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건섭 - 5시간300분 2

3학년2반 | 2022.02.15 07:36:40 댓글: 0 조회: 465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8952

마지막 시간


부산 동아 호텔 12층 사파이어볼룸에서는 12시부터 종업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형 테이블 한가운데는 부산에서 동원 된 일류 꽃꽂이 전문가들의 꽃 진열이 한참이었고 식당 과장이 진두지휘하며 식탁을 준비하고 있었다.
"몇 시면 준비가 완료됩니까?"
곤색 싱글을 입은 청년이 눈을 번뜩이며 이들의 진행 과정을 하나 하나 체크하고 있었다.
"앞으로 30분 후면 완전히 끝납니다. 식사 준비는 바로 옆방에다해놓았기 때문에 지시만 하시면 즉시 올리겠습니다. 양식과 중식으로 준비했으니까 원하시는 대로 드시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정확한 참석 인원도 파악해 주시고요."
"오늘 세미나는 한 시 삼십 분부터입니다. 약 30분 동안 인사와 의식이 있고 이어서 한 시간 동안 식사, 식사가 끝나면 바로 세미나에 들어가는데 끝나는 시간은 오후 다섯시 반 정도 되겠습니다. 질의응답이 끝나면 여섯 시가 됩니다. 그러니까 커피는 식사 직후에 한 번, 질의응답 중에 한 번 제공해 주시고 세미나 중에는 일체 종업원 출입을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이크 작동 체크 꼭 해주시고요."
의전 행사에는 몹시 익숙한 듯 호텔 종업원은 오히려 진두 지휘하며 청년은 회의실 마무리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11월 30일 오후 1시 30분, 이 시간은 부산 관내 명사들이 모여 한 달에 한 번씩 개최하는 세미나 시간이었다. 주요 기업체 사장이 다섯 명, 사회단체 대표들이 열 명, 교육계 인사가 다섯 명, 언론인과 여성 대표가 두 명이고 오늘은 부사장이 참석하게 되어 있었다. 세미나 초청 연사로는 한국 이공학계의 원로 성기준 씨가 주제 연설을 맡았다. 강연 내용은 '일반인의 과학 생활화'였다. 성기준씨는 원래 강연 하루 전에 부산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여러 가지 개인 사정으로 밤 9시 45분 특급 열차편으로 오겠다는 연락이 와 있었다.
모임은 매월 마지막 윌요일 오후 1시 30분 어김없이 개최되어 왔고 횟수도 벌써 20여 회에 이르고 있었다. 한 시가 지나고 또 20분이 지나자 회원들은 평소와 같이 전원 집합하였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두 사람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금년 이 모임의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실질적인 스폰서 역할을 맡은 김만호 회장과 강연자인 성기준 박사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강연 시간 40분 후에야 비로서 연사 성기준 박사가 나타났다. 그러나 강연을 하려는 사람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초췌해 보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강연은... 제가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몸이 너무 피곤합니다. 약 30분 정도로 요약해서 간단히 마치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저는 이 모임의 총무를 보는 사람입니다. 회장님댁에 전화를 걸어 보고 오겠습니다. 총무가 회장댁으로 전화를 걸어 보겠다며 나갔고 이어서 식사가 들어왔다. 회원들은 이 날 이 곳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어 모두들 맛있게 먹고 있었으나 성기준 박사만은 스프만 약간 마실 뿐 전혀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어이 웨이터."
스푼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성 박사는 웨이터를 불러 무엇인가를 주문했다. 잠시 후 웨이터는 석간 신문을 들고 왔다. 성 박사는 신문을 넓게 펴들었다. 사교 클럽 회원들은 깜짝 놀랐다. 성 박사쯤 되는 분이 이런 실례를 범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작은 소리로 수근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의 행위가 못마땅하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의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신문을 접지 않았다.
이 때 총무가 성 박사에게로 다가왔다.
"성 박사님."
"네."
“잠깐 저 좀 뵈올까요?"
총무는 성 박사에게 소곤거리듯 말했다. 둘은 홀 밖 복도로 나왔다. 총무, 그는 이 모임의 회장 김만호의 개인 비서였다.
김만호는 또 성 박사와 젊은 시절부터 친우 사이이기도 했다.
"성 박사님, 회장님이 쓰러지셨습니다."
"쓰러져요? 어떻게?"
"혈압인 것 같습니다. 병원 말로는 뭣인가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답니다."
"알았어요.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얼른 끝내고 가볼 테니."
상황이 이쯤 되어 버렸으니 세미나고 나발이고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성 박사 자신의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대전에서 뜻밖의 사고를 만나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고 새벽 일찍 겨우 부산에 도착하니 아침 아홉 시가 넘었다. 눈에 뜨이는 대로 호텔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호텔 교환에게 열두 시에 깨워 달라는 모닝콜을 신청했다. 잠자리에 들어간 것이 10시가 넘어서였으니 불과 두 시간밖에 못 잔 것이다. 면도 좀 하고 어쩌고 하다 보니 모임에마저 늦어 버린 것이다.
강연이 끝나자 호텔 보이가 달려왔다. 서울에서 장거리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뭐야? 어째? 형사들이 왔다갔다고?"
"네. 두 번이나 왔다갔는데 당신 사진 좀 보자 어쩌자 야단들이었어요. 무슨 일이에요?"
"아무것도 아냐. 그 미친 놈들... 민호는 뭐 해? 바꿔 줘."
"아버지세요? 무슨 일이에요."
"응, 걱정 마. 경찰에서 뭘 잘못 알고 그러는 거니까... 내가 곧 올라갈께."
외국에서 공부 마치고 오느라고 늦도록 장가도 못 간 아들 녀석이었다.
"미친놈들."
계속 욕만 뱉어 대던 성 박사는 호텔을 빠져나와 김 회장이 입원하고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김 회장은 적십자 부산 병원 107호실에 입원하고 있었다. 의사의 설명에 의하면 위험한 고비는 넘겼고 무엇인가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아침에 신문을 보다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했다.
성 박사는 가족들에게 물었다.
"어젯밤 댁에서는 별일 없었습니까?"
"아뇨? 전혀예요.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저녁에 곧장 귀가하셨거든요. 식사도 알맞게 드시고 서재에서 책도 좀 읽으시고 그리고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부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이는 좀 들어 보였으나 김 회장만큼이나 품위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깨끗한 얼굴에 몸매도 단정했고 말씨도 매우 침착해 보였다. 그러나 남편의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몹시 초조해 보였고 얼굴도 초췌하게 보였다.
"부인 저도 급한 일이 있어 바로 서울로 올라가야겠습니다."
성 박사는 매우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왔다.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 버린 듯 어깨 버티기까지 힘이 들었다. 택시를 몰아 김해 국제 공항으로 달려가 서울로 올라왔다. 대전에서 밤샘을 하고 부산에서 뛰어다니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 성 박사는 대강 몸을씻고 일찍 잠자리에 누웠으나 30분도 채 못 되어 일어나야 했다.
부산 김만호 회장 부인으로부터 장거리 전화가 온 것이다.
"네, 좀 어떻습니까? 좀더 있다가 올라왔어야 했는데... 서울에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요."
"별 말씀을요. 부산에 오셔서 편히 쉬시지도 못하고... 그런데 회장님이 성 박사님과 무언가 꼭 좀 상의할 일이 있으시다고 찾으시는데 어떻게 해야..."
"긴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시다구요?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내려가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열차도 편하긴 한데 뭐 어떨라구요. 국제선도 아니고 국내선인데 무슨 위험이 있을라구요. 그럼 말씀 전해 주십시오. 내일 내려가겠다구요. 뵙고 말씀 듣겠다구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성 박사는 누워서 이것저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부산 저명 인사 클럽의 회원들이 병원을 찾아왔지만 김 회장은 일체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화분을 보내 오고 과일상자들이 날라져 왔지만, 이런 것들도 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병원측과 가족들도 이런 그의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손님들이야 김회장이 중태인 줄 알고 그냥 돌아가면 그뿐이지만 눈을 멀뚱멀뚱 뜨고 앉아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앉아 있는 그를 가족들은 영문을 몰랐다.
"여보, 좀 어떠우?"
"아, 괜찮대도. 서울 성 박사한테 전화는 했어?"
"지금 막 전화 걸고 오는 길이에요."
"밖엔 지금 누구 누구 있어?"
"큰사위하고 막내애뿐이에요."
"다른 애들은..."
"큰애하고 며느리는 집으로 보냈구요. 둘째에는 미국으로 전화했어요. 빨리 귀국하라구요."
"둘째애? 개한테 전화 다시 해. 안 와도 괜찮다고... 왜 놀라게 만들어? 그리고 가정부 보고 집에 있으라고 하고 큰애하고 며느리는 애들 데리고 이리 좀 오라고 전화해. 지금 당장 오라고."
갑자기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까지 병원으로 불러오라는 말에 부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구 이 일을 어쩐다? 이게 웬변이냐 말야...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집으로 전화를 걸고 온 부인에게 이번에는 또 이상한 주문을 했다. 발이 껍껍하니 새 양말을 사오라는 것이었다.
어둠이 완전히 깔린 부산 거리에서 부인은 정신 없이 양품점을 찾았다. 무슨 색깔을 얼마에 샀는지 손에 집히는 대로 돈을 주고 두어 켤레를 집어들고는 허둥지둥 병원으로 되돌아왔다. 도무지 가슴을 진정할 수 없었다. 웬일인지 불안한 마음만 앞섰다.
병실문을 화들짝 열고 들어선 부인은 텅 비어 있는 병실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옷걸이에 걸려 있어야 할 양복도, 병실 침대 밑에 있어야 할 신발도 흔적없이 사라졌다.
"간호원- 간호원-"
부인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복도로 뛰어나갔다.
"이봐, 간호원 7호실 환자 못 봤어? 응- 7호실 환자 말야."
"못 봤는 데요--"
"못 봤어? 그럼 어딜 갔단 말야?"
허둥거리는 부인을 보고서야 병원측에서도 비로소 김 회장의 행방을 찾아나섰다. 화장실도 매점도 휴게소도 모두 돌아보았으나 그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아들과 며느리가 도착했다.
"뭐 어째요? 아버지가 병원에서 사라지셨다구요."
"글쎄 말이다."
"글쎄라뇨. 어머닌 어디 가셨어요?"
"아, 아버지가 나보고 너희들한테 전화 걸라구 해서 집으로 전화 걸었잖니. 그런데 이번엔 양말을 사오라고 하셔서 밖으로 나가 양말을 사왔지. 돌아와 보니까 병실이 텅 비어 있는 거야."
"어머니 안 되겠어요. 빨리 경찰에 연락합시다. 여보 당신은 빨리 비서 실장하고 총무 이사한테 연락해서 이리로 오라고 하고."
큰아들은 아버지의 실종을 즉시 경찰에 통보했다.
재계의 거물 김만호, 국내 굴지의 신발 공장과 몇 개의 크고 작은 회사를 거느리고 있고 차기 국회의원에 출마할 뜻을 강력하게 시사 한 거물, 그가 병원에서 실종되었으니 경찰측으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병원으로 형사가 도착되고 시내 곳곳에 비상망이 쳐져서 오가는 차량의 검문 검색을 강화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병원 탐문 수사가 허탕으로 돌아가자 가족들은 일단 집으로 되돌아 왔다. 응접실에 모여 앉아 초조하게 발만 구르고 있을 뿐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화장실을 갔다오던 큰아들이 허둥거리며 돌아왔다.
"이상해요. 아버지 서재 방문이 열려 있어요."
"그래요? 서재 방문은 아버님이 늘 잠가놓고 다니시는데..."
가족들은 김 회장이 쓰고 있는 서재로 우르르 몰려갔다. 서재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서랍은 누가 뒤졌는지 서류며 편지 심지어는 사진까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누가, 누가 뒤졌군요."
"아줌마--아줌마--"
부인이 가정부를 불렀다. 부엌에서 일하던 가정부가 눈이 휘둥그래지며 들어왔다.
"아줌마 집에 누가 들어왔었어요?"
"아뇨, 아무도 들어온 사람이 없었는데."
"아줌마는 어디 있었어요?"
"저는 사뭇 제 방에 있었어요. 혼자 있으려니 좀 무섭기도 하고 해서요."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를 전혀 못 들었다는 거죠."
"예- 전혀 못 들었어요."
"이상하다. 도둑이 들었으면 이 방을 뒤질 이유가 없는데... 담을 넘으면 자동 경보기가 울리게 되어 있고, 대문 열쇠는 식구들만 가지고 있고... 거 이상하네."
무엇을 도난당했는지 누가 침입했는지 모르나 경찰에 신고할 생각까지는 나지 않았다. 지금 당장 급한 것은 아버지의 행방뿐이었다. 이때 전화가 따르릉 하고 울렸다. 큰아들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회장님... 회장님이 여기 계세요. 회장님실에 갑자기 전깃불이 들어와서 쫓아 올라갔더니 글쎄 사무실에 계시지 않겠어요? 그래서 전화 드리는 겁니다."
공장 야근 책임자였다. 가족들은 정신없이 공장으로 차를 몰았다.
회장은 책상에 엎드려 있고 방 안에서는 무언가가 타는 냄새로 가득했다.
"아니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
"어딜 갔다왔수? 여보."
"사고는 없으셨습니까?"
모두들 김 회장을 둘러싸고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김회장은 얼굴도 들지 않고 손짓으로 모두들 나가라고 손짓했다. 이때 형사 두어 명도 뒤따라 들어왔다.
"아버님 좀 어떠세요? 말씀을 하셔야죠."
"괜찮아. 혼자 있고 싶으니 어서들 나가라구. 여기 스토브 하나 준비하고 방 좀 덥혀 놔. 좀 쉬다가 들어갈 테니까."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일행은 밖으로 나왔다. 이 때 맨 뒤에서 서성이던 형사 한 명이 함석으로 된 꽃무늬 작은 쓰레기통을 슬쩍 집어들고 밖으로 따라나와 어디론가 몸을 감췄다. 아무도 눈치채는 사람이 없었다. 벽시계가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김 회장 행방을 추적하던 형사들은 형사실에 모여 앉았다. 상대가 김만호이니만큼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경찰측에서는 그가 병원에서 사라진 것이 분명히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간파했다.
김만호 회장의 자택과 그의 집무실이 있는 공장 근처에 형사들을 배치시켜 놓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만일을 생각해서 큰 도로 요소 요소에 검문을 강화하기도 했다. 과연 그는 경찰의 예견대로 그의 자택에서 먼저 모습을 나타냈고 얼마 후 그 곳을 빠져나와 공장으로 가서 정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밝힌 것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서장님. 한밤중에 왜 그런 해프닝을 벌였는지. 병원에서 도망친 이유도 모르겠구요. 더구나 자기 집을 도둑이 들듯 들어갔으니 말입니다."
"그건 어떻게 했지?"
"잘 보관해 놓았습니다."
"결코 소홀히 하지 마. 어이 홍 형사?"
"네!"
"내일 서울 출장 좀 갔다 와."
"서울요?"
"응, 내일 서울 갈 때 그 타다 만 종이하고 부서지지 않은 재를 잘 보관해서 '과학수사연구소'로 가져가. 내가 연락해 놓을 테니까. 거기서 판독이 되면 즉시 가져 내려오라구."
"알았습니다."
"내일 아침. 아냐, 지금 당장 떠나. 차편 뭐 있나 알아보고."
"지금 시간에 서울 가는 건 없는데요."
"그럼 내 차로 갔다 와."
형사 과장이 홍 형사에게 차를 제공했다. 쓰레기통, 함석으로 된 작은 쓰레기통을 집어온 것은 홍기철형사였다. 회장의 뒤를 미행하면서 그의 행동에 미심쩍은 것이 하나 둘이 아니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의 집무실에 들어가 보니 무엇인가 태우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태워 버린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밤 그가 이상한 행동을 저지른 근본 원인이었음은 쉽사리 알 수 있었다. 홍 형사가 이것을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김 회장이 무엇인가를 태워 버린 쓰레기통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보려고 아무도 모르게 집어 온것이었다.
"지금 올라가서 판독되는 대로 즉시 연락해."
"이렇게 타다 만 것도 판독이 됩니까?"
김만호 회장이 태워 버린 것은 몇 장의 편지였다. 그러나 일부는 이미 재가 되다시피 했고 일부는 아직도 다 타지 못한 채 있었다.
다행히 종이가 양질의 것이어서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봐, 내가 지금은 일선 지휘관이 되긴 했지만 한때는 과학수사관이 되려고 공부한 적이 있었다고."
서장이 웃으며 형사 과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세요? 그런데 이 재에서 어떻게 글씨를 판독할수가 있습니까?"
"간단하게 설명해 주지. 여하튼 과학이란게 이렇게 무서워졌다구. 약품과 설비가 없어서 그렇지 재료만 있으면 간단하게 할 수 있어. 원리가 간단하거든. 서울 연구소에는 준비가 돼 있어. 한 이삼 년은 됐지. 자 이리 와. 전문 용어가 많아서 쉽게 이해하긴 어려울 테니까."
과장이 서랍에서 한 권의 책을 꺼냈다. '연소 물질의 화학 반응' 이라는 부제가 달린 "수사심리학"이라는 책이었다.
"연소된 물질을 판독하는 데 제일 중요한 건 또 조심해야 할 건 연소 물질의 조각을 잘 보존하는 거야. 그래서 그 쓰레기통을 잘 다루라는 거지. 자, 방법은 이래. 일단 타버린 종이가 발견되면 그 주변 창문이나 공기통을 막아야 돼. 바람에 날리면 안 되니까..."
서장은 연소 물질에서 타버린 글씨를 재생시키는 방법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즉 왼손으로 유리 접시 하나를 잡고 종이재에 가까이댄 다음 조심해서 유리 접시에 옮겨놓는다. 그리고 무취기(분무기의 일종)를 사용하여 이 재에 정착제[세락(화가들이 쓰는 목탄 같은 것)과 알콜의 혼합제]를 뿜는다. 그 다음 조심해서 다른 유리 접시로 납작하게 눌러지도록 올려놓고 재를 압착시킨다.
이 전체를 사진틀 속에 끼워서 정색건판으로 촬영하여 압축 인화지에 떠놓는다. 이렇게 하면 인화지에 글씨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방법은 이 외에도 또 있었다. 우선 1%의 세라친 용해온수를 준비한다. 다음 이 재를 납작한 현상용 접시에 담고 조금 전의 방법과 같이 유리판에 올려놓는다.
그 다음 이 유리판을 용액이 들어있는 접시에 잠기게 하여 표면이 용액에 잠기도록 한다.
재가 충분히 젖으면 그것을 납작하게 누르고 다른 유리판 하나를 위에 올려놓아 전체를 단단히 압축시켜 기포가 나타나지 않도록 하면 글씨를 볼 수 있다. 또 타버린 종이재를 25% 포수 클로랄 용액 속에 담근 후 이를 화씨 140도에 건조시킨 다음 이 과정을 되풀이하여 표면이 작은 백색 결정체로 뒤덮이게 한 다음 같은 용액에 10%의 글리세린을 용해시킨 것으로 처리하면 어떤 형태의
글씨든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 재를 무색 감광건판을 사용하여 사진으로 찍으면 글씨가 나타난 종이를 얻을 수 있다. 재의 글씨가 양면으로 나타나 있어도 판독은 가능하다.
"글쎄요. 저는 전문 용어를 잘 몰라서인지 쉽게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참 별 방법이 다 있군요. 그런데 이렇게 해도 될까요? 상대가 김만호인데."
"상관없어. 우릴 먼저 골탕먹인 건 오히려 그쪽이니까. 자기 스스로 이렇게 만든 거 아니겠어? 또 이 종이는 어차피 태워 없애 버린거구."
"..."
"자, 준비됐으면 홍 형사 떠나. 도착해서 좀 쉬었다가 출근 시간에 맞춰 찾아가. 판독되는 대로 즉시 보고하라구."
홍 형사는 형사 과장이 마련해 준 승용차를 이용해서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홍 형사는 차 속에서도 계속 김만호 회장에 대한 의문으로 꽉 차 있었다. 김만호 회장, 그는 부산 제일의 신발 공장인 대진 물산주식회사를 비롯하여 두어 개의 커가란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었고 부산의 각 사회 단체는 물론 모든 기관에 영향력을 줄 수 있을 만큼 확고 부동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재계의 거물이었다.
그의 개인적인 인격만 해도 그렇다. 경제는 물론 문화, 예술, 언론에 이르기까지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아 온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 보여준 행동은 전혀 평소의 그답지 않았다. 가족들로부터 그가 병원에서 실종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만 해도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다. 부산 바닥에서 누가 감히 김 회장을 납치한단 말인가.
홍 형사는 처음부터 그가 납치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어딘가에 잠적했으리라는 가능성을 추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과연 그의 추측대로 맞아떨어졌다.
그는 먼저 자기 집에서 모습을 나타냈고 약 20분 후 집을 나와 공장으로 달려간 것이다. 그는 왜 가족들을 병원으로 유인하고 집으로 갔을까. 또 지금 자기가 판독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져가는 김 회장이 소각한 종이에는 어떤 내용의 글들이 씌어져 있으며 무엇 때문에 태워 버리려고 노력했을까. 과연 거의 재가 되다시피 한 이 종이에서 글씨는 부각될까.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기며 어두워진 고속도로 주변을 내다보던 홍 형사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밤 11시 05분이 다 되었다.

한편, 안마시술소 여종업원에게 뭔가를 들어 보려고 하던 지대로 실장은 밖에서 경찰이 찾는다는 바람에 놀라 얼른 문을 열었다.
문을 열던 지 실장은 밖에서 버티고 서 있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문 앞에는 오늘 낮 무엇인가를 꼬치꼬치 캐묻던 낯익은 최찬일 형사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지 실장님."
"아니... 여긴... 웬일이십니까?
"저는 이런 데 오면 못 씁니까? 이거 제가 방해놓은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원... 별 말씀을. 잠깐 들어오시죠. 무슨 일이신지는 몰라도."
이때 지 실장과 같이 있던 여종업원이 최 형사를 비껴서면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
"미안합니다. 가지 마시고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여쭤 볼 말씀이 있으니까요."
"?"
놀란 눈으로 최 형사를 바라보던 여인이 엉거주춤하고 서 있자,
최 형사가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거기 앉아 있어요."
최 형사도 신발을 벗고 뒤따라 들어왔다. 최 형사가 얼굴을 굳히며 소리 지르는 바람에 놀란 것은 여종업원보다도 오히려 지 실장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그의 방문을 받은데다가 소리까지 질러대고 얼굴을 굳혀 버리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 실장님, 여기 누구 만나러 오셨죠?"
"..."
"어느 정도 짐작은 갑니다. 다 털어놓으시죠. 어차피 다 알게 될텐데요..."
"짐작이라니요?"
"정말 이러실 겁니까?"
최 형사는 정색을 하고 다가앉았다. 지 실장은 너무 난처한 입장이 되어 버렸다.
이 이사가, 피습당한 진남포가 안마시술소에 드나든다는 정보가 있어 가서 조사해 보라고 해서 찾아온 것인데 최 형사는 왜 갑자기 이곳에 나타났으며 또 무엇을 대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경찰측에서도 진남포의 탈선 행위를 알고 이미 조사에 착수했다는 것인가, 그러나 경찰 측에서 이러한 미미한 조연급 배우까지 조사하고 다닐 리는 없었다. 지 실장은 침착성을 되찾고 최 형사를 마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실 테죠."
그러나 최 형사는 또 그 나름대로 생각이 달랐다. 이곳 '대광 안마시술소'에는 진남포의 여동생이 일터로 일하고 있는 곳이다.
어제 하룻동안 진남포의 행적 속에는 방송국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꼭 두 시간의 확실한 공백이 있었다. 그 두 시간 동안 진남포는 어디서 누군가와 만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누군가와 특별히 교재하는 성격도 아니라고 했고 그리 사교적이지도 못한 그가 대본을 외어야겠다고 방송국에 들러 집으로 간다며 나왔다. 그런 그가 집으로 오기까지 자그마치 두 시간이나 걸렸다.
그렇다면 두 시간을 보낼 만한 곳, 최찬일은 그곳을 바로 여동생 근무처로 생각하고 뒤졌던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지 실장이 얼씬거리던 이곳에서 마주친 것이었다. 지 실장의 출현으로 해서 진남포의 여동생이 이곳에 근무하고 있다는 확신이 서자 이번에는 왜 지 실장이 이곳에 나타났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진남포가 피습되어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데 찾아온 지 실장, 그는 정말 이곳에 찾아온 목적이 휴식뿐이었을까.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았다.
지 실장, 그는 이미 진남포와 여동생과의 사이가 밀착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 에 대해 지 실장은 무엇인가를 알고 있고 이를 선명하게 털어놓지 않고 있다는 말이 성립된다. 그러니 쉽사리 이것저것 털어놓을 리가 없다. 그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말은 이미 예견하고 있던 바였다.
최 형사는 담배를 빼어 지 실장에게 내밀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아가씨가 불을 붙여 주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은 담배 한 가치가 다 타들어 가도록 침묵만 지키고 앉아 있었다.
지 실장은 정말 입장이 난처했다. 여기까지 오게 된 동기나 이유를 그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자초지종을 얘기한다는 것은 연예계의 암 같은 치부를 드러내놓는 결과밖에는 안 되고 입을 다물고 있자니 경찰측에서 무엇인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오해만 점점 더 가중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경찰이고 고강진 피살 사건과 진남포 피습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형사라고 해도 이런 일까지 속속들이 얘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 형사는 지 실장이 빨리 마음을 굳히고 무언가 속시원히 털어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 실장만은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또 그만큼 흘렀다. 최찬일 형사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10시가 훨씬 지나고 있었다. 최 형사는 여인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실례지만 댁은 지 실장님과 잘 아는 사이입니까?"
"아녜요, 오늘이 처음이에요. 오늘 여기서 만났어요."
"아가씨 왜 거짓말을 하시죠?"
"거짓말이라노?"
이번에는 지 실장이 대신 되물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겨우겨우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제 막 진남포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2만 원씩이나 팁을 주고 알아보려는 순간에 나타나서 두 사람이 마치 옛날부터 잘 아는 사이인 것처럼 말을 하고 밀회 장소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부라려대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최 형사님 좀 지나치십니다. 전 여기가 처음이구요. 이분은 여기 종업원이에요."
"종업원?"
최 형사는 이 여자가 여기서 근무하는 종업원이란 말을 듣고 전체적인 상황을 다시 정리했다. 순식간의 생각이었다.
"언제부터 근무했죠?"
"두 달이 넘었어요."
"정말 이분 모릅니까?"
"정말이에요."
여인이 정색을 하며 최 형사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최 형사는 갑자기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지 실장과 여종업원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웃는 그의 속셈을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정말 두 분 이러실 겁니까? 내가 뭐 어린앤 줄 아세요.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으시니까 이러죠. 두 분이 정말 오늘이 처음이라 이거죠? 그럼 왜 여기 이 방문은 닫아놓고 계셨죠? 그럴 이유가 뭡니까? 종업원은 손님에게 방만 안내하면 그만이고 손님은 옷 갈아입고 사우나하러 가는 게 순서가 아닙니까? 왜 방문을 닫아놓고 계셨는지 말씀하세요."
여종업원은 속이 뜨끔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최 형사의 추궁은 너무도 타당성 있는 말이었다. 손님이 오면 방이나 안내해 주고 불편 없도록 안내나 해주면 그만인 것이다. 손님의 방 안까지 따라들어와서 문을 닫고 이야기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인은 그게 아니었다. 어쩌다 이렇게 중년 신사가 오면 과잉 서비스를 해주고 때에 따라서는 고객의 요구에 따라 특별한 서비스도 제공해 준다. 그 팁은 막대한 것이다.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는 목적은 이런 적지 않은 부수입을 노리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 중년 신사가 왔을 때 첫 인상이 깨끗했고 또 알고 보니 탤런트임이 밝혀져 유혹해 보려고 덤빈 것이었다. 손님이 가운을 갈아입으려 할 때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도 가운을 갈아입기까지 거들어 주려는 속셈이었다. 수입은 언제나 이런 과잉 서비스에서부터 비롯되어졌다. 이런 형편이니 형사가 추궁하는 질문에 사실을 털어놓을 입장이 못 되었다. 잘못하면 자기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이 업소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여종업원은 어찌할 줄 모르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 생각은 지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처음 보는 여자라고 밀어대자니 문을 닫아놓고 앉아 있었던 설명에 설득력이 없어진다. 아는 여자라고 말하자니 최 형사가 노리는 함정에 빠질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자니 방송국 문제가 생긴다, 이 여자가 처음부터 자기를 유혹하려고한다는 판단은 서 있었다. 알몸이 되어야 가운을 갈아입을 수 있고 가운을 갈아입어야 사우나를 하고 돌아와 안마를 받을 수 있는데 아무리 봐도 여인이 나갈 눈치는 없었다.
원래 이곳에 온 처음부터의 목적이 사우나가 아니고 진남포가 이곳에 드나드는 정보를 탐지하는 데 있던 만큼, 은밀히 팁을 주고 조용 조용히 알아보려고 한다는 게 의외의 사태로 발전되어 버린 것이다. 여인과 지 실장은 대답할 여유를 잃고 말았다.
"아가씨, 지금부터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다른 잘못에 대해서는 일체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네, 말하겠어요."
"이분은 정말 여기가 처음입니까?"
"정말이에요, 오늘 처음 뵈었어요."
"진남포 씨 동생은 어디 있습니까?"
진남포 씨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말에 깜짝 놀란 것은 오히려 지 실장이었다.
...뭐라구! 진남포의 동생. 그러면 진남포는 이 안마시술소와 정말 아주 밀착되어 있단 말인가. 경찰은 언제부터 그런 것에까지 손을 쓰고 있었단 말인가. 근 1, 2년을 같이 생활해 오면서도 전혀 눈치 못 채고 있었는데 진남포의 사생활이 이 이사의 말과 다름없는 사실이라면 문제가 크다고 생각했다.
"어디 좀 갔다온다고 나갔어요."
"언제 돌아옵니까?"
"오늘은 비번이라 돌아올 시간은 모릅니다. 오빠네 집 아니면 친구네 집에 갔을 거예요."
"오빠가 입원한 건 모르고 있습니까?"
"저희들도 저녁 늦게 알았어요. 개는 모르고 나갔을 거예요. 저희들은 손님들 때문에 밤을 설치고 아침엔 보통 열한 시나 열두 시쯤 되어야 일어나거든요. 아마 모르고 나갔을 게 틀림없습니다."
"오빠네 집 말고 또 갈 만한 곳은 없습니까? 아 진남포 동생 이름은 뭡니까?"
"영숙이에요. 박영숙."
"그렇습니까? 진남포 본명이 박진식이니까... 그래 어디 갈 만한 곳은..."
"네, 명동에 있는 무슨 필하모니라던가 하는 델 가 있다 오곤 하죠. 음악을 좋아하나 봐요. 거기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고 하는 소릴 들었어요."
"..."
"참 이상해요. 난 암만 들어도 모르겠는데 뭐가 좋다는 건지."
"어제는 어땠습니까?"
"어제요? 허긴 참 어제부터 좀 이상하긴 했어요. 어제 영숙이 오빠가 왔다갔거든요."
"어제 진남포가 왔다갔어요?"
진남포가 왔다갔다는 소리에 최 형사는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어제 진남포 씨가 와서는 영숙이하고 방에서 한참이나 이야기하고 갔어요. 영숙이가 훌쩍훌쩍 울기도 했구요."
"우는 소리가 났어요?"
"네, 그러더니 아마 한 시간 정도는 있었을 거예요. 나중에 내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그저 시무룩한 채 아무 대답도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 낮에 나가서 여태 안 들어오는 거예요."
"알겠습니다. 우는 이유는 모르겠다 이거죠. 또 박영숙 씨가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구요?"
"네."
최찬일 형사는 진남포의 동생이 일하는 곳까지는 잘 추측해서 찾아온 셈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지 못했고 또 지금 어디 있으며 오빠와 나눈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몰라 몹시 섭섭했다. 단 진남포의 궁금했던 어제의 그 두 시간의 공백이 이곳에서 보내졌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동생 박영숙을 찾는 길뿐이었다.
어제 남매가 만나서 울고불고 했다면 뭔가 중요한 얘기가 오고간 것이 분명했다. 무슨 얘기였을까. 진남포가 누구에겐가 협박을 받고 있다는 그런 얘기였을까. 그가 동생에게 들려 준 얘기는 이번 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 얘길까. 또 지금 이 시간 진남포의 여동생 박영숙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최 형사는 아직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은 가슴 속에 찜찜하게 남아 있는 그 무엇에 대해서 안개 같은 막연한 그림자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지 실장은 비로소 모든 내용들을 일순간에 파악할 수 있었다. 진남포의 여동생은 이 안마시술소에 근무하고 있는 것이고 그가 오빠의 자격으로 이곳에 들른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진남포의 소문을 퍼뜨린 게 이런 결과를 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됐습니다. 아가씨는 좀 나가 계십시오."
최 형사는 여인을 내보냈다. 지 실장과 단 둘이 남게 되자 이번에는 지실장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조금도 달리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수사상의 의문점만 몇 가지 여쭤 보겠습니다."
"좋습니다. 사실대로만 대답하겠습니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 방송국측에서는 정말 아는게 하나도 없습니까?"
"없습니다, 저희들도 뜻밖의 사곱니다."
"진남포가 어디서 위협을 받고 있거나 아니면 새로 교제를 시작한 사람은 없습니까?"
"글쎄요. 지금까지 진남포가 누군가와 교제하고 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마치 추궁하는 것 같은데... 여긴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
"대답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잘못하면 오해를 받게 되고 그리되면 귀찮은 일이 생기거든요. 사실대로만 말씀해 주십시오. 비밀은 지켜 드리겠습니다."
"오해하실 만한 일은 없습니다. 자 밖으로 나가시죠."
둘은 안마시술소를 빠져나왔다. 밤이 무척 깊어졌다. 싸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통금이 없어 그런지 많은 젊은이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지 실장은 최 형사를 가까운 생맥주 흘로 안내했다.
두어팀들이 맥주를 마시다 말고 두 사람을 흘깃거리며 쳐다본다.
"꼰대들이 밤늦게 왜 이런 델 다녀."
여학생인 듯싶은 하나가 남자에게 입을 비죽거리며 말을 건냈다.
"야, 사람이란 자고로 나이만 먹지 마음은 안 늙는다고."
귀에 들릴 정도로 떠드는 젊은이들을 뒤로 하고 자리를 잡았다.
"최 형사님, 오해하셨겠습니다. 사실대로 털어놓죠."
지 실장은 1000cc 생맥주 두 컵과 닭튀김을 주문하고는 말문을 열었다.
"이번 고강진 살인 사건과 진남포 피습 사건, 이화영 납치 소동을 계기로 탤런트에 대한 자체 정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최근 이성구 이사님이 정보를 수집했는데 여자 몇 명과 남자 두어 명이 탈선 행위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거죠."
"어떤 종류의..."
"이건 정말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절대 외부에 누설하지 마시고 혼자만 알고 계십시오. 사회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잘못하면 방송국에서도 큰 타격을 입게 되니까요. 조사 결과 아주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면 인사 조치하고 웬만하면 자체 징계 정도로 끝낼 생각이거든요. 너무 지나치게 다루면 지장이 많아서요."
"약속하죠, 말씀하세요."
"몇몇 여자들이 요정에 드나들며 품위를 손상시키고 젊은 개그맨이 대마초를 피우고 있다는 정보였습니다. 남자 두어 명 중 진남포가 끼여 있는 거죠."
"그럼 진남포가 대마초를..."
"아, 아닙니다."
"이화영이나 고강진도 끼여 있습니까?"
"고강진은 빠졌는데 이화영은 있습니다. 이화영이 바로 대마초를 피웁니다."
"그럼 진남포는요?"
"진남포가 안마시술소에 드나들며 돈을 벌고 있다는 소문이 난 거죠. 본 사람이 여럿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체 조사를 시작한 거죠. 사건이 더 커지고 번지기 전에 우리 나름대로 손을 써보려고 했던 거죠. 이 이사님은 제가 여길 찾아나서면 진남포나 고강진에 대해서 무언가 알아볼만한 게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왠지 이 이사님은 고강진과 진남포를 자꾸만 연결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 방송국측에서도 이번 세 사건들이 결코 우연만은 아닐 거라고 심증을 굳히고 있구요."
말하는 동안 맥주와 닭튀김을 날라왔다. 둘은 한 모금씩 마시고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지 실장님, 이 이사님은 왜 고강진과 진남포를 연결시키고 있습니까?"
"확실한 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상한 눈치를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몇 번이나 제게 말하려다 말고는 했죠."
"계속하시죠."
"이건 제 생각인데 저는 아무래도 R-TV가 개입된 게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
"그 생각은 저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도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마는 저는 S-TV 자체에서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 실장님을 추궁했던 거죠."
"그건 오햅니다."
시큰등하게 대답하던 지 실장이 맥주를 한 컵 더 주문했다.
"이해하십시오. 형사 생활을 하다 보니."
"아, 뭐 다 그런 거죠. 그런데 R-TV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맥주를 주르르 따라 마신 지 실장은 최근에 있었던 R-TV얘기를 시작했다. 즉 고강진의 S-TV와의 전속 계약 만료가 금년 말이었다.
R-TV에서는 고강진을 스카웃하기 위해 손을 쓰기 시작했다. R-TV의 담당 이사 조남웅이 직접 나서서 고강진에게 회유책을 쓰기 시작했다. 좋은 조건과 대우를 내세웠다. 그러나 꼬장꼬장하고 꼿꼿한 고강진 성격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조남웅을 사람 많은 모 호텔 커피숍에서 개망신을 준 모양이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조남웅은 또 다른 문제로 곤란한 입장까지 겹치게 된 것이다. 다름아닌 '흥남 철수 작전' 시나리오 문제였다. 이 시나리오가 처음에는 R-TV와 먼저 교섭이 시작되었었다. 그러나 조남웅이 작품의 개작을 강렬히 요구하자 S-TV로 훌쩍 가져왔고 S-TV에서는 조건 없이 받아들여져서 지금 한참 작업이 진행중이었다. 고강진 스카웃이 실패로 돌아가고 대작 시나리오까지 S-TV에 빼앗긴 조남웅이 사내에서 코너로 몰리게 되자, 이번에는 S-TV를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저로서는 조남웅의 개입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거죠."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거 아주 중요한 말씀이군요. 사전 동기가 충분하구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한동안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둘은 천천히 일어났다. 지 실장 이 계산을 마치고 나오며 최 형사를 바라보았다.
"저 때문에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최 형사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공연한 오해를 해서 오히려 제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지 실장은 돌아서서 어둠으로 사라졌고 최 형사는 빈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벌써 밤 11시 0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최 형사는 온몸에 덮쳐오는 피로를 이기려는 듯 몸을 푸르르 떨어댔다.

W호텔 근처 고강진 별장에서 Q신문 민형규 기자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문호는 뜨거운 물로 목욕하여 몸을 풀고 난 후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단. 내일을 대비한 치밀한 작전도 세을 겸 오늘의 일들을 하나하나 분석해 보려는 의도였다,
어머니가 커피를 끓여 왔지만 입에도 대기 싫었다. 너무 피곤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호는 노트를 꺼내서 하나하나 메모를 시작했다.
----------------------
1. 범인의 애꾸 관계
목격자:
#1 서울역 개찰원 - 애꾸로 진술
#2 침대 열차 승무원 - 애꾸로 진술
#3 베이지색 바바리 여인 - 애꾸로 진술
#4 신부 - 자세히는 못 보았으나 애꾸가 아닌 것 같다는 진술 (단: 본인은 잘못 보았는지도 모른다고 진술, 몸이 건장하다고 진술)
#5성기준- 절대 애꾸가 아니라고 진술(대전에서 증발됨)

2. 범인 증발 관계(시간 추정 )
#1 21:45 침대 열차 출발(승객들이 범인을 목격함)
#2 23:00 천안 도착
#3 23:03 천안 출발(03-03의 범인 침대에서 담배 연기가 나오는 것을 목격)
#4 23:35 승무원 순찰(03-03 밑에 신발이 있는 것을 확인)
#5 23:45 승무원이 승객에게 표를 나눠 주기 위해 재순찰(화장실에서 나오는 성기준 목격)
#6 23:46~03:03 커튼을 열고 사람이 사라진 것을 확인
#7 23:51 시체 발견(고강진으로 밝혀짐)
#8 23:51~24:05 대전 도착. 차내 수색(애꾸를 발견하지 못함)
#9 29:50 대전 출발

3. 범행 추정
#1 범인은 고강진의 별장 밖에서 습격하여 살인한 후 대형 가방에 넣어서 125편 침대차에 승차
#2 23:40~23:50 사이에 가방만 남겨놓고 증발
#3 범인도주 가능성 공범자의 협력(단: 성기준이 공범이어야 논리가 성립됨)
범인이 승무원 도착 직전에 성기준 침대로 잠입 아니면 성기준과 화장실에 같이 있다가 승무원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 범인만 남기고 성기준이 통로에 나타나 승무원에게 보여 줌으로써 화장실 검색을 피하게 만들었을 가능성 이 있음.
#4 성기준의 공범 가능성
성기준만이 그가 애꾸가 아니라고 진술하여 수사에 혼선을 빚도록 유도한 점 대전에서 증발한 점
그의 도움 없이 시속 120km의 열차에서 범인이 사라질 방법 이 없음
#5 성기준의 공범 가능의 불합리점
이공학의 권위 있는 학자이며 사회적으로 명성이 있다는 점.

4. 범행 원인 가능성
#1 고강진으로부터 망신당하고 작품까지 S-TV에 빼앗겨 곤란한 입장에 있는 R-TV의 조남웅 개입
#2 이화영이 고강진에 대한 원한
#3 고강진 친아버지와 갈등 관계
#4 밝혀지지 않은 개인적인 원한

5. 가능성 분석
#1 조남웅 개입 - 그의 사회적 위치나 경력으로 보아 살인 가능성 희박
#2 스캔들 정도로 이화영이 살인을 계획했을 가능성도 희박 좀더 추적할 여지가 있음

6. 기타
#1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이었음
#2 사전 연습한 살인 계획임

7. 수사 진전
#1 진남포 피습: 최찬일이 추적중
#2 이화영 납치: ?

8. 준비 및 계획
#1 고강진 검시 결과를 분석
#2 성기준 소환 및 심문
#3 진남포 피습 추적 보고서 검토
#4 고강진 생부 신원 파악

#5 이화영 주변 탐색
------------------
볼펜을 놓고 침대에 몸을 눕힌 문호는 온몸이 부서질 듯 저려 왔다. 정말 길고 긴 하루였다. 만일 내일 성기준을 만나 공범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 그처럼 난감한 사태는 없을 것이다.
문호로서는 그 점이 제일 걱정이었다. 그가 공범이란 가능성 외에는 범인이 탈주할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연기나 물처럼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공범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 다음엔 어떻게 추적할 것인가. 경찰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공범 가능성은 100%의 확률을 가지고 있고 성기준의 주변을 생각하면 또 공범 가능성은 전혀 없는 셈이다, 어떤 경우라도 명예를 생명처럼 생각하는 과학자가 이런 젊은 배우의 살인극에 휘말릴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죽은 상대가 정계의 거물이라든지 재계의 인물 아니면 같은 학자라면 몰라도 죽은 사람은 한낱 젊은 배우에 지나지 않은가. 두 사람의 성격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서 생각에 잠기던 문호가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11시05분이었다. 조금만 있으면 범행 발견 만 하루가 된다. 길게 하품을 하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정말 길고 긴 하루였다







맞지않는 논리들


고강진의 피살, 진남포의 피습, 이화영의 납치, 그리고 성기준의 증발.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과는 관계 없이 아침 햇살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캘린더는 이제 11월에서 12월로 접어들었다. 수사실로 들어선 문호를 제일 먼저 맞아 준 것은 대전에서 남아 잔여 수사를 돕고 돌아온 김 형사였다.
"어제 밤늦게 도착했습니다. 기다리다 그냥 퇴근했습니다."
"괜찮아. 고생 많았지?"
"저야 고생한 게 있습니까. 그런데 이번 사건 아무래도 장기전으로 들어가지 않겠어요?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요."
"글쎄 걱정이야. 단숨에 해치웠으면 좋겠는데, 뭐 달리 보고할 건 없나."
"어제 보고드린 그대로예요. 열차 주변에 그럴 만한 흔적도 없고 또 숙박 업소도 그렇고. 열차와 고속버스 시간표를 조사했는데 대전에서 서울 오는 막차는 10시면 다 끝나요. 고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아요. 범인이 사라진 건 대전 도착 20여 분 내외니까요."
"음--그게 참 이상하단 말야. 김 형사 지금 성기준 씨 집에 좀 갔다 와."
"성기준이요? 누구죠?"
"아, 왜 있잖아. 대전에서 애꾸가 아니라고 박박 우겨대던 사람 말야."
"아, 그 노인 말이에요?"
"음, 어제 일차 갔다오긴 했는데 혹 어디서 연락온 거 없나 알아보고 잠복해 있다가 드나드는 사람들 체크 좀 해봐. 그리고 좀 조심성 있게 움직여, 학자 출신이니까, 그 사람 가족들 말에 의하면 부산 간다고 내려갔다는데 확인 좀 하고."
노인이 학자라는데 김 형사는 약간 놀라는 빛을 보였다.
"정말 신중히 다뤄. 성기준 씨가 부산에서 올라오지는 않았을 거야. 부산에서 그동안 연락이 왔었는지 여부를 알아보고 그 근처에서 출입자 동태를 살펴 봐."
김 형사는 문호가 그려 주는 약도를 들고 돌아섰다. 문호는 그의 등에다 대고 신중히 다를 것을 다시 환기시켰다.

고급 양옥 정도를 생각했던 김 형사는 깜짝 놀랐다. 이공학계의 저명한 학자이며 대학 교수 출신인 그의 집은 의외로 초라한 한옥집이었다. 문패에 분명히 성기준이라고 씌어져 있으니 틀림은 없었다. 이때 대문이 열리며 노인이 나타났다. 김 형사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숨겼다, 어제 대전에서 보아 낯익은 성기준 씨 바로 그 사람이 나오고 있었다. 김 형사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쌍둥이인가 하고 생각도 해 보았다.
대전에서의 목적지는 분명히 부산이었고, 어제 가족들 말로는 부산에 강연이 있어 간다고 했다는데 오늘 아침 집에서 나오고 있으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만도 했다 부인인 듯한 여자와 젊은 남자가 뒤따라 나오고 있었다.
"운전 기사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
하며 시계를 보고 중얼거리는 성기준에게
"부산에 꼭 가야 돼요?"
하며 부인인 듯한 여자가 근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려오라니 가봐야지. 웬만해서는 내려오랄 사람이 아닌데 밤중에 전화까지 걸어온 걸 보면 뭔가 급하긴 급한 모양이야."
"집에 차로 가시지 그래요."
"아냐, 불편해. 기사 보고 새마을호표 사가지고 오라고 했으니 곧 오겠지."
김 형사는 숨어서 엿들으며 어리둥절했다. 성기준은 어제 새벽 대전에서 사라졌다. 부산으로 갔을 것이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성기준은 누군가의 요청으로 또 부산에 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어제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에 간다고 한 그 목적은 무엇인가. 더구나 어젯밤 부산에서 전화가 왔다면 성기준은 어제 내내 서울에 있었단 말인가, 상황을 판단할 수 없는 김 형사는 가까운 공중 전화로 가서 문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저 김이에요."
"어? 왜이래 뭐가 이리 급해,"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성기준 씨가 지금 부산에 간다고 준비하고 있고 가족들이 대문 앞에서 배웅하고 있어요. 어제 부산에서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나 봐요. 어떡하죠."
"부산엘? 그럼 성기준 씨가 지금 서울에 있단 말야? 어제 집에 갔을 때도 부산에 있다고들 말했는데... 그래 만나 봤어?" "아녜요. 숨어서 들었어요. 제 생각엔 혹시 쌍둥이가 아닌가 해요."
"뒤따라가서 주민등록증 대조하고 일단 이리로 연행해 와... 알았지 실례 안되게 하는 거."
"알았습니다."
김 형사는 수화기를 딸각 내려놓았다. 놀란 것은 김 형사뿐만이 아니었다. 문호도 한참이나 멍청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제의 보고에 의하면 성기준은 부산에서 초청받아 강연차 내려갔고 오늘 오후에 귀경할 것 같다고 했다.
오후에 들렀을 때 부산 무슨 호텔로 전화하는 소리까지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제 저녁 부산에서 연락받고 오늘 아침 내려가는 김 형사가 보았다는 사람은 누구일까.성기준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김 형사는 그의 얼굴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수사 회의고 뭐고 당장 급한 것은 성기준의 연행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몹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그가 대전에서 바로 올라오고 가족들에게 허위 진술하도록 사주했다면 수사상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그러나 일단 부산으로 갔다가 다시 올라온 것이라면, 낱낱이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하룻만에 부산에 갔다 와서 다시 또 부산에 간다는 이유는 알수가 없었다.
약 30분 후 김 형사가 성기준과 함께 수사실로 들어왔다. 문호가 벌떡 일어나 앞으로 다가갔다. 만일 김 형사의 의견대로 그가 쌍둥이라면 그리고 어제의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의문은 그 자리에서 깨지고 말았다.
"어, 박문호 씨 잘 만났소."
그는 손을 내저으며 문호에게로 다가왔다.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불만에 찬 듯 볼을 실룩이고 있었다,
"이봐요, 내가 이 사람한테 더 이상 따질수가 없어서 여기까지 내 발로 왔는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자기 변명을 위한 가장된 몸짓인지 아니면 정말 자기가 이곳에서 지금 어떤 혐의를 받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지 그는 당당하게 따지며 항의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산에 있을 때 형사들이 집을 찾아와 자기 신분을 캐묻고 갔다는 말을 듣고 불쾌하기도 하고 또 가족들이 놀랄까 봐 서둘러 귀경한 것인데 이번에는 연행까지 하겠다고 하니 불만이 극도로 치밀어올랐던 것이다.
"자 앉으시죠, 이렇게 모셔와서 죄송합니다. 몇가지 질문 좀 하려고 그럽니다."
"나 참, 아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저께 당신들이 협조해 달라고 해서 내가 자진해서 증언을 해주었는데 그때부터 이게 대접이 뭡니까? 이래서야 누가 마음놓고 경찰에 협조하겠습니까?"
"자 흥분하지 마시고... 이왕 협조를 시작하신 거니까 끝까지 협조해 주세요. 저희들도 사정이 있어 그럽니다."
"사정이고 오정이고 이거야 원."
성기준은 문호가 권하는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러나 성이 가시지 않는지 계속 ㅉㅉ거리고 있었다.
"대전에서는 정말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성 박사님께 따로 문제가 생겨 모셔왔으니 너무 달리는 생각지 마십시오."
"뭐요? 나한테 문제가 생겨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두 손을 벌리며 어깨를 움찔했다.
"저 성 박사님. 열차에서 범인을 보셨다고 했죠."
"그렇소. 그래서 내가 부산에도 못 가고 대전에서 내린 게 아니 오."
"선생님은 범인이 애꾸가 아니라고 하셨죠. 분명히 보셨다구요. 그런데 범인은 분명히 애꾸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뭐요? 그럼 범인이 잡혔단 말이오."
성기준 씨는 몸체를 문호 앞으로 내밀며 눈을 크게 떴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구요. 그날 범인을 목격한 승무원과 바바리 여인 외에도 서울역에서 개찰한 역원까지 애꾸를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애꾸라는 것은 이미 조사에서 밝혀졌습니다.
범인이 애꾸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분은 성 박사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여보, 내가 나이 좀 먹었다고 이렇게 대접하기요. 내가 분명히, 그리고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그 사람은 애꾸가 아니었단 말이오. 내가 누군지 아오. 성기준이오, 성기준. 이래 뵈도 박사란 말이오, 공학 박사. 애꾸를 애꾼가 아니라고 헛말하고 다닐 사람 같소. 애꾸를 잘못 보았다는 얘기오? 아직 그렇게 늙지는 않았소. 원 세상에 뚱딴지 같은 소리나 하고 앉아서 범인을 잡겠다고... 원, 나를 공범자로 생각하는 거요?"
성기준의 태도는 단호하고 분명했다, 학자 출신답게 고지식하고 직선적이었다. 문호는 약간 당황해졌다. 그를 공범으로 내세울 증거는 없다. 범인이 사라진 트릭을 생각하다가 착안한 것이 그의 공범 가능성이었다. 그렇다고 그 가능성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사람이 안개처럼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직 박사님께 공범자라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사님을 오시라고 한 겁니다. 다시 그날 밤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그날 밤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실 겁니다. 승무원이 23시35분에 순회 점검을 했습니다, 그때 03-03 침대차 밑에 신발이 있었죠. 그리고 10분 후에 나와 보니까 신발도 애꾸도..."
"이 사람 정신이 있나 없나. 내가 애꾸는 없었다고 하지 않았소."
"좋습니다. 여하튼 박사님은 맞은편에 있던 승객이 연기처림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건 맞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화장실에서 나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소. 경찰은 남이 화장실 가는 것까지 간섭을 하십니까?"
"아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가정을 세워보는 거죠."
"그렇습니까? 경찰에서 세워놓은 그 기발난 가정 좀 들어 봅시다."
"네. 그 가정이란 이런 거죠. 즉 박사님께서는 승무원이 한 바퀴 돌고 돌아간 것을 알고 범인을 불러 화장실에 숨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 뒤이어 박사님도 화장실로 들어가신 거죠. 그리고 승무원이 표를 가지고 재차 나올 때를 때맞춰 박사님도 화장실에서 나옵니다,"
"그래서요?"
"화장실에서 나온 박사님과 승무원은 우연히 마주치게 되죠. 그리고 뒤이어 범인이 증발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차량 내 구석구석을 뒤지죠. 단 화장실만 제외하구요. 왜냐하면 화장실은 방금 박사님께서 나오신 곳이니까 더 찾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표를 찌르는 치밀한 방법으로 경찰과 승무원을 따돌린 거죠. 어떻습니까, 박사님. 제 논리에 빈 틈이 있습니까?”
문호가 성 박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범인이 사라진 논리를 전개시키는 동안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만 멀뚱멀뚱 떠보이고 있었다.
"거 당신 말하는 거 들어보니 경찰 그만두고 추리 소설이나 쓰는게 훨씬 낫겠소. 이봐요. 당신은 가정을 두고 하는 얘기지만 난 진실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난 범인이 어떤 놈인지 또 뭣하는 놈인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화장실만 해도 그렇지 내가 재수 없이 그때 마침 사용한 것뿐이고 또 당신네들이나 승무원들이 화장실을 뒤질지 안 뒤질지도 모르고 어떻게 그런 위험한 모험을 한단 말이오. 당신네들 이 찾아보지도 않고 그런 궁색한 추리를 하는 건 무식한 사람들이 흔히 무기로 내놓는 결과론밖엔 더 달리 할 말이있겠습니까? 그리고 오히려 경찰측에 협조한 사람을 의심해요."
"그렇다면 박사님. 범인이 달리고 있는 초특급 열차 속에서 어떻게 사라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단 십 분 동안에 말입니다."
문호는 성기준 씨의 논리에 타당성이 있음을 시인하면서도 끝내 그 의혹은 풀지 못했다. 그렇다. 지금 와서 성 박사를 의심하는 것은 결과론밖에는 더 해석할 수 없다. 그러나 범인이 사라진 방법에는 어떤 논리도 대입되지 않았다,
"여보, 그건 당신네들 같은 전문가가 생각할 일이지 어떻게 나보고 묻습니까?"
"좋습니다. 그러면 박사님 가족들은 어제 저희들에게 박사님이 부산에 계시다고 했는데 왜 오늘 또 부산에 간다고 하셨으며 어제는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또 대전에서는 왜 사라지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 뿐만 아니라 열차 관계자들이 모두 애꾸라고 했는데 박사님만 아니라고 했거든요. 이런 것들을 설명해 주십시오"
"이 사랑들 정말 적반하장이라더니. 내가 대전에서 사라지다니. 아니 부산 내려가는 사람 잡아놓고 목격자 진술이 필요하다고 해서 잡아놓고... 좋소. 대전에서 일찍 떠난 건 내 스케줄 때문이었고, 다시 오늘 부산에 간다고 한 것은 부산 친구가 개인적인 일로 보자고 해서 가는 길이오. 또 애꾸 문제만 해도 그렇지 내가 애꾸가 아닌것으로 확실히 본 것을 애꾸라고 거짓말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겁니까? 도대체 당신네들은 왜 내가 부산에만 가면 이렇게 잡아놓고 시간을 빼앗는 거요. 빼앗길..."
"부산에선 언제 올라오셨습니까?"
"어제 오후 비행기로 올라왔습니다."
"..."
더 이상 성기준과 말씨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언가 확실하고 선명한 대답이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어떤 경우이건 그의 공범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때 성기준이 벌떡 일어나 문호에게 한 마디 던지고 돌아섰다.
"이봐요. 내가 너무 투덜거려 미안한데 사람을 좀 보고 잡아야지. 이 성기준이가 사람 죽이는 데나 가담할 그런 사람같이 보인단 말이오? 나 어제 김만호 씨 부탁으로 부산 강연가는 길이었소. 당신네들 도우려다 이리 된 거요."

"좀 이상하지 않아?"
문호가 김 형사에게 밑도 끝도없이 물었다.
"이상하다뇨. 사건이야 처음부터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거 아닙니까."
"그런 뜻이 아니구..."
문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었다. 성기준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느낀 것은 그의 감정과잉 노출증세였다.
아무리 고지식한 이공학계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오늘 그가 보여 준 태도나 언행은 분명히 과잉 노출이었다. 하나의 사건을 그래도 자기 생각으로는 가장 조직력 있고 타당성 있는 논리하에 전개한 말인데 소설을 쓰라는 등, 웃기는 얘기라는 등, 학자답지 않게 말하고 있었고 흥분하는 모습이 필요를 넘어선 행위로 보였다. 누가 말하기도 전에 자기가 '공범'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사람이란 자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할 상황이 되거나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면 이를 감추기 위해 표현의 과잉을 가져온다. 그렇다.그는 무언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기가 말한 대로 소위 학자라는 사람이 경찰에 와서 충동적이고 직접적인 언어를 함부로 산용하고 있다는 것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 그의 언어에서는 공포로 인해 생기는 정신 분열증적 사고의 특성이 그대로 나타나 보였다.
프리드(FREAD)의 말대로 공포의 1차적 과정(primary process) 즉 언어에 논리성 같은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충동의 직접적인 언어 해소가 나타나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 그는 무언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문호는 그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아득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있는 수학의 '답'을 보고 있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저 회의 시간인데요."
김 형사가 문호를 바라보며 일어났다. 그러나 문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성기준의 말도 전혀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만일 노련한 그리고 경험이 풍부한 형사가 초동 수사를 했다면 어떤 경우라도 화장실까지 수색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실수 때문에 성기준이 공범으로 떠올라지게 되었고 범행 방법에 머리를 썩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 이 방금 사용하고 나온 화장실까지 다시 조사할 만큼 노련해지자면 이런 신비로운 사건과 끊임없이 부딪쳐야 하고 외국의 미스터리 같은 사건들을 끊임없이 공부해야 했다.
대전의 이민우 형사도 노련하기로는 평판이 나 있는 자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역부족임이 입증되었다. 어쨌든 성기준 자신은 공범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맞서고 있고 또 절대 애꾸가 아니라고 고집하고 있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몰랐다. 만일 그가 공범이라면 공범이라는 확실한 증거와 논리가 필요했고 아니라면 아닌 대로 선명하고 타당한 설명을 필요로 했다. 태도로 보아서는 공범이 아닌 것 같고, 상황으로 보아서는 공범이 틀림없는 딱한 사정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문호는 어떤 예감을 느끼며 수사 회의를 시작했다. 문호는 수사 회의에서 일단 업무를 분산시켰다. 그리고 어제 진남포 사건을 수사한 최찬일의 보고를 받기로 했다.
"어제 하룻동안 정말 고생들 많았습니다, 어제 수사에서는 얻은 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사 해결 자체에는 아무런 도움된게 없었습니다."
문호는 수사원의 노고를 치하한 다음 최찬일의 보고를 지시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노트를 꺼냈다.
"이게 참 이상합니다. 열차 사건은 눈에 분명히 보이는 미스터리인데 이쪽은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한 점이 많거든요."
"눈에 보이지 않다니 뭐 어떤 게?"
"그러니까 말입니다. 진남포가 습격당한 시간은 수사 결과 밤 12시 50분부터 1시 10분경, 그러니까 불과 20여 분 동안에 당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사고 주변을 탐문한 결과 그 시간에 사람들이 배회하거나 불량배들이 있었던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아파트 방향으로 사고가 나기 직전에 영업용 택시가 한대 왔고 거기서 뚱뚱한 남자가 내려서 잔뜩 웅크리고 아파트로 가는 것을 보았답니다. 워낙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사람이 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갈매기 주점의 주모가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곳 아파트의 주변 구조였습니다. 마을이 끝나고 조금 더 들어가서 아파트가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아파트는 막다른 길이 되는 셈이거든요. 그러면 자동차에서 내린 사람은 틀림없이 아파트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그 시간에 아파트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경비원의 말이었습니다. 또 하나 차에서 내린 사람이 왜 아파트까지 차를 몰고 들어가지 않고 아파트 멀리서 차를 내려 걸어 들어갔느냐 하는 거죠. 따라서 처음에 저는 이런 추측을 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업용 택시에서 내린 사람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진남포를 습격하고 도망친 것이죠. 그러나 그런 추리에는 너무 억지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진남포는 경비실에서 놀다가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까? 불특정 시간에 불특정 장소로 나간 진남포를 습격하기 위해서 미리 대기한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일이죠. '대본 외우는 게 골치 아파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나갔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으니까요. 경비원 말에 의하면 진남포는 7시경 아파트로 돌아온 후 계속 대본 연습하는 소리가 났고 또 과일을 싸들고 내려왔을 때도 별다른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거든요. 따라서 포인트는 주모가 보았다는 택시에서 내린 사람에게로 맞춰야 할 게 아닌가 합니다. 그 사람은 진남포와 면식이 있는 사람이고, 또 12시 50분부터 1시 10분 사이에 아파트 근처 어디선가 만나기로 이미 약속이 되지 않았을가 이런 생각을 한 겁니다."
최찬일은 어제의 수사 상황을 간추려서 보고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문호가 머리를 들었다.
"이 사고는 절대 우발적인 사고가 아냐. 계획된 피습이 틀림없어."
하고는 다시 최찬일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그 자동차를 본 주모가 무슨 다른 얘기 한 것은 없었나? 가령 자동차라든가 사람에게서..."
문호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찬일이 대답했다.
"결국 단서가 될 만한 특징은 두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 하나는 택시에서 내린 사람은 뚱뚱한 사람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멀리서 희미하게 보긴 했지만 택시 대가리에 별표 모양의 전등표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메모들 해."
문호도 수첩을 꺼내 메모를 하면서 하나하나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먼저 최 형사. 최 형사는 그 갈매기 주점에 다시 가서 확실히 그 전등 표식이 별표였는가를 확인하고 그 다음 택시 회사를 수배해 봐. 택시 대가리 표시는 회사별로 서로 다르니까 어렵지는 않을 거야. 다음, 김 형사는 성기준의 집 부근에 잠복해서 드나드는 사람 체크해 보고 특히 S-TV나 혹은 R-TV 사람들 혹은 그쪽 차량 출입을 살펴 봐. 그리고 진 형사와 이 형사는 최 형사를 도와서 안마시술소의 진남포 동생을 수배해 봐. 조사할 내용은 최 형사에게 물어보고 움직이도록... 그리고 난 부산에 좀 갔다와야겠어."
"부산에요?"
갑자기 부산에 가겠다는 말에 어리둥절하던 형사들은 그대로 일어나 지시받은 대로 뿔뿔이 헤어졌다.
부하들을 현장으로 배치하고 난 문호는 저녁차로 부산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산'. 문호가 느낀 예감은 아무래도 이번 사건의 진원지는 부산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는 성기준이 부산을 이틀 동안에 두 번이나 내려간 점이다.
사고가 나던 날 그의 목적지가 부산이었는데 다음날 아침 또 부산에 간다고 했다. 그는 부산에 가면서 김만호의 초청이라고 했는데 과연 김만호가 이틀 동안 두 번씩이나 초청했을까 하는 게 의문이었다.
둘째는 열차에서 애꾸를 목격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강한 악센트의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를 조정한 배후 인물이나 아니면 애꾸 자신도 부산 사람이 아닐까 하는 가정을 세워 본 것이다. 따라서 부산에서의 우범자들 중 애꾸를 찾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부산에서 해야 할 스케줄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 김만호와 성기준의 관계를 조사하고 다음 과연 김만호가 성기준을 연 이틀이나 초대했을까 하는 의문을 확인해 보고 그리고 왼쪽 검은 자위가 없는 애꾸를 우범자나 블랙리스트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아울러 부산에 내려가면서 침대 열차를 이용하고 도중 애꾸의 범행 방법을 생각하기로 했다.
문호는 책상 유리 밑의 수사 스케줄을 점검했다. 오늘 낮에 할 일은 고강진의 검시 결과 점검을 하고 다음은 S-TV를 찾아가 이화영 납치 사건의 결과를 알아보기로 되어 있었다. 상황에 따라 R-TV의 조남웅도 만나보기로 했다.
"박문호 씨, 전화 받으세요."
수사 스케줄에 골몰하고 있던 문호에게 동료 하나가 소릴 질렀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디래?"
"부산이라는데..."
"부산?"
그렇지 않아도 부산에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많아 오늘밤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문호는 부산에서 온 장거리 전화에 정신이 번쩍들었다. 수화기를 빼앗아 귀에 댔다.
"부산 경찰국 형사 과장입니다. 박문호 씨 부탁합니다."
"제가 박문흡니다. 무슨 일이시죠?"
"왜 서울서 피습당한 진남포라는 배우 있었죠."
"네. 있었습니다."
"그 사람 여동생이란 자가 해운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네? 뭐라고요. 아니..."
"죽은 시체는 동백섬 해변가 바위 골짜기에서 발견되었는데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했어요. 그가 소지하고 있던 핸드백에서
박영숙이란 주민등록증이 나왔고 담배와 성냥이 있었는데 성냥을 살펴보니 '대광 안마시술소'라는 상호가 있었습니다. 시체가 장님이라 흑시나 하고 그 곳으로 전화했더니 인상 착의가 동일했습니다. 유서는 없구요. 진남포 사건과 관계가 있지나 않을까 해서 전화 드리는 겁니다,"
"시체는 분명히 박영숙이죠?"
"네, 틀림없습니다. 주소가 마포구 마포동 진아 아파트로 되어 있구요. 그가 진남포 동생이라는 것도 서울 안마소에서 알려 줘서 알았죠."
부산 시경과 전화를 끝낸 문호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멍청하게 서 있었다, 부우연 안개 같은 것이 머리를 꽉 채우듯 혼미해져 갔다.
"제기랄. 이거 어떻게 된 거야.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얼굴을 껑그리며 주머니에서 담배곽을 꺼냈지만 담배는 한 개비도 없는 빈 곽이었다. 빈 담배곽을 구겨 버린 후 수사실을 막 나가려는최찬일을 불렀다.
"최 형사, 나 좀 봐. 에이 쌍."
"아니 무슨 일이 생겼어요?"
문호는 최찬일을 조용한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어제 대광 안마시술소에 갔을 때 진남포 동생이 누구라고 그랬지?"
"예, 박영숙이라고 했어요."
"음, 박영숙. 어제 언제쯤 나갔다고 그랬어?"
"오후 한 시경에 나갔다고 그랬는데요. 왜요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그 전날 저녁나절 진남포가 들렀다고 그랬었지."
"맞습니다. 한 두어 시간 있다가 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봐. 이거 굉장히 복잡하게 얽혔어. 조금 전에 부산에서 전화가 왔는데 그 박영숙이란 아가씨가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는 거야. 해운대에서 발견됐다는군.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네? 박영숙이 음독 자살을요?"
"지금 말야, 당장 대광 안마시술소로 가 봐. 가서 종업원이나 주인한테 좀더 자세히 알아봐. 사건 전날의 상황이나 박영숙 주변 그리고 진남포에 대한 정보도 입수해 보고. 무슨 단서가 될 만한 건 모조리 체크해 보라구."
최찬일을 종로로 보내고 난 문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번 사건의 진원지가 부산일 것 같다는 문호의 예감은 더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나타났다. 박영숙이 부산에서 음독 자살했다는 정보를 입수 했을 때 진남포가 부산의 남포동에서 뼈가 굵었다는 최찬일의 말을 기억에 떠올렸다. 모든 사건의 핵심은 부산에 있다.
그리고 고강진 살해 사건과 진남포 피습 사건이 결코 두 개로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싶었다.
고강진의 검시 결과를 먼저 보고 부산에 내려갈까 아니면 그대로 부산에 내려갈까 망설이던 문호는 잔뜩 긴장된 얼굴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대광 안마시술소'
이곳에는 장님 여자 안마사가 네 명, 남자 안마사가 두 명 도합 다섯 명의 안마사가 고용돼 있었고 사우나에서 잔심부름하는 남자가 한 명 카운터 경리가 한 명, 그리고 구내 이발사가 한 명이 일하고 있었다. 주인인 듯한 뚱뚱한 여자가 최 형사를 휴게실 소파로 안내했다.
"무슨 일이신지요?"
"여기는 무슨 일이 없습니까?"
"뭐 특별한 일은 없는데요. 혹시 저희들이 뭐 잘못한 거라도..."
갑자기 목소리가 낮아지며 겁먹은 듯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 그런 건 아닙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요. 어제 만났던 그 입술 옆에 검은 점 있는 아가씨는 어디갔습니까?"
"아, 화자 말씀하시는군요. 얘, 가서 화자 불러 와."
주인은 옆에 있던 종업원에게 심부름을 시키고는 최 형사에게 담배를 권했다. 무슨 일인지를 몰라 모두들 어리둥절하다 있었다.
"정말 여기 아무 일 없었습니까?
최 형사가 얼굴을 굳히며 다그쳐 묻자 주인은 당황한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말이에요. 여기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영업도정상으로 하고 있고."
"혹시 종업원 중 결근한 사람은 없습니까?"
"결근요? 아 네 영숙이요. 어젯밤에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아직 출근하지 않고 있어요. 가끔 저희 오빠한테 갔다오곤 하는데 왜 있잖았아요. 어제 신문에 쬐그만하게 난 그 배우 피습 사건 말이에요. 진남포라고 바로 그 사람이 영숙이 오빠거든요. 그래서 병원에 가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영숙이한테... 아 참 그리고요. 조금 전에 영숙이란 사람 있느냐고 어디서 전화가 왔었어요. 입원한 오빠 얘기도 해줬죠. 그랬더니 두 말 없이 전화를 끊어 버리더군요."
"그 영숙이란 안마사 말씀인데요. 오늘 말이죠..."
이 때 층계를 타고 걸어 내려오던 화자라는 아가씨가 최형사를 보고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춰섰다.
"안녕...하...세요. 무슨...일로."
내려오지도 올라가지도 않은 채 엉거주춤 서서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둥그래진 눈으로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잠깐만 내려오시죠. 뭐 잠깐이면 됩니다. 그리고 주인 아주머니, 다른 안마사들은 어디들 있습니까?"
"얘, 화자야. 너 좀 내려 와. 정신없는 사람처럼 멍청하게 서있지 말고... 저 선생님 안마사들 말이죠. 옥상 별실에들 따루 기거하고 있어요. 아 얘 너는 내려오라는데도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니. 옥상에 올라가서 아예 애들 전부 깨워 가지고 와."
주인의 고함 소리에 화자가 비로소 정신이 들었는지 후다닥 돌아서서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화자는 얼굴이 새파랗게 죽어 있었다. 어제 왔다가 간 형사가 또 찾아와 주인이고 종업원이고 전부 모이라니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가뜩이나 어제 왔을 때 무언가 눈치재고 돌아간 게 분명한데 오전을 넘기지 못하고 또 찾아왔으니 영업 정지당하고 마는 게 아닌가 하고 더럭 겁이 났던 것이다. 아직도 곤하게 자고 있는 안마사들을 깨워 휴게실로 내려왔다,
주인과 형사가 머리를 맞대고 무엇인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이들이 내려오자 의자를 권했다.
"이렇게 모이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 솔직하고 정확하게 대답해 주셔야겠습니다. 조금 전에 주인 아줌마께서 박영숙의 신분을 묻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걸어온 곳은 부산이었습니다. 박영숙 씨가 부산에서 음독 자살을 했기 때문입니다."
"네?"
"뭐요? 영숙이가 자살을..."
"걔가 왜요. 틀림없는 박영숙이래요?"
사람들은 실감이 나지 않는지 눈이 휘둥그래진 채 말끝을 맺지 못했다.
"네, 틀림없습니다. 박영숙의 신분이..."
"어머 어쩌지... 걔가..."
"아니 오빠도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왜 자살을 해, 응?"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남매가 다 불쌍한 사람들인데... 세상에..."
"아, 잠깐들 조용히 좀 하세요. 제가 찾아온 것은 두 남매가 다같이 비극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좀더 자세히 알아보려구요. 에... 어저께 진남포가 왔을 때 동생과 무슨 이야기하는 것 혹시듣지 못했습니까? 아니면 평소 박영숙이 세상을 비관한다든가 아니면 요즈음 무슨 특별한 고민거리가 생긴 것 같은 눈치가 있다거나. 뭐 아무 거라도 좋습니다, 생각나시는 게 있으시면...”
최찬일은 안마사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이들은 대부분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라고 했다. 이들이 장님인 것 외에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몸매는 누구할 것 없이 모두 여성다워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얼굴은 하나같이 기형으로 보였다. 왜 장님들은 하나같이 기형으로 생겼을까. 보통 여자들이 눈을 감고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턱이 유난히 넓다든가 광대뼈가 유난히 불거져 있다는 것. 아니면 얼굴이 정상인 이상으로 휘어 있다는, 이를테면 골격 구조 자체에 이상이 있었다. 장님인 것도 불행한데 얼굴까지 이렇게 생겼을까 생각하니 새삼 그들의 불행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저들은 저들대로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하고 살아가고 있겠지. 순간적이나마 아련한 애증을 느끼던 최 형사는 이들이 전혀 입을 열지 않으려는 태도를 읽어냈다. 그리고 무척 당황하고 놀라워하는 것도 알아냈다.
"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진 마십시오. 그가 왜 자살을 했는지 아는 것은 그의 오빠가 왜 피습을 당했는지를 아는 결과이기도 하니까요. 여러분들에게 필요 이상의 폐는 끼치지 않겠습니다. 그저 뭔가 생각나는 게 있거나 혹 아시는 게 있으면 그대로 말씀만 해주시면 됩니다."
이때 맨 앞에 잔뜩 쪼그리고 앉아 있던 안마사가 얼굴을 들며
"제가 말해도 돼요?"
하며 감겨진 눈을 깜박거렸다,
"네, 뭐라도 좋습니다."
"저, 영숙이는 저하고 좀 친한 편이었어요. 그런데... 영숙이가 한 두어 달 전부터 조금씩 우울해지기 시작했어요.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았죠. 손님 차례가 와도 반가워하지도 않고 또 어떤 때는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고민도 하구요."
"손님 차례가 뭐지요?"
"손님 차례라는 건 일을 공평하게 나눠 가지려고 번호를 정해 순서대로 손님을 받는 거죠. 그러나 지정 손님은 순서에 관계가 없어요."
"지정 손님은 또 뭡니까?"
"지정 손님은 손님이 안마사를 지정해서 부르는 거죠."
주인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박영숙에게 지정 손님은 없었습니까?"
"갠 단골이 있기는 했는데 호출 단골이었어요."
"호출은 뭡니까?"
"호출은 손님이 일정한 장소로 나오라고 해서 출장가는 거죠."
이때 눈을 깜박이던 안마사가 얼굴을 굳히며 머리를 갸우뚱인다.
"참!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언젠가 호출 손님이 영숙일 부르는데 얘가 가질 않았어요. 그 후로 두어 번 더 전화가 왔는데 끝내 안갔죠. 그리고는 그 손님하곤 끝이 났어요."
"그 때가 언제쯤이었습니까?"
"그 때가... 초가을... 추석 직전이었으니까 한두어달 된것 같아요."
이때 처음 말을 꺼냈던 영숙이 친구라는 안마사가 다시 말을 거들었다.
"네, 맞아요. 그 때부터 영숙이가 우울해지기 시작했어요. 아마 이유는 그 일 때문일 거예요."
"왜 그랬죠? 혹시 단골 손님하고 정이 든 게 아니었을까요?"
"그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음, 허긴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마지막 호출받던 날 안 가겠다고 버티더니 마구 울었어요.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면서요. 내가 왜 장님이 되었느냐고요. 남들 눈깔은 멀쩡한데 왜 우리만 이러느냐구 요.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어요. 오빠한테 미안해 죽겠다는 말을 거듭했죠. 나도 처음엔 애인이 생긴 건가 하고 생각했는데 말투가 그게 아녔어요. 오빠를 괴롭히는 결과가 되었다고요."
"오빠한테?"
"네"
"그 괴롭힌 결과란 무슨 말입니까?"
"그걸 모르겠어요. 그 후론 성질이 싹 바뀌어 버렸어요. 여간해서 말도 잘 하지 않고."
"좋습니다. 자 그건 그렇고 그럼 엊그제 오빠가 왔을 때 둘이 나눈 얘기를 누구 들은 사람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좋으니까요."
이 때 맨 뒤에서 어물어물하고 있던 화자가 안도의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경찰이 찾아온 용무의 핵심이 자기가 아니고 박영숙이라는데 대해 긴장이 풀어지는 듯했다.
"제가 조금 듣긴 했어요. 엊그제 영숙이 오빠가 찾아왔죠. 우린 언제나 그렇지만 영숙이 오빠가 오면 방을 비워 주고 둘이서 얘기할 수 있도록 해주죠"
"그 전에도 자주 왔나요?"
"아녜요. 그 전엔 어쩌다 한 번씩 들렀는데... 네 맞아요. 그 때 이후부터예요. 영숙이가 단골 호출을 기절하고 난 뒤부터 자주 들렀어요. 전엔 영숙이도 오빠네 집에 자주 들렀었는데 요즈음은 거기도 자주 안 가요."
"그래 둘이 나눈 얘기는 어떤 거였습니까?"
"제가 빨래를 거둬들이려고 옥상으로 올라갔어요. 저희들이 쓰는 방은 옥상에 있거든요. 그런데 창 틈으로 영숙이가 훌쩍훌쩍 우는소리가 났어요. 제가 깜짝 놀라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니까 '미안해요, 오빠. 저 때문에... ' 그러니까 오빠가 영숙이한테 '괜찮아, 까짓 거 자식 계속 까불면 죽여 버릴 거야. 애송이 자식이'하는 소리가 들렸구요. '자식 해치워야지. 너 나한테 무슨 일 생겨도 놀라지 마' 하는 소리도 들렸구요. 또 영숙이가 '아냐 오빠 내가 죽어 버리면 돼'하는 소리도 났는데 나중엔 오빠가 훌쩍이며 우는 소리가 나기도 했어요. 담배를 피우면서 벌떡 일어나는 게 유리창으로 보여서 그냥 내려왔죠."
"내용 전체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습니까?"
"그것은 알수가 없었어요. 말을 드문드문 들은 데다가 이 이야기가 하루이틀 얘기는 아닌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날 밤에 아니 그 다음날 낮에 밖으로 나가서 그렇게 된거죠"
"네"
"달리 전화가 오거나 연락이 온 건 없었습니까?"
"한 번도 없었어요."
최 형사는 박영숙이 쓰던 살림 가방을 뒤져 보았지만 별달리 눈에 뜨일 만한 것은 나오질 않았다. 약간의 화장품과 내복 그리고 저금 통장이 한 개 나왔다. 저금액은 250만원. 한푼도 꺼내 쓰지 않고 알뜰하게 모은 돈이었다.

사우나나 하고 가라는 주인의 호의를 거절하고 대광 안마소를 나온 최찬일은 택시 회사고 뭐고 진남포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달렸다. 할수만 있으면 억지로라도 말을 꺼내게 해 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떨어지지 않는 의문은 시간이 갈수록 가중되기만 했다. 화자라는 여인이 들었다는 둘의 대화 내용만 해도 그렇다.
진남포가 누구에겐가 맹렬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누가 됐건 상대는 애송이가 틀림없고 공격하려는 측은 진남포가 분명했다. 화자라는 여인의 말이 틀림없다면 진남포는 '애송이'라는 자식을 죽이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고 동생은 오빠에게 무언가 말못할 죄를 지어놓은 게 틀림없었다. 자살할 이유야 그렇다고 해도 최찬일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즉 진남포는 그가 이미 알고 있는 대로 부산 남포동 시절부터 힘깨나 쓰는 자로 알려져 있었다.
거기다가 오랫동안 액션 배우로 단련된 몸이고 호신술도 한두 가지는 더 배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먼저 공격하려던 측에서 오히려 당했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상대가 대여섯 명의 떼거리라면 몰라도 진남포가 당한 상황으로 보아서 일대 일의 대결이 분명한데 아무리 상대방이 칼을 가지고 있다 해로 애송이한테 그토록 처참하게 당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 애송이라는 자가 선제 공격을 하기 위해 누군가를 고용했다는 논리가 성립되는데 그렇다면 현장을 최초로 검증할 때 느낀 대로 어떻게 범인이 그렇게 기막히게 시간을 맞춰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추리의 논리는 언제나 그 시점에서 멈춰지곤 했다.
그래도 대광 안마시술소에서 얻은 수확이라면 동생 즉 박영숙과 진남포가 '애송이'라는 미지의 인물에게 맹렬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점이었다. 누굴까 그 애송이는, 그리고 무엇이 박영숙과 진남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던 최찬일은 병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진남포는 7층 외과 병동에 입원하고 있었다. 병실에는 네 명이 함께 입원하고 있었는데, 두 명은 교통 사고로 입원한 사람이고 한 명은 목 뒤에 종기가 나서 입원한 사람이었다. 진남포는 가슴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고 잠이 들었는지 옆에서 떠드는 소리가 나도 꿈적도 하지 않았다. 간호하는 사람도 없는 듯싶었다. 머리맡에는 꽃송이가 잔뜩 꽂혀 있었다.
"이 꽃은 누가 보내 준 거죠?"
"이거요? 동네 꼬마들이 꽃아 놓고 갔어요. 한 열명은 됐을 거예요"
간호원이 꽃송이를 다독이며 대답했다.
"담당 의사는 어느 분이시죠?"
"장 박사님이신데 만나 보시려면 3층으로 내려가 보세요. 거기 가서 장재훈 박사님을 찾아보세요."
진남포를 깨울 수가 없어서 담당 의사를 찾아갔다. 40대 초반의 남자로 매우 깨끗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최찬일은 찾아온 목적과 신분을 밝히고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입원할 당시 상태는 어펐습니까?"
"예, 상처가 아주 대단했습니다. 가슴 부분에 대단한 상처를 입었는데 칼로 위에서 아래로 여러 번 그은 자국이 있었습니다. 길고 짧게 약 대여섯 번 베었구요. 왼쪽 옆구리에도 찍힌 자국이있었습니다. 우선 바늘로 꿰매긴 했지만 출혈이 좀 심했었습니다."
"아주 위험한 상태는 아닙니까?"
"네, 가슴 심장 부분을 칼끝이 약간 스쳐 놀라긴 했지만 그리 위험하진 않았습니다. 의식은 어느 정도 정상이지만 출혈이 심해서요. 그러나 말하고 먹고 하는데 당장에 큰 지장은 없죠. 그런데 이 사람 전혀 입을 열지 않아요."
"예. 조금 전에도 신문사에서 기자들이 왔다갔는데 일체 입을 열지 않아요. 그의 말을 들으려면 몸의 회복보다도 심적 변화가 더 빨리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충격이 컸던 모양입니다."
"지금 상처 부위는 볼 수가 없죠?"
"지금은 곤란합니다."
"언제쯤이면 정상적인 면회를 할 수 있을까요?"
"면회는 아무 때나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말씀 드린바와 같이 우선 수면이 끝나야 하고 또 질문에 무언가의 답을 얻으려면 정신이 안정되고 심적 변화가 와야지 그 전에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지, 감사합니다. 급히 가볼 곳이 있어서요. 다시 들리겠습니다."
최찬일은 쫓기는 사람처럼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왔다. 손에 잡히는 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마포로 달려갔다. 신아 아파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맞아. 범인은 하나가 아니었어. 내가 왜 그걸 일찍 생각 못했지."
혼자 중얼거리며 택시 속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최찬일은 병원에서 의사가 계속 출혈, 출혈, 하고 있을 때 아스팔트 위에서 보았던 혈흔을 생각했다.
"확실해. 범인은 하나가 아니었어."
"네?"
"아, 아닙니다. 빨리 좀 갑시다."
운전 기사는 아까부터 뒤에 앉아 무엇인가 자꾸 중얼거리는 사람을 백미러로 훔쳐보고는 다시 액셀레이터를 힘껏 밟아댔다. 부르릉 하고 차는 가속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신아 아파트와 인접한 아스팔트, 즉 아파트 입구에서 좌측 공터 쪽으로 공사하다가 중단한 도로, 바로 진남포의 핏자국이 최초로 식별된 장소였다. 핏자국은 아직 지워지지 않고 그데로 있었다.
사람들의 통행이 없기 때문에 혈흔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최찬일은 마을통장의 도움을 얻어 사람이 다니지 못하도록 제한 조치를 하고 인근 DP점에 의뢰해서 혈흔을 최대한 정밀하게 촬영했다. 혈흔을 조사하며 최찬일은 피습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피습 장소. 그렇다, 아스팔트가 끝난 다음 공터, 마른 풀더미가 발목까지 오르는 공터가 최초의 피습 장소로 떠올랐으나 그 생각은 커다란 착오였다. 진남포가 피습당한 곳은 아파트 입구에서 옆으로 약 7m정도로 갈라져 들어간 아스팔트 도로. 어느 회사에선가 신축 아파트 공사를 위해 말뚝을 받고 새로 공사를 하다가 중단한 그 곳임이 확연히 드러났다.
아마 범인 중 한 명은 입을 틀어막고 뒤에서 붙잡고 있었고 다른 또 한 사람은 앞에서 칼로 옆구리를 찌르고 가슴을 칼로 긋고 도망간 게 틀림없어. 아니면 꿇어앉히고 했던가. 그래 맞아 범인은 두 명 이상이었어. 그렇다면... 별표식의 택시에서 내린 그 뚱뚱해보이는 한사람, 그리고 그 이후에 또 사람이 도착했다는 얘기가 성립되는데 그렇다면 한 사람은 어딘가 숨었다가 뒤에서 덮쳤고 한 사람 은 정면에서 칼질을 한 것인데, 핏자국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틀림없는 그 상황인데 그렇다면 최초에 맞은 칼이 옆구리이건 가슴이건 소리 지를 여유는 충분히 있었을 텐데 그는 왜 비명을 지르지 않았을까. 설혹 그가 어떤 절대절명의 위기에 몰려 있다
해도 위기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은 사람들의 본능인데 왜 진남포는 이런 본능까지 포기했을까. 무슨 이유일까. 칼에 찔리고도 소리를 지르지 못할 만큼 위협을 받고 있었다면 가해자는 왜 하필이면 이런 위험한 주택가를 피습 장소로 선택했을까. 왜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주변에서 덮쳤을까. 핏자국으로 보아 격투한 혈흔은 아니었다. 왜 진남포는 극한 상황에서까지 맞서 대결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그렇다면 조금 전에 안마소에서 들은 말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아닌가. 진남포가 어떤 '애송이'를 처지하겠다고 했는데 이건 오히려 당한 꼴이 되었다,
진남포가 누군가를 해치려다가 당했다는 것도 우습거니와 그 동생은 왜 오빠 곁에 있지 않고, 그 곁에서 병간호를 하지 않고 자살을 했을까. 범인이 누구라고 증언할 충분한 사유와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핏자국의 사진을 찍고 혈흔을 조사하며 범인은 최소한 두명 이상이어야 한다고 판단한 최찬일은 핏자국에 대한 깊은 의문과 교차되는 상황의 논리에 그만 머리가 얼떨떨해졌다.






O형과 MN형


곽영근 과장의 지시를 받고 올라온 홍 형사는 타버린 종이의 내용 판독이 끝나자 즉시 곽 과장에게 송전으로 보고했다. '과학 수사 연구소'에서는 재와 남은 종이의 글씨를 판독하는데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편지가 두 장, 메모가 한 장, 사진이 한 장이었다.
송전 내용을 받아든 곽 과장은 이해가 쉽게 가질 않는지 머리를 갸우뚱거린다. 사진은 미모의 여인이 고추가 뾰족이 보이는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었고 편지는 중간중간 판독되지 않은 부분이 있기는 하나 그리 연결이 힘들지는 않았다. 메모지에는 날짜와 호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곽 과장은 편지 내용을 다시 훑어보았다.

아버님.
다시 편지 드립니다... 이번이 마지막... 만일 제가 어떤 일을 저지른다고 해도 아버지께서는 정말 저와 어머니에게 어떤 방법을 지속적으로... 저도 이젠 돈도 벌었고 이름도 충분히 얻었습니다.
그보다도... 제가 사실을 폭로해 버린다면... 아버지께서는 다시는 재생하시기가... 파멸이란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실 것입... 따라서 저는 저의... 호적 정리를 즉시 해결해 주시고 지나간 날들의... 의를 어머님께 충분히 보상하게 된 것으로 알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장난쯤으로 생각 하실는지... 절대 그렇지 않다는 말씀 을... 통을 참아 가며 슬픔을 누르며...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아버지의 아들... 꿈에도... 그러나 아버지는 한 번도 얼굴을 돌리시지 않... 다. 제가 벌써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이제사 그러므로 마지막... 때까지 분명히 해주십시요. 정말 저는 하겠다면 끝까지 해내는 악착 같은...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좀더 심사숙고하셔... 절대 집안에 풍파를 일으키려는 뜻이 아닌 것만은 알고 계실 것... 내 뜻이 꼭 관철될 것으로 믿고 이만 줄입니다.
... 진 드림


아버님
나온신다고 하셨으면... 이해할수 없습니다. 만일 저를... 그렇습니다. ...극은 결코 실생활은 아닙니다. ...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코 돈보다도 삶 그 자체... 그런데 아버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데서 함부로... 그러므로 내가 더욱 아버님을... 하고 경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일찍... 호적 관계만 정상대로 해주시면 아무 불평도 불만도 없이... 더 이상 거론하지 않을 것...부탁드립니다. 금년이 가기 전에 꼭 완결시켜 주시고요. 제가 제 눈으로 확인... 않으면...이 사실을 들어... 어떻게 되는지는 아버님이 더잘 아시리라

... 이만...림


김만호 회장의 가정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야 없는 입장이지만 이 내용으로 보아 아들의 편지가 틀림없고 가정 내의 갈등과 불화가 심화된 것이 한눈에 판명되었다. 그러나 곽 과장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미국에 가있는 아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두 아들이 모두 아버지 즉 김만호 측근에 있는 점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큰아들, 아직 학교에 다니는 막내, 든든한 자리로 결혼한 딸과 사위 외에 누가 있어 이런 편지를 보냈을까 하는 점이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협박하는 투의 편지를 거듭 씹어보면서 무엇인가 안개처럼 잡혀오는게 있었다.
"어이, 김순경 전화 좀 걸어."
"네? 어디로요."
"김 회장네 회사 총무 부장?"
김 순경이 전화를 걸어 곽 과장에게 바꿔 주었다.
"나 시경 형사 과장입니다, 김만호 회장 본적을 좀 알려고 하는데요"
"네? 무엇에 쓰시게요."
"그저 좀 참고할 일이 있어 그러니 바로 좀 알려 주십시오... 아 네, 네. 287이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곽 과장은 막바로 김 순경에게 다시 지시를 내렸다.
"김 순경 진구 부전동 산 29의 31호주 김만호의 호적을 열람해 봐. 직접 가진 말구 민원실로 전화해서 내용을 기록해 놓도록 해."
김 순경에게 김만호 호적을 열람토록 하고 다시 편지 내용을 검토했다. 아무리 봐도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가 틀림없는데 내용이 마음에 걸렸다. 이 때 전화를 걸던 김 순경이 곽 과장을 불렀다.
"과장님 구청 전환데요, 직접 받아 보시겠습니까?"
"이리 바꿔 줘, 아 나 시경 형사 과장입니다. 미안하지만 김만호 회장 아들 이름들을 죽, 불러 주십시오. 네, 네. 김영구, 김진구, 김한구 삼형제 맞죠? 그리고 네, 출가한 딸 김순희.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딸깍 수화기를 내려놓은 팍 과장은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호적에 등재되지 않은 아들임을 확인했다. 이미 편지 내용에 호적 정리 운운한 것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어 갑자기 병원에서 종적을 감추었고 또 그렇게까지 해서 사진과 편지를 태우려고 했는가. 사진과 편지와 메모지를 보던 곽 과장은 무엇인가 실마리를 풀어낸 듯 수첩을 꺼내 메모를 시작했다.
"자, 자동차 준비해, 그리고 나 대진 물산에 갔다올 테니까 서울로 전화를 좀 걸어. 특별 수사반 박문호 씨를 찾아서 경부선 침대 특급 살인 사건 관계 때문에 그렇다고 지체없이 부산으로 좀 오시라고 그래. 내가 말하더라고... 그리고 해운대에서 발견됐던 장님 시체, 그 여자말야. 유품 좀 잘 정리해 놓고... 아 그리고 서울 박문호씨, 될수록 빨리 좀 내려오라구 그래. 차는 준비됐나?"
숨가쁘게 지시하고 난 곽 과장은 차량반에서 나온 차를 타고 김만호 회장님 집으로 정신 없이 달려갔다.
'사건이 복잡해지는데' 곽 과장은 혼자말처럼 뇌까리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대로 김만호가 고강진 살해 사건에 깊숙이 관계하고 있다면 사건은 단순한 복수극이나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되어졌다. 원래가 큰 기업을 서너 개씩이나 거느리고 있고 사회 단체도 이끌고 있는 거물인데다가 정계에 진출할 커다란 꿈을 가지고 있는 그이니 만큼 그가 이번 열차 살인 사건의 배후자이거나 적어도 음모에 가담할 만한 여건은 있을 수도 있었다. 더구나 이런 사회적 지명도가 높은 사람이 사건에 관여되어 있다면 해결하는데 무척 힘이 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곽 과장은 어깨가 지독하니 무거워옴을 느끼고 있었다.
"기사, 김만호 회장집으로 직행해."
그는 홍 형사로부터 송전된 사건과 편지 메모지를 움켜쥐고 차창 밖으로 흐르는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만호 그의 발자국엔 어떤 그림자들이 묻어 있을까...

한편, 같은 시간 서울서 내려간 성기준 박사는 김만호 회장집에 도착하였다. 아침부터 경찰서에 불려가 마음이 잔뜩 찌푸려 있던 그가 부산에 도착한 것은 오후 세 시가 넘었다.
부산역은 이제나 예나 수많은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열차 속에서 5시간 30분 동안 꼼짝 못하고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온몸이 쑤셔왔다.
더구나 이틀 동안 연이어 장거리 여행을 했으니 그 피로는 알 만도 했다.
"기사 양반 대한 극장 앞으로 가 주세요. 아니 부산 공원 앞으로 갑시다."
성기준 씨는 이 생각 저 생각 다 떨쳐 버리고 김만호 회장집으로 직행하기로 결심했다. 김 회장 부인이 직접 전화 걸었으니 집으로 먼저 가보는 게 순서일 것 같았다.
회사보다는 집에 있을 가능성이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김 회장 부인은 성기준 씨를 안채로 안내했다. 김 회장은 방에 누워 링게르를 맞고 있었다.
"간호원이 방금 다녀갔어요. 링게르를 꽂아 놓고... 의사는 뭐 별게 아니라더군요. 정신적으로 안정하고 푹 쉬면 괜찮을 거라고... 이거 너무 신경 쓰게 해서..."
"사모님, 걱정이 너무 크시겠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글쎄, 저는 전혀 모르겠어요."
성기준은 김 회장 옆에 앉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김 회장도 비로소 실눈을 뜨며 성기준 씨를 바라보았다.
"미안하오. 바쁠 텐데 오라구 해서."
"아 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래 지금은 좀 어떻습니까?"
"좀 괜찮아요. 저 여보 차 좀 끓여 와요."
"아니 차는, 이 경황에 무슨... 사모님 그만두십시오."
연령으로 보아서는 성기준보다 김만호가 한참이나 아래였다.
그러나 성기준이 김만호에게 깍듯이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한 마디로 오늘의 성기준이 있기까지에는 김만호의 경제적 뒷받침이
엄청난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둘이 어떻게 해서 가까워졌는지는 모르나 학구파인 성기준이 대학 시절부터 유학 그리고 귀국해서 정착할 때까지의 뒷바라지를 맡아 주었다. 이미 그들은 젊은 시절부터 한몸처럼 붙어다녔던 것이다.
"여보, 잠깐만 나가 있어."
김만호는 부인을 밖으로 내보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던 부인이 성기준에게 약간 머리 숙여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눈치를 살피던 김만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성 박사 누구하고 상의할 사람도 없고 또 답답한 일이 생겨 오시라고 했소. 피곤하실 텐데 미안합니다."
"원, 회장님도 별 말씀 다하십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
김만호는 성기준을 옆으로 다가앉게 하고 작은 소리로 무엇인가 말하기 시작했다. 놀라기도 하고 얼굴을 굳히기도 하며 둘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밖에서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 여보 시경에서 형사 과장님이 찾아오셨어요."
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워 있던 김만호가 벌떡 일어났다.
이때 문이 열리면서 사복을 입은 곽 과장이 들어왔다.
"회장님 불편하신데 찾아와 죄송합니다. 꼭 좀 여쭤볼 말씀이 있어서요."
"무슨 일인가요? 회장님이 지금 몹시 피로해 계시는데 다음에..." 성기준이 곽 과장의 말을 가로채며 김 회장을 감싸고 돌았다.
"뭐 한두 마디면 됩니다."
"아아 됐소. 물어보시오. 말할 힘은 남아 있으니까."
"뭐 별달리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뜻도 없구요. 단 부탁 드리고 싶은 말씀은 회장님께서 숨김 없이 대답만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회장님 이분 자리 좀 피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김 회장은 눈짓으로 성기준을 내보냈다. 성기준이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곽 과장은 정색을 하고 다가앉았다.
"김 회장님 오해는 마십시오.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회장님 자녀분은 몇이십니까?"
"내... 자녀...요? 아니 경찰에서 그런 것...까지..."
"대강 알고 왔습니다. 분명히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이든 솔직히 말입니다."
김 회장의 시선은 곽 과장에게서 창으로 옮겨졌다. 시선을 창 밖으로 못박아 놓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아들은 모두 셋입니다. 큰놈이 영구, 둘째가 진구, 셋째가 한구 그리고 출가한 딸애가 하나 모두 넷이죠."
"회장님 지금의 세 명 말고 또 하나가 있을텐데요. 왜 말씀하지 않습니까?"
"..."
"말씀해 주십시오."
곽 과장이 다그쳐 물어도 김회장은 시선을 창밖으로 못박아 놓은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 알고 왔습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물러가겠습니다. 회복이 되시면 다시 들리겠습니다."
곽 과장은 이렇다 저렇단 말 한 마디 없는 김 회장의 등에 대고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는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나갔다.
경찰이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성기준이 쫓아 들어왔다. 얼굴이 창백해 있었다.
"뭐라고 합니까?"
"다 알고 온 것 같소. 분명하게 대답하진 않았지만, 다시 오겠다더군요."
"이거 나도 입장이 난처하게 됐는걸."
"글쎄 말이오."
둘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 무어라 할 말을 잃었다.

본서로 돌아온 곽 과장은 무엇인가 자신에 찬 듯 사건을 일목 요연하게 기록하며 서울에서 내려올 박문호 형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회장, 그가 정신 충격을 받고 쓰러진 최초의 원인은 고강진이 피살되었다는 뉴스를 접한 직후가 틀림없을 것이고, 병원에서 사라진 이유는 자기 혼자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편지나 사진 메모지 등을 없애버리려고 급한 마음으로 뛰어다닌 것으로 판단되었다.
메모지와 편지 그리고 사진의 내용으로 보아 고강진의 생부는 당대의 재벌이며 장차 정계에 진출할 꿈을 안고 있는 그가 틀림없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을 종합해서 검토한 결과 김만호는 고강진으로부터 꾸준히 협박을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만약 편지의 발신인이 고강진이 아니었다면 김만호 회장의 편지나 사진을 태우려 했던 이유나 고강진이 아니 죽어야 할 이유가 연결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중요한 점은 바로 이런 연계성이었다.
보도에 의하면 고강진을 죽인 범인은 정말 교묘한 방법으로 시체를 열차에 유기시켜 놓고 달아났다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 공범이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었다. 공범과 죽여야 했을 필연적인 사연을 가지고 있는 배후의 인물, 신문, 어제 석간, 오늘 조간. 생각에 잠겨 있던 곽 과장이 갑자기 소리질렀다.
"누구 어제 석간, 아니 오늘 아침 Q신문 찾아봐."
사환 아이가 Q신문을 찾아다가 과장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먼저 사회면을 펼쳐보았다.

'탤런트 고강진 의문의 피살'
S-TV전속 탤런트이며 인기 절정에 있는 미남 배우 고강진(25, 사진)은 지난 11윌 29일 21시 45분 경부선 특급 열차 침대차03-03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는 대형 가방 속에서 나왔는데 가방을 버리고 달아난 자는 40대 중반의 왼쪽 검은 자위가 없는 애꾸임이 밝혀졌다.
시체가 발견될 당시 특급 열차는 대전 도착 직전이었는데 열차 내의 목격자에 의하면 범인은 천안 출발
직후에 침대에 있었음이 밝혀졌고 차 내의 승무원에 의하면 시체 발견 직전에도 범인은 침대 속에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승무원이 확인 할 수 없는 10여 분 내에 범인이 사라져 언제 어떻게 시속 120km의 열차에서 빠져나갔는지 또 어디로 잠적해 있는 지가 미궁이라고 했다.
경찰은 총력을 기울여 범인 색출에 나서고 있는데 열차 내에서의 공범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특히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박문호 형사는 시체가 발견된 03-03침대 맞은편에 있는 60대 초의 승객 S씨를 유력한 공범 혐의자로 추적하고 있는데 그를 공범자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범인이 증발된 직후 열차 내의 화장실에서 나오는 S씨를 목격한 승무원이 열차 내를 수색할 때 S씨가 사용하고 나온 화장실만 제외했고, 범인은 화장실 속에 은닉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 S씨는 범인을 애꾸가 아니라고 허위 진술했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S씨는 이학박사이며 사회 저명 인사로 밝혀졌다.

다 읽고 난 곽 과장은 신문을 팽개치고 벌떡 일어났다.
"그 양반이구만, 제길."
혼자말로 소리 지르자 과 내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범인을 열차 내에 은닉시켜 준 공범, 그가 지금 김만호 회장집에서 만나고 온 바로 그 사람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이었는데 언젠가 신문에서 보았던 이학박사 성기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곽 과장이 예측한 대로 성기준은 공범이고 김회장, 그가 배후를 조종한 주범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에게는 움직일 수 없는 물적 증거, 비록 간접 증거이긴 했지만 스스로 없애 버리려 했던 편지와 사진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지금 당장 소환해 볼까 어쩔까 하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서울에서 박문호 형사가 내려온 뒤가 좋을 것 같았다. 다행히 그들이 어디로 숨거나 잠적하지 못할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마음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진남포의 여동생 박영숙이 부산 해운대에서 음독 자살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문호는 부산에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부산에 가기 전에 방금 전화 연락을 보내 준 민형규 형사를 만나기로 했다. 대학 동문으로 어려울 때마다 결정적인 자료를 보내 주어 사건을 풀어갈 수 있도록 밀어 준 Q신문 민형규, 다른 기자와는 달리 냉정하고 명석한 판단으로 사건을 추적해 가는 기막힌 머리, 그리고 언제나 호의적이고 우정어린 진실로 대해 온 형규를 만나는 시간은 언제나 미소부터 떠올랐다.
만일 형규에게 특별한 일만 없다면 오늘 고강진 검시 결과에 대해 논의해 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민활한 판단력보다는 꼼꼼하고 세심해서 자칫 그냥 흘려보낼 자질구레한 그러나 사건 해결에는 결정적 도움을 주는 단서를 잘도 찾아내는 게 그의 장점이었다.
문호가 막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려 할 때 한 묶음의 박스가 자료로 올라 왔다. 열차 내에서 발견된 물품들 다시 말해서 범인의 유품과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범인의 유품에는 하나하나 꼬리표가 달려 있고 꼬리표에는 일련 번호가 기록되어 있었다.
#1번 유품은 대형 가방이었고,
#2번 유품은 열차 내에 비치되어 있는 슬리퍼.
#3번 유품은 그가 피우다 버린 꽁초.
#4번 유품은 빈 콜라병이었다.
소견서에 의하면 유품에서 지문 채취는 전혀 되지 않았고 담배꽁초와 콜라병에서 혹 혈액 감정이 가능할지 모른다고 했다.
문호는 꽁초와 콜라병을 다시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로 보내며 가능한한 자료를 찾을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특히 꽁초와 콜라병은 입을 댄 흔적이 있을 테니 그 점에 각별히 유의해 줄 것을 부탁했다.
몇 가지 지시를 하고 막 나가려는데 부하 한 명이 손짓을 하며 뒷문으로 나가라고 손짓했다. 이를 눈치챈 문호가 비상구로 빠져나가자마자 뒤이어 J신문 기자 두어 명과 카메라맨이 우르르 하고 몰려 왔다. 가까스로 피해 형규와 만났다.
"이거 뭐야. 다른 기자 피해서 도망 나왔는데 만나는 사람이 또 신문 기자니."
형규를 보며 투덜대자 형규가 빙글빙글 웃으며 문호에게 묻는다.
"뭐 다른 진전은 없어?"
"별 다른 건 없는데 말야. 진남포 있잖아. 그 동생이 장님이야. 어제 밝혀진 바로는 '대광 안마시술소'에서 안마사로 일하고 있는데 이게 부산에서 음독 자살했다더군. 부산에서 전화가 왔어. 그래서 오늘 저녁 내려가려고. 지금 진남포 때문에 한 사람이 따라붙어 있거든. 오늘까지의 상황도 받아 보고 또 고강진 검시 결과도 보고 그리고 진남포 상처도 조사해서 종합 검토를 한 후 가려고 해. 그런데 참 이상해 부산이 아주 당기고 있거든. 뭔가 꼭 있을것 같은 예감..."
"애꾸가 사라진 방법은 어떻게 됐어"
"일단 그 문제는 접어놔야겠어. 그보다는 용의자들을 먼저 추적해야겠어. 이들을 추적하면서 천천히 생각해야지, 그 성기준이 공범이라는 것만 확실하면 모든 건 만사가 오케이인데. 이 사람 오늘 아침에 연행해 왔었거든. 그런데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는데 미치겠더군. 왜 자기가 공범이라는 거야. 할 말이 있어야지 그냥 돌려보내긴 했는데 뭔가 있을 것 같아."
"미심쩍은 게 있어? 그 사람."
형규는 커피와 담배를 주문하고 수첩을 꺼내 메모를 훑어보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문호가 입을 열었다.
"사고 당시 성기준은 부산 가는 길이라고 했거든. 그런데 그날 밤 다시 비행기로 올라와서 어젯밤 서울에서 묵고 오늘 아침 또 부산에 내려간다고 갔어. 부산에 있는 김만호라는 사람한테 초청을 받았는데..."
"뭐? 김만호. 부산 재벌 말야?"
"응, 왜 어떻게 알고 있어?"
"아냐 그게 아니고... 응, 우리 문화부에 이기형이란 연예 담당 기자 선배가 있거든. 연예 기사도 기사지만 연예인들 내막 폭로하는데 귀신같은 사람이야. 벌써 그 손에서 녹은 사람들도 여럿이지. 그런데 요즈음 누군가를 추적하고 있는 모양이야. 얼핏 들은게 있어서 그런데 한달 전이던가 그 죽은 고강진말야. 그의 아버지가 김만호일 것 같다는 거야. 아무래도 그렇게 추측하고 있는거 같더군. 그럼... 그거 이상한데..."
고강진의 생부가 김만호일 것 같다는 민형규의 말에 문호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래?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성기준 씨가 부산에 내려간 것도 우연은 아니겠는데. 가만 있어 이거 논리가 성립되는데. 김만호가 고강진의 아버지라... 그리고 성기준이 강력한 공범으로 떠오르고 있고 또 둘이 밀착되어 있다. 이게 우연일까? 부산에 내려가서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그런데 그게 이상하단 말야. 고강진인 그렇다 치고..."
"뭐 말야. 넌 뭐가 밤낮 이상하기만 하다고 그래."
"이봐, 형규 김만호와 성기준이 밀착되어 있는 건 그렇다고 치고 진남포는 누구한테 왜 습격을 당했으며 동생 박영숙은 왜 자살했느냐 이거야."
둘이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고강진 사건은 둘을 몰고 가다 보면 무슨 결정이 나겠지만 진남포 사건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과연 두 개의 사건은 별개이며 전혀 성질이 다르다는 것일까. 또 두 사건이 동시에 터졌다는 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둘은 나름대로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자 문호 서둘지 말고 하나하나 해결해 보자구. 어떻든 줄기를 뽑으면 뿌리나 잔가지는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이니까 말야. 그리고 김만호가 과연 고강진의 친아버지냐 아니냐 하는게 사건의 핵심으로 대두될것 같은데... 아, 아까 자네가 말한 대로 만일 김만호가 고강진의 아버지가 틀림없다면 상황은 달라져.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죽일 만한 확실한 동기가 있을거야. 자 한꺼번에 너무 여러가지를 생각하면 골치 아프니까 진남포 사건은 일단 접어 두자고. 몰아붙일 때는 한 가지에만 전념하자구."
"형규, 지금부터 시간 어때. 고강진 검사 결과 좀 알아보려는데... 그리고 오늘 부산에 좀 갔다와야겠어."
호기심이 발동한 형규는 주저없이 문호를 따라나섰다. 아직 자동차를 구입하지 못한 문호를 옆에 태우고 신나게 차를 몰았다.
병원은 신당동 중앙 시장과 왕십리 네거리 중간에 있는 경찰 병원이었다. 외과를 담당하고 있는 의사가 마침 검시 결과를 기록하고 있었다, 강력 사건을 오래 맡아온 문호와 외과 담당 의사는 오랜 친분이 있는 터였다.
"어이구, 이거 대 박문호 선생께서 드디어 등장하셨구만. 앉으시지. 이분은?"
"내가 소개하지. Q신문 민형규 기자. 이쪽은 닥터 윤. 외과 전문의야. 법의학엔 권위자지. 자, 서로 인사 나누라고."
"아니 신문 기자라면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다니는 박 형께서 오늘은 웬일이십니까? 기자를 다 대동하고 다니게. 이거 정보 누설되는 거 아닙니까? 하하..."
"이 친구 이거 말이 신문 기자지 반은 형사라구요. 만일 우리 나라에 사설 탐정 제도가 허용되면 일착으로 신청할 겁니다. 뽀와르 국산판이니까요."
문호가 형규를 보며 씩 웃는다.
"이 친구... 누굴...뽀와르 머리로 친다면에 네가 나보다는 훨씬 몇수위지. 뽀와르가 회색 뇌세포라면 자넨 아주 까만 뇌세포 소유자 아냐?"
"그럼 난 멍청하게 밤낮 컴컴한 미로만 헤매고 다닐 테니... 어쨌거나 오리무중 헤매는데야 내가 도사지. 그렇지 않구서야 지금 내가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안 그래?"
셋은 윤 의사가 준비한 차를 마시며 그렇게 웃고 있었다. 찻잔이 물러가자 문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윤 형, 고강진 검시 결과가 어땠습니까?"
"검시 결과요?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꼭 이상한 상처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상한 상처요?"
"네, 아주 이해할 수 없는 상처였습니다, 목에 무엇인가에 물린 자국이 있는데 어린아이 이빨 자국으로 보기에는 치흔의 수량이 너무 많고 어른의 이빨 자국으로 보기에는 끝이 너무 예리하고 크기가 작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짐승 이빨로 볼 수도 없고."
"어떤 판단이 서는 것 같습니까?"
"글쎄, 그게 다른 것은 선명하게 나타났는데 그 이빨 자국이 좀. 아무튼 사람 이빨은 틀림없는데 특수하단 말이에요. 틀니는 절대 아니구."
"그 외에 다른 것은."
"피는 O형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망 원인은 질식사인데 목에 나타난 흔적으로 보아 두 손으로 눌러 죽인 겁니다. 상처의 깊이로 보아 아주 강인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위에서 검출된 것은 약간의 고기류와 알콜이 있구요. 독물을 사용한 흔적은 없습니다."
이때 혈액형 얘기가 나오자 문호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윤 형, 이거 전에 어디서 들은 얘긴데 말입니다. 에, 부모의 혈액형을 알면 자녀의 혈액형을 알 수 있다는 게 이게 가능한 얘깁니까?"
문호의 질문을 받은 윤 의사는 서랍에서 커다란 대학 노트를 꺼내 뒤적이고 있었다. 형규가 몹시 흥미를 느꼈는지 의자를 당겨놓고 눈을 크게 떴다. 이 꼴을 보던 문호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껄껄거렸다.
"야 형규, 하하... 왜 아버지 어머니가 가짜 같아? 내가 알기로는 자네 부모님은 틀림없으니까 걱정 말라고."
"또 지랄이군. 그래 그 얘긴 저도 들은 것 같습니다. 어떤 겁니까?"
노트를 뒤적이던 윤 의사가 어느 페이지인가를 펼쳐보았다.
"자, 이걸 보라구."
노트에는 부모 혈액형 간의 곱하기가 있고 옆에는 자녀의 혈액형 비고에는 O X로 구분한 표시가 있었다.
"어때 알아보겠어요? 이건 정확한 데이터예요. 가령 아버지나 어머니가 모두 O형인데 아들이란 자가 나타나서 조사해 보니까 피가 B형이다. 그러면 그건 가짜예요. 혈액형엔 또 재미있는 게 있어. 혈액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외에도 RH형이 있고 이것도 Rh, Rh^3^, Rh^3,3^, RhO, Rh^2^, Rh^23^는 것도 있지요. 그리고 이것을 분류한 새로운 응집형 즉 모든 피에는 유전성이 응집원인 M형, N형 MN형으로도 구분합니다. 이러한 혈액의 이중 조사를 하고 나면 친자 유무는 거의 판명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과거보다 훨씬 정밀하게 나타나죠."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앞서 기록된 혈액형 구분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도표를 보던 형규와 문호는 순간적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형규가 알았다는 듯 윤 의사에게 머리를 돌렸다.
"저, 고강진 모친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뭣 좀 알아보고 싶은데요."
"글쎄요. 아마 대기실이나 어디 있겠죠. 왜 무엇을 알아보시려구요?"
"미안하지만 간호원을 시켜 혈액형을 조사하고 싶은데요. 수사상 필요해서..."
문호가 윤 의사에게 정식으로 요청했다. 고강진이 김만호의 아들이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혈액형부터 조사해서 이상이 없어야 했다.
그러자면 서울에 와 있는 고강진 어머니와 부산에 있는 김만호 그리고 고강진의 혈액형을 대비해 볼 필요가 있었다.
윤 의사가 간호원에게 지시하자 문호는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더 질문을 했다.
"사실 이번 사건 때문에 골치거든요. 범인이 탈출한 자리에서 꽁초와 빈 콜라병이 수거되어 조사했는데 전혀 지문이 없어요. 그래서, 혈액형을 알아봐 달라고 의뢰했는데 결과가 나올까요? 또 정확할까요?"
"경우에 따라서는 정액이나 침을 통해서 혈액형을 알아낼 수도 있지요. 정액이나 침 외에도 눈물, 땀, 오줌, 담즙 심지어는 젖에서까지 혈액이 밝혀집니다. 그러나 A형, B형, O형, AB형의 피를 가진 모든 개개인의 혈액이 항원체를 분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다 침이나 눈물, 정액 따위로 혈액형을 누출시키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입증된 바에 의하면 분비자와 비분비자의 형태에서 그 비율은 70대 30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다 모든 걸 의존할 수는 없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침 속에다 혈액형 항원체를 분비하는 힘은 개인의 특성으로 '멘델'의 우세 지배 법칙에 따라 유전까지 한다는 것이죠."
둘은 윤 의사의 설명을 일일이 노트에 기록하고 있었다.
"이거 오늘 큰 공부했는데요."
"그럼 수업료 내셔야죠."
다분히 밝은 성격에 유머 감각까지 갖춘 윤 의사는 계속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혈액형은 그렇다치고 문제는 그 이상한 이빨 자국인데. 내 기억으로는 배운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아무튼 이빨 자국의 이해할 수 없는 비밀도 오늘 중으로는 밝혀질 겁니다. 이빨 형태가 특이한 것은 특수 체질이거나 특수병을 앓고 난 사람의 증후일 테니까요. 또 범죄를 위해 이빨에 무엇인가를 만들어 씌우고 물어뜯었는지도 모르구요."
이때 간호원이 들어왔다. 고강진의 어머니 혈액형은 O형으로 나타났다. 어느 누구가 물어와도 고강진의 과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응답도 없는 고강진의 어머니. 그는 과연 김만호와 어떤 관계일까.
"고강진 모친의 혈액형은 무엇에 쓸 겁니까?"
윤 의사가 의아한 듯 묻자 문호는 그제서야 수사 내용을 설명했다.
"알다시피 고강진이 탤런트로 성공하자 이상한 가십이 떠돌기 시작했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온 그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거였죠. 항간에서는 유명한 정치가다. 아니다, 모 재벌의 아들이다. 또 어떤 사람은 처음엔 학자였는데 나중에 스님이 되었다는 등 별의별 소리가 다 많았죠. 처음엔 중이 된 학자 출신이라는 말이 지배적이었답니다. 그 원인은 고강진의 본명 때문이었죠. 김석오, 좀 불교 냄새가 납니까. 입담 좋은 사람이 여기에 착안해서 퍼뜨린 루머였죠. 그런데 최근 모 기자가 추적한 바에 의하면 고강진의 아버지가 김만호라는 재벌이라는 게 가장 유력한 말이랍니다. 문제는 거기 있죠. 무엇이냐 하면 이번 사건에 강력한 공범으로 떠오른 사람이 김만호와 아주 밀착되어 있다는 겁니다. 오늘밤 부산에 가려고 하는데 가기 전에 혈액형을 조사해 보려구요."
"아, 그렇군요. 진작 얘기하시지. 자 그럼 몇 가지 더 알려 드릴께요. 아까도 잠시 말했지만... 노트 꺼내서 메모하세요. 이런 건 알아두는 게 좋으니까. 아까 말씀 드렸던 M, N, MN형은 1928년 란트 슈나이터라는 사람과 레빈이라는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이 응집원에 포함되지 않은 피는 하나도 없습니다. 혈액을 조사할 때 이것도 함께 조사하면 더욱 확실합니다. 이것으로 친자 확인을 하는방법도 있으니까요. 아까와 같은 공식 도표가 있습니다."
윤 의사는 다른 도표를 건네 주면서 일어섰다.
"기록하고 계십시오. 그동안 나는 고강진 어머니의 혈액을 확인할 테니까요."
윤 의사가 나가자 둘은 노트에 옮겨 쓰기 시작했다.
"이거 참 별 게 다 있군."
"응, 세상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 그거 위험 천만이야."
"그럼 아까 직접 혈액형하고 이 응집원 양쪽 다 조사하면 거의 80, 90%는 맞겠는데 응? 잘못 바람 피우다 큰 코 다치겠어."
"야, 넌 소위 신문 기자라는 게 바람 필 궁리만 하고 있냐. 점잖지 못하게."
"웃기지마. 그냥 해 본 소리야."
둘이 신비로운 듯 도표를 보고 있을 때 윤 의사가 돌아왔다.
"기록 끝났습니까? 자, 혈액 조사가 끝났습니다. 고강진은 N형이고 어머니는 MN형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어머니와 같은 MN형이어야 하고 어머니나 고강진이 O형이니까 아버지도 따라서 O형이어야 합니다. 참 운이 좋군요. 둘 다 똑 떨어지는 피를 가지고 있어서 만일 부산 가서 조사할 수 있으면 해보십시오. 보나마나 아버지는 O형에다 응집원이 MN일 테니까요. 뭐 심지 뽑기도 아니고 과학적 반응으로 뽑는 거니까 틀림없을 겁니다."
"이거 정말 뜻밖의 수확인데. 수업료 단단히 내야겠습니다. 술 한잔 사죠."
"아니 술 한 잔으로 묶으려고 흥 어림없는 소리 마쇼. 허허."
셋은 그렇게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때맞춰 일어났다.
"정말 오늘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부산 갔다와서 다시 들르겠습니다. 아 문호, 지금 고강진 어머니 만나보는 게 어떨까?"
형규가 문호를 바라보며 제의했으나 문호는 이미 그에게서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둘은 그대로 병원을 빠져나왔다.
"아주 재미있는 자료야. 김만호가 아무리 우겨대도 혈액형 가지고 족쳐대면 군소리 못하겠지? 그 외에 또 수사하다 보면 무슨 꼬투리가 잡혀도 잡히겠지."
"문호, 자네 부산엔 언제 갈 거야."
"부산? 오늘밤 9시 45분 특급 열차 그 범인이 탔던 침대차로 갈 거야. 03-15 바로 성기준이 타고 있던 자리야 예약해 놓으라고 했어. 가면서 연구 좀 해보게."
"그래? 내가 따라가도 될까?"
"좋지, 단 조건이 있어 넌 지금부터 신문 기자 자격이 아니라 형사, 내 조수격으로 가는 거야. 딴 데서 알면 아우성칠 테니까."
"좋아, 그럼 이따가 역에서 만나자구."
형규의 차에서 내린 문호는 본부로 다시 돌아왔다. 전화기 밑에 무엇인가 적혀 있는 메모지가 깔려 있었다.

발신: 부산 시경 형사 과장 곽영근
수신: 박문호
시간: 15시 20분
내용: 금일 중 부산 시경 출장 요망.
#1 김만호 및 고강진에 관한 수사 협조
#2 김만호에게 의혹이 발견됨
#3 고강진 피살과 관계 있음

메모를 보던 문호가 벌떡 일어났다.
"이 메모 누가 받았지?"
"제가 받았는데요."
여자 사환이 문호를 빤히 보며 대답했다.
"다른 얘긴 없었어?"
"예, 다른 말씀은 없고 오늘 꼭 내려오셔야겠다고 하셨어요."
"부산 시경 곽 과장한테 전화 걸어서 내가 오늘밤 9시 45분에 떠난다고 해. 그리고 또 다른 전화는."
"최찬일 형사님한테서 전화 왔었어요. 전화 또 걸겠다고 기다리시라구요."
말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벨이 때르릉 하고 울어댔다. 문호가 잽싸게 받았다.
"누구? 누가 돌아왔다고."
"이화영이요. 왜 고강진하고 싸웠다던."
"도대체 누구십니까?"
"아이구 죄송합니다. 급한 마음에 저 지 실장입니다. 지대로."
"아,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그리로 가겠습니다."
문호는 지체하지 않고 S-TV를 향해 달렸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그런지 사람들이 동동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차창으로 흐르는 건물과 건물 아래로 거니는 사람들, 거리의 풍경으로 보아서는 세상에 아무런 일도 일어날 것 같지가 않은 평화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이런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가슴 속에 있는 감정과 얽혀 있는 이해 관계, 그리고 사랑과 증오, 갈등 같은 것이었다,
인간은 인간끼리 얽혀 비극을 창조해 내고 있었다. 미워하고 죽이고 복수하고, 그리고 또 한무리에 서는 이를 해결하러 쫓아다니고 참으로 알수 없는 인간 세계였다. 착잡한 마음으로 창 밖의 거리를 보던 문호는 육교 난간을 거의 다 내려와서 그만 넘어지고 만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괜찮을까. 추운데 많이 다치진 않았을까. 갑자기 넘어져 뼈라도 상하진 않았을까. 얼핏 본 어린아이 넘어지는 모습이 한동안 마음에 걸려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한 곳에 멈춰졌다.
응! 사람이란 게 꼭 그렇게 쓸모없는 존재만은 아니야. 가끔 이런 착한 생각이 들 때도 있으니! 혼자 빙긋이 웃고 있었다.
차가 멈춰졌다. S-TV 광장에 도착한 것이다. 낯익은 건물이라 지 실장을 찾는데 그리 힘들지 않았다. 지 실장은 문호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옆에는 웬 아가씨가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이구,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날씨가 무척 쌀쌀해졌죠?"
"감사합니다. 이 아가씨가 바로 이화영 씨인가요?"
"네."
"지 실장님 잠깐만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문호와 이화영 둘만이 남았다. 형사와 탤런트로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서 심문하고 싶었다.
"이화영씨 그동안 어디 있었습니까?"
"..."
"납치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처음부터 이야기해 주십시오. 상황이야 어떻든 타인에 의해서 강제로 감금되어 있었다면 누가 왜 그랬는지를 알아야 하거든요. 지금 상황은 이화영씨가 생각하고 있는 거보다 훨씬 더 큽니다."
"..."
"이화영씨 하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알고 있겠지만 고강진이 죽었습니다."
"어젯밤 늦게 알았어요."
"늦게요? 어제 아침부터 방송이 나갔는데 도대체..."
"죄송합니다."
"말씀을 하셔야죠."
"저...사실은... 그저께 그러니까... 사실은 지 실장님한테도, 아직..."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잘못하면 이화영 씨에게 아주 불리합니다."
"저, 사실은 제가 납치당했다고 신고한 건 제가 고의적으로 그랬던 거예요."
"고의적으로? 왜요?"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까 지 실장님한테 말씀 듣고 제 입장을 비로소 알았는데... 사실은 저는 그 시간에 어떤 분과 근교 별장에 있었어요. 같이 가자구 자꾸 졸라서 따라간 것뿐이에요. 정말이에요."
이화영은 말끝도 못 맺고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는 이유는 알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책감이 발동한 것만은 분명했다,
요점은 그 시간에 누구와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와 같이 있던 사람이 왜 하필 그 시간에 이화영을 초대했으며 그것이 이화영 개인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고강진 살해를 위해서였는지 그게 문제였다.
그러나 짐작컨대 이화영 자신과는 큰 관계가 없을것 같았다.
"같이 있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
"대답하세요."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소리를 빽 지르며 위압을 넣었다. 아무래도 혼좀 나 봐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 실장님이나 이성구 이사님한테는 말씀하지 마세요. 그럼 말하겠어요."
"약속하죠. 그러나 확실하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사실은 R-TV 조남웅 이사님이랑 같이 있었어요."
"예? 조남웅."
"네."
"왜 거기에 그분과..."
"사실은 작년부터 절 스카웃하겠다고 했는데 제가 기간이 다 차질 않아서 마음대로 못 간다고 그러니까 그럼 가계약이라도 하자고 여러번 절 초대했어요. 어제는 사실 제 생일이었어요. 그래서 조 이사님이 절 초대했어요. 안갈수도 없고 핑계댈 수도 없고 해서 할수 없이..."
어이가 없었다. 고강진과 싸운 다음날 사라진 이화영. 그는 스카웃 싸움에 밀려 납치 연극을 벌인 것이다.
별장에서 벌어진 파티 때문에 라디오도 TV도 신문도 보지 못해 사건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화영이 고강진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짐을 덜어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남웅 이사가 아무리 고강진에게 모욕을 받고 드라마 작품에 곤란한 입장이 되긴 했어도살인에 가담할 만큼 큰 문제가 아니라서 그의 개입에 회의를 품고 있던 생각도 어느 정도 굳혀지게 되었다.
"납치 허위 신고를 하면 어떤 법에 저촉되는지 아십니까?"
"..."
"좋습니다. 이번 사건만은 묵인하겠습니다. 그러나 방송국 자체 제재만은 제가 과언하지 못합니다."
문호는 두 번 다시 그를 돌아보지 않고 방송국을 나왔다. 지실장이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광장까지 배웅해 주었다.
문호는 속으로 조남웅 이사에 대한 불만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이 어린 타 방송국 스타들을 이런 식으로 스카웃하려 들다니. 문호는 언젠가 한번 두고 보겠다는 식으로 벼르며 시내로 차를 몰았다.
추천 (0) 선물 (0명)
IP: ♡.221.♡.27
23,400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1-30
1
104
나단비
2024-01-30
1
151
나단비
2024-01-30
1
95
나단비
2024-01-30
1
92
나단비
2024-01-30
1
91
나단비
2024-01-29
1
93
나단비
2024-01-29
1
69
나단비
2024-01-29
1
80
나단비
2024-01-29
1
77
나단비
2024-01-29
0
69
나단비
2024-01-28
0
97
나단비
2024-01-28
0
88
나단비
2024-01-28
0
92
나단비
2024-01-28
0
95
나단비
2024-01-28
0
92
나단비
2024-01-27
0
105
나단비
2024-01-27
0
68
나단비
2024-01-27
0
72
나단비
2024-01-27
0
80
나단비
2024-01-27
0
92
나단비
2024-01-26
0
82
나단비
2024-01-26
0
84
나단비
2024-01-26
0
95
나단비
2024-01-26
0
85
나단비
2024-01-26
0
92
나단비
2024-01-25
0
110
나단비
2024-01-25
0
101
나단비
2024-01-25
0
112
나단비
2024-01-25
0
74
나단비
2024-01-25
0
73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