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 예고살인 5

3학년2반 | 2022.02.17 08:09:27 댓글: 0 조회: 453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413



◎ 21장. 세 여인 ◎

리틀 파독스에서는 저녁 식사를 막 끝내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 답답
한 분위기였다.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린 패트릭은 침착성을 잃은 채 더듬더듬 이야기했으
나 분위기의 변화에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필리퍼 헤임즈는 얼빠진 듯
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으며, 미스 블랙록은 전날의 명랑함을 찾아볼 수 없었
다.
그녀는 저녁 식사를 위해 옷을 갈아입고 카메오 목걸이를 걸고 있었지만,
검고 둥그스름한 눈동자에는 두려움의 빛이 역력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손가락을 연방 비비꼬았다.
오직 줄리어만이 시종 냉정하고 의젓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레티 아주머니, 미안합니다.」
그녀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저로선 이곳을 떠날 수도 없으려니와, 경찰이 그걸 허락하지도 않을 겁니
다. 하지만 제가 오랫 동안 여기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겁니다. 머지않아
클래독 경감이 찾아와 제 손에 수갑을 채울 테니까요. 왜 여태까지 그가
오지 않았을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예요.」
이에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지금 경감은 그 늙은 미스 마플을 찾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어.」
「미스 마플도 살해됐다고 여기세요?」
패트릭은 호기심에 찬 어조로 물었다.
「그건 어떤 근거에서죠? 그녀가 이번 사건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다는 건
가요?」
미스 블랙록이 어눌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모르면 몰라도, 미스 마것로이드가 그녀한테
귀띔했을 게다.」
「만일 그녀가 살해되었다면―.」
패트릭이 말했다.
「논리적으로 볼 때 범인은 다만 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게 누군데?」
그는 단정하다시피 자신있게 말했다.
「그야 미스 핀칠리피입니다. 미스 마플이 살아 있는 것을 마지막 본 곳이
볼더즈였으니, 필경 그녀가 거기를 뜨지 않았다고 봅니다.」
「골치가 아프구나.」
미스 블랙록은 힘없이 말하고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어째서 핀치가 미스 마플을 죽였을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구
나.」
패트릭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건 핀치가 마것로이드를 죽였을 때의 경우와 마찬가지지요.」
그의 말을 듣고 필리퍼가 참견했다.
「핀치는 결코 마것로이드를 살해하지 않았을 거예요.」
패트릭은 굽히지 않았다.
「가령 마것로이드가 우연히 핀치의 행위를 알고 이것을 폭로하려 들었다
면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핀치는 마것로이드가 살해될 때 정류장에 있었는데요.」
「하지만 집을 나서기 전에 죽일 수도 있어요.」
이때 별안간 레티샤 블랙록이 큰소리를 질러 모두 깜짝 놀랐다.
「살인, 살인, 살인―이제 살인 이야기를 그만할 수 없어? 뭣이 좋아서 그
소름끼치는 걸 계속 입에 올리는 거야! 난 지금처럼 공포감에 휩싸이긴
생전 처음이란 말야. 물론 전에는 그렇지가 않았어. 내 자신을 내가 이길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너희들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살
인자한테 어떻게 한단 말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우린 너무나 무력해.
오, 주님!」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머리를 숙이고 두 팔로 감싸쥐었다. 잠시 뒤에 얼
굴을 들고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들한테 미안하구나. 나도 모르게 흥분했었구나.」
「괜찮습니다, 레티 아주머니. 제가 곁에서 지켜 드리겠습니다.」
패트릭은 힘있게 말했다.
「네가 말이지?」
블랙록은 그를 바라보았으나, 그 말은 비난이 숨겨진 환멸감을 담고 있었
다.
이것은 저녁 식사를 시작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그때 미치가 들어왔다. 그
리고 저녁 요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저는 이 시각 이후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습니다. 제 방의 문을 걸어 잠그
고 내일 새벽까지 꼼짝않겠어요. 아, 무서워―사람들이 살해되다니요?―
그렇듯 사람 좋은 미스 마것로이드가 죽다니, 대관절 누가 그런 악행을
저질렀을까요? 아마 미치광이 짓일 거예요. 미친 놈은 자기가 어떤 짓을
한다는 걸 깨닫지 못하니까요.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부엌에 어두운 그
림자가 깃들고―무슨 소리도 들리고―마당에 누가 서 있는 것 같기도 하
였어요. 그뿐인가요. 식품 저장소 옆에서도 사람의 모습을 보았지요. 또
발소리가 들린 적도 있어요. 이제 저는 제 방으로 가서 당장 방문을 잠그
고 장롱을 옮겨다가 문앞에 놓을 거예요. 그리고 날이 새면 그 잔인하고
심술궂은 경찰관한테 이 집에서 나가겠다고 하겠어요. 만약 못 나가게 하
면 다음과 같이 말하겠어요. 『나가게 할 때까지 줄곧 소리치겠어요』라
고 말이에요.」
모두들, 미치의 비명을 듣기라도 하듯이 몸서리를 쳤다.
「전 제 방으로 가겠어요.」
그녀는 이 말을 강조하듯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런 다음 입고 있던 앞치
마를 벗어 던졌다.
「오늘 밤 안녕히 주무세요, 미스 블랙록. 당신은 틀림없이 내일 아침에 살
아 있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미리 작별인사를 하는 거예요.」
미치는 머뭇거리지 않고 문 쪽으로 갔다. 이윽고 문은 전과 다름없이 조용
히 닫혀졌다.
그러자 줄리어가 일어났다.
「아주 그럴싸한 대비군요. 그럼 제가 저녁을 하지요. 패트릭이 레티 아주
머니의 경호를 하겠다고 나섰으니 저는 식탁에 있을 필요가 없겠어요. 게
다가 당신을 독살했다는 죄를 뒤집어쓰는 일이 있어선 큰일이니까요.」
이날 줄리어는 맛있는 저녁을 준비했다. 필리퍼가 거들겠다고 부엌에 얼굴
을 내밀었으나, 줄리어는 끝내 도움을 거절했다.
「줄리어, 당신한테 할 말이 있는데요.」
「우리만의 이야기는 들을 겨를이 없어요. 그러니 식당으로 돌아가세요, 필
리퍼.」
드디어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들은 거실의 난로 앞 조그만 탁자에 둘러앉
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셨다. 그러면서 저마다 누군가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그게 전부였던 것이다.
8시 30분에 전화 벨이 울렸다. 클래독 경감이었다.
「15분 이내에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이스터브룩 대령 부부와 스웨트넘 부
인과 그 아들도 함께 가게 됩니다.」
「한데 경감님, 실은 오늘 밤 사람을 만날 기분이 아닙니다.」
미스 블랙록은 지친 음성으로 겨우 말했다.
「당신의 기분은 잘 압니다. 그렇지만 급히 서둘 일이라서…….」
「미스 마플을 찾았나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말을 마친 경감은 전화를 끊었다.
줄리어는 커피 쟁반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치가 서 있
었다. 그녀는 개수대 옆에 쌓아 놓은 접시들 속을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미치는 말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깨끗이 해놓은 부엌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저 프라이
팬은 내가 오믈렛 만들 때만 사용한단 말이에요. 줄리어, 거기다 무얼 하
였지요?」
「양파를 볶았는 걸.」
「못 봐 주겠군. 모두 엉망을 만들었어. 오믈렛 팬만 해도 그렇지. 이건 사
용 후에 기름종이로 닦아내야 하는데 물로 씻으려 하다니! 그리고 당신
이 쓴 이 남비는 우유를 끓일 때만 사용했다구요.」
줄리어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당신이 프라이팬을 어떻게 쓰는지 내가 알 수 있나요? 당신은 잠자러 간
다 해놓고 왜 다시 일어났지요? 내가 깨끗이 치워 놓을 테니 어서 나가
세요.」
「안 돼, 싫어요. 내 부엌을 함부로 쓰게 놔둘 순 없어요.」
「어머나, 미치, 당신이 어째서 그러는지 까닭을 모르겠네요.」
줄리어는 화를 내며 부엌 밖으로 나왔다. 마침 벨이 울렸다.
「난 현관에 나가지 않아요.」
미치가 부엌에서 소리쳤다. 할수 없이 줄리어가 현관으로 나갔다. 내심 불
쾌함을 억제하지 못하면서.
방문객은 미스 핀칠리피였다.
「느닷없이 찾아와 미안해요. 실은 경감님이 전화로 여기에 오라고 하여 왔
답니다.」
「경감님은 당신이 여기 오신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요.」
줄리어는 그녀를 응접실로 안내하며 의아해 하였다.
「하긴, 그분은 나한테 오기 싫으면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그러나 난
웬일인지 오고 싶었지요.」
아무도 미스 핀칠리피에게 마것로이드의 죽음에 대한 원망을 말하지 않았
다. 그녀 역시 초췌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참 뒤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방안의 불을 모두 켜. 그리고 난로에 석탄을 더 많이 넣고. 난 웬일인지
자꾸만 한기가 드는 걸. 미스 핀칠리피, 난롯가로 와서 앉으세요. 경감님
께서는 15분 안에 오신다고 했으니 곧 도착할 거예요.」
「미치가 다시 내려왔어요.」
줄리어가 말했다.
「그래? 나는 그 여자가 정신이 이상하지 않은가, 혹시 완전히 돌아버린 건
아닌가 하고 가끔 생각해. 아니면, 우리들이 모두 돌았던가.」
「내 생각으로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모두가 미쳤다고 봅니다.」
미스 핀칠리피가 얼른 나섰다.
「그렇지 않겠어요? 무서우리 만큼 지능적이고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
이것이 내가 그려보는 범인이거든요.」
밖에서 차가 멎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뒤에 클래독과 이스터브룩 대령
내외와 에드먼드, 또한 스웨트넘 부인이 나타났다. 그들은 유난히 침통한 표
정을 지었는데, 이스퍼브룩 대령은 이를 씻어 버리려는 듯 쩌렁쩌렁 울리는
특유의 목소리로 외쳤다.
「야! 불이 정말 좋군 그래.」
밍크 코트를 입은 이스터브룩 부인은 앞으로 손을 모으고 남편 곁에 앉았
다. 전에는 평범하고 예쁜 여인이었던 그녀는 이젠 생기가 없는, 마치 노쇠
한 족제비 얼굴을 하였다. 에드먼드는 괜스레 화가 난 표정을 하고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스웨트넘 부인은 애써 분위기를 살리려고 지껄여댔다.
「세상이 어찌 될려고 그러는지 큰일이에요. 안 그런가요? 모든 게 다 잔혹
하다구요. 차라리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버리는 것이 낫겠다 싶어져요.
이 다음은 또 누가 당할는지 모를 재난이거든요. 미스 블랙록, 브랜디를
약간 마셔 보면 어떻겠습니까? 정신을 들게 하는 데는 반 잔의 브랜디로
도 효과를 본답니다. 특히 충격을 받았을 대 아주 좋대요. 오늘 우리가
여기에 모이게 된 건 나 또한 마음이 편치 않고 무섭기조차 했어요. 그런
데 클래독 경감님이 우리 보고 꼭 와야 한다잖아요. 아직 그녀를 찾아내
지 못했으니, 이보다 중대한 문제가 어딨겠어요. 아시겠지만, 목사관의 그
불쌍한 미스 마플 말이에요. 번치는 안절부절 못하여 실성하다시피 한 모
양입니다. 그녀가 글세, 집에 가지 않고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미스
마플은 나 있는 곳에 오기는커녕 오늘은 보지도 못했답니다. 그녀가 우리
집에 왔었더라면 한눈에 알아보았을 텐데―난 뒤쪽에 있는 응접실에 있
었고, 에드먼드는 앞쪽 서재에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녀가 어디로 들어
왔든 우리 눈에 금방 띄었겠지요. 아무튼 그 착한 분이 아무 일 없이 돌
아오기만 빈답니다.」
「어머니.」
에드먼드는 못 참겠다는 듯 스웨트넘 부인을 응시했다.
「제발 잠자코 계십시오, 네?」
「그래, 이젠 더 지껄일 말도 없다.」
그녀는 이렇게 대꾸하고서 줄리어 옆자리에 앉았다.
클래독 경감은 문 옆에 서 있었다. 세 명의 여자는 그를 향해 거의 한 줄로
앉았다. 줄리어와 스웨트넘 부인은 소파에, 그리고 이스터브룩 부인은 남편
이 앉은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 앉아 있었다. 경감이 의식적으로 정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앉은 것이 그로선 편리하게 되었다.
이 밖에 미스 블랙록과 미스 핀칠리피는 난롯불 옆에 바짝 다가앉았고, 에
드먼드는 그들 가까이에 서 있었다. 필리퍼는 그 뒤쪽 조금 떨어진 그림자
속에 자리잡고 앉았다.
클래독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미스 마것로이드가 살해되었음은 여러분께서 알고 계신 사실입니다. 경찰
은 그녀를 살해한 사람이 여자라는 믿을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나는 지
금부터 여기에 모인 여자 분들이 오늘 오후 4시에서 4시 20분 사이에 무
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줄리어라고 자칭하는 저기 젊
은 아가씨만은 이미 설명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녀한테 다시 한 번 물
어볼 작정입니다. 줄리어 양, 만약 당신의 답변이 당신을 불리하게 한다
고 판단되면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말씀하지는
것은 에드워즈 순경이 모두 기록하여 법정에서 증거로 쓰이게 됨을 밝힙
니다.」
「그런 건 당신이 진술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줄리어가 따지고 들었다. 그녀의 얼굴빛은 핼쓱했지만 음성은 차분하게 가
라앉아 있었다.
「어쨌든 원하신다면 다시 말씀드리겠어요. 4시에서 4시 20분 사이에 저는
컴프튼 농장 옆의 냇물을 향해 들판을 따라 걸었어요. 그런 다음에 포플
러 나무가 있는 길로 돌아왔는데, 그동안 저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요.
볼더즈 근처에는 전혀 가지 않았습니다.」
「스웨트넘 부인께서는요?」
이때 에드먼드가 불쑥 물었다.
「아까 그 말은 우리한테도 적용됩니까?」
경감은 그를 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얼마 동안은 줄리어 양에게만 적용됩니다. 당신의 답변이 당신
을 불리하게 한다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분이나 변호사를
설정할 권리가 있고, 변호사가 없는 분은 답변을 회피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웨트넘 부인이 외쳤다.
「하지만 그런 건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아요. 나는 지금 당장 그때의 상황
을 소상하게 밝힐 수 있거든요. 그러므로 빨리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
다.」
「그러면 지금 부탁드립니다, 스웨트넘 부인.」
「그러니까―.」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미리 말합니다마는, 나는 미스 마것로이드의 죽음과 추호도 관계가 없습
니다. 여러분께서도 이 점을 알고 계시리라고 믿어요. 그러나 나는 경찰
이 하찮은 질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신중하게 대답해야 함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기록>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안 그런가요?」
스웨트넘 부인은 한참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는 에드워즈 경관에게 눈길
을 보내었다. 그리고 상냥한 어조로 덧붙였다.
「당신을 위해 천천히 이야기하겠어요. 내 말이 그렇게 빠른건 아니지요?」
에드워즈 순경은 속기가 아주 능숙했다. 그런데도 주변이 없어서 귓불을 붉
히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부인. 굳이 바라자면 조금만 더 천천히 말씀하여 주십시오.」
스웨트넘 부인은 다시 진술로 들어갔으며, 쉼표와 마침표가 찍힐 만한 곳에
서는 잠시 말을 쉬었다.
「물론 판에 박히듯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는 저, 시간 관념
이 희박하거든요. 더군다나 우리집 시계는 전쟁이 터진 뒤부터 거의 절반
이나 고장이 났답니다. 움직이는 것들도 제대로 가고 있는지, 혹은 늦거
나 빠른지 알 수가 없을뿐더러 잊어버리고 태엽을 감아 주지 않는 경우
도 있어요.」
여기서 그녀는 말을 중단하고 잠깐 생각하더니 또 입을 열었다.
「그때, 그러니까 오후 4시에 나는 양말의 뒤꿈치를 만들고 있었어요. 웬일
인지 잘못 뜨고 있어 시간이 걸렸지요―평직이 아닌 안뜨기를 하고 있지
않겠어요? 만일 그 일이 빨리 끝났더라면 정원에서 국화를 잘라 내고 있
었을 텐데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건 좀더 일찍이었어요. 비가 오기
전이었거든요.」
경감이 보충설명을 하였다.
「비는 정확히 4시 10분부터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나요? 나는 비가 너무 많이 오자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항상 비가
올 때는 거기 물이 새는 곳에 빨래통을 갖다 놓곤 하였던 거예요. 먼저
눈에 띈 것은 물이 가득 찬 물받이였어요. 홈통이 막혔구나 생각했답니
다. 그래서 곧 2층에서 내려와 비옷과 장화를 꺼냈습니다. 나는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에드먼드를 불렀으나 아무 대답이 없더군요. 필경 소설을
쓰다가 중요한 대목에 이른 모양이라고 짐작하고 더 이상 그 애를 방해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들을 불러도 대답이 없을 때는 늘 그렇듯이 오
늘도 혼자서 일했어요. 먼저 빗자루를 긴 장대에 묶어서―.」
클래독은 에드워즈 경관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치는 걸 보고 다급하게 물었
다.
「그럼 부인은 그 시간에 홈통르 소제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네, 나뭇잎들이 홈통을 막고 있었어요. 그 작업은 제법 오래 걸렸지요. 하
지만 결국 깨끗이 끝낼 수 있었답니다. 나는 집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고―옷에서는 썩은 나뭇잎 냄새가 지독했어요―빨래를 하였지요. 그러
고 나서 부엌에 가 주전자를 올려 놓았어요. 부엌 시계로 그때가 6시 15
분이었습니다.」
에드워즈 경관은 눈을 껌벅거렸다.
스웨트넘 부인은 이를 알아채고 재빨리 사족을 달았다.
「그 시각을 정확하게 말하면 5시 20분 전입니다.」
「부인이 홈통을 치우는 걸 누가 본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 없습니다. 만약 본 사람이 있었더라면 내가 도와 달라고 하였겠지
요. 혼자서 하기엔 너무 힘든 일이었답니다.」
「그러니까 비가 오고 있을 때 부인은 비옷과 장화를 신고 밖에서 홈통 청
소를 하였단 말이지요. 그런데 부인이 홈통을 청소한 사실을 증명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거구요?」
이에 스웨트넘 부인이 말했다.
「의심스러우면 우리집 홈통을 조사해 보세요. 아주 깨끗이 뚫려 있을 겁니
다.」
「스웨트넘 씨, 어머니가 당신을 부를 때 그 소리를 들었던가요?」
「못 들었습니다. 나는 잠들어 있었거든요.」
에드먼드가 대답했다.
「에드먼드―나는 네가 소설을 쓰는 줄로 알았다.」
클래독 경감은 이스터브룩 부인 쪽을 보았다.
「그럼 이스터브룩 부인께서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나는 그 시간에 아치와 더불어 서재에 있었습니다. 함께 라디오를 듣고
있었지요. 아치, 그렇지 않아요?」
부인은 선량해 보이는 눈빛으로 남편에게 동의를 구했다.
이스터브룩 대령은 잠시 주저하다가 얼굴을 붉히며 아내의 손을 쥐었다.
「당신은 이런 일들을 이해하지 못해.」
그런 다음 클래독 경감에게 말했다.
「여보시오, 경감님.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아내는 흥분상태에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신경과민이어서 진술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을 가다듬는다는
걸 알지 못합니다.」
「아치―.」
이스터브룩 부인이 볼멘소리로 불렀다.
「글쎄, 당신은 저와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거예요?」
「실제로 난 없었지. 않 그렇소, 여보? 나는 매사에 솔직해야겠다고 다짐하
지요. 하물며 오늘과 같은 진술에선 특히 그러하오. 나는 클로프트 엔드
에 가서 램프슨 농부와 한참 양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때가 3
시 45분이었어요. 그리고 비가 그친 뒤 집에 돌아왔는데, 차를 마시기 직
전의 시각이 4시 45분이었습니다. 로라가 케잌을 굽고 있었지요.」
「이스터브룩 부인, 당신께서도 외출했었습니까?」
예쁘장한 그녀의 얼굴이 순간 겁에 질린 족제비처럼 보였다. 궁지에 몰린
그녀는 허둥거렸다.
「아니예요. 나는 집에서 줄곧 라디오를 듣고 있었지요. 아무데도 나가지
않았어요. 그보다 앞서, 그러니까 3시 30분경에 잠깐 나갔다 오긴 했어요.
산책을 하기 위해서였지만 멀리 가지는 않았지요.」
그녀는 말을 마친 뒤 경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클래독은 조용히 말했다.
「이것으로 됐습니다, 이스터브룩 부인. 방금 말씀하신 게 타이핑되어 나올
테니, 읽어보고 잘못이 없으면 서명해 주십시오.」
이스터브룩 부인은 갑자기 불쾌한 안색을 하고 경감을 보았다.
「잠깐! 어째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어디에 있었는지 질문하지 않았지요?
헤임즈 부인과 에드먼드 스웨트넘 말인데―이를테면, 에드먼드가 방에서
자고 있었다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요?」
클래독 경감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미스 마것로이드는 죽기 전에 어떤 말을 하였습니다. 강도 사건이 이곳에
서 있던 날 밤에 누군가가 이 방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계속 있어
야 할 사람이 없었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미스 마것로이드는 그날 자
기가 보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꼽
아 나가다 보니 자기가 보지 못한 사람이 누구라는 걸 알게 된 것입니
다.」
「아무도 무엇을 보지 못했을 텐데요?」
줄리어가 의문스러운 듯 물었다.
그러자 미스 핀칠리피가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것로이드는 보았을 거예요. 그녀는 문 뒤에, 지금 클래독 경감님이 서
계신 저쪽에 있었어요. 그래서 방에서의 일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이때 미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들은 겨우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녀는 문을 왁살스럽게 열고 경감을 옆으로 밀치며 나타났다. 무척 흥분한
모습이었다.
「경감님, 당신을 이 미치를 부르지 않았지요? 하찮은 미치, 부엌데기 미치
는 부엌에나 틀어박혀 있으란 말이죠, 융통성 없는 경감님? 하지만 한 귀
로 흘려 버리지 마세요. 저는 다른 사람보다 그 사건을 잘 알고 있다는
걸 말이에요. 아무렴요, 강도사건이 있던 날 밤에 제가 본 것이 있거든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으나 지금가지 입을 다물고 있었지요.
시기가 올 때까지 말하지 않고 기다릴 거예요.」
클래독이 물었다.
「그럼 사건이 잠잠해지면 그 사람에게서 돈이라도 받겠다는 생각이오?」
미치는 발톱을 세운 고양이처럼 그에게 응수했다.
「오, 저를 그렇게밖에 보지 않는단 말이지요? 그래요, 그러면 좋겠네요. 제
가 아주 중요한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데, 상대방이 모른 체하고 있겠어
요? 아마 오래지 않아 저한테 많은 돈이 생기겠지요. 어쨌든, 저는 들었
어요. 죄다 안단 말이에요. 핍과 에머, 이 사람들의 비밀을 알고 있다니까
요.」
미치는 문득 줄리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사람은 가짜가 틀림없어요. 저는 돈을 뜯어낼 수도 있지만, 별안간 두
려워졌어요. 무엇보다도 제가 살아야겠단 말이에요. 이대로 있으면 누가
저를 죽일 것 같아서, 이 자리에서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밝히겠어
요.」
「당신이 알고 있는 게 무엇입니까?」
경감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말하겠어요. 그날 밤에 저는 이미 말했던 대로 식기실에 있지 않고, 총소
리를 들었을 때는 식당에 있었지요. 저는 열쇠구멍으로 홀을 들여다보았
어요. 어두운 홀에서 총소리가 또다시 들리고 회중전등이 바닥에 떨어졌
어요. 그 순간 비추었지요, 저 사람을. 손에 권총을 들고 그 사람 가까이
서 있었어요. 바로 미스 블랙록이었습니다.」
「나를? 너 어떻게 되지 않았니?」
미스 블랙록은 아연 실색하며 일어섰다.
에드먼드가 외쳤다.
「그럴 리 없어요! 미치는 미스 블랙록을 볼 수 없었어요.」
「볼 수 없었다구요, 스웨트넘 씨?」
클래독이 에드먼드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날카로웠다.
「어째서 볼 수 없지요? 권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 미스 블랙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까? 그럼 당신이었군, 그렇지요?」
「나라구요? 당치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요!」
「들어 보시오. 당신은 이스터브룩 대령의 권총을 훔쳐 루디 셔트와 사건을
계획했습니다. 그래서 패트릭의 뒤를 따라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가 불이
나가자, 기름을 칠한 문을 통해 홀로 빠져나가 미스 블랙록을 쏜 다음 루
디 셔트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거실로 돌아와 라이터 불을 켰어요.」
에드먼드는 말이 막힌 듯 멍청히 있다가 말했다.
「터무니없군요. 왜 내가 그런 행동을 합니까? 대체 무슨 이유가 있어서
요?」
「만일 미스 블랙록이 게들러 부인보다 먼저 죽으면 두 사람이 유산을 받
게 된다는 걸 알고 있겠지요? 다시 말해 핍과 에머 두 사람이 말입니다.
줄리어 시먼즈가 에머라는 건 밝혀졌거니와…….」
「핍이 나라는 말입니까?」
에드먼드가 어설프게 웃었다.
「그건 허황되고 너무 비약적인 추측입니다. 내가 그와 비슷한 것이라고는
나이뿐이지요. 나는 자신이 에드먼드 스웨트넘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호적등본이든 졸업증서든 당신이 원하는 모든 걸 보여 주겠습
니다.」
「그 사람은 핍이 아니예요.」
방 한구석에서 큰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필리퍼 헤임즈가 핼쓱한 얼굴로 걸
어 나왔다.
「경감님, 제가 핍입니다.」
「당신이? 헤임즈 부인 당신께서요?」
「그렇습니다. 모두들 핍이 남자라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아요. 줄리어는
우리가 여자 쌍둥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왜 그녀가 오늘 오후에 그 말을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군요.」
줄리어가 말했다.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나 봅니다. 난 갑자기 당신이 누구라는 걸 알게 됐
어요. 그러나 조금 전까지는 전혀 생각지 못했어요.」
필리퍼가 그 말을 받았다.
「나도 줄리어와 똑같은 생각을 하였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감격을 이기지 못해 떨리고 있었다.
「전쟁통에 남편을 잃은 저는 앞으로 어찌해야 좋을지 암담하기만 하였습
니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제가 게들러와 친척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게들러 부인은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고, 그녀가
죽으면 유산이 블랙록이라는 여자한테 넘어간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저는
미스 블랙록이 살고 있는 이곳에 왔어요. 그리고 루커스 부인에게 고용되
어 일할 수 있었습니다. 미스 블랙록은 외로운 노인이었으므로 저를 기꺼
이 도와 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제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전 능
히 일할 수 있었으니까요. 제 아들 해리의 학비를 대주기만을 바랬던 거
예요. 따지고 보면 미스 블랙록의 재산은 게들러의 것이고, 게다가 그녀
는 특별히 돈을 쓸 데가 없었습니다.」
필리퍼는 여태 가슴 속에 간직해 온 비밀을 한꺼번에 털어놓듯 빠르게 말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강도사건이 발생했어요. 저느 별안간 무서워졌어요. 미스 블랙
록을 죽일 동기를 제가 충분히 지녔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줄리어가 누
구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어요. 쌍둥이라지만 우리는 일란성 쌍둥이가 아
니어서 용모가 아주 닮지는 않았거든요. 결국 의심받는 건 저밖에 없다고
판단했어요.」
그녀는 말을 중단하고 아름다운 금발을 이마에서 뒤로 쓸어넘겼다.
클래독은 편지 봉투 속에 있었던 빛바랜 사진의 주인공이 필리퍼의 어머니
라고 생각했다.
혈육간의 닮은 점은 숨길 수가 없다. 소니어가 손을 폈다 오므렸다 하는 버
릇이 누군가를 연상시켰는데, 이제 보니 필리퍼가 그러고 있었다.
「미스 블랙록은 저한테 잘해 주셨습니다. 아주 친절히 대해 주셨어요. 저
는 그녀를 죽이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추호도 그런 마음을 갖지 않
았어요. 그렇지만 제가 틀림없는 핍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이제 아셨지요? 더 이상 에드먼드를 의심해선 안 됩니다.」
「의심치 말라구요?」
클래독의 음성에는 날카로움이 번득였다.
「에드먼드 스웨트넘은 금전에 애착하는 사람입니다. 이왕이면 돈 많은 여
자와 결혼하려는 젊은이지요. 그런데 미스 블랙록이 게들러 부인에 앞서
죽지 않으면 그는 부자가 될 수 없겠지요. 하지만 게들러 부인이 미스 블
랙록보다 먼저 죽게 될 상황이었으니 어떤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
을 겁니다. 스웨트넘 씨, 그렇지 않습니까?」
「황당 무계한 말이에요!」
에드먼드가 소리쳤다.
그때였다. 갑자기 비명이 들려 왔다. 부엌 쪽에서 끔찍한 공포의 소리가 길
게 꼬리를 끌며 들린 것이다.
「저건 미치의 소리가 아닌 걸요.」
줄리어가 말했다.
클래독 경감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습니다. 필경 세 사람을 살해한 범인의 목소리일 겁니다.」


◎ 22장. 진 실 ◎

경감이 에드먼드 스웨트넘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미치는 살며시 방을 나
와 부엌으로 들어갔다. 미스 블랙록이 뒤따라 가 보니, 미치는 개수대에 물
을 버리고 있었다.
미치는 마음의 가책 때문인지 그녀를 힐끗 쳐다본 뒤 옆쪽으로 눈길을 돌
려 버렸다.
「어쩜 거짓말을 그렇게 잘하니, 미치?」
미스 블랙록은 별 감정 없이 말했다.
「미치, 씻는 법이 틀렸어. 은그릇을 넣고 설거지대에 물을 채우는 거야. 물
이 적으면 씻을 수 없어.」
미치는 말없이 수도꼭지를 틀었다. 그리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는 내가 했던 말에 화를 안 내세요?」
「네 거짓말에 일일이 화를 내자면 난 기력을 잃고 말겠지.」
미스 블랙록의 말이었다.
「제가 경감한테, 아까 했던 말은 모두 꾸며낸 말이라고 할까요?」
「그 분은 벌써 그것을 알아차렸어.」
미스 블랙록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미치가 수도꼭지를 잠그는 찰나, 별안간 두 손이 그녀의 머리 뒤로 왔다.
그와 동시에 물이 가득한 개수대 속으로 얼굴을 밀어넣었다.
「네가 진실을 말했다는 건 내가 알고 있다.」
미스 블랙록은 악의에 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치는 몸부림쳤으나 그녀의 억센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때 뒤쪽 어딘가에서 도라 배너의 슬픈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오, 레티, 레티, 그러면 못 써…… 레티!」
미스 블랙록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손은 공중으로 뻗치고 질식해 있던
미치는 숨을 헐떡이며 얼굴을 들었다.
미스 블랙록은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다. 부엌에는 그들뿐 아무도 없는
데…….
「도라, 도라, 용서해 줘. 나는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할 수
밖에…….」
그녀는 식기실 문 쪽으로 내달았다. 그렇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커다란 몸
이 그녀 앞을 막았다. 플레쳐 형사부장이었다.
바로 그때 약속이나 한 것처럼 미스 마플이 상기된 모습으로 청소용구가
들어 있는 벽장 속에서 나왔다.
「나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 흉내를 잘 냅니다.」
미스 마플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이 여자를 물에 빠뜨려서 죽이려 했던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밖에도 혐의가 있으니, 레티샤 블랙록―.」
미스 마플이 그의 말을 거들었다.
「샬로트 블랙록이에요. 그게 이 여자 이름이에요. 늘 걸고 다니는 진주 목
걸이 밑에 수술한 자국이 있어요.」
「수술이라구요?」
「네, 갑상선 종양 수술이지요.」
미스 블랙록은 정신을 가다듬고 미스 마플을 보았다.
「당신은 모든 걸 알고 있었군요.」
「그럼요. 오래 전에 알았지요.」
샬로트 블랙록은 테이블 옆에 털썩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신은 심한 짓을 하였어요. 도라의 음성을 흉내내다니요. 나는 도라를
사랑했어요. 도라만은 진정으로 사랑했었지요.」
클래독 경감과 다른 사람들이 몰려왔다. 에드워즈 경관은 미치에게 응급치
료를 해 주었다. 말을 할 수 있게 된 미치는 으쓱거리며 마구 떠들었다.
「그럴 듯하게 하였죠? 안 그래요? 저는 영리하고 용감하거든요. 하마터면
죽을 뻔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용감하게 위험을 무릅쓰고 큰 일을 해내
었어요.」
이때 미스 핀칠리피가 사람들을 헤치고 테이블 앞에서 흐느껴 우는 미스
블랙록에게로 달려들었다.
플레쳐 형사부장은 그녀를 힘껏 끌어당기었다.
「여보세요! 이러면 안 됩니다. 감정을 억제해야 합니다. 미스 핀칠리피!」
미스 핀칠리피는 이를 갈며 외쳤다.
「그냥 좀 두세요. 저 여자를 만나야겠어요. 저 사람이 에미 마것로이드를
죽였단 말이에요!」
샬로트 블랙록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고 콧물을 훌쩍거리며 중얼거렸
다.
「난 그녀를 죽일 마음이 없었어요. 어느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았어요. 모
든 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어요. 하지만 내가 가장 슬퍼하는 것은
도라예요. 도라가 죽고 난 뒤 난 혼자가 됐어요. 난 외로웠어요. 도라, 도
라―.」
그녀는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흐느낌이 애절하
게 이어졌다.


◎ 23장. 목사관의 저녁 ◎

미스 마플은 큰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번치는 무릎을 끌어 안고 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줄리언 허먼 목사는 몸을 의자 앞으로 내밀듯이 앉아, 얼핏 보기에 원숙한
장년이라기보다 학생과 같은 자세를 하였다.
클래독 경감은 위스키 소다수를 마시는 사이사이에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
비번이라도 되는지 아주 한가한 모습이었다.
이들을 에워싸듯 줄리어와 패트릭, 그리고 에드먼드와 필리퍼가 앉아 있었
다.
「이번 일은 모두 미스 마플 당신의 공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클래독이 말했다.
「아니예요, 경감님. 저는 이것저것 조금씩 도왔을 뿐이에요. 당신이 모든
것을 맡아 해결하신 겁니다. 당신은 제가 모르는 것도 잘 알고 있잖아
요.」
번치가 답답하다는 듯 나섰다.
「그러면 두 분이 차례로 말씀하시지요. 하지만 제인 아주머니가 먼저 말
씀해 주세요. 저는 아주머니가 어떻게 거기에 생각이 미쳤는지 몹시 궁
금합니다. 미스 블랙록을 의심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습니까?」
「글쎄, 번치, 그것은 대답하기가 매우 어렵구나. 물론 그 강도사건을 꾀하
기에 가장 가능성이 많은 사람―확실히 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미스 블랙록이라고 처음부터 생각했어. 그녀가 루디 셔트와 관련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거든. 게다가 사건의 무대를 자기 집에서 꾸밀 수 있으
니 아주 수월하지 않겠어? 이를테면 스팀을 이용한 일도 그렇지. 그녀는
방안의 불빛을 없애려고 벽난로를 피우지 않았거든. 이렇게 난로를 피우
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집의 주인이 아니겠어? 그러나 또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 사건이 그렇듯 단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누군가 레티샤 블랙록을 죽일 작정이었다고 한동
안 생각했던 거야.」
「저는 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 사실을 알고 싶습니다. 그 스위스 청년은
레티샤 블랙록이 블랙록인 줄 단번에 알았나요?」
「그랬던 것 같더군. 루디 셔트는―.」
미스 마플은 말을 하다 말고 클래독을 바라보았다.
클래독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베른의 아돌프 코호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코호 박사는 갑상선 수술로
세계적인 권위자입니다. 샬로트 블랙록은 그 병원에서 갑상선 제거 수술
을 받았으며, 그때 루디 셔트는 그 병원 간호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호
텔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 금방 옛 환자였음을 알아채고 말을 걸었지요.
그가 생각이 좀더 깊었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는 그와
달라, 옛 간호원을 알아보지 못했거든요.」
「그럼 루디는 몽트루에 대해서, 또 자기 아버지가 호텔 주인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그것은 미스 블랙록이 루디가 말을 걸어 왔다는걸 과장하느라
꾸며낸 말이었어요.」
미스 마플은 감동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루디의 출현은 큰 충격이었을 거예요. 그녀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고 단정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자기 정체를 알고 있는 남
자를 만났으니, 그 놀람이 얼마나 컸겠어요. 그래서 자기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제거하겠다는 계획을 갖기에 이른 겁니다.
클래독 경감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아름답고 명랑하고 매력적인 샬로트
블랙록은 갑상선이 커지면서 생활에 파탄이 생겼어요. 감수성이 예민한
그녀에게는 대단한 불행이었지요. 한창 자기 용모에 신경을 쓰던 때였으
므로 그렇지 않겠어요. 만일 샬로트에게 어머니가 있었거나, 적어도 아버
지가 관심을 더 써 주었던들 후일 그런 비극을 겪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를 보살피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신경써 주는 사람이 그녀한테는 없었어요. 그런데다 집안 분
위기 때문에 몇 년 일찍 수술받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지요. 내가 알기로
는, 닥터 블랙록은 소견이 좁고 기질이 완고하고 독재적인 사람이었어요.
샬로트는 아버지에게서 고작 옥소 따위의 약으로 치료를 받았을 뿐 수술
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샬로트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복종
했어요. 레티샤는 의사로서의 아버지 실력을 과신하고 있었던 모양입니
다. 겁이 많고 의지가 약한 샬로트는 반사적으로 아버지를 완전히 믿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또 실제로 아버지가 그녀의 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갑상선이 커져 보기 흉하게 되면서 그녀는 남의
눈을 꺼려 집에 틀어박혔어요. 아주 친절하고 상냥한 성격이었는데 말입
니다.」
「여자 살인자를 묘사하면서 퍽 동정적이십니다.」
에드먼드는 비아냥거렸다.
미스 마플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게 보이나요? 하지만 심약하고 상냥한 사람이 종종 엉뚱한 면을 보
이지요. 가령 그들이 삶에 대한 한스러움을 갖게 되면 그 마음이 도덕적
인 힘을 부숴 버려요.
그런데 레티샤 블랙록은 샬로트와 매우 다른 성격을 가졌습니다. 클래독
경감님은 나에게 벨 게들러가 레티샤를 아주 훌륭한 여자라고 말했다고
하였지요. 나도 그 점에 대해 동감이에요. 그녀는 성격이 원만하고 정직
하지 못한 것을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였지요. 그리고 어떤 유혹 앞에서
도 부정을 저지를 여자가 아니었어요. 레티샤는 동생 샬로트를 극진히
사랑했어요. 그녀는 동생을 생활 속에 끌어들이려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까지 편지에 써서 보냈어요. 그러나 샬로트는 갈수록 깊숙히
병적상태로 빠져들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해 닥터 블랙록이 죽었어요. 레티샤는 랜들 게들러의 일을
그만두고 샬로트를 보살피려고 돌아왔지요. 그리고 동생의 수술 여부를
알기 위해 스위스의 전문가에게 함께 갔지요. 너무 오랫 동안 방치해 뒀
었지만 수술은 성공했어요. 흉하게 튀어나온 종양이 사라지고, 수술 자국
은 구슬이나 진주 목걸이로 가릴 수 있었어요. 이때 전쟁이 일어났지요.
그들은 영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스위스에 머물렀어요. 그러면서
적십자에 관한 일 등을 하며 지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경감님?」
「맞습니다, 미스 마플.」
「물론 영국에서 가끔 소식이 왔겠지요. 게들러 부인의 죽음이 가까워졌다
는 것도 알았을 겁니다 머지 않은 장래에 막대한 유산이 굴러 들러온다
는 기대감은 두 자매의 가슴을 벅차게 하였겠지요. 그래서 이것저것 계
획을 세우고 미래를 이야기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 같은 계획은
레티샤보다 샬로트에게 더 큰 뜻이 있었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이제 그
녀는 참으로 오랜만에 정상적인 여자, 이를테면 아무도 혐오와 동정을
가지고 바라보지 않는 보통 여자로서의 삶을 누리게 되었으니까요. 그녀
는 자유롭고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인생을 마음껏 즐기고 싶어졌습니
다. 여행을 다니고,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집에서 옷과 보석을 사들이며
웃음꽃을 피우고, 연극과 음악회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그 꿈 같은 일들
이 이제 샬로트의 현실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잔병 한 번 앓지 않
던 레티샤가 독감에 걸렸어요. 폐렴까지 발병한 그녀는 앓아 누운 지 1
주일 만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샬로트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요. 언니를 갑자기 잃었고 그와 동시에 바야흐로 분홍빛 풍선의 띄우던
마음 속 꿈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겁니다. 필경 그녀는 레티샤에게 분
노 같은 걸 느꼈을 거예요. 벨 게들러의 임종이 가깝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은 그즈음 레티샤가 세상을 떠나다니. 앞으로 한 달 만이라도 더 살았
다면 유산은 언니의 것이 되고 언니가 죽으면 자기 것이 될 텐데…….
바로 이것이 두 자매의 성격상 차이였습니다. 샬로트는 자기의 생각이
잘못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그 유산은 몇달 내에 레티샤에게로
오게 되어 있다―그녀는 자기와 레티샤를 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이 생각은, 의사나 누가 언니의 세례명을 물었을 때 불현듯 떠오른 발상
이었는지 몰라요―샬로트는 그때, 언니와 자기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
타낼 적에 블랙록 자매로 통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어요―좋은 가문에
서 자란 중년의 영국인 자매인 그들은 똑같은 옷을 입으면 아주 구별하
기 어렵게 보였습니다. 번치, 내가 언젠가 말한 바와 같이 나이가 많은
여인들은 대개들 비슷해 보이거든요. 그러므로 그녀는 샬로트가 벌써 죽
고 레티샤가 살아 있는 것으로 꾸밀 수가 있었던 거예요.
이 계획은 틀림없이 악한 마음에서 그랬다기 보다 다분히 충동적인 것이
었어요. 그리하여 레티샤는 샬로트의 이름으로 매장되었고, 샬로트는 비
로소 레티샤의 이름을 가지고 영국에 왔습니다. 오랫 동안 잠재해 있던
타고난 독창력과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어요. 지난날 그녀는 샬로트라
는 이름으로 단역을 맡았던 것이나, 이젠 레티샤가 차지했던 지휘자 자
리를 고스란히 받아 우월감에 취했어요. 두 사람은 정신적인 면에서 그
다지 차이가 없었지만, 도덕적 가치관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고 봅
니다.
물론 샬로트는 한두 가지 분명하게 해야 할 점이 있음을 잊지 않았어요.
그녀는 영국에 돌아가자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시골에 집을 샀어
요. 그녀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고향 캠벌랜드에서 은둔시절에
알았던 몇 사람과 레티샤를 잘 아는 벨 게들러뿐이었어요. 필체는 손가
락이 관절염에 걸렸다는 핑계로 속일 수 있었지요. 아무튼 그녀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던 셈입니다.」
「그렇지만 샬로트는 레티샤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텐데요? 제법 많
았을 것 같은데요?」
번치가 물었다.
「그들한테는 똑같이 하면 되었어.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
다지. 『요전에 레티샤 블랙록을 우연히 길에서 만났는데, 그녀가 너무
변해서 알아보지 못할 뻔했어요.』라고. 그들은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했
지만 그녀를 레티샤가 아니라고 의심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야. 그 사이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으니 사람도 변했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또, 미스
블랙록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한들 근시안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
었겠지요.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샬로트는 런던에서 레티샤가 어떻게 생활해 왔는
가를 아주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이를테면 누구를 만났었다고 하는 것
까지―알고 있었다는 점이에요. 특히 그녀는 레티샤로부터 자주 편지를
받았으므로, 레티샤를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거나 친구의 소식을 묻는 등의 수법으로 위기를 모면했을 거예요. 그
러한 중에도 그녀는 자기의 정체가 탄로날까 봐 전전긍긍했을 게 분명해
요. 리틀 파독스로 와서 살게 된 것도 그렇고, 전혀 본 적이 없는 두 젊
은 <6촌>들을 자기 집에 하숙시킨 것도 그와 같은 반증인 셈이지요. 그
리고 그들이 그녀를 레티 아주머니로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위치가 확고
해졌던 것입니다.
한동안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갔어요. 그러나 언제까지나 완벽할 수는
없었어요. 마침내 그녀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요. 이것은 그녀의
친절함과 타고난 부드러운 성격 때문에 일어난 실수였어요. 어느날 옛날
친구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그 친구는 곤경에 처해 있음을 하소연하였는
데, 샬로트는 서둘러 도움을 주려고 들었지요. 아마 이건 그녀가 외롭게
지내고 있었지 때문이었겠지요. 그녀는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과 동떨
어져 살려고 하였으니까요.
더욱이 그녀는 순수한 마음으로 도라 배너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도라
배너―다름아닌 그때 편지를 보내온 친구 이름입니다. 여학교 시절에 무
척이나 활달하고 낙천적이던 친구의 모습이 그녀의 기억에 남아 있었어
요. 그래, 자기의 입장을 잊고 설레는 기분으로 답장을 썼던 거예요.
하지만 도라는 얼마나 놀랐겠어요? 도라가 편지를 보낸 상대를 레티샤인
데 정작 답장을 보낸 사람은 샬로트였으니 말입니다. 이때만 해도 도라
는 샬로트가 레티샤로 행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어요.
오직 옛날 쓸쓸하고 불행했던 나날을 보내던 샬로트를 알고 있는 몇 사
람 가운데 하나였으니까요.
그런데 도라가 차츰 의식하기 시작했어요. 샬로트는 결국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도라는 친구가 지금까지 해온 일을 듣고 진심으로 동정해
주었어요. 하지만 일시에 머리가 혼란해진 그녀는, 친구 로티가 레티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유산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
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로티야말로 용감하게 역경을 이겨내었으니 당
연히 고난에 대한 보상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겠지요. 그 많
은 유산이 전혀 엉뚱한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건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했
던 거예요.
도라는 샬로트의 비밀이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어요. 그 유산은 샬로트에게 있어서 여분으로 놔둔 몇 파운드의 버
터와 같은 것이었거든요. 다시 말해서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자기 것
으로 만들어도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도라는 드디어 리틀 파독스로 왔어요. 샬로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오래 되지 않아서였답니다. 그것은 도라 배너가 매사에
갈피를 못 잡고 실수로 손해를 입힌다는 것만이 아니었어요. 단지 그 정
도라면 샬로트도 견디었을 거예요. 그녀는 도라를 여전히 좋아했고 소중
하게 여겼으며, 의사에게서 도라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
문이지요.
그런데 도라는 위험한 존재가 되어 버렸던 거예요. 샬로트와 레티샤는
언제나 상대방 이름을 줄여 부르지 않았는데, 도라는 늘 약자로 부르는
것이었어요. 이를테면 그녀는 블랙록 자매를 레티(레티샤)와 로티(샬로트
)라 불렀거든요. 샬로트는 도라에게 자기를 레티라고 부르도록 주의를 주
곤 하였으나, 그녀는 곧잘 로티라고 불러 버리는 거예요. 게다가 대화중에
과거의 이야기를 내놓는 거였어요. 샬로트는 도라의 빈발하는 실수에 신
경을 써야만 하였고 급기야 신경과민이 되었어요. 물론 도라의 말에 의아
해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요.
샬로트의 신상에 정말로 치명적인 타격을 준 것은 다른 사건이었어요. 앞
에서 말했지만, 로열 슈퍼 호텔에서 루디 셔트가 그녀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 왔던 거예요.
그 뒤 루디가 호텔에서 훔친 돈을 벌충하려고 샬로트 블랙록에게 찾아 갔
던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설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클래독 경감님
께서 생각하신 것처럼―유산에 관한 비밀을 알고 협박하지는 않았다고 추
측합니다.」
클래독 경감이 미스 마플의 말을 받았다.
「루디는 샬로트를 협박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용모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잘생긴 남자들이 그렇듯이 적극적
이고 요령 있게 접근한다면 중년부인에게서 돈을 얻어 낼 수 있다고 꿍
꿍이속을 가졌던 겁니다.
하지만 샬로트는 그의 유혹을 달리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서
이상한 눈치를 채고 교활한 협박이라고 단정한 모양입니다. 만약 벨 게
들러가 죽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나기라도 하면 레티샤에 대한 유산 상속
을 놓고 그가 금광을 발견한 것과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이라고 지레 짐작
한 듯 싶습니다.
아까 미스 마플께서도 언급했지만, 그녀는 신분을 속이고 있는 중이었습
니다. 세상에 레티샤 블랙록으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은행은 물론 벨 게
들러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장애가 협박자일 가능성이 많은 이 스위스 호텔 고용인인
루디 셔트였던 것입니다. 아마 그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빈틈없이 해낼
수 있었을 테고, 모든 것이 환상처럼 이루어졌겠지요. 그녀는 어떻게 해
서든지 그를 없애 버리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 동안 감정과 정서가
메마른 생활을 해온 그녀는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그 만족감에 몸을 떨
었습니다.
마침내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루디에게 파티 때
강도극을 연출해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인물이 필요하다면서, 만약 루디가 협조해 주면 많은 사례를 하겠다고
언질을 주었습니다.
그가 아무 의심 없이 승낙한 것을 보면, 역시 루디 셔트는 그녀를 협박
한 것이 아님을 확인한 셈입니다. 그에게 샬로트의 존재는 다만 돈을 잘
주는 어리석은 노부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에게 신문에 게재할 광고 문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집의 구
조를 알아야 하니 리틀 파독스에 오라고 했습니다. 이날 그녀는 두 사람
이 만날 장소와 출입구를 보여 주었습니다. 물론 도라 배너는 이 일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사건이 발생한 비극적인 날이 찾아
왔습니다.」
클래독은 말을 그쳤다. 미스 마플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의 이
야기를 이었다.
「샬로트는 초조하기 짝이 없었을 거예요. 그때만 해도 계획을 취소할 시
간이 있었으니까요. 도라 배너는 레티가 그날 몹시 불안해 하더라고 우
리에게 말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착수하려는 음모가 두려웠고, 혹시 일
이 잘못되면 어쩔까 여간 심란하지 않았던 거지요. 그러나 겁에 질려 취
소하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스터브룩 대령의 서랍에서 권총을 꺼냈을 때는 자신이 장난을 하고 있
다고 행위를 합리화시켰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달걀이나 잼을 몰래 꺼내
어 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도 없는 집 2층으로 올라가고, 소리가 나
지 않도록 응접실 두 번째 문에 기름을 발라 놓았을 때, 그리고 필리퍼
가 해 놓은 꽃꽂이를 잘 보이게 해야 한다면서 문 옆의 테이블에 옮겼을
때도 그런 기분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을 거예요. 모든 것이 게임을 준
비하는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다음에 일어난 일들은 게임이 아니었어요. 그래요. 그녀는 두려
움을 감출 수 없었어요. ……도라 배너의 느낌은 정확했었지요.」
「샬로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클래독이 말했다.
「계획은 어김없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녀는 6시가 조금 지났을 때 자리에
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오리들을 우리 안에 넣어야겠다면서 밖으로 나
갔습니다. 물론 루디 셔트를 불러들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집안에 들어온
그에게는 마스크·망토·장갑·회중전등이 전달되었습니다.
괘종시계가 6시 30분을 알리는 종을 치자, 샬로트는 자연스럽게 아치 쪽
의 테이블로 다가가 담배 상자를 집어들었습니다. 주인측으로서 손님을
맞고 있던 패트릭이 술을 가지러 갔으므로, 샬로트가 여주인으로서 담배
를 가지러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시계가 종을 치면 사람들의 시선이 시계 쪽으로 향할 것이라 여
겼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들은 시계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
람, 도라 배너는 샬로트를 응시하고 있었어요. 도라는 첫 진술에서 미스
블랙록이 그때 무엇을 했는가를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샬로트는 제비꽃
이 담긴 화병을 들고 있었답니다.
그녀는 전기줄의 철사가 드러나도록 램프의 코드를 미리 벗겨 놓았습니
다. 정전은 예정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담배 상자·화병·램프, 이 세 가
지는 모두 한 곳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녀는 제비꽃을 꺾는 듯이 하다가
전선에 물을 떨어뜨린 다음 램프의 스위치를 올렸습니다. 물은 전기의
양도체이므로 곧바로 퓨즈가 끊어졌던 것입니다.」
번치가 말했다.
「얼마 전 저녁에 우리 집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인 아주머니께
서는 그 때문에 크게 놀라셨군요?」
「그래, 번치. 나는 전기가 이상하다고 느꼈지. 그리고 한 쌍의 램프 중 하
나가 그날 밤에 있었는데, 밤 사이에 감쪽같이 다른 걸로 바꿔 놓은 걸
알아차렸어.」
「그렇습니다.」
클래독 경감이 말했다.
「플레쳐 형사부장이 다음날 아침 그 램프를 살펴보았지만 다른 램프와 다
름없이 아무런 결함이 없었습니다. 전선이 드러나거나 합선된 부분을 발
견할 수 없었습니다.」
미스 마플이 말했다.
「나는 도라 배너가 그 램프를 두고 여자 목동이라고 말한 뜻을 그것으로
알았어요. 하지만 패트릭의 일을 비유한 것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도라
배너는 자기가 들었던 것을 되풀이하여 이야기했어요. 그녀는 자기의 상
상력으로 실제의 일을 과장하거나 왜곡하여 믿지 못할 사람이라고 평판이
나 있지만, 자기 눈으로 본 것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한 여자였어요. 그러
니까 레티샤가 제비꽃을 꺾고 있는 걸 분명히 보았던 거예요.」
클래독이 말참견했다.
「하지만 자기가 중요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에 번치가 장미꽃 화병의 물을 램프의 전선에 엎질렀을 때, 난
미스 블랙록이 틀림없이 불을 껐다고 믿었어요. 테이블 앞에 있었던 사
람은 그녀뿐이었거든요.」
클래독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맹랑한 이야기였지만, 도라 배너는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다가 테이블에
놓아두어 테이블이 탔다고 투덜거렸지만, 이날 담배를 피운 사람은 아무
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화병에 물이 없어서 제비꽃이 시들고 말았는데, 이것이 레티샤의
큰 실수였습니다. 사건이 난 후에 물을 다시 채워야 하는데, 그녀는 그만
깜박 잊었나 봅니다. 어쩌면 그런데까지 신경써서 볼 사람이 없을 것이
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미스 배너조차 자기가 처음에 물을 넣
어 주지 않아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고 말을 계속했다.
「도라는 쉽사리 남의 암시에 걸리곤 했습니다. 미스 블래록은 이 약점을
여러 차례 이용했었습니다. 도라가 패트릭을 의심한 것도 분명히 미스
블랙록의 암시 때문이었습니다.」
패트릭이 불만스럽게 물었다.
「경감님은 왜 나를 끌어들입니까?」
「물론 그다지 대단한 암시는 아니었지요. 그렇지만 그 암시로써 미스 배
너의 의혹이 샬로트에게서 다른 사람한테로 옮겨 가는 효과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의 상황은 여러분이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갑
자기 전기가 나가자 사람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이때 샬로트는 기름을 칠
해 놓은 문을 통해 살짝 빠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회중전등으로 방안을
비추면서 자기의 역할을 해내는 루디 셔트의 뒤로 다가갔습니다. 그는
처음에 원예용 장갑을 낀 손으로 권총을 쥔 샬로트가 자기 등뒤에 서있
는 줄 알아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서 있기로 한 장소―아
까 서 있던 창가―에 회중전등이 비추기를 기다리다가, 그때가 되자 재
빨리 방아쇠를 당기었습니다. 두 번의 총성이 울렸고, 깜짝 놀란 루디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그의 몸을 향해 다시 한 발을 쏘았습니다.
그리고 총을 쓰러진 루디 곁에 떨어뜨리고 장갑을 벗어 홀 테이블 위에
던졌습니다. 그녀가 조금 전에 나왔던 문으로 들어가 불이 꺼질 때 서
있던 장소로 돌아가자 불이 켜졌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귀에는 상처가
있었습니다.―샬로트가 상처를 어떻게 냈는지 모르겠지만―.」
미스 마플이 말했다.
「필경 손톱깎는 가위로 그랬을 거예요. 귓불은 약간 상처를 내기만 해도
피가 많이 흐르거든요. 이건 남을 속이는 훌륭한 방법이었지요. 그녀의
흰 옷에 피가 흘러내리는 걸 보고, 사람들은 한결같이 총알이 다행스럽
게 귀를 스쳐갔다고 여겼을 거예요.」
클래독이 말했다.
「결과는 순조롭게 되었습니다. 도라 배너는 셔트가 미스 블랙록을 쏘았다
고 주장했고, 그것은 아주 의미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도
라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녀가 바로 샬로트가 피습당하는 장면
을 목격한 듯한 인상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 증언을 토대로 수사했더라
면, 루디의 죽음은 자살 아니면 사고사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손바닥
엎듯이 뒤집혔습니다. 이처럼 올바른 결말을 가져온 것은 미스 마플의
덕분입니다.」
미스 마플은 이를 부인하듯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아닙니다, 경감님. 나는 그저 흉내만 내었을 뿐인 걸요. 그 사건을 만족
해 하지 않으시고 강력하게 밀어붙인 것은 당신입니다. 초기에 마무리짓
지 않았던 건 정말 잘하신 일이었습니다.」
클래독 경감은 감회에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 저는 사건 내용을 살피고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습니다. 확실히 떠
오르지는 않았지만, 어디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습
니다. 그러한 저에게 길을 열어 주신 분이 미스 마플입니다. 이로써 미스
블랙록의 흉계는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수사과정에서 저는 그 문이 비밀리에 사용되고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이
때까지 추리의 늪에서 맴돌던 경찰에게 기름을 칠한 이 문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물이었습니다. 이것을 발견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저의 실수
때문이었지요. 그 문으로 나가려다가 문의 손잡이를 잡아버린 것입니
다.」
미스 마플이 덧붙였다.
「경감님, 난 당신이 그 문으로 인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의 표현이긴
합니다마는―.」
「그래서 수사가 다시 시자됐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각도에서였지
요. 우리는 레티샤 블랙록을 죽일 만한 인물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클래독의 말을 미스 마플이 이어받았다.
「주위에는 혐의를 받을 만한 사람이 있었지요. 미스 블래록도 그 사실을
알았어요. 이즈음 그녀는 필리퍼가 누구라는걸 알아 본 모양이에요. 왜냐
하면 소니어 게들러는 샬로트의 비밀을 아는 몇 사람 가운데 하나였거든
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클래독 경감님은 모르겠지만―젊은 시절에
만났던 사람을 몇 년 전에 만난 사람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한답니다. 필
리퍼는 샬로트가 기억하고 있는 필리퍼의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인데다
얼굴 모습이 어머니를 아주 닮아 있었어요.
드디어 필리퍼가 소니어 게들러의 딸임을 알게 된 샬로트는 무척 기뻐했
어요. 그리고 필리퍼를 친딸이기나 한 것처럼 아주 귀애하였어요. 기묘한
노릇이었지만, 모르면 몰라도 무의식 속의 양심의 가책을 애정으로 갚고
자 했음이 틀림없어요.
그녀는 유산을 받으면 필리퍼를 성심껏 돌봐 줄 작정이었지요. 그래서
필리퍼와 해리가 자기와 함께 살게 되자, 그녀는 매우 흐뭇하였고 행복
하기까지 하였던 거예요. 그런데 경감님께서 핍과 에머에 관해 캐묻자
샬로트는 적지않이 불안했어요.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필리퍼한테
뒤집어씌우고 싶지가 않았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루디가 강도질을 하려
다가 자기 실수로 죽은 것처럼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기름칠한 문이 발견되고 나자 상황이 바뀌었어요. 오직 필리퍼
만이 그녀를 죽일 만한 동기를 가졌으니까요. 물론 그녀는 주리어에 관
해 아는 바가 없었어요. 그 때문에, 필리퍼가 핍이라는 사실을 애써 감추
려고 들었어요. 그래서 당신께서 물었을 때, 소니어는 몸집이 자그마하고
머리카락이 가무잡잡하다고 속였던 거예요. 그리고 자신의 말이 거짓말
로 알려질까 싶어 앨범에 있는 소니어와 레티샤의 사진을 모조리 떼어냈
어요.」
클래독은 언짢은 기색이 되었다.
「그리고 저로 하여금 스웨트넘 부인을 소니어 게들러로 생각토록 유도했
었지요.」
에드먼드가 중얼거렸다.
「어머니만 가엾게 되셨군요. 평생 동안 고결하게 사신 분이신데―.」
미스 마플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참으로 위험한 사람은 도라 배너였어요. 그녀는 갈수록 건망증이
심해지고 말이 많아졌어요. 앞서 나는 차를 마시러 그곳에 갔는데, 미스
블랙록이 도라를 보던 눈빛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무엇 때문에 험상궂게
보았는지 아세요? 도라는 그때 그녀를 로티라고 불렀던 거예요. 우리가
보기에는 하찮은 실수였는데, 샬로트한테는 까무러칠 만한 말이었어요.
그런데도 도라는 이야기를 계속했어요. 가엾게도 떠들어대지 않으면 살
의욕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지요. 블루버드에서 차를 마실 적에도 나는
그녀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 이야기를 하는 듯한 야릇한 인상을 받
았어요. 사실 그녀는 두 사람에 관해 이야기를 하였던 거예요.
한 번은 레티에 대한 말을 했어요. 자기 친구가 아름답지는 않으나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더니, 이내 예쁘장하기는 하나 진지하지는 못한 여자라
고 정정했어요. 그러다가, 레티는 아주 영리하고 처세에 밝은 사람이라고
말하더군요. 또, 친구의 인생은 매우 불행하였다면서, <극심한 고통을 꿋
꿋이 견디는도다>라는 시구를 들려주기도 하였어요. 레티샤의 생애에 그
런 역경이 없었다고 여겨지는데요.
이날 샬로트는 블루버드에 몰래 들어와 도라가 지껄이는 소리를 죄다 들
었나 봐요. 그렇다면 램프를 바꿔 놓았다는 도라의 말을 들었을 것이고,
여자 목동의 램프가 남자 목동의 그림이 그려진 램프로 바뀌었더라는 말
에서, 도라 배너가 자기에게 위험한 존재임을 절실하게 느꼈을 겁니다.
생각해 보건대, 도라는 그날 찻집에서의 이야기로 인해 자신의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어요. 좀 지나친 표현인지 모르지만, 샬로트는 도라 배너가
거추장스러워졌다는 게 분명해졌어요. 이제까지 도라를 사랑했던 샬로트
로선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겠지요. 그녀는, 요전
에 번치에게 말한 간호원 엘러튼처럼, 상대방에 대한 자비심에서 죽이는
것이라고 합리화했을 거예요. 아무튼 샬로트는 배너의 남은 인생을 행복
으로 채워 주려고 온 정성을 기울였어요. 생일 파티에다 특제 케잌까지
만들어 주고…….」
필리퍼가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그야말로 달콤한 죽음이군요.」
「정말 그래요. 도라의 죽음이 그랬었지요. 미스 블랙록은 친구에게 달콤한
죽음을 주려고 하였지요…… 파티를 열고, 도라가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
주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한테는 그녀가 마음 편히 있도록 부탁했어요.
그리고 자기 침대 옆에, 무슨 종류인지 알 수 없는 알약이 든 아스피린
병을 놓아 두었어요. 도라가 자기의 약병이 눈에 띄지 않으면 틀림없이
미스 블랙록의 머리맡에 있는 병에서 약을 꺼내리라 생각한 것이지요.
만약 알약이 발견된다고 해도, 사람들은 누군가가 미스 블랙록을 죽이려
고 놔두었다고 여기겠지요.
그리하여 미스 배너는 잠을 자는 것처럼 행복하게 죽었어요. 샬로트는
비로소 시름을 떨치고 침착을 되찾게 되었구요. 하지만 아울러 그녀는
도라 배너와, 그녀의 우정과 충실함을 잃어버린 거지요. 앞으로는 마음을
열고 이야기할 수도 없게 되었으니 그 쓸쓸함이 오죽하겠어요. 내가 목
사님의 쪽지를 그녀에게 전하러 갔던 날 그녀는 몹시 울고 있었어요. 그
건 진심에서 우러나온 슬픔이었지요. 자기 친구를 죽였으니 그렇지 않겠
어요?」
번치가 말했다.
「소름끼치는 이야기입니다. 끔찍하군요.」
줄리언 허먼이 말했다.
「그러나 아주 인간적입니다. 우리는 살인자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잊
고는 하지요.」
미스 마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들도 인간이지요. 살인범에게도 동정할 만한 점이 있어요. 특
히 샬로트 블랙록처럼 마음 약하고 인정 많은 살인자에겐 말입니다. 하
지만 역시 위험한 존재에요. 나약한 인간은 자신의 입장이 위협 받으면
너무 무서워 과격해지고 급기야 자기를 억제할 수 없게 되지요.」
줄리언이 물었다.
「미스 마것로이드는 어떻게 되었지요?」
「오, 불쌍한 미스 마것로이드. 샬로트는 두 사람이 사는 집에 들렀다가 그
들이 살인 과정을 추정해 보는 걸 엿들었나 봐요. 창문이 열려 있어서
들을 수가 있었겠지요. 그때까지 샬로트는 더 이상 위험인물이 있지 않
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충격이 컸을 거예요.
이때 미스 핀칠리피는 미스 마것로이드에게 기억을 되살려 보라고 다그
치고 있었어요. 샬로트는 사건이 일어났던 날의 일을 목격한 사람이 있
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녀는 사람들이 모두 루디 셔트를 쳐
다 보았을 것이라 믿었거든요. 그녀는 창밖에서 계속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지요. 그러면서, 어쩌면 아무것도 생각해 내지 못할는지 모른다고
희망을 가졌을 거예요.
그런데 마침 미스 핀칠리피가 정류장을 향해 급히 뛰어나갔어요. 미스
마것로이드가 바야흐로 새로운 사실이 떠올랐는데 말이에요. 그녀는 미
스 핀칠리피의 뒤에서 『그녀는 거기에 없었어!』하고 말했어요.
나는 그 뒤 미스 핀칠리피에게 물어 보았어요. 미스 마것로이드가 어떤
식으로 말했었느냐구요. ……왜냐하면 미스 마것로이드가 <그녀는>에 힘
주어 말했다면 그 뜻이 달라지기 때문이지요.」
클래독이 말했다.
「언어의 뉘앙스는 중요합니다.」
미스 마플은 상기된 얼굴을 경감 쪽으로 돌렸다.
「그때 미스 마것로이드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사람들은 무
슨 물건을 보았으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치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오래 전에 나는 기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 현장을 보았었지
요. 그런데 객차 벽에 칠한 페인트가 열을 받아 보기 흉하게 얼룩졌던
것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거든요. 지금이라도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
어요. 그리고 런던에서 비행기가 폭발했던 적이 있었지요. 그때 유리 파
편이 사방에 흩어졌어요. 대단한 충격을 주었었지요. 지금 내 기억에 강
하게 남아 있는 것은, 내 앞에 서 있었던 여자의 스타킹 올이 나갔다는
것이었어요.
이 같은 경험으로 보아, 미스 마것로이드가 자신이 보았던 일을 기억해
내려고 노력했다면 적잖은 것들을 떠올렸을 거예요.
아마 그녀는 벽난로 가까이에서부터 기억해 냈겠지요. 회중전등이 처음
에 그곳을 비췄으니까요. 그리고 두 개의 창문이 떠오르면서, 창문과 그
녀 사이에 여러 사람들이 보였어요. 예를 들면, 허먼 부인이 손으로 얼굴
을 가리고 있었던 모습 말이에요.
그녀는 회중전등이 비추는 방향대로 기억을 이어 갑니다. 미스 배너는
입을 헤벌쭉 벌리고 커다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중이었어요. 그 다
음은 벽과 램프와 담배 상자가 놓인 테이블. 그 순간, 총소리가 들렸어
요. 미스 마것로이드는 여기에서 도저히 믿기 어려운 광경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녀는 두 개의 총알 자국이 있는 벽, 다시 말해 미스
블랙록이 총에 맞았을 때 있었다던 벽을 보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레티
는 거기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제 내 말뜻을 알겠지요? 그녀는 핀칠리피가 말한 세 여자를 생각했어
요. 만일 그들 중 한 사람이 그곳에 없었다면 그가 곧 범인일 테니까요.
그럼 그녀는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그녀는 거기에 없었어!』하고 말이
에요. 그렇지만 그녀가 생각한 것은 장소였어요. 누군가가 틀림없이 있어
야 할 장소에, 아무도 없었다는 건 그녀로선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믿어지지 않는 일이야, 핀치. 그녀는 거기에 없었어』하고 그녀가 말했
지요. 그러므로 이것은 레티샤 블랙록을 가리키는 말이었지요.」
번치가 물었다.
「한데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그 전에 이미 알고 계셨지요? 전등이 합선됐
을 때도 종이에다 의문점을 쓰셨잖아요.」
「그래. 그때 짐작했던 거야. 여러 가지 이야기가 하나의 패턴으로 맞아떨
어지더구나.」
번치는 미스 마플이 메모한 것을 인용하며 물었다.
「램프―이건 알겠어요. 제비꽃―이것두요. 아스피린 병―아주머니는 그날
미스 배너가 아스피린을 새로 샀다고 하셨지요? 그러니 미스 블랙록의
것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고 말이에요.」
「누군가 그걸 감췄다면 할 수 없었겠지. 어쨌든 레티샤 블랙록은 살인자
가 노리는 인물이라는 것을 꾸며야 했으니까.」
「그렇군요, 그리고 달콤한 죽음이라는 케잌은―그건 단순한 케잌이 아니
었어요. 파티가 벌어지고 미스 배너는 죽기 전에 행복했어요. 귀여워해
주는 개를 죽이려는 음모 같지요. 그게 무서운 거죠. 뭐랄까 겉으로마느
이 친절이라는 것 말이에요.」
「그러나 샬로트는 정말 친절한 여자였어. 마지막으로 부엌에서 『나는 아
무도 죽이고 싶지 않았어!』라고 한 말은 진심이었어. 그녀가 원하는 건
엄청난 돈이었으니까. 그리고 욕망 앞에서 다른 것은 부수적인 것이었지.
그녀는 고통스런 인생의 대가로 돈을 얻으려 했던 거야. 세상에 악의를
가진 사람은 위험해. 그들은 으레 보상받으려고 하거든. 나는 그녀보다
더 고통스럽고 비참한 환자들도 보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
도 행복하고 만족스런 생활을 보내려고 하고 있지. 사람의 행복과 불행
은 그 사람에 달려 있지. 이야기가 엉뚱하게 빗나갔군. 어디까지 이야기
했지?」
「아주머니가 종이에 적어 놓으신 것에 대해 얘기했어요.」
클래독이 물었다.
「신상조사라고 쓴 것은 뭐였지요?」
미스 마플은 장난스럽게 그를 향해 웃었다.
「클래독 경감님도 보셨겠지요? 레티샤 블랙록이 샬로트에게 보낸 편지를
경감님이 내게 보여 주셨잖아요. 그 편지에 조사(enquiries)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와요. 둘 다 e라고 되어 있는데 언젠가 내가 번치를 시켜 경감
님께 보여 드린 쪽지에는 i로 썼더군요. 대부분 사람들은 철자법에 관한
습관은 오랜 뒤에도 좀처럼 고치지 못하거든요. 그것은 내게 대단한 힌
트가 되어 주었죠.」
「그렇군요. 난 미처 알아채지 못했군요.」
번치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미스 배너는 카페에서 아주머니에게 역경을 이겨냈다고 얘기했는데 레티
샤는 그런 역경을 겪은 적이 없었지요. 그리고 요드 치료라는 말은 갑상
선 종양을 연상시켰지요?」
「그래. 샬로트는 언니가 죽은 것을 폐렴으로 말했고 또 스위스에서였다고
했지. 난 갑상선의 권위 있는 병원이 스위스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고.
그 생각은 레티샤 블랙록이 늘 걸고 다니던 싸구려 진주 목걸이와 연관
짓게 된 거지. 정말 그 목걸이는 그녀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지.
바로 목의 상처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클래독이 말했다.
「그날 밤 목걸이가 끊어졌을 때 그녀가 그토록 당황해 하던 이유를 알았
습니다. 그땐 정말 이상했습니다.」
번치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주머닌 <로티>라고 쓰셨어요. 우리는 레티라고 알고 있는데 아
주머니께서 잘못 쓰신 줄 알았어요.」
「그래. 나는 그녀의 동생 이름이 샬로트라는 걸 기억했고 도라 배너가 미
스 블랙록을 한두 번 로티라고 불렀지. 도라는 무심코 그렇게 부르고 나
서 몹시 당황했었지.」
「<베른>과 <양로연금>이란 뭐예요?」
「루디 셔트는 베른의 병원에서 일했었지.」
「양로 연금은요?」
「그건 <블루버드>에서 네게 말했잖니. 하긴 그땐 특별난 생각으로 얘기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워더스푼 부인이 죽은 패틀렛 부인의 양로 연금
을 타냈던 얘기 말이야.―나이든 여자는 대개 비슷비슷하거든. 이렇게 해
서 여러 개의 추리가 하나로 맞춰진 거지. 그리고 나는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고 밖에 나가 있었는데 그때 미스 핀칠리피를 만나 그녀가 차를
태워주었고 곧 마것로이드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 거지.」
미스 마플의 목소리가 침울해졌다. 이젠 그 목소리는 흥미롭거나 즐기는
듯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착잡해 하는 듯했다.
「나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 징조 같은 걸 느꼈지. 그러나 아무런 물증이
없었어. 그래서 한가지 가능성 있는 계획을 세워 플레쳐 형사부장에게
말을 한 거지.」
클래독이 끼어들었다.
「그를 혼내 주어야겠군요. 내게 보고하지도 않고 찬성했다니 말입니다.」
「사실 나도 가까스로 그를 설득했지요.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리틀 파독
스로 가서 미치를 설득했어요.」
줄리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를 설득했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미스 마플이 말했다.
「그녀는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이지만 남을 위한 일도 할 줄 아는 사람이
에요. 나는 그녀를 추켜 세워주고, 그녀가 고향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레
지스탕스 대원이 됐을 거라고 했지요. 그러자 그녀는 『물론이죠』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용감하고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책임감 있는 사람
이라고 말해 주었지요. 그리고 레지스탕스 운동에서 활약한 여자 이야기
를 해 주었더니 그녀는 몹시 감격했어요. 그 이야기 중에 꾸며낸 것도
꽤 많았는데―.」
패트릭이 감탄했다.
「아주 멋진데요!」
「그리고 그녀가 맡을 임무를 설명해 주었지요. 그리고 그녀가 완벽하게
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을 시켰지요. 그러고 나서 2층 자기 방으로 올려
보내고 클래독 경감이 오실 때까지 내려오면 안 된다고 말했지요. 흥분
하기 쉬운 사람들은 때가 되기도 전에 서둘러서 일을 그르치거든요.」
줄리어가 말했다.
「하지만 멋지게 해냈잖아요.」
번치가 변명하듯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내가 그곳에 없었긴 하지만…….」
「그건 좀 복잡하지―미치는 갑자기 협박할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 거야.
그리고 그때 몹시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언제라도 사실을 얘기할 수 있
다고 생각한 거지. 나는 그녀가 식당 열쇠구멍으로 권총을 들고 루디 셔
트 뒤에 있던 미스 블랙록을 보았다고 하도록 시켰지요. 곧 그녀는 실제
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런데 열쇠구멍에 열쇠가 꽂혀 있
어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을 샬로트 블랙록이 알아챌지도 모르는 일
이었지. 하지만 심한 충격을 받았을 대는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못한다
고 여겼지 때문에 미치는 분명하게 보았다고 떠들어댈 수 있었지.」
클래독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척해야 했죠. 그리고는 조금
도 의심한 일 없는 인물을 몰아세운 것입니다. 나는 에드먼드 씨를 급습
한 것이죠.」
에드먼드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멋지게 내 역할을 해냈습니다. 격렬한 부인―모든 게 계획
대로 진행되었지요. 계획에 어긋난 것은 필리퍼가 자신이 핍이라고 주장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핍은 내가 맡은 역이었죠. 그래서 경감님과 내가
손발이 맞지 않아 아슬아슬했지만 과연 경감님은 그 위기를 잘 넘겼습니
다. 경감님은 내가 부유한 부인을 노렸다고 둘러댔지요.」
「그런데 그런 연극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모르시겠어요? 샬로트 블랙록은 미치만이 진상을 안다고 생각했던 겁니
다. 경찰은 아예 미치를 거짓말쟁이라고 제쳐두고 다른 사람을 의심했지
요. 그러나 미치가 끝까지 주장한다면 경찰도 그녀의 이야기를 재고해
보리라고 생각했겠죠. 그렇다면 미치가 살인범의 다음 목표일 가능성이
크게 마련이죠.」
미스 마플이 말했다.
「미치는 방에서 나와 곧장 부엌으로 갔어요. 미스 블랙록은 곧 뒤를 따라
들어왔구요. 부엌에는 미치가 혼자 있는 듯했지만 플레쳐 형사부장은 문
뒤에 숨고 나는 부엌 벽장 속에 들어가 있었어요.」
번치가 미스 마플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아주머니?」
「두 가지 경우이지. 즉 샬로트는 돈을 주며 입을 막으려고 한다거나 또
한가지는 그녀를 죽인지도 모른다는 두 가지 경우였어.」
「하지만 그런 짓을 하고 덮어둘 수 있을까요? 곧 의심받을 텐데요.」
「그렇지 않아. 샬로트는 이미 구석으로 몰린 쥐와 다름없었어. 그날 일어
난 일만 해도 그래. 미스 핀칠리피와 마것로이드의 사건 재구성 말이야.
핀치가 역으로 갔다 오면 미스 마것로이드가 레티샤 블랙록이 사건 그날
밤 그 방에 없었던 것을 설명할 거야. 그녀의 입을 막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자 계획을 세울 여유도 없이 무자비하게 목을 죄어서 죽인 거야.
인사까지 하면서 말이야. 그리고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외출하지 않은 척하며 난롯가에 앉아 있었던 거지. 그때 경감으로부터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데려가겠다는 전화를 받자 새로운 계획을
세울 겨를도 없었던 거지. 곧 줄리어나 호감가지 않는 젊은이를 해치워
야 한다고 생각하던 중 미치의 문제가 생긴거야. 미치를 죽여 그녀의 입
을 막아야겠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지. 그때는 인간
이랄 수도 없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어.」
번치가 물었다.
「그런데 왜 플레쳐 형사부장께 맡기지 않고 벽장 속에 들어가 있었나요,
제인 아주머니?」
「두 사람이 안전했거든. 게다가 나는 도라 배너의 목소리를 흉내낼 수 있
거든. 샬로트 블랙록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려면 도라 배너의 목소리를
내는 방법 뿐이거든.」
「사실 멋진 효과를 냈지요.」
「그래…… 그녀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어.」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그때를 회상한는 듯했다. 줄리어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밝게 말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미치는 달라졌어요. 어제 사우댐턴 부근에 일자리
구했다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어요.」
줄리어는 미치의 목소리를 그럴 듯하게 흉내냈다.
「나는 그곳에서 만일 그들이 내가 외국인이니까 등록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하겠어요. 『그러죠. 경찰은 나를 잘 알아요. 내가 경찰을 도와주었으
니까요. 내가 없었다면 위험한 범인을 못잡았을 거예요. 난 사자처럼 용
감하게 위험은 신경쓰지 않으니까요』라고 말이에요. 그러면 그들은『미
치, 당신은 영웅이오. 훌륭해요』라고 말하겠죠. 그때 나는 『뭘요, 대단
한 일이 아닌걸요』라고 말해 줄 거예요.」
줄리어는 말을 멈추더니 본래의 제 목소리로 돌아왔다.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에드먼드가 말했다.
「그녀는 틀림없이 경찰을 돕게 될 겁니다.」
필리퍼가 말을 받았다.
「그녀는 내게도 친절해졌어요. 미치는 결혼선물로 <달콤한 죽음>을 만드
는 비결을 가르쳐 주었지요. 그리고 줄리어가 자기의 오믈렛 프라이 팬
을 망쳐 놓았으니 그녀에게는 가르쳐 주지 말라고 하더군요.」
「루커스 부인은 필리퍼의 일을 기뻐하고 있어요. 벨 게들러가 죽어 필리
퍼와 줄리어가 유산을 상속받았잖아요. 그녀는 우리 결혼 축하 선물로
아스파라거스 모양의 은제 가위를 주셨어요. 결혼식에 와달라는 말은 않
했지만 잘한 것 같습니다.」
에드먼드의 말에 이어 패트릭이 덧붙였다.
「이젠 축하할 일만 남았군. 에드먼드와 필리퍼―줄리어와 패트릭은 어
때?」
줄리어가 정색으로 대꾸했다.
「당신은 축하받을 자격이 없어요. 클래독 경감님이 에드먼드에게 한 얘기
가 당신에게 꼭 맞는 얘기더군요. 당신은 부유한 아내를 얻고 싶어하는
사람이에요!」
패트릭이 말했다.
「고맙군. 그러나 난 당신을 위해 한 일이었어.」
「난 감옥에 갈 뻔했어요. 당신의 건망증 때문에 말이에요. 난 당신의 동생
에게서 편지가 왔던 그날 저녁을 잊을 수가 없어요. 내게 온 편지라고밖
에 생각할 수 없어요.」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 덧붙였다.
「배우가 될까 생각도 해 보았어요.」
「뭐라고, 당신도?」
「그래요. 파스에 가면 극단에 자리가 있을지도 몰라요. 공부를 한 뒤 극장
을 경영하고 싶어요. 그럼 에드먼드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겠어요.」
줄리언 허먼이 물었다.
「당신은 소설을 쓰지 않았나요?」
「네, 그랬었지요.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죠. 그냥저냥 읽을 만한 겁니다.
덥수룩한 남자가 침대에서 빠져나와 무언가 냄새를 맡는 것으로 시작되
어 잿빛거리, 수종을 앓는 노파, 턱이 긴 매춘부―그들은 세계의 정세에
대해 얘기하고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갖는 거죠. 그런데 갑자기
나도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아주 우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
을 메모해 두었다가 가벼운 희곡을 썼습니다. 흥미를 느끼고 쓰자마자 3
막짜리 희곡을 완성시켰죠.」
패트릭이 물었다.
「제목이 뭐죠? <집사는 무엇을 보았나?>인가요?」
「나는 제목을 <코끼리도 잊는다>라고 붙였습니다. 곧 상연하게 되었지
요.」
번치가 중얼거렸다.
「코끼리도 잊는다…… 정말 그런가요?」
줄리언 허먼 목사가 갑자기 말했다.
「이야기가 하도 재미있어서 그만 설교 준비를…….」
번치가 말했다.
「이번엔 탐정 소설이 아니라 실제 이야기에 정신을 뺏겨 버렸군요.」
패트릭이 말했다.
「살인을 하지 말지어다―설교 제목으로 어떻습니까?」
「아닐세. 그건 그만두지.」
번치가 끼어들었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그보다 더 좋은 설교가 많아요.」
그리고는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성경을 인용해 가며 덧붙였다.
「봄이 오면 거북의 소리 땅에 울리도다―잘 기억이 안 나는군요. 하지만
왜 거북이라고 했는지…… 거북은 목소리가 좋을 리가 없는데 말이에
요.」
줄리언 허먼 목사가 설명했다.
「거북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오. 그건 산비둘기를 의미한 거지. 헤
브라이어로는―.」
번치가 갑자기 줄리언을 끌어안는 바람에 이야기는 끊어졌다.
「난 한가지는 알고 있어요. 성경에 나오는 아하스엘스는 알탁셀크스 2세
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하지만 우리에겐 알탁셀크스 3세에요.」
줄리언 허먼은 아내가 왜 그 이야기를 특별히 재미있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번치가 말했다.
「티글라스필레샤가 당신을 돕고 싶어해요. 어떻게 해서 퓨즈가 합선되었
는지를 가르쳐 주었으니까요.」


◎ 24장. 에필로그 ◎
에드먼드가 필리퍼에게 말했다.
「신문 몇 가지를 봐야겠어. 토트먼 씨 가게에 가봅시다.」
그들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치핑 클렉혼으로 돌아와 있었다.
동작이 느리고 뚱뚱한 토트먼은 상냥하게 두 사람을 맞았다.
「돌아오셔서 반갑습니다.」
「신문을 보려 하는데요.」
「네, 알겠습니다. 어머니는 안녕하신가요? 이제 본 머드에 정이 드셨나 모
르겠습니다.」
「어머니는 좋아하세요.」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에드먼드는 그렇게 대답했다. 대부분의 자식들이
그러하듯 부모의 일이니까 잘되려니 하는 것이다.
「네, 참 좋은 곳이죠. 작년 휴가에 그곳엘 갔었는데 아내가 무척 좋아하더
군요.」
「다행이군요. 그런데 어떤 신문으로…….」
「런던에 당신 작품이 상연되는 모양이던데 모두들 재미있다고들 합니다.」
「네, 잘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제목이 <코끼리도 잊는다>라는군요. 내 생각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잊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요.」
「네, 그렇죠. 나도 제목을 잘못 붙인 거라고 생각합니다.―모두들 당신과
같은 말을 하니까요.」
「동물학상으로 분명히 그렇습니다.」
「네, 네―알을 낳을 때의 집게벌레처럼 말이죠.」
「집게벌레도 그렇습니까? 몰랐던 사실이군요.」
「신문 말인데요―.」
「타임즈겠죠?」
토트먼 씨는 펜을 집어들며 물었다. 그러자 에드먼드는 분명하게 말했다.
「데일리 워커.」
필리퍼가 말했다.
「그리고 데일리 텔레그래프.」
「뉴 스테이트먼트.」
「라디오 타임즈도 넣어주세요.」
「스펙테이터도요.」
「가드너스 클로니클.」
두 사람은 번갈아가며 대고 나서 그제야 숨을 돌렸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가제트는요?」
「싫어요.」
필리퍼와 에드먼드는 동시에 대답했다.
「가제트는 필요하지 않단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노스 베넘 뉴스 앤드 치핑 클렉혼 가제트>가 필요하지 않단 말씀이
죠?」
토트먼은 다짐하듯 다시 한 번 물었다.
「네.」
「매주마다 나오는 신문이 필요하지 않다구요?」
「네.」
그리고 에드먼드가 덧붙였다.
「이제 됐습니까?」
「아, 네.」
에드먼드와 필리퍼는 돌아가고 토트먼은 거실로 들어갔다.
「연필 좀 줘요. 내 펜이 없어졌구료.」
토트먼 부인이 주문 장부를 집어들며 말했다.
「내가 쓸 테니 부르세요.」
「데일리 워커, 데일리 텔레그래프, 라디오 타임즈, 뉴 스테이트먼트, 스펙
테이터―그리고 가만 있자, 가드너스 클로니클이에요.」
「가드너스 클로니클.」
토트먼 부인은 되뇌면서 빠르게 적어나갔다.
「그리고 가제트?」
「가제트는 필요없다는군.」
「뭐라구요?」
「가제트는 필요없으니 넣지 말라더군.」
토트먼 부인이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잘못 들었을 거예요. 모두들 가제트를 보는데 필요하지
않다니. 그럴 리가 없어요! 이 신문이 아니면 이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
어나는지 어떻게 안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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