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화산논검 - 북개 홍칠공 4

3학년2반 | 2022.02.21 06:54:16 댓글: 0 조회: 689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0117

제16장 남장여인의 정체

여러 장로들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별 수 없이 모두 앞으로 나가 미립에게 예를 올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이것이 씻을 수 없는 아주 큰 치욕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억지로 예를 올리고는 있지만 모두들 마음 속으로는 그 반대가 되는 심지들을 하나씩 심었다.
미립이 눈치챈듯 만족하지 못한 얼굴로 그들을 비웃었다.
"개방의 장로들은 원래 불같이 뜨거운 충성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가요? 오늘 이 새 방주에 대해서도 마땅히 그같은 마음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소?"
장로들은 미립의 말을 귀넘어듣고자 했다. 이미 예를 행하여 비록 겉으로나마 충성을 다짐한 것인데 더는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속에서는 미립이 원한 불보다도 더 뜨겁고 강렬한 것이 활활 용솟음치고 있었다. 바로 미립에 대한 원망의 불꽃이었다.
범장로가 안되겠다는 듯 미립에게 다짐을 하며 나섰다.
"방주가 구양봉을 자기의 신변보호자로 삼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는 것이오. 방주도 해는 내일도 뜬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할 게요."
범장로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자존심조차 누르며 내보이는 쉽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미립에게는 지나는 날벌레의 날개짓소리로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범장천, 내일이 있으면 어찌하겠소? 당신이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말이요? 아니면 나의 아버지에게 했듯이 독으로 두 다리를 못쓰게 만들기라도 할 건가요?"
미립의 말에 범장천 뿐만 아니라 모든 장로들의 머리속은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아직 자신들을 그 범인으로 일축하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범장천은 이 개방에서 누가 과연 미운산을 폐인으로 만들었을까 고심했다. 그토록 훌륭한 인물을 망가뜨렸으니 실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미립은 방주의 자리를 더욱 견고하게 다지려는 듯 다시 장로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여러 장로들이 나의 명령에 따르기로 원하였으니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이미 철저한 계략에 의해 꾸며왔던 일이기에 미립의 행동은 거침이 없어 보였다. 아주 매끈하게 일을 처리해나가는 미립을 보는 장로들은 그저 화가 치밀어오르는 가슴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먼저 범장천에게 명령했다.
"범장로. 그대는 소씨 거렁뱅이를 즉시 찾아내어 내게로 오라 전하시오!"
그녀는 이어서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그대들 두 사람은 발 빠른 첩자를 돌려 구구 중양절 날 개방 분타(分舵)의 타주(舵主)들은 모두 건강(建康)으로 모여달라고 하시오. 내가 선포할 말이 있어요."
범장로는 그녀의 말에 빈틈이 없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비록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결국 묵인을 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시키는 대로 하겠다며 대답을 했다.
미립이 고개를 돌려 소검 오평에게도 말했다.
"그대의 기개는 내가 탄복하는 바이요. 그러나 당신은 끝내 나를 따르지 않을 건가요?"
소검 오평은 미립이 개방의 방주의 자리에 올라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순간적으로 이리저리 묘안을 모색해보았지만 선뜻 잡히는 것이 없었다. 일단 그녀를 인정해놓고 보자는 마음 쪽으로 머리가 기우는 것에 자신도 놀라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좋수다."
하고 머리를 숙여 대답하고야 말았다.
나머지 장로들은 소검 오평의 행실을 보며 속으로 개탄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가장 강직한 성품을 가졌다고 알려진 인물인데 이런 몰골을 보이다니 눈앞에 시커먼 먹장구름떼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노명성과 노경 그리고 나장태에게도 명령이 내려졌다.
"미방주께서 폐인이 된 일은 공적인 것보다 사적인 것으로 보지만 모두 방내의 대사에 속하오. 그러니 세 장로들께서는 전력을 다해 그 일을 밝혀내시오. 한가지 그 일에 대해 소홀히 하는 자가 있다면 내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노명성이 뜻하지 않게 미립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미립방주님, 우리더러 그 일을 하라고 하는데 과연 가능하다고 봅니까?"
미립이 대답을 미룬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노명성의 물음을 무시하듯 뒷짐을 지고는 방안을 서성였다.
"우리 아버지는 일찌기 두 사람에게 분부하여 그들을 방주에 앉히려고 했었소. 한 사람은 모두 알다시피 소씨 거렁뱅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홍칠공있었소. 아버지는 홍칠공에게 <강용팔장>을 전수해주기도 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모자라 그에게 미처 <타구봉법>은 전수해주지 못했어요. 그래서 내가 홍칠공을 찾아내어 그에게 타구봉법을 전수해주면 일을 좀더 수훨하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 다음 난 방주자리를 아예 홍칠공에게 넘겨주려고 해요."
장로들은 이제서야 미립이 녹옥죽봉을 탈취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은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녀가 방주 자리를 노린 것은 그런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장로들은 미립에 대한 태도를 허물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여러 장로들께 잠시 죄를 지은 점 사과를 드려요."
미립이 의외로 장로들에게 다가와 예까지 몰리며 허리를 숙였다. 장로들은 미립에게서 더욱 벗어날 수가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재간은 물론 위풍도 부릴 줄 아는 여인 앞에서 장로들은 설복이 되고만 셈이었다.
미립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신호를 보내자 여인 셋이 술단지를 들고 나왔다. 모두 세 개였는데 미립이 그것을 가르키며 한껏 웃어보였다.
"이 단지 속에 든 술은 보통술이 아니랍니다. 장로들께서 술을 즐기신다기에 마련한 것이예요. 어느 장로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보실래요? 그런 다음 우리 함께 축배를 들어요."
그런데 한가지 술단지를 들고 있는 여인들은 누더기옷을 입고 나왔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원래부터 닳아 남루해진 옷이 아니라 일부로 천을 찢어 만든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보니 자루를 뜯어 만든 옷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로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눈치들이었다. 여인들이 따르는 술냄새에 코를 갖다대고는 벌써 취한 듯 자세를 풀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술냄새를 맡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 얼굴로 풍겨오는 냄새에 범장천이 화들짝 놀랐다. 그는 장사를 해본 적이 있어 다른 사람과는 반응이 달랐던 것이다.
"아니 이건! 강남의 여아홍(女兒紅)이란 술인데 담근 지 오십년이나 되는 것이로군!"
장로들이 매우 놀라워했다. 오십년이나 되었다면 술을 담근 사람이 소녀였다 해도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여인의 성숫미처럼 오랜 세월 발효되어왔을 실로 귀한 술이 아닐 수 없었다.
여인이 이번엔 다른 단지의 덮개를 떼어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술냄새는 나지 않고 단지 속에서부터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미립이 여인을 시켜 술을 따른 다음 소검 오평에게 보이라고 했다.
소검 오평이 냄새를 맡고 김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이건 황궁에 있는 화주(火酒)가 틀림없어!"
방안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라움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유는 화주라는 술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화주를 알아본 소검 오평에게 그 원인이 있었다. 놀란 것은 미립도 마찬가지였다. 화주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소검 오평이 첫눈에 알아맞춘 것이었다.
미립은 이 소검 오평이 어떻게 화주를 알아본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굳어졌다.
"난 이 술을 마신 적이 있지요."
하며 소검 오평이 미립에게 설명을 했다. 미립이 탄복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전 이 술을 구하느냐 온갖 힘을 다 들였는데 장로께서는 벌써 마셔보기까지 했다니 정말 놀라워요."
소검 오평이 웃었다.
"하하, 사실은 내게도 분에 넘치는 복이 있었지요. 어느날 홍칠공이 한 단지를 얻어와 함께 마셨는데 벌써 삼년도 더 넘은 일이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그 맛은 잊을 수가 없소."
소검 오평이 이렇게 말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성미가 깐깐하고 강직한 사람이라 술을 맛본 내력을 말하고는 부끄럽게 생각되었던 모양이었다.
장로들은 소검 오평이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성미를 가진 소검 오평이 이처럼 감탄의 말을 이어가자 틀림없는 훌륭한 술이라 생각되었다. 미립이 다시 신호를 보내자 마지막 여인이 술단지를 내밀었다. 그 여인이 내민 술단지를 이번엔 노명성이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다른 장로들은 그 술이 어떤 술인지 알지 못했다. 그 술은 그리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안의 술은 그리 맑지도 않고 모래 같은 알갱이가 드문드문 섞여있었다.
그러나 향기만은 독특했는데 꼭 배향기 같았다.
소미타 추우가 대신 물었다.
"이건 무슨 술이요?"
그러자 미립이 기꺼이 물음에 답해주었다.
"이건 천하에서 아주 진귀한 장백산 곰술이지요. 이 술은 보기에는 이래 보여도 아주 독하답니다."
곰술이라면 아주 기이한 술이었다. 황금계절인 가을에 과원의 배나무에 배가 무르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는 것처럼 향기만으로도 사람을 취하게 만들 수 있는 술이었다. 가을에 곰이 땅에 떨어진 과일들을 보고 게걸스럽게 씹지도 않고 삼키는데 그중 들배가 곰의 위속에서 발효되면 그 곰은 취해 쓰러져 잠이 든다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달겨들어 곰을 묶어놓고 산채로 배를 가른다. 그리곤 곰이 방금 삼킨 것들을 꺼내어 술에 담가 만들었다는 게 바로 이 곰술이었다.
그러니 이런 술이 진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장로들의 얼굴에 흡족한 기운이 만연했다. 강남의 여야홍이란 술은 담근 지 오십년이나 된다니까 보기조차 힘든 술이요, 화주는 임금의 궁전에만 있는 술이니 역시 얻기 힘든 술이며, 이 곰술이란 것도 살아있는 야생곰의 배를 갈라 얻은 술이니 진귀한 술이 아닐 수 없었다. 개방의 장로들은 남북 각지를 돌아다녀 견식이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이런 술들은 아직 마셔보지 못했던 처지였다.
미립이 다시 신호를 보내자 여인들이 의자들을 날라왔다. 미립은 장로들을 좌석에 청해 앉힌 다음 말했다.
"술은 마땅히 도수가 낮은 것부터 시작해야 점점 취흥이 더해가는 법이지요. 마치 겨울로부터 시작하여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의 절기를 겪는 것처럼 차츰 뜨거워져야 하지 않겠어요."
먼저 강남의 여아홍이란 술부터 마시기 시작하였다. 단지에 있는 향기로운 술을 사발에 따라놓으니 더욱 진하게 향이 퍼졌다. 그 향기만으로도 취할 것만 같았다. 장로들은 제각기 술을 음미하고는 부드럽고 시원한 맛에 탐복을 했다. 차츰 그 향기는 뜨거운 열기로 변해 가슴속에서부터 서서히 끓어올랐다.
그 다음이 화주였다. 화주는 궁전의 술로 황제가 마시는 귀한 것이었다. 적당한 열기로 가슴을 데우고 있는 여아홍에 가미된 화주는 겉잡을 수 없는 흥분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라올랐지만 나른하다거나 정신이 흐려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눈앞으로 맑은 기운이 자리하는 듯했다.
술을 마시며 시중을 드는 여인을 바라보니 더없이 미인으로 비쳤다. 그 옆에서 줄곤 미소를 띠우고 있는 미립 역시도 천하에 둘도 없는 절색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 다음이 곰술 차례였다. 미립이 웃음을 가득 얼굴에 그리며 말했다.
"이 술을 마시려면 한가지 지켜야할 게 있어요."
"그게 뭐요?"
범장천이 거나하게 취한 눈빛을 미립에게로 옮겼다.
"단숨에 비워야 하지요. 그래야만 흥이 나는 법이거든요."
장로들은 미립의 말대로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 술은 어찌나 독한지 예리한 칼로 뱃속을 후벼파는 듯했다. 그러나 그 짜릿하고도 가벼운 통증을 동반한 맛에 장로들은 또 한번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새로운 흥분을 가져다 준 것이었다.
소검 오평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허, 정말 훌륭한 술이군, 훌륭해!"
장로들도 하나같이 모두 엄지손가락을 세워 칭찬의 말을 한마디씩 주고 받았다.
묘대야는 방안에서 자화(字畵)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는 서묵(書墨)에 각별한 취미를 갖고 있어 고서와 자화를 대하기만 하면 빠짐없이 사들이기도 했다. 또한 때때로 그것들을 집에서 감상하는 것을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으로 여겼다.
그의 장서에는 옛날 무명씨의 작품으로부터 창힐(蒼*)의 귀곡도(鬼哭圖)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장품들이 보관돼 있었다. 귀곡도에는 창힐이 글자를 만들 때 귀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창힐의 주위를 숱한 귀신들이 둘러싼 채 그와 실랑이를 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이밖에도 당조 때의 몇몇 대가들 그림도 보관돼 있기도 했다. 이런 명화들은 아주 진귀하여 쉽게 구경할 수조차 없었다.
묘대야는 그 그림들을 어루만질듯 감상을 하면서 매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누군가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묘대야님 계시오?"
묘대야는 그림들을 얼른 간수하며 대답했다.
"누구요?"
묘대야가 문발을 헤치고 밖을 내다보니 그곳엔 선비가 서 있었다. 그런데 선비의 행색이 어딘지 어색해 보였다. 묘대야는 곧 그가 미립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묘대야와 미립 간에는 지난날 아주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그는 미립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었는데 알고보니 묘령의 여인이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묘대야는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자기를 다시 찾아온 미립을 보자 묘대야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미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말했다.
"묘하군, 과연 묘해."
미립의 남복 차림에서 묘대야는 공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얼굴이 지나치게 하얗고 눈매가 곱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또한 귀도 공자보다는 작았다. 미립을 바라보는 묘대야는 저도 모르게 옛정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는 이전에 저 여인이 사내인 줄 알고 애써 잘 보이려고 했었지. 그런데 여인인 것을 알게 되어 얼마나 실망을 했던가.'
그런데 묘대야는 다시 남장을 하고 나타난 미립을 보자 마음에 혼란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고 깨달았다. 비록 여인이라고 해도 겉으로는 사내였다. 언제 자신이 저런 수려한 용모를 가진 사내와 접촉해 볼 수 있단 말인가. 이제부터라도 정답게 대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마침 잘 왔네. 내가 심심하던 참이었는데 함께 유희라도 즐기세."
미립이 예전과는 다르게 자신을 대해주려는 묘대야의 태도에 약간 놀라는 듯했다.
"형님께서 소원이라면 그렇게 하지요."
그들 두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문을 나서 큰거리에 이르렀다. 그들은 먼저 호수 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유람객들로 너무 붐벼 그들은 자연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호기심 어린 얼굴로 서로 소근댔다.
그들은 호수를 지나 낙사거(*士居)란 곳에 이르렀다. 이 낙사거는 아주 아늑한 곳이었다. 비록 그저 그런 술집이긴 했지만 이곳에 와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대체로 국자감(國子監)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거나 풍류재자(風流才子), 묵객소인(墨客騷人)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의 유난히 새하얀 바람벽에는 온통 시구절들로 얼룩져 있었는데 운치가 있고 글씨체도 멋졌다. 또한 금속공구로 글씨를 새겨놓은 것이어서 그 멋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묘대야와 미립은 이층으로 올라가 정갈하게 마련된 좌석에 앉았다. 주인이 곧 달려왔다. 이 낙사거의 사람들은 다른 술집의 시중꾼들과는 달리 모두 소매를 졸라맨 짧은 적삼을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일률적으로 똑같은 모자를 썼으며 그 모자 뒤에는 이삭처럼 생긴 꼬리가 달려있는 게 특색이었다. 그들은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며 술시중에 여념이 없었다.
또한 이곳의 시중꾼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눌 수 있었다. 한 부류는 글을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사람이었는데 이들은 그러나 이해할 수 없지만 시중꾼의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곳의 시중꾼들의 절반은 성품이 곧은 선비출신들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른 한 부류는 용모가 깔끔하게 생긴 계집들이었다. 하지만 아두(*頭)의 옷차림과는 달리 당조 때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게 특징이었다. 이들은 일솜씨가 일품이었고 손님들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으로 유
명했다.
두 사람 앞으로 곧 술과 요리가 날라왔다. 묘대야가 술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동생과 오랜 만에 한 자리에 앉아보는군."
미립이 대답 대신 미소를 보였다. 두 사람의 나이는 사실 차이가 많아 형제라는 말이 어울리지가 않았다. 하지만 묘대야는 궁궐 속에 오래 거처하면서 근심걱정 없는 나날들을 보낸 사람이라 겉보기에 조금도 늙지가 않았다. 비록 몸이 좀 불기는 했지만 아직도 용모가 우아하고 젊어보이기까지 했다.
미립은 반면에 단정하고 수려한 선비 같았다. 그래서 그들이 올라오자 시중을 드는 계집애들이 자꾸 미립에게 눈길을 주기도 했었다.
미립도 술잔을 들었다.
"시귀를 짓지 않고서야 어디 낙서거에 왔다고 할 수 있겠는지요. 형님께서 한수 지어보시는 게."
그러자 가까이 있던 계집이 얼른 웃음을 머금으며 지필묵을 받쳐들고 왔다. 그 계집은 옷소매를 걷고는 먹을 갈았다. 그러면서 자꾸 미립을 훔쳐보는 것이었다.
이 낙사거에서 시를 짓는 일을 놓고 떠도는 말이 있었다. 새하얀 벽에다 장방형의 공간이 생기도록 금을 그어놓았다. 이 장방형 속에 글을 남기려면 은자를 좀 내야했다. 이 낙사0거는 풍류인사들이 모여드는 곳이라 때로는 당조(當朝)에서 가장 유명한 문인들도 가끔 찾아올 때도 있었다.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명부에 기록하는 것 말고도 이 벽에다 시와 이름을 함께 남기기도 했다.
미립이 제법 묵직한 은덩어리를 꺼냈는데 얼추 보아도 쉰냥짜리는 될 성싶었다. 미립이 그 은덩어리를 탁자 위에 놓으며 말했다.
"이것을 받게."
그러자 계집이 은덩어리를 집어 살펴보지도 않고 옷소매 속에 얼른 감추는 것이었다. 벽에 시를 써도 좋다는 뜻이었다.
묘대야는 왼손에 잔을 든 채로 오른손으로 붓을 집었다. 여유있는 자세로 벽 쪽으로 다가가는 묘대야는 속으로 말했다.
'동생이 내게 시를 지으라 했는데 실망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벽 앞에 선 묘대야는 계집이 내민 벼루에 붓을 담갔다 천천히 들고는 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제목은 "국화를 읊노라(*菊)"였다.
꽃송이 고개 숙이니
금빛 뿔용이 깃드는 듯
밝고 어두움이 모두
그대에게 달렸어라
빛과 색깔 취하지 않고
그대로도 절색이니
너의 집에 가지 말고
내 집으로 오소서
묘대야는 시를 다 지어놓고 웃음 띤 얼굴로 미립을 주시했다. 묘대야는 방금 전 지은 시에 대해 다시 한번 속으로 음미해 보았다. 바로 미립을 향해 쓴 자신의 마음이었다. 이 시를 미립이 읽고나면 자신의 진심을 알아차릴 거라 생각했다.
미립이 시를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훌륭해요. 참 멋진 시예요. 형님이 이처럼 글재간이 대단한 줄 정말 미처 몰랐는데요. 형님이 진작 이런 글재주를 보였더라면 장원급제하여 조종을 더욱 빛낼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예요."
"너무 추켜세우지 말게. 되는대로 뇌까린건데 어디 쓴 만한 구석이라도 있는가? 이 낙사거의 명사(名士)들께 웃음거리나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미립이 고개를 크게 저으며 말했다.
"겸손의 말씀이세요. 큰형님의 재질에 전 아주 탄복을 했어요."
그러나 시중을 드는 자 중 몇몇은 매우 마뜩찮은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까짓 시구를 가지고 저 야단이라니 하는 낯빛이었다. 사실 이곳에서는 아무나 돈만 내면 시를 지을수 있으니 그들의 눈에는 달리 비칠 수 없었다.
반면에 이름을 오래 남길 만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왼쪽 벽을 보면 대거사 구양수(歐陽修)가 국화를 읊은 부(賦)가 씌여져 있었다. 또한 문 옆에도 대학사 소식(蘇軾)이 남긴 주사(酒*)가 펼쳐져 있기도 했다. 비록 일시의 취흥에 의해 씌여진 것이긴 하지만 그 농후한 기백과 운치는 속인들이 따를 수 없는 경지의 것들이었다.
이번엔 묘대야가 품속에서 은덩어리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자, 동생 차례요."
"저는 관두겠어요."
그러나 묘대야가 재차 권하자 미립은 어쩔 수가 없었다. 미립이 벽에 쓴 것은 한수의 소령(小令)이었다.
하도 권하기에 사양타 못해 나섰노라
동쪽 기슭 낙사거에서
술김에 부(賦)를 지으려나 뜻대로 안되네
구양수가 이곳에서 시를 읊었고
소식이 이곳에서 문재를 떨치었거니
전인들의 그 재질에 어이 미치리
묘대야가 그것을 보고는 마음 속으로 감탄했다. 미립의 문재가 자기보다 월등히 높았던 것이다. 한수의 소령을 짓는데도 이처럼 사나이의 기백이 넘쳐흐르지 않는가. 자기는 날마다 식칼과 국자나 주무르다 보니 사나이의 기백이란 무뎌졌다는 것에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묘대야는 미립을 더욱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묘대야가 한껏 웃으며 말했다.
"동생, 내 쉰냥짜리 은자를 모처럼 값지게 썼네. 동생의 글을 보니 이 형은 아주 부끄럽기 짝이 없다오."
이들의 웃음과 행동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하나 있었는데 서생같은 차림의 인물이었다. 정확히 미립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미립의 재능에 관심을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립이 시선이 따가워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마침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미립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연형(年兄)께 인사드립니다."
연형이라 부른 것은 미립을 향해 존대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연형이라고 하면 같이 과거를 본 선비들 사이에서 진사가 된 상대를 향해 부르는 호칭이었다.
미립이 바삐 예를 갖추며 자신도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연형께도 인사를 드립니다."
자리에 앉은 서생차림의 사내가 잔을 들며 말했다.
"저는 연형을 오랫동안 지켜보았습니다. 연형께서는 이처럼 풍채가 좋으신데 필시 저보다는 선배일 듯싶군요. 제가 연형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어떠하신지요?"
"벌써 말문을 열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하며 미립도 점잖은 태도로 응수했다.
한편 묘대야의 기분은 그늘이 져 있었다. 마침 술도 어지간히 마셨고 시를 놓고 한껏 즐거운 시간을 가졌기에 그만 미립과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인물이 불쑥 끼어들어 속으로 은근히 화가 났던 것이다.
그러나 묘대야의 이런 심중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내는 미립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전 장성(章誠)이라 부르고 호는 자거(子居)라 하죠. 그리고 정도(定都)사람으로 삼방이갑(三榜二甲) 진사이기도 합니다. 연형께서는 어디서 오신 뉘신지 알고 싶습니다만."
불현 미립은 상대의 태도에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상대가 싱거운 사람으로 비쳐졌기 ㄸ문이었다. 그러면서 미립은 마지못해 응수를 해주었다.
"부끄럽습니다. 저는 향시에는 참가해보았으나 아직 문턱조차 넘어보지 못한 사람이니 부디 비웃지 마십시오."
그러자 장성이라 자칭한 사내가 느닷없이 탁자를 치며 화를 냈다.
"공정하지 못하군. 정말 불공평해! 이처럼 재기와 식견이 있는 인물이라면 장원급제라도 문제가 없는데."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묘대야가 차가운 시선을 그에게 던지며 말했다.
"그만 물러가시오!"
장성이 묘대야의 반응에 당황하며 미립을 바라보았다.
"이 연형께서는 지금 뭐라 하시는 건지요?"
묘대야가 다시 언성을 높였다.
"어서 물러가란 말이다!"
그런데 장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묘대야의 태도를 책망하려고 했다.
"이 동생은 이토록 얌전한데 저 연형께선......"
말끝을 얼버무리는 것이 묘대야를 업신 여기겠다는 뜻이었다. 고개마저 설레설레 흔들며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묘대야가 장성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정말 물러가지 안겠어!"
급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장성은 꼼짝없이 아가미를 잡혀 끌어올려진 잉어꼴이 되고 말았다. 또한 멱살을 잡힌 탓에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힘이 들어보였다. 겨우 묘대야의 억센 팔을 물리치고 입을 열었다.
"당신 이게 무슨 짓이야? 감히 사문(師門)을 욕보이다니?"
그러자 묘대야가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을 그에게 날렸다.
"어쿠!"
장성은 주먹을 맞고는 벽 쪽으로 나가떨어졌다. 묘대야가 미립의 손을 이끌고는 술집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길을 막았다.
"네 놈은 도대체 어떤 놈이냐! 어떤 놈이기에 까닭없이 우리 선비를 때리느냐?"
"저 놈을 관청에 일러바쳐! 일러바치라구!"
"누가 이 낙사거에까지 와서 행패를 부려!"
여기저기서 묘대야를 가로막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묘대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미립의 팔을 잡고는 술집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들은 계속 쫓아왔는데 그러나 선뜻 달겨드는 사람은 없었다.
묘대야가 돌아서며 말했다.
"동생, 우리집으로 가서 못다 한 얘기나 하지?"
미립이 난처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전 할 일이 있어 안되겠어요."
그러나 묘대야가 미립의 팔을 잡아끌었다.
"동생, 우린 아직 풀어야 할 이야기가 많은데 이대로 헤어지겠다는 건가?"
묘대야는 강제로 미립을 끌고는 객점으로 들어갔다.
객점에 자리를 잡은 묘대야는 미립의 눈을 응시했다. 그는 내심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털어놓지를 못하고 미립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묘대야의 눈에는 그동안 참아두었던 정이 잔뜩 어려 있는 듯했다.
그는 원래 여인들과 정을 나누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 그가 처음 미립을 마음에 새긴 것은 미립을 사내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미립이 자기와 함께 철장방이란 범굴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들어가 한 일에 대해 매우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미립이 사내가 아니라서 그는 실망을 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후에 홍칠에게 쫓겨나는 등 미립을 석연치 않게 생각하는 점도 있었다.
"동생, 동생은 아직 날 미워하고 있는 게 아니오?"
그러자 미립이 웃었다.
"왜 제가 당신을 미워하겠어요."
묘대야는 미립의 반응에 어리둥절해졌다. 미립이 자기를 미워하지 않고 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지난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있는 미립에게서 또 한번 야릇한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묘대야는 차츰 미립의 태도에 기분이 흡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미립 동생, 그때 일에 대해 내가 사과를 하지."
그러면서 미립에게 예까지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미립이 제지했다. 미립이 새하얀 손을 들어 자신을 말리자 묘대야는 잠시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 손은 아주 섬약해보였다. 미립이 손으로 묘대야의 입을 막으면서 말했다.
"형님, 당신의 다섯 형제들은 무엇 때문에 황궁을 떠났나요? 무슨 일이라도 벌이려는 건가요?"
갑자기 화제를 돌린 미립에게서 묘대야는 낯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왜 미립이 그런 걸 물어오는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런 건 묻지?"
"알고 싶어요."
"음...... 황제 앞에서 아무리 오래 일을 해봤자 음식을 만드는 사소한 일밖에 더 하겠나? 아무런 보람도 재미도 없었어. 우리 다섯 형제는 그일을 그만두고 밖에서 더 즐거운 일을 하고 싶었지."
하며 묘대야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전번에 널 그렇게 대했지만 넌 결코 나를 미워하지 않고 있구나. 그걸 보면 너 역시 내게 감정을 두고 있는 게 분명해. 사실이 그렇다면 내가 널 속일 필요야 없겠지.'
묘대야가 손을 뻗어 미립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동생, 난 동생을 좋아해. 난 조금도 동생을 속이고 싶지는 않아. 내 진심을 어느 때이든 동생에게 말해줄 수 있어."
묘대야의 얼굴 바로 앞에서 미립이 갑자기 호 하고 낮은 숨을 내쉬었다. 그 바람에 묘대야는 혼백이 흩어질 듯 정신이 몽롱하고 온몸이 나른해져왔다.
"동생, 우리 이 침상에 누워 밤을 밝혀 밀린 얘기를 나누지."
미립이 곧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묘대야는 흥분되었다. 옷을 벗은 미립이 침상으로 오르더니 곧 이불 속으로 몸을 감췄다. 그러면서 묘대야에게로 뜨거운 눈길을 보냈다. 흥분을 이기지 못한 묘대야가 허겁지겁 옷을 벗고는 미립 옆으로 가 앉았다. 미립을 끌어안으려는데 갑자기 미립이 이불 속에 넣었던 한손을 꺼냈다. 그 손은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었다.
"형님, 내 손에 무엇이 있는가 보시겠어요?"
그러자 묘대야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게 뭐지? 그게 아무리 귀하고 희한한 물건이라도 동생만큼이나 하겠나."
하며 다시 미립을 안으려고 했다. 미립이 묘대야를 가볍게 밀어냈다. 묘대야의 눈에는 미립의 아름다움만이 들어차 있는 듯했다. 아름다운 미색을 갖춘 여인이 더군다나 귀공자 차림을 하고 있어 더욱 묘하게 끌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미립은 자꾸만 엉뚱하게도 자기 손에 들린 것을 보라고 할 뿐이었다. 미립의 부드러운 살결만을 생각하고 있는 묘대야로서는 안달이 날 판국이었다. 그녀의 손에 황금이 들어있다고 해도 지금으로서는 거들떠보고 싶지 않았다.
미립이 묘대야의 심기를 엿보았는지 묘하게 웃으며 입술을 놀렸다.
"당신이 관심이 없다 해도 전 보여드려야 하겠어요."
묘대야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럼 어서 보자고. 도대체 무엇인가 그래?"
미립이 천천히 손을 폈다. 그 안에는 새빨간 옥석으로 된 교룡(*龍)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묘대야가 아연실색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 이 금용을 어디서 얻었지?"
이것은 원래 쌍으로 되어있는 옥벽(玉壁) 중 하나였다. 하나는 황제가 지니고 있는 신물(信物)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의 수중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존재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묘대야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놀라움을 금하질 못했다. 묘대야의 얼굴빛이 갑자기 이끼라도 덮은 듯 파르스름하게 변해갔다. 그는 천천히 눈을 돌려 앞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묘대야는 불현 자신의 가슴을 옥죄는 무언가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미립이 요사스럽게 웃어댔다.
"호호호!"
"동, 동생은 아니, 당신의 정체는?"
미립이 갑자기 웃음을 거두더니 두개골이라도 뚫을 듯한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시를 지으라고 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호호호, 그 시 속에 숨은 뜻을 당신은 결국 찾아내지 못했군."
묘대야는 사태가 범상스럽지 못함을 깨닫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기 의복을 황급히 찾아 입고는 옆눈으로 미립을 살폈다. 그는 똑바로 미립을 쳐다보지 못했다. 머리속은 온통 흙탕물로 소용돌이 치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 흙탕물 한가운데에 자신이 몸부림을 치며 빠져있는 것을 순간 목격했다.
의복을 갖춘 묘대야가 미립을 향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미립의 웃음소리가 다시금 가슴을 후벼파듯 들려왔다.
"호호호, 형님! 갑자기 왜 이러시나요?"
묘대야가 황망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소인을 제발 살려주시오. 어떤 분부라도 목숨을 걸고 거행할테니 제발...... 우리 다섯 요리사는 천만번 죽더라도 따르리다."
미립이 팔짱을 끼며 조용히 물었다.
"형님, 이 옥벽을 기억한다면 황제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도 아시겠죠?"
묘대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얼른 대답했다.
"알고 말고요. 황제께서는 '짐이 눈앞에 있는 듯' 처신하라고 하시었소."
"호호호, 맞아요. 황제께서 당신에게 날 보거든 황제를 만난 것처럼 대하라고 하셨다지요?"
미립이 이렇게 말하자 묘대야는 더욱 몸둘바를 몰라 쩔쩔맸다. 온몸을 북풍한설에 잔가지 떨리듯 벌벌 흔들어대고 있는 묘대야가 고개를 깊숙히 숙였다.
"속하(屬下)는 낭낭(娘娘)께서 여기 계신 걸 몰랐소이다. 다만 낭낭께 용서를 빌 뿐이옵니다."
방금 전 옷을 벗는 미립의 자태를 감상하던 자신이 생각났다. 그런데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그때의 여인은 보이지 않았다. 품속에 안길듯 말듯 매끄러운 웃음을 피우며 넘실대던 아리따운 여인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또한 자기와 함께 낙거사에서 시를 지으며 유쾌한 웃음을 만들던 여인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오만해진 표정을 지으며 미립이 묘대야를 주시했다.
"황제께서 너희들을 출궁시키면서 분부를 내리셨을 게다. 급한 일이 생기면 내가 너희들을 찾아갈 거라고 말이다."
"그렇습니다."
"묘대야, 너희들 다섯 사람이 다시 황궁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어떠하냐? 다시 황제의 시중을 들 마음이 있는가?"
미립이 묻자 묘대야가 대답했다.
"낭낭께서는 소인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계실 줄 압니다. 우리 다섯 형제는 모두 하루속히 황궁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하고 있소이다. 밖에서 빈들거려야 무슨 진전이 있겠습니까? 낭낭께서 황제에게 저희 다섯 사람을 다시 천거해주신다면......"
미립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여부가 있겠느냐. 하지만 너희들 다섯이 어떻게 처신을 하는가에 달려있다."
"낭낭의 분부대로 하오리다!"
"너희들 다섯사람은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다. 너희들은 이제 한가지 일을 해야하겠다."
미립은 자세를 바꿔 의논을 하자는 투로 물었지만 묘대야는 결코 그런 뜻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오로지 자신은 목숨을 걸고 낭낭의 명령을 수행해야할 뿐이라 여겼다.
"낭낭께서 어떤 분부를 내리신다 해도 저희 다섯 형제는 충심을 다해 받들겠소이다."
묘대야의 말에 흡족해진 미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좋다. 너희들은 앞으로 많은 일을 해야한다. 우선 나에게 두가지의 일을 해줘야 하느니라. 그 하나는 미운산의 개방총부로 가서 밀실에 있는 홍칠과 두 남매의 시체를 거두어 내게 가져오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미립이 한층 누그러뜨린 목소리로 말했다.
"홍칠은 이제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너희들 형제는 그 시체를 가져다 내게 보이기만 하면 된다. 또 계집이 하나 있는데 넌 그 년이 누구인지 알겠느냐?"
"모르옵니다."
"그년이 바로 미립이다."
"예?"
묘대야는 너무 놀라 머리를 바닥에 찧을 뻔했다.
"그년이 진짜 미립이란 말이다."
마치 악마를 대하는 기분이었다. 묘대야는 공포에 절여진 눈길로 미립을 힐끔 훔쳐보았다. 이 여인이 바로 황궁에서 나온 황제의 심복이란 것을 묘대야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황궁에서 깊은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이 여인에게 잘못 보이기라도 하면 큰 화근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분부를 듣고 난 묘대야는 그녀에게 공손히 예를 올린 다음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호호호, 잠깐 서시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다시 불러세우는 것이었다. 긴장에 눌린 묘대야는 몇걸음 그녀 앞으로 다가가 다시 허리를 숙였다.
"전 당신의 동생이 아닌가요?"
느닷없는 질문에 묘대야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에겐 못다 한 시간이 아직 남아있는 것 같은데, 어때요? 오늘은 그만 쉬고 내일 떠나는 것이."
묘대야는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대기만 했다.
"아니, 아닙니다."
절대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여인의 정체를 알아버렸는데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판단되었다. 그러나 여인은 다시 간드러진 웃음으로 묘대야의 목덜미를 콱 움켜잡았다.
"묘대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텐데요?"
더이상 물리칠 수 없는 일이 돼버리고 말았다. 여인의 말을 조금이라도 거역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묘대야로서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미립이 가슴까지 올리고 있던 ㅇ은 이불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다시 한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가 드러났다. 백옥같이 고운 살결 위로 묘대야의 뜨거운 시선이 날아가 꽂혔다. 묘대야가 천천히 그녀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 앞에 선 묘대야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그녀의 발끝에 입을 맞추면서 서서히 입술을 위로 움직였다.
"음......"
미립의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묘대야는 미립의 탄력있는 허벅지 쪽으로 입술을 옮기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형용할 수 없는 여인의 살냄새가 심장을 뛰게 했다.
미립이 천천히 뒤로 누웠다. 묘대야는 눈앞에 드러난 눈빛 살결과 봉긋한 앞가슴에 다시 한 번 흥분에 휩싸였다. 묘대야가 손을 뻗어 그녀의 젖무덤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 좋아!"
미립이 몸을 비틀며 촉촉하게 물기어린 신음을 다시 토했다.
다섯 요리사들은 개방의 총부에 당도하자 곧 신속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총부의 뜨락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질 않았다. 창문은 지나는 바람에 속절없이 몸을 내맡겼는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또한 문짝도 떨어져나가 을씨년스럽게만 보였다.
한차례 바람이 불자 그것들은 아주 처량하게 울기 시작했다. 더섯 형제들은 정원 안팎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발견해내지를 못했다.
더욱 안쪽으로 걸어들어가던 그들은 곧 걸음을 세웠다.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던 것이었다. 둘째가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큰형님, 여기를 좀 보십시오. 혹시 이곳에 암도(暗道)로 통하는 발판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리곤 그곳을 들어보이려고 했다. 이때 묘대야가 제지를 하며 말했다.
"덤비지 말게."
하며 묘대야가 손에 들고 있던 칼로 발판이 있음직한 곳을 힘껏 눌러보았다. 그러나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는 다시 국자로 그곳 주위를 여기저기 두드려보았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분명 석실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을텐데 좀체 눈에 뜨지를 않았다. 숨겨둔 그 길을 어서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 주위를 자세히 훑어보던 묘대야의 눈빛 갑자기 돌변했다. 벽 모서리가 조금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국자로 곧 그곳을 눌러보았다.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곧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벽 모서리로부터 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곤 출입구가 눈앞에 펼쳐졌다.
"바로 여기로군!"
다섯 형제들은 초를 켜들고 발판에 올랐다. 발판은 이들을 아래로 내려주었다. 곧 웅웅 하는 소리가 멎더니 바닥에 닿았다.
이들은 통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었다. 곧 석실을 발견한 이들은 모두 숨을 멈추었다. 석실 안에는 침상이 놓여져 있었는데 그러나 역시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홍칠공이 꼭 죽었다고 볼 수는 없지."
묘대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형제들에게 명령했다.
"이곳을 샅샅이 뒤져보세."
그들은 뒤쪽으로 가 식량을 쌓아두는 방 앞에 섰다. 누군가 그동안 식량을 덜어내 먹었다는 흔적을 발견한 묘대야가 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빨리 가서 홍칠이를 찾아야 하네. 그는 분명 죽지 않고 여기 어딘가에 있을테니, 어서!"
묘대야는 석실로 처음 들어설 때부터 그런 감을 잡아낼 수가 있었다. 비록 비어있는 침상이었지만 사람의 온기를 분명 느낄 수가 있었다.
묘대야의 예감이 적중했다. 그들은 곧 홍칠의 일행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다른 석실로 갔을 때였다. 묘대야가 걸음을 우뚝 세우고는 주위를 짧게 둘러보았다. 자신의 눈앞에 작게 놓여져 있는 것이 분명 홍칠이 틀림없었다.
'저 자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홍칠은 기공을 하고 있는지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가 곧 진짜 미립이란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묘대야는 숨을 멈추며 형제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좋겠냐는 눈빛이 자신에게로 일제히 쏠렸다. 묘대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홍칠! 누가 왔는지 몸을 돌려보아라!"
그러자 비로소 홍칠이 자세를 풀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엔 전혀 당혹함 따위는 배어있지를 않았다. 홍칠은 누군가 자신의 뒤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했다. 홍칠이 잡고 있던 미립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지난번엔 널 용서해주었는데 왜 또다시 찾아왔느냐?"
묘대야가 사소롭다는 듯 식칼을 들어보이며 소리쳤다.
"네 놈을 죽이려고 왔다!"
순간 그들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홍칠을 칠 자세를 갖추었다. 더섯 요리사들은 홍칠의 거동을 주시한 채 틈을 엿보기 시작했다.
쩔컹! 쩔컹!
묘대야가 손에 든 칼과 국자를 맞부딪치며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려고 했다. 미립과 잠깐 자리를 비워다가 달려온 미기가 얼른 홍칠의 뒤로 숨으며 몸을 떨었다. 홍칠이 손을 잡아주며 일단 안심시키려고 했다.
"홍칠아, 넌 오늘 우리들 손에 죽게 되어있다. 그렇게 시킨 사람이 있으니 날 원망말아라. 그리고 허튼수작은 더더욱 하지 말아라!"
홍칠이 한발을 굴려 석실 바닥을 쿵 하고 울리게 했다.
"너희 다섯놈이 날 죽이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런데 누군가 시켰다는 게 사실이더냐? 누구인지 어서 밝혀라?"
묘대야가 웃었다.
"하하, 죽는 마당에 알아서 무엇하겠냐? 네 놈은 평소 화를 부르고 다녔으니 널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느냐?"
다섯째가 앞으로 나설 듯 몸을 움찔거리며 외쳤다.
"홍칠아, 우선 네 놈이 달고 있는 살코기를 한 두근 얻어야겠다!"
하며 저울대를 들고는 순식간에 달겨들었다.
그는 비비 꼬아둔 저울대로는 홍칠의 가슴팍에 있는 대혈을 겨누고 있었다. 또한 사슬이 달린 갈쿠리로는 홍칠의 얼굴을 갈기려는 묘한 법수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그의 동작을 피하며 홍칠이 소리쳤다.
"너희 다섯놈 모두 덤벼랏!"
그러나 그중 둘째만이 홍칠의 무예를 걱정하여 앞으로 나섰다. 일단 공격을 성공하지 못한 다섯째가 더 큰 실수를 할까봐서였다. 그는 큰 쇠솔을 머리 위로 휘두르며 홍칠의 가슴을 노렸다.
피릭- 피릭-
무서운 소리를 내며 쇠솔이 석실 안을 휩쓸어댔다. 홍칠이 또다시 공격을 피하며 큰소리로 비웃었다.
묘대야는 화가 치밀어 불덩이가 튈 것 같은 눈을 부릅 떠 홍칠을 노려보았다.
"네 놈은 이번에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네 놈의 시체를 가져오라는 분부를 기필코 이행하고야 말겠다!"
묘대야가 다시 쩔컹 쩔컹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섰다. 홍칠은 재빨리 미립을 이끌고 한쪽으로 피했다. 이제 다섯 모두가 홍칠에게 덤벼들 기세였다. 그들의 공격은 사실 홍칠로서는 벅찼다. 계속 반격은 하지 않고 피하기만 하던 홍칠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몇합을 겨루자 그들이 차츰 우세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홍칠은 옆에 있는 미립과 미기 때문에 제대로 법수를 쓸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법수를 쓰게 되면 두 남매와 조금 떨어질 수도 있었는데 혹시 묘대야 형제에게 빈틈을 보이게 될까봐서였다.
그것을 모르는 다섯 형제들은 더욱 득의양양해서 제각기 들고 있는 무기들을 요란스럽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곧 홍칠이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홍칠아, 너희들은 이제 죽는 길밖엔 없다. 햇빛을 보려면 오로지 그 방법밖에는 없으니 명심하거라!"
하며 묘대야가 국자를 홍칠에게 휘둘렀다. 이번에도 홍칠은 피하기만 할 뿐 이렇다 할 공격을 날리지 않았다. 이를 본 묘대야가 다시 빈정댔다.
"왜 그동안 저 년과 그짓만을 일삼아 다리에 힘이 떨어졌느냐? 왜 고양이 만난 쥐처럼 슬슬 꽁무니만 빼느냐?"
홍칠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미립과 미기를 벽쪽으로 가만히 밀며 웃었다.
"하하, 네 놈이 과연 날 죽일 수 있겠느냐? 오히려 그 잘난 목을 내놓게 될텐니 각오해라. 네 놈의 목을 잘라 쥐에게 던져주마!"
"꿈같은 소리 집어치워라! 오늘은 바로 네 놈 뿐만 아니라 저 남매들까지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묘대야로서는 다른 방도가 생각나질 않았다. 분부에 따르면 시체를 곱게 들쳐업고 오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홍칠을 비롯한 남매는 멀쩡히 살아있었기에 결국 이들을 죽일 수밖에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 받아랏!"
묘대야가 다시 국자를 높이 쳐들고는 홍칠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나머지 형제들도 석실 바닥에 떨어진 먼지들을 일깨우며 득달같이 달겨들었다.
휙! 휙!
홍칠의 머리와 어깨 옆을 스치는 병장기들의 소리가 매서웠다. 홍칠은 여전히 그들의 공격을 피하며 미립 남매를 추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계속 피하기만 해서는 안되었다. 어서 이들을 물리치고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되었다.
홍칠이 미립 남매를 벽쪽으로 더욱 바싹 붙여놓고는 두손을 앞으로 힘껏 뻗었다. <항용유회>법수였다. 장을 뻗어 기를 뿌리자 엄청난 힘이 쏟아졌다. 우뢰와 같은 소리와 함께 홍칠의 장에서는 돌풍이 뿜어졌다.
"저 놈의 장은 역시 무섭구나!"
돌연 뒤로 물러선 다섯 형제들이 입을 모았다. 홍칠은 이제 안전한 거리를 확보했다고 생각하고는 조금 여유롭게 법수를 부리기 시작했다. 양손을 번갈아 뻗어 장을 날리며 그들을 향해 돌진해들어갔다.
"야압!"
그의 장법은 더욱 놀라운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석실에 갇혀있던 지난 보름 동안 남모르게 익혀두었었다. 그는 또한 스스로 새롭게 세가지의 장법을 더 연마해 "강용팔장"을 십일장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 강력한 힘을 내뿜고 있었다.
"아니, 정말 대단한 장법이군!"
묘대야는 입을 떠억 벌린 채 홍칠의 법수에 놀라고 말았다.
"어서 저 놈을 쳐라!"
묘대야가 다시 자기 형제들에게 소리쳤다. 세째가 뒤로 물러서던 동작을 반대로 틀며 나섰다.
"홍칠공, 나의 장을 받아라!"
그러나 그의 공격은 느릿한 거북이의 다리를 닮아있었다. 놀던 어린아이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럽고 약한 공격이었다. 다시 세째가 힘을 모아 홍칠에게 장을 날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순간 부드러운 기운을 헤치고 나온 한갈래의 기가 거침없이 홍칠을 향해 날아왔다. 눈앞이 일순 어두워지려는 찰나였다. 홍칠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향해 장을 뻗었다. "용전어야(龍戰於野)"라는 법수였다.
삼시간에 세째를 향해 돌풍이 몰아쳐갔다. 이때 둘째가 쇠솔을 홍칠을 향해 휘둘렀다.
"얍!"
홍칠이 둘째에게로 장을 날렸다.
"앗!"
쇠솔을 감아버린 홍칠의 돌풍이 둘째를 쓰러뜨렸다.
"다시 덤볐다가는 모두 저 꼴로 만들어놓겠다!"
홍칠이 소리치자 모두들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잡고는 다시 달겨들었다. 홍칠이 계속을 장으로 다섯 형제들의 공격을 막으면서 반격을 가했다. 잠시 다섯 형제들이 원을 그리듯 분산되어 있을 때였다. 불현 한쪽을 살피던 묘대야가 짧게 소리쳤다.
"다섯째, 어서 아이를 잡아!"
곧 미기가 그의 손에 덥썩 잡히고 말았다. 미처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 홍칠보다는 다섯째가 더 미기 쪽에 가깝게 있었기 ㄸ문이었다. 미기의 덜미를 한손으로 움켜쥔 채 다섯째가 으름장을 놓았다.
"네 놈이 순순히 포박을 받지 않으면 이 아인 죽은 목숨이다!"
홍칠이 주먹을 모아쥐며 말했다.
"그 애를 죽이기 전에 너희 다섯놈의 모가지가 먼저 잘려나갈 줄 알아라!"
이때 미기가 버둥대며 외쳤다.
"날 죽이겠으면 어서 죽여라. 난 무섭지 않다!"
모두들 의외였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조금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자기 동생이 위기에 몰리자 미립 역시도 강하게 마음을 다져먹은 듯했다. 미립이 다섯 형제들을 향해 매몰찬 목소리를 내질렀다.
"내 동생을 놓아주어라! 내가 너희들을 따라갈테니 죽이려거든 나를 죽여라!"
"오호라, 네 년을 먼저 죽여하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고맙구나. 네 년을 먼저 죽이고 그 다음에 저 아이를 없애야겠다. 그땐 홍칠이 너도 더이상 날뛰지는 못할 것이다."
묘대야가 기교만장한 얼굴을 길게 뽑으며 말했다. 모두들 그 말에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묘대야가 다시 말했다.
"셋째, 자네에게 저 처녀애를 줄테니 잘 봐두게. 자네와 과연 아귀가 들어맞을지 한번 살펴보라구. 자물통도 아귀가 들어맞는 열쇠가 있어야 열리는 법이니까. 흐흐흐."
그러자 셋째가 얼른 미립이 홍칠이 있는 쪽으로 가지 못하게 막고 나섰다. 그리곤 미립에게로 가까이 다가서며 음탕하게 웃었다.
"헤헤헤, 아가씨, 우리 형님 말씀 잘 들었지? 그런데 어쩌지 아귀가 맞는지 안맞는지는 일단 안아봐야 알텐데. 자, 내가 옷을 벗겨줄까?"
미립이 소리를 지르면서 얼른 장으로 세째를 향해 일격을 가했다. 미립의 무예는 결코 그보다 뒤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어렸을 때 한질(寒疾)을 앓은 탓에 기력이 약했다. 미립의 공격을 반사적으로 피한 세째가 다시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헤헤, 네 년이 벌써 앙탈을 부리는 것이더냐? 괜히 고생스럽게 힘을 낭비할 필요가 있겠느냐. 힘은 비축해두었다가 나를 위해 쓰도록 하거라."
미립은 그러나 공격을 멈추지 않고 계속 그를 향해 손을 날렸다. 그러면서 기력이 약한 탓에 그를 쓰러뜨리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했다. 세째는 미립이 곧 기진맥진 맥을 놓자 재빨리 목덜미를 잡아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홍칠은 미처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는 미립을 질질 끌고 가더니 덮쳐들어 옷을 벗겨내려 했다.
"악! 안돼!"
미립이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순간 그의 억센 손이 옷속으로 불쑥 쳐들어오는 바람에 미립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웅크렸다. 옷이 찢어지고 손톱에 긁혔는지 허옇게 드러낸 허리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다시 그가 미립을 껴안으려 할 때였다. 미립이 발로 그의 사타구니를 힘껏 차버렸다.
"욱!"
옆으로 나가떨어져 제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벌벌 기던 그가 다시 일어섰다. 그러더니 이번엔 미립의 숨통을 두 손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미립은 곧 죽을 듯 숨을 헉헉 몰아쉬며 몸부림을 쳤다.
"홍칠아. 네가 무릎을 꿇지 않으면 이 년은 황천길이다!"
그러자 미립이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는 상관말고 어서 제 도, 동생을 구해주세요."
세째가 더욱 손아귀에 힘을 주자 미립은 결사적으로 발을 굴렸다. 옆에 있던 다섯째가 거들었다.
"홍칠아, 네 놈이 계속 반항한다면 이들 남매의 목숨은 곧 꺼져버릴 것이다!"
"너희 다섯놈의 행실은 가히 비겁하기 짝이 없구나. 강호에 너희들의 이름이 남겨질까 두려울 따름이다."
묘대야가 홍칠 앞으로 걸어나와 눙치듯 타일렀다.
"홍칠아, 네가 그만 손을 뗀다면 우린 너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은 물론 저애들도 놓아주겠다."
그러자 먼저 묘대야의 간사함을 알아차린 미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호, 홍칠공, 저 놈이 뭐라고 해도 듣지 마세요."
"미립!"
그러나 홍칠은 그쪽으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쪽으로 달려가려면 우선 앞에 버티고 있는 묘대야를 물리쳐야만 했다.
"좋다. 과연 묘수인주 묘대야의 재간이 얼마나 되는 보자!"
"허허,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구나. 좋다 정 네 놈의 소원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묘대야가 갑자기 자세를 풀더니 미기가 있는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홍칠은 어리둥절해 묘대야의 행동만을 주시했다. 묘대야가 다가오자 미기가 소리쳤다.
"네 놈이 미워. 내게 손대지 말란 말이야!"
묘대야가 타이르듯 조용히 말했다.
"꼬마야, 내 말만 들으면 널 해치지 않을테니 걱정마. 자, 봐라. 이건 바로 칼이란 거다. 내가 이걸로 저기 쓰러져서 꼴딱꼴딱 숨넘어가는 소리를 하고 있는 네 누나의 가슴을 찌르고 와라."
"뭐야? 네 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미기는 벌버둥을 치며 묘대야에게로 발길질을 해댔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것은 홍칠도 마찬가지였다.
"네 이놈! 어서 이리와 내 장을 받아랏!"
그러자 묘대야가 음흉스럽게 웃었다.
"좋다. 네 놈이 원한다면 먼저 이 두 년놈을 죽여버리겠다!"
하며 묘대야가 칼을 쥔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곤 미기를 향해 내리치려고 했다.




제17장 게걸든 거지 홍칠공
"잠깐, 손을 멈추어라!"
홍칠이 소리를 질렀다. 그는 미립과 미기가 당장 죽게 된 것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미립 남매가 놈들에게 당하게 된다면 홍칠은 평생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홍칠은 미립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사랑하는 사람의 최후를 지켜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묘대야가 손을 멈추면서 날카롭게 홍칠을 노려보았다.
"흐흐, 무슨 할말이라도 있는가 보구나. 왜 마음이 바뀌기라도 했느냐?"
묘대야가 바로 아래에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미기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곤 다시 말을 이었다.
"넌 이 석실 안에서 꽤 오랫동안 갇혀있었겠지? 흐, 그렇다면 저 계집과는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텐데 이제는 소용이 없겠구나."
묘대야는 끝까지 악인의 모습을 벗으려고 하지 않았다. 묘대야는 원래 여인들에 대해 별다른 애착이 없었던 까닭에 미립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리 미립이 얌전하고 어여쁜 여인이라 해도 그는 추호의 동정심도 발휘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자신을 이곳에 보낸 그 가짜 미립이 그리울 따름이었다. 비록 같은 여자지만 대범하고 용기가 넘쳐흐르는 그 여인에게 더 마음이 끌리고 있는 처지였다.
홍칠이 말했다.
"미립과 미기를 놔주면 난 네가 시키는대로 하겠다."
아주 단호한 태도였다. 홍칠은 이미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가 돼있었다. 그런데 묘대야는 홍칠의 말을 무시하려했다. 그는 이 세사람을 모두 죽여 시체로 가져갈 마음 뿐이었다. 오직 바로 그 가짜 미립을 위해서였다.
이때 네째가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큰형님, 이 홍칠이와 남매들을 모두 산 채로 잡아갑시다. 말이 시체라고 했지 산 채로 가져가면 더 좋아할지 모르잖아요?"
"음, 하기야...... 저 놈이 말을 듣겠는가?"
그런데 이번엔 세째가 거들었다.
"안 듣고 배기나요? 틈을 봐서 저 놈의 혈도를 눌러놓든지 그래도 안되면 독약을 먹여서라도 끌고 가야지요."
동생들의 말을 잠시 살펴보던 묘대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도 좋겠구나!"
이제는 말을 듣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는 듯이 묘대야가 자신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홍칠아, 넌 내 말을 순순히 듣고 우리와 함께 가야겠다. 결국 너희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어때? 그곳에 가게 되면 너를 만나고자 하는 분이 계실 거다. 죽고 사는 건 하늘의 뜻에 달린 것이니 일단은 그곳에 가서 네 놈의 운명을 맡겨보는 게 어떠냐?"
"하늘의 뜻? 그렇다면 나를 보자는 사람이 하늘이란 말이더냐?"
"흐흐. 그렇지! 하늘과도 같은 분이시지."
홍칠은 더이상 말설일 수가 없었다. 일단은 묘대야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미립 남매의 목숨을 살려놓고 봐야했기 때문이었다.
"좋다. 네가 하라는 대로 하마."
자신의 태도를 밝힌 홍칠이 두 손을 아래로 내려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였다. 둘째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홍칠아. 네가 영웅답다는 것에 난 매우 감탄을 한다."
이렇게 말하고는 홍칠의 몸에 있는 대혈 몇개를 재빨리 눌렀다. 그리곤 다시 몸을 돌려 홍칠의 등 뒤에 있는 대추혈(大椎穴)도 눌렀다. 그러자 홍칠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아악!"
홍칠은 온몸이 쑤시고 가려워서 저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바닥에 몸을 굴리며 홍칠은 고통을 참아내느냐 안간힘을 썼다. 둘째가 팔짱을 끼며 웃었다.
"홍칠아, 네 놈이 이전에 우리 황궁에 기어들어와 원앙오진회(鴛鴦五珍膾)를 훔쳐먹은 뒤부터 우리 형제들은 네 놈과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네 놈은 가는 곳마다 우리 다섯 사람과 맞서지 않았느냐? 생각같아서는 당장 죽여버리고 싶지만 오늘은 먼저 쓴맛만을 보여주어 우리들의 실력을 알게 해주련다."
홍칠은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을 이로 악물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내가 속았구나. 묘대야 네 이놈! 넌 사람도 아니다. 죽이려면 죽일 것이지 왜 이다지도 사람을 못살게 구느냐?"
미립은 홍칠의 아픔을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곧 그에게로 달려가 도우려고 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왜들 이러세요?"
소용이 닿지 않는 말인 줄 알면서 미립은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는 없었다. 홍칠이 자기 때문에 그런 고초를 겪고 있다는 생각에 미립의 마음은 천갈래로 찢어지고 있었다.
홍칠은 온몸에 비지땀을 흘리며 바닥에서 나뒹굴었다. 바닥에 쌓인 먼지가 땀에 닿아 홍칠은 마치 오래된 시체처럼 썩어들어간 몰골을 했다. 묘대야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홍칠이야말로 진짜 거지라더니 그 말이 맞군. 하하하!"
그러더니 홍칠에게로 바싹 다가가 머리를 숙여 얼굴을 들이댔다.
"홍칠아, 천하의 사내들 중에서 난 너같은 놈을 가장 싫어하지. 사나이란 깨끗하고 말쑥하게 생겨먹어야 하거든. 일처리에 있어서도 언제나 점잖아야 하는 게지. 그래야 사람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거야. 그런데 네 놈처럼 고집만을 앞세운다면 어느 누가 좋아하겠어?"
묘대야는 또다시 가짜 미립의 얼굴을 가슴 가득 새겨두고 있었다. 사실 묘대야로서는 사실을 떠벌인 것이었다. 그는 사내답지 않은 사내와 여인답지 않은 여인을 좋아했으므로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니 홍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홍칠이 분노를 곱씹으며 묘대야의 빈정대는 눈빛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묘대야가 국자를 들어 홍칠을 내리쳤다.
"으......"
그러나 홍칠은 애써 신음을 삼키며 끝까지 굴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어깨쪽의 옷이 찢어지면서 살이 으깨져 피가 낭자하게 바닥을 적셨다.
"하하하!"
묘대야의 웃음소리가 지옥에서 타는 기름불 이글거리는 소리로 들려왔다. 둘째가 웃음을 받아치며 앞으로 나섰다.
"헤헤헤, 홍칠아. 네 옷차림을 봐서는 실로 거지라 하기는 좀 뭣하구나."
그동안 석실에 갇혀있으면서 거의 매일 미립이 옷을 빨아주었었다. 그가 입고 있던 누더기를 기워주고 정성스레 살펴 평소보다는 깔끔한 모습이었다. 조금 전 바닥에 뒹굴면서 묻은 먼지만 아니었다면 홍칠의 외모는 더욱 단정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둘째가 다시 입을 놀렸다.
"홍칠이 네 놈이 거지같지 않으니 아무래도 다시 거지꼴을 찾아주어야겠다."
둘째가 손에 들고 있던 쇠솔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더니 홍칠을 향해 쓸듯 휘두르는 것이었다. 쇠솔이 홍칠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면서 상처를 냈다. 그런데 묘대야의 국자에 맞아 터진 상처와는 다르게 이번엔 멍자국만 선명하게 드러날 뿐이었다. 겉으로 터진 것보다 안으로 멍든 것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세째가 말했다.
"우리 다섯 사람은 너에게 각별한 정을 느끼고 있단다. 큰형과 둘째형이 너에게 관심을 두었는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네가 섭섭하게 생각하겠지?"
하며 달려와 홍칠의 속발(束髮)을 풀어 헤치더니 장을 날려 머리칼을 모두 잘라버렸다. 이것을 본 미립이 악을 썼다.
"네 놈들이 이처럼 악랄하게 굴다가는 죄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는 바람소리보다 못한 존재로 여길 뿐이었다. 그들의 그악스러움에 미립은 눈물조차 말라버린 채 심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들의 무자비한 공격은 그것으로 끝나지를 않았다. 이어서 네째와 더섯째가 번갈아가며 홍칠의 몸에 상처를 남겼다. 특히 다섯째의 저울추 공격은 홍칠을 위기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홍칠은 그자가 휘두른 저울추가 이마로 날아오는 것을 알고는 얼른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사슬이 목에 감기면서 조여들기 시작했다. 홍칠은 잠시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홍칠공!"
미립이 그에게로 달려왔으나 소용이 없었다. 홍칠은 정신을 잃은 채 아무런 신음소리조차 내뱉지를 못했다.
철장방의 임안에도 아주 은밀한 거처가 있었다. 그것이 수화은포(*花銀鋪)였는데 이 상점에서 파는 공예품들은 아주 정교하여 널리 이름이 나있기도 했다. 임안에는 손재주가 있는 여인들이 많아 장신구 가공업이 유행하였다. 하지만 이런 장신구 가공업을 이용하여 철장방이 정보탐지를 위한 기지로 상점을 세운 것을 아는 세상사람들은 별로 드물었다.
이날 땅거미가 거리를 덮을 무렵 상점들이 문을 닫으려 할 때 멀리서 웬 사람이 흔들흔들 걸오고 있었다. 그 사람의 행색을 본 은포의 주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사람은 머리에 어린아이들이 허리에 매는 속대(束袋)를 두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백개나 되는 수(壽)자와 복(福)자가 수놓아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자는 흰바탕에 붉은 색으로 되어있고 반면 수자는 붉은 바탕에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런 수대는 바로 요즘 임안성에서 유행처럼 풍미하고 있는 상
징물이었다. 말하자면 자손들이 복을 비는 의미에서 그같은 수대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미 나이가 마흔살은 족히 돼보였기에 은포의 주인은 의아하게 여겼던 것이다. 아이들이나 허리에 매는 아손복(兒孫福) 띠를 머리에 두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넓고도 긴 주머니를 뒷덜미에 매달고 있어 우습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곧 은포 앞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문을 닫으려는 주인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직 문을 닫지 마시오. 내가 물건을 살테니."
주인은 기이한 차림의 그에게 호기심도 있고 또 물건을 산다는 말에 친절하게 대꾸해주었다.
"어디서 오신 손님인지는 모르오나 무얼 사시려는지요?"
"머리 장식품 몇개를 사겠소."
주인은 별다른 생각없이 그를 데리고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곧 주인이 상점 안에 진열해 놓은 머리장식품들을 그 앞에 꺼내며 말했다.
"손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이곳 임안에선 여인들 속에 이런 노래가 불리워지고 있답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소?"
"느닷없이 노래라? 좋소, 어디 한번 내 귀라도 즐겁게 해보시오."
그러자 주인이 눈을 위로 치켜뜨며 노래를 불러주었다.
"은화(銀花)가 없이는 시집가지 않고 은화를 안보고는 꽃가마에 오르지도 않네...... 헤헤헤, 처녀들은 이 수화은포의 은장식품이 없이는 꽃가마도 마다한다는 말씀이죠."
하고 주인이 말하자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사내가 곧 머리장식품을 하나하나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인장, 꽃가마를 타기 싫다는데 억지로 은화를 보여주면서까지 타게 해서 무엇하지?"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지자 주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사내의 행실을 보아하니 상대하기 껄끄럽고 귀찮아질 것 같은 마음에서였다. 그래서 주인은 이 사내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층 웃는 얼굴로 바꾼 주인이 공손히 말했다.
"성씨를 어떻게 쓰시는지요?"
"그대는 상점주인이면서 왜 이토록 눈치가 둔하지? 내가 이 상점 문앞에 섰을 때 주인이 정중하게 물었더라면 난 벌써 알려주었을텐데 말이야. 헌데 이제야 물으니 난 대답하지 않겠네."
상점주인은 어리벙벙해졌다. 까다로운 손님이라고는 생각했지만 해도 너무 한다 싶었다.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구는 것이 어딘가 모자란 사람은 아닌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좋아요. 성함을 알려주기 싫으시다면 저도 더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주인은 사내를 어서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더이상 귀찮아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내가 주인보다 더 묘한 얼굴을 지으며 다그쳤다.
"이상하군. 그대는 이미 묻고 나서 또 묻지 않겠다고 말하니 내 정신이 오뉴월 개 혓바닥 빠지듯 쑥쑥 빠지겠소. 상점주인이라는 사람이 이처럼 솔직하지 못하고서야 어찌 물건을 마음놓고 살 수 있단 말이요?"
오히려 사내가 화를 내는 것을 보자 주인 역시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참 골치 아픈 상대를 만났다는 생각에 주인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주인이 요리조리 눈동자를 굴리며 묘수책을 생각하려 하자 사내가 눈치를 챈 듯 말했다.
"됐어. 됐으니 그만 궁리하쇼. 그대가 정 소원이라면 알려주지 않을 수 없지. 하지만 내가 이 상점에 들린 이유는 오로지 머리장식품을 사기 위해서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하자는 것은 아니지 않소? 그리고 내 이름을 말해봤자 물건을 흥정하는데 무슨 소용이 닿는단 말이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굴던 사내가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술술 조리있게 내뱉는 것이 아닌가. 상점주인은 벌어진 입으로 사내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사내가 잠시 상점 안을 둘러보더니 주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곤 자기 코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알고 싶나?"
"예? 아 예."
주인은 어떨결에 아리송한 대답을 흘리고 말았다. 그랬더니 사내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난 노완동이야. 노완동 주백통이라구. 그대는 이런 사람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봤나?"
상점주인이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그러자 노완동이 크게 웃었다.
"그럼 임자는 강호에 사는 혼백이 아니겠구먼. 하하하! 아니면 적어도 몸뚱아리는 강호에 두고 있지만 혼백은 저 먼 저승 가까운 문턱쯤에다 미리 갖다 두었는지도."
주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노완동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노완동이 다시 자기 코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임잔 정말 종남산 전진교 교주를 모른단 말인가? 대협 왕중양!"
왕중양이란 말에 그때서야 주인이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대협 왕중양이야 대단한 분이지요. 임안사람치고 그 분을 모른다면 말이나 되겠습니까!"
그러자 노완동이 올빼미처럼 부라린 두 눈으로 잡아먹을 듯 주인을 주시했다.
"그대가 왕중양을 안다면 마땅히 나도 알아모셔야 해. 난 왕중양의 사제이니까."
그런데 주인이 잔뜩 모았던 긴장을 풀면서 아니꼽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가만히 보아하니 노완동이란 인물은 점잖은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괜히 씨끄러워질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아무리 왕중양의 사제라도 버릇이 없는 놈이라면 일찌감치 상대하지 않는 것이 나을 거란 판단이었다. 주인은 어서 좋은 말로 사내를 돌려보내야겠다는 일념이었다.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물건 흥정이나 해볼까요. 당신은 부인께 은장신구를 선물할 마음은 없으신가요?"
그러자 태도가 갑자기 달라진 주인의 모습에서 은근히 부아가 일었는지 노완동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튼소리! 내게 무슨 여편네가 있다고 그래?"
"헤헤, 부인이 계시지 않는다면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은 있을 거 아닙니까요?"
주인이 계속 능글능글 구렁이 지붕 오르듯 나오자 노완동이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닥쳐!"
사실 주인의 말이 맞아떨어졌기 ㄸ문에 노완동은 정도 이상으로 화를 냈다. 속으로 간절히 좋아하고 있는 여인에게 선물을 할 마음이 가장 컸다. 사태가 이렇듯 변하자 노완동은 단순하게 처신하게 되었다. 주인이 자기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라 여겨버린 것이다.
노완동이 잠시 사리분별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취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참 어려운 일이야. 주먹질과 발길질을 배우기보다 어렵고 남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보다 힘이 들어. 그 여잔 황비(皇妃)인데 이런 장식구를 눈에 들어할까 모르겠어. 내가 선물하는 물건이 그녀에게 이미 있는 것이라면 어쩌지. 그래,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이 얼마든지 있을 거야."
주인이 노완동의 태도를 살피면서 허둥댔다. 잘못하다가는 물건을 팔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몰렸던 것이다.
"아닙니다요. 전혀 맞지 않는 말씀이지요."
그러자 노완동이 눈알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뭐가 맞지 않는다는 말이냐?"
"아무리 귀한 물건으로도 살 수 없는 게 바로 여인의 마음이고 사랑이지요. 만일 그 여인이 당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면 어떤 선물을 보내든지 마음에 들어할 겁니다."
노완동이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나즈막이 말했다.
"그래? 임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그 여인은 그 개떡같은 황제보다 날 더 좋아한다고 그랬거든."
주인은 노완동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임안부에서 황제의 여인인 황비를 꾀어내려는 흑심을 품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담이 꽤나 큰 작자인데 후에 탈이나 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중에 들통이 나서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 묻히면 그뿐이기 ㄸ문이었다.
"어서 물건을 고르시려면 그렇게 하시지요?"
주인은 사내의 반응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권했다.
그러나 노완동 주백통은 근본상 물건을 볼 줄 모르는 위인이라 몹시 힘에 부쳐했다. 한참동안 물건을 뒤적거리며 무작정 이것저것 쓸어담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그리곤 곧 한아름이나 되는 물건을 주인 앞으로 내놓았다.
주인이 속으로 감탄을 했다. 겉으로 보기엔 조금 모자란 듯 보였으나 그래도 주머니는 넉넉한 인물이라 생각되었다. 어쨌든 자기는 물건을 많이 팔아 돈만 챙기면 되었기에 주인은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 바로 이 주인이 철장방과 연관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노완동은 이곳 수화은포가 철장방의 거처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주인은 노완동이 은전을 수중에서 꺼내자 흑심을 품었다. 가뜩이나 은전이 모자라 쩔쩔매고 있던 차에 잘 된 일이라 여겼다. 오늘 사내를 죽이고 나머지 은전도 모두 가로챌 요량으로 주인은 틈을 엿보기로 했다.
주인이 자기가 내민 은전을 너무 오래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한 노완동이 물었다.
"임자가 삼백냥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 주려는데 왜 그런 표정을 짓지?"
그러자 주인이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헤헤헤, 손님께서 황비에게 선물로 드릴 장신구를 사신다는데 이대로 그냥 보낼 수는 없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주인이 간사한 웃음을 연신 말머리에 매달며 노완동을 부추겼다.
"헤헤, 제 말씀은 지금 고르신 것보다 더 훌륭한 물건이 이 상점 안에는 얼마든지 있다는 뜻입죠. 어떠세요, 더 구경하시지 않으렵니까?"
노완동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좋은 물건이 있다고? 그럼 여기에 진열해 놓은 물건 말고도 더 있다는 말인가?"
"그럼요. 아무에게나 좋은 물건을 내보이는 법은 아니니까요. 모름지기 물건엔 그 물건에 어울리는 임자가 따로 있는 법이지요."
"그말이 맞긴 한데...... 나 역시 좋은 물건이 있다면 함부로 남에게 보여주는 성격은 아니니까. 바로 이거지. 내 특별히 주인장에게만......"
하며 노완동이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주인에게로 내밀었다. 그것은 수정으로 된 구슬이었다. 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것이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그러나 하찮은 물건임을 금방 알아차린 주인이 히히 웃으며 말했다.
"보기엔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그건 어린아이들이나 갖고 놀 놀잇감에 불과하지요. 그게 그토록 대단하다는 말씀인가요?"
노완동이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그럼 임자가 말한 좋은 물건을 어서 내어보게나."
제대로 걸려들었다고 판단한 주인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런데 어쩌죠. 지금 이곳에서는 없고 저와 함께 뒷집으로 가셔야하는데......"
하며 주인이 노완동의 눈치를 살폈다.
"좋아. 기가 막힌 물건이 있다는데 그 정도의 수고를 마다하겠나?"
노완동은 쾌히 승낙을 했다. 그도 그럴것이 노완동의 머리속에는 온통 황비의 얼굴이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선물을 받고 좋아할 것을 생각하자 노완동은 금방이라도 천하를 얻은듯 가슴이 부풀어올랐던 것이다.
상점 뒤로 가보니 제법 큰 집이 한채 나왔다. 지붕도 꽤나 높았으며 전체적으로 웅장한 맛도 풍겨주는 그런 집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한 노완동이 물었다.
"주인장, 어째 이렇게 큰집에 문이 하나밖에는 없소? 그리고 창문 역시도 하나밖에는 보이지가 않는데."
주인이 노완동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차차 아시게 될 겁니다."
하며 잠시 자리를 비웠던 주인이 자그마한 함을 들고 왔다.
"이 안에 좋은 물건이 가득하니 마음대로 골라보시지요."
노완동은 주인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함을 유심히 살폈다. 그 함은 아주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노완동은 속으로 이곳 수화은포에는 정말 솜씨좋은 물건들이 많구나 하고 생각했다.
노완동이 손을 내밀어 함을 열려고 하자 주인이 만류했다.
"잠깐만!"
"왜 그러나?"
주인이 다시 눈을 가늘게 치켜뜨며 이유를 설명했다.
"이 함속에 든 물건은 단순히 은전 삼백냥으로 따질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요. 만일 그보다 더 후한 값을 치룰 수 없다면 아예 열어보지도 마시라는 뜻이지요."
노완동은 불현 화가 치밀었다. 주인의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은근히 자존심이 상한 노완동이 목에 힘줄을 툭툭 새기며 말했다.
"내게 은전이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말고 어서 함을 열어보게! 일단 구경을 해야 사든지 할게 아닌가?"
그러나 주인의 태도 역시 단호했다.
"죄송합니다만 은전을 먼저 보여주시지요. 그리고 참고삼아 말씀드리는 건데 이 함속에 들어있는 물건의 값은 천냥이올시다."
노완동이 한숨을 세게 뿜으며 주인을 노려보았다.
"있으니까 걱정말래두!"
"말은 누가 못합니까요?"
주인의 당당한 태도를 보자 노완동은 더욱 애가 탔다. 분명 좋은 물건이 있기에 저토록 자신있어하는 게 아닌가. 어서 물건을 사서 황비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가슴에서 화방수를 만들었다.
"좋습니다요. 손님 말이 옳아요. 아무리 귀한 양귀비의 앞가슴도 일단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 그 진가를 가름하는 법. 자, 그럼 함을 열겠습니다."
노완동이 침을 소리나게 삼키며 잔뜩 긴장을 했다. 주인이 함을 열자 그 안에서 옥비녀가 신비한 광채를 뽐내며 자태를 드러냈다. 둥그스름한 한쪽에는 역시 옥으로 된 봉황새가 달려있고 섬세한 조각솜씨가 엿보이는 물건이었다.
"오호!"
봉황생의 깃털 무늬까지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저절로 감탄의 말이 터져나왔다. 눈은 금강석으로 돼있고 몸엔 몇알의 눈부신 진주알과 이름 모를 보석까지 박혀있었다. 부리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역시 진주가 여러 알 물려있는 형상이었다.
노완동이 입을 다물 생각도 못한 채 계속 감탄사를 연발했다.
"좋아, 정말 좋아! 참으로 훌륭한 물건이로구나. 이 정도라면 천냥에다 내 목숨까지 얹어서라도 사겠네."
노완동은 곧 손을 천천히 내밀어 그 옥비녀를 잡았다. 바로 이때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눈앞으로 뿌우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앗!"
그 연기가 노완동의 눈을 덮자 순간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정신까지 몽롱해지는 것이었다.
"나쁜 놈! 감히 날 속이다니?!"
하고 노완동이 소리를 내지르며 함을 집어 주인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러자 주인이 다람쥐처럼 날쌘 동작에 몸을 얹어 옆으로 구르며 노완동의 공격을 피했다. 다시 몸을 일으킨 주인이 이번엔 노완동에게로 달겨들었다. 노완동은 화가 북받쳐 주먹으로 주인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그런데 주인 역시도 장으로 공격을 가해오는 것이었다.
"오라 이제야 네 놈의 정체를 알겠구나! 바로 네 놈은 철장방의 놈이렷다!"
이 즈음 천하의 무림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것이 바로 철장방이었다. 상관위(上官威)가 방주노릇을 할 때만 해도 선한 일을 행해 사람들의 입에도 좋게 오르고내렸었다. 그런데 지금의 철장방은 눈앞의 주인처럼 교활하고 악랄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주인이 철장방의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된 노완동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철장방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사람을 우습게 해치는 족속이란 점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놈을 보아도 그것은 증명되는 일이었다. 차츰 눈앞이 뿌우옇게 변해가는 노완동이 당황하며 외쳤다.
"망할 놈의 철장방 졸개야! 나의 장을 받아랏!"
노완동이 고함을 지르며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곧게 펴 그자의 어깨를 가격하였다. 그자는 노완동의 장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모양이었다. 여유만만하게 노완동의 공격을 피하려던 주인이 어깨를 움켜쥐고는 뒤로 날아갔다.
"꽈당!"
그자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노완동은 기세를 늦추지 않고 질풍같이 달려가 일격에 그자의 숨통을 끊어놓으려고 했다. 온갖 사악한 방법을 동원해 사람들을 해치는 무리를 어서 없애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자는 노완동이 질풍을 몰고 달려오는 것을 보자 황급히 몸을 옆으로 굴렸다. 노완동의 공격이 순간 빗나가버렸다. 그러나 그자는 노완동의 법수가 자기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주춤하고 있는 처지였다.
노완동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 빌어먹을 철장방놈아, 네 놈에게 재간이 있다면 어서 덤비거라. 치사한 짓꺼리로 철장방 망신이나 시키지 말고."
노완동이 욕설을 퍼붓자 그자가 비웃었다.
"노완동아, 네가 죽고 싶어 찾아왔으니 부디 날 원망말거라!"
"넌 도체 철장방에서 뭘 하는 개뼈다귀더냐? 네 놈이 누구이길래 날 해치려 드느냐? 어서 구천인이란 놈을 불러오너라. 내가 그와 상대해주겠다. 네 놈은 철장방의 졸개에 불과하니 내 명성을 더럽힐까 싸우고 싶지 않다."
그자가 거침없이 웃음을 퍼주으며 말했다.
"노완동아. 네 놈이 죽을 ㄸ가 되었는데도 아직 깨닫지를 못하는구나. 넌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로구나. 네 놈이 무슨 재간이 있다고 우리 방주영감과 대적하겠다고 하느냐. 나만 하더라도 네 놈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테니 어서 무릎을 꿇어라. 행여 고집을 부리다가 염라대왕과 장기두는 일을 자청하지 말고!"
득의양양하여 노완동을 비웃는 그자의 눈빛엔 아직 물러설 수 없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노완동은 후회가 들었다. 조심하지 않아 두 눈을 멀게 될지도 모를 위기 몰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같은 일을 중양형이 알게 되면 얼마나 꾸짖을 것인가. 노완동은 곧 자신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몰리면서도 왕중양에 대한 미안함에 고개 숙였다.
"구천인을 어서 불러오지 못하겠느냐? 내 당장 요절을 내어 순진한 농부들이 평생 짓는 터밭에 거름으로 뿌려주겠다!"
그러나 사실 구천인과는 자웅을 겨눌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구천인은 자꾸 찾아 무엇한단 말인가. 그를 만나기 전에 눈앞에 있는 자에게 어떤 굴욕을 당할지도 모르는 판국이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되면 수중에 있는 은전과 구슬마저 ㅃ앗기게 되는데 노완동은 더욱 곤혹스런 표정을 감출 길 없었다. 또한 아까 연기에 쏘인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려 더욱 고통스러웠다. 앞이 가물가물해지면서 겨우 윤곽만을 가름할 뿐이었다.
한편 운이 좋아 이자를 물리칠 수 있다 해도 문제는 남아있었다. 오히려 이자를 죽이지 말고 산 채로 잡아 해독제를 얻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었다. 그 해독제로 눈을 치료한 다음 더 큰 일을 위해 때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노완동이 꾀를 생각해 내어 그자에게 말했다.
"너에게 부탁이 있다."
"부탁? 왜 목을 칠 때 아프지 않게 살살 베어달라는 부탁이더냐?"
"나는 눈을 다쳐 너와 정당한 승부를 할 수가 없는 몸이다. 일단 내게 해독제를 달라. 그러면 댓가로 내게 있는 은전을 모두 주마."
그자의 눈빛이 약간 달라졌다.
"네 놈에게 아직 남아있는 은전이 있단 말이냐?"
순간 야릇한 느낌이 들어 노완동은 품속을 더듬어보았다.
"아니!"
자신의 품속에는 은전이 하나도 남아있지를 않았던 것이다.
"네 놈이 내 은전을 훔쳐갔구나? 솜씨가 대단한데!"
"헤헤헤, 이제야 알차리다니 너의 눈치는 형편없구나. 그래서 모두들 나를 쾌수(快手) 진(陳)이라 부르는 거다. 알고나 있느냐?"
"네 놈이 은전을 훔쳐갔지만 마지막으로 양심을 묻겠다. 해독제를 주면 용서를 하마."
그러나 통하지 않을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노완동은 그런 자신이 한심스럽게 여겨졌다.
"배짱만큼은 대협 왕중양의 뺨을 치고도 남는구나!"
노완동은 더욱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깨닫고는 조급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흐릿하게나마 보이던 그자의 윤곽이 더 가물가물하게 느껴졌다. 노완동이 정신을 집중하여 그자의 말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기를 모았다. 틈을 엿봐 여차하면 공격을 가할 계산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눈치채고 있는 그자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헤헤, 불쌍한 노완동아, 네 놈이 나를 잡겠다고? 그래서 해독제를 얻겠다고? 어림도 없지."
바로 이때였다. 노완동이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러나 이미 알아차린 그자는 한쪽으로 비켜난 채 비웃음을 던져왔다.
"넌 눈 먼 고양이인데 어림도 없지."
노완동이 다시 발을 구르며 이리저리 그자를 잡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매번 실패로 돌아갔다. 숨을 몰아쉬던 노완동은 순간 두 눈을 움켜쥐었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고통이었다. 가능하다면 두 눈을 모두 뽑아버렸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갑자기 두 눈에서 손을 뗀 노완동이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았다. 두 손을 양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전진교도처럼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자의 두 눈이 쥐에게 역습을 당한 고양이의 그것처럼 휘둥그레졌다. 이리저리 꽁지에 불똥이 떨어진 쥐처럼 자기를 잡으려고 허둥대던 노완동이 갑자기 가부좌로 앉자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노완동은 안은 채로 눈에 들어간 독기를 짜내기 위해 조식운동(調息運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매우 힘든 방법이기도 했다. 아무리 공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내력을 눈에까지 운행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완동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었다고 믿었다. 한편 한가지 숨겨놓은 계략이 있기는 했다.
노완동이 죽은 듯 앉아서 움직임을 멈추자 그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네 놈이 죽을 때가 가까워지니까 별의별 짓거리를 다하는구나."
하는 그자의 입김을 감지한 노완동이 때를 놓치지 않고 훌쩍 몸을 날렸다. 그리곤 곧바로 그자의 두 발을 움켜쥐었다. 그자가 발버둥을 치며 두손으로 바닥을 사정없이 긁어댔다. 노완동은 행여 신발을 벗고 놈이 빠져나갈까봐 손아귀에 힘을 주어 발목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이때 그자가 문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방주님!"
노완동이 얼른 그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자 놈이 공격을 가해왔다. 또 속고만 것이었다. 그 바람에 놈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노완동의 손엔 신발 한짝만 남게 되었다.
"어디로 내뺄 셈이더냐?"
소리는 질러대고 있었지만 노완동은 다시 방금전과 같은 기회는 맞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눈앞은 더욱 안개에 싸인 듯 흐릿하게 변해갔다. 그자의 숨소리가 다시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문밖으로 나가버린 모양이었다.
노완동은 바닥을 더듬으며 문을 찾기 위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겨우 문이 손끝에 닿자 노완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막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때 놈의 목소리가 들여오면서 그만 문을 밖에서 철커덕! 잠그는 소리가 났다.
"헤헤헤, 이제야 왜 이 집에 문이 하나밖에 없는 줄 알겠지?"
그리곤 잠잠해졌다. 노완동은 풀썩 그 자리에 꺼지고 말았다.
홍칠이 눈을 떠보니 주위의 풍경들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석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홍칠은 다시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그동안 석실에서 보낸 기간은 잊을 수 없는 꿈속과도 같은 시간들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그처럼 행복한 나날들을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바로 미립과의 그 수많은 시간들을 보냈다는 사실에 홍칠은 더욱 행복했었다.
미립! 갑자기 홍칠이 눈을 떴다. 그때서야 지금 자기가 어떤 위치에 놓여져 있는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미립과 미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홍칠은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미립과 미기는 보이지 않았다. 웬 여인의 침실같았는데 매우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들로 장식돼 있었다.
자기가 누워있던 침상을 돌아보던 홍칠은 그만 사색이 되고 말았다. 그 침상 위에 한 여인이 누워있었기 ㄸ문이었다. 그렇다면......? 자기가 이 여인과 오래 누워있었다는 사실 앞에서 홍칠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인이 미립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만......'
그러나 분명 미립은 아니었다. 홍칠은 허리를 숙여 여인 가까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굿이 눈을 감고 잠이 들어 있는 이 여인...... 어디선가 본 듯한 여인의 얼굴이었다.
"아니!"
곧 홍칠은 여인의 정체를 알아냈다. 바로 미방주의 신변에 머물고 있던 또다른 미립이었다.
홍칠이 황급히 침상에서 내려오려고 몸을 돌렸지만 마음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온몸의 맥들이 모두 상했는지 나른하여 생각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때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도망치려고 하나요?"
돌아보지 않아도 가짜 미립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홍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나를 어쩔 셈인가?"
그러자 미립이 손길을 뻗어왔다. 홍칠의 어깨를 천천히 쓰다듬자 홍칠이 급하게 뿌리쳤다. 미립이 요사스러운 웃음을 토했다.
"호호호! 홍칠공, 당신 역시 사내인데 어찌 이토록 뻣뻣한가요? 옆에 있는 이 여인의 실망이 크다는 걸 당신은 왜 모르시죠?"
홍칠이 자신을 수습하며 대꾸했다.
"하하, 그대의 목소리를 들어서는 조금도 실망할 것 같지가 않은데."
미립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육감적인 젖무덤이 훤히 드러났다. 홍칠이 얼른 시선을 돌리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홍칠공, 당신이 얼마든지 이곳을 나갈 수 있어요. 하지만 저 문을 나서자마자 후회하게 될 거예요. 아마 한평생 후회만을 벗으로 삼고 살아가게 될지도 몰라요."
"내가 무엇 때문에 그리 고달픈 후회를 한단 말인가?"
"솔직히 말하죠. 당신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진짜 미립은 죽게 돼요."
"뭐라고? 이 못된 것!"
"호호호, 제 말을 끝까지 들으셔야죠. 그리고 미립의 남동생의 목숨도 온전치는 못할 거예요."
"함부로 미립이란 이름을 부르지 마라!"
"호호, 미립은 예쁘지도 않은데 왜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는지 이유를 모르겠군요. 당신이 지금부터라도 나를 좋아하게 된다면......"
"당치도 않는 소리 집어치워라!"
"그렇게 되면 난 당신에게 좋은 선물을 드릴 수도 있는데......"
"흥!"
"난 당신을 개방의 방주로 삼을 생각이오."
"뭐라고!"
홍칠은 화가 치밀어 당장이라도 앞에 있는 요망한 여인을 요절내고 싶었다. 어서 목을 졸라 죽이고 미립과 미기의 생사를 확인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막 그녀에게로 몸을 돌려 손을 쓰려고 할 때였다.
"당신은 내게 '십일취(十日醉)'를 당했다는 걸 명심하세요. 이 십일동안 당신은 싫어도 내 말을 들어야 해요."
그러나 홍칠에게 그같은 말이 들릴 까닭이 없었다.
"각오해라!"
"호호호! 그러니 더욱 당신이 사랑스럽군요."
가짜 미립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오히려 웃음을 즐기려는 기색이었다.
"내가 보기엔 당신은 정말 사내다운 사람이예요. 당신은 나의 남편이 될 생각은 없나요? 그렇게 되면 난 당신에게 영원히 복종을 할 수 있어요."
홍칠이 그녀의 목을 졸랐다. 그러나 온힘을 다 주었는데도 소용이 닿지를 못했다. 손목으로 힘이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온몸은 이미 흐물흐물 마취를 당한 상태였다. 홍칠은 손을 부르르 떨며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호호호! 당신은 지금 절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죽이려고 하는 것이겠죠? 당신이 이럴수록 나는 더욱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손아귀에서 벗어난 그녀는 더욱 요망스런 눈빛을 흘리며 홍칠을 빈정댔다.
"누가 미운산 방주님을 그 꼴로 만들었는지 알만하다. 이 요사스런 계집아, 넌 죽어서도 결코 혼백만큼은 너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치를 떨며 분노하는 홍칠은 안타까운 가슴만 어루만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다시 방안을 울렸다.
"홍칠공, 당신이 나를 따르면 되는건데 무슨 고집이 이렇게 많나요. 당신이 그렇게만 마음을 먹는다면 천하는 곧 우리들 몫이라구요."
그녀의 손길이 다시 홍칠의 목을 감싸왔다. 홍칠은 애써 뿌리치려 했지만 더욱 손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홍칠공, 전 숱한 사내들을 겪어보았지만 당신처럼 내 영혼을 앗아가는 사내는 처음이예요."
그녀의 뱀 혀같은 손끝이 홍칠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었다. 홍칠은 굳어가는 몸을 뒤흔들면서 벗어나려고 했다.
"미운산이란 인물은 너무 점잖을 빼어 어디 여인의 환심이나 사겠어요. 또 그 소씨 거렁뱅이란 사람은 하루종일 히히덕거리기만 해서 여인들이 접근하지를 않으려고 해요. 그러나 당신은......"
그녀의 손길이 잘려나간 홍칠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러더니 차츰 홍칠의 목덜미를 타고 가슴 쪽으로 내려오려고 했다. 맥을 놓고 있는 홍칠은 제발 꿈이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홍칠이 몸을 틀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바로 자신의 젖꼭지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당신처럼 제 가슴을 뛰게 한 사내는 없었어요."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듯 홍칠의 가슴을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제멋대로 욕심을 채워나갔다. 홍칠은 눈을 돌려 문쪽을 응시했다. 어서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 가슴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오호, 당신은 지금 무슨 걱정을 하고 있나요? 문은 안에서 잠가두었으니 걱정마세요. 아무도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지 않을테니."
홍칠은 쓰러질듯 몸을 움찔거렸다. 그녀가 홍칠을 부축하여 자리에 눕혔다. 그리곤 베개로 홍칠의 머리를 적당하게 받쳐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신이 날 좋아하게 된다면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이제 거지노릇을 그만 두고 나의 품으로 들어와야 해요. 당신은 듣자하니 대식가이자 미식가라고 하던데 뭣 ㄸ문에 지금까지 궁핍한 생활을 이어왔나요. 자, 이젠 나를 믿고 행복의 길목으로 들어서면 돼요."
그녀가 홍칠의 바지를 벗겨냈다. 날카로운 그녀의 손톱 끝이 몸에 닿을 때마다 홍칠은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몸이 움직여주질 않는 듯했다. 의지만이 살아있을 뿐 몸은 단단한 형틀 속에 갇혀버린 듯 꼼짝을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몸을 쓸 수만 있다면 당장 강용팔장으로 요망한 계집의 심장을 도려내고 싶었다.
그녀가 이불을 덮어주고는 홍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은 미립과 석실 안에서 아주 신나는 쾌락을 누렸겠죠? 그러나 그 어린 계집이 과연 당신의 이 훌륭한 몸을 느끼기나 했을까요? 미운산보다 젊고 탄력있는 당신의 몸이 그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에게 닿았다는 생각을 하면......"
음탕한 눈길로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한마리의 독을 품은 뱀처럼 여겨졌다. 홍칠은 속으로 자신을 되짚어보았다.
'이 요사스런 여인이 미운산의 신변에 나타났던 것만 해도 교활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미운산을 해쳐 폐인으로 만들어놓지를 않았는가? 또한 개방의 장로들에게도 벌써 어떤 손길을 뻗쳤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돌풍을 맞은 구름처럼 뿔뿔히 흩어졌을지도...... 이 모두가 이 계집의 무서운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리고 이젠 내게도 어떤 음모의 손길을 뻗으려고 하지 않는가. 아, 내가 당하더라도 미립과 미기만을 놓아준다면......'
홍칠은 손끝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녀를 불렀다.
"그대는 미립을 어디에 가둬두었나?"
그러자 갑자기 그녀의 손끝이 눈앞에 보이더니 홍칠의 볼을 톡톡 치는 것이었다.
"당신은 지금도 그년을 그리워하고 있군요. 호호, 걱정말아요. 그년은 무사하니까."
그러나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녀의 행실로 봐서는 벌써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당신이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할 수 없군요."
볼을 톡톡 두드리던 그녀의 손이 다시 홍칠의 목덜미를 쓸어안았다. 그리곤 머리를 위로 쓰다듬던 그녀가 말했다.
"그 다섯 요리사들이 당신에게 너무 했군요. 이 멋진 머리칼을 자르다니. 호호호, 정말 거지같군요."
하면서 그녀의 입술이 뜨겁게 홍칠의 목덜미로 내리꽂혔다. 홍칠은 속으로만 자신을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분노로 떨었다. 그녀의 입술이 차츰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이때 그녀가 동작을 멈추며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그러자 방문이 열리면서 여종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예쁘장하게 생긴 두 명의 여종은 그녀의 분부를 기다리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는 예를 올렸다.
"가서 그 두사람을 데리고 오너라!"
"예."
밖으로 나간 여종들이 잠시후 안으로 다시 들어왔는데 이번엔 빈손이 아니었다. 작은 수레 두대를 각각 밀고 들어왔다. 누운 채로 눈을 돌려 그것을 확인한 홍칠은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수레 위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앞의 수레에는 미립이 그리고 뒤에 수레에는 미기......
그 두사람 역시 홍칠이 하고 있는 옷차림과 그 옆에 나란히 누워있는 그녀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보란듯이 말했다.
"미립아, 이 홍칠공을 잘 보거라. 이 분이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나와 이 침상에 누워 있는 홍칠공의 얼굴엔 기쁨이 가득 넘쳐나고 있지 않느냐?"
미립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홍칠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미립은 홍칠에게 뭐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홍칠은 미립에게서 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전에 보았던 미립은 생기를 잃지 않는 여인이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미립......"
홍칠이 입을 열어 사실을 밝히려고 하자 그녀가 재빨리 그의 정수리에 있는 아혈(啞穴)을 눌렀다.
"아!"
홍칠은 낮은 신음을 문 채 곧 굳어지고 말았다. 이젠 목소리조차 마음대로 내지 못하게 된 형편이었다. 그녀가 속삭이듯 홍칠의 귀에 대고 뜨거운 입김을 불었다.
"홍칠공, 저 두 남매를 잘 보기 바래요. 저 남매에게도 십일취를 썼거든요. 그런데 너무 지나치게 쓰는 바람에 저 모양으로 변하고 말지 뭐예요."
그때서야 홍칠은 미립과 미기가 자신보다 더 무기력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가 향수내를 물씬 풍기며 다시 홍칠에게로 몸을 가까이 밀착시켰다. 홍칠을 끌어안고는 그녀가 속내에서부터 솟아나는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
"으음!"
마치 미립의 귀에 오래 새겨둘 듯 그녀는 아주 음탕한 표정까지 덧붙이며 홍칠을 안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미립의 심정은 떨어져나갈 듯 아파왔다. 이미 미립의 가슴엔 홍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홍칠이 변해버렸을까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그러면서 미립은 혹시 그녀가 자기에게 한 것처럼 홍칠에게도 손을 쓴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원래 무예로 단련된 몸이고 누구보다 강한 정신력을 지닌 홍칠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미립은 쉽게 납득이
안갔다.
아버지 미운산에 이어 홍칠 역시도 이제 그녀의 손아귀에서 놓아날 운명을 맞게 되었구나 하는 참담한 생각에 미립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홍칠의 가슴은 미립보다 더한 아픔으로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몸에 이제는 입까지 굳어져 더욱 낭패스런 지경에 빠졌다.
그녀가 비웃듯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왜 당신은 사랑하는 여인이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아무 말이 없죠? 그 사랑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나 보죠?"
왜 사랑하는 미립을 위해 입을 벌려 말하고 싶지 않을 것인가. 홍칠은 더욱 간사스럽게 입을 놀리고 있는 그녀에게 저주의 화살을 가슴 속으로 쏘아댔다. 홍칠도 창백해진 볼로 두 줄기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미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으로 울고 있는 중이었다.
"너희 남매도 이젠 똑똑히 알아둬야 해. 여기에 있는 사내는 나의 영원한 동반자라구."
그러더니 여종에게 명령하는 것이었다.
"홍칠공이 몹시 시장할터이니 서둘러 먹을 것을 가져오너라!"
두 여종은 그녀의 명을 받자 총총히 밖으로 나갔다. 그녀들의 걸음걸이는 매우 가볍고 빨라 아무런 소리조차 남기질 않았다. 곧 여종들이 예의 걸음걸이를 앞세우며 들어와 음식을 그녀 앞에 대령했다.
여종이 들고온 작은 상 위에는 여덟개의 그릇이 놓여져 있었는데 구수한 음식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여덟개의 그릇은 색깔이 각기 달랐다. 한개는 붉은 그릇이었는데 편육이 보기 좋게 썰어져 담겨있었다. 그 편육은 종이장같이 매우 얇고 부드러워서 보기만 해도 군침이 입안 가득 넘쳐날 지경이었다. 다른 하나는 까만 그릇이었는데 아주 작은 과일들이 소복하게 담겨져 있었다. 콩같지도 않고 팥같지도 않은 아주 작은 과일이었다. 그밖의 나머지 그릇들도 적등황녹청
남자(赤橙黃綠靑藍紫)로 가지각색을 이루었다. 또한 나머지 한개는 운강색(雲絳色)을 띠고 있기도 했다.
그녀가 말했다.
"홍칠공, 이 음식들은 황궁의 명요리들인데 그중 유명한 것이 '전색여인(全色女人)'이죠. 그걸 또한 '적등황녹청남자'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어요. 이 마지막 운강색 요리를 여인으로 불러요. 홍칠공, 당신이 대식가이자 미식가란 말을 들었는데 어디 맛이나 보지 않겠어요?"
사실 홍칠공은 물론 미립과 미기도 몹시 배가 고픈 상태였다. 뱃가죽이 어느샌가 등짝에 달라붙어 숨을 쉴 때마다 허리가 휘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맛있는 음식을 보자 군침이 솟아나 금방이라도 이빨이 모두 흐물흐물 녹아버릴 듯한 기분이었다. 순간 미기의 뱃속에서 쪼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거의 동시에 나머지 미립과 홍칠의 배에서도 같은 소리가 이어졌다.
홍칠이 미립을 바라보았다. 미립은 음식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이 자유의 몸이라면 저 사랑하는 미립에게 음식을 먹여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텐데...... 홍칠은 속으로 그런 바램만 부여잡았다. 그러나 한편 미립이 자신을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만약 여기에서 벗어나 다시 미립과 만나게 된다 해도 어쩌면 어려워질지 모른다는 염려였다. 오해를 풀지 못한 미립이 영영 자신을
떠나버린다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미기가 실성을 한 사람처럼 음식을 바라보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그녀가 말했다.
"불쌍하구나. 이처럼 어린애를 굶기다니."
그러더니 여종에게 말했다.
"저 애한테 음식을 주어라."
두 여종 중 한 여인이 상을 들어 미기 앞으로 내밀자 다른 여인이 상아로 만든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편육을 집은 여인이 곧 미기의 입 가까이로 들이댔다. 미기는 허겁지겁 그것을 받아 몇번 씹지도 않고는 꿀꺽 삼켜버렸다. 순간 홍칠은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다. 어린 미기가 가엾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에그, 불쌍도 하지. 다른 음식들도 먹여라."
그녀가 다시 명령했다. 이번엔 자그마한 과일이 미기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미기는 과자처럼 그것을 아작아작 씹어먹었다.
이윽고 여종들은 여덟가지 요리를 골고루 미기에게 먹여주었다. 홍칠은 속으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덟가지 요리를 한입씩 맛을 본 미기는 그러나 양에 차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 애는 더 먹고 싶어서 간절한 눈빛을 여종에게로 보냈다. 상 위에 있는 요리를 모두 먹어치운다 해도 미기의 뱃가죽을 흔들어놓고 있는 시장기는 가셔질 것 같지가 않았다. 여종이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안돼. 어린애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체한다. 맛있는 음식일수록 줄여 먹으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그녀가 어울리지 않게 미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여기에 있는 여덟가지 요리들은 천하 제일의 음식들이다. 한입씩 맛을 본 것만으로도 복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미기는 더욱 간절한 눈망울을 요리조리 굴리며 그녀를 주시했다. 그녀가 미립을 바라보았다.
"너도 미립이라 부르고 나 역시 미립이라 부른다. 너도 홍칠공을 좋아하지만 나 또한 좋아하고 있다. 그러나 너와 나는 엄연히 달라야 한다. 나는 곧 홍칠공과 결혼을 할 몸이다. 그런데 너와 나의 호칭이 같아서야 되겠느냐?"
그녀의 말에 미립은 더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마도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표정처럼 비쳐 홍칠은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말했다.
"미립에게도 음식을 먹여라."
여종이 미기에게 했던 것처럼 상을 받쳐들고는 미립에게로 다가왔다. 미립이 눈을 감아버렸다. 죽어도 입을 벌릴 수 없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그녀가 가소롭다는 듯 웃어댔다.
"호호호! 미립아, 괜한 고집을 피우는구나. 조금만 먹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테니 어서 입을 벌리도록 하거라."
가증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치 미립을 자신의 친자매나 되는 듯 걱정의 말을 내비친 그녀는 다시 홍칠의 품에 기대었다. 홍칠은 속으로 그녀의 머리를 박살내고 사지를 북북 찢어버리는 상상을 했다.
여종들이 요리를 미립에게 먹이려 했지만 어려웠다. 미립은 입을 꾹 다문 채 요지부동이었다.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미기의 어린 눈동자만 빛을 낼 뿐이었다. 여종이 갑자기 젓가락에 걸려있는 편육 한조각을 미기에게 내밀자 미기가 입을 크게 벌려 덥썩 받아먹었다.
그녀가 더욱 안타깝다는 얼굴을 지었다.
"아이가 정말로 배를 채우지 못한 모양이구나. 어서 좀더 먹여주거라."
그녀의 명령에 따라 다시 미기의 입으로 여덟가지의 요리들이 골고루 들어갔다.
잠시후 다시 그녀가 제동을 걸었다.
"이젠 됐어. 그만하면 더는 배가 고프지 않을 거야. 아이를 데려가 푹 쉬게 하여라. 여긴 어린아이가 있을 만한 곳이 못되니까."
여종에 의해 미기가 타고 있는 수레가 밖으로 나갔다. 방안에는 홍칠과 미립 그리고 그녀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들에게 알려주지. 미운산을 해친 범인은 바로 나다."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홍칠은 놀라움에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슬픔과 분노가 북받쳐오르는 것은 미립도 마찬가지였다.
"당신들 개방의 몇몇 장로도 내가 죽였지. 그리고 미립의 목숨도 이제 곧 꺼져버릴 것이다. 홍칠공이 너를 좋아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겠지."
미립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홍칠은 외치고 싶었다. 아직도 미립을 사랑하고 있다고. 아니 죽을 때까지 오직 미립이란 여인만을 사랑할 거라고. 그러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젖가슴을 훤히 드러낸 그녀가 천천히 옷을 걸쳐입었다. 그러나 속이 들여다 보이는 엷은 천이라 알몸이나 마찬가지 결과였다. 그녀가 상을 들고는 홍칠에게 다가갔다.
"홍칠공, 미립이 먹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도 거부할 생각인가요? 아니예요. 음식을 드시지 않고서야 어찌 나를 안아줄 힘이 있겠어요?"
하며 그녀가 젓가락으로 요리를 집어 홍칠의 입으로 가져갔다.
홍칠은 조금 다르게 처신할 생각이었다. 지금 자신의 몸은 극도로 쇠약하고 지친 상태였다. 미록 간사한 계집이 집어주는 음식이지만 훗날을 기약하는 뜻에서 받아먹기로 마음을 돌렸던 것이다.
홍칠이 가만히 입을 벌려 편육을 받아삼켰다. 무슨 고기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맛이 썩 나쁘지가 않았다. 조금 색깔이 붉은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솔직히 맛은 일품에 가까웠다.
그녀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홍칠공, 당신은 미식가이니 여기에 있는 모든 요리가 다 마음에 들 거예요."
곧 그녀는 골고루 홍칠의 입에 넣어주었다. 일단 마음을 다져먹은 홍칠은 자존심 따위는 팽개쳐둔 채 그녀가 집어주는 요리를 마다않고 받아먹었다. 그러면서 자꾸만 혀끝에서 감도는 요리의 기가 막힌 맛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홍칠은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쾌락 중 하나가 바로 음식을 먹는 것이라 믿고 있었다. 음식을 중히 여기는 것 역시 대장부가 취해야 할 하나의 마음가짐이라 보았던 것이다. 비록 누더기를 걸치고 한데잠을 자는 처지지만 음식만은 자기 혀끝에 감도는 것을 원해야 하는 게 홍칠의 생각이기도 했다.
어느새 일곱개의 그릇에 담겨진 요리를 모두 맛본 홍칠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의외로 나머지 한개의 그릇 앞에서만 얼른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약간 맛을 본 홍칠은 곧 눈을 감고는 가만히 음미했다. 최고의 별미였기 때문에 선뜻 집어삼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이유를 물었다.
"홍칠공. 왜 그러시죠?"
대답이 없자 그녀가 오무렸던 양미간을 펼치며 홍칠에게로 다가와 슬며시 혈도를 눌렀다. 아혈이 다시 열린 홍칠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여기에 담겨있는 고기는 어느 짐승의 것인가?"
"당신이 그렇게 물어올 줄 알았어요. 이 고기는 엷게 발라낸 토끼의 입술이랍니다. 토끼의 입술을 발라낸 다음 찢어놓으면 말린 껍질처럼 되지요. 그것을 다시 참기름에 볶았다가 며칠 후 다시 기름을 친 다음 버무린다고 다섯 요리사 형제들에게 들었어요. 그런데 한가지 칼쓰는 솜씨가 좋아야 한다고 했어요. 토끼 입술을 세로로 다섯 조각이 나도록 내어야 하니까요. 그 정도의 칼솜씨를 가진 사람이라면 무림에 가서도 칼을 잘 쓰는 호수(好手)로 대접받을 수가 있다고
했어요. 그 정도의 솜씨를 부릴 수 있는 실력을 익힌다면 무림에서 최고수가 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들을 바라보는 미립의 마음은 더욱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사태를 헤아리지 못한 채 그녀와 음식타령만 하고 있는 홍칠이 원망스럽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미립은 자기가 사람을 잘못 보았던 것이라며 더욱 진한 눈물을 흘렸다. 미립의 슬픔은 곧 홍칠에 대한 끝없는 분노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홍칠은 미립에게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줄곤 눈앞에 있는 요리에 대해서만 정신을 쏟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여기에 있는 것들은 모두 명요리들이죠. 이 까만 그릇에 담긴 것은 앵무새의 대가리와 부리 그리고 혀를 한데 썰어 콩알같이 빚어 만든 것이예요. 그것을 다시 향료에 데웠다 꺼내는데 직접 향료 속에 넣는 것이 아니라 김을 쐬게 한대요. 오래 쐬게 되면 색이 까맣게 변하는데 세지 않은 불에 삶고 천천히 꺼낸 다음 다시 급히 볶죠. 완자에 껍질이 앉을 정도로 볶으면 돼요."
모든 요리들에 많은 노력과 정성이 깃들어 있음에 홍칠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황궁 요리사들이 이런 요리를 만들었을 때는 엄청난 시간과 철저한 준비가 뒤따랐을 것이다. 황궁 안에는 다행히 모든 요리의 재료들이 준비돼 있어 문제는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미 다섯 요리사들은 황궁을 떠나있지를 않은가. 그런 요리사들이 어디서 이처럼 귀한 재료들을 얻어 요리를 만든 것일까?
그렇다면 요리사들과 그녀는 각별한 사이라는 사실도 증명되는 셈이었다. 잠시 그런 생각에 빠져있자 미립이 또 홍칠을 향해 오해의 시선을 보냈다.
미립은 홍칠이 넋을 놓은 채 요리와 그녀 앞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다짐을 했다. 다시는 홍칠과 인연을 두지 않을 것이며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자신을 추스리며 미립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제18장 다리 잘린 미운산
홍칠은 한가지 미립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그녀 역시도 오래 굶었을텐데 왜 음식을 마다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단순히 자신이 미식가이기 ㄸ문에 그런 아쉬움이 생긴 것인지는 모르지만 홍칠은 어서 미립도 요리를 먹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러나 한편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미립이 그녀에게 호감 따위를 갖고 있을 리 만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홍칠은 여전히 그녀가 집어주는 요리들을 받아먹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단지 음식 자체를 먹고 있는 거란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음식이란 그 근본목적이 사람의 원기를 회복시켜주고 또 사리판단을 할 수 있는 밝음을 주는 원동력이 아닌가. 그러니 결코 그녀의 관심을 받아주는 것은 아니었다. 미립 역시도 그런 자신의 심정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만 간절했다.
한편 미립은 홍칠에 대해 드리우고 있는 실망의 끈을 쉽게 거두지 못했다. 여전히 아무런 반감도 없이 그녀가 내미는 요리를 넙죽넙죽 받아삼키고 있는 홍칠이 미울 따름이었다. 미립은 생각했다. 그 역시도 자신처럼 먹지도 마시지도 말아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설사 굶어죽는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홍칠은 자기와 같은 운명을 맞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고락과 환락을 함께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연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홍칠의 태도는 지금 어떠한가? 표독스러운 그녀가 내미는 것은 물 한모금이라도 거부하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홍칠은...... 허겁지겁 받아먹는 것도 모자라 요리를 만드는 법까지 수다스럽게 그녀와 주고 받고 있는 게 아닌가. 홍칠의 머리에는 온통 먹고 마시는 일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아주 단순하고 바보스런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아, 포근해요."
그녀는 홍칠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댄 채 가만히 미립의 태도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미립이 보는 앞에서 홍칠과 이런 장면을 연출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흡족해했다. 비록 자신이 남몰래 손을 써 홍칠을 꼼짝 못하게 만든 것이지만 어쨌든 홍칠의 품에 안겨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가늘게 뜨며 난처한 얼굴빛을 짓고 있는 미립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나름대로 짐작했다. 석실에 갇혀있는 동안 분명 홍칠과 미립은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으며 미립을 죽여야 한다는 충분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더군다나 자신이 미운산과 욕정을 불태웠던 곳에서 이들이 알몸으로 나뒹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질투심이 불타오르는 것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질투심의 불꽃 속으로 흙더미를 끼얹듯 갑자기 머리를 든
그녀가 소리쳤다.
"미립아, 이 홍칠공은 아주 훌륭한 사내란다. 네 애비보다도 몇배 나은 사내이지."
이 말에 미립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분노와 배신감 등으로 이글거렸다. 그러나 이들 앞으로 던져놓을 저주의 말들은 많아도 기력이 모자라 안타까울 뿐이었다. 거기에 배고픔까지 얹혀져 미립은 지금 몹시 지쳐있는 상태였다.
다시 몸을 일으킨 그녀가 남아있는 요리를 천천히 홍칠의 입에 넣어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랑을 하려면 이 적등황녹청남자 일곱가지 색깔에 운강색까지 합하여 모두 여덟가지 색깔이 있는 요리를 먹어야 하지요."
하며 그녀가 다시 홍칠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당신은 벌써 이 요리를 다 잡수셨으니 이젠 모든 걸 다 아는 여인을 갖게 된 것과 마찬가지이기도 해요. 어때요? 한그릇 더 드시겠어요?"
마치 그녀는 홍칠의 아내라도 되는 듯 찰싹 달라붙어서 온갖 애교를 다 떨어댔다.
"싫소!"
홍칠은 미립의 얼굴이 눈에 아프게 밟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역시 자신이 선택해야할 여인은 미립 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그녀를 원망하는 마음이 커서 내미는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미립에 비해 자신은 너무도 사내답지 못하다는 것이 가슴을 후벼팠다. 비록 배불리 먹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녀가 내미는 요리를 받아먹은 것은 사실이었다. 타의에 의한 어쩔 수 없는 행위였다 하더라도 미립의 눈에는 배신감으로 비쳤을 것이다.
홍칠이 미립의 쇠잔해진 눈동자를 살폈다. 역시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어렴풋이 발견할 수 있었다. 무기력으로 생기를 잃어가고 있는 눈동자였지만 아직 자신에 대한 분노가 어려있음을 보았다.
미립의 눈동자가 잠시 커졌다가 원망의 빛을 발하듯 날카롭게 바뀌어갔다. 그러더니 미립이 그만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녀의 집요한 장난은 계속되었다. 침상에서 내려온 그녀가 다시 음식그릇을 들고 미립에게로 다가갔다.
"네가 먹기 싫다면 강제로라도 먹여주는 수밖에. 너도 홍칠공처럼 맛이라도 봐야 될 것 아니겠어? 그리고 내가 홍칠공을 좋아한다고 슬퍼하지는 말아라. 너 역시도 좋아하고 있으니까."
미립이 다시 두 눈을 부릅 뜬 채 그녀를 쏘아보았다. 만일 미미한 힘이라도 손끝에 남아있다면 그녀의 얼굴에 일격을 날릴 기세였다.
그녀가 말했다.
"미립아, 넌 정말 융통성이라고는 개미가 먹다 흘린 쌀가루만큼도 찾아보기 힘들구나. 이렇게 훌륭한 요리를 거들떠보지도 않다니 넌 정말 바보로구나."
곧 그녀가 젓가락으로 편육조각을 집어 미립의 입에 강제로 넣으려고 했다. 미립이 결사적으로 입을 벌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미립아, 넌 석실에서 홍칠공과 함께 지내면서 남녀간의 정이 무엇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거다. 그런데 오늘 네 몸은 말이 아니다. 이런 몸으로 어찌 앞으로 홍칠공을 위해 봉사를 한단 말이더냐? 차라리 나 같이 정갈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사내와 쾌락을 만들어가는 것을 구경이나 하는 게 어떠냐?"
이 말에 홍칠은 잠시 잠자던 분노가 목덜미로 치솟아오르는 것을 감지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미립 앞에서 또다시 그녀와 한데 엉킨다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고통이었다. 홍칠의 기미를 눈치챘는지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호호호! 난 당신의 여인을 해치려는 게 아니예요. 난 다만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죠."
그녀의 웃음소리가 어깨죽지를 타고 확 기어오르는 바람에 홍칠은 몸을 떨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를 넘어서 공포마저 느끼게 하는 웃음소리였다.
"제가 한가지 제안을 하죠."
하며 다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를 즐겁게 해주면 미립은 살려주겠어요. 그러나 할 수 없다면 저로서도 더이상 인내를 발휘할 수가 없겠죠."
차라리 스스로 목숨이라도 끊어버리는 게 백번 나은 일이라고 미립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가슴에 담아두었던 사내 홍칠과 자신 그리고 요망스런 그녀는 왜 이처럼 악연으로 한 방에 있어야 하는가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미립은 속으로 다시 한 번 홍칠의 가슴을 일깨우려고 외쳤다.
'홍칠공! 당신은 사내로서 저와 이미 인연을 맺은 사이가 아니던가요? 그 석실에서 당신은 제게 소중한 마음을 보여주지 않았나요. 그런데 어찌 지금은 이토록 제게 괴로움과 씻을 수 없는 고통만을 안겨주시는 건가요. 또한 저 요귀같은 여인과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건가요? 참을 수가 없어요. 참을 수가 없어요. 당신이 제 곁을 떠나는 것보다 더욱 참을 수가 없어요!'
미립은 똑똑히 지켜보리라 다짐했다. 그녀의 요구대로 과연 홍칠이 어떤 행동을 보일 것인가 두 눈으로 새겨두리라 생각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을 청산하리라는 마음이었다.
홍칠은 난감한 상태에 빠지고만 자신에게 황급히 묻고 있었다.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더더욱 그녀의 요구에 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서 미립을 풀어주시오!'
홍칠이 소리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느새 그녀에 의해 또다시 아혈을 눌리우고 말았다. 교활하고 치밀한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정확히 계산된 순서에 맞춰 진행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용이주도하게 아혈을 이용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다시 아혈을 빼앗기고만 홍칠은 이제 어쩔 도리가 없다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순간 사부인 소씨 거렁뱅이와 미운산을 떠올렸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향해 용기를 잃지 말라고 근엄하게 꾸짖고 있는 듯했다. 홍칠은 암담하기만 했다.
'이 요사스런 계집이 살아남는다면 개방에는 해를 입는 사람이 속출하게 될 것이다. 암암리에 사람을 해쳐온 자가 바로 이 가짜 미립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이 계집이 오래 개방에 남아있을수록 사람들은 그만큼 죽어나가게 될 것이다.'
홍칠은 그녀가 쓴 십일취의 영향인지 자꾸만 정신을 한곳으로 집중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방금전도 자신은 바람 앞의 나뭇잎처럼 그 위치를 수없이 바꾸지를 않았던가. 모두 그녀가 쓴 십일취 탓이라 생각하면서도 홍칠은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이젠 지금까지 분산되려고만 했던 정신을 한곳으로 쓸어모아야 할 때였다. 홍칠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주시하기 시작했다.
"빠알간 침상 휘장 사랑놀음에 흔들거리고 흥분에 들뜬 마음 진정할 줄 몰라라. 욕정의 파도가 지나고 피곤한 몸 뉘이면 벌써 새날이 밝아오네......"
정말 요망한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시를 ㅇ듯 노래를 부르듯 그런 내용의 천박한 입놀림을 서슴치 않았다. 저속한 노래인지 아니면 전조(前朝)의 소인묵객(騷人墨客)들이 쓴 글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홍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이 방안에서 남녀간의 정사(情事)를 노래하고 싶은 사람은 오직 그녀밖에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직 음탕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길을 홍칠에게로 돌렸다.
"당신은 오늘부터 누더기는 걸치지 않아도 돼요. 거지노릇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예요."
'너같은 계집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천하의 가장 쓸모없는 사람들이 바로 거지예요."
'웃기지 말아라. 바로 너같은 요망한 계집이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허접쓰레기이다!'
홍칠은 속으로 그녀와 이렇게 말을 주고받듯 했다.
"또한 가장 명성이 하찮은 게 거지라고요. 그러니 오늘부터는 모두 벗어던지고 저를 따르세요."
'너를 따를 바에야 에미정을 제일로 알고는 꽁무니를 좇는 오리새끼가 되련다!'
홍칠은 가소로운 그녀의 말에 조소를 참지 못했다. 그러나 결코 겉으로 표현되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분노가 치밀었다.
"미립아, 넌 석실에서 홍칠공 곁에 있으면서 과연 여자구실을 해내었느냐? 비록 쾌락은 있었다고 자부하겠지만 그것은 다만 죽음을 앞둔 남녀의 절망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몸부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 두 사람은 함께 있었지만 매우 슬픈 상태였기에 쾌락은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호호호!"
그녀가 홍칠의 귓볼을 이빨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미립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그녀의 뜨거운 입술이 홍칠의 가슴을 지나 배꼽노리 근처를 애무해나갔다. 홍칠은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의지가 흔들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필시 그녀는 미립에게 고통을 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녀가 미립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립아. 넌 사내와 여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호호, 뱀이 먹이를 잡아먹기 전 자기 몸으로 칭칭 감아버리는 것을 보았더냐. 여인은 사내의 몸을 이렇게 잘 감을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언제 대처에 가보았지만 그곳의 여인들은 모두 주인에게 오로지 복종만을 하고 있더라. 그러나 세상의 사내는 복종만을 일삼는 계집을 오래 품으려 하지 않는 법. 난 그때 그 주인에게 전혀 색다른 여인의 맛을 보여주려고 했지. 그 결과가 궁금하지 않느냐?"
다시 그녀의 입술이 홍칠의 아랫배를 쓸었다. 홍칠은 감은 두 눈으로 정기를 끌어모으려고 애를 썼다. 미립은 차마 홍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난처한 표정으로 일그러져갔다.
"이틀이나 지나 그 주인이 다시 내게로 찾아왔다. 그가 하는 말이 자기는 나를 원한다는 거야. 자기집에 있는 계집들이 수백명이 되어도 소용이 없다는 거지."
그녀의 한쪽 손이 이불로 가려져 있는 홍칠의 아랫도리 쪽으로 불쑥 들어갔다. 미립은 그녀의 음난스런 표정을 보며 치를 떨었다. 어찌 남녀간의 정사가 이처럼 뭇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을까. 미립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행여나 했던 홍칠의 태도는 어떠한가. 그녀의 충실한 상대가 되어 거부의 손짓조차 내젓지 못하고 있는 꼴에 미립은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알몸인 채로 어느새 홍칠의 위로 올라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자태를 부리려 했다.
'아버지인 미운산 앞에서도 저 여인은 똑같은 자태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연인이었던 홍칠공을 마치 노리개감으로 여기고 있는 중이다. 아버지도 저 여인과 살을 섞었고 홍칠공 역시도 내가 보는 앞에서 태연하게 욕정의 더듬이를 내보이고 있지를 않는가. 난 진심으로 홍칠공을 사랑했었다. 그러나......'
미립은 더이상 홍칠에게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끝까지 그를 믿으려 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욕정의 회오리가 한차레 지났는지 그녀가 홍칠에게서 몸을 떼었다. 그리곤 옷을 걸치면서 말했다.
"홍칠공, 정말 좋았어요."
미립은 다시 눈을 감았다.
"당신에게 한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개방사람들 중 아직 소씨 거렁뱅이란 작자가 제 말을 듣지 않고 있어요. 당신이 그에게 가서 손을 써보세요."
홍칠은 그대로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사내로서의 체면은 이제 주워담으려 해도 어려웠다. 한번 떨어진 체면은 벌써 어디론가 날아가버리고 없는 듯했다. 아마도 그녀가 몸 위로 올라오면서 그 체면 역시도 멀리 차버렸으리라.
순간 홍칠은 자신이 이 난관을 빠져나갈 방법이 있나 고심했다. 일단 지금으로서는 여인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녀의 심기를 건드려 미립 남매에게까지 화를 미치게 하는 것보다 그 반대의 처신에 서서 기회를 도모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그녀에게 몸까지 내맡기며 기회를 엿보는 것만이 홍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홍칠공, 당신이 내 말을 따르겠다면 환약을 먹여드리지요. 이건 황궁에서 만든 단약(丹藥)인데 쾌활단(快活丹)이라고 부르죠. 당신이 이 약을 복용하면 공력이 평소보다 몇배로 늘어나게 되지요. 다만 내력은 부드러워지는데 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은 엄청난 힘을 얻게 된다는 거예요. 어때요?"
'우선 미립과 미기를 놓아주어라. 그런 다음 네 말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홍칠이 속으로 외쳤다.
"홍칠공, 당신의 의리는 정말 알아주어야 해요. 그 눈빛이 말하고 있는 것을 전 알아요. 그래서 더욱 당신을 소유하고 싶어요. 호호호, 알겠어요. 당신의 말대로 미립 남매를 풀어주겠어요. 그대신 당신은 저를 따라 개방으로 가야해요."
어쩔 수 없이 홍칠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립과 미기의 목숨을 살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 작정했다. 그리고 기회를 엿보아 그녀의 마수에서 벗어날 때를 기다리면 되었다.
그녀가 여종을 시켜 미기를 데려오게 했다. 그리고 홍칠이 보는 앞에서 이들에게 해독제를 먹였다. 해독제로 독기를 푼 이들 남매의 혈색은 금세 원상태로 회복이 되었다. 얼굴빛이 불게 변한 미기는 곧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땀이 말끔하게 가시자 비로소 원래의 총명스런 미기가 보였다. 곧 손과 발도 쓸 수 있게 되었다.
"누나!"
"미기야!"
이들 남매는 서로를 부등켜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말했다.
"미립아, 홍칠공이 날 좋아하는 것을 알았으니 이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알겠지?"
여종을 따라 미립괴 미기가 밖으로 나갔다. 어느 순간 미립이 뒤를 돌아 홍칠과 눈을 마주치려 했는데 홍칠이 슬쩍 피하고 말았다. 아직 미립을 생각해서는 안될 시기였다. 자신의 몸이 완전하게 자유를 얻은 다음 그녀를 찾을 생각이었다.
밖으로 나온 미립은 미기를 꼭 안으며 한숨을 쉬었다. 여종이 말했다.
"이곳을 나서면 곧바로 거리가 나와요. 그러니 가고 싶은 데로 가요."
미립에게 예를 올린 여종들이 돌아갔다.
문을 나서자 그 앞에 노인이 끄는 수레가 보였다. 노인이 미립 남매를 발견하고는 측은해 보인다는 얼굴로 말했다.
"너희들 수레에 타지 않겠니?"
미립이 얼른 품속을 더듬어보았다. 약간의 은전이 손에 잡혔다.
"고마워요."
먼저 미기를 수레에 올린 뒤 미립도 얼른 올랐다. 바람막이 안으로 들어간 남매는 힘없이 앉아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주위가 이상하여 미립이 고개를 얼른 그쪽으로 돌렸다. 알고보니 수레 안에는 여러 사람이 먼저 타고 있었는데 주로 사내들이었다. 이들이 갑자기 미립을 중간으로 밀어넣었다.
"읍!"
순간 누군가 미립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립은 소리를 지르려고 했으나 입이 막혀 그럴 수가 없었다. 워낙 사람이 빼곡히 차 있었기에 미립은 숨조차 내쉴 수 없을 정도로 압박감에 시달렸다. 이때 한 사내가 미립의 오리(五里) 대혈을 누르려고 다가왔다. 그러나 다른 사내들이 일종의 막어막이 되어 미립은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미립은 더이상 남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 그런 마음은 곧 오기와도 비슷한 강한 의지로 바뀌어갔다. 미립은 미기의 손을 꼭 잡고는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기껏해야 죽이기밖에 더 하겠는가 하는 마음이었다.
미립의 남매는 이들에 의해 성밖으로 끌려나가고 있었다. 수레가 몹시 요동을 치는 것을 보아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후 말없이 수레를 몰던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다 왔수다."
그러자 수레에 타고 있던 사내들이 미립을 끌고 내렸다. 미립 남매가 이들에 의해 끌려간 곳은 어느 집의 드넓은 뜨락이었다.
미립은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수레에 내리면서 이 다섯 사내들에 의해 대혈을 눌리우고 말았다. 대혈을 누른 이가 바로 다섯째인 일지평평(一支平平)이었다. 그러나 미립에게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이들에게 운명까지도 내맡기고자 결심했던 터라 오히려 미립의 심정은 담담하기까지 했다. 미립이 냉랭한 시선으로 이들을 쏘아보았다.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미립은 미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이들은 바로 다섯 요리사들이었다. 미립의 남매를 한 문앞까지 끌고 와서는 안을 향해 소리쳤다.
"들으시오. 황궁의 다섯 요리사가 방주를 방문하러 왔소이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미립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주라니? 그렇다면 이곳은 개방이며 또한 방주라고 불리운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던가? 아니다. 어쩌면 지금 이들에게 불리워진 방주는 아버지가 아니라 소씨 거렁뱅이일지도 모른다. 미립은 수만가지 상념들에 시달리며 다시 이들의 태도를 기다렸다.
만약에 아버지인 미운산을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미립은 동생의 손을 움켜쥐며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
이윽고 문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궁의 다섯분의 요리사들이 저를 만나러 오시다니 영광이 아닐 수 없군요."
그러면서 문이 활짝 열렸다.
다섯째가 미립의 팔을 잡고 세째가 미기를 번쩍 안아들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안쪽에서 사내 둘이 허리를 숙였다. 미립은 곧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넓은 뜨락에 근엄한 자세로 앉아있는 사람은 바로 개방의 전임 방주이자 아버지인 미운산이었다.
미운산이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당신들이 날 찾아온 용건이 무엇이요?"
순간 미운산도 미립 남매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운산은 차마 자신의 자식들이 다섯 요리사의 수중에 들어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는 기색이었다.
"아버지!"
미기가 소치쳤다. 그러나 세째에게 잡혀있는 몸이라 공중에서 버둥대는 꼴이 되고 말았다. 미운산이 안타깝게 미립 남매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근엄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미운산이 정신을 가다듬고는 웃음기 섞인 어조로 말했다.
"허허허, 황궁의 요리사들께서 혹시 날 죽이러 온 것은 아니겠지?"
그러자 묘대야가 입을 열었다.
"임금의 녹을 먹는 자는 오로지 임금께 충성을 다하는 일을 해야지요. 우린 당신에게 이렇게 마지막으로 자식들의 얼굴을 보여주려고 왔소. 만일 당신이 달갑게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이 아이들의 목숨만은 살려 줄 것이요. 그러나 당신이 순순히 목숨을 내놓지 않는다면 이 애들의 목숨마저 데리고 가야 할 것이요."
미운산이 크게 분노를 느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렇게 폐인이 된 몸으로 살아선 무엇 하겠소. 당신 손에 죽을 수밖에 없다면 할 수 없지. 하지만 난 두 다리를 쓰지 못하오.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이처럼 폐인이 되었소. 그러니 나를 죽이기는 쉬울 것이오. 아이들을 놓아준다면 내 당신들의 뜻을 기꺼이 따르리다."
단호하게 미운산이 나오자 다섯 요리사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비록 한 여인의 명을 받고 나섰지만 막상 기개가 출중한 사내 앞에 와보니 묘한 감정이 일었던 것이다.
미운산과 함께 있던 몇몇의 사내들의 눈초리가 빛을 냈다. 그들은 문을 열어준 뒤 황급히 미운산의 뒤로 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두 다섯 요리사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여차하면 몸을 날릴 태세를 갖추고 있는 듯보였다.
아닌게아니라 미기가 미운산에게로 가려고 발버둥을 치자 세째가 더욱 세게 붙잡았다. 이때 사내들이 몸을 날려 세째를 치려고 했다. 그러나 미운산이 제지하자 뒤로 주춤 물러선 상태로 계속 이들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립은 아버지가 위기에 몰린 것을 깨닫고는 더욱 초조한 마음이었다.
미운산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기꺼이 난 그대들에게 목숨을 내놓겠네."
그러면서 주위에 서 있는 사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사람들이 내 말에 동의를 하면 곧 자네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도록 하게!"
사내들이 고개를 숙여 미운산의 말에 따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내 중 하나가 눈물을 흘리는 건지 눈가를 매만졌다.
이때 다시 미기가 외쳤다.
"아버지, 절 구해주세요!"
아들의 목소리를 들은 미운산의 가슴은 천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염려마라. 곧 너희들을 구해주마."
미운산이 앉아있는 수레로 된 의자를 밀어 다섯 요리사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내가 그대들 말대로 할테니 어서 아이들을 놓아주게."
그러나 이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말을 마친 미운산이 갑자기 물밖으로 튀어올라 날아가는 새를 채는 물고기처럼 몸을 날렸던 것이다. 미운산은 다섯째인 일지평평과 네째인 백수십권(百手十拳)을 덮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모두들 뒤로 젖버둥한 자세로 물러섰다. 그리고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미운산의 움직임 ㄸ문이었다. 전혀 움직일 수 없다고 믿었던 이들에게는 기절초풍을 할 일이었다.
그동안 가짜 미립에게 자신을 구하기 위해 꾸며왔던 미운산의 계략을 모두들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었다. 또한 미운산은 자신의 자식들이 위기에 빠지자 결국 두 다리를 사용하게 된 것이었다.
"악!"
다섯째와 네째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공중으로 튀어오른 미운산이 좌우 양손으로 강한 장을 이들에게로 날렸던 것이다. 바로 "견용재전" 법수였다.
다시 몸을 돌린 미운산이 기를 모으려는데 묘대야가 가로막고 나섰다. 묘대야도 손을 뻗어 미운산의 장법과 겨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운산의 쌍장법은 천근의 힘을 지닌 것이라 묘대야로서는 무리였다. 팽팽한 힘이 두 사람 사이에서 무서운 돌풍을 이루며 자리했다.
"얏!"
"우압!"
그러나 묘대야가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둘째가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변하자 몸을 날리며 얼른 쇠솔을 휘둘러댔다.
"내가 상대해주겠다!"
둘째가 쇠솔에 달려있는 서른여섯개의 살은 가히 치명적인 무기였다. 둘째는 이 숨겨진 무기를 사용하려 했다. 살을 미운산에게로 동시에 날리기만 하면 꼼짝없이 당하게 될 위기였다.
"너희들은 가만히 있거라!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
하며 미운산이 막 몸을 쓰려는 사내들을 향해 외쳤다. 사내들이 안타까운 몸짓을 추스리며 다시 원래의 자세로 되돌아갔다.
순간 미운산이 회오리처럼 몸을 굴려 둘째에게로 접근해왔다. 그리곤 얼른 장을 날려 쇠솔을 아래로 쳐지게 만들어놓았다.
"아니"
둘째가 당황하며 쇠솔을 다시 치켜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미운산이 뿜었던 장의 위력을 갑자기 뒤집어 쇠솔을 둘째에게서 떨어뜨렸다. 쇠솔이 멀찌감치 날아가버리자 둘째가 허둥대기 시작했다.
"향용유회" 법수 앞에서는 둘째의 쇠솔도 소용이 닿지를 못했다. 둘째가 몸을 재빨리 돌려 미운산에게로 장을 뻗었다.
"얍!"
그러나 가만히 선 채로 당할 미운산이 아니었다. 바닥을 박차고 훌쩍 오른 미운산이 공중에서 몸을 굴렸다. 소용돌이를 만들듯 미운산의 몸은 빠른 속도로 회전해갔다. 그런데 한가지 미운산이 실수를 하고 말았다. 둘째의 공격을 피하는 바람에 그만 미립과 미기에게서 너무 벗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미운산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비로소 깨달은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미립과 미기는 놈들의 손에 이미 갇혀버힌 뒤였다. 이때 누군가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어대는 것이었다.
"호호호!"
미운산은 가슴으로 훅 하고 끼얹져지는 차가운 물줄기에 놀라고 말았다. 마치 불통 속에 들어있다 다시 얼음물로 뛰어든 상태처럼 온몸의 땀구멍들이 일제히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훌륭해요! 과연 미방주의 '심용재연(沈龍在淵)' 법수는 대단하군요. 위장을 하고 있다가 중요한 때를 기다려 몸을 펴는 그 모습이 마치 용이 구천으로 날아오르는 광경과도 흡사하군요! 호호호......"
미운산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방금전 자신의 온몸으로 번져오던 그 냉기의 발산지를 곧 찾아낼 수가 있었다. 그곳엔 바로 가짜 미립이 서 있었다. 한무리의 여인들에 의해 둘러싸인 채 그녀가 서서히 걸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미방주, 어때요, 당신이 걱정할까봐 저들을 보냈는데."
미운산이 냉소를 씹으며 대꾸했다.
"관심을 써줘서 고맙군."
그러나 미운산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호락호락 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운산은 짧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세가 비록 그녀의 무리 쪽으로 기울고 있다 해도 아직은 낙담하게 못 되었다. 열세이긴 하지만 자신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한가닥 위안을 삼기로 했다.
가짜 미립이 지껄였다.
"미방주, 당신이 개방총부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온 뒤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내가 당신을 이렇게 찾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호호호, 그러나저러나 우리들이 나누었던 정분은 대단하지 않았나요?"
결국 미운산을 깔보고 있는 투였다. 미운산이 근엄한 얼굴빛으로 말했다.
"난 그대에게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어. 그대와 내게 씌워진 운명의 구름들은 변하질 않아.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살아남아야 하지."
"호호호! 미립아, 네 애비가 하는 말을 들어보렴.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데 과연 내 운명은 어느 쪽일까?"
미립은 미운산을 바라보았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나약함과 함께 아주 단호한 위풍을 동시에 찾아볼 수가 있었다. 미립은 속으로 부디 아버지가 단호한 위풍을 잃지 말고 행동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한편 묘대야를 비롯한 다섯 요리사들은 속으로 놀라움을 감추고 있는 중이었다. 미운산의 무예는 확실히 소씨 거렁뱅이나 홍칠공보다는 월등 나았기 ㄸ문이었다. 더군다나 미운산의 다리에 대한 어리석은 믿음에 다시 한 번 후회가 됐다. 그런 속임수를 미리 알았더라면 이렇게 당하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제각기 가슴에 담았다.
미운산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말했다.
"나는 그대를 오래 기다렸지.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외로웠는지 당신은 모르고 있을 거요.그러나 당신은 끝내 돌아와주지 않았지."
그러자 그녀가 웃었다.
"호호호! 내가 어찌 당신의 곁을 떠날 수 있겠어요. 당신은 급한 성미 때문에 일을 자초한 것이라고요. 내가 당신 곁을 떠났어도 항상 며칠 후면 돌아오지를 않았던가요?"
두 사람간에 오고가는 말 속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겉으로는 오해를 풀고 서로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정을 교류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속내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속으로 그점에 대해 너무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미운산은 확실히 대단한 인물이다. 하지만 저 사람은 왜 자기의 모습을 찾으러 하지 않는지 모르겠군. 만일 저 사람이 내 말만 잘 듣었더라면 천하의 무림은 벌써 내 손에 쥐어졌을텐데......'
잠시 눈을 감은 채 고심을 하던 그녀가 미운산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미운산, 당신은 나의 말을 들어야 해요."
"하하하, 그대가 내 딸과 아들을 곱게 놓아주기만 하면 그렇게 하리라."
"그런가요?"
짧게 물음을 토한 그녀가 다섯 요리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미립아가씨와 미기도련님을 잘 돌봐드려라!"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 그녀를 바라보는 미운산의 눈가엔 심상치 않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미운산이 소리쳤다.
"잠깐!"
하며 미운산이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묘대야와 둘째 그리고 세째가 앞을 가로막았다.
다섯째가 저울추를 휙휙 돌리면서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곧 그것을 미기의 목에 감아 매달았다. 한편 세째는 얼른 미립의 뒤로 자리를 옮겼다. 이 다섯 형제들 중 가장 음흉한 자이기도 한 세째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미운산이 움찔했다.
저울추를 목에 달게 된 미기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미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미운산을 불렀다.
"아, 아버지! 아......버......지!"
미기는 곧 기절을 할 지경에 이르렀다.
미운산이 그녀에게 소리쳤다.
"네년이 저 다섯놈을 시켜 나를 해치려 들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네년이 허튼수작을 한다면 난 가만히 있지를 않겠다!"
그말에 모두는 경계의 눈빛을 만들었다. 미운산이 결국 목숨을 걸고 나선다면 피를 튀기는 혈전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안에 있는 모두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종국을 맞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와하하하!"
모두들 웃음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운산, 네 놈이 그 잘난 재간을 뽐내겠다고? 하하하, 가소로운 일이다!"
하며 사람들의 머리 위로 훌쩍 날아드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바닥에 소리없이 내린 사내, 거대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그 동작은 매우 가벼워보였다. 사내는 몸집이 우람했으며 한손엔 독사장을 들고 있었다.
미운산이 웃으며 받아쳤다.
"하하하! 어느 놈인가 했더니 바로 너였구나!"
일찌기 임안에는 또 한사람의 서역고수가 와 있었는데 바로 독사장을 쓴다는 말을 들었었다. 미운산이 첫눈에 그를 알아본 것도 그런 소문 때문이었다. 그 독사장 안에는 아주 강한 독성을 지닌 작은 뱀 두 마리가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상대와 격투를 하는 도중 그는 독사장 속에 감춘 독사를 쓰는 게 특기이기도 했다. 그 독사에 물리는 날에는 끝장이었다.
구양봉을 알아본 미운산이 다시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네 놈이 천하에서 으뜸 가는 악한으로 자청하는 놈이렷다!"
구양봉이 어깨를 으쓱 하며 대꾸했다.
"그래 맞다. 이놈아 잘난 체 하지 말아라! 네놈이 오늘 날 이기지 못하면 자식들과 함께 합장묘를 쓰게 될 줄 알아라!"
곧 독사장을 휘두르며 접근해 오는 구양봉의 눈에선 살기가 뿜어나왔다. 미운산은 갑작스런 구양봉의 공격에 약간 당황했다.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강용팔장을 자랑하는 미운산으로서는 그와 맞대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미운산의 강용팔장은 홍칠과는 달리 법수가 아주 매서웠고 힘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장을 날릴 때마다 마치 우뢰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하여 모두들 그 소리만 듣고도 머리를 숙인다는 정도였다.
"얍!"
구양봉이 휘두른 독사장을 피하면서 미운산이 예의 장법을 구사했다. 깜짝 놀란 구양봉이 몸을 비틀거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운산의 장법이 이처럼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자 구양봉은 한편 흥미가 풀풀 생겨나기도 했다. 독사장을 바닥에 꽉 내려꽂았다. 보통의 흙으로 된 바닥이 아니었는데도 독사장은 아주 간단히 박히고 말았다. 그것만 보더라도 구양봉의 힘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바닥은 거대한 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좋다! 네놈과 기꺼이 장법으로 맞서주마!"
하며 고함을 내지른 구양봉이 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남과 싸울 때 주로 두가지의 신공(神功)에 치중했다. 한가지는 개구리공이었고 다른 한가지는 그가 독자적으로 수련했다는 봉황력이었다. 그는 미운산이 만만치 않은 상대인 것을 깨닫고는 더욱 신이 나서 어서 한판 겨루고 싶어했다.
"간다!"
구양봉은 육중한 몸을 큰 보폭에 싣고는 번개같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틈만 생기면 장을 날려왔다. 크르릉! 한차례의 돌풍이 미운산을 살짝 비켜나갔다. 구양봉의 장법 역시도 위력이 강했다.
그런데 한가지 구양봉이 장법을 구사하는 자세는 독특하게 보였다. 그는 두 손을 수평으로 쳐들고 머리를 앞으로 내민 상태에서 개굴개굴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는 것이었다. 바로 개구리공을 구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개굴! 개굴! 개굴!"
세번 소리를 낸 구양봉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는 다시 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기이한 장면이 펼쳐졌다. 그가 끌어모은 기는 가슴으로부터 차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더니 아랫배가 갑자기 터져나갈 듯 부풀어오르는 것이었다. 마치 개구리의 그것과 흡사했다.
"개굴!"
또 개구리 소리를 내지른 구양봉이 장법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미운산은 구양봉과 제법 먼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그다지 우려하지는 않았다. 미운산 역시 속으로 구양봉의 모습을 놓고 흥미로워 했다. 서역의 무예란 참으로 괴상망측하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장법치고는 너무 기이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미운산의 여유로운 생각은 곧 끝이 나고 말았다. 갑자기 거리를 좁혀온 구양봉이 일격을 날리는 것이었다. 미운산이 몸을 잔뜩 낮추고는 돌풍을 피했다. 그런데 어느새 미운산의 머리를 뛰어넘은 구양봉이 등쪽으로 사뿐히 내리며 장법을 가해왔다. 뒤를 돌아본 미운산은 주춤했다. 크르릉! 거센 광풍이 몰려오자 미운산이 다시 자세를 낮추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새 그 광풍에 걸리고 말았다. 미운산이 미끄러지듯 뒤로 밀려갔다.
"음......"
순간 기혈(氣血)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아 이미 내상을 입었음을 미운산은 감지했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미운산이 얼른 "강용팔장" 법수 중 "항용유회" 법식으로 구양봉과 대적하고 나섰다.
"얏!"
그러자 구양봉이 이번엔 바닥에 납짝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미운산의 공격은 빗나가 맞은편 담장만 요란하게 부셔졌다. 다시 미운산이 공격을 가하자 이번엔 구양봉이 머리를 쳐들고는 개굴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곤 반격을 해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겨우 구양봉의 공격을 피한 미운산은 당황했다.
'저놈의 공격은 정말 까다롭구나! 이 일을 어쩐담...... 그렇다. 놈이 다시 기를 모으기 시작할 때를 엿봐 공격을 하면 되겠구나!'
다시 미운산의 항용유회 법식이 구양봉을 향해 뿜어졌다. 크릉! 크르릉! 두 사람의 장력이 맞부딪칠 때마다 요란한 굉음이 터졌다. 더군다나 체구가 우람한 구양봉의 위력 또한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미운산이 선제공격을 퍼부으면 그것을 맞받아치는 구양봉의 장력은 실로 가공할 만했다. 구양봉의 쌍장으로는 거센 내력이 밀물처럼 용솟음쳐 나왔다. 마치 바다의 물을 일순간 육지로 옮겨놓을 만큼 엄청난 힘이었다.
자신의 강용팔장을 쉽게 막아내는 구양봉을 보자 미운산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무예를 감당해낼 만한 사람은 없다고 자부해왔던 터였다. 그런데 서역에서 왔다는 구양봉이 맞수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드높은 하늘에 매달린 구름과 땅 위의 산맥들마저 뒤흔들 만한 장력이 한참 오고갔다. 두 사람은 온힘을 다해 자신이 지닌 내력을 뿜어대고 있는 중이었다.
미립은 아버지가 차츰 몰리는 것 같아 마음 속으로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미운산에게로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그만 두세요! 보아하니 아주 힘겨워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구양선생에게 당신을 용서해달라고 청을 드리리다."
그러나 미운산의 귀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구양봉과 결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판국에 들릴 리가 만무였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소리쳤다.
"당신의 귀여운 아들을 보세요. 당장 당신의 눈앞에서 죽게 되었는데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말인가요!"
그러더니 곧 미기를 붙잡고 있는 다섯째에게 눈짓을 보냈다. 다섯째가 곧 미기의 목을 비틀기 시작했다.
"악! 아버지!"
미기가 비명을 터뜨리자 그 때서야 미운산이 고개를 돌렸다. 막 미기가 있는 쪽으로 다가서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구양봉의 쌍장에서 내뿜어진 괴력이 자신을 치는 것이었다.
"아악!"
미운산은 무려 일곱보나 뒤로 밀려나갔다.
미운산이 위기에 처한 것을 본 미립이 말했다.
"미기야! 아버지가......"
그러나 차마 미립은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생각같아서는 미기에게 어떤 고통이 있더라도 아버지를 끝까지 싸우게 해야한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바로 눈앞에 있는 동생 미기 역시도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기에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어린 미기가 미립의 의도를 간파했는지 불현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 뜨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그녀가 말했다.
"오호, 과연 미운산의 자식들 답구나!"
하면서 다섯째에게 더 매서운 눈초리로 신호를 보내왔다. 미기의 얼굴색은 차츰 어둡게 변해갔다. 어느새 미기의 앙다물어진 작은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미기는 조금도 굴하지를 않았다. 튀어나가려는 비명조차 이빨로 강하게 물어버리고는 더 결사적으로 버텨내는 듯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로구나! 미운산의 아들이 되기에 조금도 부끄럽지가 않아!"
진심으로 감탄을 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미기의 의연한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 아직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미운산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손을 쓰면 당신의 목숨은 끝이 나요. 하지만 난 당신을 쉽게 죽이고 싶지가 않아요. 호호, 지금부터 아주 흥미로운 놀이를 할 생각이죠."
그러더니 그녀가 구양봉이 꽂아둔 독사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독사장을 뽑은 그녀가 다시 미운산에게로 왔다.
"호호호!"
그녀가 독사장을 미운산의 다리쪽으로 갖다대었다. 그녀가 손으로 가볍게 몇번 흔들자 작은 독사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곧 그 뱀들은 미운산에게로 옮겨오려 했다. 그런데 뱀의 동작이 어설프게만 보였다. 바로 그녀를 뱀들이 알아본 것이었다. 구양봉이 아닌 것을 알아차린 뱀들이 쉽게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뱀들은 독사장 자루를 통해 열심히 들락날락거렸지만 쉽게 미운산에게로 옮겨가지는 않았다.
그녀가 난처해진 얼굴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구양선생, 뱀을 미방주의 몸에 기어오르게 하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하나요?"
그러나 구양봉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주지를 않았다. 사실 구양봉은 그녀의 행동에 화가 났던 것이다. 독사로 그렇게 간단히 미운산을 죽일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자신이 지금 혈투를 벌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구양선생!"
그녀가 다시 애원을 하듯 구양봉을 응시했다.
쓴웃음을 짓고 난 구양봉이 입술을 천천히 오무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재빨리 휘파람을 두번 불었다. 그러자 작은 독사들이 순식간에 미운산의 바지가랑이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읍!"
미운산이 갑자기 굳어졌다. 잠시 구양봉의 공격 ㄸ문에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틈을 타 당하고 만 결과에 울분이 터졌다. 독사가 다리로 붙자 미운산의 가슴은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구양봉의 독사는 대단한 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 한번 미운산이 당황을 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구양봉의 다시 미운산을 향해 회심의 일격을 날려보냈다.
미운산은 꼼짝 못하는 사이 이번엔 더 멀리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구양봉이 비로소 양 손을 거두고는 거만하게 웃어젖혔다.
"와하하하! 그럼 그렇지. 역시 이 구양봉 나으리가 천하의 으뜸이라구!"
이곳에 모여있는 모든 이들은 한결같이 구양봉의 위력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속으로 벌벌 떠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황궁의 요리사들 역시 무예가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구양봉을 보자 얼른 꼬리를 감추기에 바빴다. 더군다나 장법 말고도 무서운 독사장을 갖고 있는 구양봉에게 섣불리 덤볐다가는 죽음 뿐이라는 사실을 새기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아버지!"
미운산이 쓰러지자 미립이 목을 놓아 울부짖기 시작했다. 미기는 다행히 풀려났지만 이미 사색이 다 된 얼굴이었다. 끝까지 강한 의지를 보여주긴 했지만 아직도 입술 사이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미기도 엎드린 채 울기 시작했다.
"노독물 네 이노옴! 너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가소로운 인물이구나!"
모두들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잔잔하면서도 섬뜩한 소리에 사람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허둥대기 시작했다. 더욱 당황하게 된 것은 목소리는 들렸으나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던 구양봉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소리를 낼 만한 사람은 없었다. 부드럽게 들려왔으나 분명 그 속에는 대단한 공력이 숨겨져 있음을 구양봉은 느낄 수가 있었다.
구양봉이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누구냐! 썩 나오지 못하겠느냐? 누군가 감히 이노독물에게 그같은 말버릇을 보이느냐!"
이번엔 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하!"
사람들은 더욱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노독물, 너보다 나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다시 말소리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쉽게 그 위치를 잡아낼 수가 없어 서로의 얼굴만 멀뚱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오로지 구양봉만이 보이지 않는 상대와 맞서고 있는 형편이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구양봉이 받아쳤다.
"천하의 무림 중에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누구더냐?"
구양봉의 판단으로는 목소리가 처마 쪽에서 나는 듯했다. 처음 그 목소리가 들려왔을 땐 뜨락 저편 담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돌변하고 말았다. 스스스...... 매우 빠르게 풀잎 위를 스쳐가는 습한 동물처럼 그런 소리를 남기기도 했다.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이유는 그가 경공으로 쏜살같이 날아다니며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대협 왕중양이지."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머리 위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 말에 구양봉이 치를 떨며 소리쳤다.
"뭐라고? 왕중양!"
"하하하,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 그 사람말고 너를 거꾸려뜨릴 수 있는 인물이 또 있으니까."
"또 누구냐?"
구양봉이 허공에 대고 다시 외쳤다.
"화산의 무예시합이 곧 시작될 것인데 바로 그곳에 가려는 모든 사람들이다. 네놈보다는 모두 뛰어난 무예를 갖고 있지."
"그들은 모두 거북이나 마찬가지다. 네놈 역시 거북이일터 어서 나와라. 내 네놈을 뒤집어놓아 거북이처럼 죽을 때까지 버둥거리게 만들 것이다!"
"하하하! 네놈이 원한다면 소원을 들어줄밖에."
순간 어디선가 미풍이 불어왔다. 그러더니 후드득! 새가 날개터는 소리와 함께 그가 모습을 나타냈다. 사람들의 시선이 먹이를 발견한 독수리처럼 일제히 그에게로 날아가 박혔다.
"아니!"
기풍 당당하게 걸어오는 사내는 의외로 서른살 안팎의 젊은이였다. 자주색 겉옷을 걸치고 손에는 옥피리를 들고 있었다.
"저건!"
구양봉은 다시 한 번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외마디 감탄에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바로 동해 도화도 도주인 황약사였다. 황약사는 강호에서 이름을 드높히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혼자서 태호방을 소멸시키고 대력(大力) 허패(許覇)를 굴복시킨 장본인이었다. 또한 태호의 응취봉(鷹鷲峰) 아래에 시까지 새겨놓은 것으로 유명했다.
무림의 사람치고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그의 대호가 동사(東邪)인 것도 익히 알고 있는 처지였다.
구양봉의 두 눈은 공포심으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 이름이 알려진 노독물 구양봉인지라 무작정 무릎을 꿇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약사, 네놈이었구나! 마침 잘 와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적수가 없어 심심하던 차였는데 네놈의 재간을 어디 한번 구경해보자꾸나! 하하하!"
"으윽!"
바로 이 순간이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미운산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만 것이었다. 쓰러진 미운산은 머리를 땅에 둔 채 두 다리를 허공으로 쳐들었다. 그 괴상한 행동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양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하하! 황약사 네놈은 지금 미운산이 막 독사에게 물려 늘어지는 꼴을 보았느니라."
미운산은 온몸을 심하게 떨어댔다. 독이 워낙 강한 탓에 곧 죽게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다급해진 미운산이 소리를 쳤다.
"황약사, 어서 나를 구해주게!"
황약사가 미운산이 쓰러져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소리도 남기지 않고 몸을 놀려 독사장을 그녀에게서 받아쥔 구양봉이 휘파람을 불어댔다.
휘릭- 휘릭-
그러자 미운산의 바지 속으로 들어가 있던 독사 두 마리가 빠져나와 구양봉에게로 쏜살같이 기어왔다. 곧 독사장을 기어오른 뱀들은 자루에 나있는 괴물의 머리를 닮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구멍은 마치 괴물의 콧구멍처럼 생겼다. 그러더니 이번엔 눈구멍으로 보이는 곳으로 머리를 내민 독사들이 황약사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황약사가 쉽지 않은 상대라는 것을 알고 있는 구양봉은 독사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황약사, 네놈이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 오늘 나의 독사장 맛을 보여주겠다!"
구양봉의 고함소리에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은 황약사가 미운산에게로 달려갔다. 미운산이 신음을 토하며 다급하게 외쳤다.
"어서 빨리!"
숨이 넘어갈 듯한 미운산의 말에 황약사는 침착하게 행동하려 했다. 곧 도이 온몸에 퍼져 미운산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황약사는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번개같이 몸을 날려 묘대야 앞으로 날아갔다.
"이크!"
깜짝 놀란 묘대야가 얼떨결에 국자를 그에게 휘둘렀다. 그러나 그 틈을 이용한 황약사는 얼른 다른 손에 들려있던 칼을 빼앗았다.
"악!"
순간 황약사가 올려친 칼에 맞은 국자가 휙 묘대야의 등쪽으로 날아가 일격을 가했다. 자기 손에 들려있던 국자에 맞은 묘대야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다시 미운산 쪽으로 같은 동작으로 날아온 황약사는 왼손으로 미운산의 대혈 몇곳을 눌렀다. 그리곤 칼로 미운산의 오른쪽 다리를 내리쳤다.
"아악! 으......"
미운산이 비명을 내질렀다. 미운산의 오른쪽 다리는 황약사의 손에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한칼에 잘려나가 그만큼 고통이 덜 했는지도 몰랐다.
"아, 으......"
차츰 사그라드는 비명을 입에 문 채로 미운산이 혼절해버렸다.
미립과 미기가 발을 동동 구르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아직 요리사 형제들에게 잡혀있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
미기의 울부지는 소리만 넓은 뜨락 안을 일깨울 듯했다. 그런데 피를 흘리며 기절을 한 아버지를 부르다 그만 미기 역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황약사는 미운산을 부축한 채 연거푸 혈도를 눌러 지혈에 힘을 썼다. 그리곤 곧 도화도의 영약인 "구화옥노환(九花玉露丸)"을 몇알 으깨어 미운산의 절단된 다리 상처에 발랐다. 황약사의 손놀림은 매우 민첩했다. 구양봉과 요리사 형제 그리고 그녀까지도 그런 황약사를 주시하고 있을 뿐 누구도 섣불리 대들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함부로 황약사에게 덤볐다가는 목숨을 내놓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려나간 다리에 있던 바지조각을 벗겨내 미운산의 상처를 싸맨 황약사가 말했다.
"형님! 정신이 드십니까?"
잠시 기절을 했던 미운산이 황약사의 노력으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미운산이 겨우 입을 떼었다.
"동생, 정말 고맙네. 자네가 와주었기에 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네."
그러나 미운산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미운산은 지칠대로 지쳐 그 말을 하는 데도 힘이 들어할 정도였다.
황약사가 말했다.
"형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다 마쳤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구해 도망치게 했는데 또 이렇게 붙잡히고 말았군요. 모두 제 탓입니다. 그러나 걱정 마십시오. 제가 다시 구해드리겠습니다."
원래 성품이 강직한 미운산으로서는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좀 수치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황약사의 고마움과 눈물을 보니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황약사의 마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미운산이 겨우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르켰다.
"바로 저 요사스런 계집 때문에 싱긴 일이라네. 자네가 어서 개방을 구해주게나."
황약사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걱정마십시오."
황약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구양봉을 주시했다.
"노독물, 내가 미운산 형님을 돕는 걸 막아서지 말아라!"
그러자 구양봉이 미웃었다.
"도화주는 과연 천하의 큰 영웅답군. 임자 마음대로 하게. 하지만 한가지 저 여인을 다치게 해서는 안돼. 만일 그대가 저 여인을 죽인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역시 쓴웃음으로 맞선 황약사가 이번엔 요리사들 쪽으로 매서운 눈길을 쏘아댔다. 그러더니 국자를 맞고 쓰러졌던 겨우 정신을 차린 묘대야를 불렀다.
"묘가놈아, 네놈이 덤벼든다면 아주 대환영이겠다. 네놈을 머리끝에서부터 다리까지 공평하게 정확히 두쪽으로 갈라줄테니 어서 오너라."
이들부터 없앨 계산이었다. 그러나 묘대야는 이미 꼬리를 감춰버린 뒤였다. 황약사가 가까이 다가서자 역시 엉겹결에 국자를 휘두를 뿐이었다. 미소를 짓던 황약사가 들고있던 칼로 이번엔 국자를 내리쳤다. 그러자 국자가 두 동강이 나버렸다. 자기가 아끼던 국자가 작신 부러진 것을 본 묘대야는 그만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모두들 황약사의 위력에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가짜 미립이 데리고 온 한무리의 여인들은 황약사의 기막힌 무예에 저마다 탄성까지 내질렀다.
이번엔 둘째에게로 다가선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둘째 이놈아, 네놈이 덤빈다면 쇠솔에 숨겨진 서른여섯개의 살들을 뽑아 혈도에 쑤셔넣어줄 것이다. 어떠냐? 그렇게 되면 네놈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될텐데."
겁을 먹고 벌벌 떠는 것은 둘째도 예외는 아니었다. 황약사가 부리는 엄청나고도 지독한 법수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것은 황약사가 몸에 지니고 다니는 금침을 척추뼈에 꽂아넣는 법수인데 그렇게 되면 꼼짝없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로 전략돼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바로 "부골독침(附骨毒針)"이라고 불리우는 법수였다. 그런데 더 심하게 자신의 무기인 쇠솔에 숨겨놓은 살들로 막는다니...... 둘째는 온몸을 떨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둘째는 혼을 빼앗긴 사람처럼 허둥대기 시작했다.
미립을 잡고 있는 세째에게로 온 황약사가 역시 으름장을 놓았다.
"그 여인을 놓아준다면 용서는 하마."
황약사는 요리사 중 이 세째가 가장 간교한 자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은근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누구보다 간교한 자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째가 말없이 슬그머니 한쪽으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이 틈을 이용해 미립이 얼른 미운산 쪽으로 달려갔다.
"하하하, 너 역시 총명한 놈이로구나!"
말도 붙이기 전에 슬슬 뒷걸음치는 네째를 본 황약사가 크게 웃었다. 이번엔 미기를 잡고 있는 다섯째였다. 어느새 그는 미기의 목에 다시 저울추를 감아놓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시달렸던지 미기는 축 늘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다섯째는 저울추를 풀지 않고 있었다.
"네가 아이를 놓아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가벼운 어조로 황약사가 말했다. 기절을 해 쓰러져 있는 미기를 슬쩍 살펴본 다섯째가 갑자기 소리쳤다.
"황약사, 네놈이 날 건드리면 내가 이 아일 먼저 요절내겠다!"
그러면서 미기의 목을 감고 있는 저울추에 힘을 주려고 들었다.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던 황약사라 당황하지는 않았다. 뒷걸음질 치며 계속 미기의 목을 조르려는 다섯째를 향해 황약사가 놈을 날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야압!"
순간 다섯째는 자신의 해(海)와 담중(膽中) 대혈에 이상한 느낌이 와 닿는 것을 감지했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온몸의 힘이 그 담중혈로 빠져 달아나는 것이었다. 잠시 주춤하는 사이 황약사가 다가서더니 다섯째의 팔을 잡아 당겼다. 황약사가 당기는 대로 다섯째의 몸이 돌더니 저울추가 풀렸다. 그리곤 다시 휙 하고 다섯째를 돌렸더니 이번엔 저울추가 그의 목에 칭칭 감기고 말았다.
"어서 나를 좀 구해주우!"
당황한 다섯째가 소리쳤다.
그러나 모두들 그 자리에서 한발짝도 내딛지를 못하고 있었다.
"나 죽어요!"
계속 다섯째가 발버둥을 치며 괴로워하자 모두들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당장 황약사에게로 달겨들 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구양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약사, 이 다섯 요리사들 역시 고수라는 것을 명심하라구!"
잠시 도망을 갔던 묘대야를 비롯한 나머지 세 명이 한꺼번에 황약사에게로 덤벼들었다. 황약사가 쥐고 있던 저울추를 흔들자 다섯째의 비명이 더 크게 울려퍼졌다.
"악! 나 죽는다!"
다섯째의 눈알은 자기 코보다 더 높이 튀어나오고 피가 흘렀다. 곧 바닥에 축 널부러진 그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꼼짝을 하지 않았다.
"어서 덤비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
황약사의 외침에 모두들 다시 주춤하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큰형의 책임이 컸던지 묘대야가 나서며 소리쳤다.
"네놈이 우리 다섯째를 죽였으니 용서할 수가 없다. 우리들의 체면은 말이 아니다. 우리는 앞으로 결사적으로 싸워 꼭 다섯째의 원수를 갚을 것을 밝힌다."
묘대야가 의미심장한 다짐을 하고는 막 나머지 형제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멈춰라!"
이때까지 한쪽으로 물러나 구경만 하고 있던 가짜 미립이 나섰다. 그녀는 황약사 앞으로 가더니 생글생글 웃기부터 했다.
"호호호, 당신의 솜씨는 보통이 아니군요. 천하의 다섯째를 누가 쓰러뜨릴 수 있을까 평소 궁금했었는데 오늘에서야 그 고민이 풀렸네요. 역시 도화도주로군요. 당신은 구양선생 다음으로 대단한 분이세요."
그러자 옆에 있던 구양봉이 흡족해진 얼굴로 말했다.
"어허허, 옳으신 말씀. 하지만 그대도 조심을 하라구."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긴 말 하지 않겠네. 내가 미방주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게 해준다면 난 싸움을 멈추겠네."
그녀가 대답 대신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엉뚱하게도 황약사에게로 보내는 음모를 담은 추파가 담겨져 있었으나 그는 단박에 눈치채지 못했다.
"황약사, 당신이 나와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당신의 말을 들을지도 모르는데, 어떠세요?"
하며 웃음을 흘리는 그녀를 황약사는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제19장 절곡정으로 간 노완동
황약사는 그녀가 뿌리는 웃음과 짓거리에 분노가 들끓었다. 금방이라도 가슴을 치며 날뛸 것만 같은 기색이었다.
사람들은 황약사를 가르켜 고약한 병이 있다고들 말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황약사가 남녀간의 일에 아주 괴상망측하고 병적인 행동을 보인다고 믿고 있었지만 오히려 점잖은 사람에 속했다.
그는 자신의 처자에 대해 아주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도화도에서 떠나온 몸이지만 하루라도 아형을 잊은 적이 없었다.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이 아무리 미색이 출중하다고 해도 황약사의 안중에는 아예 담겨져 있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녀가 아양을 부리려고 하자 황약사는 화가 났던 것이다.
"닥치거라!"
의외로 화를 버럭 내자 가짜 미립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상대가 꼿꼿하게 나온다고 선선히 물러설 그녀가 아니었다.
"황약사, 당신은 정말 멋이 없는 사내군요. 천하의 고수라도 여인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법은 없다구요. 그러지 말고 저와 잠깐 얘기를 좀 해요 네?"
"네년이 정 정신을 못 차린다면 별 수 없군. 우선 네년부터 죽여야겠다!"
그녀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들어 알고 있는 황약사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항상 오만과 무례함으로 상대를 농락한다는 그녀의 행동이 황약사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그녀는 아마도 자기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인을 함부로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 자신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황약사를 따르는 여인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 해도 자기에게만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확신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다시 온갖 자태를 부리며 황약사의 노기를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했다.
"호호호, 전 당신같은 사내를 좋아한답니다. 용모도 준수하고 인정미도 있는 당신을 좋아한다구요."
그러자 황약사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로 바싹 다가갔다. 황약사의 얼굴에는 더욱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을 살기라고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자기에게로 빠져드는 줄로만 알고 있는 그녀는 황약사를 맞기 위해 한껏 가슴을 부풀렸다.
바로 이때 구양봉이 소리쳤다.
"물러서!"
그녀에게 하는 소리였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몇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나 순간 그녀는 거의 동시에 황약사가 내민 중지 끝을 볼 수 있었다. 황약사는 중지로 암기를 튕겨 그녀에게로 쏘았던 것이다.
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는 곧 머리에 암기를 맞고 쓰러졌다.
때를 같이하여 구양봉의 독사장이 황약사의 눈앞으로 들이닥쳤다. 황약사는 손을 돌려 도화도에서 자기가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낙영신장(落英神掌)" 법수로 맞섰다. 독사장 자루 구멍으로 두 마리의 독사가 몸둥이를 내밀며 황약사에게로 달겨들었다. 혀를 날름거리는 것이 보기만 해도 소름이 훅 돋을 지경이었다. 황약사가 날렵하게 몸을 날리며 한쪽으로 물러섰다. 구양봉은 더 쫓아가지 않고 쓰러진 그녀를 살피기에 바빴다.
그녀는 곧 깨어났다. 두 여인이 달려와 부축하자 정신을 가다듬던 그녀가 황약사를 노려보았다. 구양봉이 중간에 나서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넘어지면서 다쳤는지 그녀의 머리에서는 빨간 피가 흘렀다. 눈을 무섭게 치켜뜨며 황약사를 노려보는 그녀는 아랫입술을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댔다. 아마도 자기의 미모에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 사내 앞에서 보일 수 있는 행동일 것이었다.
그녀가 구양봉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양선생, 저를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하며 고개를 숙이자 구양봉이 검손한 척 손을 들어 잠시 흔들었다.
"구양선생, 당신과 이 황약사 두 사람 중 어느 사람의 무예가 뛰어난가요?"
그녀다운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의 질문 속에 담겨진 것은 단순히 누구의 실력이 우월하냐는 것을 알고 싶은 뜻만은 아닐 것이다.
구양봉이 잠시 대답을 못하고 눈동자를 굴리자 그녀가 대신 나섰다.
"제가 듣기로는 선생은 천하에 드문 분이시고 무림에서 제일인자라고들 하던데, 이 황약사와는 어떻게 될런지 모르겠군요?"
"황약사 따위가 다 뭐야?"
구양봉이 그 말에 눈에 쌍불을 켜며 소리쳤다. 그녀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저 놈은 동사(東邪)지만 이 서독(西毒)을 당해내지는 못해!"
계속 자기 가슴을 칠 듯 분노하고 있는 구양봉을 주시하는 그녀의 입술 끝은 한층 묘하게 변해갔다.
그런데 황약사가 어느 때부터인가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혼자 빙그레 미소짓고 있었다. 그는 차츰 그녀의 교묘한 술책을 간파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구양봉의 자존심을 건드려 황약사와 맞서도록 종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태를 직감한 황약사가 은근슬쩍 구양봉을 떠보기로 했다.
"구양형, 우린 후일에 다시 만나 실력을 겨뤄보기로 합시다. 그때가서 서독인 당신이 강한가 아니면 동사인 내가 나은가를 가름해보는 게 어떴소?"
구양봉이 생각한 것이 있는지 묵인을 하듯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애가 타듯 앞으로 나선 것은 바로 그녀였다.
"내가 듣기에는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사람이 서독이고 천하에서 가장 이름난 사람이 서독 구양봉이라 하더군요. 하지만 당신도 결국 두려움이란 또 하나의 가슴을 지닌 사내인 줄 누가 알았겠어요?"
"지금 그대가 한 말의 뜻이 무언가?"
듣고 있던 구양봉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따지듯 물었다.
"제가 보건대 구양선생께서는 화산의 무예시합에 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듣자하니 얼마전 종남산 중양궁 뒤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화산에서 벌어질 시합 날짜를 정했다고 하더군요. 그때 그 장소에 소씨 거렁뱅이, 왕중양 그리고 이 황약사와 홍칠공 또한 남제 단황나으리까지 있었다던데요? 그런데 서독 구양봉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 뭐예요. 천하의 으뜸가는 고수들 중에 아마도 구양선생은 이름이 들어있지를 않나보죠?"
구양봉은 그녀의 말에 아픈 상처가 쑤시듯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는 원래 보통의 선비였으며 무예는 훨씬 후에 익힌 몸이었다. 그 사이에 곡절도 많이 겪었던 터라 무예에 대한 말만 나오면 썩 좋지 않은 기억 때문에 괴로웠던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부리는 개구리공은 어렵게 나중에서야 터득하게 된 것이고 지금의 성격 역시도 최근에서야 기르게 된 게 사실이었다. 그는 무슨 일에서든지 양보할 줄 모르고 본의와는 다르게 화를 잘 내게 되었는데 그게 버릇으로 굳어
져 현재는 세상사람들에게 가장 사악한 짓을 잘하는 인물로 비쳐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청하기를 노독물이라 자부해왔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곡절을 가슴에 묻어두려고 하던 구양봉의 심기를 그녀가 건드리고 말았다.
'네년이 황약사가 나타나니 나를 안중에도 넣으려 하지 않는구나! 네년의 그 심보를 내 모를 줄 아느냐? 이 구양봉의 재간을 업신여기고 있다만은 곧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구양봉은 겉잡을 수 없는 분노로 두 손을 파르르 떨기까지 했다.
"내가 중양궁 뒤 그 장소에 있지 않았다는 걸 그댄 어떻게 아나?"
그러면서 구양봉은 그 당시 어떤 논쟁이 일어났었는가에 대해 소상히 이야기했다. 지금 대협 왕중양은 이미 은거하여 그 활사인묘로 들어갔고, 여협 임조영(林朝英)은 병들어 죽었다. 그 연유는 일일이 캐어물을 필요는 없는 것이며 단지 그 후 최근 몇달 동안 허다한 변고들이 속출했었다. 구양봉은 이곳에 묵으면서 그녀와 개방의 은원(恩怨)에 발목이 잡혀 미처 종남산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할 틈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비록 몇달이 지났다 해도 그때의 일
을 잊고 있지는 않았다.
구양봉이 그런 사실을 밝히자 놀란 것은 황약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황약사는 그때 남제, 소씨 거렁뱅이, 홍칠공 등과 함께 중양궁 뒤에 있는 산 위에서 화산의 무예시합을 앞두고 '구음진경'을 쟁탈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소신을 펼쳤던 바있었다. 그는 천하에서 으뜸이라는 명예와 '구음진경'의 소유권을 무예시합의 승패로써 결정짓자고 주장했었다. 지금은 그 날짜가 임박해져서 그곳으로 가려던 판국이었다. 그런데 말을 듣고보니 결국 구양봉도 그곳 어디선가 숨어 있
었다는 게 아닌가. 황약사는 구양봉의 속을 알 수 없으니 좀더 지켜보며 사태에 태처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황약사는 과거에나 지금이나 구양봉이란 인물에 대해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오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그 단황나으리, 소씨 거렁뱅이, 왕중양만을 자기의 적수로 자리매김을 해두고 있었다. 구양봉은 훨씬 후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인물인데 황약사도 그가 차츰 풍운아로 변해가고 있다는 말만 들었을 따름이었다.
구양봉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황약사, 그대가 화산의 무예시합에 가는 건 내 상관할 바가 아니야. 허나 그대는 화산에 가기 전에 나와 먼저 싸워야겠네. 또한 그대가 나하고 싸워 이긴다 해도 화산에는 갈 수 있겠지만 그 '구음진경'을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걸세. 한편 만일 그대가 날 이기지 못하면 이곳에서 죽어 처량한 원귀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명심해두게. 그렇게 되면 그대는 한평생 '구음진경'과는 연분이 닿지 않는 인생으로 끝을 내고 마는 것이지."
황약사는 비웃고 말았다. 그의 실력을 아주 형편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왕중양이나 단황 나으리 등과 같은 인물과 비교될 수 있는 실력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황약사가 매우 여유롭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구양봉, 당신이 나와 싸우게 되면 화산 무예시합에 참가할 고수 중 하나가 줄어들게 돼 시합의 위신이 떨어질까 걱정이네."
"슬슬 비꼬듯 나를 깎아내리자는 속셈인데 당장 집어치우고 어서 한판 붙어보는 게 어떤가?"
갑자기 구양봉이 자세를 추스리며 나섰다.
이 순간을 가장 기다렸던 것은 바로 가짜 미립인 그녀였다. 구양봉이 곧 혈전을 벌이려 자세를 가다듬자 그녀는 한쪽에서 매우 만족스런 표정을 숨겼다. 이들 두 사람이 싸우는 틈을 타 미운산과 그의 자식들을 해칠 수 있으리라는 꿍심도 가슴 속으로 꾹꾹 채워넣는 눈초리였다.
곧 독사장을 치켜올린 구양봉이 황약사를 향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이 두 사람의 혈전을 지켜보는 요리사 형제들의 눈초리도 평범하지가 않았다. 이들은 고수 두 사람이 보여줄 엄청난 힘과 다양한 법수에 대한 기대 때문에 더욱 그러하기도 했다.
그런데 혈전은 그다지 심각한 상태로 변하지 않을 조짐을 보였다. 구양봉이 독사장으로 맹공격을 했으나 황약사는 그저 간단히 옥피리로 가볍게 방어할 뿐이었다. 옥피리로 구양봉의 독사장을 가르키며 교묘하게 방어를 하자 구양봉의 공격은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사태는 곧 진전돼갔다. 몇번을 그렇게 싱겁게 공격과 방어를 주고받다가 황약사가 갑자기 온몸으로 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바로 "낙영검법"을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황약사의 이 검법은 아주 기기묘묘해서 손에 짧은 옥피리(玉簫)를 들었을 뿐인데도 구양봉의 독사장 위력에 뒤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구양봉의 무예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삼사십합 정도 싸우고나서 서로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적수가 만만치 않다는
느낌을 동시에 받게 된 것이었다. 악전고투를 벌이고는 있지만 쉽게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는 처지들이었다.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그녀가 드디어 음모를 꾸미려 했다.
"묘대야, 이틈에 가서 저놈을 죽이지 않고 뭐해?"
그녀가 뻗은 손가락 끝에는 바로 미운산이 걸려 있었다. 미립과 미기 역시도 미운산 곁에 와 있었기에 결과적으로 세 사람 모두가 그녀의 표적이 되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미운산은 바닥에 주저앉아 황약사와 구양봉 간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명을 받은 묘대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황약사와는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던 그로서는 다섯째의 원수를 갚지 못해 안달이 나있었다. 그런데 그나마 대신 미운산을 치게 되어 속으로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더군다나 다리마저 못 쓰게 된 미운산 정도를 상대하는 것이었기에 어느 때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아닐 수 없었다.
곧 묘대야는 형제들을 이끌고 미운산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곤 미운산과 미립 남매를 에워싼 채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저 여인이 너를 죽으라고 했으니 원귀가 되더라도 우릴 원망말아라."
묘대야는 내심 황약사에게 뻗친 분노 때문에 미운산을 어서 북북 찢어죽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까 자기의 식칼로 국자를 두 동강 내어버린 황약사에 대한 화풀이도 한몫했다. 황약사에게는 차마 대들지 못한 처지를 미운산에게 만회해보려는 속셈으로 가득 한 묘대야가 으르렁댔다. 그러더니 곧 허연 이빨을 내보이며 맨주먹으로 미운산에게로 덮쳐들었다.
"죽어랏!"
연속 묘대야의 장이 미운산에게로 뿜어나갔지만 헛수고였다. 미운산이 잘려나간 다리를 한손으로 부여잡은 채 안간힘을 다해 공격을 피했다.
"아버지!"
이때 미립이 달려들었으나 곧 묘대야의 억센 주먹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미립아!"
미운산의 얼굴엔 독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마음대로 몸을 가눌 수가 없어 안타까운 심정일 뿐이었다.
둘째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들더니 미운산에게로 들이밀었다.
"미방주, 우리 도박을 해보자꾸나. 네놈의 어깨죽지에서 내가 살코기를 아흔일곱근을 발라낼 수 있나 없나 한번 지켜보라구."
곧 미운산의 적삼자락이 썩 하는 소리와 함께 베어졌다. 미운산이 몸을 틀었지만 어깨를 빗나간 둘째의 칼은 가슴의 근육을 자르고 말았다. 삽시간에 검붉은 피가 미운산의 가슴에서 울컥 쏟아졌다.
"으......"
쓰러졌던 미립이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네째인 백수십권(百手十拳) 우사(虞四)가 막아섰다.
미운산은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아냈다. 비명을 지르지 않는 이유는 황약사 때문이었다. 자신의 비명을 듣고 황약사가 잠시 헛점을 구양봉에게 노출시킨다면 더욱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황약사만 위험에 처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맞게 되기 때문이었다.
일은 차츰 묘하고 더 흥미롭게 진행돼 가고 있었다. 바로 때를 맞춰 소씨 거렁뱅이가 어디서 소식을 듣고 나타났는지 너털너털 걸어들어오는 것이었다.
"여기선 아주 난리법석이 벌어졌군!"
소씨 거렁뱅이는 조금도 주위에 대해서 경계를 하지 않는 걸음으로 미운산 앞에까지 다가왔다.
"당신은 아직 무사하구만요?"
모두들 그런 소씨 거렁뱅이의 행동에 넋을 놓고 있는 표정들이었다. 미운산 역시도 낭패한 기색이었지만 얼른 수습책을 떠올려 소씨 거렁뱅이에게 말했다.
"소씨, 임자가 마침 잘 와주었네. 이 개방의 일을 그대까지 모른 척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자 소씨 거렁뱅이가 힐금힐금 미운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 당신의 탓이란 말이요. 개방총부에 더러운 년을 끌어들일 때부터 내 알아봤다구. 저런 요물같은 계집을 끌어들였으니 개방천하가 편할 수 있겠소이까?"
미운산은 소씨 거렁뱅이가 휘두르는 질책에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함숨을 크게 바닥으로 부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씨 거렁뱅이는 다섯 요리사 쪽으로 눈길을 주다가 불현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죽어자빠진 광경을 보게 된 것이었다.
"하하, 오늘은 참말 기분이 좋구나. 다섯 놈 중에 한놈이 저렇게 죽어나갔으니 나머지도 곧 뒤를 따르겠군. 보아하니 개방을 해치던 놈들도 거의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 같은데!"
하고 떠벌인 소씨 거렁뱅이의 눈길은 곧 가짜 미립에게로 득달같이 달려가 꽂혔다.
"오라, 네년도 여기 있었구나. 나를 거듭 해치려 들더니 바로 여기서 죽음으로 사죄를 하려고 기다렸더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씨 거렁뱅이에게로 적의에 찬 시선을 보내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그런 태도를 툴툴 털어내며 애교까지 떨어댔다.
"제가 언제 당신을 해치려들었다고 그러세요?"
"흥!"
그녀의 말을 무시해버린 소씨 거렁뱅이가 미운산에게로 다시 얼굴을 주었다.
"당신이 개방의 일을 관여하려 하지 않았기에 개방에 이미 내란이 일어났던 것도 몰랐던 것이요......"
소씨 거렁뱅이로서는 자신이 겪었던 모든 일에 대해 소상히 털어놓으려고 마음 먹었었다. 그러나 미운산의 수심으로 가득 메워진 낯색을 보고는 더는 괴롭혀서는 않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런데 눈치를 챈 미운산이 다급하게 물어왔다.
"개방의 일이 어찌 되었단 말인가? 어서 말해주게나?"
소씨 거렁뱅이는 속으로 긴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이미 결심을 굳힌 뒤였다. 그가 날카롭게 그녀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네년은 어서 네 계집들을 데리고 물러가랏!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요절을 내고 말테다!"
그녀는 그 와중에서도 얼른 앞뒤 상황의 판도를 가름해보는 듯했다. 그녀는 자기 주변에 있는 몇사람으로 과연 미운산을 비롯해 황약사와 소씨 거렁뱅이까지도 물리칠 수 있나를 따져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등장한 소씨 거렁뱅이는 온전한 몸을 갖고 있지만 미운산은 이미 화살에 놀란 새와 같은 꼴이었다. 그렇다면 오로지 황약사와 소씨 거렁뱅이만이 대적하고 나설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 쪽의 사람이었다. 두 명 정도라면 충분히 해치울 수가 있긴한데 구
양봉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완전한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못했다고 판단한 그녀는 구양봉에게 충분한 신뢰를 품고 있지를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무예보다는 눈치 하나로 자기 몸만을 간수하려는 요리사 형제들과 등 뒤에 병풍처럼 둘러서있는 십여명의 여인들. 그러나 이 여인들의 무예는 그다지 보잘 것 없었기에 단순히 바람막이 역할밖에는 하지 못할 듯했다. 그녀가 마음 속으로 가장 염려를 하는 것은 바로 느닷없이 생선냄새를 맡고 날아든 도둑고양이
같은 소씨 거렁뱅이였다. 과연 그를 물리칠 수 있을까 하는 게 그녀의 고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둘째가 소리를 지르며 상황을 뒤바꾸려는 듯 나섰다.
"싸워서는 안돼요!"
아마도 둘째는 줄곤 고심을 하는 그녀의 얼굴만을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그녀가 오랜 생각 끝에 이를 악무는 것을 보고는 나선 듯했다. 그는 이 싸움에 승산이 없다고 간파를 한 것이었다. 미운산이 아무리 상한 다리로 반항을 한다 해도 간단히 죽일 수는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소씨 거렁뱅이에게 있었다. 구양봉과 황약사와 맞먹는 그와 맞선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둘째는 다시금 황약사나 소씨 거렁뱅이와 싸우기는 싫었다.
"큰형님, 내 보기엔 그만 두는 게 가장 현명할 것 같수다."
하며 둘째가 얼른 묘대야의 반응을 살피기 시작했다.
묘대야는 둘째의 재주를 믿었다. 다섯 형제들 중 네째가 가장 약싹빠른 면이 있었지만 일을 처리해나가는 데에 있어서는 둘째의 생각이 매번 밝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둘째가 그렇게 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란 믿음이 갔다. 하지만 사태가 긴박한 탓인지 묘대야는 입으로는 그 반대의 반응을 내보이고 말았다.
"도체 넌 지금 누구 편을 들려고 하느냐?"
"큰형님, 싸워서는 안됩니다요. 다섯째를 끌고 어서 이 자리를 피합시다!"
더욱 조급해진 둘째가 외쳤다.
묘대야는 매우 난처한 입장에 빠지고 말았다. 얼굴에 성난 물결을 닮은 어지러운 선을 그리고 있는 둘째를 바라보았다. 결코 허튼소리로 떠들어대는 것같지는 않았다. 순간 묘대야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예상대로였다. 그녀는 둘째의 행동을 못마땅히 여겨 매서운 눈초리로 살기마저 내뿜고 있었다.
묘대야가 이빨을 앙물더니 그녀에게로 다가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
"다섯째가 죽어 우리 형제들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프고 혼란스럽습니다. 우린 이만 동생의 시체를 끌고 먼저 떠나야겠으니 훗날 다시 만나 이야기합시다."
단호한 입장이었다. 묘대야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나머지 동생들이 다섯째의 시체를 수습했다. 그리곤 그들은 무리를 지어 천천히 떠나갔다. 그녀는 입이 굳어진 형상으로 떠나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한편 구양봉과 황약사의 싸움은 좀체 그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황약사가 구양봉의 공격을 피하며 얼른 미운산의 동정을 살폈다. 몹시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미운산을 본 그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비록 자신이 급한대로 피를 멈추게는 해두었지만 잘려나간 다리의 통증 ㄸ문에 미운산의 고통은 클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고 워낙 상처가 큰 탓인지 다시금 피가 싸매둔 바지천을 흠뻑 젖시고 있는 것도 보였다.
미립과 미기가 그의 통증을 가라앉히려고 옆에서 무던한 애를 쓰고는 있지만 별 소용이 닿지 못하는 듯했다. 어서 다시 손을 쓰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란 것을 황약사는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황약사는 구양봉과 함께 이 자리를 떠날 수만 있다면 미운산이 좀더 자유로워질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아직 살기를 지우지 못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는 구양봉에게 황약사가 소리쳤다.
"노독물, 내가 네놈과 앞으로도 삼백합은 더 싸우고 싶은데 네놈 생각은 어떠하냐?"
가능하다면 그와 이 자리를 벗어나 승부를 내더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구양봉은 성격 탓으로 황약사와 싸우면서 한층 흥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잠자던 법수와 법식이 고개를 쳐들고, 날개를 단 듯 용솟음치기 때문에 구양봉은 마다할 리가 없었다. 평소에 마땅한 적수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던 그로서는 황약사의 이같은 제의가 오히려 반가웠을 것이다.
"황약사, 삼백합이 아니라 평생이라도 싸울 각오는 돼있다! 그렇다면 우선 경공의 솜씨를 각자 부린 다음 싸워보도록 하자!"
쾌히 받아들이는 구양봉을 확인한 황약사가 옥피리 끝으로 그의 공문(空門)을 가리켰다. 이때 구양봉이 독사장을 크게 휘두르자 황약사는 몸을 돌려 저멀리 날아가버렸다. 구양봉이 소리쳤다.
"기다려라!"
하며 구양봉 역시 자기의 독특한 경공인 봉황력으로 황약사의 뒤를 따라 날아갔다.
이젠 소씨 거렁뱅이와 그녀 그리고 한무리의 여인들만 남은 꼴이었다. 미운산은 아직 미립 남매의 간호를 받으며 한쪽에서 고통을 참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멀리 날아가버린 두 사람의 끝을 더듬듯 한동안 빈 하늘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두말 하지 않겠다. 네년을 죽이고 싶지 않으니 어서 계집들을 데리고 물러가라!"
그녀가 뭐라고 소씨 거렁뱅이에게 소리치려는 순간 저벅저벅하는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씨 거렁뱅이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구양봉이 황약사를 따라 가버리고 잠시 마음을 놓고 있는 사이 다시 요리사 형제들이 나타났을 거라 판단했다. 아닌게아니라 그 소리를 들은 그녀의 얼굴에도 남다른 기운이 묻어났다.
그러나 그같은 염려와 기대는 일순간 무너져버렸다. 오히려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미운산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곧 한무리의 사람들이 뜨락 안으로 들어섰는데 바로 개방의 이대 집법장도가 이끄는 제자들이었다.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이 가까이에 와서 미운산을 살폈다. 이들은 미운산의 다리 한쪽이 잘려나간 것을 보고는 놀라움에 치를 떨었다. 주위가 범상치 않음을 느낀 이들은 큰 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예감했는지 모두들 심각한 얼굴빛을 만들었다.
"호호호, 집법장로들이 아니십니까요?"
하며 나선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이들에게로 바싹 다가서며 회심의 미소를 입꼬리에 매달았다.
"당신들 두 사람이 왔으니 이젠 안심이예요. 두 분 장로께선 자신들이 하신 맹세를 기억하고 계시겠죠? 그렇다면 어서 손을 써 저 미운산과 그 일가를 죽이고 여기에 있는 소씨를 총부로 끌어가세요, 어서욧!"
불현 흰 이빨을 드러내며 그녀가 날카로운 소리로 이들에게 명령했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입장이 매우 난처한 듯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그녀의 명령대로 미운산을 죽이자니 난처할 뿐이었다. 그는 바로 자기들의 옛 방주가 아니던가?
이들이 열적은 기색을 보이자 그녀가 다시 다그쳤다.
"소씨 거렁뱅이가 개방의 규율을 어겼다는 것은 장로들께서 더 잘 알고 있겠죠? 오늘 저자를 잡아가는 것이 결코 잘못 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아시겠죠?"
이들은 소씨 거렁뱅이를 바라보며 다시 곤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소씨 거렁뱅이 역시도 비록 타구봉은 빼앗겼지만 개방의 방주자리에 있던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개방의 전임방주를 죽이고 또 붙잡아야하는 일인데 정말 내키지가 않았다.
소씨 거렁뱅이가 말했다.
"네년이 개방의 장로들을 시켜 나와 미방주를 해칠 수 있다고 보느냐? 어림도 없다. 이 사람들은 결코 그런 짓은 하질 않아. 내년이 어리석은 공상에 젖어있을 뿐이라구!"
소씨 거렁뱅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호호호! 두 분 장로들께서는 정말 그런가요? 호호, 전임방주라고 사정을 봐주겠다는 말씀인가요? 음......"
그녀가 웃음을 싹뚝 거둬가더니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곧 끼고 있던 팔짱을 풀어버리며 그녀가 다시 말했다.
"좋아요. 오늘은 이 정도로 해두겠어요. 그리고 집법장로들은 나를 따르시오!"
이때서야 두 장로들은 속으로 무겁게 가슴을 누르고 있던 한숨을 토해냈다. 이들은 그녀의 말에 큰소리로 대답하고는 급급히 따라갔다.
이들이 사라지자 소씨 거렁뱅이는 미운산이 있는 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미운산이 일그러진 얼굴로 미소 비슷한 표정을 애써 만들어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쉽사리 떠나간 것은 보다 더 교묘한 술책을 부리려는 포석이란 것을. 사실 소씨 거렁뱅이와 미운산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갈등을 그녀 역시 알고 있던 터라 이들 두 사람을 한곳에 남겨둘 경우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을 노렸던 것이다. 그런 사실마저 알고 있는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
만 바라보았다.
소씨 거렁뱅이의 눈에 비친 미운산은 분노와 원한 그리고 연민과 슬픔 등 어지러운 감정들이 교차하고 있는 듯했다.
"당신은 왜 방주의 자리를 일부러 내게 물려주고 또 홍칠공에게까지 물려주었소?"
비로소 입을 뗀 소씨 거렁뱅이가 약간 격양된 투로 물었다.
"나와 홍칠은 그 후부터 아주 혹독한 마음고생을 겪었단 말이요."
그러자 미운산이 설명을 하려고 상체를 일으켰다. 미립이 옆에서 미운산의 등을 받쳐주었다. 다시 총명한 기운을 되찾아가고 있는 미기도 미운산의 한쪽 팔을 잡았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놈들이 내 아들딸을 죽일까봐 어쩔 수 없었소."
아버지로서 자식을 아끼는 것은 인간이 지닌 가장 소중한 행동이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소씨 거렁뱅이로서도 더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미운산이 소씨 거렁뱅이를 향해 비꼬듯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대는 역시 나보다는 못하단 말이야."
"무슨 소리요?"
소씨 거렁뱅이가 돌연한 미운산의 발언에 눈을 부라렸다.
"난 비록 이처럼 쓸모없는 꼴이 돼버렸지만 누구처럼 타구봉은 잃어버리지 않았거든."
그러나 비록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미운산의 얼굴에는 조금도 원망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소씨 거렁뱅이가 말했다.
"그래 맞아요. 당신이 녹옥죽봉을 잃은 게 아니라 바로 내가 잃은 것이지. 하지만 난 그 녹옥죽봉 때문에 골치가 아팠소. 도대체 어디에 놔두어야할지를 몰랐던 말이요. 홍안루에서 요리를 볶을 땐 부뚜막에 놓았더랬소. 그것이 옥으로 된 것이었으니 망정이지 만일 나무였다면 벌써 새카맣게 타버렸을지도 모르지."
이렇게 탄식을 한 소씨 거렁뱅이가 멋적게 웃었다. 그러자 미운산도 소리내어 웃었고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아주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음......"
미운산이 웃다가 다리의 통증이 시작되었는지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소씨 거렁뱅이가 황급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내가 당신을 데리고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겠소."
하며 미운산의 어깨를 짚자 미운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황혼이 붉게 하늘을 물들여가고 있었다. 대문을 통해 수레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오고 있었다. 수레에는 미운산이 탔고 미립이 뒤에서 밀고 있었다.
미립은 옆에서 비칠대며 걷고 있는 미기를 돌아보다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미립은 속으로 다시는 임안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홍칠 역시도 찾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를 편히 모실 수 있는 거처를 찾아 동생과 한평생 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어느정도 혼자의 힘으로 이 버거운 삶을 꾸려나가게 되면 청등고불(靑燈古佛)을 찾아가서 여생을 보낼 마음이기도 했다.
쓰라린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아버지인 미운산을 바라보는데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미운산은 누군가를 향해 계속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가 미워서 내는 소리인지 혹은 연민의 정이 깃들어 있는 소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수레를 끌던 소씨 거렁뱅이가 걸음을 우뚝 세우더니 미기에게로 다가왔다. 미기를 번쩍 한손으로 안아든 그가 미소를 보이면서 다시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그는 미기를 품에 안은 채 계속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미기를 유독 귀여워했었다. 미기가 이같은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이겨냈다는 말을 듣고는 혼자 결심한 바가 있기도 했다. 자신의 무예를 미기에게 전수해주려는 생각이었다.
이들은 지옥같았던 시간들을 뒤로 한 채 부지런히 밤길을 걸어나갔다.
노완동 주백통은 그 수화은포의 주인에게 결국 속아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주인의 감언이설에 속아 이 집에 갇히고만 꼴이었다.
차츰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자 노완동은 흡 하고 온몸을 엄습하는 공포를 예감했다. 이러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버리지는 않나 두려움이 생겨났던 것이다.
'조심하지 않다가 결국 주인에게 당하고 말았구나. 그놈의 법수를 보니 틀림없이 철장방의 무리 중 하나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노완동의 운명은 철장방 놈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는 말인가?'
노완동은 문앞에 기댄 채 잠시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노완동이 대리에 가서 그곳 황제인 단지흥을 만났었다. 두 사람은 신분 차이가 너무 커서 서로 어울릴 수가 없는 입장이었지만 노완동은 자기의 재주를 믿고 거침없이 대했던 것이다. 그는 단지흥에게 대뜸 호기를 부렸다.
"당신이 바로 남제 단지흥이요? 난 당신을 찾아온 노완동 주백통이라 하오."
단지흥은 그의 거침없는 행동을 오히려 사심없는 뜻으로 보고 물었다.
"그래, 그대는 날 찾아 뭘 하려는가?"
"내가 종남산에서 천리나 되는 길을 걸어와 당신을 찾은 건 요긴한 일이 있기 때문이요. 말하자면 당신을 찾아 한판 놀아보자는 뜻이요."
이 말에 단지흥은 물론 그 시위(侍衛)들까지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본 노완동이 머리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대리사람들은 진심으로 불공을 드리며 그래서 모두들 인자하다고들 하더군요. 그리고 대리는 예의의 나라라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처럼 사리를 모르니 정말 불쌍하고 한편 실망도 큽니다."
노완동이 탄식조로 말하자 단지흥이 양미간을 모으며 다시 물었다.
"그대가 나에게 조언이라도 할 심사인 것 같은데 어려워하지 말고 말해보게나."
그러면서도 단지흥은 끝까지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불(佛)이란 무엇인가? 불이란 곧 마음이 너른 것을 말하는 거요. 마음이 끝없이 넓어 서른두 개의 지옥과 서른여섯 층의 하늘이 있게 되는 거요. 그러나 불심이 제 아무리 넓다해도 난 놀이를 즐기는 것을 으뜸으로 치고 있소."
단지흥은 노완동의 말이 매우 신기하고도 흥미롭게 비친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은 채 노완동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노완동은 단지흥의 반응이 시원치 않다고 믿고는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부처도 완심(玩心)을 갖고 있는 거요. 부처님이 웃으면 천하에 수많은 남녀들이 미쳐나고 부처님이 울면 그 눈물에 구대부주(九大部州)가 눈물에 잠기지요. 또한 부처님이 심술을 부리면 천하에 흉년이 들고 부처님의 기분이 좋아지면 그해에 풍년이 든다는데 결국 부처님의 변덕은 죽끓듯 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요?"
"하하하!"
다시 단지흥이 매우 재미있어 하면서 손뼉까지 치는 것이었다.
"그래, 그대의 말이 맞소. 부처님은 정말 심술궂은 일만 하시거든."
주변의 시위들도 단지흥의 행동에 흐뭇해했다. 수년간 단지흥을 지켜왔지만 이처럼 유쾌해 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덩달아 웃음꽃을 활짝 피웠으며 노완동을 다시 한 번 흥미로운 눈초리로 보았다.
단지흥이 깎듯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기왕 이렇게 왔으니 나의 황궁에서 여러날 묵으면서 함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세."
이날부터 노완동은 대리에 묵게 되었는데 날마다 이국적인 풍경에 취했으며 이역의 산해진미를 맛보았다. 그는 대리 황궁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시위들은 그가 무예는 대단하지만 행동이 천진스런 어린아이 같은 것을 보고는 별 경계와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노완동이 황궁 안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도록 오히려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노완동의 진가는 슬슬 발휘되기 시작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노완동은 숱한 말썽을 빚어내며 나중에는 황궁 안에 일대의 풍파까지 일으키고야 말았다. 노완동이 부린 풍파가 단지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어 노완동은 황궁을 빠져나오고 만 것이다.
바로 그 황궁을 빠져나온 길에 지금의 이 수화은포에 들리게 된 것이었다. 노완동은 그때 잠시 누렸던 여인과의 꿀맛같은 시간을 생각하면서 바로 이 상점에 들린 길이었다. 그 여인에게 줄 장신구를 살 요량이었는데 뜻밖에도 목숨까지 위태롭게 되고보니 노완동은 한마디로 죽을 맛이었다.
노완동은 차츰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난 눈을 못 쓰게 되어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또 움직이지도 못한 채 이곳에서 죽을 수밖에 없구나! 여긴 재미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곳이다. 문도 이렇게 밖에서 잠겼고......'
속으로 한탄을 하던 노완동은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차가운 느낌에 깜짝 놀랐다. 바로 자기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문은 쇠로 주조하여 만든 것이었다. 이번엔 역시 하나밖에 없는 창쪽으로 가 더듬어보았지만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당기고 밀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개자식들! 집을 왜 하필이면 이따위로 만들었을까? 보아하니 나같은 사람들을 해치려고 만든 것은 아닐까?'
"야! 이 멍청한 철장방놈들아! 한겨울에 벼락맞고 장마철에 얼어죽을 놈들아!"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별의별 욕설을 다 퍼부어도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사람 없었다.
'좋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 한번 벽을 부셔보는 거다!'
아무래도 강쇠로 된 문보다는 벽이 수훨할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노완동은 뒤로 약간 물러선 채 온몸으로 기를 모았다. 그리곤 벽을 양손으로 짚고는 있는 힘을 다해 힘껏 밀었다.
뚜둑!
그런데 그만 한쪽 팔이 어긋나고 말았다. 벽은 조금도 움직이지를 않았고 노완동의 팔만 보기좋게 상하게 된 것이다. 다만 벽에 묻어있던 회가루가 부실부실 노완동을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나붓거리며 떨어질 뿐이었다. 팔이 점점 부어오르고 통증이 심해 그대로 서있을 수가 없었다. 주저 앉은 노완동은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구천인, 이 망할놈 같으니. 네놈의 철장방에는 쓸만한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나! 그런데도 무슨 철장이라고 허울좋게 떠벌이느냐? 모두 니장(泥掌)에다 목장(木掌)이 아니면 모두 두부장(豆腐掌)들 뿐이다!"
불현 니장을 생각하니 노완동은 구역질이 났다. 그러나 한편 두부장을 떠올리니 구미가 동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먹을 수 있는 것이며 흥미로운 것이기도 했다. 앞으로는 철장방 대신 두부장이라고 부르리라. 노완동은 속으로 다짐하며 두부장! 두부장! 연신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간이 감에 따라 차츰 두 눈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댈 수도 없고 하여 다시 기공을 부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너무 통증이 심하고 어긋난 팔까지 신경이 쓰여 조용히 기를 모을 수가 없었다. 결국 두부장이니 구천인 어쩌구니 하며 줄기차게 욕을 퍼붓다가 지쳐 쓰러진 채로 잠이 들고 말았다.
온몸이 요동을 치듯 흔들리는 것을 느껴 잠에서 깬 노완동은 깜짝 놀랐다. 자기는 지금 수레에 실린 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었다. 수레는 덜컹거리며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을 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수레를 모는 사람은 예상대로 철장방사람이었다. 그 마부는 큰소리로 말을 몰았다. 말은 오솔길로 급히 달려갔다.
뒤를 돌아보니 철장방 사람들이 수없이 수레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수레를 모는 이에게 계속 욕설을 퍼부으며 달려오고 있는 꼴이었다. 마부가 인정머리 없이 자기들을 험한 산길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수레를 따라 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레는 얼마후 멈춰섰다. 노완동은 자신이 지금 어느 곳에 와 있는지조차 알지를 못했다. 다만 자기가 있는 곳이 한 산봉우리 위며 그 아래로 난 계곡이 매우 아름답다는 것만 느낄 따름이었다.
노완동이 계곡으로 펼쳐져 있는 장관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렇게 놀기 좋은 곳도 다 있었던가? 나의 사형 왕중양의 그 종남산보다도 좋은 곳이로구나. 내가 어찌하여 이렇게 기막힌 곳을 몰랐던가. 벌써 와봤어야 하는건데. 임안에 가선 뭣 하겠는가. 또 수화은포에 가선 무슨 낙이 있겠는가. 내가 수화은포에 가지 않았던들...... 눈은 멀지 않았을 것인데......?'
그런데 불현듯 노완동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때서야 생각이 났던 것이다. 자기는 지금 수화은포에 갇혀있는 몸이고 또한 눈까지 멀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어째서 눈앞의 풍경은 아름답고 또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노완동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냐? 도대체 이곳이 어디길래......"
그러자 마부가 잘근잘근 이빨로 씹듯 말을 내뱉었다.
"이곳이 어딘지 묻지 말아! 죽고 싶어 안달이라도 났더냐? 아가리를 닥치지 않았다간 콱 죽여버릴테다!"
그러자 다시 누군가 소리쳤다.
"왜 떠들어대는 거야? 절정곡(絶情谷)에 와서 떠들다가 죽고 싶어서 그래?"
절정곡? 그럼 이 아름다운 계곡을 절정곡이라 부른다는 말인가? 노완동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뻑을 딱 하고 치면서 노완동이 좋아했다.
"그렇지! 그말이 맞아. 인간이 절정을 느낀다? 그래, 이 절정곡에서 한평생 살면 정말 신나겠는데! 내가 여기서 살아야겠어!"
그러자 다시 마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놈이 여기서 살고 싶다고 해서 살 수 있는 줄 알어?"
이 말을 받아치듯 절정곡이란 말을 처음 꺼낸 사내가 말했다.
"네놈은 이곳을 무슨 경치좋고 물맑은 산골쯤으로 여기나 보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 절정곡에 와 살려면 모든 속념을 버리지 않으면 안돼!"
그는 바로 절정곡에서 나온 사람이었는데 청지기 정(丁)나으리라고 마부가 불렀다.
노완동이 대꾸했다.
"그럼 더욱 잘 됐네. 난 바로 세상의 모든 때를 버리고 싶은 사람이라구."
마부가 절정곡에서 나온 사내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청지기 정나으리, 공손곡주(公孫谷主)에게 말씀드려 이놈을 잘 감시하라고 하시오. 놓쳐서는 절대 안됩니다."
노완동이 펄쩍 뛰면서 손을 내저었다.
"이 절정곡이 아주 좋은 고장이라 생각하는 내가 왜 도망을 가겠어?"
마부가 힐끔 청지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구방주님께서 화산의 무예시합에 참가하게 되시니까 각별히 공손곡주께 이놈을 지켜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만일 구방주님께서 화산에서 무슨 실수라도 있게 되면 이놈을 다그쳐 '구음진경'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때서야 노완동이 사태를 파악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들은 지금 날 인질로 삼아 사형을 괴롭히려는 수작임이 틀림없구나. 나의 사형은 날 좋아하지도 않는데 어찌 네놈에게 '구음진경'을 내어준단 말이냐? 정말 우습구나.'
마부는 이런 노완동의 생각을 모르고 사정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마부가 청지기에게 예를 올렸다.
"정나으리께서 이놈을 데리고 입곡을 하여 공손곡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우리들은 돌아가 구방주님께 복명(*命)하겠습니다."
청지기 정나으리라고 불리운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구방주님께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곡주님과 곡주부인께서 구방주님께 문안을 전하더라고 말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시 예를 주고 받더니 갈라졌다. 청지기는 철장방 사람들이 계곡을 빠져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주시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마부와 철장방 사람들이 걸음을 세워 그의 말을 기다렸다. 청지기가 정색하며 말했다.
"계곡을 드나들 때 절대로 화초들을 건드려서는 안됩니다. 그 화초들에는 독이 있어 중독되기 쉽거든요. 만약에 중독이 되면 우리 절정곡에서도 해독을 할 수 없으니 절대로 조심해야합니다!"
이 말에 모두들 조심스럽게 발밑과 주위를 살피며 계곡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청지기가 고개를 돌려 노완동에게 말했다.
"우리도 가세."
노완동은 수많은 계곡을 지나 울퉁불퉁한 길을 걸었다. 이 계곡 주변의 풍경은 아주 아름다워 노완동의 가슴은 벌렁벌렁 요동을 쳐댔다. 온통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돼 있는 길 양옆은 보기만 해도 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그런데 그 꽃은 아주 기이하여 꽃가지가 길고 구불구불하여 마치 견우화(牽牛花)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견우화보다 분명 아름다운 꽃이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붉은색과 자주색 그리고 흰색이 서로 어울리면서 계곡 안은 온통 꽃향기로 넘쳐나고 있었
다. 그 꽃들은 아주 탐스럽고도 컸다.
줄곤 시선을 빼앗기고 있던 노완동이 말했다.
"참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그러면서 마음에 드는 꽃을 따려고 손을 내밀었다. 순간 청지기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살고 싶지 않으면 그 꽃을 따게나."
화들짝 놀란 노완동이 입맛을 다시며 손을 거두었다.
"이꽃이 그렇게 무서운 꽃인가?"
"이꽃은 정화(情花)라고 하는데 칠정육욕(七情六欲)을 가진 사람이 이 꽃을 만지면 살아날 가망이 없지. 말하자면 그대가 이꽃을 만진 후 마음 속으로 남녀간의 정사(情事)를 생각하기만 하면 곧 가슴이 터질듯 아파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거야."
"참 기이하군!"
노완동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꽃들을 둘러보았다. 속으론 믿고 싶지 않았지만 행여 사실일까봐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노완동이 끌려간 곳은 절정 계곡을 안에 있는 한 넓은 대청이었다. 그곳에는 쇠로 만든 사람이 둘 서 있었는데 하나는 왼쪽 그리고 하나는 오른쪽에 각각 위풍스런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 쇠로 만든 사람 중 왼쪽은 관복을 입은 채 머리에는 조천관(朝天冠)을 쓰고 있는 형상이었다. 또한 손에는 규얼(圭*)을 들고 있기도 했다. 그 쇠사람은 사내였는데 옷은 천자(天子)의 조복(朝服)처럼 보였다. 유심히 살펴보니 황제같기도 했다.
한편 오른쪽에 있는 것은 반대로 여인의 모습이었다. 매우 미인이었으며 몸매 약간 풍만한 듯 하였지만 천하의 절색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노완동은 쇠사람을 보자 호기심이 발동해 가까이 다가갔다.
"난 무슨 사람이 여기에 꼼짝않고 서 있는가 했더니 진짜가 아니었군!"
손으로 만져보니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러자 청지기가 말했다.
"노완동, 그대는 이 절정곡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가?"
그러나 노완동은 청지기가 한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은 곡주의 행위규범 중 하나였다. 그런데 노완동은 으레 이곳에 온 사람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리 하겠소. 기꺼이 그리 하리다."
사실 노완동은 이곳을 나가고 싶지가 않았기 ㄸ문이었다. 그의 뇌리 속에는 늘 한 사내와 한 여인이 박혀있어 괴로웠다.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될까봐 한편으로는 두려움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 탓에 노완동은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었다.
'이 절정곡에서 숨어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러면 한평생 그들과 마주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테니까. 화산의 무예시합에 그 사내는 분명 참가할 것이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고수들이어서 그 시합은 볼만한 시합이 되긴 하겠지. 그런데 난 쉽게 갈 수가 없구나. 사실 그 사내를 만날까 두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사내가 그곳으로 간다면 그 여인 역시 참가할 게 분명하다. 그 사내보다는 여인과 마주치는 게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노완동은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래서 이 절정곡에서 죽을 때까지 살겠노라고 마음을 일시적이나마 굳혔던 것이고 청지기의 물음에도 얼른 대답한 것이다.
청지기가 말했다.
"이쪽에 있는 사람은 황제인데 이전 조대의 황제인 당현종(唐玄宗)이야. 이 절정곡의 규례에 의하면 그댄 검으로 이들을 찔어야 하는데 반드시 세번을 찔러야 하네. 그래야 비로소 이 절정곡에서 살 수 있게 하거든. 다른 쪽에 서있는 여인은 저 황제의 황비인데 이름은 양귀비(楊貴妃)라고 불러."
노완동이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만해. 알만 하다니까. 난 저 사람을 잘 알지."
"그대가 뭘 안다고 그래? 내가 말할 땐 잠자코 듣고나 있어."
청지기가 꾸중을 하자 노완동의 입이 삐죽 나왔다.
'사형 왕중양이 말한다면 난 찍소리도 못하고 가만 있을테지만 네간놈이 누구더라 명령이야? 네놈만 말하고 난 듣기만 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냔 말이다?'
하지만 노완동은 은근히 득의양양하여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노완동이 방금 이곳에 온 탓에 네놈이 아직 날 알지 못할테지. 그러니 난 당분간 어리숙한 체 해야겠어. 이 계곡에 거주할 수 있도록 허락이 떨어지면 그때 내 마음대로 하면 되니까.'
그런데 청지기가 이런 노완동의 속내를 벌써 들여다보고 있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 절정곡에 와서는 반드시 곡주의 명령대로 해야 해. 절정곡 사람들은 먹고 입을 근심을 안해도 되고 고생스레 일하지 않아도 되네. 이곳에서는 매일 한가하게 보낼 수 있으니 그댄 복을 누릴 수가 있어. 하지만 이 모두가 곡주의 명령이 없으면 가능하지가 않단 말이지."
"정말로 농사도 짓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요?"
청지기가 고개를 끄덕여주자 노완동이 매우 기뻐했다.
"이곳이 종남산 전진교가 있는 곳보다 훨씬 좋은 곳이로군."
"그대가 입곡을 하려면 관례를 따라 이 황제를 세번 칼로 찌르고 또 저 양귀비도 역시 세번 찔러야 한다네."
노완동이 속으로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 현종황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단 말인가? 피리도 불 줄 알고 북도 두드릴 줄 아는 등 재주가 많은 사람인데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해꼬지를 하려면 저 양귀비에게 할 것이지. 저렇게 예쁘게 생겼으니 보는 사람마다 마음을 다치게 하거든. 인물이 잘 났으면 그만이지 왜 황제를 바보로 만들어놓았단 말인가. 미인이란 정말 우환을 몰고 다니는 항아리라구.'
얼마전 노완동이 대리사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 것도 그 자신의 허물보다는 먼저 여인의 잘못을 따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처신하면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부끄러움이 좀 수그러드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노완동은 너털웃음을 뿌리며 청지기에게 말했다.
"정나으리, 당신이 나에게 이 현종황제를 찌르라고 하는데 난 그렇게 못 하겠수. 그 대신 이 여인을 여섯번 찌를테니 우리 타협합시다."
말을 마친 노완동이 병장기를 세워둔 곳에서 검 하나를 뽑아들고는 양귀비를 향해 마구 찔러댔다. 그러면서 속으로 정확히 여섯번을 세었다.
그러나 노완동은 철장방 독약에 중독이 되었다 풀린 탓에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검으로 강쇠를 내리치니 쩡! 쩡! 소리만 나고 오히려 검에 흠집만 날 뿐이었다. 노완동은 검으로 일단 여섯번을 찌르고 나서 말했다.
"정나으리, 이 여인이 괘씸하오. 차라리 이년의 낯짝에다 몇번 칼질을 더하여 보기 싫게 만들어놓는 게 낫겠소이다."
그러나 청지기가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그 여인의 모양을 못쓰게 만들면 여인의 저주를 어떻게 감당해낼 수 있겠는가?"
"그럼 하는 수 없지."
노완동은 그러면서 속으론 연신 여인은 우환을 몰고다니는 항아리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검을 다시 제자리에 세워두려고 하는데 청지기가 불렀다.
"잠깐만!"
"또 어쩌라는 게요?"
"그대가 입곡한 후 해야할 첫번째의 일이 이 두 사람을 검으로 찌르는 일이야. 그대는 방금 양귀비는 찔렀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종황제는 아직 그대로일세. 현종황제에게도 똑같이 해야겠네."
갑자기 불쾌해진 노완동이 격한 동작을 취하며 말했다.
"정나으리. 난 그렇다면 이곳에서 살지 않겠소!"
몸을 획 돌리자 청지기가 노완동을 잡았다.
"이봐, 그대가 현종과 친척뻘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난 다만 무고한 사람을 이유없이 해치기 싫다는 것이오."
노완동이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에 힘을 주자 청지기가 웃었다.
"현종이 무고한 사람이라니 우습군. 왜 현종이 무고한 사람인가 한번 밝혀보게나."
"좋아. 이 양귀비가 원래 현종 아들의 부인이었지 않소? 그런데 시아버지인 황제에게 달라붙었으니 바로 죽일 년은 이년이라구."
청지기가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황제의 명을 누구라고 거역한단 말인가? 그러니 어찌 양귀비만을 탓할 수 있겠나?"
"황제의 명이라고? 그럼 황제의 아들에게 한번 시집을 온 여인이 다시 시아버지에게 몸을 준단 말이요? 황제가 걸어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앞 꽃밭에 앉아 피리를 불면서 유혹하는데 사내라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소? 여인이 품속으로 기어들면 아무리 무정한 사내라도 방법이 없게 되는 거요. 그러니 어찌 황제를 탓할 수 있냔 말이요? 만일 현종의 눈에 들었다고 하더라도 울고불고 하면서 식음을 전폐한 채 목을 맨다 강에 뛰어든다 하고 야단을 떨었더라면 황제
라도 어찌할 수가 없었을 거요. 그러나 이년은 반대로 황제의 품에 기어들었던 것이요. 그래도 결혼한 첫날 밤엔 현종의 아들인 수왕(壽王)과 죽자살자 몸을 섞었겠지. 그래 이런 년이 가증스럽지도 않소?"
거친 숨을 토해가며 노완동이 장황하게 설명을 하자 청지기도 약간 동조의 눈빛을 보내왔다.
"그래, 그대의 말이 맞아. 그대가 알려주니 그도 그럴 법한 일이라 여겨지는군. 양귀비를 마외파(馬嵬坡)에서 반란군들이 목을 달아 죽인 것도 이상한 일만은 아닐세."
이제서야 자기 말이 먹혀들어간다고 생각한 노완동이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물론 목을 매어달아 죽여도 싸지.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이년을 두고 미인이 우환을 몰고다니는 항아리라는 말이 다 나왔겠수?"
청지기는 미인을 우환을 몰고 다니는 항아리라 표현한 노완동의 말에 껄껄 웃어댔다.
"노완동, 그대는 실로 학식이 있구만. 난 그대의 말을 듣기 전엔 곡주님의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했거든. 그런데 오늘 비로소 곡주님의 뜻을 간파해낼 수가 있을 것 같아."
이때 누군가 나타나며 말했다.
"미인은 우환을 몰고 다니는 항아리라는 노완동 당신의 말이 맞아요."
노완동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문으로부터 한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말끔한 용모를 지닌 서른살 안팎의 젊은이였다. 바로 공손곡주였다. 그가 노완동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우리 절정곡에선 노완동이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곳에서 얼마든지 머물러도 좋습니다."
"방금 청지기인 정나으리도 승낙을 했었습니다."
옆에 있던 청지기가 웃었다.
"하하, 그러나 아직 이르오. 아직 그대는 현종에게 검을 대지를 않았으니."
청지기의 변덕에 노완동은 당황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노완동이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려댔다.
이 절정곡에 사는 사람들은 일찌기 안사의 난(安史之亂) 때 이곳에 와 정착한 궁중사람들의 후예였다. 그들은 원래 당현종 신변에 있던 대관료들이었는데, 황제의 가까운 신하들로서 양귀비를 가방 미워했다. 그리하여 양귀비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또한 당현종을 따르는 자 역시 환영했다. 그들은 이곳에 정착한 후 안사의 난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당나라의 강산을 빼앗긴 것을 모두 양귀비의 탓으로 돌렸다. 황제의 측근이었던 사람들이 이렇게 여
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후세의 절정곡 사람들마저 아직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절정곡 사람들은 한가지 규정을 세워놓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바로 당현종과 양귀비를 검으로 찌르라고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찾아온 사람이 그 말을 곧이 듣고 양쪽 모두들 찌르게 되면 가차없이 절정곡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현종만을 찌르려고 하는 사람이면 가차없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다. 오로지 양귀비만을 찔러야 이곳에 머물게 하고 대접을 융숭하게 할 따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완동이 당현종을 두둔하고 나선 것은 결국 이곳 절정곡 사람들의 뜻과 맞아떨어졌다.
공손곡주가 다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노완동, 당신이 이 계곡에 있고 싶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다만 이 계곡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땐 힘을 아끼지 말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노완동은 기분이 흡족해졌다. 이 절정곡에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치뤄낼 수 있는 마음가짐이었다. 그 사내가 아무리 존귀한 대리국의 황제라 해도 이곳 절정곡까지 찾아올 리는 없을 것이었다. 또한 그 여인 역시도 찾아내지를 못할 거라고 노완동은 믿었다. 한편 그 여인이 이곳까지 무사히 왔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결코 양귀비를 찌르지 못할 게 분명했다. 바로 그녀는 양귀비와도 흡사한 여인이기 때문이다.
이제 완벽하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에 노완동은 한껏을 가슴을 폈다. 앞으로 펼쳐질 모든 일이 즐겁고 신나는 순간이 될 것 같아 노완동은 히죽히죽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청지기와 노완동은 공손곡주에게 예를 올리고 나왔다. 청지기가 노완동을 데리고 거처로 안내를 해주었다. 계곡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자그마한 가옥 한채가 보였다. 가옥 앞은 매우 정결했고 화초들로 장식이 돼 있었다. 노완동은 다시 한 번 기분이 흐뭇해졌다. 이곳에서 일을 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게 된 행운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청지기, 공손곡주란 사람은 아주 괜찮은 사람이야. 그런데 내가 보기엔 여인을 미워하는 것 같아. 그렇다면 그 사람도 이 노완동처럼 아직 부인이 없다는 말인가?"
노완동의 물음에 청지기의 얼굴빛이 사색으로 변하며 나즈막이 속삭였다.
"쉿! 조용조용히 말하게."
필요 이상으로 주위를 살피며 청지기가 유난을 떨자 노완동도 덩달아 시선을 사방으로 돌렸다. 주위에 다행히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손곡주는 부인이 있다네. 곡주님의 부인은 꽤나 절색이기도 하지."
그러자 노완동은 실망의 빛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 참 이해할 수 없군. 그 사람은 여인을 아주 싫어하는 것으로 예상했는데 장가를 들었다구?"
청지기가 소리 죽여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그렇게 총명하면서도 왜 이해를 못하는가? 여인은 아주 요상한 물건이라 손에서 놓아버리기 아깝고 또 그렇다고 꼭 잡고 있기도 꺼름칙한 거라고."
이 말에 두 사람은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청지기의 말에 노완동은 뜻이 통하는 인물이라 생각하여 박장대소를 마다하지 않았다.
온갖 화초들로 둘러싸인 가옥 뒤에는 경사가 완만한 언덕이 있었다. 그곳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양한 꽃나무들로 뒤덮여 있었다. 또한 집 앞은 깨끗한 공터가 조성되어 있기도 했는데 잡초 한포기 발견할 수가 없었다. 공터에는 울타리가 쳐져있었다. 왼쪽에 있는 울타리는 그다지 모양새가 나지를 않았지만 중간쪽의 울타리는 화초로 이루어진 것으로 마치 봉황새를 연상하게 했다. 한편 오른쪽의 울타리는 용을 닮은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봉이 울고 용이 꿈틀거리는 듯
한 형상이어서 노완동은 한번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문앞에 이르자 청지기가 안에 대고 소리쳤다.
"봉고(鳳姑), 문을 열어라!"
곧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한 여인이 다소곳한 걸음으로 나왔다. 여인의 아름다운 용모에 노완동은 또 한번 감탄하고 말았다. 흰눈과도 같은 새하얀 적삼 위로 치렁치렁 늘어진 긴 머리결이 눈부셨다.
여인이 정중하게 청지기에게 예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청지기가 가슴을 펴며 웃음기에 젖은 목소리로 답했다.
"봉고, 이 사람은 널 찾아온 사람인데 이 집에 묵게 하려고 한다. 네가 반대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을 묵게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너는 다른 거처로 옮겨야할 것이다."
여인의 눈이 갑자기 휘둥레졌지만 곧 고개를 들어 노완동의 행색을 유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살펴보던 여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이었다. 아마도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과연 절정곡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속으로 가름해 보는 듯했다.
여인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좋아요. 저 분이 소원한다면 이곳에 묵어도 좋아요."
노완동이 기다렸다는 듯이 큰소리로 받아쳤다.
"소원이지. 암, 소원이구 말구."
갑자기 정색을 한 여인이 조용히 말했다.
"한가지 미리 말씀을 드릴 게 있어요. 전 사람을 죽인 후에 이 절정곡으로 온 여인이랍니다. 전 한 사내를 죽였어요."
"뭣이라고!"
누군가 예리한 칼날을 자기 목에 들이대는 순간보다 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우 놀란 노완동이 두서없이 마구 물어댔다.
"그대는 무엇 ㄸ문에 사람을 죽였나? 무엇 ㄸ문에 사내를 죽였는가 말이야? 사내가 그대를 먼저 죽이려고 덤벼들던가. 아니면 가만히 있는 사내를 그대가 슬쩍......"
"아닙니다. 그 사내는 절 아주 좋아했어요. 하지만 전 그 사람이 싫었어요."
한번 불거진 노완동의 눈은 좀체 원상태로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봉고라는 여인이 잔뜩 굳어있는 노완동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당신이 저와 한 집에서 살려면 제 말을 들어야 해요. 만일 나를 건드렸다가는 죽여버릴지도 몰라요."
불현 향기로운 꽃동산에 마음껏 뛰어놀던 봄나비가 뜻하지 않은 돌풍에 날개를 꺾이우는 광경이 보이는 듯했다. 노완동은 혹시 잘못 온 것이 아닌가 후회가 되기도 했다. 괜히 이곳 절정곡까지 기어들어와 고약한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은 아닌지 차츰 열적은 마음으로 바뀌려 했다. 혹시 자신도 여인을 미워하게 될지도 모르기 ㄸ문에 더욱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여인은 죽였다는 사내와 자신을 결코 다른 인물로 여기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노완동은 어이도 없고 한편 오만가지 상념에 시달려 혼백을 빼앗긴 사람처럼 굳어졌다. 그러면서 속으로 혼잣말을 계속 가슴에 채워넣었다.
'이 여인을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겠군. 괜히 여인의 마음이 돌변해 나를 이 집에서 쫓아내거나 죽이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지......'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속으로 준비를 끝냈다고 믿은 노완동이 곧 얼굴을 폈다. 그리곤 봉고란 여인에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우리가 잘 지내면 문제는 없을텐데 괜한 걱정을 했군. 그대는 그대대로 난 나대로 지내면서 서로에게 지장을 주지 않으면 되겠지?"
단숨에 떠벌이고 난 노완동은 순간 여인의 반응을 살피기에 급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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