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남제 단지홍 6

3학년2반 | 2022.02.22 07:40:42 댓글: 0 조회: 470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0324




제26장 사랑, 사랑
단지흥은 급히 피하면서 손가락을 치켜 세우고 사막 옥수 노파의 허점을 노렸다. 그러나 일순 그는 눈을 치뜨며 바위처럼 굳어져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사막 옥수 뒤에 죽 늘어서서 구경하는 사람들 속에서 한 여인의 정든 얼굴을 얼핏 보았던 것이다. 단지흥이 멍청하니 서 있자 사막 옥수는 기회를 놓칠세라 용두 지팡이를 번쩍 쳐들었다. 그래도 단지흥은 눈 한 번 깜빡 않고 그 여인만 바라다보았다. 선비가 다급히 소리를 쳤다.
"폐하! 폐하!"
하지만 단지흥은 여전히 못박힌 듯 서 있을 뿐이었다. 사막 옥수의 용두 지팡이는 사정없이 단지흥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휙 바람소리가 일며 그 정다운 여인이 몸을 날려 노파를 막아 섰다.
"향녀, 왜 저 녀석 편을 드는 게냐?"
사막 옥수는 두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내질렀다. 그러나 향녀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사막 옥수님, 죄송스럽지만 저는 이 단황 나으리와 약속했던 일이 있어요. 오랜만에 만났으니 제게 좀 자리를 내주세요."
"얼빠진 년! 저따위 얼간이 같은 놈하고 약속은 무슨 약속! 보아하니 네 년이 저 녀석에게 치근대려고 그러는 모양인데 그러다간 끝이 좋지 못햇. 계집에겐 사내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구."
그러나 등아는 아랑곳 않고 단지흥을 정겹게 쳐다보았다.
"단황 나으리, 저하고 한 약속은 어떻게 됐죠?"
단지흥은 등아가 일부러 저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약속이란 기실 향녀들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것이지만 그에 대해서 이제 와 그녀가 왈가왈부할 리는 없는 것이다. 단지흥은 어색하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자리에서 등아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는 대답을 늦잡으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등아, 난 그대와 시비를 가리고 싶지 않소! 그러나 그 일은 이미 끝난 일이오!"
대환희 보살은 내내 입을 다물고 고소하게 지켜 보다가 이윽고 살살 눈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아유, 단황 나으리 역시 고운 여자한테는 오금을 못 쓰는구려. 이봐 향녀, 저렇게 살뜰하고 곱상한 사내는 아예 허리춤에 차고 다녀야 해! 그래야 남한테 앗길 염려도 없고 또 필요할 시에는 수시로 시중도 들게 할 수 있지!"
두 사람은 보살의 말에는 아랑곳 않고 계속 마주보고만 있었다. 단지흥은 등아를 대하자 다시금 연민이 솟구쳤다. 그는 결코 등아를 해치거나 시시비비를 가려 시끄럽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 일은 이미 끝난 일이고…… 무엇이든 새로운 요구가 있다면 어디 말해 보시오!"
향녀는 입을 달싹거릴 뿐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악에 받쳐 소리소리 내질렀다.
"그따위 사내한테 빠져 사정을 봐 주는 거야 뭐야, 향녀? 저 놈 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허풍선이야, 허풍선이! 사정없이 뜯어놓지 못하고 왜 그러고 섰는 거냐구?"
대환희 보살은 두 남녀가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면 자기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내심 고소해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향녀가 뜨뜻미지근하게 나오자 속이 바싹바싹 탔다. 그러나 향녀는 그 말엔 코대답도 않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무슨 생각을 하는 듯싶더니 문득 고개를 들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그 말을 하고 싶진 않아요. 훗날을 기약하지요! 전 이제 더 이상 여기서 머뭇거릴 필요가 없으니 그만 가보겠어요."
향녀는 적이 쌀쌀맞게 한마디하더니 홱 몸을 돌려 그대로 나가 버렸다. 그녀의 수하들도 묵묵히 뒤따랐다. 그러나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사막 옥수도 비웃음을 날리며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보아하니 단지흥과 향녀가 보통 사이가 아닌 듯한데 괜스레 나섰다가는 향녀한테든 단지흥한테든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단지흥은 머리를 숙인 채 그대로 있었다. 그는 잠시 마음을 진정하고는 홱 고개를 들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요즘 대리국 경내에서 연달아 아이들이 실종되는 통에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고 민심이 흉흉해지고 있소. 한데 이, 이렇게 통째로 삶아서……. 당신들은 대체 이 불쌍한 애들의 부모들이 얼마나 애타게 자식을 부르면서 통곡하고 있는지 알기나 아시오?"
좌중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얼굴에 모닥불을 뒤집어쓴 듯 즉시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단박에 대들었다.
"이보시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흉본다더니 정말 그 말이 하나도 그른 데가 없구먼요.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못하게 여기면서 무수한 무림 호걸들을 잡아죽인 자가 그래 당신이 아니란 말이오? 황족이라고 뻐겨대면서 의지가지없는 백성들을 너무 괴롭히지 말란 말예요. 백성을 멀리하면 나라가 망하는 법이에요!"
"대환희 보살, 뜬금없이 그건 대체 무슨 소리요? 그따위 허튼수작으로 생사람 잡지 마시오. 오늘은 내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 친히 나선즉, 결단코 보응을 받게 될 것이오!"
대환희 보살은 웃음보를 터뜨리며 바닥에 쓰러진 채 신음하고 있는 운풍 노인을 손가락질하며 비아냥거렸다.
"저 영감태기도 날더러 보응을 받을 것이라고 악다구니를 퍼부었지만 결국은 저절로 쓰러져 저 지경이오. 단황 나으리도 이 보살이 성을 내기 전에 어서 점잖게 물러가는 편이 좋을 거예요."
단지흥은 대뜸 운풍 노인에게로 다가가 쭈그리고 앉으면서 노인을 부축해 앉혔다.
"노옹, 저는 오래 전부터 노옹의 함자를 들어 왔습니다. 저 악귀같은 여인과 맞서시다가 욕을 보셨군요. 어서 몸을 추스르십시오!"
운풍 노인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서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한마디, 한마디 겨우 더듬거렸다.
"단황 나으리, 저 악마 같은 년을…… 죽여…… 불쌍한 애들의 원을, 원을……."
운풍 노인은 끝내 말을 못 맺고 그예 숨지고 말았다. 단지흥은 그를 조용히 눕히고 일어섰다. 그의 두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이 요망스러운 계집년! 왜 이다지도 참혹하게 사람들을 죽인단 말이냐? 독약을 처먹고 죽어야 할 년은 바로 네 년이다!"
"허, 실없는 소리! 내가 왜 죽어? 뭣 땜에? 난 오래오래 살아서 천하 무림의 제일인자가 될 것이니 그때까지 천만 다행으로 목숨을 건진다면 두고 보거라!"
대환희 보살은 바싹바싹 약을 올렸다. 단지흥은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대 시위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의미심장하게 눈길을 던졌다. 그러자 네 사람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살과 그녀의 수하들을 가차없이 죽여 버리자는 뜻이었다.
선비가 곧 큰소리로 외쳤다.
"이제 곧 단황 나으리께서는 무림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갖은 악행을 자행하는 대리국의 잡인들과 망나니들을 사정없이 처단할 것이오. 저 악독한 년에게 속아서 이 석량동으로 들어온 분들은 냉큼 저쪽으로 비켜서 주시오, 괜히 화를 당하지 말고!"
사람들은 황급히 한쪽으로 물러섰다. 그들 중에는 본디부터 심보가 고약하고 지독한 대환희 보살을 미워하는 자가 많았다. 단지흥이 급기야 그녀를 죽여 버리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여차직하면 단지흥을 도와 합심하여 대환희 보살을 처치하겠다고 작심하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준엄하게 호통을 내질렀다.
"잘 듣거라, 설사 저 보살 년의 수하라 해도 회개하고 자책하는자는 죄를 사하리라!"
단지흥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한 팔을 번쩍 쳐들어 손가락을 뻗쳤다. 무서운 힘이 뻗쳐 나갔다. 펑 소리가 진동하더니 맞은편 석벽에 휑하니 구멍이 뚫렸다. 좌중은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저 무서운 힘이 사람 가슴에 닿으면 도저히 살아 남지 못할 터였다.
대환희 보살은 펄펄 뛰면서 악을 썼다.
"단황 나으리, 그따위 재주를 피운다고 누가 수그러들 줄 아는가? 이젠 내 솜씨를 보거라!"
대환희 보살은 느닷없이 앙칼지게 휘파람을 휙 불었다. 그러자 아까 음식을 나르던 사내들이 한 무더기로 달려들었다. 하나같이 눈동자가 게슴츠레해서는 꼭 술 취한 사람마냥 혹은 검을 뽑아 들고, 혹은 부엌에서 쓰던 시퍼런 식도며 쇠스랑을 거머쥐고는 물불 안 가릴 기세로 비칠거리고 있었다. 필시 무슨 극독한 약에 중독돼 환각 상태에 빠져 있음에 틀림없었다. 선비가 다급히 귀띔했다.
"조심하십시오. 아마도 놈들이 미혼탕을 퍼마신 듯하옵니다!"
사내들은 하나같이 낯에 울긋불긋 연지 곤지를 바른 것이 우스꽝스러운 몰골들이었지만 힘들은 장사인 것 같고 기세가 여간 사납지 않았다. 그들은 함성을 지르면서 삽시간에 단지흥 일행을 에워싸더니 사정없이 쇠스랑을 내지르고 칼을 휘둘러댔다. 단지흥 일행은 서로 등을 맞대고 서서 달려드는 사내들을 쳐 눕혔다.
그렇게 밥 한사발 먹을 동안이나 싸우고 나니 보살의 수하 사내들은 대여섯이나 넘어갔다. 그때 돌연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단지흥이 얼핏 바라보니 충피가 낄낄거리며 사람들 속을 새앙쥐마냥 헤집고 다니면서 빨리 손을 써 달라고 아양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개가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는 사막 옥수마저도 팔짱을 낀 채 그저 관망하고만 있었다.
그때 문득 석량동 안에 화하는 소리가 차 넘치면서 음산한 기운이 돌았다. 사람들은 흠칫 놀라 일제히 동굴 어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동굴 어귀에는 어디서 왔는지 수많은 독사들이 기어 들어와 대가리를 쳐들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환희 보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쾌재를 불렀다.
"아이고 어쩌나, 대리국의 호걸이요, 그 무슨 남제랍시고 거들먹거리던 양반이 이제 곧 독사의 밥이 되게 됐군요!"
독사 떼는 솨솨 음산한 소리를 내면서 곧추 굴 안으로 기어 들더니 대환희 보살네 패거리들을 살짝 에돌아 곧바로 단지흥 일행 쪽으로 기어와 혀를 날름거렸다. 그렇게 되자 단지흥 일행은 흡사 활활 타오르는 들불에 갇힌 격이 되었다.
충피가 톡 끼여들었다.
"단황 나으리, 독사 밥이 될 텐가, 곱게 사죄를 할 텐가?"
단지흥은 코대답도 않고 잽싸게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휙 칼바람이 일면서 독사 서너 마리가 대번에 뭉텅뭉텅 동강이 났다. 비릿한 냄새가 확 풍겼다. 그러나 독사들은 비린내를 맡자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우글우글 몰려들었다. 그중 한 놈이 농부의 허리를 휘감고 올라가 그의 팔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충피는 팔짝팔짝 뛰어오르며 손뼉을 쳤다.
"어허, 이젠 끝장이다, 끝장! 골탕 좀 먹어 봐라!"
단지흥은 화급히 소리쳤다.
"모조리 요절을 내라!"
그 말을 신호로 단지흥 일행은 일제히 지풍을 날렸다. 그러자 독사들은 추풍 낙엽처럼 무리로 동강이 나서 널브러졌다.
시간이 갈수록 연지 곤지를 처바른 사내들과 뚱뚱보 여인들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단지흥의 일양지가 이토록 위력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독사의 허리가 뭉텅뭉텅 잘려 나가는 것을 보면 미상불 칼날도 무색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독사들은 수천 마리가 넘는지라 마치 선발대가 넘어지면 후발대가 속속 돌진해 나가듯 한 형상으로 계속 혀를 날름거리며 달려들었다. 단지흥 일행도 역시 쉴새없이 지풍을 내쳤다. 얼마나 힘차게 지풍을 날렸는지 바닥엔 깊숙이 웅덩이가 팼고 그들은 웅덩이 안에 갇힌 듯한 형상이 되었다. 독사들이 웅덩이 턱으로 대가리를 기웃거리는 족족 그들은 일양지를 뻗쳤으나, 그들의 형세는 꼭독 안엔 든 쥐 꼴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그제야 얼굴이 펴지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단황 나으리, 이젠 함정에 빠진 꼴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됐군요. 이제라도 사죄를 하면 용서해 주리다."
단지흥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눈으로는 마음을, 마음으로는 땅을 보면서 그는 조용히 삼라만상을 껴안았다. 그러자 세상의 모들 것이 공(空)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네 시위 역시 그가 하는 대로 고개를 숙였다. 네 사람도 잠시 모든 사념에서 벗어나 정신을 한데 집중시켰다. 그리고는 이내 다지 고개를 치켜 들고 매섭게 일양지를 팍팍팍 날렸다. 이상 야릇한 섬광이 번쩍이면서 독사들이 무더기로 나뒹굴었다. 매캐하고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렇게 일진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흘렀을 때, 돌연 독사도 눈에 보이지 않고 고요히 정적이 감돌았다. 그쯤 되자 웅덩이도 꽤 깊이 파였는지라 밖이 잘 내다보이지 않았다. 농부가 선뜻 나서서 웅덩이 밖으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그랬다가는 그만 진저리를 치며 도로 풀썩 주저앉았다.
"아이구 저게 뭐예요. 독사 떼는 온데간데없고 이젠 난데없이 독충들이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네요!"
그 소리에 선비도 슬그머니 일어나 내다보았다. 그 역시 기겁을 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저런! 무지무지하게 큰 왕지네들이 새까맣게 몰려와요!"
단지흥은 겉으로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으나 내심으로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왕지네는 독사와는 다르다. 왕지네는 그야말로 미물에 지나지 않아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겁을 내지 않고 달려들어 물어뜯는데 그 독만큼은 독사 못지않게 독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데 한두 마리도 아니고 몇 천, 몇 만 마리가 땅바닥을 새까맣게 뒤덮고 달려들고 있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단지흥이 다급히 소리쳤다.
"빨리, 빨리 뛰쳐나가야 해!"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뛰쳐나간단 말인가.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어느새 왕지네 떼는 웅덩이로 내려와 속속 일행에게로 기어오더니 온몸에 달라붙어 느물거렸다. 도무지 떨어뜨릴 수도 없고 막상 떨어뜨린다 해도 다시금 지겹게 달라붙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단아한 학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마치 산호채로 백옥을 두드리는 듯싶은, 그렇게 청아한 소리였다.
사람들은 일제히 동굴 어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여섯 마리의 학이 고운 날개를 유유히 펴고 굴 안으로 곧장 날아 들어왔다. 그뿐 아니었다. 뒤미처 또 대여섯 마리의 독수리가 돛처럼 큰 깃을 확 펴고 날아 들어와 허공을 빙빙 날았다. 이 독수리들은 하나같이 정수리가 벗겨진 민대가리였는데 그중 한 놈의 잔등 위에 예쁜 처녀애가 함박웃음을 머금고 앉아 있었다. 그 독수리는 곧추 단지흥 일행이 들어 있는 웅덩이로 날아갔다. 독수리 등에 앉은 처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뜸 단지흥에게 물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는데 부끄러운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아니, 할머니는 어디 계시죠?"
단지흥은 일순 어리벙벙해졌다. 할머니라니 뉘를 찾는 것인가. 이 처녀는 누굴까, 단지흥은 영문을 몰라 두 눈을 슴벅거릴 뿐이었다. 그러나 선비는 이 처녀가 숙녀동 굴 안에서 뱀을 부리던 그 처녀임을 대번에 알아보고는 알은체를 했다.
"아이구, 요 깜찍한 계집애야, 여기는 웬일이냐?"
하지만 처녀애는 생글생글 웃을 뿐 선비의 말에는 가타부타 대꾸를 않고 대환희 보살 앞에서 우쭐대는 충피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충피, 이 박쥐 같은 놈아, 석동에서 동주 노릇이나 착실히 할거지 왜 여기 와서 대환희 보살과 치근덕거리며 맞장구를 치는 게냐? 아마 죽고 싶은 모양이지?"
충피는 언짢은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요 얄미운 계집애야, 영고 아씨도 이미 숙녀동을 떠나간 마당에 중뿔나게 왜 떠들어대는 게냐? 남의 일에 참견 말고 썩 꺼져!"
"무슨 소리! 이왕에 내 눈으로 본 이상 그냥 스쳐 지날 수는 없어."
"야, 이 싱거운 계집년아! 여기서 싸우든 말든 너의 숙녀동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괜히 참견 말고 어서 꺼지라니깐!"
"쳇, 시답잖은 소리 집어치워라! 가고 안 가고는 내 맘이다! 아무튼 고맙게시리 우리 독수리와 학들의 먹잇감으로 왕지네까지 몰고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겠어. 정말 감사해. 호호호……."
"조그만 계집애가 말이 많구나! 오늘 네 년만 오지 않았다면 저 황제입네 하는 놈 코가 석 자는 빠질 텐데……. 어서 썩 물러가지 못햇!"
대환희 보살은 충피와 처녀애가 수작을 부리는 걸 보고는 가슴이 뜨끔했다. 아마도 이 발가숭이 계집애는 충피가 끌어들인 왕지네를 쉽사리 요절낼 수 있는 모양이었다. 능구렁이 같은 대환희 보살은 살살 눈웃음을 치며 사뭇 정겹게 계집애에게 말을 걸었다.
"얘야, 대관절 넌 사내애냐, 계집애냐?"
계집애는 야광주같이 빛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되받아쳤다.
"참 바보 멍텅구리로군. 그래 내가 계집애인 줄도 모르오?"
"아무리 보아도 계집애 같진 않구나. 계집애라면 어떻게 그런 모양새를 할 수 있겠느냐?"
"내 모양새가 어때서?"
"이 철딱서니없는 것아? 정녕 여자라면 사타구니와 젖무덤쯤은 가리고 다녀야지. 이 환한 대낮에 그게 무슨 꼴이냐!"
대환희 보살은 한 손으로 자기의 가슴과 엉덩이, 심지어 사타구니까지 징글맞게 척척 짚어 보이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계집애는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 물었다.
"아니, 뭐 그런 데를 다 드러낸다고 감기에라도 걸리나, 뭐?"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앙천대소를 했다. 뚱뚱보 여인들과 괴상망측한 차림새로 나선 사내들도 덩달아 음탕하게 웃어댔다. 사람들도 모두 눈앞의 광경에 얼이 빠져 있다가 그 말에는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계집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단황 나으리, 저 보살의 말이 옳은가요?"
단지흥은 이 철없는 처녀에게 딱히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좀전에 충피의 말을 듣고 이 계집아이가 바로 숙녀동 동굴에서 자기를 골탕먹인 그 아이라는 걸 알아차렸었다. 어찌 됐든 숙녀동에서는 저렇듯 벌거벗고 다녀도 누구 하나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없지만 바깥 세상에서야 통하지 않는 법이다.
그는 빙그레 웃어 보이며 일깨워 주었다.
"옷은 입어야 하는 게지."
"춥지도 않은데 공연히 옷을 입을 건 뭐예요?"
단지흥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니 어쩐지 세상물정도 모르고 남녀유별도 모르는 이 천진한 계집애가 얼핏 부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계집애는 그따위 쓸데없는 시비거리는 싹 걷어치우고 생긋 웃으면서 물었다.
"우리 할머닌 잘 지내시겠지요?"
단지흥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는 그다지 즐겁지는 못할 거예요. 숙녀동에 계실 땐 할머니 말 한마디면 누구나 다 꼼짝못했거든요. 한데 듣자니까 단황 나으리는 무슨 일이든 혼자 독단을 한다면서요? 어쩌면 그렇게 무지막지할 수가 있어요? 드문드문 우리 영고 할머니 말씀도 들어줘야지요, 뭐!"
계집애는 곱게 눈을 흘기며 종알거렸다. 단지흥은 그저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세속의 티 하나 묻지 않은 이 발가숭이 계집애가 귀엽기만 했다.
대환희 보살은 어떻게든 이 처녀를 쫓아내려고 자꾸만 트집을 잡으며 또 걸고 넘어졌다.
"이 망측한 계집애야, 여기 이렇게 숱한 남정네들이 보고 있는데 정녕 부끄럽지 않다는 게냐?"
"내가 부끄러울 게 뭐야? 무예를 비겨도 보살한테 질 것이 없는데."
처녀는 픽 웃으며 대환희 보살을 노려보았다. 그쯤 되자 보살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처녀는 여전히 독수리 등에 올라앉아 대뜸 당돌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보살, 이 단황 어르신은 우리 숙녀동 동주셨던 영고 할머니의 서방님 되시는 분이야. 그러니 잔말 말고 놓아주란 말야. 내 말 안 듣고 계속 이렇게 고생을 시키면 내 그냥 보고만 있진 않을 테니깐!"
단지흥과 네 시위는 느물느물 기어오르는 왕지네들을 조심조심 떨어뜨리느라고 비지땀을 빼고 있었다.
대환희 보살은 능글맞게 웃으며 이죽댔다.
"그래 네 따위가 어쩔 셈이냐?"
"좋아 기어코 놓아주지 않고 나와 맞서겠다면 내 솜씨를 보여 주는 수밖에!"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계집애의 주위에 깃을 가다듬고 조용히 앉아 있던 학과 독수리들이 불현듯 무섭게 날아올라 무시로 땅에 내리꽂히며 왕지네들을 사정없이 쪼아먹기 시작했다. 아무리 지독한 왕지네라도 학과 독수리 앞에서는 맛좋은 먹이에 지나지 않았다. 학과 독수리들은 순식간에 왕지네들을 몽땅 먹어 없앴다.
그러자 처녀는 득의양양하게 충피를 내려다보았다.
"충피, 이 못난 녀석아! 네 놈은 그래 기껏 오복을 가지고 우쭐대느냐? 어떠냐, 나에게는 네 그 신주 단지 같은 독충들을 다 잡아먹을 수 있는 학과 독수리들이 있다. 이래도 마냥 독충을 내몰셈이냐?"
"요 괘씸한 계집년, 왜 번번이 나를 걸고 넘어지는 거냐? 내 언제고 너희네 숙녀동을 사정없이 짓뭉개 놓고 말리라!"
충피는 꽥 소리를 지르더니 한 마리 딱정벌레처럼 또르르 달려와 주먹을 쥐고 그녀에게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자 독수리들이 즉시로 퍼드덕 달려들어 그의 팔소매를 물어뜯고 머리를 쪼아댔다. 그는 급히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달팽이처럼 몸을 오므렸다.
그 처녀는 손뼉을 치며 깔깔거렸다.
"아이고, 멋없어라. 난쟁이가 꼭 팽이처럼 잘도 도는구나!"
그러면서 그녀는 휘파람을 불어 독수리들을 물렸다. 독수리들이 물러서자 충피는 볼이 잔뜩 부어 퉁명스레 내뱉었다.
"요 앙큼한 것! 언제고 네 년을 잡으면 가만 안 둘 테다!"
"너 따위 난쟁이가 무슨 재간으로 날 가만 안 둔단 말이냐? 네놈이 날 때릴 수가 있나, 감히 욕할 수가 있나? 네 놈은 아무 재간도 없는 주제에 날 어떻게 하겠다고 그래?"
충피는 울상이 되어서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꼭 다물고 그녀를 빤히 노려볼 뿐이었다.
대리국은 중원 땅에 있는 나라들과는 어느 모로 보나 판이하게 달랐다. 대리국 황궁만 보더라도 비록 고래등 같은 집들이 들어서 있긴 하지만 우람한 성벽에 둘러싸인 으리으리한 중원의 황궁과는 비교도 안 되게 그저 재물이나 권세깨나 있는 벼슬아치들의 장원을 방불케 했다. 뿐만 아니라 황족들 사이에는 중원에서처럼 까다롭게 틀을 차리고 위엄을 부리는 법이 없고 흔히들 통쾌히 마음을 주고받으며 서로 무림없이 지내고 있었다. 다만 한 사람, 영고에게 만큼은 그
런 법도마저도 짐스럽기 그지 없었다.
주백통은 더욱이 황제의 손님으로 대리국 황궁에 온 이후 아무런 구속도 없이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그는 가끔 종남산에 있을 때의 일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언짢았다. 그는 종남산의 무림 형제들 가운데서 지위가 아주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전진파의 계율은 엄격한 편이라 왕중양에게는 깍듯이 사형이라 불러야 했고 그런가 하면 사질(師姪)들 앞에서는 본의 아니게 거드름을 피우고 위엄을 부려야 했다. 주백통은 본디 솔직한 성품이라 위계질서가 분명한 종남산 생활
에 진절머리가 났다. 더욱이 자기를 추어올리며 아첨을 떠는 사제, 사질 들을 대할 때는 정녕 입이 써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한데 실로 구속이 없는 이 대리국은 얼마나 살기 좋은가!
주백통은 이 대리에서 영고에게 검술이나 가르치며 한가로이 소일하는 것이 못내 흥에 겨웠다. 하지만 이따금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절로 혀를 내두르게 되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종남산에서는 누구도 선뜻 제자로 받아 주지 않았지 않은가. 무예를 배워 달라고 재삼 간청하는 이도 허다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했던 것이다. 한데 대리국에 온 후부터는 자진해서 영고에게 검술을 배워 주게 되었고 또 그러면서 그럴 수 없이 재미
를 느끼고 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하루는 영고의 침실 앞에서 검술을 배워 주다가 잠시 쉬게 되었다. 영고가 주백통을 쳐다보며 느닷없이 물었다.
"지금 제가 배우고 있는 전진 검법과 일양지를 비기면 어느쪽이 더 셀까요?"
"딱히 어느쪽이 세다고는 말할 수 없을 거요. 아마 비슷비슷하겠지."
주백통은 그다지 자신이 없어 대강 얼버무렸다. 그러나 영고가 방실 웃으면서 엉뚱하게 되받았다.
"전진 검법으로 일양지를 누를 수 있다니 이젠 됐어요!"
"뭐가 됐단 말이오?"
영고는 아무 말 없이 생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사실 영고는 내심 단지흥이 은근히 미워지던 참이었다. 보기와는 달리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만간 일양지를 누를 수 있는 무예를 배워 단지흥의 기를 꺾어 놓고야 말리라고 벼르고 있던 터였다.
주백통이 그러한 영고의 속마음을 알 리 없었다. 그는 지나가는 말투로 혼자 중얼거렸다.
"허 참, 종남산에 있을 땐 난 한 명도 제자를 받아 주지 않았었는데……."
그 말에 영고는 깔깔 웃어대다가 깜찍하게 대꾸했다.
"뭣 때문에 제자를 받아 주지 않았는지 다 알 만해요. 혹시 총명한 제자를 받아 두었다가 장차 사부의 무예를 뛰어넘는다면 망신살이 뻗칠까 봐 그랬지요?"
그러더니 그녀는 허리를 잡고 깔깔 웃어댔다. 웃느라고 그녀가 몸을 들썩거릴 때마다 봉곳한 젖]가슴이 탐스럽게 오르내렸다. 주백통은 슬그머니 눈길을 피하며 혼이 나간 듯 멍청히 서 있었다. 웬일인지 그때 그 대들보 위에서 보았던 그녀의 알몸이 눈앞을 스쳐 갔다. 그는 한참 만에야 한마디 내뱉었다.
"웃긴 왜 웃소?"
그러자 영고는 더욱 요란스럽게 웃어댔다. 저고리가 찢어질 듯 팽팽히 부풀어오른 그 몽실몽실한 젖가슴이 마치 손끝에 닿는 듯 해서 그는 사정없이 손이 근질거렸다. 일순 자기도 모르게 온몸으로 짜릿하게 그 무엇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는 홀린 듯이 영고의 가슴만을 건너다보면서 투덜거렸다.
"허 참, 허파에 바람이 들었나 보군, 실없이 웃기만 하는 걸 보니……."
기실 주백통은 여자의 몸을 한 번도 범해 보지 못한 동정남이요, 하룻밤 풋내기 사랑도 겪어 보지 못한 말 그대로 숫총각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이상하게도 영고와 함께 있게만 되면 괜스레 뿌듯하고 가끔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아리따운 몸매를 흘끔흘끔 훔쳐보며 마냥 가슴이 뛰는 것이었다.
주백통은 홀린 듯이 영고의 가슴팍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영고가 살며시 웃으며 수수께끼 같은 물음을 내놓았다.
"남자와 여자가 무엇이 다른지 아세요?"
주백통은 얼떨떨하니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영고는 능금알같이 얼굴이 상기되어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키득거렸다. 영리하고 눈치 빠른 영고는 진작에 주백통이 자기에게 홀딱 반했다는 걸 읽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주백통은 단지흥과는 영판 다른 사내였다. 그는 솔직하고 쾌활하며 남을 속이거나 억지를 부릴 줄 모르는 순박한 사내였다. 더욱이 자기처럼 번잡하고 까다로운 예절에는 딱 질색이고 속세의 예의 도덕을 도외시하는 그가 그녀 역시 새록새
록 좋아지는 것이었다.
영고는 주백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길에선 애교가 흘러 넘쳤다. 주백통도 괜히 설레는 가슴을 억누르며 넋을 잃고 마주보았다. 그러나 그는 영고의 마음을 다는 읽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출렁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누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남자든 여자든 다 사람인데 무에 다른 게 있겠소?"
영고에게는 그 말은 마치 남자든 여자든 번거롭게 서로 가릴 것이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녀는 대번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제야 주백통은 자기가 실언을 했음을 느끼고 다급히 용서를 빌었다.
"영고, 아마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 같구먼. 내가 아니 말한 셈 쳐 주구려."
영고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가슴 아픈 옛일들을 돌이켜보고 있었다. 단지흥과 함께 지낸 그 잊지 못할 밤을 생각하노라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날 밤, 숙녀동 밤 하늘에 휘영청 솟아오른 보름달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녀는 단지흥과의 사랑이 그날 밤의 보름달처럼 아름답게 둥그래질 수 있기를, 둘의 사랑이 고요한 보름달처럼 영원하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하지만 그녀의 자그마한 꿈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단지흥은 결코 한 여인의 품에서 살 사내가 아니었다. 그는 한 여인과의 절절한 사랑보다도 대리국의 존엄과 사직을, 무림 고수로서의 체면과 명예를 백 배, 천 배 더 소중히 여기는 사내였고 뿐더러 부처님을 위해서라면 사랑도, 가정도 버리는 냉혹한 사내였다. 영고는 일순 그에게 버림받은 듯한 느낌이 들어 적이 가슴이 쓰렸다. 그녀는 문득 주백통의 손을 잡았다.
"저를 좀 따라와요!"
주백통은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멍청히 영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손을 잡혀 있자니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도저히 뿌리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저 그녀가 잡아 끄는 대로 따라갔다.
영고는 그를 잡아 끌고 자기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들어가자마자 무엇을 찾는 사람마냥 이 구석 저 구석 샅샅이 살폈다. 휘장 뒤에라도 혹 누가 숨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윽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자 그녀는 주백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당신은 제 사부님이시죠?"
"그렇소만."
주백통은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영고가 눈빛을 반짝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저의 사부님이에요. 당신은 참말 좋은 분이세요. 한데 금은보화도, 돈도 탐내지 않으시니 저로서는 은혜를 갚을 방도가 없군요. 오늘은 은혜를 갚는 뜻으로 한 가지만 보여 드릴까 해요."
주백통은 도통 영문을 몰라 영고의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대관절 뭘 보여 주려는 걸까? 정색하고 말하는 품이 꼭 무슨 진귀한 물건을 보여 주려는 것 같다. 다 관두고 뭐니뭐니 해도 방긋 웃어 주는 편이 훨씬 좋은걸! 너무 정색하고 말하니 괜히 가슴만 아프구나.'
영고는 말뚝처럼 서 있는 주백통을 침대 쪽으로 천천히 끌었다. 주백통은 마치 귀신에게라도 홀린 듯했다. 그는 그저 맥을 놓고 비척비척 끌려갔다. 느닷없이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아무리 사부라 해도 필경은 외간 남자인 자기를 침대로 끌고 가는 영고의 마음을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영고는 침대 앞까지 바싹 다가서더니 갑자기 홱 돌아서서 주백통을 빤히 쳐다보았다. 서글서글한 두 눈에 촉촉히 이슬이 맺혔고 두 볼은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주백통은 흠칫 놀랐다. 그녀는
한동안 사내를 뜯어보더니 땀에 젖은 저고리를 벗기 시작했다.
"무예를 가르쳐 주신 사부님의 은공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저의 가장 아름다운 곳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주백통이 고개를 내두르며 뭐라 말하려는데 벌써 새하얀 젖무덤이 다 드러났다. 그 위엔 솟아오른 복숭아빛 젖꼭지까지……. 주통은 그만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려 했으나 두 발은 꼼짝을 안 하고 눈길은 자꾸만 영고의 젖가슴 쪽으로 쏠리는 것이었다. 그의 가슴은 심하게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무릇 사내들과 정을 통해 본 여인들은 이다지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인가? 영고는 눈 깜짝할 새에 옷을 다 벗고는 조용히 침대에 올라가 반듯이 누웠다. 그녀의 나체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신비롭고 매혹적이었다.
"사부님, 한번 찬찬히 보아요. 필경 사내들과 다르게 생겼을 거예요!"
영고는 착착 휘감기는 듯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속살거렸다. 그러나 주백통은 입도 벙긋 못하고 얼빠진 사람마냥 멍하니 서 있었다. 미리 속에서는 윙윙 소리가 나고 온몸이 나른했다. 자고로 남녀들이 왜 서로 살을 섞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듯도 싶었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길로 영고의 몸을 천천히 더듬었다. 영고의 알몸은 어디를 보나 신비롭기만 했다. 은잔을 엎어놓은 것 같은 하얀 젖무덤, 백옥 같은 다리, 그 사이에 펼쳐진 자그마한 수풀과 샘터…… 주백통은
그만 혼백이 달아나 버리는 듯싶었다.
세상에 여자를 좋아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으랴? 한 사내는 완고한 아버지가 무섭게 단속하는 바람에 열여덟 먹도록 담장 안에 갇혀 여자와 상종하지 못했다는 옛이야기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담장 밖에 나갔다가 아장아장 걸어가는 여인과 마주쳤다. 그것이 너무나 신기하여 집에 돌아와 제 아버지를 보고 대뜸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다. 그랬더니 그 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지 않은가.
"그 놈의 짐승이 아기작아기작 걷지 않더냐? 그게 바로 거위는 거위로되 흰 거위라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 철딱서니없는 아들 놈은 당장 거위를 사 달라고 제 아비를 못살게 굴었다는 것이다.
하기야 주백통이 그 옛이야기에 나오는 사내처럼 세상물정을 모를 리야 없지만 아무튼 남녀간의 정사에 대해서는 정말 숙맥이었다. 그는 가슴이 터질 듯 쿵덕거려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 손에 땀을 쥐었다. 영고는 점점 더 점점 더 숨결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윽이 주백통을 쳐다보면서 속삭였다.
"아무데나…… 아무데나 만져 보아요. 자, 어서요!"
주백통은 이제 콩 튀듯 심장이 뛰어댔다. 정말 만져 보고 싶었다. 하지만 손은 얼어붙은 듯 아무리 해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영고는 주백통의 손을 잡아다가 가만히 자기의 가슴 위에 올려 놓았다. 그는 일순 가늘고 달콤한 전율을 느꼈다. 마침내 그의 손은 비단결 같은 영고의 몸을 천천히 더듬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세상에는 무예를 닦는 일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깨치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왜 계집의 살결은 사내들의 살결보다 한결 더 부드럽고 따뜻할까? 그는 점점 숨이 가빠지고 손놀림이 빨라졌다.
"나 원, 여자들의 몸이란 이토록……."
"이제부터 사부님은 계집의 맛을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는 그녀는 소리 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왜 우는 거지?"
주백통은 당황해서 손길을 멈추고 빤히 영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 없이 갈수록 슬프게 울기만 할 뿐이었다.
'왜 울까? 내가 자기의 몸을 어루만져 보았다고 우는 걸까? 자기가 직접 내 손을 끌어다 어루만져 보게 해 놓고서는…….'
주백통은 그녀의 심사를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 안절부절못했다.
"됐어, 됐어. 이젠 더는 만지지 않겠으니……."
그러자 영고는 갑자기 울음을 그치고 그의 손을 더욱 힘껏 잡아 끌며 주백통을 정겹게 올려다보았다.
"저를 좋아하시겠죠?"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 거요? 무예를 닦듯 날마다 어루만져 주면 좋아하는 거요?"
영고는 이 순진한 사내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방그례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백통은 단박에 싱글벙글하며 어린애처럼 말했다.
"좋아, 날마다 그대를 좋아해 주겠소."
한 여인을 좋아하는 게 대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 사내, 이 어리숭한 사내가 영고는 미덥기 그지 없었다. 그녀는 와락 주백통의 품에 안겨 들며 가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께 여자가 무엇인지 알려 주고 싶어요."
향녀들은 들어갈 때와는 달리 걸어서 미고하 기슭에 이르렀다. 웬지 그녀들의 발걸음은 몹시 무거워 보였다. 강변까지 오니 어디선가 사내들의 웅글진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파도 사나운 막조하에는
성미 사나운 하신(河神)이 살고 있고
부평초처럼 떠도는 고깃배마다엔
변덕스러운 아낙네들 도사리고 앉았네
이 배 위의 어부님은
하루 세 번 욕을 먹고
저 배 위의 어부님은
하루 세 번 뺨을 맞네
지독하다 막조하의 아낙네들
집집마다 남정들을 종처럼 다룬다네.
향녀 등아는 처연히 듣고 있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집집마다 남정들을 종처럼 다룬다니 참 멋진 고장이군. 어찌하면 남정들이 아낙네들의 말을 곰상곰상 잘 들을 수 있을까?"
"등아 향녀님, 당신의 그 단황 나으리도 이 고장의 남정네들처럼 손아귀에 쥐어야 해요. 그분은 황제라고 너무 우쭐대면서 거들떠 보지도 않으니……."
향녀들 중에 누군가가 불쑥 말을 꺼냈다. 하나 그 말은 등아의 아픈 곳을 후벼파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등아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둔한 그 향녀는 눈치도 없게 종알거렸다.
"등아 향녀님, 단황 나으리를 한번 찾아가 물고늘어져 봐요. 이왕 정을 통한 이상 황비로 맞아들이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하면서."
등아는 고개를 숙인 채 혼자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 사람은 벌써 황비도 맞아들였고 또 여인들도 허다해."
"그따위 계집들은 나한테 맡겨요. 몽땅 죽여 버리면 돼죠, 뭐."
그 향녀는 분을 참지 못해 대뜸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등아는 어설프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향녀들은 저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등아는 조용히 고개를 들고 정겨운 눈길로 여러 향녀들을 둘러보았다. 향녀들은 늘 자기들끼리는 남의 서러움을 지나치지 않고 제 일처럼 발 벗고 나서곤 했다. 등아는 두 눈에 가랑가랑 이슬이 맺혔다.
"걱정하지 마, 헌 짚신도 다 짝이 있다는데 조만간에 시집을 가게 되겠지.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향녀들은 의아한 눈매로 등아를 건너다보았다. 등아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건 바로 다름아니라 너희들 모두가 다 시집을 가야 한다는 거야. 너희들 모두가 좋은 사내를 만나 시집을 간 뒤에 난 맨 나중에 시집을 갈 테야."
등아는 기실 단지흥을 만난 이후로 마음이 돌아서 있었다. 한때는 스스로 유방까지 절단해 가면서 독하게 마음을 사려먹었지만 이제는 사내에 대한 덧없는 원망을 훌훌 털어 버리고 가슴 없는 여자라도 원하는 사내가 있다면 모두 짝을 맺어 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고 싶은 것이었다. 향녀들은 그 말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며 정겹게 등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점점 사내다운 사내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믿을 만한 사내는 한 사
람도 없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이제 누구한테 시집을 보낸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아는 배은망덕한 사내들이 새삼스레 미워지는 것이었다.
등아는 얼른 말머리를 돌려 버렸다.
"얘들아, 실없는 말들일랑 그만 하고 어서 서두르자꾸나."
사내의 웅글진 노랫소리는 계속 구슬프게 들려 왔다.
향녀들이 한들한들 강기슭에 내려서니 한 사내가 배를 몰고 가까이 다가왔다. 아까 노래를 부른 그 사내인 듯싶었다. 향녀들은 사내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배에 올랐다. 사내는 향녀들을 보더니 대뜸 희롱하듯 물었다.
"아마 석량동에 갔다 오는 아가씨들인 게지? 어떻게 잘들 놀았소? 음식은 무얼 대접 받았소?"
향녀들은 너나없이 입들을 꾹꾹 다물고 딴전을 피웠다.
하지만사내는 그러든 말든 저 혼자서 마냥 히죽거렸다.
"듣자니 대환희 보살네 석량동에서는 도리어 남정들이 호강을 한다더구먼. 대환희 보살은 끼니때마다 사내들을 무릎에 앉히고 갓난애에게 암죽 먹이듯 밥을 먹여 준다지 않아? 참 세상에 석량동 남정들 같은 상팔자가 그래 어디 있겠소?"
사내는 향녀들을 흘끔거리며 끝없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향녀들은 여전히 묵묵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팔자야 영락없는 소 팔자라니까.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강위에서 살면서 배 빠지게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있지만, 어디 하루라도 배불리 먹을 수가 있나. 어쨌든 이날 입때껏 여편네 손에 쥐어 사는 신세니. 가끔 이따위 여편네가 없으면 못 산다더냐 하고 주먹을 부르쥘 때도 있지만 정작 여편네가 한번 소리치기만 하면 찍소리도 못하고 설설 기어야 하니, 이거 원……. 여기 풍속이 그러니 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
배가 대안에 닿았다. 향녀들은 한들한들 뱃머리에 모여 서더니 괜스레 호들갑을 떨며 뭍으로 뛰어내릴 염을 못 내고 부러 동당거렸다.
"아이구 무서워라, 어떻게 내린담?"
향녀들은 강물에 떨어질까 무서워하는 척하며 힐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사내는 얼이 빠져 멍한 눈길로 쳐다보더니 얼른 사위를 둘러보았다. 여편네가 보이지 않자 그 사내는 얼씨구 좋다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꽃 같은 향녀들을 번쩍번쩍 안아다가 하나씩 하나씩 강기슭에 내려 주었다. 사내는 구름 위에 둥둥 뜬 기분이었다.
'아이구, 이 계집의 허리는 정말 날씬하기도 하다. 아까 저 계집의 겨드랑이에서는 향긋한 내음이 나더니만……. 어이구, 저 계집은 능금알 같은 볼에 쌍보조개까지 살짝 팬 절세 미인이로구나. 아이 참, 내 신세도 가련타, 하룻밤도 이런 계집들을 끼고 자 보지 못하고 허구한 날 암캐 같은 여편네에게 들볶이기만 하다니……."
사내는 속으로 장탄식을 하면서도 연신 입이 벙싯거렸다. 실로 돈 한푼 들이지 않고 톡톡히 재미를 보는 셈이었다. 한데 다 내려 놓고 보니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 버린 듯하니 허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내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향녀들을 번갈아 보며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향녀 등아가 옳다구나 싶어 슬쩍 물었다.
"아저씬 아내가 계신가요?"
"있고말고."
그러나 사내는 뒤를 돌아보더니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목소리를 착 가라앉혔다.
"아이구, 이리로 오는구려. 저 여편넨 범같이 무섭다오. 난 저여편네 앞에서는 지레 죽었수다 하고 사는 처지라오."
등아 향녀는 씩 웃으며 그 말엔 코대답도 않고 아낙네가 다가오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가 다가오자 그녀는 넌지시 한 마디 던졌다.
"이 분이 댁네 주인인가요?"
아낙네는 함상궂은 눈길로 자기 남편과 향녀들을 쭉 둘러보더니 대번에 코방귀를 뀌었다. 등아는 아랑곳 않고 또 물었다.
"아저씬 참 좋은 분이시죠?"
"좋긴 뭐가 좋아요. 수캐처럼 그저 계집이라면 오금을 못 쓰는 놈팽인걸요. 일찌감치 죽어 버리기나 하면 속시원하겠어요. 어이구 내가 눈이 멀었지!……"
아낙네가 대뜸 성을 내자 등아는 빙긋 웃으면서 단박에 되받아 쳤다.
"좋아요, 그럼 오늘부터 남편은 잃은 셈 치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삽시에 칼날이 번쩍하는 듯싶더니 돌연 사내의 대갈통이 뎅겅 떨어져 백사장에 나뒹굴었다. 아낙네는 일순 무슨 일인가 싶어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가 이내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전 이미 향녀들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뒤였다. 뒤이어 휑한 백사장에는 한 아낙네의 애달픈 넉두리가 처연하게 떠돌았다.
"아이구, 이를 어쩌나! 내 하늘 같은 서방님, 서방님을 앗아 가다니…….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했거늘, 누가 너따위 계집들더러 상관하라고 했더냐? 아이구, 이제 나는 누굴 믿고 사나……."




제27장 말못할 사정
주백통은 영고와 더불어 꿈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사내와 계집 사이에 이토록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줄은 여태껏 몰랐었다. 요즘 그는 계집을 제자로 삼은 일을 더없이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영고가 얼마나 살뜰하게 대해 주는지, 실로 종남산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즐거움이었다. 둘은 낮이고 밤이고 간에 생각만 나면 한껏 운우지락을 누렸다.
영고는 마치 숙녀동에서의 그날 밤으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그날 그녀는 얼마나 황홀했던가. 그리고 이곳 황궁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단지흥은 누구보다도 그녀를 사랑해 주었었다. 그 치주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치주가 나타나고부터는 그는 더는 뜨겁게 그녀를 껴안아 주지 않았었다. 버림받은 심경으로 남모르게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샜는지, 그녀의 슬픔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비로소 그녀는 혼신의 정열을 쏟아 한 계집만
사랑하는 이 우직스러운 사내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함초롬히 달빛이 어린 은은한 밤이었다. 영고는 주백통을 정겹게 쳐다보며 한마디 슬쩍 농을 걸었다.
"사부님, 이젠 사내와 계집이 어떻게 다른지 아시겠지요?"
"알고말고, 계집은 필경 계집이고 사내는 필경 사내지 뭐."
주백통은 멋쩍게 웃으면서 영고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영고는 한껏 응석을 부리며 주백통의 넓은 가슴에 안겨 들었다. 주백통은 영고의 동그스름한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영고, 이제 단황 나으리가 돌아오면 난 말이오, 영고를 데리고 종남산으로 가게 해 달라고 청을 넣을 거요. 난 그대를 데리고 종남산으로 가서 사형에게 실컷 자랑을 할 테야, 이렇게 천하 절색인데다 재주도 뛰어난 제자를 얻었다고 말이오. 사실 사형님도 손불이(孫不二)라고 하는 여제자를 두고 있지. 이제 종남산에 가면 손불이와 한번 무공을 겨루어 보라구. 아마도 어슷비슷할 게야."
영고는 주백통의 가슴을 살짝 떼밀며 곱게 눈을 흘겼다.
"우리 둘의 관계가 황제 폐하께 발각이라도 되는 날에는 큰 야단이 나요. 만약 종남산에 가고자 한다면 아예 말을 내지 말고 슬그머니 떠나야 해요."
영고는 비록 숙녀동에서 아무 구속 없이 자란 여인이었지만 남녀간에 은밀히 정을 통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백통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듯싶었다.
"그래서야 안 되지. 나하고 단황 나으리는 친구간인데 말 한마디 없이 떠난다면 친구간의 의리를 저버리는 게 아니겠소?"
주백통은 막무가내로 우겨댔다. 영고는 자기가 단지흥의 황비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삼켜 버렸다. 세상에 이처럼 우직한 사내도 몇 안 되리라. 이제 곧 단지흥을 만나면 다짜고짜 자기를 데리고 종남산으로 가겠다고 떠들어댈 터인데, 그러면 모든 비밀이 드러나…….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처럼 주변머리 없고 고지식한 주백통이, 그른 짓은 죽어도 하려고 하지 않는 주백통이 밉지 않았다. 아무튼 그녀는 천성이 착한 이 사내
에게 자기 일생을 내맡기려고 작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수로 단지흥을 속이고 주백통과 함께 종남산으로 간단 말인가? 영고는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떨려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폐하는 여기서 당신이 나에게 무공을 배워 준 일마저도 못마땅하게 생각할 거예요."
영고는 잔뜩 수심에 잠겨 근심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주백통은 대수롭지 않게 큰소리를 쳤다.
"나 원 참, 별걱정을 다 하는구려. 아무려면 단황 나으리가 그렇게 옹졸한 사람이겠소? 항차 그 양반의 무공이 나보다 한 수 높은 데 말이오."
영고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공을 배워 준 일은 개의치 않는다 하더라도 자기의 황비와 정을 통한 일만큼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 비밀이 탄로나는 날에는 당장 주백통을 잡아죽이려 할지도 모른다. 한데 이 철딱서니 없는 사내는 모든 일을 좋게만 풀이하고 있으니, 영고는 너무나 답답해 장탄식을 했다.
"이봐요, 사부님! 우리 둘의 일은 그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돼요. 세상의 사내와 계집들에게는 모두 비밀이 있는 법이에요. 남녀간에 비밀을 지키면서 은밀히 사랑을 나누어야지 그것이 일단 드러나면 화가 되기가 십상이라구요. 우리 둘 사이는 아직 그 누구도 모르니까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 돼요. 알겠어요?"
"허 참, 괜찮다는데도……. 어쨌든 알겠소. 이제부터 영고는 이 주백통의 사람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대의 그…… 그 아름다운 비밀은 그 누구에게도 알려 줄 수 없지."
영고는 답답해서 두 주먹으로 주백통의 가슴을 팡팡 쳤다.
"참, 혼 나간 소리만 하시네요! 아무튼 비밀은 꼭 지켜야 해요!"
그러자 주백통은 유쾌하게 껄쩔 웃었다.
마침내 단지흥이 돌아왔다. 그는 황궁을 떠나 있으면서 영고를 살갑게 대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해 못내 후회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숙녀동의 처녀에게 도움을 받고 난 이후에는 그녀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는 황중으로 돌아오는 길로 곧장 영고의 처소로 찾아갔다. 그는 휘적휘적 걸어가면서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영고, 내가 석량동에서 누굴 만났는지 알겠소? 다름 아닌 그 깜찍한 발가숭이 계집애를 만났소. 그 계집을 여기에 데려오려고 하니까 글쎄 돌아가서 무당 할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겠소. 그래서 무당 할미는 지금 대리국 궁궐에 있고 또 이 단황의 말을 잘 들으니까 걱정 말고 함께 가자고 해도 끝내 말을 듣지 않는단 말이야. 얌통맞은 계집애같으니라구!"
그는 영고를 향한 정이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영고를 놀래 주려고 살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방으로 들어간 순간 그는 흠칫 놀랐다. 영고와 차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한가롭게 찻잔을 기울이고 있는 주백통과 눈빛이 마주쳤던 것이다.
'아니, 주백통이 왜 영고의 침소에 와 있는 거지?'
단지흥은 슬쩍 시치미를 떼고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백통 형, 여기는 웬일이오?"
주백통은 적이 서둘러댔다.
"방금 검술을 익히고 한숨 쉬는 중이오."
"그렇소?"
주백통은 얼른 일어나 자리를 권했다. 단지흥은 주백통이 권하는 대로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단지흥은 말없이 영고와 주백통을 번갈아 보며 찻잔을 잡았다. 어쩐지 주백통이 둘 사이에 끼여든 것 같아 싫었다. 오랜만에 영고와 만났는데 저토록 눈치도 없게 자리를 피해 줄 줄도 모르다니…….
하지만 주백통은 주백통대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고와의 약속은 절대로 어길 수 없고, 그녀의 비밀은 자기밖에 모르며, 자기와 영고만 말을 내지 않으면 단지흥도 결코 알 수 없으리라 생각하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주백통은 영고를 슬쩍 건너다보며 한 눈을 꿈쩍여 보였다.
단지흥은 대번에 그것을 눈치챘다. 왜 눈짓을 할까. 왜 자기를 따돌리는 것일까. 필시 무슨 꿍꿍이가 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이들 두 남녀가 서로 정을 통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해야 그 무슨 기묘한 검술을 익히고 자기를 속이고 있는 줄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백통을 건너다보다 말고 데면데면하게 영고를 바라보았다.
"영고, 난 어제 그대의 그 숙녀동의 꼬맹이 계집애를 만났었소. 그 계집애가 그토록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니까. 그 계집애만 아니었더라면 석량동에서 충피란 놈한테 크게 당할 뻔했어."
영고는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그저 담담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랬어요? 다행이군요."
"하지만 그 계집엔 아직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더군. 글쎄 대환희 보살이 별의별 상스런 말을 다 해도 그 뜻을 못 알아듣더라니까. 참말 티없이 순진한 계집애야!"
"그 애가 철부지든 뭐든 다 숙녀동의 일이고 이젠 나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영고는 적이 매정했다. 단지흥은 얼떨떨하니 입을 다물며 힐끔 영고를 쳐다보았다. 영고 역시 주백통이 어서 빨리 자리를 떴으면 해서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술 덤벙 물 덤벙 하는 주백통이 그냥 앉아 있으면 자칫 꼬리를 잡힐지도 모른다. 그녀는 조바심을 치면서 손에 땀을 쥐었다. 단지흥은 단지흥대로 어서 얼어붙은 영고의 마음을 녹여 주고 뜨겁게 포옹해 주고 싶었으나 주백통이 눈을 뻔히 뜨고 보고 있는지라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무딘 주백통은
바위처럼 듬직하게 앉아 퉁방을 같은 눈알만 끔벅거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영고가 불쑥 말을 꺼냈다.
"사부님, 미안하지만 먼저 가 보시지요. 저는 황제 폐하와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그, 그렇소?"
주백통은 떨떠름하니 일어나 주춤주춤 밖으로 나갔다. 그는 문을 열면서 어줍잖게 영고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영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가 나가고 나자 단지흥은 조용히 일어나 영고에게로 다가갔다. 한때 치주와 사랑에 빠져 영고를 멀리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영고가 미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너무나 예의 범절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어서 그랬을 뿐이었다. 하나 치주와의 사랑은 이제 다 지나가 버린 애절한 옛
이야기에 불과하게 되었고 이즈음 단지흥은 오로지 영고와의 사랑만이 하늘이 정해 준 백년가약으로 생각되는 터였다.
"영고, 그 달 밝은 밤의 신비로움을 잊을 수 없구려……."
그는 불현듯 강한 충동을 느끼면서 와락 영고를 얼싸안았다. 그러나 영고는 매정하게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단지흥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영고가 담담한 기색으로 말했다.
"폐하, 잠시 고정하십시오. 소침이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오래간만에 만나면 첫날밤보다 더 그리운 법이거늘 이야기는 두었다 하고 우선 나와 함께……."
단지흥은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다가들었다. 하나 영고는 이제 정색을 하며 단지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폐하, 황송하오나 소청은 요즘 몸이 좀 불편하와……. 여기 좀 앉으셔서 이야기나 나눴으면 하옵니다."
단지흥은 대번에 양미간을 찡그렸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구려. 검술 익히기도 잠시 멈추고 며칠 푹 쉬시오. 내 며칠 후에 다시 찾아오리다."
단지흥은 심드렁하니 한마디 던지고 이내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영고가 매섭게 외쳐 불렀다.
"폐하!"
단지흥은 흠칫하며 한 가닥 기대를 안고 멋쩍게 되돌아섰다. 그러나 영고의 눈길에는 웬지 쓸쓸함이 여려 있었다. 그를 바라다보자니 영고의 가슴은 올올이 찢어지는 듯싶었다.
'며칠 후에 오겠다 함은 다른 귀비를 만나겠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와요? 왜 그다지도 여자의 아픈 마음을 몰라준단 말인가요? 그래 이 영고란 여자는 한낱 당신의 노리개에 불과하단 말씀인가요? 마음이 내키면 데리고 놀고, 내키지 않으면 아무때나 팽개칠 수 있는 노리개……."
영고는 치미는 분을 가까스로 삭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폐하, 천하 없는 일이 있더라도 잠깐만 여기 앉아 제 말을 좀 들어주세요. 다른 귀비들과 놀 시간은 앞으로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단지흥은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주춤주춤 앉았다.
"하고픈 말이 있거든 툭 털어놓구려. 괜히 성깔 부릴 건 뭔가?"
단지흥은 다소 퉁명스레 내뱉었다. 그러나 영고는 아무 말 없이 그린 듯이 꼼짝 않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동그스름한 어깨, 봉곳한 가슴, 부드러운 두 뺨에 어린 홍조, 그 어디를 보나 시름시름 앓고 있는 계집 같지는 않았다. 단지흥은 빤히 영고를 건너다보았다. 필시 자기에게 뭔가 서운해서 저러는 게 틀림없었다. 단지흥은 내심 미안함을 느끼며 벙긋 웃어 보였다.
"영고, 무슨 안타까운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구려. 그대가 말만 하면 내 어련히 조처해 주지 않으리."
영고는 사실 그 얘기를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이렇듯 단지흥이 불쑥 찾아오지만 않았던들 얘기를 꺼내리라고는 생각조차 안 했을 터였다. 그러나 미룰 수도 없을 뿐더러, 이제 와 보니 단지흥은 영 자기에게는 일심으로 마음을 주고 있지 않음이 분명한지라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폐하, 제가 그때 폐하를 도와 천룡사 중들을 모두 구하고……. 저, 한 가지 폐하께 소청이 있사옵니다."
"무엇이오? 어서 말해 보시오."
단지흥은 의아한 눈길로 영고를 훑어보았다. 영고는 자리를 고쳐 앉더니 잠시 침묵했다가 이윽고 그 동안 주백통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거침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영고가 어찌나 빨리 말하는지 단지흥은 한마디 물어 보지도 못하고 그저 듣기만 했다. 대체 주백통과 무엇을 어쨌단 말인지, 그는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믿어지지도 않았다. 영고는 잽싸게 쭉 토해 놓더니 입을 다물고는 푹 고개를 숙였다. 순간 단지흥은 마치 머리 속에서 우레가 울리는 듯싶었
다. 그는 얼빠진 사람처럼 넋 놓고 앉아 있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영고, 영고! 멀쩡한 사람이 왜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환장을 해도 이만저만 환장한 게 아니군……."
그는 불현듯 가슴속에 불기둥이 치솟으며 두 주먹이 부르 르 떨렸다. 무릇 한 나라의 황비가 외간 사내와 배가 맞아 돌아가다니, 황제의 얼굴에 똥칠을 해도 유분수지……. 단지흥은 그 당장 영고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다가 홱 돌아서서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매몰차게 내뱉었다.
"흥, 어딜 가겠다구? 가기만 하면 죽여 버리고 말 테야!"
그녀는, 단지흥은 그래도 아량이 넓어 자기를 용서해 주고 떠나는 것을 허락해 주리라는 가느다란 기대를 안고 있었다. 하나 실로 후회막급이었다. 자기는 그렇다 쳐도 주백통의 신변이 너무나 우려되어 발을 동동 구르며 방안을 연신 왔다갔다했다. 천둥같이 대로한 단황이 언제 주백통을 죽여 버릴지 모를 일이었다.
'만약 주백통에게 손을 대는 날엔 나도 자결하고 말겠어!'
단지흥은 대전으로 돌아와 이 두 남녀를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속을 끙끙 앓았다. 도저히 발설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이라 속만 앓다가 어쩌는 수가 없어 그는 선비를 불러들여 대책을 상론했다. 단지흥은 헛헛한 마음을 달래느라 먼 산에 눈길을 준 채 침울하게 자초지종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는 한마디 던졌다.
"이 일을 어떻게 조처하면 좋겠나? 실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 되고 말았으니……. 이래서야 황실의 체모가 서겠나?"
선비는 아무래도 믿기지 않아 잠시 어안이 벙벙해 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 주백통은 폐하께서 청해다가 대접해 준 은공을 악덕으로 갚은 배은망덕한 자이옵니다. 폐하께서 손수 문책하셔야 할 줄로 사료되옵니다. 그자가 만약 자기 죄를 뉘우친다면 모르되 그냥 생떼를 쓰고 항변을 한다면 가차없이 죽여 버려야 마땅하옵니다."
"한데 주백통은 왕중양의 사제가 아닌가? 왕중양은 당대 무림의 으뜸가는 호걸이요, 대나무같이 꼿꼿하고 심지 굳은 사나이일세. 만약 드러내놓고 주백통의 죄를 다스린다면 왕중양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나?"
"물론 왕중양은 의리를 중히 여기는 호협한 사내라고들 하옵니다만 아무리 그의 사제라 해도 주백통은 필경 인정도, 의리도 모르는 악한인 줄로 아옵니다. 주백통이 저지른 죄로 보아서는 종남산으로 쳐들어가 죄를 따져도 그쪽에서는 할말이 없는 것이옵니다."
선비는 분을 참지 못해 연신 씩씩거렸다. 단지흥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조만간 알아서 조처하겠노라."
이튿날 단지흥은 연회를 열어 주백통을 청해들였다. 주백통은 좌정하고는 두루 살펴보고 나서 입가를 실룩거리며 웃었다.
"폐하, 일국의 황제라면 좀 통 크게 놀아야지 이게 뭡니까요? 이왕 저를 청해 들여 술잔을 나눌 바에는 영고 아씨는 물론이고 여러 태감들도 불러들여야지요. 달랑 폐하와 저 둘이서만 맞상을 하고 이렇게 고양이 귀때기만한 술잔으로 마신다면야 무슨 기분이 나겠습니까, 허허허……."
단지흥은 그저 빙긋 웃어 보였다.
"좋소, 그럼 큰 잔으로 대작하면서 취하도록 마셔 봅시다."
둘은 권커니자커니하면서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둘 다 어지간히 취해 자세가 흐트러졌다.
"폐하, 참 통쾌하게 잘도 마시는구려, 이 백통이 또 한잔 따르겠소이다!……."
주백통이 기분 좋게 껄껄 웃어젖혔다. 그러나 단지흥은 그의 손목을 슬쩍 밀어내면서 넌지시 물었다.
"백통 형, 내 한 가지 묻고 싶은데……."
"무슨 일이십니까? 아따 주저하지 마시고 어서 시원히 말해 보시지요!"
주백통은 당장 눈썹에서 볼꽃이 튈 줄도 모르고 껄껄 웃기만 했다. 단지흥은 정색을 하고 따지고 들었다.
"영고는 우리 대리국 황궁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겠지요?"
"아니 난데없이 그게 무슨 소리요. 대관절 무슨 뜻인가요?"
주백통은 그제야 눈을 치뜨고 놀란 듯이 되물었다. 단지흥은 픽 쓴웃음을 지었다.
"이 황궁에는 도합 서른여섯 명의 귀비들이 살고 있소. 그중에서 영고의 위치가 제일 존귀하다고 하겠소. 그녀는 이 대리국의 황비니까 말이오. 얼마 전에 죽은 치주는 비록 내 총애해 마지않았으나 그녀 역시 영고보다는 서열이 뒤이고……. 백통 형은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처신했어야 했을 것을……."
그 말은 주백통에게는 마치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그는 너무나 놀라 술기운이 싹 가시면서 입이 떡 벌어져서는 단지흥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 그렇다면 여, 영고가 바로 화, 황제의 아내……."
"그렇소."
단지흥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주백통은 그만 눈앞이 아찔해졌다. 실로 영고가 단지흥의 황비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단지흥의 누이쯤 되거나, 황족이겠거니 했는데……."
"어허, 이거 큰일났군, 큰일났어."
주백통은 호들갑스레 외쳐대며 슬그머니 일어섰다. 하나 단지흥은 한껏 도사리고 앉아 여전히 느긋하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안하우, 난 좀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해야……."
주백통은 당황해서 급히 자리를 뜨려고 운을 뗐다. 그러나 단지흥은 빙긋이 웃으며 주백통을 쏘아보았다.
"백통 형, 아무리 급한 일이 있기로서니 한 가지 일만은 똑똑히 해결하고 넘어가야 하잖겠소?"
"왜 이렇게 사람을 들볶는 거요? 내일 다 털어놓으리다!"
주백통은 급히 외치며 슬쩍 몸을 빼려 했다. 그러자 단지흥이 잽싸게 그를 막았다.
"잠시 있으라는데!"
주백통은 진땀을 빼며 안절부절못하다가 문득 기가 막힌 꾀가 하나 떠올랐다. 그는 얼른 내실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어허, 영고 아씨로군!"
단지흥은 적이 놀라 언뜻 내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틈을 타 주백통은 번개같이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단지흥이 아차 속았구나 하고 무릎을 치며 뒤따라 문 밖으로 뛰쳐나가니 주백통은 어느새 성벽 위에 높이 올라서서 끄물거리고 있었다.
"여보게 친구, 이제 보니 참 미안한 일을 했구려.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할 일이니까 꼬치꼬치 캐묻지 말아 주구려."
주백통은 꾸벅 인사를 남기고는 바람처럼 성벽 위에서 사라져 버렸다.
단지흥은 묵묵히 서 있다가 영고의 처소로 향했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침실로 들어갔다. 영고는 턱을 괴고 실신한 사람처럼 힘없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인기척을 느끼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눈길이 마주쳤다. 그녀의 서늘한 눈동자에는 뭐라 이름할 수 없는 애수가 어려있었다. 그러한 눈빛을 대하자 단지흥은 가슴이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이 여인은 얼마나 나를 아껴 주고 사모했던가! 하지만 지금 이 여자가 절절하게 그리고 있는 사내는 이 단황이 아니라 주백통이라는 도적 놈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단지흥은 화가 치밀어 불쑥 내뱉었다.
"또 어느 사내놈을 생각하고 있는 게요?"
그러나 영고는 담담하니 낯색을 굳히고 조용히 물었다.
"주백통은 어디 있나요? 설마 죽이지야 않았겠지요?"
단지흥은 그녀의 태도가 뻔뻔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 이 여자는 일편단심 주백통만을 그리고 있구나. 내가 왜 진작 주백통을 쫓아 버리지 못했던고?'
단지흥은 통탄해 마지않았다.
"난 그 얼간이 놈을 죽여 버리지 못하고 놓치고 말았다. 그러니 넌 속이 시원할 테지. 하지만 앞으로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기만 하면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말 테야!"
"놓쳐 버렸다구요? 그런 새빨간 거짓말은 이제 그만 집어치워요. 얼른 그 양반을 놓아주란 말이에요. 먼저 꼬리를 친 것도 나고 먼저 유혹한 것도 나니까 죽이려면 저를 잡아죽이세요. 왜 불쌍한 사람을 못살게 구나요? 까놓고 말해서 당신은 저한테 잘해 준 게 뭐가 있어요? 밤낮 떠돌아다니면서 계집질이나 했지요. 명색 좋게 시집은 왔지만 허구한 날 독수공방에 이젠 진절머리가 났어요. 계집을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요. 흐흑흑……."
영고는 설움에 겨워 격하게 어깨를 들까불었다. 그러자 단지흥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독한 년! 이 무슨 청승이냐! 황국의 황비라는 것이 서방질을 하고도 무슨 변명거리가 있다고 울며불며 떠들어대는 게냐, 엉?"
단지흥은 아니꼬운 눈초리로 영고를 쏘아보았다.
'내 모름지기 일국의 황제로 어찌 이다지도 수모를 당한단 말인가. 자고로 황제는 여러 여인을 거느리는 법이거늘, 이렇듯 시샘을 하여 독수공방 타령을 하니 무엄한지고!'
하지만 영고는 달랐다. 그녀는 그저 한 여인으로 남정네의 사랑을 원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황제라면 저는 황비겠지요. 황제도 계집을 예사로 보는 데 황비라고 어찌 서방을 들이지 못하나요? 당신이 숱한 계집들과 놀아날 때도 나는 군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어요. 한데 내가 어쩌다 한 번 사내와 사랑을 했다고 죽인다 살린다 이 야단이군요. 천하에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어요?"
단지흥은 그만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고무상한 황가의 법도를 들이대는데도 불복하는데야 무슨 수가 있겠는가? 원체 그 어떤 국법이나 가법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스러운 생활에 물 젖어 있던 숙녀동 출신의 이 여인, 저 창공을 나는 산비둘기와 같은 영고를 무슨 수로 길들인단 말인가? 단지흥은 장탄식을 하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좋다! 내 오늘부로 영고를 빙운궁(氷雲宮)에 유폐하기를 명하노라. 앞으로는 누구도 관계치 않을 터이나, 단 빙운궁에서 한 발짝도 못 나오느니라!"
그러자 영고는 두 눈을 까뒤집으며 발악하듯 악을 써댔다.
"빙운궁이라니요? 역대로 무수한 황비들이 빙운궁에 갇혀 신음하다가 죽었다는 바로 그 냉궁 말이오? 저도 그 무서운 비밀을 다 알고 있어요! 저는 절대로 그렇게 죽을 수는 없어요! 왜요? 왜 날 거기다 가두려는 거예요? 왜 이다지도 날 핍박하는 거예요? 그래 황제면 단가요? 황제면 다야……."
영고는 게거품을 물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단지흥은 그 꼴을 보자 분이 하늘을 찌를 듯해 문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숨이 거칠어지고 정신없이 부르르 온몸이 떨렸다. 영고는 아직까지도 바락 바락 악을 써대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화를 누를 수 없어 미친 듯이 달려가다가 언뜻 마음을 좀 달래 보려고 곧장 다른 숙비(淑妃)의 거처로 향했다.
후궁에 이르니 은은한 선율이 온몸을 휘감아 왔다. 그 소리에 단지흥은 다소 마음이 가라앉는 듯싶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는 대뜸 문을 열어제쳤다. 숙비는 단황을 보고는 대번에 희색이 만면하여 얼른 무릎을 꿇고 깍듯이 예를 갖췄다.
"폐하, 저 같은 소첩을 찾아 주시니 황공무지로소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그러나 단지흥은 대단히 노기가 서려 있는 기색이었다. 숙비는 영문을 몰라 전전긍긍하며 조심조심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단지흥은 공연히 화를 냈다.
"오늘 난 기분이 몹시 상하니까 즐겁게 해 달란 말이야!"
숙비는 주춤하더니 얼른 단지흥의 목에 감겨 들었다.
"폐하, 여부가 있겠나이까? 폐하를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바로 소첩의 소임이온데……."
그녀는 단지흥의 가슴으로 파고들며 가늘게 몸을 떨었다. 온몸이 화끈 달아올라 있었다. 단지흥은 그녀의 뜨거운 몸뚱어리를 안고 정신없이 애무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한껏 영고를 욕했다.
'이 세상엔 황비가 되려고 아득바득하는 미인들이 차고 넘쳐. 명색이 황비라는 것이 황제를 모시기는커녕 딴 서방을 끼려 하다니! 나는 애비(愛妃)가 서른여섯이나 된다. 네깟 년은 꺼져 버려도 아무 상관이 없어!'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자존심이 상해서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뿐더러 궁중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까 봐 몹시 두려웠다.
밤은 점점 깊어 갔다. 이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은은하게 들려 왔다. 단지흥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숙비를 부둥켜안고 운우지락을 누리고 있었다. 단지흥의 구릿빛 잔등에는 땀이 질펀히 흐르고 숙비는 엉덩이를 흔들며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허 정말 뛰어난 송씨로구나!"
단지흥은 쉼 없이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숙비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방긋 웃음꽃을 피웠다. 황제의 기분이 이러할 때 비위를 맞춰 욕정을 채워 준다면 앞으로 그의 총애를 독차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갖은 아양을 떨면서 온갖 재주를 다 부려 단지흥의 눈에 들려고 애를 애를 썼다.
등아는 어슴푸레한 방안에 홀로 앉아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이 고요한 밤에 그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탁상을 대하고 앉아 조정의 문서들을 뒤적이고 있을까, 아니면 아리따운 궁녀와 더불어 향락을 누리고 있을까……. 등아는 단지흥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조만간 그에게 시집을 가리라고 작심했지만 정든 향녀 자매들을 그대로 두고 떠나자니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녀들을 모두 시집보내야만 마음놓고 갈 수 있을
터인즉……. 오만 가지 시름이 찾아 들어 등아는 후유 한숨을 내쉬었다.
활짝 열어제친 창문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일순 누군가가 눈앞에 다가선 듯싶었다. 등아는 잽싸게 단도를 빼 들며 벽력같이 소리를 내질렀다.
"누구요?"
어렴풋한 달빛에 비친 그 그림자는 사내 같았다. 그 순간 그녀는 혹시 단지흥이 아닐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찬찬히 바라보았다. 단지흥은 아니었다. 화산파의 곽명송이었다. 그녀는 실망스런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내뱉었다.
"이 밤중에 어쩐 일이시오? 죗값을 치른다고 해도 밤은 좀 뭣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확명송은 스스럼없이 대꾸했다.
"아가씨를 보러 왔소."
등아는 차디찬 미소를 지으며 그윽이 쏘아보았다. 그 어떤 사내도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쌀쌀한 미소였다.
"난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게 한 가지 있소. 그날 밤 나하고 함께 지낸 향녀가 바로 아가씨지요?"
"내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날 당신 앞에서 죽은 그 향 녀가 바로 당신이 찾고 있는 향녀라고?"
그러자 작명송이 느닷없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오, 아니란 말요. 난 나와 정을 통한 향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절대로 그날 죽은 향녀는 아니야!"
등아는 냉랭히 웃으며 빈정거렸다.
"그래, 모양이 어떠했죠? 한번 말해 보세요. 너나없이 다 똑같은 향녀들인데 무슨 다른 점이 있다고 그렇게 막무가내로 우기는 거예요? 오늘 똑똑히 알려드리지요. 당신은 다정다감한 사내일지 모르나 우리 향녀들은 모두 비정한 여자들이에요. 우리 향녀들은 한결같이 사내들을 미워하고 세상 사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어해요. 그때 장문인 앞에서 나는 분명히 훗날을 기약하겠노라 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당신은 다치지 않을 생각이니 다행으로 알고 어
서 썩 꺼져 버려요!"
등아는 몹시 울적해서 지금 이 순간 그 무슨 시비를 가리고 싶지 않았다.
곽명송은 등아의 말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털썩 꿇어앉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나는 그날 밤의 첫사랑을 영원히 잊을 수 없소. 그대는 왜 이토록 매정하게 구는 게요……."
"호호호 ‥‥사내가 계집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 콧물을 쥐어 짜다니, 어이구 망측해라……."
등아는 웬지 이 순진한 사내가 은근히 마음에 들어 빙긋 웃으며 곯려 주었다. 그러자 곽명송은 더욱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대는 내게 참된 사랑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 여인이오. 한데 이제 와서 왜 시치미를 떼는 거요, 엉?"
곽명송은 처연한 눈길로 등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와 눈길이 마주치자 일순 등아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뭔가 뜨거운 것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이봐요, 곽 대협, 그저 한바탕 꿈이었다고 생각해 줘요. 이를테면 기생집에서 맛본 하룻밤 풋사랑이었다고, 사내도 그 기생도 구름처럼 흩어졌으니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거라고……. 어차피 다시 만날 수 없다면 마음속에서 지워 버리는 게 현명해요."
등아의 목소리는 어쩐지 가녀리게 떨리고 있었다. 곽명송은 호수같이 해말간 등아의 눈동자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있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바로 아가씨야! 그날 밤의 여인은 바로 아가씨란 말야!"
"제발 그런 허튼소리는 하지 말아요. 이 단도가 안 보이세요? 얼른 이 방에서 나가지 않으면 찔러 죽이고 말 거예요!"
그러나 곽명송은 되레 한걸음 다가섰다.
"좋아! 향녀, 어서 찔러 죽여 주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오."
등아는 한층 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토록 자기에게 순정을 다하는 사내는 진정 처음이었다. 단도 끝이 달빛에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어설픈 미소를 지으면서 나직이 물었다.
"당신은 정말 그 향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생각인가요?"
"그대는 끝끝내 발뺌을 하려 드는군요. 그대는…… 아아, 그대는 모를 거요. 나는 그날 밤의 그 향녀를 밤마다 꿈에 보았었소. 그 달콤한 미소와 그 눈물 어린 눈동자는 지금도 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구려. 그 향녀는 이 밤도 어디선가 울고 있을 거요, 이 무정한 곽명송을 애타게 그리면서 울고 있을 것이란 말요. 그러니 나는 그 향녀를 꼭 찾아야 하고 그 향녀를 영원토록 껴안아 주어야 하겠소. 정녕 그녀를 사랑하다가 죽을 수만 있다면 원이 없겠소. 그녀는 바
로 등아, 당신이오!"
등아는 살며시 웃으며 도리질을 했다.
"좋아요, 그토록 절실하시니 당신 원을 풀어 드리지요. 기회는 이번밖에 없어요. 저의 향녀들을 몽땅 불러올 테니까 한번 찾아보세요. 당신이 밤낮 그리는 그 향녀를 말예요! 이번에 찾지 못할 시에는……."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달빛에 어려 단도가 반짝 빛을 발했다. 곽명송은 속으로 고개를 내 흔들면서도 순순히 등아의 말을 따랐다. 저토록 완강히 부인하니 그녀 말마따나 다른 여인일지도 모른다.
향녀들이 차례차례 들어와 곽명송 앞에 나란히 늘어섰다. 등아가 곽명송과 향녀들을 둘러보고 나서 말문을 열었다.
"세상엔 별 기이한 연분도 다 있나 봐. 이분은 화산파의 곽명송이라는 호걸남아야. 한데 이분이 우리 향녀 중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대. 그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분만은 찾아낼 수 있다는군. 그래서 난 이분께 한번 기회를 주기로 했어. 정말 찾아낸다면 그 향녀를 데리고 가서 백년가약을 맺어도 무방해. 물론 그렇게 되면 그 향녀는 우리 향녀들 무리에서 나가야 하겠지만."
등아는 자기도 모르게 설레는 가슴을 어찌할 수 없었다. 순간 단지흥의 얼굴이 퍼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곽명송은 자기 앞에 가지런히 늘어선 꽃 같은 향녀들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앞이 캄캄했다. 말 그대로 똑같은 주형에 부어 만든 듯 이 향녀가 저 향녀 같고 저 향녀도 이 향녀 같았다. 곽명송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흔들었다.
"미안하지만 그날 밤처럼 불을 끄고 손으로 만져 보게 하면 꼭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소."
"그래도 찾아내지 못할 때는요?"
"내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아예 이 눈이 멀게 하겠소!"
"좋아요."
향녀들은 모두들 입을 다문 채 곽명송을 빤히 쳐다보았다.
등불이 꺼졌다. 곽명송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쿵쿵 뛰고 숨결이 가빠졌다. 그는 한 발 한 발 다가가 한 사람 한 사람 향녀들의 머리며 어깨를 조심스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향녀들은 저마다 목석처럼 꼼짝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곽명송은 안달이 나서 조용히 속삭였다.
"향녀, 그날 밤 그대는 이렇게 읊조렸소. 창 앞이 밝고 땅속도 밝은데 정의도 몰라봐서야 되나요 하고 말이오. 그래 난 그대에게 말했었소, 남녀간의 정이 있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향녀들은 너나없이 묵묵부답으로 서 있을 따름이었다. 차례차례 향녀들을 어루만지며 같은 말을 곱씹었지만 대답을 주는 여인은 하나도 없었다. 이윽고 등아에게 이르자 그녀는 곽명송의 손을 잡아 떼면서 세차게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그러자 그는 그만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곽명송은 참을성 있게 스물여덟 향녀들을 일일이 다 거쳐 갔다. 그 누구도 아니었다. 그 여인은 오직 한 사람, 등아일 수밖에 없었다. 곽명송은 미칠 것만 같았다.
반짝 등불이 켜졌다.
곽명송은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그는 얼빠진 사람마냥 항녀들을 쓱 둘러보았다. 그녀들은 보일 듯 말 듯 은은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곽명송은 답답한 가슴을 부여안고 또다시 풀썩 꿇어앉아 애타게 부르짖었다.
"나는 대협객 작명송이란 사람이오. 내가 어찌 아름다운 그대들의 가슴까지 만져 보겠소. 하지만 나는 알고 있소. 그날 밤 나와 함께 즐긴 향녀는…… 그 향녀는 젖무덤이……."
그러자 향녀들 복판에 잠자코 서 있던 등아가 조용히 저고리를 벗었다. 아니나다를까 등아의 가슴에는 젖무덤이 없었다. 곽명송은 일순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양 옆에 서 있는 향녀들도 일제히 저고리를 벗어 가슴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젖무덤이 없었다! 그때 단지흥이 그 말을 했을 땐 진정 믿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기어코 사실이 아닌가. 대관절 무슨 까닭에 그 귀중한 살점을 베어 버렸단 말인가? 곽명송은 왈칵 눈물을 쏟으면서 발을 굴렀다.
"아아, 세상에 이토록 처참한 일도 있단 말인가? 그대들은 너무나 지독하구려, 지독해!……."
곽명송은 의협심이 대단하고 불굴의 용기를 자랑하는 대협객이건만 이 섬약한 향녀들 앞에선 한갓 날개 부러진 새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맥없이 서 있었다.
일순 등아의 쌀쌀한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곽 대협, 저희 향녀들은 알고도 남음이 있어요. 이 세상에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내란 하나도 없다는 것을요! 조석으로 마음이 변하고 오늘은 이 꽃을, 내일은 저 꽃을 꺾는 사내들을 우린 믿을 수가 없단 말이에요. 지금 이 시각에도 사내들에게 짓밟히면서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저 야속한 달님을 우러러 하염없이 눈물짓고 있는지, 당신들 남정네들은 알기나 하시나요? 우린 바로 그런 세상의 사내들이 미워서 서로서로 젖무덤을 깨물어 뜯어 버리고 이렇게
향녀가 된 거예요. 그런즉 이젠 더는 말을 말고 약속이나 지키고 이곳을 떠나 주세요!"
곽명송은 잠시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있더니 대뜸 고함을 쳤다.
"향녀, 향녀! 나와 사랑을 나눈 향녀는 선뜻 나와야 할 것 아니오? 그날 밤의 속삭임을 벌써 잊었단 말이오? 아, 하늘도 무심하구나!……."
"향녀들의 말을 그대로 믿다니, 당신은 미욱하기 짝이 없는 사내군요. 향녀들이란 자고로 사내들을 감쪽같이 속인다구요!"
등아는 가슴이 몹시도 쓰라렸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거세게 면박을 주었다. 그러자 곽명송은 매섭게 고함을 내질렀다.
"그럴 수가 있어, 그럴 수가! 눈물을 머금고 절절하게 속삭인 말들이 어찌 가짜란 말인가? 아냐, 아냐! 진정은 아니야! 나는 그 맹세를 죽어도 믿고 싶어!"
곽명송은 충혈된 눈으로 스물여덟 향녀를 일일이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노래를 읊조리며 검을 비껴 들고 너울너울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곽명송은 문득 우뚝 멈춰 서더니 서럽게 울부짖었다.
"향녀, 향녀야! 설사 현세에 만날 수 없다면 내세에는 만날 수 있겠지. 한데 너는 왜 스스로 자기의 천금 같은 젖가슴을 물어뜯어 버렸느냐? 나도 그 아픔을 나누어 가지리!"
그는 순식간에 시퍼런 검을 휘둘러 자기의 가슴에서 살 한 점을 선뜻 베어 들었다.
"향녀야, 너는 지금도 이 못난 사내를 사무치게 그리고 있으련만 나는 너를 찾아내지 못하는구나. 등아와 약속한 대로 어여쁜 네 모습을 알아보고 어여쁜 너를 데리고 갈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노라. 하지만 이 못난 사내는 두 눈 뻔히 뜨고도 너를 알아보지 못하니 이 잘난 눈은 아무 소용도 없느니라. 너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 눈을 차라리 검으로 찔러 버리리!"
곽명송은 검을 거꾸로 잡아 쥐고 높이 쳐들었다.
향녀들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쏟으면서 가슴을 졸였다. 만약 천하의 사내들이 모두 곽명송만 같다면 그들을 미워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저런 사내하고라면 단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죽는다 해도 원이 없으리라! 어느덧 향녀들은 손에 땀을 쥐고 일제히 등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등아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그린 듯이 서 있었다. 등아는 독하게 마음먹고 잠자코 말이 없었다.
곽명송은 천천히 칼을 치켜 들었다. 그때였다. 돌연 단검 세 자루가 휙휙휙 번개같이 곽명송의 팔목으로 날아오더니 쨍강 소리가 일며 삽시에 검이 뚝 떨어져 버렸다. 맨 앞에서 지켜 보던 세 향녀가 바짝바짝 속을 태우던 나머지 더는 지체할 수 없어 단검을 뽑아 날린 것이었다. 이는 향녀들의 규례에 어긋나는 짓이었다. 죽게된 사내를 살려 주면 무서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세 향녀는 등아 쪽으로 돌아서더니 눈물이 글썽해서 소리쳤다.
"등아 언니, 등아 언니!……."
향녀들은 일제히 달려들어 등아를 떼밀며 얼떨떨하게 서 있는 곽명송에게로 다가갔다. 등아는 곽명송 앞에 서서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인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한 순간, 그녀는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서글서글한 두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곽 대협, 제가 바로 당신이 찾고 있는 향녀예요."



제28장 희로애락
천하에 이름난 향녀 등아가 백년가약을 맺고 시집을 가게 된다는 소문은 날개를 달고 멀리멀리 퍼져 갔다. 그 소식을 접하고 강호 호걸들은 너나없이 크게 놀랐다. 그녀가 누구한테 시집가는지도 적이 궁금했지만, 누구에게건 그녀가 시집을 간다는 것 자체가 호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등아가 시집을 가고 나면 그녀 수하의 향녀들은 더는 천하 무림의 호걸남아들을 없애려 날뛰지 않을 것이었다.
청첩이 양자강 남북에 눈꽃처럼 날렸다. 사람들은 모여 앉기만 하면 등아의 결혼을 두고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등아의 결혼은 화산 무예 시합에 버금가는 사건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화산 무예 시합은 천하 무림의 제일인자 왕중양의 명성을 다시 한 번 드날리는 셈이었지만 등아의 결혼은 늑대 같은 향녀 무리들을 천사 같은 아가씨들로 환생시켜 줄 것이요, 천하 무림들의 가슴에 드리운 음영을 말끔히 가시게 해줄 터였다.
그리하여 요즈음 천하 호걸들은 큰 경사라도 맞는 기분이었다. 청첩에는 섣달 그믐날 호남(湖南) 악양루(岳陽樓)에 천하 무림들을 청해놓고 등아의 결혼식을 치른다고 씌어 있었다.
드디어 섣달 그믐날이 밝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날씨였다. 새벽부터 악양의 서대문으로 풍막을 씌운 화려한 마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이닥쳤다. 마차들은 모두 양자강을 끼고 동정호(洞庭湖)를 앞에 둔 천하 명루(名樓) 악양루로 곧장 달려갔다. 정오쯤 되자 천하 무림의 호걸과 여걸들이 무려 백여 명이나 악양루에 모여들었다.
악양루는 목조 건물로 쇠못 하나 쓰지 않고 세운 천하의 명루였다. 한때 동오(東吳)의 명장 노숙(魯肅)이 열병루로 쓰기도 했다는 악양루를 두고 시까지 한 수 전해지고 있다.
천하 제일의 호수는 동정호요
천하 제일의 명루는 악양루일세.
객들은 악양루에 올라 만경창파 출렁이는 동정호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윽고 곱게 단장한 시종들이 술단지 몇 개를 들고 올라왔다. 객들은 술단지를 보자 입맛을 다시며 더욱 하회(下回)를 기다리면서 농을 주고받았다.
"향녀 등아의 결혼은 천하에 태평을 가져다 줄걸세."
"아냐, 천하가 아니라 사내들에게 태평을 안겨다 주지!"
입심 좋은 객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기네들끼리 찧고 까불며 흥을 돋웠다. 한순간 누군가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여보게들, 그 유명짜한 동사 황약사가 왔다네. 지금 등아와 얘기를 나누고 있대!"
모두들 가슴이 섬뜩해서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천하 5대 고수의 한 사람이요, 악명이 자자한 황약사가 무엇 때문에 등아 향녀와 무릎을 맞대고 속닥거리는 것일까. 혹시 향녀들을 꼬드겨 무림 호걸들과 맞서게 하려는 수작이 아닐까. 객들은 모두 근심스럽게 조심 조심 한마디씩 꺼내 놓았다.
마침내 화려하게 치장한 향녀들이 삼삼오오 누각 위로 올라왔다. 좌중은 그쪽을 보더니 별안간 일제히 입을 다물고 숨을 죽였다. 그녀들 뒤로 기골이 장대한 황약사가 웬 아름다운 여인의 손을 잡고 뒤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더러는 황약사 옆에 있는 절세 가인이 바로 그의 아내 아형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약사 부부는 천천히 상석 쪽으로 나아가 그 주위에 서 있는 객들에게 눈인사를 보내는 법도 없이 거만하게 누각 위를 굽어보았다. 안하무인이 아닐 수 없었다. 객들은 괘씸하기 짝이 없었으나 감히 뭐라고 대거리할 엄두도 못 내고 슬그머니 딴전만 피울 따름이었다.
마침내 혼례 옷으로 어여쁘게 단장한 등아 향녀가 곽 대협과 손을 맞잡고 올라와 앞으로 나아갔다. 좌중에는 금세 숙연한 기운이 감돌았다. 등아는 좌중을 둘러보더니 한 발 앞으로 나서면서 쾌활하게 인사를 드렸다.
"저희 결혼 잔치에 이처럼 천하 호걸들이 많이 찾아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동해 도화도의 황 도준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황 도주님은 뛰어난 의술로 저희 향녀들에게 다시금 여인의 매력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객들은 대관절 무슨 소린지 몰라 그저 옆눈질을 하면서 고개들을 주억거릴 뿐이었다. 황약사 부부는 짐짓 고개를 늘여 빼고 향녀들에게 정겹게 눈인사를 보냈다.
등아는 얼마간 홍분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이 자리를 빌려 저희 향녀들 이름으로 천하의 영웅호걸들에게 한마디 여쭙고 싶습니다. 저희들은 이제부터 더는 그 옛날의 향녀는 아닐 거예요. 저희들은 오늘부터 천하의 악한들은 증오하지만 예전처럼 분별없이 천하의 모든 남자들을 증오하지는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천하의 남자들 중메는 황 도주님이나 제 낭군 곽명송과 같은 정직한 사내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등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지런히 늘어선 향녀들이 객들을 향해 곱게 절을 올리며 이구동성으로 사죄를 했다.
"엎드려 천하 영웅호걸님들께 사죄하오니 지난날의 과오를 허물치 말아 주시옵소서."
그러자 객들 중에 더러는 콧마루가 시큰해져서 혀를 끌끌 차는 사람도 있고, 악마가 하루아침에 천사가 되랴 하며 속으로 코웃음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흥 하고 코방귀를 뀌더니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화산파의 명성을 더럽힌 년들을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좌중은 일제히 소리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름 아닌 화산파 장문인 선우순이 씨근벌떡거리며 서 있었다.
황약사는 아형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느닷없는 외침 소리를 듣고는 번쩍 고개를 쳐들고 대뜸 소리쳤다.
"화산파가 무엇이 그리 대단해서 이 점잖은 좌석에서 떵떵 소리를 치는 게요?"
"화산파가 뭐 그리 대단할 건 없소이다. 하지만 화산파의 명성은 우리에겐 목숨보다도 소중한 것이요, 그 누구도 더럽힐 수 없는 것이외다. 저 곽명송이란 자는 여러 형제들과 일체 상론도 없이 만인의 저주를 받고 있는 등아 향녀와 짝을 맺었으니 우리 문파에서 어찌 용서할 수 있겠소?"
선우순은 기고만장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황약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등아 향녀를 돌아보았다.
"허, 저 녀석이 멋모르고 떠들어대는군. 주둥이를 비틀어 놓아야 할까 보다."
"잠깐만요."
등아 향녀는 황약사를 제지하고 나서며 그윽이 선우순을 건너다 보았다. 그리고는 웃는 얼굴로 정중히 말했다.
"선우 장문님, 제가 우선 술 한잔 올리겠습니다. 좋든 싫든 제 낭군은 화산파 출신이니깐요. 하지만 말씀은 삼가셔야 하겠어요. 터놓고 말해 화산파의 명성을 더럽힌 사람은 제 낭군 곽명송이 아
니라 선우 장문님이 아닌가요? 장문님은 자기 사형을 모해하고 장문 자리에 앉았으니 이 어찌 공명정대하다 하겠소? 이왕 지나간 일은 덮어두겠으되 오늘 이렇듯 새삼스럽게 저희 낭군을 모해하려 한다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말은 비록 나긋나긋하게 하고 있었지만 가시 돋친 소리였다. 선우순의 얼굴은 대번에 시뻘개졌다.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다니, 누가 믿을 줄 아느냐?"
그러자 이번에도 황약사가 히죽이 웃으며 나섰다.
"내가 믿지."
"뭐요? 다, 당신이……. 대, 대관절 내가 뭘 어쨌단 말이오? 말 좀 조심하지 못할까아!……"
선우순은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황약사의 얼굴이 단박에 무섭게 일그러졌다. 선우순은 일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칫 황약사의 노여움을 샀다가는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의 하나 성깔을 부리는 날엔 앉은 자리에서 생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터였다. 선우순은 급급히 마음을 다잡으며 금시에 한풀 꺾인 소리로 넙죽 주워섬겼다.
"그렇다고 괜히 화를 낼 건 또 뭐요? 내 말은, 당신이 아무리 천하 없는 영웅이라 해도 우리 화산파 일을 간섭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
"본디 나는 화산파 일은 간섭하지 않았었소. 하지만 오늘 등아를 나의 양딸로 삼은 이상 간섭하지 않을 수 없게 됐소. 당신은 등아가 우리 부부의 양딸이 된 것을 그래 어떻게 생각하시오?"
황약사는 말을 늘여 빼며 빤히 선우순을 쏘아보았다. 선우순은 그만 말문이 막혀 얼빠진 사람마냥 멍하니 서 있었다. 대관절 등아가 황약사의 양딸로 들어가든 말든 그게 자기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좌중도 모두 뜻밖의 소리라 어리벙벙해서 서로 곁눈질을 주고받았다.
등아는 좌중의 기색을 살피더니 싱긋이 웃으며 향녀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분부했다.
"여러 향녀들, 아마도 제가 황 도주님의 양딸이 된 까닭을 밝혀야 할 듯하니……. 자, 보여 줍시다!"
그러자 향녀들은 일제히 돌아서서 옷고름을 풀고 가슴을 풀어헤친 다음 쭈뼛쭈뼛 되돌아섰다. 그랬더니 그 향녀들에게 싱싱한 젖가슴이며 도도록한 젖꼭지가 봉곳 솟아 있는 것이 아닌가. 실로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객들은 눈이 부셔서 짧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원래 이들은 세상의 모든 사내들과 자청해서 등을 진 향녀들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일찍이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저주하는 마음으로 자기들의 젖무덤을 스스로 물어뜯어 없애 버렸지 않았는가. 하지만 오늘 향녀들은 모두 완벽한 젖무덤을 자랑할 수 있는 싱싱한 처녀로 환생한 것이다. 대관절 이 향녀들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일까. 모두들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황약사가 시원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모든 것은 나와 아형의 공로라고 하겠소. 우리 부부는 향녀들의 몸을 예전대로 돌려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들로 환생 시키려 했던 거요. 해서 이제부터 이 향녀들을 업신여기는 자가 나타난다면 가차없이 죽여 버리고 말 테요? 잘들 명심하기 바라오!"
객들은 황약사의 위풍에 눌려 찍소리도 못했다. 사실 황약사는 서독 구양봉과 더불어 천하에서 악명을 떨쳤고 그의 무공도 왕중양을 내놓고는 당할 자가 없었다. 그러니 섣불리 황약사를 건드렸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이었다. 그런 판이니 앞으로는 향녀들이 황약사를 등에 업고 강호에서 더욱 판을 칠는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좌중은 등아가 결혼을 하면 강호에서 큰 우환거리 하나가 없어진다고 희희낙락하다가 이제 와 보니 더 더욱 앞날을 종잡을 수 없게 되자 내심
바짝바짝 속을 태웠다.
등아가 황약사를 건너다보며 또 한마디 보탰다.
"저 선우 장문님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은 주저 말고 이 자리에 나와 주세요. 이번 기회에 저희 향녀들과 겨루어 그런 기우는 뿌리를 뽑아야 하잖겠어요?"
등아는 한참 기다려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자 다시 말했다.
"나서는 분이 없으니 그럼 됐어요. 사실 저희들은 오늘부터 강호의 자질구레한 시시비비에 참견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런즉 저희 향녀들이 맘 편히 살 수 있도록 강호 여러분께서 성심성의껏 도와주시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부탁드려요!"
선우순은 그만 풀이 죽어 속으로만 끙끙거릴 뿐 아무 말도 못했다. 섣불리 항변을 하다가 황약사의 노염을 사는 날에는 목숨도 건지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등아가 말을 마치자 황약사가 일어나 말끝을 맺었다.
"신랑, 신부 측에서 여러 손님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상과 같습니다. 송구스럽지만 오늘 잔치엔 안주도 없고 술도 많지 못하니 한 분이 한잔씩만 마시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후일 다시 융숭하게 대접할 기회가 있을 것이오."
소문난 잔치에 떡을 것 없다더니 과연 속담 그른 것이 없었다. 두 사람의 백년해로를 빈다 하고 술 한 잔 마시면 끝나는 판이다. 객들은 입맛이 썼으나 황약사 앞이라 감히 군소리 한마디 못하고 차례로 술잔을 받아 마시고는 신랑, 신부에게 덕담들을 하고 나서 멋쩍게 물러가 버렸다.
객들은 자기들끼리 수군덕거리며 하나들 흩어져 갔다.
황약사는 강호 호걸들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등아를 돌아다보며 껄쩔 웃었다.
"나도 어지간히 괴짜지만 이제 보니까 너도 정말 괴짜로구나. 두 괴짜가 꾀를 부려 어중이떠중이들을 손쉽게 물리 쳤으니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냐?"
"참, 아버님도……."
등아는 곱게 눈을 흘겼다. 황약사는 기실 겉보기에는 괴벽스럽기 이를 데 없지만 마음씨 하나만은 착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등아는 자기보다 고작 몇 살 손위밖에 되지 않는 황약사를 쾌히 아버님으로 모신 터였다.
황약사는 빙그레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서 배에 오르게나. 서둘러 가 봐야지."
"아이, 참! 너무 그렇게 등 떠밀 듯 보내진 마시와요."
등아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신랑, 신부는 황약사 부부와 향녀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이내 배에 올랐다. 배는 두 사람을 태우고는 즉시 가없이 넓은 동정호를 가로질러 쭉 앞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주 작아질 때까지 쉼 없이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배가 보이지 않자 황약사는 껄껄 웃으며 향녀들을 둘러보았다. 향녀들의 눈에는 맑은 이슬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울긴 왜들 우는 게냐? 이 황약사 어른이 너희들의 허물을 벗기고 처녀로 환생시켜 주었으니 어서들 시집을 가야지. 늙었든 젊었든 간에 괴짜를 만나야 해. 난 점잔만 빼는 성인군자는 딱 질색이니까. 너희들도 그런 성인군자와 살자면 가슴에 재만 쌓일 뿐이야. 아니, 하루도 못 살고 도망치고 말걸."
황약사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아형의 손을 잡고 정처 없이 휘적휘적 길을 떠났다.
등아와 곽명송이 탄 배는 유유히 떠가고 있었다. 이제 아무 허물도 없이 서로를 속속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사이가 된 이 청춘남녀는 두 손을 맞잡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보는 눈도 없는지라 두 사람은 맘껏 껴안기도 하고 뱃전에 손을 드리운 채 물장난을 치기도 했다.
문득 작명송이 등아의 고운 눈매를 홀린 듯 쳐다보며 물었다.
"등아, 그날 밤 난 그대를 한눈에 알아봤어. 한데 그대는 한사코 시치미를 떼고……. 그렇게 매정할 수가 있소? 그래 내가 그대 앞에서 죽었다면 좋겠소?"
"호호호……사실대로 말씀드릴 까요? 애초에 저는 당신이란 사람을 몰랐거니와 조금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어요. 터놓고 말해서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단황을 좋아했거든요. 단황은 비록 저를 멀리했지만 말예요. 그건 그렇고 아무튼 그날 밤 당신 모습은 뭐랄까 우습기만 하더라구요. 언뜻언뜻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었지만……. 어쨌든 난 세상엔 여자를 위해 죽을 남자는 하나도 없다고 보았거든요. 한데 당신은 정말 자기 눈을 찌르고 목숨까지 버리려고 날뛰니 차마
끝까지 시치미를 뗄 수는 없었지요, 뭐."
곽명송은 어줍잖게 히죽 웃으며 등아를 와락 껴안았다. 그 순간 그녀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등아를 다시 찾은 후 밤마다 그녀를 껴안고 잤지만 여태껏 한 번도 그녀의 옷고름을 풀지는 않았었다. 그녀가 스스로 몸을 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둘 사이에 약정이 돼 있던 터였다. 바로 오늘이 등아가 몸을 주기로 한 날이었다. 곽명송은 구름 위에 둥둥 뜬 기분이었다. 이따금 등아의 봉곳한 젖가슴을 훔쳐볼 때마다 그의 가슴은 절구질하듯 쿵쿵 뛰놀았다.
"등아, 그날 밤 그대의 옷고름을 풀 때 난 그만 너무나 손이 떨려서……."
곽명송은 자기도 모르게 또 등아의 봉곳한 가슴을 훔쳐보다가 불쑥 실없는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러자 등아는 고개를 외로 꺾고 수줍은 듯 푹 숙였다. 하나 그녀의 숨결이 점점 가빠지고 있음이 곽명송에게도 또렷이 전해 왔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침내 그녀가 조용히 속삭였다.
"어서요, 저의 몸을 당신께 맡기고 싶어요……."
얼마나 기다렸던 말인가? 곽명송은 대번에 황홀경에 빠져 들어 두 눈을 황황히 불태우며 등아를 껴안으려 했다.
그때였다. 일순 쿵 하는 소리가 나더니 배가 훌쩍 솟구쳤다 떨어지면서 배 밑바닥에서 물이 콸콸 뿜어 오르는 것이었다. 곽명송과 등아는 엉겁결에 서로 부둥켜안고 사위를 둘러보았다. 언제 배에 올랐는지 뱃머리에 뚱뚱보 여인들이 검을 비껴 들고 이쪽을 쏘아보며 웃고 있었다. 방금 물 속에서 올라온 듯 꼭 물에 빠진 생쥐 형상이었다. 그중 한 여인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불쑥 내뱉었다.
"등아, 얼간이 같은 황약사를 등에 업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마라. 우린 그따위 놈은 시들방귀로나 아니까."
등아는 곽명송을 부둥켜안은 채 가만히 귀띔했다.
"대환희 보살과 그 수하의 뚱뚱보 계집들이군요!"
"저 계집들에게 혼쭐을 내줘야겠군!"
곽명송은 나직이 외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등아는 그를 더욱 으스러지게 부둥켜 안으며 속살거렸다.
"아예 관계치 말자구요! 배를 부숴뜨리든 말든 이렇게 꼭 부등켜안고 약이나 바짝 올려 주자구요. 당신과 함께 죽는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등아는 방실 웃어 보였다. 그러자 곽명송도 호기롭게 말했다.
"암 그렇고말고. 나도 당신과 함께 죽는 게 원이지. 못된 년들, 감히 손을 대나 어디 보자!"
곽명송과 등아는 배가 가라앉든 말든, 대환희 보살네가 다가들든 말든 조금도 아랑곳 않고 더욱 뜨겁게 껴안으면서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은 점점 무아지경에 빠져 들었다. 뚱뚱보 여인들은 점점 더 두 사람 쪽으로 다가들었다.
그때 돌연 누군가 무섭게 외치는 소리가 뚱뚱보 여인들의 등짝을 때렸다.
"에계, 이 절구통 같은 것들! 어서 썩 물러가지 못할까?"
다음 순간, 병장기들이 맞부딪는 소리가 뱃전을 가득 메웠다. 그래도 두 사람은 서로 껴안고 애무하면서 이쪽에는 염두를 두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일순 사위는 물 뿌린 듯이 조용히 정적에 잠겨 들었다. 곽명송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두 눈을 번쩍 뜨고 사위를 둘러보니 뚱뚱보 여인들은 오간데없고 배는 반쯤 물에 잠겨 있었다.
"등아, 이젠 그만 배에서 내려야 해……."
곽명송은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등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재촉했다. 그러나 등아는 응석을 부리듯 몸을 뒤채며 기를 쓰고 입을 맞췄다.
어느새 중천에 떠오른 보름달이 떼구름 사이로 숨바꼭질하며 두 청춘남녀를 훔쳐보고 있었다. 마침내 등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중얼거렸다.
"아마도 아버님이 오셨던 것 같아요……."
그러자 어둑어둑한 뱃머리 쪽에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너희들은 그래, 첫날밤을 잘 지냈느냐?"
"네, 아버님! 뚱뚱보 여인들이 소란을 피웠지만 그래도 유별나게 재미있었어요."
등아가 익살을 부리자 황약사 쪽에서도 짐짓 훈계를 했다.
"뚱뚱보 계집들도 물러가고 달 또한 휘영청 밝으니 젊은 놈들이 껴안고 있지만 말고 어서 나와 달마중이나 하거라!"
황약사는 그 한마디를 남겨 놓고 옥퉁소를 멋들어지게 불어젖히며 어디론가 표연히 사라졌다.
배가 기우뚱거리며 겨우 뭍에 닿았다. 등아는 기어이 곽명송이 자기를 안아 내려주기를 소원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곽명송이 대뜸 말했다.
"배가 기우뚱거리니까 조심해. 내가 당신을 안으리다."
둘은 벌써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사이가 된 모양이었다.
"아이 좋아라! 이런 호강은 처음 해 보네……."
등아는 아양을 부리며 곽명송에게 바싹 파고들었다. 곽명송은 등아를 번쩍 안아 올리고는 껑충 배에서 뛰어내렸다.
단지흥은 요즘 심기가 영 편치 않았다. 별것 아닌 것 가지고도 트집을 잡고 까닭 없이 화를 내기 일쑤였다. 선비는 진작에 눈치를 챘지만 전전긍긍 말을 못하다가 기회를 노려 넌지시 한마디했다.
"폐하, 천하에 미모 빼어나고 심성 고운 계집이 허다하옵니다. 그러니 일개 아녀자 때문에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단지흥은 길게 한숨을 내쉴 뿐 말이 없었다.
그때 나어린 태감 하나가 허리를 굽힌 채 넙죽넙죽 다가와 정중히 아뢰었다.
"황궁 밖에 웬 사내가 하나 와서 폐하를 뵙기를 청하옵니다. 종남산에 사는 중양 진인이라고 하옵니다."
"뭐라구? 어서, 어서 모셔 드려라!"
단지흥은 반색을 하며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급히 대전 앞으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 한 사내가 성큼성큼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데 과연 왕중양이 아닌가. 단지흥은 연신 입을 벙싯거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대번에 낯색이 굳어지고 말았다. 그 뒤에 바싹 붙어 서서 보일 듯 말 듯 몸을 가리고 주백통이 슬금슬금 뒤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감히 단지흥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저 나 죽었소 하고 허리를 꺾고 있었다. 단지흥은 못 본 척하고 왕중양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대전 안으로 청해들였다. 자리에 앉자 왕중양이 먼저 말을 꺼냈다.
"듣자니 저의 이 미욱한 사제가 여기서 크게 사단을 쳤다구요. 며칠 전 종남산에 돌아와 하소하기에 그 길로 붙잡아 가지고 오는 길이외다. 단황께서 한번 단단히 버릇을 가르쳐 주십시오."
왕중양은 불같이 주백통을 쏘아보며 엄하게 말했다. 실로 난감한 노릇이었다. 이렇듯 왕중양이 직접 주백통을 데리고 와서 사죄를 하는데야 일국의 황제요 일개 사내대장부로 좀스럽게 꽁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잠시 생각을 굴리고는 쭈뼛쭈뼛 말머리를 꺼냈다.
"백통 형, 그렇다고 영고와 좋아할 게 뭐요? 난 정말 생각도 못했소그려……."
그러자 왕중양이 다시금 정중히 사지했다.
"백통이 이런 망측한 일을 저지르리라고는 정말 생각 밖이오이다. 참말 할말이 없으니 나를 실컷 욕해 주시오."
사대 시위들은 단지흥 옆에 서서 잡아먹을 듯이 주백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성미가 불 같은 농부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주먹을 쥐락펴락하더니 급기야 악 소리를 지르며 냉큼 달려가 주백통의 면상을 힘껏 후려갈겼다. 주백통은 미처 예기치 못한지라 비칠거리며 왈칵 피를 토했다. 순식간의 일이라 단지흥은 미처 말릴 틈이 없었다. 왕중양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길게 장탄식을 했다. 그러나 농부는 앞뒤 가리지 않고 다시 주백통에게 달려들었다.
"가만있지 못할까!"
단지흥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농부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이런 망나니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대리국의 체통이 깎이는 일 아닙니까?"
그러나 단지흥은 눈을 부릅뜨며 무섭게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이왕 엎지른 물, 백통 형을 때려죽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참견 말고 저리 물러서게!"
단지흥은 일순 숨을 가다듬고는 주백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백통 형, 애시당초 내가 영고를 이 황궁으로 데려온 것부터가 잘못이었소.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영고를 데려가 주시오!"
그 말에 주백통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불에 덴 것처럼 펄쩍 뛰었다.
"아니, 그 무슨 소리이십니까? 당치도 않은 말씀이오! 애초에 황비 되시는 줄만 알았더라면 아예 근접도 하지 않았을 게요. 바른 대로 말한다면 단황 나으리도 잘못이지요. 왜 황비라 부르지 않고 영고, 영고라고만 불렀수? 마치 옆집 계집아이 부르듯이……."
"닥쳐!"
왕중양은 벽력같이 호통을 내질렀다. 그러자 주백통은 즉시로 고개를 풀썩 떨구고는 뒤로 물러나 앉았다. 왕중양은 정색을 하고 단지흥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단황 나으리, 한 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오. 백통은 저의 사제이외다. 이 놈이 지은 죄로 봐서는 백 번 죽여도 시원치 않으나 장차 전진교 일은 이 놈에게 맡겨야 할 터, 또 전진교 흥망이 단황나으리의 대리국과도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니오니 그 점을 염두에 두시어 한 번만 용서를 하시지요……."
단지흥은 짐짓 어색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바다같이 흉금이 넓은 왕중양 앞에서 어찌 다른 말을 할 수 있으랴.
단지흥의 기색을 살피고 왕중양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용서해 주셔서 감사하오이다. 이 놈을 데리고 가 내 엄히 단속할 테니 제발 마음을 푸시오."
왕중양은 정중히 말하더니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선뜻 밖으로 나섰다. 주백통은 코가 석 자나 빠져서는 단지흥에게 넙죽 절을 하고 줄레줄레 따라 나갔다. 두 사람은 황궁을 나서더니 이내 어디론가 표연히 사라졌다.
단지흥은 잠자코 서 있다가 착 가라앉은 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내 영고를 한번 만나 보아야겠다. 어서들 앞서거라."
샤실 영고에 대한 단지흥의 사랑은 그때껏 변함이 없었다. 당분간 냉궁에 유폐시켜 두었다가 때가 되면 좋은 말로 그녀의 마음을 돌려 세울 생각이었다. 단지흥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었다.
네 시위는 굽실 읍을 하고는 곧장 냉궁으로 향했다.
허울이 좋아 냉궁이지 이곳은 기실 황궁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한 헐망하기 이를 데 없는 집이었다. 단지흥은 조용히 영고의 침실로 들어섰다. 영고는 침대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단지흥을 보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폐하께서 어떤 일로 행차를 다 하시옵니까?"
영고는 반기는 기색도 없이 덤덤히 인사를 하고는 다시 침대에 걸터앉아 말이 없었다. 그녀는 짐짓 깊은 상념에 잠기는 듯했다. 방안에는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단지흥은 네 시위들을 물리치고는 측은한 눈길로 영고를 바라보았다.
"영고, 이젠 그만 성깔을 부리고 나와 함께 돌아가구려."
"폐하, 더는 저 같은 계집을 마음에 두지 말아 주소서. 저는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만 있다면 그 길로 주백통을 찾아 나설 생각이옵니다."
단지흥은 그 말에 그만 또다시 속에서 불기둥이 치솟았다. 이만큼 쓴맛을 보았으면 손이야 발이야 빌며 자기가 따뜻이 대해 줄 때 이때다 하고 냉큼 품에 안길 줄 알았는데 이토록 생고집을 부릴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단지흥은 버럭 성을 냈다.
"그 놈은 방금 중양 진인에게 코가 꿰여 나를 찾아왔었노라."
"아니, 그래서 그이를 어떻게 했나요?"
영고는 눈을 치뜨며 대들 듯이 재우쳐 물었다. 단지흥은 코방귀를 피면서 쌀쌀하게 쏘아붙였다.
"어떻게 하긴? 내가 죽이기라도 했을까 봐 이리 호들갑이오? 내 이번에는 왕중양의 낯을 봐서 곱게 돌려보냈소. 하지만 그 놈은 다시는 오지 않을 거요. 당신 생각은 다시는 하지 않을 거란 말이오. 사실 난 당신을 데려가려느냐고 물었지만 그 놈은 눈곱만큼도 그럴 생각이 없었소. 당신 안위를 염려하기는커녕 싹싹 빌고 갔단 말이오. 그러니 이젠 싹 단념해요, 단념해!"
영고의 얼굴은 금시 새하얗게 질렸다.
"아니, 아니에요. 그인 분명 저를 좋아하고 있어요. 왜 거짓말을 하나요, 왜요?"
영고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외로 꺾으며 또박또박 쏘아 붙였다.
"내 당신에게 똑똑히 알려 주지요. 난 당신이 아니라 그이를 좋아하고 있어요. 그이는 당신 같은 사람과는 달라요. 당신은 말끝마다 대리국 사직이요, 밤낮 일양지만 연마하고 있지만 그이는 저를 끔찍이 아껴 주고 또 저에게 성심껏 무공을 가르쳐 주었어요. 저는 죽어도 그이와 함께 있고 싶어요."
"그 놈은 꺼져 버렸어, 영고! 왕중양이 그 놈을 붙잡아 와서 백배 사죄를 하고 데리고 갔단 말이오. 아마도 이젠 그 놈하고 영영 만날 수 없을 테니 그리 알아요!"
단지흥은 불같이 호통을 내질렀다. 그러자 영고도 질세라 바락 바락 악을 썼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명색이 일국의 황제로서 그따위로 거짓말을 밥 먹듯 하다니, 정말 부끄럽지도 않아요?"
단지흥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서로 악만 쓰다가는 아무런 결말도 나지 않을 것 같아 그는 한껏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영고, 이젠 가슴 아픈 옛이야기는 그만 하자구. 이제부터라도 그대를 아끼고 사랑하겠소. 그러니 너무 고집을 부리지 말고……."
그때였다. 돌연 영고가 어깨를 들까불며 정신없이 구역질을 해대는 바람에 그는 얼른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영고, 영고! 왜 그러오? 어디 불편하오?"
영고는 단지흥의 두 손을 떨쳐 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제 몸에선 이미 그이의 아이가 자라고 있어요. 그러니 이제 다 끝난 일이라구요. 이제 와서 제가 어찌 그이를 버리고 당신을 따를 수 있겠나요?"
영고는 간신히 말을 마치고는 다시금 심하게 구역질을 해댔다.
단지흥은 혼이 다 달아나는 것 같았다. 일국의 황비가 황제 아닌 남의 씨를 배다니……. 망신살이 뻗쳐도 유만부득이지 도저히 이럴 수는 없다. 그는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영고는 보란 듯이 연신 헛구역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영고는 별안간 반짝 고개를 쳐들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지금 저를 죽이고 싶겠지요? 당신은 스스로 불심을 닦은 사람이라고 자처하지만 실상은 심보 사나운 사람이에요. 저같이 연약한 여자도 자기 체면 때문에 죽이기를 불사할 사람인데 어떻게 선정을 베풀 수 있겠나요? 당신은 진정 지독한 사람이에요!"
단지흥은 영고가 이처럼 외골수일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는 너무나 기가 막혀 쫓기다시피 냉궁을 나와 버렸다. 그는 넋 나간 사람마냥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그래 나쁜 사람이고 악마란 말인가? 악마에게 어찌 불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한 불심이 없다면 어찌 혜심(慧心)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단지흥은 공연히 네 시위에게 성을 내며 내쏘았다.
"천룡사로 가세. 고선 장로님을 만나 봐야겠네."
왕중양은 주백통과 나무 그늘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었다. 왕중양은 아직도 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주백통을 쏘아보며 된통 호통을 내질렀다.
"내 낯에 똥칠을 한 생각을 하면 당장 네 놈 모가지를 비틀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야!"
그러자 주백통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투덜거렸다.
"원 사형도, 사형도 그런 일이 있지 않우? 다들 안다구요!"
왕중양은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딱 막혀 버렸다.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잠시 입맛을 다시더니 또 대뜸 내쏘았다.
"글쎄 따지고 든다면야 나도 남의 허물을 탓할 사람은 아니네만 자네처럼 우둔하게 남의 황비를 가로채지는 않았단 말이야!"
"아니, 남의 황비를 가로챘다니요? 그 사람 혼자서 얼마나 많은 계집을 끼고 있는데요? 이미 죽은 치주라는 계집말고도 수십은 돼요! 그리고 영고가 싫다면 싫은 거지 왜 길길이 뛰면서 야단법석을 떠느냔 말이에요. 기실은 사형도 마찬가지지요, 뭐……."
그때 문득 누군가 손뼉을 치며 쾌재를 불렀다.
"참 보기 좋군요. 왕중양 어르신도 남의 훈계를 받을 때가 다 있군요."
왕중양은 소리난 쪽으로 황망히 고개를 돌렸다. 천만 뜻밖에도 황약사와 아형이 서 있었다. 그는 마냥 손뼉을 쳐 가며 이죽거렸다.
"백통, 자낸 정말 인물일세 그려. 종래로 왕중양의 기를 꺾을 사람은 하나도 없었는데 자넨 본때 있게 훈계를 하고 있군그래. 눈물이 찔끔 나오게 좀더 따끔하게 훈계를 하게나, 허허……."
왕중양은 바삐 일어나 황약사와 인사를 나누고는 장탄식을 했다.
"황 형, 제발 그런 말 마시오! 글쎄 이 백통이란 놈이 내 망신이나 시키고 다니지 않았겠소. 얼마간 대리국에 가 있더니 남의 황비를 넘보고 다녔단 말요. 나 원 낯뜨거워서……."
그러자 황약사가 정색을 했다.
"중양 진인, 내 보기엔 진인의 생각이 틀린 것 같소.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 여자를 백통 형에게 넘겨주라고 말했을 거요. 단황이란 사람은 왜 혼자서 숱한 계집들을 끼고 있는단 말이오? 남들은 계집 하나도 거느릴까말까 한데……. 난 누구보다도 단황 같은 사람을 제일 미워하오. 말끝마다 개도 먹지 않는 공맹지도를 부르짖는 자식들이 처첩들은 한 마당씩 거느리고 다니질 않나, 나 원 아니꼬워서! 그래 단황이란 놈은 혼자서 무려 서른 남짓이나 되는 계
집들을 끼고 흥청거리는데 그중에서 하나쯤 백통 형에게 양도하는 게 사람 된 도리가 아니겠소? 나 같으면 그따위 놈한테 하나가 아니라 열다섯 계집은 빼앗아 와야 직성이 풀리겠소. 어허, 우리 안사람이 있는데 실수를 했군!"
황약사는 얼핏 아형을 보고는 능청스럽게 혀를 쏙 내밀었다. 그러자 아형이 은근슬쩍 맞장구를 쳤다.
"서방님, 그 계집들을 몽땅 가로채도 좋겠지만 그 대신 서방님이 처첩들을 한 마당 거느리면 그땐 더는 황약사가 아니라 단황이 되는 거예요."
그 말에 넷은 박장대소했다.
아형이 방그레 웃으며 주백통에게 넌지시 한마디 던졌다.
"주 어르신, 아마도 영고라는 그 여인은 굉장한 미인이겠네요?"
"글쎄, 굉장한 미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좌우지당간 내 마음에는 쏙 들더란 말이오!"
주백통은 쑥스러운 듯 낯을 붉혔다. 그러자 황약사가 슬쩍 말꼬리를 달았다.
"원체 백통 형 눈이야 종남산보다 더 높으니 말해 무엇 하겠나? 만나 뵙지는 못했어도 서시, 양귀비도 울고 갈 게야!"
그러자 넷은 또 한 번 허리를 잡고 웃어젖혔다.
실없이 농을 주고받으며 걷노라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그들은 아무 객점이나 들어가 밤을 보내고 이튿날 왕중양이 하도 잡아끄는 바람에 황약사와 아형도 종남산으로 길을 잡았다. 며칠을 내처 걸어서야 그들은 종남산에 다다랐다.
종남산에 이르자 황약사가 불쑥 말을 꺼냈다.
"지난번 만났을 때 임 여협이 바위에 글을 새겨 넣은 비밀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었지요? 내 언젠가 다시 만나면 알려 드리기로 약속을 했는데 이렇듯 빨리 만날 줄은 미처 몰랐소. 하나 오늘은 시간도 좀 있고 하니 그 비밀을 알려드리지요."
그 말에 왕중양은 희색이 만면하여 대뜸 그 석비가 있는 쪽으로 길을 잡았다. 넷은 휘적휘적 활개를 치며 종남산 뒷산 중턱까지 한 달음에 걸어갔다. 석비는 오늘도 의연히 외롭게 서 있었다.
황약사는 성큼성큼 다가가 손바닥으로 석비를 슬쩍슬쩍 어루만지더니 손가락으로 글쓰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자 임조영이 써 놓은 시구 옆에 똑같은 시구가 완연히 새겨지는 것이 아닌가!
"아, 놀랍소! 황 형, 황 형은 실로 귀신 같은 재간을 가졌구려! 참 부럽소이다!"
왕중양은 연신 혀를 끌끌 찼다. 그러자 아형이 방실거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중양 진인님, 저것은 속임수예요. 다시 잘 보세요."
"속임 수라고요?"
왕중양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석비 가까이 다가갔다. 영문을 알수가 없었다. 그는 한껏 힘을 주어 두 눈을 부릅뜨고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과연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자, 이제 저희 둘은 그만 가 봐야 하겠수다."
황약사는 싱그레 웃으며 작별을 고했다. 왕중양은 그 순간 새삼스레 비애에 잠겨 들었으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황망히 황약사의 손을 텁석 잡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황 형, 황 형이 이토록 훌륭한 아내를 맞아들였으니 일면 기쁘고 일면 부럽구려. 아무튼 아형 아씨를 살뜰하게 대해 주시오."
"참 중양 진인도! 아형에게 할 도리를 저한테 하는구려. 아형보고 이 홀아비 같은 서방을 살뜰하게 모시라고 부탁해 주시오. 호강 한번 해 보게!"
황약사는 변죽 좋게 껄껄 웃으며 아형의 손을 잡고 총총히 떠나갔다. 왕중양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해 허탈한 웃음을 지을 따름이었다.
금실 좋은 새 내외간은 백사장에 주저앉아 점점 가라앉고 있는 배를 허전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등아는 웬지 착잡하여 혼자 중얼거렸다.
"아버님은 지금쯤 어디에 계실까? 그분은 정말 살뜰한 분이야. 배가 가라앉으리란 걸 어떻게 알고 쫓아오셨을까?"
그러더니 등아는 방그레 웃으며 곽명송에게 물었다.
"이봐요, 당신도 아버님이 어머님을 사랑하듯이 절 사랑해 줄 수 있나요?"
그때 돌연 등뒤에서 사람 말소리가 들려 왔다.
"쳇, 몰염치한 것들, 고작해야 형님, 형수뻘 되는 연놈들을 뭐 아버지, 어머니?"
"이 사람아, 괜히 성깔 부릴 건 뭔가? 천하 무림의 망나니 황약사를 양아비로 섬기는 저 두 연놈을 당장 죽여 버리면 그만인걸!"
"저것들이 황약사를 등에 업고 우쭐대지만 화산파에 쇠쪽같이 드센 우리 세 늙은이가 도사리고 있는 줄은 미처 모르는 모양이다. 재미 끝에 낭패 본다고 이제 곧 혼쭐나게 될걸! 으하하하……."
한 사람이 입을 열자 연거푸 두사람이 입을 놀려댔다. 곽명송과 등아는 흠칫 놀라 얼른 사위를 살폈다. 어슴푸레한 달빛 속에서 세 사내의 그림자가 불쑥 떠올랐다. 그것을 보고 곽명송은 삽시에 등골에 소름이 확 끼쳤다.
"이거 잘못 걸렸군!"
"누구예요?"
등아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히 물었다. 그러나 곽명송은 자못 근심스러운 모양이었다.
"화산파의 유명한 세 늙은이, 삼로(三老)요!"
"참 여러 놈 나타나서 귀찮게 구네요. 젊은 남녀가 즐기는 건 당연한 이친데 왜 늙은이마저 나서서 시샘을 하는 거예요, 시샘은? 삼로라니, 대관절 어떤 사람들이에요?"
"저 키가 작달막한 자는 노래소(老來少)라 하고, 저 흐물거리는 뚱뚱보는 노시락(老是樂), 또 저 늘 울상을 짓고 다니는 늙은이는 노불락(老不樂)이라 하지. 저 삼로는 화산파 좌상이요, 내 사숙조(師叔祖)뻘 되오."
곽명송은 나직이 속삭이고는 급히 일어나 공손히 예를 갖췄다.
"세 분 사숙조님, 별고 없으십니까?"
그러자 노시락이란 늙은이가 느물느물 웃으며 떠벌렸다.
"이 놈의 녀석아, 오늘은 네 놈의 길사니까 구태여 손을 대고 싶진 않다. 오늘 손을 대는 건 어르신의 도리가 아니니깐. 하지만 이 밤만 지나면 네 놈은 물론이고 네 놈의 여편네까지 몽땅 껍질을 벗겨 죽일 테다!"
곽명송은 감히 말을 못하고 등아가 얼른 나섰다.
"달도 참 밝네요."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딴청을 피웠다. 오늘이 첫날밤인데 공연히 강짜 부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곽명송도 덩달아 능청을 떨었다.
"사숙조님들,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대단히 고맙습니다. 아무튼 내일 아침엔 쾌히 목을 늘이고 칼을 받겠으니 오늘은 잠시 물러가 주십시오."
노불락이 울상을 해 가지고 펄쩍 뛰었다.
"쳇, 정말 개떡 같은 소리를 하는군! 우리가 물러간 사이에 슬쩍 꼬리를 빼자는 잡도리가 아니고 무언가! 그런 어림도 없는 잔꾀 부리지 말라구! 서로 좋아하겠거들랑 실컷 좋아하란 말야. 우린 여기서 내일 아침까지 너희 두 연놈을 지켜 보겠으니!"
그러자 이번에도 등아가 대뜸 말을 받았다.
"여러 어르신들, 이 밤은 저희 둘에게는 첫날밤이 아니겠어요? 오늘 밤만이라도 시간을 주신다니 고맙기 그지 없군요. 그럼 이제부터라도 제 낭군과 더불어 이 밤을 즐기겠어요."
그러자 노래소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옳거니! 내일 아침에는 죽더라도 다믄 한 순간이라도 물고 빨아야 부부간이지!"
곽명송과 등아는 이제 더는 세 늙은이를 아랑곳 않고 달빛 어린 백사장에 조용히 마주앉았다. 등아는 곽명송을 정겹게 바라다보다가 그의 다리를 베고 모로 누웠다. 곽명송의 억센 다리를 베고 누우니 마음은 햇솜처럼 부풀어올랐다. 등아는 곽명송을 말끄러미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봐요, 당신은 왜 그 사매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았나요? 그랬더라면 이런 봉변도 없었을 텐데……."
"또 실없는 소리로군!"
곽명송은 손으로 등아의 입을 막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등아는 가만히 그의 손을 치우며 하염없이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화산파의 사매에게 당신을 빼앗길 수는 없어요. 막상 당신을 앗아 간다 해도 저는 밤낮 당신만 그리다가 온갖 수단 방법을 다해서 도로 앗아 올 거예요!"
등아는 나직이 속살거리며 그의 허리춤에 안겨 들었다. 등아는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 한껏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남의 눈이 꺼림칙했다.
"아까 그 늙은이들이 그저 지켜 보고 있겠죠? 실로 주책머리없는 늙은이들이야……."
그녀는 키드득 웃었다. 그러자 곽명송이 정색을 하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 늙은이들도 젊었을 적엔 대단했던가 보오. 셋이 똑같이 한 처녀를 사모했다더군. 하지만 서로 막역한 친구 사이라 체면을 차리다 보니 그만 누구도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다질 않겠어……."
등아가 피식 웃으며 말허리를 잘랐다.
"멍청이, 정말 멍청이들이군요. 아마도 화산파엔 저런 멍청이들만 모였는가 보군요, 호호호……."
곽명송은 그래도 그 말이 듣기 거북해 얼굴을 붉혔다.
"그때만 해도 아주 점잖은 양반들이었소!"
"점잖긴 뭐가 점잖아요? 셋 중에 아무나 먼저 널 좋아해 한마디만 하면 될 걸 가지고 밤낮 속만 썩였으니, 쯧쯧……."
"당신은 맘 편한 소리만 하는구려. 하나가 독차지하면 다른 둘은 얼마나 쓸쓸하겠소? 다정한 친구간이라 서로 체면을 차린 거겠지."
"아무튼 셋 다 병신은 틀림없는 병신이에요. 그 처녀가 그토록 맘에 든다면 셋이 함께 찾아가 '우리 셋 중에 누구에게 맘을 줄 거요?' 하고 한마디만 물으면 될 것 아니에요? 그만한 배포도 없으니 병신이 아니고 뭐겠어요?"
등아는 또 키드득 웃었다. 그녀는 저만치 모여 앉아 있는 삼로가 들으라고 일부러 비꼬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곽명송은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허우대가 멀쩡한 사내 셋이서 따지고 들면 처녀 쪽이 얼마나 난처하겠는가……."
"어쨌든 그런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해서 끝내는 그 처녀를 처녀 귀신으로 만들었겠군요?"
"허, 용하군그래!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오? 사실 그 여자는 늘그막에 이고암(尼姑庵)에 입적해서 중이 되었소. 그 유명한 한연(恨緣) 사태(師太)가 바로 그 여인이오."
"아무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겠죠. 한연이란 말 그대로 속절없는 연분을 한스럽게 생각한다 그거군요. 세 사내가 얼마나 야속했으면 그런 법호를 달았겠어요? '날 사랑해 주오!' 한마디만 하는 사내가 있었더라면 그 사내에게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오순도순 얼마나 재미있게 평생을 살았겠어요. 실로 한스러운 연분이군요!"
그때였다. 저쪽에서 엿듣고 있던 삼로가 별안간 벌떡 일어나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러더니 노래소는 주책머리없게 등아의 무릎 위에, 노불락은 곽명송의 몸 위에, 그리고 노시락은 둘 사이에 털썩 들어앉았다. 그리고는 낄낄 웃으며 빈정거렸다.
"참 기막히는 일이군. 새파란 계집년이 그 먼 옛날 일을 어떻게 다 알고 있나? 네 년은 여든 먹은 호물때기 노친네도 아닌데 말야!"
"이 년이 그때 옆에서 귀띔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어. 하지만 이젠 게도 구럭도 다 놓쳐 버린 지가 옛날이야!"
"이 새파란 계집이 우리 옛일을 어떻게 알까? 분명 어느 놈이 알려 준 게야. 그 놈의 혓바닥을 썩뚝 잘라 버려야 해!"
"아이 참, 망령스럽게 이게 무슨 짓들이에욧."
등아는 자기 무릎 위에 앉은 노래소를 와락 밀치며 짐짓 역정을 냈다.




제29장 사랑하는 두 남녀
등아는 세 늙은이를 보며 여유만만하게 생글거렸다.
"세 분을 무슨 일이든 왜 그리도 깜깜이세요? 늙으면 다 그런가요, 호호호……."
노불락이 대번에 이맛살을 찡그렸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아무리 귀가 어둡다 한들 그래 우리가 남의 일에 깜깜이란 말이냐? 아니면 화산파 일에?"
"남의 일은 물론이고 화산파 일도 모르신다 그 말씀이에요."
등아는 짐짓 한숨까지 내쉬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노래소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긴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지. 한데 우리가 제 집안일도 모른다는 건 무얼 두고 하는 소린가, 엉?"
"그럼 한 가지 물을게요. 선우순이 자기의 사형을 모해하고 화산파 장문 자리를 차지한 내막을 아시나요?"
등아가 정색하고 물으니 삼로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등아는 빙긋 웃으며 한마디 쐐기를 박았다.
"여보세요, 어르신들. 저와 이이는 도망치지 않을 테니 먼저 자기 사형를 모해한 선우순이나 잡아 족친 후에 저희들을 죽이든가 말든가 하세요. 화는 언제나 안으로부터 생기는 법이에요. 군자는 제 집안부터 다스린다는 말도 있잖아요?"
삼로는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길게 한숨을 날렸다.
"한숨을 내쉴 건 뭐예요?"
노래소는 열적게 웃으며 투덜거렸다.
"선우순이 화산파 장문의 권위를 상징하는 검을 가지고 있으니 우린 어쩌는 수가 없단 말야."
"참, 그러니. 제가 답답하다 그러지요! 그런 주제들이시니 저희들 일도 이제 그만 간섭하고 어서 저리 비켜요."
삼로는 벌떡 일어나 그 자리에 잠자코 선 채 말이 없었다.
등아는 앉은걸음으로 두어 발짝 비켜 앉았다. 곽명송도 따라왔다. 둘은 세 늙은이가 있거나 말거나 서로 부둥켜안고 백사장에 누웠다. 등아가 곽명송의 가슴으로 파고드니 곽명송은 적이 난색을 지었다. 등아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점잔을 뺄 건 뭐예요? 여든 자신 늙은이들이 옆에 있다뿐인데요."
그러면서 등아는 더욱 곽명송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곽명송도 후끈 달아올라 아무 거리낌없이 등아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두 남녀가 자기들을 아랑곳하지도 않자 삼로는 포기한 듯 털퍼덕 주저앉아 그쪽이 한 덩어리가 된 것을 멍청하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노래소가 먼저 하품을 하며 늘어지게 말했다.
"어이구, 난 피곤해서 먼저 눈 좀 붙여야겠네."
"그래 한잠 자두세. 제 놈들이 뛰면 어디로 뛰겠나?"
노시락도 한마디 거들며 벌렁 드러누웠다. 두 사람이 넘어지자 노불락도 뒤따라 몸을 눕혔다. 그러더니 곧바로 드렁드렁 코를 곯아댔다.
노인들의 코고는 소리마저도 그들에게는 마치 음악 소리처럼 흘러 들었다. 두 젊은 남녀의 몸뚱어리는 시간을 더할수록 점점 불덩이처럼 달라올랐다. 곽명송의 뜨거운 입이 등아의 입술을 찾아 헤매고 등아는 스스럼없이 입을 주면서 두 팔로 곽명송의 목을 감고 늘어졌다. 곽명송은 연신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아아…… 그날 밤도 이렇게 입을 맞추었지……."
곽명송에겐 그날 밤은 마치 까마득한 전설 같기만 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 흥분에 다시금 사로잡혀 그는 당장이라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천상배필이란 말은 필시 이 두 남녀를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닐까. 휘영청 밝은 달이 두둥실 중천에 걸려 백사장에 은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등아가 가만히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서방님, 우리 도망칠까요?"
"어떻게 도망을 친단 말이오, 저 삼로의 무공아 귀신 같다는데. 무공으로 삼로를 꺾을 만한 사람은 황약사와 구양봉밖에 없다고 하지 않소."
"그럼 날샐녘까지 계속 이러고 있을 수밖에 없지요, 뭐."
등아는 애교를 떨며 한 눈을 꿈쩍여 보이더니 다시금 곽명송의 넓은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이 무렵, 향녀들은 산을 넘고 들을 지나 북방으로 북방으로 가고 있었다. 강남에는 그간 적을 삼은 무리들이 너무나 많아 도무지 자리를 잡고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풍막을 씌운 마차 네대에 나누어 앉아 온종일 길을 다그쳤다. 땅거미가 내려앉자 그녀들은 해묵은 홰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하룻밤 묵어 가기로 했다. 홍사가 향녀 셋을 불러 놓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이젠 등아 언니도 없고 하니 각별히 조심들을 해야겠어. 먼저 너희 셋이 보초를 서되 무슨 자그마한 동정이라도 있으면 지체 말고 우리를 깨워야 해."
셋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쪽으로 걸어갔다.
향녀들은 마차 옆에 나란히 누웠다. 하루종일 피곤했던 터라 그녀들은 이내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동정의 백사장에서 곽명송과 등아가 기이한 첫날밤을 지내던 바로 그 밤이었다. 문득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에 뒤미처 성난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보초를 서던 향녀들이 기겁을 하여 뛰어오면서 다급히 소리쳤다.
"어서들 일어나요, 어서들!"
마차 옆에 누웠던 향녀들은 일제히 발딱발딱 일어나 자세를 가다듬었다. 사방에 횃불이 번쩍이고 웬 사내들 한 무리가 그녀들을 에워싸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었다.
"웬 사람들이오?"
홍사가 다그쳐 물었다. 횃불을 든 사내들 속에서 누군가가 미친 듯이 웃어댔다.
"네 년들이 사람을 죽일 때도 그렇게 점잖게 묻고는 죽였더냐?"
향녀들은 저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향녀들과 원수진 놈들임에 틀림 없었으나 도대체 어느 패거리인지 알 길이 없었다. 향녀들은 서로 등을 돌려대고 둥그렇게 원을 그리면서 단검을 빼 들었다. 놈들은 횃불을 치켜 들고 조금도 거리낌없이 점점 더 죄어 들었다. 하나같이 흉측하게 생긴 몰골이었다.
"대관절 어쩔 셈이오?"
홍사가 다시금 재우쳐 물었다. 그러자 볼따구니가 흉하게 축 처진 사내가 씩 웃으며 우쭐거렸다.
"그래 네 년들은 운남 십팔마(十八馬)라는 이름도 듣지 못했단 말이냐?"
운남 십팔마란 이름 그대로 열여덟 명으로, 운남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사나운 도적 떼였다. 이들은 돈과 재물을 빼앗는 짓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사람을 잡아죽이는 악귀와 진배없는 놈들이었다. 향녀들은 운남 십팔마라는 말에 저마다 오싹 소름이 돋아 서로 쳐다보며 마음을 다졌다. 향녀 하나가 짐짓 눈웃음을 치면서 나섰다.
"아이 참, 이제 보니 운남 십팔마 형제들이로군요. 실례했어요. 여기서 만나 뵐 줄은 몰랐어요. 참말 뜻밖이군요! 늦었지만 저희 향녀들의 인사나 받으세요."
그러자 키가 껑충한 사내가 말을 받았다.
"닥쳐! 입에 발린 인사나 받자고 온종일 뒤쫓아온 줄 아느냐? 우린 네 년들 몸뚱어리가 탐나서 일심으로 뒤쫓아온 게야. 듣자니 네 년들은 악양루에서 갖은 교태를 다 부렸다더군. 심지어 천하호걸들 앞에서 훌훌 앞가슴을 헤치고 탐스러운 젖가슴까지 자랑했다면서? 우리 운남 십팔마도 병신이 아닌 이상 네 년들 맛을 좀 봐야겠다. 세상일이란 늘 공평해야 하는 법이니까. 게다가 여긴 황량한 들판이라, 남의 눈도 없으니 조금도 내숭떨 것 없다. 자, 걱정 말고 어서 옷
들이나 홀랑홀랑 벗으라구! 일이 끝난 다음에는 우리가 너희 서른 남짓을 모두 거두어 줄 테니! 너희들같이 굴러먹던 계집들에겐 꿩 먹고 알 먹기 아니냐, 으하하하……."
사내들은 일제히 허리를 꺾어가며 박장대소했다.
향녀들은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용 빼는 재주도 없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무공이 뛰어난 등아 향녀만 있다면 사생결단하고 싸워 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 사나운 도적 떼를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은 말로 구슬리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향녀들은 웃는 얼굴을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 향녀가 또 환히 웃으며 말했다.
"십팔마 오라버님들, 저희 향녀들은 악양루 잔치가 파한 그날부터 강호의 주먹놀음이나 칼부림에서는 손을 씻고 나앉기로 했어요. 다시 그런 싸움판에 뛰어들면 세상 사람들이 참으로 비웃을 거예요. 그런즉 저희 향녀들 체면을 봐서 더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그러자 키가 장대 같은 사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구말구! 바로 네 년들이 피를 보는 싸움에서 손을 씻고 착한 계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여편네로 삼으려는 거야. 아직도 천방지축 날뛰는 계집들이라면 누가 주워 가겠니. 아무튼 네 년들은 스물여덟이고 우린 열여덟이야. 한 사내 앞에 두 계집씩은 좀 모자라니까 우리들끼리 제비를 뽑아야 하겠군. 제기랄, 그래도 반 이상은 둘씩 차지한단 말이야, 으하하하……."
향녀들은 서로 의미심장하게 눈길을 주고받았다. 아마도 일장혈투는 면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향녀들은 생글생글 웃으며 이구동성으로 대꾸했다.
"좋아요, 그래도 오라버님들이 이 누이동생들을 사람 취급해 주는군요. 그럼 어디 한번 맞붙어 보십시다!"
향녀들은 단도를 움켜쥐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달려나갔다. 젱겅젱겅 칼날이 부딪치고 번쩍번쩍 밤 하늘에 불꽃이 튀었다. 일장 악전(惡戰)이 이제 막 밤 공기를 가르기 시작한 것이다.
정작 맞붙어 보니 난다 긴다 하던 소문은 다 헛소문인 듯 운남 십팔마도 그다지 무예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힘이 장사요, 병장기 또한 가지각색이라 장검이 번쩍이고 철퇴가 윙윙 울어대고 쇠채찍이 가로세로 기승을 부렸다. 향녀들은 고작 손에 잡은 것이 단검밖에 없는지라 자연 지탱해 내기가 어렵게 되었다. 향녀들은 공격을 들이대지는 못하고 가벼운 경공으로 요리 조리 몸을 피하면서 허점을 노릴 뿐이었다.
아까 그 장대 같은 사내가 서넛 되는 향녀들을 맡아 싸우며 큰소리로 지껄여댔다.
"여보게 아낙네들, 괜히 칼부림에 힘 다 쓰고 나면 이따가 무슨 힘으로 우릴 받아 주겠나. 힘은 두었다 그때 쓰라구!"
그 말에 여기저기 널려 있던 십팔마 패거리들이 낄낄 웃으며 병장기를 휘둘러댔다. 일순 향녀 하나가 칼을 맞고 찢어지듯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그걸 보고 가까이 있던 향녀 하나가 다급히 달려갔다. 바로 그때, 한 사내가 그녀를 바짝 뒤쫓아 삽시에 낚아채 옆구리에 끼고 큰소리로 외쳤다.
"형제들, 힘들 내. 난 벌써 여편네 감을 하나 골라 잡았어!
"잘했어! 누구든 잡으면 임자지!"
놈들은 맞장구를 치면서 더욱 기세 좋게 병장기를 휘둘러댔다. 장대 같은 사내도 덥석 향녀 하나를 낚아챘다. 그러자 그녀는 몸부림을 치면서 악을 쓰더니 대뜸 사내의 팔을 물어뜯었다. 그러자 사내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향녀를 떨어뜨려 버렸다. 그때를 틈타 향녀는 땅에 떨어진 단검을 거머쥐고 번개같이 자기 가슴을 콱 찔렀다. 짐승 같은 놈들에게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기로 모질게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녀는 가슴에 꽂힌 칼자루를 부여잡은 채 힘
없이 풀썩 쓰러졌다.
"멍청이 같은 자식, 다 잡은 년을 놓치고 난리야, 병신같이!"
사내들은 하나같이 핀잔을 주었다.
마차 옆에서는 한 놈이 향녀 하나를 땅에 쓰러뜨린 채 깔고 앉아 마구 옷을 벗기고 있었다.
"이 짐승 같은 놈아, 이걸 놔라, 이걸 놔!"
그녀는 두 손으로 옷고름을 거머쥐고 악을 써댔다. 그러자 사내는 향녀의 손을 비틀면서 저고리를 확 잡아 찢고는 능청을 떨었다.
"예전에는 말이야, 향녀들이 아양을 떨고 끝내 주게 교태를 부려 사내를 녹여 놓았지만 젖통만은 꼴불견이었다구. 그런데 이거 어이구…… 아무래도 황약사란 양반한테 감사를 드려야겠어. 글쎄 그대들의 젖통을 진짜 이팔청춘 아가씨들 모양으로 곱게 치료해 주었으니깐. 어이구 탐스러워라, 요것아!"
사내는 향녀의 도도록한 젖꼭지를 잡아 살짝 비틀었다. 향녀는 고개를 모로 꺾은 채 눈가에 방울방울 눈물이 맺혔다.
다른 사내들은 향녀를 깔고 앉은 사내가 부러워 침을 질질 흘리며 더욱 사납게 향녀들에게 달려들었다. 향녀들은 이제 기진맥진 해서 날아드는 검이며 철퇴를 가까스로 피하며 홰나무까지 바투 물러섰다. 향녀 하나가 다른 향녀들을 둘러보며 비장하게 외쳤다.
"우리 내세에서 다시 만나자!"
그녀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순식간에 가슴에 단검을 푹 박았다. 또 향녀 하나가 죽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하나 둘 가슴에 칼을 박고 연달아 푹푹 쓰러졌다. 잠깐 사이에 홰나무 주위에는 예닐곱 향녀의 시체가 어지러이 나뒹굴었다. 그러자 운남 십팔마의 두령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등신 같은 자식들아, 다 죽기 전에 어서 사로잡지 못햇! 그래, 죽은 귀신을 가져다가 여편네로 삼을 셈이냐?"
놈들은 두령의 호령이 떨어지자 더욱 바짝 다가들면서 칼을 휘두르다가 틈만 생기면 향녀들에게서 단검을 빼앗아 휙 던져 버리고는 그녀들을 깔아뭉갰다. 얼마나 흘렀을까, 더러는 죽고 더러는 크게 상처를 입은 채 향녀들은 모두 놈들에게 사로잡혔다.
사내들은 삭정이를 주워다 화톳불을 피워 놓고 빙 둘러앉더니 왁자지껄 떠들어대면서 술을 마셨다.
두목이 도끼눈을 해 가지고 좌중을 둘러보더니 운을 뗐다.
"몇 년 죽어 넘어졌어도 아직 우리보단 많아. 하니 맏이인 내가 일단 계집 둘은 가져야겠다."
그러자 곁에 있던 사내가 대뜸 나섰다.
"나는 셋을 잡았어. 그러니까 최소한 둘은 가져야 해. 그래도 하나는 양보하는 셈이라구."
"이 놈들, 장유유서도 모르냐? 나이에 따라 순서가 있는 법이야. 맏형이 끝났으면 내 차례지 네 녀석이 왜 나서!"
늙수그레한 염소 수염 사내가 발딱 일어서며 볼멘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다른 한 놈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빈정댔다.
"둘째형님은 계집 하나 잡지 못한 주제에 침대 위에서 어떻게 둘씩이나 다루겠다구 욕심을 부리는 게요. 그만큼 나이를 먹었으면 좀 체면을 차릴 줄도 알아야지, 나 원……."
그러자 사내들은 배를 그러안고 박장대소를 했다. 염소 수염은 발끈하며 칼을 휙 뽑아들고 으르렁거렸다.
"이 놈, 다시 한 번 그따위 잡소리를 하면 모가지가 날아갈 줄 알앗!"
허장성세로 저런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내들은 누구 하나 대거리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향녀를 차지하는 일에서 만큼은 누구도 양보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한동안이나 옥신각신 다투며 내남없이 언성을 높여도 결판이 나지 않았다.
한 순간 모두를 제압하며 두목이 꽥 소리를 질렀다.
"주둥이 닥치지 못햇! 내 칼 맛을 보아야 닥치겠느냐?"
이 두목이란 자는 성미가 불 같은지라 모두들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꾹 다물고는 두목의 눈치만 살폈다.
두목은 진작부터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계집은 무슨 일에서든 늘 불화의 화근인 법이다. 그러니 만약 이 계집들을 공평하게 나누지 못하면 앞으로 형제들의 의가 벌어지게 되고 말 것임에 틀림없었다. 두목은 짐짓 점잖게 훈계를 했다.
"향녀들을 계집으로만 봤다간 큰코다친다! 저 년들은 겉은 계집이지만 속은 여느 사내보다 더 독해! 아무때든 복수하려고 날칠 날이 있을 테니 단단히 조심들 하란 말이야. 행여 끼고 살다가 행실이 석연치 않은 구석만 보이면 가차없이 죽여 버려야 한다구."
장대 같은 사내가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참 형님도, 계집이면 그냥 계집이지 뭘 그러시우? 이제 사내맛을 한번 보면 집고양이처럼 온순해질 거외다."
"맏형, 꺽다리 말이 옳지요, 계집이야 분명 계집이겠지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어요. 다들 싫으면 나한테 둘도 좋고 셋도 좋고 몽땅 주시라요. 나 한번 진시황처럼 살아 보게시리."
다른 한 놈이 맞장구를 쳤다. 그 말에 사내들은 또 한 번 웃음보를 터뜨렸다.
향녀들은 결박당한 채 서로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모두들 초췌하기 이를 데 없고 저마다의 눈빛엔 애잔하고 처연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등아 향녀가 부럽기도 할 뿐더러 원망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등아 향녀는 곽명송 같은 순박하고 듬직한 낭군을 만나 일평생 행복하게 살 터이나 남아 있는 이 향녀들은 이게 무슨 꼴인가? 애초에 세상을 쉽게 보고 등아를 시집보낸 것부터가 잘못이었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 여인들을 욕심내고 괴롭히는 색마들이 있는
한 향녀들은 똘똘 뭉쳐서 싸워야 했다. 한데 지금에 와서야 도로 물릴 수도 없는 터, 이를 어쩐단 말인가? 향녀들은 실로 후회막급이었다. 그녀들은 얼핏 맥을 놓고 앉아 있는 듯했지만 내심 잔뜩 긴장한 채 틈만 노리고 있었다. 틈만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자결하리라.
운남 십팔마는 그제야 간신히 합의를 보았다. 맏이로부터 차례로 둘씩 갖고 그 다음엔 하나씩 가지기로 했다. 둘째는 아무런 재주도, 공로도 없었지만 항렬이 높은 까닭에 향녀 둘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한껏 기분이 좋아서 맏이에게 공손히 권했다.
"형님, 먼저 고르시죠!"
그러자 십팔마는 일제히 일어나 향녀들에게로 다가왔다. 맏이가 제일 먼저 나서서 으쓱거리며 향녀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는 손끝으로 향녀들의 턱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 보더니 난색을 지었다.
"제기랄, 다 한 어미 구녕으로 나온 딸년들인지 모두 신통하게도 닮았군. 하나같이 예쁜데 어느 년을 고른단 말인가?"
사내는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더니 복판에 있는 두 향녀를 끌고 나오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고분고분하니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 버릴 테다!"
그러자 사내들은 잇따라 향녀들을 하나 둘씩 꿰차고 저마다 희희낙락거리며 어둠이 내려앉은 숲 속으로 사라졌다. 가련한 향녀들은 마치 거친 사냥꾼에게 끌려가는 꽃사슴 같았다.
향녀들은 그 당장 자결을 못할 바에야 덮어놓고 악을 쓴다고 소용이 없을 게 뻔하므로 갖은 교태와 아양을 부려 이 우악스러운 사내들을 꺼꾸러뜨리자고 나직이 입을 모았었다. 키다리 사내에게 끌려간 향녀는 사내가 포승을 풀어 주자마자 사내의 목에 냉큼 감기면서 아양을 떨었다.
"당신들은 참 무지막지한 양반들이에요. 계집에게 이렇듯 포승을 지워 죄인 다루듯 하다니, 그래선 안 되는 거예요. 자고로 계집이란 햇병아리 다루듯 품어 주고 쓰다듬어 줘야 하는 거예요……."
그러자 키다리는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져 숨을 헐떡거리며 서둘러 향녀의 앞가슴을 풀어헤쳤다. 그와 동시에 향녀의 오른손은 슬그머니 사내의 허리춤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묵직한 물건을 텁석 쥐고 힘껏 잡아당겼다.
"으악!"
사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향녀를 콱 떠밀었다. 그녀는 뒤로 벌렁 나자빠지면서도 간드러지게 깔깔 웃어댔다. 사내는 사타구니를 부여잡고 두어 바퀴 뱅뱅 돌더니 장검을 쓱 뽑아들었다.
"요 앙큼한 년, 이 어른을 병신으로 만들려고 수작을 부린! 내 네 년을 당장 죽여 버리고 말 테다!"
키다리는 장검을 높이 쳐들고는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온몸의 힘을 다 두 팔에 모았는데도 어인 영문인지 장검은 얼어붙은 듯 허공에 멈춘 채 꼼짝도 안 했다. 실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키다리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다 허사였다. 필시 누군가 허공에서 장검을 붙잡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누구ㄴ!"
키다리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호탕한 웃음 소리가 어둠을 뚫고 휙 내리꽂혔다.
"누구냐고? 난 황약사란 사람이다. 네 놈들도 귀가 있다면 똑똑히 들었을 것인즉, 내 악양루 잔치 때 분명히 말해 둔 바 있다. 이제부터 착한 여인들로 환생한 이 향녀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은 내가 친히 나서서 가차없이 죽여 버릴 것이라고 말이다!"
그 소린 마치 고요한 밤 하늘에 울리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한창 몸이 달아올라 가쁘게 숨을 몰아 쉬며 쓱쓱 팔소매를 걷어붙이던 사내들은 너나없이 눈들이 떼꾼해졌다. 황약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는 재주를 가졌다더니 과연 또 나타났구나! 사내들은 갈팡질팡 종을 못 잡다가 얼른 향녀들을 붙잡았다. 향녀들을 방패로 삼아 대적할 심산이었다.
십팔마 두목은 양손에 두 향녀의 팔을 비틀어 잡아 쥐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언뜻 기골이 장대한 사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그 곁에 그림자 하나가 다시 떠올랐다. 달빛에 기대어 자세히 살펴보니 나중에 떠오른 그림자는 여인이었다. 미목이 수려한 것이 향녀들보다도 훨씬 아리따웠다. 천하 미인으로 이름 높은 황약사의 아내 아형이 분명했다. 두목은 그녀를 보자 얼른 약은 꾀가 하나 떠올랐다. 듣자니 저 여자는 무공을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저 여자를 사로잡
아 방패로 삼는다면 난다 긴다 하는 황약사도 쩔쩔매지 않겠는가. 두목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큰소리로 외쳤다.
"얘들아, 여덟째까지는 나하고 저 놈의 여편네를 빼앗자!"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여덟 놈이 일시에 황약사와 아형에게로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나머지 놈들은 잽싸게 향녀들을 한곳에 몰아붙였다.
"신난다, 많이 덤빌수록 좋다! 거기 놈들도 어서 덤비거라!"
황약사는 호기롭게 외쳐대며 번개같이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쌩 바람소리가 일면서 계란만한 돌멩이 하나가 휙 날아가더니 허공에서 짝 갈라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칼을 비껴 들고 앞장서 달려들던 세 놈이 으악, 으악 비명을 지르며 칼을 팽개치고는 두 눈을 감싸 쥐었다. 그러더니 금세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물컹물컹 흘러 나왔다. 세 놈은 선 자리에서 뱅뱅 돌며 아우성을 쳤다.
"어이구, 이를 어쩌나.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중 한 놈은 혼비백산하여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갈지자로 뛰어가다가 일순 향녀들의 다리에 걸려 기우뚱 나자빠졌다. 향녀 하나가 슬쩍 단검을 뽑아 그 놈의 가슴팍에 깊숙이 박았다.
두목은 가슴이 철렁했다. 황약사의 탄지신법이 이토록 무서울 줄은 천만 뜻밖이었다. 두목은 이를 부드득 갈더니 공중제비를 돌며 껑충 솟구쳐 올랐다가 대번에 황약사에게 덮쳐 들었다. 황약사는 피식 웃으며 또다시 가볍게 손가락을 퉁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두목은 뒤로 넉 장이나 밀려가 벌렁 나자빠졌다.
"형님, 형님!……."
두목이 나가떨어지자 운남 십팔마들은 우왕좌왕 비틀거리더니 다시 뭉쳐서 일제히 황약사에게 달려들었다. 모두 열여섯 놈이었는데 개중 둘은 이미 두 눈을 잃고 무리에 섞여 허우적허우적 달려들고 있었다. 무시로 철퇴가 날아들고 시퍼런 장검이 허공을 가르며 머리 위에 떨어졌다. 황약사는 아형을 안고 경공으로 슬슬 몸을 피하며 속삭였다.
"아형, 당신은 말끝마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지? 그럼 이 개 같은 놈들도 죽이지 말아야 하나?"
그러자 아형은 곱게 눈을 흘겼다.
"저들도 사람인가요? 저는 분명히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그녀는 깔깔 웃었다. 황약사는 아형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능청을 떨었다.
"아무렴, 과연 동사 황약사의 여편네가 다르긴 다르군! 그럼 내 저 놈들을 잡아죽이는 걸 보라구!"
황약사는 마치 구름을 타고 다니는 신선처럼 아형을 데리고 떠다녔다. 흉물스럽게 생긴 사내 하나가 검질기게 다가들었다.
"황약사, 네 놈의 여편네를 다친 것도 아닌데 왜 오지랖 넓게 나서는 게냐?"
황약사는 픽 웃으면서 그 놈의 정수리에 한 장을 먹였다. 팍 소리가 일며 사내의 두 눈알이 벌컥 튀어나왔다. 놈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꼬꾸라져 버렸다. 그 틈에 다른 한 놈이 아형의 가슴을 겨누고 시퍼런 장검을 똑바로 쏘아붙였다.
"네 년이 황약사의 여편네냐? 내 네 년부터 먼저 죽여야겠다!"
그러나 아형은 눈 하나 깜짝 않고 태연하게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기실 아형은 도화도에서 나는 명물 고슴도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 옷은 아무리 예리한 칼이라도 뚫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사내는 내심 흠칫 놀라며 주춤거렸다. 그 순간 황약사가 퉁긴 돌멩이 하나가 그 사내의 뒤통수로 된통 내리꽂혔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푹 꼬꾸라졌다.
황약사가 아형을 데리고 놈들의 주위를 건들건들 돌다가 슬쩍 멈춰 설 때마다 어이쿠 비명을 지르며 한놈씩 쓰러졌다.
십팔마는 벌써 여섯이 죽고 열둘이 남았다. 이젠 도저히 황약사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도망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놈이 용기를 내서 불쑥 물었다.
"황약사, 우리가 당신한테 굴복한다면 당신은 우리들을 어떻게 조처할 셈이오?"
"너희들의 죄로 봐선 백번 죽여 마땅하나 병장기를 놓고 손을 든다면야 목숨은 살려 주지. 하나 네 놈들은 내가 주는 독약을 먹고 스스로 혀를 잘라 버린 뒤 도화도로 가서 평생 노예로 살아야 한다. 이를 거역하는 놈은 그 당장 죽여 버릴 테다!"
"에끼, 이 지독한 놈아! 내 칼이나 받아라!"
한 사내가 버럭 성을 내며 장검을 내질렀다. 황약사는 슬쩍 피하며 번개같이 칼등을 잡아 살짝 틀었다. 삽시에 시퍼런 칼날은 두동강이 났다. 십팔마 패거리들을 그만 돌처럼 굳어 버렸다.
"네 놈은 살길을 틔워 줘도 굴복치 않으니 죽는 길밖에 없다!"
황약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점잖게 내쏘더니 칼자루 쥔 놈의 가슴팍에 번개같이 한 장을 날렸다. 놈은 입가로 왈칵 피거품을 빼물더니 휙 넘어갔다.
살아 남은 열한 명은 이제 완전히 기가 죽어 서로를 멍청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이젠 운남 십팔마도 끝장이란 말인가……. 사내들은 어지러이 널려 있는 형제들의 시체를 보며 장탄식을 토해냈다. 하나 자기들이 죽은 형제들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었다. 황약사에게 무릎을 꿇는다 한들 죽는 것보다 무엇이 낫겠는가. 세상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황약사의 도화도에는 혀 잘린 사내들이 피골이 상접해서 매일 무서운 노역에 시달리고 있다지 않은가.
"악귀 같은 놈! 말못하는 벙어리가 되어 노역에 시달리다가 도화도에서 무주고혼이 되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고 말겠다!"
한 사내가 한걸음 쓱 내닫더니 이내 칼을 부여잡고 배를 푹 찔렀다. 시퍼런 칼날이 번쩍였다. 잇따라 또 두 놈이 의미심장하게 눈짓을 주고 받고는 악 소리를 지르며 칼날을 서로 상대방의 가슴에 깊숙이 박고는 부둥켜안고 쓰러졌다. 이젠 여덟 놈밖에 남지 않았다. 개중에는 두 눈을 잃은 둘째 두령도 끼여 있었다. 그는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면서 넙죽 엎드려 애걸복걸했다.
"황 도주님, 난 도화도에라도 쾌히 가겠소!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오!"
"도화도에 양곡을 실어 가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너같이 앞 못 보는 병신은 밥이나 축내지 아무런 쓸모도 없어!"
황약사는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한 장을 날렸다.
"참, 서방님도!……."
아형은 민망스럽다는 듯 흘끔 황약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황약사는 빙긋 웃어 보이며 잽싸게 주워섬겼다.
"이 놈은 여간 심사가 고약한 놈이 아니라서 살려 두면 후환이 될걸세."
그리고는 살아 남은 일곱 놈에게 휙 약을 던져 주었다.
"너희들은 어서 그 약을 먹어라. 그리고 이 길로 당장 동해 바닷가에 가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거라. 반나절 정도 노를 저어 가노라면 쪽배 한 척이 나타나 너희들을 도화도로 인도해 갈 것이다. 섬에 오르면 자연히 독을 풀어 줄 사람이 나타날 것이나 만약 삼십일이 넘도록 도화도에 가지 않으면 필연코 죽게 될지어다."
일곱 사내는 넙죽 절을 하고는 서로들 눈치를 살피며 약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꽁무니 빠지듯 숲 속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향녀들은 왈칵 눈물을 쏟으며 황약사와 아형 앞으로 달려왔다. 아형은 측은하니 향녀들을 둘러보며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얼마나 고생들을 하셨어요? 울지들 말고 어서 여기 앉아요."
그러자 향녀들은 더한층 서럽게 울어댔다. 실로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듯했다. 그녀들은 의연하게 앉아 있는 황약사와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는 아형을 쳐다보면서 등아를 사무치게 그리고 있었다. 등아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황약사는 조용히 옥퉁소를 꺼내 입으로 가져 갔다. 이윽고 유연한 퉁소 소리가 은은한 달빛에 실려 멀리멀리 울려 갔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향녀들도 마음이 잠차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희뿌여니 동이 트기 시작했다. 곽명송과 등아는 여전히 부둥켜안고 서로를 애무하고 있었다. 삼로는 진작부터 잠이 깨어 눈동자를 말똥말똥 굴리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세 늙은이는 서로 앞다투어 선 하품들을 해댔다.
등아가 조용히 속살거렸다.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어요. 이젠 정말 죽어도 원이 없어요!"
곽명송은 뜨거운 눈길로 등아를 바라보더니 다시금 으스러지게 껴안으면서 그녀의 달아오른 입술이며 능금알 같은 두 볼에 미친 듯이 입을 맞췄다.
세 늙은이는 짐짓 헛기침을 해 가며 서로 쳐다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어쩌면 저렇게도 뻔뻔스러운 연놈이 있단 말인가. 세 늙은이는 낮간지러워서 도저히 눈뜨고는 볼 수 없어 제각각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노래소가 선뜻 나서며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곽명송, 날이 훤히 밝았다. 어서 우리 삼로의 칼을 받아라!"
곽명송은 애잔한 눈길로 등아를 바라보았다.
"당신, 후회하지 않겠지?"
등아는 담담하니 말을 받았다.
"후회하기는요? 저는 일생에 서방님과 같은 사내를 만난 것만으로도 행복한걸요. 정말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됐어, 됐어! 우리 세 늙은이들 코앞에서 온밤 내내 물고 빨고 했으면 지칠 때도 됐다. 이제 어서 발딱 일어서거라!"
노불락은 귀찮다는 듯이 이맛살을 찡그리고 투덜댔다. 노시락이 말을 이었다.
"명송이, 죽기 전에 남길 말은 없나?"
곽명송은 등아의 손을 가만히 떼놓고는 천천히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저는 다만 세 분 사숙조님께서 기울어지고 있는 화산파를 바로 잡아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자못 쓸쓸한 기색이었다. 그는 말을 마치고는 조용히 꿇어앉아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칼 받을 채비를 했다. 노래소는 곽명송을 그윽이 내려다보더니 등아를 건너다보며 이죽거렸다.
"너는 꽤나 총명하게 생겼는데 왜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지?"
"도망요? 저도 겪을 건 다 겪었어요. 이런 곤경도 여러 번 당했고 또 여러 번 도망을 쳤었지요. 하지만 이번만은 다 늙어빠진 영감태기들 손에서 도망을 치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등아는 생글거리며 비꼬았다. 그러자 노불락이 버럭 화를 냈다.
"뭐야? 이 앙큼한 년이 늙은이들을 데리고 놀려 들어? 어디 한번 다시 지쩔여 봐! 주둥이를 찢어 놓을 테니!"
"좋아요, 얼마든지 다시 지껄이죠! 당신들은 젊었을 적에도 계집 하나 낚을 줄 모르는 밥통들이었고 수염이 허옇게 된 지금도 눈치코치 모르는 등신들이라구요! 남의 장단에 춤만 추지 말고 늙을수록 제정신으로 살아야죠. 늙어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겠어요?"
등아는 연주포 쏘아대듯이 쏘아붙이고는 까르르 웃어젖혔다. 삼로는 머리 끝까지 분이 치밀어 올라 길길이 날뛰었다.
"뭐야? 네 년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아니, 저런 년 봤나? 우리보고 등신이라네!"
"아니, 이 년은 입이 개차반이군그래, 감히 제 아버지뻘 되는 사람한테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삼로는 일제히 장검을 빼 들고 곧바로 등아를 겨누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먼저 찌를 염은 못 냈다. 칼끝이 바르르 떨렸다.
"왜 찌르지는 못하고 그렇게 떨기만 하나? 방금 자네들에게 밥통이라고 욕을 했는데도!"
노래소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짜증을 냈다. 그러자 노불락이 울상이 되어 노시락을 돌아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저 년은 노형보고 등신이라고 한 거야! 저 년은 노형 손으로 죽여야 해!"
노시락도 질세라 느물거리며 따지고 들었다.
"이것아, 네 년이 날보고 욕했단 말이냐, 아니면 이 두 양반을 욕했단 말이냐? 날 보고 욕했다면 내가 널 죽이겠지만……."
삼로는 실없이 티격태격하면서 좀체로 누구도 선뜻 칼을 쓰려 하지 않았다. 등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 다들 찌르지 못하고 그러고 있는 거예요? 말뚝처럼 서 있기만 할 거면 저희 둘은 그만 가보겠어요! 자 서방님, 그만 가요!"
등아는 등을 돌리며 곽명송에게 말을 건넸다. 노래소가 안달을 하며 대뜸 소리쳤다.
"멍청히 서서 뭣들 하고 있나? 이 연놈들이 슬쩍 꽁무니를 빼려고 하는데!"
그러자 노불락은 기막힌 꾀가 있다는 듯 펄쩍 뛰며 소리쳤다.
"그럼 이렇게 하세나. 셋이 함께 일시에 찌르는 거야, 먼저 사내놈을!"
"그, 그러세!"
다른 두 늙은이도 마지못해 응수를 했다. 셋은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입술을 깨물고는 고함을 지르며 검을 내질렀다.
"화산병풍!"
검 세 개는 일제히 곽명송의 가슴으로 똑바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곽명송의 가슴팍과 단 일 촌을 사이에 두고 검 세 개는 아교로 딱 붙인 것같이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았다. 실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다음 순간, 세 늙은이는 너나없이 맥빠진 한숨을 날렸다.
노래소가 제일 먼저 검을 푹 모래사장에 박으면서 중얼거렸다.
"어이구 맥빠라지네. 자네들 둘도 어쩌면 그렇게 나와 똑같나! 무정키로 이름 높던 우리 화산삼경(華山三劍)도 이젠 인정에 울고 인정에 떨리는구먼. 난 도무지 이 새파란 놈들의 가슴팍에 칼을 댈 수가 없으어. 자네들도 그런가 보이, 그런가 보아!"
그러자 노불락과 노시락도 제가끔 게두덜거렸다.
"어린 양처럼 모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놈한테 어떻게 칼을 댄단 말이여?"
"밉든 곱든 우리 후배가 아닌가? 젖비린내 나는 놈한테 칼을 댈 수야 없지."
삼로는 연해 한숨만 날릴 따름이었다. 곽명송과 등아는 서로 마주보며 빙긋 웃었다.
세 늙은이는 한참 동안이나 침묵에 빠지더니 이윽고 노래소가 입을 열었다.
"이 놈아, 너는 화산파의 후배가 아니냐? 선배님들 모두가 난감해하고 있으니 네 스스로 목숨을 끊거라. 그래야 후배 된 도리를 하는 거다."
그 말에 곽명송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숙조님, 저는 스스로 자결할 수는 없소이다. 사숙조님들은 저의 죄를 논하고 계시지만 저로서는 제가 도시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사옵니다. 그러니 지그시 눈을 감고 검을 받을 수는 있사오나 스스로 자결할 까닭은 없는 줄로 아옵니다!"
노래소가 대번에 펄쩍 뛰었다.
"어이구, 이 놈이 그래도 바락바락 대드네, 바락바락 대들어! 그래 네 놈이 죄가 없단 말이냐?"
그러자 노시락이 노래소를 제치며 능글맞게 눈웃음을 쳤다.
"명송이, 그렇다면 좋아! 이젠 이 늙은 것들을 더 이상 난처하게 하지 말고 독주나 한잔 마시게. 그게 아마도 제일 점잖은 방책일 듯싶네, 이히히……."
그러나 곽명송은 다시 고개를 숙인 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노래소는 그의 정수리를 얄밉게 쏘아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내가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아마 이 방법이 제격일 게야!"
다른 두 늙은이가 다그쳐 물었다.
"무슨 방법이게?"
"이 검을 계집에게 주어 먼저 사내를 찌르게 하잔 말야. 그러면 사내도 화가 나서 계집을 찔러 눕힐걸세. 이렇게 하면 우리도 손을 더럽히지 않고 얼마나 좋은가 말이여!"
"그 방법도 좋긴 한데 누가 저 계집에게 권고한단 말인가?"
셋은 아뿔싸 하며 또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저마다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노형이 권고해 보세나, 노형이!"
"에끼, 이 사람! 내가 어떻게……."
삼로는 또 한참이나 옥신각신하더니 그래도 말을 꺼낸 노래소가 나서기로 입을 모았다. 노래소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가씨, 내 말 좀 들어 보라구. 자네는 총명해서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만서도 사람이란 백 살을 살다가 죽을 수도 있고 여남은 살 꽃 같은 나이에 죽을 수도 있어. 하나 내 칠십 평생을 보면 스무 살 먹기 전이 그래도 제일 재미가 있었지, 그 뒤의 생활은 통 재미가 없더라구. 그런즉 아가씨도 부득부득 오래 살려고 버둥거리지 말고 한창 나이일 때 껌뻑 속세를 떠나란 말야. 한마디로 인생은 살수록 괴롭고 귀찮은 법이니까. 내 말 알아듣겠어?"
"알겠어요."
등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소는 뛸 듯이 좋아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허 참, 정말 똑똑한 아가씨로군, 흐흐흐……."
그때껏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앉아 있던 곽명송이 한숨을 내쉬고는 울적하니 말했다.
"사숙조님들, 세 분의 딱한 사정도 알 만하외다. 저희를 죽이고 돌아가야 화산파 형제들에게 큰소릴 칠 수 있다 이거겠지요. 그럼 세 분을 위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서 제 스스로 자결 하겠으니 어서 검을 주십시오!"
그러자 삼로는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서로 마주보았다. 두 늙은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노래소가 곽명송에게 검을 건네 주었다. 시퍼런 칼날이 번뜩였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여인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 왔다.
"이 미욱한 사람들이 예서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삼로는 깜짝 놀라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 운고 노파 아닌가?"
"글쎄……."
"맞아, 분명 그 할망구야!"
세 늙은이가 한마디씩 중얼거리는데 휘익 바람소리가 일며 순식간에 학발계안의 깡마른 노파가 삼로 앞에 떨어져 내렸다. 복색으로 보아하니 꼭 여승 같은데 기상은 흉맹하기 짝이 없었다. 노파는 독수리같이 사나운 눈매로 삼로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삼로는 횡설수설 잘도 지껄여 대더니 이 깡마른 노파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얼굴들이 벌개져서는 눈치만 살폈다.
노파는 곽명송에게 선뜻 눈길을 던지며 매섭게 캐물었다.
"네가 이 낭자의 남정인가?"
"네, 그렇소이다. 등아의 남편이지요."
노파는 얄미운 눈초리로 등아를 흘겨보았다.
"반반하게. 생긴 계집이 바보 같은 남편을 섬기고 있군! 덮어놓고 죽여 주십사 하고 설설 기는 사내는 당장에 차 버리란 말야!"
노파는 벽력같이 꾸짖고 나서 다시 곽명송을 쏘아보았다.
"이 미련퉁이 같은 자식아, 물건을 달았으면 여편네 거느릴 줄도 알고 배짱도 있어야지, 그래 남이 죽으란다고 그렇게 순순히 죽는단 말이냐! 여기 이 세 영감태기는 말라 비틀어진 여편네 하나 없는 홀아비들이지만 너는 꽃 같은 새색시를 맞은 새신랑이 아니냐? 새색시를 두고 죽기는 왜 죽는단 말이냐?"
"서방님이 죽으면 저도 죽을래요."
등아는 얼른 끼여들어 짐짓 울상을 하고 중얼거렸다. 노파는 장탄식을 하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런 미친 것들 봤나!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방정맞게 죽겠다는 소리밖에 안 하는군. 여기 이 세 영감태기들을 보란 말야. 호두알같이 쭈글쭈글 늙어빠진 주제에 그래도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버둥거리질 않나 말이야? 나 원 기가 막혀서……."
노파는 대놓고 삼로에게 욕을 퍼부었으나 그들은 잠자코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노파는 다시 곽명송을 보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너도 화산파냐?"
"그렇소이다."
곽명송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똑바로 노파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그는 하마터면 앗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 노파가 바로 그 옛날 삼로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 여인이 아닐까? 만약 그 여인이 아니라면 우악스럽고 괴팍한 삼로가 이처럼 고분고분 말을 들을 리 만무였다.
노파는 곽명송과 등아를 번갈아 보더니 불쑥 말했다.
"너희 둘은 어서 가보거라. 이 세 영감태기가 다시 너희들을 못살게 군다면 내 정녕코 용서치 않으리라, 기어이 죽여 버리고 나도 자진하고 말 것이야!"
그제야 비로소 화산파세 노인은 서로 흘끔흘끔 쳐다보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운고! 장문이 보검을 잡고 분부한 일이니 우린들 어쩔 도리가 있겠소."
노파의 쭈글쭈글한 양 볼에 한 가득 홍조가 어리더니 삽시에 사그라졌다. 운고라니, 몇 십 년 만에 들어 보는 이름인가. 노파는 일순 마음이 두근거려 숨을 크게 한번 꿀꺽 삼키고는 다시금 호되게 삼로를 닦아세웠다.
"선우순이 자기 사형을 암해하고 장문 자리에 오른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이 젊은이들한테 듣기는 들었소만……."
"그런 배은망덕한 자식이 어디 있겠어요? 당신들은 지금도 예나 다름없이 얼뜨기들이군요! 속된 말로 만약 검둥개가 장문의 보검을 차고 있다 하더라도 당신들은 그 검둥개를 따라 멍멍 짖어댈 위인들이라구요! 제발 좀 치신머리 있게 사시라구요!"
세 늙은이는 톡톡히 무안을 당해 누구 하나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젠 선우순의 됨됨이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으나 그가 장문의 보검을 가지고 있는 이상 새삼스레 등을 돌려 대기도 뭣한 노릇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이 두 남녀를 처치하려던 터였다. 삼로는 명분을 지키는 데 이미 머리가 굳어져 있었던 것이다.
노불락은 울상을 해 가지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운고, 이제부터 선우순 놈과 담을 쌓고 지내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소만 우리가 평생 지켜 온 명분과 절의는 어떡하란 말이오?"
노파는 허탈하게 웃었다.
"참 답답한 양반들이군요! 아무튼 화산 삼로 노릇을 그만둘 생각이 있는 사람은 저의 암자에 와서 문지기 노릇이나 해 줘요."
화산 삼로 노릇을 집어치우고 운고의 말동무나 하면서 문지기 노룻을 한다……, 이보다 더 멋들어진 소임이 어디 있겠는가. 세 늙은이는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앞다투어 청을 넣었다.
"좋았어, 좋아! 이 지긋지긋한 삼로 노릇은 그만두고 내가 문지기 노릇을 하겠어!"
"좋아요, 세 분 다 원하신다면 지금 즉시 암자에 가 계세요!"
그러자 세 노인은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곽명송을 힐끔 돌아보았다. 노래소가 정색을 하고 곽명송에게 신신당부했다.
"명송이, 자낸 솔직히 화산파에서 제일 듬직한 사나일세. 화산파는 앞으로 자네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 선우순 놈이 화산파를 말아 먹지 못하도록 단단히 잡도리를 해야 해. 알겠나? 부탁일세!"
곽명송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선우순을 다스릴 사람은 이 삼로밖에 없는데 그런 중임을 다 팽개치고 자기한테만 미뤄 버리다니, 곽명송은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노래소는 다시 등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히죽거렸다.
"참 복성스러운 계집이야! 미안하지만 저 노파가 젊었을 때보다도 더 예쁘단 말이여……."
세 늙은이는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흐물흐물 물러갔다.




제30장 원앙새 수놓은 비단 수건
호젓한 궁궐에 밤기운이 창망하다. 단지흥은 깊은 수심에 잠겨 홀로 섬돌 위를 오락가락했다. 그의 손에는 비단 손수건 하나가 꼭 쥐여 있었다. 이 비단 손수건은 주백통이 왕중양에게 이끌려 왔을 때 저도 모르게 떨어뜨리고 간 것이었다. 알고 본즉슨 영고가 주백통에게 준 은근한 정표였다. 단지흥은 다시금 손수건을 펼쳐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원앙 한 쌍이 호수에서 노닐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옆에 시가 한 수 씌어 있었다.
눈물같이 맑고 푸른 호수 위에
원앙새 한 쌍 시름 없이 노니네
어인 일인고 임 만나기도 전에
까만 머리 속절없이 백발이 되네
아, 궁궐 깊은 곳에 밤이 깃들이면
임 그려 옷자락에 방울방울 눈물 짓네.
단지흥은 쓰라린 마음을 달래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영고, 영고…….'
실로 영고가 자기를 배신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모든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나 영고를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그는 이상하게도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 측은한 마음이 기우는 것이었다. 더욱이 영고를 냉궁에 보낸 후로는 밤마다 그녀를 안고 정겹게 속삭이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러다가 방그레 웃으며 잠에서 깨어 보면 큰 침실에 자기 혼자 덩그러니 누워 있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그녀가 그리웠던가. 그러기를 벌써 1년 하고도 두 달 남짓이나 되었
다. 일순 그는 갑자기 영고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삼라만상이 다 잠든 이 밤, 영고는 무얼 하고 있을까. 그 못난 주백통을 그리며 눈물 짓고 있을까, 아니면 이 무정한 사내를 원망하며 눈물 짓고 있을까.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다. 단지흥은 섬돌 위에 서서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냉궁 쪽으로 눈길을 던지며 바보같이 서 있는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스스로 내 자신을 괴롭힐 건 뭔가? 구중궁궐 안에 내 제일 좋아하는 여인이 영고말고 또 있으랴. 물론 치주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옛일, 이 대궐 안에서 그래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만한 여인은 영고밖에 없다.'
그는 영고에게 찾아가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단지흥은 태감이나 궁녀들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냉궁으로 다가가 낮은 담장을 타고 냉궁 지붕 위로 살짝 날아올랐다. 그때였다. 집 안에서 난데없이 아기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에 단지흥은 황망하기 짝이 없었다. 일국의 황비로서, 그것도 지엄한 대리국 궁궐에서 버젓이 남의 씨를 낳아 기르고 있다니……. 그는 터질 듯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단지흥은 그대로 멀거니 지붕 위에 서 있었다. 싸락싸락 서리가 내리고 밤바람은 등허리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단지흥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영고와의 지난 일들을 되새기며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 영고와의 만남은 실로 운명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 일이 눈앞에 생생히 떠올랐다. 그때를 생각하자니 영고와는 실로 하늘이 맺어 준 기이한 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숙녀동에서 영고를 데리고 나설 때 새 할미가 된 손톱 긴 여자의 목소리마저도 귀에
쟁쟁 울리는 듯했다.
"영고를 부디 살뜰하게 아껴 주고 보살펴 주옵소서!"
뿐더러 두 눈에 눈물이 가랑가랑 맺혀 숙녀동 동주 할미를 배웅하던 계집애의 모습도 눈물겹게 떠올랐다. 단지흥은 비단 손수건을 힘없이 떨구고는 저물도록 지붕 위에 서 있었다.
그날 밤 찬바람을 맞은 까닭에 단지흥은 이튿날부터 감기에 걸려 시름시름 앓아 누웠다. 그가 병이 완쾌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는 어느덧 묵은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아 있었다. 해가 바뀌었건만 그는 여전히 영고에 대한 생각을 털어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침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노라면 찻잔 하나, 휘장 하나에도 영고의 손길이 느껴지고 영고의 얼굴이 어리는 것만 같아 마음은 삼검불처럼 뒤죽박죽이 되곤 했다. 단지흥은 국사를 밀어 놓고 일양지공을 연마하
는 시간이 더 잦아졌다.
황궁 가까이 객점이 하나 있다. 어느 날 그 객점으로 웬 낯선 객 하나가 찾아들었다. 복색으로 보아 타관 사람이 분명했다. 그는 딱딱하니 표정을 굳힌 채 술상에 앉아 잔을 기울이면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에 슬며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대리국의 황제가 중병에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적이 놀라면서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지난번에는 그 요망한 황비에게 우롱을 당하고도 아직도 버르장머리를 가르쳐 주지 못했다. 이번 걸음에 그 황비든, 이 대리국의 단지흥이란 작자든, 아니면 두 연놈 다 없애 버리고 말겠다.'
그는 다시 술꾼들이 주고받는 말에 귀를 밝혔다. 모두들 단지흥이야말로 성군이며 그의 선정으로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노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들을 하면서 단지흥의 병환을 두고 못내 불안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사내는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쾌재를 불렀다. 그는 황궁에 숨어 들어가면 먼저 그 황비를 죽여 단지흥의 기를 꺾어 놓으리라 작심했다. 사내는 건너편 술상에 마주앉은 두 객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이 대리국의 임금님께서 어떻게 덕정을 베풀었기에 백성들이 이다지도 칭송하는 거요?"
두 객은 간판히 사내를 훑어보았다.
"댁은 어느 고장에서 오셨수?"
사내는 빙긋 웃어 보일 뿐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다소 의아해 하면서도 단지흥의 공덕을 구구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내는 내내 빙긋이 웃으며 듣고만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입을 다물자 사내는 짐짓 무릎을 쳤다.
"참말로 어질고 현명한 군주로군. 내 한번 꼭 만나 뵈야겠소."
그러자 두 사람은 일제히 한숨을 내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본디 단황을 만나 뵙기가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었지요. 한데 아쉽게도 황제는 요즘 근 며칠 간이나 병환중에 계시답니다. 대관절 무슨 병환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척 위중한가 봅니다. 그러니 가까운 시일 안으로는 폐하를 뵙기가 어려울 거요."
사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생각해 보아도 천재일우의 기회다 싶었다. 하지만 일양지로 천하에 이름을 드날린 단지흥이 아직 새파란 나이에 중병에 걸려 드러누워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미심쩍게 생각되었다. 웬만큼만 무공을 익혀도 스스로 병을 다스리게 되는 법인데……. 아무튼 그것을 보아도 큰 병에 걸렸음에 틀림없으니 오늘 밤을 놓치지 말자고 그는 거듭거듭 다짐했다.
밤이 깃들이기를 기다려 사내는 어두컴컴한 골목을 슬그머니 빠져 나와 곧장 황궁으로 내달았다. 그는 한 민가의 처마 밑에 몸을 숨겼다가 순라병이 지나가자 비호같이 궁성 벽을 뛰어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내는 대궐에 붙은 행랑에 몸을 숨기고 동정을 살폈다. 저쪽에서 두 사내가 흔들흔들 걸어오면서 말을 주고받았다.
"이 음식은 말야, 폐하께서 황비에게 보내는 거야. 하지만 폐하께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황후께서 보내는 것이라고 일러주라지 않겠어. 나 원 무슨 꿍꿍인지 도통 모르겠다니까."
"뭘, 그래? 그저 시키는 일이나 굽실굽실 하면 되지 그 속은 알아서 뭘 하게?"
두 사람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젊은 태감들이었다. 둘 다 손에 찬합을 받쳐들고 있었다. 순간 숨어 있던 사내는 저 음식을 가지고 재간을 피우면 마침 맞겠구나 싶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내는 행랑 벽에 바짝 붙어 있다가 두 태감이 스쳐 지나갈 찰나에 슬쩍 손을 뻗어 기를 넣었다. 한 줄기 기가 앞서가는 태감의 무릎에 닿았다. 순식간에 무릎 부위의 환조혈(環跳穴)을 맞은 태감은 찍소리도 못하고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뒤따라오던 태감이 키들키
들 웃으며 농을 붙였다.
"이봐, 황비 전에 닿기도 전에 절부터 하는 겐가?"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니까!"
앞서가던 태감은 다리를 주물러대며 이내 일어서지를 못했다. 그제야 뒤따라가던 태감이 얼른 찬합을 내려놓고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그 순간 땅에 놓인 찬합 옆으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언뜻 스쳤다가 삽시에 사라졌다.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기랄, 왜 다리에 쥐가 다 나고 야단이야, 야단이! 하마터면 찬합을 깨뜨릴 뻔했잖아?"
두 태감은 투덜거리며 다시 찬합을 받쳐들고 우쭐우쭐 냉궁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그 그림자도 바람처럼 묻혀 들어갔다. 그림자는 헐망한 병풍 뒤로 숨어 들어가 방안의 동정을 살폈다. 널따란 마루에서 게으른 시녀들 두엇이 암고양이처럼 선하품을 하고 있다가 두 태감이 들어서자 배시시 웃으며 얼른 일어나 반겼다.
"아유, 무슨 바람이 불어 이 야밤중에 다 오셨어요? 또 구실을 붙여 요 새침데기를 보러 왔겠군요?"
두 시녀는 서로 꼬집어 가면서 음탕하게 눈빛을 반짝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다리를 상한 태감이 짐짓 정색을 하고 일렀다.
"이 단설기는 황후께서 황비에게 손수 보내시는 것이다. 고맙게 받아 자시라고 해라."
"아무튼 자꾸만 구실을 만들어 가지고 오라구요! 이 새침데기는 밤마다 나를 못살게 군다구요!"
시녀들은 찬합을 받아 들며 또 까르르 웃음을 토해냈다. 태감은 넉살좋게 마주선 시녀의 발그레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총총히 문을 나섰다. 두 시녀는 곱게 눈을 흘기며 볼을 매만지고는 찬합을 받쳐들고 내실로 들어갔다.
내실에는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그린 듯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두 시녀가 찬합을 받쳐든 것을 보고는 양미간을 찡그렸다.
"누가 보내 온 것이더냐?"
"방금 황후께옵서 보내 오셨사옵니다. 황후의 은총을 생각하셔서 어서 드시와요."
병풍 뒤에 숨었던 그림자는 용마루 밑에서 슬쩍 몸을 날려 내실 휘장 뒤로 옮겨 숨었다. 자세히 보니 분명 언젠가 그 누각에서 만났던 그 미인이었다. 괘씸한 것, 오늘은 이 수상표 구천인이 톡톡히 버릇을 가르쳐 줄 테다. 휘장 뒤에 숨어 있는 이 텁수룩한 사내, 그는 바로 강남의 철장방 방주 철장 수상표였다. 언젠가 구천인은 한 누각 위에서 영고와 내기를 하다가 그만 영고가 얼렁뚱땅 내놓은 독벌레에게 물려 큰 봉변을 당할 뻔했었다. 구천인은 이를 평생의 수치
로 생각하고 아무때든 꼭 앙갚음을 하리라고 단단히 작심하고 있던 터였다.
영고는 찬합 뚜껑을 열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이말고 이 세상에 나를 생각해 주는 이가 또 있단 말인가?"
그이란 대체 누구일까, 구천인은 알 길이 없었다. 그는 곰곰 생각에 잠겨 들었다.
'한데 저 년 얼굴에 왜 저리도 수심이 어려있는 게야? 맞아! 필시 단지흥에게 버림받고 이 곳에 연금당해 있는 게 분명해! 그렇다면 저 년을 죽인다 해도 단황이란 놈은 눈 하나 꿈쩍 않겠는 걸…….'
그러나 다음 순간 구천인은 도리질을 쳤다. 저 여자가 단지흥에게 버림받았든 어쨌든 간에 자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죽여 마땅하다고 마음을 사려 먹었다. 누각에서 망신을 당하고 봉변을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판이었다.
영고는 찬합에 담긴 단설기 한 조각을 들고 깊은 상념에 잠겨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뗐다.
"황후가 보내 온 것이라고? 아니야, 어쩌면 황제가 보내온 것일지도 몰라……."
한 순간 그녀의 얼굴이 약간 밝아지는 듯싶더니 금세 다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런 냉혹한 사람이 단설기를 보낼 리 만무야……."
영고는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으며 후유 한숨을 쉬었다.
"그이는 지금 정녕 어디에 계신지? 자기 아들이 태어난 줄 안다면 그이는……."
영고의 가냘픈 얼굴에 얼핏 홍조가 어렸다.
구천인은 영고가 단설기를 먹지 않고 보고만 있자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영고는 여전히 손에 단설기를 든 채 다시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러더니 단설기를 내려놓고는 찬합을 한쪽으로 밀어 놓으며 시녀를 불렀다.
"여봐라, 이왕 황후께서 보내 오신 것이라니 너희들도 좀 맛봐야 할 것 아니냐? 얼른 가져다 맛들이나 보거라."
시녀 둘은 반색을 하며 넙죽 단설기 몇 쪽을 받아 들고 그 마루방을 거쳐 뜨락으로 나갔다. 구천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시녀들이 단설기를 먼저 먹는 날에는 그야말로 낭패가 아닌가. 하지만 마음만 조급할 뿐 당장 그 무슨 묘한 수도 없었다.
시녀들이 나가자 영고는 또다시 단설기 한 쪽을 집어 들더니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참 식성도 좋은 양반이었지. 검술을 익히고 땀을 흘린 다음에 단설기를 권하면 그렇게도 맛있게 잡수셨는데……. 지금은 어느 궁벽한 산속에서 배나 곯고 계시진 않을지……."
구천인은 그만 속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아, 저 계집이 늑장을 부려도 분수가 있지, 사람 피 말려 죽일 작정을 했나! 아무려면 일국의 황제인데 단지흥이 단설기 하나 맘대로 못 먹을까. 아니, 그것도 아닌 것 같군, 궁벽한 산골에 있는
놈이라니 그럼 단지흥이 아니라 다른 놈을 말하는 것일지도 몰라……. 저 계집이 어떤 사내 놈을 그리든 그야 내 상관할 바 아니고, 좌우간 저 단설기를 어서 먹어야 할 텐데……."
한 순간 영고가 선뜻 단설기를 입으로 가져 갔다. 구천인은 두 눈이 확 뜨였다. 그러나 바로 그때, 바깥에서 가냘픈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영고는 적이 놀란 눈빛으로 그저 단설기를 든 채 한참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이더니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저런, 저런! 또 야밤에 시녀 애들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모양이군. 아예 모른 체하자, 내 일만 해도 골치가 쑤셔……."
구천인은 등골에 땀이 확 내뱄다가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저 여자가 시녀 둘이 중독된 것을 보면 기절초풍할 정도로 야단법석을 떨 것이고 그리 되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황후께서 보내 온 것이라니 한 조각 맛이나 보자……."
영고는 다시 단설기를 집어 들었다. 한데 이번에는 또 침대 위에 곤히 잠들어 있던 갓난애가 방정맞게 울어대는 것이었다.
"어이구 내 보배, 왜 우는 게야, 응? 자 뚝! 뚝! 엄마가 안아줄게 울지마……."
영고는 다시 단설기를 내려놓고 갓난애를 안아 올려 등기둥기 어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성스럽고 부드러운 빛이 감돌았다. 그녀는 아이를 꼭 껴안고 볼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아가, 우리 모자는 이 무서운 역경을 꼭 이겨 내야 해. 그래서 기어이 네 아버지를 찾아야 해. 네 아버지가 산속에 있든, 절에 있든, 하늘 끝에 있든, 기어이 찾아내야 해! 그래 우리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꾸나."
구천인은 그 광경을 훔쳐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독한 것이 그래도 제법 어미 구실은 한다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산속이고 절이고 대관절 누구를 찾아간단 말인가? 그는 일순 그 사내가 누군지 자못 궁금해졌다. 하나 그 사내가 누구고 간에 이제 조만간 이 모자는 소리 한마디 못 지르고 황천객이 될 판국이었다.
영고의 품에 안긴 어린애는 이제 그저 한 돌이 될까말까 해 보였다. 아이는 이내 울음을 그치고 해죽 웃으며 포동포동한 손을 뻗쳐 단설기를 잡으려 했다.
"안 돼, 안 돼."
영고는 일부러 슬쩍 몸을 뒤채며 장난을 치다가 아이에게 단설기를 한 조각 쥐여 주었다.
단지흥은 오도카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슴은 가문 호수처럼 타 들어갔다. 이날 밤은 유독 영고를 찾아가 이야기라도 나누어야 답답한 가슴이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치미는 것이었다. 그는 마음을 종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채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선뜻 방문을 나섰다. 그러나 냉궁 쪽으로 몇 걸음 내딛다가 그는 그만 도리질을 치면서 우뚝 멈춰 버렸다. 그런다고 해서 영고의 마음을 돌려 세우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발길을 돌려 숙비의 처소로 향했다. 마음이 심히 울적하였다. 그는 소리 없이 조용히 숙비의 침실로 들어갔다.
숙비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한데 천만 뜻밖으로 맞은편에 두 태감이 멀쩡하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단지흥은 적이 놀라 얼른 걸음을 멈추고 문 어귀로 비켜섰다. 숙비는 마치 잠자리 날개 같은 얇은 속곳만 걸친 채였다. 봉곳한 젖가슴이 다 드러나 보였다. 그녀는 은잔에 술을 부어 차례로 두 태감에게 권했다.
"가짜배기도 한 잔 했으니 진짜배기야 두 잔을 해야지요. 아무튼 밤마다 독수공방이라 무료해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두 분이 이렇게 찾아주시니 고맙기 그지 없어요, 호호호……."
교태가 절절 흘러 넘쳤다. 단지흥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는 애써 진정하며 숨을 죽이고 가만히 훔쳐보았다. 술을 권하는 걸 보니 가짜배기란 사내는 턱주가리에 수염 하나 없이 민숭민숭한 녀석이고 진짜배기는 뾰족한 쐐기 수염이 나 있었다.
두 태감은 숙비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술 두어 잔이 뱃속으로 들어가니 자연 숙비를 훔쳐보는 눈들이 게슴츠레해졌다. 가짜배기가 숙비의 얼굴을 자못 음탕하게 쳐다보면서 먼저 말끈을 풀었다.
"저는 본시 미인이 많이 나는 항주부에서 나고 자랐지요. 하나 항주부 미인들도 숙비님만 한번 봤다 하면 울고 가겠습니다. 숙비께서 만약 항주부에 태어났더라면 지금쯤 필시 큰 부잣집 마님이 되어 종년들을 한 마당 부리며 호강하고 사실 텐데…… 허허, 이게 뭡니까? 허울이 좋아 숙비지 실은 밤마다 독수공방에 애꿎게 한숨만 내쉬고 말입니다."
"흥, 그럼 네 녀석이 큰 부자라면 나를 아내로 데려 가겠느냐?"
숙비는 슬쩍 눈을 흘기며 한마디 던졌다. 가짜배기는 신바람이 나서 농을 받았다.
"아무렴 데려가고말고요! 하지만 예를 갖추고 데려가기 전에 톡톡히 재미는 보여 줘야 해요. 이히히……."
그러자 진짜배기가 바짝 시샘을 하며 핀잔을 주었다.
"네깟 놈이 다 뭐냐? 숙비님의 귀체는 천금과도 같고 저 밤 하늘의 별처럼 높고 귀하신 것이야. 우리같이 비천한 놈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어. 괜히 헛물켜지 말란 말야!"
가짜배기가 한술 더 떴다.
"지금 당장 숙비께선 우리하고 마주앉아 계신데 공연히 까마득한 하늘의 별과 비길 건 뭔가. 옷만 벗으시면 천금 같은 귀체라도 만져 볼 수 있는 게야. 진시황 때부터 너같이 쓸개 빠진 놈들이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쳤기 때문에 삼천 궁녀가 독수공방에 피눈물을 쏟은 거라구!"
"이 놈, 네 놈만 사내고 난 뭐 빈털터리 바지저고리라더냐? 존귀하신 숙비님의 체신을 봐서 참고 있다뿐이지."
숙비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두 태감이 찧고 까부는 것을 적이 황홀하게 듣고 있다가 돌연 낯을 붉혔다.
"나는 체신이고 뭐고 죄다 하찮게 여기는 여인이야. 왜 남의 아픈 사정은 모르고 입방아만 찧는지 원……. 내 몸뚱어리라도 보고 싶다면 못 보여 줄까, 원!"
그러더니 숙비는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옷고름을 풀었다. 그러자 그나마 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던 속옷마저 하늘하늘 흘러내리고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여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것을 본 순간 단지흥은 그만 눈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당장에 뛰쳐 들어가 세 연놈을 한 주먹에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그는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숨을 죽였다.
"차, 참말로 탐스럽군요!"
가짜배기라는 태감은 끌끌 혀를 차면서 침을 질질 흘렸다. 진짜배기는 손뼉까지 치면서 떠들어댔다.
"참말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로구먼. 어이구, 눈부셔라! 서시, 양귀비도 울고 가겠네그려."
숙비는 얄밉다는 듯 두 태감을 흘겨보며 맥없이 주저앉았다.
"둘 다 등신 같은 사내들이라 별수가 없군. 두 눈 뻔히 뜨고 구경들만 하고 있으니……."
두 태감은 일순 영문을 몰라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와락 침대 앞에 꿇어앉으며 하소를 했다.
"숙비님, 이 소인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숙비는 피식 웃었다.
"여자인 내가 무슨 수로 너희들을 불쌍하게 여긴단 말이냐?"
"하긴 그렇사옵니다만, 원하신다면 저희 둘은 기꺼이 숙비님을 모실까 하옵니다."
그 말에 숙비는 얼굴이 환해지며 쌩긋 눈웃음을 쳤다.
"정말? 하지만 너희 둘이 함께 달려든다 해도 폐하 한 분의 힘도 못 따라갈걸. 네 녀석들은 다 그저 사내의 허울만 쓰고 있는 것 아니만 말야!"
"천만에! 이제 맛 좀 보시면 아실 거외다!"
두 태감은 싱글벙글 웃으며 침대에 드리운 휘장을 끌어당겼다.
단지흥은 금세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듯 참담한 심경이었다. 어찌하여 궁중의 법도가 이렇게 문란해졌단 말인가. 황제의 귀비들이 태감들을 꼬여다가 배가 맞아 돌아가고 있다니……. 단지흥은 더는 참을 수 없어 단숨에 뛰쳐 들어가 와락 휘장을 뜯어 버렸다. 달아오른 세 연놈의 시뻘건 몸뚱이가 문어 발처럼 얽혀 있었다.
영고가 아기에게 단설기 한 조각을 쥐여 주니 아기는 해죽해죽 웃으며 금세 단설기를 입으로 가져 갔다. 그때였다. 시녀 하나가 다급히 외치며 달려 들러와 와락 침대 위로 쓰러졌다. 영고는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불길한 예감이 번개같이 뇌리를 스쳤다. 영고는 아기의 입에 반쯤이나 들어간 단설기를 다짜고짜 빼앗아 힘껏 내동댕이쳤다. 아기는 대번에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시녀는 몸을 추스르며 가까스로 일어나 앉더니 무섭게 영고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머리는 삼검불처럼 헝클어졌고 두 눈엔 벌겋게 핏빛이 어려있었다.
"황비님, 이렇게 지독한 짓이 어디 있나요. 저희들은 죽어도 한이 없어요. 하지만 철모르는 아기는 왜 죽인단 말예요. 이 천진난만한 아기에게 무슨 죄가 있어요. 무슨 죄가……."
시녀는 꼭 실성한 사람마냥 어깨를 들까불더니 그대로 넘어가 더는 꼼짝도 안 했다.
구천인은 휘장 뒤에서 내심 손뼉을 치면서 고소를 머금었다.
'잘됐다! 종년이 제 주인 영고를 의심하니 영고는 황후를 의심하겠지. 어디 네 년은 황후란 년과 서로 실컷 물고 뜯으면서 한번 싸워 봐라. 이 구천인은 어부지리나 얻자……."
아닌게아니라 영고는 울음을 그치고 아기를 꼭 껴안은 채 서성이더니 단설기를 홱 집어 들어 창 밖에다 내동댕이를 쳤다.
"황후와 단황 짓임에 틀림없어! 세상에 이렇게 독한 짓을!"
그 순간 구천인은 이때다 싶어 휘익 영고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영고는 너무나도 뜻밖의 일이라 크게 놀라 입을 떡 벌린 채 똑바로 사내를 쏘아보았다. 강파른 몸집에 날카로운 눈매, 필히 어디서 본 듯한 사내였다. 영고는 곰곰 생각을 더듬었다. 한 가지 짚이는 바가 있었다. 이 사내는 바로 몇 해 전에 그 누각에서 만났던 그 사내였다. 영고는 내색을 않고 잔뜩 위엄을 갖춰 물었다.
"대관절 당신은 누구요? 여긴 뭣 하러 온 거요?"
구천인은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정녕 내가 누군지 모른다? 허, 네 년이 나를 꼬여 내기를 걸어 놓고 몰라?"
영고는 안 그래도 심란하여 대뜸 호통을 내질렀다.
"여긴 대리국 황궁이다. 그렇게 맘대로 드나들다가는 목숨이 달아난다는 걸 모르느냐? 뭣 하러 온 게냐?"
"나는 시골 장터만한 대리국을 내 집 안방 드나들 듯 드나드는 사람이다! 뭣 하러 왔느냐고? 괜히 능청 떨지 마라!"
그때 아이가 또 불에 덴 듯 울어댔다. 영고는 아이 머리에 볼을 대고 둥기둥기 어르며 구천인을 힐끔힐끔 노려보았다. 구천인은 음충맞게 웃음을 흘리며 불쑥 한마디 내던졌다.
"아마도 당신은 단황의 총애를 잃은 것 같구려. 그렇다고 황후와 짜고 음식에 독약을 넣다니……."
하나 영고는 그저 씁쓸히 웃을 뿐이었다. 그러자 구천인은 한술 더 떴다.
"황비, 외람된 말씀이지만 황비께서 마음을 사려 먹고 한 가지 일만 하면 그 아이에게 대단히 좋을 거요."
영고는 의아해하며 대뜸 되물었다.
"아이에게 좋다니요? 빙빙 둘러대지 말고 어서 말해 봐요!"
"내 말 좀 들어 보우. 만약 그자들이 또다시 손을 쓸 때까지 기다린다면 조만간 황비는 물론이요, 귀여운 아기마저 죽게 될 거요. 그때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겠소? 차라리 먼저 손을 써욧! 먼저 손을 써서 그자를 죽이고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오!"
"그자라니 대관절 누구를 가리키는 거예요?"
영고는 성마르게 다그쳤다.
"스스로 더 잘 아실 텐데."
구천인은 대답을 늦잡으며 슬며시 웃어 보였다. 그는 영고의 기색을 살피며 속셈을 퉁기고 있었다. 실로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구천인은 대리 환궁의 내막을 잘 모르지 않는가. 단지흥의 처소가 어디에 있으며, 태감 무리들이 어디에 거처하고 있는지 완전히 까막눈이었다. 그러니 영고의 도움만 받는다면 단지흥 모가지를 따는 것쯤이야 말 그대로 식은죽 먹기요, 여반장이리라.
구천인은 끈질기게 영고를 꼬드겼다.
"황비는 이 황궁에서 분명 단황의 미움을 산 것 같소. 오죽이나 미웠으면 음식에 독약을 넣었겠소?"
영고의 기색은 한결 어두워졌다.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라고 마음을 놓으면 절대로 안 되오. 본디 지독한 사람들이라 조만간 또 모해하려고 날뛸 것이오!"
영고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듣고 있었다. 이 사내가 왜 이다지도 달라붙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딱딱 사리에 들어맞지 않는가. 그녀는 혼자소리하듯 힘없이 중얼거렸다.
"정말 그럴까요?…… 하지만 나를 죽인다 해도 무방해요."
그녀는 진심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녀는 주백통과의 그 일에 대해 단지흥에게 미안한 감도 없지 않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그런 걸 어찌할 것인가. 주백통을 향한 사랑이 애절할수록 그녀는 단지흥이 주는 벌을 달게 받자고 마음을 다지고 다졌었다.
그러나 정작 영고가 그렇게 나오자 구천인은 바짝 속이 달아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날카롭게 영고를 쏘아보았다.
"황비는 죽는다손 치더라도 이 불쌍한 아기는 왜 죽이려 하는 거요? 이 아기한테야 무슨 죄가 있다고? 이 귀여운 아기까지 죽이고도 그 악귀 같은 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게야. 그 놈이 좋아하는 꼴을 보자고 아기까지 죽이려나?"
영고에게는 실로 청천벽력같이 무서운 말이었다. 순간 그녀는 비 오듯 눈물을 쏟아 내며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아 더욱 힘껏 아이를 껴안았다.
'나는 죄를 지은 계집이지만 우리 아기는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나를 죽일 순 있지만 우리 아기를 죽일 수는 없어. 아아, 지금도 하마터면 이 불쌍한 애한테 독이 든 단설기를 먹일 뻔하지 않았던가? 그랬더라면 내 손으로 내 핏덩이를 죽인 것이나 진배없지 않았을까? 어이구, 천지신명도 무심하시지……."
불현듯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으스러지게 아기를 껴안았다.
"이 아기만은, 이 아기만은 안 돼. 이 아기만은!……."
구천인은 벙싯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참 기가 막힌 일이오. 아까 그 단설기만 먹였더라면……."
"그따위 소리 당장 집어치워요. 우리 아기만은 절대로 죽게 할 수 없어요! 내 절대 그렇게 하게 내버려두지 않아요!"
영고의 두 눈은 초점을 잃고 황황히 불타고 있었다.
"이봐요, 내게 이 아기를 근심 없이 키울 수 있는 방법이 있소. 한번 들어 보겠소?"
영고는 적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구천인을 쏘아보았다.
"아니, 저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당신은 대관절 누군데 나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나를 위하는 척하는 거죠?"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누군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소. 그리고 결코 어려운 일도 아니오. 그저 단황이 어디에 있고 어느 방에서 자고 있는가만 알려 줘요. 좀더 도와줄 요량이면 나와 함께 그리로 가고. 뒷일은 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아니, 그럼 단황을 죽이려고……. 단황을?"
구천인은 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고는 워낙 총명한 여인이라 평상시라면 이 구천인의 속셈을 능히 꿰뚫어 보았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지금 워낙 경황이 없어 그만 중심을 잃고 있었다. 그녀는 일순 마음이 흔들려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어떻게 단황을 죽일 수 있겠어요? 무공으로 논할진대 당신은 결코 그 양반의 적수가 못 돼요."
구천인은 잠시 민망스러운 눈길로 영고를 쳐다보더니 불현듯 몸을 홱 돌려 벽에 대고 번개같이 한 장을 내질렀다. 쿵 소리와 함께 큼직한 돌이 굴러 떨어지면서 대번에 창만한 구멍이 뻥 뚫렸다. 구천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세상에 내 무쇠 같은 장법을 당할 자는 없소."
"과연 무공이 만만치 않군요! 단황을 대거리해서 싸울 만하겠어요. 하지만 무공도 여간이 아닌데 당신은 무슨 심사로 예까지 와서 나를 부추기는 거예요? 그저 무공을 겨루어 보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죽이려 드냔 말이에요, 당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구천인은 아니꼬운 시선으로 영고를 노려보았다.
'이 계집한테 도움이나 좀 받을까 해서 살려 두니까 제법 어른을 훈계하고 나서? 쓸개 빠진 년같으니라구! 단지흥 놈에게 빌붙어 그래 끝장이 좋았냐 말이다, 몹쓸 년!'
구천인은 잠시 침묵에 잠기더니 빙그레 웃어 보였다.
"황비, 난 그 놈을 기어이 죽여야겠어. 지난번 화산 싸움 전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참석을 못했지. 그러니 이제라도 밟으며 동사니, 서독, 남제, 북개 하는 놈들을 하나하나 죽여 버려야겠어. 천하의 제일 고수라는 무림의 왕관은 의당 내가 써야 하니까!"
구천인은 서슴없이 의중을 드러내고는 징글맞게 웃어젖혔다.
영고는 어쩐지 가슴이 섬뜩했다. 이 사내는 정녕 단지흥을 죽일 일념으로 예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비록 단지흥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영고가 단지흥이 이 낮선 사내에게 비명횡사하는 것을 바라겠는가. 영고는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당신이 단황을 죽일 생각이라면 난 결단코 도울 수 없어요."
구천인은 목구멍으로 뭔가 덩어리 같은 것이 불끈 치밀어 올랐다. 입술이 닳도록 한참 동안이나 설복시켜 겨우 마음을 돌려 세우나 했더니 결국 공연히 말품만 판 꼴이 아닌가.
"이 요망스러운 계집! 왜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변덕을 부리는 게냐? 단황의 거처를 바로 대지 않으면 먼저 너하고 네 년 갓난쟁이부터 죽이고 말 테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쌍장을 펼쳐 들고 바싹 영고에게 다가 들었다. 영고는 깜짝 놀라 한 손으로 아이를 안은 채 슬쩍 몸을 피하며 주먹을 날렸다. 영고의 검술과 점혈법은 모두 주백통에게 배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구천인을 상대로 얼마간은 너끈히 지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천인은 영고가 삼 년 전의 그 풋내기이리라고 오산하고 코웃음을 쳤다. 아이도 있는데 독벌레고 독사고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하지만 정작 맞서고 보니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구천인은 세 번이나 장을 날렸지만 세 번 다 헛물만 켜고 말았다. 구천인은 다시 두 장을 가다듬으면서 벽력같이 소리를 내질렀다.
"일찌감치 무릎 꿇지 못할까?"
구천인은 또다시 급급히 쌍장을 내쳤다. 영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번개같이 내리치는 장을 피해 요리조리 밀려 다녔다.
"이 년아 소원대로 죽여 줄 테니 지옥에 가서나 단황 녀석을 만나거라!"
구천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크게 소리치며 다가들었다.
"철장개산!"
그러자 장과 장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윙윙 칼바람이 일었다. 영고는 번쩍 몸을 날려 자지러지게 울어젖히는 아이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는 다시 뛰어내렸다. 구천인은 숨돌릴 기회도 주지 않고 영고를 침대로 밀어붙이며 무섭게 장을 내질렀다. 영고는 더는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되자 하는 수 없이 두 장으로 구천인의 장을 받았다. 그러자 두 사람의 쌍장이 허공에서 서로 엇갈린 채 부르르 떠는 형상이 되었다.
필경 사내는 사내였다. 사내의 천근 같은 내력이 영고의 장을 통해 그녀의 몸으로 밀려왔다. 영고는 더는 지탱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다면 침대 위에 울고 있는 아이가 깔릴 판이었다. 아니, 무지막지한 사내의 내력이 아기에게 흘러갈 수도 있다. 이윽고 그녀의 입가로 선지피가 뚝뚝 듣기 시작했다. 그래도 영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사내의 장을 막아냈다.
구천인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장을 거두면 용서해 줄 테다!"
"네 놈이 나한테 뭘 용서해 준단 말이냐! 어차피 이 냉궁에서 죽을 계집이다."
영고는 날카롭게 오금을 박았다. 순간 사내의 내력은 더 무섭게 뻗쳐 왔다. 영고는 더는 견뎌 낼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선뜩한 피가 흐르는 입술을 윽물었다.
"이젠 순순히 단황의 거처로 안내하시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건 못해!"
"쳇, 냉궁에 처박힌 주제에 오지랖도 넓구나. 네 년이 뭣 하러 단황 걱정을 하는 게냐?"
"남의 제사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는 격이군!"
"좋아! 그럼 네 년이 택한 길이니 나를 탓하지는 마라!"
구천인은 슬쩍 물러섰다가 다시 한 장을 힘껏 내질렀다. 영고는 호되게 옆구리를 얻어맞고 침대를 훌쩍 넘어 벽으로 밀려가 쾅 부딪혔다. 구천인은 단걸음에 침대로 다가가 아기를 겨누고 똑바로 장을 쳐들었다.
"셋까지 세겠다. 셋을 셀 때까지 대지 않으면 이 앨 박살내 버릴테다!"
영고는 몹시 다급하여 급급히 일어나려 했으나 도무지 일어설 수가 없었다. 영고는 바득바득 기어오면서 악을 썼다.
"아기만은 다치지 못해!"
구천인은 코대답도 않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영고는 눈앞이 아찔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단지흥의 처소를 알려 줄 수는 없다.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면서 울먹울먹 부르짖었다.
"잠깐만!…… 내 스스로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겠으니 그 애만은 제발 살려 두어라……."
그러나 구천인은 팍 하고 있는 힘껏 장을 내쳤다. 침대 모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리며 아이는 더욱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그는 아이를 흘겨보며 씨부렁거렸다.
"어느 놈씨인지 별별 잘도 우는군! 정말 귀찮아 죽겠다. 내 이놈을 당장……."
"저리 비켜! 내 아기만은 절대로 못 다쳐!"
"그러니 빨리 대란 말이야, 이 년아!"
영고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아기를 덮쳤다. 그 순간 우악스런 사내의 손이 영고의 어깨를 텁석 거머쥐었다.
"오늘은 밤도 깊었으니 이쯤 해 두고 가겠다. 내일 밤 다시 올 테니 잘 생각해둬!".
구천인은 한마디 뱉어 놓더니 징글맞게 웃으며 훌쩍 몸을 날려 창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영고는 급히 상반신을 들고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하나 아기의 얼굴은 핏빛으로 새빨갛고 이제는 울지도 않았다.
"아가야, 아가야!"
미친 듯 불렀지만 아기는 축 늘어진 채 꿈쩍도 안 했다. 영고는 아기를 안고 발을 동동 구르며 뱅뱅 돌았다. 그녀는 꼭 미친 사람 같았다. 눈동자가 뒤로 넘어간 채 흰자위가 다 드러났다.
그때였다. 둔중한 북소리가 울렸다. 영고는 아이를 안고 홱 뛰쳐나갔다. 단지흥은 일양지 고수이니 얼마든지 아기를 구해 낼 수 있으리라. 그녀는 아기를 안고 단지흥의 침궁을 향해 허둥지둥 달려갔다.
단지흥은 이마에 내천자를 그리고 잡아먹을 듯이 두 태감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일순 숙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자고로 황중에서 태감과 궁녀들이 배가 맞아돌아간다는 이야기는 익히 떠돌았지만 이 대리국 황궁에서, 그것도 그가 친히 그 망측한 꼬락서니를 보게 될 줄은 실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한동안 무겁게 정적이 내리눌렀다. 세 남녀는 혼비백산하여 그대로 땅에 납작 엎드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누구도 감히 찍소리도 못했다. 단지흥은 일순 장탄
식을 하더니 몸을 홱 돌려 숙비의 침궁을 나와 버렸다. 그러자 숙비는 되는 대로 아무 옷이나 거머쥐고는 알몸으로 단지흥을 쫓아 나가며 소리를 쳤다.
"폐하! 폐하…… 죽일 놈들이 저를 겁탈했사옵니다……."
숙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뭐라고 주워섬기며 뛰쳐나가다가 그만 문턱에 걸려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급히 몸을 일으켰으나 그땐 이미 단지흥의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숙비는 파리하게 질려서는 태감들을 돌아보았다. 두 태감은 낯이 흙빛으로 질려서는 아직까지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어이구, 큰일났군! 이를 어쩐단 말인가?"
진짜배기는 넋 나간 사람마냥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숙비는 천천히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그녀는 푸르뎅뎅하게 독이 올라 두 태감을 보고 싸늘하게 외쳤다.
"이리 와!"
두 태감은 질겁한 눈길로 숙비를 힐끔 보더니 그녀 앞에 풀썩 꿇어앉았다.
"쉰네는 더는 못하겠수다. 제발 비옵니다, 제발……."
그러자 숙비는 픽 웃으며 난데없이 두 태감의 뺨을 철썩철썩 후려갈겼다.
"이 등신 같은 놈들아, 뭘 못한단 말이냐? 그 말라 비틀어진 건 개한테나 떼어 주란 말야, 이 가짜배기 자식들!"
그러자 가짜배기가 볼멘소리로 힘없이 투덜거렸다.
"둘 다 가짜배기였소? 난 나 하나만 가짜배기고 이 사람은 진짜배긴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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