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이상우 - 불새 밤에 죽다 3

3학년2반 | 2022.02.16 07:56:25 댓글: 0 조회: 603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215
불새 밤에 죽다

칠. 조여오는 검은 손
아침 일찌 장형사가 아파트로 광준을 찾아왔다. 비도 내리지않는데 구겨져 볼품 없는 비
닐 우산을 소중히 들고, 담지 않아
먼지투성이가 된 구두를 신은 채였다. 후줄그레한 바바리, 꺼칠꺼칠한 살결이 꼭 실업자 행
색이다. 그러나 얼굴 표정만은 항상
명랑하고 농도 잘 걸었다. 추경감과 같이 있을 땐 연방 핀잔을
받으면서도 이런저런 의견을 잘 내놓있었다. 의견 한가지를 냈다가 핀잔을 받을때는 목을
쑥 빼고 콧잔등을 잔뜩 찡그려 보이는 밉지 않은 버릇도 있었다. 대체로 그런 사람일수록
가정에서는 원만한 남편이고 알뜰한 아버지일수가 많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거피 한 잔 얻어 먹으러 왔습니다. 바깥 날씨가 어떻게나 우중충한지 꼭 저녁 굶은 경감님
같단 말야."
장형사는 소파에 앉아 구겨진 은하수 담배갑에서 담배 한개비를 꺼내 물며 능청을 떨었다.
"저녁 굶은 시어미란 말은 들어도 저녁 굶은 경감이란 말은 못들었는데요?"
광준도 인사 대신 빙긋이 웃어 보이며 마주앉았다.
"말마쇼. 우리 추경감님이 그렇게 덩치는 작지만 어떻게 많이
먹어대는지 놀랄 지경이랍니다.수사 일로 바삐 뛰어다니다 저녁이라도 굶을라치면. 아이구
말도 마슈. 곧 숨넘어가는 사람처럼 엄살을 부린답니다."
"허허허. 경감님이 그런 면도 있다구요?"
"어쨌건, 미스곽 어디 갔나요. 따끈한 커피 한잔이 생각나는
강형사는 거실을 두리번거리며 정발 커피 냄새라도 맡을듯이
코를 킁킁거렸다.
"정자씨 차한잔 끓여 와요. 나도 한잔 주고요."
광준이 정자의 방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금방 문이 열리고
정자가 생긋 웃는 얼굴로 나왔다. 희고 고운 살결이 약간 부은것처럼 보였다. 오늘따라 그
의 커다란 엉덩이가 더 육감적이다
못해 육중하게 보이는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따끈따끈한 커피를 대접할 테니까요."
정자가 춤추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강형사님처럼 바쁜 분이 여길 키피나 마시러 들르진 않았을테고, 무슨 일이 있습니까"?"
광준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김을숙 여사의 일때문에 이곳에 잠깐 들렀습니다."
"누님의 일때문이라구요?"
"예. 원래수사 원칙에 막히면 현장에 다시가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혀서 온것은
아닙니다."
"아니, 경찰에서는 처음부터 내 말을 믿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그러면 누님이 살해됐다는것
을 이제 인정하는 겁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김을숙 여사가 한달이가깝도록
나타나지 않는것은 사실 아닙니까? 어제 신문에는 외국에 여행
중이라고 문화 단신란에 나있더군요. 아마 민속 보존 협의회에
자꾸 문의가 오니까 그렇게 말한 모양이죠?"
"그러면 여행 끝나고 돌아올때까지 기다리면 될일이지 무슨
수삼니까?"
광준이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그걸 몰랐군요."
강형사가 시침을 뚝 떼고 받아 넘겼다.
그때 곽정자가 커피 석잔을 들고 나왔다.
"고맙습니다."
강형사가 먼저 커피 잔을 들면서 정중히 인사를 했다.
"김을숙 여사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 이 아파트의 집입니다. 피살되었건, 실종되었건,
혹은 스스로 자취를 감췄건 간에
그때의 상황을 다시한번 점검해 보려는것입니다."
"그래 뭘 좀 알아냈습니까?"
광준도 빈정거리던 태도를 바꾸고 말했다.
"당시 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점검해 보았습니다만. 별로 이렇다할 단서가 없었습니다. 김선
생님이 신고를 하자마자 이 아파트 중 십사동을 봉쇄하고 출입자를 체크했습니다만 이렇다
할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당시 이사를 하고 있던 집이 있었습니다만 그 집도 이상한 점
은 전혀 없었습니다. 입구를 봉쇄하고 아파트 내의 전가구를 점검했는데, 김을숙씨나 범인
같은 사람은 전혀 찾아낼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집의 거실이며 방을 면밀히 조사했으
나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김을숙씨와
곽정자씨의 지문 이외는 다른 사람의 지문을 찾아낼수가 없었습니다. 현관문에선 김선생님
의 지문을 찾았습니다만..."
"바보가 아닌 담에야 범인이 자기 지문을 남겨 놓을 턱이 있습
니까?"
"그럴수도 있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지문이 없을수도 있지않습니까?"
"여전히 제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하하하. 뭐 꼭 그렇다는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여러가지 가능성을 놓고 조사를
하니깐요."
"그래서 뭘 좀 알아낸것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광준이 더 얘기해봤자 소용없다는듯 마치 결론이라도 빨리
내놓고가라는 투로 말했다.
"뭐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는 정도입니다. 그날 아파트의 내부만 조사한것이 아니라 외무
도 철저히 조사를 했지요. 예를 들면 그날 이 아파트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라든가. 주변에
있었던
행상이라든가, 주차해 있던 자동차라든가... 참 자동차 얘기가
났으나 말인데 그날 십이동 앞에 있던 분흥색의 스텔라 한대가
서 있었다고 하는 목격자가 있는데, 그 차를 혹시 본일이 없습
니까?"
"분흥색 스텔라 차라구요?"
광준이 눈이 둥그래섰다. 자기도 어디선가 본 차라고 생각되었다. 그날 공항에서 달려와 현
관으로 들어가려다 본것 같은 기억이 났다. 아니 딴데서 본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알고 계십니까?"
장형사가 잔뜩 긴장된 얼굴로 광준과 정자릍 번갈아보았다.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혹시 기억나면 연락해 드리지요."
"예. 그러십시오."
강형사는 실망한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건 그렇고 탈무골서는 무얼 좀 캐냈습니까?"
광준이 물었다.
"아직 이렇다할 확증은 같은게 없습니다. 장통석 회장과 무슨
관계가 있긴 있는것 같은데..."
"백순조 무당은 만나 보셨습니까?"
"무당을요? 하하하. 형사가 무당한테 점치러 갑니까?"
강형사는 또다시 오리발을 내밀었다. 광준은 더 이상 이야기
해보았자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커피 값이나 내시고 나가 볼까요. 난 시내에 볼일이
좁 있어서요."
광준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강형사는 할수 없다는듯 일어서서 현관으로 나갔다.
그리고 구겨진 비닐 우산을 소중히 챙겨 들었다.
강형사와 헤어진 광준은 종로에 있는 박문경의 회계사 사무실로 갔다. 오늘까지 협의회의
경리 감사에 관한 중간 보고를 듣게 돼 있기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엉망이었습니다."
박문경은 두툼한 서류철을 들고와 첫마디를 떼 놓았다.
"엉망이라구요? 하기야 아마추어들이 사업을 맡아 왔으니까
장부 정리가 제대로 안 된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마추어라니요? 당치 않은 얘깁니다.
그들은 회계나 경리의 명수들이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엉망이란 말씀입니까?"
"어떻게나 교묘하게 장부 처리들을 해 놨는지 맞추는 데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예?"
광준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교묘한 방법으로 엄청난 돈을 빼돌렸더군요. 전체 외형의 이십삼프로를 빼돌려 버렸더군
요."
박문경은 담배를 피워 물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빼낸 총 액수는 일억 팔천여만 원에 이르렀다. 빼내는 방법은
여러가지를 썼는데, 주로 쓰인 수법은 주인성이 관할하는 민예품 제작회사에서 그 이익금을
협의회에 기부하는 형식을 취했다. 기부받은 항목은 면세되는것을 기화로 증발시켜 버리는
수법을 썼다. 뿐아니라 타기관에서 민속 보존 사업비로 들어온 돈도 거의 증발시키는 방법
을 썼다. 이런것은 자체 장부 감사만으로는 적발이 되지 않는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박문경
은 쌍방의
장부를 조회하는 방식으로 이것을 찾아냈다고 한다. 주인성 전무가 넘긴것으로 된 기금은
쌍방이 짜지 않으면 성립될수 없는
성질의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제야 짐작가는것이 있군요. 조민희를 가운데 두고 주인성과 남궁현이 서로 이용하고 있
었군요. 그래서 남궁현은 조민희를 주인성한테 가로채임을 당하고도 큰소리를 치지 못했군
요.
그야말로 짐승 같은 사람들입니다."
광준이 주먹을 쥐었다 졌다 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그 세 사람이 야합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박문경이 두 번 세 번 그 대목을 강조했다.
"그러면 그러한 부정행위를 회장은 모르고 있었단 말입니까?"
"김을숙 회장님 말씀입니까?"
"예."
"그들은 김회장의 허가를 받아서 한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회장이 결재한 전표나 서류는 하
나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예
기장에서 누락시킨 부분이 대부분이니까, 보고를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구두로 보고하고
전표나 장부에서 자료를 없애버렸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김회장님이 그런 치사한 일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혹시 그들이 저지른 일을 김회장이 눈
치를 채지나 않았을까요?"
"그건 본인밖에는 모르는 일이죠."
박문경은 설명하기 위해 꺼냈던 자료를 다시 챙겨 봉투에 넣기 시작했다.
"이것을 법률적으로 처리하자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광준은 그냥 둘수 없다고 생각뵀다.
"그건 엄연한 위법사항입니다. 우선 탈세가 문제가 됩니다.
그 다음은 업무상 배임. 횡령 같은것이 되겠지요. 고발만 한다면 당장 구속될수 있다고 생
각합니다."
광준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들이 구속되도록 고발을 하느냐 안하느냐 하는것을 생각했
다.만약 고 발을 한다면 어떻게될까? 광준은 흔히 신문 사회면에 시커먼 활자로 크게 보도
되는기사를 머리에 떠올렸다.
"민속 보존 협의회 거액 부정"
이런 제목이 얼른 머리에 들어왔다. 그렇게 되면 민속 보존
협의회 뿐아니라 그 김회장인 김을숙 누나마저 크게 망신을 당하는 셈이다.
"박선생님, 어떻게 하는게 좋겠습니까? 고발을 해야 합니까,
그냥 둬야 합니까?"
광준이 물었다.
"제 생각으로는 고발을 하는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박문경은 단호하고 명확하게 말했다. 광준은 이때 얼른 정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 경
리 감사를 해보자는 의견을 낸것이 정자니까 정자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는것이 좋으리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밤, 저녁을 먹고 난 광준은 곽정자를 거실로 불러 소파에
마주 앉았다. 분홍 체크 무늬의 화사한 블라우스 위로 보름달이
뜨듯, 받쳐져 있는 정자의 얼굴은가히 고혹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발그레하게 홍조 띤 뺨이
며 새까맣고 커다란 눈이 차마 바로볼수 없을 정도로 눈부셨다. 오늘밤 따라 정자가 꼭 이
당 김은호의 미인도에나 나오는 여인처럼 황홀해 보였다.
"아이, 뭘 그렇게 쳐다보세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정자는 광준의 불꽂 튀는듯한 시선을 의식하고 수줍음을 타는것 같았다.
"거피 한잔 끓여 올까요?"
정자가 이쪽 대답을 듣지도 않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광준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오리궁둥이라는 별명이
붙을만큼, 풍부하고 육감적인 히프가 광준의 두 눈동자에 꽉 차왔다.
광준이 멍하고 있는 사이 정자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와
얌전히 앉았다.
광준이 낯에 박문경의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대강 이야기했다. 곽정자가 짐작했던 대로
엄청난 금액을 빼돌렸다는 이야기를 특별히 강조해서 일러 주었다. 그리고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요. 고발을 해야 할지 그냥 둬야 할차..."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회장님이 계셨더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을것입니다. 우리 사
회에는 그런 일이 이곳저곳에서
종종 일어나지만, 지성인들이 한다는 문화 사업 단체에서까지
그런 일이 있다니요. 말도 안 돼요."
곽정자는 의외로 강경하게 나왔다.
"그런 사람은 법에 호소해서 혼을 내야 합니다. 세상에... 우리 회장님이 자기들을 얼마
나 아쪄주었는데, 그런 배은망덕한짓을 했단 말입니까?"
정자는 분을 삭이지 못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그러나만약 그들을 고발해서수사가 시작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민속 보존 협의회가 쑥
밭이 되는것은 물론이요. 김을숙 회장님은 죽은 뒤에도 크게 망신을 당하는 꼴이 되지 않습
니까?"
광준이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것은 정자가 강경하게 나왔기때문에 더욱 그러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선생님. 그들이 김회장님을 해쳤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회장님이 내막을 알게
되면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회장
님을 해치웠는지도 모르잖습니까"?"
"해치워?"
"어머. 제말이 너무 지나쳤군요. 미안합니다."
광준과 정자는 그 일을 결론내지는 못했다. 며칠을 두고 더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날 참으로 이상한 일이 생겼다.
저녁 무렵 한규빈을만나고 돌아온 광준은 소파에 우두커니앉아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정자
의 얼굴에서 더없이 쓸쓸함 같은것을 느꼈다.
"웬일이에요? 무슨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나요?"
광준이 부드러운 웃음을 띠며 말을 걸었다.
"이것저것 좀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녁은 어떻게 했어요? 밖에서 잡수셨어요?"
"아뇨. 오늘은 정자씨와 함께 먹겠어요."
광준이 소파에 마주 앉았다.
"어쩜! 이를 어떻게 해. 아직 저녁을 짓지 않았어요."
정자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이다.
"괜잖아요. 기다릴 테니 천천히 지어요."
"그럴게 아니라 우리 오늘 모처럼 외식을 하는게 어때요?"
정자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듯이 말했다. 금세 얼굴에 생기가 돌고 눈이 반짝 빛
났다.
"그럴까요."
광준도 맞장구를 쳤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정자가 깡층창충 뛰듯 즐겁게 자기 방으로 들어가 얇은 세타를 입고 나왔다.
"자, 나가요."
정자는 몹시 즐거운 표정이었다. 매일 바둑이처럼 집만 지키고 있던 주부가 모처럼 남편과
함께 화려한 파티에 나가는것 같은 즐거운 표정이다.
정자는 아파트앞 광장으로 나가자 슬그머니 광준의 오른쪽팔에 팔짱을 끼었다. 마치 연인들
이 자연스럽게 산책을 하는 그런 모습이다.
"김선생님."
정자가 나직하고 물가가 흐르는듯한 정겨운 목소리로 불렀다.
"네, 정자씨."
광준도 그 기분을 이심전심으로 느낀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광준은 흐뭇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한 기분이었다. 누가 좀 보아 주었으면하는 생
각이 들정도였다.
광장은 벌써 땅거미가 진지 오래고 가로등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만들었다.
그때였다.
"악, 조심해요!"
갑자기 정자가 비명을 지르며 광준의 오른팔을 온힘을 다해
잡아당기며 오른쪽으로 나가 쓰러졌다. 광준도 넘어진 정자 위에 옆으로 쓰러졌다, 바로 그
와 동시에 자동차가 부르릉 하고 맹수처럼 소리를 지르며 스쳐 저나갔다.
눈깜빡하는 순간이었다. 자동차는 헤드라이트를 끈채 달려들었다가 그대로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정자가 광준을 갑아당기지 않았다면 틀림 없이 광준은 그 맹수같은 자동차에 치어 버렸을
것이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정자씨! 다치지 않았어요?"
광준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먼저 일어나 정자를 일으켰다.
정자는 왼팔을 감싸쥐고 일어 섰다. 팔꿈치를 다천것 같았다.
"많어 다쳤어요?"
광준이 근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조금 긁힌것 뿐이에요."
"후유."
광준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미친 녀석 아냐."
광준이 자동차가 지나간 곳을 보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자동차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 번호는 보았어요?"
정자가 물었다. 몸을 떨고 있는것 같았다.
"번호 라고요?"
"예."
"어두워서 뭐가 보여야지요. 헤드라이트도 백 라이트도다 끄고 달아났어요."
그렇다. 밤중에 볼을 켜지도 않고 무지막지한 속도로 차가 달린다는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
니다. 더구나 그 차는 광준을 치고
달아나려고 한것이 틀림없지 않은가? 만약 정자가 순간적으로
광준을 잡아당겨 넘어뜨리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그 차에 치여죽었거나 병신이 되었을것이
틀림없었다.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광준은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자기를 죽이려고 한것
이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끔찍한 생각에 갑차기 머리털이 쭈뼜 서는것 같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흩렀다.
"큰일날뻔했어요. 정자씨가 아니었다면 정말 일날뻔 했어요. 뒤에서 차가 덤벼드는 걸 어떻
게 알았어요?"
"그게 여자의 육감 아니겠어요. 감자기 등골이 오싹해지고 뒤에서 뭐가 꼭 덤벼드는것 같았
어요. 그때 저기 그림자가..."
정자가 두 사람 앞의 그림자를 가리켰다. 가로등을 등지고 걸었기때문에 두 사람 앞의 그림
자가 앞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뒤에서 차가 달려올때도 그림자가 보인것이 틀림없었다.
"누군가가 고의로 한짓입니다. 우리를 죽일려고 한 짓이 틀림없어요."
"저보다는 김선생님이 위험했어요. 차는 바로 김선생님 뒤에서 덤볐으니까요."
그 말은 틀림없었다.
"누가 날 죽이려고 했을까요?"
"전들 어떻게 알겠어요."
두 사람은 뒤늦게 두려움에 떨면서 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조그만 경양식 집으로 숨다시피
들어갔다.
식탁에 앉은 두 사람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친 곳은 어때요?"
정자는 공포의 그림자가가시지 않은 채 아직도 떨고 있는것같았다.
"하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습니까? 내가 그놈들의 정체를
꼭 밝혀 내고야 말 테니까 너무걱정하지 마세요."
광준은 정자를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큰소리를 쳤다.
"자, 들어가서 잠이나 푹 자둡시다."
"전 샤워를 좀 하고 자겠어요. 김선생님이 저 샤워하는 동안 거실에 앉아서 지켜 주세요."
정자가 약간 미소를 띠며 엉뚱한 부탁을 했다. 그 말을 하고는 무얼 상상했는지 얼굴을 붉
혀 보였다.
광준은 그날 밤 욕실에서 샤워하는 물소리를 들으며 정자릍
밖에서 지켜주었다.
광준은 처음 이 아파트에 왔을때 실수하여 정자가 샤워중인
욕실 문을 열어젖혔던 모습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다. 다아 솨아하는 물소리는 너무도 선명
하게 정자의 황홀한 나신을 그려 보이는것 같았다.
물에 흠뻑 젖어 치렁치렁해진 검은 머리. 물방울이 싱그럽게
튕기는 사과 같은 풋풋한 두 뺨. 화난것처럼 봉긋한 두 젖무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육중해 보이기까지 하는 오리궁둥이. 그 밑으로 동양화의 선처럼 뻗어
나간 두 다리. 광준은 계속 담배를 뻑뻑 피워 대며 물소리를 괴롭게 들어야만 했다.
죽음의 늪에서 위기일발로 목숨을 건진 광준은 정자의 민첩함에 감사하고 있었다. 정자가
아니었다면 자기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것이라 생각하니 아찔했다. 그러고 보면
정자는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또 한편으로는 누가 그런 끔찍한 계획을 했는지 참을수가 없었다. 광준을 없애버림으로써
득을 볼 사람이 누군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광준과 정자가 김을숙을 죽인 범인을 추적하고 있으니까 그살인범이 한 짓이라고 쉽게 짐작
할수 있다. 그렇다면 광준이 꼽고 있는 용의자 중의 하나인 장통석 거상그룹 회장이 꾸민
짓일수도 있다. 다음은 김을숙의 죽음을 예언한 백순조무당, 그다음은 남궁현이나 주인성,
조민희를 들수가 있을것이다.
더구나 남궁현, 주인성과 조민희는 그들의 경리 부정이 들통날까봐 그런 짓을 할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봐야 할것이다.
어행든 그 사건이 있은 후 정자는 갑자기 우울해진것 같았다.
두 번씩이나 죽음의 그림자를 밟은 사건이 충격을 준것 같았다.
그렇게 명랑하고 미소 속에 살던 정자가 방에 처박혀 잘 나오지도 않고, 광준과 말을 나누
는것조차 꺼리는것 같았다.
광준은 정자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점점 더 그 공포 속으로
빠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침내 광준은 주인성, 남궁현, 조인희를 고발하기로
결심했다.
광준은 회계사인 박문경을 시켜 모든 증거를 확보해 검찰과
세무서에 고발하도록 일렀다.
그러한 사실을 추경감한테 알릴까도 생각했으나, 저절로 알게 될것이라고 믿고 알리지는 않
았다. 박문경이 부정 사실을 고발한 다음날 참으로 예상치 못한 엉
뚱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광준이 잠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 정자가 거실에서 소리쳐 광준을 불렀다. 몹시 당황한 목소
리였다.
광준이 후다닥 일어나 불길한 상상을 하면서 거실로 황급히나갔다.
"김선생님, 이것 좀 보셔요, 이럴수가 있습니까?"
정자가 조간 신문을 펼쳐 든 채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광준이 신문을 뺏다시피 가로채서 펼쳐 보았다. 사회면 머릿기사에 시커먼 활자들이 어지럽
게 박혀 있고 그 밑으로 김을숙 회장의 인물 사진이 큼직하게 나 있었다.
"민속 보존 협의회에 억대 부정"
"회장 김을숙은 자취 감춰."
얼른 눈에 들어온것은 이런 제목이었다. 광준은 황급히 기사를 얽어 내려갔다.
문화사업을 한답시고 민속 보존 협의회를 조직 한 김을숙은 그동안여러가지수법으로 억대의
돈을 횡령. 탈세하고 이것이 들통날까봐 한 달째 자취를 감추고 있다. 경찰은 김을숙을 전
국에
지명수배하고 협의회장부를 모두 압수했다. 협의회 경리 책임자인 남궁현과 조민희 및 방계
회사의 주인성 전무 등을 연행 조사중인데, 탈세, 업무상 배임, 횡령 등 혐의로 구속할것이
다.
기사는 대략 이런 줄거리였다. 광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런 엉터리 기사가 어딨어!"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신문기사가 이렇게 엉터리일수가 있어요?"
정자도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분해헌다.
"이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해야 합니다. 손해배상 청구를 해야 돼요."
광준이 소리쳤다. 그것은 미국적 발상으로 쉽게 떠오른 생각이다.
"신문사와 싸워서 이길것 같아요? 당한 사람만 억울하지"
정자의 말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런 경우 자기의 권리나 명예를 찾겠
다고 신문사를 상대로 싸울 생각
을 하지 않는다. 물론 소송을 하고 싸우면 이 나라도 법치국가인데 안될 리는 없는것이다.
"그러면 이대로 당하고만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다른 신문에 어떻게 났는지 좀 봐야겠어요."
정자가 밖으로 나갔다. 얼마 있다가 두가지의 다른 조간 신문을 사들고 와서 사회면을 들쳤
다. 똑같이 약속이나 한듯 사회면 머릿기사로 다루었다, 그러나 거기서는 회장인 김을숙씨
협의회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기사만을 썼다. 김회장이 부정의 장본인이란 말은 없다.
광준은 그나마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망치에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민는 사람한테 보복당한듯한 배신감에 차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것이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자 뛰어든것은
카메라를 멘 사진기자와 전에 본적이 있는 임기자라는 사람이
었다. 협의회 사무실에 언젠가 와서 김을숙 회장이 어디갔느냐고 꼬치꼬치 캐묻던 그 임기
자였다.
"당신들도 도대체 사람이오?"
광준이 이들을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임기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따위 거짓말을 쓰다니요."
정자가 신문을 들고 흔들어 보이며 악을 썼다. 그때야 기자들은 사태를 짐작하고 빙긋이 웃
으며 말했다. 얄밉도록 능글능글하다.
"뭐가 잘못 됐습니까? 틀린게 있다면 죄꽁송니다. 바로 써드릴테니 사실대로만 좀 얘기해
주십시오."
임기자는 올라오란 허락도 받지 않고 거실로 올라와서 소파에
앉으며 사진기자를 눈짓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그래 뭐가 잘못 보도된 건지 우선 그것부터 얘기해 봅시다.
현째 김을숙 여사가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건 우리도 모릅니다.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광준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예? 자살을 했단 말입니까?"
임기자가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누님이 뭣때문에 자살을 합니까?"
"그럼 죽었을 지 모른다고 한것은?"
"누가 죽일수도 있는것 아닙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김을숙 여사가 한 달째 행방을 밝히지 않는것은 사실 아닙니까?"
그건 그랬다.
"그렇다고 이 부정사건을 저지르고 도망쳤다고 쓰면 되는 겁니까?"
광준이 신문을 다시 주웠다 팽개치며 소리를 질렀다.
"어디 그렇게 씌었습니까? 다만협의회의 책임자인 김을숙 여사는 한 달째 자취를 감추었다
는 이야기와, 이 부정사건과 김회상의 행방불명이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경찰에서 조사하고
있다고만 씌어 있지 않습니까? 김회장이 억대의 돈을 젬켜서 도망갔다고는 쓰지 않았지 않
습니까?"
기사를 자세히 보니 그 말이 맞긴 맞다. 그터나 한구절 한구절은 그렇게 돼 있지만 누구든
지 그 기사를 읽으면, 김을숙 회장이 억대의 돈을 챙겨 도망가 버린것으로 지레짐 작할수
있게 되어 있다. 기사의 마력이다. 정자나 광준도 제목이며 기사의 흐름을 읽고는 그렇게
쓴것으로 생각했으니 말이다.
"김을숙 회장은 이 사건과 관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말씀이군요. 그러면 김을숙씨가 사
라져야 할 무슨 딴 이유라도 있는것 입니까?"
임기자는 또박또박 물었다. 광준과 정자는 잠깐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다.
잘못 얘기했다가는 또 무슨 기사를 써 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피살당했다고 곧
이곧대로 이야기해봤자 미친놈 취급밖에는 받지 못할것이 뻔하다.
"그런건 남의 사생활입니다."
광준이 피할수 있는 좋은 구실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어물어물해서 기자들을돌려보낸것은 거진 열두시가가까워서
였다. 광준과 정자는 토스트와 커피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인사동의 협의회 사무실로 나
갔다.
사무실은 벌써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서 몰려든 기자들이 한탕을 치르고 간 뒤이고, 여기저기걸린 거래 관계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대부분 돈을 받아가야 할 사람들 같았다.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운전기사 미스터박과 심부름 하는 아이인 봉숙이가 땀을 빼고 있었
다. 올해 여고 일학년인 봉숙은 곽정자를 보자 금방 눈물을 주룩 흘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한테 지불할 돈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제 문을 닫는 겁니까?"
"김을숙 회장은 어디 있어요?"
모두가 한마디씩 했다. 순순히 물러가겠다는 투가 아니다.
"여러분, 좀 조용히 해 주셔요. 여러분이 받을 돈은 회장님이
며칠새 나오셔서 해결할 겁니다."
정자가 거짓말을 해댔다.
"지금 당장 나오라고 하슈."
"어디로 빼 돌렸어?"
말씨가 점점 험막해졌다. 정자는 조금만 기다리면 차근차근
해결해 주겠다고 여러번 다짐을 했다. 그러나 쉽게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사람은
한두시간 기다리다 돌아갔지만,
두어 명은 끝까지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뿐 아니라 눈에 독기까지 머금고 대들었
다.
"김을숙 이년 내놔라. 그년이 상판대기 하나는 멀쩡하게 생겼나 싶더니 끝내는 꼴값 하는구
나! 빨리 을숙이년 내놔! 그돈 못받으면 망한다구 망해..."
마흔은 됨직한 아주머니 한 분이 얼굴을 붉히고 삿대질을 하면서 악을 썼다.
민역품 공장에 매듭짓는 실을 대준 상인이었다. 정자도 자주만나 안연이 있는 여자나. 평소
에 실을 납품할때는 "김회장님,우리 회장님" 하면서 김을숙 여사 앞에서 죽는 시늉을 하던
여자였다. 정자만 보면 점심 사줄 테니 나가자, 화장품 한 세트 선물하겠다는 등 공인사를
하면서 다니던 여자였다.
그 여자가 이렇게 태도가 돌변한 데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광준과 정자가 그들에게 시달리며 달래며 거의 하루를 보냈다. 점심도 굶은 채였다. 해가뉘
엿해서야 그들은 돌아갔다. 정자와 광준은 비로소 시장기를 느끼고 옆에 있는 동해루에서
자장면을 시켜왔다. 막 젓가락을 들려는데 이번에 또 우루루 여러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러
나 그들은 빗장이와는 전혀 태도가 달랐다. 늙수그레한 남자 이명과 여자 세명, 그리고 어
린 소년 세명 이었다.
그들은 멈칫멈칫하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저..." "여기가 김회장님 사무실입니까?"
늙수그레한 남자가 공손히 물었다.
"그런데요. 어디서 오셨죠?"
봉숙이 나서서 물었다.
"맞긴 맞는구먼요. 그런데 우린 아침 텔레비를 보다가 깜짝 놀라 평택서 달려왔습죠.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우리 김회장님이 도망을 가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사나이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나왔다. 광준은 젓가락을 놓고
물끄러미 그들을 쳐다봤다.
"예. 정말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우리 김회장님이 돈을 떼먹고 도방가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어느 못된 연놈이 그따위
거짓말을 했습니까?"
곁에 있던 여자도 거들었다.
"어디서 오셨는지 앉아서 차근차근 말씀하시지요."
그들은 소파며 사무용 의자에 여기저기 앉았다.
그들은 평택에 있는 음성 나환자 마을에서 왔다고 했다. 나병은 이미 다 나았지만 세상 사
람들은 여전히 그들을 별종 인간으로 보기때문에 따로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어렵게 살아왔
다고한다.
이가난한 나환자 마을에 몇년전부터 구세주가 나타났다.
그가 바로 김을숙 여사라고 한다.
아무도 몰래 한 달에 한 번씩 이 마을을 다녀 갔다고 한다. 쌀을 사다 주기도 하고 돈을 갖
다 주기도 하고 때로는 병든 사람을 자기가족처럼 돌봐주기도 했다는것이다.
김을숙 회장의 그런 은밀한 행동은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정자씨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광준이 물었다. 정자도 감동한듯 멍하니 앉았다가 고개를 끄덕 거렸다.
"그렇게 훌륭한 우리 회장님이 돈을 떼먹고 도망을가다니요.
말도 안되는 얘깁니다."
그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것 같지는 않았다.
광준은 심한 혼란을 일으켰다. 도대체 머리가 정리되지 않는것이다.
김을숙이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된 여자일까?
지금까지 그가 캐낸 김을숙 누나의 행적으로 보아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않는 면인것이다. 마치 두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을 보는것 같았다.
김을숙의 노출된 면은 지성적이고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여류명사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
경과 선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진면목은 이와 반대였다.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이기적인 위선자에 불과했다. 이
것이 광준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누나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위선자가 남몰래 불행한 사람을 돕고 있었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광준은 그것이 한 여인의 허영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광준은 그들을 안심시켜 보내고는 정자와 함께 밤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는 동안 광준과 정자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가 착잡한 심정이었다.
이튿날 광준은 시경으로 추경감을 만나러 갔다. 무슨 소식이라도 있나 해서였다.
추경감은 전날과 다름없이 함박웃음으로 광준을 맞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좀만날까 했는데 마침 잘 오셨어요."
추경감의 얼굴은 오늘따라 더욱 볼품없어 보였다. 주름투성
이에 세수를 며칠씩이나 하지 않은 사람처럼 꾀죄죄한 얼굴이었다. 연신 담배 연기만을 뿜
어대고 있었다.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광준은 권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 전에 곽정자씨한테서 전화가 왔더군요. 큰일날뻔 했습니다. 하마터면 뺑소니차에 귀
신도 모르게 죽을뻔하지 않았습니까?"
추경감은 입가에 웃음을 홀리면서 말했다. 그러나 눈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의 고운 속마
음이 그대로 나타났다.
"정자씨가 그런 전활 했습니까?"
광준은 내심 정자를 대견스럽게 생각했다.
"얼마나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더군요. 김선생님을 잘 보호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
다."
"그랬었군요."
광준 갑자기 콧등이 찡해 오는것을 느꼈다. 정자가 진심으로 자기를 아껴준다는것을 가슴으
로 느낄수 있었다.
"그래 누가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광준이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그놈을 안다면 당장 살인미수로 쇠고랑을 채우겠습니다만..."
"뭣때문에 나를 죽이려고 한것 같습니까?"
"글쎄 그것도 명확하게 알수가 없군요. 그러나 가정은 할수가 있습니다. 첫째, 김을숙 여사
가 김선생의 말대로 피살된것이라면, 그것을 캐지 못하게 하려고 한 짓이란 생각을 할수가
있습니다."
"그럼 이제야 경감님은 누님의 피살을 인정하는 겁니까?"
"아, 꼭 그렇다는것은 아닙니다. 그럴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 둘째는 김선생 집안과 개인적인 원한이있는 경우일것입니다. 세번
째는 김선생이 있음으로 해서 자기의 일을 방해 받는다고 생각한 사람의 짓일지 모릅니다.
참, 남궁현과 주인성을 고발했더군요."
추경감이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한것이 아니고 공인 회계사가 한 일입니다."
"어쨌건 잘 하신 일입니다. 우리도 은밀히 그점을 수사하고있었습니다. 남궁현이란 사람이
분수에 넘치게 돈을 쓰고 다닌 흔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수정궁에서 상습도박
꾼들과 어울려 돈을 쓰고 있었거든요. 강형사가 그곳을 자꾸 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참으로 배은망덕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거야 재판이 끝나봐야 알겠지만 아마 벌금에다 꽤 살아야
나올 걸요. 참 그 여자 경리는 불구속으로 조사한다고 하더군요. 조민희 말입니다. 주범도
아니고 그냥 두 남자 틈에 끼여 어쩔수 없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고 하더군요."
"조민희는 풀려난단 말이죠?"
광준이 되물었다. 추경감은 그저 고개만 끄떡끄떡 했다.
"장통석 회장의 일은 좀 진전이 있습니까?"
광준이 추경감의 눈치를 봐가며 슬그머니 물었다.
"글쎄 그건 경제반으로 넘겼기때문에 어느 정도 진전이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광준은 추경감이 또 오리발을 내민다고 생각했다.
"김을숙 회장이 피살됐다고 발표하는게 어떻습니까?"
슬그머니 화가 난 광준은 엉뚱한것을 들이댔다.
"피살됐다고 발표를 해요?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요. 그러다가
나중에 나여기있소 하고 불쑥 나타나면 우리 경찰 체면은 뭐가
됩니까?"
추경감은 여전히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경감님은 참으로 고집 세고 딱한 분입니다. 제 말을 그렇게도
믿지 않다니요. 그건 맘대로 해석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신문들이 마치 김을숙 회장이 무
슨 못된 짓을 하고 도망친것처럼 써대고 있으니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나도 신문기사를 유심히 읽었는데 김회장이 똑 떨어지게 어떤 짓을 햇다고는 쓰지 않았더
군요."
광준은 그 문제는 추경감과 이야기 해봤자 별 소득이 없다는것을 알았다. 이것저것 해서 슬
그머니 화만 났다.
"경찰이나 기자나 모두 한통속이군요. 좋습니다. 범인은 꼭 내손으로 잡고 말겠어요. 안녕
히 계십시오."
광준은 횡하니 시경을 나와버렸다. 울적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정자는 그 사건이 있은 후로 사람이 좀 달라진것같이 광준이
느꼈다. 말이 적어지고 침울해졌다.
하루종일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기만 했다. 무언가 심각한 문제에 부딪혀 고민하는 사람처
럼 보였다.
"정자씨 밖에 좀 나와봐요. 햇볕이 따뜻합니다."
광준이 정자 방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좀 기분전환을 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했기때문이
다.
정자가 자다가 일어난 사람처럼 부스스한 얼굴로 나왔다.
"이렇게 화사하게 갠날 왜 방에만 박혀 있습니까?"
"저어... 논문 쓰던 걸 끝내려고씨름하고 있었어요."
정자는 그렇게 말했지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 나온 사람같지는 않았다.
논문이란 박사학위를 받겠다던 그 무속 관계 논문을 말하는것이다.
"요즘 정자씨가 좀 달라진것 같아요.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그 말에 정자가 약간 동요를 일으키는것 같았다.
"달라지다뇨? 전 언제나 곽정자 그대로예요."
정자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 미소도 전처럼
활짝 핀 웃음이 아니라고 광준은 생각했다.
탈무골에 있는 정용세로부터 편지가 왔다. 탈무골을 떠나 올때 광준이 부탁한 일 몇가지에
대해 회답을 해온것이다.
백순조 무당은 여전히 땅을 사들이는 일을 그대로 계속한다는
말이 씌어 있었다. 형인 근세의 사안에 대해서는 경찰서에서 재조사를 하고 있는것 같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것보다는 광준이 더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는것에 대한 실마리를 써보냈다.
광준 일가가 이십여년전 탈무골을 쫓켜나던 이유를 조금 알게 되었다고 씌어 있었다. 그 내
용은 김칠병 노인이 알고 있는것 같다는 이야기만 씌어 있었다.
광준이 김칠병 노인을 직접만나면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정용세의 생각으로는
그 일과 백순조 무당이 관계가
있는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편지를 읽고 난 광준은 부쩍 안달이 났다. 누님의 피살과 이십여년전 그들이 마을을 쫓겨났
던 일이 꼭 연관이 있는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광준은 다시 탈무골로 갈 결심을 해다.
정자를 혼자 놔두고 갈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정자씨 바람이다 쐴겸 탈무골에 좀 다녀올 생각 없습니까?"
광준이 조심스럽게 넌지시 물었다.
"저 혼자서요?"
정자는 뜻밖이란 표정이다.
"아뇨. 혼자라니요. 저하고 같이가시지 않으렵니까? 혼자 서 울에 남아 있게 하기는 너무
미안하고 ..."
"그러니까 김선생님이 탈무골가실 일이 있다 이거군요. 혼자다녀오십시오. 나야 뭐 여기서
죽든 살든 상관 있어요?"
정자가 뾰루퉁해졌다.
"그러니까 같이가자는것 아닙니까? 벌써 진달래가 질때가 됐어요."
정자는 말없이 창밖을 내다봤다. 파릇파릇하던 수양버들가지가 이젠 다 큰 처녀의 치렁치렁
한 머릿단처럼 무성하다.
늦봄이 삭막한 아파트 단지를 막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 내일 아침 일찍 떠납시다. 그래야 중간에 자지 않고 탈무골까지 바로 갈수가 있을 테
니깐요."
광준은 아무말도 않는 정자가 동의한것으로 생각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정자가 밥을 지어 놓았다. 두사람은 아침 일곱 시경에 아파트를
나섰다.
현관에서 뜻밖에도 서성거리고 있는 장형사를만났다.
"아니 강형사님. 새벽부터 웬일이십니까?"
"아, 예, 두 분이 어딜가시려고요?"
강형사는 멋적은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탈무골에 좀 다녀오려고 합니다. 왜 또 미행이라도 하시겠습니까?"
광준이 웃으면서 말했다.
"미행을 꼭 했으면 좋겠는데... 알수 있습니까? 또 자동차가
어디서 덮칠지..."
강형사의 말은 농담이 아닌것 같았다.
"사실 이 아파트에서 알아봐야 할 일도 아직 남아 있지만, 그보다 김선생을 덮친 그 정체불
명의 차에 대해 좀 알아보려고 온것 입니다."
"그땐 밤이었고, 더구나 차가 불을 끄고 순식 간에 지나갔기때문에 차넘버나 색깔, 차종 같
은것은 전혀 알수가 없었어요. 다만 승용차라는것만 느낄수 있었어요."
광준이 설명했다.
"그래서 혹시 그날 밤 목격자가 이 아파트 근처에 없나 해서
수소문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목격자가 있었습니까?"
"웬걸요, 아무도 그런 차를 본 사람이 없던 걸요."
강형사가 히죽이 웃으며 말했다.
광준은 참으로 바보 같은 행사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어설프게 여기저기 묻고 다닌다
고 될 일 같지가 않았다.
"어쳤든 그건 살인미수 사건이니까 경찰에서 알아서 범인을
잡아 주십시오. 그럼수고 하십시오."
광준은 정자의 등을 밀고 큰길로 나와 버렸다.
"정자씨는 왜 쓸데없이 그 일을 추경감한테 얘기해가지고 멍청한 강형사만 고생시킵니까?"
광준이 고속버스터미널로가는 택시를 타고 정자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때까지정자는 침울
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요. 경찰에 알려 두는게 좋을것 같았어요. 그 범인이 우리
회장님을 죽인 범인과 동일 인물일수도 있는 일 아녜요?"
"하지만 그 엉터리 같은 추경감이나 강형사한테 알려봤자 무슨 뾰족한수가 생길것 같습니
까?"
"어쨌든 김선생님 신변에 또다시 위험한 일이 생기는걸 전 더보고 있을수가 없단 말이에
요."
광준은 정자의 깊은 사려를 내심 고 맙게 생각했다.
그들은 해가 뉘엿해질 무렵 대곡읍에 닿았다. 전번에 왔을때
하룻밤 묵고 간 여관이 그대로 낯익고 반갑게 보였다.
"김선생님, 전 여기서 기다릴 테니 혼자 탈무골에 갔다 오실수 없어요?"
여관을 바라보고 었던 정자가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그게 무슨 소립니까? 혼자 여기 남다니"
광준이 놀라서 물었다.
"어쩐지 탈무골은 두 번 다시가고 싶지 않아요. 그날 밤 일만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져요.
전 저 여관에서 하룻밤 쉬고 있을테니 내일 돌아오심 안돼요?"
정자는 애원하는 목소리다. 광준을 올려다보고 있는 큼직한
눈이 공포에 젖어 있는것같이 보였다.
광준은 잠깐 망설였다. 그렇다. 꼭 거기까지 정자를 데리고
갈 이유는 없다. 오히려 탈무골에서는 정자가 없는 편이 편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혼자 밤을 보낼수 있겠어요?"
광준이 진심으로 걱정했다.
"문제 없어요. 안될것 같으면 멋진 남자나 한 사람 꼬셔내면
될것 아녜요?"
광준의 말에 정자는 다소 여유를가진것 같았다. 모처럼만에
들어보는 농담이었다.
"하건 그렇군요. 정자씨만한 미인이라면 놈팽이들이 줄을 설테니깐요. 하하하."
광준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여관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이소. 또 오실 줄 알았심더."
프런트의 그 능글능글하고 짓궂은 보이 녀석이 떡 벌어진 앞니 하나를 내보이며 히죽히죽
웃었다.
"이층 편리한 곳에 방 하나만 주십시오."
광준은 녀석의 표정을 못 본 척하고 말했다.
"예. 하나면 되지요. 아주 경치 좋고 아늑한 방으로 드리겠임더. 따라오이소."
녀석은 전번에 봤을때 방 두개를 쓴것을 기억하고 있는것이 틀림없었다. 녀석은 광준의가방
을 받아 들고 껑층껑층 이층으로 앞장서 서 올라갔다.
"정자씨, 그러면 내가 다녀올때까지 꼼짝 말고 이 방안에만
계셔야 합니다. 저녁이나 아침밥을 배달해다 먹고요."
광준이 적정스럽게 정자를내려다보며 말했다.
"적성 마세요. 김선생님이나 조심해서 다녀오셔요."
정자는 생긋 읏어 보였다.
광준은 꺼림칙한 생각을 떨치지 못한 채 정자를 남겨 두고 택시를 전세내어 탈무골로 향해
다.
광준이 탈무골에 도착한것은 완전히 해가 떨어진 뒤였다. 늦봄이라고는 하나 해가 진 뒤에
는 날씨가 아직도 으스스했다.
정용세는 광준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두 사람운 소주 두어병을 놓고 저녁을 먹었다. 겨우
내 먹던 묵은 김치며, 무말랭이
마른 고사리 등이 밥상에을랐다. 특히 구수한 된장은 오랜만에
먹어 보는 고향맛이었다.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부랴부랴 내려왔는데, 뭐 좀 알아낸게 있습니까?"
광준이 대강 배를 채운 뒤 말을 꺼냈다.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하나. 저어, 김형이 올라간 뒤 부탁한것을 슬금슬금 알아봤지요. 당님
은 여전히 기세가 펄펄하더군요.
더구나 그 밭뙈기 등을 사들이는 일은 계속하고 있어요. 전번에
동네 뒤에 있는 박씨네 선산도 사들였거든요."
"그런 산은 시세가 얼마나 갑니까?"
"돈이야뭐 몇 푼 되겠습니까? 한 평에 백원 정도밖엔 안갑니다."
"예."
"백순조 무당은 누가 뒤에서 돈을 내주고 있는것이 틀림없는것 같아요."
"형님인 근세씨 사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경찰서에서 사복형사들이 여러날 현장이며 이곳저곳을 살피더군요. 나한테는 이런저런것을
물어 보더군요."
"대체로 어떤것을 물어 보셨나요?"
광준이 소줏잔을 권하며 물었다.
"주로 당시의 상황을 물어 보더군요. 누구하고 원수진 일이 있느냐, 그날 아침에 아침밥을
먹고 나갔느냐, 부부 싸움은 한 일이 없느냐, 형님이 그곳 얼음판을 건너다니는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 누구냐, 그날 얼음판을 건너다니는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누구냐, 그날 얼음 두께가 얼
마나 됐느냐. 뭐 그런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타살의 가능성을 두고 재수사를 한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래 어떻게 결론이 났다고 합니까?"
"그건 아직 알수가 없어요. 한 형사는 헛수고만 한다고 투덜거리더군요. 그러나 내가 잘 아
는 한 간부는 타살의 가능성이 짙다고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무당의 예언이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런 그렇고 , 제 일에 대해서 좀 알아보셨습니까?"
광준이 용세의 입을 쳐다봤다.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김선생의 부모님께서는 이 동네서 쫓겨 나간것이 틀림없다고 하더군
요."
"그건 누구의 얘깁니까?"
"그때 상황을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무당 백순조와 김칠병
노인 내외분입니다. 전 김칠병 어른한테서 조금 들었는데요."
"그래 쫓겨난 이유는 뭐라고 합니까?"
"그게 말입니다."
용세는 참으로 민망하다는듯 말을 얼른 꺼내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지나간 일 아닙니까. 어떤 얘기를 해도 지금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다만 부
모에 관한 일이니까 내력이나마 알고자 하는것뿐입니다."
광준은 장황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 일이 혹시 누나 김을숙의 피살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
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떨칠수 없다는 이야기도 함께 했다.
"글쎄 말입니다. 김노인이 김선생을만나면 자세히 이야기 할것도 같았습니다. 나한테는 그
냥 추접한 남녀관계때문이 라고만 하더군요."
용세가 결심한듯 말했다.
"추잡한 남녀관계라고요?"
광준은 참으로 뜻밖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용을 더욱 더 알고 싶어
졌다.
"지금 당장 김칠병 노인집에 좀가봅시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겠습니다."
광준이 성실 급하게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아, 앉아요. 그렇게 서둔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김영감은 초저녁 잠이 많아 벌써 잠들었
을것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 찾아뵈도 늦지는 않습니다."
광준은 정용세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두 사람은 밤이 늦도록 소주 몇 병을 더 갖다 마시고는 사랑방에서 같이 잠이 들었다.
광준은 정자의 일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것은 아니지만. 내일오후면 만날 테니, 일단은 잊어
버리기로 하고 잡아 들었다.
얼마를 잤을까. 밖의 소란한 소리를 꿈결에 들으며 광준이 눈을 떡다.
"불이야! "
멀리서 여인의 찢어지는듯한 비명이 들리는것 같았다.
"이봐요. 김선생님 빨리 일어나요."
정용세가 광준을 흔들어 깨읒다. 광준은 벌떡 일어나 잠옷바람으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왼쪽 동네 복판에서 불길이 대낯처럼 솟고 있었다.
"아니 저건 저건..."
정용세가 놀라 말을 제대로 잇지를 못했다.
"저것은 이장님 집이야!"
"이장님이라고요"? 김칠병 노인 집이란 말입니까?"
"그래요. 빨리가봅시다."
광준과 정용세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불난 곳으로 달려갔다.
어느새 이곳 저곳에서 자다가 뛰어나온 동네 사람들이 놀라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물어야 물어야 하고 소리만 지를뿐 어떻게 손을 쓸수가 없었다.
김칠병 노인의 집은 본채와 사랑채로 갈라져 있는데 불길에
휩싸인 곳은 본채였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김칠병 노인은 런닝 셔츠와 편리 바람으로 풀적풀적 뛰며 안채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려고
몸부림을 쳤고 동네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붙들고 있었다.
정용세와 광준은 직감적으로 그곳에 사람이 있다는것을 알고
불길 앞으로 접근해 갔다.
그러나 불길이 워낙 기세에 집 속에서 사람이 타죽고 있어도
들어갈수가 없었다.
동네 몇몇 사람이 물을 퍼가지고 와서 뿌렸으나 그야말로 바위에 계란 치기밖에 되지 못했
다.
동네 사람들은 그냥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저 속에 경식이 에미가 있단 말입니다. 경식아! 경식아!"
김칠병 노인이 여전히 입에 제거품을 물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연옥이 있다면 이와 같은 처절한 모습일것이라고 광준은 생각했다,
광준도 공연히 불길 주위를 이곳저곳 뛰어다녔을 뿐 아무런일도 할수가 없었다, 이가 딱딱
마주치도록 떨리기만 했다.
이 처절한 연옥 같은 광경은 거의 두 시간이나 지나서야 수그러 들었다. 수그러 든게 아니
라 탈것은 다 태운 뒤에야 시커먼
재기둥을 드러냈다.
이 소동 틈에 벌써 날이 밝기 시작했다.
아직도 불씨가 남아 있는 재떠미 위로 사람들이 뛰어들어 갔다.
사람들은 거기서 다 타버린 김칠병 노인의 늙은 아내의 유해를 발견했다. 자다가 갑자기 치
솟은 불길때문에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참변을 당한것이다. 김칠병 노인은 사랑방에서
잤기때문에 참변을 면한것이다.
정용세의 집으로 돌아온 광준은 그때까지도 다리가 후들후들떨렸다.
그렇게 엄청나고 무서운 장면은 태어난 후에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아침밥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 방바닥에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밖에 나갔던 정용세가 혀를 끌끌 차며 들어왔다.
"그 늙은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더 상한 사람은 없습니까?"
"김칠병 노인이 까무라쳐서 읍내 병원으로 싣고 갔습니다."
"불은 왜 났습니까?"
"글쎄 그게 좀 이상합니다. 군 소방서와 경찰서에서 조사를 나왔는데 아무래도 누가 일부러
불을 지른것 같다고 하는군요."
"일부러 불을 질러요?"
광준은 남의 일이지만 의혹의 눈빛을 빛냈다.
"그런가 봐요. 감자기 불이 붙은 점이며 아궁이 같은 불씨 있는 곳에서 불이 난것이 아니라
뒷곁 안방 창문 쪽에서 불이 시작된것 같다고 하는군요. 더구나 그 곁에는 기름에 젖은 신
문조각 같은것이 남아 있어 누가 일부러 안방 쪽에다 방화를 한것 같다는 겁니다."
"누가 그런 못된 짓을 했단 말입니까?"
"글쎄 그게 이상합니다. 그들 늙은 부부는 동네를 위해 앞장서는 분들이고 누구하고 말 한
마디 다툰 적 없는 사람들입니다. 법없어도 살 사람이란 바로 그들 부부를 두고 하는 말 같
았지요."
"그렇다면 범인은 부부를 다 죽일 심산으로 저지른 일 아니겠어요? 그 집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나요"?"
"부부만 살고 있지요. 딸은 서울서 김회장님이 하시는 민예품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 얘긴 저도 들었어요."
광준은 아침에 김노인을 만나기로 한것이 뜻밖의 사건으로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일단 대곡으로 나가기로 했다.
"이대로 서울로 올라가시려는 겁니까?"
떠나는 광준을 보고 정용세가 물었다.
"일단 대곡에가서 결정하겠습니다. 다시 돌아올수 있으면 탈무골로 오고, 거기 병원에서 김
노인을 만날수 있다면 만나 보겠습니다. 내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전에 말씀드린것을 잘 좀
부탁합니다. 특히 백순조 무당의 동태를 잘 살펴서 알려 주시기 바람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리고 김칠병 노인집의 화재사건도 아무래도 꺼림칙합니다.
어떤 음모가 개입돼 있는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드는군요."
"그것도 조사가 끝나는 대로 연락을 해드리겠습니다."
광준은 정용세한테 단단히 일러놓고 대곡으로 나왔다. 큰 화재사건이 난 터라 다니는 차가
많아서 대곡으로 나오기는 쉬웠다.
광준이 대곡의 여관에 도착했을때 프론트의 사내는 빙긋이
웃으며 아는 체를 했다.
"사모님께서는 아직 주무시는것 같은데요."
녀석이 제멋대로 해석하고 주접을 떨었다.
"지금이 몇 신데 아직 자고 있단 말인가."
"이제 겨우 열시 지난 거 아입니꺼. 새벽에 잠이 안오는지 여관을 들락날락 하시더니 이제
잠든걸낍니더."
광준은 이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노크했다. 아무 기척이 없었다. 정말 아직까지 자고 있는
모양이다. 광준이 문을 쾅쾅 두드렸다.
"누구세요?"
방안에서 졸리는 목소리로 대답해 왔다.
"나요. 광준입니다."
그제야 열쇠 고리 벗기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아직까지 자고 ..."
광준이 그렇게 말을 하다가 멈췄다. 정자는 이미 화장까지 마치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앉
아 있었다.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찍 오셨군요."
"일찍이고 뭐고 끔찍해서 혼났어요."
광준이 침대 위에 털석 걸터앉으며 말했다.
"끔찍 하다니요."
"동네에 불이 나서 사람이 타 죽었어요."
"예?"
정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딱 벌렸다.
"오늘 새벽에 김칠병 노인집에 불이 나서 할머니가 타 죽었어요."
"예? 이장집에 불이 났다구요?"
정자는 여전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광준은 어곗밤에 일어난 일을 대강 이야기했다.
"누군가가 방화를 한것 같다는게 경찰의 추측이라고 하러군요. 누가 그런 못된 짓을 했을까
요.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다구..."
" 예..."
정자는 그저 뜻밖의 일들에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 한참만에 평정을 찾은 듯 정자가 말했
다. "혹시 백순조 무당과 관계있는 일은 아닐까요?" "나도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는데 꼭
무슨 음모가 있긴 있는 것 같아요."
광준은 걸터 앉았던 침대에 그냥 드러누웠다. "영 잠을 설쳐서 피곤하군요." " 그럼 거기서
우선 한숨 주무셔요. 전 밖에 나가 아침을 좀 먹고 오겠어요. 호텔 식당에 갈거예요." "그
렇게 하시겠어요? 광준은 다시 일어나 우선 웃저고리만 벗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정자는 시
트를 잡아당겨 덮어주고는 조용히 나갔다. 꼭 잠자는 아기를 재우고 나가는 어머니 같았다.
정자가 나가자 광준은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옴을 느꼈다. 눈을 감고 스르르 잠속으로 빠져
들었다.


팔. 비련의 마을
얼마를 잤을까? 광준이 눈을 떴을 대 제일 먼저 느낀것은 시장기였다. 광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았다 경대거울 앉에 정자의 핸드백이 얌전히 얹혀 있고 의자엔
녹색 코트가 길게펴져 있었다. 광준은 길게 드리운 커튼을 열어 젖혓다.
눈부신 햇살이 홍수처럼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햇살은 로마 병사들이 성을 점령하듯
방안의 구석구석을 모두 채웠다.
광준은 장렬한 햇살 앞에 눈을 가늘게 뜨고 주섬주섬 웃옷을
챙겨 입었다.
눈을 비비며 아래층 로비로 내려갔다. 계단을 다 내려서기도전에 광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광준은 눈을 비비고 다시 로비의 소파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정자가 얌전히 앉아 있고 맞은편 소파엔 추경감이
앉아 있었다. 추경감은 왼손에 잡은 담배에서 생연기가 계속 나는데도, 거기엔 신경쓰지 않
고 정자한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저 멍청이가 왜 여기까지 왔을까? 우릴 미행해 온것이 틀림없어. 그렇지 우리가 아파트를
나올때 강형사가 얼쩡거리고 있었거든. 그렇다면 강형사도 이곳 어디에 와있을 거야." 광준
은 얼른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슬그머니 화가 났다. 마치 은밀
한 데이트를 하다가 거북한
상대한테 들킨 기분이라고 할까?
"경감님, 지금 무슨 음모를 꾸미고 계십니까?"
그러나 광준의 입에서는 생각과 달리 엉뚱한 농담이 튀어나왔다.
"이제 일어나셨군요."
정자가 일어서서 미소를 띠며 광준을 쳐다보았다.
"허허허, 한숨 잘 주무셨습니까?"
추경감이 악의 없는 동안으로 웃었다. 조금도 형사 같은 인상은 풍기지 않았다.
"그래 또 무슨 일때문에 저희들을 미행해 왔나요? 우리가 뭐살인이라도 저지른 사람으로 보
입니까?"
광준이 정자 옆에 앉으며 말했다.
"미행이라뇨? 천만의 말씀입니다. 김광준씨나 곽정자씨를
우리가 미행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건 정말 오해입니다.
지금 정자씨한테 그 오해를 풀도록 설명하는 중입니다."
추경감은 두번 세번 강조해서 변명했다.
"우연이라고 자꾸 말씀하시지만, 우연이 번번이 이렇게 겹칠수가 있습니까? 솔직하게 우리
를 미행했다고 시인하세요. 강형사도 이 근처 어디에 와 있겠죠?"
광준이 빈정거렸다.
"장형사는 지금 김칠병 노인을 만나러 갔습니다. 곧 돌아올 겁니다."
"거봐요. 그래도 미행하지 않있다고 잡아떨 참입니까? 어쨌든. 경감님은 뭐때문에 여길 오신
겁니까?"
추경감이 잠시 머뭇거리다 담배 연기를 축 뿜으며 연기 속에
말을 날려보내듯이 말했다.
"탈무골 일때문에 왔습니다. 거상그룹과 탈무골의 관계를 더캐기 위해서 온것입니다."
"그렇다면 김을숙 여사 피살사건과는 관계가 없겠군요."
광준이 계속 빈정거렸다.
"아, 그야... 꼭 그렇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추경감이 어물어물 대답했다. 시인도 부인도 아닌 말이다.
"하여튼 난 지금 배가 고파 죽겠으니 점심이나 좀 먹고 얘기합시다."
"점심이라뇨? 저녁때가 다 됐어요,"
정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저녁이라고 하고..."
"저녁밥치고는 좀 이르죠?"
"하여튼 뭐든지 좀 먹읍시다. 그럼 경감님 실례합니다."
광준이 정자를 재촉해서 일으켜 세웠다. 늪에 빠진 애인을 건져서 데리고가는 기분으로 광
준은 정자를 데리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전에가본 일이 있는 맞은편 식당으로 들어갔다.
광준이 식탁에 앉으며 물었다.
"무얼 드실랍니꺼?"
식당처녀가 와서 물었다. 광준은 갈비탕 한 그릇을 시켰다.
"잘 모르겠어요. 탈무골의 우라늄광 문제는 경제반으로 수사를 넘겼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일때문에 왔다는것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로비에서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제가 김선생님이 잠든 뒤로비로 나왔더니 추경감이 거기 앉아 있더군요. 아침에 도착했는
지 그 호텔에서 잔것인지는 알수가 없었어요. 저를 보고 깜짠 놀라더군요. 그러면서 언제 왔
느냐고 들었어요."
"녀석, 늙은게 능청스럽기는..."
광준은 자신도 모르는새 거친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추경감이 탈무골 이장집에 불이 난 사건을 알고 있더군요."
정자가 몸시 리쳐진다는듯 몸을 움추리며 말했다.
"그거야 이곳 경찰서에서 들었겠죠. 경찰이 지금 화재원인을
캔다고 하던데..."
"화재원인을 캔다고요?"
"그래요, 방화의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군요."
"방화를 해요? 누가 그런 짓을..."
정자가 놀라는 표정이다. 그 놀라움은 차차 공포로 변했다.
광준은 정자의 눈동자에서 공포를 읽을수 있었다. 탈무골 당집에서 있었던, 달밤의 그 괴이
한 사건을 회상한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난 김칠병 노인을 좀 만나야겠어요. 같이 병원으로가실까요? 호텔에 그냥 있겠어
요?"
광준이 물었다.
"저도 같이 갈래요. 어쩐지 무서워서 김선생님을 놓치기가 싫어요."
그래서 그들은 다시 김노인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갔다.
김노인은 이제 정신이 든 모양이다. 링겔 주사를 꽂은채 눈만 멀뚱멀물 뜨고 누워 있었다.
"영감님, 접니다. 광준입니다."
"광준이라고 ? 자네가, 자네가 웬일인가? 자네말이야..."
김노인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하던 말을 중지했다.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자네 말이야..."
김노인은 손짓으로 광준을 가까이 불렸다. 광준의 귀를 자기
입가까이 내리는 시늉을 했다. 마치 숨 넘어가는 사람이 유언이라도 할듯한 모습이다.
광준이 김칠병의 입에 귀를 바싹 갖다 대었다.
"자네 말이야..."
김노인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나직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말이야, 탈무골엔 절대로가지 마래이."
"예? 탈무골에가지 말라고요?"
"쉿."
김노인은 또다시 사방을 한참 두리번거렸다.
"탈무골 당님이 죽일지도 몰라. 우리 할멈도 탈무골 당님이 쥑있단 말이다."
김노인은 공포에 질려 숨이 넘어가는듯한 목소리로 켜우 말했다.
"예? 할머니를 백순조 무당이 죽였단 말입니까?"
"하모. 자기 말 안 듣는다고 불에 태워 쥑있어."
"할머니가 왜 무당 말을 안 들었단 말입니까?"
"김회장이 하는 무속 마을 지정을 꼭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거든. 그리고 왜 동네 땅을 사 들이느냐고 따졌거든. 아이구 불쌍한 여편네야."
김노인은 눈물을 추록 흩렸다. 정자가 얼른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장님. 이 방에는 우리밖에 없어요. 좀 자세하게 말씀하세요.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어요."
광준이가 나직나직 말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쉬잇. 지금 뭐라카노? 신령님은 눈에 안 보이지만 우리가 가는곳은 다지키고 있대이. 아이
구 신령님. 우리 불쌍한 할망구를 와 갑아 갔는교? 우리 불쌍한 할망구..."
김노인은 다시 눈물을 흘리지 시작했다.
광준은 더 이상 무엇을 물어 보았지 대답이 나올것 같지가않았다.
"이장님. 한숨 푹 주무십시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광준은 정자한테 눈짓을 해서 같이 병실 밖으로 나왔다. 병실을 나온 두 사람은 병원 밖의
조그만 정원으로 내려셨다.
"이장은 만나봤습니까?"
정원의 벤치에는 뜻밖에 추경감이 앉아 있었다.
"또 우릴 미행한것입니까?"
광준이 쏘아붙였다.
"천만의 말씀을. 우린 참 우연한 곳에서 자주만남니다만, 절대로 김광준씨를 미행한것은 아
닙니다. 다만 알고 자 하는것이 같은 장소에 있었을 뿐이라구요."
"그럴까요? "
광준은 더 이상 말대꾸를 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그냥 나가려고 했다.
"김광준씨 내일 다시 들러서 김노인 얘기를 들어 보시지"
추경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얘기를 듣습니까?"
광준이 나가려 던 발걸음을 멈추고 추경감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반쯤 벗겨진 머리가 석양에 비쳐 반들반들 빛났다. 그러나 눈가장자리엔 무성한 주름이 웃
음을 머금고 있었다.
화를 낼수 없는 얼굴이다.
"지금 김노인은 정상을 되찾지 못했어요. 엄청난 일을 겪은 충격에서 깨나지 못하고 있기때
문에 심성이 정상이 아니랍니다.
공포에 짓눌려 아무 말이나 마구 뱉어내고 있거든요."
그 말은 맞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그럼 담에 또 봅시다."
"오늘 서울 올라가시나요?"
경감이 광준의 뒤통수에 대고 말을 던졌다.
"생각해 봐야겠어요."
"혹시 여기서 묵는다면 저녁에 나하고 소주나 한 잔 합시다."
"난 술 같운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어쨌든 저녁 여덟시쯤 호텔 식당에 있겠어요."
광준은 추경감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병원 정원을 나섰다.
날씨가 꽤 쌀쌀했다. 봄이 라고 하지만 아직 모진 겨울 바람의
여운이 산골에 그냥 남아 있었다.
호텔로 돌아온 광준은 정자 방의 옆방을 하나 더 얻었다.
넉살좋은 프론트의 보이 녀석은 뭐가 이상하지 연방 두 남녀의 얼굴이며 아래 위를 흘끔흘
끔 훑어보았다. 왜 방을 따로따로 쓰느냐는 투다. 이런 곳의 호텔이나 여관에 찾아온 젊은
남녀라면 뻔한 일인데 무슨 절차가 그렇게 까다로우냐는 표정이다.
"어젯밤엔 무서워서 혼났어요."
수트케이스를 가지러 정자 방에 들르자 정자가 코트를 벗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탈무골에 같이가자고 했던것 아닙니까?"
"거긴 더 무서운 곳이에요. 죽을뻔한기억이 생생한데 어떻게
선뜻 따라 나서겠어요?"
"밤에 잠을 설쳤을 테니까 일찍 주무시죠."
광준이 수트케이스를 들고 그냥 나왔다. 자기 방에 들러 소파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워물
었다.
바로 옆방에 정자가 혼자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어쩐지 마음이 안정이 안 되었다. 다시 그
방으로가볼까 하는 생각이 한켠으로 없는것도 아니었다. 서울의 아파트에서는 텅 빈 집에
밤마다 두 사람만이 자고 있었지만 별로 느끼지 않았던 감정이었다.
이곳이 낯선 여행지이기때문에 마음이 좀 달라진것이라고 생각했다. 광준은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일어섰다.
지금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들어 있을 정자를 눈앞에
떠올렸다. 꼭 자기가가서 손이라도 잡아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만 잡아서는 안될것
같았다. 두려움으로 할딱거리는
작은가슴을 포근히 안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광준은 문을 거세게 밀어 젖히고는 복도로 나왔다, 뚜벅뚜벅
걸었다. 그러나 방을 나올때와는 달리 정자 방 앞을 그냥 지나쳐 계단 쪽으로 갔다. 생각과
말이 따로따로 노는것 같았다. 발길은 계단을 내려서 아래층로비에 와버렸다.
광준은 방을 나올때의 생각과 실제의 행동이 달라진것을 알자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여이, 김광준씨 내려올 줄 알았어요."
추경감이로비 소파에 앉아 있다가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여긴 어쩐 일로..."
"아까 저녁에 여기서 만나자고 했었잖아요."
그러고 보니까 병원에서 추경감이 저녁에만나 한잔하자고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자, 나갑시다. 저쪽에 돼지갈비를 잘 하는 대폿집을 봐 놨거든요."
추경감은 함박웃음을 담고 앞장서서 걸었다.
두 사람은 조그만 돼지 갈비집 식탁에 마주 앉았다. 곧 소줏병과 돼지갈비 안주가 나왔다.
"객지에선 술맛이 더 나는 법이랍니다. 자, 우선 한 잔씩 쭉하고 ..."
추경감이 콸콸 소리가 나도록 소줏병을 기울였다.
"그래 김선생 사업은 잘 돼 갑니까?"
추경감은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광준을가끔 김선생이라고 불렀다.
"사업이라뇨?"
"정자씨와 벌인 청춘사업 말입니다."
"눈치가 너무 빨라 오버 센스도 하시는군요."
"허허, 이러지 맙시다. 이래봬도 형사 생활 삼심년이 다 돼갑니다. 그만한 눈치 없겠어요."
추경감은 손을 저어가면서 다 안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 시시한 얘기는 그만두시고... 이장님집 화재의 원인은
알아냈습니까?"
"그것 말입니까? 거 아무래도 무당이수상한것 같던데..."
"백순조 무당이 불을 질렀나요?"
"글쎄. 무당이 질렀는지 신령님이 질렀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 무당과 관계가 있지 않나 하는 육감이 들거든."
추경감은 연거푸 술을 마시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이 됩니까?"
"첫째, 그 집이 불타고 나면 그 접터는 헐값에 사들일수가 있단 말야."
"아무러면 그 일때문에 불을 질러 사람을 죽이겠습니까?"
광준은 수긍이가지 않았다.
"그도 그렇군요. 하지만 불나기 며칠전 김칠병 노인이 무당을
찾아가 좋지 않은 언쟁이 있었던것 같아요."
"무당과 이장이 싸웠단 말입니까?"
광준이 바짝 긴장해서 귀를 세웠다.
"뭐 싸웠다고 하는 건 정확하지 않은 표현인지 모릅니다. 무당은 지배자고 이장은 순종하는
입장에 있는것이 탈무골의 특징아닙니까. 그러니까 싸웠다기보다는 이장이 의견을 내놨다고
할수 있지요."
"무슨 의견을 내놨습니까?"
"이곳 형사들이 알아낸 건데, 이장이 탈무골은 민속 보존 마을로 지정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한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그야 뻔한 일 아닙니까? 무당이 펄펄 뛰었겠죠. 그리고 신령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큰 재앙
을 만나고 목숨까지도 잃게 된다고 경고를 했답니다. 너희 집이 망하고 너희 식구들도 다
죽을것이다. 신령님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것이다 라고 호통을 쳤다는것입니다."
추경감은 이 대목을 이야기할때 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 예언대로 된 셈입니까?"
"말하자면 그렇게 된것이지요. 오늘 낯에 형사들이 백순조 무당을 찾아갔는데 무당은 신령
님이 벌을 내린것이라고 딱 잘라말하더라고 하더군요."
"그럴수가... 그럼 자기의 범죄를 자기 입으로 말했단 말입니까?"
"허허, 광준씨. 자기의 범죄라뇨? 무당이 어디 신령닙입니까?"
"하긴 그렇군요?"
광준은 쓴읏음을 지을수밖에 없었다. 무당은 옥황상제와 신령님의 사자이니까 주범은 신행
이나 옥퐝상제일수밖에 없는것이다.
"정말 무당의 주술에 의해서 불이 날수도 있는지 모르겠어요.
유리겔러 같은 초능력자도 있지 않습니까? 나 형사 노릇 하다가
신령님수사하기는 또 처음입니다. 허허허..."
추경감은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그 불이 방화로 인해서 일어났다는것은 틀림없습니까?"
"여러가지 증거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어요."
"그럼 경찰에서는 백순조 무당이 자기가 예언한 말을 입증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고 생각하
고 있나요?"
"그 점도 용의점에 올리지 않은것은 아닙니다만, 어쩐지 백순조 무당이 불을 지른것 같지는
많더군요."
"그건 어째서 입니까?"
"육감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백순조 무당의 배후라고 추측되는 거상그룹의 짓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글쎄요. 대재벌 그룹에서 그렇게 악날하고 무모한 방법으로
땅을 사들일수가 있겠어요. 우리 그 이야기는 고민하고 술이나
한잔 더 합시다. 아주머니, 여기 소주 한병 더 주십시오."
추경감은 졸고 있는 주모를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이튿날 광준은 정자와 함께 호텔 식당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난 뒤 혼자 김칠병 노
인의 병실을 찾아갔다. 곽정자가 따라가겠다고 했으나 그냥 호텔에 기다리고 있게 했다. 김
노인이 광준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는데, 광준은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같
이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칠병 노인은 어제보다 상당히 상태가 좋은것 같았다. 마음의 평온을 되찾은것 같았다.
"이장님 기분이 좀 어떻습니까?"
광준이 사가지고 간 음료수를 내놓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게나, 아직 서울 안올라갔었나?"
김노인은 반가워하면서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얼마나 상심되십니까? 하지만 모두 운영으로 돌리고 , 큰마음
잡수십시오."
광준은 위로의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노인들 말투를 흉내낸다고 생각했다.
"김회장님 잘 계신가?"
김 노인은 김을숙이 죽었다는것을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뿐 아니라 민속 보존 협
의회가 횡령 사건으로 들통이 나버렸다는 사실도 모르는것 같았다.
광준은 적당히 대답을 했다. 시인도 부인도 아닌 그런 대답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이십년 전
왜 자기들 일가족이 탈무골에서
쫓겨났는지를 알고 싶어 서울서 여기까지 왔다는것을 힘을 주어 말했다.
"내사 이미 당님 눈에 난 사람 앙인가. 벌을 더 받아봐야 이목숨 앗아가는것밖에 더 있겠나.
내 오늘은 다 털어놔 뿌릴기라."
김노인은 한참 생각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결심 한듯 이렇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비밀이란 언션가는 밝혀지는 기라. 담배 한대 주게."
광준은 담배를 꺼내 주고 성냥불을 켜댔다.
김노인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을 꺼냈다.
"자네 춘부장이 좀 특별난 사람인지라."
"...?"
"좋게 말하면 한량인 기라. 놀기 좋아하고 큰소리 잘치고 인심 좋고 여색 좋아하고"
"더 좋게 말하자면 영웅 호걸 축에 드는 사람인 기라. 그런데
그게 좀 지나쳐가지고..."
김노인은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광준의 아버지 김춘팔은 원래가 이곳 탈무골 태생이 아니
라고 했다. 경상남도 울산이 원고향인데 어릴때 단신으로 이곳에 들어와 무당집에서 머슴살
이를 했다고 한다. 여남은살 갓 넘었을때 무당집에 들어와 잔심부름도 하고 꼴머슴 노릇을
하며 차렸다고 했다. 물론 그때의 당님은
백순조 무당이 아니라 백순조의 어머니가 무당 노릇을 하고 있을 때였다.
몇 살 아래인 백순조와는 어릴때부터 오누이처럼 한 집에서
지냈다고 한다. 나이가 차자 당님이 당집에서 심부름하던 복실이와 짝을 지어주었다는것이
다. 그 복실이가 바로 광준의 어머나라고 했다. 춘팔이와 복실이는 당집에서 독립해 나와 살
림을 차렸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자 그때 이야기는 다 묻혀 버리고 을숙이와 광준이 남매를
낳고 농군이 되어 일가를 이루었다는것이다.
그러나 동네에서는 춘팔이가 가끔 말썽을 일으켰다.
동네 밖에서 받고랑 매는 이웃 처녀의 손목을 잡았느니, 혹은 남의 마누라 목욕하는 모습을
담너머로 훔쳐보고 농을 걸었느니 하는 말썽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래서 동네서는 아비
없이 자란 개망나니라서 그렇다고 모두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한번은 이웃에 사는 김초시네 손주며느리와 마을앞 물레방앗간에서 일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좍 퍼졌다. 동네 노인들이 김춘팔이를 잡아다놓고 따졌으나 김춘팔이가 딱 잡아뗐을 뿐 아
니라, 아무도 확실한 증거를 대지 못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마을에 또 하나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당집의 무당이 죽고 백순조가 새로운 당집 주인인 세습 무당이된 몇년후의 일이었다.
새 무당인 백순조와 김춘팔이 보통 사이가 아니란 소문이 나돌았다.
새벽에 김춘팔이 무당집에서 나오는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고 무당집 뒤 대숲에서 두사람
이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 있는것을 먼 곳에서 보았다는 소문까지 났다.
조그만 마을에 남의 이야기 좋아하는 동네 여편네들이 있는말 없는 말을 보태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김칠병 노인은 서너살 아래인 김춘팔과 가까웠기 때문에 김춘팔의 일을 비교적 자세하게 알
고 있었다고 한다.
백순조 무당은 젊은 시절에 빼어난 미인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때의 미모가 주름살 뒤에
감추어피 있다고 말했다.
광준도 백무당을 처음 봤을때 젊은 시절에는 상당한 미인이었을 거란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이 동네 총각들 뿐 아니 라 이을 마을 총각들도 백무당을 보고 마음을 설레던 그런
시절이었다.
동네 김춘팔과 백무당의 소문이 나기 훨씬 전에 김춘팔이 김칠병 노인한테 고백을 하더란것
이다.
"형님, 나 백무당한테 장가들어야겠어요."
김칠병은 이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이 사람 그게 무신 소린고? 자네 복실이는 어떻게 할라고?"
"마누라 둘가지면 안 되는 겁니꺼?"
김칠병이 춘팔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진심인것 같았다. 얼굴에 결심이 분
명히 나타나 있었다.
"패가망신할 소리 그만 하게."
김칠병은 엄하게 꾸짖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두사람이 금단의 선을 넘고 있었다.
김춘팔은 이러한 사련때문에 고민 속에 세월을 보냈다. 동네서는 어렴풋이 이 일을 짐작한
여인들이 입방아를 찧고다녔다. 그러나 상대가 감히 누구도 거역할수 없는 당님인 백순조였
기때문에 아무도 나서서 따지거나 까놓고 이야기는 하지못했다. 공공연한 비밀이 된채 십여
년이 홀러갔다.
그런던 어느 날 당제가 열리던 날이었다. 굿판이 한참 무그익었을 무립 백무당이 돌연 폭탄
선언을 해버린것이다.
"김춘팔이는 탈무골을 떠나거라. 신령님이 노하셔서 일가족한테 천벌을 내릴것이니, 자식들
이 불쌍하면 하루빨리 이 마을을 떠나라."
백무당의 이 선언은 절대적이었다. 누구도 백무당의 말을 거역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다.
그래서 그 다음달 김춘팔은 을숙과 광준의 손을 이끌고 탈무재를 넘어 정든 탈무골을 떠나
고 말았던것이다.
"왜 갑자기 백무당이 그런 소리를 했을까요?"
이야기를 듣고 난 광준이 물어보았다.
"글쎄. 확실한 사정은 당사자만이 알겠지 내가 짐작키로는
자네 춘부장이 계속 다른 여자들과 좋지 않은 소문을 만드니까
그렇게 된기아인가 생각하네만..."
광준은 김노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착잡한 심정이었다.
아버지와 백무당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던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뒤 아무도 증명해 주
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아버지의 그런 행동이 광준에게는 두가지의 측면으로 받아들여졌
다.
첫째는 아버지의 그러한 무분별하고 부도덕한 행동이 뒷날 누나인 김을숙에게서 다시 나타
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두번째는 백무당과 아버지의 이룰수 없었던 안타까운 사랑을 동정하고 싶은 생각이다. 사랑
하는 사람은 뒤에 남켜 둔채 현실에 얽매여 탈무재를 넘던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것
같았다.
아버지의 그러한 무모하고 독선적인 행동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원망의 눈초리 한 번 던지자
않고 비참하게 일생을 살다간
어머니의 착한 모습이 눈에 아물거렸다. 어떻게 보면 끝없이 자기 희생만을 바쳐서 일생을
살아온 어머니가 거룩하게 보였다.
가장 한국적인 여인, 운명을 거역하거나 저항해 보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런 여인상을 어머
니에게서 보는것 같았다.
누나인 김을숙은 어머니의 인내력과 환경에 순응하는 운명적인 모습을 닮은게 아니라 아버
지의 모습을 더 많이 닮았던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광준이 미국으로 유학가기 전까지의 김을숙은 가장 한국적인
여인의 표본이었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끈질긴 노력과 핏줄에대한 냉엄한 책임감. 그리고 절
망을 극복하는 슬기. 그러나 광준이 돌아와서 들은 누나의 위선적인 이중생활, 명예욕에 치
우쳐 지혜를 그 쪽에만 써먹은 비굴한 행동. 육체의 쾌락을 찾아 타락한 모습. 그런것이 아
버지를 닮은 젊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어머니는 인내와 희생의 표본같은 사람이었다고 광
준은 생각했다. 어머니가 생전에 한번도 그러한 아버지를 욕하거나 미워하는 것을 본저기
없었다. 무슨일이든지 있으면 먼저 아버지한테 상의했고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아무일도 하
지않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과거를 한번도입에 올리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
도 그렇게 슬퍼할 수가 없었다. 며칠동안 음식을 끊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같았다. 광준은 누나가 어머니를 닮은 데가 있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리고 어
머니와 누나를 보고 자라면서 그것이 여인상이라고 생각했다. 조용히 운명에 순응하고, 어떠
한 불행도 말없이 소화하면서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생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이 한국의 여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러한 누나가 십여년 사이에 그토록 변해버
렸다는데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가ㅛ통사고로 돌아가신날 누나의 모습은
꼭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의 어머니와 같았었다. 슬픔에서 헤어난 단발머리 김을숙은 광준
이를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고 여러 번 이야기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의지는 그대로 나
타나 서른이 훨씬 넘도독 독신으로 지내면서 광준의 유학
뒷바라지를 한것이었다.
광준은 누나 김을숙만은 아버지와 백무당의 관계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김을숙이 무속에 관한 연구에 심취한것이라든지 탈무골에대해 남다른 애착을 보인것이라든
지 그런것이 예사로운 일만은 아닌것 탸은 생각이 들었다.
장통석 회장의 말대로 김을숙은 무당과 숙명적인 무슨 실로
연결돼 있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누님은 아버지와 백무당의 관계를 알고 있었습니까?"
광준이 김노인을 보고 물었다.
"돌아가신 자네 어머니가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럼 알고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런것도 같고 아인것도 같고...,..."
김노인은 애매한 대답만 했다.
"우리가 탈무골을 떠난뒤 백무당은 우리 서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까?"
"마을을 떠난 사람들을 뭣 땜에 욕하겠나? 아무도 자네네 식구에 대해 입방아 찧는 사람은
없었다네."
"동네 사람들은 모두가 아버지와 백무당에 관한 일을 알고 있있습니까?"
"소문이 났을때 더러는 긴가민가 했었지 그렇지만 백무당이
자네네를 쫓아낸 뒤에는 그기 정말이리라고 생각했지. 함부로
그런말을 한다는건 당님에 대한 불경이라고 생각들한거 아이가베."
"돌아가신 할머니는 알고 계셨습니까?"
"우리 할망구 말인가?"
"예."
그러나 김칠병 노인은 눈만 껌벅껌벅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불쌍한 여편네..."
김노인은 눈물을 주루룩 홀렸다.
광준은 더 이상 물어봤자 소용이 없을것 같아 다음으로 미루고 그냥 조용히 병실을 나와 버
렸다.
호텔로 돌아은 광준은 정자와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 커피 두잔을 시겨놓고 한참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장님은 제정신이 돌아오셨나요?"
정자가 침울해 하는 광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자씨는 대곡사에가 보셨
나요?"
광준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
"대곡사라뇨? 이곳에 있는 절 말입니까? 못가봤어요."
"그럼 거기나 가봅시다."
광준은 정자의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일어섰다.
정자는 광준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을 생각인듯 말없이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근 한시간쯤 산등성이를 올라 대곡사로 갔다.
"김노인이 무슨 언짢은 이야기라도 했나요?"
말없이 걷던 정자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산속에선 새소리가 가끔 적막을 깨뜨렸다.
"정자씨는 우리 집의 내력에 대해 누님한테 들은 적이 있나요? "
광준은 대답 대신 또 엉뚱한 질문을 해다.
"한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아버지나 어머니에 관해서 도 들은 적이 없나요?"
"착한 분들이란 얘기외는 들은게 없어요. 회장님은 탈무골이
고향이란것밖에는 별로 들려준게 없었어요."
"탈무골 사람들한테도 무슨 말을 들은것이 없었나요."
"왜 자꾸 그런것만 물어보죠?"
정자가 슬그머니 광준의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팔에서 팔로 흘러 심장으로 들어 오는것 같았다.
광준이 정자를 내려다보았다.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쩐지 그 미소가 쓸쓸하게 보였다. 꼭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우리 여기좀 쉬었다 갑시다."
광준이 절 앞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정자도 말없이 앉았다.
"우리 결혼할까봐."
광준이 먼산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산등성이에는 아지랭이가 아른아른 피어오
르고 있었다.
"광준씨 정신 좀차리셔요. 우리가 지금 무엇때문에 여기까지 와있는지 잊으셨어요?"
정자가 조용히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나 싫지는 않은 표정이다.
"정자씨는 누님을 죽인 범인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광준의 느닷없는 질문에 정자는 한참 말을 않고 쳐다보기만
했다.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아니 꼭 누구라고 말한다는게 아니라, 심증이란게 있지 않습니까?"
"김선생님은 심증이 가는 범인이 있으세요?"
"난 처음엔 장통석 회장이 한 짓이라고 굳게 믿었었죠. 지금도
그 사람이 범인이 아니라는것은 물론 아닙니다만... 하지만 요즘에 와서는 백순조 무당이
범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광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백순조 무당이 처음부터 김회장님의 죽음을 예언했고 , 정근세라
는 사람의 죽음도 예언했고 , 그리고 이강인 김칠병 노인의 아내까지 예언대로 죽지 않았습
니까?
더구나 저까지 죽게 된다고 예언을 했거든요."
"하지만 정자씨야 꼭 백무당이 한 짓이라고 할수 없잖습니까?"
광준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그러면 누가 그런 협박편지를 보냈단 말입니까?"
"글쎄요."
정자는 그때의 일을 떠올린듯 눈동자에 겁을 삼키고 있었다.
"무당이 예언한 일은 어떤 방법으로든 꼭 일어나고만다는것이 아무래도 수상해요."
"그런 경우는 대체로 두가지로 해석할수가 있습니다. 무속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힘으로 다
룰수 없는것을 다루고 있기때문에 조리로서는 설명이 안된답니다. 무당의 주술은 꼭 어떤
영적인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는것이 무속의 세계니까요. 하지만 다른 한년으로는 무당
의 예언을 치밀한 과학적 계산으로 실천에 옮기는 방법이 있다고 가정할수가 있지요. 백무
당이 자기가 제거하고 싶은 인물에 대해 죽게 된다는 예언을 하고 그것이
마치 불가사의한 신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것처럼 보이게 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무속의 세계에서는 그런 일이란 있을수 없습니다. 오직 신의 뜻에 의해 죽고 사는것이 이루
어지고, 그것을 인간세계와 연결시켜 주는, 신의 통역관이 무당일뿐
이니깐요."
정자가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면 정자씨는 어느것을 믿습니까?"
정자는 대답하지 않고 먼 산만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말을 이었다.
"무속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저의 학위 논문은 허위일뿐입니다."
두 사람은 제법 두터워진 늦봄의 햇살을 맘껏 마시며 산사를
한바퀴 돈 뒤 다시 대곡읍의 호텔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했다.
"서울엔 언제 올라가실 거예요?"
정자가 걱정스레 물었다.
"내일 탈무골에가서 백무당을 다시 만나보기로 합시다."
"예? 탈무골로 가자구요?"
정자가 놀랐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백순조 무당이 뭔가 열쇠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 열쇠를 뺏어야 돼요."
광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글쎄요"
정자는 무당 이야기만 나와도 겁먹은 표정이다.
"두려워할것 없어요. 내가 있지 않습니까."
"김선생님도 믿을수가 없어요. 어쨌든 전 탈무골에는 절대로
갈수가 없어요."
정자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어쨌든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광준은 정자의 태도가 너무나 완강했기때문에 더 이상 강권을 하지는 않았다.
그날 밤 돼지갈비 집에서 광준은 추경감과 강형사를만났다.
정자는 혼자서 조용히 쉬고 싶다고 해서 그냥 호텔에 두고 나왔다.
"우리 여기까지 왔으니 솔직히 털어놓기로 합시다. 자, 우선
내 술부터 한 잔 받으십시오."
광준은 오늘 이야말로 이 두 친구의 전의를 꼭 캐고 말겠다
는 각오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허허 이거 큰일났는데. 우린 털어놓고 주워담고 할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경감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소줏잔을 받았다.
"저는 누님의 살해범을 잡는 일을 일생을 바쳐서라도 해내고
말것입니다. 추경감님이나 강형사님도 쉽게 물러설 분이 아니란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솔직하게 털어놓고 힘을 합치면
더 일이 빨라질것 아닙니까?"
"그말은 옳아요. 헌데 김광준씨나 나나 뭘 숨긴게 있어야말이지." 강형사가 거들었다. "무슨
말씀을. 그럼 우선 강형사님께 물어보겠는데요. 강형사님은 우리를 미행하는 겁니까. 아니면
우연의 일치로 우리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겁니까?" 광준은 입가에 한껏 비웃음을 흘려보내
며 물었다. 가장 아픈곳을 찔렀다고 내심 생각했다. "천만의 말씀. 제가 왜 김선생을 미행합
니까?" "그럼 곽정자를 미행한 겁니까?" "미스곽을? 그것도 당치 않은 말씀이죠." "그럼 우
리가 처음 마주친 곳이 사직동에 있는 수저궁이란 요정이었습니다. 그곳은 거상그룹 장통석
회장 관계로 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거라고 칩시다. 그 다음 전번 우리가 탈무골갔을 때도
우연히 마주친 것입니까? 그리고 이번에도 우연히 마주친것입니까? 그 우연 참 희한한 우
연이군요." 광준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거야 광준씨나 우리가 추적하는 목표가 같으니까 그
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추경감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문제는 그만두기
로 합시다. 경찰에선 도대체 범인을 누구로 보시는 겁니?까 장통석 회장입니까? 남궁현입니
까. 주인성입니까 조민희입니까. 아니면 백순조 무당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무당이 말하는
신령님입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김을숙 여사가 살해됐는지 어쩐지에대한 결론을 내
리지 못했습니다. 김을숙씨가 납치되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종적을 감추었을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범인이라고 하는것은 김선생과 우리의 견해가 조금 다릅니다."
추경감이 잔을 넘켜주며 말했다.
"그럼 제가 백보를 양보해 납치범이라고 합시다. 그 범인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명확하게 납치범이라고 단정할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아파트 앞에서 나를 자동차로 치어 죽어려고 하던 그살인 미수범은 누구라고 생각
하십니까? 이 일은 나만 겪은게아니고 곽정자도 함께 겪은 일이니까 믿지 않는다고 하지는
않겠지요."
광준이 다짐을 하듯 말했다. 아니 윽박지른다고 해야 맞을 말투였다.
"그건 물론 믿습니다. 하지만 그 살인 미수 사건이, 솔직히 말해 김을숙 여사와 관계가 꼭
있다고 볼수는 없는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김광준씨 개인에 관한 일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한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탈무골의 백순조 무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다뇨?"
추경감이 돼지갈비를 질근질근 엡며 말했다. 강형사의 말대로 대식가임에 틀림없었다.
"이러한 여러가지 사건과 관계가 있다고 믿는지요."
"다른것은 몰라도 정근세씨의 사망과는 관계가 있는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이곳 경찰이 조
사한 바로는 누군가가 정근세가
다니는 얼음판을 새벽에 깨 놓았던것 같습니다. 그 위에 살얼음이 댄것을 모르고 지나가다
빠진것 같습니다."
"그런 증거가 있나요?"
"원래 강의 얼음이란 가장자리부터 얼기 시작하고 가장자리가 두꺼운 법입니다. 그런데 정
근세가 빠진 곳은 장의 기운데가
아니고 가장자리입니다. 강을 다 건너와가장자리서 얼음이 꺼져 빠진다는 건 납득이 안갑니
다. 이곳 경찰은 백무당이 정근세가 죽을것이란 예언을 해놓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새
벽에 얼음을 깨고 살얼음이 얼게 한 뒤 빠져 죽도록 함정 같은것을
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음 함정이군."
강형사자 혼자 히죽 웃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이지요. 백무당한테는 진짜로
사람의 생명을 뺏을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지
광준이 물었다.
"초능력이나 신통력을 믿는다면 수사라는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것입니다."
"그러면 김을숙 누님에 대한 죽음의 예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그것도 사람을 괴롭히기위한 일종의 협박수단이 아니 었을까요."
그것은 추경감의 말이 옳은지도 모른다.
광준은 그날 밤 돼지갈비 집에서 자정이 가까워서야 호텔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광준이 눈을 떴을때 창밖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창을 열고 내다보았더니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호텔 건너의 야트막한 대곡산도 비에 묻혀 보이지가 않았다.
비가 밤새 쏟아진 모양이다. 어디선가 홍수 난리가 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외출 준비를 하고 복도로 나왔다. 정자가
자는 방문을 노크했다.
"누구세요? "
낭랑한 정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광준입니다."
잠시후 문이 열렸다. 정자는 벌써 단정하게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잘 주무셨어요. 들어오세요."
정자가 방긋 웃었다. 해맑은 얼굴이 그렇게 귀여울수가 없었다.
"어껫맘에는 미안했어요. 추경감하고 소주 한 잔 하느라...
열두시쯤 들어왔더니 주무시는것 같더군요."
광준이 정자의 방으로 들어섰다. 향긋한 냄새가 방안에 가득찬것 같았다.
"비가 억수로 퍼붓는군요."
정자가 창문의 커튼을 젖히며 말했다.
"비가 와도 아침밥은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 어떻게 하실 작정이셔요. 전 서울로 올라갔으면 하는데."
"서울가야 뭐 기다릴 사람 있습니까? 난 이번 여행에서 끝장을 내버릴 작정입니다."
광준이 엄숙하게 말했다. 일부러 엄숙한 투를 냈기때문에 연극 대사를 외는것 같아 우습게
들렸다.
"호호호, 뭘 끝장을 내시려고 그러세요?"
정자가 손으로 입을가리고 웃었다. 너무나 천진하게 보였다.
웃음소리에 따라 알맞게 불룩한 젖가슴이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었다.
"두가지입니다."
광준이 여전히 연극투로 말하며 손가락 둘을 펴 보였다.
"첫째는 탈무골의 탈을 벗겨서 누님의 범인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그리고요"?"
"둘째는 정자씨를 내 사람으로만드는 일입니다."
"호호호, 어떻게 하면 제가 광준씨 사람이 되는 거예요"?"
정자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었다.
"그것은..."
머뭇머뭇하던 광준이 갑자기 정자를 와락 껴안았다. 너무나
돌연하게 일어난 일이라 정자는 깜쪽 놀란듯했다.
"지금은 아침이에요."
정자가 허리를 뒤로 제끼고 한 손으로 달려드는 광준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정자는 자연스럽게 광준의 필에서 빠겨나가며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배고파요. 식당에 안가실래요?"
광준은 머 쓱해진 채 할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자를 따라 식당으로 갔다.
그들이 아침을 먹고 나자 날씨는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화창하게 개어있었다. 테양이 물먹은
산천을 찬란하게 비치고 있었다. 광준은 정자를 데리고 탈무골에 가기위해 정자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자는 탈무골에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광준은 꼭 가야만 한다고
우겼다. 정자를 노리던 살인범이 전번에 탈무골에 나타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그 범인을
잡으려면 꼭 거기 가야 한다고 버텼다. 정자는 자기가 그럼 낚시의 미끼냐고 대들었다. 자기
의 생명을 미끼로 걸고 도박을 하겠느냐고 대들었다. 근 한시간이 걸려 광준은 정자를 설득
하는데 성공했다. 탈무골에 들어가면서부터 나올 때까지 정자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겠다
는 조건으로 승낙을 얻었다. 그들은 택시를 전세내어 탈무골로 향했다. 비에 씻긴 산골 경치
는 금방 그려놓은 수채화처럼 맑고 영롱했다. 그들이 탈무재를 넘어서자 탈무강은 수량이
불어나 물소리를 크게내며 흘러내리고있었다. 전번에 왔을때 어린에 오줌줄기같던 강물이
세찬 구비를 이루며 흐르고 있었다.그들은 전번처럼 당집으로 들어가 행랑채의 방 하나를
빌었다. 백순조 무당은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않고 낯익은 심방여인하나가 그들을 맞아주었
다. "오늘이 이장님댁 장사날이 돼서 당님은 그곳에 갔심더. 저녁무렵에 돌아오끼라예." 심
방은 심한 사투리를 썼다.
"방은 하나면 됨니다."
광준이 말했다.
심방은 두 사람을 유심히 번갈아 쳐다보다가.
"결혼식 했심니꺼?"
엉뚱한 질문을 했다.
정자의 얼굴이 홍당무가 돼 버렸다.
"곧 결혼할 칩니다. 저어..."
광준이 얼버무려 놓고 정자를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게 무슨 망신이에요."
정자가 불만가득 찬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들은 거기서 잠시 숨을 돌린 뒤 정용세의 집을 찾아갔다.
정용세도 산에가고 없었다. 마을 모든 남정네들어 산역하러
상여를 따라간것 같았다. 정용세의 아내가 두사람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정자가 이곳을 자
주 다녔기때문에 정용세의 아내와는 구면이었다.
"김회장님 일은 참 안됐심더. 얼매나 훌륭한 분인데..."
정용세의 아내가 정자를 보고 위로의 말을 했다.
정용세의 아내는 그동안에 일어났던 이장집 화재사건을 대층
정자한테 설명했다. 그리고는 결론으로 말했다.
"경찰에서는 누가 와서 불을 지른것이 확실하다고 말했심더. 불을 지른 증거가 드러났다고
안캅니꺼. 하지만 그건 틀림없이 당님의 저주를 받은 거라예. 사람이 우찌 그런 짓을 함니
꺼? 신령님이 노한게 틀림없는 거라예."
"경찰에서 무슨 증거를 잡았다고 하던가요?"
정자가 물었다.
"경찰즈그가 뭘 압니꺼? 신령님이 하시는 일을우찌 압니꺼? 뭐 불을 지르는데 쓴 신문지랑
타다 남은 성냥을 찾아냈다던가?"
"타다 남은 성냥을 찾았다고요?"
정자가 다시 확인을 했다.
"예, 그기 읍내서 쓰는 성냥이라 카덩까... 아이구 내 정신 좀봐. 시장하시지요. 내 얼른 점
심차릴게 쪼끔만 기다리시이소."
정용세의 아내가 얼른 일어서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 광준과 정자는 당집의 행랑채 방 하나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서울의 아파트에서 한 달 이상을 한집에서 살았고 탈무골 여행은 두번째였지만 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침나절에 퍼붓던 비가 그치고 난 뒤 눈부신 햇볕이 쏟아지던 밖은 어둠으로 덮이고 중천
에는 벌써만월을 갓 지난 달이 교교하게 탈무골을 비추고 있었다,
그 밝은 달은 한달전 두사람이 당집에서 묵던 그날 밤을
연상하게 헌다.
"무서 워요?"
광준이 불안한 그림자를 지우지 않고 오두마니 앉아 있는 정자를 보고 물었다.
시골집의 좁은 방은 두 사람의 숨소리만으로도 가득 차는것 같았다.
"달이 무서워요."
그러면서 정자는 웃어 보였다.
"누가 왔다고·"
갑자기 문 밖에서 억선 사투리가 들렸다. 광준이 문을 열었다. 백순조 무당이 방문 밖에 서
있었다. 달빛을 뒤로 받고 서있었기때문에 기다린 그림자가 방안까지 쭉 뻗쳤다. 왠지 섬뜩
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정자가 인사를 했다. 밖에 나갔다 이제 돌아온 모양이다.
"웬일로 또 왔노? 또 새 잡으로 왔나? 탈무골 새는 다 죽고
없다."
백무당은 밑고 끝도 없는 이 말만을 남기고 행하니 돌아서 가버렸다. 차갑고 무거운 바람을
뿌렸다.
백무당이가고 난 뒤 두 사람은 씁쓸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마주보았다.
"이렇게 앉아서 밤을 새울 작정이세요?"
정자가 무거운 침묵을 깨려는듯 나직하게 말했다.
"당님은 내일 다시만날 테니 우선 오늘밤은 좀 자 둡시다. 먼저 주무십시오. 내가 지키고 있
을 테니."
낯에 준비해 두었던 이불 두채를 따로따로 펴면서 광준이 말했다.
웬일인지 좋아하는 여인과 한방에 있다는 오붓한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처녀와 총각이
한방 안에서 하룻밤을 보냈다고 하면 무슨 일이 있었을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할것이다. 그러
나 정말 오늘밤같은 분위기라면 그 말이 거짓일수밖에 없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혼자 쓴웃
음을 지었다.
"잠깐만 밖에 나갔다 오세요."
이불을 다 펴고 나자 정자가 난처한듯 말했다.
"왜요?"
"아이 눈치도 없으시긴. 이옷 입고 그냥 잘수는 없잖아요."
광준은 뒤통수를 긁으며 문 밖으로 잠시 나갔다.
마당에 길게 드리운 대숲이 추상화를 그려 놓은것 같았다.
안채의 신당에는 아직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광준이 다시 방에 들어왔을때 정자는 몸은 보라빛의 잠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더욱 청초하고 가련하게 보인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갖는
그런 속된 감정은 전혀 없었다. 이상했다. 신비하고 고고한 자태를 보는 순수한 마음이었다.
정자는 양쪽 이불이 펴진가운데 방바닥에 성냥알을 한 줄로
죽 펴서 잇고 있었다.
"지금 뭘 하는 겁니까? 성냥개비놀이 하는 겁니까?"
광준은 정자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 물었다.
"마지노선을 치는 거예요. 언제 또 선생님이 승냥이로 변할지 모르잖 아요."
정차는 성냥개비를 이어서 줄을 긋고 방을 둘로 갈라 놓았다.
"이런일 하려고 성냥을가지고 다니십니까? 참으로 용의주도하군요."
광준이 다소 빈정거리돗 말했다.
"낯에 호텔에서가져온 거예요. 김선생님 담뱃불 붙여 드리려고요. 담배를 입에 물었을때 곁
에 있던 숙녀가 재빨리 성냥을
탁 그어대는 모습 멋있잖아요."
광준은 웃지 않을수 없었다.
광준과 정자는 성냥개비 마지노선을가운데 두고 따로따로
이불 속으로 들어 갔다. 참으로 기묘한 잠자리라고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이 기묘한 밤에 닥쳐올 엄청난 일을 두 사람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운명의 순간이 고고한 달빛을 타고
서서히 탈무골로 다가오고 있었다.
구. 불새 밤에죽다.
소란한 소리에 광준은 눈을 번쩍 떴다. 밖에서 비명과 울음소리가 범벅이 되어 들렸다. 창
호지로 바른 문살이 불빛에 벌겋게
달아 오르고 있었다.
"불이 났구나!"
광준은 깜짝놀라 벌떡 일어났다. 곁을 보았다. 정자가 자던
자리엔 이불만 개어져 있고 정자는 보이지 않았다. 바깥의 불길을 따라 방안이 붉은 조명을
비춘듯 밝아지다 어두워지고는했다.
마치 불길이 파도처럼 방안에 밀어닥친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꽤 오랜시간을 기다려야 할것같은 어둠 속이었다.
광준은 옷을 입은 채로 잤기때문에 그대로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이게 웬일인
가?
위채인 신당과, 본채가 물질에 힘싸여 있었다.
며칠 전에 본 이강 김칠병 노인집의 불길보다도 훨씬 맹렬한
기세로 치솟고 있었다.
광준은 며칠새 두 곳의 불길과 만나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자기가 연옥 뛰어든것
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것이었다.
불길 앞에서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이리 뛰고 서리 뛰고 있었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닌것 같았고 누가 누구인지 잘 분간도 가지 않았다.
옷매무새가 풀어헤쳐진 젊은 여인 서너 명이 뭐라고 아우성치며 미친듯이 뛰어다썼다.
심방이라는, 무당 밑에서 일하는 여인들 같았다.
연이어 동네 사람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바가지며 대야 등에 물을 퍼가지고 와서 퍼
부었다. 그렇지만 불길이 거세어서 아무도 접근을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수라장이었다.
문득 광준은 정자 생각이 났다. 불길때문에 정자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것이다. 급히 서두르며 이리저리 집주위를 뛰어다녔다. 그러나 찾을 길이 막연했
다.
불길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고 있었다. 대마디가 튀는듯한, 탁탁 소리가 불꽃 속에서
튀어나왔다.
"아이구 신령님 이게 웬일입니꺼! 아이구 신령님! 아이구 신령님!"
백순조 무당이 속저고리 속치마 바람으로 두 손을 내저으며
미친듯이 뛰어다니고 있는 모습을 광준은 뒤늦게 발견했다.
쪽 차있던 머리가 풀려 산발이 된 데다가 맨발로 마당을 이리뛰고 저리 뛰었다. 흰옷에 붉
은 불꽃이 비쳐 분흥으로 물들어 보였다.
"아이구 신령님, 우리 을숙이를 살려 주이소, 을숙이를 살려주이소"
광준은 자기귀를 의심 했다. 광준은 백순조 무당 앞으로 뛰어갔다. 무당의 소매를 잡고 늘어
졌다.
"당님!을숙이라니. 을숙이는 우리 누님 아닙니까? 누님이 어떻게 되었단 말입니까?"
광준이 무당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를 챈다.
무당의 그 표정은 참으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처참해져 있었다. 눈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짐승의 눈과도 같았다.
"저 속에... 저 속에... 아이구 신령님 신령님!"
무당은 타오르는 신당의 불길을가리키며 미친 사람이 되어있었다.
"저 속에 을숙누님이 있단 말입니까?"
"하모 하모, 우리을숙이 좀 살려 주이소,을숙이 좀 살려 주이소."
무당은 광준이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팔에 매달리며 울부짖었다.
불길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타올라 문짝 사이로 지옥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벽을 핥았
다.
지붕의 기와가 탁 탁 소리를 내며 높은 온도를 못 견뎌 튀고있었다.
"누님이 저 속에 있다니, 죽은 누님이 그 속에 있단 말입니까?"
광준이 무당의 양팔을 붙잡고 미친듯이 흔들어대며 물었다.
"아이구 우리을숙이, 을숙이 좀 살려 주이소."
무당은 거의 실정한 사람처럼 같은 말만 외쳐댔다.
광준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어째서 죽은 누님이 살아서 저 불길 속에 있단 말인가?
그러면 서울의 아파트에서 분명히 죽은 채로 목격되었던 여자는 누구인가?
아무리 세월이 홀렀지반 광준이 누님을 알아볼수가 없었단
말인가. 광준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당이 미쳐서 날뛰는것을 보면 분명 저
불길 속의 당집 안에 을숙누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광준이 당집 앞으로 달려갔다. 신당의 문을 열어 젖혔다. 그러자 열기와 함께 무서운불길이
이마를 삼킬듯이 쏟아져 나왔다. 화염 방사기의 기습 같았다.
불길이 쏟아질때 신당 벽에 길렀던 탱화들이 불을 뿜으며 너울거렸다.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수가 없었다. 광준은 물러나와 대청 마루 쪽으로 뛰어갔다. 마루에 올
라서려고 하자 대들보와 서까래가 불기둥이 되어 우르르 쏟아졌다, 거기도 도저히 접근할수
가 없었다.
"광준씨 광준씨."
누가 뒤에서 악을 쓰며 불러댔다. 정용세였다.
광준이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자 용세가 뒤에 와서
허리를 안고 사당으로 나뒹굴었다.
"안돼요 안돼!"
용세가 악을 냈다,
"이거 놔! 이것 놓으란 말이야. 누나를 살려야돼."
광준이 발버둥을 쳤다.
광준의 발악을 이기지 못하자 동네 사람 서너 명이 더 달려들어 광준을 마당가운데로 끌어
냈다.
"을숙아,을숙아!"
그 순간 비명을 남기고 무당이 불길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당님! 당님을 살려라."
동네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무당이 달려들어간 신당 문앞으로 우루루 몰려갔다.
그러나 맹렬한불길이 접근을 용납할수없다는듯이 동네 사람들의 얼굴을 향해 뿜어댔다. 사
람들은 다시 우르르 물러설수밖에 없었다.
"당님, 당님!"
목이 터져라 아우성을 쳤다. 물통의 물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달걀로 바위 치기다. 불길은 물을 먹고 더 거세어지는것 같았다.
무당은 불길 속에 뛰어든 뒤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심방들이 울며 아우성쳤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어떻게 할수가 없었다. 참으로 처절한 모습
이었다. 불길이 무섭다는것은
알았지만 이처럼 어마어마한 위력을가졌다는것을 사람들은 처음으로 실감했다.
인간의 힘이 얼마나 미약하고 보잘것 없는것인가를 느끼게 해준것이다.
오랜 세월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백순조 무당이 검붉은
물질의 혓바닥에 삼켜지는 처참한 모습을 대책없이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더할수 없이 비참했다.
지상에 연옥을 옮겨놓은듯한 한밤중 탈무골의 이 비극은 먼산에 동이 틀 무렵에 막을 내렸
다.
식당이 있는 건물은 기와 지붕까지 완전히 내려앉은 뒤에야
불이 꺼겼다.
방새도록 미친 사람처럼 날뛰던 동네 사람들은 완전히 허탈한
상태로 검은 잿더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불에 그을린 얼굴 같았다. 눈에는 핏발들이
서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동네 사람들은 아직 불꽃이 남아 있는 잿더미를 뒤지지 시작했다. 백순조
무당의 시체를 찾기 위해서였다.
거의 두세 시간이 겉려 사람들은 완전히 타 버리고 뼈만 남은
시체 하나를 찾아섰다. 무당 백순조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그 뼈를 정중히 다루며 멀쩡하게 남아 있는 행랑채로 옮겼다.
심방들은 눈물도 말라버린듯 울지도 못했다.
잿더미를 뒤지던 사람들은 맹렬한 불길 속에서 견뎌낸 놋촛대며 놋그릇, 그리고 부처님상을
갖아냈다. 곧이어 신당의 지하부분에 해당하는 곳에서 또 하나의 시체를 찾아냈다.
지하실에 있었기때문에 완전히 타지 않아 형체는 그을린채로 조금 남아 있었다.
여자였다. 광준은 그 시체가 을숙누님이라고 단정해다. 얼굴형제는 알아볼수 없었으나 누님
이 틀림없다는 확실한 신념을
가질수 있었다.
그것은 혈육끼리만 가지고 있는 영감인지도 모른다.
"누나,을숙누나."
동네 사람들이 들고 나온 시체 위에 없드리며 광준이 몸부림쳤다.
시체의 그을음과 광준의 얼굴이 뒤범벅이 되었다. 사람들이
광준을 뜯어말리고 시체를 옮겼다.
"김형, 정신 차려요. 그 사람이 누님인지 아닌지 모르잖아요."
정용세가 옆에서 광준을 부축하며 위로했다.
광준은 마당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날이 이제 완전히 밝아 하늘이 푸른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듯 눈이
아프도록 청명했다.
광준은 정신이 번쩍 드는것 같았다. 벌떡 일어섰다. 주위를
돌아보았다. 모두가 허탈한 모습으로 앉고 서고 한 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광준은 시선을 한 바퀴빙 돌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정자가
보이지 않았다.
광준이 뛰어가 행랑채 방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도 정자는 보이지 않았다.
정자가 누웠던 자리에는 이불이 얌전하게 개어 있었다. 간밤에 마지노선으로 그었던 성냥개
비의 줄도 그대로 있었다.
광준이 다시 나오려고 하다가 머리맡에 놓인 이상한것을 발견한다. 조그만 노트였다. 정자가
늘 백 속에 떻고 다니던 노트였다. 광준은 급하게 노트를 집어들었다. 마치 누가 빼앗아가기
라도 할것처럼 접어들고 얼른 표지를 보았다.
"김광준씨에게"
노트에는 얌전한 글씨로 그렇게 씌어 있었다. 평소에 광준이
보았을때는 아무 글씨도 없던 표지다.
광준은 황급히 노트의 표지를 넘겼다. 거기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꼼꼼하게 볼펜으로 시작
되어 있었다.
"김 광준씨
김선생님이 라고 부르지 않고 김광준씨 라고 하는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어쩐지 선생님보다
는씨라고 하는것이 한결 가까운
사람 같아서입니다.
우선 말씀드리기 전에 밝혀둘것은 이것이 광준씨와 나와 펜으로나마 나누는 마지막 대화가
된다는것입니다.
광준씨가 이 글을 읽고 있을때 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것이기 때문입니다.
광준씨는 왜 제가 이런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을것입니다.
제가 광준씨를 처음만난것은 한 달쯤 전 서울 김회장님의
아파트에서 였습니다. 경찰관이 입회한 무거운 공기 속에서지요.
솔직히 말해 그때 저의 심정은 지금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약 한 달 동안 광준씨와 함께 생활하고 여행하는 동안 저는
너무나도 달라졌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 있었습니다. 마침내는 그 변화가 제 스스
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보니 제 자신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처음 김광준씨를 향한 저의 감정은 김을숙이라는 여자의 동생이란것밖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제가 꾸미고 있는 거대한 음모의 한 소도구로밖에 느끼지 않았습
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지는 김광준이 라는 사람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로
인해 내 목숨까지 버려야 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광준씨는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수 있는 엘리트의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고학을 하다시피
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 엘리트들의 필수 코스인 미국 유학을 하고 거기서 학위를 받아 금
의환향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지한테는 별로 달갑지 않은 시시한
인생의 주인공이었지요. 그러나 김을숙씨는 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김을숙씨 이야기는 뒤에 하기로 하고 우선 광준씨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그러한 엘리트 중의 한 사람인 광준씨에게 떳떳치 못한 가문에서 태어나 사회에 크게 두각
도 나타내지 못하고 남의 하잘것없는 심부름이나 하는 저 같은 사람이 눈에 뜨였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광준씨를 관찰하는 동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광준씨에게 끌려들어가고 말았습
니다. 최면술에 걸렸다고나 할까.
범인을 찾겠다는 광준씨의 그 집념이라든지 너무나 순박하고
어떻게 보면 저돌적이기까지 한 그때묻지 않은 순수성이 저를
최면술의 노예가 되게 했는지도 모르지요.
때로는 무관심한 척하기도 하고,때로는 너무 자상하기도 하고, 그러나 남녀가 지켜야 하는
예의는 어떤 경우도 꼬박꼬박 지켜 주시던 사람이었지요. 흔히 남녀간의 예의를 지킨다고
하면 찬바람이 날 정도로 절도와 거리를 두지만, 광준씨는 그렇지 않있습니다. 우리 사이가
벌어지지 않도록 늘 적당하고 끈적끈적한 접근을 저한테 해오기도 했지요. 어떤때는 저를
당황하게 할정도로 순진한 애정의 표시를 하기도 했지요. 저처럼 세상살이의 이것저것을 다
경험하면서 때묻을 대로 묻은 감정을 가지고있는 사람은 광준씨의 그 철없이 보이기도 하는
애정의 표시가
그토록 마음을 들뜨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깜짝깜짝 놀랄때가 많
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엉뚱한 일에 크게 흔들린다는 걸 절실히 느꼈습니다.
거기서부터 문제는 생긴것입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광준씨가 좋아지고, 곁에 있고 싶었
고, 관심을 끌고 싶었던 거예요.
처음엔 제 감정을 제가 비웃었어요. 천하의 곽정자가 유치한
사랑놀음에 빠겨드는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광준씨를 만난지
열흘이 채 안 되어서 저는 광준씨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것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날부터 제 감정은 누구도 매어둘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고 세상사에 도통
하다고 자부하던 제가 그때부터
저를 원망하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광준씨를 아끼고 싶고 사랑해 주고 싶은 저의 심정은 이 순간
까지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 알량한 사랑때문에 저의 음모는 산산조각이 난것입니다.
아니 산산조각이 난것이 아니라 제가 산산조각을 내버린것입니다. 그렇게라도하지 않으면
저는제 심정을 이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삼류소설에서 사랑을 위해 자기목숨을 불태운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흔히 읽어 왔지요. 그
런데 진짜 사랑을 위해 제 목숨을 버리는 일이 저한테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광
준씨."
여기까지 읽고난 광준은 담배를 피워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평소에 생각할 수 없었던 정
자의 모습을 보는 것같았다. 정자가 그런 절실한 감정으로자기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
하니 연민의 정이 불끈 솟는것 같았다. 정자의 음모라니.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광
준은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다시 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김을숙이라는 여자. 그 이
야기부터 하기로 하지요. 김을숙씨와 제가 같이 지내는 사년동안 저는 참으로 여러가지일을
많이 겪었고 생각도 많이 하게되었습니다. 김을숙씨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완벽한 여자였
습니다. 가난한지베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남이 겪지 않은 모진 시련을 겪으면서도 비뚤어지
지않고곧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일찍 인생과 학문에 대해 눈뜬 여자입니다. 여자가 완벽하다
는 것을 저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첫째. 꿋꿋한 정신력입니다. 세파에 시달리면
서도 미래를 향한 집념. 그것은 김을숙씨에게서 누구나 느끼는 점입니다.외경스럽기까지 한
장점입니다. 그 정신력으로 그는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여자의 정조튿 끝까지 지켜온것입니
다.
둘째, 그는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그의 미모 앞에 모든여자들은 열등감을 느끼지 않
을수 없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 못생긴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김을숙씨 앞에서는
질투 같은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셋째, 김을숙씨는 예절 바르고 너그러운 인격의 소유자입니다. 그가 학계나 여성계나 사교계
에서 여왕처럼 군림 한것은 그의 고결한 인품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넷째, 그는 탁월한 학자입니다. 민속학에 대해서는 대가의 경지를 이루어가는 성숙단계에 있
었습니다.
다섯째, 그는 인정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뒷바라지를 즐겁게 했으며, 손아래 사람을 거느리는데도 흐뭇한 정감으로 대했습니
다.
이와 같이 완벽한 여자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의
사람이었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로 하여금 그냥 있을수 없게만든것입니다.
김을숙씨가 화려한 모습으로 사교계에 등장했을때 수행원으로 따라간 저 같은 사람은 열등
삼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제가 김을숙씨와 처음만난것은 학문적인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저는 김을숙씨의 개인 비서로 전락하고, 집에서는 가정부로 전
락해 버린것입니다.
물론 김을숙 자신이 저를 그렇게 취급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주위 사람들은 모두 저를 그렇게 보았습니다.
화려한 모란꽂송이 곁에 붙은 하잘것 없는 잎 하나가 저 같았습니다. 저는 김을숙씨가 솟아
나면 솟아날수록 비참해졌습니다. 저는 열등감에 견디다 못해 마침내는 그 꽃을 망가뜨리고
싶었습니다.
벌레가 먹게 하고 시들게 하고 , 마침내는 꺾어 버리려고 한것입니다.
광준씨는 저의 이 심정을 도저히 이해할수 없겠지요.
하지만 광준씨가 활달하고 야망 있는 여자였다면 이해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지는 원래가 황당무계한 꿈을 잘 꾸고 살았습니다. 저는 이세상 뭇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대
상이 되고 싶은 욕망에 불타는 여자 였습니다.
이곳저곳에 잘 뛰어들고, 무절제하게 남자도 사귀었습니다.
광준씨는 제가 정숙하고 얌전하고 순진한 처녀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런 점에서 저의 연기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김을숙씨와만나 일 년이 채 안 되던 어느 여름이었습니다.
우리는 장충동의 조그만 한옥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사귀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
다.
광준씨와는 비교가 안 되지만, 잘 생긴 인물에 서글서글한
성격이 있습니다,
그는 저와 결혼하자고 매달렸습니다.
어느날 김을숙씨가 외출하고 없는 틈에 그 사나이가 찾아왔습니다.
우리들은 즐겁게 차도 끓며마시고 점심도 지어먹고 하면서 마치 신혼살림이나 차린듯 즐거
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저녁 무렵 우리는 대청마루에 나란히 누웠습니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 껴안
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김을숙씨가 외출에서 돌아오나 우리의
모습을 본것입니다.
김을숙씨의 그때 표정은 지금도 몸서리쳐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증스럽고 추한 모습을 본것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겁이 나서 어쩔줄을 몰랐습니다.
김을숙씨는 당장 두 사람 다 이 세상에서 없어지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거리의 여자도 아닌 곽정자가 이런 부도덕한 행동을 할수 있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녀는 저의 어머니처럼 당당했습니다. 김을숙씨가 너무 지나치게 화를 내는 바람에 그 사
나이는 정신을가다듬지도 못한채 허둥지둥 대문 밖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때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도망치다시피 달려가던
사나이가 골목에서 큰길로 나서 다가 그만 트럭에 치어 그 자리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때의 저의 심정은 광준씨도 이해할것입니다. 김을숙씨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 일을 두고 김을숙씨는 저한테 큰 죄를 지었다고 늘 사과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부터 제가 김을숙씨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라고 해서 김을숙씨 같은 저명한 여류명사가 되지 말라는법도 없는것 아니겠습니까?
저만 왜 늘 김을숙씨의 그늘에가려서 하잘것 없는 잎사귀
노릇만 해야 합니까?
저는 그 사나이를 잃은 뒤 방황하는 심정을 가라앉힐수가 없었습니다. 김을숙씨 몰래 이남
자 저남자를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워낙 저의 천성이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김을숙씨 주변에 있는 남자를 유혹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표면에서 느낀 열등감을 그늘에서 보복하고 싶었습니다.
저도 미모에는 꽤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에 그 일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저는 우선 김을숙씨의 기둥이요 후원자인 장통적 거상그룹
회장을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김을숙씨의 심부름으로 장통석 회장을만나러 갔다가
마침 점심때라, 점심을 사달라고 슬쩍 말을 건넸습니다.
장회장은 웃음을 얼굴가득 담으며 선선히 응했습니다.
우리들은 빌딩 옥상의 아늑한 별실에서 점심을 즐겼습니다.
장회장은 줄곧 탐욕스런 눈으로 저의 몸매를 흘끔흘끔 보는것
같었습니다.
"미스팍은 올해 몇인가."
장회장이 이렇게 물었을때 저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서른둘이요."
나이를 일곱 살이나 올려서 얘기한것은 순전히 장난기였습니
"아니끼 그게 정말인가? 스물서넛밖에 안돼 보이는데..."
장회장은 눈이 둥그래졌습니다.
우리들은 그뒤 몇 번 저녁을 같이 했습니다.
나는 장회장을만날때면 일부러 나이든것 같은 차림을 하고다녔습니다.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 김을숙의 흉내를 낸것이라고 뒤에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은 김을숙씨 몰래 호텔이며 별장을 드나들었습니다.
이십대의 발랄한 숙녀와 점잖은 그룹 총수의 밀회였지요.
저는 삼송리에 있는 그의 별장에 자주 돌렸습니다. 별장지기들은 저한테 끔직히 공대를 했
습니다.
저는 마치 상류사회의 여왕이 된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룹 총수의 사모님이
된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삼송리 별장에 나타날때는 저도 모르게 위풍당당하게 중년부
인의 행세를 했습니다.
김을숙씨 몰래 김을숙이가 된듯한 쾌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거기서 복수의 쾌감 같은것을 느꼈던것입니다.
광준씨가 김을숙씨와 장통석 회장이 놀아났다고 생각한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김을숙씨도 저와 같은 인간인데 그렇게 탈선해 보고 싶은심
성이 왜 없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김을숙씨의 그 믿바닥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제가 대신 해
주었다고 생각할수도 있지요. 이건 독선입니까? 글쎄요. 맘대로 생각하세요.
어쨌든 저는 여기서 쾌감을 얻은뒤 더욱더 김을숙씨 행세를
하고 싶었습니다. 아니 제가 김을숙씨가 된듯한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김을숙씨를
더욱 타락시키고 싶은 심정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다음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접근해 오는 남궁현을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
다. 그이는 천성적인 바람둥이니까
누구한테라도 추파를 던지는 인물 아닙니까?
남궁현이 조민희를 이미 짓밟을 대로 짓밟았다는것을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궁현이 나를 짓밟게 한것입니다. 저는 김을숙을 대행하는 여자니까 남궁
현이 저를 농락하는것은 김을숙을 농락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지도 않은 환상이 라고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그일에서 여러가지 쾌감을 얻을
수 있었답니다. 우선 뛰어난 페이니스트인 남궁현 국장의 달콤한 사랑이 좋았구요, 다음에
이것이 김을숙에 대한 복수라는 쾌감을 얻었습니다.
뿐 아니라 그 새침때기 조인희의 애인을 빼앗았다는 성취감 같은것도 있었습니다.
남궁현과 어울린 저는 그를 따라수정궁에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광준씨가 알다시피 수정
궁은 겉으로는 민속요정이지만
속은 노름꾼이 들끓는 타락의 소굴이랍니다.
우리들, 우리들이란 저와 남궁현과 장통석 회장, 주인성씨 등을 말합니다. 어쳤든 우리들은
가끔 그곳에서 노름으로 스릴과
인생의 묘한 일면을 맛보며 지냈습니다.
물론 김을숙씨가 우리들의 이러한 뒷면 생활을 알 턱이 없지요.
남궁현이 이때 주인성의 약점을 잡아 공금을 탕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남궁현의 경리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광준씨한테
권했죠. 이것은 제가 이런 이면을 알고 있었기때문입니다. 그시점에선 남궁현을 우선 교도소
에 집어넣어 놓아야 할 이유가
있었기때문입니다.
광준씨 정말 미안해요.
저는 김을숙을 타락된 인간, 다시 제식으로 말하면 인간다운
인간을만들고 싶었습니다. 완벽한 인간이란 이 세상에 존재할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을숙씨 자신이 변모하지 못한다면 제가 대역으로 변모시킬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이 김을숙의 진짜 면모는 이런사람이었다는것을
알면 얼마나 분해하고 놀라겠어요.
어쨌든 저는 그 뒤도 김을숙의 역할을 계속했습니다. 남궁현과 함께 산부인과에 찾아가 중
절수술을 받은것도 물론 제짓입니다.
남궁현은 제가 자기의 아이를 임신했으니까 같이가야 한다고
우겼을때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실운 그 중절로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아이가 남궁현의
아기인지 아닌지는 저도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광준씨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저는 원래가 그런 여자랍니다."
여기까지 읽고 난 광준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곽정자라는 여자가 그렇게 깜찍하게 사람을 속일수 있었다는것이 무섭기만 했다.
광준은 다시 담배를 피워 물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 노트의
두께로 보아 아직 절반도 얽지 않은것 같았다.
"광준씨!
저는 병원에서도 물론 김을숙의 이름을 댔습니다. 온갖 인간적인 일에 김을숙의 이름을 다
기록해 놓고 싶었습니다.
뒤에 광준씨가 중절수술한 진찰권을 을숙씨의 방에서 발견했지요. 그것은 우연히 발견된것
이 아닙니다. 제가 광준씨의
눈에 뜨이게 해두었던것입니다.
광준씨의 눈에 뜨이게 한것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어떤은행의 사직동 지점 통장에서수백만 원을 넣었다 뺏다한 김을숙씨의 통장을 본 일이 있
지요. 그것도 제가 해놓은 일이 랍니다.
광준씨를 속여서 정말 미안해요.
제가 김을숙의 대역을 했으니까 그렇게 할수밖에 없는일 아녜요.
솔직히 말하면 김을숙씨는 화투장을만져 본 일이 없는것은
물론이고, 그 혼한 고스톱도 원수처럼 여긴 사람이랍니다.
저는 제가 김을숙이 될수 있다는 생각을 나중에는 확실히 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김을숙
을 없애야 한다는 망상에 이르게
된것입니다.
나의 애인에 대한 복수. 세상 사람들에게 가정부 취급을 당한복수. 퍼펙트 우먼에 대한 질투
같은 거였다면 이해가 되겠지요.
한가지 덧붙여 둘것은 제가 쓰고 있던 무속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 말입니다. 그것도 실은
김을숙씨가 써놓은 논문이랍니다.
저도 무속에 관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만 도저히 김을숙씨를 따라갈수가 없었습니다. 그
래서 그 학문에 관한 일도 제가
대역을 하기로 결심했었죠.
이러한 저의 음모는 잘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음모를 엉망으로만들어 버린것은 바로 광준씨
입니다.
완벽하게 타락된 한 여류를 제거하고 내가 그 자리에 올라설수 있다는 확신을가지고 있었거
든요.
일이 잘못된것은,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광준씨가 미국에서 돌아와 아파트로 찾아오던 날입니다.
하필이면 그날 돌아올것이 무어란 말입니까? 광준씨가 어느날 온다는 예고만 있었던들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면 그일까지도 대수로운것은 아닙니다.
광준씨와 제가 범인을 잡는답시고 각각 동상이몽을 꾸고 있던 한달간이 문제였습니다.
저는 수많은 남자들과 사랑을 나누어 보았지만 광준씨 같은
바보멍청이는 처음 보았습니다. 이런 별종의 인간도 세상에 존재하는가 할정도였습니다. 그
생각이 마침내 광준씨를 사랑하는 불꽃으로 타올랐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범할수없는 순수
하고 깨끗한 사랑을가지고 싶은 충동이 생겼습니다. 곽정자답지 않게, 이 무슨 못난 생각인
지 모르겠습니다.
광준씨. 이야기를 마저 끝내야겠지요."
여기서부터 시간에 쫓겨던지 글씨가 거칠어 읽기에 힘들었다.
"처음 광준씨를만났을때는 광준씨를 이용할 생각이었지요.
동생의 입으로 누님의 위선적인 생활 이면을 세상에 폭로하는일. 이 얼마나 아이로닉한 일
입니까?
그래서 누님의 사생활에 관한 힌트를 하나씩 하나씩 제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만월이 되는 날 밤 인시에 저를 죽인다는 협박장 사건을 기억하시불. 그것은 제가 저한테
보낸 연극이었습니다.
그 협박장을 타자해서 보낼때부터 제 생각은 흔들리기 시작한것입니다. 저는 광준씨가 너무
나 집요하게 김을숙 사건을 추적하는 데 놀랬습니다. 놀랐다기보다는 접이 덜컥 났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방해하려고 협박장 사건을 꾸며냈습니다. 발신지도 회현동 우체국을 택한것
은 거상그룹의 장회장을 끌어넣어
초점을 흐리게 할 심산이었지요.
하지만 지금 생각으론 꼭 그 이유때문만은 아닌것 같아요.
광준씨를 제곁에 꼭붙어 있게 하고 싶기도 하고, 광준씨로부터 동정을 받고 싶기도 했다고
할수 있어요. 저한테 관심을 돌리도록 했다고나 할까요.
탈무골에서 우리가 보름달 밤을 보낸 날을 기억하시죠. 광준씨가 제 옆방에서 자다가 정용
세씨 집에가신 날 밤 말입니다.
그날 밤에 제가 괴한한테 습격받아 죽을 뻔했죠. 인시의사건 말입니다. 그것도 제가 연극을
한것이었어요.
정말 속여서 죄송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한테 어리광을 부렸다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
니다.
그러나 서울의 우리 아파트에서 불을 끈 자동차에 치어 하마터면 죽을 뻔한 일을 기억하시
죠. 그건 진짜랍니다.
광준씨가 너무 사건의 핵심에 접근해가자 저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이러다가 지의 음모가 탄로나 나는게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광준씨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마침 경리 부정 관계로 곤경에 몰린 남궁현 국장이 광준씨를 없애야 한다고 강력히 주
장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타의반 자의반으로 광준씨를 밖으로 유인해 간것입니다. 불을 끄고
쏜살같이 달려온 그 차는 남궁현의 차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왜 제가 광준씨를 구했는가 하고 의심하겠지요.
그건 저도 몰라요. 다만 광준씨가 죽는 모습을 볼수가 없었어요.
갈대처럼 흔들리는것이 여자의 마음 아니겠어요.
이제 그 일을 다 털어놓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하군요. 정말입니다.
광준씨에게 제가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나 드리지요.
광준씨가 그처럼 알고자 하던 광준씨 집안의 비밀을 제가
알려 드릴께요.
저는 처음에 김을숙씨를 따라 탈무골에 왔다갔다 하면서 탈무골 사람들과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저 혼자 김을숙씨 심부름으로 자주 다녔죠.
거기서 저는 광준씨 부모의 비밀을 알게 되였숭니다. 광준씨 아버지와 어머니가 탈무골에서
추방당한것은 광준씨 아버지와 무당인 백순조의 치정때문이었습니다.
총각때부터 사모해 오던 백순조를, 광준씨의 아버지는 결혼후에도 잊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정사는 남의 눈을 피해 물레방앗간에서, 갈대 숲 속에서, 그리고 무성한
대나무 숲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처음엔 동네사람들이 어렴풋이 짐작만 했으나 확증을 잡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 불장난 끝에 백순조 무당은 마침내 임신을 하고
남의 눈을 속여 어린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광준씨의 어머니는 이러한 사실을 다 알고 있었지만,
하늘 같은 남편이 하는 일이라 순종만 했습니다. 백순조 무당이
낳은 아이는 광준씨의 어머니가 낳은 아이로 둔갑이 되었고, 동네 사람들은 미심적어하면서
속야 넘어갔다고 하더군요.
광준씨는 백순조 무당이 늙었지만 빼어난 미모가 어딘지 남아 있다고 느꼈을것입니다.
그 미모가 누구를 닮았다고 생각해 보지는 않았는지요?
백순조 무당이 낳은 그 아이가 바로 광준씨의 누님인 김을숙회장입니다.
놀라셨죠? 그러니까 광준씨와 김을숙씨는 이복남매랍니다.
광준씨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 여인입니다. 쉽게 체념할수 있고 운명에 순종하고 인내할
줄 아는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그 비밀을 눈을 감을때까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백순조 무당과 광준씨 아버지의 미련은 몇해 동안 계속되어
동네에 해괴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자 백순조 무당이 세습 무당의 직권으로 광준씨 일가에
추방령을 내리고만것입니다. 알다시피 탈무골에서 당님의 명을 어길 자가 그 누가 있겠습니
까.
저는 이 비밀을 가지고 백순조 무당과 흥정을 시작했습니다.
김을숙씨가 탈무골을 전통 무속 보존 마을로 지정 받으려고 할때, 장통석 회장은 그곳의 우
라늄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해가 엇갈리기 시작했지요.
저는 삼송리 별장의 호화스런 침대에서 장회장의 품에 안긴채 제안을 했날. 무당을 움직여
땅을 모두 무당이 사들이게 한뒤 넘겨줄테니, 그 대가를 치르겠느냐고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장회장은 영악한 장사꾼 아닙니까. 선뜻 제 제의를 받아들이더군요.
저는 그때부터 무당을 협박하기 시작했지요. 내 말대로 해준다면 엄청난 부를 누릴수 있지
만 그렇지 않으면, 김을숙씨의
출생 비밀을 밝혀 무당과 그 딸인 김회장을 모두 파멸시키고 말겠다고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스캔들에 약한것은 여자인가봐요.
무당은 순순히 제 제의를 받아들이더군요. 그리고 무당 자신보다 김을숙의 사회적 위치를
더 걱정했어요. 그게 핏줄인가봐요.
실제로 김을숙씨를 망신시키겠다고 을러대자 한결 더 효과가 있었거든요.
백무당은 이런 괴로운 연유때문에 갑자기 무속 마을 지정을
반대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었지요.
그뿐 아니라 김을숙씨를 다시는 탈무골에 못 오게 하기 위해
타지의 새는 죽는다는 둥하고 주술을 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우습죠. 그러나 누구나 자기 혈육과 관계되는 일이라든지 사랑과 관계되는 일에는
약해진답니다.
자기 출생의 비밀에 관해 김을숙씨는 처음엔 모르고 있었지요.
백순조 무당은 김을숙이 자기가 낳은 딸이란것을 알았지만,
김을숙은 무당이 자기 생모란것을 몰랐던 거예요.
이러한 비밀을 처음 나한테 알려 준 사람은 김칠병 이장의 부인이었담니다. 김이장의 부인
은 제가 하고 다니는 일도 대강 알고 있었지요. 제가 섭섭찮게 선물이며 돈도 건네줬으니까
요.
하지만 최근 들어 광준씨가 점점 사건의 핵심으로 접근해가자 저는 제일 먼저 김칠병 노인
의 늙은 마누라쟁이가 무엇인가
입을 놀릴것 같았습니다.
제가 대곡읍에서 광준씨를 따라가지 않고 거기 남겠다고 한것은 실은 조그만 음모를 꾸미기
위한것이었습니다. 저는 김칠병 영감 내외의 입을 막을 방법을 궁리했지요.
광준씨가 탈무골로 혼자 간 뒤 저는 몰래 호텔을 빠져나와
택시를 대절해 타고 탈무골에 숨어 들었어요. 그리고는 김칠병
노인 집에 불을 지르고 몰래 탈무골을 빠져나왔던 겁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것이 방화라는 단서가 나와서 저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불이난 다음 날 추경감이 현장에서 주웠다는 성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들어 있
던 그 호텔 마크가 붙은 성냥이랍니다.
제가 당황해서 그것을 현장에 그냥 던지고 온것 같아요.
음흉한 추경감은 그걸 제게 슬쩍 보여 주었습니다. 아무래도
추경감은 제가 한 짓을 다 알고 있는것 같아요. 저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암담함을 느꼈습
니다.
이제 더 달아날 곳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로 한것은 이것이 직접적인 동기라고 할수 있죠.
이야기가 좀 빗나갔군요.
저는 김을숙을 납치해서 탈무골의 백무당한테 넘기기로 했지요.
백무당도 자기 딸이니까 죽이기 보다는 그쪽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선뜻 동의를 했습니다.
백무당은 자기가 탈무골의 땅을 다 사들여서 그것을 장통석
회장한테 넘겨준 뒤 김을숙을 내놓겠다고 약속했지요.
그때가 되면 이미 무속 지정 마을이란 아무도 거론할수 없게
되기때문입니다.
저의 음모는 그대로 들어맞는것 같았습니다.
저는 하수인으로 남궁현을 시켰지요. 남궁현은 경리 부정을
비롯해 저한테 여러가지 약점이 잡혀 있어 포로가 되다시피했으니까요.
얼마 전 강형사가 광준씨한테, 처음 아파트에 오던날 핑크색 스텔라 차를 아파트 밖에서 본
일이 없느냐고 물은 적이 있지요. 핑크색 스텔라 차는 남궁현의 차라는것을 그땐 기억해내
지못했었나요?
저는 얼마나가슴이 뜨끔했는지 모른담니다.
남궁현은 내가 시키는 대로 김을숙을 협박해서 탈무골 백무당한테 데려다 주고 왔었죠.
그날, 그러니까 일요일이었지요. 오후 늦게 출발해서 밤중에
탈무골까지 김을숙을 싣고 와서는 무당한테 넘겨 준 뒤 다시 서울로 새벽에 돌아왔던것입니
다.
남궁현이란 사람은 워낙 믿을수 없고 여색을 밝히는 사람이라 김을숙이 변을 당했는지 어쨌
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가 김을숙을 협박해서 탈무골까지 끌고가자면 순순히 말을
들었겠습니까?
정말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함니다.
일요일날 제가 집을 일부러 비우고 난 뒤 남궁현이 혼자 있는
김을숙의 아파트를 찾아간것입니다.
남궁현은 그때 경리 부정 관계가 곧 터질 위기에 있었기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이른 상태였
지요. 저는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해 남궁현을 쉽게 조종할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말을 듣지 않으면 김을숙이 무당의 사생아라는것을 폭로해서 망신을 시키겠다고 협박
을 했겠죠. 여자한테는 치명적인
협박이었을 집니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명성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생겼으니까요.
저는 남궁현이 그 협박만은 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쥐도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습니까?
남궁현 같은 자가 천하의 절색이며 넘볼수 없는 숙녀를 아무도 없는 아파트에서만나 그냥
두었으리라고 쉽게 생각되지 않는군요. 이것은 모두가 제 죄입니다."
광준은 글을 읽어나가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노트는 이제 두어 장박에 남지 않았다.
"광준씨. 용서하세요. 저는 이렇게 나쁜 여자랍니다. 도저히
광준씨 같은 사람의 순수하고 해맑은 사랑을 받아들일수 없는여자랍니다. 마음도 육체도 모
두 악마한테 짓밟힌 그런 여자랍니다.
저는 제 계획이 뒤틀리기 시작하고 있다는것을 며칠 전부터
알았습니다. 광준씨가 제정체를 아는것은 시간 문제 였다는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추
경감이나 강형사는 저를 앞질러가고 있다는것도 알았습니다.
저는 그들에 걸린 새의 신세가 되어가고 있었던것입니다.
그렇죠. 저는 한 마리의 나쁜 불새였습니다.
제 별명이 오리 히프라는것을 들은 일이 있으시죠. 오리도
새는 새 아닙니까?
광준씨.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김을숙 회장님운 드물게 보는 훌륭한 여자였습니다. 지금쯤은 신당
의 불길 속에서 재로 변해 있겠지만 참으로 아까운 여자였습니다.
아직 그 말씀을 드리지 않았군요. 저는 비록 실패는 했지만
제가 처음 시도했던 일을 이루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지경에 이른것은 오로지 이 탈무
골이라는 마을과 무당 모녀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끝내는 대로 당집을 태워 버릴
작정입니다.
저 혼자만 죄를 지고 이 세상을 하직할수가 없기때문입니다.
광준씨
그동안 짧은 세월이었지만, 참으로 잊을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당신의 곽정자로부터"
노트는 이렇게 끝나 있었다.
광준은 노트를 덮으며 참으로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곽정자가 그렇게 철저한 이중인격자였다는것이 우선 몸서리쳐졌다.
사람이 어떻게 생겼으면 그토록 거짓과 진실을 마음대로 연출할수 있었단 말인가?
광준은 그동안 정자한테 속야 누님을 나쁜 여자로 생각해 온자 기가 부끄러웠다.
지금은 불에 탄시체가되어 안방에 누워 있는 누님이 너무도
안타깝고 불쌍했다.
분노와 연민이 한꺼번에 머리와가슴을 꽉 채웠다.
"김선생. 여기 계셨군요."
누군가가 방문을 열며 큰소리로 말했다. 듣던 목소리다.
추경감이 었다.
"여기서 혼자 뭘 하고 계십니까? 빨리 좀 나오십시오."
추경감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 탈무골까지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늘 빙그레 웃던 그 모습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채웠다. 아주 딴 사람처럼 보였다.
"언제 오셨습니까?"
광준은 노트를 윗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일어섰다.
"다 끝난 뒤에 뭣하러 나타나셨나요?"
광준이 볼멘 소리로 내뱉었다.
"다 끝나다뇨. 그럴까요?"
추경감은 비틀거 리며 방을 나오는 광준의 손을 갑아 주었다.
"자. 빨리 대곡 읍내로 갑시다. 여기 일은 정복 경찰관들이 맡을 겁니다."
"대곡읍엔 뭣하러 갑니까?"
"가보면 압니다."
"곽정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차차 말씀드리지요."
추경감은 대문 밖에 세워 둔 지프차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광준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꽥 질렀다.
"누가 말입니까?"
"살인범 곽정자 말입니다."
"글쎄 가면서 얘기 합시다."
추경감이 광준을 밀다시피 해서 지프차에 태웠다.
"안녕하심니까 김박사님."
강형사가 지프차 안에 미리 타고 있다가 인사를 했다.
"너무 늦게들 오셨군요."
광준이 불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빨리 오기도 하고 너무 늦게 오기도 했죠."
강형사가 퉁명스럽게 말하는 동안 지프차는 늙은이 해소병 앓는듯한 엔진 소리를 내며 출발
했다.
무당 집의 입구에는 앰뷸런스며 정복 경찰관들이 여러 명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어린이 어른 할것 없이 모두 이곳에 모인것 같았다.
차가 출발하자 추경감이 광준한테 담배를 권했다.
광준이 담배를 받아들자 강형사가 재빨리 성냥불을 그어 댔다.
"김선생을 서울 방배동 아파트에서 처음 뵙 던 날 내가 담배를
권했죠. 그때 김선생은 못 피운다고 했습니다. 왜 거짓말을
했습니까?"
추경감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때 제가 담배를 못 피운다고 한게 거짓말이란것을 알았습니까?"
광준이 담배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왼손 인자의 손톱이 니코틴에 찌들어 있는것을 보았습니다. 선생이 그때 거짓말
을 했기때문에 선생의 누님 피살
신고를 믿어야 할지 어쩔지 망설이게 했습니다. 왜 그때 거짓말을 했습니까?"
"제가 담배를 못 피운다고 한것은 확실한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땐 담배를 피울 기분이 아니었기에 무심코 한 말입니다. 그러나 누님의 시체를 본것은 절
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광준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것을 느꼈다.
지프차는 막 탈무장 다리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건 사실입니다."
추경감이 나직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누님이 이곳 탈무골에 와 있었습니까?"
"그럴 이유가 있었지요. 남궁현이 모두 자백을 했거든요. 하지만 남궁현은 곽정자의 하수인
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죽일 놈 같으니. 천벌을 받고 말것입니다."
광준이 다시 흥분해서 말했다.
"남궁현은 그날 아침 일찍 아파트 십사동에 숨어들어와 있었습니다. 열두 시쯤 되어 곽정자
가 외출을 하자 남궁현이 천백삼호실로 느닷없이 뛰어들어갔죠. 일요일이라 잠옷바람으로
휴일을 즐기고 있던 김을숙 회장은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죽일 놈 같으니."
광준이 추경감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저주에 찬 욕설을 퍼부었
다.
"그래서 남궁현은 곽정자가 시킨 대로 협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파트 방에는 지금
남궁현 자신과 김을숙씨밖에는 없고 자기가 어떤 짓을 해도 말릴 사람이 없다는 엄포부터
놓기 시작했죠."
"잠깐! "
광준이 추경감의 말허리를 갈랐다.
"왜 그러십니까?"
추경감이 광준을 돌아보았다.
"그 대목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누님 이 그 짐승 같은 남궁이란 자한테 어떤수모를 당했는
지 안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얘기는 제발 그냥 놔 두싶시오."
그것은 광준의 진심이었다.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누님에게 불결한 이미지를 남기고 싶
지 않은 심정이었다.
"알겠습니다. 남궁현은 정자가 시킨 대로 그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폭로하겠다고 위협 했지
요. 자기를 따라가지 않으면 사회에서 매장시켜 버리겠다고 했지요. 무당의 사생아에다가 을
숙씨아버지는 파렴치 하고 부도덕한 사람임을 폭로하겠다고 윽박질렀지요. 그래도 김을숙씨
가 순순히 말을 따르지 않았지요. 말을 따르지 않은것이 아니라 오히려 준엄하게 남궁현을
꾸짖고 인격적인 모독까지 주었지요. 김을숙 여사처럼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라면 있을
법한 이야기죠. 남궁현이 약이 올라 마침내
곁에 있던 절구통의 절구공이로 김여사의 머리를 후려쳐 버렸지요. 거실에 장식품으로 놓여
있던 그 옛날 절구통과 절구공이를
보았을 겁니다."
광준이 기억을 더듬었다. 응접 탁자로 쓰고 있는 옛날 궤짠옆에 낡아 백 년은 됨직한 절구
통이며 키 같은것이 있었다.
"김여사가 정신을 잃고 소파에 그냥 쓰러져 버렸지요. 공교롭게도 그때 김선생이 문을 열고
들어온것입니다. 남궁현은 인기척이 나자 급히 부엌의 다용도실로 숨어 버렸지요. 김선생은
그때 누님이 기절해 있는 모습을 보고 죽었다고 생각한것입니다.
그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죽었다고 생각하겠지요. 절대로 무리가
아닙니다."
추경감은 이 부분에 특히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런데 그 녀석과 누념은 어떻게 그 아파트를 빠져나갔습니까? 그때 입구를 봉쇄하고 전
아파트내의 가가호호를 다 방문하지 않았습니까?"
광준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남궁현과 김을숙 여사를 보고도 놓친것입니다."
추경감이 한탄하둣 말했다.
"내가 바보였어요."
장형사가 말을 받았다.
"그때 내가 아파트의 전가구를 샅샅이가가호호 방문을 했지요. 그런데 한 군데서도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사가는 집이 하나 있어서 그 집만 열심히 체크를 했지요."
"그러면 남궁현과 누님이 현관으로 걸어나갔단 말입니까?"
"그렇게된 셈이지요."
강형사가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가가호로 방문하고 있을때 사층의 일호실 즉 오백일호를
방문했을때의 일입니다. 그곳은 사층이란 말을 쓰지 않고 바로
오층이 라고 하니까 사실은 사층이죠. 그 오백일호실에는 사십대 초반
쯤된부부와 어린 여학생, 즉 중학교 일학년쯤 됨직한 여학생
세 식구, 그리고 가정부 등 네 명이 살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날이 일요일이라 모두 집에
있더군요. 그런데 그때 부엌에 어떤
남녀가 서 있었습니다. 쓰레기통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와이셔츠 바람
이고, 여자는 머리에수건을 푹
둘러 쓴 채 앞치마를 입고 있었습니다. 누구냐고 내가 물었더니위층인 육백일호에 사는 부
부인데 쓰레기통이 막혀 들여다보러 왔다고 했습니다. 아파트의 쓰레기 처리 통로는 제일
위층에서부터 마지막층까지 한 통로로 연결돼 있으니까 있을수 있는 일입니다. 더 구나 바
로 위 층 사람들이 라면 바로 밑층에 와서 이 상 유무를 점검할수 있는것입니다. 그때 저는
문득 쓰레기통으로 시체를 흘려보낼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그 집을 뛰쳐나와 지
하 하치 장으로 달려가봤습니다. 그러나 거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중대 실수
였습니다. 그 육백일실에 산다는 부부를 자세히 관찰하지 못한것이 제 잘못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육백일호실에는 그때 아직 입주자가 없어 비어 있는 집이었답니다. 그 십사동
에 있는 총 사십가구 중 아직 분양이 안된 아홉가구중의 하나가 육백일호실이었숩니다. 그
부부로 위장한 사람이 남궁현과 김을숙 여사였단 말입니다. 나 참 기가 막혀서..."
강형사가 정말 기가 막힌듯 입맛을 쩍쩍 다시며 말했다.
"그렇다면 오백일호 사람들은 바로 위층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도 몰랐다는 말입니까?"
광준이 믿기지 않는듯이 말했다.
"물론입니다. 아파트라는 곳이 그런 곳입니다. 위층뿐 아니라
같은 층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도 서로 모르고 지냅니다. 얼굴을
모르고 지낼 정도가 아니라 서로가 자기 정체를 감추고 살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말에 이웃사촌이란 말이 있지요. 이 말은 죽은 지 오랩니다. 특히
아파트가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이웃과는 두껍고 단단한 콘크리트로 벽을 쌓아 버린것이지
요. 마음의 문까지 꼭 닫아 걸어 잠근것입니다. 이웃집에서 사람이 죽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
습니다. 천구백삽십년대. 미국의 뉴욕 어느 아파트촌 입구에서 한 젊은 여자가 괴한에게 살
해되고 있었는데,
아파트 주민이 모두 창문으로 그 장면을 내다보면서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가운데 죽은 비극이 있었습니다. 아파트란
이렇게 비정한 점이 있습니다. 그 오백일호 사람들이 육백일호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는것은
극히 상식적인 일입니다. 남궁현이 육백일호에 산다니까 그렇게 믿은것뿐입니다."
추경감이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때 남궁현은 김을숙씨를 협박하는데 성공해서 김을숙씨가 그런 연극에 협조하도록 한것
입니다. 김선생이 김여사의 거절한 모습을 보고 파출소에 뛰어가 신고하고 오는 동안에 김
을숙씨가 깨어나고 남궁현은 김을숙씨를 협박해서 그런 연극을
한것입니다. 두 사람은 현관의 통제가 해체된 뒤 기회를 봐서
빠져나가 남궁현의 차를 타고 고속도로로 해서 탈무골에 간 것입니다."
광준은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 경찰에선 처음부터 누님이 피살된것이 아니라 납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수사를 하다가 금방 우리들의 실수를 발견한것이지요.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납치된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면 왜 저한테는 감추고 있었습니까?"
광준이 화를 냈다.
"미안합니다. 그 점은 여기서 사과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강력 한 배후 조종 용의자로 곽정
자를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김선생과 곽정자가 사랑에 빠져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진실을
얘기합니까?"
추경감이 비로소 미소를 띠며 말했다.
"뭐라구요?"
"아아, 농담입니다. 우리는 김여사의 소재를 찾기 위해 곽정자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는 자꾸 김선생님을 미행해 다닌것 같았습니다만 실은 곽정자를 미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였다. 광준 일행이 탄 지프차는 대곡 읍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고는 곧 병원 앞에서 멎었다. 김칠병 노인이 입원해 있던
병원이었다.
"아니 여기는 왜 왔습니까?"
광준이 차에서 내리며 추경감과 강형사를 돌아보고 물었다.
"곧 알게 됩니다. 김선생이 만나볼 사람이 있습니다."
추경감이 앞장 서서 광준을 데리고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어느 병실 앞에 와서 섰다.면회 금지라는 붉은 글씨가 붙어있었다. 병실 앞을 지키고 있던
정복 경찰관이 추경감을 보자 거수경례를 했다.
추청감은 본척도 않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광준에게 들어가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광준은 엉접결에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맞은편에 링겔 주사를 찾고 누워 있는 여자를 발견
했다. 광준이 다가섰다.
"아니?"
광준은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명상에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여자는 김을숙 누나였다.
"누나! "
광준은 자신도 모르는 새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어릴때
늘 부르던 누나 라는 말이 튀어나왔던것이다.
"누님, 지예요. 광준이에요."
광준은 뛰어가 김을숙의가슴에 엎어졌다.
김을숙은 천천히 손을 뻗어 광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주루룩 홀러
내렸다,
광준은 손으로 김을숙의 눈물을 닦아 주며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광준의 눈에도 뜨거운 눈
물이 홀러 김을숙의 모습이 아물아물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한참동안 응시했다.
"누님이 살아 있었군요. 정말 살아 있었군요."
광준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 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한것이 됫기가 전혀 없었다. 무척수척해져 있었다.
"어떻게 해서 여기 와 계신 겁니까?"
한참만에 광준이 눈물을 닦고 물었다.
"어젯밤에 추경감이 나를 그 신당의 지하에서 구출해 줬어. 난
그곳에 같혀 있었거든. 이제 아무 걱정 말아라. 내가 구출된 뒤에 거기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렸다고 하더군."
김을숙은 마치 남의 일인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때야 광준은 추경감이 한 말의 뜻을 알았다. 자기가 너무
늦게 왔다고 하자 너무 빠르기도 하고 너무 늦기도 했다는 그 말뜻을 새길수가 있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김을숙은 고개를가로 저었다.
"빨리 서울로 올라갑시다. 이곳은 이제 지긋지긋해요."
광준의 그 말에 김을숙은 아무 대 담도 않고 한참 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서울에 다신가지 않는다."
김을숙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광준이 물었다.
"당님이 불에 타 돌아가셨다면서. 그러면 탈무골은 누가 지킨단 말이냐? 나는 무당의 딸이
야. 내 몸에는 무당의 피가 흐르고 있어. 내가 제이십구대 세습 무당 자리를 이어받아야 해.
그건 나의 숙명이야. 우리의 당골판을 그냥 비워 둘수가 없어."
"예?"
광준은 하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그때 추경감이 병실로 들어왔다.
"자, 김여사님 좀 쉬게 우리 나갑시다."
김광준은 추경감을 따라 나오며 궁금하던것을 물었다.
"그러면, 탈무골 식당에서 타 죽은 여자는 누굽니까?"
"그건 곽정자가 아닐까요?"
"예끼 곽정자가 왜 거기서 타 죽었단 말입니까?"
"글쎄요. 제풀에 꺾여 불 속에 날아든 불새가 아닐까요? 우리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답니
다."
추경감은 주름투성 이 얼굴에 깊은 주름을 지으며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깊은 연륜을
느끼게 하는 표정 임에도 그의 얼굴은 밝고 티없는 동안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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