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 예고살인 1

3학년2반 | 2022.02.17 08:02:19 댓글: 0 조회: 499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408

A Murder is Announced(예고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著

◎ 1장. 살인 예고 ◎

(1)
조니 베트는 일요일만을 제외한 매일 아침 7시 반부터 한시간 동안 자전거로 치핑 클렉혼
마을을 한바퀴 돈다. 이빨 사이로 짜내듯이 요란스레 휘파람을 불어 대면서 큰 저택이나 허
름한 집앞에 이르면 자전거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우편함에 조간 신문을 찔러넣는다. 그는
하이 스트리트에서 문구점과 신문 소매업을 하고 있는 토트먼 씨의 고용인이다.
그가 배달하는 신문은 먼저 이스터브룩 대령 부부 댁에 <타임즈>와 <데일리 그래픽>을,
스웨트넘 부인 댁에 <타임즈>와 <데일리 워커>를, 미스 핀칠리피와 미스 마것로이드에게
<데일리 텔리그래프> 및 <뉴스 크로니클>을, 미스 블랙록에겐 <델리 그래프>와 <타임즈
>, 그리고 <데일리 에일>을 돌린다.
그 외도 금요일마다 <노스 베넘 뉴스 앤드 치핑 클렉혼>, 줄여서 그냥 <가제트>라고 부
르는 신문을 배달한다. 이 신문은 앞서 말한 집에 빠짐없이 배달될 뿐만 아니라 치핑 클렉
혼의 집집마다 배달된다.
금요일 아침이 되면 일간신문의 머리글자 「국제 정세의 위기!」「국제연합 총회 개막!」
「금발의 타이피스트 살해범 체포!」「탄광 스트라이크!」「시사이드 호텔에서 23명 식중독
사망!」등등을 쓱 훑은 후 대부분은 <가제트>를 집어 들고 읽는 것이다. 그들은 우선 독자
난을 살핀 뒤 대부분 광고난으로 눈을 돌린다.
광고난에는 매매, 종업원 모집에서부터 애완견의 매매와 질병에 관해, 그리고 정원 설비,
그 밖에 치핑 클렉혼이라는 조그만 사회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광고가 가득차 있는 것이
다.
10월 29일 금요일, 문제의 바로 그 금요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2)
스웨트넘 부인은 타임즈를 펴든 채 이마로 흘러내린 한웅큼밖에 안 되는 희끗희끗한 머리
칼을 쓸어올리며 희미한 눈으로 왼쪽 페이지 중간쯤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타
임즈란 소름끼치는 뉴스가 있어도 은폐해 버린다고 지레짐작하고 탄생, 결혼, 사망난, 특히
사망난을 잠깐 살펴보고는 초조하게 <가제트>를 집어들었다.
잠시 후 아들 에드먼드가 방에 들어왔지만 그때는 한참 광고난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부
인은 신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잘 잤니? 스메드리의 집에서 자동차를 판다는 구나. 1935년 형이라…… 그렇다면 꽤 낡
았겠네, 그렇지?」
에드먼드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커피를 따르고 훈제 청어를 담고 <데일리 워커>를 토스트
받침에 걸쳐 세웠다.
스웨트넘 부인이 읽어내려갔다.
「경비견 매매라…… 이런 때 어떻게 개까지 먹여 키운담. 정말 이해할 수 없군. 아니, 셀
리너 로렌스가 또 요리사를 구한다는 공고를 냈구나. 요즘에 광고를 낸다는 것은 정말
시간 낭비지. 게다가 주소도 없이 사서함 번호만 적어 놓았어. 이래서야 도저히 불가능할
걸. 고용인이란 의당 자기가 일할 곳을 알고 싶어하지. 좋은 곳에서 일하기를 원할 테니
까…… 틀니라. 어째 틀니가 이렇게 많이 보급되었는지 모르겠군. 여자애가 『흥미있는
일 원함. 여행도 할 수 있음』이라고. 정말 놀라겠군. 여행이 싫다는 사람도 있을까? 다
크스훈트종 개라…… 다크스훈트는 갖고 싶은 맘이 없었지. 굳이 독일개라서 그러는게
아니야. 별로 흥미가 없기 때문이지. 오, 웬일이죠, 핀치 부인?」
문이 열리더니 낡은 벨벳 베레모를 쓴 차가운 인상의 여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이제 청소를 해도 될까요?」
스웨트넘 부인이 말했다.
「아직 식사도 끝내지 않았어요. 금방 끝낼 거야.」
핀치 부인은 신문을 일고 있는 에드먼드를 흘낏 바라보더니 콧소리를 내고 방을 나갔다.
「난 지금 막 식사를 시작한 참인데요.」
「부탁인데, 그 무서운 신문(영국 공산당 기관지인 데일리 워커)일랑 읽지 마라. 핀치 부인
은 그걸 몹시 싫어한단다.」
「내 정치적 견해와 핀치 부인이 무슨 상관이죠?」
부인은 급히 말을 받았다.
「네가 노동자입네 하는 게 못마땅한 거야. 노동도 하지 않는 주제에 말이다.」
에드먼드는 화가 난 듯했다.
「천만에요. 난 글을 쓰고 있잖아요.」
「내가 말하는 건 진짜 노동 말이야. 핀치 부인이 없으면 큰 일이야. 그럼 누가 집안일을
돌봐주겠니.」
「가제트에 광고를 내면 되죠.」
에드먼드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봐야 소용없어. 이런 땐 나이가 든 가정부가 부엌일이며 다른 일도 척척 해 줘야지,
안 그러면 애를 먹어.」
「그렇다면 그런 나이 많은 가정부를 두시지 그러셨어요. 진작 내게 그런 여자를 딸려 주
었으면 됐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죠?」
「전에는 너에게도 잔심부름할 아이가 있었잖니.」
「틀렸어요, 그런 하녀는.」
스웨트넘 부인은 다시 광고난을 읽기 시작했다.
「중고 모터 제초기 양도함이라…… 굉장히 비싸군. 다크스훈트종 개가 또 나왔고…… 절
망하고 있는 워글스에게 편지나 기타 방법으로 연락 바람. 괴상한 이름이군. 스파니엘종
사냥개, 너 기억하겠니? 그 귀엽던 수지 말이다, 에드먼드. 네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잘
들었어. 쉐라톤식 그릇장 양도함. 최고급 골동품. 데이어스 홀 루커스 부인…… 거짓말쟁
이야, 이 루커스란 여자는! 쉐라톤식이라니 정말…….」
스웨트넘 부인은 코방귀를 뀌고 다시 읽어내려갔다.
「모든 게 오해였음. 영원히 사랑함. 언제나처럼 금요일에, J…… 애인끼리의 사랑싸움이군.
아니면 도둑들의 암호이든가. 또 다크스훈트! 왜 다크스훈트를 기르고 싶어하는지 모르
겠군. 네 아저씨 사이몬은 멘체스터 텔리아를 길렀지. 우아하고 귀여운 개였단다. 나는
튼튼한 다리를 가진 개라면 다 좋아하지. 해외출국으로 투피스를 깁히 팖. 치수도 값도
적혀 있지 않군. 결혼안내…… 아니! 살인이라고? 놀라운 일이야! 에드먼드, 좀 들어봐라.
살인을 예고합니다. 10월 29일 금요일 오후 6시 30분 리틀 파독스에서. 친지분들, 참석
바랍니다. 정말 괴상한 일도 다 있네.」
「뭐라고요?」
에드먼드는 읽고 있던 신문에서 눈을 뗐다.
「10월 29일 금요일이면 오늘이잖아?」
「어디 좀 봐요.」
에드먼드는 어머니로부터 신문을 빼앗았다.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
에드먼드는 의심쩍은 듯 코를 문질렀다.
「일종의 파티가 아닐까요? 살인 게임 같은 거 말이죠.」
「뭐라고? 별 이상한 짓도 다하는구나. 일부러 광고까지 내다니, 레티샤 블랙록답지 않게
말이야. 그 사람 현명한 사람인데.」
「아마 함께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한 짓일 거에요.」
「이건 너무 임박한 통고야. 오늘이라…… 우리도 가야 하나?」
「『친지분들이 오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이상을 알립니다. 이 예고를 믿으십시오』라고
되어 있어요.」
「이런 초대는 왠지 기분나쁘구나.」
「그럼 어머니는 가실 필요 없어요.」
「그래.」 부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물었다.
「에드먼드, 그 토스트를 정말 먹을 거니?」
「저 늙은이가 식탁을 치우는 일보다 저의 영양섭취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쉿! 듣겠다. 에드먼드, 살인 게임이란 도대체 어떤 거지?」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옷에 종이조각을 꽂거나 아니면 모자 속에서 제비를 뽑겠지
요. 범인과 탐정이 결정되지만 본인들 밖에는 모르지요. 그리고 전등을 끄고 누군가 어깨
를 툭 치면 악 소리 지르며 쓰러져 죽은 체하는 거지요.」
「무척 재미있겠구나.」
「아니에요, 지루할 거에요. 나는 안 가겠어요.」
「무슨 소리냐, 에드먼드? 나는 갈 테니 너도 함께 가야 해, 알았지? 결정된 거다.」
스웨트넘 부인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3)
「아치, 이것 좀 들어 보세요.」
이스터브룩 부인이 남편에게말했지만 그에게는 문제가 아니었다. 타임즈의 기사를 보고 화
가 난 것이다.
「인도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군! 아주 기본적인 것도 말이야.」
「알아요, 여보.」
「알고 있다면 이런 엉터리 같은 글을 써내지 않았을 거야.」
「그래요, 아치. 그런데 잠깐 이것 좀 들어봐요. 『살인을 예고합니다. 10월 29일』 오늘이
에요. 『금요일 오후 6시 30분 리틀 파독스에서 친지분들이 오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이
상을 알립니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읽었지만 대령은 그다지 흥미가 없는 듯했다.
「일종의 살인 놀이야.」
「어머나!」
「그것뿐이오, 여보.」
대령은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잘만 하면 재미있지만, 그러려면 잘 아는 사람이 그럴듯하게 꾸며야 돼. 먼저 제비뽑기를
해서 살인자를 정하지. 그게 누군지 아무도 모르게 말이오. 불을 끄고 살인자가 피해자를
선택하고, 피해자는 살인자에게 잡혀도 스물까지 센 다음에야 소리를 지를 수 있지. 그리
고는 탐정으로 선택된 사람이 한사람씩 심문하는 거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하
는 식으로 말이오. 그렇게 해서 범인을 찾아내는데, 꽤 재미있는 놀이지. 탐정으로 지명
된 사람이 경찰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말이오.」
「당신처럼 말이죠, 아치? 당신 관할에서는 꽤 재미있는 일도 많잖아요.」
대령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물론이야, 로라. 나라면 한두 가지 실마리를 제공할 수가 있지.」하며 대령은 어깨를 똑
바로 폈다.
「미스 블랙록도 당신의 도움을 받아야 할 거에요.」
「글세. 그녀의 집에 있는 버릇없는 젊은 녀석들이 생각해 낸 놀이일 거야. 조카라나 그런
애들 말이야. 그렇지만 신문광고까지 내다니 대단한 발상이야.」
「개인 광고난에 실렸잖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잘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마치 초대장 같지
않아요, 아치?」
「초대치고는 괴상한 방법이군.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그 초대에서 제외되었다
는 거야.」
「왜죠, 아치?」
「통지가 너무 임박했어. 알다시피 나는 바쁜 몸이잖아.」
「당신은 꼭 가야 해요. 미스 블랙록을 도와 줘야 해요. 틀림없이 그녀는 당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을 거예요. 당신은 경찰 업무를 잘 알고 계시잖아요. 당신이 없으면 모든 게 실패
로 돌아갈 거예요. 남과의 교제도 중요한 거예요.」
부인은 손질이 잘된 금발을 한쪽으로 쓸어넘기며 푸른 눈을 크게 떴다.
「로라,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가야지…….」
이스터브룩 대령은 다시 희끗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애교스런 아내의 얼굴을 기쁜 듯 바라
보았다. 부인은 대령보다 서른 살은 더 젊은 여자였다.
「저는 그것이 당신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아치.」
부인은 진지하게 말했다.

(4)
<치핑 클렉혼 가제트>는 볼더즈에 있는 미스 핀칠리피와 미스 마것로이드의 집에도 배달
된다. 세 개의 오두막을 한 지붕으로 지은 집이다.
「핀치!」
「왜, 마것로이드?」
「어디 있지?」
「닭장에.」
에미 마것로이드는 젖은 잔디를 조심스럽게 밟으며 닭장으로 갔다. 핀칠리피는 골덴 바지
와 군복 윗도리 차림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 껍질과 야채 찌꺼기 요리에 닭사료를 넣
고 있었다.
남자처럼 짧게 머리를 깎은 그녀의 얼굴에는 세파를 겪을 흔적이 나타나 있었다.
마것로이드는 통통하고 애교스런 여자로서 체크무늬 스커트와 남청색 자켓을 걸쳤으며 곱
슬거리는 잿빛 머리는 새둥지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가제트에 말이야.」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살인을 예고합니다. 10월 29일 금요일 오후 6시 30분 리
틀 파독스에서. 친지분들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 일고 나서 그녀는 친구의 반응을 기다렸다. 핀칠리피가 입을 열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소리야.」
「그렇긴 해. 하지만 무슨 뜻일까?」
「술 마시는 일이겠지 뭐.」
「그럼 초대란 말이야?」
「가보면 알게 되겠지. 구급품 세리주 정도일 거야. 잔디에서 나가는게 좋겠다, 마것로이드.
네가 신은 침실용 신발이 다 젖었잖니.」
「오, 저런!」
마것로이드는 발을 내려다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은 달걀을 몇 개나 낳았어?」
「일곱 개야. 그 암탉은 아직도 알을 품으려고 해. 이제 닭장에 넣어야겠어.」
「광고를 내다니, 재미있는 방법이잖니?」
마것로이드는 다시 가제트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광고에 대한 호기심
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강한 성격의 핀칠리피는 닭장속의 닭을 다룰 뿐 신문광고에는 전혀 관심조차 보이
지 않았다.
그녀가 진흙 땅을 질퍽거리며 들어가 얼룩덜룩한 암탉을 붙잡으려 하자 요란한 소동이 일
어났다.
「차라리 오리가 낫지. 이렇게 번거롭지는 않거든.」

(5)
「어머나, 놀랍구. 미스 블랙록 집에서 살인이 있을 예정이래요.」
허먼 부인은 아침 식탁에 마주 앉은 남편 줄리언 허먼 목사에게 말했다.
「살인이라고?」
남편은 놀라운 듯이 물었다.
「언제 말이오?」
「오늘 오후에요. 6시 30분이에요. 애석하게도 당신은 견신례 준비가 있죠? 당신, 살인 게
임을 좋아하시잖아요.」
「대체 무슨 소리요, 번치?」
얼굴이 둥글어 번치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허먼 부인은 식탁 위로 신문을 밀어 건네 주었
다.
「거기, 중고 피아노와 의치 기사 가운데에요.」
「별 희한한 광고로군.」
「그렇죠? 미스 블랙록은 살인 게임 따위에 관심갖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아마 시먼즈 남
매가 짜낸 것이 틀림없어요. 당신이 거기에 못 가신다면 제가 갔다 와서 말씀드릴께요.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겠죠. 그때 누군가 갑자기 어깨를 툭
치며 『당신은 죽는 거야』 하고 속삭이면 아마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을 것만 같아요.
그럴 것 같지 않아요?」
「아니오, 번치. 당신은 나와 함께 오래오래 살게 될 테니까.」
「같은 날에 죽어 함께 묻힌다면 정말 행복한 일이에요.」
번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꽤 기쁜 모양이구료.」
미소를 짓는 남편을 보며 허먼 부인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누군들 내 입장이 되면 기뻐하지 않겠어요? 당신과 수잔과 에드워드가 다 함께 살며 나
를 사랑해 주잖아요. 또 태양은 빛나고 이렇게 아름다운 집도 있고 말이에요.」
줄리언 허먼 목사는 낡아빠진 부엌을 둘러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휑하니 크고 바람이 들어오는 집에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할 거요.」
「하지만 저는 큰 방이 좋아요. 정원의 향기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걸요. 그리고 물건들을
어질러 놓아도 그리 거추장스럽지 않고 말이에요.」
「집안일만 번거롭고 중앙난방이 없잖소. 당신에게 너무 힘든 일일 텐데, 번치?」
「줄리언, 그렇지 않아요.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서 보일러에 불을 붙이고 집안을 스팀엔
진처럼 빙글빙글 달리죠. 그러면 8시에는 다 끝나는 걸요. 그리고 왁스로 닦고 낙엽을 쓸
며 멋지게 청소해 놓잖아요. 큰 집이라고 해서 작은 집보다 청소하기 힘든 건 아니에요.
빗자루를 들고 일하려면 여기저기 엉덩이가 부딪혀 아무 일도 못할 거에요. 그리고 저는
넓고 시원한 방에서 자는 게 좋아요. 또 크고 넓은 집이라고 해서 감자 껍질을 벗기는
일이나 설겆이 같은 것이 더 많은 것도 아니잖아요. 수잔과 에드워드가 기차놀이와 소꿉
장난을 하더라도 넓어서 좋아요. 손님들이 와도 편히 묵을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이 있다
는게 얼마나 좋아요? 지미 시메스나 조니 핀치를 보세요. 그들은 좁은 집에서 장인 장모
와 함께 살아야 하잖아요. 줄리언, 당신도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걸 원치 않을 거
에요. 저도 좋아할 수 없어요. 소녀때와 같이 살고 싶어요.」
줄리언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당신은 아직도 소녀 같은데, 번치.」
줄리언 허먼은 60살 정도로 보였으나 25년은 더 살아야 그 모습에 걸맞게 된다.
「그야 전 어리석으니까요.」
「그렇지 않아, 번치. 당신은 굉장히 머리가 좋아.」
「아니에요. 저는 조금도 지적인 데가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리고 당신이 책이며
역사나 그 밖의 이야기를 해 주실 때는 정말 좋아요. 하지만 잠자기 전에 기본(영국의
역사가)의 책을 읽어 주시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아요. 추운 곳에 있다가 아늑하고 따뜻
한 집안에서는 그런 책은 수면제나 마찬가지에요.」
줄리언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당신이 이야기해 주는 것은 좋아요. 아하스엘스에서 설교했다는 그 노목사님 이
야기를 또 들려 주세요.」
「그 이야기는 욀 정도로 많이 했잖소, 번치.」
「그래도 한번만 더 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그는 아내의 청에 따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늙은 스크림 이야기야. 어느 날 누군가 그의 교회를 들여다 보았는데, 목사는 설교단에
기댄 채 두 명의 날품팔이 아낙에게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었지. 그는 그들을 손가락으
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지. '아, 나는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소.
제 1과의 아하스엘스 대왕이 알탁셀크스 2세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틀렸소. 그는 알탁셀
크스 3세였소'라고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지.」
줄리언 허먼에겐 조금도 재미있는 얘기가 아니었으나 번치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어했다.
그녀는 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는 사람이죠? 당신도 언젠가는 그런 사람이 될 거에요.」
줄리언은 왠지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렇게 깨달은 경지에 이르지 못할 것 같소.」
번치는 일어서서 아침식사 접시를 치우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어제 배트 부인에게 들었는데, 철저한 무신론자인 그의 남편이 당신 설교
를 들으러 교회에 나간대요.」
번치는 배트 부인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말을 이었다.
「『나의 남편이 리틀 위스딜에서 온 팀킨스 씨에게 말했지요. 이 치핑 클렉혼에는 진짜
문화가 있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우리 목사님은 고등교육을 받은 신사에요. 옥스퍼드 출
신이지, 밀체스터 같은 데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분은 우리들에게 아낌없이 지식을 심어
주죠. 그리스나 로마, 또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계시죠. 목사님
집에 있는 고양이 이름까지도 앗시리아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면서요! 』 이렇게 배
트 부인이 말했어요.」
번치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끝맺었다.
「오, 빨리 끝내야겠군. 이리 온, 티글래스 필레샤(고양이 이름). 청어뼈를 줄게.」
그녀는 문을 열어 발로 고정시키고는 접시를 잔뜩 들고 날랐다. 그리고 뚜렷한 곡조도 없
이 가사를 붙인 노래를 크게 불러댔다.

오늘은 살인의 날
5월처럼 상쾌하고
탐정들은 모두 출동했다네

개수대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 때문에 다음 구절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줄리언 허먼 목
사가 집을 나설 때 자신감에 찬 노랫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모두 가세, 살인의 장소에


◎ 2장. 리틀 파독스의 아침식사 ◎

(1)
리틀 파독스에서도 아침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60살이 넘은 집주인 미스 블랙록은 테이브르이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촌스러운 트위
드 천 옷을 입고 있었고 높은 옷깃에 걸려 있는 가짜 진주 목걸이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니
었다. 그녀가 데일리 메일의 레인 노콧의 소설을 읽는 동안 줄리어 시먼즈는 그다지 흥미없
는 듯 텔레그래프를 뒤적이고 있었다.
패트릭 시먼즈는 타임즈의 크로스 워드에 열중해 있었고 미스 도라 배너는 가제트를 열심
히 보는 중이었다.
「점착성의(Adherent)야. 접착성의(Adhesive)가 아니고. 여기서 틀렸군.」
패트릭이 중얼거리고 미스 블랙록은 혼자 키득거리고 웃고 있다.
갑자기 놀란 암탉처럼 미스 배너가 소리질렀다.
「레티, 이걸 봤어? 이게 무슨 뜻이지?」
「어디 좀 봐, 도라.」
미스 배너는 블랙록이 내민 손에 신문을 건네 주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야, 레티.」
그것을 읽는 미스 블랙록의 눈썹니 치켜올라갔다. 그리고 테이블 둘레를 한번 살피더니 소
리내어 그 광고를 일기 시작했다.
「살인읠 예고합니다. 10월 29일 금요일 오후 6시 30분. 리틀 파독스에서. 친지분들이 오시
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이상을 알려드립니다.」
다 읽고 나서 그녀는 날카롭게 말했다.
「패트릭, 이거 네가 꾸민 짓이냐?」
그녀의 눈은 식탁 맞은 편에서 느긋하게 앉아 있는 젊은이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패트릭은 재빨리 부인했다.
「아닙니다, 레티 아주머니. 왜 그렇게 생각하죠? 저는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몰라요.」
「나는 또 네가 장난친 줄 알고 맨 먼저 물어봤을 뿐이야.」
「장난이라고요? 저는 그런 장난 한 적 없습니다.」
「줄리어, 너는?」
줄리어는 지겹다는 듯이 말했다.
「저도 아니에요.」
미스 배너가 중얼거렸다.
「그럼 헤임즈 부인이 아닐까.」 하며 이미 식사를 마치고 나간 헤임즈 부인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패트릭이 말했다.
「아니에요. 필리퍼는 그런 장난을 꾸밀 사람이 아니에요. 아주 얌전한 여자입니다. 안그래
요?」
「그런데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무슨 뜻인가 말이에요.」
줄리어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미스 블랙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군가 어처구니 없는 장난을 한 것 같군.」
「하지만 이유가 뭐지? 장난치고는 아주 어리석은 악취미야.」
미스 배너의 축 늘어진 볼이 떨리며 근시인 눈은 불꽃을 튀겼다.
미스 블랙록이 그녀를 보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신경쓰지 말, 배너. 누군가의 장난일 테니까. 하지만 실은 나도 누구의 짓인지 궁
금해.」
「오늘이라고 했지? 오후 6시 30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걸까?」
패트릭이 짐짓 소름끼치는 투로 내뱉었다.
「죽음이죠! 달콤한 죽음!」
「그만둬, 패트릭.」
배너가 짧게 비명을 지르자 미스 블랙록이 제지했다.
「미치가 만드는 케익을 말한 것 뿐이에요. 모두들 그 케익을 달콤한 죽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미스 블랙록은 슬며시 웃어넘겼다. 그러나 미스 배너는 끈질기게 물었다.
「레티, 정말 어떻게 생각해?」
미스 블랙록은 분위기를 바꾸며 밝게 말했다.
「6시 30분에 일어날 일이 꼭 한가지 분명한 게 있지. 마을 사람들의 절반은 호기심으로
모여들겠지. 그러니까 세리주를 준비해 두는 게 좋겠군.」

(2)
「걱정이 되는 무양이구나, 레티?」
미스 블랙록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멍하니 책상 앞에 안자 종이 위에 작은 물고기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그녀는 오랜 친구인 도라 배너의 근심스런 얼굴을 보자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배
너는 그다지 걱정도 기분도 나빠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미스 블랙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와 도라 배너는 학교때 친구였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도라는 예쁘장한 소녀였지만
그리 영리한 편은 못되었다.
그러나 명랑하고 활달한 성격 때문에 많은 친구를 끌어들였기 때문에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스 블랙록은 도라의 예쁜 모습 때문에 친구로 삼고 싶었다. 그녀는 도라가
멋진 육군 장교나 지방 변호사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다.
도라는 무척 좋은 성격을 갖고 있었다. 사랑, 헌신, 성실을 지닌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늘 성실히 일했지만 무슨 일이
든 잘되는 게 없었다.
두 사람은 오랫 동안 떨어져 살았다. 6개월 전, 미스 블랙록에게 길고 애절한 편지 한통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도라의 편지로서 그녀는 몹시 건강이 나빠졌다는 것이다. 양로연금으로
근근히 살아가며 삯바느질이라도 해 볼까 해도 류머티즘으로 손가락조차 굳어져 버렸다고
하소연해 왔다.
그녀는 여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졸업한 이후로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옛 친구가 혹
시 도움이라도 줄까 하여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미스 블랙록은 즉각 회답을 보냈다. 가엾은 도라, 연약하고 불쌍한 도라. 미스 블랙록은 도
라에게 달려가서, 집안 일이 힘겨워 누군가 도와 주었으면 하던 참이야, 하며 리틀 파독스에
서 함께 살자고 했다.
의사는 도라가 병에 침식당하고 있다고 했고 미스 블랙록은 그것을 직접 보게 되었다.
도라는 일을 저질러 놓고 도움을 청해 사람들을 당혹하세 했으며 세탁물을 망쳐 놓고, 영
수증이며 편지 등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실수 없는 미스 블랙록을 화나게 만드는
것이었다.
가엾은 도라는 늘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어했으며 진지하게 대해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은
남을 도왔다고 매우 기뻐했지만 도라야말로 남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다.
미스 블랙록이 갑자기 말했다.
「도라, 아까 내가 부탁한 거 말인데…….」
「아참, 깜빡 잊었어. 하지만 너 걱정하고 있지?」
「아니야. 걱정 같은 건 안해.」
그녀는 금방 덧붙여 말했다.
「가제트에 실린 그 엉터리 광고 때문에 내가 걱정한다는 거야?」
「응. 어쩐지 악의가 있는 장난 같아서.」
「악의?」
「그래. 말하자면 그다지 유쾌한 장난이 아니란 말이야.」
미스 블랙록은 친구를 바라보았다. 순한 눈매,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술, 살짝 들린 들창코.
가엾은 도라. 섬세하고 여린 도라는 또 이런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다. 사랑스런 도라, 그러
나 그녀에게는 사물의 가치를 본능적으로 직감하는 힘이 있다.
「도라, 그 말이 옳아. 그다지 기분좋은 장난은 아닐 거야.」
「나는 기분이 나빠. 왠지 두려워.」
도라 배너는 갑자기 열을 내며 말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레티, 너는 위협받고 있어.」
「바보 같은 소리.」
「틀림없이 위험한 일이야. 폭탄을 넣은 소포를 받는 것처럼 말이야.」
「도라, 그건 어떤 바보 같은 친구들이 단지 재미로 장난친거야.」
「하지만 재미있는 일이 못되잖아.」
사실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미스 블랙록의 얼굴에도 그러한 표정이 뚜렷이 나타났다.
그것을 본 도라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것봐.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글쎄, 도라는 참…….」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몸에 꼭 끼는 옷을 입은 풍만한 가슴을
가진 젊은 여자가 거칠게 들어왔다. 밝은 색 스커트를 입은, 검고 윤기나는 머리의 여자였
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미스 블랙록은 큰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미치, 무슨 얘기지?」
가끔 미스 블랙록은 차라리 요리며 집안일을 혼자 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
피난민 하녀는 온종일 그녀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것이다.
「간단히 말씀드리죠. 나 그만두겠어요. 지금 당장에요.」
「왜그러지? 누가 기분을 상하게 했나?」
연극을 하듯이 미치는 얘기했다.
「네, 기분이 나빠요. 나는 죽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온 유럽을 도망다녔어요. 가족은 모두
살해당했고―어머니, 남동생, 사랑스런 조카까지도―나는 도망쳐 나왔지요. 숨어 있다가
영국으로 건너와 열심히 일했지요. 제 고향에서도 할 수 없을 만큼 힘껏 일했어요. 나
는…….」
「그건 다 아는 이야기야.」
미스 블랙록이 불쑥 말했다. 그것은 이미 수차례 들은 얘기였다.
「하지만 갑자기 왜 그만두겠다는 거지?」
「그들이 또 나를 죽이려 해요.」
「누가?」
「나찌에요. 어쩌면 볼셰비키 당원일지도 모르지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죽이러 오는
거에요. 나는 그것을 읽었어요. 오늘 아침 신문에서 말이에요.」
「가제트의 광고 말이군.」
「이것 보세요. 여기 씌어 있어요.」
미치는 등뒤에 감추고 있던 가제트를 내밀었다.
「살인이라고 씌어 있잖아요? 리틀 파독스에서. 바로 여기가 아니에요? 오후 6시 30분. 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절대로!」
「어째서 이 광고가 너를 겨냥한 거라고 생각하지? 이건…… 틀림없는 장난일 거야.」
「장난이라고요?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장난인가요?」
「그렇지 않아. 만일 누군가 미치를 죽이려 한다면 왜 신문에 광고를 내겠어?」
「그렇지 않을 거라고요? 그럼 아무도 죽이지 않을 거란 말씀인가요? 어쩌면 그들이 당신
을 노릴지도 몰라요.」
미치는 떨고 있었다. 미스 블랙록은 가볍게 대꾸했다.
「누가 나를 죽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 너를 죽일 까닭이 없어, 미치」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에요. 아주 나쁜 사람들이에요.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사랑스런 조
카까지…….」
미스 블랙록은 재빨리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알았어. 하지만 나는 누군가가 미치를 죽이려 한다는 건 믿지 않아. 짤막한 광고 때문에
떠난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하지만 내 생각엔 어리석은 짓이야.」
미치가 약간 망설이는 듯하자 미스 블랙록은 급히 덧붙였다.
「점심에는 정육점에서 가져운 쇠고기로 스튜를 해먹어야겠다. 고기가 질겨 보이더라.」
「네, 특별 요리를 해 드리겠어요. 굴래시 스튜로요.」
「좋을 대로 해. 그리고 치즈 스트로를 만드는 데 굳은 치즈를 쓰도록 해. 오늘 저녁엔 술
손님이 있을 것 같아.」
「오늘 저녁이라고요? 무슨 일로요?」
「6시 30분이야.」
「신문에 났던 바로 그 시간 아니에요? 누가 무슨 일로 오는거죠?」
미스 블랙록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장례식에 오는 거지. 이제 그만 됐어, 미치. 문을 닫고 나가줘.」
미치가 문을 닫고 나가고 나자 미스 블랙록이 입을 열었다.
「이제 미치도 당분간 잠잠할 테고.」
「정말 레티는 능숙해.」
미스 배너는 감탄을 했다


◎ 3장. 금요일 오후 6시 30분 ◎

(1)
「자, 이 정도면 준비는 다 됐군.」
미스 블랙록은 두 칸으로 연결된 거실을 살피듯 둘러보았다. 장미 무늬의 면수건, 국화 모
양의 청동 화분 두 개, 제비꽃이 꽂힌 꽃병, 은제 담배 케이스, 가운데 테이블에는 술병이
얹힌 쟁반.
리틀 파독스는 초기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 방식으로 세워진 보통 크기의 주택이었다. 좁고
길다란 베란다와 녹색 덧문이 달려 있었다.
베란다 지붕에 가려진 어두운 마름모꼴 응접실은 한쪽 끝에 이중문이 있어 들창이 달린 작
은 방과 통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조 때 이중문을 떼어 버리고 벨벳 커튼을 달아 놓았다.
그 뒤 미스 블랙록은 그 커튼을 떼어내고 두 방을 완전히 연결시켜 놓았다. 두 방의 양쪽
에는 난로가 있었지만 둘다 불을 피우지 않았다.
패트릭이 말했다.
「중앙난방을 했군요.」
미스 블랙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안개가 끼고 날씨가 습해서 집안이 눅눅해서 말이다. 그래서 에번즈에게 스팀을 넣
으라고 했지.」
패트릭이 농담조로 말했다.
「그 비싼 코크스로 말이에요?」
「그래. 코크스는 정말 비싸. 하지만 그보다 석탄은 더 비싼걸. 너도 알다시피 연료국에서
제대로 배급을 줘야 말이지. 잠자코 있으면 끼니도 못 끓여먹는 게 아니냐.」
줄리어가 낯선 얘기를 듣는 것처럼 물었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석탄이며 코크스가 잔뜩 쌓여 있었지요?」
「그랬지. 그땐 값도 무척 쌌지.」
「그리고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었어요. 미리 사두지 않아도 언제든지 상점에 가면 살 수
있었고요.」
「종류도 많았고 질도 좋았지. 요즘처럼 돌덩이와 슬레이트 따위가 아니었지.」
「참 좋은 때였군요.」
줄리어는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 블랙록은 미소지었다.
「그땐 일을 할 필요도 없었겠군요. 그저 꽃을 가꾸고 편지를 쓰고…… 왜 사람들은 편지
를 썼을까요? 누구에게 보내려고요?」
미스 블랙록은 장난스레 말했다.
「너는 전화를 하잖니. 예전에는 전화 대신 편지를 한 거란다. 너는 편지를 쓸 줄 아느냐,
줄리어?」
「편지교본처럼 멋지게는 쓸 줄 몰라요. 그 책에는 청혼 받았을 때 거절하는 방법까지 나
와 있어요.」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네 생각대로 집에서 태평스럽게 즐길 수만은 없잖니. 모두들 일해야 하지. 요즘엔 잘 모
르겠다만 배너와 나는 일찍부터 일을 시작했지.」
그녀가 도라 배너에게 애정어린 미소를 보내자 도라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암, 그랬었지. 좀처럼 잊지 못할 거야. 레티는 총명해서 큰 사업가의 비서로 일했지.」
그때 문이 열리고 필리퍼 헤임즈가 들어왔다. 키가 크고 차분한 여자였다. 그녀는 놀란 듯
방안을 둘러보았다.
「파티가 있나보죠? 전 듣지 못했는데요.」
패트릭이 소리쳤다.
「물론 듣지 못했을 거예요. 치핑 클렉혼에서 모르는 사람은 아마 당신뿐일 겁니다.」
필리퍼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패트릭이 계속 말했다.
「지금 당신이 볼 장면은 살인 장면입니다.」
필리퍼는 어리둥절했고 패트릭은 두 개의 큰 국화 화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장례식 화환입니다. 저쪽의 치즈와 올리브 접시는 장례식의 구운 고기이죠.」
필리퍼는 의문스런 눈길을 미스 블랙록에게 돌렸다.
「농담하는거죠? 난 농담을 잘 알아 듣지 못한답니다.」
도라 배너가 정색하고 말했다.
「기분나쁜 농담이야. 난 그런 농담은 정말 질색이야.」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필리퍼에게 광고를 보여 줘. 나는 오리들을 우리 속에 넣어야겠어. 지금쯤 우리로 돌아왔
을 거야.」
「내가 할께요.」하고 필리퍼가 얼른 받았다.
「아니야. 할 일을 다 끝냈으니까.」
패트릭이 나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다. 전번 날 너는 빗장도 걸지 않았더구나.」
미스 블랙록이 단호히 말하자 미스 배너가 얼른 나섰다.
「레티, 내가 하겠어. 진심으로 하고 싶어서야. 덧신을 신어야겠군. 그리고 스웨터를 어디에
두었더라?」
그러나 미스 블랙록은 웃으며 방을 나갔다.
「괜찮습니다, 배너 아주머니. 레티 아주머니는 다른 사람이 일해 주는 게 성에 안 차나 봐
요. 뭐든지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시죠.」
패트릭의 말에 줄리어가 맞장구쳤다.
「정말 그래요. 좋아서 하시는 일이에요.」
「너는 지금 네가 하겠다고 한마디라도 해봤니?」
「오빠가 방금 말했잖아. 레티 아주머니는 뭐든지 직접 하신다고. 그리고…….」
줄리어는 날씬한 다리를 뻗으며 말을 이었다.
「난 가장 아끼는 스타킹을 신었거든.」
패트릭이 소리쳤다.
「실크 스타킹의 시체!」
「실크가 아니라 나일론이야.」
「나일론 스타킹의 시체라…… 별로 흥미롭지 못하군.」
필리퍼가 호소하듯 소리쳤다.
「왜들 온통 죽음에 관한 말만 하고 있지?」
그 자리의 사람들은 그 까닭을 말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가제트를 찾을 수 없었다. 미치가
부엌으로 가져간 것이다.
잠시 후에 미스 블랙록이 돌아왔다.
「자, 이제 됐어.」
그러고는 흘깃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6시 20분. 이제 곧 올 시간이야. 이웃 사람들에 대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말이
야.」
필리퍼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도대체 누가 온다는 거죠?」
「아직 모르고 있나요? 하긴 모르는게 당연하지.」
줄리어가 심드렁하게 내뱉았다.
「필리퍼는 인생에 전혀 흥미가 없군요.」
필리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미스 블랙록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 한가운데의 테이블 위에는 조금 전 미치가 갖다 놓
은 세리주와 올리브, 치즈 그리고 파이를 담은 그릇이 세 개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을 저쪽 들창 쪽으로 옮겨 놓는 게 좋겠구나. 패트릭, 그렇게 해 주겠니? 파티를
여는 게 아니지. 아무도 초대한 것도 아닌데 내가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인상은
주기 싫으니까.」
「레티 아주머니는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감추고 싶은 거죠?」
「그렇다, 패트릭.」
줄리어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조용한 저녁 한때의 화목한 분위기를 연출해야겠군요. 그리고 누군가 찾아왔을
때 깜짝 놀라기만 하면 되고요.」
미스 블랙록은 세리주를 든 채 어딘지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패트릭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반 병 정도 남아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할 거예요.」
「그래…… 패트릭, 찬장 안에 따지 않은 병이 잇는데 좀 가져다 주겠니? 아무래도 새 것
을 갖다 놓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이건 마시다 남은 거라서…….」
패트릭은 잠자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새 병을 가져와 마개를 땄다. 그것을 쟁반 위에
올려놓은 뒤 그는 미스 블랙록을 바라보았다.
「무척 꼼꼼하시군요, 레티 아주머니.」
도라 배너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레티,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
「쉿!」
미스 블랙록이 급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
「벨이 울렸어. 이제 내 말이 들어맞을 거야.」

(2)
미치가 거실 문을 열자 이스터브룩 대령 부부가 들어섰다. 그녀는 특유의 kafxn로 방문객
을 알렸다.
「이스터브룩 대령 내외분께서 오셨습니다.」
이스터브룩 대령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내심 당혹감을 숨기고 있었다.
「폐가 되지 않을는지요. 이 부근을 지나는 길에…….」
줄리어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음, 참 조용한 저녁입니다. 벌써 스팀을 넣었군요. 우리는 아직 안 넣었습니다만.」
그러자 대령 부인이 말했다.
「어머나, 국화 무늬 청동그릇이 정말 멋지군요.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까!」
「실은 신통찮은 거예요.」
줄리어가 말했다.
이스터브룩 부인은 정중히 필리퍼 헤임즈에게 인사하며, 그가 농사꾼이 아니라는 것을 알
고 있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루커스 부인의 정원은 어떻게 되어 가죠? 다시 본래대로 될 수 있을까요? 전쟁중에 완
전히 황폐해졌는데…… 그때 애쉬 노인이 이따금 풀을 뽑고 야채를 몇 포기 심긴 했었지
요.」
「손질만 잘하면 회복될 거예요. 금방은 안 되겠지만.」
미치가 또다시 문을 열고 알렸다.
「볼더즈에서 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미스 핀칠리피가 인사하며 불쑥 들어오더니 미스 블랙록의 손을 석 잡았다.
「내가 마것로이드에게 리틀 파독스에 잠깐 들러보자고 했어요. 오리들이 어떻게 되어 가
는지 궁금했거든요.」
마것로이드가 갑자기 수선스럽게 말했다.
「저 국화 무늬 좀 봐!」
「엉터리예요.」
줄리어가 내뱉었다.
「넌 왜 자꾸 비뚤게만 말하지?」
패트릭이 줄리어에게 다가가 낮게 말했다.
미스 핀칠리피가 별로 좋지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스팀을 넣었군요.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이맘때면 어찌나 습기가 심한지 말이에요.」
미스 블랙록이 받았다.
패트릭이 세리주를 내와도 되겠느냐고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미스 블랙록은 좀더 기다려,
라고 눈짓했다.
미스 블랙록은 이스터브룩 대령에게 말을 건넸다.
「올해도 네덜란드에서 수슨을 가져오셨나요?」
그때 문이 열리고 스웨트넘 부인이 머쓱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그녀의 아들 에드
먼드가 시큰둥한 채 따라 들어왔다.
「안녕들 하세요?」
스웨트넘 부인은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거북살스런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혹시 새끼 고양이를 기르고 싶으시다면 드릴까 하고요. 미스 블랙록, 우리집 고양이
가…….」
에드먼드가 뒷말을 이었다.
「새끼를 낳게 되었습니다. 어미는 갈색인데 보나마나 새끼는 신통치 않을 것입니다만…
….」
부인은 당혹해 하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어미는 아주 예쁘답니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말을 덧붙였다.
「어머, 예쁜 국화꽃 좀 봐!」
에드먼드가 물었다.
「벌써 스팀을 넣으셨군요?」
줄리어가 중얼거렸다.
「마치 똑같은 레코드를 듣는 것 같군.」
이스터브룩 대령은 패트릭을 붙잡고 무슨 얘긴가 떠벌이고 있었다.
「나는 뉴스를 싫어하지. 전쟁은 불가피해. 절대로 불가피한거지.」
「난 뉴스 같은 것엔 관심이 없습니다.」
또다시 문이 열리고 허먼 부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낡은 모자를 뒤로 젖혀 쓰고 유행에 맞
추려고 한껏 애를 쓴 듯한 차림이었다. 그녀는 보통때 늘 입던 외투가 아닌 하늘하늘한 블
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미스 블랙록? 베가 늦진 않았죠? 살인 게임은 언제 시작하죠?」
그녀는 환하게 웃어 보이며 큰소리로 인사했다.

(3)
그녀는 몹시 심하게 숨을 헐떡거렸다. 줄리어는 작게 키득거렸고 패트릭은 고개를 치켜들
었고 미스 블랙록은 마지막 손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먼 부인이 말했다.
「줄리어은 못 오게 되어 몹시 서운해 했어요. 그이는 살인 게임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지
난 주일에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문이죠. 남편의 설교를 칭찬한다는 건
좀 멋적은 노릇이지만 정말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문이죠. 남편의 설교
를 칭찬한다는 건 좀 멋적은 노릇이지만 정말 훌륭한 설교였잖아요? 평소 때보다 훨씬
좋았어요. 그건 ≪모자 살인사건≫을 읽었기 때문이에요. 그 책을 읽어 보셨나요? 푸트의
서점 여점원이 제게 특별히 갖다주었어요. 어찌나 재미있는지, 정신없이 읽다 보면 모든
게 뒤바뀌고 굉장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죠. 결국 4,5명이 살해당하죠. 그 책을 서재에 두
었는데 남편이 설교문을 생각하려고 서재에 들어갔다가 그걸 읽었지 뭐예요. 그리고는
시간에 쫓기며 설교문을 작성했죠. 자연히 학술적 논문이나 인용구를 안 쓰게 되자 썩
잘된 문장이 되었던 거예요. 어머, 내가 너무 많이 떠들었군요. 살인 게임은 언제 시작하
나요?」
미스 블랙록은 벽난로 위에 놓인 시계를 흘깃 보았다.
「6시 30분에 시작된다면 1분 남았습니다. 곧 시작될 테니 그 동안 세리주나 드세요.」
패트릭은 재빨리 입구로 향했고 미스 블랙록은 담배 상자가 놓인 테이블로 다가갔다.
「저는 세리주를 좋아하죠. 그런데 『시작된다면』이라는 건 무슨 뜻이죠?」
허먼 부인의 물음에 미스 블랙록이 대답했다.
「글쎄요. 나도 여러분처럼 아무것도 모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때 시계가 울리자 미스 블랙록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시계소리는 맑은
곡조처럼 울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며 일제히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의 마지막 여운까지 사라져 버리자 갑자기 방안의 전등이 모두 꺼지고 어둠에 잠겨 버
렸다.
(4)
어둠 속에서 가쁜 숨소리와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시작되었군.」
허먼 부인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렸다.
「오, 난 이런 건 질색이야!」
도라 배너의 비명소리도 들렸다.
「끔찍해!」
「섬뜩하군요.」
「아치, 어디 있어요?」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머, 제가 발을 밟았죠? 미안해요.」
여러 목소리들이 한데 뒤섞여 들려왔다.
그때 요란스럽게 문이 열렸다. 그리고 강한 회중전등 불빛이 방안을 홱 스쳤다. 콧소리가
섞일 사내의 목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손들어! 어서!」
그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고 사람들은 재미있어하며 머리위로 손을 올렸다.
「재미있는데요.」
「스릴 있어!」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때 두 발의 총성이 났다. 그 소리는 방안의 분위기를 단박에 깨어 버렸다. 이제 그것은
게임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비명소리…….
문 앞에 있던 사람은 갑자기 방안을 돌며 망설이는 눈치더니 세 번째 방아쇠를 당기고 쿵
쓰러졌다. 회중전등은 바닥에 떨어지고 불이 꺼졌다.
또다시 방안은 캄캄해졌다. 거실문은 잘 열려지지 않는 빅토리아 왕조식 구조였는데 조용
히 찰칵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5)
거실 안은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외치기 시작했다.
「전기 스위치를 켜요.」
「누구 라이터 가진 분 없어요?」
「오, 끔찍해라.」
「그 총소리는 진짜였어.」
「도둑일까?」
「아치, 난 돌아가야겠어요.」
「누구 라이터 가진 분 안 계세요?」
그제야 두 개의 라이터가 거의 동시에 찰칵 소리를 내며 불빛이 타올랐다.
사람들은 눈을 깜박이며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 얼굴에나 놀란 표정을 떠올리고 있
었다.
미스 블랙록은 얼굴을 손으로 감싼 채 입구 쪽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불빛이 희미했지
만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거무스름한 액체가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스터브룩 대령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재빠르게 소리쳤다.
「스위치를 켜 보게, 에드먼드」
문 곁에 있던 에드먼드가 스위치를 올렸다.
「전구나 퓨즈가 끊어진 모양이군.」
대령이 이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누가 또 끔찍한 소란을 피우고 있는 거지?」
닫혀진 문 안쪽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더 한층 높아졌다. 그리고 이어 주먹으
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도라 배너가 소리쳤다.
「미치야! 누가 미치를 죽이고 있어요!」
패트릭이 중얼거렸다.
「설마 그럴 리가…….」
「촛불을 켜야겠다, 패트릭.」
미스 블랙록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령이 문을 열었다. 그와 에드먼드는 라이터를 켜들고
홀로 들어섰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바닥에 가로놓여 있는 물체에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다.
「총을 맞은 것 같은데. 그런데 비명을 지르던 여자는 어디에 있지?」
대령의 말에 이어 에드먼드가 대답했다.
「식당입니다.」
식당은 홀을 가로질러 있었다. 그쪽에서 누군가 벽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그녀가 안에 있는 모양이에요.」
에드먼드가 열쇠를 돌리자 미치가 뛰어나왔다.
식당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미치는 미친 듯이 계속 비명을 질러 댔다. 그녀는 은
그릇을 닦고 있었던지 한손에는 세무 가죽과 다른 손에는 큼직한 그릇을 들고 있는 폼이
너무나도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조용히 해, 미치!」
「그만해요.」
에드먼드도 말했지만 미치는 계속 비명을 질러 댔다. 그러자 에드먼드가 몸을 내밀며 그
녀의 뺨을 때렸다. 미치는 입을 꾹 다물고 재채기를 하더니 그제야 조용해졌다.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부엌 선반에서 초를 가져와라, 패트릭. 그리고 두꺼비집이 어디 있는지 알지?」
「개수대 뒤에 있을 거예요. 제가 찾아 보지요.」
미스 블랙록은 불빛이 새어나오는 식당 쪽으로 다가갔다. 도라 배너는 울음을 터뜨렸고
미치는 또다시 비명을 질러 댔다.
「피.. 피에요! 미스 블랙록, 피가 잔뜩 흘러요. 죽을지도 몰라요.」
「바보같이 굴지 마. 별로 다치지 않았어. 귀를 살짝 스쳤을 뿐이야.」
줄리어가 나섰다.
「하지만 레티 아주머니, 피가 흐르잖아요.」
정말 미스 블랙록의 흰 블라우스아 진주 목걸이, 그리고 손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미스 블랙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귀에서 피가 곧잘 나지. 내가 어렸을 때 미장원에서 미용사가 가위로 내 귀를 스치는
바람에 피가 잔뜩 나왔어. 그보다 빨리 양초를 찾아야 해.」
「제게 초가 있어요.」
미치가 말했다.
줄리어는 미치와 함께 나갔다가 접시에 초를 세워서 들고 왔다.
대령이 나섰다.
「자, 범인을 봐야겠군. 촛불을 아래로 비춰 주게, 에드먼드. 가능하면 촛불이 더 있었으면
좋겠군.」
「내가 다른 쪽을 비출께요.」
필리퍼가 말하고는 두 개의 촛불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이스터브룩 대령은 몸을 쭈그려 앉으며 사렸다. 쓰러져 있는 사람은 거친 옷감의 검정 외
투를 입고 얼굴에는 검정 마스크, 손에는 검정 면장갑을 끼고 있었다 마스크가 벗겨져 금
발의 고수머리와 흰 피부가 드러났다.
대령은 사내의 맥박을 짚고 심장의 박동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움찔하여 손
을 오므렸다. 손에는 끈적하게 피가 묻어 있었다.
「제 손으로 쏘았군.」
대령이 중얼거렸다.
「중상인가요?」
미스 블랙록이 물었다.
「흠, 죽은 것 같습니다…… 자살일 수도 있고, 아니면 넘어지는 바람에 총이 발사되었을
지도 모르죠. 좀더 잘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바로 그때 마술처럼 전등이 켜졌다.
치핑 클렉혼 사람들은 리틀 파독스의 홀에서 갑작스런 살인을 목격하고 야릇한 기분에 휩
싸여 있었다.
대령의 손은 피투성이였고 미스 블랙록의 귀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은 여전히 그녀의 블라
우스와 스커트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발밑에는 사지를 쭉 벌린 채 시
체가 누워 있는 것이다.
식당에서 나온 패트릭이 말했다.
「퓨즈가 한 개 끊어진 것 같아요.」
대령은 검정 마스크를 벗겨냈다.
「누군지 봅시다. 아는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가 마스크를 벗겨내자 사람들은 목을 길게 빼고 보려고 했다. 미치의 재채기 소리만 들
릴 뿐 혼 안은 조용했다.
허먼 부인이 동정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젊은 사람이군요.」
갑자기 도라 배너가 흥분하여 소리쳤다.
「레티, 레티. 메디넘 수퍼 호텔 사람이야. 언젠가 여기에 와서 스위스로 돌아가고 싶으니
돈을 빌려달라고 성가시게 굴던 사람 있잖아. 그때 레티가 거절했잖아. 그게 모두 구실
이었던가봐. 이 집을 살피러 왔던 거야. 오, 레티― 하마터면 네가 살해될 뻔했어.」
미스 블랙록은 상황을 알아차리고 냉정하게 말했다.
「필리퍼, 식당으로 가서 배너에게 브랜디 한잔을 주도록 해. 그리고 줄리어, 욕실에 가서
벽장에 있는 반창고를 좀 갖다 주렴. 돼지처럼 피가 지저분하구나. 패트릭, 너는 경찰에
신고전화를 좀 걸어 주겠니??


◎ 4장. 로열 호텔 ◎

(1)
미들셔 경찰서장 조지 라이스델은 조용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굵
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에 중간 키를 가졌고, 지껄이는 것보다 주로 듣는
편이었다.
그가 명료한 지시를 내리면 그 명령은 곧 이행되었다.
그는 더모트 클래독 강감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클래독은 그 사건을 맡은
수사관으로서 라이스델은 그를 신뢰하고 있는 터였다. 그는 리버풀에 가 있
었는데 전날 밤 서장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되돌아온 것이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고, 무엇보다도 높이 살 만한 장점은 어떤 사건이
라도 치밀하게 조사하고 끝까지 자제력을 지킨다는 것이다.
클래독이 경위를 설명했다.
「레그 경관이 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신속하고 침착하게 처리한 것 같습
니다. 그런데 사건은 그리 쉽지 않은 듯합니다. 열두 명이나 되는 사람들
이 한꺼번에 지껄여 댔고 그 중에는 경관만 보면 흥분하는 여자가 있었
답니다. 그녀는 방에 갇히는 바람에 비명을 질러 댔답니다.」
「사망자의 신원은 확인되었나?」
「네. 루이 셔트라는 청년으로 스위스 국적입니다. 메디넘 웰즈의 로얄 슈
퍼 호텔 종업원으로 있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그 호텔에 가서 조사한
뒤, 치핑 클렉혼으로 가보았으면 합니다. 플레쳐 형사부장이 조금 전 그
리로 떠났습니다.」
라이스델은 응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이 열렸고 서장은 그쪽을 향해 말했다.
「어서 오게, 헨리. 좀 색다른 사건이 일어났네.」
헨리 클리더링 경은 전 런던 경시청의 경찰국장으로서 키가 크고 특출난
용모에 나이는 지긋한 사람이었다.
라이스델은 말을 이었다.
「자넨 여러 사건들을 신물이 나도록 다루어 봤겠지만 이번 사건만은 좀
재미가 있을 걸세.」
헨리 클리더링 경은 화난 듯이 대꾸했다.
「난 그런 적은 없네.」
「살인을 미리 예고했다는군. 헨리 경에게 그 신문 광고를 보여 주게, 클래
독.」
헨리 경이 중얼거렸다.
「노스 베넘 뉴스 앤드 치핑 클렉혼 가제트라. 대단히 긴 이름이군.」
그는 클래독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광고문을 읽어내려 갔다.
「흠, 좀 다르긴 하군.」
라이스델이 물었다.
「그 광고를 누가 냈는지 알아냈나?」
「신문사 기록에 의하면 루디 셔트가 직접 접수시켰답니다. 지난 수요일에
요.」
「광고를 접수한 사람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상하지 않
느냐 말이야.」
「담당자는 비대한 금발 여자였는데 그런 생각까지 할 인물이 못됩니다. 단
지 기계적으로 수만 세고 돈을 받았을 뿐이죠.」
「왜 그런 광고를 낸 걸까?」
헨리 경이 물었다.
라이스델이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마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잔뜩 끌어 그들을 일정한 시간, 일정한 장소에
모이게 한 뒤 그들을 위협하여 돈과 보석을 털려고 했겠지. 꽤나 독특한
방법 아닌가?」
「치핑 클렉혼이란 어떤 곳인가?」
헨리 경이 물었다.
「넓고 그림 같은 마을이지. 정육점, 빵집, 식료품점, 제법 근사한 골동품점,
게다가 찻집이 두 곳이 있지. 분명 아름다운 곳이야. 여행객들은 그곳에
서 식료품을 사고 주택도 고급이지. 전에 농부들의 집도 개조되어 나이든
독신여성이나 정년퇴직한 노부부들이 살고 있네. 빅토리아 왕조풍의 건물
도 꽤 있고 말이네.」
「그런가. 우아한 노처녀와 퇴역 장교들이 산단 말이군. 만일 그들이 그 광
고를 보았다면 6시 30분에 궁금히 여기며 모여들거야. 그곳에 내가 아는
여자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가 이 사건에서 실력을 발휘해 줄 텐
데.」
「누군가, 그 여자란? 자네 아주머니 말인가?」
헨리 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전혀 친척이 아냐. 그녀는 타고난 탐정일세. 게다가 좋은 환경에서
자란 분이거든.」
헨리 경은 이번에는 클래독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는 이 마을의 노처녀들을 경멸하지 말게. 만일 이번 사건이 복잡해진
다면, 정원 가꾸는 일과 뜨개질을 좋아하는 노처녀를 기억하게. 그녀는
정말 훌륭한 탐정일세. 사건은 이렇게 발생했을 것이고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가를 밝혀줄 걸세. 그리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까
지 말이네.」
「네,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클래독은 헨리 경으로부터 세례명까지 받은 친숙한 사이지만 겉으로는 전
혀 내색하지 않았다.
라이스델이 헨리 경에게 사건의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6시 30분에 모였다 하면, 그렇지만 그 스위스 청년이 다들 모였을 거라고
확신했을까? 또 한가지, 모인 사람들이 값진 물건을 지녔을까 하는 걸
세.」
「구식 브로치 두 개, 모조 진주 목걸이 하나―돈이라야 지폐 한두 장―정
도이겠지.」
헨리 경은 깊이 생각하듯이 물었다.
「미스 블랙록은 돈을 많이 집에 두고 있었는가?」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5파운드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닭 모이 값밖에 안 되는군.」
헨리 경이 중얼거렸다.
「그 청년이 연극을 꾸미려고 했던 게로군. 진짜 강도가 아니라 단지 돈을
강탈하는 연극을 해 보려고 했겠지. 영화에서처럼 말일세.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그런데 왜 자신을 쏘아 버린 걸까.」
라이스델이 그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 주었다.
「검시 보고서로군. 총알은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되어져―옷이 탔으며……
음…… 사고인지 자살인지 확인할 단서는 없군. 예정된 자살일 수도 있
고, 무엇에 걸려 넘어지면서 오발될 수도 있겠군. 아마 후자가 더 가능성
이 크지…….」
헨리 경은 클래독을 쳐다보며 말했다.
「먼저 목격자들은 신중히 심문해 보고 그들이 본 것을 정확히 진술하도록
하게.」
클래독 경감은 우울하게 말했다.
「그들은 보나마나 다른 의견들을 말할 겁니다.」
「그것이 재미있는 걸세. 잔뜩 긴장해 있을 때 사람들이 저마다 목격한 것
말이네. 실제로 본 것보다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이 더 흥미로운 것이지.」
라이스델 소장이 물었다.
「권총은 무슨 형이지?」
「외제입니다―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이지요―셔트는 총기 소지 면
허증도 없고, 영국으로 가져왔다는 신고도 없었습니다.」
「골치아픈 녀석이로군. 어느 모로 보나 문제가 있는 녀석이야. 클래독, 로
열 슈퍼 호텔에 가서 녀석의 신원을 조사해 주게.」
헨리 경이 흥미롭게 말했다.

(2)
로열 슈퍼 호텔에 도착한 클래독 경감은 곧 지배인 사무실로 갔다.
지배인 롤랜드슨은 키가 크고 혈색이 좋은 친절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놀랐습니
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더군요. 셔트는 극히 평범한 사람이었거든요. 인상
좋은 청년이었죠―그가 강도짓을 하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에 그가 얼마나 근무했습니까, 롤랜드슨씨?」
「경감님 오시기 전에 알아봤더니, 석 달 조금 넘었더군요. 훌륭한 소개장
도 갖고 있었고 입국 허가증도 있었습니다.」
「일하는 건 마음에 들었습니까?」
클래독은 지배인의 얼굴에 약간 망설이는 듯한 기미를 보았다.
「아주 잘했습니다.」
클래독은 이전에 써오던 방법 중 효과적던 것을 써보았다.
「아뇨,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롤랜드슨 씨. 사실은 그렇지 않았죠?」
지배인은 약간 당황하는 듯했다.
「글쎄요, 저…….」
「말해 보시오. 뭔가 있었지요? 그것이 뭡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뭔가 잘못된 점이 있다고 느낀 적은 있었겠지요?」
「글쎄…… 그래요, 있었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내 생각이 기록되
어 난처한 입장을 당하는 걸 원치 않습니다.」
클래독은 미소지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단지 셔트가 어떤 인물인가
를 알아내야 합니다. 당신이 의심하고 있는 점을 말씀해 주십시오.」
롤랜드슨은 마지못해 얘기했다.
「한두 번, 지불 계산서에 문제가 있었지요. 있지도 않는 항목이 적혀 있었
거든요.」
「말하자면 호텔의 계산에는 없는 항목을 청구서에 써넣고 손님이 지불한
차액을 슬쩍했다는 말입니까?」
「대충 그런 일이지요. 그러나 그가 부주의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한번
은 굉장히 큰 품목을 적어 넣었더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나는 그의
장부를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속임수를 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요. 하지만 실수가 많고 꼼꼼하지는 못해도 실제 액수는 꼭 들어맞더군
요. 그래서 내가 잘못 생각한 거라고 단정지었죠.」
「하지만 당신은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속임수를 써서
돈을 빼어 쓰고는 다시 보충하여 메우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네, 그가 돈을 갖고 있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경감님 말씀처럼 돈을 빼
어 쓰는 사람은 대개 돈이 궁할 테니 남아 있겠습니까?」
「만일 그가 돈을 채워 넣으려면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구하려 했겠지요.
강도짓을 해서라도 말입니다.」
「그런 모양이군요. 하지만 처음으로 한 짓이겠지요.」
「맞습니다. 수법이 매우 서투르니까요. 그가 돈을 얻을 만한 사람이 없었
는지요? 사귀는 여자는 있었나요?」
「그릴의 웨이트레스인 마너 해리스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와 얘기해 보는 게 좋겠군요.」

(3)
마너 해리스는 윤기나는 빨강 머리에 오똑한 코를 가진 예쁜 아가씨였다.
그녀는 몹시 놀라며 경계의 기색을 풀지 않으며 경관에게 심문받는 걸 심
한 모욕으로 여기는 듯 했다.
「난 그런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그가 그런 사람이란 걸 알았다면 만
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 호텔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지요. 그 호텔은 사람을 고용할 때 여간 신중한 게 아니거든요. 특히
외국인은요. 그가 나쁜 범죄 조직에 끌려들어 갔을 거라고 생각해요.」
클래독이 말했다.
「우리는 그가 혼자 저질렀다고 생각합니다.」
「천만에요, 그는 침착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거예
요. 물건이 몇 가지 없어진 적은 있어요. 지금 생각났는데, 다이아몬드 브
로치 한 개와 작은 금으로 된 장신구였어요. 하지만 그것이 루디의 짓이
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랬겠죠. 당신은 그와 아주 가까웠습니까?」
「글쎄요, 잘 알고 지냈다고 말해도 될지…….」
「친구였겠지요?」
「체, 그래요. 친구였어요. 그뿐이에요. 절대 깊은 사이는 아니에요. 전 언제
나 외국인들에게는 마음을 놓지 않거든요. 그들이 가끔 제멋대로 하는 걸
봤거든요. 전쟁 중의 폴란드인들 가운데도 있겠고요. 기혼자인 것을 숨기
고 여급사를 건드려 놓았죠. 루디도 과장해서 얘개했지만 저는 그것을 곧
이듣지 않았죠.」
클래독이 얼른 말을 끌러냈다.
「과장했다고요? 그것 참 재미있군요. 해리스 양, 그가 뭐라고 과장하던가
요?」
「뭐, 스위스의 집이 굉장히 부자라느니, 명문이라느니 하는 거죠. 하지만
그는 늘 쪼들리는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그는 돈을 마음대로 가져올 수
없다고 했어요. 그의 물건들은 싸구려였고 고급품은 하나도 없었어요. 또
그의 얘기는 허풍이 많았지요. 알프스에 오른 얘기며, 빙하의 깨진 틈으
로 사람을 구해 준 얘기 말이에요. 그는 단지 볼더 계곡 가장자리에나 가
보았을 거예요.」
「아가씬 그와 데이트를 여러 번 했습니까?」
「네, 그래요. 자주 데이트했었죠. 그는 아주 예의바른 사람이었고 여자에
대한 에티켓도 알고 있었어요. 극장에서는 언제나 좋은 좌석에 앉혀 주고
어떤 때는 꽃다발을 사다 주기도 했어요. 춤도 썩 잘 추었어요.」
「혹시 그가 당신께 미스 블랙록 얘기를 하지 않던가요?」
「가끔 이곳에서 점심을 드시는 분 말이지요? 한번은 여기서 묵은 적도 있
었지요. 하지만 루디한테서 얘기들은 적은 없어요. 그가 그녀와 아는 사
이인 줄은 몰랐어요.」
「치핑 클렉혼에 대한 얘기는 못 들었나요?」
클래독은 마너 해리스의 눈에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고 생각했으나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들은 적이 없어요…… 한번 버스에 대해서, 몇 시에 출발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지만요. 하지만 치핑 클렉혼인지 다른 곳인지 기억나지 않아요.
꽤 오래된 일이라서요.」
그녀로부터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었다 그녀 말에 의하면 루디 셔트는 평
범한 남자였다.
마너 해리스는 사건이 일어난 당일 밤에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 그녀는 루
디 셔트가 근본적으로는 절대로 나쁜 사람이 아닐거라고 거듭 강조했다.
클래독은 아마 그 말이 사실일 거라고 생각했다.


◎ 5장. 미스 블랙록과 미스 배너 ◎

리틀 파독스는 클래독 경감이 상상한 그대로였다. 오리며 닭들이 여기저기
서 돌아다니고, 바로 얼마 전까지 아름다운 초록으로 빛났을 정원에는 국화
꽃이 몇 그루 피어 있었다. 잔디와 오솔길은 손질되지 않은 채였다.
클래독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정원을 가꾸는데 그리 돈을 들
이지 않는 모양이군. 꽃은 좋아하지만 훌륭한 꽃밭을 가꿀 안목은 없는 듯하
고, 집에 칠을 새로 해야 하겠는걸. 하긴 요즘은 어느 집이나 칠을 새로 할
시기지만. 재산은 웬만큼 있는 모양이군』
클래독의 차가 현관 앞에 멈추자 집 옆쪽에서 플레쳐 형사부장이 돌아나왔
다. 그는 군인처럼 차렷자세로 선 채 「네.」하는 한마디에도 여러 가지 뜻
을 포함시키는 타입이였다.
「어이, 플레쳐!」
「네.」
「무슨 새로운 거라도 있던가?」
「지금 집을 한바퀴 살펴보았습니다. 셔트의 지문은 한군데도 남아 있질 않
습니다. 장갑을 끼고 있었겠지요. 문이나 창에도 억지로 침입한 흔적은
없습니다. 그는 메디넘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에는 6시에 도착한 듯합니
다. 이 집의 옆문을 5시 30분에 잠갔다고 하니까 그는 현관문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미스 블랙록은 현관문은 잠잘 때만 잠근다고 하는데 하녀
말로는 오후 내내 잠가둔답니다. 하지만 하녀의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
다. 어찌나 성격이 거친지…….」
「다루기 힘든 모양이군?」
「네, 그렇습니다.」
플레쳐가 강하게 힘주어 대답하자 클래독은 미소를 지었다. 플레쳐가 보고
를 계속 했다.
「집안의 전기 배선은 이상이 없습니다. 어떻게 조작했는지 모르지만 회로
가 한 개 끊어져 있었지요. 거실과 홀을 잇는 선이죠. 하긴 요즘은 거실
의 벽 전등과 홀 중앙의 전등이 연결된 곳은 없는데 이 집은 구식으로
설비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두꺼비집을 건드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을 만지려면 부엌의 개수대 옆까지 가야 했고 그러면 하녀에게
들키게 되거든요.」
「하녀와 공모했다면?」
「그럴 가능성도 있죠. 그 둘 다 외국인입니다. 그리고 그녀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전혀 말이죠.」
클래독은 현관 옆 창문에서 놀란 커다란 검은 눈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
는 것을 느꼈다. 창틀에 가려져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저 창문 곁의 여자인가?」
「그렇습니다.」
그 얼굴은 이내 사라졌다.
클래독이 현관의 벨을 누른 뒤 한참 후에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문을 열어
주었다.
「클래독 경감입니다.」
그녀는 매혹적인 푸른 눈으로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미스 불랙록이 기다리고 계세요.」
좁고 길죽한 홀에는 놀랄 만큼 많은 문들이 있었다.
젊은 여자는 왼쪽의 문 하나를 열고 말했다.
「클래독 경감님이 오셨어요, 레티 아주머니. 미치가 문도 열지 않으려 해
요. 여전히 부엌에 틀어박혀 신음 소리만 내고 있지 뭐예요. 오늘도 점심
을 차려 주긴 틀린 것 같아요.」
그녀는 클래독을 향해 덧붙였다.
「하녀는 경찰을 싫어한답니다.」
그리고는 이내 방에서 나갔다.
클래독은 리틀 파독스의 주인에게 가까이 갔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키가 크고 활동적인 60살 정도의 부인이었다. 자연스럽
게 웨이브진 흰머리가 지적으로 보여 강한 인상과는 퍽 대조적이었다. 회색
눈과 턱은 각이 졌고 왼쪽 귀를 붕대로 싸매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트위드 웃저고리와 단정한 스커트, 그 위에 자켓을 걸친 차림이었다. 목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구식 목걸이가 걸려 있어 있어 빅토리아풍의 감상적인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비슷한 또래의 부인이 앉아 있었다. 둥그런 얼굴에 헤어네트
밖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이 단정치 못한 느낌을 주었다. 클래독은 그녀가 레
그 경관의 보고서에 나와 있던 도라 배너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
의 비고난에는 <고양이>라고 쓸데없는 주석까지 붙여 놓았던 것이다.
미스 블랙록은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클래독 경감님. 이쪽은 친구인 미스 도라 배너예요. 나를 도
와 주러 와 있지요. 자, 앉으세요. 담배 피우시겠어요?」
「근무 시간에는 안 피웁니다, 미스 블랙록.」
「그러세요?」
클래독은 노련한 눈으로 방안을 훑어보았다. 거실 두 개를 연결시킨 전형적
인 빅토리아식 응접실이었다. 한쪽에는 길다란 두 개의 창이 있고 다른 쪽에
는 들창이 하나 있었다. 의자, 소파, 국화 무늬의 청동 그릇이 놓인 테이블,
독특하지는 않았지만 차분하고 아늑했다.
단 한가지 어울리지 않는 것은 작은 은꽃병에 꽂힌 시든 제비꽃이었다. 그
꽃병은 다른 방으로 통하는 입구 옆의 탁자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미스 블랙록이 시든 꽃을 놔둘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것은 뭔
가 일상의 평화로움을 깨뜨릴 만한 암시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클래독이 입을 열었다.
「미스 블랙록, 이 방이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난 방입니까?」
「네.」
갑자기 미스 배너가 끼어들며 소리쳤다.
「어제 저녁의 사건을 경감님이 보셨어야 해요. 끔찍했어요. 작은 테이블이
넘어지면서 다리가 두 개 부서지고―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아우성쳤지
요―어떤 사람이 불붙은 담배를 떨어뜨려 귀중한 가구가 다 타버렸지 뭐
예요. 사람들은―특히 젊은이들은―그런 일에 통 조심을 하지 않아요. 다
행히 중국 도자기는 하나도 안 깨졌지만…….」
미스 블랙록은 조용하고도 엄한 말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도라, 그런 건 하찮은 거야. 그보다 우린 클래독 경감님께 솔직히 대답해
드리는 게 최선의 방법이야.」
「감사합니다, 미스 블랙록. 저는 어젯밤 사건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싶습
니다. 먼저 그 죽은 남자를 처음 본 게 언제였습니까? 루디 셔트 말입니
다.」
「루디 셔트라고요?」
미스 블랙록은 약간 놀라는 듯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의 이름인가요? 나는……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지만.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건 메디넘 슈퍼에 쇼핑하러 갔을 때였어요―그러니까 3주일쯤 전이
군요―우리들이―배너와 나 말이에요―로열 슈퍼 호텔에서 식사를 마치
고 돌아오려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불렀어요. 바로 그 젊은이였지요. 그는
『미스 블랙록이시죠?』하고 묻더군요. 그리고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몽트루에 있는 알프스 호텔 주인의 아들입니다』하더군요.」
「몽트루의 알프스 호텔이라…….」
클래독은 급히 메모하고 다시 물었다.
「그를 기억하셨습니까, 미스 블랙록?」
「아뇨, 전혀 못했지요. 사실 그를 본 기억이 없었어요. 호텔 프런트의 젊은
이들은 모두 똑같아 보이잖아요. 우리가 몽트루에 있는 동안엔 아주 즐겁
게 지냈어요. 그 호텔 주인은 무척 친절한 사람이었죠. 그래서 나는 그
젊은이에게 영국에 있는동안 즐겁게 지내길 바란다고 얘기했죠. 그러자
그는 아버지 명령으로 호텔 일을 배우러 6개월간 그곳에 파견되었다고
하더군요. 별얘기도 아니었어요.」
「그 다음에 다시 만난 때는요?」
「그러니까…… 열흘 전이었어요. 그가 불쑥 찾아왔더군요. 나는 깜짝 놀랐
지요. 그는 나를 난처하게 할 생각은 없지만 영국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다며, 어머니가 위독해서 스위스로 돌아가야 하는데 돈이 없다
는 거였어요.」
「하지만 레티는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았어요.」
미스 배너가 급히 말했다.
그러자 미스 블랙록도 얼른 말을 가로챘다.
「그의 얘기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나는 그가 거짓말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요. 스위스로 돌아갈 여비가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런 돈은
스위스의 아버지가 송금해 주면 되잖아요. 또 호텔 종업원들끼리는 서로
돈을 빌려쓰기도 하죠. 난 그가 돈을 빼 썼거나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생
각했죠.」
그녀는 잠시 한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너무 냉정한 여자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나는 오랫 동안 대사업
가의 비서였기 때문에 돈 문제에 있어서 아주 신중해요. 그런 궁한 처지
에 놓일 수도 있다는 건 잘 알지만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내가 놀란 것은…… 그가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점이에요. 아무 소리 없
이 즉시 가버리더군요. 마치 애초부터 돈을 얻으리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
던 것처럼 말이에요.」
「지금 생각할 때 그가 이 집안 구조를 살피러 온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
습니까?」
미스 블랙록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래요. 그는 집을 나가면서 집안을 기웃거리더군요. 그리고는
『식당이 훌륭하군요』라고 말했어요. 실은 조금도 좋은 식당이 아지뇨.
어둡고 작은 곳이니까요. 결국 내부를 들여다보기 위한 구실이었던 거죠.
그리고는 급히 현관으로 가서 직접 문을 열었어요. 지급 생각해 보니 자
물쇠를 살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이곳 사람들은 어두워지기 전에는 현
관문을 잠그지 않죠. 아무나 들어올 수 있죠. 우리집도 마찬가지고요.」
「옆문은요? 정원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 것 같던데…….」
「네, 손님들이 오시기 전에 오리를 우리에 넣기 위해 내가 옆문으로 나갔
었죠.」
「나가실 때 문을 잠갔습니까?」
미스 블랙록은 얼굴을 찌푸렸다.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렇지만 돌아와서는 분염히 문을 잠갔어요.」
「6시 15분쯤 되었지요?」
「네, 아마 그쯤이었을 거예요.」
「그럼 현관문은요?」
「여느 때처럼 열려 있었죠. 늦게 잠그려고요.」
「그렇다면 셔트는 그 문으로 들어왔겠군요. 아니면 당시이 오리를 가두기
위해 나간 틈을 타 몰래 숨어들어왔던가. 그는 이미 집 구조를 살피고 갔
으니까 숨을 만한 곳도 봐두었을 겁니다―벽장이라든가 그 밖의 장소 말
입니다. 지금까지 하신 말씀이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아직 분명해진 것은 없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애를 써가며 어리석은 강
도짓을 꾸며 댔을까요?」
「집안에 현금을 많이 두고 계십니까, 미스 블랙록?」
「저 책상 속에 5파운드쯤 있고, 지갑에 1,2 파운드쯤 있어요.」
「보석류는?」
「반지와 브로치가 두 개씩, 그리고 지금 걸고 있는 목걸이뿐이에요. 경감
님도 이상한 사건이라고 생각하시죠?」
미스 배너가 끼어들었다.
「절대로 도둑은 아냐. 내가 전에 말했잖아, 레티. 그건 복수야! 네가 그에
게 돈을 안 주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그는 너를 노렸어―두 번이나.」
클래독이 말했다.
「자, 다시 어젯밤으로 돌아가 보죠.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죠? 미스
블랙록께서 기억하는 대로 모두 말씀해 주십시오.」
미스 블랙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얘기하기 시작했다.
「시계가 울렸어요. 벽난로 위의 시계죠.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지금
곧 일어날 거라고 내가 말했죠. 그때 시계가 두 번 쳤을 때 갑자기 불이
꺼졌어요.」
「어떤 전등이 꺼졌습니까?」
「이 방과 저족 방 벽의 램프예요. 다리가 달린 전등과 독서용 스탠드는 켜
놓지 않았었지요.」
「불이 꺼질 때 번쩍거리거나 무슨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나요?」
「나지 않았어요.」
도라 배너가 말했다.
「나는 분명히 번쩍 하는 걸 봤어요. 그리고 철컥 하는 소리도 들었고요.
소름끼쳤어요.」
「그리고요, 미스 블랙록?」
「문이 열렸어요…….」
「어느 문이죠? 방에는 문이 둘인 것 같은데.」
「이쪽 문이에요. 옆방 문은 열리지 않아요. 그것은 열리지 않는 문이지요.
이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나타났어요―복면을 하고 권총을 들고 있는 그
사람이요. 너무 급작스런 일이라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어요. 그가 뭐
라고 말했는데……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손들어! 그러지 않으면 쏜다!」
미스 배너가 연극을 하듯 소리쳤다.
「대충 그런 말이었을 거예요.」
미스 블랙록은 이렇게 말했지만 다소 의심스런 얼굴이었다.
「그래서 모두 손을 들었습니까?」
미스 배너가 또 나섰다.
「네, 물론이죠. 우린 모두 손을 들었지요. 나는 그것이 게임이라고 생각했
으니까요.」
「나는 들지 않았어요. 너무 터무니 없고 게다가 귀찮았거든요.」
미스 블랙록의 대답이 끝나자 클래독을 급히 물었다.
「그리고는요?」
「회중전등 불빛이 나를 비추었습니다. 눈이 부셨고 그순간 총알이 스쳐지
나가더니 머리 뒤의 벽에 박혔지요. 누군가 비명을 질렀고 나는 귀가 타
는 듯한 감각을 느끼면서 이어서 두 번째 총성을 들었어요.」
「정말 무서웠어요.」
미스 배너가 말했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미스 브랙록?」
「글쎄요, 너무 아프고 또 놀라기도 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리고
는 그 사람은 발에 무언가 채여 넘어진 것 같았어요. 그때 세 번째 총소
리가 울렸고 회중전등이 꺼졌지요. 다들 소리지르고 불러 대고 소동이 벌
어졌지요.」
「당신은 어디에 서 있었죠, 미스 블랙록?」
「그녀는 탁자 뒤에서 제비꽃 꽃병을 들고 있었어요.」
도라 배너가 숨가쁘게 소리쳤다.
미스 블랙록은 입구 옆의 작은 테이블 쪽으로 갔다.
「나는 여기 있었어요. 꽃병이 아니라 담배상자를 들고 있었어요.」
클래독 경감은 그녀 뒤쪽의 벽을 조사했다. 두 개의 총알 자국이 뚜렷하게
보였다. 총알은 이미 빼내어져 조사하기 위해 보내졌다.
「정말 아슬아슬했군요, 미스 블랙록.」
「레티를 향해 쏜 거예요. 나는 봤어요. 회중전등으로 한사람씩 비추다가
발견하고 곧바로 총을 쏜 거예요. 그는 레티를 죽일 계획이었어요, 분명
히!」
「도라, 너는 뭐든지 차근차근 생각하지 못해.」
「그는 레티 너를 향해 쐈어. 그는 너를 쏘려다가 실패하자 자살한 거야,
틀림없어!」
도라는 고집스럽게 힘주어 말했다.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나는 그가 자살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절대로 자살할 인물이 아니예
요.」
「권총을 쏠 때까지 장난인 줄로만 알았다고 했죠, 미스 블랙록?」
「네. 당연히 게임이라고 생각했죠.」
미스 배너가 기억을 끌어내듯 얘기했다.
「처음에 패트릭이 한 짓일 거라고 했잖아.」
「패트릭?」
경감은 번쩍 눈을 빛냈다.
「패트릭 시먼즈. 내 친척이죠. 처음 신문에서 그 광고를 보고 그 애가 장
난한 것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애는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고 완강히
부인하더군요.」
미스 배너가 또 끼어들었다.
「그런데 너는 걱정했잖니, 레티? 안 그런 척 했지만 걱정하고 있었어. 그
것은 살인을 예고한 것이었어. 바로 레티, 너를 죽이려고 했던거야. 만일
그가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레티는 죽었을 거야. 그럼 우린 어
떻게 되었을까?」
도라 배너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
다.
블랙록은 도라 배너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괜찮아, 도라. 너무 흥분하지 마. 몸에 안 좋아. 이제 다 끝났잖아. 그리고
제발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나는 네 도움으로 집안을 꾸려가고 있잖니?
오늘 세탁소에서 오는 날이지?」
그러자 도라 배너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레티, 일깨워 줘서 고마워. 그 사람들이 잃어버린
베갯잇을 찾아다줄는지 모르겠군. 어딘가 적어 놓았을 텐데. 곧 살피고
올게.」
「그리고 그 제비꽃도 치워 줘. 시든 꽃처럼 보기싫은 것도 없어.」
「불쌍해라. 어제 싱싱한 것을 꺾어다 꽂았는데 너무 일찍 시들어 버렸네.
내가 깜빡 잊고 물을 붓지 않은 모양이야. 나는 늘 잊어버린다니까. 얼른
세탁물이나 살펴보러 가야지. 얼른 다녀올게.」
그녀는 다시금 밝은 얼굴이 되어 총총히 사라졌다.
「저 친구는 몸이 약해요. 그리고 절대로 흥분은 나빠요. 그밖에 또 알고
싶은게 있나요?」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몇이죠? 그들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나와 도라 배너, 그리고 두 명의 친척이 있어요. 패트릭과 줄리어 시먼즈
남매죠. 나의 육촌 동생이죠.」
「육촌 동생이라고요? 조카가 아니었던가요?」
「레티 아주머니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육촌 동생들이지요. 그 애들 엄마와
내가 오촌이니까.」
「그들은 이곳에서 오래 살았습니까?」
「아니예요. 두 달밖에 안 됐죠. 전쟁 전에 그들은 남부 프랑스에서 살았어
요. 패트릭은 군대에 있었고 줄리어는 관청에서 근무했다고 들었어요. 전
쟁이 끝나자 그 애들 엄마가 편지를 보냈더군요. 두 아이를 내 집에 묵게
해달라고요. 줄리어는 밀체스터 종합병원에서 약제사로 있고 패트릭은 밀
체스터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있죠. 아시겠지만 밀체스터는 여기에서
버스로 50분밖에 안 걸리고 나도 그들이 우리 집에 있는 게 좋아요. 사실
이 집은 너무 큰 편이고 그들은 하숙비조로 약간의 돈을 내고 있는데, 아
주 잘 지내고 있어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젊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건 무척 즐겁답니다.」
「그리고 헤임즈 부인이라는 분도 함께 지내신다죠?」
「네, 그녀는 루커스 부인 소유의 데이어스 홀에서 정원사 조수로 일하고
있어요. 그 집에는 늙은 정원사 부부가 살기 때문에 루커스 부인이 그녀
를 우리집에 묵게 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아주 좋은 여자인데, 남편은
이탈리아에서 죽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8살 난 아들이 하나 있어요. 주말
이면 그 아이와 부인이 여기에 오곤 한답니다.」
「집안 일은 누가 합니까?」
「마을에서 허긴스 부인이 일주일에 닷새를 아침에만 거들러 오죠. 그리고
외국 피난민 한 사람이 있는데 부르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여자인데
그냥 미치라고 부르죠. 그녀는 부엌일을 해주는데 일종의 피해망상증이
있는 여자라서 보시면 다루기 힘들 여자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클래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레그 경관이 일러 준 조서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도라 배너를 <고양
이>, 레티를 <갈대>라고, 그리고 미치를 <거짓말장이>라고 했던 것이다.
미스 블랙록이 그의 생각을 알아챈 듯 말했다.
「미치에 대해 거짓말쟁이라고 너무 편견을 갖지 마세요. 어느 거짓말쟁이
도 다 그렇듯이 그녀가 하는 말 뒤에는 이유가 있어요. 그녀는 자신이 끔
찍하게 학대받았던 과거를 의식하고 신문에 실린 끔찍한 사건들이 실제
로 자신과 가족들에게 있었던 일로 생각하고 꾸며 대는 거예요. 그리고
그녀 자신 박해를 받았고 가족 가운데 누군가 살해당한 것만은 사실이에
요. 이런 피난민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녀는 심한 박해를 받았을수록 우
리의 동정과 관심이 크리라고 믿는지 더욱 과장하고 꾸며서 얘기하곤 해
요. 사실 미치는 정신 이상자예요. 우리는 그녀 때문에 종종 불쾌하고 화
가 날 때가 있죠. 의심이 많고 우울한데다 항상 자기를 업신여긴다고 생
각하는 모양이에요. 그럴수록 나는 가엾은 생각이 자꾸 들어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훌륭한 요리를 곧잘 만들곤 한답니다.」
클래독은 부드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되도록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들어올 때 문을 열어준 사람이 줄리
어 시먼즈 양입니까?」
「네, 만나보고 싶으세요? 패트릭을 외출했고 필리퍼 헤임즈는 데이어스 홀
에서 일하고 있고요.」
「감사합니다, 미스 블랙록. 괜찮으시다면 지금 곧 시먼즈 양을 만나고 싶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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