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화산논검 - 서독 구양봉 4

3학년2반 | 2022.02.18 07:42:17 댓글: 0 조회: 418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561

제19장 최초의 살인
어느새 의식이 돌아온 석초수가 난쟁이 사숙과 속문성, 그리고 제갈정과 함께 폐허 위에서 이 얘기 저 얘기 주고받고 있을 때 노독물 신독행이 있던 석실 쪽에서 요란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마구 피어 올랐다. 놀란 네 사람이 동시에 바라보니 초속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와 3, 4장 되는 높이로 쑥 날아올랐다가는 땅에 내려섰다. 그것은 사람의 형체였다.
네 사람은 모두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자리에 선 채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행동거지로 보아 이 폐허가 몹시 생소하게 느껴지는 눈치였다.
남루한 옷차림의 그는 머리칼이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고 수염이 더부룩하여 사람인지 귀신인지 분별하기 어려웠다.
아이가 그에게로 나는 듯이 달려가 물었다.
"넌 누구냐?"
그는 이마에 드리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껄껄 웃었는데 그 소리가 몹시 귀에 거슬렸다. 그 웃음 소리는 내력이 충만한 사람의 것으로 기공이 높은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아이는 은근히 놀라며 큰 소리로 재차 물었다.
"넌 누구냐?"
그는 긴 머리칼을 가볍게 가슴 쪽으로 끌어다가 좌우 두 가닥으로 땋아 내리면서 아이를 향해 말했다.
"사숙, 그래 나를 몰라보시겠소?"
아이가 크게 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신독행과 함께 침대에 앉았다가 땅속으로 꺼져 내려간 구양봉이었다. 구양봉임을 알아낸 그는 내심 반가웠다. 두 사람이 땅속에서 죽었다고 생각한 그는 이제 합마공이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실망했었는데 구양봉이 이렇게 살아 나왔으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아이는 야릇한 미소를 떠올리며 구양봉에게 물었다.
"네 사부님은 어디 계신가? 그는 왜 나오지 않지?"
구양봉은 그가 사부에 대해서 묻자 분노를 느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나의 사부님을 죽이고도 염치없이 관심 있는 체 꾸며대는 거요?"
"자네 사부님이 죽었다고? 참말인가?"
구양봉은 머리를 들어 달을 가리고 있는 검은 구름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다가 무겁게 대꾸했다.
"사부님은 돌아가셨소이다."
아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손뼉을 쳐댔다.
"잘됐구나. 노독물이 결국 죽었구나. 내 뜻대로 되었어. 양봉아, 노독물이 죽을 때 너한테 합마공 심법을 전수해 주지 않더냐?"
구양봉은 속으로 탄식했다. 유운장 안의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사부의 생사에 관심을 가진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새삼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는 생전에 그처럼 위풍이 있고 강직했건만 죽고 나니 누구 하나 그를 마음에 두는 이가 없는 것이다. 밀실에서 거처하다 고독하게 죽었으니 그의 넋 또한 고독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양봉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는
구양봉이 상심해 하는 것을 보며 다시 물었다.
"그가 너한테 합마공을 전수하여 주었지?"
구양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사숙이 합마공에 대해 저렇듯 집착하는 것을 보니 단단히 조심해야 되겠구나.'
아이는 선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양봉아, 그럼 네가 나한테 그 합마공을 전수해 주면 안 되겠냐?"
구양봉이 거칠게 대답했다.
"허튼소리 작작 하시오!"
워낙 기공 따위의 법수란 대대주 그 가문의 장문인(掌門人)이거나 가장 유력한 제자한테만 전수하는 것으로서 타인은 듣지 못하게 하는 법이다. 그런데도 사숙은 합마공을 배우고 싶은 심정이 너무도 간절한 나머지 이 모든 규례를 무시하고 후안무치하게도 구양봉에게 이 같은 청을 하고 말았다.
구양봉은 큰소리로 웃고는 입을 열었다.
"사숙이 이 합마공을 배우고 싶으면 나를 사부로 모셔야 하지 않겠소? 사숙은 본래 나의 선배인데 나를 사부로 모신다면 그게 어디 선배로서 격에 맞는 일이오? 이건 사숙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지."
아이가 얼굴에 비굴한 웃음을 바르며 대꾸했다.
"양봉이, 난 보다시피 이렇게 자라다 만 사람이네. 자네를 사부로 모셔도 부끄럽지가 않아. 하물며 자낸 우리 문중에 하나뿐인 진정한 제자가 아닌가? 우리 문중에선 앞으로 자네를 우러러 받들텐데 내가 자넬 사부로 모시면 영광이지 부끄러울 게 뭐 있겠나?"
구양봉은 이 난쟁이 사숙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데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사독옹 문하에는 대개가 이런 후안무치한 인간들뿐이었다. 신공을 배우기 위해서는 항렬과 선후배도 따지지 않고 수치도 모르니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양봉이 냉랭한 어조로 내뱉었다.
"당신은 나의 사부님을 해치고 우리 두 사람을 산 채로 땅속에 파묻혀 있게 한 장본인 아니오? 만일 사부님께서 나를 구해 주지 않았다면 난 지금 시체가 돼 버렸을 거요. 이런 일을 생각하면 당신을 산 채로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어찌 제자로 받아 줄 수 있겠소?"
구양봉의 대꾸에 체면이 여지없이 하였는데도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소리 내어 웃다가 안색을 바꾸며 차갑게 말했다.
"이것 봐, 여기에 나는 물론 자네의 큰 사형, 둘째 사형이 있는 데, 자네 태도에 따라 생사가 결정될 거야. 알아듣겠나?"
구양봉도 안색이 변하여 속으로 생각했다.
'인간이란 워낙 이러한 것인가? 한마디 말에 수시로 낯색이 달라지는구나. 인심이 이러할진대 더 말해 무엇하랴.'
구양봉은 아주 냉정하게 말을 받았다.
"사부님께서는 합마공 심법을 전수하실 때 나에게 지독한 맹세를 하게끔 하셨소. 당신들은 물론 당신의 식솔들까지 몽땅 죽여 버리라고 말이오. 그러니 어서 대처하는 게 좋을 거요."
아이가 소리쳤다.
"구양봉, 너는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너의 사부님이 20년이 가깝도록 나와 겨뤄 왔는데 그도 날 죽이지 못하고 나도 그를 죽이지 못했다. 네 사부님의 무공으로도 지금까지 나를 어쩌지 못했는데 네가 나하고 겨뤄 보겠다고?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구양봉은 아무 대답이 없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속문성이 구양봉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양봉이, 내가 변경에 있을 때 자네를 사리에 밝은 사람으로 보았기에 자네로 하여금 시를 읊은 것으로 대처하도록 한 걸세. 우리 오형제가 자네를 변경으로부터 데려온 건 자네가 악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야. 내가 보건대 자네가 합마신공을 배운 건 자네한테 그리 득될 게 없으니 그 신공 심법을 알려 주고 형님을 찾아 변경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네."
구양봉은 냉소를 머금은 채 묵묵부답이었다.
한편 제갈정은 아직도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구양봉의 모습을 악귀로 착각한 나머지 몹시 놀라고 있었다.
"넌 사람이냐, 귀신이냐? 넌 사람이냐, 귀신이냐? 네가 두아를 데려갔지? 우리 두아를 내놓아라!"
그는 감히 구양봉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불현듯 주먹을 휘두르면서 덤빌 듯 앞으로 나섰다.
속문성이 잽싸게 그를 제지했다.
"큰형님, 저 사람은 귀신이 아니오. 사숙께서 저 사람을 대적하게 형님은 좀 가만 있으슈."
구양봉은 문득 석초수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한쪽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고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 보고만 있었다.
구양봉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친구는 성미가 급해서 두세 마디 안팎에 모든 심사를 다 드러내고 마는 사람인데 오늘은 어째서 한옆에 우두커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지?'
속문성은 구양봉이 석초수 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그는 자기의 생각을 사숙에게 귀띔했다.
"선비는 사흘 동안 만나지 못해도 다시 봐야 한다지 않소이까. 구양봉은 사부님한테서 합마신공을 배웠으니 내공에 필시 큰 성취가 있을 겝니다. 내 생각엔 셋째 동생으로 하여금 먼저 구양봉과 몇 합 싸워 보게 하는 것이 좋을 듯싶소이다."
사숙도 꾀가 밝은 사람인지라 속문성이 하는 이 몇 마디에 선뜻 수긍했다.
'둘째란 놈이 그래도 충심인 것 같구나. 앞으로 저 놈을 죽여야 할 때가 오면 사정을 좀 봐 줘야겠다. 고통을 덜 느끼게 깨끗하게 죽여 버려야지.
그는 당장 석초수를 향해 소리쳤다.
"셋째야, 저 사람을 잘 보거라. 저 놈이 너의 여편네 산이를 독살한 나쁜 놈이니라. 어서 저 놈을 죽여 버려라!"
석초수는 사숙의 미혼약을 마셨던 터라 그의 말을 듣자 자기는 분신쇄골하더라도 그녀를 위해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아내가 어떻게 죽었고 또 누구의 손에 죽었는가 하는 것은 전혀 분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산이를 죽였다구요?"
그가 칼끝으로 구양봉을 가리키며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아이가 대답했다.
"그래, 바로 저 놈이야. 저 놈이 산이를 독살했어. 자넨 그것도 모르고 있었나? 우리 유운장은 몇십 년을 지탱해 오면서 줄곧 태평스러웠고 한 번도 이런 참사를 겪어 본 적이 없었어. 모두들 재미있게 살고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독살당했잖나. 바로 저 놈이 왔기 때문이야. 저 놈이야말로 천하에서 으뜸가는 악인이란 말야! 저 놈은 산이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자네의 큰 사형
의 손자 두아를 죽였고 둘째 사형의 여편네도 죽였다네. 믿어지지 않거든 저 놈에게 물어 봐."
석초수가 휘둥그래진 눈으로 속문성을 바라보았다. 속문성이 맞장구를 쳤다.
"셋째 동생, 틀림없어. 자네 집사람도 저 놈한테 죽었어."
석초수는 칼을 쳐들더니 한 손으로는 칼집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칼자루를 틀어쥔 채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
"틀림없이 저 놈이 산이를 죽였단 말이지요?"
속문성은 급히 그렇다고 대꾸했다.
석초수의 손이 떨리더니 번쩍이는 칼날이 구양봉의 몸으로 날아갔다. 구양봉은 손을 뻗쳐 힘들이지 않고 칼을 막아냈다. 그러나 그가 손을 내리기도 전에 격노한 울부짖음 소리와 함께 또 칼 한 자루가 연신 찍고 찌르면서 날아들었다. 구양봉은 연신 손을 내밀었는데 그 동작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었다. 그는 이제 60년 공력을 가진 사람으로 변한 터라 손놀림과 발놀림이 마치 질풍
과도 같이 맹렬했다. 비록 동작이 능숙하진 않았지만 일단 손을 내밀기만 하면 그 힘이 무서울 정도였다. 그는 손바닥으로 석초수의 칼등을 내리쳤다.
힘이 아주 세어 오형제 가운데서 대력으로 이름이 높은 석초수는 한칼에 화산(華山)을 찍어 가를 기세였다. 그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윙윙 바람이 일어 한쪽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은근히 탄복하고 있었다. 그의 칼 쓰는 수법은 실로 대단했다. 하지만 구양봉이 손을 쓰는 동작을 보고 세 사람은 모두 겁을 집어먹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구양봉은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몸동
작이 날렵하고 보법(步法)이 정확하여 매번 칼 밑으로 빠져 나가 석초수로 하여금 헛칼질을 하게 했다. 그는 또 수시로 손을 내밀어 칼등을 치곤 했는데 어찌나 힘이 센지 석초수는 하마터면 칼을 떨어뜨릴 뻔했다. 깜짝 놀란 그는 칼자루를 고쳐 잡고 태도를 바꾸어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항했다.
곁에서 싸움을 지켜 보던 속문성은 가슴이 후둑후둑 뛰었다. 싸움이 시작될 때만 해도 구양봉은 선비 기질을 완전히 벗지 못한 듯 불안스런 기색이 엿보였고 걸음걸이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방금 무공을 익힌 터라 숙련이 되지 못하여 처음부터 자신만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몇 합이 지나자 점점 자신감이 생기는 듯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손놀림도 유연해져 갔다. 3, 40합쯤 싸
운 뒤엔 구양봉은 이제 의기양양해졌고 장난이라도 치는 듯 여유만만 해졌다. 깜짝 놀란 속문성은 구양봉이 무서운 적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참 싸우다가 구양봉이 물었다.
"석 사형, 당신도 나의 사부님을 죽일 생각을 했더랬소?"
석초수가 큰소리로 대꾸했다.
"만일 그 늙다리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칼로 토막 내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거다!"
그는 손에 든 칼을 더욱 힘껏 틀어쥐었다.
구양봉은 문득 한쪽에 조용히 서 있는 세 사람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 놈한테 매여 시간을 끌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저 놈들이 한쪽에 서서 호시탐탐 나를 해치울 궁리만 하고 있지 않는가? 어서 이 셋째란 놈을 해치워야지 꾸물대다간 저 놈들의 독수(毒手)에 걸려 죽고 말 게야.'
구양봉은 갑자기 고함을 길게 내지르면서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여 진격하려는 듯하다가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어디로 도망가는 거냐?"
석초수가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구양봉은 잽싸게 머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땅을 짚더니 납작 엎드렸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머리를 들더니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자세를 바꾸었다.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꽉꽉' 하는 두꺼비 우는 소리를 내며 두 손을 수평으로 곧게 내밀었다. 순간 '펑!' 하는 소리가 나더니 석초수의 손에서 칼이 떨어져 나가고 사람의 몸뚱이가 마치 돌멩이처럼 먼지 속에 나뒹굴었다.
잠시 후 먼지는 걷혔으나 석초수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어졌다. 속문성과 사숙은 두리번거리다가 물너진 담장 앞 뿌리 뽑힌 나무 등걸 아래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했다. 두 사람은 얼른 그를 끄집어냈으나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몇 달 보이지 않은 사이에 구양봉의 무공이 놀라우리만큼 진전돼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꾀가 있고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이었지만 어찌해야 좋을지 난감해졌다. 제갈정은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개죽음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구양봉을 지켜 보던 사숙도 너무나 놀란 나머지 한참이나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 구양봉 자신도 몹시 당황해 있는 상태였다. 시험삼아 한 번 써 보았을 뿐인데 합마공의 효과가 너무도 엄청났던 것이다.
'난 사람을 죽였다. 내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 방금까지 펄펄 뛰던 사람이 나한테 죽었다. 그도 날 죽이려 하고 나도 그를 죽이려 했는데, 만일 이런 기공이 나한테 없었다면 그의 칼에 내가 먼저 죽고 말았으리라. 난 사람을 죽였다. 내 손이 이렇듯 피로 더럽혀진 이상 선량하게 살아가긴 어차피 틀렸다. 나는 진정 악인이 된 것이다.'
세 사람이 구양봉을 바라보니 긴 머리카락에 가려진 그의 눈에 흉악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눈길은 마치 창검과도 같이 날카로워 보였다. 그가 갑자기 소리 내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난 사람을 죽였다. 난 사람을 죽였단 말이다. 사부님, 전 사람을 죽였사옵니다. 전 진정 악인이 되었사옵니다……."
그러더니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는데, 무슨 까닭인지 그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를 지켜 보던 아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구양봉의 무공은 실로 놀라워 이젠 대적하기 어렵게 됐구나. 시일이 흐르면 더욱더 대적해 낼 수 없게 될 터이니 지금 손을 써야 한다. 세 사람이 힘을 합쳐 동시에 손을 쓰고 독을 사용하면 그 하나쯤이야 당해 내지 못하겠는가.'
그는 마음을 다진 뒤 입을 열었다.
"구양봉, 네가 셋째를 죽이기는 했다만 날 죽일 순 없을 게다."
그는 머리를 돌려 속문성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속문성은 사숙의 생각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으나 대충 감을 잡고 제갈정을 향해 말했다.
"큰형님, 저 가증스런 놈을 눈뜨고 봐 줄 수가 없구려. 저 놈은 우리 식솔들을 죽이고도 부족해서 셋째 동생까지 죽여 버렸소. 형님 앞에서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구려."
제갈정은 고개를 돌려 속문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라구? 저 놈이 셋째를 죽였다구7"
속문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정이 이어서 말했다.
"죽였으면 어쩌겠나. 셋째란 놈도 좋은 물건은 아니거든."
그는 또다시 멍해 있다가 물었다.
"말해 보게. 저 놈은 대악인인가?"
속문성이 달빛을 빌어 살펴보니 제갈정의 눈에 흉악한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움찔 놀란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탄식조로 말했다.
"형님, 형님은 저 놈을 당해 내지 못합니다. 저 구양봉에 비하면 형님이나 나나 소악(小惡)에 불과하오. 사부님이 두 가지 신공을 저 놈한테 전수한 걸 원망할 수밖에……."
제갈정은 크게 분노했다. 지금은 비록 온전한 정신이 아니지만, 그 동안 사부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대악인이 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던 일들이 눈앞에 생생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구양봉이 사부한테서 진짜 무공을 전수받아 힘들이지 않고 대악인이 되었다지 않는가? 그는 불같이 치미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구양봉에게로 달려들었다. 아이는 음침하게 웃으며
제갈정을 부추겼다.
구양봉과 맞붙은 제갈정은 깜짝 놀랐다. 그의 내력이 어찌나 큰지 사부의 내력과 엇비슷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보아하니 그를 이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속문성은 사숙이 궤계가 많은 사람임을 알고 있는지라 화급히 손을 써서 제갈정과 협력하기를 바랐다.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틈을 타서 아이는 슬그머니 구양봉의 뒤로 움직여 갔다. 그는 허리춤에서 독분을 꺼내어 구양봉을 향해 냅다 뿌렸다. 그런데 그렇게 지독한 독가루를 들이마시고도 구양봉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뜻밖의 상황에 충격을 받은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속문성 역시 사숙의 솜씨가 효험을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몸을 빼어 도망칠 궁리를 했다. 그러
한 사정을 모르는 제갈정만이 정신없이 주먹을 휘두르며 구양봉에게 덤벼들었다. 구양봉은 제갈정의 집요한 태도를 보면서 갑자기 사부님이 그들에게 당하던 때의 참상이 떠올라 격심한 증오심을 느꼈다. 그는 긴 고함소리를 내면서 제갈정에게 죽음의 손길을 뻗쳤다. 한 주먹이 제갈정의 앞가슴을 치고 다른 한 주먹은 제갈정의 왼쪽 관자놀이를 파고들었다. 제잘정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주
르르 쏟아졌다. 속문성이 이를 보고 꽥 소리쳤다.
"큰형님, 빨리 피하시오. 피하라니까!"
제갈정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면서 구양봉에게 발악적으로 덤벼들려 했다. 속문성이 안 되겠는지 머리를 썼다.
"큰형님, 구양봉이 형님네 두아를 죽치려 하오. 형님이 물러나지 않으면 저 놈이 두아를 죽일 거요!"
그러자 제갈정이 멈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두아를 죽이지 마라. 두아를 죽이지 말란 말이야. 내가 물러가지. 내가 물러가면 될 거 아닌가."
그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몸을 돌려 겅중겅중 뛰어 달아났다. 다른 놈들도 잇달아 도망쳤다.
구양봉은 난쟁이 사숙과 제갈정, 속문성 등을 일거에 죽여 버리려 했으나 그들이 모두 달아나 버리자 맥이 풀렸다. 그는 폐허를 보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사부님, 이게 웬일입니까? 이게 웬일입니까, 사부님……."
온통 불타고 부서진 살풍경한 광경에서 생기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구양봉은 또다시 중얼거렸다.
"사부님, 전 떠나야겠습니다. 훗날 그 놈들을 보면 꼭 죽여 버리겠습니다. 사부님을 위해 복수하겠나이다!"
구양봉은 곧장 그곳을 떠났다. 그는 혼자서 큰길을 따라 가며 생각했다.
'오랫동안 형님을 만나지 못했구나. 모용 낭자와는 어떻게 되었을까? 형님도 아마 날 생각하고 계시겠지?'
한편 구양적과 모용쟁 두 사람은 변경에서 구양봉과 작별한 뒤 곧장 종남산을 향해 걸었다. 구양적은 동생 구양봉에 대한 염려로 시종 침울한 기색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공이 부족함을 한탄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동생을 그런 식으로 떠나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생을 북쪽 변강에 보내 차디찬 눈보라를 맞는 고초를 겪게 하다니. 그는 모용쟁과 함께 있는지라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못하
고 속으로만 가슴을 앓았다.
종남산에 당도하니 주막이 하나 눈에 띄었다. 몹시 갈증을 느끼던 터라 둘은 길도 물을 겸 주막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뚜걱뚜걱 들리더니 금나라 사람의 복장을 한 장정들 셋이 들어왔다. 그들은 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술과 안주를 날라 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세 사람은 구양적의 옆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서 안주를 가져올 동안 한담을 늘어놓기 시작
했다.
중년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보기에 낭주(狼主)께서 마음만 있다면야 종남산이 문제가 아니지. 그래 왕중양이란 자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래?"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말을 받았다.
"조용히 하게. 사람들 말이 이 종남산 사방에 비적들이 살고 있다고 하네. 이처럼 주막을 운영하거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모두 왕중양네 사람들이라잖나."
그러자 중년의 사내가 손으로 탁자를 탁 내리치며 외쳤다.
"제기랄, 그자들이 왕중양네 사람들이면 어떻단 말인가. 그렇다고 이 나으리가 할말을 못할 것 같아? 못마땅하거든 어디 나한테 와서 덤벼 보라고 그래!"
그러면서 그는 주위를 한 번 휘둘러보았다. 그는 마치 싸우기 좋아하는 수탉처럼 누구든 걸려들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와 다투려 하지 않았다. 주막 사람들은 감히 그를 똑바로 보지조차 못했다. 괜히 그런 작자를 건드렸다가는 피를 보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구양적의 마음은 매우 울적하였다. 금 사람들은 대송(大宋) 내에 들어와서
도 이렇듯 행패를 부렸다. 강산이 짓밟혀 철옹성이 절반이나 떨어져 나갔을 뿐 아니라 사람들도 이렇듯 수모를 당하며 살게 된 것이다.
또 한 사내가 끼여들었다.
"여보게, 저자들은 왕중양 패거리들이 아닐세. 저들에게 싸움을 걸어 뭣하겠나?"
그러자 한쪽에 있던 깡마른 사내가 말했다.
"왕중양을 본 적이 있었다면 이렇듯 함부로 호기를 부리진 못할 걸?"
성미 사나운 중년 사내는 그의 비꼬는 듯한 말에 화가 치밀어 탁자를 마구 두들겨 댔다.
"지금 내 부아를 돋을 셈인가? 대금국(大金國)의 용사인 내가 왕중양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은가? 내가 그대들과 함께 종남산으로 가서 그 왕중양을 찾겠네, 그래서 그자가 그 무슨 《구음진경》이라는 책을 바치는지 안 바치는지를 보면 될 거 아냐. 그자가 그걸 바치면 가만 놔두고 만일 바치지 않는다면 우리 형제들 솜씨가 어떤가 맛을 보여 주겠어!"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던 구양적은 내심 기쁘기도 하고 근심스럽기도 했다. 기쁜 것은 이제 종남산에 당도하였으니 즉시 왕중양을 만나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왕중양의 수중에 정말 그 《구음진경》이란 책이 있다면 그것을 손안에 넣을 희망이 있게 되는 것이다. 한편 근심스러운 것은 이 세 사람이 주막에서 큰소리로 《구음진경》에 대해 떠들어대는 것으로 보아 중원의 무림 전체가
이 경서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뭇사람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판이니 그것을 손안에 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두 사람이 말없이 상념에 잠겨 있는데 때아니게 맑은 염불 소리가 들려 왔다.
"나무아미타불, 아불자비(我佛慈悲)……."
한 젊은 중이 낡은 장삼 차림으로 주막에 들어섰다. 아주 자비롭고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그의 염불 소리는 가슴 깊숙한 데서 울려 나오는 듯싶었다. 그가 가볍게 외고 있는데도 목소리가 이처럼 맑은 것을 보면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한쪽에 자리잡고 앉더니 고개를 숙인 채 앞에 있는 목탁만 들여다보았다. 주막 심부름꾼이 그에게로 다가가 인사를 하며 물었다.
"대사께서는 무슨 음식을 드시렵니까?"
중은 여전히 시선을 내리깐 채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냉수 한 대접 떠 오시우."
심부름꾼은 중이 불경을 외는 줄 잘못 알아듣고 자리에 선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중은 눈을 감은 채 양신(養神)을 하면서 더는 아무 말이 없었다.
심부름꾼은 잠시 기다리다가 그가 더 이상 말이 없자 다시 물었다.
"대사님, 무얼 드시려는지요?"
중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냉수 한 대접만 주시오."
심부름꾼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밥도 아니고 국도 아니고 냉수 한 대접이라니. 심부름꾼은 또다시 물었다.
"다른 건 드시지 않겠는지요?"
중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어글어글한 눈동자에서 만만치 않은 빛이 흘러 나왔다. 그는 두 눈을 껌벅이더니 다시 한 번 대답했다.
"냉수 한 대접을 주시오."
뒤쪽에 앉아 있던 세 금인(金人)들은 이 중의 기이한 거동을 눈길 한번 떼지 않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심부름꾼이 냉수를 가져다 탁자 위에 놓아 주었다.
중은 합장을 한 후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승인이 세속에 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남의 골혈(骨血)을 탐내고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지어다. 오늘 또다시 남의 경권(經捲)을 탕하였으니 계율에 크게 어긋났느니라. 죄과로다, 죄과로다……."
그는 합장한 채 주문을 외고 나서 두 손을 내리더니 품속에서 자그마한 보따리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그 보따리는 아주 작았으나 단단히 묶어 놓아서 그것을 풀기가 여간 힘든 것 같지 않았다. 중은 참을성 있게 매듭을 하나씩 풀어 나갔다. 보따리를 펼치니 그 속에선 금덩이도 은덩이도 아닌 바싹 마른 꽃잎 몇 장이 나왔다. 중은 엄지와 식지, 장지 세 손가락으로 그것을 집어서 가볍게
대접안의 물에 적신 뒤 입에 대고 물방울을 흘려 넣기 시작했다. 물을 마시는 모양이 그러했다. 물을 마신 뒤 그는 이번엔 새끼손가락과 무명지로 마른 꽃잎을 집어 들고는 자세히 살펴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죄과로다. 죄과로다. 춘화추실(春花秋實)도 생명이로다. 중이 계율을 범했으니 그 죄가 가볍지 아니 하도다."
말을 마치자 그는 꽃잎 한 송이를 입 안에 넣고 아주 맛좋은 듯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구양적과 모용쟁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막 안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무슨 괴물이라도 보는 듯한 태도였다.
'저 사람은 과연 물과 꽃잎만 먹고도 견뎌 낼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중은 아무런 기색도 없이 천천히 물건을 거두어 아까처럼 단단히 묶어서는 품속에 집어 넣었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다 물값으로 엽전 두 닢을 놓았다. 중은 심부름꾼에게 인사를 남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는 그대로 떠나지 않고 걸음을 옮겨 세 금인들 앞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예를 갖추며 물었다.
"세 분 시주님, 승인이 아까 듣자니 왕중양이란 사람이 경서 한 부를 지녔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의 물음에 중년이 사내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가던 길이나 가시지 말라비틀어질 놈의 경서는 무슨 경서? 고불청등(古佛靑燈)이라고 임자는 피로 쓴 대장경(大藏經)인 줄 아는 모양이지? 아니면 여섯 대를 내려오면서 베껴 쓴 금강경(金剛經)인 줄 아는가? 우리가 말한 건 무경(武經)이니 중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중은 여전히 공손하게 말을 받았다.
"소인이 말씀드리는 것은 바로 무술을 익히는 비적이옵니다. 세 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 소승도 잘못 듣지는 않았을 터인데 아마도 《구음진경》이지요? 그 경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소이다. 세 분 시주께서 알고 계신다면 소승을 데리고 가셔서 그것을 찾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년의 사내는 중의 어리석은 말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구음진경》은 아주 귀한 보물로서 무공을 배우는 사람들치고 그 것을 탐내지 않는 자가 없는데 자기를 함께 데리고 가서 그 경서를 구하게 해 달라니 어찌 어리석다 하지 않겠는가.
한쪽에 서 있던 젊은 사내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네 놈이 《구음진경》에 대해 물을 자격이나 있는 놈이냐?"
중은 순한 얼굴로 한참이나 그 사나이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시주님 보시기에 그걸 물어 보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자 그 젊은 사내는 손을 들어 가볍게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는 대번에 박살이 나서 주저앉았다. 구양적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그 사나이의 무공은 인정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은 부서진 탁자를 보며 한탄조로 말했다.
"천물(天物)을 폭진(暴殄)하였으니 죄과로다! 시주님은 하필 아까운 탁자에 대고 화풀이를 하십니까?"
그는 부서진 탁자가 몹시 아깝다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그 사내는 더욱 화가 나서 대금국의 용사도 몰라본다며 대꾸할 새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의 주먹이 바람 소리를 내며 곧장 중의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주막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탁자를 단번에 박살낸 주먹이니 그 주먹에 맞을 경우 죽지 않으면 병신이 될 게 뻔했다. 뜻밖의 사태에 구양적이 얼른 그를 구하려 했으나 그 사이에 탁자가 세 개나 있었다. 구양적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중이 얻어맞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은 사내의 날 쌘 주먹을 맞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젊은 사내 역시 한쪽 팔을 중한테로 뻗친 채 굳은 듯이 서 있는데, 자세히 보니 사내의 한쪽 주먹이 중의 앞가슴을 파고 들어가 있었다.
중이 웃으면서 말했다.
"시주님와 심보가 좋지 않아 소승이 죄를 짓게 되었구려. 소승이 시주님께 제대로 대하지 못함을 양해하기 바라오."
젊은 사내는 말이 없었지만 함께 온 동료들이 펄쩍 뛰면서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중 놈아, 그 사람을 놔주어라!"
동료 두 사람은 동시에 중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중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가슴에다 그 젊은 사내의 팔을 붙인 채로 그를 질질 끌면서 중년 사나이의 주먹과 만월도를 교묘하게 피했다. 칼이 쉴 새 없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냈으나 중의 옷자락 하나 베어 내지 못했다. 이를 지켜 보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제 눈을 의심하다가 드디어는 찬탄해 마지않았다. 세 사람은 어느덧 중의 무
공에 압도되어 쩔쩔매고 있었다.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세 사람을 향해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셋이 그까짓 재주를 가지고 감히 왕중양을 찾겠다구? 그 사람은 전진교의 교주로 신통력이 대단해!"
그러자 다른 사람이 토를 달았다.
"듣자니 왕중양은 기인이고 그분의 무공은 대단하여 보통 사람은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하더군. 그게 정말인지는 모르지만."
또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왕중양은 그만두고라도 그분의 두 제자만 하더라도 대단하대요. 내가 한번 본 적이 있는데, 그분들이 주먹만 휘두르면 그 바람이, 아아……."
이 사람은 왕중양의 제자가 무슨 대단한 재주가 있다는 것인지 말을 맺지 못하고 그저 '아아……'하는 찬탄의 소리만 연발했다.
중과 싸우던 세 금인들은 큰 낭패를 보았다. 중이 갑자기 몸을 쑥 펴자 그때까지 기를 쓰고 주먹을 뽑아 내려 날뛰던 젊은 사내가 제풀에 뒤로 나자빠졌다. 세 사람은 더 이상 덤빌 생각을 못하고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이를 지켜 보던 구양적은 남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보아하니 이 중원의 무림 인물들은 대체로 만만치가 않아. 이 중만 하더라도 그래. 겉으로 봐선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을 사람이 정작 손을 쓰는 걸 보니 기공이 대단하잖아. 정말 뜻밖이야.'
구양적의 시선을 의식한 중은 천천히 읍을 한 뒤 문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구양적은 중이 그곳을 떠나려 하자 모용쟁에게 눈짓을 하고는 둔갑술을 써서 중의 맞은편에 비스듬히 섰다. 중은 그의 이러한 거동에 무척 놀란 듯 '어이쿠' 하는 소리를 내더니 정중하게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구양적을 살핀 뒤 다시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부처 앞에서 예를 올리듯이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오."
그건 자기는 구양적과 다툴 생각이 없으니 길을 비켜 달라는 뜻이었다.
구양적이 말했다.
"이 구양적은 먼 사막에서 왔사온데 대사님의 무공이 대단하신 것을 보고 아주 탄복했습니다. 대사님의 가르침이 있기를 바랍니다."
중은 다시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소승은 남한테 손을 댈 생각이 없었소. 하지만 그 세 시주님들이 소승을 핍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어 그리 되었소이다."
구양적이 웃으며 물었다.
"대사님의 선향(仙鄕)은 어디신지요?"
중이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소승은 대리(大理)에서 살고 있소이다."
구양적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의 스승의 원수가 대리 사람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생의 말에 의하면 그 중은 일속이라 부르며 무공이 대단하다고 했다. 이 중이 바로 사문(師門)의 원수인 그 일속이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구양적은 저도 모르게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
'만일 네 놈이 사문의 원수라면 네 놈과 싸울 수밖에 없다. 만일 내가 이 놈을 죽이게 된다면 나의 사부님은 더 이상 복수심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워 하지 않으셔도 되고, 밤낮 불안에 떨며 침식을 거부하는 일도 없으실 게 아닌가.'
구양적이 생각을 감추며 다시 물었다.
"대사님께선 법호을 어떻게 부르십니까?"
중이 대답했다.
"소승의 법호는 일속이라 합니다."
모용쟁은 중의 이름이 일속이란 말을 듣고 긴장되었다. 구양적의 사부가 바로 이 일속을 가장 미워하고 있었던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모용쟁은 얼른 구양적의 기색을 살폈다. 그는 자기의 추측이 맞아떨어지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구양적은 복잡한 심정을 감추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대사님께선 대리 사람이십니까?"
"그렇소이다. 소승은 대리 사람입니다."
일속의 대답에 모용쟁이 웃으며 참견했다.
"제가 듣건대 대리는 아주 아름다운 고장으로서 도처에 다화(茶花)가 피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가요?"
주막 안에 있던 사람들은 기막히게 아리따운 처녀가 중한테 대리에 대해 묻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 처녀는 무슨 생각에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중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머리를 숙인 채 대답했다.
"여시주님, 제가 사는 대리에는 실로 산마다 다화가 만발하여 천자만홍을 이루고 있습니다. 화간지하(花間枝下)에도 학문이 있을 정도이지요."
모용쟁이 말을 받았다.
"훌륭하군요. 전 대사님과 함께 대리에 가서 천하에 이름난 다화를 구경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일속은 놀라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소승은 줄곧 한운야학(閑雲野鶴)을 벗하고 자유자재로 사는 데 습관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처녀와는 동행할 수 없는 줄로 압니다. 출가한 사람이 아가씨와 동행하려면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있을 줄로 압니다."
모용쟁은 고소한 기색으로 덧붙였다.
"당신은 출가한 사람이신가요? 제가 보기엔 출가한 사람 같지 않은데요. 제가 보기에 당신은 귀공자 같아요. 당신의 성씨는 단씨가 아닌가요?"
구양적은 모용쟁도 사부의 말씀을 들었으므로 이 중이 정말로 원수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는 것임을 짐작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용쟁이 그 중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내버려두었다.
일속이라는 중이 탄식조로 말했다.
"소인은 중이옵고, 중은 출가 후에는 세속과 인연을 끊게 되지요. 그러므로 더는 세속과 한데 섞이지 않으며 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모용쟁은 속으로 생각했다.
'네 놈이 잘도 빠져 나가는구나. 내가 네 성을 물은 것은 네 놈이 구양적 사문의 원수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였다. 요리조리 말머리를 돌리는 걸 보니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모양이지?'
그녀는 소리 내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사님, 제발 웃기지 마세요. 제가 보기에 대사님께선 가문의 이름과 성씨를 깊이 숨기려 하고 있어요. 제가 듣기에 대리의 단씨는 황족으로 그곳에서 줄곧 대단한 세도를 부려 왔다고 하더군요. 대사님께서는 대리 사람인데다가 이처럼 기품이 있으신 걸로 보아 승인이라기보다는 아주 부귀한 중인(中人) 같아 뵈는군요. 대리에 서 가장 부귀한 사람들이 대리 단씨라고들 하던데, 제가 보기
에 대사님은 필시 단씨 집안 분이신 것 같아요."
일속이 대답했다.
"죄과로다. 죄과로다. 중은 옛것을 잊어서는 안 되니 자연히 우리 가문의 성씨를 알고 있소이다."
구양적이 입을 열었다.
"단 공자(段公子), 내가 보건대 당신은 뛰어난 인재인데다가 무공도 대단하고 기예도 놀랍습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무엇 때문에 즐거운 생을 포기하고 불문의 제자가 되셨습니까?"
"소인이 지난날을 돌이킨다면 그것은 큰 불행입니다. 불가에서도 인생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내세에 대해서이지요. 소인은 세속에서 살 때 억울한 빚을 적지 않게 지었기에 일심으로 그 빚을 씻으려고 출가하였으며 법명을 일속이라 지었던 것입니다. 이 일속이란 이름은 소인이 이미 모든 세속사와 인연을 끊었다는 의미지요. 하지만 마음속에 아직 석연치 못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마음속에 일념이 있는지라 육근(六根)을 깨끗이 없애지 못했습니다. 육근을 깨끗이 없애지 못한 까닭에 정과(正果)를 이를 수 없는가 봅니다. 소인의 일생은 아마 불행할 것입니다……."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무슨 속 깊은 사연이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공자께서는 혹 지난날 살인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말하자면 공자께서 일찍이 남을 해쳐 죽음의 빚을 지지 않았는가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제대로 짚으셨습니다."
일속이 침울하게 대답하자 모용쟁이 웃으며 말했다.
"일속 대사님께서 이 종남산에 오신 것도 그 《구음진경》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소승은 다만 호기심 때문이지 경서를 쟁탈할 생각은 없습니다. 듣건대 전진교의 교주 왕중양이 천하에 드문 기경을 얻었다고 하기에 어떤 것인가 알아보려는 것뿐입니다."
일속의 대답에 구양적이 웃으며 말했다.
"소인도 대사님과 마찬가지로 전진교 교주가 갖고 있는 《구음진경》이 어떤 책인가 보려고 합니다. 대사님께서 소인과 같은 생각을 품었으니 동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속은 망설였다. 모용쟁은 그냥 생글생글 웃으며 표정이 밝은 데 반하여 구양적이란 사람은 어두운 얼굴에 기색이 침울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모두 중원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전진교의 교주를 만나러 중양궁에 가는데 두 사람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심사숙고한 끝에 중의 처지로서 아무러면 어떻겠나 싶어 그들과 동행하기로 결심했다.
세 사람은 주막 사람들의 시선을 벗어나 곧장 중양궁으로 향했다. 종남산은 웅위로운 큰 산이어서 몇십 리나 되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걸어야 했는데 면면히 이어진 산맥은 실로 장관이었다. 세 사람은 함께 부지런히 걸었다. 머리를 돌려 보니 울창한 삼림 경관이 사막과는 판판 달라 보였다. 그들이 아름다운 풍경에 기분이 상쾌해져 있는데 때마침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노랫소리
는 바람에 실려 맞은편 산허리에 가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곤 했다.
천하가 혼란한들 무슨 상관이며
두 황제가 잡혀 간들 무슨 대수라
그 사람 음란한 짓에 열심이거니
대귈에선 술로 밤을 지새네
술 취해선 풍악을 잡히고
술이 깨면 화초를 구경하며
기쁠 때도 향락을 찾고
다망한 중에도 한가로움 탐하네
임금이 이 때문에 정사를 게을리하고
그림이나 그리고 풍물이나 구경하면서
술로 명주 적삼이나 더럽히니
이것이 바로 취해 있는 임안(臨安)이라네.
이 노래는 대송조 황제를 빗대어 욕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나라를 지켜 내지 못하고 강산이 반조각이 난 것을 안타까워 하고 있는 데 황제는 나라는 돌볼 생각을 않고 향락에만 빠져 있는 것이다. 황제가 여인을 희롱하고 밤마다 연회에서 곤드레 만드레 취해 있는 동안 백성들은 뜻을 끊고 강산을 잃고 질곡에 허덕여야 했다. 그야말로 금 사람들의 말발굽 아래서 하루도 편한 날을 보낼 수가
없었다.
구양적은 비록 가사의 뜻은 잘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 구성진 목소리와 구슬픈 가락에 큰 감동을 느꼈다. 그는 모용쟁과 일속 스님의 표정이 숙연해지는 것을 보고 물었다.
"모용 낭자, 저 사람이 뭐라고 노래하고 있는 거요?"
모용쟁이 찬찬히 설명했다.
"이건 아마도 중양궁 사람이 부르는 노래 같아요. 대송조의 황제가 날마다 음락(淫樂)에 빠져 있고 백성들은 막심한 고난 속에 헤매고 있구나, 이런 나날이 과연 언제까지 지속되랴 하는 내용이에요. 이 시사(詩詞)에는 애국우민(愛國憂民)의 뜻이 담겨 있어요."
그녀의 말에 숙연해진 구양적은 속으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주사(朱砂)를 가까이 하면 붉은색에 물들고, 먹을 가까이 하면 검은색에 물든다는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는 것 같군. 왕중양이 애국자라고 하더니 이 종남산이 정기로 차 있는 걸 좀 봐. 내가 그와 싸워 《구음진경》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난 그 사람을 존중하고 싶다. 만일 그 사람의 무공이 나만 못 하다면 난 그를 죽이지 않겠어.'
이때 일속 스님이 감탄조로 입을 열었다.
"나무아미타불……. 열 보 이내에 방초(芳草)가 있다고 했은즉 소승은 그 말을 믿소이다. 이 왕중양은 필시 군자이고 《구음진경》을 소장하고 있음도 틀림없는 사실이외다."
모용쟁은 노래의 가사를 음미하다가 갑자기 구양봉 생각이 났다. 그가 사막에서 달을 보며 멍청히 서서 시를 읊조리던 일이 떠오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북국으로 떠난 그가 지금은 살아 있기나 할까? 만일 살아 있더라도 책벌레라서 별로 좋은 일이 없을 거야. 그가 이곳에 있다면 아마 저 시에다 몇 구절 더 보태기도 하고 풀이하거나 평가하기도 할 텐데. 그런 이야기를 듣노라면 이처럼 적적하진 않을 텐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어느 틈에 구양봉을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이 몹시 부끄럽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녀는 콩콩 뛰는 가슴을 진정하려 애쓰며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옆에 있는 두 사람도 각자의 생각에 잠겨 그녀의 심사를 눈치채지 못했다.




제20장 《구음진경》을 찾아서
산꼭대기에 이르니 아주 오래 된 가파른 길이 나타났다. 힘들게 오랫동안 걸어서야 중양궁에 당도했다. 중양궁 앞에는 수많은 요새들이 늘어서 있고 그 뒤에 큰 암석 두 개가 서 있었다. 바로 중양궁의 출입구였다.
몇몇 사람들이 이곳에서 파수를 보고 있고 그 가운데 한 젊은 도사가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산 위로 오르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그들이 외지 사람임을 알아내고 한걸음 나서며 공손하게 말했다.
"이 후배는 중양 사부님 문하에 있는 큰 제자 마옥(馬鈺)이올시다. 여러분들께선 먼 길을 오신 듯한데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구양적은 일속 스님이 먼저 말하게 하려고 입을 열지 않았다. 일속은 구양적이 가만히 있자 한걸음 나서며 예를 올리고 말했다.
"소승은 대리에 있는 천룡사(天龍寺)의 중 일속이라 합니다. 듣자니 중양 선생께서 천하의 무학 밀서인 《구음진경》을 얻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이 마옥이란 사람은 비록 나이는 젊으나 정인 군자였으므로 일속 스님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사부님께서는 실제로 한 부의 무학밀서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얻게 될 때 실로 공교로운 일이 있었는데 말씀드리자면 자연히 이야기가 길어집니다. 사부님께서는 최근에 이 경서에 대해 늘 한탄해 마지않고 계신데 무슨 연고인지 모르겠습니다. 고승께서는 운남 대리 사람인데, 사부님 말씀에 의하면 천하의 무학 가운데 한 갈래는 대리에 있으며 그들의 무학이 아주 깊어 우리 중원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고승께서 먼 곳에서 오셨는데 우리 제자들을 가까이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양적은 한켠에 서서 마옥이 하는 말을 듣고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 말하는 품이 도리가 있고 시원시원하긴 한데 그의 무공도 말하는 것만큼 훌륭한 것일까? 만일 중양궁이 잘생긴 이 사람처럼 말만 번지르르하다면 그 《구음진경》은 꼭 내 손에 들어오고 말 거다.'
일속은 구양적이 한쪽에서 웃고 있는 것을 보곤 그를 무시한 듯한 느낌이 들어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이분은 서역 대사막에서 온 고수 구양적이라는 분인데 역시 《구음진경》을 보고자 먼 길을 왔소이다. 한데 전진교에서 우리한테 이 경서를 보여 줄 것인지 알 수 없구려."
마옥이 대답했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으나 사부님의 인품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굳이 그것을 숨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옥은 읍을 하며 세 사람에게 산으로 올라가자고 공손하게 청했다.
산은 오를수록 험준해졌다. 발 아래의 봉우리들은 운무에 휩싸여 보이지 않았다.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운무는 내달리는 괴물처럼 사뭇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세 사람은 그러한 정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로지 마옥을 따라 걸음을 재촉하여 커다란 궁전 앞에 도착했다.
바로 말로만 듣던 중양궁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이 궁전은 꽤나 웅위로워서 수십 칸이나 되는 길다란 집에 용마루가 높이 솟은 것이 실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기와를 얹은 지붕은 그다지 호화스러운 편이 아니었다. 창문은 크기는 했지만 문창호도 평범한 것이었다. 다만 궁전 앞에 있는 명종정단(明鍾淨壇)만이 이곳이 도사들이 수신 양성을 하는 장소임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마옥은 문앞에 이르자 세 사람에게 그곳에서 기다려 줄 것을 부탁하고는 안에 들어가서 소식을 알렸다.
세 사람은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다소 지루함을 느낄 무렵 갑자기 커다란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 틈엔지 남자 한 사람이 나와 섰는데 아주 괴상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나이는 스무 살 남짓 되었을까? 어린애 같은 차림에다 머리는 더욱 희한하게 백세변자(百歲 子)를 길다랗게 땋아 늘인 모습이었다. 송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머리를
외가닥으로 땋아 위에 틀어 얹어서 어른이 되었다는 표시를 했다. 어른이 되면 남녀는 성례(成禮)하여 가정을 이루고 가실대도(家室大道)를 행하게 된다. 이 사람은 완연한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꾸민 모양은 어린애와도 같았던 것이다.
구양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소?"
구양적의 물음에 그는 묘한 소리로 웃었다.
'히히, 이 사람 봐, 히히."
그는 히히거리기만 할 뿐 구양적이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스꽝스러운 그의 모습에 가까스로 웃음을 참고 있던 모용쟁이 구양적과 똑같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이곳에서 뭘 해요?"
젊은이는 말없이 눈까풀을 까뒤집어 보였다. 그러자 눈에 흰자위만 남고 검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괴상한 추태에 구양적과 일속도 참지 못하고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한참이나 웃었다. 그들이 웃음을 그치자 젊은이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실컷들 웃었소? 그래 그렇게도 우습단 말이지요?"
구양적과 일속 스님은 더는 웃지 않았다. 일속 스님이 그에게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소승이 실례를 했소이다."
그러자 젊은이가 대답했다.
"됐소. 실례면 실례지, 누군들 실례가 없겠소? 나도 늘 사람들한테 실례를 저지르고 있소. 이번 일도 그렇소. 한데 당신들은 무엇하러 왔소?"
"소승은 중양 진인을 뵈러 왔소이다."
일속의 말에 젊은이는 펄쩍 놀랐다.
"아니, 안됐구려, 안됐어. 그대들도 그분을 찾아왔단 말씀이오?"
세 사람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다 됐구려, 다 됐어. 당신들은 그분을 찾아 뭘 하려는 거요? 나도 벌써부터 와서 그 사람을 찾고 있었소. 내가 그 사람을 3년이나 찾았다는 걸 당신들은 알고 있소? 사람들은 정성이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고 말들을 합니다만, 내 보기에 왕중양이란 사람은 돌도 아니고 나무토막일 따름이오."
구양적은 그의 입에서 왕중양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거푸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자 은근히 기뻤다.
'왕중양이란 사람은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우리가 종남산까지 오면서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입만 벌리면 칭찬이 자자했었고 모두가 좋은 말만 하려고 했지. 완전무결한 사람이 없고 순금이란 없는 법인데 그 사람이라고 그렇게 좋을 수가 있겠는가? 만일 그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에게서 《구음진경》을 빼앗아 낼 수 있단 말인가? 하
지만 드디어 이런 사람도 만나게 되었구나. 저 사람은 왕중양에 대해 탄복하기는커녕 나무라기까지 하지 않는가.'
구양적이 입을 열었다.
"맞아요. 왕중양이란 사람은 결코 대단한 사람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젊은이는 이 말을 듣자 펄쩍 뛰더니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넌 웬 놈이기에 감히 그분한테 불경스런 말을 하는 거냐? 그래 네 놈이 그분보다 더 낫단 말이냐? 만일 네 놈이 그분보다 더 낫다면 내가 네 놈을 사부님으로 모실 테다. 어떤가? 허나 만일 네가 그분보다 못하다면 내가 네 놈을 땅바닥에 넘어뜨려 놓고 용서를 빌게 할 테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구양적은 난감해졌다. 이 사람은 기실 왕중양을 대단히 숭배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이곳에 와서 그를 사부로 모시려고 떼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왕중양은 그가 3년 동안이나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제자로 받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모용쟁이 입을 열었다.
"현형(賢兄)께서는 함자가 어떻게 되시나요?"
그가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그다지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는 모용쟁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낭자께선 훌륭한 분이오. 얼핏 보아도 그런 인상입니다. 그런데 낭자께서는 나더러…… 이……."
그는 갑자기 머쓱해 하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모용쟁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물었다.
"함자를 어떻게 쓰시나요. 그걸 왜 말 못하시나요? 말씀해 보세요."
그 사람은 히히 하고 웃더니 모용쟁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이름을 말하라는 것이오?"
모용쟁이 머리를 끄덕여 보이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지요. 저의 이름은……."
그는 우물우물 이름 석 자를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은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다. 모용쟁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좀 큰소리로 말씀해 보세요. 도대체 이름이 뭔데요?"
그는 비로소 세 사람을 둘러보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겠소. 난 주백통(周伯通)이라고 부르오. 이런 이름을 들은 적이 있소?"
세 사람은 물론 그런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다.
이 주백통이란 사람은 그들 세 사람 다 자기 이름을 처음 듣는 듯하자 아주 기뻐하면서 큰소리로 웃었다.
"아니야, 아냐. 왕중양님의 말씀은 옳지 않아. 그분은 나를 천하에 이름난 괴물이라고 하셨소. 천하에 이름이 났다면 사람들마다 다 나를 알아야 되지 않겠소? 그런데 아무도 나를 모르고 있잖소."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몇십 번이나 곤두박질을 치다가 일어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들도 왕중양님께 무공을 배우려고 그러시오?"
구양적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주백통은 모용쟁과 일속에게 눈길을 주었다. 두 사람 역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주백통은 매우 기뻐하면서 말했다.
"그럼 잘됐소. 나는 당신들이 모두 왕중양한테 무공을 배우러 온 줄만 알았소. 당신들이 왕중양한테 무공을 배우러 왔다면 그분은 나에게 영영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오. 안 그렇소?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그분한테서 무공을 배울 필요가 없을 거요. 당신들의 재주로는 그분한테서 무공을 배워 낼 수 없을 게요. 그분의 재주는 천하에서 으뜸인데 당신들 공력으로는 배운다고 해도 저보다 못할
테니까요. 당신들이 그걸 배워서 뭘 하겠소. 안 그렇소?"
일속은 출가한 몸이라 남과 경쟁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구양적은 성격상 참지 못하고 주백통에게 말했다.
"여보시오, 주 형, 그대는 왕중양의 무공이 천하에 으뜸이란 걸 어떻게 아시오? 그대는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다는 도리를 알고 있기나 하오?"
주백통이 대답했다.
"아니, 당신은 그것도 모르시오? 사람들이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다고 말하는 건 모두 허튼소리요. 그건 당신이 하늘 끝까지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한테 하는 소리지요. 나도 한 번은 보름 동안이나 올라갔지만 하늘 끝까지는 이르지 못했소. 당신은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당신이 종남산에 와보지 못했기 때문이오. 당신이 만일 왕중양이란 분을 만나 보았
더라면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그런 말은 하지 못할 것이오. 사람이 무공을 배우려면 처음부터 훌륭한 사부님을 모시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되오. 내가 왕중양을 사부로 모시려는 것은 그분이 천하에 으뜸가는 고수이기 때문이오. 말씀해 보시오. 내가 천하에서 으뜸가는 고수한테서 무공을 배우게 되면 나의 무공도 남다르지 않겠소?"
구양적은 이 주백통을 사리에 밝지 못한 사람으로 보았는데 정작 하는 말을 듣고 보니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양적은 그가 입만 벌리면 왕중양이 천하에 으뜸가는 고수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왕중양의 무공을 보기나 하고 하는 소린지 의심스러웠다.
"당신은 왕중양의 무공을 본 적이 있소?"
구양적의 물음에 주백통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말도 마시오. 그분이 어디 나한테까지 자기의 무공을 보인답디까? 그분은, 자기는 나의 사부가 아니니까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겠다는 거지요. 그분은, 자기의 전진교에는 나 같은 제자가 있어선 안 된답니다. 그분의 규칙이 얼마나 엄한지 나로서는 당할 수 없었소. 나는, 난 참을 수 없었소. 그래서 그분의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본래 이 사람은 왕중양이 아예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모용쟁이 그 말을 듣곤 우스운 생각이 들어 농담삼아 물었다.
"왕중양이 당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데 그럼 내가 당신을 제자로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주백통은 모용쟁의 심사를 눈치채지 못하고 당장 큰절이라도 올릴 태세였다. 그러나 그는 곧 깨닫고 물었다.
"옳아, 서두를 것 없지. 서두를 것 없구말구. 서두르다간 차질이 생기는 거야. 내가 한 가지 묻겠소. 당신이 왕중양이란 분보다 훨씬 시원시원하기는 한데 그래 당신의 무공이 천하에서 으뜸이오?"
이 물음에 모용쟁은 말문이 막혔다.
'내가 천하에서 으뜸이냐구? 나는 천하에서 백 번째, 천 번째도 안 될 거다.'
모용쟁은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그대가 왕중양을 사부로 모시려 하나 그가 받아 주지 않는다면서요. 내가 그대를 가련히 여겨 제자로 받아 주는 거예요. 나의 무공이 천하에서 몇 번째인가는 그대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요."
주백통이 큰소리로 말했다.
"왜 관계가 없다는 거요? 보시면 알겠지만 나의 무공도 형편없진 않소이다. 내가 당신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당신이 나의 사부 노릇을 하면서 날 가르친단 말이오?"
그는 모용쟁이 답변할 틈도 주지 않고 장권(長拳)이란 무공 동작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이 장권이란 무공은 구양적과 일속 스님같은 대가들이 보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백통의 동작을 눈여겨보았다. 그의 동작은 힘도 있고 정확성도 높아서 결함 같은 것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주백통은 모든 동작을 끝낸 뒤 세 사람을 향해 물었다.
"여러분들이 보기에 어떻소?"
모용쟁은 그에게 농담을 했던 것이지 정말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아니었던 터라 두 손을 모아 쥐고 공손히 읍하면서 말했다.
"당신의 무공은 대단해요. 당신을 제자로 받지 않겠어요."
주백통이 기뻐하며 대꾸했다.
"그렇지, 그렇구말구. 다행이오. 난 사실 여인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데 당신이 나의 사부가 되신다면 난 어떻게 하겠소?"
이때 안으로 들어갔던 마옥이 나왔다.
"늦어 미안합니다. 사부님께서 세 분을 청하십니다."
구양적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왕중양은 어떤 사람이며 그의 무공은 도대체 어느 수준일까? 내가 그 사람의 상대가 될 수 있을까?'
모용쟁도 호기심을 품고 걸어가면서, 입 가진 사람마다 왕중양을 칭송하는데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고 생각했다. 막상 그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여간죄어 드는 게 아니었다.
일속은 달랐다. 그는 워낙 《구음진경》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없었으므로 구양적이나 모용쟁과는 달리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는 마옥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좋소이다. 시주께서 먼저 드시지요!"
구양적도 말없이 마옥의 뒤를 따라 중양궁으로 들어갔다.
말이 궁관(宮館)이지 그 안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대청에 들어서니 사방에 흰 기들이 너풀거리고 있었다. 삼청수상(三淸 像)이 걸려 있는데 아주 멋진 그림이었다. 앞에 향안(香案)이 놓여있는데 그다지 정교하지는 못했고, 그 위에는 밀국수며 제철 과실 따위가 놓여 있었다. 한쪽에 줄지어 놓인 긴 걸상들에는 도인들이 앉을 수 있도록 방석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앉아 있는 것은 두 사람뿐으로, 한 사람은 서른 살쯤 되는 도인이었다. 우의도관(羽衣道冠) 차림을 한 그는 두 눈에 정기가 넘쳐 실로 선풍도꼴의 기품이 엿보였다. 그의 오른쪽에는 그보다 더 젊은 도사가 앉아 있다가 휘둥그래진 눈으로 들어온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그 젊은 도사는 뭔가 몹시 갑갑증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마옥은 도사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사부님, 이분들이 알현을 청한 세 분입니다. 그리고 여기 이분은 바로 사부님을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겠다고 몇 년째 드나들고 있는 주백통입니다."
복판에 앉은 도사가 바로 종남산의 새 전진교 교주 왕중양이었다. 그는 일어나서 숙연히 읍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세 분께서는 먼 길을 오셨는데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왕중양을 본 구양적은 어쩐지 가슴이 써늘해져 옴을 느꼈다. 그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저 사람은 중원 종남산에 있는 전진교의 교주이고 나는 서역 대사막에서 제일가는 고수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같이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 걸까?'
구양적은 왕중양을 향해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저 구양적은 집안 사부님의 명을 받들고 종남산 전진교의 교주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듣건대 전진교에서 《구음진경》이란 기서를 얻었다고 하기에 읽어 보려고 왔습니다."
일속 스님도 예를 갖추며 말했다.
"소승도 무공을 배우는 사람이 온데 역시 《구음진경》을 읽어 보러 왔사오니 중양 진인의 배려를 바라옵니다."
그 뒤에 섰던 주백통이 급히 말을 가로챘다.
"저는 스승으로 모시러 왔습니다. 왕중양님,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시겠습니까, 안 받아 주시겠습니까? 받아 주신다면야 별문제가 없겠으나 만일 안 받아 주신다면 소인이 날이면 날마다 찾아올 것이니 이 얼마나 시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중양 진인은 참을성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먼저 구양적 등 세 사람에게 예를 올리고 몇 마디 인사말을 주고받은 뒤 주백통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에게 벌써 몇 번이나 말했나? 자네와 나 사이엔 사제지간의 연분이 없다고 말이야."
그러자 주백통이 소리쳤다.
"왕중양, 당신은 무림의 제일가는 고수인데 당신이 날 제자로 받지 않으면 내가 어디 가서 당신과 같은 사부님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자기가 거부당하는 것이 분해서 펄펄 뛰었다. 왕중양은 그의 성미를 아는지라 더는 알은체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구양적 등 세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나는 우연히 《구음진경》이란 기서를 얻었는데 정말로 가짜가 아니었소. 출가한 사람은 이기심이 없는 법이니, 천천히 이것을 전파하여 언젠가는 천하 사람들이 누구나 다 이 《구음진경》을 알도록 할 생각이오. 나는 이 책을 숨길 마음이 없으므로 속히 이 경서를 베껴 내어 천하 무림의 사람들이 모두 다 알도록 하려고 했소. 그래서 난 지난달부터 문을 걸어 닫고 힘들여 이 《구음진경
》을 읽었는데, 무학을 정밀하게 서술한데다가 그 속의 지식이 해박하기가 실로 일구난설이올시다. 하지만 이 경서에서 다소의 문제점을 찾아내었는데……."
그는 말허리를 잠깐 끊고는 탄식하며 몹시 안타까운 기색을 보였다.
구양적이 급한 생각에서 물었다.
"교주님의 공력으로 그 책의 문제점을 발견했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어떤 문제입니까?"
왕중양이 대답했다.
"이 경서는 앞머리에 총칙이 있고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으며 만여 자 가량 되오. 보노라면 실로 글자마다 주옥 같고 구절마다 정화(精華)인데, 지금의 무림인 가운덴 이 책을 깨우칠 인재가 없을 것이오. 이 책은 도종 황제 때 수서관원(修書官員)이었던 황상이 엮어 낸 것이오. 그분은 처음에는 이런 글을 엮을 생각이 없었으나, 천하에 널려 있는 밀서 사본들을 두루 읽던 중에 《만수도
장(萬壽道藏)》을 수정해 내게 되었던 것이오. 도종 황제는 5천4백81권으로 된 《만수도장》을 수정하고 천하의 모든 도학 서적들을 모조리 정리하여 한 부의 《도학대관(道學大觀)》을 만들어 내려 했소. 황상은 책을 잘 만들지 못하면 목이 떨어질 판인지라 목숨을 걸고 이 일을 하였소. 그는 전전긍긍 갖은 힘을 다하여 한 권 한 권 자세히 읽으면서 책을 수정해 나갔소. 이와 같이 도가의
전진(全眞)을 전부 읽던 중에 무학 기재가 되었던 것이오. 그는 스승이 없이 자력으로 무학에 통달한 사람인데 강호의 사람들 중 고수 황상이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소? 하지만 후에 황제께서 그를 파견하여 명교(明敎)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그가 손을 펴니 사람들이 죽었소. 무수한 강호의 호수(好手)들이 죽었지요. 다른 사람들이 불복하여 그와 겨루는데 무더기
로 덤벼들어서야 그에게 중상을 입혔을 정도요. 그는 도망가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적수들을 물리칠 수많은 모법들을 생각해 낸 후에야 다시 나타나 원수들을 찾았다고 하오. 그가 산속에 들어가 40년이란 세월이 유수같이 흐른 뒤 지난날의 원수들을 찾으니 모두들 황천객이 된 지 오래였다 하오. 그 당시 묘령의 소녀이던 한 여인만이 살아 남았는데, 그녀도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되어 있었
지요. 황상은 탄식하면서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는데, 세월이란 흐르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 굴 속에 들어앉아 이 《구음진경》을 써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남겨 준 것이오."
왕중양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잠시 말을 끊었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사람들은 그윽한 감회에 잠겨 황상이 걸은 길을 따라 인간의 삶과 죽음을 음미했다. 그러고 보면 사상이니 불가의 열반이니 도가의 단사(丹砂)니 하는 것들이 모두 눈앞에 지나가는 운무처럼 속절없었다.
잠시 후 왕중양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 《구음진경》을 보면서 실로 탄복하였소. 분명히 말씀드린다면, 나 같은 재주로도 천하의 영웅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소. 이 경서는 실로 전인미답의 내용을 가지고 있소. 한데 이 경서에는 큰 폐단도 있는데, 책 가운데 있는 일부 기공사술(奇功邪術)은 사람들에게 주는 해가 적지 않소. 이 책이 무림에 유입된다고 할 때 다행히 정착의 인물이 그것을 얻는다면 천하의 창생들에
게 행복이 되겠지만 만일 사악한 인물이 그것을 얻을 경우 화근 덩어리가 될 것이오. 나는 고민 끝에 몇 번이나 이 책을 불태워 버릴 생각까지 했었소.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어 번번이 그만두곤 했지요."
왕중양은 이야기를 끝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는데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구양적은 왕중양의 말이 진정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의기소침해진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이 이처럼 고뇌에 잠긴 것은 마치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간수해야 좋을지 몰라 전전긍긍 밤잠을 설치는 것과 같구나. 인간이란 역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는가 보다. 욕심이 많을수록 근심도 많아지는 법. 하지만 저 사람이 하는 말이 진실일까? 혹시 자기는 《구음진경》에 있는 술법을 다 배워 놓고 그 책을 불태워 버린 후 그 무적의 무공을 혼자 장악하기 위해
저렇듯 꾀를 쓰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일속은 구양적과 생각이 달랐다. 그는 왕중양이 상모(相貌)가 청수(淸秀)하고 선풍도골을 갖춘 것으로 보아 절대로 간교한 인간이 아니라고 인정하였으며 그가 한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속이 입을 열었다.
"나무아미타불……. 불조는 자비하고 진인(眞人)은 일념이거니, 천하의 무림 인사들을 무수히 구할 수 있을진저……."
모용쟁은 무심한 척 앉아 있었으나 왕중양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중양 진인께서는 이미 그 《구음진경》을 읽으셨겠군요?"
왕중양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모용쟁이 다시 물었다.
"중양 진인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 당신 한 사람만이 이 《구음진경》의 무공을 알고 있는 셈이 되는데, 그런가요?"
모용쟁은 대수롭지 않은 듯 물었지만 태도만은 사뭇 공손했다. 왕중양은 모용쟁의 성격도 모르거니와 그녀가 묻는 용의도 모르는지라 고지식하게 대답했다.
"그러하오."
모용쟁이 입가에 웃음을 베어 물고 물었다.
"중양 진인께서 《구음진경》에 있는 무공을 익히졌다니 천하의 무림에선 좋은 일만 생기겠군요? 이제부터 소동이 일어나게 될 거고 끝없이 어지러운 세상이 올 테니까요."
멍해진 왕중양은 이 처녀의 날카로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모용쟁은 웃으면서 기막힌 언변으로 말을 이었다.
"중양 진인께서 《구음진경》을 습득하셨으니 천하의 무림에 난이 일어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이 배웠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중양 진인은 일속 대사와 마찬가지로 모두 방외지인(方外之人)이니 인생인세(人生人世)에 대하여 이해가 있을 줄로 알아요. 인간의 선악이란 일념지간(一念之間)에 따라 뒤바뀌는 것이지요. 불조께서도 일찍이 세 차례나 미오(迷誤)에 빠지셨으
니, 범인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어요? 중양 진인께서 손에 《구음진경》을 들고 보물을 가졌다고 여기신다면 이건 하늘을 탐하는 것이며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에요. 하지만 중양 진인의 사람됨으로 보아 그러시진 않으리라고 믿어요."
왕중양은 범속한 인간이 아니었다. 지난날 그는 중원의 무림 인물들에게 요청하여 의병을 모아 금에 맞서 용감히 싸웠던 사람이다. 그가 어떤 인물인들 만나보지 않았겠는가? 그는 곧 모용쟁의 말뜻을 알아듣고 가벼운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대단한 건 아니오. 천하의 물건이란 덕이 있는 자의 손에 들어가게 마련이고 재능 있는 자도 그걸 손에 넣을 수 있지요. 음식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면, 그 음식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오. 그걸 즐기는 사람에겐 그것이 중한 것이 되지만 그걸 싫어하는 사람에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요. 하나의 보물이 진짜 보물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누구든지
그것을 볼 줄 아는가 모르는가에 달려 있소. 《구음진경》은 비록 보물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왕중양은 잠깐 말을 멈추고 일속 스님, 구양적, 모용쟁과 자기의 두 제자(큰 제자 마옥과 둘째 제자 구처기), 그리고 그들의 뒤 편에 서 있는 주백통 등을 차례로 살펴보고 나서 말했다.
"함부로 단언할 일은 아니지만 이곳에 모인 분들 가운데서 다만 두 사람만이 이 《구음진경》과 인연을 갖고 있소."
모두들 그 말을 듣고 왕중양이 자기를 두고 말하고 있다고 여겼다. 마옥과 구처기는 사부가 자기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내심 기뻐했고, 구양적은 자기와 모용쟁 낭자를 두고 한 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주백통의 생각은 달랐다.
'저자가 나를 제자로도 받아들이지 않는 판에 그 책을 나한테 보여 줄 리가 없지. 나하고는 무관한 일이야.'
그러나 이곳에 모인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오로지 그만이 이 《구음진경》의 덕을 톡톡히 보게 되리라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그저 어리숙하기만 하던 주백통이 훗날 이 《구음진경》의 무공을 가장 익숙하게 익히게 되었던 것이다.
주백통은 그렇다치고, 일속 스님만이 아무런 욕심이 없었다. 그는 중양 진인이 이 경서에 있는 무공은 배워 둘 바가 못 된다고 하니 안 배우면 그만이고 유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양 진인이 말하는, 그 경서와 인연을 가졌다는 사람 속에 자기가 끼여있으리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았다.
구양적이 참지 못하고 넌지시 왕중양을 떠보았다.
"중양 진인의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먼 곳에서 찾아왔음에 도 불구하고 《구음진경》과는 인연이 없겠군요."
왕중양이 대답했다.
"그렇소."
생각이 빗나가자 구양적은 발끈해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로 보아 중양 진인은 실로 오만한 분이로군요? 내가 중양 진인께 몇 수 배워야겠소. 그러면 이 《구음진경》의 무공이 해명을 날리고 있는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있을 것이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길다란 자루에서 사두장을 꺼냈다. 그러자 왕중양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비록 세상과 단절되어 소식에 어두운 사람이긴 해도 구양 선생의 크나큰 명성은 익히 들어 왔소. 선생은 서역 대사막의 으뜸 가는 고수로 알고 있는데 그러한 선생과 무예를 겨루어 보게 됨을 기쁘게 생각하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양적도 따라 일어났다.
사람들을 모두 중양궁에서 나와 전진교 교주와 구양적 간의 시합을 지켜 보았다.
두 사람이 마주섰다. 왕중양은 신선 같은 풍채로 바람을 마주보고 섰는데 긴 소매가 펄펄 나부끼는 품에 서릿발 같은 정기가 엿보였다. 구양적은 어두운 낯빛으로 사두장을 들고 무심한 듯이 서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은 숨소리마저 죽이고 이 두 사람을 지켜 보았다.
주백통은 한가롭게 속으로 생각했다.
'왕중양, 내가 당신을 찾아와 제자로 받아 달라고 그렇게 사정했건만 당신은 끝까지 승낙하지 않았소. 하지만 당신이 진짜로 재주가 있는지 없는지 어찌 알겠소? 당신이 정말 재주가 있다면 이 주백통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승으로 모실 테요. 하지만 당신이 경요화병(景 花甁)처럼 겉모양뿐이라면 당신을 스승으로 모실 이유가 없지.'
한편 모용쟁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여인들 중 호걸에 속하지만, 서역의 대사막을 지나 중원의 종남산에 이르기까지 수천 리 길을 몇 달 동안 구양적과 동행해 오는 동안 무척 정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구양적이 왕중양과 자웅을 가리겠다고 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구양적이 이길 가능성보다는 질 가능성이 더 커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몹시 불안해졌다
. 그가 만일 패한다면 《구음진경》을 얻지 못하게 됨은 물론이고 무슨 낯으로 사부님을 뵙는단 말인가?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구양 선생, 나의 전진교는 나름의 무공이 있지만 구양 선생이 먼 곳에서 오신 것은 《구음진경》의 기공을 보기 위한 것이니《구음진경》에서 배운 무공을 써 보겠소."
왕중양은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하늘과 땅에 번갈아 읍한 뒤 덧붙였다.
"나는 《구음진경》으로부터 일종의 연기공부(練氣功夫)를 깨우쳤는데 그것을 '선천공(先天功)'이라고 부릅니다. 이 선천 공으로 당신의 독장(毒杖)을 막아내겠소."
구양적은 서릿발 같은 위엄을 떨치며 서 있는 왕중양을 보고 내심 불안을 느꼈다. 백타산군 임일천과 싸울 때에도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았었다.
구양적은 마음을 다잡은 뒤 소리쳤다.
"왕중양, 조심하시오!"
구양적의 지팡이가 윙윙 소리를 내며 빗발처럼 날았다. 왕중양은 지팡이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도 꼼짝하지 않고 침착하게 서 있었다. 독장은 왕중양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왕중양의 주위엔 무쇠와도 같이 단단한 호신 강기가 둘러싸여 있어서 지팡이는 그의 몸에 가 닿지 못했다. 왕중양이 한 발짝 옮겨 딛자 독장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 그대로 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왕중양은 느릿느릿 기문(奇門)으로 걸어 나가 공초(空招)로 들어가면서 구양적이 독장으로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구양적은 잽싸게 왕중양의 허리에 일격을 가했다. 이번에는 적중을 한 듯 '팍!' 하는 소리가 났다. 힘껏 타격을 가했다고 생각한 구양적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나의 이 독장은 단번에 서역의 들소를 요절낸 적이 있다. 서역의 들소란 중원의 밭갈이 소와는 달라서 몽둥이는 고사하고 칼로도 죽이기가 쉽지 않아. 하지만 이 구양적의 지팡이 한 방에 곤죽이 되어 나가떨어졌단 말이다.'
그는 왕중양이 자기의 지팡이에 맞은 이상 죽지는 않더라도 중상을 입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생각일 뿐, 날아간 독장이 갑자기 딱 멎더니 잡아당겨도 끌려 오지 않았다. 구양적이 놀라 바라보니 왕중양은 웃음 띤 얼굴로 왼손의 장지와 식지로 대수롭지 않게 그 지팡이를 잡고 있었다. 구양적이 온 힘을 다하여 독사장을 당겨 보았으나 헛 일이었다.
구양적은 몹시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자신의 무공이 이렇듯 하잘것없는 것인 줄은 미처 몰랐었다. 구양적의 표정을 지켜 보던 왕중양은 지팡이를 놓아준 뒤 말없이 미소를 떠올렸다.
구양적은 마음을 가라앉힌 뒤 비로소 입을 열었다.
"중양 진인께서는 과연 놀라운 수법을 갖고 계십니다. 한데 이것은 무슨 수법인지요?"
왕중양이 웃으며 대답했다.
"기에 속하는 것들로는 일휘일수(一揮一收), 일탄일구(一彈一句)가 있는데 이 모두가 묘기를 이루는 것들이오. 이것은 《구음진경》에서 파악한 것이기는 하나 거기에 기재된 것은 아니오."
구양적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갑자기 불호(佛號)를 외치는 소리가 났다.
"나무아미타불……, 훌륭하시오. 중양 진인의 무공은 과연 묘기 중의 묘기외다. 소승이 친히 목도하지 않았던들 어찌 천하에 이런 기막힌 수법이 있는 걸 알 수 있었겠소? 중양 진인의 정채로운 묘기를 보고 소승도 손이 가려워졌소이다. 소승이 진인에게서 한 수 배울까 하오."
이렇게 말하더니 일속 대사가 긴 소매를 걷지도 않고 승의를 펄펄 날리며 달려가는데, 마치 구름 위에 있는 진불(眞佛)이 서서히 왕중양한테 떠가는 것 같았다.
왕중양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대리의 단씨네는 천하 무학의 대가로서 천룡사 귀지(貴地)는 더군다나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곳이지요. 일속 대사님과 겨루게 된 것은 중양의 행운이라 하겠소."
하지만 두 사람은 무림의 다른 사람들처럼 칼과 창, 피와 땀의 겨룸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병장기가 부서져 나가는 그런 싸움은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다년간 사귀어 온 벗이기나 한 듯이 일단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누며 정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일속 대사 쪽에서 먼저 합장한 후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식지로 왕중양을 가리켰다. 순간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목격했다. 그의 손가락에서 한줄기의 질풍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왕중양에게로 뻗쳐 나갔던 것이다.
일속은 손가락으로는 왕중양을 가리키며 입으로는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일지(一指)로 천하를 가리키고
일속(一谷)으로 자신을 약속하거니
일부러 오솔길을 걸으며
시름겨운 그림자 나 혼자라네.
왕중양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역시 두 손으로 합장을 한 뒤 가볍게 밖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양 옷소매가 돌풍처럼 날리며 일속 대사의 손가락에서 나오는 기를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닌가. 왕중양도 뒤질세라 맞받아 읊조렸다.
기묘하고 가벼울손 천지요
음험하고 무서울손 귀신이로다
하건만 능히 이 마음 알아주니
역시 도(道) 중의 인간이라네.
지켜 보는 사람들 가운데서 구양적만이 그 뜻을 잘 알아듣지 못 했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고 있었다.
일속은 지난날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고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몹시 불안을 느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입만 벌리면 게(偈 ; 불경의 노래 가사)를 읊어 댔던 것인데, 자기는 비록 기막힌 무공을 익혔건만 속세의 일념을 털어 버릴 수 없고 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되는 바 결국 자기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왕중양도 게로써 화답하였는데, 자기는 비록 《구음진경》을 얻었고 《구음진경》은 하늘 땅을 다스릴 만한 술법과 귀신도 부릴 수 있는 기공을 알려 주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왕중양이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만일 그의 쓰라린 마음을 알아준다면 자기는 아주 큰 안위를 느끼겠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는데, 초면이기는 해도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이 매우 기뻤다.
일속 대사가 말했다.
"소승에겐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법이 있어서 그것으로 귀신도 쫓아 버릴 수 있지요. 그런데 진인께서는 신선이어서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소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손가락으로 묘기를 부렸다. 그가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시늉을 할 때마다 그 손가락은 칼도 되고 검도 되고 창도 되었다. 그 무수한 변화를 한 손가락으로 이루어 내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는 구양적의 등골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대사막에서 태어나 지금껏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지 못했다. 그저 백타산군 임일천 정도가 내게는 고수였다. 하지만 이 일속이나 왕중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왕중양은 대체 무학의 도가 얼마나 깊은 사람일까? 또한 일속 대사는 무학에 그처럼 정통하였지만 그것은 살상을 위한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이 보여 준 법수와 동작은 절묘하기 그지없고 천하에 드문 독보적인 것들
이다.'
두 사람이 한창 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는 판이라 사람들은 모두 구경에 열을 올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두 사람에 대해 탄복했다. 천하의 절세 무학이 바로 이 자리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아주 맑고 우렁찬 목소리가 산 뒤에서 들려 왔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청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들 깜짝 놀랐다.
"더러운 도사 놈과 개 같은 중 놈이 사내가 할 일을 하지 않고 이곳에서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군 그래. 폼만 잡고 흉내만 내니 우습지 않은가요?"
모두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비록 폭언을 퍼부었지만 소리가 맑고 부드러운 것이 아리따운 여인의 음성이었다.
이윽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그 여인은 중양궁의 대경석(大頸石) 위에 서 있었는데 마치 바람을 타고 온 나뭇잎이 가볍게 얹혀 있는 듯했다. 가만히 눈여겨보니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칼이며 반달 같은 눈썹 등이 대단히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나이는 25, 6세쯤 되어 보였는데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어쩐지 약간의 살기가 엿보였다.
손님들은 이 여인을 알지 못했으나 중양궁 사람들은 그녀를 보자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마옥과 구처기는 급히 고개를 떨구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대범하던 왕중양도 그 여인을 보자 역시 당황하는 눈치였다.
여인이 소리쳤다.
"왕중양, 당신이 중양궁 안에 숨어서 한 달 남짓 머리를 내밀지 않더니 그새 무슨 대단한 무예라도 배운 모양이죠?"
왕중양이 그녀를 향해 공손히 읍하며 말했다.
"임 시주(施主), 중양궁에 오셨는데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모용쟁은 이들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중양궁 사람들의 기색을 보면 이 여인이 중양궁과 극히 깊은 연원(淵源)을 가진 것이 분명했고, 왕중양 또한 이 여인과 아주 잘 아는 사이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 두 사람은 마치 원수지간처럼 보이는 것일까? 왕중양은 이 여인이 나타나기 전에는 기백과 풍도가 있어 무공이고 이야기고 간에 누구한테도
꿀리는 점이 없었는데 지금은 왜 이 모양인가?
여인은 구양적과 일속 스님을 번갈아 보고 나서 나무라듯 말했다.
"왕중양, 그대도 이 시대의 영웅인데 무엇 때문에 늘 혼탁한 세속 사람들의 교란을 받나요?"
그녀는 애석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왕중양이 일속 대사에게 말했다.
"이분은 임 시주님이십니다. 만일 구양 선생이 임 시주님과 겨룰 수만 있다면 천하의 무공에는 누가 으뜸이라 말하기 어렵다는 임시주님의 말을 더는 믿지 않게 될 것이오. 임 시주님의 무공은 저보다 강한데 이것은 이 중양이 진심으로 인정하는 바올시다."
손님들은 모두 놀랐다. 왕중양 같은 인물이 이런 말을 할 때에는 임씨(임조영) 성을 가진 이 여인의 무예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방금 보았다시피 왕중양은 눈 깜짝할 사이에 구양적을 패배시켰고 일속과 싸운 그 무예도 기막혔는데, 그런 그가 이렇듯 추어올리는 여인의 무예는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는가?
모두들 말없이 지켜 보고 있는데 갑자기 주백통이 임조영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는 굽신 인사를 하고는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이봐요, 우린 당신의 이름을 모르오. 이름이 뭐요?"
임조영은 주백통의 행색을 훑어보고는 불쾌한 낯으로 쌀쌀하게 대답했다.
"내 이름이 뭐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지?"
주백통이 히히덕거리며 말을 받았다.
"중양 어른 말씀이 당신의 무예가 자기보다 더 강하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오?"
사람들은 왕중양이 방금 한 말은 겸손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인은 주백통의 물음에 엷은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저 중양 진인의 무예는 평범하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뱉는 그녀의 말에 모두들 깜짝 놀라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임 시주님의 무예는 매우 훌륭해서 저는 그에 이치지 못하지 요."
왕중양의 말 속에는 진정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주백통이 기쁜 기색으로 손뼉을 쳐대면서 지껄였다.
"잘됐어, 잘됐다니까. 난 바로 이 중양 진인 때문에 근신하고 있던 사람이오. 저분은 날 제자로 삼고 싶어하지 않는데, 저분보다 무예가 나은 당신이 나를 제자로 받아 주는 게 어떻겠소? 제가 당신께 절을 올리겠소. 내 이름은 주백통인데 사람들은 그저 장난꾸러기라고 불러요. 난 훌륭한 무예를 보기만 하면 기뻐서 잠도 자지 못하죠. 그런 내가 무예를 배우지 않으면 뭘 하겠소? 한데 저
사람들은 정말 둔해요. 그런데 당신은 내가 배울 만한 훌륭한 수법을 얼마나 갖고 있소? 스승이 지닌 게 몇 가지 수법뿐이라면 하루 이틀 사이에 다 배우고 말지 않겠소? 그래서는 안 되지요. 단번에 다 배워 버려 사부님이란 사람이 나보다도 못하게 되면 이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이겠소?"
그는 임조영이 말할 새도 없이 혼자서 떠들어댔다.
임조영이 입을 열었다.
"난 너를 제자로 받지 않겠다."
주백통이 말했다.
"당신은 왜 제자를 받지 않겠다는 거요? 당신은 제자를 받은 적이 없소? 당신의 무예가 왕중양보다 더 높은데도 제자를 받지 않는다면 애석한 일이 아니오?"
그는 거듭 한탄하면서 임조영한테 굽신굽신 절을 해댔다.
임조영이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의 행동거지로 보아 천성이 순박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간계를 피우거나 이기심을 드러내는 일은 없겠어. 만일 저 사람이 여자라면 제자로 받아들여 큰 그릇을 만들 텐데 사내라서 곤란하구나.'
그녀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중양, 나의 새 무공 '옥녀심경(玉女心經)'을 다 만들었어요. 당신이 한번 시험해 보지 않을래요? 듣자니 당신이 문을 걸어 닫고 그 기경에 있는 무예를 배웠다고 하던데, 생각이 있으면 나와 한 번 겨루어 보지요."
왕중양은 공손한 태도로 임조영에게 예를 올린 뒤 말했다.
"임 시주님께서 만드신 새 무공은 필시 훌륭할 것이오. 하지만 오늘은 손님이 많아서 임 시주님과 무예를 겨루지 못하겠구려, 날짜를 정하여 다시 오셔서 가르쳐 주시는 게 어떻겠소?"
임조영은 냉소했다.
"좋아요. 그럼 다음에 봐요."
그녀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몸을 솟구쳐 바위에서 훌쩍 날아올랐다. 그리고 산 아래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종적이 묘연해졌다.




제21장 사랑인지 원한인지
구양적과 모용쟁, 일속 대사는 올 때와는 달리 불쾌한 기분으로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을 오를 때는 희망에 차 있었는데, 지금은 오로지 실망과 오리무중에 빠진 기분이었다.
일속 대사는 그래도 기분이 괜찮았다. 전진교 교주 왕중양과 무공을 겨루어 볼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대리 단씨 가문의 무예인 일양지로 왕중양이 《구음진경》에서 터득한 선천공에 맞서 싸워보니 양쪽이 강약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엇비슷했다. 일속 대사는 왕중양과 서로 게를 읊던 일을 떠올렸다.
'사람이란 살아가는 동안 무슨 일에든 오류를 범해선 안 된다. 일단 오류를 범하면 한평생 후회가 따르는 법. 하지만 인간이 정(情), 한(恨), 권(權), 욕(欲)에 봉착할 때 항상 정(正)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인간이 만일 자그마한 실수조차 없이 산다면 어찌 부처 되기가 어렵다 하겠는가? 나와 중양이 게 읊기를 주고받아 보니 나는 과거에 집착하고 있고 그 사람은 금세에 미혹되어 있다. 둘
다 총명하고 지혜롭지만 모두 부질없는 것에 집착하여 창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일속 대사는 지혜롭고 명석하여 세상일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기 가슴속의 응어리만큼은 풀기 어려웠다.
구양적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그 흥이 몽땅 깨어진 채 돌아가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종남산을 내려오면서 그는 한동안 미궁에 빠진 기분이었다.
'사부님의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다. 사부님의 원수는 바로 사문의 원수이기도 하다. 사부님이 나에게 《구음진경》을 빼앗아 오라 하신 것은 이 사람을 찾아 사문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진경도 손에 넣지 못했고 또 눈앞에 있는 이 원수도 무예가 대단하여 나로서는 적수가 못 되니 이를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모용쟁은 흥이 나서 걸으면서 일속 대사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일속 대사님, 한 가지 물어 봐도 될까요?"
"낭자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소승이 아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말씀드리리다."
일속 대사가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자 모용쟁이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 사찰들은 한결같이 기암절벽 위에 세워져 있더군요. 이런 산엔 물과 식량은 물론 인적이 드물어서 매사에 무척 불편할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하필 절을 이런 산 꼭대기 위에다 세우는지 모르겠어요. 화산(華山)의 옥화봉(玉華峰), 숭산(嵩山)의 소림사(少林寺) 등 알려진 큰 절들이 다 그렇지 않아요? 생각해 보세요. 산에 들어와 불공 드리는 사람들한테도 이
얼마나 불편한 일이에요. 그런데 굳이 이렇게 하는 것은 불가의 대의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또 절에는 무슨 이점이 있나요?"
일속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매우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낭자께선 이 일의 깊은 뜻을 잘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대저 불공을 드린다고 하면 그 정성을 보아야지요. 만일 인가 부근에 절간을 세운다면 조석으로 분향 재배를 할 수 있어 그 횟수는 많아지겠지만 부처에 대한 공경심이 꼭 커진다고는 할 수 없지요. 이렇게 되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생생사사(生生死死)든 길흉화복이든 모든 일을 부처님께 묻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집에 자물쇠를
잠그는 것을 비롯하여 장작이며 쌀이며 기름이며 소금 따위 자질구레한 일을 가지고도 부처님을 성가시게 굴겠지요. 그러면 부처님도 부처답지 못하게 돼 버리고 사람의 마음속에도 불경스러운 심리가 생길 텐데 그러고야 부처님을 중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만일 낭자께서 부처님을 만날 생각이시면 사흘 동안 음식을 삼가고 갱의목욕(更衣沐浴), 불행방사(不行房事), 수거향촉(手擧香燭)을
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걸음걸음마다 정성을 담아 산에 올라와야 합니다. 이 산은 또 비할 데 없이 가파르지 않습니까? 낭자께서 평소에 문 밖에 나설 때는 차교(車轎)를 소리쳐 부르고 앞뒤로 옹위를 받지 않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합시다. 팔을 쳐들면 계집종이 그것을 받쳐 주고 눈을 껌벅이면 옷을 입혀 주고……. 부귀는 인간을 게으르고 타락하게 만들지요. 낭자께선 일찍
이 이런 고초를 맛본 일이 있습니까? 오늘 낭자께선 발이 부르트고 땀투성이가 되면서 만 장이나 되는 계단을 밟고 산을 올라가서 부처님을 만나 보았지요? 그때 낭자의 심정은 보통 때보다 더 경건해지며 더욱 감개무량했을 것이오. 이번 사묘(寺廟)를 돌아봄은 낭자에게 있어 잊지 못할 경험이 되었을 줄로 압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일속 대사는 모용쟁을 바라보며 시 한 수를 읊기 시작했다.
심산에 오랜 절 숨어 있어
작은 골목의 술 더욱 향기롭네
인간이 세상일을 안다면
웃음마다 온통 문장이 되리.
모용쟁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떠올리며 일속 대사를 바라보았다. 긴 옷소매를 나부끼며 산바람을 따라 걷는 품이 구름 속의 나한(羅漢)인 듯 속세를 벗어난 느낌이었다. 모용쟁은 내심 부러워 하며 생각했다.
'정말 대단한 사내로구나. 입만 열면 문장이 샘솟듯 하고 무예도 천하에 당할 자가 없는데다가 부드럽고 민활한 게 정말 보기 드문 사람이야. 구양네 형제들도 물론 인걸이긴 하지만, 구양적은 늘 소침하고 괴벽스러우며 곁에 누가 있든지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으니 정말 참을 수가 없어. 구양봉은 더 한심한 바보지 뭐야? 대사막에서 기갈에 시달리면서도 책벌레의 본성을 버리지 못해
달이나 노래하니 그런 한심한 바보가 어딨어? 두 사람 다 일속을 따라가려면 멀었어.'
그녀는 일속이 점잖고 재능이 출중한 사내 중의 사내로 여겨졌다
구양적은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이 일속을 거꾸러뜨리겠는가에만 정신이 쏠려 있었다. 사부가 10여 년 동안이나 서역을 벗어나지 않은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전에 그는 사부가 지나치게 소심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원수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사부와 자기가 손을 잡으면 어찌 당해 낼 수 있겠는가고 여겼었는데, 이 일속의 일양지신공을 보니 그 대단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설사 사부와 자기가 함께 손을 써서 일속과 결사전을 벌인다고 해도 승산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네 놈이 일양지신공을 갖고 있으니 사술(邪術)을 제어하고 독악(毒惡)을 막아낼 수 있을 테지. 내가 네 놈한테 독을 사용한다 해도 성공할 수 없으리란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수를 써서라도 네 놈을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구음진경》을 손에 넣지 못했으니 사문의 원수인 네 머리라도 갖고 가야 사부님 앞에서 면목이 서지 않겠느냐?'
세 사람은 산을 내려와 여관에 묵게 되었다.
구양적과 모용쟁은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논쟁을 시작했다.
"제가 보기에 당신이 함부로 손을 썼다가는 반드시 실패하고 말 거예요. 일속 스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을 보는 눈도 만만치 않고 매사에 남보다 한 수 앞서는데 당신이 무슨 수로 일속 스님을 해치겠다는 거예요?"
구양적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산을 내려오는 동안 내내 웃고 떠들고 그 작자와 죽이 잘 맞던데, 그 정초가 좋아진 모양이구려."
두 사람의 말투는 점점 거칠어졌다.
모용쟁이 약이 올라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내가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왜 나빠요? 당신이 나한테 뭐길래 상관이에요, 상관은?"
구양적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모용쟁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화를 내는 통에 어찌해야 좋을지 난감해졌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그는 성격대로 언제나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구양적은 어려서부터 대사막에서 자랐는데, 극심한 추위와 남모를 어려움들을 겪는 동안 쌀쌀하고 괴팍한 성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속에 할말이 있어도 입을 여는 것을 싫어했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굽히려 하
지 않았다. 모용쟁 같은 처녀들이 남자에게 어떤 마음을 기대하는지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연히 그의 행동은 거칠고 무뚝뚝하여 종종 모용쟁의 기분을 상하게 하곤 했다.
그는 모용쟁은 내버려둔 채 머리를 숙이고 어떻게 하면 일속을 죽일 수 있을까만 궁리했다.
모용쟁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처럼 운이 없는 년도 없을 거야. 서역의 대사막에서 그 고생 끝에 다행히 구양 형제들을 만나 기뻐했더니 이렇게 비뚤어진 심보를 가진 사람들일 줄이야. 이런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동행하지 않는 건데.'
기분이 상한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늦었어요. 그만 가서 자야겠어요."
그녀는 구양적이 무어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방에서 나가 버렸다.
밤이 깊어지자 거리는 정적에 잠겼고 여관도 조용해졌다. 구양적은 침대맡에 앉아 옷을 갈아입은 뒤 사두장을 들고 일어섰다.
이때 삼경을 알리는 목탁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밖으로 나가 조심스럽게 일속 대사가 묵고 있는 방 앞으로 걸어갔다. 문틈으로 방안의 동정을 살펴보니 일속 대사는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구양적은 품에서 작은 통을 끄집어냈다. 통에 든 것은 그와 그의 사부가 차디찬 얼음 동굴에서 키워 낸 이상한 누에였다. 이 벌레는 독성이 비할 바 없이 강할 뿐만 아니라 놀랄 만큼 추위를
몰아 와 사람의 피부에 닿았다 하면 몸이 얼어붙어 동태처럼 굳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구양적과 사부는 10년이나 걸려서 이러한 누에를 한 쌍밖에 키워 내지 못했는데, 그나마 수컷은 사부의 손에 있고 이것은 암컷이었다. 구양적은 속으로 생각했다.
'보통 독으로는 무예가 뛰어난 일속을 넘어뜨릴 수 없을 테지. 하지만 이 벌레로 중독시킨다면 일속이 아니라 대라진선(大羅眞仙)이라 하더라도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구양적은 문 앞에서 얼음누에가 약통을 벗어나 방바닥을 기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벌레는 구불구불 기어 곧장 일속에게로 향했다. 벌레가 기어가는 자리를 따라 한 갈래의 빙선( 線)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따뜻하던 방바닥 한복판으로부터 얼음줄이 무시무시하게 뻗어 나왔다. 벌레는 일속이 자고 있는 침대로 기어올라갔다. 구양적은 일속이 깨어나면 어쩌나 하고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일
속은 가볍게 코까지 고는 품이 깊게 단잠이 든 모양이었다. 벌레는 이제 그의 등허리에 기어들어갔다. 한기가 일속의 체내에 주입되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구양적은 독사장을 들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침대 곁에 서서 일격을 가할 틈을 노렸다.
이때 꼼짝 않고 누워 있던 일속의 장삼이 부스럭거리는 듯하더니 그가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그대는 왜 나를 해치려고 하는고?'
일속은 잠에 취한 듯 눈을 감은 채 입도 벙긋하지 않았으나 마치 이렇게 묻는 것만 같아 구양적은 놀란 나머지 사두 장으로 일속의 머리에 일격을 가했다. 이것은 독사비천(毒蛇飛天), 일룡귀연(一龍歸淵), 용반호거(龍磐虎踞)라는, 사장독초(蛇杖毒招) 가운데 가장 악랄한 세 가지 타격 법이었다. 이 법수로 머리를 가격하면 제아무리 대단한 기공을 가진 일속이라 해도 축지 않고는 배겨내기
어려울 것이다. 설령 그 독사장을 막아낸다고 하더리도 벌레가 몸에 기어올라간 이상 반드시 죽게끔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속은 신통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문득 왼손을 들어 꽃이라도 따듯 가볍게 그것을 막아내는 것이 아닌가? 구양적은 손에서 쥐가 나는 듯한 느낌에 하마터면 독사장을 떨어뜨릴 뻔했다. 구양적이 멈칫하자 일속은 손가락 두 개를 써서 독사장을 확 붙잡았다. 구양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의 무예로는 일속을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구양적은 벌레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
런데 이미 일속의 몸에 달라붙은 벌레가 일속이 식지로 가리키는 시늉을 하자 더는 움직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일속이 정색을 하전 입을 열었다.
"나무아미타불, 나는 시주님이 길을 오는 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나 눈에 살기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소. 그 살의는 다름아닌 나를 향한 것이었소. 나와 구양 시주님 사이에 무슨 연원이 있길래 시주님은 이처럼 나를 미워하는 것이오?"
구양적이 성난 기색으로 말했다.
"일속, 당신은 내가 누군지나 알그 있소?"
"그대는 서역 대사막의 으뜸가는 고수 구양적이 아니시오. 이미 알고 있소이다."
일속의 대답에 구양적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말해 주지 않으니 알 리가 없지. 나의 사부님은 백면라살 수라아시다."
그의 말에 일속은 크게 놀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시주의 사부님은 어디 계시오? 그녀가 지금도 살아 있소?"
구양적이 버럭 화를 냈다.
"네 놈이 죽지 않았는데 사부님께서 어찌 죽을 수 있겠느냐?"
일속은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몸을 비틀거렸다. 그는 천천히 구양적의 독사장을 놓아주며 말했다.
"그렇지, 그래. 내가 죽지 않았는데 그녀가 어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렇게 죽지 않고 있는데……."
일속은 그답지 않게 몹시 흔들리는 기색을 보였다.
독사장을 집어든 구양적은 이때를 틈타 일격을 가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망설였다. 그는 일속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일속은 몹시 괴로워하며 방안을 오락가락했다. 그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수라아, 수라아, 천룡팔부(天龍八部), 귀신은 나살(羅熬)을 위하고 신은 인도(人道)를 위함이니 여귀(女鬼)를 막아냄은 수라를 위함이라."
구양적은 염불을 모르는지라 일속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일속이 희비가 엇갈리는 표정으로 미친 듯이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어안이벙벙해졌다. 갑자기 일속이 구양적의 옷자
락을 틀어쥐며 물었다.
"말해 주게,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12년이나 되도록 왜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가?"
"사부님은 얼음 동굴 속에 계시지. 그분은 네 놈을 죽이려고 벼르고 계시다. 그동안 사부님의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얼굴에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분은 너를 이가 갈리도록 미워하고 있어. 만일 그분이 네 놈을 만났더라면 기어이 죽여 버렸을 거다!"
구양적의 대답에 일속이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그녀가 어떻게 혼자 얼음 동굴 속에서 살 수 있어? 그리고 그 아리따운 얼굴에 어찌 혈색이 없을 수 있어? 그녀의 삼단 같은 머리가 어찌 백발이 될 수 있어? 거짓말이야, 거짓말!"
구양적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속은 표정이 굳어지며 말했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 있기는 하지만 이미 죽은 몸이고 마음도 죽었어. 다만 숨만 쉬고 있을 뿐이야. 그것은 내게 아직도 자그마한 속념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 난 그녀를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네. 그런데 자네가 나를 괴롭히는 까닭은 뭔가? 나를 해치려는 이유가 뭐야? 자네는 왜 그녀가 잘살고 있고 여전히 아름답다고 말해 주지 못하나? 그렇게 말하면 자네한테 해라도 생긴단 말인가?"
구양적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해야 하나? 나 역시 사부님을 사랑한다. 그 분은 나를 구해 주셨고 무예를 가르쳐 주셨지. 난 그분을 좋아한다. 난 그분이 어떤 지경이 되었는지 네 놈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
아. 세상 누구든 그분을 만나려 한다면 난 그 놈을 죽여 버리고 말 거다."
일속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는 구양적을 뚫어지게 쏘아 보았다.
"자네, 그 말이 진정인가?"
구양적이 머리를 끄덕이자 일속은 머리를 숙이고 잠자코 침대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더는 말이 없었다.
일속은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듯싶더니 앉은 자세 그대로 방안을 한바퀴 날아서 돌았다. 이것은 그의 일지 법인데,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키기만 하면 마음대로 허공을 떠다닐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침대에 돌아와 평온하게 앉더니 손으로 얼음누에를 집어들었다. 그는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얼음 동굴이 차다고 하는데 이 벌레보다 더 찬가? 인심이 독하다고 하는데 이 벌레보다 더 독한가?"
일속은 마치 그 벌레가 얼마나 독한지를 전혀 모르는 듯이 손바닥에 놓고 말했다.
"구양적, 이 벌레가 독이 있다고 하지만 나를 해칠 수는 없네. 보게나."
일속이 왼손을 곧게 펼치자 벌레가 내뿜은 냉기로 인해 손바닥이 삽시에 얼음투성이가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혈맥 속의 피는 여전히 제대로 순환하고 있었다.
일속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한테 독벌레가 있다고 해도 나한테 일양지신공이 있으니 자낸 나를 해치기 어려울 걸세."
그러나 구양적이 보기에 그의 왼팔은 이미 얼음 덩이가 되었고 몸은 덜덜 떠는 것으로 보아 그의 내공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독벌레를 이겨 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일속은 오른손을 내밀어 식지로 왼쪽 어깨의 천천혈(天泉穴)을 가리켰다. 식지가 바들바들 떨리는 걸 보니 매우 힘든 눈치였다. 그러나 그 식지가 차례로 아래쪽을 가리키자 시꺼멓게 죽었던 혈색이 눈 깜짝할 사이에 본래대
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구양적은 깜짝 놀랐다. 그는 자기가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
'저 놈이 이렇듯 기공이 대단한데 《구음진경》을 손에 넣었다 해도 그의 적수가 되기는 어려웠겠구나……."
구양적은 너무나 낙담한 나머지 살고 싶은 생각마저 없어졌다.
일속은 여전히 손바닥에 벌레를 놓은 채 구양적에게 말했다.
"내가 자네한테 나의 수법을 보여 준 건 자네에게 내 마음을 알리기 위해서네. 나는 벌레의 독을 달갑게 받고 싶네. 내가 죽은 뒤 더는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수라아에게 전해 주게.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 뿐일세."
일속은 숙연히 정좌를 하고 두 손을 한데 모아 쥐었다. 손에 여전히 벌레를 쥔 채, 그걸 들여다보며 그가 나직이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대는 얼음 동굴에 있고
나는 얼음 벌레를 들었으니
손발도 얼고 마음조차 차가워졌구려
그대는 나를 지독하다고 미워하고
나는 그대를 지독하다고 생각하니
나도 독하고 그대도 독하지만
마음은 둘 다 고독하구려.
구양적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일속이 무엇 때문에 두 손으로 벌레를 그냥 쥐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벌레를 두 손으로 쥐고 마음속에 끌어들이면 혈맥을 통하여 온몸이 굳어 버리므로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속은 얼굴에 평온한 미소를 띠고 각오가 되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는 추호의 속념도 없이 곧장 서방의 극락 세계로 갈 참이었다.
구양적은 멍하니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백면라살 수라아를 스승으로 모신 뒤 사문의 원수를 저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속이 언 시체로 변해 가는 것을 보면서 내심 극도의 쾌감을 느꼈다. 그는 하늘을 향해 감사를 드리고 싶었고 빨리 사부께 알리고 싶었다. 이제 사문의 원수가 죽어 없어질 테니 그녀의 근심은 사라져 이제 사부는 얼음 동굴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모용쟁이 들어왔다. 그녀는 일속 대사와 구양적을 번갈아 보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채었다. 그녀는 곧장 일속에게로 달려가려 했으나 구양적
의 사두장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녀는 사두장에 밀려 곤두박질쳤다. 그녀가 막 몸을 일으키려는데 구양적이 쌀쌀하게 말했다.
"낭자가 저 사람을 건드리면 낭자도 죽고 마오. 저 사람이 쥐고 있는 벌레에는 무서운 독이 있어서 죽지 않고는 못 배기오."
모용쟁은 그 말을 듣자 두 눈에 불을 켜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결국 일을 저지르고야 마는군요!"
모용쟁은 다시 일속에게로 가려 했다.
구양적이 두 번이나 막아 섰으나 모용쟁은 기어이 그를 뿌리치고 일속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있는 벌레를 땅바닥에 떨쳐 버렸다.
"당신은 미쳤어요. 얼음 벌레로 중독시 켰으니 저분은 죽고 말 거예요!"
그녀는 펄펄 뛰었다.
구양적이 차가운 어조로 빈정댔다.
"모용낭자, 저 놈이 죽고 사는 건 우리 사문의 일인데 낭자가 무슨 상관이오? 어서 물러나시오."
벌레는 땅바닥에서 여전히 꿈틀거리며 기고 있었다. 모용쟁은 홧김에 얼음누에를 밟아 죽이며 소리쳤다.
"당신은 정말 비열한 인간이군요! 정정당당히 싸워서는 이기지 못할 것 같으니까 이런 악독한 궤계를 쓰는 거지요? 벌레로 사람을 해치려 하다니 이런 부끄러운 짓이 어디 있어요!"
"모용 낭자, 저 놈은 우리 사문의 원수요. 낭자는 상관 말고 물러나시오!"
모용쟁은 서글픈 심정으로 일속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일속 대사를 무척 존경했다. 이 세상에서 일속 대사와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나기란 어려울 것임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속은 그녀의 안타까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굳어 있었다. 모용쟁은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구양적, 당신은 인간이 아니에요! 당신은 인간도 아니라구요!"
그녀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구양적은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서역 대사막에 계시는 사부님께서 이 제자가 사문의 원수를 죽였다는 소식을 들으신다면 큰 위안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사부님께선 이제 더는 그 얼음 동굴에서 고생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말을 마친 뒤 이번엔 일속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속 대사, 그대는 아주 비장한 죽음을 택했소. 내가 돌아가면 사부님께 그대의 심정을 고스란히 전하겠소."
구양적은 비록 일속이 읊은 게(偈)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속에 은밀한 정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그저 고스란히 사부에게 전하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관에서 달려나온 모용쟁은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저려 왔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다지도 극악스러운가?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고 죽이고 못살게 구는가? 일속 대사 같은 인물은 실로 귀한 분인데 구양적은 왜 그분을 기어이 죽이고 말았을까? 아
아, 알 수 없는 일이야.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녀는 무거운 심정으로 수림 근처에까지 와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모용쟁, 너는 앞으로 무엇을 하려 하며 어떻게 살아 나갈 작정이지? 너는 정암으로 돌아가려느냐, 아니면 강호에서 유랑하려느냐? 너는 부모 형제는 물론 돌봐 줄 가까운 친척 하나 없는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녀는 갖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가 이렇듯 번뇌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부르는 듯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모용 낭자, 이곳에서 뭘 하고 있지?"
깜짝 놀란 모용쟁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세요? 제가 모용쟁인 걸 어떻게 아시나요?"
그러자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천년 묵은 얼음 동굴에서 한 번 상봉하였거니, 오로지 지난 일을 알 뿐 내세를 알 수는 없도다."
"당신은 백면라살 수라아시군요!"
모용쟁이 놀라며 말했다.
상대방은 그렇다고 대답한 뒤 은근히 비꼬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모용쟁, 넌 왜 우리 적이와 함께 있지 않느냐? 그가 널 버렸느냐?"
그녀는 모용쟁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적이는 자기의 동생과 함께 있겠구나."
모용쟁이 대답했다.
"구양봉은 북강 노독물(老毒物)의 제자들한테 끌려갔어요."
여인이 놀란 듯 되물었다.
"뭐라고?"
모용쟁이 다시 한 번 똑같이 대답하자 여인은 묵묵부답 반응이 없었다. 노독물을 잘 아는 그녀는 구양봉이 노독물의 부하들한테 잡혀 갔으니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했다.
한참 지나서야 그녀는 다시 물었다.
"그럼 적이는……, 그 앤 잘 있느냐?"
그녀의 이 물음에는 깊은 관심이 깃들어 있었다.
모용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여인은 정말 흉악한 인간이지 뭐야? 자기가 그 얼음 동굴에서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구양적을 짐승같이 무서운 사람으로 만들다니!'
모용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야멸차게 쏘아붙였다.
"당신의 그 제잔 정말 대단한 사람이지 뭐예요? 그는 지금 사람을 죽이고 있어요."
여인이 놀란 소리로 물었다.
"뭐?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 그래 누굴 죽이고 있단 말이냐?"
"그 사람은 일속 스님을 죽였어요."
모용쟁의 눈에선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여인은 모용쟁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모용쟁의 머리칼을 틀어쥐더니 큰소리로 물었다.
"그 애가 어디에 있느냐? 빨리 말해라. 그 애가 어디에 있지?"
모용쟁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 사람은 객점에 있어요. 운우(雲雨) 여관에 말이에요. 그 사람을 찾고 싶으면 그곳에나 가 보세요. 날 괴롭히지 말고."
여인은 모용쟁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나는 듯이 걸어갔다.
구양적은 일속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죽어 가던 일속이 구양적에게 할말이 생각났는지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고 다만 두 눈으로 구양적을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눈에는 눈물이 가득 괴어있었다.
구양적이 입을 열었다.
"일속 대사, 당신이 죽으면 내가 묻어 주리다. 하지만 당신의 머리는 베어 내야겠소. 서역에 갖고 가서 사부님께 보여야 하니까."
일속의 정신은 아직 살아 있는지 구양적이 한 말을 알아듣고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백발의 여인이 나는 듯이 들어왔다. 그녀는 곧장 일속에게 다가가 그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갔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놀란 구양적은 얼른 그녀를 뒤쫓았다.
"적아!"
일속을 안고 나가던 여인이 소리쳤다. 구양적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사부님이 어떻게 여길…….'
구양적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계속해서 뒤쫓았다. 멀리 사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수림 속으로 번개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구양적은 영문을 모른 채 부지런히 뒤쫓았으나 사부의 그림자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시냇가에 앉아 있는 사부를 발견했다. 달빛 아래서 일속을 안고 앉아 있는 사부의 어깨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일속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명전(明 )씨, 내가 당신을 해쳤어요. 내가 당신을 해쳤다구요……."
구양적이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모용쟁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구양적의 곁에 섰다.
일속은 이미 잿빛으로 죽어 가고 있었으나 정신은 아직 살아 있는 듯 눈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는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이 바로 그가 불가에 귀의하기 이전의 속세지념(俗世之念)을 남겨
준 그 여인임을 알았다. 바로 그녀가 그로 하여금 불조와 만날 수 없게 했고 한평생 우울하고 허무한 나날을 보내게 한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는 그녀에게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입술만 달싹거릴 뿐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시냇물이 소리 내어 흐르면서 백발 여인과 일속 스님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일속 스님을 꼭 끌어안은 채 여인이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명전 씨, 당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작정이었군요. 만일 당신이 죽을 생각이 없었던들 적이가 어찌 당신을 죽일 수 있었겠어요? 적이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명전씨……, 난 최근에야 당신이 무엇 때문에 법명을 일속이라 지었는지 알게 됐어요. 당신이 일속이라 한 건 일 점(一點)의 속념, 즉 저를 염두에 둔 것이지요? 말씀해 주세요. 이대로 가시면 안 돼요…
…."
구양적과 모용쟁은 두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일속의 몸에서는 점점 얼음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여인은 일속의 이빨 사이로 약을 흘려 넣으려 했다. 그것은 얼음누에의 독을 푸는 영약(靈藥)이었다. 하지만 일속은 그녀를 바라볼 뿐 입을 열지 못했다.
"명전 씨, 입을 벌리세요. 이 약을 자셔야지요. 이 약을 자시면 당신은 살 수 있어요."
그녀는 자기의 입으로 환약을 씹어서는 일속의 입에 밀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일속은 여전히 입을 벌리지 못했다. 그녀가 일속의 입을 억지로 벌리자 일속의 입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다. 그녀는 오열을 터뜨렸다. 비 오듯 흘러내린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적셨다.
시냇물이 일속의 몸에 돋은 얼음을 씻어 갔다. 얼음 조각들이 물에 둥둥 떠내려갔다. 그러자 시냇물에서 물고기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벌레의 독성이 어찌나 극렬한지 시냇물의 물고기들까지 모두 중독되어 죽어 버린 것이다.
백발의 여인은 통곡하며 부르짖었다.
"어리석군요. 당신은 정말 어리석어요. 당신은 일양지공을 갖고 있으면서도 얼음누에한테 독살당한단 말이에요? 당신은 그래 일양지공을 사용하기가 소원이 아니었던가요? 바보 같은 양반……, 바보 같은 양반……."
그녀는 자기와 함께 웃으면서 인생을 담론하던 지난날의 일속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얼마나 유쾌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누렸던가? 하지만 그것은 잠시, 일속은 갑자기 모습을 감췄고 그녀는 얼음 동굴 속에 들어가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다. 그랬던 것이 어언 12년, 뼈를 깎는 고통 끝에 만나고 보니 그는 스님이 되어 있고, 또 죽어서 자기 품에 안겨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고쳐 생각해
보아도 억울하고 분한 일이었다.
구양적은 사부가 일속을 끌어안고 냇가에 앉아 목놓아 우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부의 심정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사부가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을 찾아가서 복수하려 하지 않았고 또 무엇 때문에 《구음진경》을 구해 오라고 했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구음진경》을 얻어 무예를 닦은 다음 일속을 찾아 정식으로 겨루어 자기 앞에 무릎 꿇게 하려던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일속
을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부님은 왜 내게 사실대로 말씀하시지 않았던 걸까? 일속을 죽이지 말라고 왜 미리 말씀해 주시지 않았을까?'
구양적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일 구양적이 일속을 찾게 된다 하더라도 그가 절대 일속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구양적이 일속을 찾게 되더라도 일속이 절대 구양적을 죽이지 않으리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이런 사태가 벌어지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구양적이 얼음누에를 사용하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또한 일속이 제대로 막아내지 않고 죽기로 작정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어느덧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발의 여인은 일속의 시체를 부둥켜안은 채 여전히 물가에 앉아 있었다. 일속의 몸에 돋아났던 얼음 덩이들도 어느덧 완전히 녹아 그와 수라아의 몸뚱이는 온통 젖어 있었다. 수라아는 한기로 인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일속을 부둥켜안고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구양적은 감히 나설 엄두가 안 나 모용쟁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을 읽은 모용쟁이 여인에게 다가갔다.
"이제 그만 그분을 내려놓으세요.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수라아는 그녀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죽은 사람을 꼭 끌어안은 채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모용쟁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깊은 감동을 느꼈다.
'이런 걸 보고 애증이라고 하나? 남녀간의 사랑과 증오란 잘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이 두 사람의 경우만 봐도 그렇지. 이들의 생과 사는 원한 때문인가, 아니면 사랑 때문인가?'
모용쟁은 잠자코 수라아의 모습을 지켜 보다가 마음을 다져 먹고 물 속에 들어섰다. 물은 어찌나 차가운지 이빨이 딱딱 부딪칠 정도였다. 그녀는 수라아에게 다가가 완곡한 말투로 권했다.
"선배님, 춥지 않으세요? 일속 대사께서도 추워하실 텐데요……."
그러자 수라아는 평소의 태도와는 달리 부드러운 어조로 되물었다.
"뭐라구? 이분이 추워한다구?"
모용쟁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라아는 일속이 살아 있는 사람이기나 한 듯이 그에게 물었다.
"명전 씨, 추운가요? 당신은 일양지신공을 하시는 분이니 춥지 않으시겠죠? 안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이 찬물 속에 이렇게 있는 걸 원치 않으시죠? 당신은 선원(禪院)에서 등잔이나 낡은 불상을 지키고 앉아 있고 싶죠?"
수라아는 그제야 몸을 일으키더니 비틀거리며 천천히 기슭으로 올라가 일속의 시체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일속의 곁에 꿇어앉아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명전 씨, 당신은 돌아가셨군요. 당신은 정말 돌아가셨어요……."
그녀는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잠자코 서 있던 구양적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사부님, 이 제자가 죽일 놈입니다."
"적아, 그게 무슨 말이냐? 이건 나와 저 사람 사이의 일이지 너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수라아가 무심한 어조로 천천히 대답했다.
그녀는 옷소매로 일속의 얼굴을 깨끗이 닦아 주고는 또다시 탄식했다.
"당신은 여전히 스무 살의 젊은이 같지만, 절 보세요. 전 이제 꺼져 가는 촛불과도 같아요. 이렇게 덧없는 게 인생인 것을……."
그녀는 계속해서 일속의 몸을 정성들여 닦아 주며 말을 이었다.
"명전 씨, 당신은 어땠나요? 당신도 나와 헤어지고 싶었던 건 아니겠죠? 그런데 당신은 왜 도망을 갔나요? 왜 한마디도 나한테 귀띔하지 않았나요? 혹여 당신이 나와 헤어지고 싶었다면, 그런 말을 한마디라도 했던들 전 당신을 물고늘어 지진 않았을 거예요. 당신은 왜 귀띔도 하지 않으셨어요?"
구양적은 가슴이 쓰라렸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품안에서 컸으며 그녀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 그녀는 그를 안아 줄 때마다 늘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곤 했는데, 그것이 바로 명전이었던 것이다. 명전이 누구인지 구양적은 알지 못했었다. 그는 다만 사부가 그 사람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분노가 차 올라 괴로워하신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런데 사부의 한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구양적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자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부님, 적이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구양적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사두장으로 자기의 머리를 후려치려 했다.
백면라살은 꿈짹도 하지 않고 구양적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모용쟁이 잽싸게 달려들어 지팡이를 낚아챘다.
"선배님, 구양 오라버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데 왜 막지 않나요?"
백면라살이 탄식조로 대답했다.
"너 같은 계집이 뭘 안다고 그러느냐? 저 앤 죽어야 해. 일속이 죽었으니 저 애도 죽어야 해. 그리고 저 애가 죽게 되면 나라고 해서 혼자 살아 있을 성싶으냐?"
그녀의 말은 무서울 정도로 단호했다.
모용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곧 참지 못하고 속엣말들을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당신은 한 남자를 죽이고도 모자라 당신의 제자까지 함께 죽일 작정이에요? 제자는 당신을 위해 복수를 한 것인데, 그것이 설령 잘못되었다손 치더라도 그게 다 누구 탓인데요? 당신이 일속 대사를 죽도록 미워했기 때문에 이런 쓰라린 결과가 빚어진 거예요. 자업자득이라구요!"
구양적이 모용쟁의 말을 막았다.
"모용 낭자, 그만하라구!"
모용쟁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던 백면라살 수라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이 모든 건 자업자득이니 남을 원망할 것이 없지."
그녀는 모용쟁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 하고 싶은 말을 대담하게 할 줄 아는 이 처녀가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일속의 시체를 한쪽에 눕혀 놓고 세 사람은 조용히 마주앉았다.
그들은 각자 상념에 잠겨 말이 없었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 올 뿐 사위는 그지없이 고요했다.
백면라살이 정적을 깨며 입을 열었다.
"적아, 저분이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하더냐?"
구양적은 깜짝 놀랐다. 그는 그제야 일속의 말들이 생각났다.
"저분은 게어(渴語)로 말씀하셨는데 승인들이 죽을 때 말하는 도리 같았습니다."
여인이 재촉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내게 들려주렴."
그녀는 구양적이 그것을 다 기억하기 어려우리란 걸 알고 덧붙여 말했다.
"네가 기억하는 만큼만 차근차근 말해 보아라."
구양적은 사실 일속이 했던 말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시사(詩詞) 따위에는 반감을 갖고 있던 터라 죽어 가는 사람이 한 말을 제대로 기억할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제가 사부님께서 얼음 동굴 속에서 12년이나 계셨다고 하니까 그분은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으셨어요."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일속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 얼음 동굴 속에서 살았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이때 모용쟁이 입을 열었다.
"제가 마침 밖에서 그분이 게를 읊으시는 걸 들었는데 말씀드리지요."
"어서 말해 보아라."
모용쟁은 천천히 읊기 시작했다.
그대는 얼음 동굴 속에 있고
나는 얼음 벌레를 들었으니
손발도 얼고 마음조차 차가워졌구려
그대는 날 지독하다고 미워하고
난 그대를 지독하다고 생각하니
나도 독하고 그대도 독하지만
마음은 둘 다 고독하구려.
여인은 조용히 듣더니 그것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그대는 얼음 동굴 속에 있고 나는 얼음 벌레를 들었으니 손발도 얼었고 마음조차 차가워졌구려……. 명전 씨, 나는 얼음 동굴에서 살더라도 당신은 그 벌레를 피했어야 했어요. 얼음 동굴에서는 사람이 살 수가 있지만 얼음누에는 사람을 죽이는데 당신은 정말 어리석구려."
그녀는 다시 눈물을 쏟으면서 일속의 말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대는 날 지독하다고 미워하고, 난 그대를 지독하다고 생각하네……. 당신 말씀이 맞아요. 난 당신을 지독하다고 생각하고 당신도 날 지독하다고 생각하셨겠죠. 당신을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독한 생각이 골수에 뻗쳐 백발이 되었지요. 독한 생각에 영혼이 없어지고 독한 생각에 배가 긁혀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지요."
구양적파 모용쟁은 그녀를 보면서 슬픈 생각에 젖어 들었다. 불제자가 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마저 버리고 떠난 남자를 잊지 못해 자신의 삶을 훼멸시키면서까지 애증을 키워 온 이 여인……. 이처럼 비극적이고 허무한 사랑이 또 어디 있겠는가.




제22장 사랑과 이별
백면라살 수라아와 구양적, 모용쟁은 모두 일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막 묘지에 눕힌 일속의 모습은 너무도 평온하고 고요해 보였다. 세 사람을 향한 그의 미소 띤 얼굴은 모든 속념에서 해탈되어 아무런 근심도 괴로움도 없어 보였다. 이제 그는 극락 세계에 이르러 더는 세속의 풍진에 휩싸이지 않아도 되리라.
백면라살 수라아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적아, 이제 그만 저분을…… 묻어 드리자."
구양적과 모용쟁은 사부를 부축하여 한쪽으로 비켜서게 한 뒤 묻기 시작했다. 봉분을 한 뒤 구양적은 팻말을 세우기 위해 옆에 뒹구는 나무토막을 집어 들었다. 그가 팻말에 일속의 이름을 새기려 고 하자 백면라살이 말렸다.
"그분은 생전에 이름을 남기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돌아가셔서도 남이 자기를 두고 시끄럽게 구는 걸 바라지 않으실 거야."
그녀의 어조는 너무나 담담해서 조금 전까지의 슬픔이나 고통의 기색은 흔적조차 없어 보였다.
무덤을 마저 정리하고 아홉 번 큰절을 한 뒤 구양적이 사부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백면라살 수라아는 생각을 더듬어 본 뒤 입을 열었다.
"적아, 너와 나는 이 중원에서 해야 할 일이 없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동생을 잃어버렸으니 찾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구양적은 그 동안 동생 일엔 마음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동생을 찾아야 한다는 사부의 말에 반가운 마음으로 얼른 대답했다.
"만일 사부님께서 나서신다면 저는 누구도 두렵지 않습니다. 놈들의 무예가 어찌나 대단한지 저 혼자서는 당해 낼 수가 없었거든요."
백면라살이 말했다.
"난 그 놈들을 알고 있다. 그들의 사부는 북강에서 가장 이름난 고수지. 악인으로 소문이 난데다 그 놈 스스로도 자기를 대악인이라고 자처하고 있느니라. 그 놈은 남들이 싫어하는 일만 저지르는 데, 동생이 그 놈들 손에 들어갔으니 불안하기 짝이 없구나."
모용쟁은 그녀의 말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난 정암에서 도망쳐 나오다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다시 남쪽으로 간다는 건 위험한 일이야. 사부님이나 정암 사람들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난 죽은 거나 다름없다. 이 사람들과 함께 북강에 가는 게 좋겠어. 만일 이들을 도와 구양봉을 찾게 된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은 없지.
"선배님, 저도 둘째 공자를 찾는 데 동행하면 안 될까요?"
백면라살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되고말고. 원한다면 함께 가자꾸나."
세 사람은 함께 북강을 향해 길을 떠났다.
참으로 먼 길이었다.
가까스로 북강에 당도하여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유운장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세 사람은 몹시 기뻤다. 이제 유운장에만 가면 구양봉의 행방을 알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유운장에 당도한 그들은 멍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유운장은 온통 폐허가 되어 살아 있는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담벽 하나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도처에 쥐들이 득실거렸으며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세 사람은 반나절이나 멍하니 서 있다가 그곳을 떠났다. 길을 걷다가 한 인가에 들러 물어 보니 그것이 벌써 1년 전의 일이라 했다.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유운장에서 불이 났는데, 피해가 어찌나 심했던지 장원 사람들이 거의 다 타 죽고 겨우 몇몇 사람만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장원 사람들이 평소에 얼마나 나쁜 짓만 일삼아 왔던지, 큰불이 나자 사람들은 가서 구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손뼉을 치면서 통쾌해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마을은 잿더미가 되었고 이제 그곳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그곳에 가끔 귀신이 나타났었다고 했다. 야밤 삼경이면 누군가가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귀신조차 머물 만한 곳이 못 된다고 생각했는지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구양적이 다급해서 물었다.
"노인장, 작년에 이 부락에 한 서생이 왔던 일을 모르십니까?"
노인이 대답했다.
"모르겠소. 그런 사람이 있었더라도 불에 타 죽었을 거요. 생각해 보시구려, 그 부락 사람들은 모두 무예에 능통한 사람들인데도 불에 타 죽었는데 서생이야 더 말할 게 있겠소? 죽은 게 틀림없소. 암 죽었고말고……."
구양적은 동생이 죽었으리라는 말을 듣자 눈물이 솟구쳤다.
"네가 죽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모용정은 그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 위로했다.
"구양 오라버니, 동생이 꼭 죽었다고는 볼 수 없으니 너무 상심 마세요."
"그 앤 무예를 모르니 살아 있을 가능성이 희박하오. 그 애가 무슨 수로 이런 상황에서 제 몸을 지킬 수 있었겠소?"
구양적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쪽에 서 있던 백면라살 수라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적아, 울지 마라. 너나나나 고달픈 인생을 타고난 사람들 아니더냐? 그 애 역시 밤낮으로 고생만 하며 살아왔는데, 그게 어디 죽는 것보다 나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인생이란 그렇듯 덧없는 것, 너와 나도 함께 따라 죽으면 되는 일이다. 그 애가 며칠 먼저 저 세상에 갔기로 그게 무슨 슬퍼할 일이겠냐?"
구양적은 울음을 멈추고 멍청히 사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면라살이 말을 이었다.
"적아, 우리가 그 앨 찾지 못할 바엔 다시 얼음 동굴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우리 둘이 그곳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죽는 게 시름을 놓는 일이다."
"사부님, 전 고생하며 그 애를 키우면서 일심으로 그 애가 우리 구양씨 가문을 빛내 주기를 바라 왔어요. 하지만 그 애가 이렇게 죽을 줄, 이 북강 노독물의 손에 죽을 줄을 어찌 알았겠어요?"
구양적이 절망스럽게 말했다. 백면라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적아, 내 짐작으로 너의 동생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 앤 북강의 대악인 신독행의 손에 떨어져 이미 잘못된 것 같다. 그러니 나와 함께 돌아가는 게 좋겠다."
구양적은 여전히 비탄에 잠겨 헤어나지 못했다. 구양적은 백면라살 수라아에게 무예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얼음 동굴에서 사문의 독공을 배우다 보니 몸에 변이가 생겨 더는 당당한 사내 구실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몸에 번진 음독(陰毒)은 그의 육체뿐 아니라 성미까지도 달라지게 했다. 이 일은 구양적 자신은 물론 백면라살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와 백면라살 수라아는 정이 들 대로
들어, 그는 백면라살의 제자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장 가까운 애인이기도 했다. 정이 통할 때면 두 사람은 서로를 뜨겁게 끌어안고 몇 날이고 그 차가운 얼음 동굴에서 함께 지냈다. 두 사람은 만나던 날로부터 지금까지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었으며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어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그러한 까닭에 구양적은 가문의 대를 잇는 문제가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그는 생각 끝에 하루라도 빨리 동생을 장가들여 가업을 이어 나가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모용 낭자와 동생이 가까워지길 바랐던 것도 순전히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이런 변을 만나 동생을 잃게 될 줄이야.
한참을 비탄에 잠겨 있던 구양적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사부님, 저는 사부님을 따라 얼음 동굴로 가겠습니다. 이제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며 강호의 인사들과도 교제를 끊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동생이 죽어 구양 가문의 대가 끊겼으니 제가 죽은 후 부모님을 만나 뵐 면목이 없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가슴을 치며 다시 통곡하기 시작했다.
백면라살 역시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구양 형제 두 사람이 중원에 들어와 재앙을 당한 것은 순전히 자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비통에 잠겨 있는 구양적을 바라보다가 문득 한쪽에 묵묵히 서 있는 모용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모용쟁을 보자 그녀는 갑자기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왜 구양씨 가문에 후손이 없겠는가? 난 반드시 구양씨 가문에 대를 잇게 해 줄 테다. 내겐 대사막에서 몇십 년 살아오는 동안 모아 둔 재산도 좀 있다. 구양씨 가문에 후손이 생기게 된다면 재산을 내주어 그가 서역 사막에서 으뜸가는 부자로 살 수 있게 해 줄 테다.'
백면라살은 기인으로서 일단 마음만 먹으면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모용쟁에게 말했다.
"모용 낭자, 내가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는데."
한창 생각에 잠겨 있던 모용쟁은 백면라살이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신데요?"
"적아, 내가 모용 낭자와 할말이 있으니 넌 자리를 좀 비켜 주렴."
백면라살이 담담한 얼굴로 구양적에게 말했다.
구양적이 자리를 피하고, 두 여인 사이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용쟁은 백면라살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고 사뭇 긴장해서 바라보았다.
백면라살이 신중하려 애쓰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내가 듣기로 그대는 정암에서 도망쳐 나왔다던데 그게 정말인가?"
모용쟁은 머리를 끄덕였다.
백면라살이 탄식조로 말했다.
"구양씨 가문의 두 형제는 모두 훌륭한 자질을 타고난 사람들이야. 굳이 비교하자면 구양봉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구양봉이 중원에 들어와 늙은 독물 신독행의 손에 들어가 비명에 죽었으니 이렇게 애석할 수가 없군. 그래, 이젠 적이 혼자 남았는데 어떻게 살아 나갈지 걱정이야."
진지하게 듣고 있던 모용쟁이 의아한 듯 백면라살을 바라보았다.
'이분이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처리에는 매우 과단성이 있던데 지금은 뭘 저렇게 주저하는 거지?'
모용쟁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어려워 마시고 말씀해 보세요."
그러자 백면라살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좋아. 낭자는 과연 시원시원한 사람이로군. 그럼 솔직히 얘기하지. 낭자한테 한 가지 묻겠는데, 낭잔 우리 적이의 아내가 될 생각이 없나?"
모용쟁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구양적의 사부가 자기한테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었다. 그녀는 비록 구양적과 동행하여 대사막을 지나 중원으로 오는 동안 몇 달 간 함께 지내기는 하였지만 구양적과 인연을 맺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백면라살 수라아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우리 적이 정도면 괜찮은 성격이지. 난 그 애가 자라는 과정을 지켜 보아 아는데, 그 앤 말수는 적어도 마음은 따뜻한 사람이야. 그 앤 강호의 보통 사나이들과는 달라. 낭자만 좋다면 나는 두 사람을 혼인시킬 생각인데, 어떤가?"
모용쟁은 망설였다. 뜻하지 않게 이런 말을 듣게 되니 성격과는 달리 수줍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모용쟁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선배님, 저는 정암 문하의 사람이에요. 비록 출가한 몸은 아니어도 백타산군 임일천한테 잡혔을 땐 옥쇄(玉碎)하리라 작심했었어요. 다행히도 하늘이 돌보셨는지 구양 공자가 절 구해 주었지요. 하지만 요즘 들어 저는 자꾸만 생사니 인생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뜬구름과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서 저는 정암에 돌아가 삭발하고 중이 되어 일생을 마칠까 해요."
백면라살 수라아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어린 나이에 벌써 속세를 등지고 살 생각을 품고 있다니. 이 애가 불가에 귀의한다면 꽃다운 나이에 아름다운 용모가 아깝지 않나.'
백면라살이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단지 우리 적이를 위해서만이 아니고 낭자를 위한 것이기도 해. 낭자는 자기가 얼음누에의 한독(寒毒)을 받은 걸 알고 있나? 적이 말에 의하면 낭자는 일속을 구하려고 손끝으로 얼음누에를 쳐서 떨어뜨렸다면서? 낭잔 그 얼음누에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모를 거야. 손발이나 피부에 가볍게 스치기만 해도 온몸에 독이 퍼지지. 남녀가 동시에 중독되
면 여자 쪽이 좀 늦게 발작하지만 정작 발작하면 더욱 심해져. 그것은 여자가 음(陰)에 속하므로 음독을 막아내지 못하는 까닭이야. 낭자가 만일 얼음누에에 닿았다면 즉시 약을 복용해야 해. 그러면 보름 사이에 천천히 회복될 수 있어. 낭자가 살아나려면 두 가지 방법밖에 없어. 한 가지는 대리 단씨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일양지공을 배우는 것이지. 일양지공은 천하양강(天下陽剛)의 기
로서 이 공력을 닦으면 몸에 있는 독을 천천히 없앨 수 있어. 다른 한 가지는 적이와 가까이 하여 부부의 정을 맺는 것이야. 이렇게 하면 적이가 기혈로써 낭자를 도와 천천히 독을 제거해 줄 수 있지. 나는 여자니까 자연히 낭자와 인연을 맺을 수 없는 것이고, 적이는 사내니까 낭자와 인연을 맺어 낭자를 구할 수 있단 말야. 그 애는 인정도 있고 분별이 있는 사람이라 분명 낭자를 도와줄
거야."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낭자한테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우리 적이한테 시집오는 게 좋아. 내가 방금 말한 운남 대리의 단씨들이 배우는 일양지공을 임잔 배울 수 없을 거야, 단씨들이 일양지공을 자기들 가족들에게만 전수하고 외전(外傳)하지 않기 때문이지. 뿐만 아니라 일양지공을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사내들이야. 여인은 음에 속하는 탓에 그런 격렬한 무예를 배우기란 거의 불가능하거든."
모용쟁은 백면라살의 말에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이렇게 죽고 만단 말인가? 옛날에 집에서 글을 읽고 시를 읊을 때는 시구가 그리는 아름다운 정경이 그림 같아 인간이 시세계 속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지. 강변에 쪽배 한 척이 떠 있고 그 위에 한 젊은이가 앉아 있었지. 갓 성년이 된 듯 소년 티를 채 벗지 못한 모습으로 그는 배 위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지. 그는 정기가 번뜩이는 두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는데,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어. 시 속의 아름다운 아가씨는 바로 나였거든. 나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내가 꿈꿔 왔던 그런 청년을 만나 보지도 못한 채 어찌 죽을 수 있겠어?'
백면라살 수라아가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내가 따져 보니 일속 스님이 잘못된 그 시각에 낭자도 독에 중독된 셈이니 반달 후면 발작이 일어나게 돼 있어. 일단 발작이 시작되면 10일 후에 다시 발작하는데, 그 다음엔 닷새 만에, 그 다음엔 3일 만에, 종국에는 하루에 세 번씩 발작하면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한 끝에 숨이 끊어지게 되지."
들을수록 소름이 끼치는 얘기였다. 모용쟁은 몹시 놀라면서 한 편으론 반신반의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백면라살의 말은 사실이 아닐 거야. 자기의 제자를 위해 꾸며낸 말이 틀림없어. 나를 구양적에게 시집가게 하려고 저렇듯 무서운 말들을 꾸며 대는 거야.'
백면라살은 모용쟁의 마음을 읽은 듯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거든 낭자 손의 소음심경맥(少陰心經脈)으로 시험해 봐. 내력이 소충(少衝), 신문(神門), 통리(通里), 삼혈로부터 심계로 흐르는데 기가 잘 통하는지 시험해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말은 모용쟁을 더더욱 긴장시켰다. 모용쟁은 급히 백면라살이 하라는 대로 내력을 운행시켜 보았다. 처음에는 이상한 감각이 없었는데 청령(靑靈), 극전(極全)에 이르러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전신의 내력이 당장에 흩어져 다시 모이지 않았다. 모용쟁의 얼굴은 즉각 잿빛으로 변했다.
백면라살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모용쟁은 말문이 막혀 백면라살을 바라보았다. 구양적과 결혼하여 서역의 대사막에서 구양적의 무시무시한 사부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죽기보다 싫었다. 모용쟁은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그녀는 체념한 듯 말했다.
"만일 구양 오라버니께서 원하신다면 전 선배님의 말씀대로 하겠어요."
구양적은 사부가 모용쟁과 무슨 말을 하는지 속으로 몹시 궁금했다. 지금껏 모든 일을 자기와 함께 처리해 오던 사부가 오늘은 어쩐 일로 모용쟁하고만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사부가 모용쟁에게 사제간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모용쟁에게 떠날 것을 권하는 게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만일 그렇다면 구양적으로 하여금
직접 모용쟁과 작별하게 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사부는 필경 매우 중요한 일을 놓고 모용쟁과 의논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윽고 백면라살이 함빡 웃음을 머금고 구양적에게로 왔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구양적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의 어린 시절이 어제만 같은데 이렇듯 자라서 어른이 된 것이 꿈만 같았다. 그녀는 보면 볼수록 구양적이 대견했다.
"적아, 내가 이미 모용 낭자와 의논했다. 네가 원한다면 모용 낭자와 인연을 맺는 게 좋겠다. 네가 모용 낭자와 혼인하면 구양씨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고 제단의 향불도 꺼지지 않게 될 게 아니냐?"
구양적은 비로소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이 됐다. 그는 비록 사부를 존경하고는 있었으나 버럭 화가 났다.
"제가 언제 장가들고 싶다고 했습니까? 제가 모용 낭자한테 장가들고 싶다고 했냐구요!"
백면라살은 유난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적아, 너의 쓰린 마음을 난 누구보다 잘 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문이 번성하고 대가 끊기지 않기를 바라지. 넌 구양씨 가문의 장자인데 너의 동생마저 죽지 않았느냐? 만일 네가 장가를 가지 않는다면 구양씨 가문의 선조들에게 죄스러운 일이 아니냐?"
구양적은 백면라살 수라아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전 조상들께도 떳떳하고 스스로도 부끄럽지 않게 살렵니다. 사부님께서 저더러 장가를 가라고 하시면 전 그 명에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모용 낭자를 색시로 삼으라는 겁니까?"
백면라살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적아, 그럼 달리 보아 둔 처녀라도 있다는 거냐? 그렇다면 그 처녀를 만나 보도록 하자꾸나."
구양적은 대담하게 앞으로 나서면서 대답했다.
"말씀드리지요. 제가 장가들려는 여인은 바로 사부님이십니다. 바로 백면라살 수라아입니다!"
백면라살은 순간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잠시 후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구양적의 어깨를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적아, 넌 이제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하지만 어찌 자기 사부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런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을 거다. 게다가 너의 사부가 무슨 좋은 물건이라고 이러느냐? 사람들이 이전에 날 백면라살이라고 불렀던 건 용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이지. 하지만 지금은 이렇듯 형편없이 변했는데 어디 볼 데가 있다고 그러는 거냐? 적아, 어리석은 생각일랑 말아라."
구양적이 고집스레 대답했다.
"사부님께서 제게 장가들라 하면 전 장가를 들겠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사부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어느 날 얼음 동굴의 추위 속에서 백면라살 수라아가 구양적을 꼭 끌어안은 후부터 두 사람의 정은 싹터 올랐다. 구양적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사부의 품에서 자라났다. 그는 그때부터 각박한 인정과 거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어머니의 품에서 느끼는 그런 포근함과 따사로움을 수라아에게서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구양적이 이렇게 말하자 백면라살은 큰 위안을 받기는 했지만 가
슴이 쓰려 왔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적아, 나는 이제 여자라고 볼 수가 없는 사람이다. 이 세상엔 훌륭한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하필 나를 고를 게 뭐냐?"
사부를 바라보는 구양적의 큰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면라살이 말을 이었다.
"내가 중원에 있을 때 그 단씨 성을 가진 공자를 만났더랬다. 그 때 그 공자는 풍류남아였는데 그와 나는 첫눈에 정이 들었다. 우리는 함께 며칠을 보냈는데, 그분은 내 성미가 좋지 않은 걸 모르고 있었지. 난 그분한테 걸핏하면 화를 내곤 했는데, 어느 날 그분은 조용히 내 곁을 떠나가고 말았다. 그 후 난 그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그를 잊지 못한 채 급기야 병
이 나서 오늘날 이 꼴이 된 거지. 네가 날 처음 보았던 그 무렵부터 난 하루하루 나빠지고 있었던 거야. 적아, 넌 선녀와 같이 아름답던 시절의 내 모습은 본 일이 없어. 백면라살이란 이름이 괜히 얻어진 건 아니었단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지난날의 감미로운 회상에 잠기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적아, 나도 널 좋아한다. 만일 내가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여자라면 내가 널 거절할 이유는 없다. 우린 자연히 함께할 것이고 누구도 우릴 갈라놓지 못할 거다. 나와 일속의 일은 이미 끝난 지 오래고, 나와 너 두 사람은 뜻깊은 한 쌍의 연인이 될 거야. 하지만 지금의 내 몰골로는 불가능하다. 네가 날 원한다 해도 내 쪽에서 원하지 않아. 난 이미 그 얼음 동굴로 돌아가기로 작심했다. 돌
아가자마자 동굴의 출입구를 막아 버리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지낼 생각이다. 그게 가장 현명한 처사야……."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에 가득 눈물이 괴었다.
"조금만 일찍 만났더라면……, 조금만 일찍 만났더라면 이렇듯 가슴 아픈 일은 없었을 것을……."
그녀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조용히 시 한 수를 읊기 시작했다.
그 삭수(溯水) 가에서
난 아름다운 한 여인을 보았네
그녀의 머리칼은 치렁치렁하고
두 눈썹은 반달 같았네
그녀의 걸음걸이 가볍고
날씬한 그 자태 더욱 정답네
여인이 웃는 그 웃음
낯을 찡그려도 사랑스럽게
옥패(玉佩)를 끌러 내어
양인(良人)에게 드리네
착수는 유유히 흐르는데
그 속에서 음악이 들리는 듯
난 그이를 따르려니
한평생 갈라지지 않으리
하지만 해돋기를 기다려
풀었던 옷고름을 매노라
향차(香車) 떠나가매
기쁜 비 분분히 내리네
사람마다 날 노래하며
가인(佳人)을 얻었다 하네
졸지에 깨고 보니 꿈이요
몸 돌이키니 곁에 사람이 없네
하건만 그림자는 보이어
따라가려 해도 깊은 물이 앞을 막네
가슴이 터지게 부르고 불러도
그 사람은 이미 눈에 안 보이니
손에 쥔 그 옥패를
품속 깊이 간수할 뿐이어라…….
구양적은 시와 문장을 공부한 적은 없으나 사부가 읊은 시가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백면라살이 읊은 것은 강에서 물려받은 옥패[江上玉佩]라는 제목의 옛이야기에서 따온 시였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한 풍류 공자가 강변에서 노닐다가 자주색 옷을 입은 여인과 붉은 옷을 입은 여인 두 사람이 사뿐사뿐 걸어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그 중 한 여인을 마음속으로 우러러 사모하게 되는데, 다가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나 감히 그러지 못한다. 그런데 그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지나가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에게 방긋 웃어 보인다. 이 웃음이 어찌나 교태가 넘치는지, 그것을 본 공자는
삽시에 머리에서 삼혼(三塊)이 달아나고 발 밑으로 육백(六魄)이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는 급히 그 여인을 뒤쫓기 시작한다. 늘씬한 몸매에 걸음걸이는 또 어찌나 교태스러운지 그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렇게 한참을 뒤쫓아가노라니 두 여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그리곤 그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그를 흘깃 쳐다보는데 그 눈길에는 은근한 유혹의 빛
이 깃들어 있다.
그는 그 두 여인에게 공손히 예를 올리고는 말한다.
"소생은 강변에서 우연히 두 미인을 만나 보게 되었사온데, 무슨 큰 바람이 있는 건 아니고 다만 두 분께서 소생한테 자그마한 물건을 남겨 주시면 기념으로 삼고자 합니다. 소생이 늘그막에 그것을 가지고 자손들에게 자랑할까 해서지요. 내가 젊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만났는데 그들에게 이런 예물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그의 말에 두 여인은 서로 마주보다가 붉은 옷을 입은 여인 쪽에서 입을 연다.
"언니, 자손들에게 자랑하겠다는데 언니가 저분한테 무엇인가 좀 드리지 그래?"
자주색 옷을 입은 여인이 언니인 모양으로, 수줍음을 타는 그녀는 당장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모기만한 소리로 말한다.
"내가 무슨 물건을 드리겠니? 네가 드리려무나."
불은 옷을 입은 여인이 몸에 달고 있던 옥패를 풀어 공자에게 주면서 미소 띤 얼굴로 말한다.
"공자님께선 다정한 분이시니 밤에 주무실 때 가장 좋기는 이 옥……."
여기까지 말하다가 그녀는 실언을 했다고 느꼈는지 자주색 옷을 입은 여인을 끌고 얼른 달아나기 시작한다. 두 여인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잠시 후 먼 곳에서 여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가졌던 옥패를
가생(佳生)한테 주었나니
그대 만일 날 생각하려거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노랫소리는 점점 약해졌으나 메아리가 되어 길게 울려 퍼진다.
백면라살은 이 시를 읊어 자기와 구양적 간의 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물론 경중월수(鏡中月水) 중의 꽃이요, 강 위에서 옥패를 남겨 주었다는 것들은 허구로 꾸며 넣은 이야기로 무슨 대단한 결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구양적은 그녀의 운율 속에 담긴 뜻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녀에게 화답할 수가 없었다.
백면라살은 가볍게 탄식하며 막했다.
'걱아, 너의 마음을 알고 있다만 넌 구양씨 가문을 위해 꼭 아내를 얻어야 한다. 이 일만큼은 내 말을 듣는 게 좋아."
"사부님……."
구양적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백면라살이 가로챘다.
"적아, 네가 만일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난 네 앞에서 죽을 작정이다. 명전 씨까지 죽었으니 난 이 세상에서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고는 없다. 내가 그냥 해 보는 소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야."
구양적이 눈물을 흘리면서 비로소 대답했다.
"좋습니다, 사부님. 사부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한 쌍의 강호의 아들딸이 산기슭 나무 아래에서 사부인 백면라살의 주례하에 땅바닥에 꿇어앉았다.
"우선 하늘과 땅에 첫 절을 올리고, 두 번째 절은 부모님께, 그리고 마지막 절은 나에게 해라. 너희들은 오늘부터 부부간이니라. 모용 낭자는 하루 속히 완치되어 구양씨 가문의 대를 잇고, 두 사
람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백년해로하길 바란다."
두 사람은 사부에게 절을 올렸다.
땅거미가 질 무렵 그들 세 사란은 일찌감치 여관에 들었다.
백면라살이 구양적에게 말했다.
"적아, 넌 이제 혼례를 치렀다. 강호의 아들딸들이야 워낙 이것 저것 따질 처지가 못 된다. 모용 낭자의 상태가 몹시 위급하니 서둘러야 할 것 같다. 내 보기엔 너희들이 오늘 밤에 한 몸이 되는 게 좋겠다. 모용 낭자의 상처를 되도록 빨리 치료하는 일이 중하니라."
구양적과 모용쟁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 밤이 깊었는데도 구양적은 여관 뜰에서 서성거리며 방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등잔불을 밝혀 놓은 두 방을 바라보았다. 방 하나에는 그의 사부가 들어 있다. 그와 가장 가까운 백면라살이. 오늘부터 그는 다시는 사부와 포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더는 사부의 구양적이 아니라 모용 낭자의 남편이며 구양씨 가문의 가장인 것이다. 하
지만 그는 얼음 동굴에서 뜨겁게 지냈던 일이며 10여 년 간 사부와 나눈 육친과도 같은 정에 사로잡혀 울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사부님께서 오늘 밤을 어찌 견디실까? 눈물이나 흘리시지 않을는지? 혹여 사부님께서 상심하여 돌아가시지는 않을지……."
구양적은 사부가 묵고 있는 방문을 슬며시 밀어 보았다. 문은 안으로 잠겨 열리지 않았다.
구양적이 소리쳤다.
"사부님, 문 좀 열어 보세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안에서 백면라살의 말이 들려 왔다.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어서 가거라, 너의 새 사람이 널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구양적은 문을 짓부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는 복잡한 심정으로 문 앞에 멍하니 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백면라살은 사위가 잠잠하자 구양적이 간 줄 알고 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뒷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 구양적이 그대로 서 있는 것을 보고 내심 당황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적아, 돌아가서 쉬려무나."
구양적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백면라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방문을 닫은 뒤 구양적의 손을 잡고 모용쟁의 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모용쟁은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있었는데, 문이 열리는데도 고개를 들어 누가 들어오는지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묵고 있는 여관은 아주 작고 초라했다. 백면라살은 주인에게 오늘은 두 후배들의 특별한 날이니 방안을 깨끗이 해 달라고 미리 부탁해 두었었다. 그래서인지 방안은 아주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침대 위에는 객점 주인이 일부러 가져온 붉은 이불이 가져올 때 그대로 얌전히 놓여 있고 창턱엔 팔뚝만큼 굵은 초가 아름답게 타고 있었다.
백면라살은 모용쟁에게 다가갔다.
"모용 낭자, 낭자와 적이는 혼례를 치렀으니 오늘 밤을 기쁘게 보내야 해. 내가 적이한테 낭자의 상처를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미리 일러 두었으니 시름을 놓게."
방안의 분위기는 매우 싸늘했다. 구양적은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이런 첫날밤을 맞이할 줄은 이제껏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사실 모용 낭자를, 사부에 대한 감정과는 다르지만 내심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길에서 만난 여인으로,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일 생각은 해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밤부터 모용쟁은 그의 아내가 되고 가장 가까운 사람
이 되는 것이다.
한편 모용쟁은 가슴이 타서 재가 될 지경이었다. 그녀가 꿈속에서 그리던 낭군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밤부터는 꼼짝없이 구양적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고 있자 백면라살이 웃음을 머금으면서 말했다.
"새 사람들이 신방에 들게 될 때에는 복남복녀(福男福女)들이 이부자리를 펴 드려야 하는데 오늘 저녁에는 그 사람들이 없구나. 그러니 나라도 대신할 수밖에. 나는 비록 타고난 운명이 이렇지만, 너희들이 금슬 좋게 잘살 것을 축원한다."
말을 마친 뒤 백면라살은 신발과 버선을 차례로 벗기 시작했다. 한쌍의 유연하고 미끈한 다리가 드러났다. 순간 모용쟁과 구양적은 깜짝 놀랐다.
'백면라살 수라아가 저렇듯 아름다운 발을 가진 여인이었다니……."
모용쟁은 속으로 감탄했다.
만일 이 여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이 신비스런 발만 본다면 사내가 아닌 같은 여자끼리라도 그 매력에 심취될 것 같았다.
'보아하니 구양 오라버니의 사부님은 이전엔 아주 절색이었겠어.'
구양적은 백면라살과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지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발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도 모용쟁과 마찬가지로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사부님은 이런 발을 갖고 있었구나. 이렇게 훌륭한 발을 갖고 있었구나……."
백면라살은 웃음 어린 얼굴로 천천히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이불을 펴면서 노래를 불렀다.
붉은 비단 이불을 펴고
함께 기쁘게 잠자리에 드네
자손이 끊이지 말고 근심 걱정 사라지라
원앙침이라 원앙침
원앙침을 베고서
밤낮으로 즐겨 보세
사내도 탐이 났고
여인도 혼이 나갔는데
두 원앙, 생사를 같이하네.
백면라살은 정성들여 이불을 펴고 베개를 놓은 다음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또 휘장을 쳐 주면서 노래를 계속했다.
함께 기쁘게 침대에 들어
붉은 파도 일면
두 남녀 얼마나 기쁘랴
아름다운 머리 풀고 옷고름 끄르노라면
너와 나 상사(相思)가 예서 생겨나리.
이것은 혼례 때 집빈인(執賓人)이 부르는 희사(喜詞)였다. 이전에는 혼례를 할 때 언제나 희인(喜人)들을 신방에 끌어들였다. 이런 희사들은 각양각색이지만 하나같이 남녀간의 정사를 노래하고 기쁨과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었다.
백면라살은 만면에 웃음을 담고 성의껏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노래 부르다 말고 웃으며 말했다.
"나도 혼례는 못해 보았어. 이 희사들은 모두 내가 어렸을 때 혼례식에서 얻어들은 것들이야. 전부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흥이 날 때면 두어 마디 부르곤 하지."
그녀는 다시 서성대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밤은 그대의 가장 멋진 시간
새 사람의 꿈이런가
살결은 눈과 같고 웃음은 꿀과 같구나
마음 황황하고 얼굴 뜨겁고
발걸음 비틀거리네
하고픈 말 안 하고 애무도 멈추었거니
그게 어디 급한 일이랴?
새 사람들 머리 풀어 폭포처럼 드리우고
배우자 앞에 머리 숙여 맹세를 다지누나
희촉(喜燭)은 타서 눈물이 되고
새옷 가지런히 벽에 걸렸는데
갑자기 방이 어두워지매
만음월강(漫淫月光)이 빛나누나.
이 노래는 계속될수록 그 내용이 점점 짓궂어지는데, 나중에는 속삭이듯 부르다가 슬슬 밖으로 나가 문을 가볍게 닫는다. 그리하여 사람과 노랫소리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백면라살이 그렇게 사라지고 나자 모용쟁과 구양적만이 남게 되었다. 침묵 속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붉은 초는 백면라살이 꺼 놓았고 방문도 백면라살이 잘 닫아 놓았으므로 더 이상 그들이 할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앉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구양적이 속으로 생각했다.
'모용쟁은 훌륭한 처녀다. 그녀가 나한테 시집오자니 속으로 원통했을 거야. 만일 동생이 죽지 않았다면 동생과 혼인시켰을 텐데. 동생이 이 여자와 혼인하면 우리 구양 가문도 빛낼 수 있고 나도 사부님과 생사를 같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오죽 좋았을까……."
모용쟁은 그가 한참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자 공연히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끄러워져서 조심스럽게 신을 벗고 옷을 벗은 다음 이불을 들추고 그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녀는 몸을 벽 쪽으로 향하고 피곤한 듯 하품을 했다.
그녀는 내심 걱정을 했었다. 옷을 벗을 때까지만 해도 구양적이 다가와 거칠게 굴까봐 두려웠는데 다행히도 그는 그녀가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앉아 어둠을 지켜 볼 뿐이었다.
구양적이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당신…… 이렇게 돼도 괜찮겠소?"
모용쟁은 무엇인가 말하고 싶었으나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그대로 침묵을 지켰다.
구양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당신은…… 마음이 내켜서 이러는 게 아니지?"
모용쟁은 역시 대답하지 않고 아랫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
'저이는 서역 대사막의 으뜸가는 고수 구양적이다. 저이는 거친 사나이이기는 하지만 백타산군 임일천과 같은 소인배는 아니구나. 저이는 여자를 생각해 줄 줄 아는 사내야……."
밤이 깊어 하늘에서는 반달이 숨박꼭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름다운 모습을 감추었다가는 다시 얼굴을 내밀곤 했다.
달빛 아래 한 여인이 나무 곁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못 박인 듯 서서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웃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머리를 숙여 자기의 그림자를 굽어보더니 중얼거린다.
"수라아, 수라아. 넌 알고 있느냐? 네가 지금 어디에 백면라살다운 점이 남아 있단 말이냐? 다만 너의 그림자만이 저렇듯 매끈하고 사람 꼴을 하고 있구나! 그것말고 너에게서 뭐 볼 게 남았느냐, 뭐가 남았어?"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시를 읊기 시작했다.
인생에서 만나지 않으려고
몸 움직여 장삿길에 나섰다네
오늘 저녁은 어떤 저녁이기에
화촉등광이 이리 밝으뇨.
젊고 건강한 시절 얼마나 오래 가랴
귀밑머리 이젠 백발이 되었구나
반생을 귀신으로 살던 옛일 생각하면
창자가 끊어질 듯 괴롭구나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12년 만에
또다시 님을 만나게 될 줄을
님을 석별한 한이 가시기도 전에
아들딸 졸지에 성례를 치르는구나
태연히 사부의 위엄 갖추어야지
아들딸 술판을 벌이누나
밤비에 봄부추 잘라다가
새로 부엌에서 요리를 하노라
주인이 열 잔이나 잔을 비웠네
열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으니
감정이 지나치게 부풀어오른 탓일까
내일이면 산악에 가로막혀
세상일 두 쪽으로 갈라지리라.
장시를 한 번 읊노라니 무예를 연마할 때보다 힘이 배로 드는 듯 했다. 그녀는 두보(杜甫)와는 달리, 벗들이 서로 만난 뒤 후일이 망망한 데 대한 감상으로 이 시를 읊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과거를 잊기로 했다. 이제 과거는 일속을 따라 묻혀 버렸고 구양적과 모용쟁을 따라 날아가 버렸다.
그녀에겐 이제 껍질만이 남았을 뿐 모든 것이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제23장 무림 고수들의 만남
구양봉은 형님을 찾기 위해 중원으로 향했다. 형님을 찾으면 자연히 모용쟁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이른 새벽에 길을 떠나고 밤늦게 유숙하면서 드디어 임안에 도착했다.
그는 임안에 도착한 후 형님이 있을 만한 곳을 구석구석 찾아다녔다. 그러나 객점이란 객점은 거의 훑다시피 하고 몇몇 무술관까지 살펴보았으나 형님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는 형님이 임안에 있지 않고 종남산에 가서 그 전진교의 교주 왕중양과 무예를 겨루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은 《구음진경》을 얻기 전에는 대 사막으로 돌아갈 리가 없으므로 형님을 찾으려
면 먼저 왕중양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일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종남산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길을 가다가 그는 짬짬이 자신의 합마공을 점검해 보곤 했다. 다행히도 그는 신독행이 60년이나 닦은 내공을 흡수한 터라 그것을 익히는 데 큰 힘이 들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과거와 달랐으며 어제의 구양봉이 아니었다. 오늘의 구양봉은 노독물의 제자로서 이 세상의 모든 원수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악인인 것이다.
그는 사부 앞에서 자기의 사형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맹세했지만 거친 사나이 석초수 하나를 죽였을 뿐 제갈정, 속문성 그리고 그 과묵한 두 사형과 음험하고 지독한 사숙은 손도 대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사부에게 그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약속한 이상 그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든 눈에 띄기만 하면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으리라고 구양봉은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종남산에 당도한 구양봉은 산 아래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앉아 생각을 더듬었다.
'사부님께서는 임종하실 때 《구음진경》은 확실한 기서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손에 넣으라고 당부하셨다. 하지만 형님 역시 그것을 찾고 있는데 내가 어찌 형님과 쟁탈전을 벌일 수 있으랴. 하지만 남이 그 책을 얻었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더구나 왕중양이 남에게 《구음진경》을 빼앗겼을 정도라면 그만큼 무예가 신통치 못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니 두려울 게 뭐겠는가?'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보아하니 그들도 하나같이 《구음진경》을 얻기 위해 왔다가 실패하고 돌아가는 눈치였다.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을 고쳤다.
'보아하니 왕중양의 《구음진경》은 빼앗긴 게 아니야. 만일 그가 그 책을 빼앗겼다면 종남산이 이처럼 북적거릴 리가 없어.'
구양봉은 왕중양이 천하의기(天下義旗)의 수령이며, 이렇듯 무림 인물들이 오가는 까닭이 결코 《구음진경》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금과 결전을 벌여 대송강산(大宋江山)을 되찾을지 왕중양과 상론하기 위해서 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구양봉은 산 아래에서 이틀쯤 묵으며 동정을 살피다가 밤을 틈타 산에 뛰어들었다.
그는 나는 듯이 산을 올라 한 시간도 채 안 걸려서 중양궁 밖에 있는 두 개의 커다란 암석 앞에 도착했다. 그는 이제 과거의 그 서생이 아니라 봉황력과 합마공이라는 신비한 기술을 가진데다 외공과 내공에 있어서도 천하 제일의 고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암석 위에 앉아 중양궁을 관찰하면서 어떻게 궁 안에 들어가 왕중양을 탐지할 것인가를 궁리했다. 잠시 후 그는 가볍게 몸을 날
려 중양궁으로 들어갔다.
중양궁을 지키던 몇몇 사람들은 날아가는 구양봉의 그림자가 어찌나 빠른지 누구 하나 제대로 보아 내지 못했다. 그들은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리는 듯하자 떠들어대기 시작하더니 더는 아무런 기척이 없자 이내 조용해졌다.
중양궁 안에 들어온 구양봉은 큰 도관(道館)이 바로 왕중양의 거처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곳저곳 뒤지다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작은 별채로 다가갔다. 그는 손으로 창호지에 구멍을 내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집안에는 세 사람이 있었는데 중간에 앉은 사람이 의심할 바 없이 왕중양인 것 같았다. 옆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그 앞에서 매우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왕중양의 제자인 마옥과 구처기였다.
왕중양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마옥아, 금의 군대가 강을 건넌 후에 계속 밀고 내려온다는 말을 듣지 못했느냐?"
마옥이 대답했다.
"사부님, 금군의 세력은 여전히 어마어마하고 조정의 관원들이라곤 모두 제 잇속을 차리느라 정신이 없는데 금군이 공격해 올 때 누가 앞에 나서려 하겠습니까? 그자들은 금인(金印)을 옷소매에 넣고 도망가지 않으면 금인을 걸어 둔 채 종적을 감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탐관 허화정(許華亭)이란 놈은 금인을 옷소매에 넣고 달아났는데 변경에서 이 금인이 팔렸다고 합니다. 개자식이 어
찌나 제멋대로 노는지 나와 사제 두 사람은 그 놈을 죽일 생각을 다 했을 정돕니다."
옆에 앉아 있던 성미 급한 구처기가 큰소리로 덧붙였다.
"사부님, 사형께서 절 말리지 않았다면 그 놈은 벌써 귀신이 됐을 겁니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대송강산이 피폐해지고 인심이 흩어지게 된 건 전적으로 그런 개 같은 놈들이 있기 때문이다. 네가 그 놈을 죽이지 않으면 또다시 그런 자들이 생겨나게 될 텐데 왜 그 놈을 죽여 버리지 못했느냐?"
구처기가 대답했다.
"사부님, 제가 그 놈의 거처를 알고 있으니 죽여 버리면 되옵니다."
"처기야, 네가 가서 그 놈을 죽이고 그 놈의 머리를 금인과 함께 깃대에 매달아 대송의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하여라. 그리하여 이런 탐관들이 종국에는 어찌 되는지를 알게 해야 한다."
왕중양의 명령에 구처기는 얼른 내일이라도 당장 이 일을 처리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이들의 대화를 듣던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모두 나의 사부님을 노독물이라고 부른다. 사람을 파리 죽이듯 하고 악한 일을 너무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왕중양도 사람을 죽이기는 마찬가지구나. 도사의 손에서 피비린내가 나니……. 세상이 이러한데 천하의 선인과 악인을 어찌 똑똑히 가려 볼 수 있겠는가? 대송강산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대송의 강산은 그 우매한 군주의 것이다. 그 놈이 기개를 잃어버렸는 데
사람을 시켜 그 놈을 돕게 하다니. 왕은 날마다 주색에 빠져 나라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태도고 신하라는 것들은 모두 제 잇속만 챙기려 드니 이처럼 썩을 수밖에. 그런데 그걸 어쩌겠다는 말인가?'
왕중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젠가 들으니 일부 금의 군대들이 종남산에 오려고 했다더구나. 그들은 대부분이 무림 사람들이야. 너희들은 행여라도 금나라 사람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염려 마십시오. 제가 이미 문하의 제자들에게 다 말해 놓아 모두들 조심하고 있으니 그런 불상사는 절대 없을 것입니다."
마옥이 대답했다.
"그럼 됐다. 너희들도 지쳤을 텐데 가서 쉬도록 해라."
왕중양의 말이 떨어지자 두 사람은 조용히 물러났다.
구양봉은 두 사람이 방을 나가자 은근히 기뻤다. 이제 왕중양이 혼자 남았으니 《구음진경》을 손에 넣기가 한결 수월해진 것이다.
그는 당장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행동을 멈추었다. 너무 서두르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그는 왕중양의 행동을 좀더 지켜 보기로 했다. 그는 분명 《구음진경》을 깊이 감추어 두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함부로 뛰어들었다간 그것을 손에 넣기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구양봉은 마음을 신중히 하고 왕중양의 동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왕중양이 창문을 열고 교교한 달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간이 오래 살기를 원하노니, 천리 길을 그대와 같이하며 월색을 감상하리……."
구양봉은 그가 읊은 것이 당대의 대문인 소식(蘇軾)의 시구임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슬그머니 웃었다.
'네 놈도 수사전진(修士全眞 ; 도사)이거늘 어찌 욕심이 그리 많단 말이냐?'
이때 왕중양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급히 밖으로 나갔다. 구양봉은 그가 《구음진경》을 찾으러 가는 것으로 생각되어 내심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여럿이면 소란스러운 일이 많은 법이라 《구음진경》을 집에 두지 않고 어느 비밀 동굴에 숨겨 둔 채 거기서 무예를 연마할 지도 모르는 일이지. 만일 그렇다면 너 왕중양은 오늘 내 손에 죽게 된 거다.'
구양봉은 왕중양의 뒤를 쫓아 뒷산에 이르렀다.
왕중양은 커다란 묘 앞에 멈춰 섰다. 뒤에 숨어 서서 묘지의 비문을 본 구앙봉은 생각했다.
'그래, 이 놈은 이곳에서 《구음진경》의 무예를 배우는 게 틀림없어. 무예를 연마하는데 공동 묘지만큼 조용한 장소는 없지.'
그런데 갑자기 왕중양이 큰소리로 고함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구양봉은 심장이 떨어지는 듯했다.
'왕중양의 무예가 놀랍다는 말은 들었지만, 소리지르는 걸 들으니 실로 용이 큰 연못에서 울부짖고 봉이 구천(九天)에서 날갯짓 하는 소리 같구나.'
그 소리는 실로 대단하여 계곡 사이를 메아리치면서 오랫동안 사라질 줄을 몰랐다. 구양봉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왕중양이 무예나 익힐 일이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묘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구양봉은 그제야 깨달았다. 왕중양은 묘 안에 있는 사람을 부르느라고 그렇게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자기가 들어가 무예를 연마하겠으니 문을 열라고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온 사람을 보니 생각이 또 달라졌다. 25, 6세쯤 되는 젊은 여인이 제집 뜨락에서 산보라도 하듯이 천천히 걸어 나온 것이다. 그녀는 왕중양 앞으로
다가와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왕중양……, 당신이군요?"
왕중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또 가만히 왕중양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왕중양, 당신은 명도 그다지 길지 못하면서 어찌 이다지도 몸을 돌보지 않나요? 그래, 천하 대사가 당신을 이토록 노심초사하게 만든단 말인가요?"
왕중양이 그 말에는 대꾸를 않고 안부부터 물었다.
"조영, 잘 있었소?"
여인이 그 말에 소리 내어 웃었다.
"조영이라, 당신이 날 그렇게 불러요? 참 듣기 좋은데요. 전에 는 날 어떻게 불렀죠? 임 시주라고 부르지 않았나요?"
왕중양은 그녀가 중양궁 앞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가 일속과 구양적, 두 사람과 무례를 겨루고 있을 때 임조영이 나타나자 그가 그녀에게 매우 공손히 임 시주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왕중양은 몇 달이 지났는데도 임조영이 그 일을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조영, 당신에게 할말이 있어 왔소. 이 묘지에서 떠나는 게 좋겠소. 이곳은 내가 있던 곳이지만 그땐 내가 홧김에 그리 했던 것이고 또 혈기가 넘쳐 바보짓을 한 게 아니겠소? 다른 곳으로 가시오. 내가 당신이 거처할 장소를 마련해 주겠소. 고분은 습기가 많아 당신한테 좋은 점이 없을 거요."
임조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중양 진인의 성의만은 알 만해요. 하지만 중양 진인이 건망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이 묘지는 당신 것이었지만 당신이 무예를 겨루어 나한테 졌기 때문에 그때부터 내 것이 된 거예요. 난 이곳에서 살겠어요. 내가 살기 싫으면 그때 떠나면 되는 거지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그들의 대화를 듣던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는 보아하니 왕중양과 관계가 아주 깊은 사람 같군. 난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려 대는 여자는 세상에 모용쟁 한 사람뿐인줄 알았더니 여기에 모용쟁 같은 한심한 여자가 또 한 사람 있었구만. 여자가 왕중양 앞에서 저렇듯 기고만장한 것은 정말 자기에게 남다른 재주가 있어서일까?'
이때 임조영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왕중양, 내가 당신을 오라고 한 건 당신과 이런 한담이나 하자는 게 아니에요."
왕중양은 그녀의 말에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왕중양, 당신의 이 묘는 아주 좋은 곳이에요. 난 생각해 둔 게 있어요. 우선 여기서 살다가 죽게 되면 사람을 불러 이곳에 내 시체를 매장하게 하는 거예요. 난 이 묘에 관을 두 개 갖다 놓겠어요. 내가 죽게 되면 제자를 시켜 나를 관에 넣게 할 거예요. 좋은 생각 같지 않아요?"
왕중양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임조영이 이렇게 말하니 그는 할말이 없었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다. 왕중양은 착잡한 심정으로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자기만 아니었어도 오늘날 그녀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때 왕중양은 인마를 이끌고 강호를 넘나들었었다. 그것은 금의 군대가 중원에 쳐들어와 마을을 불사르고 백성들을 살육하므로 의기(義旗)를 높이 들고 금군과 싸우기 위해서였다. 다행히도 첫 싸움은 그의 승리로 끝났고 중원의 의병들은 모두 왕중양을 높이 추대하였다. 그는 의병들을 거느리고 금의 군대와 수차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금의 병력이 얼마나 엄청난지 의군은 점차 열세에 몰
리기 시작했고, 조정의 지원을 받지 못한 탓에 연거푸 패전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왕중양은 모함을 받아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됐고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와 보니 의군은 뿔뿔이 흩어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에 크게 자책과 회의를 느껴 출가를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이 옛 무덤에 틀어박혀 묘지 밖으로 한걸음도 나가지 않으려 했으며 스스로 '살아 있는 죽은 사람[활사인(活死人)
]'이라 칭하였다. 어느 날 임조영이 찾아와 그에게 무예를 겨루자고 청했다. 임조영은 만일 자신이 지게 되면 자결하고 왕중양이 지게 되면 이 활사인 묘를 자기가 차지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무예 시합을 앞두고 임조영은 산 위에 있는 큰 바위에 여덟 구절로 된 시를 새겼다.
자방은 진을 멸할 뜻을 품었건만
한때는 다리 밑으로 기어 나가야 했고
한이 이 세상에 일어선 후에야
하늘 떠받치는 기둥으로 우뚝 솟을 수 있었다네
적송(赤松)을 동무하여 빈들거리고
무예를 배우고는 뿌리치고 가 버렸지만
뛰어난 사람과 뛰어난 책을
조물주는 가볍게 여기지 아니하더라.
이 여덟 구절의 시는 왕중양을 두고 쓴 것이었다. 시합에서 임조영은 왕중양에게 두 사람이 각자 바위를 골라 글자를 새기자고 했다. 임조영은 손가락 하나로 이 큰 돌에다 여덟 구절이나 되는 시를 새겼는데,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석공이 정으로 쪼은 것처럼 정교했다. 이를 본 왕중양은 깜짝 놀라 당장에 무릎을 꿇고 패배를 인정했다. 활사인 묘가 임조영에게 넘어오게 된 경위는 바로 이
러했다.
"조영, 내가 당신을 찾은 건 당신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오. 내 보기에 이 묘는 습기가 너무 많은 것 같소. 고집은 그만 부리고 여기서 나왔으면 하오."
임조영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중양 진인, 당신은 워낙 이곳에서 잘 지내지 않았어요? 나는 이제야 이곳이 좋은 줄 알게 되었단 말이에요. 난 이곳에 있는 게 아주 좋아요. 당신은 내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왕중양은 할말이 없어졌다. 두 사람은 상대방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들여다보면서도 그것을 입 밖에 꺼내어 말하지는 못했다.
그는 임조영이 줄곧 자기를 연모해 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임조영을 좋아했지만 그녀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강호에서 겪을 풍파와 위험을 생각하니 임조영을 데려다가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임조영은 왕중양을 천하의 큰 영웅이 되려는 생각만 하는 몰인정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렸다. 두 사람은 서로 한치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고 결국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조영, 내가 당신을 찾았소, 아니면 당신이 날 오라고 한 거요?"
왕중양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으로서 매사에 분명한 걸 좋아했다. 이번 일 역시 그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임조영은 그의 물음에 발칵 화를 내며 쌀쌀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당신을 오라고 했지요. 내가 '옥녀심경'이란 무예를 새로 닦았는데 당신과 한 번 겨뤄 보고 싶어서예요."
왕중양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조영, 난 정말로 《구음진경》이란 책을 얻었소. 이 책은 기서인 데 난 그 책에 기재된 무예를 다 닦았소. 그건 모두 기묘하기 이를 데 없소……."
왕중양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흥분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 기재된 무예는 진정 이 세상에 둘도 없는 것이오."
임조영이 여전히 쌀쌀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왕중양, 당신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아요? 그 《구음진경》이란 책은 누가 썼다던가요? 책을 써내는 사람들이 신선이야 아니겠지요?"
"신선은 아니지만 그분은 확실히 기인이지요. 그분은 대송조의 도종 황제 때 사람으로 황상이라 부르오. 그분은……."
임조영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꼬리를 낚아챘다.
"됐어요, 됐다구요. 당신은 또 그가 《만수도장》인지 뭔지를 수정하던 일을 끄집어내려는 게 아닌가요? 당신은 이미 그 일을 입이 닳도록 말했어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고 있는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들한테는 이야기해 주지 않고 이 야밤 삼경에 쓸데없이 날 붙들고 이러는 건가요?"
왕중양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난 당신과 말다툼을 하러 온 것이 아니오. 당신이 '옥녀심경'을 다 익혔다고 하기에 한 수 배우러 온 것뿐이오."
"그런가요?"
임조영은 가만히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왕중양, 난 당신을 겸손한 군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당신도 호남아였군요. 난 당신이 마음속으로라도 날 이해하고 정분도 좀 있는 줄 알았어요. 이 깊은 밤에 이렇게 와 주신 것도 날 생각하는 마음에서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당신은 소위 그 대사라는 것을 다 치른 다음에야 와서, 결국 한다는 말이 나와 겨뤄 보겠다는 거군요. 보아하니 내가 공연히 속을 태운 것이로군요. 당신 같은 사람
을 두고 괜한 속을 태운 거예요.'
그녀는 생각할 수록 설움에 겨워 눈물을 홀리기 시작했다.
왕중양은 미처 그녀의 심증을 헤아리지 못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내심 당황했다.
"조영, 몸이 불편한 모양인데 난 돌아가겠소. 후에 다시 와서 무예에 대해 의논하기로 합시다."
임조영은 얼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당신의 호의에 대해선 알 만해요. 오늘 당신에게 나의 '옥녀심경'을 보여 주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전 당신한테 진짜로 져보고 싶어요."
워낙 전번의 시합도 임조영이 주장해 벌인 것이었다. 그녀가 암석에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새기자 왕중양이 선뜻 패배를 인정했던 진짜 이유는 그가 임조영의 성미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녀가 지게 되면 그녀는 약속대로 당장 자결해 버릴 게 분명했던 것이다. 그가 어찌 임조영이 죽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신선이 왔다 하더라도 무쇠같이 단단한
암석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새길 수는 없을 것이라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임조영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지금 날 우습게 보고 있구나. 좋다. 네가 정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다. 지금부터 또 한 가지 무예를 연마하여 너를 정식으로 격패시키고야 말 테다. 그때 가서 무슨 말을 하는지 보기로 하자.'
이리하여 그녀는 왕중양의 활사인 묘를 차지하고 앉아 새로운 검법을 생각해 냈던 것인데 오늘에야 그것을 겨뤄 보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이 검법으로 전진교의 검법에 대항하여 왕중양을 꺾어 볼 심산이었다.
왕중양은 그녀의 이런 심사를 모르는 채 임조영에게 말했다.
"조영, 당신한테 그런 검법이 있다고 하니 나의 전진교의 검술을 가히 격파할 수 있겠소. 시합을 해 보지 않았으니 장담할 순 없겠지만 말이오."
임조영이 대답했다.
"좋아요. 겨뤄 보지요."
이들을 지켜 보던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사부님한테서 무예를 배우고 합마공과 봉황력을 체득한 후로는 천하 무림들의 무예를 실로 어린애들 장난으로 여겨 왔다. 이 왕중양의 무예가 천하에 일품이라고 소문이 나 있지만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었는데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구나. 그리고 저 여자 역시 겁없이 왕중양한테 덤벼드는 걸 보면 무공이 보통은 아닌 모양이야. 두 사람이 싸우는 걸 잘 보아야지, 도대체 수준이 어느
정도나 될까?'
이런 생각을 하는 그의 마음은 한편으론 흥분이 되고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했다. 그것은 그가 일신에 기공을 갖게 되긴 하였지만 왕중양과 임조영 같은 적수를 만나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종남산에 온 목적까지 깡그리 잊은 채 정신없이 그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왕중양이 땅에서 나뭇가지 한 개를 집어 들었다. 그는 임조영과 마주서더니 말했다.
"조영, 덤비시오."
임조영도 내심 매우 흥분되었다. 그녀는 몇 년을 고심한 끝에 '옥녀심경'을 새롭게 심화시켰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전진교 교주 왕중양의 검법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의 수법들은 모두 전진교 검술의 특징에 대처하여 고안한 것인데, 과연 효과를 볼 수 있을는지,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조영도 손에 검을 뽑아 들고 왕중양에게 말했다.
"당신 조심하세요. 사람들이 전진교의 검법이 아주 무서운 것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무것도 아니에요. 두고 봐요. 내가 꼭 당신의 전진교 검법을 물리치고 말 테니까요."
왕중양은 그녀의 말에 언짢은 생각이 들었다.
'나의 전진교 검법이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검법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일개 아녀자가 내 전진교 검법을 물리치기란 쉽지 않을걸? 내가 당신과의 오랜 정을 생각해서, 아니 당신에 대한 이 마음 때문에 당신이 너무 형편없이 참패당하지 않게 해 주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요.'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조영, 어서 칼을 뽑으시오."
임조영은 움직치지 않고 되레 왕중양에게 말했다.
"당신이 출검해야 해요. 당신께 알려 드린다는 걸 깜빡했군요. 나의 검법은 전진교에 대처하는 것으로서 뒤에 손을 써서 제압하는 것이에요. 당신이 먼저 출검해야 나도 출검할 수 있어요. 당신 검법의 위력이 클수록 나의 검이 더욱 무섭고 강해지죠."
두 사람은 곁에서 구양봉이 지켜 보고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한 채 싸움을 시작했다.
곧 두 개의 칼날이 정신없이 왔다갔다 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구양봉은 그것을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깝짝 놀랐다. 보아하니 이 두 사람의 무예는 자기보다 훨씬 강한 것 같았다. 말로만 듣던 왕중양의 무예는 추호의 빈틈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임조영은 이상하게도 칼을 뽑은 후로 줄곧 막기만 할뿐 공격은 전혀 하지 않았다.
왕중양은 손을 멈추더니 입을 열었다.
"조영, 내 보기에 당신은 싸우려는 투지가 조금도 없구려.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겠소."
임조영이 대꾸했다.
"왕중양, 저도 당신을 난처하게 하고 싶진 않아요. 내가 말씀드렸지요? 당신의 전진교 검법은 대단한 게 아니라고요. 괜히 큰소리치는 게 아니에요. 믿기지 않거든 보세요……."
임조영은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검술 동작은 구양봉이 볼 때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유운장에서 내공심법과 사문기공만을 배웠을 뿐으로 검도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이건 무슨 검법이오? 우리 전진교 검법을 격파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한 것 같구려."
임조영이 가볍게 웃으며 쌀쌀하게 말했다.
"왕중양, 당신의 전진교 검법도 일반적인 것에 불과해요. 나의 '옥녀심경'은 바로 당신의 전진교 검법을 격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예요. 당신에게 72식의 검법이 있고 나한테는 '옥녀심경'이 있지요. 결국 당신의 모든 검법이 다 나한테 격파되었어요. 당신은 전진교 검법을 대단하다고 여길 테지만 기실 아무것도 아니라구요."
임조영이 갑자기 손을 치켜 들어 검을 휘둘러 댔다. 검을 휘두르는 기세가 마치 장하대천(長河大川)처럼 도도하였다.
왕중양은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임조영의 검법은 그 일초일식(一招一式)이 하나같이 중양검법을 격파하기 위한 것으로, 손을 쓸 때마다 전진교의 검법 동작을 철저히 막아내고 또 그것을 깡그리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임조영은 연이어 예닐곱 가지 동작을 보여 주었는데, 갈수록 그 동작이 더욱 절묘하여 그것을 보는 왕중양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말문이 다 막혔다. 그는 임조영의 몇 가지 검법을 보고 나서 말했다.
"조영, 이것이 당신이 새로 만든 '옥녀심경'이란 무술이오?"
"맞아요. 당신 보기에 중양궁의 검법으로 나의 '옥녀심경'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나요?"
임조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왕중양은 임조영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조영, 조영……, 당신은 왜 이토록 정력을 낭비하는 거요? 나도 당신의 무예가 대단하다는 걸 인정하지만 하필 전진교를 적으로 삼을 게 뭐요? 전진교는 하나의 큰 교파로서 그것은 결코 무림에서 무예를 겨루자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고 있지 않소. 중요하게는 강포한 자를 제거하고 약한 자를 보호하며 강산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오. 당신은 온통 전진교를 대처하는 데만 마음을 쏟고
있는데, 이게 다 무슨 쓸데없는 짓이오?'
이렇게 생각하자 그는 화가 치밀었다.
임조영은 왕중양의 심정을 알지 못한 채 그가 자기의 무예를 보고 내심 두려워하는 줄로 착각하고 득의양양해졌다. 그녀가 '옥녀심경'을 연마한 기본 목적이 왕중양으로 하여금 진심으로 탄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의 태도를 보자 여간 통쾌하지 않았다.
"중양, 당신이 보기에도 나의 '옥녀심경'은 만만치 않지요? 당신의 전진교 사람들 모두에게 이 무예를 보여 주고 싶군요. 내가 앞으로 제자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 애도 우의도관(羽衣道冠)을 걸친 당신의 제자들보다 더 무서울 거예요."
그녀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함빡 웃음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기가 들인 노력이 헛되지 않았고 자기의 무예가 왕중양을 진심으로 감복시켰으며 이 세상에 자기한테 감복하지 않을 자가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임조영은 기쁨에 젖어 계속해서 말했다.
"중양, 한 가지 당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녀는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고개를 떨구었다.
'중양, 오늘은 당신한테 꼭 말해야겠어요.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해야겠어요. 만일 오늘도 말하지 못한다면 난 다시는 당신한테 이런 말들을 할 수 없을 거예요. 중양,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도 어리석은가요? 당신은 한 여인이 당신한테 이런 말을 하게 해야 하나요? 그래도 당신이 사낸데 이런 말은 당신 쪽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녀는 문득 화가 치밀어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열었다.
"중양, 나와 당신이…… 내가 아까 당신과 무예를 겨룬 건 다만 장난이었을 뿐이에요. 난 당신에게……."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교교한 달빛 아래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왕중양은 가 버렸다. 말 한마디 없이 슬그머니 가 버린 것이다.
임조영은 절망적인 기분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들고 있던 검이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구양봉은 물론 왕중양이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이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남모르는 사연이 있으리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모용 낭자만 천하에 물정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중양의 저 여자도 마찬가지로군. 세상 여자들이란 다 저 모양인가? 이러니 사내들이 여자들한테 무슨 기대를 가질 수 있겠어?'
교교한 달빛과 싸늘한 대기 속에서 구양봉은 왕중양이 천천히 산꼭대기로 걸어가 큰 바위 곁에 앉는 것을 보았다. 구양봉은 그가 어찌하여 그곳에 가 앉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거라곤 거기에는 바람이 불고 있고 풍세도 대단하다는 것뿐이었다. 산기슭에서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에 구양봉은 몸이 떨려 왔다. 왕중양은 저곳에 앉아 무엇을 하는 걸까?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
가?
왕중양은 지난날 자기와 임조영 간에 있었던 한 차례의 도박적인 시합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도박에서 패배한 왕중양이 임조영에게 활사인 묘를 내준 것이다.
산꼭대기에 앉아 있는 왕중양의 심정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가 갖은 애를 다 쓴 항금대사(抗金大事)는 성공하지 못했고 자기와 임조영 간의 일도 엉망이 되었다. 그는 손으로 바위를 쓸어만지다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손에 만져지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임조영이 한 획 한 획 손가락으로 새긴 글자의 흔적이었다. 그것은 결코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임조영은 글자를 써냈으며 왕중양은 그녀가 바위에 써 놓은 여덟 구절의 시를 분명히 보았었다.
왕중양은 그것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자방은 진을 멸할 뜻을 품었건만
한때는 다리 밑으로 기어 나가야 했고
한이 이 세상에 일어선 후에야
하늘 떠받치는 기둥으로 우뚝 솟을 수 있었다네.
왕중양은 내심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임조영은 자기를 한조(漢朝)를 흥하게 한 개국 공신 장량(張良)에 비유했던 것이다. 장량은 유방(劉邦)을 보좌하여 5백 청사에 길이 남을 공로를 세웠으며, 그 도형서(圖形書)가 능연각(凌烟閣)에 그려져 실로 천하의 일대 미담으로 남아 있다. 임조영이 자기를 장자방에 비유한 것은 칭찬을 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왕중양은 탄식했다.
'내가 어디 장자방 같은 사람인가? 나는 다만 패군지장이며 하나의 활사인일 따름이다. 격노한 임조영에 의해 옛 무덤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여전히 묘 속에 갇혀 있는 신세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한을 일으킨 공신 장량에 비할 수 있겠는가?'
구양봉은 왕중양이 암석을 만지면서 깊은 감상에 젖어 있는 것을 보고 지레짐작했다.
'《구음진경》을 저 암석 밑에 숨겨 둔 게로구나. 왕중양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군. 《구음진경》을 저런 곳에다 감추다니.'
이때 맑은 피리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 피리 소리는 어떤 고사(故事)를 말해 주고 있었다.
앞에 고요히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바닷물은 어찌나 맑은지 그 속의 것들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다. 헤엄치는 물고기들, 춤추는 해초들, 그 밖에도 수많은 조용하고 한가로운 것들이 다 들여다보인다.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대해에 물결이 일기 시작한다. 커다란 파도가 일더니 그 물결을 타고 바닷속에 잠겼던 시해(尸骸)들이 떠올라온다.
그 피리 소리는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하고 점점 비통하게 만들어 물고기처럼 바닷속에 뛰어들고 싶게 했다.
왕중양의 귀에도 그 소리가 들리는 듯 몹시 괴로운 눈치였다. 그는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정신을 모아 그 피리 소리에 대항하는 듯했다. 피리 소리는 여전히 멎지 않고 들려 왔다. 그 곡절 많고 가락의 변화가 잦은 피리 소리는 마치 왕중양과 싸워 그를 거꾸러뜨리기라도 하려는 듯싶었다.
구양봉도 음악에는 조예가 깊고 특히 아쟁에 솜씨가 있는지라 피리 소리에 귀를 귀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내 손에 아쟁만 있다면 저 피리 소리와 맞춰 볼 수 있을 텐데. 저 피리 소리가 강한 선율을 표현할 때면 나는 부드러운 화음으로 맞추어 주고 저 피리 소리가 유연해질 때면 나는 강한 음을 내어 주고……."
그런데 그 피리 소리는 구양봉에게도 이롭지는 않았다. 구양봉은 번뇌와 함께 가슴속의 혈기가 끓어오르는 듯하여 일시 혼란에 빠졌다. 그는 급급히 정신을 집중하고 내공을 모아 피리 소리를 막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왕중양과 구양봉이 정신을 집중하여 전력으로 피리 소리에 대항하고 있을 때 피리 소리 사이로 누군가가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대여(大呂)의 큰 종소리 같았다.
"불설(佛說)에 초(初)에도 무난(無難)이요 후(後)에도 무난이라고 했은즉, 인생이 시초부터 힘 다하다가 한결같이 끝나는 것은 구구)(九九 ; 9월 9일로 중양절이라는 명절)가 돌아와야 진심으로 뉘우침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니라. 색을 보고도 가까이하지 않고 사람을 보아도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탐하지 않고 역정 내지 않고 성내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극락으로 사는 것을 불가의……."
이 염불 소리는 교묘하게도 피리 소리가 끊어질 듯 작아졌다가 다시 커지곤 하는 사이에 나곤 했는데 구구절절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그 염불을 외우면 사람의 마음이 밝게 열리고 푸근해지며 모든 번뇌가 없어질 것 같았다.
왕중양이 갑자기 왼쪽 신발을 벗어 들고는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에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왕중양이 피리 소리에 미친 거 아냐? 갑자기 뭣 땜에 신발을 들여다보는 거지?'
왕중양은 그 신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오른쪽 발에서 나머지 신발마저 벗겨 내어 두 신발을 손에 든 채 달빛 속에서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피리 소리는 더욱 빨라졌다. 해상의 파도는 이제 집채같이 사납게 일어나 모든 생령들을 통째로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염불을 외우는 사람의 목소리는 더욱 부드러워져 간곡하게 인생과 예의, 불법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구절구절마다 더욱 가슴 갚이 파고들었다.
마음이 동한 구양봉은 앉은 채로 아쟁을 타기라도 하듯이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기의 아쟁 연주곡인 대사막풍사진(大沙漠風沙塵) 을 끊임없이 연주해 댔다.
한편 왕중양은 손을 움직여 두 신발 바닥을 딱딱 마주치기 시작했다. 왕중양은 두 신발 바닥을 마주치다가는 한쪽 신 바닥으로 철썩 무릎을 갈기고 다른 한쪽 신 바닥으로는 큰 청석(靑石)을 철썩 내리갈겼다. 이어서 그는 또 두 신발 바닥으로 청석을 두들겨 대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신발 바닥에서 생생한 음률이 튀어나오는 것 이 아닌가? 그의 신발 바닥 두들기는 소리는 때로는 염불 소
리와 한데 어울리고 때로는 피리 소리와 한데 어울렸으며 때로는 다른 것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울리곤 했다.
세 사람은 이렇게 한바탕 법석을 떨다가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소란을 멈췄다.
왕중양은 여전히 바위 위에 앉아 있었는데 미소를 띄우고 있는 품이 제정신을 잃은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는 개운해진 기분으로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손님은 동해 도화도의 도주 황약사가 아니시오? 참으로 무서운 곡입니다. 대해마저 뒤집어질 지경이니까요."
그의 질문에 누군가 한바탕 웃더니 대답했다.
"중양 진인께서는 귀가 밝으시군요. 이건 제가 만든 신곡 벽해조생곡(碧海潮生曲) 이온데 도화도에서는 너무나도 무료하여 파도가 치는 듯한 이 곡을 즐겨 듣소이다. 일부러 진인을 괴롭혔다고는 생각지 마시오."
왕중양이 웃으며 대답했다.
"손님은 운남 대리의 단씨 나으리가 아니십니까? 인간들에게 진심으로 뉘우칠 것을 권하시면서 남과 다투더라도 부처의 인자한 마음을 체득해야 한다고 하셨소이다. 댁은 틀림없는 대리의 단씨 나으리인 것 같소이다."
가지가 울창한 한 노목 아래 사람 하나가 앉아 있는 모습이 달빛에 드러났다. 그가 입은 연한 자주색 두루마기가 달빛을 받아 짙게 물들어 보였다. 손에는 긴 피리를 들었는데 보아하니 옥소(玉簫) 같았다. 나무 밑에 앉아 배를 탄 듯 몸을 좌우로 흔들던 그가 왕중양에게 읍하며 말했다.
"중양궁에서 묵다가 한밤중에 피리 소리를 들었소이다. 군(君)이 선도(禪道)를 아시는지라 감격하여 백현경(白玄經)을 함께 이야기한 셈이지요."
그는 황약사의 모습을 담담하게 쳐다보았다.
어느 틈엔지 바위 곁에도 사람 하나가 와서 서 있었다. 그는 몸에 담황색 두루마기를 걸쳤고 오른손에 염주를 들고 있었다. 그는 밤낮으로 스물네 알 염주를 한 알씩 세면서 세월을 보냈을 사람이었다. 그가 한 손으로 읍하면서 말했다.
"객이 중양궁에 당도하니 때마침 보름이고 사람들은 모두 묘체(妙諦 ; 인생을 깨달은 자)들이라 경서를 말하고 가을바람을 이야기하게 되었소이다."
왕중양은 즉시 태도가 숙연해지더니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소인은 중양궁에서 살고 중양은 제 이름이올시다. 구구(九九)는 중양일(重陽日 )이온데 누구와 기경(奇經)을 담론하리까?"
으슥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구양봉은 내심으로 무척 기뻤다.
'내가 대사막에서 갑자기 미침증이 들어 그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음풍영월을 하다가 모용쟁한테 조롱을 당했지. 그녀는 나를 글에 미친 멍청이라고 했어. 그런데 지금 보니 무림의 고수라고 하는 이자들도 모두 어줍잖은 시 몇 줄쯤은 읊을 줄 알잖아?'
그는 마음속으로 기쁘기도 하고 가소로운 생각도 들어 숨어 있는 처지만 아니었다면 소리 내어 웃어댈 뻔했다. 그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보아하니 너희들은 모두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무림 인물들인데 시를 읊은 재주는 썩 신통치가 않구나. 내가 읊어 볼 테니 어디 들어 보거라. 아마 너희들보다 못하진 않을 게다.'
하지만 그가 미처 소리를 내기도 전에 누군가가 큰소리로 말했다.
"아유, 더럽구나, 더러워. 홍칠아, 천하에서 가장 더러운 게 어떤 놈들인지 어디 말해 봐라."
다른 한 사람이 대답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더러운 놈이란 아마도 변소 치우는 사람이겠지요?"
사부라는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천하에서 가장 더러운 놈은 왕중양, 단지흥, 그리고 황약사야."
홍칠이 대답했다一
"사부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알 만합니다. 천하에서 가장 맛좋은 요리를 저는 가려 볼 줄 모르겠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당신의 '강산이개'가 맛이 좋다 하시지만 그래도 묘수주자가 만든 '원앙오진회'가 더 맛좋지 않소이까?"
사부라는 사람이 거만하게 소리쳤다.
"부아를 돋우어 날 죽일 셈이냐? 남들은 모두 팔이 안으로 굽는다던데, 너는 사부가 만든 요리가 맛있다고 말하지는 못할망정 그 묘수주자 놈의 개떡 같은 원앙오진회를 맛있다고 하니 부아를 돋우어 날 죽일 셈이구나?"
두 사람은 이렇게 주고받으면서 걸어 나왔다. 구양봉은 대뜸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두 사람 중 하나는 경성 홍안루의 요사 소씨 거렁뱅이였고 또 한 사람은 자기와 함께 황궁에 들어가 어선방의 음식을 훔쳐먹던 홍칠이었던 것이다.
―제3권에 계속―




제24장 종남산의 결투
구양봉이 본 이 다섯 사람은 당대의 5대 고수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운남 대리국의 황제 단지흥, 전진교 교주 왕중양, 동해 도화도 도주 황약사, 이밖에 경성에서 이름난 거지 무리의 두 고수인 방주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이었다.
이 다섯 사람이 이곳에 모이게 된 것은 실로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구음진경》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형님뿐이 아니로군. 이들도 대부분 그 《구음진경》때문에 왔을 거야. 이 사람들이 동시에 종남산에 모여들었으니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걸. 형님은 저 소씨 거렁뱅이 하나도 대적해 내기 어려울 텐데, 천하의 으뜸가는 고수들이 다 모였으니 보통 일이 아냐. 형님이 틈을 보아 손을 써야지 경솔하게 행동했다가는 큰코다치겠어. 하
지만 다른 사람들이 드러나 있는 데 비해 형님의 존재는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는 것이 유리한 점일 수도 있어. 형님이 혹시 그 점을 이용해서 《구음진경》을 손에 넣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왕중양의 말소리가 들렸다.
"동해 도화도 도주에서 중원에 오셨다는 말은 들은 지 오래 되었으나 오늘에야 뵙게 되는군요. 오늘 만나고 보니 실로 용봉(龍鳳)의 자태요 늠름한 인재십니다."
황약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중양 진인께서는 겸손한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들이 당신을 찾아온 것은 무슨 좋은 일 때문이 아니지요. 하지만 당신이 점잖게 나오니 우리가 어찌 당신과 싸울 수 있겠습니까?"
소씨 거렁뱅이가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모두 시깨나 외울 줄 아는 사람들이로구만. 나와 홍칠이는 그 따위와는 애시당초 담쌓았지. 하지만 당신들이 싸움을 하겠다면 우리 두 사람도 한판 끼여 볼 생각인데 말이야."
그는 먼지를 풀썩풀썩 일으키며 히히덕거렸는데 점잖은 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황약사가 끼여들었다.
"소씨 거렁뱅이, 중양 진인한테 손을 쓰기에는 당신은 좀 늙은 것 같지 않소?"
소씨 거렁뱅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보아하니 당신들은 모두 젊기 때문에 속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을 거야. 그러니 손을 쓰다가 맞아 죽기라도 하면 어쩌겠나? 누가 대단하다고 알아주겠냐구? 그러니 내 보기
엔 자네들도 얌전히 있는 게 좋겠어."
왕중양은 이 네 사람이 일시에 중양궁에 모여든 까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네 사람은 모두 고수들이다. 대리의 단씨 황제가 염불을 외워 황약사의 〈벽해조생곡〉에 맞추는 걸 보면 실로 가볍게 볼일이 아니야. 그리고 이 소씨 거렁뱅이는 일찍부터 경성에서 유명한 인물인데다가 홍칠이까지 있지 않나? 홍칠이는 결코 만만하게 봐 넘길 인물이 아니야. 이들은 필시 《구음진경》 때문에 이렇게 모여들었을게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왕중양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진인께서는 무슨 곤란한 일이 있으신 눈치십니다. 안전에 사람들이 있으니 근심을 같이 나눕시다. 제가 그 근심거리를 나눌 수 있겠는지요?"
왕중양이 대답했다.
"사실 전 아주 근심스럽습니다. 천하의 4대 고수들이 저의 중양궁에 다 모여들어 나의 머리를 찾으니 제가 어찌 근심스럽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들이 이곳에 모여든 까닭을 알 수가 없군요."
그들이 찾아온 목적이야 빤했으나 왕중양이 모르는 척 시침을 떼며 묻자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려는 사람이 없었다. 네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대리 황제 단지흥이 먼저 운을 메었다.
"중양 진인, 저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중양 진인에 물었으면 합니다만……."
"단황께서 무슨 큰일을 저한테 물으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주저하지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제가 묻고 싶은 건 다름아니라, 저의 족형(族兄) 되시는 대리 천룡사의 일속 스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께선 몇 달 전엔 중양 진인께서 《구음진경》이라는 기서를 얻었다는 소문을 들었지요. 그 분은 출가한 사람이라 결코 딴마음을 품지 않는데, 다만 무학의 도를 너무 즐기다 보니 줄곧 해 오던 불경과도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중양 진인한테 그런 기경이 있다는 말을 듣자 친히
눈으로 보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분이 대리를 떠나 이곳으로 오셨으니 필시 중양 진인의 그 기서를 보았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한데 일속 형님의 행방이 묘연하여 혹시 중양 진인께서는 알고 계시지 않을까 하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일속 대사의 얘기가 나오자 왕중양은 반가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제가 그 일속 대사를 만나 보았습니다. 대사께서는 용봉의 자태를 가진 늠름한 인재로 이 중양의 시야를 크게 넓혀 주셨습니다. 저와 일속 대사는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무예도 겨뤄 보았는데, 대사님의 일양지공은 실로 놀라워서 저와 그분은 승부를 가를 수가 없었습니다. 대사막 제일의 고수인 구양적과 함께 떠나갔는데 그 이후의 행방에 대해서는 저도 알 수가 없군요."
단지흥은 그의 말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참 이상한 일이로군. 여기로 오는 동안 그분께서 대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혹시 중원 어디서 일을 보시느라 지체하고 계신 건가?"
이때 황약사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나도 당신이 말씀하신 그 일속 대사와 겨루어 본 사람인데 제게는 묻지 않습니까?"
단지흥이 놀라서 소리쳤다.
"그런가요? 그러면 당신은 그분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황약사가 대답했다.
"알지 못하지요. 그분이 저를 만난 건 아마 이곳에 오시기 전일겁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자기와 일속이 만났던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소씨 거렁뱅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것은 그가 일속과 바둑을 두던 장소에 소씨 거렁뱅이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씨 거렁뱅이는 일속을 만난 적이 없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단지흥은 제 이야기에 취해 떠들고 있는 황약사의 말을 가볍게 흘려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도 어지간히 떨떠름한 사람이로구나. 자기가 일속 형님을 먼저 보았다면 진작에 말해 주잖구서.'
황약사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황중양이 끼여들었다.
"그날 일속 대사와 저는 무예를 겨루어 승부를 가르지 못했습니다. 제가 《구음진경》을 일속대사에게 보일 생각이 없었고, 일속대사도 저의 고충을 알게 되어 그 책을 억지로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구양적과 함께 떠났지요. 그들과 함께 왔던 처녀도 떠났습니다."
줄곧 왕중양의 말을 엿듣고 있던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형님은 그 《구음진경》을 손에 넣지 못했구나. 보아하니 형님은 저 사람에게 패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형님 성미에 절대 그냥 물러날 리가 없어.'
예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구음진경》을 손에 넣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님을 비로소 깨달았다. 형님이 해내지 못한 일을 자기가 어떻게 해낼 수 있겠는가? 구양봉은 자기가 신독행의 60년 공력을 이어받은 뒤 실제로 싸운 경험이 적어 능숙하지 못할 뿐이지 천하에 드문 고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흥이 대단히 실망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랬었군요."
소씨 거렁뱅이는 쓸데없이 말 많은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그는 두 사람이 종남산에 왔던 중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것을 듣고 짜증이 났다.
'왕중양, 그러고 보니 자네란 인물은 쓸데없이 말만 많군. 날마다 이렇게 하찮은 일을 가지고 떠들어댄단 말이지? 이래 가지고서야 어찌 무림의 총수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금의 군대와 싸울 수 있었는지 의심스럽네. 이거야말로 웃음거리가 아니고 뭔가?'
소씨 거렁뱅이가 입을 열었다.
"왕중양, 이 사람들이 당신을 찾아온 건 다른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한테 있다는 그 《구음진경》을 보기 위해서요. 소문에 의하면 그 책은 천하에 드문 기경이라고들 하던데 그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 책을 우리한테 내놓고 보이는 게 좋겠소."
황약사도 거들었다.
"나도 단황처럼 그 무슨 중을 찾자는 건 아닙니다. 나 역시 그 《구음진경)을 한번 보려고 온 것이지요 그 경서에는 아주 무서운 무공이 기재되어 있다고들 하던데 우리들 모두 함께 읽어 보는게 어떻겠습니까?"
"그 책은 확실히 제 손에 있으며 그것은 정녕 단 하나뿐인 기경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강호의 무림에 큰 우환거리가 될지도 모르는 그 책을 끝까지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때문에 중양은 그 책을 내놓을 수가 없으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왕중양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가 말했다.
"왕중양, 모두들 그 기경이 도종 황제 때의 대인물인 황상이 쓴 거라고 말하던데, 정말 그런가?"
"맞습니다. 분명히 황상이 쓴 책입니다. 이 책은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고 글자 수가 만여 자나 됩니다. 앞부분은 총칙으로 되어 있고 결말은 한 단락의 범문(梵文)으로 되어 있지요. 이 경서는 심오하고 해박하기가 일구난설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왕중양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했다.
무예를 닦는 사람들로서 훌륭한 무공비적을 만나게 되면 자연히 문인 묵객들이 훌륭한 서화(書晝)를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각별히 기쁘고 남의 손에 넘겨주기를 아까워하게 되는 법이다. 왕중양 역시 그런 심정이어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구음진경》의 내용을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소씨 거렁뱅이는 은근히 속이 뒤틀렸다.
'왕중양, 이 바보 같은 자식아! 우리가 그 책을 보려고 왔다는 걸 너도 알지 않느냐? 그런데 네 놈은 책 자락만 하고 보여 줄 수는 없다니 대체 무슨 심보냐? 그렇지 않아도 갑갑해 죽겠는데 네가 지껄이는 말을 듣자니 속이 터질 것 같다. 네 놈은 참말로 싸가지가 없구나.'
황약사도 내심 화가 났다.
'왕중양, 자랑만 할 게 아니라 그 《구음진경》을 내놓고 우리한테 보여 주면 좀 좋으냐? 하긴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내 손에 있는 것을 남에게 보여 주기는 싫을 게다. 마치 좋은 술을 집에 두고 남들한테 그 술맛을 자랑할 수는 있어도 남과 나누어 마시기는 아까운 것처럼 말이야.'
그러나 대리 황제 단지흥은 왕중양의 말을 사심 없이 듣고 있다가 그 책이 신비하다는 생각만으로 물었다.
"진인께서는 그 책이 그토록 훌륭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왜 보고 싶어하는 여러 사람들 앞에 내놓아 모두가 잘 배울 수 있도록 하기를 꺼려하시는지요 ? "
왕중양이 대답했다.
"이 《구음진경》이 뭇사람들 손에 들어가게 되면 무수한 인명을 해치게 됩니다. 이 책에 쓰인 무공의 위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들이지 요. 제가 이 《구음진경》을 사람들한테 보이기를 원치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생각 때문인 것입니다."
왕중양은 도가의 전진(全眞)으로서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승부 따위에는 그다지 집착하는 편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는 예전에 이루지 못했던 금을 다시금 항격(抗擊)하는 중임을 떠맡고 있는지라 오랫동안 《구음진경》만 익히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왕중양은 구양적을 만났을 때 이미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리고 있었다. 즉 그 경서로 무림 천하를 해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구양적의 온몸에 사악한 팍의 무예가 배어 있는데다가 사람이 무뚝뚝하여 말수가 적고 성미가 괴벽한 것을 보고는 그한테 그 책을 꺼내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구양적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 이렇듯 한꺼번에 찾아와 그 책을 내놓으라 하니 마음이 여간 심란하지 않았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뭐라고 말씀하셔도 저는 《구음진경》을 절대로 넘겨주지 못하겠습니다."
단지흥은 일국의 임금인지라 그 말을 듣고서 묵묵히 머리를 숙이고 침묵을 지켰다. 소씨 거렁뱅이는 홍칠에게 무슨 의견이라도 내놓으라는 듯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 역시 무어라 할말이 없었다.
모인 사람들 중에 가장 똑똑하고 말재주가 있는 황약사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중양 진인, 저는 한 가지 일을 똑똑히 알지 못하고 있는데 중양 진인의 가르침을 바랍니다."
황약사가 총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왕중양은 내심 경계심을 가지면서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듣자니 황상이 썼다는 이 《구음진경》을 진인께서는 우연히 얻으셨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황상이 이 책을 쓴 것은 인간 사이의 원한에 대해 간파하고 그것들이 모두 시야를 가리는 구름이나 연기와 같다는 깨달음이 있은 후입니다. 그는 후세 사람들이 자기의 올바른 기공을 얻어 천하의 절기가 매몰되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책을 쓴 것이지요."
왕중양의 대답에 황약사는 큰소리로 웃어댔다. 웃음소리가 어찌나 무례한지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이까지도 그가 방약무인하다 고 생각할 정도였다.
황약사는 웃음을 그치더니 커다란 눈을 부릅뜨고 왕중양을 쏘아 보았다.
왕중양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황 도주께서는 왜 웃으십니까?"
황약사가 대답했다.
"그 황상 때문에 웃는 겁니다. 그 사람은 정말이지 대단한 바보로군요. 그분이 《구음진경》을 남긴 건 실로 후대를 생각하여 일부 기공을 남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대대손손 이 절기를 전수해 내도록 하기 위해 그분은 고심을 한 거지요. 그런데 전진교에 왕중양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이 경서의 절기를 사유물로 삼아 통째로 삼키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황상의 영령이 계셔서 이
일을 아신다면 통곡하실 겁니다."
왕중양은 말문이 막혀 뭐라고 대답할지 난감해졌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구음진경》을 없애 버린다면 죄를 짓게 되는 것일까? 만일 내가 잘못 생각하여 황상 선배님의 업적을 없애 버린다면 어찌 무림의 죄인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경서를 저 사람들한테 내주어 그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이때 단지흥이 염불을 외기 시작했다.
"나무아미타불, 중양 진인께서는 지나치게 고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마음에 부끄러운 일이 없다면 남이 어떻게 평가하든 관계할 것 있습니까? 만일 중양 진인께서 《구음진경》이 세상에 전할 게 못 된다고 결론지으셨다면 거기엔 그만한 까닭이 있겠지요. 전 중양 진인을 믿기에, 역시 이 책이 일단 세상에 전해져 무림을 그르치게 되면 화가 적지 않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때 가서 후회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소씨 거렁뱅이가 중얼거렸다.
"저 사람 손에 있을 땐 무림이 망하지 않고 이 소씨 거렁뱅이 손에 있게 되면 무림 천하에 큰 난이 생기게 된다는 말인가?"
왕중양이 숙연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소씨 선배님께서 이 중양의 인품에 대해 의심되는 점이 있으십니까?"
그의 어조에는 은근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홍칠이 불쑥 끼여들었다.
"중양 진인께서는 천하의 영재이시고 뭇사람들의 성망을 얻고 계신데 우리 사제간이 감히 진인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해되지 않는 점이 좀 있어서 그럴 뿐이지요."
왕중양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홍칠, 난 당신이 거지 무리의 장로이며 강호에서 아주 유명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소. 오늘 밤 중양궁에 천하 무림에서 으뜸가는 몇 분의 고수들이 오셨는데 당신이 나를 납득시킨다면 그 말에 따를 용의도 있습니다."
홍칠이 큰소리로 대꾸했다.
"왕중양, 당신 역시 무림 세계에서 으뜸가는 인물입니다. 만일 당신이 스승한테서 그 《구음진경》을 물려받은 것이라면 우리들이 달려들어 빼앗으려 해도 명분이 서질 않지요. 하지만 당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을 얻었으니 그게 어디 당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구음진경》이 당신 전진교의 물건도 아닌데 당신이 없애 버리고 싶다고 해서 없애 버린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하지
만 만일 당신이 힘을 겨뤄 나와 사부님을 이긴다면 우리 거지 무리는 이 《구음진경》을 당신한테 양보하렵니다."
황약사가 손뼉을 치면서 홍칠의 말에 전적으로 찬성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중양 진인, 저는 그것을 보기 위해 도화도에서 여기까지 불원천리하고 찾아왔는데 중양 진인한테 몇 가지라도 배워 가지고 가야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왕중양이 바위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한참 동안 달을 올려다보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전 당신들과 싸우고 싶지 않지만 당신들 모두가 이 《구음진경》을 요구하고 있으니 싸워서 승부를 가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군요. 만일 중양이 당신들한테 패한다면 《구음진경》을 그대로 내놓겠습니다."
왕중양이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자 사람들은 모두 할말을 잃었다. 왕중양은 사람들의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단지흥은 존귀한 대리의 황제로서 이 《구음진경》을 탐내는 게 아니야. 무예를 배우는 사람의 호기심에서 그것이 정말로 천하의 기경인지를 알아보려는 마음일 뿐이다. 그런데 저 사람, 소씨 거렁뱅이를 보면 항상 히히덕거리는 품이 조금도 진실돼 보이질 않아. 《구음진경》이 이 사람 손에 들어가게 되면 거지 무리에 큰 풍파가 일어나겠어. 무슨 일을 하든지 신중성이 얼고 경서에 대해
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그가 만약 《구음진경》을 얻게 되면 엄청난 화근이 될 게야.'
그는 소씨 거렁뱅이 곁에 있는 홍칠을 보고 또 한 번 탄식했다.
'거지 무리에 홍칠이 있는 한 그 무리는 반드시 번성할 것이다. 이 홍칠을 얕보아서는 안 돼. 그가 거둔 성과는 결코 소씨 거렁뱅이만 못하지 않거든.'
왕중양은 이제 한편에서 쓴웃음을 짓고 있는 황약사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 몇 사람 중에서 가장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이 동해 도화도 도주로구나. 이 사람은 경륜이 높고 속에 잔꾀와 모략이 가득한 사람으로 만일 이 사람이 《구음진경》을 얻게 된다면 어찌 천하가 어지러워지지 않겠는가?'
달빛이 교교한 종남산 나무숲에 다섯 고수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구음진경》을 차지하기 위해 이곳에서 승부를 가리게 된 것이다.
왕중양이 물었다.
"여러분이 함께 덤비시렵니까, 아니면 이 중양이 한 분 한 분씩 상대할까요?"
황약사는 생각했다.
'이 단지흥의 염불을 들어보니 무공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 내가 만약 저 사람과 겨룬다면 기껏해야 비기고 말 거다. 그러니 저 사람으로 하여금 중양한테 손을 쓰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가 입을 열었다.
"여럿이 달려들어 한 사람을 능욕하는 건 영웅이 할 짓이 아니지요. 제 보기엔 단황께서도 꼭 저와 같은 의견일 줄 압니다. 단황께서 먼저 시범을 보여 주시면 다음에 우리들도 중양과 차례로 시합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단지흥은 선한 사람이지만 황약사의 뜻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황 도주께서 저더러 주견을 내놓으라고 하시는데, 제 생각엔 각각 한 번씩 세 번 시합하여 승부를 결정하도록 하면 좋을 성싶습니다."
왕중양은 속으로 냉소했다. 모두가 자기 한 사람을 상대로 싸우려 든다면 자신의 무예가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네 사람하고 싸우는데 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왕중양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당신들이 어떤 방법을 내세워도 나는 당신들과 싸울 수밖에 없다. 설사 내가 져서 생명을 잃게 된다 하더라도.'
단지흥이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엔 세 차례 시합하면 될 것 같은데 나와 중양 진인이 첫 번째로 맞붙고 중양 진인과 소씨 선배가 두 번째로 맞붙고 마지막으로 황 도주께서 중양 진인과 맞붙는 게 좋겠습니다."
단지흥의 말에 네 사람의 마음은 한 덩어리가 되었다. 세상의 일이란 다 이러한 바, 말하기 힘들고 해내기 어려운 것도 일단 하기로 하고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되면 대단할 게 없다. 무슨 일이든 기어이 해내려고만 든다면 못할 게 어디 있겠는가?
한쪽 구석에 숨어 숨죽이며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구양봉이 속으로 생각했다.
'천하의 가장 뛰어난 무림 고수들의 재주를 다 볼 수 있게 됐구나. 내가 북강에 있을 때 사부님은 진짜 고수들과 맞붙어 보지 못했다고 했었지. 사숙만 하더라도 여기에 모인 사람들과는 겨루어 볼 기회가 없었을 거야. 이 사람들은 모두 천하 무림의 대종사(大宗師)들이라 사부의 공력을 받은 나 역시도 이들과 겨루면 아마 당해 낼 수 없을 거다.'
구양봉이 한참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단지흥이 두루마기를 펄럭이며 천천히 왕중양에게 다가들었다.
왕중양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무학에서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은 매우 유명한 것으로서 함부로 얕잡아 볼 게 아니었다.
단지흥이 입을 열었다.
"중양 진인, 제가 여쭤 볼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연해졌다. 이건 시합인데 첫 시합에서 몇 마디 그한테 묻는다는 것은 왕중양의 기를 살려 주는 셈이 아닌가?
하지만 왕중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흥은 일국의 임금이기 때문에 그가 말하려는 몇 마디는 반드시 무게가 있는 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 중양은 단황의 가르침을 들으려 하오니 주저 말고 말씀하십시오."
왕중양이 공손하게 대하자 단지흥이 다시 정중하게 물었다.
"그 《구음진경》이 세속에 전파되면 사람들이 악을 저지르게 될 것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기억하건대, 그 책에 기재된 일부 장법의 공법은 천화(天和)를 크게 어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경서를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며 그것이 무림을 해칠까 두려운 것입니다."
단지흥이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틀렸도다, 그대는 틀렸도다. 불조(佛祖)가 선(禪)을 말하는데 석가가 한옆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노라. 이것은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인데 그대는 무슨 연고인지 아는가?"
왕중양도 이 불경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 내용에 의하면, 불조가 선을 강의할 때 뭇사람들은 숙연히 있는데 석가만이 한옆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다. 불조는 석가가 선기(禪機)를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가사와 바리때를 석가에게 넘겨주었다.
이것은 거의 누구나 다 아는 불경 이야기이지만 이 시각 단지흥을 통해 듣게 되자 왕중양은 새삼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는 숙연해져서 입을 열었다.
"단황께서 좀더 상세히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단지흥이 말했다.
"당신 손에 《구음진경》이 놓이게 된 것은 하늘이 사람을 빌어 당신 손에 놓이게 한 것입니다. 공로니 과실이니, 옳으니 틀리니 하는 것은 모두 인심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그것을 얻은 것도 하늘의 뜻이요 그것을 잃는 것도 하늘의 뜻이지요. 하늘의 뜻이라면 사람의 힘으로 그것을 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구음진경》을 없애 버리려고 하는데 그야말로 넘
치는 생각이지요."
왕중양은 크게 깨닫고 단지흥에게 예를 올렸다. 그의 한마디에 경서를 얻은 후 가졌던 모든 번뇌가 연무(烟霧)로 화하여 하늘로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황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는구나. 내가 쓸데없는 근심을 하고 있었구나.'
단지흥이 말을 이었다.
"인생은 고달프고 짧은 것이므로 저도 기실 중양 진인과 다툴 필요가 업습니다. 하지만 저도 세속의 기분을 초탈하지 못한지라 호승심이 없지 않습니다. 중양 진인, 해 봅시다."
왕중양도 정색을 하였다. 그는 단지흥의 무공이 천하에서 일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리 단씨의 무공은 그 가학(家學)이 해박하고 과인하여 그것에 맞설 경우 대체로 패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지금 자기가 그것과 맞서는 판이니 아주 신중해야 했다. 단지흥이 담백하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진짜 신기(神技)를 보여주지 않는다 해도 그의 무공은 여전히 대단할 것이었다.
단지흥이 왕중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중양 진인, 어서 손을 쓰시오."
왕중양은 천천히 나아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것은 그의 선천공(先天公)의 출수식(出手式)으로서 '명심향불(明心向佛)'이었다. 이 선천공은 일종의 기공으로서 손을 내미는 데 일정한 법칙이 없이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느낄 때 손을 내밀 따름이다. 선천공의 화식(化式)은 상대방이 술법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면 그 변화 과정을 보아 그에 따라 법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단지흥은 일양지공을 써서 왕중양과 맞섰다. 그는 우선 일양지공으로 육맥신검 가운데 소충검(少凉創)을 펼쳐 냈다. 이 검법은 손가락 하나만을 사용할 뿐이지만 손가락 뒤에는 팔이 있고 팔 뒤에서는 몸이 받쳐 주므로 극히 무서운 것이었다.
왕중양은 비록 선천신공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단지흥이 내력으로 내포는 법수의 위력에 몸을 피하기만 했다. 그러다 왕중양은 그 일양지신공에 몸이 찔려 '퍽퍽!' 하는 소리가 났다. 다행히도 그것들은 모두 요해처가 아니었고 혈도를 겨냥한 게 아니었다.
왕중양은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선천공으로 전신을 충만시켜 온몸을 바람 받은 돛폭처럼 부풀려 내력으로 가득 차게 했다. 단지흥이 일발지로 그의 몸을 찔렀으나 의복만 뚫고 들어갔을 뿐 몸은 상하지 않았다. 왕중양은 전진검법을 썼는데 왼손을 검처럼 쓰면서 오른쪽 손바닥을 내밀었다. 전진검법은 일양지공과 대치되어 두 사람의 무공은 점점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워졌다.
싸움을 구경하는 동안 구양봉은 아주 놀랍고 신기함에 가슴이 다 설레었다. 그는 과거와는 달라서 단지흥이 손을 내미는 것만 보고도 그의 일양지공이 어느 정도로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만일 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더라면 난 아마도 피하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봉황력 경공을 쓰기만 하면 그것을 쉽사리 피할 수가 있어. 만일 그가 손가락을 내밀기만 하면 난 합마공으로 대적하여 겨루어 낼 수 있지. 하지만 저 사람과 맞붙을 때 저 귀신같은 손가락에 찔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군. 만일 저 손가락에 찔리기만 하면 견디기가 여간 어렵지 않겠어.'
왕중양의 전진검법을 보니 실로 대가다운 기백이며 명가의 풍도가 엿보이는 것 같았다. 검을 쓸 때는 대체로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군자의 검을 쓰는 법도이다. 무제무사(無詭無邪)하고 불편불격 (不偏不激)한 것이, 중양 진인처럼 검을 쓰는 사람은 실로 천하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참 열전을 벌이다가 왕중양이 갑자기 손을 멈추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단황께 이 중양은 할말이 없습니다. 단황께서 《구음진경》을 보시려거든 보십시오.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은 절묘하기 그지없어 이 중양이 진심으로 탄복하는 바입니다."
단지흥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중양 진인, 저는 자그마한 나라의 임금입니다. 변경 해관의 작은 관리가 우연히 하늘의 인연을 얻어 일국의 임금이 된 것으로서 심히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대리는 재난이 많은 고장으로 저는 그것만 돌보기도 벅찬데 어느 겨를에 《구음진경》을 읽고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황약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대리에서 제왕 노릇을 하느라고 강호의 일에 간섭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로군. 행동거지는 물론 사람됨을 봐도 자기의 제왕실가(帶王室家)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거든. 이런 사람은
《구음진경》을 얻는다고 해도 화가 되진 않을 거야. 저 사람이 《구음진경》을 요구하지 않는 데는 아마도 자기 나름의 생각이 있겠지'
황약사가 볼 때 왕중양과 단지흥 사이의 대결에서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하지 않고 손이 나가는 대로 대처하는 것 같았다. 몇십 합을 싸우는데 법수는 아주 교묘해도 그다지 위험한 장면은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황약사는 속으로 은근히 냉소하면서 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일양지공이라는 게 겨우 이 정도이며 왕중양은 고작 전진검법이니 전진파장법(全眞派掌法)밖에 갖고 있지 못한가 하고 생각했다.
단지흥이 입을 열었다.
"제가 중양 진인과 시합을 해 보니 이 《구음진경》은 오로지 중양 진인의 손에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하늘이 《구음진경》을 내려보냄에 사람을 바로 골랐다고 여겨집니다. 중양 진인께서 이 경서를 가지고 천하의 무림에 복을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단지흥은 말을 마치고 몸을 훌쩍 날려 뒤로 물러서더니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황약사는 그쯤에서 단지흥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못마땅한 기색으로 말했다.
"보아하니 단황께서는 중양 진인과 더는 시합하고 싶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단지흥이 대답했다.
"난 이미 중양 진인과 시합을 했습니다. 중양 진인이 이렇듯 늠름할 수 있는 것은 《구음진경》이 있고 없고와 무관한 것인 줄 압니다."
한쪽에서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던 소씨 거렁뱅이가 드디어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왕중양, 당신이 중원 무림의 대단한 고수라는 걸 난 알고 있소. 나 소씨 거렁뱅이가 혹시 당신의 적수가 되지 못할 수도 있소. 하지만 나한테는 거지 무리의 두 가지 신기가 있어 당신과 엇비슷이 맞설 수는 있을 거요. 난 당신한테 먼저 나의 타구봉법을 맛보이고 그 다음에는 강룡십팔장을 맛보이겠소."
왕중양도 개방파의 이 두 가지 절기를 알고 있었다.
"좋습니다. 선배님께서 손을 써 보십시오."
소씨 거렁뱅이가 손에 곤봉을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왕중양, 죄를 짓게 되었소. 거지들의 몽둥이란 워낙 개를 때림으로써 자기를 보호하는 것인데, 오늘 중양 진인을 적으로 삼았으니 이 타구봉법이 이로 인해 빛을 내게 되는가 보오."
왕중양은 속으로 쓴웃음을 웃었다. 그는 소씨 거렁뱅이가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쓴 인간임은 알고 있었지만 입만 벌리면 타구봉 타령을 하는 데는 분노가 솟구쳤다.
'그래, 네가 전진교의 교주 왕중양을 한 마리의 미친개로밖에 여기지 않는대서야 말이나 되는 일이냐?'
왕중양이 아무리 품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어찌 참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조용히 서서 두 손을 들어 자세를 갖추며 말했다.
"소 선배님, 어서 시작해 보시지요!"
소씨 거렁뱅이도 손을 씀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였다. 그는 손을 쓸 때마다 타구봉법 중의 '점(粘)'자에 집착하여 '봉조나견(棒조(兆)癩犬)'법으로 왕중양을 밀어붙이려 했다. 왕중양은 몸을 훌쩍 날리면서 그의 곤봉을 피했다. 그는 손바닥으로 반격을 가했는데 그 손바닥의 위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팍!'하는 큰소리와 함께 소씨 거렁뱅이의 몸뚱이가 한쪽으로 밀려 탔다. 그 바람에 소씨 거
렁뱅이는 손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소씨 거렁뱅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날리 강호의 세속 먼지 속을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사람인지라 명성 따위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왕중양, 조심하게!"
그는 몽둥이를 들고 왕중양을 향해 재도전을 했다.
몽둥이가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가볍게 솟아오르는가 싶으면 급작스레 내리꽂히고, 또 어느새 허공을 휘저으면서 조화를 부렸다. 그 봉법이 하도 괴이하고 놀라워 사람들은 모두 감탄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왕중양은 소씨 거렁뱅이를 따라 이동하기만 하면서 주먹 한 번 제대로 내밀지 못하는 태도였다. 그는 소씨 거렁뱅이의 주변을 왔다갔다할 뿐 어떻게 손을 쓰는지조차 볼 수가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의 타구봉법은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평소에 다른 사람과 맞붙었더라면 벌써 백 명의 호한이라도 때려눕혔을 것이고 한 무리의 미친 개라도 몽땅 쓰러 눕혔으련만 왕중양에 관한 한 사정이 달랐다.
소씨 거렁뱅이가 소리를 질렀다.
"왕중양, 내게 강룡십팔장이라는 절기가 있네. 자네 한번 시험해 보려나? 나의 이 장법에 견뎌 낼 수 있겠는가 말이야."
왕중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천천히 대답했다.
"선배님의 절기를 배우도록 하지요."
소씨 거렁뱅이가 소리쳤다.
"왕중양, 너무 겸손 떨지 말게. 만일 자네가 나의 강룡십팔장을 이겨 낸다면 내가 자넬 선배로 모시지. 그리고 더는 자네와 그 《구음진경 》을 다투지 않겠네."
소씨 거렁뱅이는 타구봉을 팽개치듯 내던졌다. 곤봉은 공중에서 휙 소리를 내며 곧장 아래로 내려와 홍칠의 손에 떨어졌다. 홍칠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것을 손에 받아 쥐었다.
곤봉을 받아 쥐는 흥칠의 재주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들은 그제야 이 홍칠의 무공이 소씨 거렁뱅이 못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왕중양과 겨루는 바람에 그가 재주를 보여 줄 수 없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거지 무리의 법도에 대해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의 강룡십팔장은 대단한 무공으로서 힘이 아주 좋아야 그걸 쓸 수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한평생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아 근 60년에 달하는 동자공(童子功)을 몸에 지닌 탓으로 그가 이 강룡십팔장을 사용할라치면 여간 무시무시한 게 아니었다. 그가 손바닥을 내밀어 '견룡재전'을 밀어붙이자 '팍!' 하는 큰소리와 함께 중양의 몸 뒤에 있던 돌이 밀려 넘어지며 그대로 박살이
났다.
왕중양은 가볍게 날아서 몸을 옮겼다. 그는 선천신공을 써서 소씨 거렁뱅이의 손바닥을 피했는데 털끝만큼도 상한 곳이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당황한 나머지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거지 무리라고 해도 천하에서 가장 큰 거지 무리가 아닌가? 만일 이 소씨 거렁뱅이가 왕중양과 일전을 벌여 우리 거지 무리의 두 가지 신기를 다 쓰고서도 그를 당해 내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전부 소씨 거렁뱅이를 무능하다고 비옷을 것이다. 이 일을 가볍게 처리해서는 안 되겠다.'
예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또다시 '항룡유회'란 술법을 썼다. 손을 수평으로 내미는 술법으로 그가 머리를 돌렸다가 다시 몸을 돌이키면서 손을 내밀자 용맹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이 소리는 아까의 소리보다 더 둔탁했다. '쿵!' 하는 소리가 나자 왕중양도 두어 걸음 물러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왕중양이 여전히 행약무사(行若無事)한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이 소씨 거렁뱅이가 이렇게 패하고야 마는 것인가? 이 왕중양이란 물건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인간인가? 두 번이나 손바닥으로 가격했는데도 여전히 끄떡없으니, 그래 신선이라도 된단 말인가?'
소씨 거렁뱅이가 어찌 알겠는가. 왕중양은 워낙 그보다 무공이 높았지만 《구음진경》을 본 후로는 그 무공이 자기도 모르게 한 차원 높아진 상태였다. 그는 《구음진경)에 있는 무공의 정지(精旨)를 깨달았으므로 무학의 도에 관한 한 이곳에 모인 그 누구보다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는 방금 자기의 신장(神掌)으로 소씨 거렁뱅이의 강맹장법(剛猛拳法)에 대처하려다가 갑자기 《구음진경
》에 있는 한 단락의 말을 기억해 냈다.
〈혹시 몸이 근질거리거나, 혹시 몸이 물건에 눌린 듯이 무겁거나, 혹시 몸이 가벼워 날 것 같거나, 혹시 묶인 것 같거나, 혹시 추위로 열이 나거나, 혹시 조급하게 움직이거나, 혹시 약물과 서로 접촉하면, 몸의 털이 놀라서 곤두서고 때로는 기뻐서 혼절하게 된다. 무릇 이런 갖가지는 반드시 아래의 술법으로써 신통(神通)에 도입하여야 한다.〉
이 말은 《구음진경》의 총칙에 있는 말이다. 왕중양이 처음 《구음진경》을 읽었을 당시에는 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소씨 거렁뱅이와 시합을 하노라니 갑자기 그 뜻이 명확히 깨달아지는 것이었다. 그는 기를 이끌어 입원(入元)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법으로써 일류의 고수를 대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일 날리는 나뭇잎을 부수뜨리려고 한다면 아무리 큰 힘을 쓴다고
해도 소용이 없게 된다. 오로지 그것을 맞춰서 날려 버리든지 맞춰서 물리치든지 해야지 그것을 부수자고 천 근의 힘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이리하여 소씨 거렁뱅이가 힘을 쓰면 왕중양은 날리는 나뭇잎처럼 몸을 움직이니 소씨 거렁뱅이가 아무리 힘을 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졌다. 왕중양이 자기의 기력을 조금도 받지 않자 소씨 거렁뱅이는 조급해서 점점 드세게 십팔장까지 가격하여 최후의 수단인 '용전어야'까지 다 써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상중양의 어느 한곳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자 얼른 손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왕중양, 자네가 속임수를 쓰면 이겨도 무림인답지 못해."
왕중양이 되물었다.
"선배님, 제가 어쨌단 말씀입니까?"
"내 보기에 임자의 피하는 재간이 보통이 아닌데 그 무공을 무엇이라고 부르나?"
"선천공이라 부릅니다."
소씨 거렁뱅이가 다시 물었다.
"그건 《구음진경》에 기재된 무공인가?"
왕중양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선천공은 예전에 내가 익힌 것이긴 하나 《구음진경》을 본 후에야 비로소 그 대단한 힘을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구음진경》에 있는 무공과 결합되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왕중양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이 무공은 비록 제가 만든 것이지만 그것을 확실히 깨달은 건 《구음진경》을 읽고 나서의 일입니다."
소씨 거렁뱅이와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구음진경》을 보고 이런 기묘한 술법을 만들어 내는 걸 보니 이 책의 위력은 과연 대단하구나.'
단지흥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구음진경》에 대한 욕심이 더욱 굴뚝같아졌다.
소씨 거렁뱅이가 입을 열었다.
"왕중양, 이건 부당해. 이건 부당하단 말이야/"
왕중양이 대답했다.
"무엇이 부당하단 말씀입니까? 똑똑히 말씀해 보십시오. 만일 선배님의 말씀에 일리가 있다고 느껴지면 선배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소씨 거렁뱅이는 생각했다.
'이 늙은 거지는 지금까지 남한테 억지를 써 본 일이 없다만 이번만큼은 한 번 억지를 써 봐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거지 무리의 처지가 곤란하게 되고 이 소씨도 면목이 서지 않게 된다.'
예까지 생각하고 난 소씨 거렁뱅이는 입을 열었다.
"왕중양, 자넨 그저 기서 한 부를 얻었을 따름이야. 사부님한테서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고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도 아닌데 남이 쓴 기서를 얻어 가지고 그걸 통해 남을 이긴다면 천하의 영웅들이 어찌 자네한테 탄복하겠나?"
"그렇다면 선배님 생각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만일 제가 저 자신만의 무예로 선배님을 이긴다면 선배님께서는 진심으로 승복하실 수 있습니까?"
소씨 거렁뱅이는 생각했다.
"자네한테 그런 재주가 있다면야 이 소씨 거렁뱅이가 자넬 이겨낼 수 없지. 하지만 자네는 경신공(輕身功)이 뛰어날 따름이야. 자네한테 이것 말고 무슨 훌륭한 재주가 있나? 나의 내력은 자네보다 훨씬 나아.'
소씨 거렁뱅이는 입을 열었다.
"왕중양, 우리 단 한 가지, 내력을 겨루어 보는 게 어떤가? 자네도 이 《구음진경》을 얻은 지 몇 달밖에 안 되었다고 했으니 그것을 제대로 보았을 리 만무하지. 그러니 내력을 겨뤄 누구의 내력이 더 강한가를 보잔 말야. 그것으로 승부를 정하자구. 어떤가?"
왕중양은 사리가 밝은 사람이었다. 그는 소씨 거렁뱅이의 심사를 꿰뚫어 보고 속으로 탄식했다.
'강호의 인간들은 모두 이러한가! 네가 날 따져 보고 차가 널 따져 보면서 이렇게 왔다갔다하다가 세월을 낭비하고 인심을 저버리고 사람들의 우선(友善)마저 없어지고, 다만 간사하고 교활한 것밖에 남지 않게 되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천도(天道)가 이러할진대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랴. 그는 결사적으로 싸우다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소씨 거렁뱅이와 같이 이름 높은 자, 대리 단지흥과 같이 위명이 대단한 자, 황약사와 같은 기재(奇才), 이들의 손에 죽는다면 억울할 것도 없으며 조무래기들 손에 죽기보다는 백 배 나을 것이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다른 선배들의 의견도 들어 보도록 하지요."
옆에 서 있던 단지흥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좋소, 중양 진인. 보아하니 내가 정말 당신을 잘못 보지 않았군."
단지흥은 이렇게 말하곤 덧붙여 부처의 이야기를 읊었는데, 바로 불조께서 구구 팔십일 회를 도는 수난의 이야기였다. 그 내용에 귀를 기울이던 왕중양은 새삼 용기가 솟구쳤다.
'보아하니 내가 이렇게 죽는다 해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구나. 이 대리의 단지흥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저분이 나의 심사를 이해하는 한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왕중양은 가부좌를 틀고 땅바닥에 앉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소씨 거렁뱅이의 손과 맞붙이고 내력을 겨루기 시작했다.
사실 왕중양과 소씨 거렁뱅이 같은 고수들은 모두 극히 고명한 술법을 쓰고 있으므로 여간해서 내력을 겨루는 일이 없었다. 일단 내력을 겨루면 두 사람 모두에게 큰 위험이 따르게 되는데, 둘 다 패하거나 크게 상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흥은 이 일의 위험성을 알았지만 그냥 지켜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둘 다 무림의 기재로, 남의 권고를 쉽사리 들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황약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씨 거렁뱅이의 이 수작은 그야말로 억지에 불과하구나. 저 사람 곁엔 지금 홍칠이가 있다. 이 홍칠이는 무공이 소씨 거렁뱅이보다 약하지 않고 지혜에 있어서는 소씨 거렁뱅이보다 썩 나은 것 같다. 그러니 자기가 왕중양과의 시합에서 패하게 된들 흥칠이가 있으니 무슨 걱정이겠는가 말이다.'
이때 멀리 사람들의 소리와 함께 횃불들이 움직여 오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마옥과 구처기가 중양궁 사람들을 이끌고 달려오는 중이었다. 그들은 오자마자 즉시 진을 벌여 바위 아래를 물샐틈없이 둘러쌌다. 그들은 땅바닥에 앉아 중양 진인과 소씨 거렁뱅이의 겨룸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내력은 절정에 달하여 왕중양의 손이 덜던 떨리고 있었다. 그는 소씨 거렁뱅이를 눈여겨보다가 그의 내공이 자기보다 못한 것을 알고 천천히 말했다.
"소 선배님, 제가 보건대 이 시합은 비긴 것 같습니다."
소씨 거렁뱅이는 큰소리로 웃었다. 한편으로 그는 왕중양의 내공이 순전히 정파인 데다가 내공으로 겨루고 있으면서도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소씨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다만 웃음으로 시합을 그만두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표시했다.
왕중양은 내심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이 소씨 거렁뱅이는 천하의 기인이다. 소씨 거렁뱅이와 같은 세속 사람이 만일 왕중양한테 패한 사실이 알려진다면 천하 영웅들의 비웃음을 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 왕중양이 모르고 있는 점도 있었다. 전진파의 내공심법은 천하 정종(正宗)의 심법으로서 내공이 샘솟듯 했다. 때문에 소씨 거렁뱅이는 왕중양과 겨루는 것이 아주 힘들 수밖에 없
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머리는 점점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이 열기가 계속 상승하자 두 사람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수시로 변했다. 가장 중요한 고비에 들여선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승패 여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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