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남제 단지홍 5

3학년2반 | 2022.02.22 07:39:37 댓글: 0 조회: 528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0323



제21장 향녀와 정을 나눈 사내
단지흥은 화산 아래 객점에서 주백통을 만났다. 주백통은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그를 만날 것 같아 농부와 함께 객점에 들어 있었다. 단지흥은 주백통을 보자 정중히 읍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주 형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이렇듯 뜻밖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허허허……."
"단황 나으리, 그만 해 두시우, 그만요, 헤헤헤……."
주백통은 손사래를 쳐 가며 사양을 했다.
단지흥은 왕중양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은즉, 이 사람이 왕중양의 사제인지라 각별히 예를 갖추었다.
농부는 대환희 보살에게 잡혀 끌려 다닐 때 이미 단지흥이 화산으로 올랐다는 얘기를 듣고 황제의 안위를 확인하고는 자기 한 몸이야 어찌 되든 염두에 두지 않고 매우 기뻐했었다. 하나 이제 주백통의 도움으로 그 역시 보살의 손에서 놓여나 단지흥과 이렇듯 마주앉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는 단지흥과 선비를 번갈아 보며 연신 입을 벙싯거렸다.
"폐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소인들은 폐하의 안위가 염려되어 혼백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는데 이렇듯 폐하를 마주 대하니 죽다 살아난 듯하옵니다. 그래 도대체 어찌 된 영문입니까?"
농부가 묻자 단지흥과 선비는 약속이나 한 것마냥 똑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흔드는 것이었다. 단지흥이 그 일을 더는 입에 올릴 눈치가 아니자 선비가 얼른 나섰다.
"아이고 말도 말게나. 내 천천히 얘기해 줌세. 그건 그렇고 나무꾼과 어부 소식은 못 들었나?"
"아직 못 들었네."
농부는 시무룩하니 대꾸했다. 그러자 단지흥이 나섰다.
"내 이 사람 선비에게 자네들 얘기는 들었네. 나무꾼과 어부도 화산 주변을 벗어나진 않았을 테니 조만간 만나게 되겠지."
농부와 선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흥은 다시 주백통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한데 주 진인께선 앞으로 어디로 가시려오?"
주백통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얼버무렸다.
"글쎄요,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갈지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주 진인께선 나와 함께 대리로 가십시다. 그곳은 실로 아름다운 곳이라오. 창산도 푸르고 이해도 푸르니 그 좋은 경치를 안 보시면 후회막급이오. 주 진인께서는 나만 따라가십시다."
주백통은 그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좋습니다, 좋아요. 단황 나으리께서 날 데리고만 가 주신다면 난 폐하의 친구가 되는 셈인데, 그렇담 나도 단황 나으리처럼 즐겨도 되는지……."
"그야 여부가 있겠소. 그대가 황제처럼 나날을 보내고 싶어해도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소."
주백통은 어린아이마냥 펄쩍펄쩍 뛰었다.
"좋습니다, 좋아요. 난 폐하를 따라가겠습니다."
"주 진인께서 대리에 가시는데 중양 진인께 알리지 않아도 되겠소?"
주백통은 머리를 쓱 늘여 빼고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그 기색은 얼핏 괴이하고 신비롭기까지 했다.
"내 한 가지 알려드리지요. 종래로 사형께서는 절 상관하지 않아요. 그분은 다만 장래에 제가 전진교의 구성(救星)이 될 거라고만 말씀하셨지요. 그러시면서 전진교 일에 대해서는 저더러 되도록 관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전 또 무슨 진인도 아닙니다. 그러니 폐하께선 저더러 진인 진인 하지 마시고 그냥 백통이라고 하십시오. 그래도 됩니다."
단지흥은 일국의 황제이나 공명심이 없는 사람이라 주백통의 말을 듣고도 달리 생각지 않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대리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2, 3일씩 걷고는 하루씩 휴식했다. 아직 어부와 나무꾼은 만나지 못했으나 황제가 자리를 비웠으니 시각을 다투어 대리로 먼저 돌아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네 사람은 발길을 다그쳤다.
그날도 발에 땀이 나도록 걷고 있는데 멀리 득의루(得意樓)란 객점이 눈에 띄었다. 단지흥이 선뜻 운을 뗐다.
"인생에서 뜻을 이루려면 즐길 줄도 알아야 하느니, 우리도 잠시 즐기다 갑시다!"
그러자 주백통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좋아요, 좋아요!"
농부와 선비는 한시 바삐 대리로 돌아갔으면 했지만 단지흥이 먼저 운을 뗐는지라 묵묵히 따랐다.
네 사람은 함께 누각 위로 올라갔다. 누각 위에선 이미 몇몇 호객들이 한담을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일행은 자리를 잡고 앉아 술과 요리를 주문했다. 이윽고 술상이 차려지고 그들은 피로도 풀 겸 느긋하게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일각쯤 지났을까, 얼핏 옆 자리에서 하는 얘기가 들려 왔다. 들어 보니 그들은 가운데 자리에 앉은 중년의 청수 검객을 한껏 치켜 세우고 있었다. 그 청수 검객은 기색은 담담했으나 어딘가 심정이 개운치 못한 듯 보였다.
"곽 대협께선 너무 그렇게 불쾌해하실 것 없소이다. 아, 대협께서 화산에서 그 향녀들과 실랑이를 하지 않은 건 다 대협의 도량이 넓기 때문인 게요. 향녀들이 아무리 성가시게 군다 해도 곽 대협께서야 어디 여인들과 똑같이 나가실 수 있습니까? 그러니 누가 곽 대협을 뭐라 하지도 않으니 자, 어서 술이나 드시지요!"
그 중년의 청수 검객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향녀란 소리에 단지흥과 선비는 귀가 번쩍 뜨였다. 주백통도 청수 검객을 유심히 바라보며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필시 어디서 본 듯한데 아리송하니 도무지 어디서 봤는지 알 길이 없었다.
"곽 대협, 듣자니 그 왕중양이란 분이 화산에서 영웅들을 모두 물리쳤다고 합디다. 네 사람이 일시에 손을 썼는데도 적수가 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왕중양이란 분의 기공은 단연 천하 으뜸이지요. 그리고 뭐라더라, 서역에서 왔다는 구양봉이란 사람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하던데…… 그 사람의 합마공만 해도 당해 낼 자가 없다더군요. 그런데도 그 사람도 중양 진인 손에 패하고 말았다지요?"
저쪽 자리에서 한 사람이 입에 침을 튀겼다.
주백통은 그 사람들이 자기 사형의 무공이 천하 으뜸이라고 하자 으쓱해져서 앞뒤 분간 없이 떠들어댔다.
"맞네, 맞아. 바로 서독, 동사, 그 밖에 북개에다가 여기 계신 단황 나으리까지 네 사람이 일제히 덤벼들었어도 우리 사형의 적수가 되지 못했단 말이야."
단지흥은 솔직한 사람이라 사심 없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그렇습니다. 백통 형, 당신의 무공도 당신 사형인 중양 진인과 마찬가지일 게요. 그날 당신도 나와 한판 겨뤘어야 하는데, 정말 아쉽군요."
그러자 주백통은 아차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어 발그레 얼굴을 붉혔다.
저쪽에서 또 누군가가 말했다.
"됐네. 우린 곽 사형과는 남도 아닌데 체면 차릴 필요 있나? 내 보기엔 일찌감치 일을 끝내야 할 것 같아. 함께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하는 게 중요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쪽에 앉았던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어 대면서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갔다. 그들은 필시 무슨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단지흥은 사뭇 호기심이 일어 채근했다.
"백통 형, 우리도 뒤따라가 봅시다, 저 사람들이 뭘 하는가!"
주백통이 마다할 리 없었다. 일행은 황급히 앞서 나간 사람들을 쫓아 나갔다. 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가을 바람에 정신이 번쩍번쩍 났다. 앞서 나간 사람들은 뭐라고 떠들어대면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밖에 있는 큰 뜨락에 다다라서야 발길을 멈췄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자 얼른 대문이 열리고 웬 사내가 하나 나와 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는 대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그러자 선비가 단지흥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제가 들어가 살펴보겠습니다. 폐하께서는……."
단지흥은 웃음을 지으며 선비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곳엔 오로지 단지흥이 있을 뿐 그 무슨 황제는 없네. 자네는 나에게 뜨락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할 참이었지?"
선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백통은 자못 이상하게 생각되어 물었다.
"당신은 엄연히 황제인데 어찌하여 그러시오?"
"강호엔 험난한 풍파가 있고, 황제에게는 지난한 근심이 있네."
단지흥은 마치 시 한 구절을 읖조리듯이 나직이 말했다. 그는 기실 자기는 비록 황제 노릇을 하고는 있으나 강호 무객의 처지가 부럽고, 뿐더러 갖가지 위험을 견뎌 내는 것이 진짜 사내대장부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주백통 역시 무림호걸인지라 그 뜻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훌륭하십니다. 단황 나으리는 황제 노릇은 걷어치우고 아예 강호 무객 노릇을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농부와 선비는 그제야 그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간 사람들은 뜨락을 지나 곧추 대청으로 나아갔다.
단지흥 일행은 모두 집 밖에 서 있었다. 단지흥이 눈짓을 하자 선비가 큰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운남 대리의 단씨가 뵙고자 합니다!"
그러자 주백통이 단박에 면박을 주었다.
"바보 같으니, 그렇게 소리쳐 부르면 무슨 재미가 있어? 모두들 듣고 숨어 버리면 어떻게 찾아내려고?"
그러나 그의 말과는 달리 이내 삐꺽 하며 문이 열리더니 문틈으로 머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머리를 틀어 올린 여인이었다.
"모두 사내들이네?"
여인은 단지흥 일행을 보고는 혀를 날름 내밀더니 머리를 도로 문 안으로 쓱 집어 넣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습니다. 내 다시 불러 보지요."
선비는 주백통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또다시 외쳤다.
"운남 대리의 단씨가 뵙고자 합니다!"
그러자 집 안에서 누군가 대꾸를 했다.
"먼 곳에서 오신 손님이니 어서 들어오시오!"
또다시 삐꺽 하고 문이 열리고 좀전의 그 여인이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들어오시지요!"
일행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대청 한복판에 팔걸이 의자가 놓여 있고 거기에 두 노인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영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 집 안주인인 듯싶었다. 그 두 노인은 단지흥네들이 들어가도 일어나지 않고, 고개 한번 까딱하는 법도 없었다.
"늙은 몸이라 인사를 올릴 수 없으니 용서하세요."
안주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단지흥이 알아차리고 얼른 예의를 차렸다.
"문득 뛰어든 것을 용서하십시오!"
주백통은 예의고 뭐고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폈다. 먼저 들어왔던 청수 검객네들은 모두 대청 아래에 줄지어 서서 허리를 낮추 굽히고 잠잠히 서 있었다. 그 곁에 처녀도 하나 서 있었다.
이윽고 영감이 자기 소개를 했다.
"이 늙은 것은 화산파의 장문(掌門)이고 이 사람들은 모두 나의 문하입니다. 오늘 이 노구가 저 사람들을 불러온 건 우리 화산파의 문풍 (門風)을 바로잡기 위해서지요."
장문인의 말이 떨어지자 화산파의 제자들은 저마다 두려운 기색으로 더욱 허리를 낮추었다. 두 노인은 만면에 노기가 잔뜩 서려 있었는데 보아하니 무슨 일로 무척 속이 상해 있는 듯싶었다. 아마도 이 화산파 제자들 중 누가 밖에서 무슨 과오를 저지른 것임에 틀림없었다.
"화산검을 가져 오너라!"
장문인이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머리를 뒤로 동여맨 동자 둘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손에 한 자루 검을 받쳐들고 나왔다. 단지흥과 주백통 두 사람은 이것이 예전 화산파의 장문인 풍청자(風淸子)가 쓰던 집법검 (執法劍)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화산파에서 일단 이 검을 내오게 되면 대대적인 처벌이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화산파의 제자들은 모두 입도 벙긋 못하고 서 있었다.
"화산파는 종래로 강호에서 명문(名門)에 속하는 큰 파였느니라. 이번에 왕중양 진인께서도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이 화산에서 고금에 없는 무예 시합을 열었도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화산파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장문인의 말이 길어지자 안주인이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러자 그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하더니 사설을 싹 빼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더 길게 말하지 않겠다. 다만 너희들에게 오늘 화산파의 형당(刑堂)에서 너희들의 과실에 대해 중벌을 내리려 하노라!"
보아하니 낄 자리가 아닌 터, 단지흥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서며 화산파 장문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화산파에서 오늘 내무를 처리하시는데 외인인 우리가 방해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장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했다. 그의 얼굴에 노기가 잔뜩 서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남이 화산파의 내부 일을 아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때 안주인이 웃으면서 톡 끼여들었다.
"화산파가 무슨 남이 알아서는 안 될 짓이라도 했단 말인가요?"
그러자 장문인은 다소 불평스런 기색이면서도 더는 말을 안 했다. 그대로 있어도 좋다는 뜻이 분명하자 단지흥은 할 수 없이 읍을 하고는 도로 두어 걸음 물러나왔다. 그가 제자리로 돌아오자 장문인이 대뜸 소리를 질렀다.
"명송이, 나오거라!"
대협 곽명송은 화산파의 수제자였다. 곽명송은 넙죽넙죽 걸어나와 노인들에게 머리를 깊이 숙였다.
"사숙님, 무슨 분부가 계시온지요?"
"명송아, 사부님이 돌아가신 후로 네가 화산파의 가장 큰 제자이니라. 그래서 나는 감히 너를 이래라저래라 하지도 못했거늘, 요사이 넌 무엇을 하고 있느냐?"
곽명송은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정중히 답했다.
"사숙님, 저는 요사이 강호를 다니면서 선한 일을 좀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리 대단한 건 못 됩니다."
그러자 안주인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으래? 네가 하고 다닌 일이 모두 대단한 게 아니라구? 내 듣기로는 네가 놀라운 짓을 하고 다닌다고 하던데, 그럼 그 말이 모두 거짓이더냐? 한치도 숨김 없이 있는 그대로 아뢰거라!"
곽명송은 몹시 의아했다. 사숙모께서 무슨 일을 두고 저러시는지 알 길이 없었다. 곽명송은 다시 예를 갖추어 말했다.
"사숙모님, 무슨 일을 지칭하시는 것인지 알려 주십시오."
"허, 모른다? 네가 한 짓을 네가 모른단 말이냐? 자, 갖다 보거라! 이걸 보고도 딴소리를 하는지 내 두고 보리라!"
안주인이 종이 한 장을 곽명송에게 내던졌다. 곽명송은 날아오는 종이를 묘하게 받아 들었다. 단지흥은 내심 그 솜씨에 탄복해 마지않았다.
곽명송은 묵묵히 종이를 펼쳐 보았다. 그 순간, 그의 안색이 대번에 핼쑥해져서는 몸둘 바를 몰라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이……이 일은……."
"명송아, 화산파의 법도를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넌 법도를 어겼느니라. 네 죄를 알렷다?"
안주인이 추상같이 추궁하자 곽명송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사숙을 바라보았다.
"사숙님, 전 그때……."
"또 변명을 하려는고? 네가 한 짓이렷다? 사실대로만 고해라!"
장문인도 호통을 내질렀다. 그의 눈에서는 마치 불이 뚝뚝 떨어지는 듯싶었다. 곽명송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기만 했다.
"저, 저는 다만……."
"명송아, 사부님이 살아 계셨을 때 사부님은 너만 편애하시며 부러 너의 사매(師妹)도 홀대했었느니라. 오늘 넌 악한 일을 저질렀으니 네 스스로 후과를 처리하거라."
안주인은 적이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쥐죽은듯이 숨을 죽이고 한옆에 서 있던 처녀가 울상이 되어서는 발을 동동 구르더니 조르르 달려 나와 대뜸 입을 열었다. 화산 아래 취선루에서 곽명송 곁에 앉아 있던 바로 그 여인이다.
"아버지, 어머니! 큰 사형께서는 종래로 의리를 중히 여기시고 재물을 분토같이 여기셨어요. 사형께선 화산파에 누가 될 짓을 저지를 분이 아니니 섦게 대하지 마세요."
"명주(明珠)야, 넌 물러서거라. 여긴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안주인이 말을 막았다. 처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한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영감이 말을 이었다.
"명송아, 네가 남의 여인을 간음한 일이 있으니 투서가 들어온 게 아니냐. 그 사람들은 조만간 화산파를 찾아와 원수를 갚겠다고 했다. 그래 너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느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게 제일 좋겠지요!"
곽명송은 가벼이 탄식을 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동자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자들은 사뭇 예의를 갖춰 허리를 굽실거리며 그에게 검을 갖다 주었다. 그는 검을 받아 들더니 잠시 눈을 감고 잠자코 있었다. 한 순간, 그는 두 눈을 번쩍 뜨고는 칼을 힘껏 치켜 들었다. 자신의 목을 치려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처녀가 와락 소리를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사형, 그따위 바보 짓은 하지 마세요!"
그러나 곽명송은 아랑곳 않고 자기 목을 향해 검을 힘껏 내리찍었다. 화산파 제자들도 발을 동당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일순 한옆에 비켜서 있던 단지흥이 가볍게 손가락을 쳐들었다. 그러자 쨍 하는 소리가 일며 검날이 옆으로 살짝 비켜 갔다. 그 틈에 화산파 제자들은 용기를 내어 우르르 달려들어 그의 손에서 검을 빼앗았다.
장문인은 아무 말 없이 쏘아보고 있더니 단지흥에게 눈길을 돌리며 한마디 내쏘았다.
"이보시오, 손님! 당신이 이렇게 하는 건 우리 화산파의 내부 일을 참섭하는 것이오!"
단지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중히 말했다.
"난 화산파 일을 참섭한 게 아니오. 다만 당신들 화산파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걸 막았을 따름이오."
"그건 살인이 아니라 화산파 법도요. 난 진작부터 당신이 대리의 황제라는 걸 알고 있은즉, 황제라는 신분 때문에 이 자리에 그대로 있도록 묵과한 것이오. 그런데 항차 황제라고 해서 우리 화산파 일에 관계할 수 있다는 것이오?"
단지흥은 웃기만 할 뿐 묵묵부답이었다.
"단황 나으리, 듣건대는 당신은 화산 무예 시합에서 솜씨를 보였다더군요. 천하에 다섯 고수가 있는데 동사, 서독, 남제, 북개, 중신통, 이 다섯 사람을 이르는 것 아니오? 그래, 당신이 다섯 고수에 꼽히는 남제이니 만큼 우리 화산파를 무너뜨리기야 누워서 떡먹기겠지!"
장문인은 한사코 목청을 돋웠다. 단지흥은 그저 생각 없이 곽명송을 구해 낸 걸 가지고 그가 이처럼 걸고 넘어지자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전 다만 이 곽 대협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 하는 걸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저 사람이 참말로 화산파를 대신하여 죽을 만한 죄를 지었는가, 저는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명송아, 저분 뜻이 정히 그러시다니 네가 직접 네가 한 짓을 말씀드려라."
장문인은 호기롭게 내쏘았다. 그러자 곽명송은 단지흥을 향해 깍듯이 예를 올리고 나서 말했다.
"단황 나으리, 사려 깊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사제가 지은 죄는 너무도 크므로 황제께서 저를 대신하여 죄를 사해 달라고 청을 드려도 전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곽명송은 말을 마치더니 그 종이 한 장을 단지흥에게 넘겨주었다. 단지흥은 급히 받아 들어 펼쳐 보았다. 하나 그 종이에는 기이하게도 열 몇 자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
창 앞이 밝고 땅속이 밝은데 정의도 몰라봐서야 되겠나요.
단지흥은 곽명송이 어떤 여인과 남모르게 무슨 정사를 치렀는가 하는 것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는지라 그 열 몇 자 되는 글을 아무리 새겨 보아 봤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기실 설사 곽명송이 남의 소녀를 간음했다손 치더라도 이것이 도무지 그 소녀가 편지로 곽명송의 죄를 공소하고 화산파의 처사에 증오를 느껴 복수하려는 내용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었다. 또한 이 편지만 보고서는 곽명송을 그리는 것인지, 찾아서 복수하겠다는 것인지 그 심사조차 똑똑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문인은 또박또박 단호하게 말했다.
"명송아, 네가 간음 죄를 지었은즉, 의당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느리라. 그렇게 해야 우리 화산파의 기개가 손상받지 않는 거다."
그리고는 그는 뒤미처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남제께서는 고명한 분이기는 하지만 명송이를 한평생 건사할 순 없지 않겠소이까? 당신이 일단 떠나가면 저 명송이는 결국 죽어야만 하오."
단지흥은 그 편지도 기이할 뿐더러 다소 의외의 일이라 뭐라고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 순간 주백통이 갑자기 파안대소를 하면서 대뜸 내뱉었다.
"이봐요, 노인장! 당신은 저 사람이 죽어선 안 된다는 걸 왜 모르시오? 사람들은 저 사람을 대협이라 부르며 그가 큰일을 해내리라고 믿고 있소. 당신이 저 사람을 죽이는 건 음덕(陰德)이 없는 짓 아니오?"
주백통은 그제야 그가 화산 아래 취선루에서 만난 그 청수 검객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주백통의 이 한마디에 처녀가 반색을 하며 그때껏 곽 대협이 한 선행을 쭉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큰 사형께선 하남에 있는 열일곱 가족을 구해 주었고 약탈당한 보물들도 다 찾아 주었지요. 또 사형께서는 호위표국(虎威 局)의 열여섯 사람도……."
장문인이 버럭 성을 내며 그 말을 가로챘다.
"주둥아리 놀리지 말고 썩 물러가거라!"
그러나 처녀는 순순히 굽어 들지 않고 얼굴이 새빨개져 가지고는 바락바락 악을 써댔다.
"참말이에요. 큰 사형은 우리 화산파를 위해 적지 않게 힘을 썼다구요."
단지흥은 곽명송을 바라보았다. 자못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확실히 남녀간의 일로 무슨 곡절이 있는 모양이었다.
"화산파는 천하의 명문대파(名門大派)인데 함부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걸 천하 무림에서 알게 되면 좋은 점이 없을 텐데요?"
단지흥이 다시 나서자 안주인이 쌀쌀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래서 당신이 우리 화산파 일에 참섭하겠단 말이오?"
단지흥이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달싹거리는데 그 틈을 비집고 주백통이 냅다 윽박질렀다.
"허 참, 무슨 말이 그렇게도 많소? 화산파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화산파, 화산파, 그러시오? 우리가 참견하고 싶으면 참견하는 게지, 그게 뭐 어떻단 말이오?"
그러자 곽명송이 대뜸 나섰다. 그는 자기 하나 때문에 사숙과 사숙모가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단황 나으리, 이 곽명송은 일찍이 당신을 모르고 지낸 것이 실로 유감입니다. 그 후더운 사랑에 대해서는 내세에서 보답하렵니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잘끈 혀를 깨물려고 했다. 주백통은 단박에 그것을 눈치채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등허리에 있는 세 개의 대혈을 눌러 놓았다.
"당신은 죽으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인 줄 알아? 당신은 여러 사람 앞에 왜 죽어야만 하는가를 똑똑히 얘기해야 해. 그래야만 죽도록 내버려둘 테야."
주백통이 냅다 고함을 질러대자 곽명송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단지흥을 그윽이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사연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이곳에 사매가 있기 때문에 그 일을 말하지 않으려 했었지요. 하지만 이젠 고려할 여지가 없군요. 전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곽명송은 강호를 다니다가 우연히 한 여협을 알게 되었다. 그 처녀는 풍류를 즐길 줄 알았고 아주 사랑스러웠다. 두 사람은 서로 뜻이 통해 함께 강호를 돌아다녔다. 그는 처녀의 성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다만 그녀가 자기를 좋아하고 함께 강호를 돌아다니기를 원한다는 것만 알 따름이었다. 하루는 그들이 한 객점에 묵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십여 일 동안이나 큰 비가 내렸다. 하는 수 없이 객점에 계속 머물면서 처녀와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서로 정이
통하여 그 처녀와…….
곽명송이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갑자기 처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사형, 사형은 참말로……."
그 처녀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사매, 이건 참말이야. 나도 그날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곽명송은 더 이상 말을 못 잇고 말았다. 그러자 장문인이 끼여들었다.
"네가 맘을 옳게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르게 된 거야……."
"넌 여자가 꽃같이 생겼으니까 갑자기 짐승 같은 짓을 할 마음을 품게 된 게야. 거기에 무슨 영문 모를 일이 있단 말이냐?"
안주인이 호통을 쳤다. 이제 처녀는 목놓아 울어댔다. 그녀는 마음 깊이 이 큰 사형을 사모하고 있었다. 단지흥 일행도 단박에 그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처녀는 곽명송을 사모하므로 죽더라도 곽명송 편을 들 것이었지만 그 사형이 참말로 이런 짓을 했을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자넨 그 여인이 누군지 아는가?"
단지흥이 물었다.
'보아하니 단황 나으리도 방법이 없는 모양이로군. 어리석게 그 여자가 누구냐 하는 걸 물어 어디다 쓴단 말인가? 곽명송이 남의 처녀를 간음한 것만 해도 작은 죄가 아닌데.'
주백통은 내심 생각을 굴리며 곽명송을 바라보았다.
"그 여인이 누군지는 전 모릅니다. 기이하게도 그 다음부터는 얼굴도 기억할 수 없구요."
곽명송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단지흥이 웃으면서 또 물었다.
"곽 대협, 자넨 그 여인과 처음이었나?"
곽명송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인데 단지흥이 계속 엉뚱하게 물어대자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힘없이 대답했다.
"예."
"그렇담, 곽 대협! 자넨 그 여인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네.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게야."
"단황 나으리, 당신의 호의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저지른 죄,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이옵니다. 그러니 더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이 아무리 도와주어도 이제 와선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보아하니 사내가 계집과 함께 있으면 시끄러운 점이 아주 많구나. 난 절대로 계집과 함께 있지 않을 테야.'
주백통은 여전히 혼자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검질기게 다시 말했다.
"모름지기 사내대장부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일에 광명정대하게 처신해야 하네. 자네가 그 일을 인정했으면 됐지 한평생 죄를 짊어질 필요가 있나? 그리하여 그것 때문에 자결을 하고?"
곽명송은 잠시 묵묵부답으로 생각을 굴리다가 간신히 한마디했다.
"전 정녕 그 여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여인…… 그 여인의…… 가슴이……."
곽명송이 거기까지 말하자 단지흥의 가슴은 대번에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성마르게 곽명송을 재촉했다.
"그 여인의 가슴이 어쨌다는 말인가? 속이지 말고 어서 사실대로 말하게!"
곽명송은 이를 악물었다.
"그 여인은 가슴이, 젖가슴이…… 문드러지고 없었습니다……."
그 말에 단지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화산파의 사숙과 사숙모, 제자들도 깜짝 놀랐다. 그들은 문제의 여인이 이런 여인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곽명송은 마치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마냥 넋이 빠져 중얼거렸다.
"그 여인은 유방이 문드러져 없었습니다. 막무가내로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그 여인은 계속 '다치지 말아요. 그랬다간 평생 후회하게 될 거예요'하고 말하더란 말입니다. 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후에는…… 참말로 후회했지요."
곽명송은 비분에 잠겨 하늘을 우러러 큰소리를 질렀다.
단지흥은 선비와 농부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곽명송을 보고 활짝 웃었다.
"내 자네한테 알려 주지. 난 얼마 전에 아주 오랫동안 꿈을 꾼 적이 있었지. 꿈속에서 숱한 여인들을 만났다네. 바로 그 여인들이 모둔 유방이 없더란 말일세. 그 여인들은 자기의 젖가슴을 그 모양으로 만들어 버리고는 전심전력으로 사내들을 미워하지 않겠나? 그 여인들의 유일한 목적이라면 사내들을 못살게 굴고 천하의 훌륭한 사내들을 자기들 손으로 죽여 버리는 것이었네……. 알고 보니 난 몽약이 든 미향에 중독되어……."
처녀는 어느새 울음을 멈추었다. 그 여인은 단지흥을 똑바로 바라다보았다. 여인의 두 눈에서 얼핏 따스한 빛이 반짝였다. 그것은 단지흥이 자기의 남부끄러운 경험까지 들춰 내면서까지 사형의 고충을 대변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것으로 사형에게 품게 된 한 가닥 의심도 말끔히 풀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단지흥에게 각별히 따스한 마음을 보냈다.
그러나 장문인은 싸늘히 냉소를 머금고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곽명송은 눈을 반짝 빛내며 단지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황 나으리, 당신이 하신 말씀은 모두 꿈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단지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곽명송이 다시 재우쳐 물었다.
"그럼 왜 조사해 보지 않았습니까?"



제22장 일장춘몽
그때였다. 문 밖에서 여인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화산파 사람들은 들으세요. 뵙기를 청하옵니다."
한둘이 아니라 많은 여인들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집 안의 사람들은 모두들 동시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음 순간, 누가 손을 대는 기척도 없었는데 스르르 문이 열렸다. 문 밖에 많은 여인들이 서 있었다. 일순 이 여인들이 질서 정연하게 양 옆으로 늘어서자 한 여인이 그 사이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절세 미인이었다. 단지흥은 그녀를 쳐다보고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녀는 향녀, 다름 아닌 향녀 등아였던 것이다
등아는 천천히 집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양 옆으로 늘어섰던 여인들은 둘씩 둘씩 손을 잡고 등아 뒤를 따랐다. 등아는 단지흥을 본 척도 않고 그대로 지나쳐 화산파의 장문인 앞으로 곧장 나아갔다. 그리고는 여유만만하게 웃음을 지으며 대뜸 물었다.
"선우(鮮于) 영감, 당신은 화산파 장문인 노릇을 한 지 7년 6개월 되셨지요?"
장문인은 단박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다……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오?"
등아는 그 말엔 아무 대답도 않고 노파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다시금 물었다.
"당신이 남편에게 화산파 장문인 자리를 차지하라고 권고했죠? 그리고 계략을 꾸며 사형을 해쳤죠?"
일순 화산파 제자들의 얼굴에 적이 경악스런 빛이 떠돌며 나직이 술렁거림이 일었다. 노파는 즉시로 얼굴이 험상스럽게 굳어지며 노발대발 소리쳤다.
"그렇게 사실처럼 꾸민다고 화산파 사람들이 네 년 말을 믿을 줄 아느냐?"
등아는 호기롭게 웃어젖혔다.
"이 사람들이 믿고 안 믿고는 본인들한테 달린 문제고 당신 자신이야 안 믿을 리 있겠소?"
그러자 노파는 발악을 하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난 믿지 않아. 그건 허튼소리야!"
등아는 그 말엔 코대답도 않고 크게 외쳐댔다.
"화산파 제자들은 들어 보세요. 당신들의 화산파가 날로 약해지고 있는 건 전적으로 당신들 장문인 탓이에요. 저기 있는 저 선우 장문인이 이전에 화산 검법의 일흔두 번째 초수 이후에 나온 여섯가지 초수를 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인 거예요. 저 사람이 이 일흔두 가지 초수 이후에 나온 여섯 가지 초식을 왜 배우지 못했을까요? 저 사람에게 직접 물어 보면 모든 건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을까요?"
선우 장문인은 창백하게 질려서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파는 기세등등하게 외쳐댔다.
"네 년은 누구냐? 누군데 함부로 사람을 모함하는 게냐?"
"나를 모르고 계셨군요. 난 향녀, 향녀 등아예요. 당신은 필시 향녀 이야기를 알고 있을 거예요. 사내들만이 세상에 향녀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요……."
등아는 노파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똑바로 장문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그 자리에 있는 사내들을 차례로 하나씩 훑어보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길이 단지흥에게 이르자 얼핏 부끄러운 기색이 어른거렸다.
"제가 이 화산파에 온 건 심심해서가 아니에요. 내 보기엔 오늘부터 이 세상에서 화산파가 더는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돼요. 안 그래요?"
그러자 영감은 벌떡 일어서며 갈라진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무례하구나!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렷!"
"화산파에는 워낙 의사(義士)가 몇 사람 있었지요. 하나 그 나용의(羅龍義)가 돌아가신 후로는 정인(正人)은 더는 없게 되었어요. 그러니 차제에 화산파를 없애 버리면 천하에 화근 하나를 뿌리뽑는 셈이지요."
단지흥은 그윽이 등아를 건너다보았다. 그녀의 눈에선 살기가 번득였다.
'난 저 여인이 지독하기 짝이 없다는 걸 익히 알고 있다. 저 여인은 남이 아무리 권고해도 소용이 없어. 기어코 화산파를 없애 버릴 작정인 게야. 어떻게 해서든지 이 화산파를 구해 주어야겠다.'
단지흥은 표정이 굳어졌다. 순간 등아가 마치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도 한 듯 말했다.
"단황 나으리, 당신은 화산파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 향녀들의 일에도 더는 참견하지 마세요!"
"글쎄, 난 딱 부러지게 안 그러겠다고 약조할 수 없소! 난 당신과 화산파 사이에 어떤 곡절이 있는지 알고 싶소."
그러자 등아는 그 말엔 대꾸도 않고 머리를 돌려 곽명송을 바라보았다.
"곽 대협께서는 무고하신가요?"
곽명송은 흠칫 놀라며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난 당신이 누군지 모르오. 한데 왜 내게 알은척을 하는 게요?"
"창 앞이 밝고 땅속이 밝은데 정의도 몰라봐서야 되겠나요? 곽 대협께선 이 시구를 기억하시겠죠?"
그러자 곽명송은 꺽꺽거리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신…… 당신은……."
"곽 대협께선 분명 제 가슴을 보시겠다고 하면서……. 그리고 나서는 제가 당신이 꿈에도 그리던 여인이 아니라는 걸 아셨지요?"
곽명송은 낯색이 새파래지면서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야…… 난……."
그는 자기의 혼백을 빼앗아 간 그 여인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뿐더러 그 여인의 가슴을 만져 보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는지 모른다. 그는 종래로 여인을 가까이해 본 적이 없었고 더욱이 그것이 처음이었으므로 결코 그때 그 여인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 그는 정작 이 여인을 대하자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날 밤, 웬지 미치도록 정욕에 불타 올라 온밤 함께 정을 나눈 여인이 정녕 이 여인이란 말인가…….
"좋소! 잘 왔소! 잘 왔어……."
곽명송은 의외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향녀, 난 그 일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소. 난 그날 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소."
등아는 곽명송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한껏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그런가요? 당신이 그날 밤 일을 그처럼 맘속에 새겨 두고 계신 줄은 미처 몰랐군요. 그러시다면 제가 다시 하룻밤 동무해 드릴까요? 저의 수하엔 숱한 향녀들이 있어요. 그녀들의 재간이란 곧 사내들에게 동무를 해 주고 즐겁게 해 주는 거예요. 그리하여 그 사내들이 제 나름으로는 아무리 건장하다고 여기더라도 그 정을 잊기만 하면 죽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거지요."
"나에 관한 한은 당신 맘대로 처리하시오. 당신이 날 죽일 생각이면 죽이시오. 하지만 그전에 당신은 그날 밤 내게 진심이었던가 말해야 하오. 자, 어서 말해 보오……. 그날 밤 여인이 참말로 당신이었던가……."
곽명송은 죽더라도 그 의문만은 정녕 풀고 싶었다. 지금에 와서는 이 여인이 진정 그 여인이었던가, 그는 정말 확신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그날 밤 이후,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등아는 웃음을 날렸다. 그녀의 웃음은 싸늘하니 얼음장 같았다.
"당신은 향녀가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사내의 품에 안기는 줄 알았나요? 내 이번에 확실히 알려드리지요. 향녀는 어느 사내의 품에 안기게 되면 그땐 기어이 그 사내를 죽여 버리게 돼요. 그 사내가……."
등아는 잠시 말을 끊고 단지흥을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내가 참말로 죽이기 어려운 경우, 향녀가 그 사내를 죽일 수 없는 경우를 내놓고 말이에요……."
등아는 다시 말을 끊고 향녀들을 돌아보았다.
"이리 오너라!"
등아의 한마디가 떨어지자 한 향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애티가 어려있었다. 그 향녀는 곽명송 앞으로 똑바로 나아가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곽명송은 의아한 표정으로 소리쳐 물었다.
"전 향녀예요. 제가 바로 그날 밤의 그 여자예요."
그 여인은 말을 똑똑 끊어 가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곽명송은 격하게 고갯짓을 하며 울부짖듯 소리쳤다.
"거짓말이오. 난 다만 한 여인과……."
"그 여인이 바로 저예요."
여인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대답하더니 천천히 앞섶을 풀어헤쳤다. 이윽고 그녀의 앞가슴이 다 드러났다. 놀랍게도 아름다워야 할 그 여인의 앞가슴은 보기 흉하게 문드러져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 아 하고 짧게 비명을 토해냈다. 단지흥이 좀전에 유방이 문드러진 여인들이 있다는 소리를 했을 땐 도무지 믿기지 않아 긴가민가했었는데 막상 이렇게 두 눈으로 그 모습을 직접 대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단지흥은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저 여인은 굳이 저럴 필요가 있는 것일까……. 그는 몹시 안타까웠다.
"좋소. 이젠 됐소. 어서 앞섶을 여미시오. 난 결코 그대가 그렇게까지 하기를 원하지 않소. 이젠 다 됐으니 어서 날 처치하시오."
곽명송은 장탄식을 하고는 검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는 눈을 감은 채 죽음을 기다렸다. 그것을 보고 단지흥이 대뜸 소리쳤다.
"아니야, 난 이 여인들을 알고 있소. 이 여인들은…… 전부 이렇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 이 말을 들었다. 단지흥은 그만 해서는 안 될 말, 숨겨진 향녀들의 비밀을 발설하고야 만 것이다.
"단황 나으리, 당신은…… 당신은……. 내 분명히 말했었소, 향녀의 비밀을 아는 사내는 그 누구도 살아 남지 못한다는 것을! 여봐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단황 나으리만 내놓고 몽땅 죽여 버려라!"
등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단호하게 외쳤다. 향녀들은 저마다 칼을 빼 들었다. 단지흥은 화산파를 구하려던 것이 되레 그 한마디로 화산파에 큰 화가 닥치게 되자 급급히 외쳤다.
"등아, 그따위 억지는 이제 제발 그만두시오! 내가 여기 있는 한 감히 한 사람도 죽이진 못해!"
"단황 나으리, 내 보기엔 당신은 인정이 헤픈 사람이에요. 황제가 이런다는 건 참말 쉽지 않아요. 그래서 난 당신을 그냥 놔주었던 거예요.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더는 날 건드리지 말아요!"
등아는 냉랭히 쏘아붙였다. 그러나 단지흥은 단념할 수 없었다.
"등아, 제발 그만두시오! 당신이 그만둔다면 나도 당신을 더는 난처하게 만들지 않겠소."
그는 몸을 솟구쳐 향녀 등아 앞에 떨어져 내렸다.
"단황 나으리, 당신이 하필 나한테 이럴 게 뭐예요? 기실 향녀들이 하는 일을 당신은 관계할 수 없는 거예요. 그걸 정녕 모르겠어요?"
등아는 있는 대로 목청을 높여 바락바락 대들었다. 그리고는 곽명송 쪽으로 얼굴을 홱 돌렸다.
"향녀, 네 일을 마저 끝내거라!"
스스로 곽명송과 하룻밤 연정을 나누었다고 나선 그 향녀는 적이 비장하게 곽명송에게 외쳤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으실 건가요?"
곽명송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참말로 자기가 이 처녀를 위하여 꼭 죽어야만 하는 것인지 선뜻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화산파의 일로 자결한다는 건 실로 광명정대한 일이나 이들 향녀들을 위해 목숨을 끊는다는 건 아무래도 용납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이 향녀가 원한이 사무쳐 자기를 죽여 버린다면 모를까……. 해서 그는 그대로 향녀가 자기를 죽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여인은 날카롭게 곽명송을 쏘아보더니 대뜸 소리쳤다.
"좋소, 곽명송. 당신이 죽고 싶지 않다면 내가 죽겠어요!"
향녀는 과연 비수를 꺼내더니 삽시에 자기의 가슴팍을 푹 찔렀다.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금 짤막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음 순간, 그녀는 애처롭게 비명을 내지르며 힘없이 풀썩 쓰러져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 누구도 어찌할 틈이 없었다. 단지흥은 장탄식을 했다.
"등아, 왜 이러오? 도시 왜 이러는 거요?"
그러자 등아는 혼자말하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우린 향녀예요. 제 이름이 왜 등아인지 아세요? 당신은 부나방이 불에 날아드는 걸 보지 못하셨나요? 최후로 죽을 사람은 바로 우리 향녀 자신들인 거예요. 우린 언제나 최후의 죽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곤 하지요……."
등아는 머리를 푹 숙인 채 향녀들에게 손짓을 했다. 두 향녀가 나와서 죽은 향녀의 시체를 묵묵히 들어 내갔다.
단지흥은 멍하니 서서 그러는 양을 물끄러미 지켜 보았다.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지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그는 이제야 모든 것을 확연히 깨달은 것이었다. 향녀는 결국 향녀일 뿐 결코 다른 여인들일 수는 없다. 그가 그토록 사람의 정과 사랑을 얘기해 주었건만 그녀들은 사내란 사내들은, 그것도 천하에서 가장 훌륭한 사내들만 골라 가면서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제 손으로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이거 대체 무슨 장난이야? 그처럼 쉽사리 제 손으로 목숨을 끊다니? 재미없다, 재미없어! 재미없는 노릇이다."
주백통이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자 단지흥은 비감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다가 문득 말했다.
"백통 형, 당신의 그 말은 틀렸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바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오. 무림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흔하디흔하지만 스스로 자결하는 일은 별로 없소. 남을 죽이기보다 제 목숨을 제가 끊는다는 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오."
등아는 뚫어지게 단지흥을 바라보고 있더니 불쑥 말했다.
"단황 나으리, 우린 오늘 서른일곱이 왔어요. 당신이 절 방해하면 이곳에 서른일곱 개의 주검이 널리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해요. 향녀란 최후로 불에 뛰어드는 법이니까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결국 천하에 더는 향녀 등아란 이름이 남아 있지 않게 될 거예요."
'보아하니 오늘 일은 참 시끄럽게 됐구나. 내가 저 여인들을 간섭하면 여인들이 자결할 것이고, 관계하지 않으면 화산파 사람들이 몽땅 죽게 됐으니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단지흥은 통탄을 금치 못했다.
"향녀, 향녀!"
곽명송이 연해 울부짖으면서 눈물을 쏟아 냈다. 한켠에 서 있던 화산파의 처녀는 곽명송이 이처럼 진심으로 향녀의 죽음을 애달파 하는 것을 보자 서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흐느끼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명주, 명주야!"
노파가 소리를 지르면서 뒤쫓아 나갔다.
곽명송은 명주라는 처녀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이제 막 문 밖으로 들려 나가는 향녀의 시체를 눈길로 좇으며 비탄에 잠겨 넋두리를 했다.
"향녀, 당신은 왜 이처럼 지독하오, 왜 이처럼 지독해……."
등아가 냉혹하게 외쳤다.
"곽 대협, 당신이 만일 자각하지 못하고 계속 그러고만 있는다면 당신네 화산파 제자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게 돼요!"
곽명송이 일어서면서 단호히 말했다.
"화산파는 그대들과 아무런 원수진 일이 없다! 다만 이 곽명송이 그대들의 인명 하나를 빚졌으니 어서 이 곽모를 가져가거라!"
그리고는 곽명송은 눈을 질끈 감고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등아는 강고하게 말했다.
"향녀의 비밀을 안 이상, 화산파 제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죽어야 해!"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향녀들이 검을 곧추세우고 화산파 제자들에게 일제히 달려들었다. 삽시에 고함소리와 비명 소리, 검과 칼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난무했다.
화산파 장문인 선우순(鮮于淳)은 몸을 솟구쳐 등아 앞에 떨어져 내리며 소리쳤다.
"네 년이 아무리 우리 화산파를 망치려 들어도 어림도 없다! 향녀, 내 오늘은 결코 사정을 두지 않으리라!"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등아를 향해 똑바로 장을 내뻗쳤다. 그러나 등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받아 검을 휘둘러댔다.
단지흥은 어떻게 해야 등아를 설복할 수 있을지 몰라 속수무책으로 발만 동동 굴렀다. 한편으로 어떻게 해야 이 화산파 사람들을 돕게 되는 건지도 몰라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더 이상 지체할 수도 없어 그는 무작정 큰소리를 지르며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선비와 농부도 뒤따랐다. 그러자 한 향녀가 눈을 부릅뜨고 단지흥을 쏘아보았다.
"황제 폐하, 우리 향녀들은 폐하한테 한 번도 불경스런 일을 한 적이 없었어요!"
"그건 맞는 말이다. 하나 난 도저히 살생을 묵과할 순 없다. 양쪽이 다 손을 털고 물러서기 전에는……."
단지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향녀가 소리소리 질렀다.
"어서 물러나요!"
그때 그 향녀 바로 옆에 있던 화산파 제자 하나가 그 틈을 타 잽싸게 그 향녀의 앞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향녀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만 똑바로 일 검을 맞고는 피를 뿜어내며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녀는 희멀건 눈길로 단지흥을 올려다보며 힘없이 내뱉었다.
"단황 나으리, 결국 당신은 절 해쳤어……."
단지흥은 난감하여 두 손을 떨군 채 말이 없었다.
그 사이 주백통이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어 향녀들을 도와 화산파 제자들의 공격을 막아 주고 화산파 제자들을 도와 향녀들의 공격을 막아 주면서 사람들 속을 벌이 제 집 드나들듯 바삐 드나들고 있었다.
등아는 한켠에서 선우 장문인과 초식을 주고받으면서 단지흥에게 소리쳤다.
"단황 나으리, 당신이 그토록 우리 향녀들이 이곳에서 몽땅 죽어 버리는 걸 소원하신다면 화산파 편을 들어도 좋아요!"
단지흥은 주백통을 빤히 바라볼 뿐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그는 결코 그렇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화산파 제자들이 죽어 넘어가는 것 역시 원치 않는 터, 어찌 됐든 두 측에서 한데 엉켜 생사박투를 벌이는 것은 도저히 그대로 보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순식간에 도처에 핏자국이 질벅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한 사람 한 사람 쓰러지기 시작했다. 단지흥은 장탄식을 했다.
"무림의 쟁단이란 이처럼 무서운 것인가? 한번 맞붙으면 온 땅에 주검이 널리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그는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선우순의 장법은 자못 능란하여 그는 등아를 계속 뒤로 밀어붙였다. 등아는 비록 초수는 원만했으나 내력이 약해 그녀가 선우순을 당해 내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향녀, 이쯤에서 물러가거라! 말을 듣지 않으면 너 향녀란 이름이 강호에 더는 남아 있지 못하게 된다!"
선우순은 연거푸 장을 내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향녀는 코웃음만 쳤다.
"네 놈은 향녀들이 불에 뛰어든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더냐? 우린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 너희들 화산파 손에 죽으나 천하에서 으뜸가는 왕중양 손에 죽으나 죽기는 매일반이야. 네 놈이 목숨을 내놓기가 소원이면 어디 나하고 맞바꿔 보자!"
그러더니 초수를 다하여 선우순에게 더욱 바싹 공격을 들이댔다.
선우순은 잔꾀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슬쩍 몸을 피하고는 눈방울을 데굴거리며 번개같이 생각을 굴렸다. 그는 진작에 단지흥과 이 향녀가 보통 사이가 아님을 눈치채고 있는 터, 만의 하나라도 단지흥이 향녀와 한편에 서는 날이면 화산파는 오늘부로 끝장이 나고야 말리라는 걸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단지흥은 일심으로 향녀에게 권고만 할 따름이고 그녀들을 도와줄 의향이 없음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확신이 서자 선우순은 화산파 제자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화산파 제자들아, 화산파의 존망은 바로 이 싸움에 달렸다! 추호도 사정을 두지 말아라!"
화산파 제자들 중에는 애시당초 이 향녀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꽃같이 아름다운 이 여인들에게 살수를 써서 죽이기는 못내 꺼려졌었다. 하지만 이 향녀들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박도(薄刀)를 들고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들자 생각이 달라졌다. 그런 판에 장문인의 호령을 듣자 모두들 소리를 지르면서 결사적으로 향녀들을 찔러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들이 늘어났다.
주백통을 수두룩이 널린 시체를 보며 안타까이 소리를 질렀다.
"재미없어, 참말 재미가 없단 말이야. 그저 놀면 되는 거지, 사람은 왜 죽여? 난 안 놀겠다, 안 놀겠어!"
그리고는 두 팔을 내려뜨린 채 성큼성큼 한켠으로 비켜섰다.
"향녀, 나의 화산파는 네 년들과 끝까지 해 볼 테다!"
선우순은 동자의 손에 들려 있던 화산파의 진산보검(鎭山寶劍)을 낚아채며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등아도 얼른 수격자(手擊子)를 들고 버티고 섰다. 등아는 이제까지 여지없이 몰렸으면서도 여전히 태연자약하니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선우 장문, 화산파가 평정되면 당신은 더는 그 무슨 장문 노릇을 못하게 될 게다. 만일 강호에서 누가 화산파를 언급하게 된다면 그것은 과거사를 두고 하는 말이 되겠지."
"발칙한 계집이로군. 정히 그렇다면 내 네 년에게 화산파의 검술 맛을 보여 줄 테다."
평소 사람들은 권법(拳法)은 소림(少林)에서 나오고 검법(劍法)은 화산(華山)에서 나온다고들 한다. 그토록 화산파의 검술은 풍부하고 심오한 것이었다. 화산파 장문인 선우순의 검술은 실로 경지에 올랐다고도 할 수 있었다. 선우순은 악 소리를 지르면서 등아를 향해 똑바로 검을 찔러 갔다. 다음 순간, 등아의 눈앞에서 선우순의 검이 빗발치듯 춤을 추었다. 등아는 눈앞이 아물거려 정신을 차리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그녀는 온 힘을 모아 날아드는 검을 연거푸 수격자
로 걷어 냈다. 쌩쌩 바람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채 몇 합 받아내지도 못하여 그녀는 군데군데 검날에 할퀴어 피가 낭자해졌다. 등아는 분기탱천하여 큰소리를 내질렀다.
"선우순, 네 놈 검술은 과연 대단하군. 오늘 이 자리에서 난 네 놈과 함께 죽고 말 테다!"
선우순은 냉소를 날리면서 더욱 힘껏 검을 찔러 갔다. 다시 채 십여 합도 못 돼 등아는 십여 군데나 더 상처를 입었다. 비록 중상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피가 낭자하여 보기에도 애처로웠다. 그러면 그럴수록 선우순은 사기충천하여 고함을 질러댔다.
"화산파 제자들아, 저 년들을 몽땅 죽여 없애 강호의 큰 화근을 뽑아 버려라!"
그러면서도 선우순은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다. 한 순간, 등아는 그의 검을 막아내다가 비틀 쓰러지고 말았다. 선우순은 잽싸게 달려들어 검 끝으로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건방진 계집, 어디 죽어 보아라!"
등아는 체념한 표정으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선우순은 언뜻 사위를 살폈다. 화산파 제자들은 여전히 향녀들과 맞붙어 싸우고 있었는데 오히려 향녀들 쪽보다 더 많이 죽어 있었다. 이 향녀들 역시 누구 하나 무예가 약하지 않아 선우순 같은 고수를 대적하기는 어려워도 화산파 제자들쯤은 너끈히 대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우순은 등아를 제압해 사뭇 득의양양했으나 화산파 제자들이 연신 밀리는 것을 旦고는 속이 타서 고함을 쳤다.
"등아가 죽고 사는 건 이미 내 손에 달렸거늘 너희 향녀들은 계속 싸울 셈이냐?"
화산파 제자들은 그 말을 듣자 삽시에 사기가 부쩍 올랐다. 그러나 향녀들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됨이 없이 여전히 결사적으로 검을 휘둘러댔다.
등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냉소를 날렸다.
"네 놈은 뭘 모르는군. 향녀는 스스로 등불에 덮쳐 든다. 한 번 죽으면 그뿐, 우리 향녀들은 결코 싸움을 멈추는 법이 없다."
그러자 선우순은 더욱 조급해졌다. 그는 타산이 밝은 사람이었다. 이 향녀 등아를 죽인다고 해도 저쪽의 형세를 변화시키기에는 별 소용이 없을 것임이 분명하다. 하나 화산파 제자들이 몽땅 죽어 버린다면 이제 장문인 노릇이고 뭐고 없지 않은가. 자기가 등아를 붙잡았는데도 향녀들이 끄떡도 않고 계속 싸우니 선우순 내심 흠칫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단지흥이 길게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는 한데 엉켜 있는 사람들 머리 위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훌쩍훌쩍 날아오르며 삽시에 향녀들을 제압했다.
화산파 제자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 틈을 타 향녀들을 죽여 버리려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한 사내가 즉시 손을 쓰려고 하다가 불이 번쩍 나도록 뺨따귀를 몇 대 얻어맞았다. 주백통이 손을 거두며 눈알을 부라리면서 냅다 소리를 질렀다.
"어부지리를 얻으려고는 생각도 마라!"
주백통이 손을 쓰자 화산파 제자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화산 무예 시합 이후 단지흥과 주백통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해 이 두 사람이 나서자 화산파 제자들은 더는 손을 쓰지 못했다.
선우순은 단지흥의 처사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네 놈이 황제 노릇을 할 거면 대리에서나 할 것이지 이곳 일까지 간섭할 게 무언가? 어쨌든 난 우리 화산파에 유리할 대로 해야겠다. 네 놈이 화산파에 불리한 짓을 하면 결코 가만있지 않을 테다.'
"모두 싸움을 그만두고 내 말을 들으라."
단지흥이 대갈일성을 내지르자 모두들 떨떠름하니 두 팔을 내려뜨렸다.
"등아, 그대는 왜 화산파를 없애 버리려고 하오?"
단지흥은 등아와 선우순 쪽으로 내달아 등아를 내려다보며 꾸짖 듯 소리쳤다. 등아는 두 눈을 감은 채 나직이 읖조렸다.
"등아가 불에 뛰어드는 건 타 죽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 더는 다른 말을 말고 어서 죽이기나 하세요. 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자 선우순은 그녀의 목을 겨눈 검을 내지르지도, 걷어들이지도 못하고 한 손으로 삿대질을 해댔다.
"그따위 소린 집어치워! 네 년이 화산에 와서 나를 밀어내고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네 년 말대로 내 오늘 네 년을 죽여 버리고 말 테다!"
단지흥은 훌쩍 내달아 선우순을 등아에게서 한 걸음 떼어놓고 다시 물었다.
"등아, 왜 화산파를 없애 버리려고 하오! 어서 말하시오!"
"단랑(段郎), 더 묻지 말고 자기 일이나 관계하세요."
등아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소곳이 말했다.
단랑이라니, '랑'이라고 함은 연인에게 붙이는 칭호가 아니던가. 단지흥은 그 소릴 듣고는 그만 가슴이 찡하니 저려왔다.
'저 여인은 내게 은혜를 베풀었다. 어떻게 하면 저 여인을 구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단지흥은 우두커니 선 채 오래도록 말을 못 이었다. 그는 곰곰 생각을 굴리다가 언뜻 묘안을 하나 떠올렸다. 그리하여 정색을 하고는 지체 없이 선우순에게 말을 던졌다.
"이보시오, 당신은 아까 이 여인이 말한 대로 사형을 해치고 장문인 자리를 갈취한 게 아니오? 그래서 입막음을 하려고 이 여인을 이렇듯 결사적으로 죽이려 하는 게 아니오?"
그야말로 정곡을 찌른 질문이라 선우순은 대번에 낯색이 벌게지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아냐, 아니야! 그건 순 거짓말이야, 거짓말!"
선우순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화산파 제자들 사이에서 또다시 술렁거림이 일었다. 단지흥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번에는 등아 쪽을 바라보았다.
"등아, 저 영감이 저토록 아니라고 하는데도 당신은 왜 이곳에 와서 부러 사단을 만드는 게요? 당신들 말을 백분 받아들인다 해도 당신들 향녀들과 원수진 일이 있는 사람은 저기 있는 저 곽명송 뿐이오. 당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내 모르는 바 아니오. 그러나 당신들이 무림의 계율을 어겨 가면서까지 남의 문파 내부 일에 참섭하려 들다가는 당신들이 일평생 원으로 삼는 사내들에게 복수하는 그 일을 끝끝내 하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된다는 걸 정녕 모른단 말이오?
등아는 아무 대꾸도 없이 천천히 눈꺼풀을 치켜 올리고는 그윽이 단지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단지흥이 자기를 구해 주려고 일부러 저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향녀들의 일을 애석해하며 끝내 그 일을 포기하도록 극구 자기를 설득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은 역으로 그 일을 근거로 들이대며 자기를 설득하고 있다. 자기를 구해 주려고 그의 주장마저 순순히 꺾어 버리는 그의 위인됨에 탄복해 등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등아는 선우순의 검을 가볍게 밀어내
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뚫어지게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맞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 이까짓 화산파 때문에 우리 일을 망칠 수야 없지요. 찰나 이 사람들은 우리의 비밀을 알고 말았어요. 그것도 당신 때문에! 지금 우리는 화산파 내부 일에 간섭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비밀이 더 이상 퍼지지 않게 하려고 이들과 싸우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 스스로 그것 때문에 화산파를 멸했다고 강호에 떠벌리고 다닐 수도 없는 터, 그렇게 되면 남의 문파 일에 참섭했다고 오명을 뒤집어써야 할 것인즉, 화산파 사람들이 우리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더는 화산파 일을 입 밖에 꺼내지 않겠어요."
등아가 거기까지 말하자 선우순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화산파 제자들은 여전히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만 한 사람, 곽명송만은 자기 때문에 자기 문파에 오늘과 같은 사단이 빚어졌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푹 떨군 채 자책하고 있었다.
등아는 경멸 어린 눈길로 선우순을 쏘아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우리의 비밀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우리 귀에 들어오는 날에는, 우리 향녀들은 결코 사정을 안 둘 것이에요. 또한 저기 저 곽명송만은 우리와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았은즉, 내 필히 훗날을 기약하겠어요. 그땐, 오늘처럼 이렇게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테니 명심해 두세요!"
단지흥은 애잔한 눈길로 등아를 바라보았다. 등아 역시 말을 마치고 그윽이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눈길을 마주한 채 잠시 서 있었다. 이윽고 단지흥이 선우순에게 눈길을 돌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어떻소? 길을 터주시겠소?"
선우순은 희색이 만면하여 대뜸 말을 받았다.
"저 여인의 말이 모두 거짓말인 이상, 내 더는 이 향녀들을 막을 까닭이 없소!"
그러자 등아는 바웃음을 날리며 향녀들에게 외쳤다.
"자, 가자!"
그리고는 단지흥을 쳐다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향녀들도 일제히 검을 품에 넣고는 그녀 뒤를 따랐다.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단지흥은 적이 안도하면서도 뭐라 이름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나무꾼과 어부는 화산 근처를 이 잡듯이 뒤지며 단지흥을 찾아 쏘다니다가 운수 사납게도 대환희 보살, 구양봉 무리와 마주쳤다.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들을 찾아 헤매 다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들은 내처 단지흥을 뒤쫓기는 뭣해 화산 객점에서 며칠 피로를 풀고는 이제 막 길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대환희 보살은 그들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면서 반색을 했다. 나무꾼과 어부는 내심 경계심을 가지며 병장기를 움켜쥐었다.
"아유, 잘 만났어요, 잘 만났어! 내 꼭 전할 말이 있었는데. 당신네 단황 나으리는 이젠 끝장났는데 알고 계시우? 당신들 두 시위들은 그래 그분 시체를 아직 보지 못했수?"
어부와 나무꾼은 단박에 대경실색하며 재우쳐 물었다.
"뭐라구요? 다시 한 번 말해 보시오!"
그들이 사뭇 초조해 하자 대환희 보살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들은 단지흥의 신변을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글쎄 당신네 단황 나으리는 화산 위에서 왕중양과 일전을 치렀다고 하더군요. 그분은 일양지공을 쓰고 왕중양은 선천공을 썼는데 그만…… 에그 참……."
대환희 보살은 말을 뚝 끊고는 정말 안됐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부와 나무꾼은 대번에 샘솟듯 눈물을 쏟아 냈다. 그리고는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엔 자못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황제를 잘 보필하지 못했으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으랴! 그들은 몸은 둘이나 생각은 한가지로 너나할 것없이 단지흥의 시체를 찾기만 하면 일단 대리로 옮기고 나서는 그 당장 죽기로 단단히 작심을 했다.
"그분은…… 지금 어디 있소?"
어부가 눈물을 훔치며 간신히 물었다.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대답을 늦잡으며 딴청을 피웠다.
"이분은 서독 구양봉 장주님이세요. 이번 화산 무예 시합에서 참가자들은 각자 순서를 정했대요. 듣자니 중양 진인이 첫자리이고 그 다음으로는 서독, 남제, 동사, 북개 이런 순이었다는데……. 단황 나으리한테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이번 화산 모임이 얼마나 원만했겠나요?"
구양봉은 괜스레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땅을 내려다봤다가 눈을 슴벅거리며 능청을 떨고 있었다. 나무꾼은 온 얼굴이 눈물 범벅이 되어 흐느끼며 울먹거렸다.
"수, 수고스럽지만 보살께서 알고 계시다면 우리 화, 황제 폐하가 어디 계시는지 좀 알려 주시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얼핏 장탄식을 했다.
"아마도 아직 화산 부근에 있다지요? 직접 한번 가 보세요! 그곳에 가기만 하면 찾는 거야 어려운 일도 아닐 게고……."
그러자 나무꾼과 어부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리를 굽실 꺾고는 급히 떠나갔다.
두 사람이 까마득히 멀어지자 대환희 보살은 참았던 웃음을 한꺼번에 터뜨리며 배꼽을 잡았다.
"구양 장주님, 어때요? 나의 이 꾀가?"
"그런 것도 무슨 꾀라고 할 수 있나? 그저 잠시 성가신 놈들을 떼어놨다뿐이지. 아니, 그렇지도 않을걸? 저 놈들은 분명 다시 올 게야. 당신이 한 말이 믿어지지 않아 득달같이 달려와 꼬치꼬치 캐물을 거라구."
"을 테면 오라지요. 그러자면 시간이 더욱 지체될 거 아니에요? 이렇게 해야 조금이라도 더 임금과 신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는 거예요."
구양봉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찌 됐든 단가는 운수 사납게 됐어. 어느 놈이건 이 서독과 맞서면 운수가 사나워지게 마련이야!"
한 식경도 더 지났는데 아니나다를까 저쪽에서 나무꾼이 헐레헐레 뛰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구양봉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쏜살같이 달려더니 이번에는 구양봉을 붙잡고 물고늘어졌다.
"구양 장주님, 당신도 화산 꼭대기에 올라 우리 황제 폐하와 함께 왕중양과 무예 시합을 하셨다고 했지요? 그러니 당신은 정확히 알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쉽사리 돌아가실 분이 아니십니다. 당신은 우리 황제 폐하의 행방을 모르십니까?"
"당신들의 황제는 죽었어. 죽었다는데 왜 자꾸 시끄럽게 구는 거야!"
구양봉은 대뜸 윽박질렀다. 그러자 어부가 큰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구양봉, 똑똑히 대란 말이오. 그러잖으면 우린 가만히 있지 않겠소."
"가만히 있지 않으면? 그럼, 네 녀석들 둘이 함께 덤벼들기라도 하겠다는 게냐?"
구양봉은 대뜸 사장을 집어 들었다.
어부와 나무꾼은 기실 아까 대환희 보살이 구양봉한테 자꾸 눈짓을 보내는 것이 못내 께름했었다. 뿐더러 구양봉의 기색도 영 미심쩍었었다. 하나 하도 경황이 없어서 깊이 생각해 볼 것 없이 일단 뛰쳐갔으나 가면서 생각해 보니 아무리 해도 이들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필 구양봉은 죽지 않고 왜 단지흥만 잘못되었단 말인가? 구양봉이 꿍꿍이를 꾸며 황제 폐하를 해친 것은 아닐까……. 두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시름이 놓이지 않는지라 다시
돌아가 구양봉에게 따져 묻기로 작심하고 이렇게 되돌아온 것이었다.
"네 놈들 황제는 귀신 만나러 갔으니까 너희들 두 놈도 따라서 귀신이나 보러 가거라. 가서 너네 황제한테 직접 물어 봐!"
구양봉은 말을 마치자마자 있는 힘껏 사장을 휘둘렀다. 그의 사장은 매섭기 그지 없었다. 두 사람은 도저히 막아낼 수가 없었다. 그들 두 사람도 일양지 초수를 알고 있긴 했지만 허투루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양지 초수는 꼭 내력으로 해야 하는 것인즉, 만일 그 초수를 써서도 구양봉을 제압하지 못하게 되면 두 사람은 목숨을 건지기조차 어렵게 된다.
어부는 잽싸게 사장을 피하면서 낚싯줄을 휘둘렀다. 낚싯줄이 공중에서 윙윙 소리를 내며 구양봉 쪽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구양봉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가뿐히 낚싯줄을 쳐냈다. 나무꾼은 나무꾼대로 도끼를 내리찍어댔다. 그러나 한 순간 도끼날이 구양봉의 사장에 부딪혀 쨍 소리를 내며 힘없이 밑으로 수그러 들었다. 그 바람에 나무꾼은 하마터면 도끼를 놓칠 뻔했다. 그는 깜짝 놀라 더는 도끼로 구양봉의 사장을 막을 엄두도 못 내고 연거푸 뒤로 물러났다. 어부의
낚싯줄이 때마침 날아들지 않았더라면 나무꾼은 오늘이 제삿날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어부, 나무꾼, 황제가 이미 죽었는데 시위가 다 무슨 쓸모가 있겠요? 당신들은 차라리 구양 장주님을 따라 저분의 수하가 되세요. 그러면 팔자를 고칠 수 있어요."
보살이 깝죽깝죽 끼여들었다. 그러자 어부와 나무꾼은 대로하여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네 년 말대로 황제 폐하께서 정말로 돌아가셨다면 나도 폐하를 배동하여 황천으로 갈 테다. 하나 황천에 가더라도 네 년은 꼭 끌고 갈 테니 잠자코 기다리고 있어!"
구양봉은 사장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점점 더 힘이 붙었다. 그러나 나무꾼과 어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기진맥진하여 낚싯줄과 도끼를 들고 있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이번엔 황제 폐하를 찾지도 못하고 저 놈의 사장에 목숨을 잃고 마는구나. 실로 애석한 노릇이다.'
그들 두 사람은 여전히 함성을 지르고 있었으나 이젠 죽음이 눈앞에 닥쳐 있음을 직감하고 결연히 의지를 다졌다.
"그 낚싯줄을 집어 던졌!"
구양봉은 벽력같이 소리를 내지르고는 사장으로 어부의 손을 후려갈겼다가는 이내 그의 낚싯줄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또다시 그의 손을 내리찍고 연거푸 그의 등짝을 갈겼다. 어부는 땅에 털썩 꼬꾸라졌다.
나무꾼은 그 모습을 보고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어부, 함께 가세. 나도 자네와 함께 저 노독물의 손에 깨끗이 죽어 버리겠네. 그러면 적어도 오명은 남기지 않지!"
나무꾼은 도끼를 내던지고는 손을 축 늘어뜨렸다. 구양봉은 대환희 보살에게 두 사람을 묶으라고 소리를 쳤다. 이 두 사람을 끌고 곧장 대리로 짓쳐 들어가 단지흥과 대면할 작정이었다.
두 사람은 결박당한 채 자기들 처지는 아랑곳 없이 행여 황제가 죽었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며 침통하게 그들에게 끌려갔다. 그런데 길을 가면서 구양봉과 대환희 보살은 어떤 계책으로 단지흥을 꼬여 낼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은 그 얘기를 듣고는 방심하여 이들의 계략에 휘말려든 것이 자못 한심스러우면서도 마치 죽은 황제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기뻐했다.
'황제 폐하만 무사하시다면 우린 죽어도 여한이 없다.'
대환희 보살의 수하 여인들은 이만저만 치밀한 게 아니었다. 그녀들은 늘 척후를 미리 내보내 정황을 탐지했다. 사흘쯤 지났을 때 앞서 간 척후병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단지흥 일행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 왔다. 그 일행에는 선비, 농부 그리고 전진교의 주백통이 끼여 있다고 했다.
"좋아, 그자들을 찾아내 한번 멋지게 붙어 보자!"
구양봉은 자못 흡족해서 외쳐댔다.
구양봉 일행은 단지흥 일행을 바싹 뒤쫓아갔다.
저녁때가 되면 구양봉 일행은 노숙을 했다. 구양봉은 매일 밤 그 조그마한 치주를 안고 잠을 잤다.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그는 치주를 데리고 갖은 음탕한 짓을 했으며 숨막히도록 그녀를 괴롭혔다. 하나 일행이 단지흥을 추격한다는 소리를 듣고 치주는 일심으로 그를 만날 생각을 하면서 그 고통을 참아 냈다.
'살아서 폐하를 볼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으련만. 제발 폐하를 한 번만이라도 만나 보고 죽었으면…….'
척후로부터 단지흥 일행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는 소식이 전해 올 때마다 치주의 심장은 마치 밖으로 튀어 나갈 것마냥 세차게 뛰었다.
이레 되던 날 구양봉 일행은 드디어 단지흥 일행을 따라잡았다. 그들은 더러는 말을 타고 더러는 걸으면서 느릿느릿 나아가고 있었다. 주백통은 뭐라고 뭐라고 끊임없이 지껄여대고 단지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품이 적이 한가해 보였다.
구양봉은 일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와 하고 함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천지가 진동하고 수림이 몸부림을 쳤다.
단지흥은 그 소리에 흠칫 놀라 홱 고개를 돌렸다.
"누가 따라오고 있군. 자, 멈춰 서서 기다려 보세."
단지흥은 천연덕스럽게 한마디했다. 일행은 멈춰 섰다.
구양봉은 그들 코앞까지 내처 달려왔다.
"단황 나으리, 우린 작별한 지 며칠밖에 안 되는데 당신 생각이 몹시 나더란 말야. 그래서 일부러 물어 물어 이렇게 뒤따라왔네."
그러자 주백통이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물었다.
"당신들도 대리로 가는 길이우?"
"그렇다! 난 대리 단황 나으리의 무예를 흠모한 지 오래이다. 이번에 대리에 가서 단씨 가문의 일양지공을 한번 배워 볼 작정이지! 단황 나으리께서 사심 없이 가르쳐 주길 바라오."
이윽고 대환희 보살과 뚱뚱보 여인들도 당도했다. 그 속에 치주도 끼여 있었다. 그녀는 단지흥을 발견하자 급히 뚱뚱보 여인 뒤로 몸을 숨기며 숨을 죽였다.
어부와 나무꾼은 단지흥이 정말로 무사한 것을 보자 희색이 만면해지지며 대뜸 소리쳤다.
"폐하, 이자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믿지 마십시오."
그러자 구양봉이 음충맞게 웃으며 얼른 끼여들었다.
"내가 너희들을 끌고 왔기 때문에 너희들은 단황 나으리를 만나볼 수 있게 된 게야."
단지흥은 나무꾼과 어부가 결박당한 것을 보고는 낯색을 굳히며 엄하게 외쳤다.
"구양 장주, 우리 둘 사이엔 아무런 원수진 일도 없으니 나의 그 두 형제를 당장 놓아주시오!"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단황께서 나한테 일양지공을 배워 주기만 한다면 어디 이 두 사람을 놓아준다뿐이겠소!"
구양봉은 능청을 떨었다.
"허튼소리 마우. 난 단황 나으리께 이미 물어 보았수. 단씨네 일양지공은 종래로 남한테는 전수해 주지 않는 거우. 당신은 단황 나으리의 아들도 아닌데 어찌 일양지공을 배울 수 있겠수?"
주백통이 불쑥 끼여들었다.
"단황 나으리, 난 대리로 가서 당신을 찾으려고 천릿길도 마다 않고 이렇게 달려온 것이오! 아직 대리 땅에 당도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생각만은 분명하오. 당신의 일양지공이 무섭긴 하나 나의 합마공도 썩 괜찮은 것이오. 당신이 나한테 일양지공을 가르쳐 주고 내가 당신한테 합마공을 가르쳐 주면 피차 손해볼 게 없지 않소?"
"안 되오. 대리 단씨의 일양지는 단씨 가문의 가학인데 내 어찌 당신한테 가르쳐 줄 수 있겠소? 단씨 가문의 자손들은 다른 성씨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걸 전수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있소."
"그따위 속임수로 사람을 속이려 들지 마시오. 당신은 단씨가 아닌 사람들한테는 전수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당신의 네 시위는 모두 일양지공을 알고 있지 않소? 더욱이 당신의 일양지공이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무슨 금기 같은 걸 정해둔 게요? 내가 합마공을 쓰지 않고 사장으로 공격하기만 해도 식은죽 먹기로 격파할 수 있을 텐데."
"네 시위는 대리국의 신하로서 기실 우리 집안사람이나 진배없소. 이 네 집안은 세세대대로 우리 단씨 집안과 형제지간이었소. 당신은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단씨 집안과 형제의 도리를 다할 수 있소?"
그러자 구양봉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하필 단씨 집안과 왜 형제가 돼? 난 다만 이 사장을 저 사람들 머리에 살짝 올려 놓으려 할 따름이오. 대답하기 싫으면 관두시오! 난 나대로 내 방도대로 하면 되니까!"
"노독물, 당신은 허튼수작 당장 집어치워! 남이 당신한테 일양지공을 배워 주지 않겠다면 알아서 물러나야 할 게 아니야?"
주백통이 붉으락푸르락해서는 외쳐댔다.
"구양 장주, 손을 떼란 말이오. 화산 꼭대기에서 우린 서로 맞붙어 보지 못했었소. 오늘 내가 당신과 싸워 지게 되면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하겠소. 그러니 내 형제들을 놔주오. 그런데 당신이 지면 어떻게 할 테요?"
단지흥이 다그치자 구양봉은 오만불손하게 큰소리를 쳤다.
"좋아, 좋아. 내가 지게 되면 다신 당신과 엇서지 않지!"
두 사람은 넉 장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화산 꼭대기에서 남북동서는 중신통과 《구음진경》을 쟁탈했지만 남북동서 간에는 서로 전심전력으로 겨루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서독과 남제는 어부와 나무꾼, 두 사람의 목숨을 걸고 생사박투를 해야 했다.
구양봉은 독사장을 손에 들고 흉맹스럽게 자세를 취했다. 보기드문 초식인 파화요천(把火燎天) 초수를 쓰려는 것이었다. 그는 불타는 눈초리로 남제를 쏘아보았다. 흡사 한 마리 솔개 같았다. 그러나 남제는 그처럼 허장성세는 부리지 않고 그저 평온하게 서 있었다. 그는 조용하게 지켜 보면서 구양봉이 초수를 쓰기만을 기다렸다.
두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고 한동안 서로 응시하기만 했다.



제23장 안타까운 사랑
단지흥과 구양봉은 한참이나 서로 노려보고만 있었다.
단지흥은 구양봉을 마주한 채로 지난 화산 쟁투와 향녀 등아에 대한 상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화산에서 나는 겨우 한 차례 손을 써 봤을 뿐이었다. 형편없는 일이야. 등아는 마지막으로 떠나가면서 내가 미워 돌아보지도 않았었다. 언젠가 그녀의 시녀는 등아가 날 각별히 사랑했다고 했는데……. 그네들 규례대로라면 향녀는 사내와 정을 통하면 가차없이 그 사내를 죽여 버려야 한다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녀가 날 살려 둔 걸 보면 내게 정을 둔 것이 분명해……. 지금은 구양봉과 맞서 나무꾼과 어부 두 사람을 구해 내야 한다. 며칠 안 되는 사이에 이토록 수많
은 일을 겪게 되다니…….'
두 사람은 아직도 붙박힌 듯 서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일단 겨루게 되면 바위가 부서져 나가고 천지가 진동하게 될 터이다.
일순 구양봉이 징그럽게 웃음을 날렸다.
"내가 당신을 찾아온 건 별게 아니라니까. 당신의 일양지공이 그리도 뛰어난 무학이라니 그저 한수 배워 보자는 것이지. 그런데 그걸 가르쳐 줄 생각이 없다니 당신 시위들은 곧 숨통이 끊기게 되겠군."
"허허, 내 형제들을 구해 내는 것이야 식은죽 먹기지. 만의 하나 형제들이 당신 손에 죽게 된다면 내 즉시 출가하여 중이 되리다. 더는 황제 노릇을 하지 않겠단 말이오!"
단지흥도 웃음을 머금고 여유 있게 받았다.
"좋소, 내가 대리 황제를 없애 버리면 무림에 큰 공덕을 쌓는 셈이지!"
구양봉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사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 싸움은 여느 싸움과는 달랐다. 구양봉은 사장을 세차게 휘두르는 반면 단지흥은 맨손으로 그저 손가락이나 까딱이며 대적하는 형상이었다.
"단황 나으리, 당신은 황제 노릇은 잘하는지 어떤지 몰라도 확실히 강호 사람으로서는 호수가 아니군. 강호에서 한 가닥 해먹으려면 사람은 좀 악한 구석이 있어야 해. 당신은 줄곧 선한 척만 하는데 내 오늘 당신의 진면목을 확 벗겨 놓지!"
말은 천연덕스레 하고 있었지만 구양봉은 번개같이 사장을 휘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서히 뒤엉키기 시작했다. 구양봉의 사장은 단지흥의 머리 위로 빗발 치듯 날아들었다.
하나 단지흥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사장이 날아들 때마다 손가락을 내밀어 물리쳤다. 처음에는 구양봉이 우세를 점하는 듯했으나 초식을 더할수록 그는 단지흥의 지풍을 막아내는 데만 급급했다. 일단 그 지풍에 명중되기만 하면 그 자리는 눈깜짝할 사이에 잔폐가 되고 말 터였다.
이렇게 일양지를 피하느라 번번이 물러서다 보니 구양봉은 자연 자기 초수를 펼쳐 내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구양봉은 화가 나서 무서운 소리를 내지르며 바람개비 돌리듯 사장을 휘둘러 댔으나 단지흥의 털끝 하나도 다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벌써 삼십여 합이나 싸웠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봐요, 단황 나으리! 당신은 날 이길 수 없어! 당신 시위들도 못 돌아간다구!"
구양봉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큰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단지흥은 내내 여유만만하니 동요가 없었다.
"글쎄 날 이기기만 하면 난 퇴위해서 중이 될 거고 더는 강호에는 나가지 않겠다는데."
두 사람은 서로 쫓고 쫓기며 수림 속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강변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점점 멀어져 갔다. 단지흥이 일양지를 내칠 때마다 이는 바람소리와 구양봉의 악에 받친 고함소리만이 간간이 들려 올 뿐이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이 수작을 걸기 시작했다.
"승상님, 보아하니 당신네 황제는 승산이 없군요. 당신이라고 이 대환희 보살에게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요?"
보살은 구양봉과 단지흥의 일전을 보고 내심 겁이 더럭 나서 한층 더 허세를 부리는 것이었다. 농부는 보살을 보자 치가 떨려 두 주먹을 부르쥐고 불길이 뚝뚝 듣도록 보살을 쏘아보았다. 선비도 날카롭게 그녀를 쏘아보며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우리 사람 둘을 순순히 놓아줘!"
"당신이 내 맘에만 든다면야 놓아줄 수도 있지만 보아하니 당신은 쓸데가 없겠군. 그렇게 섬약해서야 어디 이 나무꾼과 어부 못지않게 힘을 쓸 수 있겠소?"
보살은 한껏 빈정거렸다.
"내 한 가지 말해 볼까? 당신 소굴은 대양산(大凉山)에 있는 석량동(石凉洞)이란 굴이지? 그 굴에 먹을 것과 당신이 여러 해 동안 약탈해 온 물건들을 가득 쌓아 두었고? 어때?"
선비는 한마디 한마디 똑똑 부러지듯 내뱉었다. 대환희 보살은 대번에 낯색이 핼쑥해졌다.
"그래서 어쩔 셈이오?"
"대환희 보살, 내가 입만 벙긋하면 대리 백성들은 당신네 그 돼지 같은 여인이 하나라도 대리 성안에 나타났다 하면 떼거리로 몰려들어 붙잡으려 들 게야. 그러니 그렇게만 되면 하물며 어느 놈이 감히 당신들한테 먹고 쓸 것을 대주지? 내 그러는 놈들은 몽땅 옥에 집어 넣을 텐데! 난 또 대리국의 모든 병사들에게 뚱뚱보 여인이 나타났다 하면 보이는 족족 잡아들이라고 엄명을 내리고 당신의 그 석량동을 부숴 버리라고 할 테야!"
대환희 보살은 새파랗게 질리면서도 또박또박 말대꾸를 했다.
"그래서? 대리 단씨는 종래로 강호에 대해 황궁의 세력을 이용한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관례를 깨겠다고? 그따위 속임수로 위협하다가는 된통 쓴맛을 보게 된다는 걸 모르는 게로군!"
"내가 왜 당신을 속이겠나? 이번에 화산에 가서 난 당신 보살과 향녀들의 나쁜 행실을 낱낱이 알게 됐어. 난 절대로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아!"
보살은 이제 낯빛이 흙빛이 되어서는 악을 써댔다.
"이토록 대환희 보살을 업신여기고도 살아 남을 줄 아느냐?"
그러자 선비는 앙천대소를 했다.
"당신은 알고 있나? 강호 무리가 아무리 무섭다 한들 종래로 조정과 맞서 본 적은 없어!"
"아니, 아니야. 절대 그렇겐 못해!"
"황제께선 듣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난 달라. 내 한마디면 전국의 병마가 들고일어나!"
대환희 보살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선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선비가 진심으로 그러는 것인지, 그저 엄포를 놓으려는 수작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강호 일에 대해 대리 황궁은 늘 강호의 규례를 따랐으며, 강호의 쟁집(爭執)을 대리국 병사를 동원해 탄압한 적은 없었다. 한갓 승상이 몇 백 년 래의 규례를 깰 수 있을 것인가. 하나 선비가 사뭇 추상같이 호령하는지라 보살은 한껏 풀이 죽어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래 진정 어쩔 셈이에요?"
"강호의 쟁집에 대해서는 강호 법도에 따라 처리하겠다. 하지만 당신이 나의 두 형제를 붙잡은 건 강호 규례에도 어긋나는 것인즉, 당신은 필시 구양봉의 힘을 빌렸지 당신 재간으로 한 게 아니니 우린 인정할 수 없다. 그 둘을 풀어 주고 나와 당신이 싸우는 게 강호 법도를 따르는 것이다."
대환희 보살은 생각을 더듬어 보고 나서 결연히 대답했다.
"좋아요, 그 말대로 하겠어요."
그리고는 그녀는 뒤에 대고 손짓을 했다. 그러자 뚱뚱보 여인들 몇이 나무꾼과 어부를 풀어 놓았다. 나무꾼과 어부는 얼른 이쪽으로 달려왔다. 선비의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역력했다. 만일 지혜롭게 이 두 사람을 빼내지 않았더라면 독살스런 대환희 보살은 이들 두 사람에게 필경 독을 썼을 것이었다.
선비는 그제야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난 나 자신의 명예와 단황 나으리의 명예를 담보로 맹세하겠네. 절대로 대리의 권력을 이용해 그대를 업신여기지 않겠다고 말이야. 강호의 은원은 강호의 수단으로 해결할 뿐."
대환희 보살은 단지흥이 지척에 있는지라 더는 싸울 엄두도 못 내고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가자! 훗날을 기약합시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사나이가 교자를 들러멨다. 보살은 천천히 교자 위에 올라가 앉더니 갑자기 생각난 것마냥 선비를 돌아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잠깐! 나에게 예물이 하나 있어요. 단황께 전해 줘요."
그리고는 대환희 보살은 뚱뚱보 여인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한 뚱뚱보 여인이 치주를 선비 앞으로 데려왔다. 선비는 머리를 숙여 자그마한 여인을 바투 들여다보았다.
"이건 무슨 뜻인가?"
"저 앨 단황 나으리께 드리기만 해요. 단황 나으리는 저 애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을 테니!"
대환희 보살은 더는 말을 않고 휭하니 떠나갔다. 보살은 선비에게서 얼굴을 돌리자마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치주를 단씨에게 줘 버리면 구양봉은 단씨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단씨 속도 긁어 놓고!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 아닌가. 단씨는 이 여인을 다시 가진 뒤 나도 미워하게 되겠지만 더불어 구양봉도 증오하게 될 거야.'
단지흥과 구양봉은 서로 쫓고 쫓기면서 꽤 멀리까지 나갔다. 구양봉은 이 대리 부근에서는 단지흥과 오래 싸워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복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날이 어두워지도록 팽팽히 맞섰으나 여전히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구양봉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단황 나으리, 내게 물건이 하나 있소. 워낙 당신 품 안의 물건이었지만 이젠 내 것이 되었단 말이오. 내 보기에도 그 여인은 정말 쓸 만해. 천하 절색이거든. 난 밤이면 밤마다 가지고 놀았지만 질리지 않더이다. 날 따라가서 그걸 한번 볼 생각이 없으신지?"
단지흥은 그저 웃어넘겼다. 이 구양봉이란 자는 궤계가 많으니만큼 말 그대로 듣다가는 속임수에 걸려들 수도 있었다.
"구양봉, 난 이제 이만 하고 돌아가야겠소. 계속 싸울 생각이 있으면 훗날 대리으로 찾아오시오. 내 밤낮 사흘은 싸워 줄 테니!"
단지흥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등을 돌리고는 휘익 바람소리를 내며 경공을 써서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구양봉은 결코 우스개로 한 말이 아니었다. 몇 십 합을 겨뤄도 뜻대로 안 되니 그의 심사나 건드려 내력을 흩트려 놓자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단지흥이 그 말엔 코대답도 않고 사라져 버리니 멋쩍기 그지없었다.
'난 그 여인을 얻은 다음에야 여인의 참 아름다움이 작고 깜찍한데 있다는 걸 알게 됐거든. 난 그 여인을 얻고 난 다음부터 매일 밤 아주 만족스럽단 말이야. 그런데도 저 놈은 코방귀도 안 끼고 돌아가는군. 쳇, 건방진 녀석! 사실을 알고 나면 날 죽이려 들겠지? 고소하다, 고소해!'
구양봉은 이제껏 신물이 나도록 여인을 겪어 봤지만 유독 치주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밤마다 그 짓을 하면 번번이 치주가 죽다 살아나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마치 천하의 여인들이 모두 자신에게 유린당해 신음하는 듯한 쾌감을 느꼈었다. 구양봉은 치주를 얻은 뒤부터 한껏 기고만장해져 있었다.
구양봉은 급히 대환희 보살 뒤를 쫓았다. 삼십여 리나 쉬지 않고 달려가서야 그는 대환희 보살을 따라잡았다. 밤은 이미 깊어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치주부터 찾았다.
"보살, 내 그 꼬마 미인은 어디에 있나?"
대환희 보살은 만면에 웃음을 띄우면서 딴청을 부렸다.
"뭐 말이에요, 구양 장주님?"
"나의 그 꼬마 미인 말이야!"
구양봉은 몹시 다급했다. 그러나 보살은 대답을 늦잡고 뜸을 들였다.
"미녀들은 저마다 장점이 있어요. 당신은 날마다 한 계집만 품에 안을 건가요? 내 오늘은 새로 훌륭한 제자 둘을 내드리지요."
"여러 말 말고 당장 그 꼬마 미인을 내놓으란 말이야. 다른 여잔 필요 없어."
구양봉은 정색을 했다. 그러자 보살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 그게 그러니까……. 당신이 싸우느라 자리를 뜬 사이에 그만 선비와 농부가 달려들어…… 다짜고짜 치주를 빼, 뺏어 갔어요. 우린 전력을 다했지만 그 놈들을 이겨 낼 수 없었지요. 치주는 워낙 자기들의 황비였다면서 큰소리를 탕탕 치면서……."
구양봉은 노발대발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괘씸한 놈, 괘씸한 놈! 내 결코 가만두지 않으리라. 복수를 하고야 말 테다. 단씨 이 노옴……."
"구양 장주님, 제발 화를 가라앉히세요. 당신은 천하 으뜸가는 영웅이니 장차 큰일을 할 사람이에요. 그까짓 꼬마를 가지고 뭘 그리 펄펄 뛰시는 거예요. 조만간 내 장주님께 좋은 걸로 하나 선사할 테니, 자자, 그만 화를 삭여요, 화를!"
대환희 보살은 한껏 능청을 떨었다. 구양봉은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단지흥은 밤이 이슥해서야 황궁으로 돌아왔다. 네 시위가 모두 돌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단지흥은 나무꾼과 어부에게 그 동안의 정황을 캐물었다. 짐작했던 대로 황제를 찾느라 그들도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자, 자세한 얘기는 다음날 듣고 날이 어두웠으니 황제 폐하께서도 일찌감치 자리에 드시지요."
선비가 나섰다.
단지흥은 네 시위를 되찾은데다 주백통까지 함께 있으니 오랜만에 느긋하게 술잔이나 기울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네 시위는 한사코 만류하며 휴식을 권했다. 그리고는 더는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주백통을 데리고 황망히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네 사람이 무슨 내막이 있는 듯한 눈치라 더는 잡지 않았다. 그는 텅 빈 침소에 혼자 남았다. 황궁 안엔 밤이 깊어 고요히 정적이 깃들여 있었다.
향로에서는 그윽한 향내를 풍기며 용연향(龍涎香)이 타오르고 있었다. 방안 가득 기분 좋은 향내가 피어 올랐다. 단지흥은 자못 기분이 상쾌했다. 그는 화산에서 있었던 무예 시합과 왕중양, 황약사, 홍칠, 구양봉의 출중한 무예를 돌이켜 회상하면서 찬탄을 금치 못했다. 천하가 광대하다 보니 별의별 기적과 능인(能人)들이 다 있고 단지흥 자신이 따라잡기 힘든 무예 초수도 허다했다. 그는 이번의 이 행차로 퍽이나 견식을 넓혔다고 생각하며 깊은 사색으로 빠져 들어
갔다.
한 순간, 문득 궁녀 하나가 들어와 조용히 아뢰었다.
"황제 폐하, 목욕을 하시지요."
단지흥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궁녀들이 차례차례 들어와 조용히 손길을 놀리며 단지흥의 시중을 들었다.
'제왕의 생활이란 이토록 편안하고 한가로운 것이거니 모두들 제왕이 되고 싶어하는 것도 지당한 일이다. 나처럼 강호객 노릇을 하기 원하는 이가 도대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강호객이란 피를 자주 보고 때로는 목숨을 잃는 수도 있으니 어찌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으리.'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목욕을 하고 나니 머리 속이 맑고 개운했다. 그는 후원으로 나갔다.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니 오랜 여독도 멎은 듯 가시는 것 같았다. 그는 후원 담장 곁에 서서 스러져 가는 달빛을 받으며 하늘거리는 차꽃을 바라보았다. 늦가을이라 곧 차꽃이 질 터였다. 막 침궁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궁녀 하나가 다가와 정중히 절을 했다.
"황제 폐하, 승상께서 가지고 오신 예물을 바치오리까?"
"승상이 예물을? 허, 언제 그랬던고? 그럼 가 보자꾸나."
"저를 따라오십시오!"
궁녀는 허리를 꺾고 앞장서 길을 잡았다. 한데 후궁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실로 괴이한 일이로고. 무슨 예물이기에 후궁으로 데려가는 것인가?'
마침내 후궁에 이르자 궁녀는 발길을 멈추고 다시 아뢰었다.
"황제 폐하, 침대로 가까이 가시오소서."
궁녀는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는 조용히 물러갔다. 그쯤 되자 단지흥은 부쩍 호기심이 동했다. 그는 의아한 생각을 떨쳐 내지 못하며 선뜻 방안으로 들어서서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별 색다른 것도 없이 그저 침대에 휘장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선뜻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휘장 안쪽에서 누군가 가녀리게 우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 왔다. 여인의 소리였는데 아주 귀에 익었다.
'실로 괴이하군……. 아니, 영고일까? 그녀가 왜 자기 처소도 아닌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내가 황궁을 비운 지 너무 오래 되어 이처럼 슬퍼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이 들자 단지흥은 영고가 가여워졌다.
"울지 마오. 내가 왔는데 울어서야 되겠소?"
그러자 안에서는 이제 아예 흑흑 흐느끼는 것이었다.
"울지 마오, 울지마! 울지 말라니까. 어디 봅시다."
그는 휘장을 확 거머쥐었다. 그러나 여인은 휘장 모서리를 더한층 세게 틀어 잡었다.
단지흥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영고, 너무 그렇게 성을 내지 마오. 내가 밖으로 나간 건 다 일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오? 난……."
그는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닿아 버렸다. 그가 밖으로 나간 것은 단지 화산 무예 시합에 가기 위해서만 아니었다. 그는 가는 길에 몇 년 전 사라진 치주를 찾아볼 요량으로 일찌감치 황궁을 나서지 않았던가.
여인은 일순 울음을 뚝 그쳤다.
"폐하께서는 제가 누구인지 아시나요?"
단지흥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치주가 말도 없이 사라지지 않았소? 아무리 찾아도 행방이 묘연하니 내 화산에 간 김에 치주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보느라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이오. 치주는 절대 예가 싫어서 도망갈 사람이 아니야. 그 여인은 필시 어느 파의 강호객이 납치해 갔을 게요. 난 그 여인을 찾아야 하오. 누가 감히 대리의 황비를 납치해 갔는데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그리고는 단지흥은 다짜고짜 휘장을 확 열어제쳤다.
너무나 의외였다. 영고가 아니라 깜찍할 정도로 자그마한 여인이 침대 위에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단지흥은 깜짝 놀라 그 여인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그 여인, 그 여인은 다름없는 치주였다. 얼굴 모습은 그대로인데 무슨 고초를 겪었음인지 기막힐 정도로 작아진, 틀림없는 치주였다. 그는 할말을 잃은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더니 이윽고 큰소리로 외쳤다.
"치주, 네가 치주이냐? 참말로 치주란 말이냐?"
치주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황제 폐하, 제가 치주예요. 제가 치주……."
단지흥은 장탄식을 하더니 와락 달려들어 치주를 꼭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한참이나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 단지흥은 더할 수 없이 격동되었다. 황제 노릇을 하면서 한 여인 때문에 이처럼 격동된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무수한 여인들을 겪어 봤지만 그 어느 여인도 치주처럼 그를 격동시키지는 못했었다. 오늘 그는 치주로 하여 황제가 아니라 사랑을 갈구하는 한 평범한 사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치주, 너는 어찌하여……."
그는 무슨 말부터 해야 좋을지 몰라 뚫어지게 치주를 바라보았다. 치주는 그저 뜨거운 눈물을 쏟아 낼 뿐이었다.
"황제 폐하, 폐하는 치주를 잃고 대신 보잘것없는 계집애를 하나 얻으셨사옵니다."
단지흥이 생각해 보아도 치주는 사라지고 치주의 그림자만 남은 듯했다. 이 여인은 치주의 얼굴, 치주의 웃음, 치주의 열정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결코 그 치주는 아니었다. 예전의 그 성숙한 치주는 그곳에 없었다. 지금 앉아 있는 여인은 하나의 계집아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는 확실히 치주였다.
"치주, 왜 이렇게 되었느냐?"
단지흥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침통하게 말했다. 그러자 치주는 소리 없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한동안 이렇게 울고만 있더니 이윽고 그녀는 그날 밤 후원에서 처음으로 단지흥을 만났던 일이며 원래부터 천애 고아 신세로 먹을 것이 없어서 창산을 헤매다가 대환희 보살 눈에 띄어 그녀의 동굴로 잡혀 간 일, 그날 밤 충피에게 납치된 일, 그리고 자기는 추호도 단지흥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조금도 거짓이 없이 솔직하게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단지흥은 치주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녀는 너무나 작아서 마치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얘기하는 내내 가엽게도 덜덜 떨고 있었다. 단지흥은 이 여인에게 뜨거운 정이 솟구침을 느꼈다. 그는 그녀가 측은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연신 눈물을 흘리면서 한참 동안이나 나직나직 이야기를 하더니 돌연 정색을 하며 비장하게 말했다.
"전 줄곧 고통을 당했지만 그 고통이 두렵지 않았사옵니다. 전 언젠가는 꼭 폐하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사옵니다. 폐하를 만나기만 하면 전 제 진심을 모두 말씀드리려 했는데……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단지흥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치주, 난 그 몇 해 동안 줄곧 너를 찾았었노라……."
날은 진작에 저물었고 점점 더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영고는 눈이 빠지게 단지흥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단지흥이 자기를 데리고 가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원망하지 않았다. 그가 여전히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시 단지흥과 같이 있게만 된다면 더는 옥신각신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정성을 다해 즐겁게 해 주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그녀는 황궁에서 단지흥과 꿈같은 나날을 보내면서 여인은 물과 같고 사내는 불과 같다는 도리를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도 물 속에 들어가면 꺼지고 만다. 그러니 자기 아닌 다른 여인에게 몸과 마음이 뺏겨 버리면 자기를 향해 타오르던 그의 불길은 꺼져 버리지 않겠는가. 그가 떠나간 이후 그녀는 골똘히 이 생각만을 하면서 앞으로 더는 그의 신경을 건드리지 말고 여인의 매력을 다해 그를 사로잡아 그가 더는 다른 여인한테 마음이 끌리지 않도
록 하리라고 작심했다.
사내가 떠나간 지 여러 날이 되었으니 그 동안 여인을 가까이하지 못한 욕정이 불같을 것임은 뻔한 일이다. 그가 만일 자기를 찾아온다면 그의 가슴속 불을 모두 사르고 그 자리에 잔잔한 물결이
찰랑이게 해 줄 터였다. 영고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사뭇 정성 들여 요염하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곱게 빗어 내리고는, 그녀는 온밤을 꼬박 새우며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경이 되도록 그는 올 줄을 몰랐다.
단지흥은 치주를 안고 있다가 갑자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치주, 그 놈들에게 그런 곤혹을 당하면서 너는 내 생각을 했겠지?"
치주는 몹시 지쳐 있었지만 성심껏 대답했다.
"전 언제나 폐하 생각을 했사와요……. 한 순간도 폐하를 잊은 적이 없었사와요……. 늘 폐하 생각을 하면서 고통을 잊으려 했었사옵니다……."
단지흥은 몸서리 쳐지도록 격분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치주에 대한 연민이 강해지고, 그녀의 육체에 대한 갈망으로 불타 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치주가 아니었다. 다시 옛날의 그 치주가 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사내의 욕정을 더는 받아 낼 수 없는 몸, 그녀는 꽃떨기가 아니라 꽃봉오리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치주는 일순 육감적으로 단지흥이 자기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제 폐하, 폐하는 저를 원하고 계시는군요?"
단지흥 역시 사내였다. 아무리 지위가 높더라도 사내라는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오면 누구나 여인 앞에서 일종의 미친 듯한 갈구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는 불타는 눈길로 뚫어지게 치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절레절레 고개를 내흔들었다.
"자, 그런 소린 말고 이제 그만 잠을 자 둬, 피곤할 테니……. 나도 그만 가서 쉬어야겠다."
이제 치주에게서 여인의 성숙미를 원해서는 안 된다. 그는 몹시 착잡했지만 내색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치주는 그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고는 뜨거운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절 불쌍히…… 여겨 주시와요. 제발, 제발 가지 마시와요……."
단지흥은 못내 서글펐다. 그는 힘없이 주저앉아 와락 치주를 끌어안았다. 말은 안 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원하고 있다는 걸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자그만한 치주를 어떻게…… 단지흥은 마음속으로 격하게 도리질을 쳤다.
"폐하는 제가 싫어지셨나요? 제발 절 버리지 마시와요. 제발, 폐하……."
치주는 가냘프게 어깨를 들썩였다. 단지흥은 더욱 힘껏 치주를 끌어안았다. 그러고 있노라니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는 환상 속을 헤매 돌다가 일순 정말로 과거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져 들었다. 일단 착각 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그는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듯하더니 별안간 치주를 눕혀 놓고는 정신없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치주를 애무하였다. 치주 역시 거부하지 않고 그에게 몸을 휘감아 왔다. 이내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치주는 윽 하며 짧은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속으로 삼켰다. 그러나 단지흥의 몸놀림이 갈수록 격렬해지자 그녀는 더 이상 못 참고 그만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댔다. 단지흥은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몸을 추슬렀다.
"폐하, 제가 소리지르는 걸 상관하지 마시옵소서. 이제 곧 저도 좋아질 것이옵……."
치주는 애달프게 애원을 했다. 그러나 단지흥은 치주의 몸에서 피를 보았다. 구양봉의 난폭한 짓이나 단지흥의 사랑이나 치주한테 피를 흘리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치주, 이럴 줄은 몰랐노라. 너는 이젠……."
하지만 치주는 단지흥을 꼭 끌어안고 미친 듯이 소리쳤다.
"아뇨, 저도 여인이옵니다. 저도 여인이옵니다. 폐하, 진정 제가 싫어지신 것은 아니시겠죠, 네?"
영고는 도저히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불안하게 서성여댔다. 그러다가 문득 피리를 가져다 입에 댔다. 그러나 숙녀동에서라면 모를까 이곳 황궁에서 야밤에 피리를 분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피리를 내던지고는 선뜻 칼을 움켜쥐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내려서서 정신을 한곳에 모아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오만 가지 잡념 때문에 제대로 되지가 않았다.
그때 느닷없이 한 사내의 목소리가 귓전에 날아와 꽂혔다.
"무슨 놈의 검술이 그래? 별로다!"
"누구ㄴ?"
영고는 흠칫 놀라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소리쳤다. 그러자 사내는 목소리를 죽여 가며 나직이 말했다.
"떠들지 말아요, 떠들지 말라니까. 남들이 모두 잠을 자고 있지 않소?"
그러더니 삽시에 대들보 위에서 한 사람이 훌쩍 뛰어내렸다. 주백통이었다.
주백통은 황궁에 있는 커다란 객실로 안내되었다. 그 큰 방을 혼자 차지하고 있자니 밤이 이슥하도록 잠이 오지 않아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슨 방이 이렇게 커? 이런 큰 방엔 한 번도 들어와 본 적이 없으니 어디 잠이 와야지, 원. 에잇!'
그는 이리저리 잡 생각을 굴리다가 밖으로 뛰쳐나가 지붕 위로 훌쩍 솟구쳐 올라갔다. 한밤중에 지붕 위로 올라가니 그는 썩이 신이 났다. 그래서 지붕 위를 이리저리 쏘다니다가 마침 영고의 침궁에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는 이곳이 자기가 든 방보다 훨씬 좋은 것을 보자 은근히 약이 올랐다.
'쳇, 단황 나으리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군. 이곳이 내가 든 방보다 훨씬 좋잖아. 한데 왜 나한테는 이런 방을 내주지 않은 게지? 그러고서야 무슨 훌륭한 친구람.'
그는 속으로 게두덜거리며 용마루 밑 대들보로 살짝 숨어 들어갔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데 일순 한 여인이 침대에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주백통은 그 여인을 보고 엉겁결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아이구머니, 저 여잔 옷을 홀랑 벗었구먼.'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니 여인은 주섬주섬 옷을 입고 있었다.
'워낙 대리 사람들은 아주 괴상한 사람들이로구나. 옷을 홀딱 벗고 침대에 들지 않나, 그러더니 또 한밤중에 일어나 옷을 주워 입지 않나…….'
여인은 옷을 입더니 대뜸 피리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보고는 주백통은 벌써부터 마음속으로 노랫가락을 흥얼거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여인은 뜻밖에도 피리를 쳐다보며 멍청하니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피리를 내팽개치고는 대뜸 검을 뽑아 들었다.
'허어, 저것 좀 보게! 피리를 불려나 하고 흥에 겨웠더니 금세 사람을 실망시키고 이제 다시 검무를 추려 하는군. 신난다! 보아하니 단씨네 사내들은 모두 좀스럽군. 극구 일양지공을 보여 주려 하지 않더니, 여인들한테는 또 밤에만 검무를 추게 하는군. 저 여인이 검무를 추게 되면 난 그 일양지공을 다 볼 수 있지 않을까.'
주백통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형께선 언젠가 대리 단씨들한테 육맥신검이란 기공이 있다고 했었지. 이 여인은 혹 이 밤에 사람이 없으니 그 육맥신검을 연마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일양지공이 아니라도 육맥신검은 볼 수 있겠다.'
주백통은 혼자 흥에 겨워 대들보에 앉아 몸을 건들거렸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그녀의 무예는 별로가 아닌가. 그는 흥이 깨져 시들해져서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영고는 주백통을 보고는 쌀쌀맞게 내쏘았다.
"당신은 누구예요? 누군데 감히 예까지 들어온 거예요?"
"난 그저 당신이 검술을 익히는 걸 구경했을 뿐이오. 그런데 보니까 당신의 검술은 아무것도 아니구먼."
주백통은 헤헤거렸다. 영고는 사실 검법에 능하지 않았으므로 주백통이 빈정거려도 대수롭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 말엔 개의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물었다.
"누구냐니까요?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도리대로 말하면 대리 황궁에서 황비의 침궁을 이렇듯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영고는 워낙 그런 크고 작은 규례를 조금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무료하던 참이라 이 사내를 상대로 심심풀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백통은 선선히 대답했다.
"주백통이라고 하오. 사람들은 나더러 놀기 좋아한다고 완동이라고도 부르지. 단황 나으리의 친구요. 그저 무료하여 어찌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을 뿐이오."
"그럼 당신도 무예를 알고 있겠군요?"
영고는 자못 호기심이 일었다. 주백통은 자기 가슴팍을 펑펑 두드리며 대답했다.
"알고 있다뿐이오. 나의 검술은 천하에서 가장 훌륭한 거요. 당신은 종남산의 전진교 얘기를 듣지 못했소? 난 전진교 사람이오."
영고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녀는 운남에만 틀어박혀 있었기에 전진교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럼 전진교는 모른다손 치더라도 왕중양도 모르오?"
"왕중양이오? 그분은 중원 무림의 제일인자가 아닌가요? 모두들 그분이 무슨 경서를 얻었다고들 하더군요. 단황 나으리도 그 경서를 얻으려고 중원에 가셨던 건데……."
주백통은 그녀가 왕중양을 안다고 하자 더욱 기가 살았다.
"그렇다니까. 내 알려 주지. 내가 바로 왕중양의 사제요. 그러니 내 무예가 어떠하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잖겠소?"
영고는 깜짝 놀랐다.
'무슨 전진교라는 건 생전 듣도 보도 못했지만 이 사람이 원래 왕중양의 사제였구나. 그렇다면 무예가 대단하겠는걸.'
"이봐요. 그럼 내게 검술을 가르쳐 줘요, 네?"
영고는 주백통에게 바짝 매달렸다.
"아, 그러지요, 그래! 뭐 어려운 일이라고! 당신은 단황 나으리의 황궁 사람이니 내가 당신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면 결국 단황 나으리를 도와주는 셈이니까."
영고는 단박에 주백통에게 호감을 느꼈다.
'폐하가 어디에서 이런 솔직한 사람을 데려왔는지 모를 일이네. 이 사람은 이 황궁 안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잔꾀가 없고 솔직하구나. 좀 어리석다 할까? 아무튼 충직하고 미더운 사람이다.'
단지흥은 떨고 있었다. 그러나 치주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 웃음은 필경 억지로 짜 낸 것이리라. 더군다나 저리도 피를 흘리는데……. 아닌게아니라 그녀가 너무나 피를 많이 흘리는지라 단지흥은 더럭 겁이 났다.
"치주, 내 어의(御醫)를 데려오겠어!"
그러나 치주는 극구 말렸다.
"폐하, 제가 폐하와 정을 나누는 건데 어의는 무슨 어의이옵니까? 괜찮사옵니다. 폐하는 저와 정을 나누기를 소원하지 않으시는군요?"
치주는 단지흥이 자칫 자기를 멀리할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통스러워도 폐하를 위해 이를 악물고 참으려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이런 그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없이 측은한 눈길로 치주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치주는 단지흥을 힘껏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폐하, 폐하가 절 사랑하기만 하신다면 저따위는 어찌 되든 아무 상관도 없사옵니다. 그러니 그런 염려일랑 마시고 힘을 다 쏟아 끝까지 욕정을 푸시와요……."
"그래도 그럴 수는 없노라. 내 어찌 너에게 그런 모진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고. 내가 널 마음에 두지 않아 그러는 것이 아니니 서운해 말거라."
단지흥은 치주의 등을 토닥여 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치주는 어깨를 들썩여 가며 흑흑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이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으니 살아 있어도 산 목숨이 아니라는 생각에 치주는 한스럽기 그지 없었다. 단지흥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면서 그저 치주의 어깨를 감싸줄 뿐이었다.
아직도 날은 밝지 않았는데 단지흥과 치주는 말없이 서로 마주앉아 있었다. 치주는 격한 가슴을 억누르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폐하께선 이제 나를 좋아하시지 않아. 난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여인이 되고 만 것인가? 혹시 내가 성숙한 여인 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폐하께서 날 좋아하시지 않는 것일까? 아냐, 그건 아니야. 그렇다면…… 내가 모든 것을 다 알려 드려서? 그래, 이미 이렇게 남에게 짓밟힌 몸으로 폐하께서 날 좋아하시길 바랄 순 없지. 폐하가 어찌 화류의 찌꺼기를 좋아할 수 있으랴. 폐하가 어찌 보잘것없는 나 같은 여인을 좋아할 수 있으랴. 난 정숙한 여인이 아니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는 것이다. 난 이제 황제 폐하를 만나 보았으니 마땅히 죽어야 하는 거다. 그래, 아직도 미련을 두고 옛정을 다시 꿈꾸고 있으니 이 얼마나 미련한가? 난 마땅히 죽어야 한다. 내가 죽어야 폐하께 근심을 덜어 드릴 수 있다…….'
치주는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심경이었다.
단지흥은 치주를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잘 덮어 주면서 따뜻하게 말했다.
"치주, 난 때론 허튼 생각도 했었지. 궁내 사람들이 너를 어디로 빼돌리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나와 함께 있는 게 싫어 도망한 것은 아닌지……. 하지만 이젠 됐어. 이젠 이렇게 치주가 돌아왔으니 다 잘된 거야. 우린 다시는 갈라지지 말아야 해."
단지흥은 정겹게 치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갓 멱을 감은 듯 그녀의 머리는 땀으로 홈빡 젖어 있었다. 그녀는 눈동자를 말똥말똥 굴리며 말없이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렇게 그의 모습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
"치주, 이제 그만 쉬어. 내 욕정 때문에 너를 다칠 순 없노라. 그만큼 너를 좋아하기 때문인 게야."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이내 방문을 나섰다.
영고는 주백통이 하라는 대로 칼을 휘둘러댔다. 손을 열심히 놀리면서도 그녀는 머리 속으로 생각을 또글또글 굴리고 있었다.
'난 이런 사람은 처음 봤어. 이 사람은 궁리가 있는 사람 같지 않고 꼭 어린애 같아. 무슨 말을 해도 다 곧이듣는단 말이야. 내가 황제의 누이동생이라고 말해 버릴까? 내가 황비인 걸 알면 이 사람이 다시는 나한테 놀러 오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난 저 사람한테서 검술을 잘 배워야겠다. 보아하니 중원 왕중양의 검술은 참말로 심오한 것 같구나. 그러니 황제도 왕중양과 겨루러 천리도 마다 않고 간 거겠지. 나도 이 주백통한테서 무예를 배워 중원에 한 번 가 봐야지.
그럼 폐하도 날 막지는 못할걸.'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검을 휘두르며 검술을 배우다가 밤이 퍽 늦어서야 주백통과 서로 헤어졌다. 주백통이 막 돌아가고 나서 방으로 들어서는데 뒤미처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단지흥이었다. 그는 영고를 보자 유난히 반색을 했다.
"영고, 난 그대가 벌써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 깨우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직 자지 않았었군. 밤이 이토록 늦었는데 왜 자지 않는 게요?"
"폐하는 어디 갔다 이제 오시는 건가요. 궁녀들을 하나하나 다 만나 보고 이제 싫증이 나서 제게 오신 건가요?"
영고는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오지 않자 적이 화가 났었다. 그래서인지 자못 쌀쌀한 기색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나오자 단지흥은 대번에 반가운 마음이 싹 가셨다.
"무엄하오. 난 치주에게 갔었을 따름이노라."
단지흥은 퉁명스레 내뱉었다. 그 말에 영고는 바싹 약이 올라 앞뒤 안 가리고 더욱 빈정거렸다. 그녀는 기실 단지흥이 치주를 데려온 줄 모르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자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거야 이상한 일이 아니죠! 폐하께선 워낙 그 계집을 찾으러 중원으로 가신 거니까요. 폐하께선 그 여인과 함께 오셨으니 꽤 즐거우셨겠네요?"
단지흥은 치주 때문에 마음이 몹시 울적하여 영고에게 위로를 얻으려던 것이었는데 그녀가 트집을 잡자 노엽기 이를 데 없었다.
'오래 갈라졌다 만나게 되면 신혼 때보다 더 정답게 된다는 말도 있거늘, 나와 영고는 한 달 남짓이나 서로 만나지 못했는데도 나를 보고 조금도 반기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더 쌀쌀맞게 구니 실로 답답한지고.'
단지흥은 불쾌한 기색으로 영고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영고는 몸을 홱 돌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단지흥은 엉거주춤하니 서 있다가 그래도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뒤따라 들어갔다. 단지흥은 상석에 가 앉고 영고는 그예 토라져서 등을 돌린 채 그를 외면했다. 단지흥은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면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대도 치주가 어떻게 됐는지 안다면 이러진 않을 게요. 웬 사악한 놈의 법술에 걸려 그만 어린애가 돼 버렸단 말이오……."
단지흥은 노기를 가라앉히고 치주의 일을 상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덧붙여 오늘 밤 일도 자세히 알려 주었다. 여안들이란 본시 툭하면 투정을 부리니 혹시 이렇게 몇 마디라도 다정하게 말해 주면 그녀도 화가 가라앉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말을 하다 보니 치주가 여사여사하게 좋은 여인이라는 둥, 치주가 어떻게 자기를 기다렸다는 둥, 또 자기가 오늘 밤 어떻게 치주를 위로해 주었다는 둥.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튀어 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자 영고는 가슴이 터질 지경으로 화가 치밀었다.
'그래 당신은 그 여인을 품에 안고 있었단 말이로군요? 허, 가소롭게시리. 그러고도 뻔뻔스럽게 나한테 와서 그 말을 해?'
영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냉랭하게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그 여인을 품에 안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니 잘됐군요. 그런데 왜 거기 있지 않고 나한테 온 거예요?"
"그녀는 몹시 피곤해. 쉬어야 한단 말이야."
단지흥은 영고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고 침울하게 말했다. 그러자 영고는 더한층 화가 나서 팩 내쏘았다.
"그래도 폐하는 그 애한테 가 보는 게 좋겠어요. 가서 잘 달래서 당신 말을 듣게 하란 말이에요. 안아 주고 입도 맞춰 주고, 하고 싶은 걸 다 하시란 말예요. 내게 억지로 둘러대지 마시고요."
그러더니 영고는 벌떡 일어나 이불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단지흥은 난처한 기색으로 엉거주춤하니 그녀를 도우려 했다. 그러자 영고가 손을 탁 치웠다.
"그만두세요, 폐하! 그 계집에게 가서 주무시라구요. 전 이만 잠을 자야겠어요."
단지흥은 생전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 그는 대로하여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다.
"영고, 만일 그대한테 일이 생겼더라도 난 그대에게도 똑같이 대해 줬을 거야. 그래 그토록 화를 낼 건 뭔가?"
"만일 저한테 일이 생기면 전 절로 죽어 버릴 테니 폐하께선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영고도 영고대로 있는 대로 성을 냈다. 그녀는 아예 대성통곡을 해댔다.
"폐하, 전 오늘 몸이 몹시 불편하니 제발 좀 가 주세요. 폐하껜 귀비가 저 하나뿐이 아니잖아요? 어서 가세요! 제발 좀 그만 괴롭히시고!"
단지흥은 화가 나다 못해 어치가 없어 멍하니 서 있다가 홱 나와 버렸다.




제24장 비운의 여인, 치주
영고와 주백통은 아주 마음이 통했다. 두 사람은 점점 더 함께 있을 때가 많아졌는데 그때마다 오로지 무예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었다. 단지흥도 둘이 있는 모습을 더러 보았으나 그저 웃기만 할 뿐 별다른 기색은 없었다.
'영고가 최근에 심기가 좋지 못하니 백통 형한테 무예를 배우는 것도 괜찮을 게야. 심심풀이를 하느라면 좀 나아질지도 모르지.'
영고는 무예를 배우는 데 아주 열심이었다. 하루는 단지흥은 마음을 먹고 두 사람이 무예를 수련하는 곳으로 찾아갔다. 주백통은 단지흥을 보자 반색을 했다.
"단황 나으리, 저 여인은 아주 열심으로 무예를 배우길 원하는군요. 한데 폐하의 그 일양지공은 왜 배워 주시질 않수? 일양지공은 단씨 가문 사람이 아니면 전수해 주지 않는다더니 그럼 저분은 단씨 가문 사람이 아니우? 아니면 폐하도 강호의 규례를 좇아 사내에게만 가르치고 여인한테는 가르치지 않는 것이우? 폐하가 일양지를 가르쳐 주지 않으면 이 주백통한테서 절름발이 재간밖에 못 배운다니까요."
단지흥은 웃으면서 영고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주백통이 가르친 검술을 열심히 익히고 있었다. 그는 마음이 한결 개운했다.
'영고가 나와 함께 있는 것보다 날마다 검술을 배우려 드니 그것도 괜찮은 일이야.'
단지흥은 미소를 머금고 주백통에게 말했다.
"백통 형, 당신은 전진교의 수제자가 아니오? 영고가 당신한테서 무예를 배우게 된 건 복 중에 복이라 할 수 있소. 절름발이 재간이라니 너무 겸손한 말씀이시오."
주백통은 자못 우쭐해져서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단지흥이 대전으로 돌아오니 네 시위들이 모두 다 황제를 배알하러 와 있었다.
승상이 먼저 아뢰었다.
"폐하, 근자에 들어 대리에서는 괴이한 일이 속속 생기고 있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서너 살밖에 안 되는 사내애들이 없어지고 있는 데 어떤 놈의 소행인지 묘연하기 이를 데 없사옵니다. 이 일로 인해 지금 민심이 동요되고 있사오니 폐하께서 친히 영을 내리시어 잘 살펴보게 하심이 좋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허, 실로 괴이한 일이로고. 하면 마땅히 바로잡아야 할 것인즉, 사소한 단서라도 없느냐?"
그러자 선비가 다시 아뢰었다.
"한 집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옵니다. 한밤중에 어린애가 불에 덴 듯 울기에 그 어미가 급히 더듬어 보았은즉, 방금까지 있던 아이가 만져지지 않는지라 급히 등잔에 불을 켜니 검은 그림자 하나가 얼핏 보이더라고 하더이다. 그래 고함을 질렀더니 검은 그림자는 어린애를 내버리고 급히 도망가 버렸다는 것이옵니다. 얼마나 빨리 내빼는지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하옵니다."
단지흥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서서히 입을 뗐다.
"이전에 보정제가 재위할 즈음에 엽이랑(葉二娘)이란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은 갖은 악행을 다 꾸몄다 하네. 한데 한번은 남의 집 사내 애들만 붙잡아 간 일이 있었지. 그 여인은 자기 어린애가 남에게 잡혀 간 것이 원통해 그런 악행을 저질렀던 것이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도 강호 사람들이 저지른 짓일지 모르니 경들은 나가서 잘 살피도록 하게. 그리고 사실이 드러나는 대로 내게 속히 아뢰게."
네 시위는 황제의 명을 받잡고 급급히 떠날 준비를 했다.
선비는 세 사람과 의논하여 각기 흩어져서 알아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뭔가 소식이 있으면 포를 쏘아 신호를 보내자고 궁리를 짜두었다. 네 사람은 밤이 되자 굳게 악수를 나누고 각기 성밖으로 나왔다. 이 일은 주로 밤에 일어나므로 밤에 움직여야만 한층 더 빨리 그 전모를 밝혀 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선비는 월색을 빌려 급급히 다그쳐 갔다. 수림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 낡은 절이 하나 눈에 띄었다. 그는 잽싸게 그쪽으로 다가가 안을 기웃거렸다.
'정말 헐망하군. 아무래도 기미가 수상쩍어. 일단 들어가서 이상한 징조가 있는가 살펴봐야겠다.'
선비는 몸을 솟구쳐 가볍게 담장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절 안에는 무슨 인기척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한데 신상(神像) 앞에 향불이 피워져 있고 제물이 놓여 있었다.
'이처럼 헐망한 절에도 향을 피우고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이 있다니 괴이한 일이로고…….'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똑바로 신상을 바라보았다. 중년 문사(文士)의 신상이었는데 누구의 사당인지 알 수 없었다. 선비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승상인 나도 알지 못하는 신을 절에 모시다니, 정말 제멋대로군.'
그때였다. 등뒤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선비는 얼른 한켠으로 숨었다. 이윽고 흑의를 걸친 사람들이 쭉 절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절에 들어오자마자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았다.
너나없이 자루 하나씩을 들었는데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울룩불룩한데다 자루 아가리를 단단히 비끄러매 놓아 적이 수상쩍었다. 그들은 자리에 앉더니 더는 말을 않고 문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이윽고 앙칼진 웃음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 소리는 얼핏 사람의 소리 같지 않게 기괴하게 울리며 시시각각으로 가까워지더니 드디어 바로 앞에서 들려 왔다. 다음 순간, 절 안으로 난쟁이 하나가 톡 뛰어들어왔다. 선비는 그 난쟁이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그 난쟁이는 바로 운남 구구십팔동의 동주 충피였다.
충피는 흑의 사내들을 쭉 둘러보더니 느물느물 외쳤다.
"노형들, 그래, 가져 오시었소?"
그러자 모두들 자기 곁에 놓아둔 자루들을 앞으로 내밀었다.
"모두 여기 있소이다. 다행히 명을 어기지 않았소."
한 사람이 대답했다.
"좋소, 그럼 내 끌고 가지."
그리고는 충피는 휘파람을 훽 불었다. 그러자 뒤미처 뚱뚱보 여인 다섯이 어기적어기적 들어와 말없이 자루 하나씩 집어들고 밖으로 나갔다.
"자, 보살님께 말씀드려 주지. 보살님께선 무척 기뻐하실 거요. 그리고 보살님 명령만 떨어지면 내 즉각 독을 해독시켜 주지."
충피는 자못 거들먹거렸다. 그러자 모두들 일어나 일제히 충피에게 읍을 했다.
선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충피가 언제 보살의 수하로 들어갔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대리에서 어린애들이 없어지는 게 어느 놈의 소행인가는 확연해지는 듯싶었다. 대환희 보살의 짓임에 틀림없었다. 이 악독한 대환희 보살이 앞으로 또 무슨 사단을 빚어낼지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선비는 사뿐 몸을 날려 잽싸게 절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절 뒤로 돌아가 순식간에 포를 터뜨렸다. 다음 순간 화포(火砲)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마침 뚱뚱보 여인 하나가 절문 밖으로 나오다가 그것을 보고는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절 안에 있던 사람들도 고함소리를 듣고 급히 밖으로 뛰쳐나왔다.
"무슨 일이냐?"
층피는 깡충깡충 뛰어오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선비가 그 앞을 떡 가로막았다. 충피는 대번에 선비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또 네 놈이로구나? 네 놈은 대리에서 벼슬살이는 하지 않고 뭣하러 예까지 와서 귀찮게 구는 게냐?"
"충피야, 지난번에 구구십팔동에서 네 놈은 요행히 목숨을 건졌다. 하나 늘 운수가 좋을 줄 알았더냐? 넌 오늘 밤 잘못 걸려들었어!"
선비는 대갈일성을 내지르며 붓 한 쌍을 꺼내 들었다. 그는 붓 쓰는 솜씨가 대단하여 이 한 쌍의 붓으로 대여섯은 너끈히 대적할 수 있었다.
충피는 파리하게 질려 얼른 옆으로 비켜 나면서 소리쳤다.
"빨리 저 놈을 죽여 버려. 그 단황이란 놈이 알게 되면 우린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없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흑의 사내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고 똑바로 선비를 찔러 들어왔다. 선비는 급히 물러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한 쌍의 붓을 귀신같이 휘둘러대며 급급히 공격을 들이댔다. 그는 붓을 휘두르면서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만일 그들이 신호를 보았다면 즉시 달려올 것이다. 이들의 무예로 보아 얼마간은 지탱해 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들이 조금만 늦게 당도해도 난 오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선비는 한 쌍의 붓을 거침없이 연신 휘둘러댔다.
충피는 몇 사람이 나서도 선비 한 사람을 제압하지 못하자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 밥통들, 어서 저 놈을 죽이지 못하고 뭣 하는 게냐! 저 놈을 죽이지 못하면 너희들은 모두 독벌레한테 죽고 말 줄 알아라!"
흑의 사내들은 화들짝 놀라 더욱 더 가열차게 검을 휘둘러댔다. 그들의 검세가 사뭇 날카로워지자 선비는 더는 공격을 하지 못하고 막아내기에만 급급했다. 그러자 자연 틈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선비는 그만 팔을 찔리고 말았다. 중상은 아니었지만 선비가 피를 흘리는 것을 보자 그들은 사기가 부쩍 올랐다.
"저 놈이 상했다. 빨리 죽이자!"
한 자가 고함을 지르며 득달같이 검을 찔러 왔다. 선비는 눈앞이 아찔해지며 세 시위들이 어서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형제들이 오지 않으면 난 죽고 말 것이다.'
그때였다. 불현듯 긴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공력이 아주 대단한 사람 같았다. 선비는 그가 바로 네 시위 중 내력이 가장 출중한 농부임을 금세 알아보았다. 선비는 기쁜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대리의 사대 시위가 왔다. 목숨이 아깝거든 어서 손을 거두어라!"
그러자 한 자가 주춤하더니 주위를 흘끔흘끔 살피고는 삽시에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충피는 대로하여 소리소리 질러댔다.
"도망친다 해서 내 손아귀를 벗어날 줄 아느냐! 네 놈은 독에 중독된 것도 잊었단 말이냐? 빨리 저 놈을 죽여 버리지 않으면 독이 퍼져 죽게 될 줄 알아랏!"
그러나 그 사내는 막무가내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머지 놈들만이 충피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여전히 검을 휘둘러댔지만 그 검세는 사뭇 약해져 있었다.
농부는 나는 듯이 달려왔다. 그는 아까 화포가 공중에 오르는 것을 보고는 즉시 자기도 한 방 터뜨려 어부와 나무꾼에게 신호를 하고는 급히 달려온 터였다. 그가 막 절에 다가섰을 때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자세히 보니 뚱뚱보 여인들이었다.
농부는 그 여인들을 보자 몸서리를 치며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이 뚱뚱보 년들아, 썩 물러가지 못할까!"
그러자 뚱뚱보 여인들은 가소롭다는 듯 이죽거렸다.
"물러가라고? 원래 우리가 여기에 와 있었고 네 녀석이 우리 자리에 뛰어든 건데 누구더러 물러가라는 게냐? 굴러가라면야 우리도 누군 못지않게 잘할 수 있다만!"
농부는 선비의 안위가 몹시 근심이 되었다. 저쪽에서 왁자하니 시끄러운 것을 보면 선비가 놈들과 생사결투를 벌이고 있음에 분명하였다. 그는 코웃음을 치면서 큰소리로 호통쳤다.
"그따위 개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썩 비키지 못할까! 네 년들과 말동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농부는 몸을 솟구치려고 잽싸게 사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뚱뚱보 여인들은 대번에 눈치를 채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주위를 둘러싸는 것이 아닌가.
"농부, 네 놈은 지난번에 요행히 우리 손을 벗어났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은 결코 벗어날 수 없어."
뚱뚱보 여인들은 소리를 치면서 일제히 덤벼들었다. 평소에는 숨마저 헐떡거리며 퇴물같이 굼뜨더니 일단 싸움을 시작하니 그럴 수 없이 몸놀림이 민첩했다. 그녀들은 각기 병장기 하나씩을 들고서 농부의 주위를 정신 산란하게 뛰어다니며 공격을 들이댔다.
한 여인은 커다란 국자를 들고 농부의 머리를 겨냥해 똑바로 돌진해 들어왔다. 그런가 하면 한 여인은 길다란 젓가락 한 쌍을 한 손에 하나씩 갈라 쥐고는 번갈아 가며 찌르려 들었다. 그 여인이 젓가락으로 찔러대는 속도는 쌍검을 쓰는 것에 비할 만큼 빨랐다. 그 여인은 이 젓가락으로 계속 농부의 눈만 겨누었는데 초수가 대단히 지독했다. 다른 한 여인은 사발 한 개를 움켜쥐고 그 사발로 농부의 머리를 덮어 버리려고 악을 썼다. 농부가 이 세 여인들을 막아내기 란
실로 어려웠다.
"대리국의 승상과 장군이 다 왔는데 누가 또 오냐?"
뚱뚱보 여인 하나가 농부를 놀려대자 다른 한 여인이 깔깔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물론 그 시위대장(侍衛大將)과 당조어사(堂朝御史)가 오겠지. 뻔한 걸 뭘 물어 봐?"
농부는 들은 척도 않고 일심으로 세 여인을 막아냈다.
한편 선비는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이 흑의 사내들은 비록 무예가 그리 대단한 편은 아니었지만 대여섯 놈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그들의 검은 무시로 선비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충피는 한옆에 서서 손뼉을 쳐 가며 부추겼다.
"잘한다, 잘해! 선비를 제일 먼저 죽이는 사람을 제일 먼저 해독시켜 주겠다!"
그러자 흑의 사내들은 저마다 앞다투어 선비를 죽여 없애려고 발악을 했다.
뚱뚱보 여인 셋은 제각각 병장기를 휘둘러대면서 입으로는 연신 농부를 구슬렸다.
"농부, 내 보기엔 네 놈은 우리 보살님을 참으로 기쁘게 해 주겠다. 지난번에도 그랬잖니? 그러니 내 말만 듣고 어서 보살님 수하가 되라니까."
"잡소리 집어치워! 대환희 보살 년이라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다. 네 년들도 그 뒤를 따르다간 비참하게 죽고 말걸!"
농부는 있는 대로 악을 썼다. 그러자 뚱뚱보 여인들도 맞고함을 쳤다.
"네 놈의 대리국은 손바닥만한 땅뙈기에 불과한데 무슨 그리 잘난 척이 대단하냐! 너희가 하는 짓은 아무리 극악해도 악모가 아니고 우리만 악모를 꾸민다더냐! 대환희 보살님께선 너희네 대리국 군신들을 잡아다가 모두 독벌레한테 죽게 하고 말 게다!"
뚱뚱보 여인들과 농부는 입씨름에서도 서로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농부, 썩 물러가지 못햇! 중뿔나게 버텨 봤자 너희 두 놈은 독약에 중독되어 비명횡사하고 말아!"
뚱뚱보 여인 하나가 소리쳤다. 그때 선비의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전력을 다해 박투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농부는 한시 바삐 달려가 선비를 구하고 싶었으나 뚱뚱보 여인들은 의외로 검질기게 달라붙었다. 그녀들은 각일각 바싹 달려들며 사발, 젓가락, 국자를 휘둘러댔다.
선비가 몸을 날리며 소리를 질렀다.
"물러서라, 무슨 할 짓이 없어 어린애들까지 해치려 하는 게냐? 그건 절대 안 된다!"
농부는 선비가 자기한테 알려 주느라고 일부러 고함을 쳐대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어린애들을 붙잡아 가는 것이 바로 대환희 보살 짓이니 어서 단지흥에게 전하라는 뜻인 것이다. 그러나 선비가 위험에 처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대로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그는 목청껏 나무꾼과 어부를 불러댔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어부와 나무꾼은 나타나지 않았다.
뚱뚱보 여인이 징글맞게 웃으면서 비아냥거렸다.
"농부, 그따위로 바보처럼 소리를 질러대지 말고 순순히 우릴 따라가! 후회하지 말고!"
농부는 암담하여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단지흥은 이날 국사를 처리하자마자 급히 치주에게 달려갔다. 치주는 쪼그리고 앉아 새를 구경하고 있었다. 짹짹거리는 새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비껴 있었다.
치주는 언뜻 고개를 들다가 단지흥을 보고는 손뼉을 치면서 소리쳤다.
"폐하, 폐하께서 오셨군요!"
단지흥은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
"치주, 요 며칠 사이에 별일 없었는고?"
그러자 치주는 단박에 고개를 숙이며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힘없이 대답했다.
"폐하, 전 요 며칠 사이 무척 괴로웠사옵니다……. 그날 일을 생각하면 전 견디기가 어려워서……."
단지흥은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라 그저 치주의 손을 쓸어 만질 뿐이었다.
"폐하, 폐하께서는 저를 더러운 여인이라고 하시겠죠? 전 순결하지 못한……."
치주는 언뜻 고개를 들고 단지흥을 보더니 말끝을 흐려 버렸다.
"치주, 그런 말은 하지 말거라. 난 너와 진심으로 사랑을 나누며 함께 오래 살기를 원하노라. 나의 마음속에 네가 자리잡고 있다는 걸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치주는 금세 눈물을 뚝뚝 떨궜다.
"폐하, 옛날에 전 한갓 쓸모없는 계집에 불과했고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사내의 애정인지도 몰랐사와요. 그러나 폐하의 총애를 받고 나서부터는 전 달라졌사옵니다. 여인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알게 된 것이옵니다. 전 진심으로 폐하 신변에 있는 여인이고 싶었사와요. 하지만…… 전 날마다 대환희 보살이 나를 뒤쫓고 독약으로 죽이려 드는 꿈을 꿨사옵니다. 하나 저는 그걸 폐하께 감히 말씀드릴 수 없었사와요. 저는 다만 언젠가 폐하 곁을 떠나야 할 날이 오면 죽
고 말려고 했었는데……. 이 치주 일찍이 운명이 이처럼 각박하여 그토록 많은 악인들을 만나게 될 줄은 미처……."
단지흥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얼었다. 그는 다만 그녀의 손을 꼭 감싸쥐고 만지작거릴 따름이었다. 치주는 일순 눈물을 흘리며 단지흥을 잡아 끌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라.
"폐하. 저는 사내들이 왜 그토록 여인을 찾는지 잘 알고 있사와요. 만일 황제께서 저를 거두지 않으시고 더는 저를 여인으로 대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무엇 때문에 목숨을 이어 가겠사옵니까?"
단지흥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잘 알고 있었으나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그녀는 단지흥을 재촉하면서 손을 가볍게 잡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페하, 저는 약재를 얻었는데 그것을 쓰면 더는 아프지 않다 하옵니다. 그럼 피도 흘리지 않을 거고……. 피만 흘리지 않는다면 폐하께서도 기꺼이 즐기실 수 있을 테죠, 그렇죠?"
치주는 살짝 미소를 띠면서 속삭였다. 단지흥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흡사 어린애 같았지만 그녀 자신은 극구 어린애이기를 원치 않고 있었다. 그녀는 오로지 여인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치주가 능히 여인다운 여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단지흥은 치주의 기색을 보고는 적이 긴장했다. 그는 치주가 다시 피를 흘리지 않을까 몹시 저어되어 넌지시 말을 돌렸다.
"치주, 침대에 앉아 내게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줘! 난 얘기를 듣고 싶노라!"
그러자 치주는 살짝 웃으며 몸을 안겨 왔다.
"황제 폐하, 폐하께선 여인과 함께 있을 때 단지 그녀와 이야기만 나누시옵니까?"
단지흥은 가만히 치주를 끌어안았다. 그는 가슴이 쓰라려 견딜 수가 없었다. 치주는 조금도 서글픈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전 이미 궁녀들에게도 밖으로 나가라고 분부해 놓았사와요. 제가 설혹 소리를 지르더라도 방해하지 말라고……."
치주는 자기가 죽고 사는 문제도 뒷전으로 여기고 있었다. 단지흥은 진심으로 감동되었다. 그녀는 살그머니 몸을 빼더니 침대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폐하, 올라오세요."
단지흥은 사람 할 짓이 아니라고 도리질을 치면서도 치주가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데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어 엉거주춤하니 침대로 올라갔다. 치주는 단지흥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은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긴장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단지흥은 차츰차츰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더 여인의 육체를 갈구하게 되어 일순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치주에게 파고들었다. 이제 그에게는 그녀가 지금의 이 어린애 같은 치주가 아니라 성숙하고 정열적이던 예전의 그 치주로만 보였다. 그의 눈앞에는 오로지 지난날의 성숙한 치주가 어른거릴 뿐이었다.
일순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었다. 치주는 황홀하게 웃으면서 속살거렸다.
"폐하, 제가 떠난 후 폐하께서는 제 생각을 얼마나 하셨사옵니까? 폐하께서는 조금도 제 생각을 하지 않으셨지요, 그렇지요? 맞사와요. 폐하는 제 생각을 안 하셨을 것이옵니다. 폐하한테는 여인이 한둘이 아닌데 그녀들이 폐하가 제 생각을 하실 틈도 없게 만들었을 것이옵니다. 폐하께서 화산의 무예 시합에 참가하러 중원으로 가시지 않았던들 어찌 저를 생각하게 되셨겠사옵니까?"
치주는 웃고 있었지만 진작부터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을 뻗어 곁에 있던 비단 수건을 움켜쥐었다.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게 되면 틀어막으려고 미리부터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치주는 이를 악물었다. 점점 더 고통이 밀려 왔다. 그러나 그녀는 황제를 향해 한껏 아름답게 미소를 지을 뿐 눈살 한번 찌푸리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일심으로 단지흥이 오매불망 바라는 그런 성숙한 여인이고 싶었다. 이 사내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달가울 것 같았
다.
단지흥은 꿈속을 헤맸다. 그는 그 옛날의 그 치주를 안고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 꿈같은 날로 돌아가서……. 그는 점점 더 절정으로 치달아 갔다.
치주는 이제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급히 그 비단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단지흥은 황홀경에 빠져 눈을 감고 꿈속을 헤매느라 도저히 치주의 기색을 알아챌 수가 없었다. 한 순간 찢어지듯 한 비명 소리에 그는 흠칫 놀라 번쩍 눈을 떴다. 치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한쪽으로 몸을 틀면서 그예 기진맥진해 버리고 말았다. 단지흥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치주, 치주, 내가 무슨 짓을……."
"아니에요, 폐하. 제가 원했던 것이옵니다! 제가 원했사와요! 폐하, 저를 버리지 말아 주소서, 폐하!"
치주는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단지흥은 침통하니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폐하, 죄송하옵니다."
치주는 비칠 몸을 일으키더니 침대에 꿇어 엎드려 단지흥에게 세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는 그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치주, 그럴 필요 없노라. 내 잘못이야. 난 꿈을 꾼 게야. 옛날로 돌아간 꿈을……. 난 결코 너를 버리지 않는다. 내 한번 천룡사 고승들한테 너를 보여 필히 고쳐 주겠노라. 내 필히 너를 고쳐 주겠노라!"
치주의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샘솟듯 흘러 나왔다.
"폐하, 폐하께서 이처럼 저를 돌봐 주시니 전 한평생 이 은정을 다 보답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단지흥은 치주의 등을 토닥이면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 만졌다.
"너는 실로 옥인(玉人) 같도다. 내 날마다 꿈에서 널 만나 볼 것 같아."
단지흥은 치주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행복에 겨워 살며시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부둥켜안고 살포시 잠에 빠져 들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이 두 남녀는 달콤하게 잠에 취했다.
나무꾼과 어부 두 사람은 황궁을 나가 남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한밤중이 되도록 무슨 이상한 기미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도 내처 걸어 가다가 어부가 언뜻 말을 꺼냈다.
"오늘은 돌아가고, 내일 다시 오세."
"폐하께서는 이 일을 강호 놈들이 한 짓으로 여기고 있네. 그 놈들이 한 짓이라면 관아에서는 본시 조사할 수 없는 터……."
그 순간 갑자기 멀리 하늘에서 별 같은 것이 번쩍 하더니 이내 사그라졌다.
"저건 저쪽 사람들의 화포로군!"
나무꾼이 외쳤다.
두 사람은 더는 아무 말도 않고 급히 그쪽으로 줄달음쳐 갔다. 얼마쯤 달려갔을 때 그들은 또다시 화포 불빛을 보았다. 그들은 그 불빛을 길잡이삼아 방향을 가늠하면서 내처 달려갔다.
한참이나 달려서야 그들은 그 낡은 절에 당도했다. 그러나 절 안팎을 샅샅이 뒤져도 땅바닥엔 낭자한 핏자국만이 선명할 뿐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 이곳에서 누군가 피를 흘리고 싸웠음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퍼뜩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적이 심각한 어조였다.
"보아하니 이곳에서 방금까지 싸움이 있었고 누군가 심하게 부상을 당한 모양이군."
여기에서 싸운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들 중 선비나 농부가 끼여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선비와 농부는 과연 이곳에서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필시 어떤 놈들과 맞닥뜨려 혈전을 치렀음에 틀림없는데 부상을 입은 사람이 선비와 농부일까. 만일 그들이 부상을 입었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황급히 황궁으로 돌아왔다.
대리는 소국이었지만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들은 태평 성대를 누렸다. 큰 사건이 일어나는 법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꼽는다면 보정 황제 때 겪은 대가뭄이나 역시 보정제 재위시 어느 해인가 엽이랑이 어린애를 잡아가 민심을 흉흉하게 했던 것 정도였다. 하나 지금은 연거푸 어린아이들이 없어질 뿐 아니라 대리국에서 가장 지략이 뛰어난 승상까지 종적이 묘연한 판이었다.
단지흥은 이마에 내천자를 그리고 잠시 묵묵히 말이 없더니 언뜻 두 사람에게 물었다.
"경들이 보기엔 어떤 놈들 짓 같은고?"
어부가 대뜸 아뢰었다.
"대리국 경내에는 강호객들이 허다하고 강호 문파들도 많사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나라의 법도를 어기지 않았고 다른 이상한 조짐도 보이지 않았나이다. 다만 대환희 보살만이 줄곧 폐하와 맞서고 있사온즉, 폐하, 이번 일은 그 여인 소행이 아닐는지요?"
그러자 농부도 읍을 하며 말했다.
"소신이 보건대 그 여인이 한 짓이 아니라 하더라도 따져야 할 일이 있사옵니다. 지난번 화산의 무예 시합 때에도 그 여인은 폐하에게 맞섰습니다. 이번에는 결코 가만 놔두어서는 안 되옵니다."
"대환희 보살은 강호의 한 파벌이네. 정파(正派)든 사파(邪派)든 어쨌든 강호 사람인 만큼 우리가 대리국의 병력을 움직여 대처한다는 건 타당치 않아."
"우린 종래로 대리국의 병력으로 그 여인을 대처하지 않았기에 그 여인이 갈수록 기염이 사나워지게 된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종당에는 우리 대리국 경내에서 독약을 쓰고 어린애를 훔쳐 가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여인이 어린애들을 훔쳐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옵니다. 하물며 이 일로 말미암아 선량한 백성들이 불안에 떨고 있사온즉,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더욱이 소신이 보건대 주(朱) 승상과 무(武) 형도 필시 이 여인한테 잡혀
간 것 같사옵니다."
그러자 단지흥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 내 친히 경들과 함께 가리로다. 이번 일이 그 여인의 짓인지 밝혀 내 사리를 분명히 하겠노라!"
대리국의 황제들은 무예가 뛰어나 늘 출궁하여 강호객 노릇 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었다. 그들은 다른 황제들처럼 숱한 군사들을 호위병으로 대동하지 않고 홀홀 단신으로 나다니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행차에 무슨 격식 같은 것은 없었다.
단지흥은 일단 결심이 서자 그 길로 곧 나설 차비를 서둘렀다. 그때 홀연 한 사람이 뛰어들어 앞을 가로막았다. 주백통이었다.
"단황 나으리, 싸움하러 가는 길이 아니시우? 싸움하러 가시면서 왜 나한테는 숫제 알리지도 않으시우?"
그는 승상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말이 돌면서 궁안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것을 보자 손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가 없던 참이었다. 그는 싸움에 한바탕 끼여들기가 소원이었다.
그러자 단지흥은 완곡하게 만류했다.
"백통 형, 내 보기엔 당신은 가지 않는 게 좋겠소이다. 우린 대환희 보살의 소굴로 가서 그녀가 어쩌는가 보려고 하는 것이오. 그 여인은 뱀 다루는 재간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당신이 어찌 갈 수 있겠소? 그러니 당신은 도저히 못 가오!"
주백통은 그 말에 대번에 열정이 싹 식어 버렸다.
"이 운남엔 도처에 뱀이 있다면서요? 뱀으로 국을 끓여 먹지 않나……. 난 원 징그러워서……."
어부와 나무꾼은 단지흥이 주백통이 따라가는 것을 꺼리는 줄을 알고서 거들었다.
"주 영웅께선 가시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우리와 폐하는 남방 사람이라 독벌레 따위에 어느 정도 견디지만 주 영웅께서는 어디 견디시겠소?"
"어떤 독벌레들인가 한번 말해 보우."
주백통은 겁을 집어먹으면서도 자못 신기하여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어부는 한껏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겁을 주었다.
"독벌레야 아주 많지요. 오복(五福)만 하더라도 주 영웅께서는 견디기 어려울 겁니다."
"오복이란게 대관절 뭔데요?"
그때였다. 저쪽에서 어린 태감(太監) 서넛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헐레헐레 달려와 단지흥 앞에 품하며 숨을 헐떡였다.
"폐하, 크, 큰일났습니다. 그 귀비께서……."
단지흥은 영문을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누가 어떻게 됐다는 거냐? 어서 소상히 아뢰거라!"
그러자 어린 태감 하나가 두려워서 벌벌 떨며 더듬거렸다.
"폐하, 크, 큰일났습니다. 귀……귀비께서 자, 자살을……."
단지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그녀가?"
단지흥은 대번에 치주 일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황급히 치주의 처소로 달려갔다.
치주는 자는 듯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얼굴에는 잔잔히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눈은 그대로 뜬 채였다.
"치주, 치주!"
단지흥은 가슴속에서 뭔가 치미는 듯해 격하게 소리쳐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조용히 누워 있을 뿐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이불을 걷어 냈다. 치주는 알몸인 채로 가슴에 비수가 박혀 있었다. 그는 격하게 고개를 내흔들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그순간 탁상 위에 놓여 있는 하얀 종이가 얼핏 눈에 띄었다. 그는 얼른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 종이에는 시 한 수가 씌어 있었다.
달 지면 붉은 빛 사라지리
여인은 구슬피 신음하누나
귓속말로 정랑(情郎)께 묻노니
한번 사랑하자 그처럼 미더우신가요?
하건만 함께 원앙으로 짝지을 수 없고
너무 작아 용(龍)을 태울 수 없구나
살아서 무슨 쓸모 있으랴
내세(來世)를 기대함만 못하리라!
단지흥의 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치주, 이럴 게 뭔가, 이럴 게 뭔가……. 내세를 기대하겠다구? 진심으로 내세에서 다시 만나 그대와 함께 있기를 기원하노라……."
단지흥은 구슬피 울먹거렸다. 뒤에 있는 궁녀들도 눈가에 이슬이 맺혀 더욱 고개가 수드러 들었다.
'보아하니 황제 폐하는 이 귀비를 제일 좋아하셨구나. 폐하께서는 이 귀비를 진심으로 사랑하셨구나. 어찌하여 이 귀비는 어린애로 변하여……. 운명도 진정 기구하구나.'
단지흥은 처연히 치주를 바라보았다. 치주의 몸은 백설처럼 깨끗했다. 탁상 위에는 그녀가 평소 가장 즐겨 입던 옷이 정갈하게 포개져 있었다. 그것을 보자 단지흥은 걷잡을 수 없이 비애가 솟구쳐 주르르 주르르 눈물을 쏟아 냈다.
치주의 처소엔 한동안 나직한 흐느낌만이 서글프게 떠다녔다. 이윽고 궁녀 하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폐하, 저희들이 귀비께 옷을 입혀 드리고자 하옵니다."
"치주가 옷을 벗고 저 세상으로 간 뜻을 내 알 만하도다. 너희들은 잠시 물러가거라. 내 친히 치주에게 옷을 입혀 주리라."
궁녀들은 조용히 물러갔다. 단지흥은 넋을 놓고 힘없이 치주를 내려다보았다. 갖은 상념에 사로잡혀 한동안 그는 그렇게 서 있기만 했다. 일순 자기도 모르게 장탄식이 흘러 나왔다.
"바보야, 바보. 그댄 참말 바보야. 그대가 살아 있기만 하다면, 몸이 크고 작고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그에게는 귀비들이 적지 않았다. 하나 그와 더불어 살갑게 정을 나눈 여인은 몇 안 되었다.
"치주, 인간이란 본시 그런 것이로다.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행복에 겨워…… 그러다 보면 미운 정 고운 정 들어 한평생 사는 것이거늘……. 그대가 살아만 있으면 우린 때론 티격태격하겠지만 그게 다 행복인 게야."
그는 치주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그녀에게 얼굴을 파묻고 한참 동안이나 꼼짝도 안 했다.
"치주, 난 그대의 뜻을 알아. 그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내가 옷을 입혀 주기를 바랐던 게지? 내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리라……."
이윽고 단지흥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녀의 옷을 가져다가 하나씩 입혀 주기 시작했다. 단지흥은 그때껏 살아오면서 한평생 남한테 옷을 입혀 준 적이라고는 없었다. 오히려 자기 옷도 남이 입혀 주는 때가 많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욱이 죽은 사람한테 옷을 입혀 주자니 참으로 힘에 겨워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맸다. 한참이나 걸려 치주에게 옷을 입혀 놓고는 그는 다시 치주를 바라보았다. 치주는 꼭 생시처럼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치주, 난 종래로 누구한테도 옷을 입혀 준 적이 없노라. 내가 누구에게 옷을 입혀 주기는 그대가 처음인데, 마음에 드는지?"
치주는 마음에 든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제12권에 계속―





제25장 아비규환
운남의 대양산 기슭에는 아도부(阿都部)란 부락이 있다. 이 부락에는 미고하(美姑河)라는 강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강은 아주 맑아 강바닥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서로 사랑하는 한 쌍의 남녀가 미고하에 와서 강물에 서로를 비춰 보면 둘 중 누가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가를 알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올 만큼 아주 맑은 강이었다. 만일 사내가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그림자는 아주 모호하게 나타나고,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면 그림자조차 아
예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녀가 사내를 사랑하지 않아도 물에 나타나는 그림자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곳은 정말 아주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이 고장에 석량동이라는 석굴이 하나 있는데 이 고장의 풍광과 어울리지 않게 악인 중에서도 악인인 대환희 보살이 이 석굴에 들어앉아 갖은 악행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날 미고하 강변으로 몇몇 여인들이 찾아 들었다. 이곳의 뚱뚱보 여인들과는 참으로 대조적으로 몹시 여위었고 미색이 빼어났다. 여인들은 한 여인을 둘러싸고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그 여인은 개중 미색이 가장 빼어났다. 그녀들은 강변에서 한참이나 기다리다가 한 사내가 강을 건너오자 급히 다가가 물었다.
"여보세요, 석량동이 어디 있지요?"
사내는 여인들을 흘끔거리며 자못 공손하게 대꾸했다.
"석량동 말씀이신가요? 저기를 보세요! 강 건너에 길이 나 있지요? 그 길로 곧장 가면 바로 석량동이오. 강변에서 한 오 리만 가면 되지요."
그러자 여인은 대번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 리나 된다구요?"
여인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사내는 설설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낭자는 동주와 어떻게 되는 사이이오신지……."
"친구 사이죠, 뭐."
여인은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그러자 그 사내는 얼른 등을 돌려 배 쪽으로 뛰어가 소리를 질렀다.
"어서 와 봐요! 어서요!"
그러자 선창 안에서 몰골이 추하기 짝이 없는 뚱뚱보 여인이 하나 불쑥 얼굴을 내밀고 호통을 내질렀다.
"왜 이리 호들갑이야, 바보 같으니!"
사내는 절절매며 여인들을 가리켰다.
"저분들이 석량동을 찾고 계시는군. 동주님 친구 분들이라고 하시온데……."
그러자 여인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얼른 배에서 내려 쪼르르 달려왔다.
"아가씨들은 석량동으로 가는가요? 동주님 친구 분이시라구요? 어서, 어서 배에 오르시지요. 제 저 녀석들에게 분부해 아가씨들을 석량동으로 모시겠소.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뚱뚱보 여인은 아양을 떨더니 배 쪽에다 대고 있는 힘껏 호령했다.
"너희들은 듣거라. 이 아가씨들은 모두 동주의 벗들이시다. 이분들이 강을 건너시려 하니 냉큼 모시거라. 무슨 일이 생기면 모가지가 달아날 줄 알아!"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배 안에서 한 무리의 사내들이 득달같이 달려 나왔다. 그리고는 넙죽 절을 하고는 이내 여인들을 안내해 배에 오르게 했다. 그리고는 즉시 노를 저어 강을 건너가서는 교자를 메다가 미녀들을 태웠다. 그리고 그 길로 곧추 석량동까지 달려갔다. 석량동에서는 벌써 뚱뚱보 여인들이 영접을 나와 있었다.
"향녀 등아의 왕림을 감사히 여깁니다. 제가 보살님께 향녀 등아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전하면 보살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실 겁니다."
뚱뚱보 여인 하나가 정중히 읍을 했다. 그러자 여인은 아무 말없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굴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수많은 강호객들이 와 있었다.
오늘 이곳은 무릇 운남 삼교구류(三敎丸流)의 강호객들이 모두 모여들어 전에 없이 흥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대환희 보살의 초청을 받아 이곳에 온 터였다. 그녀가 오늘 이곳에서 성대한 연회를 연다는 것이었다. 이들 중에는 감히 대환희 보살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거개는 이 석량동 쪽으로는 영 발길이 내키지 않았으나 괜스레 대환희 보살과 맞서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서 고삐에 매여 끌려 오듯 온 참이었다. 더러는 흔쾌히 온 사람들도 있기는 했으나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대환희 보살처럼 악행을 즐기는 자들이었다.
아름다운 비단옷으로 치렁치렁 치장을 한 여인들과 남정네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서 쑥덕거리고 있었다. 대관절 대환희 보살이 무슨 대단한 것을 보여 주려고 이렇게 떠들썩하니 연회를 베푸는 것인지, 천하에 제일가는 요리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모두들 궁리가 많았다.
이윽고 대환희 보살이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자리에 나와 점잖게 좌중을 둘러보더니 운남에서 제일 덕망이 높다는 운풍운(雲楓雲)을 상좌에 모시고 여러 무림의 손님들에게도 일일이 자리를 권했다. 좌중이 모두 자리에 앉자 보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석량동에는 여러분들께 대접할 만한 게 딱히 있는 것도 아니지요. 한데 얼마 전 우연히 그 옛날 춘추전국 시대에 나온 《역아밀방(易牙密方)》을 손에 넣게 되어 그 《역아밀방》에 적힌 대로 요리를 만들어 본즉 그 맛이 천하별미 아니겠어요! 그처럼 맛깔스런 요리를 혼자만 맛볼 수는 없는지라 오늘 일부러 여러분을 모시게 된 것이에요. 아무튼 성의를 받아 주셔서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참말 고맙습니다."
그 말에 좌중은 아무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아하니 그녀는 춘추전국 시대의 유명한 요리사 역아의 요리 밀방을 손에 넣어 저토록 기뻐하는 모양이었다. 춘추전국 시대의 뭇 임금들은 역아의 요리 솜씨를 천하 제일로 꼽았고 서로 역아를 자기 궁중의 요리사로 붙들어 두려고 모략을 꾸미기도 했다고 하니 가히 그 요리솜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한 역아의 요리 밀방을 보고 만든 요리를 내놓는다니 좌중은 너나없이 입 안에 군침이 슬슬 돌았다. 사
람들은 침을 삼켜 가며 상 위에 요리가 오르기만을 기다렸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음악 소리까지 흥을 돋웠다. 대환희 보살은 히죽 웃으면서 여러 사람들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요즈음은 세상일이 너무도 번거로워 마음 편히 한 끼니 실컷 먹기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에요. 그런즉 강호 제위께서는 오늘 체면 차리지 마시고 많이들 드시기 바래요."
대환희 보살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손짓을 하자 계집애들처럼 단장한 사내들이 저마다 두 손에 소반을 받쳐들고 잰걸음으로 손님들에게 다가갔다. 소반에는 맑은 물이 찰랑일 뿐이라 좌중은 의아한 눈길로 대환희 보살을 쳐다보았다.
"소반에 담긴 물은 석량동 샘물이외다. 무릇 미식(美食)은 미기(美器)에 담아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기실 손으로 집어먹어야 제맛이 나지요."
좌중은 너나없이 강호의 호걸들이라 보살의 말을 듣고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들은 일찍이 귀하고 점잖은 좌석에는 앉아 보지 못한 거친 사내들이라 주객이 서로 점잔을 빼며 한 잔 두 잔 권커니자커니 술잔을 나누는 일은 딱 질색이었다. 아무때든 그저 두 손으로 닥치는 대로 집어다가 뜯어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었다.
좌중은 묵묵히 손을 씻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여러분들을 모신 까닭은 귀한 음식을 대접하자는 것도 있지만 또 여러분과 긴히 상론할 일도 있기 때문이에요. 좌우간 음식을 든 다음에 다시 말하기로 하지요."
좌중에는 슬그머니 대환희 보살을 흘겨보며 속으로 빈정거리는 사내들도 있었다. 아무려나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 놓고 먹이기만 하려고 부르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악독하기로 이름난 대환희 보살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일까. 아무튼 상론을 하든 혼자 지껄이든 굿이나 보다가 떡이나 먹자고 이죽거리며 그들은 보살을 쏘아보았다.
대환희 보살은 마냥 웃음을 발라 가며 좌중을 휘젓고 다니면서 수선을 떨었다.
"원래는 올 여름에 이 연회를 열려고 했었지요. 하지만 여름에는 워낙 바빠서 그만 깜빡하고 말았어요. 아시겠지만 그때 화산에서 강호의 여러 호걸들이 다 모여 무예를 겨루었잖아요?"
누군가 들릴 듯 말 듯 또 코방귀를 뀌었다. 《구음진경》을 얻으려고 갖은 수를 다 쓰다가 코가 석 자나 빠져서 돌아왔다는 얘기가 이미 강호에 나돈 지도 오래였던 것이다. 그러든 말든 아랑곳 않고 대환희 보살은 제 멋에 겨워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댔다.
"천하 무림에서는 한 해에 적어도 한두 번쯤은 범상치 않는 일이 벌어져야 살맛도 나고 검에 녹도 슬지 않는단 말이에요. 오늘 이 연회야말로 화산 무예 시합과 더불어 올해 빼놓을 수 없는 무림대사가 될 거예요."
좌중은 영 시답잖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보살이 하도 자신만만하게 큰소리를 쳐대는 통에 그 희한한 요리가 과연 무엇인가 하고 적이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이윽고 부드럽게 흐르던 음악 소리도 끊기고 정적이 고요히 깃들였다. 대환희 보살이 히죽 웃으며 소리쳤다.
"여봐라, 음식을 올리거라!"
그러자 사내들이 두 손에 커다란 소반을 받쳐들고 줄지어 들어와 제가끔 손님들에게로 다가갔다. 한데 소반 위에는 공기 하나만 달랑 놓여 있었다. 그마저도 조막만하니 작은 공기였는데 사내들은 무슨 신주 단지 모시듯 조심조심 소반을 받들고 엄숙히 서 있었다.
손님들은 저마다 그 공기를 받아서 식탁 위에 놓았다. 모두들 사뭇 호기심에 들떠 공기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하나같이 겁에 질려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 공기에는 무슨 파르스름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대체로 사람이 먹는 음식에 푸른빛을 띠는 것이 더러 있긴 하지만 그런 빛깔이면 대개는 변질된 것이라 어쩐지 수저를 대기가 저어되는 법이다. 누군가 공손히 두 손을 맞잡고 물었다.
"보살님, 이 공기에 담긴 미식은 무엇인지요?"
대환희 보살은 연신 히죽거렸다.
"좌우지당간 따끈할 때 맛들이나 보시라구요. 식으면 비릿한 냄새가 나서 못 자시게 될지도 모르니……."
다들 떨떠름하니 말이 없었다. 한 사람이 드디어 작정한 듯 공기를 들어올리자 하나 둘씩 뒤따라 그릇을 들고는 홀짝 들이켰다. 그랬더니 천만 뜻밖으로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것이 입맛이 개운했다. 과연 일품이었다. 모두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대환희 보살을 쳐다보았다. 그중 누군가가 또 불쑥 물었다.
"허 참, 그거 정말 일품인데요! 보살님, 이 미식이 대관절 뭐요?"
"글쎄요,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건데……."
대환희 보살은 느물느물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좌중은 더욱 궁금증만 커질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더는 입을 열지 않고 또 무엇이 나올지 숨을 죽였다.
이윽고 사내들이 또 자그마한 접시들을 받쳐들고 들어왔다. 가만히 눈여겨보니 접시 위에는 보기에도 끔찍한 독물(毒物)들이 쌍쌍이 놓여 있었다. 강남의 오복으로 불리는 전갈 한 쌍, 독거미 한 쌍, 뱀 한 자웅, 오공(蜈蚣) 한 쌍, 매미 한 쌍 등이었다. 모두들 기가 질려 입을 딱딱 벌렸다.
"여러 손님들께서는 이 다섯 가지 독물을 꺼림칙하게 여기시겠지만 실은 최상의 보약이랍니다. 어서 맛들이나 보세요."
하도 끔찍한 독물이라 게중에는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주춤 물러앉는 사람도 있었다. 수염과 이빨을 뽑지도 않은 흉물스러운 독물을 먹으라고 내놓다니, 그래 우리를 죽일 잡도리인가……. 손님들은 적이 못마땅한 눈길로 대환희 보살을 넘어다보았다. 한데 대환희 보살은 그 독물들을 닥치는 대로 입 안에 집어 넣고 와작와작 씹어 먹는 것이었다. 그 먹는 모습이 실로 군침이 돌 정도였다.
좌중에는 대환희 보살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도 앉아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내가 큰소리로 부추겼다.
"여보게들, 보살님도 잡숫는데 우리도 맛을 보자구."
그 사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독충을 집어 입 안에 넣고 바삭바삭 씹었다. 입 안에 향긋하고 고소한 맛이 돌았다. 본디 독충의 독을 제거하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말하자면 자웅이 교미할 때 납작 잡아죽이면 제아무리 무서운 독충이라도 독이 저절로 사라지는 법이었다. 물론 식탁에 내놓은 독충들은 모두 자웅이 교미할 때 잡아다가 기름에 튀긴 것들이었다.
대환희 보살의 친구가 선참으로 독충을 먹자 좌중은 서로 흘끔흘끔 눈치를 보다가 제가끔 한 마리씩 집어 입 안에 넣고 조심스럽게 씹어 보기 시작했다. 과연 별미였다. 독충을 씹는 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좌중의 입가에는 모두 노란 기름이 배어 나왔다.
좌중이 오복을 말끔히 먹어치우자 대환희 보살은 빙그레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천하의 명요리란 향기가 독특한 법이지요. 오늘 상에 오르는 요리들은 뒤에 나오는 것일수록 훨씬 더 감미로운 향기와 맛이 날 거예요. 이제 하나하나 맛보기로 하십시다."
그리고는 그녀는 제멋에 겨워 키들키들 웃었다. 그 모습이 자못 음충스러워서 좌중은 새삼스럽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저 흉물스러운 보살 년이 필경은 독충을 먹여 우리들을 제압한 후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들려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다음 순간, 대환희 보살은 좌중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 시무룩이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 맘들 푹 놓으세요. 아마도 오늘의 이 좌석은 천하에 제일 풍성한 연회석이 될 것이요, 오늘의 이 요리들은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게 될 테니까요."
운풍운이 점잖게 앉아 있다가 대환희 보살을 보고 한마디 물었다.
"듣자니 보살께서는 중원 땅에서 왕중양, 서독, 동사, 남제, 북개 등 무림 호걸들의 무예 겨룸을 보셨다고 하던데, 그 호걸들의 무예 겨룸이 볼 만했겠어요?"
대환희 보살은 시큰둥하니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렴요. 전 등아 향녀, 그리고 왕중양의 사제들과 함께 천대 평석 위에 올라가서 지켜 봤지요. 마치 범이 어우러지고 용이 엉키듯이 광풍이 울부짖고 천지가 뒤흔들리는 바람에 도무지 그 위에 서 있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우리는 평석 아래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는데 누구의 무공이 뛰어났는가 하는 건 평석 위에서 끝까지 지켜 본 사람한테 듣고서야 알게 되었지요."
잠자코 듣고 있던 신왕(神往)이란 사람이 한마디 말추렴을 들었다.
"왕중양이 혼자 네 사내를 상대로 싸웠다더구먼요. 끝내는 왕중양이 그 절묘한 선천공으로 네 사내를 굴복시켰다고 하니까 그거야말로 기공이라 하겠지요."
그 말에 누군가가 별안간 키득거렸다. 좌중의 얼굴이 일제히 소리난 쪽으로 쏠렸다. 학발계안(鶴髮?顔)이라고 문자 그대로 호두알처럼 쪼글쪼글 늙어빠진 노파가 어눌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니, 왕중양이란 자가 그렇게 드세단 말인가?"
꼭 사흘 굶은 시어미마냥 낯을 찡그리고 앉아 있는 이 노파가 바로 충피에게 몰살당한 막북삼괴의 사부, 사막(沙漠) 옥수(玉樹)였다. 그녀는 쌀쌀맞게 웃으며 군시렁댔다.
"세상에 떠도는 말을 듣자니 오늘날 무림 천하에서는 다섯 영웅이 판을 치는데 그들이 동사, 남제, 북개, 서독 그리고 중신통이라더구먼. 아무튼 난 이 다섯 호걸들을 일일이 다 만나 봐야겠다."
좌중은 감히 말대꾸를 할 엄두조차 못 내고 사막 옥수의 푸념을 듣고만 있었다. 사막 옥수는 일찍이 50여 년 간 북녘 사막을 횡행하며 쥐락펴락하는 터였다. 일순 사막 옥수는 느닷없이 신경질을 부리며 고래고래 호통을 질러댔다.
"젠장, 여기 모인 사람들은 말짱 퇴물들이야, 퇴물! 남제란 녀석만 봐도 그렇지, 그 놈에게 무슨 재능이 있다고 일국의 황제입네 하고 거들먹거린단 말이야! 실로 기도 안 찰 노릇이군!"
대환희 보살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똑바로 사막 옥수를 쏘아보았다.
'쳇, 별게 다 와서 난리를 부리는군. 이 쭈그렁 바가지야, 네 년의 그 말라 죽을 사막에나 가서 큰소리를 칠 것이지 우리 운남 땅에 와서 무슨 수작이냐? 그렇게 안하무인 격으로 설쳐 대다가는 큰 코다친다, 큰코다쳐! 내 필히 저 늙어빠진 독종에게 단단히 버릇을 가르쳐 주어야 할까 보다.'
하지만 대환희 보살은 눈웃음을 살살 치며 물었다.
"듣자니 어르신의 제자들이 천룡사에서 크게 당했다던데요, 그게 정말인가요?"
기실 막북삼괴가 죽은 건 충피의 소행이었지만 충피가 잔꾀를 부려 사막 옥수에게 천룡사 소행이라고 믿게 해 둔 터였다.
대환희 보살은 이 참에 일부러 그 말을 끄집어낸 것이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사막 옥수의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었다. 사막 옥수는 금세 노기충천하여 버럭 성을 냈다.
"천룡사 까까머리 중 놈들, 안 그래도 내 이를 갈고 있었다. 이 곳에서 일만 마치면 내 친히 놈들을 찾아가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잡아죽일 테다. 흥, 천룡사가 제아무리 대리의 국사라 해도 내 결코 사정을 두지 않으리라!"
그 말에 모두들 천룡사에 큰 화액이 닥치리라 하며 속으로 혀를 차면서 얼빠진 표정으로 사막 옥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나 대환희 보살만은 반색을 하며 쌍수를 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사막 옥수님, 천룡사 중 놈들에게 복수를 해야 하고 말고요. 한번 톡톡히 본때를 보여 주세요!"
그러자 사람들은 덩달아 식탁을 쾅 내리치면서 천룡사 놈들에게 버릇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쯤 되자 대환희 보살은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이젠 계속 요리나 맛보십시다. 이번에는 아마 여러분께서 한 번도 맛본 척이 없는 천하 일품이 상에 오를 거예요."
그라자 좌중은 이내 입들을 다물고 군침을 삼키며 두 손을 맞비비면서 싱글거렸다. 그러는데 누군가 한마디 던졌다.
"보살님, 말씀을 좀 삼가시죠. 우리들이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평생 세상을 주름잡으며 다닌 호걸 남아들인데 무엇인들 보지 못했고 무엇인들 먹어 보지 못했겠소? 우리들이 먹어 보지 못한 음식이 있다니 어디 빨리 내놓아 보시오!"
"이제 곧 헛소리가 아님을 알게 될 거예요. 천하 일품 명요리가 없고서야 어찌 외람되게 귀하신 여러분을 모실 수 있겠어요."
그러면서 대환희 보살은 밖에 대고 큰소리를 쳤다.
"자, 요리를 올리거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뚱뚱보 여인들이 소반을 들고 낑낑거리며 들어왔다. 소반 위에는 무엇인가가 봉곳하니 얹혀 있었는데 하나같이 비단 보자기를 씌워 놓아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뚱뚱보 여인들은 사람들 안에 소반을 차례차례 내려 놓았다. 사람들은 적이 군침을 흘려댔다. 대환희 보살은 한참 동안이나 말을 늦잡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 보자기 안에 뭐가 있을지 한번 알아맞혀 보세요. 천하에 드문 이 요리가 무엇인가 말예요."
좌중은 한동안 중구난방으로 갑론을박 떠들어댔다. 대환희 보살은 의미심장하게 웃음을 흘리며 입도 벙긋 않고 사람들을 쭉 휘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손뼉을 치며 히죽거렸다.
"틀렸어요, 다 틀렸어요. 아마도 여러분께 직접 보여야 하겠군요. 자, 보시지요!"
그녀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식탁 옆에 지켜 섰던 뚱뚱보 여인들이 일제히 비단 보자기를 확 벗겨 냈다. 그 순간 사람들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소반 위에 알몸뚱이 사내애들이 곱상스럽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자그마치 서른다섯 명이나 되었다. 이 애들은 저마다 가부좌를 틀고는 눈을 내리감고 앉아 있었다. 살결이 보송보송하고 눈이며 코며 입이며 심지어 눈썹까지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좌중은 넋 나간 사람들마냥 입을 헤 벌린 채 멍청히 보고만 있을 뿐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이나 침묵이 흘렀다. 대환희 보살도 입을 꾹 다문 채 회심의 미소를 띠고 사람들을 둘러보기만 했다. 드디어 헛기침 소리가 침묵을 깨더니 누군가 입을 열었다.
"보살님, 옛적에 도를 깨친 신선이 한번은 막역한 친구에게 이렇게 어린애 모양을 한 음식을 대접했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소이다. 한데 그 친구는 진짜 애들의 살점을 대접하는가 해서 사시나무 떨 듯했다는구먼. 결국 그 친구는 그 어린애 모양의 음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신선이 되지 못했다고 하더이다. 아마도 보살님이 내놓은 이 요린 바로 그 옛날 신선이 먹던 음식인지?……."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느물거리며 입을 뗐다.
"참, 귓구멍이 나팔똥 같은 양반이구먼요. 어쩌면 그따위 전설을 곧이듣는단 말씀이에요. 그거야 옛사람들이 인육을 먹고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꾸며 낸 거짓말 아니던가요?"
그러자 떨리는 목소리가 대뜸 뒤를 이었다.
"아니, 그, 그렇다면…… 보살님은 진짜 사, 사람 아이로 음식을 만들었단 말이시오?"
"그렇소만, 뭐 잘못됐소?"
보살은 스스럼없이 넙죽 대꾸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머리를 처박고 꺽꺽 토하기 시작했다. 방금 먹은 음식은 물론이요, 급기야는 제일 처음에 먹었던 시퍼런 물까지 몽땅 다 바닥에 쏟아 놓았다. 이내 시큼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는 그러고도 머리를 처박은 채 감히 소반 위에 앉아 있는 사내애를 쳐다볼 엄두조차 못 내고 벌벌 떨기만 했다. 마치 소반에 앉아 있는 사내애가 오히려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다음 순간 또 한 사람이 머리를 처박았고, 이내 전염병 돌 듯 너나없이 고개를 처박고 울컥울컥 검푸른 위액을 토해놓았다. 굴 안엔 역겨운 냄새가 진동을 했다.
맨 먼저 구역질을 한 손님이 정신없이 딸꾹질을 하면서도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입을 뗐다.
"이제 보니 대리에서 사내 애들을 납치해 간 건 죄다 보살이 한 짓이었군……."
"암, 암, 그렇구말구요! 이 애들을 잡아 오지 않았던들 여러분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언감생심 먹어 볼 수나 있겠소? 어림도 없지요."
그러자 그는 배를 그러안은 채 보살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대환희 보살, 강호에서는 누구든 악한 짓을 해도 제 맘이고 인명을 해쳐도 원수지간이 되면 그뿐이지만 이따위로 철모르는 애들까지 희생시켜서는 결코 안 된다. 남의 귀여운 자식들을 훔쳐다가 고아 먹다니 천벌을 받고야 말 거다!"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눈 한 번 깜짝 않고 덥석 젓가락을 집어들더니 사내애의 눈동자를 파내 쑥 입 안에 처넣고는 보란 듯이 오물오물 씹기 시작했다.
"천하에 제일 향기로운 고기가 뭔지 알아요? 말할 것도 없이 사람 고기지요. 하지만 직접 먹어 보지 않고서는 그 맛을 영영 모를 거예요. 자, 어서들 식기 전에 맛보라구요."
대환희 보살은 요망스럽게 깔깔 웃음을 날리고 나서 다시 좌중을 둘러보며 재촉했다.
"자, 어서들 드시라니까요. 이 애들은 결코 강바닥에서 돌멩이 줍듯 닥치는 대로 잡아 온 애들이 아니란 말씀이에요. 마빡을 톡톡 퉁겨 가며 곱고 야들야들하게 생긴 복동이들만 골라 왔다구요. 얼마나 품을 들이고 공을 들였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렇게 성의를 무시하시다니……. 어서 맛을 보란 말예요!"
그 말에 사람들은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흘끔흘끔 소반 위의 사내애를 거들떠보았다. 보면 볼수록 살아 숨실고 있는 것마냥 생생했다. 그러자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며 다시금 발작을 하며 허리를 꺾고 구역질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시는 소반 위의 사내애들을 볼 염을 못 내고 외면한 채 속으로 대환희 보살을 꾸짖어댔다.
'아, 얼마나 지독한 년인가? 철없는 남의 집 옥동자들을 잡아다가 생으로 삶고 고아서 처먹을 생각을 하다니.'
정말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노릇이었다. 손님들은 감히 맛을 보기는 고사하고 바늘 방석에 앉은 사람들마냥 몸둘 바를 몰라 이리저리 뒤척여 댔다.
그때 누군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귀청이 터지게 웃어젖혔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다름 아닌 사막 옥수였다.
"내 진작 들은 바가 있었지. 운남에 대환희 보살이라고 하는 여인이 하나 있는데 여중호걸이라고 말이야. 하지만 난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어. 한데 오늘 직접 만나 본즉 과연 호걸은 호걸이로구나."
사막 옥수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더니 무섭게 두 눈을 부릅뜨면서 고함을 쳤다.
"멍청이들 같으니라구, 어미 뱃속의 아이만 먹는 줄 알았는가? 어린애들이란 뱃속에 든 것이든 세상 빛을 본 것이든 마찬가지로 보약이 되는 법이여! 여태껏 사내애들은 먹어 보지 못했었는데 오늘은 저 보살 덕분에 입맛을 다시게 됐군그래! 아무튼 감사하이, 대환희 보살……."
사막 옥수는 자못 호기롭게 내뱉더니 술 한 모금을 쭉 들이켜고나서 젓가락을 덥석 집어 사내애의 가슴팍에다 쿡 박았다가 살점을 뜯어냈다.
"가슴팍의 고기가 제일 맛있다고들 호들갑을 떨던데 내 직접 먹어 봐야겠다!"
사막 옥수논 살점을 홀짝 입 안에 넣고 두어 번 씹더니 꿀꺽 삼켜 버렸다. 대환희 보살은 득의양양하니 미소를 지으며 지켜 보다가 불쑥 한마디 던졌다.
"과연 막북삼괴의 사부님답군요. 삼괴는 어르신 같은 사부님을 모신 것만으로도 크게 자랑스러웠을 텐데 그만 애석하게도……. 실로 어르신이야말로 여중호걸이세요."
그러나 사람들은 멍청히 구경만 하고 있을 뿐 누구도 젓가락에 손도 못 대고 있었다.
대환희 보살과 사막 옥수는 이제 권커니자커니하면서 연신 술잔을 기울이며 악귀같이 아이의 살점을 뜯어 아귀아귀 씹어댔다. 살점이 뜯기면 들길수록 아이의 형체는 엉성한 뼈다귀만 남아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형상이 되어갔다. 사람들은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뛰어 저마다 가슴을 움켜잡았다. 불현듯 누군가가 의자를 벌떡 박차고 일어나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운풍 노인이었다.
"대환희 보살, 악에도 정도가 있고 끝이 있는 법이네. 자네는 어쩌면 이다지도 지독할 수가 있단 말인가?"
대환희 보살은 표독스럽게 냉소를 쳤다.
"제가 악덕을 입든지 말든지 나으리와 무슨 상관이에요?"
운풍 노인은 무섭게 눈을 치뜨며 순식간에 휘익 검을 뽑아 들고 고함을 쳤다.
"방자한 계집년, 내 네 년의 모가지를 베어 버리고 말리라!"
운풍 노인은 서슬 푸른 검을 비껴 들고 대환희 보살을 향해 똑바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태연히 앉아 그저 노인을 쏘아볼 뿐이었다. 좌중은 두 손에 땀을 쥐고 그 두 사람을 예의주시했다. 운풍 노인은 마침내 대환희 보살 앞으로 바짝 다가들어 검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가 있는 힘껏 검을 내리치려 할 찰나, 웬일인지 그는 그 자세로 바위처럼 굳어져 버렸다. 그리고는 일순 흠칫 떨더니 대번에 눈, 코, 입에서 시뻘건 피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그제야 깔깔 웃어젖히며 번뜩이는 눈길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호호호호…… 이제야 알려 줘서 미안하군요. 난 이미 당신들이 먹은 음식에 독약을 넣었어요. 그 독약은 아주 영험이 있으나 색깔도, 냄새도 없답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이제 곧 독이 퍼지게 되어 있어요. 저 영감태기는 괜히 성깔을 부린 탓에 당신들보다 빨리 발작했을 뿐이지요. 그런즉 당신들도 괜히 화를 내지 말고 점잖게 앉아 독을 제거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사막 옥수는 눈알을 부라리며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대환희 보살, 그럼 내 음식에도 독약을 넣었단 말인가?"
"어르신께야 독약을 쓸 리 있겠어요? 전 앞으로 어르신의 신세를 톡톡히 질 참인데!"
"으하하하, 잘했다! 잘했어! 어린애 고기도 한 점 먹지 못하고 벌벌 떠는 샌님들은 몽땅 죽어도 아깝지 않다. 이 놈들을 다 죽여버리고 우리 둘이 천룡사에 가사 단지흥 놈을 혼내 주자!"
"좋아요. 그러나 그전에 그 놈에게도 이 애들 고기를 한 접시 먹여야 하잖겠어요? 호호호호……."
두 여인은 배꼽을 잡고 허리를 꺾어 가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흡사 악귀 같았다.
단지흥은 어부, 나무꾼과 함께 길을 나섰다. 그들은 숙의를 거듭해 대환희 보살 짓이라고 단정을 내리고는 그녀의 석굴이 있다는 대양산 쪽으로 발길을 다그쳤다. 길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천만 뜻밖으로 선비, 농부와 마주쳤다. 세 사람은 너무나 반가워서 일제히 와락 소리를 내질렀다. 선비와 농부는 충피와 뚱뚱보 여인들에게 잡혀 가다가 그들이 잠든 틈을 타서 기적같이 도망쳐 나와 단지흥에게 일의 전말을 알리고자 급히 황궁으로 가던 길이었다. 선비와
농부는 단지흥과 두 시위를 보자 기뻐 탄성을 지르면서도 적이 비장한 기색으로 충피에게 들은 대로 대환희 보살이 젖먹이 사내 애들을 훔쳐다가 요리를 만들어 놓고 연회를 벌이고 있다며 자초지종을 쭉 이야기했다.
단지흥은 너무나 놀라 입이 딱 벌어졌다. 등줄기를 타고 온몸으로 전율이 확 펴져 갔다.
"저런, 저런, 그렇게 참혹한 일이……. 그 요사스러운 보살이 이제는 죄 없는 애들까지 잡아다가 뭣이 어쩌고 어째……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일이다! 내 오늘 그 불여우 같은 보살 년을 잡아죽여 후환을 없애야겠다!"
선비와 농부가 대뜸 앞장서서 길을 잡았다. 그 뒤로 세 사람이 일제히 따르며 석량동을 향해 앞서거니뒤서거니 걸음을 다그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이내 미고하에 다다랐다. 강변에 나룻배 한 척이 떠있고 웬 사내가 뱃전에 걸터앉아 한가롭게 발을 씻고 있었다.
단지흥 일행은 강기슭으로 내려갔다. 농부가 나룻배 쪽에 대고 청을 넣었다.
"여보시오 사공, 이쪽으로 배를 좀 대 주시오."
사공은 그들을 건너다보며 심드렁하니 물었다.
"뉘시오?"
선비가 얼른 맞받았다.
"석량동으로 가는 사람들이오."
"석량동 연회에 참석하시려는가 보군요."
다섯 사람은 얼른 눈짓을 주고받았다. 단지흥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다시금 선비가 나서며 또 외쳤다.
"맞습니다. 오던 길에 좀 지체되어 늦었소이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었는지 선창에서 뚱뚱보 여인 하나가 삐쭉 얼굴을 내밀었다. 틀림없는 대환희 보살의 수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이들을 본 적이 없는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연회는 이미 한참 전에 시작되었소! 당신들은 보살님한테 단단히 역정을 듣겠구먼, 자, 어서 오르시오!"
여인은 대수롭지 않게 일행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 어서 배를 갖다 대지 않고 뭐하고 있는 거예요?"
그 말에 사내는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노를 저어 배를 기슭에 갖다 댔다.
다섯 사람은 얼른 배에 올랐다. 금세 배에 올랐는가 싶었는데 물살이 빨라 배는 어느새 대안에 닿았다. 다섯 사람은 훌쩍 언덕으로 뛰어올라 발걸음을 다그쳐 석량동 어귀로 걸어갔다. 석량동 어귀에는 사람 하나 얼씬대지 않았다. 아마도 모두 동굴 안에 들어가 있는 모양이었다. 다섯 사나이는 약속이나 한 듯 다짜고짜 동굴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모두 놀라 두 눈이 휘둥그래진 채 손 하나 까딱 못하고 앉아 있었다. 대환희 보살은 징글맞게 웃음을 흘리며 사람들을 쭉 휘둘러보았다.
"내막인즉슨 이렇소. 좀 전에 대접한 두 가지 음식에 독약을 넣은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 사내애들의 고기엔 독기를 풀어 없애는 약을 넣었단 말이오. 그러니 이 고기만 먹으면 즉시 해독이 될 수 있지만 기어코 먹지 않는 날에는 저 영감태기처럼 꼼짝못하고 황천객객이 될 터이니 그리 알아 두시오."
사람들은 그제야 대환희 보살의 간계와 모략에 걸려들었음을 깨닫고 속을 바짝바짝 태웠다. 실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차마 불쌍한 아이들의 고기는 먹을 수 없고 그렇다고 먹지 않자니 해독할 방책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앞에 놓인 사내아이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살겠다고 부득부득 불쌍한 어린애들의 고기를 먹는다면 한평생 악명을 짊어지고 살게 될 게 아닌가.
대환희 보살은 연해 미친 듯이 웃어대면서 지껄였다.
"아무튼 당신들은 내가 쳐 놓은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들었단 말이오. 엎드린 바에 절한다고 어서들 사내애들 고기나 먹고 나와 함께 단지흥이나 처치하러 가자구요.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죽는 길밖에 없어요!"
좌중은 비로소 대환희 보살이 선심이나 베풀 듯 자신들을 청해들인 까닭을 짐작하고는 후회막급으로 혀를 차는 것이었다.
개중 한 사내가 유난히 눈동자를 굴리며 전후좌우를 흘끔거렸다. 가슴이 심하게 두방망이질쳐댔다.
'내가 자청해서 사람 고기를 먹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저 보살의 핍박에 못 이겨 먹은 것이니 후일 누가 따지고 들어도 변명거리는 있다. 이렇게 두 눈 뻔히 뜨고 독살당할 수는 없어. 에라 모르겠다, 목숨부터 살리고 보자. 사람 고기든 뭐든 가릴 것 없다!'
그 사내는 마침내 작심을 하고 대환희 보살을 건너다보며 부르짖었다.
"좋아, 내가 먹겠소. 이 고기를 먹어도 독기가 풀리지 않을 시에는 내 당신하고 사생결단을 할 테야!"
대환희 보살은 넙죽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해독이 되고말고! 이 사막 옥수님을 보란 말예요."
사막 옥수는 원래는 자기도 중독되었는데 사내애 살점을 뜯어먹어 이미 해독된 것이구나 하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마침내 그 사람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기 한 점을 덥석 잡아 뜯어 얼른 입 안에 처넣고는 소리를 쳤다.
"내가 사람 고기를 먹는다, 사람이 사람 고기를 먹어!"
그러더니 실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기를 씹을수록 맛이 나서 그러는지, 아니면 정신이 빠져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한 사람이 먹고 나자 사람들은 쭈뼛쭈뼛거리며 제가끔 한움큼씩 사내애의 살점을 뜯으면서 소리쳤다.
"젠장, 내가 먹겠다는데 누가 뭐라는가?"
하지만 일단 맛을 보자마자 모두들 혀를 날름거리며 아귀아귀 잘도 먹어댔다. 미상불 악마들의 대잔치였다.
단지흥 일행은 급급히 굴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다섯 사람은 굴 안의 광경을 본 순간 그만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굴 안에서는 실로 하늘이 울고 땅이 울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 고기를, 그것도 애어린 젖먹이의 고기를 미친 듯이 뜯어먹고 있지 않은가. 실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제 것을 다 먹고 나니 눈알을 부라리며 남의 것까지 빼앗아 먹으니 다섯 사람은 누구랄 것도 없이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다.
단지흥은 노기가 하늘을 찔러 내공을 실어 벽력같이 소리를 내질렀다. 바다가 뒤 집어지고 산악이 무너지는 듯한 고함소리가 굴 안을 뒤흔들었다. 제가 먼저 살겠다고 설치고 날뛰던 사람들은 고막이 찢어지듯 한 통증이 엄습하여 일제히 화석처럼 굳어졌다.
"너희들은 대관절 사람이냐 귀신이냐?"
사람들은 일제히 단지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지흥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금세 얼굴이 벌게져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내 하나가 대뜸 소리쳤다.
"네 놈은 대체 누구냐? 누군데 감히 끼여들어 우리 일을 간섭하는가?"
단지흥은 정색을 하며 엄하게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우리 모두 부모님의 피를 물려받고 천지의 영묘한 기운을 타고난 인간이오! 그런즉 사람이 어찌 사람을 먹을 수가 있겠소? 실로 환장을 하지 않고서야……."
"속 모르는 소리 작작 하시오! 그래야 목숨을 건진다는데 무슨 수로 안 먹겠소? 더 이상 참견하지 마요!"
누군가 볼멘소리로 톡 내질렀다. 단지흥은 불꽃이 뚝뚝 떨어질 듯한 눈길로 대환희 보살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대환희 보살, 내 일찍이 네 년이 이렇게 지독한 줄은 미처 몰랐다! 내 오늘 일만은 결코 좌시할 수 없노라! 단단히 죗값을 치르게 해 주리라."
대환희 보살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빈정거렸다.
"단황 나으리, 왜 나만 갖고 그러시오? 이거야 정말 억울해서 어찌 살겠소? 나으리도 일국의 임금이니까 법이야 알겠지요. 그래, 나 혼자 먹은 것도 아니요, 여기 앉아 있는 서른다섯 사람이 다 먹었는데 왜 나만 들볶느냔 말이에요? 그리고 다들 먹겠다고 설치는 걸 낸들 무슨 수로 막아요. 사람을 잡아가려면 나 하나만 잡아갈 게 아니라 여기 앉아 있는 무림 호걸남아들을 다 잡아가시라구요. 나 원, 별꼴 다 보겠네……."
선비가 듣다 못해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죄를 지었으면 달갑게 벌을 받아야 하거늘…… 무엄하도다! 당신들을 몽땅 다 잡아가도 무슨 할말이 있는가!"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여전히 득의만면하여 쏘아붙였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하랬다고 대리 사람들이 속에 묻어두고 감히 꺼내지 못하는 말을 내가 대신 해 주지요. 당신들은 황족입네 하고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무림 호걸들을 잡아 넣었지요? 무림 호걸들을 다 잡아 넣고 이 대리 땅에서 독판을 치려는 게 바로 당신들 꿍꿍이라는 걸 알고도 남음이 있단 말예요!"
"뭣이?"
선비는 발끈하며 대번에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선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단지흥을 똑바로 쏘아보며 내뱉었다.
"단황 나으리, 우리 둘 사이는 아비 죽인 원수지간도 아닌데 왜 이 지경으로 날 들볶는 거예요? 내 죄라면 기껏해야 남의 젖먹이 어린애 몇을 훔쳐 온 것밖에 더 있어요? 이 일은 내가 저지른 것이니 내 스스로 애들 부모한테 사죄하면 그뿐, 내 스스로 그러겠다는데도 질질 물고늘어지며 기어이 나를 잡아다가 논죄를 하겠다면 여기 모인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가야 도리에 맞는 것 아니냐구요?"
실로 간계가 뛰어난 여인이다. 좌중은 대환희 보살과 단지흥을 번갈아 보다가 마침내는 단지흥 쪽으로 일제히 시선이 쏠렸다. 그들은 단지흥을 보면 볼수록 심중이 불안했다. 단지흥이 이미 사람 고기를 다투어 먹는 걸 보았으니 단지흥의 입을 통해 이 수치스러운 일이 퍼지는 날엔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일이 탄로나기 전에 단지흥 무리를 죽여 입을 틀어막는 게 상책이리라.
약삭빠른 선비는 좌중의 눈치가 심상치 않음을 대번에 알아채고 단지흥에게 귀띔했다.
"폐하,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그 소리에 대환희 보살은 살기등등해서 소리쳤다.
"아니, 무얼 조심하라는 거냐? 우리들의 용모와 이름을 조심스럽게 기억해 두라는 암시가 아니고 뭐냐? 흥, 앞으로 우리들을 하나하나 잡아다가 죽이려는 수작이나, 이 놈, 어림도 없다! 네 놈들한테 억울하게 당하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네 놈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두 다리 쭉 뻗고 편히 자야겠다!"
마치 그 소리가 신호이기나 한 듯 사람들은 단박에 서슬 푸르게 검을 쓱 뽑아 들고 단지흥을 노려보았다.
"단황 나으리? 당신이 바로 그 단황이시오? 오늘 처음 상면하겠구먼. 하나 보자마자 이별이라고 당신은 이미 우리가 한 짓을 알아 버렸으니 어서 칼을 받으시오!"
몇몇 사람들이 앞으로 나서서 검을 비껴 들고 단지흥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개중에는 뒤에 물러서서 숨을 죽이고 구경만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진작부터 단지흥이 대환희 보살을 잡아가는 것이 지당한 처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자신들도 인육을 먹기는 했으되 이는 오로지 중독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죄를 받는다면 의당 대환희 보살 혼자서만 받아야 한다. 검객 하나가 그렇게 생각을 굳히고는 썩 나서서 부르짖었다.
"대환희 보살, 당신은 음식에 독약을 넣어 우리를 감쪽같이 죽이려고 했다. 그러니 당신부터 살려 둘 수가 없어!"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쌍룡교(雙龍絞)라는 쇠채찍을 두 손에 갈라 쥐고 휙휙 허공에 원을 그리면서 대환희 보살을 향해 사납게 달려들었다. 대환희 보살은 미처 예기치 못한 일이나 급급히 피하며 자세를 취했다. 일순 누군가가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이 배은망덕한 자식, 이제까지 호사스럽게 대접을 받고는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주인을 해치려 들다니, 네 이 노옴!……."
다름 아닌 사막 옥수였다. 그녀는 언뜻 몸을 날려 검객을 막아서면서 용두 지팡이를 번개같이 내리쳤다. 다음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검객은 정수리를 호되게 얻어맞고 즉시로 꼬꾸라져 버렸다.
대환희 보살은 그 광경을 보고 흠칫 놀랐다. 노파의 무예는 실로 경지에 올랐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윽고 용두 지팡이가 가로세로 허공을 가르며 춤을 추기 시작하자 무서운 바람이 좌중의 얼굴을 따갑게 때렸다.
"좀 비켜 주시오!"
단지흥은 사람들을 밀치고 썩 앞으로 나섰다. 사막 옥수도 사납게 마주서며 호통을 쳤다.
"이 대리국엔 사람 같은 놈이라곤 하나도 없군! 그 천룡사 중놈들부터가 찢어 죽일 놈들이야. 오늘은 내 네 놈부터 잡아 족쳐야 직성이 풀리겠다!"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용두 지팡이가 휙 허공을 가르며 단지흥의 머리를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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