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 예고살인 4

3학년2반 | 2022.02.17 08:08:27 댓글: 0 조회: 386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412



◎ 16장. 수상한 사람들 ◎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클래독 경감은 편치 않은 하룻밤을 보냈다. 악몽을
꾼 것이다.
꿈속에서 그는 어딘가에서 무엇인가를 지키려고 옛성의 복도를 필사적으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꿈을 깨고 긴 안도의 한숨을 몰라쉬었다.
그때 문이 소리없이 열리더니 피투성이가 된 레티샤 블랙록이 소리쳤다.
「살려 주세요! 당신이 신경을 썼다면 난 살해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순간 정말로 눈을 번쩍 떴다.
어쨌든 기차는 밀체스더에 당도했고 클래독 경감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
었다.
그는 곧장 라이스델 서장에게 보고하러 갔다.
서장이 말했다.
「대단한 것은 없군. 그렇지만 미스 블랙록 말을 뒷받침해 주는군. 핍과 에
머 말일세.」
「패트릭과 줄리어 남매가 그 나이에 맞습니다. 미스 블랙록이 그들을 어렸
을 때 본 것이 아니라면…….」
라이스델은 소리를 낮춰 웃었다.
「그건 미스 마플이 벌서 확인해 주었네. 실제로 미스 블랙록은 그들을 두
달 전에 처음 보았다더군.」
「그렇다면 확실히…….」
「그리 간단하지 않아, 클래독. 우리도 조회중인데 패트릭과 줄리어는 추측
과 달라. 패트릭의 해군 복무시절 기록에도 하자가 없다네. 칸느에도 조
회해 보았는데 시먼즈 부인은 화가 난 투로 자기의 아들 딸은 치핑 클렉
혼에 사는 친척 블랙록과 함께 살고 있다고 회답이 왔어. 이게 전부라
네.」
「그녀가 진짜 시먼즈 부인일까요?」
라이스델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오래 전부터 시먼즈 부인이었어.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뿐이네.」
「그들은 나이가 비슷한데다 핍과 에머가 이곳에 와 있다면 그들이 가장
유력합니다.」
서장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클래독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 이스터브룩 부인에 대한 조사서일세.」
클래독은 흥미롭게 읽어내려갔다.
「그 늙은 남편을 감쪽같이 속여왔군요.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이번 사건과
별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하지. 또 헤임즈 부인의 조사서도 있네.」
클래독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 여자를 한 번 더 만나봐야겠군요.」
「이 기록이 뭔가를 말해 주는가?」
「무리하긴 하지만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플레쳐가 뭘 좀 알아냈습니까?」
「그는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네. 미스 블랙록의 양해 아래 그 집을 살피
고 있지. 그러나 이렇다 할 것은 없다네. 그리고 문에 기름을 칠 만한 사
람을 찾고 있지. 그 외국 여자가 외출한 뒤 집에 있던 사람도 조사하고
있는데 좀 복잡하더군. 그녀는 거의 매일 오후에 외출을 한다니까. 거리
에 곧잘 나가 블루버드라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네. 게다가 미스 배너
와 블랙록도 오후에는 대개 집을 비우지.」
「문은 항상 잠겨 있지 않나요?」
「그렇다네. 그러나 지금은 또 모르지.」
「플레쳐의 결론은 뭔가요? 집이 비었을 때 들어갔던 사람이 밝혀지지 않
았나요?」
「사실 그들 모두였다네.」
라이스델은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며 말했다.
「미스 마것로이드는 알을 품고 있는 암탉과 함께 있었다네. 그녀의 이야기
는 앞뒤가 안 맞고 모순 투성이였지. 플레쳐도 그녀가 흥분한 것은 성격
탓이지 사건과 관련있다고는 보지 않네. 그리고 스웨트넘 부인은 말 먹이
를 가지러 왔었지. 그날 미스 블랙록이 부엌 식탁 위에 말먹이를 두고 나
갔다더군.」
클래독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말했다.
「미스 블랙록은 밀체스더로 가는 길에 스웨트넘 부인의 집을 지나며 말먹
이를 갖다 주면 될 텐데.」
「글세, 모르겠군. 스웨트넘 부인의 말에 의하면 미스 블랙록은 그걸 부엌
식탁 위에 두고 미치가 없을 땐 스웨트넘 부인이 그걸 가져갔다더군.」
「아주 논리적이군요. 계속해 보십시오.」
「미스 핀칠리피, 그녀는 요즘 전혀 그 집에 가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실과
달랐어. 그런데 그녀가 옆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미치가 보았고 배트부
인―마을사람이지―도 보았다더군. 그 뒤에 미스 핀칠리피는 가긴 했는데
기억이 잘 안난다고 했지. 아마 그냥 들렸다고 말한 것 같았어.」
「이상하군요.」
「좀 수상한 점이 있지. 다음은 이스터브룩 대령 부인, 그녀는 개를 훈련시
키던 중 미스 블랙록에게 편물책을 빌리러 갔는데 집에 없어서 잠시 기
다렸다고 하더군.」
「그랬더라도 집안을 엿보고 다니는 짓은 할 수도 있고 문에 기름을 발랐
을지도 모르죠. 대령은 어떻습니까?」
「어느날 미스 블랙록이 인도에 대한 책을 읽고 싶다기에 그 책을 갖고 갔
다더군. 그리고 에드먼드 스웨트넘이 그 집에 갔었는지는 모르겠네. 그는
이따금 어머니 심부름으로 가긴 하는데 요즘은 통 간 적이 없다는군.」
「하나도 이렇다하게 해결될 게 없군요.」
라이스델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미스 마플이 적극 활약하고 있지. 그녀는 블루버드에서 아침 커피를 마셨
고 볼더즈에서는 세리주 파티에, 그리고 리틀 파독스의 생일 파티에 갔다
고 하네. 스웨트넘 부인의 정원을 보았고 또 이스터브룩 대령의 인도 얘
기를 들으러 갔었다더군.」
「그렇다면 대령이 진자 대령인지 가짜인지를 알아냈겠군요.」
「그녀 말로는 진짜인 것 같다더군. 확실히 알아보려고 극동 관계 당국에
조회를 의뢰했지.」
「그건 그렇고 미스 블랙록이 치핑 클렉혼을 떠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
각하십니까?」
「떠난다고?」
「네, 그렇습니다. 친구인 미스 배너와 함께 조용한 곳으로 가겠답니다. 스
코틀랜드로 가서 벨 게들러와 함께 지내면 좋을텐데요. 아주 안전한 곳이
지요.」
「그곳에 머물며 부인이 죽기를 기다린단 말인가?」
「서둘러야 합니다. 위험한 상황입니다. 만일 벨 게들러가 죽는다면…….」
그때 경관 한사람이 들어와 클래독은 말을 멈췄다.
「치핑 클렉혼의 레그 경관의 전화입니다.」
「연결해 주게.」
클래독 경감은 서장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혹시 미스 블랙록이…….」
라이스델 서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도라 배너가 레티샤 블랙록의 침대 맡의 병에서 아스피린을 꺼내
먹었다네. 그 병에는 겨우 몇 알밖에 남아있지 않았는데 아마 두 알을 꺼
내 먹고 한알을 남겨놓았다는군. 의사가 남은 한알을 분석했는데 아스피
린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는군.」
「미스 배너는 죽었습니까?」
「그렇다네, 오늘 아침 침대에서 숨이 끊어진 시체로 발견됐다네. 건강 상
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의사의 말로는 자연사가 아니고 마취성 독약이라
고 하네. 오늘 저녁에 검시를 할 거라는군.」
「레티샤 블랙록 침대 옆의 아스피린…… 무섭도록 교활한 놈이로군요. 패
트릭의 말로는 반쯤 남은 세리주를 버리고 새로운 술병을 땄다더군. 그러
나 약이 남아 있는 아스피린 병을 버릴 생각은 할 수 없었겠죠. 어제나
그제 그 집에 누가 다녀갔습니까? 그 아스피린이 오래전부터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라이스델은 그를 바라보았다.
「어제 모두들 그곳에 있었네. 도라 배너의 생일파티가 있었거든. 그들 중
누군가 위층으로 올라가서 약을 바꿔 놓았을 수도 있지. 물론 그 집에 사
는 사람이라면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지.」


◎ 17장. 사진첩 ◎

옷을 두껍게 입은 미스 마플은 목사관 문가에 서서 번치에게 쪽지를 건네
받았다.
「미스 블랙록에게 전해 주세요. 줄리언이 직접 못 와서 매우 유감스러워
한다는 말도요. 록 햄릿에서 신도 한사람이 죽었대요. 미스 블랙록께서
꼭 그를 만나고 싶으시다면 점심 식사 뒤에 들르겠다고 전해 주세요. 이
편지는 장례식 절차에 관한 거예요. 만일 검시 심문이 화요일에 있게 되
면 수요일로 하자더군요. 가엾은 배너, 다른 사람을 노린 독약을 먹고 죽
다니―그럼, 안녕히 다녀오세요, 아주머니. 너무 많이 걷지는 마세요. 저
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와야 한답니다.」
미스 마플이 많이 걷지는 않을 거라고 대답하자 번치는 급히 사라졌다.
미스 마플은 미스 블랙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거실을 둘러보았다 블루
버드에서 도라 배너를 만났을 때 그녀가 『불을 꺼지도록 패트릭이 장난해
놓았을 거예요』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 냈다. 어떤 전등일까? 그리고 그것
을 어떻게 했다는 걸까?
그것은 아마 현관 옆 테이블 위의 작은 전등일 것이라고 미스 마플은 생각
했다. 그리고 여자 목동이나 남자 목동이니 하고 말했는데―그 전등은 화사
한 드레스덴 도자기로 만들어진 파란 웃옷과 핑크색 바지를 입은 남자 양치
기였다.
이것은 본래 촛대였는데 전등으로 개조한 것이었다. 갓은 송아지 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너무 커서 인형이 가릴 정도였다.
도라 배너가 또 무슨 말을 했지? 『거실에 있는 것은 여자 목동이지 남자
목동이 아니었어요. 난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면 분명히 남자 목동이다.
미스 마플은 번치와 함께 미스 블랙록네 집으로 차를 마시러 왔을 때 도라
배너가 한쌍으로 되어 있는 전등에 대해 무슨 말인가 한 것을 기억했다.―
그건 여자 목동과 남자 목동 한쌍의 전등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도라 배너는 그것이 패트릭의 짓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을 것
이다―증거가 없다 해도 그녀는 그냥 그렇게 믿었다.
왜 그랬을까? 본래의 전등을 조사할 수 있다면 어떻게 전기가 나가도록 조
작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조작했을까?
미스 마플은 눈앞의 전등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전깃줄은 테이블 가장자리
를 따라 벽의 콘센트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중간에 배 모양의 스위치가 있
었다.
전기에 대해 거의 문외한인 미스 마플은 그것만을 보고 별다른 단서를 찾
아낼 수 없었다.
그럼 여자 목동 전등은 어디에 있을까? 손님용 방에? 아니면 내다버렸을
까? 혹시 도라 배너가 깃털과 기름을 들고 있는 패트릭과 마주쳤다는 그곳
에? 그녀는 이런 의문을 모두 클래독 경감에게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스 블랙록은 육촌 패트릭이 그 살인 광고와 관련이 있다고 여겼었다. 그
런 직감은 종종 들어맞는다. 미스 마플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누군가를 잘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의 생각을 잘 아는 법이니까.
패트릭 시먼즈…….
잘생기고 여자들이면 모두 좋아할 만한 젊은이. 아마 랜들 게들러의 여동
생과 결혼한 남자도 이런 타입이겠지. 패트릭 시먼즈가 핍일 수 있을까? 하
지만 그는 전쟁중에 해군에 있었다. 경찰에서도 그쯤은 즉각 알아낼 수 있
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믿기 어려울 정도의 교묘한 분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 배짱
만 있다면 멋지게 해치울 수 있지.
문이 열리고 미스 블랙록이 들어왔다. 오늘따라 그녀가 더 늙어 보인다고
미스 마플은 생각했다. 생명력이 다 빠져나간 듯 했다.
미스 마플이 말했다.
「실례해서 죄송합니다. 줄리언 목사는 신도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못
왔고 번치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습니다. 목사님께서 편지를 전해
드리라는군요.」
미스 블랙록은 그녀가 내민 편지를 받아들고 펼쳤다.
「앉으세요, 미스 마플. 이렇게 가져다 주시다니 고마워요.」
그녀는 편지를 읽어나갔다.
「목사님은 정말 자상한 분이에요. 자상하게 위로의 말을 썼어요. 장례식
준비는 잘 마무리되었다고 전해 주세요. 그녀는 찬송가 <길잡이인 은총
의 빛이여>를 제일 좋아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미스 마플이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단지 남이지만 정말 슬픈 일이랍니다.」
레티샤 블랙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비통하고
누르기 어려운 슬픔이었다. 미스 마플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 뒤 미스 블랙록은 자세를 바로잡았고 눈물로 인해 그녀의 얼굴은 얼
룩져 있었다.
「죄송해요. 도라는 과거를 기억하게 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답니다. 하지
만 그녀는 갔고 이제 나 혼자 남았어요.」
「잘 알겠어요. 과거를 기억해 주는 마지막 한사람마저 가버리면 혼자만
남게 되죠. 내게는 조카와 친구들이 있지만 내 소녀시절을 알아 주는 사
람은 아무도 없어요. 벌써 나는 오랫 동안 혼자였답니다.」
두 사람은 오랫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잘 이해해 주시는군요. 목사님께 몇 자 써서 보내드려야겠군요.」
미스 블랙록은 일어나 테이블로 가서 펜을 집어들고 천천히 써나갔다.
「관절염으로 글씨를 쓸 수 없을 때도 있죠.」
그녀는 편지를 봉하고 겉봉을 적었다.
「이걸 전해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홀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리자 미스 블랙록은 황급히 덧붙였다.
「클래독 경감이에요.」
미스 블랙록은 난로 곁의 거울 앞으로 가서 얼굴에 분을 가볍게 발랐다.
클래독이 들어와 미스 마플을 보더니 원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여기 계셨군요.」
미스 블랙록이 벽난로에서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미스 마플이 친절하게도 목사님의 편지를 가져다 주셨답니다.」
미스 마플이 당황해 하며 말했다.
「나도 이제 돌아가겠어요.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요.」
클래독이 물었다.
「어제 오후 여기에서 열린 생일파티에 오셨던가요?」
미스 마플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예요. 오지 않았어요. 몇몇 친구들을 방문했는데 번치가 자동차로 태
워다 주었지요.」
「이젠 하실 말씀 없으시겠죠?」
클래독은 마치 재촉하듯 문을 열어 주었다. 미스 마플은 당황해 하며 종종
걸음으로 달려나갔다.
클래독이 말했다.
「너무 꼬치꼬치 캐묻기 좋아하는 여자입니다.」
「당신은 너무 심하군요. 그녀는 정말로 목사님의 편지를 가져왔어요.」
「구실로야 그랬겠지요.」
「그런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내 판단으로는 일종의 집착증에 걸려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정말 친절한 사람이에요.」
천만에요, 그녀는 독사처럼 위험한 인물입니다.―클래독 경감은 마음 속으
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쓸데없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어딘가에 살인마가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으므로 되도록 말을 적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다음 희생자가 미스 마플이 아니기를…… 어딘가에 살인마가
있다. 어디에 있을까?
「시간이 없어 위로의 말은 생략하겠습니다, 미스 블랙록. 사실 미스 배너
의 죽음에 대해서는 부끄럽습니다. 어떻게든 우리가 그것을 막았어야 하
는건데.」
「그걸 어떻게 막겠어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수사를 서둘러야 합니다. 대체 누가 이
런 짓을 했을까요, 미스 블랙록? 두 번씩이나 당신 목숨을 노린 범인이
대체 누구입니까?」
미스 블랙록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몰라요, 난 몰라요.」
「게들러 부인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협조해 주었습니다. 당신
의 죽음으로 이익을 받을 사람이 몇 명 있더군요. 우선 핍과 에머이지요.
그들은 패트릭과 줄리어와 같은 또래더군요. 그러나 그들의 신원은 확실
했어요. 그 외 또다른 사람이 있겠지요. 미스 블랙록, 당신은 소니어 게
들러를 만난다면 그녀를 알아 보실 수 있겠습니까?」
「소니어를요? 물론지요.」
하다가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끝을 흐리며 이었
다.
「글쎄요, 어떨는지요.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까요. 30년…… 소니어도 퍽
늙었을 테니까요.」
「특별한 특징 같은 것은 없나요? 생긴 모습은요?」
「몸집이 작고 검은 머리칼에…… 그리고 무척 명랑한 성격이었어요.」
「지금은 그리 명랑하지 않을 겁니다. 그녀의 사진이 있습니까?」
「소니어의 사진? 오래된 스냅 사진 정도라면 앨범에 꽂혀 있을 거예요.」
「앨범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앨범이 어디 있더라?」
「미스 블랙록, 혹시 스웨트넘 부인이 소니어 게들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안드십니까?」
「스웨트넘 부인이?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군인이었어요. 인도에 있다가
그 뒤에는 홍콩―.」
「그거야 그녀가 직접 말한 것 아닙니까? 미스 블랙록께서 그것을 확인한
것은 아니겠죠?」
「그렇지요. 그렇게 말한다면…… 하지만 스웨트넘 부인이…… 그건 너무
엉뚱한 말씀이세요, 경감님!」
「소니어 게들러가 혹시 연극 같은 걸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래요. 아주 훌륭했어요.」
「그렇군요! 스웨트넘 부인은 가발을 쓰고 있어요. 허먼 부인이 그러더군
요.」
「실은 나도 가발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머리는 항상 잿빛 컬 모양이
거든요. 하지만 그럴까요, 설마. 그녀는 참 좋은 부인인 걸요.」
「그렇다면 미스 핀칠리피와 마것로이드 중 누가 소니어 게들러일 가능성
은 없습니까?」
「미스 핀칠리피는 남자처럼 키가 너무 커요.」
「그럼 미스 마것로이드는?」
「하지만 미스 마것로이드가 소니어라는 건 생각할 수도 없어요.」
「잘 못 보셨군요, 미스 블랙록?」
「얼핏 봤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소니어의 스냅 사진을 보도록 하지요. 비록 옛날 사진이어서
닮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아마추어들이 모르는 방법으로 유사점을 찾아낼
수 있으니까요.」
「그럼 시간날 때 한 번 앨범을 찾아보지요.」
「지금 곧 찾아 주시겠습니까?」
「당장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좋아요. 어디 있어라? 벽장 속의 책을 정리할 때 앨범을 보았어요. 줄리
어가 도와주다가 내가 입은 옛날 옷이 우습다고 한 것이 생각나요. 책들
은 거실 선반 위에 놓아두었는데 앨범과 미술 잡지는 어디에 두었더라?
난 이렇게 기억력이 나쁘답니다. 아마 줄리어는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그 아인 마침 오늘 집에 있어요.」
「그녀를 찾아오지요.」
패트릭 경감은 그녀를 찾았으나 아래층 어디에도 없었다.
「줄리어는 어디 있소?」
미치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알 바가 아니라는 듯 퉁명스레 대꾸했다.
「난 부엌에서 식사준비에만 신경쓰고 있어요. 저는 제가 만든 것이 아니
면 아무것도 먹지 않아요.」
경감은 2층을 향해 불러 보았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자 올라갔다.
그는 층계의 모퉁이를 돌다가 줄리어와 마주쳤다. 그녀는 좁고 꾸불꾸불한
계단 뒤의 문에서 막 나오던 참이었다.
「다락방에 있었어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클래독이 설명했다. 그러자 줄리어가 말했다.
「옛날 앨범이요? 네, 기억하고 있지요. 서재의 벽장 안에 있을 거예요. 찾
아다 드릴께요.」
그녀는 앞장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서재의 문을 열었다. 줄리어는 창문
옆의 큰 벽장을 열고 온갖 잡동사니 속을 뒤졌다.
「온갖 잡동사니 투성이에요. 그런데 노인들은 쉽게 버리려 하지 않아요.」
경감은 쭈그려 앉으며 벽장 아래선반에서 오래된 앨범을 집어들었다.
「이겁니까?」
「맞아요.」
미스 블랙록이 그 방으로 들어왔다.
「어머, 여기 두었구나! 통 기억이 나지 않았어.」
클래독은 테이블 위에 앨범을 놓고 한 장씩 펼쳐보았다.
커다란 모자를 쓰고 통이 좁은 치마를 입은 여자들이 사진 속에 있었다.
사진 밑에는 간단한 메모가 있었는데 잉크빛이 바래 있었다.
「이 앨범에 있을 거예요. 두 번째나 세 번째 면에요. 다른 앨범은 소니어
가 결혼하여 떠난 뒤의 사진들이거든요.」
미스 블랙록은 페이지를 넘기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여기 있을 텐데…….」
그 면에는 몇 개의 빈자리가 있었다.
클래독은 몸을 굽혀 희미한 메모를 읽었다.
<소니어……나……RG>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소니어와 벨 바닷가에
서>, 반대면에는 <스케인으로 피크닉>이라고 적혀 있었다.
뒷면으로 넘기자 거기에는 <샬로트, 나, 소니어, RG>라고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클래독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술은 일그러져 있었다.
「누군가 이 사진들을 떼어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일전에 우리가 보았을 땐 빈자리가 없었는데. 그렇지, 줄리어?」
「저는 그리 자세히 보지는 않고 사진 속의 옷들이 신기해서 얼핏 보았을
뿐이에요. 하지만 레티 아주머니 말씀이 맞아요. 빈자리는 없었어요.」
클래독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누군가 이 앨범에서 소니어 게들러의 사진을 몽땅 떼어낸겁니다.」

◎ 18장. 편 지 ◎

(1)
「헤임즈 부인, 실례합니다.」
필리퍼는 차갑게 말했다.
「좋으실 대로요.」
「이 방으로 들어가실까요.」
「서재요?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난로가 없어서 추우실 텐데요.」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상관없습니다. 이 방이라면 새어나갈 염려도 없구
요.」
「무슨 얘긴데요?」
「난 괜찮지만 남이 들으면 부인이 난처해질 테니까요.」
「무슨 뜻이지요?」
「부인은 남편이 이탈리아에서 전사했다고 그러셨죠?」
「그런데요?」
「사실대로 말씀하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남편께선 탈주병이었다고 말입
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녀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런 것까지 캐내신 모양이죠?」
클래독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진실을 바랄 뿐이죠.」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뇨, 헤임즈 부인?」
「그래서 어쩔 생각이냐고 묻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퍼뜨리고 다니시겠다는
건가요?」
「그럼,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풀이 꺾인 듯했다.
「아무도 몰라요. 아들인 해리조차 몰라요. 그 아이에겐 영원히 숨겨두고
싶어요.」
「헤임즈 부인, 그러면 당신이 몹시 곤란해질 겁니다. 아들이 이해할 만하
게 자라면 사실을 알려 주십시오. 스스로 그 비밀을 찾아내게 되면 그 결
과는 좋지 않습니다. 남편께서 영웅적인 전사를 꾸며내려 했다면 말입니
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진 않아요. 그애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죽었어요. 결
국, 그 이야긴―우리 모두를 위해서예요.」
「하지만 남편께서 살아 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나도 몰라요.」
「헤임즈 부인, 남편과 마지막 만난 게 언제였죠?」
필리퍼는 곧 대답했다.
「벌써 몇 년 동안 못 만났어요.」
「사실입니까? 2주인 전에 그를 만나지 않았습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죠?」
「당신이 섬머 하우스에서 루디 셔트를 만났다곤 믿어지지 않지만 미치는
확신하더군요. 내 얘기는 그날 당신이 만난 사람이 남편이 아니었나 하는
말입니다.」
「섬머 하우스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요.」
「남편께서 돈이 궁해서 당신이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를 만나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섬머 하우스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
요.」
「탈주병들은 종종 강도짓도 합니다. 그들은 외국에서 갖고 들어온 외제 연
발총을 소지하기도 하죠.」
「저는 남편이 어디에 살아 있는지도 몰라요. 벌써 여러 해 그를 만나지 못
했으니까요.」
「헤임즈 부인, 더 할 말씀 없습니까?」
「그 밖에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

(2)
클래독 경감은 필리퍼 헤임즈와의 이야기를 단념하고는 대단히 화가 치솟
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성난 듯 혼잣말로 내뱉었다.
「고집장이 노새로군.」
필리퍼가 거짓말한다는 것은 확실한데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는 것이
다.
경감은 헤임즈 대위에 대해 좀더 알고 싶었다. 그에 대한 자료는 불충분해
서 그가 죄를 범할 만한 사람인가를 알아내기 힘들었다.
어쨌든 그 문에 기름을 바른 사람이 헤임즈는 아니다. 그 집안의 누구이든
가 아니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의 짓이다.
그는 층계를 올려다보고 서 있다가 문득 줄리어가 다락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줄리어처럼 까다로운 여자에겐 다락방이란 어울
리지 않는 곳이 아닌가!
그곳에서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가볍게 2층으로 올라갔다. 거
기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다락방으로 통하는 좁은 계단을 올라갔다.
거기에는 여행가방, 슈트케이스, 망가진 가구, 다리가 떨어져나간 의자, 깨
진 도자기들이 널려 있었다.
그는 여행가방 한 개를 열어 보았다. 유행이 지난 고급옷들이 들어 있었다.
아마 미스 블랙록이나 그녀의 죽은 여동생 것이라고 경감은 짐작했다.
그는 또다른 트렁크를 열었다. 거기에는 커튼이 들어 있었다. 다시 그는 작
은 서류가방 쪽으로 갔다. 그 속에는 서류와 편지들이 들어 있었는데 그 편
지들은 누렇게 빛이 바래 있었다.
서류가방 바깥쪽에 CLB라는 머리글자가 보였다. 그는 레티샤의 여동생인
샬로트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편지 한 장을 펼쳤다.

사랑하는 샬로트, 어제 벨은 피크닉을 갈 정도로 좋아졌단다. RG도 오늘은
쉬었지. 아스보겔 회사의 주식 공모가 잘되어 RG는 매우 기뻐하고 있어.

그는 단숨에 편지를 훑어보고 서명한 곳을 보았다. <사랑하는 언니 레티샤
>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다른 편지를 집어들었다.

사랑하는 샬로트. 이따금씩 다른 사람들을 만나도록 하려무나. 너는 지나치
게 심각해. 네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심한 상태는 아니란다. 게다
가 사람들은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아.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심하지는 않다
니까.

경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벨 게들러가 샬로트 블랙록이 불구였다고 말
한 것을 기억했다. 레티샤는 동생을 돌보기 위해 일까지 버렸던 것이다.
편지는 어느 것이나 환자에 대한 위로와 사랑의 말로 가득했다. 그는 동생
에게 사소한 일까지도 소상히 적어 매일매일 적어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샬
로트는 이런 편지를 잘 보관해 두었다. 그리고 가끔 스냅 사진도 함께 들어
있는 것도 있었다.
갑자기 클래독의 가슴속에 흥분이 일었다. 이것으로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
른다. 이 많은 편지 속에는 레티샤 자신도 잊어버렸던 사실이 적혀 있을 수
도 있을 것이다.
과거를 보여 주는 사진도 있어서 귀중한 단서가 될 것이다. 앨범에서 사진
을 떼어냈던 사람조차 알 수 없는 소니어 게들러의 사진이 발견될지도 모른
다.
클래독 경감은 조심스럽게 편지들을 다시 넣고 층계를 내려왔다.
레티샤 블랙록이 아래에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락방에 올라간 사람이 당신이었나요? 발소리가 들렸지만 누군가 했어
요.」
「미스 블랙록, 오래 전에 당신이 여동생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발견했습니
다. 그것을 가져가서 읽어 보게 해 주십시오.」
그녀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
「꼭 그래야 하나요? 그것들을 읽어 본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되지요?」
「소니어 게들러의 성격에 대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죠. 또 조그만 단서를
얻을까 해서요.」
「그건 사적인 편지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럼, 역시 가져가려는 거군요. 자, 가져가라구요! 하지만 소니어에 대해
서는 알아낼 게 없을 거예요. 그녀는 내가 게들러 씨와 일한 지 1,2년 만에
결혼했으니까요.」
클래독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뭐든 쓸모가 있을 겁니다. 우리는 모든 자료를 조사해야 합니다. 저는 미
스 블랙록이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스 블랙록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도라가 나를 노린 아스피린을 먹고 죽었어요. 다음은 누구죠? 패트릭, 줄
리어, 또는 필리퍼나 미치―젊은이들의 목숨이 위험에 놓여 있어요. 나를 위
해 따라놓은 포도주나 내게 보낸 초콜렛을 먹고 죽을지도 몰라요. 편지를 가
져가세요. 보신 뒤에는 태워 버리세요. 그것은 나와 샬로트 외에는 아무 의
미도 없는 편지에요. 모두 지난 과거일 뿐이에요.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녀는 목에 걸고 있는 모조 진주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클래독은 그녀의
옷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말했다.
「편지를 가져가세요.」

(3)
클래독이 목사관을 방문한 것은 이튿날 오후였다. 어둡고 바람이 몹시 불었
다.
미스 마플은 벽난로 가까이에 의자를 당겨놓고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번치
는 마룻바닥 위에 엎드려 옷감의 본을 뜨는 중이었다.
미스 마플은 클래독을 보자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반갑
게 바라보았다.
「남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건지는 모르지만―이 편지들을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다락방에서 그 편지들을 발견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정말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미스 블랙록이 진정으로 동생을 위해 온갖 정
성을 다했어요. 그리고 의사였던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나더군요. 고집스런
영감으로 수천 명 환자들이 그 고집 때문에 목숨을 잃었을지 모르죠. 그에게
는 새로운 방법도 없었을 테니까요.」
미스 마플이 말했다.
「글쎄요, 그런 것까진 모르겠지만 젊은 의사란 무턱대고 실험해 보고 싶어
하지요. 새로운 방법이라며 남의 이를 마구 쑤셔댄 뒤 더 이상 치료할 게 없
다고 내던지고 말죠. 난 옛날처럼 큰 약병을 받는게 좋아요. 뒤엔 그것을 버
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는 클래독에게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가 말했다.
「그 편지를 읽어 보십시오. 저보다는 미스 마플께서 그 무렵의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시겠지요. 솔직히 나는 그들의 심정을 통 이해할 수 없어요.」
미스 마플은 낡은 편지를 폈다.

그리운 샬로트
집안에 문제가 있어 하루 편지를 못했단다. 랜들의 동생 소니어―너도 그녀
를 기억하지? 언젠가 네가 드라이브하자고 권했었잖니? 그리고 그것은 내가
바라던 바였고―가 결혼을 발표했어. 드미트리 스탠포디스와.
나는 그와 딱 한 번 만났지만 틀림없는 사람은 아니더구나. RG는 그를 몹
시 싫어하며 사기꾼이라고 한단다.
벨은 소니어에게 축하하며 그녀에게 바싹 붙어 있어. 소니어는 태연한 체하
지만 RG와 극한 대립을 벌이고 있단다. 어제는 정말 그녀가 오빠를 죽이는
줄로 생각했을 정도였어.
나도 힘이 들어. 소니어를 타이르고 RG에게도 얘기하여 겨우 납득시켜 놓
으면 또다시 전처럼 되어 버리지. 정말 피곤한 일이야. RG가 뒷조사를 해보
니 스탠포디스라는 사내, 정말 안좋은 인물인가봐.
그 동안 그가 사업에 신경쓰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맡아 하고 있지. RG가
소신껏 해도 좋다고 하기에 나는 아주 신나는 날을 보내고 있단다. 그가 어
제는 나에게 말했어.
『고맙군. 세상엔 아직도 정직한 사람도 있어. 당신은 사기꾼 따위와 연애
하진 않겠지, 블래키?』
『나는 누구와도 연애 따윈 하지 않아요.』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 그는 말했지.
『그럼 한 번 시험해 볼까?』
그도 이따금 심한 장난을 한단다. 일전에는 이런 말도 했어.
『당신은 나를 좁고 빠른 길로 끌고 가려고 하고 있소.』
나도 그럴 생각이야. 세상 사람이 어째서 정직하게 생각하지 못하는지. 하
지만 RG는 그렇지 않아. 그는 무엇이 위법인지 알고 있을 뿐이지.
벨은 이 사건에 대해 웃기만 하지. 소니어에 대해 마음 쓰는건 바보짓이라
고.
『소니어는 자기 재산도 있잖아요. 왜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하지 못하지
요?』
그녀의 신세를 그르치게 되기 때문이라고 내가 말하자 그녀는 다시 말했어.
『결혼하고 싶은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니예요. 랜들은 소니
어가 결혼하기를 바라지 않는가 봐. 그는 배금주의자니까.』라고 하더구나.
오늘은 이만 줄여야겠다. 아버지는 좀 어떠시니? 새삼스레 뭐라 할 말은 없
지만 네가 판단해서 잘 말씀드려.
그 뒤 누구라도 만나 보았니? 너무 침울해 있지 말아라. 소니어가 방금 안
부 전해 달라고 하더구나. 그녀는 성난 고양이처럼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어. 틀림없이 RG와 싸운 모양이다. 물론 소니어는 사람을 화나게 하는 데
가 있어. 그 차가운 눈길을 한 번 받는다면 말이야.
샬로트, 기운을 내. 이번 요드 치료는 좋은 효과가 있을 거야. 나도 여러 가
지로 조사해 봤더니 결과가 좋을 것 같구나.
사랑하는 언니 레티샤

미스 마플은 편지를 접어 클래독에게 넘겨주었다. 그녀는 상당히 흥미를 느
끼는 것 같았다.
클래독이 재촉하듯 물었다.
「그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성격이라고 상상하십니까!」
「소니어 말인가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통해 사람을 알아내기란 어려운
거예요. 직감을 믿으세요.」
클래독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성난 고양이처럼 손을 쥐었다폈다 한다……그래요, 어떤 사람이 생각났습
니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미스 마플이 중얼거려싿.
「신원 조사를 해야지요…….」
클래독이 말했다.
「만약 그 신원 조사의 결과가 나오게 되면…….」
번치가 입에 핀을 문 채, 불분명한 말투로 물었다.
「그 편지를 읽으니 세인트 메리 미드에서의 일이 연상되지 않나요?」
「글쎄……닥터 블랙록은 메디스트 교회의 목사 커티스 씨와 닮은 데가 있
어요. 그는 자기 딸의 이에 금을 씌우지 못하게 했어요. 이가 썩는 것도 신
의 뜻이라고 말이에요. 내가 이렇게 말했지요. 『당신은 수염도 깎고 머리도
자르지요? 자라는 게 신의 뜻이라면 그것도 깎지 말아야 되잖아요?』라고
말이에요. 그랬더니 그것은 다르다고 하더군요. 인간적이라나요. 하지만 이번
문제와는 관계없어요.」
「권총에 대해서는 잘 조사하지 못했습니다. 그 총은 루디 셔트의 것이 아
니었습니다. 치핑 클렉혼에서 그 권총을 갖고 있던 사람을 알아봐야겠습니
다.」
번치가 끼어들었다.
「이스터브룩 대령이 갖고 있어요. 그는 옷을 넣는 서랍 속에 그걸 넣어 두
었어요.」
「어떻게 알지요, 허먼 부인?」
「배트 부인이 그러더군요. 그녀는 일주일에 두 번 은 우리 집에 오지요.
그녀 말에 의하면 군인이니까 권총을 갖고 있는 건 당연하다더군요. 그리고
도둑이 들어오면 잡을 수도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오래 전에요. 한 6개월쯤 되었을 거예요.」
「이스터브룩 대령이라…….」
클래독이 중얼거렸다.
번치가 여전히 입에 핀을 물고 말했다.
「마치 포인터 개같지 뭐예요? 무언가 냄새를 맡고 뱅글뱅글 돌다가 이상
한 걸 발견하면 멈추잖아요.」
클래독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 이스터브룩 대령은 리틀 파독스에 인도에 관한 책을 주러 간 적
이 있습니다. 그때 문에 기름을 칠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는 매우 자상한
사람이죠. 미스 핀칠리피와는 달리…….」
미스 마플이 가볍게 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경감님, 우리와 보조를 맞춰야 합니다. 당신은 결찰이에요. 사람들은 경찰
에게 모든 건 털어좋지는 않아요. 안 그런가요!」
「왜 그럴까요? 죄를 짓지 않았는데 왜 말을 못합니까?」
번치는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가 종이조각을 고정시키고 또 끼어들었다.
「아주머니는 버터를 말하는 거예요. 암탉에게 줄 버터와 옥수수―때로는
베이컨 조각을 말이에요.」
미스 마플이 그녀에게 말했다.
「미스 블랙록에게서 온 쪽지를 보여 드려라, 번치. 아주 훌륭한 추리소설
같아요.」
「아주머니, 이것 말씀인가요?」
미스 마플은 그것을 받아들고 훑어본 다음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맞아, 이거야.」
그녀는 종이를 클래독에게 건네 주었다. 거기엔 미스 블랙록의 필체로 다음
과 같이 씌어 있었다.

조사해 보니 목요일이에요. 3시 이후에 언제든지 내게 전하려는 것을 평소
그 자리에 놓아두세요.

번치는 입에서 핀을 뱉어내고 웃었다. 미스 마플이 경감의 얼굴을 바라보았
다.
「목요일이라면 이 동네 농가에서 버터를 만드는 날이에요. 그리고 이웃에
게 조금씩 나누어 주기도 해요. 보통 미스 핀칠리피는 그것을 모으지요. 그
녀는 돼지먹이로 농장에서 버터를 긁어모아 간답니다. 하지만 이건 비밀인
데, 일종의 물물교환이지요. 버터를 받고 오이를 준다던가 돼지를 잡을 때
고기를 주나봐요. 가끔 가축이 사고를 당할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이런 물
물교환이 비합법적이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사람은 없어요. 다만
귀찮으니까 눈감아 주는 것일 뿐이죠. 난 핀치가 버터를 가지고 리틀 파독스
에 가서 언제나 놓아두는 그 자리에 놓는 거라고 생각해요. 평소 그곳이란
조리대 밑의 밀가루 그릇을 말하죠. 밀가루가 들어 있지 않아요.」
클래독은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잘 알았습니다.」
번치가 말을 이었다.
「또, 의류 배급표도 있어요. 돈은 쓰이지 않아요. 배트 부인이나 허긴스 부
인은 흔하지 않은 멋진 옷을 입고 싶어하죠. 그들은 돈 대신 배급표를 이용
해서 물건을 산답니다.」
클래독이 말했다.
「됐습니다. 모두 위법이군요.」
번치가 다시 입에 핀을 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런 답답한 법률 따위는 소용없다구요. 물론 난 그런 것은 안
해요. 줄리언이 싫어하니까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쯤은 잘 알지요.」
경감의 얼굴이 절망감으로 일그러졌다.
「재미있고 간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남자와 한 부인이 죽었고 또
한 사람이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핍과 에머에 대해서는 제쳐두고 소니어에
대해 알아봅시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 편지에는 한두
장의 스냅 사진이 들어 있었는데 그녀의 것은 없더군요.」
「어떻게 그녀가 없다는 걸 아시죠? 어떻게 생겼는지 아시나요?」
「몸집이 작고 검은 머리칼이라고 미스 블랙록이 말했습니다.」
「정말이에요? 흥미롭군요. 난 한 멋진 여자의 스냅 사진을 기억하고 있는
데, 머리는 위로 올리고 키가 늘씬하게 큰 여자였어요. 누구인지는 모르겠지
만 소니어는 아니예요. 스웨트넘 부인은 젊었을 때 검은색 머리칼을 가지지
않았을까요?」
번치가 대답했다.
「검지는 않았을 거예요.」
경감은 편지를 집어들었다.
「드미트리 스탠포디스의 사진을 찾아냈더라면 좋았을 텐데,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자, 이제 그만…… 별 도움이 못되어 유감입니다, 미스 마플.」
「아니예요. 그 편지는 썩 도움이 돼요.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 경감님.
특히 랜들 게들러가 드미트리 스탠포디스의 신상조사를 했다는 대목을 말이
에요.」
클래독은 미스 마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번치가 마룻바닥에서 일어나 홀로 나갔다. 전화는 전형적인 빅토리아식 홀
과 잘 어울리는 자리에 놓여 있었다.
번치가 돌아와 클래독에게 말했다.
「경감님 전화받으세요.」
그는 좀 놀란 듯한 표정으로 전화기 쪽으로 갔다.
「클래독인가? 나 라이스델일세.」
「네, 서장님.」
「자네 보고서를 검토했는데, 필리퍼 헤임즈가 남편이 탈주한 이후 만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녀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진실로 말했다
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네. 열흘 전, 트럭에 치인 남자가 밀체스더 병원에 실려간
사건을 기억하나? 뇌진탕과 골절이었지.」
「어린 아이를 살리려다 치었던 사람 말입니까?」
「그래. 전혀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친지도 없고 아무래도 도망다니
는 사람 같다고 했잖나. 그가 어젯밤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신원을 알아냈네. 그는 남부 롬셔 부대의 전 육군 대위 로널드 헤임즈야.」
「그럼 필리퍼 헤임즈의 남편인가요?」
「맞아. 그런데 치핑 클렉혼의 버스표와 상당액수의 돈을 지니고 있었네.」
「필리퍼에게서 받은 돈일 겁니다. 저는 미치가 섬머 하우스에서 필리퍼와
말하는 걸 들었다던 그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필리퍼는 완강히 부
인했지만 그 교통사고는 그 전에―.」
라이스델이 말을 이었다.
「그래. 사내가 밀체스더 병원에 실려간 것은 28일, 리틀 파독스에서의 강
도사건은 29일에 일어났지. 그러나 그 사건과는 관련이 없네. 물론 그의 아
내는 사고를 전혀 모르고 있지. 그가 강도사건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할지
도 모르지. 그러나 어떻든 남편이니까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
가.」
클래독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훌륭하지 않습니까?」
「트럭에서 어린 아이를 구해낸 것 말인가? 그렇지 용감해. 그가 겁쟁이여
서 군대에서 탈주한 것은 아닌 모양이야. 게다가 모두 지난 일이야. 오점을
남긴 인물에게는 훌륭한 죽음이지.」
「그녀에게는 잘된 일이군요. 그리고 아들에게도.」
「그렇지. 아버지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도 되고, 그 부인도 재혼할
수 있으니.」
클래독이 천천히 말했다.
「저는 그것을…… 가능성이 생긴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네가 그곳 담당이지. 그 소식을 자네가 그녀에게 알려주는 게 좋겠
네.」
「그러죠. 지금 곧 가겠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리틀 파독스로 돌아올 때까
지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몹시 충격적일 테니까요. 그리고 그 전에 이야
기를 나누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 19장. 사건 재구성 ◎

(1)
「가기 전에 스탠드를 켜드릴께요. 하늘이 어두워요. 곧 폭풍이 불어올 것
같아요.」
번치는 독서용 스탠드를 테이블 한쪽에 놓았다.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서 뜨개질을 하는 미스 마플이 밝게 뜨개질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전기줄이 테이블 위를 가로질러 당겨지자 고양이 티글라스필레샤가 전기줄
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장난치지 마, 필레샤. 아무 거나 막 물어뜯는구나. 코드가 벗겨지면 감전
된단 말이야.」
미스 마플이 그녀에게 인사했다.
「고마워, 번치.」
미스 마플이 손을 뻗어 스위치를 켜려고 했다.
「거기가 아니예요. 코드 중간에 있는 작은 스위치를 켜야 해요. 이 꽃을
치워야겠어요. 거치적거리기만 하니까.」
그녀는 크리스마스 장미꽃이 꽂힌 수반을 집어들었다. 고양이가 꼬리를 흔
들어 번치의 팔에 뛰어오르는 바람에 수반에서 물이 몇 방울 떨어지자 고양
이는 깜짝 놀라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미스 마플이 배 모양의 작은 스위치를 눌렀다. 물이 묻은 전기줄의 선이 벗
겨진 부분에서 탁탁 불꽃이 튀었다.
「어머, 퓨즈가 끊어졌어요. 집안의 불이 모조리 나갈 거예요.」
그녀는 옆의 전등을 켜보려고 했다.
「다 나갔어요. 멍청이야. 테이블 위에서 불꽃이 튀게 하다니 이 말썽꾸러
기 티글라스필레샤! 모두 네 탓이야. 제인 아주머니 왜 그러세요? 너무
놀라셨나보군요?」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진작 알아챘어야 하는 건데 지금에야 깨달았
어.」
「가서 퓨즈를 고치고 줄리언의 서재에서 스탠드를 가져오겠어요.」
「괜찮다. 버스를 놓치겠어. 불이 없어도 돼. 난 이제부터 조용히 생각할 게
있단다. 얼른 서두르지 않으면 버스를 놓치겠다.」
번치가 나간 뒤 미스 마플은 잠시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방안의 공기는
무거웠고 폭풍우가 위협하듯 거칠게 소리를 냈다.
미스 마플은 종이를 당겨 <스탠드>라고 쓰고 밑줄을 긋고 잠시 후 또 다
른 단어를 적었다.
그녀의 펜이 종이 위를 미끄러져 단어를 만들면서 움직여 나갔다.

(2)
낮은 천장과 창살문이 달린 볼더즈의 거실에서 미스 핀칠리피와 마것로이
드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것로이드, 너는 뭐든 해 보지 않으려는 게 나쁜 점이야.」
「하지만 핀치, 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잖아.」
「이것 봐, 마것로이드. 우리는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돼. 탐정의 눈으로 보
아야 해. 우린 문을 여는 문제에 대해 해결을 보지 못했어. 범인을 위해
문을 열어 준 것은 네가 아니야. 너는 결백해, 마것로이드!」
마것로이드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미스 핀칠리피가 말을 이었다.
「치핑 클렉혼의 청소부는 말이 없다니, 따분해! 나는 항상 그걸 고맙게 생
각했는데 이번만은 오히려 실망이야. 그곳 사람들은 거실의 문에 대해 다
알고 있는데 우린 겨우 어제야 그 얘기를 들었단 말이야.」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어떻게…….」
「그건 아주 간단한 일이야. 우리가 처음 생각한 게 옳았어. 문을 열고 회
중전등을 비추면서 권총을 쏘는 동작은 한꺼번에 할 수가 없어. 그래서
우린 권총과 회중전등을 결부시키고 문에 대한 것은 포기했지. 그런데 우
리가 틀린 거야. 손에서 버려야 할 것은 권총이었어.」
「하지만 그는 권총을 들고 있었어. 난 보았어. 쓰러져 있는 그의 곁에 있
던 총 말이야.」
「그가 죽었을 때는 그랬지. 그건 분명해. 하지만 그는 권총을 쏜 게 아니
야.」
「그럼 누가 쏘았지?」
「그것을 알아내야 해. 하지만 누군가 분명히 쏘았겠지. 그가 누구이든 레
티샤 블랙록의 침대 곁에 독이 든 아스피린을 놓아둔 사람과 동일 인물
이야. 그 때문에 도라 배너까지 희생되었지만. 그리고 루디 셔트는 아니
야. 그는 죽어버렸으니까. 범인은 강도극이 있던 날 밤과 생일 파티에도
참석한 인물일 거야. 그렇다면 허먼 부인은 아니지.」
「내 생각엔 생일 파티가 있던 날 누군가가 그 아스피린을 놓아둔 것 같은
데?」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했을까?」
「그는 가끔 그 자리를 떠났지? 난 케잌이 묻어 끈적해진 손을 씻으러 욕
실에 갔고, 이스터브룩 부인은 미스 블랙록의 침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
더군. 그녀는―.」
「핀치! 넌 그녀가―.」
「아직은 확신할 수 없어. 네가 만일 독이 든 아스피린을 갖다놓을 생각이
었다면 네가 그 방에 들어가는 것을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하지는 않
았을 거야. 그런데 그녀가 침실에 있는걸 모두 보았거든.」
「남자들은 2층에 올라간 사람이 없어.」
「뒤쪽에 또 층계가 있어. 게다가 자리를 뜬 사람의 뒤를 쫓아가 살펴본 것
도 아니잖아. 그러니 2층에 가지 않았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어? 아무
튼 그 얘긴 그만하고 처음으로 돌아가 미스 블랙록을 살해하려던 사건을
더듬어 봐야겠어. 그러니 잘 기억해내야 돼. 모든 게 네게 달려 있으니
까.」
미스 마것로이드는 깜짝 놀랐다.
「어머, 핀치! 내가 어떻게 해야 되지?」
「그건 두뇌 문제가 아니야. 그건 바로 눈에 대한 문제야. 즉 네가 무엇을
보았는지 그게 문제야.」
「하지만 난 아무것도 본 게 없는데.」
「마것로이드, 너의 좋지 않은 점은 방금 전에 말했듯이 뭐든 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거야. 주의를 집중시켜 봐. 이건 실제로 벌어진 일이야. 그날
밤, 누군가 레티 블랙록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분명 그 방에 있었어.
그는 ―편의상 <그>라고 부를게. 물론 여자일 수도 있어. 하지만 남자란
비열한 존재이니까―거실로 통하는 또 하나의 문에 미리 기름을 칠해 놓
았어. 왜그랬나 하는 이유는 묻지 마. 혼란스러우니까. 사실상 30분 쯤은
누구에게도 눈치채이지 않고 필요한 방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
을 거야. 파출부와 집주인이 없는 시간만 알면 간단한 일이지. 아무튼 그
는 철저히 계획을 세워 또 하나의 문에 기름을 발라 소리 없이 문이 열
리도록 한 거지. 불이 꺼지고 첫 번째 문 A가 활짝 열리며 회중전등 빛
이 비춘다. 모두 정신없이 소란스런 틈을 타서 범인 X―이 말이 가장 어
울리는군―는 또 하나의 문 B를 통해 조용히 홀로 나갔다. 그리고 스위
스 청년 뒤로 가서 레티 블랙록을 향해 두 발을 쏘고 그리고 스위스 청
년을 쏜다. 그는 사람들이 스위스 젊은이가 쏘았다고 여길 만한 곳에 총
을 떨어뜨려 놓고 불이 켜지기 전에 재빠르게 거실로 되돌아온다. 어때,
알겠어?」
「그래. 하지만 그게 누굴까?」
「마것로이드, 너만이 알 수도 있지.」
「내가? 나는 몰라, 아무것도!」
미스 마것로이드는 놀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를 잘 써봐. 불이 꺼졌을 때 모두 어디에 있었지?」
「몰라.」
「아니야. 너는 알고 있어. 지금 너는 흥분해 있어. 너는 네 자신이 어디 있
었는지 알지? 문 뒤에 있었어.」
「그, 그래. 문이 열리면서 내 발가락에 닿았어.」
「그 때문에 휘청할 정도라면 치료를 받지 그러니? 그러면 멍든 게 나아질
거야. 자, 다시―넌 문 뒤에 있었고 나는 벽난로 앞에서 음료수를 기다리
던 참이었어. 레티 블랙록은 현관 가까이 있는 테이블로 담배를 가지러
갔었고 패트릭 시먼즈는 레티 블랙록이 술을 준비해 둔 옆방으로 가고
있었지?」
「그래. 그러니까 생각이 나.」
「좋아. 그때 누군가가 패트릭을 따라 그 방으로 갔거나 막 뒤따르려고 했
어. 분명 그 방에 있던 남자들 중의 하나인데 그가 이스터브룩 대령인지
에드먼드 스웨트넘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넌 기억하고 있니?」
「아니.」
「넌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군. 그리고 그 방으로 간 사람이 또 있어.
필리퍼 헤임즈였어. 나는 그때 그녀의 상체가 멋지다고, 승마를 하면 멋
질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래서 기억을 하지. 그녀는 벽난로 앞을 지나
작은 방으로 갔어. 그런데 불이 꺼졌기 때문에 난 그녀가 무엇을 하려 했
는지 보지 못한거야. 이제 중요한 부분이야. 옆방에는 패트릭 시먼즈와
필리퍼 헤임즈, 그리고 이스터브룩 대령이나 에드먼드 스웨트넘 중 누군
가가 있었어―누가 범인인지는 몰라. 마것로이드, 잘 생각해봐. 셋 중에
구인가 말이야. 두 번째 문으로 빠져나가려면 재빨리 행동할 수 있도록
가까이 있는 사람이 했겠지. 아마도 그 셋 가운데 한사람일 것이라고 생
각해. 그런 경우 마것로이드 너는 관계가 없어.」
마것로이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지만 범인은 셋 중에 없을 수도 있어. 그러면 또 너는 관련되는 셈이
지.」
「난 몰라. 전혀 몰라.」
「아냐. 너는 생각해낼 수 있어. 아까도 말했듯이 네가 모른다면 아무도 모
르는 일이야. 볼 수 있던 사람은 너뿐인 걸. 너는 문 뒤에 서 있었기 때
문에 문에 가려 전등빛이 비치지 않았어. 그러니까 다른 쪽, 즉 회중전등
이 비치는 쪽을 볼 수 있었을 거야. 다른 사람들은 눈이 부셔도 너는 그
렇지 않았잖아.」
「아냐, 아냐.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회중전등이 방안을 빙 움직이며
비쳤으니까.」
「회중전등이 무얼 비추었지? 사람들 얼굴? 테이블, 의자?」
「그래, 그랬어. 미스 배너가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깜박이며 쳐다보고 있
었어.」
「그래! 너의 그 머리를 움직이기가 정말 힘들구나. 자, 계속해 봐.」
미스 핀칠리피는 힘겹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본 것은 그것뿐이야.」
「그럼 방안에 아무도 없었단 말이야? 서 있지도 앉아 있지도 않았단 말이
야?」
「아니, 그런 건 아니야. 허먼 부인이 팔걸이 의장 앉아 어린애처럼 덜덜
떨고 있었어.」
「됐어. 허먼 부인과 미스 배너는 그랬었고, 넌 내가 무엇을 찾아내려고 하
는지 아직 모르겠니? 하지만 네가 본 사람을 빼고 나면 중요한 점, 네가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남게 될 거야. 예를 들면 줄리어 시먼즈, 스웨트넘
부인, 이스터브룩 부인, 그리고 이스터브룩 대령이나 에드먼드 스웨트넘
중의 하나, 그리고 도라 배너와 번치 허먼이지. 그 중에 허먼 부인과 미
스 배너는 보았으니까 됐어. 한 사람만 남겨놓도록 기억해 봐. 마것로이
드, 그들 중에 분명히 그 방에서 보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지?」
미스 마것로이드는 열린 창틈으로 나뭇 가지가 닿는 소리에 움찔 놀랐다.
그녀는 눈을 감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꽃이 있었지…… 테이블 위에…… 커다란 의자…… 회중전등은 게가 있
는 곳까지 비치지 않았어, 핀치. 허먼 부인은…….」
그때 전화벨이 요란스레 울렸다. 미스 핀칠리피가 다가갔다.
「여보세요? 네…… 역이라구요?」
미스 마것로이드는 눈을 감고 29일에 대해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회중전등
이 천천히 움직였다. 사람들…… 창문…… 소파…… 도라 배너…… 벽……
스탠드가 놓인 테이블…… 현관…… 그리고 갑자기 권총이 나타났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야.」
미스 핀칠리피가 화가 난 듯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뭐라구요? 아침부터라구요? 지금이 몇신데 이제야 전화를 하는 거죠? 빌
어먹을! 실수였다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리예요?」
그녀는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개 말이야. 붉은 세터. 오늘 아침 8시부터 역에 있었대. 그 멍청이가
이제야 전화했어. 지금 데리러 가야겠어.」
그녀가 방을 나서자 미스 마것로이드는 큰소리로 외쳤다.
「내 말 좀 들어봐, 핀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이미 미스 핀칠리피는 차고로 쓰는 창고로 갔다. 그녀는 소리쳤다.
「내가 돌아온 뒤에 다시 이야기하자. 네가 생각해낼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해가 지고 말겠다. 너와 함께 가고 싶지만 기다릴 시간이 없어. 넌 항상
침실 슬리퍼를 신고 있는데 갈아신을 시간도 없단 말이야.」
미스 핀칠리피는 재빨리 자동차를 타고 밖으로 몰았다. 미스 마것로이드는
얼른 차 옆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핀치, 들어 봐. 지금 말해야겠어.」
「다녀와서 듣겠어.」
자동차는 속도를 내며 떠났다. 미스 마것로이드의 흥분한 목소리가 희미하
게 흩어졌다.
「하지만 핀치, 그녀는 거기에 있지 않았어…….」

(3)
머리 위에는 짙은 구름이 몰려와 주위는 어두컴컴해졌다. 미스 마것로이드
가 떠나간 차를 바라보고 있을 때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허둥지둥 달려가 뜰의 줄에 걸린 빨래를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도무지 생각도 못한 일이야…… 저런, 거의 다 말랐는데 다 젖겠네.」
그녀는 빨래 집게를 겨우 다 벗겨내자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 뒤돌아보았
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맞았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옷이 다 젖겠어요.」
「도와드릴까요?」
「고마워요. 빨래를 걷어야 하는데 빨랫줄에 손이 닿지 않아서요.」
「여기 스카프가 있어요. 목에 감아드릴까요?」
「고마워요…… 이 빨래 집게에 손이 닿을 수 있으면…….」
털로 짠 스카프가 그녀의 목에 부드럽게 감겼다. 그리고 갑자기 팽팽히 당
겨지기 시작했다.
미스 마것로이드는 입을 벌리고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숨소리만 가늘어
질 뿐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스카프는 더욱 세게 죄어지고 있었다…….

(4)
미스 핀칠리피는 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종종걸음으로 가고 있는 미스 마플
을 보고 자동차를 세웠다.
「젖으시겠어요. 우리집에 가서 차라도 한잔 드시지 않겠어요? 번치가 버스
를 기다리고 있는 걸 보았으니 집에 가셔도 아무도 없을 거예요. 난 마것
로이드와 사건을 재구성해 보고 있답니다. 어딘지 잘못되어 있던 게 아닐
까 하구요. 개를 조심하세요,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거든요.」
「개가 예쁘군요.」
「귀엽지요? 그런데 그 멍청이들이 알려주지도 않고 아침부터 내내 내버려
두었답니다. 게으름뱅이들! 어머, 이런 말씨를 써서 죄송해요. 아일랜드에
있는 하인들에게 배웠지 뭐예요.」
작은 차는 볼더즈의 좁은 뒤뜰로 달려갔다.
그들이 차에서 내리자 오리며 닭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미스 핀칠리피가 말했다.
「마것로이드가 아직 모이도 안 줬군.」
미스 마플이 물었다.
「옥수수 구하기가 어렵지 않나요?」
미스 핀칠리피는 눈을 찡긋해 보였다.
「농부에게 부탁하면 쉽게 구할 수 있죠.」
발밑의 닭을 쫓으며 그녀는 미스 마플을 집쪽으로 안내했다.
「많이 젖으셨어요?」
「아니예요. 이 옷은 방수가 아주 잘되어 있어요.」
「마것로이드가 불을 지펴 놓지 않았으면 내가 해야겠어요. 마것로이드, 어
디 있지 마것로이드! 얘는 어딜 갔담! 도대체 어딜 간 거야.」
뜰 쪽에서 개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성가시게 구는군.」
미스 핀칠리피는 문을 열고 소리쳤다.
「커티, 커티! 다른 이름을 지어 주어야겠어요. 이름이 나빠요.」
그녀가 뜰을 바라보았을 때 빨래가 나부끼고 팽팽하게 당겨진 빨랫줄 아래
에서 세터종의 개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것이 보였다.
「마것로이드가 빨래를 걷지도 않았잖아?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또다시 개가 옷뭉치인 듯한 더미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더니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저 개가 왜 그러지?」
미스 핀칠리피는 잔디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미스 마플도 걱정스러워 종종걸음으로 그녀를 뒤쫓았다. 그러다 두 사람은
우뚝 멈춰서따.
그리고 미스 마플은 미스 핀칠리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미스 핀
칠리피의 몸이 굳어진 것을 느꼈다. 미스 핀칠리피는 발밑에 누워 있는 시퍼
렇게 굳어진 물체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누군지 반드시 죽이고 말겠어. 그녀의 꽁무니만 잡았다면 그냥…….」
미스 마플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녀라니요?」
미스 핀칠리피는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미스 마플에게로 돌렸다.
「그래요. 나는 누군지 짐작하고 있어요. 세 가지 가능성 중에 하나예요.」
그녀는 죽어 있는 친구의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감
정을 억제한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에 알려야겠어요. 그들이 오는 동안 미스 마플, 당신께 말씀드리지요.
마것로이드가 살해된 것은 내 잘못이기도 해요. 나는 게임을 한 거예요.
그러나 살인 게임은 아니었는데…….」
미스 마플이 말했다.
「그럼요. 살인은 게임이 아니죠.」
미스 핀칠리피가 다이얼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은 이 사건에 대해 뭔가 알고 계신 것 아닌가요?」
그녀는 간단히 사건을 신고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면 경찰이 올 거예요. 난 당신이 이 일에 관계했다고 들었는데―
에드먼드 스웨트넘이 내게 말해 주었지요. 마것로이드와 내가 무엇을 하
려고 했는지 아세요?」
미스 핀칠리피는 역으로 나가기 전에 마것로이드와 주고받았던 얘기를 설
명해 주었다.
「내가 막 떠나려고 할 때 그녀가 내 뒤에서 소리쳤어요. 그래서 여자라는
것을 알았어요. 만일 좀더 기다렸다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빌어
먹을 그 개를 15분쯤 기다리게 해도 되는 건데 말이에요.」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누구나 앞을 내다보지 못하니까요.」
「그렇죠. 사람은 앞을 내다볼 수 없지요…… 그런데 아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분명히 범인은 밖에 있었어요. 그녀는 거기 있었던 거
예요. 그런데 마것로이드와 나는 큰소리로 얘기했구요. 그래서 그녀는 모
조리 들은거예요.」
「그런데 당신 친구가 한 말을 들었습니까?」
「꼭 한마디였어요. 『그녀는 거기 없었어』라구요.」
미스 핀칠리피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 명의 여자를 지목했죠. 스웨트넘 부인, 이스터브룩
부인, 그리고 줄리어 시먼즈―그들 중 한 명이 거기에 없었던 사람이에
요. 다른 문으로 빠져나가 홀에 나갔으니 거실에 있지 않았던 거예요.」
미스 마플이 말했다.
「그렇군요.」
「그 셋중에 하나에요.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밝혀낼 거예요.」
「잠깐, 미스 마것로이드는 지금 당신이 말한 것처럼 소리쳤나요?」
「내가 말한 것처럼이라뇨?」
「뭐랄까…… <그녀는 거기에 없었어>라고 세 마디에 똑같이 강세를 주는
방법 말이에요. 그 말을 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어요. <그녀는> 거
기에 없었어―이 경우는 특정한 사람을 강조하죠. 그녀는 거기에 <없었
어>에 힘이 들어갔다면 의혹에 가득찬 말이지요. 또 그녀는 <거기에>
없었어, 라고 하는 방법이 있지요. 이 마지막 경우는 말 전체에 강세가
들어 있지만 특히 거기에 강세를 두는 거지요.」
미스 핀칠리피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거기까지는 기억을 못해요. 마것로이드는 분명히 <그녀는 거
기에 없었어>하고 자연스럽게 말한 것 같았는데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
겠어요.」
미스 마플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글쎄요. 말하는 방법이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역시 어떤 암시를 나타내
고 있는 거에요. 그럼요. 이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고 말구요.」
미스 마플은 다시 한 번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20장. 미스 마플의 실종 ◎

(1)
치핑 클렉혼의 우체부는 아침은 물론 오후에도 배달하라는 지시를 받고 몹
시 풀이 죽어 있었다.
이날 오후 5시 10분 전에 그는 리틀 파독스에 세 통의 편지를 배달하였다.
한 통은 아이들 글시로 또박또박 쓴 것인데, 필리퍼 헤임즈가 수신인이었
다. 나머지 두 통은 미스 레티샤 블랙록 앞으로 온 편지였다.
미스 블랙록은 필리퍼와 함께 티 테이블에 앉아 편지를 뜯었다. 이날은 비
가 아침부터 줄기차게 내린 까닭에 온실 문을 닫아 버렸으므로 필리퍼는 아
무 할 일이 없었다.
미스 블랙록이 처음으로 뜯은 봉투 안에는 부엌 보일러를 수리한 청구서가
들어 있었다. 기분이 상한 그녀는 코를 킁킁거렸다.
「다이먼드는 폭리를 취하는군. 이건 정말이지 터무니없이 비싸잖아. 다른
사람도 모두 그렇게 여길 거야.」
그러면서 또 한통의 편지를 뜯었다. 그것은 눈에 익지 않은 글씨체였다.

보고 싶은 레티 아주머니

오는 화요일에 아주머니를 찾아뵈어도 괜찮을까요? 이틀 전에 패트릭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아직 회답이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음 달에 어머니가 잉글랜드에서 오시는데, 아주머니
를 뵙고자 하시거든요. 오후 4시 15분에 도착하는 열차로 치핑 클렉혼ㅇ 가
겠습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합니다.
줄리어 시먼즈

미스 블랙록은 놀람을 금치 못하며 그 편지를 읽었다. 그러나 곧 냉정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문득 필리퍼는 어떻게 하고있는지 바라보았다.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띠면
서 아들에게서 온 편지를 읽고 있었다.
「줄리어와 패트릭이 돌아왔을까요?」
그제서야 필리퍼가 얼굴을 들었다.
「네, 아까 내가 들어온 뒤 곧바로 돌아왔어요. 옷이 비에 젖었더군요. 그
래서, 갈아입으려고 2층에 올라갔답니다.」
「그럼 좀 불러 줘요.」
「그러지요.」
「잠깐만―이것 좀 읽어 봐요.」
필리퍼는 편지를 읽고 나자 낯빛이 흐려졌다.
「이럴 수가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서 줄리어와 패트릭을 불러 줘요.」
필리퍼가 층계 위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패트릭! 줄리어! 레티 아주머니가 찾으세요.」
이에 패트릭이 층계를 뛰어내려와 방으로 들어섰다.
「필리퍼! 제발 여기 있어요.」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패트릭은 활기차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레티 아주머니?」
「글쎄, 너는 이 편지 내용을 알 것 같은데…….」
묵묵히 편지를 읽어 가는 패트릭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완연했다.
「그 아이에게 전보를 쳤어야 하는 건데…… 내가 어쩌다가 이런 실수를
했을까.」
「이 편지는 틀림없이 줄리어가 쓴 것이지?」
「네, 그렇습니다.」
미스 블랙록은 정색을 하여 물었다.
「그렇다면 줄리어 시먼즈라고, 네가 여기에 데려다 놓은 여자는 대체 누
구냐? 네 누이와 내 친척이라고 말한 그 여자의 정체가 뭐냔 말이다.」
「그러니까―레티 아주머니, 모든 걸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같은
행위가 나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한편으로는 재미있
는 장난이었답니다. 저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신다면―.」
「나는 그걸 들어야겠다. 먼저, 그 젊은 여자가 누구냐?」
「제가 제대한 직후에 어느 칵테일 파티에서 알게 된 여잡니다. 우리는 이
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무심코 제가 여기에 오게 된다는 걸 알리고 말
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 함께 오면 무척 즐거울 것이라고 여겼
어요. 줄리어는―아주머니께서 아시듯이 진짜 줄리어는 그때 배우가 되
고 싶어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한사코 반대했습니다. 줄리어는 뜻
을 굽히지 않고 계속 기회를 찾다가 마침내 파스 같은 큰 극단에 들어갔
습니다. 그러나 어머니한테는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저와 함께 있겠다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얌전히 약사 공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너는 그 여자가 누구라는 걸 밝히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때, 줄리어가 태연스럽게 방에 들어왔다.
패트릭은 구원받은 듯 줄리어를 돌아보았다.
「모두 알려졌어.」
그가 말했다.
순간 줄리어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데도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걸
어와 의자에 앉았다.
「그랬군요. 그건 모두 사실이에요. 그래서 화가 나셨나 봐요?」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미스 블랙록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
었다.
「하긴 저 역시 화를 냈을 겁니다.」
「너는 누구야?」
줄리어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사실대로 밝힐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모두 말하겠어요. 저는 핍의 동생
에머, 좀더 자세하게 말씀드리자면, 에머 조슬린 스탠포디스가 제 세례명
이에요. 그 뒤 우리 아버지는 스탠포디스라는 이름을 버리고 드 크루시
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어요. 부모님은 저와 핍이 태어난 지 3년쯤 뒤에
이혼하셨지요. 그 바람에 우리는 따로따로 헤어지고 말았어요. 그분들은
우리 가족을 갈라 놓은 거예요. 저는 아버지를 따라갔는데, 그분은 매력
적인 사람이긴 했으나 아버지로선 아주 형편없었어요. 그 때문에 저는
수도원 신세를 지면서 숱한 고초를 겪었답니다. 그 당시 아버지는 돈 한
푼 없는 가난뱅이였으며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었어요. 그분은 수도원에
딸을 맡길 적에 잘사는 것처럼 양육비를 선뜻 내놓았지만 그 다음부터
한두 해 동안은 으레 소식이 없었어요. 물론 그 사이사이에 아버지와 함
께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는 등 재미있게 산 일도 있었어요. 그러나 전
쟁이 터지는 통에 우리는 완전히 헤어져 버렸답니다. 그 후에 저는 위험
한 경우를 여러 번 겪었어요. 한때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기도
했었지요. 무척 스릴이 있었어요. 이야기가 길어지면 지루할 테니까 간단
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런던으로 옮긴 저는 미래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습
니다. 그때 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지 않던 외삼촌이 많은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저는 저에게 남겨 놓은 유산이
없을까 궁금하여 그의 유서를 살펴보았지요.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없었
어요. 그래서 미망인인 외숙모에 대해 조사해 보았는데, 뜻밖에 그녀는
약물에 중독되어 의식을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어요.
결국 저에게 있어서 당신은 등불이었어요. 당신께서는 많은 재산을 가졌
으나, 제가 보기에는 그것을 쓸 사람이 친척 중에 없어 보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더 솔직히 말하겠어요. 저는, 만약에 당신이 저에게 호감을 갖
는다면―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랜들 삼촌이 돌아가셨기 때문
에 상황이 달라지리라는 예측에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재산은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없어져 버렸는데, 이로써 세상에 외톨
이가 된 가엾은 저에게 당신이 연민을 가지고 조금쯤은 도움을 주실 줄
알았어요. 그렇지만 당신을 여태껏 만나지 않았었습니다. 저 혼자서만 가
슴 속에 감격적인 상봉을 그렸을 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하였다는 말이야?」
미스 블랙록은 화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지요. 저는 당신을 본 적이 없어서…… 제가 처량하다는 느낌을 금
하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생각지 않았던 행운을 얻었어요. 저는 당신의
조카인지 육촌인지 그런 관계에 있는 패트릭을 만났지요. 굉장히 좋은
기회였어요. 제가 패트릭한테 접근하자 그는 기꺼이 받아 주었습니다. 진
짜 줄리어는 이런 연극에 능숙했으므로 그녀를 충동질하여 세러 베르나
르처럼 되기 위한 훈련을 하는게 어떻겠느냐고 하였지요. 제발 패트릭을
나무라지는 마세요. 그는 외로운 저를 안쓰러워하고 제가 누나로서 여기
에 와 있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고 용기를 주었던 거예요.」
「오냐. 그래서 그는 네가 경찰에 거짓말을 늘어놓을 적에도 모른 체해 준
것이냐?」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 이상스런 강도사건이 일어났을 때―아니, 그
일이 일어난 뒤로 저는 제 자신이 사건에 휘말리고 있음을 깨달았어요.
실상 저는 당신을 죽인 뚜렷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만, 제가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님을 당신이 잘 알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사건과
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 한데 패트릭조차 저를 수상하다고 생각한 모
양이에요. 그가 그러하다면 하물며 경찰이 어떻겠어요? 그 사람들은 필
경 저를 용의자로 지목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정말이지 견딜 수 없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줄리어로 행세하다가 이 사건이 유야무야되면 줄
행랑칠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멍청이 같은 진짜 줄리어가 프로듀서
와 크게 싸우고 화를 이기지 못해 이렇듯 뒤죽박죽으로 일을 만들 줄 누
가 알았겠어요? 줄리어가 패트릭한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여기에 와도
되는가를 물었을 때, 그에게 아직 오지 말라고 전보를 쳤어야 했어요. 그
런데 그 일을 잊고 말았다니까요!」
그녀는 한숨을 길게 쉬더니 말을 이었다.
「제가 밀체스더에서 얼마나 곤궁하게 보내었는가를 모르실겁니다. 물론
자선단체의 신세는 지지 않았지요. 그렇지만 저는 어딘가에 가고 싶었어
요. 주로 영화관에서 무서운 영화를 보고 또 보고 하며 그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핍과 에머―.」
미스 블랙록은 중얼거렸다.
「경감은 진짜 오누이라 말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구.」
그녀는 줄리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네가 에머라면, 핍은 어디 있지?」
그녀의 물음에, 맑고 순진해 보이는 줄리어의 두 눈이 빛을 발했다.
「저는 몰라요. 전혀 아는 게 없어요.」
「거짓없이 말해, 줄리어. 마지막으로 핍을 본 게 언제였지?」
이에 줄리어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가 세 살 때 엄마와 같이 떠난 뒤로는 보지 못했어요. 또한 엄마도 만
날 수 없었으며,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요.」
「그게 정말이야?」
줄리어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고말구요. 비록 제가 살인극에 관해 아는 바가 없으나, 저로선 한
번 시도해 보려고 들었을 겁니다.」
「줄리어―.」
미스 블랙록이 불렀다.
「나도 경험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만, 네가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적이 있었다지?」
「네, 18개월에 걸쳐서…….」
「그럼 사격 솜씨가 제법이겠는 걸?」
미스 블랙록의 차갑고 푸른 눈이 줄리어를 응시했다.
「저는 사격에 자신 있어요.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제가 당신을 쏜 것
은 아니예요. 믿지 않겠지만, 만약 제가 쏘았다면 빗나가지 않았을 거예
요.」

(2)
긴장된 방안의 공기를 뚫고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누굴까?」
미스 블랙록이 중얼거렸다.
미치가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문밖을 내다보았다. 겁에 질린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경찰이 또 왔어요. 이건 정말 고문이에요. 어째서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
고 괴롭힐까요? 저는 더 이상 못 참겠어요. 수상께 편지를 쓰겠어요, 국
왕께도.」
클래독은 그녀를 옆으로 밀치며 들어왔다. 그의 입가에는 모두들 두려워하
는 차가운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여느 때의 클래독 경감과는 좀 달라
보였다.
「미스 마것로이드가 목이 졸린 채 살해당했슴니다. 이 사건은 아직 한 시
간도 안 되었습니다.」
그의 눈길은 줄리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줄리어 양, 당신은 오늘 아침부터 어디에 있었지요?」
줄리어는 피곤한 듯이 말문을 열었다.
「밀체스더에 있다가 조금 전에 돌아왔습니다.」
「당신은?」
경감은 패트릭을 돌아보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두 사람이 함께 왔습니까?」
「그렇습니다.」
패트릭이 대답했다.
「아니예요.」
줄리어가 이내 부인했다.
「그렇게 해 보았자 금세 들통나고 말아, 패트릭. 버스 승객들이 우리를 잘
알고 있어서 모두 밝혀질 거야. 경감님, 제가 조금 먼저 돌아왔어요. 그
때가 4시였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했지요?」
「산책을 하였습니다.」
「볼더즈 쪽으로 말인가요?」
「아닙니다. 들판을 가로질러 갔다왔어요.」
경감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창백한 줄리어는 입술을 꼭 다문 채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짧은 동안의 침묵이 방안을 무겁게 내리누를 때 전화 벨이 울렸다.
미스 블랙록이 의혹에 찬 눈길을 보내며 수화기를 들었다.
「네, 누구지요? 오, 번치, 뭐라구요? 아니오, 그녀는 안왔는데요. ……네,
지금 여기 와 계세요.」
그리고는 수화기를 떼며 클래독에게 말했다.
「경감님, 허먼 부인이 당신과 통화하고 싶대요. 미스 마플이 목사관에 돌
아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답니다.」
클래독은 두어 걸음 걸어나가 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클래독입니다.」
수화기를 통해 번치의 음성이 어린 아이의 떨리는 목소리처럼 들려왔다.
「정말 걱정되요, 경감님. 제인 아주머니가 밖에 나가셔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시거든요. 미스 마것로이드가 살해당했다는건 사실인가요?」
「네, 사실입니다. 미스 마플이 미스 핀칠리피와 함께 만난 자리에서 시체
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에 계시겠군요?」
번치는 안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닙니다. 그녀는 거기 없어요. 벌써 30분쯤 전에 돌아갔는데요. 아직 집
에 당도하지 않았다니 나도 걱정이 됩니다.」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데, 대체 어디 갔을까요?」
「혹시 이웃집에 가지 않았을까요?」
「아주머니가 갈 만한 곳이면 다 전화해 보았어요. 하지만 한결같이 없다
는 거예요. 경감님, 정말 염려스러워요.」
「나 역시 그렇습니다.」
클래독은 이렇게 말하고 재빨리 덧붙였다.
「즉시 댁에 가겠습니다.」
「그래 주세요. 아주머니가 밖에 나가시기 전에 써 놓은 쪽지도 있으니까
요. 전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어요.」
클래독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미스 블랙록은 걱정이 되는 듯 물었다.
「미스 마플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아무런 일도 없어야 할 텐데…….」
클래독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저도 동감입니다. 그녀는 나이가 많은데다 몸이 약합니다.」
「웬일이지요?」
미스 블랙록은 자신의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불만스럽게
말을 이었다.
「일이 점점 악화되어 갑니다. 누구의 소행인지 몰라도, 이건 틀림없이 미
친 사람의 짓이에요.」
「아닌게 아니라 걱정입니다.」
그때 미스 블랙록의 손에 신경질적인 힘이 주어졌다. 그러자 진주 목걸이
가 끊어지면서 진주알들이 방바닥에 흩어졌다.
그녀는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오, 내 진주! 진주!」
그녀의 목소리는 쥐어짜는 듯한 고통스러움을 담고 있었다. 모두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목에 손을 가져가 흐느껴 울면서 밖으로 뛰어
나갔다.
필리퍼는 허리를 구부리고 진주를 줍기 시작했다.
「미스 블랙록이 이처럼 이성을 잃는 건 처음이에요. 그녀는 언제나 그 목
걸이를 걸고 있었어요. 아마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선사한 것인가
봐요. 이를테면 랜들 게들러 같은 사람 말이에요.」
「그럴 가능성도 있지요.」
경감은 맞장구를 쳤다.
필리퍼는 무릎을 꿇고 하얗게 빛을 발하는 진주를 주우며 말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이 목걸이는 진짜가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클래독은 대답 대신 한 알을 집어들고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단
정적으로 말했다.
「그래요, 이건 진짜가 아닙니다.」
그는 더 말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과연 이 진주알들이 진짜이겠는가. 알들은 너무 굵고 고르며 빛깔이 지나
치게 희었다. 분명히 가짜였다. 그러나 문득 클래독은 진짜 진주 목걸이가
전당포에서 몇 실링 안 되는 헐값에 팔렸던 형사사건을 생각해 냈다.
레티샤 블랙록은 비싼 보석류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경감에게 말했었다.
그런데 만일 이 진주가 진자라면 어느 정도의 값이 나갈까? 더구나 랜들 게
들러가 보낸 것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값을 매길 수 있겠다.
이것은 모주품이 틀림없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진짜
가 분명하면?
미스 블랙록은 그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성싶다. 아니면, 여러 사람 앞에
서 싸구려로 말해 놓고 자기 소유로 삼으려는지도 모른다. 가령 이 진주가
진짜로 판정되면 얼마 만큼의 값이 나갈까? 얼른 계산하지 못할 정도로 엄
청난 금액이리라. 살인을 범해서라도 얻을 만한 가치겠지. 누군가 진자 진주
의 가치를 알고 있는 자에게는.
경감은 상념의 늪을 헤매다가 흠칫 자기 정신으로 돌아왔다. 미스 마플이
실종되었다니 목사관에 가야만 하였다.

(3)
클래독 경감이 당도하자, 수심에 가득찬 번치와 그녀의 남편이 그를 맞았
다.
「아주머니는 아직 소식이 없어요.」
먼저 번치가 말했다.
「볼더즈를 떠나면서 이곳으로 곧잘 가시겠다고 말했던가요?」
줄리언이 물었다.
「그렇게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었습니다.」
클래독은 마지막으로 미스 마플을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천천히 대답
했다. 그는 이어서 딱딱하게 굳은 듯한 차가운 입술과 파란 눈이 유난히 빛
나던 것을 생각했다.
무슨 결심을 한 듯한 모습이었지. 무엇 때문일까? 어디에 가려는 것이었을
까?
「제가 미스 마플을 마지막 보았던 것은, 마침 대문이 있는 곳에서 플레쳐
형사부장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목사관에 와 있는 미스 핀칠리피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저는 그녀가 곧바로 목사관에 돌아가는
줄만 알았어요. 제 차로 모셔다 드렸으면 좋았겠지만, 제가 할 일이 너무
많은 터에다, 또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나가셨거든요. 어쩌면 플레쳐 씨
가 알고 계실는지도 모릅니다. 그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클래독은 플레쳐가 볼더즈에 가 있으려니 짐작하고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없었고 어디로 간다는 메모도 남기지 않았다. 경감은 그가 어
떤 까닭이 있어서 밀체스더에 간 모양이라고 여기었다.
클래독 경감은 본서에 연락해 보았으나 거기에서도 알 길이 없었다. 그때
번치가 전화로 말한 것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미스 마플이 남기고 간 종이쪽지는 어디 있습니까? 거기에 뭔가 써 있다
고 하셨지요?」
번치가 그 쪽지를 갖다 주었다. 경감은 종이를 책상 위에 펼쳤다. 번치는
경감의 어깨 너머로 바라보면서 그가 읽는 것을 들었다. 글씨가 날려 있어
서 읽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램프>. 그리고 <제비꽃>이라 씌어 있었다.
그 다음에 한 칸을 띄고, <아스피린 병은 어디 있지?>
이 구절 다음 줄은 읽기가 아주 어려웠다. 그런데 잠자코 있던 번치가 읽
었다.
「<달콤한 죽음>, 이건 미치가 만든 케잌의 이름이에요.」
그 뒤를 클래독이 읽었다.
「<신상 조사서를 만든다>. 신상 조사서? 한데, 이건 또 무슨 뜻이지? <극
한의 고통을 용기 있게 견디어 내는……>, 도대체 모를 말이로군.」
클래독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읽어 갔다.
「<요드 치료>. <진주>? 오, 진주 말이군. 그리고는 <로티>, 아니 <레티
>로군. 레와 로를 구별하기가 어렵군. 그 말 다음에는 <베른>아리고 써
있고, <양로 연금>이라? …… 이건 웬 뚱단지 같은 말이야?」
그들은 도깨비에게 홀린 듯 어리둥절한 눈길을 교환했다.
클래독은 재빨리 그것을 연결지어 보았다.
「램프. 제비꽃. 아스피린 병은 어디 있지? 달콤한 죽음. 신상 조사서를 만
든다. 극한의 고통을 용기있게 견디어 내다. 요드 치료. 진주. 레티. 베른.
양로 연금.」
번치가 입을 열었다.
「이 말들은 무슨 뜻이 있을까요? 도무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는데
요.」
「나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한데 그녀가 진주라고 쓴 게 이상하군요?」
「진주가 어떻습니까? 그것에 무슨 뜻이 있을까요?」
「미스 블랙록은 세 줄짜리 진주 목걸이를 항상 목에 걸고 있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종 그걸 보고 웃고는 하였지요. 어쩐지 꼭 가
짜로 보이거든요. 그러나 레티는 그걸 멋이라 여기는 것 같았어요.」
「혹시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클래독은 의미있게 말했다.
「설마 그 진주가 진짜라는 건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없어요.」
「부인께서는 그처럼 커다란 진짜 진주를 본 적이 있습니까?」
「그뿐 아니라, 그것들은 너무 유리구슬 같잖아요?」
클래독은 그제서야 어깨를 으쓱했다.
「참, 지금 당면 문제는 미스 마플이지요. 지주에 관해선 나중으로 돌리고
그녀를 찾아야 합니다.」
너무 늦기 전에 그녀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종
이쪽지에 쓴 말들로 미루어 보면, 그녀에게 어떤 위험이―무서운 위험이 찾
아왔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판국에 플레쳐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클래독 경감은 목사관을 나왔다. 그리고 그의 차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미스 마플을 빨리 찾아야 한다. 이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마침 그때 비에 젖은 월계수 그늘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경감님!」
그것은 플레쳐 형사부장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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