绝代双骄 09

3학년2반 | 2022.02.13 07:16:34 댓글: 0 조회: 403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8498
강별학의 봉변(逢變)
화무결은 그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소어아에게 자기 얼굴의 변화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한참 후에야 담담히 입을 열었다.
"철 아가씨는?"
"철 아가씨가 누구요?"
화무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그녀를 이해 못 해........"
소어아는 싸늘하게 그의 말을 막았다.
"나는 그녀를 모르니 이해할 필요조차 없소."
화무결은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나를 구했소?"
"당신도 나를 구한 적이 있기 때문이오."
"그것은 내가 직접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였소!"
소어아는 눈에서 빛을 내며 말했다.
"흥! 당신이 내 손에 죽게 될 것이오. 삼개월 후면 판가름이 날
테니 그때까지 몸을 잘 보존하시오."
화무결이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꼭 만납시다."
이때 소어아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
다.
"우리 둘이 석 달 후에 꼭 만나려면 서로 무사해야 되지 않겠
소?"
"그렇소."
"그러니 이 석 달 동안 우리는 서로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이오."
소어아는 크게 소리를 내어 웃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우리 석 달 동안만은 서로 친구가 되는 것이 어떻소?"
화무결은 그를 주시하면서 오랫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
만 입가에 웃음을 띠워 자기의 뜻을 나타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화림을 걸어나왔다. 검기에 날려 떨어진 꽃잎
이 어지러히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화무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어아의 탄식소리도 동시에
들렸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다가 결국 웃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게 되자 마음이 지극
히 유쾌하고 편안했으며 서로가 통하는 점이 있다고 느끼게 되었
다.
화무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사람과 석 달 동안 친구가 되는 것도 한평생의 일대 낙이
지.)
이때 소어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과 석 달 동안 친구가 될 수 있는 것도 한평생의 일대 낙
이오."
화무결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파안대소하며 웃어버렸다.
그는 일생 동안 이렇게 통쾌하게 웃어본 적이 없었다.
화림 밖에는 여전히 강별학이 타고온 마차가 그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소어아는 마차 문을 열고 시체를 가리켰다.
"이 사람을 누가 죽였는지 아오?"
화무결은 눈을 크게 떴다.
"누구요?"
"말을 해도 믿지 않을 테니 그만 두겠소. 그러나 자연히 알게
될 것이오."
어느덧 밤이 오고 강별학이 손님을 초대한 술집은 손님들로 북
적거렸다.
강별학은 파란 옷을 입고 손님들 틈에 끼어 있었다. 얼굴에는
비록 웃음을 띠우고 있었지만 눈에는 수심기가 가득했다.
합비에서 온 무사 금도무적(金刀無敵) 팽천수는 좌석에 앉아서
수염을 매만지고 있었다.
"강 대협은 화 공자를 생각하고 계신 것이 아니오?"
강별학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아직까지 오지를 않으니 후배가 약간 걱정이 되는군요."
팽천수는 크게 웃었다."화 공자는 이화궁의 유일한 전인인데 강
호에서 그 누가 그를 가볍게 제압하겠소. 강 대협은 쓸데없는 것
을 걱정하고 있소."
강별학이 쓴웃음을 보이면서 말했다.
"아까 단귀가 소식을 전했을 때 아무래도 따라 나섰어야 했던
모양이오. 그러나 손님을 만나고 있었던데다 오늘 이 회연을 준비
하느라......."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이렇게 안절부절 못 하는 것이 강호의 친구들에게 알려지면 난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팽천수도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강 대협의 친구에 대한 의리에는 정말 놀랐소. 강 대협 같은
친구가 있는 것은 정말 영광이라고 할 수 있소........"
이때 한 사람이 크게 웃으면서 팽천수의 말을 받았다.
"그렇소. 누구든 강 대협 같은 친구가 있는 것은 큰 복이오."
이때 몸이 날씬하고 얼굴에 긴 칼자국이 나 있는, 그렇지만 사
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묘한 매력을 발하고 있는 한 소년이 큰걸
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매우 힘차게 보였으며 눈에서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 같은 정기가 뻗쳐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도 이 소년이 누구인지 몰랐으나 그 당당한 기세
를 보고 필시 명문파의 제자일 것이라고 추측을 했다.
강별학은 그 소년을 보자 돌연 안색이 크게 변했다.
"네가...... 네가 어떻게 여기에 왔느냐?"
소어아는 가볍게 웃었다.
"왜? 난 오면 안 되는 곳이오?"
소어아가 말을 하는 사이 화무결이 미소를 띠우면서 걸어 들어
오더니 소어아의 곁에 섰다.
강별학은 소어아가 나타난 데다가 화무결이 살아서 나타나자 크
게 놀랐다.
사람들은 화무결이 들어오자 모두 일어서서 인사를 할 뿐 그 누
구도 강별학이 넋을 잃고 있는 것을 유의하지는 않았다.
강별학은 화무결이 무슨 수로 연남천의 신검을 피했는지도 알
길이 없었고, 또 소어아와 화무결이 어떻게 어울리게 되었는지는
더욱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한동안 넋을 잃고 서있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 화무결을 향
해 입을 열려고 했다.
이때 소어아는 강별학을 향해 무언가 암시를 주는 미소를 지으
며 사람들이 앉아있는 자리로 향하자 강별학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장내에는 사람들이 서로 사양을 했기 때문에 수석의 자리
가 몇개 비어 있었다. 소어아는 큰걸음으로 걸어가 모르는 척하며
그 자리에 앉았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눈 한 번 깜짝 하
지 않았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대뜸 술잔을 들더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강 대협은 손님을 대접하는데 술도 없소?"
강별학이 두어 번 기침 소리를 낸 후 소리쳤다.
"술을 올려라!"
"강 대협의 위명으로 보아선 나 같은 손님을 반길 것 같지가 않
군, 그러나 난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오. 화무결이 나를
청했기 때문이오."
강별학은 안색이 변하는 것을 억지로 감추면서 입을 열었다.
"화형(花兄)의 손님은 바로 나의 손님이오."
"그렇다면 화무결의 친구는 당신의 친구가 되겠군?"
강별학은 머뭇거리다가 시인을 하고 말았다.
"그렇소."
그 말을 들은 소어아는 안색이 무거워지면서 싸늘하게 내뱉았
다.
"그러나 화무결의 친구가 반드시 나의 친구는 아니오."
사실 그가 수석에 앉을 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
했지만 그 누구도 그와 강별학의 관계를 몰랐고 또 대놓고 물어보
기도 곤란해서 그저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강별학과 소어아의 대화를 듣게 되자 비로소
그들이 아무 관계가 없음을 알았다.
금도무적(金刀無敵) 팽천수는 불쾌함을 참지 못 하고 결국 입을
열었다.
"여보시오. 친구의 말은 이해하기가 어렵군."
소어아는 눈동자를 굴리며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내 말 뜻을 모르겠다는 말이오?"
"그렇소!"
"내 말은 내가 만약 화무결의 친구를 내 친구로 삼는다면 앞으
로의 내 일생이 곰팡이 냄새가 물씬 풍기게 될 것이라는 거요. 화
무결은 사람이 좋지만 그가 사귀는 친구는...... 흐흐 흐흐."
팽천수가 다그쳐 물었다.
"그 친구가 어떻다는 말이오?"
"흥! 자기 친구가 죽게 된 것을 보고도 도망이나 가는 그런 비
겁하고 졸렬한 인물이지......."
팽천수는 크게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너는 지금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화무결의 친구라는 바로 그 사람을 가리키고 있소!"
팽천수는 대노했다.
"강 대협은 화 공자의 좋은 친구인데 너는 그를........"
"하하! 난 당신을 말한 것이 아닌데 당신이 왜 그리 흥분하시
오. 하긴 당신은 화무결의 친구가 될 자격도 없지. 강별학을 위하
여 아양이나 떠는 계집 노릇밖에 못 하는 위인이니까."
팽천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듯 탁자를 '쾅' 소리가 나게
두드리며 거칠게 소리쳤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글쎄! 모르겠소."
그는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팽천수는 분함을 참지 못
하면서도 기가 차서 할 말을 잊어버렸다. 옆에 있던 사람이 얼굴
을 붉히며 말참견을 했다.
"너는 금도무적이란 영웅도 모르면서 강호에서 밥을 먹고 돌아
다니느냐?"
"어...... 알고 보니 팽노영웅이시군요."
팽천수는 소어아가 자기의 이름을 듣고는 자세를 고쳐먹을 것이
라 생각하고 비로소 흥분을 가라 앉히려 했다. 그러나 소어아는
싸늘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팽노영웅은 그 금도무적이란 이름을 갈아야겠소."
팽천수가 응수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지?"
"팽노영웅은 이름을 마비무적(馬脾無敵)이라 고쳐야겠소."
순간 장내는 잠잠해졌고 무거운 긴장이 감돌았다. 그러나 강별
학은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마치 듣지도 못 한 척 가만히 외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소어아에게 원수가 많아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돌연 팽천수는 분기탱천한 대갈일성을 지르며 소어아를 향하여
달려들었다.
그것은 소어아가 바라던 바였다. 그는 싸움을 하기 위해 그 자
리에 온 것이다. 그는 펭천수가 달려들자 젓가락을 들어 가볍게
상대했다.
순간 팽천수는 갑자기 몸이 무감각하게 되어 힘을 잃고 쓰러지
고 말았다. '우당탕'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는 연회 음식상 위로
나동그라진 것이다.
소어아는 만면에 웃음을 띠웠다.
"강별학, 과연 네 친구들은 되먹지 못 하게 손님들 상에나 올라
가는구나."
사람들은 팽천수가 봉변을 당하자 분노했다. 몇몇은 소리를 질
렀고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들은 소어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때 화무결은 조용히 강별학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별학은 손
님을 초대한 주인답지 않게 그 모든 상황에 무관한 듯한 태도를
취했다.
소어아는 달려드는 사람들을 연달아 잡아 던져 버렸고 순식간에
술집은 난장판이 되었다. 사람들은 몇 명의 고수들이 별 힘도 써
보지 못 하고 소어아에게 당하는 것을 보자 그 누구도 함부로 덤
벼들지를 못 하고 있었다.
그때서야 강별학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참견했다.
"화형,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소?"
화무결은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나도 모르오."
강별학은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짐작도 못 했었다. 그런데 막
상 화무결의 냉담한 태도를 보고 당황하고 있을 때 소어아가 신형
을 날려 공격해 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강별학, 너는 화무결이 위급함을 알면서도 달아났고 마부가 그
것을 폭로할까봐서 죽이기까지 했다."
말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소어아는 이미 십여장을 가했다.
강별학은 가볍게 피할 뿐 반격을 하지는 않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군."
"그래? 넌 이번에도 나에게 증거가 있을 줄로 아는 모양이지?"
"무슨 증거?"
"그 마부는 네 칼을 맞고도 죽지 않았다."
순간 강별학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소어아는 뒤로 몇 발짝 물
러서며 손으로 문을 가리키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자, 봐라, 그가 여기에 왔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소어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강별학은 고개를 흔들며 급히 소리쳤을 뿐이
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는........"
강별학은 돌연 말을 멈추더니 안색이 창백해졌다.
소어아는 크게 웃으며 외쳤다.
"강별학, 넌 나를 속일 수가 없어. 다 고개를 돌리는데 너만 그
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가 꼭 죽었다고 자신하기 때문이야."
소어아가 지금껏 소란을 피운 것은 강별학을 당황하게 해서 그
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산에서였다.
강별학은 사방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과연 의심이 가득찬 눈
초리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급히 화무결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화형, 그의 말을 믿으시오?"
"이 일은 그만 둡시다......."
화무결은 그저 가볍게 대답했다.
이때 소어아가 쓴웃음을 보이면서 끼어들었다.
"그 일을 믿든 안 믿든 좋소. 하지만 그와 내가 싸운다면 당신
은 누구를 돕겠소."
화무결 역시 쓴웃음을 보였다.
"당신들 두 사람이 싸우고 싶다면 그 누구도 상관하지 못 할 것
이오."
소어아는 화무결의 말이 끝나자 급히 큰소리로 소리쳤다.
"좋아, 누구든 상관한다면 당신이 처리하시오."
소어아는 강별학을 향해 다시 일장을 가했다.
강별학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게다가 소어아의 몇 장 공격이 의외로 별 위력을 가지지
못한 것을 보자 거세게 반격을 하며 소리쳤다.
"네가 손을 쓰겠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강별학의 공격은 대협이라는 칭호에 어울리게 정말 고강한 위력
을 발휘하고 있었다. 소어아는 가까스로 연달아 퍼부어지는 공격
을 피해냈고 사람들은 모두 강별학에게 갈채를 보냈다.
강별학은 강호의 인물들은 승자의 말에 승복하는 기질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약 자신이 소어아를
이기면 조금 전의 일은 덮어둘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연달아 거센 공격을 퍼부으며 소리쳤다.
"너는 영문모를 누명을 씌워 나를 해치려 하지만 그것은 네가
네 스스로의 묘혈을 파는 격이다."
소어아는 대꾸도 하지 못 하고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채 몸을
이리저리 피했다. 몇 번은 거의 강별학의 일격이 그에게 제대로
적중할 뻔 하기도 했다.
강별학은 소어아의 무공이 시시하다는 것을 느끼자 경계심이 풀
렸고 공세도 느려졌다.
"너는 비록 도리를 모르고 떠들었지만 나이가 어리니 너무 난처
하게 하지는 않겠다. 네가 사과를 한다면 더 이상 이 일을 문제삼
지 않고 너를 보내주겠다."
그의 말은 인자했고 강남 대협의 신분에 적합한 말이었다.
소어아는 거친 숨을 몰아 쉴 뿐 말을 하지 못 했다.
강별학은 체통을 세우려는 듯 더욱 공세를 늦추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히려 보다 못 하여 강별학에게 소리쳤다.
"그런 사람에게는 너무 잘 대해 줄 필요가 없소."
또 한 사람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강 대협께서 교훈을 주지 않으면 결과가 두렵소."
강별학은 하는 수 없다는 듯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너를 정
말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너를 교훈하지 않으면 남이
보기도 좋지 않으니......."
그가 이렇게 말을 하는 사이 소어아는 구석에까지 몰려 벽에 등
을 기대고 섰으며 일장도 반격할 힘이 없어 보였다.
강별학은 미소를 띠우면서 계속 말했다.
"나의 분화불유가 너의 가슴을 향할 테니 조심해라! 피하지도
막지도 않는 것이 좋다. 만약 네가 어떤 행동을 취하면 더 크게
다칠 염려가 있으니까!"
"견식을 넓혀 보겠소!"
소어아는 숨가쁘게 소리쳤다. 강별학은 오른손을 들어 소어아의
가슴을 향했다.
그 공격은 무슨 특별한 오묘함은 없었지만 변화의 속도는 무척
이나 빠르고 놀라웠다. 강별학이 미리 자기의 공격 부위를 알게
해주었으나 사람들은 그의 장법의 변화를 보고서 소어아가 더 이
상 정상적으로는 버티지 못 할 것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다시 탄식을 하며 갈채를 보냈다.
이때 돌연 '펑'하는 소리가 나며 강별학과 소어아의 손이 맞부
딪쳤다.
소어아가 돌연 손을 뻗어 일장을 받아 버린 것이다.
강별학은 큰 충격을 느끼며 더 이상 힘을 쓰지 못 하고 몸을 날
려 뒤로 물러섰다. 정확히 말해서 반격해 오는 힘에 의해 몸이 날
아가 버린 것이다.
강별학의 몸은 구경하던 사람들 위로 떨어졌고 몇몇 사람들이
그와 부딪쳐 쓰러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모두 넋을 잃고 서있는 사이 소어아는 손뼉을 치며 크
게 웃은 뒤 창문으로 가볍게 빠져나갔다.
소어아는 비록 통쾌하게 강별학을 이기지는 못 했지만 망신을
톡톡히 주었기 때문에 속이 후련했다.
사실 그는 아직 강별학을 이길 자신은 없었다. 다만 사람들에게
강별학에 대한 약간의 의심을 가지도록만 하면 그의 의도는 반 정
도는 달성된 셈이다.
강별학의 이름이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는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는 다시 여관으로 돌아와 한 잠을 늘어지게 잔 후 밤이 으슥
해지자 대청으로 나왔다.
그 신비스러운 사람이 있던 방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방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인기척은 느낄 수가 없었다.
소어아는 사방을 살펴본 후 지붕 위로 올라갔다.
소어아는 지붕, 위에서 사태를 지켜볼 작정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자 뜰에서 은밀하게 들려오던 기생의 노래 소
리도 스러지고 주위는 완전한 정적 속으로 잠겨들었다.
한 종업원이 오른손에는 등불을 들고 왼손에는 주전자를 쥔 채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으로 다가가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손님, 뭐 필요하신 것은 없습니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종업원은 다시 몸을 돌리며 혼잣말을 했다.
"이 나으리는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사나 보지. 방
에 꾹 처박혀 대체 무얼하는 건지?"
소어아는 궁금했다. 어떤 사람이길래 이 사람의 행적은 이토록
신비스러울까? 그와 강별학은 무엇을 상의 했을까? 이때 돌연 바
람 소리가 일더니 한 사람이 연기처럼 달려왔다. 그 경공의 뛰어
남은 소어아가 평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는 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소어아는 놀라는 중에도
그를 자세히 보려고 눈에 초점을 모았으나 그는 이미 방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방 안에서는 다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소어아는 이맛살
을 잔뜩 찌푸렸다.
(이 사람의 경공은 나 뿐만 아니라 화무결도 휠씬 능가하는 것
이다. 무림 중에 이런 인물이 있단 말인가! 이런 인물이 강별학과
내통하고 있으니 기필코 무서운 사건이 벌어질 것이다.)
소어아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또 한 사람이 여관 안
으로 들어왔다.
그는 검은 옷을 입고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방 앞에까지 온 그는 가볍게 기침 소리를 내면서 문을
두드렸다.
방 안에서 한 사람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누구냐!"
흑의인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후배입니다."
이 목소리를 듣고서야 소어아는 비로소 강별학이 온 줄을 알았
다.
문이 약간 열리자 강별학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몇 마디를 주고받는 모양이었지만 목소리가 너무 낮
았기 때문에 소어아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강별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배는 오늘 이상한 일을 보았습니다."
"무슨 일이냐?"
"연남천이 죽지 않고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연남천이 다시 나타났으면 어떤가?"
"선배의 무공으로는 당연히 연남천도 눈에 보이지 않겠지
만........"
"흥, 연남천이 죽지 않은 것이 더 좋다. 그가 죽으면 오히려 재
미가 없어지니까."
그는 여전히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였다.
소어아는 들을수록 놀라웠다.
(이 사람이 연남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니 연남천과 한
번이라도 싸워봤다는 얘긴가?)
연남천, 그를 당할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강소어도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은 강소어라는 말을 듣자 연남천보다 더욱 흥미가 있다
는 듯 물었다.
"그를 보았느냐?"
강별학이 쓴웃음을 지었다.
"비단 봤을 뿐만 아니라 그와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의 무공이 화무결에 비해 어떻더냐?"
"화무결 보다는 뒤떨어집니다. 하지만 계책이 많아서 약간만 소
홀히 상대하면 그에게 당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의 무공이 아주 형편 없는 줄 알았는데 그만하면 오히
려 안심이군!"
소어아는 점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이 왜 그토록 자
기에게 흥미를 갖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자기를 알고
있단 말인가?
"강소어는 화무결이 상대할 테니 너는 염려할 것 없다."
강별학의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지금 화무결과 강소어는 친구 사이가 됐습니다."
그 사람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 두 사람은 천생의 원수이고 누구 하나는 꼭 죽어야 돼. 친
구가 된다해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야."
소어아는 크게 놀랐다. 저 사람이 어떻게 화무결과 자기의 일을
이토록 잘 알고 있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선배는 후배에게 무슨 분부가 계십니까?"
"나는 다만...... ?"
말소리가 돌연 작아지더니 그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다만 강별학이 대답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네..... 네...... 네......"
그 사람이 말을 다 마쳤는지 강별학이 웃으면서 말했다.
"모두 명심하여 처리하겠습니다."
"이 몇 가지의 일은 너에게도 이익이 있으니 당연히 그렇게 해
야지!"
"분부만 하시면 저는 필히 그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그러나 후
배는 지금까지 선배님의 성함도 모르는데......."
그 사람은 싸늘하게 웃었다.
"내 신분을 모르면 내가 시킨 일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냐?"
"아닙니다. 하지만.........."
"내 이름을 알 필요는 없다. 천하에 나밖에는 너를 도울 수 있
는 사람이 없으니까. 만약 내가 없다면 너는 '대협'이 될 수 없을
뿐더러 목숨을 부지할 수도 없어."
강별학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젠 가도 좋다. 때가 되면 내가 너를 다시 찾겠다."
"네 !"
"만약 내가 시킨 일에 무슨 실수가 있으면 연남천과 강소어가
손을 쓰기 전에 내가 너를 죽이겠다. 알았나?"
"네, 잘 알겠습니다."
동 선생과 두 형제
소어아는 거기까지 듣고서야 강별학도 그 신비스러운 사람의 내
력을 모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강별학은 고개를 숙인 채 걸어나와 사방을 세심히 살펴보더니
자신을 본 사람이 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모습을 날려 사라
졌다.
소어아는 방 속에 있는 사람의 무공을 알고 극히 조심스럽게 몇
채의 지붕을 기어 지난 뒤에야 안심하고 뜰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부엌으로 가 주전자를 들고 불이 켜져 있는 그 방으로 다가갔다.
소어아는 문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손님 물이 필요치 않습니까?"
그는 그 신비스러운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심어서 위험을 무릅쓰
고 여관 종업원으로 가장한 것이다.
그러나 방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소어아는 다시 한 번 크게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방 안에서는
아무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소어아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벌써 나갔단 말인가?
그는 마음을 크게 먹고 문을 살짝 밀어보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소어아는 문간에 서서 안을 찬찬히 둘
러보았다. 방 안 탁자 위 화로에는 불이 타고 있었고 옆으로 주전
자와 네 개의 잔이 놓여 있었는데 전혀 건드린 것 같지가 않았다.
침대의 이불도 사람이 누웠던 흔적은 없었다.
그 신비스러운 사람은 방 안의 물건을 전혀 건드리지 않는 것으
로 보아 다만 그 방만 빌려서 강별학과 밀담을 나누려는 속셈이었
던 것 같다.
그는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 안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코 속을 후비고 들어왔다. 그 향기
는 기분을 상쾌하게 했고 온 몸이 훨훨 날을 것만 같았다.
이 기이한 향기 외에 소어아는 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
했다. 다만 방이 너무 깨끗이 치워져 있다는 것이 이상스럽다면
약간 이상스러운 점이었다.
그 방은 먼지 하나없이 침대 밑과 구석구석의 물건 하나하나들
까지도 아주 깔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방바닥은 맑은 물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듯 깨끗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잠깐 이야기만 할 장소로
이와 같은 방을 빌렸을까! 보아하니 투숙할 마음은 전혀 없었던
듯한데 왜 이토록 깨끗하게 치우고 신비스러운 향수까지 뿌렸을
까? 이사람은 혹시 괴팍하게 깨끗한 것만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
자가 아닐까?)
소어아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깨끗한 사람도 보기가 드물지........"
이때 한 사람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누구냐? 이 방에 무엇하러 왔지?"
그 목소리는 바로 소어아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소어아는 크게 놀랐다. 그러나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
다.
"저는 마실 물이 있는지 보러 왔어요."
"너는 이곳의 종업원이냐?"
"네."
"낮에 왔던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그 사람은 낮에 일을 하고 소인 왕삼은 밤에 일을 합니다."
그 사람은 돌연 싸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과연 강소어답군. 하지만 나는 네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너를
알고 있었으니 시치미를 뗄 필요가 없다."
소어아는 크게 놀랐다.
"당신은......."
그 사람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소어아는 몸을 돌렸다. 그러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방
문이 바람에 덜그럭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람은 가버렸단 말인가.)
소어아가 의문에 휩싸여 고개를 갸웃뚱거리며 한숨을 내쉴 때였
다.
"너는 날 볼 수 없을 거야."
그 사람은 어느새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소어아가 급히 대여섯 번을 몸을 돌려 그 사람을 보려고 했지만
그 사람은 마치 거머리처럼 소어아의 등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도
저히 그 몸을 볼 수가 없었다.
소어아는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면서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 사람의 경공이 이 정도이니 무공은 상상할 수조차 없겠구
나. 감히 싸울 엄두도 나지 않을 뿐더러 도망가지도 못 하겠다.)
비로소 동작을 멈춘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에게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면 나도 굳이 보려고
하지 않겠소."
"너는 과연 영리하구나."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으면 왜 이곳에 왔소? 날 죽이려 하는
것 같지도 않는데."
"왜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지?"
"만약 당신이 나를 죽이려 한다면 굳이 얼굴을 숨기려 하겠소?"
그 사람은 한참 동안을 잠자코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나의 마음을 아는구나."
"나는 전부터 천하에서 가장 영리한 사람이라고 자처해 왔소.
지금은 그 생각이 바뀌었지만."
소어아는 이 사람이 자기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자
담력이 커졌다. 소어아는 말을 하며 옷장쪽으로 돌아섰다. 깨끗이
닦인 옷장에 의해 등 뒤의 사람이 어렴풋이 비춰졌다.
그 사람은 긴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어깨에 덮일 정도였고 하얀
옷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에 무서운 청동가면을 쓰고 있었다.
소어아는 크게 놀라면서 소리쳤다.
"당신이 바로 동 선생이오?"
그 사람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소어아는 그의 한쌍의 눈이 뚫어지게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한쌍의 눈빛이 옷장에 반사되어서 번쩍거렸다.
두살, 음구유, 흑 지주, 모용구매..... 이 사람들의 눈도 날카
로왔지만 그래도 그들의 눈에는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동 선생의 눈은 마치 얼음으로 만든 조각품인 양 차
갑게 느껴졌고 살기가 돌았다.
한참 후에야 동 선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흑거미가 너에게 말했나?"
소어아는 쓰게 웃었다.
"난 흑 지주가 얘기하는 당신의 무공을 믿지 않았소. 그러나 오
늘 이렇게 만나보니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소."
동 선생은 싸늘하게 웃었다.
"염려할 필요는 없다. 나는 너를 결코 죽이지 않을 테니까."
"정말이오?"
"음."
"나는 처음에 이렇게 방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고 향수가 뿌려져
있어서 당신이 여자인줄 알았소. 다행히도 당신은 여자가 아니군.
만약 여자였다면 나를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믿지 못 했을 거요."
"여자를 믿지 못 한다는 말인가?"
"여자의 말은 절대로 믿을 수가 없소. 여자의 말을 믿으면 큰
일이 나니까."
"무엇 때문에?"
소어아는 장탄식을 길게 뿜어냈다.
"남자 중에서도 악한 자가 있지만 절대로 여자처럼 악독하지는
않소. 그렇게 의리 없지도 않지, 세상에서 가장 나쁜 남자라도 여
자보다는 나을 거요."
동 선생은 돌연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애미는 여자가 아닌줄 아느냐?"
"천하에 어느 여자를 나의 어머니와 비교하겠소? 그녀는 세상에
유일한 따뜻하고 아름다운 분이오."
그는 한 번도 어머니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고 마치 꿈을 꾸듯 말을 이었다.
"세상 다른 여자들처럼 변덕스럽고 잔인한......"
이때 동 선생은 돌연 소어아의 목을 움켜쥐었다. 소어아는 감히
대항할 생각을 못 했다.
동 선생의 눈에서는 불길이 활활 타올랐고 차가운 손으로 소어
아의 목을 점점 더 강하게 조여왔다.
소어아는 몸부림을 치면서 소리쳤다.
"당신...... 당신은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소!"
"원래는 너를 죽일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틀려!"
"왜..... 무엇 때문에?"
"네가 함부로 거짓말을 지껄여서 기분이 상했다."
"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소?"
"네가 네 애미를 언제 봤느냐? 한 번도 본 적이 었는 놈이 지껄
여대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란 말이냐?"
"당신...... 당신이 어떻게 내가 어머니를 뵙지 못 했는지를 아
시오?"
"내가 모르면 누가 알겠느냐?"
"보았소?"
"그...... 그럼 당신은 나의 어머니를 보았소?"
"흥!"
소어아는 반가왔다.
"나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오?"
"네 에미는 절름발이에다 낙타 등이며 곰보고 대머리지. 세상에
서 가장 추악한 여자야. 세상의 어느 여자도 그녀보다는 미인이
지."
소어아는 크게 노했다.
"거짓말, 개소리, 당신의 이야기야말로 거짓말이오."
소어아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 앞에서 번쩍이는 별들을 보
았다. 동 선생이 따귀를 후려친 것이다.
소어아의 뺨은 금시에 부어올랐고 입가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소어아는 여전히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비록 어머니를 본 적은 없었지만 어머님 얘기를 하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애틋한 정감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어머니를 생각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
에 대한 생각을 한 번 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포근한 느낌과 아련
한 그리움이 밀려왔던 것이다.
만약 동 선생이 다른 이유로 자신을 모욕했다면 소어아는 절대
로 맞서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맞서봤자 이기지 못 할 것이 뻔한 이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를 욕하자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동 선생은 연이어 그의 얼굴을 가격했고 그도 계속 욕설을 퍼부
었다.
동 선생은 이를 악물었다.
"더 욕설을 지껄여대면 너를 아주 죽여버릴 테다."
소어아는 입가에 계속 피를 흘리며 소리쳤다.
"당신이 우리 어머니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 말
한다면 나도 욕을 하지 않겠오."
"너의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여인이라고 말하면 나도
너를 봐 주겠다!"
"당신의 어머니야말로 발을 절고 낙타등이며 곰보고 대머리
요......"
동 선생은 손으로 그의 턱을 잡고 말했다.
"진정 죽고 싶으냐?"
소어아는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잡아 먹을 듯이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네가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이면 잘못했다는 뜻으로 알고 살려
주겠지만 고개를 가로 저으면 죽여버릴 테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어아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동 선생이 재차 물었다.
"너...... 너는 죽어도 너의 어머니가 가장 추악한 여인이라고
말할 수 없단 말이지?"
소어아는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너..... 너는 차라리 죽고 싶단 말이냐?"
동 선생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차 있었으나 말소리는 점차 떨리
고 있었다.
소어아는 그가 곧 손을 쓸 것으로 알았으나 그의 두 손은 맥이
빠진 듯 놓아버렸고 소어아는 그의 손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
다.
동 선생은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있었다.
소어아는 경거망동할 수가 없어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
었다.
"우리 어머니와 당신과는 무슨 원한이 있기에 그토록 그녀를 욕
하는 것이오?"
동 선생은 전혀 그의 말을 듣지 못 한 것처럼 그저 멍하니 서있
기만 할 뿐이었다.
소어아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방문을 열고 달아나기 시작했
다. 한참을 달리다가 고개를 돌려보았으나 동 선생은 쫓아오지 않
았다.
소어아는 마음 속이 혼란했으나 오래 생각할 틈이 없었다. 즉시
몸을 돌려 전개신법으로 목숨을 걸고 몸을 날려 눈 깜짝할 사이에
몇십 장을 날았다.
그때 돌연 등 뒤에서 한 사람의 냉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아직 말을 못 하겠느냐?"
"재주가 있다면 나를 죽여 보시오."
순간 소어아는 충격을 느끼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화무결은 평상시에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웬일인지 강별학의 주연에서 얼큰하게 취하기까지 했다. 그는 침
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창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한 사람의 인영이 화
무결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돌연 칼을 뽑아들더니 화무결의 손
목을 내려쳤다. 화무결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고 몸부림을 쳐
봤지만 무엇인가가 가슴을 내리누르고 있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
할 지경이었다.
이때 갑자기 창 밖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무결, 일어나라."
그 소리는 비록 나지막 했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이 화무결
의 귀에 들려왔다.
화무결은 벌떡 일어났다. 악몽을 꾼 것이다. 그의 옷은 온통 땀
에 젖어 축축했다.
창 밖에서 또다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무결, 이리로 나와라."
화무결은 정신을 차리고 급히 창문을 열었다.
하나의 그림자가 대여섯 자 밖에 서있었다.
담담한 별빛 아래 그 사람의 얼굴은 파란 빛깔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그는 무서운 가면을 쓰고 있었다.
화무결은 크게 놀랐다.
"동..... 동 선생이 아니오?"
"나와라!"
화무결이 창 밖으로 나왔을 때 동 선생은 이미 지붕 위를 나르
고 있었다.
화무결은 뒤따라서 지붕을 날아 조용한 거리를 가로질렀다.
동 선생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갑자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
다.
"이화궁의 제자가 어찌 잠을 그렇게 자는가!"
화무결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후배가 가슴이 답답해서........"
"이화궁의 제자도 가슴이 답답한가?"
화무결은 그의 비웃음에 고개를 숙일 뿐 아무말도 하지 못 했
다.
동 선생은 신속히 달리면서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조금도 움직이
는 것 같지가 않았다.
화무결은 이런 경공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누구인 줄은 알겠지?"
"후배가 이화궁을 떠날 때 스승님은 선생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명령을 들으라 했습니다."
"그밖에는 없느냐?"
화무결은 마지 못해 무거운 소리로 대답했다.
"또 저에게 강소어라는 사람을 죽이라고 분부하였습니다."
동 선생은 기쁜 듯 한껏 웃었다.
"좋아."
그는 다시는 말을 하지 않았고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길은 점점 험악해졌고 어느덧 나무가 울창한 성 밖에 다달았다.
동 선생은 돌연 방향을 바꾸어 몸을 날리면서 말했다.
"넌 거기에 있거라!"
그의 몸은 이미 나무 위로 솟구치고 있었으며 순식간에 사라지
고 말았다.
화무결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을 때 동 선생
이 한 사람을 어깨에 메고 다시 나무 꼭대기에 나타났다.
"똑바로 받아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어깨에 메고 있던 사람을 나무 위에서
내던졌다.
그 나무는 십여 장의 높이는 족히 되었다.
화무결은 그가 던진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할 겨를도 없이 몸
을 솟구쳤다.
두 개의 그림자가 아래 위로 마주치는 순간 화무결은 재빠르게
손을 뻗쳐 그 사람의 옷을 잡았다. 그러나 '찍'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사람의 옷은 찢어지고 말았고 화무결도 그 사람의 떨어지는 힘
에 밀려 밑으로 처지고 말았다.
그러나 화무결은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틀어 다시 그 사람을 공
중으로 던져 올렸다. 그리고 땅에 사뿐히 내려서 이번에는 양팔로
가볍게 그 사람을 받을 수 있었다.
별빛이 그 사람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
닌 바로 강소어였다.
화무결은 놀라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동 선생은 나무에 서서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그가 강소어인가?"
"그렇습니다."
"좋아, 그를 죽여라."
화무결은 크게 당황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소어아를 바라보면
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반항할 수 없는 사람을 죽이고 짚지 않다면 우선 그의 혈도를
풀어 주어라!"
화무결은 소어아를 눕혀 놓고는 손을 내밀어 소어아의 혈도를
풀었다. 소어아는 깊은 숨을 몰아 쉬며 눈을 떴다. 화무결을 쳐다
보는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당신이 나를 구했소?"
화무결은 혼이 빠진 사람처럼 서있을 뿐 아무말도 하지 못 했
다.
소어아는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나를 구하러 올줄 알았소. 우리는 친구이니까!"
화무결은 웬지 가슴이 아팠다. 그는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소어아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이때 한 사람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무결, 너는 왜 손을 쓰지 않는 것이냐?"
소어아는 그제서야 나무 위의 동 선생을 발견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벌떡 일어나 두 눈을 크게 뜨고 화무결을 다시 쳐다보았
다.
"알고 보니 그가 당신에게 나를 죽이라고 하였군요?"
화무결은 계속해서 길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소어아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쓴웃음을 짓고 말았
다.
"나는 당신이 그의 명령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자
손을 쓰시오."
침묵을 지키던 화무결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당신을 죽일 수 없소!"
소어아는 기뻤다. 그러나 동 선생은 부화가 치밀어올랐는지 목
소리가 높아졌다.
"뭐라고?"
화무결은 결심이 선듯 큰소리로 대꾸했다.
"저는 지금 그를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너는 네 스승의 말을 잊었느냐?"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잊지 않았다면 왜 죽이지 못 하겠다는 게지?"
화무결은 길게 한숨을 내쉬어가며 대답했다.
"나는 그와 삼개월의 약속을 했습니다. 삼개월이 되기 전에는
그를 결코 죽일 수 없습니다."
"너의 스승이 이 일을 알면 어떻게 하지?"
화무결은 이제까지 숙였던 고개를 들어서 동 선생을 향했다.
"스승의 명령은 물론 따르겠지만 약속도 지켜야 합니다. 지금
스승님이 여기에 계신다- 해도 저에게 배신자가 되라고는 하지 않
을 것입니다."
소어아도 큰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는 나를 꼭 죽일 것이니 오직 시간 문제일 뿐이오. 스승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아니오."
동 선생은 다시 화를 냈다.
"화무결, 잊지 마라. 나의 말은 곧 너의 스승의 말과도 같은데
나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건가?"
"선생님의 분부라면 무슨 일이라도 다 듣겠지만 그러나 이 일만
은 절대로 하지 못 하겠습니다."
"스승의 명령 때문에 하는 일이니 너를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야."
"선생, 용서하십시오. 나는........"
동 선생이 돌연 큰소리로 그의 말을 막았다.
"네가 그를 죽이지 못 하는 것은 약속 때문이 아니라 다른 원인
이 있는 것은 아니냐?"
화무결은 놀랐다. 사실 그가 소어아를 그의 품속에 안고 있을
때부터 그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는 소어아가 자기의 원수로 느껴
지지 않았고 오랫동안 교제해온 친구 같이 느껴졌다. 비록 만난
지 이 년도 채 못 되었지만 마치 집안의 혈육들이 주는 그런 편안
하고 친숙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소어아를 땅에 내려놓은 후에도 이런 느낌은 여전히 그의 가슴
에 남아 있었다. 지금 소어아의 믿음직한 웃음을 바라보면서 그가
어찌 손을 쓸 수 있으랴!
동 선생이 계속해서 무서운 소리로 화무결을 꾸짖었다.
"화무결, 저 녀석이 너의 가장 큰 원수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네가 만약 그와 친구가 된다면 너의 스승은 결코 너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화무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소어아가 진정 자기의 가
장 큰 원수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누가 그것을 증명해 준 적
이 있는가!
그는 조금도 소어아와 원한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신도 언제부터 그런 느낌을 갖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한 느낌은 마치 오래 전부터 그의 가슴에 숨어 있다가 소어
아와 피부를 부딪치게 되자 새삼 드러나게 된 것만 같았다.
그는 소어아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강소어, 너는 마음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가? 나와 생각이 같
겠지?)
소어아도 그를 주시하면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동 선생은 나무에서 이렇게 마주하고 서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
자 싸늘한 눈이 불덩이처럼 빛을 내기 시작했다.
"화무결, 석달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지금 손을 써라!"
소어아는 하늘을 향해 크게 웃었다."왜 석 달을 못 기다리오?
석 달 후에도 그가 손을 못 쓸 것으로 아시오77
"내가 무엇을 두려워 하랴마는 너희들은 원래가 원수야. 꼭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손에 죽어야 돼!"
"좋소. 그렇다고 해도 왜 꼭 지금 그렇게 강요를 하는 거요? 나
를 죽이고 싶다면 당신이 죽이시오..... 왜 죽이지 못 하오?"
이때 돌연 동 선생은 갑자기 칼에라도 맞은 듯 소리를 지르며
뛰어내렸다.
변화하는 화무결
화무결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팔시 동 선생이 소어아에게
손을 쓸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동 선생은 소리를 지르면서 나무
숲으로 뛰어 들어가 연달아 손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름드리 굵은 나무들이 일격에 꺽여 버리거나 낵리채 뽑혀 날
아가기 시작했다.
소어아는 그 무서운 장력을 보자 입이 다물리지 않을 정도로 놀
랐다.
동 선생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면 세상에 그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동 선생이 자기를 극도로 미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 선생은 왜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이 나무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일까?
이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동 선생은 이미 화무결의 앞에 가까
이 와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너는 석 달 후에야 그를 죽이겠단 말이지?"
화무결은 길게 한숨을 몰아 쉬었다.
"네 !"
"내가 지금 그를 죽인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는가?"
화무결의 안색이 납 같이 변했다. 그는 소어아를 한 번 바라보
더니 무섭게 업을 열었다.
"선생께서 만약에 그를 죽인다면 저는..... 저는......."
"네가 나를 가로 막겠단 말인가?"
"이건...... 제자가......"
동 선생은 갑자기 손을 멈추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화무결을 바
라보며 크게 웃었다.
"네가 그런 의리가 있다면 선배인 나로서 어찌 너를 괴롭히겠는
가? 네가 석 달을 기다리겠다면 석 달을 기다려도 무방하다."
이 변화는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화무결은 놀랍고도 기뻤다.
"선생, 감사합니다......"
동 선생이 웃음을 멈추면서 입을 열었다.
"이제 너는 가거라1?
화무결은 소어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그는......."
화무결은 다시 놀랐다.
"선생께서는........"
"내가 직접 죽이려고 했다면 굳이 지금까지 기다렸겠느냐?"
화무결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윽고 고개를 숙이며 말
했다.
"그를 죽이지 않겠다면 왜 놓아 주지 않는 겁니까? 그도 신의가
있는 인물이니 석 달의 약속 기한 중에 결코 도망가지는 않을 것
입니다."
동 선생은 싸늘하게 웃었다.
"그가 신용을 지키든 또는 어기든 간에 난 이 석 달 동안 그를
보호해야겠다. 그를 조금이라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난 석달
후에 완전하게 그를 너에게 넘겨주겠다."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그리고 나를 완전히 죽인다는 말이지요?"
"그렇다!"
"나를 보호하려면 고생을 좀 할 텐데."
"너 같은 사람을 보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야."
"나를 쉽게 보호하려는 것은 틀린 생각이오. 나에게 다른 병은
없지만 나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무척 좋아하오. 강호에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만은 아니오."
"하지만 화무결 외엔 어느 누구도 너를 죽일 수 없지."
"정말이오?"
"나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지만 앞으로 석 달 안에 내가 다치게라도
된다면 체면이 깍일 텐데."
"이 석 달 안에 네가 조금이라도 다친다면 그것은 나의 책임이
다."
"화형 이 말을 잘 들었소?"
소어아는 웃으며 화무결을 바라보았다. 화무결도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들었소."
"기억할 수 있겠소?"
"물론 기억할 것이오."
소어아는 다시 크게 웃었다.
"그럼 난 안심이오. 이 석 달 동안엔 무슨 짓을 해도 나를 다칠
사람이 없을 테니까."
이때 동 선생이 싸늘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받았다.
"안심해도 좋다. 이 석 달 동안 너는 아무일도 하지 못 할 테니
까."
소어아는 큰 눈을 몇 번 깜박깜박 하면서 웃었다.
"정말 그럴까?"
화무결은 소어아가 영리하고 교묘한 수단을 쓰기 때문에 동 선
생이 비록 무술이 뛰어나도 그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어려울 것이
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자 화무결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넌 아직도 가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
화무결은 웃음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그럼 석 달 후에......"
소어아가 잘라서 말했다.
"안심하고 가시오. 석 달 후에 내가 그 곳에서 당신을 찾을 것
이오."
그는 동 선생을 쳐다보고 나서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이 사람과 조용히 이야기하고 심은 것이 있는데 꺼
림칙하지 않소?"
동 선생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천하에 내가 마음을 놓지 못 할 일이 있는 줄로 아느냐?"
소어아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당신 재주는 좋지만 너무 큰소리를 치지는 마시오."
"네 녀석은 너무 무례하구나!"
"내가 무엇이 두렵겠소? 이 석 달 동안은 그 누구도 나를 다치
게 하지 못 할 텐데."
동 선생은 매우 화가 치밀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소어아는
살며시 화무결 앞에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안타깝게도 가면을 써서 그렇지 만약 가면만 없었다면 정말 이
쁠텐데?"
비록 작은 소리로 말을 했지만 이 소리는 동 선생도 들었을 것
같았다. 화무결은 참을 수 없어서 웃으면서 기침소리를 냈다.
"무엇을 말하고 싶소?"
"내일 오후 연남천 대협께서 화림에 와 나를 기다릴 것이오. 내
가 가지 못 할 것이라고 전해주시오."
그는 이번에는 정말 작은 소리로 말을 했다.
화무결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연남천?"
"그 분과 약간 언짢은 일이 있다는 것은 아오. 그러니 당신이
대답을 않는다 해도 원망은 않겠소."
"하하, 이 석 달 동안 나와 당신은 친구요."
"물론이오."
"친구의 부탁인데 내가 안 들어 줄 수 있겠소?"
"좋소, 당신 같은 친구가 있는 것은 정말 영광이오."
화무결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담담히 말했다.
"그러나 다만 석 달이오."
그는 일부러 냉담한 표정을 했다. 그러나 얼굴에 나타나는 섭섭
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소어아는 웃어보였다.
"석 달이면 구심 일이니 그리 짧지도 않소."
"그러나 우리는 친구로서 만나보지는 못 할 것 같구려. 다시 만
날 때는 이미 원수가 되어 있을 테니 말이오."
"천하에는 많은 뜻밖의 일이 있고 그런 일들은 매일 발생하고
있소. 어쩌면 며칠 후에 다시 만날지도 모르오."
화무결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나는 기적을 그리 믿지 않는 성격이오."
"사람은 항상 기적이 있을 것으로 믿고 일어나길 기다리는 거
요. 그렇지 않으면 매일의 나날을 무슨 재미로 이어 가겠소?"
"당신은 기적을 그렇게도 믿고 있소?"
"내가 만약에 기적을 믿지 않는다면 지금 웃음이 나을 것 같
소?"
돌연 동 선생이 두 사람의 대화 속으로 끼어들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화무결, 빨리 가지 않고 무얼
하느냐?"
소어아는 화무결이 떠나는 것을 보자 저절로 탄식이 새어나왔
다.
"좋은 사람이 잘못 태어났군."
동 선생이 곁에서 싸늘하게 웃었다.
"잘못 태어난 것은 너야! 그의 손에 의해 죽어야 하니까."
소어아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꼭 죽어야 한다면 그의 손에 죽는 것이 남의 손에 죽는 것보다
는 낫겠소."
"그를 원망하지 않느냐?"
"내가 왜 그를 원망 하겠소?"
"그의 스승이 너의 부모를 죽였는데도?"
"나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는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의 스승이 한 일은 그와 상관이 없소.
잠시 침묵을 지키던 동 선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의 애인을 빼앗아 갔는데도 그를 원망하지 않느냐?"
소어아는 쓴웃음을 띠웠다.
"여자가 마음이 변했다면 무슨 힘으로 그것을 되돌릴 수 있겠
소. 나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소. 더구나 그녀의 마음이 그를 위해
변했다면 남을 위해 변한 것보다는 낫지 않소?"
동 선생은 넋잃은 사람처럼 망연자실하고 서있다가 갑자기 소리
쳤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 사랑을 빼앗은 원한을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다니 너도 사람이냐?"
소어아는 그를 주시하면서 생각에 잠기듯 하다가 조용히 웃고
말았다.
"내가 그를 미워하든 말든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길래 이토록
참견을 하는 것이오?"
동 선생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꼭 나와 그를 싸우게 하기 위해 나를 지키겠다고 하고,
또 이 석 달 안에 우리가 좋은 우정을 갖게 될까봐 우리를 갈라
놓으려는 것이 아니오?"
"좋을 대로 생각해라."
"그가 나를 죽이려고 하면서도 원인을 말하지 못 하는 것이 이
상했었는데 이제 더 이상해지는군요."
"넌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해도 그는 너를 원망할 거야. 그래서
너를 죽이려는 것인데 무엇이 이상하지?"
"당신은 정말로 그가 나를 원망하는지 아시오?"
동 선생의 몸이 일순간 떨렸다.
"반드시 너를 원망할 걸."
"이상하군. 당신과 그의 스승은 나를 직접 죽이는 것이 훨씬 용
이할 텐데 왜 직접 손을 쓰지 않고 화무결........."
"누구 손에 죽든 네가 죽는 것은 어차피 마찬가진데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느냐?"
"차이가 있소. 다만 내가 지금 그것을 모를 뿐이오."
동 선생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 차이의 원인이 있긴 하지만 너는 영원히 모를 것이다."
"아? 그래요?"
"그 비밀은 온 천하에 단 두 사람만이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
은 결코 너에게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소어아의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이화궁주는 자연히 알 것이고......."
"물론이지."
소어아는 큰소리로 외쳤다.
"이화궁주 자매 두 사람만이 알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소?"
동 선생은 깜짝 놀랐다.
"너는 말이 너무 많으니 이제 입을 다물어라."
그는 돌연 손을 들어 소어아의 혈도를 점했고 소어아는 다만 흰
빛이 번쩍하는 것을 느꼈을 뿐이다.
이 신비스러운 동 선생은 그의 얼굴 뿐만 아니라 자기의 손조차
보지 못 하게 한 것이다.
화무결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호소할 상대도 없었거니와 남에게 말하기도 싫어하
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밤새 혼자 술을 마시다가 날이 밝아질 무
렵에야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뜰에서 소란
을 피우는 소리가 그의 잠을 깨웠다.
그가 옷을 입고 방 문을 나서자 강별학이 나무 밑에 서있다가
그를 보고 웃으면서 걸어왔다.
"어제 밤에 누구와 약속이 있어 나갔다 돌아와 보니 화 공자는
이미 술에 만취되어 자고 있더군."
그는 어제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마치 얘기할 가치도 없다
는 듯 일언반구도 언급을 하지 않았다.
화무결은 그저 웃으며 대꾸했다.
"이제야 병(病) 중에서 술병이 가장 치료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겠소."
이렇게 말을 하며 사방을 둘러보니 사람마다 황급한 표정으로
출입을 빈번히 하고 있었다.
화무결이 물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
강별학이 가볍게 탄식을 하면서 대답했다.
"단씨가의 삼소저가 자살을 기도했소."
화무결은 크게 놀랐다.
"그렇게 호쾌한 사람이 자살을 했단 말이오?"
"잊지 마시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여자요. 태반의 여자들은
모두 자살로서 일을 해결하는 것이 최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
소."
"왜 자살을 하려 했소?"
"원인은 누구도 모르오. 다만 그녀는 혼수상태에서 계속 외쳤
소.'나는 그이에게 잘못을 했어요. 다시는 나를 만나지 않겠대
요.'라고."
"그이라니? 그는 또 누구요?"
"소녀의 마음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그 누가 알겠소?"
강별학이 미소를 띠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자살도 어렵지. 내가 알
기로는 여자가 자살을 기도해 성공한 예는 그리 많지 않소."
화무결은 웃었다.
"남자가 자살해서 성공한 예는 많은가요?"
강별학도 따라서 크게 웃었다.
"당신은 과연 천하 여인들의 벗이오. 그녀들을 위해 거들어 주
는 것을 잊지 않고 있으니 말이오."
화무결은 눈길을 돌렸다.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됐지요?"
"이미 정오가 지났소."
"아, 내가 어찌 이토록 오랜 시간을 잤을까?......."
그는 방으로 돌아가 세면을 했다.
강별학이 따라 들어와 은근히 입을 열었다.
"해장술을 마시면 오히려 술이 좀 쨀 것이오. 나와 두어 잔의
황혼주를 마시지 않겠소?"
화무결이 얼굴을 닦으면서 웃었다.
"제발 술을 마시자는 말 만은 하지 마시오. '술(酒)'자만 들어
도 머리가 아프오."
"그렇다면 나가서 상쾌한 바람이나 씌지 않겠소? 내가 동행을
하겠소."
화무결이 웃으면서 흔쾌하게 거절했다.
"이미 여기서 오랜 시간을 머물렀는데 강형은 제가 길을 잃어버
릴까 걱정이오?"
강별학이 문에서 한참 서있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 그렇다면 난 단 아가씨의 상황을 둘러 보러 가봐야겠소."
강별학은 화무결이 은밀한 일이 있어 동행을 거절한다고 눈치챘
다. 그는 뜰에 들어서 두 사람을 불러 무엇인가를 분부했다.
강별학은 자신의 명을 받은 자들이 재빨리 사라지는 것을 바라
보며 입가에 잔인한 웃음을 띠운 채 중얼거렸다.
"화무결, 너에게 좋게 대하려고 했지만 나를 섭섭하게 하는구
나. 너도 내가 무정하다고 하지는 말아라!"
그는 남들에게도 말 못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 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든 그에게 비밀이 있으면 자기에게 흑심을 품은
것으로 생각해버렸다. 자고로 영웅은 보통 사람들보다 의심병이
많 았고 그것이 그들에게 치명상을 줄 때가 흔히 있었다.
성내에는 큰길에서 작은 골목길에 이르기까지 어디를 가나 강별
학이 보낸 사람들이 망을 보고 있었다.
화무결은 그저 장터를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새를 파는 가게에 들어가 한참 구경을 하더니 다시 한 찻
집으로 들어갔다.
몇몇의 사람들이 계속 강별학에게 와서 보고를 했다.
강별학은 침울하게 물었다.
"혼자 차를 마셔? 누구와 만난 것은 아니던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
한참 후 다시 한 사나이가 달려와서 인사를 하며 말했다.
"화 공자가 찻집에서 나왔습니다."
얼마 후 또다른 한 사나이가 보고를 올렸다.
"화 공자는 길거리에서 왕철비가 요술 부리는 것을 보고 있습니
다."
강별학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요술을 보고 있단 말이지? 그와 이야기 나누는 사람은 없
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누가 그를 살피고 있지?"
"지금은 송삼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삼이 황급히 달려들어 오더니 땅에 엎
드려 말했다.
"화 공자가 돌연 보이질 않습니다."
강별학은 벌떡 일어서며 상을 내리쳤다.
"너는 장님이냐? 대낮에 사람이 많은 큰길에서는 절대로 경공을
사용하지 않았을 텐데 왜 돌연 보이질 않는다는 거냐?"
송삼이 떨리는 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때는 왕철비의 딸인 유성추도 무술 시범을 보이고 있었습니
다. 그러나 돌연 그 유성추의 줄이 끊어졌고 사람들이 다칠까봐
우왕좌왕 하는 바람에 장내가 금방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지요."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소인...... 소인은 멀리 서있다가 황급히 화 공자가 있던 자리
로 가보았지만 화 공자는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성추의 줄이 어떻게 끊어졌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강별학은 다시 꾸짖었다.
"왕철비의 딸에게만 정신을 쏟고 있었지?"
송삼은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었다.
"제..... 제가 감히?"
강별학이 무서운 소리로 그를 힐책했다.
"너의 눈은 그렇게도 쓸모가 없는데 남겨서 무얼 하겠느냐?"
강별학의 말이 떨어지자 두 명의 사나이가 와서 송삼을 끌고 갔
다. 송삼의 얼굴은 마치 죽은 시체와도 같았다. 그는 용서해 달라
는 말조차 하지 못 했다.
얼마 후 처참한 소리가 들려왔다.
강별학은 마치 아무소리도 듣지 못 한 듯 혼자 중얼거렸다.
"화무결이 어디로 갔지? 왜 나를 피하는 것일까? 그가 흑 소어
아와 작당을 하고 동시에 나를 상대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의 말소리는 매우 가벼웠으나 그의 눈에는 차가운 빛과 살기
가 감돌고 있었다.
"내가 천하의 사람들을 모두 배반한다 해도 누구든 나를 배반해
서는 안 돼. 강별학아, 이 말을 꼭 명심해라!"
화무결은 성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만약 누가 그에게 '유성추가 어떻게 끊어졌지요?' 하고
물어본다면 그는 필시 더욱 크게 웃었을 것이다. 그는 조그만 돌
멩이 하나로 강철줄을 끊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길을 재촉했다.
(며칠 동안 나는 임기응변이란 것을 배웠지. 그리고 세정(世情)
의 험악함도 알았어.)
화림에 가까와지자 어제의 검기에 의해 무참히 떨어진 꽃잎들이
시든 채 사방에 널려 있었고 구름이 하늘을 덮어 더욱 더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화무결은 연남천을 만날 것을 생각하자 살며시 떠올랐던 미소마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쓰러져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위험해도
그는 꼭 소어아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땅 위의 꽃잎들이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휩쓸렸다.
화무결은 꽃을 밟으며 화림에 들어섰다. 그러나 연남천은 그 자
리에 없었고 흰옷을 입은 여인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 나무에 기댄
채 땅 위의 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등을 화무결 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무결은 그녀
의 가날픈 몸매와 허리까지 늘어져 내린 머리카락만을 볼 수 있었
다.
화무결은 비록 얼굴을 보지는 못 했어도 첫눈에 그녀가 누구인
지 알 수 있었다.
꽃들이 바람에 휘날렸다. 화무결은 가만히 선채로 움직일줄을
몰랐다.
그는 여기서 철심난을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인사를 해야 할지 어쩔지도 감이 서지를 않았다.
철심난 역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많은 생각에 잠겨 있었고 사람이 온 줄도 몰랐다. 바람
이 그녀의 귀밑 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한참 후 그녀는 탄식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꽃은 피고 지며 한줌 흙으로 변한다. 사람도 또한 이것과 다를
것이 없는데......."
화무결은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돌아서려고 했
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리고 말았다.
철심난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그녀는 단 한마디 밖에 하지 못 했다.
그녀는 서있는 사람이 화무결이라는 것을 알고는 기쁨에 넋을
잃고 말았다.
화무결의 가슴에는 할 이야기가 많았으나 얼굴 표정은 담담하기
만 했다.
그는 정말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셨던 화무결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 가까이 다가
섰다.
"내가 올 줄은 몰랐지요?"
"당신이 다치지 않은 것을 보니 정말 기뻐요."
그녀의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러나 화무
결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웬지 모를 감정이 가슴을 저며왔
다.
"감사하오."
철심난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 저 혼자 달아났는데 저를 원망하지 않았어요?"
"내가 왜 당신을 원망하겠소?"
그는 자기의 웃음이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사
실은 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또 잠시 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철심난은 다시 탄식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할 말이 많았는데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대가 말을 하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소."
철심난이 다시 말문을 열었지만 말이 잘 이어지지를 않았다.
"당신...... 당신이 안다고요?"
화무결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럽게 들렸다.
"사람을 잊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오. 때때로 당신은 그이를 잊
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의 모습과 말소리는 당신의 가슴에
영원히......."
"당신...... 당신은 저를 용서해 주시겠죠?"
그녀의 눈동자는 눈물이 가득 고여 반짝거렸다. 화무결은 고개
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눈물을 보지 못 했다.
"당신은 나의 용서를 받을 필요가 없소, 내가 당신이라도 그렇
게 하지는 않았을 거요."
"그러나 나는 정말 당신에게 미안해요. 당신은..... 왜 저를 꾸
짖지 않죠? 나무라지도 않고? 그것이 저는 더 괴로워요. 당신의
동정은 나의 고통을 더욱 부채질할 뿐이에요."
그녀는 목이 메어 더듬거리다가 드디어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
다.
골치덩어리 강소어
화무결은 한동안 침울한 표정을 짓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
했다.
"나는 절대로 당신을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을 것이오. 나는
비록 당신...... 당신과 같이 있지 못 한다 해도 영원히 당신을
동생으로 생각하겠소."
철심난은 돌연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반짝 들었다.
"정말이에요?"
"내가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소?"
그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종래에도 강소어를 미워해 본 적이 없었소. 비록 운명
이 나와 적으로 맺어졌지만 그는 내평생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하
오. 당신....... 당신이 그와 같이 있는다면 나도 정말 기쁘겠
오....... "
"오...... 오라버니, 난 한평생 영원히 당신을 존경하겠어요.
정말로 존경하겠어요."
그녀의 눈물 속에는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져 있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오. 당신을 원망
할 수도 없고 남을 원망할 수도 없으니 내 스스로 자학할 필요는
더욱 없을 것이오."
"그러나 당신...... 당신은......."
화무결이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잊혀지지 않는 고통이란 없는 법이오. 날이 가면 무슨
일이든 점차 잊어버릴 수가 있소. 그러니 당신도 근심할 필요가
없소."
철심난의 목소리는 떨려 나오고 있었다.
"당신..... 당신은 정말 너그러우시군요."
그녀는 너무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저는 알고 있어요. 당신은 비록 겉으로는 그렇게 말을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저를 미워하고 있을 거예요. 이...... 이런
사실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에요."
화무결은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지 않소."
그는 철심난이 오라버니라고 불렀을 때 이미 이 한마디가 평생
동안 다시는 변경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느껴졌다. 그는 이 년 동
안 철심난에 대해 많은 애틋한 감정을 쌓아 왔지만 그 감정은 '오
빠'라는 이 소리에 의해 변해 버리고 말았다. 이 오빠라는 말은
가까우면서도 매우 먼 거리를 두는 말이었다.
화무결은 하늘을 향해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나는 그가 당신에게 그렇게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기를 바라오.
진정으로."
철심난을 사랑하기에 하는 그의 말은 깊은 기도였고 아픔이었
다.
화무결의 마음 속에서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들의 마음은 많이 안정 되어갔다. c오빠'라는 말로 서로의 감
정을 가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철심난도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눈물을 거두었다.
"그런데, 당신은 무슨 일로 여기에 오셨죠?"
그는 주저하면서 소어아의 행방을 철심난에게 말을 해야 할지
숨겨야 할지 잠시 생각해야만 했다. 이것은 그녀를 근심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철심난이 또다시 물었다.
"혹시 연 대협을 만나려고 온 것이 아니에요?"
화무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철심난의 눈이 밝아지면서 다시 물었다.
"혹시 그이의 부탁을 받고 온 것이 아니에요?"
"음!"
"그이...... 그이는 왜 오지를 않지요?"
화무결은 대답을 피하면서 반문했다.
"연 대협은 어디에 가고 당신만 여기에 있소?"
"어젯밤에 연 대협이 저를 찾아와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저에게 오늘 여기에서 기다리라고 했지요. 오라버니도 알다시피
연대협의 말을 거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했지?"
철심난은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입술을 살며시 깨물면서 주저
하다가 입을 열었다.
"연 대협은 그이와 저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리고는........."
이때 돌연 숲밖으로부터 한 사람이 큰웃음을 터뜨리면서 들어왔
다.
"너희들 둘은 이야기를 모두 나누었는가? 내가 너무 일찍 온 것
은 아니겠지?"
화무결이 몸을 돌리자 연남천은 웃음을 거두며 물었다.
"어, 너는 어떻게 여기에 왔지?"
그는 눈길을 급히 철심난의 얼굴로 돌리면서 물었다.
"소어아는?"
철심난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전 모르겠어요. 그는........ "
"강소어는 나에게 연 대협께 알려드리라고 했소. 어쩌면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화무결의 말을 들은 연남천은 큰소리로 소리쳤다.
"그가 무엇 때문에 오지 못 하지?"
"그는 지금 다른 사람에게 감금 되어 있기 때문에 오지 못 하는
것이오."
화무결의 말을 들으며 철심난은 안색이 크게 창백해졌고, 연남
천은 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누가 그를 감금했지?"
화무결은 주저하다가 결국 실토하고 말았다.
"한 분의 무림 선배인데 그는 동 선생이라고 하오."
연남천의 노기는 더욱 거세어졌다.
"동 선생? 난 강호에 몇십 년 동안이나 돌아다녔지만 동 선생이
란 이름이 있다는 것을 들어보지를 못 했다. 혹시 네가 지어낸 것
이 아니냐?"
그는 급히 화무결 앞으로 다가서며 다시 소리쳤다.
"네가 그를 죽이고 이제와서 시치미를 떼는 것은 아니냐?"
"분명히 나는 그의 부탁을 받고 온 것이오. 그런데 연 대협께서
는 저를 의심하니, 저는........"
연남천은 눈을 크게 떴다.
"그래서 네가 어쩔 테냐?"
"제가 비록 연 대협의 상대는 못 된다 하더라도 지금 저는 연
대협과 무술로써 승부를 가려야겠소!"
연남천은 하늘을 향해 박장대소했다.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 간도 크구나!"
"간이 크지는 않지만 죽음을 두려워 하지는 않소."
"그래, 정녕 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네 소원을 들어
주마!"
이때 철심난이 달려들면서 연남천을 막아섰다.
"연 대협, 저는 그를 잘 알고 있어요. 그는 절대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소어아가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너는 그를 위해서 변명을 해주
려느냐? 그래서 소어아가 너를 외면 하는구나. 너는 마음이 잘 변
하는 여자란 말이냐?"
철심난은 눈물을 흘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강소어에게 위험이 있다면 저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를 구출
할 거예요. 그러나 화....... 공자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믿을 수
가 없어요."
이때 화무결이 나섰다.
"연남천, 나는 당신을 일대의 영웅으로 존경해왔소. 그런데 연
약한 여자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당신이 과연 영웅 자격이 있는지
의문스럽소."
철심난이 급히 사이에 끼어들었다.
"오라버니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마세요. 연 대협께서는 저
를 모독할 생각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에요. 다만 저를 이해
하지 못 했을 뿐이에요. 또 소어아를 걱정하기 때문에....... "
그녀는 이렇게 부르짖듯 말했으나 연남천과 화무결은 그녀의 말
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서로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돌연 연남천은 소리를 지르며 일장을 날렸고 화무결도 몸을 날
려 이에 맞섰다. 단 일장씩의 공격이었지만 엄청난 살기가 도사린
장세였다. 연남천이 두번째 장을 날리려는 순간, 철심난이 둘 사
이에 끼어들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안 됩니다. 두 분이 싸워서는 아니 됩니다."
연남천은 손을 거두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네가 소어아를 위해서도 목숨을 걸 수 있고 또 화무결을 위해
서 너도 죽을 수 있다면 너는 도대체 몇 개의 목숨이 있다는 말이
냐?"
철심난은 구슬 같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연 대협께서 무슨 욕을 한다해도 저는 변명을 할 수가 없습니
다. 연 대협께서 저를 몹쓸 년으로 보아도 저는 어쩔 수가 없어
요."
그녀는 땅에 쓰러져 통곡을 했다.
"저는 다만 연 대협께서 화 공자를 놓아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금후에 만약 그가 거짓말한 것으로 밝혀지면 저를 죽여도 좋습니
다."
연남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의 목숨을 걸고 그의 보증인이 되겠다구? 너 같이 변덕스러
운 여인의 목숨이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그는 다시 거세게 일장을 뿜어냈다. 천생이 화급하고 불 같은
성질이었는데다 소어아에 대한 근심 때문에 더욱 화가 치밀어 사
태를 판단해 보기 보다는 난폭한 행동이 먼저였다.
권풍과 장풍 속에 나무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것은 강호에서 백 년 이래 최고의 결투라고 해도 아무런 과장
이 없을 정도로 치열한 싸움이었다.
그들은 검으로 무공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적수공권(赤
手空拳)이었지만 전황은 매우 격렬했고 지난번 싸움보다 결코 뒤
떨어지지 않는 혈전이었다.
연남천의 권세는 검을 사용할 때와 같이 종횡무진해서 맹렬함은
천하무적이었다.
그에 비해 이화궁의 무술은 본래 이연극강 후발제인(後發制因)
이었다. 화무결의 연약한 성격도 사실 그가 어릴 때에 배운 무술
과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의 수법은 완전히 그 풍(風)을 달리했다.
그도 맹렬한 자세로 공격을 퍼부었으며 공격의 초식 하나하나에
예리한 살기가 드러났다.
자기 일생 중 가장 관심을 둔 사람 앞에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
기위해 화무결은 고군분투했다. 게다가 오랫동안 쌓아왔던 철심난
에 대한 애정이 이렇게도 허허로운 자신만의 기대였다는 것이 확
인되자 그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고 온몸을 던져 무엇인가 끝을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철심난의 울음소리는 그의 피를
더더욱 들끓게 했다.
그의 이런 기질은 자기의 어머니에게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사
랑을 위해서 아무 두려움 없이 죽을 수 있었던 그러한 뜨거운 피
가 화무결의 몸에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화궁의 차디차고 혹독한 가르침 속에서 숨어있던 그 천생의
피는 사랑의 정열로서 다시 뜨겁게 용암처럼 분출했다. 그는 죽음
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피로써 자기가 가장 관심을 둔 사람의 억울함과 자
기의 억울함을 씻고 싶은 일념 볕이었다.
격렬한 장풍은 하늘을 뒤덮고 땅을 흔들었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비가 올 것만 같이 음산했다.
화무결은 종횡무진하여 쉴사이 없이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연남천은 마치 강철로 만든 견고한 벽처럼 그의 공격을 받아냈다.
화무결의 머리카락은 엉성하게 헝클어져 이마에 흘러내렸다. 그
의 얼굴은 격동하는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장세(掌勢)는 예리한 못과 같았으나 연남천 앞에서는 바람
에 휘날리는 가랑잎처럼 무력화 되어 버렸다. 그러나 연남천의 권
세(拳勢)는 마치 천근의 망치처럼 그를 후려쳤다.
화무결은 자신의 몸이 흙 속으로 박혀 들어가는 것 같은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점차 숨을 쉬기도 벅차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고 절망하지도 않았다. 그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물러서지 않을 결심이었다.
그러나 이때 돌연 연남천이 몸을 뒤로 날려 물러서면서 입을 열
었다.
"멈추어라!"
화무결이 숨을 거칠게 내쉬며 물었다.
"왜 멈추자는 것이오?"
연남천의 눈길이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비록 동 선생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네가 거짓말
을 하지 않은 것으로 믿겠다."
"?......."
"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갑자기 너를 믿겠다고 하
는 이유를 알지 못 하겠는가?"
"그렇소."
"거짓말을 한 사람은 마음이 허할 것이고, 마음이 허하면 강렬
한 수법을 쓰지는 못 해."
화무결이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하늘을 향해 대소했다.
"지금에야 믿는다면 너무 늦지 않았을까요?"
"자네를 모독한 것을 용서하게."
화무결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사리가 분명하고 절대로 우기지를 않으니 당신은 과연 천하의
영웅이오. 정말 예삿 인물들은 따르지 못 할 것이오, 소인은 당신
과 싸울 기력이 남아 있다해도 지금은 감히 손을 쓰지 못 하겠
소."
"그러나 나는 여전히 손을 쓰겠네 !"
화무결은 놀랐다.
"네?"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알지만 나는 너를 보내지 않겠
어. 너를 붙잡아 두겠다."
"그건 무슨 이유요?"
"동 선생이라는 자는 너와 무슨 관계가 있는 모양인데?"
"그렇소, 관계가 있소."
"그가 강소어를 감금한 것은 자네 때문인가?"
"내가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지는 않았소. 그러나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소."
연남천이 소리쳤다.
"바로 그거야. 그가 강소어를 붙잡고 있으니 나도 너를 잡아 두
겠다는 것이다. 그가 강소어를 놓아 주면 나도 너를 놓아 주겠
다."
그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무거운 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가 만약 강소어를 죽이면 나도 너를 죽여버릴 테다."
"그것은 공평하군요."
"내가 하는 일은 항상 공평을 원칙으로 삼고 있어!"
"그러나 당신이 철 아가씨에게 한 말은 공평치 못 하오. 그녀는
......."
그는 이 말을 하면서 돌연 나무 밑의 철심난이 사라진 것을 발
견하였다. 마음이 산산조각으로 갈라진 아가씨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연남천이 소리쳤다.
"너는 자원하여 나를 따라 가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다시
손을 쓰게 하겠는가!"
"따라갈 용의는 있으나 지금은 가지 않을 것이오."
"왜?"
"만약 이 일 때문에 철 아가씨에게 무슨 사고가 생긴다면 당신
이 나를 보내준다 해도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연남천은 크게 웃었다.
"좋아, 내가 철심난과 강소어를 찾기 전에는 우리는 해어질 수
없겠군."
"그렇소!"
동 선생은 소어아를 안고 다시 나무 위로 올라섰다.
그 나무는 가지가 많았고 높이가 약 일장이 되었다.
동 선생은 소어아를 가지 위에 올려 놓고 나무잎이 무성한 잔가
지들로 덮기 시작했다.
소어아는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미소를 띠
고 있었다.
"정말 좋은 은신처로군.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는데 오늘은 잠을
푹 자겠는 걸."
동 선생이 싸늘하게 말했다.
"점잖게 이곳에서 자고 있어라."
"당신은 가려고?"
"흥!"
"당신은 고독을 좋아하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열난 사람이라
나를 지키지는 않을 줄 알고 있었소."
동 선생이 역시 싸늘하게 웃었다.
"도망갈 생각은 말아라! 매일 너를 보러 올 테니까. 우선 할 일
을 다 처리한 후 너를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마."
"손가락 조차도 움직일 수 없으니 나를 길거리에 내버려 둔다
해도 달아나지 못 할 것이오."
"사리판단을 잘 해서 다행이로군!"
소어아는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그런데 만약 비가 내리면 어떻게 하죠? 내가 비를 맞으면 병이
걸릴 테고, 병에 걸리는 것은 좋지만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
게 되면 당신의 명예에 손상을 입게 되니 말이오."
그는 웃으면서 계속 말했다.
"당신은 나를......"
동 선생은 싸늘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혹 네가 큰 병에 걸린다 해도 나는 치료해 줄 수가 있다."
소어아는 생각을 거듭한 후 다시 말했다.
"나도 어디가 부러질 텐데?"
"그런 염려는 마라."
소어아는 눈을 크게 뜨고 계속 말을 이었다.
"독수리 같은 것들이 내 눈을 비둘기 알인줄 알고 삼켜버리면
어떻게 하겠소?"
이 말에는 동 선생도 노기를 나타냈다.
"왜 그렇게 쓸데없는 말이 많으냐??
"나는 다른 재주가 없소. 그저 남을 말로 괴롭히는 재주 밖에는
귀찮다고 느끼면 날 죽이시오. 그러면 될 테니까."
동 선생은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이렇게 귀찮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목숨을 끊어 놓았을 일이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어떻든 간에 죽일 수가 없었다. 소어아는 단
하나 그가 세상에서 죽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동 선생은 화가 치밀어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조차 했다. 그는
수건을 한 장 꺼내더니 소어아의 얼굴을 덮고 무서운 소리로 말했
다.
"이렇게 하면 되겠나?"
소어아는 깊이 한숨을 내쉬면서 웃었다.
"당신의 수건은 정말 향기로운데요. 혹시 아가씨한테서 받은 정
표가 아니오?"
동 선생은 더욱 크게 분노를 느낀 모양이다.
"넌 왜 입을 다물고 있지를 못 하지!"
"나의 혀를 점해두면 말을 못 할 텐데요. 그러나 당신도 아시겠
지만 혀를 점하며. 세 시간 이상을 견딜 수 없소."
그는 웃으면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만약 혀를 점해두고 세 시간마다 나의 숨을 틔워줘야 한다면
아마 당신이 상당히 귀찮을 거요."
동 선생은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듯했다.
"너는 아는 것도 많구나!"
"하지만 그것 말고도 방법이 있소."
그는 말을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것은 가는 것이오, 소위 삼십육계요. 가버리면 내가 무슨 말
을 해도 듣지 못 할 테니까."
동 선생은 그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이미 몸이 나무를 내려가
고 있었다.
소어아는 일부러 탄식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가는 것은 좋으나 절대로 일찍 오지는 말아라. 누가 나를 구할
지도 모르니."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 선생이 다시 달려오더니 그
의 얼굴에 덮은 수건을 제치며 무서운 소리로 물었다.
"네가 말한 사람이 누구냐?"
소어아는 일부러 놀라는 척했다.
"아! 내가 한 말을 들었소?"
"백장 이내에서는 나르는 낙엽도 나를 속이지 못 해."
소어아는 다시 탄식을 했다.
"이렇게 해두면 결코 남들이 나를 발견할 수 없을 텐데 누가 나
를 구할 수 있겠소? 그냥 해본 말이오."
동 선생도 절대로 사람이 그를 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지는 않
았다. 그러나 소어아의 말을 듣자 오히려 의심이 생겨 다시 언성
을 높였다.
"말을 안 할 테냐?"
"무엇을 말하라는 거요?"
"누가 너를 구한다는 거냐?"
"당신은 생각도 못 하오?"
동 선생은 한참을 침울하게 생각하다가 업을 열었다.
"그렇다. 어쩌면 화무결이 돌아와 너를 구할 지도 모르지."
그는 소어아를 안고 나무 밑으로 내려왔다. 소어아는 암암리에
웃고 있었다.
사실 소어아 자신도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나무 위에 있고 싶지가 않았다. 나무 위에서는
도저히 달아날 기회가 없는 것이다. 사실 그는 동 선생 곁에서 계
속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고 그 틈을 이용해서 달아날 계산을
하고 있었다.
나무 밑으로 내려온 동 선생은 잠시 주저하고 서있었다. 소어아
는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를 어디로 데려갈 작정이오?"
"흥!"
"나를 이렇게 계속 안고 다닐 작정이오?"
"흥!"
"난 며칠 동안 목욕을 하지 못 했는데 당신은 내가 더럽지도 않
소?"
그의 말이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동 선생은 손을 놓아 버렸
다.
소어아는 '털퍼덕'하며 땅에 떨어졌다.
"아야, 큰일났소. 뼈가 부러진 것 같소."
동 선생은 발로 그의 다리의 혈도를 걷어차며 소리쳤다.
"일어서서 나를 따라와라."
소어아는 양다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맛살
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뼈가 부러졌는데 어떻게 일어서겠소. 이제부터는 정말 나를 안
고 다녀야겠소!"
동 선생은 기가 막힌지 소리를 질렀다.
"너의 뼈는 무엇으로 만들어졌길래 그렇게 가볍게 떨어졌는데도
부러진단 말이냐?"
"떨어져서 부러진 것이 아니라 당신이 걷어차서 부러졌을 거요.
아! 아이구 아파!"
소어아는 신경질을 부리면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동 선생은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 부러졌는가?"
"믿지 못 하겠다면 좀 만져 보시오."
동 선생은 한참 주저하다가 결국 몸을 구부리고는 소어아의 다
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니 거기가 아니오."
"그럼 어딘가?"
"넙적다리가 아니고 좀 더 윗쪽이오."
그러자 동 선생은 당황한 듯 돌연 손을 거두더니 그 자리에 우
두커니 서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소어아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왜 만지지 못 하오? 당신 혹시 정말 여자가 아니오?"
동 선생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닥쳐 !"
소어아는 여전히 혀를 내밀면서 역시 웃었다.
"간단하지. 천으로 내 입을 막으면 되지 않겠소!"
동 선생은 분명히 천으로 소어아의 입을 막아 둘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소어아의 말을 따라 한다는 것도 우스운 모양이었다.
동 선생은 싸늘하게 쏘아부쳤다.
"왜 내가 네가 말하는 대로 들어야 한단 말이냐?"
소어아는 '피식' 웃으며 비웃는 듯한 투로 말을 받았다.
"나의 말이 매우 감미롭고 듣기 좋은 모양이지요? 내 옆에 앉아
우리 재미있게 이야기나 나눕시다."
동 선생은 그를 바라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부들부들 떨었
다. 그는 지금까지 세상에 자신이 해결하지 못 할 일이 없다고 생
각했고, 또 자기를 상대하여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강소어라는 골치덩어리는 그
의 일생에 처음 만난 괴물이었다.
원수상면
연남천과 화무결은 화림(花林)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연남천은
비록 화무결을 볼모로 하기로 했으나 그의 혈도를 점하거나 하지
는 않았다. 그는 화무결이 도망가지 않겠다고 한 이상 절대 말썽
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화무결은 하늘을 올려다 보며 가볍게 탄식을 토했다.
"강소어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언제 동 선생의 손아귀에 들어갔지?"
"어젯밤이오."
연남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가 동 선생의 손아귀에 들어간 지 벌써 하루가 됐군."
"그러나 연 대협은 안심을 하시오. 동 선생은 절대로 그를 해치
지는 않을 것이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의 말은 그 연유를 몰라도 믿을 수 있는 경우가 있
소."
연남천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생각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
였다.
"동 선생이 그렇게 무서운 무공을 지니고 있다면 내가 왜 들어
본 적이 없을까? 넌 혹시 그의 내력을 아느냐?"
"오직 그의 무술이 불가사의하다는 것을 알 뿐이오. 그의 내력
은 하나도 아는 것이 없소."
"음! 만약에 내 짐작이 맞다면 그는 필시 어느 고수가 이름을
감추고 변장을 한 것일 게야."
"천하에 그 누가 그런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겠소?"
"이화궁주!......."
화무결은 고개를 흔들며 업을 열었다.
"스승이 왜 다른 사람으로 변장을 해야 한단 말이오? 왜 굳이
저를 속이겠소. 연남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생각에 그 동 선생이란 사람이 정말 소어아를 너에게 무사
히 데려다 줄 것 같으냐?"
화무결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동 선생은 어둠을 타고 소어아를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그 방
법외에는 당장 별다른 수가 없었다. 소어아는 침대에 누워 코까지
골며 잠에 골아 떨어졌다. 동 선생은 마치 인형처럼 의자에 꼼짝
하지 않고 앉아서 소어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소어아는 마치 어머니 곁에서 잠을 자고 있는 어린애처럼 입가
에 미소까지 띠우고 잠이 들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이상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으며 어린애처럼 순진하
게 보였고 사랑스럽기만 했다.
동 선생은 그의 얼굴에 그어진 영원히 가시지 않을 칼자국에 눈
동자가 머물자 몸을 부르르 떨며 의자를 꽉 움켜 잡았다. 그의 싸
늘한 눈동자에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그러자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의자의 손잡이가 부러져버렸
다. 그 소리에 소어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눈을 비비며 그
를 향해 웃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오랫동안 잠을 잔 모양이지요?"
동 선생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아주..... 오래 되었지."
그는 억지로 말소리를 평온하게 하려 했으나 떨리는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쭉 거기 앉아서 나를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흥."
소어아는 기지개를 펴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내가 당신의 침대를 차지해 버렸으니 정말 죄송하군요."
동 선생의 눈동자가 소어아의 다리에 머물자 갑자기 무서운 목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 너는 다리를 다치지 않았구나?"
소어아는 그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문쪽으로 결어나
갔다.
동 선생이 소리쳤다.
"어딜 가려는 거지?"
"난 잠에서 깨어나면 뒷간에 가는 버릇이 있소."
동 선생은 울컥 치미는 분노를 간신히 참는 듯했다. 그러나 그
의 목소리는 날카로왔다.
"못 간다."
소어아는 쓰디쓴 표정을 지었다.
"못 간다면 바지에 실례를 할 수밖에 없소. 냄새가 별로 좋지
않을 텐데."
동 선생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 네가 감히!"
"아무리 흉악하고 살인을 밥 먹듯 하고 다니는 사람도 대변을
보지 못 하게 하지는 않을 거요."
동 선생은 눈에서 불꽃을 내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기만 했다.
"날 대변을 못 보게 하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소. 지금 나
를 죽이시오, 난 지금....... 참을 수가 없소."
그는 말을 하면서 바지를 내리려 했다.
동 선생이 급히 소리쳤다.
"안 돼...... 여기는 안 돼......."
"그럼 나가도 되겠소?"
"어서 꺼져라!"
소어아는 걸어 나가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안심을 할 수 없다면 뒷간 밖에서 지키시오."
동 선생은 정말로 그를 따라 나셨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깨끗한 성질이어서 남이 만졌던 물건을 절
대로 만지지 않을 정도였을 뿐만 아니라 일생 동안 남과 같이 밥
을 먹어본 적도 없었다. 그의 앞에서 사람들은 숨도 크게 쉬지를
못했었다.
그런 자기가 뒷간 밖에 서서 남이 대변보고 나오기를 기다리게
될 줄이야!
약 반 시간 후에야 소어아는 배를 만지면서 천천히 걸어 나왔
다. 동 선생은 불 같이 노했다.
"그 안에서 죽은 줄 알았다!"
"며칠 동안 참았던 것을 한꺼번에 청산하자니 자연히 힘이 들었
소."
동 선생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을 했던지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어아는 여전히 웃음을 띠우고 말을 이었다.
"뱃속의 물건은 청산했으니 이젠 밥을 먹읍시다."
동 선생은 다시금 크게 노한 기색이었다.
"네가...... 네가 감히 뭐라고?"
"먹고 싸고 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일인데 왜 그러시오? 당
신은 밥 먹자는 말을 처음 듣소?"
동 선생은 기가 막혔다. 한참을 어안이 벙벙해있는 듯하더니 돌
연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비록 뒷간에 가는 것을 막지는 못 했으나 먹는 것은 금할 수가
있어."
"먹지 못 하게 한다구요?"
"내가 줄 때만 먹고 그렇지 않을 땐 입을 다물고 있어라, 알았
는가?"
소어아는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내가 밥을 먹고 싶다고 할 때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주는 것을 먹지 않고 굶어 죽어버리겠소, 그렇게 되면 당신의 계
획은 끝장이 나는 거요, 알겠소?"
동 선생이 소어아의 옷깃을 움켜쥐고 소리쳤다.
"네..... 네 녀석은 도대체........"
소어아의 얼굴에서는 시종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비록 당신을 이길 수는 없어도 굶어 죽을 수는 있소. 안 그렇
소?"
동 선생은 한참 생각을 거듭하더니 결국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
었다.
"나를 따라와!"
"나는 당신을 따라 가지 않겠소. 당신이 나를 따라 오시오. 물
론 내가 먹는 음식값은 당신이 치루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나
는 굶겠소."
동 선생은 화가 치민 나머지 온 몸이 떨렸으나 듣지 못 한 척
했다.
연남천과 화무결은 화림을 두 바퀴나 돌았으나 결국 철심난과
소어아를 찾지 못했다. 한참을 가만히 서있던 연남천이 돌연 입을
열었다.
"너 술을 할 줄 아느냐?"
"약간은 하지요."
"좋아, 우선 술이나 마시자."
두 사람은 성내로 들어왔다.
연남천은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강호 일대의 안주는 달고 북방의 것은 싱겁구나, 사천의 안주
는 맵지, 그것이야 말로 사나이 대장부의 구미에 맞는 듯한테 자
네의 의사는 어떤가?"
"성내에 양자강이란 술집이 있다고 하는데 사천요리가 일품이라
더군요."
성 안은 복잡하고 사람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으며 양자강 주루
에도 술꾼들이 꽉 차 있었다.
거기에서 강별학이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이틀간 그는 불편한 일들이 많았다. 소어아, 화무결......
그리고 그의 아들 강옥랑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때 돌연 한 사나이가 급히 이층으로 달려오며 강별학에게 소
리쳤다.
"화 공자가 돌아왔습니다."
강별학은 막 입술에 댄 술잔을 내리며 급히 물었다.
"어디에?"
"바로 밑에 있는데 이곳에 와서 술을 마시려는 것 같습니다."
"혼자냐?"
"한 남루한 옷을 입은 사나이가 같이 있는데 마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별학의 안색은 납처럼 창백해졌다.
그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빨리......빨리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막아라."
그러나 이미 화무결과 연남천은 이층으로 결어 올라오고 있었
다.
화무결은 강별학을 보자 미소를 띠우며 그에게로 걸어왔다.
강별학은 상 위에 손을 을려놓은 채 멍하니 서있었다. 화무결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강 대협도 이곳에 계신줄은 몰랐군요."
"네..... 네........ "
그는 머뭇거리며 연남천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는 목이 바싹 탔
고 두 다리가 맥이 빠져 주저앉을 것 같았으며 목이 막혀 말이 제
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 긴장해 있었다.
"후배는 벌써부터 연 대협의 협명을 흠모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뵈오니 정말 영광입니다."
연남천은 크게 웃었다.
"그렇소. 비록 우리가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만 흉금을 털어놓
고 술을 마셔봅시다. 하하하!"
이 '처음 만난 사이'라는 말을 듣자 강별학은 이상한 생각이 들
었으나 크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말 통쾌히 마셔야지요. 취하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
습니다."
연남천이 상을 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좋아,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기로 합시다. 빨리 술가져 오
너라."
동 선생과 소어아가 여관을 나올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
고, 길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길 양쪽의 점포들도 어느 사이에 문
이 닫혀 있었다.
소어아는 무척 기쁘다는 듯이 활짝 웃으면서 등짐을 지고 여유
있게 걸었다.
"너무 급하게 서둘지 마시오. 식당이 문을 닫았어도 돈만 있으
면 되오. 밥을 못 먹을까봐 걱정이오?"
동 선생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았다.
"여기 식당이 있으니 네가 문을 두드려 보아라."
"이 식당의 이름은 삼화루요. 필시 강호의 요리일 것이니 안 되
오....... 음! 저기 진북평이 있는데 필시 북방 요리라 그것도 안
되오."
동 선생은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어 소리쳤다.
"왜 안 된다는 거냐?"
"강호의 요리는 새우가 별미인데 밤이 되면 새우가 신선하지 못
하고, 북방 요리 역시 마찬가지요."
동 선생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도대체 무엇을 먹겠다는 것이냐?"
"짜고 매운 요리, 즉 배에서 땀이나는 사천 요리가 제일 좋소."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되느냐?"
"안 되오. 사람은 누구나 친구에게는 약간 미안한 짓을 할 수도
있지만 절대로 자기의 위장을 속여서는 안 되오. 친구는 내가 어
려울 때는 모두 달아나지만 위장은 한평생을 따라다니는 것이기
때문이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나를 두려워 하는데 너는..... 너는 어째
서 나를 두려워하지 않지?"
소어아는 웃었다.
"남들은 당신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 하는 것이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절대로 직접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 두려워 한단 말이오."
동 선생은 돌연 몸을 돌려 큰걸음으로 걸어갔다. 소어아는 또
크게 웃었다.
"화를 낼 필요는 없소. 당신이 화를 낼수록 내가 기뻐하는 줄
알텐데 왜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오?"
그들이 걷고 있는 길 앞에는 이층 집이 한 채 있었는데 아직까
지 불이 켜져 있었다. 그들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불빛을 받아 그
집의 간판이 보였다.
'양자강 주루 정종천채'
그러나 이때 양자강 주점은 이미 손님이 다 나가고 없었고, 몇
명의 종업원만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비질을 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자식들, 저 세 놈의 자식들은 어디서 왔는지 정말 술통이다.
밤이 이렇게 깊도록 가지 않고 우리를 괴롭히다니......."
이때 이 몇 명의 종업원들은 문득 한 사람이 앞에 서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한 가면을 쓴 사람이 언제 왔는지 싸늘하게
그들을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소어아는 히죽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넋을 잃고 있느냐. 우리 나으리는 비록 동으로 된 가면을
쓰고 괴상한 모습이지만 금은 얼마든지 있다. 빨리 손님대접을 해
야지."
한 종업원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영업이 이미 끝났습니다."
동 선생은 그의 말이 끝나자 마자 돌연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
던져버렸다.
그 종업원은 마치 구름을 탄 듯이 날아가버렸다. 그가 정신을
되찾아 보니 식당의 기둥을 안고 있었다. 그는 비록 부상을 입지
는 않았지만 간이 콩알만해져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소어아가
받지 않았다면 온 몸이 박살날 뻔했다.
동 선생이 말했다.
"그가 먹고 싶어하는 것을 전부 가져와라. 단 한 가지라도 모자
라면 네 녀석들을 살려놓지 안 겠다."
종업원들은 결코 안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소어아는 크게 웃었다.
"유쾌하군. 당신과 같은 사람과 식사를 하니 정말 유쾌하오."
"우선 네 그릇의 양채를 가져와라. 그리고 닭과 소고기 또 오리
고기와 불고기......"
한참 음식 이름을 줄줄이 대던 소어아는 숨을 돌리며 웃더니 다
시 입을 열었다.
"밤중이니 너무 많은 안주는 필요 없지, 그러니 이 정도면 됐
다. 그러나 술은 좋은 것으로 가져와야 한다."
종업원들은 모두 넋을 잃고 말았다. 그 요리들은 모두 스무 사
람이 먹을 분량이었다. 이때 한 종업원이 머리를 조아리며 더듬거
렸다.
"미안합니다. 우리...... 우리 점포의 술은 벌써 세 분의 손님
이 몽땅 마셔버렸습니다."
동 선생이 재빠르게 말을 받았다.
"다른 곳에서라도 사 와야지. 조금만 모자라도 너희들은 목숨을
내놔야 해!"
종업원들은 모두 탄식을 했다. 방금 세 놈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두 놈의 악당을 만났으니.......
반 시간 안에 술과 안주가 모두 주문대로 올려졌다. 소어아는
곧 걸신 들린 것처럼 음식을 먹기 시작했지만 동 선생은 그저 묵
묵히 서서 지켜보고 있을 뿐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당신은 왜 앉지를 않죠? 그렇게 서있으니 내가 불편하지 않
소."
그는 술잔을 들고 다시 웃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 화가 나서 먹지 않으면 나도 기분 잡치는 것이 아니겠
소?"
그러나 동 선생은 그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그저 서있을 뿐이
었다.
소어아는 요리를 골고루 먹으면서 연신 탄성을 발했다.
"입은 당신 얼굴에 달려있소. 그러니 당신이 먹지 않으면 나도
어쩔 수가 없지. 하지만 그렇게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면 어떻
게 견디겠소?"
동 선생은 돌연 손을 내밀어 옆의 탁자를 부수어버렸다. 가슴
속에 누적된 울분을 터뜨리고야 만 것이다.
소어아는 그것을 보고도 재미있다는 듯 웃을 볕이었다."탁자는
당신과 원수가 아닌데 왜 탁자를..... 차라리 나를 놓아 주는 것
이 좋겠소. 더 고생하기 전에 말이오."
동 선생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 하고 소리쳤다.
"흥, 너를 놓아달라고? 그런 꿈은 아예 꾸지도 마라!"
소어아는 술을 한 잔 들이키고는 또 웃었다.
"사실 지금 나를 놓아 준다해도 나는 가지 않을 것이오. 잠을
잘때 보호해주고 술을 마시면 돈을 내주는 사람을 내가 어디서 또
찾는단 말이오?"
동 선생은 그를 한동안 쳐다보고 있더니 싸늘하게 한마디를 내
뱉었다.
"살아있을 때 많이 즐겨라. 죽을 때는 고통스럽게 죽게 될 테니
까."
소어아는 그 말을 듣자 젓가락을 내던졌다.
"내가 한 번 물어 보겠소. 우리는 서로 알지도 못 하는 사이인
데 왜 나를 미워하는 것이오? 또 당신은 그토록 나를 미워하면서
왜 직접 나를 죽이지 않는 거요?"
동 선생은 천장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웃은 뒤 입을 열었다.
"그 비밀을 너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영원히 모른다고?"
동 선생은 힘주어 다짐하듯 말했다.
"그렇다. 영원히..... 영원히."
"알지도 못 하는 사람에게 죽어야 하는 것도 억울한데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죽는다면 그것 같이 더 비참한 어디에
일이 있겠소?"
동 선생이 한바탕 음산하게 웃었다.
"그렇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비참한 일이지. 너는
그 비참한 운명을 빠져나갈 수가 없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그 비
밀을 알 수는 없으니까."
그는 미친 듯이 크게 웃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실컷 즐겨라. 시간이 있을 때 즐겨보란
말이다."
연남천, 화무결, 강별학, 세 사람은 몸을 비틀거리면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강별학은 평생 처음 이렇게 많은 술을 마셨다. 사람이 비밀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취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상례였
지만 연남천이 거듭 잔을 권하자 그도 눈치를 보아가며 따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연남천은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세 마리의 말, 그리고 아가씨들, 좋은 술로 많은 고난을 잊어
버린다........"
그 노래 속에는 슬픔이 담겨 있으면서 울분이 섞여 있는 듯했
다.
연남천은 갑자기 강별학의 손을 잡더니 무서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너도 강씨냐?"
강별학은 흠찔 놀랐으나 곧 표정을 바꾸었다.
"후배의 이름은 강별학인데 연 대협께서는 벌써 잊으셨습니까?"
연남천은 하늘을 향해 팔을 뻗으며 길게 탄식을 했다.
"이 세상은 가장 좋은 사람이나 가장 악독한 놈이나 모두 강씨
라니......."
"그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 둘째 동생 강풍은 아주 훌륭한 인재였지, 그러나 강금
은......."
연남천의 입에서 '강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강별학은 온몸의
신경이 가시처럼 곤두섰다. 연남천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놈은 몇 푼 은자에 동생을 배반했어!"
강별학은 전신이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왔다.
연남천은 양손으로 강별학의 어깨를 불쑥 쥐더니 더욱 큰소리로
소리쳤다.
"애석하게도 난 그 놈이 어디로 달아났는지를 몰라, 그놈을 잡
으면 반드시 산산조각을 내버리겠어."
강별학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하여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연
남천의 손은 그의 뼈를 부술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다.
강별학은 억지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연 대협은 후배의..... 후배의 어깨를 부술 작정이십니까?"
연남천은 문득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았다. 그는 다시 노래를
부르며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강별학은 조용히 화무결의 옷깃을 끌어당기며 조심스레 말을 건
냈다.
"화 공자, 연 대협이 이미 취한 것 같으니 우리 그만 인사를 하
고 갑시다."
화무결은 미소를 띠웠다.
"나는 강 대협과 작별 인사를 해야겠소."
강별학은 놀랐다.
"그대...... 그대는 연 대협과 동행하겠다는 것이오?"
화무결은 강별학을 바라보았다.
"그렇소."
강별학의 온 몸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당신의 스승이 알면........"
화무결은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스승님이 안다 해도 나는 같이 가야만 하오."
강별학은 잠시 동안 할 말을 잊고 서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는 것이오?"
"강소어를 찾으러 가오."
강별학의 몸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연남천이 아직 내 정체를 모르고 있구나! 그가 강소어를 만나
게 되면 끝장이다.)
세 사람은 공교롭게도 동 선생이 묶고 있는 여관을 지나가게 되
었다.
강별학이 눈동자를 굴리다가 돌연 웃었다.
"이 여관에는 좋은 술이 있는데 연 대협께서는 한 잔 하시지 않
겠습니까?"
연남천이 호탕스럽게 웃었다.
"자네는 사람의 마음을 잘 아는군...... 가자, 우리 들어가자."
세 사람은 힘차게 여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것을 본 종업원
은 매우 불쾌했다. 그러나 단합비의 손님 강 대협이 그들 속에 있
는 것을 보자 기분 나쁜 표정을 보일 수가 없었다.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연남천은 술을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강별학은 화장실에 가는 척 하며 몰래 동 선생의 방으로 건너갔
다.
그는 동 선생을 찾아 연남천을 상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방에는 예의 그 은은한 향기가 풍겨나오고 있을 별 동 선생은 없
었다.
강별학의 실망은 대단했다. 그가 힘없이 방으로 돌아와 보니 연
남천은 이미 많은 술을 마셔 취한 빛이 역력했다.
화무결도 많이 취한 것 같았다. 강별학은 급히 다시 밖으로 나
가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고 술을 다 토해버리고는 방으로 돌아왔
다.
그는 다시 잔을 들어 술을 권하기 시작했다.
연남천은 마치 냉수를 마시듯 술을 퍼마셨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연남천이 드디어 탁자에 쓰러지더니
잠이 들은 듯했다.
이때 화무결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술이 좋은 친구를 만났으니 취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지.
자! 한 잔 더........"
그러나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상에 엎드려 코를 골기
시작했다.
강별학은 한동안 가만히 앉아 연남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극도의 긴장
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연 대협, 제가 한 잔 따라 드릴까요?"
연남천은 코를 골 뿐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는 이번에는 화무결을 향하여 속삭이듯 말했다.
"화 공자, 한 잔 더 하겠소?"
화무결도 탁자에 엎드린 그대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목 부인
강별학은 자신의 가슴이 크게 고동치고 있음을 느꼈다. 만약 강
호의 왕이 되려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였다.
강별학의 마음 속에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강별학아 강별학아, 모험을 해선 안 돼. 연남천과 화무결이 어
떤 사람들인데 그렇게 쉽게 피살되겠느냐!)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손은 온통 땀투성이었다.
(하지만 강별학아, 지금 그냥 지나치면 영원히 다시 이런 기회
가 오지 않을 것이다. 오늘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나중에는 그들
의 손에 네가 당하고 말 것이다. 무엇을 두려워하지? 무엇을 주저
하느냐? 두 사람은 이미 취해 세상 모르게 골아 떨어져 있는데 너
는 왜 손을 쓰지 않지?)
강별학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다시 주저 앉았다.
"안 돼! 일이 이렇게 쉽게 될 리가 없어.)
그의 손은 더욱 떨리고 있었다. 그는 의자를 꽉 움켜잡았다.
(하지만 이런 일은 나 자신조차도 믿지 못 하니 그들은 더욱 믿
지 못 할 것이다.)
이때 갑자기 강별학의 눈에서 빛이 번득였다.
(그렇다. 화무결과 연남천은 절대로 내가 그들을 죽이리라고 생
각지는 못 했을 것이다. 이것은 정말 두 번 다시 만나기 어려운
기회다....... 강별학아, 너는 평소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더니
오늘은 왜 그리도 두려워 하느냐? 지금 손을 쓰면 천하가 너의 것
이 된다.)
강별학은 결심한 듯 분연히 일어서더니 탁자로 달려가 전력을
다해 연남천의 머리에 일격을 가했다.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천하를 종횡무진하던 연남천이 결국 이 비겁한 자의 손에 의해
죽게된 순간이었다.
바로 이때 화무결이 돌연 몸을 일으키더니 소리치며 몸을 날렸
다.
"강별학, 오늘에야말로 당신을 알겠소. 과연 강소어는 당신을
억울하게 한 것이 아니었소!"
그러나 연남천 역시 술에 취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강별학이
일장을 내려치는 순간 연남천도 번쩍 손을 쳐들었다.
'퍽' 하는 소리가 나며 강별학의 몸이 튕겨져 벽에 부딪쳤다.
그는 온 몸의 골격이 부셔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화무결은 놀라움에 눈을 크게 뜨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당신도 취한 척하고 있었군요?"
연남천도 따라서 크게 웃었다.
"몇 잔 술로 취할 내가 아니야. 나는 이 녀석이 술을 토해내기
에 무엇을 하는지 한 번 보고 싶었지!"
그는 돌연 웃음을 멈추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강별학, 아직도 할 말이 있느냐?"
강별학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만 내......이십 년 동안 무술을 연마하고도 당신의 일장 조
차 받지 못 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나는 너와 아무 원한이 없는데 너는 왜 나를 해치려고 하느
냐?"
강별학은 순간 눈앞이 확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 원인을 모른다는 말이오?"
"내가 묻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강별학은 일부러 길게 탄식을 했다.
"영웅은 서로 공존해서 살지 못 하오. 당신과 나는 같은 하늘
아래 설 수가 없소."
그는 입술을 깨물면서 목청을 돋우었다.
"그러나 무술로는 이기지 못 하니 어찌 하겠소."
"비록 무술이 천하무적이라도 그런 심보로는 '대협'의 자격이
없다!"
연남천은 양주먹을 불끈 쥐고 한발 한 발 강별학 쪽으로 다가갔
다.
"당신....... 당신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연남천은 무서운 소리로 말을 받았다.
"너는 대협의 이름을 더럽혔고 수단도 비겁했다. 오늘 내가 강
호를 위해 너를 해치우지 않으면 금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너의
손에 죽을지 몰라."
"나를 죽이겠소?"
"그렇다."
대답을 하는 것과 동시에 연남천은 격렬한 일장을 뿜어냈다.
강별학은 땅을 튕굴며 그의 일장을 피한 후 돌연 크게 웃었다.
"당신은 절대로 나를 죽이지 못 할 거요!"
연남천은 눈을 치떴다.
"왜 너를 죽이지 못 해?"
"나를 죽이면 천하의 어느 누구도 강금의 행방을 모르게 될 것
이오. 나를 죽인다면 영원히 그를 찾을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
오!"
연남천은 놀랐다.
"너...... 네가 강금의 행방을 안단 말이냐?"
강별학은 유유히 일어서며 말했다.
"그렇소."
연남천은 그의 멱살을 움켜 잡으며 소리쳤다.
"그놈이 어디에 있지?"
강별학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있겠지만 나는 영원히 그 사람의 행방을
말하지 않을 것이오."
"난 네가 말을 하게 만들 수 있다."
강별학은 빙긋이 웃었다.
"일대의 대협이 가혹한 형을 가하여 협박을 하는 것은 그 신분
을 더럽히는 것이 아닐까요?"
연남천은 그 말을 듣자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리고 말았다.
강별학은 미소를 보이면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 정히 그것을 알고 싶다면 나의 두 가지 요구를 들어줘
야 하오."
연남천은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좋아, 말을 한다면 너를 놓아주겠다."
"연 대협께서는 나의 조건을 너무 무시하는 데요?"
"네가 어떻게 하자는 거냐?"
"한 가지는 오늘 나를 보낸 후 금후에도 나를 해치지 않겠다는
것이오."
연남천은 한참 동안 생각해보더니 얼굴을 들었다.
"좋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너를 해치울 수도 있을 테니까!"
강별학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내가 강금의 행방을 말하면 당신은 그 비밀을 지켜야
하오. 우리 세 사람 외에는 그 누구도 강금의 행방을 알게 해서는
안 되오."
연남천이 역시 큰소리로 말했다.
"이건 나 자신의 일이다. 내가 직접 그를 죽여야 하는데 왜 남
에게 알리겠느냐?"
강별학은 야릇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 말을 받았다.
"좋소. 하지만 당신이 그 사람을 죽이지 못 하면 어떻게 하겠
소?"
"내가 만약 직접 그를 죽이지 못 하면 다른 사람들도 죽이지 못
하겠지!"
"정말이오?"
"나의 말에는 거짓이 없어!"
강별학은 고개를 화무결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화 공자, 그대는?"
화무결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이것은 연 대협의 일이오. 그가 대답을 했으니 나는 할 말이
없소."
강별학은 하늘을 향해 크게 대소했다.
"좋아. 하하하!"
"이제 말해보아라. 강금은 도대체 어디에 있지?"
강별학은 서서히 웃음을 거두면서 연남천을 향해 한 자 한 자
똑똑히 말했다.
"바로 여기에 있소!"
연남천은 경악해서 소리쳤다.
"네......가.......?"
강별학은 계속해서 크게 웃었다.
"내가 바로 강금이오. 그러나 당신은 영원히 나를 해치지 않겠
다고 약속했소!"
연남천은 채찍이라도 맞은 것처럼 뒤로 물러서더니 양주먹을 잡
고 온 몸을 떨기 시작했다. 화무결도 놀라움을 금치 못 하며 물러
섰다.
강별학은 다시 광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당신은 강금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 나를 놓아주었소. 이제 강
금의 행방을 알았지만 영원히 그를 죽이지는 못 하오."
그는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웃음거리가 없다는 듯 웃어제꼈다.
연남천의 눈동자가 빨갛게 변해갔다. 그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무
섭게 소리쳤다.
"내가 너를 용서할 것 같으냐?"
그러나 강별학은 눈을 크게 뜬 채 무섭게 소리쳤다.
"당대의 대협 연남천이 자기가 한 말을 땅에 던질 셈이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연남천은 몸을 떨면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버렸다.
한참을 서있던 그는 결국 몇 발을 물러서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
고 말았다.
"좋아..... 좋다. 내가 약속 했으니 가거라."
"꼭 나를 보내줄 것으로 알았소."
연남천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끊어 놓을 것 같은 소리로 크
게 소리쳤다.
"빨리 꺼져라. 내마음이 변하기 전에 빨리 꺼져!"
강별학은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는 크게 웃으면서 사라져갔다. 방 안은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연남천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느라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화무결이 침묵을 깨고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연 대협, 저는 지금에야 당신에게 진정 탄복했소."
연남천이 비참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주먹과 검으로 두 번이나 나에게 패했으면서도 나에게 승
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멀건히 눈을 뜬 채 원수가 가
는 것을 보고 있는데 나에게 탄복을 한다는 것이냐?"
"나는 당신이 강별학을 그냥 보내는 것을 보고야 연남천이라는
분이 과연 일대 대협이라는 것을 실감했소. 당신이 그를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오. 그러나 그를 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오, 세상
에 강별학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소. 그렇지만 그를
그냥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연남천 한 사람 별일 것이오1"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계속했다.
"세상에 당신보다 더욱 사람을 두렵게 하고 당신보다 더욱 무공
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해도 당신이야 말로 '대협'의 이름을 더럽
히지 않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오!"
"하지만 너는 알고 있는가? G대협'의 이름을 보존하려면 얼마
만큼의 고통을 참아야 하며, 얼마나 많은 외로움을 감수해야 하는
지......."
"저도 지금에야 알았소. 대협이란 명성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wi 남이 하지 못 하는 일을 해야 하
고 남이 참지 못 하는 것을 참아야 하며......."
그는 연남천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그것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니오?"
강별학은 방문을 나서자 만면에 돌던 희색을 감추었다. 그는 비
록 오늘은 연남천을 속였어도 금후로는 일이 많아질 것이라고 생
각했다.
뜰의 한구석에는 대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강별학은 대나무 숲에 몸을 숨기고 연남천과 화무결의 동정을
살폈다.
그는 그 두 사람이 필시 많은 고민과 깊은 분노에 잠겨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난 후 연남천의 큰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연남천과 화무결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두움
속으로 사라져갔다.
(저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강소어를 찾으러 가는 것일까? 저
세 사람은 서로 원수인데 어떻게 해서 같이 어울리게 됐을까?)
강별학은 도저히 그 진상을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를 불안
하게 만들었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면서 한동
안 서있었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돌연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동 선생이 돌아왔다.
강별학은 급히 달려나가려 하다가 그의 곁에 또 한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 사람은 바로 강소어가 아닌
가!
강소어의 얼굴은 잘익은 사과처럼 발갛게 물들어 있었으며 만면
에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동 선생이 강소어와 어울리다니! 그리
고 술까지 취하고 돌아오다니!
강별학은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동 선생을 이용해 연남천과 화무결을 상대하려고 했었다.
그것만이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
런데 그 동 선생이 강소어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닌가.
(저 늙은 것과 조그만 괴물이 언제부터 친구가 됐을까? 동 선생
은 분명히 강소어를 죽이고 싶어 했는데 지금은 마음이 변했단 말
인가? 그가 이미 강소어의 말에 유혹된 것은 아닐까?)
강별학은 놀랍고도 무서웠다. 동 선생과 소어아가 방으로 들어
갈 때까지 그는 여전히 넋을 잃고 서있었다.
그는 자신이 완전히 고립되었다고 느꼈고, 도처에 자기의 적들
만이 우글거리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며 생각에 잠겼다.
"소어아 한 사람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연남천, 화무결, 동 선
생까지 나를 대적하는구나. 이제 죽는 길밖에 없단 말인가! 이 네
사람이 서로 내통을 한다면 천하에 또 누가 그들을 상대할 수 있
단 말인가. 강별학아, 너는 가만히 있지만 말고 무슨 대책이라도
세워야겠다.)
그는 원래부터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더욱이 오늘 같은 상황
이 벌어지자 그는 강소어, 화무결, 동 선생이 힘을 합하여 자기를
상대하려는 것 같이만 느껴졌다.
이미 밤이 깊었고, 대나무 잎에는 이슬이 알알하맺혀 있었다.
그의 얼굴을 타고 땀이 이슬방울이 되어 흘러내렸으며 옷도 함빡
젖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 하는 듯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이 네 사람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나 한 사람의 힘
으로는 도저히........"
이때 나무잎에서 한 마리의 벌레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강별학이 손을 머리 위로 올리자 그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한 마리의 뱀처럼 느껴졌다.
일순간, 그의 얼굴에는 기쁜 빛이 감돌았다.
"맞았어 내가 왜 그것을 생각해내지 못 했을까. 그들을 부르면
된다."
그는 기별 표정으로 숲을 빠져나오려다 돌연 동 선생과 강소어
가 방에 있는 것이 생각나 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 방에서는 아무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불이 켜져 있
을 뿐 창문에 사람의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동 선생과 소어
아는 이미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강별학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너무 생각에 골똘한 나머지 그들
이 언제 나갔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소어아가 다시 방으로 들어올 때는 방 안의 불이 이미 꺼져 있
었고 손을 내밀어도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방 안의 향기가 그들이 나갈 때보다 더
욱 흩어진 것을 느꼈다.
(이 방에 누가 다녀갔단 말인가?)
소어아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돌연 동 선생이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너는 왜 이제야 왔느냐?"
어둠 속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가 만족할 만한 곳을 찾으려니 힘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
가 늦었지요."
그 목소리는 동 선생의 목소리보다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말투
는 동 선생처럼 싸늘하기만 했다.
소어아는 놀라면서 생각했다.
(동 선생 같은 괴물도 여자 친구가 있군. 말소리가 똑 같이 괴
기하니 두 사람은 천생의 한쌍이군.)
그는 불씨를 꺼내어 급히 불을 켰다. 불꽃이 타오르자 소어아는
머리가 어깨까지 늘어진 검은 옷을 입은 여자를 볼 수 있었다. 그
녀는 마치 유령처럼 음산하게 서있었다.
그녀 역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나무로 조각한 것이었고
마치 죽은 자의 얼굴 같이 조각되어 있었다. 비록 불이 켜져 있었
지만 소어아는 소름이 쫙 끼쳐왔다.
이 검은 옷의 여인은 소어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바로 강소어인가?"
소어아는 코를 비비고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소. 내가 강소어요. 나를 아시오?"
검은 옷의 여인이 말을 받았다.
"난 벌써부터 너를 알고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나를 알고 있었단 말이오?"
"동 선생이 있다는 것은 알면서도 목 부인이 있다는 것은 몰랐
던 모양이지?"
"목 부인?"
목 부인은 다시 동 선생에게 얼굴을 돌렸다.
"난 벌써 여기에 도착했는데 당신들 두 사람은......."
"동 선생과 술을 마시러 나가느라 부인을 기다리게 했으니 죄송
스럽소."
목 부인의 눈에 놀란 기색이 나타났다.
"둘이 같이 술을 마시러 나갔었다는 말이냐?"
"동 선생은 저에게 참 잘 대해 주고 있소. 술도 마음대로 마시
게 하고, 내가 매운 것을 좋아한다니까 음식점에 데리고 가서 천
채를 사주었소. 이렇게 좋은 사람은 처음 봤소."
목 부인의 눈에서는 놀란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찌보면 웃
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은 표정이기도 했다.
소어아는 목 부인이라는 여인이 말투는 비록 동 선생과 같이 싸
늘했지만 그 눈만은 동 선생보다 따뜻한 것 같다고 느꼈다.
그는 탄식을 하며 말을 계속했다.
"다만 동 선생은 나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아요, 나를 보살피
느라 자기는 밥도 먹지 못 하고 잠도 자지 못 합니다. 정말 몸이
못쓰게 될까봐 걱정이오. 부인이 만약 동 선생의 친구라면 동 선
생을 대신해서 나를 보살피고 그를 쉬게 할 수는 없겠소?"
목 부인은 동 선생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씨 형님이 귀찮으시다면 저에게 인계를 하세요."
동 선생은 돌연 몸을 일으키면서 '착'하고 소어아의 따귀를 올
려부쳤다. 비록 힘있게 때리지는 않았으나 묘한 수법이었다.
소어아는 별로 아픈 것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머리가 어지
러운 것을 느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서 쓰러지고 말았다.
동 선생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 누구도 내 몸에서 그를 때어놓을 수 없어. 그가 살아 있을
때도 지켜야 하고 그가 죽어서 시체가 썩는다 해도........"
"그러나 저는......."
동 선생은 싸늘하게 웃으면서 목 부인의 말을 가로챘다.
"너도 나에게 충성을 다하지는 않아."
"언니...... 언니는 나 까지도 믿지 못 한다는 거예요?"
동 선생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을 했다.
"월노가 강풍을 데리고 간 그날부터 난 누구도 믿지 않아."
목 부인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언니가 아직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알아요. 제
가 강풍을......"
"너도 그를 사랑했었단 말이지. 그렇지?"
목 부인은 숙였던 고개를 쳐들며 큰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나도 그를 사랑했어요. 하지만 나는 그이를 얻을 생각
을 해보지는 않았어요. 언니와 싸울 생각도 없었고......"
그녀의 싸늘한 말투는 오열로 떨리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모든 것을 언니에게 양보해야 했어요, 언니
가 그 복숭아 나무에 남은 복숭아를 얻기 위해 나를 떨어뜨려 다
리를 부러뜨린 후, 나는 다시 언니와 경쟁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동 선생은 무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숙이고서 담담히 말했다.
"그 일은 잊어다오. 하여튼 간에 우리는 둘다 그이를 얻지 못
했어."
목 부인 역시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
다.
"언니, 미안해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나 봐요. 사실 나도
잊은 지 오래이고 생각하기도 싫었는데......."
그녀는 확실히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은 그녀들만
의 비밀이었다.
안타깝게도 소어아는 혼수상태라서 그녀들이 주고받은 말을 듣
지 못 했다.
소어아는 서서히 의식이 돌아오며 예의 그 이상한 향기를 맡을
수가 있었다.
그는 자기가 아직 여관 방에 누워 있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눈
을 떠보니 자기가 엉뚱한 곳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어아가 누워있는 방은 너무나 화려하고 호화스러웠다. 여관 방
이라면 결코 이렇게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리자 침대 곁에 두 명의 소녀가 서있는 것을 발
견했다.
그녀들은 모두 엷은 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화려한 화관(花冠)
을 쓰고 있었다.
얼굴은 꽃보다 더욱 향기롭고 아름다웠으나 아무런 표정도 없었
고 혈색마저 돌지 않아서 마치 눈사람 같았다.
소어아는 눈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이미 죽은 것은 아닐까? 여기가 혹시 하늘나라는 아닌
가?"
두 소녀는 꼼짝하지 않고 서서 앞을 바라볼 뿐 마치 그의 말을
듣지 못 하고 그를 보지도 못 한 듯한 표정이었다.
소어아는 눈동자를 굴리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죽은 것은 아니구나. 설사 내가 죽는다 해도 절대로 하늘
나라에 올라가지는 못 할 거야. 그리고 지옥에는 너희들처럼 아름
다운 여자들이 없어."
그는 그녀들이 웃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를 바
라보지도 않았다.
소어아는 코를 비비면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
"당신들은 내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 난 은신법을 배운 적이
없는데."
소녀들은 눈동자조차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어아는 감탄을 했다.
"너희들이 웃으면 더욱 아름다울 것 같아서 너희들을 웃기려 했
어. 하지만 뜻대로 되지가 않는군."
소녀들은 여전히 그를 상관하지 않았다.
소어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소리쳤다.
"말을 해라! 왜 말을 하지 않느냐? 당신들은 벙어리나 귀머거리
오? 아니면 장님이오?"
그는 맨발로 그녀들의 앞에 다가가 한참을 바라보더니 다시 그
녀들의 주위를 두어 바퀴 돈 후 이맛살을 찌푸리며 혼자 중얼거렸
다.
"이 둘은 사람이 아닌가? 정말 얼음으로 만들어졌나?"
그는 손을 내밀어 한 소녀의 코를 만졌다.
그때 그 소녀가 돌연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마치 봄철의 새순처럼 부드러웠다.
그러나 다섯 가지 색깔을 칠한 손가락은 마치 다섯 개의 작은 칼
처럼 소어아의 목을 향했다.
소어아는 급히 침대로 뛰어오르며 크게 웃고 있었다.
"당신들은 말을 하지는 못 해도 움직이기는 하는군."
그 소녀는 다시 돌부처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표정을 하고 있으면 쉽게 늙어요."
그는 다시 침대에서 뛰어 내려 버선을 신으며 혼자서 지껄이기
시작했다.
"옛날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매사에 조심성이 없었지. 어느 날
외출을 하게 되었는데 신발을 잘못 신어서 양발 모두에 왼쪽 신발
을 신고 나간 거야. 그는 길을 걸으며 발이 불편하다고 생각했지.
그는 신발을 잘못 신은 것을 모른 채 친구 집에까지 도착했어, 그
리고 친구가 말을 해줘서야 종을 시켜 신발을 바꾸러 보냈지. 그
런데 그 종은 돌아올 때도 빈 손이었어. 왜 그랬는 줄 알고 있
소?"
여기까지 말을 하고 소어아는 참을 수가 없어 웃어버렸다.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사람은 이상히 여겨 하인에게 물어봤지. 왜 신발을 갖고 오
지 않았는가를. 그런데 그 하인은 말하길, '바꿀 필요가 없었어
요. 집에 있는 두 짝은 모두 오른 쪽의 것이던데요' 하는 거야."
그는 허리를 펴지 못 할 정도로 웃어버렸다.
그러나 두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소어아는 탄식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내가 한 번 웃겨보지, 나에게 친구가 하나 있는데 이름
이 장삼이야. 그는 사람을 잘 웃기는 인물이지, 어느 날 그는 다
른 두명의 친구와 같이 길거리를 가다가 한 아가씨가 나무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어. 너희들처럼 싸늘한 표정으로 말이야. 장
삼은 그 아가씨를 웃기게 할 수 있다고 자부 했지만 그 두 사람의
친구는 통 믿지를 않았어. 장삼은 말했어. '나는 단 한마디로 그
녀를 웃게 할수도 있고, 또 한마디로 그녀를 화나게 할 수도 있
어. 내기를 하겠는가. 한상의 술 내기 말이야., 그 두 사람의 친
구는 그와 내기를 했지."
소어아는 본래 입재주가 좋았다. 사실 그 두 소녀는 비록 그를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그 장삼( 드)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아가씨
를 웃기고, 또 화나게 했는지 듣고 싶었다.
소어아는 계속 말을 엮어갔다.
"장삼은 아가씨 앞에 오더니 돌연 그 앞에 있는 개를 향해 '아
버지'라고 부르며 절을 하는 거야. 그 소녀는 그가 한 마리 똥개
를 아버지라 부르자 참을 수가 없어 웃어버렸어. 그러자 장삼은
이번에는 그녀에게 꿇어 앉아 '어머니'라고 불렀지. 그 소녀는 얼
굴이 빨개지더니 입술을 깨물며 발길을 돌려 가버렸어. 장삼은 과
연 술 내기에 이겼던 거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왼쪽의 둥근 얼굴의 소녀가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웃어버렸다.
소어아는 기뻐서 손뼉을 치며 따라 웃었다.
"웃었어! 웃었어! 드디어 웃고 말았어."
그러자 그 소녀는 웃음을 거두며 안색이 창백해졌다.
동 선생이 어느 사이에 들어왔는지 싸늘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지?"
그 소녀는 온 몸을 떨며 털썩 끓어 앉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
했다.
"우리......우리가 그에게 청하여 말을 하지는 않았어
요......."

활로를 찾아서
동 선생은 무서운 소리로 쏘아부쳤다.
"하지만 너는 이 사람 때문에 웃은 것이 아니냐?"
"제가.....저는"
그녀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 하고 얼굴을 가리며 울기 시작했
다.
"썩 나가거라!"
"제발 부탁이에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께
요."
소어아는 크게 놀랐다.
"당신....... 당신이 그녀를 죽이겠소?"
동 선생은 소어아를 노려보았다.
"죽여? 그럴 필요는 없다. 다만 혀를 잘라버리고 영원히 웃지
못하게 할 뿐이야."
소어아는 더욱 크게 놀랐다.
"그저 웃었을 뿐인데 혀를 자른단 말이오?"
"너 때문이야. 그녀를 웃게 해서는 안 되었지."
"나는 다만 그녀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을 뿐인데 당
신...... 당신이 질투할 필요는 없잖소?"
동 선생은 돌연 소어아의 따귀를 올려부쳤다.
소어아는 바닥에 쓰러지면서도 여전히 입을 다물지 않았다.
"나를 때리는 것은 좋지만 그녀를 처벌해서는 안 되오."
동 선생의 눈에는 빛이 번쩍였다.
"너..... 네가 감히 그녀를 옹호하는 말을 하다니?"
그는 마침내 극도로 분노하며 몸까지 떨기 시작했다.
소어아는 모른 척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 일은 그녀를 문책할 것이 아니고 나의 책임이오."
동 선생의 목소리는 떨렸다.
"좋아...... 좋아! 그녀의 혀를 자르지는 않겠다. 너....... 너
는 너의 아버지처럼 정이 많구나!"
그는 돌연 손을 내밀어 일장을 뿜어냈다. 그 둥근 얼굴의 소녀
는 그 일격을 맞고 문 쪽으로 떨어져 다시는 움직이지를 못 했다.
소어아는 일어서며 분을 못 이겨 소리쳤다.
"당신..... 당신이 기어이 그녀를 죽였군요!"
동 선생은 온 몸을 몇 번 떨더니 고개를 들어서 크게 웃었다.
"그렇다. 나는 그녀를 죽였다. 네가 그녀와 몰래 달아나지는 못
할 거야."
"당신 미쳤소? 그녀가 언제 나와 몰래 달아난다고 했소?"
"이미 달아난 후 그녀를 죽이려면 때가 이미 늦은 거야."
"당신 미쳤군요. 당신은 미쳤어...... 나는 당신이 차가운 사람
인 줄만 알았지 악독한 사람이라고는 보지 않았는데, 당신은 여자
에게도 독수를 가하는군요."말을 할수록 노기가 일어나서 자신도
모르게 달려들어 그는 양손을 뻗쳤다.
지금의 소어아의 무공은 실로 무림 고수들과 비교할 수 있을 정
도였다. 그가 극도로 화가 치밀어 가한 두 장은 무당(武堂), 곤륜
(崑崙) 양 파의 정기를 합한 것과 같은 기묘하고도 거센 위력을
지니고 뻗쳐 나갔다.
그러나 무림을 뒤흔들만한 이 두장을 동 선생은 마치 몸이 두
개인 것처럼 재빠르게 피해버렸다.
동시에 그의 손이 소어아를 향해 뻗쳤다.
소어아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비록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희귀한 무공에 놀라 입이 제대로 닫히지 않을 정도였다.
동 선생이 그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너 같은 무술로는 많아야 화무결의 수법을 오십 번 이상 받아
내지 못 한다. 나는 네가 그와 상대가 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나
를 실망 시키는 걸."
소어아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내가 그와 상대가 되든 안 되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너는 그를 이길 생각이 없나?"
"내가 이기면 어떻고 이기지 못 하면 또 어떻소?".
동 선생은 노하지 않고 품속에서 하나의 수건을 꺼내며 천천히
말했다.
"여기에는 이화궁의 무술을 격파하는 수법이 세 가지 적혀있다.
석 달 정도 연마하면 비록 화무결을 이기지는 못 한다 할지라도
적수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소어아에게 무술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소어아는 놀라 입
을 벌리며 말을 했다.
"당신..... 당신은 무슨 연유로?"
동 선생이 수건을 그의 앞에 놓더니 싸늘하게 웃으며 걸어나갔
다.
"당신은 화무결에게 나를 죽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이젠
나에게 화무결을 죽이라는 거요? 당신 혹시 몹쓸 병이 있는 것이
아니오?"
동 선생이 몸을 돌리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너의 일생은 이미 비참한 운명으로 결정되어 있다. 네가 화무
결을 죽이든 화무결이 너를 죽이든 간에 마찬가지야."
"그것이 같다는 거요? 당신....... 당신은 도대체......."
동 선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꽝'
하는 소리가 나며 문이 닫혔다. 소어아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혼자 방에 남은 아가씨가 눈물을 흘
리며 서있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그녀에게 아무말도 건내지 못 했다. 그는 정말
그 아름다운 소녀가 자기 때문에 죽는 것을 보기는 싫었다.
그 소녀는 넋을 잃고 서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소어아는 탄식을 하며 그 수건을 펴보았다.
그 수건에는 과연 세 가지의 절묘한 수법이 그림과 함께 적혀
있었다. 그 매 수법은 간단했지만 예리하고 효과적으로 바로 화무
결을 대적할 수 있는 좋은 수법이었다.
이화궁의 무술을 잘 알지 못 하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절묘한 수
법을 창안할 수가 없었다. 이화궁의 무술은 강호 최대의 비밀인데
동 선생은 어떻게 그토록 그 수법을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소어아는 이런 점을 생각하지 못 했다. 그는 다만 그 그
림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식사가 들어왔다. 모두가 사천요리였고 좋은 술도 곁들
여져 있었다.
소어아는 밥을 먹으면서도 그 중 쇠고기와 오리고기는 건드리지
않았다.
"이 두 가지는 맵지 않으니 먹으나 마나야."
이때 시종 가만히 서있던 소녀가 돌연 손을 내밀더니 오리고기
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소어아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와있는 그녀가 음식을 먹자 크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아무소리 하지 않고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시간 계산기를
보며 부지런히 음식을 입에 넣었다.
그 소녀는 음식을 두어 접시 먹고 나더니 조용히 말을 건냈다.
"어서 더 드세요."
그녀가 돌연 말을 하자 소어아는 또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지금은 말을 해도 괜찮아요. 사람이 오지 않을 테니까요."
소어아는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나는 너무 배가 불러서 쌀 한 톨도 더 먹지를 못 하겠소."
"되도록 많이 먹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앞으로 이틀 간은 아무
것도 먹지 못 할 테니까요."
소어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그건 무슨 이유요?"
"그건?"
그 소녀의 눈이 번쩍였다.
지금부터 도망을 해야하니까요. 도망가는 중에는 먹지 못 할 뿐
더러 물도 마시지 못 합니다."
"도망?..... 여기서 나가자는 말이오?"
"물론이지요. 내가 방금 음식을 먹은 것은 달아나기 위해서였어
요."
"그러나 동 선생........"
"지금 그는 입정을 했을 테니까 두 시간 내로 여기에 오지는 않
을 거예요."
"확실한가?"
"수십 년 동안 지켜온 버릇이지요,. 제가 들은 말에 의하면 십
수년 전에 같은 신분의 여자가 바로 이 시간에 한 사람을 데리고
이길을 달아났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그토록 흥분했었군. 같은 일이 다시 생길까 봐
서......"
그 소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기 시작했다.
"방금 그가 죽인 소녀가 누구인지 아세요?"
"글쎄....."
그 소녀의 눈에서는 결국 눈물방울이 흘러 떨어졌다.
"그녀는 나의 동생이에요."
소어아는 비참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오. 내가 웃게 하지만 않았어도 아무일이 없었을 탠데."
"우리는 그 사람을 칠 년간이나 따랐어요. 그는 조그마한 일 때
문에 독수를 가했는데, 당신은 나의 동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
면서 그녀를 위해 변명을 했고, 심지어는 목숨을 다하여...... ."
"당신은 그런 원인 때문에 모험을 하여 나를 구하겠다는 것이
오?"
그 소녀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록 비단옷
을 입고 있지만 마음은 전혀 생기가 돌지 않아요........"
"당신은 왜 여기에 왔소?"
"우리두 자매는 고아였고 어릴 때부터 많은 구박을 받다 못 해
이화궁 문하에 뛰어든 것입니다. 우리는 출세를 하려고 했지요.
그러나 우리는 무술을 배운 후 그의 노예가 되어버렸던 거예요.
심지어는 아무말도 못 하고 살게 했지요."
소어아는 길게 탄식했다.
"고독...... 긴 시간의 고독은 무엇보다 견디기가 어렵
지......."
그는 돌연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으며 무거운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십여 년 전에도 똑 같은 일이 있었다면 더욱 삼엄하게
경계를 할 텐데 과연 달아날 수가 있겠소?"
"만약에 그의 금궁(禁宮)이라면 전혀 달아날 기회가 없겠죠. 그
러나 그곳은 다만 그가 잠시 쉬어 가는 곳이에요."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나타났다.
"더군다나 이곳은 최근에 내가 다시 수리를 했습니다. 꼭 달아
날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
보다는 나을 거예요."
소어아는 사방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이오?"
"이곳은 절간이에요."
"절간이라고?"
그는 눈동자를 사방으로 굴리면서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정말
절간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원래는 황폐된 절간이었는데 우리가 수리를 해서 이렇게 만들
었지요."
"재주가 좋군."
그는 웃으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시간이 소중할 텐데 왜 아직 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지? 이
야기가 하고 싶으면 달아난 후에 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오."
"사람이 와서 그릇을 치운 후에 떠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발
각되어 버릴 테니까요."
소어아는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맞았어. 나는 그런 것에까지 세밀하지를 못 해. 여자들은 확실
히 세심하지."
소녀는 그를 주시하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알고 있는 여자가 많아요?"
소어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별로 그렇지는 않소..... 당신은 남자를 많이 아는가?"
"나는 하나도 몰라요."
"당신은 이제 나를 알게 되었군. 나의 성은 강이야, 이름은 소
어라고 부르고. 당신은?"
소녀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업을 열었다.
"나는 철평고(鐵萍姑)라고 부르지요."
소어아는 잠깐 놀라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성이 철(鐵) 씨야? 왜 철씨 성의 아가씨가 이렇게도 많
지........"
철평고는 돌연 손짓을 해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문 밖에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소어아는 재빨리 침대
에 누웠다. 곧 자색 옷을 입은 소녀가 청의 부인과 함께 들어왔
다.
철평고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 자색 옷의 소녀는 철평고 앞에 와서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너의 동생은 이미 죽었어 !"
철평고도 싸늘하게 대꾸했다.
"나도 알고 있다!"
"가슴이 아프냐?"
"내가 상심하면 네가 기뻐하겠지?"
자의 소녀는 돌연 몸을 돌리더니 소어아를 바라보았다. 소어아
는 그녀에게 얼굴을 찡그리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청의 부인은 그릇을 다 치워 가지고 방문을 나섰다.
자의 소녀가 불쑥 소어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가라."
소어아는 눈이 휘둥그레져 물었다.
"당신은 내가 나갈 수 있다는 거요?"
자의 소녀는 고개를 돌려 철평고를 바라보고는 싸늘하게 웃으면
서 말했다.
"내가 너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알 텐데 왜 나가지 않는 거지?"
소어아는 너무 뜻밖의 말이라 심장이 정지할 것만 같았다.
철평고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왜 나를 나가라는 거야?"
"교대할 시간이야. 가서 쉬어라."
철평고는 더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소어아는 그녀가 나가는 것을 보자 속으로 애가 바싹 탔다. 자
의 소녀는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녀가 가는 것이 싫어요?"
소어아는 일부러 하품을 하면서 웃었다.
"가는 것이 좋지. 안 그래도 그녀의 얼굴에 싫증을 느끼던 참이
야. 네가 그녀보다 더 예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새로운 것이 좋
지."
자의 소녀는 싸늘하게 웃었다.
"나를 바라보면 당신의 눈알을 파겠어요."
소어아는 철평고가 다시 조용히 들어오는 것을 보자 일부러 웃
으면서 말을 건냈다.
"네 입으로는 내가 너를 바라보는 것이 싫다고 하지만, 마음 속
으로는 너를 안아주고 입맞춰 주기를 바라지? 그렇지 않다면 왜
그녀를 보내고 네가 여기에 남는 것이지?"
자의 소녀는 화가 치밀어 안색이 변했다.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소어아는 혀를 날름 내밀고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네가 암호랑이도 아닌데 내가 왜 못 해. 너를 빨아보고 싶은
데."
"당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은 알아요. 그러나 최소한 나
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아무소리도 내지 못
하고 쓰러졌다.
철평고가 그녀의 급소를 눌러 죽여버렸던 것이다.
소어아는 급히 일어섰다.
"남에게 발각되는 것이 두렵지도 않소?"
"시간이 없고 기회도 만나기 어려우니 모험을 할 수밖에 없어
요.
더군다나 이곳 사람들은 남들의 일을 상관하지 않으니. 삼 일
동안 그녀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녀를 찾을 사람은 아무
도 없을 거예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침대를 반자쯤 밀어 놓고 손을 뻗쳐 벽을
한참 동안 더듬었다. 그러자 벽에서 하나의 문이 열렸다.
철평고는 그 속으로 들어서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저를 따라오세요."
벽 뒤에는 지하도가 있었다. 매우 길고 깊은 길이었고 어디로
통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습기와 퀴퀴한 냄새로 인해 구토가
날 것 같았다.
소어아는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가운데 코를 막고 한참 동
안 걷다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절간에도 이런 지하도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당신은 언제 여
기를 발견했소?"
"이 집을 수리할 때 발견했어요."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내가 알기로는 오호작란(五胡作亂)시대에 도적을 피해 많은 사
람들이 삭발을 하고 중이 되어 화를 벗어나려 했었대요. 그러나
절마저도 안전한 곳이 못 돼서 중들이 이 지하도를 건립한 것이래
요."
소어아는 탄복했다.
"당신은 확실히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여자들과는 틀려."
"......."
"당신은 머리가 좋아. 이 세상에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 점차로
줄어 들어가지. 게다가 어떤 여자들은 머리가 있어도 사용하지를
않고 오직 그들의 잘난 얼굴만 믿고 있지."
"그건 남자들 때문이에요."
"뭐?"
"남자들은 머리가 좋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남자들은 천생
이 자기가 여자보다 강하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여자를 기를 쓰고
보호하려 하죠.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들을 고생시키는 거예요."
소어아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웃었다.
"그렇다면 병신은 남자군. 당신은 아는 남자가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남자를 그토록 잘 이해하지?"
"여인이라는 동물은 천성이 남자를 이해하도록 되어 있지요. 그
러나 남자는 영원히 여자를 이해하지 못 해요."
소어아는 탄복했다.
"그 말은 맞아. 남자가 만약 여자를 이해하는 척 하면 고생길이
훤히 열리는 거지."
두 사람은 가슴에 공포와 불안이 가득차 있어서 될 수 있는대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 위로를 삼으려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긴장을 풀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지하도에서 자기의 목숨
이 언제 날아갈지도 모르는 판국에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다면 정
말 참기 어려운 노릇일 것이다.
지하도는 점점 더 습기가 짙어지고 어두워졌다.
소어아는 손을 내밀어서 벽을 만져보며 입을 열었다.
"이 절간의 벽은 산 가운데로 통해 있는 모양이지?"
철평고는 대답을 하지 않고 불씨를 꺼냈다.
이곳은 과연 산 허리였으며 동굴이 종횡으로 교차되는 곳이었
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소름이 끼쳤다.
"이런 곳이라면 동 선생이 아무리 재주가 좋다해도 우리를 쉽게
찾지는 못 할 거야."
"하지만 나가는 것도 쉽지는 않아요."
"당....... 당신도 나갈 길을 모르고 있단 말인가?"
"나도 몰라요."
소어아는 깜짝 놀랐다.
"그럼..... 왜 같이 달아나자고 했지?"
"하지만 길을 찾아내면 빠져나갈 수도 있는 것이지요."
소어아는 쓴웃음을 띠웠다.
"아가씨, 너무 일을 간단하게 보지 말아요. 당신도 알겠지만 산
허리의 동굴에서는 나갈 길을 찾기가 힘들어요."
"그렇지만 분명히 나갈 길도 있겠죠. 그렇죠?"
"설사 길이 있다해도 여기는 제갈량의 팔진법보다 더욱 복잡해
요. 빙빙 돌다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게 될 지도 몰라."
그는 길게 탄식을 하며 계속 입을 놀렸다.
"고금 이래 이런 산에서 죽은 사람들로 지옥을 가득 메울 거
야."
철평고는 앞장서 걸음을 계속하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을 계
속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두 명쯤 더 늘어난다 해도 상관없지 않겠어요?"
"당....... 당신은 불안하지도 않는 모양이지?"
"정히 불안하다면 지금 돌아가도 늦지는 않아요."
"화내지 말아요, 내가 당신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오. 다
만......."
철평고는 소어아에게 고개를 돌리면서 큰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곳의 위험성을 모르는줄 아세요? 그러나 하여튼 우리는
얼마 만큼의 기회가 있으니 충분히 달아날 수도 있어요. 앉아서
죽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당신이 이렇게 화를 낼 줄 알았다면 차라리 말을 하지 않을 것
을 그랬지?"
철평고는 그를 한참 바라본 후 돌연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렇게 이상한 사람인 줄은 생각 못 했어요."
"나도 당신의 성질이 이렇게 괴팍한 줄은 몰랐소."
이때 그는 석벽의 풀속에 기호가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철평고도 그것을 보았다.
그녀는 곧 그 기호의 방향을 따라 십여장이나 걸어갔다. 구석에
있는 석벽에도 역시 기호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뒤에 우두커니 서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
다.
철평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제 나갈 수 있게 됐는데 왜 움직이질 않죠?"
"그 화살표를 따라 가면 동 선생 앞에 도착할 거야.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아."
철평고는 크게 놀랐다.
"이 화살표들이 나갈 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란 말예요?"
"화살표는 분명히 길을 가리키지만 그러나 동 선생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야."
"그것을 어떻게 알죠?"
"이 화살표는 필시 옛날의 중들이 그렸을 거요. 그렇지 않소?"
"그렇겠군요."
"그들은 길을 잃고 여기에 갇히게 될까봐 화살표를 그려 놓았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그들은 도적놈들을 피하기 위해서 이곳에 숨었지, 도적놈들이
떠난 후에 그들이 어디로 갔을 것 같소?"
"당연히 절간으로 되돌아 갔겠죠."
그녀는 이런 말을 한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바가 있었다.
"그래요. 이 화살표는 절간으로 돌아가는 길이에요. 다만 여기
에 잠시 숨었을 뿐인데 나갈 길을 찾았겠어요"
소어아는 박수를 치면서 한바탕 웃었다.
"내가 벌써 말을 했잖아. 당신이 영리한 여자라고 말이오. 결국
알고 말았군. 내가 보기엔 방금 모른다고 했던 것도 그저 장난을
한 것 같아."
철평고는 그의 칭찬을 듣자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그녀는 갑자기 불씨를 소어아에게 건네주며 말머리를 돌렸다.
"당신...... 당신이 길을 안내하세요."
"영리한 여자일수록 머리가 나별 척 하면서 남자에게 많은 힘을
쓰게 하지........."
철평고는 발을 내어 딛으면서 대답했다.
"이 일은 당신이 맡는다 해도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잖아요?"
소어아는 웃으면서 큰걸음으로 앞장서서 걸어나갔다.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니 비로소 여자 같이 느껴지는군."
"나의 얼굴이 정말 빨개졌나요? 언제 얼굴이 붉어졌는지도 모르
겠어요. 아마 이것이 평생 처음일 걸요........"
소어아는 화살표가 앞을 가리키면 후퇴하고, 화살표가 왼쪽을
가리키면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는 화살표를 지날 때마다
화살표를 지워 없애버렸다. 철평고는 그를 따라 한동안 걷다가 돌
연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면 나갈 수 있을까요?"
"나로서도 나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소. 그러나 이렇게 하면 그
절간과는 멀어지지 않겠소?"
통로가 점점 좁아졌다. 때때로 걸어가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가
리키는 화살표는 이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소어아는 탄식했다.
"이젠 우리의 운수를 알아봐야겠소. 눈을 감고 걸어 봅시다."
그는 말을 하면서 불을 꺼버렸다.
"왜 길을 찾지 않고......."
소어아는 그녀의 물음을 막아버렸다.
"그 중들은 절대로 이런 곳으로 피신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
러니 여기에 화살표를 그릴 필요도 없었겠지. 우리도 찾을 필요가
없소."
철평고는 아무소리 하지 않고 소어아의 손을 잡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굴이 붉게
타올라 땅 속으로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유유자
적했다.
"하는 수 없지."
"뭐가....... 뭐가 하는 수 없다는 거예요."
"사람의 가슴이 뛰는 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소."
철평고는 그의 팔을 꼬집어 뜯으려다가 돌연 무슨 생각에서인지
걸음을 멈추고 넋을 잃은 듯 서 있었다. 그녀는 돌연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가 여자라는 것을 느꼈다. 처음으로 자기가 뜨거운
피와 살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감정은 그녀를 즐겁게 했고 현재의 상황을 돌아보지 못 할
정도로 아련하게 했다.
극히 좁은 굴이라 걸음을 옮기기가 어려웠고, 심지어는 기어가
야 하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 그런 길을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철평고는 옷이 찢어졌고 몸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기도 했으나
조금도 아픔을 느끼지 못 했다. 마치 구름에 떠 있는 것 같은 느
낌을 가졌을 뿐이었다.
가끔 소어아는 불을 켜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불길은 갈수록 약
해졌다.
소어아는 불을 되도록 아껴쓰려고 했다. 이런 곳에서 불이 없어
지면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얼마를 걸었는지 모른다. 하루 이틀이 지난 것 같
기도 했고 한두 달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철평고는 발걸음
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온 몸이 아팠고 허기가 지고 목
이 말라서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는 약물로 자란 소어아의 몸과 같지 않았다. 고생을 견디기
가 어려웠다. 만약에 소어아가 그녀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
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를 못 했을 것이다.
사실 소어아 자신도 상당히 지쳐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환경 속에서 적어도 미치지는 않
는다 해도 짜증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소어아의 성질이 워낙 이상해서 결코 짜증을 내거나 화
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철평고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좀 쉬어요."
소어아는 무거운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절대로 쉴 수는 없소. 쉬게 되면 그만이오."
"그러나 저는...... 저는 지금 이미......"
"생각을 좀 해봐요. 태고 이래로 어떤 사람이 이런 신비스러운
동굴에서 손을 잡고 산책을 해봤겠소.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낭
만적인 일이오. 이런 기회를 맞이하고도 왜 즐거워 하지 않지?"
"애석하게도..... 나는...... 나는 당신의 마음 속의 사람이 아
니에요."
"누가 아니라고 했소? 지금 이곳에 당신 외에 누가 나에게 있다
는 말이오?"
철평고는 소어아의 품속에 안겼다. 그녀의 얼굴은 불덩어리 같
았다. 이 불은 그녀의 가슴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헌원삼광과 강옥랑의 도박
철평고는 비록 강호의 경험이 많은 여자였지만 이런 어둠 속에
서 소어아와 같은 남자의 품에 안기자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철평고는 남자와는 전혀 접촉이 없었던 데다가 그녀는
청춘의 화염을 너무 오랫동안 억누르고 있었다. 이러한 생사의 기
로에서 가장 폭발하기 쉬운 것이 바로 감정이었다.
철평고는 사실 자기 자신도 소어아의 품속으로 안길 줄은 몰랐
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아무런 후회도 없었다.
그녀는 소어아의 손이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만지는 것을 느꼈
다.
철평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업을 열었다.
"인생, 인생은 정말 교묘해요. 나는 지금에야 알겠어요.......
이삼일 전까지도 당신을 몰랐었는데 그러나 지금...... 지금
은......"
이때 소어아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줄 아오?"
"몰라요."
"나는 지금 정말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은데."
"싫어요...... 제발 그것 만은 싫어요......."
그러나 불이 어느새 밝혀졌다.
철평고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부끄러워 했다. 그러면서도 그
녀는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불씨......가 다 없어 지는데........"
"불씨도 귀중하지만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어떤 진귀한
물건을 없애도 괜찮소."
철평고는 얼굴을 가렸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정말이에요?"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거울이 없소. 거울이 있다면 지금 당신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고 싶은데 말이오."
"정말 나가지 못 하게 되어도 나를 원망하지 않겠어요?"
"당신을 원망한다고? 내가 왜 당신을 원망하지?"
"거기에 있었으면 죽지는 않았을 탠데, 그러나 지금은.......
."
"그렇게 말하자면 당신이 나를 원망해야지. 내가 아니었더라면
당신이 이렇게 고생을 하겠소?"
"고생이....... 아니에요.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기뻐본 적이
없었어요."
그녀는 그윽한 눈빛으로 소어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미치도록 고독할 때면 많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다투고
웃고 화내는 그런 꿈을 꾸었어요. 그런 꿈이 평생 동안 실현되지
못 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나를 여자로 취
급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왜?"
"나 자신까지도 나를 여자로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남들은 나
를 선녀로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마녀로 보기도 하겠지만 절대로
나를 여자로 취급하지를 않을 거예요."
"당신은 분명히 여자야. 나는 일천 가지의 방법으로 증명을 할
수 있지."
"이제는 알겠어요. 나는 지금 죽어도 좋아요."
"누가 네가 죽는다고 말했어...... 우리는 꼭 나갈 길을 찾을
거야!"
철평고는 미소를 보이면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알아요....... 나는 알아요...... 당신이 나를 속이지는
못 해요."
그들이 들고 있는 횃불은 이제 겨우 콩알만한 불씨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철평고는 그 화염을 주시했다. 그녀는 눈동자가 점점 무거워지
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요. 당신이 이렇게 나를 대하는 것이 진정 나를
좋아해서가 아니고 다만 위로하기 위해서라는 것을요. 나에게 기
쁨을 주기 위해서죠?"
소어아는 크게 웃었다.
"당신......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아. 그것도 쓸데없는 생각이
야."
그러나 철평고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면서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 대해서 정말 감격했어요. 나는 다
만........ 다만 정말 피곤해요. 부탁이에요. 나를 좀 자게 해주
세요. 이대로 잠들어서 영원히 깨지 않아도 나는 만족해
요......."
소어아는 철평고가 눈을 감는 것을 보고 탄식을 금치 못 했다.
바로 이때 돌연 '스르륵' 하는 소리가 나면서 수많은 쥐들이 그
들 앞을 지나갔다.
철평고는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소어아는 만면에 회색을 띠우며 큰소리로 말했다.
"잘 필요가 없게 됐어. 이제 우린 살았어 "
"그러나 이것들은 다만 쥐들에 불과한데요?"
철평고도 이 말을 듣자 눈앞이 훤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 쥐들은 산 밖에서 들어 왔을까요?"
"그렇지. 여기는 분명히 산등성이에 접근하는 곳이야. 쥐들이
온 쪽으로 가보면 나갈 길이 이 부근에 있을지도 모르지."
그는 말을 하면서 쥐들이 몰려온 쪽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다행히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의 크지도 않
고 작지도 않은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l 동굴 밖에서 빛이
비춰 들어오고 있었다.
이 빛은 햇빛도 아니었고 불빛도 아니었다. 담담한 은빛일 뿐이
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눈이 부셔 오랫동안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그는 철평고를 이끌어 작은 동굴로 들어섰다.
그 밖 역시 하나의 동굴이었다. 그 동굴 안에는 금은 보석들이
상자에 가득 담겨 쌓여있었다.
소어아는 놀랐다.
(나는 재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데 왜 이렇게 많은 보물들을
발견하게 된 것일까?)
철평고는 상자를 하나 집어 들더니 돌연 소리쳤다.
"이 상자들은 여기에 옮긴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아직도 먼지가
묻지 않았는데요."
소어아도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과연 먼지가 묻어나지 않았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영리한 여자군.)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귀퉁이의 상자에 빨간 쪽지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쪽지에는 '단합비장'이라는 네 글자가 씌
여 있었다.
소어아는 크게 놀랐다.
이 재물들은 필시 강별학 부자가 각처에서 강탈해 온 것들로 강
옥랑이 여기에 감춘 모양이었다. 그는 이곳을 매우 비밀스러운 곳
으로 생각했겠으나 공교롭게도 소어아에게 들키고만 셈이었다. 소
어아는 기쁨을 감추지 못 해 탄성을 발했다.
이때 철평고가 다가오면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밖에 사람이 있어요!"
동굴 벽에 하나의 문이 나 있었고 조금 열린 틈새로 은은하게
불빛이 비춰 들어오고 있었다. 소어아는 가만히 다가서서 안을 살
펴 보았다. 과연 그는 하나의 큰돌 옆에 두 사람이 앉아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쪽으로 안색이 창백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강옥랑이었다. 강
옥랑의 맞은 편에는 몸집이 큰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 큰돌 옆에는 많은 술과 고기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은 음식을 먹지 않고 다만 정신을 집중해서 눈앞의 큰돌을 바라볼
뿐이었다.
강옥랑은 이미 극도로 피곤해 보였다. 그는 머리가 헝클어져 있
었고 얼굴도 때가 잔뜩 끼어 있어 오랫동안 세수를 하지 않은 사
람 같았다. 그렇지만 두 개의 눈동자만은 생기가 흐르고 있었다.
철평고가 또다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저 돌이 뭐 볼 것이 있다고 저 두 사람은 저토록 정신이 나간
듯 바라보고 있죠! 혹시 미친 것이 아니에요?"
소어아는 군침을 삼키면서 탄식했다.
"내가 보기에 저 녀석은 미치지도 않았을 생더러 역시 여전히
영리해 보이는데."
"그이를 아세요?"
소어아는 계속해서 돌 옆에 놓여 있는 고기를 주시했다.
"음!"
"그럼 왜 저 돌을 저렇게 쳐다보고 있을까요?"
"어쩌면 저 돌에서 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지도 모르지."
그의 눈은 시종 술과 고기를 떠나지 않고 있다가 이윽고 두 사
람이 바라보고 있는 돌쪽으로 서서히 옮겨졌다.
그 돌은 네모 골로 되어 있었는데 별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다만 돌 중간에 줄이 그어져 있었고 줄의 좌우 양쪽으로
각각 한 조각의 고기가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소어아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씁쓸히 웃으며 속삭
이 듯 중얼거렸다.
"내가 알기로는 분명 저 자식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소. 하지만
지금은 모르지. 어쩌면 저 놈은 고기를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먹는 줄로 알게된 모양인지 모르지."
철평고는 군침을 삼키며 조용히 웃었다.
"당신이 나가서 고기를 입으로 먹는다는 것을 좀 가르쳐 주지
그러세요?"
"내가 왜 고기 먹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싶지 않겠소? 다만 지
금 나가면 아마 그가 내 고기를 먹으려할 것이오. 그는 나를 미워
하고 있소!"
"음, 그럼 다른 한 사람은?"
"저 사람이 누군지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
소어아의 말이 채 골나기도 전에 한 마리의 쥐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더니 돌 위로 올라가 그 사나이 앞에 놓인 고기를 물고 급
히 달아나버렸다. 강옥랑은 안색이 변하며 쓴웃음을 보였다.
"좋아, 이번에도 당신이 이겼소!"
그 사나이는 크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지금 너는 나에게 백삼십만 냥을 빚지고 있어. 이제는 너의 물
건을 다 잃었겠지!"
강옥랑은 얼굴이 싸늘해졌다.
"안심하시오. 아직 많으니까!"
"나는 신경을 써서 도박을 하는데 넌 너무 싱겁게 잃어버리는구
나. 너를 혼내줄 테다."
그는 크게 웃으며 다시 고기를 잘라 돌위에 놓았다.
철평고는그때서야 깨닫고 웃었다.
"알고 보니 저 두 사람은 도박을 하고 있었군요. 자기 앞의 고
기가 쥐에게 물려가면 이기는 것이지요. 이런 도박 방법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그러나 이런 도박은 누구도 속임수를 쓸 수 없소."
"만약 쥐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마냥 기다려야지. 그건 그렇고 당신은 우리를 등지고 있는 사
람이 누구인 줄 아시오?"
"아는 사람이에요?"
"비록 얼굴을 보지는 못 했지만 말소리로 알겠어."
"누구죠?"
"그가 바로 악도귀 헌원삼광이오! 전부 따거나 완전히 잃을 때
까진 절대로 일어서지를 않지."
"악도귀? 십대악인 중의.....?"
"그렇지. 당신도 심대악인을 알고 있군."
철평고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돌연 물었다.
"당신은 그 십대악인이 누구 누구인지 아세요?"
"잘 물었어. 세상에 나처럼 십대악인을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얼
마 없을 걸."
그는 잠시 숨을 돌리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십대악인은 바로 혈수 두살, 소리장도 합함아, 불남불녀 도교
교,반인반귀 음구유, 불휼인두 이대취......"
철평고는 몸을 떨면서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소어아는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광사 철전, 미사인불베명 소미미, 악도귀 헌원삼광, 손
인불이기 백개심, 그리고 구양정, 구양당 형제이지."
"당신의 말대로 하면 열한 사람이 아니에요?"
"구양 형제는 서로 떨어질 수가 없어서 한 사람으로 칠 수밖에
없었소."
철평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면서 다시 물었다.
"그 사람들이 정말 악독해요?"
소어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그들보다 더욱 악독한 사람들도 많지. 그러나 그 사람들
은 일을 할 때 병적인 점이 많아서 그런 칭호를 받는 것이오."
"그 말이 무슨 뜻이지요?"
"예를 들어 불홀인두 이대취의 경우 평시에는 매우 온순하고 문
무를 겸비한 사람인데, 발작을 하면 자기의 마누라까지 잡아먹어
버려 막상 그를 본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가 그런 일을 할 것이라
고 짐작할 수가 없소."
이대취라는 이름을 듣자 철평고는 몸을 떨며 한참 동안 넋을 잃
은 듯 서있다가 다시 물었다.
"당신도 그들 중 한 사람이 아네요?"
"흠! 나는 그들을 알 뿐이오. 사실 나는 그들의 손에 자랐소."
철평고는 다시 놀랐다.
"그들이.....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아마 귀산 일대에 있을 거야....."
그는 돌연 말소리를 그치더니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리 자세히 묻는 것이오?"
철평고가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다만 호기심 때문에 그래요, 세상에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있
다니...... "
이때 돌연 강옥랑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일곱 여덟 주야를 도박했는데도 결판이 나지 않으니 귀찮
지 않으시오?"
헌원삼광이 말을 받았다.
"귀찮지 않아. 삼 년 반을 더해도 귀찮지는 않을 것이야."
"하지만 나는 싫증이 나는데요."
헌원삼광이 두 눈을 부릅뜨더니 큰소리로 지껄였다.
"귀찮다고? 그래도 계속 도박을 해야 돼."
"나는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좀 크게 벌
이자는 것이오."
"그래? 난 항상 큰 도박을 좋아 하지. 크게 한 판 해보겠느냐?"
"각하가 지닌 물건이 칠팔십만 냥 정도이고 내가 백삼심만 냥을
빚졌으니 이번에는 이백만 냥 짜리로 합시다."
헌원삼광이 손바닥을 매만지면서 말을 받았다.
"한번에 결판을 내는 것도 좋지. 다만......."
그는 돌연 웃음을 멈추더니 큰소리를 쳤다.
"나는 벌써 저 동굴 안을 살펴보았다. 나에게 빚진 것을 제하면
백만 냥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네가 무슨 돈으로 나와 도박을
벌이겠다는 것인가?"
"일백만 냥은 사람으로 하겠소."
헌원삼광이 미친 듯이 웃어제꼈다.
"네가 백만 냥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냐?"
강옥랑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왔다.
"나는 비록 백만 냥이 못 되지만 백만 냥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
있소."
"어디에?"
"각하께서는 우선 값을 확실히 계산해 보자는 것입니까?"
헌원삼광은 눈을 치떴다.
"물론 값을 계산해 봐야지, 아버지하고 아들이 도박을 해도 계
산을 할 것은 해야 돼."
강옥랑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 그렇다면 제가 그녀를 데리고 오죠."
헌원삼광의 몸 뒤로 튀어나온 암석이 있었다. 강옥랑은 그 위에
올려져있던 등불을 들더니 큰걸음으로 걸어 나가면서 말했다.
"각하, 안심하고 계십시오. 제가 금방 갔다 올 테니!"
"물론 안심을 하지. 네가 날 이겨보려고 가는 것인데 설마 안
돌아 오겠어?"
그는 닭다리를 한 입 뜯더니 술을 들이켰다. 넋을 잃고 쳐다보
던 철평고가 돌연 탄식을 했다.
"저 사람들은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고 또 왜 여기에
숨겨 놓았을까요?"
"물론 훔쳐온 돈이지."
"비록 훔쳐온 것이라도 한꺼번에 잃으면 아까울 텐데요."
"돈이란 들어올 때는 어렵고 나갈 때는 쉬운 것이오. 더군다나
도박을 하는 사람은 마누라를 잃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소."
그는 웃으면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다만 내가 생각을 못 했지.
저 강옥랑 녀석은 사람까지 담보로 잡힐려고 하다니 !"
"그가 자기의 마누라를 잡히고 도박을 할 작정인가요?"
"그에게 마누라가 있다해도 백만 냥은 못 돼. 저 자식이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나도 모르겠는데. 백만 냥의 가치나 나가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데?"
이때 강옥랑이 한 사람을 골고 들어왔다. 그가 골고 온 사람은
몸이 날씬한 여자였는데 얼굴을 천으로 가려서 잘 볼 수가 없었
다.
헌원삼광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찌 여자를 데리고 왔지?"
강옥랑은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물론 여자죠. 남자라면 그만한 가치가 없잖소."
헌원삼광은 크게 웃었다.
"하지만 너 같은 자식이 가져온 물건은 별 가치가 없어."
"이 아가씨가 비록 나를 따라 며칠을 다녔지만 나는 그녀를 건
드리지도 않았소."
"너 이 자식아,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은가?"
"각하께서 믿지 못 하겠다면 시험을 해보면 알 것 아니오."
그는 말을 하며 등롱을 돌 위에 놓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헌원
삼광의 몸 뒤에 놓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몸 뒤에 놓았다. 불빛은
그의 어깨를 넘어 헌원삼광의 앞을 비춰 주었다.
소어아는 그것을 보자 곰곰히 무슨 생각엔가 잠겼다.
그 여인은 시종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강옥랑이 그녀의
망사를 제쳤다. 헌원삼광은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소어아는 이 얼굴을 보자 움찔 하며 놀랐다.
'모용구매' 그 여인는 모용구매였다.
그녀는 삼소저에게 쫓겨난 후 길에서 방황을 했었다. 어두운 밤
그녀를 돌보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꿈꾸듯이 성내를
빠져나왔을 때 조향영의 장원에서 빠져나와 동정을 살피고 있던
옥랑의 눈에 띠었다. 그녀는 강옥랑을 알아보지 못 했지만 그는
즉시 모용구매를 알아보았다. 이미 화무결이나 철심난과 함께 다
니는 것을 만나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정신이 없는 모용
구매가 실종되어 버려 철심난이 무척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언젠가는 소용이 될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를 데리
고 다니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 비밀 보물창고를 누설할
걱정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이
었다. 하지만 동굴 안에는 이미 헌원삼광이 그가 발견한 보물의
주인과 도박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헌원삼광은 모용구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넋을 잃는 사람처럼 초점을 잃었다.
"미녀, 과연 신비스러울 정도의 미녀로군.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이십여 년 간 어떤 미녀에게도 흥미를 느껴보지를 못 했어.
그러니 그녀를 데리고 가라!"
강옥랑은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띠운 채 조용히 말했다.
"이 아가씨의 가치는 얼굴에 있는 것이 아니오."
"뭐, 그럼 어디냐?"
"그것은 바로 그녀의 신분이오."
헌원삼광이 크게 웃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공주라도 된단 말인가?"
"비록 공주는 아니지만 그와 비슷하죠."
헌원삼광은 강옥랑이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 분노를 참지 못 했
다.
"도대체 이 여자가 누구냐? 너 이 자식아, 수작을 부리지 마
라."
"이 여자는 바로 구수산장의 모용구매 아가씨요."
"뭐라고? 무윈영의 구 아가씨란 말이냐? 그런데 어찌 너의 손에
들어왔지?"
"이 아가씨는 누구에겐가 해를 입고 제정신을 잃고 말았소. 모
용집의 사람들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수배했지만 찾지 못 했는
데 나의 운이 좋아서인지 내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소."
강옥랑은 헌원삼광의 반짝이는 눈빛을 살펴가며 말을 이었다.
"생각을 해보시오. 만약 그녀를 그녀의 언니나 형부에게 데려다
주면 진검, 남궁유 등은 필시 크게 보상할 것이오."
헌원삼광은 한동안 생각을 하더니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좋다. 그렇다면 우리 도박을 벌여보자!"
이때 돌연 한 사람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박을 해선 안 돼 !"
소어아가 소리를 치자 헌원삼광과 강옥랑이 놀랐을 뿐만 아니라
철평고도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누구냐?"
소어아는 우선 철평고의 귀에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나를 따라 나가거든 우선 먹고 심은 것을 사양하지 말고 먹어
요. 나는 저 자식을 상대할 방법을 생각해야 돼."
그는 말을 끝낸 후 문을 열고 걸어나갔다.
"똥통에 숨어서 똥을 먹던 친구야! 벌써 나를 잊었느냐?"
강옥랑은 소어아를 보자 귀신을 본 것 보다도 더욱 놀라서 뒤로
걸음이나 물러섰다.
".......네가 네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지?"
"아직 죽지 않았으니 당연히 너를 따라 다녀야지."
헌원삼광은 반가와 그의 어깨를 치며 크게 웃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여기에 불쑥 나타났다면 우리도 크게 놀랐겠
지만 네가 나타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지."
그는 크게 웃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온 천하에 네가 못 할 일이란 없는 것 같군. 하하!"
"누가 감히 그런 말을 믿겠소? 나는 알을 낳지도 못 하는데."
그 말을 듣고 헌원삼광은 더욱 더 웃어제꼈다. 진정 거짓없는
기쁨의 웃음이었다. 소어아는 어느 사이에 먹을 것을 집어 들고
먹기 시작했다. 모용구매는 마치 그를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강옥랑은 소어아의 몸 뒤에 서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그녀도 소
어아처럼 급히 음식을 먹었다. 그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
라볼 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헌원삼광이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이봐, 나는 한평생 도박을 했는데 이번엔 왜 못 한다고 소리쳤
지?"
소어아는 입 속으로 계속 고기를 집어넣으면서 말을 했다.
"당신이 도박을 하게 되면 필시 속고 말 것이오."
"나는 늙은 도박꾼이지. 저 자식은 아직도 어리고. 그가 어떻게
나를 속일 수 있겠어? 이번 도박은 공평한 방법이야."
그는 말을 하면서 껄껄거리며 한바탕 웃었다.
소어아는 그가 웃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
다.
"이 도박에서 당신은 지금까지 많이 이겼겠지요?"
"그렇지."
"당신이 어떻게 해서 이겼는지 아시오?"
"이틀 동안의 운이 좋았겠지."
"아니오."
"그렇다면 다른 원인이 있단 말인가?"
"그것은......."
그는 일부러 강옥랑을 한 번 바라본 뒤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소."
"왜 말을 못 한다는 거냐?"
"한 이틀 간 굶었더니 체력이 떨어져서 저 자식의 공격을 받아
낼 수가 없소."
"저 자식이 너를 조금이라도 건드린다면 내가 죽여버리고 말 테
다."
"내가 강옥랑과 싸우게 되면 나를 돕겠소?"
"물론이지."
"좋아요. 그렇다면 안심을 할 수 있겠군."
그는 히죽 웃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쥐는 밝은 것을 싫어하오. 그래서 밤이 돼서
야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오. 물론 불이 켜지면 그들은 맥을 못 되
는 것이고."
"네가 쥐새끼에 대해서도 연구가 그렇게 깊을 줄은 몰랐는데."
"물고기와 쥐새끼는 고양이를 보면 골치가 아프오, 내가 그들을
이해 못 하면 어찌하겠소?"
"그러나...... 이 도박과.......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지?"
"쥐들은 식량이 없어서 미치도록 배가 고프거나 아주 안심을 하
기 전에는 결코 이 돌 위의 고기를 먹지는 않을 것이오."
"그래서 우리는 움직이지 않았지. 만약 우리가 참지 못 했다면
말한대로 쥐들이 결코 이 돌 위의 고기를 먹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당신은 한 가지 사실을 잊었소, 방금까지는 저 불이 당
신의 몸 뒤에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그림자에 가려 그 고기가 어
둠속에 파묻혀 있었소. 쥐는 밝은 것을 싫어하오. 그래서 당신이
계속 이긴 것이오."
헌원삼광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박수를 쳤다.
"과연 그렇군, 너는 정말로 영리해, 그런 것까지 생각을 해내다
니 말이야."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사람이 꼭 나 뿐만은 아니오."
헌원삼광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저 자식도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왜 계속 당하
기만 했지?"
"그도 자기 대로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오."
"이제야 알겠다. 저 자식은 애초부터 등불의 위치를 바꿔 놓을
생각으로 도박을 크게 하자는 것이었구나!"
"그렇소. 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소. 지금
은 비단 은을 빼앗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를 이길 수도 있
소."
"네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질뻔 했군."
소어아는 강옥랑을 바라보면서 빙긋이 웃었다.
"어때? 내 말이 맞지?"
강옥랑의 안색이 변해갔다.
"네가 정 그렇게 훼방을 놓는다면 나도 하는 수 없다."
소어아는 크게 웃었다.
"강옥랑, 네가 무슨 수작을 쓰려는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내
앞에서는 아예 허튼 수작을 마라."
"흥! 내가 운이 나빠서 또 너를 만나게 되었구나."
"그렇지, 네가 나를 만난 것은 일평생 최대의 악이다. 이제 장
물(臟物)과 사람을 모두 발견했으니 나를 따라서 단합비에게로 가
볼까? 거기서 나머지 이야기를 하자."
강옥랑은 소어아와 헌원삼광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고개를 떨구
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나도 할 말은 없다. 다만......"
그는 갑자기 모용구매의 뒤로 돌아가 그녀의 팔을 잡더니 득의
에 찬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만 너희들은 이 모용 아가씨의 목숨을 내어 놓아야겠다."
무아문하의 괴한들
소어아는 놀랐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 크게 웃었다.
"네가 모용구매의 목숨으로 나를 위협하려 했다면 잘못 생각한
것이야. 네가 모르고 있었군. 그녀가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내가 왜 그녀를 구하겠어?"
헌원삼광은 부리부리한 눈동자를 굴리며 크게 웃었다.
"나는 벌써부터 여자에 대해 흥미를 잃은 지 오래다. 그녀가 죽
든 살든 나와는 상관이 없어."
그렇지만 강옥랑은 여전히 미소를 보이면서 모용구매의 뒤에 서
있었다.
"정말 그렇다면 두 분은 왜 나에게 손을 쓰지 않는 것이오?"
헌원삼광이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나는 너를 죽일 생각은 없어!"
소어아가 그 말을 받았다.
"똥을 먹는 친구를 죽이면 손이 더럽혀질 뿐이야."
그러나 강옥랑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면 난 물러 가겠소. 물론 이 모용구매 아가씨는 나를 따
라 와야 해."
소어아는 조금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래 가거라! 모용구매를 데리고 가라. 꼭 너를 찾아가서 요절
낼 사람이 있을 테니까."
그러나 강옥랑은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말
했다.
"만약 사람들이 나에게 이 일을 묻는다면 나는 모용 아가씨를
너의 독수에서 구했다고 할 것이야. 이 아가씨가 애초에 너 강소
어만 없었다면 어찌 이런 모양이 되었겠어!"
소어아도 이 말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길게 탄식을 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군. 너희 부자는 다른 재주는 없고 다른
사람을 모함해서 좋은 사람을 자처하는 재주 뿐이야."
"어떤 것이 좋은 사람이고 어떤 것이 나쁜 사람이지? 이 세상에
좋고 나쁜 것의 구별이 있는 줄로 알고 있나?"
"하지만 단합비의 은을 강탈한 것은 사실이니 부정할 수가 없
지."
강옥랑은 시치미를 뗐다.
"무슨 은? 나의 두 손이 비어 있는데 은은 무슨 은이란 말이냐?
은이 누구의 것이며 누가 강탈했다는 거지?"
헌원삼광은 크게 분노했다.
"너 이 자식아, 감히 내 앞에서 허튼 수작이냐?"
"무슨 말씀, 누가 허튼 수작을 부린다는 것이오? 강호 사람들이
당신 같은 악도귀의 말을 믿겠소, 아니면 나 강옥랑의 말을 믿을
것 같소?"
헌원삼광은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 놈이 몇 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십대악인 중에 난 끼지 못
했을 거야."
"너무 칭찬은 마시오. 나는 다만......"
이때 밖에서 돌연 비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오랫동안 계속 되었으며 그 처절함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을 도려내는 듯하였다.
강옥랑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렸다.
소어아가 입을 열었다.
"네가 데려온 사람들이 아니냐?"
강옥랑은 아무소리 하지 않고 모용구매의 손을 잡더니 밖으로
뛰쳐 나가려했다.
소어아는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너의 부하들을 이토록 비참한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을 보니 필시 무서운 사람인 모양이다. 네가 죽는 건 괜찮
지만 그러나 모용구매......."
소어아는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다섯 개의 그림자
가 나타나고 있었다.
아직 어느 누구도 그들의 얼굴을 보지는 못 했으나 그들이 몰고
온 음양괴기는 이미 사람들의 손에 식은 땀을 흐르게 하고 있었
다.
'찌직 찌직'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걸어나왔다.
기이한 빛을 내는 눈동자들이 번쩍였다. 그들의 얼굴은 초록색
이었는데 몸에 흐르는 피까지도 벽록색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
도로 차가운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길고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채찍을,
또 왼손에는 커다란 새집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헌원삼광이 돌
연 소리쳤다.
"친구들은 어떤 사람이지? 무엇하러 왔나?"
그의 고함소리는 얼마나 컸던지 벼락처럼 동굴 안을 진동시켰
다.
그러나 그 다섯 명의 흑의인은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으시시한
눈으로 동굴 안의 사람들을 바라볼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강옥랑이 큰소리로 외쳤다.
"구수산장의 구 아가씨와 악도귀가 모두 여기에 있소. 친구들은
빨리 물러가는 것이 좋아.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그는 역시 매우 영악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자 즉시
헌원삼광과 모용구매의 이름으로 그들을 놀라게 할 작정을 한 것
이었다. 사실 이 두 사람의 이름은-강호의 인물들에게 두려움을
자아낼 정도로 고명한 이름들이었다. 또한 그는 상대방이 비록 그
두 사람의 이름을 무시해 버린다 해도 이 자리의 일들은 그 두 사
람에게 떠넘겨지리라고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섯 명의 흑의인들은 여전히 입을 국 다문 채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서있을 뿐이었다.
이때 철평고가 돌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소어아의 손을 꽉 움켜쥐고 부르르 떨며 더듬거렸다.
"쥐...... 저 쥐들이......"
몇십 마리의 쥐들이 그들이 들고 있는 철장 속에 갖혀 있었다.
소어아는 비록 쥐를 두려워 하지는 않았지만 수십 개의 기분 나
쁘게 반짝이는 눈들을 보자 온 몸에 소름이 끼쳐오는 것을 느꼈
다.
제일 앞에 있던 흑의인이 괴상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흐흐흐...... 그렇지. 쥐...... 우리들은 오직 쥐를 잡으러 온
것이오. 여러분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당신들을
건드리지는 않을 것이오."
쇼의 말투는 비록 예의를 갖추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쥐의 기
성(奇聲)보다 더욱 듣기가 거북했다.
헌원삼광은 놀랐다.
"당신들은 쥐를 잡으러 여기까지 오셨소?"
"그렇소!"
헌원삼광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어보았
다.
"쥐를 잡아서 어떻게 하자는 거요?"
그 흑의인이 역시 괴이한 웃음을 띠우며 말을 계속했다.
"우리들의 왕이 쥐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방으로 찾으러 다
니는 것이오, 그러나 백리 내의 쥐들이 모두 이 산으로 도망을 했
기 때문에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오."
소어아가 머리를 끄덕이며 한마디를 했다.
"그래서 이 산에 쥐들이 그렇게 많군. 알고보니 당신들에게 쫓
겨 온 것이로군."
헌원삼광의 안색이 변했다.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 듯 무서운 소
리로 재빠르게 물었다.
"친구들의 주인은 누구요?"
그러나 그 흑의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손을 들어 동
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다섯 사람의 입에서 소름끼치는 휘파람 소리가 동시에 새어나왔
다.
철평고는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귀를 막아버렸다. 소어아도
온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러나 소어아는 두 눈만은 여전히 크게 뜨고 있었다.
헌원삼광도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소어아는 그를 향해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 쥐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오?"
"음......음......."
"알고 있다는 말이오. 아니라는 말이오?"
"음......."
헌원삼광은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바로 이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수많은 쥐들이 달려나오
기 시작했다. 어두운 구석이나 벽에 난 구멍을 통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쥐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흑의인들은 철장을 바닥에 놓고 문을 열었다.
늑대나 호랑이들이 떼지어 몰려온다 해도 소어아가 이토록 두려
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창백해졌고 온 몸을 떨고 있었다.
배 속의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것 같았고 모든 것을 다 토할 것
만 같았다.
그는 간신히 구역질을 참고 있었지만 철평고는 참지 못 하고 '
웩'하는 소리를 내며 먹었던 음식을 온통 바닥에 토하기 시작했
다.
쥐가 그들의 다리 사이로 지나갔다. 이 무림의 고수들도 더 이
상 참을 수 없었던지 큰바위 위로 뛰어 올라갔다.
철평고는 양손으로 눈을 가린 채 새파랗게 질려 온 몸을 부들부
들 떨고 있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두려운 가운데서도 두 눈을 부릅 뜨고 그 광경
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천 마리의 쥐들이 자기 다리 사이로 다니
는 극히 보기 어려운 광경을 왜 놓치겠는가!
흑의인들은 계속 휘파람을 불며 채찍을 휘둘러댔다. 쥐들은 철
창속으로 몰려 들어갔다.
다섯 개의 철장이 쥐들로 꽉 들어차자 흑의인들은 비로소 채찍
을 놓고 휘파람 소리를 그쳤다.
남은 쥐들은 곧 사방으로 삽시간에 사라져버렸다.
동굴에는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철평고는 주위가 조용해지자
가만히 손을 내렸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땀투성이었다. 마치 악
몽에서 깨어난 사람 같았다.
"쥐가 무섭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군."
헌원삼광이 기침소리를 내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산천에 쥐가 많다 해도 이렇게 많은 숫자는 보지 못 했어."
강옥랑도 한마디 거들었다.
"나는 두렵지는 않았다만 오직 소름이 끼쳤을 뿐이오."
이들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흑의인이 크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 친구의 말이 맞소. 쥐는 두렵지 않을 뿐더러 매우 맛있는
고기오."
소어아는 쓰디쓴 표정을 지었다.
"맛이 있다고?"
흑의인은 예의 그 괴이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믿기지 않는다면 한 번 먹어 보시오."
그는 철창 속에서 쥐를 한 마리 꺼내서 소어아에게 건냈다.
"역시 각하께서 혼자 좋아 하시는 것이 낫겠오."
"안타깝군. 각하께서는 보기에 간이 큰 것 같은데 쥐고기도 먹
지 못 하시오? 쥐고기를 맛본 후에 다른 고기를 먹으면 마치 벌레
를 씹는 기분일 것이오."
그는 말을 마치자 정말 쥐를 산채로 씹어먹기 시작했다. 쥐는
비명을 질러댔고 그 흑의인의 입가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소어
아는 온 몸의 잔털이 불쑥불쑥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애써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업을 열었다.
"쥐를 잡았으면 이제 가야하지 않겠소?"
강옥랑이 재빠르게 그의 말을 받으며 음침하게 웃었다.
"너는 항상 남의 일에 참견하길 좋아하더니 이번에는 왜 참견을
않지?"
"내가 왜 참견을 하겠어? 네가 똥을 먹는 것도 내가 참견할 바
가 아니지."
강옥랑은 안색이 변해 흑의인을 힐끔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친구, 정말 그대로 가는 것이오?"
"벌써 말을 했잖소. 우리가 온 것은 쥐 때문이고, 당신들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오."
강옥랑은 탄식을 했다.
"친구는 여기에 쥐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르오?"
그 흑의인은 눈을 모용구매와 철평고에게 돌렸다. 그는 웃으면
서 가볍게 입을 땠다.
"본문 제자는 모두 여자를 쥐보다 귀엽게 여기지는 않소."
강옥랑은 다시 급히 입을 열었다.
"금은 같은 보물도 쥐보다 귀엽지는 않다는 거요?"
이 말이 떨어지자 흑의인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보물이 어디에 있소?"
강옥랑은 눈길을 동굴 쪽으로 돌리고 입가에 웃음을 가득 띠웠
다.
"이 두 분이 있으니 나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소."
소어아는 탄식을 한 후 쓴웃음을 지으며 강옥랑을 노려보았다.
"정말 이상하군. 내가 왜 너를 예전에 죽이지 않았을까?"
강옥랑은 소어아를 바라보며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네가 뭘 믿고 나를 죽여? 그건 어려운 일이야."
다섯 명의 흑의인은 서로 쳐다보더니 철장을 들고 뒷쪽의 동굴
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소어아가 재빨리 그들을 막아섰다.
"거기엔 쥐가 없으니 여러분들은 돌아 가시오."
그 흑의인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네가 우리의 길을 막으려고?"
"그곳은 나갈 길이 아니오."
흑의인은 또다시 그 괴이한 웃음을 보였다.
"친구, 내 말을 잘 기억 하시오. 당신은 비록 쥐를 먹지 않지만
쥐는 당신을 먹을 것이오."
"나는 이미 며칠 동안 목욕을 하지 못 했소. 너무 더러워서 쥐
들도 먹지 않을 것이오."
그 흑의인이 크게 웃고 나서 대꾸했다.
"좋아, 너는 재미있는 사람이구나. 간도 크고......."
그는 말을 하면서 수중의 채찍을 휘둘렀다.
검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채찍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소어아는 가볍게 채찍을 붙잡았다.
"친구도 기억해 두시오. 나는 비록 쥐를 두려워 하기는 해도 사
람은 두려워 하지는 않소."
흑의인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힘을 주어 채찍을 빼내려 했지만
채찍은 마치 소어아의 손에 못이라도 박은 듯 꼼짝하지를 않았다.
소어아는 다시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온 천하의
쥐를 다 잡아먹는다 해도 나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다
른 생각을 가졌다면 가만 두지 않겠소."
흑의인이 말을 받았다.
"당신이 우리를 간섭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당신 일에 간섭하지
않겠소. 하지만 당신이 우리의 갈길을 막는다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오."
그는 말을 끝내자 돌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흑의인이 즉시 철장 문을 열었다. 철장 속에
가득 들어있던 쥐들이 마치 화살처럼 밖으로 몰려 나왔다.
소어아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백 마리의 쥐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소어아는 놀랍고도 속이 메시꺼웠다. 결국
그는 채찍을 잡았던 손을 놓고야 말았다.
순간 다섯 개의 채찍이 그를 향해 휘둘러져 왔다.
소어아는 온 몸에 쥐가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에 손을 쓰지 못
하고 그저 뒤로 물러서면서 소리쳤다.
"헌원삼광, 나를 돕지 않는 거요?"
그러자 헌원삼광은 주저하면서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헌원삼광, 당신은 이미 내가 누구의 부하인 줄을 알고도 손을
쓸 작정이오?"
헌원삼광은 흑의인의 말이 떨어지자 곧 물러섰다. 그의 행동은
덩치답지 않게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헌원삼광, 당신도 여자처럼 쥐를 무서워하는 것이오?"
그러나 헌원삼광은 고개를 돌리고 그를 쳐다보지도 못 했다.
소어아의 몸에 점점 더 많은 쥐들이 달라 붙었다. 그는 몸이 가
려워 죽을 지경이었다.
다섯 개의 채찍도 그것대로 마치 독사처럼 그의 몸에 휘감겼다.
소어아는 그때서야 정말 당황하게 되었다.
강옥랑은 소어아를 바라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천하에서 가장 영리하다던 강소어가 쥐에 물려죽게 될 줄이야
몰랐겠지?"
소어아는 그 사이에 벌써 몇 번의 채찍을 맞았다.
"나도 정말 생각 못 했지......"
그가 이렇게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있을 때 돌연 한 사람이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나타나더니 흑의인 중 한 명의 목을 잡아 던
지면서 채찍을 빼앗았다.
다른 네 명의 흑의인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채찍을 그 사람에
게 휘둘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채찍은 오히려 그 흑의인들의
몸에 서로 격중하고 말았다.
소어아의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 나왔다.
"아! 당신이 왔군!"
그 사람은 바로 화무결이었다. 이화접옥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
네 사람을 서로 치게 할 수 있었으랴!
소어아는 그가 온 것을 보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쉴 수가 있었
다.
강옥랑도 그가 온 것을 보자 회색이 만면했다. 화무결이 소어아
를 구하는 것이 직접 그를 죽이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 다섯 명의 흑의인들은 모두 놀라서 멍하니 화무결을 바라보
며 다시 채찍을 휘두를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잠시 후 흑의인이
입을 열었다.
"친구는 누구시오? 왜 우리 일에 참견을 하시오?"
"나는 몰라도 내 무술은 알겠지?"
그 흑의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
"이...... 이화접옥!"
"그렇소."
"이화궁 사람이 왔다면 우리가 물러서야지!"
흑의인은 즉각 뒤로 물러섰다. 이때 소어아가 소리쳤다.
"너희들은 내 몸에다 쥐 똥칠을 하고도 그냥 갈 셈이냐?"
그러나 흑의인은 소어아를 비웃었다.
"댁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소? 각하가..... 흥!"
이때 화무결이 한 걸음 나섰다.
"당신들은 그를 무시하는 것이오?"
"흥!"
화무결은 흑의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 그렇다면 쥐의 도움을 청하지 말고. 그와 다시 싸워 보시
오. 다섯 사람이 함께 손을 써도 무방하오, 나는 절대로 손을 쓰
지 않을 테니까."
흑의인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각하께서 손을 안 쓰신다면 이 자식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어아가 일격을 가했다. 그들은 분명
히 소어아가 공격해 오는 것을 보고서도 피하지를 못 했다. 채찍
을 휘두르기도 전에 이미 한 사람이 날아가버렸다.
다른 네 명의 흑의인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소어아가 손을 몇
번 휘두르자 그 사람들도 한꺼번에 날아가버렸다.
화무결은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 지금은 그의 무서움을 알겠소?"
다섯 명의 흑의인은 아무말도 못 하고 땅에 쓰러진 채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소어아는 크게 웃었다.
"사람이 쥐보다 못 하다니. 단 한 대에 쓰러지는구나."
흑의인들은 대꾸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 했다.
이때 한쪽에 있던 헌원삼광이 그들을 보내라고 소어아에게 손짓
했다.
"빨리 가보시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흑의인들은 일어서지 않고 한데 뭉쳤다.
그리고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잠시 후 잠잠해졌다.
"당신들 스승이 와서 안고 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오?"
이때 헌원삼광이 돌연 달려와서는 한 흑의인의 몸을 제치더니
안색이 즉각 변했다. 그는 서서히 그 흑의인을 땅에 놓으며 탄식
했다.
"그들은 영원히 일어나지 못 할 거야."
초록색이었던 흑의인의 얼굴은 이미 까맣게 변색되고 있었다.
헌원삼광이 내려놓은 시체의 입, 코 등 오관에서 피가 흘러내렸
다.
소어아는 흠찔 놀라며 말했다.
"그 다섯 사람은 자살을 한 것이오?"
화무결이 한마디 했다.
"어쩌면 당신이 그들을 놔 주지 않을 줄 알고........"
소어아는 발을 떼어 놓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난 이미 목숨을 구했으니 그들을 죽일 생각은 없었소. 이 사람
들은 쥐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쥐 같은 소갈머리가 됐단 말인
가?"
헌원삼광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입에다 독약을 준비하고 다녔는지도 모르지요."
헌원삼광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몸을 굽혀 흑의인의 입을 벌렸
다.
그의 입 안에서는 먹물 같은 물이 흘러 나왔는데 이상한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그들의 입에는 이빨이 하나도 없었다.
소어아는 탄식했다.
"무서운 독약이군.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까지 이렇게 녹아버
리니 !"
헌원삼광이 탄식했다.
"네 말이 맞아. 이 녀석들은 독약을 이 속에 숨기고 있었어."
"이들은 왜 자살을 해야만 했을까? 그들을 죽일 의사도 없었고
그들을 협박하지도 않았는데......"
헌원삼광은 그 흑의인의 온 몸을 뒤졌지만 다만, 약간의 은을
찾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찾아내지를 못 했다.
헌원삼광이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생각하더니 갑자기 그의 옷섬
을 헤쳤다.
"네가 모르는 일의 회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 흑의인의 가슴에는 열 개의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 열 개의 글자는 불을 몸에다 지져 새겨 넣었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도 지울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무아문하사(無牙門下士), 가살불가욕(可殺不可辱)."
소어아는 중얼거렸다.
"무아문하사, 가살불가욕....... 이게 무슨 뜻이지?"
헌원삼광이 말을 받았다.
"남들과 싸워 이기지 못 하거든 자살을 해서 그들 주인의 명예
를 더럽히지 말라는 뜻이야. 이들이 만약 지금 자살을 하지 않고
돌아갔다면 열 배 이상의 고통을 받아야 했을 걸."
"당신 이야기는 돌아가서 주인의 형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 자살
했다는 것이오?"
"그렇지!"
"그러나 그들이 여기에서 얻어맞은 것을 그들의 주인이 어떻게
알겠소. 나도 누구에게 굳이 얘기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이 보고
하지 않으면 그만 아니오?"
"이 자식들이 네가 그렇게 화통한 사람인 줄을 알았겠느냐? 네
가......."
이때 화무결이 돌연 말참견을 했다.
"그런 것이 아니오."
소어아가 물었다.
"그럼 무슨 이유요?"
"난 여기에 들어올 때 이미 두 사람이 더 숨어있는 것을 발견했
소. 하지만 우선 안을 살펴보려고 그냥 들어왔지."
헌원삼광이 손뼉을 치면서 껄껄댔다.
"알겠군. 일곱 중에서 다섯 사람은 들어오고 두 사람은 어두운
곳에서 동정을 살피다가 사태가 좋지 않다고 생각되자 달아났을
거야. 이 다섯 사람은 그들이 이미 보고를 했을 데니 돌아가서 고
생을 하는 것보다는 지금 통쾌하게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겠
지."
이때 소어아가 갑자기 자기의 이마를 치며 소리쳤다.
"큰일났다. 정신이 없어서 강옥랑이 달아나는 것을 발견하지 못
했단 말이야."
헌원삼광도 그제서야 사방을 살핀 뒤 소리쳤다.
"맞았어. 그 강씨의 잡종이 과연 달아났군."
소어아는 화무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들어올 때만 해도 그 자식이 여기 있었지. 그 자식은
얼굴에 희색이 만면한 것이 당신이 나를 죽일 줄로 알았던 모양이
오. 그러나 상황이 이상하다고 판단하고는 달아난 게지...... 아,
그 교활한 자식을 잘 지켰어야만 했었는데."
화무결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가 가는 것도 좋소."
소어아는 놀랐다.
"당신은 그 자식이 나가는 것을 봤소?"
"그렇소."
"그러면서도 그 자식을 보냈단 말이오?"
화무결은 탄식했다.
"친구는 친구이니까......"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왜 모용구매까지 데리고 가게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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