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중신통 왕중양2

3학년2반 | 2022.02.23 07:39:44 댓글: 0 조회: 453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0557

제7장 호남아와 미인의 운명

왕중양은 왕정아가 무슨 심사로 자신을 괴롭히려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요절내고 멀리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그녀가 하자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가 기회를 엿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사내가 투덜대자 왕정아가 매섭게 쏘아보았다. 사내는 억장이 무너지는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그녀가 다시 한 번 음탕스런 말들을 흘렸다.
"오라버니, 저 사람이 지껄이는 소리는 듣지 마세요. 저자는 사내도 아니랍니다. 밤마다 그 짓을 하면서도 세 번은 숨을 돌려야 하니 어디 사내라고 하겠어요?"
그녀가 사내를 잡아먹을 듯 부득부득 이빨을 갈아댔다.
"다시 한마디만 조잘거렸다가는 죽여 버릴 테다!"
그러자 사내는 더 이상 찍소리도 하지 못한 채 멀리서 기운거리기만 했다. 배가 호만에 정박하자마자 그녀는 사내에게 명령을 했다.
"오라버니께 대접하게 어서 물고기를 좀 잡아 와요."
사내는 고분고분 그녀의 말에 따라 차가운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곧 그가 배 위로 큼지막한 물고기 두 마리를 던져 올렸다. 어찌나 빠르고 정확한지 물고기를 낡아채는 두루미에 못지않은 실력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사내에게 고함을 질렀다.
"아니 이게 뭐야? 맛좋은 고기를 잡아오라고 했는데 이까짓 퍽퍽하고 영양분도 없는 걸 누가 먹는다고 그래요?"
그녀는 그것으로 끝내지를 않고 사내가 애써 잡아 올린 물고기를 다시 배 밖으로 내던졌다. 사내는 배에 몸을 의지한 채 아직 물 속에 있는 상태였다. 그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를 배 위로 던졌다.
"물이 너무 차서 그러니 일단 올라가겠어. 정 맛이 없으면 이것저것 넣고 국을 끓이면 될 텐데 버리기는 젠장……."
그녀가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훈시하듯 말했다.
"수년 간 훈련시킨 군사들도 오직 한 번을 위해 써먹는다는 것도 몰라요? 그런데 당신은 허구헌 날 물 위에서 살면서 맛좋은 물고기도 잡지 못한다면 그게 어디 사람 구실을 한다 하겠어요?"
사내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사라지자 그녀가 왕중양을 향해 자식을 돌보는 어미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내가 다시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 것은 잡시 후였다. 그는 그녀의 요구대로 이번엔 질 좋고 맛이 괜찮다고 인정되는 물고기를 양손에 꿰어 들고는 올라왔다. 사내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사시나무가 무색할 정도로 온몸을 심하게 떨어댔다. 왕중양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이곳에 와 몸을 녹이시오."
그러자 왕정아가 눈을 흘겼다.
"쉴 틈이 어디 있어요! 어서 가서 불을 지피고 고깃국을 끓이든지 지지고 볶든지 하란 말이에요!"
사내가 갑자기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시 한마디도 못한 채 물러가는 사내를 보는 왕중양의 기분은 영 뒤틀렸다. 사내는 뱃머리 쪽으로 가더니 가마솥을 올리고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속 왕중양 곁을 떠나지 않은 채 음탕스런 눈빛을 흘려댔다.
사내는 아마도 생선국을 끓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쯤 지나자 구수한 국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왕중양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그대는 저 사람에게 좀 잘해 주지 그러나? 내가 보기엔 착한 사람 같은데."
왕중양이 망설인 끝에 사내를 두들하고 나섰다. 그러나 왕정아의 가슴에서 사내는 이미 지워진 지 오래인 듯싶었다.
"미친 짓이에요."
그녀가 키득키득 웃어댔다. 그때마다 커다란 젖가슴이 좌우로 혹은 아래위로 묘하게 요동을 쳤다.
"사내라고 다 같은 줄 아세요? 당신은 귀하지만 저자는 버러지 보다 못한 족속이라구요."
왕중양은 더는 사내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별소용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사내가 선창 안으로 들어오더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국이 다 되었는데……."
사내의 목소리가 작아서가 아니라 그녀는 왕중양 곁에 비스듬히 누운 채 음란한 공상에 젖어 있는 바람에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왕중양은 기운을 차리려고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여전히 마음 같지가 않았다. 그녀의 한쪽 젖가슴이 자신의 어깨에 얹혀져 있어 사내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국이 다 되었다니까!"
사내가 눈앞의 광경을 차마 지켜 볼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쳤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떠들고 야단이야! 왜?"
"아니 국이 다 되었으니 먹으라고……."
사내가 주눅이 든 어깨를 움츠리며 대꾸했다. 그녀가 왕중양의 팔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오라버니, 생선국을 드시면 힘이 날 거예요."
그녀가 왕중양의 팔을 부축하고는 뱃머리 쪽으로 갔다. 사내가 대접에 생선국을 퍼담고 있다가 왕중양의 거동을 슬쩍 훔쳐보았다. 비실비실 힘도 제대로 못쓰는 사내를 그녀는 어디가 좋다고 저 난리인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이리 와서 같이 드시죠?"
왕중양이 사내에게 말을 건네자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눈을 흘겼다.
"오라버니, 그렇게 공손하게 대할 필요 없어요."
사내가 다시 입을 봉한 채 한쪽으로 비칠비칠 물러서며 이가는 소리를 냈다. 그녀가 국대접을 왕중양에게 내밀며 생긋 웃었다.
"오라버니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나요? 미인이었어요?"
왕중양은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을 그렸다. 그 얼굴이 임조영이란 사실에 그는 속으로 몹시 놀랐다.
'어째서 셋째 동생의 얼굴이 떠오른단 말인가!'
잠시 상념에 빠진 왕중양을 지켜 보던 그녀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입김을 불었다.
"보아하니 오라버니는 아직 사랑하는 여인이 없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이 정아를 아내로 삼으시는 게 어때요?"
한쪽에서 쪼그리고 앉은 채 한숨을 푹푹 쉬고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섰다.
"정말 너절하게 노는구먼! 임자는 사내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는게 그리도 좋단 말이야? 그러지 말고 옛날처럼 사내를 종처럼 부리며 살라고!"
그러나 그녀는 사내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생선국을 떠서 후후 불어 왕중양에게 먹여 주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내미는 국을 받아 먹는 왕중양의 마음은 또 한 번 우울해졌다.
"내가 먹겠소."
"아이, 여인이 먹여 주면 더 맛이 난대요."
그녀는 고집을 피우며 연신 국을 떠 자기 입김을 불어넣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가슴을 치며 발을 구르던 사내가 결심을 한 듯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난 떠나겠어!"
그 말에도 그녀는 외눈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가려거든 아주 멀리 가 버려요."
사내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젠장, 아주 단단히 미쳐 버렸군!"
"아니오. 그만 가 봐야 할 사람은 바로 나요."
왕중양이 일어서려는 동작을 취하자 그녀가 억센 팔로 눌러 앉혔다.
"가라고 놔두세요."
"좋아, 어디 임자 혼자서 고기 잡고 배를 젓고 실컷 살아 보라구."
사내가 할말을 잃은 채 멍하니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왕중양이 사내를 불렀다.
"정아의 말은 상관하지 말고 이리 와 제 술이나 한잔 받으시오."
사내가 우물쭈물 그녀의 눈치만 살피자 다시 왕중양이 말을 이었다.
"만약에 두 분이 아니었다면 난 벌써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을 거요. 그러니 두 분 모두가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오."
사내가 퉁명스럽게 왕중양을 쏘아보았다.
"젠장, 이제 와서 그런 공치사를 늘어놓으면 뭘해?"
왕중양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사내를 설득해 왕중양이 술잔을 건네고 어느 정도 취기가 돌자 그녀가 끼여 들었다.
"나도 당신들과 술을 마시고 싶은데 괜찮겠어요?"
사내가 도끼눈을 뜨더니 툭 내뱉었다.
"사내들의 일에 참견 말아! 이 버러지 같은 년아!"
그녀의 눈이 커졌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자신에게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아니, 감히 누구에게 욕이야?"
"뭐! 누가 욕을 했다고 그래?"
"이젠 뱃심도 두둑해 졌네!"
"흥!"
"좋아요. 당장 꺼져 버려요!"
그런데 갑자기 왕중양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배를 움켜쥐고는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가 당황하며 황급히 왕중양을 부축했다.
"오라버니, 왜 이러세요?"
그녀는 생선국을 잘못 먹어 탈이 난 것이 아닐까 하는 근심에 국대접을 살폈다. 그런데 사내가 음흉스럽게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술에 독약을 넣었지."
"뭐, 뭐라고?"
"너도 까불다간 이 놈과 함께 물 속에 처넣을 줄 알아!"
"지사한 놈!"
"아니 그럴 필요 없이 내가 이 놈과 함께 죽어 버리겠어. 그러면 너에게 남아 있는 사내는 없을 테니까."
왕중양이 잠시 잃었던 정신을 수습하며 눈을 떴다. 그는 가슴이 답답하고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내리누르고 있는 압박감에 고통스러워했다. 이 순간사내가 품속에서 단검을 뽑아 들고는 자기 가슴을 향해 찔렀다.
"욱!"
다행히 칼은 어깨를 찔러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왕중양이 놀라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손에 기력이 전혀 없었다.
"난 임자에게…… 임자에게 피로써 보답하는 거야."
왕정아도 몹시 당황했다. 평소 이같은 행동을 전혀 볼 수 없었던 그녀라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사내가 어깨에 박힌 단검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무릎을 꿇었다.
"차라리 당신이 죽었더라면……."
왕중양은 차츰 독이 온몸으로 퍼져 근육들이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것을 느꼈다. 생각 같아서는 사내의 상처를 돌봐 주고 피를 멎게 해 주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아 괴로울 따름이었다. 괜히 자기 때문에 사내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그의 마음은 더 고통스러웠다.
"나를 구해 준 것은 바로 당신이었소. 그러니 난 당신에게 죽어도 할말이 없소."
왕중양이 힘없이 입을 열자 사내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그러나 난 원한을 풀 수가 없소이다. 당신이 이곳에 오기전까지 난 그런대로 정아와 행복하게 살았소. 매일 고기를 잡고 또 배 위에서 물새들을 벗삼아 사랑을 나누고……."
왕중양은 차라리 눈을 감고 어서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체념을 한 상태였다. 무엇이 자신과 이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또 안타까웠다. 그녀가 달래듯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이전처럼 지낼 수 있어요. 그러니 어서 오라버니에게 해독제를 먹여 독을 풀어 주세요."
사내의 표정은 묘하게 변해 갔다. 기쁨도 그렇다고 분노도 아닌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 사람이 죽기 전에는 임자의 마음은 돌아설 수가 없어. 이 사람을 죽이고 나도 죽겠소. 난 임자의 외로움을 벌로 주고 싶을 뿐이오."
"안 돼! 어서 나를 호수에 던져 버리고 예전처럼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오."
왕중양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소리쳤다. 사내가 어깨에 박힌 단검을 쓰윽 뽑아냈다. 한차례 피가 뿜어지더니 팔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사내가 이를 악물며 왕중양에게로 다가왔다.
"일단 당신은 내 앞에서 사라져야 해!"
그는 왕중양을 밧줄로 묶은 다음 곧 호수로 던져 버리려고 했다. 왕중양이 물 속으로 곤두박질 친다면 그것으로 모든 게 끝장이었다. 사내가 왕정아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입을 벌린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왜, 왜 이러세요? 오늘부터 오로지 당신에게만 충실할 테니 어서 그 눈빛을 거두세요."
다급해진 그녀가 그의 심사를 누그러뜨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사내는 왕중양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으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흐흐, 내가 또 너에게 속을 줄 아느냐?"
단검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이 떨렸다. 그녀가 황급히 몸을 일으켜 뱃머리 쪽으로 갔다. 사내를 향해 돌아선 그녀가 다시 주워 입은 옷을 벗었다. 커다란 젖무덤이 드러났다.
"지금 뭘 하려는 거지?"
"저분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 당신과 난 이런 모습이 아니었던가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물 속이든 물 밖이든 우린 상관하지 않았어요."
사내가 왕정아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의 몸은 찬바람에 가냘프게 떨렸다. 풀어헤쳐진 머리와 그 아래로 드러난 젖가슴이 아주 매혹적이었다. 바람에 머리칼이 젖가슴이 만들어 놓은 계곡을 스 치듯 나풀거렸다. 사내의 눈빛은 어느새 배고픈 짐승처럼 빛을 발하며 그녀의 깊은 곳을 더듬고 있는 중이었다.
"어서 저분을 풀어 주세요. 부탁이에요."
그러자 사내가 갑자기 왕중양의 아랫도리를 발로 세게 걷어찼다.
"헉!"
왕중양이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왕정아는 더 이상 사내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사내가 더욱 포악하게 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왕정아가 사내에게 천천히 다가오며 속삭였다.
"우리 예전처럼 사랑을 나누어요. 네?"
"버러지 같은 년! 내가 이 놈을 호수에 처넣을 때까지 기다리란 말이다!"
다시 그가 왕중양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녀가 다급하게 사내의 가슴에 매달렸다.
"나를 당신에게 드릴 테니, 제발!"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왕중양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힘없이 숙였다. 사내의 손에서 단검이 떨어져 바닥에 꽂혔다. 그런데 사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왕정아가 재빨리 그 단검을 집어 들었다. 사내에게 단검을 겨눈 그녀가 앙칼진 소리를 냈다.
"어서 이분을 풀어 줘!"
사내가 깜짝 놀라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아니!"
그녀가 왕중양 몸에 감겨 있던 밧줄을 풀었다. 그러자 맹수처럼 달려온 사내가 발로 왕중양의 배를 걷어찼다. 그 바람에 왕중양은 배 밖으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는 다행히 물 속으로 떨어지지 않고 배의 돌출 부분을 잡고 매달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을 놓지 마세요!"
사내가 노를 집어 들더니 왕중양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왕중양은 물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자지는 모용준을 따라 먼저 그곳을 벗어났지만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임조영을 남겨 두고 온 것이 어떤 아픔보다 더한 괴로움으로 자리했다. 그녀가 모용준에게 근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둘째 공자님, 셋째 공자님은 무사할까요?"
모용준이 일자로 다물었던 입을 벌리며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다.
"네가 무공을 몰라서 하는 소리야. 셋째는 벌써 그 놈들을 물리 쳤을 테니 너무 걱정 말아."
다시 자지는 모용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언덕에 오른 두 사람은 모용세가를 바라보았다. 모용세가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꽤 멀리 벗어나 있는 듯했다. 자지가 피곤한 기색으로 어깨를 주무르자 모용준이 미소 지었다.
"그래, 여인의 몸이란 사실을 깜박 잊었군."
두 사람은 낡은 절 앞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모용준이 눈을 감고 양신(養神)을 하며 입속말을 흘렸다.
"셋째가 어찌 되었는지……. 모용세가를 벗어났는지도 모르겠군.
그 말을 옆에서 들은 자지의 얼굴엔 기쁨이 드리워졌다. 보기엔 추하게 생긴 사내였지만 마음은 비단결처럼 고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모용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셋째가 없으니 앞으론 내가 누이를 돌봐 주겠어."
자지는 임조영을 가슴에 새겼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날 밤 너무도 황당한 일을 당했기에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사내로만 알고 있던 임조영의 정체가 결국은…….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있나?"
모용준이 묻자 자지가 웃음을 거두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난 우리 모용세가에 가서 셋째와 누이의 결혼식을 치를 생각이었어. 그런데 일이 이렇게 꼬일 줄 누가 알았겠나?"
결과야 꼭 그렇게 될 수는 없다 해도 모용준의 마음 씀씀이에 자지는 또 한 번 탄복했다. 자지의 생각으로는 모용준은 아직 임조영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없는 듯했다. 자지는 무엇 때문에 임조영이 자기의 신분을 의형제를 맺은 모용준에게까지 숨기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임조영이 스스로 밝힐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리라 다짐했다.
두 사람은 너무 피곤한 탓에 그만 앉은 채로 선잠에 빠지고 말았다. 자지는 어느 순간 누군가 모용준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자지가 눈을 떠보니 모용준이 좀 떨어진 곳에서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사람이 모용준에게 머리를 약간 숙이는 게 보였다.
"듣자니 모용세가에 큰 난은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용준이 힘없이 대꾸하며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공자님의 일은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꼭 좋아지리라 봅니다 요."
모용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용세가에는 나 같은 불초의 자손이 없었지. 죽어서도 조상을 뵐 면목이 없으니 정말 난감한 일이야."
모용준이 침통해 하자 그 사람은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셋째 공자님은 아직 정강 어딘가에 계실 겁니다. 정확한 장소는 모르지만 곧 알아내는 대로 알려드리지요."
"꼭 찾아야 하네. 그는 나와 의형제이긴 하지만 친형제보다 더 가깝네. 난 그에게 벌써 두 번이나 은혜를 입었어."
"저, 그런데 공자님께 할말이……."
그가 머뭇거리자 모용준이 미간을 오므렸다.
"자낸 나의 하인이지만 여러 해 동안 함께 지내서 나를 잘 알고 있을 것이네. 무슨 일이든지 어려워 말고 고하게나."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사실 강남의 강문(江門)에서 혼담이 왔는데 공자님의 의양은 어떠신지요?"
모용준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강문 처녀가 미색이 뛰어나다는 소문은 들었네. 하지만 그녀의 성미가 괴팍하다던데 사실인가?"
"하지만 무림세가의 처녀에게 장가를 드시는 게 공자님께는 도움이 될 겁니다. 다시 한 번 그 처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문이 대연국의 황제 자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또한 나 같은 사람이 태어났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만약 나에게 얌전하고 어여쁜 처녀가 시집을 온 다면 다시 한 번 우리 가문에 웃음꽃을 피울 수 있으련만……."
자지는 눈을 감고는 그들의 말을 모두 듣고 있는 중이었다. 모용준이 깊은 시련에 잠기는 것을 보자 그 사람은 더는 말을 걸지를 않았다.
"나는 사실 저 처녀와 결혼을 하고 싶었지."
"공자님,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그 사람이 나지막이 속삭이자 모용준이 머리를 저었다.
"저 처년 잠이 들었어. 몹시 피곤할 거야. 셋째와 인연을 맺은 처지인데 불행히도 그와 떨어져 온종일 걷느라 지쳐 있지."
"공자님이 반화대회에서 저 처녀를 얻으려고 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여인에게는 이미 사내가 있으니 공자님은 강문의 처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음……."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법. 임 공자께서도 자지 처녀와 꼭 맺어진다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그대는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난 동생이 좋아하는 일을 중간에서 훼방 놓고 싶지는 않아. 그가 자지 처녀를 소유할 수 없는 몸이라 해도……."
"잠깐!"
갑자기 그 사람이 한쪽을 향해 코를 벌름대더니 인상을 썼다.
"어디선가 약향(藥香)이 나는군요."
모용준이 귀를 기울이자 먼 곳으로부터 쓰쓰쓰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모용준이 다급하게 외쳤다.
"누가 온 것 같아. 그대는 자지 처녀를 깨우게. 내가 살펴볼 테니. 아무래도 낌새가 좋지 않아!"
휘파람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곧 두 사람 주위를 수많은 무리들이 에워쌌다. 이들은 한결같이 거지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차가운 인상이었다. 또한 이들은 모두 허리춤에 조롱박을 찼는데 모용준은 아마도 약냄새가 그곳에서 나는 것이라 여겼다.
자지도 일어나 불길한 시선을 모용준에게 던졌다. 세 가닥의 긴 수염을 기른 노인이 막 모용준을 가리키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훌륭한 모용 공자로군. 미녀를 끼고 떠돌아다니니 정말 팔자 한 번 좋아."
"당신들은 약왕문(藥王門) 사람들이 아니오?"
모용준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노인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렇다."
"우리 모용세가는 이전에 당신들의 약왕문에 은혜를 베푼 바 있소. 그러니 섣불리 경고망동하지 마시오."
모용준 곁에서 사나운 눈초리로 이들을 지켜 보고 있던 그 사람이 물었다.
"공자님, 약왕문 같은 보잘것없는 무리가 어디 감히 우리 모용세가를 넘보겠습니까?"
노인의 걸쭉한 웃음 소리가 주위를 일깨웠다.
"우하하핫! 절금수, 네 놈은 무얼 믿고 나서는 게냐? 네 놈이 그 잘난 재간을 믿고 덤빈다면 살아 남지 못하리라!"
모용세가의 가신(家臣)인 절금수 허불잉이 쓴웃음을 지었다.
"좋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절기를 한 수 가르쳐 주시지?"
허불잉이 앞으로 득달같이 나서려는데 모용준이 손을 들었다.
"그대들은 듣거라! 그대들은 결코 나와 허불잉을 당해 내지 못 하네. 그러니 피를 부르기 전에 이만 돌아들 가게!"
그러나 이들은 모용준의 말을 자기 발 밑에 깔려 죽을 개미로밖에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중 한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이죽거렸다.
"우리가 가진 재주 중 하나가 바로 약을 만드는 것이지. 그런데 우린 방금 한 가지 기약(奇藥)을 만들어 냈어. 이 약을 쓰면 백 명의 여인과 그 짓을 해도 지치지 않아. 히히히, 하지만 시험을 해 보려고 했으나 우리가 어디 가서 백 명의 여인을 구하겠나. 또한 아무 여인이나 대상으로 삼았다가는 그 약효가 떨어질 수도 있거든. 그런데 아주 절색을 하나 만났는데 그대가 순순히 내어준다면 우린 아량을 베풀겠네. 저 처녀를 넘기면 너희들 목숨만은 살려 주겠단 말이지
."
"허튼소리! 저 여인은 나의 누이다. 건드릴 생각일랑 아예 말아라!"
모용준이 목에 힘줄을 툭툭 새기며 고함을 지르자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엔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욕심을 보이지 말아야 하네. 하나는 티벳의 고승 라마들과는 다투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우리 약왕문 사람들에게 덤비지 않는 것이네. 그리고 덧붙이자면 예전부터 제왕들이 왜 단약(丹藥)을 만들었는지 아나? 바로 여인들과 즐기기 위해서였지."
노인의 말에 모두들 배꼽을 쥐고는 웃어댔다. 모용준이 허불잉 에게 일렀다.
"자네가 내 누이를 데리고 먼저 떠나게. 내 이 놈들의 버릇을 고쳐 놓고 뒤따라갈 테니."
허불잉이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단호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아닙니다! 공자님께서 처녀를 데리고 먼저 가십시오. 저 혼자 서도 얼마든지 저자들의 염통을 뽑아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을 수 있습니다."
"아냐. 난 두번 다시 같은 실수를 범하고 싶지는 않아. 셋째를 동정팔교의 무리들 가운데 놔두고 온 것만 해도 뼈아픈 고통이라네."
노인이 손가락 끝으로 모용준을 가리켰다.
"모용준, 그렇다면 네가 나서겠느냐? 혹시 서로 미루면서 꽁무니를 빼려는 수작은 아니겠지?"
모용준이 쓴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다가갔다.
"하찮은 놈들과 싸우게 되어 손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노인 앞에 우뚝 선 모용준이 눈을 치켜 떴다.
"모용준, 넌 이미 죽어 가고 있다!"
노인의 말을 잠시 헤아리려고 하는데 몸이 갑자기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했다.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지탱하려고 해 보았으나 어려웠다. 모용준은 이들이 나타나면서 풍겨 왔던 그 약향을 기억해 냈다.
다급해진 모용준이 검을 뽑아 들면서 결사적으로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검을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쓰러지고 말았다. 허불잉이 급히 달려와 모용준을 안았다.
"공자님!"
그러나 허불잉 역시도 곧 정신을 잃고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조금 떨어져 있던 자지 처녀만 약기운을 조금 덜 쐬었는지 말짱했다. 그러나 그녀도 이미 약향에 차츰 나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몇 사람이 달려들어 모용준과 허불잉을 포승줄로 단단히 묶었다. 마치 노루테를 덮쳐 먹잇감을 확보한 맹수들처럼 민첩하게 몸을 놀렸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인이 당부했다.
"조심해야 돼. 모용준이란 놈의 무공은 대단해. 다행히 우리가 미리 약냄새를 풍겼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떼를 지어 저승길을 헤매고 있었을 거라고."
노인의 말에 약간 겁을 먹었는지 놈들은 찹쌀떡을 댓잎으로 싸듯 모용준의 몸을 포승줄로 친친 잡아맸다. 큰일 하나를 마무리 짓기 라도 한 듯 이들은 손바닥을 탁탁 털더니 이번에는 자지 쪽으로 다가갔다. 자지는 주저앉은 채로 앞이마를 짚고 있었는데 서서히 약 기운이 온몸으로 번지는 모양이었다. 자지를 빙 둘러싼 이들이 온갖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그녀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노인이 손을 들어 이들의 행동을 만류하고는 자지 앞에 섰다.
"왜 벙어리인가? 죽여 달라든지 아니면 그 잘난 몸뚱이를 줄 테니 살려 달라고 애원이라도 해야지, 안 그래?"
자지가 고개를 획 돌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다시 헤죽거리며 말을 걸어 왔다.
"우리 약왕문에는 신기한 약이 많지, 그중 음양화합산(除暘和合散)이라는 게 있는데 그대가 한번 먹게 되면 곧 소리를 지르게 되지. 그 소리는 보통의 사람 소리와는 달라. 여인이 알고 있는 소리 중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만 쓰는 기묘한 소리야."
그 말에 무리들이 또 한 번 낄낄대며 웃었다. 자지 처녀가 맡은 약기운은 대단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자지는 원상태로 회복되었으며 정신도 맑아졌다. 혼미상태에 빠진 모용준과 허불잉은 무리들에게 들려져 절간 안으로 끌려갔다. 노인이 무리들에게 명령했다.
"목정(木鼎)을 꺼내 놓아라!"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보물을 다루듯 품속에서 목정을 꺼냈다. 그가 목정을 앞으로 내밀자 다른 사내가 다가와 그 위에 약을 바르고는 목정을 싸매고 있던 천을 천천히 풀렸다. 노란 목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리들은 목정을 보자 모두들 경건한 자세를 취했다.
그가 목정을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노인이 다시 명령했다.
"먼저 허리에 찬 약이 든 조롱박들을 풀어놓게."
이들은 일제히 허리에 각각 차고 있던 조롱박을 풀어 한 사내에게 모두 넘겨주었다. 조롱박을 걷어들인 사내는 곧 구덩이를 판 다음 그곳에다 조롱박을 집어 넣고 다시 묻어 버렸다.
노인은 자지 처녀를 데려다 자기 앞에 앉힌 다음 무리들에게 성진(星陳)을 이루듯 둘러싸라고 일렀다. 이들은 서로 손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간격을 둔 채 빙 둘러앉은 다음 아랫배에 손을 얹고는 눈을 감았다.
자지는 한복판에 한쪽 손으로 땅을 짚고 비스듬히 엎어진 채 이들의 참선을 지켜 보았다. 한 사내가 손가락을 튕겨 신호를 하자 목정 속에서부터 한 줄기의 연기가 새어 나왔다. 푸른 빛을 띠고 있는 연기였는데 바람이 없는 탓인지 곧게 공중으로 피어 올랐다. 이윽고 스르륵 스르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절 밖으로부터 커다란 왕지네들이 기어오기 시작했다. 그 왕지네들은 순식간에 절 안으로 들어와 대가리를 곧추세우고는 목정을 향해 스멀스멀 기어갔다. 왕지네를
처음 본 자지는 놀라움에 눈을 확 감았다. 노인이 슬쩍 자지의 혈도들을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네들은 탁자 위로 올라가더니 목정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노인이 양손을 높이 쳐들며 카랑카랑하게 소리쳤다.
"얼굴을 가려라!"
몇몇 사내들이 황급히 뛰쳐나오더니 천으로 모용준과 허불잉 그리고 자지 처녀의 머리와 얼굴을 감쌌다. 그리곤 자신들도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천은 앞을 볼 수 있도록 두 구멍이 나 있었는데 독한 약냄새가 물씬 풍겼다.
때를 같이하여 요란스럽게 날개를 치는 소리와 쩍쩍쩍 하는 울음 소리가 들리더니 밖에서 수천 마리의 새들이 날아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새들은 올빼미인 듯싶었다. 올빼미 떼가 목정을 중심으로 날다가는 슬쩍 그 안으로 침을 흘려 넣었다. 한참을 목정 주위를 날며 그 짓을 하다가 기진맥진했는지 날갯짓과 울음 소리가 차츰 약해져 갔다. 올빼미 떼는 곧 밖을 향해 느릿한 동작으로 날아가 버렸다. 멀리 사라지는 올빼미 떼를 확인한 노인이 다시 손을 들었다.
"됐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노인이 목정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모두들 무릎을 꿇은 채로 그 목정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절 밖을 잘 살피거라!"
노인이 경각심을 일깨우자 무리들은 눈초리에 불을 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때를 맞춰 몇 사내가 절 밖으로 나갔다. 노인이 좌중을 둘러보더니 품속에서 불쏘시개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것을 목정 가까이 갖다 대자 곧 왕지네와 올빼미의 타액이 섞이면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이윽고 형용할 수 없는 김이 오르자 절 안은 기묘한 향으로 가득 채워졌다. 달콤하기도 하면서 말로는 쉽게 표현될 수 없는 그런 향이었다.
노인이 비장한 얼굴을 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됐다! 이젠 쓸 수가 있어."
자지는 이들이 지금 무슨 해괴한 짓을 하려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이들의 행동을 지켜 볼 뿐이었다.
"바로 이 약이 네가 먹을 약이란다."
자지 처녀에게 능글능글한 웃음을 보내며 노인이 말했다.
"이 약을 먹게 되면 사내를 받아들이는 힘이 무궁무진해지지. 결국 넌 나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무리들이 일제히 낄낄거렸다. 자지는 음탕스런 웃음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것에 못 견뎌 했다. 정신을 잃었던 모용준과 허불잉이 깨어난 것은 이때였다. 모용준은 노인이 자지에게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벼락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무슨 수작들이냐?"
노인이 대수롭지 않게 모용준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하하하, 음양화합(陰陽和合)이 왜 좋은가를 알려 주고 있다!"
모용준이 벌컥 화를 내며 몸을 심하게 뒤틀었다. 그러나 포승줄에 묶인 탓에 중심만 잃을 뿐이었다.
"너희는 곧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죽더라도 셋째 동생인 임조영이 꼭 복수를 하러 찾아올 것이다!"
"오호, 넌 가만히 보니까 주둥이부터 깨어나는 신통한 기술을 가졌구나."
노인이 감탄한 듯 과장된 동작을 취하자 누군가 이렇게 지껄였다.
"보잘것없는 난쟁이도 한 가지 재주는 있다고 하더니만, 헤헤헤!"
노인이 꽝 하고 발을 구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걱정 말아라. 어찌 그가 이 일을 알겠느냐? 이 약을 쓰는 날이면 넌 대라신선(大羅神仙)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이 약을 먹은 저 처녀는 임조영이든 누구든 기억할 수 없게 된다!"
머리가 들쑤시는지 세게 흔들던 허불잉이 노인을 노려보며 욕을 퍼부었다.
"이 천년 묵은 능구렁이 같은 영감아! 허튼 짓 그만하고 네 모가지나 잘 간수해라! 언제 떨어져 나갈지 모르니 있을 때 잘 봐두라구. 하하하, 네 놈의 모가지가 네 놈의 몸뚱어리를 곧 그리워하 게 될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허불잉, 너 역시 이젠 다리 잘린 호랑이요 부리 잃은 독수리나 마찬가지렷다!"
노인이 축지법으로 후닥닥 달려와서는 허불잉의 뺨을 한차례 갈겼다. 그리곤 무리들에게 명령했다.
"어서 처녀에게 약을 먹여라!"
"그런데 호법(護法)님, 제게 한 가지 묘안이 있는데 어쩔까요? 히히히."
한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요상한 웃음 소리를 냈다.
"흥미만 있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노인이 기꺼이 받아 주자 그가 모용준을 가리켰다.
"제 생각에는 먼저 모용준에게 음양화합산을 먹인 다음 계집에게 먹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흐흐……."
노인이 탁 탁 탁 하고 박수를 세 번 쳤다.
"아주 기막힌 생각이다. 어서 그렇게 해라!"
사내들이 모용준을 향해 막 달려들려는데 다시 노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잠깐! 안 되겠다. 저 계집은 천하의 보기 드문 절색이다. 우리 형제들이 먼저 맛을 봐야지 무슨 소리냐!"
무리 중 하나가 크게 웃으며 나섰다.
"하하핫! 제 생각으론 음노삼(陰老三)이 제시한 방법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결정한 대로 해 봅시다. 저 놈이 계집을 데리고 논다고 해서 썩어문드러지는 것도 아닌데 어떻습니까? 그 다 음에 우리가 맛을 봐도 늦지는 않습죠. 일단 난쟁이 놈이 벌이는 꼴을 구경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요?"
그 사내는 말이 끝나자마자 음노삼과 함께 모용준을 끌어다가 자지 옆에 앉혀 놓았다. 모용준은 묶인 상태라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두 사내가 모용준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는 약물을 들이부었다. 모용준이 발버둥을 쳤으나 어쩔 수 없이 그 약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마셔 버리고 말았다. 곧 모용준이 바닥에 쓰러졌다. 모용준이 쓰러지자 이젠 필요가 없게 되었는지 그의 몸을 싸고 있던 포승줄을 잘라 주었다.
두 사내가 이번엔 자지를 향해 씨익 웃으며 다가왔다. 자지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한 손을 들더니 쏘아붙였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내가 직접 마시겠어요!"
두 사내가 의외라는 듯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목정을 자지에 게 내밀었다. 노인의 벽력같은 외침이 뒤를 따랐다.
"음노삼! 정신이 나갔더냐?"
음노삼이라 불린 사내가 그때서야 사태를 파악했는지 황급히 목정을 거두었다. 그리곤 자지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모용준과 자지에게 약을 먹인 이들은 히죽히죽 웃으며 옆사람을 쿡쿡 찌르기도 하며 좋아들 했다. 한쪽에서 역시 묶인 채로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던 허불잉이 탄식을 했다.
"너희 약왕문 놈들은 하나같이 더럽고 치사한 무리들이로구나! 너희들은 이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저 놈이 나불거리지 못하도록 끌어내 가라!"
노인의 명령에 따라 두 사내가 달려들어 허불잉을 끌고 나갔다.
모용준이 깨어난 것은 한 개의 향이 타버릴 만큼의 시간이 지나 서였다. 신음 소리를 내며 깨어난 모용준의 눈은 벌겋게 충혈이 된 듯했다. 그는 주위에 사내들이 빙 둘러앉아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려 자지를 찾았다. 그녀 역시 옆에 쓰러진 채로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노인이 십여 명의 무리들에게 일단 물러가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들이 자리를 떠나자 자지도 정신을 차렸다. 모용준이 반색을 하며 그녀를 불렀다.
"오호, 정신이 드는군. 그래 괜찮아?"
그런데 자지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모용준을 멀뚱히 쳐다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요. 나에게는 당신 같은 사내가 없어요."
모용준이 놀라며 그녀에게 얼굴을 길게 들이밀었다.
"난 모용준이야! 반화대회를 기억해 보라구?"
그러나 자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중얼 흘리기만 했다. 그러더니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표정을 지으며 모용준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모용준이 여러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 중이었다. 모용준이 때와 먼지를 뒤집어쓴 거지로 보였다가 풍류재자(風流才子)로도 보였다. 또한 남루한 누더기를 걸친 가난뱅이가 눈앞에 있는 듯하다가도 어느새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부자로 그 모습이 바뀌기도 했다.
자지가 경험하고 있는 이같은 기이한 현상은 모용준에게도 곧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용준의 눈이 벌겋게 충혈돼 있는 것은 바로 올빼미의 눈알을 닮아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츰 자지 처녀를 바라보고 있는 모용준의 눈은 피를 즐기는 올빼미의 그것처럼 변해 갔다. 더 이상 그의 눈엔 자지에 대한 예전의 형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눈앞에 놓인 여인은 오로지 음욕에 젖어 있는 한 마리의 암고양이로만 비칠 뿐이었다.
노인의 명령 때문에 아쉽게 물러나야 했던 무리들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의 눈은 어느 때보다 호기심으로 번들거렸고 헤벌어진 입가로 연신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모용준이 자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자지, 그대는 날 좋아하지?"
"전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자지, 그대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난 대연을 일으켜 세울 수도 없고 또 모용세가를 흥성시킬 수도 없는 놈이라구. 난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백번 나은 추물일 뿐이야! 추물에다 난쟁이……."
모용준은 차마 꺼내 놓기 싫었던 말까지 내뱉었다. 그는 죽더라도 이 말만은 하고 싶지가 않았었다. 자지 처녀가 심한 갈증을 느끼며 자기 목을 움켜쥐었다.
"물……물!"
누군가 물을 가져와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지는 한 대접의 물을 순식간에 마셔 버리고는 모용준을 바라보았다.
"사실 임 공자님은……."
그러자 모용준이 슬쩍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에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아. 셋째 동생은 큰형님을 더 좋아하고 있지.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야."
그러자 자지가 세게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임 공자님은……."
다시 모용준의 손길이 그녀의 입술 위로 옮겨 왔다.
"난 다 알고 있어. 그대는 셋째에게 어울리는 여인이지."
자지가 더는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모용준에게 기댔다. 자지의 눈빛이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무리들이 강제로 먹인 약기운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분탕질을 해대는 모양이었다. 그윽하게 멀리 날아 가는 기러기를 바라보듯 아니면 비가 내린 뒤의 무지개를 보듯 그녀의 눈빛이 가물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강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녀는 모용준을 응시했다.
"당신은 자꾸만 그를 두고 셋째 동생이라고 하는군요.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당신과 의형제를 맺을 수 없는 처지였다고요!"
앙칼지게 소리를 친 자지 처녀가 계속 초점을 잃어 가는 눈빛으로 모용준을 바라보았다.




제8장 지하궁전의 열기
약물에 취한 두 사람은 차츰 서로를 탐닉하는 짐승으로 변해 갔다. 자지와 모용준은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들의 눈에는 뜨거운 불길이 이글거렸다. 이들은 금방이라도 몸을 공중에 띄울 듯한 화기를 억누르며 한동안 서로를 뜨겁게 응시했다. 그러나 끝내 화기를 누르지 못한 이들은 서로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자지가 먼저 입술을 벌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 당신은 좋은 분이에요."
사실이었다. 지금 자지의 눈에는 모용준이 대단한 사내로 비치고 있었다. 처음 모용준을 만났을 땐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녀는 오로지 임조영만을 가슴에 품었다가 임조영이 사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하며 왕중양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모용준의 눈길 속으로 하염없이 빨려들어갔다. 그는 이미 추물도 아니고 자신이 말한 것처럼 난쟁이도 아닌 영준한 사내였다. 모용준의 눈에서도 거대한 불길이 타올랐다. 육욕으로
얼룩져 충혈된 그의 눈은 곧 엄청난 양기를 뿜어댈 것만 같았다. 자지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던 그가 나지막히 속삭였다.
"내게 그대만 있어 준다면 난 만족해."
모용준이 갑자기 몸에 불이라도 옮겨 붙은 사람처럼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는 옷을 벗으려고 했는데 마음이 앞서 얼른 매듭과 고리 들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옷을 북북 찢어발겼다. 곧 모용준이 알몸이 되어 자지의 손을 잡았다. 자지 역시 가슴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숨통을 열어 주듯 입술을 동그랗게 벌리며 입김을 토했다.
"아!"
숨어서 이들의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무리들이 숨을 꼴깍꼴깍 삼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용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슴 가득 꾹꾹 재어 넣고 있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모용준이 향로가 놓여진 탁자 위로 자지를 안아 올렸다. 그의 눈에는 향로를 받치고 있는 탁자로 보이지가 않았다. 첫날밤의 황홀한 교접을 위해 마련된 훌륭한 침대로만 여겨졌다. 탁자 위에 눕혀진 자지는 가쁜 숨을 몰아쉬듯 가슴을 간헐적으로 꿈틀대며 모용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 어서……."
그녀의 가슴은 이미 재가 되려고 하는지 모용준을 재촉했다. 모용준이 훌쩍 작은 몸을 날려 탁자 위로 올라섰다. 그리곤 무릎을 꿇은 자세로 그녀의 옷을 찢어 벗겼다. 자지의 탐스럽고도 봉긋한 젖가슴이 드러났다.
"으음……."
자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에 모용준은 아찔해졌다.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모용준이 허겁지겁 자지에게로 몸을 밀착시켰다.
이들은 한 몸이 되어 끝없는 무아의 골짜기를 향해 서서히 들어갔다. 무리들은 누가 나타나 코를 싹둑 잘라가도 모를 정도로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두 남녀가 벌이는 음탕질에 어떤 사내는 자기의 아랫도리를 움켜쥐고는 안절부절못하기도 했다.
"저건 또 뭐지?"
그런데 그중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길게 뽑았다. 모두의 시선이 자지를 향해 달려갔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자신을 덮치고 있는 모용준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중이었다. 그것은 환희의 눈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아지경에서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눈물도 아니었다. 그녀는 비로소 자기를 감싸고 있는 사내의 몸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에 실망을 한 것이다. 자기의 몸길이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난쟁이를 비로소 확인한 그녀는 차츰 식어 가는 가슴에 안
타까워 했다. 이를 눈치챈 모용준도 얼굴을 돌리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의 얼굴엔 아직 정욕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자지는 비로소 모용준을 원하고 있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기는 색정이었지만 속은 이미 변색된 다른 형태의 것을 지니고 있었다. 만일 무리들의 장난이 없었다면 차마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자지는 잠시 침울한 얼굴을 하더니 눈을 감았다.
자지가 모용준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약왕문 무리들이 우르르 달려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모용준이 벌겋게 아직 불길이 살아 있는 눈을 부라리며 이들에게 으르렁거렸다.
"어느 놈이든 가까이 왔다가는 씹어 먹고 말겠다!"
여지껏 한켠에 물러난 채로 구경을 하고 있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하! 모용준, 네 놈의 행실이나 똑바로 챙겨라. 넌 제수를 간음한 놈이 아니더냐?"
모용준이 황급히 자지에게서 몸을 떼며 두리번거렸다.
"내가 제수를 간음했다고? 그럼 이 여인이 나의 제수란 말인가? 아니다……, 아니야. 그댄 분명 자지 처녀가 맞지? 그렇다면 셋째 동생의 여인인 자지……? 그런데 내가 왜 그대와……!"
횡설수설하며 밑에 누워 있는 자지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앉은 채로 서로를 바라보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제정신이 돌아온 것이었다. 아들은 몸을 가리고자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누군가 사납게 찢어 발긴 옷조각들만 바닥에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모용준이 하늘을 우러르며 울부짖었다.
"너흰 나와 아무런 원한도 없지 않느냐!"
그러자 한 사내가 툭 튀어나오더니 떠벌렸다.
"네 놈은 스스로가 공자라고 여기지만 내 보기엔 무능하고도 볼품없는 난쟁이에 불과하다."
이번엔 비쩍 마른 사내가 휘청휘청 몸을 흐느적대며 웃어댔다.
"헤헤헤, 네 놈이 재미를 보느라 양기를 모조리 써버렸을 텐데 우리와 싸움이 되겠느냐? 차라리 멀찍이 물러나 우리 형제들이 저 계집과 어울리는 걸 감상이나 하는 게 어때?"
몇몇 사내들이 어느새 자지를 끌어안으며 입을 헤 하고 벌렸다. 자지가 소스라치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사내들의 수가 많아 자지는 번쩍 들어올려지고 말았다.
"아악!"
자지를 끌고 가는 것을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는 모용준의 가슴은 찢어졌다. 무리들은 곧 자지를 차례대로 덮쳐 강제로 욕심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지에게 자기들과 한패가 되어 기상천외 한 약을 만들며 지내자고 회유하기까지 했다.
"네 놈들이 당장 그 짓거리를 멈추지 않으면 담판을 짓겠다!"
그러나 이들의 귀에는 모용준의 말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모용준이 다시 울부짖듯 소리쳤다.
"차라리 난 자결을 하겠다!"
노인이 모용준의 말을 받았다.
"난쟁이 주제에 단단히 미쳐 버려군. 여인의 사랑이 그토록 절실하단 말이냐? 그럼 어디 마음대로 하거라!"
노인이 모용준의 앞으로 약을 쪘을 때 쓰는 절굿공이를 던졌다.
"네 놈은 모용세가에서 신선놀음으로 지내 왔는데 어찌 그것을 버리고 죽겠느냐?"
모용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난 이미 저 여인과 살을 섞은 몸, 여인을 선택할 수 없다면 죽음뿐이다!"
모용준이 절굿공이를 집어 들었다.
"내가 죽고 나면 무림의 벗들이 나를 도와 너희들을 꼭 응징할 것이다!"
노인이 잠시 생각에 잠기려 하자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호법님, 두려워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모용세가를 업신여길 수는 없지. 저 놈은 무림의 큰 문파들과 내왕이 밀접하지 않는가?"
노인이 미온적인 태도로 돌변하려고 하자 사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저 놈이 죽어 버리면 그만이지 다른 문파가 무슨 소용입니까?"
노인이 뒷짐을 진 채 몇 걸음 서성이더니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모용준을 향해 말했다.
"네 놈의 명은 오늘이 끝인 것 같다."
모용준이 곧 절굿공이로 자신의 머리를 쳤다. 자지가 그 광경을 보고는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사내들에 가려 더는 이쪽을 보지 못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모용준은 피를 철철 흘리며 꿈틀꿈틀 사지를 뒤틀어댔다.
이때 웅얼웅얼하는 말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네댓 사람은 되는 듯싶었다. 그중 하나가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며 안에 대고 누군가를 불렀다.
"공자님, 아직도 이곳에 계십니까요?"
흐려지는 정신 사이로 파고드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모용준은 설 핏 웃음을 지었다. 그는 바로 모용세가의 사람이었다. 더욱이 방금 소리를 친 사람이 가신인 일기충천 지청임에 반가웠다. 이번엔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절 밖에서 들려 왔다.
"공자님, 살아 계십니까요?"
바로 밖으로 끌려 나갔던 절금수 허불잉이었다. 그가 용케도 빠져 나가 사람들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이윽고 목우와 주정의 목소리도 뒤를 이었다. 모용준은 생각보다 머리에 입은 상처가 크지 않았고 또 이들의 목소리를 듣자 힘이 솟아오르는 듯했다.
네 사람은 안으로 들어서더니 크게 놀라고 말았다. 일기충천 지청이 으르렁댔다.
"어떤 놈들이냐?"
모용준이 겨우 고개를 들어 노인을 가리켰다.
"저기……."
일기충천 지청이 달려와 모용준을 부축했다. 다른 사내들도 모용준 곁으로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지청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눈에 살기를 담았다.
"분부만 내리십시오!"
"그래, 고맙네. 저 자지 처녀를 꼭 구해 주게."
지청이 노인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때를 맞춰 호법 노인이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두 명의 사내가 뒤에서 나타나 잽싸게 모용준을 빼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여서 모용세가의 가신들이 손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옆으로 흘렸던 절굿공이도 걷어들인 후 멀찌감치 물러났다. 지청이 일침을 가하였다.
"막왕문은 종날산(終南山)에 소굴을 두고 있으며 너희들 장문인(掌門入)은 처녀가 분명하리라. 그리고 네 놈을 그 4대 호법 중 하나인 양 호법이렷다!"
노인이 놀라 허둥댔다.
"무슨 허튼소리! 우리 약왕문의 내막을 아는 자는 없다. 어찌 처녀를 약왕문의 장문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이냐?"
"나에겐 비둘기 한 마리가 있다. 만약 공자님과 자지를 놓아주면 비둘기를 날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비둘기를 잡고 있는 손을 놓게 되면 장문인은 죽게 된다!"
그러나 양 호법은 천천히 세 가닥의 수염을 어루만지며 태연한 척했다.
"어디 마음대로 해 보게나."
"정 원한다면 하는 수 없지."
옆에 있던 사내가 양 호법에게 급히 속삭였다.
"양 호법님, 난쟁이 모용준을 방패삼아 일단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들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던 허불잉이 눈치를 채고는 핏발을 세웠다.
"만일 저 놈들이 공자님을 끌고 움직이기만 하면 모조리 없애 버립시다!"
그러자 일기충천 지청과 두 사람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양 호법이 순식간에 몸을 놀려 자지가 있는 쪽으로 옮겨갔다. 그가 사내들 틈에 엎어져 있던 자지를 낚아채었다. 막 자지를 넘보려 던 사내는 방금 건져 올린 살찐 잉어를 빼앗긴 사람처럼 못내 아쉬워했다.
양 호법이 자지의 팔을 뒤에서 꺾더니 사납게 주위를 살폈다. 그리곤 자지를 내동이치듯 앞으로 확 밀어 버렸다. 때를 같이하여 모용준도 이들에게서 풀려났다. 양 호법이 약간 수그러든 태도를 보이며 지청에게로 얼굴을 던졌다.
"지 대협, 우리가 물러나겠소. 다시는 모용세가와 맞서지 않을 것을 약속하오. 우리를 무사히 보내 주겠다고 당신들도 약속을 하시오. 그런 의미에서 공자와 처녀를 풀어 준 것이오."
절금수 허불잉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을 턱턱 치며 대답했다.
"좋아, 내가 약속하지!"
"아니오. 난 지 대협에게 물었소이다."
허불잉이 인상을 쓰며 달려들려고 하자 일기충천 지청이 나섰다.
"알겠소. 내가 다시 약속하리다."
양 호법이 무리들을 이끌고는 곧 사라졌다. 모용준과 자지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일순 두 사람은 몸둘 바를 몰라 했다. 그들은 아직 알몸인 상태였던 것이다. 지청이 어느 틈에 구해 왔는 지 두 사람에게 맞을 만한 옷을 내밀었다. 옷을 입은 모용준이 예를 갖추며 지청에게 말했다.
"지청 동생, 고맙네."
곧 절간을 빠져 나온 모용준과 자지는 교자(較子)에 올랐다.
일행은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서 북적대는 거리로 들어섰다. 이 곳에는 장원(庄院)이 하나 있었는데 제법 규모가 있어 보였다. 교자가 장원의 뜨락 안에까지 들어가 멈춰 섰다.
두 사람이 교자에서 내리자 곧 집 안에서 비녀들이 뛰어나왔다. 그녀들은 모용준이 눈짓을 하자 얼른 자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지는 비녀들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가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한뒤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데 한 비녀가 들어와 아뢰었다.
"공자님께서 대청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자고 청하셨습니다."
자지는 비녀를 따라 길고도 구불구불한 계단을 지나 한 대청에 이르렀다. 대청은 매우 호화스러웠고 장식된 물건들 역시 처음 대하는 것이라 자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곧 모용준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새옷으로 갈아입었는데 멋진 품이 매우 돋보였다. 그가 자리에 앉더니 자지에게도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공자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나요?"
자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모용준이 긴 한숨을 쉬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 그대에게 알려 주고 싶은 말이 있어. 내 생각엔……."
모용준이 말을 꺼내다 말고 주춤하자 자지는 긴장을 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자지가 눈동자를 굴리며 모용준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난 처음부터 그대를 좋아했었지. 하지만……. 지금에 와서 말해 무엇하겠나. 모두 집어치우고 내가 서신을 한 통 써 놓았는데 그대가 셋째에게 전해 주기 바라오. 또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전 하고."
모용준의 표정은 매우 우울했다. 자지가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두 사람의 알 수 없는 시선이 엇갈렸다. 모용준은 그 슬픈 시선에서 영원히 벗어나려고 했는지, 갑자기 검을 뽑더 니 자기 목에 갖다 대었다. 자지가 놀라 벌떡 일어서며 한 손으로 자기의 입을 가렸다.
"안 됩니다!"
갑자기 누군가 소리치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바로 지청이었는데 그는 몸을 날려 모용준의 검을 빼앗았다. 모용준이 고개를 떨구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지청 동생,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지 않았나? 나와 자지 처녀만 있게 해달라고. 그런데 왜 엿듣고 있었지?"
지청이 대답 없이 입을 다물자 다시 저쪽으로부터 한 사람이 더 걸어 나왔다. 절금수 허불잉이었다. 그가 다가오더니 모용준 앞에 무릎을 꿇고는 읍을 했다.
"공자님, 이제 모용세가엔 공자님 한 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부디 앞날을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모용준이 한탄했다.
"난 큰 잘못을 저질렀네. 처음부터 그럴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공자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후에 조상님들을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또한 자지 처녀가 잉태라도 하는 날엔 모용 가문에도 광명이 비칠 것입니다. 그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려 주십시오."
지청이 곧바로 자지에게 예를 올렸다.
"공자님께서 낭자에게 깊은 정을 갖고 있는 줄 압니다. 강호는 물론이고 관환세가(官宦世家)에서도 청혼이 많이 들어왔지만 공자님께서는 모두 물리치셨답니다. 모두 누구 때문인지 잘 헤아리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자지가 감당하기 어렵다는 투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제……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나요?"
허불잉이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 반화대회에서 공자님은 낭자에게 반했던 것입니다. 부디 큰 일을 앞둔 공자님을 위해 마음을 굳히시길 바랍니다."
자지가 검을 빼앗긴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용준을 바라보았다. 그가 가엾게 여겨졌다. 또한 임조영의 여인이 될 줄 알고 저토록 괴로워한다는 사실에 자지는 사실 속으로 감동을 받았다. 자지 는 그러나 임조영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이젠 그와도 전혀 상관이 없는 처지나 마찬가지인데 굳이 자신이 알릴 필요는 없다는 게 그녀의 판단이었다.
"자지, 날 이해해 주게."
모용준이 목이 메인 목소리를 내자 그녀는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허불잉이 비녀들을 불러 일렀다.
"너희들은 어서 이 낭자를 모시고 가 보살펴 드려라."
대청에는 모용준과 두 가신만이 자리했다. 늦가을의 스산한 바람이 코끝을 차갑게 스치며 지나갔다.
정강이라는 이 큰 거리에서 모용세가를 모르는 이라고는 없었다. 이유는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모용세가의 노복이었기 때문이었다. 설사 황제가 있다 해도 그들의 눈에는 모용준과 모용세가보다는 중요하지 않게 비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곳 인구는 만 명이 넘었다. 서쪽에는 묘지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죽게 되면 영락없이 그 묘지에 묻혔다. 한 가지 그 묘지에서는 평소에 괴이한 일이 자주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곳을 지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
도였다. 그러나 묘지의 지하에 궁전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그 궁전에서는 여인들이 모두 거의 알몸으로 지냈다. 그녀들은 몸에 얇은 천을 두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궁전 안에 여인이 얼마나 기거하고 있는지는 그곳 주인조차 잘 알고 있지를 못했다. 이 궁전은 변경(邊京)에 있는 황궁과 별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황궁과 다른 것이라고는 매우 사치하다는 점이었다. 섬돌 아래에는 대신(大臣)들 대신 수많은 궁녀들이 알몸으로 오락가락할 뿐이었다. 무리 지어 오고 가는 궁녀들은 온갖 보물들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출입할 때 쓰는 경필(警 )이며, 옥새(玉璽) 등등 황제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지니고 다녔다.
섬돌 위에는 용상이 놓여져 있었다. 그곳에는 한 사내가 근엄한 자세로 앉아 궁녀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바로 다름아닌 모용준이었다.
그의 얼굴은 매우 냉담했다. 섬돌 아래에 있는 궁녀들은 저마다 규얼(圭 )을 들고는 그에게 예를올리고 만세를 세 번 외쳤다.
모용준이 냉랭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만 아뢰어라!"
이윽고 한 여인이 올라오더니 허리를 숙였다.
"정상 폐하, 용주(龍州)에서 몇몇 강호객들이 우리 대연의 은표를 약탈하려다가 잡혔나이다. 법으로 엄히 다스리는 게 어떠하오리까?"
모용준은 앞뒤 가름해 보지도 않고서 턱짓으로 일축해 버렸다.
"대리사경(大理寺卿), 그대가 처리하라!"
"예."
그러자 알몸의 여인이 쪼르르 달려나와 대답하고는 얼른 사라졌다. 이번엔 또 다른 여인이 앞으로 나서며 아뢰었다.
"성상 폐하, 신들이 궁전을 살펴보니 내궁에 주인이 없어 성상 폐하의 대사에 아주 불리한 줄 아옵니다. 성상께서 하루 속히 결단을 내리시어 한 관원을 선발하여 궁중의 낭랑(娘娘)으로 삼기를 청하옵니다."
여인의 교태 어린 콧소리는 그녀 자신이 낭랑이라는 자리를 탐하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게 했다. 모용준의 손에는 옥이 들려 있었는데 광채를 뿜었다. 이것은 그가 반화대회에서 주기로 허락했던 대연의 옥이었다. 모용준이 옥을 들여다보더니 경직된 표정을 지었다.
"궁중의 낭랑은 내가 이미 선정하였노라. 후일에 내가 데리고 와서 그대들과 만나게 하겠노라!"
이 말에 여인들은 궁중의 예절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원래 궁 밖에는 성상 폐하의 마음에 든 여인이 있어 그녀가 대연의 황후로 책정이 돼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궁녀들은 그 선택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눈치였다. 모용준이 헛기침을 하자 궁녀들이 수군거림을 멈추고 머리를 조아렸다.
"듣거라! 그대들은 모두 대연의 현명한 신하들이자 나 이 모용준의 어첩들이 아닌가. 당초의 내 조상들을 생각해 보면 모두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황제 노릇은 해서 무엇한단 말인가? 이름이 어떻든 황제처럼 살면 그뿐인 것이다."
궁녀들의 반응은 깔끔할 정도로 정돈되기 시작했다. 이런 모용준의 훈시에 이젠 아주 익숙해 있는지 모두들 머리를 숙인 채 교화 돼 가고 있었다.
"경들은 궁전에서 누구나 많은 보물들을 지닐 수가 있다. 만일 밖으로 나가기를 원한다면 누구나 거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경들은 이 대연 황제의 말을 따라야 하며 제멋대로 궁전 출입을 해서는 안 된다. 궁전을 나가는 자는 자격을 박탈하고 능지처참에 처하겠노라!"
궁녀들이 입을 모아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좋다. 모두들 나를 따라 오너라!"
궁전 뒤에는 길쭉한 벽돌을 깔아 놓은 길이 나 있었는데 커다란 밀실과 이어져 있었다. 밀실 안은 아주 푸근하였고 용연향(龍延香)이 타오르고 있었다. 또한 그 안에는 요상하게 생긴 침대 하나 가 의자를 등에 업고 놓여져 있었다. 침대 위에 의자를 올려 두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작은 의자 위에는 용을 수놓은 비단까지 덮여 있어 그 광경이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궁녀들이 조용히 서서 모용준의 지시를 기다렸다. 모용준이 천천히 손을 들어 궁녀들을 지목했다.
"그대, 그리고 또 그대 이렇게 두 사람이 올라가도록 해라."
지목을 당한 두 궁녀가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녀들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얇은 천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리곤 모용준의 옷을 벗겨 한쪽으로 가지런히 놓아 두었다. 한 궁녀가 옷을 벗겨 건네주면 다른 궁녀는 그것을 받아 정돈을 하였다. 옷을 모두 벗기자 모용준의 작은 몸뚱이가 드러났다.
두 궁녀가 조심스럽게 모용준을 들어 의자 위에 앉혔다. 모용준은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궁녀들을 쳐다보았다. 그는 작고 풀이 죽어 있는 남근을 궁녀들 앞에 드러낸 채 다시 지시를 했다.
"좋다. 한 사람씩 오도록 해라."
그 안에는 모두 백 명에 가까운 여인들이 자리했다. 그녀들은 모두 얇은 천으로 어깨만 걸친 알몸으로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모용준의 지시에 따라 한 사람씩 앞으로 나서더니 온갖 교태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모용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가지 동작과 교성을 섞어 가며 밀실 안을 숨막히게 만들었다. 모용준의 환심을 사지 못하면 또다시 쓸쓸하게 여러 날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그녀들의 몸짓은 처절했다.
한 여인이 얼굴 가득 웃음을 띄우며 모용준의 앞을 스쳤다. 또 다른 여인이 자신의 젖가슴을 맞부딪쳐 묘한 소리를 만들어 내며 모용준을 현혹시키고자 애썼다. 그리고 또 다른 여인은 춤을 추는 자세로 허리선을 비비 틀며 제자리에서 돌기도 했다.
모용준이 급기야 한 여인을 선택했다.
"좋다!"
지목을 당찬 여인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가 한쪽으로 물러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용준이 다시 그중 살점이 통통하게 붙고 두리뭉실한 목덜미를 가진 한 여인을 지목했다.
"좋다!"
두 여인이 모용준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한 여인은 아주 애교가 철철 넘치는 쪽이었고, 다른 한쪽은 풍만한 몸매가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두 여인이 모용준을 의자에서 들어 내린 다음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러더니 두 여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 묘용준의 몸 구석구석을 혀로 핥기 시작했다. 모용준이 고개를 뒤로 꺾으며 꿈틀댔다. 여인들은 어느 한곳이라도 지나치는 법 없이 구석구석을 혀로 핥아대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인들의 애무는 계속되고 있었는데 모용준이 이상한 기미를 눈치챘다. 헛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려보니 한쪽에 물러나 있던 여인 중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쓰러지려 했다. 모용준이 그녀를 불렀다.
"이리 오너라!"
몇몇 여인들이 그녀를 부축하고는 모용준 앞으로 데려왔다. 모용준이 사정없이 그녀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여인이 눈물을 흘렸다.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는 게냐?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잘 구경을 하란 말이다!"
모용준에게 매를 맞는 여인은 심한 형벌을 감수해야만 했다. 모용준과 살을 섞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고통도 받아야 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여인들은 모두 정신을 바싹 차린 채 모용준과 두 궁녀가 벌이는 짓을 마치 눈에 하나하나 새기듯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모용준이 실컷 여인들로 하여금 자기의 몸을 핥게 한 다음 비로소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좋아, 너희들은 이제 물러가라."
두 여인의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입가에도 촉촉하게 물기가 묻어 있었다. 이번엔 다른 궁녀 둘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다시 그녀들이 의자 위로 모용준을 옮겨 눕히자 한 사람씩 다가왔다.
"황제 만세, 만만세!"
큰소리로 이렇게 외친 궁녀들이 차례대로 혀끝으로 모용준의 몸을 핥기 시작했다. 모용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몸을 바르르 떨어댔다. 그러면서 궁녀들에게 재촉했다.
"어서, 어서 더 빨리 핥으란 말이다!"
이윽고 밀실 안에 있던 궁녀들이 차례대로 다가와 모용준의 몸을 핥았다. 그런데 중간쯤 되었을 때 한 궁녀가 아주 미친 듯이 혀를 놀리자 모용준이 공중으로 솟구칠 듯 심하게 몸을 꿈틀댔다.
"좋아, 더 더!"
그러자 궁녀가 아예 자기 얼굴을 모용준의 사타구니에 처박고는 몸부림을 쳤다. 모용준의 눈이 허옇게 뒤집혀지면서 신음 소리를 냈다.
"아으!"
곧 모용준이 온몸의 맥을 놓고는 팔을 떨어뜨렸다.
"됐다."
드디어 모용준이 만족한 얼굴을 보였다. 그러나 여인들은 제각기 선 채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욕정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미처 모용준의 몸을 할지 못한 몇몇 여인들은 선 채로 제 손으로 자신의 음부를 애무했다.
큰 밀실은 조용해졌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여인들의 숨소리도 곧 멎었다. 모용준이 노도를 치러 낸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래, 오늘은 몇 사람이었더냐?"
그러자 한 궁녀가 무릎을 꿇고는 대답했다.
"성상의 용체가 건강하시어 오늘 궁녀 서른일곱을 다루어 내셨나이다."
옆에 있던 다른 궁녀가 얼른 붓을 들고는 숫자를 적어 넣었다. 모용준이 흐릿한 시선으로 궁녀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는 모두가 자지로 보였다.
"내가 건강하니 그대들은 행복할지어다!"
모용준이 가슴을 한껏 앞으로 내밀며 말하자 궁녀들이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한 궁녀가 모용준에게로 다가와 옆에 조용히 섰다. 그러더니 모용준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모용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숙연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는 대연의 자손이로소이다!"
"그대가 대연의 자손이라면 대연의 국군(國君)들인 선조들을 기억하겠는고?"
"기억하고 있소이다!"
궁녀의 음성이 더욱 강건해졌다.
"그러다면 그대는 정령 누구인고?"
"대연의 황제 모용준이로소이다!"
모용준이 다시 눈을 몇 번 꿈벅거리더니 덧붙였다.
"대송이 나의 황제 자리를 빼앗은 지 오래이지만 나는 대연을 되찾아 오겠나이다! 꼭 대연을 되찾아 오겠나이다!"
다른 궁녀들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합창했다.
"대연국은 흥할 것이로다. 대연국은 흥할 것이로다!"
밀실 안이 웅웅 울리며 다시금 흥이 오를 기색으로 변해 갔다.
자지는 두 비녀와 마주앉아 그녀들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 비녀들은 모용준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모두 그를 존경하고 있다고 했다. 한 비녀가 약간 아쉽다는 얼굴을 지었다.
"하지만 공자님께서 체격이 조금만 컸더라면 천하에서 가장 완벽한 사내가 되었을 거예요."
자지는 불현 모용준과의 일들을 떠올렸다. 낡은 절간 안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모용준과 몸을 섞어야만 했었다. 그전까지는 그녀의 가슴속에는 그가 조금도 들어 있지를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아내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고 그를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아니던가? 그가 추물 중에 추물이고 볼품없는 난쟁이라도 이젠 그를 거역할 수 없으리라.
비녀가 다시 입을 놀려 댔다.
"공자님은 우리에게 참 잘 대해 주세요. 그분은 생전 우리에게 난폭하게 구는 일 없이 친절하게……."
자지가 그녀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그분이 너를 어디에서 사왔냐는 말이다."
그러자 비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전 가족이 없었어요. 그런데 한 시골 부자가 절 마음에 들어해 첩으로 삼으려 했지요. 이 사실을 공자님께서 알고는 저를 데려오신 거예요."
자지는 그녀들의 말을 모두 듣고는 감동을 받았다. 이곳에 있는 비녀들은 한결같이 모용준이 구해 준 양갓집 딸들이란 점에 놀라움과 큰 감동을 받았다. 자지는 새삼 모용준에 대한 존경심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뜨락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 오자 비녀가 소곤댔다.
"공자님께서는 악기도 잘 다루시고 검무(劍舞)도 뛰어나답니다. 구경하지 않겠어요?"
자지는 그녀들을 따라 뜨락으로 나갔다. 자지는 문득 그녀들이 목숨을 바칠 각오로 모용준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준이 악기 앞에 앉아 〈야장사 (夜長思)〉란 곡을 연주했다. 이 곡은 고인(古人) 무명씨의 작품인데 아주 외롭고 쓸쓸한 감흥을 주는 곡이었다. 모용준은 곁에 누가 와 있는지도 모른 채 악기 연주에만 몰두했다. 비녀들은 옆으로 죽 늘어서서 흠모하는 표정으로 모용준을 쳐다보았다.
악기 소리가 멎었다. 모용준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비치고 있었는데 몹시 우울해 보였다. 그가 비로소 자지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띠었다.
"그대도 와 있었구려?"
모용준은 그 일이 있고 나서 많이 변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한 날부터 그는 아주 예의 바른 사내로 다시 태어난 듯 다시는 그같은 언동은 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자지 앞에서 항상 친절하게 행동했다. 모용준이 자지 뒤에 있는 한 비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명기(明棋), 내가 널 위해 혼처를 구해 놓았다. 좋은 집안인데 그 집 주인도 아주 선량한 사람이다. 일곱째 아들은 무예가 뛰어난 데 그 사람에게 시집을 가면 행복할 것이다."
바로 자지에게 모용준의 칭찬을 아끼지 않던 여인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주저앉으며 오열했다.
"공자님,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요? 저를 쫓아내시려는 거죠."
그러자 모용준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타일렀다.
"바보 같은 소리. 여인은 사내와 달라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거다. 네가 전에 시집가기를 거부한 것은 상대가 늙었기 때문이었지만 이번은 다르다. 난쟁이도 아니고 젊고 영준한 도련님이라 마음 에 들 것이다."
모용준의 눈빛이 비감에 잠기듯 잔뜩 흐려졌다. 비녀는 계속 흐느졌다.
"공자님께서 제게 베푸신 크나큰 은덕을 갚지 못하고 어떻게 떠 날 수 있겠어요?"
모용준이 고개를 돌려 한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일기충천 지청에게 일렀다.
"그대는 내일 해야 할 일이 있네. 모용세가의 아두들을 밖에서는 모두 아가씨라 불러야 한다고 이르게. 모두들 우리 사람들을 잘 대해야 한다고 꼭 이르게. 그리고 예물을 준비하여 명기에게 주게나."
명기는 목이 메어 더는 울지도 못하고 엎드린 채로 고개를 주억 거렸다. 모용준이 자지에게 시선을 던졌다.
"자지, 그대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말하시오."
"전 부족한 것이 없답니다."
그러나 자지는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모용준이 눈치를 챘는지 한동안 자지를 그윽하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미 사람들을 보내어 큰형님과 셋째를 찾도록 하였소. 곧 소식이 올 테니 기다리시오."
사실 자지는 이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모용준이 먼저 말을 해주어 자지는 난처하면서도 속으로는 흡족했다. 자지가 모용준에게로 고개를 들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전 임 공자님을 만나야겠어요. 그런 다음 다시 모용 공자님을 찾고자 합니다."
순간 모용준의 얼굴엔 먹장구름이 가득 드리워졌다. 실망의 빛에 휘감겨 당황하고 있는 모용준을 주시하며 자지는 속으로 뇌까렸다.
'당신은 임 공자의 정체에 대해 모르시죠? 그러나 당신이 알게 되면 더는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모용준이 자신의 마음을 수습하려는지 얼른 지청을 불러 몇 가지를 일렀다. 서둘러 사람들을 보내어 이재민들을 구원하고 또 강호에 사람을 풀어 이번 초겨울 정강부(靜江府)에 모여 대사를 상의 하도록 준비하라는 말이었다. 일기충천 지청이 일일이 모용준의 분부를 듣고 나서 나가기 전에 자지에게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자지 처녀는 방에 돌아가 푹 쉬고 계십시오. 무슨 소식이 있으면 내 즉시 알려 드리리다."
자지는 모용준을 훔쳐보며 다시 한 번 그에 대해 달라진 느낌에 휘청거렸다. 그는 정말 후덕한 인물로 다시 태어난 듯했다. 또한 그 일이 가슴에 걸려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그 점은 모용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자지와 나누었던 해괴한 일에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지와 좀더 정답게 말을 나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저 자지에게 임조영을 찾게 되면 알려 주겠다는 말만 남기고는 돌아섰다. 그러는 모용준의 속마음은 차마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일 때문에 갑갑하기만 했다.




제9장 선천신공을 얻은 왕중양
왕중양은 자신의 몸이 마치 구름 위에 뜬 듯 가볍게 들려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결코 구름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젠 정말 끝이로구나. 이렇게 다시금 물 속에 처 박혔으니 살아날 길이 없구나.'
왕중양은 물 위에 뜬 채로 바람결에 밀려갔다.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서도 모용준과 임조영 등의 얼굴이 유난히 선명하게 떠올라 그의 가슴을 안타깝게 했다.
그는 물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이미 물을 많이 먹어 온몸에 힘이 없었다.
그가 물결을 따라 밀려온 곳은 어느 작은 섬이었다. 이 작은 섬에 서 있는 나무들은 이상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줄기만 있을 뿐 잎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왕중양은 모래밭에 누운 채로 기이한 섬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왕중양은 땅을 기어 섬 안쪽으로 들어갔다. 몸을 쉽게 이동시킬 수가 없을 정도로 나무들이 울창했다. 한참 만에 그는 평지에 이르렀다. 그곳은 마치 맹수들이 잠을 자거나 배를 불리기 위해 마련해 놓은 장소 같았다. 왕중양은 잔뜩 긴장하여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역시 예상대로 새하얀 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다행히도 사람의 뼈가 아니라 날카롭고 유난히 흰 물고기들이 뼈였다. 어떤 맹수인지는 몰라도 물고기들을 수 천 마리
는 족히 잡아먹은 것 같았다.
왕중양은 더욱 긴장을 했다. 그것이 맹수가 아닌 이름도 정체도 모를 괴물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만약에 괴물이 나타난다면 영락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이 섬은 웬만한 집을 두어 개 모아 놓은 정도의 매우 작은 규모였기에 도망갈 곳도 없었다. 사람은 살지 않는 게 분명했다.
주위를 둘러본 왕중양은 평지 한가운데 작은 늪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수의 물을 이곳까지 끌어들인 게 틀림없었다. 물은 몹시 차가웠다. 그 안에는 물고기들이 많았는데 검은 빛을 띤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왕중양이 손을 집어 넣어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물고기들은 조금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물고기라?'
이상한 생각에 그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는 그 까만 물고기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이때였다. 머리 위로 빠르게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한 왕중양은 놀라 얼른 몸을 숨겼다. 완전히 자신을 가릴 수는 없었지만 왕중양은 납짝 엎드린 채 귀를 세웠다.
"듣고 있는가? 유운장 사람이 찾아왔다!"
그런데 소리만 들릴 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머리 위쪽으로 이상한 물체들이 획획 날아가는 것만을 감지할 뿐이었다. 잎이 나 있지 않는 나무 사이로 검은 물체가 엇갈려 날다가는 데 왕중양은 그 그림자가 모두 넷이란 것을 알았다. 또한 그들이 누구인지도 감을 잡았다. 한 사람은 사숙 사자우였고 다른 한 사람은 제갈정, 그리고 나머지 둘은 속문성과 석초수였다.
이들은 미처 왕중양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계속 저희들끼리만 짧고 다급한 소리로 주고받았다. 석초수의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소인은 듣거라! 그대는 유운장 이름을 걸고 사람을 훔쳐서는 안 될 것이다!"
사자우의 목소리도 들렸다.
"수색해! 손바닥만한 곳인데 제깟 놈이 어디로 숨겠어?"
네 사람은 나무 사이를 어수선하게 옮겨 다녔다. 제갈정의 음성이 들려 왔다.
"사숙님, 사람이 없는데요. 그 색마가 아마 외출을 한 모양입니다요."
"더 찾아보라구. 그 놈이 예쁜 여인들을 섬에 잡아 놓고 기공을 연마한다지 않는가?"
왕중양은 머리를 더 깊이 숙이고 귀를 기울였다. 놈들에게 발각되는 날이면 끝장이었다. 도저히 저들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왕중양으로서는 몸을 숨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크!"
그런데 왕중양이 한쪽으로 머리를 돌리려다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는 해골들이 널려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여인들의 것이 분명했다. 긴 머리칼을 듬성듬성 단 채 다소곳이 앉아 있는 형상이었다. 여인의 시체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아직 썩지 않은 젖가슴 쪽은 여기저기 마구 파헤쳐져 있어 끔찍했다. 왕중양은 사색이 되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나무 사이를 오가던 놈들이 왕중양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제갈정이 사뿐히 내려서며 왕중양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네 놈은 소인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
왕중양이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자 그가 다시 눈을 부릅떴다.
"내 네 놈의 입을 열게 만들 테다!"
왕중양이 다급하게 제갈정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니오. 나는 물결에 떠밀려 이곳까지 온 사람일 뿐이오."
뒤를 따라 내린 속문성이 잡아먹을 듯 눈을 부라렸다.
"말로 해서는 실토할 것 같지 않군."
그런데 속문성이 왕중양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어, 이자는 반화대회에 참가했던 협사가 아닌가?"
사자우도 왕중양을 알아보고는 혀를 찼다.
"쯔쯧, 대협이니 뭐니 하는 놈들 역시도 한패거리로군. 어서 말하지 못하겠느냐?"
왕중양은 난처한 입장에 빠지고 말았다. 사자우가 왕중양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는 두 눈을 흡뜬 채로 발버둥을 쳤다. 사자우가 눈앞에 있는 물고기를 발견하고는 왕중양을 내동댕이쳤다.
"여기에. 먹을 만한 것이 있군!"
이들은 지금 몹시 허기에 시달리고 있는 처지였다. 이곳까지 오면서도 서로를 믿지 못해 배 위에 있는 음식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혹시 누군가 독을 넣었을까 봐서였다. 그렇기에 이들은 눈 앞이 가물거릴 정도의 시장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늪 속에 있는 물고기마저 의심을 하고 있는 듯했다.
사자우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왕중양을 발로 툭 찼다.
"네 놈이 물고기를 잡아라!"
왕중양이 차가운 물을 헤치고는 물고기 한 마리를 건져 올렸다. 그것을 먼저 앞에 있던 제갈정에게 던지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바보 같은 놈이로구나. 네 놈은 사숙님이 보이지 않더냐? 음식은 선배님이 먼저 자시는 게 법도이다."
제갈정이 물고기를 집어 사자우에게 건넸다. 그는 물고기를 요리조리 뜯어보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에이, 이 물고기는 싱싱하지가 않아. 다시 건져라."
왕중양은 이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물고기를 차례대로 건져 네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들은 곧 물고기를 아구아구 뜯어먹기 시작했다. 물고기로 일단 배를 채운 이들은 소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한참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에 대해 의논을 하던 석초수가 갑자기 엉덩방아를 찧으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누가 내게 독약을 먹였어? 아이고, 난 이제 죽는구나!"
그러자 제갈정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넌 죽어야 해. 네 놈이 죽어야 우리 집 식솔들을 죽일 근심이 덜어진다구. 헤헤헤, 네 놈이 죽거들랑 시체를 호수에 던져 토실토실하게 물고기들을 살찌우게 하겠다."
속문성도 목을 움켜쥐며 컥컥 댔다.
"캑! 이건 이상한 독이 분명해!"
사자우가 눈꼬리를 위로 올리더니 제갈정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분명 그대 제갈정이 넣은 독이렷다? 그대는 그 비상한 재간으로 우리에게 독을 먹였군!"
사자우도 허리를 숙인 채 끄윽 하는 소리를 냈다.
"제갈정, 어서 해독제를……."
그러나 지금껏 가만히 있던 제갈정이 풀썩 고꾸라지며 역시 목을 움켜잡았다.
"나……도 도, 독을……."
네 사람은 한꺼번에 쓰러진 채 일제히 왕중양을 향해 손을 뻗치려 했다. 사자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왕중양을 불렀다.
"이……봐, 어서 해독제를 주게."
왕중양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제갈정이 움푹 들어간 두 눈을 사납게 굴려댔다.
"만약 해독제를 내놓지 않으면 네 놈을 죽여 버릴 테다!"
"난 모르오."
"네 놈이 우리들을 중독시키고도 모른다고? 잔말 말고 어서 해독제를 내놓아라!"
왕중양이 계속 모른다고 하자 제갈정과 석초수 그리고 속문성은 서둘러 기공으로 독을 배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제대로 되지가 않아 이들은 이마에 식은땀만 흘릴 뿐이었다. 사자우가 안 되겠다는 듯이 허연 이빨을 내보였다.
"우선 저 놈을 죽여 놓고 보자!"
사자우의 말에 제갈정이 득달같이 왕중양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는 두 손을 갈구리처럼 만들더니 왕중양의 목을 걸었다.
"네 놈을 먼저 지옥으로 보낼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속문성과 석초수도 합세했다. 왕중양은 유운장 4대 고수의 발톱에 걸린 꼴이 되고 말았다. 왕중양이 몸을 굴려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석초수가 왕중양의 앞으로 나서더니 그의 가슴을 향해 장을 날렸다. 왕중양의 몸이 높이 솟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왕중양이 호수에 떨어졌다.
죽어서 가는 길목치고는 험난하지 않고 오히려 황홀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왕중양은 눈앞으로 물고기들과 새우들이 무리를 지어 노닐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세히 둘러보니 이곳은 분명 호수의 밑바닥이 분명했다. 왕중양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필시 자신은 장을 맞아 호수로 떨어졌는데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다니.
'과연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몸이 이동하는 것을 느꼈다. 숨도 제대로 될 수 있지 않은가. 정말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이럴 수가!'
왕중양은 그때서야 자신이 커다란 거북이의 등 위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호수에 떨어지면서 다행히도 거북이를 만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숨을 온전히 쉴 수 있는 것은 또 어찌 된 일 인가? 그가 누워 있는 거북이의 주변에는 물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왕중양은 더욱 놀라웠다. 물은 거북이와 장벽을 쌓아 놓은 듯 이쪽으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정신을 가다듬은 왕중양이 거북이의 등을 어루만져 보았다. 그 속은 새하얗고 단단하였다. 마치 징을 연상하게 했는데 한복판이 오목하고 테두리가 위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바가지를 닮아 있기도 했다. 복판으로부터 주위 쪽에 나 있는 볼록한 아홉 개의 선은 네 변을 이루면서 돌출되어 있는 형상이었다. 그 선은 새카맣고 반들반들했다. 왕중양은 이것을 원수구태( 暠龜 )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말하자면 용이 새끼 아홉 마리를 낳았는데, 그 아홉 마리 새
끼는 서로 다른 원수( 暠)였던 것이다. 이들이 허물을 벗는데 그 허물 속에는 아홉 개의 선이 있으며, 다시 선 안에는 열여덟 알의 구슬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구슬은 능히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고 또 장수하게도 하며, 특히 수화(水火)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도 한다. 아홉 개의 선들에는 각기 자웅으로 된 한 쌍의 진주가 박혀 있어 모두 열여덟 개를 이루었다. 바로 야명(夜明), 거독( 毒), 벽화(酸火), 분수(分水), 정안(定顔), 모주(母珠), 구사(驅邪), 명목
(明目), 양심(養心) 등이다. 이 열여덟 개의 구슬은 비할 데 없이 진귀한 것이었다.
왕중양은 이곳이 바로 태호 기슭에서 이름난 소인(巢人)의 소굴 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바로 이 원수구태는 소인의 보물인 셈이었다. 소인은 이 원수구태를 침대삼아 잠을 자곤 했다. 또 외출을 할 때면 원수구태를 태호에 넣어 두고는 큰 돌로 눌러 놓았다. 왕중양은 거북이 위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다행히도 거북이의 등에 떨어져 목숨을 구할 수 있었구나! 그런데 과연 이곳은 어디란 말인가?'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온몸에 쇠바늘이 박혀 있는 것처럼 아픔만이 느껴졌다. 기혈들마저 서로 뒤엉켜 도저히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일어나 앉은 왕중양은 예전에 읽은 적이 있는 '선천신공(先天神功)'이라는 내공심법을 떠올렸다. 이 신공심법(神功心法)은 왕중양이 우연히 얻게 된 것이었다. 그 심법은 천하지성(天下至聖)의 심법인데 공을 닦는 사람은 반드시 '전후좌우(前後左右)가 온통 물이고 얼음이 없는 곳'을 얻어야 한다. 왕중양 이전에도 이
선천신공을 닦으려 한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어디에 가서 '전후좌우가 온통 몰이고 얼음이 없는 곳'을 만날 수 있었겠는가? 왕중양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입가에 경이로움과 환희의 미소가 피어 올랐다.
'바로 이곳이지 않은가, 바로 이곳!'
주정과 목우는 임조영을 바라보면서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흐흐, 그대는 이 굴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어. 아무리 재간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이 굴속에서는 죽게 돼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목우도 비웃음을 던졌다.
"임 공자, 만일 그대가 이곳에서 죽게 되면 우리 가문의 공자님은 의형제가 없게 돼. 그 사람은 왕중양도 잃어버리고 또 그대까지 잃게 된단 말이지. 우리의 모용 공자는 여전히 혼자 남게 되겠지. 하하하……."
임조영이 씁쓰레한 표정으로 이들에게 호령했다.
"넌 어떤 놈이냐? 어서 너의 공자님을 데려오너라!"
"우리 공자님이 널 만나 줄 것 같으냐? 그리고 큰 공자님이란 작자는 지금쯤 태호에서 물고기 밥이 되었을 게다. 너도 곧 그의 뒤를 따르게 될 테니 너무 재촉하지 말아라."
목우의 빈정거림에 임조영이 화를 벌컥 냈다.
"좋다. 내 너희들을 먼저 보내 주마!"
임조영이 몸을 추스리려고 하자 이들이 동시에 침을 쏘았다. 침을 피한 임조영이 두 눈을 날카롭게 뜨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목우가 주정에게 이죽거렸다.
"계집을 죽일 필요 있나? 죽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잖아?"
임조영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본색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임조영은 이 석굴 안에서의 싸움이 결코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놈이 가까이 다가오지 않은 채 거리를 두고 욕설만을 늘어놓고 있는 것에 더욱 애가 탔다.
'네 년은 곧 우리들의 노리개가 되어 줄 텐데 공자님을 만나서 무엇하겠느냐?"
목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사람이 임조영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들은 임조영과 적수는 되지 못했지만 잠시 색에 미쳐 앞뒤를 재보지 못했다. 주정이 임조영의 뒤로 재빨리 몸을 돌리더니 목을 조여 왔다.
'독수리가 닭을 덮치는'초수로서 기세가 맹렬했다. 목우도 손에 가느다란 사슬을 휘감고는 공격을 해왔다. 임조영도 그 사슬이 어떤 것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기에 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천년 이나 눈이 녹지 않는다는 설산의 잠사( 絲)로 꼬아 만든 것으로 한번 몸에 묶이면 살아날 수가 없었다.
임조영이 비로소 검을 뽑아 들고 위를 향해 힘껏 찔렀다. 임조영의 검끝에서 세 가지의 초수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하나는 '화산출수(華山出岫)'라는 초식이었다. 이는 화산파의 검법 중 한 가지인데 기세는 극히 평온했다.
"앗!"
검날이 목우의 눈앞을 스치면서 그의 오른팔을 겨누었다. 목우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잽싸게 비틀었다. 임조영이 쓴 두 번째 초식은 '교룡(蛟龍)이 진주를 빼앗는' 형상으로 상대의 두 눈을 목표 로 삼았다. 목우가 다시 몸을 움츠리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네 년이 나를 죽이려고 용트림을 하는구나!"
목우가 사슬을 휘두르며 공격은 하지 않고 어르듯 눈앞에서 교란을 펴기 시작했다. 임조영은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두 놈을 물리치지 않고서는 이곳을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함정 안에 빠지긴 했지만 두 놈이 나타난 것을 보면 어딘가에 출구가 있는 게 분명했다.
세 사람은 무려 10여 합을 싸웠다. 놈들의 저항도 쉽지가 않아 임조영이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니었다.
"얍!"
임조영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검을 비스듬히 올렸다. 목표는 목우였다. 사슬을 들고 있던 손이 잘려 나가면서 피를 뿌렸다.
"아!"
목우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시커멓게 변해 갔다. 사슬을 쥔 채 잘려 나간 손목은 깊게 파들어간 구덩이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목우에게 있어서 그 사슬은 자신의 목숨과도 같았다. 그가 구덩이 속으로 얼른 고개를 들이밀자 임조영이 다시 회심의 검을 그어댔다. 목우는 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채 구덩이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는 임조영의 검에 어깨를 찔렸는데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면서 피가 공중으로 솟구치는 게 보였다. 주정 역시 겁을 집어먹고는 한 발짝 뒤로 물
러섰다.
임조영은 틈을 주지 않고 날아가 주정의 머리를 향해 검을 뻗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주정이 뒷걸음 치다가 돌부리에 넘어지는 바람에 검이 빗나갔다. 주정은 자기 머리 위로 무서운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검 소리를 듣고는 공포에 질려 버렸다.
"날 건드린 너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주정의 걸음걸이를 주시하며 임조영이 다시 기회를 엿보았다. 뒤로 조금씩 물러서던 주정이 석벽에 다다랐을 때였다. 임조영이 번개같이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앞으로 내민 채 날아갔다. 검에 찔 려 죽었을 거라 믿었던 주정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주정은 사라지고 검은 석벽에 깊이 박히고 말았다. 임조영은 검을 쥐고 있는 손으로 석벽의 거대한 무게가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정마저 해치우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우선 급한 것은 이곳을 빠져 나가는 일이었다. 임조영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옳기며 주위를 살폈다. 석벽에 난 가느다란 틈을 통해 한 줄기의 빛이 들어오고 있음을 발견한 것은 잠시 후였다. 임조영이 석벽을 밀어 보려고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임조영은 느닷없이 몰려온 위기감에 식은땀을 흘렸다. 석벽에 난 틈을 이용할 수 없다면 길은 오직 하나 자신이 이곳으로 떨어졌던 함정의 출구뿐이었다.
임조영은 위를 올려다보며 높이를 가늠했다. 가능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두 발에 기를 모은 임조영은 곧 몸을 솟구쳐 벽에 착 달라붙었다. 한차례 깊은 숨을 들이마 신 그녀는 다시 위쪽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출구까지는 꽤 되었다. 차츰 팔과 다리에 힘이 빠져 가자 그녀는 안간힘을 다했다. 열 손가락의 손톱은 이미 부러졌는지 참을 수 없는 아픔이 전해졌다.
'아, 더는 견딜 수가 없는데……."
갑자기 한쪽 팔의 근육들이 한곳으로 뭉치는 기분이 들었다.
"아!"
그녀는 그만 힘이 모자라 다시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한동안 팔에 뭉쳤던 근육을 풀고 정신을 차린 임조영은 재도전을 해 보았다. 그러나 매번 실패로 돌아갔다. 나중에는 기력이 모두 떨어졌는지 자기 키도 못 넘고는 밑으로 주르르 미끄러지기만 했다. 온몸의 힘을 모두 잃어버린 그녀는 석벽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녀는 손톱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자지는 창문 앞에 앉아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그녀는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전에는 단 한 번도 마음에 두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오히려 어서 그를 만나 보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였다. 여인의 마음이란 이토록 가냘프고 보잘것없는 것인가? 그녀는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며 한편으로는 남모르게 긴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모용준은 그러나 날이 저물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애가 탔다. 자지는 모용준에게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고 싶었다. 반화대회에서 처음 만난 모용준에 대해 변해 버린 자신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모용준은 날을 아껴 주고 또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내였다. 자지는 서서히 그를 마음속으로 떠올리며 일종의 감미로운 사랑의 맛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으로 그녀는 한 사내에 대한 깊은 애정을 맛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모용준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지는 자신의 마음을 닮아 아주 미세한 바람에도 몸을 흔들고 있는 촛불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지하궁에 있는 밀실은 다시금 끈끈한 점액질을 뿌려 놓은 듯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모용준은 그곳에 있었다. 그는 용상 위에 앉아 환락을 누리기 위해 여인들을 불렀다.
"짐은 한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경들은 자기의 재주를 한껏 부려 나를 즐겁게 하라!"
일제히 고개 숙여 대답하는 여인들의 안색은 그러나 창백하기만 했다. 너무 오랫동안 지하에서만 지내 온 탓이었다. 얼굴만 창백한 것이 아니라 움직임조차 굼뜬 듯 무기력했다. 하지만 창백한 안 색과 잰 몸놀림이 없어도 여인이란 사실은 바꿀 수 없는 법이다.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는 모용준의 눈에는 다시금 불길이 당겨지고 있었다. 여인들 역시 모용준의 심사를 흐트러놓을 수는 없다는 듯 저마다 교태를 부리며 알몸이나 다름없는 몸뚱어리를 마음껏 뽐내기 시작했
다.
모용준이 손을 들어 시선을 모았다.
"짐은 국사에 노심초사하다 보니 매우 지치고 따분하다. 짐을 즐겁게 할 수 없는 여인들은 백이 있다 해도 소용이 없다!"
모용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십여 명이나 되는 여인들이 앞으로 나왔다. 그녀들은 곧 모용준에게로 다가와 마치 뽕잎을 갉아 먹는 누에처럼 그에게 매달려 입술을 움직였다. 촉촉하게 침을 묻힌 입술로 그의 허벅지며 가슴을 애무하고 앞이빨로 잘근잘근 과육을 아껴 먹듯 그의 젖꼭지를 깨무는 등 갖은 교태가 이어졌다.
"으, 으……."
여인들의 애무에 차츰 달아오른 모용준이 드디어 신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눈을 감은 채 여인들에게 몸을 내맡기고 있던 그는 참을 수 없는지 고개를 뒤로 꺾으며 신음했다. 여인들의 혀끝은 벌레의 발과 더듬이가 되어 모용준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어 나갔다. 모용준이 또 한차례 몸을 뒤틀면서 신음을 토하자 여인들이 그의 몸에 납짝 엎드렸다.
"성상, 소청이 '낙불구(樂不 )라는 물건을 하나 발명했는데 한 번 써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한 여인이 모용준의 귓가로 입술을 갖다 대며 뜨거운 숨을 불어 넣었다. 모용준이 흥미 있어 하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좋다. 어서 보이거라!"
그녀가 말한 낙불구란 자그마하게 생긴 수레였다. 수레 위에는 원통형의 찻간이 있는데 그 찻간 뒤에는 양쪽으로 팔걸이가 달려 있었다. 앞의 것과 뒤의 것은 서로 모양이 달랐는데 그 팔걸이들은 전후좌우 마음대로 움직였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찌꺽찌꺽……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마치 남녀가 한바탕 재미를 보고 있는 소리 같기도 해 모용준의 가슴은 금방 달아올랐다.
"그래, 저 수레를 어떻게 쓰는 것인고?"
모용준이 관심을 보이자 그 여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애교스러운 웃음을 띄웠다.
"소침이 보건대 성상께서는 너무 조급하십니다요. 언제나 저희들을 불러 놓고 급히 즐거움을 얻으시려는 걸 보고 제가 고안을 했지요. 앞으론 이 수레를 이용하세요. 성상께서 세 여인과 함께 이 수레 안에 들어가 즐거움을 나누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 수레는 두 가지의 아주 좋은 점을 갖고 있는데……."
"좋은 점? 그래, 무엇이더냐?"
"호호호, 만일 성상께서 이 수레에 들어가신다면 그때 말씀을 드리겠사옵니다."
모용준은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수레 안으로 서둘러 들어간 모용준은 밖에서 볼 때와 다른 점에 또 한 번 감탄을 했다. 안은 아주 정교하고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고 꽤 넓어 보이기도 했다.
"자, 이제 네 말대로 들어왔으니 어서 말해 보거라."
여인이 수레 안에 있는 온갖 장치를 일일이 가리키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 장치는 자유자재로 여인들과 재미를 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란 말에 그의 몸은 점점 달아올랐다. 그것은 장치를 이용해 여인의 위치를 마음대로 조절해 가며 즐길 수 있는 도구였다.
설명을 마친 여인이 어깨에 걸치고 있는 깁천을 스르르 아래로 떨어뜨렸다. 여인의 풍만한 젖가슴이 눈부시게 드러났다.
"성상 폐하, 소청이 이 수레를 만들었으니 성상께서는 그 상으로 저를 지목하셔야 하겠나이다."
모용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꼭 그래야 하는 법이라도 있느냐?"
그러나 여인은 모용준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는 수레 안으로 들어왔다. 여인이 안으로 들어오자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두 가닥의 띠 같은 것이 그녀의 몸을 단단히 묶어 버렸다. 바로 눈앞에 단단히 묶여져 있는 알몸의 여인을 바라보는 모용준의 눈빛이 묘하게 뒤틀렸다. 모용준이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여인이 귓속으로 다시 뜨거운 입김을 넣어 주었다.
"밖의 여인들이 듣지 못하게 해요."
모용준은 여인의 지혜에 탐복을 마다하지 않았다. 후에 이 여인에게 후한 상을 내리리라 마음먹었다. 모용준이 급하게 여인의 몸을 끌어안고는 얼굴을 들이밀려고 하자 여인이 한 손으로 제지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모용준이 동그랗게 눈을 뜨자 다시 여인의 한 손이 무언가를 틀어쥐었다. 찌꺽찌꺽 하는 소리가 나더니 곧 여인의 자세가 묘하게 변해 버렸다. 그러면서 여인이 음탕스런 눈빛을 모용준에게로 흘렸다. 아마도 모용준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자세를 고르라
는 뜻인 것 같았다. 여인이 방금 만든 자세는 도저히 침대 위에서는 해보일 수 없는 그런 기묘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곳 수레 안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여인은 마치 공중에 붕 뜬 채로 다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모용준은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 여인의 다리 사이로 몸을 막 들이 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수레 안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자세히 살펴보니 수레 안에다 작은 종과 방을 따위들을 잔뜩 달아 두었던 것이다. 한껏 달아
오른 몸으로 그것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모용준은 기분이 상했다.
"이건 또 뭐야?"
그러자 여인이 달뜬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소첩은 성상께서 수시로 즐거움을 느끼게 하시라고 이렇게 했사옵니다."
"좋다. 어쨌든 네 마음이 기특하다."
곧 모용준은 여인과의 기묘하면서도 낯선 체험 속으로 빠져들었다. 여인은 수시로 자세를 바꿔 가며 모용준의 땀방울을 짜내었다. 모용준은 처음 맛보게 된 즐거움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모용 준이 몸을 뒤척일 때마다 여인의 교성과 함께 종과 방울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그 소리는 모용준의 기분을 더 한층 돋우어 주었다.
매우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모용준이 수레에서 내렸다. 수레밖에 대기하고 있던 여인들의 얼굴엔 한결같이 시기심이 가득 넘쳐 났다. 모용준이 축 늘어진 몸을 의자에 앉히며 입을 열었다.
"짐은 대연의 황제로서 경들을 모두 처첩으로 거느리고 있는 몸이다. 짐을 기쁘게 하는 것은 경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 연시아(燕翅兒)가 만든 훌륭한 수레는 짐을 매우 즐겁게 했다. 그리하여 짐은 이 연시아를 차관(車官)에 봉하노니 이후로 내가 수레를 쓸 때 경운 옆에서 시중을 들도록 하거라!"
연시아가 매우 기뻐하며 모용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궁전에서 나온 모용준은 혼자 길을 걸었다. 얼마쯤 걷던 그는 걸음을 세우고는 석벽을 노려보았다. 그리곤 사정없이 석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넌 모용세가의 공자이다! 넌 대연의 황제가 아니란 말이다. 대 연엔 황제가 없다는 걸 넌 모르느냐? 대연에는 황제가 결코 없다 는 것을……."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석벽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석벽에 모용준의 주먹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의 주먹 역시 피멍으로 얼룩졌다.
뜨락에 이른 그는 가을 바람에 잠시 얼굴을 내맡긴 채 생각에 잠겼다. 어렸을 적의 일을 회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부친은 늘 대연의 자손이니 대연을 부흥시키는 황제가 될 것이라 말하곤 했다. 그러나 모용준은 그 말을 처음 얼마간은 머리 속에 담아 두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모용세가의 황제라면 몰라도 대연의 황제는 도저히 앉을 수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지하궁전을 만들고 모용씨의 제왕 노릇을 해왔던 것이다.
모용세가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공자를 불쌍히 여겼다. 이들은 대부분 모용준이 재난에서 구해 준 뒤 그의 노비가 된 몸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한평생을 공자를 봉양하고 공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날마다 정실(靜室)에서 무예를 닦거나 때로는 모용세가의 대사에 시간들을 할애하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그런 모용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가 어서 훌륭한 아내를 맞이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
기를 원했다. 그래야만 매일 무예만 닦고 자신들이나 모용세가의 대사를 위해 애쓰는 공자의 짐을 덜어 줄거라 믿었던 것이다.
모용준으로서는 마음에 드는 여인을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너무도 자명했다. 난쟁이에 불과한 사내를 누가 좋아한단 말인가. 사람들도 공자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어 여인을 만나지 않는 거라 믿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데 그같은 근심을 약간 덜게 되었다. 바로 자지라는 처녀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정실에 박혀 있는 모용 공자를 밖으로 끌어내 주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래서 이들은 자지에게 공자에 대해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오로지 모용세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공자와 자지가 맺어지기를 원할 뿐이었다.
자지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창 밖의 야경에 눈길을 던졌다. 그녀는 지금 너무 외롭고 쓸쓸했다. 다른 날 같았으면 비녀가 말동무를 해 주곤 했는데 오늘따라 그녀도 찾아와 주지를 않았다. 그러나 자지는 알지를 못했다. 그 비녀들 역시도 자지가 모용준과 잘 지내주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자지는 쉽게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상념에 빠져 허우적댔다. 깊은 상념 속으로 낯익은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로 왕중양과 임조영이었다. 과연 그 두 사람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또 한 자지의 눈에는 왕중양을 경모의 눈길로 바라보는 임조영의 모습이 크게 들어왔다. 임조영은 왜 왕중양에게 그같은 자신을 내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자신이라면 벌써 왕중양에게 말했을 것이다.
"왜 아직 자지 않는 건가?"
자지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모용준이었다. 그는 새하얀옷에 감싸여 있는 공자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자지가 반색을 하며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공자님이 오셨군요."
"자지, 자주 찾아오지 못해 미안해. 그동안 큰형님과 셋째를 찾는 일에 너무 몰두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모용준의 말에 자지가 눈물을 비쳤다. 한동안 눈물을 보이던 자지가 모용준에게로 바투 다가섰다. 그녀는 모용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마치 어른이 아이에게 말하듯 그녀가 모용준을 내려다 보며 입을 떼었다.
"공자님, 당신이 저를 좋아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요."
그러자 갑자기 모용준의 안색이 변했다. 중심을 잃고 비칠대듯 주위를 황망히 둘러보던 모용준이 대답했다.
"그대는 셋째의 여인이야. 그런데 왜 또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자지가 모용준의 작은 어깨를 잡고는 더 진한 눈물을 쏟았다.
"공자님께 알려 드릴 일이 있어요. 그 낡은 절에서 그런 일이 있을 때……그때 전 처녀의 몸이었어요. 흑!"
자지의 목소리는 파도에 몸을 맡긴 배처럼 심하게 떨렸다. 여인 이 사내에게 자신의 가슴속에 든 말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런 사실을 말해야 하는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자지는 모용준이 자꾸 다른 소리를 하고 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저는 정말 처음으로 사내의 품에……."
모용준의 낯빛은 검푸른 바다를 닮아 갔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자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의 눈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서로 교차하며 맑은 빛을 뿌려댔다.
"그렇다면 그댄 셋째와는 몸을 섞지 않았단 말이오?"
임조영이 사내가 아닐지 모른다는 자신의 추측에 혼란이 생기기도 했다. 어쩌면 자신이 믿고 있는 사실이 거짓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임조영과 자지는 분명 살을 섞었으리라. 이들은 한 방에 들어 있지를 않았던가?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또 한 가지 예측 해 볼 수도 있으리라. 임조영이 사내인데도 자지를 탐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값진 사내로서의 자세인가. 모용준은 어느 쪽이든 자신이 넘볼 수 없는 위치에 두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위축이 되었다. 모용준이 얼굴
에서 그늘을 거두지 않자 자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자님, 전 당신을 처음부터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모용세가에 도착한 후 당신의 행동과 처신을 보고 느꼈어요. 당신이야말로 사내 대장부라는 사실에 전 탄복했지요. 그리고 사실 임 공 자님은……."
그러나 자지는 또 한 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말하는 것이 모용준의 마음을 잡으려는 것으로 비칠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그가 손을 내저으며 자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오? 누군들 그 정도의 일을 안 하겠냔 말이오?"
"공자님, 당신은 정말 기개가 뛰어난 사내예요. 가난한 사람을 돌봐 주는 건 창생을 위해 덕을 쌓는 일인데 공자님 같은 사람은 많지가 않아요. 어떤 여인이든 공자님을 보면 호감을 품을 게 틀림 없어요."
"하지만 그대의 말대로 모두가 날 생각해 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자지가 다시 모용준의 힘없는 대꾸를 잡아 주려는데 문소리가 났다. 자지가 고개를 돌리며 들어오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명기 처녀였다. 그녀는 매우 부끄러워하는 기색으로 머리를 숙이고는 천천히 걸어왔다. 모용준이 물었다.
"명기, 할말이 있나 본데 주저하지 말고 어서 하거라. 자지 역시도 남은 아니니까, 상관말고."
명기가 망설인 끝에 겨우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공자님, 이 명기는 날이 밝으면 시집을 가게 돼요. 그동안 공자님이 이 명기를 아껴 주신 걸 생각하니 잠을 이를 수가 없어서……. 공자님이 허락해 주신다면 전 마지막으로 공자님의 시중을 들고 싶어요. 술이라도 한잔 따라 드리고 싶어요."
모용준이 감동하여 명기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곤 안면에 웃음을 띄우며 자지에게 눈길을 주었다.
"자지, 이 얼마나 기특하고 마음씨가 고운 여인이오? 우리 명기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술 한잔씩 해야겠소."
"정말 부럽고도 욕심이 나는 마음씨예요. 전 명기의 그같은 마음에 찬사를 보내고 싶어요."
자지도 칭찬을 아끼지 않자 명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명기는 곧 모용준 앞으로 술잔을 대령하고는 조심스레 술을 따랐다. 그녀가 자지를 바라보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당신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자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명기가 모용준 앞에 꿇어 앉았다.
"공자님, 제가 드리는 말씀을 꾸짖지 말아 주세요."
난데없이 눈물을 보이는 명기 앞에서 두 사람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모용준은 예전에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명기의 행동에 더욱 놀라워하며 다급하게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명기야, 네가 늘 총명하였기에 난 네게 기예(棋藝)까지 가르쳐 주었었지. 네가 어떠한 말을 한다 해도 난 용서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자지 처녀 역시 그러할 테니 너무 염려 말아라."
모용준이 따뜻한 어조로 명기의 가슴을 토닥여 주자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제10장 명기의 정체
모용준의 허락을 받은 명기는 눈물을 거두며 자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엔 깊은 갈망의 뿌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무슨 말을 하려는데 그토록 애절한 표정을 짓고 있단 말인가? 자지는 속으로 자기를 보고 있는 명기의 눈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때 명기가 말하기 시작했다.
"자지 처녀, 우리 공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잘 대해 주셨어요. 공자님께서는 매일 감당해 내기 어려운 대사를 치르시며 땀을 아끼지 않았답니다."
말을 중단한 명기가 눈가를 어루만지더니 곧 뒤를 이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자님이 저와 바둑을 두셨는데 밤이 깊어지자 저는 부끄럽게도 마구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그 때 공자님이 혼자 주무시면 적적할 것 같아 곁에 있겠다고 하였지요. 헌데 공자님께서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으시다며 저를 심하게 꾸짖으셨어요. 전 그 일이 있는 후 한시도 공자님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명기의 눈가로 다시 눈물이 흘렀다. 모용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명기야, 난 네가 앞으로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라겠다."
명기가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떨구자 자지가 대신 그녀의 마음을 헤아린 듯 말했다.
"공자님께서는 앞으로 꼭 천당에 가 복을 받으실 겁니다."
그 말에 모용준이 정색을 했다.
"천당엔 자고로 불쌍한 사람들이나 올라가야 하지. 옥황상제께서 나 같은 인간을 어디 돌봐 주기나 하시겠나?"
알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스쳐 가는 것을 본 자지는 우울해졌다. 명기가 훌쩍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부탁할 말이 있어요. 자지 처녀께서 우리 공자님을 부디 잘 보살펴 주길 바랍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공자님의 눈에 차는 여인은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답니다. 그런데 자지 처녀를 보시는 공자님의 시선은 그때와 달라요. 공자님께서는 자지 처녀를 진정 아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원하건대 부디 우리 공자님 곁에서 행복하게 해 드리세요."
"너무 걱정 말아요."
자지는 자신의 대답에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무엇을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것인가. 명기의 말대로 모용준을 보살피겠다는 의미의 대답만은 아니었다. 자지는 그 대답의 속뜻을 정확히 끄집어낼 수 가 없었다. 자지는 방금 자신이 한 말에 대해 무언가 덧붙이려고 했지만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고요한 밤하늘엔 뭇별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별들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무수한 꿈을 꾸게 해 준다. 사람들은 어렸을 때 자신의 앞날에 대해 수많은 꿈을 꾸게 된다. 그러나 나이가 차츰 들면서 의지는 나약해지고 그동안 겪어 왔던 삶의 굴곡들 때문에 기개 역시 꺾이고 마는 것이다. 말하자면 칼날은 무뎌지고 금현(琴弦)이 끊어져 급기야는 눈까지 멀게 된다. 바로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조용한 밤이면 별을 바라보며 꿈을 꾼다. 그것도
언제나 영롱한 빛으로 떠있기를 원하는 아름다운 꿈에 자신을 비쳐 보게 된다.
그처럼 수많은 꿈을 꾸게 해주는 별 아래로 한 사람의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는 수림 앞에 멈춰 서더니 잠시 주위를 살피는 듯했다. 그림자를 보니 아주 건장한 사내가 분명했다. 그는 오랫동안 나무와 마주한 채 움직이질 않았다. 그러던 그가 나무를 향해 예를 올리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외쳐 댔다.
"천하에 폐인(蔽人)이란 없는 법이다!"
한밤중에 나무와 말을 나누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번엔 나무에서 말소리가 들려 오는 게 아닌가?
"땅 위에 있는 잡초들은 모두가 약이로다!"
나무가 말을 할 리는 없었다. 곧 나무 중간이 쩌억 하고 마치 문처럼 열리면서 구멍이 드러났다. 그 사내가 구멍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그 안에서는 연무(烟霧)들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연무를 타고 수많은 벌레들이 이리저리 오가는 것이 보였다. 벌레들의 몸은 매우 번들거리고 눈부시어 오래 바라보고 있노라면 눈이 시렸다.
사내가 순식간에 연무를 뚫고는 큰 대청에 이르렀다. 대청에는 대형 조각상이 서 있는데 손에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책 위에는 글자가 씌어져 있었고 그의 주변에는 호미 한 자루와 약바구니가 놓여져 있었다. 약왕(藥王) 손사막(孫思邈)의 형상이었다. 또한 약왕상 앞에는 열여섯 개의 의자가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그 의자에는 열여섯 사람이 앉은 채로 그들 위에 놓여져 있는 빈 의자를 일제히 주시했다. 이윽고 누군가 가벼운 걸음걸이로 다가와 빈 의자에 앉
았다.
"할말이 있나요?"
의자에 앉은 여인이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양 호법이 일어나 읍을 했다.
"장문인, 이번에 강남 정강아 가서 모용 공자의 대사를 적절하게 처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분은 꽤 만족해 하면서 날짜를 정해 감사 표시를 표하러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장문인은 면사포를 쓰고 있었기에 얼굴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가 면사포 뒤에서 말했다.
"모용 공자는 우리 약왕문에 은혜를 베푼 분입니다. 그분이 요구 한 일은 응당 해 드려야 해요. 당신들이 적절하게 조치를 취한 건 잘한 일이에요."
양 호법이 예를 올리고 나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또 좌중을 훑어보며 물었다.
"강호에 다른 소식은 없나요?"
"듣자하니 강남에 한 기인이 출몰했다고 합니다."
한 사내가 벌떡 일어서며 급히 예를 올리곤 말을 이어 갔다.
"그 사람은 황약사라 부르는데 늘 제멋대로여서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죽인다고들 합니다. 그 사람이 중원에 가서 중원의 8대 문파들에게 도전을 했는데 그 문파들이 여지없이 얻어맞고 쫓겨갔다는 군요. 또한 그 사람은 중원 무림의 악인들을 일부 잔폐로 만들어 동해 도화도로 끌고 갔다고 합니다."
다른 사내가 거들며 나섰다.
"이상한 건 해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도화도로 찾아갔다고 합니다. 가지 않겠다고 한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답니다."
거들고 나선 사내의 말에 의문이 생겼는지 누군가 큰소리로 물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약 당신이 어떤 독약을 먹었다면 마음대로 도망을 칠 수 있겠소?"
그때서야 모두들 이유를 알겠다는 듯 웅성웅성거렸다.
"누구냐?"
밖에서 학수를 보고 있던 제자들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뒤이어 몇 사람이 화닥닥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이들은 모두 모용세가의 가신들로 지청, 주정 그리고 목우였다. 그중 목우는 임조영에 게 입은 상처로 인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오른쪽 손목은 잘려 나가 천으로 싸매져 있고 어깨에도 깊은 상처를 입은 처지였다. 이들 세 사람이 길을 내자 뒤에서 교자 하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교자는 비교적 작았는데 두 명이 들고는 총총걸음으로 들어 왔다. 교자
를 바닥에 내려놓자 면사포를 쓴 약왕문의 장문인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모용 공자께서 본 방에 드신 것 같은데 무슨 하실 말씀이 있는 모양이군요?"
교자의 문발을 걷고 모용준이 나오더니 머리를 들어 장문인을 쳐다보았다.
"모두들 약왕문은 신비한 방착(幇派)라고들 말하면서 장문인은 미모의 여인이라고도 하였소. 처녀의 옥용(玉容)을 볼 수 있겠는지요?"
모용준의 말에 그녀가 어깨를 약간 들썩였다.
"약왕문은 작은 파이고 모용 공자님은 또한 우리 약왕문의 은인이 아닌가요? 모용 공자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분부만 내리시지요."
"소문에 따르면 당신은 아주 사랑스럽게 생겼다고 하던데?"
알겠다는 듯이 그녀가 손을 들어 면사포를 벗으려 했다. 막 그녀의 얼굴이 드러날 참에 갑자기 누군가 소리쳐 제지했다.
"모용 공자! 당신은 지금 행동이 약왕문에 대한 모욕인 것을 정령 모르오?"
양 호법이었다. 벌떡 일어난 그가 모용준에게 정중히 읍한 다음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속에는 상당히 도전적인 무엇이 섞여 있었다.
"모용 공자께서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 있고 약왕문에 은덕을 베푼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없소. 하지만 공자의 지금 행동은 실로 실망이 아닐 수 없소. 우선 약왕문의 은밀한 장소에 이렇듯 뛰어든 것이 그렇고, 또한 우리 장문인을 업신여기려 한 것도 그러하오. 우리 약왕문을 하잘것없는 작은 문파라 하여 만만하게 보려는 겁니까?"
그는 모용준이 그냥 넘길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양 호법은 떳떳하게 맞서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모용준은 그의 눈빛을 힐금 살피고는 그만이었다. 대신 나선 것은 일기충천 지청이었다.
"약왕문은 모용세가의 한 작은 갈래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가 다시 한 번 일깨워 줘야겠나?"
약왕문 사람들이 비웃었다. 그것으로 이들이 모용세가에 대해 불복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모용준인 정색을 하며 다짐했다.
"원래 난 약왕문에 대해 아무런 적대감도 없었다. 난 자질구레한 일은 따지지 않는 성미이다. 그대들 약왕문이 나의 명령에 충성을 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로지 죽음뿐이다!"
말끝에 일침을 놓듯 사나운 기색을 보인 그가 대청 안을 한바퀴 돌았다. 그가 우뚝 걸음을 멈추자 열여섯 개나 되는 의자의 등받이가 모두 떨어져 나갔다.
장문인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모용준에게 쏘아붙였다.
"모용 공자님, 당신이 만일 계속 약왕문을 깔본다면 뱀에게 물릴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허허, 넌 도대체 누구길래 얼굴을 감추려는 것이냐? 당장 면사포를 벗어 버리지 못하겠느냐?"
모용준이 바닥을 힘껏 박차덕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곤 한쪽 손을 뻗은 채 그녀에게로 날아갔다. 그녀의 면사포를 벗겨 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 역시 경공을 부려 훌쩍 다른 쪽으로 피해 날아가 버리는 게 아닌가. 그녀는 꼭 월궁(月宮)의 옥토끼인 양옥으로 된 절굿공이를 손에 들고는 모용준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모용준이 자리를 피해 날아간 그녀를 향해 슬쩍 미소 짓자 다시 그녀가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이번엔 그 절굿공이를 치켜 든 채 공격을 해왔다
. '피릭―피리릭―' 모용준이 팔을 들어 옷소매를 휘둘렀다. '더엉!'
옷소매는 쇠붙이로 만들어진 듯 절굿공이를 막아내며 커다란 징을 울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옆으로 비껴 지나간 그녀가 얼른 거리를 두며 숨을 몰아쉬었다.
"면사포만 벗으면 될 텐데 왜 이리 힘들게 하느냐?"
모용준이 틈을주지 않고 다시 매처럼 몸을 날렸다. 미처 모용준의 접근을 알아채지 못한 그녀가 놀라며 몸을 틀었다. 그 바람에 모용준의 손아귀엔 면사포 대신 그녀의 옷자락이 잡혀 부욱 찢어졌다. 어깻죽지의 백옥 같은 새하얀 살이 드러나고 말았다.
"하하하, 이토록 살결이 고운데 어찌 얼굴을 감추려 드느냐?"
모용준이 재미있어 하면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대며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가 꾸짖었다.
"모용준, 당신의 선조들은 대연의 황제들이었는데 그들도 당신처럼 개망나니였나 보죠?"
"잘 알고 있군 그래. 그런데 황제들이 모두 여색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왜 모르는가? 하하하!"
모용준이 다시 그녀의 주위를 빙빙 돌며 슬쩍슬쩍 손을 뻗으려 했다. 그녀는 면사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아래서 이들의 행동을 올려다보고 있는 약왕문 사람들의 표정이 매순간마다 변해 갔다. 안타까워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노기를 품기도 했고 또 때로는 곡예를 구경하는 천진한 아이들처럼 조마조마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벽을 타오르다 몸을 뒤로 젖혀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은 그녀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모용준, 우리 약왕문 사람들이 당신을 도와 그 무지한 처녀애를 속이기까지 한 것을 잊었소? 잊지 않았다면 왜 우리를 이처럼 못 살게 구는 것이오?"
"그대들이 날 진심으로 도와준 것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 허나 그대의 약왕문 놈들이 자지 처녀 앞에서 내게 뭐라고 했는지 아나? 날 쓸모 없고 볼품없는 난쟁이라고 모욕을 했지 않 았는가?"
사실 약왕문의 사람이 자지 앞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모두 모용준을 돕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어찌 죄로 여길 수 있겠는가. 한 사내가 변명을 하려고 움찔하자 모용준이 알았다는 듯 얼른 몸을 날렸다. 그 사내 앞으로 날아간 모용준이 사나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바로 네 놈이렷다!"
사내가 약간 물러서다 말고 갑자기 옆으로 몸을 틀어 재주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몸이 거꾸로 세워질 때에 맞춰 이렇게 나불거렸다.
"그래, 이 난쟁이 놈아!"
모용준이 사내를 따라 몇 걸음 따라가려다 멈췄다. 사내가 곧 몸을 세우더니 모용준을 향해 주먹을 뻗어 왔다.
"받아랏!"
그러나 사내의 주먹에 얼굴을 내줄 모용준이 아니었다. 살짝 상체만 비낀 채 사내의 주먹을 얼굴 옆으로 흘렸다. 다시 사내가 달려들었다. 이번엔 사내의 주먹이 날아오기도 전에 모용준이 번개 같이 손을 내밀었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콧잔등 위로 모용준의 주먹이 꽂혔다.
"억!"
사내가 코를 감싸 쥔 채 뒤로 넘어졌다. 잠시 자신의 코를 어루만져 보던 그는 별이상이 없다고 여겼는지 안심을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를 지켜 보던 약왕문 사람들의 눈들이 일제히 밤톨만하게 커지고 말았다. 사내의 코에 구멍이 뚫렸는데 차츰 넓어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급기야 얼굴 전체가 휑하니 뚫리며 해골까지 드러나게 되었다. 이미 두 눈알은 어디론가 빠져 달아났고 이목구비는 엉망이 된 상태였다.
"으악!"
사내가 비명을 내지르며 풀썩 고꾸라졌다. 이를 본 양 호법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상흔권(傷痕拳)!"
모용준이 껄껄 웃으며 약왕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천하의 무림에서 이 모용준에게 덤빌 자는 없다. 모용세가는 천하의 무림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데 너희들은 아직도 무엇이 정도인 지도 모르고 있느냐? 하하하!"
칼끝보다 더 예리한 눈초리로 이들을 노려보는 모용준의 얼굴엔 살기가 맴돌았다. 그의 눈길엔 사람들의 생각마저도 녹여 버릴 듯 한 강력한 독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사람들이 슬금슬금 뒤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용준과 눈길조차 마주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모용준이 양 호법에게 일렀다.
"네 놈은 사람들을 시켜 내게 무례함을 범했다. 그래, 모용세가를 멸시하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느냐?"
모용준의 무공은 실로 소문에 듣던 것보다 월등해 이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장문인도 겁에 질린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모용 공자님, 천하의 남쪽엔 모용이 있고 북쪽엔 신독행이 있다는 말에 결코 반기를 들지 않겠소. 그러나 공자님이 왜 이곳까지 왔는지 알고 싶소. 만약 우리 약왕문에 죄가 있다면 내가 듣고 난 뒤 진심으로 사지드리리다."
모용준이 손을 높이 쳐들자 일기충천 지청이 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모용준에게 작은 병 하나를 넘겨주고는 다시 자기 자리로 갔다. 모용준이 그것을 높이 쳐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약왕문 무리들아, 잘 듣거라! 이 병 안에는 약이 들어 있는데 만일 너희들이 한 알씩 받아먹는다면 난 기꺼이 용서할 것이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양 호법이 모용준의 말을 거역하고 나섰다.
"당신은 정말 지독한 사람이군요. 당신은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서 우리 약왕문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여기오?"
모용준의 반응은 애초 기대하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양 호법이 눈에 불을 켜더니 자기 말이 끝나자마자 약을 찧을 때 쓰는 절굿공이를 모용준을 향해 던졌다. 모용준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다가 슬쩍 손을 내뻗기만 했다. 그러자 절굿공이가 방향을 바꾸더니 다시 양 호법에게로 날아가는 게 아닌가.
'파팍!' 하며 양 호법이 반사적으로 양손을 들어 막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양호법의 손가락들을 모조리 부러뜨린 절굿공이는 그의 가슴팍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으으……."
양 호법이 허리를 반으로 꺾으며 아픔을 참아냈다. 그러나 곧 아래로 향한 얼굴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자 그는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목우가 실실 웃으며 다가와 쓰러진 양 호법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공자님께서 네 놈을 용서해 목숨만은 살려 주신 걸 감사하라구."
양호법은 아픔을 참는지 아니면 수치심을 억누르고 있는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신음조차 내지를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치명타를 입은 게 분명했다. 주정이 목우의 뒤를 이어 이죽거렸다.
"양 호법, 네 놈이 어디 할말이 있거들랑 해 보라구?"
두 사람이 자신을 개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양 호법은 더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저 어렵게 치켜 뜬 두 눈으로 이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양 호법, 그대는 왜 말이 없어졌지? 조잘조잘 나불나불 어서 입을 벌려 보라구. 공자님이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이라도 있나?"
이렇게 또 집적댄 것은 목우였다. 그는 말로 어르는 척하다가 몸을 돌려 양 호법에게 장을 날렸다. 그의 일격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양호법의 등짝을 부셔 버렸다.
"어헉!"
양 호법이 입을 벌리며 피를 토했다. 때를 기다려 일기충천 지청이 고함을 질렀다.
"죽여라!"
그러자 일제히 모용세가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약왕문 사람들은 그저 소리를 지르며 겁을 주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정말 살기를 내뿜으며 공격해 오는 이들을 보고는 맞서기 시작했다.
"아악, 살려!"
삽시간에 피가 솟구치고 어느 부위인지 모를 살점들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대청 안은 온통 피바다가 되어 비린내로 코를 찔렀다.
모용준이 주먹을 날릴 때마다 상대의 얼굴엔 커다란 구멍이 나 버렸다. 얼굴이 휑하니 뚫려 버린 자들은 황급히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울부짖었다. 손가락 사이로 쉬지 않고 흘러내리는 피가 온몸을 적시는 바람에 사람의 형상이 말이 아니었다.
"모용준, 네 놈 때문에 우리가 악인으로 가장해 네가 여인을 차지하게 해 주지 않았더냐?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들을 죽여 증거를 없애려는 수작이 분명하구나. 네 놈을 도저히 살려 둘 수 없으 니 각오해라!"
그는 낡은 절간에 있었던 사내 중 하나였다.
"얏, 간다!"
그가 질풍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달려들었지만 모용준은 손끝 하나 움직이질 않았다. 모용준 바로 앞에 몸을 세운 그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서히 눈앞으로 뿌연 안개가 피어 올랐다. 안개 속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차츰 사라져 갔다. 운무 속에서 사내가 사방으로 팔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내가 모용준을 죽였다! 내가 모용준을 죽였단 말이다!"
다시 안개가 빠른 속도로 흩어지며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모두의 눈동자가 화둥잔만하게 커졌다. 사내의 얼굴에서는 살점들 이 피범벅이 되어 하염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사내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몰골로 비틀거렸다.
약왕문 사람들은 풀과 나무 등으로 독약을 만드는 재주를 지녔다. 그렇지만 모용준의 이같은 재주를 대하고는 모두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준의 그 작은 주먹이 얼굴에 한번 닿기만 하면 저절로 살점이 헤어져 나가고 피바다를 이루니 어찌 두렵지 않을 것인가. 순식간에 해골로 변해 버리는 것을 보고 누가 섣불리 그와 대적하려 들 것인가.
일찍이 소림사(少林寺)의 칠상 대사(七傷大師)조차도 모용준의 주먹이 두려워 이를 상흔권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사태를 주시하던 장문인이 다급하게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빨리 제황목왕정(祭黃木王鼎)을 가져오너라!"
뒤쪽으로 급히 달려갔던 한 사내가 다시 몸을 공중에 붕 띄우면서 나타났다. 그가 제황목왕정을 그녀의 손에 넘겨주며 물었다.
"몇 가지의 향을 태울까요?"
그녀가 조급하지만 위엄을 잃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간이 없으니 가급적 많이 태워라!"
사내가 향에 불을 붙이자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 올랐다. 일기충천 지청이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목청을 높였다.
"저 놈이 목정을 태우지 못하게 해라!"
모용세가에서 가장 총명하다고 이름난 그의 말이었기에 모두들 수상하게 여기게 되었다. 모용세가의 사람들이 그의 말에 따라 바닥을 얼음판 위를 지치듯 매끄럽게 그쪽으로 달려갔다. 약왕문의 무리들 역시 이제는 마지막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달려오는 이들에 맞서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래도 의리는 살아 있는지 방금 전 널브러진 두 사내를 둘러싼 채 공격을 막으며 목정에 불이 붙기를 기다렸다.
"땅 위에 있는 잡초들은 모두가 약이로다!"
다시금 그 소리가 들려 왔다. 이들이 쓰는 일종의 주문 같은 거였는데 용기를 주며 기를 되살려 준다고 믿었다. 약왕문 사람들은 이 주문을 외우며 결사적으로 목정을 지키려 했다.
드디어 목정에 불이 붙고 그 안에 있던 향이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기만 모락모락 피어 오를 뿐이었다. 약간의 냄새만 풀풀 풍기자 모용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까짓 목정 하나로 날 이겨 보겠다고?"
더욱 화가 뻗친 모용준이 별이라도 따려는 듯 높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열 길도 넘게 공중으로 솟구친 모용준이 빙그르르 몸을 화전시키더니 곧추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정확히 목정을 향해 아래로 내리꽂히려 했다.
"공자님, 안 됩니다!"
거의 목정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지청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가슴을 쳤다. 모용준이 어렵게 몸을 틀어 옆으로 내려앉은 것은 지청의 목소리가 사뭇 다르게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내공의 힘으로 가슴에서부터 내지르는 소리였는데 분명 어떤 절실함이 어려있는 듯했다.
모용준은 그때서야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약왕문 무리들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다. 약왕문 사람들은 오히려 목정을 빼앗기려고 허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게 아닌가. 허튼 초수로 눈가림을 했을 뿐 이들은 목정을 완벽하게 지키고 있지를 않았다. 이 목정은 천하의 삼대 독보(三代毒寶) 중 하나로서 약왕문 무리들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거였다. 그렇기에 이들은 죽기 살기로 지켜 내는 것이 도리였다. 하지만 약왕문 무리들은 힘을 제대로 쓰지 않고 있어 모용준은 어리둥
절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지청의 외침이 다른 때와는 달리 절실하게 가슴을 후려쳤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모용준은 지금 눈앞에 진을 치듯 목정을 둘러싸고 있는 무리들의 거동을 대단하게 보지 않았다. 이들 정도라면 아무리 속임수를 갖고 있더라도 능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재빨리 몸을 써 목정만 빼내 오면 될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이들은 곧 발톱 잘린 맹수 꼴이 되어 나자빠질 게 분명했다.
모용준은 자신의 무공을 믿고는 약왕문 무리들의 틈을 노렸다. 이들은 그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약간의 빈틈을 보였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모용준이 재빨리 목정 옆의 탁자 귀퉁이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다.
"아니!"
떨어져 나간 귀퉁이로 곧 독을 품은 지네와 뱀들이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다. 특히 독이 잔뜩 오른 뱀들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두 가닥의 혀를 벌름거리며 모용준을 향해 흔들어 댔다. 뿐만 아니었다. 이 밖에도 올빼미와 박쥐 같은 썩 보기 좋지 않은 독물들이 연이어 밖으로 튀어나왔다. 모용준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얼른 인상을 썼다.
"오호라, 바로 이것을 보여 주려고 했군. 하하하, 하지만 이까짓 걸로 날 어쩔 셈이냐?"
그녀가 뒤질세라 역시 웃음으로 받아쳤다.
"오호호! 또 하나 당신께 보여 드릴 게 있소. 당신이 정 나를 보고 싶다면 보여 드리지요."
그녀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포를 벗었다. 곧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니, 이럴…… 수가!"
모용준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몸까지 떨고 있는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모용준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란 사실을 곧 깨달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찌……. 바로 너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그녀는 바로 자기와 늘 바둑을 두던 명기였다. 또한 자지에게 눈물로 호소를 하던 그 명기였다.
명기가 웃음을 싹 거두며 차갑게 모용준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계집들이나 사들이더니 나중엔 약왕문의 장문인도 사들일 작정이었나요?"
다분히 비꼬는 투였다. 모용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너의 진짜 이름은 무어냐?"
그러자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명기라고 불러요."
"아니다. 너의 진짜 이름을 말해라!"
"공자님께서는 아두들의 이름짓기를 즐기셨죠? 당신은 아두들을 자신의 독점 물로만 생각하셨기에 저의 진짜 이름은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모용준은 속으로 자기를 돌봐 주던 명기, 아니 정체 모를 이 여인이 지닌 미모에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왜 전에는 이같은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을까?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난 정충(丁忠)이라 부르지요."
"하하하!"
모용준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충? 명기? 정충? 명기? 한 마리의 벌레에 지나지 않는 군."
사태는 서서히 역전돼 가고 있는 중이었다. 독을 품은 뱀이 일기 충천 지청의 몸을 친친 감았다. 그러나 그는 소리도 내지 않고 손톱을 튕겨 이들을 물리치려 했다. 탁탁 하는 소리가 나자 독사들이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번엔 왕지네와 왕거미들이 그를 향해 꿈틀꿈틀 다가왔다. 이 틈을 타 약왕문 무리들이 기세를 높였다.
"피리를 불어! 어서 피리를 불란 말이야!"
곧 누군가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피리는 매우 작았지만 소리는 날카롭고도 음이 높아 소름끼칠 정도였다. 피리 소리를 들은 독물들이 불안을 느끼는지 더욱 날뛰었다. 삘리리리―피리 소리에 따라 그 독물들은 모용세가 사람들만 골라 덮쳐 들었다.
"모용 공자님, 당신의 몸엔 왜 저 독물들이 덤벼들지 않나요?"
정충이 불쑥 물었다.
"난 어려서부터 독약을 먹고 자랐기에 독물들도 날 좋아하지 않지."
정충이 뒤에 있던 사내에게 눈짓을 주었다.
모용준은 잠시 후 목우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한 손을 마구 휘두르며 몸으로 기어오르는 독물들을 내리치려고 했다. 또한 주정은 겁을 먹고는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오직 지청만이 고함을 지르며 독물들과 피나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형편이었다.
정충이 모용준에게 말을 걸었다.
"공자님, 당신은 날 때부터 사내 구실을 하지 못하는 고자가 아닌가요?"
"뭐라고!"
모용준의 심기를 흐트러 놓자는 수작이었다. 모용준은 그녀가 모용세가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이같은 일을 꾸몄을 것이라 상상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용서할 수가 없었다. 명기라는 여인 만을 알았고 또 온순하고 마음씨 고운 한 여인만을 기억했던 모용 준으로서는 악몽이 아닐 수 없었다. 모용준이 품속에서 작은 책을 꺼냈다. 약왕문 무리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그건 《염왕장(闇王帳)》이 아니오?"
그중 하나가 이렇게 소리치자 모용준이 크게 웃었다.
"하하핫! 그래, 《염왕장》이구말구."
이 《염왕장》이 모용세가의 보물이란 것은 강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염라대왕의 구혼장(句塊帳)처럼 이 책을 꺼내 들기만 하면 당장 사람이 죽어 자빠진다는 것이었다. 모용준이 정충을 보며 꾸짖었다.
"정충아, 네가 나의 시중을 들어준 일을 생각하면 백번이고 고마움을 금할 길 없다. 헌데 네가 이렇게 나를 모욕하다니 널 죽이지 않고서야 어찌 마음을 편히 하겠느냐?"
모용준이 몸을 그녀에게로 날리며 잡아채려고 했다. 그녀는 여전히 살짝 몸을 피하여 모용준의 손길을 벗어났다.
"당신이 만일 약왕문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장문인을 해친다면 곧 화를 부르게 될 것이오!"
모용준이 들고 있던 《염왕장》을 휘두른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곧 눈앞에서 놀랍고도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갑자기 온 누리에 금빛이 가득 들어차면서 사방이 훤히 밝아 오기 시작했다. 약왕문 사람들은 말로만 들었지 《염왕장》의 위력을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사방으로 퍼진 금빛 때문에 오히려 눈앞이 흐려지고 목이 조여드는 기분에 한 사람씩 컥컥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한 사내가 목이 찢어진 채로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며 허둥댔다.
그가 앞으로 뛰쳐나오며 무의식중에 칼을 뽑아 들었다. 바로 그 앞에 모용준이 버티고 있었는데 그가 칼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곧 사내의 목에 붉은 점이 나타나며 힘없이 아래로 허물어졌다. 뒤를 이어 약왕문 사람들이 하나 둘씩 쓰러져 갔다.
정충이 위기에 몰리자 최후의 수단을 쓰려고 했다.
"미심약(媚心藥)을 뿌려라?"
아직 쓰러지지 않은 약왕문 사람들이 모용준과 모용세가의 사람들을 한복판에 몰아넣었다. 제각기 흩어져 있던 독물들도 일제히 이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모용준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정충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당신 같은 난쟁이는 아예 여인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아. 당신이 그러면 괜히 울고 가는 여인들만 생기니까."
정충이 훌쩍 몸을 날리며 모용준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모용준이 뒤를 따라 날며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게 섰거라!"
그녀가 바닥으로 소리 없이 내리자 모용준도 따라 내렸다.
"모용 공자, 얼마나 힘이 드는지 내가 당신을 안아보고 싶네요."
"그럼 어서 안아 보지 않고 뭘 하지?"
모용준의 손에서 《염왕장》이 다시 번쩍했다. 모용준은 《염왕장》으로 그녀를 공격하려 했지만 어느 틈엔가 피해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녀가 높이 오르며 아래에 대고 지껄였다.
"모용 공자, 듣자하니 모용세가 사람들은 대대로 색을 좋아한다고 하던데 당신은 어찌하여 여인에 대해 이토록 모진가요? 호호호!"
《염왕장》이 다시 번쩍였으나 이번에도 그녀는 몸을 피했다. 그녀의 머리는 어지럽게 흐트러져 얼굴을 가렸다. 모용준이 《염왕장》을 계속 휘두르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주위를 빠르게 훑어보던 지청이 말했다.
"공자님을 모시고 뚫고 나가자!"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지청이 얼른 판단을 내렸다. 그런데 벌어진 지청의 입으로 약가루가 들어가는 통에 그가 비틀거렸다. 옆에 있던 목우의 어깨를 부여잡은 채 지청이 심하게 몸부림을 쳤다.
"이거 왜 이래?"
지청이 목우의 멱살을 거머쥐고 말았다. 놀란 목우가 지청을 뿌리치려 했지만 결사적으로 매달렸다.
"이 사람, 나야 나!"
지청이 매서운 눈을 치켜 떴다.
"그래, 바로 널 죽이려는 거다! 네 놈은 내가 처음부터 공자의 부하 노릇을 하기 싫어하는 줄 몰랐단 말이냐? 내가 줄곧 저 놈의 뒤에 서서 허리를 굽히고 저 난쟁이를……."
목우의 눈동자가 함지박만하게 부풀었다. 그 말을 모용준이 들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청은 살아 남기가 어려웠다. 지청은 지금 제정신이 아닌 듯싶었으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망발을 마 구 지껄여댔다.
모용준이 목우에게 일렀다.
"어서 저 사람을 끌어내거라!"
지청의 무공은 이들 중 가장 뛰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이 나간 상태인지 목우가 잡아끌자 순순히 따라왔다. 그런데 갑자기 지청이 소금벼락을 맞은 미꾸라지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 들이 몰려들자 사정없이 그가 주먹을 내지르며 고함을 쳤다.
"내가 공자 노릇을 하자고 들면 못할 줄 아느냐?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난 무림 중에서 모용씨 가문이 아주 대단한 줄 알고 가신이 되려고 했던 거야. 하지만 이젠 당신을 대단하게 보지 않아!"
지청의 시선은 모용준에게로 달려가 박혔다. 그리고는 열에 들 뜬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 당신은 이미 미약(迷藥)에 중독되었어!"
정충이 머리칼이 곤두설 정도의 소름 돋는 웃음소리를 냈다.
"오호호홋! 모용준, 당신의 부하까지 이젠 당신을 존경하지 않는데 그만 체면 따위는 벗어 던지시지?"
그녀에게로 달려갈 줄 알았던 모용준은 느닷없이 지청을 향해 몸을 던졌다. 지청은 귓볼을 세게 얻어맞고는 비틀거렸다. 이를 본 주정이 남모르게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터라 주정은 지청이 공자에게 신임을 잃어 가는 듯 싶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미심약을 다시 뿌려랏!"
정충이 또다시 외치며 몸을 띄워 한쪽으로 물러섰다. 약왕문 사람들이 약주머니를 꺼내 일제히 사방으로 뿌려댔다. 목우가 지레 목을 움켜쥐고는 컥컥거렸다.
"헉, 야단났어. 이 도깨비 같은 놈들이 날마다 이런 독약을 주물러대더니 아예 사람들 씨를 말리려고 하는구나!"
목에 모랫가루라도 들어간 듯 심하게 컥컥대며 뒤로 물러서던 목우가 갑자기 검을 뽑아 들었다. 모용세가가 이제 끝장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모용준이 눈치를 채고는 쏜살같이 달려가 막 자신의 가슴을 찌르려던 목우를 덮쳤다. 검을 빼앗으려 했으나 목우의 힘은 대단했다.
"그자는 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찌르려 할 것이다!"
그녀의 말이 없었어도 모용준은 지금 지청과 목우가 심하게 정신을 잃어 가고 있음을 간파해 냈다. 목우가 바닥으로 쓰러지더니 미친 사람처럼 발작을 해댔다.
"아, 으! 으윽!"
그는 자신의 팔과 다리를 보이는 대로 물어뜯으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개나 돼지처럼 바닥에 납짝 엎으려 마구 짖어대기까지 했다.
"공자님, 어서 해독제를!"
소리친 것은 지청이었다. 그는 어느정도 정신을 회복했는지 비칠거리면서도 애써 자세를 잡으려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모용준을 불렀다.
"자, 어서 이리와 해독제를 가져 가시지요. 제 품안에 있는데 직접 가져 가세요."
모용준이 그녀 앞으로 다가가려는데 주정이 만류했다.
"공자님, 조심하세요. 저들에게는 백해(百解)라고 불리는 약이 있는데 다른 불순물이 조금만 섞였어도 해독이 되지 않는답니다. 저 년이 그것을 던져 줄지도 몰라요."
그때 정충이 자신의 앞가슴을 확 풀어헤쳤다. 육감적인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의 젖가슴은 매우 컸으며 탐스러워 누구라도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녀의 젖가슴에 서서히 영상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아름다운 소녀들이었다. 소녀들은 몸을 유유히 움직이면서 정충의 젖가슴 위에서 뛰어 놀았다.
"이게 바로 백해라는 겁니다. 이걸 보면 세상의 어떤 독이라도 다 해독할 수 있지요."
이렇게 소리치며 갑자기 주정의 몸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는 사태를 잘 알고 있었기에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너무 거리가 멀어 모용준을 빼내 올 수가 없었다.
이미 모용준은 그녀의 마수에 걸린 상태였다. 그녀에게로 끌리 듯 다가온 모용준 얼굴 앞에서 그녀가 젖꼭지를 홱 비틀어 버렸다. 그녀의 유두로부터 희디흰 액체가 모용준의 얼굴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제11장 미녀 정충의 음모
"앗!"
모용준은 눈앞으로 뿌연 액체가 쏟아지는 것을 느끼곤 얼른 몸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늦은 상태였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몸을 돌리는 바람에 그녀의 분비물은 얼굴을 피해 옷에 떨어졌다. 그녀의 유두에서 뿜어진 그 젖 같은 분비물이 닿자 곧 옷이 새카맣게 변해 버렸다. 그는 정충이 몸에 독을 품고는 암기(暗器)를 쓰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모용준은 옷이 타들어가자 얼른 바닥에 몸을 굴렸다.
"공자님, 난 당신을 죽여야겠어요. 그리하여 다시는 강남에 모용이란 인물을 찾아볼 수 없게 만들겠어요. 그러면 천하의 무림이 얼마나 조용해지겠어요?"
정충의 자신만만한 소리를 무시하며 모용준이 고개를 돌려 자기 무리를 찾았다. 이미 모용세가 사람들은 약왕문 무리들에게 잡힌 뒤였다. 모용준이 정충의 젖가슴에 허물어지자 모두들 전의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한 사내가 쓰러져 있는 모용준에게로 다가오며 생포된 토끼를 대하는 맹호처럼 여유를 부렸다.
"모용 공자, 그대가 우리 약왕문 손에 죽게 되었는데 어떤 방법으로 죽고 싶은지 말해 보라구?"
정충이 모용준의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투로 외쳤다.
"운무를 뿜어라!"
이 수림 속에는 지나는 그림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한 사람도 없었다. 만일 생명이 있는 것이 부시럭댔다가는 끝장이었다. 수림은 바람결에 옆사람의 머리칼 날리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였다. 정충이 곧 사람들에게 지시를 해 풍막을 세우게 했다. 이 풍막속에다 모용준을 가두었다. 정충이 손을 들어 약왕문 무리들에게 다른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이들은 곧 모용세가의 사람들을 데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혼자 남은 정충이 모용준에게로 다가오며 미소를 띄웠다. 그것은 예전 명기가 지니고 있었던 맑고 사랑스런 미소는 아니었다.
"공자님, 당신은 내가 당신 밑에서 비녀 노릇을 할 때의 일들을 기억하시겠죠?"
"듣기 싫다!"
모용준은 두번 다시 그같은 일들을 떠올리고 싶지가 않았다. 명기는 허깨비에 불과한 현실인데 과거 속의 일을 생각해서 무엇하리. 그 기억 속의 모습들은 모두 거짓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당신이 훌륭한 군자인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후후, 나중에 당신이 색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지하궁 밀실에서 당신이 벌인 해괴한 짓을 난 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넌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 너무 많은 것을 안다는 것은 곧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이치와 같으니까."
정충은 조금도 물러서지를 않았다.
"내가 당신을 따랐더라면 필경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허공으로 눈길을 던지던 그녀가 갑자기 모용준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의 비녀 노릇을 하면서 매일 어떤 궁리를 했는지 아세요? 나는 그곳에서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죠. 그렇기에 지금 당신을 내 치마 속에 엎드려 있는 신하로 만들 수 있는 거."
"넌 나의 궁녀들보다 못한 요물이다."
"호호호, 공자가 나와 살을 섞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장담을 하죠?"
모용준이 코웃음을 치자 그녀가 달려들었다. 그녀는 모용준의 타들어간 옷을 부욱 찢어 멀리 내던졌다. 순식간에 모용준은 알몸 이 된 채로 그녀 앞에 서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사내들이란 옷을 벗고 나면 모두 이런 모습인가요?"
"계집 역시 마찬가지지."
그러자 정충이 요란스럽게 웃어젖히며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여기를 다시 보시오!"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으로 눈길을 던진 모용준은 눈을 꿈벅였다. 그녀의 젖가슴에는 아까 비쳤던 그림 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모용준은 그녀가 무엇을 보라고 했는지 얼른 감을 잡지 못했 다. 그런데 정충이 나머지 옷까지 벗어 버리는 게 아닌가. 모용준의 두 눈은 얼음 속에 담긴 듯 일시에 굳어 버렸다. 그녀의 몸에는 온통 문신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찔한 현기증에 시달리며 모용준은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특히 그녀의 국부에
그려진 것은 자세히는 보이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검은 빛깔을 한 문신이었다. 모용준이 그녀의 국부 쪽으로 던진 시선을 오랫동안 거두지 못한 채 넋을 놓았다. 그녀가 눈치를 채고는 좀더 가까이 모용준에게로 걸어왔다.
국부에 새겨진 것은 술병 같았다.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는 술냄새에 쏠리듯 손을 뻗어 그 술병으로 짐작되는 것을 잡으려 했다. 그녀가 얼른 모용준의 손을 뿌리치며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죠?"
모용준이 그녀의 얼굴과 국부를 번갈아 살피기 시작했다. 방금 전 그녀가 말한 것에 한 가지 떠오른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이때서야 모용준은 그녀의 국부에 새겨진 형상을 정확히 보게 되었다. 바로 수많은 남녀가 한데 모여 있는 문신이었다. 그 그림을 이루고 있는 선들은 아주 정교하면서도 환상적인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용준이 신기한 눈으로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공자님은 매일 마주앉은 채로 저를 괴롭혔어요. 그때마다 저의 그곳은 축축히 젖어 샘이라도 이를 듯하였지만 공자님은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어요. 전 오늘을 기다렸는지도 몰라요."
정충이 한쪽에 대고 소리치자 자그마하게 생긴 계집애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너의 그 음생산(陰生散)을 가져다 먹이거라!"
계집은 꽤나 아름답게 생겼는데 깨끗한 처녀인 듯했다. 그런데 이같은 청초한 계집에게 무슨 음생산이란 약이 있다는 말인가? 모용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그 계집애를 주시했다.
계집이 잠시 망설이자 정충이 다그쳤다.
"다시 말해야 알겠느냐?"
계집이 작은 얼굴을 힘없이 숙이고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몸을 숙여 그 약을 꺼내려고 했다. 정충이 냉랭한 어조로 계집에게 덧붙였다.
"부끄러워할 것 없다. 모용 공자가 얼마나 많은 여인들을 다루어 냈는지 넌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거다."
계집이 하반신을 굽혀 국부에서 작은 알약을 꺼냈다. 정충의 손바닥 위에 그 알약을 건네주며 계집이 홍조를 띤 얼굴을 숙였다.
"됐다. 모용 공자는 필시 너를 잊지 않을 거다."
갑자기 계집이 꿇어앉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정충에게 간청했다.
"모용 공자님을 꼭 한 번만 노리개로 삼으세요!"
그러자 정충이 비꼬듯 계집을 쏘아보았다.
"모용 공자는 존귀한 분이신데 너까지 수청을 들게 할 것 같으냐?"
그녀가 말을 끝내자마자 손을 날려 계집의 머리를 강타했다.
"아악!"
계집의 머리와 눈에서 피가 ㅆ구쳤다. 옆으로 쓰러졌던 계집이 기다시피 하며 애원을 했다.
"절 죽여 주세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충이 왜 계집의 목숨을 이처럼 쉽게 빼앗으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충이 살며시 모용준 곁으로 다가오며 속삭였다.
"공자님, 이건 약왕문의 진귀한 약 중 하나인데 음생산이라 부르지요. 이 약은 열여덟 살 되는 계집애가 흘리는 월경을 백 가지 약초와 섞어 환을 지은 것입니다. 계집애들이 하루 동안 음기를 모았다가는 다음날 배출하곤 하는데 음기가 이 환약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사내에겐 그만이랍니다. 사내가 이 약을 먹게 되면 한평생 자기가 탐내던 여인만을 기억할 수 있게 되지요."
모용준은 기겁을 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약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를 떠나서 정충이란 한낱 여인에 불과한 상대에게 이같은 수모를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난 먹지 않겠다!"
그러자 정충이 아주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어서 드세요. 이걸 드시면 당신은 오로지 나만을 기억하게 될 거예요……."
모용준이 그녀를 뿌리쳤다. 그녀가 모용준의 겨드랑이를 끼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눌렀다. 그리곤 빠른 동작으로 모용준의 입 속에 약을 밀어 넣었다. 목구멍에 통증을 느끼며 모용준은 어쩔 수 없이 환약을 받아삼키고 말았다.
그 환약의 효과가 곧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는데 차츰 뱃속에서 불이 붙는 듯하더니 눈앞으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눈앞에 있는 정충이 기막힌 미인으로 비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정충을 만져 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뻗어도 정충이 잡히지 않았다.
"명기!"
모용준이 잔뜩 풀린 눈으로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그래요. 제가 명기예요."
모용준은 어느새 명기와 나누었던 예전의 시간으로 돌아가려 했다.
"명기야, 가서 바둑판을 가져오렴?"
정충이 곧 바둑판을 대령했다. 받침대가 옥으로 되어 있는 바둑판이었다.
"그것 참 훌륭한 옥이로구나!"
명기가 한껏 웃음을 터뜨리며 모용준의 어깨로 얼굴을 묻었다. 곧 그녀의 부름에 따라 풍막 밖에 있던 한 계집이 두 개의 옥으로 된 술잔을 쟁반에 담아 들고 들어왔다. 모용준이 다시 술잔을 보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곳엔 훌륭한 물건들이 많군!"
그녀는 투명한 옥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피처럼 붉고 진한 포도주가 잔에 가득 넘쳤다.
"술마시기 시합을 해요. 지는 사람이 벌주로 한 잔을 더 마시는 겁니다."
"허허, 그건 내가 그대에게 가르친 것인데 다시 내게 쓰려는 건가?"
모용준은 명기와 바둑을 두기 전 지금처럼 술을 놓고 내기를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모용준의 가슴은 새롭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알몸인 그녀를 마주하는 모용준의 시선은 종잡을 수 없이 오락가락했다.
"공자님, 제가 당신과 바둑을 둘 때는 이처럼 알몸으로 마주하지는 않았지요. 공자님은 한평생 잊지 못할 시합을 하게 될 겁니다."
"그대가 날 이리로 오게 한 것만으로도 난 한평생 잊지 못할 것이야."
정충이 고개를 슬쩍 돌리며 야릇한 미소를 보였다. 모용준이 손을 들어 바둑알 하나를 집었다. 그 바둑알은 새카만 것이었는데 제법 무거웠다. 모용준이 바둑알을 성목(星目)에 딱 하고 놓았다. 모용준은 바둑을 둘 때면 다른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무리 눈앞의 명기가 갖은 교태를 부린다 해도 모용준은 눈 하나 꿈적하지 않았다. 모용준은 명기 앞에서만큼은 어엿한 공자였다. 다만 지하 궁전에서만 제왕 노릇을 했던 것이다.
정충이 입을 열었다.
"공자님, 당신은 일찍이 저에게 은혜를 베푼 분이에요. 당신에게 기회를 주겠는데 만일 당신이 절 이기게 되면 당신의 일행을 돌려보내 드리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진다면 끝장이에요. 당신은 살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두 사람의 바둑을 두는 속도가 차츰 빨라졌다. 모용준의 눈빛이 서서히 변해 갔다. 그는 지금 몹시 애를 먹고 있는 상태였다. 한 절반쯤 바둑판을 채웠을 때 다시 속도가 주춤해졌다. 모용준이 신중하게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의 바둑 솜씨에 모용준은 속으로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이 여인은 내 앞에서 자기의 실력을 감추고 있었단 말인가? 나에게 그동안 일부러 져 주다가 오늘에서야 진짜 실력을 보이려는 것이리라.'
모용준은 정신을 바싹 차리려고 했다. 아직 두 사람 중 누구도 완벽한 승리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모용준이 바둑알 하나하나에 신경을 집중하자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셔 버렸다.
"음."
모용준은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온몸에 퍼져 있던 기를 끌어 모았다. 막상막하의 승부가 이어졌다. 그런데 그같은 팽팽한 긴장을 깬 것은 정충이었다.
"이리 오너라!"
그녀가 계집을 불렀다. 아까 제 가랑이 속에서 환약을 꺼냈던 계집이었다.
"이 공자님께 풍류를 알려 드려야겠다. 나는 지금 바쁘니 네가 대신 공자님과 어울리거라!"
계집이 고개를 들어 모용준을 바라보았다. 계집 역시도 모용준에 대한 명성은 이미 알고 있는 터였다. 비록 볼품없는 난쟁이에 불과하지만 강남의 모용세가 공자님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녀가 곧 머리를 끄덕이며 정충의 분부에 따르겠다고 했다.
모용준은 계집의 눈빛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바둑에만 몰두해 계집이 천천히 무릎을 꿇고는 그에게로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계집이 모용준의 몸을 핥기 시작했다.
"호호호, 그렇게 해서야 되겠느냐?"
정충이 간드러진 웃음을 뿌리더니 곧 정색하며 계집에게 일렀다.
"값지고 기름진 물고기도 비늘을 벗겨야 먹을 수 있는 법. 아무리 향기롭고 아름다운 석류도 그 속을 열어 봐야 비로소 열매를 얻는 법이다."
그 말에 계집이 일어서더니 옷을 벗었다. 모용준의 눈앞에는 매끄러운 윤기를 자아내고 있는 여체가 둘씩이나 놓여져 있는 판이었다.
"그대의 바둑 솜씨는 안 되겠어. 그만 돌을 놓지?"
모용준이 애써 눈앞의 어른거림을 부정하려고 딴전을 피웠다. 그러나 정충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손을 내저었다. 계집이 다시 무릎을 꿇고는 모용준에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모용준의 눈동자 에 계집의 목덜미에 난 부드러운 솜털이 들어와 박혔다. 계집의 입술 끝이 몸에 닿자 모용준의 가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다시 정충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 왔다.
"당신은 수많은 여인들을 다루어 왔을 텐데 주저하지는 않겠지요?"
"그렇다!"
모용준은 자신의 말에 스스.로가 꿈틀 놀라고 말았다. 그는 자신을 쉽게 조정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어 갔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계집을 향해 말했다.
"넌 더욱 힘을 써야 할 것이다."
계집이 혼자만의 묘한 얼굴을 지었다.
'내가 장문인의 뜻을 받들지 못하면 약왕문의 징벌을 면하지 못 하겠지?'
계집의 입술은 더욱 집요하게 움직였다. 모용준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자극에 몸을 비비 틀며 신음하기 시작했다.
쾌감에 몸을 내맡기게 된 모용준은 더는 바둑판에 정신을 모을 수가 없었다. 바둑보다는 지금 자신의 몸에서 일기 시작한 불을 어서 꺼야겠다는 마음에 확확 가슴이 달아올랐다. 모용준이 일그러진 얼굴을 들어 정충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날 이기고 싶다면 내가 져줄 수도 있다. 그러니 어서 이 계집을 물리쳐라!"
그녀가 대답 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모용준이 발끈 달아 올라 바둑돌을 집어 던졌다.
"날 이렇게 시달리게 할 바엔 아예 졌다고 소리치겠다!"
"당신이 이러시면 당신의 부하들은 살아 남을 수 없어요."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모용준은 바둑판에 시선을 집중할 수 없어 몸을 연신 뒤척였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
"난 사내들이 한번 자리에 앉으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고 한 말을 믿지 않기로 했지요. 오늘 보니까 천하의 모용 공자도 별 수가 없군요."
모용준은 진퇴양난 속에 갇히고 말았다. 어찌 계집의 집요한 손길을 받으며 제정신으로 바둑을 둘 수가 있단 말인가? 인간으로 아니 사내로서는 견뎌 내기 힘든 고초였다.
"이건 공정하지가 못한 승부야!"
모용준이 목청을 높였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계집 역시도 자신의 일에 열중이었다. 급기야는 모용준의 깊은 곳을 향해 입술을 움직이려 했다. 모용준이 완강한 자세로 음탕한 그물에 걸려들지 않자 다시 손을 들어 명령했다.
"이리 오너라!"
그러자 다른 계집이 나타났다.
"넌 지금부터 나를 어루만지거라. 그래야 공평할 테니까."
그녀의 명령에 계집이 정충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싱싱한 잎에 앉아 갉아대는 송충이처럼 계집은 몸을 있는 대로 구부렸다가 폈다 하면서 정충의 몸을 혀로 핥았다. 정충은 조금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모용준의 바둑은 점점 수세에 몰렸다.
"이건 공평하지가 못해!"
바둑돌을 집으려다 손을 부들부들 떨고 마는 모용준을 본 그녀가 계집을 물리쳤다. 그리곤 이번엔 사내를 불러들였다. 사내가 안으로 들어서며 휘둥그래진 눈으로 살피더니 곧 몸을 돌리려 했다.
"게 섰지 못할까?"
정충의 앙칼진 목소리가 사내의 목덜미를 거머쥐었다.
"그댄 날 싫어하는가?"
정충의 독기 어린 물음에 사내가 벌벌 떨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렇다면 어서 내게 입을 맞춰라."
사내는 약왕문 분단(分壇)의 단주로 정충을 두려워하고 있는 반면 경모하고 있기도 했다.
"녹 단주(鹿壇主), 그대는 평소에 나를 좋아하지 않았는가?"
정충의 물음에 사내가 별안간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전 장문님을 지금껏 공경해 왔습니다."
"호호호, 바보 같으니. 바로 그 때문에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이라고."
사내는 내심 기뻐하면서도 지금의 상황에 매우 당황하고 있는 중이었다. 계집이 모용준에게 해괴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판국에 어찌 자신이 또 정충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곳에서 어찌……."
녹 단주가 망설이자 정충이 따끔하게 꾸짖었다.
"하라면 하는 것이지 웬 말이 그리 많소?"
잠시 우물쭈물대던 녹 단주가 정충의 하반신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정충의 입술 사이에서 신음이 흘러 나왔다. 여인의 교성이 터지자 모용준의 가슴엔 더욱 큰 불덩이가 내려앉는 듯했다.
'저 여인의 교성에 삭신이 다 녹아 드는 것 같구나. 이제 바둑을 더는 둘 수가 없다.'
그러나 정충은 몸을 외로 꼬면서도 모용준에게 다그쳤다.
"자, 공자님이 두실 차례예요."
모용준이 급하게 바둑알을 집어 들었다. 모용준의 손은 심하게 떨고 있어 바둑알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겨우 바둑알을 내려놓자 이번엔 정충이 두었다. 모용준의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자신은 계집의 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정충은 여전히 정확 한 수로 맞서고 있는 게 아닌가. 몇 번의 소가 오고 갔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용준은 더욱 위기에 몰려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졌소. 난 수많은 여인들과 상대를 해 보았지만 그대와 같은 수단을 부리는 여인은 처음이오. 난 끝내 그대의 손에 죽을 수 밖에 없는 것 같으니 어서……."
정충이 모용준에게로 가까이 왔다. 그녀는 대답 대신 모용준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모용준은 불에 덴 듯 심하게 몸을 움츠렸다. 마치 흡혈박쥐의 이빨이라도 달린 듯 그녀의 손길이 몸에 닿자 온몸의 피가 빠져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제게 복종을 하시겠어요?"
그녀가 속삭이듯 혹은 비웃듯 모용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내 복종하지. 물론이고말고."
모용준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려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손가락 끝에는 정욕에 굶주린 몰골로 몸을 떨고 있는 한 사내가 걸려 있었다. 바로 모용준이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당신을 죽여야겠어요!"
정충이 사람을 시켜 모용세가의 사람들을 끌어냈다. 지청과 주정 그리고 목우 등이 힘없이 모습을 드러냈라. 모용준이 이들을 향해 무기력한 시선을 던졌다. 이들의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이들을 끌고 들어온 한 건장한 사내가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목소리로 쩌렁쩌렁 외쳐 댔다.
"이자들이 방 단주(方壇主)를 죽이고 또 그의 사람들을 죽이려 했는데 형제들이 왜 가만있겠습니까?"
그자가 정충에게 알리자 그녀가 슬쩍 입술을 틀어 미소로 답했다. 그녀가 지청에게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당신은 훌륭한 사내예요. 우리 약왕문의 단주 노릇을 할 의향은 없나요?"
그러자 지청이 의외로 순순히 그녀의 말에 복종하려 했다.
"할 생각이 있습니다."
지청의 반응에 게름칙한 기운을 발견했는지 그녀가 눈빛이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의 대답은 너무 빨라 내가 믿을 수가 없단 말이에요."
시선을 지청에게서 돌린 그녀가 나머지 사람들에게 알렸다.
"난 당신들의 공자와 내기를 했는데 그 승패에 따라 당신들의 목숨은 좌지우지될 것이오."
사람들은 그 결과에 대해 몹시 궁금해 했다. 지청이 탄식하며 나섰다.
"그대가 죽일 생각이면 그렇게 하라구. 난 공자님과 함께 죽기를 원해."
"호호호, 내가 보기엔 모두 투항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번엔 목우가 눈에 불을 켜며 잡아먹을 듯 정충 앞으로 나섰다.
"내가 왜 그대에게 무릎을 꿇는단 말인가?"
"정 그렇다면 날 원망하지 마오."
정충이 곧 사람들을 시켜 이들의 손과 발을 묶어 버렸다.
"너희들은 곧 굴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 있는 표정을 교환했다. 한 사내가 먼저 주정의 몸을 천으로 닦아 내기 시작했다. 그 천은 점액질에 담갔다 꺼낸 듯 끈적거렸다. 사내가 주장의 몸에 그것을 붙였다가는 다시 힘껏 뜯어 냈다.
"으악!"
주정이 숨넘어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뒤로 꺾고 말았다. 천이 살가죽을 함께 뜯어가 그곳에서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졌다.
"주정, 네 놈이 우리 약왕문 사람을 해쳤으니 그 대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정충이 이를 갈며 사내에게 다시 눈짓을 보냈다. 사내가 천을 들고는 주정에게 접근했다.
"안돼!"
주정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이를 지켜 보고 있는 모용세가의 사람들의 눈에도 두려움이 가득했다.
정충이 모용준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공자님, 지난날의 정분을 생각하여 당신에게는 어떠한 형벌도 가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약왕문 문하에 있기를 원한다면 백초단(百草丹) 한 알씩을 먹인 뒤 자유롭게 풀어 주겠어요."
"닥치거라! 내 곧 네 년을 죽여 버릴 것이다!"
모용준의 외침에 정충이 씁쓸히 웃었다.
"꿈같은 생각을 하고 있군요. 그러기 전에 먼저 공자님이 죽게 될 텐데요."
정충이 손을 들어 지청에게 다시 형벌을 가하도록 일렀다. 그녀가 지청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공자님과 형님 동생 한다는 것을 잘 알아요. 정말 함께 죽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아까운 목숨을 버리기보다는 우리 약왕문으로 들어오는 게 어때요?"
지청이 의외로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정충에게 대답했다.
"그대는 지금 공연한 수고를 하고 있군."
"그런가요? 할 수 없군요. 당신들을 먼저 죽여 주는 수밖에."
절굿공이를 꺼내 든 정충이 매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절굿공이는 괴상하게 생겨 먹었는데 머리 부분에 뾰족한 돌기가 몇 개 있어 칼이나 마찬가지였다. 뒤쪽에는 둥근 테를 씌워 묵직하게 느껴졌다.
정충이 절굿공이를 지청을 향해 어지럽게 그어댔다. 피하고 말고 할 사이가 없었다. 그녀의 절굿공이가 지청의 몸에 닿자마자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알몸뚱이가 돼 버렸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절굿공이가 다시 지청의 몸에 소용돌이를 남기며 스쳤다. 지청의 발악전기(拔岳顚氣) 초수로도 그녀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지청의 살갗은 절굿공이의 돌기에 파헤쳐졌다.
"당신은 공자를 위해 훌륭한 계략을 일조했다고 아는데 지금은 어찌 된 일이죠?"
지청은 상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시선을 꽂았다. 상처에서 피가 하염없이 흘렀다. 크게 분노한 것은 모용준이었다.
"더러운 년, 사람을 죽이고 싶거든 어서 나를 죽이거라!"
"걱정 말아요. 이 사람들을 모두 없앤 다음 당신을 천천히 죽일 생각이니까."
그녀가 다시 절굿공이로 지청의 몸을 마구 헤쳤다.
"어서 말해 봐요. 나에게도 말해 줄 훌륭한 계략이 없나요?"
이렇게 소리친 그녀가 나머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를 갈았다.
"만약에 그럴 수 없다면 당신들마저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모용준이 곤혹스런 얼굴로 이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만약에 약왕문 무리들에게 참패를 당한다면 모용세가는 큰 수치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이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고 꿈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대가 우리 공자님을 원한다면 솔직히 말하라!"
이렇게 말하고 나선 것은 지청이었다. 그는 언제나 명석한 머리를 지녔기에 사태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차라리 공자님의 품에 안겨 애교를 떨어 보라고!"
지청이 마저 말을 잇자 정충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뭐라고?"
갑자기 지청에게로 달려든 그녀가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내가 난쟁이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멋진 사내를 좋아하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대는 분명 공자님을 좋아하고 있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지청이 입을 열었다. 정충이 지청을 풀어 주며 힘없이 명령했다.
"이들을 다시 끌고 가거라!"
사내들이 이들을 끌고는 다시 나갔다.
한동안 뒷짐을 풀지 않은 자세로 모용준 앞을 서성이던 그녀가 턱을 괴었다. 모용준에게 할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선뜻 꺼내지 않는 것이 꽤나 망설이고 있음을 알게 했다.
그녀가 비로소 모용준을 주시하며 입을 메었다.
"그렇게 옷을 벗고 있으니 더욱 보기가 좋군요."
그러나 정충의 눈시울이 갑자기 붉어지면서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모용준이 비웃었다.
"날 미워하면서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무언가?"
"상관하지 말아요."
그녀는 예전의 명기를 그리워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용준이 슬쩍 그녀의 심중을 건드려 보았다.
"그대는 명기일 뿐 다른 여인의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
정충이 흐느끼며 모용준의 품으로 쓰러졌다. 모용준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는 갑자기 생겨난 애정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대는 다시 명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해. 지금 쓰고 있는 탈은 그대에게 어울리지 않아."
모용준이 말을 할 때마다 그녀의 머리칼이 조용히 쓸렸다. 그녀도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더욱 모용준의 품안으로 들어오며 뜨겁게 숨을 내뿜었다.
"그댄 어떻게 정충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나?"
그녀가 조용히 모용준의 가슴에 기대어 자신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저의 아버지께서는 약왕문의 장문인 노릇을 하셨답니다. 제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는 끊임없이 각혈하게 하는 독약을 만드셨는데 정정아(丁丁兒)라 불렀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면 정용(丁龍)이라 부르고 딸이 태어나면 정충이라 부르기로 하셨대요. 그래서 제가……."
모용준이 깊은 숨을 토했다. 그녀가 다시 모용준의 가슴을 토닥였다.
"공자님, 그런데 왜 당신은 저에게 모질게 대하셨나요?"
모용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렸다. 정충은 이미 그가 지하궁전을 거느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그 궁전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에 대해서도.
"난 모용세가에서는 훌륭한 공자였지만 지하궁전에서는 하나의 악인으로 살아왔지."
"공자님, 당신은 강호에 있는 그 어떤 호수(好手)에 비해 무공이 뒤떨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왜 당신은 그런 호수들에게 멸시를 당하는 거죠?"
모용준이 웃었다.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 놓고 싶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정충이 알고 싶어하는 부분은 더욱 그러했다.
"당신은 제게 너무 무정한 사내였어요. 어느 날인가 머리에 꽃을 꽂고 당신 앞에 나섰지만 여전히 무심한 시선을 줄 뿐이었어요. 전 그때부터 당신에 대한 원망의 칼날을 세우게 되었죠."
갑자기 그녀가 모용준의 가슴팍을 물어뜯었다. 모용준의 가슴에서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당신은 제가 그토록 싫었나요? 당신이 제게 얻어 준 그 사내를 어떻게 했는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불현 그녀가 한 사내에게 시집을 갔었다는 사실이 상기되었다. 모용준이 가슴으로부터 이는 아픔을 삭이며 눈으로 물었다.
"혼례를 치른 그날 밤 전 그 도련님을 동방(洞房)에 불러들였어요. 그리곤 사내에게 제가 이렇게 말했죠. 저를 이겨야만 한평생 순종하며 옷도 벗겠노라고. 하지만 반대로 도련님이 지면 제 말을 들어야 한다고요. 호호호!"
모용준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어떻게 되었나?"
정충이 입을 다물자 모용준이 다급하게 물었다.
"도련님이 그대를 이겼나?"
정충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럼 그대가 이겼나?"
또 정충이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냔 말이다?"
모용준의 눈빛이 요동을 치듯 심하게 떨렸다. 그렇다면 결과는 오직 하나, 그 사내는 죽음을 당한 게 분명했다.
"호, 혹시 그대가……."
정충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 사내를 죽이지 않고서야 어찌 혼자의 몸을 다시 찾겠어요?"
두 사람 사이에 질기고도 함부로 내몰 수 없을 것 같은 침묵이 자리했다. 모용준은 정충의 마음을 훔쳐보고는 치를 떨었다. 그녀가 쉽게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모용준은 속으로 자신이 모용세가의 마지막 사람이 될 거라는 것도 새겼다.
"당신은 지금 몹시 떨고 있군요. 왜 제가 당신을 죽일까 봐 두려우신가요? 하지만 전 당신을 죽이지 않을 거예요. 당장 강호의 영웅들에게 당신과 내가 결혼을 한다고 알릴 작정이에요."
"뭣이라고!"
"천하의 이름을 날리던 모용 공자는 사라지고 힘없고 유순한 한 가정의 지아비와 어버이란 이름으로 남겨질 뿐이에요. 사람들은 그때 가서 당신을 불쌍한 눈으로 바라볼 테죠. 아니면 내가 모용씨의 이름을 등에 엎고 사람들을 호령하게 될지도 몰라요. 그리하여 난 약왕문의 일을 더 넓게 펼칠 수도 있겠죠."
그녀의 음모는 무서웠다. 모용세가의 최후뿐만 아니라 모용준 자신에게도 그것은 최악의 형벌이었다. 또한 대연국의 회복은 더 더욱 어려워지는 게 아닌가. 모용준이 그녀를 향해 일격을 가하려 고 했다.
"닥치거라!"
그러나 그녀가 얼른 모용준의 혈도를 눌러 놓았다. 모용준은 꼼짝없이 그녀에게 사로잡힌 꼴이 되었다. 모용준이 분노를 씹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모용준이 태도를 바꾼 것은 조금 후였다. 한참을 눈을 감은 채 골몰하던 그가 말을 건넸다.
"난 지금까지 많은 여인과 상대를 해왔지만 불행히도 후사가 없었지. 만약에 그대가 나의 아들을 잉태해 줄 수만 있다면 난 그대를 정식으로 대연국 황후에 앉히겠어."
모용준의 뜻밖의 제의에 그녀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12장 반벽산장의 혈투
반벽산장(半壁山莊)은 무림에서 아주 유명한 곳이었다. 그래서 강릉부(江陵府)에 이르러 반벽산장의 주인인 유기를 배알하지 않고서는 발을 붙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강릉부는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곳으로 이곳에서는 세상에 둘도 없는 부호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기도 했다. 대문 앞에 돌사자를 위풍 있게 세워 둔 집들이 수없이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강릉부의 부호 가운데서도 유기는 그중 으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기의 장원에는 새 주인이 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옥총이었다. 이 옥총은 장원에 들어온 후 유기와 의형제를 맺고 서로 우의를 다졌다.
어느 날 반벽산장 병마들은 해불개와 결사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해불개가 그날 이후로는 바다에 빠진 돌처럼 종무소식이었다. 그가 반벽산장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품고 있지를 않은 듯이 도통 그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반벽산장에서는 수많은 호환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름이 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젊은 협객들인 직검(直劍) 마옥(,騎鈺)과 그의 아내 손불이(孫不二)가 그중 하나였다. 또한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십팔검객(十八劍客)이 있고 경도(京都)에서 유명한 다리도적 제일사(齋一思)도 참가했다. 이들은 강남 혹도의 총두목인 해불개와 싸우기 위해 모여든 길이었다.
반벽산장은 산과 물을 끼고 있는 형상이라 매우 경치가 아름다웠다. 평소에도 강호 사람들이 부러워했는데 그렇기에 더욱 부유한 것으로 여겼다. 한 나라와도 맞먹을 정도로 아름답고 값진 산장을 두고 사람들은 부러움의 눈길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 산장을 함부로 건드리려는 자도 없었다. 그런데 반벽산장과 강남 흑도의 총두목 해불개가 자웅을 겨루게 되어 위기를 막게 된 것이다.
겨울철로 들어서자 반벽산장에서는 무림에 서신을 돌려 수많은 무림 호수들을 청하였으며 이와 함께 해불개도 청했었다. 강호에서의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태호를 벗어나 강남에까지 이른 왕중양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그는 시원한 물줄기를 굽어보며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둘째와 셋째에게 부담거리로만 머물렀었으나 이젠 그렇지가 않다. 나의 선천신공이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지는 알 수 없으나 다시 기력을 회복한 것만 사실이다. 그러니 반벽산장과 강남 흑도간의 싸움이나 구경하면서 원기를 더 다져야겠다.'
그가 웬 사람에게 반벽산장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러자 그가 뒤로 넘어갈 듯 크게 놀라며 손을 저어댔다.
"당신이 그곳에 가서 뭘 하려는 거요?"
왕중양이 웃으며 대답했다.
"듣자하니까 반벽산장에서 무림에 청첩을 돌렸다고 합디다. 그러니 그곳은 곧 흥청거릴 테고, 그래서 구경을 가는 길이오."
왕중양의 말에 대경실색한 그가 목소리를 죽였다.
"쉿, 내가 보기엔 당신은 얌전한 선비 같은데 그런 곳엔 아예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많은 강호 사람들이 그곳에서 싸움을 벌인다고 하던데 괜히 휩쓸려 아까운 목숨 버리지 마시오."
왕중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껄껄 웃었다. 그가 다시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왕중양의 어깨를 짚었다.
"소원이 정 그렇다면 가 보시오만 후회할 것이오."
왕중양은 얼른 일러주지 않는 그를 설득해 겨우 반벽산장으로 가는 길을 알아냈다.
그 길로 걸음을 재촉하여 반벽산장 앞에 도착한 왕중양은 주의깊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산장은 작은 강 건너편에 있었는데 나룻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나룻배를 모는 사공은 외눈박이였다. 그는 삿대를 쓰지 않고 강을 가로질러 매어 둔 밧줄을 당겨 배를 움직였다. 왕중양말고도 배 위에는 세 사람이 더 있었다. 그중 구레나룻을 텁수룩하게 기른 사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옷차림으로 보아 분명 중원 사람이 아닌 듯싶었기에 얼른 눈에 들어왔다. 그는 뱃머리에 앉아 배
를 빨리 움직이라고 연신 호통을 쳐댔다. 다른 한 사람을 비교적 말끔하게 차려 입은 공자였는데 손에는 온통 순금으로 만들어진 부채를 들고 있었다. 부채의 중간에는 누공(누空)으로 새겨진 불조도겁도(佛祖渡劫圖)가 있기도 했다. 그 불조의 겁탈을 그린 조각은 모두 색에 대한 것들이었다. 또 한 사람은 여인으로 줄곧 유유히 흐르는 강물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들 셋은 일행으로 한결같이 배가 어서 떠나 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들을 보자 무공이 보통은 넘을 것이라 왕중양은 상상했다. 구레나룻이 난 사내는 계속 마뜩찮은 눈길을 부라리며 어서 배를 띄우라고 사공을 닦달했다. 사공이 참다못해 한마디했다.
"손님께선 반벽산장에 가실 의양이면 그리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요. 사람들이 더 오른 다음 떠날 테니 그리 아시오."
구레나룻을 기른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사공을 잡아먹을 듯 으르렁댔다.
"허튼 수작 말어. 어서 배를 띄우지 못하겠어?"
그가 사공의 멱살을 부여잡더니 번쩍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배를 띄울 테야 말 테야?"
사공이 말을 듣지 않으면 배 밖으로 던져 버릴 태세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공자가 허허 웃었다.
"불조께서 요구하시는 뱃사공 역시 이런 방법으로 배를 모는 사람은 아닐진대, 아예 그 놈의 팔다리를 작신 분질러 강 속에 집어 던지시오. 그러면 그 놈도 겁탈을 한 번 겪은 셈이 되니까."
사공이 목놓아 울부짖었다.
"제발 집어 던지지 마시오. 제가 배를 띄우겠소이다!"
겨우 사내에게 풀려난 사공이 잔뜩 주눅이 든 몰골로 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사내가 사공을 윽박지르며 나섰다.
"왜 이렇게 꾸물거려? 내가 당길 테니 저리 비켜!"
그가 사공에게로 다가가 밧줄을 빼앗더니 힘껏 당겼다. 배는 마치 날개라도 단 듯 강 건너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윽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강기슭에 이르렀다. 사내가 미친 듯이 웃어젖히며 다시 배를 건너온 쪽을 향해 밀었다. 배는 또 날개를 달아 눈 깜짝할 사이에 강을 건너갔다.
"무심(無心) 공자, 갑시다!"
사내가 몸을 솟구치더니 작은 언덕 위로 사뿐히 올라섰다. 공자도 그를 따라 몸을 날렸는데 마치 바람에 몸을 준 낙엽처럼 소리조차 내지를 않았다. 그런데 혼자 남았던 여인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손을 날려 가늘고 예리한 침을 뿌렸다. 그 침이 언덕 위에 있는 한 바위에 가 꽂혔다. 자세히 보니 침에는 가느다란 줄이 이어져 있었는데 비단인지 쇠붙이를 갈아서 만든 것인지 햇빛에 반짝였다. 여인이 곧 몸을 훌쩍 띄우더니 그 줄을 타고
언덕 위까지 날아갔다. 이들이 언덕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낀 왕중양이 얼른 시선을 돌렸다. 이들은 분명 엄청난 고수들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왕중양은 곧 반벽산장이 시끄러워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왕중양이 얼빠진 사람처럼 그때까지 서 있던 사공에게 뱃삯을 던져 주었다.
언덕 위에서 왕중양의 거동을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던 구레나룻의 사내가 공자에게 중얼거렸다.
"무심 공자, 정말 모를 일이라니까. 반벽산장으로 오는 사람들은 모두 무공을 지닌 사람들인데 저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니 한심하기 그지없어. 무공도 없어 보이는데 이곳엔 무슨 일로 왔을까?" 무심이 사내가 가리키는 쪽으로 눈길을 주다가 웃었다.
"하하, 어쩌면 자기의 실력을 숨기려는 진정한 호수일는지도 모르지."
여인만이 무표정한 얼굴로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곧 언덕 위로 오른 그들은 왕중양과 더불어 반벽산장 안으로 들어섰다.
반벽산장은 과연 훌륭한 곳이었다. 산장에 들어서니 곳곳에 울창한 나무숲이며 어느 곳이 중심이 되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고도 아름다웠다. 이들이 산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의 장 객(莊客)을 만나게 되었다. 그중 예순 살 안팎으로 보이는 늙은이가 인사를 하며 말을 건네 왔다.
"여러분들이 산장에 오신 것을 장주께서는 환영하십니다. 오신 분들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무심이 미소를 띄운 얼굴로 약간 허리를 굽혔다. 그리곤 일일이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이분은 몽골의 으뜸가는 용사인 챵바이고 이분은 귀낭자(鬼娘子)라 부르며 나는 무심이라 한다네."
두 장객은 이 세 사람의 명성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황급히 세 사람에게 읍을 하면서 입을 모았다.
"반갑소이다. 장주께선 다른 일 때문에 영접하지 못함을 이해해 주십시오."
챵바가 빈정거렸다.
"무심 공자, 장주가 일이 있어 영접하러 나오지 못했다는데, 그 대신 우리에게 욕먹는 걸 각오해야 될걸."
무심은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강호의 예절로 한 말일 뿐이라구."
챵바가 알듯 모를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산장의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장객들이 이들을 경의청(敬義廳)으로 안내했다. 경의청에 이르니 그 옥총이란 사람이 웃는 얼굴로 환영해 주었다. 그는 네 사람에게 읍을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무심 공자와 몇몇 분이 함께 오신다는 말을 듣고 아주 기뻤습니다."
챵바가 또 빈정대는 투로 무심을 힐끔 쳐다보았다.
"저분이 내가 찾아오는 걸 원했다고 말한 것 같은데 맞소?"
무심이 쓴웃음을 지으며 챵바를 책망하듯 말했다.
"중원 사람들은 말할 때 원하지 않으면서도 원한다고 하는데 당신은 그걸 믿나?"
"내가 왜 믿지 않겠소? 저 사람은 진정 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심은 챵바가 중원 사람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혼자 쓴맛을 마셨다.
옥총이 이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여러분께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장주님과 해불개 간의 일전이 벌어질 테니 많은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그래, 그래야지."
무심이 건성으로 대꾸를 했다.
그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큰소리가 났다. 무심 공자의 일행은 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왔어요. 왔습니다요!"
누군가 이렇게 외치자 옥총의 낯색이 달라지며 급히 일어섰다.
"여러분께선 잠깐 앉아 계십시오. 제가 나가 보고 오겠소이다."
"좋소. 우린 상관하지 마시게."
기분이 약간 상한 무심이 손을 들어 알겠다고 했다.
밖은 어수한 것이 전쟁이라도 한바탕 치를 조짐이 역력했다. 바로 해불개와 그의 일행이 당도한 것이었다. 산장 밖 강변에 배 몇 척이 들어왔는데 그 위에는 해불개 일행들이 앉아 있었다. 배에서 내린 이들은 들소 떼를 몰아붙이듯 산장을 향해 우르르 달려오기 시작했다. 해불개는 또한 각오를 다지듯 자기네들이 타고 온 배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도록 명령했다.
"이 해불개와 형제들은 반벽산장에 복수하러 왔다. 복수를 하지 않고서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해불개가 선창을 하자 모두들 하늘을 찌를 듯한 고함을 내질렀다. 그중 한사람이 칼을 뽑아 하늘로 치켜 올렸다.
"불개 형, 걱정 마시오. 반벽산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우리 강남 흑도와는 적수가 못 될 것이오."
다시 함성을 지른 이들은 나머지 배에도 불을 지르고는 산장을 향해 물밀듯이 밀려 올라갔다.
산장 앞에 이르자 한 사내가 안에 대고 으름장을 놓았다.
"반벽산장 놈들은 듣거라! 네 놈들이 감히 우리 강남의 무림 호걸들에게 청첩을 돌리다니 담도 크구나. 지금 강남 무림의 맹주 해불개 형님께서 너희들을 다스리려 오셨으니 각오하거라!"
기다렸다는 듯이 산장으로부터 사람들이 떼로 몰려나왔다. 그 숫자 역시 만만하지가 않았다. 이들 중에는 강남 백도(百道)의 영웅호걸이 끼여 있는가 하면 외다리 도적과 왕중양의 일행까지 뒤섞 여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장주인 유기 뒤에 떠억 버티고 섰다.
유기가 해불개를 노려보았다.
"해불개, 전번에 임안의 반화대회에서 난 네 놈에게 모욕을 받았다. 오늘 이렇게 몇몇 형제들을 청해 왔는데 그때 진 빛을 갚아야겠다!"
해불개는 아예 유기를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로 이죽거렸다.
"유기, 네 놈이 죽을 때가 가까워 오니까 발악을 하는구나. 오늘은 끝장을 내주마!"
"해불개, 강남의 형제들이 네 놈을 큰형님이라 부르니까 넌 스스로가 대단한 놈으로 아는 모양이로구나?"
"언제 내가 큰형님이라 불러 달라고 했더냐? 흐흐, 네 놈은 나 보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왜 형님이라 불렀더냐? 나이를 먹었어도 용기가 없으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뭐냐?"
유기와 해불개 사이에 잠시 살기 어린 눈빛들이 교차했다. 그러더니 유기가 뒤로 한걸음씩 물러섰다. 대신 앞으로 나선 것은 반벽산장 싸움꾼 외다리 도적 제일사였다. 그가 해불개를 씹어먹을 듯 사납게 노려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해불개, 내 보기엔 나한테도 적수가 되지 못할 것 같구나."
해불개가 입꼬리로 비웃음을 툭 던지며 받아쳤다.
"흥, 일사 형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군. 어쩌자고 반벽산장 쪽에 빌붙어서는 추태를 부리는 거요?"
제일사는 전에 유기에게 큰 은혜를 입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해불개의 말대로 유기를 도와 혹도와 맞설 이유는 없었다. 제일사가 눈가로 짙은 그림자를 만들며 해불개를 바라보았다.
"난 원래 남의 일에 이러쿵저러쿵 하며 나서는 성미가 아니다. 하지만 이번만은 꼭 나서야 할 것 같으니 알아서 해라."
해불개가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젖혔다.
"우하하하! 어느 형제가 제일사와 겨루어 보겠는가? 하지만 저 사람한테 돈주머니를 도적맞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네."
해불개가 주위에 대고 소리치자 곧 한 사내가 성큼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의 손에는 녹이 잔뜩 슨 검이 들려 있었는데 동작이 굼뜨고 매우 느려 터진 자였다. 제일사가 그 사내를 알아보고는 읍하며 인사를 던졌다.
"향벽(向璧) 형, 오랜만이구려?"
향벽이 느린 동작과는 달리 제법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제일사, 토끼도 제 굴 앞의 풀은 다치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대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그댄 강남 영웅호걸들의 맹주도 아니지 않나?"
다분히 비꼬는 투였다. 제일사도 만만하게 물러설 수는 없다는 기세로 향벽에게 여유로운 표정을 내보였다.
"향벽 형, 난 형님과 싸우고 싶지 않은데 하필이면 형님이 나설건 뭡니까? 하지만 상황이 그렇다면 하는 수 없겠지만……."
그러자 향벽의 입꼬리가 귀까지 찢어지며 벽력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앗!"
처음 느리게 보였던 것과는 달랐다. 그는 빠른 동작으로 제일사의 앞뒤로 위치를 옮겨 가며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가 쓰는 권법은 소림파의 나한신권(羅漢神拳)이었다. 왼쪽 주먹은 나한배 불(羅漢拜佛)이라 부르며 오른쪽 주먹은 나한관세 (羅漢觀世)라 불렀다.
향벽의 갑작스런 공격에 몸을 피하던 제일사가 움찔했다. 다시 그의 주먹이 날아들었는데 예불나한(禮佛羅漢)이라 부르는 권법이었다. 향벽의 권법에는 빈틈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묵직한 무게가 실려 날라 오는 그의 주먹에 제일사는 긴장하며 자신의 초수를 쓰기 시작했다.
향벽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제일사가 외다리 도적의 전설에서 말하는 상사색(相思索)처럼 아주 매서운 초수를 쓰고 있음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제일사에게 한번 붙잡히면 죽기 전에는 풀려 날 수 없으리라. 향벽은 더욱 제일사의 동작을 주시하며 민첩하게 몸을 놀렸다. 제일사의 뒤쪽으로 자리를 옮겨 간 향벽이 기회를 노려 주먹을 끌어쥐었다. 곧 그의 가슴팍에 일격이 꽂힐 찰나였다.
"얏!"
그런데 제일사가 어느새 눈치를 채고는 몸을 돌리는 바람에 빗나가고 말았다. 제일사가 훌쩍 몸을 뒤로 날리며 의외의 말을 흘렸다.
"향벽 형, 우리 싸우지 맙시다!"
향벽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일사의 의도를 알지 못한 그는 잠시 주춤하며 느리게 걸음을 메어놓았다. 그런데 제일사의 의도는 곧 드러나고 말았다. 그의 손엔 어느새 아패(牙牌)가 들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향벽의 신물이었다. 언제 그 신물을 훔쳐갔는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향벽의 인상은 험악하게 변해 갔다. 그러면서 속으로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어 혼자 중얼거렸다.
'오호, 어쩌면 저자가 나를 봐준 것인지도 모른다. 아패를 훔쳐 갈 정도라면 벌써 나의 급소는 저자에게 노출되었을 텐데…….'
향벽의 심사는 뒤죽박죽 뒤틀리기 시작했다.
"좋아, 싸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
상황을 지켜 보던 해불개의 수하 중 한 사람인 중이 앞으로 나와 제일사를 향해 가슴을 폈다.
"그런 재간이 있다면 나와 한번 붙어 봅시다. 치사하게 남의 물건을 훔치다니!"
제일사가 히히덕거렸다.
"내 보기엔 당신은 숭산파(崇山派)인 모양인데 숭산파의 검술은 오악(五岳)의 여러 파 가운데 가장 훌륭하지. 하지만……."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내젓자 중이 달려들었다.
"그럼 이 중의 실력을 보여 주마!"
중이 넓은 팔소매를 휘두르자 요란한 바람소리가 나며 강한 기류가 뿜어졌다. 중의 실력을 감상하던 제일사가 놀라며 주춤 상체를 젖혔다.
"좋다. 돌려주마!"
제일사가 아패를 던졌다. 그 아패는 처음에는 천천히 날아가는 듯싶더니 도중에 갑자기 욍윙 소리를 지르며 번개같이 중을 향해 돌진해 갔다. 그런데 중은 끽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정중하게 읍하는 자세를 취했다.
"제 시주님의 마음을 이 소승은 고맙게 받겠소이다."
그러더니 다시 팔소매를 펼쳐 그 아패를 공중으로 튕겨 올렸다.
공중으로 튕겨진 아패가 제자리에서 회전을 하더니 곧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바로 중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는지 깜쪽같이 사라졌다.
"대사, 내 보기엔 당신은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게 좋겠소이다. '아침 종을 저녁에 듣게 된다면 춘하추동을 알 수 있으리오'라는 주련도 있지 않소? 당신은 출가한 몸이라 남의 일에 간섭할 필요가 없소!"
중이 제일사의 말을 뿌리치는 의도로 소맷자락을 엇갈려 휘날렸다.
"자, 잔말 말고 나와 겨루어 보자!"
중은 팔소매를 다시 휘둘러 제일사의 공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시험해 보려고 했다. 제일사는 이런 싸움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계속 중의 공격을 피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제일사가 이를 악물고는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중의 공력에 밀려 몇 걸음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중도 마찬가지여서 제일사의 공력에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한편에서 이를 지켜 보던 왕중양은 중의 공력이 월등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중이 제일사를 쉽게 죽일 수 있는 실력은 못 되었지만 어쨌든 제일사가 밀리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야아―."
중이 계속 달려들며 팔소매를 휘둘러댔다. 확확 하는 섬뜩한 소리가 제일사의 눈앞을 스쳤다. 제일사는 그것을 피하느라 여간 애를 먹고 있는 게 아니었다. 곧 승부는 판가름이 날 것 같았다.
이때 쫘악 하는 소리가 나더니 중의 한쪽 소매가 찢어지고 말았다. 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찢겨져 나간 소맷자락을 살펴보았다. 어떻게 당한 것인지 그는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어 두리번거 릴 뿐이었다. 철수청풍(鐵手淸風)의 절기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게 깨져 버린 순간이었다.
누가 중의 옷소매를 찢었는지는 옆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알지 못했다. 중이 화를 버럭 내며 양팔을 사방으로 내저었다.
"누가 한 짓이냐 ? 어서 그 모습을 보이거라!"
이미 그는 중이 아닌 강호객의 모습으로 앞뒤 가릴 것 없이 고함을 질러대고 욕설까지 퍼부으며 보이지 않는 호수를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네 따위가 감히 나를 찾겠단 말이냐!"
모두들 그 목소리에 허둥대기 시작했다. 분명 말소리는 들려 오고 있는데 사람은 보이지가 않았다. 귀신이라도 출몰했다는 말인가. 중은 목소리의 임자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연을 올렸다. 그러나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를 한번 찾아보거라, 이 얼빠진 사내 놈아!"
그 말에 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굳어 있다가 곧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있는 여인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 가운데에는 반벽산장의 장주 유기의 딸인 유일민(劉一珉)과 귀낭자(鬼娘子)도 끼여 있었다. 또 검을 등에 차고 있는 여협(女俠)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그 여협은 면사포로 얼굴을 감추고 있어 누구인지 감을 잡을 순가 없었다.
중이 이 여인들을 주시하며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사내 놈이라 부른 것을 보면 필시 여인일 것이다!"
그가 여인들을 한 사람씩 손가락으로 짚었다. 유일민이 손가락 끝이 자기를 향하자 고개를 가로 저었다. 중이 그녀를 유심히 살피더니 곧 여협에게로 다가가려 했다. 그런데 걸음을 쉽게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여협으로부터 검기(劍氣)를 심하게 느껴 그가 주춤 했다. 검기는 숨통을 조일 듯 가슴팍을 강타했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이 여협은 아닐 거라 믿었다. 이토록 정기를 가진 여협이 무엇 때문에 숨어서 목소리만을 내지른단 말인가. 이윽고 귀낭자 앞에 선 중이
허연 이빨을 내보였다.
"바로 네 년이렷다!"
귀낭자가 눈셉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는 중의 물음에 답했다.
"그렇다!"
중이 손을 뻗어 귀낭자를 덮치려 했다. 소금나법(小檎拿法)이란 초수였다. 팍팍팍! 세 번이나 중의 손이 바람을 갈랐지만 그때마다 귀낭자가 막아냈다. 귀낭자의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
"그까짓 재간으로 이곳에 와 이름을 밝힐 수 있느냐?"
귀낭자가 중의 비위를 슬슬 건드렸다. 그는 화가 치밀어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래도 계율 때문에 귀낭자를 죽일 마음은 애써 다스리고 있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귀낭자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금강지(金剛指)라는 초수를 쓰기 시작했다.
"좋다. 얍!"
그가 손을 뻗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귀낭자의 옷자락에 휑하니 구멍이 나 버렸다. 귀낭자가 놀라며 몸을 사렸다.
"이 중농아, 네 놈이 옷을 못쓰게 만들었으니 용서할 수 없다!"
귀낭자가 품속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자 중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귀신물건!"
원래 이 귀낭자는 오귀서생(五鬼書生)의 아내로 오귀서생에게 몇 가지 귀문(鬼門)의 재간을 전수받았던 터였다. 그 후 오귀선생이 죽자 귀낭자가 귀역(鬼域)의 유일한 전인(傳人)이 되었던 것이 다. 그때부터 그녀가 지니고 다니는 물건들을 강호 사람은 귀신물건이라 불렀다.
얼핏 볼 때에는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들은 그다지 위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새카만 나무토막과 참대로 만든 작은 경쇠 그리고 우산이 전부였다. 중이 속으로 비웃었다. 그까짓 물건들 때문에 강호 사람들이 벌벌 떨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중 우산은 매우 기묘하게 생겼다. 실로 우산 자루를 친친 감아 놓았는데 무엇으로 된 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또한 우산천은 방수로 된 것인지 운지(雲紙)인지는 모르지만 번들거리며 두껍게 보였다.
"귀신 우산이 하늘을 버틴다!"
귀낭자가 이렇게 소리지르며 우산을 높이 쳐들었다. 강호에서 소문이 난 귀낭자의 우산이므로 중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이 몸을 날려 중궁(中宮)을 밟고는 손위(巽位)로 나가면서 반약장 (般若掌)이란 초수를 썼다. 순식간에 장이 귀 낭자에게로 뻗었다. 이 장법은 겉으로 보기에는 가벼웠지만 무한한 내력을 지닌 것이기도 했다. 귀낭자가 우산을 활짝 펼쳤다.
중은 번쩍 하는 금빛을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펼쳐진 우산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미처 확인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찬란한 금빛이 눈부시게 번뜩였다.
"음……."
그가 가슴팍에 통증을 느끼며 몸을 구부렸다. 어느새 가슴에서 피가 철철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는 서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귀낭자, 나와 반벽산장 사이의 일에 네가 나서 간섭할 건 워냐?"
해불개가 끼여들자 귀낭자는 여유작작한 태도로 그를 주시했다.
"난 구경을 온 사람이지 간섭을 하러 온 사람은 아니야."
울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해불개가 세게 코바람을 불었다. 섣불리 건드릴 수도 없어 그는 속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기를 누르느라 애가 탔다.
'형님, 내가 겨루어 보겠소이다!"
이때 해불개의 신변에 버티고 서 있던 사내 하나가 나섰다. 그는 남루한 옷을 걸쳤는데 몰골을 보니 한 사나흘은 족히 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앞으로 나오자 옥총의 안색이 변했다. 바로 이자가 강남 흑도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하는 경천필 연뇌(連雷)였다. 강호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경천필 연뇌는 생소했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강남 소주(蘇州) 입뢰(立 )에서 호한 스물셋을 때려눕혔고 또 강음로(江陰路)에서는 재물을 털었는데 강남의 사대 표국(漂局)의 화물을 모두 강탈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한 쌍의 붓을 무기로 쓰 는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었다.
경천필이 귀낭자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내가 네 년의 귀신물건과 맞서 보련다!"
그러더니 그가 품속에서 붓 한 쌍을 꺼냈다. 모두들 그 붓에 눈길을 던졌다. 붓에서 카카카 하는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 자루로 변해 버렸다. 한 자루로 변해 버린 붓은 다시 다섯 자가 넘게 길이가 커졌다.
"귀낭자, 어서 덤비거라!"
"내가 왜 네 놈과 힘을 낭비하겠느냐?"
귀낭자도 만만하지가 않았다. 경천필이 눈썹을 하늘로 치켜 뜨며 다그쳤다.
"네 년이 사람을 해쳐 놓고도 발뺌을 할 셈이더냐?"
경천필이 괴성을 지르며 귀낭자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해불개가 그를 잡았다.
"연뇌 형, 저 여인을 조심하시오. 일단 내력이나 알아본 다음 대적해도 늦지 않을 것 같소."
"내력을 알아보다니?"
경천필이 의아하게 여기자 귀낭자가 코방귀를 뀌었다.
"그건 알아서 뭘해? 난 단지 이곳에 구경을 왔을 따름이라구."
이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은 유기였다. 경계를 하고 있던 그로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귀낭자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귀낭자께서 우리 반벽산장과는 원한을 산 일은 없지요. 제가 해불개와 이치를 따진 다음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소이다."
일순 귀낭자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대들끼리 싸우고 싶으면 싸우라구. 난 여기서 구경이나 할 생각이니까."
유기가 몸을 돌리더니 무심과 챵바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의 생각으로는 챵바의 무공이 뛰어나 보였다. 유기가 이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데 직검 마옥과 그의 아내인 손불이가 해불개에게로 다가갔다.
"해불개, 당신과 유 장주 사이에 있었던 일을 우린 다 알고 있어요. 남이 당신에게 은자를 꿔주었으면 그 인정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 그러니 당신이 반벽산장을 원수로 여기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요."
해불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댄 누군가?"
"손불이요."
해불개는 손불이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처지였다. 뛰어난 검술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강호의 풍문을 통해 전해 들었었다.
"난 강남 호걸들의 우두머리야. 그대가 내게 이래라저래라 훈시를 놓을 셈인가?"
그러자 손불이가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당신이 나의 말을 듣지 않는 건 상관없지만 처신은 곧아야 하지 않겠소?"
"네 년이 그토록 똑똑하면 네 서방이나 가르칠 것이지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려 드느냐?"
해불개가 화를 내며 몸을 돌리려 하자 순식간에 십여 자루의 검이 번쩍 빛을 발하며 마옥의 복부를 겨누었다. 강남에 열 명의 도객(刀客)이 있다는 사실을 무림 사람들은 너무도 잘 알았다.
이 열 사람의 도객들은 원래 강호에서는 무명 소졸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이들은 한데 모여 고인(古人)들이 남긴 도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이들은 종남산의 한 구역에다 초막을 지어 놓고 칼쓰는 법을 연마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 때문에 모두가 머리칼이 귀신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길게 자랐다. 이들은 끝없는 수련 끝에 절세의 도법을 익힐 수가 있었고 모두들 이름있는 도객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산에서 내려온 뒤 창량검(蒼凉劍) 주무진(朱無塵)을 죽
이고 감섬로(甘陝路)의 큰 도적 회하하(回賀賀) 역시 물리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한편 이들이 쓰는 열한 가지 초수 중 마지막을 천수지참(天愁地慘)이라 불렀다. 이들은 아직 자기들의 초수를 제대로 써보지를 못했기에 좋은 기회로 여기고는 칼을 뽑아 들었던 것이다. 번뜩이는 칼날 속에도 태양이 들어 있는 듯했다.
마옥과 손불이 두 사람 역시 검술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열 명이나 되는 이들을 당해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손불이가 검을 뽑아 들고는 앞으로 나섰다.
"검이 나간다!"
손불이는 자신의 검으로 열 명이 내민 칼을 후려쳤다. 열 명의 도객들이 호기를 만난 듯 날뛰기 시작했다. 마옥과 손불이는 서로 등을 댄 채 이들과 열전을 벌였다. 두 사람의 도객이 손불이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려 했다. 피냄새를 부르는 칼날이 손불이의 코끝을 스치며 지나갔다. 손불이가 반사적으로 얼굴을 감추며 상대의 칼끝 움직임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여인이란 사내와 달리 자신의 얼굴을 목숨만큼이나 아끼는 법이었다. 그녀는 검으로 눈앞의 칼날을 헤치며
자리를 옮겼다. 뒤에 있던 마옥도 그녀와 동작을 같이 하며 재빠르게 발을 굴렸다.
"조심하오!"
마옥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 왔다. 마옥을 등에 지고는 있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허점이 되었던 결과였다. 마옥의 왼쪽 얼굴을 스치며 날아든 칼끝이 손불이에게로 들어왔다. 겨우 칼을 피하긴 했는데 그만 손불이는 머리를 묶어 두었던 끈이 풀리면서 산발한 모양이 돼 버렸다.
"얏!"
때를 놓치지 않고 다른 도적이 손불이의 머리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그런데 칼이 손불이의 등뒤에서 멈칫 서 버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작은 돌멩이 하나가 막 칼에 맞아 멀리 튕겨 나갔다. 작은 돌멩이 하나로 칼을 막아낼 수 있다면 대단한 내력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치 천 근의 무게를 얻은 듯 돌멩이는 강하게 날아갔다. 칼을 쥐고 있던 그 도객의 손아귀엔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러나 싸움은 처음부터 공정하지가 못했다. 우선 숫자로 열세 에 놓였던 마옥과 손불이는 차츰 이들에게 몰리기 시작했다. 손불이가 기진하여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악!"
어디선가 날아든 칼이 그녀를 맞추었다. 그녀는 갑자기 자심추골(刺心椎骨)에서 심한 동통을 느끼며 몸을 꺾었다. 그러면서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앞으로 접근해 온 세 자루의 칼을 물리쳤다. 그러나 이들의 공격은 더욱 집요해졌다. 사방에서 칼울음 소리가 우웅우웅 하고 손불이의 신경을 흐트러 놓았다.
'이렇게 죽고 마는구나!'
손불이는 속으로 자신이 처한 위기를 새겼다. 다시 칼이 날아들었는데 이번에도 아까처럼 도중에 돌멩이에 막혀 멈칫하듯 공중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계속 도객들의 공격을 막아 주고 있는 듯했다. 다시 등뒤에 있던 마옥을 겨누던 한 사내가 또 힘없이 칼을 내던지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누구냐? 어서 정체를 밝혀라!"
이렇게 버럭 소리친 것은 도객 중 하나인 귀도(鬼刀) 허재(虛才)였다. 강호객들도 허재의 고함에 모두 당황했다. 허재가 다시 목청을 돋우었다.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치사하게 굴지 말고 어서 나와라!"
누가 마옥과 손불이를 도와주고 있는지 찾아내려고 했지만 어려웠다. 허재의 외침에 누구 하나 대답하며 나서는 자가 없었다.
지금껏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던 무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열 사람의 도객은 강호에서도 명성이 적지 않은데 실력은 어린아이 장난 같군!"
도객들이 곧 무심을 에워쌌다. 그러나 이들은 쉽게 무심에게로 접근하지 못했다. 앞에 동장철벽(銅墻鐵擘)이 가로막고 선 듯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무심의 얼굴빛이 변해 갔다.
"네 놈들의 재간으로는 어림도 없다. 목숨이 아깝거든 어서 물러 서거라!"
허재가 손을 쓰지 않고 한쪽에서 구경만 하고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비쳤다. 그는 다시 뒤쪽으로 물러난 아홉의 도객들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유기의 뒤에는 열여덟이나 되는 검객들이 서 있었는데 이들은 언제나 함께 다니며 싸우는 무리였다. 이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나서자 대장관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앞으로 다섯 걸음씩 내딛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위치에 서 있었는데도 어느 틈엔가 같은 열을 이루어 도객들 앞에 당도하게 되었다. 그 동작의 능숙함만을 보고서라도 꽁무니를 뺄 이들도 적지 않을 성싶었다.
이들 중 맏이가 신호를 보냈다.
"시작!"
이들이 다시 민첩한 동작으로 이상한 대열을 만들며 흩어졌다가 모이는 것을 반복했다. 그 동작은 매끈하고 절도가 있어 보는 사람들이 모두 입을 헤 하고 벌릴 정도였다.
허재가 비웃었다.
"강호에는 칼이 있으면 검이 있어서는 안 되는 법. 오늘 칼이 강한가 검이 강한가를 겨뤄 보자!"
허재의 말에 용기를 얻은 도객들도 저마다 초수를 부리며 자세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십팔검객 중 맏이가 짧게 소리질렀다.
"출검이다!"
허재가 칼을 마구 휘두르며 맏이에게로 달려갔다.
"야압?"
"받아랏!"
검과 칼이 맞부딪치며 요란한 금속성의 소리를 내질렀다. 불꽃이 튀고 검이 가르는 바람 소리에 소름이 다 돋을 정도였다. 그런데 맏이는 쉽사리 검을 뽑아 들지를 않았다. 맏이는 등에 검을 메 고 있는 사람이었다.
등에 검을 멘다는 것은 인자한 사람일 경우가 많다는 게 떠도는 말이기도 했다. 손에서 비교적 먼 등에 검을 두고 있으니 매사에 조심스럽고 함부로 검을 뽑지 않기 때문일 거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한편 검술이 뛰어날수록 검을 등에 멘다고 보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만큼 검이 손에서 멀어도 얼마든지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그럴 거라는 생각이었다.
바로 맏이 역시도 검을 등뒤에 메고 있었기에 허재가 섣불리 보고는 덤볐던 것이다. 허재가 칼로 내리치려는데 맏이가 잽싸게 몸을 돌리며 공격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등에 메고 있는 검에는 손을 주지 않았다. 허재는 그 점이 이상하면서도 계속 틈을 주지 않으려고 공격해 들어왔다. 한쪽에 물끄러미 선 채로 맏이를 바라보고 있던 왕중양의 눈빛이 흔들렸다.
'과연 이 싸움의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강호에서 이름이 난 열 명의 도객들과 검을 쓰는 저 사내……. 그런데 왜 저자는 검을 뽑아 들지 않는 것일까?'
왕중양이 약간 근심 어린 눈으로 맏이를 주시했다. 그런데 맏이가 드디어 천천히 손을 들어 검을 뽑아 들기 시작했다
-제1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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