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북개 홍칠공 3

3학년2반 | 2022.02.20 07:15:38 댓글: 1 조회: 476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983

제12장 운낭의 죽음
구양봉이 독사장을 질풍같이 휘둘러대는 바람에 소씨 거렁뱅이는 몹시 당황했다.
'이런 고수는 정말 처음 대하는데. 대협 왕중양, 대리의 단황나으리, 그 도화도에 있는 황노사(黃老祀)를 제외하고는 천하의 고수는 없는 줄 알았더니, 이런 구양봉이 나타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한편 구양봉이 다루는 독사장법수는 갈수록 절묘한 신기를 표출해냈다. 독사장 자루에 매달린 작은 뱀들이 바로 눈앞에서 슉슉 혀를 내물며 지나다녔다. 자칫하다가는 그 요상스런 뱀들에게 물린 판이었다.
그 뱀을 본 소씨 거렁뱅이는 괴상하기 그지 없어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그 작은 뱀은 여느 큰뱀들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대가리가 유독 가늘고 긴데 비하여 눈언저리가 타들어간듯 시커멓게 칠해져있어 눈이 몹시 표독스럽게 보였다. 몸에 돋아난 비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른 독사들의 것보다 비늘이 컸고 황록색을 띠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았다. 소씨 거렁뱅이도 늘상 뱀을 가지고 놀던 사람이었지만 이런 독사는 사실
처음 대하기에 속으로는 은근히 겁을 집어먹고 있는 중이었다.
위기에 봉착한 소씨 거렁뱅이는 개방의 녹옥죽봉을 얼른 꺼내어 그 끝을 구양봉을 향해 겨누었다. 악전고투가 예상되기는 했지만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되도록 구양봉의 독사장 끝에 감겨 있는 뱀이 자기 몸에 닿지 못하도록 애를 썼다. 일단 그 뱀의 날카로운 이빨에 스치기라도 하는 날엔 끝장이었다. 구양봉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물론 목숨마저 간수하지 못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자리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물러설 수 없다는 질긴 승부욕이 빚어낸 끈이기도 했다. 그 만큼 두 사람의 무예는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막상막하의 상태에서 잠시 머물고 있는 셈이었다.
구양봉은 서서히 독사장에 감겨 있는 독사를 이용해 우세를 점하려고 했다. 한편 소씨 거렁뱅이는 조심스럽게 녹옥죽봉을 휘두르며 그 두 마리의 작은 독사에게서 눈을 떼지를 않았다.
'저 두 마리의 독사를 때려죽인다고 해도 결코 무사할 수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을 게다.'
하며 생각의 끝자락을 순간 거둔 소씨 거렁뱅이가 약간 솟구치듯 몸을 날렸다. 녹옥죽봉을 잽싸게 휘둘러 바로 앞에 있던 독사의 몸둥이를 내리쳤던 것이다. 녹옥죽봉은 독사의 몸을 떠나 독사장과 차가운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아니 이럴수가!"
그러나 즉사한 줄 알았던 독사가 여전히 꿈틀대기 시작했다. 결국 녹옥죽봉과 녹사장이 순간 몇백근도 넘을 듯한 육중한 무게로 힘을 겨누게 되었다. 결국 독사는 죽지를 않았다. 더욱 끈질기게 두 가닥의 혀를 날름거리며 어느새 녹옥죽봉 끝으로 건너오려고 스멀스멀 몸뚱이를 내뻗었다. 당황한 소씨 거렁뱅이는 얼른 죽봉을 옆으로 거두면서 법수를 바꾸기로 작정했다.
두 사람은 벌써 몇십합이 넘는 사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승부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소씨 거렁뱅이는 차츰 법수가 딸리는 듯했다.
위기를 느낀 소씨 거렁뱅이는 기회를 모색하며 잠시 긴장을 늦추었다.
'이 구양봉이란 작자는 과연 어디에서 불쑥 나타났을까? 철장방 놈들이 서역으로부터 불러들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호, 이 놈과 맞붙은 게 결국 신수사나운 꼴이 되고 말았구나!'
소씨 거렁뱅이는 원래 절에서 뛰쳐나와 옥면검객 호심을 구하려고 했던 일이었는데 뜻하지 않은 서독 구양봉과 대면하게 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제 몸뚱어리조차 돌볼 수 없게 된 지금 어찌 호심을 구할 수 있겠는가? 호심이 두번 비명을 지른 뒤에 잠잠해있는 걸 보면 처지가 아주 급박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몸을 둘로 가르지 못하는 이상 옥면검객 호심을 구할 길은 없는 노릇이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얼굴은 움직이지 않은 채 재빨리 눈을 돌려 한쪽을 살폈다. 옥면검객 호심은 이미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상태였다. 그 흉악한 몰골을 지닌 자가 검으로 그의 오른쪽 손을 쿡 찍어 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 자는 입꼬리를 옆으로 찢어 웃으며 사납게 내뱉었다.
"흐흐흐, 네 놈이 개방의 장로이든 개방의 장로가 아니든 죽더라도 이 점만은 똑똑히 알아두어라. 너희들 개방놈들은 모조리 죽어야 해! 내가 너희들을 모두 죽여 불쏘시개로 삼겠다!"
그리곤 갑자기 손바닥을 펴 호심의 가슴을 장을 향해 한방 먹였다. 만약에 그가 알아준다는 고수였다면 호심은 영락없이 숨통이 멎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의 공격은 별 것이 아니어서 호심은 약간 피를 토하였을 뿐 여전히 가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한쪽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호심이 힘들여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고. 주, 죽일 생각이면 제대로 손을 써야지."
하는 욕설을 듣자 그 자가 다시 허연 이빨을 내보일 듯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네 놈은 개방을 대단한 것으로 보느냐? 오늘은 이 집 일을 상관하고 내일은 저 집 일을 상관하면서 마치 천하의 대사는 몽땅 너희 개방에서 관계해야 하는 것처럼 여긴단 말이냐. 그러니 어찌 남의 부아를 돋구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흐흐흐, 네 놈의 개방은 이제 사면초가에 빠졌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오늘부터 네 놈의 개방에 속한 자들은 하나둘씩 씨를 말리게 될 것이다!"
팍! 그리곤 또다시 호심의 아랫배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웁!"
호심은 비명을 내지르며 온몸을 떨었다. 아픔을 어루만질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오른손이 검 끝에 눌려 있기 ㄸ문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호심은 결국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지경으로 곤두박질치고 만 꼴이었다. 호심은 온몸으로 아픔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오른손이 검 끝에 눌려있는 데다가 등어리와 팔에는 독약이 묻는 바람에 더욱 곤혹스러웠다. 그 독은 서서히 헤어진 살 속으로 스며들어 훤히 보이는 뼈까지 강한 통증으로 갉아대는 듯했다.
"이 천하의 몹쓸 놈들아! 네 놈들은 영락없는 철장방의 악한들이로구나. 난 죽더라도 네 놈을 꼭 죽여버리고 말것이다!"
하고 호심이 다시 힘을 다해 고함을 내지르자 그 자의 안색이 돌변했다.
"죽어가면서도 붙어있는 주둥이라고 날 욕한다는 말이냐?"
그러면서 네 손가락을 곧추 편 손바닥으로 호심의 아랫배를 힘껏 찔렀다.
"우욱!"
그 일격은 무서운 것이었다. 원래 그 자의 다섯손가락에는 각각 강쇠로 된 가락지를 씌워져 있었기에 그 아픔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자는 그것으로 끝내지를 않았다. 그 자가 다시 호심의 아랫배 깊이 찔렀던 손가락을 안으로 오무려 밖으로 끌어당겼다.
"으아악!"
호심이 곧 고개를 꺾어 스스로 숨을 놓을 듯 비명을 질러댔다. 그 바람 검끝에 눌려있던 오른손 손가락이 피를 튀기며 잘려나갔다.
"으으...... 아악!"
다시금 호심이 고통을 무는 소리를 내지르며 잠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호심이 갑자기 솟아오르듯 그 자에게 덮쳐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깊이 독이 퍼져 있는 몸이라 그 자 가까이 닿을 수가 없었다. 힘이 모자라 그 자 앞에 손가락 끝조차 내밀지를 못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는 다만 화기를 누르지 못해 용솟음칠 것같은 눈빛으로 그 자를 노려볼 뿐이었다. 호심의 아랫배로 피가 그침없이 뿜어져나왔다. 그리곤 곧 피물을 흥건히 뒤
집어쓴 창자가 흘러내렸다. 호심은 자신의 배를 내려보며 분노했다.
"내가 저 놈에게...... 한칼에 베어버렸어야 했는데, 윽!"
그러나 호심은 더이상 어떤 분노의 외침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호심은 그 자리에서 풀썩 고개를 꺾더니 쓰러지고 말았다. 그뿐이었다. 그것으로 호심은 영원히 숨이 끊어지고 만 것이었다.
놈들은 휘둥러그러진 눈으로 땅바닥에 널부러진 호심을 내려다보았다. 호심은 반면에 아직 노기가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눈을 그대로 부릅 뜬 채 죽어있었다. 모두들 호심의 무서운 최후를 목격하고는 공포심을 느끼는 듯했다. 몸을 떨며 그 자리에 굳어버리는 자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더 싸우고 싶은 마음도 나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호심이 죽자 비로소 소씨 거렁뱅이와 구양봉이 싸우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씨 거렁뱅이는 법수가 점점 떨어져가는 데다 다른 놈들까지 몰려오니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옥면검객 호심이 죽지 않았다면 이 놈들이 이렇게 몰려올 수 없었을 거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소씨 거렁뱅이는 불현 투지를 잃어버린 채 도망갈 틈만 엿보았다.
그가 방금 구양봉과 맞붙었을 때만 하더라도 도망을 하려고 들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젠 이십여명이나 되는 놈들에게 둘러싸였고 또 놈들이 저마다 독액이 가득 들어찬 죽통을 들고 있어 그도 쉬운 일이 아닌 듯싶었다.
그 순간 흉악한 작자가 나서 구양봉에게 소리쳤다.
"구양선생, 우리가 저 놈에게 독약을 뿌릴까요? 간단히 독약으로 죽여버리고 맙시다!"
그러자 구양봉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헛헛헛, 임자들의 도움은 필요없으니 저기 한켠으로 물러나 구경이나 하게!"
그러면서 구양봉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중원에서 명성이 대단치 않으므로 이 서독의 이름을 아는 자들이 많지 못할 것이다. 오늘 이 소씨 거렁뱅이를 거꾸러뜨려 너희들에게 이 구양봉의 진가를 보여주마.'
구양봉은 점점 정신이 깨어나고 법수와 동작 역시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절묘해지기 시작했다.
구양봉의 이 독사장법은 원래 그의 형인 구양적의 것이었다. 하지만 구양적의 독사장법은 부드러운 것으로서 그 법수와 동작은 신기롭고 변화가 많은 특징을 위주로 하였었다. 반면에 구양봉의 독사장법은 구양적의 그것을 바탕으로 더욱 맹렬하고 강력한 부분들을 가미해 발전시켰던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도 그놈의 무서운 두 마리의 독사만 아니라면 더 대담하게 싸울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두 마리의 작은 뱀이 독사장 자루 끝에 징그럽게 감겨있으면서 수시로 혀를 빼문 대가리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독사장 자루가 녹옥죽봉과 맞부딪칠 때마다 그 뱀은 녹옥죽봉에 더 결사적으로 매달리려고 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 뱀이 녹옥죽봉에 옮겨오지 않도록 하면서 싸우려니까 자기의 법수와 정확한 동작을 마음대로 부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흐를
수록 구양봉에게 수세로 몰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구경하고 있는 놈들은 모두 악랄하고 한편 비겁한 무리들이기도 했다. 그 자들이 떠벌인 대로 그 죽통 속의 독액을 내어 뿜기만 하면 소씨 거렁뱅이는 처참하게 죽어나자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구양봉이란 이 사람이 자존심이 대단한 데다 지금 소씨 거렁뱅이와 팽팽한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맞붙어 있는 중이어서 그자들이 참견하는 걸 허락할 리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잠시 느슨하게 풀어두었던 긴장을 거두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외쳤다.
"구양봉, 임자도 호인물로 부를 만하이. 임자의 이만한 실력이면 천하의 5대고수들과 어깨를 견줄만 하단 말이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임자의 이 부하들은 모두 무예도 보잘 것 없거니와 독액으로 사람을 해치는 너절한 수단을 쓰고 있으니 어찌 모두들 임자를 비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자 구양봉이 변명 아닌 변명같은 말을 흘렸다.
"너절한 수단을 쓰겠으면 쓰라지. 저 사람들은 나의 백타산장 사람들이 아니니까 내 관여할 바가 아니오. 저 놈들은 철장방 방주 구천이란 자의 부하들이란 말이요."
구양봉이 그렇게 말하자 주위에 퍼져있던 그들은 일제히 눈길을 모았다. 구양봉 쪽으로 얼굴을 돌린 그들 중 몰골이 흉악하게 생긴 자가 나서며 말했다.
"구양선생, 구양선생께서 수고하실 거 없이 우리가 저 자와 싸우게 해주십시오."
구양봉은 그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처음부터 소씨 거렁뱅이와 싸우고 싶었으나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무예가 대단하여 그와는 우열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만일 이때 독액을 분사하는 죽통을 쓴다면 저 놈은 끝내 도망칠 수가 없지 않은가? 이런 호기를 왜 마다하겠는가? 소씨 거렁뱅이를 죽이는 것은 철장방과 개방 사이의 원한에 관계되는 일인데 내가 고생스럽게 끼어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구양봉은 아주 간사하게 이 일에서 발뺌을 하고자 결심했다. 구양봉이 입을 떼었다.
"좋아, 소씨 거렁뱅이! 나 이 노독물은 임자의 실격을 인정하지. 당신들 개방과 철장방 사이에 무슨 곡절이 있다는 것을 난 몰랐거든. 그러니 임자들끼리 해결하라구."
말을 마친 구양봉이 슬그머니 한쪽으로 물러나며 철장방 무리 십수명이 소씨 거렁뱅이를 에워싸는 것을 구경했다.
십여개의 분사죽통이 일제히 소씨 거렁뱅이를 겨누기 시작했다. 또한 수십개나 되는 살기어린 눈빛들이 소씨 거렁뱅이의 몸에 집중되고 있었다. 그 놈들은 모두 소씨 거렁뱅이의 몸에다 독액을 뿜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선수를 치려는 자는 보이질 않았다. 소씨 거렁뱅이를 독액으로 거꾸러뜨리려 하면서도 그의 뛰어난 무공이 두려워 주춤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손을 쓰기만 하면 눈깜짝할 사이에 상대를 쓰러뜨릴 수가 있다는 사실을 모
두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십여개나 되는 분사죽통을 앞세운 그 놈들은 소씨 거렁뱅이를 겨냥한 채 감히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틈만 노리고 있었다.
그때 흉악한 몰골을 지닌 자가 마치 크르릉 하는 짐승소리를 내며 외쳤다.
"소씨 거렁뱅이! 네 놈이 죽을 때가 되었으니 어서 고스란히 목숨을 내놓으시지!"
그러자 소씨 거렁뱅이가 쓴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
"네놈들이 그까짓 분사죽통으로 날 업신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리석은 수작 말아라!"
그자가 다시 너털웃음을 토하며 재반격에 나섰다.
"소씨 거렁뱅이야, 네 놈은 개방의 방주가 되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다고 여기느냐? 너같은 놈은 한 마리의 개나 다름없다. 미운산이 죽지 않으면 네가 죽어야 하고 네 놈이 죽지 않으면 홍칠이란 놈이 죽어야 한다. 누구든 개방의 방주 노릇을 하는 놈은 모조리 죽음을 면치 못할 거다!"
잠시 제 목소리에 취해 격한 몸짓을 하던 그 자가 사위를 둘러보며 제법 위풍있게 호령했다.
"저 놈을 죽여라!"
놈들이 일제히 분사죽통을 겨누기 시작하자 소씨 거렁뱅이는 더는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홀연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치솟더니 두번이나 재주넘기를 했다.
픽! 픽! 픽!
순간 세 줄기의 독액이 그를 향해 뿜어졌다. 소씨 거렁뱅이는 얼굴 옆으로 비껴지나가는 독액을 느꼈다. 훅 하고 코끝으로 풍겨오는 지독한 냄새를 맡은 소씨 거렁뱅이는 순간 아찔함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땅바닥에 사뿐히 내리자마자 이번엔 두 놈이 독약을 쏘아댔다. 소씨 거렁뱅이는 왼쪽 소매로 독액을 막듯 휘두르는 한편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녹옥죽봉을 공중으로 힘차게 그어댔다.
"칵! 칵!"
두 놈이 녹옥죽봉에 목대를 맞아 고개를 꺾은 채 고꾸라졌다. 그 두 놈은 미처 죽는다는 소리조차 질러보지 못하고는 땅바닥에 허물어져버렸다.
한번 시작된 녹옥죽봉은 가히 대단한 위력이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머리를 돌려 그 십여명이나 되는 무리들을 한꺼번에 덮치려 했다. 그는 이렇게 하면 그놈들이 혼란을 일으킬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일대 아수라장이 돼버리면 자기 편에게 독이 미칠까봐 놈들은 함부로 분사통을 사용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자의 표독스런 목소리가 다시 다급하게 들려왔다.
"어서 다시 뿜지 않고 뭘 하느냐! 저놈을 아예 독액으로 버무려버려라!"
그 자는 소씨 거렁뱅이가 미처 숨을 돌릴 틈을 주지 않으려는 계략이었다. 그 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 몇개의 죽통에서 독액이 발사됐다. 픽! 픽! 소씨 거렁뱅이는 급히 몸을 피했다. 그러자 그 독액이 마침 맞은편에 있던 놈의 얼굴에 고스란히 떨어지고 말았다.
"사람살려!"
놈의 얼굴은 단번에 새까만 재처럼 변하더니 급기야는 살점이 여기저기서 묻어나기 시작했다.
"크큭, 크윽크......"
놈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얼굴을 감싸고는 사람의 소리로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괴성을 토했다.
그때 이상한 기미를 눈치 챈 소씨 거렁뱅이는 재빨리 눈을 돌려 녹옥죽봉으로 막 움찔거리려는 한놈의 손을 찍었다. 그놈은 소씨 거렁뱅이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독액을 뿜으려고 하던 참이었다. 놈의 손목은 보기 좋게 부러지고 말았다. 비명조차 내지를 겨를도 없이 놈은 손목을 움켜쥐고는 데굴데굴 굴렀다.
"받아라!"
때를 놓쳐서는 안되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다시 녹옥죽봉을 휘둘러 다른 놈의 머리를 내리쳤다. 놈의 머리가 박살이 난 것은 확인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놈 역시 맥을 놓은 채 제자리에서 풀썩 무너져버렸다. 그런데 놈이 허물어지면서 반사적으로 독액을 뿜어대는 바람에 소씨 거렁뱅이가 흠칫 몸을 피했다. 다행히 독액은 발밑에 떨어져 무사할 수가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두 다리에 힘을 가해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토끼의 그것보다 더 날샌 솜씨로 오른 소씨 거렁뱅이는 이번엔 사나운 매가 되어 아래로 내리꽂혔다. 그 순간 네 명이나 되는 놈들이 낙엽처럼 소리조차 내지 않고 쓰러졌다.
소씨 거렁뱅이는 자세를 추스리고는 목청을 높혔다.
"어서 물러나거라! 피하지 않고 나와 대적하려고 하는 놈은 가차없이 죽여버리겠다! 아니 지옥에까지 쫓아가 남아있는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것이다!"
그러나 놈들은 이미 목숨을 내놓은 듯했다. 한 사람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소씨 거렁뱅이와 맞선 그대로를 고집했다. 그들이 각기 들고 있는 분사죽통 만큼이나 독하고 질긴 무리들이 아닐 수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용맹스럽게 놈들을 해치우는 것을 보면서도 겁을 집어먹지 않는 눈치들이었다.
놈들은 결사적으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십여개의 죽통을 앞세운 채 동시에 독액을 내뿜었다. 삽시간에 지독한 독액냄새가 공중에 흩어졌다.
위기를 모면한 소씨 거렁뱅이는 그러나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일찌감치 이 십여명의 무리들을 없애지 않으면 자기가 크게 다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만일 자기가 황약사, 왕중양 같은 사람들의 손에 죽게 된다면 오히려 달게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허나 이처럼 소인배나 다름없는 자들에게 목숨을 받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야야야!"
소씨 거렁뱅이는 괴성을 내지르며 녹옥죽봉을 번개같이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소씨 거렁뱅이가 그것을 쓸 때면 어찌나 그 소리가 크고 또 그 소용돌이가 엄청났던지 모두들 위축되어 몸을 사리기에 급급했었다. 그 때문에 그의 주위에는 단단한 장벽을 둘러싸고 있는 듯 사방에서 날아오는 어떠한 독액도 허사였다. 그런데 놈들은 강호의 오합지졸들과는 다른 면을 갖고 있었다. 철장방 놈들은 근본상 죽음을 두려워하질 않았다. 앞의 놈이 녹옥죽봉에 힘없이 나가떨어지면
뒤에서 버티고 있던 다른 놈이 대신 달겨들었다.
"앗!"
바로 그때였다.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독액이 날아와 자신의 어깨를 맞히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녹옥죽봉의 소용돌이를 멈추지를 않았다. 그런데 차츰 어깨가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예리한 발을 지닌 벌레가 앉아 간지럽히는 듯하더니 곧 뼈속까지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급기야는 심장 속까지 독액이 파고든 모양이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불현 몸의 일부가 경직되는 기분에 휩싸였다. 삽시간에 독액은 심장까지 이르렀는지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소씨 거렁뱅이는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무리를 노려보다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야앗!"
무서운 속도로 다시 무리들 가운데로 내리꽂힌 소씨 거렁뱅이는 녹옥죽봉을 휘둘렀다.
"퍽!"
녹옥죽봉이 한놈의 관자놀이께를 갈기자 그런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두 눈을 흡뜬 채 입으로 꾸역꾸역 피덩어리를 내뿜던 놈은 곧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런데 더욱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쏴아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독액으로 추측되는 것이 등으로 꽂히는 것을 느꼈다. 등짝은 불꼬챙이로 쑤시는 듯 뜨겁고 묵직한 통증이 일어났다.
"으!"
소씨 거렁뱅이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입에 물고 말았다.
그러자 그 흉악한 몰골을 지닌 자가 외쳤다.
"소씨 거렁뱅이야, 네 놈은 개방 방주 노릇하기가 알맞지 않으니 지옥에나 떨어지란 말이다. 그곳으로 너희네 그 개방제자들을 끌고 가서 부귀영화를 누리라구. 우하하하하!"
승자의 기쁨을 맛보고자 그 자는 연신 기분 나쁜 웃음을 매달았다. 그리고 이미 소씨 거렁뱅이가 일격을 받아 회생할 수 없는 치명타를 입었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분사죽통을 쏘게 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독액에 맞으면 삽시간에 중독이 되어 살점이 썩고 구멍이 휑하니 드러나기 ㄸ문이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 놈이 득의양양해 하는 꼴을 보며 대노했다. 그 분노는 곧 행동으로 옮겨졌는데 어느 ㄸ보다 소씨 거렁뱅이는 힘을 모았다.
슈욱!
녹옥죽봉이 득달같이 놈의 눈을 향해 날아갔다. 어찌나 그 속도가 빠르던지 놈은 거의 피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약간 틀었지만 소용이 닿지를 못했다. 그 바람에 오히려 조금 빗나갔다 싶었던 녹옥죽봉이 정확하게 놈의 눈에 명중되고 말았다. 그때를 기다려 소씨 거렁뱅이는 힘껏 녹옥죽봉을 밀었다. 그러자 놈의 눈알을 찢으며 틀어박힌 녹옥죽봉은 곧 두개골 깊숙히 박히고 말았다.
"악!"
놈의 비명소리가 주위를 일깨울 듯 소름끼칠 정도로 울렸다. 그 자 역시 녹옥죽봉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놈은 주르르 녹옥죽봉에 몸을 의지한 채 천천히 쓰러져버렸다.
소씨 거렁뱅이는 녹옥죽봉을 거두고는 쓰러진 자를 한번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가 또 일어나려고 했다. 그 사실 앞에서 소씨 거렁뱅이는 의외로 당황하게 되었다. 갑자기 위기에 몰린 무리들의 동태가 더욱 급박하게 돌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일 강호의 기타 패거리에 속하는 무리들이었다면 벌써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가 치명타를 입고도 이처럼 용감무쌍한 괴력을 보이는데 남아있을 자는 없을 것이다. 저마다 살길을 찾아 뿔뿔히 흩어지는 게 어쩌면 옳은 일에 속했다. 하지만 이 철장방은 규율이 엄한 무리로서 도망을 가다가는 더욱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놈들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더욱 거리를 좁혀오고 있는 것이었다. 수많은 자들이 피를 내뿜으며
죽어갔는데도 놈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 소씨 거렁뱅이를 향해 악착같이 달겨들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거의 본능적으로 녹옥죽봉을 휘둘러댔다. 소씨 거렁뱅이는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의 근육들이 나른해옴을 느꼈다. 처음 굳어질 듯 단단히 경직되던 것과는 반대로 온몸의 근육들이 곧 흘러내릴 것처럼 맥이 없게 느껴졌다. 한발짝의 걸음조차 옮겨놓기가 벅찼다. 그는 녹옥죽봉을 세차게 휘두르고 있기는 했지만 법수를 따르지 못해 정확한 힘이 살아나지를 못했다. 정신이 가물가물한 것이 아무래도 놈들 앞에서 힘없이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 밀실(密室)에서는 침향(沈香)이 타고 있었다. 향 연기가 조용히 피어놀라 천정에 이르렀다가는 다시 아래로 은은하게 스미어 온 방안이 향내로 가득찼다.
미운산이 의자에 앉아 두 눈으로 향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운낭(雲娘)에게 물었다.
"임잔 이 연무(烟霧)가 형태가 있다고 여기나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여기나?"
그러자 운낭이 흐드득 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연무의 형태를 친히 보시고도 그러세요. 왜 형태가 없겠나요."
미운산이 그 말에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임잔 형태가 있다고 말하지만 기실 그건 형태가 없는 거야. 흩날리는 연무는 임자가 보는 것과 내가 보는 것에 차이가 있거든."
"차이가 있다니요?"
"인간이 속세에서 사는 것도 이러한 이치와 같지. 임잔 그걸 똑똑히 보고 있다고 하지만 내 보기엔 흐릿흐릿하거든."
운낭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미운산이 하는 말의 뜻을 쉽게 헤아릴 수가 없었다.
미운산이 다시 운낭에게 얼굴을 주며 입을 열었다.
"여야(*兒)가 죽었는데 임자가 날 따르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지. 아마도 임자가 떠나가는 게 더 좋을지도 몰라. 내가 이미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임잔 떠나갈 때 되도록이면 슬그머니 사라지란 말야. 안 그러면 내가 아주 마음이 편치 않게 될테니. 또 그렇게 되면 내가 사람들을 시켜 임자를 죽여버리게 될지도 모르지."
다시 웃음을 입가로 만든 운낭이 대꾸했다.
"당신께서 절 죽일 마음이라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가 될텐데요."
일순 정색을 한 미운산이 숨을 크게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허나 어찌 임잘 죽일 수 있겠는가? 임잔 나와 함께 지금까지 삼사년이나 살아왔는데 어찌 내가 매정하게 함부로 그런 마음을 먹겠나?"
그러자 비로소 진한 웃음을 흘리며 운낭이 미운산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호호호, 남녀가 함께 있는 건 단지 그 정 때문인 것만은 아닐테죠. 지금처럼 서로 이렇게 바라보는 것도 삶의 소중한 쾌락이 아닐런지요?"
미운산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자, 내게 차 한잔 따라주게."
그들이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미립(米粒)이 밖으로부터 슬그머니 들어왔다. 미립이 운낭과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으며 조그마한 입술을 열었다.
"운낭, 아빠는 어떠신가요?"
운낭이 미운산에게서 몸을 떼며 대답했다.
"괜찮단다. 정신이 전보다 많이 좋아지셨어. 다만 때때로 탄식을 하며 머리를 내저으실 뿐이야. 영웅이 기개를 떨칠 수 없으니까 속내가 갑갑하신 거지."
미립은 운낭의 말에 아까의 미소를 다시 내보이며 더이상은 캐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미립이 이번엔 미운산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아버지...... 좀 어떠세요?"
미운산은 순간 미립이 자기를 부르고 있는 입술에는 조소와 멸시가 가득 묻어있음을 알아차렸다. 또한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음탕한 온갖 상념들이 깃들어 있음도.
"흥."
미운산은 머리를 쳐들지 않고 그런 콧소리로 대신했다. 미립은 슬쩍 시선을 돌려 운낭을 살폈다. 운낭이 이미 나가고 없는 것을 확인한 미립이 미운산의 뒤에가 선 채로 말했다.
"아빤 제 생각을 하고나 계세요? 매일마다 이렇게 앓고 있는 척 꾸며대시면서 속으로 제 생각을 하시고나 있나요?"
미립은 말을 마치고는 미운산의 목을 뒤에서 끌어안고 목덜미에다 가볍게 기(氣)를 불어넣었다.
미인이 목덜미를 자극하자 미운산은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저도 모르게 한차례 몸을 떨었다. 그리곤 곧 황급히 몸을 돌려 미립을 세게 끌어안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누가 네 아버지더냐? 누가 네 애비란 말이냐? 보아하니 너도 불초의 자식이로구나. 감히 애비를 놀린단 말이냐?"
두 사람은 곧 하나로 엉켰다. 두 마리의 뱀이 비로소 상대를 탐하듯 풀리지 않을 듯한 형태로 얽히기 시작했다. 미운산이 미립을 끌어안으며 손으로 그녀의 볼록한 가슴을 더듬었다. 미립이 몸을 틀며 가느다란 신음을 물었다. 미운산은 더욱 집요하게 미립의 젖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쨍강!"
그들이 한창 한데 엉켜 서로를 탐닉하고 있는데 무엇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그대로 한동안 굳어진 상태였다. 그것은 찻잔이 깨지는 소리였다. 그리곤 순간 등 뒤로 이상한 기운이 자리하는 것을 느낀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사색이 된 채 더욱 굳어지고 말았다. 그곳엔 어느새 들어왔는지 운낭이 서 있었다. 운낭은 워낙 거동에 아주 조심스런 여인이라서 매번 이 석실에 들어올 때면 문밖에서 손기척을 하거나
헛기침으로 자신을 알리곤 했었다. 그런데 방금 들어왔다가 나간 탓이었는지 그것을 그만 놓쳤던 결과였다. 또한 운낭의 생각으로 차가 식을까봐 급히 들어섰던 것이었다.
그런데 미운산이 미립을 끌어안고 애무를 하는 것을 보자 운낭은 그만 저도 모르게 찻잔을 놓쳤던 것이다.
미운산과 미립이 그때서야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그러나 미립은 뜻밖에도 운낭을 보자 고개를 외로 틀며 웃었다. 낯빛이 파르스름하게 변한 것은 오직 운낭과 미운산 뿐이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미운산은 비로소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운낭을 향해 소리쳤다.
"왜 기침이라도 하지 않는 거야!"
불만으로 가득찬 미운산의 태도를 구경하고 있던 미립이 웃어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운낭에게도 살랑살랑 걸어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건드렸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시는구만. 아빠는 날 좋아하신다구. 안 그래요?"
하며 미립이 미운산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미운산은 대꾸없이 미립이 하는 행동을 말없이 주시할 뿐이었다. 미립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아빠가 나만을 생각하는지 모르고 있었군요. 그렇죠?"
운낭은 내심으로 미운산이 딸과 이처럼 정을 통하고 있을 줄은 꿈에 몰랐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귀신조차 믿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운낭은 직접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운낭이 얼마나 놀랐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운낭은 줄곤 선 채로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
정신을 가다듬은 운낭이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저 애와 그래서는 결코 안돼요......"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미립이 손을 내밀어 운낭을 뺨을 호되게 갈겼다. 운낭의 뺨은 순식간에 뻘겋게 달아올랐다.
"사실 아빤 날 가장 좋아해. 네 년과 여아 따위에게 관심이라도 있는 줄 알아? 하하하!"
미립은 이렇게 지껄이고 나서 한바탕 깔깔 웃어댔다.
그리고 미립은 또 미운산을 향해 매몰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이 여인을 죽여버리라고 내가 몇번이나 말했던가요? 그런데도 아빤 내 말을 듣지 않았지요. 아빠가 그까짓 여아쯤 죽인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이 년은 아무리 아빠 시중을 잘 든다 해도 저보다 나을 순 없어요. 내가 이 년을 죽여버리는 걸 보시겠어요?"
하자 미운산이 정색하며 대꾸했다.
"네가 손 댈 것 없다. 내 손으로 죽일테니."
운낭은 내심 겉잡을 수 없는 화방수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을 감당해낼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그동안 정을 나누었던 미운산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베개머리에서는 그처럼 자기에게 부드럽고 다정하던 사내가 이토록 달라질 수가 있단 말인가.
운낭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래요, 당신은 날 죽이는 게 좋을 거예요."
운낭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미립이 그것을 보고는 키득키득 웃어댔다.
"아빤 속이 좁다는 걸 전 잘 알아요. 아빤 이 년을 끔찍하게 좋아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년을 죽이는 걸 원치 않을 거예요. 그래도 내가 죽여버리는 게 나아요. 그러니 아빤 그저 구경만 하세요."
미운산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니 야릇한 두려움마저 미립에게서 받은 미운산은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네가 죽이고 싶으면 그렇게 하려무나."
미립은 서서히 운낭에게로 다가갔다.
"운낭, 네 년은 나와 아빨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아빠와 함께 있는 걸 보고도 모른 체 했었더라면 그나마 목숨은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 년이 모든 걸 똑똑히 그 눈알에 새겨두었으니 오로지 죽는 길밖엔 없어!"
운낭은 자세를 가누면서 미립을 향해 손을 뻗으려고 했다. 그러자 미립이 머리를 흔들면서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괜한 짓은 말라구. 다 쓸데없는 짓이니까. 네까짓 년이 감히 나에게 손을 대겠다구. 허튼 꿈은 아예 꾸지 않는 게 좋을걸. 얏!"
미립은 말을 마치자마자 순간 운낭에게 일격을 날렸다. 미립의 동작은 매우 빨랐다. 그녀는 대번에 운낭의 양 옆구리를 겨냥했다. 운낭이 겨우 피하며 미립을 노려보았다.
"이 못된 계집 같으니라고!"
운낭이 욕설을 퍼부으며 장을 날려 반격을 가해왔다. 미립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강용팔장 법수로군! 솜씨가 괜찮은데."
이 장법은 그야말로 뛰어난 것이었는데 미운산이 전수해준 유일한 법수이기도 했다. 이 법수가 바로 <향용유회>라는 것이었다. 운낭이 다급한 나머지 그 법수를 써버렸던 것이다. 놀란 것은 미립이었다. 운낭이 <강용팔장> 법수를 쓰자 쓴웃음을 치며 말했다.
"과연 아빠가 사랑하는 사람이 틀림없군. 가문의 무예까지 전수해주다니."
그녀의 말 속에는 여인의 예리한 질투심이 그득 깃들여 있었다.
"얍!"
미립은 이렇게 말은 내뱉으며 몸을 날렸다. 주먹질과 발길질이 운낭에게로 쏟아졌다. 그 무예는 모두 강남 여러 패거리들에게서 익힌 명문묘기(名門妙技)였다.
그럴 때마다 운낭은 다행히 몸을 피하긴 했지만 속으론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찮은 법수 한가지로 위기를 넘기고 있다는 자신이 문득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방극에게서 <강용팔장> 중의 한가지 법식밖에는 배우질 못했다. 아무리 몸을 쓰려고 해도 <항용유회> 말고는 달리 부릴 수 있는 법식가 없었다.
원래 이 <강용팔장>은 가장 뛰어난 절기(絶技)였다. 그러나 운낭은 그중 한가지 법식에만 치중하여 자기를 방어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립이 손을 뻗어오면 그 법식대로 반격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차츰 힘이 모자라 그 법식으로 손을 내미는 속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느려진 속도에 비례하여 그 위력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미립에게 비쳐졌다.
그 사실을 눈치챈 미립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는 운낭을 노려보았다.
"네 년이 아빠의 이불 속에서 더 훌륭한 법식은 터득하지를 못했나 보구나!"
운낭은 그때서야 절실하게 깨달았다. 미립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천진스런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미립이 내뱉는 말이 어디 순진무구한 계집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분명히 천하게 밑바닥을 전전하던 부류의 계집이나 써먹던 말솜씨가 분명했다.
안으로만 삭이려던 분노가 치솟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운낭은 자세를 단단하게 추스리며 분노에 찬 목소리를 미립에게 쏘아댔다.
"네 년이 날 죽이지 못하면 내가 오늘 너를 요절내고 말테다!"
운낭은 미립을 향해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그것으로 아예 미립을 거꾸러뜨리려 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미립이 바닥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곤 운낭에게로 달겨들었다.
"얏!"
그녀는 학처럼 몸을 둥둥 허공에 띄운 채 연거푸 운낭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녀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며 운낭을 궁지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어찌나 그 동작이 빠르던지 운낭은 미처 피할 겨를도 찾지를 못했다.
"받아랏!"
미립이 연거푸 두 장으로 운낭의 어깨를 가격했다. 그리곤 몸을 한쪽으로 틀며 다시 한쪽 장으로 운낭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악!"
운낭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바닥에 사뿐히 자리를 잡고 내려앉은 미립이 입꼬리를 길게 치켜올렸다. 그리곤 곧 쓰러져 있는 운낭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미립이 손가락으로 운낭의 대혈을 누르자 한차례 꿈틀댔다. 운낭 앞에 꿇어앉은 미립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운낭아, 네 년은 이젠 사람노릇을 다 하게 되었다. 네 년은 하필 아빠를 사랑했을 게 무어냐?"
운낭은 꼼짝없이 사지를 미립에게 내맡긴 채 이를 악물을 뿐이었다. 그녀의 입과 귀로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립이 다시 입을 열어 비웃음을 쏟아냈다.
"네 년은 아빠가 아직도 너를 좋아한다고 믿겠지? 그러나 이 세상 사내치고 사랑을 영원히 지키는 사내는 없는 거다. 네 년은 아빠가 널 속인 걸 알고 있느냐?"
그러자 운낭이 겨우 피가 묻어있는 입술을 열어 말했다.
"그인 날 속이지 않았어. 그인 절대 날 배신하지 않았단 말이야!"
그 소리는 매우 처절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미립은 비웃을 뿐이었다.
"아빠가 널 속이지 않았다면 날 속였단 말이냐! 그렇다면 아빠의 몸에 핀 독 때문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한다고 믿고 있을텐데 한번 보겠어?"
운낭은 무슨 말인가 간파하지 못하고는 휘둥그러진 눈을 돌렸다. 그녀는 미립이 왜 그런 말을 꺼내는지 도무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미립이 웃으면서 손으로 미운산을 끌어당겼다.
"아빠, 어서 일어나보세요. 와서 이 여인에게 보여주는 게 어때요?"
운낭은 더욱 긴장된 눈으로 미운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말 믿어지짖 않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미운산이 일어서더니 천천히 자기에게로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운낭은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운산의 걸음걸이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미운산이 이윽고 운낭 앞에 다가와 우뚝 서더니 말했다.
"운낭, 임잔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한 게 탈이었소."
그 말의 속뜻을 알아차린 운낭은 고개를 떨구었다. 운낭이 지금까지 미립에게 당한 수모를 다시 한 번 깊게 새겨주는 말이었다.
운낭이 속으로 자신의 신세를 아프게 꾸짖었다.
'원래 다리를 쓰지 못한다고 한 것은 일부러 꾸며낸 계략이었다니? 만일 저 사람이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절대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내게 그동안 다정하게 대해주었단 말인가? 나와 여아를 속이면서까지 자기는 다시는 여인과 관계를 나눌 수 없는 처지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결국 저 사람은 지금까지 가면을 쓴 채 나와 여아를 속였던 것이로구나. 그런 사실도 모르고 나는 저 사람을 믿고 있었다니? 여아는
목숨을 빼앗기고 나는 이런 신세로 전락되고 말았구나. 저 사람은 과연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운낭은 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더이상 삭일 수가 없었다.
"당, 당신은 왜 이런 짓을 꾸몄나요?"
그러자 미운산이 아주 태연한 낯빛으로 운낭을 바라보았다.
"내 말을 듣지 않는 놈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 놈들은 모두 죽여버려야 한다고 믿었거든. 그래서 난 몸이 불편한 척 위장을 하여 놈들을 안심시킨 뒤 하나씩 처리해버리고자 한 것이지."
너무도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이제 확연히 그들의 계략을 알게 된 운낭은 탄식을 했다.
"아주 훌륭한 계책이군요......"
미운산이 대답했다.
"물론이지. 임자 뿐만 아니라 여아까지 나한테 속아넘어가지 않았겠어. 하루는 여아가 나한테 오더니 스스로 옷을 벗더군. 반나절이나 땀을 뻘뻘 흘려가며 나를 다시 일으켜보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지. 그녀는 내가 이젠 사내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을 깨닫고는 화를 내며 도망을 치더군."
"그렇다면 당신이 여아를 죽였나요?"
운낭이 소리쳤다. 운낭은 미운산이 지금 아주 지독한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 음모에 걸려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운산이 어떤 짓을 하려고 하는지 구체적인 윤곽은 짚어낼 수가 없었다.
미운산이 말했다.
"운낭, 임잔 알지 말았어야 할 일들을 알아버린 거라구. 그렇지 않았더라면 임잔 후에 나와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을텐데. 임잔 눈치가 너무 빠른 게 흠이라구."
그러자 미립이 갑자기 운낭에게 달겨들어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참 아름답군. 아빠가 당신을 선택했던 이유를 이제 알겠어."
하며 손톱으로 운낭의 얼굴을 할퀴었다.
"나쁜년!"
운낭의 얼굴에는 몇줄기의 피가 고랑을 이루듯 흘러내렸다. 그러나 미립은 그것으로 멈추질 않았다. 다시 운낭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손톱으로 긁어댔다. 운낭의 얼굴은 삽시간에 피칠갑을 이루었다.
미립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소리를 질렀다.
"네 년은 아빠가 널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야 해. 아빤 날마다 나와 정을 통했다구. 하하하!"
미립은 완벽한 승리자를 자청하듯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는 아주 방자하게 들려왔다. 그러더니 미운산에게 다가가 두 팔로 목을 끌어안으며 간사하게 입을 놀렸다.
"매일 저녁 네 년의 시중이 끝나면 난 아빠와 한 이불 속에서 깊은 사랑을 나누었지. 이불 속에서의 아빠의 실력은 네 년이 더 잘 알고 있겠지?"
미립의 말엔 더이상 천진한 여인의 그림자가 남아있지를 않았다. 운낭은 그녀는 분명 음탕한 탕부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운낭은 다시 한 번 탄식을 했다.
'그래, 저 년의 말을 나도 믿는다. 저 미립이란 년은 얼추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계집 같지만 속내에는 음기로 가득찬 탕녀일 뿐이다. 저토록 미운산에게 매달려 음탕한 자태를 자아내는 것만을 봐도 알지.'
운낭의 분노는 극에 치달았다. 그들을 향해 일침의 반격을 가하고 싶었으나 이미 몸은 망가진 상태였다. 할 수 없이 그들을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부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개만도 못한 년놈들아!"
정말 개돼지보다 못한 인간들이었다. 친부녀지간으로 알고 있던 그들의 행각은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버러지 같은 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운산이 운낭의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눙치듯 말했다.
"임잔 나를 무정하다고 원망하지 말라구. 이건 대단한 비밀이고 개방사람들 중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어. 임자가 알게 되었으니 비밀이 새어나가면 나의 대사를 망치게 된다구."
그것은 곧 운낭의 끝장을 의미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말을 마친 미운산이 운낭을 향해 오히려 일격을 가해왔다. 운낭은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운낭이 일격을 맞고 쓰러지자 미립이 말했다.
"왜 그렇게 급하게 처리하죠? 운낭이란 년이 고통을 받을까봐 일부러 한 손에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겠죠?"
미운산은 대꾸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순간 마음 속으로 운낭과의 정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는 운낭이 미립에게 시달림을 받으며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미립이 그런 자신의 심중을 간파하고 있는 게 아닌가.
미운산은 미립이 쓰러진 운낭에게로 다가가 머리에 꽂혀있던 금비녀를 빼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미립은 다시 그것으로 운낭의 가슴을 찔렀다.
"아빠 곁에는 오로지 나밖에는 없다!"
금비녀가 가슴에 꽂히자 아직 숨이 남아있던 운낭이 공중으로 몸을 띄우듯 잠시 꿈틀댔다. 미립은 다시 금비녀로 운낭의 사지에 대고 무차별하게 난자를 해댔다. 미운산이 그 광경을 보다 못해 말했다.
"미립아, 저 여잘 용서해라. 어서 조용히 죽도록 내버려두라구."
미립이 두 눈을 부릅 치켜뜨며 미운산을 쏘아보았다. 낯설게만 보이는 얼굴이었다.
"미운산. 당신의 마음은 이해해요. 하지만 날 건드리지 말아요. 나를 건드렸다가는 당신의 대사도 흔들리게 될지 모르니까."
하며 미립이 으름장을 놓자 미운산은 어쩔 수가 없었다. 미운산의 눈에는 어느새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이 비치고 있었다.
거의 꺼져가는 숨을 몰아쉬고 있는 운낭이 생각했다.
'이 여인이 이다지도 흉악한 것을 내 어찌 몰랐단 말인가? 태산이 무너져도 꼼짝도 하지 않던 미운산이 저토록 고분고분하다니. 앞으로 개방이 처할 고초가 막심하기만 하구나.'
온몸으로 파고드는 고통에 운낭은 신음소리를 토했다. 운낭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날 빨리 죽여다오!"
그러나 미립은 쓴웃음을 만들며 운낭의 적삼을 찢어 벗겨냈다. 허연 속살이 드러났다.
"아빠, 당신은 이 여인의 어느 곳을 가장 탐하셨나요? 이 어깨가 아닌가요? 옛사람이 미녀의 미끈한 어깨, 가는 허리 버들과도 같아라 하고 말했다고 하는데 아빤 아마도 어깨를 좋아했겠죠? 아니면 저 허리를 좋아했나요?"
미립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운낭의 어깨를 꽉 깨물어버렸다. 운낭은 더이상 지를 비명조차 남아있지를 않았다. 그저 분통함의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운낭의 어깨에서 뻘건 살점이 뜯겨나갔다.
"옛날 양귀비 몸의 살점이 향기롭고 흘리는 땀마저 연지와 분의 색깔을 띠고 있었다던데 아빠가 좋아하는 운낭의 살점은 왜 이다지도 비린가요?"
하며 미립이 이빨로 문 살점을 퇘 하고 뱉았다. 미운산은 대답을 못하고 놀란 표정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운낭, 네 년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더라도 절대로 여인으로 태어나지 말아야해. 더군다나 미운산과 같은 이런 사내의 여인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되지."
라고 떠벌인 미립이 요사스럽게 웃어댔다. 그녀는 운낭이 입고 있던 옷의 소매자락을 찢어내어 피가 묻은 자기 입술을 훔쳤다.
미운산은 머리를 푹 숙인 채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이전에는 이 운낭을 가장 소중한 여인이라고 여겼는데 오늘은 저 여인이 고초를 겪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구나."
미운산은 차마 운낭의 최후를 지켜볼 수도 없었고 또한 미립에게 어떠한 제동을 걸 수도 없었기에 그저 시선을 돌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미립은 미운산의 거동을 살피더니 다시 운낭에게로 표독스런 눈빛을 쏘아댔다. 이제 회생할 기미는 전혀 없이 꺼져가는 운낭을 향해 다짐했다.
'미운산이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분명히 속으론 몹시 아플 것이다. 나 역시 미운산을 보니 마음이 좋지를 않구나. 더 괴롭히지 말고 내가 지독한 여인이라는 걸 보여주기만 해야겠다.'
그리하여 미립은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운낭에게 말했다.
"운낭, 네 년이 죽은 뒤 나도 네 년을 생각하게 될지도 몰라."
그리곤 손으로 운낭의 아혈을 짚고나서 가슴을 향해 힘껏 치명타를 꽂았다. 운낭은 한마디의 말도 남기지 못했다. 미립의 손바닥 가격이 엄청난 파괴를 가져온 것이라 운낭은 곧 절명하고 말았다.
미운산은 그 자리에 멍청이 서서 운낭의 시체를 들여다 보았다. 운낭의 시체를 바라보는 미운산의 심정은 아주 괴로웠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미립이 어느새 다가와 미운산의 목에 매달렸다.
"아빠, 아빤 무얼 그리 생각하세요?"
미운산이 미립을 돌아보았다. 그는 내심으로 이 여인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 여인을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유는 미립은 이미 자신이 세운 계획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미립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미립이 다시 간사스런 목소리를 미운산의 목덜미에 대고 불었다.
"아빠, 아빤 저 년을 원해요 아니면 날 원해요?"
미립의 목소리에 섞여 전해지는 숨소리에 미운산은 긴장감을 맡을 수 있었다.
"난 물론 널 원해."
그러자 미립이 와락 미운산의 품으로 덮쳐들어 얼굴을 들이댔다. 미립의 손에 강제로 이끌린 미운산이 침상으로 가 누웠다. 그녀는 미운산의 옷자락을 찢으며 말했다.
"난 당신을 원해요. 난 당신을 원한단 말이예요. 당신은 나와 함께 있지 않으면 안돼요. 당신이 나를 먼저 죽이지 않고서는 내 곁을 떠날 수 없을테니 그리 알아요!"
미립은 미운산의 옷을 벗기고는 애무를 하기 시작했다. 미운산은 내키지 않았지만 차츰 농도가 짙어가는 미립의 애무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비틀고 말았다. 정욕이 일어나기 시작한 미운산이 이번엔 미립을 덮쳐 옷을 찢어발기고는 짙은 애무를 했다. 두 사람은 한데 얽혀 다시 정욕을 불태웠다.
소씨 거렁뱅이는 자기가 이제 더이상 포위를 뚫고 나가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죽게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독이 묻은 상처가 뼈속까지 들쑤시는 바람에 힘을 낼 수가 없었다. 철장방 놈들은 저마다 분사죽통을 내밀고는 어지럽게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속으로 애탄했다.
'이 소씨 거렁뱅이가 이런 허접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죽임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의 상태로는 싸움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이놈들아! 어찌하여 십여명이나 되는 놈들이 한 영감을 그리도 못살게 구는 거냐?"
그 사람은 히히덕거리며 다가왔는데 장난기가 철철 넘쳐흐르는 것이 아무리 둘러봐도 점잖은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철장방 놈들은 그러나 그 소리에 개의치 않고 소씨 거렁뱅이를 치려고 더욱 거리를 좁혀왔다. 그놈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넌 누구냐? 순순히 물러서지 않으면 네 놈의 살을 포를 떠 지나는 까마귀에게 던져주겠다!"
그러자 다시 히히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로 웃기고 있구나. 네 놈들이 나까지 죽이겠다구.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텐데."
이윽고 그 목소리의 임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선비차림을 한 사람이었는데 아주 기괴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도사처럼 보이는가 싶더니 아닌 것 같고, 공자 같으면서도 공자 같지가 않고, 어른인가 하면 차림새가 그렇지 않았고, 어린애처럼 보였으나 삼사십살은 넘어보이기도 했다. 그 선비차림이 철장방 무리 속으로 날아들며 외쳤다.
"그대들은 무얼 빼앗으려고 그러나? 저 사람한테 무슨 흥미로운 물건이라도 있나?"
그가 다시 히히덕거리자 무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사태를 주시했다. 그러나 놈들은 그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가 않은 눈치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눈치를 살피다가 선비차림을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어서 물러가지 못하겠어!"
그러나 선비차림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얼른 손을 내밀어 상대의 발을 잡아 비틀었다. 그러자 상대는 두번이나 공중에서 돌더니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다시 선비차림이 호탕하게 웃었다.
"우화화화,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네 놈의 공중제비가 이 노완동보다 썩 나은데."
그때서야 그 자가 노완동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완동은 바닥에 널부러진 놈을 내려다보며 비웃음을 퍼부었다. 넘어진 자가 화를 내며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두 손을 뻗어 노완동의 눈알을 파내려고 했다. 놈의 날카로운 손톱이 노완동의 눈에 박히려는 찰나 다시 딱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노완동이 놈의 손가락을 이빨로 깨물어 작신 부러뜨리고 말았다.
"재미없구나, 재미없어. 웬 놈의 손이 이다지 맛없고 더럽단 말인가? 우하하하하!"
그러면서 여전히 노완동은 비웃는 것인지 모를 웃음을 터뜨렸다.
철장방 무리들은 몹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법수에 뛰어난 한 고인(高人)의 출현으로 모두들 잔뜩 겁을 집어먹는 눈치였다. 그들은 강력한 상대를 만난 것에 맞춰 새로운 술책을 쓰려고 했다. 무리 중 다섯놈이 갈라져나와 노완동을 재빨리 에워쌌다. 한놈이 분사죽통을 쳐들자 노완동 역시 얼른 손을 쳐들며 소매 속으로부터 죽통을 끄집어내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외쳤다.
"그건 뭘 하는 물건이냐? 여기도 있다!"
노완동이 자기의 죽통으로 앞에 있는 두 놈을 겨누었다. 철장방 놈들은 그 죽통을 보자 모두 질겁을 했다. 그 놈들 역시 죽통 안에 들어있는 독액이 몸에 묻기만 하면 처참하게 끝장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놈은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 다섯 놈 모두가 물러서는 것을 보던 노완동이 말했다.
"좋아, 참 좋단 말이야. 네 놈들보다 내가 독액을 먼저 뿜겠다."
미처 멀리 도망치지 못한 놈들을 향해 노완동이 독액을 뿜었다. 다섯 놈 모두에게 적중하도록 노완동은 죽통을 좌우로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악!"
"어쿠!"
그 다섯 놈은 독액에 맞아 저마다 소리를 내지르며 들고 있던 죽통을 버리곤 도망을 쳤다. 도망을 치면서도 품속에서 해독약들을 꺼내 입에 쑤셔넣느냐 야단이었다. 노완동이 다시 소리쳤다.
"너희들이 아직도 놀 생각이면 내가 친구를 해주지. 이 죽통의 독액은 다 썼으니 새 죽통으로 바꾸어야겠다."
그런데 떨어진 죽통을 들어 안을 확인하던 노완동이 인상을 찌푸렸다. 죽통은 비어있었다.
"재미가 또 없군."
또 하나의 죽통을 집어들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이거 화가 나는군. 모조리 빈 통들이로군."
그는 죽통을 네 개째 확인하고는 휙 휙 집어던졌다. 그러다가 마지막 다섯번째 죽통을 집어들었다. 순간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노완동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호, 드디어 놀잇감 하나가 생겼군."
하며 갑자기 죽통을 소씨 거렁뱅이 쪽으로 돌려 겨누었다. 그런데 누군가 소리쳤다.
"저 죽통엔 독약이 없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직 남아있는 무리 가운데 세놈이 노완동에게 달겨들었다.
"죽고 싶어서 성화를 부리느냐?"
노완동이 히히 웃더니 죽통에 있던 독액을 세 놈에게 뿜었다. 세 놈은 아무런 방비도 없이 있다가 그대로 얼굴과 가슴팍에 독액벼락을 맞았다.
"살려!"
세 놈들은 모두 가슴과 얼굴 등을 감싸안고 비명을 토했다. 그 비명소리는 마치 짐승이 내는 그것과도 흡사했다. 한 놈이 두 손으로 자기 앞가슴을 움켜쥐고는 고통스러워했다. 손에까지 독액이 묻는데도 놈은 가슴을 사정없이 어우만지며 신음을 게워냈다. 놈은 곧 쓰러져버렸다. 다른 한 놈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액에 아랫배를 맞았는데 주머니 속에 든 해독약을 꺼내 입에 넣으려는데 그만 아랫배에서 내장이 쏟아져나왔다. 그것을 본 놈은 해독약을 써보지도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그런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노완동이 죽통을 팽개치며 말했다.
"아이구, 깜짝 놀랐네! 이렇게 지독한 독이 들어있을 줄이야."
하며 노완동은 줄행랑을 칠 준비를 했다. 노완동의 손에서 죽통이 벗어나자 한 놈이 대신 죽통을 집어들고는 소리쳤다.
"서랏! 어딜 도망가려 하느냐?"
몇걸음 도망을 치다가 고개를 돌린 노완동의 눈이 커졌다. 바로 자기가 들고있던 죽통이었다. 노완동은 잔뜩 겁을 먹었다.
'저놈이 정말로 내게 독액을 내뿜기라도 하면 난 죽은 목숨인데......'
그는 얼른 눈둥자를 요리조리 굴리며 꾀를 생각해냈다. 그때 죽통을 집어든 놈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네 놈이 꿇어앉아 날 어버이로 섬긴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널 죽이고야 말겠다!"
그러자 노완동이 다시 히히덕거리며 방금 떠올린 꾀를 내보였다.
"내게 보물들이 많은데 갖고 싶은 생각 없나?"
죽통을 집어든 놈은 철장방에서 가장 가난한 자였다. 그 자는 노완동의 말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사실이냐? 그렇다면 어서 꺼내보아라!"
놈이 외치자 노완동이 기다렸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수정구슬을 한줌 꺼냈다. 그것은 반들거리는 광채를 뿌리고 있어 멀리서 봐도 귀한 물건처럼 보였다. 하지만 철장방 놈은 어리석은 자가 아닌지라 그 구슬이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진기한 물건은 아니라는 것쯤은 간파했다.
"네 놈이 날 놀리느냐?"
하고 소리를 지르며 노완동에게 독액을 뿜으려고 했다. 노완동의 다급해진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잠깐! 모두 주겠어! 네게 모두 줄테니 진정하라구!"
그러나 그것 역시 노완동의 꾀였다. 놈에게 구슬을 건네는 시늉을 하면서 노완동이 아홉개의 구슬을 힘껏 날렸다. 팍팍팍......
"윽!"
구슬은 놈의 머리와 손 등에 박히고 말았다. 놈은 그중 하나의 구슬이 자신의 혈도에 명중되는 것을 감지했다. 죽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간괴한 놈!"
그러나 이미 놈은 노완동에게 넘어가고 만 것이었다. 손뼉을 치며 노완동이 여유롭게 웃었다.
"내 구슬이 싫다구 했더냐? 차라리 잘 됐다. 네 놈이 그걸 가져가면 난 무엇으로 놀겠느냐?"
노완동이 떨어진 죽통을 들어 멀리 있는 바위를 향해 힘껏 던졌다. 죽통은 보기좋게 박살이 나버렸다. 독액이 흩어졌는지 바위가 갑자기 흙갈색으로 변하며 까맣게 타들어갔다. 푸스스. 돌가루가 떨어져내리는 것을 바라보던 노완동이 혀를 내밀었다.
"어휴, 무서워라. 정말 대단한 독이야!"
이제 소씨 거렁뱅이 주위에는 다섯밖에는 남지를 않았다. 그것을 본 노완동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 멍청한 놈들아! 아직도 도망가지를 않았더냐? 오냐, 너희들마저 저기 바위처럼 만들어주마!"
그러자 놈들은 불리함을 깨닫고는 하나둘 도망치기 시작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갑자기 앞이 흐려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노완동이 달려와 소씨 거렁뱅이를 흔들었다.
"영감, 정신을 자리시우. 정신을 차리란 말이요. 영감이 죽으면 내가 괜히 헛수고를 해야되지 않수?"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는 꿈적도 하질 않았다. 노완동은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쓰러진 사람들을 툭툭 치며 확인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작은 움직임조차 발견할 수가 없었다.
"모두 죽어버렸군. 산 놈이라고는 없으니 저 영감을 어쩐담."
순간 노완동은 뒷머리를 치고 가는 것을 감지했다.
"그렇지! 해독제를 찾아보면 되겠군."
노완동은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곧 해독제를 발견한 노완동은 소씨 거렁뱅이 입에 밀어넣었다. 그러나 의식이 없는 상태라 소씨 거렁뱅이는 약을 받아먹지를 못했다. 노완동이 손가락 끝으로 소씨 거렁뱅이의 인후를 가볍게 찌르자 그때서야 꾸르륵 하고 약이 넘어갔다. 노완동은 나머지 약들도 모두 모아들였다.
"이 정도면 충분한지 모르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노완동은 소씨 거렁뱅이를 내려다보았다.




제13장 녹옥죽봉의 행방
노완동은 다시 한 번 독액의 위력에 대해 감탄을 하였다. 꼭 해독제가 있어야만 회생시킬 수 있었기에 더욱 두려운 존재이기도 했다. 혹시 철장방 놈들이 독장(毒掌)을 익힐 때 쓰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몸에 닿기만 해도 치명타를 입히는 걸 보면 아주 지독한 독임은 틀림없었다.
그때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이곳인가?"
하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는데 그들은 개방사람들이었다. 노완동을 발견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노완동이 웃으면서 대답을 피했다. 그는 이 사람들과 지껄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들 중 한사람이 나섰다.
"난 개방의 육대(六袋)제자 노유각(魯有脚)이라고 하오. 당신은 뉘시오? 어서 이름을 밝히시오?"
별 수 없는 일이었다. 노완동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난 노완동 주백통이다. 그래 내가 어쨌다는 거야?"
그런데 그들은 소씨 거렁뱅이가 힘없이 쓰러져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수상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아까 가까이 오면서 노완동이 무언가를 입에 강제로 넣으려고 하는 걸 얼핏 보았기에 더욱 노완동을 의심했다.
노유각이 말했다.
"당신은 소방주에게 무얼 먹였소?"
노완동이 예의 웃음을 앞세우며 빈정대는 투로 대꾸했다.
"히히히, 아무것도 아니야. 독약을 먹였는지도 모르지만."
노유각이 크게 화를 내며 다그쳤다.
"네 놈이 감히 우리의 방주님을 해쳐? 에잇!"
노유각의 발길질이 날라왔다. 노유각이란 발 힘이 세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름에 걸맞지 않게 노완동은 요지부동이었다. 연거푸 노유각의 발길질이 날라왔지만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왕처일의 발길질이 무섭다고는 하지만 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도 모두 철각선(鐵脚仙)이라고들 부른단 말이지. 그대의 이름이 노유각이니 나 이 노완동과 한판 붙어보는 게 어떻겠소? 우리 한번 발길질 놀이를 해보잔 말야!"
노완동이 벌떡 일어서더니 뒷짐을 지고는 한발을 들어 세차게 바닥에 내리쳤다. 그리곤 곧 노유각과 서로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두 사람은 싸움닭을 연상하게 했다. 그들은 한발로 껑충껑충 뛰면서 다른 발로는 상대방을 걷어차는 묘한 싸움을 시작했는데 노완동의 재주가 조금 나은 듯했다. 그는 한발로 걷어차면서 공중제비까지 부렸는데 하늘로 치솟았다가도 한발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노완동이 엄살을 부리며 말했다.
"이거 한 발로 서 있자니 너무 힘이 들어. 놀이가 점점 재미없어지는데."
그러면서 다시 한발로 노유각을 세게 걷어차는 것이었다. 그 솜씨는 번개와도 같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노유각은 개방에서 육대제자일 뿐만 아니라 가장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가 성품이 순박하고 후덥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개방사람들은 모두 그를 믿고 존경하고 있었다. 노유각이 발싸움에서 몰리는 것을 그대로 묵시하고 있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함께 온 개방사람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몰려들었다. 그런데 노유각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하였다.
"가만히들 있게. 저 사람의 발길질이 나은가 아닌가는 더 두고봐야지."
그는 노완동과 정식으로 발길질의 우열을 가름해보고 싶었다. 노완동은 한편 그 말에 더욱 신이 나서 떠벌였다.
"그대가 날 이기면 그대 발이 내 발보다 나은 거고, 그대가 진다면 그댄 오늘부터 발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일세."
노완동은 줄곧 싸움을 장난으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유각은 신중한 자세로 임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걸리는 게 있어 노유각이 잠시 주춤했다.
'내가 만일 저 자에게 지게 되면 내 발을 못쓰게 만들지도 모른다. 오늘 어떻게 해서든 저 자에게 무릎을 꿇어서는 안될 것이다.'
노유각이 먼저 선수를 쳤다. 실로 노유각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였다. 돌풍이라도 일으키듯 노유각의 발길질이 지나면서 휙 하고 바람이 일었다. 그는 발로 차는 세가지 법수를 익히고 있었다. 그 세가지 법수는 또 아홉가지 법식으로 나뉘어져 있어 적시적소에 응용되기도 했다. 이처럼 노유각은 다른 사람들이 부리는 장법의 법수와 법식보다 더욱 숙련된 발재간을 갖고 있었다.
싸우기 좋아하는 노완동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우고는 풀쩍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재미 있구나, 재미 있어."
노완동도 한발로 차는 법수를 썼는데 두 사람의 싸움은 그야말로 볼만했다. 노유각은 법수와 법식을 부리는 것에 신중을 기했다. 반면에 노완동은 마치 원숭이처럼 위아래로 풀쩍풀쩍 뛰면서 때로는 공중에 머문 채 발길질을 해댔다.
개방사람들은 옆으로 물러서서 그들의 싸움을 구경했다. 그들의 훌륭한 법수와 법식들을 보며 탄성을 내지를 뿐이었다.
노유각과 노완동의 발재간은 쉽게 가름되지 않았지만 노완동의 경우는 다분히 장난기가 많았다. 노유각을 해칠 마음은 아예 없었고 그저 놀이상대로 삼을 뿐이었다. 노완동이 발길질을 하다말고 말했다.
"듣자하니 일찍 남송의 인종(仁宗)황제가 공차기를 좋아했는데 그 수하에 고구(高球)라는 사람이 있었지. 그 사람이 발길질을 썩 잘했던 모양이야. 자넨 노유각이라 하지 말고 노유구(魯有球)라 부르는 게 어때?"
히히덕거리는 것으로 일관하는 노완동을 보다못한 노유각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좋지, 내가 네 놈을 걷어차 사구(死球)로 만들어버릴테다!"
노유각의 발길질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자 노완동이 자기 발로 노유각의 발을 걸어 몸을 훌쩍 날렸다. 그런데 순간 공중으로 떴다 다시 떨어지면서 노유각의 덜미를 걷어차 버린 것이었다.
"어쿠!"
노유각이 쓰러지자 노완동이 박장대소를 하며 놀려댔다.
"우화화화! 개방(**)아, 개방아, 쌀 빼앗으려다 다 못 빼앗고 막걸리만 마셨구나!"
그런데 갑자기 노완동의 웃음소리가 멈췄다. 노완동 주위로 몇사람이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개방의 장로들이었다. 그들은 부귀산인(富貴散人) 범장천(範長天), 청한자자(淸閑慈者) 노명성(魯名聲), 사개(蛇개) 정원(程遠), 일점지(一點지) 나장태(羅長太), 소미타(笑彌陀) 추우(鄒雨). 이밖에도 냉소를 짓고 있는 외팔이 소검(少劍) 오평(伍平)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마치 한마리의 원숭이를 구경하는 것처럼 노완동을 냉소적인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노완동은 갑자기 그들이 출현하자 웃음을 거둔 채 말했다.
"재미없군. 난 그만 가겠어."
옆에 있던 부귀산인 범장천이 얼굴에 웃음을 띠우면서 노완동에게 다가와 예를 올렸다.
"도대체 뉘신데 우리 개방사람과 싸우십니까?"
노완동이 그 말에 손을 홱 내저으며 무시하려 했다.
"됐어, 됐어. 모르면 모르는대로 가만있으라구. 나 역시 당신들이 누군지 모르잖아. 그러니 우리 서로 묻지 말자구."
노완동은 갑자기 느낀 위기감에 얼른 빠져나갈 마음이었다. 아무래도 개방의 여러 장로들인 듯한데 무예가 모두 뛰어나 보였다. 이들과 맞섰다가는 낭패를 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소씨 거렁뱅이의 등어리는 썩은 살점이 사라지고 허물이 앉았는데 해독제의 효과를 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너무 많이 복용을 했는지 소씨 거렁뱅이는 깨어나자마자 심하게 토하기 시작했다. 쓴물까지 다 올라오고도 구역질은 쉽게 멈추질 않았다.
범장천이 소씨 거렁뱅이게 허리 숙이며 말했다.
"소방주님, 저희들이 늦게 당도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입을 약간 내밀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말했다.
'무슨 개떡같은 방주더냐? 너희들의 방주인 미운산이 일보기 싫어 내게 짐보따리를 맡긴건데. 너희들 중의 어느 놈이 미운산을 해친 나쁜 놈일지도 모르지. 그놈을 알면 잡아죽이는 건데.'
그때 한쪽에서 껄껄 웃는 소리가 들여왔다. 모두들 깜짝 놀라 그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어찌나 웃음소리가 크던지 사람의 혼백마저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곳엔 한 거인이 발에 만화(蠻靴)를 신고 몸에는 호목을 두른 채 서 있었다. 왼쪽 팔소매를 허리에 감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흉악하기 그지 없었다. 커다란 눈에서는 불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그가 고수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범장천이 예의를 갖추며 물었다.
"선생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거인이 오만한 자태로 지껄였다.
"네 놈이 다른 사람을 몰라보는 거야 어쩔 수 없다만 날 모른다면 곧 죽음밖에는 없을 것이다!"
거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아주 거만하게 웃었다. 그 말에 화가 난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이 달려나가 한판 붙으려고 했다. 그러자 범장천이 손을 내어 맹동하지 말라고 말렸다.
"선생의 성함은 모르오나 말씀해주시면 우리들이 그만큼 눈을 넓힐 수 있을텐데요."
거인이 범장천의 말에 다시 웃었다.
"좋아. 알려주지. 너희들도 알겠지만 난 천하에서 가장 지독하고 사나운 노독물 구양봉이라고 한다."
개방의 장로들은 모두 질겁을 했다. 비록 구양봉이 아직까지 그렇게 이름을 날린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서역의 백타산장이란 곳에 있는 백타산군이 바로 구양봉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구양봉과 무예를 겨룰 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 역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었기에 놀라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점지 나장태가 코방귀를 뀌며 나섰다.
"당신은 여기에 뭘 하러 왔소?"
구양봉이 너털웃음을 앞세우며 대답했다.
"헛헛헛, 너희들이 서로 마구 죽이는 게 재미있더군. 처음에는 검을 가진 자가 이 죽어자빠진 놈들과 싸우더니 후에는 저 자가 오지 않겠어. 난 저 자가 바로 소씨 거렁뱅이란 걸 알고 있지. 검을 가진 놈이 저 죽어넘어진 놈들과 반나절이나 싸우다가 결국 검을 빼앗겼단 말이야. 저 소씨 거렁뱅이가 빼앗은 검으로 검 임자의 손을 찍어 눌렀거든. 그래서 검 임자는 결국 소씨 거렁뱅이가 지닌 죽통을 맞고 쓰러졌지. 그런데 이 소씨 거렁뱅이는 원래부터 저 쓰러진 놈들
과 한 무리였어."
구양봉의 말에 장로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구양봉의 말을 믿어야할지 얼른 감을 잡지 못하는 눈치들이었다. 여기에 모인 장로들은 11대 장로들 중 누군가 미운산을 암암리에 해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놈은 미운산에게 몰래 독약을 먹여 두 다리를 못쓰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자가 누구인지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확실히 짚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씨 거렁뱅이가 옥면검객 호심을 죽였다는 말에 모두들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범장천이 소씨 거렁뱅이게 물었다.
"방주님, 이 구양봉선생은 널리 알려진 인물인데 거짓을 말하지는 않겠지요?"
그러자 소씨 거렁뱅이가 머리를 쳐들며 크게 꾸짖었다.
"범장천, 자넨 정말 바로로군. 그래 이 구양봉이란 놈의 개수작을 곧이 듣는단 말이냐? 난 아까 절 안에서 호장로와 술을 마셨는데 누가 불러 그가 밖으로 나갔단 말이다."
청한자자 노명성이 쌀쌀한 어조로 합세했다.
"소방주, 그렇다면 호장로가 절 밖으로 불리워 나갔는데도 당신은 방관을 했단 말씀이군요?"
소씨 거렁뱅이가 더욱 거칠게 맞서며 대꾸했다.
"어쨌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네. 그건 호장로의 일일 뿐, 쥐새끼 같은 놈들이 그 사람을 찾는데 내가 거기까지 따라갔어야 하나?"
이번엔 사개 정원이 나섰다.
"호장로가 밖으로 나간 다음에도 당신은 여전히 혼자 앉아 술을 마셨단 말이군요?"
"그렇다. 그 사람이 검만 빼어들면 순식간에 그 쥐새끼 같은 놈들의 염통을 꿰어버릴 줄 알았다. 누가 그 사람이 죽임을 당할지 알았겠나?"
범장천이 더욱 의심이 간다는 얼굴로 말했다.
"소방주, 그럼 호장로가 저 놈들과 싸우다가 맞아 죽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내가 나와보니 호장로는 이미......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구하려고 했는데 어디 뜻대로 일이 돼주어야 말이지."
소씨 거렁뱅이의 미적지근한 대답에 사개 정원이 재차 물었다.
"소방주, 당신이 나올 때 호장로는 구해달라고 소리를 질렀겠지요?"
"그 사람이 비명을 질렀으니까 내가 나왔던 거네. 하지만 이 놈의 구양봉이 나타나 싸움을 걸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나도 하마터면 저 놈의 손에......"
소씨 거렁뱅이는 그들이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어려웠다. 하지만 벌써 사람들의 눈길이 구양봉에게로 집중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구양봉은 있을 수 없는 거짓이라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범장천이 다시 물었다.
"소장주, 그런데 당신 몸의 상처는 어떻게 생긴 겁니까?"
소씨 거렁뱅이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소리쳤다.
"어떻게 생기다니? 그럼 내 스스로가 독을 뿌렸단 말인가!"
그때 구경만 하고 있던 소미타 추우가 비아냥거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난 남이 믿게끔 하기 위해서라면 제 몸에 독약을 뿌릴 수도 있다고 보는데......"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는 속으로 혼자 저주의 말들을 흘릴 뿐이었다.
이 시점에 와서 한결같이 자신에게 호감을 두지 않을 줄 어찌 알았으랴. 이 장로들은 오의파와 금의파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자기 패거리의 이익만을 위해 눈알이 빠지게 싸우는 처지였다. 더군다나 아무 패거리에도 속하지 않는 소씨 거렁뱅이가 미운산에 의해 개방의 방주로 오르자 누구도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범장천이 다시 미온적인 태도에 의심을 품고 물어왔다.
"소방주, 당신과 구양봉이 맞섰다는데 그럼 누가 이겼습니까?"
소씨 거렁뱅이가 의외로 고개를 숙이고는 낮게 뇌까렸다.
"저 놈을 이기지 못했어."
그 말에 모두들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그들은 소씨 거렁뱅이의 천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에게 허리 굽히는 성미가 아닌 그가 비록 무예가 딸린다 해도 그것을 자인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신이 구양선생보다 무예가 못한데 무엇 때문에 독액을 맞았습니까?"
하는 범장천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가 화를 버럭 냈다.
"내가 저 사람과 싸울 때 구양봉이 놈들의 말만 듣고 놈들에게 독액을 뿜게 한 것이야. 구양봉은 한쪽에 서서 냉소를 짓고 있었지."
구양봉이 나섰다.
"그 말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느냐? 내가 네 놈을 죽일 수 있었는데 하필 그 여우무리같은 놈들을 시켜 너를 공격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냐? 그렇게 하면 강호의 금기(禁忌)를 범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구양봉의 말에 믿음이 생긴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소씨 거렁뱅이를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반면에 소씨 거렁뱅이는 자기를 믿어주지 않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너희들 금의파와 오의파들이 방주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줄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를 업신여기려는 것이겠지. 후후, 나 역시 이런 개떡 같은 방주노릇은 하고 싶지 않다. 너희들이 정 원한다면 이 녹옥죽봉을 가져가거라!"
그러면서 녹옥죽봉을 허공을 향해 던졌다. 녹옥죽봉이 화살처럼 날아오르더니 땅속으로 절반이나 깊이 꽂히고 말았다. 그 순간 범장천과 나장태가 그 녹옥죽봉을 탐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너희들이 나를 없애고 싶거들랑 그렇게 할 것이지 왜 호장로를 죽였다고 모함을 하느냔 말이다."
"방주께서 자기 자리를 소장로에게 내어준 건 소장로더러 방내의 그 반역자를 색출하라는 뜻인 줄 압니다. 소장로께서 방주가 된 처지에서 반역을 꾀한다면 우리 방에 큰 화가 미칠 것으로 압니다."
범장천의 말이 끝나자 일점지 나장태가 말했다.
"소씨 거렁뱅이, 당신이 옥면검객 호심을 해친 죄는 따지지 않을 수 없었소!"
"개방에 네 놈 같은 바보들 뿐이니 어찌 태평성쇄할 수 있겠느냐?"
소씨 거렁뱅이는 나장로와 몇몇 장로들이 차디찬 시선을 보이자 계속 말을 이어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 히히 웃으며 끼어들었다.
"임자들은 왜 이처럼 모두 밥통을 닮았는가? 임자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왜 내게 묻지 못해?"
"당신은 누구요?"
라고 범장천이 묻자 또 히히 하고 웃었다.
"난 노완동 주백통이야. 알만하냐?"
범장천이 모른다고 고개를 젓자 노완동이 한탄하는 듯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나 같은 사람은 아무런 명성도 없구나. 물론 날 모를 수도 있겠지. 그럼 내가 말해주지. 난 전진교 사람이다."
그러자 청한자자 노명성이 물어왔다.
"당신이 정말 전진교 사람이요? 그럼 구처기의 제자거나 왕처일의 제자이겠구먼?"
"네 놈이야말로 구처기의 제자이고 왕처일의 제자이로다. 네 놈이 구처기의 제자면 나한테는 도손(徒孫)이 되겠구먼."
청한자자 노명성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전진교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있지만 내 보기엔 그런 것 같지 않다. 자기가 구처기의 제자가 아니라면 구처기가 저 놈의 제자벌이 된다는 말이렷다. 하지만 저 놈은 구처기와 나이가 엇비슷하거나 기껏해야 몇살밖에 더 먹어 보이지 않는다. 저 놈이 왕중양과 동년배인 것 같지는 않아. 그리고 왕중양한테 그 무슨 사형, 사제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 없는데...... 만약에 왕중양에게 사형이나 사제가 있다면 명성이 드높을 법 한데 저 놈은 그렇지도 않다."
청한자자 노명성 뿐만 아니었다. 모두들 노완동을 대협 왕중양의 사제일 수는 없다고 믿었다.
"당신은 전진교 사람이라고 하는데 전진교의 어떤 사람인가를 밝히시오?"
범장천이 그렇게 재촉하자 노완동이 허옇게 이빨을 내보이며 냉소를 씹었다.
"난 전진교 교주 왕중양의 사제다, 어때? 그래도 믿어지지 않는단 말이지?"
"당신이 천진교 교주 왕중양의 사제라면 강호에서는 아주 존경을 받는 인물일텐데 도체 무엇을 보았는지 여기서 말해보시오?"
소미타 추우가 그렇게 거들자 노완동은 속으로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호 이것참, 나더러 무엇을 보았는가 털어놓으라구? 큰 낭패로구나. 난 다만 이 죽어넘어진 놈들이 저 영감을 죽이려 했고, 저 사람들의 싸움이 승부를 가름하기 어려울 지경으로 치닫는 것만 보았을 뿐인데...... 그러니 저 영감이 그 전에 무엇을 어찌하였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나 이 노완동이 보건대 저 영감 소씨 거렁뱅이는 필시 좋은 사람이구 오히려 저 구양봉이가 그 반대일 것 같아. 그렇다면 내가 저 사람을 구해주면 어떨까?'
노완동이 잠시 그렇게 자신을 추스리고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난 이 구양봉과 소씨 거렁뱅이가 싸우다가 후에 저 놈들이 덤비는 바람에 보지를 못했소이다."
개방의 장로들은 만일 노완동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철장방 놈들이 호장로를 죽였고 이 백타산군 구양봉이도 호장로를 죽인 흉수일 거라 짐작했다. 그들은 모두 구양봉에게 살기어린 눈빛을 쏘아대며 싸울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노완동이 더 말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또 한가지가 생각이 나서 그만 입을 열고 말았다.
"사실 나도 임자들 중에 누가 누굴 죽이려 하는지 모르겠소. 전번에 그 작은 객점에서 나도 임자들 개방사람이 둘이나 죽는 걸 보았지.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겠거든. 나는 힘껏 때린 것도 아닌데 숨이 꼴깍 떨어지더라구."
노완동이 지껄이자 장로들은 전율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그들은 속으로 과천청 제갈옥생과 운중현 서불성 두 장로 역시 이 전진교의 노완동에게 죽임을 당했구나 하고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두 사람의 사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노완동이 스스로 자백을 해오자 장로들은 크게 노할 수밖에 없었다. 청한자자 노명성이 이를 부득 갈며 곧 달겨들 태세를 취했다.
"오호라, 바로 네 놈이었구나?"
자기를 바라보는 모두의 눈에서 적의와 살기가 충만해 있음을 느낀 노완동이 팔을 내저었다.
"내 말을 끝까지 들으라구. 그 두 사람이 바로 여아를 죽이려 했단 말야. 그래 내가 어찌 사람을 죽이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신이 그들 두 사람이 여아를 죽이려 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었소?"
범장천이 다그치듯 묻자 노완동이 큰한숨을 섞어 말했다.
"휴우, 그 두 사람이 바로 여아를 죽이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들을 제지시켰던 거야."
그러자 소미타 추우가 물어왔다.
"그렇다면 과천청 제갈장로의 몸에 박힌 암기(暗器)가 당신이 손 쓴 것이란 말이지?"
노완동은 그제서야 자기가 바보짓을 한 것에 후회를 했다. 이 일을 말하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다. 사실 그때 누가 여아를 죽였는지는 노완동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또한 노완동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도 저 사람들이 믿을 리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이런 말을 새롭게 꺼낸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차라리 말하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다급해진 노완동이 뒤늦게 수습을 하려고 덤볐다.
"아니야, 아니!"
그러나 노완동은 거짓말을 하는 재주가 썩 신통하지가 못해 그 당황하는 기색으로 곧 들통이 나버렸다. 개방장로들은 더는 그에게 아무것도 물으려 하질 않았다. 오히려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볼 뿐이었다.
"당신은 전진교이므로 우리 개방과는 깊은 인연이 있는 거요. 그러니 당신은 우리와 싸울 생각을 말고 전진교 교주 왕중양을 함께 찾아 갑시다. 가서 그 분과 시비를 따져보는 게 어떻소?"
범장천이 이런 제의를 하자 노완동이 빈정댔다.
"거기에 뭐 시비를 따질 거라도 있나? 우리 사형께선 당신들 같은 거지들을 만나려고 하질 않을 걸."
그 말은 사실이었다. 왕중양은 평소에 외인들과는 접촉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자기들을 멸시하는 말을 들은 개방의 장로들은 대노할 수밖에 없었다. 범장천이 한발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좋아. 네 놈이 전진교 사람이라고 해서 우리 개방을 깔보고 장로를 세 사람이나 죽였으니 우리 개방에서 체면을 차릴 필요는 없다."
범장천이 세번 요상한 웃음을 흘리자 개방의 장로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노완동에게로 덤벼들었다. 또한 다른 사람들마저 장로들과 합세하려고 했다.
노완동이 당황하여 외쳤다.
"너희들은 모두 미친 놈들이 아니더냐? 누가 너희들의 사람을 죽였는지도 모르면서 내게 함부로 시비를 걸다니. 내가 너희네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해!"
그러나 노완동이 아무리 변명을 해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온갖 법수를 동원해 노완동을 치려는 생각 뿐이었다. 청한자자 노명성은 상상할 수도 없는 법수를 부리며 노완동에게로 다가왔다. 사개 정원은 뱀 두 마리를 자유자재로 부렸으며, 소검 오평은 외팔로 검을 움켜쥐었다. 부귀산인 범장천, 소미타 추우는 조금 멀찌감치에 물러서서 노완동의 빈틈을 노렸다. 노완동은 꼼짝없이 그들에게 갇히고 말았다. 더군다나 평소에 가장 두려워했던 뱀을 든 사개 정원을 경
계하느냐 노완동은 땀을 뻘뻘 흘렸다. 노완동은 도망갈 궁리만을 모색할 뿐이었다. 누가 옥면검객 호심을 죽였는가 하는 것을 따질 만한 경황은 아예 없었다.
이때 한쪽에 서서 구경하고 있던 구양봉은 매우 흡족한 얼굴을 지었다. 그는 너무도 기분이 좋아 그저 헤헤 웃기만 했다. 그는 자기의 말 한마디에 전진교와 개방이 원수가 되어 죽기로 싸우는 것을 보자 더없이 즐거웠다.
노완동은 여전히 그 뱀 때문에 전전긍긍이었다. 이를 본 개방 장로들은 노완동의 심기를 알아차렸다. 사개 정원이 팔을 들어 말했다.
"모두 비키시오. 내가 저 놈을 상대하리라!"
사개 정원이 자루를 벌리더니 큰 뱀 수십마리를 꺼냈다. 괴상망측하게 생긴 그 뱀들은 대가리에 혹같은 것이 달려있어 보기만 해도 소름이 확 돋았다. 사개 정원이 이 독사들을 노완동에게 풀었다. 슉슉- 삽시간에 수십마리의 독사들이 노완동을 에워쌌다. 노완동은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못했다.
"노완동, 네 놈이 우리 개방의 세 장로를 죽였으니 어서 순순히 말을 듣고 우리와 함께 개방에 가서 방주님의 처분을 받도록 하여라!"
범장천의 호기스런 말에 노완동이 웃었다.
"어느 방주를 말하는 거냐? 소씨 거렁뱅이가 너희들의 방주가 아니더냐?"
범장천은 그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냉소만 짓고 있는데 일점지 나장태가 대신 나섰다.
"소씨 거렁뱅이는 우리 개방의 규율을 어긴 것이다. 개방에서는 개방사람들을 모아놓고 소씨 거렁뱅이를 방주에서 추방시킬 것이다!"
노완동은 정말 사면초과에 몰린 상태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미운산에게 개방 방주의 자리를 물려받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지금 진상을 밝힌다는 것도 어렵게 되었구나. 하는 탄식만 가슴에 새겼다.
휘익- 휙-
사개 정원의 휘파람 소리에 따라 독사들이 대가리를 쳐든 채 더욱 노완동에게로 조여왔다. 노완동은 콩알 만한 땀을 뚝뚝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네 놈이 호장로를 죽였지?"
사개 정원의 물음에 노완동은 일단 목숨을 구하고 봐야겠다는 심정이었다.
"난 그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난 다만 너희들의 다른 두 사람만을 죽였을 뿐이야. 한 사람은 내가 암기로 죽였고 다른 사람은 무슨 영문인지 저절로 쓰러졌다구."
"노완동. 네가 사실을 밝힌 것은 대장부의 행동답다. 그러니 우리와 함께 개방에 가서 처분을 받아라!"
"좋아, 그대들이 가자면 가는 거지."
달리 방도가 없다는 결론 때문이었다. 그러자 곧 소미타 추우가 노완동에게로 다가왔다. 노완동의 몸에 있는 대혈을 눌러놓고는 그를 독사들로부터 빼내왔다. 모두들 소씨 거렁뱅이를 주시했다. 그는 앉은 채로 기공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범장천이 말했다.
"소방주, 당신도 우리와 함께 개방의 총부로 가야겠소."
"난 너희들의 방주가 아냐. 미운산이 나에게 방주노릇을 시켜서 겨우 며칠 했을 뿐이라구. 난 방주노릇이 싫어. 난 이제 필요없으니 녹옥죽봉도 가져가라구."
"물론 녹옥죽봉은 우리가 가져가야겠소. 당신은 방주로서 행실이 옳지 않고 또 본 방의 장로를 해치었소. 본 방의 집접장로가 사실을 밝힌 다음 당신의 일에 대해 처리가 있을 거요. 그러니 우리와 함께 동행을 해야되겠소이다."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는 이 사건을 밝히는 것도 어렵고 그들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입을 다문 채 그들의 다음 행동을 지켜보고자 했다.
범장로가 다가와서 녹옥죽봉을 거둬가려고 하는데 나장로가 나섰다.
"잠깐!"
범장로가 우뚝 자리에 선 채 머리를 돌려 나장로를 응시했다.
"나장로께서 무슨 할 말씀이라도 있으시오?"
"녹옥죽봉은 개방에 있는 진방(鎭幇)의 보배요. 당신이 그걸 가져가려면 개방사람들의 승인이 있어야 하오. 당신은 슬그머니 그것을 가져갈 셈이요?"
"이 녹옥죽봉은 원래 금의파장로의 수중에 있던 것이었소. 전의 방주 미운산도 금의파사람이었소. 그런데 후에 이 소씨 거렁뱅이에게 잘못 전해졌던 것이오. 그러니 이젠 금의파 수중으로 다시 귀속되어야 하오."
"금의파? 금의파가 다 무슨 소용이요? 개방이 창립될 때 그 금의파란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소. 멋들어진 옷을 입고 호주머니에 은자가 불룩한 것이 무슨 거지란 말이오? 기생년들처럼 거리에서 웃음을 팔면서 밥을 비는 게 아니라 향략을 누리고 있으니 어찌 거지라고 할 수 있겠소?"
하며 나장로가 주먹을 뻗었다. 그러자 범장천이 재빨리 손으로 주먹을 가로 막으며 말했다.
"나장로. 화를 내지 마시오. 그까짓 재간으로 감히 날 건드리려고?"
"그래, 너 일개의 범장천이 날 어쩔 셈이냐?"
두 사람은 녹옥죽봉을 옆에 놓고 곧 싸움을 시작했는데 승부가 쉽게 나지를 않을 것 같았다.
여러 장로들이 쌀쌀한 기색으로 그들의 싸움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방주의 자리를 놓고 금의파와 오의파 간의 갈등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에 모두들 심각한 눈빛을 감출 수 없었다.
"얍!"
나장로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그럴 때마다 범장천은 매번 그 공격을 막아냈다. 나장로는 범장천이 자신의 공격을 매번 피하는 것에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두 사람은 어느새 삼사십합이나 싸웠는데도 승부를 판가름하질 못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비웃음을 가득 입가로 그린 채 구경만 했다. 미운산의 말이 과연 틀리지 않았구나. 금의파이니 오의파이니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심성이 바른 놈이 없지 않는가. 단지 개방에서 자리나 다투고 녹옥죽봉이나 차지하려고 싸울 따름이지. 하며 속으로 비웃기만 했다.
그런 소씨 거렁뱅이의 속내를 읽어내지 못한 두 사람은 사정없이 치고 박고 싸움에 열중할 따름이었다.
가뜩이나 기분이 흡족하던 차에 구양봉은 더욱 신나는 구경거리를 보게 되었다.
"너희들 개방놈들도 실로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자기들끼리 죽자살자 싸움을 벌이다니, 너희들 두 놈 중에는 이 녹옥죽봉을 차지할 인물이 없는 것 같으니 차라리 내가 가져가는 게 좋겠구나. 너희들이 승부를 가르게 되면 그때 돌려주마."
그렇게 중얼거린 구양봉이 번개같이 몸을 놀려 녹옥죽봉을 한손에 넣고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것을 본 장로들은 그만 사색이 돼버렸다.
"구양봉, 게 섰거라!"
하고 소리 친 것은 소미타 추우였다. 그는 구양봉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므로 구양봉이 도망을 치자 곧 쫓아갔다. 그러나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우헤헤헤헤!"
멀리서 구양봉의 요상한 웃음소리만 들려오더니 곧 그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개방의 장로들은 소씨 거렁뱅이와 노완동에게 화풀이를 할 기세였다. 이 두 놈들 때문에 구양봉이 어부지리로 녹옥죽봉을 가로챘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구양봉의 재간으로 볼 때 그것을 다시 찾아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범장천이 눈을 감은 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눈을 떴다.
"됐소. 이 두 놈을 개방총부로 끌고 간 후에 다시 보기로 하지."
다른 방법을 찾을 길 없는 장로들은 범장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의 전임방주인 미운산은 여전히 그 밀실에 머물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미립이 서 있었다.
개방의 장로들이 한사람씩 천천히 그의 앞으로 들어섰다. 범장천, 나장태 등은 미운산에게 예를 올렸다. 미운산이 가벼운 웃음을 자아내며 물었다.
"여러 장로들이 무슨 일로 이처럼 예의를 갖추는고? 난 이미 본 방의 방주가 아니지 않소?"
범장로가 그동안 자기들이 겪었던 일에 대해 소상히 고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난 미운산이 놀라며 장로들을 돌아보았다.
"개방 방주의 녹옥죽봉은 대신물(大信物)인데 악인의 수중에 들어가서야 되겠는가? 큰 화가 미칠지도 모르는 일이야."
모두들 숙연한 자세로 아무 대꾸도 못하였다. 구양봉의 무예가 대단하였으므로 그를 이기고 다시 되찾아올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범장천이 입을 떼었다.
"또 한가지 일이 있사온데......"
소씨 거렁뱅이와 노완동의 일을 낱낱이 고하자 미운산이 다시 탄식을 하며 말했다.
"우리 개방의 11명 장로들 중에 무예로 말하자면 소씨 거렁뱅이가 첫자리이고 호장로가 그 다음인데 한 사람은 이미 죽고 또 한 사람은 상했으니 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있는가?"
범장천이 소씨 거렁뱅이를 석실로 끌고 들어왔다. 미운산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소방주, 무고하우?"
소씨 거렁뱅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개떡같은 방주란 말입니까? 당신이 그 녹옥죽봉을 내게 주었기에 허구헌날 그걸 지켜야 한단 말입니다. 이거 어디 밥먹고 할 노릇입니까요? 개방의 사정이 망태기가 되어 수습해낼 수가 없게 되니까 그 방주자리를 내게 맡겼으니 누구 하나 내 말을 듣는 놈이 없소이다. 난 이젠 그만 두겠소."
"소방주, 임자의 마음이 정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 그 대신 임자가 녹옥죽봉을 되찾아온다면 마음대로 하게 할테니 그리 아시오."
미운산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꿀먹은 벙어리가 돼버렸다. 그러면서 속으로 미운산의 말이 옳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좋소. 내가 그 녹옥죽봉을 찾아다 드리지요."
말을 마친 소씨 거렁뱅이는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나왔다.
범장천. 나장태 등 여러 장로들은 소씨 거렁뱅이가 나가지 못하게 가로 막으려고 했으나 미운산이 손을 들었다. 그냥 보내라는 뜻이었다. 장로들은 그런 미운산의 태도에 못마땅한 낯빛이었다. 그들은 아직 소씨 거렁뱅이가 호심의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금의파 장로들은 누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호심은 두 파의 싸움에서 오는 재앙을 막으려고 애써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미운산이 소씨 거렁뱅이를
그냥 놓아주는 게 아닌가.
"방주께서는 어이하여 저 자를 놓아주십니까요?"
범장천이 묻자 미운산이 설명했다.
"그 녹옥죽봉이 구양봉의 손에 있는데 다른 사람보다는 그래도 소씨가 가져오는 게 합당하이. 그 녹옥죽봉은 그 사람이 가서 뺏어와야 해."
그때서야 여러 장로들이 미운산의 말을 이해했다.
"나의 10대 장로에다가 소장로까지 합하면 열한사람인데 지금 소장로가 상했고 또 호심, 제갈씨와 서씨 등 동생들이 죽었네 그려. 내 보기에 우리 개방에 재난이 점점 크게 일어날 조짐이니 여러 장로들은 각별히 조심을 해야겠네."
범장천이 다시 허리를 숙였다.
"방주님, 제게 드릴 말씀이 있사온데 드려야할지 어쩔지......"
"범장로, 할 말이 있거들랑 시원히 털어놓게나."
"개방에 생긴 난은 다 우리 10대 장로들 손에서 이루어진 겁니다. 방주께서 자리를 소장로에게 내어줘서는 개방이 흥성할 수 없습니다. 소씨 거렁뱅이는 비록 방주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걸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개방의 대사를 망쳐버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자 미운산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빠른 시일 안에 새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세. 소장로가 녹옥죽봉을 빼앗오는가 하는 것을 봐가며 다시 방법을 의논해보는 게 어떤가?"
여러 장로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입을 모으고는 물러났다.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 두 사람이 노완동 주백통을 끌고 들어왔다. 노완동이 미운산을 보자 히히덕거리며 떠벌였다.
"당신이 바로 개방의 방주요? 그렇소?"
미운산은 노완동을 보고 이상한 생각에 휩싸였다. 삼사십세가 된 무림의 고수라는 사람의 행동거지가 아이처럼 덜렁거리고 천진한 것이 한편 우습기도 했다.
"네 놈이 제갈장로와 서장로를 죽였느냐?"
그 말에 노완동이 태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운산이 다시 엄하게 꾸짖듯 물었다.
"그래, 왜 우리 개방의 장로들을 죽였느냐?"
"그 두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있지 뭡니까? 여아라는 처녀애를 죽이고 있었단 말이요. 난 그 처녀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그 못된 두 놈을 죽여버렸소."
미운산이 빙그레 웃었다. 여아가 도망한 일은 실로 입밖에 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네 놈은 전진교 사람이기에 억울하더라도 이 개방총부에서 며칠 갇혀있어야겠다. 너희네 전진교 교주 왕중양이 온 다음에 다시 보기로 하자."
미운산이 단호하게 말하자 노완동은 목청을 높였다.
"뭘 두고 볼 게 있단 말이요? 당신이 날 풀어주면 될 게 아니겠소? 난 당신을 해친 일도 없는데 날 가둬서 뭘 어찌하겠단 게요?"
"개방의 서장로, 제갈장로가 네 손에 죽었는데 네 놈이 그따위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더냐?"
"난 그 사람을 해친 게 아니라니까 그러슈. 당신의 제갈장로가 내게 먼저 암기를 뿌렸단 말이요. 그 암기엔 독이 있었는데 난 다만 그가 내던진 것을 되받아 던졌을 뿐이요. 그게 재수없게도 그 자의 몸에 맞은 것이오. 그리고 당신의 그 서장로는 이미 쓰러져 있었는데 어떻게 죽었는지는 내 모르겠소. 이래도 내게 잘못이 있단 말이요?"
그러나 미운산은 지금 노완동이 허튼소리만을 한다고 여길 뿐이었다.
"거짓말 말아라! 네 놈이 여아를 죽였지?"
"난 그 여잘 죽이지 않았소. 또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모르오. 내가 제갈장로와 싸우다가 머리를 쳐들어 보니까 이미 여아가 죽어 있었소. 난 절대 여아를 죽이지 않았소이다."
역시 미운산은 노완동의 말에 신뢰하지를 않았다.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분위기를 얼른 읽어낸 노완동이 말했다.
"당신들이 믿건 안 믿건간에 난 여아를 죽이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여아의 죽음과는 맹세코 아무 상관도 없소."
미운산이 손을 내어 휘젓자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이 노완동을 끌고 나갔다.
개방총부를 나선 소씨 거렁뱅이는 어떻게 구양봉을 찾아내야할지 막막했다.
'내가 개방의 방주 노릇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백번 옳은 생각이지. 개방의 방주 노릇이 뭐가 좋단 말인가. 마음고생만 할 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 그 녹옥죽봉이란 것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이그, 정말 좋은 점이라고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어. 그저 이꼴 저꼴 보지 않고 거지노릇이나 하는 게 나아.'
그는 다짐을 하듯 속으로 생각하고는 거리에 있는 육포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술로 우울한 심사를 달래고 있는데 깜찍하게 생겨먹은 처녀가 맞은편에 와서 생긋 웃는 것이었다.
"넌 누군데 날 쳐다보고 웃는 거지?"
그러자 계집애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전 미립이예요. 당신은 미립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소씨 거렁뱅이는 순간 혹시 미운산의 딸이 아닌가 했다. 미운산에게도 미립이라고 부르는 어여쁜 딸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취기가 어느정도 오른 것을 빌미로 미립에게 쉽게 큰소리를 내질렀다.
"그런데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그러나 미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전히 방글방글 웃음을 앞세우며 애교를 떨었다.
"당신은 개방의 장로이신데 왜 이곳에서 술을 마시지요? 무슨 시름겨운 일이라도 있나보죠?"
소씨 거렁뱅이가 머리를 내저었다.
"내게 무슨 시름이 있겠느냐. 네가 상관할 일도 아니니까 저리 물러가거라. 쬐끄만 계집이 뭘 안다고 참견이냐?"
"호호호!"
갑자기 미립의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소씨 거렁뱅이는 깜짝 놀라 미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호호, 아버지가 그러는데 당신이 녹옥죽봉을 잃어버렸다면서요?"
그러면서 녹옥죽봉을 다시 찾으러 나온 길이란 사실도 알고 있다면 미립이 계속 비웃듯 조잘거렸다.
"그러나 구양봉에게 죽을까봐 여기서 술이나 마시며 신세한탄을 하는 것이죠?"
"씨끄럽다! 이 소씨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아!"
"그렇다면 왜 당장 그놈을 찾아가지 못하고 여기서 술타령인가요?"
"내가 어디가서 그놈을 찾아낸단 말이냐? 그놈은 신출귀몰하고 한번 지나가면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는데 내가 어떻게......"
순간 소씨 거렁뱅이는 어린 계집 앞에서 별소리를 다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허나 그놈이라고 먹지도 자지도 않는다고 할 수는 없겠죠. 그런데 그놈의 키가 아주 크다는 걸 알고 있나요? 또 그놈은 짧은 적삼을 입었지 두루마리는 입지 않아요. 호복차림을 했고요."
그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귀가 솔깃했다.
"그놈은 또 항상 독사장을 짚고 있어요. 그 독사장 자루에는 낯짝이 두개인 괴상한 몰골이 새겨져 있고 수시로 독사가 기어나오곤 하죠."
소씨 거렁뱅이는 순간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 그래, 술집과 객점만 찾아다니로라면 그놈을 만날 수 있을 거야"
"훌륭해요. 당신은 과연 비범한 분이시군요."
육포집을 빠져나온 소씨 거렁뱅이는 눈에 띄는 술집과 객점들을 샅샅이 훑으며 구양봉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벌써 여러날 곳곳을 뒤져보았지만 구양봉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를 못했다. 하루는 한 객점에 들려 구양봉의 흔적을 발견했지만 바로 전날 묵고는 아침 일찍 떠났다는 거였다. 그는 그 향방을 캐물어 곧 임안성을 나왔다.
한참을 뒤쫓자 농촌이 나왔다. 작은 촌락이었는데 몇집 살고 있지를 않았다. 소씨 거렁뱅이는 아직 상처도 치료되지 않았고 온종일 걸음에 시달려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할 수 없이 어느 집으로 찾아들어가 주인을 불렀다. 한참 만에 웬 노인이 나왔다.
"손님은 뉘시요?"
"사람을 좀 찾는데 혹 모르시나 해서요. 그 자는 남들과는 아주 다른 옷을 걸쳤지요. 옷은 왼쪽으로 여미게 되어있고 그리고 키가 아주 큰데 손에는 독사장을 들었습니다."
"아, 누구인지 생각이 나는군요."
그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곧 그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소씨 거렁뱅이는 노인에게 절까지 하며 채근했다.
"그래, 그 사람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어쩌죠. 그 사람은 방금 떠났는데. 조금 전까지 우리 집에서 밥을 먹었는데 아직 멀리는 못갔을 거요."
소씨렁뱅이는 노인에게 다시 한 번 예를 올리고는 곧장 구양봉을 쫓았다. 곧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는 숨이 차오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걸음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드넓은 황무지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와화화화!"
바로 구양봉의 웃음소리였다.
"네 놈이 기어코 나를 쫓아왔구나. 결국 이곳이 네 놈의 무덤이 될텐데 어떠냐?"
그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소씨 거렁뱅이는 한참 만에야 발견할 수 있었다. 구양봉은 나무가지 위에 가볍게 걸터앉아 조금씩 간들거리고 있었다. 눈빛에는 조롱의 기운이 가득 들어차 있는 모습이었다.
"구양봉, 어서 녹옥죽봉을 내게 내놔라! 그럼 네 놈과의 일은 없었던 걸로 할테니 어서. 그렇지 않으면 네 놈의 오장육부를 끄집어내어 아이들에게 장난감으로 나눠주겠다."
그러나 구양봉은 특유의 너털웃음을 아래로 뿌리며 몸을 흔들었다.
"한가지 너에게 알려줄 말이 있다. 나에게 너를 죽여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있는데 오늘 바로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 기쁘구나!"
"누구냐?"
"바로 너희네 방주다. 짐작을 했을텐데."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구양봉, 허튼소리 말고 어서 녹옥죽봉을 내놔라!"
구양봉이 날쌘 살쾡이처럼 나무가지에서 풀썩 뛰어 소씨 거렁뱅이 앞으로 내렸다.
"그래 좋다. 네 놈이 날 죽이면 이 녹옥죽봉을 가져갈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넌 이곳에서 죽게돼."
구양봉이 손에 있던 독사장을 추켜들었다. 독사장 자루 구멍으로 작은 뱀들이 들락날락하는 게 보였다. 구양봉은 잔뜩 소씨 거렁뱅이를 노려보며 일격을 가하려고 빈틈을 살피기 시작했다.



제14장 가짜 미립의 음모
구양봉이 독사장을 내리치자 소씨 거렁뱅이가 살짝 피했다. 천근의 무게를 자랑하는 독사장을 정면으로 맞받아쳐서는 안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소씨거렁뱅이는 오목지팡이로 구양봉과 대적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실력은 불꽃이 튈 정도로 격렬했다.
"받아랏!"
"오냐, 얼마든지 오너라!"
소씨 거렁뱅이는 오로지 녹옥죽봉을 빼앗으려는 마음이었기에 어느 때보다 힘이 넘쳐났다. 하지만 싸우면 싸울수록 구양봉의 법수는 더욱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차츰 소씨 거렁뱅이가 몰리는 판국이었다.
이미 나이가 들어차 오래 싸우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소씨 거렁뱅이는 일단 몸을 피할 생각이었다. 얼른 몸을 돌려 도망을 치려는데 구양봉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네 이놈! 어디를 도망치려 하느냐!"
소씨 거렁뱅이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구양봉이 바싹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잡히게 되면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 구양봉을 찾아나설 때는 오직 녹옥죽봉을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결심이 대단했는데 결국 대세가 불리하게 돼버렸던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런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한참 쫓고 쫓기고 하는 판에 어디선가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백성들은 먹는 것을 하늘로 아는데
천자는 어이하여 하늘만 위하는가
천자여, 듣고도 못 들은 체 말고서
먹을 것이 첫째라는 말 해 보시라
뒤이어 또 한 사람의 노래소리가 들려왔는데 앞의 것보다 더욱 애절하고 구슬펐다.
한신은 굶주릴 때 한끼 대접 받은 걸
천금 주고 그 은혜 갚았다니
진후가 굶주린 현량을 연회에 청하니
제비가 흙을 문 듯이 음식을 삼키지 못했어라
인생에서 고배를 마시는 시간 짧아도
부귀는 드물게 얻어진단 말 말아야 하리
원하노니, 그대 하루 세끼 음식을
차 한잔 밥 한술이라도 남 권할 줄 알아야 하리
이번엔 또 다른 사람의 노래소리가 들려왔는데 목소리가 매우 가늘었다.
여행길 돈 없다 걱정말아
목마르면 물 마시고 소금으로 끼니 떼우거늘
인생살이 편안할 날 없네
우물 파고 집짓고 일이 끝간데 없네
낭군께 한번이라도 더 좋은 음식 대접하니
나 죽으면 낭군께 누가 음식 권하랴
또 한 사람이 목탁을 두드리며 노래소리를 날려보내왔다.
같잖은 음식을 먹고
같잖은 옷을 입는데
하필 하루에 세끼씩이나 치르느냐
백성놈들의 생활이야 다른 재미란 없고
날마다 배 채울 일이 걱정이라네
마지막 노래 끝에는 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달려있었다.
구양봉과 소씨 거렁뱅이는 뜻하지 않은 노래소리로 잠시 넋이 나간 상태였다. 하던 동작을 멈추고는 모두 소리가 나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이윽고 다섯 명의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첫번째 사람은 얼굴에 약간 살이 붙었으며 배가 불거지고 걸음걸이가 매우 오만하였다. 양손에는 식칼과 국자를 각각 들었는데 짧고 투박한 식칼이나 가늘고 긴 국자는 보기에도 어설픈 데가 있었다. 그런데 국자 속에는 밥공기가 담겨져 있는 게 아닌가.
두번째 사람은 큰 솔을 들고 있었는데 크고 아주 무거워 보였다. 서른 여섯개의 가늘고 까만 털이 솟아있기도 했다. 세번째는 아무런 병장기도 들지 않고 오로지 두 주먹만을 틀어쥐고 있는 상태였다. 네번째는 눈을 지긋이 감고 팔장을 낀 채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섯번째는 손에 쇠갈쿠리를 들고 저울대와 저울추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들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바로 이들 다섯명은 명성을 드높히고 있는 황궁의 다섯 요리사들이었다.
그중 맏이인 묘수인주(妙手人廚) 묘대야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소씨 거렁뱅이, 그동안 무고한가?"
소씨 거렁뱅이가 멀찌감치 자기 뒤쪽에 서 있는 구양봉의 눈치를 살피며 대꾸했다.
"운수가 보다시피 썩 좋은 편이 아니오. 그런 다섯분의 요리사들께선 아주 좋아보이는데요."
묘대야가 손을 내저었다.
"황궁의 오주(五廚)들도 운수가 그저 그렇지. 보다시피 묵을 곳도 없게 되었소. 결국 예까지 와 그대들과 한데 섞이게 되었으니 부끄럽기까지 하다오."
둘째인 천도만과 과이야가 구양봉을 힐끔 바라보며 소리쳤다.
"구양봉 선생은 서역의 제일 고수라고들 하던데 우리들에게 한수 가르쳐 주시지요?"
구양봉은 자기를 에워싸듯 나타난 그들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차였다.
"일단 물러나시오! 내 저 자를 죽인 다음 당신들과 한판 붙을 것이니."
다섯째 일지평 평오야가 거들었다.
"당신은 우리 다섯 황궁 요리사들과 싸우지 않고서는 몸을 빼기가 어려울텐데."
황궁 요리사들은 곧 구양봉과 대결한 자세를 취했다. 소씨 거렁뱅이를 죽일 절호의 기회에 나타난 그들 때문에 일이 번거롭게 되어 구양봉은 내심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기왕 일이 뒤틀린 바에야 그들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구양봉은 독사장을 쳐들어 그중 묘대야를 향해 내리쳤다.
"쨔앙-"
독사장이 묘대야의 국자에 막혀 요란한 소리를 내질렀다. 묘대야는 이 국자를 사용하는데 물을 두 근이나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였다. 평소 묘대야는 국자로 기름을 담아 가마솥에 붓곤 하는데 그 솜씨가 일품이어서 기름을 한방울도 흘리는 법이 없었다.
구양봉이 선수를 치자 묘대야가 한발 물러서며 화를 버럭 냈다.
"구양봉아, 네 놈은 서역에 가서나 행패를 부리는 게 어때? 그렇지 않으면 네 놈의 명성도 너덜너덜해진다는 걸 왜 모르느냐? 자, 간다!"
묘대야는 식칼을 휘두르고 국자로는 구양봉의 헛점을 노렸다. 묘대야는 국자로 적수의 귀를 긁어내는 장기를 가졌는데 이번에도 구양봉의 오른쪽 귀를 계속 노리고 있었다. 그 국자에 얻어맞기만 하면 구양봉의 귀는 물론이고 머리마저 절반이나 잘려나갈 형편이었다.
"쨔앙-"
구양봉이 몸을 피하는 순간 묘대야의 식칼이 독사장에 부딪쳤다. 그런데 묘대야는 한가지 노린 것이 있었다. 그 순간 독사장 자루의 구멍으로 기어나오려는 독사의 대가리를 찍어버린 것이었다. 그 일격에 뱀의 대가리는 두쪽이 났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되면 승리를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작은 독사는 칼에 찍힌 채로 여전히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그리곤 오히려 묘대야를 향해 공격해올 태세를 갖추었다.
"아니!"
묘대야는 황급히 칼과 국자를 거두고는 몸을 피해 다시 기회를 엿보려고 했다. 묘대야가 칼과 국자를 쓸 때마다 짤캉 짤캉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구양봉이 물었다.
"도체 무슨 소리더냐?"
"하하하, 네 놈은 술청에 가 음식을 먹어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국자로 요리를 하노라면 당연히 이런 소리가 나게 마련이다."
묘대야의 술수 중 하나였는데 그 소리로 상대의 집중력을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틈을 이용해 다른 법수를 써 상대를 눕히는 게 묘대야의 특기였다.
짤캉 짤캉......
묘대야가 또다시 칼과 국자를 맞부딪치며 구양봉에게로 달겨들었다. 구양봉이 그것을 피하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휘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일순 머리 위로 저울대가 날아들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울대는 구양봉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머리칼 몇올을 뽑아가버렸다.
"이럴 수가!"
다행히 얼른 숙여 피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일격에 머리를 날려버릴 뻔 했었다.
저울대를 휘둘렀던 일지평 평오야가 소리쳤다.
"구양봉아, 운이 아주 좋구나!"
이 다섯째인 평오야가 지닌 무기도 아주 요상한 것이었는데 바로 이 저울대였다. 때론 저울대와 사슬이 달린 쇠갈쿠리를 교차적으로 휘두르며 공격을 해오기도 했다. 그 법수와 법식 역시 만만하지 않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했다.
맏이와 다섯째가 공격을 하자 나머지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맹공격이었다. 구양봉은 수세로 몰리면서도 정신을 바싹 차렸다. 이들을 모두 없애 다시는 황궁 안의 다섯 요리사 어쩌구 하는 우쭐거림을 뿌리뽑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구양봉은 일찌기 악한 중의 악한이라 사람 죽이는 일이 대수롭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방해꾼으로 나선 이들은 가차없이 없애버렸다. 그러니 어찌 이들 다섯 요리사라고 봐줄 수 있겠는가. 지난날 홍칠과 함께 황궁의 어선방에 가서 음식을 훔쳐먹다가 이들에게 들켜 혼이 난 적도 있어 구양봉의 다짐은 더욱 강했다.
한편 홍칠은 미립과 마주한 채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난 미운산 방주가 있는 곳에서도 미립이라는 계집을 본 적이 있는......"
하며 홍칠이 말하자 미립이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별 수가 없군요."
눈물까지 내보이는 미립을 본 미기가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아버지 곁에 또 미기라는 애는 없던가요?"
홍칠은 머리를 가로로 흔들었다. 미기도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미립을 보며 말했다.
"누나, 우린 무서워할 것 없어요. 아버지에게 가서 함께 죽자고 하면 그만이거든요."
그러자 미립이 단호한 말투로 만류했다.
"안돼! 그 일은 나도 벌써 생각해봤어. 아버지를 위협하면서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 우리가 가면 결국 범의 소굴에 갇히는 꼴밖에는 되지 않아."
홍칠에게 얼굴을 돌린 미립이 공손하게 청했다.
"당신에게 부탁을 하면 도와줄 수 있겠나요?"
"내가 왜 돕지 않겠소. 어서 말해보시오."
홍칠이 반색을 하며 쾌히 승낙을 하자 미립은 약간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께서 이렇게 하신 건 황궁에서 파견된 사람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일 거예요. 그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철장방에게 본 방이 모두 죽게 된대요. 이런 일이 없었다면 아버지께서 저에게 도망치게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미립이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곧 뒤를 이었다.
"전 당신이 가서 아버지를 구해주시길 바래요. 그렇게 해주실 수 있죠?"
"나 이 홍칠이 있는 한 그런 악한 무리들의 음모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오."
두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개방총부에 가서 미운산을 구해낼 것을 다짐했다.
"우리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강용팔장'을 전수한 걸 보면 다 뜻이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우리 아버지를 구원하시게 되면 더는 강호에 몸을 두지 말고 평온한 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주세요."
미립은 눈물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홍칠은 사내로 어른이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인과 한 자리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미립과 같은 어여쁜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가슴이 몹시 뛰는 것이었다. 인간이란 오래 같이 있으면 정이 생기게 되는 법이었다. 이 미립이란 여인은 특히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부드러운 면이 많았다. 그런데 나라는 인간은 문벌도 보잘 것 없고 부모조차 없으니 어찌 이런 처자와 가까이 할 수 있겠는가. 사랑? 아니다. 주제넘은 짓을 하여 그녀를 난처함에
빠뜨려서는 안될 것이다. 홍칠은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미립 앞에 아주 예의롭게 처신하면서 영웅남아로서의 기개를 잃지 않는 것만이 자신의 참모습이라고 여겼다.
홍칠은 미립, 미기 남매와 함께 개방으로 향했다. 그들 세 사람은 한마음으로 오로지 미운산을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하루종일 걸어서 겨우 개방총부에 당도할 수가 있었다.
집 가까이에 이르러 보니 겉모습은 여전하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다른 분위기에 싸여있는 듯했다.
"아버지께서 건강하셨을 때는 이 집 앞은 아주 활기가 넘쳤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황량해 보여요."
홍칠은 그녀의 슬픈 목소리를 들으며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세 사람은 마당 안으로 들어선 후 회랑(回廊)을 지나 높은 담장 안쪽의 다른 마당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중당(中堂)을 지나 다시 아버지가 거처하는 방에 이르렀다.
방은 비어있었다.
"이 방은 아버지께서 거처하시던 방이었어요. 아버지께선 날마다 이곳에서 개방의 대사들을 처리하셨어요. 이 의자는 아버지께서 늘 즐겨 앉으시던......"
추억에 잠긴 얼굴로 미립은 그 의자를 어루만졌다.
홍칠은 그녀가 쓸쓸한 얼굴에 파묻히는 걸 보고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홍칠은 단순한 면이 많은 사내라 이처럼 복잡한 감정에는 도움조차 줄 수 없었다. 미립의 슬픈 표정을 보면서 홍칠은 여인의 정서란 사내들과는 달리 참으로 섬세하구나 할 뿐이었다. 연민의 정으로 미립을 바라보는 홍칠의 얼굴에도 침울함이 자리했다.
세 사람은 그곳을 나와 내실로 갔다. 자그마한 석실이었는데 왠지 허전해 보였다. 미립이 홍칠에게 얼굴을 주었다.
"당신이 지난번에 오셨을 때 이 곳으로 내려가지 않았던가요?"
홍칠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땐 다른 방으로 들어갔었던 것이다. 미립이 지금 안내하는 길은 그때와 전혀 달랐다. 미기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던 미립이 걸음을 세웠다.
"조심하세요."
하며 한쪽 벽을 발로 찼다. 그러자 발밑의 옥석이 서서히 움직이면서 그들을 아래로 내려주었다. 바닥에 이르자 미립이 말했다.
"이곳이 바로 아버지가 몸을 숨기는 곳이예요."
이곳 역시 석실이었는데 한복판에 긴 의자가 있었고 그 옆으로 침상이 놓여져 있는 게 보였다. 몸을 돌리면 문발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 너머에는 후실(后室)이 만들어져 있기도 했다. 그런데 두 방 안에는 모두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미립의 얼굴색이 차츰 상기되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이미 떠나셨을까? 왜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
그런데 다시 침상이 있는 쪽으로 왔을 때 미립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는 몸서리쳤다. 침상으로 가까이 다가가보니 한 여인이 반듯하게 누워있는 것이었다. 온몸엔 피칠갑을 한 상태로 이미 죽은 뒤였다. 얼굴에도 예리한 것으로 여러 군데나 긁힌 자국이 있어 끔찍한 형상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던 미립의 눈이 커졌다.
"아니!"
미립은 그때서야 그게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운낭이예요! 아버지의 시중을 들던 여인."
미립은 거의 실신을 할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홍칠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미기도 양손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운낭! 운낭! 저 여잔 분명 운낭이 맞아요."
미기가 엉엉 울면서 운낭의 어깨를 잡고는 흔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운낭의 보살핌을 받았던 미기라 더없이 슬퍼하는 게 당연했다. 미립은 정신을 수습하고는 어린 동생이 더 충격을 받을까봐 얼른 안아주었다.
홍칠은 죽은 운낭을 바라보면서 복잡해지는 상념들을 정리했다.
'미운산이 운낭과 함께 있었는지 아니면 그 미립과 같이 있었는지 도통 알아낼 수가 없구나! 만일 가짜 미립과 함께 있었다면 그 여인이 필시 다른 사람과 결탁하여 미운산을 해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 여인을 죽인 다음 미운산도 어디론가 끌고 갔을 것인가?'
그러나 쉽게 추리해낼 수가 없었다.
홍칠은 두 사람을 데리고 후실로 일단 들어갔다. 후실에는 주방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는 쌀부대와 말린 살코기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또 더 안쪽으로 걸어가니 제법 커다란 석실 한칸이 있는데 그곳은 바로 미운산이 무예를 닦던 곳이었다. 석실 내부에는 켜켜이 먼지가 덮여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미운산이 오랫동안 무예를 연마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더이상 나가는 길은 없었다. 세 사람은 다시 승강장치를 이용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 집은 참 괴상하단 말이야. 생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으니. 일단 밖으로 나가 앞으로의 일을 의논해 봅시다."
홍칠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까 세 사람을 이곳까지 내려보냈던 옥석이 움직이질 않았다.
"홍칠공, 큰일났어요! 움직이지를 않아요."
미립이 소리를 치며 다시 옥석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마찬가지였다. 옥석으로 된 발판은 꿈쩍을 하지 않았다. 위를 올려다보니 장방형으로 된 구멍이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벽을 타고 올라가 살펴봐야겠소."
홍칠은 곧 천천히 숨을 죽이고는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동작이 하도 가벼워 미립은 속으로 감탄을 하였다. 실로 홍칠은 훌륭한 벽호공(壁虎功)을 쓰고 있었다. 그는 한번에 반자 정도씩 위로 올랐다. 금방 구멍이 나있는 곳까지 오른 홍칠을 올려다보는 두 사람은 초조하기만 했다. 그런데 순간 난처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꽝!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홍칠의 머리 위로 철판으로 보이는 것이 구멍을 막으려고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빨리요!"
아래에 있던 미립괴 미기는 비명을 지르며 홍칠에게 어서 오르라고 재촉을 했다. 그러나 철판은 이미 구멍을 막아버리고 말았다. 홍칠이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밀어보았지만 끄덕도 하지 않았다.
결국 세 사람은 갇혀버리고 만 꼴이었다. 다시 아래로 내려온 홍칠은 빠져나갈 방법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황하고 있다는 모습을 두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되었다. 그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미립이 홍칠에게 안기며 소리쳤다.
"위에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아마 우릴 해칠지도 몰라요!"
미기도 그 바람에 덩달아 눈물을 터뜨렸다. 홍칠이 미립을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이젠 집에 오지 않았소? 여긴 석실이고 당신의 아버지가 거처하던 곳이 아니오. 먹을 것도 충분하고 잠자리도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오. 운낭을 편히 모셔주고 잠시 기다리다 보면 누군가 우릴 구하러 올 것이오."
두 사람은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홍칠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세 사람은 운낭의 시체를 수습하려고 했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앗! 이럴 수가......"
운낭의 시체가 말끔이 치워져 있는 것이었다. 핏물이 떨어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등골이 오싹해 그 자리에서 굳어지고 말았다.
"홍칠공, 혹시 이곳에 귀신이 살고 있지는 않을까요?"
하며 미립이 바들바들 떨며 물자 홍칠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여긴 개방의 총부가 아니오. 그런데 무슨 귀신이 있겠소? 귀신이 설사 있다 해도 거지들을 해치진 않을 것이오. 우린 거지가 아니겠소."
비록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홍칠 역시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은 조심스럽게 서로의 손을 잡고는 다시 여기저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말린 살코기와 쌀부대는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가지 못하고 한동안 이곳에 갇혀있게 된다 해도 당분간은 문제가 없을 것이다.
홍칠은 두 사람을 이끌고 다시 미운산이 무예를 연마하던 곳으로 가보았다. 어쩌면 앞으론 세 사람이 이곳에서 무작정 무예를 연마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야릇한 생각이 들어 홍칠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침상이 있는 석실로 온 홍칠이 말했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주무시오. 난 문밖에서 지키고 있을테니."
하며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미립이 불러세웠다.
"홍칠공!"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가실 것같지가 않아서였다. 미립이 부르자 홍칠이 걸음을 세우고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당신이 나갈 필요는 없어요. 이곳에서 함께 자요."
홍칠은 그들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가만히 보니 그들 남매는 모두 겁에 질려 떨고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 남매는 한 사람은 처녀고 한 사람은 어린애에 불과했다. 자신처럼 황산야령(荒山野領)을 돌아다니면서 낡은 절간이나 빈 오두막 같은 데서 자본 일도 없을 것이었다.
"알겠소."
홍칠이 침상과 맞닿아 있는 긴 의자를 옮겨다 한쪽 벽 옆에 놓았다.
"그럼 난 여기서 자겠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소리쳐 날 부르시오."
홍칠은 곧 코를 곯며 잠에 빠져버렸다. 미립과 미기는 서로를 쳐다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두 사람은 지금 자신들이 앉아있는 침상이 바로 아버지가 쓰던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기분이 야릇해졌던 것이다. 미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나, 아버지께서 혹시......"
미립은 미기가 하려는 말의 뜻을 헤아리고는 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아냐! 아버지께선 아무일도 당하시지 않았을테니 걱정마."
그러나 미기의 눈에 근심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미립은 동생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다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진 스스로 나가신 거야. 다른 개방 사람들도 보이지 않잖아. 아버지께서 무슨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는 몸을 피하신 것 같아."
미기는 조금 안심을 하는 듯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한숨과 불안 속에서 뒤척이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구양봉과 황궁의 다섯 요리사는 싸움을 끝내지 못했다. 여전히 묘대야는 왼쪽에는 식칼을 들고 오른쪽에는 국자를 치켜든 채 구양봉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얏! 이번에는 끝장을 내주마!"
그는 칼로 일단 내리치고는 국자로 재차 공격을 하는 법식을 취했다. 그때마다 구양봉은 날쌘 동작으로 위기를 피해갔다. 둘째는 큰 솔로 주위를 아예 쓸어버릴 듯 휘둘렀는데 구양봉을 넘어뜨리려고 주로 발 쪽을 공격했다.
셋째인 심야와 넷째 우사야도 주먹과 장으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구양봉을 각각 공격하였다. 구양봉은 이 다섯사람의 무예가 보통이 아니었기에 더욱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마치 바람개비를 돌리듯 독사장을 재빨리 휘두르며 수시로 틈을 노려 다섯사람에게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여섯사람이 부리는 법수와 법식은 막중해서 쉽게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저만큼 물러나 그들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소씨 거렁뱅이는 초조하기만 했다. 그는 속으로 부끄러움을 감추질 못했다. 황궁의 다섯 요리사가 아니었더라면 벌써 구양봉의 손에 목이 달아났을텐데.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아직 구양봉과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기를 기다려 다시 그와 맞설 마음이었다.
이때 황궁의 다섯 요리사는 물샐 틈 없이 구양봉을 에워싸고 마지막 일격을 퍼부으려고 했다. 그러나 구양봉의 반격 역시 만만치가 않아 그들은 끝없는 소모전만 계속하고 있는 꼴이었다.
묘수인주 묘대야는 안달이 나 허둥대고 있었다. 묘대야가 신호를 보내자 잠시 네명의 요리사가 물러섰다. 묘대야가 구양봉을 노려보았다.
"오라, 이번엔 네 놈이 나서겠다는 거냐!"
구양봉이 빈정대듯 소리치자 묘대야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네 놈이 녹옥죽봉을 순순히 내놓으면 없었던 일로 하겠다."
그러자 구양봉이 박장대소를 하며 말했다.
"그래 황제에게 용상(龍床)에서 물러나 거지가 되라는 말이더냐? 황제노릇을 그런대로 봐줄 수 있지만 거지노릇은 정말 싫다. 하하하하!"
구양봉의 태도를 보아 만만하게 녹옥죽봉을 내놓을 것 같지를 않았다. 다섯 요리사는 이제 정말 다른 방법은 없다고 깨달았다. 이들은 익히 구양봉의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무예가 뛰어나고 당해낼 자가 없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자기들 다섯이 힘을 합쳐 대적한다면 결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는 입장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개방 방주의 신물인 녹옥죽봉을 다시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구양봉의 무예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맹렬하게 돌풍을 일으키고 있어 선뜻 앞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고민하던 끝에 묘대야가 한가지 해결책을 꺼냈다.
"구양봉, 너와 싸우려는 사람이 있는데 가보지 않겠냐?"
그러자 구양봉이 오만하게 머리를 쳐들고는 대꾸했다.
"안 안가! 날 만나려면 그 자더러 직접 오라고 하시지."
"그댄 백타산군인데 재간이 뛰어나다고 해서 천하를 주름잡고 있지. 그래서 강호에선 임자를 서독이라 부르고 천하의 제일 악한이라고들 말하고 있어. 우리가 보건대도 그런 것 같아."
구양봉은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개구리를 알아맞추게 되어 유운장에 간 뒤로 노독물 신독행을 스승으로 모시고 봉황력과 개구리공이라는 두가지 절기(絶技)를 익혀 천하에 더없는 고수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또 신독행에게서 천하의 악한이 될지언정 선한 일은 조금도 하지 않겠다는 인생신조를 배우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는 묘대야의 말을 그 반대의 의미로 해석했던 것이다.
"날더러 어쩌라는 말이냐? 내가 네 놈들을 두려워할 줄 아느냐!"
"그럼 먼저 한가지 묻겠는데 사실대로 말해달라. 네 놈이 그 녹옥죽봉을 갖고 왔느냐?"
묘대야의 말에 모두들 긴장을 했다. 정신을 바싹 차리고는 구양봉을 주시했다. 소씨 거렁뱅이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녹옥죽봉 때문이었다. 만일 구양봉이 그것을 갖고 오지 않았다면 괜한 시간낭비를 할 뿐이었다.
구양봉이 웃음을 터뜨리며 당당한 기색으로 말했다.
"난 반드시 녹옥죽봉을 몸에 지니고 다닌단 말이다. 너희들이 보고 싶다면 그렇게 해주지."
그러나 모두들 그가 녹옥죽봉을 감춰둘 만한 곳이 없다고 여겼기에 내심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구양봉이 허튼수작을 하려는 게 아닌가 해서 긴장을 했다.
구양봉이 손에 들고 있던 독사장을 높이 쳐들었다.
"자, 모두들 두 눈 크게 뜨고 자알 보기 바란다!"
곧 독사장 중간에 있는 단추같은 것을 눌렀다. 그러자 독사장이 두쪽으로 갈라지면서 그 속에서 번들거리는 녹옥죽봉이 자태를 드러냈다.
구양봉이 다시 크게 웃어젖혔다.
"하하하, 난 이 녹옥죽봉을 갖고 서역으로 돌아가련다. 나의 조카 구양극이 크거들랑 이 녹옥죽봉을 갖고 중원에 와 우선 방주 노릇을 하게 하련다. 어때, 내 계산이 신통하지 않느냐?"
구양봉이 다시 땅을 가를듯한 웃음을 토했다. 그 웃음은 비범한 기운을 담고 있어 다른 사람들의 살갗을 파고들 정도였다. 그들은 구양봉의 사력(邪力)을 막아야 한다고 느꼈다.
셋째가 말했다.
"임자를 만나보려는 사람이 정말 기다리고 있소. 임자가 가기만 하면 복이 굴러들어올텐데."
"하하하, 날 함정에 빠뜨려는 수작인 줄 다 안다."
그러자 묘대야가 눙치는 목소리로 꾸미며 거들고 나섰다.
"임자가 가면 자연히 알게 될텐데 뭘 그래. 그런데 임자가 감히 갈 수 있을지가 의문이구먼."
그 말에 구양봉이 호기스런 표정을 만들며 꾸짖었다.
"내가 왜 못간다는 말이냐? 오냐, 너희들을 따라 가겠으니 어서 앞장을 서라!"
소씨 거렁뱅이는 아무래도 무슨 내막이 있는 것 같아 가슴을 조였다. 구양봉을 끌고 가서 다시 술책을 꾸미려는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한번 잃어버린 녹옥죽봉을 다시 손에 넣는다는 게 힘들다는 것을 새삼 ㄲ달았다. 하지만 소씨 거렁뱅이는 내색을 하지 않은 채 한숨만 내쉬었다.
묘대야가 다가오더니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소씨 거렁뱅이, 임자의 녹옥죽봉이 강호의 영웅들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속을 썩일 게 뭐요? 임자가 다시 우리를 추격하다간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으니 명심하시오."
그러면서 그들은 아직 소씨 거렁뱅이에 대한 적개심을 놓치 않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손을 움직이기라도 하면 곧바로 달겨들 태세를 갖추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원래 이 다섯 요리사를 두려워 하지를 않았다. 그러나 섣불리 그들을 공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유는 바로 구양봉의 얄팍하고 줏대없는 태도 때문이었다. 구양봉이 선선히 그들을 따라나서겠다고 태도를 바꾸었기에 더욱 불리한 입장이 돼버렸던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는 일단 구양봉을 먼저 떠나보내고 조용히 뒤를 따라가 볼 계산이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말했다.
"그대들 가고 싶은대로 가면 될텐데 무슨 군말이 그렇게도 많은가?"
그러자 다섯 요리사가 입을 모아 한소리로 합창을 했다.
"좋아, 우린 당신과는 구면이니까. 그럼 우린 가겠어."
그렇게 구양봉을 데리고 다섯 요리사는 표표히 떠나갔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들이 멀리 사라지자 혼잣말을 흘렸다.
'저 놈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뒤를 밟아보자. 저 놈들이 간 곳을 곧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뒤 개방의 장로들을 데리고 가서 그 녹옥죽봉을 되찾으면 되겠다.'
구양봉과 다섯 황궁 요리사들은 임안을 벗어나 북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도중에 그들은 구양봉에게 갖은 아첨을 부렸으며 좋은 술과 기름진 음식으로 각별히 대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껏 달아오른 구양봉은 매우 흡족하여 더욱 거만하게 행동했다.
이들은 제남부(濟南府)에 도착했는데 객지로만 떠돌다 보니 모두 지친 상태였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 이들은 소주(蘇州)라는 곳에도 들렸었는데 그곳에서 너무 기력을 소비한 탓도 있었다.
소주에 이르렀을 때 묘대야가 구양봉에게 묘한 눈빛을 만들며 제의해왔었다.
"구양선생, 이곳 소주에서 한번 놀아볼 생각은 없는지요?"
오는 길에 그들에게 환대를 받아 악의를 모두 씻어버린 구양봉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소주에 뭐 볼 만한 게 있소?"
일단 자기들의 제의를 구양봉이 받아들이자 다섯 요리사들은 곧바로 소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소주에서 이름난 곳은 모두 들려 구양봉을 즐겁게 해주는 일에 열중했다. 그들 여섯 사람은 빈들거리며 진종일 유희를 즐긴 다음 다시 길을 떠났던 것이다.
제남부에 들어서자 묘대야가 새로운 사실을 알려왔다.
"구양선생, 당신은 여기에서 오늘 당신을 찾는 사람을 만나게 될 거요. 오늘 바로 당신은 그 장본인을 만날 수단 말이요."
"오호, 벌써 이곳에 왔다고? 그런데 차라리 그대들 몇몇이 날 따라 백타산장으로 가는 게 나을 걸 그랬소. 거기에 가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게 황제가 있는 황궁에서 지내는 것보다 나을 거네."
사실 구양봉의 생각은 그러했다. 황궁의 내원도 그저 그럴 것이고 자기의 백타산장보다 못할 게 분명하다는 믿음이었다. 구양봉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을 보이자 다섯 요리사들은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 구양봉을 한 기생집으로 데리고갔다. 뜨락을 지나 가장 뒤쪽에 이르러 한 아담한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방안에는 향기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으며 매우 멋진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당조 때의 오도자(吳道子)의 그림이며 옛날 위부인(衛夫人)의 초서(草書)
이며 또 고색창연한 초미금(焦尾琴)이 걸려 있기도 했다. 침상을 보니 공주낭낭(公主娘娘)의 거처와 다를 바없이 깨끗하고 화려했다.
그 앞에서 놀라며 구양봉이 목소리를 높였다.
"임자들이 날 이곳에 데려다 놓고 뭘 하자는 건가? 혹 기생놀이를 하자는 건 아니겠지?"
그러자 묘대야가 반대로 나즈막이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요. 우리 다섯 사람이 구양선생을 데리고 온 것은 이곳에서 누가 선생을 보자고 했기 때문이오."
"어떤 사람이 날 만나자고 하는 건지 어서 시원하게 말해보구려. 이렇게 자꾸만 변죽만 울리니 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소."
바로 이때 누구인가 꾀꼬리를 닮은 목소리를 잔뜩 뽐내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호호호, 그러신가요? 보아하니 구양선생의 소문이 실은 그런 게 아니었군요?"
구양봉이 얼른 얼굴을 돌려 보니 한 여인이 다소곳한 자세로 서 있었다. 키는 그다지 큰 편도 작은 편도 아니었으나 아주 뛰어난 미색이었다. 몸매 역시도 적당해서 구양봉은 한눈에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멋진 여인인데!'
구양봉의 백타산장에는 천지인(天地人) 세 집이 있는데 거기에도 용모가 뛰어난 여인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여인에 비하면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았다.
앞으로 간들간들 걸어오고 있는 여인에게 눈길을 빼앗기고 있는 구양봉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여인이 애교 띤 자태로 말했다.
"구양선생께서 불원천리하고 절 보러 예까지 오셨으니 정말 그 성의에 감동을 하지 않을 수 없군요."
구양봉이 빨려들어갈 듯 그녀의 반짝이는 두 눈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날 만나자고 하는 줄을 미리 알았다면 벌써 구름을 잡아타고서라도 왔을 거요."
여인의 손길이 구양봉의 얼굴로 천천히 올라왔다. 그녀는 구양봉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구양선생, 당신의 모습을 보니 여인들을 많이 다루어본 것 같은데 당신을 진심으로 섬겼던 여인이 있었던가요?"
구양봉은 그 말에 매우 침울해졌다. 잠시 지나온 과거를 더듬어보았다. 자기의 형수인 모용쟁과 정을 주고 받던 일이 생각났다. 두 사람은 정이 깊어 후회없는 나날도 보내었지만 차츰 모용쟁이 항상 우울에 빠져 자기를 괴롭히다가 종국에는 헌 절간에서 죽어버렸던 것이다. 그후로 구양봉의 심중에는 마음에 맞는 여인이 자리하지를 못했었다. 비록 백타산에 세 층으로 나누어진 집에 여인들이 가득했고 그녀들과 놀곤 했었지만 모두가 허사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잠시
모용쟁을 떠올리던 구양봉은 애써 기억을 떨어내며 다시 여인의 얼굴을 주시했다.
구양봉의 심기를 읽어냈는지 여인이 다시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대장부로 이 세상을 살면서 풍우를 질타하고 강호를 손에 넣지 못한다면 천년을 산들 무슨 재미가 있겠나요?"
구양봉은 그녀가 자기의 속에 들어있는 말을 대신 하고 있음에 기분이 흐뭇해졌다.
"우하하하하!"
크게 구양봉이 웃자 여인이 황궁의 요리사들을 향해 손가락을 폈다. 그리곤 허공에서 핑 바람소리를 내며 튕기자 다섯 사람은 즉시 밖으로 나갔다. 여인은 구양봉을 앉히고 향기로운 차 한잔을 대접했다.
"구양선생, 사람들이 말하기를 강호에서 부초처럼 떠다니는 것보다 의지할 곳이 있어야 더 대장부답게 될 수 있다고 하였어요. 선생께서는 저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구양봉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옥같은 살결이며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차츰 빼앗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백타산장에 널려있는 그 허다한 미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여인이라고. 이 여인은 용모가 절색일 뿐더러 지혜롭고 말재간도 뛰어나지를 않은가.
"차 대접을 잘 받았소. 그런데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며 날 찾아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묻고 싶군요."
여인이 더욱 교태스럽게 몸을 흔들며 말했다.
"과연 구양선생다워요. 곁에 미인과 술잔을 두고도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다니. 당신이 알고 싶다면 알려드리지요."
그러면서 여인이 가까이 오더니 구양봉의 옷깃을 바로잡아주었다. 손길은 말 그대로 섬섬옥수로 향기마저 나는 듯했다. 그런데 여인은 옷깃을 여미며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주무르다가 톡톡 털기도 하며 오래 그러고 있는 것이었다.
구양봉의 옷깃은 오래 흙먼지에 시달려 있어 매우 더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든 님의 옷깃인양 정성스레 매만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섬섬옥수의 손길이 구양봉의 옷깃에서 떨어졌다. 그러면서 여인이 입을 열었다.
"전 미립이라고 불러요."
"미립?"
여인은 구양봉을 유심히 바라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듣자하니 구양봉선생께서는 개방의 녹옥죽봉을 손에 얻으셨다 들었는데 전 그것에 매우 관심이 깊답니다. 저의 부친 미운산이 개방의 방주이거든요. 아버지는 수하의 장로에게 해를 입어 지금 두 다리를 못쓰게 되었죠. 걸을 수도 없어요. 그리하여 할 수 없이 녹옥죽봉을 개방의 장로인 소씨 거렁뱅이에게 넘겨주고 자리도 내놓았지요. 하지만 선생께서 용감무쌍하기에 소씨 거렁뱅이 손에 있던 녹옥죽봉을 ㅃ앗다는데 저에게 다시 돌려줄 수는 없는지요?"
여인이 다시 부드러운 손길로 구양봉의 볼을 어루만졌다. 구양봉은 이제서야 여인이 자기를 보자고 한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왜 녹옥죽봉을 그대에게 주겠는가?"
하며 약간 냉랭하게 뿌리치자 여인이 고개를 떨구었다.
"전 어렸을 때부터 개방에서 자라왔지만 지금껏 남의 업신여김을 받아보지 못했어요. 선생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부디 녹옥죽봉을 제게......"
그러나 여인의 말이 아무리 애절하여도 구양봉은 흔들리지 않았다. 간사하고 악랄하기로 소문난 그가 아니었던가. 구양봉은 더욱 매정한 눈초리로 여인을 응시했다.
"당신이 황궁의 그 다섯 요리사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걸 보면 재간이 대단해. 하지만 당신이 이 녹옥죽봉을 가지려면 나와 싸워 이겨야 할걸."
그러자 여인이 갑자기 깔깔 웃으며 한 손가락으로 구양봉의 이마를 짚었다. 그 손가락은 마치 수정같이 맑아 안이 들여다보일 듯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구양봉의 이마를 소리나게 치면서 말했다.
"천하의 당신 구양봉을 이길 사람이 어디 있나요? 꾀를 가지고도 당신을 속일 수 없으니 전들 무슨 방도가 있겠는지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여인이 깔깔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손가락 끝으로 구양봉의 이마를 자극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황궁의 다섯 요리사를 죽이지 않은 건 무엇 때문인가요?"
구양봉이 대답했다.
"그댄 내가 그들을 능히 죽일 수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지?"
"제가 당신의 머리에 있는 혈도를 수십번이나 건드렸는데 당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군요. 이건 당신의 정력(定力)이 그만 대단하다는 증거지요. 당신은 실로 정복하기 어려운 사람이예요."
여인은 고개를 떨구며 구양봉 이마에 있던 손을 거두었다. 여인은 쓸쓸히 탄식을 하며 몹시 실망하는 눈치였다.
"내 추측이 맞다면 그댄 다섯 요리사 뿐만 아니라 임안에 있는 황제와도 무슨 친분이 있는 것 같은데?"
여인이 고개를 들어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제가 임안성의 황제와 친분이 있다는 걸 당신은 어떻게 눈치채셨나요?"
"그대가 만일 나를 위해 세가지 일만 해준다면 내 이 녹옥죽봉을 주리다."
그러자 여인은 너무 뜻밖이라 화들짝 놀라며 급히 물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무슨 일이든 할테니 어서 말해주시지요."
잠시 주위를 살피던 구양봉이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화산의 무예시합에 가서 왕중양과 황약사를 비롯한 소씨 거렁뱅이, 홍칠공, 단황나으리 등 몇몇 사람들과 결사전을 벌이게 돼. 그러니까 그댄 황제에게 말씀드려 날 서역의 신군(神君)으로 봉해주면 되는 거네. 어때, 할 수 있겠는가?"
여인이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하필 황제가 당신을 책봉할 이유는 무언가요? 당신 스스로 자기를 봉하면 되지 않아요. 그것이 이름에 걸맞게 서역의 폭군이란 당신에게 어울리는 행동일텐데."
구양봉의 그녀의 말 속에는 자신을 어느정도 조롱하는 날카로운 가시를 숨겨놓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 녹옥죽봉은 내가 조카 구양극에게 줄려고 뺏은 거지. 그대가 내 조카에게 한가지 힘을 좀 써줘야하겠네."
"무슨 말씀이온지......"
"그 애도 남조(南朝)에 와 유쾌히 보낼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이지."
그러자 여인이 깔깔대며 말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요. 구양선생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하지만 내가 하려고 하는 이 마지막 일이 힘들 거야. 난 그 일을 해내겠다고 대답을 했는데 그대의 황제에게 도움을 꼭 받아야겠네. 난 그 단황나으리를 죽인 다음 황중양을 칠 걸세. 그리고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공도 모두 죽여버려야 해. 음...... 그밖에도 또 한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동해 도화도주 황약사지. 이들은 내게 원수나 마찬가지지. 그놈들을 모두 죽여버려야겠는데 그대가 좀 나서줘야겠어."
"구양선생, 당신이 하려는 일이 모두 대사들인데 내 도움이 없이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기꺼이 도와드리리다."
"하하하, 그대가 도와주지 않아도 그놈들을 해치우는 데는 문제가 없어. 다만 한꺼번에 그 일을 처리할 수가 없을 뿐이지. 한놈 한놈 처치하다보면 씨끄러워진다구. 난 먼저 소씨 거렁뱅이를 죽이고 그 다음에 홍칠공을 죽일 생각이지. 그렇게 되면 결국 강적 두 놈이 사라지게 되는 셈이지."
그러자 여인이 손을 내저으며 구양봉의 생각을 막았다.
"안돼요! 소씨 거렁뱅이 하나만 죽이면 돼요."
"뭐라고?"
"호호호, 그 홍칠공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아니 죽지 않았어도 폐인이 되었을 거예요. 그 놈은 지옥에 갇히고 말았으니까요. 그러니 절반은 사람이고 절반은 이미 귀신이 된 셈이죠."
여인의 말에 구양봉은 반가우면서도 한편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홍칠이 자신이 손을 쓰기도 전에 무기력하게 쓰러졌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지만 여인의 태도를 봐서는 거짓은 아닌 듯싶었다.
"뭐 홍칠공이 어떻게 되었다구? 그래, 그럼 죽었단 말인가?"
여인 역시 격양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곧 그렇게 될 거예요. 그 놈은 지금 석실에 갇힌 채 차츰 숨통이 조여오고 있을 테니까요."
"그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럼 내가 소씨 거렁뱅이만 처리하면 되겠군. 그대가 나를 도와준다면 그대의 말을 믿겠어."
그러면서 구양봉이 독사장 속에 있는 녹옥죽봉을 꺼내어 여인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이걸 누구에게 주려는 건가? 아버지?"
그러자 여인이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구양선생, 난 아버지에게 주지 않겠어요. 제가 개방의 방주가 될까 하는데 당신의 생각은 어떤지요?"
"핫핫핫!"
구양봉은 갑자기 속으로부터 용솟음쳐 오른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리둥절하는 여인을 보면서 구양봉은 허리를 곧게 편 채 웃음을 즐겼다.
"훌륭하군, 정말 훙륭해! 개방에 여방주가 드디어 나타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하하하, 그렇게 되면 아주 재미있겠는 걸. 당신이 개방의 방주가 되는 게 좋겠어. 뭐, 개방에 여방주라고? 우헤헤헤헤!"
구양봉은 생각할수록 재미있어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결코 여인이 개방의 방주로 오른다는 것 때문에 이처럼 웃음을 터뜨린 것만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여인으로 변장한 자기, 바로 구양봉을 보았기 ㄸ문이었다. 앞에 있는 여인은 분명 자신과 똑같이 지독한 심보를 가진 악인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홍칠과 미립 그리고 미기 세 사람은 석실 안에 벌써 수일째 갇혀 있었다. 그들은 만일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면 결국 그 안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차츰 절실하게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홍칠은 그들 남매가 잠을 잘 때 손에 촛불을 밝혀들고는 석실 안을 다시금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허사였다. 나갈 수 있는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홍칠은 난감한 심정에 휩싸였다. 그러나 남매에게는 아무런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저 매일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무예를 닦는 일에만 짐짓 열중해 왔었다.
홍칠이 석실 이곳저곳을 돌아오고 오니 미립이 어느새 밥을 지어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홍칠은 그들 남매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홍칠이 미립에게 말했다.
"난 지금껏 이처럼 잘 먹어본 일이 없다오. 지금보다 더 배불리 먹어도 보았지만 편안한 것만은 비길 게 못 되오. 난 실로 그대들 남매의 신세로 아주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셈이요. 이후 이곳을 나가게 되더라도 지금처럼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소."
미기는 말없이 건성으로 젓가락을 놀렸다. 미립 역시도 머리를 숙인 채 젓가락을 쥔 손을 어디에 둘지 몰라 허둥대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미립의 눈에선 어느새 구슬같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슬퍼하는 것을 본 홍칠은 매우 난처해졌다.
"난 다른 뜻으로 말한 게 아니요. 그러니 슬퍼하지 마시오."
미기는 자기 누나가 우는 것을 보자 불현 슬퍼졌는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두 남매는 한동안 눈물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들의 울음소리가 사면을 막고 있는 석벽에 무딪쳐 메아리되어 울렸다. 그 ㄸ문에 세 사람은 더 한층 두렵고 막막한 기분에 휩싸였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어디에도 없는 상태였다. 다만 주먹이 들어갈 정도의 굵기로 된 공기통만이 외부와 통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마치 활사인묘(活死人墓)에 매장당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곳에 산 채로 있지만 결국 매장당한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석실 안에 있던 식량도 이제 거의 떨어져가고 있었다. 쌀 몇줌과 바람에 말린 고기만 조금 남았을 뿐이었다. 이러다가 별 수 없이 죽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번씩 이들을 덮쳤던 것이다. 그때마다 홍칠이 애써 위로를 해주었지만 오늘은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남매가 하염없이 우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홍칠 역시 침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립이 미기가 흐느껴 우는 것을 보자 얼른 자기 품으로 안았다. 미립은 자기 몸 하나 죽는 것은 서럽지 않았지만 어린 동생까지 죽게 된 것에 더욱 슬펐던 것이다. 동생만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하는 바램을 마음 속으로 다지고 또 다졌다.
이들의 슬픔을 보고도 위로할 수 없었던 홍칠이 묵묵히 밥그릇을 내려놓고는 일어섰다. 큰 석실로 간 홍칠은 그곳에 앉았다. 그는 석실에 갇혀 있는 동안 용전어야(龍戰於野)와 비용구회(飛龍九回)라는 장법을 익힌 바 있었다. 그는 이 두가지 장법을 강용팔장 만큼이나 익숙하게 연마했던 것이다.
이때 인기척이 들려 머리를 돌려 보니 미립이 조용히 서 있는 것이었다.
"미기는 뭘 하오?"
하고 홍칠이 묻자 미립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앤 울다가 잠이 들었어요."
미립이 가까이 다가와 홍칠의 팔을 잡았다.
"우리가 이렇게 있다가는 조만간 죽고 말 거예요."
"내가 왜 이대로 죽는단 말이요. 개방에서 점을 치는 노명성 장로가 내게 이르기를 육십년은 더 살거라고 했소. 나는 지금 내 명의 절반밖에는 살지 못했는데 어찌 죽을 수 있단 말이요."
홍칠은 그러면서 애써 웃음을 내보였다. 그러나 미립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전 두려워요."
하며 홍칠에게 몸을 살며시 기대었다. 사실 홍칠은 미립을 속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그 노장로는 한평생 여인을 맞이할 수 없다고 했지만 결코 맞는 말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바로 곁에는 이처럼 아름다운 미립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곰곰 다시 생각해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만일 노장로의 말이 이처럼 틀리다면 육십살을 산다고 한 것도 거짓이란 결론이었다. 순간 미립과 함께 이 석실 안에서 최후를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시커먼 그림자가 눈앞에 드리워지는
걸 느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미립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지를 않은가. 이제 한 달 정도만 지나면 영락없이 시체로 변할텐데......
홍칠은 저도 모르게 미립을 품속 가득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힘껏 안으며 뜨거운 입김을 토했다. 미립의 몸은 몹시 뜨거워 홍칠은 오랜 만에 푸근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지내온 삶들이 한탄 부질없는 것으로 비쳐졌다. 홍칠은 이제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이처럼 아름다운 미립과 석실에서 함께 죽음을 맞는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무덤도 없으리라. 홍칠은 미립을 더욱 세게 안으며 쓴웃음을 얼굴 가득 그렸다.




제15장 여인에게 넘어간 장로들
구양봉은 여인의 얼굴에서 교활하고 간사한 기미를 발견하고는 속으로 매우 탄복하고 있었다. 그는 한평생 숱한 여인들과 시간을 보냈었다. 그중에는 음탕한 여인들도 있었고 반대로 현숙한 여인들도 만나 보았다. 또한 수즙음을 자신의 전부인 듯 내보이는 어린 처녀애들도 적지 않게 상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처럼 오로지 가슴에 권세욕을 가득 묻어두고 있는 여인은 처음이었다.
그녀를 보는 구양봉은 저도 모르게 모용쟁을 떠올렸다. 비록 모용쟁은 형수라는 위치에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아내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모용쟁과 이 여인을 비교해보니 차이점이 너무도 많았다.
"구양봉선생, 당신은 서역의 폭군이신데 중원에서는 그 노릇을 할 수 없나보군요. 당신도 그걸 유감으로 여기고 있겠죠?"
여인은 이렇게 말문을 열고는 가을호수같은 그윽하고 잔잔한 눈길로 구양봉을 주시했다.
"저의 인생신조는 간단해요. 이왕 이 세상에 나와 살다가 갈바에야 독하게 살다 죽겠다(人有我毒 人天有我)는 거죠. 이 신조가 당신 생각에는 어때요?"
하며 여인이 덧붙이자 구양봉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살 바에는 독하게 살다가 죽겠다? 훌륭하군, 정말 훌륭해!"
그것은 또 한번 구양봉 마음 속에 있는 말을 대신한 결과였다. 노독물의 행동준칙과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이 여인과는 묘한 인연으로 앞으로 중대한 일을 치루어내야 할 것 같은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구양봉은 여인에게 가능하다면 모든 도움을 받아 자신의 뜻을 이루는데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런 다짐을 하고 있는데 여인이 불렀다.
"구양봉씨, 당신은 내가 개방의 방주가 되는 걸 도와주실 거죠? 그렇게 해주신다면 전 당신의 모든 요구를 들어드릴 수 있어요."
구양봉은 기다렸던 말이라 크게 웃으며 답했다.
"하하! 물론이지. 이제보니 당신이야말로 개방의 방주로 아주 적합한 인물이라구. 내가 소씨 거렁뱅이를 미워하던 차에 잘됐소. 내 기꺼이 도와드리리다."
"당신이 나를 방주에 앉게만 해준다면 하라는 대로 다 하겠어요."
그 말에 구양봉의 두 눈에는 활활 기쁨의 불이 타올랐다.
"그래?"
그러나 아직은 미덥지 않다는 기색을 엿보였는지 여인이 웃음을 매달며 구양봉에게로 바싹 몸을 주는 것이었다.
"안아주세요. 당신이 절 안아 침상에 눕혀주세요. 우리 누워서 천천히 의논해보는 게 어때요?"
구양봉의 가슴은 우박이 떨어지듯 한차례 뛰었다. 백타산장에 있는 <천지인> 삼층집에서 평소 여인들과 수없이 관계를 가졌지만 이처럼 가슴이 뛴 적은 없었다. 구양봉은 불현 웃음이 터져나왔다. 순간 도둑질 한 물건이 가장 마음에 든다는 옛사람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구양봉은 온몸에서 핏줄들이 뒤틀리는 기분을 감지했다. 그 핏줄 속으로 줄기차게 돌고 있는 피 역시 확인해보지 않아도 펄펄 끓고 있을 것이다. 그는 여인을 번쩍 안아들고는 침상으로 갔다. 여인은 어느새 가냘픈 손톱을 구양봉의 가슴팍에 박고는 음탕한 표정을 지었다.
미운산은 뜨락에 나앉아서 밤하늘을 망연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요한 밤하늘에서는 멀리 뭇별들만 희미하게 깜박일 뿐이었다. 미운산은 눈을 돌려 옆에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미립은 어디를 갔지?"
사내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방주님, 미립낭자는 외출할 때 우리들에게 알리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문지기가 하는 말이 낭자께서 가마를 타셨는데 가마꾼이 어찌나 빠르던지 꼭 나는 듯 하더랍니다."
"음......"
미운산은 입을 다문 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 속으로 자기의 친자식들인 미립과 미기를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그 아이들은 어디에 있는지 미운산은 답답할 따름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묘연한 상태라 더욱 애가 타는 심정을 누를 길 없었다. 또 어디 멀리 가버렸는지 걱정이 돼 미운산은 가슴으로 울고 있었다.
순간 미립의 행세를 하고 있는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운산은 저절로 이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미운산이 그 여인을 이곳에 들여놓은 것은 우연한 기회였었다. 어느날 마음에 들어 그녀를 개방총부로 데려다 밀실에 숨겨놓았었다. 여인은 겉으로는 유순해 보였지만 매번 깊은 밤이 되면 암코양이처럼 변하는 것이었다. 이 가짜 미립은 미운산을 매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천성이 음탕한지 침상에서 그 짓을 할라치면 아예 미운산을 녹초로 만들어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듯 집요하게 달라붙었던 것이다. 또한 미운산이 미처 원기를 회복하기도 전에 계속 찰거머리처럼 달
라붙어 피를 말리자는 듯 음탕한 몸을 흔들어댔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여인이 히히닥거리며 미운산에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자기가 미운산의 아들과 딸을 사람을 시켜 끌어갔는데, 만일 경고망동을 하면 그들이 모두 죽게 된다는 엄포를 놓았었다. 미운산은 그때부터 여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여인의 곁을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그동안 가짜 미립의 행세를 한 여인은 미운산을 대수롭지 않은 존재로 여겨왔었다. 그런데 그런 여인이 벌써 며칠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신변에 서있던 사내가 미운산의 심사를 헤아렸다는 듯이 말했다.
"방주님, 제 생각으로는 미립낭자는 멀리 가지 않았을 겁니다. 아가씬 이틀 이내로 돌아올테니 너무 걱정마십시오. 그리고 개방 장로들에게 이미 통지를 했습니다. 여러 방면으로 찾아보라고 말입니다."
미운산이 고개를 힘없이 끄덕여주었다. 그는 개방사람들이 미립을 찾아낸다는 것은 사람이 하늘에 오르기만큼이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은연중 그 반대를 바라고 있었기에 무의식중 고개를 끄덕여 사실로 믿고 싶었던 것이다. 미운산은 바로 다름아닌 자신의 친딸인 미립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누군가 다가와서는 허리를 숙였다.
"범장로와 노장로께서 배방을 오셨습니다."
미운산은 속으로 꿈틀 놀라면서 중얼거렸다.
'난 이제 개방의 일을 관계하지 않는데 그들 두 사람은 왜 나를 찾아온 것일까?'
이윽고 부귀산인 범장천과 청한자자 노명성이 나타나 미운산에게 예를 올렸다.
"속하(屬下)들 방주님을 배알하려 하옵니다!"
미운산이 얼굴에 씌웠던 그늘을 가리며 미소를 지었다.
"난 이곳에 한가롭게 있자니 무료하기 짝이 없네. 그대들이 이렇게 찾아와주니 난 개방의 형제들과 있었던 지난 일들에 빠지게 되는 것 같군. 또 지금 마음 속으로 그대들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주 반갑네."
미운산의 부드러운 말에도 그들은 굳어진 표정을 풀지 않았다. 미운산은 두 사람의 노기를 보고는 약간 긴장을 했다. 미운산이 다시 분위기를 바꾸려고 웃음을 만들며 말했다.
"범장로, 노장로, 거기에 앉게나. 우리 형제들끼리 술 한잔씩 하지 않겠나?"
그러나 노명성 쌀쌀한 기색으로 미운산을 불렀다.
"미방주님, 당신은 개방의 방주로서 녹옥죽봉을 나쁜 놈에게 잘못 물려주어 개방에 큰 화를 미치게 하였습니다. 우선 운중연 서불성장로가 죽었고 그 다음으로 과천청 제갈장로가 당했으며 또 옥면검객 호심이 죽어나갔습니다. 또한 소검 오평 역시 그러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당신의 과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당신은 개방의 방주인데 어째서 녹옥죽봉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단 말입니까? 더군다나 소씨 거렁뱅이같은 작자에게 넘겨주어 개방이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
으니 이 어찌 삼십만 형제들을 배신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미운산은 노장로의 질책에 머리를 숙였다. 그는 부끄러운 마음에 할말을 잃고 말았다.
"노장로의 말이 옳아."
하며 미운산이 입을 연 것은 한참 만이었다. 그는 대담하지 못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개방의 대사를 그르쳤으니 실로 가슴 아픈 일이네."
"방중에는 장로가 열한사람 뿐인데 지금 소씨 거렁뱅이까지 상하고 개방의 녹옥죽봉이 남의 손에 넘어갔으니 개방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방주께선 무슨 대책이 있는지요?"
하며 나선 것은 범장천이었다. 그러나 미운산은 머리를 들지 못한 채 자신의 두 다리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범장로, 내가 이 모양이 되었고 오늘은 살아있지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판에 무슨 대책을 말하리오."
미운산의 병약해진 태도에 청한자자 노명성도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했다.
"정말 슬픈 일입니다. 이제 개방은 비극을 맞게 되었습니다. 당신 같은 방주님 때문에 개방은 아무런 희망도 없게 되었으니 삼십만 형제들은 이제 누구를 믿고 숨을 쉬며 누구를 믿고 충성을 다하겠습니까?"
"방주님, 정말 아무런 양책(良策)도 없으십니까?"
답답한지 범장천이 재차 물어왔다.
"내게 무슨 양책이 있겠나? 개방의 형제들이 한마음으로 단합을 한다면 혹 그 녹옥죽봉을 다시 찾아올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미운산의 말은 노명성의 냉소만을 부추길 뿐이었다. 노명성이 한숨소리를 일부러 크게 내며 대꾸했다.
"퓨! 그 녹옥죽봉은 우리 개방에서 십여대를 전해 내려오면서 한번도 잃어버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런 일이 생겼으니 개방의 조종들에게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미운산은 줄곧 자신의 두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범장천은 그런 미운산의 모습에서 승리감을 느꼈다. 미운산이 자신의 다리를 개탄하고 있다고 믿었기 ㄸ문이었다.
다시 깊은 시름에 들어 침묵하던 미운산이 어렵게 입을 떼었다.
"두 장로께서 이렇게 함께 오신 걸 보면 개방이 수치를 면할 만한 방법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하하하, 방주께선 그래도 남의 심중을 꿰뚫어보는 눈은 아직 갖고 계시는군요. 옳게 추측하셨습니다. 저와 노장로는 개방의 녹옥죽봉을 되찾아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방으로 하여금 다시금 위력을 떨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방주님의 물건 중 한가지를 잠시 빌려야겠습니다."
불현 불길한 기운을 예감한 미운산이 미로소 머리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다......당신들 두 장로가 내게서 무엇을 빌리겠다는 건가?"
노명성이 갑자기 나서며 미운산의 한쪽 팔을 움켜잡았다.
"바로 방주의 이 한쪽 손을 빌리렵니다."
"뭣이라고!"
그러나 미운산은 개방의 방주답게 처신하려고 했다. 비록 얼굴색은 창백하게 변했지만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대들 두 사람은 농담도 잘 하는군. 나처럼 폐인이 다 된 사람의 한쪽 손을 뭣에 쓴다고 그러는가?"
그러자 노명성이 갑자기 손으로 미운산의 식지를 할퀴었다.
"앗!"
미운산의 식지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노명성이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목숨을 살리고 싶으면 내 말을 잘 들어!"
그러자 범장로도 미운산을 노려보며 말했다.
"개방 방주 미운산은 개방 방주의 자리를 본 방의 장로인 범장천에게 물려주로라. 그리하여 범장천이 국세를 장악하게 하려 하노라. 본 방의 방주대리 소씨 거렁뱅이가 방주노릇을 하는 것은 본 방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본 방 방주와 십대 장로들은 그를 폐하려 하노라!"
짐짓 미운산이 그러는 것처럼 말을 꾸며 범장로가 술술 ㅇ어댔다.
미운산이 비단폭 위에 천천히 식지를 들어 흐르는 피로 혈서를 쓰기 시작했다. 노명성이 그것을 내려다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미운산을 멸시하려는 행동이었다. 미운산은 왼쪽 손으로 덜덜 떨어가며 한참만에야 혈서를 모두 끝냈다.
"이 아래에 서명을 해야 하는가?"
하고 묻자 범장천이 고개를 까닥이며 빈정댔다.
"그럼, 그럼. 암 그렇고 말구. 그래도 방주라 주도세밀하군."
미운산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기의 이름을 마저 썼다. 그 비단폭을 범장천에게 넘겨주었다.
아주 만족스런 얼굴로 그것을 확인하던 범장천이 말했다.
"방주, 우리 두 사람은 방주에게 한가지 더 빌릴 것이 있는데."
미운산이 다시 흠칫 놀라며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또, 무, 무얼 빌린다는 거요?"
"다른 게 아니요. 이건 꼭 필요한 것이니 들여주어야 하오."
"꼭 필요한 것?"
"하하, 그렇소. 너무 긴장하지를 마시오. 곧 괜찮아질테니. 그것을 우리에게 주고 나면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를 못할 것이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우린 바로 당신의 머리를 갖고 가서 소씨 거렁뱅이를 죽여야겠소!"
"뭐라고! 그건 안돼!"
미운산이 대노하며 소리를 치자 그들이 갑자기 달겨들었다. 이때 잠시 다른 곳에 물러나 있던 사내 둘이 나타나 휘둥그러진 눈으로 이 광경을 목격했다.
"노명성, 범장천! 당신들은 개방의 장로들인데 감히 누구 앞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인가?"
두 사내가 곧 두 장로를 덮쳤다. 그중 금종조공(金鐘*功)을 익히 작고 단단한 사내가 주먹으로 노명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노명성이 손을 들어 순간 사내의 머리를 가리켰다. 사내가 그 자리에 굳어버릴 듯 멈춰섰다. 사내는 주먹을 앞으로 뻗은 모습 그대로 멍하니 서버린 것이었다. 바로 노명성의 장기였다. 이 법수는 상대의 헛점을 노리는 것으로써 한쪽 손으로 머리를 가리키고 있지만 그것은 일종의 속임수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다른 한쪽 손이었는데 이번에도
예외없이 다른 손이 바로 사내의 배꼽을 향하고 있었다. 이 배꼽은 대방이 기공을 일으키는 조문(*門)이므로 일단 적중되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죽고마는 것이었다.
다른 한 사내는 범장천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 사내가 익힌 것은 회남(淮南) 지구에서 널리 유행되고 있는 응조문(應爪門)의 대력응조공(大力應爪功)이었다. 독수리가 양을 덮치는 형상을 나타낸 법수였다(惡應*羊). 하지만 그 사내는 상대를 잘못 고른 셈이었다. 그의 앞에 버티고 서있는 범장천은 양이 아니라 맹호였던 것이다.
"아니!"
어느새 범장천에게 손목을 잡히고 만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서운 괴성을 내지르며 다른 손으로 범장천을 가격하려 했다. 그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빠른 동작으로 그의 공격을 막아낸 범장천이 꾸짖었다.
"이 정도의 실력으로 감히 나를 넘보다니!"
하며 두 손에 힘을 주어 사내의 손목을 아래로 꺾었다.
"뚜둑!"
사내의 손목은 순간 끊어져 간들거렸다.
"생사는 명에 달렸다고 하는데 내가 한 주먹으로 너를 죽이지 못하면 넌 명이 긴 셈일 게다!"
무슨 영문인지 모른 체 손목을 감싸쥐고 있던 사내의 얼굴로 범장천의 주먹이 꽂혔다.
"캭!"
사내는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미운산이 의자에 앉은 채 수심어린 눈길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는 개방이 왜 망할 수밖에 없는지 이제야 알겠다는 투로 탄식의 눈빛을 만들었다.
"우리가 망해가는 이유를 알겠군!"
노명성이 천천히 쓰러진 사내의 옷자락을 부욱 하고 뜯더니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러면서 거들먹거리며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한번 왜 우리가 망해가는지 말해보시지?"
"너같은 놈들이 늘 야심이 가득하여 방주의 자리를 엿보는데 어찌 망하지 않겠느냐?"
범장천이 손뼉을 철썩 치며 미운산의 말을 꺾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미방주의 말이 내게는 꼭 맞는 소리라구. 나와 노장로는 당신의 바로 그런 머리를 떼어내어 소씨 거렁뱅이를 죽이는데 쓰면 되겠군. 그럼 그 오의파 사람들이 나의 기묘한 계략을 의심하지 않을테니."
"네 놈의 그 간사한 꾀를 알만하다. 네 놈은 날 죽인 다음 소씨 거렁뱅이가 죽였다고 꾸며댈 셈이지? 그리고 소씨 거렁뱅이를 찾아 죽여버리려는 게 아니더냐? 또한 내가 쓴 혈서를 가지고 개방사람들마저 속일테지. 그러나 네 놈들의 그 가면극에 개방의 형제들이 넘어갈 성싶으냐?"
범장천이 이죽거리며 미운산을 몰아세웠다.
"개방의 사람들은 당신이 없으면 곧 나를 따를 게 분명하다. 그러니 개방의 형제들을 속이기는 쉽지. 네가 죽거든 장례를 극진하게 모시고 한바탕 울어주면 그뿐일 것이다. 하하하!"
범장천의 웃음 뒤에는 분명 악한의 얼굴이 숨어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지금 권모술수로 얻어낼 승리를 앞두고 스스로가 감탄을 하고 있는 증이었다. 미운산은 그를 죽이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울 따름이었다.
"두고 보자하니까 더는 못 참겠구나! 네 놈들은 나의 두 다리가 정말로 못 쓰게 된 줄 알고 있겠지?"
그 말에 범장천과 노명성은 어리둥절하여 서로의 얼굴만 마주 보았다. 순간 혹시 미운산의 다리에 어떤 계략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그들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사실 미운산이 일어서기만 하면 그들의 목숨은 온전하지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들이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미운산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직 미운산은 어떠한 동작도 취하지 않은 채 앉아있기만 했다. 그들은 차마 미운산에게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기에 바빴다.
범장천이 슬그머니 미운산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나 겁을 내어 가까이 접근하지는 못하고 약간 거리를 두고는 손가락으로 미운산의 혈도를 겨냥했다. 미운산이 한눈을 파는 사이였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미운산의 어깨에 있는 혈도가 명중되고 말았다. 미운산이 움찔 옆으로 쓰러질 듯 하더니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졌다.
노명성이 나섰다.
"범장로, 내 보기엔 미방주가 다리를 못 쓴다는 게 거짓은 아닌 것 같소. 다리를 쓰지 못한다는 것은 방중의 형제들이 알고 있는 지가 벌써 오래 전이요. 만일 꾸민 것이라면 그동안 들통이 나도 났을 것이요. 그러니 어서 죽이시오."
두 사람은 더는 두고 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살기를 띤 두 사람이 미운산에게로 바싹 다가갔다. 막 손바닥을 펴 미운산에게 가격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미운산이 천천히 몸을 펴고 앉았는데 얼굴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미운산의 의연한 모습에 두 사람은 잠시 주춤했다. 감히 손을 댈 수 없어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때 갑자기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놈들이 만일 사람을 죽였다가는 네 놈들 목부터 달아날 줄 알아라!"
미운산의 머리속에는 일순간 복잡한 생각이 파고 들었다. 사실 자신이 끝까지 다리를 쓰지 않고 있는 것도 혹시 주변에 그 여인이 와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기까지 미운산은 끝내 여인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는 비로소 여인의 목소리를 듣자 한시름 놓았다. 오히려 여인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미운산이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난 네가 돌아오지 않는 줄로만 알았는데 와 주었구나!"
그러자 여인의 야릇한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후후후,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런 말을 하시오?"
순간 미운산은 아차 싶었다. 그때서야 자신이 기다리던 목소리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인은 미립이 아니였다. 여인이 비로소 모습을 보이자 그 사실은 분명해졌다. 여인은 도가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손에는 먼지털이개를 든 채 조용히 미운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장천이 소리쳤다.
"넌 누구냐?"
여인이 오만한 자태로 두 사람을 힐끔 쳐다보고는 외면해버렸다. 오로지 미운산과 상대를 하겠다는 투였다.
"당신은 아들도 있고 딸도 있는 사람인데 왜 이런 고생을 하시오? 처신을 그렇게 해서 어디 사내라고나 하겠소?"
미운산을 책망하듯 여인은 제법 호기스런 눈빛을 만들었다. 골똘히 생각하던 미운산이 속으로 다시 한 번 아차 했다. 이제서야 여인의 정체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누구인지 알겠구나.'
미운산이 광채를 띤 눈길로 여인을 주시했다. 여인은 그러나 사태를 더 즐겨보자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노명성과 범장천을 다시 노려보았다.
"너희들 두 놈은 그 못된 궁리를 집어치우고 어서 도망을 치는 게 좋을 것이다! 고개도 들지 말고 어서 사라져라! 네 놈들이 만일 여기서 죽게 되면 누명만 남게 될 것이다."
그때서야 두 사람도 여인이 분명 도고(道姑)인 것을 알아차렸다. 강호에서 이름난 여걸인 도고. 강호에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종남산 왕중양대협에게는 임조영(林朝英)이라 부르는 애인이 있었는데 바로 이 여인이었다.
노명성이 머리를 돌려 범장천을 슬쩍 살폈다. 그는 두 주먹을 움켜쥔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의 얼굴에는 아주 두려운 기색이 드리워져 있고 온몸이 차츰 굳어가고 있는 듯했다.
범장천은 속으로 겁을 집어먹고 있는 중이었다. 이 여인이 분명 임조영일텐데 그렇다면 큰 낭패가 아닌가. 강호에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천하의 왕중양의 무예가 제일인데 바로 임조영만이 그와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임조영이 왕중양을 찾아 싸웠는데 두 사람은 몇날 며칠을 싸우고도 승부를 가르지 못했다는 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강호 사람이라면 어린아이조차도 그것을 노래처럼 부르고 다닐 정도였다.
위기를 느낀 범장천이 그녀에게 예를 올리며 공손히 물었다.
"여협께서는 종남산의 임조영이 아니십니까?"
임조영은 범장천의 행동을 바라보며 코방귀를 뀌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아주 난처한 입장에 빠지고 말았다. 만약 이대로 미운산을 놔두었다가는 큰 후환이 따를 것이었다. 훗날 미운산이 장로들 앞에서 오늘 있은 일을 발설한다면 그들 두 사람은 그것으로 끝장이 날 게 분명했다. 미운산을 죽여야만 하는데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닐 듯싶었다. 더군다나 임조영을 이길 자신이 없었기에 더욱 곤혹스런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개방에서 가장 모략이 뛰어난 자들로서 무슨 일을 하든지 타산이 분명했다. 이 시점에 있어서도 그들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 꾸미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재빨리 궁지를 벗어날 계략을 끌어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임조영이 먼지털이개 끝으로 그들을 지적하며 말했다.
"네 놈들이 꿍꿍이 수작을 꾸미고 있다는 걸 난 다 보아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은 너희들을 죽이고 싶지 않다. 그러니 허튼수작 그만하고 썩 물러가기 바란다."
그러면서 손에 들린 먼지털이개로 탁자를 내치쳤다. 순간 탁자 한쪽 모서리가 썩은 이빨 부러지듯 툭 하고 떨어져나갔다. 새 탁자였는데 일순 빗물에 오래 씻겨 너덜너덜해진 나무처럼 힘없이 떨어져나간 것이다.
노명성과 범장천이 뒤로 주춤 물러서며 입을 크게 벌렸다. 그 옆에 있던 미운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말로만 듣던 임조영의 무예를 직접 눈으로 보는 순간이었다. 한마디로 대단한 무공이었다. 간단히 힘도 안들이고 저토록 단단한 탁자를 자를 수 있다니. 미운산을 비롯한 장로들은 자기들의 무예는 그녀의 발에도 미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범장천과 노명성이 임조영에게로 와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리곤 한마디도 못하고는 몸을 돌려 황급히 꽁무니를 빼며 물러났다.
미운산이 임조영을 바라보자 그녀는 화가 덜 풀린 눈길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운산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임여협께서 훈시할 말씀이 계시면 하시오."
"당신이 목숨이 아까우면 무예를 배워 무엇하며 문제가 일어나는 걸 두려워 하면 개방의 방주노릇은 해 무엇하리오. 내 보기엔 당신은 아주 허약한 사내일 뿐이요."
하며 몸을 돌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혼자 남은 미운산은 다시 하늘을 우러르며 불편한 심기를 달래려고 했다. 여전히 밤하늘에는 뭇별들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미운산은 그 별 중 어느것이 더 밝고 어느 것이 사위어가는지 가려내기가 힘들었다. 모두 자신의 심정처럼 꺼질듯 나약하게만 보였다.
하늘의 별도 똑똑히 보이지 않는데 땅 위에 있는 사람이야...... 그 심사를 어찌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속으로 자신을 원망할 뿐이었다.
미운산의 신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두 사내는 이미 장로들의 발밑에 깔려 죽은 지 오래였다. 그는 조용히 의자에 앉은 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날 제남부(濟南部)에 모이라는 통지를 받은 몇몇 장로들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곳에 있는 십리취(十里翠)라는 기생집이 모임의 장소로 돼있기 ㄸ문이었다. 그 통지를 전하러 온 사람이 장로들에게 고했다.
"영을 내리신 분은 바로 방주님이시며 그 증표로 방주의 신물인 녹옥죽봉을 보았습니다."
그 말 ㄸ문에 장로들은 더욱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녹옥죽봉은 구양봉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영을 전달하러 온 사람이 녹옥죽봉을 보았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영을 내린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개방의 장로들은 결국 오의파이니 금의파이니 하는 차별을 두지 않고 곧 제남으로 향하기로 결정을 했다.
모이라는 날자는 칠월 칠석이었다. 바로 하늘에서는 견우직녀가 만나는 날이었다. 이날은 또한 여인들이 하늘에 바느질을 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비는 날이기도 했다. 아마도 여인들이 날때부터 생각이 우둔하거나 공상이 많기 때문에 하늘에 그같은 지혜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날 여인들은 밤에 잠을 자서는 안되며 누대(樓坮) 아래에 앉아 일제히 자기들이 더욱 총명해질 수 있도록 비는 것이었다.
개방의 장로들은 한결같이 마음 속에 들어찬 의문을 풀지 못한 채 제남으로 향했다. 왜 하필이면 제남부에서 회의를 열며 더군다나 기생집으로 정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구양봉의 손에 있다는 녹옥죽봉을 보았다니......
이날 날이 저물 무렵 개방의 금의파 장로들인 부귀산인 범장천, 청한자자 노명성, 사개 정원, 출수표(出手*) 노경(노敬)과 오의파의 장로들인 일점지 나장태, 소검 오평, 소미타 추우 등이 십리취 기생집에 당도하였다.
이름은 십리취라고 하지만 사실은 매우 보잘 것 없는 곳이었다. 맞은편에 자그마한 다락집이 하나 있었는데 어떤 묵객(墨客)이 허울좋게 그같이 큼지막하게 써놓았고 좌우에도 주련을 써 붙여두었다. 왼쪽 주련에는 "돈을 물쓰듯이 하면서도 떠나기 아쉬워라(埇金* 翠夜野不去)" 라고 씌어져 있고 오른쪽 주련에는 "이쁜 얼굴 고운 목소리 날마다 오게 하누나(五面**聲天天都來)"라고 각각 씌어져 있었다. 그 주련만 봐도 보통의 기생집에 지나지 않았으며 특이한 점도 없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개방의 장로들이 당도하니 기생어미가 반기며 간사한 목소리를 흘렸다.
"얘들아, 어서 손님들을 맞아들여라. 손님들이 많이 오셨구나. 어서들 와!"
그러자 안에서 얼굴에 분과 연지를 바른 몇몇 여인들이 자태를 뽐내며 걸어나왔다. 그 여인들은 장로들을 에워싸고 아양을 부리며 난리를 쳐댔다. 아마도 장로들을 대단한 부자들로 안 모양이었다.
소검 오평이 부릅 뜬 눈으로 흘겨보자 기생들이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슬슬 피하는 것이었다. 나장태 역시 의외로 차가운 기색을 보이자 기생들은 그에게 수작을 걸지 못하고 멀찌감치 물러서서 눈길만 주었다. 먼저 수작을 걸어오기를 바라는 태도였다. 범장천과 노명성 두 사람만이 기생들과 수작을 주고 받으며 한껏 흥을 돋구고 있었다.
노명성이 한 기생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 기생집에 웬 괴상한 사람이 있더냐?"
그러나 기생이 말의 뜻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하고는 초롱초롱한 눈만 요리조리 굴렸다.
"무슨 괴상한 사람이겠어요. 아리따운 여인을 찾으실텐데."
하며 입술을 내밀고는 삐죽거렸다.
"그런 거라면 그대들 어미가 다 알아서 처리해줄텐데 신경을 쓰겠나?"
기생어미가 그 말을 듣고는 웃음을 뿌렸다.
"호호, 손님들은 뭘 알고 싶으신 거죠?"
노명성이 근엄한 표정을 만들며 한손으로 자기 가슴을 쳤다.
"우린 개방의 십대 장로들인데 누군가 보낸 통지를 받고 오는 길일세. 우리들에게 이곳으로 모이라고 했는데 그 통지를 보낸 사람을 혹시 아는가?"
기생어미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대답했다.
"참, 후원에 한 사람이 있긴한데...... 그런데 여인이지요. 그 여인이 사람들을 시켜 손님들을 부른 게 틀림없어요."
범장천이 품속에 안겼던 기생을 밀어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들 범장천의 뒤를 따랐다. 뒤뜨락에 이르자 삼엄한 경비를 만나게 되었다. 몇십명이나 되는 사내들이 말없이 서서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사람마다 손에 무기를 들었다. 그것을 본 장로들은 어정쩡한 기분에 싸여 과연 여인의 정체가 무얼까 고심했다. 여인이 자신들을 찾은 이유에 대해 얼른 캐어낼 수가 없었다.
노명성이 사내들을 향해 소리쳤다.
"개방의 장로들이 배알하러 왔소이다!"
그러나 대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작은집에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사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계속 묵묵히 서 있었다. 한참 만에야 누군가 목소리만 내보냈다.
"개방의 장로들이 오셨으면 들어오시죠."
목소리만 듣고서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나 꽤나 부드럽고 감칠맛 나는 소리라 모두들 마음이 끌렸다. 분명 여인의 목소리였는데 장로들은 사위를 둘러보며 끌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깨끗하고 정갈한 방이었다. 그 안에는 묘령의 여인이 앉아있었다. 여인이 고개를 돌리며 미소지었다.
"금의파, 오의파 장로들이 다 오셨군요."
범장천이 살펴보니 여인은 전임 방주 미운산의 딸 미립임이 분명한 듯했다. 범장천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네가 바로 우리를 부른 장본인이란 말이지?"
그러자 미립이 특유의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제가 불렀어요."
미립은 웃음을 가득 칠한 눈으로 장로들에게 하나하나 눈인사를 주었다. 일곱이나 되는 장로들은 선 채로 미립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까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좀체 미립의 입은 열리지가 않았다.
범장천이 양미간을 오무리며 물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개방에 첩자를 돌려 칠대 장로들을 불러들였단 말이냐?"
"제가 여러분들을 청해온 것은 개방의 방주가 또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죠."
"개방의 방주가 바뀌었다는 일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더냐?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범장천이 단호한 태도로 일관하자 미립이 자세를 고쳐앉으며 설명했다.
"원래 개방의 방주는 아버지였어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하실 수 없게 되자 방주의 자리를 소씨 거렁뱅이에게 넘져주었지요. 그런데 그가 지키지 못할 줄 어찌 알았겠어요."
일점지 나장태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며 나섰다.
"잠깐! 넌 개방의 장로도 아니고 개방문중의 믿음직한 제자도 아니다! 아무런 공로도 세우지 못한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누가 방주에 오르느냐 하는 대사를 논하는 것이냐?"
그러나 미립이 눈썹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자세로 답했다.
"전 개방에서 태어나 개방에서 자란 사람인데 왜 자격이 없겠어요. 전 오늘 여러 장로들을 소집하여 이번의 방주는 바로 제가 맡는다는 사실을 선포할 생각이니 그리들 아세요."
"뭐라고!"
일곱 장로들은 모두 아연실색해 서로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한동안 말을 잃어버렸던 범장천이 비웃으며 말했다.
"첩자의 말로는 통지를 받을 때 분명 진방(鎭幇)의 보물인 녹옥죽봉을 보았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우리들 앞에서 그것을 보이거라?"
개방의 보물이자 방주의 수신신물(隨身信物)인 녹옥죽봉은 이미 구양봉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개의 계집이 그것을 갖고 있다는 말에 범장천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범장천의 호기를 노려보던 미립이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그러자 몇몇 여인들이 허리를 숙이며 들어섰다.
개방에는 원래 지위가 높은 사람의 일부 가족만이 여제자를 거느릴 수 있었다. 그런데 몇몇 여제자로 보이는 여인들이 부름에 맞춰 들어오자 개방의 장로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여인들은 살결이 백설같이 눈부셨지만 거지로 분장을 하다보니 남루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저마다 아름답고 교태가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 전혀 거지다운 맛이 없었다.
교태있는 걸음걸이를 뽐내며 걸어와서는 두 줄로 서는 여인들을 장로들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한 여인의 손에 바로 녹옥죽봉이 들려있는 것이었다.
미립이 여유있는 웃음을 지으며 범장천을 바라보았다.
"자, 이 녹옥죽봉을 잘 보세요. 이건 개방의 보물이니까 자세히 보라고요."
일곱 장로들은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녹옥죽봉을 자세히 살폈다. 분명한 녹옥죽봉이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서로 마주보았다. 순간 마음이 하나로 통했다. 우선 녹옥죽봉을 ㅃ앗고 보자는 게 그들이 서둘러 모은 공통된 생각이었다.
미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방의 대사는 이전에는 나의 아버지가 장악하셨지만 이제부터는 제가 관할하겠어요. 여러 장로들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노명성이 침울한 표정을 털어내지 못하고 미립을 주시했다.
"개방 방주는 원래 덕이 있는 사람이 차지하였소. 소저는 그 어린 나이에 무슨 덕이 있다고 개방의 방주에 앉겠다는 것이오? 또한 보잘것 없는 재간으로 어찌 삼십만에 달하는 거지들을 호령할 수 있겠소?"
그러자 미립이 깔깔 웃더니 갑자기 정색을 하며 노명성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저 한사람 힘만으로는 안되지만 일곱 장로들께서 도와주신다면 문제될 게 없겠지요. 개방은 반드시 흥성하게 될 겁니다. 제가 여러 장로들을 청해온 것도 바로 이 대사를 의논드리기 위해서였어요."
범장천이 가소롭다는 투로 물었다.
"하하하, 소저의 나이가 올해 몇이오?"
그러나 미립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꺼릴 게 하나도 없다는 듯 범장천의 물음에 기꺼이 답하고 나섰다.
"열여섯이지요."
범장로가 박장대소를 하며 다시 미립을 책망했다.
"소저 나이엔 고운 옷 입고 훌륭한 가문으로 시집을 가는 게 가장 어울릴 것 같소. 신부노릇을 하며 깨나 받으며 살아야지 어찌 우리 거지들과 한데 어울려 다닌단 말이요. 다른 건 그만 두더라도 소저가 방주로 오른다면 개방의 모든 사람들이 소저에게 침을 뱉어도 할말이 없을 거요. 아니 그 침에 맞아 소저는 죽고 말 것이요. 삼십만 개방사람들의 대소사를 어찌 소저가 맡아 처리할 수 있겠소? 이게 어디 장난인 줄 아오? 내 생각같아서는 소저는 그만 물러서는 게 좋
겠소이다."
"범장로께서 하신 말씀을 저 역시 새겨보지 않은 건 아니랍니다. 아버지께선 누구의 모함을 받으셨는데 여러 장로들께서 알아내지 못하니 아무래도 제가 나서야 할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방주 노릇을 하지 않으신다면 저밖에는 달리 없다구요. 좀 난처한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장로들은 미립의 말에 쓴웃음을 씻어낼 수가 없었다. 계집이 감히 천하에서 제일 큰 개방의 방주가 되려하다니 가소롭기 그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미립이 나장태를 불렀다.
"아저씨, 아저씨께선 제가 방주가 되는 걸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만일 나장태가 동의를 한다면 오의파의 몇몇 장로들은 더는 씨끄럽게 굴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장태는 미립에게 일침을 놓았다.
"네가 개방의 방주가 된다니 꿈도 꾸지 말아라!"
이번엔 범장천에게 물었다.
"아저씨 생각은 그럼 어떠세요?"
범장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가 조금 일찍 태어났더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
미립은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지 않음에 몹시 곤혹스러워했다.
"그렇테지요. 전 당신들이 제가 방주가 되는 걸 바라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러나 당신들이 달갑게 여기지 않아도 할 수 없어요. 개방의 신물인 녹옥죽봉이 이미 제 손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명심하세요."
범장천과 나장태는 미립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미립의 무예란 안중에도 없었기에 그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를 않았다. 미립이 다른 사람들과 싸워 이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더니 곧 의기투합을 했다.
"얍!"
소리를 내지르며 공중으로 몸을 띄운 두 사람은 녹옥죽봉을 든 계집을 순식간에 덮쳤다.
나장태는 성난 사자가 발톱으로 먹이를 잡아채듯 두 손으로 미립을 내리쳤다. 범장천 역시 두루미가 두 날개를 펼치면서 땅에 내리듯 했다. 미립은 미처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던지 멍하니 선 채로 두 사람의 공격에 꼼짝하지를 못했다. 순간 뒤로 주춤 물러선 미립이 황급히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런데 범장천과 나장로 사이에 뜻하지 않은 괴리가 생기고 말았다. 그들은 서로 녹옥죽봉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상대에게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처음부터 수를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처음 미립을 덮치면서 어느정도의 힘을 분산시켜 상대를 겨냥했던 것이다. 범장천은 미립의 정수리로부터 내리 꽂아 두 어깨를 끌어잡으려고 했다. 반면에 나장태 역시 그녀의 앞가슴 쪽을 노리면서 녹옥죽봉을 잡으려 했다.
여러 장로들은 그들이 덮치면 미립이 몸을 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립이 위기에 몰렸는데도 여전히 태연한 기색으로 꼼짝 않고 있는 것이었다.
"멋지군요! 무예들이 정말 대단한데요? 개방의 장로로서 손색이 없어요."
하는 조롱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만 할 뿐이었다. 순간 미립이 말을 하는 사이를 틈타 두 사람은 녹옥죽봉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보이지 않던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와 두 사람을 노려보는 게 아닌가? 그는 바로 구양봉이었다.
나장로와 범장로는 구양봉을 알아보자 급히 손을 멈추었다. 그들 두 사람은 황급히 몸을 추스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나머지 장로들 역시 놀란 눈으로 구양봉을 주시하면서 파르르 떨고들 있었다. 천하의 악독하기로 소문난 구양봉의 출현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뒤에 그를 숨겨두고 있었기에 미립이 그토록 거만하게 굴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립의 요망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든 녹옥죽봉을 가져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보시라구! 아니면 모두 내 말을 따라야 해!"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외팔이 소검 오평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난 절대 찬성할 수 없다!"
그리곤 천천히 구양봉에게로 다가가 부드럽게 청했다.
"구양선생, 개방 내부의 대사는 선생과는 아무 상관도 없잖소? 그러니 당신은 이만 물러나는 게 좋을 듯 싶은데요."
구양봉이 곁눈으로 소검 오평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하하하, 알고 있기로는 임자의 한쪽 팔은 남의 검에 잘려나갔다고 하던데 나머지 팔마저 잃어버리고 싶은가?"
소검 오평은 더이상 말이 통할 위인이 못될 것 같다고 깨달았는지 약간 뒤로 물러서면서 검을 뽑아들었다. 다른 장로들이 말리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그는 구양봉을 향해 돌진해들어갔다. 그가 있는 힘을 다 모아 구양봉의 가슴팍을 찔렀다. 그런데 구양봉은 거의 검끝이 눈앞까지 다가올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번개보다 빠르게 손을 놀렸다. 어느새 양손바닥으로 검날을 덥썩 잡았던 것이다. 힘을 주자 그의 검은 땅을 향해 차츰 내려갔다
. 한손으로 검을 쓰다보니 구양봉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구양봉이 타이르듯 말했다.
"그대가 이까짓 재간을 믿고 내게 덤비다니? 실로 가소로운 일이로구나."
그리곤 곧 양손에 힘을 주어 소검 오평의 장검을 작신 부러뜨렸다.
이때 하늘을 찌를 듯한 미립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구양선생, 소검 오평은 아직 혈기왕성한 젊은이인데 용서해주시지요?"
구양봉이 손을 거두고는 그를 뒤로 떠밀어버렸다.
범장천과 나장태는 넋이 나간 얼굴로 서로를 응시했다. 모든 것이 불처럼 환하게 밝혀진 뒤였다. 장로들이 구양봉을 공격한다 해도 참혹한 살상만이 일어날 뿐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범장천이 천천히 미립에게로 걸어나왔다.
"내가 듣건대 구양선생은 서역의 백타산군인데 소저는 무슨 연유로 그를 청해왔는지 모르겠구먼."
범장천이 구양봉을 돌아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구양선생이 소저를 부추겨준다면 녹옥죽봉을 포기하겠소. 하지만 구양선생은 날마다 소저를 따라다닐 수는 없는 일이오. 결국 소저의 운명은 비참하게 맞이할 것이오."
그러자 미립이 화를 내며 범장천을 호되게 몰아부쳤다.
"이 범장로께선 꽤나 속을 썩이는군요. 전 다만 당신들 일곱 장로들 중에서 누가 우리 아버지를 죽이려 한 자인가를 알아내려는 것 뿐이요. 그 자를 색출해서 내친 다음 나에게도 생각이 따로 있소."
미립이 갑자기 말을 끊더니 상체를 돌려 여인의 손에서 녹옥죽봉을 받들었다. 그리고 높이 쳐들며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녹옥죽봉이 내 손에 있는데 개방의 장로들 중 누가 명을 거역하겠는가!"
장로들은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침묵으로 일관할 따름이었다. 구양봉이 미립을 부추겼다.
"그대가 저 놈을 죽이지 않고서야 어디 놈이 복종하려 하겠는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구양봉이 출수표 노경에게로 몸을 날렸다. 출수표 노경은 구양봉이 자기에게로 손을 뻗자 몹시 당황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무예가 뛰어난 구양봉이지만 겁을 먹고 싸워보지도 못했다면 어찌 사람구실을 다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다짐을 순간 가슴에 새겼다.
구양봉이 다시 한발을 땅에 짚고는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ㄸ를 맞춰 출수표 노경은 손에 들고 있던 열두개의 표창을 날렸다. 피릭- 열두개의 표창은 구양봉의 전신을 향해 날아갔다. 표창 끝에는 한결같이 독이 묻어있어 맞기만 하면 끝장이었다.
"얏!"
구양봉이 허공에서 옷소매를 휘저었다. 표창들이 구양봉을 비켜날아갔다. 또한 그중 몇개는 노경에게로 되돌아갔다.
"읍!"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처 되돌아온 표창을 피하지 못한 노경이 허리를 반으로 꺾었다. 한쪽 어깨에 표창이 꽂혔던 것이다. 구양봉은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노경 앞으로 다가왔다. 쓰러진 노경을 바라보며 구양봉이 웃었다.
"네 놈이 감히...... 흐흐흐."
하며 쓰러진 노경을 한손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노경은 허공에 매달린 채로 두발을 버둥대기 시작했다. 개방의 나머지 장로들은 더이상 구경만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구양봉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구양봉이 한손으로 노경을 바람개비처럼 돌렸다.
"네 놈들이 다가오면 이 놈은 곧 내장이 튀어나가 죽고 말 것이다! 내가 이 놈을 무작정 돌리면 내장 뿐만 아니라 뼈까지 너희에게로 쏟아져나갈 것이다!"
구양봉은 여유롭게 휘파람을 불며 장로들을 주시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 없지. 자, 그럼 잘 보도록 해라!"
하며 휘파람을 계속 불었다. 순간 한쪽 손으로 들고 있던 독사장에서 두 마리의 작은 뱀이 기어나왔다. 슉슉- 삽시간에 뱀은 출수표 노경의 머리로 건너가 그의 두 귀에 매달렸다. 혀를 낼름거리던 뱀이 노경을 몸으로 싸고 돌았다.
"아악!"
노경이 비명을 질러댔다.
"어떠냐? 이 장로의 목숨은 네 놈들에게 달려있다."
구양봉은 곧 출수표 노경을 바닥을 향해 내던졌다. 그는 땅바닥에 내리꽂힌 채로 버둥대기 시작했다. 아직 귀에 매달려 있는 독사들 ㄸ문에 마치 불통에라 빠진 사람처럼 열심히 몸부림을 쳤다. 범장천이 노경을 바라보던 눈길을 구양봉에게로 돌렸다. 구양봉의 손엔 독사장이 위풍스럽게 들려있었다. 그는 오만한 눈으로 장로들을 내려보며 호기스런 웃음을 내보이고 있었다.
"하하하, 보아하니 내가 손을 써 이 개방의 장로놈들을 모조리 죽여야 할 것 같다. 개방엔 제자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마음대로 끌어모을 수 있지 않겠느냐?"
개방의 일곱 장로들은 구양봉의 말에 수습책을 마련하기에 바빴다. 만약 구양봉이 자신들을 모두 없앤다면 개방은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었다. 녹옥죽봉을 빼앗기도 전에 죽음을 당해선 안될 것이었다.
"구양선생, 그리 급히 드셔서는 체하지요. 개방의 장로들도 대략은 알고 있으니 그들이 어찌 쉽사리 목숨을 내놓겠어요. 제가 저 사람들과 말을 한번 해보지요."
하며 나선 것은 미립이었다. 미립이 범장천에게로 다가가 눈치를 살피려하자 범장천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네 년이 아무리 입이 닳도록 떠벌여도 난 듣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
미립의 입술이 움찔움찔대더니 나긋한 소리를 뱉어냈다.
"아저씨, 당신이 재산을 탕진해가면서 개방에 들어와 지금에 이르렀는데 어렵게 되었네요. 참 유감스러운 일이죠?"
"네가 차라리 날 죽여라. 하지만 날 죽일 수는 있어도 개방을 얻기란 어려울 것이다!"
"아저씨, 내가 아저씨를 죽여 무엇을 얻겠어요? 난 그저 한가지 일을 아저씨에게 알려드리려는 것 뿐이예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범장천은 미립의 말에 귀를 세웠다.
"임안성 동사조(東斜조) 골목에는 자그마한 돌다리가 있고 다리 뒤에는 작은 뜨락이 있죠. 그 뜨락에 식구가 다섯이 되는 한식구가 살고 있잖아요? 그 집에 중년의 사내와 한 여인이 있고 어린아이도 셋이나 되죠. 둘은 사내고 하나가 계집애죠. 그 애들은 아주 사랑스럽게 생겼어요. 안그래요?"
"네, 네가 가,감히......"
바로 범장천의 집이었다. 미립이 요사스럽게 웃었다.
"호호호! 범장로, 당신이 절 방주로 받들지 않는다면 그 집 안의 사람들은 죽고 말텐데요. 그집 뜨락엔 작은 우물이 있는데 아마 모두 죽고나면 그 우물 탓이라고 사람들은 말할테죠."
범장로는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어떠한 고통도 참아낼 수 있는 자신이었지만 가족들을 미끼로 위협을 하는 미립 앞에서는 더이상 견뎌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괘씸하기 짝이 없구나!"
하며 외친 것은 노명성이었다. 미립이 노명성을 할끔거리다가 입술을 옆으로 찢어 웃었다.
"호호호, 노장로가 아닌가요? 강호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존경하고 있다지요? 당신이 협의(俠義)있는 사람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러기에 청한자자(淸閒慈者)라는 별호까지 생겨난 게 아니겠어요. 전 이 별호를 들을 때마다 십팔나한(十八羅漢)의 이름을 들을 때처럼 경모의 정을 품게 되지 뭐예요.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맞는가봐요. 하지만 전 당신에게도 몇가지의 일을 알려줘야겠어요. 그럼 당신의 생각도 달라질지 모
르니까요."
"허튼수작 말아라!"
노명성이 어림없다는 투로 미립의 말을 흘려넘겼다.
"좋아요. 그럼 당신께는 몇글자만 알려드리지요."
"몇글자라니?"
노명성이 어리둥절해하자 곧 미립이 정면을 날카롭게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청평채(淸平寨), 운가교(雲家校), 녹보(鹿堡)......"
"아니!"
노명성의 얼굴은 갑자기 푸르스름한 기운으로 뒤덮히고 말았다. 귀신이라도 본 듯 노명성의 표정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굳어졌다.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미립에 대해 노명성은 또한번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미립의 방자함은 그것으로 끝나지를 않았다. 그밖의 다섯 장로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섯분의 장로님들도 저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만일 할 말씀이 없다면 개방의 방주가 될 수 있겠지요?"
"집어치워!"
하며 소리친 것은 바닥에 쓰러졌던 소검 오평이었다. 어느새 뱀들을 물리친 그는 비칠비칠 미립에게로 다가서며 단호하게 말했다. 쓰러지면서 해독제를 급히 삼킨 탓에 위기를 넘긴 듯했다. 그러나 그의 어깨에는 표창에 맞은 상처로 피가 짙게 배어 있었다.
"넌 나를 마음대로 부리진 못해! 난 두렵지 않단 말이다. 내게도 전해 줄 말이 있다면 어디 해보렴?"
"아저씬 사람됨됨이가 과연 광명정대하군요. 하지만 무릇 사람이란 누구나 헛점은 있기 마련이죠. 당신은 비록 절개가 높고 청념한 분이시지만 남에게 털어놓지 못할 고초는 있겠죠. 그걸 제가 밝힌다면 어떨까요?"
"뭐라구! 네가 그따위 심보를 가지고 개방의 방주가 된다면 사람들은 원망의 소리만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난 절대로 네가 개방의 방주가 되는 것을 구경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저씨, 당신은 저를 가장 훌륭하게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봐요. 그렇게 되면 당신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어때요? 후회하기 전에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는 것이?"
"소저가 후회를 한다고 했는데 궁금하구나? 도대체 무엇을 놓고 나를 비웃겠다는 건지 어서 말해보거라?"
그러자 미립이 전혀 새롭고도 군침이 돌만한 사실을 꺼내놓았다.
"아저씨에게 한권의 훌륭한 검보(劍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당신은 한평생 그런 책을 얻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제가 그 검보를 드린다면 어떨까요?"
정말 뜻밖이었다. 황소보다 더 커진 눈으로 미립을 보던 소검 오평은 입술이 탔다.
"뭐라고 했더냐? 정말 네게 그런 검보가, 그렇게 훌륭한 검보가 있더란 말이냐? 혹시 나를 기만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의 목소리를 떨리고 있었다. 정말 사실이라면 더할나위 없는 기쁨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그 검보는 다만 당신과 나만 아는 것으로 해요. 그건 양가죽으로 덮개를 씌운 책인데 모두 백한장이었지만 지금은 한장이 모자란 백장이지요."
미립의 말을 옆에서 ㄷ고 있던 개방의 장로들은 이미 면밀한 계획이 서 있음에 경악했다. 결국 자기들은 이미 그녀의 손아귀 안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미립이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전 분명 개방의 방주가 될 거예요. 어디 한번 말해보세요. 그렇지 않은가요?"
그러나 모두들 묵묵부답으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대신 대답을 하듯 나선 것은 구양봉이었다.
"훌륭하군, 과연 훌륭해! 이 노독물도 그대가 은근히 무서운 여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네. 당신은 실로 멋진 여인이야!"
미립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구양선생의 칭찬에 감사를 드려요. 제가 보기엔 여러분 장로님들도 반대를 하지 않으시는 눈치 같군요."
말을 마친 미립의 눈에서는 예사스럽지 않은 빛이 흘러나왔다. 곧 의자에 앉은 미립이 사방을 둘러보며 고개를 곧추 세우고는 소리쳤다.
"방주가 예 있으니 그대들 장로들은 방주를 정식으로 배알하시오!"
그 소리는 장로들의 귓전을 후벼파듯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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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이다 (♡.50.♡.153) - 2022/02/20 2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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