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 예고살인 2

3학년2반 | 2022.02.17 08:04:36 댓글: 0 조회: 351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409


◎ 6장. 줄리어, 미치, 패트릭 ◎

(1)
줄리어는 방으로 들어와 조금 전까지 미스 블랙록이 앉았던 자리에 태연자
약한 태도로 앉았다. 클래독은 그녀의 그런 태도에 슬그머니 화가 났다. 그
녀는 빤히 경감을 쳐다보며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스 블랙록이 그 방을 나갔고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어제저녁 얘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시먼즈 양?」
그녀는 멍하니 눈을 크게 뜨고 나직하게 말했다.
「어제저녁이요? 우리는 푹 잠이 들었어요. 그런 것을 반작용이라고 하나
요?」
「아니, 나는 어제 저녁 6시 30분 이후를 말합니다.」
「아, 네, 따분한 손님들이 많이 왔었어요…….」
「따분한 손님들이라뇨?」
그녀는 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신은 이미 다 알고 계시잖아요?」
「질문하는 건 내 쪽입니다, 시먼즈 양.」
클래독은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난 항상 지나치게 묻곤 하죠. 경감님은…… 아니예요, 말씀드리
죠. 손님이라곤 이스터브룩 대령 부부, 스웨트넘 부인과 그의 아들, 그 리
고 하먼 부인 뿐이었어요. 말씀드린 순서대로 도착했지요. 그들이 한 말
이 알고 싶다면 말씀드리죠. 그들은 똑같은 말을 했어요. 『벌써 스팀을
넣으셨군요, 국화 꽃이 사랑스럽군요』라고 말하더군요.」
클래독은 입술을 깨물었다.
「흉내를 잘 내시는군요.」
「하지만 허먼 부인은 다른 말을 했어요. 그녀는 모자를 금방이라도 떨어뜨
릴 것처럼 쓰고 구두끈도 묶지 않은 채 들어와서는 살인 게임을 언제 시
작할 거냐고 다짜고짜 물었어요. 모두들 당황했지요. 그들은 지나다가 우
연히 들른 체 했거든요. 레티 아주머니가 무뚝뚝하게 『곧 시작되겠지
요』라고 대답했지요. 그때 시계가 울렸고 갑자기 불이 꺼지고 문이 거칠
게 열리더니 복면을 쓴 사람이 나타나 『손들어!』라고 한 것 같았어요.
마치 3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니까요. 정말 우스운 노릇이었지요. 그때
레티 아주머니를 향해 두 발의 총알이 발사되었고 갑자기 상황이 긴박해
진 거예요.」
「그때 사람들은 어디 계셨습니까?」
「불이 꺼졌을 때 말인가요? 글세 이 부근에 흩어져 있었지요. 허먼 부인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핀치―핀칠리피 말이에요―는 난로 앞에 남자 같은
자세로 서 있었어요.」
「당신은 어디쯤에 있었나요?」
「창가에요. 레티 아주머니는 담배를 가지러 가셨어요.」
「입구 쪽의 탁자에 있었겠군요?」
「그래요. 그때 불이 나갔고 바로 그 3류 영화가 시작된 셈이죠.」
「그는 회중전등을 갖고 있었다는데 그걸로 어떻게 하던가요?」
「우릴 비추었어요. 불빛이 굉장히 세어서 눈이 부셨어요.」
「자, 이번엔 신중히 대답해 주십시오, 시먼즈 양. 그가 불빛을 어디에 고정
시키던가요, 아니면 방안을 비추던가요?」
줄리어는 곰곰 생각하는 듯했다. 조금전의 따분해 하는 표정은 이제 사라졌
다.
「방안을 천천히 비췄어요. 댄스 홀에서 화려한 불빛처럼 말이에요. 내 눈
을 비추고 계속해서 방안을 두루 살폈어요. 그때 총성이 울렸어요. 두 차
례나 말이에요.」
「그러고 나서?」
「그는 갑자기 불빛을 홱 돌렸고―미치가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 같은 비명
을 지르기 시작했어요. 회중전등이 떨어져 깨지면서 또 한차례 총성이 울
렸어요. 그리고 문이 닫혔는데 삐꺽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 통에 우리
는 굉장히 섬뜩했어요. 주위가 캄캄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배너
아주머니가 금방 숨넘어가는 듯이 비명을 질러댔어요. 그때 미치가 홀을
가로질러 나갔지요.」
「그가 자살을 한 건지, 아니면 발이 걸려 오발한 건지, 어떻게 생각합니
까?」
「뭐라고 할 수 없어요. 모든 게 다 연극 같으니까요. 사실 그땐 장난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레티 아주머니의 귀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고는 아니라
는 걸 알았지요. 아무리 연극을 실감나게 한다 해도 직접 머리쪽을 쏠 만
큼 자신있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는 자신이 쏘려는 사람을 똑똑히 보았을까요? 그가
미스 블랙록의 모습을 회중전등으로 뚜렷하게 비추던가 말입니다.」
「모르겠어요. 난 아주머니 쪽을 보고 있지 않았거든요. 저는 그 남자를 보
고 있었어요.」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그가 미스 블랙록을, 일부러 미스 블랙록을 향해
쏘았느냐 하는 겁니다. 특히 아주머니를 노리고 말입니다.」
그 말에 줄리어는 좀 놀라는 듯했다.
「레티 아주머니를 노렸다고요? 그건 아닐 거예요. 레티 아주머니를 쏠 계
획이었다면 더 적당한 기회가 있었을 텐데요. 게다가 친구들과 이웃을 불
러 모아놓고 했을 리가 없잖아요. 차라리 아일랜드식 울타리 뒤에서 아주
머니를 쏘았다면 더 성공할 가능성이 크죠.」
클래독은 줄리어의 말이 배너가 주장하듯 레티샤 블랙록의 살해설에 대해
정반대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시먼즈 양. 지금부터 미치를 만났으면 합니다.」
줄리어가 경고하듯 말했다.
「그녀의 손톱을 조심하세요. 다루기 여간 힘든 게 아니니까요!」

(2)
플레쳐와 함께 클래독은 부엌에서 미치를 찾아냈다. 그녀는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다가 그들이 들어서자 경계의 빛을 띠며 쳐다보았다.
그녀의 검은 머리칼은 눈 위까지 흘러 내려와 있었고 얼굴은 우울한 표정
을 짓고 있엇다. 붉은 스웨터와 녹색 스커트는 창백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
다.
「왜 부엌까지 오신 거죠? 당신은 경관이죠? 어딜 가나 박해뿐이군요. 이젠
몸에 배어 버렸다구요. 영국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더니 하나도 다를 게
없군요. 나를 고문하려는 거죠? 무슨 말인가 알아내려고요. 하지만 저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거예요. 그럼 손톱을 뽑고 성냥불로 지지려는 거겠죠.
하지만 아무 말도 안할 거예요. 그러면 포로 수용소로 보내겠죠. 그래도
저는 겁나지 않아요.」
클래독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며 보다 효과적인 접근 방법을 생각했다.
마침내 그는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모자와 외투를 입어요.」
미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무슨 소리예요?」
「모자와 외투를 입고 함께 가잔 말이오. 여긴 손톱 뽑는 기구도 없소. 그
걸 본서에 두고 왔지. 플레쳐, 수갑을 가져 왔지?」
플레쳐는 얼른 알아채고 대답했다.
「네!」
미치는 몸을 움츠리며 소리쳤다.
「난 싫어요. 가고 싶지 않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해요. 원한다면 변호사를 불러도 좋
소.」
「변호사라구요? 싫어요. 변호사따윈 필요없어요!」
그녀는 밀 방망이를 내려놓고 손에 묻은 가루를 옷에다 문지른 뒤 퉁명스
럽게 말했다.
「뭘 알고 싶은 거죠?」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말해 주면 됩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당신도 잘 알잖아요?」
「당신에게 직접 듣고 싶소」
「난 이 집을 나가려고 했어요. 그녀가 말하지 않았나요? 신문에서 살인에
대한 광고가 났을 때 그만 두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저를 보내주지 않았
어요. 그녀는 조금도 동정해 주는 사람이 아니예요. 그냥 있으라는 거예
요. 하지만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았어요. 제가 살해당하리라
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살해되지 않았잖소?」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요.」
「자,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얘기해 봐요.」
「저는 두려웠어요. 정말 불안했다구요. 저녁 내내 안절부절 못했지요. 그래
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홀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것 같아 살펴보았더니 헤임즈 부인이 들어오는 기척이었어요. 현관을 더
럽히지 않으려고 옆문으로 들어왔다나요. 그녀는 조심성도 많지 뭐예요.
헤임즈 부인은 나찌와 같답니다. 금발에 푸른 눈의 그녀는 늘 저를 업신
여기고, 하찮은 여자로 취급한답니다.」
「헤임즈 부인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말아요.」
「그녀는 뭐가 잘났다는 건가요? 나처럼 값비싼 대학교육을 받았나요, 아니
면 학사 학위라도 받았겠어요? 그녀는 단지 날품팔이 일꾼에 불과해요.
잔디를 깎아주고 토요일마다 주급을 받을 뿐이지요. 그런데 누가 그녀를
숙녀라고 불러주겠어요?」
「헤임즈 부인에 대해선 아무래도 좋다지 않소, 계속해 봐요.」
「나는 세리주와 잔, 그리고 맛있게 구워낸 파이를 거실로 가져갔어요. 그
때 현관의 벨이 울려 문을 열었지요. 계속해서 손님이 와서 여러번 문을
열었지요. 좀 창피하긴 했지만 그래도 문을 열었어요. 그리고 식기실로
돌아가 은그릇을 닦기 시작했어요. 누가 나를 죽이러 올 것 같아서 날카
로운 식칼을 옆에 놔두었지요.」
「좋은 생각이었군요.」
「그때 갑자기 총소리가 났어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지요. 나는
식당을 지나―또 다른 문은 열리지 않았어요―뛰어갔어요. 가만히 귀를
기울였을 때 또 다시 총소리가 울리고 쿵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나는 문
손잡이를 돌렸지만 밖에서 잠겨 있었어요. 그래서 덫에 걸린 쥐처럼 되었
던 거예요. 비명을 지르고 문을 세게 두드렸죠. 그러다가 나중에 문을 열
어 줘서 겨우 나왔지요. 나는 많은 초를 가져왔어요. 불을 밝히자 피가
보였어요. 피가 말이에요! 나는 숱하게 피를 봤었지요. 제 남동생이 눈앞
에서 살해되는 걸 보았거든요―거리에서도 피를 보았어요―총을 맞고 쓰
러진 시체를 말이에요―난…….」
클래독 경감이 말했다.
「알았어요. 고맙습니다.」
미치가 두려운 억양으로 물었다.
「이제 절 체포해서 감옥에 넣을 건가요?」
「오늘은 아닙니다.」
클래독 경감은 얼른 대답했다.

(3)
클래독가 플레쳐가 홀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나가는데 문이 열리며 키가 크
고 잘생긴 젊은이가 들어왔다. 하마터면 그들은 부딪칠 뻔했다.
젊은이가 소리쳤다.
「경관이시군요?」
「패트릭 시먼즈 씨?」
「네. 경감님이시죠? 이쪽은 형사부장님이시고.」
「그렇습니다, 시먼즈 씨. 잠깐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아무 죄도 없어요. 맹세코 난 결백합니다.」
「시먼즈 씨, 농담은 그만 하시죠. 아직 만나볼 사람이 많습니다. 이 방을
좀 봐도 될까요?」
「말하자면 서재라는 곳이죠. 하지만 아무도 공부하지 않죠.」
「학생이라고 들었는데요?」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도 수학 공부가 안 되서 집으로 와버렸습니다.」
클래독은 사무적으로 그의 이름, 나이, 군대 경력 등을 물었다.
「시먼즈 씨, 어젯밤 사건에 대해 말해 주시겠소?」
「우린 살찐 송아지를 잡았지요. 미치는 파이를 만들고 레티 아주머니는 세
리주를 땄고…….」
클래독이 말을 막았다.
「네. 반 병쯤 들어 있었지요. 하지만 레티 아주머니는 그걸로 안 되겠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때 미스 블랙록께서 긴장하고 계시던가요?」
「아뇨,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주머니는 무척 침착한 분이시거든요. 그런데
배너 아주머니가 하루 종일 옆에서 끔찍한 얘기만 했을 거예요.」
「미스 배너는 초조해 했었군요.」
「네. 하지만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던 걸요.」
「그 광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였겠군요.」
「네. 그 광고 때문에 몹시 무서워했어요.」
「미스 블랙록 말에 의하면 그 광고를 당신이 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데
그 이유는 뭘까요?」
「저는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의심을 받곤 한답니다.」
「정말 당신의 장난이 아니란 말입니까, 시먼즈 씨?」
「제가요? 절대로 아닙니다.」
「전에 루디 셔트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전혀.」
「비록 당신이 한 짓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광고는 흔히 하는 장난이겠지
요?」
「누가 그러죠? 아마 배너 아주머니에게 장난을 쳤고, 그리고 미치에게 나
찌의 비밀 경찰이 그녀를 찾고 있다는 엽서를 보낸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럼, 어젯밤 일을 설명해 주시겠소?」
「전 세리주를 가지러 거실로 갔었는데 바로 그때 불이 나갔습니다. 돌아와
보니 어떤 남자가 『손들어!』하고 소리쳤어요.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제가 녀석을 한번 덮쳐 볼까 생각하는 순간 총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고 회중전등도
꺼졌습니다. 다시 컴컴해졌지요. 이스터브룩 대령의 명령조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불을 켜!』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내 라이터가 켜지지 않지
뭐예요.」
「그가 미스 블랙록을 노렸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재미있게 하려고 쏜 건데 그만 너무 상했던 게 아닐까요?」
「그래서 자살했단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는 일이죠. 소심하고 좀도둑 같았다구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 분명하죠?」
「물론입니다, 전혀.」
「고맙습니다, 시먼즈 씨. 어젯밤 이곳에 모였던 다른 사람도 만나보고 싶
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필리퍼―헤임즈 부인 말입니다―는 데이어스 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
집은 요 맞은편에 있어요. 그 다음엔 스웨트넘 부인 댁이 가장 가까울 겁
니다. 그 부근에 가셔서 물어보시면 쉽게 찾으실 겁니다.」



◎ 7장. 사람들 ◎

(1)
데이어스 홀은 전쟁 동안 황폐해진 듯했다. 아스파라거스 밭이었던 곳에는
강아지풀이 무성했고, 간간이 부드러운 아스파라거스 잎이 겨울 흔적을 남
기고 있을 뿐이었다. 곳곳에 잡초만이 눈에 띄었다.
한 노인이 괭이를 짚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헤임즈 부인을 찾아오셨소? 글세 나도 그녀가 어디에 가있는지 모르오.
언제나 자기 멋대로 하니까. 도대체 남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니까, 요즘 젊은 여자들은! 바지를 입고 트랙터를 굴리면 뭐든지 다 아는
걸로 생각한다니까. 그녀가 여기서 하는 일은 정원 가꾸는 일이지. 그것
은 하루 이틀에 배울 수 있는 게 못되지요. 정원 가꾸기, 그 일이 그 여
자의 일이랍니다.」
클래독이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노인은 그의 말을 잘못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이 땅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아시오? 장정 세 명과 어린 애 한 명은
있어야 가꿀 수 있소. 그런데 이곳엔 사람이 부족해요. 어떤 때는 밤 8시
까지 일한 적도 있지, 글세 8시까지 말이오.」
「그렇게 늦게까지 하면 어떻게 일을 하지요? 등불이라도 켜놓고 하시나
요?」
「요즘에는 그렇게 하지 않지. 한 여름에는 저녁 늦게까지 한다 이 말이
오.」
「아, 네. 제가 헤임즈 부인을 찾아보겠습니다.」
노인은 이 말에 흥미를 나타내는 듯했다.
「왜 그녀를 찾는다는 거요? 경찰이오? 혹시 리틀 파독스에서의 일 때문이
오? 복면을 쓴 괴한이 침입해서 그곳 사람들을 위협했다니, 이런 일은
전쟁 전엔 없었지요. 군대의 이탈자들일 게요. 그들이 마을을 떠도는 거
겠지. 왜 군대에서 그들을 잡아가지 않는지 모르겠다니까.」
클래독이 말을 받았다.
「글쎄요. 이번 일로 마을이 술렁거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네드 버커의 말에 의하면 너무 영화
를 많이 본 때문이라더군요. 톰 라일리는 외국인을 너무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라고 하구요. 그는 미스 블랙록의 그 고약한 외국인 하녀가 너무
설친다고 하더군요. 그 여잔 공산주의자든가 아니면 그보다 더한 여자라
고 말이오. 그리고 술집에 있는 마린은 미스 블랙록의 집에 틀림없이 값
진 물건이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사실 나는 미스 블랙록이 목에 걸고
있는 진주 목걸이를 제외하고는 상당히 소박한 여자라고 생각해왔소. 마
린은 그 진주가 진짜라고 생각하지만 벨러미 영감의 딸 플로리는 말도
안 된다며 액세서리라고 부르더군. 상류 계층에서는 로마의 진주라고도
했지. 내 마누라는 어느 귀족 부인의 하녀였는데 그걸 파리의 다이아몬
드라고도 한답니다. 하지만 이름이야 어떻든 그냥 유리알이지요! 젊은 시
먼즈 양도 금빛 덩굴잎과 강아지 모양의 액세서리를 달고 다니더군요.
요즘은 진짜 금 같은 건 볼 수도 없다니까. 심지어 결혼반지도 도금한
것으로 하잖소. 그런 건 천박하단 말이야.」
노인은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짐 허긴스도 그러는데 미스 블랙록은 집에 많은 돈을 두지 않는다는군
요. 그의 부인이 리틀 파독스에서 일을 해 주고 있으니 잘 알지도 모르
지요. 참견하기 좋아하는 여자라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아낸답니
다.」
「허긴스 부인이 뭐라던가요?」
「미치가 의심스럽다는 거요. 그녀는 성격이 고약하고, 언젠가는 허긴스 부
인을 대놓고 나품팔이 여편네라고 했다나요.」
클래독은 선 채로, 노인의 말 하나하나를 정리하여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그의 말은 치핑 클렉혼 사람들의 개성을 나타내 주었으나 사건에 직접적인
실마리가 되어 주지는 못했다.
그가 돌아서서 걸음을 옮겨놓자 노인은 그 뒤에 대고 말을 던졌다.
「사과밭에 가면 헤임즈 부인이 거기 있소. 사과 따기엔 나보다 젊은 사람
이 더 나으니까.」
클래독은 사과밭에서 필리퍼 헤임즈를 만났다. 맨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
은 나무를 타고 가볍게 내려오는 그녀의 쭉 뻗은 두 다리였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나뭇가지에 걸려 흐트러진 금발을 날리며 필리퍼는 놀
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클래독은 그녀가 로잘린느 역에 적합하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클래독 경
감은 셰익스피어를 무척 좋아하여 고아원 위문때 <뜻대로 하세요>를 공연
하여 우울한 잭 역을 훌륭히 해낸 적이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생각을 전환시키게 되었다. 필리퍼 헤임즈는 로잘린느 역을
맡기에는 너무 뻣뻣했다. 그녀의 분위기는 영국적이었지만 16세기 영국인은
아니었다. 냉정하고 품위있는 20세기 영국인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헤임즈 부인? 놀라셨다면 용서하십오. 미들셔 경찰서의 클
래독 경감입니다. 잠시 얘기 좀 하실까요?」
「어젯밤 사건에 대해선가요?」
「그렇습니다.」
「오래 걸리나요? 그렇다면…….」
그녀는 썩 내키지 않는 듯한 태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클래독은 나무 그
루터기 쪽을 가리켰다.
「편안히 들으십시오. 너무 시간을 뺏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지요. 어젯밤에는 일을 마치고 돌아간 시간이 몇
시쯤이었습니까?」
「5시 30분경이었어요. 온실에 물을 주느라 20분쯤 더 있었죠.」
「어느 문으로 들어갔습니까?」
「옆문이에요. 오리 우리와 닭장을 지나는 오솔길로 가면 더 가깝지요. 현
관을 더럽히지도 않고요. 가끔 신발에 흙이 묻어 있을 때가 많거든요.」
「언제나 그 문을 사용합니까?」
「네.」
「그 문이 잠겨 있지는 않았나요?」
「아뇨. 여름이면 활짝 열어두고, 요즘에도 닫아두긴 해도 잠그지는 않는답
니다. 우린 대개 그 문으로 드나들지요. 어제도 제가 들어간 뒤 문을 잠
갔지요.」
「늘 그럽니까?」
「지난 주부터 그렇게 하고 있어요. 요즘은 6시면 어둑어둑해지니까요. 미
스 블랙록이 직접 오리와 닭장을 단속하러 나오기도 해요. 그땐 대개 부
엌문으로 나가나 봐요.」
「어제도 옆문으로 들어간 다음 분명히 문을 잠갔습니까?」
「네, 틀림없어요.」
「헤임즈 부인. 집안으로 들어가서는 뭘 하셨죠?」
「흙이 묻은 옷과 신발을 털고 2층으로 올라가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
었지요. 아래층에 내려왔을 때 곧 파티가 시작되었어요. 그때까지 저는
그 광고에 대해서 까맣게 모르고 있었어요.」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얘기해 주실까요?」
「갑자기 불이 꺼졌어요.」
「그때 어디에 계셨죠?」
「벽난로 앞에요. 라이터를 그 위에 놓아둔 것 같아서요. 전기가 나가자 모
두들 소리를 죽여 키득거렸어요. 갑자기 문이 열리고 그 남자가 회중전
등을 비추면서 손을 들라고 위협했어요.」
「그래서 당신은 손을 들었습니까?」
「아뇨. 들지 않았어요. 장난인 줄 알았고 또 피곤했기 때문이죠.」
「부인은 그런 것이 시시했던 모양이군요.」
「네, 사실은. 그런데 총소리가 났어요. 귀가 멍멍하고 몹시 놀랐어요. 전등
이 한바퀴 방안을 비추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회중전등이 꺼졌
어요. 그러자 미치가 비명을 질러댔어요. 마치 돼지를 잡는 소리를요.」
「회중전등에 눈이 부셨나요?」
「아뇨. 그렇지는 않았어요. 꽤 강한 빛이긴 했는데, 회중전등이 잠시 미스
배너를 비쳤을 때 그녀는 새하얀 도깨비 같았어요. 핏기 없는 얼굴에 툭
튀어나온 눈을 부릅뜬 그녀의 모습, 상상이 가시겠죠?」
「그 남자가 회중전등을 휘두르던가요?」
「네. 온 방안을 둘러 비추었어요.」
「특별히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습니까?」
「아뇨.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되었지요?」
필리퍼 헤임즈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온통 난리법석이 되었지요. 에드먼드 스웨트넘과 패트릭 시먼즈가 라이
터를 켜고 홀로 들어가자 우리가 뒤따랐지요. 누군가 식당문을 열었는
데―그곳은 불이 꺼지지 않았더군요―에드먼드 스웨트넘이 뺨을 때리자
그녀는 그제야 겨우 비명을 멈추더군요.」
「죽은 사람을 보셨습니까?」
「네.」
「전에 그를 본 적이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오.」
「그의 죽음은 사고와 자살, 그 어느 쪽이라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모르겠어요.」
「그가 전에 리틀 파독스에 찾아왔을 때 보지 못했나요?」
「오전에 왔었다는데 그땐 집에 없었지요.」
「고맙습니다, 헤임즈 부인. 한가지만 더 묻겠는데 부인은 값나가는 보석을
갖고 계십니까? 반지나 팔지 같은 종류 말입니다.」
「약혼 반지와…… 브로치가 있어요.」
「미스 블랙록의 집에 특별히 값진 물건은 없습니까?」
「별로. 근사한 은그릇이 있긴 하지만…… 특별히 값비싼 건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헤임즈 부인.」

(3)
클래독은 채소밭을 지나오다 한 여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큰 몸집을 콜셋
으로 꽉 죄어 입은 붉그레한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조금은 공격적인 투로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뭘 하시는 거죠?」
「루커스 부인이시죠 난 클래독 경감입니다.」
「그러세요? 실례했습니다. 저는 낯선 사람이 이곳에 들어와 서성거리며
잡담을 거는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직무를 수행하러 오신거라
면…….」
「네, 그렇습니다.」
「어젯밤, 미스 블랙록의 집에서 있었던 그 끔찍한 사건은 어떻게 됐나요?
범죄 조직에 의한 사건인가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루커스 부인.」
「요즘은 하도 도둑이 많아서요. 경찰은 뭘하는지 모르겠어요.」
클래독이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그녀는 말을 이었다.
「필리퍼 헤임즈와 무슨 얘기를 하는 것 같던데요?」
「네. 목격자로서 증언을 필요로 했으니까요.」
「그러시려면 1시까지 기다렸으면 좋았을걸 그랬어요. 그 시간에 질문을
하면 좀더 차분히 얘기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요.」
「본서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요즘은 통 경우 지키는 사람이 없어요. 느지막이 출근해서 30분을 어정
거리다가 11시 휴식인데 10시만 되면 쉬려고 들고 비가 오면 하루 종일
노는 거죠. 잔디를 깎는 일도 제대로 안하고 퇴근은 항상 5분이나 10분
앞당긴다구요.」
「헤임즈 부인은 어제 5시 20분에 퇴근했다던데요?」
「네. 그녀는 무척 열심히 일하는 편이에요. 간혹 밭에서 사라져 버릴 때가
있긴 하지만요. 그녀는 타고난 숙녀에요. 그녀를 보면 전쟁 미망인들에게
무언가 해 주어야 할 의무를 느끼곤 한답니다. 학교가 방학일 때는 그녀
에게 휴가를 주기로 하고 있죠. 제가 언젠가 이런 말을 해 주었어요. 요
즘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지내는 것보다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캠핑 그
룹이 많아서 훨씬 재미있어할 거라구요. 그런 곳이 있다면 굳이 여름 방
학이 되어도 집에 돌아올 필요가 없으니까요.」
「헤임즈 부인은 그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겠죠?」
「그녀는 고집센 노새 같아요. 그녀가 거의 매일 테니스 코트의 잔디를 깎
고 손질을 해 주면 좋을 텐데, 이제 애쉬 노인은 허리가 구부러져 제대
로 해내지를 못해요.」
「헤임즈 부인의 급료는 적은 편이겠군요.」
「당연하죠. 그 이상을 줘야 된다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루커스 부인.」

(3)
「정말 끔찍했어요. 너무 끔찍한 일이에요. 가제트 사에서도 그 광고를 접
수할 때 좀더 신중했어야 해요. 나는 그 광고를 보고 정말 이상하다고
느꼈어요. 내가 그랬었잖니, 에드먼드?」
스웨트넘 부인은 흥분하여 말했다.
「불이 나갔을 때 무엇을 하고 계셨죠, 스웨트넘 부인?」
「전에 있던 늙은 하녀가 곧잘 하던 말이 있죠. 『빛이 사라졌을 때 모세
는 어디 있었던가?』대답은 물론 『어둠 속에 있었다』지요. 엊저녁처럼
말이에요. 모두들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가슴 죄며 있었어요. 그때 문이 열
리고 권총을 든 시커먼 괴한이 들어온 거예요. 눈이 부시도록 회중 전등
을 비추며 『돈을 내놓지 않으면 죽이겠다!』하고 위협했어요. 정말 그것
은 게임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1분도 안 되어 그 끔찍한 일이 일어난 거
예요. 큰 총소리가 울렸어요. 전쟁터 같았다니까요.」
「그때 어디에 서 계셨습니까?」
「글세, 어디에 있었는지…… 내가 누구와 얘기하고 있었지 않니, 에드먼
드?」
「전혀 기억할 수 없어요, 어머니.」
「쌀쌀한 날씨에는 닭들에게 간유를 주라고 미스 핀칠리피와 얘기하고 있
었나? 아니면 허먼 부인과…… 아니야. 그녀는 그때 막 도착했지. 이스터
브룩 대령에게 영국에서 원자력 연구소를 만드는 건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방사선의 유출로 위험하다고 말했었지요.」
「서 있었는지 앉아 있었는지 기억이 납니까?」
「그게 중요한가요, 경감님? 아마 창가나 벽난로 곁에 있었을 거예요. 시계
가 울렸을 때 그 근처였다는걸 느꼈으니까. 정말 조마조마했어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그 심정 말이에요!」
「회중전등의 불빛에 눈이 부셨다고 했는데 부인의 얼굴에 불빛이 직접 비
추었나요?」
「내 눈을 똑바로 비추는 바람에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어요.」
「회중전등을 고정시켜 한곳을 비추던가요, 아니면 방안을 두루 비추던가
요?」
「잘 기억이 안 나는군요. 에드먼드, 너는 생각이 나니?」
에드먼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를 살피려는 듯이 천천히 한사람씩 비추었어요.」
「당신은 정확히 어디에 있었지요, 에드먼드씨?」
「그 방 한가운데서 줄리어와 시먼즈와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방에 있었습니까? 다른 방에도 사람들이 있었나요?」
「필리퍼와 헤임즈는 벽난로 쪽으로 가서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습니다.」
「세 번째 총알은 사고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계획된 자살이었다고
보십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는 갑자기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쿵 하고 쓰러졌어요.
그리고는 혼란스러워졌고 그때 상황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어요. 미
치는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댔고요.」
「식당문을 열고 당신이 미치를 나오게 해 주었다던데요?」
「네, 그렇습니다.」
「문이 분명히 밖으로 잠겨 있었나요?」
에드먼드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틀림없어요. 그런데 왜…….」
「그냥 분명히 확인해 두려고 그럽니다. 감사합니다, 스웨트넘 씨.」

(4)
이스터브룩 대령 집에서 클래독 경감은 한참 동안 지체해야 했다. 그 사건
의 심리학적 고찰이라는 장황한 대령의 설명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심리학적 접근―이것이야말로 사건을 파악할 유일한 방법입니다. 먼저
범죄자를 알아야지요. 나처럼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는 쉬운 방법이지요. 그
런 광고를 낸 이유가 뭘까? 심리학적으로 그는 자신을 광고하고 싶었던 겁
니다. 자신에게 시선을 주목시키려고 말입니다. 그는 슈퍼 호텔의 종업원들
로부터 외국인이라고 따돌림 받았겠지요. 여자에게 채였는지도 모르죠. 그래
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었을 겁니다. 요즘 영화 속의 우상이 어떤 인물
인지 아십니까? 무법자들이죠. 그는 『나도 한번 무법자가 되어 보자』했겠
지요. 복면을 쓰고 권총을 준비했지만 관중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무대를
준비했죠. 정작 클라이막스에 이르자 단순한 좀도둑이 아닌 살인자가 된 겁
니다. 아무런 목적도 분별도 없이 쏘아댄 겁니다.」
클래독은 기회를 틈타 정중히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아무런 목적도 없다고 하셨죠, 대령님? 그렇다면 그가 어떤 특정한 인물,
미스 블랙록을 노렸다고 생각하시진 않군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냥 맹목적으로 쏘았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정
신을 차린거지요. 총알이 누군가를 살짝 스치긴 했지만 그런 건 몰랐을 테
고 그는 자신을 쏜 겁니다.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몹시 당황한
끝에 자신을 쏜거죠.」
이스터브룩 대령은 말을 끊고 헛기침을 하더니 만족스런 목소리로 다시 말
을 이었다.
「사건은 명백해요. 뻔한 이치죠.」
대령 부인이 끼어들었다.
「정말 멋있어요. 당신이 속속들이 파악하고 계시다니 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존경과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
클래독 경감은 그럴 듯하다고 여겨졌지만 부인처럼 찬탄할 정도는 아니라
고 생각했다.
「총소리가 났을 때 방안 어디에 계셨습니까?」
「아내와 함께 중앙의 테이블 옆에 서 있었죠. 무슨 꽃이 놓인 테이블이었
지요.」
「일이 일어났을 때 난 당신의 팔을 붙잡았어요. 그렇죠, 아치? 그때 꼭 놀
라 죽는 줄만 알았어요.」
대령은 장난스럽게 이죽거렸다.
「오, 가엾게도…….」

(5)
클래독 경감은 돼지 우리 곁으로 미스 핀칠리피를 찾아갔다. 그녀는 돼지
의 분홍빛 잔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아주 사랑스럽죠? 잘 자라고 있어요. 크리스마스 때쯤이면 좋은 베이컨
감이 되죠. 그런데 왜 나를 보자고 했나요? 이미 어젯밤에 그 일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고 경관에게 말했어요. 모프 부인이 그러던데 메디넘 웰
즈의 큰 호텔의 종업원이라지요? 어째서 그곳에서 강도짓을 하지 않았을
까요? 그 편이 훨씬 나았을 텐데.」
『그렇긴 하군』이렇게 생각하며 클래독은 질문을 시작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당신은 어디 있었습니까?」
「사건이요? 방공대원으로 있을 때 생각이 나네요. 그때는 사건의 연속이
었죠. 총소리가 울렸을 때 말인가요?」
「네.」
「누군가 술 한잔 갖다주기를 기대하면서 벽난로에 기대 서 있었어요.」
「그가 총을 마구 쏜 것 같은가요, 아니면 특정 인물을 겨냥했다고 생각합
니까.」
「미스 블랙록을 말하시는 거죠?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때 심정이 어땠는
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잘 기억이 안나는데요. 불이 꺼지자 회중
전등이 방안을 이리저리 비추었고 그때 총이 발사되었어요. 나는 패트릭
시먼즈가 장난하는 줄로만 알고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었죠.」
「그럼 패트릭 시먼즈 짓이라고 생각했나요?」
「네, 그렇게 생각했어요. 에드먼드 스웨트넘은 인텔리 작가이고, 이스터브
룩 대령도 장난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패트릭은 장난이 좀 심한 편이죠.
그런데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그에게 미안한 노릇이에요.」
「당신 친구도 패트릭의 장난인 줄 아셨습니까?」
「마것로이드 말씀이세요? 그애와 직접 얘기해 보세요. 하지만 아무것도
얻어낼 게 없을 거예요. 과수원에 있는데 불러 드릴까요?」
미스 핀칠리피는 과수원 쪽을 향해 힘차게 불렀다.
「마것로이드!」
희미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지금 갈게.」
「빨리 와. 경찰에서 나오셨어!」
잠시 후에 미스 마것로이드는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치맛자락은 흘러내
려왔고, 헤어네트 밖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이 삐져나와 있었다. 둥근 얼굴은
미소를 띠었다.
「런던 경시청에서 나오셨나요? 이렇게 찾아오실 줄 알았으면 한발짝도 움
직이지 않았을텐데.」
그녀는 숨가쁘게 물었다.
「아직 런던 경시청에는 보고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밀체스더 경찰
서의 클래독 경감입니다.」
「그러세요! 무슨 단서라도 찾으셨나요?」
미스 마것로이드는 관심밖이라는 듯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미스 핀칠리피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사건 당시 네가 어디 있었는지 알고 싶다는구나, 마것로이드.」
「그러세요? 그렇다면 알리바이를 준비해 두는 건데. 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요.」
미스 마것로이드는 여전히 숨을 헐떡거렸다.
「너는 함께 있지 않았어.」
미스 핀칠리피가 말했다.
「그랬나? 맞아. 난 그때 국화를 보고 있었어요. 그때 사건이 벌어졌어요.
그런 일이 이전부터 벌어져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설마 진짜 권총이리
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어둠 속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렸어요.
그 하녀가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어요. 그 외국 여자 말이에요. 홀 저쪽
어딘가에서 목이라도 찔린 줄 알았어요. 그 남자가 있다는 것도 몰랐는
데 목소리가 들렸어요. 『손들어요!』하고 말이에요.」
「『손들어!』했어. 공손한 말투는 아니었다구.」
미스 핀칠리피가 정정해 주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기 전까지 그것을 재미있어 했어요. 캄캄한 곳에서
어찌나 무섭고 소름끼치던지…… 더 알고 싶은 게 있나요?」
「아닙니다.」
클래독 경감은 곰곰 마것로이드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미스 핀칠리피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분은 네 마음을 알아보려고 하는 거야.」
「난 대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거든.」
「경감님께선 그만 됐데.」
미스 핀칠리피는 흘긋 클래독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필요하시다면 다음엔 목사 댁에 가보세요. 그곳에서는 무슨 단서를 얻을
지도 몰라요. 허먼 부인이 좀 어리숙하다지만 난 그 부인을 똑똑하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뭔가 단서를 제공할 거예요.」
플레쳐와 클래독 경감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마것로이드가 숨가쁘게 말했
다.
「오, 핀치! 내 태도가 자연스러웠니? 너무 떨렸어!」
미스 핀칠리피는 미소지었다.
「아냐. 썩 잘해냈어.」

(6)
클래독 경감은 즐거운 기분으로 널찍한 방을 둘러보았다. 그 방은 캠벌랜
드의 고향집을 생각나게 했던 것이다.
낡은 무명 시트가 덮인 큼직한 의자, 흩어져 있는 꽃이며 책, 그리고 바구
니에는 스파니엘종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다.
허먼 부인의 당혹한 표정을 대하자 그는 동정심을 느꼈다. 그녀는 곧 솔직
하게 얘기를 시작했다.
「별로 도움을 드리지 못할 거예요. 난 눈을 감고 있었거든요. 눈이 부셨어
요. 그리고 총소리가 울려 눈을 더 꼭 감았지요. 저는 좀더 조용한 살인
게임을 기대했거든요. 총은 생각지도 않았어요.」
경감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럼 아무것도 못 보셨습니까? 그래도 들을 수는 있었지 않나요?」
「그래요. 모든 소리를 다 들었지요.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웅성대는
목소리, 헐떡이는 숨소리도 들었어요. 미치의 비명 소리―가엾게도 미스
배너는 겁에 질린 토끼처럼 울었어요. 서로 밀고 엎치고 했어요. 총소리
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어요. 곧 불이 들어왔고 아무 일도 없던 것
처럼 보통때와 마찬가지가 되었죠. 우리는 본디대로 돌아온 거였어요. 어
둠 속에 있을 때 사람들은 완전히 변하는 모양이에요, 그렇잖아요?」
「무슨 말뜻인지 알겠습니다, 허먼 부인.」
허먼 부인은 빙긋 웃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쓰러져 있었어요. 조금 교활해 보이는 외국인이었어
요―붉그스름한 얼굴에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쓰러져 있었죠―옆에 권총
이 있었고. 오, 정말 뭐가 뭔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어요.」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것은 클래독 경감에게 있어서도 모든 것이 복잡
한 골칫거리인 것이다.




◎ 8장. 미스 마플의 등장 ◎

(1)
클래독 경감은 서장의 책상 위에 타이핑된 심문 보고서를 내놓았다. 서장
은 막 스위스 경찰에게서 보내온 전보문을 읽고 난 후였다.
「전과가 있군. 흠, 역시 생각했던 대로야.」
「네, 그렇습니다.」
「보석 강도…… 흐음, 수표위조…… 굉장한 사기꾼이야.」
「네, 좀도둑정도이죠.」
「좀도둑이 나중에 거물되는 법일세.」
「그럴까요?」
서장은 눈길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리 의심스러운가, 클래독?」
「그렇습니다.」
「왜지? 사건은 뻔하지 않나. 자네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분명하지.」
서장은 보고서를 끌어당겨 단숨에 읽어나갔다.
「별다르지 않군. 역시 모순과 일치가 있지. 긴장된 순간에 대한 저마다의
얘기는 언제나 들어맞지 않거든. 하지만 결정적인 상황은 분명하지.」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역시 완전하지 못한 상황이지요. 미심쩍은 데가
있어요.」
「그럼 사건을 살펴보기로 하지. 루디 셔트는 메디넘에서 출발하여 6시에
치핑 클렉혼에 도착했는데 대해서는 안내원과 두 명의 승객이 증인이지.
버스 정류장에서 그는 리틀 파독스로 걸어가 어렵지 않게 그 집으로 들
어갔고―아마 현관문으로 들어간 것 같군. 그런 다음 모인 사람들을 위
협하며 두 발의 총을 쏘았는데 그 한방이 미스 블랙록에게 가벼운 상처
를 낸 모양이군. 그리고 세 벌째 총알로 자신을 쏘았는데, 자살시도냐 오
발이냐 하는 명확한 증거는 없네. 그리고 그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도
불분명하다는 건 동감일세. 하지만 그 이유야 우리가 골치를 썩여가며
찾아내야 할 해답은 아니지. 검시관들은 자살이나 사고사라고 판결내리
겠지만 어떻게 내려지든 우리의 일은 마찬가지일세. 사건은 우리 손으로
종결지어야 하니까.」
클래독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서장님은 이스터브룩 대령의 심리학에 의지하라는 말씀에 긍정하시나 보
죠?」
라이스델 서장은 미소를 지었다.
「대령은 경험이 풍부하지. 무조건 그 심리학을 배척할 필요는 없지.」
「내 생각에는 전혀 상황이 다른 것 같은데요?」
「그럼 치핑 클렉혼 사람들이 그런 일을 꾸민 다른 이유라도 있다는 건
가?」
클래독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 외국 여자는 제게 얘기한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
다. 어쩌면 제가 잘못 본 것인지도 모르지만요.」
「그 여자와 셔트가 잘 아는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그를 집안에 들
여놓고, 일을 저지르도록 도왔을 거란 말이야?」
「그런 비슷한 말이죠. 아마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집에
값진 물건이 있는 듯합니다. 미스 블랙록이나 다른 사람들은 극구 부인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귀중품이 있었다는 셈이죠.」
「추리소설감이군.」
「황당한 얘기라는 걸 인정합니다만, 주목할 사항은 셔트가 미스 블랙록을
살해하려고 했다고 미스 배너가 확신하는 점입니다.」
「자네 말이나 그 미스 배너의 진술로 미루어 보아 그녀는…….」
클래독은 급히 서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렇습니다, 서장님. 그녀의 말은 믿을 수가 없죠. 그러나 셔트가 미스
블랙록을 살해하려 했다는 말은 누구의 암시도 받지 않은 그녀의 생각이
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걸 부인했지만 미스 배
너는 누구의 의견에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럼 루디 셔트가 왜 미스 블랙록을 죽이려고 했다는 건가?」
「바로 그게 문젭니다. 그점에 대해선 저도 모릅니다. 미스 불랙록이 거짓
말한 게 아니라면 그녀 자신도 모릅니다. 그것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데,
그래서 사실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클래독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운을 내게, 클래독. 헨리 경과의 점심에 함께 가세. 메디넘 웰즈의 로
열 슈퍼 호텔의 훌륭한 요리로 말일세…….」
클래독은 뜻밖이라는 듯이 서장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는 편지를 받았네…….」
그때 헨리 클리더링 경이 들어오자 서장은 말을 멈추었다.
「잘 있었나, 더모트!」
서장은 그를 맞으며 말했다.
「자네에게 보여줄 것이 있네, 헨리.」
「뭔가?」
「어떤 노처녀에게 온 편지일세. 로열 슈퍼 호텔에 묵고 있는데 이번 사건
에 대해 얘기해 줄 것이 있다는군.」
헨리 경은 약간은 우쭐대듯이 말을 받았다.
「그 노처녀들은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지. 별의별 말을 다 입에 올리지.
대체 뭘 알고 있다는 건가?」
라이스델은 편지를 보면서 투덜거리듯 얘기했다.
「나이가 많은 할머니인가 보군. 잉크병에 빠진 거미가 지나간 것 같아. 완
고한 말투군. 귀중한 시간을 뺏지는 않겠지만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식
으로 말일세. 이름이 뭐라더라…… 제인…… 그래, 제인 마플이야.」
헨리 경이 소리쳤다.
「정말인가? 그녀는 내가 전에 말했던 기막힌 그 여자일세. 무척 자신만만
한 노처녀지. 그녀는 세인트 메리 미드 집에서 조용히 있지 못하고 메디
넘 웰즈까지 왔군. 한번쯤 더 살인 게임의 예고가 있어도 좋겠는 걸. 미
스 마플을 위해서.」
라이스델이 일축하듯이 말을 잘랐다.
「헨리, 자네가 말하는 거물을 만나보세나. 자, 로열 슈퍼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그 여자를 만나도록 하세. 클래독은 매우 의심스런 표정이군.」
「아닙니다.」
클래독은 정중히 대답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대부(代父)인 헨리 경이 끼어들지 않아도 좋을 일
에 손을 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미스 제인 마플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클래독이 상상했던 모습과 거의 일치
했다.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자상했고 또 나이가 들었다. 사실 할머니라고
할 나이였다. 눈처럼 하얀 머리에 분홍빛 얼굴, 그리고 맑은 푸른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털실로 뜨개질을 하고 있다가 헨리 경을 보자 몹시 반가와했다. 그
리고 서장과 클래독을 소개받고는 들떠 떠들어댔다.
「헨리 경, 어서 오세요. 무척 오랜만이에요. 정말 그래요. 내 류머티즘이
악화되어 버렸지 뭐예요. 요즘 호텔 숙박료가 어찌나 비싼지 이런 곳에
묵을 형편이 못되는데…… 하지만 레이먼드가―내 조카 말이에요―손을
써주었어요. 기억하시죠?」
「그 사람이야 모르는 이가 없지요.」
「그래요. 그는 작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죠. 최근 작품이 독서 클럽
에서 선택되었다는군요. 그 레이먼드가 글세 내 생활비를 대주겠다고 하
지 뭐예요. 그애 와이프는 화가인데 이름이 꽤 알려져 있죠. 대부분 시들
어가는 꽃이나 창턱에 놓인 이빠진 빗 그림들이지만요. 물론 내가 평할
수는 없지요. 나는 지금도 블레어 레이튼과 앨머 터디머에게는 감복한답
니다. 어머, 내가 너무 수다를 떨었군요. 서장님께서 이렇게 와주실 줄은
몰랐어요. 사실 이런 얘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시간을 빼앗아서 죄
송해요.」
클래독 경감은 은근히 불쾌해짐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굉장
히 늙은 고양이군』하고.
라이스델이 입을 열었다.
「지배인실로 들어갑시다. 그곳에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미스 마플은 뜨개바늘을 가지런히 정돈해 놓고 그들을 따라 지배인실로 들
어갔다.
「자, 미스 마플. 우리에게 얘기를 들려 주실까요?」
뜻밖에도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수표 말인데요, 그 사람이 고쳤어요.」
「그 사람이라니요?」
「이곳에서 일하던 젊은이 말이에요. 강도극을 연출하고 자신을 쏘았다고
알려진 그 사람 있잖아요?」
「그가 수표를 고쳤단 말씀입니까?」
미스 마플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여기 갖고 있어요.」
그녀는 백에서 수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오늘 아침 은행에서 인출한 다른 수표들 틈에 섞여 있었어요. 이것 보세
요, 7파운드짜리를 17파운드로 고쳤어요. 7자 앞에 1을 쓰고 세븐(Seven)
뒤에 틴(teen)이라고 교묘히 적어 넣었어요. 내가 봐도 틀림없는 금액이라
고 생각돼요. 잉크도 같아요. 내가 카운터에서 수표에 서명했으니까요. 그
사람이 전에도 자주 이런 짓을 했을 거라고 난 생각해요.」
「그 친구, 이번엔 잘못되었군.」
헨리 경의 말에 미스 마플은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런 일이 없었다면 그 사람이 끔찍한 범죄 조직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해요. 그에게는 내가 나쁜 상대였죠. 갓 결혼한 여자라
든가 한창 열애중인 여자들이야 자기가 수없이 서명한 수표를 찬찬히 들
여다보지 않겠지요. 그러나 나처럼 할 일 없는 노인네나 세심한 사람은
자신을 속이려는 사람을 찾아내고야 말지요. 나는 17파운드 금액은 전혀
끊지를 않아요. 매달 급료와 책값으로 20파운드를 쓰고 내 개인적인 지
출로 늘 7파운드를 쓰지요. 5파운드가 될 때도 있지만 요즘은 물가가 올
라서 7파운드를 쓰죠.」
헨리 경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그를 보고 또 다른 사람을 생각하진 않았습니까?」
미스 마플은 미소지으며 그를 돌아다보았다.
「당신 참 짓궂어요, 헨리 경. 실은 생선가게의 프레드를 생각했어요. 그는
항상 물건 값보다 웃돈을 받곤 했어요. 요즘은 생선이 많이 팔려나가니
까 꽤 많은 돈을 남길 거예요. 사람들은 대부분 무심코 넘어가기 때문에
그는 항상 10실링씩을 더 받아냈던 거죠. 그는 그것으로 넥타이도 사고,
제시 스프책―포목집 점원이죠―을 데리고 영화구경할 정도로는 충분해
요. 내가 여기에 온 첫주에 내 계산서에 차질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에게
지적했더니 공손히 사과했지만 매우 당혹해 하더군요. 나는 그때 그가
『치밀한 눈을 가졌구나』하고 생각했죠. 치밀한 눈빛이란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절대로 눈을 이리저리 돌리지 않는 그런 눈이지요.」
클래독은 그 말을 듣고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몇 년 전 그를 법정에까지
서게 했던 악명 높은 사기꾼 짐 켈리를 생각해낸 것이다.
「루디 셔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믿을 사람이 못됩니다. 그는 스위스에
서도 전과가 있었습니다.」
라이스델의 말을 받아 미스 마플이 이었다.
「아마 스위스에서의 상황이 불리하게 되자 증명서를 위조하여 이곳으로
온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라이스델이 대답했다.
「그는 식당에서 일하는 빨강머리의 웨이트레스와 가깝게 지냈다더군요.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빠져 있지 않았어요. 그는 그녀에게 꽃다발이나
쵸콜렛을 선사했죠. 다른 영국 젊은이들은 그런 걸 하지 않아요. 그녀가
모두 다 말하던가요?」
미스 마플은 갑자기 클래독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면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요?」
클래독은 곰곰히 생각하듯 말했다.
「글쎄요.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미스 마플이 말을 이었다.
「뭔가 숨기고 다 말하진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대단히 당황했나봐요. 오
늘 아침에도 청어를 주문했는데 연어를 가져왔고 우유는 아예 빼먹었지
뭐예요. 보통때는 아주 눈치빠른 아가씨였는데. 정말 걱정스러워 보였어
요. 증언, 그런 것들로 머릿속이 온통 꽉 차 있는 것 같았죠. 그러나 내
생각엔…….」
미스 마플의 푸른 눈동자는 클래독 경감의 핸섬한 얼굴을 빅토리아 여왕처
럼 우아한 태도로 바라보았다.
「당신이라면 그녀를 설득하여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클래독 경감의 얼굴이 붉어졌고 헨리 경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미스 마플이 말을 이었다.
「이건 중요한 일이에요. 그 젊은이는 그녀에게 그것이 누군지 얘기했을지
도 몰라요.」
라이스델은 미스 마플을 보며 물었다.
「그것이 누구라뇨, 무슨 말이죠?」
「아, 말을 분명히 하지 못했군요. 그에게 시킨 사람이 누군가 하는 말이에
요.」
「그럼, 누군가 뒤에서 그를 조종했다고 생각합니까, 미스 마플?」
미스 마플은 깜짝 놀라 바라보았다.
「말하자면…… 그래요. 그는 단정한 젊은이였어요. 여기저기서 돈을 빼내
고, 소액의 수표를 위조하고 보석을 슬쩍하지요. 이 모두 하찮은 좀도둑
이지요. 깔끔하게 차려입고 여자와 데이트하는 그런 남자 아니에요? 그
런 남자가 갑자기 총을 들고 사람들을 위협해서 누군가를 쏜다. 전에는
그런 짓을 해본 적이 없었고 또 그럴 만한 인물이 못되죠. 그런 짓은 그
에게 불필요한 것이에요.」
클래독은 갑자기 숨을 멈추었다. 그건 레티샤 블랙록이 한 말이었고 허먼
부인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도 그쪽으로 기울고 미스 마플
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미스 마플,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 것 같군
요.」
클래독의 목소리는 갑자기 공격적이 되었다. 그녀는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죠? 신문에 난 것만 알 뿐이에요. 그것도 일부분
이긴 하지만요. 물론 추측할 수는 있지만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지
요.」
헨리 경이 서장을 향해 말했다.
「조지, 마을 사람들을 심문한 보고서를 미스 마플께 보여 주면 안 될
까?」
「글세, 규칙위반이지. 하지만 나는 그런 규칙에 구애받는 사람이 아니지.
미스 마플,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에 무척 관심이 많습
니다.」
미스 마플은 적이 당황한 듯했다.
「서장님, 헨리 경의 말을 믿지 마세요. 이분은 늘 이렇게 지나치게 세심하
시거든요. 내가 하찮게 추리한 것을 이분은 대단하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사실 나에겐 그런 재능은 없어요. 전혀 말이에요.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지능을 빼놓는다면 말이죠. 사람들은―물론 내가 아는 사람들이지요―너
무 깊이 사물을 믿는 경향이 있어요. 반면에 나는 늘 최악의 경우만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답니다. 결코 좋은 버릇이라고는 할 수 없죠. 하지만
곧잘 나의 판단이 옳다는 게 밝혀진답니다.」
라이스델은 타이핑된 보고서를 미스 마플 앞에 내밀었다.
「이걸 읽어 보십시오. 금방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당신이 의견을
말해 주실 영역입니다. 미스 마플께서도 그들처럼 많은 사람을 알고 계실
테니까 우리가 몰랐던 것을 알아낼 수도 있을 겁니다. 이 사건도 곧 일단
락지어야 합니다. 부디 그 전에 아마추어의 의견을 들려주십시오. 클래독
도 이 사건에 대해 만족할 만한 결론을 못 내린 것 같습니다. 그도 역시
당신과 같은 말을 하는군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입니다.」
미스 마플이 보고서를 읽는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그녀는 눈길을 떼
었다.
「잘 보았어요.」
그녀는 한숨을 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이 사람들이 한 말―생각들은 모두 틀리군요. 본 것이나―또는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 하찮은 것들 뿐이에요. 하지만 한가지만이라
도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그걸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지요.
마른 풀더미 속에서 바늘찾기나 마찬가지지요.」
클래독은 심한 실망을 느꼈다. 잠시 동안 그는 헨리 경의 이 노부인에 대
한 평가가 옳은지 의심했다.
그녀는 무엇인가 정확하게 집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이든 사람에게는
예리한 데가 있는 법이니까. 예로써, 클래독의 대고모인 에머 부인에겐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었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는 코가 실룩거리더라고 뒷날
대고모가 그에게 말해 주었다.
그런데 헨리 경이 그렇게 칭찬하던 미스 마플은 평범하게 의견을 말할 뿐
이었다. 그는 불쾌한 생각이 들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사건은 명백합니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게 조금씩 다르다 해도 이들
이 본 것은 한가지입니다.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 위협하는 걸 보
았다는 거지요. 『손들어!』라든가, 『돈을 내놔.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
리겠다!』라고 소리쳤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쨌든 협박을 당했기 때
문에 그런 말을 떠올렸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그를 보았다는 겁니다.」
미스 마플이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
「그렇지만 경감님. 사실 그들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지요.」
클래독은 갑자기 숨을 삼켰다. 그녀의 말이 옳다! 그녀는 날카로운 통찰력
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그는 미스 마플을 시험해 보기 위해 말을 던진 것
인데 그녀는 넘어가지 않았다.
이 시험은 사건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미스 마플은
클래독과 똑같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즉, 복면을 쓴 사람에게 협박받았다
는 그 사람들은 실제로 그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미스 마플은 홍조띤 얼굴로 어린 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얘기했다.
「내 판단이 옳다면 바깥 홀에도, 층계참에도 전등은 켜져 있지 않았을 거
예요.」
클래독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문간에 버티고 있던 남자가 강한 회중전등 불빛을 비추었다면 방
안의 사람들은 그 불빛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지 않겠어요?」
「그렇죠. 볼 수 없지요. 그것은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복면을 쓴 남자를 보았다는 것은, 사실은 보지 못했고 나중에
전등이 켜지고 난 뒤에 본 것을 짐작한 거지요. 이 점은 모든 가정에 잘
들어맞죠. 루디 셔트가 <제물>이었다는 가정에도 말이에요.」
라이스델은 흥분하여 빨갛게 달아오르는 그녀의 볼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미스 마플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제대로 표현했는지 모르겠군요. 나는 미국식 어법은 잘 몰라요. 그
리고 미국어는 뜻이 잘 바뀌니까요. 나는 더 쉴해미트의 소설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조카 레이먼드의 말로는 그가 추리소설에 있어서 최고의 작
가라는군요.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제물>이라고 말씀
드린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 죄를 짓고 누명을 입은 사람을 뜻하는 거예
요. 루디 셔트도 그런 종류의 인물인 것 같군요. 정말 어리석은 일이지만
탐욕스런 사람은 쉽게 걸려들기 마련이죠.」
라이스델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럼 누군가의 부추김에 의해서 총을 쏘았다는 말인가요? 점점 어려워지
는 걸.」
「그에게는 장난이라고 했겠지요. 물론 보수를 받기로 하고 신문에 광고도
내고 그 집에 찾아가서 살펴보기도 했어요. 그리고 사건이 나던 날 밤에
복면을 쓰고 회중전등을 들이대면서 위협하는 것까지 말이에요.」
「그리고 권총을 쏘는 것도 말입니까?」
「아니예요. 그는 권총 같은 건 갖고 있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모두들 그렇게 말했는데…….」
라이스델이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
「만일 그가 권총을 갖고 있었다 해도 사람들은 그걸 볼 수가 없죠. 나는
그가 총을 갖고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가 『손들어!』하고 소리친
뒤에 누군가 그의 뒤로 가서 어깨 너머로 총을 쏜 거예요. 그가 놀라자
누군가 그를 쏜 뒤 총을 그의 옆에 떨어뜨려 놓은 거죠.」
세 사람은 미스 마플을 바라보았다. 헨리 경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게 추리할 수도 있겠군요.」
「그럼, 어둠 속에서 다가간 사람은 누구일까요?」
서장이 물었다. 그러자 미스 마플을 곧 대답했다.
「미스 블랙록을 죽이려느 사람이 누구인지 그건 그녀에게 물어보는 수밖
에 없지요.」
그것을 알아내기에는 도라 배너가 적임자라고 클래독은 생각했다. 그녀는
늘 무언가를 얘기해 주고 싶어서 안달하니까.
「그럼 누군가 미스 블랙록의 생명을 노리고 한 짓이란 말씀입니까?」
라이스델이 물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래요. 한두 가지 의심스러운 점이 있긴 하지만요. 그러
나 내가 정말 의심하는 것은 좀더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하는 점이에요.
루디 셔트와 이 일을 꾸민 사람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의 입을 막으려 했
겠지만 결국 비밀이 지켜지게 되었지요. 만일 루디 셔트가 누군가에게
발설했다면 그건 웨이트레스인 마너 해리스일 거예요. 그리고 누가 시킨
일인가 하는 몇 마디의 암시쯤은 남겨 두었을 거예요.」
클래독이 벌떡 일어났다.
「지금 곧 미스 해리스를 만나보고 오지요.」
미스 마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클래독 경감님. 그녀도 당신께 다 털어놓는 게 신상에 안전할
테니까요.」
「안전이라구요? 아, 알겠습니다.」
클래독은 방을 나갔다.
라이스델 서장은 약간은 의문스러워했지만 듣기좋게 말했다.
「미스 마플, 상당히 도움 말씀을 주신 것 같군요.」

(3)
「제발 그렇게 캐묻지 마세요. 그 할머니는 사소한 일에도 야단법석을 떠
는 분이라구요. 게다가 내가 공모자라는 거 아니예요?」
마너 해리스는 쉴새 없이 말을 뱉아놓았다.
「경감님께서 내 말을 곧이듣지 않은지 모르지만 루디의 사건은 장난이라
고 내가 말했잖아요.」
클래독은 그녀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효과적인 말을 거듭 반복해 말했
다.
「좋아요. 뭐든 말씀드리겠어요. 그 시초는 루디가 저와의 데이트 약속을
어긴 것부터였어요. 우리는 사건이 나던 날 저녁에 영화구경을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가 못 가게 됐다는 거에요. 나는 화가 났지요. 그건 루
디의 제안이었거든요. 사실 외국인과 교제하는 건 싫었어요. 그는 제게
무척 미안하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는 그날 밤 파티에 가게 되었다고, 절
대로 손해보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어요. 어떤 파티냐고 물어보았더니 장
난으로 협박할 거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자기가 낸 신문 광고를 내게 보
여 주었어요. 난 그저 웃어 버렸지요. 그는 영국인들은 어린애 장난이나
한다면서 빈정거렸어요. 그래서 제가 왜 영국인들을 그런 식으로 말하느
냐고 따졌고 우리는 잠시 말다툼을 했지요. 경감님도 아시겠지만 루디는
그날 저녁 누군가를 쏘고 자신도 쏘아 버렸더군요. 왜 그랬을까요? 난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모르겠어요. 만일 내가 그 전부터 파티에 관해 알
고 있었다고 지껄이면 나까지 사건에 관련된 걸로 생각할 테니까요. 하
지만 그때 말했을 땐 정말 장난인 줄 알았어요. 루디도 그렇게 알고 있
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가 총을 갖고 있었다는 말도 한마디도 비추지 않
았어요.」
클래독은 그녀를 진정시키며 중요한 질문을 했다.
「누가 그 일을 시켰다고 말하던가요?」
그녀의 대답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제 생각엔 부탁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모두 그가 혼자 한 행동 같아요.」
「아무 이름도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그>라든가 <그녀>라는 말이라도
요.」
「아뇨. 소동을 일으키러 간다고만 했어요. 『그들의 놀란 표정을 보면 우
스울 거야』라고만 말했을 뿐이에요.」
클래독은 생각했다. 『녀석은 웃을 시간도 없었구나』하고.

(4)
메디넘으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라이스델이 말했다.
「그건 추리에 지나지 않아. 뒷받침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잖은가. 그 노부
인의 망상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진행시키는 게 어떻겠나?」
「글쎄요.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서장님.」
「그건 믿어지지 않아. 어둠 속에서 스위스인 루디 셔트의 뒤에 나타났다
니, 도대체 누가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그가 누구이며 지금 어디 있
단 말인가?」
「옆문으로 들어왔을 수도 있지요. 셔트가 들어온 것처럼 말이지요. 아니면
부엌으로 들어왔을지도 모르죠.」
「<그녀>가 부엌에서 들어올 수 있다, 그런 뜻이군.」
「그렇습니다. 가능한 일이죠. 그 여자가 의문스럽습니다. 비명을 지르고
발작적으로 신경질을 내는 게 아무래도 연극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 여
자는 루디와 짜고 적당한 시간에 들여보낸 다음 미리 계획했던 대로 그
를 쏘고는 식당으로 달아난 겁니다. 그리고는 은그릇을 들고 비명을 질
러댔던 거지요.」
「하지만 우리가 얻은 사실로…… 음, 이름이 뭐였더라. 그렇지, 에드먼드
스웨트넘의 말로는 문이 밖에서 잠겨 열쇠로 열어 그녀를 나오도록 해
주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 방으로 들어가는 다른 문이 있는 건가?」
「네, 뒷계단으로 통하는 문이 있습니다. 부엌은 층계 아래쪽에 있는데 손
잡이가 3주일 전에 망가졌는데 아직 그걸 수리하지 않았다는군요. 그래
서 그 문은 열지 못합니다. 문밖 홀의 선반 위에 굴대와 손잡이 두 개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능숙한 사람은 문을
부수지 않고도 열 수 있었겠지만요.」
「자세히 그 여자의 신분을 파악해 보는 게 좋겠군. 신분 증명서를 지니고
있는지 조사해 보게. 하지만 너무 추측만으로 흐르는 것 같군.」
클래독은 그 말에 조용히 대답했다.
「서장님께서 이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지어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의 여유를 주신다면 사건을 밝히고야 말겠습니다.」
서장은 조용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아뭏든 자네를 믿네.」
「아까 제 생각이 옳다면 그 권총은 셔트의 것이 아닙니다. 또 누구도 그
가 권총을 갖고 있었다고 확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독일제였지?」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영국에는 유럽제 총기가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많이 유럽제 총을 갖고 있고 영국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그래. 뭔가 새로이 짐작가는 데라도 있나?」
「먼저 동기를 밝혀내야 합니다. 제 추측대로라면 지난 금요일의 사건은
단순한 장난이나 강도극이 아닌 끔찍한 계획살인입니다. 누군가 블랙록
을 죽이려 했다, 이에 대한 해답은 미스 블랙록 자신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터무니없다고 비웃을 걸세.」
「루디 셔트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일축했지요. 하지만 다른 사
실이 있습니다, 서장님.」
「그게 뭐지?」
「누군가 또다시 미스 블랙록을 죽이려고 시도할지 모른다는 거죠.」
「그렇다면 그 추측이 들어맞겠군.」
서장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이내 덧붙였다.
「그리고 미스 마플을 신경써 주게.」
「미스 마플을요? 왜 그러시죠?」
「그녀는 요즘 치핑 클렉혼의 목사관에 머물면서 1주일에 두 번씩 메디넘
웰즈로 치료받으러 가는 모양이야. 목사관 부인의 딸이 미스 마플의 옛
친구 딸이라는군. 아무튼 그녀에겐 날카로운 직감이 있지 않나. 그녀는
일상생활에 별 흥미를 못 느끼고 살인의 뒷조사를 찾아다니고 있는 것
같아.」
클래독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저는 그녀가 치핑 클렉혼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네 혼자 해 보려고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멋진 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래서이
지요. 제 생각에는 우리들의 추측에 뭔가 있다는 겁니다.」



◎ 9장. 문에 대하여 ◎

(1)
「또다시 이렇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미스 블랙록.」
「괜찮아요. 법정심리가 일주일 연기되어서 더 많은 증거를 얻으려고 다니
시는군요.」
클래독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 블랙록, 루디 셔트는 몽트루의 알프스 호텔 주인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는 베른의 병원에서 처음 일을 시작하였는데 그때 많은 환자들이 보석
들을 도둑맞았답니다. 그리고 이름을 바꿔 스키장에서 급사 노릇을 한 적
도 있지요. 그는 레스토랑의 계산서를 이중으로 만들어 그 차액을 챙겼던
것입니다. 그 뒤로 쮜리히 백화점에 근무했는데 그가 근무하는 동안 분실
된 물건이 보통때보다 훨씬 웃돌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소행이라고 봐야
겠지요.」
미스 블랙록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는 도둑이었군요. 그 사람을 전에 본 적이 없다고 한 것도 맞는 얘기로
군요.」
「그렇습니다. 그는 로열 슈퍼에서 당신을 눈여겨 보았다가 전부터 아는 체
했던 거죠. 스위스 경찰의 추적을 받자 위조한 신분 증명서를 가지고 이
곳 로열 슈퍼 호텔에 취직한 거죠.」
미스 블랙록은 여전히 무뚝뚝하게 말을 받았다.
「돈벌이 장소로는 아주 좋은 곳이지요. 그곳에 묵는 사람들은 부유하고 돈
을 잘 쓰니까요. 그런 사람들은 계산서따윈 들여다보지도 않을 테니까
요.」
「그렇습니다. 셔트에겐 그곳이 안성맞춤의 장소였겠군요.」
미스 블랙록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왜 치핑 클렉혼을 택한거죠? 어째서 돈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로열 슈퍼 호텔을 놔두고 말이에요.」
「이 집엔 아무리 뒤져도 값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싶은거죠?」
「그래요. 그건 분명하잖아요, 경감님. 이 집엔 램브란트 그림 같은 건 하나
도 없어요.」
「그렇다면 당신 친구인 미스 배너의 말이 옳겠군요. 즉, 그가 당신을 죽이
러 왔다는 것 말입니다.」
「어머나, 레티! 내가 그런 끔찍한 얘길 했다구?」
「말도 안 돼, 배너!」
클래독은 미스 블랙록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것이 진실이라
고 생각합니다.」
미스 블랙록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얘기를 해 보세요. 그 젊은이가 신문에 광고를 내고 일정한 시간에
사람이 모이도록 한 뒤 소란을 벌이도록 했다는 말씀인가요?」
갑자기 미스 배너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그렇게 예상하진 못했을 거야. 그것은 레티, 너에 대
한 끔찍한 예고였어. 내가 <살인예고>라는 광고를 보았을 때 느꼈던 생
각 그대로야. 그땐 정말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 그가 너를 쏘고 도망가 버
렸다면 범인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겠어?」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그 광고가 장난이 아니란 걸 알았어, 레티. 내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
었지. 그리고 미치를 보았더니 잔뜩 겁에 질려 있더군.」
클래독이 낮게 소리쳤다.
「아, 미치! 그녀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습니다.」
「그녀의 입국 허가증과 신분 증명서는 모두 합법적인 거예요.」
「그렇겠죠. 루디 셔트의 신분증도 이상이 없었으니까요.」
클래독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루디 셔트가 왜 나를 죽이려 했다는 거죠?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는군요, 경감님.」
클래독은 천천히 대답했다.
「셔트를 조종한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 점에 대해 생각나는게 없습니
까?」
클래독은 가급적 우회하여 말했지만 미스 마플의 추측이 옳다면 자신의 말
도 진실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스 블랙록에게는 그런 말도 소용
없었으며 여전히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녀가 대답했다.
「문제는, 도대체 왜 나를 죽이려는 것과 마찬가지군요.」
「미스 블랙록, 당신에게서 그 해답을 듣고 싶습니다.」
「난 몰라요. 대답할 말도 없고요. 나는 원한 가진 사람도 없어요. 이웃과도
좋게 지내왔죠. 남의 약점이나 비밀 같은 건 조금도 몰라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리고 미치가 이 일과 관계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어리석
은 추측이에요. 배너도 말했지만 그녀는 <가제트>에서 그 광고를 보고
무척 두려워했어요. 그때 정말로 짐을 꾸려 떠나려고 했을 정도니까요.」
「아마 그녀가 교묘히 수를 쓴 건지도 모르지요. 그녀는 당신이 분명히 붙
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테죠.」
「경감님이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얼마든지 이유는 찾을 수 있죠. 하
지만 미치가 나에게 증오심을 품었다면 음식에 독을 넣을 수도 있을 거예
요. 그런데 왜 일부러 일을 번거롭게 했겠어요. 경찰은 외국인들에게 배타
적이라고 들었어요.미치는 거짓말쟁이일지는 몰라도 냉혹한 여자는 아니
에요. 만일 정 미심쩍다면 다시 한번 그녀를 추궁해 보세요. 그녀가 졸도
하거나 방문을 걸어잠근 채 비명만 질러댄다면 오늘 저녁 준비는 못된다
는 걸 알아두세요. 오후에 허먼 부인이 어떤 노부인을 모시고 와서 차를
들기로 했어요. 그래서 미치에게 케잌을 만들라고 했는데―분명 당신은
또 그녀를 흥분시키고 말 거예요. 그러니 이만 돌아가셔서 다른 사람에게
로 의심을 돌려주세요.」

(2)
클래독은 부엌으로 갔다. 그는 일전과 똑같은 질문을 했고 미치는 역시 지
난번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그렇다. 그녀는 4시에 현관문을 잠갔다. 보통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그
날 오후에는 그 끔찍한 광고에 겁을 먹었던 것이다.
옆문은 잠가도 소용이 없다. 미스 블랙록이나 미스 배너가 오리를 가두기
위해 드나들고 헤임즈 부인도 그 문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헤임즈 부인은 5시 30분에 들어와 자신이 문을 잠갔다고 하던데요?」
「당신은 그녀를 믿는군요. 정말이지 경감님은 그녀를 믿고 계시군요.」
「왜, 그녀를 믿지 못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제 생각이 무슨 참고가 되겠어요? 당신은 나를 믿지 않는데…….」
「그럼, 믿을 기회를 주겠소? 그러니까 헤임즈 부인이 저 문을 잠그지 않았
다고 생각하는군요?」
「그 여자는 잠그는 척했을 뿐이에요.」
「그게 무슨 뜻이지요?」
클래독이 물었다.
「그 젊은 남자는 혼자 일을 꾸민 게 아니예요. 그 남자는 들어올 문과 그
문이 열려져 있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던 거죠. 아주 쉽게 열고 들어올
수 있다는 것까지도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제 말 같은 건 쓸데없는 얘기지요. 지금 경감님은 믿지 않을 거예요. 그리
고 거짓말쟁이 외국 여자라고 생각하실 테죠? 그녀는 영국 숙녀니까 무척
정직하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러니까 저 같은 여자는 믿지 않을 거예요. 하
지만 저는 경감님께 말해 줄 수 있어요!」
미치는 난로 위에 스튜 남비를 소리나게 얹었다. 클래독은 악의에 찬 이 여
자의 말을 받아들여야 할지, 어떨지 망설였다.
「우리의 얘기는 모두 기록될 거요.」
「난 아무 말도 안했어요. 왜 내가 이야기해야 돼죠? 당신들은 불쌍한 망명
자들을 학대하고 경멸하잖아요. 만일 내가 일주일 전에 그 젊은 남자가
미스 블랙록에게 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고, 헤임즈 부인과 바깥 섬머
하우스에서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고 경감님께 얘기한다면 내가 꾸며서 얘
기하는 거라고 하실 테죠?」
클래독은 분명히 꾸며서 한 얘기일 거라고 생각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바깥 섬머 하우스에서 얘기하는 소리가 당신한테 들릴 리가 없잖소.」
그러자 미치는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요. 난 쐐기풀을 뜯으러 나갔었지요. 그건 아주 좋은 찬거리가
되거든요. 하지만 아무도 모르죠. 난 쐐기풀로 요리를 해서 식탁에 올리답
니다. 그때, 그들의 얘기소리를 들었어요. 그가 『난 어디에 숨지요?』하
고 말하자 그녀가 『내가 가르쳐 줄께요』하더군요. 그리고 6시 15분이라
고 말했어요. 난 생각했어요. 숙녀인 체하는 여자가 일을 마치자마자 남자
를 집안으로 끌어들였다구요. 미스 블랙록은 그런 짓을 싫어하니까 당장
쫓아낼 거라고 생각했지요. 나는 숨어 그 장면을 보았지요. 미스 블랙록에
게 그대로 일러주려고요. 그런데 이제 생각하니 제가 잘못 생각한 거였어
요. 그들이 꾸민 것은 사랑의 행각이 아니라 강도와 살인―바로 그 계획
이었어요. 하지만 경감님은 모두 제가 꾸며댄 얘기라고 생각하시겠죠?
『거짓말장이! 너를 감옥에 처넣겠다!』라고 말이에요.」
클래독은 어처구니없었다. 그녀 말대로 조작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
실일 수도 있다.
그는 신중하게 물었다.
「헤임즈 부인과 얘기하던 남자가 분명 셔트였다고 장담할 수 있소?」
미치는 자신있게 말했다.
「틀림없어요. 그는 차도를 가로질러 섬머 하우스로 들어갔어요. 이젠 그
만―신선한 쐐기풀이 있을까?」
클래독은 미치가 아무 까닭없이 엿들은 데 대해 둘러대느라고 쐐기풀 얘기
를 꺼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얘기 말고 더 들은 건 없습니까?」
미치는 기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스 배너가―늘 사람을 업신여기는 여자지요―나를 불렀어요. 그래서 그
녀에게 갔지요. 그녀는 정말 사람을 번거롭게 해요. 가보았더니 요리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거예요. 미스 배너의 음식 솜씨란 맹물 맛이지요.」
클래독이 차갑게 물었다.
「지난 번엔 왜 이 얘기를 안했죠?」
「그땐 잘 기억나지 않았어요―미처 생각도 못했지요―그런데 뒤에 생각해
보니 바로 그때 그 여자에 의해 꾸며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헤임즈 부인이란 걸 확신하나요?」
「그래요, 확신해요. 절대로요. 그 여잔 도둑이에요. 정원사 일을 해서는 그
처럼 숙녀 행세를 못하죠. 그렇지만 그렇게 친절히 대해 주는 미스 블랙
록의 물건을 훔칠 수 있을까요? 오, 나쁜 여자예요! 아주 나쁜 여자예
요!」
클래독 경감은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며 말했다.
「만일 누군가가 당신이 루디 셔트와 이야기하는 걸 보았다면 뭐라고 하겠
소?」
그 말은 기대했던 것보다 효과가 없었다. 미치는 깔깔 웃으며 고개를 흔들
었다.
「제가 루디 셔트와 이야기하는 걸 보았다면 그건 보통 거짓말이 아니예요.
남의 말을 퍼뜨리긴 쉬운 일이에요. 하지만 영국에서는 자기가 퍼뜨린 얘
기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미스 블랙록이 그렇게 일러 주더군요. 정말
그런가요? 난 살인자나 도둑과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영국의 경
찰관들은 내가 그랬다고 할 수는 없을 거예요. 경감님이 이렇게 곁에 붙
어 있으니 제가 어떻게 요리를 할 수 있겠어요? 어서 부엌에서 나가 주세
요. 저는 소스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클래독은 순순히 나왔다. 미치에 대한 의심이 어느 정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헤임즈 부인에 대해 한 얘기는 확신에 찬 말이었다. 아마 미치는 거
짓말쟁이일 것이라고 클래독은 생각했다. 그러나 헤임즈에 대한 이야기만은
뭔가 사실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고 느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헤임즈 부
인과 이야기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클래독은 질문에 대답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조용하고 교양있는 인상을 받았
다. 그로서는 헤임즈가 조금도 의심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클래독이 홀을 가로질러 무심코 부서진 손잡이가 달린 문을 열려고 했을 때
마침 미스 배너가 층계를 내려오다가 황급하게 외쳤다.
「아니, 그 문은 열리지 않아요. 다른 문으로 가세요. 너무 혼동되죠? 이 집
에는 문이 너무 많아서…….」
「정말 많군요.」
클래독은 좁은 홀 안을 두리번거렸다. 미스 배너는 친절하게 문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첫 번째 것은 옷장 문이고, 그 다음은 붙박이 문, 다음은 식당 문인데 저
옆쪽에 있지요. 그리고 이쪽에는 방금 경감님께서 나가려던 <열리지 않는
문>, 다음은 거실로 들어가는 문, 그리고 도자기 벽장문, 다음이 꽃꽂이
방, 그리고 맨 끝에 옆문이 있지요. 정말 복잡해요. 특히 이 두 개의 문은
서로 가까이 붙어 있어서 곧잘 혼동한답니다. 나도 가끔 열곤 하지요. 보
통때는 이 문에 테이블을 붙여 놓았는데 얼마 전 저 벽쪽으로 옮겨 놓았
어요.」
클래독은 문득 자신이 열려고 했던 문짝에 수평으로 나 있는 희미한 자국을
보았다. 테이블이 놓여 있던 흔적이었다.
「테이블을 언제 옮겨 놓았습니까?」
경감은 마음속에서 무언가 희미하게 짚이는 게 있었다.
다해스럽게도 도라 배너에게는 질문에 대한 이유를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
떤 질문이든지 수다스런 미스 배너에게는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
이다. 그녀는 하찮은 것이라도 알려 주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그러니까…… 열흘이나 2주일쯤 되었을 거예요.」
「왜 옮겼죠?」
「잘 생각나진 않지만 아마 무슨 꽃 때문인 것 같았어요. 필리퍼가 커다란
꽃병에 가을 꽃들을 잔뜩 꽂아 놓았었죠. 그런데 너무 커서 지나가는 사
람의 머리에 닿을 정도였어요. 그래서 필리퍼 헤임즈가 테이블을 옮기는
게 좋겠다고, 문보다 벽을 배경으로 하는 게 보기 좋을 것 같다고 하는
바람에 옮겼지요.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고, 그리고
는 층계 밑에 놓았지요.」
클래독은 그 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처음부터 <열리지 않는 문>은 아니겠지요?」
「그럼요. 원래는 작은 거실 문이었는데 거실 두 개를 합쳐서 사용하니 문
이 두 개씩 필요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이 문은 잠가버린 거예요.」
「잠그다니요? 못을 박았습니까? 아니면 자물쇠로 잠갔다는 겁니까?」
「네, 자물쇠로 잠그고 빗장을 걸어놓았어요.」
클래독은 문 위쪽의 빗장을 보고 그것을 열려고 했다. 그러자 빗장은 쉽게
빠졌다. 아주 쉽게…….
「마지막으로 열었던 게 언제쯤입니까?」
「여러 해 전일 거예요. 내가 온 뒤로 한번도 연 적이 없었으니까요.」
「이 열쇠는 어디 있습니까?」
「홀 서랍 속에 열쇠가 많이 들어 있는데 그 중에 있을 거예요.」
클래독은 그녀를 따라가 서랍을 열고 오래 전에 넣어둔 채로 있는 녹슨 열
쇠 뭉치를 보았다.
그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그 중 조금 다른 모양의 열쇠 하나를
집어들고 그 문으로 되돌아갔다. 열쇠는 꼭 들어맞아 쉽게 돌아갔다. 그가 문
을 밀자 소리없이 조용히 열렸다.
미스 배너가 소리쳤다.
「오, 조심하세요. 안쪽의 벽에 물건들을 기대어 두었을지도 몰라요. 그 문
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거든요.」
「그렇습니까?」
경감의 얼굴에는 차가운 빛이 스쳤다. 그는 딱딱하게 말했다.
「이 문은 최근에 열렸었군요, 미스 배너. 열쇠 구멍과 경첩에 기름이 칠해
져 있는 걸요.」
미스 배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클래독은 냉담하게 말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생각했다―외부에서 X가 들어온 것인가?―아니다, X는 여기 있었다―
이 집안에. X는 그날 밤 거실 안에 있었던 것이다.



◎ 10장. 핍과 에머 ◎

(1)
미스 블랙록은 이번에는 좀더 세심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클
래독이 알고 있는 바대로 그의 말 속의 복잡한 면도 잘 알아들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그렇다면 사태가 달라지겠군요. 아무도 저 문에 손댈 까닭이
없지요.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경감은 다그치듯 말했다.
「그날 밤 불이 꺼졌을 때 누군가가 이 방에 있다가 저 문으로 나가서 루
디 셔트의 뒤에서 총을 쏜 것입니다.」
「눈에 띄지도 않고 소리도 내지 않고 말인가요?」
「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말입니다. 그날 밤, 불이 꺼지자 모인 사람들
이 비명을 질러대며 이리저리 부딪쳤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다만 회중전등의 불빛뿐입니다.」
미스 블랙록은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 모인 사람들―우리 이웃들 중의 한 사람이―가운데 누군
가가 몰래 저 문으로 빠져나가 나를 죽이려 했다는 건가요? 나를요? 하
지만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것에 대한 대답은 당신이 잘 아실 텐데요, 미스 블랙록.」
「모릅니다, 경감님. 맹세코 정말 몰라요.」
「좋습니다. 그럼 시작합시다. 당신 돌아가신다면 누가 유산을 받게 됩니
까?」
미스 블랙록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패트릭과 줄리어입니다. 이 집의 가구와 약간의 연금은 배너에게 돌아가
죠. 사실 남길 것도 별로 없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주식 같은 게 조
금 있지만 세금은 많고 이익금은 낮죠. 게다가 갖고 있던 돈을 전부 1년
전에 연금에 넣어버렸어요.」
「달리 수입이 있는 걸로 압니다만, 미스 블랙록? 패트릭과 줄리어가 그것
까지 물려받게 되나요?」
「왜 그런 확신을 하시는 거죠?」
「단지 그애들의 태도로 보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절대로 그 애들을 의심
하지 않아요. 언젠가는 나도 살해될 만큼 재산이 많아질 때가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예요.」
클래독은 미스 블랙록의 말을 얼른 잡아챘다.
「언젠가라니요? 그게 무슨 뜻이죠, 미스 블랙록?」
「막연히 어느 날이라는 말이에요. 경우에 따라 빠른 기일에…… 나도 큰
부자가 될 수도 있잖겠어요?」
「흥미있는 말씀이군요. 자세히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아실지 모르지만 나는 20년 동안 랜들 게들러라는 분의 비
서로 일하면서 가깝게 지내왔죠.」
클래독은 흥미를 느꼈다. 랜들 게들러라면 재계에서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대담한 투자와 그를 둘러싼 평판은 그를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인물로 만들었
던 것이다. 클래독의 기억으로는 그는 1937년이나 193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분은 당신보다 앞 세대의 사람이지요. 그렇지만 이름은 들어보셨을 거
예요.」
「네, 그분은 백만장자였지요.」
「그래요. 그의 재산은 변동이 있긴 했지만 수백만 달러 이상은 되었지요.
그는 항상 기회를 포착하여 대담한 투기를 하곤 했지요.」
그녀는 추억으로 눈을 빛내며 얘기를 계속했다.
「아뭏든 그는 상당한 부자인 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분에겐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아내에게 재산을 모두 남겼지요. 그리고 아내가 죽
은 뒤에는 내게 남겨지도록 했어요.」
경감의 기억 속에 희미한 낱말들이 떠올랐다.
거액의 유산, 충성스런 비서에게 가다! 일종의 그런 비슷한 기사였다.
미스 블랙록은 눈을 깜박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최근 12년 동안은―게들러 부인을 죽일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어요. 하지만 이런 건 경감님께 아무 도움도 안 되겠죠?」
「이런 걸 여쭤봐서 실례입니다만, 게들러 부인은 남편의 유산 처리 방법
에 대해 불만을 품지 않았습니까?」
미스 블랙록은 오히려 재미있어했다.
「그렇게 어렵게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경감님은 내가 랜들 게들러의 애
인이 아니었느냐고 묻고 싶은거죠? 하지만 아니예요. 랜들은 단 한순간
도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어요. 나 역시 마찬가지였구요. 그는 아내인 벨
을 사랑했고, 죽을 때까지도 그러했어요. 그분이 유산을 그런 식으로 처
리한 것은 나에 대한 보답이었을 거예요. 그가 젊었을 땐 재정적 안정이
안 되어 파산 직전에 놓인 적이 있었지요. 그때 현금으로 1천 파운드가
필요했답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큰 거래였어요. 그런데 밀고나갈 돈이 그
에게는 없었어요. 그때 나는 재산을 털어서 그를 도와 주었지요. 그를 믿
었으니까요. 그런데 대단한 성공이었어요. 1주일도 못되어 그는 큰 부자
가 되었답니다. 그 후로 그분은 나를 동업자로 대해 주었어요. 아, 정말
신나는 시절이었어요!」
미스 블랙록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정말 즐거웠어요. 그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하나뿐인 여동생은 병을 앓
고 있어서 난 모든 건 포기하고 그 애를 돌봐야 했어요. 그로부터 몇년
뒤 랜들도 세상을 떠났어요. 그 회사에 있을 때 난 많은 돈을 벌었기 때
문에 그분이 나에게 재산을 남겨 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난 무
척 감동했어요. 그런데 벨이 먼저 죽는다면―그녀는 몸이 약해 모두들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했죠―내가 그의 전재산을 상속받는다는 걸 알고
굉장히 기뻐했어요. 벨은 아주 좋은 여자였죠. 유산에 대해 함께 기뻐해
줄 정도로요. 그녀는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는데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
받는 것 외에 몇 년간 못 만났죠. 난 전쟁이 시작되기 전 동생을 데리고
스위스의 요양원으로 갔었어요. 그 애는 그곳에서 폐병으로 죽고 말았지
요.」
미스 블랙록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나는 1년 전에 영국으로 돌아왔지요.」
「당신은 곧 부자가 될 거라고 하셨는데 언제쯤을 말씀하시는거죠?」
「벨의 상태가 급속히 쇠약해졌다고 담당 간호원이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아마 몇 주일 못 살 거라고…….」
그녀는 슬픈 듯 다시 덧붙였다.
「하지만 내겐 그 돈도 별의미가 없어요. 요즘처럼 단촐한 생활에는 지금
의 수입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얼마 전까지도 다시 증권에 투자해 볼까
생각했지만 이젠 늙었어요. 이해하시겠어요? 패트릭과 줄리어가 돈이 탐
나서 나를 죽이려 했다면 몇주일만 더 기다리면 되는걸요.」
「알겠습니다, 미스 블랙록. 만일 부인께서 게들러 부인보다 먼저 돌아가시
게 되면 누가 유산을 받게 되죠?」
「글쎄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아마 핍과 에머가 아닐까
요?」
클래독의 멍한 표정을 보고 미스 블랙록은 미소지었다.
「이상한 이름이죠? 만일 내가 벨보다 먼저 죽을 경우 법률상의 자손에게
재산이 돌아가게 되겠죠. 랜들의 유일한 여동생인 소니어에게 갈 거라고
생각해요. 랜들은 누이동생과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그녀는 랜들이 반대
하는 부랑자 같은 사람과 결혼했거든요.」
「그 남자는 정말 부랑자였습니까?」
「네, 그랬어요. 하지만 여자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었나봐요. 그는
그리스인과 루마니아 혈통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이름이 스탠포디스, 맞
아요. 드미트리 스탠포디스라고 했어요.」
「랜들 게들러는 누이동생이 그와 결혼해 버리자 아예 관계를 끊어 버렸습
니까?」
「아니예요. 소니어는 부모의 유산이 있어 아주 잘 살아요. 랜들은 그녀의
남편이 손댈 수 없게 누이동생의이름으로 재산을 넘겨 주었지요. 하지만
변호사가 벨보다 내가 먼저 죽을 경우를 대비하여 또 다른 상속자를 대
라고 했다면 달리 사람이 없을테니 소니어의 자식들에게 물려주게끔 해
놓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자선기관이나 사회에 내놓을 사람은 아니니까
요.」
「누이동생에게 아이가 있군요?」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핍과 에머에요. 우스운 이름이죠? 소니어는 결혼 한 뒤 벨에게 편지
를 보냈는데, 자기는 무척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며 쌍둥이를 낳았는데
핍과 에머라고 이름지었으니 랜들에게 전해달라는 내용이었어요. 그 뒤
로는 편지 연락은 없었지만 벨은 나보다 더 많은 얘기를 해줄 수 있을
거예요.」
미스 블랙록은 자신의 과거 얘기를 즐거운 듯 얘기했다. 그러나 클래독은
전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만일 당신이 그날 밤 살해되었다면 그 두 사람이 막대한 유산을 받게 되
겠군요. 자신을 죽일 만한 이유가 없다고 하신 말씀은 틀린 겁니다. 당신
의 죽음을 원하는 사람이 분명히 두 사람은 있습니다. 그 쌍둥이는 몇살
입니까?」
미스 블랙록은 얼굴을 찌푸리며 기억해 내려고 했다.
「글쎄요……1922년생이던가……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한 스물 대여섯
쯤 되었을 겁니다.」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경감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누군가 당신을 살해할 목적으로 총을 쏘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일
인물이 또다시 시도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심스럽게 행동하
십시오, 살인 계획이 실패되면 또다시 시도할 가능성이 높죠. 그것도 눈
앞에 다가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2)
필리퍼 헤임즈는 허리를 펴고 땀이 번들거리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
을 쓸어올렸다. 그녀는 정원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웬일이시죠, 경감님?」
그녀는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 클래독 역시 더욱 유심히 그녀의 모습
을 살폈다. 꽤 미인이었다. 아름다운 금발에 갸름한 얼굴, 전형적인 영국 여
인이었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턱과 입, 어딘지 모르게 엄격한 인상을 주었
다.
푸른 눈동자에도 확고함 같은 것이 있어서 클래독은 그녀가 완전한 비밀을
지켜낼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헤임즈 부인, 번번히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점심시간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리틀 파독스에서 떠나 이곳에서 애기하는 게
편할 듯싶어서요.」
「무슨 일이죠, 경감님?」
그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흥미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의 상상일지 모
르지만 뭔가 경계의 빛이 느껴졌다.
「오늘 아침에 어떤 얘기를 들었는데, 그게 부인과 관계된 얘기라서요.」
필리퍼 헤임즈는 눈썹을 약간 움직였다.
「당신은 루디 셔트를 전혀 모른다고 하셨죠?」
「네.」
「그가 죽었을 때 처음 보았다고 하셨죠?」
「그래요. 그때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이를테면 리틀 파독스의 섬머 하우스에서 그를 만난 적은 없습니까?」
「섬머 하우스요?」
헤임즈 부인의 목소리에는 분명히 두려움의 기색이 배어 있었다.
「그렇습니다. 헤임즈 부인.」
「누가 그런 소릴 하던가요?」
「내가 들은 얘긴 이렇습니다. 루디 셔트가 숨을 곳을 묻고 당신이 가르쳐
주겠다고 했으며 6시 15분이라고 시간 약속을 했다던데요. 사건이 나던
날 밤 그가 버스에서 내려 그곳에 간 것도 6시 15분쯤이었지요.」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가로놓였다. 그러다 헤임즈는 비웃듯 짧게 웃
었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짐작은 가요. 정말 어리석고 바보같
은…… 물론 악의가 있는 말이긴 해요. 미치는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저를 미워하죠.」
「그럼 사실과 다르단 말씀입니까?」
「물론 거짓말이에요. 나는 셔트라는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고 그날 아침
여기서 일하고 있었어요.」
클래독 경감은 침착하게 물었다.
「그날 아침이라면 어느 날을 말씀하시는 거죠?」
잠시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고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매일 아침마다 여기에 나와 있어요. 1시까지는 떠나지 않아요. 미치의 이
야기를 들어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거예요. 그녀는 언제나 거짓말을 하
거든요.」

클래독은 플레쳐 형사부장과 함께 걸어나오면서 중얼거렸다.
「두 여자 말이 서로 다르니 도대체 어느 쪽을 믿어야 하지?」
「그 외국 여자가 또 거짓말을 한다고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제
경험으로 보아 외국인들은 거짓말을 예사롭게 하는 편이죠. 미치가 헤임
즈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건 확실한 듯합니다.」
「그럼 자네라면 헤임즈 부인을 믿겠다는 말인가?」
「별다른 혐의 사실이 없다면요.」
사실 클래독의 생각으로도 별다른 의심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단지 고집
스런 푸른 눈동자와 <그날 아침>이라고 자신있게 얘기했던 것을 제외하고
는.
클래독의 기억으로는 섬머 하우스에서의 대화가 오전인지 오후인지 물어보
지 않았다. 미스 블랙록이나, 배너가 젊은 외국인이 여비를 빌리러 왔던 사
실을 그녀에게 말했을지도 모르며 그래서 헤임즈는 <그날 아침>이라고 했
는지 모른다.
하지만 <섬머 하우스요?>하며 두려움이 깃든 목소리로 되묻던 그녀의 말
을 클래독은 아직도 새겨두고 있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좀더 두고보자고 마음먹었다.

(3)
목사관 정원은 아늑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 쬐고 있었다. 클래독 경감은
성 마틴 축제일인지 성 누가 축제일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런 아늑하고 푸근
한 날씨를 알고 있었다.
마침 어머니 모임에 가려던 번치가 클래독을 위해 의자를 갖다 주었다. 그
옆에는 미스 마플이 숄을 두르고 무릎 덮개를 한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햇빛, 조용한 분위기, 미스 마플의 뜨개질 바늘이 부딪히는 소리,
이 모든 것이 경감에게는 나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쪽에서는 악몽같은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가라앉아 있다가 차츰 높아져 결국은 공포로 뒤바뀌는, 흔히 꾸는 악몽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미스 마플은 이곳에 계시면 안 됩니다.」
순간 미스 마플의 뜨개질 소리가 딱 멈췄다. 그녀의 조용한 푸른 눈동자가
클래독을 바라보았다.
「경감님은 꽤 성실한 분이군요. 번치의 아버지―우리 교구의 목사님이시
자 학자였어요―와 어머니―이분도 영적으로 대단한 분이셨어요―는 모
두 나의 오랜 친구예요. 그러니 내가 메디넘에 와서 번치네 집에 며칠간
묵는다는 건 당연하지 않아요?」
「그렇긴 하지만…… 너무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저는 왠
지……그렇게 해야 안전할 것 같아서요.」
미스 마플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우리처럼 나이먹은 사람들은 늘 기웃거리고 다닌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지요. 세상 여기저기에 사는 친구들에 관해 묻고,
이러이러한 것을 아느냐, 하고 기웃거리죠. 누구누구의 딸의 결혼 상대자
를 알고 있느냐 하는 등 말이에요. 이런 것도 도움을 주거든요. 안 그래
요?」
「도움이 된다구요?」
경감은 시들하게 물었다.
「소문에 관한 것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죠. 그 점이 바로 당신이 염려
하는 게 아닌가요? 그리고 전쟁이후 세상이 많이 변했지요. 그 예로 치
핑 클렉혼을 보세요. 내가 살고 있는 세인트 메리 미드와 비슷한데 15년
전까지도 우리 마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어요. 큰 저택에 사는 밴트리
가족, 하트넬 가족, 플라이스 리들리 집안, 웨저비 집안…… 이 집안들의
부모,조부모, 숙부, 숙모들은 오래 전부터 그곳에 살았지요. 만일 누군가
그곳에 살기 위해 이사오면 자신들의 소개장을 가져오고, 이 고장 사람
들과 같은 연대에 소속해 있었던가 배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죠. 만일 누
군가 낯선 사람이 아무 연고도 없이 옮겨왔다가는 마을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완전히 알기 전까지는 사귀려들지도 않는답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어요. 마을이든 어떤 도시든 아무 연고도 없이 이
사하고 옮겨다니지요. 대저택은 팔리고 시골집은 개조되어 바뀌었어요.
그리고 모두 새로 이사온 사람들뿐이고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들
이 말하는 정도이지요. 그들은 세계 곳곳에서 왔어요. 인도, 홍콩,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빈민가, 그리고 기묘한 섬에서 말이죠. 그들은 웬만큼
돈을 모았기 때문에 은둔 생활을 하므로 누군지 신분을 파악할 수 없답
니다. 아시겠어요, 경감님? 이젠 누구나 비널리즈의 놋쇠 그릇을 가질 수
있고 인도의 요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도 있죠. 타올마너의 그림이나
영국의 교회와 도서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지요―미스 핀칠리피나
미스 마것로이드처럼 말이에요. 남프랑스에서도 옮겨올 수 있고, 동양에
서 남은 평생을 보낼 수 있죠.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평가를 건성
으로 흘리는 편이죠. 잘 아는 사람이니까 잘 대해주라는 편지를 받아야
만 대우해 주는 게 아니랍니다.」
그 사실은 분명하게 클래독을 압박해 왔다. 정말로 그는 깨닫지 못했던 사
실이다. 그들은 이주 증명서와, 사진도 지문도 없는, 다만 번호만 적혀 있는
그 카드로 멋지게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신분 증명서쯤은 조금만 힘쓰면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영국에서
전원생활을 연계해 주던 미묘한 연관이 샅샅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이제 도시 사람들은 이웃에 관심갖지 않으려고 한다. 시골에서조차 이웃
사람을 알려 하지 않는다.
기름친 문을 발견하고 클래독은 미스 블랙록의 거실에 이웃 사람으로 가장
한 누군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문에 미스 마플의 신상을 염려했
던 것이다. 그녀는 게다가 몸이 약했고 나이가 많으며 사람들 눈에 잘 띄었
던 것이다.
「그들의 신원을 조회할 수는 있습니다.」
클래독은 이렇게 말했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인도, 중국, 홍콩, 남프랑스…… 15년 전에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도 잘 아는 사람 중에 도시에서 갑작스럽게 죽은 사람들의 신분증을 훔
쳐내 시골로 오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신분 증명서를 사거나 위조하는 조
직이다.
물론 신원조회를 할 수는 있지만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냥 시간을 들
일 수만은 없다. 랜들 게들러의 미망인은 머지 않아 죽음에 임박해 있으니
까…….
클래독은 지치고 피곤함을 느꼈지만 햇빛에 어느 정도 가벼워진 마음으로
미스 마플에게 랜들 게들러와 핍과 에머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쌍둥이 이름입니다. 별난 이름이죠? 그들은 아마 유럽 어딘가에 어엿한
시인으로 살고 있겠지요. 어쩌면 그 둘다, 아니면 둘 중 하나가 이 치핑
클렉혼에 와 있을 수도 있지요.」
25세 정도에―누가 그들의 인상착의를 알고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혼
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조카 남매―아니면 육촌이라든가―미스 블랙록이 그들을 마지막
으로 본 것이 언제일까.」
미스 마플이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알아다 드리지요, 경감님.」
「아닙니다, 미스 마플. 이젠 그런 말씀 마십시오.」
「간단한 일이에요. 나라면 그리 눈에 띄지 않을 테니까요. 난 공식적인 직
업을 갖지 않았죠. 만일 잘못된다 해도 경계하지는 않을 거예요.」
핍과 에머…… 그는 그 이름에 정신이 뺏겨 있었다. 매력적이고 대담한 젊
은 남자와 차가운 눈길의 아름다운 여자…….
클래독이 말했다.
「48시간 안으로 알아내야 합니다. 지금부터 스코틀랜드로 떠나겠습니다.
게들러 부인이 입을 연다면 두 사람에 대해 상당한 수확이 있으리라 생
각합니다.」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미스 마플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미스 블랙록에게 조심하도록 일러두는 게 좋겠어요.」
「네, 이미 말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몰래 경계할 사람도 배치해 놓겠습니
다.」
클래독은 미스 마플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눈은 <위험이 숨어 있다면
경관에게 감시시켜 봐야 소용없어요>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클래독이 말했다.
「이건 분명히 기억해 두십시오. 나는 부인에게도 경고를 드렸습니다.」
「기억해 두지요, 경감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염려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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