绝代双骄 11

3학년2반 | 2022.02.14 07:55:38 댓글: 0 조회: 344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8670
생사(生死)의 기로에서
강옥랑은 화무결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소리쳤다.
"좋아, 네가 정 그렇게 죽고 싶다면 하는 수 없지. 사람을 죽이
는 것도 여자와 기분을 내는 것만큼이나 재미있는 일이지."
그는 재빨리 손에 암기를 쥐고 던질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갑자기 화무결이 몸을 떨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평소에 그토록 얌전하던 화무결이 어찌 저런 모습으로 미친 듯
한 소리를 내며 웃을 수가 있을까?
강옥랑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너 미쳤느냐?"
"왜 이상...... 이상...... 하냐?"
화무결이 마지막 걸음을 옮겨 놓았을 때 침이 그의 몸 깊숙히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곧 온 몸이 간지럽더니 웃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다.
그는 참을 수가 없어 또다시 마구 웃어제꼈다. 도저히 웃음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막혔던 진기가 돌연 소
통되기 시작했다.
강옥랑은 한편으로는 놀랐고, 또 한편으로는 이상한 생각이 들
어 급히 손에 쥐고 있던 은침들을 비오듯이 날렸다.
화무결은 계속 웃으면서 소리쳤다.
"네가...... 네가 감히......."
그는 손을 들어 하나의 원을 그렸다. 그러자 날아오던 암기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흑 지주가 경탄의 탄성을 발했다.
"아! 이화접옥이군!"
순간 강옥랑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네가...... 네가 어떻게......."
"하하....... 빨리 그녀를 놓아라!"
강옥랑은 온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나...... 내가 그녀를 놓으면 나를 살려주겠소?"
"놓아...... 놓아라......!"
강옥랑은 그의 말에는 절대 거짓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급히 철심난을 내던지고는 몸을 날려
달아나버렸다.
화무결은 미친 듯이 웃어제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이미 냉
정을 되찾고 있었다!
(백산군의 말은 과연 거짓이 아니었구나!)
화무결은 아무리 웃음을 막아보려 해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
다. 그는 철심난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철심난은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당신, 무엇이 그토록 우스워요?"
"나...... 나......."
철심난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당신은 우리를 속여 애를 바싹 태운 것이 그렇게도 우스워요?"
"난...... 난......."
그는 철심난이 오해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해명할 수가
없었다. 철심난이 진상을 알게 되면 상심할까봐 걱정이 앞섰기 때
문이다.
그는 그녀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려 흑 지주의 혈도
를 풀어 주었다.
흑 지주는 크게 노하여 소리쳤다.
"너는 무엇이 그렇게도 재미가 있는가?"
화무결은 너무나 속이 탔지만 그저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철심난은 정히 밖으로 향했다.
흑 지주는 강호의 경력이 풍부했기 때문에 화무결의 행동에 무
엇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생각
을 거듭하다가 문득 모용구매가 멍하니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
을 발견했다.
그는 즉각 모든 상념을 접어두고 급히 모용구매를 데리고 밖으
로 달려나갔다.
날이 밝기 전의 가장 어두운 시간,
화무결과 철심난은 광야쪽으로 달렸다. 하늘의 별들은 점점 자
취를 감추어 가고 있었고 숲은 매우 조용해서 화무결의 웃음소리
가 더욱 두드러졌다.
철심난은 드디어 화를 내고야 말았다.
"제발 웃지좀 마세요!"
화무결은 발걸음을 점차 늦추었다. 그와 반대로 그의 웃음소리
는 더욱 거칠어졌다.
"나...... 난......."
"사람을 속이는 것이 그토록 재미있다고 느껴져요?"
화무결의 마음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철심난에게 자기가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보다는 차라리 그녀에게 오해를 하도록 놔두고 홀로 죽는 것이 좋
겠다고 생각했다. 결코 그녀를 상심케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
다.
철심난이 앞으로 한 발을 내딛으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그렇게 계속 웃는다면 난 혼자 가버리겠어
요."
화무결이 탄식했다.
"가시오! 하하...... 하여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
니...... 하하하! 빨리 가시오!"
"정말 나더러 가라는 것이에요!"
화무결은 또 미친 듯이 웃었다.
"그렇소!"
화무결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엔 슬픈 빛이 감돌았다.
화무결은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웃을 뿐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철심난은 이를 악물며 앞으로 내달렸다.
"좋아요. 가라면 가겠어요. 난...... 난 지금에야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았어요."
그녀는 몸을 돌려서 달리기 시작했다.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루
흘러내렸다.
그러나 화무결은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미친 듯이 웃고만 있
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
았다. 자기가 목숨을 걸고 구출한 사람,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오해하고 곁을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쉬지 않고 계속 웃었다.
조용하고 어두운 숲은 온통 그의 처절한 웃음소리로 휩싸였다.
마지막 남아있던 하나의 별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화무결의 얼굴 위로는 피와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냉혹한 세계에서 자랐기 때문에 왜 눈물을 흘
리는지 모르고 자랐다. 그러나 지금...... 그는 미친 듯한 웃음소
리 속에서 처절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철심난은 어느새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나 조용히 그를 바
라보고 있었다.
화무결은 급히 얼굴의 눈물을 닦으며 크게 웃었다.
"왜 또 돌아왔소?"
철심난의 얼굴에는 무거운 빛이 감돌고 있었다.
"말해 줘요.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에요?"
"무슨 일? 하하, 난 다만 당신이 우수울 뿐이오. 하하하, 가지
않을 텐가?"
"난 당신이 결코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
아요. 난 가지 않겠어요."
"가지 않겠다고? 하하 좋아, 그럼 내가 가지!"
그러나 그가 몸을 돌리기도 전에 철심난이 그를 안고서 소리쳤
다.
"말해 줘요. 당신...... 이상한 상처를 입었지요?"
"누가 감히 나를 다치게 하겠소."
"그렇지 않다면 제발 부탁이니 웃지 말아요."
그녀는 손마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내가 왜 웃지를 못 하지? 하하...... 당신은 왜 나를 안고 있
는 것이오? 놓으시오. 빨리 놓으시오. 하하하...... 빨리 소어아
를 찾아가시오."
철심난은 그의 손이 얼음과 같이 차가운 것을 느꼈다.
"당신은 왜 사실대로 말을 하지 않나요. 네?"
화무결은 여전히 웃을 뿐이었다.
"손을 놓으시오...... 빨리 놓아......."
철심난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좋아요. 내가 손을 놓아 드리죠. 당신은 내가 안는 것이 어울
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요. 당신이 날더러 더러운 여자
라고 욕을 하면 놓아 드리겠어요."
"당신은...... 하하하...... 당신은......."
철심난은 눈을 크게 뜨고 화무결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러
나 화무결은 철심난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철심난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벌써 알았어요. 당신은 결코 나를 속이지 못 해요. 당신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를 아프게 하는 말은 하지를 못 했어요."
화무결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미친 사람처럼 계속 웃음만 터져나오니 어쩌란 말인가!
철심난은 눈물을 흘렸다.
"당신이 나를 위해서 이꼴이 됐다는 것을 알아요. 당신......."
"당신을 위해서라고...... 하하 당신은 어서 강소어를 찾아 가
시오."
철심난은 원망히 가득한 목소리로 쏘아부쳤다.
"난 가지 않겠어요. 어디로도 가지 않고 당신과 같이 있겠어
요!"
"강소어는?"
철심난은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어아?...... 난 벌써 그이를 잊어 버렸어요."
"그를 잊어 버렸다고?...... 하하 그것이 정말이오?......."
"그이...... 그이가 나에게 어떻게 대하는 지는 당신도 아시잖
아요. 내가 만약 위험에 처해 있어 위급한 상황이 되어도 그는 거
들떠 보지도 않고 가버릴지도 몰라요."
"그러나...... 하하...... 사랑은 교환하는 것이 아니오. 하하
하,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간에
언제까지나 그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오."
"나...... 난......."
그녀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 하고 땅바닥에 쓰러져 통곡하기
시작했다.
"화무결...... 강소어......."
그녀는 자기가 두 동강이로 나눠졌으면 싶었다.
화무결은 또 하늘을 향해 대소했다.
"당신은 어서 그를 찾아가시오...... 그리고 잘 보살펴주시오.
알았소?...... 하하 하하...... 한평생 행복해야 하오......."
그의 웃음소리는 점점 멀어져갔다.
철심난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화무결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영원히 그를 쫓아가지 못 할 것으로 알고 통곡하면서 부
르짖었다.
"화무결, 당신이 이렇게 죽으면 내가 소어아에게 시집을 갈 것
같아요? 당신이 이렇게 죽으면 우리의 일생에 기쁜 나날이 있을
것 같아요?"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서 절규했다.
"화무결, 화무결,...... 빨리 돌아와요!"
그러나 다만 차가운 바람이 숲을 지나며 스산한 소리를 낼 뿐
화무결은 돌아오지 않았다.
날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화무결은 자신의 목숨이 하루를 살다 죽는 벌레보다도 더욱 짧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화무결은 절망 속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일어섰
다.
그는 하늘을 향해 한바탕 웃으면서 소리쳤다.
"화무결아! 너는 아직 목숨이 붙어 있다. 너는 비록 짧은 목숨
이지만 한 건의 일을 할 수가 있어! 너는 죽어도 이렇게 죽어선
안 된다."
그는 몸을 돌려 그 산군신묘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화무결은 대전으로 들어서 신성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백산군, 어서 나와라!"
그의 목소리는 몇십 리 밖의 거리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그러나 고요한 새벽의 정적만 감돌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
다.
화무결이 책상을 들어 뜰로 던져버리며 소리쳤다.
"백산군, 듣거라. 난 너희들 같이 악독한 사람들은 모두 죽여
버려야겠다."
이때 그의 말이 끝남과 거의 동시에 호랑이가 포효하며 그에게
갑자기 달려들었다.
화무결은 침착하게 몸을 낮추며 피하지 않고 달려들어 호랑이의
목에 일격을 가했다.
하늘을 뒤흔드는 듯한 포효 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미친 듯한 화무결의 웃음 소리와 호랑이의 비명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백산군 부처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화무결이 다시 공격을 하려고 몸을 돌렸을 때 맹호는 이미 땅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대전에는 화무결의 웃음소리만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그 웃음소
리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하고 처량했다. 그는 뒤에 있는
정원으로 달려갔다.
정원에도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화무결은 가득한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문을 부수며 탁자를 집어
던져버렸다.
화무결은 미친 듯이 웃으면서 소리쳤다.
"백산군! 백산군! 너 어디에 있느냐! 왜 나와서 싸우지를 않느
냐?"
그러나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그의 웃음소리만이 마치 자
신을 비웃듯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사방에는 사람이 없었고 다만
벽에 걸린 그림 속의 사람만이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면서 마치 그
를 비웃고 있는 듯했다.
(화무결! 너는 조용히 죽는 편이 좋겠다. 왜 거기 서서 소리를
치지? 네가 목이 터진다 해도 결코 너를 찾을 사람이 없을 거야!
이들은 네가 죽을 것을 뻔히 아는데 굳이 왜 너와 싸우겠는가?)
화무결은 벽의 그림을 떼어내어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그 싸늘한 그림의 눈초리는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한쌍의 눈은 계속 그를 바라보면서 그를 비웃고 있었다. 적
어도 그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네가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지? 난 여전히 너를 바
라보고 있고, 네가 죽을 때까지 아니 네가 죽은 후 천백 년이 지
난 후에도 나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 화무결은 죽는다 해도 그 그림은 계속 여기에 있을 것
이다. 그것에 비하면 인간의 목숨은 얼마나 하찮고 가련한 것인
가!
화무결은 속에서 피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입으로는 계속 웃고
있었으나 피가 튀어 나와 온 몸을 적셨다.
그는 힘이 빠지며 점차 몸이 흔들렸고 그의 노한 기세도 차츰
누그러져 갔다.
날이 밝아오며 새벽 노을의 처량한 빛이 감돌았다.
죽음 자체는 두려운 것도 슬픈 것도 아니었다. 슬픈 것은 노여
움을 발산할 곳이 없다는 것이었고 두려운 것은 죽음 직전의 외로
움 뿐이었다.
화무결은 어느 한 사람이라도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누구든
상관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외롭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일생을 풍족하고 명예롭게 보냈지만 그러나 시종 고독했
다. 그는 고독하게 태어나긴 했어도 고독하게 죽기는 싫었다.
그는 차라리 격렬하게 싸우다 죽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를 상대
하여 싸울 사람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 틈에서 죽고 싶었으나 그
에게는 걸어갈 힘조차 없었다.
화무결은 뒤로 물러서 의자에 쓰러졌다. 그는 눈길을 다가오는
서광으로 돌렸다.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죽음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또 터져 나왔다. 그는 웃고 또
웃었다.
그는 자신의 웃음소리에 질식할 것만 같았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 미친 듯한 웃음소리만이 결국 자기의 죽음과 동행할
벗이란 말인가!
그는 양손을 들어 자신의 귀를 막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찌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겠는가!
그는 자신의 웃음소리가 그치는 순간이 죽음의 순간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때, 망막한 서광 속에 돌연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
다.
그 사람은 긴 옷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채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
었다.
아침 안개가 뿌연 여명 속에 화무결은 그 얼굴을 볼 수가 있었
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백 부인, 바로 그 백 부인이었다.
화무결은 다만 넋을 잃은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움직일 힘조차 없었던 것이다.
백 부인은 유령 같이 걸어왔다.
화무결은 그녀가 필시 자기를 죽이러 왔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러나 그녀는 조용히 그의 앞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화무결은 또 미친 듯이 웃었다.
"잘 왔소. 왔으면 왜 손을 쓰지 않소?"
백 부인은 그를 바라볼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당신은 그저 내가 죽는 꼴을 보기 위해서 왔군?"
백 부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좋아. 당신이 무엇을 하러 왔건 간에 당신을 고맙게 생각해야
지. 난 외롭소."
그제서야 백 부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암담하게 말했다.
"가련한 사람, 당신은 살려달라고 할 용기조차 잃었소?"
화무결은 분개했다.
"내가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다니. 지금 나의 고
통이 모자란 것 같은가?"
"당신에게 부상을 입혔으니 필시 나를 미워할 것이오. 그러나
나의 고충도 이해를 해주었으면 하오."
그녀의 음성은 차분했다.
"고충? 당신도 고충이 있소?"
"여인은 자기의 남편을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할 수가 있어요.
백산군은 나의 남편인데 내가 어찌...... 당신이 그를 죽이는 것
을 바라만 보겠어요?"
그녀는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애수에 젖은 목소리
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내가 잘못한 것도 알고 있으니 용서해 주시오."
"왜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오? 계속 나를 속일 작정이
오?"
"이미 이 모양이 된 당신을 내가 왜 속이겠소? 내가 왜 당신을
속여야 하오?"
"나도 왜 당신이 죽어가는 사람을 속이려는 것인지 모르겠소.
그러나 어떤 이유든 간에 이번에는 속지 않을 것이오."
백 부인은 암담함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당신이 나를 믿지 못 하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당
신은 나와 꼭 무엇인가를 보아야 해요."
백 부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주시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당신을 다치게 하지 않겠어요."
그녀의 눈길은 애절했다.
"그렇겠지. 난 이미 죽어가는데 누가 또 나에게 독수를 쓰겠
소."
그는 마침내 그녀를 따라 나섰다.
몇 개의 방을 지나자 화무결은 한 사나이가 긴 칼에 맞아 가슴
이 뚫린 채 벽에 박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백 부인은 걸음을 멈추면서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사람이오."
"이건...... 이게 누구요?"
"누구인지 모르겠소?"
그녀가 자기의 옷을 찢어 그 시체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냈
다. 그 사람은 바로 그녀의 남편 백산군이었다.
"백산군이......."
화무결은 크게 놀랐다. 그는 자기가 백산군을 없애버리려고 했
었지만 그가 이렇게 비참하게 죽은 것을 보자 사람의 목숨이 이토
록 허무한가 하는 감정이 불현듯 솟구쳤다.
백 부인은 조용하게 말을 계속 이었다.
"내가 내 남편의 시체를 보여주는 것은 당신에게 미안하기 때문
이오."
"당신이 이 사람을 죽였소?"
"그렇소. 내가 죽였소."
화무결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백 부인을 바라볼 뿐 아무말
도 할 수가 없었다.
백 부인이 다시 말했다.
"내가 그이를 죽인 것이 이상하오?"
화무결은 믿을 수가 없었다.
백 부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당신은 내가 왜 그이를 죽였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죽일 이유가 너무 많았소."
화무결은 미친 듯이 웃어대며 소리쳤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죽이려 한다고 해도 당신은 그 사람
을 죽일 수가 없었소. 그런데 왜 그를 죽어야 했소?"
"그는 필시 당신에게 나를 악마 같은 여자로 욕했을 것이오. 그
러나 당신은...... 그런 말을 믿소?"
"......."
"내가 만약 정말 그런 여자였다면 그가 어찌 나와 삼십 년간을
같이 살았겠소? 그와 같은 성질로서는 벌써 나를 죽였을 것이오."
그녀는 화무결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했던 것은 다만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
던 것이었소. 그를 위해서라면 어느 사람이든 해칠 수가 있었고
무슨 일이든 할 수가 있었지......."
그녀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말은 진지하고 침통했다.
"그토록 그를 사랑한다면 왜 그를 죽였소?"
"나는 모든 힘을 다해서 그를 다시 내게로 돌아오게 하려 했소.
그러나...... 그러나......."
그녀는 돌연 화무결의 품으로 안겨들면서 통곡을 했다.
"그는 부처의 정을 생각하지 않고 나를 죽이려고 했소."
"그래서...... 그래서 그를 죽였소?"
"난 그이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었소. 하지만 그이가 나를 죽이
려 하자 나는 참을 수가 없었소. 삼십 년 동안 받은 고통과 삼십
년 동안의 비통함이 모두 일순간에 떠올랐소. 그래서 나는 칼을
꺼내어 그를 찔러버리고 말았소!"
그녀는 흐느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내가 반항을 하지 못 할 줄로 알고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지. 나도 그를 정말로 죽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의 칼은 정
말...... 그를 찔러버렸......."
백 부인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부여잡으며 눈물섞인 말을 계속
했다.
"말해 봐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었겠소!"
"당신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소."
백 부인은 그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나를 이해해줄 것으로 알고 있었소. 세상 모든 사람들
이 나를 동정하지 않는다 해도 당신만은 나를 동정할 것이라 생각
하고 있었소. 그것은...... 그것은......."
그녀는 한번 처절히 웃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많은 남자들을 보아왔지만 그 중에 당신이 가장 여자의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됐소."
화무결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과거의 일은 말하지 맙시다. 난...... 절대로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테니까......."
"날 용서하겠소?"
화무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당신의 말이 다 끝났소?"
"내가 할 말은 다 했소. 당신도 무슨 할 말이 있소?"
"난...... 난 다만 당신이......."
그는 물론 백 부인이 자기의 웃음을 그치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
었다.
그러나 백 부인은 그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암담하게 말했다.
"벌써부터 당신 소혈 중의 소혼침(銷魂針)을 꺼내야 했소. 그러
나 이미 침이 깊이 들어가버렸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게 되었
소."
화무결은 돌연 백 부인을 밀어내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자기의 운명이 정녕 이렇게 웃다가 죽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
을 깨달았다.
그는 이런 모습으로 여자 앞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여인
의 가슴에 자신을 가련하게 여기는 감정을 남기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백 부인은 재빨리 그의 길을 막아섰다.
"지금 갈 수는 없소."
화무결은 치밀어오르는 노여움을 억누르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됐는데 왜 또 나를 붙잡는 것이오."
"난 비록 당신을 구할 수도 없으나 당신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구인지는 알고 있소."
화무결은 하늘을 향해 대소했다.
"내가 이미 이런 모양이 되었는데 남의 구원을 청할 것 같소?"
"나는 당신을 용기가 많은 사람으로 보았는데 살아야겠다는 용
기마저 없는 사람이란 말이오?"
화무결은 고개를 떨구었다. 백 부인은 눈을 빛내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난 비록 당신을 구할 수는 없지만 목숨을 삼 일 동안 연장시킬
수는 있소. 또 삼 일 내에 당신을 위해 그 사람을 찾을 수가 있
소. 살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부탁을 해야 되오. 당
신은 아직 나이가 젊으니 살기 위해 부탁하는 것은 파렴치한 일이
아니오."
화무결은 너무 웃은 탓으로 목이 쉬어 목소리조차 딴사람 같았
다.
"내가 부탁을 해도 그 사람이 꼭 들어준다는 보장도 없는데 내
가 왜......."
백 부인이 그의 말을 끊었다.
"난 그 사람을 잘 알고 있소. 내가 부탁을 하면 필시 당신을 구
해줄 것이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계속 말했다.
"더구나 당신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는 것뿐이오. 환자가 의
사를 찾아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우스운 일이 아니겠소."
화무결은 드디어 마음이 움직였다.
"백 부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부탁이니 나를 위해서라도 대답해요. 살아야 돼. 당신이
죽는다면 난 어떻하고...... 당신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난
영원히 감격할 것이오."
화무결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는 이런 진지한 부탁을 거절할 만큼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죽음이 두려웠는지도 몰랐다.
함정(陷穽)
화무결과 백 부인 떠나가자 조용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주위를
감쌌다. 서광이 처참한 시체를 비추고 있었다.
이때 강옥랑이 유연한 걸음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선배는 과연 수단이 보통이 아니오. 후배는 정말로 탄복했소."
기둥에 박혀있던 시체가 돌연 껄껄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런 계책은 화씨 같은 사람이나 속지 너와 나 같은 사람이라
면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걸. 세상에 화무결 같은 사람이 있
으면 너와 나 같은 남자도 있어야지. 그러나 세상의 모든 남자들
이 너와 나 같은 사람들 뿐이라면 여자들이 너무 불쌍하지 않을
까?"
그 시체는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몸에 동강이 난 채 붙어
있던 칼을 떼냈다.
화무결은 백 부인에게 또 속아 넘어간 것이다. 백 부인이 왜 그
를 속인 것일까? 또 그녀는 그를 데리고 도대체 누구를 만나러 간
것일까?
화무결은 혼미한 상태로 마차 속에 앉아 있었다.
백 부인은 그에게 약을 주었고 약효가 발생한 탓인지 그는 몽롱
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잠에 빠져들 수는 없었다. 잠이 들기만 하면 웃음
때문에 곧 깨고 말았다.
그는 이미 전신의 힘이 모두 빠질 만큼 웃어 버렸고 도무지 힘
을 낼 수가 없었다.
다행히 마차 속은 아늑했다. 그는 백 부인이 이 마차를 어디에
서 구해왔는지도 몰랐고 또 마차를 몰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더우기 마차의 방향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마차는 사흘 동안을 달렸다. 사흘 동안 백 부인은 그를
지극히 보살폈다. 그는 말은 하지 않았어도 내심 감격하고 있었
다.
사흘 째 되는 날 황혼 무렵, 마차는 한 언덕에서 멈추었다. 언
덕은 꽃들이 만발했고 석양빛을 받아 더욱 아름다웠다.
전면으로는 강이 흘렀고 불 같은 해가 비친 강물은 더욱 찬란하
게 빛났다.
화무결은 생각했다.
(아!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비록 목숨을 구하지 못 하고 죽는
다해도 이런 곳에서 죽는다면 행복한 일이다.)
백 부인이 길게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바로 여기에 있소. 이젠 헤어져야 하오."
"당신은 가려는 거요?"
"그렇소. 난 돌아가겠소."
"왜요?"
백 부인은 쓴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 사람은 성질이 이상해서 난...... 난 만나고 싶지 않소."
그녀는 문을 열고 화무결을 안아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앞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쪽의 정자가 보이시오?"
꽃이 만발한 언덕을 지나 하나의 정자가 보였다. 양쪽에서는 샘
물이 흘러나와 정자를 감싸고 돌았고 석양의 아름다운 빛이 반짝
이고 있었다.
화무결은 꽃의 향기가 바람에 묻어오는 것을 느끼며 모든 것을
잊고 잠시 서있었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보았소."
산의 고적함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뚫고 그의 웃음소리가
다시 퍼져나갔다.
백 부인이 말했다.
"정자를 지나면 석문(石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오. 석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 쉽게 들어갈 수 있소."
화무결은 생각했다.
(여기에 사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런 고인(高
人)과 만날 수 있다니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내 행색이 이렇게
형편이 아니니.......)
다시 백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문을 들어서면 자연히 그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오. 그
사람을 만나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오. 당신들은 모두 평
범한 사람들이 아니니까!"
화무결이 목메인 웃음소리로 말했다.
"이미 이 모양이 되었는데 어찌 남과 얘기를 나눌 수 있겠소?"
"자포자기 하지 마시오. 그 사람은 절정고수이고 총명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반드시 당신보다 잘났다고
는 할 수 없소."
"그 사람의 이름은 무엇이오?"
"그의 이름은 소앵(蘇櫻)이오."
"소앵...... 소앵...... 서로 모르는 사이에 목숨을 구해 달라
고 할 수 있겠소?"
"그 사람을 만나면 필시 누가 당신을 데리고 왔느냐고 물을 것
이오. 그러면 내 이름을 말해 주시오. 나의 본명은 마역운(馬易
雲)이오."
"알겠소."
백 부인이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제 가보시오. 난 나쁜 여자이니 날 기억하지는 마시오. 나를
원망하지만 않는다면 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소."
화무결이 놀라면서 말했다.
"죽는다고? 당신...... 당신이 그렇다면......."
백 부인의 안색은 차츰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난 앞으로 살아도 죽은 것과 같을 것이니 너무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는 마시오. 금후로는 세상에 나와 같은 불행한 여자가 없기
를 바라오......."
그녀는 돌연 말을 멈추었다. 그녀가 마차에 오르자 마차는 곧
달려가기 시작했고 화무결은 도깨비에게라도 홀린 것 같은 심정으
로 망연히 서있었다.
그는 그 여인이 자기에게 해를 가했음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
겼다. 절대로 의심과 분노는 그의 가슴 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마차는 몇 개의 산을 지나자 멈추어섰다. 산골짜기의 무성한 숲
에서 세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바로 칠평고, 강옥랑, 백산
군이었다.
백산군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일이 잘 됐소?"
백 부인이 애교 있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하는 일도 마음을 놓지 못 해요?"
강옥랑이 말을 받았다.
"부인께서는 여걸 중의 여걸입니다. 제가 같이 다닐 수 있는 것
만 해도 정말 행운이오."
"녀석, 말은 잘 하는구나!"
백산군이 껄껄거리며 끼어들었다.
"화무결은 사흘 내로 이화접옥의 비밀을 말하게 될 게야. 그러
면 이화궁의 두 요괴도 오래 살지 못 하지. 흐흐."
강옥랑은 눈에서 빛을 내며 말했다.
"그 사람이 정말 화무결을......."
이번에는 백 부인이 나섰다.
"네 녀석이 온갖 수단을 다 쓴다해도 그 사람의 손에서 빠져나
가지는 못할 걸."
강옥랑이 말했다.
"그 사람의 무술이 그토록 높단 말인가요?"
"그녀는 무술을 몰라!"
강옥랑은 훔찔하며 놀랐다.
"여자였소? 그리고 무술을 못 하는 여자가 그토록 무섭단 말이
오?"
"무술이 뛰어난 사람만이 사람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힘으로 싸우면 안 되겠지만 그러나 머리로는 강옥랑이 열 명이라
도 못 당해."
강옥랑은 웃으면서 말했다.
"과연 그럴까요?"
강옥랑의 순복하지 않는다는 어투를 들은 백 부인은 그를 바라
보면서 말했다.
"믿지 못 하겠느냐? 그럼 물어보겠는데 나는 어떠냐?"
"부인은 절대 무쌍이오. 천하에 누구도 못 당하죠."
"네가 나를 천하의 무쌍이라 하지만 나는 그녀에 비하면 아직도
멀었지."
백산군은 옆에서 두 사람의 얘기를 재미있게 듣다가 크게 웃으
면서 끼어들었다.
"들었느냐? 나의 마누라까지도 감탄할만한 위인이지."
백 부인이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은 나도 당할 수가 없어요."
강옥랑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부인의 능력만으로도 화무결을 정신없이 만들었는데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결코 살길을 찾지는 못 하겠군요?"
"어느 남자든지 그녀를 만나면 모두 죽는 길밖에 없지."
"후배는 지금까지도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데요?"
"녀석, 네가 다른 생각을 하려는 거냐? 네 옆에 질투를 하는 사
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철평고가 담담히 웃으면서 말했다.
"후배도 그 사람의 이름을 알고 싶군요?"
백 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소앵이야. 아름답기는 해도 독하지."
화무결은 이미 벽록색의 석문까지 다다랐다.
석문 뒤에는 동굴이 있었다.
화무결은 자기의 웃음소리가 이 유곡의 조용함을 파괴하는 것을
원망했다. 그는 자기의 입을 막았으나 웃음은 여전히 새어나왔다.
잠시 후, 그는 동굴 깊숙히 들어섰다.
동굴은 점점 좁아졌다가 갑자기 앞이 환해지면서 하나의 유곡이
나타났다.
하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고 땅에는 꽃이 만발했다. 바위들
과 샘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하나의 정자가 서있었다.
멀리서 학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많은 학들이 몰려와 손님을
마중하는 듯했다.
한 마리의 학이 그의 옷깃을 물더니 그에게 길을 안내했다. 샘
가에 한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 보였다. 마치
물속의 고기들에게 산 중의 외로움과 청춘의 무상한 흐름을 이야
기하는 듯도 싶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고 옷은 순백색
으로 황혼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백의 소녀는 화무결의 웃음소리를 듣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
보았다.
순간, 꽃들마저 그 빛깔을 잃는 듯했다. 입술이 약간 크고 이마
가 약간 넓긴 했어도 그 한쌍의 눈은 모든 결점을 가리고도 남았
다.
그녀는 철심난보다 아름답지는 못 했다. 모용구매보다 깨끗하지
도 못 했다. 소선녀보다 매력이 없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름대로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
움을 지니고 있었다.
화무결의 안색은 자기도 모르게 빨갛게 물들어 갔다.
"저...... 저는 화무결이오. 소앵, 소노선생을 만나고 싶어서
찾아왔소."
백의 소녀는 그를 잠시 바라본 후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에 소행은 있지만 노선생은 아니오!"
화무결은 놀랐다.
"......?"
"내가 바로 소앵이오."
화무결은 놀랐다. 소앵이 필시 나이가 많은 무림에서 은거한 의
사라고 생각했었다. 나이 이십이 못 되는 소녀이라고는 꿈에도 생
각지 못 한 것이다.
소앵은 담담히 말했다.
"산 중의 유곡인데 어느 사람이 길을 안내했는지요?"
"이건...... 제가......."
화무결은 백 부인이 자기에게 이런 소녀에게 목숨을 구해달라고
부탁하게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 했다. 화무결은 그녀의 싸늘한
눈초리를 바라보면서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소앵이 다시 말했다.
"각하께서는 먼 길을 일부러 나를 찾아오고도 왜 말을 하지 못
하시오?"
화무결은 그녀의 말은 비록 친절했으나 그 웃음은 자기를 멸시
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화무결이 말했다.
"제가 실수로 여기에 들어서서 아가씨를 괴롭혔으니 정말 죄송
하오......."
그는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렸다.
소앵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있다가 화무결이 숲을 벗어날 무렵
돌연 그를 불러세웠다.
"공자, 멈추시오!"
"아가씨, 무슨 견식이라도?"
"돌아오세요."
그녀의 말은 아주 부드러웠다.
화무결은 자신도 모르게 돌아서 걸어갔다.
소앵은 담담히 말했다.
"당신은 여기에 실수로 온 것이 아니오. 정확히 온 것이오. 다
만 소앵이 어리다는 것을 안 후 실망을 했겠지요. 그렇죠?"
"저는......."
"대답은 필요없어요. 당신을 난처하게 했군요. 당신은 여자 앞
에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니 말이에요."
화무결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를 몰랐다.
소앵이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여자에게 부탁하는 것이 파렴치
한 일이라 생각하여서 말을 못 하는 것이지요?"
화무결은 다시 놀랐다.
그 소녀는 그저 그를 잠잠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가슴 깊숙
한 생각까지도 알고 있었다.
소앵은 가볍게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정 가고 싶다면 막을 수는 없소. 그러나 말해 둘 것은
당신은 그 돌문을 빠져나갈 때까지도 살아있지 못 할 거예요."
화무결은 놀라움에 여전히 멍하니 서있었고 소앵은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의 심맥이 곧 끊어져요. 얼굴에 이미 죽음의 빛이 감돌고
있군요. 천하에 오직 세 명의 사람만이 당신을 구할 수가 있어
요."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바로 그 중 하나에요. 당신이 자기의 목숨을 그다지 소중
하게 느끼지 않는다면 사람을 실망케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넓은 방, 사방에는 큼직한 창문들이 있었다. 날은 이미 저물어
촛불을 켜야 할 시간이었으며 계곡의 꽃향기가 밤바람을 따라 풍
겨 들어왔다. 하늘에는 하나 둘 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앵은 창문을 열었는데 그 손이 너무 하얗고 아름다와서 마치
투명한 나비의 날개가 하늘거리는 것 같았다.
소나무가 밤바람 속에서 향기를 냈다.
창문 옆의 책장으로는 여러 가지 책들과 옥이나 돌, 나무를 조
각한 병들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큰 방 안에는 의자 하나 외에는 다른 가구가 아무 것
도 없었다.
그 의자는 이상한 것이었다. 마치 큰 상자와 같이 보였다. 가운
데 움푹 들어간 곳으로 사람이 앉을 수 있게 만들어졌다.
소앵은 그 의자에 앉았다.
화무결은 곁에 서서 여전히 쉰 목소리로 웃고 있었다.
소앵은 담담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이곳에는 손님이 잘 오지 않아요. 사람이 온다해도 대개 위태
로운 지경이라 앉지도 못 하지요. 그래서 나는 두 개의 의자를 준
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어요."
화무결은 여전히 쉬지 않고 웃으면서 생각했다.
(누가 와도 앉지를 못 한다면 그냥 서있는단 말인가?)
소앵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서있지도 못 하니 땅에 누워야겠죠?"
화무결은 놀랐다. 무슨 생각을 하든 그녀가 다 알고 있지 않은
가! 소앵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안심하세요. 땅에 눕게 하지는 않을 테니......."
그 의자는 손잡이가 매우 컸다. 그녀는 의자의 손잡이를 열었
다.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손잡이들이 있었다.
소앵은 그 중 한 손잡이를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스르륵' 하
는 소리와 함께 구멍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의 침대
가 올라왔다.
"이제 침대에 누워있게 되었어요. 또 무엇이 필요하죠?"
"차를 한 잔 마시고 싶소."
"아, 내가 잊었군. 멀리서 손님이 왔는데 술은 없어도 한 잔의
차는 대접 해야지!"
그녀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 손으로 다른 손잡이를 쳤다.
그러자 벽의 책장이 열리며 나무로 만든 작은 인형이 나타났다.
그 나무 인형은 손에 두 개의 잔을 들고 있었고 잔 속에는 우유빛
액체가 담겨있었다.
소앵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이곳엔 차가 없어서 산에 있는 석류로 손님을 대접
해야 하니까요?"
"정말 교묘하군요."
"과분한 말씀이에요."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별빛이 사람의 얼굴을 비추기는 했으나
매우 어두웠다. 화무결이 물었다.
"아가씨는 손을 쓰지 않고 불을 켤 수도 있소?"
"난 게으른 사람이에요, 그래서 생각을 많이 하죠......."
그녀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그러자 책장에 달려있던 등불이 몇
번 깜빡거리더니 불이 켜졌다.
소앵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봐요? 여기에 앉아서도 많은 일을 할 수가 있지요?"
화무결은 크게 웃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웃고 시어서 웃은 것이
다.
"내가 보기엔 직접 물을 따르고 불을 켜는 것이 더욱 편리하겠
소. 당신은 왜 그런 어려운 방법을 생각하셨소?"
웬일인지 그는 소앵의 오만함을 꺾고 실었다. 본래 이런 성격은
아니었으나 너무 신경이 날카로와진 모양이다.
"나 같은 사람이 당신을 위해 차를 따라줄 것 같소?"
"왜 종들을 쓰지 않지요? 그 방법이 훨씬 쉬울 텐데."
"나는 사람들과 같이 있기가 싫어요."
화무결은 할 말이 없어졌다. 소앵이 그를 주시하면서 서서히 다
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나를 꺾고 싶은 것이죠? 말해 두지만
세상에 나를 누를 만한 사람은 없어요. 그번 생각은 아예 갖지도
말아요."
"그러나 당신은 약한 여인이오. 어느 사람이든 당신을 꺾을 수
가 있소."
"내가 무공을 연마하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이 알아챘으니 눈이
좋군요."
"고맙소."
"당신은 무공이 높겠군요?"
"그저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이 나에게 구원을 청하는 거예요. 내가 구
원을 청하는 것이 아니에요. 또 세상의 많은 일들은 무술로만 해
결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것은 지혜
때문이지 결코 힘이 아니에요. 힘으로 따지면 당나귀의 힘도 사람
보다는 강해요."
화무결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이때 소앵이 웃으면서 자리에
서 일어났다.
"누우세요. 약을 드리지요. 그 웃음소리가 곧 사라질 거예요."
화무결은 그녀의 아름다운 웃음을 바라보고 또 부드러운 목소리
를 듣자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한 말은 바로 화
무결이 가장 바라던 바가 아닌가!
드디어 웃음이 그쳤다.
화무결은 약을 먹은 뒤 곧 깊은 잠에 빠졌다.
이때 돌연 한 사람이 그 방을 들어서며 애교있게 말했다.
"동생, 정말 용해. 어떤 무서운 남자라도 동생 앞에서는 한 마
리의 개와 같이 변하는군......."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바로 백 부인이었다.
소앵은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담담히 말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벌써 찾아 왔나요?"
"동생이 이토록 영리한데 내가 왜 마음을 놓지 않겠어. 다
만......."
"다만 무엇이에요?"
"다만 이번만은 동생이 성질을 꾹 참고 이화접옥의 비밀을 꼭
알아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거야."
소앵은 그녀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하지 못 할 것 같아요."
"아니야. 다만 동생이 너무 싸늘하게 그를 대할 것 같아서 그러
는 거야."
"동생, 너는 영리하니까 할 수 있을 거야. 남자들은 모
두......."
"좀 부드럽게 대하고 심지어 필요할 때는 옷이라도 벗고 그의
품속으로 뛰어 들란 말이지요?"
백 부인이 애교있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여튼 이 자식은 죽어가니까 그렇게 해도 상관이 없어."
"그런 방법은 당신이 전문이니 당신이 하는 게 어때요?'
"나는 이미 늙었어. 벗으면 정말 보기 싫을 거야."
"이십 년 정도 더 젊다 해도 지금보다 더 보기 좋지는 않을 거
에요."
백 부인은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소앵이 싸늘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그런 방법을 사용한다 해도 그는 말을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의 남편에게 시험을 해보면 몰라도."
"그러나...... 그러나......."
"이런 사람은 내 방법을 써야 해요. 내가 이렇게 대해야만 그는
내가 부탁이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 할 거예요. 내가 왜 무술을
못한다는 것을 일부러 가르쳐 줬겠어요? 그것은 경계심을 없애기
위해서였어요. 사실 그런 쓸데없는 무술을 배우고 싶지도 않았지
만 내가 만약 일류 고수 행세를 했다해도 그는 알아차리지 못 했
을 거예요."
백 부인이 그녀의 말을 이었다.
"지금에야 알 것 같군. 동생의 수단은 과연 보통이 아니야."
소앵도 그제서야 허리를 펴보이면서 말했다.
"당신이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요. 이젠 빨리 가세요. 내일 이맘
때에 이화접옥의 비술을 완전히 펼치도록 만들 테니까요."
강옥랑의 음심(淫心)
이튿날 화무결이 깨어나보니 과연 웃음이 멈추어져 있었다. 그
러나 온 몸이 나른했고 힘이 없어 침대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
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방에서 꽃 향기가 풍겨왔고 새 울
음소리가 들려왔다.
돌연 집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나가! 나가라고, 난 이런 나무 뿌리는 먹고 싶지 않다고 했는
데 왜 자꾸 나에게 먹이려는 거지?"
소앵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나무 뿌리가 아니라 인삼이라는 거예요."
그 사람이 다시 소리쳤다.
"인삼(人蔘)이든 귀삼(鬼蔘)이든 난 안 먹는다면 안 먹어!"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보겠어요. 좋아요. 먹지 않겠다면 그만
둬요."
화무결은 그녀가 의외로 사람에게 고분고분한 것을 듣자 이상하
게 생각됐다. 그리고 그녀에게 큰소리를 치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
지가 궁금했다.
잠시 후 소앵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그녀는 방에 들어서자 곧 그녀의 아름다움과 자태가 다시 되살
아났다. 그녀는 손에 인삼탕을 들고 있었다.
화무결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사람이 먹지 않아서 나에게 주려는 것일가?)
그는 확실히 인삼의 약효가 필요했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인삼
탕을 자기에게 권한다 해도 자기 역시 먹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앵은 방을 들어서자 인삼탕을 창밖으로 쏘아버리고 탕
기를 선반에 올렸다.
화무결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소앵은 침대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몸이 좀 좋아졌어요?"
화무결은 그제서야 웃음이 그치지 않던 때의 고통이 생각났다.
그는 소앵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아가씨, 고맙소!"
"아직 감사하기에는 일러요."
"왜......왜요?"
"비록 웃음은 그쳤어도 그 침은 아직도 당신의 기혈 속에 남아
있어요. 우선 약을 사용해 당신의 소혈까지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당신이 힘을 쓴다면 다시 재발될 거예요."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소앵이 말했다.
"그것은 당신 스스로에게 달려 있어요."
"나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고?"
"그 침은 흑석 같은 보물로도 빼내기가 힘들 거예요. 오직 당신
의 내력으로만 빼낼 수가 있지요."
"그러나...... 그러나 난 조금의 힘도 없는데?"
"물론 당신은 그런 힘을 쓸 수가 없죠. 당신이 할 수 있었다면
나를 찾아 왔겠어요?"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없소?"
"방법이 있어요. 당신의 내공 비결을 나에게 말해 준다면 내가
옆에서 도와 독침을 뺄 수가 있지요."
그녀는 마치 별일도 아닌 것처럼 가볍게 이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오히려 이렇게 말을 해야만 화무결이 모든 것이 힘들여
만든 함정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화무결은 정말로 그녀의 태연한 태도에 별 의심을 가지지 않았
다. 그러나 이화접옥의 비결은 천하무술 중에서도 가장 큰 비밀이
었기 때문에 그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앵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
을 열었다.
"내가 당신의 내공을 배울까봐 걱정하는 것이지요?"
"그런 뜻에서가 아니오. 다만......."
"내가 만약 무술을 좋아했다면 지금쯤 필시 천하 제일의 고수가
되었을 거예요."
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들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무술을 보물처럼 취
급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오."
그녀는 말을 마치자 발걸음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화무결은 급히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잠깐!"
소앵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싸늘하게 대꾸했다.
"말을 하든 안 하든 그것은 당신 마음대로예요."
화무결은 깊이 탄식하며 말했다.
"제가 연마한 무술은 이화접옥이라 하오. 그것은......."
황혼무렵, 백산군 부부는 이미 강옥랑과 철평고와 함께 곡 밖의
작은 정자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네 사람은 모두 얼굴에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 하고 있었다.
강옥랑은 기다리다 지쳤는지 웃으면서 말했다.
"난 정말 그분 소 아가씨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군요? 두 분
선배님께서도 이토록 그녀를 어려워하니 말이오."
백 부인이 그의 말에 대답했다.
"넌 그녀를 보면 말도 제대로 못 할 거야."
그는 웃으며 백 부인의 말에 반박하려 하다가 입을 벌린 채 멍
하니 정자 밖을 바라보았다.
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석양의 하늘빛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
다. 한 마리의 학이 그녀의 앞장을 서고 있었고 사슴 한 마리가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그녀의 머리채를 스
쳐가고 있었으며 그녀는 손을 내밀어 가볍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
다.
온 천하의 남성을 숨막히게 할 자태였다.
강옥랑은 그 자태에 놀라 입을 떼지도 못 한 것이다.
백 부인이 그녀를 바라보더니 싱긋이 웃으며 앞으로 다가섰다.
"동생 네가 과연 왔구나!"
소앵이 담담히 말했다.
"난 한 말은 꼭 실행하고야 말아요."
백산군도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거야 물론이지. 이화접옥의 비결을 필시 알아냈겠지?"
"그래요. 알아냈어요."
백산군은 크게 기뻐했다.
"고맙군......."
그러나 소앵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나에게 물어볼 생각은 말아요."
"그래? 이런 경우가 있나. 우선 동생이 좀 앉아야지......."
백 부인은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자 은근히 시간을 끌기
위해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소앵도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난 앉지 않겠어요. 돌아가야 하니까요."
"그럼...... 그럼...... 동생, 너는 이미 이화접옥의 비결을 다
적어 놓았겠지?"
"적을 필요가 있겠어요? 이미 다 기억을 했어요."
이번에는 백산군이 나섰다.
"그래, 그래. 동생이야말로 다 기억을 하겠지. 다만......."
백 부인이 그의 말을 이었다.
"다만 우리는 동생의 그러한 재주가 없인, 네가......."
소앵이 매몰찬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당신들은 그런 재주가 필요 없어요."
"그래, 동생이 우리에게 써줄 텐데 그리 급할 것은 없지."
"난 당신들에게 써줄 필요를 느끼지 않아요."
"그럼...... 그럼 동생, 너의 뜻은......"
"당신은 재미있는 물건을 얻는다면 쉽사리 남에게 주겠어요?"
"이거...... 이건......."
백 부인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동생은 언제쯤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줄 생각인가?"
"음, 어쩌면 삼 일? 오 일? 혹은 일 년 아니면 십 년...... 내
가 싫증이 나면 당신들에게 말해 주겠어요."
백산군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며 놀란 눈을 했다. 백 부인은 웃
으며 입을 열었다.
"동생, 농담 말아라. 만약 십 년을 기다리게 되면 애가 타서 죽
을 것이야."
"당신들이 애가 타든 말든 그것은 당신들의 일이에요. 나와는
관계가 없어요."
백 부인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러나...... 그러나 동생은 이미 우리에게 승낙을 했잖
아......."
"난 다만 화무결에게서 이화접옥의 비결을 알아내겠다고 했지
당신들에게 알려 주겠다고 승낙하지는 않았어요."
백산군 부부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넋을 잃고 말을 하지
못 했다.
소앵은 서서히 몸을 돌렸다.
"깊은 산중이라 손님을 초대하지 못 하니 돌아들 가시오."
백 부인은 분노로 호흡이 거칠어졌다.
"동생 멈춰라!"
"당신들은 내가 한 번 뱉은 말을 절대로 변경하지 않는다는 것
을 알 텐데 왜 이리 귀찮게 하지요?"
백 부인은 즉시 웃는 표정으로 안면을 바꾸며 입을 열었다.
"난 그 화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서 그래."
"그가 죽든 살든 모두 나의 일이에요. 당신들과는 이제 상관이
없어요."
"동생, 그를 죽였느냐?"
소앵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내가 언제 그런 비겁한 짓을 했어요? 손이 더럽혀질까 걱정이
에요."
그녀는 말을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절대로 그를 놓아주지는 않을 테니까. 그
는 평생 다시 사람을 볼 생각을 아니할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걸음을 옮겼다.
백산군 부부는 서로 마주 볼 뿐 그녀를 막지 못 했다.
한참 후에야 철평고가 탄식했다.
"저분 아가씨는 너무 건방진데요."
강옥랑이 쓴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도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도 드물지."
"간 뒤에 그런 말을 하면 뭘해요."
강옥랑은 철평고의 말을 마치 듣지 못 한 척 했다.
"저 계집애는 아무런 무공도 없다면서 왜 선배들이 붙잡지도 않
았지요?"
백산군이 탄식을 하더니 말했다.
"늙은이가 그녀를 보배처럼 생각하고 있어. 만약 우리가 그녀를
다치면 늙은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우리 부부는 아직 그렇게
되길 원하지는 않으니 그녀를 놓아줄 수밖에."
백 부인이 말을 받았다.
"더군다나 그녀는 보기엔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아도 꾀가 많아
서 우리 몇 사람으로는 그녀를 제압하기 힘들지도 몰라."
강옥랑은 다만 엷은 미소를 보일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백산군은 그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눈에서 돌연 빛을 냈다.
"네가 순복하지 못 하겠다는 것이냐?"
"분명히 순복하지 못 해요."
"네가 정말 가서 한 번 시험을 해보겠다는 말이지?"
강옥랑은 철평고를 힐끗 바라본 뒤 그저 잠잠하고 있었다.
백산군은 그의 어깨를 쳤다.
"자식, 좋아. 나는 벌써부터 네가 여인을 다루는 수법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가서 시험을 해보아라. 그 계집애도 춘심이 움
직일 때이니까 어쩌면 너에게 말을 해줄지도 모르지."
강옥랑이 철평고를 바라보며 웃었다.
"제가 여자에 대해 무슨 재주가 있겠어요. 선배는 농담도 잘하
십니다."
백 부인은 이미 철평고의 목을 안으면서 애교를 떨었다. 그의
말 뜻을 알았기 때문이다.
"동생, 그에게 가라고 해요. 내가 보증을 하겠는데 그는 절대로
너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거야. 그가 마음이 변한다면 내가
죽여버릴 테니까."
강옥랑은 큰걸음으로 산골짜기를 향해 걸어갔다. 꽃향기가 얼굴
을 스쳤다.
여자에 대해서라면 그는 정말로 보통은 넘었다. 더군다나 이런
매혹적이고 젊은 아가씨에 대해서는 더욱 자신이 있었다.
그가 만만하게 생각한 것은 그녀가 조금의 무술도 하지 못 한다
는 점이었다. 그녀가 설사 무술을 한다 해도 자신의 임기응변에
자신이 있었다.
더군다나 급할 때에는 그녀를 정복할 생각이었다.
여자는 십중 팔구 야생마다. 올라타기만 하면 그 사람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환하게 알고 있었다.
이럴 즈음 한 사람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누구요? 무엇을 믿고 여기에 들어 오는 것이오?"
소앵을 발견한 그는 즉시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여자의
동정심을 이용하려고 했다.
소앵이 다시 말했다.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하러 온 것이오?"
강옥랑은 고개를 숙이면서 서서히 말했다.
"제가 함부로 들어온 것을 용서하시오......."
"무례한 줄을 알고 있으면 지금이라도 빨리 물러 가시오!"
강옥랑은 이미 준비해 두었던 말로 소녀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그녀는 마치 어름 벽처럼 차갑기만 할 뿐 더 이상 말을 붙
이지 못 하게 했다.
소앵은 싸늘하게 돌아섰다. 강옥랑은 눈동자를 굴리면서 돌연
큰 소리로 불렀다.
"아가씨 잠깐. 아가씨는 내 목숨을 구해야 하오."
그의 계산은 적중했다. 소앵은 과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여
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당신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강옥랑이 다시 고개를 숙이며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난 몸에 큰 병을 앓고 있으므로 아가씨의 도움을 바라
오......."
"병이 있으면 의사를 찾아 갈 것이지 여기에 와서 무엇을 하려
는 것이오?"
"만약 의사가 고칠 수 있다면 내가 왜 아가씨를 괴롭히겠소. 세
상에는 의사가 많지만 아가씨 같은 재주는 없소. 제가...... 아,
그렇지 않으면 제가 멀리서 아가씨를 괴롭히려고 찾아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오."
소앵의 안색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입에서는 여전히 싸
늘한 말이 새어나왔다.
"내가 병을 치료할 줄 아는지 어떻게 알았소? 누가 말했소?"
"그건...... 그건 나의 한 선배께서 내가 아픈 것을 보다못해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쓴웃음을 띠워가며 말을 계속했다.
"선배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소. 그러나 아가
씨 앞에서 어찌 거짓말을 하겠소. 저를 여기에 데리고 온 사람은
바로 백산군 노선배와 그의 부인이오."
강옥랑은 정말 거짓말의 기술을 잘 알고 있었다. 거짓말을 할
때에는 약간의 진실된 말도 섞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면 믿을 사람이 없다. 그러나 거짓
말 속에 반쯤 진실을 섞어 넣으면 그 효과가 몇 배 더 커지는 것
이다.
소앵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두 부부는 정말로 나를 괴롭히는군."
강옥랑은 그녀의 말을 듣자 성공할 가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급히 신음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나의 병은 다른 사람은 고치지를 못 하니 아가씨께서 만약에
오늘...... 나를 가엾게 여기지 않으면 난 기필코 죽고 말 것이
오."
소앵은 밝은 눈으로 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본 후 가볍게 탄식을
토해냈다.
"당신이 정말......."
그녀는 이렇게 말을 하며 돌아섰다.
강옥랑은 큰소리로 외쳤다.
"아가씨 가시면 안 되오. 나를 꼭 살려주셔야 하오."
"바보, 나를 따라오지는 못 하나?"
"이렇게 말하며 웃자 강옥랑은 온 몸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그
바보 소리가 강옥랑에게는 어쩐지 달콤한 느낌을 주었다.
소앵은 강옥랑을 화무결이 있던 방으로 데려갔다. 화무결은 어
디로 갔는지 보이지를 않았다.
강옥랑은 그녀의 가냘픈 허리를 보자 그녀를 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여자는 너무 급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가 모를 리가 없었다.
소앵이 말했다.
"말해 보아요. 무슨 병인지? 어디가 아파요?"
강옥랑은 아무 병도 없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크게 당황했다.
"제가...... 배가 아주 아프군요."
소앵은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배가 아픈 것도 병인가요?"
강옥랑은 그녀가 웃고 있는 것을 보자 자신이 생겼다.
"배가 아플 뿐만 아니라 온 몸이 아프오."
"심하게 아픈가요?"
"죽을 지경이오."
소앵이 돌연 탄식을 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서 병의 징조를 볼 수가 없는데요."
강옥랑은 약간 놀랐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얼굴이
붉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강옥랑은 즉각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아가씨 앞에서 어찌 함부로 거짓말을 할 수 있겠소. 다만
아가씨 같은 아름다운 사람을 보자 모든 아픔을 잊은 것이오."
소앵은 웃으면서 말했다.
"나를 보기만 해도 잊을 수 있는 정도의 아픔이라면 무슨 의사
가 필요하겠어요?"
"지금은 진통이 좀 가라앉았지만 그러나...... 그러나......."
그의 내공은 깊었다. 몰래 운공을 하자 곧 이마에 콩알만한 땀
방울이 흘러내렸다.
소앵이 그의 땀방울을 보자 곧 초조한 빛을 나타냈다.
"그렇게 아프면 빨리 눕지 않고 뭘 하는 거예요?"
강옥랑은 마음 속으로는 기뻤으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나는......."
"누워있을 힘도 없단 말이에요?"
강옥랑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음......."
"내 환자들이 모두 당신과 같다면 난 정말 지치겠어요."
그녀가 강옥랑을 부축하자 그는 전신을 그녀의 몸으로 기대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감사하오."
그러나 소앵은 화를 내지 않았다. 강옥랑은 더욱 용기를 얻어
두손으로 그녀를 안으려 했다. 그러나 소앵은 몸을 돌려 피하며
말했다.
"얌전하게 침대에 눕지 않으면 난 가겠어요."
"네, 네, 말을 듣지요."
소앵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말을 들어야 좋은 아이지. 누나가 좋은 것을 주지."
그녀의 달래는 듯한 목소리에 강옥랑은 배를 안으며 말했다.
"나 아파...... 더욱 아파요. 빨리...... 빨리 와 봐요."
소앵은 과연 다시 걸어와서 말했다.
"어디가 아파요?"
강옥랑은 거침없이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배를 만지게 했다.
"여기...... 바로 여기요."
소앵은 연약한 손으로 그의 배를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이제 좀 괜찮아요?"
강옥랑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아! 좋아졌어요...... 그러나 멈추지 말아요. 멈추면 아파요."
소앵은 정말 그의 말대로 멈추지 않고 계속 쓰다듬었다.
강옥랑은 내심 웃으면서 생각했다.
(남들은 이 아가씨가 매우 무섭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사춘기
에 접어든 계집애일 뿐이야. 묘책을 잘 쓰면 내 것이 될 수도 있
겠다.)
돌연 향기가 풍겨오며 소앵의 손이 그의 입가로 다가왔다. 그녀
의 손에는 향기로운 알약이 쥐어져 있었다.
"이것은 내가 손수 만든 진통제로 통증을 멈출 뿐만 아니라 보
약이 될 수도 있어요. 먹으면 배가 아프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강옥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난 안 먹겠소!"
"안 먹다니?"
"내가 먹으면 배가 아프지 않을 거고, 나의 배가 아프지 않으면
아가씨는 나를...... 쓸어 주지도 않을 테니."
"흥...... 좋아요. 당신이 이 약을 먹어도 내가 계속 쓸어 드리
지요."
소앵이 이렇게 말하자 강옥랑은 혼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쓰지 않나요?"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치 사탕 같아요. 자 얌전히 입을 벌
려요. 먹여 드릴테니까."
강옥랑은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향긋한 알약이 그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이때 한 사람이 멀리서 큰소리로 외쳤다.
"술은? 술이 없구나. 소 계집애야, 빨리 술을 가져와라."
소앵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멈추었다.
"얌전히 여기에 누워있어요. 금방 갔다 올 테니."
그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급히 달려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
리며 말했다.
"당신이 만약에 함부로 돌아다니면 날 다시는 보지 못 하게 될
것이오."
멀리서 다시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 계집애야. 귀가 먹었느냐? 빨리 오지 못 해."
소앵의 애교있는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왔어요. 내가 빨리 술을 가져다 드리겠어요."
강옥랑은 생각했다.
(정말 재미있군. 저 사람은 그녀를 계집애라고 부르면서도 그녀
를 순복하게 하다니 무슨 재주로 말을 듣게 했을까?)
그는 정말 몰래 나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경거망동해서 도리어
일을 망치게 될까 두려워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이 꽃 같은 미인을 품에 안을 생각을 했다. 천
하의 무림 사람들이 고대하던 그 이화접옥의 비결도 자신은 곧 알
게 될 것이다.
그는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백산군아, 내가 그 비결을 알게 되면 과연 너에게 말을 해 줄
것 같으냐? 내가 정말 너에게 말을 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면 너는
천하에 제일 바보다."
이때 한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누가 천하에서 제일 바보라는 것이지요?"
강옥랑은 깜짝 놀랐지만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아가씨를 계집애라고 부른 사람이 천하 제일의 바보라는 말이
지요."
소앵은 웃으며 말했다.
"그는 다만 늙은 주정꾼이에요. 우리는 상관할 필요가 없어요."
강옥랑은 늙은이라는 말을 듣자 안심이 됐고, '우리'라는 소리
를 듣자 크게 기뻤다.
"네, 네, 우리 그것은 더 이상 상관하지 말아요."
"이젠 배가 아프지 않나요?"
강옥랑은 즉각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파...... 죽을 지경이오. 좀 쓸어 주시오."
소앵은 웃으면서 다시 그의 배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강옥랑
은 온 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 얼마 후 소앵의 목소리가 어
렴풋이 들려왔다.
"마음 속으로는 내가 멍청이라고 생각할 테지?"
강옥랑은 놀라면서 급히 정신을 차렸다.
"내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너는 내 나이가 너무 젊고 남자도 모르기 때문에 필시 남자에
게 잘 속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또 너는 묘책으로 그 이화접옥
의 비결을 알아내려고 했지?"
강옥랑은 크게 놀랐다. 그러나 이제 와서 실토할 수도 없는 일
이 아닌가!
"그건...... 그런 말이 어디 있소. 아가씨는...... 너
무......."
"너는 내가 무술을 하지 못 하는 것을 알고 더욱 용기를 가졌겠
지?"
강옥랑은 크게 놀라 일어나려고 했으나 온 몸에 힘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가씨 오해를 마시오. 난 절대로 그런 뜻이 없었소."
"너는 나를 정복해서 꼼짝 못 하게 할 생각이었어."
강옥랑은 땀방울을 주루루 흘렸다.
"그런 말 마시오. 내가 정말 그랬다면 죽을 것이오."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너를 살려 둘 것 같으냐?"
강옥랑은 또 한번 크게 놀랐다.
"나...... 나...... 아가씨...... 아이구!"
소앵의 손은 여전히 그의 배를 주무르고 있었다. 이때 돌연 그
녀가 힘을 주어 누르자 강옥랑은 큰소리를 지르며 땀을 흘렸다.
"날더러 배를 주물러 달라고 했으니 내가 배를 주물러 주지. 내
가 왜 네 말대로 해주는지 아느냐?"
강옥랑은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저...... 저는 모릅니다. 아가씨 이젠 주무르지 마시오."
소앵이 크게 웃었다.
"지금에야 너는 아픈 것을 느끼고 멈추라는 것이다. 그러나 배
가 아픈데 그냥 놓아둘 수 있겠어?"
"나...... 난 병이 없소...... 아무런 병도 없소!"
"아프지 않다면 왜 나를 속였지?"
그녀가 손에 다시 힘을 주어 누르자 강옥랑은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난 병이 있소. 병이......."
소앵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왔다.
"맞았어. 너는 병이 있을 뿐더러 중병이지. 이후로는 한 장의
종이가 너의 손에 떨어져도 너는 아픈 것을 느낄 것이야."
강옥랑이 크게 놀라서 말했다.
"부...... 부탁이오. 아가씨, 제발 나를 살려 주......."
소앵의 손은 여전히 그의 배를 가볍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러
나 강옥랑은 마치 배를 잡아 쥐어 뜯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골격이 부서질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소앵이 갑자기 깊은 탄식을 했다.
"이젠 나도 구할 수가 없어. 네가 방금 먹은 약은 진통약이 아
니고 백병백통최생환(百丙百痛催生丸)이야."
"그게 무슨 약이오?"
그는 이런 약 이름을 일찌기 들어본 적이 없었다.
철장(鐵帳) 속의 소어아
소앵은 웃으며 말했다.
"병이 있는 사람이 이 약을 먹으면 병세가 열 배로 악화되고,
병이 없는 사람이 이 약을 먹으면 즉각 백 가지 병이 생겨서 죽도
록 아프지......."
"아가씨...... 나와 아가씨는 아무 원한이 없는데 왜 나를 해치
려는 것이오."
"네가 아프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는 네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너에게 이 약을 먹였지. 만약 네가 정말 병
이 생기게 되면 거짓말을 한 것이...... 그리고 너의 병이 너무
늦추어질까봐 너의 배를 주물러 약 효과가 빨리 발생하도록 도와
주는 거야."
그녀는 탄식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보아라! 내가 이토록 좋게 대하는 데 너는 감사도 하지 않다
니!"
강옥랑은 한편 놀랐고 한편으로는 매우 아팠다. 이마에서는 땀
방울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목소리도 떨렸다.
"소 아가씨...... 난...... 소인은 당신의 무서움을 이제야 알
겠소. 제발 백산군 부부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용서해 주시오."
"아 그렇군. 난 네가 백산군 부처의 친구라는 것을 잊었군."
"아...... 아가씨 절대로 잊어선 아니 되오!"
"그렇지. 그들이 네가 여기서 죽는 꼴을 보지는 못 하겠지. 나
는 너를 구해야 되지...... 그러나 이것은 독약이 아니라 해독약
이 없어. 어떻게 하지?"
그녀는 농담을 하는 것인지 진실을 이야기 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제발 부탁이오. 아가씨, 아가씨는 필시 방법이 있을 것이오."
소앵이 잠시 생각해 보더니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있다. 내가 방법을 생각해냈어."
강옥랑은 크게 기뻤다.
"무슨 방법이오?"
"너의 배를 갈라서 약을 꺼낼 수밖에 없지."
강옥랑은 너무나 기가 막혀 벌린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배를 해부한다고요?"
소앵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안심해. 살살 할 테니까. 그렇게 아프지는 않을 거야."
강옥랑은 일찌기 이러한 궁지에 몰린 적이 없었다.
"배를 해부하면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죽을 것이오."
"너는 과연 영리하군."
그녀는 한바탕 웃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방법이지. 손이 아프
면 손을 자르고 발이 아프면 발을, 머리가 아프면 머리를, 배가
아프면 배를 가르지. 그러면 반드시 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
야."
그녀는 일어서더니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칼이...... 어디 있지......."
강옥랑이 너무 놀라 소리쳤다.
"아가씨...... 아가씨, 제발......."
"왜 병을 고칠 필요가 없는가!"
"필요 없소. 필요 없어요."
"필요 없다면 하는 수 없지. 네가 원한 것이니 나를 원망 말아
라!"
"네, 네, 알았어요."
"이젠 누가 천하에서 제일 바보인가 알겠지?"
강옥랑은 쓴웃음을 보였다.
"나요. 내가 천하에서 제일가는 바보요......."
그는 분을 참지 못 하는 데다 겁이 나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병신 같은 놈, 대장부가 울어? 보기 보다는 약하군."
그녀의 손이 의자에서 가볍게 움직였다.
침대가 튕겨지며 강옥랑이 침대 뒤의 구멍으로 집어 던져졌다.
강옥랑은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동굴 속에 빠져버렸다.
소앵의 입가에는 다시 미소가 번졌다.
"하나는 울고 하나는 웃으니 두 사람은 정말 천생의 한쌍이구
나. 같이 잘 지내라......."
침대가 다시 내려가며 구멍이 사라졌다.
이때 멀리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혼자서 술을 마시면 재미가 없는데 빨리 오지 않고 무엇을 하
지!"
소앵은 그 소리를 듣자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를 보면 난 힘이 빠져......."
집 뒤로는 꽃이 만발해 언덕을 뒤덮고 있었다. 그 언덕 밑으로
는 하나의 산굴이 있었고 그 속은 대낮 같이 밝게 불이 켜져 있었
다. 그러나 그곳은 굴이라고 하기 보다는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
이라고 보는 게 더 옳다. 그곳은 굴이라고는 하나 보통 집의 규방
보다 더욱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산굴에는 한 사람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맨발이었다. 몸에는 약간 헐렁한 옷을 입고 있어
서 매우 우스운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동굴 속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소리를 질렀다.
"소씨 계집애야, 이리 빨리 오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
난......."
소앵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가까이에서 들렸다.
"지금 왔지 않아요? 당신 같이 성질이 급한 사람은 평생 동안
다시 볼 수 없을 거예요."
그 사람은 상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내 성미가 급하다고? 내 천성의 성질이 원래 이러니 보기 싫으
면 보지 말아라!"
소앵이 고개를 숙였다.
그 사람은 돌연 웃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만약 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찌 너를 불렀겠어. 하루를 보
지 않으면 마치 삼 년을 못 본 것 같다는 말이 있지만 난 잠시라
도 너를 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
소앵은 참을 수 없었던지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당신에게 애가 타서 죽어버릴 지경이에요."
"죽으면 안 돼. 네가 죽으면 누가 나와 술을 마시지?"
그는 크게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
다.
그의 얼굴에는 긴 칼자국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흉악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그의 눈은 크고 밝았으며 코도 우뚝 솟아
있었다. 얇은 입술과 그 웃음.......
그는 사람의 이목을 잡아 끄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 귀찮게
굴어도 결코 밉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길래
모두가 두려워하는 소앵에게 이토록 큰소리를 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소어아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소앵은 소어아가 몸을 돌리자 눈에서 빛을 내며 부드럽게 웃음
을 보냈다.
"날더러 술을 따르라 하면서 왜 술잔을 주지 않는 거예요?"
소어아는 눈을 깜박이면서 말했다.
"나와 같이 술을 마시겠다면서 너는 왜 들어오지를 않느냐?"
소앵은 고개를 저었다.
"난 밖에서 마시면 되지 않겠어요?"
"어찌 그것이 같을 수가 있어? 네가 내 옆에 앉아 나와 이야기
를 해야만 내가 술을 마실 수 있어. 방금 말을 했잖아. 나는 너를
매우 생각하고 있다고."
소앵이 눈동자를 굴리며 얼굴을 붉혔다.
"내가 밖에 있어도 나를 볼 수가 있잖아요."
"그러나 난 네가 들어 오는 것이 더 좋다."
"난 들어가지 않는 것이 더 좋아요."
소어아는 돌연 일어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너 이 계집애야. 누가 술을 같이 마시자고 했느냐? 꺼져 버려
라!"
소앵은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칭찬을 늘어 놓아도 난 들어가지 않을 것이고,
나를 욕해도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내가 너를 잡아 먹을까봐 걱정 하느냐? 나는 이대취도 아니란
말이다."
"당신이 사람을 먹지 않는 것은 알아요. 그러나 내가 문을 열면
당신이 달려나오겠지요. 응?"
소어아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 뱃속의 회충도 아닌데 어찌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아느
냐?"
소앵은 다만 가볍게 웃을 뿐 말을 하지 않았다.
소어아는 안에서 몇 바퀴를 돈 뒤 돌연 앞으로 와서 멈추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난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 그리고 나에게 잘 대하는
것도 알고. 내가 욕해도 화를 내지 않으면서 왜 나를 여기에 가두
어 놓는지 모르겠어."
소앵의 입에서는 탄식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당신은 아직도 나의 마음을 몰라요?"
"듣고 싶군."
"당신은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또 성질이 급해서 만약
가둬 두지 않았으면 벌써 달아났을 거예요. 그러나 당신은 상처가
아직 낫지를 않았기 때문에 돌아다니기엔 위험해요."
"이제 보니 너는 나에게 좋은 마음을 가졌었구나!"
소앵은 웃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날뛰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너의 그 좋은 뜻을 난 받아 들이지 않아. 내가 살든 죽
든 너와는 관련이 없어. 네가 나를 구한다고 해서 나는 너에게 감
사하지 않아. 네가 좋아서 한 일이니 너에게 감격해야 할 필요
도......."
"나...... 난 감격을 바라지는 않았어요."
소어아는 다시 일곱 여덟 바퀴를 돈 후 돌연 웃으면서 물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왜 나를 구했는지를 모르겠
어......."
소앵은 기억을 더듬는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
었다.
"그날 마침 내가 천외천(天外天)에 갔었는데......."
그녀가 이 한마디를 하자 소어아는 날뛰면서 소리쳤다.
"무슨 '천외천'이야. 거기는 오로지 쥐구멍이 있었을 뿐이야."
소앵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좋아요. 쥐구멍이라도 좋아요. 화내지 말아요."
"내가 왜 화를 내지 못 해. 지금도 나는 쥐라는 소리만 들으면
골치가 아파."
"그러나 그 말은 당신이 한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에요."
"남이 말을 해도 골치가 아프지만 내 스스로가 말을 하면 더욱
골이 쑤시고 아파!"
소앵은 웃음을 참으면서 말했다.
"말을 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억지로 말을 하라는 사람도 없는
데요."
"말을 하지 않으면 입이 가렵구나......."
여기까지 말을 한 그는 참지 못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도
너무 했다는 것을 생각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감시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이야기를 계속 하지 않지?"
"그날 내가 마침 천(天)......."
그녀는 돌연 '천외천'을 말하지도 못 하고 '쥐'라는 소리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자 웃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날 내가 거기에 간 것은 약초를 가지러 가기 위해서였는데
당신이 마침 거기에 있었어요."
"내가 거기에 있게 된 것은 나의 불행이고, 네가 나를 만난 것
은 너의 불행이다."
"그러나 그날 내가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당신에게는 조금의
불행한 빛이 없었어요. 당신이 입고 있던 옷은 비록 남루했지만
그 표정만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멋있었어요."
소어아는 앉아서 다리를 쳐들며 말했다.
"그리고 비단 표정이 멋있을 뿐만 아니라 못 생기지도 않았지?"
"그래요. 당신은 못 생기지도 않았어요. 더우기 당신의
눈......."
소어아는 또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나의 눈썹, 나의 코, 그리고 나의 입도 못 생기지는 않았지?"
소앵은 즐거운 듯 웃었다.
"당신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멋있어요...... 이제 됐어요?"
소어아는 술을 들이키며 말했다.
"음...... 그럼 그렇지......."
소앵은 허리를 펴지 못 할 정도로 웃어제꼈다.
"꼭 남에게 억지를 써가며 말을 하도록 하는군요. 당신은......
당신 같은 사람은 보지 못 했어요."
"나 같은 사람은 물론 쉽게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나도 본래 쉽게 놀라는 사람이 아닌데, 그러나 당신을 본 후
난........"
"넌 나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져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지.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말이야. 난 너의 입에다 계란을 넣고 싶었어!"
소앵이 '푸' 하고 웃었다.
"그건 내가 마음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에
요."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냐?"
"첫째, 이상한 것은 당신이 어떻게...... 거기를 찾았는
지......."
소어아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네가 알 필요는 없어. 내가 어떻게 거기를 찾았든
간에 너와는 상관이 없으니까."
"그리고 더 이상 했던 것은 당신의 태도였어요. 조금도 두려워
하는 기색이 없이 얼마나 당당해 보였던지......."
소어아의 목소리가 차츰 싸늘해졌다.
"그곳이 뭐가 두렵다는 것이냐? 거기보다 더욱 무서운 곳도 가
봤어."
"그러면 당신은...... 위무아보다도 더 무서운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소어아는 돌연 말을 하지 못 했다. 술잔을 든 손이 약간 떨렸고
잔 속의 술이 넘칠 것 같았다.
소앵은 다시 탄식을 했다.
"난 일곱 여덟 살 때부터 이삼 일 간격으로 그를 만났어요. 그
러나 지금까지도 나는 그를 만나면 웬지 겁이 나요."
소어아는 들었던 잔을 상에다 던지며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이 두렵지는 않았어. 다만 토하고 싶은 느낌을 받
았지. 그 얼굴, 그 모습은 사람 같지도 않아...... 그의 모습은
마치 하느님이 한 마리의 쥐와 한 마리의 여우, 한 마리의 늑대를
반죽해서 다시 독약과 썩은 물에 섞어 만든 귀신 같았어."
"당신의 입은 너무 하군요. 그러나 당신은 그의 모습을 아주 묘
하게 표현했어요. 당신이 무공을 배우지 않고 문학(文學)을 배웠
더라면 굉장했을 거예요."
"물론이지!"
"어떻든 당신이 위무아를 만날 때는 굉장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를 감히 올려다 보지도 못 할 뿐더러 아무말도 못 하죠."
소어아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돌연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말이지만 난 너희들을 처음 보았을 때 마음 속으로 매우
우스웠지. 너희 두 사람이 같이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비둘기 옆
에 개똥을 둔 것처럼 기묘한 장면이었어."
소앵은 고개를 떨구고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비록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나...... 나에 대해서
만은 매우 친절했어요. 십 년 동안 내 뜻을 따르지 않은 적이 없
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모두 들어 주었지요."
"흥, 못난이가 미인에게 친절한 것은 당연한 이치야."
소앵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당신이 들어와 눈을 크게 뜨고 소리치는 것을 보자 몹시
놀라버렸어요. 나는 지금까지 그의 안색이 크게 변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나 그는 당신을 보자 눈동자마저 녹색으로
변하는 것 같았어요."
소어아는 고개를 젖히며 광소했다.
"그 동굴에 장치해 놓은 조잡한 것들로 나를 막을 수가 있을 것
같아? 그 물건들은 어린애 장난감으로 밖엔 보이지 않았어."
"당신은 비록 어린애 장난감으로 밖에 보지 않았지만 그 장난감
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아세요?"
소어아는 '탁' 하고 소리가 나게 상을 친 후 소리쳤다.
"진작 그런 줄 알았다면 모두 태워버렸을 거야."
"그는 당신이 열여덟 개의 기관을 통과했다는 것을 알자 두려움
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당신이 소리를 쳐도 여전히 앉아
움직이지를 않았던 것이에요."
"나에게 두려움을 갖고 있었으면서 왜 그 병신들을 보내서 나를
상대하게 했지!"
"자신이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제자들에게 손을 쓰라고 한 것은
당신의 무공과 내력을 알기 위해서였어요. 그는 그 사람들이 분명
히 당신의 상대가 못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요."
소어아는 다시 크게 웃었다.
"너는 내가 그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던 줄 알았느냐? 난 고의로
나의 무공과 내력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지."
"나는 당신이 손을 쓰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이상하다고? 너는 내 속을 알고 있었단 말이냐?"
"난 비록 무술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천하 각문 각파의 무술을
약간씩은 알고 있어요. 그러나 당신의 무술은......."
그녀는 살짝 웃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의 무술은 당신의 생김새보다 더욱 이상했어요. 분명히 무
당파의 '현조획사' 같았는데 자세히 보면 또 아니고, 때때로
는......."
소어아는 소앵의 말을 잘라 자신이 대신했다.
"때때로 네가 보기엔 분명히 '마랄자계' 같지만 분명히 사천의
'궁보계정'인 것 같기도 했고. 그렇지?"
"그래요. 천하 각문 각파의 무술이 모두 다 약간씩 섞여 있었어
요. 그러나 절대로 그들 본문의 무술과 같지는 않았어요."
"나의 무술은 본래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어. 종류가 많아서
복잡은 해도 멋은 있지."
사실 그를 가르친 선생은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합합
아, 음구유, 도교교, 이대취, 두살 등 그들의 무술 자체가 원래
복잡한 것이었다.
그래서 소어아가 곡을 나올 때에는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이미
몇십 가지의 무술을 익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악인곡을 떠난
후에도 만난 사람들에게서 꼭 한두 가지 초식을 익혔다. 게다가
그가 얻은 무림비급은 여러 고수들의 힘을 합하여 창작한 것이었
다.
그의 무술을 화무결과 비한다면 화무결의 무술은 명요리사가 최
상의 원료로 만든 한 그릇의 맛있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소어아의
무술은 복잡한 것이었다. 마치 수십 명의 요리사가 마련한 잔칫상
같았다.
소앵이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위무아는 당신의 무술문로를 결국 알아내지 못 했어요."
"그래서 앉아서 손을 쓰지 않았군."
"그래요."
"제자들이 나에게 맞아 죽는 것을 보기만 하고 말이지?"
"그 사람들은 비록 그의 제자이긴 했지만 입실을 하지 못 한 상
태였고, 그가 좋아하는 제자들도 아니었어요. 더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은 죽든 살든 상관하지도 않아요.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아마 자기 아들의 목을 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예요."
"벌써부터 그 자식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는
짐승보다도 못 한 놈이야."
"당신이 그 몇 명의 사람들을 때려 눕히자 그는 당신을 자리에
앉게 했지요. 그런데 당신은 정말 그 자리에 앉았어요. 아, 당신
은 영리한 사람인데 그가 독술을 감추고 있다는 걸 몰랐어요?"
"나는 내 자신이 영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무슨 묘략을
써도 당하지 않을 것으로 알았지."
"그러나 결국 당신은 당하고야 말았어요."
소어아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네가 무엇을 안다는 거야. 머리를 쓰는 것이든 무술을 하는 것
이든 그는 아직도 멀었어."
"그러나 당신은...... 당신은......."
소어아는 탄식을 했다.
"사실 지혜로는 내가 이길 수도 있었겠지만 힘으로는 내가 질
테지. 난 정말 그 짐승의 무술이 그토록 무서울 줄은 몰랐어."
"들리는 말에 이십 년 전에도 이미 그의 무술은 천하 몇몇 고수
중의 하나였대요. '십이성상'이 강호에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한 사람의 힘 때문이었다고 해요."
소어아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나도 십이성상 중의 몇 사람을 만난 적이 있지만 무술은 그와
비할 바도 아니었지."
"이십 년 전 그는 자신이 천하무적인 줄 알고 있다가 이화궁주
를 만나 크게 패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손을 씻고 여기에 숨었지
요. 그 이십 년을 그는 밤낮으로 무술을 연마했어요. 그의 말로는
이제 이화궁주와 같은 두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해도 그녀들
을 두려워 하지는 않을 거래요."
소어아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큰소리 치는 것이겠지. 이화궁주가 아니라 이화궁주의 제자가
와도 그를 이길 수가 있어."
소앵은 큰 눈을 굴렸다.
"이화궁주는 몇 명의 제자가 있어요?"
"여자는 모르지만 남자는 단 하나가 있지."
소앵이 그를 주시하면서 말했다.
"당신...... 당신은 그와 친구인가요?"
소어아는 길게 탄식을 하며 말했다.
"본래는 그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지금......
지금은 그와 원수가 될 수밖에 없지."
"좋아, 좋아요."
"무엇이 좋다는 말이냐?"
소앵이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어아는 그녀의 속을 몰랐다. 더우기 화무결이 죽어가는 줄은
더욱 몰랐다. 그는 위무아와 싸우던 때를 떠올리며 계속 말을 이
었다.
"나도 그가 계책으로 나를 해치려는 것인줄 알고 있었어. 그러
나 난 그와 무공으로 싸우는 것은 두려웠어도 계책으로 싸우는 것
은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자에 앉아 버렸지."
"그 의자에는 기관이 장치되어 있었어요. 그가 손잡이를 누르면
의자에 앉은 사람은 즉각 칼날이 수없이 박혀있는 구멍으로 빠지
게 되지요. 무술이 아무리 뛰어나 날고 긴다해도 결국은 죽고 말
아요."
"정말 그렇게 무서워?"
"그는 무술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학문에는 능통해
요. 기관을 발동하면 당신을 죽일 수 있으니 굳이 당신과 싸울 필
요가 없었지요."
"자기가 기관을 발동해도 내가 여전히 앉아 있을 줄은 몰랐겠
지?"
"그도 이상히 여겼지만 나도 이상히 여겼어요."
"나는 그 의자가 이상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지.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앉은 것 같이 보였지만 사실은 앉지 않고
있었지."
"당신에게 정말 놀랐어요."
"나는 그를 욕했고, 그 늙은 짐승은 참지 못 하고 뛰어나왔지.
난 사실 그의 무공에 정말 놀랄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그와 맞붙었지요. 그렇게 큰 싸움은 일
찌기 보지를 못 했어요."
소어아는 탄식을 터뜨렸다.
"그 늙은 짐승은 과연 무섭더군. 무술이 높을 뿐만 아니라 수법
도 악독했지. 그리고 선기를 기묘하게 유지했기 때문에 나의 무술
이 그보다 뛰어나다 해도 이기지 못 할 상황이었어."
"그 자신도 설사 무술이 그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결코 자신을 이기지는 못 할 것이라고 말해왔어요."
"그가 약간 손에 사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꽤 오랫동안
버틸 수가 있었지. 그러나 내가 약간만 부주의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
"당신의 무공도 보통이 아니었어요. 그의 부하들 중에는 산 사
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난 결국 그의 손에 죽게 되나 보구나라고 생각했지. 그러나 이
대로는 그냥 죽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지. 결코 그의 손에 죽을 수
는 없다고 말이야."
"그래서 당신이...... 당신이......."
소어아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한 발 한 발 물러서 벽 구석까지 물러섰지."
"그 벽 구석에도 기관이 있었어요. 당신이 근처의 마룻바닥을
밟으면 즉각 칼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었지요."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았어?"
"당신이 알고 있었다구요? 알면서 왜 그곳으로 갔죠?"
"나는 이미 그가 나를 구석으로 유인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어. 그래서 일부러 뒤로 물러서 기관을 밟아 칼을 맞은 거
야."
소앵은 할 말을 잊었다. 잠시 후 그녀는 다그쳐 물었다.
"왜? 당신은 왜 고의로 그렇게 했죠?"
"그의 손에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 칼에 독이 있는 것을 알고나 있었어요?"
"칼에 독이 있어도 그의 손보다는 낫지."
그는 크게 웃고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계산을 했지. 내가 칼을 맞으면 그가 필시 계속 싸우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러면 다시 도망갈 기회를 만들수도 있게 되는
것이 아니겠어. 그렇지 않고서야 죽을 때까지 싸워야지...... 이
제야 알겠어? 난 진짜로 그에게 당한 것은 아니야!"
소앵은 그를 한동안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묘책과 수단의 기민함과 눈치가 빠른 것은 세상에서 당신을 당
할 사람이 없을 거예요."
소어아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너는 내가 천하에서 가장 영리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색단포천
"그러나 당신은 아직 완전히 안전한 것이 아니에요. 이젠 나의
손에서 빠져나가야 되지 않겠어요?"
소어아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나를 구하지 않아도 나를 구할 사람이 있어."
소앵은 놀라서 말했다.
"누군데요?"
"지금은 몰라도 그러나 때가 되면 나를 구해줄 사람이 있지. 나
의 목숨이 짧을 것 같아?"
"그렇다면 차라리 그때에도 내가 구하지 말 걸 그랬지요?"
"흥."
"내가 조금 더 기다릴 걸 그랬군요. 어느 병신이 와서 당신을
구하는지 구경이나 하면서."
"그래. 나를 구하는 사람은 모두 병신들이지. 너의 말이 맞았
어."
소앵은 한 발을 내어 디디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소어아는 탁자 위에 발을 올리고 유유히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꼭 병신이 나를 구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결코 죽지 않
아. 좋은 사람은 명이 짧고 나쁜 사람은 명이 길다는 것도 몰라?"
"당신......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정말 하는 수 없군
요."
"이렇든 저렇든 너는 나를 구하지 말아야 했어. 지금은 후회하
고 있겠지?"
"후회?...... 나는 어떠한 일을 해도 후회라는 것을 몰라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화제를 돌렸다.
"그날 당신은 독이 묻은 칼에 맞은 후 그만 졸도 하고 말았지
요. 위무아는 당신이 죽은 줄 알고 당신을 쥐에게 먹이려고 했어
요."
소어아는 혀를 날름 내밀면서 말했다.
"쥐에게 먹인다고?"
"음."
소어아는 온 몸이 가려운 것을 느꼈다. 쥐 이야기만 하면 공연
히 온 몸이 가려웠다.
"운이 좋았어, 운이......."
"이제 와서야 자기의 운이 좋았던 것을 알게 됐군요."
"내가 운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쥐가 운이 좋았던 거란 말이
야."
소앵은 그에게 또 한 대 얻어맞은 셈이었다.
"나 같은 놈을 먹고 속이 멀쩡했을 것 같아? 필시 속이 뒤틀려
죽어버렸을 거야."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소앵은 허리를 펴지 못 할 정도로 웃
어버렸다.
소어아가 말했다.
"재미 있는가?"
소앵은 웃음을 멈추고 한동안 소어아를 바라보더니 탄식을 했
다.
"아세요?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웃어본 적이 없어요."
"너는 나날을 매우 슬프게 보냈단 말인가?"
"난...... 난......."
그녀는 돌연 눈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숙였다.
"괴로워 하지 마라.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사실은 너에게 감
사하다는 의미야."
소앵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당신은 비록 입으로는 별 말을 다 해도 사실 마음은 그렇
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말은 좋
게 해도 마음은 무엇보다도 추악하지요."
두 사람 사이엔 문을 사이에 두고 얼마의 침묵이 흘렀다. 소앵
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날 나는 당신을 구할 기회가 없을 줄로 알았어요. 그러나 위
무아는 마침 귀중한 손님이 왔기 때문에 그 사람을 맞이하러 가야
했어요. 남에게 나를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그
자리에 두고 나갔지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너를 빼앗아 갈까 봐서 그러나?"
이 말은 소앵의 마음을 건드렸다. 그러나 그녀는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다시 입을 뗐
다.
"그가 떠난 뒤에야 나는 두 명의 제자를 불러 당신을 여기까지
데려올 수 있었지요. 나는 그들에게 꽃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비
료로 써야 한다고 말했지요."
"두 명의 병신 제자에게는 그 말이 통했겠지만 위무아도 믿었단
말인가?"
"그는 알지 못 할 거예요."
"어?"
"그의 제자들은 모두 그를 호랑이보다도 더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를 봐도 아무말을 하지 못 하지요."
소어아는 허리를 펴면서 말했다.
"너는 나 같이 총명한 사람이 죽는 것이 안타까와 나를 구했다
는 말인가?"
"나도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을 구했는지 몰라요. 혹시......
당신이 위무아를 본 후에도, 독 칼을 맞은 뒤에도 나를 보며 웃었
기 때문에...... 죽기 전에 나를 향해서 웃는 사람을 어찌 죽게
놓아 둘 수가 있겠어요?"
"내가 웃은 것이 효력이 있었군."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를 향해 웃은 것이 나에게 구원을
청한 계략이었단 말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다 죽어가는 내가 무엇이 좋아서 웃고 있겠어?"
소앵은 순간 입술을 깨물며 분함을 억눌렀다.
"당신...... 당신은 왜 나를 본 순간 정신과 혼이 달아나는 듯
했기 때문에 웃었다고 하지 못 하지요?"
"네가 이미 나를 구했는데 너를 속여서 무얼 하겠어? 더군다나
너의 성난 모습이 웃는 것보다 더욱 아름다운데!"
소앵은 화났던 얼굴을 곧 풀었다. 그녀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다
시 웃으면서 말했다.
"알고 보니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남이 상처를 받는다
해도 별 악의 없는 거짓말 조차 하지 않는군요?"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모르는 일이 하나 있는데요."
"네가 기왕 날더러 나쁜 놈이라 욕을 했으니 무슨 일이든 다 말
해 주겠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위무아를 찾아갔던 것이지요?"
"벌써 말했잖아...... 내가 위무아를 찾아간 것은 내 친구를 찾
기 위해서라고."
"당신은 어떻게 친구가 그곳에 있는지 알았지요?"
"나의 친구는 길에 기호를 많이 남겨 놓았지. 그 표기는 천외천
으로 갔다고 되어 있었어!"
"어쩌면 그들은 밖에서만 맴돌고 들어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
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 어쩌면 들어갔다가 나와서 표시를 남겨
놓았는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기호는 내가 어려서부터 잘 알
고 있어."
소앵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그러나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석 달 동안 어느 사람도 거기
에 들어 가지는 못 했어요. 다만 당신이...... 당신이 처음으로
들어 갔지요."
소어아는 펄쩍 뛰면서 소리쳤다.
"절대로 그렇지 않을 걸!"
소앵은 그를 바라보며 무거운 소리로 말했다.
"나를 믿어도 좋아요. 나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난 분명이 그 기호들을 보았는데......."
"그 기호가 어찌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보장 하겠어요?"
"그 표기들은 그들 외에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흉내내지를 못
해."
"그렇다면 필시 당신의 친구들이 당신을 속이고 있겠군요."
소어아는 다시 날뛰면서 소리쳤다.
"그들이 나를 속였다고?...... 그들이 왜 나를 속이지?"
"그들은 어쩌면 자기들이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 하자 당신이 앞
장을 서도록 했을지도 모르지요. 또 어쩌면 당신을 죽이려고 했을
런지도 모르고요."
소어아는 의자에 기대어 막막히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중얼
거렸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는 않아, 절대로...... 그들은 어릴 때부터
나를 키웠는데 지금에 와서 왜 나를 해치려 하겠어."
그는 돌연 다시 날뛰며 철장쪽으로 뛰어갔다.
"날 내보내 줘. 날 내보내 달란 말이다. 난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꼭 알아야 겠어."
소앵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지금 나가더라도 다시 무슨 일을 할 생각은 말아요!"
"그것은 나의 일이니 너는 상관할 필요가 없어!"
"당신은 아직도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았어요. 독도 완전히 제
거되지 않았는데 어찌...... 당신은 천하에서 가장 총명한 사람이
라 하면서 그것도 몰라요?"
이때 돌연 한 사람이 음산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너무 다정한데?"
소어아는 깜짝 놀라 물었다.
"누구냐?"
그러나 소행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히려 서서히 몸을 돌리며
말했다.
"여기에는 손님이 많지 않아서 어떤 손님이 와도 나는 환영을
하오."
꽃숲에서 한 사람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다만 애석하게 내가 온 시간이 적당치는 않았소."
소앵이 담담히 웃으면서 말했다.
"꽃숲에서는 손님을 대접 못 하오. 각하께서는 왜 나오지를 않
는 거지요?"
"당신이 나를 보고 싶다면 당신이 이쪽으로 오시오."
"꽃에는 가시가 많고 가시에는 독이 있으니 각하께서는 무슨 일
이 있어도 날 원망마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꽃숲에서 마치 누군가에게 차인 것
처럼 한 사람이 몸을 날리며 나왔다.
그 사람의 얼굴은 삼각형이었고 큰 코에 매우 징그러운 생김새
였다. 그는 소앵에게 인사를 하며 껄껄 웃었다.
"농담을 해서 소 아가씨를 놀라게 한 것을 용서하시오."
소어아는 이 사람이 소앵을 알고 있는 사람이며, 또 그녀에게
농담을 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소앵은 안색을 무겁게 가지며 싸늘하게 말했다.
"무엇하러 왔죠? 당신 스승이 여기에 마음대로 가지 말라고 말
하지 않았어요?"
"저 같은 작은 간으로 어찌 소 아가씨의 집에 들어오겠소. 그러
나 이번에는 스승님이 날더러 가보라고 했소."
"그가 가보라고 다고? 뭐하러?"
"그분 노인께서는 그 죽은 사람을 비료로 사용한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고 오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한 분의 손님도 보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이 말이 나오자 소앵과 소어아는 동시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 했
다.
소앵은 싸늘했던 표정을 즉각 완화시키며 미소를 보였다.
"손님이란 누구지?"
그 사람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저의 작은 간으로 어찌 스승에게 손님의 성함을 물어보겠소?"
"정 그렇다면 내가 그 꽃을 한 번 보여주지."
"볼 필요가 없소."
"왜?"
그 사람은 쥐 같은 눈을 돌리며 소어아를 쳐다보았다.
"비료가 아직도 술을 마시고 있으니 그 꽃은 필시 피어나지 않
았을 것이오. 그렇죠?"
"너는......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 사람은 탄식을 하며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네가 돌아가서 그 꽃이 잘 자라고 있다고 말하면 너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
"저의 작은 간으로 어찌 스승님에게 거짓말을 하겠소."
"그래 어쩌겠다는 건가?"
"아가씨께서 나의 간을 크게 할 수밖에 없소."
"어떻게 해야 너의 간이 커지겠느냐?"
그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소앵을 바라보았다. 그 눈엔 빛
이나고 있었다.
"색단표천이라는 말을 알고 계시는가요?"
소앵은 안색이 약간 변했지만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너의 스승님이 질투할 염려는 없겠느냐?"
"그렇지요. 스승님은 확실히 질투를 잘 하죠. 그 노인께서 아가
씨가 비료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알면...... 흐흥 아가씨
에게 계속 친절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오."
"나를 협박할 필요는 없어. 나는 벌써부터 너를......."
그녀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 한 손으로는 천장을 만졌다.
그 사람은 돌연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는 비료를 풀어놔서 날 죽일 작정인가요...... 흐흐 아
가씨께서 손을 더 이상 움직이면 난 즉각 돌아갈 것이고 얼마 지
나지 않아 스승님이 여기에 올 것이오."
소앵의 손이 스르르 내려왔다.
"너는 너무 의심이 많구나!"
"조심성도 있고 선견지명도 있지요. 아가씨가 절대 나를 좋아하
지 않는 것도 알고 있소. 그러나 오늘 같은 기회를 놓치면 언제
재미를 보겠소."
"그러나 여기는...... 적당한 장소가 못 돼. 집으로 들어가지."
그 사람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저는 벌써부터 아가씨의 방에 기관이 많
다는 것을 들었소. 만약 아가씨를 따라 들어 갔다간 나의 작은 무
술이 끝나고 말 것이오."
소앵은 계속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너...... 너는...... 여기서......."
그녀는 웃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 사람은 뒤로 몇 걸음을 물러선 뒤 빠르게 말했다.
"오지 마시오."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왜 접근하지 못 하게 하는 것이지?"
"물론 아가씨가 필요하지요. 그러나 아가씨는 우선 옷을 모두
벗고 이리로 오시오."
"왜...... 무엇 때문에 옷을 벗어야 하지?"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사람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벌써부터 아가씨의 무서움을 알고 있소."
"내가 무술을 못 하는 것을 모르느냐?"
"아가씨는 비록 무술은 못 해도 꾀가 많아서 내가 어떻게 할 수
가 없소. 다만......."
그는 웃으면서 계속 말했다.
"아가씨가 옷을 다 벗으면 안심을 할 수 있겠소. 전라의 몸으로
는 아무 짓도 못 할 테니까요."
소어아는 매우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 사람은 여우보다도 더 간
사하고 독사보다도 더 간교했다.
소앵이 웃으면서 한쌍의 부드러운 손으로 옷섶을 헤쳤다.
소어아는 보다 못 해서 큰소리로 외쳤다. 정말 노기가 충천했
다.
"왜 그를 두려워하는 거지? 그에게 돌아가 이야기 하라고
해...... 위무아인가 뭔가 하는 놈이 지금 오기만 하면 죽여버릴
테니까."
그러나 소앵은 웃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보니 당신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셨군요. 그렇지만
내가 어찌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겠어요?"
소어아는 노한 목소리로 계속 소리쳤다.
"난 두렵지 않아. 위무아를 이기지는 못 한다 해도 달아나는 것
은 문제가 없어...... 이 자식이 돌아 가기만 한다면 난 곧 너를
데리고 달아나겠어."
소앵의 입에서 탄식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우리는 달아나지 못 해요."
그 사람이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
"역시 아가씨가 영리하군요. 아가씨만 얌전히 군다면 난 절대로
말을 하지 않겠소."
그는 소앵이 한 알 한 알씩 단추를 열 때마나 군침을 삼켰다.
소어아의 눈에서는 불이 날 지경이었다.
"정말 죽겠군."
소앵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어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절대로 죽지 않을 거예요. 난 절대로......."
이때 돌연 '싹' 하고 가늘고도 맹렬한 바람소리가 일었다. 그
사람은 순간 놀라 급히 몸을 돌렸으나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한동안 넋을 잃은 듯 서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중얼거
렸다.
"내가 귀신을 봤나......?"
그러나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는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뒤따라 날카로운 대나무가 날아와 그를 뚫고 땅바닥 깊숙히 박
혔다. 피와 살이 엉겨 튀면서 그는 절명을 하고 말았다.
소어아 같은 눈으로도 그 사람이 어떻게 쓰러졌는지를 볼 수 없
었다. 그를 죽인 사람의 수단의 신속함은 정말 놀라울 뿐이었다.
소어아는 다시 그 사람의 가슴에 박힌 대나무를 보았다. 흙 속
으로 한 자 깊이나 박혀 들어간 것이 내력도 대단히 놀라와 보였
다.
"어느...... 어느 선배께서 저를 구하셨는지 만나서 감사드리고
싶군요."
그러나 바람에 꽃잎이 스치는 소리만 들릴 뿐 사방은 조용했다.
소앵이 다시 말했다.
"선배께서는 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가요?"
사방은 여전히 조용했다.
이번에는 소어아가 큰소리로 외쳤다.
"왜 나를 놓아주지 않지?"
소앵은 탄식했다.
"나는 일생 동안 이토록 남에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어요.
다만 당신만이......."
그녀는 잠시 숨을 돌리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난 무슨 일을 해도 당신을 위험에 빠지게 할 수는 없어
요."
"내가 죽고 싶다면 네가 어쩔 테냐?"
"난 한 번 결심한 일은 절대로 변경하지 않아요. 당신이 자살을
한다해도 나는 방법을 생각해서 당신을 구할 거예요."
"성질도...... 너는 사람이 아니고 요귀야!"
"여요귀와 악당! 정말 천생연분인 걸요."
그녀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재빨리 몸
을 돌려 달아나버렸다.
소어아는 그녀를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쓴웃음이 입가에서 번
져 나왔다.
"천하에 이런 여인도 보기가 드물지. 그녀가 필시 나를 따를 생
각인 모양인데 이거 야단났군."
멀리서 소앵이 소리쳤다.
"당신은 거기서 기다려요. 내가 그분 선배께서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고 곧 오겠어요."
"그 사람은 무공이 높은데 너...... 조심 해라!"
"안심해요. 당신이 죽기 전엔 나도 죽을 수 없으니까요. 더군다
나 이분 선배께서는 나를 구했으니 나에게 악의는 없을 거예요."
그녀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꽃숲으로 사라졌다.
소어아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을 했다.
(보기엔 누구보다도 연약해 보이지만 그 누구도 그녀 같은 강경
한 성질을 가지지는 못 했을 거야.)
소앵은 과연 강한 여인이었다. 싫어하는 일은 칼이 목을 쑤시고
들어온다 해도 승복하지 않았으나 하고자 하는 일은 무슨 방법으
로든 하고야 말았다. 그녀는 무슨 일을 해도 시원스럽게 해치웠
다.
점차 밤기운이 짙어갔다. 비록 별빛이 반짝거리기는 했지만 음
산한 기분이 들었다.
소앵은 분화불류(分花拂柳)의 수법으로 걸어가면서 소리쳤다.
"이곳은 보기에는 비록 아름답지만 사실은 함정이 많아요. 선배
께서 만약에 다치시면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소앵은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정말 이상하군. 나를 구했으면서도 만나지 않으려는
것은 무엇 때문이지?"
소앵은 집 주위를 한 바퀴 돈 후 다시 산굴로 돌아왔다. 그러나
굴 가까이 온 그녀는 안색이 크게 변했다. 산굴 앞의 철장이 이미
열려 있었고 그 속에 있어야 할 소어아가 보이지를 않았다.
(그는 정말 모든 것을 무릅쓰고 달아났을까? 아니다. 절대 혼자
힘으로 달아나지는 못 할 거야. 이 철문은 절대 혼자서 열 수가
없어. 이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위무아와 그의 수제자 위
마의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와서 소어아를 납치해 갔단 말인
가?)
만약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크게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
이다. 그러나 소앵은 오히려 진정을 할 수가 있었다.
세상엔 위험과 곤란이 닥쳐 왔을 때 더욱 침착하고 조심성이 많
아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소앵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성급하게 행동해도 소용이 없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어아가 만약 정말 위무아에게 납치 당해 갔다면 그럼 방금
나를 구한 고수는 어디로 갔을까? 그렇다면 그는 사람을 구한 뒤
곧 떠났단 말인가? 더군다나 위무아가 정말 왔다면 소어아가 어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잡혀 갔을까? 이런 것으로 보아서 그는
어쩌면 그 고수가 구해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고수는 도대
체 어떤 사람일까? 왜 소어아를 구해 갔으며 또 나를 만나려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을 때 멀리서 욕하는 소리
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소어아의 목소리였다.
소어아는 소앵이 사라지자 술잔을 들었다. 그때 돌연 '탕' 하는
소리가 나면서 하나의 돌이 철장에 적중했다. 불빛이 사방으로 튀
며 철장이 서서히 움직였다.
소어아가 놀라서 눈을 들어보자 어둠 속에서 마의를 입은 유령
같은 그림자가 싸늘한 눈초리로 소어아를 노려보고 서있었다. 그
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소어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를 구하러 왔소?"
"......."
"위무아의 제자를 죽인 사람도 당신이오?"
그 사람은 그제서야 입술을 움직였다.
"음!"
"그렇다면 당신은 왜 소앵이 불렀을 때 나타나지 않았소?"
"우선 너를 내 손에 넣어야 했으니까."
"그건 또 무슨 이유요? 그리고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왜 나를
구하는 것이오?"
그는 대답을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
"네가 나오기 싫다면 다시 철창을 닫아도 무방하겠지?"
"나를 구했다 해도 내가 고마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소?"
"네가 만약에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구하지도 않았
을 것이다."
소어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어디 나를 한번 구해 보시오."
그 사람은 몸을 돌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날 따라와라!"
소어아는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소앵 아가씨 미안하오. 금후에 시간이 있으면 다시 오겠소. 당
신의 마음도 마음으로 받겠소."
그 사람은 마치 나는 것처럼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소어아는
뒤를 따라가며 탄성을 발했다.
"각하의 경공은 정말 훌륭하시군요?"
"그저 보통이지."
"그러나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이지요?"
짝사랑
"도착하면 자연히 알게 될 거야."
소어아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었다.
"당신이 나를 구했다고 해서 내가 무조건 따라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벌써 말을 했지만 난 결코 당신에게 감격하지
않소. 당신이 지금 명확히 말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기서 갈
라져서 갈 수밖에 없소."
그 사람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네가 꽤 어려운 사람이라 하는군. 이제
보니 과연......."
그의 말소리가 갑자기 멈추어졌다.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조심해. 사람이 오는구나! 어쩌면 위무아일지도 모른다."
"어디에 사람이 온단 말이오."
그 사람은 소어아의 손을 가만히 잡아당기며 싸늘하게 말했다.
"바로 저기야!"
소어아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그의 백문을 눌렀
다.
"당신...... 무얼 하는 거요?"
그 사람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좌우로 급히 그의 몇 군데 혈도
를 점해 버렸다.
소어아는 노하여 말했다.
"당신 미쳤소? 나를 구해놓고는 다시 나를 해치려 하는 것은 무
엇 때문이오?"
"그 이유를 모르느냐?"
"내가 안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소?"
그 사람은 싸늘하게 웃으면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소어아를 나
무에다 매달았다.
"너 이 미친 놈아, 짐승 같은 놈아, 나를 어쩔 셈이냐?"
그 사람은 소어아를 돌아보지도 않고 사라졌다.
소어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몸을 흔들었다.
"미친 놈, 미친 놈...... 내가 어쩌다 저런 미친 놈을 만났지."
소앵은 소어아의 외침소리를 듣자 기쁘고도 놀라웠다. 하여튼
간에 소어아가 아직 산에 남아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그녀는 소
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돌연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의 싸늘한 목소리가 그녀
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
한 사람이 말소리와 함께 걸어 나왔다.
그는 양쪽 볼이 튀어나왔고 코가 컸으며 눈에는 오만함과 싸늘
함이 가득차 있었다.
소앵이 놀라움을 금치 못 하고 길게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당신이었군요."
그 마의인이 코웃음을 쳤다.
"흥."
"방금...... 당신이 위십팔을 죽였나요?"
"흥!"
"살인수법이 당신과 비슷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당신일 것
이라고는 생각지 못 했어요."
"내가 올 줄은 짐작도 못 했겠지."
소앵이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정말 생각을 못 했어요. 늙은이와 다툰 지 이미 사 년......
사년 석 달 동안 당신은 소식이 전혀 없었잖아요."
"아직도 나를 기억하는군!"
소앵이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내가 어찌 당신을 잊겠어요. 항상 저에게 친절하셨는데."
그 말을 들은 마의인은 돌연 노하여 소리쳤다.
"누가 너에게 친절했느냐?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친절을 베풀지
는 않았어!"
"당신이 입으로 어떻게 말을 하든 난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어
요. 만약 나 때문이 아니었다면 어찌 늙은이와 싸우고 떠날 수 있
었겠어요."
"너는 내가 늙은이와 질투 때문에 싸운 것으로 알고 있느냐?"
"그렇지 않았단 말예요?"
"나는 다만 그 노인이 보기 싫어서 그랬을 뿐이야. 내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일을 해주었어? 그러나 그는 시종 나를 노예로 취급
했지."
"그것 외에는 정말 다른 원인이 없었나요?"
마의인은 정면으로 아픈 곳을 찔린 듯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너를 위해서야. 그가 반쯤은 흙 속으로 들어갈 나이에
너...... 너를 아끼고 남이 쳐다만 봐도 미친 척하는 꼴이 보기
싫었지."
소앵은 잠시 말을 않고 침묵을 지키다가 서서히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돌아왔어요."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는 것이지, 누가 나를 상관할
수는 없는 일이야."
"하지만 그 늙은이는 당신을 좋아했어요. 당신이 떠나간 뒤에도
그는 자꾸 자기에게 제자는 많지만 그러나 그를 이어갈 사람은 당
신 뿐이라는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하곤 했지요."
"흥! 너는 나의 무술을 그가 가르쳤는지 아느냐? 흥...... 위아
무가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가 맞이한 제자는 많지만 모두 돈을 줄 필요가 없는 하인들이
지. 언제 그가 남에게 가르쳐 주었어? 그는 다만 약간을 그 사람
들에게 보여주었을 뿐이야. 그러면서 그들에게는 목숨을 다하여
충성하기를 바랐지."
"그럼 당신의 무술은......?"
"나의 무술은 몰래 약간씩 배운 것이야. 그가 자기 무술을 익힐
때 몰래 숨어 배운 것이야."
"그는 제자를 대하는 방법이 나빴어요. 그래서 당신을 나무랄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당신은...... 당신은 왜 돌아온 것이지
요?"
"나...... 난 다만 돌아오고 싶었을 뿐이야."
"당신이 돌아온 것은 물론 그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겠지요?"
"흥."
소앵의 눈에 장난기가 어린 표정이 일순간 지나갔다.
"당신이 돌아온 것은 나를 보기 위해서죠?"
마의인은 그녀를 무서운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힘없이 말했다.
"그렇지. 전에는 나도 너를 좋아했어. 그러나 지금......."
소앵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받았다.
"지금은 나를 좋아하지 않나요?"
"지금에야 알았어. 너는 무정무의하여 남이 어떻게 너를 대하든
간에 마음에 두지 않고 감격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
소앵은 약간 섭섭한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일까요?"
"물론 너는 그런 사람이지. 그 늙은이는 남을 구박해도 그러나
너에 대해서는...... 흥! 그가 어떻게 너를 대하는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그는 나에게 친절했어요. 내가 감격하지 않아야 할까요? 그에
게 나쁘게 대해야 하나요? 내가 그의 곁을 떠나야 하나요?"
"너는 영리한 사람이니 물론 떠나지 못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
겠지."
"내가 내 자신을 보호하지 못 할 줄 아세요?"
"그럼 너는 네가 네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줄로 알았느냐? 너
는 남이 정말 너를 두려워하는 줄 아느냐?"
"그러나 내가 사는 이곳은 그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 해요."
"그건 다만 다른 사람들이 너를 그 늙은이의 보배라고 알고 있
기 때문이야. 그래서 너를 괴롭히지 못 할 뿐이야. 만약 늙은이가
너를 돌보아 주지 않았다면 여기는 벌써 황무지가 되어버렸을 테
고 너는 몇 번이나 죽었을지도 몰라."
소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이 틀리지도 않았기 때문이
다.
"알고 보니 당신도 늙은이를 위해서 말을 하는군요?"
"그러나 안심해. 너의 일을 그에게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은 물론 위십팔처럼 무례하지는 않겠죠. 그렇지 않다면 당
신이 그를 죽이지도 않았을 거예요?"
"흥."
"그러나 당신이 그를 죽인 것은 나 때문이에요. 당신은 그가 나
를 괴롭히는 것을 참지 못 했기 때문에 그를 죽인 거예요. 당신은
여전히 나를 생각하고 있었군요. 그렇지요?"
마의인이 돌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소앵은 예쁜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무엇이 그렇게 우습지요?"
마의인이 돌연 웃음을 멈췄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습지만 사실 난 누가 너를
좋아하든 상관이 없어."
"그럼 당신은 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납치했지요?"
"그 원인은 멀지 않아 곧 알게 될 것이다. 우선 그를 만나려면
나를 따라와라!"
소어아는 소앵과 그 마의인이 함께 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 또
두 사람이 잘 아는 사이인 것을 보고서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미친 놈은 대체 누구냐?"
소앵은 소어아가 나무에 매달린 것을 보자 탄식을 하면서 쓴웃
음을 지었다.
"천하에서 가장 영리한 사람이 이꼴이 되다니!"
소어아는 그녀의 장난기 섞인 말에 또 노했다.
"그것은 내가 이 사람이 미친 사람인 줄을 몰랐기 때문이야. 하
는 일도 정말 이상하군."
"그것은 당신이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에
요."
"내가 만약 알고 있다면 너에게 물어 보았겠느냐?"
"이 사람이 바로 위무아의 부하 중에서 가장 무술이 뛰어난 수
제자예요. 강호에서 무상색명 위마의라 하면 떨지 않는 사람이 없
지요. 그러니 당신이 어찌 그에게 당하지 않겠어요."
소어아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람이 위무아의 수제자라니 내가 정말 귀신을 만났구나!"
위마의는 그제서야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소어아는 그에게 이상한 표정을 하면서 말했다.
"할 말은 없어. 그러나 방귀가 뀌고 싶은데 한 번 냄새를 맡아
보겠어?"
소어아의 엉뚱한 말에 소앵은 참을 수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위마의도 거꾸로 매달려 심통이 나 있는 그의 표정을 보자 웃으면
서 소앵에게 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가?"
만약 다른 여자였다면 비록 좋아한다 해도 불쑥 대답 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앵은 고개를 당당하게 들고 소어아를 바라
보며 말했다.
"그래요."
위마의는 싸늘한 웃음을 보이면서 말했다.
"네 눈이 필시 높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고작 이런 병신이야?"
"당신은 그를 바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담이 매우 큰
대영웅이에요."
위마의는 몇 번 웃고 난 뒤 말했다.
"대영웅? 후후 웃겨."
"그렇다면 내가 한 가지 물어보지요. 나무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이토록 침착한 웃음을 지을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겠어
요?"
위마의는 자기에게는 그런 배짱이 없다는 것을 느끼자 질투심이
일었다.
"이 자식에게 홀렸으니 물론 그의 모든 것이 좋게 보이겠지."
"원래가 좋아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내가 어찌 그에게
반했겠어요!"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여자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왜 하고 싶은 말을 못 해요? 이게 무슨 망신스런 일인가요. 마
음 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말을 못 하는 것이야말로 병신이지요.
안 그렇다고 생각해요?"
위마의의 노랗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설사 네가 그를 좋아한다 해도 그가 너를 좋아할지가 문제구
나."
"내가 그를 좋아만 하면 고가 나를 좋아하든 안 하든 그것은 상
관이 없어요. 당신이 관여할 바도 아니고요."
"흥......."
그는 '흥' 하는 콧소리만 냈을 뿐 더 이상 말을 계속하지는 못
했다.
소앵이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나를 좋아하
게 할 방법이 있어요."
여기까지 듣고 있던 소어아는 참을 수가 없어서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 말 한번 잘했어. 난 지금부터 너를 좋아할 것 같다."
이 말을 들은 위마의의 안색이 돌연 변했다. 그의 목소리는 점
점 냉정해졌다.
"그가 죽으면 너는 필시 매우 상심할 테지."
소앵은 약간의 미소를 띠우면서 말했다.
"난 벌써부터 당신이 그런 말로 나를 협박할 줄 알고 있었어요.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바라지요?"
위마의는 그녀의 눈동자와 그녀의 출렁이는 가슴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난...... 난 네가......."
그는 돌연 큰소리를 치면서 자기의 가슴을 일곱 여덟 번을 치고
는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큰소리로 말했다.
"난 다만 네가 알고 있는 비밀을 알고 싶을 뿐이다!"
"백산군을 만난 모양이지요?"
"흥."
"사실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그 비밀보다는 나였군요. 당신은
나를 만날 용기가 없어서 그런 구실을 만들어 가지고 왔군요."
위마의는 몸을 돌려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너...... 너 이 계집년아, 더러운 년아, 네가...... 네
가...... 네가......."
소앵은 안색도 변하지 않고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난 당신이 후회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어요. 왜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없었을까 하고 말예요. 그러나 그건 당신의 일이니 나에게
화풀이 할 필요는 없어요."
위마의는 정말 분통이 터졌다.
"누가 너 같은 더러운 여자를 좋아한데! 너...... 너를......."
그는 돌연 소앵의 따귀를 후려치려 했다. 그녀는 피하지 않고
말했다.
"때리고 싶으면 때려요. 그런 마음이 있으면 때려봐요."
별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위마의는 들었던 손을 스르르 내려버렸다.
"때려요. 왜 못 때리지요?"
위마의의 몸은 벌써부터 떨고 있었다.
사실 그는 그녀를 왈칵 껴안고 입맞추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의 노란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뚝뚝 굴러 떨어졌다.
소어아는 분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그들을 쳐다보고 있던
그는 돌연 소앵의 손에 언제부터인지 반짝이는 반지가 끼어져 있
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거꾸로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별빛이 반사되어 빛나는 반
지를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그 반지에는 은침이 나와 있었다.
소앵은 입으로 무엇인가를 말하면서 그 반지가 끼어져 있는 손
으로 위마의의 목을 안았다.
위마의는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욕정으로 숨을 거칠게 몰아
쉬고 있었고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망연히 허수아비
처럼 서서 소앵이 하는데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순간 소어아가 소리쳤다.
"그녀의 손을 조심해! 그녀의 손에는 독침이 있어!"
소어아의 외침 소리에 위마의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재빨리 그
녀를 밀어냈다.
소어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그렇게 원망스러워 보일 수
가 없었다.
"당신...... 당신 미쳤어요?"
그러나 소어아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왜 날더러 미쳤다는 거야. 나는 멀쩡하다고!"
소앵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말했다.
"그럼 당신은 왜...... 왜......."
"내가 왜 그를 구했는지 이상히 여기는가?"
소앵은 입술을 깨물면서 말을 하지 않았다. 위마의는 놀랍고도
두려웠다. 그러나 왜 소어아가 자기를 구했는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다만 아무말도 하지 못 하고 그 자리에 서있었다. 소어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그를 구한 것은 나도 너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야!"
"당신...... 무엇이라고요?"
이분 형이 너를 죽도록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억지로 기회를 만
들어 그 비밀을 알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상당히 중요한
일에 관한 것일 거야."
"흥."
"너도 어떻게 해서든 그 비밀은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내 생각이 틀림없을 거야."
"바보...... 당신은...... 당신은 나의 의도를 모른단 말이오?"
소어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난 물론 너의 의도를 알지. 그러나 그가 자기가 중독된 것을
알게 되면 너를 놓아줄 것 같으냐?"
"나를 죽이지는 못 할 거예요. 나를 죽이면 비밀을 알 수 없으
니까요."
"바로 그것이야. 그는 어떻든 간에 비밀을 알려고 하고, 너는
비밀을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필시 재미있는 비밀일 테니 나도
들어야 하지 않겠어!"
"그러나 만약에 내가......."
소어아가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내가 비밀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그가 너를 협박해서 말하게
하는 것이야. 그가 너에게 피살 되어 버리면 나도 알지 못 하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내가 금후에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을 것 같아요."
"그건 틀린 말이야. 내가 목숨을 구하게 되면 너는 그 빌미로
나를 묶어 두려고 하겠지. 언제 이야기를 해줄지도 모르는데 내가
한 없이 기다리기만 할 수 있겠어?"
그는 크게 웃고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 말이지만 네가 나를 구한다고 해도 나는 금방 가버릴지도
몰라. 그러면 나는 영원히 비밀을 알지 못 하게 될 테니 한평생
개운치 않을 게 아니야?"
소어아가 이런 말을 하자 위마의까지도 어이가 없어했다. 소앵
은 화가 치밀어서 큰소리로 말했다.
"그 비밀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당신이 옆에서 들었는데 그
가 어찌 당신을 놓아 주겠어요. 당신...... 당신은 천하에서 가장
총명한 사람이라 자처하면서 이런 점도 생각하지 못 했어요?"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 해도 유감은 없어. 내가 그런 귀중
한 비밀을 들은 후라면 죽어도 무방하지."
소앵은 넋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그녀는 쓴웃음을 보이며 지
친듯 말했다.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니. 내가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결코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 했을 거예요."
"난 벌써 말했잖아. 나를 만난 것이 너의 불행이라고 말이야.
빨리 그 비밀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는 나를 죽일지도 몰라."
그는 마치 자기를 죽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 말했다. 그의 말
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위마의가 무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맞았어. 네가 만약 또 무엇을 지껄이면 너를 죽여버리겠다."
소앵은 소어아를 한참 바라보다가 돌연 애교있게 웃으면서 말했
다.
"재미있어. 확실히 재미있어요. 천하에 이런 사람이 있고 이런
일이 있다니...... 나는 절대로 비밀을 이야기 하지 않으려고 했
었는데 그러나 당신을 위해선......."
"나를 위해서라면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단 말이지?"
"이 세상은 본래 재미가 없는 세상인데, 만약 당신까지 죽게 되
면 난 더욱 살 맛이 없을 거예요."
"그래 그래. 나 같은 사람은 절대로 죽어선 안 되지. 그러니까
빨리 말해 봐."
소앵은 위마의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그녀의 안색이 무거워졌
다.
"사실 내가 이화접옥의 비결을 당신에게 말해준다 해도 당신은
어설프게나마 그것을 배우게 되겠지만 그 무공을 파괴하지는 못
할 거예요."
소앵의 말을 들은 소어아는 안색이 크게 변했다.
"네가 지금 무어라고 했지? 이화접옥의 비결?"
"그래요. 이화접옥의 비결은 무학 중 최대의 비밀이지요. 이들
스승과 제자는 그 이화접옥 때문에 이십 년 동안을 불안하게 지냈
어요."
소어아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네가...... 네가 이화접옥의 비밀을 어떻게 알았느냐?"
"그래요. 이화궁의 사람 외에는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
뿐일 거예요."
위마의는 이미 참을 수가 없어 소리쳤다.
"네가 말만 하면 돼. 배우든 말든 나의 사정이니까."
"좋아요. 들어요......."
그녀가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돌연 소어아의 고함소리가 먼저
터져 나왔다.
"하느님이여! 빨리 나를 구해주시오."
그가 계속 소리를 지르자 위마의는 소앵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
나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불 같이 노하여 큰소리로 외쳤
다.
"너 이 자식아 미쳤느냐?"
소어아는 그에게 기묘한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난 미치지 않았어. 단지 이 비밀을 알고 싶지 않을 뿐이야."
이 말에 소앵은 몹시 놀랐다.
위마의는 더욱 날뛰면서 소리쳤다.
"넌 본래 비밀을 들으면 죽어도 유감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는
가!"
"다른 비밀이라면 몰라도 그러나 이화접옥의 비밀은...... 흐흐
나는 세 살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으니 들을 필요가 없지."
위마의가 놀라면서 말했다.
"너...... 너도 알고 있단 말이냐?"
"알고 있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야. 소앵이 알고 있는 것보
다 더 자세히 알고 있지. 너도 알고 싶으냐?"
위마의는 놀랍고도 기뻤다.
"네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 말고도 얘기할 사람이
있으니까!"
"소앵이 말해주는 정도로는 백 살 때까지도 성공할 생각을 마시
오."
소앵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 말은 옳아요."
"그러나 내가 이 비밀을 말하면 삼 일 내로 연마할 수 있을 거
요. 내가 알고 있는 이화접옥을 배우는 것이 빠른 비결이지."
위마의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네가 정말 이야기해 주기만 한다면 난......."
"당신의 감사도 필요 없소. 다만 나를 놓아 주면 돼오."
"물론, 꼭 너를......."
소어아가 말했다.
"들으시오. 내가 말을 하면 곧 따라해 보시오."
"좋아!"
소어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화접옥은 행공이 가장 중요하오. 우선 물구나무를 서서 양다
리를 벌리고 숨을 죽이시오."
위마의는 양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게 무술 무술이야?"
"이것을 알아야 되오. 이화접옥은 오묘한 수법이오. 모든 것을
거꾸로 해야 하니 무술을 연마하는 자세도 자연히 그렇게 해야 되
오."
소어아의 말에는 위엄까지도 깃들어 있었다. 위마의는 머뭇거리
며 말했다.
"그러나......."
소어아는 역시 정색을 하고 그의 말을 가로챘다.
"당신이 배우고 싶지 않다면 하는 수 없지."
위마의는 비록 약간의 의심이 가기도 했지만 이화접옥을 배울
수 있다는 일념에 잠자코 땅에 손을 짚었다.
소앵은 한쪽에서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위마의는 이미 그의 말대로 물구나무를 서서 양다리를 약간 벌
렸다. 그 모양은 정말 재미 있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약간의 웃음도 나타내지 않고 말했다.
"무릎을 약간 더 굽혀요. 고개를 더 들고!"
위마의는 그의 말을 따라 즉각 자세를 고쳤다.
"이렇게 하면 되오?"
"그렇소."
소어아는 이 말을 끝낸 후에 잠잠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잠시 후 위마의가 참을 수 없어 물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오?"
"무술을 익히려면 고생을 해야 하오. 당신은 그런 인내도 없이
무엇을 배우겠다는 것이오."
위마의는 돌연 일어서서 소어아를 노려보았다.
"만약에 나를 속인다면 난......."
"당신을 속여? 왜 당신을 속인다는 거지? 생각을 해보시오. 내
가 이 비밀을 모른다면 이 비밀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겠소?
이화접옥의 무술을 천하에 누가 안다고 하겠소?"
위마의는 그를 한동안 바라보며 서있었다. 결국 그는 다시 거꾸
로 물구나무를 서면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소어아도 역시 다시
잠자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위마의가 비록 내력이 뛰어나긴 했지만 그 자세로 오래 지탱하
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한참 후 위마의의 이마에서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그는 고통을 참아가며 입을 열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오?"
"좋아요. 지금 당신의 숨이 이미 가슴으로 향했으니 두번째 자
세로 넘어갑시다. 두번째 자세는 우선 방귀를 뀌어야 되오!"
위마의는 분노하여 소리쳤다.
"무어라고?"
"방귀를 뀌라는 것이오."
위마의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그는 이왕 시작했던 일을 망칠까봐 여전히 일어서지를
못했다.
소어아는 말했다.
"이것을 알아야 하오. 방귀는 인채내에 필요가 없는 것이오. 내
가 방귀를 뀌라는 것은 우선 체내에 필요 었는 것을 없애라는 것
이오."
병신 방귀 뀌는 무술
위마의는 소어아의 얘기를 듣고 생각을 해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소어아의 말대로 방귀를 뀌었다. 무술이 뛰
어난 사람은 자기 체내의 기맥을 조정할 수가 있기 때문에 방귀를
뀌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소앵은 벌써부터 코를 막
고 몸을 돌리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느라고 애쓰고 있었
다.
그러나 소어아는 우습지도 않은 듯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방귀로는 안 되오!"
"안 된다고? 왜?"
"이 방귀는 바지를 벗고 해야만 되는 것이오?"
"바지를 벗...... 벗는다고......?"
그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말을 하지 못 했다.
"우선 바지를 벗고 통쾌히 방귀를 뀌시오."
위마의는 다시 무섭게 소리를 치면서 일어섰다.
그는 바보가 아닐 뿐더러 매우 교활한 인물이었다. 다만 지금은
이화접옥을 배우기 위해서 혹시나 하며 꼭 눌러 참았을 뿐이다.
그래서 소어아가 이용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위마의는 들을수
록 이상한 생각이 들어 급히 일어서며 소리쳤다.
"이...... 이런 것이 도대체 무슨 무술인가?"
소어아는 여전히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건 병신 방귀 뀌는 무술이라 하오. 이화접옥의 무술보다도
무섭지요."
위마의는 양주먹을 꽉 쥐고 온 몸을 떨었다. 극도로 화가 치밀
어 올랐다.
소앵도 참을 수가 없어서 크게 웃어버렸다.
소어아도 그제서야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병신, 내가 정말 이화접옥의 무술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나무
에 매달려 있겠어? 네가 나를 속였으니 나도 너를 속여야 하지 않
겠어?"
소앵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은 너무 했어요!"
"나를 골탕먹이는 사람은 혼이 나야 돼!"
위마의의 분노는 정말 대단했다.
"나는 너를 죽이고 말겠다."
이때 소앵이 급히 말했다.
"이화접옥 무술의 비밀은 바로......."
이 몇 마디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컸다.
위마의는 공격하던 손을 다시 멈추었다.
"무엇이냐? 말을 해......."
"물론 말을 하겠어요. 그러나 당신은 그를......."
위마의는 소어아를 한 번 바라본 후 웃으며 말했다.
"이젠 늦었어. 우선 이 자식의 입을 영원히 막아 두어야겠어."
"하늘이여, 귀신이여, 빨리 나와서 나를 구하지 않으면 나는 당
신들을 욕할 것이오!"
위마의는 그의 행동을 보자 웃으면서 말했다.
"너 같은 녀석은 귀신도 구하지 않을 거야!"
그의 손가락이 소어아의 혈도를 향했다.
바로 이때 어둠 속에서 하나의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귀신이 아닌데 어찌 귀신이 나오지 않을 줄로 아느냐?"
그 말소리는 들렸다 끊겼다 하면서 조금도 생기가 없게 들렸다.
게다가 이야기의 시작은 동쪽에서 들렸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은 서
쪽에서 들려왔다.
심야의 숲속에서 이런 소리를 듣게 되면 그 누가 두려움을 느끼
지 않겠는가! 위마의까지도 몸을 떨었다.
"누구요?"
어둠 속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사람이 아니야!"
위마의는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 편의 어둠 속에서 다시 음산한 웃음소리
가 들려왔다.
"난 여기에 있다!"
위마의가 몸을 돌리자 그 목소리는 차갑게 그를 비웃는 듯했다.
"위를 쳐다 봐라!"
과연 나무 위에 회백색의 그림자가 하나 보였다. 음산한 기운이
주위를 감돌았다.
위마의는 과연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상대방의 모습을 보자 곧
침착을 되찾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며 싸늘하게 말했
다.
"각하께서 정말 귀신이 되고 싶다면 할 수 없군요."
순간 그의 손에서 은빛의 암기가 발사되어 나무 위로 향했다.
아래에서 위로 힘을 쓰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위
마의의 공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이 은빛의 암기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뻗쳐나갔다.
나무 위의 그림자가 소리를 치며 낙엽처럼 떨어졌다.
위마의는 싸늘하게 말했다.
"네가 아직도 까불겠어......."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껄껄거리며 웃
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죽어도 귀신이고, 두 번 죽어도 귀신이니 네 암기가 무
슨 소용이 있겠는가!"
위마의는 크게 당황하여 고개를 돌렸다. 그 회백색의 그림자는
이미 왼쪽 십장 밖에 있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한쌍의 회백
색 눈이 위마의를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위마의는 비록 무술이 뛰어나고 간도 컸지만 이때 만큼은 손발
이 모두 차가워져 버렸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몸 뒤에서 크게
웃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같은 사람도 귀신에게 놀란단 말인가?"
위마의가 또 몸을 돌리자 미소를 보이며 둥근 얼굴의 중이 걸어
오고 있었다. 위마의는 자세를 고치면서 무서운 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귀신이란 말이오?"
그 중은 껄껄 웃었다.
"중은 중이지. 그리고 난 귀신을 잡는 중이야."
"귀신을 잡는 중?"
"그렇지...... 하하, 중은 사람을 잡지 않고 귀신만 잡지!"
"그렇다면 중인 당신이 그 귀신을 잡아보시오."
"하하, 중은 누가 사람이고 누가 귀신인지 알 수가 있지. 하지
만 그 놈은 귀신 같지가 않은데."
"귀신이 아니라고?"
"물론 귀신이 아니지...... 하하, 귀신은 거기에 있지 않아!"
"그럼 귀신이 어디에 있소?"
그 중의 손이 돌연 옆의 숲을 향했다.
위마의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달려가
보았다. 과연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손에 흰 물
건을 들고 있었으며 또 그것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위마의가 큰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은 약간 귀신 같기도 하오. 그러나 저 사람도 정말 귀
신 같지는 않소."
그 중은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귀신은 보기엔 귀신 같지 않는 법이야. 귀신은 반은 사람 같
고, 반은 귀신 같지."
위마의는 사방을 바라보며 적과 싸울 준비를 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그러나 귀신이 저렇게 먹기 좋아하는 법이 어디 있소?"
"귀신은 다른 건 먹지 않아...... 하하, 귀신은 사람만 먹지."
위마의도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람을 먹어......? 그가 먹는 것이 사람이란 말이오?"
"하하, 그것을 믿지 않나...... 그를 좀더 자세히 보고 싶은
가?"
이때 숲 가운데 앉아 있던 그 사람이 껄껄 웃었다. 그는 손에
있던 것을 위마의쪽으로 던졌다. 위마의는 급히 손을 내밀어 그것
을 받았다.
그는 우선 그 물건이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가 눈을 비비며 그것을 자세히 바라보자 그것은 사람의 팔이었다.
잇자국이 있었고 삶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위마의도 정말로 놀랐다. 그는 급히 그 사람의 팔을
멀리 던져버렸다.
그러자 숲에 앉아 있던 사람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고는 껄껄
웃었다.
"이 지방 사람은 맛이 없어. 내가 힘들여서 먹을만한 사람 하나
를 찾았지. 절약해서 삼 일 동안을 먹고 나니 이 반쪽의 팔밖에
남지 않았는데 땅에 떨어뜨리면 아깝잖아?"
그는 말을 마치자 아그작 아그작 그 팔을 먹기 시작했다.
위마의는 구역질이 나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 중은 크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심하게! 그가 너를 먹지는 못 할 거야."
"여...... 여러분은 도대체 누구이며 어쩌자는 것이오?"
이때 또다른 한 사람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 말이 있으면 나에게 해봐라!"
그는 소리를 치면서 큰걸음으로 걸어나왔다. 몸이 크긴 해도 바
싹 말라 있었고 하얀색의 긴 옷을 입고 있었으며, 창백한 얼굴은
얼음처럼 차갑고 귀신보다 무섭게 보였다.
위마의가 소리쳤다.
"좋아. 당신이 사람이라면 귀신으로 만들어주지!"
그는 말을 하면서 번개 같이 주먹을 뻗쳐나갔다.
그 백의인은 긴 옷소매를 들어 피하지도 않고 정면으로 그의 일
격을 막았다.
위마의가 다시 소리쳤다.
"죽고 싶으냐!"
그는 재빨리 수법을 바꾸었다. 그의 손은 상대방의 팔을 낚아챘
다.
그의 다섯 개의 손가락은 돌 뿐만 아니라 철도 뚫을 만큼 위력
이 있었다. 그러나 그 백의인은 전혀 피하지 않고 더욱 팔을 앞으
로 내밀 뿐이었다.
위마의는 쉽게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는 차가운 촉감을
느꼈다. 그가 잡은 것은 사람의 팔이 아니었다. 그가 크게 놀라
어안이 벙벙해 있을 때 그 백의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손을 놓아라!"
'슥'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의 긴 소매가 갈라졌다. 위마의는
상대방의 손이 자기의 손을 스치자 피가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
꼈다.
그 백의인의 손은 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중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사람이 때로는 귀신보다 더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겠지!"
위마의는 손의 상처가 크지는 않았지만 상대방의 손에 독이 있
을까봐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다. 그는 급히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한 사람의 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아문하는 위험이 있을 때 달아나는 사람인가? 그들이 사람이
든 귀신이든 두려울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소리를 치면서 한 사람이 나타나 중을 공격했다. 그 중
은 급히 멀리 어둠속으로 달아나버렸다.
그 사람은 몸집이 매우 작아 어린애와 같이 보였다.
그는 보기 좋게 수염을 길렀는데 그 수염이 곧 땅에 닿을 것 같
았다.
그의 머리에는 금관이 씌어져 있었고 긴 옷은 빛이 번쩍거렸다.
보기에 우습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숲속에서 팔을 먹던 사람이
소리쳤다.
"위무아가 왔구나! 귀신도 두려워하다니 달아나야지."
위마의는 놀라면서 탄식했다.
"당신...... 당신......."
위무아가 싸늘하게 웃었다.
"너는 비록 나를 배반했지만 나는 너를 여전히 제자로 생각한
다. 내 제자가 남에게 괴로움을 당해서야 되겠느냐?"
위마의는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만 소어아가 나
무위에 매달려 있을 뿐 소앵도 어디론지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위마의는 탄식을 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제자는 오늘에야 알겠소.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스승보다는 못
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위무아의 긴 수염이 몇 번 움찔하더니 그 사이로 붉은 입술이
보였다.
"네가 알면 다행이다."
그는 옷소매를 휘두르며 다시 말했다.
"그사람이 너의 어디를 다치게 했느냐?"
"손입니다. 대단치는 않으나 독이 있을 것 같군요."
위무아가 다가오며 말했다.
"손을 내밀어라. 내가 좀 자세히 보자."
위마의는 서서히 손을 내밀다가 돌연 위무아를 향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이번에는 더욱 맹렬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위무아는 벌써부터
그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몸을 뒤로 한장쯤 피해버
리면서 소리쳤다.
"나쁜 놈, 스승에 대해서 이토록 무례하다니!"
"당신의 변장술은 뛰어나기는 하지만 위무아를 가장하기엔 아직
멀었소!"
그 위무아가 껄껄 웃었다.
"좋아, 알아차렸군. 하지만 물어볼 게 있는데 내가 어디를 잘못
한 것이지?"
"위무아를 본 적이 있소?"
"만약 위무아를 보지 못 했으면 어떻게 변장할 수가 있었겠나?"
"위무아가 길을 걷는 걸 본적이 있느냔 말이오."
그 사람은 놀라면서 말했다.
"걷는 모습이라니?"
위마의는 크게 웃었다.
"그가 천생에 병신이라는 것을 모르오? 그의 두 다리는 어린애
와 같아서 걸음 걸이가 기어가는 것 같소. 그래서 그는 통 걷지를
않지."
그의 말이 그치기 전에 웃음소리와 함께 그 중이 다시 뛰어나오
면서 박수를 쳤다.
"이번엔 우리가 당했군."
사람을 먹던 귀신도 돌연 나타나서 크게 웃었다.
"과연 우리가 당했어. 그 악당 놈이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 하
는 놈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
위무아로 변장하고 있던 사람은 몸이 갑자기 두 자나 길어지면
서 웃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위무아를 제대로 걷게 해야겠군."
위마의는 그 순간 몸을 소어아의 몸 옆으로 날려 단도를 꺼내
그의 목을 겨누었다. 그리고는 눈알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당신들은 이 녀석을 구하러 왔소?"
그 중은 여전히 웃으면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만약 여기를 물러서지 않는다면 난 우선 이녀석을 죽
이겠소"
그 중은 박수를 치면서 말을 받았다.
"난 또 네가 대단한 재주를 갖고 있을줄로 알았지...... 하하,
너는 그런 방법 밖에 생각할 수가 없는 놈이구나!"
이번에는 사람을 먹던 귀신이 크게 웃었다.
"네가 그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들이 이렇게 떠들고 웃고 있는 사이 나무에 매달려 있던 소어
아가 갑자기 번개 같이 움직였다!
그는 양손을 움직여 위마의의 몇 군데 혈도를 일시에 점해버렸
다.
위마의는 크게 놀란 나머지 반격할 틈도 없이 온 몸이 제압되었
다. 소어아는 단도를 빼앗아 묶인 줄을 끊어버리고 땅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는 위마의를 향해 크게 웃었다.
"네가 또 나에게 당하는구나!"
그 중이 크게 웃었다.
"그에게 대항했다가는 한평생 좋은 날이 없어지고 말지."
위마의는 눈을 치뜨며 이를 악물었다. 이런 지경에 무슨 할 말
이 있겠는가! 소어아는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지금에야 알겠지? 나에게 이익을 보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야."
사람을 먹던 귀신이 걸어와서 위마의의 몸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그의 얼굴에는 기쁜 표정이 나타났고 곧이어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이 사람 몸에는 쥐 냄새가 없군. 약간의 파와 간장만 있으면
맛이 있을 것도 같은데."
위마의는 정색을 했다.
"네가...... 네가 감히......."
사람을 먹던 귀신은 그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즐거운 표정을 지
었다.
"왜 화를 내는 거야? 너의 고기가 나의 뱃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지. 내 뱃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너보
다 고수였어. 네가 약간의 이름이 없다면 난 건드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야."
위마의의 눈에서 순간 무서운 빛이 번쩍였다.
"당신...... 당신은 그 불흘인두 이대취가 아니오?"
사람을 먹던 귀신은 안면의 근육을 몇 번 움직이더니 대답했다.
"이미 이십 년 동안 강호를 다니지 않았는데 아직도 나의 이름
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군!"
위마의는 온 몸의 힘이 빠졌다. 다른 사람이 그를 먹겠다고 했
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의 말은 진정 농담이 아
니었다.
소어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그를 놀라게 하지요? 놀란 고기는 맛이 없어요."
이대취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말을 잘했어. 그를 굽게 되면 엉덩이의 맛있는 고기는
너에게 주어야겠는 걸."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미간을 찌푸리며 언짢아했다.
"난 남의 것을 뺏지는 않아요. 손가락만 맛보게 해주면 충분해
요."
"좋아. 이 손가락을 보니 오리다리보다 더욱 맛있을 것 같기는
한데."
이때 돌연 한 사람이 공중에서 날아왔다. 그는 온 몸에 하얀 옷
을 입었으며 위마의의 앞에 내려 섰다. 그러더니 그를 향해 웃으
면서 말했다.
"너는 불흘인두 이대취만 알고 나는 모르느냐?"
그 사람이 바로 방금 위마의가 암기를 사용해서 나무에서 떨어
뜨린 사람이었다. 흰색의 높은 모자에 은침이 꽂혀 있었다.
위마의는 그를 바라보고는 눈을 감고 탄식을 했다.
"당신이 필시 반인반귀 음구유겠군."
그러나 그 사람은 그의 고개를 손으로 돌리며 말했다.
"눈을 크게 뜨게나. 크게 뜨고 음구유가 어디에 있는지 보게."
위마의가 바라보니 나무 가지에 한 사람이 걸려 있었다. 앞에
있는 사람과 차림이 똑 같았다.
귀신으로 가장했던 사람은 두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
게 변화가 많았던 것이다.
위마의는 길게 탄식을 하며 말했다.
"십대악인! 오늘은 도대체 몇 명이나 왔소."
"많지도 않지. 다만 여섯 명이야. 내가 바로 손인불이기 백개심
이야. 너는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들어봤소. 백개심은 십대악인 중에서 가장 소용이 없는 사람이
라고. 다만 강호의 사람들이 수를 채우기 위해 그렇게 칭호하는
것이라고 하더군."
순간 백개심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러나 그는 곧 크게 웃으
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어. 난 이미 나이가 마흔 여덟 살이니
쉽게 그런 수에 속아 화를 내지는 않아."
그 중이 박수를 치면서 끼어들었다.
"백개심은 과연 어른이 되었어. 다만 너는 쉰 둘인데 왜 사십팔
세라고 하지. 너는 여자도 아닌데 왜 거짓말을 하고 다니냐?"
백개심이 말했다.
"난 아직도 결혼을 못 했어. 만약에 몇 살이라도 감하지 않는다
면 누가 나에게 시집을 오겠나?"
이대취가 크게 웃었다.
"만약 정말 자네에게 시집갈 사람이 없으면 도교교와 결혼을 하
지 그래? 반개의 여자라도 없는 것 보다는 좋을 걸."
위무아로 가장한 것은 물론 도교교였다.
그녀는 이대취를 바라보며 껄껄대고 웃었다.
"안심해. 나는 그와는 결혼을 해도 너와는 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최소한 마누라에게 불친절하건 해도 잡아먹지는 않을 거야."
이대취는 그 일을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었다. 때때로 자기가
말할 때도 있었고 남들이 그 얘기로 자기를 놀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나이가 많아졌고 잠이 오지 않을 때는 그 일
이 생각났다.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미고 아파왔다.
그럴때면 그는 마누라의 따뜻함을 생각했다. 그녀의 한쌍의 하
얀 손...... 그는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팠다.
사람이 늙으면 외로움과 무서움을 알게 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도교교는 그와 같이 이십 년 동안을 살았기 때문에 물론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일부로 그의 아픈 상처를
찌른 셈이었다.
이대취는 즉각 안색을 바꾸고 노기를 나타냈다.
"도교교, 네가 다시 그 일을 말하면 너를 죽여버릴 테다!"
그러나 도교교는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나를 죽이면 무얼해. 나의 살은 네 마누라보다 부드럽지는 못
할 텐데."
이대취는 호랑이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도교교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약간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정말 안면을 바꾸려는 거야? 좋아, 와봐. 난 벌써부터 너와 승
부를 가리고 싶었으니까."
두 사람이 정말 싸우려고 했다.
이때 중이 급히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한 바탕 폭소를 터뜨렸
다.
"당신들 두 사람은 모두 다 늙어가는 어른들인데 어찌 어린애와
같이 몇 마디 농담에 서로 얼굴을 붉히는가! 남이 보면 웃어요."
백개심은 그 중의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괜히 생각해주는 척 하지마. 이 싸움은 너 때문에 시작됐어."
그는 위마의의 어깨를 치면서 다시 말했다.
"알아? 웃음 속에 칼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이 중은 나쁜 놈
이야."
위마의는 탄식을 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웃음 속에 칼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로군."
그는 고개를 돌려 안색이 창백한 백의인을 향했다.
"당신...... 당신은......."
그 백의인이 옷소매를 들치자 양손이 드러났다. 오른손은 강철
이었고, 왼손은 빨간 핏빛이었다.
"혈...... 혈수 두살이로군!"
두살은 코웃음을 쳤다.
"흥!"
"좋아, 좋아. 알고 보니 십대악인 중에 여섯 명이 도착했군. 내
가 당신들의 손에 빠졌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소."
"그렇지. 너는 죽을 수밖에 없지."
두살은 한 걸음 한 걸음 위마의를 향해 다가가며 강철 손으로
위마의의 목을 향했다. 그 손이 그의 목에 막 닿으려는 순간 이대
취가 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면 안 돼!"
"어떻게 하려고?"
이대취는 웃음을 보였다.
"두 노대!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겼소?"
"알고 있다면 왜 나를 막고 이는 것이지?"
"두형의 일을 내가 어찌 막겠소. 다만 그의 몸에는 살이 많지
않은데다 죽인 뒤 다시 삶으면 고기 맛이 없어져요."
"그럼 그를 산채로 솥에다 넣겠단 말이냐?"
"나는 오랫동안 그럴 듯 하게 먹어보지를 못 했으니 이번엔 도
와주시오."
"다음 번에......."
"다음에는 두형에게 기분을 내도록 해드리겠소."
"흥."
그는 힐끗 위마의를 바라보고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위마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대취, 너와 나는 모두 무림의 일맥인데 나를 죽이는 것까지
좋지만 그러나 네가 어찌...... 어찌......."
그는 속이 쓰린 것을 느끼며 뱃속의 모든 것을 토했다.
"토해라, 속이 깨끗한 것이 좋지. 그래야 바로 솥에 들어가지.
그렇지 않으면 삼 일 동안 너의 속이 비게 되기를 기다려야
돼......."
위마의의 표정은 처참했다.
"네가...... 네가 감히...... 귀신이 되어서라도 너를 놔주지
않을 테다."
이때 소어아가 웃으면서 말참견을 했다.
"이 선생은 간이 커서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지."
"너...... 너는 강호의 도리도 상관않느냐?"
위마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소어아는 담담한 표
정을 지었다.
"이 선생은 인정이 없어. 그러니 강호의 도리 같은 것은 몰라."
이대취가 징그러운 잇몸을 내보이며 끼어들었다.
"그렇지. 난 다만 어떻게 해야 너를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하
고 그것밖에 생각할 줄 몰라."
그는 위마의의 살결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한 근의 술과 두 근의 간장과 약간의 파와 생강으로 좋은 요리
를 할 수 있지."
위마의는 완전히 혈색을 잃었다.
"부탁이오, 나...... 나...... 제발 부탁이오."
소어아가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이 선생은 마음이 강경해서 부탁을 해도 소용이 없을 걸."
이대취는 그의 말에 장단이라도 치듯 두 손으로 위마의를 번쩍
쳐들었다.
"여러분, 저는 배가 고파서 먼저 가겠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위마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졸
도하고 말았다.
합합아가 손뼉을 치며 그의 독특한 웃음을 터뜨렸다.
"졸도했어? 이대취는 과연 잘하는데."
이대취가 말을 받았다.
"아무리 악독한 사람이라도 불에 타 죽는 것은 두려워할 거야.
그렇지?"
이대취가 크게 웃었다.
이때 백개심이 한 발 나서며 기절해 있는 위마의의 어깨를 두들
겼다.
"이 자식이 깨어난 뒤에는 필시 말을 잘 들을 거야. 우리가 위
무아를 잡으려면 이 자식의 도움이 크겠지."
합합아도 마치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듯이 급히 말참견
을 했다.
"바로 그거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왜 시간을 낭비하면서 그
를 놀라게 했겠어?"
소어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만 고생을 했소. 공중에 반 시간 이상 매달려 있었으니까."
도교교는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본 후 웃으며 말했다.
"너에게 물어볼 말이 있는데?"
"무엇인데요?"
"그 소씨라는 계집애가 이화접옥의 비밀을 이야기하려 할 때 왜
그것을 막았지?"
백개심이 급히 그의 말을 받았다.
"그래. 너는 왜 그녀를 막았지? 어차피 화무결과 싸우게 될 테
니 만약에 이화접옥의 비밀을 알게 되면 사태가 유리하게 될 텐
데."
"그의 무술의 비밀을 알고서 그와 싸우면 무슨 재미가 있겠소?"
"그가 너를 죽이면 무슨 재미가 있단 말이냐?"
"싸움도 힘이 들어야 재미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마치 고양이와
개를 죽이는 것처럼 재미가 없어요."
백개심은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
했다.
"너는 이제 보니 좋은 사람이로군."
그는 돌연 크게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합합아에서부터 이대취, 두 노대, 도교교, 음구유, 이 다섯 사
람이 키운 사람인데 좋은 사람이라니......?"
그는 그 다섯 사람을 돌아보며 한바탕 웃고 난 뒤 다시 말했다.
"여우굴에서 개를 키웠으니 당신들 다섯은 창피하지도 않소!"
음구유, 두살 등은 안색이 약간 변했다.
천치(天痴) 화무결
이대취는 즉각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너도 도교교를 닮아서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도교교가 껄껄 웃으면서 그 말을 받았다.
"소어아에게 얻어맞은 적이 있어서 심술을 부리는 게지."
"그럼 무슨 소용이 있어? 하하, 열 명의 백개심도 한 명의 소어
아를 이기지 못 하지. 그러니 복수할 생각은 아예 갖지도 말아
라."
합합아의 말에 백개심은 화를 내지도 않고 씽긋 웃더니 입을 열
었다.
"물론이지. 여우가 개에게 불리게 되면 그거야 말로 창피한 일
이 아니겠어?"
이 말이 나오자 이대취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러나 소어아는 박수를 치면서 크게 웃었다.
"손인불이기, 과연 손인불이기로군."
이때 한 사람의 애교있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십대악인, 과연 명불허전이오. 난 탄복했소."
그 소리와 함께 근처에 있던 아름드리 나무에서 돌연 문이 열렸
다. 그 나무는 기묘하게 만들어진 밀실이었다.
소앵이 그 속에서 걸어 나오며 웃고 있었다.
"천하에 이름난 십대악인이 오셨는데 마중을 못 나갔으니 용서
하셔요."
합합아가 제일 먼저 앞으로 나섰다.
"아가씨, 너무 친절히 하지 마시오. 우린 원래 비겁한 사람인지
라 남이 친절하게 대하면 혹시 우리를 해칠까 걱정을 합니다."
"제가 여러분들 앞에서 나쁜 생각을 한다면 죽여도 좋습니다."
이대취가 돌연 큰소리를 쳤다.
"가자 가자. 빨리 가자."
소앵은 여전히 웃음을 띠고 있었으나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
다.
"여러분들은 술도 마시지 않으셨는데 왜 벌써 가시려고 하시지
요."
이대취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다가는 견디지 못 하겠어......."
도교교가 나섰다.
"무엇을 못 견디겠다는 거야?"
"이 계집애의 가느다란 허리를 보니 군침이 저절로 돌아. 하지
만 소어아가 먹지 못 하게 할 테니 내가 미치겠단 말이야."
그는 이미 위마의를 업고 날아가듯 걸어갔다.
백개심이 펄쩍 뛰며 말했다.
"나도 가겠어. 애교있는 미인을 보니까 이 홀아비의 마음도 움
직이는데. 또 소어아와 싸우고 싶지도 않고."
그는 말을 하면서 이미 석장 밖으로 나아갔다.
합합아도 따라나섰다.
"그렇지. 이 중도 마음이 움직이겠는 걸."
도교교가 실눈을 뜨면서 소어아 앞으로 다가섰다.
"다행히 나는 반은 여인이야. 하지만......."
그녀는 소어아를 힐끗 바라보면서 의미있는 웃음을 지으며 숲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이번에는 음구유가 말했다.
"아가씨가 혹시 귀신이 되고 싶거든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도 좋
아. 아름다운 여자 귀신은 인기가 있으니까."
소앵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감사하오. 하지만 지금도 나는 재미있게 살고 있어요."
음구유는 소어아를 바라보면서 크게 웃었다.
"만약 그 녀석을 좋아하게 되면 얼마 후에는 인생에 싫증을 느
끼게 될 것이야."
그의 웃음은 이미 십여장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두살이 소어아에게 물었다.
"여기에 언제까지 있을 생각인가?"
"오래 있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를 찾을 수 있겠어?"
"예!"
"좋아!"
그는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다가 돌연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조심해. 예쁜 아가씨가 사람을 먹을 때에는 목까지 먹으니까!"
소앵은 애교있게 웃으며 마주 소리쳤다.
"선배께서는 안심을 하셔요. 저는 위장이 나빠서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고 있어요."
숲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소앵은 웃음띤 얼굴로 소어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언제 그 사람들이 왔어요?"
"제 때에 잘 왔지. 위마의가 나를 나무에 매달자 마자 왔으니
까."
"그들이 이미 당신의 막혔던 혈도를 풀어 놓았었군요."
"그 위씨가 너무 기술이 좋아서 그들 여섯 사람은 한참 시간을
소비해서야 풀 수 있었지."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 하는 척 하면서 나를 속였
어요."
"난 본래 너를 속일 생각은 없었어. 나는 그저 위마의에게 본때
를 보여주려고 한 것 뿐이야."
"본래는 나를 속이지 않을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나를
속이고 말았어요."
소어아는 어깨를 한 번 움찔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별 수가 없지."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친절한 것을 알고 나를 속이는 거예요.
나를 걱정하게 하고 애타게 하고. 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
을 구하려 하는 데 당신은 도리어 그 점을 이용하여 내 비밀이나
들으려고 하고......."
그녀는 소어아를 바라보며 애교있는 표정으로 투정을 부렸다.
소어아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보았다.
"내가 벌써 말했잖아?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다. 만약
나에게 뭘 바란다면 그게 벌써 불행이야."
소앵은 탄식을 하면서 서서히 말머리를 돌렸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가 나쁜 사람일까봐 걱정을 하
는데 당신은 틀려요. 자기를 나쁜 사람으로 증명하려고 하니 도대
체 어찌된 일이에요?"
"그건 내가 천성이 나쁘기 때문일 거야!"
"그러나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상상하는 것처럼 나쁘지 않은 사
람이라는 걸 알아요?"
"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네가 나 자신 보다 더 잘 안단 말이
야?"
"음."
"말좀 해 봐라!"
"그것은 당신이 어릴 때부터 나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자랐기
때문에 당신의 마음 속으로 자꾸 자기가 좋게 못 될 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정말 그럴까?"
"그리고 당신은 자신이 좋게 변하면 당신을 기른 사람들에게 미
안하게 생각되어 때때로 나쁜 일을 해서 자기를 증명하려 하기도
하구요."
소어아는 돌연 크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나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를 이해한단 말이지?"
"나도 본래는 이해를 못 했어요. 그러나 그 사람들을 본 후에
알게 되었지."
"어?"
"그 사람들은 정말 나쁜 사람들 중에서도 천재들 아니에요? 이
미 극도에 달했으니 그들은 아무리 악독한 일이라도 아주 재미있
게 할 수가 있지요."
"그렇게 그들을 욕할 필요는 없어. 그들은 너에게 아무 잘못이
없으니까."
"그럴지도 몰라요. 나는 그들에게 감사를 드려야지요."
"무엇이라고?"
소앵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만약에 그들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당신을 만났겠어요?"
소어아는 눈을 깜박깜박하면서 말했다.
"네가 하는 말은 점점 알아듣지 못 하겠구나."
"정말 몰라요?"
"음."
"당신은 아직도 그들이 당신을 그 쥐굴에 유인했다는 것을 몰라
요?"
소어아는 다시 웃음을 보였다.
"농담마라. 정말 웃기는구나. 그들이 왜 나를 속인다는 거냐?"
"어쩌면 그들은 이미 당신이 그들과 같이 나쁜 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는지도 몰라요. 당신이 반역할 것이 두려워 일부러 기
호를 남겨서 그 쥐굴에 유인해......."
"그렇다면 그들이 나를 해치려고 했단 말인가?"
"음."
"그럼 너에게 물어 보겠는데 지금은 왜 나를 구했지?"
"그건 어쩌면 갑자기 당신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거나 그
들이 직접 죽이기는 싫어서......."
소어아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이야. 너의 말을 나는 하나도 믿을 수 없어."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지 않겠지요."
"거짓말이야. 너는 내 뱃속의 회충도 아닌데 어찌 내 마음을 알
겠느냐?"
"당신에게 믿으라고 하지는 않겠어요. 다만 조심하세요."
"날더러 조심을 하라고? 내가 보기엔 네가 조심을 해야겠어?"
"나?...... 나는 무엇을 조심해야 될까요?"
"너는 여기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가?"
"여기야 항상 안전하죠!"
"그러나 지금은 틀려."
"어?......."
"여기에 온 사람들은 모두 위무아를 괴롭히러 온 사람들인데 어
찌 그의 체면을 봐서 너에게 친절을 베풀겠느냐?"
"당신의 말도 일리가 있어요. 더 이상 머물지는 못 하겠어요.
그러나 당신은...... 당신은 왜 여기에 굳이 남았지요?"
"나무에 매달렸던 사람은 남보다 본 것이 많지."
소앵은 급히 물었다.
"도대체 무엇을 봤길래 그래요?"
"나는 두 사람을 보았어."
소앵은 피식 웃었다.
"스무 사람을 보았더라도 이상한 일은 못 되지요."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매우 이상한 사람들이야."
"어떤 사람들인데요?"
"그 두 사람은 이미 저쪽의 바위에 숨어 있었어. 내 친구들이
나를 구할 때부터 이미 그곳에 있었지. 그러나 그들은 남의 일에
참견하기는 싫어하는 것 같았어. 너와 위마의가 이 숲으로 들어오
자 그들은 즉각 저쪽의 집으로 달아났는데 경공이 매우 놀라울 정
도였지."
소어아는 소앵이 놀랄줄 알았는데 도리어 웃어버렸다.
"당신은 그런 일 때문에 여기에 남았단 말이에요."
"흥!"
"알고 보니 당신은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군요."
"네가 자아도취를 한다면 나도 하는 수 없지. 그러나 지금은 도
취할 때가 아니야. 그 두 사람......."
소앵은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나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난 이미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누군데?"
"한쌍의 재미있는 부부이지요. 자기들 멋대로 놀지요. 남자는
좀 괜찮지만 여자는 항상 남보다 영리하다고 생각하면서 매우 신
경질적이에요."
"항상 남보다 영리하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태반이 정신에 이상
이 있지. 그러나 난 예외야. 난 확실히 남보다 영리하니까."
소앵은 이미 크게 웃고 있었다.
"그 두 부부를 당신에게 소개해야겠군요......."
"안타깝게도 지금은 너무 늦었어."
"그들...... 그들이 이미 갔나요?"
"갔을 뿐더러 두 가지의 물건을 가지고 갔지!"
"언제 갔지요?"
"바로 조금 전에 네가 가장 신나게 웃고 있을 때였어."
"왜 말을 하지 않았지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네가 너무 신나게 웃고 있었기 때문에 내
가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어."
그는 일부러 탄식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제는 웃음이 나오지 않지?"
그러나 소앵은 눈알을 굴리면서 다시 웃어버렸다.
"그들이 훔쳐간 것은 두 가지의 물건이 아니라 두 사람일 거예
요."
이번엔 소어아가 놀랐다.
"두 사람을 훔쳐 갔다고? 산 사람이냐?"
"산 사람도 아니고 죽은 사람도 아닌 두 명의 사람이지요."
"그 부부가 이곳까지 온 것이 바로 그 두 명의 죽지도 살지도
않은 사람을 훔치기 위해서란 말이냐?"
"음."
"반은 죽고 반은 산 사람을 훔쳐서 무얼 하지?"
"만약 용도가 있으면 내가 그들에게 가져 가게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소어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부부는 확실히 병적이군......."
"그러나 그들은 당신을 구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소어아는 다시 놀랐다.
"그들이 어떻게 했길래?"
"그들이 훔친 두 사람 중 하나는 당신과 싸울 원수였어요."
소어아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의 원수? 누구지?"
"생각을 해봐요. 최근에 누구와 싸울려고 했었죠?"
소어아는 순간 가슴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너...... 너는...... 화무결을 말하고 있느냐?"
"그래요."
소어아는 마치 꼬랑지를 남에게 밟힌 고양이처럼 껑충 뛰었다.
"화무결이 납치 되었단 말이냐?"
소앵은 그의 놀라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 그렇지요."
"왜 진작 말을 하지 않았지?"
"내가 어찌 그가 남에게 납치되는 것을 알았겠어요? 당신이 말
을 진작 나에게 하지 않았지요?"
소어아는 손을 들어 자신의 따귀를 때렸다.
"그렇다. 내가 왜 진작 말을 하지 않았지? 내가 왜 진작 그들을
막지 않았지......."
그는 소리치면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소앵은 그를 막으려고 했으나 그는 이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
다. 숲에는 다만 소앵 한 사람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한동안 멍
하니 서있던 그녀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소앵...... 소앵...... 너는 그냥 그를 보내려느냐?"
그녀는 돌연 큰 결심을 한듯 금히 숲 밖으로 달려 나가면서 입
속으로는 계속 중얼거렸다.
"소어아...... 소어아...... 그대로 당신을 보내지는 않을 테
야. 당신 같은 사람을 찾을 수가 없으니, 당신이 어디에 간다 해
도 나는 꼭 찾아 갈테야."
그녀가 사라지자 나무 옆의 돌이 돌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하
나의 구멍이 나타났다.
그 구멍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보기에 개 한 마리가 들어가기
도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한 사람이 분명히 그 속에서 나타났다.
그는 몸을 종이처럼 접을 수가 있었고, 그의 눈은 마치 칼날 같
이 날카로왔다.
그는 음산한 미소를 띠었다.
"너는 근심할 필요가 없어. 그 자식이 어디에 가든 난 찾을 수
가 있으니까."
산 뒤의 은밀한 곳에 하나의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마차는 나무가지로 덮여 었었고 철평고가 손에 채찍을 들고
수시로 달려나갈 기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깊은 수심에 잠겨 있었다.
돌연 '수-우' 하는 소리가 나더니 마차를 덮고 있던 나무잎이
흔들렸다.
"선배님들이 돌아 오셨나요?"
백산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야!"
철평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성공했어요?"
"안심해라. 너의 옥랑이 여기에 있으니까."
백 부인의 목소리였다.
철평고는 돌연 채찍을 휘둘러 말을 재촉했다.
몇 개의 산을 지나 급히 내달았다.
마차 안에서는 강옥랑의 신음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숨을 몰아 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추워...... 추워...... 아 난 추워 죽겠어!"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의 몸은 온통 땀방울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더워 더워서 견딜 수가 없어."
길을 달리는 동안 극심한 한기와 열기가 번갈아 가며 강옥랑을
괴롭혔다. 백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그 계집애는 무슨 독을 썼기에 이 녀석을 이렇게 만들었지?"
"가슴이 아프면 왜 구해줄 방법을 생각지 않느냐?"
약간 상기된 백산군의 목소리였다.
백 무인은 탄식을 했다.
"그 계집애가 무슨 독을 가했는지 알지 못 하는데 어찌 그를 구
하겠어요."
"이 자식은 우리와 친척도 아니야. 다만 우리 이름 때문에 왔는
데 그렇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어!"
"당신 질투를 하는 거예요?"
"흥!"
백 부인이 그의 얼굴을 만지면서 말했다.
"병신 같은 늙은이, 내가 정말 가슴이 아픈 줄 알아요? 난 다만
그 계집애의 수단이 너무 무섭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이 화 공
자를 좀 봐요. 이게 무슨 꼴이람......."
백산군도 따라서 탄식을 했다.
"이 화씨가 정말 걱정꺼리인데!"
화무결은 마치 백치가 된 것 같았다.
그는 멍하니 앉아 말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눈에는
막막한 표정만 떠오를 뿐 마치 아무런 느낌도 엷는 것 같았다.
모용구매는 그래도 입을 열 수가 있었고 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화무결은 죽은 사람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다만 숨이
붙어 있는 것만 같을 뿐이었다. 남이 무슨 말을 물어봐도 듣지 못
하는 것 같았다.
깊은 산 속에 먹구름과 안개가 쌓이기 시작했다.
음산한 나무 숲속에 한 채의 작은 돌집이 있었다. 옛날에 중이
수양하던 곳을 백산군이 은신처로 삼은 것이다.
돌상과 돌의자가 있었다.
화무결은 다른 사람이 안고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남의 말을 듣지 못 할 뿐만 아니라 걸어 다니지도 못했다.
백 부인은 그를 바라보며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정말로 이런 모양이 되었을까? 아니면 위장일까?"
"판단하기가 어렵군!"
"만약 정말이라면 이화접옥의 비결까지 잊게 되었을 것이 아녜
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야 할 텐데......."
철평고는 강옥랑을 안고 돌집 밖 나무 곁에 와서 앉았다. 그녀
는 감히 화무결을 대할 수가 없어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 했다.
이때 백산군이 눈을 반짝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가 지금 더워 하는가 아니면 추워 하는가?"
철평고가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지금 온 몸이 아프다고 하는데 혹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돌연 그녀는 어깨가 아픈 것을 느꼈다. 견
정 대혈이 이미 백산군에 의해 봉쇄되어 버린 것이다.
철평고는 놀랍고도 화가 치밀었다.
"선배...... 이게 무슨 짓이오?"
"네가 이화궁에서 탈출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이
냐?"
"당신...... 당신이 알고 있다면 물어볼 필요도 없지 않소?"
백산군이 징그럽게 웃었다.
"정 그렇다면 너의 몸을 빌려야겠어!"
그는 철평고의 팔을 잡아 당겼다.
철평고의 품속에 안겨 있던 강옥랑이 신음을 하며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 무방하오, 선...... 배께서 빌리시오."
정말 악독한 놈이었다.
그러나 백산군은 그를 상관하지 않고 철평고를 데리고 돌집에
들어가버렸다. 그는 화무결 앞에 와서 무서운 소리로 말했다.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화무결은 멍하니 철평고를 바라보기만 할 뿐 고개를 젓지도 않
고 끄덕이지도 않았다.
"이 여자는 이화궁의 수하인데 아느냐?"
화무결은 여전히 움직이지도 않았다.
"우리는 네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확인해야겠어!"
그의 손이 돌연 철평고의 앞가슴 옷섬을 찢어버렸다. 그러자 그
녀의 풍만한 가슴이 드러났다.
철평고는 이를 악물고 애걸하지도 소리치지도 않았다. 소리를
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무결은 멍하니 앉은 채로 얼굴에 전혀 표정이 없었다. 한쌍의
큰 눈을 뜬 채 막막히 철평고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녀를 모르느냐? 좋아, 더 자세히 보여주지!"
'스-슥' 하고 옷이 찢어지면서 철평고의 아름답고 성숙한 육체
가 온통 드러났다. 그는 그녀를 화무결 앞에 우뚝 세웠다.
그녀의 길고 날씬한 다리와 그녀의 젖가슴이 차가운 바람 속에
서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불 같은 분노가 일었으며 수치를 느꼈지만 원한의 눈초
리로 백산군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백산군은 화무결의 눈동자를 주의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화무결의 눈에서 어떤 조짐이라도 찾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무결은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여전히 멍하니 철평고의
가슴과 배와 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무결의 눈은 바위와 같았다.
백산군이 노하여 소리쳤다.
"너는 너의 동문이 이렇게 모욕을 당해도 가만히 있다니 이화궁
이 창피를 당해도 괜찮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외치는 소리를 화무결은 조금도 듣지 못 한 듯했
다.
백산군의 노한 목소리가 계속 터져나왔다.
"좋아. 내가 더 심하게 보여 주지!"
그는 철평고의 나체를 안고, 안고서......."
도약사(搗藥似)
한편, 백 부인은 계속 웃으면서 방관하고 있다가 백산군의 어깨
를 두드렸다.
"됐어요, 됐어. 당신이 여기에서 더 나가면 내가 질투를 하겠어
요."
백산군이 손을 놓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자식은 정말 혼이 나갔군."
"음, 그렇지 않다면 동문 여제자가 모욕을 당하는 걸 그냥 보고
만 있겠어요?"
그녀는 철평고를 향해 말했다.
"이건 연극이니 너무 화를 내지마라!"
철평고는 눈을 스르르 감더니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백 부인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너 이 늙은이야, 남의 아가씨를 이토록 만들다니!"
백산군이 유쾌하게 웃었다.
"만약 화를 못 참겠거든 나의 옷을 벗겨 보라 그래!"
백 부인은 겉옷을 벗어 철평고의 몸을 감싸주며 부드러운 목소
리로 말했다.
"남자들은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가만히 있지를 못 해요. 그러
니......."
"내가 그녀를 안고 나갈까?"
백산군의 느물거리는 목소리였다.
"또 무슨 수작이에요. 이제는 당신이 필요 없어요."
그녀는 철평고를 안고 나가서 가볍게 강옥랑의 옆에 내려놓았
다.
"젊은 사람끼리 기분이나 내거라."
그녀는 철평고의 혈도를 풀어주지 않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
렸다. 모욕을 당한 그녀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였다.
강옥랑은 통증으로 인하여 혈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간신히
웃음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과연 아이군. 남이 농담을 해도 울어 버리다니."
철평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화를 벌컥냈다.
"당신...... 당신...... 당신이 도대체 사람이에요?"
강옥랑이 눈길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그는 길게 탄식을 하며
소리를 죽였다.
"네가 이렇게 모욕을 당하는데 내 가슴이 어찌 아프지 않은 줄
로 아느냐?"
"가슴 아프다면 왜 그와 같이 사람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요."
"이런 처지에서 무슨 할 이야기가 있겠어. 조심하지 않으면 죽
어."
"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난 죽어도 남에게 모욕을 당할
수는 없어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바보들의 행동이야."
철평고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당신...... 당신은 그토록 죽음이 두렵단 말이에요? 정말 내가
당신을 잘못 본 모양이군요."
"개똥처럼 굴러도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 보다는 낫지."
"그런 말은 파렴치한 병신들이나 하는 말이에요."
"하지만 너는 복수를 할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
철평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이지요."
강옥랑은 입가에 미소를 보였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은 절대로 복수를 하지 못 한다는 것도 알
아야 돼."
백산군 부처는 매우 실망하였다.
애써 화무결을 소앵에게서 훔쳐온 것은, 물론 화무결의 입에서
이화접옥의 비결을 듣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고생이 허공에 뜨고 만 것이다.
백 부인은 길게 탄식을 하며 일어서더니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백산군도 그녀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 보고 싶은 심정이 못 되
었던지 원망어린 눈초리로 화무결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얼마 후 백 부인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나와 봐요. 이게 무엇이지요?"
백산군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강옥
랑과 철평고가 함께 누워있었고 백 부인은 한 구석을 바라보고 그
자리에 굳은 듯 서있었다. 그러나 주위에는 별로 특별한 것이 보
이지 않았다. 다만 낙엽들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백 부인의 얼굴에는 무서운 흥분의 빛을 보였다.
"이게 무엇이지요?"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들이지."
"다시 한 번 자세히 봐요."
그 낙엽들이 쌓이는 곳에 작은 구멍이 보였다.
백산군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보았어."
"당신의 눈이 전보다는 못 하지만 곧 알아차릴 것이라고 생각했
어요."
"하지만 이것은 작은 짐승의 굴에 불과해. 당신은 이런 걸 처음
봐?"
백 부인은 돌연 고개를 돌려 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백산군은 웃으며 말했다.
"나까지도 처음 보느냐?"
백 부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확실히 늙었군요...... 늙었어......."
"나이가 많아도 체력은 여전하지...... 이 점은 네가 누구보다
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밤마다 잠좀 자자고 칭얼대는 게 누군
데......."
백 부인은 얼굴을 약간 붉혔다.
"난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당신은...... 당신은......."
백산군은 갑자기 그녀의 가는 허리를 안고 웃었다.
"이 숲도 괜찮으니 우리 여기서......."
백 부인은 그를 밀어 부치며 말했다.
"종일 이런 일밖에 생각을 못 하니 눈이 멀지요."
"내 눈이 왜 쓸모가 없어?"
"더 자세히 저 굴을 바라보아요."
"저 속에 뭐 볼게 있다는 거야. 당신 몸이나...... 하하, 내가
보고 싶구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 부인은 그의 따귀를 후려치면서 얼굴을
붉혔다.
"못난 늙은이!"
그녀는 허리를 굽혀서 동굴 입구에 싸인 낙엽들을 긁어냈다. 그
동굴의 사방은 매우 평탄했고 다른 출구는 없어 보였다. 그 동굴
은 필시 다른 길로 통하고 있는 듯했다.
백 부인이 말했다.
"지금도 모르겠어요?"
백산군이 약간 노기띤 음성으로 말했다.
"알겠어! 이 동굴은 사람이 판 것이야."
"그래요. 다시 생각을 해봐요. 사람이 왜 이런 깊은 산 밑에 구
멍을 팠을까요?"
"여기에 숨어서 남을 엿보려는 것이겠지."
"바로 그 점이에요. 그러나 이런 작은 구멍에 누가 들어갈 수
있겠어요?"
백산군의 얼굴엔 점점 흥분하는 기색이 감돌았다.
"그를 얘기하는 거야? 그가 여기에 왔다구!"
"그 외에 또 누가 있어요?"
백산군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오랫동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서 죽은 줄로 알고 있었는데."
"생각을 해봐요. 그와 같은 사람이 쉽게 죽을 것 같애요. 누가
그를 죽일 수 있겠어요?"
"그렇지. 좋은 사람은 명이 짧아도 그렇게 나쁜 놈은 명이 길
지."
백 부인은 웃으며 말했다.
"질투를 하는 거예요?"
"당신 옛사랑이 왔다고 그렇게 웃을 필요는 없어."
백 부인은 그의 목을 끌어 안으며
"바보, 내가 그를 좋아했다면 어찌 당신에게 시집을 왔겠어요.
자......."
그러나 이번에는 백산군이 그녀를 밀어버렸다.
"필요 없어!"
"방금까지도 나에게 치근거리더니 왜 그래요?"
"지금은 흥미를 잃어버렸어."
그는 많은 낙엽을 걷어차며 다시 말했다.
"이 자식이 어딘가 있다는 걸 생각하니 아무 흥미도 없어졌어."
"그럼...... 우리 들어가요."
"싫어, 난 여기에 있겠어."
"왜요?"
"이런 말 몰라?"
"무슨 말?"
"나무 옆에서 토끼를 기다린다는 말!"
강옥랑은 정말 죽도록 아팠다. 그러나 백산군 부처의 얘기가 심
상치 않자 귀를 기울여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는 두 부부가 헛수작을 하는 것을 보자 우습기도 했지만 여기
에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소리를 했을 때엔 의구심이 불쑥불쑥 일
어서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이렇게 작은 동굴은 다섯 살 짜리 아이도 숨기가 어려울 텐데
어른이 어떻게 숨는다는 말인가!)
백산군의 마지막 말이 들렸다.
'나무 옆에서 토끼를 기다린다는 말!'
강옥랑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십이성상 중 토끼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십이성상은 바로 열두 마리의 동물로 되어 있었다. 쥐, 소, 호
랑이, 토끼, 용, 뱀, 돼지, 말, 양, 닭, 원숭이, 개 등이었다.
쥐의 호는 무아(無牙)이고, 소의 호는 운양(運糧)이며, 호랑이
는 산군(山君), 토끼는 도약(搗藥), 용은 사영지수(四靈之數), 뱀
은 식녹신군(食鹿神君), 돼지는 흑면(黑面), 말은 답설(踏雪)이었
다. 그리고 양은 질석(叱石), 닭은 사진(司震), 원숭이는 헌과(獻
果), 개는 영객이었다.
십칠 년 전에 흑면군 돼지와 사진객 닭은 이미 이화궁주의 손에
죽었다. 영객인 개도 연남천의 검에 죽었고, 헌과인 원숭이는 소
미미에게 죽었다. 식녹인 뱀은 강별학의 계책에 빠져 동굴 속에서
묘두응에게 죽어버렸다. 그래서 지금 십이성상 중에는 일곱 사람
만이 남아있었다.
이 일곱 사람이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머리를 쓰는 것이
나 무술이 모두 죽은 자들보다 무섭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
십칠년 동안 일곱 사람의 무술은 더욱 진보되어 있었다. 십이성상
중에서 토끼는 자칭 전궁낙약이었고 시종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강호에서는 정말로 도약사의 진면목을 본 사람이 없었다. 그래
서 어느 누구도 그의 본 모습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무술이 무섭다는 것은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
다.
백산군은 나무 옆에 앉아 토끼를 기다렸다.
백 부인은 조용히 그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돌연 크게 웃으
면서 말했다.
"당신은 '나무 옆에서 토끼를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아세요?"
"비록 책을 많이 읽지는 못 했지만 그 이야기는 알지."
백 부인은 바닥에 주저 앉으며 말했다.
"그 이야기를 좀 해봐요."
"그 이야기는 한비자에 나오는 것이지. 옛날 수국에 가난한 농
부의 자식이 있었지. 어느 날 그가 밭에 있는데 토끼가 급하게 달
려와 나무에 부딪쳐 죽고 말았지."
"그래서 토끼든 사람이든 성질이 너무 급하면 안 돼요."
백산군이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그녀의 말에는 대답도 않
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자식은 토끼를 주워다 장에 내다 팔았지. 그는 이렇게 쉽게
토끼를 주워 돈을 벌 수도 있으니 밭을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
고 다시는 밭에 나가지를 않았어."
백 부인은 웃으며 말했다.
"오랫동안 부부생활을 해왔지만 당신이 이토록 유식한지는 몰랐
는 걸요."
"난 배운 게 많은 것은 아니야. 다만 토끼에 대해서는 각별한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토끼에 관한 일을 잘 알고 있는 것이지."
"정 그렇다면 그 자식이 그 후에 정말 토끼를 많이 잡았는지 그
여부를 알고 있나요?"
"물론 잡을 수가 없었지. 성질이 급한 사람은 많지만 성질이 급
한 토끼는 그리 많지가 않아."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다시는 찾아오는 토끼가 없었어. 사람들
은 그를 놀렸지."
"당신은 그 논리를 알고 있으면서 왜 그것을 따라 하지요? 여기
서 토끼를 기다리다가 오지 않게 되면 남에게 우스운 일이 되지
않을까요?"
"반드시 올 거야."
"어떻게 그것을 확신하죠?"
"그는 이미 여기에 와 보았어. 그리고 지금 필시 네가 여기에
온 것을 알 거야. 네가 이곳에 있는 것을 아는데 다시 오지 않겠
어? 흐흐, 어쩌면 그가 이미 여기에 와서 너를 만날 기회를 엿보
고 있는지도 모르지."
백 부인은 계속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난 이미 늙었는데 뭐 볼 게 있겠어요?"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틀려. 비록 늙었지만 그의 눈에는 미
인으로 보일는지도 몰라."
"당신의 눈에서는 내가 어떻게 보여요?"
백산군은 돌연 크게 웃었다.
"나의 눈에는 네가 정말 하늘의 선녀 같이 보이지."
이 늙은 부부는 마치 젊은이들처럼 주거니 받거니 싱거운 수작
을 하고 있었다. 강옥랑은 몸이 아픈 가운데도 쓴웃음을 지었다.
돌연 백산군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왔다!"
강옥랑도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사람의 머리통보다 약간 굵
은 석자 길이의 통나무가 굴러오고 있었다.
그 나무는 스스로 땅을 구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눈이 달
린 듯 장애물을 이리저리 피하며 오고 있었다.
깊은 산속에서 이런 괴상한 일을 만나게 되면 간이 큰 사람도
식은 땀이 날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강옥랑은 그 나무가 도약사와
관련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두려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놀라움과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나무는 베개보다도 얼마 크지 않은데 어떻게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무림에서 이름난 사람이 어린애 정
도의 몸집이란 말인가? 그럼 어찌 백 부인과 옛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었을까? 백 부인 같은 여자는 절대로 난장이를 좋아할 사람
이 아닌데.......)
백산군이 나무를 바라보는 눈길은 마치 불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는 두 주먹을 꽉 움켜 쥐었다.
백 부인은 가볍게 그의 손을 잡으며 애교있게 웃은 뒤 입술을
뗐다.
"옛친구, 오래간만이에요. 옛날처럼 만나기만 하면 싸워서야 되
겠어요?"
백산군은 싸늘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친구라면 왜 숨어서 나오지 않는 것이지."
그 나무가 한바탕 웃어 제끼더니 대답했다.
"오래간만인데도 두 부부가 여전히 사랑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무척 흐뭇하군."
백산군이 큰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우리가 사랑하는 줄을 알지? 몰래 우리를 살피고 있었
군."
"만약 서로 사랑을 하지 않으면 어찌 질투심이 그렇게 강하겠
소. 그것으로 보아 알 수가 있소."
웃음소리 중에 나무 속에서 하나의 머리가 밖으로 내밀렸다.
강옥랑은 나무 속에 분명히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
서도 놀라고 말았다.
그 사람은 창백하고 수염이 얼마 없었다. 한쌍의 눈은 크고 밝
았으며 마치 두 개의 커다란 진주 같이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눈
은 너무 동그레서 사람의 눈 같지가 않고 토끼 눈과 흡사했다.
가장 이상한 것은 그 머리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켰으며 귀도
유난히 컸는데 정말 토끼 귀보다도 두 배는 됐다.
이토록 큰 머리에 큰 귀가 있는 사람도 있을까?
강옥랑과 철평고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벌린 입을 다물줄
을 몰랐다.
백 부인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엉뚱하고 쾌활하군요."
그 사람이 웃으며 대답했다.
"강산은 변하기 쉬워도 사람의 성질은 고칠 수가 없는 것이지."
백산군은 싸늘하게 말했다.
"여자가 까부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어? 풍습이 옛날과 달라진 모양이지? 난 장난끼도 있고 쾌활한
남자가 매우 인기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까부는 남자는 물론 인기가 있지만 그러나 까부는 늙은이
는...... 흐흐 징그럽지."
백 부인은 남자들이 자기를 두고 질투심을 불태우는 것을 보자
마음 속으로 매우 흐뭇했다.
그러나 그녀는 화를 내는 것처럼 말했다.
"당신들 두 사람이 다시 싸우면 난 상관을 않겠어요."
백산군이 노해서 소리쳤다.
"나는 너의 남편이야. 어찌 상관을 하지 않겠다는 거지?"
"난 정말 그러지도 않을 텐데 무슨 화를 그렇게 내요?"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십여 년은 젊어진 것 같았다. 세상에
여자를 가장 젊게 할 수 있는 것은 남자들의 질투였다.
그래서 노처녀는 빨리 늙어버리는 것이다.
"백형, 정말 복도 많소. 당신이 관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형수
는 아가씨처럼 젊을 것이오."
백산군이 갑자기 노기를 띠웠다.
"나를 모욕하는 거냐? 내가 죽는다 해도 너는 국물도 없어."
"어! 그럼 누구 차례죠?"
"네가 걱정할 바가 아니야. 너는 나보다 일찍 죽을 것이니까!"
그는 소리를 치면서 일격을 가했다.
'펑' 하는 소리가 나며 그 통나무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순
간 한 사람이 통나무에서 튀어 나와 곁에 서있던 나무 위로 올라
갔다.
그 사람은 큰 머리를 나무에서 내밀며 말했다.
"사람은 호랑이를 해칠 마음이 없었도 호랑이는 사람을 해칠 수
가 있지. 그러나 백형, 내가 이번에 온 것은 당신과 싸우기 위해
서가 아니오."
백산군의 노기는 대단했다.
"그럼 뭘 하러 왔지? 나 이 호랑이는 비록 사람을 먹지는 않아
도 토끼는 먹을 수가 있어."
"만약 나를 해친다면 한평생 당신은 이화접옥의 비결을 알지 못
하게 될 것이오."
순간 백산군의 얼굴은 즉각 웃는 표정으로 변했다.
"동생, 내가 정말 화를 내고 있는 줄 아는가?"
그 사람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화를 내는 것이 아니며. 뭐요?"
백산군은 계면쩍은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너는 내 마누라의 옛친구면서 그녀의 성질을 잊었느냐?"
"그녀의 성질이 어떻다는 것이오?"
"그녀는 남이 자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을 좋아하지. 난 그녀의
남편이니 자연히 자주 그녀를 기쁘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어? 그래
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팍' 하며 백 부인에게 따귀를 얻
어 맞았다.
백 부인은 눈을 크게 뜨고 호통을 쳤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백산군은 화를 내지도 않고 웃을 뿐이었다.
"사실 난 너도 좋아는 하지만 이화접옥도 매우 좋아하지."
백 부인은 야릇한 교태를 보이며 대답했다.
"늙은 사람아! 누가 나를 좋아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누가
당신을 좋아한데요?"
그녀는 다시 나무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못난 토끼야, 빨리 내 앞에 내려오지 못 하겠느냐?"
그 사람은 나무 위에서 밑을 향해 소리쳤다.
"네, 네, 명령대로 내가 곧 내려가겠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뛰어내렸다. 그가 내려서자 일곱 자는 충분히 될
만한 거한이었다. 백산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것 같이 보였다.
강옥랑은 놀라서 눈알이 빠져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정말 어떻
게 그 큰 사나이가 석 자 남짓의 통나무 속에 들어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때 돌연 백산군이 강옥랑을 향해 걸어오면서 웃었다.
"이미 깨어나 있었군."
강옥랑은 그의 말에 대꾸했다.
"후배는 정신이 없었을 뿐이지 잠이 들지는 않았었습니다."
"저 조그만 나무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느
냐?"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천하에 유명한 도약사이지. 강호의 사람들은
모두 도약사의 '쇠자축골공(銷子縮骨功)'이 절전의 무술이라는 것
을 알고 있어!"
"쇠자축골공이라고요? 그것은 바로 옛날 무골도인의 무공으로
지금은 전해 내려오지 않는 무술이 아닙니까?"
"네가 견식이 꽤 있구나. 이젠 알겠느냐?"
"예!"
"알았으면 빨리 들어가지 않고 무엇을 엿듣으려는 것이지?"
"그럼 후배는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일어서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이를 악물고 일어서 철평
고와 함께 집안으로 향했다.
그들이 몸을 추스리지 못 해 비틀거리게 되자 철평고의 옷자락
이 넘실거리며 그녀의 하얀 다리가 드러났다.
도약사는 그 광경을 보고 눈이 멍해졌다.
"고 계집애 다리가 괜찮은데."
백산군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다리 뿐 아니라 다른 곳도...... 흐흐......."
도약사는 순간 군침을 삼켰다.
"당신이 보았소?"
"호랑이가 옆에 따라 다녀 눈으로 보았을 뿐인지 만질 수는 없
었지. 하지만 네가 마음에 있다면 나에게 맡겨 두어라."
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두 귀를 백 부인에게 잡혔다.
백 부인은 이를 악물고 호랑이 눈을 하고 서있었다.
"늙은 색골아, 그동안 밖에서 나 몰래 많은 여인과 관계를 맺었
겠지? 빨리 말해봐라!"
백산군은 안면을 잔뜩 찌푸렸다.
"없어, 정말 없어. 옥황대제, 제발 놓아 주시오!"
"사실대로 말을 하지 않으면 귀를 잘라 버리겠어요."
도약사가 옆에서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내가 보기엔 백형이 당신에게 매우 충심스러운 것 같은데!"
백 부인이 그를 힐끗 바라본 후 말했다.
"그를 대신해서 변명해줄 필요 없어. 당신도 좋은 사람은 못 되
니까."
"아이구, 정말 생사람을 잡는군."
백 부인은 결국 '피식'하고 웃으며 잡았던 손을 놓았다.
"남자는...... 열 명의 남자 중에 아홉 명은 색골이지."
백산군이 벌겋게 물든 귀를 매만지며 웃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두고 동생, 너는 정말 그 비밀을 알고
있는가?"
도약사는 대답을 하지 않고 딴전을 피웠다.
"당신은 물론 내가 벌써 온 것을 알고 있었겠죠?"
"그렇지도 않아. 얼마 전에 알았는 걸. 너의 장안법은 십 년 전
보다 더욱 진보 되었어."
도약사의 얼굴에 기쁜 표정이 역력했다.
"들리는 말에는 동해부상국(東海扶桑國)에도 나의 이 장안법과
비슷한 무술이 있다고 하더군요. 인술(忍術)이라고 하던가요?"
백산군은 웃으면서 그 말을 받았다.
"그런 호박 같은 무술이 어찌 너의 무술과 비교되겠어?"
도약사는 크게 몇 번을 웃은 뒤 말했다.
"당신들이 위무아의 제자 위마의를 여기까지 끌어 들여 소씨라
는 여자를 찾게 한 것까지 보았지요."
이번에는 백 부인이 말했다.
"소앵이 바로 위무아가 목숨처럼 아끼는 아이라는 것을 알아?"
"지금은 물론 알지. 그러나 난 당신들이 정말 이상하게 여겨졌
었소. 왜 직접 들어가지 않고 그를 끌어들였는지 말이오. 그후 나
는 당신들이 그를 몰래 따라가는 것을 보았지."
백산군이 크게 웃었다.
"동생, 너도 과연 따라 왔었군!"
도약사는 탄식을 했다.
"나의 병도 정말 고치질 못 했지. 재미있는 것을 보면 꼭 쫓아
가고 싶고...... 하지만 그곳은 멋은 있어도 사실은 함정투성이었
어."
백 부인이 말했다.
"그 계집애는 무술을 배우지는 않았어도 늙은이의 소식기관(消
息機關)을 모두 전수받았지. 듣기에는 늙은이 보다도 더욱 뛰어나
다는군."
"그 계집애는 과연 영리해요......."
백산군이 한숨을 쉬며 한마디 거들었다.
"영리할 뿐더러 이쁘기도 하지."
백부인이 눈썹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당신들 두 사람은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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