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건섭 - 5시간300분 4

3학년2반 | 2022.02.15 07:40:02 댓글: 1 조회: 890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8957


두시간의 공백


얼마를 잤을까. 잠 속에서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깬 문호는 칼싸움하는 소리와 중국인이 뭐라고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눈을 미처 뜨지 못하고 어렴풋한 잠결에 들은 소리와 그 소리의 소재가 일찍 파악되지 않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민형규는 아직도 머리를 의자 등받이에 젖히고 코까지 골고 있었고, 칼소리나 중국인 떠드는 소리는 고속버스 운전 기사 위에 설치된 비디오 TV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문호는 안내양을 불러 물을 한컵 얻어마시고는 의자 등받이를 45도 젖히고 시선을 비디오로 주었다.
영화는 중국 무술 영화였다. 화면에는 낯익은 중국 배우들이 칼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진성'이라는 악한과 '성걸'이라는 의협의 대결 장면이 나타났다.
소림사의 전통 무예를 기록해 놓은 책을 빼돌리려는 악한과 이를 지키려는 의협이 벌이는 대결이었다. 영화는 일급 배우들 출연의 영화답게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아슬아슬한 장면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었다.
정신 없이 화면을 보고 있던 문호가 무엇이 생각났는지 영화가 끝나자마자 안내양을 불렀다.
"안내양 이거 미안하지만 무슨 영화였죠?"
"소림사 결투라는 영화였어요. 재미있죠?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개봉하지 않은 거예요."
"이 영화 내가 중간부터 보았는데 다시 한번 볼수 없을까요?"
"글쎄요. 다른 필름도 있는데..."
"내가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영화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뭔가 꼭 보고 싶은 장면이 있어서 그러거든요. 꼭 좀 부탁하고 싶은데..."
"그래요? 그럼 잠깐 기다리세요. 필름을 되감아야 하니깐요."
필름을 되감는 동안 차내에는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창 밖은 완전히 어둠에 깔려 있었다. 문호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벌써 19시 20분이 되었다. 한 시간이 넘게 깜박 잠에 취해 있었다.
형규는 무척이나 피곤해 있었는지 여전히 코를 골고 있었다. 문호는 조금 전에 보던 필름의 결투 장면에서 아주 미묘한 것을 포착했다.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말한 것은 영화 자체를 보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아까 문득 무슨 생각을 떠올리게 한 그 장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필름이 되감기는 시간은 의외로 길었다.
문호는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워물고 필름이 끝까지 되감기는 시간을 기다리며 어떤 상황에 집착하고 있었다. 별것 아닌 두 사람의 결투에서 문호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잠시 후 화면에서 지직지직 하는 잡음이 나오고 이어서 XX회사의 상품광고와 고속버스 자사 선전이 나온 뒤 본영화 '소림사 결투'가 나오기 시작했다.
뒤로 젖혔던 의자를 곧게 펴고 두 손으로 턱을 괴어 받친 채 계속 되는 쿵후와 칼싸움에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시선의 힘으로 TV의 부속이라는 꿰뚫어보려는 듯 힘을 집중시키고있던 문호는 형규를 깨워 일으켰다. 부석부석한 눈을 뜨고 짜증스러운 듯 문호를 바라보는 형규에게 손가락으로 TV를 가리켰다. TV를 잠시 보던 형규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머리를 의자에 떨구자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봐 형규, 이 영화에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는 장면이 나와."
이 소리에 '엉'? 하며 놀란 형규가 벌떡 일어났다.
"사건이라니, 이 영화가?"
"가만 있어. 내가 설명해 줄께. 영화를 자세히 봐. 조금 있으면 주인공 둘이 칼로 결투를 벌이는데 이 장면을 자세히 봐두라고. 영화 끝나면 내가 다시 설명해 줄게."
그 소리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형규가 TV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별로 영화에 관심이 없는 형규는 그저 문호가 시키는 대로 멀뚱멀뚱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필름이 약 40분 정도 돌자 조금 전에 보던 장면이 다시 나타났다. 문호는 형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잘 보아 두라는 신호였다.
한 검객이 다른 검객을 칼로 쳐서 죽이는 장면인데 칼을 번쩍 들어, 좌측에서 우측으로 내려갈기더니 이번에는 그대로 칼을 들어 우측에서 칼을 내리치자 적의 가슴에서는 X자 상처가 나고 상처에서 붉은 선혈이 뿜어나오더니 힘없이 쓰러졌다.
뒤이어 나온 다른 장면에서는 둘이 칼싸움을 하는데 하나가 좌측으로 칼을 치면 하나는 칼을 우측으로 비껴 막고 있었다, 칼은 언제나 X로 맞부딪치며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너무나 흔한 칼싸움 장면이었다.
형규는 잠시 어리벙벙해 있었다. 무엇을 보아 두라는 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잠시후 영화는 끝이 났다. 영화가 끝나자 안내양의 방송이 들려 왔다.
"잠시 후 추풍령 휴게소에서 10분간 휴식이 있겠습니다. 이 차는 H고속 9744호이오니 승차하실 때 착오 없도록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양의 방송이 끝나자 차는 휴게소 광장으로 빨려들어가더니스르륵 하고 멈춰섰다. 둘은 차에서 내려 용변을 본후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다시 승차했다. 다른 승객은 아직 올라오지 않았다.
"무슨 얘기야? 아까 그 중국 영화."
"음. 아까 그 칼싸움하던 장면 생각나? 둘이 싸우던 것 말야."
"기억나지 둘이 싸우다 하나 죽은 거 말야."
"봤지, 가슴에 상처입고 쓰러진 거."
"봤어,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야?"
"그 상처 모양이 어땠어?"
"상처? 응, 글세 모양이? 기억이 잘 안나는데. 야 누가 그런 것까지 보냐. 하나가 죽으면 됐지."
"그러니까 잘 보라고 했잖아. 에이 참. 그래 그건 그렇고 둘이 칼싸움할 때 칼이 어떻게 부딪쳐? 그건 생각나겠지."
"이거 장난하는 거야 뭐야. 야 칼싸움 할 때야 칼이 서로 엇갈려 싸우지 어떻게 싸워. 둘이 같은 방향으로 칼싸움할 수는 없잖아."
"그렇지? 확실하지."
"허 참. 남 자는데 깨워놓고 농담 따먹기 할 거야."
"이봐. 농담이 아냐. 두 사람이 마주서서 칼싸움할 때는 언제나 칼은 X자를 이루지. 이건 신체 구조와 관계가 없이 편리에 따른 관습이거든. 또 사람이 칼로 상대를 칠 때는 칼이 아래로 내려간 위치에서 다시 올려 반대편으로 내려치거든. 즉 엑스자(X) 이렇게 말야."
"그래서?"
"이봐, 기자라는 게 아직도 모르겠어? 이렇게 센스가 둔해서야. 원 참, 진남..."
"아, 알았다, 그래 맞아."
깜짝 놀란 형규가 벌떡 일어나려다 도로 주저 물러앉았다. 의자의 안전 벨트로 몸을 묶고 있던 것을 그만 깜박 잊었던 것이다.
형규가 턱을 괴고 앉아 무엇인가 골똘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호가 병원에서 꼼꼼이 그려온 진남포의 상처 그림을 펴보았다, 그 그림은 문호가 형규에게도 두어 번 보여 준 그림이었다.
"음, 맞아. 진남포는 칼로 여러 번 상처를 입었는데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려간 상처만 있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간 상처는 없단말야. 이건 확실히 이상해, 이런 상처가 나려면 뒤에서 껴안고 한손으로만 내려긋는 방법밖에 없는데 진남포쯤의 노련한 싸움꾼이 네 개의 상처를 입도록 그대로 있을 리도 없고 또 옆구리 상처도 방향이 이해가 안 가는데. 그렇다면... 아, 혹시."
"혹시가 아닐 거야. 난 아까 영화 보면서 모든 수수께끼가 한 번에 풀리는 것 같았어. 진남포 피습 현장 말야.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거 참 이상한데... 이해가 안 가지?"
둘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한 것은 진남포의 행위 자체였다.
그들 둘이 중국 무술 영화를 보고 판단한 것은 진남포가 자해 행위를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순 빛을 보듯 두 사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진남포 피습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첫째, 가장 이상했던 점이 그 힘좋은 진남포가 왜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는가 하는 점이었는데 그것은 스스로 자기 몸을 찌른 것으로 해명이 되었고 다음이 어떤 가정의 범인이 진남포가 바람을 쏘이러 나올 시간을 어떻게 알고 대기하고 있다가 습격했을까 하는 점이었는데 이것 역시 해결이 난 셈이었다. 또 싸움하는 소리도 못 들었고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던 그 시간에 어떤 사람들에게 당했을까 의아해 했었는데 이것도 풀어진 셈이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자해 단서가 있었다. 그것은 최찬일 형사가 조사한 피흘린 자국이었다.
주변 어디에도 피흘린 자국은 없었다, 만일 결투를 해서 흘린 피라면 아무리 갑자기 습격을 당했다 하더라도 최초의 상처를 받으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해서 피흘린 자리가 여러 곳에 있어야 하는데 피는 오직 한 군데만 떨어져 있고 아파트로 돌아오며 흘린 자국밖에는 없었다.
또 가슴을 먼저 당하고 옆구리를 찍혔다면 옆구리 상처는 스치는 정도밖에 나지 않았을 텐데 오히려 옆구리 상처가 깊었다. 반대로 옆구리부터 당하고 가슴을 당했다면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옆구리를 찍히면 일단 앞으로 주저 물러앉게 되는데 그런 상황이라면 가슴이 노출되지 않고 무릎이 보호하는 형태가 된다. 어떻게 칼로 가슴을 그을 수 있는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상황이 자해라는 결론으로 풀리자 일순간에 다 해결되었다.
너무나 상식적인 상황을 두고 고민한 문호는 자기나 최찬일이 모두 바보라고 생각하니 피식 하고 자조의 웃음까지 터져나왔다.
쪼그리고 앉아서 자기 가슴을 먼저 칼로 긋고 다음 옆구리를 찌르고 칼을 어딘가에 감추고 아파트로 돌아온다. 이것은 최찬일이 조사한 혈흔의 흔적에서 #1번과 #4번밖에 발견되지 않은 이유로 풀이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칼로 자기 몸을 찌른다는 상황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의 함정에 빠져 사흘이나 넘긴 셈이 되었다.
만일 문호와 형규가 추리한 대로 진남포가 자해를 했다면 피습 장소의 미스터리는 풀린다. 그러나 진남포가 자해를 했다는게 밝혀져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또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갈매기 주점'의 주모가 발견한 별 모양의 상호를 달고 왔던 택시에서 내린 사람이 의문이었다. 아파트에도 들어온 사람이 없고 방향은 아파트로 향했던 그 뚱뚱해 보인다는 사람의 정체와 행선지는...
이 때 타고 있던 고속버스가 몸체를 돌려 고속도로 위로 올라와 달리기 시작했다. 둘은 한동안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 속은 사건 현장 여기저기를 정신 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윽고 문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봐 형규'하며 어깨를 툭 쳤다.
"응? 어, 왜."
생각에 잠겨 있던 형규는 문호가 갑자기 치는 통에 그만 깜짝 놀랐다.
"말이지, 만일 진남포가 자해한 것이 밝혀지면 말야. 지금 뭐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그렇다면 안개가 끼던 날 밤 갈매기 주점 앞에서 내렸다는 그 뚱뚱한 사람 말야. 그 자는 누구이며 어디로 간 것일까. 또 진남포는 왜 자해를 했을까. 그게 궁금하단 말이 야."
"..."
"그 택시에서 내렸다는 사람 말이야. 이번 사건하고 관계 없는거 아닐까?"
"..."
"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사람 속 답답하게 벙어리처럼 앉아 있지만 말고."
"가만히 좀 있어. 지금 뭣 좀 생각중이야." 형규가 짜증을 냈다.
"..."
이번에는 문호가 입을 다물었다. 자꾸 떠들고만 있을 게 아니라 자기도 무엇인가를 생각해야겠다고 느낀 것이다.
고속버스는 두 사람의 어지러운 머리 속과 관계 없이 계속해서 어둠속을 달리고 있었다. 차 안의 TV프로도 꺼지고 음악 소리도 멈추었다. 대부분 어두운 차내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대전 10km' 라는 팻말이 라이트에 스쳐 보였다.
형규가 담배갑을 꺼내 뒤적이다가 그냥 구겨 버렸다. 담배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문호가 이 꼴을 보고 한 개비 꺼내 물려 주고 불을 붙여 주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어두운 차창만 내다보고 있었다.
진남포가 자해를 했을 경우 거기에는 어떤 깊은 사연이 감춰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칼로 자기 몸을 찌른다는 것이 보통 결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문호나 형규가 판단한 상황으로써는 '자해'라는 결론이 참으로 타당했다. 그렇다면 자해 행위와 또 다른 범죄행위와의 역동적 연관성을 추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확증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가 자해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길 때까지의 스토리는 무엇인가. 그 밀접한 관련성의 발자국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더구나 자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극한 상황 속에서 타인에게 공포를 주어 자신을 지키려는 목적과 스스로의 감정과 흥분을 인내하지 못하고 저지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당시 상황으로 보아 진남포가 자해를 한것은 계획적인 행위가 틀림없었다.
다시 그 상황으로 거슬러올라가 보자. '진남포는 밤 12시 50분쯤 자기 아파트에서 나오며 약간의 과일을 가지고 경비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한참을 앉아서 놀다가 머리를 식히려고 밖으로 나갔다. 짙은 안개 속으로 진남포는 사라진다.
잠시 후 01시 10분경 피투성이가 된 채 다시 아파트로 돌아온다' 이것이 그날 밤 진남포 행각의 전부였다. 그렇다면 그 당시 그의 정신 상태는 극히 정상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해'라는 추리로 방향을 틀자 문호는 매우 심한 정신적 갈등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해'라는 추리로써 풀어진 의문도 많았지만 그러한 추리 때문에 새로운 벽에 부딪치는 것도 적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첫째가 조금 전에도 생각하고 있던 별표 택시에서 하차한 사람의 신원과 행선지였고 또 하나는 부산 동백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생의 행위가 이상하게 얽히기 때문이었다.
'자해'와 '자살'의 차이는 목숨을 보존하느냐 아니면 목숨을 포기하느냐의 커다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진남포를 자살 미수로 볼수는 절대 없다. 또 하나 평소 누군가를 해치우겠다던 진남포의 발언이었다. '애송이 같은 놈'을 해치우겠다던 진남포가 왜 '자해'를 했느냐 하는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걷잡을 수 없는 의문 때문인지 문호는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진남포가 자해를 했건 자살을 했건 단 한 점의 혈육인 동생 박영숙은 병원에 나타났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병원에 나타나지 않고 외롭고 외로운 겨울 바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린것이다.
그렇다면 동생은 오빠의 신변 변화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리고 그 원인이 동생 자신에게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사고 전 날 만난 두 남매의 대화 속에서도 밝혀진 바 있다. 진남포는 무엇인가 커다란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이 자해 사건과 고강진 피살 사건에 어떤 연결되는 나사는 없을까. 그러나 문호의 머리에는 두 사건의 연결점은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문호가 집요하게 생각을 쫓고 있는 것 만큼 형규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턱을 괴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형규를 보며 문호가 의견을 제시해 왔다.
"이봐, 형규 이거 말야, 참 묘한데."
"응 묘해. 문호는 어떻게 생각해."
"난 말야, 진남포 자해 추리는 절대적이라고 생각해. 칼자국이나 핏자국을 보거나 당일 상황으로 보아 자해는 틀림없는데 몇 가지 의문이 있단 말야."
"..."
문호는 택시에서 내린 사람의 신원 및 행방과 동생의 자살 사건을 간추려 이야기하며 그 함수를 들려 주었다. 그 점은 형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고민은 진남포 고강진 두 사건의 연결점을 못 찾는 데 있었다. 과연 두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었을까?
아니면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러나 둘은 어떤 보이지 않는 두 사건의 나사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건의 연결점만 찾으면 금년에 특종상 두 개는 얻겠는데."
"이봐, 특종 받을 생각말고 사건 파악이나 잘해 보라고. 이거야 원 어디 따라다니는 게 신통치 않아서, 쯧쯧."
"걱정 마. 그 보담두 형사 나리. 댁께서 한번 해보시지, 그래,"
둘은 픽 웃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차는 어느덧 안양을 지나고 있었다.
"서울가면 곧장 집으로 갈 거야?"
문호가 형규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글쎄, 자넨..."
"난 마포 아파트에 들렀다 가야겠어, 진남포가 살고 있는 진아 아파트."
"좋아, 나도 따라가지."
"의리 하나 좋군. 가서 말야 갈매기 주점과 아파트 경비원을 만나 보고 주위 좀 살펴봐야겠어. 최 형사가 미처 보지 못한 무엇이 있을 지도 몰라. 별것 아닌 것 같은데도 알고 보면 사건하고 깊은 관련이 있는 게 많거든."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멀리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영동 일대의 불빛이 불타오르듯 찬란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차는 몸체를 서서히 돌리며 터미널 광장으로 들어섰다.
문호와 형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택시를 타고 마포 진아 아파트로 달렸다, 동작동 국립 묘지와 흑성동을 지나 여의도를 거쳐 마포에 도착했다. 둘은 아파트로 들어가기 전에 '갈매기 주점'부터 찾아들었다.
갈매기 주점은 진아 아파트 정문에서는 약간 떨어져 있고 마을에서는 끝에 해당되는 위치에 있었다. 문호가 앞장서서 들어갔다. 훈훈한 온기와 구수한 찌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주머니 소주 한 병 하고 김치 찌개 좀 해주시고요. 공기밥 두 그릇만 주세요."
달아오른 연탄불에 손을 녹이며 의자에 앉았다. 다른 두어 팀의 손님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뜨겁게 데워 드릴 테니..."
잠시 후 주모는 지글지글 끓는 찌개와 소주 한 병을 쟁반에 담아 왔다. 돌아서려는 주모를 문호가 불러세웠다.
"저 아줌마, 지금 바쁘세요?"
"왜 그러우."
"뭣 좀 여쭤볼 게 있어 그러는데... 시간 좀 내 주시겠습니까?"
"젊은이들 나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건 아니겠지. 하하, 그런데 왜 그러우?"
하며 앞치마에 손을 닦고 다가와 앉는다.
"저 엊그제 여기 누가 찾아온 사람 없었어요? 요 앞에 아파트에 사는 진남포라는 배우 때문에."
"아, 예 있었어요. 방송국에 있다는..."
"방송국? 경찰이 아니구요?"
"경찰? 방송국 사람이라던데... 그러고 보니... 어쩐지 경찰 냄새가 나더라니."
"저 다른 게 아니고요. 사건이 나던 날 아주머니가 보셨다는 그 택시 말입니다. 대가리에 별표 불빛이 보였다던... 그 기억나시죠."
"네 알고 있죠. 요전에 그 사람한테도 얘기해 주었는데. 그런데 왜 그러죠? 댁들도 경찰서에서 오셨어요?"
"아녜요, 전 경찰이 아니고 신문 기자예요. 취재 좀 하려구요. 아줌마 그 날 밤 기억나는 대로 말씀 좀 해주세요."
주모는 형규가 따라 주는 술잔을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홀짝 마셔 버리고는 술국을 후르르 마신다. 그리고는 그 날 밤의 상황을 이야기 해 주었지만 최 형사가 조사한 것에서 더 얻어낼 것은 없었다.
"안개 속이라 아주 자세히는 못 봤지만요, 대가리에 별 달린 택시가 저만큼서 턱하니 서더라구요. 그러더니 키 크고 뚱뚱한 사내가 내려서 아파트 쪽으로 성큼성큼 들어갔어요. 그래서 제가 이상하다고 했죠. '왜 돈내고 타는 택시를 아파트까지 몰고 들어가지 길가에 세워 놓고 걸어가나'하고 말이에요. 별 싱거운 사람 다 있네 하고 돌아서서 가게문을 닫았죠."
주모의 말로는 그 때가 자정이 약간 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밤 12시 10, 20분 경쯤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둘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아파트 경비실로 찾아갔다. 이미 알고 있는 대로 아파트는 몹시 낡아 있었다. 내년 여름부터 모 건설 업체에서 이곳을 매입 새로 연립 주택을 건립한다는 것이 매우 신빙성 있게 들렸다.
아파트는 외면으로 복도가 나 있었고 복도의 베란다는 사람 허리쯤 차 오르게 낮은 울타리 형식의 안전벽이 있었다. 층과 층의 차도 몹시 낮았다.
둘이 경비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경비원은 의자에 앉아 끄덕이며 졸고 있었다. 난로에는 불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
형규가 경비원을 흔들어 깨웠다. 졸리운 눈을 게슴츠레 뜨고 형규와 문호를 바라보았다.
"저, 경찰에서 왔습니다."
문호가 신분증을 보이며 말을 건냈다.
"네? 경찰요. 무슨...일로."
"잠깐 좀 여쭤볼 게 있어서요."
"네, 이리 좀 앉으시죠."
경비원은 구석에 있는 야전 침대를 펴며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대략 아시겠지만 여기 살고 있는 진남포라는 배우 때문에 왔습니다."
"어, 어저께 형사가 왔다갔는데..."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끝나질 않아서요."
경비원도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말해 주었지만 내용은 마찬가지였다.
"그때 옷차림은 어땠습니까?"
형규가 경비원에게 다음 질문을 하는 동안 문호는 슬그머니 경비실을 빠져나갔다.
"그때... 옷이... 청바지에 T셔츠를 입었었지요. 좀 춥게 입고 나간 것 같아요. 맞아요. 제가 밖에 나가는 진남포 씨한테 '그렇게 입고 나가면 감기 들지 않겠느냐'고 물은 기억이 나요."
"그때 시간은..."
"뭐 새벽 한 시 십 분경이었죠."
"무슨 비명이나 싸우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까?"
"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별다른 소리를 들은 기억은 없습니다. 혼자 피투성이가 돼서 돌아왔으니까요. 다른 소리는..."
둘이 질문하고 대답하는 사이 문호는 밖에서 무엇인가 알아보려는 듯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며 아파트를 둘러보며 무엇을 생각했는지 수첩에 메모도 하고 있었다. 메모를 마친 문호가 경비실 문을 두드렸다. 형규가 돌아보자 그는 손가락으로 형규를 나오라고 손짓했다.
"이봐 형규. 수수께끼가 또 하나 풀릴 것 같아. 이리와 봐."
"뭐야?"
"거 왜 대가리에 별을 달고 왔다는 영업용 택시 말야. 그 차에서 내린 사람의 행방이 이상하다고 했잖아."
"그랬지"
"자, 그건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어. 자네 말야. 지금 바로 다시 경비실로 들어가 있어. 난 여기 있을 테니."
문호는 밑도끝도없이 형규를 경비실로 되쫓았다. 형규가 경비실로 들어간 후 약 7, 8분쯤 되어 문호가 나타났다. 그러나 문호가 나타난 곳은 아파트 광장에서가 아니라 아파트 속에서 경비실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형규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만 해도 둘은 광장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또 이 아파트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호가 웃으며 여유만만하게 들어왔다. 경비원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봐, 뭘 그렇게 멍청하게 앉아 있어. 이쪽으로 나와 봐."
문호는 두 사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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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호 형사의 사건 일지 미 해결 사건- 해결된 사건
1. 고강진 살해범 증발- ?
2. 이상한 이빨 자국- ?
3. 이화영 납치 사건- 조작으로 판명
4. 고강진 환경- #1김만호가 부친임, #2성기준과 밀착됨,
#3성격이 특이함(고강진)
5. 성기준 공범- 가능성은 있으나 아직 미지수임
6. 신부의 정체- ?
7. 진남포 피습- 자해 가능성이 농후함
8. 택시에서 내린 사람의 방향- 베란다를 이용하여 아파트로 잠입함
9. 위 사람의 정체- ?
10. 진남포 동생의 자살 이유는- ?
11. 진남포가 자해했을 경우 그 이유는- ?
12. 진남포는?- 과거 건달에서 배우로 전향
13. 아파트의 핏자국- 자해일 경우 해명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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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보라고. 영업용 택시에서 내린 사람은 분명히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고 했지. 그런데 정문으로 들어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단 말이야. 누군지는 모르지만 차에서 내려 아파트로 들어온 후 자 봐, 보통 사람들이 가정집으로 들어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 대문으로 들어가는 길과 울타리를 넘어가는 방법. 그런데 그 원리는 아파트도 마찬가지야. 이 경비실 앞을 통과해서 들어가는 방법과 베란다를 타고 넘어 들어가는 방법이 있어. 일단 일층에만 잠입하면 몇 층이든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거든. 절대 경비원 눈에 뜨이지 않고."
"음, 그거 가능한데 ! 말이 돼."
"이제 알겠어? 차에서 내린 사람은 경비원이 모르게 의식적으로 피해서 아파트로 온 거야. 그것은 차를 길가에서 세우고 들어올 때부터 다분히 의도적이었지. 왜 그랬을까. 이해가 가?"
문호와 형규는 추위도 잊은 듯 오랫동안 서서 아파트의 베란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문호와 형규는 다음날 만나기로 하고 일단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문호는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메모를 뒤적이며 진아 아파트 베란다 침입 사건과 진남포 피습 사건을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몇 가지는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도 하고 또 몇 가지는 아직도 미궁상태로 남아 있다. 문호는 백지에 도표를 그려가며 일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풀지 못한 사건들이 크고 중요했다. 알아낸 사실보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들이 이 사건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고강진과 진남포 사건의 관련성은 아직은 보이지 않고 있다. 문호는 내일의 스케줄을 생각하고 있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신부의 신원파악, 다음이 진남포 자해 여부의 과학적 수사 및 본인 심문, 그리고 세 번째가 고강진 목에서 나온 이상한 이빨 자국의 탐문 수사, 끝으로 부산 곽 과장에게 연락하여 스타 호텔과 코스모스 호텔의 알력 관계 체크였다. 메모를 작성하던 문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무엇인가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을 뒤쫓기 시작했다.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02시 정각이 다 되어갔다.

민형규 기자의 사건기록
시간 비고
11월 30일
20:00 고강진 피살(피살된 추정 시간)
21:45 침대 열차 승차(애꾸와 함께)
22:00 진남포 외출
23:45 고강진, 시체로 발견(대전)
00:10 진남포 귀가
00:30 진남포 경비실 도착
00:50 진남포 밖으로 산책
01:10 진남포 자해 후 귀가
01:30 병원으로 우송
12월 1일
23:00 진남포 동생 부산에서 자살

한편 문호가 사건 메모를 하고 있는 시간 형규도 무엇인가를 자꾸만 썼다가는 지우고 지웠다가는 또 쓰며 마치 기계를 조립하듯 무엇인가를 맞춰 보고 있었다.
진남포가 자해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서자 그는 아파트 앞에서 내렸다는 뚱뚱한 사람의 신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마포에 도착해서 아파트로 들어간 것이 밤 12시 10분경 그리고 진남포가 과일을 들고 경비실을 나타난 것이 12시 30분경, 그리고 아파트 밖으로 바람을 쏘이러 나간 것이 12시 50분, 피습을 당하고 돌아온 것이 01시 10분경, 여기에는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약 20분의 간격들이 나 있었다. 다른 시간이야 어쨌든 마포 아파트에 영업용으로 도착한 사람이 12시 l0분경이고 진남포가 경비실에 나타난 것이 12시 30분경이라면... 그 영업용에서 내린 사람 이 진남포 자신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었다. 20분 간이면 아파트로 스며들어간 후 옷을 바로 입고 경비실로 내려올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형규는 문호에게서 얻어온 피습 현장의 핏자국 그림을 꺼내 보았다. 이 그림 중 피습 현장에 있던 핏자국의 형태는 #1번과 #4번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경찰측이나 형규의 추리대로 한 사람은 뒤에서 붙잡고 있고 한 사람은 앞에서 칼로 긋고 찌르고 했던 상상은 단숨에 깨어져 버린다. 즉 이 피의 그림으로 보아 그는 쪼그리고 앉아 가슴을 긋고 다음 옆구리를 찌르고 아파트로 돌아왔다는 상황이 정립된다.
그렇다면 진남포는 어디를 갔다와서 그 시간에 자해를 한 것이냐 하는 게 쟁점으로 남게 된다. 경비원의 진술로는 밤 10시까지 진남포는 자기 방에서 대사를 연습하는 소리가 났었고 전깃불도 보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10시부터 12시까지 또 다른 두 시간의 공백이 생긴다.
두 시간! 두 시간 동안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고강진이 피살되어 가방에 담긴 채 열차에 오른 것이 밤 9시 45분이었으니 진남포가 가지고 있는 두 시간의 공백과는 아무런 관계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남포와 고강진 사건은 별개의 사건인가?
형규는 노트를 꺼내 사건이 일어났던 시간을 기록해 보았다.
시간을 적고 맞춰 보았지만 새로운 사실이 더 발견된 것은 없었다. 형규는 날이 밝는 대로 문호와 협력하여 진남포 자해 여부에 관하여 조사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시계가 0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허치슨 이빨


사건 발생일로부터 4일째인 목요일 아침이 밝아 왔다. 새벽 두 시가 거의 다 되어 잠이 들었던 문호는 다섯 시간 동안의 깊은 수면에서 깨어났다. 평소 같으면 다섯시 반이면 깨어날 문호가 7시가 되도록 몸이 무거운지 이불 속에서만 꼼지락 거릴뿐 도무지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유리창은 성에꽃이 하얗게 피어 있었다. 냉랭한 추위가 방안에 가득했지만 초겨울 특유의 맑고투명한 햇살이 성에꽃을 녹이며 방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일어난 문호는 간단한 운동을 마친 후 어머니가 만들어 준 간단한 식사로 아침을 마치고 곧바로 진남포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갔다.
진남포는 가슴에 붕대를 감고 깊은 수면에 빠져 있었다. 담당 의사도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출근 시간까지는 아직도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병실을 빠져나온 문호는 병원의 경내를 거닐며 아침 공기를 즐기고 있었다.
'DAE RUK HOSPITAL'이라는 영자 간판이 햇살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HOSPITAL'글자를 읽던 문호는 HOTEL의 원어가 거기서 유래되어 왔다는 생각이 들자 그만 '픽' 하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호텔과 병원. 사람을 눕혀놓고 돈 벌기는 마찬가지이니 그게 그거 아니냐는 생각을 한 것이다.
얼마 후 각 병동에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각 전문 의사와 간호원, 환자들 그리고 그의 가족들, 응급실로 찾아오는 중환자들, 병원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처럼 변해 버렸다.
조금 전의 조용하고 차분하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바뀐 것이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 들것에 누워 링겔을 꽂고 들려 가는 사람, 절뚝이는 사람...
문호는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외과 과장을 찾아갔다.
김형식이라는 젊은 의사였다. 얼굴이 아주 깨끗하게 보였다.
"경찰에서 왔습니다. 진남포를 처음부터 보살펴 주신 분이라기에 찾아왔습니다."
"아, 네 앉으시죠. 그런데 무슨..."
"몇 가지 조사 좀 해보려구요."
의사는 문호에게 담배를 권하며 진남포의 병력 카드를 찾아 꺼냈다. 그는 여기저기 서랍을 뒤져 몇 장의 종이를 꺼넸다.
"상처가 아주 심합니다. 아주 결정적인 상처는 없었지만 여기저기를 다쳐 출혈이 많았지요. 그러나 회복은 시간문젭니다. 이제 얼마 후면 퇴원할 수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에...칼에 맞은 자국에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사실 저희들도 수사 결과로는 문제점이 좀 있었습니다. 사실 저회들 의견으로는 이번 피습 사건이 단순한 피습이 아니라 피해자의 '자해' 사건으로 보고 있는 거죠. 자, 이 그림을 보십시오. 이것은 제가 이 병원에서 제공한 상처 부위를 옮겨 그린 것인데."
문호는 수첩을 꺼내 진남포 칼자국 형태의 그림을 보여 주었다.
"자, 보십시오. 선생님, 이 칼자국의 방향은 일정하게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으로 그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상대방이 앞에서 칼질을 했다면 상처는 X자 형식으로 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 한 거죠."
그림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의사가 고개를 흔들며 문호를 바라보았다. 의사의 의견으로는 칼로 한 번 긋고 뒤로 물러서거나 아니면 피해자가 피해서 다시 대들었다면 칼자국의 방향은 일정한 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 점입니다. 저희들이 현장 조사를 한 결과 진남포가 최초의 습격을 받고 아파트로 돌아온 시간은 아무리 길게 봐도 6분 이상을 넘지 않았습니다. 6분 동안에 다섯 군데의 칼침을 맞았다면 순식간에 당한 것으로밖에 추측할수 없는데 이게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림을 보며 머리를 끄덕이는 의사에게 문호는 어젯밤 생각했던 현장과 상황을 보충 설명했다. 즉 자해일 경우 상처가 처음에는 굉장히 깊고 끝은 약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 칼로 자기 몸을 찢는데는 상당한 결단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최초에는 힘껏 찌르지만 그어 내려가면서 의욕이 떨어져 끝이 약하게 되며, 또 만일 상대방이 칼로 베었다면 처음 부분과 끝부분은 상처가 약하고 중간 부분이 깊을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의사가 손으로 허공을 몇 번이나 그어 보더니 그 말을 쉽게 이해했다. 한참을 서서 생각에 잠기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호를 바라보았다.
"네, 타당한 말씀입니다 오늘 오후 5시까지 상처 부위를 다시 조사해 보겠습니다. 만일 자해라면 뚜렷한 상황을 상처가 보여질것입니다. "
"꼭 좀 부탁 드립니다. 그가 피습을 당한 것이냐 자해를 한것이냐 하는 문제는 수사에 아주 큰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꼭 좀 협조해 주십시오."
문호는 의사에게 명함과 함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본부로 돌아온 문호를 가장 반갑게 맞아 준 것은 최찬일 형사였다.
"아니 어딜 다녀오셨어요. 집으로 전화도 걸고 난리가 났었는데."
"병원에 좀 다녀오느라구... 왜 무슨 일 있었어?"
"어제 저녁에 성기준 씨 연행했잖아요... 자길 연행하는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내가 서울 바닥에서 도망갈 놈이냐' '박문호를 만나야 출두하겠다'는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럴 것도 같아 그냥 집으로 돌려 보냈죠. 오늘 두 번이나 전화가 왔어요."
"어디 가지 않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겠대요. 아주 굉장히 흥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떡할까요?"
"진 형사가 갔으니까 틀림없을 겁니다."
"좋아, 성기준 씨한테 전화 좀 걸어 줘, 그리고 S-TV 지대로 실장도 좀 오라고 하고... 오늘 좀 바쁠 거야. 최 형사도 오늘은 꼼짝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부하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하고난 문호는 눈을 감고 잠시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이번 사건이 터진 이래 정말 숨 쉴틈 없이 쫓아 다녔다. 서울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다시 서울로 부산으로...
별달리 뾰족한 단서도 못 잡은 채 지금까지 숨가쁘게 뛰기만 했으니 몸이 강철이라도 어지간히 지칠 만한 때였다. 이 때 최찬일로부터 신호가 왔다. 성기준과 전화 연락이 된 것 같았다.
"저 박문호입니다. 성기준 씨..."
"나, 성기준이오."
그의 특유한 음성이 들려 왔다, 점잖고 길게 빼는 그래서 자기의 품위를 돋보이게 하는 그런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런 음성도 조금만 흥분하면 금세 억양이 바뀐다는 것을 일찍 알고 있는 문호였다.
"어젯밤 부산에서 올라왔습니다."
"그렇습니까? 나 당신 부하들 때문에 망신당한 거 아시오? 도대체 아 성기준을 어떻게 보고 그러는 거요. 아무리 경찰이라고 그래 이렇게 터무니없이 사람을 망신 주고 말이오. 물론 경찰에 잘 협조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오. 그래서 처음부터 나섰던거 아니오. 어디 내가 돛떼기 시장에 날깡패요? ...내가 어제 보다는 화가 좀 가라앉았으니 내 지금 그 곳으로 가리다. 만나서 얘기합시다."
문호는 아침부터 기분 나쁜 전화를 받고 투덜거리며 앉았다.
"노 순경- 노 순경-"
노 순경이 교환실로 전화를 걸고 얼마 되지 않아 연결이 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문호가 수화기를 집어들며 얼굴에 밝은 웃음을 짓는다.
"곽 과장님 저 서울 박문홉니다. 어제는 신세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 서울엔 잘 올라가셨나요?"
"덕분에요. 저 다름아니라 스타 호텔과 코스모스 호텔 관계 알아 보셨나 하구요?"
"아, 그거 우리 애들 양쪽으로 보내서 다 알아보았습니다. 말씀대로 고강진을 사이에 놓고 양쪽에서 줄다리기 한것도 사실이고 또 스타 호텔측에서 세 곱의 개런티를 제시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 때문에 고강진을 죽일 이유는 없다는 거죠. 스타에서는 이미 고강진을 포기하고 그대신 홍콩 배우 있잖아요, 그 쿵후 영화로 유명한... 네, 그 배우를 초청하기로 계약을 한 모양입니다. 뭐 이쪽은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곽 과장의 대답은 이미 예측한 대로였다. 김진구가 어떻게 입수한 정보인지는 몰라도 꽤나 정확하긴 했다. 그러나 사건 자체와 관계가 있으리라고는 보지 않았다,
수화기를 놓고 서류를 뒤적이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성기준이 보였다.
"박문호 씨 얘기 좀 합시다. 어디 조용한 데 좀 없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요.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해고 삼해고 간에 이렇게 사람을 대접하시면 됩니까?"
문호는 그에게 담배를 권하며 비어 있는 회의실로 안내했다.
의자에 앉은 그는 시큰둥하니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의외로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문호가 당황했다.
"저희들이 무례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 박사님도 지금 아주 난처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특히 사건 당일... 아, 그건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요. 그보다 먼저, 성 박사님은 고강진과 김만호 회장님과의 관계를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김 회장님이 사생아 문제로 골치 아파하고 있는 것은 어렴풋이 알았습니다만 그 대상이 고강진인 것은 이번에 알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난 절대 이번 사건과는 관계가 없어요. 재수없이 사건이 난 차에 함께 탔던 것 외에는... 오해 마시고 일을 차분하게 풀어 나가십시오. 내가 뭐 아쉬워서 사람 죽이는 일에 끼어들겠습니까."
"어제 부산에서 제가 김 회장 찾아간 것 아십니까?"
"예."
"그럼, 왜 피하셨습니까?"
"박문호 씨가 찾아온 것을 알고 제가 나서려는데 김 회장이 말렸습니다. 뒷문으로 절 빼돌린 거죠. 김 회장도 절 이상하게 본 모양입니다."
"좋습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좀 자세히 들어 주세요. 범인은 지난 11월 29일 밤 9시 45분 경부선 특급 열차 침대 차편 03-03호를 이용하여 시체만 남겨놓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때마침 맞은편 침대차에는 박사님이 타고 있었고요. 그뿐 아니라 당일 범인 목격자는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그중 두 분만이 범인이 애꾸가 아니라고 진술했습니다. 또 한분은 까만 신사복을 입었던 분 말입니다."
"아 예, 생각이 납니다."
문호는 성기준의 눈을 마주 들여다보며 그를 연행하게 된 사유와 범인의 화장실 트릭, 그리고 곧 신부도 연행되리라는 암시를 주었다.
그러나 어리둥절한 것은 오히려 성기준이었다. 자기가 그렇게 완벽한 논리 속에 빠져나갈 틈도 없이 범인을 도와 준 공범으로 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보았을 때 범인은 분명히 애꾸가 아니었는데 다른 목격자들이 애꾸라고 하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박문호 씨, 내가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죠. 목격자들의 진술은 두 가지로 갈라져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범인이 애꾸였다. 또 한편에서는 애꾸가 아니었다. 그런데 제가 보기로는 절대 범인은 애꾸가 아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뭔가 생각나는 게 없을까요?"
"?"
"생각해 보십시오, 난 그 신부라는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일하고 있는 분인지 이름도 얼굴도 전혀 모릅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목격담은 거의 일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즉 범인이 애꾸라고 진술한 사람들 말을 의심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문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김 순경이 다가와 S-TV 지대로 실장과 연락이 닿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문호는 전화에 대고 한참이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오늘 만나야 할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다. 저녁 9시에는 지 실장과, 잠시 후 11시에는 원주 교구로 수사차 내려갔던 진 형사를 만나야 했고 오후 1시에는 어느 치과 의사와 점심 약속이 있었다.
또 오후 5시에는 대륙 병원 진남포 상처 부위를 부탁한 의사와 만나 진남포의 자해 여부를 조사해야 했다. 업무의 중요성으로 보아 부하에게 맡길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흘깃 쳐다보니 성기준은 신문을 들썩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문호는 그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다. 지난 여름, 토곡리 밀실 살인 사건 때 양중달이라는 사람을 잘못 잡아 법정에까지 서게 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조한 것은 성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문호 자신이었다.
성기준에게 어떤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었다. 상황, 상황만으로는 입건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문호였다.
이때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진 형사가 허겁지겁 뛰어들어왔다.
"틀렸습니다, 틀렸어요."
"틀리다니, 자, 앉아서 차근차근 보고해."
진 형사는 메모지를 꺼내 문호 앞으로 내밀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쓱쓱 문질러댔다. 무엇인가 아주 낭패한 표정이었다. 문호는 메모를 들여다보았다. 신부의 신원과 최근 생활이 적혀 있었다.

성명: 김요한 (본명 김기환)
생년월일: 1932년 7월 28일
본적: 강원도 춘천시 소양로 1가-257
주소: 서울 동대문구 석관동 1-47
현근무처: 원주 교구
학력: 한국 천주교 신학 대학 졸업, 필리핀 신학 대학 졸업
최근 경력: 필리핀 신학 대학을 졸업하고 1983년 11월 27일 귀국,
1983년 11윌 30일 대구 초청 미사 집권
저서: 천로역정, 한국 천주교 100년사, 미사 의식과 유교 의식의 공통점

대략 위와 같았다. 사건 당일 대구에 내려간 것은 그쪽 교회의 초청 미사로 내려간 것이고 이것은 귀국 3일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본인의 진술에 따르면 열차 내의 살인 사건을 그냥 지나칠수가 없어 대구에서 올라오는 길에 신문사와 수사계를 들러 자기가 대전 도착 직전에 화장실을 사용한 점과 경찰과 신문의 추리에 미스가 있음을 밝힌 것이라고 했다.
어느 구석에도 성기준이나 김만호와 연결되는 부분이 없었다,
특히 사건 당일의 목격에 의하면 아무래도 범인을 애꾸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첨부했다고 했다.
"그럼 외국 유학 가서 귀국한지 3일밖에 되지 않는다 이거지."
"네, 그것은 교회측에서 증명해 주었구요. 여러 가지 자료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렇다면?...수고했어... 나가 있어."
문호는 어깨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까지 버티어 온 것도 성기준의 '화장실 트릭'에 한가닥 회망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마지막 기대까지 무너진 것이다.
신부의 진술에 따르면 '열차가 달리고 있고 시체가 발견된 이후 화장실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범인은 어디로 빠져 달아났단 말인가. 일반 열차 같으면 뛰어내린다는 가정이라도 할 텐데 부산-서울 간은 5시간 30분 동안에 돌파하는 초특급 열차가 아닌가? 만일 범인이 열차에서 뛰어 내렸다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대전의 이민우 형사의 보고에 의하면 천안에서 대전까지의 철로 주변에 피의 흔적은 전혀 없다고 했다. 문호는 일단 성기준에게 깊이 사과하고 돌려보냈다. 이제까지의 태도와 달리 별소리 없이 곱게 물러갔다. 혐의를 벗은 것만도 홀가분하게 느낀 것 같았다.
문제는 최초의 원점보다 더 복잡하게 얽혀 버렸다, 성기준이나 신부의 혐의가 벗겨지면서부터 새로 시작된 문제 즉 '범인은 과연 애꾸였느냐?' 하는 의문과, 그렇다면 베이지색 바바리 여인과 서울역 검표원과 열차 내 승무원의 거짓 진술인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이들이 사전에 결탁한 것인가, 그리고 범인은 승무원 대기실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좌절하지 말고 일어나자' 문호는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일어났으나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아득함을 거둬내지 못하고 있었다

'화장실 은닉'의 추리가 깨어진 이상 사건은 원점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야 한단 말인가.
광화문을 빠져나와 종로 1가에서부터 4가까지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약속 시간보다도 40분이나 일찍 치과 병원에 도착했다. 진행중인 것은 어떻든 마무리짓기로 했다.
"아이구, 박 형사님.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왜 이리 풀이 죽어 있습니까?"
"이거, 사건 하나가 터졌는데 영 풀리지가 않는군요. 자 오늘 내가 점심 살 테니 어디 조용한 데 안내나 좀 하십시오."
"아니, 단골 손님한테 점심을 얻어먹어요? 천만에 이빨 장사는 해도 돈은 내가 더 잘 벌텐데... 자 나갑시다. 내가 살게."
닥터 정은 문호를 가까운 일식집으로 안내했다. 식사 시간이라 식당이 몹시 소란스러웠지만 특별히 부탁해서 독실로 옮겼다.
"뭐, 물어볼 게 있으시다구요?"
밥상이 물러가자 닥터 정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아시죠, 탤런트 살인 사건 말입니다."
"아, 그 사건 맡으셨군요."
"네, 그런데 이게 지금 오리무중입니다. 실마리가 잡힐 듯하다가는 사라지고 또 잡힐 듯하다가는 사라지고... 정말 속된 말로 미치고 펄쩍 뛰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뵙자고 한 건 다름아니고 그 죽은 탤런트 목에서 이상한 상처가 발견되었어요. 어떻게 보면 사람 이빨 자국도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짐승 이빨 자국도 같은데 이게 도무지..."
"아, 그 사건 참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우리 애들도 왜 범인 못 잡느냐고 난리예요. 그건 그렇고 그 이상한 이빨 자국이라는 거 어떤 겁니까7"
문호는 상처 부위의 확대 사진과 손수 그린 그림을 꺼내 보여 주었다."
"자세히 좀 보십시오. 왼쪽 송곳니부터 오른쪽 송곳니까지의 간격은 보통 성인의 경우 6cm 정도 되거든요. 이 이빨 자국도 약 6cm 정도의 간격이 됩니다. 그런데 이 상처를 보세요. 마치 이빨 전체가 송곳니로만 되어 있는 것같이 끝이 날카롭습니다. 넓적한 이빨 자국이 하나도 없어요. 거기다가 이빨 끝이 불규칙적으로 파여져 있지 않습니까?"
"글쎄요...이게..."
그림과 사진을 번갈아 보던 닥터 정은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사람 이빨입니다."
"사람 이빨요?"
"네, 그러나 아주 특수한 사람의 이빨입니다. 이런 이빨을 허치슨 이빨이라고 합니다."
"허치슨 이빨요? 그게 뭡니까?"
"허치슨 이빨이라고 하는 것은 에, 선진국에서는 보기 어렵고 중진국이나 후진국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특수 형태의 이빨인데 이건 선천성 매독 환자나 음성 매독 환자만이 가지고 있는 이빨입니다. 부모가 매독균을 가지고 아이를 임신했을 경우 생기는데, 매독 환자가 치료를 받지 않을 경우 '스피로헤타 혈증 파동'이라는 상태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파동의 주파수가 줄어들게 되는데 이때 임신을 하면 태아에 감염이 되지요. 선진국에서는 임신부에 대한 혈청 검사를 사전에 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안 생기지만 후진국에서는 사전 혈청 검사 같은 위생 처리를 하지 않으니까 태아가 감염된 채 태어납니다. 이런 경우 매독에 감염된 아이는 처음부터 이런 기묘한 허치슨 이빨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특히 앞니에서 생기는 게 특징인데 나사 돌리개 같은 모양으로 이빨 가장자리에 홈이 패이고 끝으로 갈수록 예리해져서 마치 송곳이 듬성듬성 나 있는 것처럼 됩니다. 육안으로 얼핏 보면 모르는데 이렇게 이빨 자국으로 보면 금세 알게 되죠. 이 매독이라는 게 아주 무서워요. 심한 사람은 피부 조직이 망가지기도하고 얼굴이 흉칙하게 늘어지기도 하죠. 어떤 사람은 골격 구조까지 변합니다."
"그럼 이 이빨 자국의 주인공은 매독 음성 반응이 나타날 확률이 많겠군요?"
"그야 100% 확률이죠."
"..."
나흘 동안의 수사 끝에 알아낸 것이라곤 범인이 허치슨 이빨을 가진 나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적어도 지금 같은 위생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시대에 태어난, 그러니까 적어도 40대 이상은 되었다는 결론으로 얻은 것이었다.
닥터 정과 헤어져 나온 문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세시반. 대륙 병원 진남포 담당 의사와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90 분 이상이 남아 있었다.
문호는 택시를 잡아타고 삼청공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짧은 시간 이나마 머리나 식히며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건의 실마리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얽혀 있는지 그 실마리가 어느 틈 속에 묻혀 나타나지 않고 있는지 찾아낼 수가 없었다.
너무 바쁘고 긴장되었던 나흘, '화장실 은닉 트릭'의 발상까지는 좋았는데 엉뚱하게 빗나가 버린 결과. 애매한 신부의 의심, 그리고 오늘 알아낸 허치슨 이빨, 진남포의 자해 가능성 추리, 박영숙의 자살 사유, 진남포의 끈질긴 함구, 고강진과 진남포 두 사건의 연관성... 하나도 풀어지는 것이 없는 사건들이 그를 얼떨떨하게 만들어 버렸다.
삼청공원의 겨울 바람은 을씨년스럽게 불고 있었다. 산책하는 사람조차 얼어 더욱 쓸쓸해 보였다. 아직 지지 않은 낙엽들이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버린 여린 가지에 애처롭게 붙어 있었고 벤치 위에는 이미 떨어진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벤치에 쌓여 있는 낙엽들을 치우지 않고 그냥 깔고 앉았다. 오늘 따라 무척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 넷. 집에서는 빨리 장가들라고 성화였지만 집에 있는 날보다 수사 때문에 돌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은 판국에 결혼한다고 해서 더 편할 것도 없는 처지라 미루어 왔던 것이다. 또 그렇게 애타도록 따라다니는 여자도 없고 누군가 죽자하고 사랑해 본 일도 없었다.
어쩌다 어딘가 초대받아 달콤하게 살아가는 가정을 볼 때나 불현듯 가정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 시간이 지나면 그도 그뿐이었다.
문호는 갑자기 진남포는 왜 여태 결흔하지 않고 있나 하는 생각에 미쳤다. 나이도 사십이 훨씬 넘었다. 생활이 어렵고 얼굴이 좀 뭣하기는 해도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의 생활은 보장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어떻든 짝은 맞추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여태까지 독신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돈이 없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쌍한 동생 때문에? 그것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동생은 이미 자기 생활을 꾸려갈 경제력이 있다.
많지는 않지만 안마사의 수입으로 생활은 된다. 그렇다면 얼굴이? 얼굴이?... 문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공원 입구까지 마구 달려 영업용 승용차를 잡아 대륙 병원 진남포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마구 달려갔다.
한편 평소보다 조금 늦게 출근한 형규는 몇 가지 기사를 정리하고 다시 마포 신아 아파트로 달려갔다. 형규는 교대하는 어젯밤의 경비원을 불러 인근 다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젯밤 귀찮게 해드리고 또 쫓아왔습니다 갑자기 뭣인가 떠오른생각이 있어서요."
"에, 말씀하십시오.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있다면야..."
"다름아니라 사고가 나던 날 밤 말입니다. 그날 진남포 씨가 경비실로 들어온 게 밤 12시 30분 경이 틀림없지요."
"예, 틀림없어요. 그날따라 날도 스산하고 또 안개가 많이 끼어서 순찰을 돌고 들어와 막 업무일지를 쓰고 난 뒤였거든요. 제가 일지 쓰는 시간이 대개 12시경인데 그날 당일은 조금 늦었습니다. 시계로 확인은 안 했어도 틀림없을 겁니다."
"미안하지만 그 전날 밤 순찰하던 상황을 한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전날 밤 순찰이요?... 그러니까...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안개가 너무 끼어서 순찰을 돌았죠. 요샌 좀도둑에 강력범까지 너무 설쳐대서요. 9시 30분경 층층이 오르내리며 점검했죠."
"진남포가 그때 있었다고 했죠, 그것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순찰을 돌 때 어떤 집은 TV를 켜놓은 집도 있었고 어떤 집은 불을 끄고 일찍 주무시는 집도 있었습니다. 407호가 진남포 씨 집인데 그때 베란다에서 보니까 방에 불도 켜져 있었고 또 대사 연습하는 소리가 한참 나고 있었죠. 별일 없으려니 하고 5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상황이죠?"
"순찰을 도실 때 진남포가 대사 외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죠?"
"예, 들었습니다."
"그때 대사 외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글쎄요, 확실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그때... 소리가... 아무튼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이북 사투리가 들려 왔었어요. '간나이 자식 너는 부르조아 간나 새끼야, 핵명 전선에 나가 공을 세우라우야' 뭐 이런 소리였습니다. 아무튼 참 열심히 연습했죠, 보통 때도 대본 연습 때문에 이웃집 항의를 받은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상 더 자세히 들은 것은 없었습니까?"
"글쎄요... 그나마도 텔레비전 대사 외우는 소리니까 호기심을 가지고 잠깐 들었지 남의 집을 엿보거나 엿들을 수는 없죠. 순찰 돌때는 한바퀴 획 돌고 별일 없으면 그냥 내려오는 게 보통이죠."
"진남포 씨 얼굴도 보았나요?"
"얼굴은 못 보죠. 베란다 방향으로 나 있는 창의 위치가 높아요. 일부러 무엇을 놓고 들여다보기 전에는..."
형규는 그에게 커피를 대접했다. 커피를 마시고 나가려는 그에게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찔러 주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붙들고 늘어졌다가 아침 일찍 찾아와서 귀찮게 했고 또 대답도 순순히 응해준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는 한동안 사양했지만 형규는 그냥 돌아서서 S-TV로 달려갔다.
형규는 도착하자마자 제작 담당 이성구 이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자리에는 없다고 했다. Q신문 기자라고 밝힌 게 잘못이었다. 이성구 이사는 이미 겹겹이 진을 치고 기자와 경찰의 접근을 봉쇄하고 있었다. 형규는 기다리다 못해 문호에게서 들어 알고 있는 지대로 탤런트 실장을 찾아갔다.
그도 몹시 피곤한 듯 무거워 보이는 몸으로 형규를 맞았다.
커피가 날라져오고 담배를 권하고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낸 뒤 질문을 시작했다.
"진남포라는 배우의 역할이 '흥남 철수 작전'에서 어느 정도의비중이 있습니까?"
"비중이오? 비중이랄 것까지 있나요? 공산당 내무 서원으로 나오는데 전반부에는 조금 나오지만 후반부에는 거의 안 나옵니다. 원래 진남포, 고강진 그리고 여주인공 홍청자가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진남포가 소작인의 아들이고 고강진과 홍청자가 지주의 아들로 나오는데, 공산 혁명이 일어나자 고강진과 홍청자가 부르조아의 자식이라고 진남포에게서 괴롭힘을 당하죠. 진남포가 홍청자를 짝사랑했거든요. 진남포 등쌀에 둘이 일단 남하했다가 9.25-6.28수복으로 다시 흥남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1.25-6.4후퇴를 맞아 둘이 흥남에서 이별을 하게 되고... 뭐 그런 얘기라 후반에 잠깐 고강진의 추억 장면에 한 번 더 출연하고 끝이죠."
"그럼 진남포가 부르조아 아들이라고 고강진을 괴롭히는 장면은 도입 부분이 되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 대본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지대로 실장은 캐비닛에서 대본을 꺼내 형규에게 넘겨 주었다.
팔절지 갱지를 옆으로묶어 타자로 찍은게 '흥남 철수 작전'의 대본이었다. 지대로 실장은 국군 장교 역할을 맡고 있었다.
"지금 촬영은 얼마나..."
"아, 저기 마침 이 작품 프로듀서가 오는군요. 잠깐 기다리세요."
말을 나누던 지대로 실장이 밖으로 뛰어 나가더니 늘씬하고 예리해 보이는 30대 초반의 남자를 동행해서 다시 돌아왔다.
"인사하시죠. 이분이 이번 대작을 맡고 계신 박봉민 PD구요. 이쪽은 Q신문에 있는 기자입니다. 이번 고강진 사건 때문에 나오셨나봐요."
"아, 그렇습니까? 지금 바쁜데...나중에..."
"잠깐이면 됩니다. 저 나름대로 사건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협조해 주십시오."
"..."
마지못해 의자에 앉은 박 PD는 형규를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히 보였다. 자고로 신문 기자는 멀리도 가까이도 못할 존재라는 것을 그는 일찍 터득해 온 터였다.
"다시 말씀 드려야겠군요. '흥남 철수 작전'은 지금 어느 정도 촬영이 되어 있습니까?"
박 PD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대본을 한장 한장 넘겨가며 진행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고강진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갈팡질팡했습니다. 65%이상을 끝내고 이제 눈이 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드라마라는게 대본 순서대로 촬영하는 게 아니고 영화같이 촬영하기 좋을 때 하기 때문에 한 마디로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아무튼 여름 가을 장면은 전부 끝냈습니다."
"그럼, 진남포가 고강진과 흥청자를 괴롭히는 장면은 어느 계절이 되죠?
이상하다는 듯 대본을 뒤적이며 PD에게 물었다.
"그건 6^256^25 직전이니까 여름 장면이죠..."
앉아 있던 형규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눈이 휘둥그래지며 한참을 멍하니서 있었다.
"지 실장님 이 대본 하나 얻을 수 있습니까?"
"그야 뭐, 어렵겠습니까? 필요하시면..."
형규는 두 사람에게 인사도 변변히 못하고 허둥거리며 방송국을 나왔다. 광장에 세워 놓은 자기 차에 오르기가 무섭게 액셀레이터를 밟으며 진남포가 입원해 있는 대륙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한 형규는 진남포를 면회할 수가 없었다. 그의 병실은 임시로 독실로 옮겨졌고 의사와 간호원이 상처 부위를 특별 검진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떼거지를 써도 거절만 당하고 말았다.
일층 대기실로 내려와 문호에게 전화 걸었지만 문호도 자리에 없었다.
그 시간 의사와 간호원은 진남포를 치료할 시간은 아니었다.
문호가 부탁한 상처 부위의 상태를 검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도 문호의 의견에 매우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만일 상대방이 칼을 가지고 덤볐다면 결투는 한동안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결투가 벌어지면 칼이 몸을 그어간 방향이 일정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하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내용의 결투라면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박 형사의 말에 따르면 결투 시간은 길어야 5, 6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상처는 당연히 X자로 나 있어야 했다. 또 박 형사의 추리대로 진남포가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힌 자해 사건이라면 상처의 처음의 부분은 깊을 것이고 끝부분은 약할 것이다. 그 상처가 또 가해에 의해 발생된 것이라면 첫부분과 끝부분은 약하고 중간 부분이 깊을 것이다.
진남포의 가슴을 감싸고 있는 붕대를 풀어 상처를 들여다보던 의사는 계속 기록도 하고 그림도 그려가며 검토하고 있었다. 작업은 약 30분간에 걸쳐 끝이 났다. 의사가 밖으로 나오고 진남포도 최초의 병실로 옮겨졌다.
형규가 진남포를 면회한 것은 검사가 끝나고도 10분이나 지난 뒤였다.
"저, 진남포 씨 Q신문 민형규 기잡니다."
"수... 수고하십...니다. 그런데...무슨..."
"뭣좀 여쭤 볼 일이 있어서요, 상처는 좀 어떻습니까?"
"병원에서 치료를 잘 해주어 많이 좋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진남포 씨... 그날, 피습을 당하던 날 상황을 설명해 주실수 있겠습니까?"
"...제가... 그 말을 꼭 해야 합니까?"
"뭐, 의무같은 건 없습니다. 그러나 알아는 봐야죠"
"..."
"본인이 피습을 당했는데 침묵만 지키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혹 피습자를 잘 알고 있는 사이는 아닙니까?"
"아...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그럼 말못할 이유가 없지 않아요?"
진남포는 입을 다물고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갈색 나뭇잎들이 앙상하게 매달려 하늘거리고 있었다, 형규도 입을 다물고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다.
"저... 그날... 오늘이 참 무슨 요일이죠?"
"오늘이 목요일입니다. 12월 3일."
"네...그날이...일요일이었죠...제가 방송국에서 집에 올때 모르고...대본을 놓고 와서 다시 방송국에 갔습니다. 거기서 '쇼는 즐거워' 녹화 잠깐 구경하고 어딜 좀...들렀다가 집으로 왔죠."
"잠깐, 그 어딜 들렀다는 데가 어디죠?"
"..."
"좋습니다, 그 다음은요?"
"그 다음은 집에 돌아와 대사 연습도 하고 연기 연습도 하고 그랬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시 쉬었다가 또 일을 했죠... 12시가 훨씬 넘으니까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해서 밖으로 바람을 쏘이러 나갔습니다... 경비실에 가서 잠깐...놀다가 거리로 나갔는데...안개 속에서 갑자기...바바리를 입은 뚱뚱한 사람이 나타나서 칼을... 휘두르고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였죠. 저는 피투성이가 되어 아파트로 돌아왔는데...그후로는 기억...이... 잘..."
"손이나 팔목에는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까?"
"네, 보시다시피 위험한 부분만 당했습니다, 가슴과 옆구리..."
상대방이 쳐들어오면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손이나 팔뚝으로 온몸을 감싼다. 마치 권투 선수가 반사적으로 커버하듯이. 그러나 진남포의 상처는 오직 가슴과 옆구리뿐이었다.
그리고 형규가 '자해'를 했다는 증거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더 물어 볼까 어쩔까 하고 있는데 병실 문이 후다닥 열리며 문호가 뛰어들어왔다. 들어오던 문호가 형규를 보고는 멈칫서더니 팔뚝을 끌고 밖으로 불러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음, 나 신아 아파트 경비원하고 방송국 PD와 지대로 실장을 만나고 왔어... 그리고 곧바로 이리로 온 거야. 그런데 자넨 어디가 있었어. 아주 중요한 단서가 생겼는데..."
"그래? 음 나도 사실은 아주 중요한 단서를 잡았어. 자 담당 외과 의사한테 가보자구. 뭣 좀 부탁한 게 있어."
문호는 형규를 이끌고 담당 의사에게로 갔다. 진남포를 검사하고 돌아온 외과 과장이 담배를 피우며 쉬고 있다가 일어나 맞아 주었다.
"아 박 형사님, 지금 막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이거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워낙 사건이 미묘해서요..."
"별 말씀 다하십니다. 저희들이야 이런 게 직업인 걸요."
외과 과장은 노트와 기록 카드를 꺼내 문호에게 보여 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자, 잘 보십시오. 우리 몸에는 각 부분에 근(abdominnis)이라는 게 있습니다. 왜 학교 다닐 때 아령을 많이 하면 이두박근이 발달한다 어쩐다 하는 말 있잖아요. 이런 근이 있는데 몸통 부분에도 외복사근(obliqus externus abdominis)과 내복사근(obliqus internus abdominis) 이라는 것이 있죠. 외복사근은 복부의 전부를 감싸고 있고 그 근육 밑을 형성하고 있는 또 한 곁의 근육이 내복사근입니다. 그리고 복직근이라는게 있는데 이것은 복벽(배 속의 내부벽)의 깊숙이 있는 것이죠. 진남포의 상처는 갈빗대 부분부터 하복부 방향으로 상처가 나 있는데 이 갈빗대 부분은 사실 칼이 깊숙이 파고들지 못합니다. 결국 복부 근육을 조사했는데 역시 위에서 아래로 강에서 약으로 상처가나 있었습니다. 상단 부분은 내복사근까지 상처가 나 있고 하단 부분은 외복사근만 상처를 입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힘을 주고 찔렀다가 내려오면서 손을 뗀 것으로 볼 수 있는 거죠. 상처의 넓이로 봐도 상단은 넓고 하단은 좁습니다. 또 한 가지 가해자는 의학적인 지식은 없겠지만 몸통의 어느 부분이 위험 부위이고 어느 부분이 안전한 부위인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아주 극히 위험한 곳은 교묘히 피해 갔거든요."
"네, 상황을 대강 알겠습니다. 만일 혈청 검사를 하면 결과는 언제쯤 알 수 있겠습니까?"
"혈청 검사로 무엇을 알아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글쎄요, 웬만한 건 2, 3일이면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뭣 때문에 혈청 검사를 하려고 하죠?"
"진남포가 혹시 매독 음성 반응이 있지 않나 해서 그럽니다. 사실은 죽은 고강진의 목에서 이상한 이빨 자국이 나왔거든요. 이상하게도 이빨 자국이 마치 짐승 이빨 같았어요. 어떤 분에게 여쭤 봤더니 허치슨 이빨 같다고 해서 알아보려구요."
"아, 허치슨 이빨. 그거 뭐 바쁜데 혈청 검사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내가 직접 허치슨 이빨 여부를 조사하고 오죠. 시작한 길에 X-RAY도 찍어 보죠. 허치슨 이빨 소유자는 두개골 형태도 특이하니까요. 물론 외형만 봐도 알지만 정확한 기록도 필요합니다."






5시간30분


외과 과장이 진남포의 허치슨 이빨 조사와 골격 X-RAY를 촬영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문호는 닥터 정에게서 허치슨 이빨 얘기를 들었을 때 이빨과 더불어 얼굴의 근육이 늘어져 있는 음성 매독 환자의 특징으로, 진남포와 그의 동생 얼굴을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진남포의 이빨이 허치슨 이빨이고 그가 음성 매독을 가진, 그래서 고강진의 목상처의 주인공인 진남포를 떠올리며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럴 수가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호가 이 사실을 형규에게 말했을 때 형규도 진남포의 자해 상황은 물론 그가 고강진 사건에 어떤 깊은 내막이 깔려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형규는 지금 취재를 하고 돌아온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진남포가 고강진을 살해한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혔어. 오늘 진아 아파트와 방송국에 들렀거든. 그런데 지난 일요일 즉 고강진이 피살당하던 날 밤, 진남포는 자기 아파트에 있지 않았어."
"뭐? 진남포가 아파트에 없었다구? 몇 시부터?"
"저녁 7시 10분경부터 자정이 지난 0시 10분까지 죽--"
"?"
"왜 진아 아파트 경비원이 밤 9시 30분경 순찰을 돌 때 진남포 방에서 대본 연습하고 있는 걸 보았다고 했잖아."
"그래서?"
"거기에 함정이 있었던 거야. 나는 그가 진남포의 얼굴까지 확인하지 않았음을 알았지. 대사 연습 하는 것도 목소리만 들었을 뿐이야. 그래서 대사 내용이 어떤 것이냐고 물으니까 띄엄띄엄 기억을 했어. '사람 목소리만 듣고 사람을 보지 못했다면 사람이 없을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거야."
형규는 들고 있던 '흥남 철수 작전'의 대본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즉, 경비원이 들었다는 내용은 '간나이 자식 너는 부르조아 간나새끼야. 혁명전선에 나가 공을 세우라우야'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대사는 드라마의 서두 장면이었다. 6.25남침 준비가 한참인 때의 장면일텐데 이 추운 겨울에 그런 장면을 연습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계절적으로 초봄의 장면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미 그 장면은 촬영이 끝났다는 얘기였다.
왜 진남포는 촬영이 끝난 부분을 연습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진남포 자신이 아니라 그가 전에 연습할때 사용하던 녹음 테이프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즉시 방송국으로 쫓아가 관계 직원에게 확인하고 대본까지 얻어왔다.
대본을 검토하고 PD에게까지 확인한 결과 형규의 생각대로 그 장면은 이미 녹화가 끝난 지 오래된 장면이었다. 진남포의 아파트를 뒤져 보고 싶었으나 마음대로 가택 수색을 할 입장이 못되었다.
어쨌건 형규는 진남포가 '자해' 행위를 했다는 생각과 '사건 당일 아파트에 부재중'이었다는 확신을 얻고 있었다.
문호와 형규가 새로운 발견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는 동안 담당 외과 과장이 돌아왔다. 40분이 훨씬 지난 뒤였다. 그는 손에 X-RAY 필름까지 들고 왔다. 매우 밝은 표정이었다.
"박 형사님 말씀대로 그는 허치슨 이빨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리고 X-RAY 확인 결과 정상의 두개골 소유자가 아니란 것도 판명이 났습니다."
그는 형광판에 필름을 올려놓고 전깃불을 켰다. 불빛 위에 보여진 그의 두개골은 측면으로 보였는데 정상인과는 약간 다른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과 같이 진남포의 골격은 '전두골'이 훨씬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고 상대적으로 '비골'은 움푹 패여 있었다. 또 '두정골'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으며 '하악골'은 길게 앞으로 빠져 있고 이빨도 상하가 어긋나 있었다.

드라마 대사 녹음 사건과 허치슨 이빨 확인으로 사건은 급속히 호전되고 있었다. 문호는 수첩을 꺼내 차근차근 메모하여 불확실한 것은 형규와 의논하기도 했다.

1. 진남포는 7시경 S-TV에서 돌아와 아파트 정문을 통과하여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이때 대본을 가져오는 중이라며 그의 귀가를 제 3자에게 확인시켜 준다.
2. 7시가 지나서 아파트를 빠져나온다. 이때는 방에 녹음 장치를 하고 불을 켜고 베란다를 통해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행동한다.
3. 경비원이 9시 30분경 순찰을 돌 때 녹음기 소리와 대사 연습을 혼동해서 사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4. 진남포와 고강진이 어느 장소에선가 맞부닥뜨리고 여기서 고강진은 진남포에 의해 살해당한다.
5. 진남포는 미리 준비한 대형 가방에 고강진의 시체를 넣고 침대 열차에 승차한다.
6. 어떤 방법으로든 열차를 탈출하여 아파트로 돌아온다. 올때 또 베란다를 이용, 경비원의 시선을 피한다.
7. 들어온 후 곧장 경비실로 내려간다. 과일 등을 가지고 내려감으로써 그 동안 죽 실내에 있었음을 입증시킨다. 소위 알리바이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8. 밖으로 나가 자해한 다음 다시 돌아온다.

매우 논리적인 추리였지만 아직도 문제는 많았다. 첫째, 범인 목격 당시 엇갈렸던 애꾸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미제로 남아 있고, 다음 두 번째는 열차 속에서 갑자기 증발한 사건, 그리고 세 번째 갈매기 주점 주모가 보았다는 뚱뚱한 바바리 남자의 신원이었다. 어쨌든 그 문제는 또 추후 생각하기로 하고 문호는 본부를 불러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즉 진남포 입원실에 형사를 한명 따라붙이고 병원측에 진남포를 예의 주시해 달라는 부탁을 한것이다.
진남포가 고강진 살해범으로 용의 선상에 떠오른 직접적인 동기는 그의 목에서 나타난 진남포의 이빨 자국과 사건 당일 현장 부재 증명을 위해 녹음기를 이용한 것이 탄로가 난 것이 원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피습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상처가 X자로 나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가 못한 것이 밝혀진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가 선명하게 풀린 것은 아니었다, 문호는 형규를 병원에 남겨 두고 S-TV 지대로 실장에게 달려갔다. 밤 9시 만나자고 연락이 왔으나 그때까지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문호가 방송국으로 달려간 후 형규는 어젯밤 작성한 메모를 들여다보며 시간 차이를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다. 한 두어 시간이 지나서야 문호가 돌아왔다. 얼굴이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이봐 형규, 새로운 사실이 또 발견되었어. 방송국 측에서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구나'하고 느낀 지 실장이 날 만나자고 했던 거야."
"뭔데... 새로운 사실이라는 게?"
"고강진, 그 친구가 진남포를 무지하게 괴롭히고 있었어."
"뭐야? 고강진이 진남포를?"
"음--고강진이 성격이 남다르다는 건 이미 알아 냈었잖아? 그런데 고강진이 야간 촬영을 마치고 몸이 피곤하다고 안마소에 들러 사우나를 하고 안마를 했는데 이 때 진남포의 동생이 안마사라는 것을 알아낸 거야. 그리고 진남포를 불러 동생이 안마사를 못하게 하든지 아니면 이번 출연을 포기하라고 협박한 거야."
"왜, 그게 자기와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게 고강진의 가장 큰 결점이지, 묘한 성격. 그런 불결한 직업을 가진 사람의 오빠와 같이 공연할수 없다는 거야. 거 왜 알지, 자기 성격에 안 맞으면 어떻게든 바꿔 버리는 고집. 생각다 못한 진남포가 실장한테 상담을 한 모양이야. 실장이 중재에 나서긴 했지만 일은 더 커지기만 했어, 진남포의 계약을 취소하지 않으면 자기가 방송국을 옮기겠다고... 거기다가 동생 박영숙을 불러 어지간히 깐깐하게 굴었던 모양이야.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기 시작한 동생은 정신상태까지 불안정하게 되었어. 그 후로 고강진이 불러 괴롭히는 기색이 있으면 만나 주질 않은 모양이야."
"도대체 고강진이 왜 성격이 그 모양이야. 거 묘한 사람이군."
"그 친구도 어려서부터 불안정하게 자라서 그런 성격이 생긴 모양이야, 일이 이렇게 되자 동생이 자꾸만 죽어 버리겠다고 오빠한테 하소연했고 급기야는... 글쎄... 아직 확실히는 모르지만 그래서 진남포가 고강진을 살해한 게 아닌가 해. 그 뿐이 아닌가 봐, 촬영 중에도 말야. 이제 겨우 빛을 보아 인기가 오르긴 했어도 고강진 연예 경력은 겨우 2년이야. 그런데 진남포는 25, 6년이 넘는다고. 이런 대선배한테 잔심부름도 시키고 학대도 하고 그런 모양이야. 고강진 그 친구 진남포에게 어떤 약점이 있다고 함부로 자존심을 밟아 버린 거지... 그리고 왜 그렇게 학대했는지. 또 왜 진남포는 꾹꾹 참으며 견뎌왔는지 모른다는 거야..."
"...거...참!"
"여하튼 진범은 진남포가 거의 틀림없는데 아직도 해결할게 많아."
그렇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진남포가 범인이라는 확증은 있지만 알 수 없는 상황은 꼬리를 물고 남아 있었다.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많아도 범인이 진남포라는 의견엔 이의가 없어. 그럼 어떡할 거야?"
"맞아, 맞는데 나도 명색이 '뱀 같은 박문호'야. 범인 보고 강제로 자백하라고 할 수는 없지. 자 지금부터 또 뛸 수밖에 없어. 이 일도 어지간히 끝나가기는 하는데 그래도 걱정은 돼, 처음엔 R-TV 조 이사를 의심했을 때 끝나는 줄 알았고 그 다음이 성기준 씨와 '화장실 트릭' 사건 때 그랬거든. 이거 또 엉뚱하게 튀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문호와 형규는 어두워지는 광교 네거리에서 헤어졌다. 은행의 전자 시계가 18:00을 가리키고 있었다.

형규는 신문사로 들어가는 도중 가판대에 진열되어 있는 주간지를 하나 사들었다. 표지에는 고강진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 되어 있었고 얼굴 위에는 ?표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기사 내용의 타이틀도 뽑혀 있었다. '고강진의 죽음, 그 신비를 알아본다'
내용을 훑어보았다. 모든 상상을 다 동원하여 기록해 놓았다. 고강진 아버지에 대한 기사는 아주 재미있게 풀어 가고 있었다.
계룡산에 은거하고 있는 모 고승이 고강진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고강진의 어머니가 아들을 얻으려고 계룡산에 백 일 기도 하러간 사실이 있었는데 그 때 그 고승의 도움으로 아들을 얻게 되었고 이름도 김석오라는 불교식 이름으로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형규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계룡산에서 백 일 기도 하는 모습을 본 사람까지 있다는 것이다. 정말 이렇게 멋대로 써갈겨도 되는 것인지 몰랐다. 확실히 보고 파악하고 그리고 확인한 후에 다시 검토해서 기사를 써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소지가 많은 게 신문 기사였다.
어떻게 남의 말만 듣고 공익지인 신문에 함부로 써댈 수 있을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며 사무실까지 도착한 형규는 어젯밤 작성한 메모와 오늘 해결된 사건들, 그리고 맞추다 만 시간표를 보며 진남포와 고강진의 두 사건을 연결시키는데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같은 시간, 문호는 서울역에서 애꾸를 보았다는 검표원을 만나고 있었다. 문호도 무언가 확신을 갖고 본격적인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진남포가 고강진을 살해할 가능성은 아주 높아졌다. 요는 몇 가지 남아 있는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전에 도와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아직도 다 풀려지지를 않고 있어요. 지금 가장 해결이 어려운 점은 그 큰 가방을 끌고왔던 사람이 과연 애꾸냐 아니냐 하는 겁니다. 혹시 잘못 보셨거나..."
"아, 아니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자가 애꾸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왼쪽 검은 자위가 아주 하얗게 보였으니까요."
문호는 수첩에서 진남포의 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다.
"글쎄요, 닳기는 좀 닳은 것 같은데... 이 사람은 아닐 겁니다. 첫째 이 사람은 애꾸가 아니잖아요. 골격이 비슷하긴 한데 좀더 나이가 들어 보였죠."
"눈동자가 틀리고 나이가 좀더 들어 보이고 골격은 비슷하다 이거죠?"
"네, 그건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 사진보다 주름살이 조금 더 많은 것 같았으니까요."
애꾸와 주름살... 주름살과 애꾸... 나이가 좀더 들어 보이고
"그럼 체격은 어땠습니까?"
"나이에 비해 체격은 단단하고 야무져 보였죠. 키도 큰 편이었구요. 옷은 잠바를 입었는데 색깔은 기억이 안 납니다."
잠바? 잠바를 입고 있었다면 그 옷은 또 하나의 장벽을 만들고 있었다. 갈매기 주점 주모의 목격에 의하면 바바리 깃을 올린 뚱뚱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검표원은 잠바차림의 키가 늘씬하게 큰 사람이라고 했다. 둘의 이야기가 공통되는 것은 키가 크고 건장하다는 것뿐이었다. 문호는 가까운 퇴계로 스카이 호텔로 가서 수첩을 펴고 다시 메모를 훑어보았다. '해결된 점과 해결하지 못한 점'이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추가로 해결된 곳에는 메모를 집어넣었다.

2. 이상한 이빨: 진남포의 허치슨 이빨
6. 신부의 정체: 신부로 확인

남아 있는 미해결은 아직도 1번의 범인 열차 내 증발 9번의 택시 하차자의 신원, 10번의 진남포 동생 자살 이유(지 실장의 진술에 의해 어느 정도 밝혀지긴 했음) 10번의 진남포 자해 이유. 이상 네 가지였다. 이 중에서 수사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1번과 9번이었다.
문호는 진남포가 범인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면서도 혹시 애꾸를 동원한 제 3의 공범자가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아무튼 확실한 증거와 타당성 있는 논리에 맞는 추리가 잡힐 때까지는 진남포 체포를 보류하기로 했다.
그리고 맞지 않는, 또 풀리지 않고 있는 미로들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문호는 본부로 전화를 걸어 최찬일을 찾았다.
"좀 늦더라도 대기하고 있어. 그리고 곧 갈 테니까, 그리고 민 기자 연락오면 거기 와서 기다리라고 전해 주고. 참, 진남포한테는 누가 가 있지?"
"네, 진 형사가 바로 쫓아갔습니다."
"됐어."
수화기를 내려놓은 문호는 어딘가 잠깐 들렀다가는 곧바로 본부로 들어갔다. 문호는 형규가 만들어놓았던 시간표에서 무언가 중요한 사각에 빠져 있던 힌트를 얻어냈다. 그리고 보다 조직적이고 확실한 시간표를 재구성하고 있었다.
첫째는 고강진이 '쇼는 즐거워' 리허설을 하는 시간에 진남포가 현장에 있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이상한 전화를 받은 고강진이 이화영을 찾아 '자기가 이화영을 유혹하려 했다는 루머를 왜 퍼뜨렸느냐'하며 싸웠다. 화가 풀리지 않은 고강진은 동생처럼 생각하는 후배 가수한테 별장으로 가겠노라는 말을 한다. 이 때도 진남포는 그 현장에 있었다.
둘째는 이 말을 들은 진남포는 방송국을 나와 곧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종로에 있는 동생에게 가서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안마소에서 나와 7시경 아파트로 돌아오며 경비원에게 말을 걸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시킨다. 그리고 그리고... 아니, 아니... 문호는 여기서 새로운 착안점을 찾아내고는 눈빛이 확 밝아졌다.
진남포는 잠바를 입고, 접으면 적어지는 대형 가방에 바바리를 접어넣고 가방을 들고 베란다를 타고 넘어 고강진 별장으로 간다.
별장에서 고강진을 불러내어 고강진을 목눌러 살해한 다음 가방에담아 넣고 열차를 탄다. 열차를 타고... 열차를 타고...
여기까지는 추리가 잘 되었다. 그런데 또 애꾸와 증발 사건에서 막혀 버렸다. 가방에서 바바리를 꺼내 잠바를 입고 아파트까지 오면 뚱뚱하게 보이고 옷이 두 가지였던 의문도 풀려지는데 증발과 애꾸 문제는 전혀 풀어낼 수가 없었다.
문호는 다시 시간들을 기록해 보았다. 아파트를 나간 것이 밤 7시. 열차가 떠난 것이 밤 9시 45분. 진남포가 아파트까지 돌아온 게 12시 10분에서 15분경. 그렇다면 진남포는 어느 지점에서 하차했을까.
문호는 머리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열차가 대전에 도착하기 전에 꼭 한 번 멎었던 곳, 그곳은 천안이었다. 9시 45분 열차가 천안에 도착한 것은 11시 정각. 만일 진남포가 천안에서 내렸다면... 만일 그가 천안에서 내렸다면, 그런 가정을 세운다면 시간은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갔다.
1. 밤 9시 45분 서울 출발~11시 천안 도착 (1시간15분)
2. 천안(11시) -- 서울 도착(12시 20분):(1시간 20분) - 아파트 도착
시간대가 비슷하게 맞아 들어갔다. 그러나 열차 내에서 바바리 여인이 진술한 바에 의하면 '천안에서 열차가 떠날 때 목격한 사실은 담배 연기가 침대에서 나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범인은 천안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범인이 천안에서 내리지 않았다면 12시 20분까지 진남포는 집으로 돌아올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생각을 쥐어짜고 있던 문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밖에 대고 소리 질렀다.
"최 형사, 최 형사 !"
최 찬일이 쫓아 들어왔다.
"지금 바로 천안 경찰서에 연락해서 형사과 직원 누구 좀 찾아 봐."
최 찬일이 나간지 5분도 못 되어 천안 경찰서와 연락이 닿았다.
"서울 특별 수사반 박문홉니다. 긴급한 일이 생겨 지금 내가 천안에 내려가려고 하는데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요."
"무슨 부탁인지 말씀하십시오."
"지금 바로 천악역에 가셔서 11월 29일 밤 9시 45분 서울 출발 125편 열차표를 찾아 묶어 놓아 주십시오. 자세한 말씀은 내려가서 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문호는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최 형사를 불러 차를 대기하도록 지시했다.
"최 형사 오늘밤 안으로 고강진 살해범이 체포될 지 몰라. 계속 대기하고 있고 지금 바로 진 형사한테 연락해. 진남포 잘 좀 살펴보라고. 잘못하면 진남포도 죽을지 모르니까 명심해."
"알겠습니다."
최 형사의 경례를 받으며 차에 올라 탄 문호는 기사를 재촉하며 차를 천안으로 몰았다.
천안에 가서 수사한 결과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맞아 떨어진다면 모든 미궁의 사건들은 해결이 나게 될 것이다. 이대로 해결이 된다면 연 4일 간 문호는 헛다리만 긁고 다닌 꼴이 된다.
문호는 사건 첫날밤 형규가 한 말이 생각났다. '눈이나 귀라고 하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또 감상에 약한 눈이나 귀는 이성을 앞지르지 못한다. 범인이 인간이라면 열차 속에서 증발할 수가 없다. 공포 때문에 일어난 이성의 마비' 문호는 차속에서 계속 터져나오는 울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는 잃었던 4일 간의 이성을 되찾기 위해 천안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천안에 도착한 것은 8시 40분. 꼭 1시간 10분이 걸렸다.
경찰서에서는 형사과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에 들러 형사 한 명을 대동하고 곧바로 천안역으로 달려갔다. 천안역에서는 경찰의 부탁으로 이미 표를 묶어 정리해 놓고 문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일 천안에서 내린 승객은 모두 34명. 34개의 열차표가 문호의 손에 쥐어졌다. 표를 일일이 점검하던 문호는 그 중 하나를 뽑아 역원의 양해를 얻어 수첩에 끼워 넣었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부터 이 역 부근을 좀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순경 한 분만 지원해 주십시오."
문호는 역전 파출소 순경을 한 명 지원받아 역 구내를 빠져나갔다. 역 광장에는 영업용 차량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천안에 도착한 지 1시간이 지났다. 벌써 10시가 다 되어갔다.
역전 광장에서 일을 마친 문호는 담배를 피워물고 역 대합실에서 잠시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모든 것은 생각대로 순조롭게 끝났다,
생각지도 않았던 그늘에서 4일 만에 범인을 찾아낸 것이다. 지난 일요일 고강진이 피살되어 밤 11시 45분 열차 내에서 시체로 발견된 이후 만 4일이 지난 것이다. 그 동안 부산으로, 대전으로, 천안으로 숨가쁘게 뛰어다닌 결과 처음 생각과는 엉뚱하게 풀려 버린 것이다.
의문에 의문을 꼬리가 꼬리를 물며 사람의 가슴을 애태우게 하던 살인 사건이 그래도 시간으로 따지면 손쉽게 끝이 난 것이다.
이번 사건에도 문호로 하여금 사건을 풀게 한 일등 공로자는 역시 형규였다. 타다 남은 꽁초를 부벼끄고 다시 서울로 차를 몰았다.
'진남포가 죽지 말아야 할텐데.'

문호가 갑자기 천안으로 내려갔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앉아 기다리던 형규가 11시가 다 되어 얼굴에 만면의 웃음을 지으며 돌아오는 문호와 만났다. 흥분된 모습이나 표정으로 보아 무엇인가 잘되어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맞아 주었다.
"이봐, 형규. 도와 줘서 고마워."
"이 친구 툭하면 고맙다는 소리는."
"범 인이 밝혀졌어."
"범인이? 누구야?"
"진남포."
"..."
"문제의 해결 시발은 아무래도 진남포의 자해를 가정했을 때부터로 보아야 할거야. 모든 미스터리는 다 풀렸어, 진남포의 고백만 남아있어."
"그럼, 범인이, 아니 진남포가 열차 내에서 사라진 방법과 집으로 돌아온 시간을 맞춰놓았다는 거야? 애꾸 문제하고? “
"제길, 장난 같은 짓에 속은 거지."
"어떻게 된 거야, 사라진 방법이?"
"진남포? 대단한 사람이야. 자네 부산에서 진남포 취재할때 들은 얘기 생각나지 않아? 파도파하고 자갈치파가 싸울 때 진남포가 짜놓은 작전 때문에 파도파가 번번이 당했다던 것 말야. 얼굴보다 머리가 몇 수 높은 사람이야."
"어떻게 된 건데, 빨리 말해 봐. 이거야 답답해서 살 수가 있나."
문호는 사건의 전모를 천천히 들려 주기 시작했다. 시계가 11시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남포는 말야..."
"..."
"5시간 30분이야."
"뭐? 5시간 30분?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문호는 수첩에서 꼬깃꼬깃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진남포가 고강진을 살해한 동기는 물론 법정에서 자세히 밝혀지겠지만 내용은 아마도 지 실장이 이야기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으리라고 추측했다. 25, 6년의 관록 붙은 노배우가 애송이 배우한테 갖가지 수모를 다 겪으며 동생과 자기의 생활을 보호하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살해한 것이 틀림없었다.
진남포는 고강진을 살해하고 열차 속에서 귀신같이 사라졌다가 아파트로 돌아와 자해한 후 입원하여 알리바이를 완벽하게 성립시키는데 불과 5시간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사건 해결의 기폭제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자해 확인'이었다. 별것 아닌 영화에서 얻은 힌트가 사건을 일사천리로 해결하게 만든 것이다.
그것을 토대로 문호는 형규가 최초에 작성한 시간도표를 참고 삼아 세심한 주의와 치밀한 계산 하에 진남포의 하룻밤 행동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첫째: 진남포와 고강진의 위치, 즉 W호텔 근처에 있는 그의 별장을 찾아간 의문은 이렇다. 사건 당일 '쇼는 즐거워'의 리허설 자리에 부드럽게 나타나기 위해 대본을 가지러오는 방법을 택했고 거기서 고강진과 이화영의 싸움을 목격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싸움의 발단도 진남포가 고강진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 이 싸움을 일으키게 한것으로 추리할 수 있었다. 이때 흥분한 고강진이 집으로 가지 않고 별장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아파트로 돌아오며 계획된 살인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강진을 해치우리라 마음먹고 집으로 가던 발길을 돌려 동생에게로 먼저 갔다. 실패하는 경우 자살이라도 해버릴 결심이었을것이다. 동생과 만났을때 '애송이 같은 자식 해치우겠다'고 한 애송이는 고강진을 지칭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 말을 같은 안마소 직원이 듣고 최찬일에게 진술한 것은 이미 수집된 정보였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며 아파트 경비원에게 자기가 집으로 들어감을 확인 시켜 준다. '이때가 19시 40분이었다.'

둘째: 경비원이 순찰을 돌 때 진남포의 방에서 연습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 다음과 같다. 즉 방으로 돌아온 진남포는 평소 가지고 있던 대형 가방에 바바리를 넣고 이를 둘둘말아 작은 부피로 만들고 19시 40분경 베란다를 이용, 아파트를 빠져나온다. 나올 때 만일에 대비하여 연습한 녹음을 틀어 놓고 나온다. '후에 이 테이프는 이미 촬영이 끝나 연습할 필요가 없는 대사임이 밝혀졌다.' 아파트를 나온 진남포는 고강진이 돌아올 별장 근처에 숨어 있다가 습격하여 목눌러 죽인 후 전날 미리 준비한 125열차 침대차에 승차한다. 여기서 점표원이 그를 애꾸로 본다. '이때가 21시 45분이다.'

셋째: 서울을 떠난 열차가 천안에 도착한 것은 정각 23시였다. 그 동안 진남포를 목격한 사람은 베이지색 바바리 여인, 성기준, 신부, 승무원 등이다. 이들은 애꾸 시비로 옥신각신 하게 된다. 열차가 천안에 도착하자 진남포는 천안에서 내려 역에서 대기하고 있는영업용 택시를 대절하여 서울 아파트로 온다. 그러나 경비원의 눈을 피하기 위해 미리 준비했던 바바리 옷을 걸쳐입어 몸을 뚱뚱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베란다를 이용 방으로 들어온다. 이때 갈매기 주점 주모의 눈에 발각되어 '뚱뚱한 사람'으로 오인받는다. 방으로 돌아온후 과일을 들고 경비실을 방문하여 계속 아파트 내에 있었음을 확인케 한다.
'이 때가 12시 50분이었다.'

넷째 경비원에게 '머리가 아파 바람 쐬러간다'며 밖으로 나가 준비한 칼로 자해한 다음 경비실로 쫓아와 '어떤 놈이 어떤 놈이'하며 쓰러져 입원케 만든다. '이때가 다음날 새벽 1시 10분경이 된다.'

즉 1번 19시 40분부터 4번 새벽 1시 10분까지 꼭 5시간 30분이 라는 시간을 이용한 것이다.
문호의 치밀한 계산이나 정확한 추리에는 무리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설명 부분은 하나도 기록되지 않았다. 문호의 기록을 보며 형규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추리도 좋고 논리도 좋아, 그런데 진짜는 하나도 없잖아?"
"진짜라니?"
"아, 왜 애꾸 사건과 증발 사건 말야. 그 트릭을 깨지 못하고야 말짱 도로아미타불 아니겠어?"
"사실 그게 이번 사건의 초점이지.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니었는데 말야... 진남포는 이번 살인을 계획하면서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또 고안해 냈어. 첫째, 11월 29일 밤 안개가 많이 낄 것이리라는 예보를 입수했고 또 트릭을 연구한 거야. 방에 녹음기를 틀어놓고 불을 켜놓고 나간다든지 하는. 애꾸도 담배 연기도 전부 장난이야, 장난. 그놈의 녹음기 장난 때문에 고생했지만 진남포는 또 그것 때문에 꼬릴 잡혔잖아. 그런데 담배 연기로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만든 것은 참 기막힌 장난이었지. 콜라병 그거였어. 허참 기가 막혀."
"담배 연기와 콜라병?"
"음, 자네도 알다시피 사고 현장에는 담배 꽁초 하나, 빈 콜라병이 나왔었지. 내가 그 곳에서 수거한 물건들을 조사했을때 나타난 거였지, 그런데 담배 꽁초까지 발견되었는데 왜 콜라병엔 뚜껑이 없었을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당연히 나왔어야 하는 건데 뚜껑을 창밖으로 버릴 이유가 없거든. 재떨이가 비치되어 있으니까 말이야. 거기다가 콜라병 속이 완전히 메말라 있었어... 콜라를 마신 것이라면 속에 콜라 한 방울쯤 남아 있던가 아니면 습기라도 있어야 하는데, 나는 여기서 이 콜라병은 처음부터 비어 있는 병이다 하고 판단을 내렸어."
"아니, 빈 병을 왜 가지고 왔을까?"
"자넨 진남포보다 둔재구만. 성기준에게 담뱃불을 얻어 담배를 피우며 연기를 콜라병에 담아 두었던 거야. 천안에서 내리며 막았던 연기를 풀어놓은 거지."
"아! 그랬었구나. 거참!"
형규는 그저 놀라고만 있을 뿐이었다, 진남포가 그렇게까지 치밀한 계산 하에 살인을 저질렀으리라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잠깐 무엇을 생각하더니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다.
"그럼, 그건 어떻게 된 거야?"
"뭐? 또 있어?"
"있지, 신발. 사람이 신발과 함께 사라졌잖아. 승무원이 돌아볼 때는 분명히 신발이 있었다고 했잖아?"
"신발, 사실 담배 연기보다 더 날 괴롭힌 건 신발이었어. 그것 때문에 제일 고심했지. 그렇게 간단한 걸 가지고."
"간단한 걸 가지고?"
"음, 참 나 기가 막혀 왜 내가 그걸 일찍 못 알았는지 몰라.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침대 열차에 승차한 사람은 천안에서 내릴 사람이 하나도 없었거든. 복도고 뭐고 조용할 수밖에 없지. 천안에서 내리면서 성기준의 구두를 슬그머니 자기 앞자리에 끌어다 놓은 거야. 침대 밑에는 열차에서 준비해 준 슬리퍼도 많으니 누가 눈여겨보나. 또 승무원도 내릴 사람 신발에나 관심 두지 딴 사람 신발까지 신경 쓰지는 않거든. 하필이면 대전 도착 직전에 화장실을 가려던 성기준 씨가 슬리퍼를 신다가 자기 신발이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당겨다 놓은 거지, 왜 바바리 여인도 신발을 밟았다고 했잖아. 그 방법을 천안에 내리면서 다른 용도로 써먹은 거야."
"그럼 애꾸 사건은?"
"애꾸? 이봐 진남포 직업이 뭐아? 액션 배우라고, 액션 배우. 자네 영화도 안 봐? 배우가 애꾸 만드는거 잠간이야. 콘택트에 흰 물감칠을 해서 끼우면 영락없는 애꾸가 되지. 더구나 약간 나이들게 분장하는 것쯤이야 20년이 넘는 배우 생활에 그거 하나 못하겠어."
애꾸가 콘택트를 이용한 트릭이었다는 말에 그만 형규도 자지러들고 말았다. 콘택트를 끼었다 벗었다 했을 테니 애꾸다,
아니다 하고 시비가 붙을 수밖에. 애꿎은 성기준 씨만 녹아난 셈이 되었다.
"그런데 천안은 왜 갔었어?"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어. 그런데 내가 천안을 가기 전에 먼저 들른 곳이 있었어. 진남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방이었지."
"진남포 방엔 왜?"
"수색이지, 가택 수색. 미처 영장을 못 받아 임의 집행했어, 물론 수확이 있었지."
"..."
"횐 물감이 그려진 콘택트 렌즈, 녹음테이프, 칼은 못 찾았어."
"..."
"자, 이제부터 천안에 갔다온 얘기를 할께, 첫째 이유는 그가 천안에서 내릴 때 어떤 방법으로 역을 빠져나왔을까 하는 의문을 풀기 위해서였지. 그는 처음부터 125편 열차의 침대 차표와 특급 천안행 차표 두 장을 준비한 거야. 서울역에서 탈 때는 침대표를 내밀었고 천안에서 내릴 때는 특급표를 주었지. 천안에서 조사한게 바로 특급 열차표였어. 무엇이냐 하면 최초 승차할 때는 검표원이 티켓에 구멍을 뚫어 확인해 주거든. 그런데 진남포는 침대 차표를 내밀었기 때문에 특급 차표에는 구멍이 없으리라 판단했지. 바로 이거야."
문호는 천안에서 가져온 표를 보여주었다. 서울-천안 특급 차표였다. 날짜를 보니 11윌 29일이 틀림없었고 방금 문호의 말대로 표에는 어떤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문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두 번째 이유는 천안에서 어떤 방법으로 서울에 왔을까 하는 것을 조사하자는게 목적이었어. 그가 천안에서 내린 밤 11시에는 기차도 버스도 막차가 다 끊어진 뒤였거던. 서울에 빨리는 와야겠고... 그래서 그곳에 있는 영업용을 대절한 거야.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마포까지 대절한 승용차가 나타났어. 대가리에 별모양의 마크가 달렸더군. 갈매기 주점 주모가 본게 바로 그 차였어. 결국 이번에 제일 재수 없었던 것은 하필 진남포 앞에 타고 있던 성기준 씨였지, 내일은 사과하러 한 번 가야겠어."
"그런데 진남포는 왜 고강진 목을 물어뜯었을까?"
"그 사람 흥분하면 이성을 잃어. 어려서부터 눌려 왔고 불행하게 자라온 압박감 때문에 생긴 성격인데다 음성 매독 환자들은 뇌손상도 입게 마련이거든.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물어뜯은 거지. 왜 네가 취재했지. 진남포 부모가 다 이상하게 머리털이 빠지고 피부가 곪는 병을 앓다 죽었다고, 그게 매독 증상이야. 자 이제 그만 해두고 진남포한테나 가보자구. 살인은 했지만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야."
둘은 천천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자정이 넘었는데도 차량이나 사람들은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처음 하루이틀은 그래도 진남포 병실을 찾는 사람이 있었지만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누구도 찾는 이가 없었다. 꽃도 시들고 다른 환자들도 퇴원하여 혼자만이 썰렁하게 누워 있었다.
진 형사가 로비에서 웅크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빨리 퇴원시켜 검찰에 넘기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쓸쓸한 감정을 누를 수는 없었다.
형규와 문호와 진 형사는 407호실 병실 문을 열려고 흔들었지만 안에서 잠그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은 문호는 병원측에 이 사실을 알리고 열쇠를 뜯고 들어갔다.
진남포는 침대에서 모포를 머리까지 뒤덮어쓰고 잠들어 있었다.
간호원이 조심스럽게 담요를 벗기다 말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빈병을 깨어 동맥을 자르고 자살을 한것이었다.
왼손에는 찢어진 신문지가 한 장 쥐어져 있었다. 신문 구석에는 어떤 여자 안마사가 부산 동백섬에서 자살했다는 기사가 나 있었다.
머리맡엔 볼펜으로 쓴 서투른 글씨의 유서가 남겨져 있었다. 지대로 실장 앞으로 적은 것이었다.
--지 실장님 고강진에게서 상상 이외의 정신 타격을 입고 1년을 버티어 왔었습니다. 모든 걸 용서해 주십시오-- 그뿐이었다.
모든 것은 침묵 속으로 사라져 갔다. 고강진도 진남포도 박영숙도 남은 것은 오직 싸늘한 침묵뿐이었다.

작가의 말
(1)
1983년 12월 5일. 장편 추리소설 '덫'을 발표하여 독자들의 뜨거운 성원을 받으며 국내 추리소설 붐을 일으켰다. 데뷔작의 생각지도 않았던 대단한 반응을 생각한다면 '덫'은 내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덫'을 꼽는 것을 주저하는 것은 바로 이 '5시간 30분'이라는 소설 때문이다. '덫'과 '5시간 30분'은 같은 시기에 동시 집필된 작품이다.
나는 왜 이 작품에 그토록 집착하여 애정을 식히지 못하는가. 적어도 추리소설이 갖는 완벽한 트릭과 문학성, 시계 부속같은 정밀성에 있어 아직 국내에서는 이만한 완전도를 갖춘 작품이 없을 것이라는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는 시간 싸움이 이 소설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서울에서 벌어진 조연급 탤런트 피습사건과 달리는 경부선 열차에서연기처럼 사라진 애꾸눈,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발견된 톱 탤런트 고강진의 시체.
서울과 대전에서 동시에 일어난 두 사건의 연결성과 시간이 엮어 내는 교묘한 트릭은 결코 독자 여러분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은 추리소설하면 폭력과 섹스의 뒤범벅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부순 작품이기도 하다.
오로지 이해할 수 없는 미스테리적 사건 발단과 추리에 의한 범인 추적, 그리고 비참하고 불행했던 범인의 과거만이 이 소설의 전부이다.
120km의 초고속으로 달리는 경부선 특급열차에서 단 5분만에 사라진 범인은 2시간 동안 어디서 또 무엇을 했는지 함께 탐정이 되어 추리해 나가보자.

(2)
'5시간 30분'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면 데뷔작이나 다름없는 작품이어서 문장력이 다소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능력을 저울질 하는 뜻에서 몇군데 손질만 했을 뿐 거의 그대로 재출판한다. 아직 추리소설을 읽어보지 않으신 분, 혹은 폭력과 섹스에 싫증을 느끼신 추리문학 애호가가 있으시다면 자신있게 권하고 싶다.
84년 5월에 선보인 작품이니 횟수로 거의 7년이 가까워온다. 표지 장정을 다시 하고 새 출판하게 되어 여간 기쁘지 않다. 기꺼이 출판 해 주신 (심지)와 독자 제위께 거듭 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990년 11월 30일
정건섭

'5시간 30분' 이렇게 평한다.

#1 '덫'이라는 수준급 소설이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우리 문화풍토도 다른 이유로 어느 면에서 조금 변이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만일 이러한 견해가 타당하다면 문화풍토의 변이를 따져보는 일이 그 하나이고 작가 정건섭을 분석해 보는 것이 그 다른 하나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석해 볼수 있는 것은 정건섭의 작품 '5시간 30분'이다...(문학평론가 김윤식)

#2 부담없이 읽을 수 있고 여운도 은은... 진범잡는 생생한 드라마 '5시간 30분'... 리얼하게 그려진 관심 모은 추리소설(동아일보)

#3 흥미위주의 추리소설을 탈피, 고도의 범죄수법과 이를 지능으로 검거하는 추리력을 동원하였으며 기계처럼 정밀한 구성과 인간의 감성을 찌르는 비극을 그려감으로써 문학적 향기가 넘치는 추리소설로 전개시켰다. 사회와 인간 내면의 갈등, 섬세한 심리묘사로 세계추리문학에 도전하겠다는 야심으로 제작된 작품...(주간경향)

#4 2탄 '5시간 30분'서 추리물의 진가보여... '5시간 30분'은 나 자신도 뽐내고 싶은 수준작입니다. 계속 정진해서 더 좋은 추리소설을 쓰고 싶습니다.'짙은 안개 속의 열차 살인사건, 달리는 열차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애꾸눈의 사나이는... (주간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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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12 (♡.123.♡.178) - 2022/02/15 11:04:58

정건섭 제2의 찬스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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