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건섭 - 5시간300분 1

3학년2반 | 2022.02.15 07:35:30 댓글: 0 조회: 941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8951
5시간 30분 - 정건섭


안개열차

"안개가 굉장하죠?"
"원--이렇게 코앞도 분간할 수 없으니. 영동에서 오는데 시간이 무척 걸렸어."
서울역 대합실에 모인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며 여기저기 웅성거리고 앉아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21시 45분 경부선
특급열차가 개찰되기까지는 아직도 30분이나 남았다. 초저녁부터 한강을 중심으로 번지기 시작한 안개는 삽시간에 서울 전역을 뒤덮어 버렸고 자동차는 라이트를 켜고도 엉금엉금 기고 있었다.
광장의 시계탑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깔려 야간 특급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한가닥 불안감을 떨어 버릴 수가 없었다.
"내일 갈까 봐."
베이지색 바바리 코트를 어깨에 걸친 20대 초반의 여인이 사내의 팔에 몸을 밀착시키며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뭐 할 수 없지. 한 삼십 분만 기다리면 될 텐데 뭘. 내친김에 내려가자구. 춥지는 않아?
"약간! 그런데 실내는 따뜻할까? 침대차는 처음이야."
"촌놈. 들어가 봐. 생각보다 훨씬 포근해. 커피 하나 뽑아 줄까? "싫어, 그냥 여기 있어."
사내는 여인의 어깨를 감싸며 대합실을 둘러 보았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서성이며 시계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의자에 앉아 끄덕이며 졸기도 하였다. 더러는 자판기에서 뽑아낸 커피로 몸을 덥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때 '번쩍'하고 자동 전자 시계에서 자색 불빛이 나오더니 '21:45'라는 글시가 조명되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서서히 몸을 움직여 열을 지어 섰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대합실에 퍼졌다.
"경부선 21시 45분 경부선 특급 열차를 기다리시는 분께 알립니다. 잠시후 개찰이 시작되오니 일렬로 질서있게 서서 승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경부선 21시 45분 특급 열차를 기다리시는 분은 잠시후 개찰이 시작되오니 일렬로 질서있게 서서 승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사내의 팔에 매달려 있던 여인이 여행용 작은 가방을 들어 남자에게 넘겨 주고는 해죽 웃었다. 남자는 무표정하게 가방을 받아 어깨에 메고는 주머니에서 승차권을 두 장 꺼내 손가락을 집게처럼 오므려 표를 끼웠다. 이 두 남녀 뒤에는 신부 한 사람이 검정 서류 가방을 들고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개찰 안내 방송이 나온지 5분이 지났는데도 개찰원이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은 열을 흐트리기시작하였다. 더러는 쭈그리고 앉기도 하고 더러는 가방을 내려놓고 깔고 앉기도 하였다, 무료했는지 신부는 품속에서 포켓용 책을 꺼내 읽었다.
"신부님 빨리 가세요."
뒤에 있던 청년이 신부를 툭 치자 그 때서야 개찰이 시작된걸 알고 가방을 들고는 바삐 걸어 앞선 남녀를 따라 대합실을 빠져나갔다. 21시 45분 대합실 여행객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고 개찰원이 다시 모자를 만지며 돌아서려고 할 때 커다란 비닐백을 질질 끌며 40대 중반의 남자가 들어섰다.
"어이구 늦을 뻔했네."
사내는 표를 개찰원에게 내밀었다. 125 열차편 03-03침대 차표였다. 차표에 구멍을 뚫어 표시를 한 후 사내에게 되돌려 주던 개찰원이 사내를 보자 흠칫 놀라며 얼굴이 굳어졌다. 이런 개찰원의 표정을 보던 사내가 씩 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가방을 끌고 대합실을 빠져 나갔다. 가방은 바닥에 바퀴가 달려 있는지 크기가 무게보다는 쉽게 사내의 손에 끌려나갔다. 개찰원은 이런 사내의 뒷모습을 다시 돌아보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되돌아갔다.
125편 경부선 특급 열차에는 일반 특급 객차 뒤에 세 차량의 침대 칸이 마련되어 있다. 침대차는 21시 정각 두 번에 걸쳐 운행되고 있다. 침대 열차 내에는,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 침대가 아래위층으로 마련되어 있고 한쪽편에 6개 즉 아래위로 12개의 침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좌우로 12개씩 24개의 침대가 이런 차량의 3대나 딸려 있었다. 침대 객차에는 세 명의 승무원이 차량을 커버하며 서비스하고 있었다.
커다란 가방을 낑낑거리며 침대 구석에 밀어넣는 사내는 힘이 들었는지 잠시 수건으로 땀을 닦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선생님, 표 주십시오."
승무원이 사내에게 다가왔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표를 꺼내 승무원에게 내밀었다. 사내에게서 표를 받던 승무원이 사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얼굴이 굳어지고 흠칫 놀라며
"대전 도착 10분 전에 깨워 드리겠습니다.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하고 총총히 사라졌다. 03-03, 즉 침대 3호 열차 3호실 하단 침대가 이 사내의 좌석이었다. 사내는 신발을 벗어 침대 밑 통로에 가지런히 놓고 열차측에서 준비해 준 슬리퍼로 바꿔 신고는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40대 중반의 주름이 약간 져 있는 얼굴에는 수심에 찬 듯 우울해 보였다. 그러나 체격은 건장하여 어깨가 딱 벌어져 있고 강인하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흔들'하고 열차가 움직이자 사내는 슬리퍼를 벗어 구두 옆에 가지런히 놓고는 침대속으로 들어간 후 커튼을 닫았다. 침대는 무척 단조로웠다.
상하단의 침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외에는 식당차도 휴게실도 없었다. 누울 수 있다는 장점 외에는 일반 객차와 별다른 점이 없었다. 아니 혼자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적적하고 무료한 구조였다. 옆사람의 얼굴을 본다거나 또는 대화를 나눈다거나 하는 여행 특유의 즐거움도 허락되지 않았다. 마음대로 복도를 거닐수 없고, 흔한 음료수나 군것질 거리를 파는 홍익회 사람들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소지품은 자기 침대에서 자기가 관리하게 되어 있는데, 허술한 커튼을 열고 잠든 새에 도난당할 우려를 생각하여 취해진 조치였다. 이 차내를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는 사람은 오직승무원뿐이었다. 가정을 지키듯 자기 소유의 침대는 자기가 책임져야 했다.
침대 열차는 세 개의 차량을 세 명의 승무원이 커버하기 때문에 매우 복잡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승객으로부터 거둬들인 표를 점검하여 목적지에 닿기 십 분 전에 승객의 잠을 깨우고 표를 되돌려 주는 일 외에는 이따금 한 번씩 둘러보기만 하면 되는 지극히 단조로운 업무였다. 열차는 서서히 서울을 빠져 궤도를 따라 수원 방면으로 달리고 있었다. 짙은 안개를 벗어나자 이번에는 먹물 같은 어둠이 창 밖의 시야를 가렸다.
누워 있던 사내가 머리맡에 스위치를 눌렀다. 좁은 침대차 안이 작은 조명 시설에 조금 밝아졌다. 그는 다시 수건을 꺼내 땀을 닦고는 누워서 담배를 꺼내며 커튼을 약간 열었다. 바로 맞은편 침대차 손님도 잠이 오지 않는지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그쪽 침대차의 커튼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왔다. 사내는 슬리퍼를 신고 반쯤 열려 있는 맞은편 침대 커튼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미안하지만 성냥 좀... 아이구 영감님이시군요. 죄송합니다."
"원, 별말씀을. 자 라이터를 빌려 드리죠. 멀리 가십니까?"
영감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사내의 입에 갖다대며 불을 붙여 주었다. 한 모금 길게 빨아들인 사내가 영감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대전에 급한 일이 있어서요. 몸 컨디션이 나빠 침대차를 탔는데요, 오히려 일반 객차보다 더 불편한 것 같아요. 조명이 어두워 책도 못읽고..."
영감도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사내는 자기 침대로 되돌아왔다. 불을 끄고 커튼을 약간 열어 놓았다. 영감이 사용하고 있는 침대의 윗칸과 사내의 윗칸 침대는 손님이 없는지 커튼이 활짝 열려 있었다. 통로에는 신발과 슬리퍼만 가지런히 놓여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승무원도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시계는 22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내는 복도를 살펴보고는 신발을 복도 중앙으로 조금 밀어놓고 실내등을 다시 켜 놓고는 잠자 코 누운 채 발가락으로 커다란 가방을 툭툭 치고 있었다.
이때 화장실을 가려는지 베이지색 바바리를 어깨부터 치렁치렁 내리걸친 여인이 걸어나오다가 복도 중앙에 밀어놓았던 사내의 신발을 밟아 버렸다.
"어머 죄송해요, 미처 못 보았어요."
여인은 열려진 커튼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사내에게 사과하려고 머리를 돌리다가는 깜짝 놀라며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리고는 빨려들 듯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가더니 다시 나와 위층의 사내 침대로 기어올라갔다. 이를 바라보던 03-03 침대차의 사내가 의미 모를 웃음을 씩 웃고는 신발을 털고는 처음의 제자리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커튼을 닫고 조명을 끄고는 죽은 듯이 조용히 누웠다. 전자 손목 시계의 버튼을 누르자 라이트가 파란색으로 켜지며 22시 35분을 가리킨다. 밤 10시 35분이었다. 시계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사내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125편 특급 열차가 천안에 도착한 것은 정확하게 23시 정각이었다. 침대차는 여전히 조용하고 일반 객차에는 사람들이 쏟아져나와 역사로 빠져 들어갔다. 사람들은 검표원에게 표를 던져주고는 추운듯 어깨를 움츠리며 어둠 속을 종종 걸음으로 사라졌다.
열차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꿈쩍하고는 다시 철로를 따라 다음 정차역인 대전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승무원은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23시 35분 이제 25분 후가 되면 대전에 도착할 시간이다. 도착 10분 전에는 대전 손님을 깨우고 하차 준비를 시켜야 한다. 대전 손님은 세 사람이었다. 02-14호의 장교 한 명, 그리고 01-7호의 임신부 한 명,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은 커다란 가방을 가지고 왔던 이상한 사내 즉 03-03호의 손님이었다.
보관하던 표를 꺼내 나눠 줄 준비를 하고 복도를 내다 보았다.
1호차에서 3호차까지 둘러보았다. 신발이 그대로들 있는 것으로 화장실을 간 사람은 없는 듯싶었다. 기척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깊은 잠에 빠져 든 것 같았다. 단 1분이라도 더 단잠을 자도록 방치해 두는 게 승무원의 임무 중 하나였다. 깨어 있는 사람과 단잠을 자고 있는 사람과의 시간은 개념부터 틀리다. 승무원은 각 차량의 내릴 사람들의 신발을 확인하고 다시 1호차로 옮겨왔다.
그리고 작은 승무원실로 돌아와 잠시 쉰 후 시계를 보았다. 23시 45분 시계를 확인한 승무원은 세 사람을 깨우려고 통로로 나와 3호차로 들어오는 순간 화장실에서 나오는 영감과 마주쳤다. 03-15, 즉 03-03호 사내의 맞은편 침대 노인이었다.
"영감님 춥지 않으십니까?"
승무원이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자
"아주 좋습니다."
하고는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시속 120Km로 질주하던 열차가 대전이 가까워 오자 속도를 늦췄다. 영감이 침대 속으로 들어가자 승무원은 03-03호의 이상한 손님을 깨우려고 커튼에 손을 대다가 흠칫 하고 멈춰버렸다.
"어디 갔지?"
하고는 화장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닌데, 거기는 지금 노인이 나왔으니까 있을 리가 없고..."
승무원은 1호차와 2호차의 대전 하차 손님에게 표를 나눠 주고 다시 03 -03호 침대칸 앞으로 왔다
23시 35분 1차 순회 점검할 때는 멀리서는 보았어도 슬리퍼 옆으로 분명히 한 켤레의 구두가 있었다, 그런데 표를 넘겨 주려고 10 분 후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신발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한데?"
혼자 중얼거리며 커튼을 확 열어젖혔다. 침대에는 커다란 가방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그 이상한 손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조금 전에도 있었는데... 화장실에선 노인이 나왔으니 거긴 없을 테고."
1, 2, 3호차 통로는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칸막이를 뜯어냈다,
만일 누군가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면 쉽사리 눈에 뜨일 텐데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승무원은 열차의 비어 있는 칸과 승강구를 뛰어 다니며 찾아보았지만 그 이상한 사내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승무원은 다시 03-03 침대로 돌아왔다. 사람의 앉은키만큼이나 커다란 가방을 들여다보던 승무원은 지퍼가 조금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열어보려다 말고 1호차 승무원실로 되돌아가 다른 승무원을 데리고 왔다.
"이봐, 여기 이상한 일이 생겼어. 이 랜턴(대형 손전등)을 비춰 줘. 가방 좀 열어보게. 여기 승객이 없어졌단 말야."
승무원은 동료에게 랜턴을 맡기고 불빛을 비추게 한후 지퍼를 열어 젖혔다. 가방이 옆으로 쓰러지면서 커다란 손이 흔들거리며 빠져나왔다.
"악 사람이... 시... 체야... 시체."
이 때 덜컹하며 열차가 멈추어 섰다. 대전에 도착한 것이다.

열차가 잠시 연착되고 대전 경찰서에서 형사, 검시관, 사진사가 각 한명씩 동원되었다. 현장에는 빈 콜라병 하나, 담배 꽁초, 그리고 시체와 시체가 들어 있는 대형 비닐 가방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혹시 승무원 외에 이 칸에 타고 있던 사람을 보신 분은 없습니까?"
형사는 침대에서 시체가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통로로 우르르 몰려나온 승객에게 소리 질렀다. 그리고 승무원을 양쪽 승강구에 세워 놓고 승객이 있는 침대까지 일일이 조사하였다. 조사가 끝나자,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영감이 가방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제가 보았습니다. 서울서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제게서 담뱃불을 빌려간 일이 있었죠."
"감사합니다. 누구 또 다른 분은 없습니까? 미안하지만 이 칸에 타고 있던 사람을 목격한 사실이 있거나 아는 분이 있으면 좀 도와주십시오."
형사가 승객의 도움을 받고 있는 동안 사진사는 시체를 가방에서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검시관은 눌린 자국이 있는 목부분을 검사하고 있었다.
"이 형사님."
사진을 찍으려고 렌즈를 시체의 얼굴에 대던 사진사가 통로를 향해 소리 질렀다.
"이 형사님, 이 형사님. 이 사람이..."
"뭐야, 왜 그래."
"이 사람 탤런트 고강진이에요."
"뭐? 고강진."
'고강진'이 시체의 주인공이라는 말이 나오자 통로에서 웅성거리고 서있던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벌린 채 닫을줄 모르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다가는 우르르 하고 시체 곁으로 달라붙었다.
"고강진이래."
"아니 고강진이 왜 여기서 죽었지."
제각기 생각나는 대로 떠들고 있었다. '고강진.' 2, 3년 전부터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이제는 명실공히 톱의 자리에 올라와 있는 미남형 스타 고강진. 그 유명한 인기 절정의 탤런트가 열차 침대 속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이었다.
시체의 주인공이 고강진으로 밝혀지자 남자의 팔에 매달려 바들바들 떨고 있던 바바리 여인이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섰다.
"저 -- 형사님. 이 칸에 타고 있던 사람 저도 보았어요."
아직은 얼굴이 파랗게 굳어진 채, 그러나 호기심만은 어쩔수 없었는지 연신 흘끔거리며 시체를 훔쳐보았다.
"감사합니다. 열차는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습니다. 목격하신 분께서는 보신 대로 진술만 해주시면 됩니다. 지금부터 대전경찰서로 자리를 옳기겠습니다. 목격자 승객 되시는 분은 저희들이 책임지고 목적지까지 도착하시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형사는 시체가 들어 있는 가방과 사진사, 검시관 그리고 범인 목격자를 인솔하고 열차에서 내렸다. 이들이 출구에서 빠져나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열차는 덜컹 하고 움직이며 다음 역인 대구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가방 손잡이는 절대 손대지 말고 나머지 분들은 이쪽 사무실로 들어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이 김군, 가서 사람 숫자대로 커피 좀 뽑아 오고. 그리고 이 순경, 과장님한테 빨리 전화해서 오시도록 해. 그리고 텔렉스 올려 보내고... 어이 그 쪽엔 손대지 말라니까."
대전 경찰서 형사과 이민우 형사는 자신만만하고 민첩하게 하나하나를 지시했다. 조금도 당황하거나 서둘지 않았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협조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선 이후에라도 참고가 되도록 주소를 기록하겠습니다."
이 형사는 베이지색 바바리 여인, 그리고 뒤늦게 목격자로 나타난 신부, 영감의 순서대로 주소를 기록하고 메모 노트를 꺼냈다. 열차 승무원이 어딘가에 열심히 전화를 걸고 있었다.
"서울에서 약 한시간 반 정도 있으면 전문 형사님들이 내려올텐데, 어떻습니까? 기다리시는 동안 저희들이 마련한 숙소로 가셔서 피로를 푸시는 게... 그 때까지만 기다리시면..."
일행은 경찰 호의에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졌다. 경찰에서 제공한 차량으로 대전역 맞은편 중앙 관광호텔로 자리를 옮겨 각자 방을 하나씩 제공받았다.
선잠을 깼지만 누구도 잠을 이루는 사람은 없었다. 열차가 대전에 도착한 것이 00시 05분. 지금이 01시 40분이니까 그 동안 1시간 35분이나 지났다. 이민우 형사와 열차 승무원이 무엇인가 열심히 의견을 나누며 메모도 하고 시계도 들여다 보았다.
이 때 구내 전화가 따르릉 울려 왔다.
"이 형사님 여기 정문인데요. 서울에서 수사 본부 사람들이 내려 오셨습니다."
"알았어."
이민우 형사는 수화기를 놓고 건물 현관 쪽으로 뛰어나갔다.
현관마당에는 마크V에서 서너 명의 사람이 내려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담당이십니까? 서울 특별수사반 박문호라고 합니다."
"이거 밤중에 내려오시느라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민웁니다."
문호는 이 형사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새로 지은 청사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내부 분위기도 산뜻하게 보였다.
"저, 과장님이십니다. 이쪽은 서울 수사반에서 오신 박문호 씨이구요"
이 형사는 박문호와 자기 과장을 소개시켜 주고 의자를 당겨 두 사람 옆에 앉았다. 과장이 담배를 꺼내 권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문호가 과장과 이 형사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일단 자리를 옳기시죠. 지금 중앙 관광호텔에 참고인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대구에서 내리셔야 할 신부님 한 분과 부산에서 내리실 분 세 분이 계시는데 빨리 참고진술을 받고 돌려보내 드려야 하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그분들께 폐를 끼쳐 드리면 안돼죠. 빨리 그곳으로 갑시다."
문호는 이민우 형사를 앞세워 목격자들이 투숙하고 있는 호텔로 향했다. 대전의 밤거리는 지방도시답게 비교적 조용하였다. 일없이 배회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밤새워 영업하는 술집도 눈에 띄지 않았다. 작은 건물들이 고만고만하게 어깨를 맞대고 서있었다.
대전 중앙 관광호텔은 대전의 명성에 비견할 만큼 훌륭한 호텔이었다. 수퍼마켓과 나이트 클럽이 한 건물을 점유하여 쓰고 있었다. 문호는 작은 홀로 안내되었다, 호텔측에서 준비했는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고 웨이터가 커피를 준비하고 있었다. 몇 개의 편안한 의자가 테이블을 중심으로 잘 정돈된 채 나란히 준비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이민우 형사가 들려 준 사건의 대략적인 경위를 생각하며 볼펜과 백지를 테이블을 위에 올려 놓고 참고 진술인들의 증언을 들을 준비를 하는 동안 호텔 종업원은 각 방에 연락하여 사람들이 모이도록 했다.
"밤늦도록 죄송합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사건이라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사건 내용이야 여러분들도 아시는 바와 같고 또 사건 자체가 너무 기묘해서 경찰측인 저희들로서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정하게 정지된 지역에서 난 사고라면 여러 각도에서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 볼 수도 있겠는데 시속 120Km로 달리는 열차 속에서 시체만 발견되었기 때문에 범인 목격자인 여러분들의 증언을 토대로 수사를 진행할 방법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민우 형사가 참고진술인들에게 조리 있고 설득력 있는 인사말을 한 후 박문호 형사에게 다음 일을 맡겼다.
문호는 한 사람 한 사람 바라보며, 마치 얼굴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아 읽으려는 듯 눈빛을 밝혔다.
"감사합니다. 특별 수사 본부 박문호 형삽니다. 지금 막 서울에서 달려왔습니다. 이미 여러분들께서도 아시다시피 피살자는 유명한 탤런트이고 범인은 열차 속에서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범인을 목격하신 분들은 여기 계신 여러분과 승무원 한 분뿐입니다. 되도록 자세하고 확실하게 보신 대로 말씀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느 분이든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먼저 말씀 드리지요."
들고 있던 작은 여행용 가방을 옆으로 밀어넣고 나선 사람은 범인이 타고 있던 03-03호의 바로 맞은편 03-15에 타고 있던 영감이었다.
"부산에 일이 좀 있어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마침 사고가 난 침대 맞은편에 제가 있었죠. 서울을 떠난 지 한 십분이나 되었을까요. 맞은편 침대에 있는 사람이 잠이 오지 않는지 부스럭거리다가는 제 침대 커튼을 열고는 얼굴을 들이밀며 담뱃불을 빌려 달라더군요. 아주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습니다. 몸은 크고 건장한데 얼굴이 좀...아무튼 두 눈동자가 매섭게 생기고 좀 인상이 험악해 보이..."
"어? 그게 아닌데."
영감의 말을 듣고 있던 열차 승무원과 베이지색 바바리의 여인이 동시에 눈이 휘둥그래지며 영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이번에는 문호와 이민우 형사가 영문을 몰라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아녜요, 두 눈동자가 매섭다뇨..."
베이지색 바바리의 여인이 손을 좌우로 흔들며 영감을 향해 말을 꺼냈다.
"제가요... 음, 화장실을 가려고... 저는 03-19호에 타고 있었거든요. 화장실을 가려면 그 침대 앞을 통과해야 했어요. 그런데 그 사라졌던 사람의 칸 앞에서 그만 실수로 그 사람이 벗어놓은 신발을 밟아 버렸거든요. 그래서 그 신발을 밀어놓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머리를 돌리는데... 글세... 어휴, 인상이 얼마나 소름이 끼칠 정도로 어찌나 무서웠던지 기겁을 하고 되돌아갔죠. 그래도 무서워서 위층 이분한테 갔어요. 올라가서 그 얘길 했더니 남의 속도 모르고 웃더니, 그럼 2호차 화장실을 쓰라고 해서 그쪽을 사용하고 왔죠. 얼굴이 너무 무서웠어요. 아이 끔찍해. 그런데 이제 보니 그 자식이 고강진씨 살해범이잖아요. 할아버지는 잘못 보신 거예요. 두 눈이 날카롭다뇨. 어휴, 애꾸에 그 인상하고는..."
하며 옆 사내의 팔을 잡았다.
"어? 그럼 이상한데?"
이번에는 범인을 잠깐 보았다는 신부가 나섰다.
"저는 03-17호에 타고 있었거든요. 그 침대와는 대각선으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잠깐이긴 하지만 비교적 자세히 본 셈이에요. 제가 승차해서 표를 승무원에게 넘겨 주고 짐을 챙긴 다음 침대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데 열차가 떠나기 직전에 이 문제의 사나이가 커다란 가방을 메고 올라왔어요. 처음엔 자세히 못 봤는데 가방을 안에다 밀어넣고는 잠시 후 제가 하듯 그 사람도 침대에 걸터앉아 쉬고 있었는데, 글쎄요... 제 기억으로는 눈이 멀쩡한 것 같았어요. 만일 눈동자가 이상하다면 제가 못 볼 리가 없죠. 그 후론 저도 죽 잠을 잤는데 대전이 가까와서 소란스러운 말소리에 잠이 깬 거죠... 글쎄요, 그런데 확실히는 모르죠. 모든 사람이 다 까만 눈동자를 갖고 있게 마련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본게 착각을 일으켰는지. 글쎄... 그게."
"잘들 좀 기억해 주십시오. 범인이 애꾼지 아닌지 수사상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니깐요. 물론 어두운 열차에서 모든 사물을 정확하게 보고 기억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허지만 이건..."
"사라진 사람이 애꾸인 건 확실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보담두..."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아닙니다, 절대..."
승무원의 말을 가로챈 영감이 정색을 하며 나섰다.
"내 눈은 절대 확실합니다. 그는 바로 내 앞에 얼굴을 내밀고 담뱃불을 붙여달라고 했습니다, 내가 라이터로 불을 붙여 준 다음 그 사람과 몇 마디 얘기까지 나누었는데요 뭘. 그는 절대 애꾸는 아니었습니다."
"허 참, 영감님도 답답하십니다, 영감님은 잘못 보신 거예요. 제가 그 사람의 승차권을 회수하려고 얼굴을 들여다보았을 때 분명히 왼쪽 눈동자가 없는 애꾸였어요. 애꾸일 뿐 아니라 얼굴이 아까... 저 아가씨 말대로 얼마나 음산하고 무서웠다구요. 기분이 나빠 얼른 돌아섰죠. 정말 기분 나쁜 얼굴이었습니다."
승무원은 턱도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문호는 이렇다저렇다는 의견 한 마디 없이 진술 하나하나를 열심히 메모하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지금까지의 증언을 토대로 한다면 사라진 사람은 애꾸가 틀림없습니다. 두 사람이나 얼굴을 보고 놀랐다면 죄송하지만 신부님이나 영감님은 아무래도 눈동자에 관심없이 그냥 지나치신게 틀림없을 겁니다. 애꾸를 애꾸가 아닌 것으로 지나쳐 볼수는 있어도 애꾸가 아닌 것을 애꾸로 착각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다음 그 사라진 범인을 최후로 목격하신 것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기억나는 대로..."
신부와 영감과 승무원은 서울을 출발할 때 부딪치고는 이후 얼굴은 못 보았다고 했다. 이때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인이 신부를 흘낏 쳐다보고는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저는 화장실을 갔다와서는 이내 잠이 들었죠. 그런데 얼만가 시간이 지났을 무렵 덜컹 하고 진동이 왔어요. 잠이 깨서 잠깐 누워 있다가 차가 다시 출발할 때쯤 시선이 우연히도 그 이상한 침대의 사내가 있는 쪽으로 갔어요. 그런데 거기서 담배 연기가 커튼 사이로 빠져나오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차가 떠날 때 그 사람은 분명히 거기 있었어요."
노인도 승무원도 신부도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턱을 괴고 가만히 앉아 있던 승무원이 탁자를 툭치며 문호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대전에 도착하기 25분 전에도 침대에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보관하고 있는 승객의 승차권을 목적지에 닿기 10분 전에 승객에게 되돌려 줍니다. 이 열차가 대전에 도착하는 시간은 00시 05분이거든요. 제가 자정 25분 전에 한 바퀴 순찰을 돌았습니다. 왜냐하면 대전에서 내려야 할 승객이 사라진 애꾸 외에도 두 사람이나 더 있었거든요, 세 분의 동정을 살펴보려고 돌고 있을 때 분명히 03-03 침대 밑에는 구두가 있었습니다. 한 7,8m 전방에서 신발이 있는 걸 확인했죠. 불도 꺼져 있는지 깜깜하고 해서 잠을 자고 있나 보다 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표를 체크해서 뽑아놓고 담배를 한대 피우고 나니 대전 도착 15분 전이 되었어요. 천천히 일어나서 표를 되돌려 주려고 3호차부터 갔는데 신발이 없어서 커튼을 열어보니까 사람까지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그 애꾸는 밤 11시 35분부터 45분 사이에 없어진 것입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가 애꾸냐 아니냐 이게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이놈이 십 분 동안에 어디로 꺼졌느냐 이겁니다. 침대엔 가방만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참나 기가 차서..."
문호는 장황하게 설명하는 승무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혹시 창문으로 탈출할 가능성은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창문은 구조상 사람이 드나들 면적이 못됩니다. 난장이라면 몰라도 말입니다. 그 큰 덩치로... 더구나..."
"그렇다면 열차 내에 어딘가 숨어 있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
문호가 승무원을 의아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승무원은 어깨를 으쓱하며 두 손을 펴보였다
"제가 가보지 않은 곳은 화장실 한 곳뿐이였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표를 주려고 03호 침대 앞에 막 도착했을 때 이 영감님이 화장실에서 용변을 마친 후 나오고 있었거든요. 그러니 들어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승강대며 침대며 손님이 있건 없건 모든 구석구석 깡그리 뒤져보았습니다. 그러나 애꾸는 어디서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대전에서 열차가 멈추고 경찰이 올 때까지 어느 누구도 출입을 못하도록 문을 닫아놓았죠. 경찰이도착한 후 저희들과 합동해서 또 찾아봤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열차가 멈춰 있는 상태라면 범인이 어디론가 도망쳤다고도 할수 있겠지만 그 때 열차는 최고 속력으로 달리고 있을 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그러니까 최고의 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열차 내에서 10분만에 연기처럼 사라진 것입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사실이 하나하나 밝혀지자 형사들은 물론 승객들까지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열차밖에 매달려 몸을 숨긴다는 것은 구조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승무원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또 열차 내에 숨어 있는다고 해도 일반 객차와는 분리되어 있는 침대차 1, 2, 3호차에 국한된다. 특히 대전에 도착할 시간이면 1, 3호차 승강구에는 승객에게 서비스하기 위해 승무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물론 양 출구에도 언제나 승무원이 대기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사무실에 드나들거나 쉬기 위해서 자리를 비우기도 한다. 열차가 서울을 떠나 대전에 도착하기 전에 내릴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미 승차권을 수거한 승무원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대전 도착 30분 전까지는 비교적 자유스럽고 편히 쉴 수 있었다. 오늘도 어느 날과 마찬가지로 천안 하차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범인이 대전 도착 직전까지 차내에 있었다는 것도 승무원과 승객에 의하여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시속 120Km로 달리고 있는 초고속 열차에서 범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범인이 여기서 뛰어 내린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대전역을 기점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25분 거리, 그 철로의 주변에 범인으로 지목된 애꾸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완전히 불가사의한 사태로 돌변하게 되는 것이다.
10분, 그 10분의 짧은 시간에 달리는 열차 속에서, 그 작은 공간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발생되었기에 사람이 연기처럼 사라진단 말인가.
되는 대로 떠들어대던 승객들과 승무원 그리고 대전 현지 경찰과 서울서 내려온 특별 수사반 요원들은 한동안 멍하니 앉아 말을 잃고 말았다.
경찰측은 일단 참고진술인들을 목적지로 되돌려 보내기로 하고 차편을 마련하려 했지만 승객들은 비로소 피로가 엄습해 오는지 호텔에서 잠을 좀더 자고 아침에 떠나겠다는 의사를 표시해 왔다.
수사진은 호텔을 떠나 대전 경찰서로 철수했다.

수사는 뒷전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황 판단마저 어려운 실정이었다. 승무원과 바바리 여인이 사라진 사람을 애꾸로 보았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진술로 보아야 했다. 그런데 왜 영감은 그가 애꾸가 아니라고 딱 잘라 단정을 했을까. 아무리 어두운 장소라고 해도 사람의 눈이 애꾸인가 아닌가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 영감은 라이터로 담뱃불까지 붙여 주었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애꾸가 침대칸의 좁은 공간에서, 그것도 초고속으로 달리는 열차 속에서 사라진 사건이다.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그는 안개 같은 사람인가?
아무래도 쉽사리 풀려갈 것 같지는 않았다. 문호는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생각에 잠기고 있었고 이민우 형사와 형사 과장은 얼굴을 찡그리고 앉아 진술인들의 기록을 살펴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형사가 꽁초를 구둣발로 밟아 뭉개며 문호를 바라보았다. 문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03시 20분. 사건 발생 후 벌써 세시간이나 지났다. 이 때 전화가 따르릉 걸려 왔다. 대기중이던 순경이 수화기를 들었다.
"네? 네? 서울이라구요. 특수반... 아 네, 지금 계십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바꿔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받던 순경이 수화기를 들고 문호를 바라본다.
"서울입니다. 전화 받으세요."
문호는 성큼성큼 걸아가 수화기를 빼앗듯 나꿔챘다.
"나 박문홉니다."
"아-- 박 선배님, 저 이승룡입니다. 고생 많으시죠."
고강진 피살 사건을 최초로 보고했던 후배 형사였다
"음, 나는 괜찮아. 그런데 무슨 일로."
"저, 서울서도 난리가 났어요."
"난리!"
"예, 새벽 1시 15분경 보고가 들어왔어요. 마포 경찰서에요. 진남포라는 조연급 탤런트가 피습을 당했어요. 지금 관할 경찰서에서 출동해서 수사중입니다. 피습자는 인근 병원에서 가료중이고요.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요. 죽은 고강진이나 진남포가 모두 S-TV의 전속 배우이고 또 비록 조연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비중이 있는 역을 맡은 배우라는 거예요."
"알았어. 고강진 피살 사건도 어차피 여기서 해결되긴 틀렸어. 내 곧 서울로 올라갈께. 시체는 앰블런스에 실어서 경찰 병원으로 옳길 테니 S--TV에도 연락해 놓으라구, 알았지."
수화기를 내려놓은 문호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그대로 떠올랐다, 하룻밤 사이에 두 사람의 탤런트가 그것도 한 방송국의 전속 배우가 같은 시간대에 당한 것이 그를 당황하게 만든 것이다.
이승룡의 말대로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서 어떤 배우가 또 당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고강진 말고 진남포라는 배우가 또 당한 모양입니다, 죽지는 않고 피습을 당한 모양인데... 다른 배우들이 또 당할까봐 걱정입니다. 고강진 살해도 서울서 이뤄진 게 분명하니 일단 저희들은 서울로 올라가겠습니다. 시체를 서울로 옮기도록 손 좀 써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수사진을 동원해서 천안부터 대전까지도 철로변도 조사 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 범인의 시체가 발견될지도 모르니까요. 또 가능하면 호텔이나 인근 여관도 검문하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문호는 대전 경찰서 형사 과장에게 협조를 구하고 과장은 노트에 일일이 메모를 하고 있었다.
"아 ! 그리고 김 형사. 김 형사는 여기 남아서 돕도록 하고, 천안, 대전 간 열차, 고속버스 시간표까지 정확히 알아놔. 밤 9시부터 새벽 3시까지, 서울, 천안, 대전 그리고 그 반대로 대전, 천안, 서울의 순서대로...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여기서 협조하도록."
문호는 수행해 온 부하 요원에게 지시하고 광장으로 나가 차에 다시 몸을 실었다.
연예인 피습 사건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좀 오래된 얘기지만 가수 N씨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객석에 있던 젊은이가 느닷없이 뛰어올라 깨진 유리병으로 얼굴을 난자하여 장기간의 수술을 요하는 상처를 입힌 일도 있었고, 또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어느 가수는 매일 밤 심야에 협박 전화를 걸어와 공포에 질린 나머지 정신 병원에 입원한 일도 있었다. 연예인사건은 이러한 가해 작용뿐 아니라 다양한 양상을 나타내기도 했다.
자기 자신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하여 위장 피습을 가하는 일도 있었고, 스스로 가십을 조작하여 언론에 흘려보내는 일도 있었다.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비단 우리 나라뿐만은 아니었다. 비틀즈로 유명한 존 레논의 피살도 아무 이유없이 자행된 사건이었고 마릴린 몬로의 자살은 아직도 확실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연예인들을 둘러싼 범죄는 때로는 냉혹한 면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원인이나 행위의 이유가 금세 밝혀지는 게 특징이기도 하다. 외국의 경우 인기 여우와 기업인 혹은 정객간에 얽힌 치정을 은폐시키기 위해 고도의 수법으로 살해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고도의 수법으로 연예계의 이제까지 쌓였던 아주 어둡고 눅눅한 비리들이 한꺼번에 터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일어났다. 죽은 고강진 배우 하나라면 치정 사건이나 인기 시샘을 낸 다른 누구의 짓이라고 쉽사리 상상할 수도 있지만 살해 직전에 목숨을 건진 진남포를 생각하면 반드시 그것만은 아닌 듯 싶기도 했다.
--고강진이란 배우는 어떤 사람이며 그 주변 인물은 어떤 사람들일까. 진남포 사건과 고강진 사건은 어떤 연결성이 있는 것일까. 혹 방송국 자체 내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방송국 대 방송국의 경쟁도, 기업 대 기업의 경쟁 못지 않게 치열하다는데 만일 이러한 경쟁이 빚은 살인과 피습 사건이라면 생각보다도 훨씬 더 크고 복잡한 사건은 아닐까. 그건 그렇고 도대체 범인은 어디로 연기처럼 사라진 것일까. 불과 10분 사이에 범인이 모습을 감추었다면 범인은 그 짧은 시간에 열차를 탈출했다는 논리인데 초고속으로 달리는 특급 열차에서 과연 범인은 어떻게 탈출할수 있었는가, 숨는다는 것도 말이 안되는 소리다. 열차 그것도 1, 2, 3호차의 한정된 침대차에서 손바닥 보듯 열차의 구조를 훤히 아는 승무원을 속이고 어디로 숨는단 말인가. 애꾸가 범인은 누구이며 그는 왜 죽어 버린 고강진을 침대에 버리고 사라졌을까. 더구나 이것은 사건의 양상으로 보아 절대 우연이나 돌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치밀한 계획하에서 짜여진 계획적 범죄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실올처럼 밀도 있는 연극을 연출해 낸 범인의 뒤에는 어떤 그림자가 버티고 있는 것일까--
서울로 돌아오는 문호의 머리는 착잡하였다, 고정된 장소에서는 그래도 면밀히 조사하고 검토하면 실올 같은 단서라도 잡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열차의 경우는 현장을 한없이 붙들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단서라고는 대형 가방과 담배 꽁초 그리고 비어 있는 속이 메마른 콜라병 하나뿐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사 방향을 잡아 야 할지 앞이 캄캄하였다.
"박 선배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앞 좌석에서 턱을 괴고 앉았던 후배 형사가 불쑥 물어왔다.
문호가 손수 지명해서 대동한 형사였다. 머리가 좋고 재치 있거나 회전이 빠른 그런 형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매우 침착하고 부드러우며 생각이 깊고 조심스러운, 한 마디로 신중파 형사로 알려진 그런 인물이었다. 날렵하고 재빠른 형사보다 이런 성격의 스타일이 이번 사건에는 훨씬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그는 D대학 경찰 행정학과 4회 졸업생. 그러니까 문호보다 4년 후배되는 동문이기도 했다.
"자넨 어떻게 생각해."
"글쎄요, 지금까지 곰곰이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고강진 사건과 진남포 사건은 별개가 아닌가 싶어요."
"어째서지?"
"물론 서울에 도착해서 수사를 해봐야 알겠지만요. 고강진은 계획적인 살인 같구요, 진남포는 우발적인 사고 같아요. 우연히도 그게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일어났기 때문에 자꾸만 연관되어 생각되어 지는데 따로 분리해 보면 진남포 사건은 그저 어쩌다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사고가 아닌가 합니다.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요. 사실 제겐 선배님이 잘 모르시는 면이 있어요. 저는..."
"뭐, 어떤 것인데. 내가 잘 모르고 있는 자네의 다른 면이..."
"별건 아니구요. 사실 저는 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요. 영화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사생활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편이에요. 사실 고강진이야 요즘에 반짝 인기를 얻은 탤런트지만요, 진남포는 어려서부터 영화계에 데뷔한, 아주 갈고 닦여진 배우거든요. 특히 진남포는 액션 배우로만 일관해 온 성격파였죠. 영화가 빛을 잃자 한동안 영화에 뜸하더니 S-TV에서 스카웃한 모양인데, 아마 이번 사건은 어디서 싸움에 휘말려 들었거나 아니면 요즘 젊은 애들이 액션 배우라니까 집적거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옛날에 유명했던 액션의 대스타들, 이를 테면 장동휘나 박노식 같은 배우들도 실제 배우이기 이전에 주먹이라면 한가닥하던 사람들이었거든요. 박노식 같은 이는 세계 챔피언이었던 황금의 왼팔이라는 김기수 선수와도 링에서 맞붙은 적이 있는 권투 선수였구요. 장동휘 씨도 인천에서 떠들썩하던 주먹이었으니깐요. 50년대에 지방 공연을 가면 이런 배우들이 영화에서만 주먹왕이지 실제야 뭐 별 볼일 있었겠느냐는 식으로 동네 건달들이 싸움을 걸어오곤 했죠. 지금 같은 세상이면 배우들이 피하죠. 인기 관리상 대들어 싸울 수도 없고 또 잘못하면 치료비 물어 주기 십상이니까요. 그러나 그 시대에는 그게 아니었어요. 건달들 중에 제일 왕초를 불러 한 방에 보내면 바로 그게 신화가 되고 인기 관리에도 도움이 되었거든요. 맞은 쪽이 깨끗이 승복하는 소위 '멋'이 있었어요. 왜 이소룡 있잖아요. 그 배우도 사실 실생활에선 많은 도전을 받았어요. 이소룡이 죽었을 때 영화 잡지에 이런 가십이 난 일도 있었죠. 한국 태권도 선수와 겨루다가 뇌에 손상을 입은 게 죽은 원인이 되었다구요. 사실 진남포도 부산에서 이름난 싸움꾼이었습니다. 이름도 말이죠, 자기가 누비던 부산의 남포동 이름을 따서 '진짜 남포동'이라 해서 '진남포'라고 예명을 바꾸고 영화계에 데뷔했죠. 그 사람 데뷔할때가 60년대 초였죠. '두만강아 잘 있거라' '안개 낀 부두' 같은 액션 영화가 판을 치던 때인데 이 무렵 액션 전문 영화사가 있었어요. 최두관이라는 분이었는데 이 사람이 부산 촬영지 물색차 갔다가 마침 자갈치 시장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골목에 이르러 진남포를 발견하고 스카웃했죠. 체격 좋고 싸움 잘하고 아직 나이 어리고... 얼굴이 좀 뭣해서 큰 빛은 못 보았어요. 워낙 한다하는 대스타들이 많기도 했구요. 자연히 조연급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한때를 풍미하던 배우였어요. 에, 제 생각에는 그 사람이 시비하는 사람들을 피하기만 하다가 당하기만 하고 만 게 아닌가 하고 추측하는 거죠."
"자넨 어떻게 그렇게 옛날 배우들의 일까지 자세히 알고 있나. 정말 내가 모르고 있던 면인데, 참고가 크게 될 것 같아. 그래 진남포하고는 아는 사인가?"
"웬걸요. 사실은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시골에서 쬐그만 영화관을 하나 경영하신 적이 있었어요. 자연 분위기가 그쪽으로 몰리게 되죠. 이것저것 영화 잡지도 많았구요. 이따금 지방 공연 오는 악극단에 배우 한두 명이 간판으로 따라와 노래 한두 곡 부르곤 했죠. 그 때 진남포도 한두 번 본 기억이 있어요."
"음... 그거 잘됐구만. 서울 가면 일을 나누자고. 난 고강진을 맡을 테니까 자넨 진남포를 맡아. 껄렁거리는 놈들 조사해서 아주 이번에 뿌릴 뽑자구. 직업상 약한 편에 있는 배우들 보호 좀 해야지... 에이, 인기인 그것도 못해 먹을 짓이야."
최찬일 형사는 어렸을 때 아버지 몰래 극장에 들어가 못생긴 진남포가 멋지게 노래 부르던 기억을 감감히 떠올렸다. 무대에서 노래 부르던 진남포는 지금 누구에겐가 피습을 당해 중태에 있고 객석에 앉아 숨어 노래를 들으며 멋지다고 생각하던 자기는 형사가 되어 범인을 잡아 주기 위해 뛴다는 것을 생각하니 사람의 인연이란 것이 참으로 신비하게만 느껴졌다. 찬일은 약간 흥분되는 가슴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차는 톨 게이트를 지나 수원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부우연 안개가 그대로 있어서 가까운 거리도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 한기가 으스르 몰려왔다. 문호는 피우던 담배를 부벼끄고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이리 뒤적 저리 뒤적하며 사건을 생각하고 있었다.
"금년엔 정신 없는 일만 생기는 구만."
혀를 쯧쯧거리며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토곡리 사건이 끝난지도 벌써 두 달이나 되었죠?"
"벌써 그렇게 되었나? 신문에서는 환상적인 살인이라고 대서 특필하였지. 처음부터 그 사건에 뛰어들었던 Q신문 민 기자가 실감 나게 썼더군. 그 친구 머리가 보통 아냐. 만약 신문 기자 그만두고 형사계로 나서면 크게 한몫 할 거야. 생각해 봐 방문이 모두 안에서 잠겨 있고 거기서 화재는 나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니 손목 잘린 시체가 발견되고, 손목은 엉뚱한데서 발견되고... 사람 환장하겠다더군. 오죽하면 신문에서 덫에 걸렸다고 '덫'이라는 제호를 대문짝 만하게 올려놨겠어. 그 사건이 터지고 두 달도 안돼 또 이런 사건이 터지니... 아니 십 분 전에 있던 애꾸, 이 자식이 도대체 어디루 어떻게 꺼졌느냐 이거야. 사람이 무슨 연기도 아니구 물도 아니구. 참 웃기는 구먼... 날이 밝으면 서울역에 가서 침대차 구조를 좀 살펴봐야겠어. 시속 120Km에서 뛰어내리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으니 어딘가 숨은 게 틀림없을 텐데. 열차 승무원이 숨은 곳을 모를 리도 없고. 그 승무원 얘기로는 숨는 것은 불가항력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건 또 그렇다치구 도대체 한 사람을 놓고 한쪽은 애꾸다, 또 한쪽은 아니다. 난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그 신부도 그렇고, 사람을 보면 제일 먼저 보는 곳이 상대방 눈동자라구.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두 사람이나 눈동자가 없는 허연 애꾸라면 틀림없는 애꾼데,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이 차 좀 세워, 빨리."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로 차를 멈추게 한 문호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뚱거리더니 기사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쯤이지? 수원 톨 게이트 바로 앞이에요."
"그래? 그럼 차를 톨 게이트에서 돌려서 빨리 대전으로 내려가 빨리. 전속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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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노인


차는 다시 대전으로 되돌아 왔다. 벌써 아침 7시가 다 되었다.
문호는 경찰서로 가지 않고 바로 중앙 관광호텔로 직행했다.
도착하자마자 당직 지배인부터 찾았다. 프론트에 있던 벨 보이들이 부석부석한 눈을 부비며 나왔다.
"지배인 어디 갔지?"
"어젯밤 홀랑 새우고 댁으로 일찍 돌아가셨어요."
"다음 책임자는 누구야?"
"전데요. 무슨 일로..."
검은 양복을 입은 종업원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어젯밤 사건 때문에 투숙한 손님들 있는 곳으로 안내 좀 해줘요"
검은 양복으로 정장한 종업원이 앞장서서 걸어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6층 버튼을 눌렀다. 증인으로 자청해서 나섰던 사람들은 잠에 떨어졌는지 문들이 꽉꽉 잠겨 있었다.
"거 제일 나이 많은 영감이 투숙하고 있는 방은 어디죠?"
"602호실이에요."
문호는 602호 방문 앞에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같은 간격으로 3, 4회나 눌러댔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깊이 잠드신 모양인데요."
종업원이 무의식적으로 도어 핸들을 비틀며 중얼거리다 말고 깜짝 놀란다. 손잡이는 힘없이 그의 손아귀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어? 문이 열려 있네. 어떻게 된 거지."
종업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호가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시트 는 사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정돈되어 있었고 테이블에 커피잔 하나 만이 덜렁 놓여 있었다. 문호는 화장실에까지 들어가 확인해 보았다. 치약도 칫솔도 비누도 어느 것 하나 사용한 흔적 없이 그대로 있었다.
"언제 나갔지?"
"글세... 잘... 모르겠네요. 어이 미스터 김 이리 좀 와봐. 602호실 손님 언제 체크 아웃했는지 알아봐."
조금 전에 나왔던 눈이 부석부석한 벨 보이가
"저도 잘 모르겠네요. 부지배인님이 오실 때에도 박스에 키가 없었어요." 하고 대답했다.
"키? 지금은 어딨지?"
"가만 계세요. 제가 확인해 보고 올께요."
벨 보이가 프론트로 나가더니 한참 후에 나타났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프론트에도 키가 없네요."
"그래? 그럼 방을 뒤져 봐."
602호 키는 침실 베개 밑에서 나왔다, 다른 방에는 신부와 베이지 색 바바리 여인과 그의 동행자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애꾸가 아니라고 잘라 말하던 노인만이 호텔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짐작은 했지. 아직 단정을 할 수 없지만 애꾸가 사라진 것은 논리 적으로 성립이 돼. 아직 가정이긴 하지만..."
"어떤..."
최찬일이 호기심이 가는지 옆으로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자, 이왕에 노인은 놓친 거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자구. 가만 있자 노인의 연락처가 어디더라. 주소는 주민등록증 보고 제대로 기록해 놓았겠지?"
노인을 놓친 게 억울한 듯 주먹으로 벽을 쾅쾅 쥐어박던 문호가 호텔광장으로 되돌아가 차를 다시 서울로 몰았다. 차 속에서 한 마디 도 않고 있던 문호가 머리를 끄덕끄덕하더니 그대로 잠에 떨어졌다.
서울은 아침 햇살에 안개가 말끔히 가셔져 있었다.

아침 수사 회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문호는 사무실과 가까이 있는 '아람 다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Q신문 사회부 차장 민형규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 소위 '덫'으로 알려진 토곡리 밀실 살인 사건때 해결의 큰 역할을 맡아 주었던 장본인이었다. 민형규는 신당동에 있는 경찰 병원에서 사진 기자와 함께 고강진 사건 을 취재하고 막바로 문호에게 달려온 것이다.
"금년에 이거 왜 이러지. 힘들어 어디 해먹겠어?"
문호가 투덜거리며 형규와 마주 앉았다.
"아까 병원에서 잠깐 얘기 들었어. 고생 했더군. 그런데 왜 좀 일찍 연락하지 않았어? 놓쳤잖아. 특종감인데."
"너 특종 다섯 개 얻으면 장가간다고 그랬지. 지난번 '덫'사건으로 세개 채우고 두개 더 채워서 장가가면 내가 심심해서 어떻게 살아."
"약 올리지마. 잠깐, 나 얼른 신문사에 가서 기사 만들어 놓고 올테니 같이 좀 뛰지. 어때."
"좋아, 지금 9시 30분이지. 그럼 11시까지 서울역장실로 나와. 나 거기 있을 거니까. 그런데 이번 사건 의외로 좀 복잡해. 이게 말야... 아냐. 이따가 만나서 얘기하지. 지금 바쁘니까."
"그럼 11시 서울역장실에서..."
문호와 형규는 다방 앞에서 헤어졌다. 문호는 터덜터덜 걸으며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서도, 어떤 사건에서도 숨쉬는 사람들간에 일어난 사건이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 일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사람의 능력으로 추리할 수 없는 불가해한 일도 그것이 과연 초자연적이고 초능력적인 사건일까 하는 점에 도달하면 그 신비에 대한 회의가 먼저 다가오곤 했다. 풀리지 않는 사건,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건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보이지 않는 질서가 물 흐르듯 질서 정연하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질서 의 서두, 그 서두만 잡히면 얽힌 실오라기가 풀리듯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풀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장 힘드는 일은 그 서두가 풀리지 않을 때였다. 처음부터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얽히고 설킨 것처럼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달리는 열차 속에서 불과 10분 동안에 사라진 사람. 그 신비만 해도 그렇다. 그가 분명히 사람이고 신발이 확실한 물체라면 어떤 물리적 작용이 일어난 사실이지 절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경우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게 '공범자' 관계였다. 공범자가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문호가 수원에서 차를 되돌려 대전으로 급히 되돌아간 이유 도 이런 가능성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대전에서 사라진 노인이 공범자로 밝혀진다면, 범인이 열차에서 사라진 방법은 간단하게 해결된다. 만일 그 노인이 공범자라고 가정한다면 사건의 서두는 보다 쉽게 풀리고 빠르게 진전될 수 있다. 그가 기록해 놓은 그의 신원이 확실하다면... 그러나 문제가 또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노인은 범인이 애꾸가 아니라고 진술했었다. 그 때문에 그가 공범자일 것으로 생각됐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런 진술 때문에 공범이 아닌 것같다는 인상도 짙게 젖어왔다. 승무원이 이미 밝혔거니와 한쪽 눈의 검은자위가 없다는 것은 누구도 식별하기 쉬운 일이다. 승무원뿐만 아니라 그 베이지색 바바리 여인도 그렇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유독 왜 그 노인만이 애꾸가 아니라고 진술했을까, 애꾸를 애꾸가 아니라고 진술했어도 뒤집혀질 일도 아니지 않는가. 만일 그가 애꾸임이 밝혀지면 자기 자신에게는 움직일 수 없는 허위 진술의 기록이 남게 된다. 만일 그 노인이 공범자라면 그런 터무니없는 진술을 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점이 그가 '공범자'라는 생각에 회의를 품게 하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그 노인은 왜 호텔에서 사라졌을까. 젊은 사람들도 밤샘을 하고 피로를 못 이겨 갈길도 마다 하고 잠에 떨어졌는데 그 노인만이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면 그 점은 또 그가 '공범자'일 가능성을 더욱 질기게 묶어 놓는 결과가 된다. 사라진 노인,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며 범인과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단순한 승객으로 착시 현상을 일으킨 것에 불과한 사람일까. 만일 그 노인이 공범자가 아니라면 범인은 그 짧은 시간에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 달리는 조그만 침대 열차칸 하나, 그것이 문호의 머리를 아프도록 때리고 있었다.

사무실 본부로 되돌아온 문호는 노트를 꺼내놓고 수사 진행에 따른 일정표를 두 장 만들어 한 장은 책상 유리 밑에 잘 보이도록 꽃아 놓고 한장은 지갑에 접어넣었다. 그리고 나서 책상에 엎드려 단잠에 빠져들었다.
아침부터 시내는 온통 고강진 피살 사건으로 들끓었다. 그것도 그럴것이 그가 가지고 태어난 미모와 연기인으로서의 확실한 재질, 거기다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는 인기가 이번 사건의 신비스러움과 결부되었으니 그 강도는 쉽사리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방송국 앞에서는 어린 여학생들과 여인들이 인산 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신문사로는 문의 전화가 빗발치듯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방송국이나 신문사가 아니고 바로 수사 당국이었다. 쉴 새 없이 걸려오는 문의 전화와 범인을 잡지 못하면 경찰서 앞에서 자살해 버리겠다는 소녀들의 협박, 경찰이 유능하다면 이럴 때 실력을 보여 주어야 할 게 아니냐는 야유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 왔다.
신문사측에서도 특집까지 준비하며 독자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려고 애쓰고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스파트 뉴스로 그의 죽음을 보도했고 경찰의 능력을 가늠해 볼 때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해 왔다. 수사진은 토곡리 사건 소위 '덫' 살인 사건 해결로 명성을 높인 박문호 형사를 중심으로 특별 수사반을 편성해서 사건 해결에 나섰다.
문호는 첫번째 조치로 만일을 대비해서 방송국 정문에 기동대를 투입시켜 정문을 봉쇄하였다.
마치 이태리의 미남 배우 발렌티노나 제임스 딘, 마릴린 몬로가 죽었을 때의 광경을 방불케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수 없는 사태였다. 이러한 사태 속에서 가장 침통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곳은 뭐니뭐니해도 바로 S-TV였다. R-TV에 언제나 눌려만 왔던 S-TV가 R- TV에게서 선두 주자의 자리를 빼앗은 것은 새로 발굴한 고강진 때문이었다. 고강진 자신도 자신의 인기 관리에 혼신의 힘을 다해왔지만 방송국측에서도 막대한 물량을 투입하여 그를 성장시켜 놓은 것이었다. 이제 그의 인기가 절정에 달해 최대한의 효과를 얻으려고 벼르던 터였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죽어 버려 S-TV로서는 본전도 못 건진 장사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고강진 자신의 죽음문제보다도 방송국 앞일이 더 걱정이 되어 임원진은 초죽음 상태가 되어 있었다. 사건에 대한 조사차 경찰에서 방문하겠다는 연락은 받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일주일 분 녹화가 끝나 금주 말까지 방영될 홈 드라마 '꿈길'은 그런 대로 커버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막대한 물량을 투입하여 제작중인 '흥남 철수 작전'이 더 큰 문제였다. 외국의 TV 용 영화 대작 '뿌리'나 '남북전쟁'에 버금가는 한국 최초의 12시간의 대하 드라마였다. 작년부터 시작된 이산가족 찾기 운동과 돌아올 6, 25를 겨냥한 대작으로 오래 전부터 기획하여 촬영하였고 이제 최종 막바지 촬영에 열을 올리고 있는 터였다. 시나리오를 개작하던가 아니면 고강진 대타로 누굴 내세워야 하는데, 문제는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이러한 당면 문제와 톱 스타를 잃은 결정적 피해가 이들을 초조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렇게 S-TV와 경찰측이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을 즈음 대전에서 문호에게로 연락이 왔다. 대전을 기점으로 천안일대의 철로 주변을 샅샅이 조사하였으나 단서가 될 만한 범인의 유품이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대전과 천안 일대의 여관이나 여인숙에도 수상한 사람이 투숙한 흔적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대전에 잔류로 남아 있던 김 형사도 12시 차편으로 상경하겠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대전으로부터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보고를 받은 문호는 시간을 맞춰 서울역으로 갔다. 미리 연락을 해놔서 그런지 담당 역원과 역장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이거 신세를 지게 돼서 죄송합니다. 협조 좀 얻으려구요."
"네, 그렇지 않아도 연락받고 준비중입니다. 거 하필이면 열차에서 그런 일이 생겨서... 저희들도 무척 당황하고 있습니다. 자 안으로 드시죠."
문호는 역장이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가 앉고 이어서 문이 열리고 잠바차림의 깨끗한 인상의 남자가 들어왔다. Q신문 사회부 차장 민형규였다. 문호는 형규와 역장을 간단히 인사시켜 주고 사건의 개요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어젯밤 9시 45분 특급 열차 개찰을 맡았던 분을 뵙고 싶은데요."
"아, 곧 올 겁니다. 아까 말씀 듣고 대기하도록 지시해 놨으니까요"
역장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문호와 형규에게 담배를 한 대씩 권했다.
"거 고강진이란 배우 인기가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죠?"
역장이 웃으며 문호를 바라보았다.
"아이구 말도 마십시오. 웬 꼬마 계집애들이 그렇게 난리를 피우는지 모르겠어요. 자기 오빠가 죽어도 그 난리는 안 피울 겁니다. 원 세상에... 경찰에 전화 걸어서 뭐라는지 아십니까? 책임지고 범인 잡아내고 만약 범인 못 잡으면 치안 국장이나 책임자가 물러나라는 거예요. 요새 애들 이렇게 당돌해요."
문호의 말을 싱글거리며 듣던 형규가 역장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경찰만 당하는 줄 아십니까. 신문사는 또 어떻구요. 10초마다 한 통씩 전화가 와요. '범인 잡았느냐' '고강진이 혹 아주 죽지는 않은 거 아니냐' '지금 시체는 어디서 보관하고 있느냐' '빨리 경찰에 압력 넣어라' 별 말 다한다구요. 일전에 말이죠. D신문사에서 K라는 바이올리니스트를 초청해서 연주회를 가진 일이 있었어요. 오랜만에구경을 갔죠.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했는데 연주가 참 기막히더군요. 바이올린이 그렇게 아름다운 선율을 내는 줄 정말 몰랐었어요. 앵콜을 다섯 번이나 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구 연주회가 끝나고 일어났어요. 바이올리니스트 K가 대기하고 있는 대기실에서 난리가 났어요. 그저 한 중3이나 고1, 2학년은 됐을까요. 여학생들이 몰려와서 발로 문을 걷어 차고 K씨 내놓으라고 아우성이었어요. 취재하려던 우리 신문사 음악 담당이 곤욕을 치룬 모양이에요. 요새 애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나이 서른을 넘은 사람보고 K씨 K씨 하며 내놓으라니 기가 차서. 뭐 어쩌겠다는 거예요, 글쎄. 고강진 때문에 난리 피우는 거 알 만해요. 아이구 역장님 혹시 그만한 따님 가지고 계시면 아예 초장부터 조져 버리시라구요."
역장과 문호와 형규는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좀 늙어보이는 듯한 사람이 들어와서 역장에게 깍듯이 절을 했다.
"자 이리 좀 앉으시죠."
역장은 방금 들어온 사람에게 의자를 권하며 두 사람에게 소개했다.
"이분이 어제 개찰을 맡았던 최씹니다. 뭐 여쭤볼 거 있으면..."
"좋습니다. 역장님은 바쁘실 테니 이분 모시고 자리를 옮기죠. 오늘 정말 여러 가지로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호와 형규는 역원과 함께 역 구내로 나갔다. 문호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으며 말을 꺼냈다.
"퇴근도 못하시고... 죄송합니다. 이거 사람도 같은 사람인데 인기인이 죽으니까 보통 난리가 아닙니다. 여쭤볼 말씀은 다름이 아니구 어젯밤 9시 45분 침대 특급 열차 개찰할 때 혹 특별한 사람 기억이 나는가 해서요. 가령 애꾸라든가 아니면 좀..."
"애꾸요?"
옆에서 묵묵히 따라오던 역원이 깜짝 놀라며 우뚝 서 버렸다.
"뭐 기억에 남을 만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문호가 긴장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 있었습니다. 어휴. 어제... 개찰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는데, 그 때가 9시 38분이나 40분은 족히 됐을 겁니다. 돌아갈까 어쩔까 망설이며 시계를 보고 있는데 웬 사람이 침대 차표를 불쑥 내밀었어요. 표에 구멍을 뚫어 검표를 하고 돌려 주는 순간 얼굴을 보았는데 전 그만 깜짝 놀랐어요. 왼쪽 검은 자위가 없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얼굴 전체 분위기가 어찌나 무시무시하고 음산하던지 소름이 쭉 끼칠 정도였으니까요. 그 사람 커다란 가방을 질질 끌고 나가는데 힘이 무척 강해 보였습니다. 아무튼 기분도 나쁘고 해서 서둘러 일을 끝냈죠."
"분명히 한쪽 눈이... 아니 왼쪽 눈이라고 하셨죠. 검은자위 없는 게.
"네 틀림없었어요. 왼쪽 눈이 그냥 하앴으니까요."
"나이는 어느 정도나 되어 보였습니까?"
"글쎄요, 한 사십 사오 세?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다른 특별한 특징은..."
"글쎄요... 다른 특징은 잘 모르겠어요. 워낙 엉겹결에 놀라 버려서, 그저 힘 좀 세어 보이고 어깨가 딱 벌어지구 얼굴이 험상궂다는 것 외에는..."
"감사합니다. 그리고..."
잠깐 서서 생각에 잠기던 문호는 다시 역원을 바라보며 "잠깐, 그 침대 열차 구조 좀 살펴보고 싶은데 볼 수 있습니까?"
"그야 어렵지 않죠, 마침 어젯밤 부산에서 올라와 정비 점검중인 차량이 있으니까요."
역원은 형규와 문호를 안내하며 앞장 서서 걸었다. 형규가 문호를 툭치며 이상하다는 듯 질문을 던져왔다.
"이봐, 저 사람도 범인이 애꾸라고 하지 않아. 어젯밤 승무원도 애꾸라고 했고 또 한 사람도 그렇게 봤다고 했고. 그런데 왜 그 없어진 노인만이 애꾸가 아니라고 했을까. 난 아까 저 개찰 역원이 말했을때 말야, 그 사람이 애꾸라고... 그 때 난 말야, 없어진 그 노인이 혹시 공범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 어때 문호는 어떻게 생각해."
"음, 그 문제 때문에 나도 생각중이야. 그 용의자가 애꾸라는 건 이젠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지만 말야. 그 영감이 진술한 바에 따르면 두 눈이 예리하고 날카롭게 생겼다고 했거든. 아주 무시무시할 만큼 말야. 그 사람이 공범자가 사실이라면 용의자를 감추는데 도움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구태여 애꾸가 아니라고 진술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모든 사람이 다 애꾸라고 밝히고 있는데 자기만 아니라고 주장하면 자기가 주목을 받을게 뻔한 이칠 텐데.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공범자가 아닌 것도 같고 또 범인이 연기처럼 사라진 점을 생각하면 그 노인밖에는 더 혐의가 가는 사람이 없구 말야... 거기다가 그 노인만이 대전에서 또 어디론가 사라졌단 말야."
이야기하며 걷는 동안 그들은 침대차 내부로 안내되었다. 어젯밤 부산으로 내려간 침대차와 내부 구조가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했다.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단조로웠다. 복도를 중심으로 좌우로 침대칸이 있는데 한 칸은 상하로 다시 나뉘어 있어 2층 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한쪽편이 6명씩 그러니까 상하 12명이 승차할수 있었다.
문호는 침대차의 내부를 도면으로 그려서 주머니에 넣고 따라온 역원을 돌려보냈다. 둘만이 열차 복도에서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봐, 형규 이 도면을 잘 보라고. 내가 대전에서 올라오다가 생각한건데. 만일 말야, 이건 물론 어디까지나 가상이야. 그러니까, 가상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얘기를 들어 보라구."
문호는 연필을 꺼내어 도면에 그림까지 그려 가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넌 아직 상황이 투명하게 이해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의 상황 설명을 잘 들어봐. 그 애꾸라는 자가 고강진 시체가 들어 있는 대형 가방을 들고 승차하기 전에 제일 먼저 얼굴을 본 사람이 이 개찰원. 아까 그 사람이고, 다음이 03호 차량에서 일하던 승무원이 두번째 목격자. 그 사람은 침대 차표를 인수할 때 목격했지. 그리고 애꾸의 바로 맞은편 03-15에 승차했다가 대전에서 사라진 노인이 세번째 목격자. 그리고 신부가 네번째 목격자. 베이지색 바바리를 입고 있던 여인이 다섯번째 목격자란 말야. 그러니까 자, A가 개찰 역원, B가 03 침대차승무원,C가 03-15노인, D가 신부, E가 베이지색 바바리 여인인 것이야. 이렇게 다섯 명이 모두 목격자로 밝혀졌는데 A가 개찰할 때 애꾸를 보고 섬ㅉ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지. 그리고 B가 표를 인수할 때 역시 그랬고, 다음 C는 애꾸가 담뱃불을 빌려 달라고 했을 때 두 눈동자가 멀쩡하다고 했지. 다음 D신부. 신부는 애꾸가 아닌 것 같지만 확실히는 못 보았다고 했으니까 예외로 치구. 다음이 E의 바바리 여인. 이 사람도 애꾸를 보고 섬ㅉ하여 놀라서 되돌아갈 정도라고 진술했지. 그 여자는 애꾸의 신발을 밟고 사과하려고 머리를 돌리다가 봤다거든. 이 모든게 수원도 미처 도착하기 전의 일이란 말야, 그리고 열차가 다음 역인 천안에 도착했지. 거기서 머문 시간은 2, 3분밖에 되지 않았어. 침대차에는 더구나 천안 하차를 위해 침대차를 이용한 사람도 없었고, 한번 더 확인할 필요는 있겠지만 이 때 침대 열차 승객은 100%깊은 수면에 빠져 있을 시간이거든. 승무원이 이 시간에 순찰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 있는 거야. 열차가 잠시 멈췄다가 덜컹하며 출발할 때 잠에서 깨어난 게 바로 E의 베이지색 바바리 여인이었어. 이 여자는 서울서 출발할 때 화장실 가려다 애꾸를 보고는 놀라서 침대로 되돌아갔다가 2호 차량 화장실을 이용하고 되돌아왔지. 잠에서 깬 E의 여인이 무심코 통로를 내다보다가 애꾸의 자리에서 시선이 멈춘 거야. 그 때 그 침대 커튼 사이에서는 담배 연기가 빠져 나오고 있었다거든. 열차가 출발한 뒤였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범인은 침대 속에 누워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는 결론이야. 애꾸가 있었다는 얘기지. 그 다음 승무원 B가 밤 11시 35분에 대전 하차 승객을 점검하기 위해 순찰을 돌았거든. 02-14호의 장교, 01-07호의 임신부 한 명, 그리고 03-03의 문제의 애꾸, 이렇게 세 사람의 동태를 살피려고 순찰을 돌면서 보니까 세 사람 침대 밑에 구두가 다 있었다는 거야. 그러니까 밤 11시 35분에도 애꾸는 있었다는 얘기가 되거든."
말을 잠시 멈추고 생각에 잠기던 문호가 형규의 어깨를 탁 쳤다.
"이봐,형규. 나 담배 하나 줘."
형규가 문호를 흘깃 쳐다보고는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주었다.
"자네 지금 누구 바라봤어?"
"싱겁긴, 너 쳐다봤지 누굴 쳐다봐."
"어딜 봤어?"
"갈수록 태산이군. 네 얼굴 봤다, 왜?"
"그렇지? 그런데 그 담뱃불 빌려준 노인이 03-03사내의 얼굴을 못봤다고는 할 수 없겠지. 더구나 그 거리에서 그의 눈동자를 못봤다는 것도 말이 안돼."
"그야 그렇지."
"자, 그럼 지금부터는 그 대전에서 사라진 노인 얘기야. 들어봐. 아까 말하던 상황의 연속이야. 그 승무원이 10분 후에 대전 하차 손님 표를 꺼내서 되돌려 주려고 03-03침대로 가는 순간 C의 03-15의 영감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을 봤단 말야. 정면으로 얼굴이 마주친 거지. 그리고 둘이서 인사를 나누었지. 그리고 03-03 침대 밑을 보니까 조금 전에도 보았던 그의 구두가 없어진 거야. 커튼을 열어 보니까 구두뿐 아니라 사람까지도 연기처럼 사라진 뒤였지. 깜짝 놀란 승무원이 방금 노인이 나온 화장실만 빼고는 다 뒤져본 거야. 그러나 애꾸는 연기처럼 열차에서 사라졌다 이거지. 형규, 너 뭐 생각나는 거 없어?"
문호의 이야기를 열심히 메모하며 듣고 있던 형규가 갑자기얼굴을 들어 문호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아하, 그렇구나."
하고는 이번에는 문호를 이끌고 열차 03호 화장실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호, 난 말야 내 생각이 자네 생각과 일치하는지 일치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는 없어. 그러나 자네 생각의 근사치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말할 테니 들어봐."
형규는 화장실 벽에 기대어서서 지금까지 문호가 들려 준 상황을 종합하여 사라진 애꾸의 미스터리를 추리하기 시작했다.
"마술사들이 상자 속에 든 사람을 없앤다는 얘기나 실제의 마술을 본 일이 있어.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사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관객의 눈을 환각에 젖도록 교묘히 만드는 트릭이거든. 트릭이란 알고 보면 언제나 장난 같은 짓에 불과해. 소위 '덫'으로 알려진 토곡리 살인 사건만 해도 그래. 문이 모두 안에서 잠겨져 있고 그 안에서 화재가 나고, 그래서 사람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니 손목 없는 시체가 발견되고, 손목은 밖에서 발견되고, 얼마나 신비롭게 보였어. 그러나 알고 보니 장난 같은 트릭에 불과했잖아. 이것도 마찬가지야. 눈이나 귀라고 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믿을 만한게 못돼. 더구나 눈이나 귀는 감상에 무척 약하거든. 직관에 의한 판단 능력, 눈이나 귀의 힘은 결코 사고력에 미치지 못해. 그게 이 사건의 포인트 같애. 더구나 사람이 공포에 싸이게 되면 사고력이 형편없이 둔화되거든. 소위 이성을 잃는 거지. 사람의 커다란 약점이기도 하지만. 다시 말해서 마술사가 사람이 들어 있는 상자를 순식간에 텅빈 상자로 만들었을 때 눈은 환각이라는 트릭에 걸려들게 돼. 사람, 그 상자 속의 사람이 어디로 어떻게 빠져나갔을까 어떻게 우리의 눈을 속였을까 하는 사고력은 어디론가 증발해 버리고, 사라진 자체에만 놀라는 거지. 그 환각에 마취되어 버린 거야. 마술이 끝나면 사람들이 먼저 보이는 제일의 반응은 박수야. 떠나갈 듯한 박수.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는 순간이지. 그 다음엔 뭐가 오는지 알아? 혼란이야 혼란. 이성을 잃은 증거로 나타나는 혼란의 증거로 수군거리는 양상을 나타내지. '어떻게 된 거지' '아, 놀랍다' '기가 막히다' 하고 놀라기는 하면서도 왜 그럴까 하고 사고할 생각은 없는 거야.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아낼 수 있는 원리, 즉 공포는 감성을 앞세워 이성을 잃게 한다는 원리를 생각하면 애꾸가 10분 동안에 사라진 원리는 너무 간단해. 그 노인이 애꾸의 '공범자'라는 가정하에서이긴 하지만."
문호는 형규의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신문 기자다운 아주 냉정하고 적절한 표현이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결국, 애꾸는 사라진 게 아니었어. 알겠지 문호, 그 노인이 장난한 거야. 노인은 복도에서 최초의 순찰을 마치고 돌아간 승무원이 사무실에 있는 동안 애꾸를 불러내어 화장실에 피신시켜 놓고 자기도 화장실에 같이 있다가 승무원이 다시 나오는 시간에 맞춰 자기 자신이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음을 승무원에게 보여준거야. 그러니까 승무원이 03-03의 침대 커튼을 열었을 때 애꾸는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지. 승무원은 놀랄 수밖에 없고 이 때부터 승무원은 사고력과 이성을 잃은 것이지. 그가 만일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면 노인이 방금 나온 그 화장실을 뒤져보았을 거야. 그러나 그 상황에서 그걸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지. 지금 여기서 우리가 곰곰이 생각하니까 그렇지 그 상황에서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지. 그 애꾸야 적당한 기회에 화장실 옆에 있는 승강구를이용해서 탈출하면 그만이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범인이 열차 내에서 10분 만에 연기처럼 사라진 원리가 해명되지 않겠어?"
"맞아, 내가 생각한 점이 바로 그거였어. 내가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오다 말고 다시 대전으로 내려간 이유가 바로 그 점이었거든. 그런데 그 노인은 대전 중앙 관광호텔에서 일찌감치 사라져 버린 뒤였어. 그가 '공범자'였으리라는 가능성을 지금 형규가 추리한 바탕 위에 결정적인 짙은 색깔로 채색한 셈이 되지. 아주 완벽하게 완성시킨 거야. 젊은 사람들도 지쳐서 잠에 떨어졌는데 노인이 침대에 한번도 눕지 않고 사라졌다는 것은 스스로 공범자임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지. 또 그밖에는 애꾸가 사라질 방법이 없어. 나도 인간에게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아.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완벽한 추리를 무너뜨릴 가능성이 1%정도는 남아 있어. 그게 좀 마음에 걸려. 만일 우리가 믿고 있는 99%의 이 가능성이 1%의 논리로 깨져 버린다면 나는 인간의 초자연적 힘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없어. 최후 절망을 맛보는 거지."
"뭔데 ? 1%의 논리라는 게."
"그건 말야... 믿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거야."
갑자기 힘이 빠지는지 문호는 침대차 03-03에 털썩 주저 물러앉았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던 그가 깜짝 놀라 다시 담배를 꼬나 물었다. 정신 없이 뭔가를 생각하다가 담배를 거꾸로 입에 물었고 필터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99%의 가능성을 무너뜨리는 1%의 논리, 그것은 사라진 03-15의 노인이 공범자가 아님이 밝혀졌을 경우야."
그 말에 형규도 더 할 말이 없었다. 논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 노인은 절대 공범자이어야 했다. 그러나 아직 그가 공범자라는 확증은 없다. 더구나 그가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이 애꾸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한 점이 1%의 논리에 더욱 힘있는 뒷받침이 돼 주고 있다. 애꾸를 애꾸가 아니라고 우기는 데는 그가 잘못 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밀고 나가는 우직함이 포함되어 있었다. 만일 그가 공범자라면 그런 서투른 증언을 할 리가 없었다.
만일 그가 수사의 혼선을 빚기 위해 허위 진술을 한 것이라면 몰라도. 그러나 또 그가 허위 진술을 했다면 자기가 제공한 자기의 집 주소가 엉터리일 것이다. 둘 중 하나는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그 노인 신원은 파악돼 있어?"
형규가 약간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주민등록증 보고 주소를 적어놨다니 틀림없겠지. 대전 이민우 형사가 받아놓은 것이니까."
"확인 아직 못했지?"
"조사하라고 지시해 놨어. 서울 사람이니까 저녁이면 다 알게 될 거야."
"좋아 그 때까지 기다려 보는 수밖에. 어때, 승차원 발매소에 가지 않겠어?"
형규와 문호는 다시 승차원 발매소로 자리를 옮겼다. 많은 사람들이 서류를 만지기도 하고 또 승차권을 쌓아놓고 지역별로 묶기도 한다. 문호가 용건을 말하자 계장이라는 사람이 안내했다.
"죄송합니다. 용건이 좀 있어서요. 어젯밤 9시 45분 경부선 특급 열차 중 침대차 발매분에 대해 조사 좀 하려고 합니다. 협조를 부탁 드립니다."
"역장님한테서 각 부서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수사에 최대한협조하라구요. 그건 금방 뽑을 수 있습니다. 요새는 컴퓨터화되어 있기 때문에 뭐 특별히 뽑고 자시고 할 것도 없죠."
계장은 어느 캐비닛을 열어 한 묶음의 종이를 가져왔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표를 정리하면서 125편의 침대 차표를 1, 2, 3 호차로 구분하여 가져 왔다.
"한 칸에 24명, 어제 당일 세칸이 운행됐으니까 72명이 정원입니다, 그런데 어젯밤 승객은 42명뿐이었습니다. 1호차에 18명, 2호차에 13명, 3호차에 11명이었습니다."
문호는 03-03 즉 애꾸가 구입해 간 문제의 승차권 카피를 찾아냈다. 그리고 나머지 승차권도 일일이 조사했다. 대전이 3명, 대구가 10명, 부산이 29명이었다. 행선지가 모두 일목 요연하게 보였다. 예상대로 서울-천안 승객은 한 명도 없었다. 형규는 애꾸가 구입했던 승차권의 카피를 보며 계장에게 물었다.
"이 승차권의 발매 번호를 보아 이건 하루 전에 예매한 게 틀림없군요. 다른 것보다 번호가 훨씬 빠른 걸 보니."
"그렇습니까? 어디 좀 봅시다."
계장은 42매의 승차권 카피를 되돌려 받아 죽 훑어보고는
"맞습니다. 이것 하나만 예매를 했군요. 왜 이랬을까."
하며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어째서 그랬을까요. 요즈음... 최근 침대 차표 발매 실적은 어떻습니까? 꼭 예매를 해야 할 실정이었습니까?"
"아니죠. 어제만 해도 겨우 60%를 웃돌지 않았습니까? 당일 구입해도 충분하죠. 예약 문의 전화가 와도 당일 구입해도 좋다는 어나운스를 꼭 해 드리죠. 사실 연휴나 명절 아닌 다음에는 소화량이 절대 부족입니다."
형규는 03-03 즉 3호차 3번 좌석 승차권 카피를 노트에 옮겼다.
문호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계장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계장님 그러면..."
형규가 승차권 카피를 메모하고 있는 것을 넋없이 바라보던 계장이 깜짝 놀랬다.
"아, 네네 무슨..."
"저 죄송합니다만, 이 승차권만이 하루 전에 예매된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표를 판매한 사람은 혹 이 표를 구입해간 사람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잠시 만나 볼 수 있을까요?"
"네, 그저께 근무했으니까 어제 비번이고 오늘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리로 가실까요?"
계장이 먼저 일어났다. 승차권 판매원을 만나봐야 특별히 참고 될 만한 것은 없겠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한 마디라도 더 듣고 싶은 심정이 솟구친 것이다. 그리고 문호가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것은 03-15 즉 대전서 사라진 노인이 구입한 승차권은 애꾸와 마주 앉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배제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주도 면밀하게 계획한다고 해도 실수나 허점은 있게 마련이다. 만일 03-03표를 구입한 것이 노인이라면, 노인과 애꾸의 관계를 맺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꿈같은 기대는 역시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판매원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학생이 구입해 갔다는 것이다.
애꾸의 친척이거나 지나가는 학생 돈 몇 푼 주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여기서 그것을 더 이상 추적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선 방송국 방문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고강진의 검시 결과도 궁금했다. 침대 열차의 구조 파악은 세밀하게 조사해서 끝냈다.
그러나 무슨 단서가 되거나 가능성을 제시해 볼 방법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남아 있는 마지막 열쇠는 사라진 노인의 정체를 밝히는 일 뿐이었다. 과연 그는 공범자인가 아닌가. 그 결과에 따라 모든 사건 의 실마리가 풀어지게 마련이었다, 주민등록증을 보고 기재했다고는 하나, 그 와중에 사진까지 확인해서 기록했는지 아니면 불러 주는 대로 받아 쓴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대전 이민우 형사에게서 받아온 노인의 주소에 성기준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지 않는다면 이 사건은 장기화되던가 아니면 아주 완전 범죄로 처리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문호는 입술이 말라가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가장 어려울 때 신문기자라는 입장을 떠나서 자기를 도와 주었던 민형규. 대학 동창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이런 미궁 같은 사건이 발생될 때마다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 준 형규를 대전까지 데리고 가지 못한 게 몹시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상사의 눈초리도 어쩔 수 없어 그를 떼어놓았던 것이다.
서울역 구내 다방에 들어가 몸을 녹이며 형규와 문호는 똑같이 공범혐의를 가지고 있는 성기준 씨에 대해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형규가 입을 열었다.
"문호, 다음 수사 방향은 어디다 초점을 마출 거야. 이거 노인만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 사실 그 노인의 주소가 확실해도 문제는 있어."
"음... 나도 지금 그 생각 중이야. 문제는 바로 그거야. 네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거. 주소가 확실하고 신분이 뚜렷하다면 최소한 그를 '공범자'로 볼 수는 없어 이런 커다란 살인 사건에 소위 공범자라는 자가 자기 주소를 경찰에 제공하겠어? 마치 날 잡아가주슈 하는 식으로 말야. 지금 내가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는 게 바로 그 점이거든. 그런데 자넨 어떻게 내 속을 그렇게 손바닥 보듯 훤히 읽어 ! 기분 나쁘게."
"흥, 야 네 속 하나 못읽고 어떻게 사건 기자 해먹니. 그건 그렇고 그 노인의 신분이 확실해도 걱정, 불투명해도 걱정, 이거 정말 죽겠는데..."
사실이 그랬다. 문호나 형규가 말도 못하고 서로 끙끙 앓는게 바로 이 점이었다. '사라진 노인' 만일 그 노인의 주소가 확실하고 그 거처가 분명하다면 그를 도저히 공범자로 볼 수 없는 입장이 된다. 공범자가 스스로 나서서 자기의 위치와 신분을 밝히고 목격자임을 자청해서 나서기까지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소나 신분이 확실하면 공범자로 볼 수 없을 것이다'하는 한 차원 뛰어넘은 수법을 써서 대담하게 자기를 노출시켜 경찰측의 판단을 흐리게 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고차적인 수법까지 썼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만일 그의 신분이 확실하게 드러난다면 그리고 그가 공범자가 아님이 밝혀진다면 어떻게 되나. 노인의 주소나 신분이 확실해서 공범 혐의가 벗어지면 그 다음엔 형규가 말한 대로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고 그 후에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혼란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또 그의 주소나 신분이 불투명해서 그가 '공범'임이 강력하게 대두된다면 어떻게되나. 인상 하나만으로 노인을 체포하기에는 막대한 정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공범자로 지목된 노인은 그 신분이 확실해도, 또 불투명해도 고민이라는 이유는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호나 형규는 차라리 노인이 불투명한 채로 아주 잠적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시속 120km로 달리는 열차, 그 열차의 침대 속에서 노인의 도움 없이 어떻게 증발할 수 있겠는가. 전혀 논리에 맞지 않게 사라진 범인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는 사라진 노인이 공범이어야 만했다. 설혹 노인을 잡지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 범인의 증발 방법은 설명되어지기 때문이었다. '공범자'로 지목되는 노인의 신분이 확실해서는 안 된다는 이 이상한 논리 앞에 두 사람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난 오늘 방송국 방문하기로 되어 있거든. 나 먼저 가볼테니 잘 좀 추리해 보라구."
다방에서 나온 문호와 형규는 무거운 마음을 누르며 서울역 광장 앞에서 헤어졌다. 문호는 수첩에서 오늘의 수사 스케줄을 꺼내 보았다. 지금부터 가 보아야 할 곳은 S-TV였다. S-TV에서 이성구 제작담당 이사를 만나기로 한 것이다. 교보 빌딩에서 지하도를 건너 국제극장 맞은편으로 빠져나왔다. 좌석 버스 720번이 S-TV로 가는 차였다. 초겨울 추위가 목덜미로 파고 들었다.
사람들은 옷깃을 세워 바람을 막으며 종종걸음을 걸었다. 어디선지 성급한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려 왔다.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차를 기다리며 무엇인가의 생각에 잠겨 있던 문호는 720번 좌석 버스가 두 대나 지나가도록 승차할 생각을 않고 있더니 발길을 돌려 다시 지하도로 총총히 걸어 모습을 감추었다.

거리에는 서둘러 나온 석간 신문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거리에 신문을 쌓아놓고 팔고 있는 소년들은 '특보요 특보'하며 목청을 돋구고 있었고 사람들은 소년들이 집어 줄 사이도 없이 동전을 던져놓고 손수 집어 그 자리에서 펴보며 특보 기사를 읽기에 바빴다. 신문 기자들이란 좀 엉뚱한 데가 있는 친구들이어서 이런 커다란 사고가 나면 때로는 경찰측에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사를 쓰곤 했다. 전혀 엉뚱하게 짚는 때도 있었지만 또 어떤 때는 정확히 예견하는 때도 있었다. 최찬일 형사는 Y신문과 J일보를 사들고 마포 입구에 있는 골든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최찬일을 중심으로 한 양쪽 테이블에는 중년 부인들이 신문을 펴들고는 커피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고강진 피살 사건'을 입에 침이 튀도록 떠들어대고 있었다.
"어머 얘, 이 사진 좀 봐. 얼마나 미남이니..."
"글쎄 말야. 이렇게 멋지게 생긴 배우가 글쎄 왜 죽었을까? 그것도 열차 속에서 말야. 이거 무슨 썸씽 있는 거 아냐?"
"아깝다, 아까워.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바에야 살았을 때 나나 한 번 사랑해 주지. 그럼 내가 울어 주기라도 하잖아."
"어머, 얘 너 못하는 소리가 없어."
"웃기지 마. 넌 그런 생각 한 번도 안해 봤단 말야? 난 솔직히 말해서 그래."
"호호호..."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할 일 없는 여편네들이었다. 남편들은 죽자하고 직장에서 뛰고 있는데 호텔 커피숍에서 죽은 배우한테 사랑 한 번 못 받은 게 불만이라는 세상에 참. 최찬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 동안 앉아서 이 여인들을 쫓아낼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아주머니 조금 전에 라디오 못 들으셨어요?"
최찬일이 일어서며 떠들고 있는 여인들에게 말을 걸었다.
"예? 못 들었는데요. 무슨 뉴스라도."
뚱뚱한 중년 부인이 호들갑을 떨며 몸체를 앞으로 내밀며 최 형사를 바라보았다.
"고강진이란 배우가 죽었대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구..."
하고는 얼른 돌아가서 커피숍을 빠져나와 화랑실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나와 보니 이들 대여섯 명은 무엇인가 열심히 떠들며 호텔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혼자 킥킥거리고 있던 최 형사는 아까 자기가 한 말의 끝을 독백처럼 달아맸다.
'그게 아니구요, 사망했대요' 통쾌한 듯 여인들을 보던 그는 다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보나마나 그 여인들, 돌아다니며 고강진이 아직 죽지는 않은 것이라고 아는 체 떠벌리며 돌아다니겠지. 딴 사람 들은 아직 그 뉴스를 모를 테니까. J일보는 고강진 피살의 원인을 여성 문제 쪽이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었고 Y신문은 그의 인기를 시샘낸 다른 연예인의 사주에 의한 살인이거나 아니면 어떤 개인적 원한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촌평하고 있었다. 신문마다 고강진 피살은 대문짝같이 게재했으면서도 진남포 피습 사건은 눈에 뜨이지도 않을 정도로 구석에 조그마하게 실었다. 고강진이 죽은 것 만큼 진남포도 상처는 대단했다. 가슴을 온통 붕대와 솜으로 휘감고 있었다. 의식을 잃거나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출혈이 심하고 상처가 여러 곳 나 있어서 치료에는 시일이 좀 걸려 앞으로 2, 3주 후에나 퇴원하게 될 것이라고 담당 의사가 말했다. 서른 바늘 이상을 꿰맸다고 하니 그 정도는 짐작이 갈 만했다. 아직 면회할 단계도 못 된다고 해서 진남포의 집만 알아보고 곧바로 마포로 찾아온 것이다. 진남포의 집은 작은 아파트였다. 그러나 그의 아파트를 찾아가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마포 경찰서에서 알선해 준 이 근처 똘마니와 만나기로 했다. 얼마 후 커피숍 카운터에서 안내 방송이 들려 왔다.
"최찬일 씨 계세요? 최찬일 씨 계세요."
최 형사는 카운터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20대 초의 청년인데 머리는 요즈음 유행하는 퍼머 머리를 했고 바지는 여자 것인지 남자 것인지 모를 이상한 것을 입고 있었다. 목에는 목걸이까지 하고 있었다. 최 형사는 손을 흔들어 청년에게 손짓했다.
"앉아, 커피하겠어?"
"그러죠 뭐, 어이 커피."
사양하는 기색이나 어려워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덥석 커피를 주문하고는 부스럭대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뭣땜에 그러슈."
"어제 진남포라는 배우 이 동네서 당한 거 알고 있어?"
"신문에서두 보고 동네서도 소문이 나서 알고 있어요."
"어떻게 생각해."
"제가 뭐 생각하고 어쩌고 할 게 있나요. 그 사람 좀 안 됐다는
생각밖엔."
"자네하고 진남포하고 아는 사이야?"
"아 그럼 이 동네서 뼈가 굵었는데 그 사람 모를까요."
"어때."
"뭐가요?"
"그 사람"
"...글쎄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에 꼬고 앉아 꺼들꺼들하며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소릴 지르거나 다그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저 잘 구슬르고 얼러서 조그만 정보라도 얻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청년은 담배를 부벼끄고는 다시 껌을 꺼내 짝짝 씹어대고 있었다.
"진남포 평판은 어때? 이 동네서."
"왔다예요."
"왔다라니, 무슨 말이야?"
"있잖아요. 그 사람 괜찮아요. 인기도 있구. 인정도 많구. 명절때나 크리스마스 같은 때는 이 동네 신문팔이 애들같이 좀 불쌍한 애들 양말 한 컬레씩이라도 꼭 사줘요. 구두닦이 애들 몇이 모여서 꽃이라도 사가지구 병원에 찾아가겠다나 봐요."
"그럼 이 동네서 인심은 안 잃은 편이구만."
"인심을 잃다뇨? 그 형님만 같으라 그래요. 얼굴이 못 생겨서 그렇지 장가는 안 가두 마음 씀씀이는 그만이에요. 허기야 돈도 없으니 뭐."
"진남포 씨 돈 없는 거 어떻게 알아?"
"보면 척이죠. 자동차도 딸딸이에요. 구식 브리사 몰고 다니는데 고것도 누가 그냥 준 거래요. 돈 생각하면 그것도 몰고 다닐 처지가 못 되는데 준 사람 생각해서 겨우 휘발유나 넣고 다니나 봐요. 집도 자기 것이 아니라 전세라죠. 그런데도 불쌍한 애들한텐 기차게 해주거든요. 아깐 미안했어요. 경찰이라면 전 괜히 싫거든요. 진남포 형 잘봐 줘요. 제가 형, 형, 하며 따르는 처지거든요."
"이 동네서 진남포 건드릴 만한 놈은 없나?"
"택도 없어요. 누가 이 동네서 형을 건드려요. 그리고 형님이 보통인줄 아세요. 시시한놈 너댓놈 덤벼도 눈도 꿈쩍 안할 거예요.”
청년에게서 얻은 정보는 그가 이 마을에서 인심을 잃지 않고 살아 왔다는 점과 그가 몹시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최 형사는 청년을 돌려보내고 진남포가 사는 아파트로 왔다. 생각보다 훨씬 후미진 곳이 많았다. 그가 피습당했다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한동안 생각에 빠졌다.
새벽 1시 20분경 피습을 당했다는데 도대체 그 깊은 심야에 그는 왜 후미진 뒷골목을 나왔으며 그를 습격한 괴한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진남포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만이 목적이었을까 아니면 살인 미수로 그치고 도망친 것일까.
그가 피습당한 부근까지 오자 이제까지 우발적인 사고일 것으로만 생각했던 추측에 수정을 가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새벽 1시경 이 어둡고 칙칙한 골목에 진남포가 서성거리고 있었던 그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또 피습자는 그 시간에 어떻게 이 골목에 나타나 진남포와 맞부닥뜨렸을까 하는 점도 쉽사리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협박을 받고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왜 그는 누구에게 협박을 받고 있었을까.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니다. 얼굴이 잘 생기고 인기가 많아 시샘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다. 따라서 연예인으로서 누구에겐가 위협을 줄 만큼 대단한 인물도 못 된다. 그렇다면 그가 피습당한 제일 큰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꼬리도 보이지 않았다. 고강진 피살은 나름대로 여러 가지 추측이떠오른다. 그러나 진남포 피습은 도무지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점, 바로 그 점을 찾는 것이 최 형사의 임무였다. 아파트 일대와 마포극장 일대를 돌아보았다. 피습 장소를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단서가 될 만한 물건을 찾는다는 것도 무리였다. 지역적 여건으로 보아 범죄가 자주 일어날 우범지대도 못 되었다. 그렇다면... 최찬일은 새로운 각도에서 수사를 시작해야 했다. 박문호 선배에게 우발적인 '사고일 것'이라고 자신 있게 한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이 곳 상황이나 사고 시간대를 생각하면 절대 우연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왜? 무엇을 진남포에게서 노렸을까, 그에게 무엇이 있어서 심야에 습격을 했을까, 과연 진남포 피습 사건과 고강진 피살 사건은 아무 관련이 없을까...
머리가 복잡해진 최 형사는 근처 구멍가게에 들어가 바람을 피하며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가게의 유리창을 통하여 아파트가 보였다. 이 때 아파트 정문에서 두툼한 잠바를 걸친 경비원이 다가와 담배를 한 갑 사서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최 형사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벌떡 일어나 경비원 뒤를 쫓았다.
"저, 아저씨 아저씨."
하고 큰소리로 부르자 경비원이 뒤를 휙 돌아다보았다. 한쪽 눈자위가 약간 희미한 애꾸였다.





퍼즐 속의 미로


S-TV 제작 담당 이사 이성구는 참모진들과 회의를 열고 있었다.
말이 회의이지 모여 앉아 턱들만 받쳐들고 이 난감한 문제를 어찌할수 없어 한숨들만 쉬고 있는 실정이었다. 회의에는 '흥남 철수 작전'을 쓴 드라마 작가 조성래씨와 연출가 박영웅씨 그리고 진행 책임의 김호균씨도 참석하고 있었다.
"정말 힘들겠습니까?"
이성구 이사가 조성래 씨를 보며 물었다.
"지금 말씀 드린 대롭니다. 그가 지금 죽는것으로 만들면 드라마는 죽도 밥도 안됩니다. 그를 살려내고 그 어려운 고통을 이겨나가는 게 이 드라마의 핵심인데 주인공이 중간에서 죽는대야 무슨 감동이 있겠습니까? 제가 말씀 드린 대로 고강진이 죽은 거야 세상이 다 아는 거고, 비슷한 배우를 골라 대타로 내보내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드라마 작가 조성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출을 맡았던 박영웅이 테이블을 탁치며 흥분된 목소리로 의견을 제시해 왔다.
"아니 조 선생님, 그것도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아무리 배우가 죽었다고 대타를 쳐서 내보내면 그게 드라마가 됩니까? 장난이지. 그거 기억 안 나세요? 타이론 파워 말입니다.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이라는 영화를 촬영하다가 급사했을 때 비슷한 배우를 골라서 대타를 내보냈습니까? 아닙니다. 적어도 국제 수준의 대작을 만들려는 방송국측 의도나 일생 일대의 작품을 만들려는 저는 절대 그걸 용납할 수 없습니다. 타이론 파워가 죽자 시나리오를 다시 고쳐서 율부린너를 내세워 처음부터 다시 촬영하지 않았습니까. 어려우시지만, 약간만 개작해서 주인공 바꾸고 다시 촬영합시다. 밤을 새워서라도 나도 작업할 테니까요."
"박영웅씨 당신은 당신 욕심만 생각하십니까? 지금 진행이 50% 이상이나 진척되었어요. 이제 본격적으로 눈이 오기 시작하면 촬영이 막바지로 오를 텐데 처음부터 다시 찍으면 제작비는 어떻게 감당하고 계절 촬영은 어떻게 커버할 겁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 생각 같아서는 주인공이 여기서 죽고 여인이 자기의 죽은 애인 사진을 가슴에 묻고 흥남 철수 작전에 따라 남하하기 위해 배를 타고 서있는 장면을 끝으로 막을 내렸으면 좋겠어요."
연출 진행을 맡은 김호균이 처음의 고집을 꺾지 않고 있었다. 세 사람의 의견이 모두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진짜 걱정은 시청자들의 반응이었다. 고강진이 죽은 것은 어차피 세상이 다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촬영한 내용으로 보아 주인공 고강진은 한참 클라이맥스에서 사고를 당한 것이다. 제작 책임자인 이성구 이사는 작가의 의견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 4후퇴 때 헤어진 애인이 서로를 그리워하며 결혼도 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다가 이산 가족 생방송 인연으로 늙어서 다시 만나는 눈물겨운 포인트의 장면이 빠진대서야 드라마를 제작한 보람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하늘을 찌를 듯 치솟고 있는 고강진의 인기가 그의 죽음으로 해서 드라마에 관심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비록 50% 지만 고강진의 모습을 더 볼 수 있다는 것은 방송국측의 시청자에 대한 서비스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이성구 이사의 계산이었다. 나머지 50%는 어쩔수 없다.
대타를 내세우는 길밖에는. 그리고 그것은 시청자들도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문제는 온 생애를 걸어 이 작품에 몰두하고 있는 연출가 박영웅의 고집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지난 여름 즉 6.25발발 시점부터 시작되는 이 드라마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그간 과로로 입원한 일도 있었고 때로는 산 속에서 야간 촬영을 강행하다 때마침 내린 비로 옷을 벗어 카메라를 덮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려 큰병으로 번질 뻔한 고비도 있었다, 이런 것들을 누구보다도 이성구 이사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이 전혀 타당성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스토리가 어떻고 감동이 어떠니 해도 주인공이 중간에 바꿔지면 드라마 자체의 긴박감이 여지없이 풀어져 버린다. 그리고 이왕에 대작을 기획하여 시청자의 성원에 보답하고 외국의 진출까지 모색할 바에야 제대로 만들자는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6.25는 어차피 전쟁이 빚은 비극이니 만큼 드라마 작가가 6.25시점부터 시작되는 장면을 6.28수복장면부터 새로 써서 촬영을 시작하면 작은 문제는 해결해 나갈수 있었다.
그러나 진행의 김호균의 말도 그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었다. 50%나 끝난 촬영을 다시 하는 것도 여러 가지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입장이 돼 버린 이성구 이사는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문호가 S-TV에 도착한 시간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아무리 제작이 중요하고 사업이 바빠도 전속 톱 탤런트가 피살당하고 그래서 경찰측에서 수사를 위해 출동했다는데 우물쭈물하고 있을수는 없었다. 반갑지는 않은 손님이지만 어쩔 수 없이 회의를 중단하고 밖에 마련된 응접실로 들어갔다.
"제작 담당 이성구라고 합니다."
명함을 내밀며 비서를 시켜 커피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몇 가지 알아야겠기에 들렀습니다."
"원 별 말씀을, 잘 오셨습니다."
말은 친절하였지만 그의 태도는 귀찮아 하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공연히 시계를 들여다보고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방문자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쯤에 동요될 문호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런 면에서는 이 이사보다는 문호가 훨씬 고단이었다. 더구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냥 두지 않는게 문호의 성미였다.
"이 이사님 큰일났군요."
"네? 네, 정말 큰일입니다."
"이사님,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마흔 아홉입니다."
"정말 큰일이십니다."
"뭐가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그 나이에 벌써 신경통으로 그렇게 좌불안석이니 큰일 아닙니까? 무슨 약을 쓰시던지... 온천도 좋다던데."
문호의 빈정거리는 말뜻을 못 알아들을 이 이사가 아니었다.
슬그머니 의자에 앉더니 비로소 말을 건냈다. 이 때를 놓칠새라 문호는 본론을 꺼내 질문을 시작했다.
"협조 좀 부탁합니다."
"뭐든 말씀하시죠. 사실 오늘 경찰측 연락을 받고 지금까지 쭉 대책회의를 열고 있었습니다. 아직 점심 식사도 못했으니까요."
"그럼 아직 병원엔 못 가보신 셈이시군요."
이 소리가 그의 아픈 곳을 찔렀는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까 직원들 시켜서 조화만 보냈습니다. 시간을 내서 가봐야 할텐데."
말끝을 맺지 못하고 손톱으로 책상만 두드리고 있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책임자가 영안실도 둘러보지 않고 종일 사무실에만 있었다는 것은 고강진이가 사람이 아니라 철저한 상품 가치밖에 없었다는 것을 웅변해 주고 있었다. 아까 방송국에 오려고 광화문에 서있다가 되돌아간 것도 병원에 먼저 가보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병원에는 팬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가족도 있었으나 정작 방송국측의 상부에서는 어느 누구의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문호가 병원에 먼저 들른 것은 방송국 사람들이 병원에 먼저 와 있을것이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병원엔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이사님, 저는 협조를 좀 얻자는 것뿐입니다. 절대 귀찮게 안해 드릴 겁니다. 요는 범인이 누구냐, 왜 죽였느냐 하는 방증 수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온 겁니다. 특별히 오늘 제가 찾아온 목적은 평소 고강진의 태도나 그 주변 사람, 또 사건 당일 고강진의 행적을 추적 해 보려고 하는 거죠. 다시 말해서 고강진의 주변 인물, 그리고 당일의 발자국을 쫓아보자는 것뿐입니다. 이 상황에서 가족에게 꼬치꼬치 물어보기도 어렵고 또 가족들보다는 아무래도 방송국측에서 더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은 내일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조금 전보다는 훨씬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문호는 이 이사를 바라보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강진의 요 며칠 행적입니다. 가까운 탤런트나 그간 쭉 같이 행동해 온 다른 동료들을 소개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방송국 안에서의 그의 평판이나 태도도 알고 싶구요."
이 이사는 탤런트실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찾아 올려보내라고 지시했다. 잠시후 젊고 발랄하게 생긴 아가씨가 하나 올라 왔다.
"이분, 지대로 탤런트 실장한테 모시고 가. 내가 전화해 놓을게."
이 이사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협조를 아끼지 말라는 지시까지 해놓고는 일어서서 응접실을 나왔다.
문호는 아가씨가 안내하는 대로 뒤를 따라 한참이나 걸어서 어느 커다란 홀로 들어섰다. 홀에는 벽에 거울이 일렬로 쫙 부착되어 있었고 거울 밑으로는 책상을 연결해 놓은 듯 화장대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울긋불긋한 옷들이 함부로 널려 있었고 열려져 있는 캐비닛 속에는 흔히 볼 수 없는 옷들이 꽉꽉 들어 차 있었다. 낯익은 탤런트들과 가수들이 바쁘게 왔다갔다 하며 일들을 하고 있었다.
한 구석에서는 고강진 피살 사건을 얘기하고 있는지 심각한 얼굴로 수군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그 커다란 홀을 지나 작은 방으로 다시 안내되었다. 입구에는 '실장'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대본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책상 안쪽으로 50대의 낯익은 탤런트가 앉아 있다가 일어서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지대로라고 합니다."
그는 손을 내밀며 먼저 악수를 청했다. 이 이사와 이미 연락이 닿았던 것같이 보였다.
"아, 네. 화면에서 여러번 뵈온 것 같습니다. 특별 수사반 박문홉니다."
지대로라는 탤런트는 이 곳 S-TV의 탤런트 실장을 맡고 있었다.
탤런트를 대표해서 회사측과 업무 협의도 하고 일정이나 기획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연극계에서 오랫동안 종사하다가 탤런트로 전향해서 중후한 연기로 팬을 사로잡는 중년 남자였다. 고강진이 데뷔할 무렵 많은 후원을 해주었던 장본인이라고 설명했다.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겨서 그저 어리벙벙할 뿐입니다.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저희들은 상상도 못하겠어요. 아, 어저께까지만 해도 바로 여기서 허허거리며 같이 웃고 떠들고 했는데 말이죠. 참 세상사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들은 만나 보셨나요?"
"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병원부터 다녀왔죠. 가족이라야 자기 홀어머니하고 이모뿐이니까요. 좀 외로운 애죠."
지대로 실장은 창가에 투사된 건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았다. 고강진이 죽은 후 그의 가족들 외에는 처음 보는 눈물이었다. 문호도 마음이 숙연해졌다.
세상에서는 그의 죽음을 다만 흥미거리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반하여 오십이 넘은 이 노탤럴트는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잠시후 문호가 질문을 시작했다.
"그의 환경은 어떻습니까?"
"환경요?"
고강진, 그는 아버지가 없었다. 아니 없는 게 아니고 누구인지를 몰랐다. 어머니가 젊은 시절 화류계에 몸담고 있었다는 말은 있었지만 자신이 태어난 동기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가 탤런트로서 명성을 날리고 젊은이들간에 우상으로 받들어지는 인기를 누리게 되자 주간지에서는 이따금 그의 아버지가, 유명한 정객이었느니 실업인이었느니 떠들어대긴 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아버지의 실체가 누구였건 피를 나누어 준 사람을 닮아 무척 귀족적이고 이성적인용모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확실했고 그가 태어나기 직전이나 직후에 아버지는 둘을 버렸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짓궂은 기자들이 고강진의 어머니를 찾아가 끈질기게 물어봤지만 끝내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의 성격은 내성적이긴 하지만 또 거친 면도 있었다. 모친에게는 극진히 대하는 효성도 있었다. 그가 H대학 연극 영화과에 다닐 때 그의 교수로부터 지대로 실장에게 추천서가 날아 들어왔다. 얼굴과 재질을 검토한 지 실장이 적극 후원하여 데뷔하자마자 주연급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의 첫 작품은 장년의 히트작 '10대의 반항'을 리바이벌한 사회물이었다. 그의 반항적 성격이나 오만한 성품이 아주 확실하게 일치되어 작품이 공전의 대히트를 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김석오라는 사내는 고강진이라는 탤런트로서 새출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탤런트들 사이에서는 그리 원만하지가 못했다.
원래 성격이 타협적이질 못하고 나이도 아직 어린데다가 인기가 온통 햇병아리 신인에게만 쏠리니 다른 탤런트들이 고분고분 대해 주지도 않았다. 이러한 다른 탤런트들의 태도를 가지고 그 자신도 불만을 터뜨려 비교적 주위 동료들과 썩 어울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의 감점은 직업관이 투철한 연예인으로 철저한 프로근성이 있어 지금까지 촬영 시간이나 모임에 단 한번도 늦거나 펑크를 내본 경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대로 실장의 말을 빌리면 아주 깐깐한 청년임을 알수 있었다.
아무리 자기보다 선배라고 해도 자기 성격에 안 맞으면 곧바로 들이대고 언쟁을 벌렸고 자기 상대역이 마음에 안 맞으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배역을 바꾸어야만 직성이 풀려 작품에 임한다고 했다.
그대신 일단 작품이 시작되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촬영에 임했고 밤을 세워서라도 대본을 외우며 절대 실수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영화가 아닌 TV에서는 가장 힘든 점이 대본 암기였다.
영화는 촬영 후 녹음을 따로 하는 구태의연한 더빙 방법을 쓰고 있지만 TV는 직접 대사를 암기해야 했다.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고강진의 인적 사항이 도착되었다. 실장은 자기가 먼저 훑어본 후 문호에게 넘겨 주었다. 문호는 습관처럼 수첩을 꺼내 기록하기 시작했다.

본적: 서울 성북구 미아동 87번지
주소: 서울 강남구 반포동 7번지 5의3
성명: 고강진(본명: 김석오)
생년월일: 1959년 10월 14일 생
학력: H대학 연극 영화과 졸업
작품: 데뷔작 '십대의 반항'
주요작 : '사랑의 계절' '행복의 길'
진행 작품 : '흥남 철수 작전' '꿈길' '쇼는 즐거워(사회)'

대략 메모를 마치고 수첩을 집어넣으려는데 밖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지 실장 책상에도 요란스러운 벨소리가 울려 왔다.
"저,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인데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바쁘실 텐데... 저도 일어나..."
"아, 아닙니다.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일어나려는 문호를 억지로 되앉혀 놓은 지 실장은 문호에게깍듯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문호는 그를 기다리는 동안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살인이라고 하는 엄청난 사건을 저지를 때는 그만한 대가를 받는다. 우발적이거나 충동적인 살인이 아니라 주도 면밀한 계획된 살인에는 그에 대응하는 대가나 충분한 사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강진을 살해한 범인이나 그 배후자는 그에게서 어떤 대가를 얻으려 했을까. 문호는 지금까지의 지 실장 말을 토대로 수사 방향을 설정하고 있었다. 만일 고강진이 자기의 친아버지를 최근 찾았거나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이것을 안 아버지가 자기의 신분이나 위치에 흔들림이 온다든가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될 경우 아무도 모르게 없애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첫째, 고강진의 생부는 누구일까? 이것이 수사방향의 방침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둘째, 고강진의 죽음으로 드라마의 주인공 역할과 톱 스타가 공석이 된다. 그의 뒤를 이을 강력한 후보자는 누구일까?
셋째, 고강진의 여성 관계는 어떨까? 밝혀지지 않은 스캔들은 없을까? 만일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중 단 한 가지라도 강력한 사유로 떠오르는 게 있으면 집중 수사를 하기로 다짐하며 메모지에 지금 생각을 옮기고 있었다. 이 때 밖으로 나갔던 지 실장이 되돌아왔다. 얼굴이 창백해 있었다.
"박 선생님 또 사고가 터졌습니다."
"네 ?"
깜짝 놀란 문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슨 사곱니까? 누가 또 당했습니까?
"저희들이 지난 가을 프로 개편 때 '쇼는 즐거워'라는 프로를 신설했습니다. 이 쇼에...아, 자 앉으시죠. 이게 보통 심각한게 아닙니다."
지 실장은 문호를 다시 소파에 앉히고는 담배를 꺼내 문호에게 한대 권하고는 힘없이 빨아들였다. 문호는 잠시 그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희들이 '쇼는 즐거워' 프로를 신설하면서 사회자로 고강진과 전속 여성 개그맨 이화영을 지명했습니다. 이 프로는 일주일에 한번 공개 방송으로 나가는데 그저께 리허설을 했습니다. 오늘이 바로 공개 방송 시간인데 고강진 대신 다른 배우를 내세워 땜질을 했는데 이번에는 이화영이 나타나질 않는 겁니다. 벌써 한시간이나 지났는데두요.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담당 프로듀서한테 전화가 왔답니다. 아주 다급한 목소리로요. 어딘지는 모르지만 납치되어 있는데 아주 무서워 죽겠다고 합니다. 전화도 다 못 맺고 끊어졌답니다."
고강진의 얘기가 끝나면 다음 진남포에 대해서 알아보려던 문호는 또 다른 사건이 터지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불과 이틀 사이에 S-TV에서 세 개의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저께 리허설했거든요. 촬영 전에 한번씩 하는 총연습 말입니다. 그때만 해도 아무일 없었답니다, 고강진이두 이화영두 아주 밝았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무슨 일인가로 둘이 무척 심하게 다투었다는군요.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어제 리허설하던 사람들을 만나볼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촬영 때문에 전부 모여 있으니까요. 또 방송도 어차피 누군가를 대타로 내세워야 하니까 시간이 좀 있어요. 만나시겠다면 제가 안내하죠. 혹 참고가 되실는지도 모르니까요."
문호와 지실장은 스튜디오로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문호는 생소한 방송국 환경을 흥미 있게 관찰했다. 영화에서나 TV에서만 보던 유명한 배우나 가수, 코미디언들을 볼 수가 있었고 또 이들의 화려한 의상에 놀라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 비해서 지대로 실장이라는 사람은 너무나 검소했다. 뿐만 아니라 무척 섬세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어딘지 모르게 품위가 있어 보였고 신뢰감까지 들었다. 흔히 생각하는 연예인들의 이미지와 막상 만나본 연예인들의 성품은 너무도 차이가 많았다.
오히려 더 인간답고 순수하며 따뜻한 성품까지 느낄수 있었다. 어느 사회에서나 갈등도 있고 사고도 생긴다. 그런데 유독 연예계의 사고는 사람들이 비상한 관심으로 지켜보며 작은 흠집까지 확대해서 힐난하려 든다. 물론 유명세와 인기세가 따라붙는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같은 인간이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보다 더 감싸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녹화실 스튜디오에는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화려한 의상을 입은 가수와 개그맨들이 여기저기 앉아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송국 사정으로 공개 방송이 취소되었다는 벽보를 만들고 있었다.
모두들 긴장된 얼굴들이었다.
프로듀서와 카메라맨 그리고 조명기사, 연예인들이 웅성거리고 모여 앉아 수군거리고 있었다. 무대 장치 담당인 듯한 사람이 페인트가 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왔다갔다 하기도 했다.
지 실장은 이들을 한곳으로 불러모았다. 이들이 방청석 의자에 듬성듬성 앉자 문호를 소개시켜 주었다. 지 실장은 이번 연이어 발생 된 사건 해결에 참고가 되도록 협조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들 옆에 앉았다. 문호가 절을 꾸벅 하고는 말을 꺼냈다.
"사건 해결은 반드시 커다란 단서에 의해서만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지극히 사소한 일, 평소에는 그냥 지나쳐도 그만인 그런 일들이 사건 해결에 큰 도움을 줍니다. 여러분들도 이미 아시다시피 어젯밤 고강진 씨가 피살된 채 열차 속에서 발견되었고 또 진남포 씨가 피습당해 입원중이고 오늘은 이화영씨가 누구에겐가 납치당해 이 자리에 못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꺼번에 사건이 터진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그저께 여러분들은 진남포를 제외한 두 사람과 같이 리허설에 참여했습니다. 사소하고 적은 것 같은 일들이라도 기억나는 대로 더듬어서 엊그제 일들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문호가 말을 하고 있는 동안 이들은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있었다. 얼굴에는 불안한 그림자가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한 젊은 개그맨이 주섬주섬 일어나 문호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고 문호는 수첩과 볼펜을 꺼내 메모를 시작했다.
"저... 사실 엊그제 리허설할 때만 해도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이번 프로가 특히 젊은 시청자들에게서 좋은 반응이 있었고 고강진씨나 이화영씨도 호흡이 잘 맞아 출연자들도 기분이 썩 좋은 상태였습니다. 연습이 다 끝날 때까지는 별일이 없었는데... 아마 연습이 끝날 무렵이던가, 막 돌아서려고 하는데 고강진씨가 이화영씨를 부르더니 '바쁘더라도 나 좀 보고 가'하며 안색을 바꾸더니, 요 뒤에 있는 의상실로 데리고 갔어요. 잠시 후 억양이 높아지고 싸우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죠."
그가 말을 마치자 비로소 여기저기서 질서 없이 한 마디씩 거들어댔다. 문호는 이들을 진정시키고 한 사람씩 차근차근 이야기하도록 부탁했다.
"싸우는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혹 기억에 남으십니까?"
"제가 똑바로 들었어요."
요란한 의상을 하고 눈에 짙은 눈썹을 붙인 아가씨가 일어났다.
"무슨 내용으로 싸우는 것 같았습니까?"
"있잖아요. 음... 제가 두 분이 싸우는 소리가 나서 깜짝 놀라 문앞으로 다가갔어요. 목소리가 아주 분명하게 들렸어요. 고강진씨가 매우 고조된 억양으로 '뭐 어째? 내가 언제 너보고 나이트 가자고 졸랐어'하니까 화영이 언니가 '별꼴이네 내가 언제 고강진씨 보고 나이트 가자 그랬어요. 참 웃겨, 누가 그래요. 대요. 대'하고 발악하듯 악쓰는 소리가 났어요. 그러니까 고강진씨가 '다 듣고 온 사람이 있어. 네가 다니면서 그랬다는데 뭘 그래. 고강진이가 날 유혹해서 나이트하러 호텔 가자고 그랬다고 말야. 내가 언제 널 유혹했어. 없는 말을 왜 하고 다녀'하며 소리 지르고 의상 내던지는 소리가 우당탕퉁탕하고 났고 이화영 언니는 울고불고 아주 난리가 났었어요."
"저도 그건 들었어요."
"저 두요."
모두들 머리를 끄덕이며 한 마디씩 했다.
"그 때가 몇 시나 되었습니까?"
"한 4시 30분쯤 되었을 겁니다."
그들의 말을 종합해서 정리해 보면 이화영이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고강진이 자기를 유혹하려 했다고 떠들며 다녔고, 이 말을 들은 고강진이 흥분해서 이화영에게 따진 것이고 이화영은 죽어도 자기는 그런 말 한 일이 없다고 우겨대는 것이었다.
이 정도야 연예인들간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문제는 현재 그 두 사람 모두 신상에 이상이 있다는 점이었다. 문호의 고민은 바로 그 점에 있었다. 이화영이란 아가씨는 지금 어디에, 왜 누구에게 납치되어 있으며 그들은 왜 납치를 했을까. 생각에 잠기던 문호가 지 실장에게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네, 그 문제는 자세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는데요. 박 형사님. 마침 그분이 지금 이성구 제작 이사실에 있습니다. 아침부터 대책 회의를 하고 있거든요."
지 실장은 문호를 앞세우고 이성구 이사실로 올라갔다.

수사 방향은 다갈래로 검토되어야 했다. '흥남 철수 작전'의 작가 조성래 씨를 만나고 나서야 문호는 이 사건들이 결코 단순하지가 않음을 알았다. 요는 어느 맥을 짚어야 이번 사건 해결의 지름길이 되느냐 하는 게 문제였다.
문호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간의 수사 생활을 해오면서 이렇게 방향을 잡을 수 없는 사건이 터진 일도 별로 없었다. 수사를 하다 보면 함정에 빠지는 일이 있기는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 가을 끝이 났던 소위 토곡리 밀실 살인 사건 '덧'의 수사 때가 그랬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용의 선상에 오른 사람은 한정이 되어 있었다. 불과 세 명의 용의자를 놓고 범인의 함정에 빠져 무려 두 달이나 걸려 사건을 매듭지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그 양상이 또 달랐다. 수사 방향을 어지럽히는 복잡하고 애매한 사건들이 너무 많이 얽혀 있었다.
방송국을 나온 문호는 본부로 돌아오지 않고 막바로 정릉으로방향을 틀었다.
다만 한두 시간이라도 조용히 생각하며 머리를 정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들이 땅바닥을 훑으며 이리저리 구르고 있었다. 목덜미에 싸한 바람이 파고들었다. 주중이라 그런지 등산객도 별로 눈에 뜨이지 않았다. 산길을 천천히 오르며 사건의 방향을 하나하나 생각하고 있었다.
첫째, 고강진외 개인적인 사생활. 즉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그의 생부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좀더 자세히 알아봐야 하겠지만 자기와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를 찾아 위협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고강진의 아버지가 의외로 정계나 기타 분야에서 거물로 통하는 인사는 아닐까. 이러한 자기 아버지에게 복수하려고 한 일은 없을까. 따라서 뒤늦게 연예인이 되어 찾아온 아들이란 자가 자기의 명성이나 명예에 위협을 주자 누군가를 시켜 없애 버리려고 획책하여 생긴 사고는 아닐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아버지 수하 중 누군가 과잉 충성을 하기 위해 저지른 사고는 아닐까. 이 점이 첫째가는 관심거리였다. 그렇다면 고강진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문호도 첫번째 수사 대상으로 고강진의 친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두 번째, '흥남 철수 작전'의 작가 조성래의 말을 토대로 한다면 이 드라마를 위해 R-TV에서도 혼신의 노력을 다한 것이 밝혀졌다. 조성래가 이 작품을 들고 처음 찾아간 곳은 S-TV가 아니라 R-TV였다. S-TV와는 경쟁 상대로 되어 있는 R-TV에서는 이 작품을 검토하고 내용은 좋으나 대중성이 부족하니 일부 개작해서 시작하자고 누누이 교섭을 벌여온 터였다.
그러나 개작 생각이 추호도 없는 조성래는 원고 뭉치를 싸들고 그대로 S-TV에 넘겼던 것이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R-TV에서는 조성래를 위협하기도 하고 급기야는 S - TV를 맹렬히 비난하기까지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작품을 그냥 촬영하게 놔두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이나 주요 배역을 없애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더욱 배우들의 스카웃 문제로 상호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게 지금의 실정이었다. R-TV에서는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고강진을 유인하려던 사실도 밝혀졌다.
실패로 돌아간 R-TV측으로서는 고강진에 대한 원한이 사무친 것도 사실이었다. 두 TV간의 갈등이 이번 사건을 일으킨 기폭제가 되었다고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치정으로 얽힌 여성 관계였다. 치정 사건의 가장 손쉬운 복수 방법은 살인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만큼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남다른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그는 여성을 함부로 사귀지도 않았을 뿐아니라 치정 복수의 살인은 대개 우발적이거나 거칠어서 미궁으로까지 몰아갈 힘이 없기 때문이다. 여하튼 03-03의 사내나 혹은 그 배후 인물이 열차표를 사전에 예매한 것이 드러났고, 열차 내에서 범인이 연기처럼 증발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사건은 치밀한 계산과 계획, 사전 탐사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분명해졌다.
가장 확실한 것은 지금 고강진이 피살되어 죽어 있는 것이고 가장 불투명한 것은 범인의 정체와 동기였다. 더욱 문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진남포의 피습과 이화영의 납치 사건이었다. 과연 이 세 개의 사건은 서로 연관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발적인 개체의 사건일까, 그리고 고강진과 이화영이 다툰 내용 즉 고강진이이화영을 유혹했다는 말은 이화영이 조작한 스캔들일까, 아니면 실제 고강진 자신이 유혹을 시도했던 것일까. 그 문제도 아주 애매했다. 확실히 증언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모두 사고에 휘말렸기 때문이었다. 벌써 5시가 다 되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호의 머리는 정리가 되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와 본부로 돌아왔다.
"어딜 다녀 오셨어요. 무척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방송국에 전활 걸었더니 거기서도 나가신 지 오래라구요. 다녀온거 보고 드리겠습니다."
공범자로 지목되는 노인의 집을 방문해서 신원 조사를 하고 돌아 온 부하 형사가 들어오자마자 서두르고 있었다. 문호가 보고문을 받아 막 들여다보려고 할 때 구내 전화가 따르릉하고 울려 왔다.
"아, 네 네 감사합니다. 지금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바로 이 앞에 아람 다방이라고 있습니다. 거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지금 막바로 나가겠습니다."
문호는 보고문을 결재판에 도로 꽃아 놓고 부하 형사에게 멀리 가지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지시하고는 황급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다방에서 아까 방송국에서 만난 일이 있는 신인 여가수가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조금 전 방송국에서 일을 마치고 나올 때 뒤따라오며 '이따가 찾아뵙고 싶은데 어떻게 만날 수 있나요'하며 '귓속말로 건네 주던 사람이었다. 무엇인가 은밀히 나누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았다. 여가수는 흔히 볼 수 있는 청바지에 값싼 잠바를 걸치고 있었다. 얼굴 화장도 하지않고 말씨도 매우 분별 있어 보이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바쁘실 텐데 일부러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호는 되도록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얼굴에 함박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TV에서보다 훨씬 더 미인이시군요. 발랄해 보이시구요." 하며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늘어놓자 여가수의 얼굴에는 금방 화기가 돌았다.
"어머 고마워요. 워낙 신인이라 잘 모르실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TV에서 절 보셨나 봐요."
"웬걸요. 저도 팬 자격이 있는 겁니까? 이거 영광인데요."
'어머 어머'하고 가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정말 신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가씨였다.
"그건 그렇고, 무슨 긴한 말씀이라도."
적당한 때를 맞추어 문호가 용건을 물었다.
"있잖아요, 선생님. 제가 알고 있는 게 몇 가지 있는데 혹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해서 찾아왔어요. 사실 강진이 오빠가 왜 죽었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그런데 어저께 강진이 오빠하구 화영이 언니하고 대판 싸웠잖아요. 서로 유혹하려 했느니 언제 그랬냐느니 하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사실 그 말을 한 사람은 화영이 언니도 아니구 강진이 오빠두 아녔어요. 전 그날 강진이 오빠하구 쭉 같이 있었는데..."
"그럼 아가씨는 고강진씨 하구 어떤..."
"아이 그런게 아니구요. 강진이 오빠가 유독 저한테 잘해 주셨고 또 저도 잘 따랐어요. 그래서 그냥 부르기 좋게 오빠 오빠 하는 거죠, 뭐."
잠깐 말을 쉬던 아가씨가 테이블 위에 있는 담배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문호는 그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고한 대 권했지만 담배는 못 피운다고 했다.
"아녜요. 담배가 피우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구요, 강진이 오빠가 생각나서 그래요. 엊그제 리허설을 시작하려고 막 준비하고 있는데 어디선지 전화가 왔어요. 고강진을 찾는다고 해서 강진이 오빠가 그쪽으로 갔어요. 구내 전화였죠. 저도 무심결에 슬슬 뒤따라갔어요. 그런데 전화를 받더니 조금 후에 '뭐 어째, 누구? 이화영이가요. 실례지만... 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더니 수화기를 탁 내려놓고 돌아서려다가 내가 있으니까 나보고 '이화영이 어디 있지'하기에 '무슨 전화예요'하니까 '아, 나참 기가 막혀 이화영이 쓸데없는 나발을 불고 다니고 있대' 하기에 내가 '아니 왜 그래요? 무슨 전화예요?' 하니까 그 말을 하더라구요. '글쎄 내가 이화영일 유혹해서 호텔에 데려가려구 해서 자기가 아주 애를 먹었다고 떠들고 다닌다'는 거예요. 저도 그말 듣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어요. 강진이 오빠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제가 잘알고 있거든요. 오빠말이에요, 어떻게 보면 아주 냉정하고 쌀쌀한 사람이에요. 허튼짓 한 번 없고, 거기다가 또 결벽증까지 있어요. 아주 대단해요. 같이 촬영하는 다른 남자 탤런트요, 옷에 비듬만 조금 묻어도 공연 중지예요. 성격도 그런데 그런 말을 들었으니 어떻겠어요. 한꺼번에 담배를 두 대나 피우고는 리허설에 들어갔죠. 그래서 제가 틈을 내어 화영이 언니한테 슬쩍 물었거든요. 아니래요. 자기가 왜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느냐고요. 있지도 않은 일이라는 거예요. 그렇지만 누가 알아요. 자기가 유명해지려구 오빠를 이용하는 건지. 지금 납치되어 있다는 것두 순 구라예요. 좀 엉뚱한 데가 있는 사람이거든요. 저 보고요 자기가 K대학 국문과 출신이라고 하잖아요. 알고 보니까 2년 예술 전문 학교 출신이에요. 그런 앙큼한 사람이니까 지금도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게 뭐예요. 얼굴 좀 예쁘고 말 좀 잘하는 거 가지고 출세하려는 사람이에요."
"그래, 그 다음엔 어떻게 됐죠?"
"그 다음은 아시다시피 리허설 끝나고 싸웠잖아요. 사실 이 내용 때문에 찾아온 거예요."
말을 잠깐 마친 여가수는 엽차를 홀짝 마시고는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처음에는 싸움이 그렇게 격렬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싸움이 보통 커진 게 아녔어요. 의상실이 떠나가도록 아주 격렬하게 싸웠어요. 저는 걱정이 돼서 끝까지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싸우면서 이런 말 하는 걸 들었거든요. '이 자식아, 난 사람 없는 줄 알아. 너 같은 새끼 죽여 버릴 테야. 인기 좀 있다고 까불지마'하니까 강진이 오빠가 '야 너 같은 년한테 죽을 놈 어딨어'하며 뺨 갈기는 소리가 났어요. '너 같은 게 인기 좀 얻으려고 날 팔아?'하고 말이에요. 울고불고 하던 화영 언니가 어디 두고 봐. 너를 살려 두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고 펄펄 뛰기에 참다 못해 뛰어들어가 '참으세요. 천천히 생각하고 진정해요'하니까 강진이 오빠가 '에이 더러워, 나 오늘 집으로 안 가고 별장으로 갈테니 이따 밤에 전화해'하고 밖으로 막 나가려는데 진남포 씨가 어디서 말을 듣고 왔는지 눈이 휘둥그래져 와서는 강진이 오빠보고 마음 가라앉히라고 누누이 당부했어요. 화영 언니도 그냥 안 두겠다며 악을 쓰고 나가 싸움은 끝이 났는데 하필 그날 저녁 피살당할게 뭐예요. 화영 언니도 사라지고... 아무래도 이상한 예감이 들어 찾아온 거예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별장이란 곳은 어디 있습니까?"
"별장이래야 뭐 대단한 것은 아녜요. 연습실도 겸해서 쓰고 있는 곳인데 아주 조그마하고 아담한 집이에요. 오빠가 대본 연습도 하고 연기 연습도 하는 곳인데 저도 한번 가본 일은 있죠. 그 날 저녁 저보고 전화하라고 해서 전화 걸었더니 안 받아요. 그래서 다른 데로 갔나부다 했지, 누가..."
"그 별장은 어딨죠?"
"저 구의동 아시죠. 워커힐 입구 말이에요. 그 정문에서 약 500m쯤 산으로 들어가면 구의동하고 워커힐 정문하고 중간쯤 되는 곳에 있어요. 그 근처에 별장 같은 게 두어 개 있는데 제일 작고 또 벽이 전부 갈색이라 눈에 쉽게 뜨이는 집이에요."
"그 별장을 아는 사람은 누구 누굽니까?"
여가수는 한참 앉아 생각에 잠기더니
"그거 산 게 지난 봄이니까 봬 많이들 알고 있을 거예요. 그래도 사람들 잘 데려가진 않았어요."
"그 날 고강진 씨가 별장에 간다는 걸 아는 사람은 이화영씨 그리고 아가씨뿐이겠네요?"
하니까 가수가 깜짝 놀라며 얼굴이 굳어졌다.
"어마 선생님 절 오해하세요?"
"원 별 말씀을 제가 왜 아가씰 의심합니까? 의심받을 만한 사람이 여기까지 와서 이런 정보를 제공하겠습니까? 두 사람 중 의심받지 않을 사람이 한 사람이면 의심받을 사람은 나머지 한 사람 아니겠어요. 기분 나빠 하실 필요 없습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달래주자 비로소 빙긋이 웃으며 얼굴이 풀어졌다.
"미안해요. 선생님."

사건은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어떤 경우보다도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가능성을 토대로 새롭게 수사를 시작해야 했다. 애꾸의 바로 앞석에 있던 '사라진 노인'은 그의 기록대로 현주소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는 전직 대학교수로 이공학 박사로서 지금은 연구와 강연으로 남은 생애를 보내고 있는 사람이었다.
성기준 씨의 신분은 확연히 드러난 셈이 된 것이다.
이화영과 고강진의 싸움. 그리고 성기준 씨의 신원이 밝혀진 것이 오늘의 수확이었다. 문제는 성기준 씨가 이 살인 사건에 가담을 했느냐 아니냐가 중대한 관심사로 남게 된 것이다.
만일 이화영이 어떤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누굴 사주하여 저지른 범죄라면 성기준 씨의 개입 가능성은 전혀 희박해진다. 그만한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가진 학자가 나이 어린 여가수의 사주를 받을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기준 씨가 이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다면(물론 그가 귀경하면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이화영의 개입 가능성이 짙어진다.
그러나 문제는 성기준 씨가 개입하지 않았다고 추측 할 때 범인이 열차 내에서 사라진 방법이 미궁에 빠져 버리고 만다. 어떤 경우이든 노인, 즉 성기준 씨의 도움 없이는 애꾸는 절대 열차 속에서 사라질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화영과 성기준의 연결 가능 방법, 그것은 성기준 씨가 이화명의 사주를 받고 가담했을 경우인데... 이런 가능성은 정말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도 더 실현 가능성이 없는 상황이었다.
문호의 머리는 몽롱하게 되어 버렸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만 혼란이 오고야 말았다 예리하고 노련하며 논리에뛰어나다는 박문호. 지난번 소위 '덫' 사건 때도 한 번도 이런 혼란에 빠진 일이 없는 문호가 이번 사건에는 그만 넋을 잃고야 말았다.
어쨌든 이화영이 '고강진을 죽여 버리겠다'고 공언하고 떠나던 날 밤, 고강진은 경부선 특급 열차 속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이화영은 출연도 하지 않고 어딘가에 납치되었다는 전화만 하고 끊어졌으니 이화영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진남포의 피습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일까. 진남포는 왜 누구에게 피습당한 것일까. 그를 담당한 최찬일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문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도무지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화영, 성기준 그리고 사라진 애꾸. 이 세 명이 설치해 놓은 퍼즐의 미로에서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거기다가 이유를 알수 없는 진남포 피습 사건까지 가담하여 그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벌떡 일어난 문호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밤새워 대전을 왔다 갔다 한 피로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찔한 순간과 영감처럼 머리에 생각이 떠오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일어나 어디론가 가려던 문호는 다시 책상에 주저 물러앉았다. 나이 어린 가수의 살해 음모와 교수 출신의 노학자 성기준 씨가 살해에 가담했을 경우 이를 뒷받침 할 논리적 가능성을 생각해 낸 것이다.
좀 거북하고 뻑뻑한 추리이긴 했지만 그러나 결코 소홀히 할수 없는 아주 중요한 가능성이었다.
이화영과 성기준을 꿰어 맞출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 그것은 바로 R-TV의 개입 가능성을 전제로 사건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즉 고강진이 이화영을 유혹하려 했다는 터무니없는 루머를 퍼뜨려 두 사람이 싸우도록 유도한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TV로서는 S-TV의 녹화나 공개 방송 시간을 충분히 알아낼수 있기 때문에 사전에 치밀히 계산한 계획적인 일로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명성과 인기를 위해 루머 저지와 오해의 갈등으로 격렬하게 싸운다. 그 다음 이화영을 납치한다.
그리고 그날 밤 고강진을 피살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범인을 탈출시킨다. 이 탈주를 위하여 방송국에서는 성기준을 동원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추리 속에 함정은 있었다. 그것은 R-TV와 성기준의 관계였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생각한 문호는 R-TV의 제작 담당 책임자인 조남웅을
기억에 떠올려 보았다. 가령 성기준 씨가 평소 조남웅의 신세를 단단히 지고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아주 가까운 친적이든가 선후배, 아니면 후견인으로 보살펴 주는 그런 인맥 관계를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 이런 가능성이 그리고 이런 추리가 적중하여 맞아 들어간다면 진남포 사건까지도 어느 정도 윤곽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즉 그 깊은 밤중에 R-TV정도라면 2류 탤런트쯤 어디로든 끌어내는 것은 손쉬운 일일 것이다. 가령 좋은 조건으로 스카웃하겠다든가 아니면 무슨 대책을 세워 활로를 뚫어 주겠다든가하는 미끼만 던져 놓으면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문호는 심사숙고하며 이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쳐 보고 있었다.
성기준 씨가 '공범자' 가능성을 받을 지도 모를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자기 신분을 거리낌 없이 노출시킨 점. 그리고도 새벽에 대전에서 증발한 점. 다음 이화영의 증발과 고강진의 다툼,
마지막으로 고강진이 피살되고 진남포가 피습된 점. 이런 것들을 하나의 줄로 일목 요연하게 꿰어 맞출 수 있는 길은 오직 R-TV의 조남웅이 개입했다는 가정 아래에서만 가능했다.
문호는 이제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애꾸의 행방을 찾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어두워지는 서울 거리에는 어둠과 불빛이 교차되며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는 택시를 잡으려고 뛰어다녔다. 고강진의 별장을 조사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보름 가까운 달이 주위를 조명하고 있어서 어둠 속에서도 주변을 식별하는 데는 그리 큰 어려움이 따르진 않았다. 저녁에 찾아온 여가수의 말대로 별장은 구의동 워커힐 입구에서 워커힐 정문 방향으로 5백여 미터 들어간 큰길 옆, 척추 장애자 자활원인 정립회관에서 다시 아차산 속으로 20m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큰 도로변에서 겨우 자동차 한 대 들어갈 만한 좁은 도로가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채 뚫려 있었고 그 끝에는 작기는 하지만 아름답게 생긴 별장 하나가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별장 15m 전방에서 차를 내린 문호는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며 올라갔다. 별장 근처에는 승용차가 있는 듯 어렴풋이 보여 왔다.
승용차를 멀리서 바라보던 문호가 깜짝 놀라 몸을 숨겼다. 승용차 뒤에서 어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한 것이다. 그림자는 승용차 뒤로 해서 건물 뒤편으로 사라졌다. 불이 하나도 켜져 있지 않은 건물을 배회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숲속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잔뜩 웅크린 채 숨어 있는 문호는 손바닥에 배어 오는 촉촉한 땀을 느끼고 있었다.
건물 뒤로 사라졌던 그림자가 다시 한 바퀴 돌아 반대 방향에서 나타나 건물 정문 앞으로 다가와 잔뜩 꾸부리고 앉아 땅바닥에서 무엇을 찾으려는지 더듬거리고 있다. 문호는 살금살금 다가갔으나 그림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그대로 꾸부리고 앉아 무엇을 하고 있었다. 문호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다가가 힘껏 덮쳤다. 갑자기 습격을 당한 그림자는 몸을 빼돌리려고 발버둥쳤으나 유도와 격투술로 단련된 문호의 완력에 저항하기에는 너무도 역부족이었다.
잠깐 엎치락뒤치락하며 엉켜 붙었으나 문호의 주먹 한 방에 그림자는 넙죽이 엎어져 버렸다. 문호가 엎어진 그림자를 그대로 내려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그림자가 엉금엉금 기어 옆의 나무를 의지하고 일어났다.
"누구야, 누구냔 말야."
일어나는 사내를 바라보던 문호는 그만 어이가 없었다. 문호는 놀란 채 그림자로 다가갔다, 그러나 정작 놀란 것은 문호가 아니고 그림자의 사내였다. 둘은 서로 얼굴을 들여다보다 말고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네가 갑자기 등뒤에서 덮치는 바람에 여기서 인생 끝나나 부다 했지. 어이구 깜짝 놀랐네. 웬놈의 주먹이 그렇게 세. 봐가면서 쳐야지."
둘은 마른 풀밭에 앉았다.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는 멍청하게 부어 오른 턱을 만지며 앉아 있었다. 그림자는 다름아닌 Q신문사 민형규 기자였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문호가 형규의 턱을 미안한 듯 바라보며 물었다. 등에 흐르는 땀이 찬 바람으로 서늘해졌다. 형규가 일어나 문호를 끌고 자기가 몰고온 승용차 속으로 들어갔다. 히타를 켜고 둘은 잠시 앉아 쉬고 있었다.
"나 오늘 종일 취재 다녔어. 방송국에 가니까 박문호 형사가 다녀갔다 그러더군."
"그랬어? 그런데 여긴 왜 왔어?"
"여기?"
갑자기 한기가 오는지 몸을 부르르 떨던 형규가 손수건을 꺼내 등의 땀을 닦았다.
"여기가 고강진이 피살당한 장소 같아서 찾아왔어. 혹 무슨 단서라도 발견할까 하고."
"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형규나 문호가 방송국에서 얻은 자료에 의하면 고강진이 이화영과 싸우고 난 뒤 이 곳 별장으로 오겠다고 말을 했다. 그렇다면 방송국을 나온 고강진은 이곳으로 달려왔을 테고 누군가가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습격했다는 추측을 쉽게 할수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게 있어."
"이상해? 뭐가."
"문호 자네보다 난 한 시간 정도 먼저 왔어. 그런데 이 근처에 아무리 살펴봐도 격투를 했거나 사람을 죽였을 만한 장소는 못찾았어. 집안팎이 너무도 잘 정돈된 채로 있단 말야. 도대체 무슨 흔적이 없어."
"글세... 만약 범인이 고강진과 면식이 있는 범인이라면 집안에서 사고가 났겠지. 그런데 대문이 밖에서 잠겨 있다는 것은, 그리고 안팎이 잘 정돈 되어 있다는 것은 집 밖에서 범행했다는 증거란 말야. 이런 경우가 아닐까. 즉 범인이 이 숲속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고강진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길에서 습격해서 죽은 거 말야. 그 상황 같은데."
"글쎄, 그 생각도 해 보았는데, 그래도 무언가 싸웠다면 흔적이 있어야 할 텐데. 그걸 발견하지 못하겠어."
"가령 범인이 힘이 아주 강하다면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냐. 아까 내가 널 덮쳤을 때 죽일 마음만 먹었으면 간단히 끝났어. 목 졸라 버리면 말야. 고강진이 죽은 것도 그것으로 판단하고 있잖아."
"경찰 병원에서 검시 결과는 언제 나온대?"
"내일 오전 중에 나오나 봐."
"검시 결과를 기다려 보자구. 그 결과에 따라 추적하는게 정확할것 같아."
"이봐 형규. 검시 결과도 중요하지만 말야. 난 아무래도 머리가 정리되질 않아. 도대체 범인은 누구며, 열차에서 어디로 사라졌으며, 열차에서는 왜 애꾸다 아니다 하며 진술이 엇갈리는지. 거기다가 이화영이까지 누구에겐가 납치당했으니. 진남포 피습 사건만 해도 그렇고 정신을 못 차리겠어. 정신을."
"그래도 생각나는 게 있을 거 아냐."
"생각이야 많지. 난 이번 사건들이 절대 개체 사건이 아니다 하는 생각뿐이야. 고강진, 진남포, 애꾸, 사라진 노인. 즉 성기준, 이화영 이들이 모두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얽혀있으면서도 보이지는 않는 거야. 중요한건 이들을 하나로 일목 요연하게 꿰어 맞출수 있는 논리를 성립시켜야 하거든. 그 논리 성립이란 게 참 어렵단 말야. 내가 어떤 가정의 논리는 성립시켜 놓았어. 논리적으로는 이들이 한끈으로 꿰어져. 그런데 문제는 현실성 결여야. 현실성이 부족해. 그래서 고민중이라고."
"그래? 그거 아주 흥미 있는 얘긴데. 진남포, 고강진, 이화영, 노인이 모두 하나로 연결된다 이거지. 그것 좀 들어보자고."
"가만 있어. 그렇게 흥분할 만한 게 못 돼."
문호는 온몸에 피로가 엄습해 오는지 시트에 몸을 기대고 기지개를 켜며 온몸을 뒤틀어 댔다. 그도 그릴 것이 새벽부터 사건이 터져 서울에서 대전으로 다시 서울로, 방송국으로 한시도 쉴 새 없이 뛰어 다녔으니 아무리 강인한 체력이라 해도 한계를 느끼지 않을수 없기 때문이었다. 시트에 기대어 눈을 감은 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한 가능성은 딱 한 가지, 즉 R-TV의 개입이야. 거기 제작 담당 이사 조남웅이 고강진을 스카웃하려다 오히려 망신만 당한 얘기는 다 알려진 것이고 거기다가 손에 들어온 떡을 놓친 결과가 돼 버린 '흥남 철수 작전' 시나리오 사건하며, 더구나 그 주연에 고강진이 발탁됐다고 하니 그 사람 눈 뒤집히게도 됐거든. 방송국 측에서도 조남웅이 쓸데없는 고집 피우다가 죽 쑤었다고 상당히 불만을 품고 있나 봐. 그러니 그의 개입 가능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단 말야. 조남웅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화영과 고강진의 스캔들을 흘리는 것쯤 손쉬운 일이거든. 그러니까 두 사람이 같이 출연하는 프로에 시간을 맞춰서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가운데서 다투도록 유도할 수 있고, 그리고 다툰 다음날 누굴 시켜서 고강진을 살해하는 거야. 다음 이화영을 납치하는 거지. 혐의를 이화영에게 돌리도록. 그리고 제 2의 사건을 또 하나 터뜨리는 거야. 혼선을 빚도록 말야, 거기서 억울하게 당한 게 바로 진남포라 이거지. 소위 손자 병법에 나오는 허허실실전법을 사용한 거야. 그 다음 범인을 완전 범죄로 만들어 법망에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자기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성기준을 동원시킨 거지. 이렇게 되면 범인이 사라진 방법도 또 모든 사건을 하나로 꿰어 맞출 수 있는 논리가 완벽하게 성립되거든."
"거 기가 막히는 추린데. 그 노인이 공범자였다는 증거만 포착되면 사건은 일사천리로 풀려 나가겠는데..."
그러나 문호의 표정은 결코 밝지만은 않았다. 그 나름대로의 멋진 추리에도 한가닥 질긴 회의는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현실성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성이야. TV방송국 제작 담당 이사 정도 되는 사람이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과연 살인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지. 물론 조남웅이 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고 범인이 그 하수인이라는 게 나타나면 사건이야 쉽사리 끝나겠지만 가능성이 희박하단 말야. 그렇다고 그의 개입이 한낱 추측에 불과한 것이라면 사건 해결이 문제고."
형규는 잠자코 있었다. 예리하고 판단력이 강한 문호가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의 고충이 이해가 되었다. 물론 조남웅이 개입되었다면 일은 쉽게 풀려간다. 그러나 문호 자신의 판단대로 그만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의 탑을 포기하고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이런 커다란 범죄를 감행할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형규 자신도 회의에 젖지 않을수가 없었다.
형규는 담배를 빼어 문호에게 넘겨 주었다.
"이봐 너무 성급하게만 생각하지 마. 아직 사건이 터진 지 하루도 못됐어.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붙어 봐. 또 무슨 구멍이 뚫리겠지. 기다려 보자구. 금년에 참 어려운 일만 생기는구먼. 하나 해결하면 또 하나 터지고..."
문호와 형규는 차 뒷좌석 시트에 기대어 담배만 혼자 다 타들어가도록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바람이 또 스산하게 불어댔다.






갈매기 주점


진남포가 살고 있던 아파트 앞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이 아파트 경비원이 애꾸인것을 안 최찬일 형사가 뒤따라가 그를 불러세웠다.
우연일까, 아니면 이번 사건과 관계가 있는 사람일까, 최찬일은 흥분되는 가슴을 누르며 말을 건넸다.
"저, 미안합니다. 여기가 신아 아파트가 맞죠?"
"네, 그렇소마는 댁은 뉘신지."
경비원은 약 47, 8세 가량 되어 보였다. 그는 바람이 차다며 최찬일을 경비실 안으로 안내했다.
"여기 아파트는 몇 평짜리나 되죠?"
처음부터 엉뚱한 질문이었다. 그 애꾸의 동태나 어젯밤의 행적을 알아보자면 처음부터 자기가 경찰임을 내세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쪽 떠오르는 실망의 빛은 어쩔수가 없었다. 연령은 비슷해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나약한 체격이었고 얼굴도 아주 곱상하게 보였다. 말투도 매우 고분고분했고 분위기도 좋은 사람이었다.
"이거요? 이거 전부 열두 평짜리죠. 방 두 칸에 부엌이 하난데... 왜 방 얻으시게요?"
"아뇨, 그런 게 아니구 뭣 좀 알아보려구요."
"이거 젊은이니까 하는 얘긴데 이 아파트 살 생각은 아예 마시우."
"왜요.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이유는요, 보면 몰라요? 아파트가 너무 낡았어요. 아파트가 처음 건립되기 시작할 무렵 지은 거니까 수명이 다 된 거나 다름없죠. 그저 잠깐 세들어 살 거라면 몰라두요. 곧 헐릴 거예요. 뭐 뭐라더라. 어떤 건설 회사에서 뒷 부지까지 한꺼번에 매입해서 새 아파트를 짓겠다나 봐요."
"아, 그렇군요."
찬일은 경비원에게 담배를 한 개비 권했으나 사양했다.
"담배하고 술은 전혀 안해요. 식구들이 전부 교회를 다녀서..."
경비원은 담배 대신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씹었다. 찬일은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 형사임을 밝혔다. 이 경비원이 애꾸인 것과 범인이 애꾸인 것은 우연에 불과했다.
첫째 열차 내에서의 목격자들 진술에 의하면 범인은 어깨가 딱 벌어지고 체격이 좋은, 그리고 얼굴 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고 또 강한 악센트의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고 했는데 이 경비원은 똑 떨어진 서울 말씨를 쓰고 있었다. 말씨야 위장을 할수도 있지만 체격 조건은 아무래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최찬일이 형사라는 말을 듣고 경비원은 깜짝 놀라며 눈이 휘둥그래졌다.
"네, 그러셨군요. 그런데 무슨 일로... 혹시 어저께 사건 때문에... 진남포라는 배우..."
"예, 맞습니다. 어젯밤 그 사건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조사 좀 해 보려구요. 어젯밤 그가 피습당한 상황, 그러니까 시간이나 장소 그밖의 참고 될 만한 게 없을까 하고 찾아온 거죠. 혹 무슨 기억나시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진남포, 그는 최찬일이 알고 있는 대로 부산 뒷골목에서 이름난 씨름꾼에다가 주먹을 잘 쓰는 건달이었다. 부산 어시장을 무대로 같은 또래의 똘마니와 어울려 뒷골목을 주름잡고 있었는데 다행히 영화사 사장의 눈에 띄어 배우로 새출발한 사람이었다.
영화계에서 한동안 눈에 뜨이지 않아 그가 그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어떤 경로를 밟았는지 지금은 S-TV에 전속되어 그나마 커다란 행운을 잡은 셈이 된 3류 액션 배우였다. 그가 잡은 S-TV전속의 기회는 참으로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진남포가 정열적으로 영화계에서 뛸적에 같이 일했던 다른 2, 3류 조연급 배우들의 지금 생활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재주가 없으니 취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아놓은 돈이 많아 장사를 하거나 새로운 생활 터전을 잡을 수 있는 형편들이 아니었다. 작은 출연료에 그나마 진남포 같은 사람의 생활 터전이 되어 준 액션 영화가 관객의 인기를 잃어 퇴조하자 더욱 발디딜 틈이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 후 어쩌다 촬영하는 전쟁 영화에 단역을 맡아 뛰기는 했지만 그나마 정말 어쩌다 한번이었고 배역이 안 주어지면 몇날 몇달이고 충무로 뒷골목만 배회할 뿐이었다. 그러니 생활의 어려움이란 짐작할 만도 했다. 그래도 진남포가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선천적인 기묘한 얼굴 덕과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점수를 따며 살아온 덕분이었다.
배우 시절도 그랬지만 지금도 작은 수입으로 주위의 불쌍한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 사는 성품이 그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돕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찬일이 아는 것은 그것뿐 더 이상의 깊은 사생활이나 그의 생활 방식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대략 어떤 게 알고 싶은가요?"
경비원이 난로 뚜껑을 쑤석이며 물었다.
"어제 그분, 집에 돌아와서 피습당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나 하는게 궁금합니다. 가령 누가 찾아왔었고 또 누굴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
"사실 오늘 나는 비번입니다. 어젯밤 근무했거든요. 그런데 오늘 근무하는 김씨가 부인 병환 때문에 하루만 더 수고해 달라고 해서 근무하는 겁니다. 하필이면 어젯밤 내가 근무할때 그런 일이 생겨서 골치가 아파요. 어제 진남포씨가 집으로 돌아온게 밤 7시경이었거든요. 평소와 다름없었어요. 그런데 아파트로 들어가다 말고 이리로 들어왔어요. 오히려 기분이 썩 좋아 보였어요. TV에 나오던 중 가장 큰 배역을 맡았는데 이제 자기가 본격적으로 출연할 장면을 찍을 때가 됐다나요. 사람이 착하긴 해도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죠. 그런데 어제는 유난히 기분도 좋아 보였죠. 여기서 한참 놀다갔어요. 그러면서 오늘밤 대본 연습 좀 해야겠다 그러더군요. 그 후 제가 9시 30분경 아파트 각 층을 순찰했어요. 진남포 씨는 4충을 쓰고 있어요. 어제 안개가 너무 끼어서 혹시나 하고 돌았는데 베란다 복도에서 보니까 진남포 씨 방에 불이 커져 있고 대본 외우는 소리가 나고 있었어요. 그 전에도 가끔 대본 연습하는 걸 본 일은 있었지만 어저께는 아주 굉장히 진지하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밤 12시 30분경 되었을까요. 머리가 부석부석 한 채 진남포씨가 먹을 것을 싸가지고 또 내려왔어요. 잠도 잘 안 오고 대본도 잘 안 외워져서 머리 좀 식혀야겠다구요. 허긴 전에도 가끔 먹을걸 들고 내려와 같이 놀다갔으니 별다른 생각은 없었죠. 과일도 좀 먹고 과자도 좀 먹다가 진남포 씨가 어쩐지 머리가 찌쁘듯 하다면서 찬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죠. 뭐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런가부다 했죠. 그런데 한 20분 후에 피투성이가 돼서 돌아왔어요. 얼마나 놀랬는지..."
경비원이 이야기하는 동안 최찬일은 하나 빠짐 없이 요점을 요약해서 기록하고 있었다.
"그 때가 약 몇 시경이었습니까?"
"한 새벽 1시 10분경 됐을 겁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죠?"
"아, 네 진남포 씨가 내려온 게 12시 30분경이었거든요. 진남포씨가 바람 쏘이러 나가고 내가 일지를 기록한 게 12시 50분경이었어요. 그리고 한 20분 후에 돌아왔으니까 1시 10분경으로 생각하는 거죠."
"무슨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어떤 놈이... 어떤 놈이... 하며 매우 숨가빠했습니다. 저는 바로 112에 신고해서 백차를 불러 병원으로 옮겼죠."
"진남포 씨 가족은 어떻습니까?"
가족은 여동생 하나밖에 없다고 했다. 서른 살이 다 된 여동생은 그러나 정상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라고 했다. 장님 여동생 때문인지 아니면 경제적 여건 때문인지는 모르나 아직 그 나이가 되도록 장가도 들지 않고 있다고 했다. 마흔 다섯 살의 진남포는 여태 독신으로 살아온 것이다. 여동생은 종로에서 일하며 거기서 먹고 자며 이따금 이 아파트에 들른다고 했다.

우발적인 사고가 아닐 것이라고 예견했던 최찬일의 생각은 또다시 수정되어야 했다. 진남포는 1시 30분경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이 아파트 근처를 거닐고 있었고 그때 누군가 와서 그를 난자하고 도망친 것이다. 진남포가 만일 누구에겐가 전화를 받고 나간 것이라면 아니 누구와 약속이 있어서 밖으로 나간, 다시 말해서 그를 피습한 사람과 사전 약속이 있어 밖으로 나간 것이라면 경비실에 앉아서 과일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즉 불특정시간에 밖으로 나가서 불특정인에게 피습을 당한 그런 상황이었다. 그가 단순히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밖으로 나가서 생긴 우발적인 사고로 드러났다.
진남포 피습 사건이 우발적인 사건이라면 전체적인 수사 방향은 진로를 바꿔야 했다. 고강진 사건과 관련이 없다면 특별 수사반에서 수사를 할 게 아니라 관할 경찰서에서 진행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좀더 기다리기로 했다. 같은 방송국 같은 프로에 출연하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가 아직은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진남포의 역할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시점에서 피습을 당했고 고강진이 피살당했다. 함부로 결정할 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
"아파트는 지금 비어 있나요?"
"네, 열쇠를 본인이 가지고 있는데. 아, 동생도 하나 가지고 있군요. 사고가 난 후로는 찾아온 사람도 없고 계속 비어 있는 상태죠."
"어젯밤 이곳에 왔을 때 누굴 만나야겠다든가 혹은 누가 찾아올 사람이 있다든가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없었습니까?"
"그런 말은 없었어요. 아침 10시쯤 외출했다가 오후 1시경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네 시경 나가면서 '아 이렇게'정신이 없으니, 대본을 방송국에 놓고 그냥 왔지 뭐예요' 하며 웃으면서나갔었지요. 그리고 다시 돌아온 게 오후 1시경이었습니다."
"그럼 시간으로 봐서는 이렇게 되는 셈이군요, 아침 10시경 외출했다가 1시경 돌아왔고, 4시경 다시 외출했다가 7시경 돌아왔다. 그 다음 9시 30분경 순찰돌 때 대본 외우며 연습하다가 머리를 식힌다며 내려온 게 12시 30분경, 밖으로 나간 게 12시 50분경, 피투성이가 되서 돌아온 게 새벽 1시 10분경이 되는군요."
"예, 그렇게 되는 셈입니다."
고강진과 진남포가 같은 날 밤 당했다는 동질의 성격 말고도 두 사람은 여러 가지로 유사점이 많았다. 그러나 사건 자체에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밖으로 바람을 쐬러 나왔다면 몰라도 임의대로 나왔다가 더구나 경비원과 마음놓고 놀다가 잠깐 밖으로 나간 것이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밖으로 나왔으니 그가 습격당한 것은 누구의 계획적인 피습이라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거리의 불량배 짓이거나 아니면 술먹고 취해서 쏘다니는 건달패로 밖에는 볼수 없다. 그 시간에 이 거리를 나다닐 만한 사람을 찾아야 했다.
최찬일은 일단 경비원과 헤어져서 마포 경찰서의 도움을 얻기로 하고 돌아섰다. 돌아서던 최찬일이 우뚝 서서 무엇을 생각하더니 다시 경비원을 불렀다.
"아저씨, 죄송하지만 눈은 어떻게 다치셨나요?"
"눈요? 허허 이거 뭐라고 해야 할지, 꽤 오래 됐죠. 군에서 안전 사고를 일으켜 다쳤는데 흉하죠?"
열차에서 사라진 애꾸와 같은 왼쪽이긴 했지만 동일 인물이 아님은 증명되었다. 열차에서 사건이 터졌을 때 경비원은 여기서 근무를 했고 더구나 진남포와 같이 있으며 그가 다쳤을 때 도와 주기까지 했다.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판단한 그는 마포 경찰서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내일 진남포를 만나 봐야 알겠지만 이 정도로도 피습 사건의 상황은 윤곽이 떠올랐다. 문제는 그 시간대에 이 근처를 배회한 불량배를 찾는 것과 이 근처 대폿집을 찾아 늦도록 술마신 자들을 탐문해 보는 일이 남아 있었고 이것은 마포의 형사와 함께 조사하기로 했다.

마포 아파트를 중심으로 2km내의 크고 작은 술집은 자그마치 40여개나 되었다. 이 작은 구역에 대폿집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웬놈의 대폿집이 이렇게 많소?"
대동한 형사에게 물어 보았지만 그는 씨익 웃기만 했다. 아현동 고개 넘어서부터 마포 극장에 이르는 뒷동네는 아무리 봐줘도 서울 기준으로는 빈촌임이 틀림없었다. 요정 같은 요란한 술집은 한 군데도 없었다. 오가며 한 잔의 대폿잔으로 애환을 달래기에 꼭 알맞는 거리였다. 30여 군데를 둘러보았지만 그 시간에 술을 팔았다는 집은 한 곳도 없었다. 보통 때 같으면 그렇게 술꾼들 발길이 끊어질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젯밤 만은 상황이 달랐다.
"웬걸입쇼. 어제는 밤 열시부터 손님이 발길을 딱 끊었어요. 원 세상에 손님이 없어도 그렇게..."
아파트와 가장 가까운 '갈매기'라는 대폿집이었다. 드럼통으로 화덕을 만들어 여기저기 세워 놓고 등도 없는 의자를 네 개씩 화덕 주위에 돌려놓았다. 곱창, 순대, 묵, 돼지 불고기, 꼼장어 같은안주와 소주, 막걸리, 맥주 같은 주류를 진열해 놓고 팔고 있었다.
"초저녁부터 안개가 끼여서 그런지 밤 11시가 되니까 손님 발길이 딱 끊어졌어요. 그냥 문닫기도 섭섭해서... 아 지금 몇 시죠? 8시. 어제는 이맘 때부터 싹수가 노랬어요. 코앞도 못 알아볼 정도로 안개가 잔뜩 끼였으니 어디 갱신이나 하겠어요. 전부 일찍들 집으로 기어들어갔는지."
앞치마에 물 묻은 손을 닦으며 주모가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손님이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여기도 말이죠. 순대 한 사라하고 소주 한 병만 주세요. 이거 지금 소주 마시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닌데..."
"아이구 그럽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나중 들어온 손님에게 순대국을 한 그릇 말아 주고는 순대와 곱창을 설겅설겅 썰어 소주와 같이 가져온 주모가 옆에 덥썩 주저 물러앉았다.
"아주머니도 한 잔 드세요."
찬일이 소줏잔 넘치도록 따라부어 주모 앞으로 밀어놓자 이렇다
저렇다 말 한 마디 없이 홀짝 마셔 버리고는 커다란 순대를 하나 집어들었다.
"속이 씨원하구먼. 자 아저씨도 한 잔 받으시우."
방금 입에서 떼낸 소줏잔을 찬일 앞으로 되돌려놓자 이를 바라보던 최 형사가
"저 아주머니 어젯밤 이 근처에 수상한 사람 못 봤어요? 가령 뭐 밤늦게 돌아다닌다거나 여기서 술먹고 취해서 나갔다거나 아니면 무슨 싸우는 소리를 들었거나..."
"아따 원 젊은 사람들이 겁주네."
"겁주다뇨?"
"아 이런데 오면 공연히 형사나 되는 체하며 떠벌리는 놈들이 한두 놈인가요. 괜히 겁주고 폼잡고..."
"아니 그게 아니구요."
"아니긴, 척하면 삼천리지 내가 하나 둘 겪었는지 알아. 이런데서 대폿잔은 팔아도 눈치코치 하나는 기막히다고. 아 글쎄 어저께는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놈이 썩 들어오더니 한 상 뻐근하게 시켜 놓고는 뭐라고 씨부렁이는지 알아. 글쎄 뭐 미국서 유학하고 돌아와 대포 생각이 나서 왔다나? 내 웃겨서 이 자식 나중에 술값 내는 꼬깃꼬깃 구겨진 오천 원짜리 지폐 하나 찾는데 자그마치 10분은 걸렸을 거여. 그러더니 안주값이 비싸니 어쩌니 투정하잖아. 내가 뭐랬는지 알아요. 'X할 자식 미국서 공부하고 돌아왔다는 놈이 안주값이 비싼지 싼지 어떻게 알아, 나가 재수 없어' 하니까 그냥 도망가더라구요. 요새 세상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한 잔 먹고 취한 척, 그놈의 척 아주 매력 없다구."
하더니 이번에는 대동한 형사에게 한 잔 쪼르르 따라 부었다.
"아주머니 우리는 형사도 아니구 아무것두 아녜요.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인데요. 에 어젯밤 요 앞에서 진남포라는 배우가 누구한테 칼침 맞아서 입원중이에요. 그래서 혹시나 찾아볼수 있을까 하고 찾아온 거예요. 오해하지 마시구..."
"아이구 난 또 그것도 모르고. 아유 난 형사고 순경이고 그런 분들 딱 질색이라구요. 뭐가 어떠니 저떠니 하면서... 이거 공연히 미안 하구먼유. 근데 그런데 있으면 좋겠네요. 배우도 실컷 보고 가수도 보고. 아이구 내 팔자는 요놈에 곱창 꼬이듯 배배 꼬여가지구... 젊어서 남편한테 소박맞고 평생 요지랄로밖엔 못사니..."
주모는 입을 비죽거리며 한 잔 따라 자기가 마셔 버렸다. 저렇게 혼자 흥분하기 시작하면 말을 시키지 않아도 잘 떠들어댔다. 찬일은 그런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주머니 내가 멋진 남자 가수 하나 이리 데려다 한 잔 마실테니 그때 구경하세요. 인사도 시켜 드릴께."
하고 흥을 돋궈 주자 얼굴이 빨개지며 또 입을 비죽거렸다.
"그럼 그땐 내가 살께요."
하고 주모는 소줏잔을 다시 찬일에게 내밀었다, 이때는 놓치지 않고 다가앉으며 본론을 꺼내 묻기 시작했다.
"아줌마, 어제 혹 이상한 사람 못 봤수?
"어제? 이상한 사람이라니?"
"그런게 아니구 어제 늦도록 여기서 술 마신 사람이 있다든가 아니면 이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어제 뭐 특별한 사람은 없었는데... 내가 어제는 하도 장사가 안 돼서 문을 닫으려고, 그때가 12시 가까이 되었지. 그런데 글쎄 뭐 특별한 사람은 기억에 없는데. 글쎄, 뭐 굳이. 아 생각이 나요. 이상하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는 사람이 있었죠."
"그래요.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서 잘 좀 생각해 봐요."
찬일은 놀라서 주모를 바라보았다.
"있죠. 어제 12시가 휠씬 넘었어요. 손님이 워낙 하나도 없어서 혹시나 하고 밖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죠. 사람 그림자도 없으면 아예 문을 닫아 버릴려구요. 그런데 안개 저쪽에서 자동차 불빛이 좍하니 비쳐오더라구요. 눅눅한 날은 사실 술맛이 좀 당기거든요. 그래서 끝까지 기다려 본다구 서성거리는데 자동차 불빛이 탁 꺼지더니 조금 후에 아주 뚱뚱해 보이는 사람이 차에서 내리더라구요. 이상하다는 건 바로 이건데 택시 대가리에 별 모양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거든요. 차는 틀림없이 영업용이고요. 근데 차에서 내린 사람이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아파트 쪽으로 걸어들어갔단 말이에요. 술도 안 마시고 성큼성큼 걸어 가길래 '제길 술도 안 처먹고 가니 샷타나 내려야지' 하면서 문을 닫았는데요. 가만 생각해 보니 웃겨요. 아 돈 주고 타는 택시를 왜 아파트 앞에서 세워서 걸어갔나 하구요."
"그러면 그 사람이 차를 타고 아파트 앞마당까지 가지 않고 아파트 밖에서 차를 세워서 걸어들어갔다는 말씀이죠."
"그럼요. 이 앞길이 외길 아닙니까? 아파트가 끝인데 더 갈 데 있나요. 보나마나 아파트로 간 거죠."
12시가 한참 지났다니까 12시 20, 30분 정도? 영업용 승용차에서 내려서 신아 아파트를 향해 걸어들어간 사람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그리고 그는 왜 차를 아파트 마당까지 몰고 가서 내리지 않고 문 밖에서 내려서 걸어들어 갔을까. 어젯밤 진남포를 습격한 장본인 일까. 어쨌거나 진남포가 습격당하기 전 이 근처에 나타난 사람을 목격한 최초의 사람은 이 갈매기 주점 주모로 밝혀진 셈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마을 구조로 보아 이 아파트는 이곳이 종점이 되는 셈이다. 아파트 뒷 공터는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아 버려진 채 그대로 있었고 가옥들은 한 채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도 별다른 소리를 못 들었다니 아무래도 마을 한가운데서 당한 게 아니라 후미진 뒷 공터나 그 근처에서 당한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여기서 부딪쳤다. 아무리 뒷 공터를 둘러보아도 사람이 머리를 식히고 거닐 만한 장소는 없었다.
쓰레기가 함부로 버려져 있었고 마른 풀더미가 함부로 널려 있는 빈 공터. 과연 이런 곳을 바람을 쐬러 거닐 만한 곳으로 선택할 사람이 있을까. 공터에서 우두커니 서있던 그는 아파트 경비실을 다시 둘러 확인해 보았지만 실망만 더했을 뿐이었다.
12시가 넘어 이 아파트로 들어온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여 있었기 때문에 택시에서 내린 사람이 이 마당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절대 사람들 눈에 뜨일 염려는 없다. 그런 가정을 해본다 해도 진남포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 것을 예측하고 숨어 기다린단 말인가. 그 사람이 택시에서 내려 숨어 있었을 것이다는 추측은 타당성은 있지만 논리에는 부족 한 점이 많았다.
핏자국은 아파트 정문에서 4,5m전방 즉 공터나 입구 도로 주변에서부터 발견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공터에는 마른풀이 널려 있어 발자국을 찾는 것은 더더욱이나 불가능했다.
갈매기 주점이 문을 닫은 후에 돌아다녔을 불량배가 없다고 단정 할 수는 없다. 갈매기 주점이 문을 닫은 게 12시 30분쯤일 것으로 가정하고 진남포가 습격당한 게 12시 50분부터 새벽 1시 10분 사이라면 그 시간의 간격은 불과 20여 분밖에 되지 않았다.
진남포가 12시 50분에 아파트를 나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게 1시 10분이니까 꼭 2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 셈인데 그는 왜 괴한을 보고 소리 지르거나 사람들의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또
그가 소리 지르는 것을 아무도 듣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최찬일은 찬바람이 옷소매로 파고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터에 서서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침착하고 노련한 그의 태도였다.
"최 형사님 좀 이상하지 않아요? "
"글쎄요, 저도 아까부터 생각중인데 이거 좀 묘한 데가 있어요."
"그렇지요?"
"네,"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닫았다. 마포서에서 나온 김 형사가 생각 끝에 의견을 제시해 왔다.
"제 생각에는요."
"네."
"만일 진남포가 말입니다. 이건 순 제 생각입니다만. 만일 진남포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이 근처를 걷고 있을 때 불량배가 아닌, 저희들이 생각하는 진남포를 알고 있는 사람이 계획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다면 말이죠."
"그래서요?"
"만약 그랬다면 이 괴한이 갑자기 나타나서 위협을 하고 소리 지르지 말라고 했다면 조용했겠죠? 그리고 칼로 순식간에 긋고 도망 쳤다면 진남포가 소리 지를 여유가 없었겠죠."
"그도 좋은 착상이긴 합니다. 그러나 범인이 미리 진남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상황이 묘하지 않습니까? 진남포는 일찌감치 나와서 경비원에게 간식을 주면서 같이 놀다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불특정 시간에 나온 그를 미리 알고 밖에서 기다린다는 게 영 논리에 맞지 않는다 이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그 생각은요... 에, 그게 좀."
다시 생각에 잠기던 최찬일은 생각을 굳히려는 듯 다물었던 입을 한참 만에 열었다.
"그 가정은 이런 상황 외에는 더 추측할 수 없습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우발적인 사고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던 불량배가 갑자기 나타나서 칼을 휘두를 이유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고 봅니다. 시비가 붙어도 한참 붙죠. 특히 한국 사람이 싸우는 시간보다 워밍업 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려요. 처음에는 네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하며 말 싸움으로 한 시간 보내죠. 말 싸움 끝에 흥분해서 주먹이 오고 가거든요. 아무리 시대가 스피드하게 바뀌었다 해도 이런 동양 대륙적 특성은 안 바뀝니다. 영화를 봐도 그래요."
영화에 도통한 최찬일다운 발상이었다, 그랬다. 영화를 봐도 그렇다. 영국이나 일본 같은 섬나라 아니면 미국같이 개척의 수난을 겪은 민족은 싸움을 해도 질질 끌지 않는다. 시비가 붙으면 막바로 결투가 시작되고 결투가 시작되면 이내 끝장이 나고 만다, 서부 영화를 보면 이러쿵 저러쿵 말 싸움 할 틈이 없다. 상대가 적이다 하는 판단이 내려지면 주먹부터 올라가든가 정당하게 권총으로 대결하여 끝을 본다. 영국이나 일본 같은 결투를 보면 우선 싸울 장소를 정해 놓고 증인을 세워 결투를 벌여 죽을 때까지 싸운다.
그러나 중국 영화를 보면 싸움의 양상이 자못 다르다. 적을 만나면 우선 쑤알라 대며 시비를 가린다, 지리할 만큼 떠들어댄 다음 칼 싸움이나 주먹 싸움을 벌인다. 싸우면서도 계속 떠들어댄다. 우리 나라 싸움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우선 말로써 시비를 건다. 그리고 주위에서 싸움을 말리면 이때부터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진다. 싸움이 끝나도 깨끗하게 헤어지는 법이 없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욕지거리를 퍼붓는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이번에는 주위 사람에게 상대방을 맹렬히 비난한다, 이것이 보통 우리가 흔히 볼수 있는 싸움의 전형적인 방법이다. 강도질을 하기 위해 습격하는 방법 외에 시비가 붙어 벌이는 싸움은 이 범주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기를 마시러 밖으로 나온 사람에게 무엇을 빼앗을 게 있어 습격한단 말인가.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치뤄진 이 습격에서 최찬일이 생각한 경우란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진남포가 당한 습격은 계획적인게 틀림없습니다. 내가 상상한 경우는 이런 거죠. 즉 이러한 경우는 전화 연락이 가능케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만나고 싶다. 아니면 만나야 한다. 몇 시까지 어디로 나와라 하고 지시하는 경우죠. 물론 진남포가 아는 사람일 것이고 만나려는 이유가 충분하겠죠. 시간을 맞춰서 경비실에서 나오고 잠깐 쉬었다가 바람 쐬러 간다는 명목으로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그를 불러낸 사람은 칼로 긋고 도망하는 경우죠. 생각해 보세요. 진남포가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또 경비원과 놀다가 밖으로 나갔을 때 표정이 무척 밝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상황이 제 추측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그거야 지금 당장에는 알 수 없겠죠. 이제부터 우리는 진남포의 주변 사람이나 단서를 찾아야 합니다. 독신으로 반평생을 보낸 진남포 주변에 어떤 인물이 있는지는 캄캄합니다. 그러나 찾아야죠. 아마 진남포 자신도 쉽게 털어놓진 않을 겁니다. 자, 일단 방송국으로 갑시다. 더 늦기 전에 찾아내야죠."
둘은 그곳을 떠나 S-TV로 방향을 돌렸다. 제작 담당 이성구 이사를 찾아갔다. 이성구 이사는 짜증이 날 정도였다. 오후 내내 박문호 형사에게 시달리고 그가 돌아가자마자 Q신문 민 기자가 또와서 시간을 뺏아갔다. 다른 신문 기자도 번이나 왔다간데다 숨좀 돌릴 만하자 최찬일이 만나자고 덤볐으니 짜증이 날만도 했다. 제작 방향도 결정짓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계속 찾아오자 그만 외출했다는 핑계를 대고 따돌려 버렸다. 그러나 그냥 호락호락 물러갈 최찬일도 아니었고 무조건 피하고만 다닐 방송국 입장도 못되었다.
이성구 이사 대타로 들어선 사람은 지대로 실장이었다. 그러나 지대로 실장이라고 해서 더 달리 뾰족한 단서가 나올 리도 없었다. 진남포는 사건이 나던 날 잊고 온 대본을 찾으러 방송국에 잠깐 들렀고 고강진과 이화영이 싸우는 것을 보고 말리다가 밖으로 5시경 나갔다. 누구와 다툰 일도 기분 나빠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이 이사 대타로 나온 지대로 실장도 몹시 지쳐 있었다.
두 사람의 탤런트가 갑자기 빠져 버린 데다가 이화영까지 증발되었고 종일 신경쓸일만 생기니 골치가 다 아파왔다.
"미안합니다. 한 가지만 더 여쭤 보겠습니다. 귀찮으시겠지만 좀 도와주십시오."
"말씀하십시오."
"진남포 씨가 들렀을 때 유난히 기뻐하거나 들떠 있는 표정은 아니었습니까?"
"그런 눈치는 전혀 없었습니다. 평범했습니다. 진남포 씨가 대본을, 들고 나가며 '실장님 오늘 내일은 일이 없어서 집에서 대본 연습이나 하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수고하세요' 하며 나갔거든요. 이화영과 고강진 싸우던 날이긴 했지만 얼굴에 다른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진남포와 고강진 사이는 어땠습니까?"
"글쎄요. 뭐... 고강진이 진남포를 썩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분위기가 이상하니까 진남포가 서둘러 나갔는지도 모르겠군요. 고강진이 너무 깔끔한 척해서 사람들이 주위에 잘 붙어 있지 않는 게 흠집이긴 합니다만."
"알겠습니다. 여하튼 진남포가 방송국을 나간 이후로 여기서는 누구도 그를 본 일이 없다는 말씀이죠. 그렇다면 이 방송국에서 거기 까지 두 시간에... 네,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밑도 끝도 없이 중얼거리던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말을 중단시키고 김 형사와 함께 방송국을 빠져나왔다.
"김 형사님, 오늘 수고가 너무 많았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몇군데 들러 볼테니 여기서 오늘은 헤어지죠. 정말 오늘 여러 가지로 감사했습니다."
김 형사를 되돌려 보낸 최 형사는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그는 무엇인가 아직 자기의 손이 미치지 않는 그 무엇을 감지하고 있었다. 가까운 다방으로 들어가 커피를 한 잔 마시고는 조각처럼 굳어진 채 앉아 있었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그 의문은 손끝에 감촉이 닿을 듯 닿을 듯 멀어지는 그 의문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밖을 향해 막 뛰어나가려는데 뒤에서 급하게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 여보세요... 선생님."
깜짝 놀라 뒤돌아본 그는 그만 아차 싶었다. 생각에 골똘하느라고 그만 찻값을 치르는 것을 깜박했던 것이다. 계산을 급하게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를 나올 때 진남포는 분명히 대본을 빠뜨리고 나와서 가지러 간다고 했다. 그리고 고강진과 이화영의 싸움이 거의 끝나갈무렵 방송국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가 방송국을 나온 시간은 오후 5시경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경비원의 말을 빌리면 그가 아파트로 돌아온 것은 오후 7시경이라고 했으니 그가 방송국에서 아파트로 돌아오기까지의 두 시간은 공백으로 떠있는 상태가 되었다. 마포에서 방송국까지는 아무리 줄잡아도 자동차로 10분 거리밖에는 되지 않는다.
방송국에서 나올 때도 지 실장에게 '집에 가서 대본 연습이나 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는 그 후 두 시간이나 어디선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두 시간 동안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사건 당일 그의 행적 가운데서 가장 진공 상태로 빠진 것은 5시부터 7시까지의 두 시간이었다. 최찬일을 지금부터 그가 두 시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또 누구와 만났는지를 알아보아야 했다. 방송국 사람들과는 다섯 시에 헤어졌다니 그쪽 사람들에게서는 더 알아 볼 일이 없다. 탤런트실 외에 그가 갈 만한 곳은 배우 협회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시간이면 그곳 사람들도 거의가 퇴근할 무렵이다. 또 설혹 그가 배우 협회를 들른다고 해도 대본 연습이 바쁘다고 했으니 오래 머무를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그의 사생활에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지역, 그리고 그가 만나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만한 사람, 대본 연습보다 더 중요한 일을 보아야 할 장소와 사람을 찾아야 한다. 최찬일이 그 장소와 사람을 점찍고 찾아간 곳은 종로 변화가였다.

최 형사가 돌아갔다는 보고를 받은 이성구 이사는 지대로 실장을 불렀다. 중요 간부도 몇 명 모여 있었다. 소파에 깊숙이 파묻혀 눈을 감고 있던 이 이사가 일어났다.
"오늘 사장님으로부터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첩을 꺼내 뒤적이더니 사장의 지시 사항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사장님 지시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메모들 해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이화영 증발 소동을 관리 부서에서 신속히 조사할것. 둘째, 경찰이나 언론 기관에 사내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적극 보안할 것. 셋째, 고강진의 자리를 메울 대타를 신속히 선정할것. 단신인 발굴에도 최선을 다할 것. 넷째, 이번 사건을 게기로 전속 연예인의 개인적인 사생활을 파악할 것. 이상 네 가지 지시가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세번째 사항 중 '흥남 철수 작전'의 주인공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 내일 중역 회의를 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회의의 결정에 따라 내일부터 즉시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또 네번째 사항은 아주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특히 요정 출입이나 대마초로 품위를 떨어뜨리는 사람은 가차없이 조처하겠답니다."
할 말이 있으면 이때 하라는 식으로 이 이사는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지대로 실장만 남고 모두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회의는 사장님 지시 사항 전달로 간단히 끝났다. 이 이사는 지대로 실장만 남겨놓고 모두 돌려 보냈다.
"탤런트실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뭐 말이 아닙니다. 그보담두 오늘 나가야 할 '쇼는 즐거워' 사회자 두 명이 모두 펑크가 나서 못 내보냈습니다. 그게 토요일 다섯 시부터 방송되는 프론데 그쪽에서 무슨 보고 없었습니까? "
"아까 보고받고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쇼는 즐거워'가 50분프로거든요. 그래서 그 시간에 '프로야구 하이라이트' 특집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거 해마다 연말쯤이면 꼭 한 건씩 터져 아주 죽겠습니다. 작년에도 대마초로 '김민자'가 없어지는 바람에 얼마나 애먹었습니까... 그런데 경찰측에서는 뭐라고 합디까?"
다리를 아예 책상에 올려 놓고 머리를 의자 뒤로 젖히고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지 실장을 바라보았다.
"뭐 그 얘기가 그 얘기였습니다."
이 이사는 아까부터 뭔가 말하려는 핵심을 자꾸만 피하는 것 같았다. 뭔가 좋지 않은 얘기를 꺼내려는 눈치였다.
"지 실장님, 저 좀 어려운 부탁이..."
"아, 말씀하시죠. 제게 무슨..."
"저 다름 아니라...사실은 이번에 Q신문에서 은밀히 조사하고 있는 어떤 사건을 입수했습니다. 사실 지금 탤런트 몇 명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데 그 중엔 중견도 몇명 끼여 있습니다."
"블랙리스트라뇨?"
"일부 탤런트들이 탈선하고 있다는 거죠. 우리 방송국에도 여자가 세 명 남자가 두 명이나 됩니다. 우리 방송국뿐만은 아니지만 지금 사건도 그렇고 해서 철저히 조사해서 아주 뿌리를 뽑으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누굽니까?"
"신화일하고 지금 입원하고 있는 진남포 두 사람입니다."
"진남포가요?"
지대로 실장은 깜짝 놀랐다. 여자 탤런트가 요정이나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탤런트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은 종종 있어온 일이었다.
그런데 남자 탤런트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금시 초문이었다.
더구나 진남포가 끼여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미남도 아닌데다가 유명한 것도 아니고 또 무슨 별다른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 그가 탈선 행위를 한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신화일은 어떤 내용이고 진남포는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신화일, 그거 햇병아리가 얼굴 좀 반지르르하다고 벌써부터 얼굴값하고 다녀요. 돈 많은 유부녀 후리고 다니는 모양인데 잘 좀 알아봐요. 엉터리 제보인지도 모르니까요. 삼청동 근처 모 요정에서 누구와 어울리는걸 본 사람도 있다는데. 그리고 진남포는 너무 확실해요. 지금 입원하고 있는 판국에 뒷조사 한다는게 미안하긴 하지만 실장님이 좀 확인 좀 해보시고 그게 사실이라면 퇴원하는 대로 조치하십시오."
"대개 어떤 종류입니까? 제 생각엔..."
"지 실장두 진남포 사생활이 어떤지 좀 아십니까?"
"글쎄요, 독신으로 살고 있다는 것 외에는 별로 알려진게 없어요. 여기 온지도 얼마 안되고..."
"잘못하다가는 우리 방송국 전속 탤런트 때문에 큰 망신당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니죠. 이제 망신은 시작된 거나 다름없죠. 고강진 사건이나 이화영 같은 일이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까? 나 참. 그런데 이제 진남포까지 한몫 거들어대니 나 기가 막혀서 이봐요. 지실장님. 아 글쎄 진남포가 유한 마담 전문 안마사로 돌아다닌다지 뭡니까. 한두 군데서만 들었어도 믿지 않을 텐데 이건 뭐 사방에서..."
"아니 진남포가 안마를 하러 다닌다구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러니까 하는 소리 아닙니까? 그것도 요즈음은 아주 종로에 있는 안마시술소에 대놓고 다닌다니 나 참 기가 막혀. 그러고돌아다니니 그런 꼴 당하고 있지."
지 실장으로서는 정말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그의 생활이 곤궁한것은 대략 알고 있었다. 액션 영화 퇴조로 영화가에서 잠적해 있다가 나타났을 때 그의 생활 수준은 금세 알아볼 만했다.
그러나 그가 안마소에 다니며 유한 마담을 상대로 안마를 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 얼굴 가지고는 그런 직업을 택할 수가 없으리라는 판단이 앞섰다.
그러나 이 이사의 태도나 말투로 보아서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하는 말이 틀림없었다.
생각하고 있는 사건의 실마리는 이 이사나 지 실장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 희한한 장소에 드나드는 돈푼깨나 흘리고 다니는 여자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놀다가는 여자라면 사생활이 깨끗할 리 없다. 둘이 상상하고 있는 점은 바로 이 점이었다.
"그렇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여자들에게 돈을 뜯으려고 협박하거나 공갈치다가 오히려 그쪽에서 깡패를 동원해서 선수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죠."
"결국 그의 생활이 궁핍하다든가 그가 안마시술소에 드나든다든가 또 집 앞에서 괴한에게 습격당한 게 다 하나로 엮어지는 얘기죠. 문제는 우리 회사가 얼마나 크게 망신을 당하느냐 이것만이 남은 꼴이 되어 버렸으니 내 속이 안 타겠습니까? 보나마나 이화영, 고강진 그것들 당한 것도 다 그렇고 그런 내막이 있을 겁니다. 지 실장님 진남포 건은 오늘 당장 알아봐서 내일까지 보고하라는 사장님 지시가 있었습니다. 어려우시지만 오늘 좀 뛰어 보시고 내일 보고해 주십시오. 이화영이도 지금 있을 만한 곳을 수배해 놓았습니다. 세상에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통 물을 흐려 놓는다더니 되지도 못한 것들이..."
"알겠습니다. 오늘 뛰어다녀 보고 내일 결과를 말씀 올리겠습니다."
이사실을 나온 지 실장은 곧바로 시내로 나왔다. 날은 벌써 많이 어두워졌다.
그가 찾아다닐 범위는 종로 1가부터 3가까지가 고작이었다. 4, 5, 6가는 그런 사치스러운 장소가 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진남포가 자주 드나든다는 안마시술소를 찾아 나서긴 했지만 지 실장은 아무래도 이 이사가 잘못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첫째, 약간은 기형적이기도 한 그의 얼굴 생김생김부터가 어울리지 않았고,
둘째는 그의 평소 성품이나 행동이 그런 짓을 하기에는 썩 어울리지가 않았다. 진남포, 비록 3류 탤런트이긴 했지만 한때는 그래도 날리던 액션 배우였다. 그가 한때를 풍미하던 씨름꾼이라는 것도, 남포동 뒷골목에서 어깨에 힘주던 뒷골목 사내라는 것도 지 실장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무대에서 인기 없는 연극 배우로 뛸 무렵 그는 비록 조연급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나 팔리고 있었다. 그러나 연예계 생리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만 표면으로 나타난 화려함에 비하면 보이지 않는 실생활은 의외로 형편없는 사람이 많았다. 진남포도 연예계에 데뷔해서는 오히려 헤플 수밖에 없었다. 벌기는 잘했지만 관리가 소홀했던 것이다. 그런데다가 그의 이상한 성격이 또 그에게 약점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착할 수가 없었다. 특히 신체적 부자유, 정신 박약 같은 선천성 불구자에게는 더없이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돈도 아끼지 않고 도와 주었다. 그러나 그의 비위에 맞지 않는 일이 생기면 평소의 그답지 않게 난폭해졌다.
내가 언제 착하던 진남포냐 싶게 호랑이 같은 성격으로 돌변해서마치 남포동 뒷골목처럼 휩쓸고 다녔다. 그나마 연예인이란 딱지만 없었어도 더 많은 수난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타격은 그런 사소한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타격은 삽시간에 외면당한 액션 영화의 영향이었다.
개인적인 인기가 떨어져도 수입에 당장 타격이 오는 연예계에서 영화 자체의 판도가 바뀌니 그 생활 정도는 쉽사리 추측할 만했다.
액션 영화의 인기가 떨어진 이유는 소위 국산 영화의 칼라화 개발과 대형 스크린 도입에서부터였다, 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총천연색 영화에 시네마스코프 스크린이 극장 곳곳에 설치되자 제작자들은 앞을 다투어 사극 영화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사극은 의상, 배경부터가 화려한 분위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궁귈, 대왕, 장군으로부터 왕비 궁녀에 이르기까지 그 의상의 호화로움이란 시청자들의 시각적 효과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극 영화에 정식으로 불을 당긴 것은 신상옥 감독의 '성 춘향' 과 홍성기 감독의 '대 춘향전' 대결에서부터였다. '성 춘향'이 당시 인기 절정의 최은희를 내세워 공전의 대히트를 치자 각 영화사에서는 앞을 다투어 사극 제작에 열을 올렸고 액션 영화는 언제냐 싶게 퇴조해 버린 것이다, 진남포의 얼굴이 사라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 후 한동안 유행하던 여름철 납량물 괴기 영화에 드문드문 모습을 나타내긴 했지만 최근 7, 8년 간은 전혀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기회란 일생에 몇 번은 있는 것이어서 그를 필요로 하는 일터가 생긴 것이었다. 소위 국책 영화인 전쟁 드라마와 범죄 수사용 추리물이 성행하게 되자 제작자들이 찾아낸게 바로 옛날 액션 배우 였던 진남포였다. S-TV에서 출연 교섭이 오자 웬 떡이냐 싶게 선뜻 받아들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지 실장이 이 이사의 의견에 선뜻 동조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러한 그의 발자취였다. 비록 생활은 곤궁했지만 그의 굵은 성격이나 생활 태도가 그를 그토록 타락시키지는 못했으리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가 재기의 발판을 이제 막 굳히려는 시점에 서서 돈 몇 푼 벌자고 그 따위 짓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종로 1, 2, 3가에는 안마시술소가 모두 여섯 개 있었다. 서너 군데를 돌았지만 결과는 지 실장의 추측대로였다.
안마시술소의 안마사들은 80%가 여자였고 나머지가 남자였다.
이들도 그냥 안마사를 하는 게 아니라 당당히 자격증을 얻어야 비로소 취업이 가능했다. 보사부 장관의 허가를 얻은 자격자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다섯 군데까지 둘러보았지만 그럴 만한 사람이 일하고 있는 곳은 없다고 했다.
벌써 밤 10시가 가까왔다. 이제 남은 곳은 마지막 한 곳밖에 없었다.
현관에는 '대광 안마시술소'라는 간판이 화려하게 걸려 있었다.
지 실장은 안마시술소 앞에서 한참이나 망설이고 서 있다가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건물로 모습을 감추고 있을때 그의 뒤에는 검은 가죽잠바를 입은 사람이 그림자 속에 숨어서 하나 하나의 거동을 살펴보고 있었다. 지 실장 모습이 보이지 않자 한참을 서 있던 가죽잠바의 남자가 뒤따라 들어갔다.
안마시술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지 실장은 의외로 시설이 화려한데 놀라고 있었다. 어리둥절하며 서 있는데 예쁜 옷을 차려 입은 여인이 나타나서 안내를 했다.
"제일 조용한 방을 좀 줘요."
"걱정 마세요.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방이든지 다 조용하니까요."
앞장서서 걷던 여인은 2층 제일 구석진 방문을 열고 지 실장을 들여보냈다. 방 안에는 칼라 TV와 화장대, 그리고 룸 히타가 설치되어 있었다. 방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화장대 위에는 남성용 화장품과 머리빗이 진열되어 있었다.
지 실장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아가씨가 방 구석에 얌전히 개어져 있는 이불 위에서 샤워용 가운을 집어 주며 입으라고 건네 주었다.
"아저씨 가운 갈아입으세요. 그리고 지하실로 가셔서 샤워하셔야죠"
"그러지..."
"아이, 옷 갈아입으시라니까요."
방에까지 따라 들어온 아가씨는 지 실장에게 가운을 갈아입도록 독촉하면서도 전혀 나가려는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지 실장은 당황했다. 이런 곳에 처음 와보는 그로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두서를 못찾고 있었다.
"어머, 아저씨 이런 데 처음인가 봐요. 제가 옷 갈아입혀 드릴까요?"
하며 넥타이를 풀어 주고 와이셔츠 단추에 손을 대려 했다.
지 실장 이 깜짝 놀라 손을 밀어치려 하자 이 여인이 지 실장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근데 아저씨 어디서 많이 본것 같아요. 혹시 탤런트 아니세요. 그렇죠? 히히 이 집에 배우 사태나겠네..."
하며 키득거렸다. 지 실장은 이 소리에 깜짝 놀랐다. 배우 사태라니 그럼 지금 여기 누가 또 왔다는 말인가?
그가 당황해 하는 것을 보자 여인이 옆에서 히죽거리며 계속 얼굴을 뜯어보았다.
"저 아가씨 여기 좀 앉지."
지 실장은 여인을 앉히고는 주머니에서 만 원권 지폐 두장을 꺼내 손에 쥐어 주었다. 진남포의 발자국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던 지 실장은 이곳이 마지막 안마소임을 알고는 큰 마음먹고 손님으로 위장해서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자기 말고 또 다른 배우가 있다는 말에 얼핏 진남포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여인은 서슴없이 돈을 받아 쥐고 그를 또 빤히 들여다보았다.
"아저씨 샤워하시고 안마하시고 그리고 이 방 담당을 찾으세요. 그럼 제가 올라와서 재미있게 놀아 드릴께요."
"아냐 아냐. 그게 아니구 지금 뭐라고 그랬지? 여기 배우 사태났다고 했지."
"걱정 마세요. 오늘은 아저씨 혼자니까."
"그럼 누가 또 단골로 찾아오나?"
"아녜요, 단골이 아니구요. 여기 오는 배우는..."
여인이 지 실장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고 있었다. 이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 왔다. 여인이 벌떡 일어나 문앞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하고 묻자 잠시 조용했다.
"경찰에서 왔습니다."
"경찰요?"
깜짝 놀란 여인이
"누구세요?"
하고 다시 묻자
"경찰에서 왔습니다."
"경찰요?"
깜짝 놀란 여인은 블라우스 단추를 다시 채우며 방문을 열었다.
놀란 것은 여인뿐만 아니었다. 안마소에 찾아온게 뭐 잘못된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런 장소에서 이런 시간에 경찰이 노크를 하며 찾아왔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한편, 다방을 뛰쳐나온 최찬일 형사도 종로 일대 안마시술소를 뒤지고 있었다. 진남포의 여동생이 장님인데다가 직장이 종로라고 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여자 장님이 직장을 가질 만한 곳은 안마시술소밖에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몇 군데 둘러보았지만 그럴 만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가 여기저기 다니며 찾다가 '대광 안마시술소'에까지 찾아온 것은 시간이 꽤 지난 후였다. 그리고 그는 안마소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지대로 실장을 본 것이었다. 최찬일 형사는 이상한 예감이 떠올랐다.
평소에 진남포의 사생활을 알 만한 사람, 그리고 방송국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공백 두 시간을 메웠으리라고 판단한 사람은 진남포의 여동생이었다. 그 추측대로 찾아오다 보니 이곳까지 온것인데 안마소 앞에서 선뜻 들어가지도 않고 서성거리고 있다가 들어가는 지 실장을 본 최찬일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왜 지 실장이 이곳까지 왔는가 하는 점이 궁금했다. 그의 태도로 보아 이 장소에는 진남포의 여동생이 있는게 분명했고 또 둘은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임에 틀림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순간적으로 최찬일은 하나의 추리를 떠올렸다.
그것은 진남포나 고강진 사이에 S-TV 가 개입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아직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S - TV자체에서 이 밤중에 진남포 여동생을 찾도록 지 실장을 은밀히 파견해 보냈다면 무언가 보이지 않는 내막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그 내막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S-TV 자체에서 이 사건을 계획한 것이라면 내부의 갈등이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인에게 신원을 밝히고 확인한 바, 진남포의 여동생이 여기서 일하고 있는 게 분명해졌고 여길 찾아온 지 실장은 2층에 막 입실했음을 알아냈다. 최찬일은 종업원을 앞세워 지 실장이 입실한 209호 방문을 노크했다.
"누구세요?"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지 실장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지금 저 목소리의 여인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사전에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일까 아니면 진남포의 여동생일까. 잔뜩긴장해서 잠깐 머뭇거리던 그는 신분을 밝혔다.
"경찰에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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