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화산논검 - 북개 홍칠공 7

3학년2반 | 2022.02.21 06:59:01 댓글: 1 조회: 553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0120




제28장 운의의 비애
황성(皇城) 안에 어둠이 깃들여 고요하고 쓸쓸했다. 궁전의 위전(圍殿)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등불을 든 위사들이 가끔 오가기도 했으나 등불 자락을 끌고 지나가고 나면 황궁의 높은 담벽 안은 한층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웠다.
후궁 귀퉁이 문 밖으로 한 여인이 걸어갔다. 머리에 베일을 쓰고 있는 그 여인은 후궁의 위사한테 반쪽짜리 옥벽을 꺼내 보였다. 후궁 위사는 여인이 황궁에서도 최고의 신물(信物)인 이 옥벽을 가진 것을 보자 더 물을 생각도 않고 황급히 달려들어가 보고를 올렸다. 한참 있다가 황실 문하 사람이 손에 등불을 들고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이 여인은 그 사람을 따라 수 없이 궁문을 지나고 구불구불 돌아서야 서향헌( 香軒)에 당도했다. 이곳이 바로 황제가 그녀를 만나는 곳이었다. 지난날 황제와 온밤을 지새며 즐겁게 지내던 일이 생각났다. 다시 이곳에 불려 온 이 여인은 가슴이 울렁거리고, 자못 긴장되었다. 다시 황제를 만나 하룻밤 사랑을 나눔으로써 그간의 노고를 보상받을 생각을 하니 가슴은 사정없이 두근거렸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붙안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데 갑자기 간드러진 여인의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오지 않아요, 오지 않아!"
그녀는 비꼬듯 말하고는 또 깔깔거렸다. 마치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 같았다. 그녀의 웃음 소리를 듣고서야 당조(唐朝)의 대시인 백낙천(白樂天)이 비파 소리를 왜 옥쟁반에 은구슬 떨어지는 소리에 비유했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웃음 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워 그녀마저 괜스레 흥취가 일며 웃는 사람이 누구인가 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나타나더니 영종(寧宗) 황제는 용상에 가 앉고 한 여인이 그 곁으로 다가가 바싹 붙어 서서 옥 같은 한 쌍
의 팔로 황제의 목을 그러안은 채 웃으면서 아양을 떨었다.
"폐하, 폐하께선 날마다 수염을 쓰다듬고 계시는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사와요. 매일매일 이 전 위에 앉아 계시자니 너무 무료하여 이처럼 수염을 쓰다듬는 습관이 생긴 게 아닌가 하오이다."
그리고는 또 까르르 웃어대는 것이었다.
"여아(麗兒), 네 말이 맞아. 넌 황제 노릇을 못해 봤으니까 모르겠지만 황제 노릇이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란다. 이 전 위에 앉아 있으면 대신들이 몰려와 한두 마디면 될 것도 장황하게 늘어놓곤 한단다. 모두 쓸데없는 말들인데 온종일 앉아서 그걸 듣자니 어디 쉬운 일이겠느냐? 그래서 이렇게 태연자약한 척 수염을 쓰다듬는 버릇이 생긴 게야."
영종 역시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두 사람은 한데 어울려 한바탕 웃어젖혔다.
머리에 베일을 쓴 여인은 심히 착잡하였다.
'내가 출궁한 지 시일이 오래였더니 황제께서는 또 한 여인을 총애하고 계시는구나. 저 여인이 저토록 아름답고 목소리까지 저토록 옥을 굴리는 듯한데 황제께서 총애하지 않을 수 없겠다.'
여인은 한없이 구슬퍼졌다. 황제는 아마도 다시는 자기를 생각하지 않을 듯싶었다.
황제는 언뜻 머리를 들고 이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아야, 저 여인을 좀 보거라. 저 여인은 천하의 기녀(奇女)이니라."
여아가 고개를 들어 보니 눈앞에 한 여인이 서 있는데 밤옷을 입고 머리에 베일을 쓰고 있었다. 황궁 안에서 이런 옷차림을 한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저 여인은 누군가요?"
"저 여인은 이전의 나의 귀비, 운의야."
황제의 말을 듣고 베일을 쓴 여인은 적이 불안해졌다.
'황제께선 이제 나를 그저 귀비라고 하시는구나.'
여인은 마음이 쓰라려 황제한테 다정하게 대하려던 마음이 삽시에 얼음처럼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황제는 웃는 낯으로 이 여인을 바라보았다.
"운의, 이 아이는 여아이니라."
여아 역시 약빠른 여인인지라 운의를 보자마자 보통 여인이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아차렸다. 여아는 예쁜 눈매로 운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운의는 황제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신첩(臣妾)이 황제를 배알하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떨려 나왔다. 영종 황제는 태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애첩은 일어서거라. 애첩이 하고 있는 일은 어떻게 되었는고?"
운의는 머리를 들어 여아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여아가 있는 자리에서는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영종 황제는 단호하게 말했다.
"서향헌에 외인은 없느니라."
운의는 한결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하는 수 없이 개방의 일을 쭉 말하고 나서 덧붙였다.
"개방의 일은 이미 마무리되어 가고 있사와요. 홍칠만 처치하면 소녀는 방주 자리를 일점지 나장태한테 물려주고 궁으로 다시 돌아오려 하나이다."
영종 황제는 일순 얼떨떨해졌다. 그는 운의가 이렇게 말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귀비는 이미 출궁한 몸이라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노라. 이 궁전이 뭐가 그리 좋은고? 이 여아는 밖에서 궁궐에 들어온 뒤 갑갑해 못 견뎌 내고 있단다. 여아는 나한테 임안의 재미있는 일들을 알려 주는데 실로 흥미 있더군. 나도 변복을 하고 밖에 나가 돌아다니겠다고 내시들한테 말했지만 그들은 말리기만 하고 어디 들어줘야 말이지. 정말 답답한지고, 답답한지고……."
영종 황제는 성이 나는지 목소리가 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여인은 황제의 말을 듣고 속으로 탄식을 했다.
'폐하께선 바깥 일이 재미있다고 여기시지만 소녀가 강호에서 갖은 위험을 겪은 일을 어찌 아시리까? 개방 하나를 빼앗으려고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나들고 피비린내 나는 일까지 다반사로 겪었는데 그게 어이하여 재미있는 일이기만 하겠사옵니까?'
여인의 심사는 복잡했다. 황제는 강호 사람들의 형편을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며 이 운의가 겪은 고초를 짐작도 못할 거라 생각하자 자기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영종 황제는 노기 띤 얼굴로 말했다.
"그 홍칠이란 놈은 정말 무지한 녀석이야. 그대는 서둘러 그 놈을 죽여 버리고 개방을 철장방 밑에 복속시키라. 개방 놈들이 다시는 소란을 피우지 못하게! 그런데 일이 왜 이토록 늦어지는고?"
황제는 그 말뿐 뚝뚝하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운의는 황제가 무례하다고 느꼈으나 뭐라 강변할 수는 없었다. 황제가 자기한테 정을 두고 있어 둘 사이가 정답다면 여러 가지 어려운 속사정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나 황제가 이처럼 무서운 기색으로 나오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운의는 더는 말을 하지 않고 다만 당혹스런 표정으로 황제와 여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영종 황제가 갑자기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운의, 그대는 마침 잘 왔노라. 짐이 한 가지 일이 있어 그대를 만나려던 참이었노라."
그 말에 운의는 조심스레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황제는 뭔가 중차대한 일이 있어 자기한테 그 일을 시키려 함이 분명했다. 이는 황제가 아직까지도 자기를 신임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운의는 활짝 웃으면서 황제한테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께서 분부하시는 일이라면 신첩은 만 번 죽더라도 하고자 하나이다."
"이 일은 그대만이 할 수 있노라. 하지만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황제는 웃는 얼굴로 그녀를 가까이 불렀다. 운의는 가슴이 심하게 두방망이쳐댔다.
'황제께선 그래도 옛정을 잊지는 않으셨구나.'
그녀가 다가가자 황제는 꽃병을 가리켰다.
"우리 둘이 이걸 들어 복판에다 옮겨 놓자."
그 꽃병은 송나라 때 정요(定窯)에서 만든 정말 아름다운 꽃병이었다. 사람의 키만큼 컸고 병 입이 보름달처럼 동그랬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이까짓 꽃병 따위는 황궁에서는 기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운의는 황제가 무엇 때문에 꽃병을 옮겨 놓으려는지 의아해하면서도 영종 황제를 도와 그 꽃병을 조심스레 복판으로 옮겼다. 그러자 영종 황제는 여아를 보며 다정스레 웃었다.
"여아야, 어서 오너라. 나와 운의를 위해 신명을 다해 춤을 추거라."
운의는 다시금 여아라는 이름을 듣자 일순 번개같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저 여인의 이름이 여아라고?'
운의가 처음 개방으로 갔을 때 그녀는 온몸으로 미운산을 유혹했으나 미운산은 자기보다도 여아라는 계집을 더 좋아했었다. 여아는 본시 아주 음란한 여인이었다. 미운산의 눈길은 한시도 그녀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운의는 갖은 수단을 다하여 여아, 운낭을 죽였던 것이다. 그 일은 얼마나 어려웠던가! 그런데 이름이 똑같은 여인이 나타나 이번에는 자기와 황제 사이에 끼여들다니……. 운의는 여아를 바라보며 생각을 더듬었다. 하지만 황제가 운의의 이런
심정을 알 턱이 없었다
"여아야, 어서 춤을 추라니까!"
여아는 한껏 교태를 부렸다.
"아니, 안 추겠어요."
'여아야, 넌 매일 밤 내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춤을 추지 않았느냐? 오늘 운의가 왔는데 저 여인을 위해서도 한 번 추라는데!"
"전 다만 폐하를 위해서만 춤출 따름이에요."
"옳은 말이다. 넌 다만 짐을 위해서만 춤을 춰야지. 하나 운의가 밖에서 고생을 많이 했으니 그 공로가 얼마나 크냐. 네가 운의를 위해 춤을 추면 그건 나를 즐겁게 해 주는 일이요, 운의한테 상을 주는 거나 진배없느니라."
그러자 여아는 마지못해 하면서도 살그머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켜 꽃병 위로 올라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 마리 나비 같이 사뿐사뿐 춤추는 모습은 정말 황홀했다. 그녀는 춤을 추면서 돌아칠 때마다 황제에게 머리를 돌리며 추파를 던졌다. 적이 요염했다. 과연 지난날의 궁정악기(宮廷樂妓)들에 못지않았다.
영종 황제는 장단을 맞춰 노래를 흥얼거렸다. 운의는 황제가 자기한테 성은을 베풀고 총애하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이 여아가 자기를 대신해 자기보다 더욱 총애를 받고 있다. 그녀는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쓰라렸다. 영종은 웃음을 머금고 노래를 부르며 시종 여아만을 바라보았다. 운의에게 눈길을 주는 법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운의는 서글퍼서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황제한테 읍을 하고는 나직이 말했다.
"신첩은 출궁해야겠사와요. 밤이 너무 늦어 더 이상 지체하면 위험할까 하옵니다."
황제는 한창 흥이 나 있는데 운의가 이렇게 말하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대는 이곳에서 성은을 받고 있는 줄 알지어다. 짐이 가지 말라고 하는데도 기어이 가겠다고 하니 실로 망녕이 났도다.'
하지만 황제는 내색하지 않고,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그대가 출궁하겠다고 하니 뜻대로 하라. 개방 일은 그대가 맡아 처리하라."
여인은 읍을 한 후 황망히 몸을 돌려 서향헌을 물러 나왔다. 여인은 걸어가면서 지난날 자기가 몸담았던 황궁의 내원(內院)을 살펴보았다. 그 당시에는 그토록 웅장하고 화려했는데 오늘따라 쓸쓸하고 음산해 보였다. 보면 볼수록 기분이 상했다. 임금을 섬긴다는 것이 마치 호랑이를 섬기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볼 만치 보았고 알 만큼 알고 있었으나, 그녀 자신이 그것을 절감하게 되리라곤, 그녀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어느 여인이건 황제가 여인을 사랑할 땐 그 여인
자체가 아니라 다만 색에 반해 거기에만 빠져 드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황제를 위해 얼마나 전심전력을 했든 일단 마음이 떠나고 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실총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그제야 깨닫는 것이었다.
홍칠은 정신을 한데 모아 오로지 무예를 연마하는 데 전념했다. 요 며칠 사이 매우 빠르게 진전을 보였다. 때로는 미립과 함께 석실에서 보냈던 나날을 생각하고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곤 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고삐를 바싹 죄었다. 일평생 다시는 미립 같은 여인을 만나지 못하리라. 그래도 이제 그런 일에는 결코 마음을 두지 않기로 작정하고 그는 미운산 방주의 강룡십팔장을 완전히 익히는 데만 매진했다. 다행히도 그는 내력이 대단했다. 전날 대리국 황제 단
지흥의 도움으로 심맥(心脈)이 갑절로 늘었고, 후에는 대협 왕중양과 여협 임조영의 도움으로 진력(進力)을 전수 받았다. 이젠 공력이 남제, 동사와 어깨를 견줄 만하게 되었으며 당대에서 일류가는 고수라 자부해도 못함이 없었다. 이와 같은 내력 때문에 그가 강룡십팔장을 연마하기란 아주 용이했다. 그리하여 항룡유회로부터 용비어천에 이르기까지 이 강룡십팔장을 숙련되게 연마하자 그의 무공은 날로 높아 갔다. 장을 내밀고 당겨 오는 데 변화가 무방하거니와 매우
힘차고도 맹렬하여 법수와 법식들이 모두 다 정교하기 그지 없었다.
그날도 홍칠이 장법을 연마하고 있는데 나대통, 노유각이 기별을 알렸다.
"방주님,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 장로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무슨 일이라고 하셨소?"
"두 장로님께서 두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한데 두 사람은 방주님께 직접 고해야 한다며 아무리 해도 입을 열지 않는답니다."
"그 두 자들을 데려오라고 하시오."
노유각, 나대통은 읍을 하고 물러갔다. 잠시 후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가 그 두 사람을 끌고 들어왔다. 그들은 아주 남루한 거지 행색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홍칠공이지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소!"
두 사람은 홍칠을 보자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쌀쌀히 바라보면서 대뜸 말했다. 홍칠은 아랑곳 않고 아량 있게 웃어 보였다.
"두 분은 개방에 무슨 일로 오셨소?"
그러자 그중 한 사나이가 말했다.
"난 일곱째이고 저 사람은 여섯째인데 우리 맏형님이 당신을 불러오라 하셨소!"
그러더니 그 사람은 무엇을 말할 듯 말할 듯 하면서도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을 흘끔흘끔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마도 중요한 얘기가 있으니 주위를 물리라는 뜻 같았다.
"두 장로님은 잠시 바깥에 나가 있으시오."
홍칠이 한마디하자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은 읍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일곱째가 문을 잠그고는 홍칠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우린 모두 개방 사람인데 저 사람은 개방의 육대 제자 노불정(盧不停)이고, 저는 칠대 제자 운권(雲權)입니다. 우리가 방주님을 찾아온 건 나 장로의 명을 받들어 소식을 전하고자 함입니다."
"나 장로와 난 이젠 아무 관계도 없소. 내가 그 사람보고 그 여인 수하를 떠나라고 권고했지만 그 사람은 듣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와서 나한테 무슨 소식을 전하겠다는 거요?"
"나 장로께서는 방주님께 개방 중에 밀정이 있다는 걸 알려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 밀정은 바로 출수표 노경입니다."
홍칠은 깜짝 놀랐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개방 중에 밀정이 있다면 나대통, 노유각, 소미타 추우, 사개 정원 네 사람 중에 있으리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출수표 노경이 밀정이라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장로께서는 우리 두 사람더러 방주님께 이 소식을 알리라고 하면서 이전의 일은 달리 생각지 말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홍칠은 심기가 산란하여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그 두 사람도 그의 거동을 보고 그가 기분이 몹시 언짢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더 이상 말을 않고 읍을 하고 물러 나왔다.
홍칠은 사개 정원, 소미타 추우, 노유각, 나대통을 불러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노유각이 대뜸 대로하여 외쳤다.
"개자식 같으니! 그 자식이 우리 개방의 숱한 사람을 죽이고도 인자한 척 사탕 발림을 하다니!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내 그자를 죽여 버리고야 말리라!"
사개 정원도 외쳤다.
"참말 그 놈이라면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소미타 추우는 저어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래도 신중해야 합니다. 방주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직접 신문해 보십시오. 참말 그러하다면 죽여 마땅하지요."
홍칠은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게 좋겠소. 추 장로, 그래도 추 장로께서 가셔서 그 사람을 청해오는 게 좋겠소. 조금도 내색하지 말고 출수표 노경을 청해 오란 말이오. 내가 일을 상론하잔다고!"
소미타 추우가 매사에 신중하였기에 홍칠은 그에게 명했던 것이다.
소미타 추우는 노경을 찾아가 홍칠의 명을 전했다. 노경은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추우를 따라왔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홍칠은 의자에 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켠에서 사개 정원이 비웃는 기색으로 쌀쌀히 쏘아보며 두 마리 독사를 주무르고 있었다.
출수표 노경은 그 두 사람의 험악한 남색을 보고 낌새를 쳤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방주께서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홍칠은 의미 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노 장로, 당신 말이 듣기 이상하구려. 내가 당신을 찾은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당신을 찾은 거요."
출수표 노경은 어안이 벙벙했다.
"다른 사람이라니요? 누구요?"
그는 홱 고개를 돌려 등뒤를 살폈다. 뒤쪽에 소미타 추우와 개방의 2대 타주인 나대통, 노유각이 서 있었다.
"방주님,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 분부를 내리십시오!"
노경은 시치미를 뗐다.
"노 장로, 아직도 못 알아들은 게로군. 내가 그대를 찾은 게 아니라 미 방주가 당신을 찾는단 말이오."
출수표 노경은 약간 추춤거리다가 말했다.
"미 방주께선 이미 사망하셨는데 어찌 저를 찾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홍칠은 비웃음을 흘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개가 소리쳤다. 그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맞는 말이오! 미 방주께선 이미 돌아가시고 여러 장로들도 죽었지. 그분들은 지금 저 세상에서 그대의 공로를 따지려고 기다리고 있소."
출수표 노경은 고함을 내질렀다.
"아, 이제야 알 만하구먼, 워낙 당신들은 날 의심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노경이 사위를 돌아보니 이미 네 사람이 그를 빙 둘러싸고 차디찬 눈길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내심 당황했으나 태연하게 소리쳤다.
"당신들은 무슨 근거로 날 의심하는 게요? 미기를 구한 건 나요! 철장방 놈들이 미기를 죽일 때 난 노유각, 나대통과 함께 놈들을 뒤쫓았었소! 그런데 이제 와서 누굴 원망하는 거요?"
그러자 나대통이 노기를 띠며 외쳤다.
"그건 다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일이었다! 네 놈이 사람들을 불러 그 애를 죽이게 하고 또 우리가 그 집에 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기다리게 했어. 놈들은 우리 세 사람이 당도하는 걸 보고 그제야 도망갔단 말이야. 내 보기엔 그 네 놈의 무예는 실로 약하지 않았다. 철장방에서 네 사람이나 보내 어린애 하나를 죽인다는 게 격에 맞는 짓인가?"
노경은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쳇, 당치도 않은 소리! 철장방 놈들이 미기를 죽인 게 대체 나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이오? 당신은 함부로 모함하지 마시오!"
모두들 입을 다물고 말이 얼었다. 이윽고 홍칠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노 장로, 그대가 왜 그 계집을 돕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군. 시침 떼지 말고 솔직히 털어놓으시오!"
출수표 노경은 묵묵히 있다가 갑자기 머리를 쳐들었다.
"흐흐흐흐……. 그래, 난 그 여인을 돕고 있다.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난 개방에 들어오기 전에 황제의 수하에 있던 사람이었다. 난 임안 경조윤(京兆尹) 막하의 지휘사(指揮使)이다!"
그는 미친 듯이 웃어대며 제자리에서 뱅그르르 두 바퀴 돌았다.
"홍칠이 이 놈, 넌 무지한 놈이라서 거지 우두머리가 제격이다! 네 놈이 그래 때와 장소를 아는 놈이냐?"
그 말에 너나없이 분기탱천하여 당장이라도 덤벼들 기세로 뒤룩 뒤룩 눈알을 굴렸다. 노경이 개방에 들어와 군자를 자처하며 뒤로는 갖은 죄악을 다 저지르고 허다한 개방 형제들을 해친 생각을 하며 제까끔 통탄해 마지않았다. 조금이라도 일찍 놈의 흑심을 간파했더라면 일은 이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홍칠은 악이 치받쳤다. 그는 대죄를 저지른 놈은 한시라도 목숨을 살려 두고 싶지 않아 손이 근질거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출수표 노경에게로 다가갔다.
"서랏!"
노경이 고함을 질렀다. 홍칠은 멈춰 서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경을 쏘아보았다.
"노경, 네 놈이 나와 겨뤄 보겠다는 것인가!"
"홍칠, 네 놈은 날 잘못 봤다. 이 출수표 노경이 아무 재간도 없는 줄 알았더냐. 내 오늘이야말로 본때를 보여 줄 테다!"
그 순간, 사개 정원이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너같이 악독한 놈은 독사의 밥으로 만들어야 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개 정원의 손에 있던 두 마리의 작은 독사가 쏜살같이 노경에게 덮쳐 들었다. 출수표는 순식간에 두 손을 휘둘렀다. 휙 암기가 날았다. 그러나 소리만 날 뿐 암기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공중으로 사개가 날려보낸 두 마리 독사가 날고 있었다. 독사들은 어느덧 출수표 노경의 눈앞에까지 다가갔다. 일순 공중에서 팍팍 소리가 들리더니 두 마리 독사는 툭 땅바닥에 떨어져 몇 번 꿈틀거리더니 그대로 뻗어 버렸다.
"하하하, 이게 바로 내 절묘한 침 법수이다. 나는 침으로 너희 몇 놈을 일시에 죽여 버릴 수도 있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화가 치밀어 다짜고짜 앞뒤에서 출수표 노경에게 달려들었다. 노경은 자기가 만일 포위를 뚫고 나가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개방 사람들은 밀정을 제일 미워하는지라 자기를 죽이지 않고서는 분이 풀리지 않을 터, 자기와 같이 간특하고 반복이 무방한 사람을 이 개방 사람들이 용서할 리 없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출수표 노경은 결사적으로 암기를 날려보냈다. 윙윙 바람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가 뿌린 침은 각각 노유각, 나대통, 사개 정원, 소미타 추우를 향해 맹렬하게 날아갔다. 출수표 노경은 홍칠한테는 침을 한줌이나 뿌렸다.
출수표 노경의 암기를 쓰는 법수는 실로 놀라웠다. 모두들 그가 이런 뛰어난 재간을 갖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개방 대회에서 과천청 제갈옥생과 맞붙었다가 여지없이 참패를 당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것도 다 일부러 꾸며 낸 수작이었다. 그의 무예는 과천청 제갈옥생을 훨씬 웃도는, 실로 경지에 올랐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개 정원은 출수표 노경한테 덮쳐 들어 주먹으로 노경을 갈기려다가 은침 두 개가 눈앞으로 날아드는 것을 보고 놀라서 뒤로 나뒹굴었다. 그는 공중제비를 돌 듯 땅바닥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뒹굴고 나서 벌떡 일어났다. 만일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죽거나 두 눈이 멀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한편 노경이 뿌린 침 네 개는 소미타 추우의 기해(氣海), 담중(膽中) 두 대혈로 곧바로 날아들었다. 소미타 추우는 내공을 돋웠다. 침은 정확히 꽂혔으나 그는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급히 내공을 돋우지 않았다면 전신의 내력이 파괴되어 모든 공력이 물거품이 될 뻔하였다.
그러나 나대통과 노유각은 끝내 침을 피하지 못했다. 노유각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나대통은 공중으로 몸을 날리자마자 두 다리가 뻣뻣해짐을 느끼면서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출수표 노경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개방에는 나의 침에 맞설 만한 호한이 없구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홍칠은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장은 눈 앞으로 날아온 침들을 종적 없이 날려보내고 출수표 노경의 머리 위에 한 가닥 선풍을 몰아붙였다.
노경은 침을 뿌린 다음 모두들 그것을 피하느라 자리를 비키는 틈을 타 도망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침을 날려보내자마자 오히려 그쪽으로부터 선풍이 휘몰아쳐 올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홍칠이 다시 장풍을 날리려고 몸을 비키자 앞에 비집고 나갈 틈이 생기는 듯하여 출수표 노경은 잽싸게 앞으로 돌진해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홍칠이 떡 막아 섰다.
"노경, 네 놈이 아무리 악독한 놈이기로서니 내 마음대로 오갈 수 있을 줄 알았더냐?"
홍칠은 무섭게 소리를 내질렀다. 노경은 호기를 놓치자 한탄을 금할 수 없었다. 홍칠은 눈을 부릅 뜨고 계속 외쳤다.
"노경, 네 놈 수중에 표창이 예순네 개나 있다고 해도 내 몸은 털끝 하나 다치지 못한다."
노경은 자기와 홍칠 사이가 너무나 가까워 표창을 던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뒤로 물러나 홍칠에게 손을 쓰려 했다. 그때 소미타 추우가 외쳤다.
"방주님, 틈을 두지 말고 어서 죽여 버리시오!"
그러나 홍칠은 여전히 두 눈을 부릅 뜨고 노경을 쏘아보기만 하면서 그가 물러나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노경은 홍칠과 일곱 장 남짓한 거리로 물러나 호기롭게 웃어젖혔다.
"홍칠! 오늘은 내 제삿날이 되든, 네 제삿날이 되든 결판을 내자!"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표창을 뿌렸다. 표창은 어지러이 허공을 날았다. 표창이 날자마자 홍칠은 강룡십팔장 법수를 펼쳐 냈다. 처음엔 항룡유회 법수, 그 다음엔 침룡재연(沈龍在淵) 법수, 그 다음에는 몸을 한 바퀴 돌리며 견룡재전 법수를 쓰는 것이었다. 그가 세 가지 법식을 연거푸 펼쳐 내자 출수표 노경이 날려보낸 예순네 개의 표창은 다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노경, 네 놈은 이젠 밑천이 다 떨어졌군. 방주님을 수고시킬 것 없이 어디 나와 맞붙어 보자!"
소미타 추우가 외쳤다. 그는 삽시간에 몸을 훌쩍 날려 노경에게 장을 밀어붙였다. 노경은 급히 장으로 막았고 그들 두 사람은 순식간에 한데 맞붙어 장법으로 승부를 가르는 판국이 되었다. 일순 팍 하는 소리가 나더니 출수표 노경이 장으로 소미타 추우의 어깨를 가격했다. 개방에서는 대체로 부귀산인 범장천, 청한자자 노명성과 일점지 나장태를 내놓고는 집법장로들인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의 장법이 대단하다고들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두 사람이 어울려 채
몇 합도 싸우지 못했는데 소미타 추우가 맞아 상하게 되니 노경의 장력이 보통이 아니라고들 내심 바싹 긴장을 했다. 추우는 넘어졌다가 얼른 다시 몸을 일으켰다.
"잠깐, 가만있게!"
홍칠이 소미타 추우를 막아 서며 노경을 쏘아보았다. 그의 두 눈에선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홍칠은 미립과 미기를 떠올리고 미운산을 생각하였다. 또 소씨 거렁뱅이를 생각하였다.
'개방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죄는 모두 이 놈한테 있는 것이다. 네 놈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리지 않고서야 가슴속의 원한을 어찌 풀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한달음에 앞으로 달려나가면서 출수표 노경에게 천천히 장을 내밀었다. 그러자 한 가닥 대력이 파도처럼 밀려가 출수표 노경은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는 자기가 홍칠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피할 도리가 없어 엉겁결에 쌍장을 내밀었다. 날렵한 표엽십삼장(飄葉十三掌) 법수였다. 홍칠의 장력만 피하면 목숨을 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홍칠은 그가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보자 다시금 한 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 장에는 힘을 제대로 넣지 않고 다시 전신의 힘을 모아 쌍장을 곧추 노경의 가슴팍으로 내밀었다. 노경은 급급히 장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방장이 서로 맞붙었다. 하지만 장법을 겨룸에 있어 두 사람의 장이 서로 마주 닿기만 하면 다만 서로 내력을 비기게 될 뿐이라는 사실을 노경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내력만 가지고 견준다면 홍칠이 엄연한 고수인지라 노경은 근본상 그의 적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서로의 방장이 마주 닿자 노경은 대력이 밀물처럼 자기 쪽으로 흘러드는 듯하더니 온몸에서 혈기가 마구 끊어지는 것 같았다.
홍칠은 분개하여 목소리를 덜덜 떨며 외쳤다.
"네 놈은 이제 끝장이다!"
노경은 일순 목구멍에서 비릿한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선지피를 울컥 토해냈다.
"네 놈은 이젠 죽어!"
홍칠은 격하게 외치고는 있는 힘껏 장을 내밀었다. 출수표 노경은 홍칠이 한 장을 치우자 그 틈을 타 장으로 홍칠을 가격하려 했다. 그러나 홍칠이 오른손에 힘을 주자 젖 먹던 힘까지 다 쥐어 짜내도 밀릴 판이었다. 자칫하면 홍칠에게 밀려 담벽에 가 박힐 형세였다. 노경은 전신의 힘을 왼쪽 장에 모아 홍칠의 장력을 막아냈다.
홍칠이 떼었던 장을 다시 내밀며 말했다.
"노경, 네 놈은 죽어 가면서도 참말 지독하구나!"
홍칠은 장으로 있는 힘껏 노경의 어깨를 가격했다. 노경은 홍칠의 장풍에 여지없이 밀려나며 뚝 소리와 함께 어깨뼈와 쇄골이 부서져 나갔다. 그는 더는 버텨 내지 못하고 구석 쪽으로 밀려가 옴짝달싹도 못했다.
홍칠은 더는 손을 쓰지 않았다. 나대통이 달려 나오며 외쳤다.
"먼저 간 개방 형제들을 대신해 네 놈에게 한 장 안겨 주마!"
나대통은 노경의 다른 쪽 어깨를 장으로 마저 가격했다. 노경은 처참할 정도로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두 어깨뼈는 모조리 부서져 버렸다. 이번에는 소미타 추우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네 놈이 바깥 놈들을 끌어들여 우리 두 방주님을 해쳤으니 그 죄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주먹으로 노경의 아랫배를 내질렀다. 노경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노유각도 달려들었다.
"가증스러운 놈! 네 놈을 죽이지 않고는 죽어도 이 원한을 풀 수 없다!"
노유각은 노경을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노경의 팔이 담벽에 부딪히며 그는 다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다시금 나대통이 나섰다.
"개방 사람들은 네 놈 때문에 개망신을 당했다!"
그는 이빨을 바드득 갈며 노경의 머리를 걷어찼다. 노경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래도 노경은 수그러들지 않고 홍칠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홍칠이 이 놈! 내 죄가 죽일 죄라면 의당 죽여야지 어찌 이리 못살게 구는 게냐!"
홍칠은 서서히 노경 앞으로 다가가 나직이 말했다.
"노경, 네 놈은 너무나도 무참히 개방을 해쳤다. 난 결코 네 놈을 용서할 수 없다……."
"호, 홍칠, 그래…… 죽을 죄를 졌다. 그러나 네 놈들은 너무나도 비겁하게 구는구나."
노경와 얼굴에 비웃는 기색이 역력하자 홍칠은 가소롭다는 듯 냉소를 흘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다가 소리를 질렀다.
"모두 비켜!……. 네 놈은 속죄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구나. 하지만 개방에서는 네 놈에게 그처럼 지독하게 굴지는 않겠다. 자, 이제는 원대로 죽여 주지!"
홍칠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방장을 내밀었다. 노경은 일어서려고 발악을 하다가 홍칠의 장력이 밀려들자 마치 자기 위로 태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여 그대로 푹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가슴이 납작하게 눌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입가에 선지피가 낭자한 채 그는 서서히 숨이 넘어갔다.
노경이 죽었다 해도 그들은 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개방 사람들이 무수한 수난을 당한 것은 모두 다 이 노경과 그 여인 때문이었다. 그들은 치떨리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해 당장이라도 그 계집년의 목숨을 끊어 놓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홍칠아, 미 방주님께서 널 찾아왔다! 어서 나와 맞이하거라!"
홍칠 등은 지체 않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계집애들이 두 줄을 지어 밀려 들어와 양쪽으로 갈라 서자 그 사이로 여인 하나가 손에 녹옥죽봉을 들고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여인 뒤로 서독 구양봉과 철장방 방주 구천인, 일점지 나장태가 차례로 뒤따랐다.
여인의 행색은 보통 때와 달라 보였다. 이전처럼 머리를 틀어올리지 않고 뒤에 늘어뜨려 하나로 질끈 동여맸으며, 요란하게 화장을 하지도 않아 좀 창백해 보였다. 여인은 사방을 휘둘러보다가 홍칠을 발견하자 그에게 눈길이 멎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어쩐지 요염한 웃음도, 독살스런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홍칠공, 내가 이렇게 친히 당신을 찾아왔는데, 조금도 달가워 하지 않는 기색이군요."
홍칠은 코방귀만 뀌었다.
"흥, 마침 잘 왔소! 그대가 나한테 심어 놓은 밀정은 오늘부로 처치해 버렸지! 어디 한번 보겠소?"
홍칠은 그 여인의 심보가 독사보다도 지독하여 출수표 노경의 죽음 같은 건 안중에도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난 그 사람이 조만간 죽고 말리라는 걸 예측하고 있었어요."
예상과 달리 그 말을 했을 때 그녀의 얼굴엔 웬지 슬픈 기색이 깃들여 있었다. 홍칠은 그것을 눈치채고는 머리를 돌려 나대통과 노경에게 눈짓을 보냈다. 출수표 노경의 시체를 들어 내오라는 뜻이었다. 노경의 시체는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여인은 천천히 걸어가 노경을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노경, 이 꼴이 뭔가요? 아무리 힘을 다해도 그저 남한테 이용이나 당하고 값없이 죽을 뿐인데 이토록 고생을 하다니……."
개방 사람들은 모두 적이 놀랐다. 그들의 심중에 이 여인은 그저 사악하고 오만한 계집으로만 굳어져 있을 뿐, 연약한 여인의 인상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모두들 어안이 벙벙했다. 여인은 한참을 울더니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머리를 들어 홍칠을 바라보았다.
"홍칠공, 전 당신과 수화상극으로 지내고 싶지 않지만 반드시 한 번은 싸워야겠어요! 모레 우리 두 사람은 결판을 내지요."
홍칠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이 여인이 개방의 반대 세력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자기의 방주 자리를 확고히 할 타산으로 마침내 정면 대결을 청하는 거라고 짐작되었다. 하지만 조만간에 결전이 불가피하리라고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빨리 도전해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그는 다소 의심이 갔다. 그러나 홍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홍칠에게서 눈길을 거둬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을 향했다.
"홍칠공, 개방 장로는 그 수가 적지 않았는데 지금은 너무 많이 죽었군요. 지금 당신한텐 장로가 두 분밖에 없고 저한테는 나 장로 한 분뿐이에요. 그럼 모레 우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홍칠은 다시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여인은 무슨 일이든 독단전횡을 하며 당최 일을 상논하는 법을 모르는데, 자기에게 결전을 청하면서도 마치 집안일을 상논하는 듯하지 않은가.
"그대 생각을 먼저 말하시오. 난 그 연후에 말하겠소."
여인은 대답을 않고 홍칠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하였다. 마치 어떤 궁리를 하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여인이 입을 열었다.
"홍칠공, 제가 당신한테 저의 진짜 이름을 알려드리지요. 전 미립도 아닐 뿐더러 그 이름을 좋아하지도 않아요."
"그대가 미립이 아니란 건 이미 알고 있었소."
여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홍칠공, 제 이름은 운의예요. '구름 같은 의복에 꽃 같은 얼굴'이란 시구가 있는데 제 이름은 그 구절에서 따온 것이에요. 당신은 구름이 어떤 모양으로 생겼다고 생각하나요?"
여인은 담담한 웃음을 지었다. 여인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 점점 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홍칠은 이 여인이 갑자기 미립과 꼭 같아 보여 흠칫 놀랐다.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음탕하기 짝이 없고, 천진하고 수줍은 처녀다운 구석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어 늘 미립과는 천양지차라고 여겼는데, 이 순간만큼은 분명 깊은 애수에 잠겨 있어 너무나도 미립과 흡사했다. 여인은 탄식하는 어조로 계속 말했다.
"기실 당신은 제 이름을 기억하려고도 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당신한테 이렇게 알려 드리는 것도 다 쓸데없는 일일지 모르지요."
구양봉도 이 여인의 말을 듣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난 이전에 이 여인을 늘 칭찬했었다. 나 이 노독물처럼 남한테 지는 걸 지독히도 싫어했는데 오늘은 왜 이 모양인가? 비애에 잠기고 탄식을 하고. 방주 같은 위풍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군…….'
구천인도 속으로 탄식해 마지않았다.
'만일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 여인은 저 홍칠이란 바보를 좋아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홍칠이 녀석의 세력이 이렇게 커 가다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여인은 여전히 느릿느릿 말했다.
"홍칠공, 난 모레 당신과 결전을 벌일 때 남들이야 어떻게 싸우든 당신과 단독으로 싸우겠어요. 당신이 날 죽일 수 있으면 이 녹옥죽봉은 당신 것이 되는 거에요. 내가 당신을 죽이게 된다면 당신을 따라간 개방 사람들은 나한테 복종해야 하고."
구양봉은 맘속으로 이 여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무예를 놓고 볼 때 저 여인은 홍칠의 절반에도 못 미치니 일단 맞붙는다면 목숨을 잃고 말 것임이 분명하였다. 구천인도 그녀의 말을 듣고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하였다. 철장방이 개방을 합병하는 일이 거의 눈앞에 보이는데 저 여인이 저렇게 얼빠진 소리를 하다니……. 홍칠이 저 여인과 싸운다면 식은죽 먹기로 저 여인을 죽여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개방은 홍칠한테 귀속되고 자기가 오랫동안 고생한 보람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 아닌가.
여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홍칠공, 당신과 싸우기 전에 당신한테 당면한 한 가지 일을 얘기하고 싶어요."
"할말이 있으면 어서 해 보시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홍칠은 다시금 흠칫 놀랐다. 이 여인이 어떤 곤경에 처하였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이 여인은 지독하고 사악한 반면, 솔직하고 둘러 말하지 않는 일면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여인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것일까? 나대통, 노유각은 홍칠이 그녀와 단독으로 만나는 것을 꺼려 했다. 만의 하나 홍칠이 실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은 홍칠에게 그 말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권했지만 그는 여인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가다듬었다.
"좋소!"
그는 손을 들어 집 안으로 들어가자고 청했다.
모두들 밖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개방 중에서 대립되는 이 두 우두머리가 집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구양봉, 구천인은 이 여인이 궁리가 뛰어나고 처사가 비범하니 홍칠과 함께 두 사람이 방안에서 만나게 되면 기필코 홍칠한테 불리할 거라고 생각하였다. 비록 홍칠의 무예가 여인보다 뛰어나다 하나 홍칠은 지략 면에서는 결코 이 여인을 따르지 못할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구양봉과 구천인은 홍칠이 기필코 여인 손에 잘못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한편으로 나대통, 노유각과 개방의 두 장로는 그들 나름대로 마음을 놓고 있었다. 이 여인이 홍칠과 한방에 들어가 몇 마디 수작하는 것처럼 하다가 틈을 보아 손을 쓰려고 그러는 것이겠지만 제까짓 것이 손을 쓴대야 홍칠의 적수가 못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제 문이 열리면 홍칠의 손에 녹옥죽봉이 들려 있고 여인은 집 안에 죽어 널브러져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을 닫아 건 다음 여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홍칠공, 제가 당신한테 말씀드리지요. 전 영종 황제의 총기(寵妓)예요. 황제는 워낙 저를 가장 신임했어요. 황제 폐하께선 궁중에서 누가 자기를 암살할까 봐 늘 나와 함께 주무시면서 제가 폐하를 보호하도록 하셨지요. 그 당시 폐하께서는 저를 심히 총애하셨어요. 이 년이 지났는데 궁중엔 자객이 나타나지 않았지요. 하루는 폐하께서 저를 보고 나의 이런 재간으로 궁중에만 남아 있으면 실로 기재(奇才)를 썩이게 된다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웃으면서 그러면 나를 궁
전 밖으로 파견하시라고 청을 들였지요. 폐하께서는 흔쾌히 허락하셨어요. 당시 나는 그저 농담삼아 한 말인데 황제께서는 엄숙한 어조로, '황제의 말은 농담이 아닐진저' 하고 말씀 하시더니 개방을 없애 버리라고 궁전 밖으로 파견한 거랍니다……."
홍칠은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이미 이 여인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칠공, 전 당신을 만나자마자 당신이 마음에 들었어요. 다만 당신이 데면데면하여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을 따름이지요."
홍칠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일이 이 지경이 되었은즉 네 년과 나는 수화상극이야. 모레면 둘 중 한 사람은 거꾸러져 야 한단 말이다. 이런 판에 와서 네년이 나한테 그따위 간사한 소리를 하여 내 심사를 헝클어 놓을 수 있을 줄 아느냐? '
여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홍칠을 이윽히 바라보다가 탄식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 기색을 보니 제 말을 믿지 않는 것 같군요. 당신이 믿지 않는 바에야 제가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요?"
홍칠은 어정쩡하여 아무 대꾸도 못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다.
"홍칠공, 당신은 이 녹옥죽봉을 그냥 가져 가세요. 당신이 절 좋아했다고 한마디만 해 주고……."
홍칠은 머리를 저으며 이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년이 독사 같은 여인이 아니라 선녀같이 아름다운 여인이라 하더라도 난 네 년과 가까이할 수 없다. 나는 미립말고는 이 한생에 다시는 어떤 여인과도 관계를 가지지 않을 거다. 미립은 이미 죽었다. 죽어도 아주 불쌍하게 죽었단 말이다. 그녀는 끝까지 날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용서하려 하지도 않았지. 그녀는 나를 연인으로서는 가까이하지 못할 사내로 여겼지. 그러나 난 언제까지나 미립만을 사랑해.'
홍칠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난 그대의 녹옥죽봉을 가질 수 없소. 이 녹옥죽봉은 구양봉이 나의 사부님한테서 빼앗아 간 거요. 내가 다시 그대한테서 빼앗아 개방과 그대의 은원을 마무리 지어야만 하는 거요."
"홍칠공, 당신은 바보예요. 당신이 참말로 날 죽인다면 당신은 꿈속에서도 날 생각하게 될 거예요. 당신은 내 생각을 하게 되면 꼭 후회하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기분이 좋겠나요? 당신이 참말로 개방 방주가 된다 한들 그게 무슨 좋은 일이겠나요?"
홍칠은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홍칠공, 당신은 제가 왜 미립을 죽였는지 아세요?"
홍칠은 그녀가 이 일을 끄집어내자 또다시 원한에 사무쳤다. 그는 다그치듯 물었다.
"그래, 왜 미립을 죽였소?"
"말씀드리지요. 미립이 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하고 저도 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이었어요!"
홍칠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 만 했다.
모두들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면 그 문으로 오직 한사람만 나올 것인가, 아니면 두 사람 다 나올 것인가……."
마침내 문이 열렸다. 뜻밖에 여인과 홍칠 두 사람이 나란히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여인이 여러 사람들을 바라보며 웃더니 입을 열었다.
"사게, 소미타 당신들 두 사람에게 말하겠어요. 모레 저는 홍칠공과 결전을 벌이기로 했어요. 비나 오지 않으면 좋겠군요."
소미타와 사개는 모두 대답이 없었다. 그들 두 사람은 이 여인에게 무어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 여인에게서 어찌하여 좀전의 그 애수에 잠긴 기색은 사라지고, 저처럼 희색이 만면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자기가 꼭 이기리라고 굳게 확신하는 듯싶었다. 그녀는 도마 위에 놓인 고기를 바라보기라도 하듯이 홍칠의 수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 기색은 유난히 한가롭고 태연자약했다.




제29장 와신상담
범장천은 잠시도 쉬지 않고 춤을 추다가는 방안을 왔다갔다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에게 수청을 드는 시녀들은 처음에는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으나 여러 날이 흘러가자 싫증이 나서 날로 등한해졌다.
범장천은 이젠 개방 총부 안에서는 아주 자유로워져 그 안에서라면 어디든 마음대로 쏘다닐 수 있었다. 개방 사람들은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도 범장천은 자기 방에서 또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동쪽 비탈진 골목길, 골목 옆에 돌다리 있고, 돌다리 곁에……."
노래를 부르고 부르다가 범장천은 일순 얼떨떨해졌다. 주위는 너무나 조용했다. 그는 얼른 바깥으로 나와 보았다. 밖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그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걸었다. 그리고는 삽시에 얼굴이 굳어지며 재빠르게 흑의를 두르고 천으로 얼굴도 가렸다. 철장방 복색이었다. 그는 옷을 갖춰 입자 모기장을 드리워 놓고 그 속에 베개를 놓은 뒤 이불을 덮어 마치 사람이 자고 있는 것처럼 가장해 놓고 총총히 밖으로 나왔다.
범장천의 손자는 작은 방에 들어 있었는데 개방의 두 시녀들이 보살피고 있었다. 시녀들은 범 공자라고 깍듯이 대해 주었다. 그러나 범 공자는 그저 묻는 대로 대답하고 시키는 대로 할 따름이었다. 시간이 흘러가자 이 두 시녀들은 범 공자와 잠을 자려고 한껏 교태를 부리며 그에게 몸을 휘감았다. 그러자 범 공자는 겁이 나서 숨도 바로 내쉬지 못하고 그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몸을 까딱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두 시녀는 그의 곁에 바싹 달라붙어 온몸을
더듬고 허튼소리를 해댔다. 그는 전전긍긍하기만 할 뿐 도무지 취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밤에는 범 공자가 꿈을 꾸었다. 동사조항 골목에 있는 집이 나타나고 온 식구들이 참살당하는 모습이 꿈속에서도 생생하게 펼쳐졌다. 범 공자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는 뛰쳐 나가려다가 옆에 있는 시녀의 품속에 안기고 말았다. 그 시녀는 따뜻한 말로 위안해 주었다. 범 공자는 엉엉 울면서 그때부터 이 두 시녀들한테 꼭 달라붙어 더는 다
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깊은 밤이었다. 범 공자는 한창 젊은 나이라 밤 일을 즐기기 시작하자 이젠 일찍 자는 법도 없었다. 그와 두 시녀가 모두 자지 않고 있는데 삐꺽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쓱 들어섰다. 그는 재빨리 문을 잠그고는 범 공자가 누워 있는 침대머리로 왔다. 그 사람은 밤에 움직이기 수월하라고 그랬는지 온통 새까만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게 가리고 있었다. 손에 오용(烏龍)철장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철장방 사람임에 분명했다.
범 공자가 놀라서 소리쳤다.
"당신은 누구요? 어쩔 셈이오?"
그 사람을 보자 범 공자는 동사조항 골목에서 벌어졌던 그 참상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는 철장방으로 위장하고 끝끝내 자기를 죽이려고 다시 찾아온 것이리라. 시녀들은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며 소리를 질러댔다.
"당신은 철장방 사람이죠? 도대체 어쩔 셈이죠? 구 방주님이 두렵지도 않아요?"
그 사람은 아무 대꾸도 않고 침대머리에 앉더니 오용 철장으로 한 시녀의 어깨를 가리켰다. 눈결같이 새하얀 계집의 어깨에 새까만 오용 철장을 들이대자 소름이 끼치도록 섬뜩했다. 시녀는 겁에 질려 찍소리도 못했다. 그 사람은 급히 두 시녀의 대혈을 눌렀다. 범 공자는 그 사람이 두 여인의 혈도를 누르는 것을 보고 자기를 죽이려는 줄 알고 벌벌 떨며 외쳤다.
"네 놈은 기어코 우리 범씨 가문 가솔들을 다 죽이려 드는구나. 네 놈이 나를 죽인다면 네 놈도 참살을 면치 못하리라."
그 사람은 아무 대꾸도 없이 한 장으로 한 시녀의 사혈(死穴)을 들이치고 다른 한 장으로 다른 시녀도 처치했다. 범 공자는 그자가 지독하게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고 성이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지독한 놈이구나, 죽이겠으면 죽여라. 난 두렵지 않다."
그러나 그 사람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침대에서 범 공자의 의복을 주워 들어 그에게 던져 주었다. 어서 옷을 입으라는 뜻이었다. 범 공자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일단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범 공자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철장을 틀어쥐었다. 그런데 범 공자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은 의외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심 아주 격동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천천히 뜨락으로 내려섰다. 개방 사람들을 만날까 봐 두려워 그 사람은 범 공자의 손을 잡고 벽 쪽으로 바싹 다가가 범 공자를 안고 담벽 위로 훌쩍 뛰어올라 바깥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범 공자를 데리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렇게 뛰었는지 모른다. 사내는 한 자그마한 거리에 이르렀다. 이곳은 바로 일점지 나장태의 구역이었다. 밤이었으나 거리엔 등불이 환히 밝혀 있어 대낮같이 밝았다. 주정뱅이와 도박꾼들이 여기저기서 주사위를 던지거나 환담을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일점지 나장태를 찾아 주시오."
술에 취한 사람은 그 말에 취기가 말끔히 가셨다. 주사위를 던지던 도박꾼도 천천히 주사위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두 사람이 앞뒤로 둘러쌌다.
"그댄 철장방 사람인데, 우리 맏형님을 왜 찾나?"
그러자 그 사람은 매우 다급하게 말했다.
"알릴 일이 있어 그러우! 빨리 찾아 줘요!"
"여섯째, 가서 큰형님한테 알리게. 철장방 사람이 만나잔다고."
한 사람은 먼저 뛰어가고, 한 사람은 이 사내와 잔뜩 겁을 집어먹어 초주검이 된 어린 소년을 데리고 뒤따라갔다. 잠시 후 그 사람은 범 공자를 데리고 일점지 나장태 앞에 섰다. 일정지 나장태는 그들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
"그댄 철장방 사람인가?"
그러자 그 사람은 머리를 끄덕였다. 나장태는 또다시 물었다.
"이 아이는 누군가?"
그러자 흑의의 사내는 말했다.
"이 소년은 범 공자입니다."
"알 만하군. 그대의 철장방에서는 이 아이를 죽여 버리고 싶지만 감히 죽이지 못하겠으니 나더러 죽이라고 데려온 게로군!"
그러자 흑의 사내는 고개를 내흔들었다.
"누가 이 사람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범씨 가문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은 게 불쌍하여 당신에게 구해 달라고 데려온 겁니다."
"그댄 나를 퍽 신임하는구먼."
흑의 사내는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범 공자를 그곳에 남겨 둔 채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발걸음을 뗐다. 그가 문 어귀에 이르렀을 때 홀연 일점지 나장태가 소리쳤다.
"범장천, 그래 이렇게 왔다가 그냥 갈 참이오?"
흑의 사내는 멈춰 섰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일점지 나장태를 이윽히 바라보았다.
"그대는 내가 범장천인 걸 어떻게 아셨소?"
일점지 나장태는 껄껄 웃었다.
"당신은 남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날 속일 수야 없지. 당신은 손자를 나한테 맡기면서 두렵지도 않소? 내가 이 애를 미 방주한테 보내면 어떻게 할 참이오?"
그러자 흑의 사내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장태, 그대가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나도 당신을 알고 있소."
범장천은 나장태와 더 얘기하려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범장천의 손자는 얼이 빠져 있다가 이 흑의 사내가 바로 자기의 할아버지인 것을 알아차리고는 냉큼 뒤돌아서 쫓아가려 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러나 일점지 나장태가 가로막았다. 범 공자는 겁먹은 얼굴로 눈망울을 굴리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일점지 나장태 역시 범 공자를 바라보면서 그저 되뇌기만 했다.
"범장천, 범장천……."
그는 범 공자에게 범장천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즉시 일곱째와 아홉째를 불렀다.
"일곱째, 아홉째, 지난번 그 일로 셋째가 죽었다. 오늘 이 일도 그때처럼 위험한 일이야. 오늘은 자네들이 그 일을 맡아 줘야겠다. 잘못하면 죽게 될지도 몰라. 각별히 조심해야 하네."
그들 두 사람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확연하였다.
"이 소년은 범 장로의 손자인데 자네들이 홍칠공한테 데려다 맡겨야겠네. 그저 맡기고만 오면 되네."
그들 두 사람은 두말없이 범 공자를 데리고 떠났다.
세 사람은 거리에 나서서 발걸음을 다그쳤다. 이곳에서 홍칠이 있는 곳까지는 아주 멀었다. 세 사람이 한참 걸어가고 있노라니 누군가가 뒤에서 쓴웃음을 지으면서 소리쳤다.
"어딜 그리 급히 가나. 밤이 어두운데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그러자 또 한 사람이 소리쳤다.
"유감스럽군. 범장천이 아무리 교묘하다 해도 그 여인의 눈길을 벗어날 수는 없는 거야."
일곱째와 아홉째는 범 공자의 손을 잡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네 놈은 누구냐? 어서 모습을 나타내라!"
"어서 나오지 못할까?"
일곱째가 한마디 외치자 아홉째도 연이어 소리쳤다.
그러자 과연 눈앞에 네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흑의를 걸친 철장방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너희들은 모두 일점지 나장태의 수하이지? 너희들은 순순히 놓아주겠다만, 그 어린 놈은 죽여 버려야겠어! 너희들 두 놈은 알아차리고 어서 썩 꺼져!"
일곱째와 아홉째는 쓴웃음을 지었다. 맏형님이 예측하던 일이 과연 틀림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두 사람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철장방 네 놈들의 거동만 주시했다.
철장방 놈들 중에서 또 한 자가 외쳤다.
"네 놈들이 물러가지 않겠다면 어디 이곳에서 한번 죽어 봐라!"
그자는 소리를 지르면서 일곱째한테 장을 날렸다. 일곱째는 그자가 덤벼드는 것을 보자 급히 맞받아 싸웠다. 그 철장방 놈의 무예는 일곱째보다 좀 못했다. 다른 쪽에서 또 한 놈이 덤벼들었다. 두 놈이 일곱째와 싸우는 것을 보고 아홉째가 노하여 소리쳤다.
"철장방 놈들아, 주먹을 받아라!"
네 사람이 한데 엉켜 결사전을 발였으나 좀처럼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다른 한켠에 있던 두 놈이 징그럽게 웃으며 범 공자한테 다가들었다.
"요 쌍놈의 새끼야, 먼젓번엔 널 놓아주었는데 내가 무예가 모자라서 놓아준 줄 아는 모양이로구나. 그때는 나으리의 명을 받들어 일부러 네 놈 목숨을 건져 준 것이었다. 범장천이란 녀석이 개방을 위해 일을 더 잘하게끔 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렇지 않았던들 네놈도 이미 네 놈 일가와 함께 저승에 가 있을 몸이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팍 하며 장을 내밀었다. 범 공자의 무예로는 개방 중의 보통 거렁뱅이와 싸운다면 그래도 이길 가망이 좀 있지만 이런 고수들과 맞선다면 채 한 합도 겨루기 전에 나가떨어지고야 말 것이었다. 그자가 장을 휘두르면 그대로 얻어맞을 수 밖에 없게 된 형편인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큰소리로 외쳤다.
"냉큼 그 손 놓지 못할까!"
두 사람이 머리를 돌려 보니 뒤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온통 철장방의 흑의를 걸치고 오른손에는 오용 철장을 틀어쥐고 있었다. 철장방 놈들이 대뜸 외쳤다.
"범장천, 네 놈이 감히 나왔으면 다시는 숨어 다닐 필요가 없다!"
그들 두 사람은 눈길을 주고받더니 한 놈은 범장천에게 달려들고 한 놈은 범 공자한테 달려들었다. 철장방 놈들은 악독한 놈들이었다. 그들 두 놈은 일단 범장천이 나타난 이상 버티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먼저 이 범 공자를 죽여 버리지 않고서는 후에 다시 기회를 얻기가 어렵겠다고 타산하여 한 놈은 범장천을 막고 한 놈은 범 공자를 죽이기로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미처 달려들기도 전에 범장천이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손에 들었던 암기를 뿌렸다. 암기는 윙윙 소리를 내면서 개중 한 사내의 등허리로 날아갔다. 그자는 멈칫하며 얼른 암기를 피했다. 바로 그 순간에 범장천은 철장으로 놈의 등허리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그는 땅바닥에 털버덕 쓰러져 버렸다. 범장천은 손자를 향해 소리쳤다.
"빨리 도망치거라!"
그는 고함을 지르는 한편 법 공자한테 달려들려 하는 철장방 놈에게 덮쳐 들었다.
철장방 놈들은 워낙 넷이었는데 뜻밖에도 그중 한 놈이 범장천의 철장에 맞아 상하자 셋이서 법장천, 일곱째, 아홉째를 대적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힘이 부쳤다. 한편 범장천과 싸우게 된 이자들은 바로 그의 가족을 죽인 놈들이었다. 범장천은 방금 이 사내들이 손자에게 그 말을 하는 걸 들었는지라 목숨을 내놓고 결사적으로 덤비고 있었다. 그는 이 세 놈을 마저 죽여 버리고 자기도 함께 죽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범 공자는 범장천의 외침 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도망을 치다가 급히 생각했다.
'내가 이 집에 숨으면 저 놈들이 날 찾지 못할 것이다.'
범 공자는 담장 위로 기어올랐다. 그 담장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그가 오르기엔 버거웠다. 그는 그만 담장에서 발을 헛디뎌 쿵 소리를 내며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누구냐?"
집 안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범 공자는 감히 찍소리도 못하고 살금살금 뒤꼍으로 기어가 까딱 않고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범장천과 아홉째, 일곱째 세 사람은 철장방 세 놈과 백여 합이나 싸웠다. 그쯤 되자 철장방 쪽이 밀리기 시작했다.
"목숨을 내놓아라!"
범장천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맞서 있는 철장방 놈의 어깨를 와락 끌어당겼다. 이 오용 철장은 신축성이 대단하여 일단 그 끝에 그 놈의 어깨가 틀어 잡히자 철장 끝이 안으로 모아지면서 어깨 살속 깊숙이 박혀 버렸다. 범장천은 철장을 잡아당겨 그자를 자기 앞으로 끌어 오는 동시에 다른 한 장을 들어 그자의 어깨를 힘껏 내리쳤다. 어찌나 심하게 내리쳤던지 오용 철장은 그 놈의 어깨에 더욱 깊숙이 박혔다. 범장천은 눈에 불꽃이 튀었다. 눈앞에 동사조항 돌다
리 옆 집이 번갯불 번쩍이듯 언뜻 언뜻 스쳐 지나갔다. 그는 벽력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연거푸 장을 내밀어 그자의 가슴을 가격했다. 놈은 울컥울컥 피를 토하더니 고꾸라지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범장천은 바드득 이빨을 갈며 혼신의 힘으로 그자의 등판을 내리찍었다. 놈은 찍소리도 못하고 사지를 뻗어 버렸다. 범장천은 뻗어 버린 놈에게 침을 퉤 뱉고는 또 한 놈에게 덤벼들었다. 철장방에서 남은 두 사람은 일곱째, 아홉째와 싸우는 것만 해도 힘이 부치는데 범장
천까지 달려드니 사태가 기울어진 것을 깨닫고 도망하려 했으나 도망할 틈이 없었다.
범장천은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마구 덮쳐 들었다. 그는 자기가 얻어맞을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대로 돌진해 들어 갔다. 그러자 철장방 놈들은 당황해서 연거푸 실수를 하였다. 이 두 놈은 그대로 장을 얻어맞아 내력이 상하고 말았다. 뒤이어 일곱째와 아홉째의 주먹질과 발길질에 얻어맞아 땅바닥에 거꾸러졌다. 범장천이 외쳤다.
"저 놈들을 죽여 버릴 테다!"
두 사람이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그는 그대로 달려나가 두 놈들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들이댔다. 그 두 놈은 그 자리에서 널브러졌다. 범장천의 심상찮은 기색에 일곱째와 아홉째는 놀라서 서로 마주보았다. 범장천의 모양새로 봐선 그는 영락없이 실성한 사람이었다.
그즈음, 가짜 미립은 오두마니 등불을 켜 놓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가 황궁에서 성은을 담뿍 받으며 행복하게 지내던 때를 회상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황궁에서 황제가 한창 여아와 놀아나고 있는 장면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구인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이를 두지도 않은 채 점점 더 문 두드리는 소리가 커지자 여인은 퉁명스레 외쳤다.
"들어와욧!"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뛰어들어왔다. 그 사람, 그 사람은 뜻밖에도 실성해서 반병신이 다 되었던 범장천이었다. 그는 흑의를 걸치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여인을 노려 보면서 노래를 불렀다.
"동쪽 비탈진 골목길, 골목 옆에 돌다리 있고, 돌다리 곁에……."
그는 비틀거리며 여인한테로 다가왔다. 거동을 보니 완전히 실성한 상태였다. 여인은 아무 방비도 않고 그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마침내 그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녀는 불현듯 웃음을 터뜨렸다.
"범 장로, 절 죽이고 싶으면 그냥 죽일 거지 하필 미친 척할 건 뭔가요?"
그 말에 범장천은 멈칫했다. 그리고는 금세 눈빛을 바꿔 사납게 여인을 쏘아보았다.
"그래 맞아, 난 미치지 않았다. 난 네 년을 죽일 생각으로 매일 밤잠을 설쳤다. 네 년은 오늘 내 손에 죽어 줘야겠다!"
여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웃는 낯으로 범장천을 바라보았다.
"범 장로, 당신이 날 죽이고 싶다 해서 죽일 수 있을 것 같나요? 참말 불쌍하군요. 그대는 이 길로 당장 도망가서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럼 죽음은 면할 수 있지요."
범장천은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네 년은 우리 온 가족을 죽이고서 그걸 홍칠공에게 덮어씌우고, 일점지 나장태에게 덮어씌웠다. 내가 네 년의 껍질을 벗기고 고기를 씹어 먹겠다."
여인은 대수로이 여기지 않고 그를 건너다 보았다.
"역시 빨리 가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나 그는 코대답도 않고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 오용 철장을 치켜 들고 여인의 동가슴을 향해 힘껏 찔러 갔다. 그는 이 여인을 죽일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의 마음속에선 증오심이 활활 불타 올랐다. 바람소리가 허공을 가르자 그 여인도 훌쩍 몸을 피하고는 맞서 대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예로는 결코 범장천을 따를 수 없으니 그녀는 연신 뒷걸음질만 쳤다.
범장천은 미친 듯이 공격만 하였다. 그는 숨돌릴 사이 없이 삼십여 합이나 공격을 들이댔다. 여인은 벽 모서리로 밀려갔다. 이제 철장을 한 번만 휘두르면 그녀의 목숨은 없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범 장로, 이제 그만두세요. 만일 계속 싸우게 되면 당신은 필시 이곳에서 죽게 돼요."
여인은 갑자기 탄식하듯 소리쳤다. 범장천의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철장을 높이 치켜 들었다.
"범 장로, 전 당신이 꼭 오리라는 걸 이미 짐작하고 구 방주님더러 절 돕도록 청해 놓았어요. 그분은 지금 당신 뒤에 서 있어요. 믿어지지 않으면 뒤를 돌아다보세요!"
'이 년은 참말 요사스럽구나. 내가 네 말을 들을 줄 아느냐?'
하지만 범장천은 아주 세밀한 사람으로 일거일동도 신중히 타산하고 행하는 사람이었다. 세밀한 사람들이란 의심이 많은 법이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닌게아니라 정말로 구천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등뒤에 버티고 서 있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은 건 너의 미 방주가 너를 처치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개방에 장로가 둘밖에 남지 않았는데 네가 죽으면 나장태 홀로 남게 되겠군!"
구천인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한껏 이죽거렸다. 범장천은 삽시에 남색이 창백해졌다.
'보아하니 복수하기도 어렵게 되었구나.'
구천인이 이곳에 있는 이상 이 여인이 자기 손에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범장천은 탄식을 하면서 구천인 쪽으로 돌아서서 웃는 낯으로 말했다.
"구 방주님이 오셨으니 내가 그대로 포박을 당하리다."
"암, 그래야지."
구천인은 오만하게 말했다. 범장천은 오용 철장을 땅바닥에 집어 던지고는 천천히 구천인 쪽으로 다가갔다. 구천인을 대적해 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 쪽을 택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다소곳이 구천인 쪽으로 걸어가던 범장천은 일순 뒷발질로 오용 철장을 공중으로 퉁겨 올렸다. 오용 철장은 곧바로 범장천의 손으로 떨어졌다. 철장이 손에 잡히자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구천인의 머리를 내리깠다.
"범장천, 네 놈이 나와 싸우려 드니 허튼 짓이 아니고 뭐냐?"
구천인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으나 부릅뜬 눈으로 범장천을 쏘아보기만 할 뿐 팔짱을 긴 손도 풀지 않았다. 범장천이 오용 철장으로 연거푸 예닐곱 번이나 공격했는데도 구천인은 미동도 안 했다. 뿐더러 그의 몸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그러자니 범장천은 그만 투지가 꺾이고 말았다. 하지만 대수로이 여기지 않고 외쳤다.
"구천인, 네 놈을 죽이지 못하고서야 어찌 한을 풀겠느냐?"
그러자 구천인은 웃음을 질질 흘리며 한쪽 손만 내밀어 장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저 살짝 장을 날렸을 뿐인데도 그의 장법은 아주 교묘하여 상대방한테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았다. 범장천은 내밀었던 장을 끌어 당겼다가 다시 공격하려 하였으나 장을 이동시키는 속도가 늦어 구천인한테 철장을 잡히고 말았다.
"손을 놓아라!"
구천인이 소리를 질렀다. 범장천도 맞받아 외쳤다.
"구천인, 내 네 놈과 생사 판가름을 하리라!"
"범장천, 네 놈은 당장 죽게 되었는데도 이다지도 완고하냐? 그럼 어디 죽어 보아라!"
구천인은 한마디 내뱉고는 장을 들어 범장천의 머리를 가격하려 했다. 이 한 장에 범장천의 목숨은 없어지게 될 판이었다.
그때였다. 여인이 갑자기 소리쳤다.
"잠깐만! 손을 멈추시오!"
구천인은 머리를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범장천을 죽일 생각이 없음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구천인은 범장천의 혈도를 눌러 놓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여인은 탄식하는 어조로 말했다.
"구 방주님, 당신이 절 구해 준 걸 아주 감사히 생각해요. 제가 범장천과 이야기를 나눠 보겠어요."
구천인은 웃으면서 가 버렸다. 여인은 자리에 앉아 범장천에게 말했다.
"범 장로, 당신이 절 미워하고 죽이려 하는 걸 전 나무라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은 하필 구 방주와 싸울 게 뭐예요? 당신이 그와 싸우게 되면 죽음밖에 없잖아요? 당신이 동사조항 골목 돌다리 옆집의 가족들이 비명에 죽은 일이 다 내가 한 짓으로 알고 절 뼈에 사무치게 미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하지만 제 보기엔 당신은 이곳을 떠나야 해요. 가서 홍칠공을 찾으세요. 모레 전 홍칠공과 결사전을 하게 돼요. 그때 누가 이기든 간에 승부가 날 테니 더는 범 장로
를 괴롭히고 싶지 않아요."
범장천은 속으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 여인이 자기를 조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이곳까지 찾아 들어 올 때엔 저 여인을 꼭 죽여 버리려고 온 것인데 그런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순순히 놓아 보낼 수 있단 말일가. 여인은 범장천이 자기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가벼운 웃음을 띄우며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시녀 둘이 달려왔다. 여인은 분부를 내렸다.
"너희들은 이 범 장로를 홍칠공에게 모셔다 드려라. 그리고 홍칠공에게 나는 이 범 장로를 해치고 싶지 않다고 전해라."
그 두 시녀들은 명을 받고 범장천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범장천은 혈도가 눌려 꼼짝도 못하고 그저 시녀들이 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은 답답하여 터질 지경이었다.
두 시녀들은 문 어귀에서 범장천을 마차에 부축해 앉히고는 자기들 둘은 나란히 앞머리에 앉았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 사내가 어둠을 틈타 쥐도 새도 모르게 마차 안으로 살그머니 들어갔다가 금세 다시 땅으로 떨어져내려 반대편을 향해 사라져 갔다. 한순간 마차가 덜컹했으나 시녀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시녀들은 마차를 몰고 곧장 홍칠의 거처에까지 당도하였다. 홍칠의 거처에 이르자 개중 한 시녀가 말했다.
"뜨락 안에 있는 분들은 들으세요. 미 방주께서는 범장천을 이곳으로 보내셨어요. 그분은 범 장로를 해칠 생각이 없으시대요."
이 두 시녀들은 마차에서 내려 나는 듯이 도망을 갔다. 무슨 변고라도 생길까 봐 몹시 겁이 났다.
나대통과 노유각이 앞장서서 뛰쳐나왔다. 사람은 간데없고 마차만 하나 달랑 서 있었다. 무슨 계략일지도 몰라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 나대통은 마차를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범장천이 마차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나대통은 놀라는 한편 의심되어 크게 소리질렀다.
"마차를 뜨락으로 끌어들여라!"
마차를 뜨락 안으로 끌어들이자 홍칠과 사개 정원, 소미타 추우 세 사람이 달려 나왔다. 나대통이 홍칠에게 사정을 고했다.
"범 장로께서 오셨구먼. 어서 마차에서 내리시도록 하게."
홍칠은 반색을 하며 외쳤다. 나대통, 노유각은 마차 문을 열고 범장천에게 말했다.
"범 장로, 내리십시오."
하지만 범장천은 두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손 하나 까딱 안 했다. 홍칠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범 장로는 미쳤으니 지금 정신이 똑똑하지 못할지도 몰라. 그러니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을걸.'
홍칠은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범장천의 손을 잡고 말했다.
"범 장로, 어서 마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그러나 홍칠이 그의 손을 잡아 끌자마자 그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자세히 보니 범장천은 이미 숨이 넘어가고 난 뒤였다.
모두들 깜짝 놀라며 범장천의 시체를 마차에서 들어 내렸다. 그의 기색을 살피니 적이 격분한 형색이었다. 다시 몸을 살펴보니 가슴에 장을 얻어맞은 치명적인 흔적이 있었다. 범장천이 어찌하여 이처럼 치명적인 일격을 고스란히 받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들 의견이 분분하였다. 나대통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기필코 그 지독한 년 짓입니다. 범 장로를 죽여 가지고 우리 개방에 보낸 거지요. 결전을 앞두고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뜻으로!"
모두들 생각이 그쪽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범장천은 생각이 아주 찬찬한 사람인데 드디어는 이처럼 어이없이 당하고 마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모두들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일점지 나장태는 예의 그 의자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숱한 생각으로 머리 속이 어지러웠다.
"소씨 거렁뱅이는 이상한 사람이야. 하필 이런 걸상에 앉는단 말인가? 그 사람은 이 걸상에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서 이 걸상이 불편하다는 걸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그는 웬지 그것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한순간, 소리도 없이 두 사람이 그 앞으로 다가섰다. 일곱째와 아홉째였다. 일점지 나장태는 묵묵히 이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일곱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맏형님, 그 네 놈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 네 놈이라니?"
나장태는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우리 둘은 범 공자를 데리고 가다가 도중에 철장방 놈들하고 맞닥뜨렸습니다. 그 네 놈들의 무예는 결코 허투로 볼 게 아니라서 우리 둘의 힘에 부쳤습니다. 이때 범장천이 나타나 우릴 도왔기에 그 네 놈을 몽땅 해치워 버렸습니다."
일점지 나장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자네들은 가서 좀 쉬게."
두 사람은 읍을 하고는 조용히 물러나갔다. 두 사람이 나간 후 일점지 나장태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생각을 굴렸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그는 내내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한순간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일곱째와 아홉째가 황급히 달려 들어와 더듬거렸다.
"맏형님, 그, 그녀가…… 옵니다. 그녀가……."
두 사람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인은 벌써 들이닥쳤다.
"나 장로, 듣건대 나 장로 수하에는 형제들이 많고 재간도 퍽 뛰어나다고 하던데 오늘 보니 과연 그렇군요."
여인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들어서서는 나장태 맞은편으로 똑바로 걸어왔다.
"나 장로는 대단히 재미있는 분이군요. 밤에도 주무시지 않고 그 낡아빠진 의자에 앉아 뭘 하시는 건가요?"
나장태는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두 눈을 휘둥그래 뜬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이 여인은 이 늦은 시각에 왜 이곳을 찾은 것일까……."
아무리 해도 짚이는 바가 없었다.
"나 장로, 듣자 하니 소씨 거렁뱅이가 낡은 의자 한 개를 홍안루 주방에 갖다 놓고 거기에 앉아 수십 명 요리사들을 지휘하였다고들 하던데 평소 그는 미치지 않았다면 좀 괴짜 같은 사람이었군요. 후에 들은 바로는 누가 이 의자를 은자 서른 냥을 주고 사 갔다고 하더니만 알고 보니 바로 나 장로이셨군요."
여인은 의자를 가리키며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나 장로가 이 의자를 산 일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나장태는 여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 년이 귀신같이 간사한 년이란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만 이 한밤중에 왜 여기까지 왔는지 정말 모르겠구나.'
나장태는 그녀 뒤에 구천인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구천인은 쌀쌀한 기색으로 방안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여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 장로, 당신이 내 심사를 아신다면 당신은 다시는 그 의자에 앉으려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나장태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여인은 또다시 가벼이 탄식했다.
"전 워낙 개방 방주 노릇을 하면 아주 멋지고 위풍이 있게 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정작 해 보니 생각과 다르더군요. 매일 시끄러운 일들이 수도 없는데다가 개방 사람들이란 모조리 게으르고 제멋대로라서 그들에게 말을 듣게 한다는 건 얼마나 힘든지……."
일점지 나장태는 이 여인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더욱이 그녀의 말에 어떻게 대꾸해야 좋을지 정말 알 길이 없었다. 밖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죽이고 엄숙하게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문 가까이에 계집애 열이 저마다 손에 검을 들고 서 있었다. 보아하니 그 계집애들은 집 밖에 있는 개방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동안에 많은 개방 사람들이 잠이 깨어 이 집 문 앞에 모여든 것이었다. 집 안에 있는 나장태가 한마디 호령
을 하기만 하면 이 사나이들이 달려들어 열 명의 계집애들쯤은 얼마든지 처치할 수 있었다.
"나 장로, 난 대사가 있어 당신과 상논하러 왔어요. 당신은 수하 형제들을 좀 멀찌감치 물리는 게 어때요?"
일점지 나장태는 쌀쌀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번개같이 한 생각을 떠올렸다.
'이 여인은 계집애들을 데리고, 심지어는 철장방 방주 구천인까지 달고 왔다. 이 여인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필시 날 해치려 드는 것일 게다.'
일단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장태는 시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
"방주께선 나와 무슨 일을 상논하려는 거요?"
"나 장로께서 저의 생각을 아시게 되면 아주 기뻐하실 거예요. 전 암만 생각해 봐도 제가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야만 하겠어요. 그리하여 다시는 당신네 개방 일에 참견하지 않기로 작심했어요."
나장태는 그녀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개방 방주 자리를 빼앗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 쓰던 여인인데 어떻게 이렇듯 쉽사리 방주 자리를 내놓을 수 있겠는가?
"전 심사숙고하여 이 일을 나 장로한테 말씀드리는 거예요. 전 황궁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것은…… 거기에…… 절 생각하는 분이 있기 때문……."
나장태는 반신반의하였다. 그는 군말하지 않고 그저 여인을 지켜 보기만 했다.
"나 장로, 전 이 녹옥죽봉을 당신한테 드리고 모레 홍칠과 결전을 치르기에 앞서 개방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개방 방주로 정했다고 선포할 참이에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모레 결전을 치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소만, 방주님, 그 말이 참말이오?"
나장태는 깜짝 놀라 외쳤다
"물론 참말이지요. 제가 왜 당신을 속이겠어요?"
그러자 나장태는 즉시 무릎을 꿇었다.
"방주님 은혜에 감사를 드리오. 방주님께서 날 이렇게 도와주신다면 난 영원히 방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거요."
"나 장로께서는 너무 예절을 차리시는군요. 전 참말로 이곳에 있는 걸 바라지 않아요. 전 황궁으로 돌아가야겠어요. 거기엔 참말로 절 아껴 주는 분이 계석요. 전 더 이상 그이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요."
그녀의 얼굴엔 홍조가 떠올랐다. 여인은 내처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다가 구천인의 기침 소리가 들리자 잠시 주춤하며 그 뜻을 알 만하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장로, 저와 구 방주님은 서로 약속한 바가 있어요. 개방은 금후엔 철장방의 분부를 들어야만 하는데 나 장로께선 그걸 원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러자 나장태는 큰소리로 얼른 대답했다.
"그러지요. 그러고말고요."
하지만 나장태는 기실 구천인의 분부를 들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일이 급하다 보니 부득불 일단 그렇게 대답한 것이었다.
"구 방주님, 많이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구천인은 건성으로 코대답을 하였다. 나 장로는 생각했다.
'구천인, 너무 콧대를 세우지 말게. 내가 개방 방주가 되기만 하면 조만간 네 놈을 처치할 테니.'
그는 비록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였지만 겉으로는 구천인의 분부를 잘 들을 것이며 조금도 어기지 않을 듯이 아첨을 하였다.
여인은 곧 소리쳐 사람을 불렀다. 그러자 시녀 하나가 녹옥죽봉을 가져다 여인한테 바쳤다. 여인은 그것을 받아 들고 말했다.
"개방 사람들은 누구나 이 녹옥죽봉을 대단하게 여기더군요. 나 장로, 이젠 당신의 소원대로 되었어요."
여인은 손에 들고 있던 녹옥죽봉을 나장태에게로 가져 갔다. 그런데 나장태는 머리를 낮추 숙인 채 두 손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 들었다가 한순간 갑자기 손을 탁 떨구며 말했다.
"방주님, 이렇게 해선 안 되겠소!"
여인은 의아했다. 그녀는 내심 나장태에게 녹옥죽봉을 건네 주어 모레 있을 홍칠과의 맞대결을 피해 보려던 심산이었다.
"나 장로,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씀이세요?"
"방주님, 이 일은 이렇게 처리해선 안 될 것 같소. 방주님이 이 자리를 넘겨받을 때에도 천하 72개 분타 타주들이 모두 한자리에 있지 않았소? 방주 자리를 계승하는 일은 개방에서 모든 사람이 다 알게 하여야만 하오. 좀더 격식을 차려야만 하겠소."
구천인은 한옆에서 냉소를 쳤다.
"내가 옆에 참관하고 있는데 무엇이 정중하지 않다는 겐가? 그래 그대의 72개 분타 타주들이 나만큼 중요하단 말인가?"
"구 방주님, 당신은 저한테 영광을 주신 분입니다. 하지만 개방 사람들이 선뜻 수긍하지 않으면 방주 자리는 온전치 못하게 됩니다. 게다가 모레 방주께서 홍칠과 결전을 치르신다는데 싸움이 끝나고 나서 방주 자리를 저한테 넘겨주는 게 좋겠습니다."
여인은 냉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나장태의 생각이 갑자기 달라진 원인을 대번에 짐작하였다. 나장태는 모레의 결전이 필시 큰 싸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일 지금 자기가 방주 자리를 넘겨받게 된다면 기필코 홍칠과 대립하게 되어 홍칠한테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방주 노릇이고 뭐고 끝장이 아닌가?
"나 장로의 말씀도 옳은 것 같군요. 그러면 나 장로께서 저의 싸움을 도와주어야겠어요.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 방주 자리는 나 장로한테 넘겨드리지요."
"방주님의 생각이 지당합니다. 방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여인은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뜨락 안은 워낙 당장 싸움이 붙을 듯 험악한 분위기였으나 몇 마디 말이 오가고 나자 모든 적의는 사라져 버렸다. 여인은 천천히 걸어 나가면서 뜨락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나장태가 이곳 경도 임안에 거처를 잡고 있는 것이 적이 마땅치 않았지만 더는 아무 말도 않고 고개만 저으면서 가 버렸다.
여인은 방안에 들어와 자리에 앉아서 구천인한테도 자리를 권했다. 구천인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나장태란 녀석은 우리와 한마음 한뜻이 아니오. 그 놈은 그대를 해치려 하고 있소. 방주 자리를 물려받고 싶어하면서도 종당에 가서는 또 주견을 바꾸니 심사가 지독한 놈이란 말이오."
그러자 여인은 쌀쌀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그럼 당신은 제가 그자보다 못하다고 보시는가요?"
구천인은 씁쓰레하니 입맛만 다시며 아무 대꾸도 못했다.
여인은 조용히 탄식을 하였다. 그녀의 눈앞엔 최근에 황궁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황제란 사람이 치신머리없이 한 계집아이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그 계집은 그 노랫소리에 장단을 맞추며 큰 꽃병 위에 올라가 춤을 추던 광경이 선연히 눈앞에 보이는 듯싶었다. 황제가 여색에 빠져 조정의 일에는 관계치 않고 노래나 부르고 춤을 구경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자기는 험악한 강호에 뛰어들어 무엇을 했던가. 그 여인이 황제 앞에서 교태를 부리는 광경이
떠오르자 그녀는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구천인은 여인을 바라보면서 정색을 했다.
"대전이 눈앞에 닥쳤는데 그대는 기분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아 보이는군요. 내 보기엔 그때 구양 선생을 청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 홍칠이 놈과 싸우겠소. 그댄 앉아서 구경만 하시오."
그러나 여인은 머리를 저으면서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홍칠공을 죽이려면 구 방주님도 힘이 들 텐데 제가 제 재간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어요."
"그대가 나장태를 방주로 삼는다면 난 그자를 죽여 버리게 될지도 모르오. 난 그런 간악한 자를 제일 혐오하오."
여인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없었다.
'네 놈은 그자를 간악하다고 하지만 기실 너는 간악한 놈이 아니란 말이냐? 나장태가 방주 노릇을 하면 네 놈이 개방을 삼켜 버리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
하지만 여인은 속심을 털어놓지 않고 담담히 미소만 띠었다.
대전이 임박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무료감을 느꼈다. 홍칠은 집 안에서 내공을 연마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는 강룡십팔장을 능숙하게 터득하였는바, 거침없이 실전에 써먹을 수 있었다. 문 밖에서는 소미타, 사게, 나대통, 노유각 등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홍칠이 한참 내공을 연마하고 있는데 갑자기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나대통과 정원이 소리쳤다.
"웬놈이냐?"
휘파람은 두 사람이 불고 있었다. 그 소리는 담벽 안을 오랫동안 메아리 치고서야 멎었다.
"저는 일곱째이고 이 사람은 아홉째입니다."
나대통이 맞받았다.
"무슨 일이오?"
"우리 맏형님께서 방주님을 만나겠다고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벌써 나장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난 홍 방주를 만나야겠소."
나대통과 노유각 등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나 안에서 소리를 듣고 홍칠은 벌써 뜨락에 나와 있었다. 그는 나장태를 보고 미소를 띠었다.
"내가 일찍 나 장로더러 돌아오라고 권고할 땐 대답도 않더니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오셨소?"
"방주께 알려야 할 일이 있소. 그 여인은 황궁으로 돌아갈 모양이오. 황제께서 그 여잘 여전히 총애하고 있는 듯했소."
홍칠은 잠시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안 했다. 나장태가 보니 범장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범 장로가 돌아왔다고 하던데 왜 보이지 않는 거요?"
삽시에 여러 사람들의 기색이 어두워졌다.
"범 장로는 돌아가셨소."
홍칠은 그저 짤막하니 대꾸했다.
"아니 그럴 수가…… 범 장로를 이곳으로 보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죽는단 말이오?"
홍칠은 범장천의 일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나장태는 끝까지 듣고 나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개방에서 일심으로 홍 방주를 도왔소. 노경을 들추어내고 또 범장천을 구해 낸 건 나의 자그마한 성의였소. 그런데 범장천이 이렇게 죽을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어느 놈 짓인지 밝혀 내기만 하면 내 손으로 죽여 버리겠소."
"내 보기엔 기필코 그 년이 한 짓이오. 그 년은 범장천이 일부러 미친 척하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어찌 가만히 놓아두려 했겠소? 범장천은 필시 그 년 손에 죽은 거요."
홍칠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따라오라는 듯 눈짓을 보내고는 앞장서 갔다. 나장태는 그를 따라 영당(靈堂)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처참한 심경으로 범장천의 영구를 바라보았다. 나장태는 개방이 비록 말썽은 많았지만 금의파와 오의파에 장로가 10명이나 되고 인재들이 우글우글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강호의 크고작은 파들이 모두 개방을 업신여기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모가 가장 뛰어나고 재간 있는 범 장로마저 죽었으니…….
나장태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범 장로, 왜 이렇게 죽는단 말이오? 금의파니 오의파니 하는 게 다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이오? 당신이 죽지 않았던들 개방을 위해 큰 공로를 세울 수 있지 않았겠소? 당신이 죽지 않았더라면 개방이 얼마나 흥성하겠는가 말이오!"
나장태는 큰소리를 질렀다. 그는 비 오듯이 눈물을 흘렸다. 범장천이 살아 있을 때 그와 나장태의 사이가 가장 나빴던 일을 모두들 기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걸핏하면 말다툼을 벌이고 방주 자리를 탐내며 서로 끊임없이 아귀다툼을 했었다. 그러나 정작 범장천이 죽자 나장태는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이 아닌가.
나장태는 다소 마음을 가라앉히고 홍칠을 바라보며 말했다.
"홍칠공, 당신이 방주가 되는 걸 나는 원치 않았었소. 하지만 당신이 그 여인과 싸워 이기게 되면 나도 당신이 방주가 되는 걸 원하게 될 수도 있소. 내가 당신을 수긍해야만 이 임안 분타도 당신을 방주로 천거할 수 있게 되는 거요."
사개 정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 장로, 우리도 당신이 수고한 걸 잘 알고 있소. 당신이 출수표 노경의 일을 알려 준 게 우리 개방에 큰 도움이 되었소. 당신도 그 여인한테서 떠나기를 권고하는 바이오."
나장태는 머리를 한 번 굽실 숙였다.
"아니오. 그렇게 해선 안 되오. 사람이 한두 번 잘못을 저지를 수는 있지만 세 번, 네 번 잘못을 저질러서야 안 되는 일이지."
나장태의 얼굴에선 결연한 의지가 감돌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나가다가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오로지 그 결전에다 모든 걸 맡길 뿐이오. 그때 내가 개방 여러분들께 죄를 짓게 될지도 모르는 일, 미리 말해 두는 바요."
나장태는 이 말 한마디만 남기고 표연히 나가 버렸다. 그가 떠나간 후 모두들 안타까운 심정으로 입을 모았다.
"나장태가 저처럼 고집스러운 걸 보면 일심으로 그 여인을 위하는 게 분명하오. 그 여인과 관계가 아주 깊을지도 모르오."
홍칠만이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고심암을 떠올렸으며 그 여인이 하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인은 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미립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했었다. 그 말을 떠올리자 홍칠의 마음은 느닷없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노완동은 너무나도 심심했다. 철장방의 자그마한 초가집에 갇혀 하루 세 끼 식사를 하는 것을 빼놓고는 하는 일이 없었다. 무료함에 견디기 어려워진 노완동은 집 안 땅바닥에 구멍 몇 개를 뚫어 놓고 유리알 치기를 하였다. 혼자서 하는 놀이라 왼손과 오른손을 편을 갈라 놓고 알 치기 시합을 하였다. 그리하여 오른손이 이기면 오른손으로 왼쪽 얼굴을 때리고, 왼손이 이기면 왼손으로 오른쪽 얼굴을 때리다가 중얼거렸다.
"개자식, 왜 이리도 몹시 때려, 자기 얼굴이 아닌감?"
그는 성이 나서 왼손으로 오른손을 때리고 오른손으로 왼손을 때렸다. 노완동이 오른손으로 왼손을 때리는데 오른쪽 장으로 들이치면 왼쪽 장으로 막는 것이었다. 두 장의 힘이 엇비슷한지라 그는 한참 동안이나 씨름을 하다가 제풀에 꺾여 중얼거렸다.
"어느쪽이 이기고 지는 걸 미리 알면야 무슨 재미가 있담?"
노완동은 알 치기에도 싫증을 느껴 이제는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람을 그렸는데 코도 그려 넣고 눈도 그려 넣었다. 그림을 다 그린 다음에는 먼 곳에서 그 그림을 과녘삼아 유리알을 던졌다. 코, 입, 두 눈에 네 개의 구멍이 뚫렸다. 벽에 그린 사람의 이빨이 유리알에 맞아 부서지고 입이 비뚤어지고 코에 구멍이 나고 눈이 뻥 뚫어지게 되니 노완동은 신명이 나서 반나절이나 웃어댔다. 하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그는 한동안 침울하게 앉아 이 생각 저 생
각 머리를 굴리다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이리 와, 이리 오라니까, 한 가지 물어 볼 게 있어."
간수가 가까이 다가왔다.
"뭘 물어 보려구 그래?"
"자네들 철장방에 구천인 말고 누가 장력이 제일 센가?"
그 사람은 노완동의 말을 듣고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철장방 사람들이면 누구나 공력이 대단하다. 네 놈이 철장방 맛을 보고 싶거든 어디 나와 견주어 보자,"
노완동은 쾌재를 부르며 품속에서 작은 금덩이를 꺼내 간수한테 보이면서 말했다.
"내가 알려 주지. 난 어디로 가나 이 금덩이를 갖고 다니며 이걸로 내 운세를 점쳐 본다네."
그 간수는 노완동이 금덩이를 들고 있는 것을 보자 욕심이 났다.
"그 금덩이 날 주게."
"자네가 내 팔을 부러뜨릴 수만 있다면 이 금덩일 주겠네."
간수는 금덩이가 욕심이 나 한번 시험삼아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노완동이 옥에 갇혀 있으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자넨 어서 이 옥문을 열게.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시험해 볼 수 있겠나?"
그러자 간수는 냉소를 쳤다.
"노완동, 자넨 대협 왕중양의 사제인데 그 재간을 누가 당하겠나? 자네를 내놓았다간 금덩이를 얻기는 고사하고 내 목숨도 건지지 못할 텐데 실없는 소리 작작 하게."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나?"
노완동은 천연덕스럽게 금덩이를 이 손 저 손으로 옮겨 가면서 가지고 놀았다. 금덩이는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간수는 자꾸만 군침을 삼켰다.
"자네가 팔을 이 창문으로 내밀게. 그래 가지고 내가 시험해 보는 게 어떻겠나?"
간수는 얕은 꾀를 굴렸다. 이 창문에는 창살을 박았고 창구멍도 한 자밖에 안 되니 노완동이 팔을 내밀기만 하면 한 장에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일 자기가 두 손으로 노완동의 손을 잡아당겨 팔을 부러뜨리게 될 지경이면 그가 다급하여 금덩이를 밖으로 내던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간수는 성마르게 졸라댔다.
"자네가 팔을 밖으로 내밀라니깐. 그래서 시험해 보자구."
노완동은 머리를 저었다.
"싫어, 안 하겠어. 내가 팔을 밖으로 내밀면 자넨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씩 내리쳐서 내 팔을 부러뜨릴 속셈 아닌가?"
"정히 그럴 생각이 없다면 관두라구."
간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일부러 장으로 쇠살창을 치는 것이었다. 쇠창살이 쾅 하고 울렸다. 노완동은 다시 간수에게 말했다.
"좋아! 그런데 자네 조심해야 하네. 한 번이라도 내 팔을 격중시키면 시합은 그것으로 끝난 것으로 치잔 말야. 어때?"
"그래, 좋다!"
노완동은 과연 천천히 한쪽 팔을 밖으로 내밀었다. 그 팔은 보기가 구차할 지경으로 더러웠다. 그러자 간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단 한 장에 네 놈의 팔을 맞히지 못한다면 네 놈은 팔을 걷어들이겠지? 그러면 난 금덩이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차라리 저 놈의 팔을 꽉 틀어잡고 부러뜨리자. 그러면 금덩이를 안 내놓고는 못 배길 거다.'
간수가 이런 꿍꿍이를 구미고 있는데 노완동은 안달이 나서 재촉했다.
"자넨 왜 손을 안 쓰나? 한 번밖에 못 친다고 하니까 그러나? 한 장에 끊어 버리지 못하면 지게 되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럼 이제부턴 그 무슨 철장방이라고 자랑이나 하지 말게."
노완동은 있는 대로 비꼬았다. 그러자 간수는 바싹 약이 올라 노완동의 팔을 잡아 비틀려고 두 손을 내밀었다. 순간 노완동의 팔이 미꾸라지처럼 미끌하더니 도리어 간수의 팔을 꼭 틀어쥐는 것이 아닌가. 노완동이 힘을 쓰자 간수의 팔은 뚝 하고 부러져 버렸다. 노완동은 기뻐서 환호성을 울렸다.
"자네가 내 팔을 부러뜨리지 못하고 오히려 나한테 팔이 부러졌단 말씀이야. 자네가 먼저 나쁜 마음을 먹었으니 날 탓하지 말게! 어서 열쇠를 내놔! 이곳에선 아무 재미도 없단 말이야."
50. 최후의 결전
날이 훤히 밝았는데도 여인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팔베개를 한 채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달콤한 꿈이라도 꾸는 듯 얼굴엔 미소가 어리고 이따금 입을 방싯거렸다. 아마도 황제를 만나 성은을 입는 꿈이라도 꾸는 듯했다.
"나보고 꽃병 위에 올라가 춤을 추라 하시면 전 그 여인보다 훨씬 더 잘 출 것이와요……."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들릴 듯 말 듯 잠꼬대를 하였다.
시녀 몇이 문 앞에 지켜 서서 그녀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그녀를 깨우지 못했다. 오늘은 바로 그녀가 홍칠과 결사전을 벌이기로 약정한 날이다. 그녀가 홍칠을 이긴다면 이 여인들 역시 후일 살아 나갈 근심이라곤 하나도 없겠지만 만의 하나 패하는 날이면 실로 막막한 노릇이었다. 시녀들은 모두 적이 엄숙하게 침묵을 지키고 서 있었다.
한순간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는 방안을 휘둘러보고는 이 넓은 방안에 자기 혼자 누워 있음을 깨닫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뭔가 껴안고 있었는데 그건 고작 베개였다.
"이따위가 다 뭐야. 이따위가……."
그녀의 눈에선 소리 없이 눈물 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침대를 내려서다가 자기 옷이 엉망으로 구겨진 것을 알아차리고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게 아무도 없느냐?"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은 황급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여인은 속옷 바람으로 침대에 앉아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저만치에 내던져진 옷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옷을 다 불살라버려!"
시녀들은 영문을 몰라 어정쩡하니 서로 눈치만 살폈다.
"내 말이 안 들리느냐? 저 옷을 다 불살라 버리란 말이야!"
여인은 노한 듯 고함을 내질렀다. 그제야 시녀들은 황급히 그 옷들을 거두어 밖으로 나가 불을 질렀다. 잠시 후 안에서 여인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옷을 가져 와!"
몇몇 시녀가 장롱을 뒤져 옷을 찾기 시작했다. 여인은 그 시녀들을 멀거니 보고 있다가 또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깐만!"
시녀들은 멈칫하며 명을 기다렸다.
"너희들은 모두 가서 깨끗이 목욕을 하고 입고 있는 그 누더기 따윌랑 다 벗어 던지고 모조리 불태워 버려라!"
시녀들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여인의 속내를 전혀 짐작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희색이 만면하여 읍을 하고 총총히 나갔다. 이 여인들은 모두 미색이 뛰어난데 평소 그런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자니 정말 한숨만 나올 지경이었던 것이다.
여인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침대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 그녀는 자기가 늑장을 부려도 홍칠은 기다리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홍칠이 그녀를 오래도록 기다리게 하리라고 작심하였다. 자기를 오래 기다리게 한다고 해서 그에겐 그리 안타까운 일도 아닐 테지만……."
시녀들은 저마다 향수내를 물씬 풍기고,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나는 듯이 달려 들어왔다. 그녀들은 모두 침대 곁에 다소곳이 서서 여인의 분부를 기다렸다. 이 여인은 그녀들에게 늘 잘 대해 주었다. 개중 몇몇은 바로 이 여인의 도움으로 기생 소굴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들 중 더러는 오늘 일진을 보아 여차하면 이 여인을 위해 한목숨 바치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있기도 했다.
"의복을 가져 오너라!"
이윽고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녀들은 차례차례로 의복을 가져와 여인에게 선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번번이 살래살래 머리를 내저었다. 시녀들은 어느 정도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다음 새하얀 소복을 가져다 여인에게 보였다. 그제야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을 했다.
"좋아! 하지만 그이의 맘에 들지 모르겠구나!"
시녀들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서로 마주 쳐다보았다. 여인이 마음에 두고 있는 사나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홍칠일까 생각해 보았으나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생사결전을 눈앞에 두고 있는 판인데, 이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렇담, 홍칠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일까?
여인은 천천히 목욕을 하고 옷을 입었다. 시녀들은 정성껏 여인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처음에 트레머리를 올려 주었더니 여인은 거울을 보고는 불만스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이가 어찌 이런 모습을 좋아하시겠느냐?"
시녀들은 도대체 그 사내가 누군지 몰라 애가 달았다. 이 여인이 사내 때문에 신경을 쓰는 것은 본 적이 없는지라 그녀들은 기이한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여인은 이 머리, 저 머리 다 마음에 안들어 했다. 그래 그저 등뒤로 길게 늘어뜨리고 귀 밑에 꽃물 한 송이 꽂았다. 그제야 여인은 흡족해했다.
"좋다! 이제 마음에 드는구나!"
여인의 눈가에 미소가 번져 갔다. 그 모습은 방주다운 위풍은 조금도 없고 천진하고 순결한 시골 처녀 그대로였다. 여인의 얼굴에선 그 어떤 집념과 갈망이 내비쳤다.
"어때, 이게 좋지?"
여인은 시녀들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녀들은 서로 쳐다보기만 하면서 선뜻 대답을 못하다가 개중 하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안…… 좋아요."
"어디가 안 좋아 보이느냐?"
"꼭 시골 처녀 같아요."
"그러니까 좋은 거지."
여인은 뜻밖에도 활짝 웃었다.
구양봉은 아침 햇살 속으로 나왔다. 잠도 실컷 자고 배불리 먹어서 각별히 몸이 거뜬했다. 그는 사장을 손에 잡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심장도 고르게 뛰고 있는 듯했다. 그는 자기가 일단 문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피를 흘리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죄의식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그는 자기가 사람을 얼마나 죽였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무리 사람을 죽여도 그 무슨 감각도 없이 그는 늘 태연자약했다.
구양봉은 문 앞에서 철장방 방주 구천인과 마주쳤다. 구천인이 그를 보고 굽실 읍을 하였다.
"오늘은 구양 선생께서 수고가 많으시겠소!"
구양봉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그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걸었다.
"그 여인이 홍칠과 싸우게 되면 승산이 있겠나?"
구양봉이 물었다. 구천인은 쌀쌀한 어조로 맞받았다.
"승산은 무슨 승산……. 목숨이나마 건지겠소?"
구양봉은 구천인을 흘낏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심사가 사악한 걸로 치자면 이 놈이 당연 으뜸이다. 이 노독물이 강호에서 악명을 날리기는 했지만 이 구천인보다 악독하달 수는 없지. 오늘의 결전에서 이자의 공력이 어떤지 내 지켜 보리라.'
구양봉은 그에게서 눈길을 거두며 짐짓 속내를 드러냈다.
"내 보기엔 나장태도 오늘 결전에서 홍칠의 손에 죽고 말 것 같아. 그러니 그대가 개방을 삼키려는 계략도 물거품이 되고 말걸!"
구천인은 마음속으로 흠칫 놀랐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내가 쌓아 온 공로는 어떻게 되고?"
구양봉은 냉소를 쳤다.
"대사를 이루려면 사소한 일은 따지지 말아야 하는 법, 그녀가 홍칠과 싸우려 들 때 그댄 가만있어서는 안 되네. 그녀가 손을 쓰기 전에 자네가 먼저 나서야 한단 말이야. 다만……."
구천인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구양봉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톡 뛰어들어 따져 물었다.
"다만 어쨌단 말이오? 구양 선생, 똑똑히 말해 주시오!"
"다만 자네가 홍칠이 놈을 두려워해서 그 놈을 죽이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비기기는 해야 한단 말이야."
구천인은 대답이 없었다. 기실 구양봉의 말은 사리에 맞았다.
그는 홍칠과 싸우게 되면 대체로 이길 승산이 없었다. 구천인은 손을 모아 쥐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러니 구양 선생께서 저를 좀 도와주석야지요! 구양 선생만 도와주시면 내가 개방을 먹어치우고 천하 무림에서 가장 크게 위력을 떨칠 수 있을 터인데……. 구양 선생의 명이라면 기필코 전심전력을 다하겠소."
구양봉은 껄껄 웃어제쳤다.
"내가 손을 쓰면야 홍칠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지!"
구양봉은 사뭇 득의 양양했다. 그는 자기가 소씨 거렁뱅이와 싸우고 미운산을 죽일 때도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기 혼자 힘으로 능히 해치웠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는 단황이나, 황약사 같은 고수들과도 겨뤄 보았으니 홍칠을 죽이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구천인만 내 명을 받든다면 화산 무예 시합 때 나한테 조력군이 생기는 셈이다. 저 놈만 날 도와준다면 남제, 동사 등을 일거에 쓰러 눕힐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만 되면 천하에 무림의 으뜸은 내가 되는 건데……."
구양봉은 호기롭게 내뱉었다.
"좋아, 내가 그대를 따라가 홍칠이란 놈을 죽여 주지. 그거야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
일점지 나장태는 여전히 방안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른 때와 달리 밖은 사뭇 조용했다. 2, 3백 명 되는 사람들이 장속을 갖추고 손에 병장기를 든 채 일점지 나장태가 문을 나서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장태는 방안에 그대로 처박힌 채 오래도록 나올 기미가 없었다. 그는 소씨 거렁뱅이가 쓰던 그 의자에 앉아 팔걸이를 어루만지면서 나직하게 뭐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문이 가볍게 열리며 일곱째와 아홉째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한 켠에 조용히 서서 나장태의 분부를 기다렸다. 일점지 나장태는 서두르지 않고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침내 일곱째가 기다리다 지쳐 입을 열었다.
"큰형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두들 준비는 다 되었는가?"
"준비는 어제 벌써 다 되었습니다. 형제들에게 은자도 다 나눠주고 잠자리도 다 마련해 놓았습니다. 모두들 결사전을 벌이고자 각오가 대단합니다."
아홉째가 읍을 하면서 자못 비장하게 말했다. 나장태는 그 말엔 대꾸도 않고 의자 등받이에 지그시 몸을 기댔다.
"일곱째, 이 의자, 좋아 보이는가?"
일곱째는 큰형이 뚱딴지같이 왜 자꾸 그런 말만 하는지 알 수 없어 얼떨떨했다. 딱히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도 아니었다.
나장태는 서서히 손을 내밀었다. 일곱째가 손에 들고 있던 보검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나장태는 보검을 받아 들더니 천천히 일어나 의자를 마주보고 섰다. 그리고는 보검을 번쩍 휘둘러 의자를 두동강이를 내버렸다. 그리고는 긴 숨을 몰아쉬었다.
"가세!"
밖에서는 2, 3백 명이 엄숙하게 서서 저마다 흥분된 가슴을 누르며 나장태가 나오는 것을 똑바로 지켜 보았다. 맏형이 와신상담으로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는 것을 그들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맏형을 따라 생사 고비를 수차 넘나든 것도 바로 이날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형제들, 이번 싸움은 이전의 어떤 싸움과도 다르다. 내가 만약 이 싸움에서 지게 된다면 난 스스로 목을 자를 것이다!"
나장태는 자못 위엄 있게 소리쳤다. 그러자 사나이들은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만약 지게 된다면 스스로 목을 자르겠습니다!"
"개방은 대방(大 )이지만 종래로 비단옷을 입은 사람이 없었다. 난 좋은 옷을 입은 자식들만 보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다. 조만간 내가 개방을 장악하게 되면 형제들을 각 분타의 타주로 임명하겠노라. 하지만 형제들 중에는 호의호식하려는 자가 없을 것으로 믿는다! 또 한 가지 우린 미 방주 수하 명의로 출전하지만 그 여인을 도와서는 안 된다."
나장태의 위엄 서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섰다.
"큰형님, 우린 큰형님이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들은 이번에 홍칠공을 도와야 합니까?"
'허튼소리! 우리는 아무도 안 돕는다. 우리는 홍칠공과 그 여인이 싸워 둘 다 상해 나자빠진 다음에 나선다."
나장태는 고함치듯 소리를 내질렀다. 모두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비로소 일점지 나장태가 미 방주 편도 홍칠 편도 아니요, 그가 직접 개방 방주가 되려 한다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되었다. 일점지 나장태는 머리를 돌려 뜨락 안의 작은 집을 바라보았다. 그는 개방의 장로 노릇을 하고 이 사람들의 맏형 노릇을 하면서 이 작은 집에서 몇 년 동안이나 기거해 왔다. 그날따라 그 집은 유달리 작고 볼품없어 보였다. 나장태는 손에 검을 치켜 든 채 일곱째와 아
홉째를 향해 외쳤다.
"불을 지르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집은 삽시에 불타 올랐다. 2, 3백 명 되는 사람은 작은 잡이 불타는 것을 엄숙히 바라보았다. 대들보가 불에 타서 쿵 하고 무너져 내렸다. 나장태는 이곳이 온통 폐허로 변하는 것을 보고서야 다짐하듯 뇌까렸다.
"성공하지 않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나장태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 뒤로 일제히 열을 맞춰 수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집 안에 조용히 앉아 오늘의 싸움에 대하여 의논을 하였다.
"그 여인이 말한 게 있네. 난 최후의 순간 그걸 홍칠공에게 알려 드리려 하네. 그래, 자넨 오늘 싸움을 어떻게 생각하나?"
사개 정원의 말에 소미타 추우는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의 싸움이 개방의 운명에 관계되는데 한마디로 단언할 수는 없지! 하나 그 여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홍칠공한테 미리 알려 드리는 게 좋겠네."
사개 정원은 급히 일어나 소미타 추우와 함께 홍칠을 찾아갔다. 홍칠은 자리에 얕은 채로 정신을 집중해 기공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감히 방해할 수 없어서 한쪽에 숨죽이고 앉아 있다가 홍칠이 모았던 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서야 입을 열었다.
"방주님, 우리는 한 가지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사개 정원이 입을 뗐다. 홍칠은 정중한 기색으로 말했다.
"정 장로, 무슨 일인지 사양 말고 이야기하오."
"그 여인은 최후의 시각에 이르거든 저더러 이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나장태란 사람이 꿍꿍이가 있을 테니 조심 하라고요."
홍칠은 생각을 더듬고 나서 말했다.
"나는 워낙 이번 결전에 우리 몇 사람만 가려고 했었소. 하나 사정이 그러하다면 노유각, 나대통에게 개방의 이백 용사들을 소집하도록 하시오!"
홍칠은 사개 정원, 소미타 추우, 나대통, 노유각을 위시해 이백 용사들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아주 용맹한 사람들이었다. 모두들 비장한 각오로 남다르게 가슴이 설렌다. 오늘부터 개방은 새로 방주를 옹립하여 또다시 강호의 큰 무리로 발돋움 하는 것이며 다시는 사분오열되는 사태는 없을 것이다. 이전에 미운산 방주 휘하에서 개방은 10대 장로를 중심으로 천지를 진동하는 대업을 여러 차례 이룬 바 있었다. 오늘의 싸움을 거쳐 개방이 또다시 우뚝
서게 되는데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홍칠이 진두에 서서 대오를 이끌고 나갔다. 대오는 드디어 임안 성 밖 나무 숲에 당도했다. 이곳은 줄곧 문인묵객(文人墨客)들이 모이는 장소로 되어 있었는데 나무들이 듬성듬성 나 있어 아주 쓸쓸해 보였다.
아무도 와 있지 않았다. 홍칠은 뚫어지게 한곳을 응시하면서 그 여인과 처음 만나던 정경을 회상해 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미립을 떠올려 보았다.
'미립, 그대의 죽음은 전적으로 그 여인 때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구려. 난 오늘 결전을 치러 그대의 원한을 갚을 것이오.'
드디어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 뒤로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다.
'오늘 결전에서 죽든 살든 모든 은원은 여기에서 끝내야 한다.'
홍칠은 그녀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는 뒤쪽을 향해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정 장로, 추 장로, 오늘 싸움에선 경각심을 높여야겠소."
홍칠은 저쪽 무리에 서역 백타산군 구양봉, 철장방 방주 구천인이 끼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두 놈을 대적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 싸움의 승부는 참으로 예측하기 어려웠다.
소씨 거렁뱅이는 경도 임안 거리를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공기도 맑고 기분도 퍽이나 유쾌했다. 그는 한 난전 앞에 다다랐다. 호떡을 굽는 영감이 그를 보고 말을 건넸다.
"아유, 대단하더구먼. 수많은 사람들이 성밖에 있는 나무 숲으로 몰려갔다우. 아마도 무슨 큰일이 벌어질 모양인가 본데, 아유 소름 끼쳐……. 모두 거지 행색인데 하나같이 손에 칼을 들고 있는 게 정말 무시무시하더구먼."
소씨 거렁뱅이는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개방에 또 무슨 일이 났기에 이런 북새판을 벌이는 거지.'
그는 시끄러운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모르는 척하자고 생각하였다. 소씨 거렁뱅이는 단지흥의 구원을 받고서야 겨우 뱀 독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력은 이전의 오륙 할 정도밖에 되지 않아 남과 싸우기란 매우 힘들었다. 그는 단황의 거처를 나온 후부터 혼자 제멋대로 떠돌아다녔다. 그래도 누구 하나 상관하는 사람도 없어 마음은 몹시 편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개방의 일에 상관해서 뭘 한단 말인가? 게다가 모두들 그가 구양봉한테 맞아 죽어 강호엔 그 뼈다귀
조차 남아 있지 않은 줄로 알 터인데 다시 나타나 사단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호떡 굽는 영감은 계속 주절거렸다.
"참말로 무섭다니까. 워낙 개방의 노 장로란 사람은 인품이 좋고 수더분한데 어느 놈이 그 사람 두 손을 그래 놨는지 몰라. 뼈가 다 으스러지고 귀까지 하나 뜯겨 나갔다니까. 그런데도 그런 사람까지도 가만 놔두지 않고 흑부(黑府) 골목에서 죽여 버렸거든."
소씨 거렁뱅이는 또다시 흠칫 놀랐다.
'지금 공력으로 구양봉이나 구천인과 싸운다면 난 결코 당해 내지 못할 거다. 하지만 얘기를 듣고 보니 개방에 무슨 큰 사단이 났는지 안 가 볼 수 없겠군!'
예까지 생각하고 난 소씨 거렁뱅이는 노인에게 물었다.
"영감, 그 거지들이 어디로 갑디까?"
"보아하니 당신도 거지 같구먼. 나이도 적잖이 자신 것 같은데 제발 거기로는 가지 마시우. 그 거지들이 저마다 살기 등등해 가지고 손에 검들을 들었더란 말이오."
소씨 거렁뱅이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저 구경만 하려고 그러오. 좀 알려 주시오."
노인은 그가 악한 같아 보이는지 않는지라 그 거지들이 달려간 나무 숲 쪽을 가리켰다.
정오가 가까워 올 무렵 나무 숲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몇 무더기로 나뉘어 서 있었다. 한쪽에 홍칠공이 사개 정원, 소미타 추우, 나대통, 노유각과 개방의 용사 2백 명을 데리고 서 있고 그 바로 앞쪽으로 가짜 미립이 구천인, 구양봉과 시녀들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좀 떨어진 곳에 개방 장로 나장태가 일곱째, 아홉째와 2, 3백 부하들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형세를 보니 일점지 나장태는 마치도 그 여인의 원군으로 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방관자 같기도 하였다.
그 여인은 온몸에 새하얀 소복을 걸치고 얼굴에 분화장도 하지 않은 채 머리는 청사(靑絲)로 졸라맸다. 그녀 주위의 십여 명 시녀들은 모두 다 화려하고 울긋불긋한 차림을 하고 있어 평소의 개방 여인다운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인이 앞으로 걸어 나와 홍칠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홍칠공, 전 제가 늦게 나와 당신을 기다리게 했는가 하였더니 당신도 그리 일찍 나온 건 아닌 것 같군요."
홍칠은 냉소를 쳤다.
"그대나 나나 늦지 않았소. 오늘 싸움은 어떻게 할 참이오?"
여인은 나장태를 바라보았다.
"나 장로, 제가 보기엔 당신이 개방 장로들과 먼저 싸워 보는 게 어때요?"
나장태는 달리 방법이 없어 선뜻 나섰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가 동시에 뛰어나와 나장태와 접전할 태세를 갖췄다. 그러자 사개 정원이 소미타 추우를 말렸다.
"저자는 내가 맡겠네."
소미타 추우는 사개 정원이 뱀을 사용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자기보다 무예가 뛰어나므로 그는 사개 정원한테 양보하고 뒤로 물러났다. 사개 정원이 소리쳤다.
"미련한 자한테 뒷복이 있다고들 하더라만 나 장로 너는 미련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뒷복은 많구먼그래. 오늘까지 무사히 살아 있는 것만 해도 실로 행운이지!"
"사개, 그래 무예가 나만 못하거늘 아예 졌다고 인정하고 싸움을 그만두는 게 어떤가?"
사개 정원은 껄껄 웃어젖혔다.
"나 장로, 오늘 싸움은 누가 이기고 질지 알 수 없는 일, 당신은 조심하는 게 좋아."
사개 정원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장을 내밀어 나장태를 찔러 갔다. 나장태는 사개가 달려들자 검을 뒤에 찬 채 적고권(赤尻拳)으로 사개에게 맞섰다. 사개는 사형십칠보(蛇形十七步)를 펼쳤다. 나장태의 적고권은 일명 후권( 卷)이라고도 하는데 그들의 싸움은 마치도 원숭이와 뱀이 싸우는 듯이 영활하고 재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밥 한 사발 다 먹을 시간 동안이나 싸웠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순간 사개 정원이 나장태의 권법을 당해 내지 못하고 뒤로 주춤
물러서서 법수를 바꿔 두 마리 독사를 내보냈다. 대청(大靑)과 소청(小靑)이라고 하는 이 두 마리의 독사는 사개가 각별히 훈련시킨 것들이었다.
독사 두 마리가 일제히 나장태한테 달려들자 그는 두 손으로 뱀을 냉큼 집어서는 힘껏 패대기쳤다. 그리고는 팍 하고 장을 날려 사개 정원의 어깨를 내리쳤다. 사개 정원은 일순 몸을 비틀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나장태는 급히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여기까지 했으면 이젠 됐네. 그만 하세."
그리고는 더는 사개한테 손을 쓰지 않고 제자리로 물러나 버렸다. 그는 이미 이겼으므로 더는 사개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인이 외쳤다.
"홍칠공, 어서 투항하세요. 당신 수하의 몇 사람들은 모두 쓸모없는 자들뿐인데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당신이 날 이긴다고 해도 구양 선생과 구 방주가 나서기만 하면 당신들 이백여 명은 몰살당하고 말 거예요"
말은 비록 당당했으나 그녀의 얼굴에는 예전의 그 오만하고 경멸어린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되레 평온하고 다소 쓸쓸한 기색이 감도는 것이었다. 홍칠은 큰소리로 외쳤다.
"만의 하나 그대 손에 패해 죽는다 해도 내 그대를 탓하지는 않으리라!"
여인은 탄식만 할 뿐 더는 권고하지 않았다.
이때 구천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홍칠이, 내 보기엔 너는 나와 싸워야 할 것 같다. 만일 네가 이긴다면 그땐 다시 구양 선생과 맞붙어 보고! 네가 나와 구양 선생을 이긴다면 의당 개방 방주가 될 수 있다!"
홍칠은 냉소를 치며 싸울 태세를 갖췄다. 그때 소미타 추우가 소리쳤다.
"방주님, 그건 원래의 약속과 어긋납니다. 방주님께서는 전력으로 저 여인과 싸워야 합니다!"
홍칠은 그 말을 듣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구양봉은 이처럼 언쟁이나 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수다스럽게 입씨름이나 해 가지고서는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 무슨 시비나 캐고 도리를 따질 게 있단 말인가. 구양봉은 성마르게 외쳐 댔다.
"난 홍칠이 너와 싸우기만 바란다. 딴 놈들한텐 볼일도 없다. 그러니 잔말 말고 나서거라! 내가 네 놈을 죽여 버리면 개방에 더는 시끄러운 일이 없겠지!"
홍칠은 구양봉이 나서자 분노가 치밀었다.
"구양봉 이 놈! 네 놈이 오늘 봉황력과 합마공으로 날 이겨 보려 한다면 그건 망상이다!"
"홍칠아, 소씨 거렁뱅이도 죽었거늘 네 놈도 이 자리를 살아서 빠져 나갈 생각은 마라! 이 놈, 사장 맛이나 봐라!"
구양봉은 사장을 치켜 들고 우쭐거렸다.
그때였다. 호탕한 웃음 소리가 좌중을 뒤흔들었다.
"구양봉, 내가 누구인지 보기나 해라!"
구양봉은 머리를 홱 돌렸다. 자기 편 한쪽 옆에 웬 사람이 하나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꾀죄죄하고 의복이 남루한 것이 마치 감옥에서 도주해 나온 죄수 같았다. 바로 노완동 주백통이었다.
"보아하니 네 놈은 실로 무뢰한이로구나. 홍칠은 너를 집적거리지도 않는데 네 놈은 기어이 싸움을 거니 이런 무뢰한 놈이 어디 있느냐? 차라리 나와 몇 합 겨뤄 보자."
그러더니 노완동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날쌔게 달려들어 구양봉의 면상을 주먹으로 팍팍팍 연거푸 세 번 내질렀다. 구양봉은 노완동의 주먹을 살짝 피하면서 소리쳤다.
"노완동, 네 놈이 나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나서느냐, 나서기를! 난 너 따위엔 관심도 없고 죽일 생각도 없다."
"네 놈이 나와 원수진 일이 없다고? 네 놈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나는 대협 왕중양의 사제이다. 네 놈들 동사서독, 남제가 모두 나의 사형의 《구음진경》을 빼앗으려 하지 않았더냐?"
"노완동, 괜히 내 부아를 돋우지 말아라. 내가 《구음진경》을 빼앗건 말건 그게 네 놈과 무슨 상관이냐?"
"구양봉, 네 놈은 사장을 가지고 나와 겨루려 하나, 만일 주먹싸움을 한다면 네 놈이 나보다 결코 앞서진 못할걸!"
구양봉은 아주 오만한 사람이라 노완동의 이 말을 듣자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쳐 펄펄 뛰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노완동, 오늘 내 네 놈에게 나의 장력 맛을 보여 줄 테다."
그러더니 독사장을 땅바닥에다 푹 꽂아 놓고 주먹을 부르쥐었다. 노완동은 구양봉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워낙 뱀을 두려워하는 성미라 사장만 좀 겁낼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구양봉의 화를 돋워 그가 독사장을 던져 버리도록 한 것이다. 구양봉이 사장을 내버리자 노완동은 신바람이 났다.
"노독물, 그댄 통이 커서 강호에서 으뜸가는 인물로 손꼽을 수도 있지. 그러니 화산 무예 시합 땐 자네도 얼마든지 끼워 줌세!"
그는 마치 화산의 무예 시합에 참가하는 자격을 자기가 부여하는 것마냥 이죽거렸다. 구양봉은 노완동이 꾀를 부리느라고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라 노완동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번 일은 두고 봐야겠구나. 하필 노완동이란 녀석이 불쑥 튀어 나오느냔 말이다. 오늘 네 놈을 죽이지 않고서야 어찌 이 서독의 재간을 보여 줄 수 있단 말인가.'
구양봉은 지체 않고 연거푸 장을 내밀었다. 그 장법은 독특하고도 힘이 있어 노완동은 금세 얼굴이 따끔거렸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서독의 재간이란 합마공을 배운데다가 독사장을 휘두르는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더니 발길질과 주먹질도 이처럼 뛰어날 줄이야……. 보아하니 오늘 일은 재수 없게 되었구나.'
노완동은 정신을 가다듬고 주먹을 팍팍팍 세 번 날렸다. 그러나 구양봉은 그때마다 미꾸라지처럼 피해 버렸다. 구양봉과 이십여 합도 싸우지 않아 노완동은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그는 양미간을 찌푸리더니 기가 막힌 꾀를 하나 생각해 냈다.
"노독물, 저기 우리 사형이 왔다!"
노독물도 천하에서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전진교 교주 왕중양이었다. 왕중양이 왔다는 말을 듣고 그는 다급히 머리를 돌려 살펴보았다. 자기 뒤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이쪽저쪽에 하나같이 개방 사람들만 몰려 서 있을 뿐 왕중양은커녕 전진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구양봉은 속았다고 생각하자 분이 치받쳐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노완동은 구양봉이 머리를 돌리자마자 쏜살같이 달려나가 구양봉의 사장을 집어 들었다. 노완동은 자기가 구양봉의 이 보배를 빼앗기만 하면 그가 절대로 자기를 이겨 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사장을 집어 든 순간 두 마리 독사가 징그럽게 혀를 날름거리며 덥석 그에게 덤벼들었다.
"조심하시오!"
그것을 본 사개 정원이 큰소리로 외치며 자기의 뱀 대청과 소청을 놓아 보냈다. 대청과 소청은 평소 사람을 물 때면 절대로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 두 마리 독사는 사장으로 잽싸게 기어 올라갔으나 사장 자루 구멍에 이르러서는 대뜸 기어들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땅바닥으로 털썩 떨어져 축 널브러진 채 꼼짝도 안 했다. 사장 구멍 안에 있는 두 마리 작은 뱀한테 대가리를 물리고 만 것이었다. 두 마리 작은 뱀은 곧추 머리를 치켜들고 노완동
한테 달려들었다. 노완동은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사장을 흔들어 뱀을 떨어뜨리고는 그대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다.
"아이구머니나!"
노완동은 하도 놀라서 도망치면서도 자기가 사장을 그대로 손에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장에서는 이상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두 마리 작은 뱀은 그 향기를 쫓아 땅바닥을 쏜살같이 기어갔다. 노완동은 꽤나 멀리 달려왔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놓고 돌아보았다. 그했더니 웬걸, 그 작은 뱀들은 자기 뒤를 바싹 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혼백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큰일났다. 큰일났어!"
그는 죽겠다고 소리를 내지르며 계속 내뺐다. 두 마리 작은 뱀도 끈질기게 따라갔다. 그 모습을 보고 구양봉도 노완동을 쫓아 냅다 달려갔다.
"노완동 이 놈, 사장을 돌려주지 못할까!"
노완동은 구양봉이 쫓아오는 것을 보자 기겁을 하며 외쳤다.
"뱀이 네 쪽에 있지 어디 내 손에 있느냐? 내가 어떻게 돌려준단 말이냐?"
노완동은 독사가 자기 뒤를 쫓고 있으나 필경 사장을 자기가 들고 있는 이상 독사들이 계속 쫓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저 무서운 생각에 있는 힘을 다해 내빼기만 하였다. 구양봉은 워낙 쫓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노완동이 자기가 아끼는 사장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자 분통이 터져 견딜수가 없었다. 구양봉은 독사 앞까지 뛰어가서 허리를 굽히고 휘파람을 홱 불었다. 그러자 두 마리 작은 뱀은 구양봉 팔 위로 기어오르는 것이었
다. 그는 일단 독사 두 마리를 걷어들이고 나서 계속 노완동의 뒤를 쫓았다. 그가 잠시 허리를 굽히는 사이에 노완동은 꽤나 멀리로 달아났다. 노완동은 뱀한테 물리지 않으려고 앞만 바라보며 열심으로 내빼기만 하였다. 구양봉도 그 뒤를 번개같이 뒤쫓아갔다. 잠깐 사이에 두 사람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구천인은 속으로 한탄해 마지않았다.
'구양봉이 없으니 우리 쪽은 고수가 한 사람 준 셈이군……."
하지만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구천인은 조금도 굽히려 하지 않았다. 되레 한편으로는 이때야말로 이 개방을 송두리째 삼켜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큰소리로 외쳤다.
"홍칠아, 나오너라! 나와 한판 겨뤄 보자!"
그러나 홍칠이 미처 대꾸하기도 전에 숲 속에서 껄껄 웃으며 나서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은 뜻밖에도 홍칠의 사부 소씨 거렁뱅이였다. 홍칠 쪽에서는 모두들 놀라는 한편 기뻐서 환성을 올렸다.
소씨 거렁뱅이는 천천히 걸어 나와 웃으며 소리쳤다.
"구천인, 네 놈과 구양봉 녀석은 날 죽이려 했겠지만 그건 어림없는 일이다. 내 오늘 네 놈의 죄를 따지러 왔다. 네 놈을 죽여 화산의 무예 시합일랑 꿈도 못 꾸게 만들어 놓을 테다!"
소씨 거렁뱅이는 죽다가 겨우 살아난 터라 가슴속엔 구천인과 구양봉에 대한 증오심이 들끓어 올랐다. 그리하여 아직 자기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지만 구천인을 보자 그만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백 합쯤은 버텨 낼 자신이 있었다.
"구천인, 내가 너와 이백 합만 싸워 보겠다. 내가 이백 합 안짝에 날 이긴다면 난 화산의 무예 시합에 안 가겠으니 내 대신 네 놈이 가거라! 대신 이백 합 안짝에 네 놈이 나한테 패한다면 네 놈은 화산의 무예 시합에 대해서는 더는 떠들지 말거라. 그러면 천하의 영웅들이 네 놈을 비웃을 게다. 으하하하……. 만일 이백 합 안짝에 승부를 가르지 못하게 되거든 우리는 싸움을 멈추고 이담에 화산에 가서 자웅을 겨루기로 하자! 어떠냐?"
구천인은 소씨 거렁뱅이의 말을 듣고 암암리에 생각했다.
'오늘 일은 처음부터 재수 없게 꼬이는구나. 먼저는 노완동이란 녀석이 구양봉을 끌고 달아나더니 이젠 또 천만 뜻밖으로 소씨 거렁뱅이까지 끼여들다니…… 우리 쪽은 이미 고수 하나를 잃었다. 나와 소씨 거렁뱅이가 싸운다면 실력이 걸맞은 일이나 이 여인과 나장태가 홍칠을 이길 가망은 매우 작다.'
하지만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물러설 수도 없다고 생각되어 구천인은 짐짓 웃으면서 대꾸했다.
"좋다, 소씨 거렁뱅이야! 어디 덤벼 봐라."
소씨 거렁뱅이는 타구봉을 치켜 들고 외쳤다.
"난 전임 방주한테서 타구봉법을 전수 받았으나 한 번도 써먹은 적이 없다. 오늘 너 구천인을 놓고 한번 시험해 볼 터이다."
구천인은 소씨 거렁뱅이가 자기를 비꼬아 욕하자 화가 치밀어 두말없이 무서운 소리를 내지르며 장을 날렸다. 두 사람이 어울려 싸우기 시작하니 처음에는 오히려 소씨 거렁뱅이 쪽에서 우세를 점했다. 그의 타구봉법은 실로 절묘하여 구천인은 부득불 방어에만 바빴다. 그는 연거푸 장을 날렸으나 그것은 다만 소씨 거렁뱅이의 타구봉법을 막아내는 데 불과하였다. 벌써 육십여 합을 겨뤘으나 형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쯤 되자 구천인은 몹시 조급했다.
'내가 소씨 거렁뱅이와 싸워 이기지 못한다면 오늘의 싸움은 연거푸 참패를 면치 못하게 될 거다. 저 여인이 홍칠을 이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소씨 거렁뱅이를 이겨야만 한다!'
구천인은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틈을 노려 점차 방어에서 공격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되자 이제는 그가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다.
구천인의 장법이 아주 훌륭한 것을 보고 소씨 거렁뱅이는 내심 매우 놀랐다. 그는 얼른 법수를 바꾸어 구천인의 장법을 흩트려 놓았다. 구천인은 소씨 거렁뱅이가 구양봉의 뱀 독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형편을 모르는 터라 한바탕 악전고투를 치러야 되겠다고 지레 짐작하여 몸을 사리며 전력을 다해 맹공격을 들이대지 못했다. 만일 구천인이 전력을 다했더라면 소씨 거렁뱅이는 결코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백칠십 합쯤까지 싸우게 되자 소씨 거렁뱅이는
기쁘기 그지 없었다.
'나의 이 공력으로 저 놈과 능히 이길 수 있게 되면 저 놈은 오늘 이 싸움판에서 조금도 이득을 보지 못하게 된다.'
구천인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초조해서 갖은 법수를 다 동원하여 소씨 거렁뱅이를 이겨 보려고 발악을 하였다. 소씨 거렁뱅이는 웃으면서 구천인을 한껏 비꼬았다.
"구천인, 우쭐거리지 마라! 네 놈이 전력을 다하면 이제부터 강룡십팔장으로 네 놈과 놀고자 한다!"
그 말에 구천인은 흠칫 놀라 더욱 조급해졌다. 그는 강룡십팔장이 지양지강(至陽至剛)의 장법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소씨 거렁뱅이가 강룡십팔장 법수를 쓰기만 하면 자기의 처지는 아주 불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숱한 사람 앞에서 망신만 당하고 철장방의 위신은 땅바닥에 곤두박이고 만다. 구천인은 더욱 빠르게 장을 휘둘렀다. 소씨 거렁뱅이가 소리질렀다.
"구천인, 억지 부리지 마라. 난 너에게 알맞은 장법을 쓰고 있는 데 하필 날 핍박할 건 뭐냐?"
소씨 거렁뱅이는 점점 지탱해 내기가 힘들게 되자 다시 소리를 질렀다.
"구천인, 난 네 놈한테 우리 개방 사람의 타구봉법을 제대로 보여 줄 테다. 이번엔 끄는 법수를 보여 주겠으니 한번 구경해 보거라!"
구천인이 장을 날리며 달려들자 소씨 거렁뱅이는 타구봉 끝을 가벼이 끌면서 몸을 비켰다. 동냥하러 다니다 보면 거지들은 개와 맞닥뜨리기 십상이다. 이때도 온순한 개들은 그대로 지나치지만 성미 사나운 놈들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다. 이런 때는 '끄는(拖)' 법수를 써서 개를 다른 쪽으로 유인해 간다. 지금 소씨 거렁뱅이가 펼쳐 내는 법수는 이와 똑같은 이치의 법수이다. 구천인은 소씨 거렁뱅이가 이쪽으로 끌다가는 또 저쪽으로 끌어가자 도저히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화가 치밀었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한켠에 서 있던 소미타 추우가 외쳤다.
"이백 합! 이백 합이오!"
구천인은 이백 합을 싸우도록 소씨 거렁뱅이를 이기지 못하게 되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갑자기 전력을 다해 두 팔로 쇠가마를 떠미는 법수를 펼쳤다. 이때 소씨 거렁뱅이는 이백 합이란 소리를 듣고 손을 거둔 채 방심하다가 구천인의 장력에 떼밀려 급히 물러섰지만 이미 때는 늦어 한 장 남짓 날아 땅에 쿵 하고 떨어져 버렸다. 구천인은 그제야 갑자기 머리 속이 환해지는 감을 느겼다. 그는 소씨 거렁뱅이가 뱀 독을 입어 내공이 예전 같지 못하다는 걸 알아
차렸던 것이다. 진작에 장력으로 갈겼더라면 소씨 거렁뱅이는 벌써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구천인은 불현듯 악 소리를 지르며 한달음에 달려나가 한 장으로 소씨 거렁뱅이를 갈겼다. 소씨 거렁뱅이의 입가에선 금세 선지피가 흘러 나왔다. 그러나 그는 냉소를 치며 구천인을 쏘아보았다. 그는 내심 만일 구천인의 이 장에 제대로 얻어맞았다면 기필코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고 생각했다.
사태가 상서롭지 못한 것을 보고 홍칠은 급히 달려나갔다.
"구천인, 손을 멈춰라! 너는 나의 사부님과 이미 이백 합이나 싸워 승부를 가르지 못했다. 계속 싸우겠거든, 자, 덤벼라!"
그러나 구천인은 아무 대꾸도 안 했다. 실로 후회막급이었다. 소씨 거렁뱅이를 죽여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니 그는 통탄하기 그지 없었다.
홍칠은 여인을 바라보며 외쳤다.
"개방의 은원은 그대와 나 사이에서 생긴 것이니 필경 우리 둘이 싸워야 하오. 그대의 요구대로 우리 둘이 결사전을 벌입시다!"
여인은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미소엔 아첨하는 기색도, 요염스런 기색도 서려 있지 않았다.
"홍 방주께서 다행히 저와 싸우게 되어 저는 실로 기뻐요. 홍 방주께선 제 요구대로 하겠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참말인가요?"
"그렇소, 참말이오."
"이 나무 숲 속에 낡은 절이 하나 있어요. 몹시 오래 되어 사람이 거처하고 있지 않아요. 당신과 저는 그 절 안으로 들어가 승부를 가릅시다."
그러더니 머리를 돌려 시녀들에게 말했다.
"내가 절 안에서 죽게 되거든 여러 자매들이 수고하여 내 시체를 염습해다가 이 나무 숲에 묻어 달라!"
그녀는 다시 홍칠에게로 얼굴을 돌리며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녹옥죽봉을 들고 먼저 발걸음을 뗐다.
여인의 말을 듣고 구천인과 나장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 방주, 내 보기엔 이렇게 하는 게……."
구천인이 말머리를 떼자 여인은 웃으며 그를 돌아다보았다.
"구 방주님, 당신이 저희 개방 일을 도와준 걸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요. 이후엔 더 많이 보살펴 주세요. 하지만 오늘까지는 제가 방주예요."
구천인은 그녀의 말에 아주 과단성이 있음을 감지했다. 그녀가 이미 결단을 내린 이상 아무리 해도 말릴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여인은 무슨 일을 해도 항상 지독하구나. 홍칠과 감히 낡은 절에서 싸우겠다니. 심중에 무슨 계책을 품고 있음에 틀림없다.'
구천인은 더는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장태가 읍을 하며 말했다.
"미 방주, 내 보기엔 그래도 이곳에서 싸우는 게 좋을 것 같소. 개방 형제들이 누구나 다 볼 수 있으니 진심으로 탄복하지 않겠소?"
여인은 담담하게 웃으며 나장태를 쏘아보았다.
"나 장로, 당신의 처사는 때론 깨끗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래 당신 수하 형제들도 당신한테 진심으로 탄복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녀는 나장태를 이윽히 쏘아보았다. 나장태는 속이 꿈틀하여 감히 더 말하지 못했다. 말을 더 했다간 공연히 위신만 깎일 게 뻔했다. 여인은 머리를 돌려 단호하게 말했다.
"홍 방주님, 들어가십시다!"
홍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이 앞서고 다른 한 사람이 뒤따라 천천히 낡은 절을 향해 걸어갔다.
여인은 묵묵히 걸어 가다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홍칠공, 제가 진짜 미립이라면 당신은 절 좋아하시겠나요?"
홍칠은 아무 대꾸 없이,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그저 걷기만 했다. 여인은 또다시 탄식하는 어조로 말했다.
"홍칠공, 당신은 꿈속에서 미립을 본 적이 있나요?"
그러나 이번에도 홍칠은 말이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앞만 똑바로 바라보며 발걸음만 옮겨 놓았다.
"전 이전에 꿈을 꾸면 종래로 황궁은 보이지 않고 다만 한 사나이만 보이는 것이었어요. 그 사내는 황제도 아니고…… 후에 당신을 만나고 나서야 알았지만 그 사나이는 바로 당신……."
홍칠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천천히 낡은 절에 당도했다. 여인이 절 문을 열었다.
"천하의 사람들은 절을 지을 때 모두 향객들이 끊임없이 찾아오고 향불이 꺼지지 않기를 바랐을 거예요. 그런데 이 절은 이처럼 황폐해졌는데도 아무도 수리하려고 들지 않았군요."
여인은 이렇게 말하며 처연히 웃었다. 홍칠은 그녀의 웃음 소리에서 짐짓 쓸쓸함을 느꼈으나 아무 내색도 않고 그저 뒤따라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아주 작은 절이었다. 뜨락에는 향로가 하나밖에 없었다. 돌로 만들어진 그 향로는 석대 위에 놓여 있었다.
"홍칠공, 오늘 싸움은 저의 일생의 대사이니 제가 향을 피워도 뭐라 질책하지 마세요!"
홍칠은 그저 소박한 사람이라 좀 번잡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인네들이란 참말로 복잡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족속들이야. 당장 싸우게 된 판국에 이런다고 하여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여인은 품속에서 향을 한 묶음 꺼내더니 향로에 꽂아 놓고 불을 붙였다.
"홍칠공, 녹옥죽봉도 여기에 이렇게 놓아두겠으니 이제 당신이 저를 이기게 되면 가져 가세요."
여인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녹옥죽봉을 땅바닥에 푹 꽂았다. 홍칠은 말없이 그 녹옥죽봉을 바라보았다.
'이 녹옥죽봉은 우리 개방의 보배로서 절대 네 년 손에 들어갈 물건이 아니다. 이 계집은 심보가 지독하여 무슨 엉뚱한 궁리를 꾸며 댈지도 모르니 각별히 경계해야만 한다.'
홍칠은 이 여인은 계책이 대단하여 손톱만큼이라도 자기를 해칠 자신이 없었다면 친히 그와 싸우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잔뜩 몸을 사렸다.
여인은 향로를 향해 서더니 다소곳이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쓸쓸한 심정으로 불경을 외웠다.
'인간이 신에게 비는 것은 모두 자기가 염원하는 바가 아니면, 육친 또는 지기들의 염원을 빌어 주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두 가지 시름거리를 하늘에 기탁하여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쓰라린 마음을 어디에다 하소한단 말인가? 황제는 그 자신의 기분에 따라 즐기거늘 어찌 나를 위해 조금이라도 마음을 비워 두겠는가? 홍칠공이 비록 지금 내 옆에 있지마는 조금도 내 생각을 않으니 이런 사람한테 하소연해도 쓸데없는 일이다.'
여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서러움에 복받쳐 저도 모르게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홍칠은 여인을 물끄러미 지켜 보았다. 이 석인이 어찌하여 이다지도 고통스러워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지난날, 호풍환우하면서 강호에서 얼마나 우쭐거렸던가! 그런데 오늘은 어이하여 이다지도 쓸쓸해 보이는 건지……."
'난 저 여인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저 여인한테 말을 많이 하다가는 이 여인의 감정에 손발이 묶여 투지를 잃게 될 수도 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여인은 눈물을 닦고 천천히 일어나 홍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홍칠공, 당신은 저의 이 꼴을 우습게 보셨을 테죠?"
홍칠이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자 여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홍칠공, 난 한 가지 일을 늘 당신한테 묻고 싶었어요. 당신은 남의 핍박을 받을 분이 아닌데 오른쪽 식지는 누구한테 상했나요?"
홍칠은 흠칫하면서도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식지가 이리 된 사연을 어찌 결전을 눈앞에 두고 적수인 이 여인에게 말한단 말인가. 그러자 여인은 탄식하는 어조로 다시 말했다.
"홍칠공, 당신은 하필 그처럼 고집스러울 건 뭔가요? 당신이 음식을 자시기 좋아하는 데는 기필코 그에 따르는 도리가 있을 게 아닌가요? 당신이 음식을 자시기 싫다면 그것은 또 왜 그럴까요?
전 십육 년을 살았어요. 그러니 아는 것도 적어요.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란 자기가 즐기는 일을 할 때 제일 행복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왜 하필 자기를 억제하고 남을 위해 일하는 거예요?"
홍칠은 깜짝 놀라 여인을 쳐다보았다.
'내 맘속의 생각을 저 여인은 어쩌면 이토록 환히 알고 있는 걸까? 저 여인이 만일 황궁에서 나은 여인이 아니라면 나와 화해하고 훌륭한 친구로 사귈 수도 있겠구나. 그러나……."
홍칠은 내심 놀라면서도 이 여인이 자기의 적수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정색을 했다.
나무 숲에서 나장태는 수하들을 거느린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일단 결과를 보고 나서마 다음 일을 결정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구천인은 참을 수 없었다.
"나 장로 왜 손을 쓰지 않는 겐가? 저 거렁뱅이들을 처치하면 방주 자리는 자연 그대에게 돌아갈 텐데!"
구천인이 외쳤다. 그러나 나장태는 냉소를 쳤다.
"구 방주님은 잘못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왜 방주 자리를 탐내겠습니까? 범장천, 노명성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은 일심으로 개방 방주 노릇을 하려고 하다가 죽고 말았지 않습니까? 그런 바보 짓을 내가 왜 하오?"
두 사람의 수작을 듣고 사개 정원이 냉소를 쳤다.
"나 장로, 저 여인이 최후의 순간에 홍칠공에게 해 드리라고 한 한마디 말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오?"
나장태는 어정쩡하게 되물었다.
"미 방주가 홍칠공한테 무슨 말을 하라고 했는지를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오?"
사개 정원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알 턱이 없지. 그렇담 내가 알려 주겠소. 저 여인이 말하기를 나장태란 인간은 간사하고 교활하니 경계하라고 했다오."
그 말을 듣고 나장태는 미친 듯이 앙천대소했다. 그는 마치도 가슴속의 울적한 심사를 한꺼번에 토해내려는 듯이 한바탕 요란하게 웃어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나서 그는 사개 정원을 쏘아보았다.
"정 장로, 자넨 왜 날 부추겨 해치려 드나? 자네와 나는 모두 개방의 10대 장로에 속하는데 자네가 홍칠을 따르고, 나는 그러지 않았다고 그러나? 지금 이 마당에 저 여인이 뭐라고 했든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네."
나장태는 말을 마치고는 숙연한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에게선 그 무슨 살기 같은 건 조금도 읽을 수 없었다. 마치 중대사를 상론하러 오는 듯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일단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갑자기 악 소리를 지르며 검으로 사정없이 사개 정원을 찔러 들어갔다. 사재는 경계하지 않고 있다가 팔을 찔리고 말았다.
사개 정원은 전혀 예상 밖의 일에 어리벙벙하면서도 분노하여 대갈일성을 내찔렀다.
"나장태, 이 놈! 내 손수 네 놈을 요절내고야 말리라!"
그 순간 일곱째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것을 신호로 나장태 수하 2, 3백 령은 검을 치켜 들고 저마다 앞다투어 일제히 쳐들어갔다. 그들은 자기들이 쳐들어가면 개방은 기필코 진세가 허물어지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씨 거렁뱅이가 벽력같이 소리를 내지르며 개방 사람들을 이끌고 마주 짓쳐 나오는 것이 아닌가. 양측이 맞붙게 되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양편이 똑같을 수단으로 덤비니 이거 큰일이군!'
몇 백 명 되는 사람들은 수림 속에서 서로 미친 듯이 살륙전을 벌였다. 구천인은 그 틈을 노려 소씨 거렁뱅이에게 덮쳐 들었다. 그것을 보고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이 일제히 구천인을 막아 나섰다. 소씨 거렁뱅이도 후닥닥 뛰쳐 일어나 나장태와 결전할 태세를 갖췄다. 노유각, 나대통 등도 가세했다. 싸움은 승부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해졌다.
여인은 홍칠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홍칠공, 당신은 사내이니 제가 하는 말을 들으시리라고 믿어요. 제가 싸움 방식을 생각해 보았는데 당신이 절 이기게 되면 전 복종하고 이 녹옥죽봉을 당신께 넘겨드리지요."
"좋소, 그대 말을 듣지. 그대가 하자는 대로 하겠소!"
"우리 두 사람의 싸움은 별다른 게 아니에요. 제가 또 향 석 대에 불을 붙이면 우리들의 싸움은 시작되는 거죠. 제가 싸움 방식을 얘기했는데도 당신이 그대로 못하면 진 것으로 치겠어요."
홍칠은 점점 더 의아하기만 했다.
'무슨 일인들 내가 못해 낸단 말인가? 네 년과 주먹질, 발길질을 하잔 말인가. 독약을 쓰는 수단을 비기잔 말인가. 함께 저승으로 가잔 말인가, 난 어느 것이든 가리지 않는다!'
여인은 향에 불을 붙이고 나서 말했다
"첫번째 싸움이에요. 홍칠공, 당신은 나를 끌어안아 주세요. 이 향이 다 탈 때까지 그렇게 저를 안고 계셔야 해요."
홍칠은 정말 놀랐다. 그는 이 여인이 이런 것을 궁리해 내리라고는 도시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는 주춤주춤할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러자 여인은 담담히 웃음을 지었다.
"불주(佛主)께서도 일찍이 겁탈을 견뎌 낸 바 있었어요. 일곱 가지 겁탈 중에 색에 대한 것이 들어 있지요. 당신이 만일 이 색을 겁탈하고 싶은 마음을 견뎌 낸다면 대장부라 할 수 있어요."
홍칠은 마음속으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 여인의 싸움 방식은 실로 괴상하기는 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저 여인을 품에 안는 게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좋소."
그는 결연히 대꾸했다. 홍칠은 여인을 품에 안았다. 여인은 그의 품속에 안겨 그의 옷을 살살 어루만졌다.
"전 어지러운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녀는 살짝 웃어 보였다. 여인은 홍칠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그의 가슴팍에 귀를 대고 심장 박동에 귀를 기울였다.
홍칠은 마음을 다잡았다.
'네 년이 아무리 음탕하다 할지라도 내 마음을 움직일 순 없어. 네 년의 그런 심사는 다 쓸데없는 짓이야. 난 네 년이 이런 짓을 하려는 줄 짐작도 못했지만, 여인의 수단으로 이 홍칠을 유혹하려고는 꿈에도 생각 마라!'
홍칠은 이 여인이 절대로 조용히 품속에 안겨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여인이 어떤 술수를 부릴지 잔뜩 경계하면서 향이 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인은 이제 홍칠의 품에 안겨 까딱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홍칠을 보고 웃지도 않고 손도 놀리지 않으면서 조용히 붙어선 채 속삭였다.
"홍칠공, 이 나무 숲은 바람이 세차서 춥군요."
홍칠은 그 말에는 대답도 않고 향이 타는 것만 바라보았다.
"향이 얼마나 남았어요?"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소."
"제가 좀더 단단한 향을 사 두는 건데 깜박했군요. 좀더 천천히 탔으면 좋겠어요."
홍칠은 조용히 기다렸다. 그는 이 여인이 기필코 다른 수작을 들이대거나 갑자기 습격할 수도 있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여인은 손 하나 까딱 않고 그 향이 다 타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 향이 다 타자 홍칠은 무거운 짐이라도 벗어 놓은 듯이 말했다.
"됐소!"
그리고는 여인을 떼어내 가만히 밀었다. 여인은 원망 어린 눈길로 홍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흩어진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댄 손을 쓰시오! 이런 수작으론 아무 소용이 없소."
그러자 여인은 방싯 웃었다.
"홍칠공 그럼 또 한 가지를 제안하겠어요. 만일 당신이 이기면 이 녹옥죽봉을 가져 가세요."
여인은 또다시 향에 불을 붙이고 나서 품속에서 새까만 물건을 꺼냈다. 그녀는 탄식하며 말했다.
"홍칠공, 이건 응구(鷹嘔)예요. 무릇 공력이 있는 사람이 복용하기만하면 꼭 죽게 돼요. 당신은 뱀 독을 복용한 적이 있고 독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나와 함께 이 응구를 복용할 담력이 있나요?"
홍칠은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이 여인은 일심으로 황제의 환심을 사려고 자기 목숨을 기가 막히게 아껴 온 처지인데 감히 독약을 복용할 수 있단 말인가? 한바탕 우쭐거려 보느라고 하는 수작이겠지.'
이렇게 생각하다가 갑자기 경계심이 들었다.
'이 여인이 밖에 사람을 매복시켜 놓고 날 꼬이는 수작일 수도 있어. 밖에서는 손을 쓰기가 좋으니까. 만일 그러할지도 모르니 각별히 조심해야겠다.'
홍칠은 정신을 가다듬고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좋소. 그걸 내가 좀 봐야겠소."
여인은 응구 한조각을 던졌다. 홍칠이 살펴보니 새까만 것이 돌 같기도 하고 뼈 같기도 했다. 비린내가 났다. 홍칠이 말랐다.
"좋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응구를 두 조각으로 나눠 한 조각을 자기 입에 넣고 한 조각은 여인에게 던져 주었다. 여인은 응구 조각을 받아 들고 홍칠을 바라보았다.
"홍칠공, 당신은 참말로 그걸 먹은 거예요? 전 믿지 못하겠어요."
홍칠은 토해 냈다가 다시 천천히 입에 넣었다. 잠시 후 여인도 응구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홍칠은 이 결전은 기실 무예로 겨루는 일전보다 더 무서운 것임을 깨달았다.
"홍칠공, 전 어느 날 궁전에 들어가 황제 폐하께서 또 다른 여인을 총애하는 걸 보았어요. 그 여인은 꽃병 위에서 춤을 추었지요. 황제는 노래를 불러 장단을 맞추고……."
여인은 말끝을 흐리며 천천히 벽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눈길도 망연해졌다. 홍칠은 그녀가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난 왜 아무렇지도 않지?"
여인은 홍칠을 바라보며 힘없이 웃었다.
"홍칠공, 당신은 내가 당신한테 진짜 응구를 먹게 했는 줄 아세요? 당신이 먹은 건 그저 나무껍질일 뿐이에요. 내가 먹은 것이 진짜 응구이고……."
홍칠은 적이 놀라 외쳤다.
"뭐요? 왜 그런 거요? 왜?"
그리고는 여인 앞에 털버덕 꿇어앉아 여인을 부축했다.
"홍칠공, 황제는 절 싫어하고 당신도 절 아랑곳하지 않았지요. 전 방금 향을 태우면서 빌었어요. 황제께서 잘 지내고 당신도 행복하게 살게 해 달라고. 하지만 전 그걸 말할 수는 없었어요. 황제께서 날 싫어하고 당신도 절 싫어하니까요……."
홍칠의 마음은 뭐라 형언할 수 없이 쓰라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이 여인이 자기를 해칠까 봐 백방으로 경계심을 가졌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자기만 독약을 먹다니……."
"그댈 구하겠소…… 그댈 구하겠어……."
홍칠이 소리치자 여인은 생긋 웃어 보였다.
"전 이제 죽어요. 구하려 해도 쓸데없어요. 귀를 좀 가까이 대세요. 아, 알려 드릴 일이 있으니까……."
홍칠은 재빨리 그녀의 입 가까이로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음식을 자시는 데만 흥미를 느끼는 분이에요, 음식에만……. 더는 다른 여인을 가까이하지 마세요. 이 세상엔 좋은 여인이 없어요. 참말이에요……. 좋은 여인은 어, 없어요……."
홍칠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는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인은 한 자 한 자 간신히 말을 했다.
"나장태가…… 범장천을 죽이……."
그러나 그녀는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절 문이 삐꺽 열리고 홍칠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왼손엔 녹옥죽봉이 들려 있었다. 밖에선 한참 일대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장태와 소씨 거렁뱅이가 악전고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장태는 왼쪽 어깨가 상한 채 검을 들고 결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사개, 소미타는 구천인과 맞서 있었는데 두 개방 장로는 부상을 입고 몰리고 있었다. 홍칠은 우울했다. 가슴이 짓눌리는 듯했다. 그는 목청껏 소리를 내질렀다.
"아아아아……."
그 소리는 나무 숲을 휩쓸면서 창공으로 높이 높이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모두들 머리를 쳐들고 소리난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홍칠이 서 있고, 그의 왼손에는 녹옥죽봉이 들려 있었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뭇사람들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모두 싸움을 멈추어라. 내가 할말이 있다!"
―제3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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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이다 (♡.50.♡.153) - 2022/02/21 20:5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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