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우 - 불새 밤에 죽다 2

3학년2반 | 2022.02.16 07:55:17 댓글: 0 조회: 648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214
불새 밤에 죽다


사. 탈무골의 달
광준은 약속대로 곽정자와 함께 탈무골로가기로 했다.
"미스곽, 빨리 갑시다."
광준이 먼저 간단한 행장을 챙기고 거실로 나와 미스곽을 독촉했다.
돋보이게 했다. 붉은 줄 무늬의 횐 바탕은 그녀의 유방을 강조하는데 큰 몫을 했다.
담백한 아름다움. 티없는 얼굴. 육감적인 몸매. 거기에 후광처럼 은은한 지성미를 풍긴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이 있을까?
"참 멋져요."
광준이 멀거니 정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았다.
"아이, 김선생님도 뭘 그렇게 보셔요. 부끄러워요."
미스곽은 아닌게 아니라 얼굴이 상기되었다.
"꼭 즐거운 소풍이라도 떠나는 것 같군요."
소풍? 그렇다. 광준에겐 불행하고 암담하던 어린 절에나 있었던 소풍이지만 그 날만은 즐거
웠었다. 봉제공장에 다니던 누나 김을숙 여사가 그날만은 일찍 일어나 김밥을 말아주고 ,
옥수수 삶은거랑 사과 두세개를 보자기에 싸들려주고 몇 닢의 동전도 쥐 어 주며 잘 놀다
오라고 당부하던 그 정겹던 모습이 뇌리를 번개처럼 스쳐갔다.
"빨리가셔요."
이번에 정자가 재촉을 했다.
"무슨가방이 그렇게 큽니까?"
"며칠이 걸릴지 몰라서 옷가지를 좀 챙겼지요. 김선생님 허드레옷과 내의도..."
"예? 제 내의를요?"
광준은 자기 목소리가 너무 겼다고 생각했다.
"예. 오전에 제가수퍼에 나가서 몇가지 사가지고 왔어요."
광준의 목소리에 비해 정자의 목소리는 부끄러움으로 더욱 기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들은 마치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랑 신부와도 같은 야릇한
기대와 조금은 흥분된 마음으로 아파트를 나섰다.
누님을 죽인 원수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나, 모레, 음력 십팔일 새땐이면 죽음의 마신이
찾아올 것이라는 정자의 공포가 이순간만은 다 떠나버렸다.
그들은 고 속버스와 완행버스를 번갈아 타면서 탈무골 입구의
조그만 읍인 경북 금능군의 대곡에 닿았다. 거기서 탈무골은 삼십리 남짓하지만 늦어서 들
어갈수가 없었다.
대곡은 원래 대곡사라는 명찰로가는 입구라서 여름철이면 피서객이 많이 찾는곳이다. 폭은
좁지만계곡이 깊은 강이 있고 바위와 산이수려해서 부호들의 별장도 더러 있는 곳이
"정자씨 오늘은 할수 없이 여기서 하룻밤 자야겠군요."
광준은 정류장 건너편에 있는, 이 골짜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호텔을 건너다보았다. 빨간 네온으로 빛나는 온천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저 여관에 들어갑시다."
정자는 여전히 아무 말도 않고 뒤를 따라왔다. 차 안에서부터
씹던 껌을 소리까지 내면서 짝짝 씹어댔다. 즐겁다는 표시인 것
같았다.
그들은 서로 어색한 동작을 감추지 못하며 호텔인지 여관인지의 문을 들어섰다. 여자를 데
리고 호텔로 들어서는 심성이 이런것인가 하고 느끼는 광준은 공연히 무슨 죄를 짓는 것 같
았다.
"어서오이소." 프론트에서 주간지를 뒤적이고 있던 보이 녀석이 억센경상도사투리로떠들면
서 벌떡 일어섰다. "경치좋은 방이 있음더. 서울서 오셨지얘." 녀석은 여전히수선을 떤다.
"따듯한 방 두개를 주십시오." 광준이 성큼 다가서며 용기를 내 말했다. "방을 둘이나 쓰실
라고예?" 녀석은 광준과 정자를 번갈아 훑어보며 의아스럽다는 표정이다. "왜 방이 없습니
까?" "아니 없다뇨. 모두 텅텅 비어있음더. 오늘 주무시는 손님은 조금전에 오신 두분뿐이
라예. 이층방이 따듯하이깨 그리 드시소. 목욕탕도 붙어 있고예. 이곳 온천물이 기똥찹니
더." 녀석은 광준이 들고있는 커다란가방을 뺏다시피 들고 이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녀석은
이층에 나란히 붙은 방 두개의 문을 따주면서 줄곧 이상한 남녀란듯이 쳐다봤다. "이까지
오시가꼬 왜 돈 더들이고 방을 따로따로 쓰십니꺼."" 우리야 뭐 돈 더 받이이께 좋지만서
두." 녀석은 개속 남의 일에 참견하려고 들었다. "정자씨 옷갈아입고 밑에 로비로 나오세
요. 어디가서 저녀기나 먹어놔야지요." 광준이 보이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요즘은
철이아니라서 우리 식당은 안합니더.요 건너편에 김천 식당이 있는데 거기가서 저녁 잡숫고
오이소. 그 대신 내일 아침은 우리 식당서 합니더. 딴 손님이 몇 분 있으이께예."
녀석은 히죽 웃어 보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광준은 손발을 닦은 뒤 대강 세수를 하고로비로 나갔다. 텅비고 을씨년스런 소파에 정자가
벌써 나와 얌전히 앉아 있었다.
초록색 바바리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이가가르쳐 준 식 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전에 이 여관에 들른 적이 있어요."
정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회장님하고 탈무골 다녀오다가 차가 챌기는 바람에 여기서
하룻밤 묵고 갔어요. 그땐 한여름이라 피서철이 되어서 그런지
방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겨우 방 하나를 얻어서 둘이 자고 간적이 있어요. 오늘도 그때 같
았다면 방은 하나밖에 못 얻었을것 아녜요?"
광준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랬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예? 아이 짓궂기는..."
정자는 금방 홍조를 띠며 입을가리고 웃었다.
"저녁에 무서워서 어떻게 혼자 자죠?"
정자가 자못 심각하게 말했다.
"문을 잠그고 자요. 내가 옆방에서 지켜 드리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럼 열두 시까지만 우리 함께 있어요. 제 방에서 얘기나 하다가 가서 자기로 하죠."
광준은 말해놓고도 엉뚱한 제의를 했다고 생각했다. "김선생님을 믿을수 있어요? 회장님은
늘 사내는 틈만있으면 덤벼드는 승냥이라고 말씀하시던데..." "누님이 그랬어요? 하하하
" "호호호" 둘은 유퇘하게 웃었다. "승냥이도승냥이 나름이지요. 승냥이가 뭐 체면차린대
요?" 미스곽은 곱게 눈을 흘겨보였다. 저녁을 먹고난 그들은 곧 호텔로 돌아왔다. 바깥날씨
가 의외로 쌀쌀하기 ㄸ문에 거리를 걸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들은 광준의 말대로 광준의
방에 함께 들어왔다. 더블 침대옆에 놓인 간이 소파에 마주 앉았다. 자못 어색한 공기가 꼭
꼭 닫은 창문 안에서 맴돌았다. "정자씨는 연애해본일 있으세요?" 광준이 어색한 분위기를
바꿀 양으로 말을 걸었다. "승냥이는 대개 첫질문을 그렇게 한대요." 정자는 짐짓 옷긴을
여미며 대꾸했다. "그것도 느님이가르쳐주셨나요?"" 아뇨. 소설책에서 봤어요." "그때 대답
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승냥이와 싸울 생각이 있으면 경험이 있다고 대답하구요. 싸우지
않고 항복할 생각이면 고개만 흔드는 거래요" "허허허. 그래 정자씨는 어느쪽입니까?" "고
개만 흔들었으면 좋겠는데 회장님께 꾸중들을까봐 못하겠어요."
"회장님은 돌아가셨는데..."
그 말을 하다가 둘은 자세가 굳어졌다. 그렇다. 우리가 무엇때문에 이곳에 와 있는데 실없
는 소리나 하고 있단 말인가?
그 생각이 동시에 두 사람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는 그만가서 자겠어요. 차에 시달려 피곤하실 테니 김선생님도 주무셔요, 내일 아침 일
찍 식당에서만나요."
미스곽이 단호하게 말하고 벌떡 일어섰다.
"제가 바래다 드리지요."
광준도 따라 일어나 옆의 정자 방으로 들어갔다. 불이 꺼져 깜깜했다. 광준이 변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는다는 것이 벽 아닌
미스곽의가슴에 손이 닿고 말았다.
"정자씨..."
광준은 갑자기 그 손을 허리 뒤로 돌려 끌어 안았다. 그리고
번개같이 양팔에 정자를 껴안고 입술을 더듬었다.
"아... 아니..."
너무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정자는 자기 의사를 표현할 기회가 없었다. 뿐 아니라 너무
뜻밖이라 어떻게 할 줄을 몰라 하다가 벽 스위치를 급히 눌러 불을 켜 버렸다.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자 광준은 주춤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가 주세요."
미스곽이 어느 틈에 광준의 양닺에서 빠져나오며 뾰루퉁해졌다.
"정자씨!"
"아무 얘기도 듣고 싶지 않아요. 나가 주시면 돼요!"
너무도 앙칼지 고 또렷한 목소리에 기가 죽은 광준은 아무 말도 하지못하고 그 방을 나와
버렸다.
혼자 오두마니 빈 방에 남은 정자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형언할수 없는 야릇한 심정이었다. 왜 광준을 쫓아내 버렸는지
자기 심사를 자기도 이해할수가 없었다. 거부하는 몸짓은 여성의 숙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을 했다.
두근거리는가슴과 후회와 한켠으로 몰려 오는 야릇한 충격을
삭일 양으로 침대 시트를 들치고 드러누워 버렸다.
이튿날 아침 광준과 정자는 호텔 아래층 식탁에 마주앉았다.
서로 어젯밤의 해프닝을 의식해서 인지 두 사람은 더욱 어색해했다. 그러 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약간 상기 된 정자의
모습은 갑자기 행복해진 사람의 모습 그대로다.
슬금슬금 곁눈질로 정자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광준은 잡지가
눈이 동그레졌다. 정자의 어깨 너머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은 뜻밖에도 서울 시경의
추경감이었다. 뿐 아니라 뒤에는 강형사가 바둑이처럼 추경감을 따라 들어섰다.
"아니, 저 사람들이...,."
광준이 숟가락을 든 채 굳어지자 정자도 깜한 놀라 뒤를 돌아다봤다.
"아이고 이거 김광준씨 아뇨? 아니 미스곽까지..."
추경감이 함박웃음을 웃으며 반갑게 다가왔다.
"이 골짜기에 웬일들이슈."
강형사도 거들었다.
광준은 엉거주춤 일어나 추경감이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했"설마 두 분이 사랑의 도피를
한 것은 아닐 테고..."
추경감이 옆 테이블에 앉으며 장난기어린 말을 건넸다.
"경감님과 강형사님이야말로 여기 웬일이십니까? 설마 이번에도 저를 미행한 것운 아니겠
죠?"
광준이 정신을 차린 뒤 쏘아붙였다.
"미행이라뇨.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김천에 출장 왔다가
여기 경치 좋은 곳이 있다기에 잠깐 들른 것입니다."
추경감이 주름투성이 얼굴에 연방 미소를 지으며 능글능글하게 능청을 떨었다.
"거짓말 마슈. 우릴 미행한게 틀림없어요. 도대체 무엇때문에 날 쫓아다니는 겁니까´ 경찰
관이 그렇게 할 일이 없으심니까?"
"오해하지 마십쇼. 전 한 번도 김선생과 곽정자씨를 미행한일이 없습니다. 아니. 처녀 총각
이 경치 좋은 곳 찾아 밀어를 나누리 다니는데 아무리 눈치 없는 경찰관이기로소니 미행을
하겠습니까?"
"말을 좀 삼가 주세요. 우리가 뭐할 없이 사랑놀음이나 하러 다니는 줄 아세요?"
정자가 더 못 듣겠다는듯이 묄아붙였다.
"그게 아닙니까?"
"아아, 그렇다면 취소하겠습니다."
강형사가 금방 사과하는 태도다.
"도대체 여긴 뭣하러 왔습니까? 혹시 탈무골에가시는 건 아닌지요."
추경감이 정곡을 찔렀다.
"그렇습니다. 살인범 을 찾는 단서가 혹시 있을지 몰라 가보는것입니다. 같이 가시겠습니
까?"
광준은 기왕 이렇게 된 일, 더 적극적으로 나왔다.
"어떻습니까? 아침 먹고 같이가시지 않겠습니까?"
"아아, 아뇨. 우린 이곳 대곡사나 좁 들렀다가 김천으로 나가야 합니다."
"거짓말 하지 마십쇼. 탈무골에서 마주쳐 서로 겸연쩍어하지말고 같이가시죠."
광준도 지지는 않았다.
"천만의 말씀. 넘겨집지 마십쇼. 이래봬도 제 직업이 형사구요. 경찰관 생활 이팔년째입니
다."
너무 딱 잡아떼자 광준은 정발 그들과 우연히 여기서 마주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 어서 아침 식사나 드시죠."
추경감과 강형사는 대수롭지 않다는듯이 국에 밥을 말아 훌훌 마셔댔다,
"누님 피살사건의수사는 어떻게 돼가는 겁니까?"
광준은 영 분이 풀리지 않아 다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아... 그 김을숙 여사 실종사건 말입니까? 전국에 수배를 해놨으니 머지 않아 무슨 단서
가 나올겁니다. 저 희도 힘 쓰는 대로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능글맞은 녀석을 보았다. 광준은 물어본 자신이 잘못이란듯 입을 봉하고 말았다.
광준은 정자를 끌다시피하고 식당을 나와 버렸다.
"서울서만납시다."
나오는 광준과 정자의 등뒤에 대고 추경감이 인사말을 던졌다.
광준과 정자는 호텔을 나와 택시를 하나 전세냈다.
보이 녀석이 희한한 청춘남녀도 다 봤다는듯이 연방 히죽거리며 택시 문을 열어 주었다.
대곡읍에서 탈무골로가는 길은 꽤 험했지만 경치는 그만이었다. 아스팔트가 돼 있지 않아
엉덩방아를 계속 찌어대며 시속
이십킬로 정도의 느린 속도로 차가 달렸다.
"이거 좀 드세요."
정자가 핸드백을 열고 과자를 꺼내 손바닥에 얹고 광준의 턱밑에 갖다댔다.
"이건 어디서 났어요?"
"서울서 올때가져왔어요. 오래 차를 타고가면 출출할 것 같아서..."
광준은 정자의 용의주도함에 감탄했다.
하얗고 조그만 손바닥이 더 없이 귀여워 보였다.
"탈무골에가면 아시는 분이 있어요?"
"아는 사람? 글쎄 너무 오래 돼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무당할머니도 날 못 알아볼 거고. 하지만 몇몇 노인네를 나는 알아볼수 있을 거
야. 자기들은 내가 워낙 어릴때 나왔기때문에 모르겠지만, 나는 알아볼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마을에 들어서서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글쎄, 우선 내가 난 생가나 한 번 들러보고 , 그 담에 백순조무당이나 좀만나봐야죠."
"무당을요? "
정자가 놀라는 기색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무당이 괴상한 예언을 했다니까 그걸 좀
캐 봐야겠는데요."
"전 같이가지 않을래요."
정자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스쳤다.
"괜찮아요. 현대 여성이 까짓 미신을 그렇게 마음에 끼고 있을것 없어요. 우리가 뭣때문에
왔는지 무당은 알 턱이 없어요."
차가 뒤뚱거리며 고개를 넘지 자그마한 탈무강이 한눈에 보였다.
가물어서 그런지 강에는 물줄기가 어린애 오줌 줄기만큼가냘프게 쫄쫄거리고 있었다. 그러
나 강 옆으로 치솟은 벼랑이며 그벼랑 위에 선 온갖 풍상을 다 겪은 것같이 뒤틀린 소나무
는 여전히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듯했다.
광준은 한눈에 펼쳐지는 강 건너의 옛고향 마을을 보자가슴이 벅차올랐다.
여섯 살때 철모르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건너던 그 강이다 그때 어머니는 머
리를 감싼 명주수건으로 계속 눈물을 찍어내며 탈무골을 뒤돌아보고 뒤돌아보고 했다.
그때 을숙누나도 따라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버지는 아무말도 않고 대강 챙겨 실은 이삿
짐 달구지를 끌고 있었다.
왜 그런 절망적인 행색으로 일가가 탈무골을 떠나야만 했던지 광준은 아직도 그 이유를 모
른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은 그때 동네에서 추방당한 것이란 것뿐이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떤 일을 저
질러 동네에 살수 없게 되었을 것이란 짐작만을 하고 있었다. 광준은 물론 누님인 김을숙에
게 그때 상황을 한 번도 물어 본 일이 없다.
아프고 슬픈 추억의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심사때문인지도 모른다.
두 남매는 고아처럼 온갖 고생을 헤치고 살면서 도 그 문제만은 무슨 묵계라도 한듯 한 번
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오직 입에 풀칠하고 세파를 헤쳐나가는 데만 정신이 없었다.
그 어려운 유년 시절을 그래도 빗나가지 않고 배움에만 열중하던 남매였다.
이 곳저 곳 사글세 방을 옮켜다닐때도 이웃사람들은 착한 오누이로 동정했었다.
터덜거리던 택시는 어느덧 탈무강 다리를 건너 동네로 들어섰다.
마을은 날씨 탓인지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볼수가 없었다.
"됐어요. 여기서 세워 주십시오."
동네가운데까지 들어가기 전에 광준과 정자는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려선 채 광준은 동네를 눈으로 한 번 훑어 보았다.
언덕배기에 층층대처럼 서 있는 집들은 어렴풋이 옛날 그때의
모습을 더듬게 했다. 동네 뒤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고목은 그때나 다름이 없었다, 다만
그 뒤로 보이는 무당의 집은 없어지고
커다란 기와집의 대문만이 보였다.
"아니 백무당 집은 없어졌잖아?"
광준이 뜻밖이란듯이 혼잣말을했다.
"저기 큰 기와집이 무당집이잖아요."
정자가 손가락으로가리켰다. "그래요 그럼 옛날 집은 헐어버리고 새로 지은 겁니까?" "그건
모르지만 하여튼 저 커다란 집이 백순조 무당이 사는 집이예요." "그렇게 됐군요. 무당할멈
이 큰 부자가 된 모양이죠?" 광준은 참으로 신기했다. "저 집에가면 사랑채 같은게 있는데
대개 이곳에 들른 낯선 사람들은 거기서 쉬다 간대요. 말하자면 동네 응접실 같은 곳이에
요. 저 무당집 울타리 안에 집이 세채나 있어요. 하나는 무당이 자기 신을 모셔놓은 곳이고
한채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당이란 곳이고 또 한채, 대문 옆에 있는 집은 동네 사랑방같
은 곳이래요. 저번에 회장님과 왔을때도 그곳에서 하룻밤 자고 갔어요." 정자가 자세히 설
명을 했다. "그럼 우선 그리로가봅시다." 광준이가방을 들고 앞장 섰다. 그들이 고목나무
앞까지 오는 동안 동네 사람은 아무도만나지 못했다. 광준은 무당의 집에서 우선 방 두칸을
빌렸다. 무당의 집은 이십여년전 광준이 보았을때와는 완연히 달랐다. 위치는 그곳인듯한데
그때의 집 모습은 오데간데 없고 널찍하고 어마어마한 부잣집 대가 처럼 변해있었다. 행랑
채처럼 대문 입구에 서너칸의 집이 한채서있고 그위 산기슭쪽으로 조금 높은 곳에 당이라는
곳과 무당이 사는 본채가 따로 있었다. 행랑채와 본채의가운데는 널찍한 아담이 마련되어
있고 마당 곁으로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그 대나무숲은 어릴때 본 그대로였다.
방을 비는 것도 아주수월했다. 정자가 안채에 올라가 백순조 무당할머니한테 얘기해서 쉽게
허락을받았다. 무당할머니와 정자는 전부터 안연이 있었기때문이리라.
"내가 누구라고 얘기를 했나요?"
우선 마루에 걸터앉은 광준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정자를
보고 물었다.
" 아뇨."
"그럼 물어보지도 않던가요?"
"새를 연구하는 학교선생님이라고 그랬어요. 이 지방에 사는
조류를 관찰하러 왔다고 했죠."
"잘도 둘러대는군. 내가 무슨 새를 연구한단 말입니까?"
"따지고 보면 영 관계 없는 것도 아니라구요. 우리 회장님이
여기 오셨을때 무당한테 저주받은 타지의 새라는 지적을 받은일이 있었거든요. 무속과 새라
는 것은 옛날부터 야릇한 관계가있어 왔어요."
"하기야 미국에도 멕시칸들이 조롱 속에 새를 넣어가지고 길거리에 나와 새점이라는 것을
치더군요."
"옛날 티베트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는 것으로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요즘도 그쪽 일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잘게 썰어서 새 먹이로 주는 끔찍한풍
속이 남아 있다고 하더군요. 새처럼 휠흴 날아가는 자유를 얻으라는
뜻인지..."
"에엣, 끔찍한 얘기를 눈하나 까딱 않고 술술 하는군..."
"어떤 나라에서는 새를 영생불멸의 상징으로 상기도 해요."
"실제로 있지 않은 상상의 새라는 것도 많이 있다던데요."
"그렇대요. 봉황새나 불사조 같은 것은 실제로 없는 새 아녜요? 또 불새라는 것로 있지요.
이곳저곳에 불을 지르며 다니는 새란 뜻도 있고, 정열의 덩어리란 뜻도 있는 그런 상상의
새지요. 스트라빈스키의 저 유명한 무용조곡 중에 화조라는
것이 있지요. 뒤에 안무가 포권이 일막 이장짜리 발레로만들어
더욱 유명해진 곡이에요."
"정자씨는 동서문물을 모르는 것이 없군요."
"미안해요. 너무 아는 척했어요."
"그럼 우리 새 관칠이나 좀 하러 나갈까요?"
광준이 툇마루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광준은 이십여년만에 찾아온 고향 마을을 좀 둘러보고 싶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음속 깊
숙한 곳에서 잠자던 동심의 세계를 음미하고 싶었다.
그들은 우선 무당집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채 옆에 기역자로 서 있는 당집은 문이 잠켜 있
어 들어갈수가 없었다. 대밭은 하늘을 찌를듯한 대나무가 무성 한 잎으로 정글을 이 루고
있었다. 어두컴컴하고 습윤한 대숲은 어쩐지 들어가보지 꺼림직했다. 금방이라도 부령을 흔
들어대는 표독스런 무녀들이 뛰어나올 것만 같은 약간의 공포가 감도는 그런 숲이었다.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어 대숲이요란하게수다를 떨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를수없이 재잘거리는 것 같았다.
당집의 뒤는 높은 담이 쳐져 있고 그 너머는 뒷산의 숲과 이어져 있었다.
그 산은 탈무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탈무산은 예부터 호랑이가 살고 있다고 해서가끔 무
당이 호식을 막는 굿을 하기도 했다.
"호식굿이란 말 들어봤습니까?"
광준이 어릴때 듣던 말이 얼핏 머리를 스쳐 정자에게 물어
보았다.
정월 보름이 지나고 음력 이월로 접어들면 동네는 "호슥굿"
준비로 한창 들떠 있다. 이 굿은 물론 백순조 무당이 주판을 한다. 이 굿에는 호랑이 역을
할 젊은 장정과, 포수, 마을 이장등이 중요 등장 인물이다. 그 중에도 조수역을 하는 것이
가장 영광된 스타이다. 굿의요지는 마을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잡먹 고 난동을 부리 자
용맹스런 포수가 나와 호랑이와 대결해서 쏘아죽인다는 줄거리다.
여기에 무당과 꽹가리 징, 북을 울리는 각종 쟁이들이 등장하고, 온 동네가 합심해서 제물
이며 먹을 것들을 준비한다.
호랑이의 화를 막는 의식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마을 잔치 같은 것이기도 했다.
광준은 누나 을숙과 함께 이 굿판의 뒷전에 서서 종이탈을 쓰고 사람을 마구 잡아 먹는 호
랑이역의 동네 아저씨며 재담을 늘어놓는 포수며, 날이 번쩍번쩍하는 무당의 칼을 지켜보며
웃지도 하고가슴 조이기도 했다. 굿판이 끝날 무렵 갈라 주는 시루떡을 누나의 치마에 싸
들고 집에 와서 맛있게 먹던 생각이 났다.
"호슥굿이라고 했나요?"
정자가 물었다.
"예. 호식굿이란 말을 그렇게 부른 것 같아요."
"그것은 호탈굿이라고 도 하는데요. 주로 경상도 동해안 지역에 전래되어 온 굿이에요. 뒤
에는 탈굿과 합쳐져서 일종의 풍자굿이 되기도 했죠. 양반을 풍자하고 , 행실 나쁜 남녀를
호되게 꾸짓기도 하는 그런 똘이굿으로 아직도 전해 오고 있어요. 하지만 이 탈무골에는 아
직도 호식굿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라고 회장님이 늘 말씀하셨어요."
"그 얘긴 나중에 더 듣기로 하죠. 난 동네에가서 뭘 좀 알아보고 와야겠어요."
"뭘 어떻게 말죠?"
"글쎄요. 나도 막연합니다. 그러나 이대로 무당집에 죽치고
있다가 갈수는 없지 않습니까? 누님 이 이 마을을 민속 보존 마을로 정하려고 했다면 필시
거기 얽힌 뒷얘기가 있었을 겁니다."
"뒷얘기라뇨?"
"반대를 했다든지 어떤 이권이 관계되어요구 조건이 있었다던지."
"그런 걸 누구한테 물어 볼 작정이에요?"
"글쎄요. 우선 이장님을 찾아가서 좀 알아볼까 해요. 정자씨는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광준은 명령조로 말하고 마을 쪽으로 돌아셨다.
마을 이장은 마침 집에 있었다. 광준이 어릴때 면서기로 다니던 김칠병이라는 노인이었다.
광준은 첫눈에 김칠병을 알아보았으나 그는 광준을 알아보지못했다. 광준이 마을을 떠날때
는 삼십대였던 그도 이젠 환갑을
지낸 노인이 되어 얼굴에 굵은 주름이 여기저기 잡혀 있었다. 했빛에 그을 린 것도 아닌데
검게 탄 얼굴에 희끗희끗한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전형적인 농사꾼의 순박한 얼굴 그대로였다.
"그래 손님은 무슨 일로 이 첩첩산중까지 오셨나요?"
"저어, 새를 좀 관찰하러 왔다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아, 참 그랬었지요짐은 아직 철이 일러 산새들은 보기가 힘들 낍니더. 까치나 까마구나 참
새나 장끼 같은 놈들은 더러 보이지만..."
"저어, 혹시 김을숙씨라고 아시는지요?"
광준이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물었다.
"김을숙이?"
"예, 옛날에 여기 살다가 지금은 서울서 살고 있는..."
"아아 김회장 말씀이군. 김회장 모르는 탈무골 사람이 어디 있읍니 꺼?"
"예. 김회장 말입니다. 제가 김을숙이 동생입니다."
"뭐라카노? 김회장 동생이라고?가만 있자, 그러면 자네가 광준이가?"
노인은 참으로 놀라는 기색이다.
"예. 제가 김광준입니다."
"아이구, 이 사람아, 이게 무슨 일이고 . 이기 몇 년만이고 말이다. 코를 쨀쨀 흘리던 광준
이가 이리 컸다니. 이 사람 반갑네
반가워...,"
김칠병 노인은 광준의 손을 덥썩 잡았다.
김 노인은 지나간 광준의 옛얘기를 묻고 또 묻고 했다. 광준은 적당히 대답하고, 지금은 학
교 생물선생님 노릇을 한다고 얼버 무렸다.
그리고 김회장의 비서와 함께 야생 조수 관찰을 하기 위해 봄방학 동안 여기에 온 것이라고
둘러댔다.
"누님이 이 마을을 민속 보존 마을로만들기 위해 애쓴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거기에 대해 혹
시 들은 일이 있는지요?"
이런저런 얘기 끝에 지나가는 말처럼 광준이 물었다.
"민속 무속 보존 마을이란 거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듣다 마다뿐이겠나. 온 마을이 몇 년 동안 그 일가지고 떠들썩 했는데..."
"떠들썩하다뇨?"
"이젠 우리 마을도 관광 손님 맞아 살판 나게 된다고 들떠서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밌는가 하모, 한쪽에선 이제 마을 다 베리놓는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어."
"베리 놓다니요?"
"아, 글쎄 도시 사람들이 모여들모 기중에는 못된 놈도 있을끼고, 바람꿈도 있을끼고...
그래서 동네 인심 베리고, 아들딸
키우기 힘들게 될 끼다 이런 이야기 아인가베."
"예. 그렇겠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될 끼 뭐 있나. 당님이 신령님께 물어봐서 결정하기로
한거 아이가."
당님이란 백순조 무당을 말하는 것이다. 마을의 의사는
예부터 이런 식으로 무당이 신령께 계시를 받아집행하는게 오랜 관습으로 돼 있었다. 그리
고 그 당님의 말은 아무도 거역하지
못했다. 당님의 말을 거역하면 천벌을 받아 급사하거나 동네를
떠나야만 한다.
그 권능에 대해선 아무도 추호의 의심을 갗지 않는다.
"그래서 신령님이 어떻게 결정을 했습니까?"
"글쎄 그게 좀 얄궂게 됐다 아이가."
"얄궂게 되다뇨?"
김칠병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당님 이 좋다고 허락을 했는데 금년 봄에 와서는 신령님이 절대로 안 된다고 말
씀하셨다 이거야."
"아니 신령님도 이랬다 저랬다 합니까?"
"마을 운세로 봐서 작년에 정부로부터 지정을 받았으면 괜찮은데, 올해부터는 마을 운이 바
뀌어서 안 된다는 거야.만약 고발을 거역하면 마을이 풍지박산된다 카는 기라. 역신한테 잡
혀 병들고 죽고 벼락맞아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아이구 끔찍해라."
"그래서 어떻게 결정이 해습니까?"
"결정이고 뭐고가 어딨노? 당님 말씀 거역할 사람이 어딨노?
하기사 한 사람이 있었지만..."
"한 사람이 있었다구요? 그게 누굽니까?"
"자네가 잘 알라는지 모르겠다. 저 물레방앗간집 아들 근세
라고 아나? 김천가서 중학 마치고 온 사람인데 당젯날
민속 마을로 지정받으면 모두 잘 살게 될 거라고 일장 연설을
했지"
김칠병 노인의 얘기는 계속했다.
근세는 말하자면 이 마을의 개화 청년이나. 마을을 개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다.
새로운 농사법을 도입하기도 하고 경운기를 사 오기도 했다. 그러나 백무당은 그 경운기의
털털 거리는 소리가 신령님을 화나게 한다고 해서 당장 집어치우란
명령이 떨어졌다. 동네 사람들의 눈총을 이기지 못한 근세는 경운기를 대곡읍에가져가 팔아
버리고 온 일까지 있었다.
정월 당제 날 동네 사람이 다 모인 굿판에서 소주를 한잔먹고
올라온 근세가 광광 민속 마을로 우리 마을을 바꿔 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했다.
굿을 집전하고 있던 백무당이 대단히 화가 난 것은 당연하다.
"근세 이놈, 탈무산 신령님이 네 버릇 좀 그친다고 칸다. 여기서 당장 목 조아리고 사죄 안
하면 열흘을 살지 못할 끼라!"
백순조 무당이 믄령을 쩔렁쩔렁 흔들었다. 서릿발이 선 무도가 공중에 바람을 일으키며 번
쩍였다.
그뒤 열홀이 못가 근세는 탈무강 얼음판 위를 걸어 건너다 얼음이 꺼쪄 빠져 죽고 말았다고
한다.
"예?"
광준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토록 무섭게 예언이 들어맞을수 있단 말인가?
"근세씨가 죽은 것은 순전히 그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두 말 해서 뭐하노? 당님 말씀 거역해가 살사람,어딨노?"
"그때 사망원인을 따로 조사해 본 일은 없습니까"?"
"조사해 보나마나 아이가. 지서에서 나와가 장까지가 보고 이틀이나 조사해가더이 그뒤 아
무말도 없드라카이."
그렇다. 그것은 우연의 일치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민속촌 지정하는 것은 당님이 아직도 반대하고 있습니까?"
"그야 마 그렇다고 봐야재. 하지만 그 일이 있은 후로 아무도
거기 대해서 말 안 한다 아이가."
"그뒤 누님이 오시지 않았습니까?"
"왜 한 달 후깨 다녀 갔지 나하고만나서도 민속 무속 마을은
꼭 해야 된다고 얘기하고 안 갔나. 나도 김회장님께 신세지고 있는 입장이고 또 김회장님
말 들어 보이 그게 결코 나쁜 기 아인기라. 하지만 이 목숨이 하나뿌인데 앞장서서 하잔 말
도 못하고..."
"누님께 신세를 지다뇨?"
"막내딸 하나 있는 거 서울 김회장님 공예품 공장에 취직 안시켰나."
"예. 그랬었군요. 그래서 누님은 그냥 포기하고 올라가셨나요?"
"이네... 김회장님이 포기할 사람이아네. 당님하고 만나서
며칠 동안 말타툼하다 갔지"
"싸웠습니까?"
"싸우다이? 쌈한게 아니고 설득시키다가 올라간 기지"
"당님이 처음엔 찬성하다가 반대한 이유는 뭣이라고 생각합니까?"
"그야 신령님 속마음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노?"
"누님과 당님이 의견이 안 맞았다면 마을 사람들도 누님을 별로 안 좋아하겠는데요."
"안 좋아하다이? 김회장이 우리 마을을 위해 얼마나 공헌을
했는데. 작년에만 해도가뭄이 들어 벼가 다 타네 어쪄네 할때,
그걸 건져 준 사람이 누군데?"
"건져 주다뇨?"
"서울서 우물 파는 기술자들을 데리고 와서 근 한 달 동안 우물을 파주지 않았겠어. 이 동
네는 해발이 높은 곳이라 좀체 지하수가 나오지 않았거든. 그런데 그 기술자들이 돈 한푼
안 받고 이 동네 스물두군데나 샘을 팠다카이. 무슨 빙빙 도는 기계를
갖고 아마 사람 키로 설른 길 쉰 길이나 뚫었을 걸. 조금 내려가
봐야 물도 안 나오고 암석 이 받히 는 바람에 그 바위까지 뚫고 내려가 물을 뽑아 올렸다
아이가. 야 그놈의 기계 참 희한하데이.
나중에 그 기술자 양반들이 이 동네 밑에 박힌 바우가 뭐 특별히
연구할가치가 있다고 하던데. 좌우간 그 어마어마한 역사를 김회장이 다 서둘러 했다 아이
가. 덕택에가뭄을 이겼지.
동네 사람들이 얼매나 고마워하는지..."
"왜 당님이 신령님께 부탁해서 비나 내리게 하지 않았는지요?"
광준이 슬그머니 물어 보았다.
"와 안 했겠노. 당님이 기우제를 두 번이나 올렸지 그런데 신령님이 그 근세놈의 경운기 통
통기리는 소리에 화가 나서 비를
안 준다 칸다 아이가."
"예? 하하하."
광준은 절로 웃음이 나올수밖에 없었다.
"우스운 일이지 하지만 꼭 그 말이 안 맞는다고 할수도 없는기라."
그때였다. 사랑방 문을 열고 할머니가 술상을 차려 들고 왔다. 막걸리 주전자에 김치며 부
침개를 두어 접시 얹어 왔다.
"임자, 야가 글쎄 김회장님 동생 광준이라카이."
김칠병 노인이 광준을가리키며 대견하단듯이 소개했다.
"뭐라카노? 야가 광준이라고... 아이구 광준이가 이렇게 장성했나."
할머니는 참으로 반갑다는듯 광준의 손을 덥석 잡고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타향서 말도 못하게 고생했다는 이야기 우리 다 들었다. 쯧쯧쯧. 그래 이렇게 훌륨히 장성
해서 고향에 돌아오이 얼매나 반감노? 엄마 아부지는 그만 빛도 못보고 쯧쯧. 그때 일 생각
하모 모두 너무했지 너무해."
그 대목에서 김영감이 할머니의 입을 막았다.
"임자는 고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 보래이."
"괜찮습니다. 그때 얘기 좀 들려 주십시오, 할머니."
광준이 할머니의 손을 갑고 애원하듯 쳐다봤다.
"고마나가 보래이."
그러나 김영감이 완강히 말하자 할머니는 엉거주춤 일어서더니
"우리 집에서 점심 차릴 테니 앉아 놀거라이."
하고는 사랑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우리가 이 동네를 떠나게 된 사연을 혹시 아시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광준이 정중하게 물었다.
"모른다. 남으집 사정을 우리가 우에 아노? 엄마나 아부지가
무슨 얘기 안 하더나?"
김영감은 뭔가를 숨기고 싶은 모양이다. 그렇게 떳떳하지도
못한 남의 집 사정을 얘기해서 괜히 언짢은 얼굴로 대하기 싫다는 표정이다.
광준은 그 집에서 점심을 먹고가라고 한사코 붙들었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미스곽이
생각나 혼자 점심을 먹고 있을수가 없었다. 저녁때 들르겠다고 얘기를 하고 간신히 빠져나
왔다.
광준이 무당집으로 돌아오자 거긴 뜻밖에도 백순조 할머니와
정자가 같이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서 오게. 새잡으로 왔다고?"
무당은 얼굴에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자리에 앉은 채로 말했다.
"예. 김광준이라 합니다."
"얘기 다 들었네. 김을숙이 동생이지? 참 장성했구나. 그러고보면 우리가 안 늙은기
라..."
무당은 여전히 아무 표정도 억양도 없이 책 읽듯이 말했다.
이제는 주름이 뺨까지 잡혀 있는 할머니지만 옛날의 혼칠하게
잘생긴 얼굴 윤곽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동네뿐 아니라 금능군내에 미인 무당으로 이름을
달리던 젊은 시절이 그래도 주름살뒤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이거 갑자기 찾아와 폐나 되지 않는지요."
광준은 입에 발린 인삿발을 하면서도 내심 정자가 여기 온 목적을 혹시 얘기하지 않았나 싶
어 걱정하고 있었다.
"여기는 객청이나 마찬가지니까 편안히 쉬게. 내 집에 온손님아잉가베."
무당은 그렇게 말하고 아무 표정 없이 그냥 일어셨다.
"내일 영등제 굿을 올려야 하기때문에 나는 바빠서 그만 나가보겠네. 점심은 재 곧 차려 보
내지"
무당이 나가고 난 뒤 광준은 다급하게 정자에게 다그쳤다.
"우리가 왜 왔다고 얘기했어요? 누님이 죽은 것도 얘기했어요? 정자씨한테 온 편지 얘기도
했어요?"
광준이 하도 급하게 물어 대자 정자는 한참동안 광준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차근차근 한가지씩 물으세요. 한꺼번에 그렇게 서너가지를
물으면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
그때야 광준은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그만..."
"알겠어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우린 새를 관찰하러 왔고 광준씨는 김회장님 동생이라는 얘
기말고는 아무 말도 안 했으니깐요. 속 시원해요?"
"미안해요."
"그래 뭘 좀 알아냈어요?"
정자가 다시 온화한 얼굴로 되돌아와 물었다,
"별로 신통한 얘기는 못 들었지만 몇가지 알아가지고 왔어요."
광준은 김칠병 노인을만난 얘기며, 근세라는 청년의 이상한
죽음이며, 김회장의 계획을 무당이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는 얘기며 작년가뭄때 김회장이 우
물을 파준 얘기 등을 했다.
"우물을 판 것은 거상그룹 장통석 회장님이 도와주셨어요. 거상그룹에는 지하자원조사회사
가 있는데 그쪽 장비를 동원하면 쉬운 일이거든요." "지하자원조사회사라고요?" "예, 거상
개발주식회사라는 회사예요. 문화재 발굴대도가끔와서 도와주었어요. 석탄광산이나 규조토,
우라늄, 금광같은 것을 찾아내는 일을해요.요즘은 동남아에 나가 석유탐사일에도 한몴하고
있대요." 광준은 거상그룹 장회장 애기가 나오자 별로 유쾌하지 못했다. 곧 점심상이 들어
왔다. 백순조 무당밑에 매어서 일을하는 여자들이 두어명있는 것 같았다. 그여자들이 밥상
을 들고왔다. 별로 푸짐한 상은 아니지만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호박말랭이며 무말랭이
같은 밑반찬이 맛있었다. "여기있는 여자들은 몇이나 됩니까? 잘모르지만 두세명되는것같아
요. 그들은 심방이라고 부르는데 무당수습생대우를 받고 있어요. 굿이나 올리때 한몴들하지
요." "백순조무당은 세습무당이라고 하던데 이십 몇 댄가 됐지요? 처음에 어떻게 무당이 된
걸까요?" 광준이 마주앉아 점심을 맛있게 먹으며 물었다. 광준은 정자가 금석학에 대해 거
의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무당의 기원설화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곳 탈무골의 무
당은 제석설화에 해당되는 것 같아요." "제석설화라고요?"
"예. 제석 설화도 여 러가지가 있는데 듣고 보면 좀 점잖치 못한 점이 있어요."
정자는 약간 겸연쩍다는듯이 말했다.
"어떤 얘기인데요?"
광준은 더욱 호기심이 나서 물었다.
"제석 설화는 제석굿으로 구체화되어 있는데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그 줄거리는 비 슷해요. 탈무골 무당 설화는 이 제석 류의 일종인데 특히 강릉 지
방의 대관령 시준굿 스토리와 비슷해요. 아득한 옛날 어느점에 당금 아가씨가 살고 있었는
데, 어느날 지나가던 스님이 공양을 하러 그 집에 들러요. 스님은 하녀들이 주는 공양은 받
지를 않고 그집 아가씨 즉 당금 아가씨가 직접 공양을 줘야 받겠다고 버텨요. 하는수 없이
당금 아가씨가 나와서 공양을 주는데 스님은 공양을 받은 뒤 하룻밤 자고가겠다고 청해요.
그것도 당금 아가씨 방에서 자겠다고 버텨요. 방가운데 병풍을 쳐 놓고 병풍 밑에 물 세 그
릇을 떠다놓고 절대
그 선을 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요. 당금 아가씨는 안심하고 지는데 자는 척하고 코를 골던
스님, 이 대목에선 중이라고 하지요. 중이 엉큼한 생각을 품고 거미로 둔잡을 해가지고 병
풍을넘어가 당금 아가씨를... 아이 왜 그런 눈으로 봐요"?"
광준이 너무 빤히 정자의 얼굴을 바라보자 정자는 얼굴을 붉히며 입에 손을가리고 웃었다.
"하하하,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그래서 하는수 없이 당금 아가씨는요샛말로 당한 거죠 뭐.
아이 기분 나빠."
"하하하. 그래서요?"
"아이 김선생님도 짓궂으셔. 뭐 이런 얘기를 시켜가지고..."
"그래서 당금 아가씨는 어떻게 됐나요?"
"그래서 일을 성사시킨 스님은 박씨 세 알만 주고는 도술을 부려 사라져 버렸지요. 그뒤 당
금 아가씨의 배가 불러 오자 그 아홉 오빠들이가만 있질 않았어요. 처녀가 애를 뱄으니 될
법한일이에요? 그래서 죽이기로 했었대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불쌍하게 생각해 뒷산 석함
속에 당금 아가씨를 갖다가두었대요. 그뒤 당금 아가씨가 아들 셋을 낳았는데 이 아들들은
중이남기 고 간 박씨를 심어서 그 박넝쿨이 간 곳을 찾아갔더니 거기에 엉큼한 스님, 즉 아
버지가 있더래요."
"재미있군요."
"맏아들은 금강산 신령님으로 둘째는 태박산 문수님으로 셋째는 대관령 산신령이 되고, 당
금각시 즉 어머니는 탈무골 무당의 시조가 되었다고 해요."
"그럴듯한 거짓말이군요."
"그러나 이것은 좀 잘못된 설화 같아요. 이 탈무골은 무속의
형태가 특이하게도 모권 사회의 관습 같은게 불가사의하게 시대를 초월해서 남아 있어요.
중이 등장하는 설화는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봐야 불교가 전파된 이후 아니겠어요?"
"하긴 그렇군요."
"제석굿의 설화가 이곳에 흘러들어와 만들어진 것 같아요. 더구나 강릉 지방의 설화가 태백
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것 같아요.
그러나 태백산 설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는 제주도의 영등설화까지도 비슷하게 남아
있어요."
"영등 설화라니요."
"아까 백순조 무당이 나가면서 내일 영등제 준비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죠."
"영등제란 이월달에 올리는 제사인데 그 뿌리는 제주도에서 찾을수 있어요, 여기 경상도 지
역에는 물론 영등제가 없는 건 아니예요. 풍신제니, 바람 올리느니 하는 음력 이월에 올리
는 제사를 일컫는 거예요. 음력 이월 초하룻날 영통함이 제주선 영등할방이다 하죠. 그 영
등할미가 이곳으로 내려와요. 영등할미는 바람, 비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바람을 주관하는 풍신인가요?"
"우리나라는 계절적으로 봄에 바람이 많이 불어요. 그 바람이
바닷가에 사는 제주 사람들에겐 생명을 좌우하는 중대사가 아니겠어요. 그래서 바람을 곱게
불게 해 달라는 기원의 일종이지요. 거기 한수 더 떠서 풍년이 들게 해 달라는 다출산 기원
도들어 있어요. 바람이 부는 이유는 영등할미가 이곳으로 내려올때 며느리나 두 딸을 데리
고 오는데 며느리를 데리고 올때는 며느리가 미워서 고운 치마에 비를 뿌려 못쓰게 하려고
비바람을
불게 하고, 딸을 데리고 올때는 딸의 고운 분홍치마가 봄바람에
팔락거리라고 바람만 불게 한대요. 재밌죠, 호호호."
"하하하, 영등할미도 심술깨나 있군요."
둘은 마주보고 한참 웃었다.
"그 영등할미가 음력 십이월 십오일에서 이십일 사이에 하늘로 올라간대요. 그래서 내일 하
는 영등굿은 작별인사 파티 같은 거래요."
"하하하."
광준은 더욱 큰소리로 웃었다.
"내일 굿마당을 한 번 보세요. 아주 볼만 하답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짧은 해가 뉘엿해질 무렵 광준은 무당을만나 보기로 작정하고 안채 쪽으
로 올라갔다. 널직 한 마당을 건너 높다란 섬돌 다섯 칸 위에 무당이 거처하는 안채가 있었
다.
그 옆으로 걸게 늘어선 별채는 신당이다. 거기는 보통 사람들은
얼씬도 못하게 하기때문에 기웃거리지 말라고 정자가 귀뜸을
했었다. 그 신당 앞에는 대나무를 아름씩 잘라다가 묶음을 지워놓아 두었었다. 대나무가지
에는 울긋불긋한 헝겊이며 창호지조각 같은 것을 너울너울하게 달아 놓았다. 그 머리맡에
다섯 개의 물 사발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영등할미한테 바치는 정화수라는 것을
정자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광준은 곁눈질로 슬금슬금 식당을 훔쳐보면서 안채 섬돌로 올라갔다. 신당 쪽에는 무언가
범할수 없는 신비와 같은 공기가
감싸고 있다는 공연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혹은 필부가 이해할수 없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무당할머니는 쪽지은 머리를 단정히 빗은 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앉아서 광준을 들어오
라고 했다.
방안 맞은편 벽에는 한손에 칼 한손에 무령을 들고 장군복을
입은 커다란 화랭이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아래 조그만 젯상 위에는 곶감이며 유과들이
한 상 차려져 있었다. 젯상양쪽 끝에는 왕촛불이 켜져 있었다.
"바쁜데 죄송합니다. 몇가지 물어 보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말해 보게."
무당은 여전히 눈 하나 깜짝 않는다.
"당님은 저희 부모님을 잘 알고 계시죠."
"이 동네에서 신령님의 말씀을 지켰으니 알지"
"그런데 저희 집은 왜 이곳을 떠나야만 했습니까?"
그 말을 듣자 무당은 비로소 고개를 들어 광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뜻밖의 질문이란 표현이
다. 광준은 그러한 무당의 얼굴에서 무언가 조그만 파도가 일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기집이 동네에서 쫓켜난 데는 필경 이 무당할멈과 무슨 관계가 있
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건 이제 와서 왜 묻노?"
"자식된 도리로 내력이나마 알아 두고자 함입니다."
"난 잘 모른다네. 신령님의 뜻이라고만 생각하면 되는게지"
"그럼 저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신령님의 뜻을 어긴 일이라도
있단말입니까?"
"그럴 테지 동네 늙은이들이 뭐라고 얘길 헌는지 모르지만 그건 신령님이 정한 일이었으나
나한테는 더 이상 묻지 말게나."
무당은 단호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난 번에 저희 누님이 오셨을때 무슨 약속이라도 한 일이 있나요?"
"약속이라니?"
"이 마을을 민속 보존 마을로 지정하는 데 대한 무슨 삼으라도..."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신령님이 화내기 전에 그런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아라."
"화내신다고요?"
"우리 이 당집은 천 년도 더 되는 터야. 여기다가 무슨 정부
간판을 갖다 걸고 도회지의 뭇 연놈들을 끌어들여 우리 신성한
탈무골을 더럽히려고 하다니. 내가 살아 있는 한 신령님이 용서치 않을 것이야. 다시 그 말
만 내뱉어도 부정탄다."
"처음엔 당님도 찬성하셨다고 하던데요."
"누가 그런 쓸데없는 소릴 지껄여?"
무당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처음엔 그런 따위 부정타는 일인 줄 몰랐을 뿐이야. 뒤에 우리 신령님껜서 나한테 현몽해
서 야단을 치더라카이. 내가 우리
신령님 팔아묵을 뿐했지"
무당은 화가 나니까 거센 사투리가 마구 튀어나왔다.
"한 달 전 누님이 오셨을때 그 일로 언성을 높인 일이 있습니까?"
"김회장인지 을숙인지 걔도 내 말 안 들으면 제명에 못 죽어.
여러 귀신이 벼르고 있는데 천지도 모르고 개춤을 추고 돌아댕기쌌는다 아이가."
"그래서 목숨이 위태롭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까?"
"내가 목숨이 위태로운지 어떤지 어떻게 아나? 신령님이 내목소리를 통해서 여러 번 얘기를
했을거야."
"그 뒤에 누님이 또 왔습니까?"
광준이 캐묻자 무당은 다시 광준의 얼굴을 빤히 한참동안 쳐다봤다. 그 눈에 살기가 돋운
것 같아 광준은 얼굴을 피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동생이라문서 내한테 물어?"
광준은 더 이상 얘기해 봤자 별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대로
나와 버렸다.
행람채의 정자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정자가 마당에 나와 서있었다.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
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무서워서 그래요."
"무섭다니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까 김선생님이 동네에가셨을때 방에 혼자 앉아 있었어요."
"그래서요?"
"그런데 산쪽으로 나있는 내방창문에 누가 엿보고 있는것
같았어요."
"누군데?"
"글쎄요. 방안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머리 뒤꼭지가 섬뜩한 것같은 생각이 들어 뒤의 창문
을 돌아봤더니 글쎄 창호지에 사람의 그림자 같은게 얼씬거렸어요. 그래서 후다닥 일어나
창문을열어 봤더니 아무도 보이지는 않는데 누가 뛰어가는 발소리 같은게 분명히 들렸어요.
조금 전에도 창문께 뭐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창문을 열어 봤더니 아까와 꼭 같이
누가 엿보고 달아나는듯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어요."
"어디로 누가가는지 봤습니까?"
"보진 못했는데 창문 쪽에서 뒷산 쪽 담 모퉁이로 누가 뛰어가는 것처럼 느꼈어요. 그래서
나와서 그쪽으로가봤지요."
"담 모퉁이를 돌아가 봤더니 그곳은 신당 뒤쪽이었어요."
"아무것도 없었나요?"
"예. 신당으로 들어가는 작은 쪽대문이 돌담 사이에 있는데 그문은 잠겨 있었어요."
기울이고서 있는데 어디서 인기척이 났다.
"거기서 뭣들 하는고?"
그곳에 불쑥 나타난것은 뜻밖에도 무당 백순조였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은 시선둘바를 몰라했다.
"그문은 탈무산 신령님이 오실때만 여는문 아이가. 거기선
아무것도 볼끼라곤 없는데..."
"그냥 산보 좀 나온 겁니다. 진달래도 핀것 같구요. 새소리
도 들리는것 같아서요."
광준이 우물쭈물 대답을 했다.
"여기선 가끔 장기나 까투리가 푸드득거리는걸 볼수가 있지."
"그래요? 다른 새는 어떤 새가 보이나요?"
광준이 말꼬리를 받았다.
"뻐꾸기도 있고 밤에는 부엉이도 날아댕긴다 아이가."
"예에."
"그뿐 아이다. 박쥐도 더러 볼수 있다 아이가?"
"박쥐요?"
"하모."
"박쥐는 새가 아니라 쥐예요."
정자가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날아댕기면 다 날짐승이지 뭐."
무당도 히죽 웃음을 지으며 앞장서 걸어갔다. 두 사람은 하는수 없다는듯이 무당뒤를 따라
도로 행랑채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전 겁이 나서 이곳에 못 있겠어요."
툇마루에 걸터앉은 정자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겁은 무슨 겁입니까? 어린애도 아니고..."
광준이 정자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정자는 자연스럽게 몸을 광준 쪽으로 약
간 기울여 주었다.
"내일이 음력 이월 시팔일이에요. 인시면 새벽이구요."
"인시?"
"예. 아이 어떡하면 좋아요."
정자는 갑자기 죽음의 그림자를 밟고 선것 같은 흐린 얼굴로
변했다. 광준도 서울서 받은 저주스런 편지를 생각해 냈다. 그예언대로라면 내일 새볐에 정
자가 죽게 되는것이다.
광준은 물론 그. 편지의 장난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누님 김을숙 회장의 죽음과 무당의
예언 그리고 낮에 들은 근세라는 청년의 죽음도 무당의 예언으로 이루어졌다는것이 맘에 걸
렸다.
우연의 일치라는것은 연거푸 일어나는수도 있으니까, 하고 믿지 않으려는 신념을 굳히려고
애썼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자꾸만 불안이 자라고 있었다.
"그 따위 황당무계한 편지 같은것은 잊어버리십시오. 누가 장난질 한것이 틀림없을 겁니
다."
광준은 필요이상으로 큰 목소리를 내며 정자를 안심시키려고했다.
"김선생님."
"예."
"우리 여길 떠나요."
"떠나요?"
"예. 전 무서워서 여기서 밤을 샐것 같지 않아요. 안되면 우리 어제 저녁에 잔 대곡읍의 그
여관으로라도가요."
정자의 말은 진심인것 같았다.
"걱정 말아요. 지금은 너무 늦었어요. 여기서 자고 내일 영등굿인가 바람굿인가 하는 걸 좀
봅시다. 그때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 테니까 혹시 뭔가 좀 알아낼수 있을지 몰라요."
"전 행요. 저 신당인지 뭔가 하는게 맘에 걸려요. 이곳에서
자다간 꼭 무슨 일이 생길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오늘 저녁은 밤을 새워서 내가 지켜드릴께요."
"김선생님은 안 주무시구요?"
"나야 뭐 틈틈이 조금 자면서..."
"제 방에 또 들어오실려고요?"
정자는 그 말을 해 놓고는 얼굴이 화끈해졌다. 어젯밤에 있었던 느닷없는 광준의 행동이 떠
올랐기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싫지만은 않다고 생각되었다.
오히려은근히 다시 그런 일이 타의에 의해서 되풀이되었으면
하는 생각까지도 부인할수가 없었다.
"하하하, 어젯밤 일은 우리 없었던 걸로 합시다. 오늘밤은 정중하게 모시겠습니다. 귀부인
을 모시는 기사처럼 분명하고 신사답게 지켜드리겠어요.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그날 저녁도 그곳에서 얻어 먹었다. 저녁 무렵 이장인
김칠병 노인이 사람을 보내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으나 광준은
가지 않았다. 정자를 데리고 가자니 이런저런 변명하기가 귀찮았고 정자를 이곳에 혼자 두
고 갈수도 없고 하기때문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두 사람은 나란히 마루에 걸터앉았다, 불을켜지 않아도 보름을 갓 지난 달
빛이 대낯처럼 환하게 비쳤다.
우거진 대숲 위로 떠 오른 달은 금방 세수하고 나온 큰애기 얼굴처럼 맑고 아름다웠다.
"그저께가 보름이라고 했죠?"
"네. 허지만 보름달 밤보다 하루 먼저 나 뒷날 만월이 될때가 많아요. 오늘이 만월인지도
몰라요."
"달은 여인의 상징이라고 하죠?"
"그런가 봐요. 태양이 남자의 상징이고 달이 여자의 상징이란것은 동서양이 같은가봐요."
"달과 무당은 무슨 관계가 없나요?"
"김선생님도 민속이나 무속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정자가 웃음을 띠며 반문했다.
"글쎄요. 정자씨때문인것 같아요."
"호호호 저때문이라뇨? 제가 뭐 무당이라도 되나요?"
"내가 보기엔 무당선생님 같은데요. 하하하."
두 사람은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티없이 해맑은 웃음이 아니었다. 뱃속 깊이에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라 불안을 덮어 두려는듯한 자기 위로의 웃음과도 같았다.
대숲 위에 뜬 달은 이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빙긋이 웃으며 유유히 고요한 당집의 빈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광준과 정자는 어디서 인지도 모르지만 다가오는 운명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달빛에 목욕을
하고 있었다.
오. 인시의 사신
무당집의 뜰은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마당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대폭이 이따금 바람에 흔들려 출렁일 뿐 너무 조용했다.
"정자씨 춥지 않으십니까?"
툇마루에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나란히 걸터앉은 광준이 옆자리에 같은 모양으로 앉은 곽정
자를 향해 고요를 깨지 않으려는듯 나직이 말했다.
"어쩐지 으시시해요"
정자도 나직이 말하며 몸을 움추려 보였다.
"내가 겁나지 않으세요?"
"왜요?"
하고 정자가 광준을 쳐다보다가 늦게야 말귀를 알아들었다.
"늘 조심하고 있어요. 언제 또 승냥이로 변하지 모르잖아요."
"하하하. 하지만 염려 마십시오. 절대로 승냥이가 나오지는
않을 테니까요."
여기까지 무심코 얘기하던 정자는 갑자기 말투가 달라졌다.
"아니, 지금 김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런 걸 물어보시는거예요? 설마 우리 회장님과
장회장님이..."
정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 아닙니다. 그냥 물어봤을 뿐입니다. 이상한 연상은 하지마십시오."
"김선생님은 보기보다 나쁜 마음씨가 한 구석에 있군요. 설마하니 그런 발상을 하시다니."
"무슨 발상을 했다고 이러십니까? 다만 누님의 행적을 자세히 알려고 한것뿐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좀더 자세히 예기해보세요. 수정궁이란요정은 도대체 누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
곳임니까?"
광준은 이런 경우를 내친 걸음이라고 생각했다.수정궁이란곳도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는
곳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사직동 지점의 그 저금통장이 아무래도 맘에 걸렸다.
"점점 이상한 말씀만 하시는군요."
정자는 이제 완전히 뾰루퉁해졌다. 그러나 광준은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그럼 정자씨는 현금을 넣었다 찾았다 한 그 통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거야 그만한 사정이 있었겠지요. 그 수정궁요정은 회장님보다 남궁현 극장이나 주인성
전무가 더 많이 드나들던 곳이에요. 원래가 남궁국장이 출입해서 회장님이 알게 된 곳이니
까요."
정자는 내뱉듯이 말했다.가시돋친 음성이다.
"남궁씨와 수정궁 문 마담과는 전부터 아는 사이인가요?"
"전 잘 몰라요. 남궁씨한테 직접 물어 보세요."
"누님은 그 집에 남궁씨를 자주 데리고 갔나요? 아니면 장회장님과 같이 자주 다녔나요?"
"그것도 전 잘 몰라요. 남궁씨 같은 수단꾼이 회장님 모시고
한두번 드나들었겠어요?"
"예?"
정자의 뜻밖의 말에 놀란것은 광준이었다.
"그럼 정자씨는 누님과 남궁씨나, 장통석 회장과 그곳에 늘드나드는것을 알고 있었군요? 그
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시렁뱅이 추경감이나 강형사가 눈독을 들이고 들락거
렸나요?"
"그런 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하지만 분명한것은 우리 회장님 같은 인격자를 야릇한 생각
을 가지고 의심한다는것은 용서할수 없어요. 김선생님도 회장님 동생이지만 회장님을 헐뜯
는듯한 엉뚱한 생각은 용서할수 없어요."
"제가 뭐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것은 아닙니다."
"그럼 지금까지 한 얘기는뭐예요?"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동안 앉아 있었다. 각각 딴생각을 하고 있는것 같았다.
아니면 정자는 분을 사이 지 못해 꾹눌러 참고 있었다. 광준에 대해 적잖이 실망한것 같기
도 했다.
한참만에 정자가 입을 열었다.
"제 말을 못 믿겠거든, 다른 사람한테 회장님에 대한 얘기를
들어 보세요."
"다른 사람이 누굽니까?"
"남궁 극장이나, 주전무나, 장회장님이나. 미스조나 누구한테라도 물어 보셔요."
"우리 이제 그 얘긴 그만 하기로 합시다."
그때였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바람결에 댓잎이 스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신음소
리 같기도 했다. 아니 듣는이에 따라서는 여귀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돌연 호흡을 딱 멈추고 귀를 곤두세웠다.
그러나 그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가 분명히 났죠?"
"그래요. 낮에도 저 소리를 분명히 들었어요. 저기 신당속에서 난것 같았어요."
정자가 잔뜩 겁에 질렸다.
"거기 무당이 모시는 신령님이 산다고 했죠?"
두 사람은 다시 숨을 죽이고 무엇인가를 들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달빛만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너무 신경과민인것 같아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잖아요. 이제 먼저 들어가서 눈
좀 붙이세요. 난 정자씨 잠드는것 보고 내방에서 자겠어요."
"싫어요. 제가 잠든 걸 보고 또 승냥이로 변할지 모르잖아요."
정자는 공포에서 벗어나려는듯 농을 걸었다.
"하하하. 걱정 마세요. 저 달을 두고 맹세하지요."
"믿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자어서들어가세요. 이러다가 감기들겠어요." 광준이 정자의 팔을 잡아끌었
다."알았어요. 김선생님도 그만 주무세요." 정자가 못이긴듯이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자
장지문 밖으로 불이 밝혀졌다. 옷을 갈아입는 모양이다. 광준은 우두커니 앉아 위쪽의 당집
과 신당을 쳐다봤다. 달빛어린 기왓장이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자방에 불이 다시
꺼지는것을 보고 광준은 자기방으로 들어갔다. 좁은 방이어서 발을 쭉 펴니까 벽에 닿을듯
했다. 광준은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새벽네시 즉 인시라는 것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리고
혼자 곰곰이 생각했다. 누가 그런 터무니없는 협박편지를 보냈을까? 틀림없이 누님을 살해
한 놈과 그 편지는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무슨 목적으로 정자에게 겁을
주었을까? 더이상 그 사건을 추적하지 말라는 뜻인가 아니면 정자가 무슨 비밀을 알고 있다
는 뜻인가? 그러나 광준은 정자가 자기한테 숨기는 무슨 비밀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러나 저러나 이제 대여섯시간후면 인시가 되는데, 과연 그때 무슨일이 일어날 것인가? 광준
은 무슨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추호도 믿지않았다. 광준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
길가로 난 봉창문에 그림자가 얼씬거렸다. 밝은 달에 비쳐 움직이는 그림자는 분명 사람의
손이었다. 사람의 손이 천천히 봉창문 앞으로 다가왔다. 광준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
았다. 그리고 그 창문의 그림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가 쭈뼛 서는 것을 느꼈
다. 그림자는 천천히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똑 똑 똑!"
그림자는 극히 조심스럽게 천천히 창문을 두들겼다. 마치 나직이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와
비슷했다. 광준은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똑 똑 똑!"
그림자는 다시 전과 똑같은 속도로 천천히 문을 두들겼다.
"누... 누구십니까?"
광준이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을 했다.
"김광준씨 계십니까?"
그림자는 이번엔 노크 대신 나직한 목소리로 들어왔다.
"누구십니까?"
광준이 일어서서 창문가까이에 얼굴을 바싹 들어내고 다시물었다.
"김광준씨를 좀 만났으면 합니다."
그림자는 이번엔 좀 소리를 높여 얘기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광준이 잠겨 있는 봉창문 고리를 벗기고 문을 열었다. 달빛이
밀물처럼 방안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창 밖에는 역광을 안고 키가 조그만 사나이가 서 있었다.
"내가 김광준인데 누구십니까?"
"나는 정용세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
"이장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들어오십시오."
"대문이 잠겨 있어요."
"내가 열어 드릴께요. 대문 앞으로 오십시오."
광준은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대문께로 나갔다. 소리만 나게 가만히 빗장을 열었다. 그
리고 천천히 대문을 젖혔다. 다행히 삐걱 소리는나지 않았다. 조그만사나이는 재빨리 문틈
새로 들어왔다.
광준은 그 사나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정용세라고 합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났지요. 읍내 나가 농업고등학교
를 미치고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있습니다. 동네 사에이치운동 같은것도 맡아가지고 있지요.
저희 형님은 김선생님이 알것입니다만..."
"형님이 누구신데요?"
"정근세라고..."
"아녜, 지난 겨울에 참변을 다하셨다구요."
"예 그렇습니다. 강의 얼음판을 건너다 실족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저를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예. 낮에 동네일로 김칠병 이장님을 찾아갔다가 선생님이 오셔서 여기 묵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새를 관찰하러 오셨다구요? "
"예 그렇습니다. 저는 학교서 생물선생 노릇을 하고 있어요."
광준이 어물어물 넘기려 했다,
"그건 다 핑계라는 걸 압니다. 미국서 반도체 연구를 하셔서
학위까지 땄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전자공학 박사님께서 새를
관찰하러 다닌다는것이 말이 됩니까? 더구나 지금은 이른 봄인데 절기에 맞지 않구요."
"내 얘기는 누구한테서 들었습니까?"
"김을숙 회장님께서 해주셨습니다."
"그럼 누님을 잘 아십니까?"
"알다 뿐입니까? 돌아가신 형님과 제가 김회장님 일을 도와드리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요."
"아아, 그랬었군요. 이거 미안합니다. 미처 알지 못해서."
사나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곽정자도 이 정용세 형제를 알고 있을 텐데 왜 얘기를 해주지 않았는지 궁금하게
생각되었다.
"저희 집으로가십시다.가서 소주나 한 잔 들면서 얘기를 나누지요."
사나이가 이쪽 의사도 들어보지 않고 일어서려고 했다.
광준은 잠깐 망설였다. 이미 잠이 든것 같은 정자를 깨워서
알릴까 말까 하고 생각했다.
"이곳은 당님의 집이 돼서 아무래도..."
사나이가 재촉을 했다. 광준은 한 시 간쯤은 있다가 와도 되리라는 판단을 했다. 우선 이
사나이가 여기서는 얘기를 제대로 해줄것 같지가 않았다.
"좋습니다. 여기서 멉니까?"
"아뇨. 바로 아래 모퉁이만 돌면 돼요."
광준은 용세와 함께 살그머니 당집을 빠삐나왔다. 나중에 돌아올때를 생각해서 대문은 그냥
살그머니 닫아 놓기만 했다.
정용세의 집은 전통적인 한식 그대로의 집이었다. 방만 두칸을 터서 한방으로만들어 조금
편게 쓰고 있었다.
"누추합니다. 여긴 제가 혼자 쓰는 사랑방 비슷한 곳입니다.
동네 젊은이들이랑 회의 같은것도 하는 곳이죠."
방 한가운데는 조그만 선반이 차려져 있었다. 용세가 보자기를 열자 부침 개 같은 안주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고 선주가 몇 병곁에 놓여 있었다.
"우선 술이나 한잔 들면서 얘기하지요."
사내가 소줏병을 땄다. 사내는 자그만 키에 다부지게 생긴 몸집을 하고 있었다. 운동선수들
처럼 팔다리 근육이 탄탄해 보였다. 얼굴에 비해 눈이며 코가 너무 작게 생겼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전 술을 잘 못해서 ..."
"이제 주무실 텐데 뭐, 염려 마세요. 한두 잔이야 수면제 아닙니까?"
사나이는 이곳 태생이면서 고등학교 교육까지 마쳐서 그런지
비교적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형님 근세씨 얘기는 김노인한테서 들었습니다. 참 안됐습니다."
"뭐 재수가 없는 탓이겠지요."
"헌데 당님이 저주를 내렸다고 하던데요."
"예. 그랬습니다. 하지만 저는 작 그렇게 믿지는 않습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할수도 있겠지
요. 하지만 미심쩍은 데가 전혀 없는것은 아닙니다."
"미심쩍은 데라뇨?"
용세는 소주를 연거푸 두 잔이나 마시고 난 뒤 발을 시작했다.
"그 무당 백순조 할멈이 예언한 날짜 안에 돌아가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강은 매일 건너다니던 장인데 하필 그날 그 자리만 얼음이 꺼져 변을 당했다는것
이 좀 미심쩍습니다."
"근세씨는 매일 그 시간에 그곳을 다녔나요?"
"그렇습니다. 형님은 시계처럼 정확한사람이니까요. 언제든지 그 시간에 정미소로 나갑니
다. 강에 얼음이 얼지 않았을때는
위쪽 다리를 건너서 다녔지만... 그렇게가자면 시간이 십분은
더 걸립니다. 그래서 겨울엔 늘 그곳으로 얼음을 건너다녔죠."
"다른 사람들도 그 얼음을 건너다닙니까"?"
"별로 다니지 않는 편입니다. 아시다시피 형님 집에서 정미소까지는 그 강만 건너면 지척이
지만 다른 집 사람들은 정미소에
볼일이 없는 한 그리로 다닐 필요가 없지요. 그러니까 형님네 서구들만 다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고가 난 뒤 경찰이 원인을 조사한 일이 있나요?"
"경찰요? 그들은 별로 믿을게 못 됩니다. 타살처리를 하면 일이 복잡해지니까 단순 익사사
고로만 몰고가는 거죠. 누가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없고 말입니다. 헌데 아직도 제 생각은
왜 그곳만 얼음이 꺼졌느냐 하는것입니다. 재수가 없으려면 그럴수도 있겠습니다만..."
"경찰에서는 백순조 무당이 저주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조사했습니까?"
"물론이죠."
"그래 경찰의 견해는 어땠습니까?"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요즘 세상에 그게 말이 되느냐고요. 그 사람들은 자기 편
한 대로만 해석하고 그저 말썽 없게 하자는 자들 아닙니까?"
용세의 말투는 관청이나 경찰은 믿을게 못 된다는 투다.
"그래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대로 할수 있는건 다 했을 겁니다."
"김선생님은 안 당해봐서 그러십니다."
용세는 못마땅한 투다. 광준도 추경감이나 강형사를 머리에 그려 보았다. 정용세의 말이 맞
는지도 모른다.
"그 얘긴 그쯤 해두고..."
정용세가 술잔을 광준한테 내밀었다. 정용세는 벌써 한병 반은 혼자 마신것 같은데 전혀 취
하는것 같지 않았다. 굉장히 술이 센모양이다.
"말씀해 보시죠."
"김회장님에 관한 얘긴데..."
"저희 누님 말씀입니까?"
"예, 김을숙 회장님 말입니다. 그분을 우리가 도와줘야 합니다. 대한민국 지성인치고 김회
장님만한 선각자가 없습니다. 한국인의 정신이 똑바로 박히신 분입니다. 우리 마을을 민속
보존마을로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럼 정형이 좀 도와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저희 형제가 도와주지 위해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당님 백순
조 할멈입니다.",
"당님이 반대하고 있다면서요?"
"물론입니다. 한데 이상한 건 처음엔 찬성하다가 중간에 햇가닥한 겁니다. 그뿐 아니라 그
무당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꾸미다뇨?"
"동네 사람들은 겁이나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지만 그 무당이
이해할수 없는 짓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
"이 마을에 있는 땅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땅을 사들여요?"
"예. 그 무당이 마침내 복부인이 되었는지 이해할수 없는 짓을 합니다."
"돈이 어디서 나서 땅을 사들인단 말입니까?"
광준도 참으로 뜻밖의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하기야 쉽게 말해서 땅을 사들인다고 할수 있겠지만, 도시의
복부인들처럼 엄청난 돈을 들이는 건 아닙니다. 우선 우리 동네서 도회지로 나가버리고 버
리다시피한 헌 집터 같은것을 헐값으로 사들였지요. 여기야 이농이 많아 집을 버리다시피하
니까웬만한 집 한 채어 몇십만 원만 주면 사니까요."
"그런 집을 사들였단 말이죠?"
"그러다가요즘은 버려진 야산이나 채소밭 같은것도 더러 사들였어요. 아무도 쓰지 않고 버
려 둔 땅을 뭣때문에 사들이는지
정말 이해할수가 없어요."
"거기에 대해 동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신령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니까 아무도 내용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령님이 시켜요?"
"우리 탈무골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당님이 하는일엔 이유가 없습니다."
"정형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다고 했다간 저주를 받아 제명에 못살게요."
정용세는 한참 있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갑니다. 그건 김회장님이 하는일을 방해하려고 하는 짓이
아니겠습니까?"
정용세는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면 탈무골 땅을 자기가 다 사들이겠다는 겝니까?"
"그 할멈 심술이 그렇게 할수만 있다면 할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탈무골은 김회장님 뜻대로 보존하는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회장님 일에 대해
요즘도 이러쿵 저러쿵 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소주 두 병을 비웠다. 그러나
주로 정용세가 마셔 버렸다.
"이러쿵 저러쿵 하다니 무슨 말입니까?",
광준의 목소리도 꽤 높아졌다. 취기가 올랐다는 신호다.
"아, 그야 김회장님 얘기지요."
"우리 누님이 뭘 잘못했나요?"
"잘못하긴 뭘 잘못합니까? 옛날 얘기를가지고 그러는 늙은주책들이지요."
그 소리에 광준은 술이 확 깨는것 같았다.,
"옛날 얘기라뇨? 우리가 이 마을을 떠날때 얘깁니까?"
광준의 태도가 감자기 굳어지자 정용세도 주춤해졌다.
"아니 뭐 늙은이들 사이에 그냥 왔다갔다 하는 얘깁니다. 난 잘 몰라요."
"정형!"
광준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예?"
"그 얘길 좀 해 주십시오, 우리가, 아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왜 이 동네를 버리고 떠나갔습니까?"
"글쎄 그걸 난 절 모른다니까요."
정용세가 꽁무니를 뺀다.
"아는 데까지만 좀 얘기해 주세요. 내 어릴 적 기억으로는 동네서 쫓겨나는것 같았단 말입
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우리를 이동네서 꽃아낸것입니까?"
"글쎄 자세 한것은 모르지만... 아마도 백순조 무당과 관계가
있는것 같았습니다."
"백순조 무당과?"
"예 무당이 동네를 떠나라고 한것 아니겠습니까?"
"왜 우리를 쫓아냈단 말입니까?"
"글쎄 그게, 얘기가 여러 갈래라서 어느 얘기가 옳은지..."
정용세가 영 입을 나들이 버리려는 기색이다.
"정형! 제발 아는 대로 좀 얘기해 주십시오."
"동네 늙은이들 얘기로는 김선생님 아버님과 백순조 무당이
무슨 불미로운 일이 있는것처럼...,"
"예?"
"또다른얘기는김선생님 아버님이 행실이 좋지 않아동네 젊은 여자들과..."
"예?"
"그런 거 신경 쓸것 없습니다. 모두가 헐뜯기 위한 거짓말일테니까요."
"더 자세히 좀 얘기해 주십시오. 정형!"
"글쎄 그 이상은 나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자, 우리 술이나 한잔 더 나눕시다."
광준은 뒤 통수를 얻어 맞은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가슴 밑바닥에서 막연한 분노 같은것이
끓어을랐다.
"그럴수가... 그럴수가..."
광준은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이며 누구에게도 아닌 분노를
참느라 애를 썼다.
광준이 정용세의 집을 나선것은 거의 자정이가까워서 였다.
술을 과하게 마신 탓으로 아랫도리가 휘청거렸다. 가까스로
걸음을 가누며 당집까지 다다랐다.
그런데 살그머니 밀어 붙여두고 간 대문 한짝이 훤히 열려 있었다. 누가 또 다녀간것일까?
곽정자가 나를 찾아나선것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순간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광준은 황급히 대문을 들어서며 오른편으로 정자의 방을 흘깃
보았다. 문이 환히 열려 있었다. 장지문의 창호지가 달빛에 반사되어 마당을 훤히 비치고
있었다.
"아니?"
순간 광준은 피가 얼어붙었다. 툇마루 밑 마당에 누가 쓰러져
있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꼼찍도 않고 몸을 찧으로 누인 채 얼굴은 반듯이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자씨! 정자씨!"
광준은 엉겁결에 정자의 허리와 어깨를 번접 들어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뉘였다. 불을 켰다. 정자의 얼굴에 귀를 갖다 대 보았다. 숨을 쉬고 있었다. 기절한
것 같았다.
광준은 정자를 깥바로 누이고 베개를 받힌 뒤, 웃목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손수건에 적신
뒤 이마에 얹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사지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광준은 거의 혼비백산한 채 한 일이라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얼마를 지났을가? 정자가 눈을 떴다.
"정자씨! 정신이 들었군요."
들여다보고 있던 광준이 이제야 자기도 정신이 돌아오는것 같았다.
정자는 눈을 뜨고 사방을 조용히 살펴 보았다. 그 눈동자는 겁에 질려 거의 정상이 아닌것
처럼 보였다.
"정자씨 접니다. 광준입니다."
광준이 나직하게 그러나 힘있게 말했다. 그러나 공포에 젖은
눈동자는 풀리지 않았다.
"제가 지금 살아 있는 거예요?"
정자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정자씨 안심하세요. 여긴 내 방입니다."
그제서야 정자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자기 옷을 살펴보았다. 얇은 네글리제 차림새라는것을 알자 얼른 두 손으로가슴을가
렸다. 커다랗고 육감적인 젖가슴이 손가락 사이에서 심히 두근거리고 있는게 겉으로도 드러
났다.
"정자씨 어떻게 된 겁니까? 다친 데는 없습니까?"
광준이 다가앉으며 물었다. 정자는 얼른 손을 뒤로 올려 머리를 만져보았다. "괜찮은것 같
아요. 전 꼭 죽는 줄만 알았어요." 정자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빛이 돌았다. "도대체 어
떻게 된겁니까? 저 위채에는 사람이 없습니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알릴 틈도 없었어
요." "어떤 놈이었습니까?" "김선생님은 절 지켜준다고 큰소리치시더니 어떻게 된거예요.
사람을 이 제경에 이르도록 해놓고 어딜 갔다 오셨어요?" 정자는 몹시 섭섭한 모양이다. "
그얘긴 차차 해드릴 테니 정자씨얘기부터 들어봅시다." "제가 옷을 갈아입고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을때 김선생님이 나가시는 기척을 느꼈어요." "알고 있었군요. 난 또 자는 줄 알
고." 광준이 겸연쩍어했다. "잠이 쉽게 들지않아 뒤척이고 있었죠. 그런데 김선생님이 나갔
다는 것을 알자 갑자기 무서워졌어요. 이렇게 혼자 누웠다가 죽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들었어요." "그래서요?" "그런데 정말 무서운일이 일어났어요. 길쪽으로 난 창문쪽
에..." 정자는 손으로 봉창문을 가리키며 무서움에 떨었다. 정자는 공포를 삼키며 얘기
를 계속했다. 창문쪽에 시커먼 그림자가 다가오더니 창호지를 뚫고 커다란손이 들어오더란
것이다. 그 손이 창문고리를 벗기고 창문을 확 열어젖히더란것이다.
달빛 속에 보인 얼굴은 사람인지 짐승인지 잘 분간이가지 않았다고 한다.
기겁을 한 정자는 금방 숨이 넘어가는것 같았다고 한다. 정말 이제 저 괴물한테 잡혀 죽는
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괴물은 달빛에 유
난히도 반짝이는 흰 이빨을 드러내고 히죽이 웃는것 같았다.
정자는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목소리가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움직이려고 해도 사지가 꼼짝하지 않았다.
"이대로 죽을수가 없다. 죽을수는 없다."
속으로 계속 이렇게 되뇌었지만, 꼭가위눌린 사람처럼 마음속으로만 바둥거리는 꼴이었다.
마침내 괴물이 창문을 넘어올 양으로 얼굴을 방안으로 디밀었다,
정자는 있는 힘을 다해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몸이 움직였다.
"사... 사... 사람 살려요!"
그러나 그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가슴 속에서만 맴돌았다.
정자는 사력을 다해 방문을 박차고 사당으로 뛰어나왔다. 엎어지면서 마당에 내려서는 순간
무언가 육중한 고무뭉치 같은것이 뒤통수를 후려치는것이다. 눈에서 불이 번쩍 났다.
"악! "
신음소리 같은 약한 비명을 지르며 다시 사당으로 쓰러졌다.
그리고는 정신을 않고 말았다.
"워낙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뭐가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모르겠어요." 얘기를 끝낸 정자는
어깨에 두른 이불을 움츠리며 몸서리를 쳤다. "맞은 데는 괜찮습니까?" 광준이 걱정스레 얼
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괜찮은것 같아요. 머리만 좀 띵하고 조금 아파요. 천만다행입니
다." "그래 괴물이 사람이었나요. 짐승이었나요?" "그야 지금 생각하면 사람일테지요. 그러
나 그때는 꼭 지옥에서온 염라대왕의 사자처럼 보였어요." "도대체 어떤 놈이 그런 장난을
쳤을까요?" "장난이 아녜요. 분명히 나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나한테 죽는다고 예언을
한 그놈일거예요.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르지만." 광준의 머리는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앞
뒤를 이해할 수없는 일이었다. 이 괴이한 사건과 김을숙누님의 피살은 무슨 필연적인 관계
가 있을 것이란 막연한 생각만 들었다. "김선생님도 너무하셨어요. 그래 저를 귀신한테 잡
혀가게 혼자두고 그럴 수가 있어요?" 정자가 원망에 가득찬 눈초리로 광준을 쳐다봤다. "정
말 미안합니다. 설마하니 그런 일이 있으리라곤 짐작이나 했겠습니가? 이젠 정자씨 옆에 꼭
붙어 있겠어요. 일생동안이라도 지켜드리겠어요." "그게 정말이예요?" 정자의 눈빛이 빛났
다. "그럼요. 지켜드리고 말고요." 광준은 그 말에 힘을 주면서 슬그머니 정자 옆에 다가앉
았다.
그리고 왼손을 뻗어 부드럽게 정자의 어깨를 감쌌다. 정자는 가만히 어깨를 맡겨 두었다.
광준은 이번에 오른팔도 함께 올려 정자를 가만히 가슴에 안았다.
정자가 오들오들 떨고 있다고 느꼈다.
광준은 팔에 힘을 주고 정자의 상체를 꼭 껴안았다.
광준의 오른팔 아래 감싸인 정자의 유방이 따뜻하고 부드러운감촉을 느끼게 했다.
광준은 자신의 심장고동이 갑자기 거칠고 빨라진다고 생각했다.
"정자씨!"
정자는 아무 대답도 않고 광준의 팔어 모든 걸 맡긴채 고개를
들어 광준의 얼굴을 쳐다봤다.
포근하고 온화한 촉감을 즐기는것 같았다.
광준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정자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갰다.
정자의 입술은 어릴때 따 먹던 진달래꽃잎처럼 부드러웠다.
그때였다. 정자가 갑자기 얼굴을 옆으로 돌리면서 광준의 팔
에서 빠져나갔다.
"이러면 안 돼요. 저쪽에가서 앉아요."
정자의 태도는 돌변했다. 벽쪽으로 옮겨 앉으며 옷깃을 여몄다.
"왜 그래요?"
두 사람은 그대로 방에 앉은 채 밤을 새울 각오를 했다.
광준은 누군가가 정자와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것을 믿지 않을수가 없었다.
무엇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정자를 죽이려고 하는지 통 짐작이가지 않았다.
저렇게 순진하고 가련한 여자를 공포 앞에서 오들오들 떨게하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무당 백순조는 과연 그 편지대로 정자의 죽음을 예언한것일까?
광준은 날이 밝으면 꼭 백순조 무당을만나 뭔가를 캐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용세가 얘기한
자기 집안과 무당과의 베일에
싸인 관계도 꼭 캐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광준은 쉽게 무당 백순조를만날수 없게 되었다.
앉아서 비몽사몽 간에 밤을 지새운 광준과 정자는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눈
을 떴다.
새벽부터 영등굿 준비를 하느라 심방들과 동네 아낙네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해가 돋울 무렵이 되자 동네 사람들이때를 지어 당집 사당으로 모여들고 마당가운데는 커다
란 멍석 두 장이 깔렸다.
광준과 정자도 대강 옷을 추슬러 입 고 간단히 세수를 마친 뒤
마당에 운집한 구경꾼 틈에 섞였다.
마당가운데 펴진 멍석 위쪽에 큼직한 젯상이 놓이고 돼지머리며 시루떡이 높다랗게 쌓였다.
상 밑에도 떡시루가 두서너개놓였다. 그 앞에는 울긋불긋한수백 개의 헝겊이 엮어진 대나무
가지가 놓여졌다. 어제 신당앞에 있던 색동 대나무였다. 그 곁으로 커다란 북이 놓였다. 북
채는 몇백년이나 된듯 닳고 찌들어 오랜 풍상을 말해주는듯했다. 한 여인이 북앞에 단정히
앉았다. 그 옆에는 장고와 징, 꽹가리, 계금이 차례로 놓이고 무복을 차려입은 여인들이 와
서 앉았다. "저기 장고나 징을 치는 사람들을 재비라고 해요." 사람들틈에서 정자가 광준한
테 설명했다. "재비? 그거 재미있군요." "원래 우리나라의 제의는 굿거리와 비손이라는 두
종류로 크게 나뉘어져요. 굿거리란 저기 보이는 것처럼 가무가 따르고 비손은 무당 혼자서
만하는 거예요. 지금 하려는 것은 그러니까 굿거리군요." "그래요?" "굿거리도 개인을 위한
굿거리가 있고 동네서 공동으로 올리는 별신굿이 있지요. 지금 하려는 것은 별신굿의 일종
이에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기 탈무골에서만은 어느 지방에도 없는 독특한 양식의 별신
굿을 해요." "언제 그런걸 다 보셨습니까? 김회장님한테 들은 풍월이에요." 그때였다. 백순
조무당이 신당믄을 열고나왔다. 광준은 눈을 크게떴다. 어제 보던 모습과는 전혀다른 모습
을 한 무당할멈이었다. 두루마기처럼 생긴 이상한 검정색옷을 입었다. 동정도없는 옷에 소
매는 붉은색이다. 머리에는 갓도 아니고 모자도 아닌 이상한것을쓰고 양손에도 처음보는 물
건을 들고 나왔다. 아주 근엄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아름답고 황홀하게까지 보였다.
"저 옷은 굿거리를 할때 입는 옷인데 구군복이라고
하지요. 머리에 쓴것은 전립이라고 해요. 저기 왼손에
든것은 무령이라는 방울이에요. 유자처럼 생겼지요?"
"끝에 방울이 달려 있군요."
"예. 저것을 흔들어 신을 부르는 거예요."
"오른손에 있는 저 거다란 포크 같은것은 뭡니까?"
광준과 정자는가만히 속삭이다시피 말을 주고받았다.
"포크라뇨? 호호호."
"포크 비슷하잖아요."
"저건 삼지창이란 거예요."
"저 젯상 곁에 날이 시퍼런 칼은 뭡니까?"
"저건은 월도라고 하는 건데 춤을 출때 들고 추기도하죠."
그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때 돌연 김칠병 노인이 젯상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식당을 향해
공손히 절을 한 뒤 젯상에 술을부어 바쳤다.
"저건 뭐하는 겁니까?"
"저 사람을 수화주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마을 대표예요. 마을 대표가 각종 신한테 이제 굿
거리를 올린다는 신고를
하는거죠."
"녜에..."
광준은 어릴때, 여러번 본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오늘 하는 굿거리는 보통 음력 이월 십삼일날 올리는 영등맞이굿이라고 하는데, 이 탈무골
서는 음력 이월 보름이 지난 뒤에 올려요. 그리고 다른 지방의 영등굿과는 전혀 양식이 달
라요. 일종의 별신굿이에요."
정자가 가만가만 얘기를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퍽 열심이고
진지했다.
그때였다. 백순조 무당이 방울을 요란하게 흔들어 댔다. 재비들도 덩달아 북이며 징을 치기
시작했다. 조용한 산골이 갑자기
춤을 추듯 소란해졌다.
"지금 신령님을 불러 모으는 거예요."
얼마간 요란을 떨더니 갑자기 뚝 그치고 백순조 무당이 멍석가운데로 나와 무가를 불렀다.
"저건 말하자면 오페라 같은 거군요..."
"호호호" 정자가 광준의 팔을 꼬집으며 웃었다. 어젯밤의 일은 까맣게
잊은것 같았다. 백무당은 방울을 흔들며 무기를 계속했다.
"...안을 돌아 열두 영정
밖을 돌아 열두 영정
영정님네 난데 본은 그 어데가 본일런가
대천지 저 한바다로 솟은 물거품이 영정일레라.
뒷동산 치치올라 청솔잎에 놀던 부정, 혹솔잎에 놀던 영정,
미리너에 영정아, 재너머 영정아...
신묘장구 대다라니 나모라 다나다라..."
오페라는 계속됐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수가 없군요."
"저건 부정굿의 창이라고 해요. 별신굿을 시작할때 대개 부정
굿이라는것부터 시작하는때가 많아요."
얼마를 지났을까? 복잡한 여러 절차가 끝난 뒤 백순조 무당이
갑자기 커다란 포크, 아니 삼지창으로 돼지머리를 푹 찍었다.
그리고는 돼지머리를 위로 하고 삼지창을 세웠다. 그냥 서지않으니까 쌀을 담은 그릇에 삼
지창의 자루를 나무 심듯이 박아서 세웠다.
"저게 잘 서야 마을에 풍년이 든대요."
정자가 나직이 설명했다.
돼지머리가 창에 꽃힌 채 허공에 우뚝 섰다. 그 모양은 어떻게 보면 섬찟하고 어떻게 보면
우스웠다.
돼지머리가 서자 김칠병 노인이 그 위에 천원짜리 돈을 갖다얹었다.
뒤따라 여기저기서 동네 여인들이 나와 돈을 갖다 얹었다. 그리고 식당을 향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나갔다.
이렇게 계속된 굿거리는 거의 정오에 가까워서 야 끝났다.
"다른 지방의 별신굿은 하루종일 계속되고 또 밤새도록 계속돼요. 그리고 막판에는 동네 사
람들이 남녀노소 없이 다 어울려
맘껏 춤을 추면서 끝나지요. 말하자면 일종의 레크레이션이에요."
정자가 열심히 설명했다.
굿이 끝나고 흩어지는 사람들 틈에서 광준은 정용세를 찾아냈다.
그는 정용세의 팔을 슬그머니 끌면서 나직이 말했다.
"정형 저쪽에가서 얘기 좀 합시다."
정용세도 얼른 광준을 알아보고 따라 나섰다.
두 사람은 신당 뒤로 돌아가 언덕 기슭 납작한 돌 위에 걸터앉았다.
"어젯밤 너무 실례가 않았어요."
광준은 우선 인삿말부터 건넸다.
"잘 주무셨는지요?"
정용세도 나직이 말했다.
"누님을위해서 애쩌 주신다니 참고마운 일입니다. 정형을 믿고 내가 해둘 말이 있습니다.
꼭 비밀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광준은 어젯밤부터 이 사람만은 믿을수 있다는 판단을 굳히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 점은 염려 마시고 어서 말씀 하십시오."
광준은 우선 어젯밤에 정자한테 일어난 일부터 대충 설명을
했다. 정용세는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질문을 했다.
"정자 아가씨의 방은 살펴봤습니까"?"
"예. 아침에 들어가 봤는데 아무런 흔적을 발견할수가 없었어요. 길쪽으로 난 창문만 열려
있고 창문의 장호지가 사람 손 하나 들어올만큼 찢기 있었어요."
"그런데 그 창문의 찢겨진 모습이 좀 이상했어요. 밖에서 손을
밀어 넣었다면 종이 나부랭이가 방 안쪽으로 나와야 할 텐데 그게 걸쪽으로 너울거렸단 말
입니다. 마치 안에서 창문을 뚫은것
같았어요."
"그거야 손을 밖에서 안으로 넣었다 다시 빼면 그럴수도 있지요. 그외는 이상한 흔적이 없
었습니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이 얘기를 당님한테 했습니까?"
"아뇨."
"절 하셨습니다. 당분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고 알아보기로 합시다."
"그리고 정형!"
광준은 더욱 진지한 표정으로 정용세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저의 누님인 김을숙 회장님이 실은..."
여기서 광준은 잠깍 망설였다. 그러나 결심한듯 말을 계속했다.
"실은 누님이 피살되었습니다."
"예? 뭐라구요!"
정용세가 너무 놀라 소리치는 바람에 광준이 황급히 정용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입이 남의 손에 막힌채 정용세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조용, 조용히 얘기합시다."
"미... 미안합니다."
정용세는 좀체 충격이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광준은 서울에서 있었던 불가사의한 일을 그대로 설명했다.
가만히 끝까지 듣고 난 정용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군요. 어떤 놈이 도대체 그런 짓을 했을까요? 그처럼 훌륭한 분을 무슨
죄가 있다고..."
"아무래도 백순조 무당과 무슨 관련이 있는것은 아닐까요?
"저는 미신 같은것도 믿지 않고 신통력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샤머니즘에 대해서는 잘모르지만,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없는 것은 전 믿지않습니다." "그거
야 현대인의 상식이 아닙니까? 제생각에는 어떤 추악한 음모가 그 뒤에 숨어있으리란 생각
이 듭니다. 김회장님의 주변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정용세가 의견
을 말했다. "그래서 말씀인데요. 제가 서울 올라가서 그 점은 더알아보겠습니다. 무당할멈
을 좀 만나본 뒤 여길 떠나겠습니다. 정형께서 다음일을 좀 알아주십시오. 무당에 관한 일
이라든지. 어젯밤 정자씨방에서 일어난 일이라든지. 혹은 정형 형님인 근세씨의 죽음에 관
한 일이라든지 좌우간 무엇이든지 좀 캐내서 알려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광준이 정용세의
두손을 잡았다. "염려마십시오. 제가 알수있는 것은 다 알아가지고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두사람은 바위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신당을 돌아나와 헤어졌다.
광준은 당집으로 들어와 무당을 만날 양으로 안채로 올라갔다. 심방 두 사람이 끝난 굿판의
뒤치닥거리를 하고있었다. "당님 계십니까?" "안방에 들어가 보시소." 심방여인은 거들떠보
지도않고 말했다. 광준은 안방으로 올라가부당 백순조앞에 앉았다. "저희는 오늘 올라가야
겠습니다." 백순조무당은 광준을 흘깃보고는 무표정하게말했다.
"새는 다 잡았능교?"
"철을 잘못 택해서 안 되겠어요. 여름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런데 당님!"
광준은 결심을 하고 말했다.
"김을숙 회장에 관한 얘기인데요..."
"그 얘기라면 벌써 끝난 일 아잉가?"
백순조 할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
"끝난 일이 아닙니다. 김회장은 이 탈무골을 사랑합니다."
"그거야 나보다 더 할 사람 있는교."
"물론 당님도 탈무골을 사랑하겠지요. 그래서 이 탈무골은 꼭
영원토록 보존돼야 합니다."
백순조 무당이 그제야 넌지시 광준을 건너다보면서 말했다.
"이 탈무골을 영원히 보존시킬라모 김회장처럼 하모 안 되는기라. 도회지 뭇 잡놈들이 관광
한답시고 떼를지어 와가지고 다짓밟아 뿌는기라. 우리 신령님이 시키는 대로 그냥 놔두는기
탈무골을 위하는 길인 기라."
무당의 말은 카랑카랑하고 단호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집은 자꾸 헐리고..."
"씰데 없는 소리 그만 하그래이."
백무당은 더 듣기 싫다는 투다. 일어서려고 했다.
"최근에 김회장님만난일 없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뜻밖에 백무당의 언성이 높아졌다. 하도 큰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광준이 움찔했다.
"혹시만나셨나 해서입니다."
"만난일 없어. 지난 날인가 언제 잠깐 왔다 갔지만..."
"그땐 무슨 얘기를 나누셨나요?"
백무당은 이상한 사람 다 봤다는듯이 광준을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김을숙이가 계속 고집만 부리고 다니면 제명에 못 살아."
"예?"
"이 탈무골을 두고 자꾸 입에 오르내리게 하모 칠성님 옥황상제님이 기양 두지 않는단 말이
다. 지목숨이 몇개라고 ..."
"그게 신령님 말씀인가요?"
"하모. 신령님이 몇 뿌이나 선몽을 했어. 인자 정신좀 차리고 내 당골판 뺏는 일 그만하라
고 해. 더살고 싶으모..."
백무당은 이 렇게 내뱉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휑하니 나가버렸다. 광준도 하는수 없이 방을
나올수밖에 없었다. 내 당골판 뺏는 일이라고 했는데 당골판이 뭣인지 이해가 안 갔다.
"김선생님. 배도 안 고프세요? 뭣 좀 들어요."
행랑채 방으로 돌아오자 정자가 섬돌에서 기다리다가 광준을
맞았다. 두 사람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소반에 부침개며, 떡이며, 미역국을 가득 차려 놓았다.
"이게 다 어디서 났지요?"
그제서야 광준은 시장끼를 느끼며 상 앞에 앉았다.
"제가 직접 도가에가서 가지고 왔어요."
"도가 라뇨? "
"아까 굿할때 차린 음식들을 장만하고 가르고 하는 곳을 도가라고 한답니다."
"무당들 부엌이군요."
"호호호, 그런 셈인가요."
정자도 미역국을 훌훌 마셨다.
"그런데 당골판이란것이 어떻게 생긴 겁니까?"
광준이 궁금하던것을 물어 보았다.
"당골판? 누구한테 들었어요."
"아까 당님한테 들었어요?"
"그건 무가에서 쓰는 말인데, 말하자면 관할권 같은 겁니다.
세습 무당한테는 자기가 관할하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관할하에 있는 신도들은 일정하게 쌀이며 돈들을 세습 무당한테
바치고 있지요. 옛날 중세때 유럽의 성주와 비슷한 제도지요. 그 대신 세습 무당은 그 관할
마을의 질병 퇴치며 풍년 제사 등 액땜을 맡아서 해주는것입니다. 이것을 당골이라고 하고
자기 관할 군역을 당골판이 라고 하지요. 다른 무당이 들어올수없게 되어 있는게 관례입니
다. 어떤 지방에서는 단골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장사꾼들이 단골 손님이라고 하는것도
거기서
온것 같아요."
정자가 신이 나서 장황하게 설명했다.
"당골의 어원은 단군이나, 하늘을 뜻한다는 학설도..."
"예예 잘 알겠습니다. 정자씨는 참 모르는게 없습니다."
광준이 정자의 말허리를 끊었다. 그러면서 내심으론 정자가
이런 학구적인 면도 있다는게 대견스러웠다.
"오후에는 서울로 올라갑시다."
"정말이에요? 새 관찰은 이제 끝났나요?"
"늙은 새밖에 없어 흥미없어요."
광준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요기를 한 뒤 그들은 당집을 나섰다. 대곡까지는 차가 없기때문에 걸을수밖에 없었다.
정자의 커다란 여행용가방을 광준이 들고 앞장을 섰다. 대곡까지 이러고가지면 어깨깨나 빠
지겠다고 생각했다.
"무거워서 어떡하죠?"
정자가 미안하다는듯 말했다.
"이 정도야 뭐. 걱정 마세요."
광준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팔이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탈무재를 겨우 넘어서지 광준은 더 이상 걸을수가 없었다.
"여기 좀 쉬었다 갑시다."
광준은가방을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때였다. 마을 반대 쪽에서 차가 한 대 먼지를 일으키며 오고 있었다. 검은색 지프였다.
지프차는 광준과 정자가까이 다가오자 지나치지 않고 그 앞에 섰다. 지프에서 누가 내렸다.
회색 바바리 코트 차림에 키가 작고 얼굴이 주름투성이인 사나이가 내렸다.
그 사람은 뜻밖에도 추경감이었다.
"야 이게 누굽니까? 김선생과 미스곽 아닙니까?"
추경감은 함박웃음을 얼굴에 담고 반가워했다.
"아니, 경감님이 여길 일일이십니까?"
광준은 참으로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뭐 안 다니는 데가 있습니까? 그래, 두 분 재미는 좀 보셨소?"
추경감이 의미 있는 웃음을 다시 눈가에 지어 보였다.
"재미라뇨? 누구 약을 올리는 겁니까?"
광준은 추경감의 그 재미란 말이 너무나 역겨웠다. 역겹다기보다는 유치하게 들렸다. 그래
서 고운말이 나올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우리 꽁무니를 쫓아온 겁니까? 추경감님,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경찰관이 그렇게 할 일이 없습니까?"
"김선생,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대로 할 일이
있어서 다니는 겁니다. 김선생 뒤를밟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때 지프차에 같이 타고 있던 사람이 내렸다. 사복 차림의
지방 경찰관 같았다.
"김형사, 걱정마. 우리 김선생은 다하고 워낙 무관한 사이라
추경감이 연신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따라 내린 형사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읍내까지 걸어갈 작정 아시오?"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마십시오."
광준이 공연히 화를 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여기서 추경감한테 화를 낼 이유는 없다.
"김선생보다도 우리 미스곽이 하이힐 바람으로 읍내까지 어떻게 걸어갑니까? 자, 우리가 읍
내까지 태워다 드릴 테니 타십시오." 추경감이 권했다. "너무폐가되는 것 아녜요?" 정자가
체면불구하고 차에 탈 기색이다. 도저히 더 걸을 수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엉거주춤 광준과 정자는 추경감의 차를 얻어탔다. 지프는 다시머리를 돌려읍내쪽으로 향했
다. 이렇게되자 아까 화낸것이 슬그머니 미안해졌다. "탈무골가는 길이었나요?" 광준이 부
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강형사가 거기가있기때문에 데리러가는길입니
다." "형사를 모시러 경감이갑니까?" "허허허. 그렇게됐나요? 탈무골이어떻게생겼나 구경도
할겸." "그럼 강형사님이 탈무골에 지금 계신단 말예요? 언제 가셨어요?" 정자가 놀란듯이
물었다. "예. 어제 오후에 갔었지요." "어제오후에 갔다구요? 본일이 없는데요?" 광준도 뜻
밖이란 듯이 말했다. "형사가 남의눈에 띄게 다닙니까? 몰래 다니는게 직업아닙니까?" "나
같은 행동느린 늙은이나 질척거리지요." "무슨일로 거기까지 갔나요?" 정자가 관심을 보였
다. "우리 누님일때문에 갔었나요?" 광준도 덧붙여 물었다.
"글쎄요. 꼭 그렇다고는 할수 없지만, 뭣 좀 알아볼게 있었
습니다."
"그게 뭡니까? 얘기할수 없나요?"
"아닙니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지난겨울에 거기서 한 청년이 익사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걸 좀 알아보러 갔습니다. 그런건 이곳 경찰서의 일이고 벌써 끝난 사건이지만..."
추경감이 어물어물하면서 말했다.
"정근세씨의 일이군요."
광준이 내심 놀라 저도 모르게 말이 나오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일단 사고사로 처 리했지만 좀 미심쩍은 데가 있어서... 그런데 광준씨는
그 일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제가 오히려 물어볼 말입니다."
"후후후. 이거 형사질도 이젠 그만둬야겠군. 후후후."
추경감은 별로 우습지도 않은 대목에서 온 얼굴을 주름살투성이로 만들며 혼자 웃었다. 꼭
어린애 같았다.
"내 다 털어놓지요. 김을숙 여사의 일을 알아보다가 그런 일이
있었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것은 꼭 김을숙
회장의 일때문만은 아닙니다. 거상그룹이라는 재벌을 아시죠? 그 재벌의 장통석 회장과 이
곳이 좀 관련이 있는것 같아서 참고
자료를수집하고 있었습니다."
광준과 정자는 놀랐다. 장통석 회장과 탈무골? 그리고 정근세의 죽음? 도대체 어떤 관련이
있단 말인가?
"누님의 일을 이제 김을숙 회장 실종사건이라고 표현은 안하는군요."
김광준이 엉뚱한 말로 되받았다. 궁금한것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속마음과는 달리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건 여전히 실종사건이지요. 피살되었다는
증거는 아직 없지 않습니까?"
"누님과 거상그룹과 무슨 관계가 있었나요?"
"아닙니다. 절대로 무슨 관계가 있다고 얘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거상그룹건은 회사 업무 문
제입니다. 김을숙 회장과 관계가 있어서 알아보러 다니는건 절대 아닙니다. 다만 공교롭게
도 그것이 김을숙 여사 아니, 김광준씨의 고향인 탈무골과 관계가
있는것 같아 알아보는것 뿐입니다."
광준과 정자는 추경감이 능청을 떨고 있다고 생각했다. 필경
김회장의 피살사건과 관계가 있고, 모종의 분명한 단서를 가지고 쫓마다니는 거라고 생각했
다.
어느새 지프차가 읍내 버스 정거장에 닿았다.
"자, 여기서 내리시지요. 우린 탈무골로 다시 들어갑니다. 서울서 만납시다."
추경감이 정자의가방을 받아 내려주며 작별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추경감이 황급히 지프에 타더니 부릉 소리를 내며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광준과 정자는 그날밤 열한시가 넘어서야 서울 아파트로 돌아왔다.
이튿날 광준은 정자의 의견에 따라 누님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찾기로 결심했다. 정자가 집
회장이 쓰던 민속 보존 협의회 사무실로 나가자, 광준은 누님이 쓰던 헌 물건이며 방을 샅
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여러 종류의 핸드백이며 방안의 서랍이며, 장농등을 모조리 뒤지지
시작했다.
여기저기 서류함에서 알기 힘든 기록이며 영수증 같은것을
수없이 찾아냈다. 그러나 별로 도움될만한것이 없었다.
대부분의 자료들이 문화재에 관한 고증 서류나 사들인 영수증, 혹은 스크랩들이었다. 특히
열 몇 권이나 되는 스크랩에는
여러 신문 잡지에 쓴 문화재나 민속에 관한 글들이 모아져 있었다.
거의 점심나절이나 되었을때 헌 핸드백 속에서 종이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병원의 진찰권이
었다. 날짜는 일월 십육일. 김선화 산부인과라고 적혀 있었다. 여자니까 산부인과에 다닐수
을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광준은 그것에서 뭔가 걸리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산부인과에 다니면 큰 병원에 다니지 이런 의원급의 병원에
다녔다는게 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광준은 진찰권에 적힌 전화번호를 보고 김선화 산부인
과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여보세요. 그곳 위치가 어디쯤이지요?"
수화기의 간호원인듯한 아가씨가 가르쳐 준 곳은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같았다.
광준은 불쑥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문을 잠근 채 그 병원으로 갔다.
산부인과 병원은 전화에서 가르쳐준대로 그리 멀지 않았다.
아파트에서 일킬로쯩 떨어진 후미진 골목 입구에 있는 슈퍼마켓의 이층에 옹색하게 자리잡
고 있었다. 누님이 왜 이런 병원에 다녔을까 하는 의아심이 들 정도로 볼품없는 병원이었
다.
광준은 몇 번 망설이다가 이층 병원 안으로 올라갔다.
"어서 오세요."
하얀가운의 아가씨가 앉아서 주간지를 읽고 있다가 인사를
했다. 눈길이 누구하고 같이 왔느냐는 투다. 그도 그럴밖에, 산부인과에 젊은 남자 혼자 온
다는것이 이상할수밖에 없었을것이다.
"저어..."
광준은 어색해서 얼굴까지 붉어지며 어물거렸다.
"원장님하고 상의할 일이 있군요. 부인에 관한 일이라면 걱정
말고 말씀하세요."
아가씨는 얼른 자기대로 짐작을 한듯 원장실로 광준을 안내했다. 마누라가 원치 않는 임신
을 했다든가, 혹은 애인이 그런경우를 당했을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상의하러 온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대머리에 예순은 훨씬 더 되어 보이는듯한 원장이 의자를 권했다.
"저어...,,."
"걱정 말고 말해요. 부인이 문제가 생겼나요?"
원장은 안경 너머로 광준을 넌지시 건너다보며 다 안다는 표정이다.
"저어, 실은 뭘 좀 알아보려고 왔는데요."
"예, 어서 말해요."
"저어, 한 서너 달쯤전에 이 병원에 다녀간 어떤 여자에 대해 좀 얘기를 들어보려고 하는데
요."
"예?"
원장은 별사람 다 보았다는듯한 표정이다.
"저의 형수인데요. 김을숙이라고 ."
"뭣때문에 그런 걸 알리는 겁니까잔 환자의 비밀은 절대로 공개할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저의가족입니다. 이 병원에 다녀온 뒤 죽었단 말입니다."
광준은 그냥 순진하게 행동하다가는 안 될것 같다는 생각이들어 태도를 바꿨다.
"이 병원서 어떻게 했길래 생사람을 잡는 겁니까? 고소부터하자고 가족이 펄펄 뛰지만, 우
선 병원에서 잘못한것이 없을지
모르니 알아보자고 제가 말린 겁니다."
광준은 조용조용 말을 했으나 그 뜻은 아주 겁을 주는 내용의
거짓말이 었다.
"뭐라고요? 나한테 공갈치는 거요?"
원장은 큰소리는 치지만 뭔가 켕기는 눈치다. 담배를 피워 무는 손이 가늘게 떨리는것을 놓
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병원의 잘못이 없다는 기록만 보여주면 됩니다.
저도 병원서 뭘 잘못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가족들이
그러니까..."
한참 담배만 빨던 원장은 결심한듯 말했다.
"알았습니다. 진찰기록을 좀 찾아 봅시다. 날짜가 언제라고했죠?"
"일월 십육일입니다. 이름은 김을숙."
원장은 여러 서류철이며 카드를 한참 뒤척이다가 카드 하나를
뽑아 들고 왔다.
"김을숙, 나이 이십구세, 주소는 관악구..."
광준은 나이가 이십구세라고 적힌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수긍이 갔다. 누님도 여자니까 삼십대로 적기는 싫었을것이다.
"아아, 이 아주머니 생각남니다. 남편과 같이 왔었지요.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 피임이 잘못
돼 임신을 했다던 그 아주머니군요."
"예? 임신을 했다구요?"
"아니 그럼 그것도 모르셨어요?"
"그야 뭐, 시동생한테 그런 얘기까지 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그래서 남편 되는 분의 구두 동의를 얻어 낙태수술을 했었죠.
그뒤 두어 번 왔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전혀 후유증이
없었는데 죽다니요?"
광준은 원장의 이야기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님이 이런 곳에 와서 남몰래 낙태수술을 하다니! 더구나 남편하고 같이 왔다고.
"형님하고 같이 왔다구요?"
"예. 참 재미있는 분이더군요. 우스운 얘기도 잘하고 훤칠한 키에 인물도 좋고..."
원장은 다소 안심이 되는듯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병원측은 잘못이 없다고 가족들한테 얘기하죠."
광준은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병원을 뛰쳐나왔다. 누구에게도 아닌 분노가 치솟았다. 누
님이 그런 타락한 여자라니! 훤칠한 커에 미남이더라고? 흥. 어떤 놈팽이와 놀아났기
에...
광준은 혼자 씩씩거리며 김으로 돌아왔다. 분해서 견딜수 없는 심성이 되었다. 누구든지 만
나면 주먹으로 때려주고싶은 심정이었다. 아니면 어디가서 혼자 실컷 울고 싶은 심정이었
다.



육. 음모의 실마리
광준은 산부인과 병원에서 을숙 누나의 더럽고 비열한 과거의
한조각을 보고 난 뒤 더욱 착잡한 심정을 가눌수가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분노로 변해 있
었다. 세상 모든것에 대한 울분과
같은것이었다. 그럴수는 없다. 설마하니 누님이 거기까지 타락했을리는 없다.
광준은 속으로 이렇게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게 얼마나 다행이었을 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누가 누님을 죽였건 상관하지 말고 지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김을
숙 누나의 과거는 캐면 캘수록 더욱 두려운 일들만이 노출될것 같았다. "그래도 끝까지 캐
봐야 한다. 누님의 원수는 내가 꼭 갚아야 한다."
광준은 한편으로 이 생각을 버릴수가 없었다.
"누님이 아무리 나쁜 여자었더라도 역시 누님은 누님이다. 범인은 꼭 잡고야 말겠다."
광준은 며칠 동안 집에 틀어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다가 드디어 이런 결심을 얻어냈다.
광준이 꼼짝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자 초조해진것은 정자였다.
"김선생님, 어떻게 된거예요. 어디 편찮으시기라도 한 거예요?"
곽정자가 커피며 과일이며를 날마다 정성스레 들고 들어와 안타까워 했지만 광준은 별로 대
꾸조차 해주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말씀 좀 해 보셔요. 제가 보기 싫어서 그런거예요?"
"정자씨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럼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실수 없습니까?"
"김회장님을 살해한 범인 추적은 이제 포기하신 거예요? 만약
김선생님이 그 일을 포기했다면 제가 나서겠어요."
"누가 포기한다고 했습니까?"
광준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왜 그러고만 계시는 겁니까?"
"그 일이 과연 해 볼만한가치가 있느냐 하는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정자는 너무 뜻밖의 말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정자씨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무얼 말입니까?"
"김회장님의 사생활에 대해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정자씨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참, 김선생님도 답답하십니다. 제가 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전 숨기는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아는 대로는 다 이야기했습니다. 탈무골까지 따라갔다 오지 않았
어요?"
정자는 뾰루퉁해지면서까지 강력하게 항변을 했다.
"누님은 정말 애인이나, 가까이 사귀는 남자가 없었습니까?"
"또 그 얘기군요. 몇 번을 이야기해야 곧이듣겠습니까? 김회장님은 김선생님이 생각하시듯
그런 불결하고 부도덕한 위선자가 아니에요. 이거 답답해서 살수가 있나. 속이라도 확 뒤집
어보여 주고 싶군요."
정자는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그럼 몇가지만 묻겠습니다."
"물어 보셔요."
"김회장님은 장통석 회장 별장에 뭣하러 드나들었습니까?"
"예? 장회장님의 별장이라고요?"
정자는 확실히 놀라는것 같았다. 얼굴에 번개처럼 스치는 엷은 파도를 광준은 놓치지 않고
읽었다.
"예. 별장 말입니다. 삼송리에 있는 장통석인지 나발인지 하는 작자의 별장 말입니다."
광준은 스스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거칠게 내뱉았다.
"그런 일은 처음 들어요. 장회장님의 별장이 삼송리에 있는지
사송리에 있는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정자도 언성이 높아졌다.
"정자씨 얘기를 하는게 아닙니다. 김회장 얘김니다."
"김회장님한테도 그런 얘기 들은 적은 없어요. 도대체 누구한테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들으
셨어요?"
광준은 더 이야기해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했다.
"그 얘긴 그만둡시다."
그 순간 광준은 산부인과 의사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같이온 남자는 잘생긴 인물에 우스갯
소리도 잘 하는 남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혹시 남궁현 국장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궁국장과 누님 사이는 어떤 관계입니까?"
"예?"
정자가 다시 놀라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자는 광준이 어떤 심한 층격을 받아 자기 감정을가누지 못하고 있는 걸로 받아들였다.
"김선생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지독한 편견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것은 아닙니까?"
"내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럼 남궁국장과 김회장님의 사이를 물어 본것은 무슨 뜻입니까? 분명하게 대답해 보세
요."
정자도 그렇다면 그냥 넘길수 없다는 태도다.
"남자와 여자의 사이를 물은것입니다."
"어머머 "
정자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그냥 아무 말도없이 나가 버렸다.
이번에는 곽정자가 자기 방에 처박혀 꼼짝을 하지 않았다. 김광준 같은 사람과는 다시는
말도 나누지 않겠다는 투였다.때가되면 나와서 밥상만 차려 놓고는 식사도 마주앉아 하지
않았다.
이틀을 그런 냉전 상태로 보낸 광준은 태도를 바꾸었다.
정자의 문앞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망설이 다가 노크를 했다.
"뭐예요?"
앙칼진 정자의 목소리가 도어를 뚫고 비수처럼 날아왔다.
"좀 나와 보셔요."
"그대로 말씀 하셔요."
여전히 앙칼진 목소리다.
"아파트 앞에 개나리가 한창입니다. 산책이나 나갑시다."
"혼자 다녀 오셔요."
좀 누그러진 목소리다
"사내 혼자 무슨 꽃구경입니까? 같이좀 가줘요."
광준이 마치 어리광부리듯 말했다. 조금 있다 문이 열리고 정자가 나왔다. 멋적은듯 빙그레
웃어 보였다.
"김선생님 나쁜 사람".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화해를 했다.
광준은 김을숙 누나에 대한 과거를 더 캐보려면 정자 아닌 다른 사람들을 만나볼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민속 문화 보존 협의회 사무실로 찾아갔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고 조민희 혼자 동그마니 책상에 앉아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미스조는 광준을 보자 다소 뜻밖이란 표정이었으나, 곧 반겨주었다.
"미스조. 혼자 있었구먼 그래."
광준도 반가운 척했다.
"남궁국장은 어디 나갔어요?"
"예. 조선조 백자를 만든다는 그곳 말입니다."
"남궁국장은 거길 자주가나요?"
"일 주일에 두서너번씩은 다녀와요. 그곳 물건들을 찾는 외국손님들이 많거든요."
"그런데 외국 손님을 그곳까지 모시고가기도 합니까?"
"예. 때로는 그러기도 해요. 국장님은 손수 운전을 하시니까
옆에 손님을 태우고 왔다 갔다 하죠. 외국분들은 그 공장 구경이
신기한가 봐요."
"미스조도가본 일이 있나요?"
"예. 저도 국장님 차를 얻어타고 두어 번가봤어요. 거진 손님들을 접대하지 위해 아주 잘
꾸며진 숙소 같은 곳도 있어요."
"거기서 자고 오신 일도 있나요?"
"예. 너무 늦으면..."
"남궁씨도 함께?"
"예. 아니 무슨 말씀을..."
조민희는 엉겁결에 예라는 대담을 해 놓고는 그게 무슨 뜻인지 짐작하고는 금방 당황한 표
정이다.
"아니 뭐 손님을 접대하자면 그럴수도 있을 테니까요."
민망해 하는 조민희를 오히려 광준이 얼버무려 주었다.
"김을숙 회장님도 그곳에 자주 들르셨나요?"
"가끔..."
"그때도 남궁국장차를 타고 다녔나요?"
"회장님은 주로 박기사가 모시고 다녔어요. 남궁국장님의 차를 잘 이용한것은 미스곽이었
죠."
조민희는 약간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는 안할말을 뺏다는 표정이다. 금방 얼
굴빛이 달라졌다.
"뭐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녜요."
새침하면서도 야무지게 생긴 얼굴.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순진해 보이고 어떻게 보면 닳아
빠진 오피스걸 같아도 보이는 조인희. 한듯만듯한 은은한 화장이 남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
분한 세련된 모습.
"미스곽이 뭣 하러 그곳엘 자주 다닙니까?"
"그야 뭐 김회장님 심부름이라고 한마디만 하면 다 통하는것아녜요."
조민희의 말에는 여전히 가시 같은것이 감추어져 있었다. 광준은 그것이 일종의 질투라고
생각했다.
"그럼 미스곽과 남궁국장은 다른 일로도 자주 어울려 다녔겠군요."
광준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 슬그머니 호기심이 일었다.
"제가 어떻게 남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겠어요. 그냥 그런것같았어요... 저 선생님 차
한잔 대접해 드릴까요?"
조민희가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은 광준 앞으로 걸어오며
물었다.
"지금 점심시간인데 우리 밖에 나가 점심이나 같이 할까요?"
광준이 넌지시 제의를 해봤다.
"지금 사무실이 비어서 나갈수가 없어요. 조금 있으면 주인성
전무님이 오실 텐데..."
조민희는 주저하는 눈치다. 자기한테서 미스곽과 남궁국장에 관한것을 더 캐들을까봐 피하
는것 같았다..
"그냥 사무실을 잠그고 나가면 안 되나요?"
"그럴수는 없어요. 전화 오는것도 받아야죠, 또 딴 손님들이
올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군요. 그동안 사무실 운영은 어떻게 해 왔나요?"
"운영이 라구요?"
"결재 같은것 말입니다. 회장님이 안계신지가 꽤 오래 되지않았습니까?"
"그건 김선생님 말씀대로 남궁국장께서 협의회 일은 결재를
하셨구요. 민예품 회사는 주전무께서 결재를 하셨어요. 필요하시면 제가 별도로 보고를 해
드릴수가 있어요."
이 대목에서 조민희는 상당히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갔다.
"아니 뭐 내가 꼭그런 걸 알자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금이 잘 안 돌아갈때는 남궁국장이 거상그룹의 장회장님과 상의를 하는것 같았어
요."
"장회장님이 여기 들르는 일이 있습니까?"
"그런 일은 없어요. 민예사 개소식때 한번 왔다가고는 온일이 없는것 같아요."
"그럼 김을숙 회장은 장회장과 주로 어디서만나나요?"
"그야 저보다 미스곽이 더 잘 알텐데요.가끔 회현동의 장회장님의 회사를 들르시는것 같았
어요. 외부에서 만날때는 수정궁에서만나는것 같구요."
"수정궁?"
"예. 사직동에 있는 한식요정이에요. 그런건 저보다 미스곽이 주로 맡아 했으니까 잘 알거
예요. 김회장님과 장통석 회장님
사이의 심부름이라든지 김회장님과 남궁국장 사이 심부름같은 건 미스곽이 도맡아 했거든
요."
"남궁국장 같은 멋쟁이는 드물게 보는 사람입니다. 미스조,
그렇지 않아요?"
광준이 동의를 구했다.
"멋쟁이면 뭐합니까? 사람이 진실해야죠?"
그러나 조민희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대꾸했다.
"그럼 남궁국장이 건달이란 말씀인가요?"
"제가 언제 그랬나요?"
"그러면...?"
"우리 국장님은 너무 여자를 울리고 다니는것 같아요."
"여자를 울려요?"
"너무 멋쟁이셔서 그런가 봐요."
조민희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갑자기 얼굴이 귀밑까지 발그레 물이 들었다.
여기서 광준은 조민희와 곽정자와 남궁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는것을 직감했다. 거기다가 김을숙 회장까지 끼어들어 있으리란 짐작도 쉽게 할수가 있
었다.
광준은 그 비밀을 어디서든지 캐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다음에 또 들르겠습니다. 점심은 그때 하기로 하죠."
광준은 협의회 사무실을 나왔다. 그러고는 회현동 거상그룹 빌딩 지하 다방에가서 한규빈
을 불러냈다. 한규빈이 점심 먹으러 나갔다고 해서 삼십분 이상이나 다방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했다.
누님을 살해한 배경에는 남궁현이나 조민희 그리고 장통적 회장이 관련돼 있는것만 같은 생
각이 자꾸 들었다. 특히 장통석은
여러가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것 같았다.
탈무골을 민속 보존 마을로 지정하는 데는 장통석의 도움 없이는 거의 어려웠을것이다. 그
것은 돈줄 없이 무슨 일이 성사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장통석 회장은 김을숙 회장이 아무리 숨겨 놓은 정부라고 하지만 아무 이득 없이 막대한 자
금을 투입 할리가 없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짜식아 뭘 그리 멍청하게 생각하고 있냐?"
어느새 한규빈이 들어와 생각에 잠긴 광준의 어깨를 툭 쳤다.
"어! 너 왔구나!"
"짜식아 소식도 없이 그동안 어디 쏘다니다 왔냐? 집에 한번
전화를 넣었더니 아무도 받지 않더구나. 어디 살림 차렸냐?"
"살림?"
"짜식아 너 숨겨 놓은 여자 있다며."
광준은 웃을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딜 쏘다니다 왔냐?"
"새 잡으러 갔다 왔지"
광준도 엉뚱한 대답을 했다.
"새 잡으러? 좋지 입술 빨갛게 칠하고 엉덩판 넓적하고, 허리 잘룩한 새 많지 그래 짜식아
몇 마리나 잡았냐?"
한규빈도 농담으로 받아 넘겼다.
"다 임자가 있어서 한 마리도 못 잡았다."
"짜아식. 너 같은 주제에 그게 그리 쉽게 될것 같으냐? 그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
기까지 왔니? 어이. 아가씨 여기
커피 두 잔." 한규빈은 물어 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커피를 시키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실은 또 좀 알아봐줘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짜식아, 넌 우리 회장님 뒷조사를 해 달라는 거냐? 나 그런짓 자꾸 하다가 모가지 날아가
겠다. 짜식아."
"미안해."
"하지만 걱정마. 이 한규빈이 그렇게 눈치 없는 놈 아니니까... 어디 말해 봐."
"너희 그룹 중에 거상개발주식회사라는것 있지"
"거상개발? 있지. 한데 그건 또 왜?"
"이유는 묻지 말고 거기 대해서 좀 알고 싶어서 그래."
광준은 거상개발이 탈무골의 우물을 파는 일을 했다는 얘기를
들을때부터 거기 대해 뭔가가 알고 싶었다.
더구나 추경감과 강형사가 거상그룹의 일을 캐기 위해 탈무골
에 갔다고 하지 않았는가?
"짜식아 이제 복부인이 될려고 하는 거야 뭐야? 거상개발이란
변두리의 땅을 헐값에 사서 아파트 단지며 공업용지로 바꿔 팔아먹는, 말하자면 허가 낸 복
부인 같은 거야."
"그 일밖에는 하지 않는 거야?"
"왜 더러는 광산권 설정 같은것도 하고 석유 시추 사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그러지"
"실은 말이야..."
광준은 고향인 탈무골에 다녀온 이야기를 대강 들려 주었다.
그리고 경찰이 거상그룹과 탈무골 관계를 뭔가 추적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리고 지난 여름 거상개발에서 탈무골에 우물을 파주었다는
얘기도 들려 주었다.
"짜식아 너 반도체 공부한게 아니라 혹시 산업스파이 공부하고 온건아니니?"
한규빈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일때문에 그래. 이유는 나중에 말해줄께."
한규빈은 한참동안 광준을 쳐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알았어. 이유는 묻지 않을께. 마침 거상개발 기회실에 우리 후배 한놈이 있어. 그놈을 좀
써 먹야지 그래 알고자 하는 초점이 뭐야?"
"탈무골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그걸 좀 알고 싶어."
그때 커피 두 잔을가져왔다. 한규빈은 설탕도 타지 않고 커피를 훌훌 소리를 내며 마셔댔
다.
"저녁때 여기서만나. 다섯시 십분께 퇴근할 테니까. 그때 어디가서 한잔 하자구."
한규빈은 그렇게 말하고 훌쩍 일어서서 나가 버렸다.
광준은 지하 다방을 나와 서울거리를 서너 시간 서성거렸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엄정난 사건과 마주쳐 근 일년만에
온 서울 거리도 마음 놓고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다섯 시가 조금 넘어서야 다시 터덜터덜
걸어서 다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점심도 굶고 다녀 몹시 지치고 배가 고팠다.
다방에는 한규빈이 벌쩌 와 있었다.
"김박사 여기야 여기"
한규빈이 큰소리를 지르며 손짓을 했다. 다른 손님들이 무슨 일이 났다 해서 두리번거릴 정
도였다.
김광준이 귀국한 이래 김박사라고 볼러 준것은 한규빈이 처음이었다.
"야, 박사가 뭐니 창피하게."
"이런 짜식 봤나. 나 같으면 자랑스러워 명함을 큼직하게 적어 막 뿌리고 다니겠다. 창피하
다니? 짜식 그게 무슨 소리야.
뭐 박사란게 나일론 뽕해서 따는 줄 아니?"
한규빈이 수다를 떨었다.
"야, 배고파 죽겠다. 어디 딴데로 옮기지."
둘은 일어서서 전에가 본 일이 있는 무교동 낙지집 으로 갔다.
광준은 배가 고픈김에 우선 하얀 쌀밥을 낙지볶음에 비벼 정신없이 퍼 먹고 나서 매워서 얼
얼한 혓바닥에 소주 두어 잔을 퍼부었다.
광준의 모습을 입을 벌린채 지켜보고 있던 한규빈이 히죽이
웃었다.
"짜식아 이제 정신이 좀 드나? 꼭 백 년은 굶은 사람 같다."
"그건 그렇고 내 숙제는 해가지고 왔나?"
"천천히 얘기하지. 나도 우선 목부터 축이고..."
한규빈도 소주병을 기울였다. 연거푸 세 잔을 마신 뒤 입을
열었다.
"거 참 희한한 비밀이 있더군."
"희한한 비밀?"
"짜식아, 너희 고향이라는 탈무골 말이야. 무당이 지배하는
마을이라면서? 요즘 세상에 그런 곳이 남아 있다니 참 희한한
노릇이야. 그뿐이 아냐. 내가 희한하다고 한것은 그 탈무골의
땅속이야."
"땅속이라고?"
광준은 정신이 번쩍 드는것 같았다.
"작년가뭄때 관정을 파려고 내려갔던 거상개발팀이
말이야..."
"관정이 뭐하는 거야?"
"우물 말이야 짜식아. 지하수를 뽑아내는 우물..."
"알았어. 그래서..."
"근데 고놈의 마을 바닥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리 파도 지하수가 나오지 않더라는 거야.
깊은 곳은 팔십피트까지 팠다고 하니
말이야."
"그래서?"
광준은 술잔을 든채 한규빈의 입술만 쳐다보았다.
"그런데 땅 밑에는 대부분 암석층으로 덮여 있었다 이거야. 그암석을 다시 뚫고 내려가자
그때야 거기 지하수가 고여 있더란
거야. 이건 석유를 캐는 작업과 비슷하다고 할수 있지"
"그럼 석유가 나왔단 말이야?"
"짜식아, 무식하긴. 그 정도 파가지고 석유가 나올것 같아?
한국 땅에서 석유나오는것 봤니?"
한규빈은 턱을 쑥 내밀어 보이며 광준을 힐책했다.
"그럼 뭐가 희한한 일이란 말야."
"잠자코 듣기나 해. 이건 거상그룹의 초특급 비밀인데 말야.
야 야, 그거 캐내는 데 군자금깨나 들었다. 알아서 해."
"어서 얘기나 해 봐."
"근데 그 암석이란것이 문제란 말야. 거상그룹 연구실에서 그
암석을 분석한 결과 엄청난 광맥을 찾아냈다 이거야."
"광맥?"
"그럼. 아주 고품위 우라늄 광맥이란 것을 확인했어. 이쪽의
분석으로 세계에서 몇 군데 없는 우라늄 노다지 광맥이란 거야.
그런데 그게 묘하게도 모두 탈무골의 마을 밑에 집중돼 있다 이거야. 지상은 무당이 지배하
고 지하는 우라늄 천지의 세계이고 ,
이거 아이로닉 하지 않아?"
"그래서 거상그룹선 어떻게 한대?"
"짜식아 그걸 말이라고 물어? 너 같으면 어떻게 하겠나?"
한규빈이 소줏잔을 홀짝 들어부으며 말했다.
"광업권 설정을 하고 캐내서 때부자 되겠다는 거지 뭐야."
"우리나라에 있는 우라늄땅은 경제성이 없다고 들었는데..."
"짜식아, 그러니까 아무도 캐려고 들지 않는것 아냐. 그러나
그것이 고품위가 돼서 노다지라면 문제가 다르지 않겠어.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우라늄광은
두 군데가 있어. 충북 옥천계하고
경북의 영양계가 그것인데 이것은 모두 영점영영사프로밖에 함유량이
없어서 경제성이 없었단 말야."
"그럼 탈무골은 얼마나 되는데?"
"거긴 노다지야 노다지 세계시 우라늄 생산량이 많은 곳은 미국, 호주, 캐나다인데 여기것
들은 모두 품위가 영점칠프로가 넘는단말야. 경제성이 있자면 최소 영점일프로는 돼야한대.
그런데 탈무골
지하의 우라늄은 그 함량이 대충 시칠프로가 넘는다 이거야. 이런 고품위는 어디에도 없어.
이거야말로 노다지지 뭐냐."
한규빈은 자기 일처럼 신이나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캐자면 마을 전체 집들을 사들여야 되게 돼있단 말이야."
"그곳을 지금 무속 보존 마을로 지정하려고 하는데.,..,,."
"짜식아, 그러니까 문제가 있는것 아니냐 이거야. 그곳에 노다지기 묻혔다는 소문만 나 봐
라. 누가 집이며 밭을 팔려고 하겠어. 팔아도 엄청난 값을 내라고 할것 아냐. 그러니까 몰
래 집이며 땅을 살금살금 사들이는 방법밖에 없단 말야."
그제야 광준은 머리에 얼른 떠오르는게 있었다. 그렇다. 무당 백순조가 헌 집이며 밭이며
언덕배기를 슬금슬금 헐값에 사들이고 있다고 정용세가 귀띔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무당 백
순조가 장통식의 사주를 받고 그런 짓을 하고 있는것이 틀림없다고 봐야 한다.
거기다가 민속 보존 마을로 지정해 버리면 자기들 일이 제대로 될 턱이 없다,
무당 백순조가 처음엔 민속 보존 마을 지정을 찬성했다가 중간에 맹렬히 반대한 이유가 거
기에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백순조의 적은 누구인가?
민속보존 마을을 고집한 김을숙 회장이 최대의 방해자로 보였을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광준은 벌떡 일어섰다.
"짜식아 갑자기 왜 이래?"
한규빈이 술잔을 든채 광준을 쳐다보고 눈이 둥그레졌다.
"알았어. 알았단 말야!"
광준이 소리릍 버럭 질렀다.
"짜식이 미쳤나? 뭘 알았단 말야?"
"나쁜 놈 같으니. 그렇다고 사람을 죽여?"
"짜식아 누가 누굴 죽였단 말야?"
"장통석. 그놈 짓이야."
"...? "
한규빈은 어이없다는듯이 광준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다가 말했다.
"너 술 취했구나. 야, 나가자 나가."
그들은 낙지집을 나왔다.
한규빈과 헤어진 광준은 집으로 오면서 계속 치를 떨었다. 도요또미히데요신지 장통석인
지 하는 녀석. 어디 두고 보자. 그는 입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김으로 돌아온 광준은 곽정자를 불러 놓고 한규빈한테 들은 얘기를 대강 들려 주었다. 그리
고 범인임에 틀림없는 장통석을 그냥 돌수 없다고 혼자 흥분해서 떠들었다.
"전에 정자씨한테 보낸 협박편지 말입니다. 그 봉투에 찍힌
소인이 회현동 우체국으로 돼있어요. 회현동이란 거상그룹이
있는 곳 아닙니까? 내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
살인예고 편지도 장통석이란 놈의 짓이 틀림없어요."
"장회장님이 왜 저한테 그런 무시무시한 편지를 보냈을까요."
정자가 몸서리쳐진다는듯 몸을 움추리며 말했다.
"그야 뻔한일 아닙니까? 정자씨나 내가 더 이상 누님의 피살사건을 캐지 말라고 겁준거 아
니겠어요?"
광준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장통석 회장님이 김회장님을 죽였다손치더라도 아무런 증거를 찾을수 없잖아요."
"증거? 그거야 지금부터 찾아내야죠. 꼭 증거를 찾아내서 사형대에 올려 세울 겁니다. 실컷
농락하고 나중에는 죽이기까지하다니..."
"농락이라뇨?"
"장통석이 누님을 농락했단 말입니다. 삼송린가 사송리에 별장을 지어놓고 거기 누님을 데
리고가서 농락했단 말입니다."
"어머!"
정자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따위 재벌 총수가 있으니까 다른 재벌들이 욕을 얻어 먹는것 아닙니까?"
"김선생님. 확증도 없으면서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시다니요."
광준이 너무흥분해서 떠드는 바람에 정자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확증? 확증 다가지고 있습
니다. 내 일생을 바쳐서라도 장통석이란 놈을 꼭 파멸시키고 말겠어!"
두 사람은 한동안 묵묵히 앉아 있었다. 목걸이에 달린 하회탈을 두 손으로만지작거리고 있
던 정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자가 여자를 농락했다는 표현은 점잖지 못할 뿐 아니라 옳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해요."
곽정자가 워낙 톤을 낮춰 타이르듯 조용히 말하는 바람에 광준도 아무 말 않고 조용히 쳐다
보기만 했다.
"그런 말은 전 세대적 용어랍니다. 저는 우리 회장님이 그런유치한 짓을 했으리라고는 물론
추호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김선생님이 말씀하신 농락이라는 남녀관계의 표현에는 저항을
느끼게 되네요.요즘의 성인남녀들은 모두 자기 일은 자기가 판단할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
다. 누가 누구를 농락했다고 하는 봉건적인 용어는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하지만 한쪽의 감언이설에 속아 같이 놀아 줄수는 있는 일 아닙니까"?"
"그렇더라도 농락이라고 볼수는 없는 거예요."
"남궁현 국장 같은 사람이 농락의 명수라면서요?"
말이 달리자 광준은 엉뚱한 방향으로 갔다. 따지고 보면 엉뚱한 방향이 아니라 남궁현도 장
통석이처럼 김회장을 농락한 사람이란 생각때문에 나온 말인지도 모른다.
"왜 얘기가 빗나가세요?"
"그렇지 않습니까? 미스곽도 남궁현 국장과 자주 어울려 다녔다면서요?"
광준은 내친 김에 조민희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쏟아버렸다.
"어머! 그게 무슨 의미예요?"
"남궁국장 차를 타고 도요지에 자주 다녔다고 하던데요. 거기서 놀다 오기도 하고."
이 대목에서 광준은 히죽 웃었다. 이것이 질투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구한테서 그런 중상 모략 얘기를 들으셨어요? 밝혀 보세요."
정자는 야무진 말씨로 따지고 들었다. 밝혀야 한다는 태도다.
광준은 괜히 실없는 소리를 했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꼭 밝혀야 합니다. 김선생님! 절 이제까지 그런 여자로 보아왔어요? 아이 분해!"
"그야 뭐, 꼭 어떻다는 얘기가 아니고..."
광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얼버무리려고 했다.
"누구예요? 말씀해 보세요."
정말 낭패였다. 광준은 하는수 없이 미스조를 대지 않을수 없었다.
"미스조가 그러는데..., 뭐 곡 헐뜯으려고 한 말은 아니야.
그건 분명해요."
"조민희? 세상에 그럴수가... 그럴수가... 자기가 한 일을
나한테 덮어씌우다니..."
정자가 적잖이 흥분하는것 같았다.
"자기가 한 일이라고요?"
"예. 조민희가 어떤 여자인지 잘 모르죠? 제가 이런 말은
안하려고 했지만 분해서 말씀드리지 않을수 없어요."
"어떤 얘긴데요?"
"이런 말 하는것은 내 인격부터 깎이는 일이지만, 기왕 말이 나왔으니다 얘기 하겠어요. 미
스조는 보기는 그렇게 얌전하고 깔끔하게 보이지만 행실은 아주 개차반이에요. 우리 회
사에 오기 전부터 있던 회사에서 남녀관계로 말썽이 많았어요."
"어떤 말썽이었나요?"
광준은 아주 훙미롭다는듯이 담배를 피워 물며 본격적으로 들어줄 태세를 갖췄다.
"남녀관계 말썽이란게 뻔한것 아녜요. 직장 상사와 눈이맞아 놀아나다가 고소를 하네마네
하고 떠들었죠, 또 옆에 있는 과의 미혼 남자사원과도 하루가 멀다 하고 호텔이며 온천
을 돌아다녀 회사에 치사한 소문이 파다했대요. 그러자니 회사 공금에도 손 대게 되
고... 좌우간 엉망진창이었대요. 그무렵에 사귀게 된 사람이 남궁국장인데 금세 또 눈이
맞았나 봐요. 남궁국장이 조민희를 우리 협의회에 끌어들였으니까요. 협의회 일을 하면서도
계속 남궁국장과 놀아나면서 결국은 공금까지 탈을 냈던 거예요. 남궁국장이 도박 뒷돈을
누구한테 대 주다가 그렇게 됐다고 하지만 실은 두 사람이
놀아나면서 가져다 쓴걸거예요."
곽정자는 한 번 말문을 열자 그냥 술술 풀어 놓았다. 광준은 얌전하고 예의바른 숙녀인 정
자한테 이런 면이 있었다 하고 다시 보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구요."
"그뿐 아니에요. 그녀는 남자를 홀리는 데 천재적인 재질이
있는지 천성이 그런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한 남자만으론
직성이 풀리지 않는가 봐요. 주인성 전무까지 홀려가지고..."
"예?"
광준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정말이에요. 까짓거 다 털어놔 버리지요. 어느날 제가 회장님 심부름으로 급히 민예품 공
장에 간 일이 있었어요. 시간이 늦어 모두 퇴큰했을까봐 급히 서둘러 인사동까지 갔는데
마침 사무실 문이 열려 있었어요. 제가 무심코 사무실 문을 확 당기고 들어섰었지요. 그런
데 나원 참...!"
정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광준은 더욱 궁금해졌다. 정자는 광준한테서 시선을 돌리고
나직이 발했다.
"주전무님과 미스조가 소파에서.,...,"
정자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수 있어요?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에요."
"사랑에 장소와 시간이 문젭니까. 하하하. 재미있군요. 더계속해 보세요."
광준이 익살을 부렸다. 그럴수록 정자는 수줍어 어쩔줄 몰라했다.
"그게 도대체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그날 저녁에 제가 회장님을 모시고 어떤 호텔 커피숍에
간 일이 있는데 글쎄..."
정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 발을 계속했다.
"글쎄 그 커피숍에 이변엔 남궁국장과 마주 앉아서 생글거리고 있잖아요. 세상에 사람이 그
럴수가 있어요."
"주전무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설마하니..."
"그러실 거예요. 안믿어도 좋아요. 주전무님도 사람은 예의바르고 정직하게 보이지요. 하지
만 그런 엉큼한 구석이 있답니다. 하기야 여자가 그런 식으로 덤비면 물러날 남자가 있
겠어요?"
정자의 말도 옳은 점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들을 김을숙 회장님은 모르고 있었나요?"
광준이 물었다
"속속들이야 모르셨겠지만 소문이 파다한데 모를리가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공금까지 축낸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누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몇 번 불러서 야단을 쳤죠. 요즘 미스조한테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도니 조심하라는 정도로
처음엔 얘기했어요. 그래도
계속 그런 소문이 나돌자 한번은 불러다가 호되게 꾸짖었어요.
"그게 언젭니까?"
"회장님이 돌아가시기 이틀 전쯤이었나 봐요."
"그랬군요."
광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미스조가 김회장에대한 앙심을 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김회장과 남궁국장이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면 중간에 끼어든 조민희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여자의 질투란 얼마나 무서운가를 광준은 미국 소설에서 자주 읽
어 봤다. 더구나 김회장은
조민희보다 나이가 많다는 핸디챕이 있다. 그렇다면 김회장이
조민희를 그냥 꾸짖는 정도로 끝내지는 않았을것이다. 줄수있는 온갖 모욕은 다 주었을것이
다.
그런 경우 조민희같이 막돼먹은 여자가 그냥 있을리 없다.
충분히 살인이라도 할수 있었을것이라고 광준은 생각했다.
"조민희와 주전무의 관계도 누님이 알고 있었나요?"
"아마 대강은 눈치채고 있었을것입니다."
정자는 다털어놓고나니 시원하다는 표정보다는 공연히
흥분해서 떠든것을 후회하는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주전무와 남궁국장 사이는 어땠어요?"
"그게 저는 좀 이해 안가는 점이 있었어요. 치사한 말로하자면 주전무님이 남궁국장으 애인
을 새치기한 셈이 되는데, 오히려 주전무님이 고자세로 나오고 남궁국장님이 절절
매는것 같았거든요. 아이 우리 이런 치사한 얘기는 그만두기로 해요. 오히려 우리 인격만
버리게 되는것 같아요."
정자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광준은 참으로 놀라운 사회의 뒷면을 보는것 같아
마음이 개운하지 못했다. 문화사업을 한답시고 모여들 앉아 겉으로는 민족문화가 어떻고
하면서 떠들어대고 뒷구멍에서는 치사하고 불결한 싸움질이나 해대는 그런 사람들. 국가의
경제가 어쩌고 수출이 어쩌고
하면서 기부할 궁리나 하고, 끼리끼리 사회의 뒷그늘에서 성욕을 채우며 놀아나는 재벌 총
수 장통석.
"하하하."
광준은 천장을 쳐다보며 큰소리로 웃었다.
광준은 이래도 누님의 살인범을 찾아내야 하느냐 하는 의문에 잠시 빠졌다.
그들의 하는 짓이 살인과 다를 바가 뭐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법률적으로야 살
인보다 더한 죄가 있을까마는, 이것은 도덕적으로 교수형을 받아도 마땅한 짓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치사한 구렁텅이에 정자씨는 빠져들지 않은게 천만다행입니다."
"저도 그런축이라고 김선생님은 생각하고 계시잖아요?"
정자는 미소를 띠며 상냥하게 말했다. 기분이 좋다는 표시다. 광준은 그런 모습의 정자가
더없이 맑고 귀염게 보였다.
도톰한 입술에 정감이 무르익었다. 조금 전에 보였던 성난 표정은 찾아볼수가 없었다.
"천만에요. 정자씨가 누군데요. 우리가 알게 된것이 한달만 되었더라도 제가 청혼을 했겠습
니다."
"그건 무슨 뜻이에요?"
"만난지 한달도 안돼 사랑한다느니 미워한다느니 하면 그게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게 아
닙니까?"
"사랑이란 첫눈에라는 말이 있어요. 시간이 무슨 문제인가요?"
정자는 더욱 생글거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지금 내가 프로포즈를 해도 받아주시겠습니까?"
광준이 몸이 단듯했다.
"어떻게 되나 한번 해보세요."
"정자씨 사랑합니다. 우리 결혼합시다."
광준은 농담삼아 한 말이지만 실은 진정에 더가까운 말이었다.
"어머머... 몰라요. 우린 아직 그런 달콤한 얘기를 할 처지가 아니랍니다. 김선생님 정
신 차리세요."
정자가 또록또록한 말씨로 타이르듯 하고는 일어서서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날 광준은 시경으로 추경감을 만나러 갔다. 마침 추경감은 멍하니 다리를 포개고 앉
아 뭔가 생각에 장겨 있었다.
왼손에 끼고 있는 담배가 다 타들어가 손이 델 지경인데도
모르고 있었다.
"경감님!"
앞에 다가서서 광준이 부를때까지 모르고 있다가 화들짝
자세를 고치고 쳐다봤다.
"아니 이거 김광준씨 아닙니까? 어서 오십시오."
추경감은 두리번거리다가 멀리 있는 의자를 끌고 와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밖에 나가서 차라도 한 잔 하실까요?"
광준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전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에 추경감은 뜻밖이라는 표정이다.
"이거 영광입니다. 김선생이 차를 다 사겠다고 하니... 암 가고 말고요."
추경감이 일어서서 앞장 셨다. 두 사람은 시경 옆 골목 지하 다방으로 들어가 마주앉았다,
"그래 무슨 바람이 불어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까?"
앉자마자 추경감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다 낡은 지퍼 라이터기가 불이 켜지지 않아
몇번이나 켜댔다.
"그래 탈무골에선 뮐 좀 캐냈습니까?"
광준이 먼저 물었다.
"그 정근세라는 사람의 익사사건 말입니까? 그건 아직 별다른 진전이 없습니다."
"그것보다 거상그룹과 탈무골의 관계는 좀 알아낸게 있습니까?"
그때 레지가 와서 차 주문을 받아 갔다.
"장통석이란 사람 혹시 아시는지요?"
추경감이 물었다.
"한번만난 일이 있습니다. 누님의 일을 후원해 주고 있다고 해서..."
"참 그랬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탈무골에 대해 무지무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건 벌써 제가 다 알아냈습니다."
"예? 어떻게 그걸..."
추경감이 놀랐다. 광준은 조금 으시대고 싶은 어린애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라늄광을 캐내려고 무당을 시켜 마을 땅을 사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광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참 용케 알아내셨군요. 김선생이야말로 형사 뺨치겠군요."
추경감은 주름투성이 얼굴에 함박웃음을 담았다.
"그러면, 장통석 회장이 자기 일의 방해자인 누님을 살해했다고는 보시지 않는지요?"
"글쎄. 그건 좀 비약이 아닐까요?"
"비약이라뇨? 동기가 확실한데 비약이랄수가 있습니까?"
"첫째, 김을숙 여사가 살해됐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습니다.
둘째 과연 재벌의 총수이며 사회적인 저명 인사가 그런 졸렬하고 상식 밖의 일을 했다고 생
각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경강님은 아직도 누님이 살아 있다고 믿는 겁니까?"
광준이 언성을 높였다.
"아, 아, 김광준씨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꼭 그렇다고 확신하는것은 아닙니다. 어느 쪽이
든 가능성은 있는것입니다. 즉 김을숙 여사가, 김선생 주장처럼 실해된 경우, 둘째 스스로
자취를 감춰 버린 경우, 셋째 누군가에 의해 납치된 경우, 이 세가지의 가능성은 언제나 있
는것입니다. 한가지 확실한것은 김을숙 여사가 십이일동안 사라진것입니다,"
광준은 그 문제를 더 따져봤자 경감의 태도가 변할리 없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수정궁은 뭣때문에
내사를 했습니까?"
"수정궁? 거 사직동에 있는 요정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강형사가 나를 미행해서 왔던 곳이죠."
"미행이라뇨? 우리 그런 일은 없었던 걸로 합시다."
"어쨌든 거기서 무엇을캐냈습니까? 그것이 누님의 피살과 관계가 있습니까?"
"장통석 회장의 사생활을 좀 조사하다가 그곳이 나온것 뿐입니다. 그곳에 민속 보존 협의회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더군요.
한가지만 말씀드리죠. 거기 남궁현이란 사람과 주인성이란 사람이 있죠?"
경감이 광준을 넌지시 건너보았다. 그 눈에는 착하디착한 웃음거기서려 있었다.
"예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 드나들면서 손장난을 좀 했더군요."
"손장난이 라뇨?"
"도박 말입니다. 상습적인 전과자 몇 사람과 도박을 벌인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한테 걸리면 패가망신하기 마련이지요."
"거기에 우리 누님도 함께 끼었단 말입니까?"
"예? 김을숙 여사가요? 글쎄 김여사 같은 인격자가 거기에 끼일 턱이 있습니까?"
"그럼 장통적 회장과는 관계가 있습니까?"
"장회장은 그런 도박 같은것은 안 합니다. 다만 거기 주인인
문마담이란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와 가까이 지냈다는것만은
확실합니다. 그요정을 차린것도 장통석 회장이 돈을 대준것
같았습니다. 이 거 비밀을 너무 털어놓는것 같은데... 김선생 이건 안들은 걸로 해주시
오."
추경감은 여기서 말문을 닫아버렸다.
장통석이란자가 누님을 농락하더니, 문마담도 역시 그런 희생자였구나 하고 광준은 생각했
다.
광준은 우선 누님 김을숙 여사를 살해했을 제일의 혐의자로
장통석 거상그룹회장을 지목했다. 죽일만한 동기가 충분히 있는것이다. 그리고 장통석이 김
을숙을 숨겨 놓은 여자로 삼아 엔조이를 했다면 이제 신물이 날 단계에 왔음직도 하다. 세
상에 스캔들이 알려져 세인의 입에 오르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것이다. 대재벌 그룹의 총수와 여류명사의 불륜의 정사.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충분한 입방아감이 될뿐 아니라 기업 자체에 큰 마이너스를 가지고
올수도 있는것이다. 더구나 탈무골의 일을 방해하는 강력한 장애물을 제거시켜 버릴 필요도
있었을것이다.
두번째의 용의자로는 남궁현을 염두에 둘수 있다. 조민희,
주인성 등과 함께 치사한 치정관계를 이어오고 있던 남궁현을
김을숙이 호되게 꾸짖었을것이다. 더구나 남궁현과 김을숙이
지저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면 그 질투는 광적이었을지 모른다. 견디다 못한 남궁현이 김
을숙을 죽였을지 모른다. 아니 그보다도 돈을 좋아하는 남궁현이 협의회나 민예품 공장의
돈을 빼돌려 난처한 입장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번째 용의자로는 조민희를 꼽을수 있다. 자기의 애인인 남궁현을 김을숙이 가로챘다고 생
각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여자의
소견으로는 복수를 택할수도 있는것이다.
네번째 용의자로는 주인성 전무를 배제할수가 없다. 조민희
와의 부정한 관계를 김을숙이 알고 있었을지 모츤다. 그렇다면
김을숙이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남궁현과 주인성이 짜고 공금을 어떻게
축낸 이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섯번째의 용의자는 탈무골의 무당 백순조를 꼽을수 있을것이다. 그 무당의 불가사의한 여
러가지 행동, 그중에도 민속마을 지정을 반대했다는것은 범행의 동기로 성립될수 있다.
아니, 그보다 두 사람 사이에는 끈끈한 그 무엇이 얽혀 있는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광준은 이 다섯 사람의 용의자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것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가야 한다."고 생각한 광준은 장통석 회장을 만나
보기로 하고 그의 회사로 찾아갔다.
비서실에서 신분을 밝히고 장회장을 꼭만나야겠다고 단호하게 부탁했다.
바쁘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평계를 아예 대지 못하게 하려고
필요 이상으로 강경한 태도를 보여줬다. 그러나 비서는 의외로
면회를 허락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김을숙 회장의동생 김광준입니다."
광준이장통석을 만나자 수다스러울 정도로 인사를 했다.
"어서 오게. 알아보다 뿐인가. 거기 좀 앉개. 안그래도 내가
좀 만나려고 했는데..."
장통석과 마주앉은 광준은 장통석의 얼굴을 다시한번 찬찬히 바라보았다. 쭈글쭈글한 비계
덩이 같은 얼굴, 볼품없이 구겨진 코, 짤막하고 방정맞은 턱, 왜소한 제구, 거기에 어울리
지 않게 매서운 눈초리 그렇다. 누가 도요또미라고 별명을 잘지었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장통석의 얼굴이 더욱 추하고 호색한처럼 보였다.
"더러운 녀석."
이 말이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그래 김회장에 관한 단서는 좀 찾았는가?"
장통적이 입가에 미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웃음을 흘리면서
물었다.
"조금 찾긴 했습니다만..."
"그래 어떤 놈이 김회장을 죽였단 말인가?"
"그보다... 저. 제가 지난 주어 탈무골을 좀 다녀왔습니다."
광준은 일부러 탈무골이란 단어에 힘을 주면서 말하고, 장회장의 표정을 살쳤다.
"탈무골?"
장회장은 확실히 찔끔하는것 같았다.
"예, 저희 고향이고 회장님도 관심을가지고 계시는 탈무골 말입니다."
"거긴 무슨 일이 있었나?"
"이런 능청스런 늙은이 보았나."
광준은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그곳에 백순조라는 무당이 있는데 그 무당이 평소에 누님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관계를 캐보러 갔었습니다."
"무당이 죽음을 예언했다고?"
장회장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보았다.
"예. 회장님은 혹시 그 무당을 모르시나요?"
"무당? 그런 사람을 내가 어떻게 알겠나?"
"평소에 백순조 무당에 관해 들은 일이 없으십니까?"
"듣기야 김여사한테 여러번 들었지 하지만 그런 예언을 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네. 하긴
좀..."
장회장이 무언가 생각난다는 표정이다. 광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누님이 백순조에 대해 무어라고 얘기하던가요?"
"김여사가 가끔 무당 얘기를 했는데 나로서는 이해할수 없는
얘기였다네."
"어떤 얘기였는데요?"
"김여사가 너무 무속이 라는 데 열중하다 보니까, 아니 열중이라기보다 심취하다 보니까,
무당의 신비성을 믿는것 같기도 했어."
"무당을 믿다니요?"
광준운 더욱 궁금해졌다.
"김여사가 가끔 자기는 무당과 끊을수 없는 어떤 운명의 실로 묶여있는것 같다는 말을 했었
지 그러나 그것은 꼭 탈무골 무당만을 지청하는것은 아니었어. 뭐 자기의 핏속에는 무당의
피가 흐르는지도 모른다는 등 이해할수 없는 말들을 가끔 했지"
"무당의 피가 흐른다고요?"
"김여사는때로 진지한 학자의 태도를 보일때가 많았지. 학문과 자기를 혼동하고 있는것 같
은때가 가끔 있었어. 너무 무속연구에 몰두하다 보니까 무당이 된것 같은 착각을 할때가 있
는것 같았네."
"예. 그럴수도 있겠군요."
광준은 여기서 잠깐 자기를 되돌아보았다. 반도체에 미쳐 끼니도 잊고 연구에 열중했을때는
자기의 두뇌가 칩으로 가득찬것 같았고, 자기의 손톱이 디램으로 보인 적도 있었다. 그것은
미국 대학 연구실에서의 이야기다. 학자라면 그런 착각에 빠질수도 있다.
"난 김여사의 핏속에 무당피가 흐른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하나 무당과 김여사는 범인이 이
해할수 없는, 말하자면 텔레파시
같은것이 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네."
"회장님은 영적교류를 믿으세요?"
"충분히 이해를 하네."
광준은 이 사람이 보통의 장사꾼과는 좀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원래 장회장을
찾아온 목적을 달성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님과 김을숙 누나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어떤 관계? 무슨 의민가?"
장회장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인간적인 관계 말입니다."
"자네가 뭔가를 오해할 그런 관계는 아니라네. 그러니까 지금부터 팔년전인가..."
장통석은 담배를 피워 물며 말을 시작했다.
"내가 우리 회사의 어떤 조그만 하청 업체에 시찰을 난 일이
있다네. 봉제공장인데, 거기서 수출품 샘플로만든 우리 고유의
여러가지 깜찍한 봉제품을 발견했네. 이게 누구의 아이디어냐고 사장한테 물었더니, 김을숙
이라는 사원의 아이디어라고 하더군."
"어떤 봉제품이었습니까?"
"흔히 우리의만화에 나오는 마음씨 좋은 호랑이의 모습, 도깨비의 모습 그런 거였다네. 그
래서 쓸만하다고 생각하고 김을숙이를 불러 오라고 했지"
장통석 회장은 거기서 김을숙을 처음 봤다고 해다. 깔끔한 몸가짐에 빼어난 미인이라고 생
각했다.
장회장은 김을숙을 데려다 자기 회사의 비서실에 근무하게 했다.
김을숙은 공원으로 다니던 봉제 회사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 대학에 다녔다고 했
다. 그녀는 그의 빼어난 미모때문에
많은 괴로움을 당했다. 같이 일하는 남자 공원들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던때문이다. 계속 따
라다니며 데이트를신청해 왔던것이다.을숙은 적당히 웃어넘기며 자기 몸을요령있게 잘 간수
했다. 때론 작업 조장이나 과장들이 침을 흘리고 온갖 감언이설로, 혹은 직책을 이용해 접
근해 왔다. 그러나 예절바르고 상냥하게 그 끈적끈적한 압력을 잘 막아냈다, 그리고 야간대
학을 졸업했다. 그녀를 기특하게 생각한 봉제공장 사장이 그를 작업장의 실 먼지 덮어쓰는
고된 일은 면하게 해 주었다. 개발실이란데를 보내 새 제품 모델을 개발하게 했다.을숙은
여기서 토속적인 모델 개발에 노력했다. 토속적인것에 심취하다가 마침내 민
속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봉제공장의 사장은 마흔 살이 넘은 홀아비였다. 그 또한 끈질기게 을숙을 잡아당겼다. 나중
에는 결혼하자고까지 졸랐다. 그러나 을숙은 결혼보다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을숙이
그사장의 집요한 요구를 피해 도망이라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장통석 회장을 만
나게 된것이다.
김을숙은 장통석을 따라 그 회사를 빠져나갔다. 장회장은 김을숙을 자기 비서실에 근무하게
하고 공부하는 뒷바라지를 다해 주었다. 김을숙은 마침내 민속학에 대한 일가의 경지를 이
루고, 사보에 글을 쓰기 시작한것이 인연이 되어 여기저기 잡지에
민속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여성들의 사회 활동에 참여하게 되고 마침내는
독립해서 사업도 하였으며 민속 문화 보존 협의회 회장까지 맡게 되었다. 이것이장통석이
설명하는 김을숙 여사와의 관계였다.
"그러니까 나는 똑똑한 딸 하나 얻는 셈치고 뒤를 밀어 주었다네."
"딸이 라고요?"
광준운 창자 속에서부터 역해 오는 감정을 꾹 눌러 참았다.
"그래 딸 같은 여자를 삼송리 별장에 밤마다 데리고가서 망가뜨려 놓았단 말이야? 이 뻔뻔
한 녀석아."
그러나 이 말은 차마 내뱉자 못했다.
"그런데 누님이 탈무골을 장회장님께 양보하지 않았단 말이죠?"
저도 모르는 사이에 광준의 입에서 이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게 무슨 소린가? 양보하지 않다니?"
도요또미의 눈이 희둥그래졌다.
"에잇 모르겠다."고 생각한 광준은 내친 김에 말해야겠다 결심했다.
"탈무골이 우라늄 노다지 광이란것을 제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곳을 무속 보존 마을로 해야 한다고 우긴것이 누님 아닙니까?"
충격을 받은듯 한참 눈만 깜박이던 장회장이 결심한듯 입을
열었다.
"김군이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네만... 탈무골에 우라늄 광맥이 있는것
은 틀림없다네. 꽤 품위가 높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곳이 문화재적가치가 있어서 보존해야
된다면 난 끝까지 우라늄을 캐자고 우길 생각은 없네. 어느것이 더 나
라를 위하는 일인가 하는 생각부터 하게 된다네."
"이런 뻔뻔스런 녀석 보았다." 하고 광준은 속이 뒤틀렸다.
"그래서 누님과 심한 의견 충돌이 있었군요."
"천만에, 김을숙 회장은 거기에 우라늄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네."
광준은 장회장이 또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김여사에 관한 소식은 좀 들었는가? 도대체 어떤놈의 짓인것 같은가?"
광준은 장회장이 능청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회장님께선 짐작가는 범인이 꼭 있으리라고 생각되는데요?"
광준이 입가에 약간 비웃음을 띠고 말했다.
"내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건 잘못 짚은것 일세."
광준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오늘은 물러나기로했다.
광준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등 하고 회장실을 나와 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몇가지 생각이 좀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나가 현실과 학문을 혼동해서 무속에 너무 미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기의 핏
속에 무당의 피가 흐른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발상은 범상한 일이 아닌듯 싶었다.
광준이 아파트 앞에 다다랐을때 십사동 앞에 낯익은 자동차 한대가 멎었다. 분홍빛 스텔라
였다. 특이한 색깔이라 얼른 눈에
띄었다. 광준은 어디선가 본듯한 차라고 생각했다.
거기서 한 여자가 내리고 차는 곧장가버렸다,
거기서 내린 여자는 뜻밖에도 곽정자였다. 화사한 하늘색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스커트를 입
고 큼직한 핸드백을 왼쪽 어깨에
메고 있었다. 희디 흰 얼굴빛이 봄날의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참으로 건강하고 풋풋한 아름다움이라고 광준은 생각했다.
"정자씨!"
광준이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앞서서 걸어가던 정자가
깜짝 놀라 뒤돌아셨다.
"어마! 김선생님!"
정자는 함빡 웃음을 담으며 반가워했다.
"어딜 갔다 오는 길입니까?"
"예. 학교에 좀 다녀오는 길이에요."
"학교라니요?"
"공부하러 갔죠."
정자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공부하러?"
광준이 의아해 할수밖에 없었다.
"예.가면서 얘기해요 우리."
정자가 슬그머니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두 사람은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서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제가 학위 논문 준비하고 있는것 몰랐죠."
"정자씨는 이미 석사학위를 끝낸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 이상은 학위가 없나요 뭐."
"그럼 피 에이취 디?"
"예."
정자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거의 다 했요. 이번 하기에 제출하려고 해요."
"야아, 곽정자 박사님이라... 그거 괜찮은데요."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엇에 관한것입니까?"
"한국 무속의 근원과 현존 상황에 관한것이에요."
"어쩐지 그 방면에 도통하다 싶더라니..."
광준이 정자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대견스럽고 귀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자는 고개를 들고 광준을 쳐다보며 그냥 웃기만 했다.
조그만 엘리베이터 안이 갑자기 야릇한 기분으로가득 찬 밀페된 공간으로 두 사람에게 느껴
졌다.
광준이 슬그머니 왼손으로 정자의 허리를 감아 끌어안았다.
"아이! 점잖지 못하게, 여긴 엘리베이터예요."
정자가 부끄러워했으나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서버리고 문이 열렸다. 꼬마
두명이 탔다. 정자와 광준은
못된짓 하다 들킨 아이들처럼 겸연쩍어했다.
"아까 그 분흥색 차는 누구 참니까? 어디서 꼭 본듯한 한데..."
광준이 궁금해 하던것을 물어 보았다.
"남궁국장 차예요. 협의회 사무실에 들렀다가 태워다 준다고
하는 바람에... 남궁국장이 이쪽에 볼일이 있어 오는 길이니 같이가자고 하더 군요. 남
궁국장은 서초동 전시관에 간다고 했어요."
정자가 뜻밖에 당황한듯 길게 변명을 늘어 놓았다.
"남자가 무슨 그런 색깔의 차를 타고 다님니까?"
"남궁국장은 좀 그런 별난 데가 있어요. 쉽게 말해 속된 멋을
좋아하거 든요."
"속된 멋이 아니라 유치한 멋이군요. 바람둥이들이나 하는 짓처럼."
광준은 공연히 남궁국장을 비난한다고 생각되었다. 그가 정자를 태우고 다녔기때문에 슬그
머니 화가 난것 같았다.
"질투하시는 거예요?"
정자가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
"질투? 천만에요. 내가 그따위 바람둥이한테 질투를 한단 말입니까? 생각만 해도 치사해
요."
그러나 광준의 그 말투는 질투로 가득 차있었다. 누구를 질투한다는것, 그것은 누구를 사랑
한다는 전제가 없이는 안되는일이다.
두 사람은 대화를 뚝 끊은 채 아파트로 들어왔다.
"어때요? 커피 한 잔 하실 생각 없으세요?"
정자가 물었다, 마치 외출하고 돌아온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말 같았다.
"정자씨가 같이 마셔 준다면?"
광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은 커피잔 두 개를 마주 놓고 앉아 봄날의 오후 한때를
한가하고 다정하게 보냈다.
광준은 장통석 회장을 만난 이야기며 우라늄 광에 관한 이야기를들려 주었다. 그리고 제일
의 용의자는 장통석이요, 그다음은 남궁현, 조민희, 주인성의 순서 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
다.
정자는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 내용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자기 의견도 그런것 같다
고 말하고는 덧붙였다.
"김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남궁현 국장님도 동기가 성립되는군요. 그렇다면 남궁국장과
조민희가,회장님께 무엇인가를
속이고 있다는 가정을 할수 있습니다.가령 협의회와 민예품 공장의 공금을 축냈다든가..."
여기까지 말한 정자는 갑자기 눈을 깜박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누굴 시켜서 회계 감
사를 해보면 어때요. 남궁국장이 필경 거액의 공금을 탈냈을 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그것이
탄로날까 두려워 회장님을 해칠수도 있는 일 아녜요?"
그럴수도 있다. 광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광준은 정자의 말대로 누구를 시켜 경리
장부를 조사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장인 김을숙 여사를 없애야 할 일이 그 사람들한테 있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얽힌 치정. 거기다가 금전관계가 개입되었다면 더욱 필연적인 이유가
될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장통석이 만약 범인이 아니라면 그 다음은 남궁현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 협의회와 민예품 공장의 장부를 정밀하게 검사해 보면 그들이 한 짓이 나올지도 모
른다.
언젠가 광준이 협의회 사무실에 들렀을때 조민희와 남궁현이
전표며 장부를 늘어 놓고 맞추고 있다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본기억이 났다. 그때는 무심코
넘겼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꼭 무슨 협잡을 하고 있었던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광준은 아침 일찍 일어 나 세수를 하는둥마는둥 하고
한규빈한테로 달려갔다.
거상그룹의 지하 다방에서 한규빈을 불러냈다. 그리고 다짜고짜 말을 꺼냈다.
"이봐 한군. 회계사나 세무사 한 사람 믿을만한 사람 있어?"
"짜아식.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이유는 나중에 말할게. 경리 감사를 좀 할 일이 있단 말이야."
"좌우간 차나 한 잔 마시고 얘기하지."
한규빈이 커피를 시켰다. 그리고 자기 동창생 중에 회계사 사무실을 열고 있는 친구를 알선
해 주겠다고 했다.
다음날 광준은 한규빈이 소개해 준 박문경 이라는 회계사와 함께 우선 협의회 사무실에 들
이닥쳤다.
남궁현 국장과 조민희가 영문도 모르고 반겨주었다.
"남궁국장님 인사 나누세요. 회계사인 박선생입니다."
광준은 응접소파에 앉기전 인사부터 시켰다. 남궁국장은
다소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시키는 짓이라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남궁국장은 전부터 나보고 누님 대신에 결재를 봐달라고 했는데, 내가 그런 자격이 있어야
지요. 그래서 박선생께 부탁해서
돌아가는 사정을 좀 알아보고 난 뒤 내 마음을 정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광준이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예, 그러셨군요. 잘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저와 미스조가 박선생께 그간의 경위를 브리핑
해 드리겠습니다."
남궁현은 뜻밖이란듯 잡시 놀라는 표정이었으나 곧 사태를
집작한듯 얼버무리려 했다.
"브리핑만 해 드릴것이 아니라 아예 모든 장부며 전표를 다보여드리고 진단을 받는것이 좋
을듯합니다. 박선생, 그래야겠죠?"
광준이 응원을 청하자 박문경이 받아 넘겼다.
"물론이죠. 제가 처음부터 다 맞춰 보겠습니다."
그때야 남궁현과 조민희는 낭패한 얼굴이 되었다.
"한 일주일 걸릴 겁니다. 김선생님 어떻습니까? 민예품 회사
장부도 이번 기회에 훑어보는게 어떨지요?"
박문경은 한수 더 떴다.
"그렇습니까? 박선생께 완전히 맏기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단체에 대한 경리 감사가 시작되었다. 박문경은 자기 회사 직원 두 사람을
더 데리고와서 아침부터 밤까지 장부며 전표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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