. 절대로 당신의 일을 망치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요."
그녀는 그제야 비로소 소어아의 뒤에 서 있는 모용구매를 주시
했다.
강별학의 수난(受難)
모용구매는 전신이 검은 옷으로 가리워져 있었고 심지어 머리마
저 덮혀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그녀를 주시하던 삼소저도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드디어 참지 못하여 입을 열었다.
"이 분은 누구입니까?"
삼소저의 물음에 우물쭈물 하던 소어아가 결국 대답했다.
"이 아가씨는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매우 큰 관련이 있으니, 장
차 알게 될 것이오."
그는 모용구매를 삼소저에게 넘겨 주며 독촉했다.
"빨리 가시오."
모용구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고자 했지
만 소어아가 이미 발길을 돌렸기에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이
러한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삼소저는 얼굴에 한가닥 의심하는 듯
한 빛이 스쳤으나 이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모용구매에게 말을 던
졌다.
"나를 따라와요!"
일찌감치 사당에 도착한 소어아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주위에다 몇 가지의 장치를 했다.
그리고는 은신하기 가장 좋은 곳을 찾아 자신의 몸을 숨겼다.
그곳은 사당의 모든 구석을 환하게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에
게 들킬 염려도 없는 곳이었다.
소어아는 자기의 계책을 처음부터 다시금 검토했다.
(검진과 남궁유는 모용구매의 쪽지를 받고 반드시 올 것이다.
강별학도 역시 편지를 보았으니 안 올 수가 없을 것이고. 진검 등
그들은 팔십만 냥의 은을 휴대하고 있을 테고 강별학 쪽의 사람들
은 표은을 찾고자 할 테니 그들이 이곳에서 만나면 반드시 흥미진
진한 장면들이 벌어질 것이다! 서로 조급하게 굴 것이니 한마디만
잘못하면 싸우게 되겠지. 설사 그들이 서로 끝까지 싸움을 하지
않는다해도 삼소저가 모용구매를 강별학의 방에 데려다 놓는다면,
모용집안의 인물들이 백개심의 밀고를 듣고 그녀를 찾아낼 테니,
그때 가서는 절대 강별학을 가만 놓아 두지 않을 것이다.)
소어아의 이 계책은 실로 일거양득일 뿐만 아니라 일거다득의
묘안이 숨겨져 있었다.
첫째, 강별학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쓰라림을 맛볼 수 있게 하
는 것이 가장 큰 이득이었다.
둘째, 소선녀 고인옥 등 어젯밤 그를 골탕먹인 사람들에게 대가
를 치뤄줄 수가 있었다.
셋째, 결국 모용구매를 자기 집안의 사람에게 돌려 주게 되면
설사 정신이 회복되지 않는다 해도 떠돌아 다니며 놀림을 당하지
는 않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소어아로서도 걱정거리 한 가
지를 덜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네째, 강별학이 이번 계책에 넘어간다면 설사 목숨을 건진다해
도 거동을 얼마쯤은 삼가할 것이고, 또한 백개심 등 사람들도 함
부로 일을 저지르지는 못하게 될 것이었다.
다섯째, 단씨네의 표은을 되찾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것은 친절
을 베풀어 주는 단씨 부녀에 대한 보답이 되는 셈이었다.
여섯째, 애재여명이란 칭호를 받고 있던 노영웅 철무쌍도 이 계
책으로 인하여 억울함을 씻을 수 있었다. 이것이 그 불쌍한 노인
을 편안히 잠들게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방법이었다.
소어아는 생각을 거듭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의 계책이
추호의 빈틈도 없다고 느껴졌고, 강별학이 제아무리 영악하다 해
도 아마 이토록 교묘한 계책을 세우지는 못 할 것이라고 느껴졌
다.
강별학, 진검, 남궁유, 백개심, 나구, 나삼 등 이 계책과 관련
있는 사람들은 모두 상대하기 힘든 영악한 존재들이었지만, 그에
게 이용을 당하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이 세상에 자기의
계책을 미리 알 수 있는 자는 절대로 없을 것이라 자부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 띤 얼굴로 뇌까리기까지 했다.
"누가 감히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총명한 사람이 아니라 말할
수 있나! 누가 감히 내가 천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느냔 말이
다."
"이봐, 나를 따라 오라니까!"
삼소저는 다시금 그녀를 재촉했다. 그러나 모용구매는 전혀 그
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그저 소어아가 가버린 방향을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다.
삼소저는 일부러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몸집은 모용
구매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모용구매의 시선을 막을 수가 있었다.
"당...... 당신은 왜 나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죠?"
"그는 떠나간 지 이미 오래되었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보는 것
이냐?"
모용구매는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더니
갑자기 웃음을 띠웠다.
"옳은 말이에요. 그는 이미 갔지요. 하지만 그는 언젠가 반드시
나를 찾아올 거예요."
"그는 너를 속이고 있는 거야. 너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으로 너
희들의 사이는 이미 끝난 것이란다."
"그가 절대로 나를 속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
요."
그녀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달빛이 그녀의 미
소를 띠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맑고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미래의 행복이 가득차 있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실로 더없이 아름다웠다. 삼소저도 여자였
지만 그녀의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멍해졌고 한참이 지난 후
에야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너...... 네가 어떻게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나?"
"그분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은 오직 내 마음깊이 파묻혀있
는 악마를 내쫓기 위해서입니다. 그 악마가 내몸에서 떠난다면 그
는 다시금 나를 찾아올 것입니다."
"너의 마음 속에 악마가 파묻혀 있다고?"
모용구매는 애절한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 악마가 내 마음 속에 파묻혀 있기에 나는 과거의 일들
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삼소저는 그녀의 아름답고도 순정어린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는 과거를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이냐? 만약 네가
제 정신이었다면 그분이 너를 이곳에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냐?"
"그도 나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요."
"너의 정신만 회복되면 그는...... 즉시 너를 찾아온단 말이
지?"
삼소저의 음성은 질투로 인하여 떨리고 있었다.
모용구매는 여전히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틀림없이 저를 찾으러 올 것입니다."
"그는...... 그는 또다른 말은 하지 않았느냐?"
모용구매의 안개가 가득찬 눈에서 갑자기 빛이 쏟아져 나왔다.
"또 있어요. 그는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영리하고 아름다운 소
녀라고도 했어요. 그리고 내가 그의 말을 잘 듣는다면 영원히 내
곁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했지요. 나는 당연히 그의 말을 잘 듣겠
어요."
삼소저는 그녀의 이러한 말에 갑자기 울부짖는 음성으로 부정하
듯 말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모용구매는 그녀의 외침소리에 놀라 겁난 눈동자로 그녀를 살폈
다.
"왜요?"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야. 너는 조금도 영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금도 예쁘지 못하고 단지 일개의 추한 미친 여자밖에 지
나지 않다. 그 분이 절대로 너를 좋아할 리가 없어!"
모용구매는 멍하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끝내는 눈물로 두
뺨을 적셨다.
"나를 속이려는 것이지...... 나를 속인 것 뿐이지......."
삼소저의 선량한 눈에는 놀랍게도 흉악한 빛이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큰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생각해 보아라. 그와 같은 분이 어찌 너 같은 미친 계집을 좋
아할 리가 있겠느냐? 이것은 결코 꾸며대는 말이 아니란다!"
모용구매는 더 이상 참다 못하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나는 미친 사람이 아니야. 나는 결코 미친 사람이 아니란 말이
야......."
"네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럼 너는 누구이며, 어디에 살고 있었
느냐?"
"나는...... 나는......."
아무리 애써 생각해봐도 모용구매는 머리만 쪼개질 듯 아파왔고
생각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있는 기력을 다하여 자신의 머리를 쥐
어뜯던 그녀는 드디어 통곡하면서 말을 이었다.
"제발, 제발 부탁이니 나에게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나는 모
르겠습니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그러나 애걸하며 괴로워하는 모용구매에게 삼소저는 냉소를 터
뜨렸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미친 사람이란 말이냐?"
이 말에 모용구매는 크게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미쳤다. 나는 미쳤단 말이다...... 그분이 나를 좋아할
리가 없다. 좋아할 리가 없단 말이야......."
이렇게 외친 그녀는 통곡을 하며 마구 달려가기 시작했다.
삼소저는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본 후에야 비로소
숨을 돌리며 허탈한 듯 내뱉았다.
"가라! 멀리 멀리 가라! 그 분이 영원히 너를 찾을 수 없게 말
이다......."
그녀의 입가에서는 한가닥의 잔혹한 승리의 미소가 넘쳐 흘렀
다.
평상시에는 그토록 선량했던 여인이 한 남자를 사랑하고 독차지
하기 위해 이같이 잔혹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매
우 정상적인 일이었고 절대로 그녀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탓할 수
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토록 영리한 소어아도 역시 이런 변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 세상에 질투하지 않는 여자는 없다는 것을 잊었던 것이
다.
그는 여자의 마음이 갈대와 같다는 말을 잊었던 것이었고, 여자
의 약속은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이 지켜진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
다.
한 남자로서 만약 불행하게도 그 점을 잊는다면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했다. 운이 매우 좋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소어아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
었다. 그곳은 교외였기 때문에 야경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멀리서 은은히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
어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 쪽에서 먼저 왔을까? 양쪽 모두가 조급하겠지만 강별학은
비교적 침착하게 처신할 테니 아마도 진검 쪽이 먼저 온 모양이
다.)
당나귀의 울음소리와 마차 수레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과연 내 생각대로 진검 그들이구나. 하지만 그들이 당나귀가
끄는 수레로 은을 운반할 줄이야.......)
그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진검과 남궁유 같은 집안의 공자는 설사 수레로 은을 운반한다
해도 말로 수레를 끌 것이지 절대로 당나귀로 끌지는 않을 것이라
는 생각에서였다. 소어아는 비록 허황된 장난꾸러기였지만 일을
처리할 때는 매우 치밀했기 때문에 약간의 이상한 것도 그냥 지나
치지를 않았다. 그가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에서 벗어난 것도 결
코 남보다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오직 조심하는 사람만이 오래
살 수 있다는 이치를 어릴 때부터 익히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마차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진검과 남궁유 쪽도 아니었고, 강별학은 더욱 아
니었다. 엉뚱하게도 그들은 상복차림의 산발을 한 육칠 명의 촌여
자들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지 이 무슨 엉뚱한 일이란 말인가? 이
토록 깊은 밤에 이 촌여자들은 잠도 자지 않고 무엇 때문에 이곳
에 왔단 말인가?)
그 촌여자들은 사당에 들어서자 일제히 땅바닥에 꿇어앉아 방성
대곡을 했고, 왼쪽에 있던 부인은 큰절을 하며 곡을 하는 것이 아
닌가!
"영감! 불쌍한 내 영감! 당신의 영혼이 계신다면 말 좀 해 보십
시오. 나는 당신 집안의 핏줄을 이어 주려고 십여 년 동안을 과부
로 늙으며 고생끝에 아들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가 남의 해침을
받을 줄이야...... 나보고 앞으로 무엇을 믿고 살아가라는 것입니
까?"
이 부인의 연령은 사십 세 안팎이었고 비록 상복 차림을 하고는
있었지만 깔끔한 용모였다. 부인의 뒤에는 한 젊은 아낙이 그 부
인의 등을 쓰다듬으며 울먹였다.
"작은 어머님! 제발 고정하셔요. 몸을 생각해서라도 너무 상심
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날엔 가산을 모두
뺐기고 말 것입니다. 작은 어머님이 뭐하러 남에게 좋은 일을 해
줍니까?"
이때 오른쪽에 꿇어앉아 있던 부인이 지지 않으려는 듯 즉시 울
음을 터뜨렸다.
"영감! 당신의 영혼이 계시다면 저 천한 년의 입을 찢어 주십시
오. 비록 내가 난 자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집안을 이어받을
핏줄인데 어찌 내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겠습니까? 저 천한
것이 오직 우리의 가산이 탐이 나 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것입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그 부인은 나이가 조금 위인 것 같았고 얼굴이 못 생긴 편이었
으며 또 보기 민망할 정도로 야위었다.
그녀가 이렇게 울고 불고하자 그의 옆에서도 역시 한 젊은 부인
이 그녀를 따라 울었다.
"큰 어머님, 제발 몸을 생각해서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도 눈이 있으니 절대로 저 악독한 작은 어머님에게 가산을
빼앗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어아는 이 몇 마디를 듣자 사태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
다.
원래 이 두 부인은 한 남편을 섬긴 부인과 첩이었다. 그녀들의
남편은 일찍이 세상을 하직했고 아들을 하나 남겼는데 그는 첩의
자식이었다.
아들이 죽기 전에 첩은 아들의 귀중함을 믿고 자주 본부인을 괴
롭혀 왔다. 그러나 그 아들이 갑자기 죽고 말자 본부인은 오랫동
안 당한 울분을 참지 못해 첩을 내쫓으려 했고 첩은 본부인이 자
기 아들을 죽였다고 우기며 도리어 본부인을 내쫓으려 했다. 그들
은 집안 싸움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이토록 깊은 밤에 조상의 사
당을 찾아온 것이었다.
소어아는 이렇게 일이 전개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당황해서 귓 속이 윙윙거렸고 그저 그녀들을 쫓아내고자 하는 마
음만이 간절했다.
비록 낡아 빠진 사당이었지만 역시 그 부인들의 소유였으니 그
가 어떻게 그녀들을 쫓아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만약 그가 나
서 있을 때 강별학 등 사람들이 갑자기 들이닥친다면 그의 계책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될 위험이 있었다.
그가 마음 속으로 푸념을 하며 부인네들을 원망하고 있을 때,
얼굴을 가린 대여섯 명의 흑의인영이 소리없이 사당 입구에 나란
히 나타났다.
(음! 드디어 나타나셨군. 강별학 네 놈도 역시 별 수 없는 놈이
로구나!)
그러나 이 일을 전혀 모르고 있는 부인들은 아직도 울며 불며
서로 욕을 하고 있었다. 그 흑의인들이 그녀들 뒤에 다가와 섰지
만 전혀 입을 열지는 않았다.
처음에 그 본부인과 첩은 저승에 있는 남편을 이용하여 빗대어
상대를 욕했었는데, 지금은 열이 오른 듯 서로 직접 욕들을 퍼부
었다. 본부인이 첩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우같은 년! 네 년만 없었으면 내 남편이 벌써 돌아가셨을 리
가 만무하다. 네 자식이 죽은 것이야 말로 천벌인데, 네 년이 감
히 그 죄를 내게 뒤집어 씌우려 하다니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첩도 가만히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 추악하기 짝이 없는 년아! 물을 떠다 얼굴을 비춰 본 뒤에
나 남을 질투할 일이지...... 너야 말로 내 남편을 죽인 진범이
야!"
본부인의 음성 속엔 노기가 등등했다.
"누가 네 남편이야? 그 분은 분명히 내 남편인데 네가 무슨 자
격으로 그 분을 남편이라 부르느냐? 이 망할 년아!"
"흥! 너야말로 진짜 집안을 망칠 년이다. 자식 하나도 못 낳은
주제에 무슨 큰소리냐? 내가 아니었던들 남편 묘소에 향불을 피울
사람조차도 없을 뻔하지 않았느냐!"
첩의 치욕적인 욕설을 듣자 흥분한 본부인은 치를 떨며 첩의 뺨
을 후려쳤다.
따귀를 얻어맞은 첩은 상기된 얼굴로 외치다시피 말했다.
"좋다. 이제 감히 손까지 올라오다니 너 죽고 나 죽자!"
그녀는 덤벼들어 본부인의 머리채를 잡아 당겼다. 양쪽으로 갈
라 서있던 젊은 부인들은 이 광경을 보자 급히 싸움을 막으려 했
다.
하지만 결국은 서로 치고 받게 되었고 심지어 당사자들보다 더
욱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정말 가관이었다. 여러 명의 아낙네들은 머리카락이나 옷자락을
휘어잡으며 뒹굴기 시작했다. 싸움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그 아낙
네들은 흑의인들이 서 있는 곳까지 밀려갔다.
이때 갑자기 쉭! 쉭! 쉭! 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싸움을 하고 있
던 아낙네들의 몸에서 수십 개의 암기가 솟구쳐 나왔다.
그 암기들은 실로 악독하고 빨랐다.
흑의인들은 이미 완전히 암기에 덮여 있었고, 전혀 피할 가망이
없어 보였다.
사실 소어아는 벌써부터 뭔가 수상한 점을 발견했었다.
그것은 그 아낙네들이 비록 산발을 했고 얼굴의 피부도 곱지 않
았지만, 열 손가락이 매우 희고 곱다는 점이었다.
(모용집안의 아가씨들은 과연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구나! 강별
학! 네가 오늘 제대로 걸렸구나!)
그러나 흑의인들은 그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들은 일제히 허공에 몸을 솟구쳤다가는 검을 뽑아 들고 곤두
박질하며 그 아낙네들을 향하여 공격을 뿜어냈다.
그렇다고 그 아낙네들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제각
기 신형을 날려 흑의인의 공격을 피했다. 그녀들의 손에도 어느새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이때 흑의인 중의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갑자기 냉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감히 내 앞에서 조잡한 간계를 부리다니...... 그 따위 재주로
나를 속이는 것은 어림도 없다. 흥! 이 사당은 이미 멸족을 당한
집안의 것이다.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
면 살아서 이곳을 나갈 생각은 하지 말아라!"
소어아는 이 광경을 보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강별학은 과연 여우 같이 교활한 놈이구나! 무슨 일을 하든지
사전에 치밀한 조사를 하고 계획을 세우니 말이다.)
이때 그 본부인이 냉소를 지으며 흑의인에게 물었다.
"시침을 떼지 말아라! 우리가 뭣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네가 모
른단 말이냐?"
그녀의 이런 질문은 사실 대답하기가 그리 어려운 아니었다. 하
지만 그 흑의인은 극히 치밀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
히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더욱이 이 일은 막대한 표은과 강옥
랑의 생사와도 관련이 있는 까닭에 그는 섣불리 응답하기가 곤란
했다.
상대방이 왜 왔는지를 알고 있다고 응답하면 자신이 그 표은을
강탈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만약 상대방이 그를 떠보는
것에 지나지 않다면 결국 계책에 말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본부인과 첩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첩이란 여인이 먼
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그 편지 때문에 온 것이 아니오?"
흑의인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냉소를 터뜨렸다.
"만약 그 편지가 아니었다면 내가 뭣 때문에 깊은 밤에 이곳까
지 왔소?"
여전히 첩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은이 꼭 필요하겠군요!"
"비단 은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사람도 필요하오!"
본부인은 얼굴 색이 크게 변하며 대노했다.
"은을 가진 후에도 사람을 필요로 한단 말이오?"
"한 가지도 놓칠 수 없소!"
그 첩으로 변장한 여인도 대노한 음성으로 맞섰다.
"당신은 무엇을 믿고 그렇게 건방진 것이오!"
흑의인은 그녀의 말에 싸늘하게 응답했다.
"손에 쥐고 있는 검을 믿고 하는 말이오."
이렇게 되자 쌍방은 모두 자기들이 찾고 있는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오해가 더욱 더 깊어 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흑의인은 표은과 강옥랑을 모두 중요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
히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고 되찾겠다고 했고, 그 아낙네들은 그
가 은을 가진 후에도 모용구매를 되돌려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
쌍방은 점점 화가 치밀었다. 한편 소어아는 자신의 계책에 도취
되어 흐뭇함을 금치 못했고 그들이 빨리 싸움을 시작하기를 고대
하고 있었다.
이때 첩으로 변장한 여인과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이 다시금
눈짓을 교환했다.
"당신은 결코 은과 사람 중 단 한 가지도 가질 생각을 마시오.
그 원인은 우리는 전혀 은을 가지고 오지 않았고, 사람은......
당신이 만약 사람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당신의 생명을 앗아가겠
어!"
흑의인은 독한 눈빛으로 아낙네들을 쏘아 보았다.
"벌써 말했지만 은과 사람 중 단 한 가지도 빠져서는 안 된다.
자, 우선 은을 가지고 오너라!"
그는 뒤에 있는 부하들에게 살며시 손짓을 했다.
앞에 있던 두 명이 갑자기 일격을 뿜어냈다. 칼빛이 번쩍거리자
마차를 끌던 당나귀가 그들이 뿜어낸 일격을 맞고 땅바닥에 쓰러
졌다.
동시에 뒤에 있던 두 흑의인이 재빨리 수레에 놓여있는 관들 중
하나를 끌어 당겨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화라락'하는 소리와 함
께 관에서 많은 은이 쏟아져 나왔다. 비록 밤이었지만 그 많은 은
은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우두머리인 그 흑의인도 엄청나게 많은 은을 보자 기쁜 듯 껄껄
웃어댔다.
"벌써 말했지만 나를 속이기엔 너희들이 아직 어리다."
은을 본 그는 살기가 더욱 짙어져 갔다. 그 은이 바로 표은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흑의인은 다시 살며시 손짓을 했다. 흑의 대한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들며 공격을 퍼부으려 했다. 바로 이때 돌연 또다시 '쉭! 쉭!
쉭!'하고 바람을 가르는 예리한 소리가 연거푸 들려오며 은을 담
은 관 속에서 수심 가닥의 거무스름한 빛이 흑의인들을 향하여 솟
구쳐 나왔다.
관 속에 은이 담겨져 있으리라는 것도 예측하기가 힘든 일이었
는데, 그 속에 다른 장치가 있을 줄이야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하였
다.
흑의 대한들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우두머리인 흑의인은 보다 먼 곳에 서 있었고 임기응변 또한 매
우 신속했기에, 검빛을 휘날리며 암기들을 모두 막아냈다. 그는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부하가 모두 죽음을 당한 것
을 보자 눈빛 속에 놀라움과 살기가 가득찼다. 그는 대갈일성했
다.
"이 악독한 것들이 감히......."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당신 같이 악독한 자를 상대할 때는 당연히 이런 악독한 방법
을 써야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당신을 이길 수 있단 말이
냐!"
그녀는 다른 아낙네들과 합세하여 흑의인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좁혔다. 그와 때를 같이해서 흑의인의 뒤에서 '꽝'하는 소리와 함
께 하나의 관이 산산조각이 나더니 그 속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
다. 그녀는 사나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너는 또 무슨 할 말이 있느냐?"
그 흑의인은 홀로 중앙에 포위되었지만, 두려운 기세는 조금도
없었다.
"너희들이 이토록 치밀한 계획을 세웠는지를 미처 몰랐다. 아마
내가 너희들을 너무 무시한 모양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아직 기뻐
하기는 이르다."
그 관에서 나타난 사람은 몸매가 곱고 얼굴이 면사로 가리워진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그녀의 얼굴엔 비록 면사가 가리워져 있었
지만 소어아는 첫눈에 그녀가 바로 소선녀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성질이 매우 급했기 때문에 일을 그르칠까 봐 관
속에 숨어있게 한 것 같았다.
그녀는 그 동안 막혔던 숨이 탁 트이자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흑의인의 등을 향하여 일검을 뿜어내며 외쳤다.
"잔소리 말고 어서 목숨을 바쳐라!"
그 흑의인은 등에 눈이라도 달린 듯 돌아보지도 않은 채 뒤로
일 검을 뿜어냈다. 그 충격으로 소선녀는 검이 손에서 벗어날 뻔
했다.
소선녀는 손에 불에 덴 듯한 통증을 느꼈고, 그제서야 비로소
흑의인이 자기의 평생 처음 만난 강적임을 알아차리고 놀라고도
화가 치밀어 큰소리로 외쳤다.
"네 놈은 죽음을 앞두고도 감히 반항을 하겠단 말이냐?"
흑의인은 뿜어낸 일검의 기세를 이용하여 재빨리 벽쪽으로 물러
섰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자가 누군지 어디 사방을 바라보아라!"
그의 이러한 말이 떨어지자 아낙네들을 즉시 고개를 돌려 바라
보았다. 이때 사당밖에는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흑의인이 도사리
고 있었다. 그들 손에는 모두 화살이 쥐어져 있었다.
여인들은 모두 아연실색함을 금치 못했다.
흑의인의 냉소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지금 이 사당밖에는 백사십 장의 철태궁(鐵胎弓)이 놓여 있고,
또한 매 한 장의 궁마다 삼백 석의 침이 들어 있다. 내가 셋을 샐
동안 만약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지 않는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 것
인지는 너희들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백사십 장의 철태강궁(鐵胎强弓)이 한꺼번에 발사된다면 설사
무예계의 제일 가는 절정고수라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아낙네들도 당연히 자기쪽에서 설사 한두 사람이 뚫고 나갈
수 있다해도 나머지 사람들은 필히 당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그녀들은 한자리에 모여 소곤대며 의논을 했
다. 소선녀와 그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금방이라도 뚫고 나가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이 그녀들의
손목을 굳게 잡는 바람에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이윽고 옆에서 그녀들이 의논하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흑의인이 유유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이때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잠깐! 은과 사람을 모두 당신에게 주겠소!"
"그럼 우선 사람을......."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당밖에서 돌연 한 차례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며 몇 명의 흑의인이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이 은과 사람을 모두 주겠다는 말을 들
은 소어아는 그들이 계속 협상해 나간다면 필시 자기의 계책을 망
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미리 준비해둔 돌멩이들을 궁수들에게
퍼부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엄밀하게 설치된 궁수들의 포진이 삽시간에 혼란을
일으키며 흩어져 버렸다.
사정이 급변하자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그 틈을 놓칠세라 급히
외쳤다.
"삼매, 칠매, 어서 돌격해 나가자꾸나!"
외침소리와 함께 그녀는 한 자루의 단검으로 흑의인을 향하여
일격을 뿜어냈다.
그녀는 단검으로 한 줄기의 검빛을 휘날리며 삽시간에 강별학을
향해 십여 초의 공격을 퍼부었다. 그녀는 비록 여자의 몸이었지만
뿜어낸 검법은 악독하고도 거센 것이었다.
무예계에서는 여자고수도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여자는 모두
힘이 연약한 까닭에 암기와 경공으로 이름을 떨칠 뿐이지 검과 내
력은 천생의 소질로 인하여 남자보다 비교적 뒤떨어졌다.
또 몇몇 검법으로 이름을 날린 여자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교묘한 변화에 능숙하지 이처럼 거친 힘과 악독한 초식을 동시에
지닌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첩으로 변장한 그 여인은 비단 검법이 악독할 뿐만 아니
라 매초마다 상대와 함께 죽을 결심을 각오하고 있는 듯했다.
곁에 서 있는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은 그저 검을 가슴팍에
비스듬히 빗겨들고 있을 뿐이지 전혀 협공할 기세가 없었다. 여자
와 남자가 격투할 때는 손해보는 쪽이 아무래도 여자였다. 그러므
로 여자들이 설사 협공을 한다해도 무예계에서 그것을 가지고 왈
가왈부 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 첩으로 변장한 여자는 자기
의 신분을 생각하는 듯 협공을 전혀 바라는 눈치가 아니었고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자 역시 눈을 번뜩이고 서 있을 뿐 참견하지
를 않았다. 이 얼마나 패기가 가득찬 여자들인가!
흑의인은 이 광경을 보면 볼수록 이상하게 여겨졌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라움이 커갔다.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젊은 부인들로 변장한 시녀 같은
여인들도 암기를 퍼붓는 수법이 보통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녀
들이 손을 번쩍 들기만 하면 밖에서는 즉시 몇 가닥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소선녀는 벌써부터 밖으로 달려나가 이리저리 몸을 날리고 있었
다. 백여 명의 흑의 대한 중 이미 사오십 명이 땅바닥에 쓰러졌고
나머지 대한들은 자신을 방어하기에도 바빴다.
이 광경을 주시하고 있던 소어아는 기뻐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
았다. 강별학에게 여러 번이나 당한 분노를 오늘에야 비로소 풀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첩으로 변장한 그 여인의 검은 점점 신속해졌고 초식 또한 악독
해졌다. 그녀는 매초마다 흑의인의 급소를 노렸다. 이번에 그녀는
흑의인의 목구멍을 향하여 일검을 퍼부었다. 남이 보기엔 흑의인
이 패배를 앞두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흑의인은 실로 매우 영악한 성격의 소유자라 생각에 잠
겨 있었던 까닭에, 지금까지 자신을 방어할 뿐이었지 정신을 쏟아
격투하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그는 생각을 끝내자 갑자기 우렁찬 음성으로 껄껄 웃으며 평범
한 일검을 뿜어냈다.
그러나 그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상대방이 뿜어낸 가벼운 일검
이 천여 근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이 느꼈다. 그녀는 검이 당
도하기도 전에 이미 웅혼한 힘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초식을 변경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맞부딪
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검법은 비록 악독하고 강인했지만 내력은 여전히 그 흑
의인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은 다
급한 목소리로 급히 말했다.
"그와 힘의 대결을 하지 말아요!"
그녀는 협공 따위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사태가 너무나 긴박
했기에 하는 수없이 장검을 휘날리며 치열한 격전 속으로 달려 들
어갔다.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불꽃이 사방으로 튕겼다.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과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동시에 흑의인
과 일격을 맞부딪쳤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쥐고 있던 장검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이 혈전을 주시해 온 소어아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 계집들이 자기들의 특기를 쓰지 않고 도리어 남과 힘의 대
결을 하니 정말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구나!)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과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흑의인의 힘에
밀려 약 이 장이나 물러서 거의 벽에 부딪칠 뻔했다. 하지만 이러
한 실수를 범한 그녀들은 여전히 당황하지 않고 손에 한 줌의 암
기를 쥐어 들었다.
모용가문 아가씨들의 경신술과 암기는 무예계에서 벌써부터 알
려진 것이었고, 흑의인이 만약 승리하고 싶은 생각에서 계속 공격
을 퍼부어 온다면 아마 성한 몸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흑의인은 자신의 일격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보자 즉시 공격을
멈추더니 우렁찬 음성으로 말을 걸어왔다.
"오늘 밤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이대로 떠나겠소."
그는 서서히 뒤로 후퇴해 갔다.
그가 취한 이 행동은 심지어 소어아에게도 의외의 일이었다. 본
부인으로 변장한 여인과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더욱 이상하게 여
겼다. 흑의인은 분명 이기고 있는데 어째서 오히려 간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첩으로 변장한 여인이 큰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애를 쓰며 우리를 괴롭혔는데 왜 갑자기 간다는 것이
오?"
"지금까지는 소저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그랬오. 만약 떠난다면
후일에 어디가서 소저들을 찾는단 말이오."
첩으로 변장한 여인이 다그쳐 물었다.
"지금은?"
"모용가문의 소저들은 무예계에 이름을 떨쳐왔을 뿐만 아니라
가산(家産)도 있으니 비록 오늘은 내가 원하는 물건을 얻어 갈 수
가 없을 망정 훗날 소저들의 댁을 찾아가서 얻으면 되지 않겠소?"
첩으로 변장한 여인의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흥! 당신은 이미 우리의 신분을 알았단 말이오?"
"모용가문에 둘째 소저의 검법은 악독하고도 강인함이 천하에
알려진 사실이오. 만약 내가 그래도 소저들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
한다면 눈뜬 장님이오!"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그의 말을 듣자 갑자기 머리 위에서 한
주먹의 머리카락을 뽑아들며 얼굴을 가린 가면을 벗어 던졌다. 한
장의 백설 같이 희고 고운 얼굴이 가면 뒤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살기가 등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신은 우리의 신분을 알았지만 우리는 당신의 신분을 아직도
모르고 있으니 훗날에 다시 당신을 찾을 길이 없지 않소? 그러니
우리는 당신을 보내 줄 수가 없소?"
이때 갑자기 한가닥의 음성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는 이제 갈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소선녀의 음성이었다. 그녀는 지금 사당의 문을 가로막
고 있었다.
뒤를 돌아 본 흑의인이 그녀를 보자 갑자기 미친 듯이 껄껄 웃
었다.
"만약 내가 여길 빠져 나갈 자신이 없었으면 방금 그런 말도 하
지 않았을 것이오."
모용쌍은 큰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달아나나 두고 봅시다!"
이 모용가문의 둘째 소저는 과연 다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조
금 전에 분명히 패배를 당하고도 조금도 흑의인을 두려워 하지 않
고 다시 검을 휘날리며 다가갔다.
그때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
이 그녀의 앞을 가로 막았다.
모용쌍은 자기를 막은 사람이 동생인 것을 보자 대노한 음성으
로 외쳤다.
"삼매, 너는 저 자를 놓아 줄 속셈이냐? 너는 구매를 찾고 싶지
않단 말이냐?"
모용가문의 삼소저는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 자는 이미 독 안의 쥐와 같은데 서둘 필요가 없지 않아요?"
모용산은 매우 총명한 여인이었기에 모용가문에서 재질이 가장
뛰어나다고 소문이 나있었다. 그래서 모용쌍은 성질이 비록 급했
지만 평상시엔 모용산의 말을 매우 잘 귀기울여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못마땅한 듯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무엇을 기다리란 말이냐?"
"제가 보기엔 이 일에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에요."
"곡절은 무슨 곡절이냐?"
"이 자는 우리를 이곳까지 불러 냈으니 당연히 우리가 누구란
것을 알아야 할 텐데, 어째서 지금에야 비로소 우리의 신분을 알
았느냐 하는 말입니다. 이 점이 이상하지 않아요?"
모용쌍은 멈칫하더니 여전히 발을 굴렀다.
"그것이 뭐가 수상하단 말이냐? 그가 연극이라도 하는 것이 아
니라고 누가 보증하겠나?"
소선녀도 끼어들었다.
"옳은 말이요. 우선 이 놈을 잡아 놓고 봅시다."
흑의인이 이때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아가씨들께서 잠시 고정하시고 불초의 말을 조금 들어 주십시
오. 소저들과 나는 아마도 남의 간계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와르르'하는 소리가 들
려오며, 천장을 바친 기둥 위에서 향로 하나가 흰 포목을 펼치며
떨어졌다.
그 흰 포목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강별학! 너는 많은 악독한 일을 저질렀기에 이젠 변명할 여지
가 없다."
주먹만한 붓글씨로 쓰여 있는 그 글자는 비록 밤이었지만 확실
하게 볼 수가 있었다.
이것들을 본 모용집안의 소저들과 소선녀는 모두 깜짝 놀랐다.
모용쌍은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을 발했다.
"당...... 당신이 강별학이오?"
흑의인의 눈에 놀라움과 당황함이 나타났다. 그는 역시 자기가
남의 계교에 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상대가 누구인줄도 모르
게 말이다.
(이 계략을 세운 놈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당하게 할 수
있을 정도니 참으로 무서운 지혜를 가진 놈이로구나! 이토록 무서
운 자가 암암리에 나를 노리고 있으니 설사 오늘은 내가 이곳을
빠져 나간다 해도 앞으로 편히 살 생각을 말아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그는 등뼈가 오싹해옴을 느꼈다.
그는 매우 영악한 사람이라 남이 한 가지 일을 생각해 낼 때 그
는 열 가지 일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 점이 도
리어 그에게 화를 안겨 주었다. 그것은 그가 생각에 잠겨 있기 때
문에 대답을 종종 잊기 때문이다.
모용쌍은 그가 응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냉소를 터뜨렸다.
"당당한 강남 대협께서 그런 일을 저지를 줄이야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흑의인이 응답을 하기도 전에 또다시 한 차례 '와르르' 하는 소
리가 들려 오며 향로 하나가 또다시 천정에 위치한 기둥에서 떨어
져 내려왔다. 그 향로도 흰 포목에 매달려 있었다.
거기에도 주먹 만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강별학! 네가 숨긴 사람을 이미 찾아냈으니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그 흰 포목은 물론 소어아가 미리 장치했던 것이었다.
그는 모용산의 말이 점점 이상해져가는 것을 듣자 그대로 나가
다간 자기의 걸작이 망쳐질까봐 재빨리 그 장치를 가동시켰던 것
이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시간을 연장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는 진검 등 사람들이 강별학의 방에서 모용구매를 찾아내 이
곳까지 데려 오기만 하면 강별학은 설사 백 개의 입이 달렸다고
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라 아울러 생각했다.
그의 계략은 정히 만무일실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꿈에도 그 일이 뒤틀리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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