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중신통 왕중양1

3학년2반 | 2022.02.23 07:38:15 댓글: 0 조회: 540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0556
[화산논검5] -
중신통 왕중양편



제1장 나체 미인들의 시장
대송(大宋)은 점점 몰락해 이제 강산의 절반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임금은 부화타락한 생활에 빠진 채 백성들만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적들을 몰아낼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강대한 나라에 맞서 싸우기에 역부족인지라 사람들은 그저 침통한 심정을 술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이날도 여전히 임안성은 많은 인파로 북적댔다. 사람들은 마치 세상의 종말을 앞둔 것처럼 행동했다. 환락을 찾아 호주머니 속에 있는 몇 푼 안 남은 은자들을 사루(四樓)에 던지기에 바빴다. 이 사루란 어떤 곳인가? 바로 술집을 말하는 것이다. 술집에는 천 잔 을 마시지 않고는 세상사를 묻지 말라는 말이 풍미하고 있었고, 찻집에서는 고금의 눈물겨운 이야기로 서로 손목을 쥐고 장탄식을 하였다. 또한 청루(靑樓)에서는 품속을 파고드는 미녀들의 교태 어린 웃음에
천금을 아까워하지 않으며 던져 주곤 했다. 서루(書樓 ; 서가)에서는 이야기꾼들이 침을 튀겨 가며 고금의 영웅들을 들먹이거나 지난날의 득실(得失)들을 짚어 가면서 깨어진 영웅꿈과 이에 휩쓸린 세기의 여인들께 대해 한바탕 떠벌려 댔다.
임안에는 사절(四絶)이라고 불리는 아주 유명한 것이 있었다.
제일절(第一絶)은 청루인데 '회모루(回眸樓)'라고 불린다. 이 청루에는 조대 당명황(唐明皇)의 귀비인 양태진(楊太眞 ; 양귀비)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데 그녀가 눈동자를 굴리며 한번 웃음지으면 삽시간에 임금의 혼백이 달아났다고 한다. 그렇듯 회모루는 미녀들이 득실거리는 매우 풍류스러운 곳이다.
제이전(第二絶)은 '태백루(太白樓)'라고 불리는 술집이다. 이태백(李太白)이 서경(西京)으로 갈 때 이 술집에 묵은 적이 있는데 술이 독하고 혀끝을 살살 녹이는 술맛에 감탄했다 한다. 그는 취흥이 달아오르자 곧 지필묵을 가져오라고 하여 글을 남겼다. 이태백이 '술이 너무 맑아 밑바닥까지 보이는데(酒太白淸別見底)'라고 쓰자 술이 좋지 않다고 쓴 것으로 이해를 한 주인이 화가 나서 그를 나무랐다. 그런데 이태백이 '취흥이 도도하여 등등 뜬 기분이로다(人大樂 浮
一大白)'라는 구절을 잇자 주인의 태도가 금방 달라졌다. 이때부터 태백루는 다른 술집과 달라지기 시작했다. '태백루(太白樓)'라고 부르면서도 쓰기는 '대백루(大白樓)'라고 썼던 것이다. 그리하여 간판을 보고 '대백루'라고 부르면 전고(典故)를 모른다고 해서 무식하다는 조롱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어떤 문인들은 도리어 그것을 비웃듯 끝까지 '대백루'라고 불렀다.
제삼절(第三絶)은 임안의 '작향루(疇香樓)'라는 찻집인데, 어떤 손님이 오차물을 마시다가 찻잎을 씹고 그 향기에 취해 쓰러진 뒤로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 작향루라는 이름은 이
일화로 얻어진 것이다.
제사절(第四絶)은 사패방(圖牌埼)의 '설서루(說書樓)'이다. 이 설서루를 '청고루(聽古樓)'라고도 하는데 언제나 구경꾼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이야기를 듣는 청중이 대단히 많은 이 설서루를 임안의 경성이라 불렀다.
어느 날 작향루에 한 손님이 왔다. 이 사람은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아주 영준하게 생겼는데 자리에 앉아서 음미하듯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점심 때가 가까워지자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났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점심밥은 청하지 않고 찻잔 앞에 장시간 앉아 있었다. 이 사람은 차 마시는 데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다만 주위 사람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는 눈치였다.
임안은 큰 고장으로 송조 때는 가장 번창한 곳이었다. 난세에는 괴이한 사건이 수없이 일어나는 탓에 이 임안은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깃거리가 유독 많은 고장이기도 했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글쎄, 이 얼마나 괴이한 일인가? 그 회모루에 어제 십여 명이나 되는 미녀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다고 하더군. 기생어미는 횡재를 하게 되었다며 입이 귀밑까지 쩌억 찢어졌다는군. 그 기생어미는 미녀들에게 위층으로 올라가 몸단장을 하라며 채근했지. 그런데 한 시진(時辰)이 지났는데도 층계가 울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어. 그래 또 한참을 기다렸으나 사람이 내려오는 그림자를 볼 수 없었대나. 그래서 기생어미가 위로 올라가 보니 글쎄, 무슨 판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짐작이나 가나?"
그러자 청중들은 잔뜩 흥미를 가지고는 입을 헤벌렸다.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어서 다음 말을 이어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표정들이었다. 그 사람이 킥킥 웃더니 상 위에 있던 차를 단숨에 삼켜 리고 나서 빈잔을 내보이며 말했다.
"바로 이렇게 깜쪽같이 그 십여 명이나 되는 미녀들이 사라져 버렸단 말일세."
곧 귀기울이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녀들이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 이유에 대해 저마다 추리해 보는 눈치였다.
"기생들이 사라진 것을 알고는 기생어미는 마치 제 부모가 죽은 듯 대성통곡을 하더라구. 아무리 봐도 기생어미가 누군가와 짜고 그녀들을 빼돌린 것 같지는 않았어. 임안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미녀들을 찾지 못했거든. 그중에서도 인물이 아주 뛰어난 자지라는 계집을 유돌 아까워한다는 말도 있다네."
청중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한 사내의 거동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주인을 불러 찻값을 치르고는 천천히 층계를 내려가는데도 눈길을 던지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거리로 나선 그는 자기 쪽으로 톡톡 튀듯 가벼운 걸음걸이로 걸어오는 한 유랑아를 붙잡고 물었다.
"이봐, 회모루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지?"
유랑아는 회모루라는 말에 씨익 웃으며 두 눈을 연신 깜박였다.
"손님이 회모루로 가신다면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그런데 푼돈 좀 주셔야겠어요."
유랑아는 계속 웃는 낯짝으로 사내의 얼굴을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사내가 웃으면서 동전 몇 닢을 쥐여 주었다. 그러자 유랑아가 갑자기 입을 삐죽 내밀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겨우 요것뿐인가요? 미녀들 앞에서는 은자를 한줌씩 꺼내 주며 허세를 부리면서 나한테는 겨우 요거뿐이에요?"
유랑아는 머리에 묻은 비듬을 털어내듯 연신 툴툴거리며 앞서 걸어갔다. 사내는 유랑아가 가는 대로 쫓아갔다. 여러 거리를 지나 어느 집 앞에 이르렀다.
집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규모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사내는 속으로 그런 일을 하는데 넓고 큰 집은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웃음을 베어 물었다. 힘만 좋으면 되는 일이니까.
사내가 안으로 들어서니 한 여인이 쪼르르 달려 나왔다. 이 여인은 기실 나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화류계의 세월에 찌들어 지레 늙어 버린 것 같았다. 그녀가 웃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오늘은 누구의 운수가 펴려나? 여기 공자님 한 분이 오셨다. 아주 미남자서!"
사내가 약간 당황해 하자 그녀가 갑자기 그의 손을 잡았다. 사내가 흠칫 놀라 손을 뿌리쳤다. 깔깔 웃어대는 그녀의 태도를 보니 사내를 얕잡아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내를 주물러 은자를 후려내려는 속셈이 역력했다. 기생어미가 더욱 요상한 웃음을 흘리며 사내를 주시했다. 사내가 정색하고 말했다.
"난 놀러 온 게 아니오. 어제 이 집에서 미녀 십여 명이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오? 난 그걸 알고 싶어서 온 거요. 사실을 듣고 싶소이다."
불쑥 내뱉은 사내의 말에 열쩍은 낯빛을 보이던 기생어미가 얼굴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누가 알겠수? 이층에 있는 줄 알고만 있었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이것들이 온데간데 말도 없이 몽땅 사라지고 말았다우."
"내가 한번 올라가 살펴봐도 괜찮겠소?"
사내의 말에 기생어미가 화들짝 놀라며 가로막아 섰다.
"공자님, 그럴 수는 없어요."
"왜 올라갈 수가 없다는 말이오?"
사내가 단호하게 나오자 기생어미는 다시 교태스런 눈을 꿈벅이며 대꾸했다.
"남이 재미있게 노는 판에 방안을 들여다본다면 공자님은 흥이 나겠나요?"
"걱정 말게. 내가 그 미녀들을 찾아 줄 테니 나를 믿으라고."
기생어미의 깔깔대는 웃음 소리가 뒤를 이었다.
"에구, 공자님이 참말로 그 애들을 찾아낼 수 있단 말이우? 그럼 공자님은 천하에 드문 대협일텐데……. 그렇다면 도대체 공자님은 성씨를 어떻게 쓰시우?"
기생어미의 눈초리가 매우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그녀는 사내의 행색이며 얼굴 생김새를 찬찬히 훑어보다가 예사롭지 않은 기운에 놀라는 눈치였다.
"내 성은 왕가요."
사내가 대답하자 기생어미가 손을 까닥거렸다.
"왕 공자, 그렇다면 얼른 내 뒤를 따라와요."
왕 공자는 기생어미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어느 방문 앞에선 그녀가 안에 대고 소리쳤다.
"가릴 건 가리되 휘장은 젖혀 놓아라!"
기생어미가 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방안에는 예상대로 두 여인이 한창 땀을 흘리며 기기묘묘한 자태로 서로를 탐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난데없는 불청객의 방문에 허겁지겁 이불을 끌어
당겨 얼굴을 감추느라 바빴다. 기생어미가 그들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거서 밖으로 나가라. 어서!"
그러자 두 사람은 의복을 대충 걸치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왕 공자는 입을 꽉 다물고 방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참이나 방안을 둘러보던 그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기생어미가 웃으며 그를 잡았다.
"왕 공자, 내 보기엔 공자님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공자님이 정말로 저를 도와 아이들만 찾아 준다면 내 약속하리다. 공자님이 매일 이곳에 들러 얼마든지 즐길 수 있도록 하겠어요."
그녀는 자신의 말이 너무 지나쳤다고 여겼는지 얼른 얼굴색을 고치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 대신 바쁘지 않을 때 오셔야 해요."
왕 공자가 잠시 미소를 짓다가 몸을 돌렸다.
"난 이만 가야겠소."
기생어미의 속내는 여러 상념으로 분탕질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평범한 인물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왕 공자를 잘 이용만 한다면 자기에게 더없는 이득이 돌아올 게 분명하다고 그녀는 속으로 계산했다. 지금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가 몇 있으니 그녀들을 시켜 왕 공자의 마음을 완전히 녹여 버릴 심사였다.
"왕 공자님, 보아하니 공자께선 참말 영웅다운 데가 있수. 우선 공자께선 이곳에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시는 게 좋을 것 같으니 그리 하시우. 만약 그 아이들을 모두 찾게만 해 준다면 공자님의
요구는 무엇이든지 들어드리리다. 그리고 정 모두를 데려올 수 없다면 꼭 한 아이만이라도 내게 넘겨줘야 해요. 자지라는 이름을 쓰는 아인데 얼굴이 백옥처럼 희고 그중 미색이 뛰어나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을 게요. 부탁해요."
그리곤 왕 공자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기생어미가 안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얘들아, 뭣들 하리 빨리 나오너라! 아주 귀한 손님이 오셨다!"
기생어미의 호들갑에 여기저기서 불만스런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실 이 기생어미는 손님이 올 때마다 이렇게 장신구를 달듯 말을 꾸민 탓에 모두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이윽고 코를 찌를 듯 진한 향수내를 풍기는 기생 세 명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들은 곧 왕 공자에게로 다가가 뱀이라도 되는 양 몸으로 친친 그를 감기 시작했다. 왕 공자는 미간을 잔뜩 오므리면서도 애써 뿌리치지는 않았다. 기생들은 왕 공자를 보자 한눈에 반해 버린 눈치들이었다. 기생들은 왕 공자의 몸을 살짝살짝 스치며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그중 한 기생이 왕 공자에게 음탕스런 눈빛을 흘리며 교태를 부렸다.
"왕 공자께선 우리들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즐겁게 해 주셔야 해요."
옆에서 그녀들의 짓거리를 말없이 지켜 보고 있는 기생어미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은 이런 여인들을 만나고 싶어도 어려울 것이오. 이 아이들이 한번 몸을 꿈틀거리면 그댄 아마 몇 날 며칠 동안 오금조차 제대로 펼 수가 없을 거요.'
아닌게아니라 왕 공자는 지금껏 기생집의 참맛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기생들의 진한 농지거리와 자태에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바로 이 방인가? 그렇다면 또 어느 방에 처녀들이 들어 있는가?"
갑자기 밖에서 들려 온 말소리에 모두들 시선을 집중했다. 그 목소리는 꽤나 청아했다.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서자 왕 공자가 살며시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그 공자는 미남자였는데 흰 피부에 늘씬한 몸매를 지닌 사내였다. 방안에 들어선 그 공자는 왕 공자를 발견하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더니 곧 웃음을 띄우며 시선을 돌렸다. 그는 대차호(大茶壺)를 보고는 물었다.
"이 방이 처녀애들이 실종되었다던 곳인가?"
대차호는 그 공자의 기색이 썩 좋지 않음을 간파하고는 공손히 허리 숙여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요. 공자님께서 처녀들을 찾아 주시면 그 은혜는 꼭 보답하겠습니다."
그 공자가 다시 왕 공자에게로 알 수 없는 쓴웃음을 보내 왔다. 그 사람은 곧 방안을 낱낱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하찮은 것까지도 깊은 눈길을 주며 살폈다. 기생들이 바닥에 흘린 것으로 보이는 난잡한 쓰레기까지 일일이 손으로 만져 보고 눈으로 오래 확인 해 보기도 했다. 그러더니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는 왕 공자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자리를 좀 비켜 줄 수 있겠소?"
왕 공자의 기분도 유쾌하지는 못했다. 그는 속으로 뇌까렸다.
'보아하니 이 사람도 약자를 동정하는 사람으로 보이는군. 이 사람도 필시 실종되었다는 그 미녀들을 찾고자 온 게 분명해.'
천천히 자리를 비켜 주는 왕 공자는 유심히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살폈다. 그 공자가 혼자말을 하듯 매우 날카로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처녀의 침대와 아편쟁이의 방은 꼭 뒤져 봐야 해. 그리고 소문이 날까 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그러면서 그는 이불을 들치고는 그 속에 무슨 물건이라도 숨겨져 있나 살폈다. 이불 속을 이리저리 들춰보던 공자의 표정이 갑자기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 속에는 기생들이 매음을 할 때 쓰는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공자는 그것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를 모르는 기색으로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그가 기생어미에게 물었다.
"이건 무슨 물건이지?"
기생어미가 돼지 오줌보에 서 바람 새듯 피식 웃었다. 이곳에 있는 두 사내 모두가 전혀 여체를 가까이 해보지 못한 숙맥들이란 생각에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남의 일을 해결해 주겠다니, 기생어미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사라진 기생들을 찾아 주겠다는 이들의 말에 더욱 앞뒤가 맞지 않아 웃음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어찌 고기맛을 알지 못하는 사냥개가 사냥길을 앞장서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기생어미가 꾹꾹 터지려는 웃음을 안으로 재어 넣으며 말했다.
"후후, 이건 기생들이 쓰는 도구랍니다. 기생들은 이런 물건을 가지고 기쁨을 얻는다구요. 호호호!"
기생어미는 두 풋내기들을 바라보며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오호호호!"
때를 기다려 옆에 있던 기생들도 배꼽을 움켜쥐고는 박장대소를 했다. 그 음탕스런 웃음은 좀처럼 그치지를 않았다. 하지만 기생어미는 그 와중에서도 사태를 파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만약에 이들 두 공자에게 계속 비웃음을 내보이다가는 자신들이 불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생어미가 웃음을 말끔히 거두며 두 공자에게 공손하게 대했다.
"두 분이 원하신다면 이곳에서 마음껏 즐기시지요."
말을 마친 기생어미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기생들이 새로 온 공자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처음 왕 공자에게 수작을 부리려고 했으나 새로 온 공자가 더욱 미남이란 사실에 마음을 바꾼 것이다. 기생들은 그 공자에게 바싹 몸을 붙이며 아양을 떨어댔다.
"공자님은 성씨를 어떻게 쓰시나요?"
그러자 왕 공자를 슬쩍 곁눈질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난 성이 임(林)가지."
기다렸다는 듯이 한 기생이 그의 성을 부르며 나섰다.
"임 공자님, 당신의 성씨는 참 멋져요. 두 나무가 가지런히 자라는 게 바로 임(林)이 아닌가요?"
그 기생은 이렇게 읊조리더니 곧 임 공자에게 접근해 입을 맞추려고 했다. 그러면서 기생은 속으로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되짚어 보았다.
'난 지금껏 이처럼 잘난 젊은이를 보지 못했어. 이런 사내와 정을 맺고 함께 도망가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그 기생은 입술을 임 공자의 입술 위에 포개었다. 임 공자는 부끄러운지 얼굴빛이 갑자기 빨개지면서 머리를 뒤로 젖혔다.
"자꾸 이러면 가만 놔두지 않겠어!"
그러나 기생은 웃는 얼굴로 더욱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나의 침대를 어느 귀신에게 내주는지 아시나요? 옛사람도 아니고 지금 사람도 아니지요. 멀리로는 편지에다 애끓는 사연을 써넣을 줄 아는 설도(薛濤) 같은 사람과, 가까이로는 몸 바쳐 한공자 (韓公子)를 따른 양홍옥(梁紅玉) 같은 사람한테 내주는 거예요. 당신은 저의 이런 심정을 이해하시겠어요?"
임 공자는 묘한 말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는 기생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얼른 물러앉았다.
"재가 이곳에 온 것은 여인들이 사라진 일을 알아보기 위해서이지 그대와 정담을 나누기 위해서는 아니오."
그러나 기생이 다시 공자를 껴안으며 꿈을 꾸듯 입을 놀렸다.
"공자님들은 다 아리따운 여인들을 사랑한다던데 당신은 왜 나의 심정을 이토록 몰라주시나요?"
정색을 한 임 공자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왜 유독 나에게만 지나친 관심을 두려는가? 이곳엔 나 말고도 또 사내가 있지 않은가?"
잠시 기생이 불만스러운 눈길로 주위를 살폈다. 임 공자가 화제를 얼른 다른 곳으로 돌리듯 기생들을 향해 물었다.
"그 몇몇 여인들이 실종되었을 때 이상한 점을 본 사람은 없는가?"
그러자 서로 다투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말하려고 나섰다. 한 기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 두 사람이 사랑하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어요."
임 공자의 눈이 커졌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꿈벅이며 물었다.
"여인들끼리 어떻게 사랑을 한단 말이냐?"
그 기생이 다른 두 기생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너희들 둘이 임 공자님에게 여인들끼리 노는 걸 보여 드려라. 임 공자님의 견식을 넓혀 드려야겠다."
그녀들은 그런 일에 이골이 났는지 자연스럽게 천천히 한쪽으로 걸어가더니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요상한 자태를 취했다. 임 공자는 그녀들의 음탕하고도 괴이한 동작을 슬쩍 피하며 왕 공자를 살폈다. 그가 눈길을 빼앗기고 있는 것을 발견한 입 공자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임 공자가 손을 내저으며 제지했다.
"됐어. 그래 또 다른 소리는 들은 것이 없는가?"
그 기생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애들은 한식경이나 그 장난을 하더니만 곧 잠잠해졌어요."
"됐어. 그렇다면 난 이쯤에서 돌아가겠어."
그러나 기생들이 임 공자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임 공자를 강제로 잡아당기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했다. 임 공자가 끝내 그녀들을 뿌리치고는 나가 버렸다.
그러자 이번엔 아쉬운 김에 모두들 왕 공자에게로 몰려들었다.
왕 공자는 돌아서 가는 임 공자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상념에 빠졌다.
'보아하니 저 공자도 강호 사람이 분명한데 공정치 못한 일에 정의를 앞세우는 것은 역시 같구나. 그런데 저 공자가 없어진 기생들을 무슨 수로 찾아낸다는 말인가? 이 사건은 보아하니 실마리를 쉽게 잡아낼 수가 없는 듯한데. 여염집 규수가 아닌 사라진 기생들을 찾아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기생들을 어렵게 물리친 왕 공자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는 무작정 다시 그 '대백루'술집으로 가 술을 마시기로 했다.
갑자기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 온 것은 그가 몇 잔의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기분을 돋우고 있을 무렵이었다.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한 무리의 강호 사람들이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구 척이나 될 성싶은 큰 키에 흥하게 생겨 먹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큰 탁자 주위에 둘러 앉더니 주인을 소리쳐 불렀다. 주인이 허리를 숙이며 달려왔다. 그들은 다시 벽력같은 큰소리로 술과 안주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중 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오늘 꽃구경 하는데 그대들은 찍소리도 내지 말라구. 큰형님의 분부를 들어야 해."
다른 이들이 그대로 따르겠노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한 사람이 킬킬 웃으며 반기를 들고 나섰다.
"아마 큰형님도 정작 그런 일에 봉착하기만 하면 꽃에 반해서 찍소리도 못하게 될걸. 그땐 우린 또 뭘 기다려야 하나?"
큰형님이라 불리는 자가 일침을 놓듯 인상을 쓰며 받아쳤다.
"허튼소리! 내가 언제 꽃에 반한 적이 있었냐?"
모두들 큰형님이란 자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는 좋은 말로 눙치기에 바빴다. 그런데 반기를 들었던 자가 다시 덧붙였다.
"큰형님, 이번엔 정말로 무시해 버릴 게 아닙니다요. 형님께선 그때 가서 잘 보십시오. 형님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우린 그 명화(名花)를 얻어 마음껏 즐기렵니다."
곧 이들의 왁자지껄한 술판이 벌어졌다. 그들은 술잔을 높이 치켜 들고 요란하게 서로 권하기도 하고 잔을 부딪치며 마시기도 했다. 한창 술판이 무르익어 갔다.
얼마 후 왕 공자는 그들이 술에 어지간히 취하여 비틀거리며 술집을 빠져 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연히 그는 무리 중 한 사람이 대상 없이 혼자 흘리는 말을 엿들었다.
"주홍이 도도할 때 꽃구경을 하게 되었군 그래."
왕 공자는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꽃구경을 하려는가 궁금했다. 또한 주홍이 날 때 꽃구경을 한다는 말에 더욱 호기심이 동했고 의심마저 들었다. 왕 공자는 이들을 뒤쫓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 무리들은 밖으로 나가자 곧 한 사람씩 잰 동작으로 말에 올라탔다. 말들도 주인을 닮아 어디선가 술이라도 퍼마셨는지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왕 공자도 말을 타고 천천히 이들을 따라 임안성 밖으로 나왔다.
날은 벌써 어두워 오고 있었다. 이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들은 말에 채찍질을 가하며 달리기 시작했는데 술이 다 깼는지 그 속돈가 차츰 빨라졌다.
이윽고 산모퉁이를 따라 돌아서니 커다란 산장이 나타났다. 멀리서 바라보니 산장은 아주 야릇했다. 등불들이 환하게 켜져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수림 속으로 웬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가 여인들이었다. 여인들은 마치 활짝 펼쳐진 꽃나무를 연상케 하는 야릇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왕 공자는 숨을 죽인 채 뒤에서 동정을 살폈다. 무리들이 수림 안으로 들어서자 누군가 다가와 팔을 끼고 따라 걷는 게 보였다. 그들 역시 모두 여인들이었다. 그것도 꽃처럼 아름답고 애교가 철철 흘러넘칠 것 같은 여인들이었다. 왕 공자는 더욱 발소리를 죽이고 그 뒤를 쫓았다.
그들이 수림 한복판에 이르자 집은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들마다에는 초롱불이 매달려 있었다. 또한 모인 사람들을 살펴보니 온통 강호객들이었다.
주위를 넋을 잃고 둘러보는데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양쪽 팔을 잡는 것을 느꼈다. 여인들이었다. 앞의 무리들처럼 왕 공자도 여인들에 이끌려 더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한결같이 미색을 겸 비한 백옥 같은 살결을 지닌 미인들이었다. 그녀들은 왕 공자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매우 정답게 굴었다. 왕 공자는 자리를 잡고 앉아 꽃구경이 시작되기만을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뭇처녀들이 수림 속에서 하나 둘씩 걸어 나왔다. 하나같이 눈이 부실 정도로 기막힌 미인이었다. 더군다나 등불 밑에 드러난 여인들의 자태는 감히 선녀와 비하고도 남았다. 그 여인들은 조용히 사람들 앞으로 다가섰다.
강호객들이 앞다투어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그중 어느 한 사람이 약간 목청을 높였다.
"모두들 조용히 해 주시오. 내가 할말이 있수다!"
모두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귀를 기울였다. 말을 꺼낸 사람은 키가 매우 작은 난쟁이였으나 얼굴을 보니 서른 살은 족히 돼 보였다. 그는 뭇사람들을 향해 웃음을 띄웠다. 그러나 그 모습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음탕하고 음험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강호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무림의 인물들이 아니었다면 그 웃음에 벌써 몇몇은 자리를 피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시 그 사람이 예의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우린 북방 유운장(留雲莊) 사람들이오. 우리가 이곳에 머물면서 임안 지방을 살펴보니 실로 좋은 곳이란 것을 깨달았소. 그래서 우린 이곳에서 한바탕 놀아 보기로 했소. 여러분들도 함께 놀아 보는 것이 어떻겠소? 유운장이 나의 사형인 신독행(愼獨行)의 손에 넘어갔다는 걸 아는 사람도 있을 거요. 그분은 적지 않은 강호의 큰 사건들을 일으킨 사람이오. 그래서 난 오늘 이 임안에서 큰 사건 하나를 일으키려고 하오. 이 사건은 지난날에도 없었거니와 앞으로
도 찾아보기 힘든 아주 큰일이 될 거요."
그러자 주위가 웅성웅성 슬렁이기 시작했다. 그 난쟁이가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이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리 천하에서 이름난 화초라 하더라도 모두 한철이 전부인 거요. 모두 세 계절의 고비를 넘기기가 어렵거든. 여러분은 모두 강호객들이니만큼 무릇 미녀들이라고 하더라도 다 이러저러한 흠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거요. 말하자면 거리에서 만난 여인 앞에선 가슴이 요동을 치지만 가까이서 보면 이게 아닌데 하고 고개를 내저었던 기억을 누구나 갖고 있다는 말이오. 그러니 천하엔 흠잡을 데가 없는 여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오."
모두들 난쟁이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난쟁이의 말이 계속되었다.
"밤에 미인들을 보게 되면 때로는 동시(東施)를 왕장(王薔)으로 보게 되고 무염(無墮)을 포사(褻 )로 착각하는 수가 있지요. 이유는 밤에는 흔히 사람을 잘못 알아보기 때문인 거요. 하지만 삼경(三境)하에 사람을 보게 된다면 결코 어긋나는 법이 없지요."
그 말에 모두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길게 뽑거나 옆사람과 수군거렸다. 그들을 바라보던 난쟁이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곧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오."
곧이어 손을 대면 그대로 가슴을 타고 허리 밑까지 스르르 흘러 내릴 듯 몸매가 잘 빠진 여인들 몇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나무 그림자 사이를 걸어오는 그녀들은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나무의 그림자가 그녀들의 온몸에 묘한 무늬를 남기고 있어 보는 이들을 더욱 황홀경 속에 몰아넣었다. 어두워 얼굴을 똑똑히 분간할 수는 없었으나 그 몸매만큼은 절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들은 강호객들 사이로 걸어와서는 천천히 몸에 걸치고 있던 얇은 천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여인들은 곧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돼 버렸다. 그녀들 중 하나가 알몸인 채로 원을 그리듯 빙 둘러앉은 강호객들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여인의 알몸을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럿을 가까이서 바라본 강호객들의 혼백은 이미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여인들은 모두 일곱이었다. 그녀들의 길게 풀어헤친 머리칼은 불빛을 받아 윤기를 머금은 듯했다. 또한 날씬한 다리며 매끄럽게 엉덩이로 흘러내린 허리선과 아랫배는 뭇사내들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난쟁이가 바로 유운장의 사숙(師叔) 사자우(査自雨)였다. 그가 한참 만에 다시 입을 때었다.
"이게 바로 미인인 거야. 미인이 한번 시선을 주면 마음이 설레고 미인이 한번 교태를 부리면 목숨이 심연 속에 빠져들어 가는 법이라구. 이 미인들이 어떤가?"
왕 공자의 가슴도 후득후득 우박을 맞은 듯 심하게 떨렸다. 바로 한가운데 나와 섰던 미녀가 곧장 자기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이리 와!"
그 미녀는 별반응 없이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미녀를 부른 사람은 아주 장대한 체구를 가진 인물이었는데 시커먼 큰 손으로 미녀의 젖가슴을 덥석 움켜잡았다. 그녀의 젖가슴을 떡주무르듯이 하며 그가 감탄을 했다.
"훌륭하군, 훌륭해! 살결이 정말 부드러워!"
그러자 누군가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제노삼(齋老三)은 이전에는 여색을 가까이 하지도 않더니 오늘 밤엔 어찌 되어 살결이 부드럽다는 말까지 다 하는가?"
그 말에 모두들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왕 공자가 보기에 미인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고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이자들은 늘 이따위 짓을 즐기는 모양이군. 그런데 이 여인들이 회모루에 있던 그 십여 명의 기생들인지 아닌지 알아낼 방법이 없구나. 그녀들이 분명하다면 어딘가에 자지라는 여인이 끼여 있을텐데…….'
그때 사자우의 목소리가 깔깔대는 웃음에 실려 들려 왔다.
"부드러우니 안 부드러우니 말들은 해도 정말로 알자면 손안에 넣어 봐야 하지."
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그런데 웃음이 사그라들 무렵 누군가 이렇게 외쳤다.
"칠백 냥!"
돌아보니 왕 공자 옆에 있던 처음 보는 낯선 사내였다. 그는 지금 그 여인의 몸값을 흥정하려고 하는 중이었다. 때를 같이하여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허튼소리 말어! 이 좋은 밤에 모두들 기분도 즐거운데 그대가 처음부터 칠백 냥을 부르다니?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려는 수작이야?"
불만의 소리가 터지자 처음 칠백 냥을 외쳤던 사내가 받아쳤다.
"제 형은 큰 인물이니까 값을 더 높이 부를 것 같은데, 그래 얼마를 생각하고 계시우?"
제노삼이 뒤질세라 맞섰다.
"천 냥!"
그러나 이들이 흥정하고자 하는 여인은 그다지 경국지색은 아니었다. 그러니 천 냥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은자 삼천 냥이오!"
불쑥 날아든 또 다른 소리에 모두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에 는 작은 수레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그 수레는 얼마나 작은지 사람이 겨우 앉을까말까 할 정도였다. 그런데 수레 위에는 바로 그 목소리의 임자가 앉은 채로 세 손가락을 곧추 펴들고 있지 않은가.
모두들 그자의 몰골과 여인을 사겠다고 그 많은 돈을 내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자를 쳐다보았다.
삼천 냥과 대적할 액수가 나오지 않자 곧 그자는 여인을 불렀다.
"이리로 와. 어디 자세히 봐야겠다."
여인은 별수없이 그에게로 갈 수밖에 없었다. 여인은 가급적이면 사뿐사뿐 걸으려고 했으나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감추질 못했다. 수레 위에 있는 사람이 책망하는 낯빛을 지었다.
"미인이란 걸음걸이가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걸 너는 모르나?"
그러자 여인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어렸다. 그러나 억지로 자신의 심정을 숨긴 채 그에게로 가까이 가서는 허리를 굽혔다.
"공자님, 무슨 분부가 계신지요? 전 공자님의 분부대로 따르겠나이다."
'그는 매우 가늘고 약해 보이는 다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 이 두 다리가 보기 좋은가 그렇지 않은가를 말해 보거라?"
수레 밑으로 축 드리워져 있는 그의 두 다리는 전혀 움직일 것 같지가 않았다. 여인은 매우 난처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자님의 두 다리는…… 두 다리는 보기가 좋아요."
그가 고개를 서너 번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보기 좋다고 하면서 왜 시선을 피하는 게지?"
여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길은 매의 눈빛처럼 사납고 날카로운 빛을 뿜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여인은 그의 두 다리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때 그가 느닷없이 여인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아악!"
버둥대는 여인의 머리채를 한 손으로 틀어쥔 그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봐! 보란 말이다!"
다리는 보잘것없었지만 반대로 손힘은 대단했다. 여인은 머리채를 빼앗긴 채 곧 허공으로 들어올려졌다. 그가 손에 힘을 주어 여인의 머리채를 홱 비틀었다.
"헉!"
여인은 곧바로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다. 정말 대단한 힘이었다. 왕 공자가 그녀를 구해 주려고 막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듣거라!"
사자우가 주위를 일깨울 듯 목청을 높였다.
"천하에 아무리 사악한 자도 유운장에 대면 어림도 없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 너희들이 감히 함부로 손발을 놀렸다가는 우리 유운장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뭇사람들은 사자우의 뒤에 산맥처럼 버티고 있는 자들이 유운장의 호수(好手)들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모두들 그다지 그들을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는 눈치였다.
한 사람이 개탄을 하며 나섰다.
"유운장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 우리도 건드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제형께서 꽃을 짓밟는 건 결코 환영할 만한 일이 못 된다구."
그러자 수레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냉소를 머금었다. 그 대신 대답한 것은 사자우였다.
"그 계집애를 산 이상 죽이고 살리는 것 역시 이분의 손에 달린거야. 누구도 관여할 수 없지."
모두들 무언가에 눌리듯 침묵하고 있는데 다시 사자우가 입을 놀렸다.
"보란 말이야. 또 오네, 또 와!"
또 한 여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수심에 가득 찬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걸음은 매우 특이해서 마치 스르르 땅 위를 미끄러지는 듯했다. 여인 역시 한가운데로 와 섰다. 누군가 그녀의 걸음걸이를 보고는 최고라고 소리쳤다. 여인의 몸매는 방금 전 죽은 그녀보다 훨씬 우아하고 매력적이었다.
"삼천 냥이오!"
다시 여인의 값이 매겨지기 시작했다. 삼천 장이란 소리를 비웃기라고 하듯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돈을 아끼시는구려. 당신은 오천 냥이라도 내놓을 수 있잖소?"
다른 또 한 사람이 웃으며 그 말을 비꼬았다.
"오천 냥을 내놓고 싶으면 그렇게 하시구려. 그렇지만 쌀독에 거미줄 치지 않도록 살펴보는 게 좋을 거요."
처음 삼천 냥을 부른 사람은 마화산장(魔花山莊)의 장주 마성(魔晟)이었다. 마성의 부인은 무서운 여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마성이 색을 즐기기는 했지만 일단 여인을 데려가면 부인에게 먼저 빼앗겨 자기가 품에 안을 수가 없었다. 이런 마성의 형편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한바탕 웃어댔다.
한사람이 그를 돌아보며 충고했다.
"마 형, 당신이 여인을 얻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오? 필시 당신의 그 잘난 여편네가 여전에서 생선 훔치는 고양이처럼 잽싸게 가로챌 게 분명한데. 당신이 미인을 수십 명을 사들인다면 종국엔 부인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이 아니겠소?"
그 말에 다시 한 번 폭소가 이어졌다. 마성이 뜨뜻미지근한 어조로 답했다.
"꼭 그렇지는 않아. 여편네가 가로챌 때마다 하나 더 사면 되지 뭐. 여편네도 끝에 가서는 지쳐 포기할지 모르거든."
마성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 미녀를 한 번 더 훑어보았다. 그리곤 한쪽 손을 활짝 펼쳤다.
"좋아, 내가 오천 냥을 내지!"
여인의 운명이 결정되려는 찰나였다. 어쩌면 마성의 부인 손에 넘어가는 게 이곳에 있는 악한들에게 시달림을 받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성이 여인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며 손짓을 했다.
"이리 오너라, 어서 이리 오라구."
여인이 천천히 마성 앞으로 걸어갔다. 마성이 여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이 곱구나. 너에 비하면 우리 여편네의 손은 진흙뭉치를 짓밟아 놓은 것 같다구. 넌 얼굴도 고우니 아마 얻어맞지는 않을 것이다. 그 년은 사람을 때려도 꼭 뺨만 골라 후려치거든. 그럴 때면 옆에 있는 내게 몇 번이나 후려치는가 세라고 시키지. 하지만 넌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야. 내가 어찌 너처럼 고운 계집이 얻어맞는 것을 바라볼 수 있으며 또 몇 대나 맞는지 옆에서 셈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러나 그 원녀(怨女)는 마치 무슨 괴물을 대하듯 눈을 치켜 뜨고는 마성을 노려보았다. 마성이 히히덕거렸다.
"일전에도 내가 한 계집을 사 갔는데 어느 날 그 여편네가 버릇이 도졌던 거야. 내게 몇 대를 치는지 옆에서 세라고 하더군. 여편네는 정확히 열한 대를 후려쳤는데 내가 일곱 대를 때렸을 때 열한 대라고 했지. 그런데 그냥 넘어갈 여자가 아니었어. 급기야 그 계집은 나머지 네 대를 더 맞고는 죽어 버렸지."
"마 형, 사정이 그러한데 어째서 여인을 산다고 하는 거요? 괜한 고생 시키지 말고 어서 물러요!"
한 사람이 꾸짖듯 일침을 놓자 마성이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마음 같아서야 그러고 싶지만 여인이 알몸으로 눈앞을 어지럽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있어야지."
원녀는 결국 마성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 여인의 운명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한쪽에서 팔짱를 낀 채 잠시 이들이 노닥거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던 사자우가 말했다.
"쇠뿔도 각각이요 염불도 몫몫이라 했소. 그러니 미녀의 용모 역시 원래 각기 다른 법, 당신들이 또 다른 미녀를 보게 되면 아마도 더욱 마음에 들 것이오."
이번에는 미녀들이 줄을 지어 한꺼번에 사람들 앞으로 나왔다. 여인들은 제각기 개성이 달랐고 그 자태 역시 각양각색을 이루었다.
왕 공자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미녀들 중에 아마도 회모루 사람이 있을 거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을 찾아내지? 직접 한번 물어 보는 수밖에 없겠군.'
왕 공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내가 듣기에는 강호 사람들이 회모루에서 새로 십여 명의 미녀들을 데리고 왔다는데 어떤 여인들이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득달같이 날아와 꽂혔다. 그중 사자우가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왕 공자를 노려보았다.
"그댄 누구냐? 누군데 감히 회모루의 처녀들을 찾지?"
왕 공자가 가슴을 펴고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난 종남산(終南山) 사람인데 왕중양(王重陽)이라 하오. 회모루의 처녀들이 천하의 절색이라고는 하지만 난 그저 그녀들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오."
"좋아. 그렇다면 알려 주지."
사자우가 손을 내젓자 뒤로부터 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강호객들은 더는 앉아 있지 못하겠다는 듯 모두 일어섰다.
이윽고 여인이 모두가 한눈에 볼 수 있는 옷까지 이르렀다.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알몸인 그녀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왕중양까지도 그 여인의 미모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나이는 스무 살 미만인 듯싶었으나 여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상태였다. 혹시 기생어미가 입이 마르도록 떠벌리던 그 여인이 아닌가 싶었다.
사자우가 그 여인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다.
"이 다인 오늘 밤의 황후야. 하지만 아랑(阿郎)이 누가 되겠는지는 알 수 없지. 원래 내가 유운장에 남겨 두어 사형 신독행에게 드리려고 했었지.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형에게는 미녀들 이 이미 지나칠 정도로 많단 말이야. 그래서 이 처녀를 팔려고 하는 것이지. 뜻이 있는 사람은 값을 부르라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사람이 큰소리로 외쳐 댔다.
"칠천 냥이오!"
이번엔 다른 사람이 만 냥을 불렀다. 그러자 모두들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정도는 치러야 할 거라는 생각들이었다. 그런데 다시 뒤쪽에서 목소리가 날아왔다.
"저 옥 같은 살결을 보면 만 냥도 아깝지가 않지. 난 일만 오천 냥을 내겠어!"
사람들은 서로 간을 올리고 상대방을 헐뜯고 하면서 일대의 혼잡 을 이루었다. 왕중양은 이 사람들이 모두 강호에서 이름난 색마들 인 것은 알지 못했다. 한데 그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사태가 심각하지 않으면 결코 좌우나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쉽게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오로지 나쁜 짓만을 일삼는 흑도(黑道)의 인물들만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큰소리로 떠들거나 상대를 향해 으르렁대는 꼴이었다. 그들은 마치 행여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처럼 비쳤다.
그 여인이 머리를 들어 달을 유심히 올려다보았다. 등불빛과 달 그림자 그리고 사람들의 그림자가 한데 어울려 기이한 풍경을 자아냈다. 그녀의 표정은 아주 우울해 보였다.
"내가 삼만 냥을 내겠소!"
다시 누군가 찬물을 쫘악 끼얹은 듯한 말을 했다. 역시 나서기 좋아하는 강남(江南)의 흑도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흑도의 총두 목인 해불개(奚不改)라는 인물이었다. 주위는 삽시간에 조용해졌 다. 해불개는 자신이 내뱉은 말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꼭 행동에 옮기는 인물이었다.
언젠가 그에게 누군가 이렇게 물어 온 적이 있었는데 결과는 참변을 부르는 꼴이 되고 말았다.
"당신네 부(府)엔 도대체 사람이 얼마나 있소?"
그는 별생각 없이 내키는 대로 대답을 해 버렸다.
"서른아홉이오."
그런데 그의 친구가 실제로 수를 세어 보니 마흔한 명이었다. 해불개가 탄식을 섞어 가며 말했다.
"해불개라 해불개, 내 이름이 해불개인데 왜 불개라 하였겠느냐!"
그는 곧바로 검을 들어 자기 주변에 있던 두 사람의 목을 잘라 버렸다. 그 이후로 그의 부에는 오로지 서른아홉 사람만이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인물이고 보니 그가 이미 입으로 말을 내뱉은 이상 누가 사족을 달 수가 있단 말인가, 만약 누군가 그의 말을 걸고 넘어진 다면 또다시 해불개의 진면목을 보여 준답시고 검을 들 게 분명했다. 모두들 입을 다문 채 그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는데 누군가 불 쑥 말을 던졌다.
"내가 삼만 일천 냥을 내겠소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날아갔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그 돈을 내고 저 계집을 사다가 어머니 몸종으로 삼게 하리다."
모두들 놀란 것은 둘째치고 앞으로 일어날 사태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을 사리기에 바빴다. 일대의 혼란을 예고하며 나선 자는 바로 강남 모용씨 가문의 방탕한 귀공자로 알려진 모용준이었다.
이 모용 공자의 방탕함을 말하자면 사흘 밤낮도 모자랄 정도였다. 강남 모용씨 가문의 귀공자들은 저마다 무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점잖고 풍류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가문에 반기를 들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유일한 사람이 모용준이었다. 그의 키는 남의 허리 춤밖에는 닿지 않았으며 얼굴도 두번 다시 보기 싫을 정도로 추물에 속했다. 비록 소문에 의하면 모용씨의 가문에서 가장 유능하고 백년이 지나도 이런 인재는 찾아볼 수 없다고들 하지만 못난이라는 소리를 면
하기는 힘들었다. 이젠 점잖고 풍류스러운 모용세가(募容世家)의 공자는 다시는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해불개가 모용준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모용 공자는 내 성미를 잘 알고 있을텐데?"
그러자 모용준 역시 해불개를 쏘아보며 받아쳤다.
"당신이 살 수 있는 걸 내가 왜 못 사겠는가?"
해불개가 흐흐 웃으며 말을 뱉었다.
"난 한번 내뱉은 말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이름도 무엇 때문에 고치겠냐는 의미로 해불개가 아니겠어."
갑자기 말을 끝낸 해불개가 검을 뽑아 들고는 모용준을 향해 일곱 번을 찔러댔다. 첫번째로 찌른 것은 '천흉착두(穿陶破 )' 초식이었고 두 번째는 '고사수장(苦思,愁腸)'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도단고량(桃斷膏梁)' 초식이며 네 번째가 '쌍용탈주( 龍奪珠)', 또한 다섯 번째는 '일지월광(一地月光)'이었다. 이어서 '차도제초(借道齋楚)'와 '몽침황량(夢枕黃梁)'초식이 각각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에 해당되었다.
해불개는 이 일곱 가지 초식을 번개같이 부리며 모용준을 검으로 공격했다. 그는 모용준이 일찍이 가문으로부터 절기의 기공을 전수받아 천하의 모든 병장기들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습적인 공격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용준은 몇 차례 몸을 움직여 해불개의 일곱 차례나 되는 검공격을 쉽게 피해 버렸다.
모용준이 가소롭다는 듯이 한쪽으로 물러서며 외쳤다.
"허허, 천하의 우리 가문에 도전하는 자가 있는 줄 내 미처 몰랐구나. 네 놈이 죽고 싶어 몸살이 나는 모양이로구나!"
그리곤 모용준이 몸을 가볍게 날리며 바닥에서부터 통통 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정말 볼품딸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해불개의 허리춤밖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얕잡아 볼 수만은 없는 실력이었다. 곧 해불개도 자세를 가다듬으며 그와 맞서기 시작했다.
"난 저 처녀가 마음에 들었단 말이다. 우리 어머니가 지금의 처녀애들은 모두가 소용이 없는 가짜들이라고 하셨지. 마치 너희들 강호의 가짜 협객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난 다행히도 진정한 처녀애를 찾은 것이다. 어머니를 위해 저 처녀를 사겠다는 게 잘못이라도 된다는 것이냐?"
모용준의 말에 해불개가 씩씩거렸다.
"남이 그 계집을 아주 귀중하게 다루겠다고 하는데 너는 어째서 늙은 어미의 몸종으로 삼겠다는 말이더냐? 그렇게 계집을 헛되이 쓰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사람들이 해불개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한마디씩 했다. 그러자 모용준이 다시 목에 힘을 주었다.
"네 놈이 해불개지만 생각을 고쳐 먹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해불개는 여전히 얼굴 가득 비웃음을 담은 채 모용준을 노려볼 뿐이었다.
"어서 고쳐 먹지 못하겠느냐!"
모용준이 다시 해불개에게 다짐하듯 소리치고는 몸을 날려 세 번이나 초식을 바꿔 가며 공격을 가했다.
"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용준의 발에 채인 해불개가 공중에서 한바퀴 돌더니 뒤로 나가떨어졌다.




제2장 생사를 건 강탈
비명을 내지르며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나가떨어진 해불개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모용준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아픔을 참으며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더는 모용준에게 덤빌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모용준이 보일 듯 말듯 웃음을 지었다.
"난 저 처녀를 사다가 어머니의 몸종으로 드리련다. 어때, 내 말을 또 거역하겠느냐?"
해불개는 말발굽에 채인 강아지처럼 끙끙거릴 뿐이었다. 다시 모용준이 입을 열었다.
"좋다. 네가 정 심보를 고쳐 먹지 않겠다면 죽음을 각오하는 수 밖에……."
이렇게 뇌까린 모용준이 살기를 띠며 해불개에게로 다가갔다.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도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이 모용준을 가로막고 나서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강남 모용 가문의 사람들은 마음대로 살인을 해도 된단 말인가?"
누군가 벽력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검을 뽑아 들고 모용준 앞으로 한걸음 내딛었다. 바로 난쟁이 사자우였다. 갑작스런 고함소리에 모두들 아연실색했다. 그의 무예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그 고함소리에 기가 꺾이고 말았다. 모두들 작은 체구에서 그 처럼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주위는 더욱 숙연해졌다.
사자우가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 북방 유운장 사람이다. 그대들이 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유운장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일은 바로 천하의 대악인이 되는 거야. 그대들 중 재간이 있는 사람은 은자를 내고 저 계집을 사갈 수 있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함부로 덤볐다가는 내가 가만 두지 않을테다!"
모용준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좋아, 이 모용 공자가 그렇게 하지. 그런데 누가 나와 맞서 흥정놀이를 할 것인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마치 강력한 풀이라도 한 숟가락씩 입에 문 듯 조용해졌다. 돈을 주고 계집은 살 수 있지만 강남 흑도의 총 두목인 해불개를 노여워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모용준을 노하게 만든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계집 하나를 얻기 위해 해씨와 모용씨를 건드린다는 것은 결코 이득되는 일이 아니었다.
사자우가 다시 모두 들을 수 있게 큰소리로 말했다.
"그대들 두 사람 중에 은자를 많이 내는 사람이 이 계집을 차지 할 수 있네. 해불개가 사겠다면 우린 계집을 집에까지 데려다 줄 수도 있지. 공자 역시 마찬가지야. 돈만 두둑하게 낸다면 얼마든 지 그렇게 해 주겠네."
그러면서 사자우는 송곳처럼 날카로운 눈초리로 강호객들을 일일이 눈여겨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천하에 능인(能人)이 있다 하더라도 북방 유운장 사람들과 세력 다툼을 할 만한 자는 많지 않을 것이야."
사자우의 말을 자르며 해불개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내가 오만 냥을 내겠소!"
모용준이라고 가만있을 리 없었다.
"난 오만 일천 냥을 기꺼이 내리다."
해불개가 고개를 돌려 살피자 그의 뒤에 앉아 있던 두 형제가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사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이젠 모용준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해불개가 조롱박을 잡더니 꿀꺽꿀꺽 술 몇 모금을 들이켰다. 그가 모용준을 노려보며 냉소적인 말투로 내뱉었다.
"네 놈의 모용세가가 부자라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난 네 놈과 끝까지 도박을 할 셈이다.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
모두들 해불개의 다음 행동에 시선을 모았다. 가슴을 잔뜩 부풀렸던 해불개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목젖이 출렁일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칠만 냥!"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려 왔다. 도박이든 싸움이든 어쨌든 오늘 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을 거란 예감에 모두들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자우가 웃음을 입꼬리에 처바르며 시선을 끌어 모았다.
"헤헤, 잠깐 기다리게. 그대들 두 사람은 값만 불러야지 손을 써서는 안 되네. 모용 공자, 꼭 돈으로 승부를 가름해야 하네."
그러면서 사자우는 여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좇았다. 그는 여인 앞에 우뚝 걸음을 세우더니 손가락 끝으로 여인의 국부에 난 거웃을 살살 만지며 수작을 부렸다.
"이 계집은 정말 괜찮아. 아직 누구도 건드려 보지 않았으니, 흐흐……."
"함부로 만지지 마라!"
모용준이 기분 나쁜 듯 소리쳤다. 그러자 사자우가 깔깔거리며 모용준에게 충고를 던졌다.
"모용 공자, 이 자지(紫枝) 처녀는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란 것 을 알아 두라구."
자지 처녀라는 말에 매우 놀란 사람은 바로 왕중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필시 회모루의 기생임에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머지 십여 명도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게 불 보듯 뻔했다.
모용준이 준엄하게 말했다.
"내가 요구하는 것도 저 계집의 티없이 맑은 순결이오. 만일 저 계집이 더럽혀진다면 난 당신을 죽일테다!"
"좋아, 모용 공자가 정말 흥미를 갖고 있는 모양인데 내 건드리지 않으리다. 그런데 어째 노모를 위한다는 말은 거짓처럼 들리는데?"
사자우의 말에 모용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여인은 모용준의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용준이 어색함을 만회하려는 듯 해불개를 향해 웃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해불개, 그대는 나와 동향이 아니던가. 그러니 나와 옥신각신 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청하건대 계집을 내게 양보하기를 바라네."
그러나 순순히 모용준의 말을 들어줄 해불개가 아니었다.
"개떡 같은 소리 집어치워! 네 놈 집안과는 앙숙이란 것을 잊었느냐? 이 어른이 죽어도 양보를 못하겠다면 어쩔 테냐!"
태연한 기색으로 해불개의 반응을 주시하던 모용준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저 처녀를 너 같은 무지막지한 놈에게 줄 수는 없지. 자, 팔만 냥이오!"
"뭐라고! 좋다. 네 놈의 가문은 우리 강남 흑도를 업신여긴 지 오래지만 난 참을 만큼 참아 왔다. 그러나 이젠 어림도 없다. 난 구만 냥이다!"
만만하지 않은 해불개의 태도에 모용준이 잠시 상념에 빠졌다.
그때 사자우가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이거 시간만 끄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하지. 어차피 갖고 있는 돈이 누가 많은가에 따라 승부가 날 것 같은데 수중에 있는 돈을 모두 꺼내는 게 어때?"
해불개가 손짓을 하자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이 품속에서 묵직한 은표(銀票)를 꺼내 사자우 앞으로 가져왔다.
사자우가 매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훌륭해, 정말 훌륭하군. 난 원래 이처럼 값진 은표를 좋아한다구. 난 사형처럼 나무에 매달려 무공만을 닦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아."
모두들 사자우의 반응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의 사형은 구사독옹(九邪毒翁)의 문하 사람인데 노독물(老毒物) 신독행(愼獨行)이라 불렀다. 그는 북방에서 으뜸가는 마귀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무슨 사문공법(邪門功法)을 연마하기에 나무에 매달린다는 말인가?
은표를 세어 보던 사자우가 해불개에게로 요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봐, 그대의 은표는 육만 냥뿐이야? 아직 삼만 냥이 모자라는데?"
그 말을 듣고 있던 모용준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사자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손가락에 끼었던 벽옥(碧玉) 반지를 빼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곤 다시 반월벽환(半月璧環)과 스물네 알의 용주(龍珠) 꾸러미도 함께 꺼냈다.
그런데 사자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대는 은자는 내놓지 않고 어째서 이따위 골동품을 내놓는 것인가? 내가 이따위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대는 모르나?"
"하하하!"
모용준이 느닷없이 웃어젖히자 옆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제의를 했다.
"대안적(大眼賊)에게 값을 물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골동품을 잘 보는 눈을 가진 대안적 이었다.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자 그는 곧 사자우 앞으로 다가와 벽옥 반지를 건네 받았다. 유심히 그 반지를 살펴보던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대단하군! 이건 진품이야!"
그러자 모용준이 정색하며 으스대었다.
"우리 가문에 어디 가짜가 있었단 말인가?"
대안적이 그의 얼굴을 잠시 살피더니 칼을 뽑아 들고는 공중을 향해 던지며 외쳤다.
"그러나 자세히 봐야지!"
그가 벽옥 반지를 바닥으로 내던지자 공중으로 치솟았던 칼이 그곳으로 내리박혔다. 모두들 그 광경을 보고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반지가 부서졌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반지는 조금 도 상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제야 진품임을 알아보고는 모두들 박수를 쳤다. 대안적이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반지는 이만 냥 정도는 가겠는데."
그는 도적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자였다. 그는 계산이 어찌나 빠르고 정확한지 단 한 번도 어긋남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이만 냥이라 말한 순간부터 벽옥 반지의 값은 돌변할 수 없게 되는 셈이었다. 대안적이 덧붙였다.
"이 반지는 한(漢)나라 장군 이광(李廣)의 반지인데 장군을 따라 대공을 세운 셈이지."
사람들은 왜 이 작은 반지가 그토록 값이 나가는지를 알게 되었다. 대안적은 이번엔 용주 꾸러미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대안적의 눈빛으로 몰렸다. 용주는 좌로 보나 우로 보나 부드러우면서도 은은한 빛을 뿌렸다.
"이것 역시 좋은 구슬이군!"
대안적이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시 그가 값을 불러 주기를 기다렸으나 대안적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군가 기다리기가 갑갑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두어 번 했는데도 대안적은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대안적은 아직도 제정신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보배 구슬을 떠올리며 넋을 놓았다. 어떻게 이 같은 구슬들을 얻었을까 하는 생각에 빠지다 보니 얼른 값을 부를 여유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윽고 그가 말문을 열었다.
"이 구슬들은 얻기 힘든 건데, 아무튼 이 구슬값은 자그만치 사만 냥은 족히 되오. 내가 예전에……."
말을 하려다 말고 그가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자기가 저질렀던 한 사건이 급작스레 눈앞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서둘러 자신이 내뱉으려던 말들을 수습했다.
"이런 구슬은 처음 보는 것이오."
그러나 그의 말을 믿으려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구슬을 처음 보는 것이라면 어떻게 값을 매길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그것을 따지려 드는 사람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반월벽환을 들여다보고 있는 대안적의 눈이 또다시 크게 빛났다. 모용준 쪽으로 얼굴을 돌린 그가 입을 열었다.
"모용 공자, 제가 보건대 당신의 가문에서 가장 귀중한 물건이 바로 이 옥벽인데 왜 내놓으려고 하시오?"
대안적이 옥벽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에 흐뭇해진 모용준이 해불개 쪽을 힐끗 쳐다보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소. 난 저자가 여인을 더럽히는 꼴을 도저히 볼 수가 없소이다."
대안적이 굳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굳어진 표정으로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모두들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은 채 대안적의 거동만을 주시할 뿐이었다.
"이 옥벽은 값이 얼마 되지 않소."
겨우 입을 연 대안적은 그러나 전혀 예상 밖의 말을 흘렸다. 사람들은 그가 장난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 방금 두 보물에 대해 자신있게 값을 매기던 모습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모용 가문에서 가장 귀중한 물건이라고 제 입으로 확인시켜 둔 것을 감안한다면 일대의 파문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리둥절해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대안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옥벽은 은자 열 냥어치밖에는 되지 않소."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앞의 두 보물이 모두 만 냥을 넘어섰는데 아무리 대안적이 정신이 나갔다 해도 열 냥이라 함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그러나 대안적의 말에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쨌거나 모용준과 해불개는 각각 육만 냥씩을 여인의 몸값으로 내 놓고 있는 셈이었다. 모용준이 태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잠깐, 나의 이 옥벽값이 형편없다고는 하나 어쨌든 내가 해불개보다는 열 냥을 더 낸 게 아니겠소? 그러니 저 여인은 내가 데려 가야겠소."
말을 마친 모용준이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여인이 모용준이 자신의 주인이 된 것에 흡족한 듯 미소지었다.
"이 여인도 지금 웃고 있지를 않은가, 우리 모용세가를 이만큼 사람들에게 복을 주고 있단 증거지. 그러니 자네 해불개는 어서 마음을 고쳐 먹게나."
그러나 해불개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기세였다.
"잠깐만!"
그의 외침에 모용준이 고개를 돌렸다.
"해불개, 그대는 아직 할말이 남았던가?"
그러자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한 해불개가 허둥대며 사람들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여러분, 제게 돈을 좀 꾸어 줄 사람 없소? 이 해불개를 도와 은자를 내주시면 정말 고맙겠소이다."
해불개가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읍을 하며 얼굴 가득 웃음을 흘렸다. 사람들의 얼굴은 매우 떫떠름하게 변해 갔다. 그들은 모용세가와 원수진 일도 없었기에 섣불리 해불개만을 도와줄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되면 모용세가와 없었던 원한을 맺게 되는 결과인데 선뜻 해불개를 위해 은자를 던져 줄 것 같지는 않았다. 해불개는 애가 타서 사람들 앞으로 가 연신 읍을 하며 도움의 손길을 뻗쳤다. 그윽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던 왕중양의 눈가에는 예사롭지 않
은 기운이 서서히 번져 나갔다.
'내가 술집에서 저자가 몇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을 땐 그저 보통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저자가 바로 강남 흑도의 총 두목인 해불개였구나. 저자가 저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봐서는 모용준과 목숨이라도 걸고 죽기 살기로 대적할 조짐이 역력하다.'
모용준은 이제 승부가 났다고 여겼는지 여인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 그리고 해불개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은자를 얻기 위해 두 손이 닿도록 읍을 해대었다.
이즈음 한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모용준을 소리 높여 불렀다.
"모용 공자, 난 옥총(玉聰)이라 부르오. 난 당신을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없소. 하지만 난 해불개 총타주와는 인연이 깊소. 예전에 큰 은혜를 받은 적이 있어 지금 갚지 않을 수가 없구려."
옥총이 은표를 사자우 앞에 한 장 한 장 내놓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가장 기뻐한 것은 역시 해불개였다. 사자우가 옥총의 은표를 넙죽넙죽 받더니 만족스러운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모용준, 그대가 졌네. 해불개는 육만 이천 오백 냥을 낸 셈이 되었네."
그러자 모용준이 반월벽환을 집어 들고는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건 강남 모용세가에서 대물림으로 전해지고 있는 보배인데 어째서 값이 열 냥밖에는 되지 않는단 말이오? 모용세가에서 이 보물을 중히 여기는 건 국보이기 때문이오. 옛날 대연국(大燕國)의 보물로 이것 하나만이 남았을 뿐이오!"
모용준의 온몸엔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모용준은 가슴 깊이 일기 시작하는 참기 어려운 슬픔을 느꼈다. 이전에 그의 선조로 모용복(幕容覆)이란 공자가 있었는데 일심으로 연나라를 회복시키려 다가 끝내 미쳐 죽고 말았다. 그 후 모용준의 세대에 이르러서는 대연국을 부흥시키려는 꿈은 더 이상 꾸지 않게 되었다. 대송 강산은 이미 절반밖에는 남지 않았고 그런 대송과 싸우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잊어버린 지 오래 된 대연을 운운한다는 것
이 너무 한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조차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도 못하는 대연국을 지금에 와서 떠올린다는 것에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이다.
모용준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슬픈 기색을 비쳤다. 그러나 모용준을 옹호하며 앞으로 나서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왕중양은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렇다면 이 자지 처녀를 회모루로 데리고 갈 방법은 없단 말인가! 왜 이들은 모용 공자가 처녀를 데리고 가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아 서려는 것인가. 차라리 모용 공자가 데리고 가면 좋으련만 ……. 다시 회모루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왕중양은 자신이 나설 때라고 판단했다. 그는 모두 알아듣게 목청을 높였다.
"모용 공자, 내가 은자 삼천 냥으로 당신의 옥벽을 사겠소!"
사람들은 계속되는 놀라움에 넋을 아예 놓고 있었다. 모용 공자가 보기 좋게 패배할 것이라 예상했던 그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용준에게 새로운 빛이 비치는 대역전이기도 했다. 사실 모용준은 거의 포기상태에 빠져 있었다. 해불개에게 여인을 빼앗기는구나 하며 침통해 있었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자청한 사람을 보자 너무 반가웠다. 모용준이 왕중양에게 정중히 예를 올리며 물었다.
"정함을 어떻게 쓰시는지요?"
왕중양이 곧 자신을 밝혔다.
"저는 종남산 사람으로 왕중양이라 부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왕중양을 아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를 않았다. 그는 강호의 평범한 무객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모용준이 크게 가슴을 펴며 왕중양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표시했다.
"오늘부터 난 당신과 형제로 지내고 싶은데 어떻소?"
왕중양이 미소로 답했다. 이들을 지켜 보는 사람들 중에는 뒤늦게 후회를 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모용준과 왕중양이 이처럼 하나로 묶여지는 판에 어째서 미리 모용준과 형제의 의를 맺지 못했던
가 하는 후회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 그같은 섭섭함을 벗어 던졌다. 만약 모용준과 가까워지면 반대로 흑도의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는 결과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여인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하고 있음을 느낀 왕중양은 생각했다.
'이 처녀는 실로 천하절색이로구나. 그렇지 않았던들 어찌 모용준과 해불개의 눈에 들 수 있었으랴?'
왕중양이 여인의 시선에 잠시 정신을 놓고 있는데 사자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남의 행운을 막지 말아야 해. 모용준이 신방에 들어가는가 아니면 해불개가 신방에 들어가는가 하는 건 아직 모르거든."
모용준이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젠 육만 삼천 냥이란 말이오. 자지 처녀는 날 따라갈 수밖에 없소."
난처한 지경에 빠지고 만 것은 오로지 해불개였다. 그는 난데없이 왕중양이 나서 모용준을 돕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이 자식은 하늘이 높은지 땅이 높은지도 모르는 아주 무례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구나. 그러니 이 해불개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틈을 봐서 이 놈을 죽여 버려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내 이 원 통함을 지을 길이 없다.'
해불개의 얼굴은 곧 터질 것 같은 노여움으로 변해 갔다. 얼굴의 근육들이 실록실록하니 험상궂게 보였다. 그는 일단 사태에 따라 처신할 생각이었다.
"좋다. 나도 방법이 없으니까……."
이렇게 말한 해불개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일에 말려들기 싫은지 얼른 시선을 돌린 채 해불개의 눈치만을 살피기에 바빴다. 해불개가 누군가를 향해 큰소리로 꾸짖었다.
"유 장주, 그래 당신은 형제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도 도와줄 마음이 없는 거요?"
반벽산장의 유기(劉器)는 해불개가 자기를 지목하자 속으로 꿈틀 놀랐다.
'이젠 끝장이로구나. 이 해불개가 날 벼랑 끝으로 몰고 가려는 속셈이야.'
유기는 모용준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모용준은 그 가문에서 가장 이름난 사람으로. 자신이 받은 일에 대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꼭 보복을 하는 성미였다. 그런 이유에서 강호 사람들은 평소에 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런데 해불개가 자신을 지목한 것은 모용준과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예고하는 결과였다. 유기가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해불개 총타주님, 당신께 은자를 드리리다. 암 드려야지요."
해불개의 안색이 갑자기 밝아졌다.
"좋소. 유 장주의 성의에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그런데 유기가 갑자기 허둥대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은표 만 냥을 나눠 오천 냥씩 두 사람에 게 꿔주겠다는 말이오."
두 사람이라 함은 곧 모용준도 포함된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유기의 얄팍한 꾀에 혀를 내둘렀다. 유기는 두 사람에게 모두 미움을 사는 것을 피해 보려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두 사람의 원성만 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유기가 오천 냥씩 내놓았지만 상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모용준이 자기 가슴을 짚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난 강남 모용세가의 사람이오. 그 증거가 바로 이 옥벽이지. 누구든지 옥벽을 가지게 되면 강호 사람들을 위해 대사를 이를 수가 있소. 다만 협의(俠義)를 중히 여기는 내 뜻과 어긋나지만 않으면 되오. 이 옥벽을 내놓을 테니 오만 냥만 빌려 주시오."
모용준은 이 자리에서 자신의 재산을 저당잡히겠다고 나왔다. 일단 옥벽을 잡고 있으면 자신의 신변은 보호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곧 그 반응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서로가 옥벽을 차지하 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 아우성을 헤치고 한 건장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난 북방 성원표국(猩猿 局)의 국주(局主)외다. 내가 오만 냥의 은자를 내고 모용 공자의 신물(信物)을 갖겠소."
곧 그는 품속에서 은표 뭉치를 꺼내 사자우에게 내밀었다. 사자 우가 은표를 집으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껄껄 하며 괴상한 웃음 소리를 냈다. 그는 머리를 어깨까지 길게 풀어헤치고 있었는데 마치 마귀를 연상하게 하는 형색이었다. 그가 빠르게 달려오더니 성원 표국의 국주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내가 이 옥벽을 받지 않으려는데 누가 감히 받는다는 말이냐?"
그는 들고 있던 죽장으로 은표 뭉치를 공중으로 날렸다. 은표들은 공중에서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때를 맞춰 그가 몸을 공중으로 띄우더니 세 바퀴를 선회하며 그 은표들을 모두 걷어들였다. 은표는 한 장도 남김없이 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내 은표를 누가 빼앗을 속셈이냐?"
국주가 이렇게 외치면서 주먹으로 난발을 한 사내의 가슴을 향해 세 번 연거푸 공격했다. 사람들은 이제 그가 쓰러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전혀 요동도 하지 않은 채 말짱했다. 다시 국주가 주먹을 날리자 그는 하나, 둘, 셋! 하며 숫자까지 세는 여유를 부렸다.
"네 놈이 날 세 번이나 주먹으로 때렸겠다. 내가 누구라고 감히 주먹질이냐? 하지만 내 오늘은 그냥 참겠다."
성원표국의 국주는 큰 수치를 당하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사자우에게 도움을 청했다.
"유운장 사람들은 저 놈이 내 은자를 빼앗는 걸 보고도 관계하지 않는단 말이오?"
그러자 사자우가 유유작작한 태도로 대꾸했다.
"난 어차피 장사만 끝내면 되니까, 장사만 방해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환영한다구."
국주의 노기는 밤하늘을 환하게 밝힐 정도로 커졌다.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얼굴을 돌려 마귀의 모습을 한 사내를 노려보았다.
"내가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다시 주먹질을 하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마귀 같은 괴한은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내리며 그의 주먹을 모두 피했다. 사람들은 벌써 결과를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귀를 닮은 그가 일침을 쏘았다.
"원 국주, 난 그대의 은표를 이미 갖고 있기 때문에 참는 거요. 하지만 계속 귀찮게 군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다시 국주가 공격할 태세를 갖추자 마귀를 닮은 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곤 손으로 살짝 국주를 건드리자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국주를 두 사람이 나와 부축해 가지고 나갔다. 마귀 같은 자가 음흉한 웃음을 남기며 자리를 뜨려고 하자 사자우가 가로막았다.
"그만 가려는가?"
"난 모용 공자를 낙심하게 만들 수도 없고 해불개도 성나게 할 수 없는 입장이오. 그리고 난 이 은표를 그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줄 마음도 없소. 난 이 은표를 가지고 임안에 가 한바탕 즐길 생각 뿐이오."
사자우가 미소지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 그런데 자낸 한 가지를 잊었군."
마귀를 닮은 자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뭘 잊었단 말이오?"
"내가 똑똑히 말해 주었을텐데. 나도 은표를 아주 좋아한다구."
그자가 수중에 넣은 은표를 모두 빼앗으려는 속셈이었다. 사자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세 사람이 마귀를 닮은 자에게 덤벼들었다. 유운장 사람들은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공력 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의 무공은 특히 출중하여 모두들 경계를 해온 터였다. 한 사람은 제갈정(諸葛征)이었는데 타락한 선비의 옷차림에 파묻힌 꼴이었다. 그는 가냘픈 손으로 마귀 같은 자의 목덜미에 있는 힘줄을 뽑아 버리려고 했다. 두 번째 사내는 속문성(續文成)
으로 주로 하체를 노렸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석초수(石楚秀)라 불리는 사내였는데 기분 나쁜 웃음을 얼굴 가득 띄 우고는 그의 등뒤를 노렸다. 바로 이들이 북방의 악패인 노독물 신 독행의 제자들이었다.
마귀를 닳은 자는 갑작스런 이들의 공격에 매우 당황했다. 방금 전에 치렀던 국주와의 싸움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
"흐흐, 유운장 네 놈들이 은자를 빼앗겠다는 속셈이군."
마귀를 닮은 자가 이들을 노려보며 뇌까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은표를 먼저 강탈한 것은 마귀를 닮은 자였기 때문이었다.
"당장 싸움을 그만두지 못할까!"
어디선가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은 이들 네 사람이 막 맞붙으려고 할 때였다. 사람들은 감히 유운장의 일에 나서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목소리에서 대단한 내력을 읽어 낼 수 있었기에 모두들 일제히 목소리의 주인을 찾고자 급히 시선을 돌렸다. 부드러운 달빛과 반짝이는 등불을 온몸으로 받으며 우뚝 서 있는 사내는 이제 스무 살 남짓해 보이는 영준한 사내였다.
사자우가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누구인지 얼른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 두려움이 생겼다. 그가 물었다.
"너는 누구냐? 누군데 남의 일에 참견을 하는 건가?"
그러자 영준한 사내가 가까이 다가오며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을 알렸다.
"난 이곳에서 반화대회(盤花大會)가 있다기에 우연히 찾아온 길이오. 그런데 이 무슨 알량한 짓거리들이오. 당신들이 여인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일인데 은자를 놓고 싸움질까지 하다니 정의라고는 정말 찾아볼 수가 없소."
사자우가 불쾌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잠깐, 도대체 누군데 내게 훈시를 하는 거야?"
"아까도 한차례 밝혔듯이 난 종남산 사람으로 왕중양이라고 하오."
사자우가 가소롭다는 듯이 입을 놀렸다.
"그래, 그대는 자기를 대단한 인물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지? 대리(大理)의 남조(南詔) 사람이라고 해서 우리와 대적할 만하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동해(東海) 도화도(桃花島) 사람이라고 해서 우리와 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하하하!"
그런데 사람들 중에서 왕중양의 담력에 감탄한 사람이 나서 한마디했다.
"유운장은 천하에서 가장 큰 부락이오. 당신들한테 도전한 사람이 있는데 싸울 생각은 않고 빈말만 늘어놔서야 되겠소?"
그렇지 않아도 사자우는 느닷없이 자기 일에 시비를 걸고 나선 사내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사람은 체격도 늘씬한 것이 약골은 아닐 것 같다. 천하의 무림 중에서 어느 놈이 유운장이라는 말을 듣고서도 덤비는 어리석음을 범한단 말인가. 그런데 저자가 나선 것을 보면 필시 대단한 무공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잠시 앞뒤를 재보단 사자우가 앞으로 나서며 왕중양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좋다. 그대가 정 나와 싸우고 싶다면 하는 수 없지."
사자우가 훌쩍 몸을 날리더니 매처럼 왕중양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의 공격은 매우 집요하고 오밀조밀했다. 이번엔 다시 굶주린 호랑이가 되어 사정없이 왕중양을 몰아붙였다.
"얏!"
사자우는 주먹으로 치명타를 입힐 만한 곳을 공격했다. 그러나 왕중양은 공격은 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피하기만 했다. 그는 사실 자신이 검을 뽑아 들거나 주위를 둘러보기만 하면 여러 사람이 도와줄 거라 믿었다. 왕중양이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 그가 무공이 딸리기 때문이라 생각한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하나 걸음을 떼려 하지 않았다. 왕중양은 속으로 울분을 참지 못했다. 그것은 여기 모인 사람들이 여인을 노리개 이상으로는 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괜한 싸움에 휘말려들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사람들의 힘을 빌려 더 확실하게 정의를 보여 주려던 왕중양은 비로소 검을 뽑아 들었다.
"좋다! 어디 이 검 끝에 달린 정의의 외침을 들어 보아라!"
왕중양이 무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는 검날이 살기를 뿌려댔다. 그야말로 명가(名家)의 검법을 방불케 하는 솜씨였다. 그러나 내력이 부족한 탓인지 매번 우세를 점하면서도 결정적 인 기회는 얻지 못했다.
한시름 놓고 있는 것은 사자우였다. 처음 검을 뽑아 들 땐 어느 정도 두려움도 없지 않았으나 왕중양이 차츰 내력이 쇠잔해지는 것 같자 여유를 되찾았다. 사자우는 왕중양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의 위신이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죽이더라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끝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강호 사람들이 이 일로 강한 공포심을 갖게 만들어야겠다는 게 그의 속셈이었다. 여유를 되찾은 그가 공격의 속도를 약간 늦추었다.
"네 놈이 그까짓 재간으로 날 넘보려고 하다니, 단단히 각오해 랏!"
다시 사자우가 공중으로 치솟더니 왕중양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왕중양이 공격을 피하면서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역시 밤하늘만 요란스럽게 가를 뿐이었다. 땅에 사뿐히 내려앉은 사자우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며 왕중양이 소리쳤다.
"네 놈의 유운장은 대단할 것도 없다. 난 네 놈과 싸워 공도(公道)를 수호할 생각이다!"
사자우가 비웃듯 웃어젖혔다.
"하하하! 천하에서 으뜸가는 악인과 공도를 논하다니, 네 놈의 머리가 돈 것은 아니냐?"
그러면서 사자우가 다시 주먹질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먹은 그의 몸 뒤로 도는가 싶더니 순간 왕중양의 가슴을 향해 날아 들었다.
"이크!"
왕중양이 급히 몸을 피하느라 옆에 있던 모용준 앞에까지 물러섰다. 모용준이 손을 내밀어 입으로 피를 흘리는 왕중양을 부축했다.
"선생, 당신의 용기에는 탄복하는 바이오. 하지만 단지 용기만으로 살 수는 없는 일이오."
모용준의 눈빛에는 감동의 빛이 어렸다. 왕중양은 모용준의 말속에 기회를 엿봐 자리를 피하라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았다. 모용준은 왕중양이 사자우에게 큰 화를 입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진심 으로 걱정해 주었다.
왕중양이 입가로 흘러내린 피를 훔치며 예를 갖췄다.
"강남의 모용 가문에 대해 고마움을 드립니다."
자세를 다시 추스린 왕중양이 사자우에게 달려갔다. 사자우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변해 갔다. 그는 간단하게 왕중양을 물리쳤다면 더욱 천하 무림의 호걸들 앞에서 위신을 세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괜한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아 이쯤에서 끝내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더욱이 왕중양이 검을 세워 든 채 비장한 기운으로 다시 공격해 올 줄은 몰랐었다.
"받아랏!"
왕중양의 공격을 피하면서 사자우는 얼른 손을 써 검을 작신 부러뜨렸다. 그러나 왕중양은 몸을 한차례 움찔거리더니 곧 공격을 가해 왔다. 다급해진 사자우가 얼른 잔꾀를 부렸다.
"제갈정! 내가 저 놈과 싸운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러니 그대가 대신 요절을 내게나."
제갈정은 몇몇 유운장의 제자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자에 속했다. 그는 꼬마 사숙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았다. 또한 그는 교활한 자여서 왕중양을 때려눕혀야 한다는 것쯤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 다. 왕중양 앞으로 나온 그가 허연 이빨을 내보였다.
"너의 버릇은 내가 고쳐 주마!"
잠시 살기 어린 눈초리로 왕중양을 노려보던 그가 갑자기 점잖은 태도를 취했다. 그는 무인(武士)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문사(文士)인 듯 행동하려 했다.
"창생이 가련해도 나는 애닯게 여기지 않고 인간이 목숨을 살리려 해야 나는 가련히 여기노라!"
그는 시구를 읊조리듯 하더니 곧 야윈 손을 왕중양을 향해 내뻗었다.
"자, 받아랏!"
왕중양이 다시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겨우 세 합도 넘기지 못해 왕중양은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제갈정은 틈을 주지 않고 공격을 해왔다. 퍽! 하는 소리가 나더니 급기야 왕중양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난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대협인 척하는 것을 가장 미워하지. 바로 너 같은 놈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말을 마친 그는 다시 뒤로 물러난 왕중양을 향해 주먹을 던졌다.
"윽!"
역시 왕중양은 공격을 피하지 못한 채 가슴을 얻어맞고는 더 멀리 뒤로 휘청거리며 밀려나고 말았다. 왕중양의 얼굴은 피로 얼룩 졌다. 이미 가슴에서 참기 힘든 동통(疼痛)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갈정을 쏘아보는 눈초리만은 여전히 매서웠다. 강한 공격에도 굴하지 않는 왕중양을 본 제갈정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진정한 대협의 기백을 갖추고 있는 사람일지 모른 다는 생각에 제갈정이 의미로운 눈빛을 지었다. 그가 보기엔 왕중양이 무공을
조금 더 연마한다면 곧 강호에서 제일가는 고수가 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제갈정은 한 가지 속으로 다짐했다. 만약 왕중양이 강호의 고수가 된다면 후환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그를 없애버리는 게 나을 거란 계산을 했다. 그는 자기의 '제갈무후십팔변(諸葛武侯十八變)'초수로 끝장을 내려고 했다.
"각오해라!"
제갈정이 주먹을 날렸다. 그 주먹은 왕중양에게로 날아가다가 갑자기 돌변을 했다. 왕중양이 용케 주먹을 피하는 것을 느낀 그는 얼른 장(掌)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우욱!"
영락없이 그의 장은 왕중양의 가슴을 강타했다. 울컥하고 왕중양의 입에서부터 피가 토해졌다. 그것은 입에서 난 것이 아니라 속으로부터 올라온 시커먼 피였다. 왕중양은 전력을 다해 또다시 공 격해 들어오는 그와 장을 막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장이 팔꿈치로 바뀌어 왕중양을 가격했다. 왕중양이 또 피를 쏟았다.
왕중양은 기력을 잃고 말았다. 그는 종남산 밑에서 열심히 무예를 닦았었다. 그런데 이처럼 보잘것없는 꼴로 휘청거리다니. 그는 속으로 매우 원통해 했다.
"이젠 마지막이다!"
제갈정이 회심의 일격을 날리기 위해 기를 모았다.
사자우가 낄낄거리며 한마디했다.
"히히, 왕중양. 자네가 살고 싶으면 이 자리에서 큰소리로 말해 보게. '좋은 사람 노릇을 하면 손해를 보게 되니 천하에서 가장 큰 악인이 되는 게 낫다'고 말일세."
그러나 왕중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제갈정에게 죽는 한이 있어도 그 따위 말은 입에 담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갈정이 화를 버럭 내며 왕중양을 다그쳤다.
"사숙님이 네 놈에게 특별히 기회를 주셨다. 어서 그대로 외치란 말이야!"
왕중양이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자 그는 다시 장을 날렸다.
"아악!"
왕중양의 몸은 공중으로 떠올라 멀리 날아갔다. 제갈정이 빠른 걸음으로 쫓아가 다시 왕중양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래도 따라 하지 않을 것이냐?"
왕중양이 숨을 몰아쉬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죽어도 그럴 수는 없다!"
사람들은 서서히 왕중양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섣불리 어느 누구도 유운장 사람들에게 맞서 나서는 자는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닥쳐올 재난을 먼저 염두에 두는 듯싶었다.
이때까지 싸움을 안타깝게 지켜 보던 모용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갈 선생, 당신은 우리 가문의 안면을 봐서라도 그를 풀어 주는 게 어떻겠소."
"강남의 모용씨라? 이전에는 강호에 그같은 이름이 있었지. 하지만 그들은 모두 깡그리 죽어 버렸는데 무슨 소리!"
제갈정은 물러설 기미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모용준은 그가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 하는 말이란 것을 알았다. 모용준은 속으로 조만간 강남 모용 가문의 사람들을 동원해 유운장을 물리칠 것을 다짐했다. 모용준은 제갈정의 말에 분노가 치솟았으나 억지로 삭이면서 미소 지었다.
"제갈 선생, 당신은 비록 북방에서 제일 큰 부락인 유운장 사람이지만 우리 강남 모용씨와는 아무런 원한도 없지 않소? 그런데 왜 우리 가문을 모욕하는 것이오?"
그러자 옆에 있던 속문성이 대신 대꾸하며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너희들 모용세가가 무엇이 대단하단 말이냐? 떨어진 낙엽이요 거리에 구르는 개똥보다 못한 세력을 갖고서!"
모용준의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하하하! 천하의 무림인 우리 가문을 너희 놈들이 감히 넘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그러면서 모용준이 고개를 돌려 여러 호걸들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 속문성과 나눈 말 때문에 사람들의 가슴을 자극시켰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제갈정의 웃음 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헛헛헛! 모용준, 지금의 너희 가문은 작파한 지 오래라는 것을 알아 두라구! 또한 한 사람이 더 그 가문을 볼품없게 만들고 있기도 하지."
"뭐라구?"
"왜, 내 말이 틀렸냐? 코끼리가 돼지를 낳고 돼지가 고양이를 낳더니 종국에는 개새끼 한 마리가 태어난 꼴이 아니고 무엇이더냐 ? 모용세가 사람들은 비록 무능하기는 해도 생김새야 그만하면 됐지. 그런데 어째서 개보다 못한 너 같은 놈이 태어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하하!"
사람들은 어렴풋이 유운장 사람들의 속셈을 간파해 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단순히 은자를 강탈하기 위해 지금까지 싸움을 걸고 또 부추기고 한 것이 아니었다. 유운장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누군가를 치려는 목적이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무공이 약한 왕 중양을 죽이고서야 어디 유운장의 체면이 서겠는가. 그래서 모용준에게로 그 살기 어린 시선을 돌리려는 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방해를 하고 나선다면 유운장과는 원수가 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
었다. 사람들은 내심으로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쉽게 일어설 생각은 하지 못했다. 모용준이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왕중양을 돌아보았다.
"왕 공자, 나의 이 옥벽을 그대가 가져 가시오. 조만간 쓸모가 있게 될 것이니."
다시 고개를 돌린 모용준이 이번엔 제갈정에게 일렀다.
"제갈정, 네 놈의 사숙 사자우와 사생결단을 낼 것이다!"
모용준이 으름장을 놓자 석초수가 히히덕거리더니 가슴을 활짝 폈다.
"헤헤헤, 네 놈이 그까짓 재간을 믿고 감히 사숙님께 도전을 하겠단 말이냐? 죽고 싶어서 발광을 하는구나. 그러지 말고 나와 한 판 붙어 보는 게 어떠냐? 내가 네 놈을 죽여 버리면 천하가 다 태 평해질 텐데, 어때?"
석초수가 곧 몸을 용수철처럼 오무렸다 펴더니 모용준에게로 날아왔다. 그는 팔과 다리를 전혀 쓰지 않고서도 순식간에 모용준 앞까지 왔다.
"내 무공을 한번 볼테냐?"
석초수가 소리를 내지르며 모용준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중얼중얼 혼자말을 흘렸다.
"우리 삼형제는 사부님의 계승자들이지. 하지만 내가 큰형이나 둘째 형보다는 더 지독한 악인이란 점을 명심하라구!"
그러자 멀찌감치 물러나 있던 제갈정이 못마땅하다는 투로 받아 쳤다.
"뭐라고! 네가 나보다 더 악하다구? 난 지난번 석우촌(石半村)에서 한번에 사내 서른일곱 놈과 계집 넷을 죽였단 말이다. 흐흐, 물론 계집들은 그냥 죽인 것은 아니지. 그래도 나보다 더 악인이라 말할 수 있느냐?"
그 말에 석초수가 잠시 공격을 멈추더니 싱긋 웃었다.
"그게 뭘 대단하우? 난 일전에 그 소의촌(小依村)에서 계집을 꾀어 내어 그 에미 앞에서 실컷 가지고 놀았소이다. 또 나중에는 에미를 그 계집 앞에서 똑같이 주무르기도 했었지. 흐흐흐!"
속문성이라고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는 더욱 요상한 소리로 웃어대더니 말을 꺼냈다.
"힛힛, 두 사람 모두 나보다는 악하다 할 수 없소. 난 평양지(平凉地)에서 백여 사람이 물을 길어 마시는 우물에다 독약을 넣어 그 촌의 사람들을 몽땅 죽여 버렸소. 어떻소? 이만하면 악인 중에 악인이 아니겠소?"
이들 형제들은 모용준과의 싸움은 뒷전이라는 듯 자기들의 전과를 늘어놓기에 정신이 없었다. 이들 형제들의 묘한 말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악인으로 이름이 나 있는 자들이지만 이처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떠벌릴 줄은 몰랐었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흥이 나서 더 지독한 일들을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한참 후에 제일 큰형인 제갈정이 일침을 놓았다.
"그럼 좋다. 우리 세 형제가 왕중양 이 놈을 괴롭히는 시합을 하면 되겠군. 저 놈이 죽자고 해도 그럴 수 없고 또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만드는 사람에게 두 사람이 머리를 숙이는 시합이다!"
그의 말에 속문성과 석초수가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들은 주위에 누가 있는지 그리고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조차 알고 있지를 못했다. 이들의 눈에는 강호객들이나 왕중양 이나 모두 자기 내키는 대로 죽여 버릴 수 있는 하찮은 존재로만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제3장 검으로 얻은 미인
해볼개가 넌지시 사자우에게 청했다.
"사 선배님, 난 당신께 은자를 드렸으니 여인을 주셔야지요!"
그러자 옆에 있는 자지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사자우가 간사하게 웃어댔다.
"헤헤헤, 이처럼 아리따운 미인을 그대에게 내준다면 난 바보가 되는 셈인데? 머리칼도 이처럼 아름답고 부드러운 미인을 우둔한 너에게 준다는 것은 섭섭한 노릇이지."
주위를 짧게 돌아보던 해불개가 사자우에게만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겠소. 그렇게만 해준다면 훗날 꼭 오만 냥을 더 내리다."
사자우의 눈빛이 순간 의미있게 반짝였다. 그는 예리한 눈으로 해불개를 잠시 쳐다보았다.
사자우는 혀를 끌끌 차더니 자지의 손목을 끌어다 해불개에게 넘겨주었다. 갑자기 환호성이 터졌다. 미녀가 자기들 손에 넘겨지자 해불개의 수하 사람들이 한시름 놓고 환호를 지른 것이었다. 해불개가 그윽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자지 소저, 날 따라가면 끝없는 부귀를 누리게 될 것이오."
기쁨에 취해 있던 사내 중 하나가 아직 여인이 알몸인 것을 보고는 얼른 옷을 입혀 주려고 했다. 그러자 해불개가 제지했다.
"만지지 마! 내가 입힐 것이다."
달빛 아래에 드러난 여인의 알몸을 능글맞게 들여다보며 해불개가 천천히 옷을 입혔다. 옷을 입은 자지는 더욱 절색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얌전을 빼는 듯 입을 확 다물고 있었다.
여인마저 빼앗긴 모용준은 화를 누를 수 없었다.
"않돼! 그렇다면 내 보물을 돌려줘!"
여인을 손에 넣을 수 없다면 보물은 다시 건네 받아야 도리였다. 그러나 사자우는 코방귀를 뀌며 고개를 흔들었다.
"흥, 그대가 내게 구슬 꾸러미와 반지를 예물로 바치는 것을 모두 지켜 봤는데 이제 와서 무슨 어거지야?"
결과적으로 모용준만 당한 꼴이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는 목줄기에 힘줄을 새겼다.
"네 놈이 이 모용준을 업신여길 수 있다고 보느냐?"
모용준이 사숙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모용준은 팔방에서 비 내리는 '팔방래우(八方來雨)'초수를 썼다. '사숙이 살짝 모용준의 공격을 피했다.
"헤헤, 내가 강호 사람들과 싸우게 되면 언제나 손해를 보았지. 그러나 네 놈과의 싸움에선 결코 손해가 없다고. 왜냐하면 우리는 둘 다 난쟁이이니까!"
그러면서 사자우도 자세를 취하더니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정말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처럼 싸웠다.
한편 수세에 몰려 더는 빠져 나갈 틈을 찾지 못하고 있는 왕중양은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세 명의 사형제(師兄第)가 왕중양을 상대로 누가 더 악한인지를 가르는 시합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악인 중의 악인으로 소문이 나 있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역사 속의 인물 가운데 세 사람을 악인으로 숭배해 왔다. 한 사람은 폭군으로 알려진 진시황(素始皇)이었다. 진시황은 육국(六國)을 멸하고 사람들을 못살게 군 천하에서 으뜸가는 폭군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여인의 신분으로 황제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였다. 그녀는 진시황 못지않게 독한 면을 지닌 여인이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금조(今朝)의 전임 재상이었던 진회(素檜)였다. 진회는 악인으로 줄곧 십삼도(十三道)의 금패(金牌)를 받은 자이기도 했다. 그는
황용부(黃龍府)의 악비(岳飛)를 해쳤으며 송실(宋室)의 금수강산을 절반이나 금나라에 넘겨준 장본인이다.
대악인인 이 세 사람을 숭배하는 그들은 노독물 신독행에게서 무공을 배웠다. 이들은 비록 노독물의 절세 절기인 봉황력(鳳凰力)과 합마공(蛤蝶功)은 익히지 못했지만 대단한 무공을 가진 자들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제갈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장으로 가격하여 저 놈의 기(氣)를 헛돌게 만들 것이니 잘 지켜 보거라!"
왕중양은 피할 기력도 없었고 몸을 사린다고 해서 안전할 수도 없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곧바로 제갈정의 장이 날라왔다. 왕중양은 가슴을 얻어맞고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심장이 터 질 것 같고 혼백마저 뿔뿔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으으……."
왕중양이 신음을 토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장에 밀려난 왕중양이 그대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넘어지려는 그를 뒤에서 석초수가 받쳐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들의 시
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왕중양은 입과 귀로 붉은 선혈을 뿜어냈다. 그러나 치명타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왕중양을 통해 자신들의 악랄함만을 보이면 되었기에 섣불리 죽이지는 않았다. 다시 제갈정이 괴성을 지르며 왕중앙을 향해 일격을 가했다. 왕중양은 뒤로 쓰러지지도 못한 채 그 장을 가슴으로 고스란히 받았다.
"으윽!"
왕중양은 심한 타격을 입었다. 그는 더 이상 강호의 무림으로 남아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번엔 속문성이 잘근잘근 말을 씹듯 내뱉으며 나섰다.
"훌륭하오! 큰형님이 장력으로 놈의 공력을 없애 버렸으니 난 사내 구실을 못하게 만들겠소."
왕중양에게로 다가간 그는 거만한 태도로 앞이빨을 내보였다.
"넌 천하의 악한 유운장 사람들을 애당초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어. 이제 사내 구실조차 못하게 될 테니 앞으로는 절간에 들어가 살 궁리나 하라구."
그러자 석초수가 자기도 뒤질 수 없다는 듯 미리 다짐했다.
"큰형님의 한 장에 놈의 내공이 달아났고 둘째 형님 덕분에 사내구실마저 못하게 될 테고, 그럼 난 한평생 놈이 약탕 속에서 살게 만들어 야겠소."
속문성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를 끌어 모으며 외쳤다.
"좋다!"
그가 장을 뻗어 막 왕중양에게 회심의 일격을 날릴 때였다. 사람들 속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 왔다.
"잠깐만!"
모두들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모두의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내가 틀림없는데 여인보다 더 깨끗한 용모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 공자는 그야말로 용모가 출중할 뿐만 아니라 전혀 때가 묻지 않은 듯 청아해 보이기까지 했다. 몸에는 소복 단장을 했는데 검은 머리칼과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머리칼은 달빛을 받아 푸른 기운을 머금고 있는 듯했다. 그가 한 손에 검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감싸듯 하면서 사자우에게 읍을 했다.
"사 선생, 당신들은 지금 이곳에서 반화(盤花) 모임을 갖고 있는 건지 아니면 살생의 잔치를 열고 있는지 모르겠소이다."
그의 말에 사자우는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결국 자기가 하는 일에 방해를 하고자 나선 인물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사자 우는 애써 속으로 뒤틀리는 심사를 억눌렀다. 지레 겁을 먹고는 기꺼이 구경꾼을 자청하고 있는 말은 사람들과는 달리 대단한 각오를 하고 있는 인물이란 생각에 은근히 경계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쩌자는 셈인가? 할말이 있거든 해 보아라!"
사자우가 불쾌한 기색을 털지 못하고 퉁명스럽게 묻자 공자는 약간 머리를 숙였다. 그는 매우 점잖고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사자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유운장이 비록 천하의 으뜸가는 고장이긴 하나 무슨 일을 하든지 자체의 도리는 존재했다고 생각하오. 그런데 지금의 당신들은 이해할 수가 없소. 그저 내키는 대로 하는 것 같은데 유운장엔 남아 있는 법도가 없단 말이오?"
사자우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공자를 주시했다.
"넌 도대체 누군데 남의 일에 참견이더냐?"
공자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밝혔다.
"전 임조영(林朝英)이라 합니다. 유운장 사람들의 처사가 공정하지 못해 이렇게 나선 것이오."
사자우가 헤죽거리며 임 공자를 향해 턱짓을 했다.
"그래,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어서 말해 봐?"
임조영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제게 청이 한 가지 있습니다. 부디 왕 공자를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옆에 있던 제갈정이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왜 저 놈을 놓아달란 말이냐? 한창 시합이 무르익어 가고 있는 판인데!"
임조영이 백옥 같은 이를 보이며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난 꽃을 사려고 합니다. 당신은 장사를 하고 싶지 않소? 유운장에서 이곳으로 올 때는 남과 싸우려는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닐 테지요?"
사자우는 잠시 눈을 감고 고심을 했다.
'젠장, 내가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는 꼴이로구나. 내가 여인들을 수도 없이 구해 왔는데 일이 잘못되어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면 장사고 뭐고 힘들겠지. 장사를 하고 나서 죽이든 살리든 하는 게 낫겠다.'
이렇게 생각을 다진 그는 표정을 바꾸고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목청을 높여 말했다.
"좋다. 반화 모임을 갖자는 데 어려울 건 없지. 꽃을 구경시키지 않고서야 강호의 대협객들을 불러다 무엇을 하겠는가?"
이렇게 사태의 수습책을 찾은 사자우가 기진맥진해 있는 왕중양을 슬쩍 밀쳤다. 왕중양이 맥없이 뒤로 풀썩 허물어졌다. 그는 쓰러진 채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흐릿한 시선 속으로 사람들의 모습 이 보일 듯 말 듯 잡혔다.
'강호 사람들이 협의와 담력이 없다고 무시할 것만은 아니로구나, 이렇듯 유운장 사람들이 악랄하고 무공마저 뛰어나니 누가 감히 맞서겠다고 나서겠는가. 맞선다는 것은 곧 목숨을 내놓는 것이 나 마찬가지 결과일 테니까…….'
왕중양이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키며 임조영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때서야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그는 바로 낮에 회모루에서 보았던 그 공자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행여 그 역시 유운장 사람들의 술책에 말려들어 크게 화를 입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왕중양이 가슴의 통증을 참으며 그에게 한마디 던졌다.
"임 공자, 당신은 절대 저 사람들과 대적하지 마시오. 유운장 사람들의 무공이 대단하오……."
그러나 임조영이 걱정 말라는 투로 웃으며 대답했다.
"고맙소. 왕 공자님의 그같은 관심에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왕중양의 눈에도 임조영의 용모가 매우 뛰어나 보였다. 더군다나 사자우와 제갈정 그리고 속문성 등 악인의 무리들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상태라 더더욱 그 모습이 돋보였다.
사자우가 임조영에게 약간 고개를 숙였다.
"공자께서 일깨워 줘서 고맙소. 그렇지 않았다면 대사를 망쳤을 지도 모르지. 이리 오너라!"
그가 소리치자 몇몇 여인들이 걸어 나왔다. 바로 값이 매겨지기를 기다리던 한 무리의 여인들이었다. 어떤 여인은 살갗이 백설처럼 희고 고왔지만 더러는 매우 여위고 생기가 없어 보였다. 또 여유롭게 자태를 뽐내는 여인들도 몇 끼여 있었다.
사자우가 음흉스런 표정을 짓더니 조그마한 입을 벌름거렸다.
"모두들 자지 처녀만 좋아하지만 이 아이들도 각기 지닌 맛은 있겠지."
그러더니 한 여인을 끌어안고는 희롱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손으로 여인의 여기저기를 쓰다듬고 주무르자 여인이 불가에 놓인 뱀처럼 온몸을 꼬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일부 사내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 한마디씩 교성 같은 말들을 뱉었다.
"아이고 죽겠네!"
그들은 갑자기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 옴을 느끼곤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임조영이 보다못해 한마디했다.
"사자우, 집어치시오. 당신이 데리고 온 여인들은 우리가 본 뒤 데려가면 될 텐데, 왜 하필이면 사람들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이시오?"
사자우의 웃음 소리가 터졌다.
"우하하하! 이 계집을 잘 보란 말이오. 난 이 계집을 그대에게 팔 생각인데 우선 명심해야 할 거라구. 괜히 계집에게 넋을 빼앗겨 장작개비처럼 말라비틀어지지 말고."
그러나 임조영은 그의 말을 흘려 들었다.
"내가 보기엔 당신의 계집들은 쓸 만한 게 없소. 딱 한 계집만 빼고……. 그 계집을 팔 의향이 있소?"
사람들은 일제히 긴장했다. 임조영 역시 자지 처녀를 손가락 끝으로 지목했기 때문이었다. 또 한차례 피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예감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해불개가 발끈하며 나섰다.
"임 공자, 그대는 이미 내가 저 계집을 샀다는 걸 잊었나?"
임조영이 해불개의 말을 무시했다.
"당신 같은 추한 사내를 누가 좋다고 하겠소?"
이때 사자우가 요상하게 눈을 뜨며 임조영에게 물었다.
"임 공자, 그렇다면 자네는 사내가 아니란 말인가? 어째 말하는 투가 계집 같구만. 그래, 이제 보니 이름도 여인네의 것이고……. 혹시 계집이 아닌가?"
임조영이 코방귀 소리를 내며 받아쳤다.
"당신은 물건처럼 팔고 사는 여인이라고 업신여겨도 된다는 말이오?"
임조영은 격분을 삼키듯 입을 굳게 다물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은 임조영의 이런 행동에 새삼 감동을 받았다. 아마도 임 조영이 여인을 존중해 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라고 여기는 눈치였다. 임조영이 시선을 거두어 다시 해불개를 향했다.
"해불개, 자지 처녀를 내게 넘겨주시오."
그러자 해불개가 팔뚝에 앉은 날벌레를 쫓듯 말을 툭 던졌다.
"내가 이미 샀다니까 계속 귀찮게 굴 건가?"
"그러지 말고 처녀를 내게 넘기시오. 유운장 사람들이 당신에게 받은 은자를 모두 돌려주겠소."
해불개가 피식 하고 비웃었다. 그는 순간 임조영을 풋내기로 여겼던 것이다. 사자우가 어떤 인물인데 한번 거머쥔 은자를 내놓는 단 말인가. 그가 만약 은자를 포기한다면 그게 어디 유운장 사람이겠는가. 자선당(慈善堂) 사람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사자우는 결코 그런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강호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임조영의 말을 들을 리 없다고 믿었다.
"자지 처녀의 인물이 워낙 뛰어나 여기 모인 많은 사내들이 모두 탐을 내었지. 그러나 이 해불개가 차지하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 여인이 필요하다면 여기서 마음껏 고르면 되지 않겠는가?"
해불개의 말이 임조영의 귀에 들어올 리가 얼었다. 임조영은 천천히 자지 앞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의 눈길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처녀 앞에서 걸음을 멈춘 임조영이 입을 열었다.
"너는 정령 해불개를 따라갈 마음인가?"
그러자 자지가 임조영에게 눈길을 주며 담담하게 되물었다.
"절더러 어찌란 말인가요?"
임조영이 자지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여인도 필시 사람일텐데……."
그러자 자지 처녀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서럽게 울었다.
"나도 사람이에요. 하지만 이곳에서 누가 날 사람 취급이나 하던 가요? 사내들이 원망스러울 뿐이에요. 난 다시는 사내들과 가까이 하고 싶지가 않아요. 당신도 필요 없으니 내 앞에서 없어지란 말이에요!"
자지는 참았던 눈물을 흘리듯 하염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임조영이 탄식하는 어조로 해불개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이 처녀를 꼭 사야겠소."
해불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거칠게 코바람을 불어댔다. 그리곤 임조영 쪽으로 몇 걸음 내딛더니 가슴을 폈다.
"네가 감히 나와 맞서겠다는 거냐?"
해불개가 입을 씰룩이며 다시 두어 걸음 더 임조영 쪽으로 내딛었다. 그가 남긴 발자국이 달빛에 선명하게 드러났는데 땅이 움푹 파여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해불개는 단단히 화가 나 있는 게 분명했다. 사람들은 해불개가 남기는 발자국을 보며 더욱 긴장했다. 곧 임조영과 해불개가 크게 한판 붙을 찰나였다. 사자우가 예의 웃음 소리를 내며 중간에 나서지 않았다면 그들은 혈전을 벌였을 것이다. 사자우는 훌쩍 몸을 날려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임 공자, 그대가 정 자지 처녀를 사고 싶다면 그렇게 하게나. 그런데 은표를 내겠는가 아니면 주보(珠寶)를 내놓을 것인가?"
임조영이 막 대답을 하려는데 대신 해불개가 격분하여 사자우에게 따져 물었다.
"사자우, 당신은 이 처녀를 이미 내게 팔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려는 거요. 당신이 이처럼 지조가 없는 줄은 내 미처 몰랐소이다!"
사자우가 손을 내저으며 해불개를 진정시키고자 했다.
"서둘지 말게나. 자낸 처녀 하나에 백 사람이 청혼을 한다는 말도 못 들어 봤나? 우선 임 공자가 무엇을 얼마나 내는가를 지켜보자구."
해불개를 일단 잠재운 사자우는 임조영에게 의미 있는 눈빛을 보냈다.
"자네가 은자를 얼마나 갖고 왔는지 어서 보이시지?"
그러나 해불개가 주먹을 움켜쥐며 나섰다.
"집어치워! 누구든 내가 산 처녀를 건드렸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테다!"
그 말이 떨어지자 그의 곁에 있던 세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자세를 추스르기 시작했다. 한 사내는 쌍갈고리를 쓰고 또 한 사내는 장검을 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내는 육각류성색(六角流星索)을 쓰면서 각각 임조영을 에워쌌다. 이들은 거의 동시에 임조영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임조영은 이들이 쓰는 병장기 사이를 드나들며 기회를 엿보았다. 임조영은 한 손에 검을 틀어쥐고 다른 손으로 장을 내뻗었다.
"이크!"
사내들이 불현 공격을 멈추고는 놀라움에 떨었다. 한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마치 검으로 후려치는 것처럼 장이 날카롭게 자신들에게 날아오자 그들은 주춤했다.
임조영의 장의 위력으로 싸움이 중단되었다. 임조영은 때를 놓치지 않고 해불개에게로 다가가 몇 마디 말을 뱉었다. 그러자 해불개의 안색이 변하면서 손을 들어 명령했다.
"모두 무기를 거두어라!"
세 명의 사내들은 무슨 영문이지 몰라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해불개의 심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임조영에게서 들었기에 돌변했는지 사내들은 알아 낼 방법이 없었다. 해불개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서서히 일그러져 갔다. 어스름한 달빛을 받은 그의 안면은 시체의 그것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그는 임조영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는 듯싶었다.
"좋소, 나와 형제들은 임 공자의 말대로 하겠소. 자, 모두들 가자!"
해불개가 형제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나자 사자우는 내심 흐뭇했다.
"해불개, 그럼 은자는 돌려줄 수 없소이다!"
해불개의 축 처진 어깨를 향해 사자우가 소리쳤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사자우는 임조영을 쳐다보며 눈을 꿈벅였다. 해불개의 성격으로 순순히 물러나는 게 의아했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군! 자네가 무슨 말을 했기에 저토록 풀이 죽어 가는지 도통 모르겠어.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임조영은 그의 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다시 자지 처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저는 날 따라가겠는가?"
자지 처녀의 눈빛은 아직 물기에 젖어 있었다. 그녀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임조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저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 어서 말해 봐."
자지 처녀가 한참을 고심하던 끝에 비로소 입을 열어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따라가겠어요."
임조영이 흡족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으려는데 제갈정과 석초수 그리고 속문성이 장벽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갈정이 전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임 공자, 무림에는 그대와 같은 미남자는 드물지. 그대가 날 따라 유운장에 가는 게 어떤가? 내가 사부님께 말씀드리면 그대를 측근으로 기꺼이 삼으실 걸세."
그 말을 들은 임조영이 눈을 치켜 뜨며 검으로 제갈정을 찌르려고 했다. 속문성이 껄껄 웃으며 제지했다.
"과연 훌륭하군. 성미도 패나 호걸답네그려. 정말 우리를 따라 유운장으로 가는 게 좋겠어. 임 공자만 우리 편이 돼 준다면 강호 사람들이 엉뚱한 마음을 품을 수 없을 테니."
석초수도 한마디하며 나섰다.
"그대가 우리를 따르겠다면 내가 아주 즐겁게 노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그 방면에서는 내가 제일이거든. 어때?"
임조영이 다시 검을 높이 쳐들자 이들도 더 이상의 입씨름은 통하지 않을 거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곧 네 사람은 한데 엉켜 싸움을 시작했다.
그런데 불쑥 사자우가 제동을 걸었다.
"모두 손을 멈춰라!"
사자우는 임조영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은 독가시가 들어 있는 듯 날카롭고 매서웠다. 사자우는 부릅뜬 눈을 약간 누그러뜨리며 이죽거렸다.
"과연 좋은 몸매야. 사부님한테 데려간다면 난 어쩌지?"
그가 다시 요상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에헤헤, 유감스럽게도 난 여인이 아니거든. 사형께서는 미남자를 좋아하지만 난 역시 여인이 최고야."
임조영은 솟구치는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떨며 사자우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사자우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입을 놀렸다.
"그렇다면 어서 말해 봐. 자넨 무엇으로 자지 처녀를 사려나? 자네에게 오늘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은자를 합친 것보다 많다면 모르지만……."
"없소!"
너무도 쉽게 대답하는 임조영의 태도에 모두들 놀랐다. 사자우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안 되겠구먼. 그만한 은자가 없다면야 이 옥 같은 계집의 손목조차 만질 수가 없지."
임조영이 손에 들린 검을 사자우 얼굴 가까이 불쑥 내밀었다.
"난 이 검으로 저 처녀를 얻겠소이다."
코웃음을 치던 사자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동안 하늘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팔짱을 끼며 입을 메었다.
"좋아, 나와 싸워 보겠단 말이지? 어디 한번 두고 볼까!"
사자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러는 앞으로 몇 걸음 다가와 좀더 자세히 보려는 동작을 취하기도 하고 더러는 겁먹은 기색으로 뒤로 물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들 또다시 벌어지게 될 싸움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해불개와 모용준, 왕중양과 유운장 사람들의 싸움이 있었고, 지금은 임조영이 감히 유운장 사람들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무림의 사람들은 이처럼 흥분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임조영이 검을 단단히 쥐고는 사자우를 겨누었다. 사자우가 기를 온몸에 모으려고 할 때 제갈정이 나섰다.
"사숙님, 제가 대신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수다!"
그러더니 그가 가볍게 몸을 날려 임조영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곧 주먹을 휘두르며 임조영의 안면을 공격했다.
"각오해라!"
임조영이 주먹을 피하며 검으로 허공을 그었다. 달빛 아래라 이 들의 동작은 그다지 선명하게 드러나지를 않았다. 다만 임조영이 휘두르는 검날이 허공을 긋는 소리나 제갈정이 주먹을 날리며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모습만 어렴풋이 확인될 뿐이었다. 옆에 있던 속문성이 마치 제갈정의 싸움을 방해라도 하듯 엉뚱한 소리를 중얼거렸다.
"잘하는구먼. 큰 사형, 힘을 내시오. 형님이 죽으면 결국 내가 형님의 집까지 책임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큰일이지요. 형님의 딸년을 내가 기꺼이 거두어야 하는데 그럼 형님의 사위가 되는 꼴 이 아니겠소?"
제갈정이 그 소리를 못 들을 리 없었다. 임조영과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면서 얼른 고개를 돌려 꾸짖었다.
"개만도 못한 놈이로구나! 날 언제까지 놀릴 셈이냐?"
그리곤 다시 주먹을 내뻗으며 임조영에게로 달려갔다. 휘릭! 임조영의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제갈정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은 임조영이 재빠른 동작으로 검을 내리쳤다. 겨우 검을 피한 제갈정이 숨을 몰아쉬며 자세를 수습하기에 바빴다.
사람들은 임조영의 검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유운장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잡아먹을 듯 헐뜯는 꼴에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천하의 악인이라고는 하지만 해도 너무 한다 싶었다. 사형이 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가 죽기를 바라는 행동은 도저히 이해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제갈정은 속문성이 마음에 걸리는지 분통을 터뜨렸다.
"이 개만도 못한 놈아, 일전에도 넌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내 여편네에게 독약을 써 죽이지를 않았느냐? 내 여편네가 무슨 원수진 일을 했다고 죽였느냐?"
그러자 속문성이 빈정거리며 대꾸했다.
"히히, 형님은 벌써 잊었소이까? 형님은 평소 쭈글쭈글 칠면조 같은 마누라의 낯짝이 보기 싫다고 하지 않았소. 그래서 내가 그것을 없애 버린 것인데 오히려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오. 만약 형님이 죽였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원망을 했겠소? 난 형님의 마누라를 죽인 대가로 악인의 자리를 굳히는 것이고, 형님은 다시 꽃 같은 여인을 맞이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 아니겠소?"
제갈정이 이를 갈며 속문성에게 뭐라고 소리치려다가 그만두었다. 갑자기 눈앞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어느새 달려온 임조영 의 검이 그의 팔에 꽂혔다. 임조영은 처음부터 자신이 유리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치명타를 입히지 않고 팔을 찌르는 것으로 끝내고 싶었다. 제갈정은 맨손이라 남이 보기에도 불공평한 싸움이 아닐 수 없었다.
상처를 입은 제갈정이 속으로 뇌까렸다.
'처음부터 둘째 놈은 내가 지기를 바라고 있었구나. 내게 말을 걸어 온 것도 결국 정신 집중을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었음을 내 어찌 간파해 내지 못했던가!'
제갈정이 속으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해 심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 바람에 봉두난발이 마구 흘날렸다.
"임 공자, 네 놈이 날 봐주는 것 같은데 어서 덤비거라! 이번엔 제대로 검을 쓰게 만들어 주마!"
제갈정이 품속에서 부채를 꺼내더니 쫙 펼쳐 들었다. 그가 임조영을 향해 부채를 내갈겼다. 임조영이 옆으로 비껴서며 다시 검을 높이 쳐들었다. 임조영은 곧 '숙녀개장(淑女개壯)' 초수를 썼다. 이 초수 앞에서는 제갈정의 부채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곧 오른손을 찔리고 말았다. 찔린 곳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를 악문 제갈정의 눈에서는 불길이 이글거렸다.
"죽여 버릴 테다!"
그러자 속문성과 석초수가 손뼉을 치며 웃어댔다.
"하하하! 큰형님, 형님은 학식이 있는 사람인데, 어째서 임 공자와 문재(文才)를 겨뤄 보지 않소?"
이들은 제갈정이 어서 죽어 넘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히히덕 거리며 화를 돋우었다.
제갈정과 임조영의 싸움을 지켜 보던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임조영의 검술이 매우 다양하며 신기에 가깝다는 사실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드디어 제갈정이 싸움을 포기하고 물러서자 사람들은 더는 숨기지 않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 주었다.
유운장의 위신이 바닥에 떨어진 꼴이 되고 말자 사자우가 크게 분노하며 제갈정을 꾸짖었다.
"제갈정! 역시 속문성에게 네 놈을 죽이고 네 딸년을 가지라고 해야겠다!"
속문성은 사자우가 정말 그러라는 줄 알고 양손을 황급히 휘저으며 질겁을 했다.
"이그 싫소. 그 딸년은 워낙 추물이라 내 거두기를 사양하겠소."
사람들이 그 말에 박장대소를 하며 허리를 꺾었다. 사자우가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임 공자, 할 수 없으니 내가 상대를 해야겠다. 네가 날 이긴다면 자지 처녀를 데려가도 좋다."
임조영이 검을 다시 빼들고는 사람들이 빙 둘러싼 한가운데로 나와 섰다. 사자우도 그 앞에 말없이 버티고 섰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어느 쪽에서든지 긴장을 늦추기라도 하면 엄청난 혈투가 벌어질 것만 같았다. 사람들 모두 숨죽이면 다음을 기다렸다.
"야앗!"
임조영이 먼저 검을 휘둘러 공격을 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눈길을 빼앗겼다. 그의 검술은 마치 미풍에 간들거리는 버들가지처럼 날렵하고도 유연한 자태를 자아냈다. 또한 검법 역시 처음 보는 기이한 것이라 사람들의 휘둥그래진 눈은 좀체 원래의 상태를 찾지 못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훌륭한 검객들도 적지 않았지만 임조영의 초식을 알아낼 만한 인물은 없었다. 그렇다면 임조영이 부리는 초식은 허식(虛式)이란 말인가? 사자우도 처음 보는 검법에 매우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임조영의 검을 피하기만 하고 선뜻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 검을 받아랏!"
다시 임조영이 소리치며 검법을 밤하늘에 뿌렸다. 이때 사자우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언뜻 보기에 흔한 병장기 같지는 않았다. 그 물건은 희한하게 생겼는데 국자가 달려 있는가 하면 등을두드리고 긁는 데 쓰는 작은 방망이와 갈고리 등등 매우 요상한 물건들이 달려 있었다. 병장기라 함은 대개 창이나 검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의 것은 장난감처럼 보이는 매우 신기한 물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틈을 이용해 공격하려는 듯 싶었다. 아
니나다를까 사자우가 작은 국자를 들고는 임조영의 가슴을 할퀴듯 공격을 해왔다.
"에잇!"
임조영이 검으로 그의 공격을 물리치며 그를 쏘아보았다.
"네 놈을 죽이고야 말겠다!"
사자우도 뒤질세라 국자를 자기 어깨 위로 거두며 받아쳤다.
"나의 사형이 왜 여색을 즐기지 않고 남색을 좇는지 오늘 밤 네놈을 보고서야 알겠다. 지금이라도 나를 따라가는 게 어떠냐?" 임조영을 흥분시켜 빈틈을 엿보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다시 임조명의 검날이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쨍!"
국자와 맞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두 사람간에 엄청난 내력과 기공이 교차했다. 사람들의 입에선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사자우의 손에 들려 있던 작은 국자가 사라지고 없었다. 다른 손에 있던 갈고리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임조영의 검에 멀리 날아간 것이라 사람들은 생각했다.
사자우가 넋 나간 얼굴로 임조영을 주시하더니 힘없이 내뱉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나의 사형도 마찬가지야. 우리 유운장 사람들을 당해 낼 자가 중원엔 없다고 했는데……."
위기감에 봉착한 사자우가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곤 유운장 무리들에게 급히 소리쳤다.
"어서 여기를 떠나자!"
사자우의 명령이 떨어지자 몇몇이 토끼 걸음으로 통통 튀듯 사라 졌다. 제갈정과 속문성 그리고 석초수 역시도 사태를 깨닫고는 얼른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이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임조영이 막아 섰다.
"도망가는 놈부터 차례대로 목을 날릴 것이다!"
그러자 세 사람은 발이 묶인 듯 제자리에 멈춰 서 버렸다. 제갈정이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를 겨우 흘렸다.
"난 지금 막 생각을 고쳐 먹었소이다. 내가 왜 도망을 친단 말이오. 당신은 천하에서 가장 신의를 지킬 줄 아는 대협사(大俠士)이시오. 난 당신에게 패하여 죽더라도 영광으로 삼겠소."
속문성이 제갈정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나섰다.
"맞소. 저 사람은 천하에서 제일가는 대협이라 불러도 마땅하오. 우리 유운장을 이겼으니 달리 할말이 없소."
석초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옳소, 그렇지만 당신은 천하에서 제일가는 대협이기에 우리 같은 무리들은 죽이지 않을 거라 믿소. 당신이 만약 유운장을 패하고자 한다면 사숙님부터 없애는 게 순서요. 악한으로 말하자면 사숙 님을 따라갈 이는 없으니까. 그 다음이 바로 큰형 님이오. 그리고 한 가지 말해 둘 것은 당신은 결코 큰형님이 외는 지호자야(之乎者也)에 마음을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큰형님이야말로 악인이오. 또한 그 다음이 둘째 형님이오. 저 사람은 한 가문의 사람들만을 해치기 좋아
하는 자란 말이오. 늘 큰형님을 내치고 그 딸자식을 빼앗을 궁리만을 일삼고 있소."
임조영이 조소를 보냈다. 이들은 곧 죽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사형으로 모시던 사람들을 헐뜯는 사내의 비굴함을 보자 임조영은 더욱 가증스러웠다. 임조영이 눈길 조차 주지 않은 채 말을 씹듯 내뱉었다.
"제갈정, 네 놈의 그 은자들을 어서 내놓아라!"
그러자 제갈정이 난처한 낯빛으로 사정했다.
"곤란하오. 군자인 내가 어찌 재물을 탐하겠소만 만약 사숙이 날 불러 은자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난 끝장이오. 그러니 제발 은자만은……."
임조영이 말없이 검을 높이 쳐들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아니지. 사숙은 벌써 멀리 도망을 쳤지!"
제갈정이 얼른 태도를 바꾸더니 임조영에게 살갑게 굴었다.
"이 은자야 이젠 임 공자의 것이지. 암, 임 공자가 쓰고 싶은 대로 써야 한다니까. 내가 은자를 내놓겠소."
제갈정이 얼른 은자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제갈정은 사숙의 교활함에 치를 떨어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은자는 사숙이 지녔었다. 그런데 사태가 불리하게 되자 얼른 자리를 피하면서 제갈 정에서 떠넘겼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제갈정은 속으로 잔뜩 몰려드는 먹구름에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만일 은표를 빼앗겼다고 하면 사숙이 가만있지 않을 게 불 보듯 했기 때문이었다. 은표까지 빼앗기기 전에 도망갈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제갈정이 눈을 돌려 두
사제를 응시했다. 이들 세 사람은 도망칠 기회를 엿보기 위해 서로 눈짓을 맞추는 중이었다.
"너희 세 놈은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그런데 임조영이 뜻밖의 말을 던지자 이들은 될 듯이 기뻐했다. 이들은 임조영에게 연신 허리를 굽히고는 줄행랑을 쳤다. 그런데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싶었는지 그중 하나가 뒤를 돌아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임 공자, 후에 다시 만나기만 하면 네 놈의 오장육부를 꺼내 소금에 절여 주겠다!"
임조영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여인들에게 일렀다.
"날이 찬데 어서 옷들을 입거라!"
그러자 여인들이 떨리는 몸으로 옷을 찾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옷을 모두 차려 입은 여인들이 곧 임조영 앞으로 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임 공자께서 저희를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한평생 저희는 임 공자만을 따르렵니다!"
그러나 임조영은 매우 곤혹스런 얼굴로 도리질을 했다.
"아니다. 너희들이 나를 따라 무슨 행복이 있겠느냐? 그리고 난 원래 여러 사람을 이끌고 강호를 다니지 않는 성미이다. 또 가난하여 너희들을 먹여 살리지도 못해."
임조영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은자들을 가리켰다.
"저기에 은자들이 있으니 한 장씩 나눠 가지거라. 그리고 바라건대 좋은 사람의 집을 찾아가서 이제부터 양민으로 평범하게 살았으면 한다."
여인들은 다시 임조영에게 허리를 숙이더니 각자 은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서로 짝을 지어, 혹은 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여인들이 모두 떠나자 임조영은 강호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번 반화 모임은 결국 여러분들에게 실망만 안겨 주게 되었군요. 제가 대신 사죄를 드립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겸손하고 예의 바른 임조영에게 다시 한 번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더군다나 무공마저 뛰어난 임조영과 기꺼이 사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리하여 임조영과 다시 인사를 나눈 이들은 정담을 주고받았다.
모용준이 안면 가득 웃음을 띄우며 임조영에게로 다가왔다.
"임 형을 보니 용봉의 자태요 정말 늠름한 인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세인들 앞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임조영이 그의 인사를 공손히 받아 주고는 두리번거리자 누군가 물었다.
"임 공자님, 누굴 찾으십니까?"
"그게 아니고……, 아까 그 왕 공자라는 분은 어디 계시지요?"
임조영의 말에 모두들 의롭고 용감한 행동을 보이던 왕중양을 떠 올렸다. 그때서야 왕중양을 찾으려고 했으나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가 없었다.
임조영이 아직 가지 않고 서 있는 자지 처녀를 주시했다. 다른 여인들은 모두 제 갈길로 떠나간 상태였다. 자지 처녀는 말없이 임 조영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그대도 은자를 갖고 어서 갈길로 가야지. 부디 좋은 사람 만나 훌륭한 가문을 잇게."
그러자 갑자기 자지 처녀가 눈물을 터뜨렸다.
"임 공자님, 전…… 전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요?"
임조영은 난감해졌다. 사실 처녀의 미모가 뛰어나 함부로 길을 떠났다가는 사내들의 집요한 손길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잘못하다가 방탕한 색마라도 만나게 된다면 결국 방금 전에 벌어졌던 곤혹스러움과 별반 다를 게 없을 듯했다. 임조영이 한동안 자지 처녀를 두고 고심하고 있는데 모용준이 물었다.
"임 공자는 혹시 이 처녀가 마음에 들지 않소?"
그러자 자지 처녀가 자신의 심중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고개를 숙였다.
"임 공자, 당신은 용맹스럽고 출충한 용모를 갖고 있어 아마도 자지 처녀는 당신을 마음에 두고 있는 듯하오, 이젠 별수없소. 당신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저 처녀를 데리고 갈 수밖에."
임조영이 눈을 지그시 감고는 생각했다. 잠시 후 자지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좋다. 너의 소원이 정 그렇다면 날 따르도록 해라."
그가 그렇게 결정을 내리자 사람들은 못내 아쉽다는 듯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들은 자지 처녀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을 아직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설레는 가슴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자자 처녀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또한 임조영이 자지 처녀의 손목을 잡자 이들은 더욱 마음을 다 치고 말았다. 임조영도 여인을 가까이 하는 뭇사내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들이 씁쓰레한 얼굴을 보이자 임조영이 손을 들어 작별인사를 했다.
"다시 만납시다!"
임조영이 곧 자지 처녀를 데리고 떠나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임조영은 자지 처녀가 가늘게 몸을 떨고 있음 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랫동안 알몸인 채로 시달렸으니 지쳐 몹시 한기를 느끼리라 여겨졌다.
걷는 도중에 날이 밝아 왔다. 두 사람의 걸음은 차츰 느려졌다. 한바탕 신경전을 벌이고 싸움까지 한 끝이라 둘 다 지쳐 있었다.
자지는 문득 낯설게 전해지는 느낌에 당황했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임조영의 손길이 아주 보드랍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그러나 그 손은 사내들처럼 힘이 모아져 있었고 불같이 뜨겁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
'임 공자와 같은 분을 만나게 되어 다행이야. 난 다시는 악한들에게 시달림을 받지 않아도 돼. 어머니는 날 절로 보냈었지만 그만 향을 태우는 사이 남에게 잡혀가서는 지금까지 수십 일 동안 시달림을 받아야만 했지. 하지만 이젠 임 공자 덕분으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난 이 임 공자를 위해 한평생을 바치리라. 훗날 이분이 아름다운 아내를 맞는다 해도 난 상관하지 않겠어. 설혹 첩으로 들어가는 일이 있어도 난 만족하리라. 그런데 나 같은 여인을 과연 거두어 주
실까? 세상의 여인이란 딱딱한 조개를 지붕삼는 진주처럼 잘 숨겨져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난…… 뭇사내들 앞에서 옷까지 벗었으니 이미 끝장이 난 거나 다름이 없구나!'
임조영의 눈길이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자지, 피곤하지 않나? 그만 쉬어 가도록 하지.
자지 처녀가 아주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지치지 않았어요. 전 지치지 않았어요."
순간 임조영은 뒤쪽에서 수상한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 지치지 않았다구? 이봐, 그대는 지치지 않았어도 지쳤다고 말해야 한다구. 그래야 임 공자가 그대를 더욱 아껴 줄 테니까."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곳엔 모용준이 떠억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닌가. 모용준이 임조영에게 읍했다.
"임 형과는 이미 작별인사를 나누었지만 한 가지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렇게 뒤 쫓아왔으니 부디 용서하시오."
임조영이 모용준을 바라보며 눈짓으로 알겠다는 뜻을 비쳤다.
"내게 물어 볼 말이라도 있는 거요?"
임조영이 여유스런 표정을 지으며 모용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4장 의형제를 맺은 세 사람
정작 임조영을 불러 세워 놓고는 모용준은 망설였다. 할말이 남아 뒤를 따라온 그는 생각과는 달리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는 속으로 자신을 다그쳤다.
'어떻게 말을 해야 내가 진심으로 이 사람을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전할 수 있을까? 좋다, 어쨌든 사내답게 당당하게 말을 해보는 거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다짐을 마친 모용준이 비로소 입을 떼었다.
"임 형, 난 재능이 없는 사람이지만 임 형을 존경하고 있소. 임 형과 사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소."
모용준의 말에 임조영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남 모용세가의 사람들은 도도하며 강호 사람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모용준의 태도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혹시 자신의 외모가 추해서 자격지심 탓에 이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든 임조영으로서는 썩 불쾌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임조영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뜻은 고맙지만 저는 원래 무림의 사람들과는 사귀지 않습니다. 바람을 벗삼아 떠도는 구름이나 들에 사는 두루미처럼 자유롭게 사는 게 습관이 되었지요."
그러자 모용준이 미소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난 임 형과 사귀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친구도 함께 소개해 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임 형, 누가 와 있는지 보시구려."
모용준이 신호를 보내자 어디선가 들것을 든 두 사람이 나왔다. 들것에는 웬 사람이 누워 있었는데, 임조영이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는 바로 왕중양이었다. 그를 보자 임조영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임조영은 왕중양이 재간은 아직 부족하지만 정의감만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그의 부상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왕 공자, 당신의 상처는 좀 어떠시오?"
왕중양이 감격한 표정으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임 형께서 이렇게 걱정해 주시니 곧 낫겠지요."
왕중양의 얼굴엔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모용준은 임조영이 자기 예상대로 왕중양을 깊게 새기고 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약간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임 형께서 왕 공자를 찾지 않았소? 사실 난 사람들에게 왕 공자를 보살피게 했었소."
"모용 형께서 더 수고가 많으셨군요."
임조영이 흐뭇해 하자 모용준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임 형, 난 어젯밤에 자지 처녀를 꼭 데려가고 싶었소. 하지만 어쨌든 두 형들이 나서는 바람에 그들에게서 빼내 왔으니 다행이오."
"모용 형의 대의(大義)도 감동적이었소. 역시 모용 형은 기인이오."
"임 형,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어떨지 모르겠소."
임조영은 갑자기 모용준이 정색을 하는 것을 보고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주저 말고 하시오."
"왕 공자와 임 형을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을 난 영광으로 생각하오. 셋이서 의형제를 맺고 싶은데 임 형의 의양은 어떤지요?"
임조영의 미간이 약간 찌푸러졌다. 그것을 본 왕중양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강호에서 이름이 난 사람들인데 내가 어찌 의형제를 맺을 수 있단 말인가? 임 공자가 망설이고 있는 걸 보면 나와 의형제를 맺기를 꺼려 하는 것 같다.'
왕중양은 더 생각할 게 없다는 듯 단호한 자세를 취했다.
"임 공자, 난 당신들 두 사람과는 어울릴 수 없소. 난 자격이 없소. 그러니 두 사람만 의형제를 맺으시오."
"왕 형, 그게 무슨 섭섭한 말씀이오? 당신은 우리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비중이 있는 사람이오. 무공은 나보다 좀 못하지만 사람 됨됨이는 몇 배 월등하오."
모용준이 정색하고 말하자 임조영이 거들었다.
"그 말은 모용 형이 맞아요."
그러자 용기를 얻었는지 모용준이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이번 반화대회에서 수확을 얻어야겠는데 두 분과 생사지교(生死之交)를 맺는 것으로 대신할 생각이오."
"내가 할말이 있소."
임조영의 말에 모용준이 싱글벙글하며 제동을 걸었다.
"아직 말하지 말아요. 먼저 나이를 따져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를 가른 다음 입을 열도록 합시다."
모용준이 앉아 흙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향을 피우는 것을 대신하려고 했다. 임조영이 서둘러 모용준을 말렸다.
"모용 형, 난 당신들과 의형제를 맺을 수 없소. 모용 형은 이해를 할 것이오."
흙을 모으다 말고 모용준이 임조영을 뚫어지게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길엔 실망의 빛이 가득 어렸다.
"알겠소!"
모용준이 맥이 모두 달아난 목소리로 말하고는 한쪽으로 물러나 망연하게 하늘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알려야 하겠소. 우리 모용세가는 원래 풍류스런 미남자들로 대를 이어 오다가 나의 대에 이르러 이런 흉물이 태어난 것이오. 모용세가의 한 숙적이 일부러 미친 여인을 아버지에게 보냈었지. 그 미친 여인은 난쟁이에다 못난이였소. 아버진 그 여인과 함께 잠자리에 들려 하지 않았으나 여인이 미약(迷藥)을 써 버렸소. 그리하여 아버지가 여인과 잠자리를 하지 않으면 욕화(欲火)에 시달려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지……."
모용준의 눈엔 어느새 물기가 어른거렸다. 흐릿한 눈길로 임조영을 주시하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임 형, 난 형제 한 사람만이라도 있었던들 벌써 자살을 했을 거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형제도 없고 자매도 없소."
"모용세가의 공자가 그같은 곡절을 안고 있었으니 어찌 사람 대접을 받았겠소?"
왕중양의 말에 모용준이 씁쓰레한 표정을 지으며 임조영에게 눈길을 던졌다.
"임 형, 난 두 분 형에 비하면 실로 오리새끼에 지나지 않소. 내가 어찌 당신들의 용봉과도 같은 자태에 비하겠소. 하지만 난 당신들과 의형제를 맺고 싶소."
임조영이 침묵을 지키자 왕중양이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나무랐다. 그는 모용준의 뜻을 따르기로 작정한 것이다.
"임 공자, 당신은 이 모용 형의 말을 듣지 못했소? 저 사람은 당당한 사내 대장부인데 당신은 왜 그와 의형제를 맺지 못하겠다는 거요? 모용 형이 당신을 모욕한 적도 없는데 왜 마다하는 것이 오!"
임조영은 가볍게 탄식을 하며 입을 열려다가 말았다. 임조영은 두 사람이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기세에 눌린 듯 입을 꽉 다물고는 생각에 빠졌다. 한동안 고심을 하듯 주위를 둘러보던 임조영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내게도 말 못할 고초는 있습니다. 하지만 두 분이 이렇게 나오시니 더 이상은 고집을 피울 수가 없군요."
누워 있던 왕중양이 한껏 웃음을 띄우며 임조영의 말에 찬사를 보냈다. 모용준도 떨리는 목소리로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임 형, 당신은 정말 저와 그리고 왕 형과 의형제를 맺어도 후회하지 않겠지요?"
임조영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세 사람은 곧 무릎을 꿇고 흙을 모아 향로로 삼고 그 흙향로에 꽂은 봉을 향으로 여기기로 했다. 세 사람의 표정은 서로 달랐다. 모용준은 말할 것도 없이 기쁨으로 가득 넘치는 얼굴이었고 임조영은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한편 왕중양은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를 물끄러미 지켜 보고 있는 자지 처녀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왕중양이 임조영을 향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임조영 같은 이런 용감한 사내와 벗으로 사귄다는 것만 해도 한 평생 기쁨으로 간직할 수 있으리라!'
"자, 그럼 어떻게 맹세를 해야 하지요?"
임조영이 조용히 묻자 모용준이 고개를 들었다.
"진심이 담긴 말이라면 어떤 말이든 상관없겠지요. 그런데 우리 셋 중 누가 연배가 위인지 모르겠군. 나이가 많은 분이 먼저 말씀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각자 나이를 따져 보니 왕중양이 가장 위였다. 왕중양이 불편한 몸을 겨우 지탱해 일어서더니 하늘과 땅을 향해 절을 올렸다.
"나 왕중양은 임조영과 모용준 두 형제와 결의형제를 맺어 한평생 뜻을 같이하며 서로의 정을 상하지 않게 하겠습니다."
왕중양이 결의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맹세를 하자 모두들 숙연해졌다. 그는 다시 한 번 임조영과 같은 인물과 형제를 맺게 된 것에 감사를 했다.
"난 두 분의 동생들을 결코 고통에 빠지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임조영은 왕중양의 말을 듣고 흐뭇해 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구나. 이분은 정말 정의감이 넘치는 사내야.'
둘째는 모용준이었다. 그도 엎드려 절을 올린 다음 근엄한 자세로 다짐했다.
"난 형님과 동생을 위해 언제라도 달갑게 죽겠습니다. 간뇌도지(肝腦塗地) 하더라도 결코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왕중양은 속으로 모용준의 맹세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더 먼저 생각하고 있는 그에게 왕중양은 깊은 존경심마저 느꼈다.
마지막으로 임조영이 두 사람을 한번 쳐다보더니 곧 무릎을 꿇었다.
"이 임조영은 두 형님과 환난을 같이하렵니다."
임조영의 맹세는 비교적 간단명료했으나 그 뜻은 깊고도 넓었다. 두 형제와 언제나 생사를 같이하겠다는 뜻이었기에 두 사람의 가슴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의형제를 맺고 나자 모용준이 비로소 옆에 서 있던 자지 처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자지 처녀, 그대는 올해 몇 살인가?"
자지 처녀가 머리를 숙이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열다섯 살이에요."
모용준이 그윽한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우리 삼형제보다 나이가 어리니 이후부터는 오라비들을 잘 섬겨야 해."
곧 그녀가 자세를 추스리고는 왕중양에게 예를 올리며 만복을 기원했다.
"큰 오라버니의 행복을 원합니다!"
그러자 왕중양도 황급히 답례를 주었다. 그녀는 또 모용준에게도 예를 올렸다.
"둘째 오라버니께도 행복을 기원합니다."
"하하, 좋다. 앞으로 셋째가 널 괴롭히면 언제든지 내게 일러라."
"하하하!"
네 사람은 한바탕 웃어젖혔다. 그리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이들은 곧 한 작은 객점 앞에 이르렀다. 임안성 밖에는 이처럼 작고 허름한 객점들이 수없이 자리했다. 외지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손님들은 이곳 성밖에다 자리를 잡고는 성안으로 볼일을 보러 다녔던 것이다. 네 사람은 그 객점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앞장서서 방을 잡는다며 분주하게 움직인 것은 모용준이었다. 그는 이런 일에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나서는 성미였다. 자지 처녀는 임조영의 방 옆에 잡아 두었고, 자기와 왕중양의 방은 각각 임조영을 중심으로 또 다른 쪽에 차례대로 잡았다.
"큰형님, 형님의 방은 제일 뒤쪽에 잡아 두었는데 제가 돌봐 드리죠."
모용준의 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껏 웃음을 띄우며 모두에게 제의했다.
"오늘 같은 날 술이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두 가지 대사를 축하하는 의미로 술잔을 듭시다!"
왕중양이 물었다.
"두 가지 대사란 도대체 무언가?"
"한 가지는 우리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은 것입니다. 이것은 무림 중의 대사가 아닐 수 없지요. 오늘부터 우리 형제 세 사람은 생사고락을 같이할 뜻을 다졌는데 이 어찌 대사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또 한 가지는 셋째가 자지 처녀와 짝을 지을 모양인데 이 또한 대사지요."
왕중양이 슬쩍 임조영의 얼굴을 살폈다.
'셋째인 임조영은 자지 처녀와 결혼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 데 둘째는 무슨 근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곧 임조영이 반응을 나타냈다.
"자지 처녀는 우리가 잠시 데리고 있다가 좋은 거처를 마련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용준의 말을 간단히 뒤집는 태도였다. 그런데 막상 자지 처녀는 아무런 느낌도 없다는 듯이 말없이 임조영만을 바라보았다.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간 뒤 혼자 남은 왕중양은 온몸을 들쑤시는 통증을 참아내야만 했다. 더군다나 종일 걸었던 탓에 이미 몸은 물에 담갔다 꺼낸 솜뭉치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오늘 있었던 치욕적인 일을 다시금 뼈아프게 회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난 줄곧 스스로의 무공에 대해 자신하고 있었지. 그래서 백성들을 해치는 무리들을 소탕하고 강호의 협사 노릇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어. 그런데 이 꼴이 무언가? 제갈정의 일격에 나의 무공은 모두 소실되었으니 한평생 어떤 노릇도 할 수 없으리라?'
왕중양이 침대에 누운 채로 우울함을 곱씹고 있는데 문이 살며시 열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임조영이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왕중양에게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였다.
"큰형님, 전 형님과 결의를 맺게 되어 아주 기쁩니다."
왕중양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임조영의 말속에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의형제를 맺자고 했을 때 임조영은 처음엔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을 보였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도 지금의 그 말은 왕중양에게는 대단한 의미로 받아 들여졌다. 왕중양 역시 미소를 지으며 임조영에게 말을 건넸다.
"동생, 난 그 제갈정의 장에 맞아 대맥(帶脈)이 상했는데 아마도 쉽게 회복될 것 같지가 않아. 그래서 사실 처음 그런 말이 나왔 을 땐 무척 망설였지. 괜히 두 사람에게 짐이 되는 건 아닌가 하여……."
'난 당신을 무거운 짐으로 받아들이기를 기꺼이 원한답니다. 당신은 저의 이 심정을 알고나 계시나요?'
그러나 임조영은 결코 그같은 자신의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한편 자기 방에서 나온 모용준은 자지 처녀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는 문앞에서 한참 동안이나 망설였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아직 자지 않은 채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던 참이었다.
모용준이 주춤 망설이다가 곧 입을 열었다.
"자지, 사자우에게 두 가지 보물을 내놓았을 뻔 정말 그대를 산후 자유를 주려고 했던 거야.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지. 셋째 동생이 아니었더라면 그대는 지금쯤 그 짐승보다도 못한 무리들에게 온갖 수치와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테니까."
말없이 앉아 있는 자지를 바라보는 모용준의 눈이 빛났다. 등불 밑에 놓여져 있는 그녀는 달빛 아래서보다 더욱 곱고 눈부셨다. 그녀는 머리칼만 제의하고는 온통 새하얀 분가루로 뒤덮여 있는 듯했다.
"난 처음 그대를 우리 가문으로 데려가려고 했지. 하지만 지금이 더 그대에게 나올지 몰라. 아무튼 난 셋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네."
자지가 고개를 돌려 모용준을 바라보았다. 모용준의 얼굴에는 생각과는 달리 자신이 엉뚱한 쪽으로 마음을 열어 보이고 있다는 안타까운 표정이 어렸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자지의 우유빛 같은 목덜미에만 시선을 꽂았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둘째 오라버니, 전 진정으로 셋째 오라버니에게 마음을 허락했어요."
모용준이 몹시 놀라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조……좋지, 암 좋구말구. 셋째는 정녕 용봉의 자태를 지니고 있는 사내지. 네가 그와 함께 지내면 행복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모용준의 가슴은 난도질을 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날이 선 도끼로 사정없이 자신의 가슴을 향해 내리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는 자지의 붉게 변해 가는 두 볼을 응시했다. 자지는 그 말만을 던져 놓고는 머리를 숙인 채 조용했다. 모용준이 더욱 침울한 목소리로 자지를 불렀다.
"자지, 난 이만 가겠으니 좀 쉬도록 해."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가더니 곧바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모용준이 맥없이 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자지의 눈에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바로 임조영의 형상이었다. 그녀는 왕중양의 방으로 간 임조영이 왜 돌아오지 않는지 궁금했다. 밤도 깊었고 모두들 피곤한 몸일 텐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까, 자지는 문득 임조영이 은연중 왕중양과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상했다. 좀더 자신과 시간을 보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큰 만큼 임조영이 지금 다른 곳에 있다는 생각은 그녀의 가슴을 옥죄어
왔다.
그녀는 자리에 눕지도 않은 채 문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임조영을 기다렸다. 사실 그녀는 뭇사내들의 시선에 시달리고 또 이 곳까지 지친 몸을 이끌고 걸어오는 바람에 몹시 피곤했다. 그러나 어쩐지 임조영을 보기 전에는 쉽게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누군가의 방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려 온 것은 이때였다. 그녀는 필시 임조영일 거라 추측했다. 그녀는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벗기 시작했다. 분명 임조영이 자기 방에 들러 줄 거라 믿었던 것이다. 임조영이 오면 꼭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불로 알몸을 가린 채 그녀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는 동안 서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다시 일어나 옷을 입었다. 자신의 모습이 갑자기 부끄럽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방문을 흔드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임조영은 찾아와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오지 않는 임조영을 생각하는 틈을 비집고 또 다른 한 사람의 얼굴이 겹쳐졌다. 바로 왕중양이었다. 임 조영이 자기를 찾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떠오른 사람이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그는 호남아였다. 그 때문께 임조영이 그에게 각별하게 대하고 있는 거라 추측하였다. 임조영과 왕중양, 그녀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떠올리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꿈속인 듯싶게 의식은 몽롱했지만 누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분명했다. 임조영은 피곤한 탓에 얼른 눈을 떠 확인하고 싶지가 않았다. 바람 소리를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일단 접어 두고 다시 잠속으로 빠지려고 할 때였다. 다시 방바닥에 무언가가 끌리는 소리를 들었다.
눈을 뜬 임조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기 앞에 웬 여인이 서 있는 게 아닌가. 객점 주인에게 여인을 불러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여인이 침대머리로 다가오더니 가만히 속삭였다.
"당신은 왜 절 찾아오지 않았나요?"
그때서야 임조영은 안심을 했다. 바로 자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절 좋아하지 않나요? 그 수많은 사내들이 모두 저의 몸을 탐내는데 당신은……? 당신은 그래서 절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 건가요?"
임조영은 이미 잠이 달아났지만 몸이 무거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가 않았다. 임조영은 그녀의 몸에서 나는 진한 향수 냄새 에 범상하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전 당신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자지 처녀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져 침대에 누워 있는 임조영을 적셨다. 임조영은 화들짝 놀라며 섬뜩하게 온몸을 엄습해 오는 느낌에 당황했다. 뱀이 허물을 벗듯 그녀의 옷이 스르르 아래로 미끌어져 내렸다. 곧 반화대회에서 본 그 알몸인 상태가 되었다. 그녀가 임조영의 얼굴 가까이로 입술을 대고는 속삭였다.
"당신은 절 갖고 싶지 않나요?"
임조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자지, 잠깐 내 말을 들어 봐."
그러나 자지는 이미 자신의 마음을 굳힌 뒤였다. 임조영이 어떤 말로 자신을 제지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듯 욕정으로 젖어 가는 여인의 눈빛을 지었다. 그녀가 침대로 올라와 눕자 임조영이 얼른 내려서며 내뱉었다.
"안돼!"
그러자 자지가 당혹스런 얼굴로 임조영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절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군요?"
임조영이 머리를 세게 저으며 천장으로 눈길을 던졌다. 자지가 임조영의 팔을 잡았다.
"역시 당신도 절 역겨워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자지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임조영을 안았다. 임조영은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나무토막처럼 몸을 단단하게 굳힌 채 임조영은 그녀가 스스로 물러나 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 는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뒤였다. 그녀가 임조영을 침대로 이끌었다.
"당신이 이처럼 절 슬프게 할 생각이었다면 왜 그때 해불개가 절 데려가도록 놔두지 않았나요? 그자들의 십팔타(十八舵)의 기생 노릇을 하며 평생을 보내는 게 더 나았을 거예요."
자지는 금방이라도 델 것만 같은 노여움으로 임조영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절 결코 좋아하고 있지를 않아요. 그러면서 왜 절 데려 왔죠?"
그녀는 임조영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서는 와락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 그녀의 두 눈은 정욕의 불길로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그녀는 임조영의 옷을 강제로 벗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임조영은 그 녀의 손길을 제지하지 않았다. 자지는 더욱 집요하게 몸을 움직여 임조영을 흔들어 놓고자 했다. 그녀는 임조영과 미친 듯이 밤을 즐기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지금으로서는 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가능하다면 임조영의 품 안에서 죽고 싶었다.
그런데 순간 자지의 손길이 멈칫했다. 임조영의 옷을 벗겨 낸 그녀는 자기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사실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임조영의 가슴엔 여인네의 그것처럼 탐스러운 젖가슴이 달려 있는 게 아닌가? 언제 그랬는지 머리도 길게 내려뜨려져 영락없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사태를 짐작하고는 고개 숙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밤은 더욱 깊어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거리는 지나는 날벌레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달빛만이 고요한 어둠을 지켜 주는 듯했다. 한 여인의 울음 소리가 끊임없이 그 달 빛 사이로 춤추듯 들려 왔다.
자지는 아직 옷을 입지 않은 상태로 임조영만을 바라보았다. 임조영이 사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어디서부터 일을 수습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임조영 역시 숨기려던 자신의 비밀이 탄로났기에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임조영은 자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감기 들겠어."
자지는 임조영의 따뜻한 마음에 다시 한 번 자신의 신세를 원망하였다. 이토록 자상하고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이 사내였다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는 듯 전신의 힘을 놓고는 누워 있기만 했다.
어느 틈엔가 잠속으로 빠져 든 자지는 잠꼬대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돌아보는 임조영의 표정은 침울하기만 했다.
"당신은 왜! 왜…… 사내가 아니었나요?"
임조영은 아프게 자신의 귀를 후벼파는 자지의 잠꼬대를 들으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모용준은 침대 위에 앉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의 얼굴은 그다지 평온하지 못한 상태였다. 다른 날 같았으면 지금쯤 모용세 가에서 무예를 연마하지 않으면 여인들을 찾아 밖으로 쏘다니고 있을 때였다. 그는 일찍이 모용세가에 있는 여종들을 모조리 간음하여 그들에게 슬픔을 안겨 주었었다. 모용준으로서는 그런 짓을 해야지만 마음의 평정을 이를 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마저도 내키지 않으면 무지막지한 무림의 친구들을 찾아가서 소일하곤 했었다. 비록
모용준이 난쟁이에 속하고 추물이었지만 성미가 사나워 누구도 그를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했다. 더욱이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어디까지나 모용세가의 공자님으로 행세했기 때문이다.
모용준은 지금 자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일 마음까지 갖고 있었다. 그 방법만이 자신의 무분별한 행각을 매듭짓고 어엿한 가장으로서의 위신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또한 불처럼 혹은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처럼 솟아나는 자신의 욕망도 쉽게 다스릴 수 있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모용준은 가문의 보물까지 내놓으면서 자지를 사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자지를 그곳에서 빼내 왔지만 현재로는 자신의 손에 들어 와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처음에는 해불개에게 넘어가려 하더니 이제는 임조영에게……. 순간 모용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빛을 토하며 반짝였다. 어쩌면 임조영이 사내가 아닐 뿐 아니라 절세의 미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것은 외모에서 느낄 수 있는 부드러움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엉뚱한 마음도 가슴 한켠으로 심었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자지와 임조영 둘 다를 품안에 안고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만 같았다.
해불개는 자기 부하들을 거두고는 그곳을 떠나 한 낡은 절에 이르렀다. 이들은 절에서 하룻밤 묵을 작정이었다. 절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는 겁에 질려 감히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 지를 못했다. 그런 점은 그의 부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불개가 당한 수모를 알고 있기에 가급적이면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장작불을 피워 놓고 둘러앉아 매우 심각하게 말들을 주고받았다. 한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큰형님, 내 보기엔 우리 형제들이 그 사람과 결사적으로 싸워 볼 걸 그랬다는 아쉬움이 생깁니다요. 그자가 우리 강남 흑도의 모든 호한들을 다 이길 수야 없을 테니까요."
그러자 다른 사내가 말을 받았다.
"너무 나서지 말어. 큰형 님께서 생각이 있을 테니 좀 기다려 보자구."
모두들 해불개의 입만 쳐다보았다. 해불개가 이윽고 쓴웃음을 지으며 지껄였다.
"강남 흑도도 중요하지만 우선 그자의 검을 막아낼 수가 없으니 낭패스럽군."
모두들 놀라며 그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물었다. 그러나 해불개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 일은 일단 접어 두고 오랜만에 우리의 옛친구들이나 환영하는 게 어때?"
그들은 분명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 사내들은 한쪽에 조용히 앉아 날카로운 눈매를 실룩거렸다. 이들은 저마다 손에 병 장기를 들고 있었는데 해불개가 명령만 내리면 당장이라도 누구에게든지 덤벼들 태세였다.
이때 덜커덕거리는 수레 소리가 들려 왔다. 모두들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레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말소리도 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이곳에 절이 있으니 쉬어 가는 게 어때요?"
그러자 노인이 몹시 피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자꾸나. 좀 쉬었다가 일찌감치 떠나자. 각별히 주위를 살피고."
노인의 목소리엔 불안감이 잔뜩 어려 있음이 역력했다. 곧 수레가 멈추더니 십여 명쯤 되는 사람들이 절 안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절 안에 다른 사람들이 먼저 와 있다는 것을 보고는 놀라는 눈치였다. 더군다나 이들이 해불개와 그의 부하들인 것을 알아차리고는 더욱 질겁을 했다.
이들 중 한 사람이 노인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먼저 와 있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우린 다른 곳으로 가 조용히 쉽시다."
해불개의 부하 중 하나가 그 말을 듣고는 나섰다.
"그럴 필요 없어! 유(劉) 나으리의 수레는 이곳에서 쉬었다 가는 게 좋을걸."
수레를 타고 온 이는 바로 반화대회에 참가했던 반벽산장의 장주 유기였다. 그는 해불개를 보자 매우 낭패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겉으로는 웃음을 흘렸다.
"불개 형님, 난 형님이 이곳에서 쉬고 계신 줄 몰랐수다. 내가 알았다면야 어찌 찾아와 시끄럽게 굴었겠소?"
잔뜩 눙치는 투로 떠벌리자 해불개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별말씀을……, 내가 오히려 유 나으리에게 덕을 보고 있는 처지인데 당치도 않지."
그러나 유기는 해불개의 말속에 분명 가시가 박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유기가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형님, 형님께선 강남의 가장 높은 나으리시고 우리 반벽산장은 형님의 뜻을 많이 받들어 왔지요. 우리 반벽산장에 무슨 흠이라도 있게 되면 항상 꾸짖어 주시기도 하셨잖습니까?"
"듣자니 유 나으리 당신과 나의 관계가 아주 친밀하다고 떠들고 다닌다는데 사실인가?"
"그럼요, 암, 그렇고말고요."
"그래? 그렇다면 그대와 내가 은전 만 냥을 주고받을 만한 교분이라도 되는 건가?"
해불개는 그가 귀찮게 굴지 못하도록 수를 썼다. 그런데 유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교분이 깊은데 그까짓 은전 만 냥이 대수인가요. 제게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러더니 사람들에게 손짓을 했다. 유기를 따라 온 사람들도 사태를 짐작했는지 자기들이 지니고 있던 은전들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왔다. 유기가 은자와 은표들을 해불개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 나 해불개는 그것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를 매섭게 쏘아보며 비꼬듯 말했다.
"유 장주, 당신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군. 난 은전이 필요한 게 아니라구. 난 그 난쟁이 사자우에게 몇만 냥이나 되는 은자를 거저 내주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게 많아."
그러자 유기가 껄껄 웃으며 손을 저었다.
"형님, 제가 이까짓 은자를 가지고 무슨 충성을 나타내겠습니까. 그저 부하들이 술을 마시는 데 쓰라는 뜻입니다."
해불개가 비웃더니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은 듣거라! 반벽산장의 유 장주께서 은자 만 냥을 내놓아 너희들에게 술을 대접하겠다고 하는구나. 그래, 마실 생각들이 있느냐?"
그러자 한 사내가 칼을 뽑아 들더니 은자를 내리쳤다. 은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격앙된 그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은잔 필요 없어! 내가 요구하는 건 바로 네 놈의 대가리 야!"
그러나 유기는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은 기색으로 해불개를 주시했다. 해불개가 다시 입을 열어 사태를 결말지으려고 하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서 죽이지 그래!"
이렇게 소리친 사람이 풀썩 몸을 던져 유기에게로 덮쳐 들었다. 손엔 칼이 들려 있었는데 반벽산장 사람들도 만만하지가 않았다. 모두들 반격할 태세로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는 자세를 갖추었다. 유기가 해불개를 불렀다.
"형님, 꼭 이렇게 해야 되겠소?"
그러더니 십여 보 정도 뒤로 재빠르게 물러난 유기가 순식간에 손을 썼다. 해불개는 유기의 행동을 주시하기만 했다. 그는 유기가 암기를 쓰려는 것을 눈치챘다. 유기의 암기는 강남에서 이름이 나 있는데 그의 손에서 한번에 삼십 알의 화주(火珠)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 화주는 구슬 같지만 구슬이 아니고, 가시 같지만 가시가 아닌 바로 구리 비녀였다. 그 끝에는 언제나 독액이 묻어 있어 맞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장인 아주 무서운 무기였다.
유기의 손에서 세 알의 화주가 튀어나왔다.
"팍팍팍!"
해불개가 재빨리 칼을 뽑아 화주를 막았다.
"나쁜 놈! 감히 내게 덤비겠다고!"
그런데 세 알의 화주 중 하나는 해불개의 칼에 맞고 소실되었고 하나가 그 뒤에 서 있던 부하의 얼굴에 명중되었다. 그는 단발마의 비명을 남기고는 거꾸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개는 절간 대들보에 깊숙이 박혔다.
유기는 화주로 해불개를 쓰러뜨리지 못하자 후닥닥 달려들어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해불개는 차마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이라 고스란히 당하게 되었다.
"윽!"
더군다나 두 사람이 한데 엉키다 보니 칼을 쓸 틈도 생기지가 않았다. 해불개가 양손으로 유기의 팔을 움켜쥐며 목울대가 흔들릴 정도로 외쳤다.
"이 필부(匹夫)야, 그래 이 해불개를 만만하게 보았단 말이냐. 난 죽인다면 꼭 죽이는 사람이다. 불개라는 이름이 괜히 생긴 줄 알았느냐!"
곧 해불개가 '불개' 라는 말을 세 번 연거푸 소리치며 연주포식 공격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기는 워낙 노련한 자라 해불개의 초수와 초식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읽어 냈다. 그는 해불개의 세 가지 초수와 여섯 가지 초식을 잘 피해 갔다.
이윽고 유기에게서 풀려난 해불개가 매섭게 눈을 치켜 떴다.
"네 놈이 감히 나의 강남 흑도 혹령기(黑令旗)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 놈의 온 가족을 찢어 죽이고 너의 반벽산장도 불 태워 버리겠다!"
유기가 태연자약한 기색으로 받아쳤다.
"어디 마음대로 해 보시지. 하지만 먼저 네 놈의 낯짝에 피칠갑을 하여 까마귀때가 떠나지 않게 만들어 주겠다!"
유기의 부하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해불개의 부하들은 처음부터 열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양쪽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차츰 싸움이 무르익어 가자 해불개 부하들의 사기가 높아지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유기의 부하 중 두 사람이 겁을 먹고는 막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우욱!"
그러나 그만 날아든 칼에 몸뚱이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러자 반벽산장 사람들의 사기가 더욱 떨어졌다. 유기가 강호객의 자세를 되찾으며 소리를 질렀다.
"결사적으로 싸워라!"
그러자 반벽산장 사람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꼭 유기의 외침 때문만이 아니라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는 사태였기에 그들도 작심을 한 것이었다. 절간 안은 온통 피와 떨어져 나간 살점들로 얼룩졌다. 불상에도 핏덩어리가 튀어 아래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렸다.
"해불개, 네 놈의 손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꼭 네 놈을 병신으로 만들어 놓고 말겠다!"
한 사내가 싸우다 말고 이 소리를 듣고는 대신 대답했다.
"네 놈이 우리 해불개 형님께 끝까지 반항하려는구나!"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다. 양쪽 모두 칼에 쓰러져 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다시 전의를 가다들었던 반벽산장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지자 더 이상의 살상은 모두에게 마지막이 될 거라는 생각에 유기가 서둘러 싸움을 중단시켰다.
"그만둡시다! 우리가 졌소! 해불개, 우리 사람들을 돌려보내 준다면 내 한 목숨 기꺼이 내놓으리다!"
해불개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뇌까렸다.
"흐흐, 넌 정말 명석한 머리를 가졌어.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한차례 유기를 노려보던 해불개가 다시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죽여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쓸어 버려라!"
이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능하다면 사람들을 살리고자 했던 유기도 더는 어쩌지 못하고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이미 많은 숫자를 잃은 반벽산장 사람들은 계속 몰리기만 했다.
잠시 아수라장에서 물러 나온 유기가 해불개에게 조금 나약해진 모습을 보였다.
"다시 한 번 청하겠소. 저 사람들까지 죽일 필요가 있겠소?"
해불개가 여유스럽게 팔짱을 끼며 지껄였다.
"유기, 네 놈은 곧 죽게 될 운명인데 무슨 할말이 그리 많더냐? 너희 반벽산장은 이제 끝장이다!"
그때 절간을 향해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해불개가 짧게 눈빛을 번뜩였다. 누군가 말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서며 외쳐 댔다.
"해불개 형님, 제 말 좀 들어 보시오!"
그는 몹시 격양된 얼굴로 서둘러 말을 이었다.
"형님, 싸움을 멈추십시오. 이들과는 대화로 풀어 가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를 먼저 알아본 것은 유기였다. 반화대회 때 해불개에게 은자를 빌려 주었던 옥총이었다. 유기가 그를 바라보며 창백해진 낯빛을 지었다.
"옥총, 해불개가 우릴 쓸어 버리려고 하고 있으니 소용없을 거요. 저 놈은 우리의 원수로 남겠다고 작정한 놈이오."
"그래, 내가 네 놈들의 불구대천의 원수다! 어쩔 셈이냐?"
해불개의 말에 옥총이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불개 형, 내 얼굴을 봐서라도 유기 형을 용서하시오. 나와 유기 형은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이입니다."
"그런가? 나와는 원수지간인데 그대와는 친구라고? 이거 정말 낭패인걸……."
옥총의 얼굴색이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깊게 가슴으로 숨을 들이쉰 그가 마음을 어느 정도 가다듬었는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 불개 형의 너그러운 도량에 대하여 찬사를 보낼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곳에 있는 흑토의 사람들만 형님께 복종을 하겠습니까?"
한편 해불개는 유기만을 감싸려는 옥총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옥총의 청을 들어주고는 싶지만 입맛이 영 떫떠름해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해불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좋다. 내가 저 놈의 따귀를 열 대 때리는 것으로 이 일을 매듭지으련다!"
"고맙소이다. 역시 큰형님의 아량에는 멀리서 나는 새들마저 듣고는 고개 숙일 것이오. 그런데……."
"그런데 또 뭐냐?"
"형님은 끝까지 분풀이를 하려는 뜻인가 본데 정 그렇다면 저를 때리시는 게 어떨지요?"
그러자 해불개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지면서 얼굴에 화기가 가득 돌았다.
"뭐야?"
"형님, 달리 생각하지 마시오. 나와 형님이 우애를 나누는 것처럼 유 형과도 떨어질 수 없는 형제일 따름이오. 난 형님들 두 사람 이 서로 싸운다는 걸 원치 않을 뿐이란 뜻이오."
해불개가 호탕하게 웃으며 상체를 심하게 흔들었다.
"허허허, 좋다!"
유기가 달려오더니 옥총의 팔을 잡았다.
"옥총 동생!"
옥총이 웃으며 유기를 바라보았다.
"유 형, 내 보기엔 불개 형이 나를 아프게 때릴 것 같지는 않으니 너무 상심 마오."
두 사람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던 해불개가 미소를 지을 듯 말 듯한 얼굴로 다가서며 말했다.
"도리대로 한다면 내가 그대를 때려서는 안 되지, 하지만 내가 때리는 매는 그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유기를 향한 것이라 생각하게."
사실 해불개는 속으로 대단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옥총의 등장으로 유기는 물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이 손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기회만 있다면 유기의 앞이빨 몇 개는 작신 부러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천히 해불개가 옥총을 향해 몸을 돌렸다.
"따악!"
한차례 해불개의 손이 옥총의 뺨을 향해 날아갔다. 옥총은 뒤로 휘청 물러서며 얼른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귀에서는 위잉 하는 소리가 들리고 정신이 모두 빠져 버린 듯했다. 주먹으로 내리치는 것만 큼이나 강한 힘이라 모두들 입을 크게 벌린 채 말이 없었다.




제5장 죽음 앞에 선 왕중양
왕중양은 갑자기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왕중양은 얼굴을 문 쪽으로 길게 내밀었다.
"열려 있으니 들어오시게."
그는 의형제를 맺은 두 사람 중 하나일 거라 짐작했다. 왕중양의 예상이 맞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은 바로 모용준이었다. 그는 긴요하게 할 말이 있어 들어온 사람처럼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왕중양이 그의 심중을 꿰뚫어 보았다.
"둘째 동생, 할말이 있는 것 같은데 어서 말해 보게."
모용준이 방안을 슬쩍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큰형님,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동생과 나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어서 털어놓게 나."
모용준이 결심을 한 듯 얼굴에 힘을 모으더니 말을 이었다.
"큰형님, 나와 셋째 동생은 강호를 돌아다닐 생각이 있지만 사실 형님 때문에 마음이 놓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끝을 흐리는 모용준의 태도에 왕중양은 긴장했다. 어떤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올지 여간 궁금하지가 않았다.
"동생, 그만 애태우고 어서 속시원히 말해 보라니까."
"알겠습니다. 형님께서 부상을 입어 무척 걱정이 됩니다. 강호를 돌아다니다 보면 숱한 패거리들과 본의 아닌 싸움도 벌여야 하는데 형님 때문에 곤란을 받을까 염려가 되는군요."
왕중양이 잠시 눈을 감고는 상념에 빠졌다. 사실 모용준의 말이 섭섭하기는 했지만 그를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입장이 바뀌었더라도 그같은 기우는 변함이 없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 점이라면 너무 염려를 말게. 그렇지 않아도 난 가 볼 데가 있다네."
왕중양은 지금 거짓말을 하는 중이었다. 모용준이 한숨을 내쉬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형님께 말씀을 드릴 참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형님께서 저의 모용세가에 한동안 머물러 있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만 어떠신지요? 저와 셋째가 자주 찾아 뵙고 형님의 쾌유만을 기다리겠습니다."
왕중양은 모용준의 말에 크게 감동했다. 두 동생들을 따라다니며 짐이 되는 것보다는 혼자 남아 상처를 치유하고 무예도 더 연마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와 셋째의 무예로 형님을 모시고 다니는 데는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다시 입을 연 것은 모용준이었다. 그는 왕중양의 기색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셋째가 자지 처녀와 인연을 두는 바람에……."
놀란 왕중양은 모용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변명을 위해 꾸며낸 말 같지는 않았다. 황중양은 비로소 임조영과 자지 처녀가 그런 사이라는 것에 서운한 느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모용준의 말이 사실이고 임조영이 자지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더 이상 강호를 떠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되면 모용준 혼자만이 외로운 길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일단 셋째에게 속마음을 타진해 보고 난 뒤 결정을 하도록 하세."
왕중양이 수습책을 꺼내자 모용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셋째 역시도 형님을 혼자 남겨 두고 싶어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할 수는 없네. 나를 데리고 가자면 힘이 몇 배 더 들텐데."
"생각 같아서는 셋째에게 자지 처녀를 한곳에 정착시키도록 종용하고 싶지만 말을 들을까 걱정이 되는군요."
"자지 처녀는 셋째와 함께 있어야 해. 만약에 두 사람이 이미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면 말이야. 내가 떠나는 게 좋겠어. 아니 지금 당장 일어서야겠네. 셋째에게는 동생이 잘 말해 주게나."
그러자 모용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수하 두 사람을 급히 불렀다. 그중 하나는 손에 구리망치를 들고 있는 아주 건장한 사내 였는데 곱슬곱슬한 턱수염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마치 목숨을 바쳐 은혜에 보답했다는 개백정 주해(朱亥)의 모습과 흡사했다. 다른 한 사내는 아주 여윈 키다리였는데 어딘가 간사해 보이는 구석이 엿보였다. 흰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아 더욱 그렇게 보였다.
모용준이 설명했다.
"이 두 사람은 나와 형제처럼 지내고 있는데 한 사람은 주정(朱亭)이라 부르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목우(程雨)입니다. 이들이 형님을 모용세가로 모셔 갈 겁니다."
곧 주정과 목우가 왕중양에게 예를 올렸다. 모용준이 두 사람에게 일렀다.
"이분은 나의 큰형님이시다. 그러니 두 사람은 모용세가까지 잘 모시도록."
왕중양은 이들과 함께 객점을 떠나게 되었다. 왕중양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 속으로 생각했다. 무공이 사라진 자신이 두 동생들에게 괜한 짐으로 맡겨질까 봐 내심 걱정되던 차였다. 그렇기에 모용준의 말대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다음 대사를 도모하는 게 나을 듯 싶었다.
세 사람은 말을 달려 임안을 벗어났다. 그들은 강남 한복판을 가로질러 며칠 후 태호(太湖)에 당도하게 되었다.
어느새 다시 날이 어두워 하늘에는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중양은 의미로운 눈길로 거대한 태호의 물결을 응시했다. 그는 갑자기 기분이 유쾌해져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이 태호는 정말 좋은 곳이오. 우리 배를 타고 마음껏 즐깁시다."
두 사람이 깍듯이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
"공자님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지요."
이들은 곧 배를 한 척 빌려 몸을 싣고는 호수 안쪽으로 노를 저어 나갔다. 호수를 바라보는 왕중양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빛이 났다.
배가 이윽고 호수 한복판에 이르자 주정과 목우가 술과 요리를 꺼냈다. 주정이 말했다.
"공자님, 월색도 좋은데 한잔 하시지 않겠습니까?"
"임자들이나 드시오. 난 호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취흥이 나는구려."
그러자 주정이 약간 못마땅한 기색을 나타냈다.
"우린 공자님이라 받들고 있는데 공자님은 우릴 무시하고 있군요."
그 말에 왕중양이 긴장을 하며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허허, 주 형, 난 모용준과 의형제를 맺었소. 그대들은 나의 둘 째와도 형제 사이이니 나와도 역시 수족 같은 사이가 아니겠소. 그러니 달리 생각 마오. 내가 술을 마시고 싶었다면 벌써 찾았을 거요. 하지만 난 지금 저 달빛과 이 호수를 즐기고 싶소."
그러자 주정이 버럭 화를 내었다.
"우린 공자님을 꼭 마시게 하겠수다! 어쩔 셈이오?"
고집을 부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왕중양이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 형께서 정 이렇게 나오니 그러리다."
그는 이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술만 자셔서야 어디 재미가 나겠소.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더할 나위 없는 취흥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주정의 말에 목우가 거들며 나섰다.
"좋지, 그거 좋지!"
왕중양은 주정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는 이곳까지 오면서 별로 입을 열지 않는 사내로 비쳤었다. 그런데 그런 주정이 갑자기 화젯거리를 찾자 왕중양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주정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먼저 한마디 하겠소. 이전에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게 된 일이 있었소. 그런데 의형제를 맺기 전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지요. '난 내가 죽을 때 나머지 두 형제와 한곳에 묻히기를 원하오.'하지만 이 사람은 속으로는 전혀 다른 꿍심을 갖고 있었소. 그는 속으로 두 형제들이 먼저 죽기를 원하고 있었던 거죠. 또한 다른 한 형제가 말하기를 자신이 죽게 되면 두 형제가 친 혈육처럼 슬피 울어 주기를 바랐지요. 하지만 이 사람 역시 속으론 두 사람의 아들이 죽고
그 손자가 결혼을 할 때까지도 살아 있고 싶어했습니다."
왕중양은 주정의 말을 들으며 문득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에게서 피비린내를 맡았던 것이다.
'둘째 동생 신변에 이같은 자들이 있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조만간에 만나게 되면 깨우쳐 줘야겠어. 조심하라고 말이야.'
속으로 혼자 다짐을 하고 있는데 이번엔 목우가 입을 열었다.
"에이, 그런 얘기는 재미가 없어. 차라리 술먹기 내기를 하는 게 어때? 진 사람이 물에 들어가는 거야."
여름을 넘긴 가을 중간이라 물은 몹시 찼다. 그런데도 목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이다. 주정이 껄껄 웃으며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거 좋지. 내가 먼저 너와 내기를 하겠어!"
그러면서 그가 슬쩍 왕중양의 눈치를 살폈다.
"저분은 공자라 우리와는 내기 따위를 하지 않을 게 분명해. 그러니 우리끼리 즐기자구."
"잠깐, 나도 내기를 하겠소!"
왕중양은 그들에 대한 속마음을 숨기고 가급적이면 이 두 사람과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왜냐하면 이들과 아직도 며칠을 더 함께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사이가 벌어지면 아무래도 손해를 입을 것만 같았다.
주정의 안색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지껄였다.
"좋소. 공자님이 그렇게 마음을 정한 것을 대환영하오."
술마시기 내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대적하려니 왕중양이 딸렸다. 그는 내기에 질 때마다 벌주를 마셔야 했다. 이래저래 취한 왕중양은 앞이 약간 흐려지는 기운에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주정이 흥에 취해 팔을 휘저으며 떠들어댔다.
"이제부터는 처음 약속대로 지게 되면 호숫물에 뛰어드는 거요."
다시 가득 채운 술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엔 주정이 지고 말았다. 그는 약속대로 호수에 몸을 던졌다. 목우가 그를 두고 빈정댔다.
"자낸 평소에도 좀 못된 성미를 지녔었다구. 그러니 물 속에서 정신을 말끔하게 씻고 나오게나."
그러자 주정이 손과 발로 물을 저어 대며 숨가쁜 소리를 냈다.
"뭐, 뭐라고! 요 놈의 자식, 네가 나에게 욕을 한다 이거지? 허헉!"
그가 곧 허우적대더니 배 위로 올라왔다.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 졌다.
"다시 하자. 이번엔 너희들 두 사람을 물 속에 처넣을 테니 두고 보라구!"
달빛은 더욱 창연하여 배의 그림자를 호수 위로 드넓게 펼쳐 놓았다. 이들은 배 위에 앉아 다시 술내기를 시작하였다.
드디어 왕중양이 걸리고 말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 속으로 풍덩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어갔다.
"난 헤엄에 서투르니 이만 올려 주오!"
허우적대던 왕중양이 뱃전으로 기어오르려 하자 주정과 목우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왕중양은 간신히 뱃전에 매달린 채로 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취기로 얼룩진 시야에 달빛마저 가미해 이들의 얼굴이 한층 괴상하게 비쳤다. 마치 호수에 살고 있을 듯한 괴물을 보는 듯했다. 왕중양이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애원했다.
"어서 손을 잡아 주오. 내가 기력이 모자라 혼자는 힘이 드오."
그런데 주정이 느닷없이 손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드는 것이 아닌가. 또한 왕중양은 그의 손에 큰 구리망치가 들려져 있음을 깨달았다.
"에잇!"
그가 힘껏 왕중양을 향해 망치를 내리쳤다. 왕중양이 머리를 옆으로 피하는 바람에 뱃전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다시 왕중양이 물을 헤치며 손을 뻗어 뱃전을 잡으려고 하는데 주정의 망치가 내리꽂혔다. 이번엔 왕중양의 어깨에 적중하고 말았다.
"악!"
왕중양은 비명을 내지르며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왕중양이 가라앉은 곳에서 꼬르륵꼬르륵 하는 물방울들이 솟아오르더니 곧 그가 떠올랐다.
"푸우! 어서 손을!"
왕중양이 소리를 질렀지만 주정이 쓴웃음을 지으며 못 들은 척했다.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목우가 다급히 주정을 불렀다.
"주정, 자네 미쳤나? 저분은 모용 공자의 큰형님이신데 어쩌려고 하는가?"
그러나 주정은 이미 왕중양을 죽일 속셈인 모양이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왕중양에게 매서운 눈초리를 던졌다.
"난 저 놈을 죽여 버릴 테다! 큰형님은 무슨 놈의 큰형님이야. 내 보기엔 저 놈은 쓸모 없는 궤짝에 불과하다구. 기력도 없는 형편없는 몸으로 어찌 우리 공자님의 형님 노릇을 하겠다는 게야!"
주정의 화는 좀체 가라앉을 줄 몰랐다. 왕중양은 망치로 얻어맞은 어깻죽지의 통증 때문에 더 이상 뱃전을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고통스런 얼굴로 숨을 몰아쉬자 옆에 있던 목우가 대신 손을 내밀었다.
"자, 큰형님! 내 손을 잡아요."
그러자 주정이 금속성의 목소리로 목우의 행동을 꾸짖었다.
"가만 놔두지 못하겠어! 이대로 태호 물에 빠져 죽게 놔두란 말이다!"
"모용 공자가 우리에게 한 말을 자넨 잊었나? 이분을 죽인다면 훗날 어찌 모용 공자를 대하겠는가?"
주정이 외면하며 혼자말처럼 흘렸다.
"난 조금도 모용 공자에게 미안한 생각이 없어. 구태여 있지도 않은 마음까지 모아 가며 머리 숙이고 싶지는 않아."
그러나 목우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왕중양을 얼른 끌어 올렸다. 배 위로 올라온 왕중양은 기진맥진하여 머리를 숙인 채 한동안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주정이 다가와 망치를 높이 쳐드는 것을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악!"
왕중양은 눈앞으로 스치는 노을을 보았다. 그것은 아찔함을 동반한 섬광 같은 빛이었다. 주정이 휘두른 망치의 위력은 왕중양의 가슴이 한 뼘이나 깊이 들어갈 정도로 대단했다.
다시 물 속으로 곤두박질 친 왕중양은 서서히 떠오르며 사지를 길 게 늘어뜨렸다.
두 사람이 방금 왕중양을 해치는 것을 본 뱃사공은 겁을 먹고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주정이 힐끔 돌아보며 그를 불렀다.
"이봐 사공!"
주정이 묘하게 입꼬리를 위로 치켜 올리며 물었다.
"사공, 너는 방금 전 무엇을 보았지?"
"전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뎁쇼."
사공은 질린 목소리로 들릴락말락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목우가 상체를 뒤로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대는 똑똑히 그 눈깔로 보고도 왜 거짓말을 하는가?"
뱃사공이 더욱 졸아든 목소리를 쥐어짜듯 말했다.
"저, 정말 모릅니다요."
목우는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애써 왕중양을 끌어올려 주던 방금 전과는 다른 또 하나의 모습이었다. 그것을 똑똑히 목격한 사공은 그래서 더욱 몸을 벌벌 떨어댔다.
"악!"
주정이 날린 구리망치에 사공의 머리는 저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잘려 나간 목이 먼저 물 속으로 떨어지고 곧 몸뚱이가 따라 풍덩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처박혔다.
주정이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술잔을 높이 들자 목우도 호탕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이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웃음 소리에 달빛마저도 마구 흔들렸다.
해불개는 다시 한 번 손에 힘을 주어 옥총의 뺨을 갈겼다.
"욱!"
옥총이 옆으로 몇 걸음 미끄러지다가 얼른 버티어 섰다. 그의 입과 귀에서는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해불개는 유기에 대한 앙갚음을 잊을 수 없는지 씩씩거리며 중얼댔다.
"옥총 동생, 이건 분명 그대를 때리는 게 아니라 저 유기란 놈을 때리는 걸세!"
해불개가 유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유기가 약간 긴장을 한 얼굴로 옥총을 응시했다.
"옥총 동생, 그댄 왜 이 고통을 자청하는가?"
유기의 안타까워하는 말을 뒤로한 채 옥총이 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불개 형님, 어서 더 때리시오."
그러자 해불개가 유기를 돌아보며 도리질을 해댔다.
"안 되겠어. 내 손에 그대가 큰 타격을 입을까 걱정이 되네. 나머지는 저 유기가 맞도록 하는 게 좋겠어."
유기가 나섰다.
"좋소. 이봐 옥총, 자낸 어서 물러나게."
그런데 해불개가 혼자만의 생각이 있는지 손을 들어 유기를 제지했다. 옥총이 고개를 들어 해불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따악! 하며 해불개의 손이 번개같이 옥총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이번엔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옥총이 꼼짝을 않은 채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닌가. 해불개는 체면에 손상을 입었다고 생각했는지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모두들 휘둥그래진 눈으로 해불개와 옥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해불개가 다시 손을 들어 옥총의 뺨을 갈겼
다. 그런데 이번엔 처음처럼 옥총이 맥없이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옥총이 겨우 일어나더니 볼멘소리를 냈다.
"불개 형님, 어서 더 때리시오!"
옥총의 뺨은 퉁퉁 부어 올라 마치 심통이 난 사람처럼 돼 버렸다. 이빨도 흔들리는 것 같아 옥총은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는 만약 해불개가 몇 대 더 손을 쓴다면 상처를 달래는 데도 오랜 시일이 걸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해불개가 질렸다는 듯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옥총 동생, 어서 물러나게!"
옥총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해불개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온통 피멍이 들어 보기조차 민망할 지경이었다. 옥총이 아픔을 참아 가며 입을 떼었다.
"불개 형님, 이제 겨우 네 대를 맞았을 뿐이오. 약속대로 하지 않고 여기서 중단한다면 난 결국 쓸데없는 공매를 맞은 셈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옥총, 그대는 총명한 사람이야. 그런데 어째서 괜한 고집을 부려 죽음을 재촉하려는가? 그댄 정말 유기를 위해 죽을 각오라도 돼 있는 건가?"
옥총이 탈바가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우스운 형상으로 지껄였다.
"불개 형님이 설마 날 죽이기야 하겠소?"
옥총은 그러나 속으로 만일 해불개가 다시 손을 든다면 더 이상 견뎌 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유기를 돕자고 나선 일인데 여기서 중단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할 게 분명했다. 유기가 더는 못 보겠다는 듯 침통한 얼굴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옥총 동생은 이만 물러나게. 내가 차라리 저 놈과 한판 겨루겠어!"
"안 돼요!"
옥총이 매우 단호하게 제동을 걸자 유기가 주춤했다. 옥총이 아예 유기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해불개의 성질을 돋우었다.
"왜 겁이라도 나는 거요? 망설이지 말고 어서 때리란 말이오!"
그러자 해불개가 화를 벌컥 내며 곧 잡아먹을 듯 이빨을 내보였다.
"오냐, 좋다. 죽여 달라고 해도 난 마다하지 않겠다!"
딱! 딱! 딱! 해불개가 연거푸 옥총의 뺨을 후려갈겼다. 결과는 뻔한 일이었다. 옥총은 그만 정신을 잃고는 바닥에 녹아 내리듯 쓰러졌다. 해불개가 아직 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유기를 노려보며 말했다.
"유기 네 놈은 그래도 죽어야 한다! 옥총이 대신 매를 맞았다고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러나 유기의 눈에는 오로지 자기 때문에 변을 당한 옥총만이 들어왔다. 그는 옥총을 끌어안고는 목을 놓았다.
"옥총 동생!"
다행히 옥총은 천천히 의식을 되찾고는 눈을 떴다. 유기를 본 옥총이 고통을 이빨로 사려물며 어렵게 입을 떼었다.
"혀, 형님은 무엇 때문에 그까짓 반화대회를 구경하신단 말이오. 형님은 이제 연세도 많으신데 그걸 구경해서 무엇하겠소?"
유기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래, 동생 말이 맞아. 난 다시는 이같은 강호의 싸움엔 말려들 지 않을 생각이야."
유기는 마음이 상해 더는 옥총을 하라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해불개가 다가와 옥총을 향해 지껄였다.
"그래도 더 맞겠다고 하겠는가? 고집을 버리게나. 그러다가 죽는다구."
"유기 형님, 절 좀 부축해 줘요."
유기에게 의지한 채 일어선 옥총이 해불개를 노려보았다.
"불개 형님, 당신은 이제 나의 형님이 아니오. 그러니 나를 동생으로 여기지 말고 어서 마저 때리시오. 내가 이까짓 아픔을 참아내지 못한다면 어찌 옥면낭군(玉面郎君) 옥총으로 강호에서 불릴 수 있겠소?"
"하하하!"
해불개가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음을 싹 거두고는 옥총의 눈을 빼먹을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역시 자낸 심지가 곧은 데가 있어 좋아. 좋다, 그럼 어디 자네의 그 잘난 이름을 지켜 보라구!"
말을 마친 해불개가 이번엔 아예 몸을 날려 옥총의 면상을 호되게 갈겼다.
"웁!"
옥총은 뒤로 자기 키보다 높게 떠서 뒤로 날아갔다. 옥총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질렀다. 돌로 된 바닥에 금이 갔던지 아니면 옥총의 몸 어디가 부러진 듯했다. 그런데도 옥총은 굴하지를 않았다.
"흐흐, 겨우 이 정도요. 이처럼 용기가 있고 무예가 뛰어난 당원이 왜 유운장 사람들 앞에서는 손안에 잡힌 개미처럼 허둥대었단 말이오? 또한 어찌 임 공자 앞에서는 말 한마디 꺼내지도 못한 채 돌아섰단 말이오?"
해불개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들어갔다. 가슴에서 열기가 솟구쳐 지레 고꾸라질 것 같은 해불개는 입을 벌린 채 옥총을 노려보았다. 강호에서 이처럼 사내답지 못한 일들이 알려진다면 그것은 곧 최후를 예고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어찌 강호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해불개가 분노를 짓누르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허허, 그대는 정말 내 형제답게 처신을 하려는군."
그러나 그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해불개는 더 이상 솟아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강호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일이 있어도 옥총의 기고만장함을 영원히 잠재울 생각이었다.
딱! 딱! 딱! 해불개는 쏜살같이 달려들어 옥총의 뺨을 마구 갈기기 시작했다. 옥총은 더 이상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얻어맞고는 죽 뻗어 버렸다. 하지만 부릅뜬 두 눈은 여전히 해불개를 향 해 열을 내뿜고 있었다.
해불개가 씩씩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자 크게 몇 번 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옆으로 길게 찢으며 말했다.
"나와 유 장주 사이에 일은 이 정도로 하고 묻어 두겠다. 하지만 훗날 다시 만나 그 죄값을 받아낼 것이다! 얘들아, 가자!"
해불개가 명령을 하자 살아 남은 부하들이 그를 따라 떠나갔다.
임조영과 자지는 침대 위에 나란히 누운 채 말이 없었다. 자지 처녀의 가냘프면서 규칙적이지 못한 숨소리가 들려 왔다. 두 사람은 쉽게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자지가 한쪽으로 몸을 옮기며 한 숨을 내뱉었다.
"그분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임조영은 언뜻 짚이는 데가 있어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누구를 말하는 거지?"
자지는 임조영이 왕중양을 마음에 두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채 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은 눈치가 무딘가 봐요. 호호호!"
"왜 웃지?"
"아니……."
이곳으로 오던 길에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은 일이 떠올라 황급히 말문을 닫아 버렸다. 그때 임조영은 너무도 태연하게 두 사람과 의형제의 굳은 결의를 다지지 않았던가? 그러나 자지는 왕중양과 모용준이 어리석고 우둔하게 여겨져 웃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웃음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고개를 들어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왕 공자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분은 달라요."
"누구? 모용준을 두고 하는 말이냐?"
"예."
"그럴 리가 없다."
다시 자지의 긴 한숨 소리가 방안을 메웠다. 자지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털어놓은 것은 그 긴 한숨이 지나고 또 얼마간의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머물다 간 뒤였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어느 날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했던 것이다. 그때 어머니는 피살이 되었고 혼자 지금까지 어려운 나날들을 보내 왔었다.
자지의 사정을 듣고 난 임조영은 나지막이 한숨을 부려 놓았다.
이때였다.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임조영이 머리를 그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누구요?"
모용준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 왔다.
"셋째 동생, 큰일이 났어. 빨리 일어나 보라구!"
두 사람이 급히 일어나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모용준이 안으로 들어서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임조영 방에 있는 자지 처녀를 확인한 그는 얼굴에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그러나 모용준은 더 급한 일이 벌어졌다는 듯 임조영의 팔을 잡았다.
"큰형님이 떠났는지 보이지가 않아!"
임조영이 깜짝 놀라며 문밖으로 황급히 시선을 던졌다.
"도대체 큰형님이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모르겠어. 큰형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난 내 방으로 갔을 뿐이야. 이젠 어떡한다지! 한 가지 짚이는 것은 형님과 나눈 대화였어. 형님은 나와 동생에게 부담이 된다는 말을 했었어. 난 극구 말 렸지. 가려거든 다 함께 가자고 했었어. 또 동생이 형님을 극진히 생각하고 있다는 말도 했었지. 만약 정 떠나려거든 동생에게 알리고 나서 가시라고까지 했는데. 그런데 큰형님은……."
갑자기 말끝을 흐리는 모용준에게서 무언가 범상하지 않은 기운 을 감지한 임조영이 물었다.
"그래, 큰형님이 또 뭐라고 하시던가요?"
"큰형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원래 우리와 의형제를 맺을 마음이 없었다고 하더군. 그래서 우리 두 사람과 함께 있자니 부담스럽기만 하다면서……. 내 말은 전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네. 난 형님을 설득하다가 내 방으로 돌아왔지. 날이 밝거든 다시 의논해 보자는 약속까지 했는데 그만……."
"그래 곳곳을 찾아보기는 했나요?"
"소용없어. 벌써 멀리 가셨을 테니까. 따라잡기도 어려워."
"큰형님은 무공을 쓸 수 없는 몸인데다가 경공마저도 어려워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예요."
자지도 임조영의 말을 듣고는 함께 왕중양을 찾아보자고 했다. 그런데 모용준이 안 된다며 두 사람을 막았다.
"동생, 내가 동생의 입장이라면 큰형님을 찾지는 않을 거야."
"무슨 뜻이죠?"
"큰형님은 그대와 나를 동생으로 삼고 수족같이 여기고 있어. 우리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떠났는데 우리가 다시 찾아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냔 말이지."
임조영의 가슴은 휑하니 바람구멍이라도 난 듯 허전하기만 했다. 스스로도 왜 이다지 가슴을 졸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만 큼 왕중양이 차지하고 있던 마음자리가 컸는지도 모르는 일이었 다.
"큰형님께서는 제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나요?"
임조영은 아직 가슴에 그의 목소리와 얼굴이 깊이 새겨져 있음을 상기하며 자신을 위해 한마디라도 남겼을 거라 믿고 싶었다.
"맞아요. 왕 공자님께서 떠나실 때 필시 둘째 오라버니를 통해 무슨 말인가를 남기셨을 거예요. 여기 있는 임……, 임 공자님께 어서 말씀드리세요."
자지가 나서서 거들었다. 그녀는 자칫 임조영의 정체를 드러낼 뻔했다. 그러나 모용준은 짐짓 말을 더듬는 자지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큰형님은 셋째가 피곤할까 봐 깨우지 않았던 거야."
그러나 임조영이 알고 있는 왕중양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토록 무책임한 행동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갈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말게. 내가 혹시나 해서 벌써 사람을 시켜 뒤쫓게 했으니까. 그들이 큰형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 모용세가로 정중히 모시라고 당부를 했네."
자지가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모용세가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곳에 가서 일단 큰 오라버니를 만나자고요."
자지의 제안에 임조영이 순간 눈빛을 반짝였다. 별수없다는 듯이 모용준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었다.
"하하, 역시 동생들의 말이 옳아. 그리고 난 두 동생들의 깊은 마음에 탄복했다고. 그래, 우리 함께 가서 큰형님을 만나자고. 우리 모용세가를 두 동생이 방문해 준다면 나 역시 영광일 테니까."
모용준의 말에 모두들 길을 떠나기 위해 서두르기 시작했다.
서서히 불어오는 바람에 주름살을 더해 가는 물결이 햇빛에 아름답게 춤을 추고 있었다. 호수는 마치 거센 폭풍 전야의 조짐을 예고하듯 크고 작은 물결들이 서로 어깨를 견주고 있는 듯했다. 그 호수 위로는 커다란 배 한 척이 떠 작게 흔들거렸다. 배 위에서는 젊은 남녀가 알몸인 채로 사랑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절정을 향해 가쁜 숨을 몰아쉬던 여인이 고개를 꺾으며 신음을 물었다. 잠시 후 사내가 여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두 사람은 격정의 파도를 가라앉히
듯 미풍에 몸을 말리는 자세를 취했다.
여인이 사내를 바라보다가 그 뒤로 언뜻 눈에 들어오는 물체에 눈길을 빼앗겼다.
"어머, 저것 좀 봐요. 무슨 고기가 저렇게 크죠?"
그러나 사내는 여인의 말에 귀기울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방금 전 온몸을 떨게 하던 여인과의 정사에 마음이 가 있었고 다시금 뒷덜미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욕정을 새삼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가 언제 이처럼 마음놓고 또 근사한 곳에서 재미를 본 적이 있었나? 그런데 그대는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군. 아직 그럴 만한 힘이 남아 있는 건가?"
사내가 투덜대자 여인이 키드득 웃었다.
"그건 당신의 재간이 형편없기 때문이라구요. 당신이 좀더 강했더라면 난 벌써 녹초가 되어 손끝조차 움직이지 못했을 거라구요."
사내가 주눅이 든 얼굴로 빈 눈길만 허공으로 던졌다. 여인이 이윽고 몸을 일으키며 명령조로 말했다.
"가서 저걸 건져 와요. 내가 상을 후하게 줄테니."
사내는 그 말에 귀가 솔깃해서 물었다.
"무슨 상을 주시겠수?"
그러자 느닷없이 여인이 사내의 뺨을 후려쳤다.
"잔말 말고 어서 건져 오기나 해요!"
사내는 투덜대며 곧 물 속으로 텀벙 하고 뛰어들었다. 사내가 천천히 헤엄을 쳐 여인이 가리킨 물체가 떠있는 옷까지 다가갔다.
"익!"
사내의 두 눈이 개구리처럼 튀어나온 것은 바로 그가 손을 뻗어 그것을 만져 보려 할 때였다. 그곳엔 죽은 시체로 보이는 시커먼 물체가 나무토막에 얹힌 채로 떠있었다.
"죽은 사람이구먼!"
사내가 배 위에서 알몸을 드러내고 서 있는 여인에게 알렸다. 여인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에그 불쌍도 하지. 어쨌든 건져 오세요. 뭐 값나갈 물건이라도 있나 보게."
사내가 호숫물이 입 안으로 들어갔는지 퇘 하고 침을 내뱉으며 투덜댔다.
"죽은 사람인데 뭐가 나올라고?"
여인이 버럭 소리치며 사내를 윽박질렀다.
"건져 오지 않으려거든 거기서 살어!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알았어. 혹시 이게 당신의 죽은 영감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사내가 시체를 배 위로 올려 놓았다. 온통 시커먼 형상을 한 시체는 축 늘어진 상태였다. 특히 가슴 부분에 커다란 상처가 나 있어 여인은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여인이 혀를 심하게 찼다.
"잘생긴 미남자구먼. 귀공자가 아깝게 변을 당한 모양이야."
사내가 묘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 사내가 부잣집 귀공자라는 걸 어떻게 아우?"
"당신이야 사람 볼 줄 모르지만 난 다 알지. 당신은 그저 살코기밖에는 모르는 위인이니까."
"그래, 여인이란 바로 한 덩어리의 살코기지 뭐."
여인이 사내의 빈정거림에 대꾸를 하려는데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맙소사! 살아있어!"
여인이 자세히 누워 있는 사내를 살폈다. 그러자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경련을 일으키며 입술을 움직였다.
"이, 이곳이 어디요?"
여인이 대답했다.
"동정호(洞庭湖)예요."
"동정호……?"
"생각이 나질 않나요? 그래 아내가 죽었나요. 아니면 노잣돈이 떨어졌던가요?"
사내가 이윽고 정신을 수습하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슴의 통증 때문에 그는 다시 눕고만 싶어졌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을 가만히 보니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문짝처럼 어설프게만 보였다. 사내는 추물에 다 늙었는데 여인은 백옥 같은 살결에 제법 미모를 겸비한 젊은 여인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여인과 사내는 그제야 시체가 아닌 산 사람이 자기들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옷을 주워 입었다.
여인이 요염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신은 성씨를 어떻게 쓰시나요?"
사내가 기꺼이 대답해 주었다.
"왕씨지요. 왕중양이라고 합니다. 당신들이 절 구해 주셨군요. 늦었지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왕중양은 깊은 상처를 입은 채로 호수 위를 떠돌았다. 원래 흐르지 않는 것이 호수였지만 날이 밝아 오면서 갑자기 세어진 바람에 그는 나뭇잎처럼 힘없이 이 배가 있는 곳까지 밀려왔던 것이다. 왕중양은 용케도 나무토막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죽기 직전에 이들에게 발견되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연명하게 되었다.
"왕씨!"
여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호들갑을 떨어댔다.
"어쩜, 저도 왕씨인데 그럼 나이는……."
왕중양이 나이마저 말해 주자 그녀는 다시 손뼉을 쳐가며 기뻐했다.
"그럼 당신은 저에게 오라버니뻘이 되시는군요."
여인이 옆에 있던 추물인 사내에게 일렀다.
"어서 노를 저어 집으로 가자구."
그녀가 말한 집이란 바로 배 위에 있는 선창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왕중양은 그저 여인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아픈 몸을 의지했다. 여인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물에 빠지게 되었나요?"
왕중양이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소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여인은 크게 화를 내며 이까지 부드득 갈았다.
"그럼 그 두 놈이 바로 오라버니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군요? 그 모용준이란 작자는 더욱 나빠요."
그러나 왕중양이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는 나와 의형제의 피를 나눈 사람이오. 다만 모용준이 붙여 준 그 두 놈들이 미울 따름이오."
여인이 왕중양을 자기 가슴에 안으며 속삭였다.
"난 왕정아(王亭兒)라고 불러요. 오라버니는 마음 편히 이곳에서 휴식을 갖도록 하세요. 이곳에서 나는 물고기를 많이 드시면 몸이 훨씬 좋아지고 회복도 빠를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 왕중양의 상처와 건강은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왕정아는 그런 왕중양을 보면서 매우 흐뭇해 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왕중양 곁에 머물면서 온갖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줄곧 왕중양 곁에서 시중을 들다가 그가 깊이 잠든 한밤중이 되어서야 잠깐 눈을 붙일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왕정아의 이런 행동에 쌍심지를 눈에 달고 나선 것은 바로 그 추물인 사내였다.
"물고기를 건지려다 결국은 애비를 얻은 셈이로군."
그는 툭하면 이렇게 비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왕정아는 사내의 질투를 따끔한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아니 바로 당신의 애비인지도 모르지요."
사내가 발끈해서 받아쳤다.
"내 아버진 너무 일찍 세상을 떠서 자식의 효성이 무언지도 잘 모르는 양반이라구."
하지만 이같은 싸움은 언제나 여인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래, 내가 당신의 목을 졸라 죽여 버려야 정신을 차리겠어요? 아니면 호수에 처박을까요?"
여인의 따금한 일침에 사내는 입을 다물고는 슬슬 눈치 살피기에 바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틈만 나면 왕정아의 심기를 살살 긁어 놓곤 했다.
"임잔 매일 저자의 얼굴을 발에 채이는 돌멩이만큼이나 실컷 감상할테지. 어떤가? 내 얼굴을 보는 것보다야 백번 낫겠지?"
"이 도깨비 같은 것아. 입 좀 다물 수 없어?"
그러자 사내가 침을 질질 흘리며 가까이 다가오려 했다. 그는 여인이 날마다 왕중양 곁에서 시중을 드느라 자기 욕심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 게 불만이었다.
"저리 비켜요. 난 생각이 없으니 다른 데 가서 알아보든지……."
사내가 버럭 화를 냈다.
"뭐, 생각이 없다고? 그게 뭐 끼니 때마다 챙겨 먹는 쌀이야 나물이야? 생각이 없다고 해결되는 문제인 줄 알아? 정 그렇다면 그 녀석을 다시 물 속에 처넣고야 말겠어! 그럼 임자도 그땐 쌀이 없어도 또 나물이 없어도 게걸스럽게 밥을 찾는 지경이 될 테니 까!"
사내가 몸을 일으키며 단호하게 말하자 여인이 지지 않고 맞섰다.
"함부로 그분에게 손을 댔다가는 각오하라구요. 당신도 꽁꽁 묶어 살점을 모조리 뜯어낸 다음 고깃밥으로 던져 줄 테니까!"
사내가 갑자기 입을 벌리더니 할말을 잃은 듯 조용해졌다. 여인이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어깨를 계속 들먹이자 그가 여인의 팔을 잡으며 눙치듯 말했다.
"아니 정말로 화를 내는 거야?"
여인이 갑자기 비수를 꺼내 들더니 사내에게 겨누었다.
"날 건드리지 말아! 난 지금부터 잠을 자야겠으니."
사내는 별도리 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왕중양을 물에서 건진 것을 크게 후회하는 순간이었다.
한편 왕중양은 선창 속에서 두 남녀가 다투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그는 이제 몸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기에 그만 떠나려던 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날 가슴에 치명타를 입고도 살아난 것이 기적과도 같았다. 아직 완전히 건강을 되찾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내일 두 사람이 배를 뭍에 대면 떠나리라 다짐했다.
이튿날 배가 나루에 이르자 여인이 사내에게 일렀다.
"당신이 가서 먹을 걸 좀 사 오세요. 오라버니를 대접해야죠. 그동안 배 위에 있은 탓에 육고기는 구경도 못했잖아요. 아니면 다른 좋은 걸 좀 사 오던가."
그러자 사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좋은 거라니? 그게 도대체 뭔데? 정 그렇다면 임자가 가서 사오시지?"
"얼른 갔다오지 못하겠어요?"
"알았어. 알았다구!"
사내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발에 채이는 돌멩이를 멀리 날려 보냈다.
여인은 뱃머리에 기대어 앉아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호수에서 물을 떠올려 감는 머리는 언제나 상쾌했다. 그녀는 물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서 둘러 머리를 말리고는 급히 선창으로 가 왕중양을 찾았다.
왕중양은 선창 안에서 한가롭게 앉아 있다가 여인이 허리를 숙이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왕중양 앞으로 오더니 다감하게 말을 건넸다.
"오라버니, 속이 갑갑하지 않으세요?"
"아니 괜찮소."
"아이, 동생에게 존대를 하는 오라버니도 있나요. 호호호!"
왕중양도 멋쩍은 듯 웃음을 띄웠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웃는 게 보기 싫지는 않지요? 제가 보기엔 오라버니는 아주 패기 있는 사내 같아요. 하지만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전 오라버니 앞에서 수선을 떨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전 어렸을 적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새겨 들었는데 사내가 여인과 즐기지 못하면 마음이 굶주린 거래요. 혹시 오라버니는 마음이 굶주려 있는 건 아닌지요?"
왕중양이 시선을 돌리며 정색을 했다.
"아니오!"
그러나 왕정아는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는 곧 훌륭한 여인을 얻게 될 것이고 그러면 정말 건강한 마음과 몸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녀가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벗는다는 것보다는 한 마리의 물고기가 거센 물결에 찢기고 상처입은 비늘을 털어내고 있다는 편이 더 어울렸다. 남루한 옷을 벗어 버리자 그녀는 정말 한 마리의 물고기로 다시 태어난 듯했다.
왕중양은 말없이 그녀의 행동을 지켜 보기만 했다. 미끈하고 윤기가 흘러 금방이라도 퍼득일 것만 같은 그녀의 몸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서요!"
그녀가 살짝 미소 지으며 왕중양에게 재촉했다.
"이봐 동생, 그대에게는 이미 사내가 있지 않나?"
"그는 사내가 아니에요. 그 사람은 제가 주워 온 사람인데 언제든지 물 속에 처박을 수도 있어요."
"아, 안 돼!"
"난 오라버니를 구해 드렸고 또 지금도 구원을 드리려고 하는 거랍니다. 오라버니는 마음을 굶주리고 있는데 제가 채워 드리겠어요."
왕중양은 끝까지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급기야 그녀가 왕중양의 몸을 덮치며 속삭였다.
"사내란 여인의 손길을 알아야지 힘도 생겨나는 법이에요."
그녀가 손을 왕중양의 다리 사이로 불쑥 집어 넣었다. 왕중양이 그녀를 뿌리치며 일어섰다. 그러자 그녀가 왕중양을 다시 쓰러뜨리고는 선창 밖으로 끌고 나갔다. 왕중양은 아직 기력을 완전하게 회복시킨 뒤가 아니라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그녀가 왕중양의 다리를 자기 어깨 위로 들어올리더니 협박을 했다.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할 수 없어요. 다시 물 속으로 던져 버리는 수밖에!"
정말 그녀는 왕중양을 던져 버렸다. 다시 차가운 물 속으로 내던져진 왕중양은 이제 죽음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기력이 이미 쇠잔해져 소리조차 지를 힘도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가라앉는 육신을 물에 맡겼다. 그런데 한 마리의 물고기마냥 뒤따라 물 속으로 들어온 그녀가 왕중양을 잡아채더니 다시 배 위로 기어올랐다.
"다시 한 번 전 오라버니를 구해 드렸네요."
"이미 말했잖는가. 난 진심으로 그대에게 감사하고 있어."
두 사람은 모두 숨이 차 가쁘게 가슴을 부풀렸다.
"하지만 전 아직 식지 않은 가슴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아요. 저 차가운 물조차도 저를 달랠 수가 없어요."
그녀의 눈에서는 또 다른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왕중양은 달리 그녀를 달래 줄 방법을 찾지 못했다.
"제가 그토록 뒤떨어지는 계집인가요?"
그녀는 어느 누구와도 견줄 만한 미모를 갖춘 여인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의 그녀는 촉촉하게 온몸에 매끄러운 물기를 머금고 있어 그 자태는 더욱 황홀했다. 왕중양은 저도 모르게 뛰는 가슴을 달래 고자 눈을 감았다.
"눈은 왜 감는 거죠? 차라리 보지 않겠다는 말씀인가요?"
그녀의 손이 다시 불쑥 왕중양의 아랫도리로 파고들었다. 흡 하고 놀란 왕중양이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호호호! 벌써 내게 들켜 버린 걸요. 오라버니의 마음도 이미 움직이고 있어요."
그녀는 다시금 격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들이밀 태세였다. 왕중양을 강제로 눕혀 놓고는 위로 올라가 애무를 하기 시작했다. 왕중양으로서는 난생 처음 당해 보는 괴이한 일이었다. 그녀는 배를 부리는 여인답게 힘이 강했다. 왕중양이 몸을 뒤척이려 하자 두 다리로 그의 허벅지를 내리누른 채 옷을 벗겨 냈다. 그녀는 남성을 드러낸 왕중양을 자신에게로 들이밀려고 더욱 집요하게 몸을 움직였다. 또한 손길도 그의 몸 구석구석을 바쁘게 더듬어 갔다. 마치 여인과
사내가 뒤바뀐 꼴이라 왕중양은 그 와중에서도 누가 볼까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정말 누군가 주위에 있었던 것이다.
"정아, 내가 돌아왔다!"
사내가 소리치며 배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가 신경질을 부렸다.
"벌써 오면 어떡해! 한창 재미를 보려던 참인데."
아직 그녀와 왕중양이 벌이고 있는 광경을 보지 못한 그는 농담으로 그러는 줄 알고 히히 웃기까지 했다. 사실 걸음을 돌려 다시 온 것도 그같은 의심이 생겨서였다. 그러나 훤한 대낮에 엄연히 사내가 있는 여인이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사내가 배 위로 오르자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오고야 말았다. 그는 한동안 쫓던 토끼 대신 나타난 호랑이 앞에 선 사냥꾼처럼 굳어진 얼굴로 그 자리에 붙박혀 버렸다.
"하필이면 꼭 결정적인 때 나타날 게 뭐람!"
그녀의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사내가 고함을 꽥 하고 질렀다.
"이게 뭐야! 둘이 붙었다 이거지?"
그녀는 아직 왕중양의 몸 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로 그를 오히려 꾸짖었다.
"썩 물러가지 못해!"
웬일인지 사내가 선창 귀퉁이로 몸을 감추며 숨을 죽였다. 그것을 확인한 그녀가 다시 왕중양의 사그라든 몸을 세우려고 애무를 했다. 그러나 왕중양은 스스로 자신을 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워낙 기력을 잃어버린데다 다시 물 속에 처박혔다 나온 탓에 그녀의 손길이 집요했지만 완벽한 남성을 만들 수가 없었다. 곧 그녀의 짧고도 깊은 신음 소리가 얼굴 전체로 훅 전해졌다.
"으음……."
왕중양은 자신의 얼굴로 짙게 전해지는 그녀의 입김을 맡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저 혼자 욕심을 채우고 말았다. 왕중양은 화가 치밀어 당장이라도 그녀를 요절내고 싶었다. 그녀가 왕중양에 게서 몸을 떼며 옷을 주워 입었다. 그리곤 그때까지 숨어 있던 사내에게 명령하듯 다그쳤다.
"어서 배를 몰지 않고 뭘 해요!"
"알았어. 몰면 될 거 아냐, 그래, 재미는 실컷 보았냐?"
"저분이 마음의 양식을 채우셨으니 이젠 만족하실 거예요. 그런데 당신이 뭘 안다고 나서요?"
"하지만 저 사람은 배를 불렸겠지만 난 벌써 며칠째 굶었는걸!"
왕중양은 눈을 감은 채 기이하기만 한 이들의 대화를 들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다시 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바람결에 묻어 오듯 아련하게 전해졌다.
"천천히 몰아요. 호수 귀퉁이에 이르면 고기 두 마리를 잡아 오라버니께 드려야겠어요."
"영양보충을 시켜 놓고 또 굶주린 마음의 배도 채워 주시겠다고?"
이상했다. 그 사내는 여인을 미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또한 다른 사내와 몸을 섞고 있는데도 노여워하지 않았으며 아니 노여워했으며 또 아무렇지도 않게 굴기도 했다. 왕중양은 과연 이들은 어떤 사이인가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는 가운데 배는 어느덧 호만(湖灣)에 이르렀다.



제6장 함정에 빠진 임조영
임조영과 모용준의 일행은 정강(靜江) 쪽으로 향했다. 모두들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지만 걸음을 늦추지는 않았다. 이윽고 이들은 정강에 이르러 눈앞에 모용세가를 두게 되었다.
모용준은 오는 동안 임조영과 자지에게 각별하게 대했다.
"동생들, 나의 모용세가에 곧 당도하네. 자네들은 이제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될 테니 조금만 참게. 자네들은 모용세가의 경치를 본적이 없을 거야. 굉장하다네, 자네들이 그걸 보게 돼서 난 무척 기쁘다네. 그대들을 보면 우리 가문 사람들도 몹시 기뻐할 걸세. 이처럼 훌륭한 의형제를 얻었다는 것은 모르고 있을 테니까."
임조영은 대답 대신 미소를 보냈다. 모용준은 임조영의 미소를 보며 속으로 흐뭇해 했다. 임조영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미소와 분위기는 자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윽고 큰 호수 앞에 이르렀다. 호수에는 연(蓮)이 가득 있었는데 늦가을이라 잎이 시든 상태였다. 모용준이 웃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 것도 신나는 일이지."
그러나 배가 좀체 눈에 띄지를 않았다. 그런데 자지가 한쪽을 바라보다 급히 소리쳤다.
"오라버니들, 저길 좀 보세요!"
자지가 가리킨 쪽은 마을이었는데 짙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큰불이 일어난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것을 보던 모용준의 낯빛이 금세 굳어졌다.
"저……저건 모용세가가 틀림없는데!"
그는 곧 배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다행히 갈대숲으로부터 배 한 척이 빠져 나오는 것을 발견한 그가 손을 흔들었다.
"이보시오! 우리를 좀 태워 주시겠소?"
배 위에 있던 사람이 되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처음부터 반말을 하는 그 사내에게서 모용준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
"우린 모용세가로 가는 길이오!"
배 위에 있던 사내가 소름이 돋을 정도의 징그러운 웃음을 흘렸다.
"우후후훗, 모용세가로 간다고? 하지만 오늘부터는 다신 모용세가를 찾을 수 없을걸. 우하하하핫!"
사내가 또다시 요란스럽게 웃어댔다. 모용준이 당황하며 그에게 황급히 물었다.
"넌 도대체 누구냐?"
사내가 한 자 한 자 힘을 주며 소리 높이 외쳤다.
"동정팔교(洞庭八較)!"
"동정팔교가 우리 모용세가와는 무슨 원한이 있단 말이냐?"
대답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던 터라 모용준은 훌쩍 몸을 날려 배위로 올라갔다. 곧 두 사람은 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사내가 칼을 휘둘렀는데 모용준이 날렵하게 몸을 놀려 매번 빗나가고 말았다. 모용준도 검을 뽑아 들고는 사내의 가슴을 향해 공격했다. 사내는 그때마다 덫에 걸린 쥐마냥 섬칫 놀라곤 했다. 마치 십여 개의 검날이 동시에 날아드는 듯한 신기한 검법이었다. 사내가 칼로 공격해 오자 모용준은 얼른 검법을 바꾸어 그자의 아랫도리를 찔렀다. 사내가 몸
을 움츠리며 뒤쪽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곧 싸움은 결판이 나고 말았다.
"풍덩!"
위기를 느낀 사내가 그만 물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세 사람은 무사히 배를 타고 대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불을 지르며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모용준이 소리쳤다.
"나 모용준이 왔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세 명의 사내가 막 비녀(婢女)들을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모용준이 장검을 뽑아 들고는 그쪽으로 날아갔다. 사내들은 바로 강남 흑도의 사람들이었다. 이를 확인한 임 조영도 검을 들고는 자지를 이끌고 뒤를 따랐다.
"그들을 놓아주면 용서를 하겠다!"
그러나 임조영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는 자들이었다.
"공자, 그대가 지금 잡고 있는 여인이 이 비녀들보다 나은데 그래. 어서 이리 오라구."
그러자 몇몇 사내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모용준이 그 사이로 나서며 주먹을 내보였다.
"동정팔교가 뭐가 그리 대단하더냐? 감히 나의 모용 산장에 와 행패를 부리다니 목숨들이 아깝지가 않느냐?"
모용준은 '망우검법(忘憂劍法)'을 쓰며 사내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사내도 칼을 제법 쓰는 자인지라 만만하지가 않았다. 검날 들이 맞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었다.
"훌륭한 검술이로군! 모용세가엔 이런 호수(好手)가 없었는데!"
사내가 기분 나쁜 웃음을 짓더니 다시 칼을 모아쥐고는 공격해 왔다. 모용준이 임조영을 향해 경각심을 일깨웠다.
"셋째 동생, 이 놈들을 반드시 죽여야 하네. 이들은 흑도에서 가장 사악한 자들이라구!"
사내가 으르렁대며 맞섰다.
"네 놈은 백도(白道) 인물이니 똥이로구나! 흑도에는 옥이 있고 백도에는 똥이 있도다, 라는 말도 못 들어 봤느냐?"
그가 달려들어 모용준의 옷자락을 북 찢어 놓았다.
다른 쪽에서 무리들과 맞서 싸우고 있는 임조영이 짧게 돌아보며 주의를 주었다.
"조심해요!"
그러나 위기는 임조영이 먼저 맞게 되었다. 아까 물 속으로 뛰어 든 자가 앞에 나타난 것이다.
"넌 좋은 집 자손 같은데 왜 하필이면 모용준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느냐?"
임조영은 대꾸하지 않은 채 검을 들어 그자의 팔을 찔렀다. 그 동작이 하도 빨라 그자는 미처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 놈을 죽여라!"
그자가 팔을 움켜쥐며 옆으로 물러선 채 소리치자 살인과 강간을 일삼으며 날뛰고 있던 사내들이 칼을 높이 쳐들고는 일제히 달려들었다. 모두 일곱이었는데 임조영을 에워싸고는 칼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그 놈이 잡고 있는 여인부터 쳐라! 그래야 빈틈이 생기는 법이다!"
누군가 이렇게 소리를 질러댔다. 과연 사악한 무리들이 아닐 수 없었다. 임조영은 그 말에 더욱 자지의 손을 부여잡고는 대적하였다. 그러나 생각만큼 무리들의 공격을 막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배경으로 버티고 선 사내가 거들먹거렸다.
"모용준아, 네 놈이 무슨 백도 인물이란 말이냐? 네 놈은 한낱 난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네 놈의 가문에서 사내라고는 씨가 말랐고 계집들도 모두 네 놈에게 짓밟혀 남아나지를 않았다. 내가 네 놈이 데리고 논 찌꺼기를 거두자니 실로 구역질이 다 난다!"
모용준이 검을 힘껏 잡고는 앞으로 나서려 했다. 다시 그 사내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그런데 한 가지 괴상한 일이 있어. 너 같은 난쟁이가 여인을 잘 다룬다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한편 임조영을 에워싸고 있던 무리 중 하나가 역시 간괴한 말로 부아를 돋우기 시작했다.
"너 같은 놈이 미인을 데리고 다닌다는 게 볼썽사납다. 어서 우리 동정팔교에게 넘겨주는 게 어떠냐?"
임조영이 이를 악물며 검으로 바람을 갈랐다. 자지만 없었더라면 더 수월하게 놈들을 단번에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지가 그런 임조영의 심정을 간파해 냈는지 입을 열었다.
"공자님, 조심하세요. 그리고 전 상관하지 마세요."
그러나 자지를 악한 무리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용준 앞으로 몇 사람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들의 손에는 여인들과 노인들인 묶여 있었는데 모두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사내가 으름장을 놓았다.
"모용준, 네 놈이 그 검을 내려놓는다면 이 영감은 살려 주마!"
그는 어느새 칼로 노인의 목을 겨누었다. 노인은 그러나 굴하지 않았다.
"모용세가가 백여 년을 이끌어 왔는데 네 놈이 위협을 한다고 해서 무릎을 꿇을 것 같으냐?"
노인은 조금도 두려워하지를 않았다. 노인은 또한 모용준에게 원수를 꼭 갚아 달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곤 그것으로 노인은 세상과 이별을 하고 말았다. 사내가 칼로 노인의 목을 잘라 공중으로 날려보냈다. 잘려 나간 노인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노인은 바로 모용준을 어렸을 적부터 길러 준 사람이었다. 그러니 모용준의 분노가 클 수밖에 없었다.
모용준은 검끝을 가슴 쪽으로 겨누고 자결할 결심을 했다.
"오냐, 잘 생각했다. 네 놈만 사라지면 이 사람들은 죽음을 면할 수 있다!"
"정말이더냐? 내 한 목숨 버리는 것으로 저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모용준이 막 검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려고 할 때였다. 임조영이 다급해진 목소리로 불렀다.
"안 돼요! 저 놈들의 말을 믿어선 안 됩니다! 형님이 죽는다면 오히려 조상들에게 누를 끼치는 일밖에는 되질 않아요."
모용준이 검을 서서히 아래로 내려뜨리며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모용준의 실의는 그때뿐이었다. 곧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고개를 쳐든 그가 포효했다.
"좋다! 네 놈들이 모용세가 사람을 한 사람 죽일 때마다 난 동 정팔교 너희 놈들을 열씩 한꺼번에 꿰어 사지를 찢어발기겠다!"
모용준의 말이 떨어지자 다시 사내에 의해 또 다른 노인의 목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아저씨!'
모용준은 속으로 노인을 불렀다. 이번엔 낮익은 비녀의 머리채를 사내가 잡아채고는 살기 어린 눈초리를 굴려 댔다.
"이 계집애는 참 곱구나, 죽이긴 아까운데……."
사내는 강제로 비녀의 품속으로 손을 넣어 마구 주물러댔다. 비녀가 울먹이며 모용준을 불렀다.
"공자님!"
모용준이 한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기회를 엿봐 검으로 놈의 목을 치려고 했다. 그 순간 비녀의 가냘픈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악!"
사내가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고는 세게 비틀어 버린 것이었다.
모용준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죽든지 어서 싸움을 끝내 죄없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고 싶었다.
"치사하게 힘없는 여인을 괴롭히지 말고 어서 덤벼라!"
그러자 사내가 비웃었다.
"누가 네 놈과 싸우겠다더냐? 우리 동정팔교가 너 같은 놈과 싸움을 했다는 소문이 강호에 알려지면 웃음거리가 아니겠느냐?"
그것은 치욕적인 말이었다. 모용준은 소리를 내지르며 검을 높이 쳐들었다. 보폭을 넓히며 곧 사내에게로 달려든 모용준이 검을 휘둘렀다. 이 사내가 바로 동정팔교의 우두머리인 뇨해교(鬧海蛟)란 작자였다. 그는 매우 간사하여 상대에게 온갖 욕설과 치욕을 안겨 주기로 유명했다.
"난쟁이 주제에 제법 검을 쓰는구나!"
모용준이 번개같이 검을 쓰자 그자도 칼을 들어 맞섰다. 서로 부딪칠 때마다 불꽃과 함께 날카로운 금속성의 단발마가 울려 퍼졌다. 한차례 공격을 끝낸 모용준이 자세를 가다듬는 틈을 타 사내가 푸드득 날아들었다. 모용준은 옆으로 살짝 물러서며 그자의 허리를 노렸다. 그러나 역시 검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만 요란스럽게 났다. 이번엔 모용준이 땅을 박차고는 높이 솟아올랐다. 키는 작지만 경공은 그자보다 뛰어나 그 높이가 만만하지가 않았다. 잠시 눈앞에서 사라
진 모용준을 찾던 그자가 황급히 몸을 숙이며 칼을 내 밀었다. 모용준이 아래로 내리면서 그자의 머리를 축으로 하여 밟고는 다시 치솟았다.
임조영도 결사적으로 무리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옆에 자지가 있긴 해도 원래 무공이 뛰어난 임조영이라 조금도 빈틈을 내보이지 않았다. 아까 소리친 사내가 다시 똑같은 명령을 내렸다.
"어서 여인을 먼저 치렷다!"
무리들이 곧 자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임조영은 그녀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뒤로 물러서며 공격을 막아냈다. 한 사내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번쩍! 마치 강한 햇살이 검에 반사 되듯 섬광이 일었다. 그리곤 달려들어온 사내가 스르르 아래로 허 물어졌다. 임조영의 검에 정확히 가슴을 베이고 말았다. 다시 한 사내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긴장감을 사이에 둔 채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곧 그가 칼을 양손으로 모아쥔 채 달려왔다. 이번엔 잡고 있
는 자지의 손을 축으로 하여 공중에서 한바퀴 돈 임조영 이 검으로 그자의 어깨를 찔렀다. 그는 상처를 움켜쥐고는 뒤로 물러섰다. 이자가 바로 동정팔교 무리 중 둘째인 출수교(出水蛟)였다. 이자는 여색을 밝히는 인물로 처음부터 자지를 빼앗을 욕심으로 나섰던 길이었다. 그런데 섣부른 공격으로 상처만 입게 되었다. 다시 일곱이나 되는 무리들이 한꺼번에 임조영에게로 달려들 태세였다.
그러자 애절한 자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서 제 손을 놓으세요!"
그녀는 지금 최선의 방법을 택하려고 했다. 만약에 임조영이 자기 때문에 화를 당한다면 자기뿐만 아니라 모용준까지도 죽음을 면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싸움은 어느 쪽도 우세를 점하고 있지를 않기 때문에 임조영이 빠진다면 큰 손실이 난다는 것도 그녀는 미루어 짐작했다. 모용준이 임조영을 불렀다.
"셋째, 어서 자지 처녀를 데리고 먼저 빠져 나가게! 내 뒤따라 갈테니. 어서!"
임조영이 힐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염려는 마시고 앞의 놈들이나 해치우세요!"
뇨해교의 무공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모용준과 임조영이 서로 얘기를 나누는 틈을 타 다시 모용준에게 칼을 휘두른 뇨해교의 눈빛은 온통 살기로 득실대고 있었다. 모용준이 겨우 그의 칼을 피하자 뒤에 있던 사내가 이죽거렸다.
"큰형님, 또 둘을 죽여 버리지요!"
"좋지! 다시 한 번 저 놈이 아끼던 년의 비명을 들어 보자꾸나!"
사내가 곧 사람들 틈에서 벌벌 떨고 있던 비녀를 끌어냈다.
"공자님! 흑……."
그녀는 잔뜩 겁에 질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모용준이 다독였다.
"두려워 말아라. 내가 곧 구해 주마."
그녀는 꿈에서라도 죽기는 싫은지 다급하게 모용준을 불렀다.
"공자님, 당신은 전에 저에게……."
옆에 있던 사내의 칼끝에 눌린 그녀는 말을 다 잇지를 못했다. 대신 사내가 말을 이었다.
"저자가 네 년을 잘 대해 주지 못했단 말을 하려던 참이었지? 흐흐, 저 놈은 지금 자기 몸도 돌보지 못하게 된 판국인데 어찌 너를 생각하겠느냐?"
이들의 참극을 지켜 보던 태백(泰伯) 노인이 한 손을 높이 들며 앞으로 나왔다. 그는 가장 나이가 든 노인이었다. 모용준의 눈빛이 몹시 흐려졌다.
"내가 할말이 있소이다!"
모용준은 노인의 의도를 단번에 읽어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렁그렁 눈앞이 흐려졌던 것이다. 태백 노인이 땅에 널린 시체를 내려다보면서 입을 떼었다.
"이 사람아, 자넨 모용세가의 주인이고 난 자넬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었지. 자네가 남과 달라 곡절도 많았고 그 때문에 마음을 다쳐 남을 용서 못하고 또 자신조차도 돌보지 않는다는 것도 아네. 하지만 지금은 굳게 마음을 다져야 하는 시기일세. 그리고 네 놈들도 잘 듣거라. 이토록 살상을 저지르고도 살아 남기를 바란다더냐! 난 네 놈들의 손에 죽더라도 모용세가의 사람답게 떳떳하게 죽음을 택할 것이다!"
뇨해교가 양미간을 일그러뜨리더니 얼른 칼을 노인의 목에 갖다 대었다.
"모용세가에서도 이런 인물이 남아 있었다니 뜻밖인걸. 하지만 네 놈이 얼마나 대가 센 놈인지 한번 보겠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노인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아저씨!"
모용준이 달려갔지만 뇨해교의 칼에 막히고 말았다. 그런데 쓰러진 태백 노인이 꿈틀대며 손을 뻗으려고 했다. 다시 한 번 이들의 관악성에 모용준은 치를 떨었다. 고통을 배로 주기 위해 일부러 한칼을 쓰지 않은 것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뇨해교가 쓰러진 노인을 향해 다시 칼로 마구 들쑤셔댔다. 옆에서 지켜 보던 동정팔교 무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까지 쳤다. 알고 보니 그는 잔꾀를 부려 노인의 몸을 피해 옷자락만 찔러대고 있는 중이었다.
"내 앞에서는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 되지, 그러나!"
뇨해교가 자기 칼을 코앞까지 들어 한동안 바라보더니 곧 노인을 향해 난도질을 했다. 이번엔 옷자락만을 찢는 것이 아니었다. 노인은 어금니를 악문 채 몸부림을 쳤다. 그는 노인의 살점만을 발기발기 벗겨 냈다. 처음에는 있지도 않은 양쪽 볼의 살점을 발라내더니 두 어깨와 앞가슴 순서로 고통스럽게 죽여 갔다. 그가 칼을 그어 댈 때마다 노인의 살점이 피와 함께 사방으로 튀었다. 그런데도 노인은 쉽게 숨을 거두질 않았다. 아픔을 참아 가며 노기 어린 눈으로 뇨해
교를 노려보자 그는 약간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네 놈은 역시 진정한 칼을 쓸 줄 모르는 자로구나!"
온몸으로 피범벅을 한 채 꿈틀대며 발악을 하는 노인을 보자 뇨해교는 경악을 했다. 그는 서둘러 칼로 노인의 가슴을 찍었다.
모용준이 잠긴 목소리로 뇨해교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네 놈을 기필코 조각 내어 저 노인의 무덤가에 향으로 피우겠다!"
뇨해교가 실실 웃으며 모용준의 가슴을 후벼파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에 따르면, 처음 모용써 조상들은 위풍이 그런대로 대단했다. 모용복은 비록 미치광이였지만 '인간의 도로 인간의 몸을 다스리는(以其人之道, 還治其人之身)' 재간을 갖고 있었으니 실로 천하에 드문 호한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모용준은 알려진 사실만 해도 보잘것없는 난쟁이였고 재간도 형편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또한 이젠 그 잘난 모용세가도 불타 없어지게 되었으니 모용준도 강호에서 사람 구실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도 덧붙였다. 천
하 무림의 사대 가문 중 하나인 모용세가의 몰락을 떠 벌리고 있는 뇨해교가 자신의 말에 종지부를 찍듯 목청을 높여 덧 붙였다.
"그런 네 놈이 모용세가를 운운한단 말이냐? 차라리 우물을 찾아 스스로 빠져 죽는 게 나을 것이다!"
임조영이 슬쩍 모용준 쪽을 살피더니 얼른 자지를 안고 몸을 날려 두 사람 사이에 섰다. 임조영이 침통한 낯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모용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손을 통해 그가 지금 몹시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임조영은 우선 모용준을 살려 놓고 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잡고 있는 손에 자지의 손을 옮겨 주며 당부했다.
"둘째 형님은 이 처녀를 데리고 먼저 자리를 피하세요."
임조영의 태도는 진지했다. 모용준은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뿌리쳤지만 달리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모용준은 임조영이 동정팔교를 당해 내지 못하여 위험에 처할 것만 같은 예감 때문에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임조영이 다시 재촉하자 두 사람은 침통한 얼굴로 막 몸을 돌렸다. 그러나 동정팔교가 이들을 그대로 돌려보낼 리가 없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그러나 임조영이 재빨리 검으로 막아 서는 틈을 타 모용준과 자지가 무리를 벗어났다. 임조영은 두 사람이 안전하게 무리들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어서 너희들도 도망을 가는 게 좋을 것이다!"
뇨해교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어젖혔다.
"하하하! 네 놈 혼자서 우리와 대적하겠다는 거냐? 그 용기 하나는 내 높이 사주마."
그가 코끝에 앉은 파리를 쫓듯 짧게 고갯짓을 하자 일제히 무리들이 소리를 지르며 임조영을 빙 둘러쌌다. 여덟이나 되는 무리들 이 한꺼번에 공격을 해올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임조영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야압!"
한 사내가 칼을 앞으로 길게 내민 채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입조영이 매처럼 날쌔게 몸을 솟구쳐 놈의 머리 위로 뛰어넘었다.
"웁!"
놈의 정수리에서 피가 튀었다. 임조영은 마치 냇가에서 물고기를 창으로 찔러 잡듯 검으로 놈의 정수리를 찍었던 것이다. 사내가 힘없이 고꾸라지자 모두들 뒤로 주춤 물러섰다.
뇨해교가 임조영을 노려보더니 무리들을 향해 외쳤다.
"팔선도진(八仙刀陳)을 쳐라!"
그러자 나머지 무리들이 운무를 연상하게 하는 형상으로 넓게 흩어졌다. 그러더니 서로 어우러지듯 각자 위치를 바꿔 가며 춤을 추 듯 했다. 그들의 칼끝은 임조영의 급소를 향해 꼿꼿하게 세워졌다. 임조영은 분주하게 몸을 회전시키며 놈들의 발을 주시했다. 뇨해교가 다시 소리쳤다.
"칼을 받아랏!"
무리들의 칼날이 번쩍였다. 일제히 임조영을 향해 굶주린 맹수의 얼굴로 달려들었다. 놈들의 초수는 제각기 달랐는데 그중 뇨해교는 '여선일검정건곤(呂仙一劍定乾坤)'이란 초수를 썼다. 이는 곧 상대의 아랫배를 중점적으로 노리는 초수이기도 했다.
둘째인 출수교는 '한상자출적시풍(韓湘子出笛試風)'이란 초수를, 그리고 셋째인 분랑교(分浪蛟)는 '하선고취설운양(何仙姑醉說雲賜)'을 쓰면서 찌르지는 않고 요란하게 칼을 휘둘러 임조영의 시선 을 혼란시키고자 했다. 넷째인 가선교(駕船鮫)는 칼을 부채처럼 펼치고는 임조영의 머리를 내리치는 '한종리용진원신(漢鐘 用盡元神)' 초수를 각각 펼쳤다.
또한 나머지 무리들도 각기 다른 초수를 구사하며 임조영의 곳곳을 노렸다. 이들 고수들은 제각기 다른 초수를 쓰면서도 그 동작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중 뇨해교의 동작이 가장 빠르고 날카로웠다. 그의 칼끝은 곧바로 임조영의 젖가슴을 겨눈 채 들어왔다.
"혹시 네 놈은 가짜 사내는 아니더냐? 어째 젖가슴 쪽이 수상한 데!"
임조영이 대답 대신 검으로 뇨해교의 칼날을 받으며 옆으로 비껴 나갔다. 마침 그 앞에는 가선교가 버티고 있는 게 보였다. 가선교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임조영을 덮쳤다.
"죽여 버리겠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임조영의 검에 어깨를 찔린 그가 혼절하듯 바닥에 쓰러졌다.
"부……분하다."
모두들 쓰러진 가선교를 쳐다보며 동작을 멈추었다. 그는 분명 어깨를 찔렸는데 서서히 죽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으윽!"
가선교가 비명을 한차례 내지르며 꿈틀댔다. 그는 조금씩 숨통이 조여 오는 고통에 손과 발을 흔들었다. 그것을 본 뇨해교가 탄식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옳은 것 같군. 그대가 그 반화대회에서 북방 악패인 유운장 사람들을 여지없이 깔봤다면서? 과연 소문대로 군!"
전의를 상실한 듯한 뇨해교의 말이 떨어지자 무리들 중 몇몇이 황급히 달려나와 쓰러진 가선교를 메고 물러갔다. 뇨해교도 무리들을 이끌고는 돌아섰다. 모용세가의 비녀들과 노인을 지키고 있던 사내들 역시 하나 둘씩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모용세가 사람들은 시체들을 모아 정성스레 매장을 해 주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임조영의 눈앞에는 한사내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큰형님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곳에는 없는 것 같다. 만약 이곳에 있었다면 벌써 모습을 나타냈을 텐데……. 살아 계시기나 한 건지?'
임조영이 사람들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혹시 왕 공자라는 분을 보지 못했소? 그분이 이곳에 벌써 도착 해 있어야 할 사람인데."
시체를 거두고 있던 노인과 아두는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둘째 형님인 모용준을 따라 임안에 갔던 몇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 왕 공자와 함께 모용세가로 왔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러자 노인이 무언가 짚이는 데가 있었는지 꾸부정한 몸을 곧추 펴며 되물었다.
"임안에 갔었다는 사람의 생김새는 어떠한가요?"
임조영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미처 모용준에게서 그들의 인상 착의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아두가 안타까워하는 임조영을 보다못해 거들며 나섰다.
"그럼 혹시 제가 그럴 만한 사람들의 이름을 댈 테니 알아볼 수는 있으신지요?"
아두가 곧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 외기 시작했다.
"일기충천(一氣沖天) 지청(遲靑)인가요?"
임조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절금수(折金手) 허불잉(許不剩)인가요?"
역시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혹시 병부(病夫) 목우(穆雨)와 귀살(鬼煞) 주정(朱亭)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러나 임조영으로서는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는 처지였다. 노인이 근심 어린 얼굴로 임조영을 쳐다보았다.
"공자께서 돌아올지 모르니 기다려 보시지요. 공자께서 만약에 오지 않으면 아까 말한 그 사람들이라도 올 게 아니겠소. 아마 도중에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도 모르지요."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을 도모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임조영은 비로소 검을 집에 끼워 넣고는 마땅한 곳에 앉아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토닥였다. 싸움도 그러했지만 도저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살상과 방화에 임조영은 심신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아두가 다가오더니 생긋 웃음을 던졌다.
"피곤해 보이시네요. 그리고 시장하실 텐데 저를 따라 오시지요."
임조영은 그때서야 자신의 뱃가죽이 볼품없이 흐느적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아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임조영은 곧 주렸던 배를 채웠다. 혼자 빈방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아두가 얼굴을 내밀었다.
"공자님, 기쁜 소식이에요. 공자님이 말한 그 두 사람이 막 돌아 왔어요. 그들이 왕 공자님을 뵈었다고 했어요."
반가운 소식이었다. 임조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지금 당장 그들을 만나볼 테니 안내하게."
임조영은 아두를 따라가면서 곧 만나게 될 왕중양 생각에 기분이 달뜨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청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내들 가운데는 왕중양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두 사내가 각각 주정과 목우라고 자신들을 밝히며 임조영에게 예를 올렸다. 임조영이 답례를 하며 슬쩍 이들의 얼굴을 살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다.
주정이라고 밝힌 사내는 말이 없이 무뚝뚝한 얼굴로 시종일관 임조영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반면에 목우는 임조영 앞에서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여러번 예를 올리는 등 지나치게 친절을 내 보이기도 했다. 임조영이 부담스러워 그를 말려야 할 정도였다.
"잠깐, 그런데 당신들 두 사람이 왕 공자를 모시고 이곳으로 오게 되었던 게 아니었소? 그분은 어디 계시오?"
주정이 막 입을 열려다가 목우의 눈치를 살피더니 그만두었다. 목우가 대신 예의 웃음을 온 얼굴에 띄우며 허리 숙였다.
"셋째 공자님께 알려 드립니다. 저희 두 사람은 왕 공자님을 모시고 오던 길에 동정호에 들렀었습니다. 왕 공자님께서 동정호를 구경하시겠다고 하여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배에 올랐는데……." 갑자기 목우가 눈물을 흘리자 임조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던 게 분명하리라. 임조영은 불길한 예감으로 초조해졌다.
목우의 말에 의하면 왕중양은 배에서 술에 취한 상태로 자꾸만 물 속에 뛰어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극구 말리자 왕중양은 심하게 꾸짖으며 고집을 피웠다. 이 때문에 두 사람과 왕중양 사이가 서먹해져서 배에서 내리고도 좋지 않은 감정이 자리했다. 왕중양이 두 사람에게 따지며 고집을 피웠다.
"대장부가 남에게 이처럼 끌려다녀서 야 되겠는가? 난 내 스스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성미야. 그대들이 자꾸 갑갑하게 굴면 난 모용세가로 가지 않겠어!"
화를 버럭 낸 왕중양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후에 왕중양의 뒤를 밟았는데 안타깝게도 영주(永州)까지 와서 그만 놓쳐 버렸다며 목우는 마치 전설을 들려주듯 담담하게 뇌까렸다.
주정이 냉랭한 기색으로 왕중양을 헐뜯으려고 했다.
"그 사람이 우릴 업신여기는 바람에 우리도 더 이상은 찾고 싶지가 않았소이다."
임조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자 목우가 얼른 나섰다.
"셋째 공자님, 우리 두 사람이 큰공자님을 찾지 않은 게 아니라 그분이……."
목우가 말을 다 맺지 못한 채 슬그머니 임조영의 눈치만 살폈다. 임조영은 침묵한 채로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왕중양이 이곳에 오지 않으려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처럼 무책임하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남에게 신세를 지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더군다나 이들의 말처럼 상대를 업신여기는 행동은 더더욱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왕중양은 지금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너무 걱정 마십시오."
임조영의 심기를 달래고자 입을 연 것은 뜻밖에도 평소 말이 없는 주정이었다. 목우도 뒤질세라 목청을 돋우었다.
"공자님, 이 사람이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모용세가의 세력이 강호에서는 아직 대단하기에 사람들을 동원하면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왕 공자님은 꼭 찾을 수 있을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임조영은 하는 수 없이 산장에서 특기로 했다. 달리 서둘러 떠나 야 할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또 왕중양의 일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튿날 산장 사람들이 모용준의 소식을 들려주었다. 모용준이 동정팔교 무리들과 대적할 의사를 밝혀 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임조영에게 자기가 돌아갈 때까지 산장에 조금 더 있어 달라는 부탁도 하더라는 거였다. 임조영은 그보다 더욱 애가 타는 일이 있어 마음을 졸였다. 그를 따라간 자지의 안부와 계속 앙금으로 남는 왕중양에 대한 걱정이었다. 임조영이 망설인 끝에 떠나려는 의사를 보이자 목우가 극구 말리며 나섰다.
"우리 두 사람은 이미 큰공자님을 잃어버렸는데 셋째 공자님마저 모시지 못한 것을 아시게 되면 저흰 모용 공자님께 죽음을 면치 못 합니다. 제발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임조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에서 마음만 졸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불쑥 주정이 한 가지 제의를 해왔다.
"산굴 구경을 안 하시렵니까?"
임조영은 난데없는 산굴 구경이란 말에 의아해 하자 목우가 설명했다.
"모용세가의 산장 뒤에는 땅굴이 하나 있는데 아주 기묘하기가 그지없습죠. 그 굴 안에는 모용세가의 무공초수가 적힌 서책들이 있는데 지금껏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임조영은 그다지 흥미가 끌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모용세가의 비밀과도 같은 곳이라면 애써 가 본들 무엇하겠냐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지금의 상태로서는 그보다 더 값진 구경거리가 있다 해도 물리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공자님이 보신다면 매우 도움이 될 줄 압니다만……."
다시 목우가 같이 갈 것을 종용하였다. 임조영은 이들의 간곡한 청도 있고 또 그 굴을 구경하고 나면 마음이 좀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뒤를 따랐다.
굴 안은 컴컴했고 어귀에는 가시덤불이 가득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지 않았음을 한눈에 짐작하게 했다. 그런데 목우가 엉뚱한 말을 흘렸다.
"그런데 한 가지 공자님 혼자서 들어가셔야 합니다. 저흰 이곳에서 기다릴 테니 혼자 마음껏 구경을 하십시오."
임조영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들은 숱하게 구경해서 그만 이력이 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임조영은 곧 횃불을 밝혀 들고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굴 안의 석벽은 습하여 만지면 축축하게 물기가 묻어날 것만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발을 내딛을 때마다 철퍽철퍽 소리가 날 정도로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굴은 곧게 뻗어 있지 않았지만 매우 길고 웅장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큰 석벽이 눈에 띄었다. 거기에는 '대연이 부흥할 날이 있으리라(大燕復光 指日可待)'라고 붉은 색으로 커다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그 글자들은 아주 깊이 파서 새긴 것으로 붉은 색은 사람의 피가 아닌가 싶었다. 혹시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석벽에 오랜 세월을 걸쳐 새겨 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호기심에 임조영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곤 손가락을 글자 위에 대고 획을 따라 움직여 보았다. 추측이 맞다면 이 글자를 새긴
사람은 매일 획을 따라 손가락에서 피가 나도록 수천 수만번을 그어 댔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혹시 여러 사람이 글자를 새긴 것은 아닐까. 모용준의 조상들이 이 대연국(大燕國)의 후예라는 사실을 몰랐던 임조영의 추측은 거의 맞은 셈이다. 그들은 대대손손 대연을 부흥시키고자 매일 자신들의 결의를 석벽에 새겼던 것이다. 지금은 그들의 광이 사라졌기에 모용준은 이곳에 와 덧글자를 새기는 일을 하지 않았다.
안으로 더 들어가자 수많은 병장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게 보였다. 그것들은 매우 오래 된 것으로 아마도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손들에게 이같은 유물 들을 물려주어 가문의 위풍을 잇고자 했을 게 분명했다.
계속 걸음을 안쪽으로 옮기자 이번엔 목우가 말해 주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책궤들이 임조영을 기다렸다. 책들은 가지런히 정돈된 상태였다. 그런데 보통 책과는 달랐다. 크기도 보통이 넘었지만 종이가 아닌 쇠로 만들었다는 게 달랐다.
임조영이 그중 하나를 힘들여 꺼내 살펴보았다. 겉에는 '복호권(伏虎拳)'이라 씌어져 있었다. 안을 보니 글자 대신 그림 몇 장이 있을 뿐이었다. 첫 그림은 한 노승이 권법을 익히고 있는 장면인데 그의 곁에는 맞아죽은 듯한 맹호가 쓰러져 있었다. 두 번째 그림은 한 섬약해 보이는 선비가 복호권으로 맹호를 죽인 그 노승을 때려 죽이는 형상이었다. 선비의 얼굴 옆으로는 '이때로부터 모용복의 손에 의하여 소림 복호권을 아는 사람이 더는 없게 되었도다(以玆 時超,
白募容覆手下, 少林伏虎拳面無人矣)'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임조영은 이 모용복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그는 일찍이 강호를 주름잡으면서 각 문파의 영웅들을 수없이 죽였고 복호권으로 맹호를 때려잡던 용음(龍吟) 대사도 그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모용복은 이 기록을 남겨 후손들에게 자기가 이 절기에 뛰어난 전인(傳人)이라는 것을 알리려 한 것이었다.
임조영은 한쪽 구석에 있는 대형 깃발들을 발견하고는 또 한 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깃발들에는 글자들이 적혀 있었는데 한결같이 연(燕)자였다. 임조영은 모용세가에 얽혀 있는 사연을 알지 못했기에 그저 단순히 깃발의 크기와 같은 글자에 대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더 안으로 들어가자 두 벽에 온갖 글자와 그림들이 가득 들어찬 것을 보게 되었다. 그 그림들은 일부 강호의 각 문파 무공초수들을 그려 놓은 듯했다. 무당파(武當派)의 전진검법(全眞劍法), 공동파( 派)의 공동구검( 九劍) 등등, 각 문파의 공법전술(功法傳術)이 총망라되어 있는 벽화였다. 임조영은 그중 몇 가지 무공은 천하에 드문 절기(絶奇)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른 벽에는 한 여인이 그려져 있었는데 옷을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커다란 섬돌 위에 앉아 있는
여인 옆으로는 역시 글자가 가득 씌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비범한 느낌을 받게 했다. 그저 단순히 그려 놓은 것 같지는 않았다. 글자가 나타내고 있는 뜻은 이러했다.
〈숙녀(淑女)는 옥녀(玉女)이다. 옥녀가 일찍이 황제에게 심경(心經)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물었다. 황제가 심경에는 심(心)과 행(行)이 들어 있다고 대답하였다. 황제는 옥녀에게 심경으로 몸가짐을 조절하는 비결을 말해 주었다. 이리하여 우리 모용씨의 무공은 아들에게만 전수하고 딸에게는 전수하지 않는다. 이 심경은 내게는 쓸모가 없으므로 여기에 기록하여 훗날을 위해 남겨 둔다.〉
글을 읽고 있는 임조영은 강한 느낌에 전율했다. 그녀는 기(氣)가 허선을 따라 차츰 올라와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다시 기가 한곳에 모이는 느낌을 감지했다. 임조영이 더 자세히 보려고 한 발 을 움직이려는데 갑자기 발밑이 허물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기가 상승하여 몸이 두둥실 뜨는 게 아닌가. 임조영은 상기된 얼굴로 발밑을 보려고 했다. 때를 같이하여 석벽이 무너지면서 무수한 돌조각들이 임조영에게로 날아와 박혔다. 꽈르릉! 임조영의 머리 위로 바위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임조영은 재빨리 석벽으로 몸을 밀착시켰다. 눈앞으로 흙먼지가 뿌옇게 흩날렸다. 잠시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린 임조영이 눈을 뜨고는 주위를 살폈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두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바로 주정과 목우 였다. 주정은 역시 말없이 잔뜩 굳은 얼굴을 했고 목우도 예의 웃음을 내보이며 천천히 임조영 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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