绝代双骄 10

3학년2반 | 2022.02.13 07:17:54 댓글: 0 조회: 323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8499
간계(奸計)에 빠진 철평고
화무결은 모용구매를 강옥랑이 데리고 갔다는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모용 아가씨?...... 모용 아가씨가 그와 같이 있었소?"
"당신..... 당신은 보지 못 했소?"
"한 여자가 그의 옆에 있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그녀가 모용 아
가씨인 줄은 몰랐소. 당신을 구하려는 마음이 급해서......"
소어아는 쓴웃음을 보였다.
"당신과 난 눈을 좀 씻어야겠소."
이때 헌원삼광이 돌연 그의 어깨를 치면서 말을 건냈다.
"너와 같이 나온 아가씨도 달아났는데?"
소어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왜 달아났지? 그녀도 화무결을 두려워한다는 말인가?"
화무결이 물었다.
"그 아가씨는 또 어떤 사람이오?"
"그녀는 철평고라 하오..... 그녀를 아시오?"
"그런 이름은 들어보지를 못 했는 걸."
소어아는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맞았어. 그녀가 여자라는 걸 잊었었군. 여자는 자기가 가야한
다고 생각하면 즉각 가고 말지. 아무 이유 없이도 말이야."
헌원삼광은 그의 말을 듣자 크게 웃었다.
"너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백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이유를 남자들은 한평생 이해를 하
지 못하지."
철평고는 확실히 이유가 있었다. 그것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화무결은 본래 그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에는 철평고라
는 본명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화무결을 보자 곧
안색이 변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화무결이 자기에게 신경을 쓰
지 않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바삐 달아났다.
동굴의 입구에는 일곱 여덟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어 비참한 광
경이었지만 동굴 밖의 천지는 아름다웠다.
산에는 석양이 내리고 있었고 소슬한 바람 속에 꽃의 향기가 물
씬 풍겨왔다. 철평고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로운 몸이 된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잠시 멍
하니 서 있다가는 발길이 닿는대로 걷기 시작했다. 더 이상 머뭇
거리다가 이화궁 전인인 화무결의 눈에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서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옥랑이
몰래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화무결을 보고 매우 기뻐했으나 소어아에 대한 태도를 보
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강옥랑은 머리가 잘 돌아갔다. 그는 일단 자리를 피하기로 결정
하고 모용구매를 이끌고 동굴을 삐져나왔다. 그런데 그와 모용구
매에 앞서 철평고가 동굴을 빠져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철평
고가 달아나는 것을 본 강옥랑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철평고가 경공을 전개하자 강옥랑은 더욱 놀랐다.
그 소녀의 경공은 오묘하고도 놀라왔고 몸이 날 때 일종의 독특
하고 고귀한 자세를 취했다.
천하 각문각파의 경공과는 전혀 틀렸고, 화무결의 신법과 비슷
했다.
강옥랑은 그 소녀의 뒤를 쫓아 도대체 어떻게 오늘과 같은 일이
생겼는지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강옥랑은 자신의 몸 뒤에도 두 사람이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소어아, 화무결, 헌원삼광은 드디어 동굴을 나섰다.
소어아는 시체를 바라보며 탄식을 했다.
"이 사람들은 비록 강옥랑을 쫓아 왔지만 강옥랑이 그들을 버리
고 가버렸으니 우리가......"
헌원삼광은 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넌 네 일이나 해라. 죽은 사람들은 내가 매장할 테니까."
"나보고 뭘 하라는 것이오?"
헌원삼광은 탄식을 했다.
"내가 너라면 빨리 구멍을 하나 파고 드러 누워서 다시는 나오
지 않겠다."
"내가 싫다면?"
"네가 숨기가 싫다면 네가 평생 처음보는 악독하고 소름이 끼치
고 골치가 아픈 사람을 상대할 준비를 해야지."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요?"
"위무아야! 그 쥐새끼들의 두목이지."
"그 다섯 명을 내가 죽인 것도 아닌데......."
"그가 도리를 지키는 줄 아느냐? 어차피 네가 그의 부하를 건드
렸으니 그는 너를 끝까지 추적할 것이야."
소어아는 눈을 몇 번 깜박깜박하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나를 알아볼 수 있겠소."
"그 잡종은 알 방법이 있지."
"그렇다 해도 나를 찾을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은 찾지 못 해도 그는 찾을 수가 있어."
소어아는 깊이 숨을 들어 마셨다.
"위무아란 녀석은 도대체 어떤 놈이오?"
"십이성상에 대해 들어 봤느냐? 그가 바로 심이성상 중의 자성
(子星)이지......"
"난 또 누구라고, 알고 보니 심이성상이었군..... 십이성상 몇
명을 상대해 봤지만 나를 어떻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누구와 싸웠지?"
소어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여러 명이오. 그 중에는 뱀도 있었소."
"뱀이 쥐보다 무섭지 않을까요?"
헌원삼광은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위무아를 벽사와 같이 취급했다간 곧 죽고 말아. 십이성
상중 이 자성 위무아는 다른 열 하나를 합친 것보다 몇 배나 더
무서운 놈이야."
"......"
"십이성상이 이름을 날렸던 것도 사실은 위무아 덕분이야. 그들
이 한창 이름을 날릴 때에는 사람들이 십이성상의 이름만 듣고서
도 밤에 잠을 자지 못 했지. 너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당시지만."
"그가 그렇게 대단하오?"
"하늘도 땅도 두려워하지 않는 십대악인도 위무아의 이름을 들
으면 골치가 아파지는 걸."
소어아는 그때서야 약간 이해가 가는 듯하였다.
"십대악인도 골치를 앓는다면 보통이 아니겠군!"
화무결이 침묵을 깨뜨리고 말했다.
"나도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소."
소어아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화무결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화궁도 그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소."
화무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궁을 떠날 때 스승님은 날더러 두 사람을 주의하라고 하
셨지. 그 중 하나가 위무아야."
"또 하나는?"
"화무결은 그를 힐끗 바라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또 하나는 연남천, 연 대협이지!"
헌원삼광이 옆에서 박수를 쳤다.
"내말이 맞지. 이화궁 사람까지도 그를 연남천과 똑 같이 취급
하니 말이야."
소어아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불쑥 물었다.
"그가 지금 어디에 있죠?"
헌원삼광이 대답했다.
"십이성상이 잠잠하게 된 이유는 바로 위무아가 십여 년 전에
돌연 사라진 탓이야. 어떤 사람은 그가 이화궁주와 싸우다 다쳐서
숨어버렸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일종의 신비스러운 무
술을 연마하기 위해 은거하고 있다고도 해....... "
그는 길게 탄식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의 무술이 완성되면 이화궁주와 연남천
의 무술조차도 어린애 장난이 된다는 것이지."
화무결이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했다.
"이화궁의 무술은 영원히 어린애와 같지 않을 거요."
헌원삼광은 그를 향해 웃었다.
"공연히 그가 큰소리를 치는 것이겠지, 어떻든 간에 나는 그의
무술이 실패하기를 바라고 있어."
"당신 생각에는 고가 어디에 있을 것 같소?"
"글쎄 그가 숨고자 하면 귀신도 찾지 못 해."
소어아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혹시 귀산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구양 형제 두 사람
이 죽기 전에 말했던 사람이 바로 그가 아닐까?....... "
그는 돌연 헌원삼광의 어깨를 치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죽은 시체를 매장한 후 무엇을 하겠소?"
"도박을 한판 벌릴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흥미를 잃었어."
"그럼 당신이 동굴 속에 있는 은을 단합비에게 갖다 주고 누가
강탈했었는지 말해주지 않겠소 ?"
그는 기침을 한 번 하고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물건을 돌려준 후 다시 도박을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오. 단
합비는 식욕이 좋으니 먹기 도박을 하면 거절하지 않을 거요."
소어아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무결을 데리고 몸을 날렸다.
헌원삼광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보일 뿐이었다.
"강소어의 일은 거절하기가 정말 어렵지."
소어아는 화무결에게 자기가 겪은 일을 얘기했다.
화무결은 놀라움을 금치 못 하며 듣고 있었다. 그 자신은 그 동
선생이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점차로 그의
내력에 대해서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화무결도 소어아에게 연남천을 만났던 얘기를 해 주었다.
"연 대협께서 나를 찾는 후에야 당신을 놓아 준다고 했다면서
지금은 어떻게 된 것이오?"
"이 이틀 동안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
소. 마치 무슨 교란이 닥칠 것 같은 예감이 자꾸 들었고 내 일생
중 한번도 경험하지 못 한 그런 심정이었소."
"이틀 동안 재난을 당한 것은 나인데 어찌 당신 마음이 불안해
졌지. 이거 정말 이상한 일이군."
그들은 이것이 바로 마음이 통하고 피가 당기는 형제이기 때문
에 일어나는 감응임을 모르고 있었다.
화무결이 쓴웃음을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이상히 여기고 떴소, 정말 밖으로 나오고 싫었고 마치 무
슨 큰 일을 만날 것 같은 그런 불안감에 사로 잡혔었소."
"그래서?"
"연 대협은 눈치가 이상했던지 나에게 뭐 원하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소. 나는 나가고 싫다고 했지...... 나는 연 대협이 막을 줄
알았는데 그는 통쾌히 허락을 했소."
"당신이 그저 이유도 말하지 않고 나가고 싶다고만 했는데도 그
가 당신을 보냈단 말이오?"
"그렇소. 그래서 나는 나의 예감이 이끄는 대로 그 동굴까지 가
게 된 것이오."
"연남천은 과연 연남천이고 동 선생과는 틀리오. 그런 사람을
만난 것은 진정 당신의 복이오."
화무결은 침묵을 지킬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 속
으로 연남천을 흠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존경하는 사람이 이
화궁의 원수라니........."
소어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그의 생각을 멈추게 했다.
"하지만 당신도 역시 군자요. 그래서 그가 당신을 놓아 줄 수가
있었지. 만약에 나를 만났다면 그렇게 쉽게 보내주지를 않았을 거
요."
"당신은 왜 자신을 군자가 아니라고 하지?"
소어아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난 어릴 때부터 악인들 틈에서 자랐소. 게다가 강호에 나와 한
두 사람의 군자라는 사람을 만났었지만 그들은 모두 나를 실망케
했소...... "
그는 한바탕 웃고 나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것은 세상에 위선자가 너무 많은 까닭이오.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화무결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대는 많은 배 중에 한두 개 썩은 것만 먹어보고 모두가 썩었
다고 하는 것과 같소."
"당신이라면 하나의 썩은 배를 먹고도 두번째의 것을 또 먹을
마음이 들겠소?"
"나는 계속 여덟 개의 썩은 배를 먹었다 해도 아홉 개째를 또
먹어보겠소, 계속 먹어 보지 않으면 영원히 맛있는 배를 먹을 기
회가 없어지기 때문이오."
소어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겠지. 나처럼 어리석은 판단을 하면 영원히 좋은 배를 먹
어보지 못 하겠지....... "
화무결은 담담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연 대협께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탠데, 그대는....... "
소어아는 급히 그의 말을 잘랐다.
"당신은 그를 만나거든 나를 봤다는 소리는 마시오."
화무결은 소어아의 말에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에게 가지 않겠다는 말이오?"
"나..... 나는 귀산에 가고 실소. 그가 알게 되면 필시 나를 못
가게 할 것이오."
화무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귀산에 가겠다고? 왜?"
"나는 사람들을 구해야 하오!"
"누구를?"
"악인!"
화무결은 깜짝 놀랐다.
"십대악인 중에......"
"당신이 어떻게 그것은 아시오."
"철 소저에게 당신이 악인곡에서 자랐다는 얘기를 들었소."
소어아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렇소. 그들은 남에게 속아 귀산에 가게 되었소. 위무아가 정
말 그토록 무서운 사람이고, 또 거기에 있다면. 그들은 위험에 빠
지게 될 것이오."
"그러나 그들은....... "
"비록 좋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나를 키운 사람들이오. 내가 그
일을 이미 알고 있으니 상관을 하지 않을 수 없소. 더군다
나.......나는 철평고를 찾고 싶소. 그녀도 무술이 뛰어나기는 하
지만 세상의 험악함을 모르니 수시로 남에게 속기 쉬울 것이오.
그녀가 나를 구했으니 나도 그녀를 도와야 되오....... "
그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도 알아야 돼. 미인에게 빛을 지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
을!"
화무결은 소어아를 주시할 별 한동안 할 말을 잊은 듯했다. 얼
마후 그가 입술을 뗐다.
"나는 지금에야 당신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겠소...... "
조그마한 마을, 간판이 달린 작은 주점에서 음식 냄새가 흘러나
와 사람의 식욕을 돋우고 있었다.
철평고는 그 냄새를 맡자 가뜩이나 고팠던 배가 더욱 더 쓰려왔
다.
비록 동굴에서 얼마 간의 음식을 먹었지만 이삼 일간이나 굶은
사람의 식욕이 그렇게 쉽게 만족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배고픔이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 것인가 하고 새삼스레 느꼈다.
그녀는 그 작은 음식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주점 안은 너무나 지저분했고 아직 치우지 않은 상에서는 파리
떼들이 붙어 있었다.
평상시였다면 이런 곳에는 가마로 모셔온다고 해도 절대로 들어
오지 않았을 철평고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문 앞에서 귀를 후비고 있던 종업원이 주저하며 일어서더니 철
평고를 아래 위로 뚫어보았다.
그녀가 이화궁에 있을 때는 고급스럽고도 세련된 비단옷을 입고
있었을 뿐더러 본래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러나 이 이틀 간의
고생으로 지금은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이나 옷은 흙과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으며 머
리도 형편없이 헝클어져 있어 감옥에서 탈옥한 여죄수나 집에서
쫓겨난 첩의 행색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동 선생으로부터 탈출한
후에 한번도 자신의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리라고는 생
각하지도 못 했다.
주점 안에는 세 사람의 손님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모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왜 그들이 자기를
그렇게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종업원이 천천히 다가와서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걸어 왔다.
"아가씨께서는 식사하러 오셨소?"
"음!"
그녀는 군침이 업 안에 가득차서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아가씨께선 국수를 잡수시겠습니까?"
철평고는 깊히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나는 국수를 싫어한다. 우선 닭고기와 소다리, 그리고......
맞았어. 저런 음식 몇 가지를 좀 가지고 와라."
그녀는 말 한 마리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옆에 있던 세 명의 손님은 그녀가 주문하는 것을 보자
웃음을 터뜨렸고 종업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가 그저 고기를 좀 먹겠다고 했으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
나 닭이나 소다리라니." 사실 이화궁의 사람이 어찌 예삿 음식점
의 요리명을 알 수 있었겠는가!
철평고는 눈동자를 크게 뜨면서 물었다.
"왜 너희 주막에는 이 몇 가지 음식도 없단 말이냐?"
"음식은 있지만 먼저 드릴 말씀이 있소."
"무슨 말이냐?"
"본 식당에서는 선불을 주셔야 합니다."
철평고는 놀라고 말았다.
십여 년의 이화궁 생활로 돈이 필요한 것을 잊었던 것이다.
"식사를 하시려면 돈을 내셔야 하는 것도 몰랐습니까?"
철평고는 얼굴을 붉히며 더 이상 말을 하지 못 했다.
곁에 앉았던 세 사람이 다시 크게 웃어 제졌다. 그들 중 한 사
람이 나섰다.
"아가씨, 이쪽으로 와서 같이 듭시다. 여기에는 닭 뿐만 아니라
오리도 반쯤 남았으니 잡수시오."
철평고는 너무 부끄러워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었으면 하고 후
회했다. 만약 그녀가 소선녀였다면 벌써 그 사람들을 채찍으로 쫓
아버렸을 것이다. 또 만약 소미미였었다면 그 사람들은 살 생각을
말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철평고는 비록 싸늘하기는 했어도 악
독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계속 앉아있는 것도 창피했고 그대로 나간다는 것도 창
피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망연히 앉아 있었다.
이때 강옥랑이 주점의 문을 열고 걸어 들어왔다.
그는 철평고 앞으로 다가오더니 공손히 인사를 하며 양손으로
열 몇 개의 금닢을 바치며 웃었다.
"누님께서 급히 나오시는 바람에 돈을 가지고 나오지 못 한 것
을 알고, 고장(姑丈)께서 갔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종업원과 옆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넋을 잃고 말았다. 그
러나 그 중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물론 철평고 자신이었다. 그녀
는 그가 강소어가 욕을 하던 나쁜 사람인 줄로만 알 뿐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몰랐다.
그러나 하여튼 간에 금이 필요했으므로 그녀는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강옥랑이 그녀의 앞 좌석에 앉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
보고만 있었다. 모용구매도 마치 그의 시녀처럼 따라서 앉았다.
종업원은 매우 공손한 태도로 변하며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왔다.
얼마 안 되어 많은 음식들이 차려졌다.
강옥랑은 냉수로 철평고의 젓가락을 씻어 건네며 말했다.
"야채가 아주 싱싱한데 좀 잡수어 보세요."
철평고는 돌연 이런 '동생'이 생기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를 몰랐다. 평상시에 강옥랑이 그녀의 음식값을 대신 치르려 했다
면 아마 거절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강옥랑은 너무나도 사태를 잘
이용할 줄 알았다. 그녀가 망신을 당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의
체면을 살려놓은 것이었다.
철평고는 매우 난처했다. 그러나 그녀는 시종 강옥랑과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식사를 마쳤다. 그런 후 그녀는 돈을 탁
자 위에 올려둔 채로 나갔다. 강소어가 그 사람을 싫어 하니 그
사람이 필시 좋은 사람이 아니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옥랑도 생각을 한 번 변경하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는 철평고의 뒤를 계속 쫓기 시작했다.
철평고는 얼마를 가다가 더 참을 수가 없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대체 무얼 할려는 거요?"
"나는 다만 아가씨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묻고 싫을 뿐이오?"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오."
"아가씨 혼자서는 불편할 테니 아가씨의 시중을 들어 드렸으면
하오."
"당신의 관심은 필요 없소."
그녀는 업으로는 이렇게 말을 했으나 마음이 이미 움직이고 있
었다.
거리의 행인들이 하나 둘 줄어들었다.
그녀는 정말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다. 그녀는 세상에서 살아
가는 것이 절대로 자기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느꼈다.
철장에 갇혀 있던 새는 자유를 얻어 산으로 돌아가도 얼마 안
되어 굶어 죽어버린다. 이미 독립하여 생활할 힘이 없어졌기 때문
이다.
철평고는 강옥랑이 오랫동안 아무소리도 내지 않자 그가 갔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급히 고개를 돌려 뒤돌아 보자 강옥랑은 웃으며 여전히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큰소리로 말을 하려고 했으나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
했다.
"왜 아직 나를 따라다니는 거죠?"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 아가씨는 쉴 생각이 없소?"
철평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정말 피곤했다. 그러나 어디
로 가서 쉬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세상에 여관이라는 것이 있
는 것도 몰랐다.
강옥랑의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아가씨께서 나와 같이 있고 싶지 않다면 제가 여관을 찾아드리
죠."
철평고로서는 거절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여관을 찾아 들어간 철평고는 단단하게 문을 닫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이제 가도 좋아요."
이번에는 강옥랑도 말을 잘 듣는 듯했다. 철평고는 한참 귀를
기울여도 아무 동정이 없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이 며칠 동안은 너무 일이 많았다. 그녀는 강소어를 생각했고
또 화무결을 생각했다. 그리고 강옥랑도 생각을 했다.
(강소어는 왜 그와 맞설까? 그의 인품도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철평고는 너무 피곤하였다. 낯선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다.
이튿날 거의 정오가 되어서야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곧 배가 고픈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몇 번이나 음식을 주문
하려 하다가는 결국 참고 말았다.
이때 돌연 밖에서 종업원의 웃음섞인 말소리가 들려왔다.
"강 공자께서 아침식사를 시키셨는데 지금 들여가도 될까요?"
그녀가 살며시 문을 열자 종업원이 밥상을 갖고 들어왔다.
식사가 끝난 후 세수를 하며 거울을 보고서야 철평고는 자기의
모습이 얼마나 가관인가를 발견했다. 그녀는 탁자 위의 겨울을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새
옷을 구해 입을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그때 종업원이 다시 찾아왔
다.
이번에 그는 아름다운 옷을 안고 들어왔다. 화장도구, 귀한 분
과 버선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 세상에 이런 것을 거절할 수 있는 여자는 얼마 있지 않을
것이다.
철평고가 그 옷을 입고 화장을 단정히 끝내자 강옥랑이 찾아왔
다.
"제가 들어가도 되겠소?"
철평고는 그가 보내준 음식을 먹었고 그가 보내준 옷을 입고 있
었다.
어찌 들어오지 못 하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강옥랑은 한참 동안이나 그 방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철평고
도 그를 보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그에게 의지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애써 참으며 그와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잠자코 앉아 있던 강옥랑이 이윽고 먼저 말을 꺼냈다.
"모용 아가씨는 몸이 불편해서 누워있소."그러나 사실은 강옥랑
이 그녀의 수혈을 짚어 이불 속에 넣어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용가와의 훗날을 생각해서 몸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는 웃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제가 술을 청해 놓았으니 아가씨께서 반대하지 않는다면 한 잔
하는 것이 좋겠소. 내키지 않으면 아가씨는 술을 들지 않아도 좋
소."
그들이 묵고 있는 곳은 작은 여관이었기 때문에 좋은 음식이 없
었다. 그래서 강옥랑은 많은 안주와 술을 다른 음식점에 주문하여
놓았던 것이다.
철평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술이 오자 그녀는 술잔
에 술을 하나 가득히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그녀는 뜨겁고 매운 기운이 불덩어리처럼 그녀의 목을 향해 치
솟아오르자 눈물이 펑 돌았다.
강옥랑은 몰래 웃고 있었다.
"술을 마셔 보지 않았다면 마시지 않는 것이 좋겠소. 만약 술에
취해버리면......."
그는 매우 다정하게 정말 철평고가 취하는 것이 걱정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그녀가 빨리 취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여자의 성미를 잘 알고 있었다. 못 마시게 하면 할수록 더
욱 마시고 싶어하고 권할수록 마시지 않는 그 성질을 말이다.
철평고는 과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또 한 잔의 술잔
을 비워버렸다. 강옥랑은 옆에서 한숨을 쉬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매우 기뻤다.
술을 두어 잔 마시자 철평고는 온 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으
며, 마치 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넉 잔을 비우자 그녀는 이 술
이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라고 느꼈다. 다섯 잔째를 비우자 그녀
는 이미 모든 걱정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강옥랑은 또 다시 그녀에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취하지 않는다면 제가 좀 더 권하겠소."
철평고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취해? 이런 달콤한 물이 사람을 취하게 만든단 말이오?"
"아가씨께서는 술을 많이 드시는군요. 제가 한 잔 더 드리죠."
세상에 주량(酒量)이 좋다는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철평고는 다시 한 잔을 들면서 강옥랑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도대체 좋은 사람이오, 나쁜 사람이오?"
그녀의 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강옥랑은 미
소를 지었다.
"아가씨가 보기엔 어떻소?"
철평고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소. 그러나...... 강소어가 왜 당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했을까?"
강옥랑은 슬그머니 탄식을 했다.
"저는 아가씨가 강소어의 친구인 것을 아오. 나는 뒤에서 나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소...... 아! 사실 그가 나를 원망하지는 말
아야 하는데......."
"그가 왜 당신을 원망하지?"
"아가씨께서는 그와 다정한 사이요?"
"아직은..... 그렇게 깊지는 않소."
"아가씨께서 그의 인품을 알게 되면...... 아! 모용 아가씨가
그사람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렇게 되었겠소?"
철평고는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다시 술을 들이켰다.
강옥랑은 철평고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을 말해서 고통을 주지는 말아야 했는데......."
철평고는 돌연 웃었다. 그녀가 그의 속셈을 알 리가 없었다.
"그렇지. 우리 기쁜 이야기를 합시다. 무슨 재미있는 얘기라도
말해보시오. 당신이 한마디 할 때마다 내가 한 잔씩 마시지."
강옥랑은 입재주가 좋았다. 그는 한마디를 하고 또 한마디를 하
고 또 한마디를 했다. 철평고는 마시고 또 마셨다. 그녀는 허허롭
게 웃으면서 술이 탁자와 자기의 몸을 함빡 적실 정도까지 마셨
다.
나중엔 강옥랑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는 웃으며 술을 마셨다.
결국 그녀는 탁자 아래로 넘어지고 말았다. 순간 강옥랑의 눈에
서 야릇한 빛이 번져나왔다.
"아가씨 내 말이 들리오?"
철평고는 아무소리도 내지 않았다.
강옥랑은 그녀를 상에다 끌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네가 마시고 싶어 마신 것이야. 나를 원망 말아라."
이때 갑자기 한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형씨의 수단에 나는 탄복하고 말았소."
순간 강옥랑은 놀라서 철평고를 안았던 손을 풀며 몸을 돌렸다.
키가 크고 작은 두 사람이 음산하게 웃으면서 방으로 걸어 들어
오고 있었다.
사람의 탈을 쓴 짐승
아직 등불을 켜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어느새 많이 어두컴컴
해져 있었다. 스산하고 침침한 방 안에 서있는 두 사람은 그 표정
과 음산한 눈초리가 이 세상의 사람 같지가 않았다.
강옥랑은 미소를 보이면서 입을 열었다.
"나를 말하는 것이오?"
키가 큰사람이 대답했다.
"그렇소."
작은 사람이 껄껄 웃었다.
"나는 여태껏 많은 풍류객을 보아왔지만 형씨 만큼 여자를 다루
는 수단이 좋은 사람은 본 적이 없소."
강옥랑이 한바탕 호기를 보였다.
."두 분은 농담을 잘 하시는군요."
키가 큰사람의 얼굴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며 싸늘한 냉기가 돌
았다.
"나는 농담을 좋아 하지 않소!"
작은 사람이 음산하게 웃으며 그의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아가씨는 이미 형씨의 물건이 되어 버렸소. 형씨는 이
제부터 기분을 내겠지만 구경만 하는 우리는 좀 섭섭하지 않겠
소?"
"당신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키가 큰사람이 나섰다.
"형씨가 기분을 내는 것처럼 우리도 좀 내보자는 거요. 그렇지
않으면......."
키가 작은 사람이 웃으면서 또 그의 말을 받았다.
"우리 형제는 항상 남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는 않소."
강옥랑은 눈동자를 굴리면서 웃었다.
"두 분은 맛을 좀 보겠다는 거요?"
키가 작은 사람이 음흉스럽게 웃었다.
"그래야 되지 않겠소? 형씨께서는 새로운 사람이 있으니 이불
속의 사람은 우리 형제에게 양보를 하셔야지!"
강옥랑도 그를 따라 크게 웃었다.
"두 분은 아는 것도 많군요."
"형씨가 이 아가씨의 뒤를 쫓을 때부터 우리는 당신의 일거일동
을 자세히 보아왔소."
키가 큰사나이가 끼어들었다.
"꼭 필요할 때 금을 갖다 주고, 아침을 갖다 주고, 웃을 갖다
주면서 작전을 펴는데, 우리는 정말 형씨의 수단에 놀라버렸소,
벌써부터 이 아가씨는 이미 형씨의 손아귀에 빠져 있었던 것이
오."
"좋아, 좋아. 나에 대해서 그렇게 흥미가 많다니 어서 앉으시
오. 우선 술이나 한 잔 마십시다."
"술? 좋소. 그러나 안주는 우리 형제가 가지고 있소."
자리에 앉은 그는 웃소매에서 쥐를 한 마리 꺼내더니 입 속에
넣고 그대로 씹기 시작했다.
강옥랑은 놀라면서 말했다.
"알고 보니 각하께선 그 다섯 사람과 일행이구려? 그래서 우리
를 알고 있었군요."
키가 작은 사람이 말을 받았다.
"비단 형씨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불 속의 아가씨에 대해서도
알고 있소."
"두 분이 우리를 따라온 이유는 진정 무엇이오?"
키가 큰사람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모용가의 아가씨와 사랑을 나누는 일 말고도 형씨에게 물어볼
것이 또 있소."
"무슨 일이오?"
키가 큰사람이 갑자기 눈에서 무서운 빛을. 냈다.
"동굴 속의 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오? 또 당신과는 무
슨 관계요?"
"그들 중 하나는 헌원삼광이고, 하나는 강소어이고, 또 하나는
화무결이라 하오. 두 분도 보셨으니 그들과 내가 원수라는 것은
아시겠지요?"
"원한이 깊소?"
"우리는 서로가 죽이고 짚도록 미워하고 있소."
그 사람은 음침하게 웃었다.
"좋아, 좋아!"
강옥랑은 눈치를 보며 넘겨 짚었다.
"그 다섯 친구는 혹시 이미 그들에게......"
키가 작은 사람이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그렇소. 이미 그들에게 살해 되었소."
강옥랑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나와 당신들은 같은 입장이군. 자, 술 한 잔 합시
다."
"좋소. 그리고 형씨는 이 술을 마신 뒤 우리를 따라 가야겠소."
키가 큰사나이도 한마디 거들었다.
"이 아가씨는 가는 길에...... 하하, 우리 형제는 형씨를 위해
필히 좋은 마차를 준비하겠소."
"두 분은 날더러 어디로 가자는 거요?"
"형씨는 그 세 사람과 깊은 원한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그 세
사람이 형씨의 행방을 알면 필시 따라오지 않겠소."
"이..... 이건....."
"형씨께서는 우리와 같이 가서 그 세 사람을 유인하자는 것이
오."
키가 작은 사나이도 입술을 쫑긋하며 말했다.
"형씨에게는 미안하게 됐지만 그러나 이 방법 외에는 우리 형제
도 별 수가 없게 됐소. 우리 형제는 결코 빈 손으로 돌아갈 수가
없소. 그래서......."
강옥랑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두 분의 뜻을 알겠소. 두 분이 그 세 사람을 유인해서 복수하
게 되면 나에게도 유익한 일인대 내가 왜 허락을 못 하겠소?"
키가 작은 사람이 크게 웃으며 좋아했다.
"형씨는 과연 도리를 아는 사람이군, 나도 한 잔 권하겠소!"
강옥랑은 술잔을 받아 들었다.
"이 한 잔을 마시고 두 분과 같이 길을 떠납시다."
세 사람은 일제히 술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그러나 술이 채 목구멍으로 넘어가기도 전에 강옥랑은 손에 들
고 있던 술잔을 키가 큰사람의 목을 향해 던졌다.
그 사람은 코로 술을 모두 쏟으며 목을 끌어안고 쓰러져버렸다.
키가 작은 사람은 크게 놀라며 급히 대비하려 했으나 한 모금의
술이 목에 걸려 있는 바람에 결국 그것을 삼키느라 약간 수족이
지체됐다.
바로 그 짧은 순간에 강옥랑의 양손이 번개같이 공격을 퍼부었
다.
그의 손은 비록 소어아보다 빠르지는 못 했지만 매우 악독했다.
'팍 팍'하는 소리가 나면서 키가 작은 사나이도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강옥랑은 손을 털며 싸늘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너희들은 나를 상대하기엔 아직 멀었다."
두 사람은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움직이지를 못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 강옥랑은 어느새 그들의 혈도를
짚고 있었다.
강옥랑은 우선 그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그는
살인을 남이 모르는 곳에서만 자행했다.
철평고가 몸을 뒤척이다 다시 탁자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황혼빛이 그녀의 얼굴에 비추자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강옥랑은 큰소리로 종업원을 불렀다. 그는 종업원에게 자기의
분부가 없이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 하게 일렀다. 그리고 얼마 간
의 은을 그의 품에 찔러주었다. 은의 힘은 효과가 큰 것이었다.
그는 종업원에게 '두 명의 술취한 친구'를 '병을 앓고 있는 아
가씨'가 있는 옆방으로 옮기도록 시켰다.
그 두 사람은 술취한 기색이 없었는데도 은을 받은 종업원은 굽
신거리며 그 말을 따랐다.
어두운 적막이 그 작은 여관을 찾아왔다. 여관에 있는 침침한
등불은 그 무거운 어둠을 이겨 내지는 못 했다.
더군다나 이 여관의 방들은 밤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불이 꺼져
있었다. 엄격히 말해 주인의 방을 제외한 여섯 개의 방은 아직도
불을 켜지 않고 있었다.
네 개의 방에는 손님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불을 켤 필요가
없었고 동쪽에 있는 방에는 그 '병을 앓고 있는 아가씨'가 이미
하루 이상을 잠에 취해 있었다. 지금은 또 두 명의 술취한 사람이
인사불성의 상태에서 같이 눕혀져 있었다. 종업원은 당연히 그 방
에 등불을 켜지 않았다.
사실상 그 종업원이 바로 그 초라한 여관의 주인이었다. 그는
장사가 시원치 않자 직접 손님을 접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뜰에 있는 석등을 켜기 위해 마당으로 나왔다.
그때 다른 방들과 마찬가지로 어둠에 잠겨 있던 강옥랑이 있는
방에서는 미묘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처음에는 신음하던 소리가
점점 커져 거친 호흡소리로 변했다. 그것을 듣고 있는 종업원의
이마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갔다.
그는 왜 자신이 여관을 하게 됐는지 후회할 적이 많았다. 돈을
별로 많이 벌지도 못 하면서 별 너저분하고 악한 일을 다 보게 되
는 것이다.
지금도 한 가지 죄악이 그의 앞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지극히 못난 놈으로 느
껴지기조차 했다.
신음소리는 더욱 강렬해졌다.
철평고는 잠에서 깨어나자 전신에 통증을 느꼈다. 온 몸이 찢어
지듯 아팠고, 머리도 깨어지는 듯했다. 차츰 정신이 맑아지자 그
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옷이 벗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탁자에 바지만 입은 채로 걸터앉아 있는 강옥랑을 발견했
다.
순간 그녀는 모든 상황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기가 막혀 오
히려 아무소리도 낼 수 없었고 몸도 꼼짝할 수가 었었다.
강옥랑은 소리를 내어 울고 있었다. 통곡해야 할 사람은 철평고
였는데 오히려 그가 울고 있는 것이다.
철평고는 이불로 황급히 몸을 감싸며 소리쳤다.
"당신...... 당신...... 악독하군. 네가......"
강옥랑은 여전히 울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한 짓을 알고 있소.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시오.....
."
철평고는 이를 악물며 온 몸을 떨었다.
"난...... 정말......."
"내가 밉다면 나를 죽이시오. 나...... 나는 정말 내 자신을 억
제할 수가 없었소. 나도 취해서.....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는
데......"
그는 침대로 달려들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나를 죽여 주시오. 죽이시오. 그래야 하오."
철평고는 그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그러나 강옥랑이 이렇게
슬프게 우는 것을 보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자의 마음은 본래 약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제와서는
그녀가 잃은 것을 다시 찾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녀에게 속했던 것이 지금은 이미 그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어
쨌든 그는 이미 이 세상에서 그녀와 가장 밀접한 관계의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강옥랑은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더욱 슬프게 울
었다. 그는 남자의 눈물이 여자의 눈물보다 효력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울음, 비록 여자의 보물이지만 여자의 전매품은 아니다. 남자가
사용하면 여자보다 더욱 효과가 큰 것이다.
철평고도 결국은 어쩌지 못 하고 침대에 누워 울어버렸다.
강옥랑의 입가에는 음흉스럽고도 얄팍한 웃음이 떠올랐지만 목
소리는 여전히 울음을 섞어가며 말했다.
"내가 죽일 놈이오. 하지만 나는..... 첫눈에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살아도 당신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죽어도 당신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소."
그는 한숨을 쉬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비록 잘못했지만 이것은 나의 진심이오. 당신이 나를 믿
어 준다면 나는 일생 동안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겠소. 맹세할 수
있소."
그는 다시 울음을 터뜨리며 살며시 몸을 철평고에게 갖다댔다.
철평고는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여자가 피하지 않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을 강옥랑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돌연 그녀를 안고 큰소리로 말했다.
"나를 용서하겠소? 아! 그렇지 않다면 날 죽여 주시오. 그러나
날 미워하지는 마오. 나는 비록 죽는다 해도 결코 당신을......."
강옥랑은 자기의 계략이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그는
철평고의 귀에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다정한 사랑의 맹세를
했다.
철평고의 울음이 점점 약해졌다.
그녀는 고독한 사람이었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막막한
처지에 한 남자를 알게된 것이었다.
그 느낌은 누가 뭐라고 해도 달콤한 것이었다. 강옥랑이 웃음섞
인 부드러운 소리로 말을 건냈다.
"나를 용서하는 거요?"
철평고는 머리를 베개에 파묻었다.
"음!"
강옥랑이 붉어진 그녀의 귓볼에 대고 부드러운 소리로 속삭였
다.
"나를 원망하지 않겠소?"
철평고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작
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말이 진실이라면 당신이 오늘 한 말을 잊지 않는다면
나......"
이때 처참한 소리가 옆방에서 들려왔다. 그 처참한 소리는 매우
짧았지만 머리가 쭈뼛거릴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강옥랑은 서둘러 웃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그는 방을 달려나와서 비명소리가 난 방으로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등불을 찾아들고는 뚤로 나가 그 방의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등불을 창 안으로 던져 넣었다.
등불이 바닥에 떨어지자 화염이 즉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길
이 혀를 날름거리며 이 음침한 방을 더욱 음산한 분위기로 만들었
다. 모용구매가 이불 속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키가 크고 작은 두 사람은 두 덩어리의 핏덩이가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은 강옥랑을 소름끼치게 했지만 또 안심을 시키게도
했다.
누군가가 이 두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왔다면 일단은 안심이 되
었다.
한 사람이 불빛 속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많은 여자를 현혹하게 할 미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두 눈은 아무리 담력이 큰 사람이라도 간이 써늘해질 만
큼 잔혹하게 보였다. 마치 며칠을 굶주린 맹수의 눈과도 같았다.
그 사람의 얼굴은 너무 창백해서 거의 투명하게 보였다. 심지어
는 뼈가 들여다 보일 듯도 했다.
그의 몸에 걸친 하얀 옷은 무엇인지 모를 괴상한 무늬가 수놓아
져 있었다. 사실 그 꽃 같은 점들은 선혈이 튀어서 생긴 핏자국이
었다.
강옥랑은 그 사람을 보자 심장이 멎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사람은 싸늘하게 강옥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이 두 사람의 혈도를 짚었는가?"
강옥랑이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그렇소.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각하께서 그들을
해결했으니 제가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그는 이미 이 사람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고강한 인물이라는
것을 느끼고서 환심을 사려고 수작을 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여
전히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알고 싶소!"
그는 돌연 웃으면서 하얀 이빨을 내보였다. 깨끗하고 고른 치아
였다.
"난 바로 그들의 주인 위백의다. 그들은 나의 노예이고"
강옥랑은 숨이 한꺼번에 거꾸로 뒤집혀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
았다.
"그러나 당신...... 당신이 그들을 죽였지, 내가 아니오......"
이 사람은 돌연 시체 쪼가리를 주워들더니 웃을 찢어 시체의 맨
살을 보여 주었다. 불빛에 열 개의 글자가 나타났다.
"무아문하사(無牙門下士), 가살불가욕(可殺不可辱)!"
그는 피묻은 손을 코앞에 가져가 자세히 들여다보며 냄새를 맡
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좋아하는 그림이라도 감상
하는 것 같았다.
강옥랑은 토할 것 같은 느낌을 참으며 말했다.
"그것이 무슨 뜻이지요. 난 모르겠소."
"이 두 사람이 이미 너에게 모욕을 당했으니 나는 그들을 죽일
수 밖에 없었지, 나의 체면이 깍이기 전에 말이야."
강옥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살인의 이유가 그렇게 간단하오?"
"때로는 이것보다 더욱 간단할 수도 있지1?
"어떤 때는 나도 살인을 하오. 그러나 나는 정당한 이유가 있
소. 예를 들면......"
이때 바닥에서 타오르던 화염이 돌연 꺼지면서 사방은 곧 칠흑
같은 암흑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사람의 눈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고 있었
다.
"예를 들면?"
강옥랑도 눈에서 빛이 번쩍이고 있다. 수시로 손을 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사람이 두려웠고 자기의 무공이 그보다 월등하다고 생
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있는 위치가 그 사나이보다 훨씬
유리했다. 그는 그 사람이 먼저 달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강옥랑을 바라보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마치 쥐가 나무를 갉아대는 소리와 흡사했고
온 몸에 소름을 끼치게 했다.
"내가 지금 너를 죽일 것 같이 생각되느냐?"
"당신은 이미 충분히 나를 죽일 이유가 있지 않소?"
"내가 사람을 죽이려고 마음을 먹으면 절대 그와 이야기를 하지
않아!"
강옥랑은 놀랐다.
"당신은 왜 나를 죽이지 않겠다는 것이오!"
그 사람은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더니 입을 열었다.
"그것은 너와 함께 세 사람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강옥랑은 즉시 깨달았다.
"그렇지. 나를 죽이기 전에 우선 사태를 파악하겠다는 말이군
요."
"네가 일주일 안에 나를 데리고 헌원삼광, 강소어와 화무결을
찾을 수 있다면 나는 너를 비단 죽이지 않을 뿐더러 오래 살게 해
주겠다."
그러나 강옥랑의 얼굴빛은 침울해졌다.
"그들은 나의 원수이기도 하오. 당신이 그들을 죽일 수 있다면
물론 데리고 가겠소. 그렇지만 그 세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결코 쉬
운 일이 아니오. 그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쉬울 지 모
르오. 만약 당신이 그들을 죽이지 못 하고 오히려 당하게 된다면
나도 당하게 될 것이 아니오?"
"흥! 너는 피해를 입기가 싫은 모양인데. 내 마음에 꼭 들었
다."
"손해를 보기 싫어하는 사람은 남이 하자는 일을 쉽게 따라 하
지는 않소."
"하하! 그럼 너는 어떻게 해야 내가 그들을 죽일 수 있다고 믿
겠는가?"
"그건 당신이 무슨 방법으로 나를 믿게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
소."
"천 가지 이상의 방법으로 네가 믿을 수 있도록 할 수 있지. 네
가 무아문하의 무술을 견식하고 싶다면 보여 주겠다......"
그가 돌연 손을 젓자 즉각 음산한 화염이 발산되어 벽에 부딪쳤
다. 그 화염은 강렬하지도 않았고 벽에 부딪친 후 즉각 꺼져 버렸
다.
그러나 화염이 번쩍하는 순간 그 사나이는 이미 뜰 안에 서있었
다.
(창문으로 빠져나온 것도 아닌데 어디로 나왔을까?)
강옥랑은 놀라며 벽에 하나의 큰 구멍이 나있는 것을 발견하였
다.
눈에 잘 띄지도 않던 불길이 순식간에 벽에다 큰 구멍을 뚫었던
것이다.
강옥랑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강옥랑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이
와같은 신기한 무공과 접하게 된 셈이었다.
그 사람은 강옥랑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눈에서 빛을
내며 그를 바라보았고 그 눈에는 모종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또다른 것을 견식하고 싶은가?"
"나..... 나는......"
그 사람은 또 미친 듯이 웃어제꼈다.
"무아문하의 신공을 너는......."
이때였다.
미친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아문하의 신공이라면 나도 보고 싶다."
광소하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의 그림자가 유성처럼 공중에서
날아왔다.
남천대협 노중달
강옥랑은 평생 동안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는 웃음 소리는 들
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놀라며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보았
다. 그는 어느새 땅에 내려와 마치 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무아문하도 마치 그에게는 놀란 듯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면서 무
서운 소리로 말했다.
"누가 무아문하 앞에서 무례하게 구느냐?"
"나는 연남천이다!"
순간 강옥랑과 위백의는 간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연남천이 다시 포효하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는 위무아와 어떻게 되는 사이이며 지금 그는 어디에 있지?"
"당신은 스승을 찾아갈 필요가 없소. 무아문하의 부하 네 사람
은 모두 연남천을 찾아가 한번 싸워보고 싶었소, 나 위백의가 오
늘 행운을 만나......"
이때 강옥랑이 돌연 노한 소리로 외쳤다.
"너는 무엇인데 이토록 연 대협에게 무례한가!"
그는 이미 번개 같이 위백의에게 석 장을 가했다. 그 수법은 무
당파의 정종 수법이었다.
그와 소어아가 연마한 무공비급은 천하 무림의 총수였다. 각 문
파의 무공이 집대성 되어 있는 것이었고 그것을 연마한 사람은 각
문파의 무공을 응용하거나 그대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위백의는 냉소를 지으며 맞섰다.
"네가 나와 싸우겠다는 거냐?"
그는 자기가 두세 수법을 펼치면 강옥랑이 물러설 것으로 알았
다.
그러나 그것은 강옥랑의 무공을 너무 무시한 처사였다.
그는 강옥랑에게 갑작스럽게 선기를 빼앗기게 되어 마음대로 손
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게다가 강옥랑은 연남천이 곁에서 도울
것으로 계산하고 아무 두려움 없이 맹렬하게 공격했다.
위백의의 무술은 비록 기이하고 악독했지만 계속 수세에 몰리게
되자 무공을 펴질 못 했다.
연남천이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좋아...... 좋아! 입조활사는 내가 사용한다 해도 그리 강하지
는 못 할 거야."
이때 돌연 위백의의 몸이 한 바퀴 돌더니 네다섯 개의 음산한
화염을 뿜어냈다.
번쩍이는 불빛 아래서 강옥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벽을 단번
에 뚫어 버렸던 괴이한 화염이 그의 몸에 적중하려는 순간 돌연
연남천이 소리를 지르면서 일장을 뿜어내 그 불길을 막아냈다. 순
간, 연남천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위백의는 크게 놀랐다. 그
는 몸을 피하려 했으나 이미 연남천은 양손을 뻗치며 그의 가슴으
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는 급히 양손을 들어 연남천의 두 손을 맞
받아쳤다. 그러나 네 개의 손바닥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팔은 나
무 젓가락처럼 부러지고 말았다. 또한 깊은 내상을 입은 그는 울
컥피를 토하며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연남천은 그의 멱살을 잡고 호통을 쳤다.
"위무아는 어디에 있지?"
연남천을 바라보는 위백의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바로 귀산 무풍대(龜山無風臺)에 있는데 찾아 가겠소?"
"네놈이 안내를 해줘야겠다."
위백의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나 가서 한 잔 하시오. 나는 가지 않을 테니까."
그는 이 말을 마치고는 이를 악물었다.
"무아문하사 가살불가욕(無牙門下士 可殺不可辱)......."
그의 입가에서는 이미 비린내나는 액체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 했다.
연남천은 그의 옷소매를 놓고 고개를 돌려 강옥랑을 향해 웃으
며 말을 던졌다.
"너는 무당문하(武當門下)냐?"
강옥랑은 그때서야 정신을 되찾으며 웃었다.
"무당문하의 제자 옥소천이 연노선배님을 뵈옵습니다."
연남천은 인사를 올리는 그의 어깨를 치며 크게 웃었다.
"좋아, 좋아. 정파 문하(正派門下)에 너 같은 사람이 있으니 그
깟 몇몇 흑도의 미친 것들은 목숨을 내놓고 다니는 것에 지나지
않아. 하하하."
강옥랑은 더욱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선배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제가 어찌 목숨을 부지하
여 살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연남천이 조금만 더
일찍 와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면 그도 위백의와 같은 꼴이 될
뻔한 것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내가 만약 친구와 여기서 만나기로 하지
않았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야."
"너나 내 작은 친구나 모두 무림에서 얻기 어려운 인재들이야.
너도 여기서 나와 함께 그를 기다리도록 하자. 어쩌면 너희들은
좋은 친구가 될 지도 모르니까."
"선배님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선배의 칭
찬을 받을 수 있을 정도라면 필시 보통인재가 아닐 테니 기대가
되는군요."
"화무결이라고 하는 청년이야. 강호에서 필시 이 이름을 들어
봤을 것이다."
순간 강옥랑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미소를 지
으며 입을 열었다.
"후배는 산에서 내려온 지가 얼마 안 되어 강호의 인물들에 대
해서는 생소합니다."
그는 계속 주의하고 있었지만 철평고가 그때까지 아무런 동정이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계속했다.
"제가 왔을 때 그 위백의는 한 분의 모용 아가씨에게 손을 쓰려
고 하고 있었지요. 그 아가씨가 지금 방에 누워 있는데 선배님께
서는 가보시겠습니까?"
"모용 아가씨?..... 그럼 모용가의 사람이 여기에 있다는 말인
가?"
그는 즉시 발걸음을 옮겼다.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고 모용구매는 이불 속에 누워있었다. 연
남천은 그녀를 살펴본 후 입을 열었다.
"아혈을 짚혔군. 비록 치명적인 곳은 아니지만 그 놈이 너무 심
하게 손을 썼고 시간도 너무 오래 경과되었다."
"그렇다면 이 아가씨의 원기가 많이 손상 되었겠군요?"
연남천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그렇지. 그녀는 열기에 많은 피해를 입었어, 지금 혈도를 풀어
준다 해도 석 달 후에야 회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럼 어떻게 하죠?"
"혈도를 풀기 전에 우선 내력으로 그녀의 피를 유통시켜야 돼."
그는 웃으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운이 좋은 여자군. 만약 네가 내 옆에 없었다면 행공을 해주기
도 힘들었을 텐데."
"후배는 선배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 하겠습니다."
"그녀의 피를 순환시키기 위해 행공(行功)을 하다가 만약 어떤
연유로라도 중단하게 되면 그녀와 난 내상을 입고 말아. 하지만
네가 옆에서 지킨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
"선배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후배가 비록 무능하기는 해도
힘써 곁에서 지키겠습니다."
연남천은 크게 기뻐했다.
"내가 안심을 하지 못 한다면 이런 모험을 하겠나? 자연노도(紫
煉老道) 무당장주의 제자가 나를 안심시키지 못 하면 누가 나를
안심시키겠는가? 어서 불을 좀 켜주게."
그는 침대에 앉아 양손으로 모용구매의 등을 매만지며 행공을
시작했다.
등불을 켠 강옥랑은 그의 뒤에 조용히 서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음흉한 미소가 소리없이 번지고 있었다.
철평고는 깊은 갈등과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안고 여관을
빠져나와 버렸다.
강옥랑의 달콤한 속삭임이 비록 분노는 삭혀줬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더없는 수치를 느꼈고, 결국 자기가 자기 자신을 팔아버렸다
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원망했다. 왜 강옥랑을 죽이지 못 했을까?
이제는 이미 손을 쓰기에도 늦었다.
그녀는 자신이 한없이 미웠다. 그토록 쉽게 자기의 귀중한 것을
빼앗기고 그런 악한 인물의 감언이설에 그녀가 속아 넘어가다니
그녀는 두려웠다. 강옥랑이 결국에는 자기를 무시하게 될까봐 더
욱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원망과 두려움과 수치와 고통
속에서도 일말의 미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져가고 있었다.
그녀는 여관을 빠져나가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막막한
세상에 혼자 서있는 느낌이 들자 그녀는 왜 그 여관을 나왔을까
하고 후회하는 마음도 생겼다.
그러나 이젠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그녀는 길도 알지 못 했고 가야할 방향을 알 수도 없었다.
(길 옆의 무수한 나무들도 서로 의지하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
게 홀로 고독할까?)
그녀는 나무 둥지로 달려가 쓰러져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눈물마저도 이미 말라버렸고 다만 눈
을 멍하니 크게 뜨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어둠 속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걸어왔다. 그들은 철평고의
몇 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조용한 밤공기를 타고 그들의 말
소리가 들려왔다.
"강소어, 당신은 정말 그를 만나지 않겠는가?"
'강소어'라는 말을 듣자 철평고는 뛰어가서 ,그의 품속으로 안
겨들고만 싶었다.
그러나 이미 자기는 남의 품에 뛰어들어갈 자격이 없지 않은가!
그녀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미약한 바람을 타고 강소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만 지금은 그를 만
나고 싶지 않소."
"당신은 어째서 그가 꼭 당신의 길을 막을 것으로만 생각하시
오. 어쩌면......."
"물론 그는 나와 동행하려고 할 것이오. 그러나 이 일은 내가
하기로 결정했으니 꼭 내가 해야 하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여기까지 나를 따라 왔는데....... "
소어아는 돌연 탄식을 했다.
"사실 나는 당신과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소."
화무결은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또 하루가 지났어. 시간은 정말 빨리도 흘러 가는군. 지금은
다만......"
"다만 칠십육 일 밖에 남지 않았지."
"그대와 내가 칠십육 일 동안만 친구로 지낼 수 있다니...... "
소어아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그의 말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한평생을 친구로 사귀면서도 암투를 하는데, 우
리는 비록 오랜 친구는 되지 못 한다 할지라도 마음만은 그들보다
훨씬 잘 통하오."
"그러나 칠십육 일 후에는....... "
소어아는 정말 더 이상 그 생각을 하기가 싫었다. 그는 화무결
의 말을 끊었다.
"연 대협은 어디에서 당신을 기다린다고 했오?"
"바로 저 앞에 있는 작은 여관에 있소. 이 마을에는 단 하나의
여관밖에 없다고 하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오."
이 말을 듣자 철평고의 가슴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강옥랑이
아직 여관에 있는데 그들도 여관으로 가다니!
그녀는 강옥랑이 죽도록 미웠다. 그러나 막상 강옥랑에게 위험
이 닥치는 것을 알게 되자 가슴이 아려왔다.
여인들의 마음 속에는 항상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함이 있다. 미
워하는 것인지 사랑하는 것인지 그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소어아의 목소리가 다시 밤공기를 타고 들려왔다.
"나는 그대와 같이 귀산에 가고 싶소. 그러나 그대가 이미 연
백부와 약속이 있으니......."
"연 대협에게 신용을 잃을 수는 없소."
"그렇다면 가 보시오."
"당신은?"
"나도 지금 곧 길을 떠나겠소."
이번에는 화무결이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별을 하면 언제....... "
그는 말을 멈추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소어아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작은 소
리로 말했다.
"여하한 일이 있어도 우리는 꼭 만날 날이 있겠지......"
그는 이미 큰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화무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를 쫓아가며 말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내가 배웅해 주겠소."
철평고는 그 두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아직도 떨고 있었다. 이를 악물며 일어선 그녀는 여
관쪽으로 몸을 날렸다.
철평고가 여관에 돌아와 보니 방 안에서는 어떤 남자가 침대 위
의 아가씨에게 운기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강옥랑은 바로 그
사나이의 뒤에 서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기이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잔
혹한 미소를 띠우면서 그 사나이의 등을 향해 서서히 손을 들었
다.
철평고는 창문으로 달려 들어가며 무심코 소리쳤다.
"강옥랑, 당신....... "
강옥랑이라는 말에 연남천은 돌연 고개를 돌리며 안색이 변해버
렸다. 순간적으로 그는 자신이 이미 속았고 위험에 빠져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옥소천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행공중이라 급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강옥랑의 손이 힘차게 그의 등에 일장을 가했다.
연남천은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울컥 피를 토했다. 모용구매
연약한 몸 위로 그의 피가 번졌다. 그러나 그는 분연히 몸을 일으
키며 침대에 내려섰다. 강옥랑은 놀라 안색이 창백해지며 뒤의 벽
쪽으로 물러섰다.
연남천은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쥐 새끼 같은 놈! 네가 감히 나를 속이다니....... "
그의 온 몸에 있는 뼈마디들이 우드득거리며 부딪치는 듯한 소
리가 들려왔다.
강옥랑은 너무 놀라 다리의 힘이 일시에 빠져 주저 앉아 버렸
다.
그는 몸을 벽쪽으로 기대며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 했다.
연남천이 양 주먹을 쥐고 한발한발 다가서고 있었다.
"너는 도대체 누구이고 왜 나를 암살하려는 것이냐?"
강옥랑은 겁에 질린 채 몰래 창밖의 철평고를 바라보며 구원을
청했다.
그녀는 강옥랑이 그토록 악독한 수법으로 몰래 암살하려는 것을
보자 매우 분노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을 보고서는 다시 마음이
약해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 연남천의 등 뒤에 일장을 가했다.
다시 한 번 처참한 비명소리를 지른 연남천은 결국 쓰러지고 말
았다.
강옥랑은 웃으면서 소리쳤다.
"네가 나를 알고 싫다고? 좋아! 말해주지, 내가 바로 강남 대협
의 아들 강옥랑이다!"
연남천은 크게 놀랐다. 그는 마침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좋아! 좋아! 천하를 종횡무진으로 다니던 내가 오늘 너 같이
쥐새끼 같은 놈의 손에 죽게 되다니 !"
"말을 함부로 하니 나는 너를 더욱 비참하게 죽이겠다."
철평고는 연남천에게 일장을 가한 후 정신나간 사람처럼 우뚝
서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자기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들의 말을 듣자 강옥랑을 잡아 끌면서 물었다.
"이분은 어떤 사람이에요? 당신...... 당신은 왜 이분
을......."
강옥랑은 바닥의 시체를 가리켰다.
"이 사람은 죄가 너무 커, 어떻게 살려둘 수가 있겠어?"
철평고는 탄식을 했다.
"그렇다 해도 그는 이미 죽어가고 있어요. 더 이상 손을 쓰는
것은 잔인한 일일 뿐이에요."
그녀는 강옥랑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강옥랑은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 당신 말대로 하지."
철평고는 그의 손을 놓고 다시 입을 열었다.
"화무결이 곧 올 거예요."
이 말이 떨어지자 강옥랑의 웃음이 즉각 사라졌다.
"그를 보았어?"
"강소어도 있었어요."
강옥랑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철평고를 끌고 방을 나셨다. 그러
나 그는 곧 다시 돌아와 모용구매를 안았다. 그에게 유리한 물건
을 내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어렵지 않게 마을을 빠져나갔다. 철평고가 화무결이 올
방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반대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얼마를 가다가 강옥랑이 갑자기 물었다.
"당신은 화무결을 만났다고 했는데, 그를 아나?"
"음!"
강옥랑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면서 다시 물
었다.
"어떻게 그를 알지?"
철평고는 먼 곳을 바라보면서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
고 입을 열었다.
"나도 이화궁의 부하이기 때문이에요."
소어아와 화무결은 헤어짐이 아쉬워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천
천히 걷고 있었다. 대지가 침묵하는 호흡소리마저 들려주고 있는
듯 했다.
이때 돌연 멀리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먼 곳으로부터 나는 소리라 미약하기는 했지만 그 비통함은 사
람의 심장을 끊어놓는 듯했다.
소어아와 화무결은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비명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달려
갔다.
여관의 문앞에서 한 사람이 구토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 여관
의 주인이었다. 많은 음모가 그 여관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그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기에 그는 다만 방 안에 잠잠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주위가 잠잠해져 밖으로 나와 보자 끔찍한 시체들이 널
려 있는 것이 아닌가!
소어아와 화무결은 소리없이 서로 눈치를 교환하면서 조용히 여
관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그들은 핏속에서 쓰러져 있는 연남천을 발견하고 두 사
람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소어아와 화무결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연남천이 깊이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너..... 너희들이 왔구나...... 좋아..... 좋아."
화무결은 달려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후배가 한발 늦었습니다."
연남천의 눈가에 처절한 웃음이 번졌다.
"네가 늦은 것은 아니다. 죽기 전에 너희들을 볼 수 있었으니
됐어."
소어아도 그를 끌어 안고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죽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당신을 해칠 수는 없어
요!"
화무결은 목이 메었다.
"누가 독수를 가했습니까? 누구입니까?"
"강옥랑!"
화무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약속하겠소. 꼭 그를 죽여 당신을 위해 복수를 하겠소."
연남천이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돌려 소어아를 바라보았다.
소어아는 눈이 마주치자 눌렸던 감정을 터뜨리고 말았다.
"강옥랑은 내가 복수하겠소.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나는 선배님
을 위해 꼭 복수를 하겠어요."
화무결은 놀라며 물었다.
"어떤 사람이든? 이 분이 연 대협이 아니면 누구라는 말이오?"
연남천은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고통스럽게 말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를 속이지는
못했구나."
화무결이 다시 소리쳤다.
"선배께선 연 대협이 아니십니까?"
"연남천은 내 평생에 제일 좋아하는 친구야......."
"그럼 선배, 당신은......"
"나의 성은 노(路)야."
소어아가 입을 열었다.
"노선배께서는 남천 대협 노중달이십니까?"
노중달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제자는 다섯 살 때부터 선배의 협명을 들어왔습니다. 그 혈수
두살은 비록 선배의 손에 팔을 잘릴 뻔했지만 시종 선배를 탄복해
했습니다."
이번에는 화무결이 물었다.
"그러나......노 대협은 왜 연 대협으로 행세를 하셨지요?"
"그것은.......연......"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말을 하기가 무척 고통스러운 듯 보였
다.
소어아가 대신 입을 열었다.
"제가 노 대협을 대신해서 이야기를 하죠. 만약 나의 말이 틀리
지 않는다면 선배께선 고개를 끄덕이시고 틀린다면 선배께서 다시
이야기를 하십시오."
노중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어아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 대협께서는 악인곡에서 탈출한 후 정신은 점점 회복 되었으
나 무술은 아마 그리 빨리 회복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노중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어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연 대협께서는 곡(谷)을 떠난 뒤 곧 노 대협을 찾았죠?"
노중달의 고개가 아래 위로 또 한 번 끄덕여졌다.
"그는 십대악인이 나온 이상 강호에 필시 변고가 많이 생길 것
으로 생각했으나 아직은 몸이 회복되지 않아 구원을 청한 것이 아
닙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노중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어아는 잠시 시간을 두고 생각을 거듭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노 대협께서는 그의 공력이 금방 회복되지 못 할 것
을 알고 그의 무술을 배우려 한 것입니까?"
노중달이 탄식을 하며 다시 진기를 모아 입을 열었다.
"난 십여 년 전에 위무아에게 패배한 적이 있어. 그때 나는 내
무술이 부족한 것을 알고 은퇴를......"
그의 얼굴에 또다시 고통의 빛이 감돌았다.
소어아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선배께서는 자신의 무술이 부족할까봐 연 대협의 무
술을 이어 받았단 말입니까?"
노중달이 다시 웃으며 말을 했다.
"녀석...... 너...... 너는 벌써 그점을 생각해 냈을 게야. 다
만 나의 체면이 깎일까봐 말을 하지 못 한 것이지?"
소어아는 고개를 숙였다.
"노선배님은 무술에 대한 기초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짧은 몇
달동안 연 대협의 무술을 이어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노중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굳어가고 있었지만 표
정만은 기쁜듯 보였다.
"노 대협께선 그런 원인 때문에 다시 강호에 나타날 때 연 대협
의 이름을 빌린 것이었군요."
고개를 쳐든 소어아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노 대협의 신분과 지위로서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리
고 싶지는 않았을 텐데요."
노중달이 진기를 모아가며 한마디를 더 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어."
소어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악인곡을 떠난 악인들이 연남천의 이름으로만 진압될 수 있어
서 그렇게 하셨군요."
"너는 과연 영리한 사람이야..... 난 비단 연남천의 무술을 배
웠을 뿐만 아니라 만춘류에게 나의 얼굴을 바꾸게 했지. 그런데
네가 어떻게 알았지?"
"저를 처음 만났을 때 당연히 만춘류의 이야기를 했어야 했을
텐데 당신은 마치 그 사람을 잊고 있는 것 같아서 의심을 품기 시
작했지요."
"그...... 그리고?"
"필시 그리고 저는 선배의 표정이 십여 년 전의 전설의 연 대협
과 똑 같은 것을 보고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소어아는 처절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저는 연 대협이 당한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 어찌 변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노중달은 남은 진기를 모아가며 말했다.
"그렇지. 연남천......은 확실히 많이 변했어!"
그의 말소리는 너무 미약해져서 소어아도 잘 알아듣지 못 할 정
도였다.
노중달은 마음 속의 말을 다 하지는 못 했다. 그가 정말 연남천
이었다면 어떻게 오늘의 강별학이 바로 옛날의 강금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이미 강별학에게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을 하지 않
았는가! 남과 약속을 했으면 끌까지 지켜야 하며, 죽을 때까지도
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무림의 도리였다.
소어아는 길게 탄식을 했다.
"연 대협 아니 연 백부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노중달은 대답을 하지 못 하고 눈을 스르르 감았다.
침탈(侵奪) 당하는 이화궁
남천 대협 노중달은 조용히 안장 되었다. 예식은 매우 간결하게
진행되고 다시 황혼이 되었다
소어아와 화무결은 침통한 모습으로 노중달의 무덤 앞에 서있었
다.
그들은 한 잔의 탁주로 이 일대 검협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었
다.
어느덧 황혼마저 스러지고 밤이 되어 별이 점차 떠오르고도 얼
마후에야 그들은 무덤 곁을 떠났다.
화무결이 하늘을 향해서 탄식했다.
"강호가 평온을 되찾지도 못 했는데 노 대협은 너무 일찍 가셨
소. 심지어 연 대협의 행방도 말을 하지 못 하고 돌아가셨으니 정
말 유감스러운 일이오."
소어아도 길게 탄식을 했다.
"그는 연 백부의 행방을 말할 수도 있었는데 일부러 말하지 않
았소."
"왜? 무엇 때문에 그것을 말하지 않았을까?"
소어아는 쓴웃음을 보였다.
"어쩌면 그 누구도 연 대협의 안정을 방해하지 못 하게 하기 위
해서인지도 모르오. 혹은...... 연 백부님께서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를 상심케 할까봐 말을 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르지."
화무결은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살아있을 때 연 대협을 꼭 만나뵈었으면 좋겠는데.......
"
소어아는 답답했던지 돌연 가슴을 펴며 큰소리로 외쳤다.
"물론 그를 만날 수 있소, 그는 결코 죽지 않았을 것이오."
화무결은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렇소. 어느 누구도 그를 죽일 수는 없소. 염라대왕이라도 예
외는 아니지. 나는 꼭 그를 만날 날이 있을 것으로 믿소!"
소어아도 웃으며 말했다.
"당신 말이 맞소......."
소어아는 웃음을 그치고 한참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때때로 당신이 나와 아주 비슷한 사람이라고 느낄 때가
있소. 이상한 일이지? 칠십오 일 후에 내가 죽게 되면 당신은 나
를 대신하여 살아주시오."
화무결의 표정은 무거워졌다.
"당신은 지금 귀산으로 가겠소?"
"같이 갑시다. 좋은 구경거리가 있다는 것을 보증할 수 있소."
화무결은 고개를 떨구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같이 갈 수가 없소."
"왜?"
"나...... 나에게는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있소."
소어아는 정말 화무결과 헤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우리에게는 칠십오 일이 남았을 뿐이오. 나와 같이 있고 싶지
않소?"
화무결은 멀리 있는 별을 바라보면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일을 잘 처리하면 칠십오 일 이후에도 우리는 친구로
남아있게 될지 모르오."
소어아는 그를 한동안 쳐다보고 있다가 돌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화궁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오?"
"당신이 그것을 꼭 알아야겠소?"
"당신은 이화궁주에게 나를 죽이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할 작정
이오?"
"난 왜 내가 당신을 죽여야 하는지 묻고 싶을 뿐이오."
소어아는 크게 웃었다.
"그녀들이 당신에게 말을 해줄 것 같소?"
"최소한 내가 가서 물어볼 수는 있소."
"당신 성격도 나와 비슷하군. 무슨 일을 하기로 결정을 하면 어
느 누구도 막지를 못 하지, 그러나 어떤 사람은 천생에 비참한 운
명을 가지고 태어나오. 남녀간에도 그렇지만 친구간에도 있을 수
있는 일이오."
그는 쓴웃음을 보이며 말을 계속했다.
"남녀가 분명히 서로 사랑을 하면서도 결국 서로를 저주하게 되
고 마는 것이 바로 인생이지. 그대와 나의 운명은..... 장차 나를
죽이지 않는다 해도 어쩌면 내가 당신을 죽일지도 모르오."
"강소어, 그렇다면 당신은 운명에 굴복하겠다는 것이오?"
소어아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소, 당신은 가보시오. 어떻든 간에 우리는 꼭 다시 만날 날
이 있으니까."
가을, 많은 꽃들이 차츰 시들어갔다.
그러나 이곳에는 아직 많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국화, 목단,
장미, 매화, 복숭아꽃, 난초, 야래향 등이 온통 만발했다.
그것들은 결코 같은 계절에 피는 꽃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
에서는 모두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이곳은 깊은 산 속이라 음산한 안개와 차가운 바람이 있을 법도
했지만, 여기에는 찬란한 햇빛이 꽃을 비취고 있었고 기온은 마치
봄날의 들판처럼 훈훈하고 따사롭기만 했다.
어떤 사람이든 여기에 오게 되면 꽃의 향기에 취하여 모든 고뇌
를 잊어버릴 듯 했다.
그러나 이곳은 바로 천하에서 가장 신비스럽고도 위험한 곳이었
다!
이화궁(移花宮)!
꽃이 만발한 숲속에 하나의 화려한 궁궐이 있었는데 그 건물은
햇빛 아래서 마치 백금으로 만든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꽃숲에서는 네 명의 소녀가 물을 끓이고 나무잎을 뜯으며 화초
를 가꾸고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사람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
고 말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녀들은 모두 보기드문 미녀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하고 화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들은 매우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 꽃숲과 화려한 궁
궐의 아름다운 정경도 한없이 적막하고 고독한 느낌을 주었다.
이때 한 여인이 그 꽃숲 속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원래 흰색이었던 것 같았으나 이미 때가
타고 군데군데 핏자국이 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지치고 초췌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녀는 입술이 바싹 말라 있었고 배가 고파 현기증이 나는지 제
대로 일어서 걷지도 못 하고 땅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은 여기저기 상처가 나 피가 묻어 있었고,
금방이라도 기절해 버릴 것만 같았다.
꽃잎을 다듬고 있던 소녀 하나가 돌연 입을 열었다.
"사람이 온다!"
그녀의 싸늘한 눈초리에서는 더욱 싸늘한 빛이 쏟아지고 있다.
다른 세 명의 소녀들도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산 아래서 기어 을라오고 있는 사람은 바로 철심난이었다.
그녀는 물론 이화궁의 신비함과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
나 그녀는 이화궁주에게 한마디를 묻고 싶어 그 험한 길을 위험을
무릎쓰고 헤쳐왔던 것이다.
왜 화무결에게 강소어을 죽이게 해야만 한단 말인가?
찬란한 꽃들을 보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고통이 일시
에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진정 고통이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것을 모
르고 있었다.
그녀는 꽃숲의 네 소녀를 바라보았다. 철심난은 억지로 몸을 추
스리며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들에게......."
그러나 그녀가 입을 떼자마자 한 소녀가 몸을 날리더니 그녀를
발로 걷어차버렸다.
철심난은 비명을 질렀다.
"아가씨는....... 사람을 말도 못 하게 하나요?"
그 소녀는 말끄러미 철심난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감히 여기를 침입하다니 간이 크구나."
"나는 다만 궁주에게 한마디를 물어보고 심어 왔을 뿐이오."
그 소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매몰차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든 이 궁에 함부로 들어오게 되면 무엇을 하러 왔
든간에 우리의 손에 죽어야 해."
철심난은 온 몸의 피가 일시에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설사 나를 죽인다 해도 우선 궁주를 만나게 해주어야 하오."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다."
그 소녀는 돌연 손을 내밀어 철심난의 옷을 찢어버렸다. 순식간
에 네 명의 소녀가 철심난을 에워쌌다. 철심난은 찢겨진 피부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가뜩이나 지쳐있던 그녀
는 두려움과 절망감에 정신이 가물가물해져 왔다.
"손을 멈춰라. 그녀를 놓아......"
그녀는 정신이 점점 아련해지면서 한 사람의 외침소리를 들었
다.
그리고는 결국 쓰러져버렸다.
철심난은 기묘한 향기를 맡으며 몽롱한 상태에서 점점 정신이
맑아져 옴을 느꼈다. 그녀가 무겁게 눈꺼풀을 뜨자 화무결이 부드
럽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철심난은 왈콱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화무결, 당신 정말 화무결이에요?"
화무결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나요. 내가 당신 곁에 있으니 두려워마시오."
철심난은 눈을 감고 탄식을 했다.
"화무결, 내가 위험할 때마다 당신이 나를 구하는군요."
"여기는 이화궁이며 나의 집이오. 결코 아무도 당신을 다치지
못하도록 하겠소."
철심난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치
듯 목청을 돋우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이화궁주를 만나게 해주세요. 제가 모든 위
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것은 오직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였어
요."
화무결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돌아온 것도 그녀들을 만나기 위해서요. 하지만 그녀들은
지금 궁에 있지를 않소."
철심난은 다시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그녀들은 어디로 갔지요?"
"글쎄, 두 분 궁주가 모두 궁을 떠나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
닌데....... "
"이렇게도 운이 없다니. 나...... 나......."
그녀는 흐느끼면서 얼굴을 가렸고 다시 말을 잇지 못 했다.
화무결은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온 이유는 알겠소. 사실 나도 같은 일 때문에 온
것이오."
철심난이 이불 속에서 흐느끼다가 돌연 이불을 걷으며. 물었다.
"요 며칠 사이에 그이를 본 적이 있어요?"
화무결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는 지금 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의 웃음은 고통스러운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이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알고 있소. 당신의 몸이 회복되면 나와 같이 가 봅시다."
철심난은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홀렸다.
"당신..... 당신은 항상 저를 이리도 생각해 주시는군요. 당
신........ 당신......"
화무결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도 이제는 여자의 마음을 차츰
알 것 같았다.
"오늘 정말 미안하오. 그러나 그녀들은..... 너무 불쌍한 여자
들이오. 외로움이 그녀들을 그토록 냉혹하게 만들었을 별이니 그
녀들을 용서하시오."
철심난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알아요. 그녀들의 일생은 저보다도 더욱 불행하지요."
이때 돌연 밖에서 기이하고도 소름끼치는 마치 칼을 갈고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따라 소녀들의 비명소
리가 들려왔다.
철심난은 놀라서 고개를 번쩍 쳐들며 몸을 움츠렸다.
"이게 무슨 소리죠?"
화무결도 안색이 약간 변했다.
"내가 나가 봐야겠소."
천하의 이화궁에서 어떻게 비명소리가 들려올 수가 있단 말인
가.
필시 예삿일이 아닐 것 같았다.
철심난은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저도 함께 가요."
"그러나 당신은 아직 상처가......."
"당신이 옆에 있는데 제가 무엇을 두려워 하겠어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화무결은 속으로 탄식을 했다.
"아! 여인......여인이란......"
이때 그 기이한 소리가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급히 밖으로 나갔다. 소녀들은 모두 한쪽에 서서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꽃숲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철심난이 소리쳤다.
"쥐! 저렇게 많은 쥐들이 어디서....... "
수천 마리의 고양이만한 쥐들이 꽃을 갉아대고 있었다.
화무결은 안색이 변해 소리를 질렀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위무아의 부하인가?"
그러나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 볼 수가 없었고, 다만 수천 마리
의 쥐들만이 여전히 날뛰고 있었다. 화무결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그도 이 쥐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천하에 이름 난 이화궁의 제자도 쥐때들에게는 어쩔 도리가 없
었던 것이다.
휘황한 꽃의 숲은 이미 처참하게 파괴되어 버렸다.
이때 돌연 어둠 속에서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쥐를 무시하지만, 그러나 세상에 가장 무
서운 것이 바로 쥐란 말이야!"
다른 한 사람이 웃으면서 그의 말을 이어 받았다.
"안타깝게도 이화궁주가 집에 없군. 그녀들에게 이 꽃밭이 쥐들
에게 요절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아마 그들은 피를 토
할 것이다."
화무결은 이미 제정신을 되찾았고 당황하지도 노하지도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까지 떠올라 있었다.
"무아문하(無牙門下)의 사람들이 왔으면 몸을 나타내시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자식은 제법 침착한데. 저 자식이 누구인지 아는가?"
다른 한 사람이 웃었다.
"이화궁에는 모두 암놈 뿐이라고 들었는데 어찌 숫놈이 나타났
지?"
화무결은 여전히 침착한 태도로 담담히 말했다.
"소인 화무결도 이화궁의 문하요!"
"화무결!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말소리가 골나자 어둠 속에서 돌연 음산한 빛이 비치며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마른 몸집이었고 한 사나이는 노란 옷을 또
한 사나이는 파란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나이는 별로 많아 보이지 않았으며 생김새가 추악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음산하고 구역질이 나는
인상이었다.
쥐들은 그 빛을 보자 모두 두 사람의 발 밑을 향해 모여 들었
다.
그 청의인은 화무결을 아래 위로 몇 번 훗어보더니 껄껄 웃었
다.
"우리 형제가 무아문하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견
식이 꽤 풍부한 것 같은데,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게 되었으니 안
타까운 일이군."
황의인도 따라서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난 위황의이고 이 사람은 위청의이다. 너를 죽일 뜻은 없지만
스승님이 다시 강호에 나타나셔서 한 말씀이 우선 이화궁을 파괴
하라는 것이었으니 우리도 하는 수가 없다."
그들은 비록 웃고 있었으나 눈길은 차갑고 냉혹했다. 상대방이
긴장을 풀도록 하기 위해 억지 웃음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
나 화무결만은 그들의 의도를 이미 파악하고 침착하게 그들을 주
시하고 있었다.
위청의의 어깨가 약간 흔들리는 순간 화무결이 즉각 하늘로 솟
아 올랐다. 파란 빛이 위청의의 손에서 뿜어져 나와 한 소녀의 몸
에 격중했다. 그러나 화무결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양손을 뻗어
위청의의 머리를 향했다.
위청의가 뒤로 급히 물러서는 순간 위황의가 옆에서 일장을 뻗
어냈다.
그러나 화무결의 일장은 허세였다. 그는 팔을 다시 걷어 가볍게
휘둘렀다.
위황의의 주먹이 위청의를 향해 뻗쳐나갔다. 위청의가 당황해
오른팔을 올리는 순간 '퍽'하는 소리와 함께 그 팔이 부러지고 말
았다.
위황의, 위청의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위청의 자신은
비록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자기가 위청의의 팔을 부러뜨리게
되자 당황해 뒤로 물러서 눈을 부릅뜨고 화무결을 쏘아보았다.
화무결은 다시 땅에 사뿐히 내려서며 담담히 웃고 있었다. 그는
재차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이화궁의 무술이 천하각문각파의 무술과 틀린 점이
었다.
다른 문파에서는 선기를 잡는 것을 극히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
나 이화궁의 무술은 상대방의 무공을 역이용할 수가 있는 것이었
다.
위청의, 위황의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즉시 휘파람
을 불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잠잠하게 있던 쥐들이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철심난은 창문으로 올라가 나뭇가지를 꺾었다. 그녀는 비록 온
몸에 통증을 느꼈지만 이를 악물면서 나뭇가지로 쥐를 때려 죽이
기 시작했다.
숨어 있던 소녀들도 그제서야 하나하나씩 달려나왔다.
그녀들은 겁을 내면서도 몇 마리 쥐를 죽이자 차차 담력을 회복
하고 쥐들과 싸움을 시작했다.
쥐들은 앞 뒤로 계속 밀려왔다. 그녀들도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쉬지 않고 계속 내려쳤다.
어떤 소녀는 손에 힘이 뼈져 발로 밟기도 하였다.
정말 징그럽고 기이한 싸움이었다. 내장이 터져나온 쥐들이 처
참한 비명을 지르며 부르르 떨고 있었고 온통 선혈이 낭자했다.
아름다운 소녀들은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미친 듯이 나뭇가지를
내려쳤다.
그녀들은 무공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손발을 놀리고 있었다. 수
천 마리의 쥐가 죽어 나자빠졌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남
은 몇마리가 달아나버렸다.
끔찍한 악몽과도 같은 싸움이었다.
잠시 후 그녀들은 나뭇가지를 던지고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어
떤 소녀들은 서로 끌어안고 통곡을 하고 있었다.
철심난은 손을 멈추자 즉시 화무결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화무결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위청의, 위황의도 보이지 않았다.
철심난은 놀라고 당황했다. 그녀는 정신없이 쥐들을 죽이느라고
그쪽의 전황을 살펴보지 못 한 것이다.
화무결의 무공이 뛰어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두 사람 역시 이
화궁에 당당히 쳐들어 을 정도의 고수였다. 비록 위청의의 팔을
하나 부러뜨리기는 했지만 화무결 혼자서는 그들의 상대가 될 수
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철심난은 애가 탔다.
정신없이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꽃 숲에서 하나의 시체를 발견
했다.
다행히 그는 화무결이 아니고 위청의였다.
그의 오른팔은 이미 짤려 있었고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의 으시시한 얼굴은 시퍼렇게 부어올라 형태를 알아보
기도 어려웠다.
철심난은 더 이상 보지를 못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순간 위청의의 왼손에 무엇인가가 쥐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피묻은 두 개의 눈동자였다.
철심난은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화무결이 이 사람에게 당했단 말인가!
화무결의 다정한 눈이 이 사람의 손에.......
철심난은 몸을 떨며 두 개의 눈 알을 자기의 식은 땀이 흐르는
손에 쥐었다.
그녀는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돌연 마치 부상당한 맹수의 울음 같은 것이 절벽 쪽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급히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한 사람이 얼굴에서 피를 흘리며 나무 아래 서서 거친 숨을 몰
아쉬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피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화무결이 아니고 위황의였다.
화무결은 이화접옥의 솜씨로 위청의가 동료의 눈을 파내게 했던
것이다.
그는 아직 쓰러지지 않고 살아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처절
하여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귀산(鬼山)으로
철심난은 그 피투성이의 인물이 화무결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서
야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처참한 모습에는 몸서리
를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그 순간 화무결을 발견했다.
그는 위황의의 맞은편에 있는 나무 밑에 서있었다.
그의 단정하던 머리가 온통 헝클어져 있었으며 옷도 찢어져 있
었다. 항상 침착하던 얼굴도 땀투성이가 되어 흥분한 기색이 역력
했다.
그는 몸의 모든 근육 하나하나가 긴장에 싸여 있는 듯 보였다.
그의 눈은 계속 위황의 손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조용히 서있었지만 사실 무엇보다도 긴박한 상
황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철심난마저도 긴장에 싸여 숨도 제대
로 쉬지 못 할 정도였다.
돌연 위황의가 소리를 지르며 화무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귀는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확하게 화무결이 서있는 방향으로 마치 미친 맹수처럼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철심난은 그것을 보고 너무나 다급하여 자기도 모르게 비명 소
리를 지르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 화무결이 좌우 양손으로 각각 돌을 튕겨내며 몸
을 솟구쳤다.
'뿌지직'하는 소리가 나며 화무결이 서있던 자리에 있던 아름드
리 나무가 위황의의 공격에 부러져나갔다.
그러나 그 충격에도 불구하고 위황의는 여전히 꼿꼿히 서서 무
섭게 웃었다.
"화무결, 이번엔 가만히 서서 내 일장을 받아라. 어차피 너는
달아나질 못 해. 너와 나 두 사람 다 살 생각은 말자. 우리는 여
기서 같이 죽어야 돼."
그러나 그는 화무결이 그의 앞에 다가왔는데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화무결이 던진 두 개의 돌에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철심난은 그의 모습이 무섭기도 했고 가련하기도 했다. 만약 화
무결이 위험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면 차마 눈 뜨고 볼 수도 없
었을 것이다.
화무결은 탄식했다.
"나는 너를 사나이로 대접해 여기에 서있을 테니 올 테면 와 봐
라!"
위황의는 흠찔 놀랐고 그 피투성이의 얼굴이 부르르 떨리기 시
작했다.
"화씨,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네가 자비를 베푸는 것이냐?"
"난 너와 싸울 수가 없어, 넌 이미......"
위황의가 돌연 날뛰며 소리쳤다.
"나를 불쌍히 여길 필요는 없다. 나...... 나는......."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 하고 자기 가슴을 치며 통곡을
터뜨리고 말았다.
철심난은 눈물을 흘렸다. 설사 위황의가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사람이라 해도 그는 사나이였다.
그녀는 그 사람의 육체가 만신창이가 되버렸지만, 내심의 고통
이 더욱 심한 것을 알자 측은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 빨리 가세요. 난 화...... 공자가 절대로 당신을 막지
않을 것을 알아요."
그러나 위황의는 무서운 웃음을 보였다.
"가라고? 너는 무아문하의 가살불가욕을 모르느냐?"
그는 돌연 날으며 철심난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더니 소리쳤다.
"너는 말이 너무 많아. 비록 화무결을 죽이지는 못 해도 너를
죽일 수는 있어!"
철심난은 너무 당황하여 미처 피할 생각을 하지 못 했다.
위황의는 양팔로 철심난을 잡고 미친 듯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죽는다 해도 그저 혼자 죽을 줄 알았더냐?"
철심난은 온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며 피
범벅이 된 얼굴, 피투성이의 두 구멍이 그녀의 눈앞을 가로막자
그녀는 겁에 질려 아무소리도 내지 못 했다.
이때 갑자기 '쇠' 하는 바람 소리가 일면서 위황의의 웃음이 그
쳤다. 그는 양손을 놓고 비틀거리며 몇 걸음을 옮기다가 절벽 아
래로 떨어져버렸다.
화무결이 이미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철심난은 화무결의 품속으로 뛰어들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화무결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소. 나는......."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
데...... 그랬으면 당신이 앞도 보지 못 하는 그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나......나는 모든 일을 망치는군요."
화무결은 다정하게 그녀를 안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마음이 너무 약하오, 당신이 잘못한 것은 아니오. 당신
은 그저 일이 잘 되게 하려고 힘을 다했을 뿐이야."
철심난은 흐느꼈다.
"당신은 언제나 저를 이렇게 대해 주시는군오. 그러나 저
는......저는......."
그녀는 돌연 화무결의 가슴을 밀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전 잘못한 일이 너무 많아요."
화무결은 더 이상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고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절벽 밑에 있는 위황의의 시체를
말끄러미 바라보며 탄식했다.
"무아문하, 무서운 무아문하이군. 강소어, 네가 상대할 수가 있
겠는가?"
그가 시선을 철심난에게 돌렸다.
철심난은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놀라서 멍하니 서있
었다.
화무결의 탄식이 계속됐다.
"무아문하의 제자가 이 정도이니 더군다나 위무아 자신은? 아!
강소어......."
철심난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강소어, 그가......"
화무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은 무거웠다.
"강소어는 어쩌면 이미 귀산에 도착했을 것이오. 또 어쩌면 이
미 위무아를 만났을는 지도 모르오."
이튿날 화무결은 철심난을 데리고 귀산으로 향했다.
그는 철심난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길을 갈 때에도 철심난
의 뒤를 따랐으며, 식사 시간에는 다른 일을 하다가 철심난이 식
사를 다 마치고 나서야 그도 음식을 들었다.
밤에 투숙할 때에도 철심난의 옆방에서 자지 않고 멀리 떨어진
방에서 잤다.
그들의 심정은 무거웠고, 종일토록 웃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이 한쌍의 걸출한 남녀를 보고 모두 부러운
눈초리를 감추지 못 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 쉽사리 풀 수 없는 감정과 고통이 있
다는 것을 그 누가 알 수 있었으랴!
그들은 소어아의 걱정으로 더욱 침울했다.
그가 혼자 귀산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그들이 이화궁에서 귀산을 향해 떠나온 지 며칠이 지났다. 그날
밤도 화무결은 일찌감치 자기 방으로 건너가 혼자 앉아 있었다.
바람이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왔다. 상 위의 촛불이 흔들리며
그 그림자가 짙게 늘어졌다 줄어들었다 하고 있었다.
화무결은 촛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촛불을 바라보면서 여
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어아 그리고 철심난, 또 이화궁주
와 그 신비스러운 동 선생.......
이때 돌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무결은 종업원이 온줄 알고 여전히 촛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들어와. 문이 결려 있지는 않다."
그러나 문을 열고도 한참을 머뭇거리며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화무결이 고개를 돌리자 문앞에는 철심난이 서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문앞에 서있었다.
화무결은 마음이 무거웠으나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왜 아직 잠을 자지 않소?"
철심난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잠이. 오지를 않아요. 할 이야기도 있고."
화무결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리와 앉아요."
그는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 말을 던졌을 뿐이
었다. 그렇게 말을 하고는 화무결 자신도 자신의 목소리가 싸늘하
고 어색하다고 느꼈다.
철심난은 방문을 들어셨으나 앉지는 않았다. 그녀는 몇 번인가
를 주저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요 며칠 사이 당신은 너무나 저를 멀리하고 싸늘하게 대해 왔
어요."
화무결은 흠찔 놀라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너.....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은 평소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왜 저를 속이시
죠."
화무결은 할 말음 잃고 한참 동안 침묵음 지키다가 앉은 채 길
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더러 정말 말을 하라는 것이오?"
철심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무결은 촛불을 지그시 움켜 쥐었다. 그러면서 자기의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했다.
그는 마침내 무겁고도 딱딱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당신도 알 것이오. 사람과 사람 사이란 너무 가깝게 접근을 하
면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오. 더군다나 곤란한 환난 중에는 더욱
그렇지."
화무결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렇게 딱딱할 수가 없다.
철심난은 촛불을 잡고있는 그의 손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었
다.
"강소어..... 그는 나의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내 일생의
유일한 친구가 되었소. 나는 스승의 명령에 따라 꼭 그를 죽여야
하지만 당신 때문에 그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소."
철심난은 눈길을 들어 화무결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에게 못할 짓을 할 것 같은가요?"
화무결은 고개를 숙이면서 대꾸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게 아니고 내가......."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말을 계속했다.
"나는 당신의 감정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소. 만약에 우
리가 너무 가까이 접근을 하게 되면 비단 나만 고통을 격는 것이
아니고 당신도 고통스럽게 되고 마오."
철심난은 고개를 떨구었고 화무결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엔 우리가 되도록 떨어져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
것이 당신 역시 고통스럽다는 것은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할 수가 없소."
철심난은 몸을 떨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돌연 고개를 들어 화무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저는...... 다만 당신을 오빠처럼 모시겠으니 저를 믿
어주세요......."
화무결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굳이 서로 멀리 할 필요가 있겠어요? 우리 마음이 깨끗
하다면 남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남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이 없어요."
화무결은 여전히 촛불을 응시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는 웃음을 보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에야 당신이 용기있는 여자라는 것을 확신했소. 필요
할 때가 되면 당신은 어떤 사람보다 더욱 용감하고 더욱 침착해지
는군."
철심난은 길게 숨을 몰아 쉬었다.
"이런 말을 모두 쏟아 놓으니 가슴이 후련하네요, 정말 이제 술
이라도 한 잔 하고 자축하고 싶어요."
화무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웃었다.
"내 마음도 정말 통쾌하오. 나도 술이나 한 잔 마시며 자축하고
싶소."
두 사람은 마음 속에 깊이 숨겼던 말을 모조리 털어내버리자 가
슴이 시원했다. 두 사람은 다정한 모습으로 길거리를 향해 나섰
다.
두 사람은 주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허름한 거리엔 작고
허름한 주점들 뿐이었다. 결국 그 중 하나의 주점을 택하여 걸어
가며 철심난이 입을 열었다.
"이런 집에서 국수를 먹고 술을 마시는 것도 별미가 있을 것이
라고 생각하는 데 혹시 더럽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에요?"
화무결도 미소를 지었다.
"당신에게는 내가 좋은 집에서만 술을 마시는 사람으로 보이는
모양이군?"
철심난은 기분좋게 웃으며 그 식당의 문을 들어서서 큰소리로
소리쳤다.
"반 근의 고기와 술을 좀 주세요!"
부드러운 밤바람 속에서 아무 부자연스러움 없이 통쾌히 술을
마시는 것은 정말 멋있는 일이었다.
식당의 대부분의 자리는 밤이 늦었기 때문인지 거의 비어 있었
다. 다만 온 몸에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람이 탁자 위에 앉아서 술
을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솥에서 나오는 열기로 등불이 아른거렸고 그 몽롱한 불빛 아래
흑의인의 얼굴은 나무보다도 더욱 딱딱해 보였다.
그러나 한쌍의 눈은 하늘의 별빛보다 더욱 밝았다.
그는 술상에 앉아 오리다리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고 있었고 그
모습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이 보였다.
철심난과 화무결은 그를 별로 유의하지 않고 다정스레 얘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무심코 소어아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화무결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좋은 밤, 좋은 술과 안주가 있는 것으로 족해야 할 탠
데, 그래도 나는 무엇인가가 모자라는 것 같소."
"당신은..... 그의 생각을 하고 있군요."
"그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하지 못 하니 좋다고만 할 수가 없구
려."
"우리 세 사람이 한 자리에서 술 마실 기회가 곧 오겠죠."
화무결은 신색(身色)을 암담하게 바꾸고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인생 백 년은 다 이런 것이지.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와 마음
편히 술을 마시는 게 소원이오. 하지만 우리에잰......."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 우리 강소어를 위해서 건배합시다."
'강소어'라는 세 글자가 화무결 입에서 튀어 나오자 그 흑의인
이 돌연 술잔을 내려놓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철심난은 술 한 잔
을 들이키고는 코가 시큰한지 눈물을 글썽이며 천천히 말했다.
"아! 차라리 나도 남자였다면 얼마나 좋아......"
탄식을 하던 그녀는 고개를 드는 순간 흑의인의 뚫어질 듯 쳐다
보고 있는 눈과 마주쳤다.
이 흑의인은 돌연 화무결에게 물었다.
"당신이 화무결인가?"
"그렇소. 댁은?"
흑의인은 그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이번에는 철심난을 향
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바로 철심난이오?"
철심난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아심에 아무말도 하지 못 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길래 우리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일
까?)
흑의인의 눈이 더욱 크게 떠졌다.
"당신들은 방금 강소어를 위해서 건배를 했소?"
철심난이 깊은 숨을 내쉬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그래요. 그래서 어떻다는 거예요?"
그녀는 소어아에게 원수가 많기 때문에 그 흑의인도 혹 시비를
걸어오려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 흑의인은 걸상을 들고 곁에
앉더니 말을 걸어왔다.
"좋아! 당신들이 강소어를 위해서 건배하니 나도 석 잔을주겠소
1? 그는 술단지를 들더니 그들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철심난과 화
무결은 서로 바라보면서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흑의인은 자신이 우선 한 잔을 들이켰다.
"드시오. 술에 독이라도 있을 것 같소?"
화무결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었고 철심난의 입술이 먼저 열렸
다.
"미안해요. 이 술을 마시려면 우선 당신이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겠어요."
흑의인이 돌연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매우 온순한 줄로 알고 있는데 말솜씨가 소어아와
비슷하군요!"
철심난은 싸늘하게 웃었다.
"그것은 상대에 따라 달라져요. 만약 모르는 사람이 시비를 한
다면......흥!"
그녀가 손을 흔들자 젓가락이 맞은편의 기둥에 꽂혀버렸다.
그러나 흑의인은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웃음을 띤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강소어야! 너는 복도 많구나."
철심난은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무엇 하러 왔소?"
"내가 누군지는 상관마시오, 다만 내가 강소어의 친구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돼오."
"좋아요. 당신이 강소어의 친구라면 나는 이 술을 마시겠어요."
흑의인은 화무결을 바라보면서 말을 걸어왔다.
"당신은?"
화무결도 미소를 지었다.
"나도 석 잔을 마시겠소."
흑의인은 그제서야 크게 웃었다.
"좋아. 당신은 과연 호인이군.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있어."
그는 화무결과 석 잔의 술잔을 교환한 후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이런 별빛 아래서. 미녀와 술을 마시면서도 강소어를 잊지 않
다니...이 좋아, 다시 석 잔을 드리지!"
술단지가 비워졌지만 그 흑의인의 눈빛은 여전히 맑았다. 그러
나 어쩌면 이미 취한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는 철심난과 화무
결은 상관하지도 않고 다만 혼자서 계속 술을 마시며 하늘을 바라
보았다.
철심난은 그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정말 강소어와 친구인가요?"
"강소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내가 거짓말을 하겠어?"
"당신은 최근에 그를 본 적이 있습니까?"
흑의인은 대답할 생각을 않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술잔을
놓으며 길게 탄식을 했다.
"사실 말이지만 그 자식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모르오."
그는 이야기를 잠시 멈추었다가 돌연 목청을 돋우었다.
"당신들이 그를 만나게 되면 나의 안부를 좀 전해 주시오."
"당신은 그이를 만나지 못 하나요?"
흑의인은 또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밉을 열었다.
"그를 만나지 못 할지도 모르오."
"왜요?"
철심난의 물음에 그는 대답을 않고 다시 술잔만 연거퍼 비웠다.
그녀는 다그쳐 물었다.
"우리가 소어아를 보면 무어라고 해야 되죠?"
"그의 큰형님이라고만 말하면 돼."
철심난이 갑자기 일어서서 무서운 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음성
은 칼날 같이 날카로웠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내가 말했잖아......."
그는 철심난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좋아 당신들은 과연 소어아의 좋은 친구들이군..... 나는 그에
게 나를 큰형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었지. 그러나 그는 항상 나를
동생이라고 불렀소."
철심난은 그 말에 웃으면서 다시 앉았다.
"그렇다면 그이에게 동생이 문안드리더라고 하지요."
흑의인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혼자 술을 들이키며
하늘을 향해 길게 탄식을 했다.
"강소어야! 너는 저런 친구가 있으니 죽어도 원한이 없겠지. 그
러나 나는?......."
별빛 아래 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더없이 침통했다.
철심난은 참을 수가 없어 또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마음 속 깊이 무슨 비밀을 감추고 있군요?"
"비밀이라고? 나 같은 사람에게 무슨 비밀이 있겠소?"
"당신이 정말 강소어의 친구라면 왜 마음 속의 생각을 말하지
않죠? 혹...... 어쩌면 우리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흥, 도와준다고? 내가 남의 도움을 받을 것 같아!"
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는 비통한 분노가 섞
여 있었다.
철심난은 더 묻고 싶었으나 화무결이 눈짓을 해 그것을 제지했
다.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삼경이 지났다.
흑의인이 다시 웃으며 화무결과 철심난을 향하여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정말 나를 도아주겠다는 건가?"
"물론, 정말이에요."
"좋아, 당신들이 다시 석 잔을 마시면 나를 도와주는 표시로 받
아들이지."
여섯 잔을 거뜬히 비운 흑의인은 하늘을 향해 지껄여댔다.
"오늘 밤을 혼자 지낼 줄로 알았었는데 이렇게 당신들을 만났으
니 이것도 내겐 기쁜 일이지."
"오늘 밤에 당신에게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지요?"
흑의인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하는 듯했지만 머뭇거리며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철심난은 큰소리로 소리쳤다.
"당신이 술을 마시고 싶다면 우리 내일 다시 마셔요?"
흑의인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내일..... 어떤 사람에게나 내일이 있는 것은 아니오."
그는 주인 앞으로 걸어가더니 주머니의 물건들을 모조리 꺼냈
다.
그 속에 몇 닢의 금화가 있었다.
"술값이니 모두 받아라!"
주인이 놀란 표정으로 감사하다고 말을 했을 때는 이미 그 흑의
인이 문 밖을 나선 후였다. 불빛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비췄다.
철심난은 웬지 가슴이 쓰라림을 느꼈다.
"고독한 사람이군요. 술 마실 친구를 찾는 것마저도 인생의 큰
일이라 생각하다니..... 저 사람의 한평생은 매우 외로왔을 거예
요."
화무결이 무겁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죽는 날까지도 혼자 지내야 하다니......."
"죽다니요?"
화무결은 탄식했다.
"그것을 모르겠다는 말이오?"
그는 돌연 철심난의 손을 잡아 끌고 주점 밖으로 나갔다.
그 흑의인의 발걸음은 매우 느렸다. 그러나 갑자기 은빛이 빛나
더니 그는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몇 개의 지붕을 지나서야 화무결은 철심난에게 말했다.
"내가 그를 쫓아갈 테니 여기에서 좀 기다려요."
철심난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경공은 그 흑의인이나 화무결에 비해 많이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별빛 아래 회색의 지붕들만이 쭉 이어져 있는 깊은 밤, 사람들
은 벌써 깊이 잠들어 있었고 대지도 이미 잠들어 고요했다.
철심난의 품으로 스며드는 바람은 마치 연인의 눈물 같기도 했
고 어머님의 따뜻한 손길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철심난은 산란한 마음으로 평온을 찾지 못 하고 있었다.
(그 흑의인이 누구일까? 그는 왜 죽어야 할까? 그와 소어아는?
.......)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하더니 화무결이 그녀에
게 다가왔다.
철심난은 그를 보자 다급하게 물었다.
"그를 찾았어요?"
화무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 사람은 경공이 매우 뛰어나더군!"
"어디로 갔죠?"
"나를 따라와요."
두 사람은 다시 지붕 위를 날기 시작했다. 철심난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째서 그가 죽어야 하는지 알아냈어요?"
"그는 필시 오늘 밤에 무슨 위험한 일을 해야되는 모양이오."
"그건 저도 눈치를 챘어요."
"금후로는 소어아를 못 볼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하며 몸에 지닌
돈을 모두 그 술집 주인에게 줘버린 것으로 보아 그는 필시 매우
위험한 일을 하고 있을 거야. 죽을 각오를 하고......"
"그렇지요...... 그는 왜 분명히 죽을 줄 알면서도 남에게 도움
을 받지 않으려 할까요."
"그러나 그는 강소어의 친구이니 우리가 어찌 좌시할 수 있겠
소."
"그는 경공이 남보다 뛰어난 듯했는데 이기지 못 하면 달아날
수도 있을 텐데. 달아날 마음도 갖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상대가 필
시 무서운 사람인가 봐요."
화무결의 태도도 차츰 굳어갔다.
"그러니 당신은 더욱 조심을 해야 돼요. 내가 있으니 당신이 함
부로 손을 쓰면 안 돼!"
철심난은 앞쪽 얼마 안 되는 곳에 규모가 크지 않은 하나의 절
간을 발견했다. 절간 뒤에는 늦은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환하게 불
이 켜져 있었다.
"여기가 어디죠?"
"도관(道關)이오."
"그가 이 도관으로 들어갔나요?"
"음."
"당신은 그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도 그냥......"
"그는 매우 행동에 조심을 하며 저곳으로 들어갔소. 그의 경공
으로는 남에게 발각되지 않겠다고 확신이 갔기에 우선 당신을 데
리러 갔던 것이오."
그 도관의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는데 전혀 인기척이 없었으며
밤의 적막만이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
"들어간 지 오래 되었는데도 왜 아무 동정이 없죠? 상대방이 그
를 발견하지 못 한 것일까요?"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가 죽을 각오로 왔다면 남들이 그를 발견하지 못 했다 해도
필시 무슨 거동이 있어야 할 탠데 왜 계속 어둠 속에 숨어 있을까
요?"
"여기서 기다리시오, 내가 들어가서 살피고 올 테니까."
철심난은 화무결의 손을 골면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 생각에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그가
다른 사람과 내통해서 당신을 여기까지 유인했을지도 몰라요."
화무결은 담담한 웃음으로 대꾸했다.
"그 사람이 정말 나를 유인하여 함정에 빠뜨릴 작정이었다면,
나로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더더욱 알아봐야겠소."
그는 가볍게 철심난의 손을 뿌리치고 어둠 속으로 신형을 날렸
다.
철심난은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 사람의 성질은 어떤 때에 보면 소어아와 꼭 같단 말이야!"
그 도관의 뒤뜰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앞의 정원
과 대전은 완전히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화무결은 어두운 지붕에서 뒤뜰로 내려와서야 비로소 그 밝은
뒤 뜰은 절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의 모양도 여느 여염
집들과 다름이 없었다. 앞으로는 도관이었고 뒤로는 보통 집이었
던 것이다. 가장 이상한 것은 그 뒤뜰에 아무런 사람의 소리도 들
리지 않았고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다만
화청에 호화스런 휘장이 늘어져 있었고 그 앞으로 맹호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기이한 집, 사람이 없는 화청, 다만 맹호가 누워있는 이곳에 화
무결은 이상한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화청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때, 그 잠잠히 누워있던 맹호가 벌떡 일어서며 포효하기
시작했다.
기인(奇人)과 악인(惡人)
그러자 이때 휘장 속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앉아라. 손님을 놀라게 하지 말고."
맹호는 그 소리를 알아들었다는 듯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휘장 뒤에서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내밀렸다. 그 손은 호랑이의
등을 서서히 쓰다듬었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기왕 예까지 오셨으니 좀 들어와 앉지 않으시겠소?"
화무결은 잠시 망연히 서 생각에 잠겼다.
(그 흑의인은 어떻게 됐을까?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왔으니 필시
물러서지는 않았을 탠데.......)
화무결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큰걸음으로 걸어 들어갔다.
화무결은 원래 담력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다. 다만 천성이
침착했기 때문에 화청 속의 살기를 느끼면서도 들어가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갔다. 마치 친구
를 방문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휘장 뒤에서 애교있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멋있는 공자로군. 이름을 듣고 싶다면?"
화무결이 인사를 하면서 공손히 업을 열었다.
"소인은 화무결이라 하오."
"아, 화 공자이시군요."
"아가씨의 성함은?"
"난 이미 시집을 갔으니 아가씨는 못 돼요..... 백씨에요."
"아, 백 부인이시군요."
"화 공자, 앉으시오."
화무결은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고맙소."
화무결은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
서 그 여인이 권하는 자리에 살며시 앉았다.
이것은 고칠 수 없는 화무결의 성질이었다. 남이 그에게 친절을
베풀면 그를 죽인다 해도 그 사람에게 친절로 보답하는 성미였다.
백 부인이 다시 웃음띤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공자께서는 멀리서 오신 듯한데 나가서 대접을 못 하니 용서하
시오."
"비록 부인과 휘장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지만 저는 영광
이라고 생각하오."
백 부인은 돌연 크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신은 나보다 더욱 친절하군요. 하지만 이대로 얘기하다가는
당신이 무슨 일로 왔는지 물어보지도 못 하게 될 테니 이런 것은
그만둡시다."
화무결은 미소를 보이면서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싸우는 것보다는 역시 서로 친절한 것이 좋겠
소."
"당신은 정말 재미있군요."
"제가 감히."
"당신과 나는 아무 원한이 없어요. 심지어 당신은 나의 얼굴조
차 모르는데 어찌 내가 싸울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이지요?"
"모르는 사람이 여기에 왔으니 부인께선 무기로 대접을 하는 것
도 당연한 일이죠."
백 부인은 애교있게 웃었다.
"나는 당신이 여기에 온 연유를 모르오. 그러나 당신은 깨끗한
차림이고 공부도 한 것 같아서 나쁜 사람으로 여기고 싶지는 않아
요. 그렇지만 당신이 만약 방금 들어온 사람 모양이라면 내가 당
신을 난처하게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그냥두지를 않을 거예
요."
화무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게도 나는 방금 그 사람 때문에 온 것이오."
"그럼 당신은 그 지저분한 사람과 친구로 지낸단 말이오?"
"그렇소."
"그 사람을 찾으러 왔소?"
"부인께서 그의 행방을 말해준다면 정말 고맙겠소."
"내가 그의 행방을 말해준다 해도 당신이 그를 구할 능력이 있
겠소?"
화무결이 미소를 머금은 채 담담히 말했다.
"부인이 보시기에 제가 생사를 함부로 하는 사람 같은 가요?"
백 부인도 여유있게 말했다.
"당신 말투로는 재주가 많은 것 같군요."
"하지만 어찌 감히 부인 앞에서 함부로 행동을 하겠소,"
"좋아요. 내가 양해할 테니 솜씨를 좀 보여주시오. 그를 정말
구할 재주가 있는가를 봐야겠소."
"그럼 실례하겠소,"
그는 의자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의자에
몸을 붙인 채 공증을 날기 시작했다.
백 부인이 갈채를 보냈다.
"좋은 힘과 좋은 경공이군. 젊은 나이에 그만큼 실력을 쌓다
니....... 태어날 때부터 무공을 연마하기라도 한 모양이군요."
화무결이 서서히 다시 바닥에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면목이 없소. 태어난 후 서너 달은 그냥 허비했고 백일 후부터
무공을 연마했소."
"좋아요. 당신 정도의 재주라면 비관할 필요는 없겠소. 다
만......."
화무결은 안색이 변했다.
"뭐가 문제지요."
"나는 벌써 말했소. 그 사람은 나와 아무 원한이 없소. 그의 행
색은 지저분하고 보기 싫었지만 나는 그를 난처하게 하지는 않았
어요."
화무결은 침착한 마음으로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잠잠히 그녀
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백 부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두 손님은 그를 눈에 거슬리게 보았어요. 그들
은 무엇 때문인지 싸우게 되었지요. 아, 당신 친구는 모습이 독하
게 생겼지만 내 두 친구의 상대는 안 되었어요."
"그렇다면 그가 이미 남의 독수에 당했다는 말이오?"
"당신은 너무 나를 무시하는군요. 이곳에서 누가 감히 살인을
할수 있겠어요."
"그럼 그 친구는........"
"당신 친구는 이미 내 친구가 데리고 갔소. 하지만 어디로 갔는
지는 모르겠소."
화무결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망연히 있었다.
그는 이 백 부인의 신분을 알 수가 없었다. 더우기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의 여부를 가릴 수도 없었다.
달려가 백 부인을 잡고 말을 하라고 협박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죽어도 그렇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냥 가기도 곤란하고, 가지 않자니 그것도 역시 곤란했
다.
이때 백 부인이 돌연 '푸우' 하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이 정말 그 사람을 찾
아야만 한다면 내가 데리고 갈 수도 있어요."
화무결은 크게 기뻐했다.
"정말이오? 부인, 고맙소."
그러나 백 부인의 탄식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나도 여기에 갇혀 움직이지를 못 하는데 어떻게 하지요?"
화무결은 고개를 발끈 젖히면서 크게 놀랐다.
"부인도 남에 의해 갇혀있단 말이오?"
백 부인은 또 탄식했다.
"나와 같이 그 사람을 찾겠다면 우선 나를 구해야 해요."
"부인께서는 여기의 주인이 아니오?"
"누가 그런 말을 했지요? 난 분명 이곳의 주인이오."
화무결은 그 호랑이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을 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부인께서 이곳의 주인이고 호랑이도 부인이 길렀다면 왜 여기
에 갇혀 있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군요."
"그 이야기를 하면 길어져요. 우선 이 휘장을 제쳐요. 그럼 이
야기해 드릴 테니까."
화무결은 주저했다.
"함정은 아니겠지요?"
"당신은 자기의 재주가 많다고 하면서 이것도 제치지 못 해요?"
화무결은 벌떡 일어서더니 그 휘장을 제쳤다.
휘장을 제친 그는 크게 놀라서 입도 제대로 다물지를 못 했다.
화청의 앞은 우아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그 휘장으로
가려진 쪽은 온통 풀이 우거져 있었고 구석에 하나의 물통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곳은 사람이 사는 곳 같지가 않았고 마치 우마
의 축사 같았다. 그는 이 화청의 뒤편이 그런 곳일 줄이야 전혀
뜻밖이었다.
더우기 그 마구간보다 못 한 곳에 깨끗한 차림의 중년 부인이
앉아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이런 상황은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더우기 놀라운 것
은 그 아름다운 부인의 목에 쇠사슬이 감겨져 있었고 그 쇠사슬은
벽에 박혀 있었다.
화무결은 마치 땅에 뿌리라도 내린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백 부인은 처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젠 왜 내가 당신과 함께 갈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알겠지요?"
화무결은 탄식했다.
"이거..... 이것은 도대체 누가 한 짓이죠? 누가........"
"제 남편이에요."
백 부인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화무결은 망연하게 물었다.
"당신의 남편이?"
"그래요, 나의 남편은 천하에서 가장 질투심이 많고 도리를 지
키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는 자기가 집만 비우면 내가 곧 다른 남
자들과 정을 통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는...... 그는 부인인 당신을 ."
"그이는 밖으로 나갈 때면 나를 이렇게 감금해 놓지요. 그
는......그는 나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아요. 나를 마치 소나 말
로 취급하지요."
화무결은 말끄러미 그녀를 바라볼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 했
다.
"당신은 나의 옷차림이 깨끗하다고 해서 이상히 여길지도 몰라
요."
"그것은.......?"
"그는 비록 나를 학대하지만 몸만은 깨끗이 해 놓지요."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계속했다.
"그가 즐겨야 하니까요. 만약에 누군가가 나를 보게 되면 그는
그 사람을 죽여버리지요. 지금 당신이 나를 보았으니 그는 당신
을......"
화무결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져나왔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여자를 괴롭히는 사람이오. 부
인께서 부탁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일이 있어도 나는 꼭 부인을
구해야겠소!"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군요. 첫눈에 좋은 사람일 줄 알았
어...... 그러나 구하려면 빨리 구해줘요. 남편이 오면 당신은 상
대가 안돼요."
철심난은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다.
돌연 그녀는 하늘을 뒤흔드는 듯한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들었
다.
그러나 곧이어 사방은 다시 조용해졌고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아무 동정도 없는 적막은 소란스러움보다 더욱 철심난을 걱정시
켰다.
그는 또 얼마를 잠잠히 기다렸다. 그녀는 초조하고 애가 탔다.
마침내는 참을 수가 없어 뛰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둠 속에 감혀있는 도관은 아무런 위험을 줄 것 같지가 않았
다.
철심난은 담으로 뛰어올랐다.
그녀가 담으로 막 뛰어 올랐을 때 돌연 불빛이 번쩍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스쳐갔다.
뒤따라 검은 대전에 한 사람이 몸을 나타내더니 음흉한 목소리
로 이죽거렸다.
"나는 또 누구라고? 알고 보니 철심난 아가씨로군,"
철심난은 놀랐다. 그녀는 담 위에 선 채 몸이 굳어버렸다.
"당신은 누구시오?"
"아가씨를 알고 있으니 아가씨의 친구겠지."
"당신......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들어와보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거요."
철심난은 놀랍고도 의심이 갔다.
그 사람은 음침한 웃음을 터뜨렸다.
"기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들어오는 것이 좋겠소. 그렇지 않으면
아가씨의 두 친구도 나가지 못 하오. 아가씨의 재주로 그들을 데
려갈 수 있겠소?"
철심난은 온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화무결이 이미 함정에 빠져 독수를 당했단 말인가?
그녀는 이를 악물며 달려 들어갔다.
어둠을 가르며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돌계단 옆에 있는 기둥에 횃불이 있소. 아가씨는 불을 켜들고
들어오시오. 나를 보면 미남자라는 생각이 들 것이오."
철심난은 주저했다.
(혹시 무슨 함정이 아닐까?)
그러나 그녀는 그가 말한대로 불을 켜들었다.
어둠 속에서 철심난은 횃불을 들고 한 발 한 발 천천히 걸어 들
어갔다.
커다란 향로와 무서운 불상.....
철심난은 소름이 끼쳐왔다. 그녀는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에요? 왜 숨어 모습을 나타내지 않
는 것이지요?"
그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전 안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가 없었다.
(사람이 없는데 어찌 말 소리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철심난은 돌연 거대한 산신이 호랑이 등에 타고 그녀를 향해 웃
고 있는 조각을 발견했다.
바람이 불자 불빛이 흔들렸고 그 산신의 그림자가 너울너울 움
직이기 시작했다.
철심난은 너무나 엄청난 일에 놀라 망연히 선채 떨기 시작했다.
돌연 미친 듯한 웃음이 들려왔다.
"철심난, 너의 담력도 보통이 아니구나!"
그 말소리는 바로 그 나무로 조각된 산신에게서 들려오고 있었
다.
그러나 철심난은 오히려 침착함을 되찾고 싸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도망할 생각을 체념하자 오히려 용기가 생겼다.
"나를 여기까지 들어오게 해놓고 당신은 왜 숨어서 나오지 않는
것이오?"
그 사람은 다시 크게 웃었다.
"여자의 담력은 때때로 남자보다도 더 클 때가 있지. 너를 놀라
게 하려 했는데 싱거운 일이 되고 말았구나."
웃음소리에 따라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창백한 얼굴이
었지만 그는 과연 멋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철심난은 그 남자를
보자 악마를 본 것 보다도 더욱 놀랐다.
"강옥랑, 네가!"
강옥랑은 만면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다. 나야. 놀랐나?"
그는 말을 하면서 한 발 한 발 걸어나왔다.
철심난은 뒤로 한 발 한 발 물러서면서 말했다.
"네..... 네가 어쩔 테냐?"
"우라는 옛 친구인데 왜 나를 두려워하는 것이지?"
철심난은 다리가 얼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목소
리만은 높았다.
"누가 두려워한다는 거지? 나는 기뻐하고 있어!"
그녀는 입으로는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한 발 한
발, 계속 물러서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잘 생긴 얼굴과 부드러운
목소리의 남자가 독사보다도 더 두려웠다.
그녀는 돌연 손의 횃불을 강옥랑에게 던지고 몸을 돌려 달아나
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을 잊은 듯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한 사람의 품에 부딪친 것을 느꼈다.
철심난은 보지 않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사람
의 몸은 연약하고 매끄러웠으며 온몸에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것
이 마치 독사 같았다.
그는 한쌍의 손으로 가볍게 철심난을 안고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달아나지? 나를 두려워한다는 말인가?"
철심난은 온 몸의 힘이 빠지면서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를 밀어낼 힘조차 낼 수가 없었다.
강옥랑은 그녀의 어깨를 매만지면서 간지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
어갔다.
"말해 봐,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야?"
철심난은 마음의 평온을 되찾으려 혼자 생각했다.
(철심난, 침착을 잃지 마라. 조금도 방심하지 말아라. 그가 가
면을 벗으면 너의 위험은 더욱 커진다.)
그녀는 발을 고쳐 딛으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물론 당신과 싸우지는 않을래요. 나를 놀라게 한 일쯤으로 당
신과 싸울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녀는 자기가 강옥랑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애교가 그녀의 유일한 무기였다.
"너는 정말로 귀여운 여자야. 그래서 화무결과 소어아가 너에게
반했군."
철심난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당신은?"
"나도 남자야.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서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어."
철심난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그들 두 사람보다 못 한 줄 아세요?"
강옥랑은 눈을 감았다.
"그들 두 사람과 비교해서 나를 어떻다고 생각하지?"
"그들은 아직 어린 아이들이에요. 하지만 당신..... 당신은 이
미 어른이 되었지요."
강옥랑이 크게 웃으면서 눈을 떴다.
"넌 과연 사람을 볼 줄 아는군. 왜 진작 나에게 말하지 않았
지?"
그는 철심난을 굳게 껴안았다. 철심난은 구역질이 났다.
그러나 그녀는 애교있게 웃으며 그를 가만히 떠밀었다.
"당신은 바보야. 내가 꼭 말을 해야만 돼요?"
강옥랑은 크게 웃었다. 매우 기뿐 표정이었다.
"맞았어. 남자로서 여자가 말을 해야만 여자의 뜻을 안다면 정
말 병신이지."
조용한 어둠 속에서 품속에 이런 아름다운 여인이 안겨있자 마
음이 약해졌다.
철심난의 목소리는 더욱 부드러웠다.
"이제야 당신에게 말할 기회가 왔군요. 사실 저는 벌써부
터........"
그녀는 양팔에다 힘을 주어 강옥랑의 허리를 향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움직이는 순간 좌우 어깨의 '견혈(肩穴)'이
이미 강옥랑에 의하여 점해졌다. 그녀는 조금의 힘도 쓸 수가 없
었다.
강옥랑이란 악마는 벌써부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일곱 여덟 군데의 혈도를 차례로 짚어나갔다. 그는
웃으며 지껄여댔다.
"나는 벌써부터 네가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러니 오늘 밤에는 너의 뜻을 받아들여야지."
"너.... 너 이 악마야. 네가 감히......."
"흐흐, 네가 지금 후회하는 거냐? 그러나 이미 후회하기에는 늦
었다."
그의 차가운 손이 그녀의 옷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철심난의 온 몸은 그의 손에 의해 서서히 점령당해 갔다.
이것은 그녀가 처녀로써 느끼는 최초의 수난이었다.
그녀는 차라리 죽고만 싶었다.
강옥랑은 그녀의 귓볼을 뜨겁게 핥으며 그녀에게 말을 건냈다.
"두려워마라. 나는 따뜻하게, 그렇지, 매우 따뜻하게 대할 테니
까...... 소어아와 화무결이 나에 비하면 그저 어린애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철심난은 입술을 깨물고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소리를 쳐
도 소용이 없으며 더욱 강옥랑의 음욕을 부채질해 줄 뿐이라는 것
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렸다.
"소어아..... 화무결, 미안해요!"
그러나 바로 이때, 강옥랑이 돌연 손을 멈추었다. 철심난은 아
직 무슨 일인지 모르고 있었다. 강옥랑은 그녀를 한쪽으로 밀었
다.
그녀는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한 여자가 서있는 것
을 발견하였다.
그 여인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강옥랑을 노려보며 서있었다. 그
러나 싸늘한 눈에는 분노도 없었고 슬픔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강옥랑은 멋적었던지 손을 털며 억지 웃음을 지었다.
"이 계집애가 나를 바보로 취급해서 속이려고 하기에 버릇을 좀
가르치려 했을 뿐이오."
그 여자는 여전히 싸늘하게 그를 바라볼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
다.
강옥랑은 웃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당신, 질투하는 거야?"
그는 웃으면서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화를 낼 필요는 없소. 질투할 필요도 없고. 사실 나는 오직 당
신만을 좋아하고 있소."
그 여자는 움직이지도 않고 그가 몸을 만져도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강옥랑의 말이 계속됐다.
"아직도 화를 낼 테요? 나를 믿지 않고?"
그녀는 드디어 강옥랑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금후로 당신이 다른 여자에게 손대는 것을 보기만 하면 나는
곧 당신을 죽여버리겠어요. 그리고 나도 자살하겠어요."
극도로 분노했을 때에나 할 말이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여전히 평온하면서도 냉정했다. 그녀의 목소리로는 조금도
분노와 질투의 빛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백산군(白山君) 부처(夫妻)
그 여자는 철평고였다.
강옥랑은 혀를 내밀어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의심도 많구려. 당신과 같이 예별 마누라가 있는
데 내가 어찌 다른 마음을 먹겠소?"
그는 철평고를 껴안고 그녀의 얼굴에 입맞춤을 했다.
"당신이 나를 잘 대해주기만 한다면 다른 무슨 나별 일을 해도
나는 상관않겠어요. 그러나 이런 일만은 나를 속이지 말아요. 다
른 일은 속여도 좋아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렸다.
"당신도 알잖아요. 당신은 내 평생의 첫번째의 남자이며, 내 평
생 처음으로 친절한 사람이었어요. 당신이 진심이든 거짓이든 영
원히 이렇게 나를 대하면 난 만족하겠어요. 당신이 다른 나쁜 짓
을 한다해도 나는 난......."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계속 잇지 못 했다.
철심난은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이 얼마나 외롭고 가련한 여인인가? 강옥랑이 자기에게 거짓말
을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의 일생이 이토록 오랫동안
외로웠단 말인가? 그녀는 너무 외로웠던 나머지 이런 수치에도 애
정을 구걸해야 한단 말인가?)
철심난은 가슴이 아팠고 동정이 앞섰다.
그녀는 이 여자가 자기보다도 더욱 가련하다고 느꼈다. 여자는
자기보다 더욱 가련한 여자를 보면 자기의 곤란을 잊을 수가 있지
만 남자는 그렇치가 않다.
남자들은 도박을 할 때 남이 자가보다 많이 잃은 것을 보아야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동정심이 많은 것이라기 보다는
여자의 감정이 남자보다 풍부하고 연약하기 때문이다.
대전의 신좌 밑에는 하나의 비밀통로가 있었다.
그 통로는 몇 개의 지하실로 통했다. 그곳은 다른 지하실처럼
어둡고 습기가 눅눅한 곳이 아니었다. 실상 그 지하실은 세상 어
느 집들 보다 더욱 살기 좋게 꾸며져 있었다.
철심난은 철평고에게 이끌려 그 아늑한 지하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곧 그 '흑의인'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힘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이미 누군가에게 혈도를
짚힌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철심난을 그리 크게 놀라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
려 그녀의 생각이 들어맞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철심난을 놀라게
한 것은 그 '흑의인'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소녀였던 것이다.
그 소녀는 매우 아름다운 두 눈을 갖고 있었지만 그 큰 두 눈은
빛을 잃어 오히려 좀 멍청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멍하니 그 흑의인을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도
싶었다. 그 흑의인도 그녀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바로 모용구매였다.
모용구매가 어떻게 이런 곳에 와 있을까? 철심난은 놀라서 탄식
소리를 내고 말았다.
강옥랑이 그들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여기에도 너의 옛친구가 있단 말이지?"
철심난은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강옥랑이 다시 물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녀는 너를 알아보지 못 한다는 점이야. 넌 그
녀를 이런 모습으로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겠지?"
그는 흑 지주에게 다가가서 크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지주형, 또 한 친구가 당신을 찾아왔군요. 그런데 왜 아무 말
씀도 없소?"
흑 지주는 꿈에서 깨어난 듯 퍼득 놀라서 철심난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놀라움에 휘둥그레지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네가7 네가 어찌 여기를 왔지?"
철심난은 쓴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우린 본래..... 본래 당신을 도우려 했는데......"
강옥랑은 한껏 호기를 보였다.
"좋아, 좋아. 알고보니 흑 지주를 구할 생각이었구나. 흑 지주
는 모용구매를 구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사람을 구할 사람이 오히
려 다른 사람이 구해주기를 기다려야 하는군. 흥?"
그는 고개를 들어 미친 듯이 웃어 제꼈다.
"그러나 온 천하의 어느 누구도 너희를 구하지는 못 할 것이야!
하하하하......"
"잊지 말아요. 화 공자가......."
철심난의 말을 강옥랑이 가로챘다.
"화무결을 말하고 있는가?"
그는 더욱 크게 웃다가는 돌연 웃음을 멈추고 싸늘하게 말했다.
"화무결도 지금쯤은 남이 도와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걸."
"그런 말로 나를 속이려고......"
"너를 속인다고? 천하의 화무결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줄 아느냐?"
"최소한도 당신은 못 해요."
"난 안 되지만 다른 사람은 없을까?"
철심난은 암암리에 긴장을 하면서 물었다.
"누구예요?"
강옥랑이 눈을 감았다.
"당신은 그녀의 이름을 알 필요가 없어. 화무결 같은 사람이 열
명이라도 그녀의 손아귀에서는 벗어나지 못 할 걸."
화무결은 백 부인의 목에 감겨있던 철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그는 철쇠사슬은 손쉽게 풀 수 있었으나 백 부인의 몸에서 풍기
는 향기로 그의 가슴은 급히 뛰었고 정신이 자꾸 혼미해지려고 하
는 바람에 제대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백 부인의 목은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며 그 가날픈 목에 화무결
의 손이 부딪칠 때마다 백 부인은 몸을 떨며 교태를 부렸다.
"저를 좀 긁어 주어요. 나..... 난 가려워서."
화무결은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가 조심할수록 백 부인의 웃음소리는 더욱 요란해졌고
심지어 몸 전체를 떨기도 했다.
그는 몰래 탄식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여인은 왜 이토록 가려움을 참지 못 하는 것일까?)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백 부인의 모습을 보는 그도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호' 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물론 그녀의
행동이 일종의 농락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쇠사슬을 풀었고, 온통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
쇠사슬을 푸는 것이 격렬하게 싸울 때보다도 더욱 힘이 들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 이젠 일어날 수 있겠지요."
백 부인은 풀밭에 누워 거칠게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내가 지금 어찌 일어설 수가 있겠어요."
화무결이 약간 놀라면서 말했다."왜 일어서지를 못 하오?"
백 부인은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걸 모른단 말이오?"
"모르겠는데요."
"바보, 당신은 지금 나의 몸에 조금의 힘도 없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야?"
화무결은 헛기침 소리를 내며 쓴웃음을 지었다.
"부인께선 시간이 급하다고 하더니 지금은 왜 서두르지를 않
소?"
"고의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니 빨리 나를 일으켜 주시오."
화무결은 하는 수 없이 그녀의 몸을 안고 말았다.
그러나 백 부인은 그의 손이 몸에 닿자 몸을 비틀고 말았고 화
무결은 그 바람에 부인의 위로 쓰러질 뻔했다.
그는 도리 없이 백 부인의 허리를 안았다.
백 부인은 온 몸을 흔들며 웃었다.
"가려워..... 가려워 죽겠구나! 알고 보니 당신도 결코 좋은 사
람이 아니에요. 내가 가려움을 참지 못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
부러 그렇게 하다니."
화무결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난 절대로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소."
"일부러 했는지 누가 알겠소?"
화무결은 민망해서 그녀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
를 돌리며 말했다.
"부인이 정 일어나지를 않는다면 제가........."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이미 나를 구해주었는데 지금에 와서
나를 버릴 작정인가?"
"저는..... 저는......"
그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백 부인이 말했다.
"바보, 당신은 남자이면서도 이런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모
른단 말이오?"
"그러면 부인의 뜻은 절더러 어떻게 하란 말인가요?"
"당신은 정말 나를 안을 수가 없어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풍만한 가슴을 아래 위로 움직였다.
만약 강옥랑이었다면 필시 그녀를 안았을 것이다. 한편 소어아
였다면 우선 그녀의 따귀를 한 대 후려치고 다시 그녀에게 속셈을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무결은 천하 어느 여인에게도 무례하게 대하지 못 하
고 화를 내지도 못 하는 성미였다.
그는 이 무력한 여인이 그 옆의 맹호보다도 열 배 이상 더 위험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오직 이 여인이 음탕한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느꼈을 뿐이었다.
그는 그 여인의 희롱을 받아줄 수도 없었고 그녀를 단호하게 무
시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 여인이 불쌍하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
문이다.
이화궁 안에도 이런 가련한 여인들이 많이 있지 않은가? 그는
항상 그녀들을 동정했었다. 더군다나 그는 그 여인이 자기에게 호
의를 가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냉정하게
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어아가 만약 화무결의 지금 생각을
알았다면 필시 크게 웃어버렸을 것이다.
화무결이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탄식했다.
"부인께서 지금 정말 일어설 수가 없다면 여기에서 기다리겠
소."
백 부인은 아래 위로 그를 뚫어보며 물었다.
"정말 아무일도 않고 여기서 기다리겠소?"
"그렇소."
"내가 만약 한 시진이 지나도 일어서지를 않는다면?"
"또 한 시진을 더 기다리죠."
백 부인이 말했다.
"정말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겠소?"
"나는 참을성이 많소."
백 부인이 '푸' 하고 웃고 말았다.
"내가 만약 삼 일 동안을 일어나지 못 한다 해도 그 삼 일을 기
다려 주겠소?"
화무결은 입가에 미소를 보이면서 말했다.
"저는 부인께서 절대로 나에게 삼 일 동안이나 기다리게 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고 있소."
백 부인이 그를 무시하듯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이토록 이상한 사람인줄은 생각을 못 했는데......"
그러면서 그녀는 갑자기 화무결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부인, 당신이........"
백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아, 야단났어요. 내....... 내 남편이 돌아왔어요."
화무결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어디?"
"바로...... 바로......."
이때 밖에서 한 사람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여기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창문이 부서지며 한 덩치 큰 사나
이가 날아 들어왔다. 그 사나이는 키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으나
어깨가 넓고 용맹스러운 모습이 매우 위풍당당했다. 그는 오색 찬
란한 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얼굴이 검었고 수염을 길렀으며, 빛이
나는 두 눈동자는 바라보지 못 할 정도였다.
화무결은 백 부인을 밀어내려 했으나 백 부인은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사나이는 무섭게 소리쳤다.
"더러운 년! 네 년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그는 급히 대청으로 뛰어 들었다. 호랑이는 꼬리를 몇 번 감추
며 피해 버렸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수백 근이 나가는 맹호의 따
귀를 후려치며 소리쳤다.
"쓸모없는 놈! 널더러 이 더러운 년을 지키라고 했지, 잠이나
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 맹호는 몸을 뒤집으며 얌전히 그 자리에 꿇어 앉아 고개를
들지 못 했다.
화무결은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귀하께선 잠시 노여움을 거두시고 내 말을 들으시오."
그 사나이는 화무결의 말을 듣자 더욱 날뛰면서 소리쳤다.
"무엇을 들으란 말이냐? 너의 개소리를 들으란 말이냐? 너희들
이 좋은 일을 하는구나. 이 개년아, 천생이 더러운 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새파란 애송이와......."
화무결은 참을 수가 없어 안짝이 변하면서 소리쳤다.
"당신, 말조심 하시오......."
"날더러 말조심 하라고? 네가 나의 마누라를 품속에 끼고 나를
교육시키려느냐?"
화무결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건...... 이건 오해요......."
"무슨 놈의 오해냐? 내가 똑똑히 보고 있는 데도 시침이를 뗄
작정이냐?"
"난....... 난 절대로 귀하께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오,
귀하께서는 왜 부인에게 묻지를 않소?"
그는 마음 속으로부터 화가 치밀어오르고 있었으나 이 일을 무
난히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국 참고 있었다.
그 사나이가 소리쳤다.
"좋아, 이 더러운 년아, 말해봐라. 이 자식이 누구이며 너희들
은 뭘 하고 있었지?"
백 부인이 유유히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당신을 속일 필요는 없겠죠. 이 사람
은.....바로 나의 정랑(情郞)이에요."
화무결은 너무나 깜짝 놀라면서 급히 그녀를 밀어제꼈다.
"부인,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백 부인이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됐으니 그를 속일 필요는 없어요."
"부인, 당신...... 당신이........"
그 사나이가 소리쳤다.
"네가 시침이를 뗄 작정이냐? 이 자식아, 아직도 할 말이 있느
냐?"
"나와 당신 부인은 모르는 사이요......"
"모르는 사이? 흥 개소리 마라. 모르는 사이인데 어찌 서로 안
고 있을 수가 있지? 사실대로 말 해라, 넌 언제부터 내 마누라와
정을 통했지?"
"나는 오늘 처음......."
백 부인이 큰소리로 말했다.
"말을 해요.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 하겠어요?"
그녀는 자기의 남편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우리는 이미 이삼 년 동안 같이 만나고 있었어요. 당신이 나갈
때마다 이이가 나를 찾아왔죠."
그 사나이는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르면서 가슴을 쳤다.
"정말 미치겠구나!"
그러나 화무결은 그보다 열 배나 더욱 격노하여 소리쳤다.
"백....... 백 부인, 나와 당신은 아무런 원수지간도 아닌데 당
신....... 당신은 왜 이렇게 해야만 합니까?"
백 부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받았다.
"무엇을 두려워 해요. 일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자꾸 거짓말
을 해서 어쩌자는 거예요?"
화무결은 분노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당신....... 당신이......."
그 사나이가 무섭게 소리치며 그의 말을 막았다.
"사실을 말해도 필요없어. 어차피 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
그는 소리를 치면서 급히 일격을 가했다.
그의 주먹에서 바람이 일자 청내의 불빛까지도 흔들렸다. 화무
결의 옷깃도 그바람에 흔들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싸움에 휘
말리고 짚지 않았기 때문에 가볍게 몸을 피할 뿐이었다.
그 사나이는 더욱 분노하면서 소리쳤다.
"자식, 약간의 무술을 믿고 남의 마누라를 훔쳤구나."
그는 다시 세 번 공격을 가했다.
화무결은 즉각 다시 몸을 피했고 여전히 반격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비단 완력이 강했을 뿐더러 수법도 매우 악
독해서 그저 피할 수만은 없었다.
백 부인이 화급하게 소리쳤다.
"반격을 해요, 왜 양보하는 거지요. 당신이 그이를 죽이지 않는
다해도 그는 당신을 죽이고 말거야!"
결국 화무결도 반격을 하지 않을 수 었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
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왼손으로 공격을 하면서 오른손을 한 번 휘
저었다.
그것은 천하에 가장 절묘하다는 '이화접옥'의 신공이었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큰소리를 치면서 몸을 뒤로 약간 물리더니
주먹의 힘을 거두어버렸다.
그토록 악독하고 맹렬하게 공격을 하던 힘을 간단하게 거두어버
린 것이다.
화무결은 그 사람이 '이화접옥의 신공을 피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다. 연남천 외에는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사나이는 화무결을 바라보며 웃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이화궁에서 나왔군. 그러나 너의 그 얕은 수작으로
나 백산군을 어찌하겠어."
그는 다시 공격을 취했고 그 힘은 더욱 크고 맹렬했다.
화무결은 함부로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이화접옥이란 무술은
보기에는 쉬운 것 같아도 사실은 커다란 공력을 소비하게 되는 것
이었다.
그러나 그 백산군의 무술은 그의 적개심을 더욱 북돋웠다. 그는
무서운 상대를 만나자 승부를 가리고 심은 욕망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몸을 회전하며 날카로운 초식을 전개했다.
백 부인이 한쪽에서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맞았어. 그를 두려워 말아요. 나를 위해서라도 그와 싸워야 해
요."
이 소리를 듣자 화무결은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었으나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셈이었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정말 이 백 부인이 무슨 속셈으로 그같은 이야기를 지껄이
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백산군은 더욱 거세게 공격해 들어왔다.
그는 매 수법마다, 매 주먹마다 온갖 힘을 다한 듯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화무결의 몸도 용처럼 휘며 꿈틀댔다. 백산군의 주먹은
그의 옷자락을 스칠 뿐 그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백 부인은 애교를 떨면서 계속 그를 충돌질했다.
"당신이 그런 무공을 지닌 줄은 몰랐는데 당신 같은 사람이 있
으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 하겠어? 빨리 늙은 놈을 죽여요.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부부가 되는 거야!"
그녀가 입을 벌리면 벌릴수록 더욱 더 설상가상이었다.
그렇다고 화무결은 그녀의 입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 백산군의 주먹은 그에게 조금의 틈도 주지를 않았다.
이때 백 부인이 돌연 비명을 질렀다.
"아! 조심해요."
백산군의 일장이 화무결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화무결은 약간 몸을 비틀어 피해버렸다. 그것은 별 특별한 초식
도 아니었으며 화무결이 예상하지 못 한 공격도 아니었다. 화무결
은 백 부인이 왜 돌연 소리를 질렀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순간, 그는 양다리가 마치 모기에라도 물린 것 같은 느
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져버렸다.
화무결은 암기가 발사되는 소리를 백 부인의 비명소리 때문에
들을 수가 없었다.
화무결이 쓰러지자 백 부인은 달려나와 백산군의 목에 팔을 휘
감으며 말했다.
"난 내가 그를 좋아하는 줄로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당신들이
싸우게 되자 그때서야 정말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어요. 나는 천하의 어느 누구도 당신을 건드리지는 못 하게 할 거
예요."
화무결은 가볍게 탄식을 했다. 그는 눈을 감으면서 중얼거렸다.
"아, 여자.....!"
그는 그제서야 소어아가 왜 여자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지 알
만했다.
'팍'하는 소리가 났다. 백 부인이 백산군에게 따귀를 얻어맞는
소리다.
뒤따라서 백산군의 노한 소리가 들려왔다.
"너 이 더러운 년! 지금에야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그는 말을 할 때마다 따귀를 후려쳤다. 백 부인은 비참한 소리
를 내었고 그 소리를 듣는 화무결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를
몰랐다.
백 부인은 확실히 비겁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자가 여자
를 때리는 것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눈을
감고 탄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만약 눈을 뜨고 있었다면
더더욱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백 부인은 비록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나 얼굴에는
조금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눈에 기이하게 흥분한 빛을 띠고 있었으며 백산군이 손
을 내려칠 때마다 피하지 않고 오히려 달려들어 얻어맞는 것이었
다.
백산군이 무섭게 욕하고 더욱 세차게 내려칠수록 그녀의 눈은
더 욱 빛을 내며 오히려 쾌감에 몸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백산군이 그녀를 때리며 외쳤다.
"이 더러운 년아, 다시 나를 배반하겠느냐?"
백 부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시는 배반하지 않겠어요. 정말 않겠어요. 당신 외에는 다른
남자가 필요 없어요.""그런 말을 한다고 내가 손에 사정을 둘 것
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야."
백 부인은 야릇한 신음소리를 연발했다.
"좋은 사람, 당신...... 정말 악독하군요. 차라리 나를 죽여
요."
그녀는 달려들어 백산군의 다리를 안았다.
백산군은 그녀를 발로 차버렸고 그녀는 '펑' 하며 벽에 부딪쳤
다가는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다시 움직이지 못 하고 오
직 약한 신음 소리를 낼 뿐이었다.
화무결은 그 신음소리를 듣자 몰래 탄식을 했다.
백산군이 껄껄 웃으며 화무결의 곁으로 다가왔다.
"너는 지금에야 알았겠지. 우리 마누라가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
지. 그녀를 잘못 건드렸다간 이렇게 돼. 너는 젊은 나이에 바보도
아닌데 어찌 이런 꼴을 당했지?"
화무결은 이를 악물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명을 해도 소용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백산군은 그의 옷깃을 잡아 당겨 번쩍 들어 안고는 걸음을 옮겼
다.
화무결은 참을 수 없어 말했다.
"백산군, 당신도 사나이 대장부라면 차라리 한 칼로 나를 베시
오.그러면 당신에게 감격하겠소, 당신이 만약 나를 괴롭힐 생각이
라면 그것은 대장부의 행실이 아니오."
백산군이 크게 웃으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빨리 죽여달라고?"
"일이 이쯤 됐으니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소?"
화무결은 암담히 탄식을 하고는 눈을 감았다. 그는 다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조용히 죽음을 맞으려 했다.
백산군은 그를 자리에 누이더니 그의 몸을 뒤집고 바지를 벗겼
다.
화무결이 놀라서 소리쳤다.
"당신...... 당신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는 고개를 들고 눈을 치켜떴다.
백산군은 웃으며 서있었다. 그의 얼굴은 조금도 악의가 없어 보
였다.
"내 마누라의 암기는 옛날 연남천도 골치를 썩을 정도였지. 넌
양다리에 그 암기를 하나씩 맞았으니 그것을 빨리 빼내지 않으면
한평생 걸어다닐 생각을 말아야 해."
화무결은 놀랐다.
"당신........ 당신은 왜 나를 구하는 것이오?"
"내가 너를 구하면 안 되나?"
"그러나....... 그러나......."
백산군이 돌연 크게 웃었다.
"너는 내가 정말 내 마누라가 한 말을 믿는 줄로 아느냐?"
그는 화무결의 양다리에서 두 개의 가느다란 침을 뽑아냈다. 그
두 개의 가느다랗고 짧은 침이 심지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
하게 한 것이다.
침이 뽑히자 화무결은 즉각 원기를 되찾았다. 그는 급히 일어서
백산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왜..... 왜 그토록 화를 냈소?"
백산군은 어깨를 움찔하며 말했다.
"난 다만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해주었을 뿐이야."
화무결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원한다고?"
"그렇지, 왜 이상한가?"
"사실 말이지만 난 평생 동안 이처럼 이상한 일은 보지를 못 했
오."
백 부인이 남편에게 묶여 살면서 자기에게 구원을 청한 것부터
가 괴팍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백 부인을 구하자 그녀는 오히려
자기를 해치려 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이젠 백산군이 그를 구해내
며 이런 말을 하자 그는 오리무중에 빠진 것처럼 어리둥절했다.
백산군은 그의 어깨를 치면서 입을 열었다.
"녀석, 나도 네가 도대체 무엇을 이해 못 하는 것인지 알아. 앉
아라, 이야기해 줄 테니."
"정말 알고 싶군요."
백산군은 탄식을 하면서 쓴웃음을 보였다.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이 많이 있지. 남이 존경하고 사랑할수록
고통을 느끼고 반대로 학대할수록 쾌락을 느끼는 사람도 그중 하
나야."
"세상에 그런 사람도 있소?"
"물론 있지. 내 마누라가 바로 그 중의 하나야."
화무결은 놀랐다.
"예?"
"말을 해도 믿기 어려울 거야. 내 마누라는 평생 동안 별로 좋
아하는 것이 없었어. 다만 내가 때려주기만을 바라고 심하게 때릴
수록 더 통쾌함을 느꼈지. 얻어맞은 다음 날은 더욱 정신이 깨끗
하고 맑아. 하지만 두들겨 맞지 않으면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말도 하기를 싫어해."
"그녀..... 그녀가 그런 괴팍한 성격이란 말이오?"
"어릴 때부터 그랬던 모양이야. 남에게 학대받기를 바랄 뿐더러
자기가 자기 자신을 학대하기도 하지. 나이를 먹으니까 그런 성질
이 더욱 심해져서 보통 거실에는 앉아 있지를 못 해. 결국 마굿간
에다가 쇠사슬로 묶어달라기에........ ."
"음! 알고보니 그녀 스스로가 원해 그렇게 한 것이군요. 난
또......."
"너는 날 인정도 없는 폭군으로 생각했겠지?"
화무결은 쓴웃음을 보였다.
"제가 어찌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소나 말로 취급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난 그녀가 그런 병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떤 때에는 차
마 손을 댈 수가 없어. 그럴 땐 그녀는 일부러 나를 격노시켜서라
도 얻어맞으려고 해."
"오늘의 일도 결국 그런 원인 때문이군요."
"다른 원인도 있지."
"그래요?"
"그녀는 나이가 점점 들자 내가 자기에게 싫증을 느끼고 다른
여 인을 사랑하게 될까봐 고의로 나를 질투하게 만드는 거야."
화무결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백 부인의 그런 속셈은 쓸데없는 일이오. 귀하께서는 처를 그
토록 사랑하시니 말이오."
"그녀 자신이 모르는데 네가 어떻게 알지."
"귀하께서 만약 정말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오늘 같은
일이 있겠소?"
백산군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자세를 바로 하고 정중
히 입을 열었다.
"그렇지. 그녀의 버릇 때문에 친구를 괴롭혔군. 이것은 우리 부
처간의 잘못이니 어떻게 하든 친구 마음대로 하시오."
옷매무새를 고친 화무결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저는 본래 이 일 때문에 매우 화가 났었소. 그러나 귀하의 말
씀을 듣고보니 오히려 귀하의 처지에 대해 동정을 할 수밖에 없
소. 더구나 귀하의 애정에는 존경을 표하고 싶소. 도리어 제가 부
인에게 잘못을 저질렀으니 귀하께서 마음대로 처분하시오."
"친구,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오."
화무결은 정중히 인사를 하면서 말했다.
"하여튼 간에 오늘의 일은 다시 말을 하지 않겠소. 그러나 두
분께서는 영원히 함께........"
그는 돌연 말소리를 멈췄다. 그는 행동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숨
이 허리에까지 차서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백산군은 여전히 웃으며 인삿말을 했다.
"친구, 가려는 것이오?"
"귀하께서는 무슨 분부라도 있소?"
"당신 스스로가 이미 미안하다고 사과했는데 어찌 더 용무가 있
겠소?"
"정 그렇다면 귀하께서는 왜 나의 허리에 손을 썼소?"
백산군은 놀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정말이오? 그렇다면 필시
내가 잘못하여 다시 그 유사침(遊絲針)
을 당신의 허리에 꽂은 모양이군요."
화무결은 허리를 가리키며 천천히 말했다.
"바로 소요혈에다 말이오."
백산군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만약에 소요혈 부근이라면 큰일이오. 잘못해서 그 침이 당신
소요혈 속으로 침입을 한다면 아무도 당신을 구하지 못 할 것이
오. 당신은 다만 삼 일 동안 웃으면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
소."
화무결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정히 그렇다면 난 작별하여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겠
소."
"지금 그런 상태로 함부로 걷는다면 그 유사침이 당신의 피를
따라서 움직일 것이오. 조심을 한다해도 칠십 걸음을 옮기기 전에
웃음을 시작할 데고 그땐 그나마 사흘도 견디지 못 하고 죽고 말
것이오."
화무결은 옮기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몸을 돌리고 조용히
내쉬면서 고백산군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길게 한숨을
개를 저었다.
"당신 부부의 행각은 정말 이상하군요. 부인께서는 사람보다는
소나 말 같이 취급받기를 원하고 당신은......."
백산군은 의미있는 웃음을 보였다.
"친구께서 궁금한 점이 있다면 난 힘이 닿는대로 설명해 드리겠
소."
"난 귀하께서 나에게 독수를 가할 줄로 알았지만 귀하께서는 오
히려 나를 구하고 부인의 비밀까지도 말했소. 하지만 내가 당신을
친구로 취급하자 나에게 독수를 가했으니 정말 알 수 었는 일이
오."
백산군은 드디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지 크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친구가 물어보니 내가 말을 아니할 수 없군.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물론 이유가 있소."
"무슨 이유요?"
"친구, 당신이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난 해치지 않았을 뿐더
러 문앞까지 모셔다 드렸을 것이오. 그러나 귀하께서는 이화궁의
사람이니 사정이 크게 틀린 것이오."
"무엇이 틀리다는 것이지요?"
백산군은 돌연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너는 정말 지금까지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저의 견식이 풍부하지 못 해서......"
"그렇겠지. 이화궁 문하는 강호의 행적을 유의하지는 않
지......그러나 '십이성상'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지는 않겠
지?"
"그래서 귀하께서는 호랑이를 기르는군요. 그리고 그래서 댁의
부인이 사람 취급을 받으려하지 않고 말이오."
백산군은 유쾌한 듯 박장대소 했다.
"넌 견식은 풍부하지 않지만 상상력 만큼은 풍부하구나. 하하
하!"
그는 돌연 웃음을 그치고 안색을 무겁게 바꿨다.
"너는 십이성상이 이화궁과는 원수지간이라는 것을 알겠지. 내
손에 걸려든 지금 두렵지도 않으냐?"
화무결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귀하께서 손을 쓸 생각이었다면 방금 나를 구할 필요는 없었
소. 나를 구한 것은 필시 나에게 부탁이 있기 때문일 것이오. 귀
하께서 나에게 부탁이 있는데 내가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소?"
"하하! 네가 이렇게 영리하게 변할 줄은 몰랐구나!"
그는 웃으면서 여전히 인상을 풀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그렇지. 난 확실히 너에게 부탁이 있다. 이화접옥의 비밀을 알
려준다면 너를 놓아줄 뿐더러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 주겠다."
화무결은 웃어버렸다.
"이화접옥의 비밀을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면 필시 크게 실망할 것이오."
"말을 하지 않겠느냐?"
"세상에는 입을 열게하는 방법이 많소. 생사로 협박을 할 수도
있고 형벌로 할 수도 있소. 귀하께서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시
험 해 보시오. 내가 입을 여는지."
백산군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또 웃었다.
"그런 방법으로는 너의 입을 열지 못 할 것을 알고 있어."
"그렇다면 귀하께서는 어쩔 작정이시오?"
"나는 힘들일 필요가 없어. 난 너를 그냥 놔두겠다. 내가 필요
하게 되면 큰소리로 불러라. 그러면 내가 꼭 가겠다."
그는 이렇게 말을 한 후 몸을 돌려 발걸음을 때기 시작했다.
백산군이 걸어나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잊지마라. 절대 칠십 걸음 이상을 걷지는 못 해. 칠십 걸음을
넘기게 되면 크게 웃다가 죽고 말아. 그 맛은 무엇보다도 견디기
가 어려울 거야."
사랑을 위하여
백산군은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화무결은 그를 따라 나가고 싶었으나 감히 움직이지를 못 했다.
그는 백군산의 말이 결코 공허한 협박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설마 그것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 해도 목숨을 걸고 죽음
의 여부를 점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죽음을 두려
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아무 가치 없는 일에 목
숨을 내던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가 망연히 서서 방도를 생각하고 있을 때 돌연 호랑이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커다란 포효 소리에 등불이 흔들렸고 의자가 넘어졌다.
화무결은 안색이 변해갔다. 혹랑이의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가까와지더니 창문을 부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화무결이 평상시 같았으면 단 일장으로 호랑이를 죽이지는 못
한다 하더라도 열 마리의 호랑이가 한꺼번에 덤벼들어도 감당해
낼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상태에서는 발걸음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를 못
하는데 어떻게 호랑이를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한 발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몇 발걸음 뒤로 물러서자 그는 이미 구석까지 몰리게 되었다.
화무결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맺혀 흘러내렸다.
백산군에게 구원을 청하지 않으면 호랑이의 밥이 되고 말 형국
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냥 죽는한이 있다 할지라도 백산군에게
목숨을 구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한 번 호랑이의 포효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진동에 탁자 위의 꽃병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며 흩
어졌다.
강옥랑은 크게 웃으면서 걸어 나갔다.
철심난은 그의 만족스러워하는 웃음소리를 듣자 손발이 차가워
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강옥랑이 악독함에도 불구하고 담이 작은 것을 알고 있
었다. 그런 그가 정말로 화무결을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면 어찌
저렇게 여유있는 태도를 보이며 마음을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진정 화무결이 당하고야 말았단 말인가?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것을 본 흑 지주가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여인은 여인이구나! 죽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토록 상
심해서 우는 거냐?"
철심난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 당신은 내가 나 자신 때문에 울고 있는 줄로 아세
요?"
"너 자신 때문이 아니면 누구 때문인가?"
철심난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몰라요...... 당신은 몰라."
흑 지주는 돌연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화씨 때문인가?"
"음!"
흑 지주는 큰소리로 말했다.
"만약 소어아가 죽는다면 네가 이토록 상심하겠는가?"
철심난은 고개를 들더니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처절한 웃
음이 그녀의 입가에 떠올랐다.
"그가 죽는다면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왜 남을 위해 상심하는 거야? 한 여인은 오직 한 남
자를 걱정하는 것으로 족해. 다른 남자가 죽고 사는 것은 상관이
없지."
"나의 마음을 당신은 몰라요. 영원히 이해 못 할 거예요. 어느
사람도......"
"그렇지. 여인의 마음은 남자보다 약하니까."
철심난이 말했다.
"화무결 뿐만 아니라 당신이 죽는다 해도 난 상심하게 될거예
오."
"왜?"
"당신도 소어아의 친구이기 때문이지요."
"넌 정말 나를 구하기 위해 왔단 말이냐?"
"물론이지요."
"내가 지금 움직일 수 있다면 너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겠
다."
철심난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당신을 구하러 왔는데 나를 원망하지요?"
"나 흑씨는 한평생 남의 도움을 받지 않았어. 지금 내가 죽어가
는 마당에 너의 은혜를 입었으면 죽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
야."
"나도 당신의 심정을 이해해요. 당신은 사내 대장부이니까."
"흥!"
모용구매는 여전히 혼이 나간 사람처럼 거기에 서있다. 그녀는
손가락 하나 조차 움직이지를 않고 석상처럼 그저 멍하니 서있었
다.
철심난이 처절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당신도 잊지 말아요, 당신 자신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서 온 것이 아네요?"
"그렇지. 나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왔지! 나는 그녀를 위해서
라면 죽을 수도 있어. 그러나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가 당장 내
앞에서 죽는다 해도 나는 손을 내밀지 않을 거야."
철심난은 그제서야 정말 놀랐다.
그녀는 그 싸늘한 사람에게 그토록 진지한 감정이 있을 것이라
고는 생각지 못 했다. 더우기 그가 그런 감정을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것은 이해못 할 일이었다.
흑 지주는 소리쳤다.
"이상하게 생각 돼? 그녀가 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으
로 보이는가? 그녀는 세상의 어떤 여자보다도 더욱 아름답고 고운
여자야."
철심난은 그를 주시하면서 말했다.
"그러나 당신이 그녀를 진정으로 대해도 그녀는 모를 거예요."
"흥!"
"당신은 그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요?"
"그녀가 꼭 알아 달랄 필요는 없어. 또 그녀가 나에게 똑 같이
대할 필요도 없지. 난 그녀를 그냥 사랑할 뿐이야. 아무 조건이
필요없어 !"
철심난의 목소리는 차츰 떨려왔다. 그의 말은 연인의 마음을 사
로잡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물었다.
"그녀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계속 사랑할 것인가요?"
흑 지주는 생각해볼 여지도 없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물론이지.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그녀에게 시집을 오라는
것은 아니야. 다만 그녀가 잘 산다면 난 죽어도 무방해."
"한 여인이 일생에 그런 애정을 얻을 수만 있다면 죽어도 아무
런 서운한 감정이 없을 거예요."
철심난은 모용구매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철심난이 놀라서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우리 말을 알아 들었나요? 당신은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어요?"
모용구매의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눈망울은 여전
히 한 곳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었다. 흑 지주의 얼굴에도 잠시 기
쁜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암담한 표정으로 변했다.
철심난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너무 괴로워할 필요는 없어요. 비록 정신이 올바르지는 못 해
도 당신의 진정한 사랑이 그녀를 감동시켰으니 당신의 마음이 변
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꼭 받아줄 날이 있을 거예요."
이때 한 사람의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그날?..., 흐흐, 그날은 영원히 올 수가 없어."
강옥랑이 다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혼자였다.
철심난이 놀라서 물었다.
"무엇하러 왔지요?"
"너를 보러 왔지!"
그는 천천히 철심난 앞에 와서 그녀의 얼굴을 만지작 거렸다.
"옛말에 하루만 보지 못 해도 삼 년을 못 만난 것 같다는 말이
있지만, 난 비록 반 시간을 못 봤지만 마치 몇 년을 못 본 것 같
은 걸."
철심난은 큰소리로 소리쳤다.
"네가...... 너는 그 흰 옷의 아가씨를 잊지마라......."
"하하! 난 물론 그녀를 잊지는 않아. 그래서 나는 이미 그녀에
게 약을 먹였지. 지금 그녀는 잠이 들어 있으니 네가 목이 터지도
록 불러도 듣지 못 할 거야."
"나에게 조금이라도 손을 댄다면 나는......."
그러나 그의 손은 이미 그녀의 어깨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고 있
었다.
철심난은 피마저 차가워지면서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부..... 부탁이다. 그러지 말고 나를 죽여라."
"너를 죽여달라고? 내가 왜 너를 죽여? 강소어와 화무결의 애인
인데 내가 재미를 보지 않으면 그들에게 미안하지."
그는 크게 웃으면서 철심난을 바싹 끌어안았다.
"난 모든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너를 가져야 돼. 정말 너를 좋아
하는 것은 아니야. 다만 화무결과 강소어가......."
철심난은 그의 말을 다 듣지도 못 하고 기절해버렸다.
흑 지주는 뜬 눈으로 강옥랑이 그녀를 안고 가는 것을 보며 이
를 갈 뿐 속수무책이었다.
맹호는 덤벼들 자세를 취했다. 화무결의 목숨은 풍전등화의 경
각지간이 되었다.
바로 이때, 그는 호랑이의 포효 소리에 흔들거리는 족자 뒤로
하나의 손잡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화무결은 생각해볼 여지가 없이 급히 그 그림을 제치고 문을 열
었다.
문을 들어선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정신을 되찾
고보니 밑으로 여섯 일곱 개의 계단이 보였고 그것은 하나의 통로
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 통로 끝으로 하나의 빛이 새어나오는 문
이 보였다.
화무결은 비록 그 속의 상황이 궁금했으나 감히 한 걸음 한 걸
음을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는 한 번 옮길 때마다 다음
발에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
이때 문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 부탁이다. 그러지 말고 나를 죽여라."
철심난의 목소리였다.
화무결은 순식간에 피가 들끓었다..
강옥랑이 철심난을 안고 방을 나가려는 순간 돌연 한 사람이 문
앞에 서서 그의 길을 막았다.
그 사람의 혈색은 매우 창백했으며 분노에 차서 부르르 떨고 있
었다.
문앞을 막아 선 사람은 바로 화무결이었다.
강옥랑은 마치 뒷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즉각 뒤로 몇 발을 물
러섰다.
화무결은 무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만약 화무결이 소요혈을 집
힌 상태가 아니었다면 정말 이런 비겁한 자식을 세상에 살려두지
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저 서서 노려볼 뿐 손을 쓸 수
가 없었다.
다행히 강옥랑은 그가 사람을 다칠만한 힘이 없다는 것을 모르
고 있었다. 강옥랑은 목숨을 하나 더 준다해도 손을 쓰지 못 할
정도로 겁에 질려버렸다.
화무결은 탄식을 하며 조용히 말했다.
"그녀를 놓지 못 하겠는가?"
강옥랑이 비굴한 웃음을 보이며 머뭇거렸다.
"네..... 네......."
그는 살며시 철심난을 의자에 내려놓았다.
화무결이 다시 말했다.
"너를 다치고 싶지는 않으니..... 빨리 가거라!."
강옥랑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라 따질 것도 없이 급히 달아나
면서 말했다.
"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이 모습을 본 흑 지주는 분개해서 소리쳤다.
"화씨, 당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왜 그런 놈을 살려두
는 거요?"
화무결은 쓴웃음을 보였다.
"죽이면 손이 더러울 데니 놓아주는 것도 좋겠지요."
그는 강옥랑이 듣게 될까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흑 지주는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노하며 말했
다.
"당신은 당신의 그 보배스러운 손을 더럽힐까 걱정하지만, 난
두렵지 않으니 빨리 나의 혈도나 풀어주시오. 내가 가서 그와 싸
울테니까."
화무결은 듣지 못 한 척 하는 수밖에 없었다.
흑 지주는 다시 크게 노했다.
"나도 너의 손을 더럽힐 것 같으냐?"
"형께서는 급할 것이 없소."
"급하게 굴지 말라고? 지금이 급하지 않으면 언제가 급한가?"
화무결은 다만 고개를 숙이고 철심난 쪽으로 걸어갔다.
흑 지주가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 좋아. 알고보니 네가 그런 사람이었군. 우리가 오해 했
어! 너, 너 같은 사람이 나를 만지면 내가 토할 것이다."
화무결은 쓰디 쓰게 웃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는 평생 이토록 모욕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만 참
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진상을 말하여 강옥랑이 알게 되버
리면 모두가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었다. 철심난은 점점 정신을
되찾았다.
그녀는 화무결을 보게 되자 눈에서 즉각 빛을 내면서 소리쳤다.
"당신이 왔군요! 당신이 정말 왔어요. 나는 당신이 꼭 우리를
구해줄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기쁨을 감추지 못 하고 울먹이며 소리쳤다. 흑 지주는
폭소를 터뜨리며 빈정거렸다.
"그런 사람의 구원을 받는 것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
다."
철심난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급히 물었다.
"당신..... 당신은 왜 그런 말을 하죠?"
"왜 그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래."
철심난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화무결이 고개를 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가엔 계속
쓴 웃음만이 번져나왔다.
"아무 일도 아니오."
"하여튼 당신이 왔으니 됐어요, 빨리 여기에서 나가요. 왜 그냥
서있기만 하지요?"
화무결은 온통 땀으로 전신이 축축해졌다.
"나...... 난......."
그가 말을 잇지 못 하고 괴로워할 때 한 사람이 껄껄 웃으며 몸
을 나타냈다.
"화 공자는 자기 자신도 돌보지 못 하는데 너희들을 구할 힘이
있겠는가? 왜 그에게 억지를 쓰는 거냐? 하하하하......."
강옥랑이 다시 큰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화무결은 그가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도 아무말을 하지 못
했다.
철심난은 크게 놀라서 소리쳤다.
"그 말이...... 정말이에요?"
화무결은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길게 탄식을 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끝까지 한번만 더 버티어 볼 생각을 했다.
"강옥랑, 너를 죽이지는 않으려고 했는데 자살을 할 작정이냐?"
"그렇소. 자살을 하려는 거요. 난 철심난을 안고 그녀의 몸 위
에서 죽으려는 거요."
그는 입으로는 이렇게 얘기했으나 마음 속으로는 화무결에 대해
아직도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서서히 화무결의 곁으로 돌
아 철심난에게 다가갔다.
철심난이 크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너..... 네가 감히......."
강옥랑은 화무결이 손을 쓰지 않는 것을 보자 더욱 대담해졌다.
그는 껄껄 웃으며 방자하게 말했다.
"내가 왜 못 해? 화 공자가 나를 어떻게 하겠어?"
그는 철심난을 안고서 큰걸음으로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러
나 눈은 여전히 화무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철심난은 화무결을 바라보았다. 비록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눈
에는 이미 절망의 빛을 보이고 있었고 그것은 화무결에 대한 소리
없는 절규로 변해가고 있었다.
화무결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비오듯 떨어졌다!
그는 이미 대여섯 걸음을 옮겼다. 다음 걸음은 그를 지옥으로
보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강옥랑은 재미있다는 듯이 계속 빈정댔다.
"화무결아, 왜 그러고 있지? 그 천하무적의 무술은 어디로 갔
나. 너는 내가 네 연인을 안고 침대로 가는 것도 좋단 말이냐."
그는 문앞에까지 물러서서는 일부러 멈추었다.
화무결은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지
만 그가 만약 죽어버린다면 철심난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강옥랑의 손이 철심난의 앞가슴을 더듬어 올라갔다.
"보아라. 이 부드러운 가슴과 가날픈 몸매, 이 처녀의 몸은 이
제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가 있어."
화무결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돌연 한 걸음 한 걸
음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철심난을 구하지 못 한다 해도 철심난이 이런 모욕을 당하
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그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많은 결심과 용기가 필요했다!
강옥랑이 웃음을 멈추었다.
그는 화무결의 새파란 얼굴을 바라보면서 놀라운 소리로 말했
다.
"너..... 네가......."
화무결이 깊이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녀를 놓아라!"
강옥랑은 눈동자를 굴리면서 그의 모습을 살폈다.
화무결의 안색이 비록 무서웠지만 그의 발걸음은 이미 공력을
잃은 사람의 걸음걸이였다.
강옥랑은 미친 듯이 웃어 제꼈다.
"화무결, 나를 놀라게 하지는 못 할 걸! 난 벌써 알고 있어. 너
는 이미 백산오(白山吳)부처에게 당하고 말았어. 무술을 조금도
사용할 수 없을 걸. 흥? 하하하."
화무결은 대답없이 이를 악물면서 앞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갔
다.
그는 물론 강옥랑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죽는 길밖에 택할 여지가 없었다.
강옥랑이 다시 말했다.
"자식, 넌 정말 무섭구나! 그러나 네가 한 발만 더 다가온다면
난 너를 죽여버릴 것이다."
화무결은 암담한 숨을 내쉬면서 앞으로 한 발 더 움직였다.
(죽음! 빨리 오너라!)
그는 돌연 죽음이 그렇게 무섭게 생각되지 않았다.
철심난이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화무결, 부탁이에요. 오지 마세요. 난..... 난 괜찮아요. 너무
나를 생각하지 마세요."
화무결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다만 난 당신을......"
"당신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는 못 할 것
이에요. 당신이 나를 위해서 죽는다 해도 내가 사랑하는 것은 여
전히 소어아인데 왜 저 때문에 죽음을 택하는 거예요?"
강옥랑은 미친 듯이 웃었다.
"화무결, 그녀의 말을 들었는가?"
"들었다. 모두 들었다!"
"그래도 죽음을 택할 테냐?"
"너는 내가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으로 아느냐?"
"잊지 마라. 한 사람은 한 목숨밖에 없어!"
"그렇겠지. 생명은 고귀한 것이니까. 절대로 바꿀 물건이 없
지......"
그는 미소를 보이면서 계속 말했다.
"그래서 나는 한 사람읕 위해서 죽는 것은 교환 조건이 필요없
다고 생각해, 그녀가 나를 좋게 대하든지 나를 사랑하든지 간에
아무런 상관이 없어."
철심난은 너무 상심한 나머지 말을 하지도 못 했다.
흑 지주는 묵묵히 듣다 못 해 큰소리로 말했다.
"사나이군! 나 흑 지주는 남에게 고개를 숙여본 일이 없었으나
그러나, 당신은...... 내가 오해를 했으니 지금 정중히 사과를 하
오. 당신..... 잘 가시오!"
화무결이 뒤로 고개를 돌리고 미소를 보였다.
"고맙소!"
그는 또다시 앞으로 한 발을 움직였다. 강옥랑은 그의 이런 모
습에 적지 않게 놀랐다. 화무결 역시 소어아와 같이 필요할 때에
는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다. 그토록 남들이 집착하는 생명이 그들
의 눈에는 담담하게만 보인단 말인가!
화무결은 허리에 통증을 느꼈다.
그는 죽음과의 거리가 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 제6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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