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북개 홍칠공 5

3학년2반 | 2022.02.21 06:55:52 댓글: 0 조회: 376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0118

제20장 거듭되는 홍칠공의 위기
노완동은 여인의 눈치를 살피면서 얼른 그녀의 용모에 다시 한 번 끈끈한 눈길을 주었다. 가히 미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백설같이 새하얀 옷에 어울리는 머리칼과 날카로운 듯하면서도 은근히 고요함도 엿보이는 표정......
그 ㄸ문인지 노완동은 서서히 그녀에 대한 적의를 풀 수가 있었다. 그러나 노완동의 근본적인 마음가짐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이 여인이 아무리 절색이고 마음에 든다 해도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그저 서로가 간섭하지 않고 지내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그러면서 또 가슴 한쪽으로는 슬금슬금 장난기가 동하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자기에게 친절히 대하지 않는 여인을 보자 노완동은 장난을 치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봉고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간 노완동은 두리번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집안은 겉에서 본 것과 다름없이 아주 청결하고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창문 곁에는 작은 탁자가 놓여져 있고 그 위에는 책궤와 집필묵들이 흰 종이들과 어울려 가지런히 정돈돼 있는 모습이었다.
노완동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봉고는 시구라도 짓는지 계속 붓을 놀려댔다. 노완동은 방안의 풍경들에 오래 시선을 ㅃ앗기고 있었다. 한쪽에는 촘촘히 미세한 구멍이 나있는 커다란 방충망이 달린 침상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그 옆에는 또 참대로 엮은 것으로 보이는 간이침상도 눈에 띄었다. 노완동이 그 대나무로 엮은 침상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오호라, 내가 저 대나무 침상에서 자고 그대가 저쪽 침상에서 자면 되겠군."
그러자 봉고는 노완동을 한번 힐금 쳐다보고는 그만이었다. 다시 시선을 가져가며 자기 하던 일에 몰두했다.
머쓱해진 노완동이 혼잣말처럼 흘렸다.
"이거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나?"
주위를 둘러보며 노완동이 짐짓 큰소리를 뒤에 달자 봉고가 고개를 들었다.
"배가 고프면 직접 밥을 지어 드시죠. 여기엔 당신의 시중을 들어줄 사람은 없으니까요."
노완동이 고개를 조용히 내저으며 대꾸했다.
"무슨 소리! 이 절정곡에 오면 농사도 안짓고 일도 안하고 밥도 짓지 않는다고 들었소. 놀기만 해도 하루가 모자라다고 하던데, 뭐 밥을 직접 지어먹으라구?"
무표정으로 노완동의 말을 듣고 있던 봉고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모두가 밥을 짓지 않고 놀기만 한다면 굶어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노완동이 얼굴색을 바꾸며 헤죽거리기 시작했다. 봉고에게로 고개를 길게 내민 노완동이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그대는 그럼 배가 안 고프나?"
봉고가 다시 미소지었다.
"전 배 고프지 않아요."
"허허, 배가 고프지 않아도 밥은 먹어야 해. 밤에 배가 고파 뱃속에서 쪼르륵 쪼륵 하고 소리를 내지르면 어쩔려고?"
불현 노완동이 실소를 터뜨린 것은 봉고가 밤에 자면서 연신 그런 소리를 낼까봐서였다.
"좋아. 그대가 굶기를 소원으로 한다면 그렇게 하라구."
한편 노완동은 혹시 자기만을 골탕먹이려는 수작이 아닌지 의심했다. 모두들 가만히 앉아서 배를 채우는데 자기만 봉고의 말만 믿고 밥을 직접 지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괜히 심술이 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가지 머리에 박혔다. 아무리 사람을 죽인 여인이지만 왜 하필이면 이곳에 와서 혼자 살고 있는지 얼른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얼마든지 자신의 미모로 한평생 숱한 사내들의 관심을 받으며 살 수도 있을텐데......
봉고가 천천히 일어섰다. 밖으로 나간 그녀는 꽃 명송이를 따려고 했다. 바로 처음 계곡을 들어서며 보았던 정화(情花)였다. 결코 만져서는 안된다고 청지기가 알려준 바로 그 꽃이었다. 그런데 봉고는 서슴없이 손을 뻗어 그 정화를 따고 있는지를 않은가. 혹시 그 말은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봉고가 꽃을 땄는데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을까?
봉고는 아주 즐거운 기분으로 꽃을 따는데 열중했다. 잠시후 쟁반 위에 그 정화를 소복하게 담아가지고 들어왔다. 노완동을 보자 미소를 보였다.
"정 배가 고프시다면 이 꽃 몇송이로 시장기나 꺼두세요."
이 말에 더욱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아니! 이꽃을 먹는단 말이요?"
곧 봉고가 꽃을 내밀자 구렁이라도 본듯 뒤로 한발 물러서며 노완동이 말했다.
"왜 싫으세요? 전 매일 이꽃을 먹고 있는데요."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차츰 깊은 혼란의 골짜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꽃은 정화라고 부르지요. 당신은 절정곡에 온 이상 다시는 정을 품어서도 또 받아서도 안된답니다. 이꽃 몇송이를 먹으면 당신에겐 새로운 세계가 밝아올 거예요."
그러나 꽃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노완동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청지기가 하는 말이 이 정화를 만지면 큰일이 난다고 하던데? 특히 칠정육욕(七情六欲)을 가진 사람이 이 꽃을 만지면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했어. 혹은 마음 속으로 남녀간의 정사(情事)를 생각하기만 하면 곧 가슴이 터질듯 아파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다는 말도 들었지."
"당신은 이미 정절곡에 들어와 있는데 정을 품어선 무엇하고 또 남녀간의 정사에 대해 생각해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당신은 앞으로 한평생 그런 따위의 감정과는 인연이 없게 될 거예요."
갑자기 노완동는 태도를 달리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비록 영고를 만나선 안 될 것이지만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ㄸ로는 꿈에서도 언뜻 보게 되는 영고였기에 봉고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만약 정화를 먹는 것은 고사하고 만지기라도 하는 날엔 금방 죽게 될 게 분명했다. 영고를 기억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봉고가 입을 열었다.
"이 정화엔 독이 없고 아주 맛이 있어요. 당신이 싫다면 저 혼자 먹겠어요."
그러더니 곧 한송이를 집어든 봉고가 아주 맛있게 씹어먹기 시작했다. 노완동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봉고의 아작아작 소리내며 움직이는 입만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봉고는 쟁반에 담겨있던 정화를 모두 먹어치웠다.
정화를 맛있게 먹고 난 봉고가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꽃향기가 노완동의 얼굴로 물씬 풍겨왔다. 봉고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노완동을 바라보았다.
"당신도 만약 이 정화를 먹는다면 입에선 아름다운 향기가 나올 거예요."
노완동은 꽃향기고 뭐고 정말 낭패한 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곳 사람들은 봉고처럼 모두 정화를 먹고 산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 노릇을 어떡해 해야할지 노완동은 암담하기만 했다.
날은 어느새 저물고 주위엔 그윽한 꽃향기만이 넘실댔다.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온통 그 향기로운 냄새만이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는 듯했다.
노완동은 대나무 침상에 누운 채로 깊은 상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옆 다른 침상에 누워 자고 있는 봉고를 힐금 쳐다보며 노완동이 중얼거렸다.
'저 봉고라는 여인은 참 기이한 여인이로구나. 남녀가 한방에서 그것도 가까이 침상을 대고 누웠는데도 전혀 휘장조차 내리지 않고 있다. 아무리 이 노완동이 여인에게 흥미를 잃었다지만 어디까지나 사내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저 봉고라는 여인은 나를 사내로 취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다짐했던 말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무례한 행동이라도 보인다면 저 여인은 당장 나를......"
정말 봉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침상에서 자는 모습을 훤히 내보이고 있었다. 마치 노완동이 무례한 행동을 해주기를 바라는 듯싶었다.
봉고가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완동은 다시금 희미한 기억을 붙잡기 시작했다. 노완동의 유일한 소원은 날마다 무예를 닦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대리에서 영고란 여인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노완동은 그 여인의 아름다움과 옥구슬 구르는 말솜씨에 반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영고는 그때 노완동에게 무예를 함께 연마하자며 접근을 해왔다. 노완동은 그렇게 나오는 영고에게 오히려 깊은 존경심과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곧 영고에게
몇가지 멋진 법수를 가르쳐 주게 되었다. 영고는 매우 즐거워했다. 그녀의 남편인 단지흥은 노완동보다 무예가 월등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고는 그 앞에서 단 한번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무릇 무예란 배우는 사람이든 가르치는 사람이든 기쁜 마음이 들어야 하는 법이었다.
희미한 기억이 차츰 선명하게 바뀌어갈 때 노완동은 애써 머리를 저어댔다. 미인이란 역시 우환만을 몰고 다니는 항아리일 뿐이라는 생각이 불쑥 파고들었다.
깊은 계곡의 밤은 천리밖에서 들려오는 여인네 한숨소리조차 잡아낼 듯 고요하기만 했다. 이때 잠에서 깬 봉고가 침상에서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침상에서 내려와 천천히 탁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곧 물을 마시는 것이었다.
언뜻 떠오른 것이 있어 노완동이 그쪽에 대고 나즈막이 말했다.
"그대는 정말 배가 안 고픈가?"
구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뱃속에서 나는 쪼르륵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노완동의 갑작스런 말에 봉고가 놀라 물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물잔이 보기 좋게 박살이 나면서 고요했던 적막에 잠시 금이 북 그어졌다. 잠시 가슴을 어루만지던 봉고가 말했다.
"아이, 놀랐잖아요?"
노완동이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밝힌 다음 봉고에게 다가갔다.
"난 배가 고파 죽을 판이요. 먹을 게 정말 그 정화 말고는 없소?"
"예, 그거라도 드시겠다면 제가 갖다드리지요."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말라비틀어지기 직전인 창자부터 구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또한 저 여인도 먹었는데...... 하는 마음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남녀간의 정이고 뭐고는 나중에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았다.
"좋아. 정화라도 가져오슈. 내 기꺼이 먹을테니."
봉고가 정화를 따러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봉고의 자태는 실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여인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두 번이라고들 했다. 한번은 여인이 방금 목욕을 하고 났을 때이다. 방금 물에서 몸을 씻고 나온 여인은 햇살에 반짝이는 물고기의 비늘처럼 빛을 낸다. 여인의 모습은 매끄러운 허리와 다리선 그리고 머리칼에 이르기까지 청초하고 싱그러운 느낌을 머금은 듯하다. 또 다른 한번은 바로 잠이 들었을 때이다. 나비가 마음에 드는 꽃술에 앉듯 슬
며시 감은 눈매며 산수유빛 입술 사이로 살짝 드러난 백옥같은 이빨...... 비록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자태지만 그 나름대로 매력과 멋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잠을 자다가 방금 깨어난 봉고의 모습은 그 두가지를 모두 합해놓은 듯 황홀할 정도였다.
봉고의 아름다움에 눈길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는 노완동은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
'아, 이 여인의 모습은 영고보다도 훌륭하고 아름답구나! 영고의 미모도 빠지지는 않지만 어딘가 싸늘한 기운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 여인은 너무도 눈이 부시듯 아름다워!'
자신도 모르게 자꾸 뛰고 있는 가슴에 노완동은 몹시 당황했다.
밖으로 나갔던 봉고가 쟁반에 정화를 가득 담아 들어왔다.
"당신이 세 송이만 잡수시면 날이 밝는대로 하루 세끼 음식을 지어 드리리다."
봉고의 말에 노완동은 그나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언제까지나 일도 않고 무예에만 열중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끼니 걱정까지 해가며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던 차에 봉고의 이같은 제의는 아주 달가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정화를 먹고 난 뒤의 일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여인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자신이기에 별다른 변화는 없을 거란 확신이 생겼다.
노완동이 천천히 정화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처음에는 약간 쓴맛이 돌던 것이 점차 달콤하고 향기롭게 혀를 자극해 노완동은 안심이 되었다. 세 송이가 아니라 생각 같아서는 쟁반에 담긴 전부라도 먹을 것 같았다. 노완동이 약속대로 세 송이를 모두 먹고 나서 봉고에게 말했다.
"오늘 보니까 당신도 정화만을 먹었던 것 같은데 혹시 더 먹을 생각은 없소?"
그러자 봉고가 웃었다.
"그러죠."
봉고는 두 손가락 끝으로 꽃송이를 하나하나씩 집어서는 입에 넣고 조용히 씹어먹기 시작했다. 아니 그 모양이 하도 조용하고 예뻐 마치 녹여먹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봉고가 혀 끝으로 윗입술을 살짝 스치면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차꽃 향기에 대해 감탄을 아끼지 않지요. 하지만 이 정화도 그 향기에 뒤지지 않아요. 맛도 또한 향기도 차꽃과 매우 흡사하지요."
노완동은 속으로 어쩌면 정화 역시도 차꽃에 가까운 종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쟁반에 담겼던 정화꽃을 모두 먹고 난 봉고가 한껏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좋아요. 이젠 제가 음식을 만들어 드릴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노완동은 그녀가 음식을 만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열길도 넘을 듯 뱃속이 텅 비어있었던 터라 노완동은 몹시 배가 고팠다. 정화꽃 세 송이로는 어림도 없었다.
잠시후 봉고가 음식을 가져왔다. 눈이 번쩍 뜨인 노완동은 음식을 보자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봉고는 맞은 편에 다소곳이 앉아 노완동이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모습을 구경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엔 안도의 기운이 맴도는 듯했다.
노완동이 배불리 먹고나서 시원하게 트름까지 해댔다. 그런데 순간 노완동은 아직도 자기 입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피어나는 것을 느끼고는 깜짝 놀랬다. 사내의 입에서 이같은 향기로운 냄새가 나다니 노완동은 속으로 우습기도 했다. 만일 사형인 왕중양이나 전진교의 구처기가 알면 얼마나 웃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 약간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아무튼 고맙소. 이제 난 잠을 자야겠소."
그런데 느닷없이 봉고가 손을 노완동의 어깨에 얹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슬며시 감으면서 속삭였다.
"저와 함께 주무시지 않을래요?"
노완동은 순간 뒷머리를 치고 달아나는 강한 충격에 아찔했다.
'이게 무슨 엉청난 음모란 말인가? 난 바보가 아니다. 네가 영고처럼 또 날 속이려고 하는 걸 다 안다. 어림도 없지.'
수세에 몰린듯 노완동이 다급하게 말했다.
"안돼. 난 원래 남과 함께 자는 습관이 없어놔서."
그러자 봉고가 더욱 집요하게 매달렸다.
"그게 무슨 말이죠? 인간이 일단 정을 가슴에서 씻어내면 사내나 여인이나 같아진다는 것을 모르시나 보죠. 당신이 대나무 침상에서 주무시면 춥기도 하니 어서......"
노완동은 문득 그녀의 눈빛에서 묘한 감정을 엿보았다. 혹시 자신을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당신이 만일 감기라도 들면 제가 약을 구해다 드려야 해요. 그게 오히려 힘이 든다고요. 그러니 어서 저와 함께 침상으로."
노완동은 그녀의 침상으로 가 누웠다. 이불 안이 포근했다. 노완동은 될 수 있으면 봉고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요. 어서 쉬세요."
하며 봉고가 다가오더니 침상에 걸터 앉았다. 그녀는 다리를 끌어안은 자세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위태롭게 노완동 옆에 앉게 되었다. 노완동은 눈을 떠 그녀를 보지 않으려고 내심 애를 썼지만 어려웠다. 할 수 없이 눈을 떠 봉고를 찾았다. 그런데 봉고의 두 다리와 작은 발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아주 예쁘고 작은 발이었다. 언제나 신을 신지 않고 그대로 다녔으면 하는 엉뚱한 바램마저 노완동은 했다.
자신의 발을 바라보고 있는 노완동을 눈치 챈 봉고가 등을 보이며 누웠다. 잠시후 봉고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제가 죽인 사내도 제 발을 보기를 좋아했어요. 밤이면 그 이는 저의 두 발을 끌어안고 잠자기를 원하기도 했어요. 당신은 어떤가요?"
노완동의 가슴은 벌써 설레이고 있는 중이었다. 영고와 함께 대리에서 보낸 시간이 눈앞으로 짧게 스치며 감미로운 느낌과 씁쓸함을 번갈아 남겨놓았다. 노완동은 자신의 몸이 몹시 경직된 채 떨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러더니 곧 심한 동통이 온몸에서 일기 시작했다. 정화의 독이 퍼지는 것은 아닌지 노완동은 불길한 예감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노완동이 주체할 수 없이 몸을 떨자 봉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이러시면 절정곡에서 살 수가 없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제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 말에 노완동은 입술마저 바르르 떨며 대꾸했다.
"당신은 그럼 결국 나를 죽이려는 생각이지? 그래서 정화를 억지로 먹이고......"
갑자기 봉고의 웃음소리에 싸늘한 기운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동통이 더 넓게 번져갔다.
"호호, 당신이야말로 사랑하는 여인을 해친 사내가 아니던가요?"
노완동은 봉고가 사내를 죽이고 나서 모든 사내들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 그렇다면 봉고는 이곳 계곡으로 들어오면서 과연 검으로 누구를 찔렀는지 궁금했다. 당현종을 찌르지 않고 양귀비를 찔렀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여간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온몸의 동통이 더욱 심해졌다. 아무래도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을 거란 불길한 생각 때문에 오금조차 제대로 펴지 못했다. 얼른 위기를 모면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내가 왜 사랑하는 여인을 죽이겠나?"
바삐 도망쳐오느라 사실 그럴 겨를도 없었다. 봉고의 웃음소리가 다시 등 뒤에서 들려왔다.
"당신은 절 죽이면 되는 거예요. 전 이미 한 사내를 죽인 몸이잖아요. 당신 말대로 전 억지로 정화를 먹였어요. 그러니 제가 밉거든 어서 죽이세요."
대답을 못하고 가만히 있자 봉고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이불을 홱 젖히고는 자기의 아래 내의를 벗었다. 그녀는 희고 미끈한 다리를 드러내며 노완동에게 속삭였다.
"절 죽이지 못한다면 제 다리를 어루만져주세요."
봉고를 바라보던 노완동이 눈을 얼른 감으며 소리쳤다.
"아니 안돼!"
봉고가 천천히 자세를 고쳐 앉더니 곧 노완동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그럼 제가 당신 곁에 눕겠어요. 만일 절 원하신다면 안아주세요."
더욱 경직돼가는 자신의 몸을 움찔하며 노완동이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봉고가 부드러운 팔로 안아오며 옆으로 눕는 것이었다.
"제가 사내를 어떤 방법으로죽였는지 아세요? 그 사람이 잠을 자는 틈에 손가락으로 혈도를 찔렀지요. 모두 여섯 군데를 찔렀는데 그 사람은 꼼짝을 하지 못하더군요. 저는 곧 한칼한칼 정성을 다하듯 칼질을 했어요. 그 사람은 아파서 고통스러워 했어요. 그럴수록 피는 더욱 힘차게 뿜어졌고...... 나중에는 제게 욕을 퍼붓더군요. 그러나 그럴수록 전 칼질을 멈추지 않았어요. 아니 더 잔인하게 그 사람을 썰었지요. 결국 그 사람은 고통을 이기지 못한 채 눈을 부릅뜨
고는 죽고 말았어요."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봉고는 무감각한 어조로 말했다. 천연덕스러운 그녀의 태도에 노완동은 질겁을 했다.
"전 사내를 미워해요. 이 세상의 사내를 모두 죽여버리는 게 제 소원이지요."
노완동은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져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봉고의 숨소리를 헤아려보니 이상했다. 그녀는 노완동을 안은 채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방안에는 등잔불이 몸을 세우고는 소리없이 타고 있었다. 잠이 든 봉고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노완동은 자신이 대리로부터 이곳까지 오게 된 일을 더듬기 시작했다. 꿈결을 걷고 있는 듯 야릇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여인 봉고. 노완동은 이처럼 달콤하게 잠을 잘 수 있는 여인에게서 놀라움을 금할 길 없었다. 그는 누운 채로 꼼짝도 않고 날을 밝혔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뜬 봉고는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노완동을 발견했다. 순간 봉고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호호호!"
노완동은 밤새 한잠도 못자고 봉고를 경계하느냐 눈알이 뻘겋게 충혈돼 있는 것이었다.
"당신같은 사내가 왜 이 절정곡에는 왔는지 모르겠네요. 당신이 아무리 재간이 뛰어나다고 해도 열흘이나 보름 후에는 죽고 말 거예요. 그러니 아무도 몰래 이곳을 떠나세요."
아무런 대꾸조차 할 수 없는 노완동은 그저 봉고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봉고가 손을 내밀어 노완동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정을 그리워 하는 기색으로 노완동에게 눈길을 보냈다.
'어쩌면 정화의 독도 이 여인만은 정복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의지가 흔들렸던 나만이 당한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 때문인지 잠시 잊었던 동통이 시작되었다. 어느새 몸에서 식은 땀이 배어나오고 손바닥이 흠뻑 젖었다.
"당신은 밤새 주무시지 않고 저만 지켜보았겠죠?"
노완동은 또 대답하지 않았다. 밤새 겪은 고초를 생각하니 치가 떨려왔다. 그녀가 다시 웃음을 토했다.
"호호, 이 절정곡은 아주 조용한 곳이예요. 세속의 모든 소리들을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지요. 앞으론 편히 주무세요. 아무도 당신을 방해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러면서 봉고가 손끝으로 노완동의 볼을 가볍게 쳤다.
'여인이란 우환만을 몰고 오는......'
노완동은 속으로 입버릇같은 그말만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침상에서 내려선 봉고가 엷은 적삼자락을 휘날리며 한쪽으로 걸어갔다. 길게 풀어헤친 머리를 보던 노완동은 갑자기 가슴에서 이는 동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픔 ㄸ문에 신음까지 새어나왔다.
"음...... 물러가. 어서 물러가란 말이야! 난 잠을 좀 자야겠소!"
그러나 다시 침상으로 온 봉고가 단호한 얼굴로 꾸짖었다.
"당신은 더 주무실 수 없어요. 지금은 아침이예요. 밤에 자고 나서도 또 자다간 병이 나요. 일어나서 저와 함께 정화꽃을 먹어요."
변덕을 부린 그녀는 곧 맨발인 상태로 쟁반을 들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또 왜 저러는걸까 노완동은 속으로 팽팽하게 자리하는 긴장을 맛보았다. 정화는 아침이슬을 촉촉하게 온몸에 바른 채 안으로 들어왔다. 쟁반을 내려놓으며 봉고가 입을 열었다.
"전 이곳에 온 날부터 이 정화를 먹기 시작했어요. 사내들이란 모두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예요."
결국 봉고는 정화의 독에 중독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독도 인체에 한번 인을 박고나면 내성이 생겨 다시 독을 부르게 되는 법이었다. 그래서 계속 독을 먹지 않으면 오히려 견디지 못하고 탈이 나게 되는 것이었다.
노완동은 이슬을 촉촉하게 머금은 정화꽃을 모두 먹어치우는 봉고를 보며 속으로 다시 한 번 두려움에 떨었다.
"이슬이 묻은 아침 정화는 낮이나 저녁과는 다른 맛과 향기를 줘요. 한번 드셔보시지 않겠어요?"
"싫어! 어서 물러가란 말이요!"
노완동은 몹시 피곤해서 어서 잠을 자고 싶을 따름이었다. 지금처럼 피곤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노완동이 느끼는 고통은 심했다. 귀속에서는 날벌레라도 들어가 있는지 계속 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한 가슴은 칼로 베어내는 아픔이 자리하여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어서 자기 일이나 보시오. 난 잘테니."
재차 말하자 봉고가 고개를 들었다.
"난 잠이 다 깨었는데 당신은 왜 자려고 해요?"
"지금 나하고 장난을 하자는 거요? 피곤하니까 자려는 거지 이유가 따로 있단 말이요. 정 혼자 놀기 심심하면 저기 걸려있는 내 옷 주머니에 있는 것을 가져가 놀란 말이요."
노완동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든 유리알들을 꺼내 봉고에게 주었다. 또 은전까지 내어주며 말했다.
"이 모두를 당신에게 줄테니 제발 잠 좀 자게 해달라고."
유리알은 노완동이 가장 아끼는 물건 중 하나였다. 그러나 사정이 이렇게 되고보니 그것조차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녹작지근하게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싶을 뿐이었다.
"안돼요!"
그런데 봉고가 거절을 하고 나섰다.
"뭐라고? 정말 내게 한번 혼이 나야 알아듣겠어?"
노완동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손을 들어 봉고의 뺨을 갈겼다. 그런데 봉고가 빠른 동작으로 노완동의 손을 막아냈다.
"화를 낼 이유는 없잖아요?"
"어서 물러가란 뜻이야. 날 좀 자게 해줘!"
다시 소리를 내지르자 봉고가 조금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알았어요. 어서 주무세요."
"내게 볼일이 남았다면 나중에 잠에서 깬 다음 보자구. 알았지?"
하며 노완동이 자리에 누워 등을 돌렸다.
홍칠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분노에 가슴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홍칠은 자기 앞에 있는 여인을 향해 소리쳤다.
"당신의 정체는 도대체 뭐야? 왜 나를 이런 곳에 가두었냐고?"
여인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제 이름을 밝혀드리지요. 전 운의(雲儀)라고 해요. 개방의 새로운 방주이기도 하죠."
이때서야 홍칠은 가짜 미립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운의? 그대가 거지가 되겠다면 내 환영하지. 그러나 개방의 방주가 되겠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그러자 운의는 곤봉같은 것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홍칠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그것은 바로 녹옥죽봉이었다. 개방의 신물인 타구봉이었던 것이다.
홍칠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개방의 타구봉인 녹옥죽봉은 방중의 보물인데 어찌하여 이 여인의 수중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여인의 말대로 개방을 자기 손에 넣었다는 게 사실일지도 몰랐다.
운의가 홍칠에게 말했다.
"미운산이 폐인이 되어 더는 방주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어요. 또 소씨 거렁뱅이도 앞으론 나를 찾아와 소란을 피우지 않을 거예요. 홍칠공, 난 꼭 복수를 원해요. 지금 이 녹옥죽봉을 당신에게 넘겨주니 당신은 개방의 새 방주가 되세요."
그러면서 운의가 홍칠에게로 슬쩍 몸을 기대왔다.
"홍칠공, 전 전에도 말했듯이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만 진심으로 절 대해준다면 영원히 순종......"
순간 그녀의 말을 자르며 홍칠이 소리쳤다.
"그댄 미립과 미기를 어디로 보냈소?"
운의가 얼굴 가득 그림자를 드리우며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아직 미립과 미기만을 생각하는군요. 당신은 왜 그들 남매만을 염려하시죠? 제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을 건가요?"
하며 운의가 다시 홍칠에게로 엎드리며 간절하게 애원을 했다. 그러나 홍칠은 이 가짜 미립이었던 운의의 악랄함을 알고 있었기에 두 번 다시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난 그대의 속셈을 알아. 그댄 절대로 그들 남매를 곱게 보내주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들을 모낸 곳을 말해주지 않으면 난 어떤 대답도 하지 않겠어."
"홍칠공, 벌써 잊으셨나요? 당신은 나를 따르겠다고 했잖아요? 아무튼 당신은 내 말을 듣게 될테니 알아서 하세요?"
미립의 일을 떠올리며 홍칠은 안타까운 심정을 달랠 수가 없었다. 미립! 홍칠은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리고 순간 이어서 떠오른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당신은 그 분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겠지?"
"누구 말이죠?"
"미운산!"
운의가 웃었다.
"호호호! 그 사람은 내가 자기를 가장 좋아하는 줄 알고 있지만 틀렸어요. 전 오로지 당신밖에는 생각하지 않아요. 한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려드릴까요?"
"새로운 사실이라니?"
"그 사람은 가엾게도 다리 하나를 잃어버렸어요.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정도가 아니라 이번엔 아예 잘려나간 거죠."
"그럴 수가! 당신이 그런 짓을 한 게지? 보지 않아도 안다. 그대는 미립과 미기를 이용해 미운산을 해쳤을 게 분명해."
홍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의 양 주먹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홍칠공, 아직 십일취의 약효과가 가시지 않았다는 걸 명심하세요. 당신은 내게 화를 낼 수 없어요. 난 언제든지 당신을 죽일 준비도 하고 있는 여자니까요."
"그 타구봉을 손에 넣은 걸 보면 내 사부님도 해쳤다는 뜻이로군!"
"정말 당신은 총명한 분이예요."
홍칠은 형언할 수 없는 격분을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문 채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두 손으로 그녀의 옷깃을 틀어쥐었다. 그러나 운의는 안면에 웃음을 그린 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홍칠공, 당신이 이러면 영원히 미립과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아두세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손을 써 그녀를 일격에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홍칠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의 옷깃을 잡고 있는 홍칠의 손이 힘을 잃고 떨렸다. 그녀의 말대로 아직 약기운이 가시지 않은 탓에 벌써 두 다리도 맥없이 휘청거렸다. 홍칠은 운의를 죽이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며 눈을 감았다. 순간 운의가 발로 홍칠을 차 넘어뜨렸다.
"당신은 날 죽이고 싶겠지!"
하며 다시 운의가 장을 날려 홍칠의 어깨를 가격했다. 홍칠은 쓰러진 채로 힘없이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쳤다. 홍칠에게로 비호처럼 달려든 그녀가 이번엔 홍칠의 옷깃을 부여잡으며 외쳤다.
"날 죽이고 싶단 말이지?"
그녀가 홍칠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당신이 날 때려죽이고 싶도록 미워한단 말이지?"
다시 짐승같은 외마디 소리를 내지른 그녀가 주먹으로 홍칠의 안면을 가격했다. 홍칠의 입과 귀로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또 홍칠에게로 달려와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런데 홍칠이 안간힘을 다해 기묘한 동작으로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과연 홍칠공이군요! 내가 십일취를 쓰지 않았다면 난 역시 당신을 이기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홍칠은 남아있는 힘을 한꺼번에 쓰는 바람에 더욱 휘청거렸다. 순간 그녀가 다시 홍칠의 대혈을 찔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속삭였다.
"내가 때린 게 몹시 아프나요?"
정말 알 수 없는 여인이었다. 홍칠은 그녀가 지금 눈에 가득 담고 있는 게 눈물이란 사실에 혼란스러웠다. 운의가 자기의 옷소매로 홍칠의 입과 귀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내가 왜 당신을 때렸던가요? 내가 왜 당신을 이토록 못살게 구는 건가요? 전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이 거부해도 전 어쩔 수가 없어요. 기다리겠어요. 당신의 마음이 돌아설 때까지...... 한번만이라도 웃어주세요. 그 웃음으로 전 위안을 삼고 기다리겠어요."
변화무쌍한 운의의 태도 앞에서 홍칠은 할말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무자비하게 힘을 잃고 있는 홍칠에게 공격을 가하고, 지금은 또 구슬프게 울고 있지를 않는가. 또 홍칠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 자기 품으로 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 것인지. 홍칠은 자기를 안은 채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애무하려는 운의에 대해 끝없는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어서 말하세요. 다 말씀드리지요."
태도마저 전혀 반대로 돌아서고 있는 그녀였다.
"그럼 묻지. 그대는 다섯 요리사들과 친하지? 그 사람들은 모두 당신의 말이라면 잘 듣지 않는가?"
운의가 머리를 끄덕이자 홍칠이 다시 물었다.
"그댄 또한 미방주를 죽이려 하지? 또한 개방의 십대 장로들도 빠짐없이 죽이려 하지?"
이번에도 운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홍칠은 잠시 주춤했다. 숨김없이 묻는대로 대답을 하는 그녀의 태도에 의구심이 일었던 것이다. 홍칠은 그녀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지금과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댄 개방의 서장로와 제갈장로를 죽였지?"
그러나 운의가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죽인 게 아니라 그 다섯 요리사들이 죽였지요. 그날 그들이 두 사람을 죽였는데 곧바로 전진교의 그 무슨 노완동인가 하는 사람과 맞부딪쳤다고 했어요. 그 사람의 무예 역시 대단하다고 들었어요. 그러나 요리사들이 손을 썼기 ㄸ문에 그 사람에게는 발각되지 않았지요."
홍칠이 대충 있었던 일을 머리속으로 엮어보다가 물었다.
"그대가 미방주를 해치려고 하는 건 오로지 방주자리를 탐하기 때문인가?"
"개방의 방주자리는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니죠. 제가 이렇게 하는 건 오직 천하의 무림을 주름잡기 위해서예요."
천하의 무림을 제패하기 위해서? 홍칠의 운의의 얼굴을 비로소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정말 거대한 야심이 들어차 있는 듯했다. 결국 타구봉을 손에 넣은 이상 방주자리에 대해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기가 말한대로 무림마저 손에 넣고자...... 홍칠은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하! 그대의 재간으로 천하의 무림을 통치하겠다고?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홍칠이 아는 강호의 고수들만 해도 열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였다. 자신의 사부인 소씨 거렁뱅이를 비롯해 도화도주 황약사와 대리의 단황나으리 같은 사람들의 무예만 쳐도 천하의 으뜸이었다. 그러나 그 모두가 힘을 모은다 해도 무림을 정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것을 꿈꾸고 있는 중이었다.
"홍칠공, 당신이 내 말만 들으면 당신은 개방의 방주자리에 곧 앉을 수 있어요."
"그 자리는 대단하지도 않다며? 난 그보다 녹옥죽봉을 다시 개방 집법장로에게 넘겨주는 일을 택하겠네."
하며 홍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운의가 말했다.
"이제 곡 개방대회가 열릴 예정이예요. 당신이 거부한다 해도 어쩔 수 없어요."
홍칠은 어서 타구봉을 되찾아 신음중인 개방을 살려야겠다는 일념 뿐이었다. 다시는 요망한 운의의 술책에 넘어가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운의가 문쪽으로 나가다 뒤돌아보며 말했다.
"홍칠공, 당신이 정말로 죽음을 원한다면 바로 이곳에서 그렇게 해드리죠."
홍칠은 자리 앉은 채로 꼼짝을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여 기를 모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단전(丹田) 안에서 내력을 모을 수가 없었다. 개방의 운명이 위태롭게 벼랑 끝에 걸려있는 것을 생각하면 얼른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만 했다. 그러나......
이때 문소리가 나더니 밖에서부터 두 사람이 들어왔다. 이들은 홍칠 앞으로 다가와 섰다. 홍칠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란 사실도 또 이들이 자기 앞에 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또한 걸음걸이가 무겁고 둔탁하다는 점에 사내라는 사실도 예상했다. 그중 한 사람이 말했다.
"홍칠공, 우린 개방사람들인데 당신을 보러 이렇게 왔습니다."
어디선가 들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한가지 느낄 수 있는 것은 약간 겁을 먹고 있는 목소리라는 점이었다. 홍칠이 눈을 뜨며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확인했다. 이들은 집법장로들인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이었다.
홍칠은 대충 사태를 짐작하고는 냉랭한 눈초리를 이들에게로 쏟았다. 필시 운의의 간괴한 술책에 넘어간 것이 분명했다. 사개 정원이 입을 열었다.
"홍칠공, 당신은 날 만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요? 할말이 없으신가요?"
그러나 역시 차가운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홍칠이 대꾸했다.
"미방주가 저 여인의 손에 잘못되었다는데 사실인가?"
사개 정원이 약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바로 저 여인이 미방주의 한쪽 다리를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을 시켜서...... 노독물 구양봉이 갖고 있는 독사장의 독사가 미방주의 다리를 물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황약사가 방주의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겨우 미방주는 목숨을 살릴 수 있었고......"
"아니......"
그녀의 말이 모두 거짓이 아니라는 점에 놀란 것만은 아니었다 홍칠은 미운산의 소식에 온몸이 격류에 휩쓸리듯 요동치는 것을 감지했다.
"그럼 미립소저는......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다시 사개 정원이 대답했다.
"미소저는 동생 미기와 함께 미방주를 따라갔습니다."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미립의 생사가 확인되었고 불행 중 다행으로 아버지인 미운산과 함께 있다니 안심이었다.
홍칠이 두 장로에게 말했다.
"개방대회가 열린다는데 사실인가?"
이번엔 소미타 추우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 여인은 우리 개방의 장로들에게 일흔두 개 분타의 타주더러 10월 초에 건강에 모이라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개방대회를 열고 많은 일을 의논한답니다. 방주께선 저더러 당신을 청하여 개방대회에 참가시키라고 했습니다."
"누가 개방의 방주란 말인가?"
홍칠이 거세게 몰아부치자 두 장로의 얼굴색이 변했다. 난처한 기색으로 일관하던 소미타 추우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여인의 수중에 개방의 신물인 녹옥죽봉이 있었으므로 우리 두 사람은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범장천과 노명성 그리 소검 오평과 나장로까지 모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홍칠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들을 주시했다. 소미타 추우가 홍칠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이틀후에 제가 다시 사개 정원과 당신을 찾아올테니 그때 같이 떠나도록 합시다."
한편 두 장로들이 돌아가자 운의는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탁자에 앉아 화를 가라앉히고 있는 중이었다.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자신의 성격 탓에 호락호락 마음을 주지 않는 홍칠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그녀는 수심에 잠긴 채 움직이지를 않았다. 홍칠만 자기 편으로 온다면 개방에는 미운산이 지정해놓은 방주의 계승자가 명백하게 존재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일흔두 명의 분타 타주들을 설복시키는 것은 매우 쉬워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홍칠은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으니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순간 운의는 갑자기 등 뒤쪽으로 불고 있는 살기를 느꼈다. 누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감지할 수가 있었다. 그녀가 돌아보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그대는 그 검을 내려놓을 수는 없는가요? 내게 올 때는 검은 벗어두고 와야한다는 걸 잊었나요?"
하며 그녀가 몸을 돌려 그림자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검을 잡아챘다. 동시에 검은 창밖으로 날아가버렸다.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 겸연쩍은 얼굴을 하고 있는 금의파 장로 소검 오평을 주시했다. 소검 오평이 말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떨어진 검을 주워들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녀 앞에 검을 든 자세로 선 소검 오평이 얼굴을 들었다.
"난 그대가 검을 갖고 나를 만나러 오는 걸 환영하지 않아요. 어서 이 탁자 위에 올려놓으세요."
그러자 소겸 오평의 눈동자가 불에 타들어가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갑자기 검을 잡은 손으로 운의를 껴안더니 침상 위로 휙 집어던졌다. 침상으로 널부러진 그녀에게 다가간 소검 오평은 검을 머리맡에 놓고는 옆으로 가 앉았다. 얼른 자세를 추스리며 앉은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소검 오평이 침상으로 벌렁 드러누우며 두 눈을 감았다.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사내들이란 정말 둔해. 부드럽게 굴 줄도 모르고 여인을 침상에 내던지다니? 그러고도 여인과 함께 자겠단 말이예요?"
소검 오평이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말했다.
"내숭떨지 말아. 그대가 한 짓을 남이 모르고 있는 줄 알아? 그대는 자기 앞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바보로 아는 모양이지?"
그녀를 쏘아보는 소검 오평의 눈길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대는 개방의 모든 장로들과 치근덕거리고 있어. 그래 모든 사내들의 환심을 사고 싶단 말이지?"
그녀가 소검 오평의 말에 미소지었다.
"보아하니 당신은 정말로 저를 좋아하나 보군요. 안 그래요?"
그녀는 내심 소검 오평의 거친 행동에 마음이 끌리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 말수가 적어 무뚝뚝한 사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처럼 자신을 대하자 기분이 흡족해졌다. 그러지 않아도 다른 장로들과는 달리 냉정하게 구는 소검 오평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차였다.
운의가 소검 오평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당신만 절 좋아한다면 전 그 이상 행복이 없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소검 오평의 옷매무새를 바로 잡아주었다.
"그댄 그 홍칠을 좋아하지 않나? 그 홍칠에게 더 미련을 두고 있는 것 같은데?"
소검 오평이 손을 뿌리치며 냉소를 입에 물자 그녀가 깔깔 대고 웃었다.
"호호호! 당신은 바보예요. 제가 진심으로 홍칠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줄 아세요? 홍칠이 소씨 거렁뱅이의 제자라는 걸 제가 모르고 있는 줄 아세요? 또한 그 사람은 미운산에게 무예를 전수받은 사람이예요. 미운산이 그에게 '강용팔장'까지 전수해주었는데 제가 어찌 그 사람을 믿을 수 있겠나요? 전 다만 개방대회를 열어 개방사람들이 모두 나를 따르게 만들려는 생각이예요. 홍칠을 그 회의에 참석시켜 미운산이 선정한 방주의 계승자도 나를 따른다는 것을 개방사람
들에게 보여줄 생각이지요."
소검 오평의 입이 순간 굳게 잠겼다. 그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말했다.
"그대가 홍칠을 좋아한다면 난 그자를 죽이고 말테야. 그놈이 시체가 되어 썩어가는데도 그대가 좋아하는지를 꼭 두고 볼 것이야!"
말을 마친 소검 오평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운의는 그를 쫓아가려 하다가 얼굴에 웃음을 그리며 혼잣말을 남겼다.
"일단 그가 홍칠을 만나도록 내버려두자."
한편 혼자 앉아있다 누군가 오고 있음을 느낀 홍칠이 눈을 떴다. 그 발걸음 소리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일정한 간격을 갖고 있었다. 곧 홍칠 앞에 당도한 걸음이 여덟 팔자로 벌리고 섰다. 홍칠은 그 사람의 행동에서 문득 살기를 느꼈다. 숨이 막힐 듯한 긴장이 자리했다.
홍칠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소검 오평이 아닌가?"
그러나 소검 오평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홍칠 역시도 개방의 8대 제자로 있은 적이 있었다. 그때 제자들 중 소검 오평은 평소에 가장 과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한나절이 지나도록 말 한마디 내뱉는 법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이처럼 불쑥 찾아온 데에는 그만한 곡절이 있을 거라 홍칠은 예감했다. 더군다나 자신이 지금 처한 입장을 헤아리고 보면 더욱 자명한 사실처럼 보였다.
홍칠이 재차 물었다.
"자넨 왜 그러고 있나?"
홍칠은 이미 알고 있었다. 소검 오평마저도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을. 그러나 더이상 그런 문제를 들먹여 자신의 입을 더럽히고 싶지가 않았다.
소검 오평이 검을 쳐들며 갑자기 외쳐댄 것은 바로 이때였다.
"네놈을 죽여버리고 말테다!"
그러나 홍칠은 일부러 태연한 척 자신을 꾸몄다.
"날 죽이려는 사람은 실로 많지만 그대가 날 죽이려고 할 줄이야, 정말 뜻밖인걸!"
외팔이 소검 오평은 검을 뽑더니 높이 쳐들었다. 그 모습이 매우 날렵했다. 한손으로 검을 뽑으려니 어쩔 수 없이 검집을 허공으로 날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동작이 하도 빠르고 정확해 홍칠이 속으로 감탄을 할 정도였다.
검집이 바닥에 떨어졌다. 소검 오평이 검끝으로 홍칠의 어깨를 건드리며 말했다.
"홍칠아, 넌 오늘 내 손에 죽어야 해!"
홍칠은 순간 깨달은 바가 있어 씁쓸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결국 그녀가 보내 온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소검 오평이어야 하는가? 홍칠은 평소 강직하기로 소문난 그가 운의의 심복이 되었다는 사실에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홍칠의 몸에 번진 십일취의 약효과가 아직도 남아있는 탓에 여전히 움직임을 자유롭게 할 수가 없었다. 꼼짝없이 소검 오평의 검에 맞아 죽게 될 판국이었다. 홍칠이 의연한 자세로 눈을 감았다.
"소검은 손을 멈추게!"
하며 나타난 것은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이었다. 두 장로들은 황급히 걸어와 소검 오평 곁으로 섰다.
사개 정원이 말했다.
"소검 오평, 자네가 그 검으로 찌른다면 후환을 감당해내기 어려울 걸세."
소미타 추우도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홍칠공은 개방 방주가 지정한 계승자야. 저 사람은 타구봉법과 강용팔장을 터득한 사람인데 자네가 죽인다면 개방대회 때 난처한 지경에 빠지게 되고 만다고."
소검 오평은 씩씩거리며 두 장로들을 노려보다 검을 내렸다. 그리곤 몇걸음 가다가 날쌘 동작으로 검끝으로 검집을 들어올렸다. 검은 곧 검집으로 몸을 숨겼다. 소검 오평이 나가자 소미타 추우가 말했다.
"홍칠공, 그 여인의 말을 들으시오. 일단 그녀에게 몸에 배인 독을 해독시켜달라고 하는 게 순서인 것 같소. 그런 다음 개방대회에 가서 새 방주님을 위해 힘을 내는 것이오. 미방주는 이미 폐하였고 소방주 역시도 그분을 따라가버렸소. 개방의 장로들은 모두 그녀의 명령에 따르고 있는데 당신 홍칠공 혼자의 힘으로 맞서봤자 소용없는 일이지 않소?"
결국 홍칠의 마음을 흔들어놓고자 다시 온 것이었다. 홍칠은 눈을 감은 채 그들의 말을 귀넘어들으려 했다.
말이 통하지 않자 그들은 곧 밖으로 나가버렸다. 홍칠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아팠다. 모두가 간괴한 여인에게 복종을 하고 있는 판이라 시간이 감에 따라 눈앞은 어둡게만 변해갔다. 더군다나 홍칠이 암담해하는 이유 중에는 버티고 있는 것은 자기 혼자라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눈을 뜬 홍칠이 한가지 발견한 것이 있었다. 바닥에 작은 주머니가 떨어져 있었는데 전에는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힘을 모아 겨우 주머니를 집어들고는 안을 확인했다. 더욱 놀랄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안에는 해독제로 보이는 환약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은 운의가 있는 방으로 건너갔다. 그곳에는 소검 오평이 그녀의 침상에 거만한 자세로 걸터앉아 있었다. 그녀와 마주한 소미타 추우가 입을 열었다.
"소검의 행실은 가히 망녕된 짓이요. 개방의 대사를 중히 여기지 않고 홍칠을 죽이려 들었소. 만약 홍칠이 죽었다면 개방대회에서 일흔두 분타의 타주들에게 뭐라고 설명을 할 것이었소?"
소미타 추우가 강력히 따져묻자 사개 정원도 덧붙이며 나섰다.
"우리가 개방 방주의 자리를 빼앗고 소씨 거렁뱅이와 미운산을 쫓아낸 것만 해도 어려운 도박이었는데 홍칠까지 상처를 입힌다면 사람들이 과연 복종하려 들겠소?"
운의가 소검 오평을 돌아보며 냉랭한 기색으로 말했다.
"제가 홍칠공을 건드리지 말라고 그렇게도 말렸는데 왜 듣지 않는 거죠?"
그러자 소검 오평이 천천히 자세를 풀어 침상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래, 나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단 말인가?"
소검 오평의 단호한 기색에 그녀가 비웃었다.
"당연하죠. 당신은 왜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거죠?"
소검 오평이 그녀에게로 바싹 다가와 눈을 부라렸다. 그녀 역시도 질 수 없다는 듯 당당하게 맞섰다. 그러다가 그녀가 갑자기 후드득 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당신은 푹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일 우리 다시 이야기하기로 해요."
그녀가 곧 가볍게 머리를 움직여 나머지 장로들에게 그만 나가달라고 신호했다. 그리곤 자신도 슬그머니 다른 방으로 가버렸다.
그들이 나가자 소검 오평이 침상에 힘없이 앉으며 탄식했다.
"난 옥면검객보다 못해. 검법도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람됨됨이도 뒤떨어진단 말이야."
소검 오평은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자조섞인 말을 내뱉았다. 그는 베개를 베고 누워 곧 잠에 빠지려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면검객 호심은 이미 죽었는데 그대가 그를 그리워한다면 왜 따라 죽지를 않나?"
소검 오평은 훌쩍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두 어깨는 이미 거대한 물체에 눌린 상태였다. 손으로 검을 더듬어보았으나 없었다.
냉소에 절여진 목소리만 들려왔다.
"소검, 조급해 말게. 내가 그대 대신 검을 들테니."
순간 소검 오평의 눈앞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보이더니 곧 모습이 나타났다. 그런데 다시 물체가 사라져버렸다. 공중으로 솟은 듯했으나 소검 오평은 쉽게 찾아내지를 못했다. 바로 이때였다.
"악!"
다시 눈앞으로 무언가 스치는 듯할 때 소검 오평은 비명을 질러댔다. 검은 물체가 욱중한 무게로 자신의 무릎 위로 내려앉았던 것이다. 마치 천근이나 되는 쇠덩어리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소검 오평은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개방 금의파 장로 부귀산인 범장천이었다. 그런데 또 한사람이 더 있었다. 소검 오평을 뒤에서 잡아당기는 사람이 있었는데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다보려 했지만 어려웠다. 그는 소검 오평의 대혈을 눌러놓고 읏으면서 검을 집었다. 그리곤 검집을 잡고는 앞으로 손을 뻗어 검을 범장천에게로 날려보냈다.
검을 잡은 범장천이 이리저리 살피더니 비웃듯 말했다.
"소검 오평, 이 검은 정말 옥면검객의 검보다 못하군."
그러나 소검 오평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심하게 떨군 채 자포자기 상태에서나 보일 법한 형상을 만들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소검 오평은 웅크린 채 그대로 있었다. 범장천이 들고 있던 검을 그 앞으로 내던졌다.
고개를 든 소검 오평의 눈엔 잔뜩 흐린 기운이 어려있었다. 그는 부릅 뜬 눈으로 범장천을 바라보다가 검을 집어들었다. 그리곤 검으로 자기 배를 힘껏 찔렀다. 곧 선혈이 뿜어져 침상을 뻘겋게 물들였다. 무언가로 목이 콱 막힌 듯한 소리로 그가 말했다.
"범......장천, 노명성! 다, 당신들 두 사람은 원래......"
말을 잇지 못하자 범장천이 외쳤다.
"소검, 무슨 말인지 계속하게!"
그러나 소검 오평은 말이 없었다. 그는 곧 앞으로 풀썩 꺼지고 말았다. 이렇게 죽고만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두 눈을 흡뜬 채로였다.
범장천과 노명성 두 사람은 소검 오평이 죽은 것을 확인했다. 범장천이 말했다.
"이놈이 없어졌으니 이젠 편히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겠군. 난 평소 이놈이 가장 두려운 존재였지. 언제나 웃는 법도 없이 치켜뜬 눈으로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게 영 마음에 들지를 않았거든."
그러자 노명성이 정색을 하며 짧게 내뱉었다.
"아직 일러!"
"응?"
"아직 몇놈이 더 있단 말이야. 그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이란 작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들 두 작자는 집법장로여서 지위가 매우 중요해. 만일 그 자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아예 여기서......"
노명성은 범장천이 말하고자 하는 속뜻을 알아차리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그래도 더 기다려보는 게 상수야. 자네는 왜 항상 사람을 죽이려고만 드는 거야?"
이들 두 사람은 곧 주위를 살피며 몸을 돌려 밖으로 빠져나갔다.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이 나타난 것은 조금 뒤였다. 이들은 문을 두드리며 소검을 깨우려고 했다.
"소검, 소검! 아직 자나?"
소검 오평이 대답을 하지 않자 이들 두사람은 순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짧게 쓰치는 무언가에 놀란 듯한 표정들이었다.
"소검은 원래 처신이 남과는 달라. 이렇게 못 알아듣지는 않는데......"
사개 정원이 눈짓을 보내자 소미타 추우도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두 사람은 곧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검 오평은 침상에 엎드린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문쪽으로 향한 그의 얼굴은 아주 매서운 두 눈을 달고 있었다.
그에게로 다가서던 사개 정원이 말했다.
"소검, 자는 모양이 너무 우습군. 우린 무슨 일이라도......!"
순간 사개 정원의 안색이 변했다.
"큰일 났다!"
하고 소리치자 범장천이 후다닥 침상 위로 튀어올라 소검 오평의 팔을 잡았다. 소검 오평은 검을 들고 있었는데 검은 바로 그의 명치에 정확히 박혀 있는 것이었다. 강한 힘으로 검이 박혔는지 등 뒤로 그 끝이 나와있을 정도였다. 이때서야 이 두사람은 소검이 대답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무말도 하지를 못했다.




제21장 개방 대회
나무 몇 그루만 성기게 서 있을 뿐, 사뭇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마을이었다. 몇몇 집 굴뚝에서 가냘프게 연기가 피어 오르고, 농부 몇이 밭을 갈고 있었다. 미립은 퍽이나 적적한 마을이라고 생각했다.
미립은 문득 홍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를 떠올리자 그녀는 야속한 마음 달랠 길이 없었다. 자기가 그토록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는 보란 듯이 팔직완(八直碗)만을 게걸스럽게 먹어대지 않았던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이제부터 사내라는 것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겠어.'
미립은 이를 악물었다.
"누나! 빨리, 빨리 좀 와! 지금 아버지와 소씨 아저씨가 다투고 계셔."
한순간, 미기가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홍칠에 대한 생각을 접고 서둘러 집으로 달려갔다. 미기 말대로 소씨 거렁뱅이와 미운산 두 사람 다 낯빛이 시퍼래져서는 입을 꾹 다문 채 씩씩거리며 앉아 있었다. 필시 단단히 다투고 난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지, 아버진 소씨 아저씨와……."
"아저씨는 무슨 아저씨, 그냥 소씨 거렁뱅이라고 햇!"
미립이 입을 달싹거리자 대뜸 미운산이 고함을 질렀다.
"그렇소, 난 소씨 거렁뱅이요. 이제 와서 그게 어쨌단 말이오. 난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위인이니 뭐라고 부르든 그건 당신 마음이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당신은 절대 개방 대회에 못 갑니다!"
소씨 거렁뱅이도 만만치 않았다. 목소리에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 요망한 계집년 때문에 난 다리 병신이 되고 말았어.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년이야. 한데 이번 건강(健康)에서 열리는 개방 대회에 그 계집년이 녹옥죽봉을 들고 개방 방주 자리를 차지하려고 들면 그땐 어쩌겠는가? 자칫 잘못하면 그 계집 때문에 개방 상하가 다 눌려서 찍소리도 못하고 그 계집을 방주 자리에 앉힐 지도 모르는데!"
미운산은 도저히 화를 삭일 수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장탄식을 하였다.
"다 내 탓이오. 내가 그만 그것을 빼앗기는 바람에 대사를 망쳤소이다."
소씨 거렁뱅이가 고분고분하게 나오자 미운산도 다소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그건 자네만 나무랄 일도 아니네."
기실 녹옥죽봉이 누구 손에 있었든, 설혹 미운산 수중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 정황에서는 구양봉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소씨 거렁뱅이는 자기를 변명할 수도 없었고, 변명하려 들지도 않았다.
'미운산은 지금 나를 위안하느라고 저러는 거다. 그는 내가 이 일이 어떻게 돼가는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저 단순히 녹옥죽봉을 잃어버려서 이러는 거라고 여기고 있는 거다. 기실 구양봉의 사장(蛇杖)은 그 위력이 무방하여 미 방주가 상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를 대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는 한층 누그러져서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미립은 그들이 개방 대회 때문에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잠자코 있다가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지자 입을 열었다.
"글쎄, 소씨 아저씨는 가시려면 가서도 아버지는 개방 대회에 못 가십니다."
"네가 뭘 안다고 나서는 게냐. 내가 가야 한다. 가서 두 눈 똑똑히 뜨고 그 년이 어떻게 개방 방주가 되는지 좀 봐야겠다. 아무리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 개방 삼십만, 72개 분타(分舵)가 모두 그 년한테 굽실거리지야 않겠지."
그러자 소씨 거렁뱅이는 미운산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 그렇다면 가십시다. 내 비록 소씨 거렁뱅이라 해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아니외다. 만의 하나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우리 둘이 목숨을 내걸고 싸워 봅시다. 설사 그러다가 죽는다 해도 목숨을 아까이 여기지 않겠소."
미운산과 소씨 거렁뱅이가 개방 대회에 가겠다고 마음을 정하자 미립은 문득 가슴이 설ㄹ다. 건강에 가면 혹 홍칠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미립은 곧 이를 악물었다.
'흥, 홍칠이고 뭐고 사내라면 누구든 거들떠보지 않겠다고 하고선……. 어쨌든 만난다고 해도 이젠 말 한마디 건네지 않겠어. 두고 보라지!'
"단 조건이 있소. 우리는 가도 미립과 미기는 꼭 여기 남겨 둬야 하오."
소씨 거렁뱅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왜 제가 여기 남아야 한다는 거예요?"
미립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벌컥 화를 냈다. 미기도 질세라 소리쳤다.
"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저도 따라가겠어요."
미운산은 처연한 눈길로 미립과 미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한순간 자기도 모르게 회한의 눈물이 솟구쳐 두 뺨을 적셨다. 애초에 이 두 남매를 그 여인한테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도 오늘날 개방이 이 지경으로 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그래라……. 그러자꾸나. 과연 우리 미씨 후예답다. 가자, 모두 가자!"
미운산은 눈물을 머금고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들은 미운산을 목의차(木椅車)에 앉히고 급히 행장을 꾸려 작은 배를 타고 곧바로 건강으로 향했다.
건강성과 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 용골묘(龍骨墓)라는 큰 사찰이 있었다. 이 사찰에 '용골묘'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그만한 내력이 있다. 옛날에 건강성을 끼고 도는 이 강에 용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이 용이 산더미만큼 커다란 물고기로 변해 강물에서 솟구쳐 올라 이 기슭 모래톱에 떨어져 내렸다. 그 물고기는 그대로 모래톱에 길게 가로 누운 채 꼬리 한 번 퍼덕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예삿일이 아니었다. 건강 사람들은 몹시 괴이하게 생각
하여 모두 몰려나와 물고기한테 분향 재배를 올리고는, 개중에서 연장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넓은 강으로 다시 돌아가시겠나이까? 그러시겠다면 우리들이 큰 도랑을 파서 강물을 끌어 대겠나이다. 강으로 돌아가 주옵소서."
그러자 물고기는 그 말을 알아들은 듯 천천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러시다면 여기 계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그 사람이 다시 묻자 물고기는 이번엔 그저 묵묵히 뭇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할 수 없이 강에서 물을 길어다가 물고기 입에다 쏟아 부어 주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물고기는 입을 딱 다물고 한 모금도 먹으려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기이하게 여기면서도 쉬지 않고 물을 길어다 대었다. 그러다 보니 날이 저물고 밤이 깊어 갔다. 그래도 사람들은 물을 긷느라 분주하게 다리품을 팔았다.
이윽고 희뿌여니 동녘이 밝아올 즈음, 느닷없이 강에서 우레 우는 듯한 소리가 진동하더니 온 천지가 요란한 소리에 파묻혔다. 사람들은 모두 화들짝 놀라 땅바닥에 납작 엎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한순간 두텁게 드리운 휘장이 걷히듯, 모든 소리는 일시에 멈춰 버리고 사위는 정적에 잠겼다. 사람들이 정신을 차려 보니 물고기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들은 이 물고기가 왜 모래톱에서 그대로 죽기를 자원했는지 그 뜻을 헤아릴 수는 없었으나, 이 이변을
그대로 지나칠 수 없어 재간 있는 장인(匠人)들을 불러다가 그 물고기 뼈를 새로 잇고 맞물리게 하여 사찰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찰에 용골묘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개방 대회는 이 유서 깊은 사찰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이 기슭으로 거렁뱅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새까맣게 모였다. 천하의 거렁뱅이란 거렁뱅이는 모두 모인 것 같았다. 사찰 밖 여기저기서 화톳불이 타오르고, 화톳불 주변에 옹기종기 거렁뱅이들이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제가끔 소리를 죽여 수군거렸다.
용골묘 내전에는 화톳불이 밝게 타오르고, 거기에 한 여인이 자못 위엄 어린 자태로 앉아 있었다.
"어서 방주의 녹옥죽봉을 가져 오너라!"
여인이 매섭게 소리쳤다. 그러자 누더기를 걸친 소녀 몇이 걸어 나왔다. 개중 한 소녀가 두 손으로 녹옥죽봉을 받쳐들고 있었다. 소녀는 좌중 앞에 다다르자 엄숙한 기색으로 녹옥죽봉을 땅에다 탕 탕 두 번 내리찧었다. 개방 대회를 개회한다는 신호였다. 여인 양 옆엔 장로 몇이 서 있었다. 격랑과도 같이 한차례 내분의 진통이 거세게 휘몰아친 개방은 이미 예전의 기상을 잃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인의 왼편으로 부귀산인 범장천, 청한자자 노명성, 출수표 노경
등이 서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일점지 나장태, 소미타 추우, 사개 정원 등 개방 6대 장로가 모두 우뚝 서 있었다. 모두들 공손하고 숙연한 품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을 자아냈다.
내전 앞에는 개방의 부하 소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키가 껑충한 자, 비쩍 여윈 자, 개중에 언뜻언뜻 영웅호걸다운 풍모를 풍기는 자, 비굴한 웃음을 흘리는 자…… 등 백태만상이었다.
한순간,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가 법장을 높이 치켜 들며 소리쳤다.
"개방의 신임 방주 소씨 거렁뱅이는 오늘 부득이한 일로 대회에 참석치 못하고, 대신 전임 방주 미운산의 따님이신 미립 아가씨가 오늘 대회를 주재한다. 각 분타 타주(舵主)들은 모두 그 호령을 받들라."
개방 분타의 타주들은 모두들 이 말에 크게 놀라는 기색이었다. 근간에 장로들 몇이 죽고, 또 전임 방주 미운산이 상하였다는 말을 듣고 너나없이 괴이하게 생각하던 참에 대회가 열린다는 통보를 받고는 자초지종을 알고자 황급히 몰려든 터였다. 그러던 차에 집법장로의 그 한마디는 장내를 들쑤셔 놓은 격이었다.
"개방 방주는 의당 전임 방주가 지목하는 법이 아닌가? 상례대로 미운산 방주가 소씨를 지목하여 방주로 내세운 터, 다시 소씨가 다른 사람을 지목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저따위 여자가 나서서 개방 방주를 자처할 수 있단 말인가?"
타주 한사람이 운을 떼자 72개 분타 타주들은 앞을 다투어 옳은 소리라고 한마디씩 뱉어 놓았다.
그러나 여인은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차디찬 눈빛으로 장내를 쏘아볼 뿐이었다. 사개 정원이 다시 법장을 치켜 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들 하시오! 개방의 6대 장로들이 다 여기에 있고 방주의 법장인 녹옥죽봉 또한 엄연히 여기에 있거늘 그대들은 무슨 일로 그리 떠드는가? 개방의 율이 무섭지도 않은가!"
그 한마디에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제야 여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72개 분타 타주들을 일일이 훑어보았다.
"여러 타주님들이 의아해하는 건 짐작이 가고도 남아요. 여러분들은 필시 그러하실 거예요. 우리 아버지 미운산은 독해를 받자 개방 방주 자리를 소씨 거렁뱅이에게 내주었지요. 그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개방의 10대 장로와 일부 분타 타주들이 함께 계셨었어요. 그러나 문제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요. 우리 아버지는 그때 다만 녹옥죽봉만을 소씨에게 넘겨주었을 뿐 타구봉법과 절기(絶技)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은 전수해 주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소씨 거렁뱅이가 미덥지 않았던 거지요. 제멋대로 방종한데다 허탕한 기질이 있어서……. 그래요! 방주 자리만 넘겨주었을 뿐 결코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은 전수해 주지 않았어요!"
가짜 미립은 근엄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몇 발자국 걸어가 소녀에게서 녹옥죽봉을 받아 쥐고는 장내를 향해 돌아섰다. 녹옥죽봉을 들고 서 있으니 자못 방주 같은 위엄이 풍겨 나왔다.
타주들 중에선 속으로 감탄하는 이도 있었다.
여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여러분에게 미리 밝혀 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아버지 미운산의 다리를 불구로 만든 자는 바로 우리 개방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개방 10대 장로들 중에!"
여인의 한마디에 72개 분타 타주들은 일순 어안이 벙벙하여 입도 벙긋 못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자 하나같이 분개해 마지 않으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자가 누구요, 엉? 어서 말해 보시오, 그자가 대체 누군지! 그 놈을 당장 능지처참을 하고야 말리다!"
그러나 여인은 눈 한 번 깜빡 않고 그저 잠잠히 입가에 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그건 차차 말하기로 하지요. 지금은 방주를 정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예요. 우리 아버지는 자기를 암해한 자가 소씨 거렁뱅이도 암해하리라 짐작하고는, 방주 자리는 일단 소씨에게 넘겨주었으되 강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은 홍칠공에게 전수하였지요. 그런데 아닌게아니라 우리 개방에 불행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어요. 어느 놈이 우리 아버지의 시낭(侍娘)인 여아를 죽이고, 또 개방의 장로님이신 운중연 서불성과 과천청 제갈옥생을 죽였어요. 그러나 이는 단지 시작
이었을 뿐, 여러분들이 다 알고 계시다시피 이어서 개방 장로 옥면검객 호심이 당했고, 근자에는 소검 오평이 뜻하지 않게 자살을 했어요. 그래서 개방 10대 장로 중에서 겨우 6대 장로만 남게 되었으니 우리 개방의 손실이란 실로 적지 않단 말이에요. 그리하여 차제에 제가 72개 분타 타주들을 모두 모이시게 한 것은 이 방주 자리를 홍칠공이 이미 저한테 넘겨주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인데……."
여인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장내는 또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72개 분타 타주들은 대부분 홍칠과 소씨 거렁뱅이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미립이라는 여자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사람들은 중구난방으로 말들이 많았다. 소란은 쉽사리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그때 소란한 틈을 뚫고 누군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금의파 장로 청한자자 노명성이었다.
"예로부터 개방에 대사가 있으면 10대 장로들이 방주를 모시고 숙의에 숙의를 거듭하여 결정하여 왔소. 만일 그런 절차를 밟고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땐 개방 대회를 열어 여러 타주들의 의견을 구했었소. 우리는 지금 개방 방주를 새로이 정하려 하고 있소. 이 일은 우리 개방에서 대사 중의 대사라 할 것이오. 그런 고로 비록 지금 남아 있는 여섯 장로들은 다 미립 아가씨를 방주로 내세우자고 의견을 모았지만, 그래도 72개 분타 타주 여러분들의 고견을 청취코자
이렇게 모이시 라고 한 것이오. 그러니 그렇게들 떠들지만 말고 어서 의견들을 말하시오. 우리의 결정에 동의하는가 어떤가를 말이오."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좌중엔 고요히 정적만이 감돌았 . 잠시 후 누군가 무거운 침묵을 깨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렇다면 좋소. 한 가지만 물어 봅시다. 미립 아가씨는 강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을 정말로 전수 받았소, 어떻소? 그 점을 필히 알아야겠소."
그 말에 여인은 그저 웃어 보일 뿐 대답이 없었다. 뜻을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이었다. 개방 방주의 그 두 가지 절기를 다 습득했다는 것인지, 습득하지 못했다는 것인지……."
'그 두 가지 절기를 지니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타구봉법이야 아무리 기교가 복잡해도 무예가 뛰어나다면 여인이라 해서 습득하지 못할 리 없겠지만 강룡십팔장은 극히 양강(陽剛)한 장법이라 섬약한 여인네들은 도저히 장악할 수 없다. 그래, 틀림없다. 그래서 말을 못하고 그저 웃기만 하는 거다.'
질문을 한 사람은 제 나름대로 단정을 내리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또 물었다.
"미립 아가씨께 하나 더 물어 봅시다. 아가씨께선 홍칠공한테서 녹옥죽봉을 넘겨받았다고 했는데, 여기 계시는 이 6대 장로말고 누가 또 보았습니까? 그리고 홍칠공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말을 한 사람은 개방에서도 신망이 두터운 나대통이었다. 그의 이 한마디는 그야말로 정곡을 찌른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러나 범장천이 대뜸 나서며 나무라는 어조로 호통을 쳤다.
"나대통, 자네 그게 무슨 뜻인가? 자네는 우리 개방의 6대 장로가 다 의심스럽단 말인가?"
그 말에 나대통은 얼마간 당혹스러워졌다. 그마저 개방에 남아 있는 이 6대 장로를 의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여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 아닌가. 하나 범 장로라면 청한자자 노명성처럼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서 재산을 다 나누어 주고 개방에 들어온 사람으로, 개방 사람들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덕망으로 말하자면 미운산보다도 더 높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 범 장로가 말을 가로막고 나서자 나대통도 더 대꾸할
수 없었다.
다른 타주들 역시 수굿하니 고개를 숙인 채 범 장로의 말에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오히려 6대 장로가 하나같이 미립을 옹립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무공이 상당하리라고 단정짓는 것이었다. 일단 생각이 그렇게 들어가자 모두들 그녀에게 개방의 앞날을 기탁해도 걱정 없겠다고 마음을 놓고는 묵묵히 6대 장로와 분부만 기다렸다.
그러나 나대통은 아무리 해도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는 말을 하지 않으려 했으나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성마르게 외쳤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꼭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미립 아가씨, 홍칠공이 방주 자리를 아가씨에게 넘겨주었다는데, 홍칠공은 대체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미립은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불행히도 홍칠공 역시 독해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여러 분타 타주들 뜻이 정히 그러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미립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손짓을 했다. 그러자 소녀 둘이 내전 안으로 들어가 교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홍칠은 그 교자에 앉아 있었다.
타주들 중에서 나대통과 노유각이 홍칠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그들은 홍칠의 모습을 보자 더럭 의심이 나서 급히 교자 쪽으로 달려갔다. 홍칠은 마치 흙으로 빚어 놓은 오뚜기마냥 꼿꼿이 앉은 채 얼굴엔 아무 표정도 없었다.
"홍칠공, 이게 웬일이오?"
노유각이 다급히 물었다. 그러나 홍칠은 말이 없었다. 멀거니 허공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홍칠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얼굴 반쪽이 완전히 마비된 채 입을 벙긋하기는커녕 눈꺼풀 한 번 깜짝거릴 힘도 없었다. 쏟아지듯 졸음이 밀려왔다.
"홍칠공, 어쩌다가 이런 몰골이 되었소? 이게 대체 웬일이란 말이오? 어느 죽일 놈이 홍칠공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소, 엉?"
나대통은 발뒤축을 굴러 가며 정신나간 사람처럼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휙 돌아서서 72개 분타 타주들을 향해 있는 힘껏 치켜 들었다. 마치 72개 분타 타주들이 모두 홍칠을 해친 홍수이기나 한 것처럼……."
"홍칠공, 왜 말이 없소? 누가 홍칠공에게 이런 짓을 했는지 말을 해요, 말을! 그 한마디만 떨어지면 이 자리에서 그 놈을 당장 찢어 놓을 테니 어서 말을……."
노유각도 두 눈을 뒤집고 울분을 토해냈다. 장내는 다시 흥분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그이를 자꾸 괴롭히지 마세요. 그이는 지금 아무것도 몰라요. 당신들이 뭐라고 해도 다 허사예요."
미립이 장탄식을 하며 나대통과 노유각을 만류했다.
"그럼 미립 아가씨, 아가씨가 말해 보시오. 누구요? 누가 이런 짓을 했소?"
노유각이 버럭 성을 내며 대들었다. 미립은 가냘프게 한숨을 지었다.
"난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자세한 것은 노 장로님께 여쭤보세요."
사람들의 눈길은 일제히 노명성에게 쏠렸다. 노명성은 무척 슬픈 기색을 띠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 무슨 말을 더 하겠소. 하여튼 이제껏 우리 개방에 이런 수치는 없었소. 이번 일은 우리 개방 역사상 최대의 수치요."
침 넘어가는 소리만이 고요히 깃들인 위로 노명성의 목소리는 침중하게 울려 나갔다.
"우리 개방에 반역자가 나타났소. 미운산 방주님이 제일 먼저 알았고 그 다음엔 집법장로들이 알게 되었소. 나와 범 장로는 요즘 들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소. 미운산 방주님은 온몸에 출중한 무예를 지니고 계셨는데, 그만 독약에 암해를 당하셨소. 그래서 지금은 꼼짝도 못하고 계시오. 대체 누가, 어느 장로가 이런 악행을 저질렀는가? 시초엔 도무지 알 길이 없었소. 그래서 미운산 방주님은 계책을 꾸미셨소.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 두 사람을 다 개방 방주로 삼되,
먼저 소씨 거렁뱅이에게 방주를 맡게 하였소. 그래서 그 반역자가 다시 소씨 거렁뱅이를 해치려 할 때 붙잡으려고 말이오. 그런 연후에 홍칠을 진짜 방준로 내세우실 심산이었지요. 소씨 거렁뱅이는 원래 방탕한 게 흠이지만, 이번 개방 대사만큼은 각별히 신중을 기해 미운산 방주의 분부대로 시행하였소. 하나 그 반역자 놈은 극히 교활한 놈이라 감쪽같이 제 정체를 속이고 마침내는 소씨 거렁뱅이까지 홀려서……."
노 장로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72개 분타 타주들은 그에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노 장로님, 그렇게 길게 말씀하실 거 없습니다. 어서 결론만 말씀하시오. 그 놈이 대체 누굽니까? 그 놈이 누군가만 알면 우리 72개 분타 타주들이 나서서 당장 사단을 내 버리고야 말겠소이다. 어서 말씀을 하세요!"
노명성은 잠시 말을 끊고 범장천을 바라보았다. 범장천은 엄숙한 표정으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좌중의 의사에 따르라는 뜻이었다. 노명성은 눈을 한 번 질끈 감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놈이 누군고 하니…… 차마 입에 담기도 역한 일이오마는……그 놈은, 그 놈은 바로 소검 오평……."
노명성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장내는 죽 끓듯 끓어올랐다. 개방 사람들은 모두 소검 오평을 좋아하지 않았다. 개방 10대 장로 중에서 소검 오평이 제일 오만했고, 행동거지도 남달랐다. 그는 개방의 어느 무리에도 섞이기를 꺼렸으며 비록 오의파 장로이긴 했지만 언제나 혼자서만 다녔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미운산 방주를 암해하고 서 장로, 제갈 장로, 호 장로를 죽인 것이 바로 그라는 소리를 듣자 72개 분타 타주들은 하나같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
이며 분기탱천하여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극히 드물었지만 개중에는 소검 오평이 오만하기는 해도 원래 간악한 사람은 아니라서, 그런 흉수를 쓸 위인은 못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소검 오평의 소행이라는데 그 증거가 있습니까? 그 증거가 뭐요?"
어떤 사람이 소리쳤다.
그러자 범장천은 의미 심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증거야 물론 있소. 새 방주인 소씨 거렁뱅이가 실마리를 얻어 소검을 신문하려 하자 소검은 다짜고짜 달려들어 소씨 거렁뱅이를 해하려 했소. 다행히 노 장로와 내가 곁에 있어 더 이상 손을 쓰진 못했지만, 그자의 기세로 보아 우리는 단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소. 며칠 후에 나와 노 장로가 방주의 명을 받들어 소검을 만나러 갔을 땐 그는 이미 배에다 칼을 꽂고 자결한 후였소."
나대통은 범장천의 말이 끝나자 덤벼들 기세로 외쳤다.
"소검 오평이 비록 성미는 괴벽하다 하나 행동거지는 언제나 단정했는데 자살을 하다니요? 그가 암해를 당한 게 아니고 자살했다는 증거라도 있습니까?"
나대통과 노유각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 다 여기엔 필시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가짜 미립이 성큼 한 발 나서며 손을 홱 내젓더니 녹옥죽봉을 번쩍 치켜 들고 소리쳤다.
"소검 오평은 자기 죄가 겁나서 죽은 것이에요. 그게 아니라면 왜 자살을 했겠어요? 그자말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 관련이 없어요. 소검 오평은 여러 차례나 미운산 방주님을 해하려 했고 또 소 방주님도 해하려 했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홍칠공에게마저 마수를 뻗쳐 이 모양으로……. 그자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 개방을 모조리 없애 버리려고 미친 듯이 날뛰다가 급기야는 죄가 무서워서 자살하고 만거예요. 그가 죽음으로써 개방은 비로소 평온을 되찾기 시작
했어요.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을 모이시게 한 것은 우리 개방을 예전처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예요."
"그렇다면 한마디 더 물어 봅시다. 미립 아가씨가 지금 들고 있는 그 개방 방주의 신표인 녹옥죽봉은 어디서 난 것입니까?"
나대통은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미립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여유 만만하게 대답했다.
"이 녹옥죽봉은 원래 전임 방주인 우리 아버지께서 소씨 거렁뱅이 소 선배님께 넘겨주었던 건데 후에 소 선배님이 다시 홍칠공에게 넘겨주었지요. 홍칠공이 개방 방주를 맡아야 한다는 것이 제 아버지의 본의였으니깐요. 그런데 홍칠공마저 이렇게 될 줄이야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기실 나와 홍칠공은……."
그녀는 갑자기 비칠비칠 홍칠에게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 모습엔 그를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이 절절히 배어 있었다.
미립은 눈물을 훔치며 울먹였다.
"기실 저와 홍칠공은 이미 약혼을 한 터인데 이렇게 될 줄은……. 홍칠공은 저에게 녹옥죽봉을 넘겨주기는 하였으나 저에게 개방 방주가 되라는 말은 없었어요. 그리하여 저 혼자 결정할 수 없어 이 녹옥죽봉을 들고 6대 장로님들을 뵌 것이지요. 개방 방주를 새로이 선출하자고 말이에요. 그랬더니 뜻밖에도 범 장로님, 노 장로님, 나 장로님 등 모두가 저에게 개방 방주를 맡으라고 하셔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가 이 무거운 짐을 떠맡게 된 것이지요……."
그녀는 간신히 말을 마치고는 다시금 눈물을 함빡 쏟아 냈다. 그 눈물에 마음이 약해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미립이 새 방주가 되는 것만이 가장 적합한 인선인 것도 같았다. 전임 개방 방주의 딸이요, 홍칠의 여인이며, 또 무예도 출중하지 않은가.
좌중은 대부분 그쪽으로 마음이 쏠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대통, 노유각만은 달랐다. 그들은 웬지 영 석연치가 않았다. 나대통은 끈질기게 물고늘어졌다.
"개방 방주라면 종래로 두 가지 절기를 지녀야 하는 법, 미립 아가씨께서는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을 장악하고 있는지 모르겠소?"
그녀는 다소 난처한 기색을 지었다.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저는 줄곧 홍칠공이 방주가 된다고 생각하였기에 그 두 가지 절기는 아직 익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뜻하지 않게 홍칠공이 저 지경이 되어, 안타깝게도 개방의 두 가지 절기는 저에게 이르러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개방 사람들은 또다시 웅성거리며 의견이 분분했다. 대대로 개방이 자랑해 오던 두 가지 절기가 대가 끊겼다면 개방으로서는 그야말로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개방은 앞으로 무슨 수로 강호 무리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또 한편으로는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 두 가지 절기를 지니지 않았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방주로 옹립할 수도 없는 터, 미립에게 새 방주 자리를 맡길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나왔다. 좌중은 한동안 옥신각신 갑논을박이
오갔다.
그때 범장천이 휘파람을 홱 불었다. 여느 때보다 높고 평온한 휘파람 소리가 용골묘 저 멀리까지 아득히 퍼져 나가고 좌중은 쥐죽은듯이 고요에 잠겼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범장천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미립 아가씨가 타구봉법을 익히지 못한 건 사실이오. 하나 지금 우리 개방에 타구봉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소, 없소? 있으면 한번 나와 보시오!"
나서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모두들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묵묵부답이었다. 누구나가 그 두 가지 절기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자기들 중에는 있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노유각은 통탄을 금치 못하며, 목석같이 꼿꼿이 굳어 버린 채 말이 없는 홍칠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온 천하가 떠나가도록 크게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을 만큼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은 오직 한시라도 빨리 용골모로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미운산이 타고 있는 목의차를 밀며 뛰다시피 발길을 재촉했다. 시시각각으로 어둠이 몰려왔다. 풀이며 나무며 어슴푸레하게 윤곽만 드러난 속으로 네 사람의 그림자는 한데 어울려 파묻혀 갔다. 밤이 되기 전에는 용골묘에 닿아야 했다. 멀리 강기슭에서 피어 오르는 화톳불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필시 대회의 안전을 기하기 위해 파수꾼들이 지펴 놓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네 사람은 화톳불을 보자 한결
발길을 재촉했다.
어느 한순간, 불현듯 차디찬 웃음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 웃음 소리의 주인은 경공이 매우 뛰어난 사람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여러 차례나 그들 네 사람 앞뒤로 훌쩍훌쩍 날아올랐다.
소씨 거렁뱅이는 대뜸 그가 바로 백타산군 노독물 구양봉인 줄을 알아차리고는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다.
"구양봉, 어서 모습을 나타내라!"
구양봉은 사장을 들고 우뚝 네 사람 앞에 자취를 드러냈다.
"흥, 한눈에 알아보는군. 그러나 오늘이 바로 너희들 넷의 제삿날이 될 줄은 몰랐겠지."
소씨 거렁뱅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구양봉 이 놈, 네깟 놈의 재간으로 무엇을 어쩌겠다구? 그따위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렸다간 큰일날 줄 알아라, 이 노옴!"
"그래도 입은 살아 있군! 이 소씨 거렁뱅이야, 오늘은 내가 사단을 내고야 말 테니 고비를 넘기겠단 생각은 꿈에도 말아라."
구양봉은 연신 기괴한 웃음 소리를 흩날렸다. 그 소린 적이 살기등등했다. 그는 오늘에야말로 소씨 거렁뱅이와 미운산은 물론, 미립과 그의 남동생까지도 모조리 요절을 내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야, 어서 순순히 목숨을 내놓지 못할까!"
소씨 거렁뱅이는 정황이 예사롭지 못함을 느끼고 미운산에게 다급하게 속삭였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미 방주님은 어서 가셔야 합니다."
그러나 미운산은 쓴웃음을 지으며 미립과 미기를 돌아보았다.
"아니오, 그럴 수는 없소. 자, 너희들은 어서 떠나거라. 한시도 지체해선 안 된다. 곧장 용골묘로 달려가 홍칠공을 찾아 그 여인의 간계를 명명백백히 밝혀야 한다. 자, 어서 떠나거라!"
그 말에 구양봉이 소리쳤다.
"허튼소리 마라! 가긴 어딜 간다는 게냐! 너희 넷 중 한 사람도 내 손에서 못 벗어난다."
구양봉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장을 들고 소씨 거렁뱅이한테 달려들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항룡유회(亢龍有悔)를 펼치며 장풍을 날렸다. 그는 전에 전임 방주한테서 강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을 전수 받았으나 평소에는 절대 쓰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개방의 방주가 아니므로 방주의 두 가지 절기를 함부로 쓰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구양봉이 그들 넷을 모두 죽이려고 덤비는데야 이것저것 가릴 것이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
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구양봉과 사생결단을 하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굳히고 있는 힘껏 항룡유회 법수를 펼쳐 냈던 것이다.
소겨 거렁뱅이가 항룡유회 법수를 펼치며 장풍을 날리자 구양봉은 내심 흠칫 놀라며 몸을 솟구쳐 허공에서 몇 번 돌다가 떨어져 내렸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살수를 써!"
구양봉은 노하여 눈을 부릅떴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 말엔 대꾸도 않고 외쳤다.
"어서 떠나라는데!"
그러면서 발뒤축을 한 번 구르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이번에는 견룡재전 법수를 펼치며 장풍을 날렸다.
구양봉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강룡십팔장은 모두 아주 강력한 법수라서 소씨 거렁뱅이가 하나하나 바꿔 가며 법수를 펼쳐 낼 때마다 폭풍 같은 장풍이 구양봉을 덮치곤 했다. 구양봉은 정신을 가다듬어 사장을 거둬 들이고 왼손 손바닥을 칼날같이 모로 세우고는 소씨 거렁뱅이의 손목 혈맥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소씨 거렁뱅이는 손목을 얼른 앞으로 거둬 들였다. 하나 구양봉이 어찌나 바투 다가섰는지 다시금 장풍을 날리기가 매우 곤란해졌다.
미운산은 형세로 보아 오늘 일은 반드시 피를 보고서야 결판이 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뒷일을 소씨 거렁뱅이에게 맡겨야겠다고 마음먹고는 황급히 미립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어서 나를 밀고 가자.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미립과 미기는 뒤에서 미운산을 밀며 내뛰었다. 미운산은 가면서 계속 소리쳤다
"미기야, 네가 먼저 달려가거라. 누구든 개방 사람을 만나면 홍칠공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라. 홍칠공에게 그 여인이 개방을 없애려고 간계를 쓰고 있다는 걸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다. 자, 어서 가!"
"싫습니다, 아버지! 난 아버지와 같이 있겠어요!"
미기는 울먹이며 외쳤다. 미운산은 버럭 성을 냈다.
"너는 구양봉이 얼마나 악독한 자라는 걸 몰라서 그러느냐? 자칫 잘못하면 소씨 아저씨와 나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너희들은 반드시 살아 남아서 용골묘로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사를 망치게 돼!"
그러자 미기는 소리내어 통곡을 했다. 미운산은 더욱 노하여 소리쳤다.
"울긴 왜 우느냐? 너는 미씨의 후예다! 사내대장부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거늘, 눈물이 다 무어란 말이냐."
미기는 부끄러운 듯 미운산을 바라보더니 두말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뒤를 한 번 돌아보는 법도 없었다. 순식간에 미기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미운산은 마음이 좀 놓여 미립에게 말했다.
"미립아, 내가 죽더라도 너는 동생을 잘 보살펴야 한다."
미립은 그만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여 자기도 모르게 흐느껴 울고 말았다.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미운산도 그 말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미립은 묵묵히 아버지를 밀면서 앞으로만 내달렸다. 소씨 거렁뱅이와 구양봉이 싸우는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싸움은 쉬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구양봉은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여자 앞에서 소씨 거렁뱅이와 미운산 일가를 몰살시키겠다고 장담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소씨 거렁뱅이 하나 감당하지 못해서야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 여자가 얼마나 비웃겠는가? 나 이 노독물은 한번 내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실행에 옮긴다. 오늘에야말로 놈들을 모두 몰살시키고야 말리라.'
구양봉은 온몸의 힘을 모아 대갈일성을 내지르며 소씨 거렁뱅이를 향해 사장을 휘둘렀다. 소씨 거렁뱅이는 강룡십팔장 법수를 펼쳐 가며 구양봉을 막아냈다. 소씨 거렁뱅이의 강룡십팔장 앞에서 구양봉은 도저히 맥을 출 수 없었다. 구양봉의 사장은 번번이 소씨 거렁뱅이의 장풍에 날려 뒤로 밀려나는 것이었다. 구양봉은 대로 하여 사장을 땅에다 푹 박으며 쭈그리고 앉아 합마공을 쓰기 시작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구양봉이 그렇게 나오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노독물 구양봉이 자기와 내력을 비기려고 해야 그를 한시라도 더 여기에 붙잡아 둘 수 있고, 또 그래야 미운산이 용골묘까지 갈 시간을 벌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구양봉에게 무한정 사장을 휘두르게 하다가는 자칫 그 사장에 얻어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두 손바닥을 내밀었다. 구양봉은 쌍장(雙掌)을 들어 전력으로 막아냈다. 아무래도 구양봉의 내력이 소씨 거렁뱅이보다 한 수 위였다. 소씨 거렁뱅이는 엉겁결에 휘청휘청 뒤로 밀려났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혼신의 힘을 다 짜내 다시 손바닥을 내뻗쳤다. 구양봉과 소씨 거렁뱅이는 한동안 서로 손바닥이 맞닿은 채 뻗치기만 하였다.
"소씨 거렁뱅이야, 그만하면 네 놈 재간을 다 뽐냈느니라. 왕중양과 황약사가 왜 널 적수로 보는지 이제야 알 만하다. 이제 다른 건 또 없느냐?"
구양봉이 소리쳤다.
"시끄럽다. 너는 나를 어쩌지 못하고는 미운산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 수 없다는 것만 알고 있거라."
소씨 거렁뱅이가 내쏘았다.
구양봉은 사실 애시당초 소씨 거렁뱅이는 뒷전이었다. 일단 미운산을 요절내기만 하면 반 이상은 성공을 거두는 거라고 생각하던 터였다. 마침내 소씨 거렁뱅이의 입가에서 선지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구양봉은 의기 양양해서 소리쳤다.
"이 소씨 거렁뱅이야, 죽음이 임박했는 줄도 모르고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소씨 거렁뱅이는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웠다. 구양봉의 합마공이 어찌나 세찬지 그는 몸이 치떨리고 피가 머리로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는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쳇, 네 놈이 미운산을 죽여? 그런 가당찮은 소리를 하다니, 꿈도 꾸지 말아라. 네 놈이 나를 죽이지 못하고는 절대로 여기를 못 벗어나!"
기실 구양봉도 소씨 거렁뱅이와 이렇게 뻗치고 있으려니 초조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는 언뜻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그러나 이미 미운산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일순 난감해져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때 문득 땅에 꽂혀 있는 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급히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사장 위 작은 구멍에 들어 있던 뱀 두 마리가 땅에 툭 떨어지더니 구양봉과 소씨 거렁뱅이가 있는 곳으로 쏜살같이 기어왔다. 뱀들은 어느새 구양봉의 다리로 기어
올라 순식간에 구양봉의 손끝까지 이르러 혀를 날름 거렸다. 소씨 거렁뱅이는 소름이 확 끼쳤다. 이 독사에게 물리기만 하면 목숨을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을 소씨 거렁뱅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개방의 안위에만 염두를 둘 뿐, 자신의 생사 따위는 아랑곳 않고 이를 악물고는 구양봉의 손바닥을 있는 힘껏 내밀기만 했다.
구양봉이 또 휘파람을 불었다. 독사들은 이번엔 소씨 거렁뱅이의 팔뚝으로 스멀스멀 기어갔다.
"헤헤, 이 소씨 거렁뱅이야! 이제 너는 끝장이다, 끝장!"
구양봉은 징글맞게 웃음을 흘렸다.
소씨 거렁뱅이는 독사가 팔뚝으로 기어오르자 온몸이 보좌하며 식은땀이 확 돋았으나 그래도 꺾이지 않고 구양봉의 손바닥을 맞받아 손바닥을 힘껏 내밀었다.
구양봉은 계속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의 휘파람 소리에 따라 독사들은 연신 꿈틀거라며 소씨 거렁뱅이의 뺨까지 올라왔다. 그 순간 구양봉은 갑자기 기괴하게 세 번 웃어 젖히더니 소씨 거렁뱅이를 세차게 밀쳐 냈다.
그때 독사에게 물렸는지 소씨 거렁뱅이는 목덜미가 따끔하며 머리 위로 피가 솟구치는 듯싶더니 몸이 뻣뻣해지며 뒤로 벌렁 넘어가 악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뒤쪽 벼랑 밑으로 날려 떨어졌다. 석 장도 더 되는 듯싶은 벼랑 밑은 출렁이는 강물이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거꾸로 강물에 처박히고 말았다.
소씨 거렁뱅이가 뒤로 넘어가는 순간 구양봉은 급히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독사 두 마리는 소씨 거렁뱅이의 머리에서 휙 날아 그에게 돌아왔다. 그는 낚아채듯 사장을 거머쥐고는 경공 봉황력을 써서 나는 듯 앞으로 달려갔다. 쌩 하는 바람소리가 나무 숲을 뒤흔들었다.
미립은 쉬지 않고 미운산을 밀며 앞으로 내달렸다. 이제 구양봉과 소씨 거렁뱅이가 싸우는 소리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차츰차츰 화톳불이 가까이 다가왔다. 한순간 뒤쪽에서 냉기가 확 끼치더니 고막을 찢어 놓을 듯한 바람소리가 두 사람을 덮쳤다.
"미립아, 애석하게도 소씨 아저씨는 당한 모양이다. 난 여기 놔두고 너는 어서 홍칠이를 찾아가거라, 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홍칠이를 새 방주로 내세워야 한다!"
미운산은 다급히 말했다.
"난 못 가요. 아버지를 두고 나 혼자서는 못 가요."
미립은 울부짖었다.
미운산이 미립의 심정을 다 헤아린다고는 할 수 없었다. 미립은 아버지를 그대로 두고 갈 수도 없었지만, 홍칠을 마주 대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비록 홍칠과 석실에서 사랑을 나누긴 했지만, 공교롭게도 그때 놈들에게 잡혀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에는 홍칠을 향한 그녀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미운산은 탄식하며 말했다.
"미립아, 나는 너희들 남매 때문에…… 사사로운 정 때문에 개방대사를 망쳤다. 개방 형제들이 알면 그들은 필시 나를 원망할 것이다. 더 이상 개방 대사를 망치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 한시가 급하다. 너는 내 말대로 어서 가서 개방을 구해라. 그것이 지금 네가 할 일이다!"
미립은 비통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이대로 떠난다면 이승에서 다시는 아버지를 못 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대사를 눈 앞에 두고 사사로운 정에 얽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녀가 잠시 중심을 잃고……. 아버지 뜻에 따르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그녀는 아버지를 뒤에 남겨 둔 채 무겁게 발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엇에라도 끌리는 사람처럼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미운산은 그저 어서 가라며 손짓만 했다. 미립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두 눈 가득 눈물이 맺힌 채 이를 악물고 아버지에게 무언의 인사를 보내고는 용골묘를 향해 힘껏 달려갔다.
미립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섬뜩한 바람소리가 허공을 휙 가르며 귓전에 내리꽂혔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시커먼 물체가 하늘에서 떨어지듯 미운산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구양봉이었다.
"하하하, 멀리도 못 가고 고작 여기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소?"
구양봉은 기분 나쁜 웃음을 흩날리며 비아냥거렸다.
"소씨는 어디 있느냐?"
구양봉은 미운산을 흘낏 흘겨보았다. 야색에 가려 그 형태만 뿌여니 눈에 들어올 뿐, 미운산의 기색은 똑똑히 볼 수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를 만나고 싶소? 하하 그거야 어렵지 않은 일! 내 이 사장 아래 귀신이 된다면야 염라 전에서 서로 꼭 만날 터인즉!"
구양봉은 여전히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미운산은 비통해 마지않으며 길게 탄식을 했다. 평소 그는 소씨 거렁뱅이와 자주 다투었고, 또 그리 가까이 지낸 편도 아니었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소씨 거렁뱅이를 높이 존경해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소씨 거렁뱅이가 결국은 이 구양봉의 사장에 목숨을 잃었다니……. 더욱이 이 모든 책임은 바로 그에게 있는데, 소씨 거렁뱅이는 바로 자기를 구하려다가 이렇듯 참변을 당한 것이다. 미운산은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하여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짓는 꼴만 봐도 다 죽어 가는 품이로군. 이왕 죽을 몸, 기도나 드리시오."
"이 노독물 놈, 죽기를 각오하고 네 놈을 처치하고야 말리라."
미운산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지르며 두 손으로 목의차 바퀴를 굴려 구양봉을 향해 맞받아 달려갔다. 구양봉은 병신이 다 된 미운산 쯤은 상대도 안 된다는 듯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전혀 예기치 않게 미운산은 수레에서 솔개같이 가뿐히 내려섰다. 그의 손엔 어느새 지팡이 하나와 검까지 한 자루 들려 있었다.
미운산은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고 또 한 손으로는 검을 휘두르며 거침없이 구양봉을 향해 찔러 왔다. 비록 다리 하나와 한 손을 못 쓸망정 보기 드문 법수였다.
"구양봉 이 놈, 내 다리를 끊어 놓은 원수를 오늘 꼭 갚고야 말테다."
구양봉은 껄껄 웃으며 사장을 휘둘러 미운산의 검을 막았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미운산은 마치 날 때부터 다리 하나를 못 쓰는 사람마냥 지팡이를 짚고도 날렵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검을 휘둘러댔다. 구양봉은 적이 놀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힘껏 사장을 휘둘렀다. 악전고투였다. 벌써 20여 합이나 싸웠으나 쉽사리 판가름날 것 같지 않았다. 구양봉은 정신없이 사장을 휘두르다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래, 이 놈의 아들딸이 보이지 않는다. 교활한 놈, 먼저 개방 대회에 보냈구나. 저 놈은 그 여인의 정체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녀는 저 놈이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 정체를 폭로할까 봐 매우 노심초사했었다. 그래서 나에게 저 놈 일가의 목숨을 모두 끊어 놓으라고……. 이 놈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어린 년놈을 다 죽여야 하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구양봉은 급히 사장을 거두며 미립을 뒤쫓아가려고 경공을 쓰려고 했다. 그것을 눈치채고 미운산이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구양봉 이 놈, 목숨이 아까워서 내빼려느냐!"
미운산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막 돌아서는 구양봉을 겨냥해 검을 푹 찔러 들어갔다. 검날은 구양봉의 옆구리를 스쳤다. 비록 찔리지는 않았지만 그는 온몸에 식은땀이 쭉 배어 났다.
그쯤 되자 구양봉은 악이 받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는 몸을 홱 돌렸다.
"이 놈, 일찍 죽지 못해 성화냐? 좋다! 내 사장을 받아랏!"
구양봉은 코웃음을 치며 사장을 치켜 들어 미운산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개방 대회에선 범장천의 그 한마디에 모두들 숨을 죽인 채 말이 없었다. 아무리 미운산의 딸이라고 해도 개방의 두 가지 절기를 지니고 있지 않은 이상 개방 방주를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개방에 따로 그 두 가지 절기를 익히고 있는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달리 묘책도 없어 아무도 딱 부러지게 뭐라고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범장천은 그것 보라는 듯이 회심의 미소를 띤 채 좌중을 쭉 훑어보았다.
그때였다.
"제가 알아요!"
여인의 맑은 목소리가 낭랑하게 장내에 울려 퍼졌다. 모두의 눈길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한 여인이 등을 꼿꼿이 세우고는 천천히 내전을 향해 걸어 나갔다. 차림새로 보아선 개방 사람임에 틀림없었지만 미모만큼은 천하일색이었다.
그녀가 72개 분타 타주들 사이를 비집고 당당하게 걸어 나오자 가짜 미립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반사적으로 범장천과 노명성을 돌아다보았다. 범장천과 노명성의 얼굴에도 당혹스런 기색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미모의 여인은 가짜 미립 앞까지 바싹 걸어가더니 뭇사람을 향해 돌아서며 외치듯이 말했다.
"내가 개방의 두 가지 절기,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아, 아가씨는 대체 누군데요?"
좌중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개방 방주 미운산의 딸, 미립입니다."
여인은 한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 말에 모두는 어안이 벙벙해져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이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원래 개방 방주 미운산은 개방 사람들에게 자기 집안일을 말하지 않았었다. 그런 연고로 미운산에게 자식이 몇이나 있는지, 실제로 미립이라는 딸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더욱이 미립을 직접 본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미립이 어렸을 때 그저 지나치듯 한두 번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미립이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또 하나 나타났으니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개 정원이 제일 먼저 나서서 크게 외쳤다.
"저기 저 아가씨도 미운산 방주의 딸 미립이라고 하는데, 아가씨도 미립이라구요? 그걸 어떻게 믿소? 아가씨가 진짜 미립이라고 할 만한 증거라도 있소?"
미립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예를 갖춰 다소곳이 대발했다.
"내가 진짜 미립이라는 걸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 없이 타구봉법을 한번 펼쳐 보이면 어떻겠습니까?"
사개 정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립은 그에게 고개를 까딱 숙이고는 돌아서서 분타 타주 한 사람에게 타구봉을 건네 받았다. 그녀는 타구봉을 쥐더니 내전 앞 한 가운데로 걸어 나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는 타구봉법을 연시해 보였다
그녀가 '전(纏)'자 구결을 외우면서 연거푸 열 몇 개 법수를 펼쳐보이자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법수 하나하나가 실로 정묘하여 개방 방주 미운산에게서 직접 전수 받았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타구붕법을 모두 펼쳐 보이자 누군가가 또 외쳤다.
"미운산 방주님에게서 직접 전수를 받았다면 강룡십팔장도 익혔을 터인즉, 강룡십팔장도 한번 펼쳐 보이시오."
미립은 대답 대신 타구봉을 주인에게 돌려주고는 선뜻 두 발을 모아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기운을 모아 두 손바닥을 세워 앞으로 내밀었다. 바로 항룡유회 법수였다.
분타 타주들은 비록 강룡십팔장을 쓸 줄은 모르지만 전에 방주가 쓰는 것을 보았던 터라, 강룡십팔장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었다. 모두들 경탄해 마지 않으며 입을 모아 부르짖었다.
"아, 강룡십팔장이다!"
미립은 천천히 강룡십팔장 자세를 거두고 사람들을 향해 다시 한 번 인사를 올리고는 가짜 미립 앞으로 걸어갔다.
"나도 미립이고, 거기도 미립이라는데 도대체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지 어디 밝혀 봅시다."
미립의 목소리는 똑똑 끊어졌다.
개방 사람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강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을 몸에 지니고 있는 여인이 진짜 미립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하여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미운산 몰래 어떤 다른 방법으로 익혔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가짜 미립은 눈썹 한 번 까딱 않고 태연자약하게 서서 한동안 경멸 어린 눈초리로 새로 나타난 미립을 쏘아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무리 강룡십팔장이니 타구봉법이니를 익히고 있다 해도 너는 미립이 아니야. 가짜야!"
그리고는 홍칠에게 다가가 홍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노려보았다.
"그래, 넌 이분이 누군지 알기나 하니?"
미립은 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다가 간신히 한마디했다.
"알아요."
그녀는 홍칠과 자기의 사이를 털어놓기가 쑥스러웠다.
"그래, 너도 홍칠공을 좋아해? 그래?"
여인은 사뭇 당당했다.
진짜 미립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여 금세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애써 냉담한 기색으로 간신히 한마디 꺼내 놓았다.
"그렇지는 않아요."
그러자 가짜 미립의 얼굴에 희색이 번졌다.
"흥, 그렇담, 넌 우리 아버지가 방주 자리를 왜 홍칠공에게 넘겨주었는지도 모르겠군. 그건 바로 홍칠공이 내 남편이기 때문이야. 이건 여기 있는 개방 장로님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너 따위가 어떤 수작을 부려 우리 아버지를 홀려서 그 두 가지 절기를 훔쳐 배웠는지 모르겠다만, 네가 지금 우리 개방의 대사가 무엇인지 그 내막을 모르고 있거늘 어찌 감히 우리 아버지 미운산의 딸이라고 나서며 이 많은 사람들을 우롱하려 드느냐? 하늘이 무섭지 않은 게로군!"
그리고는 가짜 미립은 6대 장로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내 딱 한마디만 더 해 주지. 6대 장로님들은 모두 나를 믿고 있지 너 따위는 믿지 않는다. 그러니 허튼수작 당장 집어치우고 죄를 달게 받으라! 집법장로님들, 저 년을 어서 결박하세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가 달려들어 진짜 미립의 팔을 양쪽에서 꽉 붙잡았다.
"그 년을 당장 내전 안에 가두시오!"
범장천이 소리쳤다.
사개 정원은 소미타 추우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무슨 말을 하려다가 애써 참으며 입을 다물었다.
도시 영문을 알 수 없어 얼떨떨해 있던 개방의 분타 타주들은 범 장로 등이 나서는 모양을 보고 내심 생각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개방 장로라면 의당 방주의 신변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어느 여인이 진짜 미립인지 모를 리 없으리라고 여기고들 있는 것이었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미립을 내전 뒤로 끌고 갔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가 막 사라졌을 때 문득 대열 뒤쪽에서 가냘픈 소리가 들려 왔다.
"잠깐…… 잠깐……."
그 소리는 너무나 작아서 뒤열에 있는 사람만이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몇 사람이 돌아보니, 묘당 앞에 웬 사람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한쪽 다리로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다. 머리칼이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인 그 사람, 그 사람은 천만 뜻밖에도 전임 방주 미운산이었다!
"아, 아니, 이럴 수가! 미 방주님이 오셨다! 미 방주님이 오셨다!"
사람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노유각과 나대통은 미운산이 나타나자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황급히 달려가 양쪽에서 미운산을 부축하였다. 그나마 하나밖에 남지 않은 미운산의 다리는 정신없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노유각과 나대통이 부축하는데도 그는 한걸음도 떼 놓지 못하고 그저 사람들만 처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입술을 달싹거리고는 있었지만 한마디도 꺼내 놓지 못했다. 그의 등에 장검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검은 등을 꿰뚫고 앞가슴까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미운산은 온몸의 힘을 쥐어 짜내는 듯 양미간을 찌푸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홍…… 홍칠…… 홍……."
"어서 홍칠공을 이리 모셔 오너라!"
노유각이 고함을 쳤다.
뭇 타주들은 부랴부랴 홍칠의 교자를 들고 왔다. 미운산은 홍칠을 보자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그제야 그는 홍칠이 이미 독해를 입고 말도 못하고 눈조차 껌벅거리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것이다.
가짜 미립은 살그머니 다가와 사람들 틈에 끼여들었다. 미운산을 보니 그녀는 놀라움을 금할 길 없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짐짓 대성통곡을 터뜨리며 비 오듯 눈물을 쏟아냈다.
"아, 아버지! 누, 누가 아버지를……."
미운산은 이 계집년을 보자 눈에 불꽃이 튀고 분에 치받쳐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그러자 칼에 꽂힌 등이 찢어지듯 아파 왔다. 그는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러나 소리가 되어 나오기는커녕 그저 가느다란 신음 소리만 흘러 나갈 뿐이었다.
"넌…… 넌…… 넌…… 아니……."
분타 타주들은 미운산의 말을 들어 보려고 숨소리를 죽였다. 그러나 미운산은 끝내 말을 못 잇고 입술만 몇 번 더 달싹이더니 두 눈을 부릅뜬 채 숨이 넘어가고 말았다.
가짜 미립은 대성통곡을 하였다.
"아버지, 아이고…… 아, 아버지…… 어느 놈이 아버지를 해쳤나요? 흐흐흑……그 놈이 누구예요, 누구? 아이고, 아버지, 아버지!……."
그녀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비통하게 울었다. 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해 눈시울을 적셨다. 분타 타주들은 그 여인의 격한 울음 소리에 감동하여 생각했다.
'진짜 제 아버지가 아니면 저렇듯 애간장이 끊어지게 통곡할 수야 없지. 그래, 맞아. 미운산의 딸이 분명하다니까.'
사람들 몇이 나와 미운산의 등에서 칼을 뽑아 내고, 모당 앞에 거적때기를 깔고는 그 위에다 미운산을 눕혔다. 가짜 미립은 무릎을 꿇고 땅을 치면서 어깨를 들썩여 가며 대성호곡을 하였다. 개방 장로들과 72개 분타 타주들도 모두 무릎을 꿇고 곡을 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짜 미립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검을 치켜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지 않고는 이 미립은 이 세상에 살아남지 않으리라!"
그녀의 목소리는 적이 비장하였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녀는 똑 하고 칼을 분질러 두 동강을 냈다. 그리고는 또 함씬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이제 이 여인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여인이 진짜 미립이며 개방의 새 방주가 되어야 한다고 입에 침을 튀겼다. 섬약한 처녀 몸으로 아버지를 잃은 비통한 순간에도 굴하지 않고 결의를 다지며 개방 대사에 온몸을 내맡기는 강고한 여인, 이 여인이야말로 개방의 새 방주로 적임자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이제 모두들 생각을 굳혔다.
다만 몇 사람, 나대통과 노유각 등은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었다. 미운산이 남긴 마지막 몇 마디, 임종 전 그가 이 여인을 쏘아보던 원한 서린 눈길…… 아무래도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들은 필시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고 직감하고 있었다.
그때 범장천이 큰소리로 외쳤다.
"미립 아가씨의 불행이자 우리 개방 모두의 비극이오. 미 방주를 해친 원수 놈을 끝까지 찾아내 우리 손으로 처단합시다! 자자, 그러려면 우리 개방이 먼저 전열을 정비해야 하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새 방주를 뽑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미립 아가씨를 개방 방주로 내세웁시다. 그리하여 미립 아가씨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상하가 일심동체로 협력하여 이 원수를 갚읍시다!"
그러자 사람들은 일제히 고성을 올렸다. 개방 대회는 이제 새로운 결의와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잠깐! 잠깐만!"
열기가 다소 가라앉자 한 사람이 고함을 쳤다. 노유각이었다. 분타 타주들은 모두 그를 돌아보았다. 노유각은 비록 6대 제자에 불과한 신분이지만, 그의 처사는 언제나 매우 신중하여 개방 상하가 모두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 여인이 미운산 방주님의 딸이라는 걸 무엇으로 증명할 수가 있습니까?"
그 말은 실로 다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격이었다. 여기저기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가짜 미립은 한숨을 폭 내쉬며, 힘없이 말했다.
"미 방주님은 저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미 방주님의 친딸이라는데 그렇게도 못 믿으시겠다니, 난들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그녀는 간신히 말을 마치고는 미운산의 시체를 돌아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노유각이 다시금 무슨 말을 하려는데 나대통이 그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그만두라는 뜻이었다. 개방 타주 여럿이 노기 등등하여 노유각을 쏘아보고 있으니 공연히 말을 또 꺼냈다가는 욕만 얻어먹을 게 뻔했다.
그때 청한자자 노명성이 크게 외쳤다.
"72개 분타 타주들은 다른 의견이 없는가? 없다면 이제 미립 아가씨를 우리 개방의 신임 방주로 모실 것을 엄중히 선포하는 바이오!
뭇사람들은 일제히 우레 같은 환성을 올렸다.




제22장 개방에 드리운 먹구름
미립은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에게 떼밀려 용골묘 내전 안으로 곤두박이쳐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신단 위에 신상(神像)이 우뚝 서서 미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뚱어리는 물고기 모양에다 사람 머리를 한 기괴한 신상이었다. 미립은 혈도를 찍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는 듯했다. 그녀 자신이 이렇듯 모함을 당해 고생하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아버지와 동생의 생사를 추측할 길이 없어 그녀는 더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미
립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미립을 내전 안에다 끌어다 놓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사개 정원이 휭하니 밖으로 나갔다. 그는 한참 만에야 되돌아와 소미타 추우를 한켠으로 데려가더니 소리를 낮춰 무언가 속닥거렸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미립에게로 다가왔다. 사개 정원이 미립의 눈치를 살피며 말문을 열었다.
"미립 아가씨……."
"뭐라구요? 그럼 당신은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내가 진짜 미립이라는 것을?"
"네,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지요. 그것보다도 미립 아가씨, 미, 미운산 방주님이 그만 잘못되셨습니다. 어느 놈한테 칼로 등을 찔려서 그만…… 칼이 가슴까지 꿰뚫고 나와……."
그는 미립을 흘끔 보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미립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볼 뿐 말을 못했다. 이윽고 두 눈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주르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버지가 죽음을 각오하고 계셨음은 아미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엄연한 현실로 다가오자 놀랍고도 절통하여 단 한마디도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미립 아가씨, 내 말 좀 들어 봐요……."
소미타 추우도 말을 꺼내다가 그만 목이 메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비 오듯 눈물을 쏟아 냈다.
"아무 소용 없어요. 당신들은 우리를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병신을 만들고 싶으면 병신을 만들고, 모함하고 싶으면 모함하고 별 짓을 다 했습니다. 이제 와서 무슨 할말이 있단 말입니까?"
미립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기운 하나 없이 차분한 말씨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개방에 대해서도 절망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세상 만사가 다 귀찮아져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소미타 추우는 애절한 눈길로 미립을 바라보았다.
"나와 정원 장로는 모두 미운산 방주님의 신임을 얻고 있던 부하들이었습니다. 저 여인이 우리 개방에 들어와 책동을 부리고 있다는 말을 우리는 미운산 방주님한테서 이미 자세히 들었습니다. 미운산 방주님께서는 또한 우리 두 사람에게 여아(麗兒) 아가씨를 죽이라고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그 아가씨가 저 여인에게 넘어가 저 여인의 수족이 되어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지요. 일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방주님께서 뜻하지 않게 운명을 달리하셔서 사정이 급
변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더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속히 여기를 떠나야 합니다."
미립은 이제 개방 사람이라면 누구 하나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집법장로라 해도 그들 두 사람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는 필시 백타산군 구양봉 손에 죽은 것이다. 그런데 미기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애는 필시 이쪽으로 오다가 개방 사람들을 만났을 터인데 개방 상하에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미기는 이미 그들 손에 걸려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아아, 그렇게 되었으면 어떻게 하지……. 개방 사람들은 서로 물고 뜯을 줄이나 알지 하나같이 바보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가 이렇게 살해 당하도록까지, 개방 장로들이 이렇게 영문도 모르게 죽도록까지 일
을 방치해 두지 않았을 것이다.'
미립이 아무 대꾸도 않자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또 무엇인가 수군거리더니 미립만 남겨 두고 둘 다 밖으로 나갔다. 한참 만에야 사개 정원 혼자서 남자옷 한 벌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어서 이 옷으로 갈아입으시고 우리들을 따라 이곳을 떠납시다. 빨리요!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요!"
사개 정원이 황망히 다그치는 바람에 미립은 엉겁결에 옷을 받아 들었다. 옷은 남루하기 그지 없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도무지 그 옷을 걸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생각해 보면, 그 자리에서 그렇게 눈뜨고 죽음만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살아 남아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 누더기 옷을 걸쳐 입었다.
"됐소, 됐어. 감쪽같아. 그런데 아무래도 얼굴에 검댕이라도 좀 발라야겠소."
미립은 소미타 추우가 시키는 대로 향로에서 재를 듬뿍 덜어다가 얼굴에 덕지덕지 처바르고는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는 개방 대회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 세 사람은 슬그머니 앞열에 가 섰다. 가짜 미립이 개방 사람들에게 호령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전에 우리 개방은 우리 힘에 부치는데도 욕심스럽게 모든 일을 다 싸안고 어떻게든 해 보려고 했었습니다. 나라의 대사에도 관여하려 하고, 강호의 은원 관계에도 간섭하려 했으며, 부호를 털어 가난을 구제하려고 나서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이제부터 우리 개방은 한 가지 큰일에만 목표를 두고 그 일에만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천하 창생에 덕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고로 강북의 분타들은 이제 나
라의 군사 일에 가담하여 금(金)나라를 치고자 하는 일에서 손을 떼고 오로지 일심 협력하여 개방 일에만 몰두할 것을 명 하는 바입니다."
여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고함을 쳤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미운산 방주님 수하에서 우리 개방은 혼연일체가 되어 금나라를 치고 강산을 수복하는 데 큰 뜻을 두었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 상소를 올리기도 하고, 조정과 연합하여 싸우면서 그 일을 큰 자랑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런데 아가씨께서는 왜 전임 방주의 큰 뜻을 저버리고 새로이 방주가 되자마자 개방의 율을 깨뜨리려고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자 가짜 미립은 코웃음을 치며 언성을 높였다.
"일개 분타 타주이시면서 왜 그리도 견식이 얕지요? 우리 개방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 대사도 때에 따라서는 방책과 주장을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상례라는 것을 왜 몰라요? 우리 송나라는 몇 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금군(金軍)에 항거했으나 끝내는 굴복하고 말았어요. 그래 하는 수 없이 금나라 왕에게 신하를 자칭하며 해마다 금은보화를 바침으로써 근근이 강남의 반벽강산(半壁江山)을 유지하고 있는 것 아니에요? 이런 상황에서 하물며 우리 같은 일개 백성이 어찌 금
나라에 대항하겠어요? 마음은 살아서 잃어버린 강산을 되찾겠다고 하지만, 그건 다 부질없는 일이에요. 공연히 우리 개방 사람들 목숨이나 공으로 갖다 바치는 짓이란 말이에요."
여인은 열변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 분타 타주는 여인의 말을 조금도 수긍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72개 분타 타주 거개가 그녀의 말을 용납할 수 없었다. 좌중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여러분, 내 한마디만 합시다!"
장내의 술렁임을 제압하며 범장천이 소리쳤다.
"종래로 개방의 큰일은 모두 방주님께서 결재하는 법입니다. 진퇴(進退) 여부와 거사 여하는 누구 일 개인에게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개방 전체의 운명에 관계되는 일이기에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은 모두 방주의 결정을 존중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각 분타 타주들은 돌아가서 제각기 방주님의 명에 따르는 것이 좋을 듯하오! 이후에도 상황 여하에 따라 우리 개방은 얼마든지 다시 또 나라일에 가담할 수 있으니까 말이오."
개방 사람들은 종지부를 찍는 듯한 범장천의 말에 한층 의구심을 품었다. 그러나 개방 방주며, 장로의 명이라 더 이상 거역할 수도 없었다. 분타 타주들은 미진한 대로 모두들 그러겠노라 명을 받들고 말았다.
"자, 이제 대사가 결정되었으니 집법장로님은 홍칠공을 데리고 가서 좀 편히 쉬게 하세요."
여인은 사개 정원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홍칠의 곁으로 다가가 다정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면서 그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
"먼저 가세요. 저도 곧 뒤 따라갈게요."
그녀의 목소리엔 한껏 정감이 어려있었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 그리고 얼굴이 온통 검댕투성이인 웬 젊은 제자 하나, 이 세 사람은 홍칠이 탄 교자를 들고 조용히 용골묘 밖으로 빠져 나왔다.
미기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용골묘를 향해 달렸다. 붉게 타오르는 화톳불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기쁨은 더해 갔다.
'아버지는 지금 구양봉 놈과 싸우고 계시겠지. 개방 사람을 만나면 한시라도 빨리 그들을 데리고 가서 아버지를 구할 테다.'
미기는 저만치에 화톳불이 보이자 반가운 마음에 헐레벌떡 달려갔다. 화톳불 옆에 귀공자마냥 자색 도포를 걸친 웬 사나이 하나가 앉아 눈을 내리깔고 운기 조식을 하고 있었다. 그 곁에 한 자 남짓 되는 큰 잉어들이 가지런히 꿰어 있는 나무 꼬챙이가 보였다.
한순간 사나이는 눈을 번쩍 뜨더니 그 길로 곧바로 잉어 한 마리를 잡아 빼 화톳불에 구워 먹으면서, 혀를 끌끌 찼다.
"허 참, 맛있다. 정말 맛있어."
아무리 보아도 거렁뱅이 품새는 아니었다. 미기는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여보세요, 당신은 거렁뱅이가 맞습니까?"
사나이는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 미기를 쳐다보았다.
"거렁뱅이? 너야말로 딱 거렁뱅이로구나. 옳아, 이 물고기가 먹고 싶은 게로군! 그럼 먹으려무나."
"고기가 먹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난 개방 사람들을 찾고 있어요."
"개방 사람? 그렇다면 잘못 왔군그래. 저기 화톳불이 많이 보이지? 그리로 가 봐라. 거렁뱅이란 거렁뱅이는 다 모여 있을 테니."
사나이는 웃으며 손가락질을 했다.
미기는 길을 잘못 잡았다고 생각하고는 급한 마음에 얼른 일어나 뒤돌아섰다. 그때였다. 막 한 발 떼려는데 벽력같은 고함소리가 등뒤에 날아와 꽂혔다.
"이 노옴, 가긴 어딜 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돌연 찬바람이 홱 일더니 등뒤로 바싹 인기척이 느껴졌다. 미기는 엉겁결에 고개를 돌렸다. 눈길을 들어 올려다본 순간 미기는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위처럼 등뒤에 버티고 선 사내, 그는 바로 구양봉이 아닌가!
구양봉은 두 눈을 부릅 뜨고 소리쳤다.
"네 아버진 이미 죽었다. 소씨 거렁뱅이도 저승 귀신이 됐다. 으하하하……. 너 혼자 살아 남아 봐야 천애 고아 신세, 나를 따라 순순히 풍도성( 都城)으로 가자!"
흉악한 구양봉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대자 어린 미기는 혼비백산하여 찍소리도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미기는 구원이라도 청하는 눈빛으로 애절하게 화톳불 곁의 사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사내는 이쪽은 상관치도 않고 손가락을 빨아 가면서 게걸스레 잉어를 먹어대고 있었다. 뼈에 묻은 살까지 알뜰히 발라 먹고는 사내는 한 손으로 입을 쓱쓱 닦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미기와 구양봉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아니, 이거 구양봉 아닌가? 한데 왜 죄 없는 어린아이를 그리 못살게 구는 겐가?"
그 사내는 이미 이쪽의 사내가 구양봉이란 걸 알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구양봉은 사나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뜻밖에도 그 사나이는 황약사였다. 구양봉은 예의 그 기괴한 웃음을 날렸다.
"흐흐흐, 황약사 내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내 일에 참견 말라고!"
"이봐, 구양봉! 듣자 하니 자네도 화산에 가서 나와 무예를 겨뤄 보겠다고 했다면서? 내 보기엔 자넨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으이. 그러는 편이 자네한텐 득이 될걸세. 공연히 갔다가 천하 고수들의 검에 죽게 되면 오히려 강호에 웃음거리만 될 게 아닌가."
황약사는 있는 대로 빈정거렸다. 구양봉은 노기가 치받쳐 괴성을 내질렀다. 그는 원래 속이 좁아 자기 무공이 남보다 못하다는 말만 들으면 미친 듯이 날뛰곤 했다.
"황약사 이 놈, 내 원래는 너는 다치지 않으려고 했었다. 자비를 베풀어 이 다음에 화산에서야 손을 봐 주려고 했는데, 오늘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네 스스로 명을 앞당기기를 재촉하니, 그 건 다 방정맞은 네 놈 말버릇 때문인 줄이나 알아라!"
황약사는 그의 말에 코방귀도 안 뀌고 길게 말을 늘여 뽑았다.
"어디 원대로 손을 대 보시지. 눈 하나 깜짝 안 할 테니……."
황약사는 느려 터진 동작으로 천천히 옥소를 꺼내 자세를 잡았다. 구양봉은 성마르게 소리를 내지르며 황약사를 겨냥해 사장을 휘둘렀다. 황약사는 슬쩍 옆으로 피하며 옥소를 내뻗었다. 구양봉은 헛손질만 한 셈이지만 절묘하게 황약사의 옥소를 피해 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은 불꽃을 튀었다. 초반에는 구양봉이 열세인 듯했으나 초식을 더할수록 두 사람은 신명이 나서 혼신을 다 했다. 좀처럼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이들 두 사람은 모두 내로라 하는 무학대가로서, 각자가 펼쳐 내는 법수란 정묘하기 그지없고 변화무쌍하며 한 가지 법수를 채 다 쓰기도 전에 벌써 다른 법수를 펼쳐 내곤 하였다. 구양봉은 온몸의 힘을 다 짜내 번개같이 사장을 휘둘러댔고, 황약사의 옥소는 무시로 구양봉의 공문(空門)을 내질렀다. 두 사람이 법수를 펼쳐 낼 때마다 강풍(强鳳)이 일고 번개가 치는 듯했다.
"하, 이거 신명난다, 신명나! 구양봉아, 네가 날 이기겠다구? 생각은 자유니, 마음대로 생각하려무나."
"너 따위한테 이기고 어쩌고는 안중에도 없다! 그저 혼쭐나도록 손이나 좀 봐 주려는 것일 뿐! 흐흐흐……."
구양봉은 기분 나쁜 웃음을 흩뿌렸다.
둘은 벌써 백여 합이나 정신없이 겨루고 있었다.
"야, 구양봉아, 가만 좀 있거라!"
황약사의 한마디에 구양봉도 잠시 손을 멈췄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어디 갔지?"
그 말에 구양봉은 문득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아무데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사장과 옥소를 거두고 주위를 샅샅이 뒤졌다. 아이는커녕 꼬챙이에 꽂아 놓은 잉어도 서너 마리나 사라져 버렸다.
"노독물 이 놈, 무학대가를 자처하는 놈이 그래 고작 남의 집 코흘리개나 넘봐! 내 일찍이 서역 한 땅을 독무대로 삼아 주름잡는 노독물이 그런 연약한 어린 양이나 넘보는 병신 승냥이란 소린 듣도 보도 못했다! 그러고도 네가 무학대가라 할 수 있느냐!"
황약사가 한껏 빈정거렸다. 구양봉은 쓴웃음만 지을 뿐 대꾸를 안 했다. 황약사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봐, 이젠 그 아이를 죽이려 해도 다 글러 먹었으니 나하고 여기 앉아 물고기 안주에 술잔이나 기울이세그려. 내가 자네를 지키고 있는 이상 그 애를 해칠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일세."
구양봉은 한참 동안이나 입을 꾹 다물고 황약사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목을 뒤로 젖히며 크게 웃어제쳤다.
"제기랄, 네 놈 꼴상은 보기 싫다만 아이를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뛸 마음은 싹 사라졌으니 네 놈 말대로 물고기 맛이나 봐야겠다."
그리고는 사장을 한옆에 푹 꽂아 놓고 화톳불 곁에 퍼질러 앉아 황약사와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봐, 자넨 일평생 악한 짓으로 그 손을 피로 물들이면서도 먹는 것 하나는 왜나 질탕하네그려."
황약사가 놀려대도 구양봉은 아랑곳 않고 게걸스럽게 술과 물고기를 꾸역꾸역 입 안에 넣으며 그저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글쎄 그 말이 다른 사람 입에서 나왔다면야 무슨 권고로나 듣겠지만 황약사 네 놈이 그런 말을 하니 코웃음밖에 안 나온다. 그래, 자넨 언제 자비스런 보살님이 되셨나, 엉? 뻔뻔하다, 뻔뻔하다, 엔간히 뻔뻔해야지. 악하기로 말한다면 네 놈 황약사가 이 노독물보다 둘째가라면 더 서러워할 텐데?"
얘기를 주고받고 권커니 잣거니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에 그 많은 물고기는 벌써 동이 나고 있었다.
"이봐, 아무래도 오늘 개방에서 무슨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 한번 가 보지 않겠나?"
황약사가 말했다 구양봉은 선뜻 응대를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능구렁이 같은 황약사 놈은 나와 닮은 데가 많다. 누가 좋아하든 말든 제 마음대로 하는 놈이니, 만약 가서 보다가 제 성미에 맞지 않으면 그 여인의 일을 단번에 화닥닥 뒤엎어 놓을 수도 있단 말씀이야. 호락호락 말을 듣고 앉았다간 큰일나겠다.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놈을 얼러서 여기 붙잡아 두는 것이 상책이다.'
구양봉은 넙죽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네 놈이 개방 방주라도 된단 말이냐? 무슨 난장판이 나든 자기네들끼리 찧고 까부는 게지 우리가 무에 상관이 있어? 여기서 물고기나 먹고 술이나 마시세."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홍칠의 교자를 들고 일단 밖으로 나오자 한편으론 안도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적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경망스러이 서두를 수도 없었다. 자칫 잘못해서 눈치를 채이게 되면 만사가 다 수포로 돌아간다. 두 사람은 미립에게 눈짓을 보냈다. 각별히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세 사람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조심조심 발길을 옮겼다. 다행히 개방 사람들은 신임 방
주가 내놓은 국사불문(國事不問) 주장을 놓고 옳으니 그르니 쟁논을 벌이느라 그들을 주목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어느 정도 용골묘에서 멀찌감치 떨어지자 그들은 발을 재게 놀리며 구불구불한 소로를 따라 강변으로 향했다. 갈림길에 이르자 사개 정원이 소리를 죽여 나직이 말했다.
"소 장로, 그냥 이 소로를 따라가는 게 어떨까?"
소미타 추우는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아닐세. 강변으로 가서 배를 타고 가세. 그게 더 빨라."
사개 정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변 쪽으로 길을 잡아 내처 치달아 갔다.
개방 분타 타주들 중 많은 사람이 배를 타고 왔기 때문에 강변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여러 척 매여 있었다. 그 위쪽으로 배를 지키는 사람들이 서로 한담을 나누며 서 있었다. 강변에 이르자 소미타 추우가 소리쳤다.
"어느 배가 가장 좋고 빠르냐?"
그들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개방의 두 집법장로임을 알아 보고는 개중 한 사람이 꽁무니 빠지듯 달려왔다.
"우리 이 배가 제일입니다. 건강 분타 타주 나대통의 배입지요."
그는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좋다. 우리 둘은 급한 용무로 서둘러 길을 떠나는 참이다. 이 배를 좀 써도 무방하겠지? 자, 지체 말고 배를 몰아라."
소미타 추우는 한껏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자 사공은 즉각 명을 받잡아 부랴부랴 닻을 올렸다. 대단히 큰 배였다. 그들 셋은 홍칠이 탄 교자를 번쩍 들어 배에 올려 놓았다. 마침 순풍이라 배는 거침없이 나아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몇 리 길을 내려왔다. 소미타 추우, 사개 정원 그리고 미립은 홍칠을 에워싸고 이물에 서서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미운산 방주님은 불행히도 그 계집년 손에 돌아가셨지만 미립 아가씨는 요행히 빼내 왔구먼. 그나마 다행일세. 일단 미립 아가씨를 어디 조용한 데다가 숨겨 놓았다가 다소 조용해지면 미운산 방주님의 원수를 갚도록 함세."
소미타 추우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개 정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홍칠을 바라보고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황황히 말했다.
"아차, 이 정신 좀 봐. 어서 물을 가져 오게, 어서! 홍칠공 얼굴에 발라 놓은 마약을 씻어 줘야지."
미립은 그제야 일의 전말을 짐작하고는, 한순간 주춤하다가 이내 고물로 걸어갔다. 거기에 때마침 두레박이 하나 있었다. 미립은 얼른 두레박을 늘어뜨려 물을 길어서는 이물로 가져 왔다.
사개 정원은 긴 수건을 물에 푹 적셔 홍칠의 얼굴을 여러 번 닦아 주었다. 그러자 홍칠은 한두 번 눈을 꿈쩍여 보고 입술도 달싹거리더니 이윽고 또렷이 눈을 떴다. 다음 순간, 가느다랗게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바, 방주님은……."
홍칠은 목이 메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시울은 금세 발갛게 물들었다. 사개 정원이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미운산 방주님은 그만 타계하셨소. 비통하기 그지없으나 되돌릴 수 없는 일, 기회를 보아 그 계집년을 쳐죽이고 원수를 갚아야지요."
홍칠은 말없이 머리를 끄덕이고 미립을 돌아보았다. 배는 나는 듯이 물 위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바람이 산들 불어 그녀의 옷자락은 한들한들 나부꼈다. 비록 거렁뱅이 누추한 남장을 하고 있을지언정 그녀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러나 미립은 웬일인지 냉랭한 기색으로 홍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홍칠과 눈길이 마주치자 슬며시 외면하며 멀리 강물로 눈길을 돌렸다.
"미…… 미립…… 미립 아가씨!"
홍칠의 목소리엔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꾸를 않고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뜨려고 하였다.
"미립 아가씨, 거기 좀 서요. 하, 할말이 있소."
홍칠의 목소리가 하도 간절하여 미립은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발걸음을 떼다 말고 주춤 멈춰 섰다.
"미립 아가씨, 나와 그 계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왜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소?"
홍칠의 말에 미립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의 두 눈은 촉촉히 젖어 있었다. 그리고는 어느결에 소리 없이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세 사람은 하나같이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미립 아가씨, 미운산 방주님 일도 천만부당한 일이요, 비통함을 금할 수 없지만 우리 사부님이 어찌 되셨는지 알 길이 없으니 이런 답답한 일이 또 어디 있겠소?"
홍칠은 소씨 거렁뱅이의 생사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미립은 소씨도 이미 죽었으리라 단정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죽었으니 아버지 먼저 구양봉을 막고 나섰던 소씨가 살아 있을 리 만무였다. 하지만 홍칠에게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미립은 그저 고개를 푹 떨굴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등뒤에서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날아들고 이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돛이 주르르 미끌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대갈일성을 했다.
"홍칠, 감히 어디로 도망치려는 게냐? 아무리 잔꾀를 부려 봐야 우리 손바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가!"
네 사람은 가슴이 섬뜩하여 얼른 뒤돌아보았다. 선창 쪽에서 몇 사람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앞장서 오는 사람은 부귀산인 범장천이요, 그 뒤로 개방 오의파 장로 일점지 나장태, 평소 늘 음울한 기색으로 말수가 적은 청한자자 노명성이 따르고 있었다.
"우리 손에서 그리 쉽사리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한심한 녀석들이로군!"
범 장로는 한껏 비아냥거렸다. 청한자자 노명성도 덩달아 뇌까렸다.
"홍칠이, 어리석군! 그리 쉽게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는가!"
그리고는 내처 음침한 눈길로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를 번갈아 쏘아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너희들의 얕은 속을 우리가 모를 줄 알았더냐. 우리 형제는 말할 것도 없고 새 방주님도 너희들 둘이 우리와 한마음 한뜻이 아니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감히 우리를 속이고 홍칠이를 빼돌리려고 들다니……."
그러자 사개 정원은 노기가 충천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너 따위들이 개방 장로냐? 미운산 방주님은 누가 죽였느냐? 범장천, 노명성! 네 놈들도 공모를 했겠지? 너희들은 귀신도 모르게 일을 처리했다고 자신만만해하겠지만 하늘은 안다. 하늘은 알아! 개방 장로 탈을 쓰고 악모를 꾸미다니, 극악무도한 놈들!"
"너희 두 놈이 그간 미운산한테 신임을 얻어 그의 수족 노릇을 해 온 건 우리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네깟 놈들이 어찌 집법장로에까지 오를 수 있었겠느냐. 너희 놈들이 미운산과 손잡고 어떤 꿍꿍이를 꾸미는 줄도 모르고, 모두 다 두 눈 멀거니 뜨고 속아넘어갈 줄 알았더냐."
소미타는 노기 서린 눈초리로 범장천을 쏘아보았다.
"소검 오평은 비록 그 계집에게 반해 그 계집과 가까이 지내 보려고는 하였을망정, 그 일 때문에 결코 자결까지 할 사람은 아니었다. 이것도 다 너희들의 음모야!"
그러자 노명성은 신들린 사람마냥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댔다.
"그래, 제대로 알고 있군. 그렇담 우리들이 소경만 죽일 수 있는 게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겠군. 너와 홍칠이는 이미 사형 명단에 올라 있다. 조만간 저승길로 보내 줄 테니 거기 가서 미운산과 소검을 만나 회포나 풀거라."
개방 장로란 위명 아래 은폐돼 있던 노명성의 검은 속마음은 공공연히 드러났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개방 장로 중에서도 무공이 매우 고강한지라 그들을 해치기 위해 이번에는 범장천, 노명성 등이 직접 나선 것이었다.
노명성은 범장천에게 흘끔 눈짓을 보냈다. 그 눈짓을 신호로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뻗쳤다.
범장천은 사개 정원을 공격해 들어갔다. 사개 정원은 황급히 소금나수(小擒拿手)를 펼치며 범장천을 막아냈다. 하나 범장천의 법수는 겉으로 봐선 유연한 것 같았지만 기실 역도(力道)가 대단히 강하여 사개는 연거푸 몇 걸음 뒷걸음질쳤다. 사개 정원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시 소금나수를 펼쳤다. 이번에는 죽을 각오로 온몸에 힘을 모아 펼쳤기에 좀전보다 빠르고 힘이 실려 있었다. 범장천은 가까스로 그의 법수를 피해 냈다.
한편 노명성은 소미타를 노려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소미타야, 발악 말고 손을 거둬라. 그러면 홍칠이는 죽여도 너만은 살려 주마."
소미타도 질세라 노한 기색으로 대들었다.
"개 같은 소리 작작 해라! 방주님께서는 아무리 흉흉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장로들은 다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지만, 네 놈들이 홍칠공을 해치려 하는 이상 우리도 가만있을 수 없다!"
노명성은 내심 미운산의 선견지명에 탄복해 마지않았다. 미운산은 벌써 이런 일을 예감하고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를 시켜 홍칠을 보호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시킨 것임에 분명하였다. 그의 예견은 과연 놀라우리만치 적중했다.
"그만 지껄이고 내 주먹이나 받아랏!"
노명성은 주먹을 휘두르며 소미타 추우에게 덮쳐 들었다.
네 사람은 두 패로 나뉘어 싸웠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개방의 집법장로로 평소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 힘만으로는 노명성과 범장천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혼신의 힘을 진력하여 대적하고 있었다.
미립은 옆에서 그들 네 사람이 싸우는 것을 지켜 보기만 하였다. 그녀는 마치 그들의 싸움과 승패가 자기와는 무관한 듯 그저 담담히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기쁜 기색도, 슬픈 기색도, 노한 기색도, 그 누구를 원망하는 기색도 없었다.
이즈음 소미타 추우는 주먹을 휘둘러 노명성의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노명성이 그의 주먹을 피해 냉큼 뒤로 물러서자 소미타 추우는 그 틈을 타서 소리쳤다.
"미립 아가씨, 어서 홍칠공을 데리고 여기를 피하시오."
그리고는 다시 뱃사공에게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배를 어서 기슭으로 몰아다 대거라. 너희 타주 나대통도 내 명령에는 늘 복종했었다!"
물살이 잠잠한 곳에 이르러 배는 아주 느리게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배를 기슭에 대기란 실로 여반장이요,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질 일이었다. 그러나 뱃사공은 선뜻 나서지 않고 어리벙벙하니 소미타 추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범장천과 노명성은 집안의 재물을 모두 나눠 주고 개방에 들어온 장로로서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데 그런 악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한편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의 명도 거역할 수는 없는 노
릇이었다. 두 사람 다 집법장로요, 방주는 무슨 일이든 먼저 집법장로에게 분부를 내리는 법이다. 그들은 명실공히 방주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뱃사공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목석같이 서 있기만 했다.
소미타 추우는 안달이 나서 발뒤축을 구르며 고함쳤다.
"미립 아가씨, 빨리 홍칠공을 데리고 떠나라니깐. 지금 홍칠공만이 개방의 유일한 희망이오!"
그러나 미립은 꿈쩍도 안 했다.
'아버지까지 돌아가셨는데 이까짓 계집의 목숨이야 하나도 아까울 게 없다. 다만 미기의 안위를 알 수 없어 답답하구나. 혹 죽지나 않았는지. 만의 하나 그 애도 대악당 구양봉 손에 죽고 말았다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난 살아야 한다. 악착같이 살아서 동생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하나 홍칠은 어떻게 하나? 저렇게도 홍칠을 살려 주라고 애원을 하건만 내가 왜 홍칠을 살려 준단 말인가? 홍칠은 이젠 내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미 그 계집과……. 지금은
꼼짝하지 못해 저러고 있지만 거동만 할 수 있으면 곧바로 그 계집의 치마폭으로 달려갈 위인이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내가 홍칠이를……."
사개 정원도 범장천과 생사결전을 벌이면서도 틈만 나면 소리를 질렀다.
"미립 아가씨, 어서 가라는데! 제발……."
사개 정원이 채 말을 맺기도 전에 그는 범장천의 장풍에 휘말려 그의 장력이 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 범장천은 장력을 앞쪽으로 쭉 끌어당겼다. 사개 정원은 그 힘에 끌려 빙빙 돌며 한쪽 귀퉁이로 끌려갔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배에서 떨어질 판이었다.
다급해진 사개는 야잇 소리를 내지르며 힘껏 소매를 내둘렀다. 그러자 소매 속에서 독사 두 마리가 범장천을 향해 휙 날아갔다. 뱀으로 상대를 해치는 것은 사개 정원이 갖고 있는 특유한 무공이었다. 이 독사는 한 마리는 대청(大靑)이고 한 마리는 소청(小靑)인데 독이 대단했다.
독사 두 마리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도 범장천은 대수롭지 않은 기색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뱀이 바로 앞에까지 오자 그는 손가락을 세워 가볍게 툭툭 퉁겨 냈다. 비록 가벼운 손놀림이었지만 장력이 대단해 독사 두 마리는 그의 손가락에 닿자마자 휙 퉁겨져 그대로 물 속으로 꽂혀 버렸다.
"사개 이 놈, 그따위 잔재주로 나에게 맞서 보려고? 허, 어림도 없다. 딴생각 말고 어서 손을 멈춰라."
사개와 소미타가 필사적으로 싸우는 것을 멀거니 지켜 보고 있던 미립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초식을 더할수록 사개와 소미타는 점점 열세에 몰렸고 그대로 가다가는 그들 두 사람은 노명성과 범장천의 손에 죽고 말 형국이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홍칠이 앉아 있는 교자를 밀고 정신없이 달려나갔다. 그러자 홍칠은 낯을 잔뜩 찌푸렸다. 웃는 것인지, 무언가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요!"
미립은 표정 없이 이 한마디만 짤막하게 하고는 계속해서 홍칠을 뱃전으로 쭉 밀고 갔다. 사공을 협박해서라도 배를 기슭에 대일 작정이었다. 그때 등뒤에서 날카로운 외마디소리가 들려 왔다.
"가긴 어딜 가!"
노명성이었다. 그는 소매 안에서 줄 달린 갈쿠리를 꺼내 휙 뿌렸다. 갈쿠리는 쉭 소리를 내며 홍칠이 앉아 있는 교자로 날아가 퍽 꽂히고, 다음 순간 노명성은 갈쿠리 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 힘에 배가 크게 한 번 기우뚱거렸다. 미립은 비틀 한쪽으로 기울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홍칠의 교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노명성은 의기 양양해서 뇌까렸다.
"이 노명성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걸 이제야 실감하겠느냐!"
그러더니 홍칠의 교자를 향해 장풍을 날렸다. 바로 그때였다. 한번 기우뚱했던 배는 제자리를 잡느라고 다시 한 번 크게 기우뚱 거렸다. 그 바람에 노명성의 장풍은 헛나가고, 미립은 저쪽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녀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을 때, 싸움의 판세는 다소 달라져 있었다. 노명성이 홍칠 쪽으로 신경을 쏟자 범장천은 혼자서 이물 쪽을 맡아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를 상대하고 있었다. 혼자서 둘을 감당하기란 그리 수월치 않았으나 그 역시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판이라 몇 십 합을 싸워도 견뎌 낼 만했다. 그는 그들 둘을 한꺼번에 이기겠다는 생각은 아예 접고 뱃머리의 높은 위치를 점하고 그저 막아내기만 할 뿐이었다.
노명성은 뒷짐을 지고 홍칠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홍칠이, 죽을 때가 임박했다. 알고 있나?"
홍칠은 노명성을 바라보며 의미 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교자에 앉아 손도 못 쓰고 꼼짝 못하고 앉아 있는 홍칠의 그 웃음은 차라리 어설프게 느껴졌다.
"이렇게 세상을 하직한다고 나를 원망하지는 마라!"
노명성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치고는 홍칠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내리쳤다. 노명성의 주먹이 홍칠이 앉은 교자 위로 휙 날아갈
순간이었다. 뜻밖에도 홍칠이 벌떡 일어섰다. 노명성은 그만 기겁하여 손을 딱 멈춘 채 입이 헤벌어졌다.
'홍칠이 중독된 게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거 큰일인데!'
개방 중에 미운산을 내놓고는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을 감당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노명성도 익히 알고 있었다. 홍칠이 성한 몸으로 일어난다면 자기들은 도저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홍칠은 휘파람을 길게 내불었다. 그것은 사개와 정원에게 노명성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것을 알려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신호였으며, 그때껏 가슴에 쌓인 울분을 토해내는 것이기도 했다.
홍칠의 휘파람 소리에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용기백배하여 진력을 다해 장풍을 날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홍칠의 안위만을 염려하던 사개와 추우는 그가 이렇게 우뚝 일어서자 신명이 났다. 그들이 펼치는 소금나수에도 한층 강력한 위력이 실려 있었다.
"범장천, 내 목을 따겠다구? 좋다, 나는 네 목을 따는 대신 네 눈알을 뽑고 혀를 베어서 다시는 악모를 꾸미지 못하게 해 줄 테다!"
사개 정원은 고성을 내질렀다. 범장천은 지탱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일이 이 지경으로 될 줄 알았다면 결코 이 일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후회막급이었다. 일단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 그는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이었다.
"범장천, 네 놈은 노명성과 같이 개방 장로로 천하를 호령했다. 재물을 나누어 주고 제 발로 개방에 찾아왔다 하여 뭇사람들이 네 놈들을 존경했었다. 그런데 간악한 계집년 치맛자락에 매달려 흉계를 꾸미고, 미운산 방주님을 죽인 죄, 이 죄가 얼마나 큰지 내 알게 해 주리라!"
소미타 추우가 벽력같이 고함을 내질렀다. 범장천은 마음 한구석에서 회한에 사무치면서도 사개와 소미타가 아랫사람 다루듯 자기를 훈계하자 반발심이 치밀어 노기 띤 목소리로 외쳤다.
"사개 이 노옴, 감히 나한테 그런 망발을 하다니이……."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장풍을 날렸다. 폭풍우가 몰아치듯 배가 크게 한 번 들썩거렸다.
한편 노명성을 바라보고 있자니 홍칠의 가슴에선 걷잡을 수 없이 증오심이 끓어올랐다. 평소 그는 심성이 고와 결코 남을 증오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악모를 꾸미면서 개방 전체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는 자들이 아닌가!
"그 계집년의 달콤한 속임수에 넘어가 미운산 방주님을 살해한 놈들이 바로 네 놈들이란 말이지?"
홍칠의 목소리는 부르르 떨려 나왔다.
"미운산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미운산, 미운산 하느냐? 나는 정의를 구하고 개방을 바로잡기 위해 이 한 몸을 기꺼이 바친 거다. 개방 대사는 아예 뒷전에 밀쳐 두고 향락에만 빠져 있는 미운산 놈을 없애지 않고서는 개방의 앞날엔 먹구름만 낄 뿐이었다."
노명성은 여전히 뻔뻔스럽게 자기 변명을 늘어놓았다. 홍칠은 냉소만 흘릴 뿐 입을 닫아 버렸다. 뭐라고 대꾸할 가치조차 없었다.
"홍칠이, 너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위인이다. 하지만 그 여인이 방주가 되면 개방엔 서광이 비칠 것이다!"
노명성은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 여인은 송(宋) 황제의 총희, 범장천의 식구들에게 자그마하나마 벼슬 감투 하나씩 씌워 주는 것쯤은 식은죽 먹기다. 범장천이 혹한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그에 반해 노명성은 한때 저지른 남 부끄러운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 여인이 그 내막을 다 알고 있어, 입막음을 하느라고 그는 코가 꿰이듯 그녀 쪽에 가 붙은 것이었다. 어쨌든 이런 연유로 그들 두 사람은 그 여인의 충복 노릇을 하고 있었다.
"노 장로, 내 손으로 노 장로를 죽여 마땅하나 지금은 죽이지는 않겠소! 그대는 당장 돌아가 그 계집에게 전하시오. 그 계집이 개방에서 속히 물러가지 않으면 이 홍칠이 절대 살려 두지 않겠다고 말이오!"
홍칠은 정중하게 말했다.
이 배에는 원래 범장천, 노명성 등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개방 사람들을 매복시켜 놓았는데 그들은 갑판 밑에 숨어서 배 위의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만 뜻밖으로 홍칠이 정신을 차려 범장천 등을 꾸짖자 장막이 걷히듯 사태를 확연히 알아차리고는 모두들 홍칠 편으로 돌아서기로 입을 모았다. 그들은 일시에 갑판 위로 우르르 몰려나와 노명성을 에워쌌다.
노명성은 사세가 험악해지자, 다급하게 소리찼다.
"사개, 소미타! 할말이 있다!"
사개와 소미타는 그 말에 손을 거두고 한옆으로 냉큼 비켜서서 노명성의 말을 기다렸다. 범장천도 쓰거운 표정으로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꼭 물에 빠진 생쥐 형색이었다.
노명성은 일단 다급한 마음에 한 소리 외치긴 했으나 몇 십 년 일궈 온 명성이 일시에 허물어진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꺽꺽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우, 우리 두 사람이 가서 새 방주님께 권고해 개방에서 물러나게 하고 홍칠공을 정중히 모셔 가도록 하겠네. 어떤가, 자네들 생각은?"
그의 태도는 사뭇 비굴했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그들의 말이라면 애시당초 믿지 않았으나 홍칠을 보아하니 그는 그들 두 사람이 돌아가는 것을 묵허(默許)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 두 사람은 내심 일찍부터 홍칠을 방주로 모시고 있었다. 미운산도 여러 차례 그들 둘에게, 남 모르게 뒤에서 홍칠을 보호하면서 위급할 시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홍칠만은 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홍칠의 의사를 거역할 수 없었다. 범장천과 노명성을 그 자리에서 당장 요절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그들은 꾹꾹 눌러 참았다.
뱃사공이 배를 기슭에 갖다 댔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이고 배를 내려 오던 길을 따라 느릿느릿 거슬러 올라갔다.
홍칠은 울렁이는 가슴을 달래며 미립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립과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미립은 그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저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물만 초연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립 아가씨……."
홍칠은 다가갔다. 부드러운 음성이건만 미립은 머리도 돌리지 않았다. 홍칠은 가만히 미립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말아요!"
미립은 쏘아붙이듯 말했다. 홍칠은 어정쩡하니 미립의 어깨에서 손을 떼지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서 있었다.
홍칠은 정말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함께 석실에서 보냈던 그 꿈같은 나날들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그땐 사랑이 충만했었다. 20여 년을 거렁뱅이로 떠돌면서 그때껏 홍칠이 처음으로 맛본 행복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 나날들을,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애타게 그리던 정을 미립은 정녕 잊었단 말인가? 홍칠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오다가다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처럼 자기를 냉대하며 말 한마디 없다니……. 홍칠은 마음이 뒤숭숭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홍
칠은 문득 짚이는 데가 있었다. 그때 그 요리, 팔직완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던 일……. 미립은 필시 그 일로 여태것 성을 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홍칠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여태까지 내가 미립을 노엽게 한 일이라곤 없었는데, 맞아, 그 일 때문이야. 그러나 그게 뭐 대순가? 주육(酒肉)으로 배를 채워도 불심(佛心)만 신실하면 된다는 고언도 있는데…… 하긴 그때 그 요린 정말 맛있었어. 그리고 내가 뭐 요리를 먹었을 뿐, 그 계집을 어떻게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 일이야 내가 십일취에 중독되어 그런 거니……. 아, 그 일은 생각하기조차 싫어. 정말 지독한 년이었어. 어쨌든 미립은 그 요리 때문에 여태까지 날 고깝게 보는 게다.'
"내가 그때 요리를 먹은 걸 가지고 그러오? 내 생각엔 그런가 보오. 그땐 정말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었는데 구수한 냄새를 맡으니 견딜 수가 없었소. 그뿐이었소. 정말 그뿐이야."
홍칠은 뭐라고 더 말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미립의 어깨가 가늘게 들썩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소리를 죽여 가며 울고 있었다. 홍칠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게 내 버릇이오. 다른 것은 몰라도 먹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단 말이오. 바로 눈앞에 맛있는 음식이 가득 놓여 있는데 어찌……."
홍칠은 열적게 웃었다. 미립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먹는 데만 유별날 뿐 자기한테는 그렇듯 무심한 사내와 평생을 무슨 재미로 살아간단 말인가. 또 그 일도 잊을 수 없고…….
미립이 아무 응대도 없자 홍칠은 안달이 났다.
"하긴 엄밀히 따져 보면 이번 일은 모두 내 잘못이오. 내가 그렇게 식탐(食貪)을 내지 않았어도 미립 아가씨가 그 계집의 손에 떨어지지 않았을 거고 나도 이렇게 낭패를 보진 않았을 게요. 또 미운산 방주님이 살해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이 일은 모두 내 탓으로……."
그래도 미립은 응대가 없다.
"내가 그토록 원망스럽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난 그저 아가씨 결정에 따를 뿐이오."
미립은 여전히 홍칠을 돌아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어디 조용한 절이라도 찾아가 동그마니 등불을 밝혀 놓고 불상을 마주 대하며 세상 시름을 잊고 싶었다. 그렇게 일생을 보내면 어떠랴……. 그녀는 속세의 그 어느 것에서도 가치를 찾을 수 없었다.
미립이 영 쌀쌀맞게 나오자 홍칠은 애가 탔다. 미립이 철장방 놈들을 막아내고 그를 구해 줄 때만 해도 그녀는 그를 정말 사랑했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자 홍칠은 미립에게 속죄해야만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미립 아가씨, 진심이오. 난 그때 정말 먹어야겠다는 생각밖에 다른 뜻은 추호도 없었소. 아가씨도 보셔서 알겠지만 내가 그 여자에 대해서 딴마음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다니깐……."
홍칠은 답답했다. 무슨 말을 해도 미립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하염없이 강물만 바라다볼 뿐이었다.
그때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홍칠과 미립을 피해 이물 쪽으로 가서 개방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뜻 보니 홍칠과 미립 사이가 웬지 서먹서먹하게만 보여 두 사람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는, 소미타가 웃으며 외쳤다.
"미칩 아가씨, 이제 그 계집을 잡으면 그 계집의 목을 따서 방주님께 제사를 지냅시다. 어떻습니까?"
미립은 무뚝뚝하니 그를 한 번 흘낏 쳐다볼 뿐 대꾸가 없었다. 그러자 사개 정원이 나섰다.
"아가씨와 홍칠공이 만난 것도 다 연분입니다. 방주님께서 개방 대사를 홍칠공에게 부탁할 때부터 벌써 방주님은 마음속에 달리 생각한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미립은 여전히 말이 없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그만 머쓱해져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홍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가씨는 진정으로 나와 결혼하기 싫은 게로군요. 정녕 그런 마음이라면 고개라도 한 번 끄덕거려 보오."
그러자 미립은 여전히 그를 외면한 채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미립의 결연한 태도에 홍칠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정말, 정말 싫다는 말이오?"
홍칠은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러나 미립은 대답이 없었다. 미동도 않고 그녀는 그저 강물만 바라볼 뿐이었다.
강물에 어린 미립의 모습은 매우 황홀했다. 날씬한 몸매에 꽃 같은 얼굴……. 이 아름다운 여인은 홍칠에 대한 노여움을 삭이지 못한 채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홍칠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안 그래도 소씨 거렁뱅이 일이며, 운명을 달리한 미운산 방주며, 개방 장로 호심과 소검 오평의 죽음을 생각하노라면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그였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죽으나 사나 떳떳해야지 이게 무슨 꼴인가? 한 섬약한 여인한테 업신여김을 당하면서 비굴하게 이 말 저 말 주워섬기고 있다니……."
"아가씨가 날 미워하는 줄은 나도 아오. 나도 나 자신이 밉소. 하잘것없는 그깟 음식만 탐하는 꼴이라니……. 나란 인간은 정말 식충이 같은 놈이 아닐 수 없소. 하나 내 맹세하지만 앞으로는 결단코 그 버릇을 버리고……."
홍칠은 마음과는 달리 또 미립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뭐라든 미립은 그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 반응이 없자, 홍칠은 손을 들어 오른손 식지를 세워 보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 오늘 미립 아가씨에게 나의 결의를 보여 주겠소, 이후로는 아무리 산해진미라도 탐하지 않겠다는! 나는 원래 무슨 음식이든 이 식지로 집어먹는 버릇이 있어서……."
홍칠은 말을 채 끝맺지도 않고 왼손으로 배 갈고랑이를 거머쥐었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고 오른손 식지를 힘껏 내리찍었다. 다음 순간 그는 악 소리를 지르며 왼손으로 오른손을 얼른 감싸쥐었다. 오른손 식지가 뭉팅 끊어져 나가고 샘솟듯 피가 솟구쳤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가 비명 소리를 듣고 황급히 뛰어와 의아한 눈초리로 미립과 홍칠을 번갈아 보았다.
홍칠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조용히 말했다.
"난 상관 말고 두 분은 저쪽으로 가 계세요."
"얼른 싸매야지요."
사개 정원이 걱정스럽게 말하자 홍칠은 짜증이 나는 듯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글쎄, 상관 말고 저쪽으로 가 계시라는데도요."
홍칠이 이처럼 화가 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사개 정원은 더는 말을 않고 소미타 추우를 데리고 뱃머리로 물러갔다.
홍칠은 옷자락을 쭉 찢어서 제 손으로 직접 손가락을 싸맸다. 그러나 울분이 치받쳐 손이 후들후들 떨리고 잘되지 않았다. 미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돌아섰다. 그리고는 홍칠의 오른손을 받쳐들고 그 더럽고 꼬질꼬질한 천 조각을 도로 풀어 강물에 내던지고는 자기 품에서 눈같이 하얀 수건을 꺼내 쭉 찢어서 꼼꼼히 상처를 싸매기 시작했다.
미립의 손끝이 와 닿자 홍칠은 또다시 석실에서 나뒀던 그 애절한 사랑이 떠올랐다. 그리고 미운산이 자기에게 개방은 물론 미립을 잘 돌봐 달라고 당부하던 말소리도 머리를 스쳐 갔다. 상처를 싸매는 미립을 지그시 내려다보면서 그의 마음엔 기쁨이 물결쳤다. 그리고 그의 얼굴엔 오랜만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구운 잉어 세 마리를 들고 미기는 정신없이 달렸다. 얼마나 그렇게 내 달렸는지, 일순 정신을 차려 돌아보니 주위엔 칠흙같은 어둠만이 짙게 내려앉아 있을 뿐 무슨 화톳불 빛 같은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미기는 크게 놀랐다.
'어, 이상한데……. 아버지는 분명히 화톳불 쪽으로만 길을 잡으면 용골묘에 가 닿을 숙 있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이지? 왜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게야? 용골묘는 어디 있고? 아아, 개방 사람들을 만나 아버지를 구해야 하는데. 이러다가는 아버진 그 놈 손에 죽고 만다!'
그 순간 미기는 문득 구양봉이 자기를 덮쳤던 생각이 났다. 구양봉이 자기를 따라왔다면 그 놈은 이미 아버지와 소씨 아저씨를 해쳤음에 틀림없다. 미기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다리가 떨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부르며 목놓아 울었다.
얼마나 그렇게 울었는지 모른다. 미기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어디로 가야 할지, 멍하니 서 있었다. 주위는 어둡기만 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되는 대로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채 몇 걸음도 나아가지 않아 그는 무엇엔가 쾅 부딪혀 뒤로 벌렁 나가 넘어졌다.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니 눈앞엔 두 장은 족히 넘을 듯싶은 벼랑이 우뚝 버티고 있었다. 미기는 당혹스럽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해서 얼른 일어나 황황히 벼랑을 기어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자꾸만 주르르 주르르 미끄러져 내릴 뿐,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었다. 매기는 절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온몸에 힘이 다 빠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기진맥진하여 벼랑에 몸을 기대고 엉엉 울었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적막한 이곳, 먼데서 강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미기는 아버지와 누나를 번갈아 부르면서 흐느껴 울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날이 훤히 밝아서야 미기는 깨어났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따갑게 눈을 콕 찔렀다. 미기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오던 길로 되돌아가면 어떻게 그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미기는 벌떡 일어나 지난밤 그를 곤경에 빠뜨렸던 벼랑을 등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찬 숲을 가로지르고, 야트막한 구릉을 넘으며 한참을 달려 냇물을 하나 건너자 저만치에 용골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용골묘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풀밭 여기저기에 먹다 남은 음식물과 누더기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미 스러진 화톳불에서는 실낱 같은 연기가 아직도 피어 오르고 있었다.
미기는 의아해하면서도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마침내 그는 용골묘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러나 용골묘 안은 인적 하나 없이 괴괴하기만 했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문소리에 머리칼이 삐죽삐죽 곤두설 정도였다. 미기는 절 안 구석구석을 다 뒤졌으나 뜰에 깔았던 거적때기만 휑뎅그레 남아 있을 뿐 사람 그림자라곤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치는 괴이한 생각에 사로잡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웬지 섬뜩한 기분이 들어 그는 뒤로 주춤주
춤 물러서다가 어서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에 뒤로 홱 돌아섰다. 그 순간 미기는 숨이 탁 멎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장대같이 큰 사나이 하나가 팔짱을 낀 채 딱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사나이는 엄한 눈길로 미기를 쏘아보았다. 허리에 표창 자루들을 두르고 있는지 온몸을 휘감고 있는 금의(錦衣) 여기저기가 불룩불룩 도드라져 있었다. 미기는 언젠가 들은, 고강한 표창수들은 표창을 수시로 꺼내 집어 던질 수 있게 표창 자루를 앞가슴이건 옆구리건 등뒤건 심지어는 어깨며 팔죽지, 허벅다리 안쪽에까지도 두르고 다닌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미기는 이 사나이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는 필시 표창을 잘 쓰는 무학대가임에 틀림없었다.
"개방 사람인가요?"
미기는 조심스레 물어 보았다.
"난 출수표 노경이다. 넌 누구냐?"
미기는 어리지만 호기심이 많아, 강호의 흥미 있는 일들을 적지않이 알고 있었으며, 개방 10대 장로들이 각각 어떤 무예를 지니고 있는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미기는 그 사나이가 출수표 노경이라는 소리를 듣자 금세 울음이 터져 나왔다.
"왜 우느냐? 무슨 일이냐? 말을 해야지, 말을……."
"우리…… 우리 아버지가 구양봉한테 쫓기어…… 지금쯤 아마 돌아가셨을지도 몰라요."
"네 아버지가 누군데?"
"미운산이에요, 미운산!"
미기는 흐느끼며 대답했다. 출수표 노경은 깜짝 놀라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그는 주위를 한번 살피고는 나직이 물었다.
"네가 미운산 방주님의 아들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또 있느냐?"
미기는 도리질을 했다. 그를 아는 사람이 개방에 없다는 뜻인지, 아니면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노경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정스레 말했다.
"나를 따라 가자. 이제부터는 나와 함께 다니는 게 좋겠다."
"그보다도 어서 우리 아버지를 구해 주세요! 어서 개방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구해야 해요. 아저씨, 어서요! 암기(暗器)들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계신 걸 보면 무예가 대단한 분 같은데 어서요! 어서 우리 아버지를 구해 주세요!"
미기는 발을 동동 굴렀다. 출수표 노경은 허리를 굽혀 미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아버진 벌써 돌아가셨다. 얘야, 넌 네 아버지가 왜 놈들한테 살해당했는지 아느냐?"
"아저씨 뭐라구요? 우, 우리 아버지가 살해 당하셨다구요? 우리 아버지가 정말 죽었어요? 정말요?……."
미기는 대성통곡을 하였다.
"얘야, 울지 마라! 네가 우는 소리를 들으면 놈들이 와서 너마저 죽여 버리려 들 게야!"
출수표 노경은 소리를 죽이며 미기를 흔들었다. 그 말에 미기는 겁먹은 표정으로 꿀꺽 울음을 삼키고 흑흑 흐느끼기만 했다.
"얘야, 내 말을 잘 들어라. 이제부터 너는 어린 거렁뱅이로 가장 하여 나와 함께 다니자꾸나. 네게는 미립이라고 누나도 하나 있을 텐데?…… 다니면서 네 누나도 찾아보자구나!"
미기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23장 옥벽 반쪽을 지닌 여인
절정곡(絶情谷)에 온 이후로 노완동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이 곳으로 올 때만 해도 그는 혼수 상태를 헤매고 있었다. 자기 거처로 정해진, 절정곡에 있는 이 집에 들어서서야 그는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즈음은 꽤 회복되어 한가롭게 거닐면서 절정곡의 경치를 감상하자니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더욱이 절정곡은 그야말로 절경이라, 색다른 흥취를 안겨 주었다. 가을도 꽤 깊었건만 초목은 여전히 푸르디푸르고, 초록에 어울려 점점이 피어 있는 고운 빛
깔 산꽃들은 바람결에 살랑이며 한껏 운치를 자아냈다. 어디선가 벽계수 흐르는 소리도 명쾌하게 들렸다.
노완동은 그저 산보삼아 절정곡 안 이곳저곳을 여유롭게 찾아다녔다. 그때마다 다리 하나를 들고 서 있는 흰 학, 무리 지어 몰려다니는 사슴 떼, 초목 사이를 누비는 토끼와 다람쥐…… 들짐승과 마주치곤 했다. 이곳 짐승들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노완동은 즐겨 짐승들을 상대로 장난을 쳤다. 학한테 장풍을 날려 보기도 하고 가볍게 혈도를 찍어 보기도 했다. 그러면 학은 그 긴 목을 앞뒤로 흔들흔들 하다가 푸득푸득 뒷걸음질을 치며 끼르륵 소리를 요란히 떨궈 놓고는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때로는 흰 사슴과 경공을 견줘 보기도 했다. 벌써 몇 번이나 사슴 뒤를 쫓아 달려가 보았는데 그럴 때마다 사슴은 그림자같이 사라져 버렸다. 다람쥐나 토끼를 보면 장난기가 더욱 발동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런
날은 그는 해가 지고 으스름이 깔리고 난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이 며칠 동안 노완동은 봉고(鳳姑)와 함께 생활했다. 밥도 한 상에서 같이 먹고 잠도 한 침상 위에서 함께 잤다. 남들이 보면 두 사람은 영락없이 부부였다. 피 끓는 나이 삼사십, 여느 사내라면 여인과 이렇게 가까이 지내노라면 자연 서로 살을 섞는 일이 있을 법도 하건만 노완동은 달랐다. 그는 괴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싱거운 장난은 즐겨 할망정 여인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며, 그런 밤에 하는 일은 더 더욱 달가이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봉고는 참지 못하는 눈치였다. 잠자리에 들 때면 때때로 그녀는 그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교태를 부리고, 그래도 노완동이 꿈쩍을 안 하면 종알종알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도 노완동의 굳은 마음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봉고가 그렇게 나올수록 그는 밤에 금세 곯아떨어지고자 온종일 짐승들을 따라다니고, 무예를 연마하는 데 진력을 다했다. 어쨌든 노완동은 근심 걱정 없이 태평스럽게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그날도 그렇게 놀다가 해질녘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봉고가 밥상을 챙겨 들어왔다. 둘은 마주앉아 밥을 먹고는 한담을 나눴다. 노완동은 입담이 좋았다. 한 가지 흠이라면 늘 이 말 하다 저 말 하다 두서가 없다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어찌 어찌 재미나게 엮어 나가는 데는 배꼽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도 봉고는 허리를 꺾어 가며 한창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창 밖엔 노을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꽤 늦은 시간인데도 웬일로 문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봉고 아씨 집에 있나?"
"있습니다! 있습니다!"
노완동은 부랴부랴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그는 절정곡 청지기겠거니 했는데 뜻밖에도 절정곡 곡주(谷主)인 공손지(갓孫止)가 서 있었다. 타오르는 석양빛에 비껴 공손지는 그날따라 제법 의젓하고 준수해 보였다. 공손지는 딱히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어색하니 노완동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문께로 몇 발자국 더 다가가 또 봉고를 불렀다.
"봉고 아씨 있나?"
노완동은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좀 전에 분명히 있다고 했는데도 들어갈 생각은 않고 밖에서 자꾸 봉고, 봉고 찾기만 하니 별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더욱 괴이한 것은 봉고마저도 마치 아무 소리도 못 들은 것마냥 잠자코 있는 것이었다. 공손지는 공손지대로 집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없으니 들어 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니 서서 또 물었다.
"봉고 아씨, 들어가도 괜찮수?"
그제야 집 안에서 봉고의 말소리가 흘러 나왔다.
"공손 곡주님, 대체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저 같은 걸 다 찾아오셨나요?"
봉고의 말소리를 듣자 공손지는 대뜸 얼굴이 환해지며 기뻐서 소리쳤다.
"아주 긴요한 일이 있어, 긴요한 일이!"
공손지의 말투가 평상시와 달라서인지 봉고는 얼마간 주춤거리다가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긴요한 일이 있으면 부인과 상의하실 게지 나 같은 사람을 뭣하러 찾아와요?"
공손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긴요한 일이야. 이건 꼭 아씨하고만 얘기해야 해!"
봉고는 한참 지나서야 마지못해 대답했다.
"곡주님께서 정 그러시다면 들어와 얘기하세요."
공손지는 괜스레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노완동이 보건대, 그들 두 사람은 서로 생소한 사이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친숙한 사이 같기도 했다. 절정곡 곡주 공손지라면 절정곡에서는 어느 집에 가도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아들이는 법인데, 봉고는 왜 저리도 냉담하며, 공손지는 또 왜 저리도 머뭇거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장난기가 발동해 창문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사나이로 생겨나 남의 얘기나 엿듣는 간신배 같은 짓은 내키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태도가 하도 기이해 엿듣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다. 노완동은 창가에 붙어 서서 창문으로 방안을 흘낏 들여다보았다. 공손지는 탁자 옆에 서 있고, 봉고는 침상 위에 앉아 있었는데 두 사람 사이는 매우 가까웠다.
"큰일이 생겼는데……."
공손지가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봉고가 담담히 물었다.
"절정곡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샘물처럼 깨끗한데 큰일은 무슨 큰일이 생겼다고 그러세요?"
공손지는 또 한숨을 지었다.
"아씨는 모르오. 난 그 여자를…… 그 여자를…… 깊은 산골짜기 밑으로 밀어 버렸다니까.……."
봉고는 사뭇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한동안 공손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돌고 있었다.
"나는 이 일을 아씨한테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 절정곡 안에 아씨말고는 딱히 말할 사람도 없어서……."
"아니, 그게 사실이에요? 나를 속이려는 게 아니고?"
"아이고 속이긴 누굴 속여? 믿지 못하겠으면 어디 가 봐! 내 선단방(仙丹房)에든, 영지방(靈芝房)에든, 서재에든, 또……."
공손지는 아마 침실에도 가 보라는 말을 하려 한 듯했지만 급히 입을 닫아 버렸다. 그는 어쩐지 봉고를 어려워하고 있는 듯했다.
봉고는 쓸쓸히 웃으면서 말했다.
"곡주님이 사람을 숨기려고 들면 절정곡 이 넓은 곳에 어디든 못 숨기겠어요. 그리고 곡주님의 부인이 어디 숨어 있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내가 곡주님의 선단방이니 영지 방이니 서재를 들어가 봐요?"
그러자 공손지는 안달이 났다.
"봉고 아씨, 내 말 좀 들어 봐. 그 여잔 나를 너무나 괄시했어. 내가 선단방에 있으면 쫓아와 연단로(煙丹爐)를 뒤엎어 놓지 않나 선단을 밟아 뭉개 버리지 않나. 또 내가 영지방에 있으면 거기도 쫓아와 영지를 막 내뿌려 버리지, 서재에서 책을 보면 와락 책을 빼앗아 짝짝 찢어 버리지……. 남편 대접을 이렇게 하는 것 봤어? 그 여자 눈엔 내가 도무지 남편으로 보이지 않는다니 깐……."
공손지는 성이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봉고는 공손지를 동정하기는커녕 도리어 비아냥거렸다.
"그래요? 점점 곧이들리지 않는 소리만 하는군요. 곡주님 부부는 금실이 좋다고 이 절정곡에 소문이 자자한데, 무슨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세요?"
"아이고 답답해. 내 말은 모두 사실이야, 사실!"
공손지는 가슴을 치며 소리질렀다.
기실 공손지는 첫눈에 지금의 아내, 구천척에게 반했었다. 그러나 구천척은 자기보다 어린 공손지에게 별다른 마음이 없었다. 더욱이 오빠 구천인도 결사적으로 반대하여 그녀는 공손지와 결혼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안 했다. 그러나 공손지가 막무가내로 끈질기게 달라붙는 바람에 구천척은 이 생각 저 생각 골머리를 썩이기 싫어 그만 못 이기는 척 절정곡으로 들어와 공손지와 결혼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웬지 결혼한 뒤에는 공손지도 마음이 식어 버리고 서로 뜨악한
것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정답게 지내는 시간보다 다툴 때가 더 많아졌다. 서로간에 믿음도 없고 정도 없으면 부부간이란 기실 남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런 나날이 오래 지속되자 공손지는 딴마음을 품고 구천척이 무공을 수련하는 틈을 타서 시녀와 놀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급기야 그녀와 작당해 절정곡에서 몰래 도망치려고 했다. 그 사실을 알아낸 구천척은 그 자리에서 시녀를 죽여 버리고 공손지까지 죽이려고 덤벼들었다. 당시만 해도 공손지는 무
공이 구천척보다 못하여, 그저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구천척은 일단 공손지를 용서했지만 이후로는 툭하면 그 일을 들춰내 공손지를 궁지에 몰아넣곤 했다. 이에 앙심을 품고 기회만 노리고 있던 공손지는 드디어 절정곡 어느 골짜기에서 구천척을 밀어 떨어뜨려 버렸던 것이다.
"봉고 아씨도 내 마음을 알고 있겠지만…… 우리 절정곡에서 많은 처녀들이 제법 나를 따르지만 난 어느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봉고 아씨만은 달라. 봉고 아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난 완전히 첫눈에 반했다니까."
"곡주님이 날 이곳에 데려온 건 저도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사랑이니 뭐니 그런 말씀은 이젠 제발 그만두세요."
그러더니 봉고는 정화(情花) 꽃잎이 담긴 접시를 자기 쪽으로 끌어다가 한 잎 집어서 입으로 가져 갔다. 그녀는 정화 꽃잎을 다소곳이 씹고 나서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곡주님, 그때 그 말 한마디는 참 잘하셨는데……."
"그 말이라니, 무슨 말?"
"왜 곡주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대체로 정이란 것은 첫맛은 달지만 뒷맛은 쓰고 가시가 돋쳐 있기에 찔리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 사람들이 그래서 이 꽃을 정화라고 한다고……."
공손지는 봉고가 지금 왜 그 말을 꺼내는지 그 속마음을 알 수 없어 멀거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봉고는 또 방긋 웃더니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정화, 정화, 이 꽃은 말 그대로 첫맛은 달콤하지만 뒷맛은 쓰거든요. 하여튼 그 한마디는 멋들어져, 실로 의미 심장해요……."
"봉고 아씨, 난 아씨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거야."
그러나 봉고는 정화 꽃잎만 만지작거리며 아무 대꾸도 안 했다. 동백꽃보다 더 곱고 부용보다 더 향기로운 꽃이었다. 하나 이 아름다운 꽃을 먹기만 하면 중독된다. 연인 사이라면 더 더욱 깊이……."
"나는 마음이 하도 답답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아씨를 찾아온 거야. 무슨 말이든 좀 들어 보려고……."
공손지의 목소리는 애절했다.
"곡주님, 제가 이 절정곡에 처음 찾아 들었을 때도 곡주님은 이렇게 저를 찾아오셨지요. 우리 곁에는 백학도 서 있었고 사슴도 몇 마리 뛰놀았어요. 다람쥐와 토끼도 우리를 에워싸고 돌며 우리가…… 우리가 서로 부둥켜안는 걸 보았죠. 그러나 웬일인지 곡주님은 그후로 다시는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우리의 정은 단지 그 때뿐이었어요."
"봉고 아씨, 아씨는 모를 테지만 우리 그 여편네는 시샘이 대단한 여자야. 그때 그 여편네가 그걸 알았더라면 아씨를 가만 놔두지 않았을 거야, 자칫하면 그 손에 벌써 목숨이……."
"정 없이 목숨만 부지하면 무엇 하겠어요."
봉고는 쌀쌀맞게 웃었다. 공손지는 봉고를 보기가 부끄러웠다. 사실 공손지는 그날 봉고와 사랑을 나누고 난 후에는 구천척이 무서워 다시는 봉고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곡주님, 난 매일매일 이 정화 꽃잎을 먹다 보니 이젠 너무나 심하게 중독되어 아무런 정욕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심드렁해져 버렸어요. 매일매일 노완동과 한 침대에서 자지만 뭘 어떻게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나질 않아요. 그러니 곡주님,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마세요.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둬요. 이대로 마음 편히 내버려두세요."
봉고는 담담히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구천척을 절정곡 심연에다 밀어 버리고 마음이 황망하여 안절부절못하다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달래 보려고 봉고를 찾아왔는데, 그녀조차 적이 냉담하게 따스한 눈길 한 번 주지 않자 공손지는 말할 수 없이 서글퍼서 한숨만 나왔다.
"봉고 아씨가 정녕 날 용서하지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공손지는 주춤주춤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봉고도 서먹하니 그를 뒤따라 나와 문가에 섰다.
그때 한 사람이 황급히 비탈길을 올라왔다. 청지기 정씨였다. 그는 공손지에게 정중히 읍을 하고는 말했다.
"곡주님, 철장방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래?"
공손지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철장방에서 사람을 보내 노완동 주백통을 도로 데려가겠답니다. 보내시겠습니까? 곡주님의 의향은 어떠하온지요?"
청지기는 재차 읍하며 공손히 아뢰었다.
"난 안 간다, 난 안 가!"
노완동은 그때껏 창가에 서 있다가 화들짝 놀라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공손지는 내심 노완동이 영 마뜩지 않았었다.
"그래, 안 가겠다고 해서 아니 갈 수 있는 게요? 애시당초 이곳으로 올 때도 제 발로 걸어온 건 아니잖소! 철장방 사람들한테 끌려 온 거고 이제 철장방에서 다시 돌아오라는데 무슨 재주로 안 간단 말이오. 어서 가시오!"
공손지의 말에 노완동은 부아가 치밀었다.
'옳아, 내가 여기 있어서 봉고를 보러 다니기 불편하다, 이거지? 딱히 그렇다면 굳이 날 가라고까지 할 건 또 무어냐? 봉고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 놓으면 되지!'
노완동은 원래 말을 속에 담아 두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가 봉고 아씨와 같이 있는 게 고까워서 그러오? 그렇다면야 다른 집을 한 채 비워 봉고 아씨를 거기다 데려다 놓으면 되지 않소? 굳이 나더러 가라고 할 것까지야 있냔 말이오?"
공손지는 노완동이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위인이란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니저러니 주고받다가는 망신만 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는 노완동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고개를 돌려 청지기 정씨를 재촉했다.
"어서 이 노완동을 데리고 가서 철장방 사람들에게 넘겨주지 않고 뭐 하고 섰는 게야?"
노완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공손지와는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공연히 공손지를 건드려 절정곡에 있는 무림 고수들을 다 불러내게 하면 일만 시끄럽게 되고 자기는 쫓기는 신세가 될 것이 뻔했다.
"제기랄, 가라면 가겠소. 어쨌든 이제 볼 것 다 보고 놀 것 다 놀았으니 더 있어 봤자 심심하기만 할 뿐이오."
노완동은 이를 바드득 갈면서 뇌까리고는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마음속의 미련을 완전히 털어 낼 수는 없었다. 이제 떠나면 이만한 곳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서운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노완동은 정씨를 따라 묵묵히 비탈을 내려갔다. 정씨가 이끄는 대로 절정곡 아래 공손지의 집 대청에 들어서니 한결같이 검은 옷에, 검은 두건을 두른 철장방 사람 여럿이 울타리 치듯 둘러서 있었다. 그들을 보자 노완동은 한숨을 후 내쉬며 투덜거렸다.
"난 아직 이 절정곡에서 원대로 놀아 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데리러 오다니…… 이거 정말 서운한데……."
그러거나 말거나 철장방 무리들은 코대답도 않고 우르르 몰려들어 노완동의 대혈을 꾹꾹 찔러 놓고 밧줄로 온몸을 꽁꽁 묶었다. 그리고는 그 길로 노완동을 끌고 절정곡을 떠나갔다.
'아아, 이 노환동을 어디로 또 끌고 간단 말인가? 철장방에 이 곳보다 좋은 곳이 또 있을까?'
노완동은 말은 한마디도 못하고 혼자 속앓이만 했다.
묘대야는 과이야, 허삼야, 우사야를 데리고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점심나절이 좀 지났을 때 한 사내가 찾아왔었다.
"여인 한 분이 옥벽(玉壁) 반 조각을 어르신한테 팔겠답니다."
묘대야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분명 가짜 미립이 자기를 부르는 것이었다. 덜컥 겁부터 났다.
당시 넷째 아우가 소씨 거렁뱅이나 미운산과 싸운 것은 결코 자원해서가 아니었다. 그래 과이야가 퇴각하자는 말에 그들 네 형제는 평오야의 시체를 업고 그 시비 많은 옷을 서둘러 떠났었다. 그 때 여인은 그들을 적이 경멸 어린 눈길로 바라봤었다. 대내오주에 대한 불만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그 여인은 그들을 부른 것이다. 상서롭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니 갈 수도 없는 터, 네 사람은 이번에야말로 필시 무슨 일이 터지고야 말리라고 예측하고
미리부터 단단히 각오하고는 저마다 병기를 하나씩 들고 암기(暗器)를 넉넉히 챙가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는 이 골목 저 골목을 에돌아 이 집 정원에 들어섰던 것이다.
비록 가산(暇山)에, 연못에, 널찍한 대청까지 몇 칸이나 되었지만 임안(臨安)에서는 그리 대단치도 않은 그저 그런 정원이었다.
회랑까지 천천히 걸어오면서 그들은 주위를 예의 주시하며 먼저 퇴로부터 봐 두었다. 좌우는 모두 공터였다. 그들은 여차직하면 내뺄 심산으로 서로 의미 심장하게 눈길을 주고받았다.
이들 네 사람은 기실 이 여인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으나 혹시나 하는 요행수를 바라 한 가닥 기대를 안고 이곳에 온 것이다. 어쩌면 이 여인이 자기네들을 책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슨 중책을 맡기려는 것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네 사람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뒤숭숭한 마음을 달래며 한데 몰려 서 있었다.
드디어 그 여인이 한들한들 걸어왔다. 여인이 나타나자 묘대네 넷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녹옥죽봉을 든 품이 여인은 영락없이 개방 방주의 위엄을 풍겼다. 더욱이 전혀 예기치 않게 서역 폭군인 백타산군 구양봉, 천하 악당으로 명성이 자자한 철장방 방주 구천인, 그리고 개방 장로들인 부귀산인 범장천, 청한자가 노명성, 일점지 나장태, 출수표 노경 등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여인은 쌀쌀하게 냉소를 치더니 묘대야를 똑바로 쳐다보며 비아냥거렸다.
"대내오주들을 보니 과연 생사를 같이하는 형제들이더군요. 평오야가 죽으니 묘대야나 과이야도, 허삼야나 우사야도 모두 꽁무니를 빼는데, 그 모습을 보고 난 정말 탄복했어요."
네 사람은 여인의 말에 살기가 등등함을 느꼈으나,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뭐라고 반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입을 다물고 여인의 다음 말만 기다렸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심복들이기에 마음놓고 한마디 묻겠어요. 내가 그때 옥벽 반 조각을 보이면서 한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겠죠?"
묘대야는 물론 잊지 않고 있었다. 그가 애초 황궁에서 나올 때 황상은 그들에게, 앞으로 누가 옥벽 반 조각을 보이거든 그것은 곧 여짐친림(如朕親臨), 즉 황제가 친히 온 것이나 진배없음으로 알라고 말했었다. 그러기에 묘대야는 여인의 그 한마디에 금세 등골에 식은땀이 쫙 내뱄다. 나머지 세 사람 역시 숨이 멎는 듯했다.
천하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제만은 거역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그 때 당시 대내오주들은 황제의 비위를 거슬렀기 때문에 쫓겨나듯 황궁에서 물러나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때 황제의 진노는 대단했었다. 그들은 아무리 비상한 재간을 지녔다 하더라도 황제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황제의 명대로 강호에 나가면 옥벽 반 조각을 지닌 사람의 명에 따라 진력을 다해 공로를 세우고, 그것으로 궁으로 돌아와 편안히 살겠다고 마음을 다졌었다.
여인은 옥벽 반 조각을 내보이며 네 사람에게 다시 말했다.
"황제의 칙지는 개방이 다시는 나라일에 상관 못하도를 개방을 해산시켜 버리라는 것이었소. 다행히 백타산군 구양봉님과 철장방주 구천인님, 그리고 여기 장로님 몇 분이 도와주셔서 어느 정도 황제의 명을 받들 수 있었지, 대내오주만 믿고 있었다면 큰 낭패를 보지 않았겠소? 어떻게 생각하오?"
네 사람은 속이 얼어붙는 듯했다. 묘대야가 뭐라고 변명하려고 입을 달싹거리는데 여인이 가로막았다.
"변명 따윈 듣고 싶지 않아요. 무슨 할말이 있겠소?"
묘대야는 여인의 입만 멍하니 바라볼 뿐 아무 말도 못했다. 여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양봉, 구천인 등이 잽싸게 네 사람을 에워쌌다. 둘째 과이야가 묘대야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말이 필요 없으니 어서 내빼자는 신호였다. 그러나 묘대야는 그때까지도 가느다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잘 해 보면 여인의 마음을 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날 일은 기실 제 탓이 아닙니다……."
그의 말과 동시에 쌩하며 바람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묘대야가 얼결에 보니 출수표 노경이 그저 두 손을 번쩍 했을 뿐인데도 상, 중, 하 세 층으로 열 개 남짓하니 표창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묘대는 번개같이 몸을 피하며 소리쳤다.
"표창이닷!"
그 소리에 과이야는 순식간에 큰 솥을 내저어 표창을 내치고 허삼야와 우사야는 몸을 솟구쳐 밖으로 달아나려 했다. 묘대야도 달아나려고 얼른 돌아보았다. 그의 등뒤로 왼쪽으로는 파리 잡듯 사람을 잡아 죽이는 백타산군 구양봉, 오른쪽으로는 구천인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묘대야는 기가 질렸다. 그들 네 형제가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구양봉 하나 이기지 못할 판인데 구천인까지 합세하다니…….
"황제께선 아씨의 말을 들으라고 명했을 뿐, 아씨한테 우릴 죽이라고까지는 명하지 않으셨소! 안 그러오?"
묘대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여인은 득의 양양하게 깔깔 웃어젖혔다.
"당신 묘대야는 황제한테 어탕이나 해 바치는 요리사에 불과하지만 난 황상에게 베갯머리에서 시중드는 사람이다. 그걸 모르느냐? 그래, 황제께서 내 말을 듣겠느냐, 네 말을 듣겠느냐?"
음탕하고도 간악한 여인이었다. 미운산 곁에서 천연덕스럽게 미운산의 딸 노릇을 하면서 뒤에서 온갖 음모를 다 꾸며 왔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개방을 송두리째 움켜쥐자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의 정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담도 커질 대로 커져서 이번에 대내오주들을 징치하는 것으로 자기 휘하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단단히 일침을 놓으려는 심산임에 분명했다. 묘대야는 그녀
의 속마음을 간파하고 소리쳤다.
"나도 황제 앞에서 할말이 있소. 나하고 같이 황제 앞으로 나가 당당하게 시비를 캐 봅시다."
그러자 여인은 코웃음을 쳤다.
"아마 당신들 넷은 영영 황제를 못 만나게 될 건데?"
묘대야는 그 말에 흠칫했다. 후회와 절망감, 이 간악한 여인을 향한 끓어오르는 증오심, 황궁에서 보냈던 안락한 나날에 대한 미련…… 모든 것이 한꺼번에 가슴 가득 차올랐다.
"황제께서는 분명 아씨에게 날 죽이라고까지는 하지 않으셨소. 나를 죽인다면 그것은 황상의 칙지를 거역하는 거나 진배없소."
묘대야는 또 한 번 되풀이 외쳤다. 여인은 여전히 깔깔 웃어댔다.
"정말 왜 그렇게 아둔하지? 칙지란 뭔가? 황제께서 말씀하신 그 여짐친림이 그럼 칙지가 아니란 말인가?"
묘대야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렇다. 황상의 분부대로 옥벽 반 조각을 지닌 사람은 황제의 대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얼마든지 자기를 죽일 수도 있다.
묘대야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장탄식을 하였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더니 정말 그 고담이 하나도 틀린 데가 없구나……."
묘대야는 몹시 착잡하여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구양봉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가들었다.
"쓸데없는 소리 작작 하고 아씨의 분부나 받들어라!"
묘대네 넷은 어리석게도 제 발로 함정에 뛰어들었다고 자탄하며 속수무책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내 자비를 베풀어 넷을 모두 죽이지는 않겠다. 그러나 버릇을 가르쳐 주기 위해 하나는 필히 죽여야겠다. 묘대야, 너는 어떠냐? 너로 할까, 아니면 과이야로 할까?"
여인은 묘대야를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묘대야늘 자기도 모르게 과이야를 돌아보았다. 과이야도 흠칫 놀라 그를 보았다. 두 사람은 바라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그들 모두 당혹스런 눈빛이었다. 한순간 과이야가 소리쳤다.
"형님, 날 죽이라고 하시오. 내가 죽겠소. 우리 대내오주가 이미 오주가 안 되는 이상 하나 더 죽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소!"
묘대야는 마음을 도사렸지만 과이야가 그렇게 나오자 생각을 바꿔 몸서리를 치며 한바탕 웃었다.
"흐흐흐…… 꼭 죽여야겠다면 나를 죽여라! 대내오주에선 이 묘대야가 우두머리다. 세 동생에겐 내 말을 따른 죄밖에 없다!"
"말은 바로하는구먼!"
여인은 냉소했다. 그리고는 구양봉에게 눈짓을 보냈다. 구양봉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즉시 묘대야를 향해 손을 뻗쳤다. 절망감에 빠져 묘대야는 대항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나 구양봉이 그를 붙잡으려 하자 얼결에 냉큼 한 발짝 물러났다.
"흥, 묘대야! 잔재주를 부리면 더 참혹하게 죽는다는 걸 모르느냐!"
구양봉은 냉랭하게 한마디 내쏘고는 또 손을 쓱 뻗쳤다. 이번에도 묘대야는 또 한 발짝 물러섰다. 구양봉은 화가 나서 손을 휙휙 휘둘렀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묘대야는 이쪽저쪽으로 물러났다. 구양봉은 대로하여 성큼 뛰어 내달아 묘대야를 붙잡았다. 묘대야는 뒤로 물러서며 금선탈각술(金蟬脫覺術)을 쓰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그만 구양봉에게 앞가슴을 틀어쥐이고 말았다.
"네 이 놈, 그깟 잔재주로 내 손에서 벗어날 줄 알았더냐!"
구양봉은 번개같이 묘대야의 대혈 몇 군데를 쿡쿡 찔러 놓고는, 목을 움켜쥐며 번쩍 치켜 들었다.
"주인을 배반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
그는 묘대야를 똑바로 노려보며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묘대야도 눈알을 부라리며 구양봉을 노려보았다.
"내가 죽어 원귀(怨鬼)…… 원귀가 되어서라도 널 가만 놔두지 않겠다!"
"말 같지 않은 소리! 귀신도 나 같은 악한은 무서워한다! 네놈이 원귀가 되어도 내 앞에선 설설 길 뿐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묘대야는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대내오주가 황궁에 있을 때만 해도 얼마나 황제를 극진히 섬겼던가. 그런데 아차 하는 한 번 실수로 황제한테 쫓겨나 이 여인의 수하가 되고 급기야는 이 계집의 손에 이렇듯 처참하게 죽게 되다니……."
구양봉은 묘대야의 목을 더 힘껏 조였다. 묘대야는 이젠 숨도 바로 쉬지 못했다.
"형님, 아이고 형님!"
과이야, 허삼야, 우사야 세 사람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다. 그러나 구양봉은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묘대야의 목을 확 조였다. 한순간 묘대는 털썩 고개를 떨구더니 더 이상 미동을 하지 않았다. 과이야와 허삼야, 우사야 세 사람은 대성통곡을 했다.
그런데 그때껏 가만 있던 구천인이 후닥닥 과이야한테 덮쳐 들어 다짜고짜 귀때기를 연거푸 후려쳤다. 불이 번쩍 나는 듯싶었다. 과이야는 힘없이 옆으로 푹 고꾸라졌다. 구천인은 과이야의 멱살 을 움켜쥐고 일으켜 세우며 뇌까렸다.
"난 너 같은 놈을 제일 증오한다. 바로 네 놈 때문에 이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쥐새끼 같은 녀석, 네 놈은 살짝 빠지고 묘대야를 죽게 해? 죽어야 할 놈은 바로 네 놈이야!"
그리고는 과이야의 가슴에다 팍팍팍 연거푸 장풍을 날렸다. 과이야의 입으로 시뻘건 피가 울컥울컥 솟구쳤다. 여인의 말과 다르게 묘대야를 죽여 놓고도 또 과이야까지 죽이려고 덤비자 허삼야와 우사야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나만 죽이겠다더니 왜 과이야까지 죽이려느냐?"
그러자 계집은 빙그레 웃으며 코웃음을 쳤다.
"하나고 둘이고 내가 죽이고 싶으면 죽이는 거다. 너희들이 상관 할 바가 아니야!"
허삼야와 우사야는 격분해서 치를 떨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처럼 계속 뻣뻣하게 나갔다간 그들 둘까지도 참살을 면할 수 없을 터였다. 그들은 그저 눈물이 글썽한 채로 과이야가 당하는 것을 지켜 볼밖에 도리가 없었다.
철장방 방주 구천인의 철장은 지독했다. 과이야의 옷 앞자락에 벌써 피가 흥건한데도 입에서는 여전히 울컥울컥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대내오주…… 동생들 둘만 남았는데…… 어서…… 어서 내빼, 어서……."
과이야는 가까스로 눈꺼풀을 치켜 뜨며 우사야에게 한마디하더니 덜컥 숨을 거뒀다.
허삼야와 우사야는 치를 떨며 여인을 노려보았다.
"이렇듯 말에 신용이 없다니. 말은 한 사람만 죽이겠다고 해 놓고서 두 사람을 다 죽이시오? 이렇게 지독한 법이 어디 있소?"
그러자 여인은 싱긋 웃으며 묘대야에게로 걸어가 그의 가슴을 한 손으로 어루만졌다.
"너네 맏이는 겁이 나서 기절했을 뿐 숨이 아예 넘어간 건 아니다. 좀 있으면 되살아날 게야."
과연 시간이 좀 흐르자 묘대야는 서서히 깨어났다.
"고맙습…… 죽이지는 않아서……."
묘대야는 희멀건한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며 더듬거렸다. 허삼야와 우사야는 묘대야에게 달려들어 그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맏형, 과이야가 죽었소, 과이야가……."
"뭐라구?"
묘대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온통 피범벅이 되어 내동댕이쳐져 있는 과이야가 눈에 들어왔다. 묘대야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과이야는 왜 죽인단 말이오?"
여인은 깔깔 웃어댔다. 아주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과이야쯤은 죽으나 사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기색이었다.
"그때 과이야가 퇴각하자고 했을 때 과이야 말을 듣지 말고 그냥 싸웠어야 했다. 퇴각하지 않고 넷이서 단합하여 싸웠으면 능히 소씨 거렁뱅이를 이길 수도 있었다. 이 놈이 일을 다 망쳐 놓은 거야. 황상의 분부대로 나는 황상 대신이거늘, 내 명을 거역하고 과이야가 너희를 여기까지 몰고 온 것이니, 그는 죽어 마땅하다. 하나 과이야만 탓할 수는 없는 터, 묘대야 네 놈도 네 죄를 알렷다?"
묘대야는 아무 말도 못했다. 허삼야과 우사야도 말이 없었다. 그들의 가슴엔 오직 비통함만 가득 찰 뿐이었다.
여인은 갑자기 요염하게 웃더니 태도를 일변해 묘대야를 지그시 바라보며 자못 다정스레 말했다.
"오라버니, 그때 오라버니는 날 오직 강호 사람으로만 알고 나를 집으로 데려가 의형제를 맺었지요. 그리고 그때 나를 철장방에도 데려갔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오라버니는 철장방 방주가 이미 내사람이라는 걸 감감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기실 나와 구천인 방주는 그때 말은 안 했어도 서로 눈짓으로 할말을 다 주고받았어요. 그때 오라버니를 기름 가마 속으로 집어 던진 것도 다 내가 시킨 거였죠. 오라버니는 기름 가마 속에서 완전히 혼절해 버렸는데 사실은 혼절한
게 아니고 혈도를 눌려 잠이 든 것뿐이었어요. 그 사이 나와 구 방주는 대사를 의논하였죠. 그리고 오라버니가 깨어났을 때는 내가 부러 잠든 척하였으니 오라버닌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수밖에요."
여인은 또 한 번 사람 홀리는 웃음을 방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 여하튼 우리는 의남매예요. 그 정을 생각해서라도 난 오라버니를 죽일 수는 없어요. 이번 일은 다 과이야가 책임진 거예요. 과이야에게는 운수 사나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여인은 따스한 눈빛으로 묘대야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듯한 눈치였다. 묘대야는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내가 눈이 멀었지. 이 여인이 황제가 파견한 여인인 줄 눈치챘던 때부터 행동을 조심했어야 했는데…… 이런 변이 생길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여인은 이제 묘대야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구천인과 구양봉에게 말했다.
"개방 대사는 이제 초보적으로나마 기틀이 잡히긴 했지만 아직 몇 가지 처리할 일이 남아 있어요. 그중 가장 중대한 일이 바로 홍칠을 붙잡는 거예요."
여인은 매서운 눈초리로 부귀산인 범장천과 청한자자 노명성을 번갈아 쏘아보았다. 둘은 여인이 자기네를 쏘아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황망히 허리를 굽실거리며 변명을 했다.
"방주님, 우리 둘이 홍칠을 추적했을 때 그 놈은 이미 해독이 되어 있는데다가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까지 합세해 셋이서 덤벼드는 바람에 그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범장천은 그저 싸움에 패했다는 것만 수긍하고 나설 뿐, 싹싹 빌어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는 말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여인은 범장천과 노명성을 쏘아보며 꾸짖었다.
"그렇게 털끝 하나 안 다치고서야 어떻게 그 대단한 홍칠을 붙잡아올 수 있단 말이에요? 그렇게 몸을 아껴서, 그래 무슨 일을 하겠다고?"
범장천과 노명성은 찍소리도 못했다. 여인은 양팔에 구양봉과 구천인을 끼고 있다. 여인의 비위를 거슬렀다가는 당장이라도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과이야가 죽어 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는가. 개방 장로 범장천, 나장태, 노명성 세 사람은 속이 사뭇 떨렸다. 그러나 여인은 의외로 미소를 띠며 한마디 던졌다.
"오로지 우리 몇이 일심협력하면 홍칠쯤은 쉽사리 죽여 버릴 수 있어요. 범 장로와 노 장로는 계속 홍칠과 미립을 찾아보세요. 그 뒤는 아무래도 구천인 방주님과 구양봉 대협의 수고를 빌려야 할 것 같아요."
범장천은 그 말이 귀에 거슬렸다. 찾아내는 일은 자기네들이 하고 정작 손을 쓰는 건 구천인과 구양봉에게 맡기겠다는 것은 분명 자기네들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대접하겠다는 뜻이고, 앞으로도 중임은 맡기지 못하겠다는 소리 아닌가! 더욱이 과이야의 참혹한 죽음을 대면하고 나서 자기네들의 운명도 그와 같이 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는 터, 그는 더는 이 여인을 위해 목숨을 내걸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여인은 사람들을 쭉 훑어보다가 구양봉에게 눈길이 미치자 미소를 머금었다.
"앞으로 많은 일을 대협께 수고를 끼쳐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염려일랑 딱 비끄러매시오. 이전에 내가 말한 대로 그 세가지 일만 보장해 준다면 무슨 일이든 모두 도와드리겠소."
구양봉은 고개를 건들거리며 대답했다.
"아, 대협의 조카 일 말이죠? 그건 염려 마시라니깐요. 이미 사람을 보내 황제에게 품하게 했으니 불원간에 호소식이 올 거예요."
구양봉이 요구한 세 가지 일 중에서 가장 간절하게 원했던 것은 그의 조카 구양극을 중원에 데려다가 벼슬 자리를 주고 호사를 시켜 보자는 것이었다. 말이 조카이지, 실은 구양봉과 그의 형수 모용쟁 사이에 난 그의 아들이기에 구양극에 대한 구양봉의 사랑은 더없이 끔찍했다. 구양극이 중원에서 벼슬 자리를 얻을 수만 있다면 구양봉은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구양봉의 마음을 헤아리기나 한 듯 여인은 살짝 한 번 웃어 보이고는 이번에는 구천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구 방주님, 개방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저는 개방 일은 모두 철장방에게 맡겨 관리하게 할 셈이에요. 큰 문제 없겠죠?"
구천인은 그 말에 언감생심, 넙죽 읍을 하였다.
홍칠과 미립,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 등은 며칠이나 내처 걸어갔다. 어느 날, 그들은 임안에서 왜 떨어진 한 자그마한 읍에 이르렀다.
"미운산 방주님께서는 전에 벌써 이곳에다 우리 사람들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 사람들과 힘을 합하면 앞날을 다시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미타 추우가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홍칠은 미운산의 선견지명과 주도면일한 처사에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진(雨鎭)이라고 하는 이 읍은 사람이 그리 많이 살지 않는 작은 읍이었다. 미운산은 일년 전에 이 읍을 사들여, 원래 이곳에 살던 사람들을 점차 타고장으로 이주시키고 믿을 만한 개방 수하들만 남게 했다.
네 사람이 읍 안으로 들어서자 멀리에서부터 두 사람이 반가운 기색으로 뛰어왔다. 다름아닌 개방의 두 분타 타주 나대통과 노유각이었다. 둘은 공손히 읍을 하였다. 홍칠은 급히 말리며 두 사람 손을 덥석 잡았다. 나대통과 노유각은 일행을 한 집으로 안내해 갔다. 정원도 크고 대청도 있는 큰 집이었다. 정원 안팎으로 경비가 사뭇 삼엄했다. 일행은 대청으로 들어갔다.
대청 안 선명 당에는 '개( )'자가 크게 씌어 있는 족자가 한 폭 걸려 있고, 그 좌우로 주련도 한 쌍 걸려 있었다. 상련에는 '사방을 먹고 팔방을 돌아다니니 곳곳마다 기분이 좋고(吃四方走八方方方皆順)'라는 글귀가, 하련에는 '오늘을 보고 내일을 말하니 날마다 근심이 없네(看今天說明天天天悠閑)'라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하나 횡련(橫聯)엔 아무런 글귀도 없었다. 원래 개방은 횡련에는 글을 쓰는 법이 없었다. 무슨 이치가 있어서는 아니고, 글이 위에 있으면 '개'
자를 누르게 되어 거렝뱅이의 살길이 눌리게 된다 하여 오랜 관습으로 굳어져 온 것이었다.
'개'자가 씌어진 족자 아래에는 향로가 놓여 있고 그 뒤로 신패(神牌)가 두 개 세워져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개방의 전임 방주 미운산의 신위(神位)요, 다른 하나는 개방 방주 소씨 거렁뱅이의 신위였다.
그것을 보자 홍칠은 울음이 복받쳤다. 비단 미운산과 소씨 거렁뱅이의 비참한 운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에 이르러 개방이 당면한 이 험난한 정국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뭔가 날카로운 것이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개방은 그간 항시 국가 대사를 염려하며 금나라에 대항해 북방의 강토를 수복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 왔다. 그런데 이것이 그만 조정의 비위를 건드리는 결과가 되어, 조정이 직접 개방 일에 개입해 개방을 물리치기 시작하였는바 천
하 제일의 큰 방( )인 개방은 바야흐로 한 계집의 작간으로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10대 장로 중에 이미 명을 달리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한 사람도 있다. 더욱이 그 계집에게 투항해 버린 자도 있어 지금은 오로지 두 집법장로인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만 남았으니 실로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홍칠은 향로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짓찧듯이 땅바닥에다 이마를 쿵쿵 내리 박았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 미립도 숙연히 절을 올렸다. 한순간 미립은 허물어지듯 주저 앉아 아버지를 부르다가 그만 목이 메어 오열을 터뜨렸다. 아버지 미운산이 개방 일로 고생만 하시다가 그 계집에게 순순히 고개를 숙이게 된 것도 다 자기와 미기 때문이요, 바로 그 때문에 개방도 이 지경이 되고 아버지도 참혹하게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미립은
비통하기 그지없어 울고 또 울었다. 그러다가 그예 혼절을 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황급히 미립을 업고 방으로 데려갔다. 홍칠의 가슴에선 울분이 화산처럼 끓어올랐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우리 개방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그 악독한 계집을 처단하지 않고서는 개방 형제들과 사부님의 영전을 대할 면목이 없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추우, 나대통과 노유각 네 사람은 가만히 홍칠에게로 다가섰다. 사개 정원이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홍칠공도 이젠 알겠지만 그 당시 개방 일이 복잡해지자 미 방주님께서는 내게 미립 낭자는 물론 홍칠공을 꼭 보호하라는 밀명을 내리셨습니다. 미 방주님은 소씨 거렁뱅이에게는 세상 만사를 허망하게 여기는 품성이 있어서 개방의 일을 온전히 맡길 수는 없다고 여겨 오로지 홍칠공에게만 방주 자리를 넘겨주려 하였지요. 미 방주님이 이렇게 결심하시기까지 결코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그후로 우리 둘은 다른 장로들과 같이 그 여인에게 투항한 척하고 온갖 수모
를 다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참아 왔습니다. 분노가 치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오늘을 위해 참고 견딘 것이지요. 오늘 저는 미 방주님과 소씨 거렁뱅이의 신위 앞에서 홍칠공을 개방 제 16대 방주로 천거하고자 합니다. 홍칠공의 의사는 어떠합니까?"
홍칠은 숙연히 머리를 들고 네 사람을 한번 휘둘러보았다.
'개방이 이 지경이 되어 있는데 내가 방주를 마다한다면 이건 개방 삼십만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나 다를 바 없다!'
홍칠은 거연히 머리를 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미력하나마 제가 개방 방주를 맡겠습니다."
홍칠의 말에 네 사람의 얼굴엔 희색이 돌았다. 그들은 서로들 눈길을 마주치면서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홍칠이 방주가 되면 개방에도 이제 명실상부하게 영도자가 생기는 것이고, 그 계집을 물리쳐 옛날처럼 개방을 진흥시킬 희망도 가질 수 있다.
네 사람은 향로에 향불을 피우고 제상을 차렸다. 개방의 집법장로인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이 각각 향로 양 옆에 서자, 대청 안으로 2백여 명 남짓되는 개방 사람들이 엄숙한 기색으로 질서 정연하게 들어왔다. 어떤 사람은 홍칠과 구면이요, 또 개중에는 첫 대면인 사람도 있었으나 그들 모두는 개방에서도 진정으로 영웅호걸로 꼽힐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팔대(八袋) 제자였던 사람도 있었고, 비록 이름은 나지 않았으나 남에게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무공이
출중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흰 상복을 입고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는 숙연히 서서 집법장로 사개 정원의 말을 기다렸다.
사개 정원과 소미자 추우는 자못 위엄을 갖추고 뭇사람들을 둘러 보았다. 사개 정원이 입을 열었다.
"우진은 비록 작지만 개방의 몇 백 정영(精英)이 뭉쳐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방주의 법장, 녹옥죽봉을 도로 빼앗고 개방의 삼십만 인중을 영도하는 대권을 다시 빼앗아 명실상부하게 개방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에 일로 매진합시다!"
모두들 용기백배하여 팔뚝을 내두르며 쩌렁쩌렁 환호성을 올렸다. 이번엔 소미타 추우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장엄히 선포했다.
"이제부터 홍칠공을 개방 제16대 방주로 모시는 계위 대전(繼位大典)을 시작한다!"
그러자 한 사람이 의자 하나를 복판에 가져다 놓았다.
홍칠은 한복판으로 나아가 먼저 미운산의 신위와 소씨 거렁뱅이의 신위에 절을 하고 나서 의자에 가 앉았다. 집법장로가 개방 방주의 신표인 녹옥죽봉 대신 집법장로 법장을 홍칠에게 넘겨주었다.
"방주님께 참배!"
사개 정원이 소리쳤다.
먼저 집법장로인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이 홍칠에게 절을 하고 그의 몸에 침을 뱉었다. 그 다음으로 나대통과 노유각이 나서서 절을 하고 침을 뱉었다. 그들 두 사람은 평소부터 홍칠을 흠모해 마지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홍칠을 개방 방주로 모시게 되어 개방에도 서광이 비친다고 생각하니 기쁘다 못해 환희에 넘쳐 희색이 만면했다. 그리고 나서 개방의 2백 용사들이 차례차례로 홍칠에게 절을 하고 그의 몸에 침을 뱉었다.
참배가 끝나자 홍칠이 말했다.
"정 장로, 추 장로, 내 소견에는 우리가 이대로 우진에 머물러 있는 것은 방책이 아닌 것 같소. 우리들이 무슨 일부터 해 나가야 할지 두 장로께선 어떤 계책이 없으시오?"
"방주님, 제가 보기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 사람을 내보내 노명성, 범장천, 노경, 나장태 이 네 악한이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염탐해 봐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사람들을 보내 소 방주님의 시체를 찾아야 하고, 또 세 번째로는 미운산 방주님의 아드님을 찾아봐야 할 줄로 압니다."
소미타 추우가 대답했다.
"지당한 말이오."
홍칠은 흔연히 동의하고 나서 그 자리에서 당장 의논하여 각기 소임을 맡았다. 홍칠은 나대통, 노유각과 함께 범장천과 노명성의 동태를 살피고 그 속마음을 타진하기로 했다. 한편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각기 소씨 거렁뱅이의 시체와 미운산의 아들 미기를 찾아보기로 했다.
대청 안은 새로운 결의와 결연한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느라 미립이 다가오는 걸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마냥 어느결에 대청 안으로 걸어 들어와 홍칠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얼굴색이 몹시 창백했다.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다소곳이 절을 하고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개방 분들이 저를 구해 주어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어요."
"뭐, 뭐요? 가다니? 가긴 어딜 간단 말이오?"
홍칠은 너무나도 뜻밖이라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는 다그치듯 물었다. 미립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심산 고찰 청등고불(靑燈古佛)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이 미립이 가 있을 곳인 줄 압니다."
"아니, 낭자, 낭자는 제정신이 아니군요! 미 방주님의 원수도 못 갚았고, 동생 미기의 행방도 모르는 터에 낭자는 그 무슨 망발이오?"
홍칠이 부르짖었다. 그러나 미립은 아주 냉담한 기색으로 장탄식을 하였다.
"인생이란 한 번 가면 다시 못 오는 법……. 우리 아버지는 개방을 위해 한평생 분망하셨지만 가시는 길은 그토록 참혹하였으니 인생이란 정말 무엇인지 난 알 수가 없어요. 이제 다시는 그런 피비린내를 맡긴 싫어요."
미립은 말을 마치고 조용히 돌아서 나갔다.
홍칠은 몹시 조급해졌다. 그는 개방의 급한 일들을 일단 처리하고 나면 미립과 성례를 올려 가정을 일구고 행복하게 살겠다고 꿈을 키워 왔었다. 그런데, 그런데 미립이 자기를 버리고 가 버리려 하다니…… 홍칠은 그 순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립은 천천히 대청을 걸어 나갔다.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 그리고 나대통과 노유각 등은 미립을 말리고 싶었지만 말릴 수가 없었다. 홍칠이 저토록 입을 다물고 있는데야 그들이 어떻게 나서겠는가.
한순간 홍칠이 벌떡 일어나더니 달려가 미립을 가로막았다.
"가지 말아요! 나와 함께 미기를 찾으러 갑시다!"
미립은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미기의 생사 여부를 알게 되면 저한테 기별이나 주세요."
미짐은 의외로 확고했다. 풍랑을 겪고 난 후 그녀는 사람마저 달라져 버렸다. 인간 속세 세상 만사가 다 시들시들하게만 보이고 그 어떤 가치도 찾을 수 없었다. 홍칠과의 일도 그러했다. 미기 일도 마찬가지였다. 생각하면 애절한 마음 금할 길 없으나 애써 동생을 찾아야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미립은 뭇사람들에게 또 한 번 읍을 하고는 결연히 돌아서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어느덧 정원을 지나는 듯싶고, 어느새 대문 가에서 희끗하더니 그녀의 자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가슴 한구석에 정하니 찬바람이 일더니 홍칠은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밀려왔다. 이제라도 뛰어가 어떻게든 미립을 설득해 보고, 아니면 억지로라도 끌고 올 수도 있었지만 홍칠은 그 자리에 굳어 버린 채 꼼짝도 안 했다. 억지 춘향으로 여인의 정을 붙들어 두기는 싫었다. 그는 다만 애절한 심정으로 미립을 선연히 떠나 보냈다.
'이 세상에서 남녀간의 사랑만큼 번거로운 것은 없다. 내가 그토록 미립을 아끼고 사랑했건만 그깟 대수롭지 않은 요리 때문에 그만 책을 잡혀……. 앞으로 설령 미립과 부부가 된다 하더라도 미립은 그 일을 가슴속에 담아 두고 나를 바로 보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에 이런 옭매듭을 풀지 못하고야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홍칠은 애석하고 구슬픈 심경 달랠 길 없어 남몰래 한탄만 자아냈다. 어쩌면 다시는 미립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는 저미듯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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