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 예고살인 3

3학년2반 | 2022.02.17 08:06:12 댓글: 0 조회: 499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411



◎ 11장. 미스 마플의 방문 ◎

허먼 부인이 자기 집의 손님과 함께 차를 마시러 왔을 때 주인 레티샤 블
랙록은 굳은 표정이었으나 미스 마플과의 첫대면에서는 조금도 딱딱함이 없
었다.
그 노부인은 대단히 매력적이며 온화하고 친밀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도둑
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그 얘기에 열중해 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아요. 도둑도 아메리칸 스타일인가봐요. 나는 아
직도 구식 방법에만 신경을 쓰죠. 자물쇠를 열고 빗장을 여는 방법 말이
에요. 그런데 그들은 그것까지 뽑을 수 있어요. 시험해 보셨나요?」
미스 마플의 말에 블랙록은 조용히 대꾸했다.
「빗장 같은 것엔 그리 신경쓰지 않아요. 우리집에는 도둑맞을 만한 물건이
없답니다.」
「현관에 있는 사슬 말인데요, 하녀가 밖을 내다보려면 사슬이 걸린 채로
그 틈으로 확인할 수 있겠더군요.」
「미치는 종종 그랬어요.」
「강도극 때 몹시 놀라셨겠군요? 번치가 이야기해 주더군요.」
「난 정말 놀랬어요.」
번치가 말했다.
미스 블랙록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게 놀라운 일은 나도 처음이에요. 실수로 자신을 쏘다니, 천벌을 받
은 거예요.」
「요즘 도둑은 거칠기 짝이 없어요.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들어왔을까요?」
「아마 잊고 문을 잠그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미스 배너가 갑자기 소리쳤다.
「오, 레티! 깜빡 잊고 말하지 않았는데 그 경감이 오늘 아침에 이상한 걸
묻던 걸. 그는 쓰지 않는 문을 열어 보겠다고 하잖아? 서랍에서 열쇠를
찾아 열어 보니까, 글세 열쇠구멍에 기름이 칠해져 있었다는 거야.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미스 배너는 블랙록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한참 뒤에야 알아차리고
입을 벌린 채 말을 멈추었다.
「오, 레티―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너무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지?」
「괜찮아.」
미스 블랙록은 이렇게 말했지만 화가 난 표정이었다.
「클래독 경감은 그런 얘기가 누설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거야. 그가 이
집을 조사할 때 도라 네가 함께 있었는 줄은 몰랐어. 이해하겠지요, 허먼
부인?」
「물론이지요. 우리는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 제인 아주
머니? 하지만 그가 왜…….」
허먼 부인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미스 배너는 어쩔 줄 몰
라하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언제나 쓸데없는 소리만 지껄이고…… 오, 레티 난 왜 이렇게 천덕
꾸러기일까?」
미스 블랙록이 재빨리 가로막았다.
「아냐, 도라. 네가 있어서 난 마음이 든든해. 하긴 도라가 말하지 않아도
치핑 클렉혼에서는 금방 알려질 텐데.」
미스 마플이 끼어들었다.
「그렇고말고요. 사소한 것이라도 엉뚱한 경로로 퍼져나가죠. 하녀들을 통
해서 말이에요. 하긴 요즘엔 하녀가 있는 집이 많지는 않죠. 꼭 그들만이
아니라 파출부들은 여러 집을 다니면서 소문을 퍼뜨리기 마련이에요.」
「아, 알았어요! 그 문이 열린다면 누군가 어둠 속에서 몰래 빠져나가 강도
짓을 꾸밀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이 방에 있던 사람은 아니겠군요.
왜냐하면 범인은 로열 슈퍼에서 온 남자였으니까요. 혹시 그가 아니라고
한다면……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허먼 부인이 열띠게 말하고 나더니 생각에 잠긴 듯 말을 끊었다.
「그때의 사건이 이 방에서 일어났나요?」
미스 마플은 이렇게 묻고 나서 미안한 듯이 다시 덧붙였다.
「너무 호기심이 많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 흥미로운 일 아니예요? 신문
에 나옴직한 사건이죠. 그런데 사건에 대해 자세히 들어 보고 싶군요. 이
해해 주시겠어요, 미스 블랙록?」
그러자 허먼 부인과 미스 배너는 열을 내며 이야기했고 미스 블랙록은 이
따금 그들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한참 이야기중일 때 패트릭이 들어와 루디 셔트의 역을 맡아주었다.
「레티 아주머니는 저기 계셨어요. 입구 쪽에요. 아주머니, 거기 서 보세
요.」
미스 블랙록은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미스 마플은 그녀 뒷벽에 박힌 총알
자국을 보았다. 그녀는 놀라 소리쳤다.
「정말 운이 좋았어요!」
「손님들께 권하려고 담배상자를 집으려 했지요.」
미스 배너가 끼어들며 불평하는 투로 내뱉었다.
「사람들은 담배 피울 때 너무나 무신경해요. 도무지 조심하지 않는다니까
요. 평소에는 가구를 칭찬하면서 담배를 피울 땐 잊어버리나 봐요. 이것
보세요. 까맣게 탄 자국을요. 누군가 담배를 여기 놓았기 때문이에요.」
미스 블랙록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내 물건인데,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되잖아?」
「하지만 너무 훌륭한 탁자잖니, 레티.」
미스 배너는 친구의 물건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소중히 아꼈다. 허먼 부인
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지만 그런 점이 미스 배너의 가장 좋은 점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탁자로군요. 그 위에 있는 램프도 좋구요.」
미스 마플의 말에 미스 배너는 자신의 물건을 칭찬받는 양 또다시 떠들댔
다.
「멋지지요? 드레스덴 도자기에요. 한 쌍인데 다른 한 개는 손님용 방에 있
지요.」
「이 집안의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구나, 도라. 너는 나보다 물
건을 더 아끼는 것 같아.」
미스 블랙록의 말에 도라 배너는 몹시 얼굴을 붉혔다.
「좋은 물건을 아끼는 것뿐이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거부감이 담겨 있는 듯했고 어딘지 아쉬운 듯했다.
미스 마플이 끼어들었다.
「사실은 작은 물건이라도 각자에겐 소중한 거죠. 수많은 추억이 담겨 있
죠. 말하자면 사진처럼 말이에요. 요즘 사람들은 사진을 별로 추억으로
남겨두려 하지 않아요. 나는 아직까지도 내 조카들의 갓난 아이 때 사진
을 갖고 있답니다. 물론 그 뒤의 여러 사진들도 마찬가지예요.」
번치가 말을 받았다.
「아주머니는 저의 3살 때 사진도 갖고 계시죠. 폭스테리어종 개를 안고 눈
은 사팔뜨기처럼 뜨고 말이에요.」
미스 마플은 패트릭을 향해 말을 돌렸다.
「아주머니께서는 당신 사진을 많이 갖고 계시겠군요?」
패트릭이 말했다.
「하지만 우린 먼 친척이라서요.」
「네 엄마가 너의 아기 때 사진을 부쳐 준 적이 있었지. 그런데 어디론가
없어진 것 같구나. 너의 엄마가 너희들을 이곳으로 보내올 때까지 아기를
몇을 낳았는지, 또 이름은 뭐라고 하는지도 몰랐단다.」
미스 마플이 끼어들었다.
「날짜가 적혀 있지 않았나요? 요즘에는 어린 친족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
어요. 예전처럼 대가족이었을 때는 안 그랬는데 말이에요.」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내가 패트릭과 줄리어의 엄마를 마지막으로 본 게 30년 전 그녀의 결혼
식장에서였죠. 아주 아름다운 여자였어요.」
패트릭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자식들이 이렇게 잘생겼죠?」
줄리어도 한마디했다.
「아주머니는 아주 멋진 옛날 앨범을 갖고 계시더군요. 요전날 그 앨범을
보았어요.」
미스 블랙록은 한숨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그땐 좋았지.」
패트릭이 말했다.
「레티 아주머니, 너무 생각하지 마세요. 줄리어도 후일에 자신의 사진을
꺼내 보인다면 자신이 그렇게 생겼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거예요.」

번치는 미스 마플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물었다.
「무슨 의도로 사진 얘기를 꺼낸 거지요?」
「맞아. 미스 블랙록이 그 젊은이들은 이전에도 본 적도 없다는 사실이 흥
미로운 걸. 클래독 경감이 알면 무척 눈을 빛낼 거야.」

◎ 12장. 치핑 클렉혼의 아침 (1) ◎

(1)
에드먼드 스웨트넘은 정원의 땅을 고르는 롤러 위에 다소 위태로운 자세로
걸터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필리퍼.」
「안녕하세요?」
「바쁜가요?」
「그저 그래요.」
「뭘 하시는 겁니까?」
「보면 모르시겠어요?」
「아뇨. 난 정원일은 전혀 모르거든요. 흙장난 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겨울 상추를 찔러심고 있어요.」
「찔러심는다구요? 퍽 이상한 말이군요. 마치 찌른다는 말 같네요. 필리퍼,
찔러 꽂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사실 나도 얼마 전에 배웠는데
그때까진 전문적인 경기에서만 쓰이는 줄 알았어요.」
필리퍼는 차갑게 대꾸했다.
「내게 무슨 볼일이 있나요?」
「그래요. 당신을 보고싶은 거지요.」
필리퍼는 그를 흘깃 쏘아보았다.
「이런 식으로 오지 마세요. 루커스 부인은 그런 걸 아주 싫어하니까요.」
「그녀는 당신의 수행자를 허락하지 않을까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둬요!」
「수행자―썩 좋은 표현인 걸. 지금의 나를 적절하게 나타낸 말입니다. 공
손하게 먼 거리에서 더욱이 어디까지나 쫓아가는 거죠.」
「제발 저리 가주세요.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천만에요. 나는 볼일이 있어요. 오늘 아침 루커스 부인이 우리 어머니에
게 전화를 걸었더군요. 여기에 호리병박이 많다구요.」
에드먼드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래요, 수없이 많아요.」
「그러니 벌꿀과 바꾸지 않겠느냐고 하던 걸요?」
「그건 불공평한 교환이군요. 요즘은 호리병박이 남아 돌아가서 잘 팔 수
없어요.」
「알고 있어요. 그래서 루커스 부인이 전화를 걸어온 거죠. 지난번에는 탈
지 우유와 양상추를 교환했는데 양상추는 시기가 좀 일렀기 때문에 1실
링쯤 할 때니까요.」
필리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드먼드는 주머니에서 벌꿀 한 병을 꺼
냈다.
「구실이죠. 만일 루커스 부인이 나와서 화를 내더라도 나는 호리병박을 가
지러 온 셈이니까 당신의 시간을 빼앗는다고 할 수는 없지요.」
「알았어요.」
에드먼드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테니슨의 시를 읽어본 적이 있나요?」
「없어요.」
「일거 봐요. 요즘 부쩍 테니슨의 시를 많이 읽더군요. 저녁에 라디오를 틀
어도 트롤롭을 듣지 않아도 돼요. 그의 작품은 너무 애정에 치우쳐요. 물
론 트롤롭의 작품도 읽긴 하지만 좋아할 만큼은 못되요. 하지만 테니슨은
좋습니다. <모드>를 읽어 보셨나요?」
「오래 전에 한번.」
그는 조용히 시의 한 구절을 읊었다.

티가 없는 실패작
차갑고 굳어진 견고함
아름다울 만큼 무표정함!

「바로 당신을 두고 하는 소리예요, 필리퍼.」
「별로 좋지 않군요.」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를 사로잡은 것처럼 모드도 그 가엾은 젊은이
를 사로잡았을 겁니다.」
「어리석게 굴지 말아요, 에드먼드.」
「필리퍼, 당신의 인습에 얽매인 교양 뒤에는 어떤 마음을 감추고 있는 거
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 건가요? 행복합니까? 비참해요? 아
니면 두려운가요? 틀림없이 뭔가 있기는 있을 텐데 말입니다.」
필리퍼는 조용히 말했다.
「그것은 내 일이에요.」
「나는 당신의 말을 듣고 싶어요. 당신의 냉정한 침묵 속에 무엇이 감추어
져 있는지 알고 싶단 말입니다. 내겐 알 권리가 있소. 있고 말구요. 나는
사랑 따위를 하려는게 아닙니다. 그저 조용히 앉아 글을 쓰고 싶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글을 말입니다. 인간은 모두 비참한 생활의
문제를 피해가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지요. 번 존즈의 생애에 대해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필리퍼는 흙손질을 멈추고 찌푸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번 존즈에게 뭘 배웠단 말인가요?」
「전부예요. 라파엘 이전의 것을 읽어 보면 생활양식을 알게 될 거예요. 그
들은 마음껏 속어를 쓰고 활기가 있지요. 그리고 호기있게 웃고 농담하고
모든 게 아름답고 멋있지요. 하지만 그들이 우리보다 행복하고 건강했던
것도 아니고 우리가 그들보다 더 비참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생활양식이란 것이죠. 전쟁이 끝난 뒤 우리는 섹스만을 찾았죠. 하지만
결과는 별게 아니란 겁니다. 왜 이런 말을 지껄이는지 압니까? 나는 당신
과 나의 이야기를 하려는 겁니다. 당신이 도와 주려 하지않기 때문에 자
꾸만 주저앉아 버리는군요.」
「도대체 나에게 뭘 원하는 거예요? 」
「말해줘요! 당신의 남편에 관해서! 당신은 그를 사랑했소? 그런데 그가 전
쟁터에서 죽자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린거요? 그렇습니까? 좋아요. 당
신은 그를 사랑했군요. 그리고 그는 죽은 거죠. 하지만 많은 여자들이 남
편을 잃었어요. 그 중에는 남편을 끔찍이 사랑했던 여자도 있어요. 그녀
들은 술집에서 그런 얘기를 털어놓고 울며 견딜 수 없어 함께 자자고 하
는거요. 그러면 어느 정도 위로를 받는 겁니다. 당신은 젊어요―대단히
아름답구요. 게다가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자, 당신의 남편 이
야기를 해줘요.」
「말할 게 없어요. 우리는 그냥 만나 결혼한 것뿐이에요.」
「아주 젊었을 때인가 보군요.」
「너무 어렸어요.」
「그와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나요? 말해 봐요, 필리퍼.」
「말할 게 없다니까요. 우리는 결혼했고 모두들 그렇듯이 행복하게 살았지
요. 해리가 태어났고 로널드는 전쟁에 나갔고―그는 이탈리아에서 죽었어
요」
「해리가 있잖습니까.」
「네, 그애가 있지요.」
「난 해리를 좋아해요. 정말 좋은 아이지요. 물론 그애도 나를 잘 따릅니다.
어때요, 필리퍼. 나와 결혼해 주겠소? 당신은 정원일을 계속하고 나는 글
을 쓰고 말입니다. 그리고 주말이면 일을 그만두고 즐겁게 지내는 겁니
다. 우리 어머니와는 함께 살지 않아도 되고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을
그냥 못 본체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 난 아직 부모에게 기대어
사는 형편이고 글도 보잘 것 없고 그리고 또 말도 많다는 단점이 있지요.
어때요, 결혼해 주겠소?」
필리퍼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커다란 안경을
쓴 젊은 사나이를 그녀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안돼요.」
필리퍼가 말했다.
「정말로?」
「절대로 않돼요.」
「왜죠?」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그게 이유입니까?」
「당신은 정말 모르고 있어요.」
에드먼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군요. 잘 모르고 있어요. 하지만 도대체 누가 당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건가요, 내 사랑…….」
그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듯 리듬있게 말을 이었다.

넓고 넓은 정원의 종달새
황혼이 지네(지금은 오전 11시이지만)
필, 필, 필
우짖노라, 부르고 있네

「아무래도 당신 이름은 리듬에 맞지 않아요. 꼭 만년필에게 바치는 노래
같지 않아요? 다른 이름은 없어요?」
「조안이라고 해요. 빨리 저리 가요. 루커스 부인이 오고 있어요.」
「조안, 조안, 조안. 이 이름이 좀 낫군요. 하지만 썩 좋지는 않은데요. 조
안, 기름 투성이 남비를 엎었도다. 멋진 결혼생활이 될 수 없겠군요.」
「루커스 부인이에요―.」
「빌어먹을. 시든 호리병박을 줘요.」

(2)
플레쳐 형사부장은 리틀 파독스에 머물러 있었다.
그날은 미치가 비번이어서 그녀는 언제나처럼 11시 버스로 메디넘 웰즈에
갔다. 플레쳐는 미스 블랙록에게 그 집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도록 양해를
얻었다. 그녀와 도라 배너는 마을에 나가고 없었다.
플레쳐는 재빠르게 일을 시작했다. 문에 기름을 발라두고 전기가 나가자 거
실을 빠져나가려고 누군가 계획했던 것이다. 미치는 거실 밖에 있었으니 그
문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 거실을 빠져나간 사람이 누구인가? 이웃사람도 혐의에서 빼는 게 좋
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문에 기름을 치고 살인을 계획할 기회가 없었다.
패트릭과 줄리어 남매, 필리퍼 헤임즈, 그리고 도라 배너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패트릭 남매는 밀체스더에 가 있고 필리퍼 헤임즈는 일하는 중이었다.
플레쳐는 아무런 방해없이 수색할 수 있지만 집안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나
오지 않았다.
전기에 대해 전문가인 플레쳐도 배선이나 전기 장치만을 보고 어떻게 불이
나가게 했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침실까지 샅샅이
조사했지만 짜증날 정도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필리퍼 헤임즈의 방에는 맑은 눈빛을 가진 어린 아이 사진과 그 아이의 갓
난 아기 때 사진, 그리고 아이가 학교에서 보내온 편지 한뭉치, 극장표 두어
장이 있을 뿐이었다.
줄리어의 방에는 남프랑스에서 찍은 사진들이 서랍 가득 들어 있었다. 미모
사꽃들이 배경을 깔린 해수욕장 사진들이었다.
패트릭의 방에는 해군시절이 기념품들이 있었고, 도라 배너는 사소한 물건
들을 갖고 있을 뿐 그리 수상한 점은 없었다.
그래도 플레쳐는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 중에 누군가가 저 문에 기름을
칠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느 재빨리 계단 쪽으로 나가 아래픙을 내려
다 보았다.
스웨트넘 부인이 홀을 가로질러 오는 참이었다. 그녀는 바구니를 든 채 거
실을 들어다 보고는 홀을 가로질러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이
번에는 빈손으로 식당을 나왔다.
플레쳐가 밟고 있는 마루가 삐걱거리는 바람에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소리
쳤다.
「누구세요? 미스 블랙록?」
「아닙니다, 스웨트넘 부인.」
그녀는 가벼운 비명을 질렀다.
「어마, 깜짝 놀랐어요. 도둑이 들어왔는 줄 알았어요.」
플레쳐는 층계를 내려왔다.
「이 집은 도둑에 대비하지 않는군요. 누구든 도둑처럼 드나들 수 있나
요?」
스웨트넘 부인이 설명했다.
「나는 마르멜로를 가져왔어요. 미스 블랙록은 마르멜로 젤리를 만들고 싶
어하는데 이 집에는 마르멜로 나무가 없거든요. 식당에 두고 왔어요.」
그녀는 미소를 짓더니 다시 말했다.
「아, 내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고 싶은 거죠? 저 옆문으로 들어왔어요.
우리는 서로 자유로이 드나들지요. 어두워질 때까지는 아무도 문을 잠그
지 않으니까요. 모처럼 물건을 갖고 왔다가 도로 가져간다면 우습잖아요?
벨이 울리면 곧 하인이 달려나가는 옛날과는 다른 때니까요.」
스웨트넘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도에서는 하인을 열 여덟 명이나 두고 살았지요. 유모를 빼고는 말이에
요.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는 언제나 세 명을 두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언
제나 요리사도 못 둘 정도로 가난하다고 여기셨지만 말이에요. 불평할 것
은 못되지만 어쨌든 그때보다 불편한 것은 사실이에요. 아무튼 탄광부들
은 석탄캐는 흉내만 내고 시금치를 재배할 줄도 모르면서 정원사가 되려
고 하니 점점 힘든 세상이지요.」
그녀는 얘기하면서 재빨리 문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너무 떠들었군요. 바쁘실 텐데 시간을 뺏었나 봐요. 이제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겠지요?」
「왜죠, 스웨트넘 부인?」
「여기서 당신을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요. 또 사건이 일어났나 해서
요. 참, 미스 블랙록에게 마르멜로를 갖다 놓았다고 전해 주세요.」
스웨트넘 부인은 나갔고 플레쳐는 마치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지금까지
문에 기름을 칠한 사람은 이 집 사람일 것이라고 가정해 왔다. 하지만 그 생
각이 틀렸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외부사람이 미치가 버스를 타고 외출하고 레티샤 블랙록과 도라 배너가 이
집을 비울 때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그런 기회라면 쉽게 있다.
플레쳐는 그날 밤 거실에 모여 있던 어느 누구도 혐의자에서 제외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3)
「마것로이드.」
「왜, 핀치?」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
「무슨 생각?」
「나의 뇌세포가 움직이고 있어. 그날 밤의 사건은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의심스럽다니?」
「그래. 자, 머리칼을 올리고 인두를 들어 봐. 그리고 권총을 든 강도를 흉
내내 봐.」
「어머나!」
미스 마것로이드는 불안스럽게 말했다.
「괜찮아. 무섭게는 않할 테니. 자, 부엌문 쪽으로 걸어 봐. 너는 이제 도둑
이 되는 거야. 부엌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위협해 봐. 그리고 회중전등
을 켜고!」
「이렇게 환한 대낮에?」
「상상으로 해보라고, 마것로이드. 자, 불을 켜!」
마것로이드는 어색한 동작으로 시키는 대로 했다. 한쪽 팔로 인두를 세워
잡았다.
미스 핀칠리피가 계속 말했다.
「자, 시작해 봐.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헬미어 역을
했던 것을 생각해.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서 해 보라고. 『손들어!』그 말
만 하면 돼. 『손을 들어 주세요』라고 하지 말고.」
미스 마것로이드는 순순히 회중전등과 인두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그녀는
오른 손에 회중전등을 들고 문손잡이를 돌린 다음 왼손으로 전등을 바꿔 들
고 소리쳤다.
「손들어!」
그녀는 가늘게 소리치고 난처한 듯 덧붙였다.
「너무 어려워, 핀치.」
「어째서?」
「문 말이야. 손을 놓으면 자꾸 닫히잖아. 두 손에 물건을 들고 있고.」
「맞아!」
미스 핀칠리피는 작게 소리쳤다.
「리틀 파독스의 문도 자동문이야. 그래서 언제나 열어 놓은채로 있는 걸
못봤어. 그래서 레티 블랙록이 중심가의 엘리어트의 가게에서 두꺼운 유
리로 된 문받침대를 사온 거야. 내가 그 가게에서 사려고 했을 때 그녀가
먼저 사가고 말았어. 내가 보기좋게 값을 깎아 엘리어트에게서 8기니에서
6파운드 10실링까지 깎아 놓았었거든. 그때 블랙록이 가로채 사버린 거
야. 그렇게 아름다운 받침대를 본 적이 없어. 너도 그렇게 큰 유리 물건
은 못 보았을 거야.」
미스 마것로이드가 말했다.
「아마 그 도둑은 문을 열어 놓기 위해 그 받침대를 썼을 거야.」
「상식적으로 그가 어떻게 했겠니? 우선 문을 열어젖히고 <실례>하고 말
하고 문 받침대를 놓은 뒤 『손들어!』하고 위협했을까? 그럼, 어깨로 문
을 받쳐 봐, 어때?」
「아주 불편해.」
「그렇군. 권총, 회중전등을 든 채로 문을 열어 놓기는 힘들겠구. 그럼 도대
체 어떻게 했을까?」
미스 마것로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머
리좋은 친구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미스 핀칠리피가 입을 열었다.
「그는 분명히 권총을 갖고 있었을 거야. 그는 총을 쏘았으니까. 그리고 회
중전등도 갖고 있었지. 거기에 있는 사람 모두 보았어. 이스터브룩 대령
이 지루하게 얘기하는 인도의 로프 요술에 걸린 게 아니라면― 누군가
그 도둑을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는 말이 되는 거야.」
「하지만 누가?」
「글세, 너라도 할 수 있었어, 마것로이드. 내 기억으로는 전기가 나갔을 때
너는 바로 그 사람 뒤에 서 있었으니까.」
미스 핀칠리피는 큰소리로 웃었다.
「유력한 용의자야, 마것로이드. 그렇지만 누가 그렇게 생각하겠어? 자, 그
인두를 이리 줘 봐. 진짜 총이 아니길 다행이군. 자, 이번엔 네가 자신을
쏠 차례야.」

(4)
이스터브룩 대령이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야. 정말 이상한 일이야. 여보, 로라.」
「네?」
「잠깐만 이 방으로 와 봐요.」
「무슨 일이죠?」
이스터브룩 부인이 열린 문 앞으로 나타났다.
「전에 당신에게 권총을 보여 주었는데, 기억나오?」
「네, 기억해요, 아치. 무시무시한 검은색 권총 말이죠?」
「그래. 독일군의 기념품이요. 분명히 이 서랍 속에 넣어 두었는데.」
「그래요.」
「그런데 그게 없어졌소.」
「어머나, 정말 이상하군요.」
「당신 혹시 만지지 않았소?」
「아뇨. 그런 무서운 물건을 어떻게 만져요?」
「그 아주머니―이름이 뭐라더라?―그녀가 만지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을 거예요. 배트 부인은 그럴 사람이 아니예요. 그래도 물어 볼
까요?」
「아니오. 가만히 덮어 두는 게 좋겠어. 내가 당신에게 보여준게 언제였
지?」
「글쎄요. 한 일주일쯤 됐어요. 당신이 칼라와 세탁물에 대해 불평하시면서
이 서랍을 끝까지 열었잖아요. 그때 서랍 깊숙이 그게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뭐냐고 물었지요.」
「맞아. 일주일 전이었다고? 날짜를 기억하오?」
이스터브룩 부인은 눈을 감고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다.
「기억나요. 토요일이었어요. 우리는 영화보러 가려다가 그만 두었잖아요.」
「그날이 분명한가? 그 전날 아니었소? 수요일? 목요일? 아니면 전주일이
라던가.」
「아니예요. 난 분명히 기억해요. 30일 토요일이었어요. 그 사이에 많은 사
건이 일어나서 오래된 것 같아도, 미스 블랙록의 집에 강도 사건이 일어
난 다음날이었거든요. 그 권총을 보았을 때 전날 밤 일이 생각나서 분명
히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왜 그러죠, 아치?」
「만일 권총이 그 사건이 있던 날 이전에 없어졌다면 스위스 청년의 총이
내 것일지도 모르잖소.」
「하지만 그가 어떻게 당신이 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겠어요?」
「그런 범죄단은 어디에 누가 사는가 하는 것쯤은 쉽게 알아내지.」
「당신은 아는 것도 많군요, 아치.」
「그런 경우를 한두번 경험했거든. 그 사건 이후에 당신이 분명히 권총을
보았다면 그것으로 됐소. 그 스위스 청년이 쏜 것은 절대로 내 것이 아니
야, 그렇지?」
「물론이죠.」
「이제야 마음 놓았소. 그 일로 인해 하마터면 경찰에 불려갈 뻔했는데 말
이오, 그들은 끈질기게 캐물을 것이고 나는 그곳에 묶여 있어야 할 거야.
나는 총기 소지 허가증이 없으니까. 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규칙 따위는
잊어버리거든. 나는 그것을 무기가 아니라 기념물로 간직하고 있었거
든.」
「알아요.」
「그런데 그 권총이 어디로 없어진 걸까?」
「아마 배트 부인이 치웠을 거예요. 그녀는 정직한 사람이지만 그 사건 이
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집안에 총을 두어야겠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추궁해 봐야 솔직히 대답하지 않을 테고, 달라고 하지도 않겠어요. 그래
봐야 화를 내게 할 뿐이죠. 그렇게 되면 안 되죠. 이렇게 큰집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거든요.」
「그렇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겠소.」
이스터브룩 대령이 말했다.



◎ 13장. 치핑 클렉혼의 아침 (2) ◎

미스 마플은 목사관을 나와 시내로 이어진 작은 샛길을 내려갔다. 그녀는
줄리언 허먼 목사의 물푸레나무 지팡이를 짚고 총총히 걸었다.
그녀는 레트 카우와 푸줏간을 지나 엘리어트의 골동품 가게 쇼윈도를 들여
다보느라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 쇼윈도는 블루버드라는 찻집과 보기좋게 연결되어 있는데, 자가용을 가
진 부자가 <홈 메이드 과자>라는 맛좋게 보이는 과자와 커피를 먹을까 하
고 그곳에 멈추어 서면 멋지게 설계된 엘리어트의 쇼윈도가 시선을 끌게 되
어 있는 것이다.
활모양으로 구부러진 쇼윈도 안에 엘리어트는 온갖 물건들을 장식해 놓았
다.
완벽한 와인쿨러 위에 두 개의 워터포트 글라스, 그리고 섬세하게 짜여진
호도나무 책상이며 또 싸구려 노커, 이상한 인형들과 이가 빠진 드레스덴
도자기, 그을린 빛깔의 구슬 목걸이 두 개, 그리고 <테임브리지 웰즈가 보냄
>이라는 서명이 있는 컵,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은제품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미스 마플이 넋을 잃고 쇼윈도를 들여다보자, 늙은 거미가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평가하듯 엘리어트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목사관에 살고 있는 그 부인이 <데임브리지 웰즈가 보냄>의 매력에
걸려 들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때 도라 배너가 블루버드로 들어가는 모습
이 미스 마플의 눈에 띄었다. 미스 마플은 쌀쌀한 날씨에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너덧 명의 여자들이 아침 쇼핑을 나왔다가 즐겁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바깥에서 어두컴컴한 실내로 들어왔기 때문에 미스 마플은 눈을 깜박이며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바로 곁에서 도라 배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미스 마플. 여기 앉으세요. 난 혼자에요.」
「고마와요.」
미스 마플은 각이 진 푸른 의자에 앉았다.
「정말 바람이 차가와요. 난 다리에 류머티즘이 있어서 내내 시달린답니
다.」
미스 마플이 투덜거렸다.
「그러세요? 나도 1년 전부터 좌골 신경통을 앓는 바람에 고통을 받았지
요.」
분홍색 옷을 입은 불친절해 보이는 소녀가 하품을 삼키며 커피와 케잌을
주문받으러 왔다.
미스 배너가 속삭였다.
「이 집 케잌은 알아준답니다.」
미스 마플이 말했다.
「요전날 미스 블랙록 집에서 나오다 보았던 멋진 여자 있잖아요. 그 여자
에게 관심이 있어요. 그녀는 정원 일을 한다고 했는데, 하인즈라고 하던
가…….」
「아, 필리퍼 헤임즈에요. 우리와 함께 있죠. 좋은 여자에요. 말이 없고, 전
형적인 숙녀랍니다.」
「그래요? 난 인도에 있던 기병대의 헤임즈 대령이란 사람을 안답니다. 혹
시 그녀의 아버지가 아닐까요?」
「하지만 그녀는 헤임즈 부인이에요. 미망인이지요. 남편은 이탈리아에서
죽었다는군요. 그러니 남편의 아버지인지도 모르겠군요.」
미스 마플은 은근하게 말을 이었다.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것 같더군요. 그 키 큰 남자하고 말이에요.」
「패트릭 말인가요?」
「아니, 안경을 쓴 젊은 남자 말이에요. 전에 얼핏 본 듯한데.」
「에드먼드 말씀이군요. 쉬! 저기 구석자리에 어머니인 스웨트넘 부인이 계
세요. 글쎄요, 난 확실히 모르는 일이라……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생
각하세요? 에드먼드는 괴상한 남자예요. 이따금 불안한 말을 하곤 하죠.
사람들은 그가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말이에요.」
미스 배너는 그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배웠다고 전부는 아니지요. 자, 커피가 나왔군요.」
퉁명스런 점원이 덜그럭거리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당신은 미스 블랙록과 같이 학교에 다녔다던데 정말 친했겠군요.」
「네, 그래요. 옛 친구 중에 그녀만큼 생각해 주는 사람도 없어요. 그 시절
이 아득한 옛날 같군요. 즐거웠던 소녀시절―그땐 모든 것이 슬펐답니
다.」
미스 마플은 무엇이 그리도 슬펐을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리고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인생은 정말 힘든 거예요.」
미스 배너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중얼거렸다.
「심한 고통을 견디자, 난 언제나 이 구절을 생각하곤 합니다. 참다운 인내,
이런 것은 보상받아야 해요. 미스 블랙록이 아무리 큰 보상을 받는다 해
도 크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진실로 그런 보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
거든요.」
미스 배너의 말에서 미스 블랙록에게 엄청난 유산이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내포한 것처럼 느껴졌다.
미스 마플이 말했다.
「돈이야말로 고생스런 인생을 평탄한 곳으로 이끌어 주죠.」
미스 마플의 말은 도라 배너에게 또다른 생각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돈! 돈 때문에 고생해 보지 않은 사람은 돈이 어떤 것인지, 돈이 없다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해요.」
미스 마플은 백발의 머리를 끄덕였다.
미스 배너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빠르게 말했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하지요―꽃이 없는 테이블에서 식사하느니 차
라리 음식이 없고 꽃만 있는 테이블이 낫다고 말이죠. 하지만 그런 사람
이 정말 배고픈 게 뭔지 알까요? 빵과 고기, 한조각의 마가린. 그들은 날
마다 고기 요리 한 접시와 야채 두 접시를 기다리지요. 그리고 누더기와
해진 옷을 가리면서 말이에요. 일자리를 구하려고 해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퇴짜맞고 어쩌다 일자리를 구해도 힘에 부쳐 견딜 수가 없어요.
그리고는 다시 살던 곳으로 되돌아오지요. 집세, 항상 그놈의 집세가 문
제랍니다. 집세를 지불하지 못하면 거리로 쫓겨나는 거예요. 요즘 형편이
나아졌다고 해도 양로연금 갖고는 살아갈 수도 없어요.」
「그렇지요.」
미스 마플은 조용히 말하고 미스 배너의 흥분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레티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우연히 신문에서 그녀의 이름을 보았거든
요. 밀체스터 병원에서 식사를 제공받고 있을 때였어요. 신문에 레티샤
블랙록이란 이름이 있었어요. 그것을 보는 순간 옛생각이 났겠지요. 벌써
여러 해 동안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었지요. 알다시피 그녀는 대단한
부자인 게들러의 비서였어요. 그녀는 똑똑했지요. 출세한 편이었죠. 나는
그녀가 나를 기억할 테고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소녀시절도 함께
보냈고 여학교도 같이 다녔지요. 소꿉친구는 결코 잊지 않는 법이랍니다.
그러나 편지로 도움을 청할 그런 사이는 아니었지요.」
도라 배너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런데 레티가 내게 와서 나를 데리고 가주었어요. 일손이 필요하다면서
요. 난 놀랐어요. 고맙기도 했구요. 신문기사에 실린 그녀의 이야기는 모
두 잘못된 거였어요. 그녀는 정말 친절했어요. 게다가 정도 많아요. 나는
옛정을 생각하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열심히 일하리라 마음먹었죠.
정말이에요. 지금도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늘 실수만 하고, 깜박 잊어버
리고 쓸데없는 소리만 지껄인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참아요. 고맙게도
내가 꼭 필요하다고 말해 주는 거에요. 정말 친절해요. 그렇지 않나요?」
미스 마플은 부드럽게 대꾸했다.
「정말 그렇군요. 친절한 사람이에요.」
「내가 리틀 파독스에 온 뒤로 만일 미스 블랙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나 하고 곧잘 걱정을 했어요.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어
느날 뜻밖에도 그녀는 나에게 얼마간 연금을 남겨놓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내가 매우 소중히 여기는 가구도 말이에요. 나는 그 가구들을 무
척 조심스럽게 다루는데 다른 사람은 그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
는다더군요. 그 말이 맞는다 해도 난 뜨거운 글라스를 탁자 위에 놓아
자국을 낸다던가 하는 일은 참을 수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지독히 습관
이 나빠요. 나도 그리 바보는 아니랍니다.」
미스 배너는 계속해서 말했다.
「레티가 간혹 부담스러워 하는 때가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이름은 밝히
지 않겠어요―그녀를 이용해요. 미스 블랙록은 사람을 너무 쉽게 믿어
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미스 마플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은 것 같았는데.」
「아네요. 정말 그래요. 당신과 나는 세상을 아는 편이죠. 하지만 미스 블
랙록은…….」
미스 배너가 고개를 저었다.
대자본가의 비서로 일했다면 미스 블랙록도 세상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미
스 마플은 생각했다. 도라 배너의 말뜻은 레티샤 블랙록이 부담스러운 것을
피해 살아왔다는 것이겠지. 그런 생활이란 인간의 심연에 대해 알지 못한다
는 의미일 것이다.
「패트릭은요!」
깜짝 놀랄 정도로 미스 배너는 갑작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아마 두 차례는 될 거에요. 쪼들리는 내색을 하고 그녀로부터 돈을 받아
쓰지요. 블랙록은 너무 마음이 좋아요. 그래서 내가 충고했더니 『그 아
이는 젊어. 뭐든지 하고 싶을 때야』라고 말하더군요.」
「그건 맞아요. 더구나 잘생긴 젊은이라면 더욱 그렇겠죠.」
도라 배너가 말했다.
「마음이 아름다우면 모습 또한 아름답다―하지만 패트릭은 사람을 우습게
알아요. 여자들과 놀러다니고 나는 놀림감밖에 안 돼요. 사람에겐 감정이
있다는 것을 모르나 봐요.」
미스 마플이 말했다.
「젊은 사람들은 그런 것가지 신경쓰진 못하죠.」
미스 배너는 갑자기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나직이 말했다.
「이런 얘기 다른 사람에겐 하지 마세요. 그런데 난 패트릭이 이번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답니다. 그는 이전부터 그 젊
은이를 알고 있었을 거에요. 줄리어도 알고 있었겠죠. 용기를 내어 미스
블랙록에게 이런 얘기를 비추었는데 바보 같은 소리라고 일축해 버렸어
요. 당연한지도 모르죠. 그녀의 육촌이며 어쨌든 친척이잖아요. 그 스위
스 젊은이가 자살한 거라면 패트릭도 도의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
까요? 패트릭이 그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말이에요. 모든 일이 복잡해요.
모두들 거실의 문 얘기를 하더군요. 게다가 경감님께서 문에 기름을 쳤
다고 말했는데, 내 눈으로 보기로는…….」
도라 배너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미스 마플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난처하시겠군요, 미스 배너.」
동정하듯 말하고 미스 마플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경찰의 눈을 속이려고 하지는 않겠지요?」
도라 배너가 소리쳤다.
「그래요. 나는 밤에도 걱정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요…… 일전에 정원
에서 패트릭과 마주쳤어요. 나는 달걀을 찾고 있었어요―암탉이 아무데
나 알을 낳거든요. 그런데 그는 깃털과 컵을 들고 있었어요―기름이 담
긴 컵을요. 그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이게 왜 여기 떨어져 있을까
요』하더군요. 그는 워낙 꾀가 많은 애라서 그때도 아마 둘러댄 걸 거예
요. 만일 거기에 있다는 걸 미리 알지 않았다면 어떻게 찾아냈겠어요?
나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요. 그래야죠.」
「하지만 난 그애를 흘끔 노려보았지요.」
미스 배너는 칙칙한 붉은 빛이 도는 케잌을 집어 그것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다른 날이었는데, 그가 줄리어와 이상한 얘기를 나누는 것을 우
연히 들었답니다. 그들은 서로 다투는 것 같았어요. 패트릭이 『네가 그
런 일에 관계하다니!』해서요. 그러나 줄리어가―그녀는 퍽 침착한 아가
씨에요―『그럼 어떻해야겠어?』하더군요. 그때 내가 밟고 있던 마루가
삐걱거리는 바람에 그들이 나를 발견했지요. 나는 『너희들 싸우는구
나?』하고 웃어넘기려 했어요. 그러자 패트릭이 말하기를 『줄리어에게
암시장에서 손을 떼라고 경고하는 참이었어요』그러더군요. 서슴지 않고
술술 말했지만 나는 그런 얘기를 주고받은 게 아니란 걸 알지요. 그날
밤 틀림없이 패트릭이 거실 전 등을 조작해 놓았을 거예요. 왜냐하면 거
실에 있던 것은 여자 목동이였지 남자 목동이 아니란 걸 똑똑히 기억하
거든요. 그런데 다음 날…….」
그녀는 갑자기 말을 뚝 멈추며 얼굴을 붉혔다. 미스 마플이 뒤돌아보니 미
스 블랙록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녀는 막 들어오던 참이었다.
「커피와 소문거리군, 미스 배너.」
미스 블랙록은 나무라는 투로 말하고 미스 마플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미스 마플? 날씨가 꽤 쌀쌀하군요.」
미스 배너가 황급히 변명을 둘러댔다.
「배급 이야기를 하던 참이야. 항상 불규칙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말이
야.」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허먼 부인이 블루버드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커피시간에 늦었나요?」
미스 마플이 말했다.
「괜찮아. 앉아서 마셔.」
미스 블랙록이 배너를 흘깃 보며 말했다.
「우린 이제 가봐야겠어요. 쇼핑을 마쳤니, 배너?」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초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래, 레티. 돌아가는 길에 약방에서 아스피린과 물집에 바르는 연고를
사면 돼.」
그들이 나가고 블루버드의 문이 닫히자 번치가 물었다.
「무슨 말을 하셨나요?」
미스 마플은 그녀가 주문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말했다.
「가족간의 결속이란 대단한 거지. 정말 대단해. 번치도 그 사건을 기억해?
난 확실히는 기억 못하지만 남편이 아내를 독살하려던 사건이 있었지.
술잔에 넣어서 말리야. 그런데 법정에서 그 딸이 자기가 어머니의 술잔
을 반쯤 마셨다고 증언해서 아버지를 구해 주었지. 그 뒤 딸은 소문인지
모르지만, 아버지와 평생 말도 하지 않고 함께 살지도 않았대. 물론 아버
지와 조카는 다르지만 어쨌든 자신의 혈연이 교수형에 처해 진다면 누군
들 가만히 있겠어?」
「물론이죠.」
번치는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미스 마플은 의자에 깊숙이 기대며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어딜 가나 비슷하군.」
「저는 누구와 닮았지요?」
「번치는 번치를 닮았지. 특히 누구와 닮았다고 생각나진 않지만…… 그렇
군. 그녀를 빼놓는다면.」
「그녀라니요?」
「우리집에 있던 하녀를 생각했지.」
「제가 하녀를 닮았다구요?」
「아니, 그녀가 그랬지. 그녀는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차려놓고 부엌 칼
과 테이블 나이프를 혼동하는거야. 이건 오래된 얘기지만 그녀는 한 번
도 모자를 똑바로 쓴 적이 없었지.」
번치는 재발리 손으로 모자를 매만졌다.
「그리고 또 다른 건 없나요?」
「그래도 나는 그녀가 즐겁게 집안 일을 하고 나를 곧잘 웃겨주어서 그냥
집에 두었지. 그리고 직선적으로 말하는 게 좋았거든. 어느날 그녀는 내
게 와서 『잘은 모르겠지만 플로리가 의자에 앉은 모습을 보면 꼭 결혼
한 여자 같아요』하더군. 사실 그때 플로리는 임신중이었거든. 상대는 예
의바른 이발사 조수였지 다행히도 내가 그와 얘기를 나누어 그들은 마침
내 행복한 가정을 꾸밀 수 있었지. 플로리는 아주 참한 아가씨였지.」
「그 여자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나요? 그 하녀 말이에요.」
번치가 물었다.
「아니, 그녀는 침례교 목사와 결혼해서 아이 셋을 낳았어.」
「어머나, 나와 똑같군요. 난 에드워드와 수잔밖에 낳지 않았지만요.」
번치는 잠시 말을 끊고 잠시후에 다시 물었다.
「제인 아주머니, 지금 누구를 생각하세요?」
「많은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세인트 메리 미드 생각도요?」
「응, 지금은 엘러튼 간호원을 생각했어. 친절한 여자였지. 그녀는 어떤 노
부인을 정성껏 보살폈어. 그런데 그 노부인이 죽자 다른 노부인을 간호
했는데 그 부인도 세상을 떠났지. 곧 모든 일이 밝혀졌는데 몰핀을 사용
한 거야. 그런데 그 간호원은 자기가 잘못한다고 깨닫지 못하고 친절을
베풀었다고 생각한 거지. 그녀의 말로는 그들 환자는 얼마 못 살고 암으
로 몹시 고통을 받았다는 거야.」
「안락사시킨 거로군요.」
「아냐. 두 노부인은 엘러튼에게 돈을 남겼단다. 그녀는 돈이 탐났던 거야.
알겠니, 번치? 그리고 그녀에게는 정기선을 타는 남자가 있었지. 신문 판
매소를 하는 뷰지 부인의 조카였어. 그는 물건을 훔쳐 그녀에게 팔게 했
지. 외국에서 산 물건이라고 해서 그녀는 정말 믿었지. 그런데 경찰이 눈
치채고 집안을 뒤지고 캐묻자 그는 자신의 아주머니를 때려 그녀가 경찰
에 털어놓지 못하게 했던 거야. 질이 좋은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잘생긴
남자였지. 그는 두 여자를 사귀면서 돈을 몽땅 다 써버렸지 뭐니.」
「비열한 사람이었군요.」
「그랬단다. 그리고 옷감가게 클레이 부인은 아들에게 무조건이었지. 너무
응석을 받아 줘서 아주 버릇이 나바졌단다. 그리고 조안 크로프트를 기
억하니, 번치?」
「아뇨, 기억이 안 나요.」
「언젠가 네가 우리집에 왔을 때 보았을 거야. 잎담배나 파이프를 피우던
여자 말이야. 언젠가 은행 강도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조안 크로프트가
강도를 쓰러뜨리고 총을 빼앗았지. 경찰에서 그녀의 용기를 칭찬했었
어.」
번치는 온 주의력을 기울여 미스 마플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구요?」
「그해 여름, 생 쟝 드 콜린느에서 만난 그 아가씨―별로 말이 없는 아가
씨였지. 누구나 그녀를 좋아했지만 별로 친한 사람은 없었지. 나중에 알
고 보니 그녀의 남편이 위조범이었다는구나. 그 때문에 자연히 그녀는
사람들에게 외면당한다고 여겼고, 나중엔 정신이 이상해지기까지 했어.」
「그리고 영국령 인도의 대령도 있잖아요?」
「그래. 라체스의 본 소령과 심러 로지의 라이트 대령이 있었지. 둘다 좋은
사람들이었지. 그보다, 은행 지배인이었던 허지슨 씨가 있었지. 그는 여
행을 다니다가 딸 정도의 젊은 여자와 결혼했단다. 그녀의 출생이 어딘
지도 몰랐지. 그녀가 직접 말한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었어.」
「그녀가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었겠죠?」
「그래, 모두 거짓이었어.」
번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을 꼽아가며 말했다.
「우린 지금까지 도라, 잘생긴 패트릭, 스웨트넘 부인과 에드먼드, 필리퍼
헤임즈, 이스터브룩 대련과 그 부인에 대해 얘기했어요. 그런데 이스터브
룩 대령 부인에 대한 아주머니 의견은 정말 놀라와요. 하지만 그녀가 미
스 블랙록의 목숨을 노릴 이유가 없잖아요?」
「남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은 비밀으르 미스 블랙록이 알고 있을 수도 있
지.」
「아주머니, 오래 전부터의 소문 말인가요? 그건 이미 비밀도 아니예요.」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수는 없지. 번치, 너는 소문에 신경쓰지 않는 성격
이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어떤 비밀을 가진 사람이 더구나 떠돌이 고양
이 같은 신세가 됐을 때 우선 누군가 집으로 데려가 먹을 크림과 어루만
져 줄 손길을 구할 수 있다면…… 그런 좋은 환경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는 생각지도 않은 일을 해야겠지요. 아주머니는 그 사람들에 대해 모두
얘기해 주신 거로군요.」
미스 마플은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모두는 아니야.」
「아니라구요? 그럼 줄리어군요? 줄리어는 특별난(피큘리어·peculiar) 것
같긴 해요.」
퉁명스런 여점원이 다가와 말했다.
「3실링 6펜스에요.」
한껏 숨을 들이마쉰 뒤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요, 부인. 왜 저더러 피큘리어(유대인)라고 하시는거죠? 피큘리어
회원인 백모님이 계시긴 하지만 저는 충실한 성공회 신자랍니다.」
번치가 말했다.
「미안해요. 난 노래를 인용했을 뿐이에요. 난 아가씨 이름이 줄리어인 줄
몰랐어요.」
그러자 무뚝뚝한 종업원은 얼굴을 풀었다.
「우연한 일이로군요. 저도 갑자기 제 이름이 들려서 그랬던거예요. 잘 알
았습니다.」
그녀는 총총히 돌아갔다.
「제인 아주머니. 왜 그리 놀라세요?」
「분명히…… 하지만 불가능해. 그럴 수는 없어…….」
「제인 아주머니!」
미스 마플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번치.」
「누가 범인일가 생각하셨나요? 누구지요?」
「전혀 모르겠다. 언뜻 떠오르는가 싶더니―그게 아니었더. 나도 알고 싶
다. 그런데 정말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다니요?」
「스코틀랜드의 노부인이 곧 죽게 될 것 같다는구나.」
번치는 빤히 미스 마플을 쳐다보았다.
「그럼 핍과 에머를 범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들이 시도했고 또다
시 할 거라구요?」
미스 마플은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 두 사람이 마음먹었다면 틀림없이 할 거야. 만인 네가 누군가를
살해하려고 계획했다면 첫 번째 실패했다고 포기하겠니? 게다가 확신을
갖는다면 의심을 받지 않게 되지.」
「하지만 핍과 에머라면―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둘밖에 없어요. 패트릭
과 줄리어에요. 그들은 남매인데다 핍과 에머의 나이와 비슷해요.」
「번치,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야. 세부적으로는 복잡하게 얽혀 있어. 만
일 그들이 결혼했다면 핍과 에머에게는 아내와 남편이 있겠지. 게다가
그들의 어머니는 직접 유산을 받지는 못한다 해도 관계는 있어. 레티 블
랙록이 30년 동안이나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니까 잘 알아보지 못하겠지.
나이든 여자는 흔히 비슷해 보이니까. 번치, 너는 워더스푼 부인을 기억
하지? 그녀는 몇해 전에 죽은 바틀렛 부인의 양로연금을 받아내지 않았
니? 미스 블랙록은 근시야. 그녀가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게다가 그 애들의 아버지는 정말 나쁜 사람이야.」
「하지만 외국인이잖아요?」
「출생지로는 그렇지. 하지만 서투른 영어로 말하고 손짓으로 이야기한다
고 그렇게 믿을 필요는 없지. 그가 이 사건에서 영국령 인도의 대령이
되지 말란 법이 없지.」
「그런 생각을 하셨군요.」
「아니. 단지 거기에 결부된 거액의 돈을 생각할 뿐이지. 사람들은 돈을 위
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한다는 걸 수차 보아왔으니까.」
「그렇긴 해요.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는 나쁜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을 거
예요.」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른단다.」
번치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사람들이란 자기만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고 여기죠. 나만 해도 그런
걸요.」
미스 마플은 생각에 잠겼다―너는 그 돈으로 좋은 일을 하겠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구나. 여러 가지 계획들―고아원을 세우고, 지친 어머니들, 힘겹게
살아온 늙은 어머니들을 위한 안식처를…….
미스 마플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고 눈빛은 점차 슬픈 빛을 띠었다.
「아주머니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아요. 제가 속물같은 인간이라
고 생각하시는 거죠? 제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말이에요. 사람이란 누구
나 돈이 필요할 때면 자신을 속물이라고 여기고 말죠. 그러나 그 돈으로
좋은 일을 한다고 자신을 속이면 다른 사름을 해치는 정도는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죠.」
번치는 눈을 크게 뜨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난 아니예요. 난 아무도 죽이지 못해요. 늙거나 병든 사람도,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라도, 협박꾼이나 짐승 같은 사람일지라도 말
이에요.」
그녀는 커피잔에 빠진 파리를 조심스럽게 건져올려 테이블 위에 놓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죠. 파리도 마찬가지에
요. 비록 늙고 병들어 고생하더라도 어떻게든 살려고 할 걸요. 젊고 강한
사람보다 늙고 병든 사람이 더욱 간절히 살려고 한다고 줄리언도 그러더
군요. 나 역시 살고 싶어요. 행복이나 즐거움이 없더라도 내가 살아 있다
는 것 자체를 느끼는게 좋거든요.」
그녀는 파리에게 조용히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파리는 비실거리더니 어디
론가 날아가 버렸다.
「염려마세요, 제인 아주먼. 전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도 죽이지 않아요.」


◎ 14장. 과거를 찾아서 ◎

기차 속에서 하룻밤을 지낸 클래독 경감은 스코틀랜드 지방의 작은 역에서
내렸다.
게들러 부인 같은 부유한 재산가가 상류지역의 집과 햄프셔의 별장, 남프
랑스의 별장들을 마다하고 이 외진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는지 경감에게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이곳에 있음으로 친구와 즐거운 오락과 멀어져 외로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아니면 주위를 돌보거나 관심갖기에는 너무 병세가 악화된 걸까?
자동차 한 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식 대형 다이믈러에는 나이가 지
긋한 운전수가 있었다.
상쾌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20마일을 달리는 동안 경감은 부인이 무척 먼
곳에 깊숙이 산다는 것에 놀랐다. 그가 슬쩍 운전사에게 물어본 이야기에서
부인에 대해 꽤 알아낼 수 있었다.
「이곳은 부인이 어렸을 때부터 살던 곳이지요. 그분은 가족 중 유일한 생
존자입니다. 게들러 씨 부부는 어느 곳보다도 여기를 좋아했었죠. 게들러
씨가 런던을 떠나시기 어려웠지만 그분께서 오시는 날이면 마치 어린 아
이처럼 기뻐하셨답니다.」
오래된 고가의 잿빛 벽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클래독은 과거 속으로 거슬
러 올라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늙은 집사의 마중을 받고 클래독은 목욕과 면도를 마친 뒤 커다란 난로가
타고 있는 방으로 안내되어 아침식사를 받았다.
식사가 끝나자 간호원 옷을 입은 중년의 늘씬한 여자가 명랑하고 당당한
태도로 들어오더니 자신을 매클랜드라고 소개했다.
「클래독 경위님, 부인께서 지금 당신을 만나시겠답니다.」
클래독은 그녀와 약속했다.
「네, 환자를 흥분시키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만나보시면 아시겠지만 미리 주의를 드리는 게 낫겠군요. 게들러 부인께
서는 보통때는 극히 정상입니다. 말씀도 잘하시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
지요. 그러다가 갑자기 기력이 떨어집니다. 그대는 곧 저를 부르세요. 부
인은 몰핀으로 연명해 가고 있죠. 그래서 언제나 몽롱한 상태인데 당신
이 오신다기에 강한 자극제를 주사했지요. 그러나 약효가 떨어지면 의식
이 희미해 질 거예요.」
「잘 알겠습니다. 미스 매클랜다. 그런데 게들러 부인의 상태를 자세히 알
려 주시겠습니까?」
「부인께서는 임종이 가까웠습니다. 몇 주인 못 사실 거예요. 이런 말씀 드
리면 놀라실 테지만 부인께선 사실 몇 해 전에 돌아가신 것과 다름없어
요. 게들러 부인의 삶에 대한 의지는 대단하셔서 지금까지 목숨을 이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오랜 투병 생활로 50년 동안이나 집밖에 나가본 적
이 없다면 믿지 않으실테지만 사실입니다. 부인의 생명에 대한 애착은
누구 못지 않게 강렬한 것이지요.」
그녀는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게다가 부인은 아주 매력적인 분이랍니다.」
클래독은 커다란 침실로 안내되었다. 벽난로가 활활 타오르는 그 방의 휘
장이 드리워진 침대에는 노부인이 누워 있었다. 그녀의 백발은 단정히 빗겨
있었고 엷은 회색빛 망토로 어깨를 덮고 있었다.
얼굴에는 고통과 다정함이 함께 어려 있었고 푸른 두 눈에는 어딘지 모르
게 강인함이 엿보였다.
「흥미로운 일이군요. 내가 경찰의 방문을 받다니 말이에요. 레티샤 블랙록
이 위험했었다구요. 그녀는 좀 어떤가요?」
「네, 건강합니다. 부인께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헤어진 뒤 퍽 오랫 동안 못 만났군요. 그 동안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
받았을 뿐이죠. 샬로트가 죽고 영국에 돌아왔을 때 내가 이곳으로 오라
고 했더니 오랜 시간이 흘러도 고통은 남을거라며 거절해 왔더군요. 그
말이 옳았어요…… 블래키는 언제나 생각이 깊었어요.」
클래독은 그녀 스스로 말을 하게 되어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가 게들러와
블랙록의 관계를 상세히 알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게들러 부인이 불쑥 말했
다.
「당신은 유산에 대해 알고 싶으신 거죠? 랜들은 내가 죽은 뒤 전재산이
블래키에게 돌아가도록 했어요. 물론 내가 자기보다 오래 살리라고는 상
상도 못했을 거예요. 그는 건강하고 병을 앓은 적도 없지만 나는 항상
투정을 부려 의사들을 들락거리게 했지요.」
「투정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부인.」
노부인은 빙긋 웃었다.
「불평했다거나 내 자신을 비참히 여겼다는 뜻이 아니예요. 나는 남편보다
당연히 먼저 죽을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상황이 바뀐 거죠.」
클래독은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남편은 어째서 그런 식으로 유산을 처리하셨나요?」
「왜 블래키에게 물려주도록 했느냔 말씀인가요? 하지만 당신이 상상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었어요. 당신네 경찰의 생각, 랜들은 한 번도 그녀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어요. 그녀도 마찬가지였죠. 레티샤는 남자
같았어요. 여자다운 감정이나 나약함이라곤 전혀 없었어요. 남자를 사랑
할 그런 타입이 아니에요. 특별히 예쁘지도 않고 옷에도 그리 신경을 쓰
지 않아요. 그저 습관적으로 약간 화장을 하는 게 고작이었어요.」
그녀는 생각에 잠겨서 말을 이었다.
「랜들은 블래키를 동생처럼 생각했던 듯해요. 그는 그녀의 판단력을 믿었
고 덕분에 곤경에서 빠져나온 게 여러 번 있죠.」
「한번은 자신의 돈으로 주인어른을 구해 드린 적이 있다고 미스 블랙록에
게서 들었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한 번이 아니었어요. 이미 지난 얘기니까 말씀드리지만
랜들은 판단력이 없었어요. 정직한 것과 거짓도 구별하지 못했어요. 그의
이런 면을 블래키가 보완해 주었던 거죠. 그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나는 항상 그녀를 존경했어요. 블랙록 자매는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더군요. 아버지는 늙은 시골 의사였는데 고집스럽고 가정에서는 강압적
이었어요. 레티샤는 집을 나와 런던에서 회계 교육을 받았어요. 그녀의
동생은 정상이 아니어서 사람들을 꺼리고 일체 밖에는 나가지 않았지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레티샤는 모든 걸 포기하고 동생을 돌보기 위해
집으로 간 거예요. 랜들이 그녀를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레티샤는
해야 할 일이라고 결정하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그런 성격이랍니
다.」
「그 일은 게들러 씨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의 일입니까?」
「3,4년 전쯤일 거예요. 남편은 그녀가 회사를 떠나기 전에 유언장을 만들
었지요. 그리고 내게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에겐 자식이 없소. 우리 두
사람이 죽으면 블래키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게 어떻겠소? 그녀라면 잘
번창시킬 거요』라고 말이에요. 사실, 랜들은 돈을 있는 대로 내기하기를
무척 좋아했어요. 모험과 스릴을 즐겼던 거지요. 블래키도 남편처럼 모험
심이 많고 똑같은 육감을 가졌어요. 가엾게도 그녀에게는 여자로서의 즐
거움이 없었을 거예요. 가정을 꾸미고 아기를 갖는 그런 인생의 즐거움
말이에요.」
클래독은 그녀의 말 중간에 끼어들었다.
「게들러 씨는 재산을 물려 줄 만한 육친이 없었기 때문에 미스 블랙록에
게 남겼다고 했는데 엄밀히 따지면 다르지 않습니까? 누이동생이 한명
있었다던데요?」
「소니어 말이군요. 하지만 두 사람은 여러 해 전에 다투고는 남남처럼 되
고 말았지요.」
「게들러 씨는 누이동생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으셨나요?」
「그래요. 그녀와 결혼한 남자의 이름이…….」
「스탠포디스.」
「네, 맞아요. 드미트리 스탠포디스였어요. 랜들은 그 남자를 사기꾼에다
건달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소니어는 진정으로 그 남자를 사랑했어요. 나
는 솔직히 랜들이 그렇게까지 반대하는 이유를 몰랐어요. 그녀는 25살이
나 되었고 철없는 소녀가 아니었거든요. 사실 그는 전과도 있는 건달이
었죠. 소니어도 알고 있었어요. 랜들이 단 한가지―드미트리가 여자들에
게 꽤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걸 랜들은 깨닫지 못했던 거예요. 그리고 드
미트리도 소니어를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그런데 랜들은 그가 돈을 보고
결혼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사실과 달라요. 소니어는 분명한 성격
이기 때문에 그가 거칠다거나 자신에게 잘해 주지 않으면 즉시 드미트리
와 관계를 끊었을 거예요.」
「그들은 결국 화해하지 않았나요?」
「그래요. 그들 사이는 화해되지 않았죠. 그녀는 랜들이 결혼을 반대한 것
에 몹시 화를 냈어요. 『잘 알았어요. 이제 다시는 만나지 않겠어요!』라
고 했지요.」
「정말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습니까?」
게들러 부인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1년 반쯤 뒤에 그녀에게서 편지를 받았어요. 부다페스트에서 온 것
으로 기억되는데 주소는 적혀 있지 않았어요. 그녀는 매우 행복하게 살
고 있으며 쌍둥이를 낳았다거 오빠에게 전해달라더군요.」
「아이들 이름도 적었습니까?」
벨 게들러는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정오에 태어났기 때문에 핍과 에머라고 불러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농담일 수도 있었어요.」
「그녀로부터 언제 다시 소식이 왔습니까?」
「아니오.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과 곧 미국으로 간다고 했는데 그 이후로
소식이 없었지요.」
「혹시 그 편지 보관하고 게시지 않습니까?」
「아니오. 난 그 편지를 랜들에게 읽어 주었어요. 그러자 그는 『그런 녀석
과 결혼한 것을 언젠가는 후회할 거야!』라고 하더군요. 그 말뿐이었어
요. 그 뒤로 그녀에 대한 기억은 우리 생활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지요.」
「미스 블랙록이 부인보다 먼저 돌아가시게 되면 재산은 소니어의 아이들
에게 돌아가도록 게들러 씨가 해놓으셨겠지요?」
「아니예요. 내가 그렇게 했어요. 그가 유언장에 대해 내게 말했을 때 『만
일 블래키가 나보다 먼저 죽으면 어떻게 하죠?』하고 물었죠. 그는 몹시
놀라는 표정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덧붙이기를 『아, 알아요. 블래키는
튼튼하고 나는 약하다는 것을요. 하지만 재난이라는 것도 있으니까.』했
어요. 그러자 남편은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소니어의
아이들에게 주면 되잖아요.』했더니 투덜거리며 핍과 에머의 이름을 적
어넣었답니다.」
「그 뒤로 소니어나 그녀의 아이들에 대해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하셨나
요?」
「아무것도요. 죽었는지, 아니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치핑 클렉혼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클래독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벨 게들러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블래키는 좋은 여자에요. 절대로 해를 당해서는…….」
갑자기 부인 목소리가 처지며 입과 눈가에 잿빛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클
래독이 말했다.
「피곤하신 모양이군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맥을 들여보내 주세요. 그래요 피곤해요…… 블래키를 지켜주세요. 그녀
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선 안 돼요. 그녀를 보살펴…….」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염려 마세요, 부인.」
그는 일어나 문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내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녀를 보호해 주세요.…….」
실같이 가는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그가 막 방문을 나섰을 때 맥클랜드 간호원이 달려왔다.
「내가 환자에게 해롭게 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아니예요, 클래독 경감님.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부인은 갑자기 기력이
약해진답니다.」
잠시 후, 그는 간호원에게 물었다.
「부인께 한가지 물어보지 못한 게 있는데, 혹시 부인께서 옛날 사진을 갖
고 계시지 않습니까?」
「글쎄요. 그런 것은 없는 것 같았어요. 전쟁이 시작되자 부인은 개인서류
나 물건들을 서류함에 넣어 런던의 창고에 보관했는데 폭격당하는 바람
에 없어져 버렸어요. 부인은 기념품들과 편지들이 없어져 버려 아주 애
석해 하셨지요. 아마 그런 것은 없을 거예요.」
그랬었군. 그러나 클래독은 이번 여행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핍과 에머, 이 쌍둥이는 껍데기가 아닌 실존해 있는 것이다.
클래독의 상상력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소니어 게들러는 결혼 당시만 해도
부유했지만 유럽의 재산은 전쟁통에 다 날려보냈다. 그래서 전과가 있는 남
편의 아들과 딸이 영국으로 돌아온 게 아닐까?
그때 그들은 부유한 친지를 찾겠지. 막대한 재산가였던 아저씨는 죽어다.
그들은 우선 아저씨의 유서를 보고 자신들의 어머니에게 남겨진 유산이 있
나 확인하겠지. 아마 그때 레티샤 블랙록의 존재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랜
들 게들러의 미망인은 얼마 살지 못하고, 만일 미스 블랙록이 부인보다 먼
저 죽는다면 자신들에게 막대한 유산이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겠지. 그
렇다면!
클래독은 생각했다. 그들은 레티샤 블랙록이 살고 있는 곳을 알아내어 그
곳으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신분으로는 아닐 테고, 함께 아니면 따로? 내 생각으로는 핍
과 에머가…… 그렇다면 핍과 에머는 틀림없이 치핑 클렉혼에 있다.

◎ 15장. 달콤한 죽음 ◎

(1)
리틀 파독스의 부엌에서 미스 블랙록은 미치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했다.
「토마토와 정어리 샌드위치, 그리고 작은 스콘은 맛있게 만들도록 해. 그 리고 미치가 잘 만드는 스페샬 케잌은 멋지게 솜씨를 내어 만들어 봐.」
「파티가 있나요? 이런 여러 가지 음식을 …….」
「도라의 생일이야. 손님 몇 분이 오시기로 되어 있지.」
「그 나이 정도 되면 생일은 차리지 않게 되는데요. 차라리 잊는 게 낫
지.」
「하지만 그녀는 잊고 싶어하지 않아. 몇몇이 그녀에게 선물을 갖다줄 테
니―조촐하게 파티를 여는 것도 괜찮잖아?」
「일전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잖아요―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죠?」
미스 블랙록은 화가 난 듯 말했다.
「이번에는 그런 일 없을 거야.」
「하지만 이 집안에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고 어떻게 장담을 할 수 있
죠? 전 겁이 나서 하루 종일 어쩔 줄 몰라하고 방문을 걸어잠그고 또, 누
가 숨어 있지나 않을까 해서 옷장 속을 살펴본답니다.」
미스 블랙록은 차갑게 대꾸했다.
「안전한 방법이군.」
「제게 특별히 만들라고 하신 케잌은…….」
미치의 발음은 꼭 고양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았다.
「특별히, 맛좋은 것이라야 해.」
「특별히 맛있게라구요? 하지만 그러려면 초콜렛과 버터가 필요하고 설탕
과 건포도도 있어야 해요.」
「미국에서 보내온 버터를 쓰도록 해. 그리고 크리스마스용 건포도도 있고
여기 초콜렛과 설탕 1파운드쯤 있으니까.」
미치는 갑자기 얼굴이 밝아졌다.
「좋아요. 미스 블랙록을 위해서 기가 막힌 케잌을 만들어 드릴께요.」
기쁨에 겨워 미치는 소리를 질렀다.
「맛있게 특별히 훌륭하게 만들 거라구요. 케잌 위에는 초콜렛으로 장식하
고 <행복이 있으라>라고 쓰겠어요. 영국 사람들은 먹어본 적이 없는 케
잌을 만들겠어요. 모두들 정말 맛있다고 말할 거에요.」
갑자기 미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패트릭은 내 케잌을 <달콤한 죽음>이라고 불러요. 내가 만든 케잌을요!
난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아요.」
「미치, 그건 칭찬의 말이야. 그렇게 맛있는 케잌을 먹으면 죽어도 좋다는
뜻이야.」
미치는 의혹에 찬 눈으로 미스 블랙록을 쳐다보았다.
「저는 그 죽는다는 단어가 싫어요. 하지만 그들은 제가 만든 케잌을 먹고
아주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그래, 그럴 거야.」
미스 블랙록은 별생각 없이 대꾸하고 한숨을 쉬며 나왔다.
미치는 정말 알 수 없는 여자였다.
그녀는 나오다 도라 배너와 마주쳤다.
「레티, 내가 미치에게 샌드위치 써는 방법을 일러줘야겠어.」
「안 돼. 지금 미치는 기분이 좋은데, 망쳐놓으면 안 돼.」
미스 블랙록은 도라 배너를 거실로 밀고 나가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단지 일러주기만 할 건데…….」
「아무것도 하지 마. 유럽 사람들은 간섭하는 걸 아주 싫어해.」
도라는 의아한 듯 바라보다가 곧 미소를 지었다.
「에드먼드 스웨트넘이 지금 막 전화를 걸어 나보고 오래 살라고 하더군.
그리고 오후에는 꿀을 선물로 가져오겠대. 정말 친절하지? 그가 내 생일
을 기억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네가 스스로 알렸으니까 모두들 알고 있을 거야.」
「그래. 오늘이 내 쉰 아홉번 째 생일이라고 말했었지.」
「예순 넷이야.」
미스 블랙록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2)
초대된 사람들이 거실의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자리에 앉았을 때 패트릭이
연주를 하듯이 소리쳤다.
「오, 눈앞에 있는 게 무엇인가? <달콤한 죽음>이로군!」
「쉿! 미치가 듣겠다. 그녀는 그렇게 부르는 걸 싫어해.」
미스 블랙록의 말에 패트릭은 또다시 이죽거렸다.
「그래도 이건 <달콤한 죽음>인 걸요. 이게 미스 배너의 생일 축하 케잌입
니까?」
「맞다. 난 아주 멋진 생일을 맞게 될 거다.」
미스 배너의 얼굴을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이스터브룩 대령이 작은 과자 상자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대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줄리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미스 블랙록 쪽을 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구석까지 음식이 차려졌고 사람들은 과자를 집어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리어가 말했다.
「저 케잌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요. 분명히 지난 번과 똑같아요.」
패트릭이 대꾸했다.
「그렇지만 케잌은 훌륭해.」
「외국인들은 케잌을 잘 만들어요. 하지만 산뜻한 푸딩은 잘 만들지 못하더
군요.」
미스 피칠리피가 끼어들었다.
패트릭은 산뜻한 푸딩을 원하는 분 안 계십니까, 하는 말을 꺼내려고 입술에 온
신경을 모으고 있는 듯했다.
미스 핀칠리피가 블랙록과 함께 거실로 들어오며 물었다.
「새 정원사를 두셨나요?」
「아니오, 그런데 왜 그러죠?」
「닭장 부근에 군인 타입의 남자가 서성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줄리어가 끼어들었다.
「아, 그 사람. 탐저이에요.」
이스터브룩 부인이 핸드백을 떨어뜨리며 소리쳤다.
「탐정이라구요? 탐정이 무슨 일로요?」
「그건 모르겠어요. 그는 집 안팎을 감시하고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아요. 아
마 레티 아주머니를 지키려는 것일 거예요.」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고맙지만, 나는 내 스스로를 진킬 수 있어.」
이스터브룩 부인이 말했다.
「그 사건은 이미 끝난 게 아닌가요? 그런데도 그들은 왜 심리를 연기했을
까요?」
「경찰에서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거겠지.」
이스터브룩 대령이 대답했다.
「뭐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거죠?」
이스터브룩 대령은 많은 대답 가운데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라 고개를 흔들었다.
대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에드먼드 스웨트넘이 입을 열었다.
「그건 우리 모두가 용의자로 주목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혐의로요?」
이스터브룩 부인이 물었다.
「신경쓰지 말아요, 여보.」
그녀의 남편이 말했다.
「살인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거죠. 적절한 기회를요.」
도라 배너가 울부짖듯이 소리질렀다.
「제발 그만둬요, 스웨트넘 씨. 아무도 내 친구 레티를 죽이려는 사람은 없
어요!」
뭐라고 해야 할지 당황한 얼굴이 되어 에드먼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농담으로 한 소리에요.」
필리퍼가 밝은 목소리로 6시 뉴스를 듣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고 모두들 그에 찬성했다.
패트릭이 줄리어에게 낮게 속삭였다.
「허먼 부인이 있었으면 분명히 높고 카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을 거
야―『나는 지금도 누군가 당신을 노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미스 블랙록?』하고 말이야.」
「난 그 미스 마플이 오지 않아서 기뻐. 그 노부인은 철저하게 파고들거든.
그 마음속은 깊은 동굴 속 같고, 철저한 빅토리아 시대의 여자야.」
모두들 뉴스를 들으며 핵전쟁의 공포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이스터브룩 대령은 문명국에 대한 진짜의 적은 러시아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에드먼드는 진실한 러시아 친구가 몇 명 있다고 대꾸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파티는 미스 블랙록에 대한 인사로 끝이 났다.
마지막 손님이 나간 뒤 미스 블랙록이 물었다.
「즐거웠지, 도라?」
「물론이야, 그런데 머리가 아파. 너무 흥분했던 모양이야.d」
패트릭이 말했다.
「케잌 때문이에요. 게다가 아주머니는 아침 내내 초콜렛을 드셨잖아요.」
「가서 쉬어야겠어. 아스피린을 두알 먹고 잠이나 푹 자야지.」
「그게 좋겠어.」
미스 배너는 2층으로 올라갔다.
패트릭이 물었다.
「오리 우리를 닫을까요, 레티 아주머니?」
미스 블랙록은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렇게 해 주겠다면.」
「네, 단단히 닫겠어요.」
줄리어가 말했다.
「세리주 한잔 드시겠어요, 아주머니? 예전에 저를 돌보던 간호원이 곧잘
소화가 될거라고 했지요. 그런데 정말 딱 들어맞아요.」
「그것 참 좋은 방법이구나. 확실히 기름진 음식은 부담스러우니까. 어머나!
왜 그래, 도라? 놀랐잖아?」
「아스피린을 못 찾겠어.」
「내 것을 먹도록 해. 침대 옆에 있으니까.」
필리퍼가 말했다.
「내 화장대 위에도 있어요.」
「그래, 고마워. 내 것을 찾지 못한다면 그걸 먹지. 틀림없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새 병인데 어디 두었더라?」
줄리어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욕실에도 꽤 많던데요. 이 집은 온통 아스피린 투성이에요.」
「난 정말 조심성이 없고 기억이 없단 말이야. 슬픈 일이지.」
미스 배너는 다시 2층으로 오르면서 중얼거렸다.
줄리어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가엾은 배너 아주머니에게도 세리주를 드려야겠어요.」
미스 블랙록이 만류했다.
「아니다. 그녀는 너무 흥분해서 좋지 않을 거야. 거기다가 세리주까지 주
면 더욱 나빠질 거야. 그냥 혼자 있게 놔두는 게 좋겠어.」
「배너 아주머니는 세리주를 좋아하시는데…….」
패트릭이 중얼거렸다.
줄리어가 제안했다.
「미치에게 줘요.」
패트릭이 미치를 데려오자 줄리어는 그녀에게 세리주를 따라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요리사를 위해서!」
패트릭의 말에 미치는 왠지 기뻐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요리사가 아닌 걸요. 고향에선 나도 꽤 고급스런 일을 했답니
다.」
「그렇다면 재능이 썩고 있는 셈이로군요. <달콤한 죽음>같은 걸작 말고
그 고급스런 일이란 게 뭐죠?」
「오, 난 그 이름을 싫어한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패트릭이 말했다.
「좋든 싫든 상관없어요. 그건 내가 케잌에 붙인 이름이고 이 건배도 달콤
한 죽음과 그 결과를 위해서니까!」

(3)
「필리퍼, 나와 얘기 좀 할까요?d」
「뭐지요?」
필리퍼 헤임즈는 놀란 기색으로 미스 블랙록을 쳐다보았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요?」
「걱정이라구요?」
「요즘 걱정스런 표정인데,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어?」
「아니예요, 없어요. 제가 그렇게 보이나요?」
「내 생각엔 당신과 패트릭이…….」
「패트릭이요?」
필리퍼는 분명 놀란 표정이었다.
「아닌가보군. 실례되는 말을 해서 미안해요. 당신은 우리와 함께 살아왔고
게다가 패트릭은 내 친척이니까. 솔직히 그애는 좋은 남편감이라고 생각
지 않아요. 곧 알게 되겠지만.」
필리퍼의 표정이 굳어졌다.
「난 재혼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 될 걸. 아직 젊으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정말 걱정거리가 없는 건가요? 이를테면 돈이라든가.」
「아니예요. 그런 걱정은 마세요.」
「하지만 당신이 아이들 교육 문제로 걱정하는 것은 알아요. 바로 그 얘기
를 하려고 하는 거지. 오늘 오후에 내 변호사인 베딩펠드를 만나서 밀체
스더에 갔었지. 어쩐지 요즘 마음이 편칠 않아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서 새 유언장을 만들려고 말이에요. 미스 배너의 몫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당신에게 주려고 해요, 필리퍼.」
「뭐라구요?」
필리퍼는 몹시 놀랐다. 눈을 크게 뜨고 미스 블랙록을 바라볼 분이었다.
「그렇지만 난 괜찮아요. 아니, 오히려 주지 않는 게 나아요. 그런데 어째서
제게 주려는 거죠?」
미스 블랙록은 특유의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사람이 없기 때문이지.」
「패트릭과 줄리어가 있잖아요?」
「그렇지. 그 애들이 있긴 하지.」
미스 블랙록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딱딱함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미스 블랙록의 친척이잖아요?」
「하지만 아주 먼 친척이에요. 그 애들은 내게 바랄 권리가 없어.」
「저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뭘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난 바라지 않아
요.」
그녀의 눈빛에는 고마움보다 오히려 적의를 담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두려워하는 듯했다.
「난 내가 지금 어떤 일을 하는지 잘 알아요. 필리퍼가 좋아졌어. 또 당신
에겐 아들도 있고. 만인 내가 죽으면 유산이라야 뻔하지만 몇주일만 더
있으면 상황이 달라지거든.」
그녀는 필리퍼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미스 블랙록, 당신을 죽지 않아요!」
「조심해서 피할 수만 있다면…….」
「조심한다구요?」
「아네요…… 더 이상 걱정해 봐야 소용없어요.」
미스 블랙록이 방에서 나간 뒤 필리퍼는 그녀가 홀에서 줄리어와 무언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조금 뒤 줄리어가 거실로 들어왔다. 그녀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꽤 훌륭하시군요, 필리퍼! 당신은 아무 관계도 없는 줄 알았는데…… 다
크호스군요?」
「들었군요…….」
「네, 들었어요. 하지만 내가 받을 차례에요.」
「그게 무슨 뜻이죠?」
「우리 아주머니는 바보가 아니에요. 어쨌든 성공한 셈이군요, 필리퍼.」
「줄리어, 난 생각도 못했던 일이에요.」
「아니에요. 당신은 벌써부터 계산하고 있었어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잖
아요? 하지만 이걸 기억해 둬요―레티 아주머니가 살해된다면 당신은 첫
번째 용의자로 지목받을 거예요.」
「지금 내가 그녀를 살해한다는 건 바보짓이에요. 좀더 기다리기만 하
면…….」
「그렇다면 스코틀랜드의 그 노부인에 관해서도 알고 있군요? 그렇다면 필
리퍼 당신이 진자 다크호스였군.」
「난 줄리어나 패트릭을 배신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요? 미안하게도 난 당신을 못 믿겠어요.」

추천 (0) 선물 (0명)
IP: ♡.221.♡.0
23,397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1-30
1
92
나단비
2024-01-30
1
91
나단비
2024-01-29
1
92
나단비
2024-01-29
1
68
나단비
2024-01-29
1
79
나단비
2024-01-29
1
76
나단비
2024-01-29
0
69
나단비
2024-01-28
0
96
나단비
2024-01-28
0
87
나단비
2024-01-28
0
92
나단비
2024-01-28
0
95
나단비
2024-01-28
0
92
나단비
2024-01-27
0
104
나단비
2024-01-27
0
66
나단비
2024-01-27
0
72
나단비
2024-01-27
0
80
나단비
2024-01-27
0
92
나단비
2024-01-26
0
82
나단비
2024-01-26
0
82
나단비
2024-01-26
0
94
나단비
2024-01-26
0
84
나단비
2024-01-26
0
90
나단비
2024-01-25
0
110
나단비
2024-01-25
0
101
나단비
2024-01-25
0
111
나단비
2024-01-25
0
74
나단비
2024-01-25
0
72
나단비
2024-01-24
1
119
나단비
2024-01-24
1
102
나단비
2024-01-24
1
112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