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중신통 왕중양4

3학년2반 | 2022.02.23 07:42:26 댓글: 0 조회: 864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0559
제19장 독사와의 사투
임조영의 정체를 알게 된 왕중양의 안색이 더욱 상기되어 갔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와 의형제를 맺은 임조영이 여인이었구나! 셋째 동생이 사내가 아닌 여인? 그것도 천하 절색,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다니!'
남장을 하고 있었을 때의 임조영과는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왕중양은 남장을 한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임조영도 자신을 바라보는 왕중양의 시선이 따가워 주위를 살피다가 그만 화들짝 놀랐다. 그제야 면사포가 벗겨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녀도 하는 수 없이 왕중양에게 다가갔다.
"왕 공자님!"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형님으로 부르리라 속으로 다짐했었지만 엉뚱하게도 이같은 말이 새어 나ㅇ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판단한 왕중양이 임조영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셋째, 유일민을 묻어야겠소. 그러니 나를 좀 도와주시오."
"알겠어요."
두 사람은 중원 사람들과 훗날을 기약하고는 작별을 나누었다. 왕중양과 임조영은 유일민의 시신을 안고서 발길을 재촉했다.
이들은 곧 영주 벌판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걸어왔다. 볕 좋고 바람이 잘 드는 양지를 골라 유일민을 묻어주었다. 그리곤 칼로 '유문여 일민지묘(劉門女 一珉之墓)'라고 새긴 작은 묘비도 세웠다.
제를 올리고 두 사람이 돌아서려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휘익 휘익 하는 휘파람 소리가 나더니 수풀을 헤치며 수많은 뱀들이 두 사람을 향해 기어오는 게 아닌가. 왕중양이 급히 임조영의 팔을 잡고는 다른 쪽으로 뛰었다.
이미 사방은 뱀 천지였다. 낮게 엎드려 기어오는 뱀은 마치 흙탕물이 넘실대는 것처럼 보였다. 흰 무늬가 있는 까만 뱀이었는데 크기도 보통의 것들보다 엄청타게 컸다. 뱀들은 대가리를 꼿꼿이 쳐들고는 붉은 혀를 냄름거렸다. 쉭쉭 소리를 내며 뱀들이 더욱 집요하게 이들에게로 몰려들었다.
"저기를 봐요!"
임조영이 가리킨 곳에서 한 사내가 실실 웃으며 걸어왔다. 그 사내는 뱀을 부리는 사소(蛇嘯)라 일컫는 작은 퉁소를 불고 있었다. 그 소리 때문인지 뱀들은 포악하게 대가리를 쳐든 채 몰려들었다. 흔들흔들 춤을 추는가 싶더니 뱀들이 서로 엉키어 두 사람 앞에까지 이르렀다. 역한 뱀의 비린내 때문에 고개가 돌아갔다.
"어서 죽여 버려요!"
임조영이 징그러운지 얼굴을 찌푸리며 왕중양에게 외쳤다. 왕중양이 뱀을 향해 장을 날렸다. 그러자 서로 엉켜 있던 여러 마리의 뱀이 순식간에 피를 뿌리며 산산조각이 났다.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지?"
사소를 불던 사내가 어느새 나무 위로 올라앉아 태연하게 아래를 보며 지껄여댔다.
"그런 너는 누구냐? 누군데 사악한 뱀으로 사람을 해치려 드느냐?"
왕중양이 나무 밑둥이 뒤척일 만한 큰소리로 되물었다. 사내가 껄껄 웃어대더니 아래를 내려다보며 거만을 떨었다.
"나? 난 영주에서 뱀을 부리는 사람으로 통하지. 이름은 사가자(蛇 子)라고 한다! 내가 보기엔 시원치 않은 것 같은데, 그 주제에 무슨 천하 무림의 맹주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냐? 오늘 이 사가자가 단단히 버릇을 고쳐 주겠다!"
왕중양이 쓴웃음을 지으며 읍을 했다.
"나 왕중양은 스스로가 무림의 맹주가 된 것은 아니오. 난 사람들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었던 거요."
"하하하! 금나라고 송나라고 난 흥미없어. 난 그저 저 뱀들을 데리고 놀면 그뿐이라고. 그대도 제 코나 닦으면서 놀 것이지 왜 나서는 거야?"
임조영이 가소롭다는 투로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있는 사가자를 향해 한마디 쏘아댔다.
"그럼 당신이 천하 무림의 맹주라도 되겠다는 거요?"
"히히히, 난 그런 생각은 절대 안해. 그런 흑심을 품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임조영이 다시 위에다 대고 물었다.
"그게 누구요? 천하 무림의 맹주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이요? 그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면 기꺼이 맹주로 받들겠소!"
"자격이야 저 왕중양이 없겠지. 그 분을 따라올라면 아직 멀었지."
"그 사람도 무림대회에 그도 참가했나요?"
"허허, 그분이 그런 시시한 대회나 기웃거리는 소인인 줄 알아? 그분은 사실 맹주 자리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아. 다만 막중한 소임이 있어 그것을 이루려고 보니 당분간 필요할 뿐이야."
이번엔 왕중양이 사가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부리는 뱀들을 보니 모두 독사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놈들 같은데 어떻게 길들였소?"
왕중양이 제법 진지하게 물어 온다고 느꼈는지 사가자가 어험 하고 헛기침을 한 번 내더니 대꾸했다.
"내 가르쳐주지. 천하의 독사란 오독(五毒) 중의 상물(上物)과 성미들이 엇비슷하여 오직 그 독성을 잘 파악하기만 하면 부리지 못하는 독사는 없지. 헌데……."
사가자가 갑자기 말꼬리를 감추고는 화를 버럭 냈다. 왜냐하면 자기를 올려다보고 있는 두 사람이 처음과는 달리 성의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왕중양은 빙그레 웃기까지 하고 있어 더더욱 기분이 틀어졌다.
"오라, 네 놈들이 나를 부추겨 그 비결을 알아내려고 하는 게지? 그래 비결은 알아서 무엇에 쓰려고 하는 것이냐?"
그가 태도를 바꿔 다시 으르렁대자 왕중양이 얼른 임조영에게 눈짓했다. 알겠다는 기색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인 임조영이 먼저 바닥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뒤를 따라 왕중양도 몸을 솟구쳤다. 이들은 아름드리에다 높이도 만만하지 않은 한 나무 위로 가볍게 오른 것이다. 이 나무 역시 독사들이 에워싸고는 있었지만 높이가 있어 안전하리라 믿었다. 왕중양과 임조영은 각각 다른 나무에 올랐는데 그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두 사람이 거의 자기와 같은 높이로 마주하게 되자 사가자가 투덜댔다.
"왕중양, 정말 끝까지 속을 썩히는군. 그저 가만히 있으면 제 목숨대로 살 수 있을 텐데, 왜 맹주 노릇은 자청하고 나선 게지? 그러다가 죽으면 누구를 원망할 셈인가?"
말끝을 비온 뒤 드러난 돌부리처럼 삐죽 세운 사가자가 다시 사소를 불어댔다. 독사들은 그 소리에 맞춰 두 사람이 있는 나무 위로 기어올랐다. 두 사람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젠 달리 방법이 없었다. 독사들은 신기하게도 땅에서보다 더 무서운 기운으로 꿈틀꿈틀 오르는 게 아닌가. 독사들이 줄을 지어 새카맣게 두 사람이 있는 나무로 오르자 사가자가 낄낄대며 좋아했다.
"이제 너희들은 귀신이 될 테지. 그것도 살점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백골귀신이 될 텐데 볼만하겠구나!"
그러면서 그는 사소를 휘릭 휘릭 더욱 빨리 불어댔다. 대가리를 꼿꼿하게 세운 독사들이 그악스럽게 왕중양의 다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른손으로 나뭇가지를 잡고 있던 왕중양은 검을 쓰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가지 하나를 뚝 잘라 힘껏 내던졌다. 선천신공이 담겨 있는 그 가지는 곧바로 막 임조영에게 혀를 낼름거리는 독사에게로 날아갔다. 화살보다 빠르게 날아간 가지가 독사의 대가리를 꿰뚫고는 나무에 깊이 박혔다. 임조영도 같은 방
법으로 독사들을 물리치려고 했다. 나뭇가지를 꺾어든 그녀는 역시 기를 넣어 독사를 향해 던졌다. 그녀의 무공도 대단했기에 독사들은 영락없이 대가리에서 피를 뿜었다. 그녀가 쓰고 있는 법수는 옥녀심경법(玉女心經法)으로 그 동작과 파괴력이 가히 으뜸이었다.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는구나!"
사가자가 비아냥거렸다. 그는 대가리가 찢긴 채 나무에 처박힌 독사를 가엾은 눈으로 바라보더니 계속 눈알을 굴리며 악을 썼다.
"어차피 죽을 목숨들인데 그렇게 발악해서 무엇 하겠어? 괜한 시간 낭비 말고 어서 죽을 준비들이나 하라구!"
왕중양과 임조영은 사가자가 떠들어대는 소리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들은 계속 기어오르는 독사들을 향해 나뭇가지를 꽂았다. 그럴 때마다 단 한 번도 빗나가는 법 없이 독사들이 피를 뿜었다. 이들은 또 자신들이 매달려 있는 나무뿐만 아니라 서로를 향해 가지를 던지기도 했다. 왕중양의 다리에 휘감기려는 독사는 임조영이 막아주었고, 그녀 역시 왕중양이 날린 가지로 인해 위험을 넘겼다. 이렇게 해치운 독사가 무려 백 마리를 넘겼다. 이 독사들은 마치도 새롭게
돋아난 가지처럼 나무에 다닥다닥 매달려 보기에도 흉칙스러웠다.
"너무 뻐기지 말라구. 너희들이 죽인 뱀은 별 것 아니니까. 난 수십만 마리도 넘는 독사를 갖고 있거든. 내가 사로를 불어대기만 하면 천지에 널려 있는 온갖 독사들은 다 몰려오게 돼 있지. 히히히, 그리고 네 놈들은 끝내 나뭇가지를 다 써버리고 나면 꼼짝없이 독사에 물려 죽게 될 테니 어디 그때까지만 용을 써보라구!"
사소소리가 더 집요하게 그리고 길게 이어졌다. 보이지 않던 독사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차라리 내려가 사가자를 칩시다!"
그러나 사가자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독사밭에 쓰러질 게 불 보듯 뻔했다. 왕중양은 이제 달려 있는 나뭇가지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 조금 위축이 되었다. 검을 뽑아들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검을 독사를 향해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되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끝이 나게 될 것이다. 결론은 검으로 가까이 접근해 온 독사를 내리치는 것인데 그것은 끝도 없는 사투가 될 것 같았다.
"무림대회에서 너희들이 얼마나 위엄을 떨쳤는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보기에는 용기없는 소인배와 다를 게 없다! 용기가 있다면 어서 내려와 나를 죽여 보시지 그래?"
사소 가락이 빨라질수록 독사들은 더욱 포악스럽게 대가리를 쳐들고는 기어올랐다. 이미 나뭇가지에 막고 죽은 다른 놈들을 타넘고 기어오른 독사들에게서 역한 냄새가 풍겨났다. 왕중양은 발로 힘껏 독사 대가리를 차 버렸다. 몇 마리의 독사가 아래로 떨어졌지만 별로 표시가 나지 않았다. 뒤를 이어 오르고 있는 독사들이 수천 수만에 이르렀다. 죽은 채 매달려 있는 놈들과 그 위를 타넘고 있는 놈들 때문인지 왕중양이 서 있는 굵은 가지가 우직 부러지려고 했다. 원
래의 아름드리 나무에 매달려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버틸 수가 있었겠지만 겨우 사람의 팔뚝만한 가지에 올라 있는 처지라 위태로웠다.
이같은 위기를 먼저 맞게 된 것은 임조영 쪽이었다. 그녀가 서 있는 가지가 우지직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막 부러지려 했다.
"어서 뛰어내려!"
왕중양이 그쪽을 향해 급히 소리질렀다. 우직! 왕중양이 있는 가지에서도 더 크게 소리가 났다. 이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는 몸을 띄워 공중에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각자 어깨와 머리로 방향을 조정하고는 아래로 빠르게 내려왔다. 때를 놓치지 않고 사가자가 재빨리 사소를 불어댔다. 두 사람이 내려앉을 곳을 미리 계산해 두었다가 그곳으로 독사를 모으려는 수작이었다.
사가자의 이같은 술책이 맞아떨어졌다. 두 사람이 사뿐히 내린 곳에는 어느 틈엔가 몰려든 독사들로 우글거렸다. 임조영이 황급히 발을 구르며 그중 몇 마리를 압사시켰다. 왕중양도 연신 발꿈치로 기어오르려는 독사를 쳐죽였다.
"악!"
임조영의 비명소리였다. 그만 그녀가 독사에게 다리를 물린 것이다. 외마디의 비명을 토한 임조영이 비틀거리자 얼른 왕중양이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어서 이곳을 피하세요!"
검을 꺼내든 임조영이 독사를 내리치며 다급하게 내뱉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빠르게 교차했다.
"제 걱정 마시고 어서!"
그러면서 임조영이 다시 검으로 바닥을 훑었다. 바닥에서 물결을 이루고 있던 독사 중 수십 마리의 것으로 보이는 대가리들이 동시에 피를 뿌리며 튀어올랐다. 임조영의 검에 잘려 나간 독사의 대가리를 보던 사가자는 더욱 사소를 빨리 불어댔다.
"야 앗!"
사소를 불고 있는 사가자를 향해 왕중양이 덮쳐 들었다. 비로소 왕중양이 자기의 곁을 떠나자 임조영은 정신을 바싹 차리며 검을 힘있게 틀어쥐었다. 범이 울부짖는 소리를 내며 사가자에게로 날아간 왕중양이 손을 뻗었다. 번쩍! 어깨춤까지 춰가며 사소를 불어대던 사가자가 갑자기 머리를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그의 손에서 사소가 떨어졌다. 왕중양의 장에 머리를 얻어맞은 그는 돌풍을 만난 삭정이처럼 사정없이 굴렀다. 그가 데굴데굴 구르면서 깔려 있던 낙엽들을 일제히 일깨우는 바람에 온 천지가 낙엽으로 뒤덮일 지경이었다. 큰 나무 밑둥에 가 퉁 하고 부딪친 사가자가 신음을 토했다.
"으…… 으 내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보다!"
왕중양이 파파파팍! 하는 소리를 내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왕중양의 신기한 보법을 보던 그가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저 독사들을 거두어 가지 않으면 당장 살아 있는 네 놈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이다!"
왕중양이 멈칫 걸음을 세우며 겁을 주자 사가자가 나무 뒤에서 눈만 빠꼼히 내밀었다.
"젠장, 오늘은 내가 몸이 안 좋아 물러가지만 다음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네 놈을 산 채로 씹어먹을 테다!"
왕중양의 두 다리를 유심히 살피며 사소가 떨어진 곳까지 조심조심 달려온 그가 얼른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휘이 휘이 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가락을 뽑자 곧 독사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그는 처음 나타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여유스런 몸짓을 하며 독사들을 이끌고는 멀리 사라져 갔다.
"아아……."
신음소리? 왕중양은 퍼뜩 임조영이 떠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그녀는 낮게 신음을 내뱉으며 막 바닥으로 허물어지려는 찰나였다. 한 걸음에 달려간 왕중양이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의 두 볼은 매우 창백했고 사지가 축 늘어진 것이 위급한 지경에 빠진 상태였다. 임조영의 눈빛이 강하게 타올랐다. 그녀는 내공으로 몸에 번진 독을 내몰고 있는 중이었다. 영주의 독사는 지독하기로 이름이 나 있는 것이라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임조영을 번쩍 안아올린 왕중양
은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려 했다.
"저를 내려 주세요. 아직 독이……."
임조영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왕중양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안전한 곳으로 가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에는 너무 늦을 거라 판단되었다.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그녀의 몸속에 있는 독을 빼내는 것이란 사실을 절감한 왕중양이 그녀를 다시 내려놓았다. 임조영이 자세를 겨우 추스려 앉자 왕중양도 그녀 뒤로 가 가부좌를 틀었다. 왕중양은 그녀의 등뒤에서 함께 일심정력을 다해 독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왕중양은 임조영을 도와 독을 빼내는데 온 정신을 쏟고 있을 때 갑자기 두 사람으로 짐작되는 그림자와 함께 말소리가 들려 왔다. 뒤늦게 알아차린 왕중양의 눈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이들은 코앞까지 접근해 왔는데 미처 왕중양과 임조영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자네네 공자는 그저 말뿐이야. 여지껏 행동으로 보여준 게 뭐 있나?"
한 사내가 입을 떼자 곧 다른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공자님을 탓할 게 아니지. 아직 그럴 시기가 되지 않았으니까. 때가 되면 공자님이 가만 있겠나? 다 알아서 자네를 기쁘게 해줄 걸세. 그러니 당분간은 좀 참고 기다리라구."
그중 한 사내의 낯이 익었다. 그랬다. 얼마 전 반벽산장에서 그곳 장주 유기를 즉인 옥총이 틀림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그 일을 하고 나서는 하루도 편히 잠을 자 본 적이 없어. 눈만 감으면 꿈에 그 사람이 나타나 날 미치게 만들지 뭔가."
옥총이 얼굴을 찌푸리며 하소연을 했다.
"그래서 근심이 병이라고 하는 거야. 근심이 많으니 꿈도 많고 그러다보니 괴상망측한 꿈에도 시달리게 되는 법이라니까. 그러니 근심을 버리게나."
"근심이 안 되게 되었어? 유기와 가깝게 지내던 벗이 없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저러나 누가 유기와 가깝게 지내는 인물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어? 젠장, 이러다가 그들의 손에 칼침을 맞고 비명횡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옥총의 말에 다른 사내는 묵묵부답이었다. 바스락대는 소리가 계속 나는 걸 보니 그중 한 사람은 극히 초조해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안절부절못하고 발로 떨어진 낙엽들을 툭툭 차고 있는 소리일 거라 왕중양은 생각했다.
잠시 후 곧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던 사내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사정은 알겠는데 어쩌라는 말이야?"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옥총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듣자하니 자네 공자님 집안에는 그럴듯한 지하궁전이 있다던데……?"
"뭐라고? 이 사람이 지금 잠꼬대를 하나?"
사내가 펄쩍 뛰면서 옥총을 나무랬다. 옥총이 빙긋 웃는 모습이 보였는데 누런 이빨이 다 드러났다.
"참, 그렇게 날뛸 건 또 뭐요? 그대가 잡아뗀다고 모를 줄 알아. 모두들 다 알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내색 안 할 따름이라고."
"허,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공자님에게 말 좀 해주게나. 그 궁전을 내 은신처로 삼고 싶다고 말이야."
왕중양과 임조영은 옥총과 말을 주고받고 있는 상대에 대해서는 얼른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임조영의 몸에 든 독을 빼는데 더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상태라 그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또한 옥총과 마주보고 있는 이 상대는 등을 보이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임조영의 몸이 약간 움직이는 것 같자 왕중양이 더욱 강하게 그녀의 등을 손바닥으로 밀어 주었다.
한편 옥총과 그 상대는 끊임없이 소곤대며 말을 주고받았다. 왠일인지 목소리가 너무 작아져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중양이 날카롭게 그쪽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옥총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손을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너…… 이게 무슨 짓이냐! 이 개만도 못한 놈!"
옥총은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어려웠다. 아마도 상대에게 치명타를 입은 모양이었다.
"공자님이 너 같은 놈을 궁전에 들일 거라 생각했더냐? 그곳은 모두 여인들뿐이지. 거세도 하지 않은 너를 그 궁전에 들였다가 무슨 뒷감당을 치르려고?"
"으, 으……."
옥총의 양팔이 더욱 거세게 허공을 긁어대더니 이내 꿍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마터면 공자님 대사를 망칠 뻔했잖아."
사내가 혼자 씨부렁대며 손등을 슬그머니 옥총의 코끝에 갖다 대었다.
"음, 아주 확실하게 손을 봐야지."
하며 그가 무언가를 머리 위로 치켜들더니 옥총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 이때 사람들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나자 그 사내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달아났다.
왕중양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무심과 그 황소보다도 힘이 센 미련한 챵바였다. 그리고 그의 뒤에 한 사람이 더 보였는데 뜻밖에도 아까 그 사가자였다.
"그들 중 분명 하나가 다쳤다는 말이지?"
무심이 사가자에게 약간 흥분된 목소리를 던졌다. 그토록 사악하게 굴던 사가자가 어찌된 영문인지 무심 앞에서는 설설 기는 모습이었다.
"물론이고 말고요.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요. 분명 여인이 뱀에게 물려 지금쯤은 죽어가고 있을 겝니다. 그런데 꽤나 미인이더라구요. 히히."
"사내가 아니고 여인?"
이렇게 반문한 것은 챵바였다. 사가자는 챵바의 말속에 담긴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사실 챵바는 은근히 임조영을 마음에 품고 있던 참이었다. 임조영의 미모에 반해 가뜩이나 그리워하고 있는 판국인데 왕중양이 아닌 그녀가 다쳤다는 말에 부아가 치밀었다.
"걱정 마십시오. 다음엔 꼭 이 사가자가 왕중양의 아가리 속에 뱀을 쳐넣으리다."
사가자가 헤죽거리며 비위를 맞추자 챵바는 더 이상은 다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모르나?"
무심이 매서운 눈초리로 주위를 힐끔 둘러보며 다시 사가자에게 물었다.
"글쎄요. 내 독사에게 한 번 물리면 서른 걸음도 못 가서 즉사를 하는 법인데 정말 요상합니다요. 사내가 부축을 해서 이쪽으로 가는 걸 보긴 했지만 도통 알 수 없는 노릇이네요. 여인은 죽고 사내가 그 시체를 떠메고 갔다고 해도 그리 멀리 벗어나지는 못했을 텐데……."
사가자의 심드렁한 대꾸에 무심이 흥 하고 코방귀를 뀌었다. 무심이 몇 걸음 옮기며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어 그닥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왕중양은 긴장하며 소리를 죽였다. 이제 임조영의 몸에서 거의 독을 빼내 가고 있지만 쉽게 움직일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무심의 말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내 아무리 생각해도 그 두 사람을 없애는 방법밖에는 없어!"
그러자 챵바가 심통스럽게 한마디 툭 내뱉었다.
"여인은 왜?"
무심이 기막히다는 눈길로 챵바를 돌아보았다.
"아무튼 왕중양은 꼭 없애버려야해.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 몽골이 금나라나 송나라와 대적할 때 화근으로 남게 된단 말이야."
왕중양은 이제 무심이 왜 자신을 이토록 증오하는지를 알았다. 무심의 속셈을 알게 된 왕중양은 분노가 치솟아 올랐지만 어쩌지 못하는 그 상황에선 타오르는 눈길로 쏘아볼 뿐이었다.
그런데 사가자가 별안간 몸을 사리며 큰소리로 외쳐 댔다.
"저기 사람이 있다!"
왕중양과 임조영은 자신들이 발각된 줄 알았다.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므로 왕중양은 큰 위기감을 느꼈다. 혼자의 몸이라면 얼마든지 저들과 상대할 수 있겠지만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임조영이 곁에 있는 한 섣불리 싸움에 나설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무심과 챵바 그리고 사가자가 이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임조영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게 변해갔다. 그런데 중간쯤에서 걸음을 우뚝 세운 무심이 허리를 굽히며 발 아래를 보는 게 아닌가. 이들은 쓰러져 있던 옥총의 시체를 발견한 것이었다.
"에이, 벌써 죽은 사람이잖아. 살아있는 놈 같았으면 내가 독사를 불러 한바탕 놀아 볼까 했는데……."
사가자가 간죽거리는데 무심이 손을 들어 입을 다물라는 동작을 취했다.
"숨결이 아직 붙어 있는 것 같다."
무심이 얼른 옥총 곁에 앉으며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았다.
"음, 역시 아직 죽지 않았어."
"정말입니까? 어디 나도 한 번 들어 봅시다."
사가자가 설레발을 치며 옥총의 가슴에 귀를 바싹 갖다 댔다. 한쪽 눈을 묘하게 치켜 뜨던 사가자가 히죽 웃었다.
"흐흐, 정말 아직 죽지 않았네."
얼른 몸을 일으킨 사가자가 무심에게 속삭였다.
"제게 있는 사담고심환(蛇膽苦心丸)을 한 알만 먹이면 벌떡 일어설 겁니다."
무심이 어서 그렇게 하라고 이르자 사가자가 품속에 있던 환약을 꺼내 옥총의 입 속으로 밀어넣었다. 사가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잠시 후 옥총이 서서히 의식을 회복하고는 눈을 떴다.
"당신들이 나를 살렸소!"
옥총이 무심에게 읍을 하며 감격해 했다.
"그렇네.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자네는 그 반벽산장에서 남을 도와 자기 형제를 죽인 그 옥총이란 사람이지?"
무심의 질문에 옥총이 애써 반색하며 허리를 또 약간 숙였다.
"무심 공자님, 잘 아시면서 뭘 또 물으십니까요. 전 원래부터 해불개 형님의 수하입니다."
옥총의 번들거리는 태도에 무심이 상체를 뒤로 젖혀 웃었다.
"아니 왜 웃으십니까요?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
옥총이 애가 타는지 이마에 잔뜩 주름을 그어대며 다급하게 물었다.
"아냐, 그런 게 아니고. 난 자네가 해불개의 수하라는 건 벌써 알고 있었다네. 다만 난 자네가 견식이 형편없어 웃었을 뿐이라네."
"예? 그건 또 무슨 뜻이죠?"
무심이 비웃듯 바람 소리를 피식 내며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새는 나무를 가려 깃을 만들고, 대장부는 주인을 가려 섬긴다는 말이 있지. 내 말은 자네 같은 유능한 사람이 하필이면 해불개를 따를 게 뭐냐는 말이네."
"그렇다면……."
"대장부로 났으면 한 번쯤은 사람 위의 사람인 인상인(人上人)이 되어야 하는 법이지. 허나 말 네 필이 이끄는 수레도 못 알아본다면 살아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자네는 그 우둔한 사람의 뒤나 따르고 있으니 답답하지 그지없네. 그럴 바에야 나를 따르는 게 낫지. 나를 따르면 적어도 벼슬 한자리는 괜찮게 할 수 있지. 처자권속도 근심 없이 잘 살 수 있을 테니 말일세."
"공자님 말씀을 들으니 밤에 빛을 만난 듯 앞이 환하여집니다요. 죽은 목숨을 공자님께서 살려 주신 데다가 또 이렇게 앞길까지 열어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공자님 말씀이 없어도 제가 스스로 따르려 했던 바 앞으로는 일심으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옥총의 말에 왕중양은 분노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무심이 다시 옥총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 혹시 두 남녀가 이쪽으로 오는 걸 보지 못했나?"
옥총의 빈 눈길로 주위를 훑고는 있었으나 그 역시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선이 왕중양과 임조영이 있는 수풀에까지 미쳤지만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대로 지나쳤다.
"글쎄요, 보지 못했는데요. 저를 해친 자와 함께 이곳에 이르렀고 또 서로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음, 그 사람과 여기 온 지는 얼마나 되나?"
"한 시간 남짓 되었을 겁니다."
무심이 뒤에 버티고 있는 챵바와 사가자에게 일렀다.
"왜 서 있기만 하는 건가? 어서 그들을 수색해 봐야지!"
다시 옥총에게로 몸을 돌린 무심이 뱀눈을 떴다.
"이봐 옥총, 그때 자네는 꽤나 약삭빠른 처세를 보이더군. 유기하고 생사고락을 같이 하겠다고 의형제를 맺어 놓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해쳤으니 말이네. 세상일이란 그렇듯 예측하기 힘든 법이지. 흐흐."
옥총이 약간 발끈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공자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전 무심 공자님이 대인의 도량을 가졌다고 믿었는데 이러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요."
머리를 가로로 흔들던 옥총이 더 큰 한숨을 내쉬었다.
"무심 공자님, 그렇다면 절 놔두시고 가던 길이나 가보시지요."
무심이 입꼬리를 위로 치켜 올리면서 쏘아붙였다.
"내 말이 틀렸단 말인가?"
"물론입죠. 먼 옛날 천하가 어지럽던 전국시기에 제(齊), 초(楚), 조(趙), 진(晋), 이 네 나라 공자님들은 모두 가뭄에 물 구하듯 현인들을 구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천하를 얻은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글쎄다. 나도 요행히 책을 접해 그런 역사쯤은 알고 있는데……. 하지만 천하를 얻은 공자는 없는 줄 알고 있다만."
"맞아요. 천하를 얻은 사람은 없었어요. 허나 그 네 나라는 각기 네 명의 공자가 있었기에 먼저 멸망되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공자들이 없었더라면 그 나라들은 벌써 망했을 게 분명합니다. 이런 이치로 보자면 무심 공자님도 대송 강산을 얻으려면 먼저 송나라 백성들의 민심을 얻어야 합니다. 민심만 얻으면 천하는 조만간에 손안으로 굴러들어오고 될 겁니다. 지금 공자님께서 나를 대하듯 다른 사람들을 의심하고 내치려고 한다면 대송 강산은커녕 무림의 맹
주도 될 수 없을 겝니다."
옥총의 눈빛이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그는 이 무심이 반드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될 악한이라 생각했다. 무심은 옥총의 말에 외눈 하나 꿈적이지 않고는 오히려 웃으며 좋아했다. 사실 그런 야심을 속으로 품고는 있었지만 떳떳하게 내세우지 못했던 게 무심의 심정이었다. 일개의 옥총이었지만 대신 그것을 일깨워주자 기분이 흡족해졌던 것이다.
"알았네. 내 자네의 말을 기꺼이 듣겠네. 그럼 우리하고 함께 가자구."
이렇게 말하고는 한쪽에 떨어져서 왕중양의 흔적이라도 찾고 있는지 두리번대고 있는 챵바를 불렀다.
"이 사람을 업고 어서 여기를 뜨자."
"난 싫어!"
엉뚱하게도 챵바가 뭉그적댔다. 그의 입은 불만으로 삐죽 나와 있었다. 옥총의 죽 끓듯 하는 변덕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챵바의 소고집을 익히 알고 있는 무심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사가자에게 일렀다.
"할 수 없군. 그럼 자네가 대신 수고를 좀 해 주게. 이 옥총을 자네가 업고 가야겠어."
사가자는 두말 없이 옥총을 등에 업었다. 이들은 천천히 다른 곳을 향해 떠나갔다.
왕중양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독기를 빼내고 서서히 원기를 회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젠 우리도 가야지."
왕중양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아까 그들이 있던 곳까지 나와 방향을 잡으려는데 이상한 것이 눈에 띄어 주춤했다. 땅바닥에는 '궁전. 궁전'이라는 몇 글자가 씌어져 있는 게 아닌가. 손가락으로 다급하게 새긴 것으로 짐작되었다. 왕중양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까 옥총이 쓰러뜨리고 달아난 그 사람 있지 않은가.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음성이 귀에 익은 듯하네. 근데…… 누구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어."
"저도 그래요. 어디선가 들은 목소리가 분명한데……."
임조영의 눈길을 보는 왕중양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인 줄 모르고 결의형제를 맺겠다고 했으니…….'
그때의 일을 생각하던 왕중양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베어 물었다.
두 사람은 걸음을 재촉해 영주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 어디 가서 요기부터 하지?"
왕중양의 말에 임조영이 가볍게 주억거렸다. 그녀는 왕중양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흐뭇했다.
이들이 거리를 걷자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몰렸다. 아마도 천하의 미남 미녀를 보고는 감탄하는 모양이었다.
이들은 곧 한 주루에 들어가 술과 안주를 시켰다. 날라온 음식들을 먹고 있는데 이층에서 요란한 발짝 소리가 들려 왔다. 술시중을 들던 심부름꾼의 방정맞은 말소리가 뒤를 이었다.
"아이구, 귀객들이 오셨는데 뭣들 하는 거야! 귀객들이 오셨다고!"
누 아래에 있던 심부름꾼들마저도 그 소리에 우당탕 이층으로 뛰어올라갔다.
"귀객이란 누구요?"
왕중양이 급히 한 사람을 붙잡고는 물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도 잘 모른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곧 이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이윽고 아래로 다시 내려온 심부름꾼 중 하나가 느릿느릿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왕중양이 그를 불러 재차 물었다. 그가 설명해 주었다.
"황궁의 황비낭랑이 나오셨어요. 글쎄 어쩐 일로 이런 누추한 영주까지 다 오셨는지……. 벌써 사흘인가 나흘인가 되었다고 합니다. 궁에서 데리고 나온 시녀들만 삼백이 넘는대요. 그때 한 강호객이 그 여인의 교자를 붙잡고는 미모를 보겠다며 늘어졌지 뭡니까. 은 오십 냥이나 바치겠다면서 고집을 피웠어요. 그 강호객은 보나마나 녹림대도(綠林大盜)였지요. 그 녹림대도는 물론 이 여인의 신분을 모르고는 그런 고집을 부린 겁니다요. 문발을 한 번만 거두어 미모를
보여 준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사정을 했지요."
왕중양과 임조영의 시선이 마주쳤다. 영주라는 곳에 이렇듯 기이한 일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천성이 남에 대해 미주알고주알하는 게 특기인지 심부름꾼이 더욱 열을 올리며 계속 나불거렸다.
"녹림대도가 그렇게 말하자 교자 안의 여인이 대답했습죠. 은자만 내면 자기 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고. 그러자 다시 녹림대도가 사정을 하니 여인은 다른 사람을 물리라고 했습죠. 녹림대도가 곧 여인의 분부대로 했습니다요. 그렇지만 기막힌 구경거리를 놔두고 어떤 놈이 물러가겠습니까? 오히려 히히거리며 자리를 뜨지를 않았지요. 그 강호객이 그중 한 놈의 뱃구레를 발로 걷어차 버리는 불상사까지 일어났지 뭡니까."
함창 신명을 떨어가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심부름꾼이 그 일이 눈에 보이는지 입을 헤 하고 벌렸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사태가 그렇게 되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겁을 먹고는 뿔뿔이 흩어지게 이르렀습니다. 드디어 문발을 거둔 여인이 녹림대도의 소원을 들어주었지요. 비록 면사포에 가려져 있었지만 대단한 미색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임조영이 궁금한 점이 있어 그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겁을 먹고 달아났는데 당신은 어찌 그것을 볼 수 있었나요?"
그러자 심부름꾼이 헤헤 웃었다.
"난 그때 주루 위에서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거든요. 나는 그 자가 오십 냥짜리 은자를 열 개나 내놓는 것도 똑똑히 보았어요. 그러자 여인이 면사포를 벗었어요. 그 자의 입은 술독만큼 벌어졌지만 곧 여인이 그만 가자고 하지 뭡니까. 헌데 교자가 꿈쩍도 하지 않는 거예요. 보니 그 자가 교자를 놔주지 않았는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더 가관이었어요. 자기는 원래 무림의 맹주가 되고자 이곳 영주까지 온 몸인데 다 집어치우고 은자로 여인을 사는 일에 목숨을 걸겠다지
뭐예요. 그 자가 품에서 은표) 열몇 장을 꺼내 보였어요. 여인이 그게 전부 얼마나 되냐고 물었어요. 오백 냥이라고 대답하자 여인이 자기 시녀 하나를 불러 자기들의 지니고 있는 은표 뭉치를 내보이라고 했어요. 시녀가 은표 뭉치를 꺼냈는데 어마어마한 액수였어요. 여인이 말하기를 그 은표를 줄테니 가서 다른 여인이나 알아보라고 했어요. 교자가 이윽고 움직이려는데 그 자가 교자를 향해 칼을 꺼내 들었어요."
말을 중단한 심부름꾼은 그후 어떻게 되었겠냐는 투로 왕중양을 쳐다보았다. 왕중양이 눈만 껌벅이자 다시 심부름꾼이 말을 이었다.
"그자는 그만 코를 땅에 박고는 엎어지고 말았죠. 여인도 또 그 누구도 그 자를 향해 손을 쓰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요."
그게 사실이라면 보통의 여인은 아닐 거라 여겨졌다.
"그래, 그 여인이 바로 저 아래에 와 있다는 말이요?"
왕중양이 운을 떼자 심부름꾼이 반색하며 받아쳤다.
"물론 그 여인이고말고요. 정말 대단한 미인입니다요. 여기 계신 분도 미모가 뒤떨어지지는 않지만……."
"그런데 그 여인은 왜 이곳에 와서 술을 마시나요? 혼자 온 건가요?"
임조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심부름꾼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왜 혼자겠습니까요? 처음엔 혼자 오는 것같더니만 그 후로는 여러 사람과 대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강호 사람들이죠. 그들도 처음에 여인과 생면부지인 처지였지만 차츰 가깝게 지내게 되었죠. 지금은 여인과 알고 지내는 강호객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예요."
도대체 누구일까? 왕중양과 임조영은 또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그토록 영주까지 와서 수많은 강호객들을 사귀는 여인의 정체에 대해 쉽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답답함만 늘어갔다.
심부름꾼이 나섰다.
"강호객들은 술을 마신 뒤 여인을 따라 어디론가 가곤 하는데 이상한 것은 그때마다 여인은 별로 취하지 않은 것 같고 오히려 취한 건 강호객들이었죠."
심부름꾼의 말에 왕중양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 한 번 그 여인을 만나보지 않겠어요?"
하고 제의를 한 것은 임조영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왕중양이 고개를 끄덕이자 임조영이 먼저 일어섰다. 왕중양도 뒤따라 몸을 일으켜 그녀와 함께 윗층으로 올라갔다.



제20장 다시 만난 의형제들
왕중양과 임조영은 나란히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 주루는 대단히 큰 규모여서 두 사람이 나란히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별로 개의치를 않았다.
이층에 올라간 두 사람은 눈앞의 광경에 약간 놀라고 말았다. 이층에는 강호 사람들로 보이는 인물들로 빈자리 하나 없이 들어차 있고 그 열기 또한 대단했다. 중간쯤에 아름답게 생긴 여인이 앉아 있고 그녀 주위로 한 무리의 시녀들이 서 있었다. 시녀들 역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미색이었다. 여인이 걸치고 있는 의복은 호화스러웠고 신발도 귀한 구슬들이 박혀 있어 미색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여인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임조영은 조금 무안
한 기색을 띠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 역시 왕중양 앞에서 그렇게 자신을 감추고 다녔기 때문이다.
수많은 강호객들은 여인의 손짓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면서 저마다 사내임을 뽐내고 있었다.
"난 이미 석 잔이나 마셨는데 어떠신가요?"
여인이 앞에 앉은 중년의 사내에게 촉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의 호의는 고맙습니다만 술이 너무 과해져서 그만두겠소."
"호호호, 그래요? 그것 참 모를 일이네요. 제가 알기로는 제갈풍운(諸葛風雲)씨께서는 미인과 마주앉아 큰 사발로 무려 열 차례나 술을 비웠다고 하던데요? 그래, 제가 그 여인보다 못하다는 말씀인가요?"
제갈풍운이라 불린 사내가 허허 웃었다. 십 년 전의 그 일이 떠올라 아주 흐뭇한 모양이었다. 그가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그런 게 아니라 내 나이가 원망스럽소. 그때처럼 청년의 나이였다면 몰라도……, 허허허."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한 젊은 사내가 제갈풍운의 웃음을 받으며 지껄였다.
"하하, 하긴 그렇겠네요. 제갈 노형의 나이는 이젠 좀 많지요."
제갈풍운이 인상을 썼다. 자기 입으로 나이가 어떻고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새파랗게 젊은 놈이 옆에서 이죽거리자 은근히 노기가 뻗쳤다.
"누군데 함부로 지껄이는 거요?"
제갈풍운이 버럭 화를 내자 젊은 사내 역시 뒤질세라 맞섰다.
"당신보다 젊은 사람이외다."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턱턱 발소리를 유난히 내며 제갈풍운 앞으로 다가왔다.
"제갈 노형, 나이가 많으니 적으니 하는 말은 내가 아니라 노형께서 먼저 꺼낸 것이오. 그리고 늙었으면 나이에 맞게 처신을 할 것이지 젊은 여인 앞에서 무슨 추태요?"
젊은 사내가 앞뒤 잴 것도 없이 빈정대는 투로 몰아붙이자 제갈풍운이 호통을 쳤다.
"아니, 이 건방진 놈이 죽지 못해 환장을 했나?"
어느새 뽑아든 검날이 섬뜩한 기운을 내며 젊은 사내의 가슴을 겨누었다. 그러나 미인 앞이라 그런지 젊은이도 굽신거리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허, 이런다고 내가 벌벌 떨 줄 아시오?"
젊은이와 제 손에 들려있는 검을 번갈아 보던 제갈풍운의 눈이 휙 돌아갔다.
"흥, 네 놈이 계속 날 깔보겠단 말이지?"
하며 검끝을 쿡 들이밀자 그제야 젊은이는 예전의 그를 떠올리며 조금 수그러드는 자세를 취했다.
"선배님, 저 미인에 비하면야 늙은 게 사실 아닙니까?"
제갈풍운이 검을 단단히 틀어쥐며 또 한 번 호통을 쳤다.
"뭐라구! 하기야 늙긴 늙었지만……."
제갈풍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인의 옥구슬 구르는 듯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오호호호, 제갈 대협님, 왜 이러세요. 저 사람 말이 틀리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제 눈에 그렇게 보이지만 않으면 되지 않겠어요?"
그러자 비로소 검을 거둔 제갈풍운이 여인을 돌아보았다. 비록 얼굴은 가리고 있으나 황홀함을 주기에 충분한 미색의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한풀 기가 꺾인 어조로 대꾸했다.
"아가씨의 말대로 난 늙었소. 하지만 다른 놈이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소!"
그러면서 그가 풀썩 주저앉았다. 자기가 던진 말 한마디에 사태가 평정되자 스스로 흡족해진 여인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누군지 내가 한 잔 마시면 자기는 열 잔도 더 마시겠다고 한 분이 있었는데 누구시던가요?"
여인의 말이 떨어지자 저쪽에서 한 사내가 고개를 쳐들며 일어섰다.
"바로 나였소이다. 아가씨가 원하시다면 독주라도 기꺼이 마시겠소."
"호, 그러나저러나 뭐라고 부르시나요?"
그러면서 여인이 눈을 묘하게 뜨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 요염한 자태는 사내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했다.
"나는 북방에서 온 조평(租平)이라는 사람올시다."
이내 주위가 술렁임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이 사내가 그럼 경성 4대 집안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던 그 독각대도(獨脚大盜) 조평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놀란 입을 좀체 다물 줄 몰랐다. 사람들은 조심스런 눈길을 조평에게 주었다.
조평이 좌중을 한차례 쓰윽 둘러보았다. 그는 매우 득의에 가득찬 표정이었다.
"저도 아직 아가씨의 이름을 모릅니다. 하지만 들리는 말로는 거리에서 사수양괴(泗水兩怪) 중의 하나인 대괴어령(大怪魚靈)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조평의 물음에 다른 사람들도 귀를 쫑긋 세우고는 여인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이면 어쩌자는 거죠?"
여인이 정색하며 그의 말을 받았다. 목소리에 냉랭함이 감돌았다.
"그 사수양괴는 만만치 않은 녀석들이지 않소?"
"그래요?"
여인이 피식 웃었다. 조평의 말에 그녀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그날 아가씨에게 맞은 그 놈이 반나절이나 길바닥에 누워 있었다니 정말 대단한 솜씨로군요."
조평이 눙치는 투로 얼른 그녀를 부추기며 나왔다.
"글쎄, 그 사람이 그까짓 은자로 내 몸을 사겠다고 하니 화가 이만저만 나는 게 아니었어요. 그래서 별 수 없이……."
왕중양은 이제서야 심부름꾼이 한 말이 사실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처럼 큰 일을 저질러 놓고도 태연하게 사내들과 노닥거릴 수 있다니 보통 여인이 아닐 거란 생각도 뒤를 이었다.
조평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사수양괴는 지금껏 남에게 꺾여 본 적이 없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놈들입니다. 이곳에 온 것도 사실은 무림의 맹주 자리를 차지해 볼 야심으로 온 것이지요. 그런데 아가씨에게 망신을 톡톡히 당했으니 모르긴 해도 가만있지를 않을 겁니다."
"그만 떠들고 앉아서 술이나 마셔요."
여인이 귀찮다는 기색으로 조평의 말을 툭 잘랐다. 조평은 무안하기도 하고 은근히 화도 나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 여인에게 수모를 당하니 여간 밸이 꼬이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뭇사내들이 어쩌면 여인의 편을 들고 나설지 모른다는 판단에 그는 노기를 억눌렀다.
"아가씨, 난 오직 그대가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이었소."
조평은 그 한마디만 던지고는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곤 술 두 잔을 쉬지 않고 입속으로 털어넣었다.
여인의 감드러진 웃음 소리가 뒤를 따랐다.
"호호호, 그래요.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그렇게 술이나 마시라고요. 일취해천수(一醉解千愁)라는 말도 있잖아요?"
"맞아. 일취해천수라! 거참, 멋들어진 말이로군!"
좌중에서 누군가 이렇게 맞장구치며 나섰다.
"나는 오늘날까지 강호에서 남에게 당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예요. 이렇게 집을 떠나서도 마찬가지였죠."
여인이 입을 열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녀의 말속에 행여 자기들이 기대한 것이 들어 있을까 귀를 기울였다. 혹시 그녀의 신분을 더듬어 볼 만한 것이 있나 해서였다.
그러나 여인은 이미 그같은 뭇사내들의 눈빛을 읽어 냈는지 한 마디로 일축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후에 꼭 알게 될 테니 서두르지 마세요. 설혹 사수양괴와 싸움이 붙는다 해도 저 혼자 나설 테니 여러분들은 염려 말고 술이나 마시라고요."
여인이 흐트러진 몸짓으로 사람들을 향해 한창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데 아래에서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그 거만한 계집이 어디 있냔 말이다!"
그 소리에 사람들은 잔뜩 긴장했다. 사수양괴가 쳐들어왔구나 하는 추측 때문이었다.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했지만 전혀 동요되는 모습이 아니었다. 꼼짝도 않고 앉아서 빈 술잔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곧 두 괴한이 쿵쿵 계단을 올라왔다. 여인에게 참패를 당했던 그 사내와 또 다른 사내였다. 수모를 당한 사내가 뒤의 사내에게 툭 내뱉었다.
"아우, 바로 저 계집이야. 저 계집!"
말하는 것을 보아서는 뒤에 있는 사내가 동생인 듯싶었다. 그런데 형뻘이 되는 사내가 일러바치는 것을 보니 동생이 더 무공이 뛰어난 모양이었다.
동생이 여인을 향해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네 년은 누구길래 우리 사수양괴를 우습게 보는 거냐?"
여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누군가 사이로 뛰어들었다. 조평이었다. 그가 여인을 대신해 사수양괴아 대적하려는 듯 자세를 취했다.
"이봐!"
조평을 뒤에서 제갈풍운이 불렀다.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뜻이었다.
"당신들이 정말 사수양괴가 맞소?"
여인이 여유 있는 태도로 물었다.
"우리가 누구든 상관 말아!"
"난 지금 여기서 호걸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 중이예요. 볼일이 있거든 술자리가 파한 다음 보기로 해요."
"……."
여인은 끝까지 애교와 거만함을 잊지 않았다.
동생 이괴(二怪)는 여인의 자태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형인 대괴(大怪)는 영 풀리지 않는 울화로 애가 타서 동생인 이괴에게 어서 손을 쓰라고 눈짓을 보냈다.
이것을 얼른 알아차린 여인이 이괴에게 눈웃음을 치며 다시 매끄러운 목소리를 뿌렸다.
"그래 당신이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요?"
이괴가 미적거리며 슬쩍 형인 대괴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뭐, 그럴 생각까지는 없고, 우리 형님이 아가씨의 어굴 좀 보자는데 너무 하지 않았나 해서……."
여인이 깔깔대며 웃음보를 터뜨렸다.
"언젠가 강회(江淮)로 오는 길에 또 신력(神力) 허명(許鳴)이란 사람이 그런 요구를 하더군요. 그래 난 은자 3천냥을 내면 응하겠다고 하였지요."
여인이 털어놓는 말에 사람들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신력 허명이라 하면 대력 허패의 동생인데 그 무공이 사수양괴보다 월등한 자였다.
"그 신력 허명을 내세워 우리를 눌러보겠다는 뜻이오?"
퍼뜩 정신을 차린 이괴가 여인을 노려보았다.
"호호, 그렇지는 않지요. 난 오직 그깐 은자 5백냥으로는 날 어쩌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네가 황후낭랑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무슨 낯짝값이 그리도 비싸? 도대체 얼마면 되는 게냐?"
"딱히 정해진 값이야 없지요. 내 마음에 내키는 사람에게는 한푼도 받지 않고도 보여 드리니까. 허나 그런 위인은 이 강호에서 꼭 세 분밖에는 없어요."
사람들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과연 이 여인이 강짜 한 번 부리지 않고 다소곳이 대한다는 호걸은 누구일까?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그 사람이 누구요?"
"어디 한 번 들어나 봅시다!"
"누구지?"
여기저기서 떠들어댔다. 왕중양과 임조영 역시도 여인의 말에 흥미가 일었다. 이 여인의 정체는 무엇이며 또 그 호걸들은 과연 누구 누구일지 궁금하기만 했다.
그러나 막상 말을 꺼낸 여인의 태도가 좀 이상해졌다. 긴 한숨만을 탁자 위로 길게 부려 놓으며 탄식을 하는 게 아닌가.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휙 돌아보던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하는 그 세 사람은 여기에 없어요."
"그럼 누군지 어서 속시원히 말해 보라구?"
이괴가 자기 가슴을 꽝꽝 내리치며 다그쳤다.
"내가 말한 그 세 분 중에 첫째는, 조금 전 영주 들판에서 천하 무림의 맹주로 추대되신 왕중양이예요. 그는 당대의 영웅이지요."
여인이 이윽고 입을 열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왕중양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터라 누구 하나 그를 놓고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또한 그 벌판에서 금나라 기병들을 물리치는 광경을 지켜본 사람도 끼여 있어 여인의 말에 고개마저 끄덕였다.
"왕중양이라면 이해가 가오. 그렇다면 두 번째 사람은 누구요?"
좌중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터졌다.
임조영이 미소를 머금으며 가만히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그는 굳은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임조영의 가슴에는 두 가지의 상념이 자리했다. 여러 사람들이 왕중양의 인품에 대해 존경하고 있음에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여인이 그를 알고 있다는 것에는 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여인이 두 번째 호걸에 대해 털어놓았다.
"두 번째 분은 비록 명성이야 왕중양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꽤 유명한 호걸이지요. 기실 난 이 두 번째 분을 더 좋아하고 있는데……."
여인이 갑자기 머뭇거리며 말을 중단했다. 그리고는 머리를 약간 숙였다. 사람들은 지레짐작으로 혹시 여인과 정분이 난 사내가 아닐까 해서 더욱 눈망울을 바쁘게 굴려 댔다.
"하지만 그분은 사내가 아니라 여인이예요."
이 말에 사람들은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여인을 좋아한다고? 뭇사내들의 표정에는 실망과 함께 묘한 기운이 교차했다.
"무공 역시 왕중양과 별 차이가 없는 임조영이라 하는 여인이죠."
순간적으로 왕중양과 임조영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눈동자엔 오직 한 사람의 형상만이 비쳤다. 이들은 곧 여인이 누구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해냈다.
왕중양이 속으로 뇌까렸다.
'내 예상이 맞다면 저 여인은……?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왔을까?'
반가움 때문에 그랬는지 임조영이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잠시만……."
왕중양이 슬쩍 그녀의 옷깃을 잡으며 만류했다. 이런 자리에서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임조영도 그런 왕중양의 의도를 간파했는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여인이 좌중을 향해 또 입을 열었다.
"또 다른 한 분이 있지요. 그러나 그 분에 대해서는 여기서 밝히지 않겠어요."
왕중양과 임조영은 그녀가 말하지 않은 세 번째 사람이 누군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만 두 사람을 밝히면서 굳이 모용준을 숨기는 까닭이 뭔지 의아스럽기만 했다.
사람들이 아쉽다는 듯 불만의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여인은 한 번 둘러본 시선을 거두더니 입을 굳게 다물었다.
"흥, 누군가 했더니 그 잘난 왕중양이었구먼!"
하고 흙탕물을 튀길 듯 하고 나선 사람은 이괴였다. 그는 왕중양이 그저 운이 좋아 맹주가 된 것이라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빈정대며 덧붙였다.
"만약 내가 왕중양을 죽이고 또 임조영인지 뭔지 하는 여인까지 목을 친다면 어떻게 하겠나? 그때는 내 말을 순순히 들어줄 텐가?"
"호호호, 그 재간으로 왕중양에게 덤비겠다는 말인가요? 또 그 잘난 머리로 임조영을 이길 수 있다고 믿나요?"
여인이 한껏 비웃으며 이괴를 놀려 댔다. 그러나 다짜고짜 여인에게로 이괴가 달려들었다. 동작이 크고 우수꽝스러웠지만 민첩하기 이를 때 없었다. 이괴가 여인의 어깨를 꽉 움켜쥐려고 할 때였다.
"어!"
이괴의 손은 여인의 어깨에 닿기도 전에 뻣뻣하게 굳어졌다. 누군가 그 짧은 틈을 노려 이괴의 혈에 손을 댄 듯싶었다. 이괴의 이마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누구얏!"
이괴가 목울대를 출렁이며 소리쳤지만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괴 곁에는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누가 이괴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이러고도 내 얼굴을 보겠단 말인가요?"
여인이 계속 쩔쩔매고 있는 이괴를 놀렸다.
"이그, 구미호 같은 네 년에게 잘못 걸려들어 내가 이 수모를 겪는구나!"
이괴가 고개를 뒤로 꺾으며 장탄식을 터뜨렸다.
"오호호, 그러지 마시고 보시고 싶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여인이 살짝 면사포를 들더니 이괴에게만 제 얼굴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이괴는 도깨비에게라도 홀린 듯 아무 말도 못하고는 목젓이 다 보일 정도로 입을 헤 벌렸다.
"이젠 되었나요?"
여인이 애교스럽게 한마디 건네자 이괴가 멍청한 표정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하루에 한 번씩 이곳에 들려 여러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왔지만 오늘은 기분이 썩 내키지가 않네요."
좌중을 향해 이렇게 인사를 마친 여인이 홀연히 계단 쪽을 향해 걸어갔다. 작고 어여쁜 발로 사뿐싸뿐 걸어가는 여인의 뒤태에 시선을 박은 뭇사내들은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사수양괴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침통한 기색을 감추질 못했다. 이 주루에 온 목적은 여인을 혼내주기 위함이었는데 영 뒤틀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기 형 대괴의 말만 믿고 따라왔던 이괴는 오히려 여인에게 반해 버린 상태였다.
"내가 몇 번이나 충고를 했더냐? 그 계집의 쌍판은 절대 볼 생각을 말라고. 그런데도……."
대괴가 옷자락을 툭툭 털며 신경질을 부렸다.
"씨끄럽소! 또 한 번도 그따위로 혀를 놀렸다가는 가만두지 않겠소!"
이괴가 성깔을 부리자 대괴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주루를 빠져 나와 거리 안쪽으로 들어섰다. 자기들이 묵고 있는 객점 안에 들어가니 웬 아리따운 젊은 여인 둘이 생글생글 웃으며 반겨 주었다.
"우리집 낭랑께서 두 호걸들을 뵙자는데 어서들 가시지요."
여인들의 나긋나긋한 말솜씨에 반한 이괴가 관심을 보였다.
"낭랑이 누구요?"
"호호, 금방 우리 낭랑과 만나시고도 모르신단 말씀인가요?"
이 말에 이괴의 가슴이 쿵쿵 다시 방아질을 해댔다.
"그래? 알았어. 우리 형님과 같이 간다고 일러라."
"우리 낭랑께서 이르시기를 오늘 밤 너무 적적하니 두 분을 급히 모셔 오라고 하셨거든요. 어서 가시지요."
지금까지 품었던 여인에 대한 반감 따위는 잊어버린 채 대괴까지 덩달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은 여인들을 따라 성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인적이 없는 곳에 이르자 차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우리를 어디까지 데리고 갈 셈이냐?"
이괴가 묻자 여인이 미소를 띠며 차분한 말투로 대꾸했다.
"우리 낭랑께서는 한적한 곳을 좋아하신다는 것도 모르세요? 사람들이 많은 곳은 공기마저 더럽다 하시어 낭랑께서는 피하십니다요. 호호호."
이들은 별 수 없이 여인들을 따라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여인들은 저희들끼리 웃고 까불면서 히히덕거렸지만 이괴나 대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들이 한참 만에 당도한 곳은 거대한 막사가 쳐 있는 곳이었다. 어마어마한 막사인데도 눈에 띄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점에 이들은 또 한 번 의심을 품었다. 안에는 촛불이 수없이 켜져 있어 대낮보다 더 밝았다. 그리고 사방에는 사내와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그림들이 현란하게 붙어 있었다. 그 음란한 그림들에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던 대괴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너희 낭랑이 정말 황비란 말이렷다!"
"자꾸 물으시면 안 되옵니다. 황궁의 깊은 내막을 알려고 하면 화가 미칠지도 모르니까요."
여인의 충고에 대괴는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 같아 더는 묻지 않았다.
이윽고 여인이 저쪽에서 걸어왔다. 그녀는 사수양괴를 보고는 방긋 웃으며 반겨 주었다.
"난 팔자가 기구한 여인이랍니다. 두 분을 여기까지 모셔온 이유는 긴히 드릴 청이 있어서인데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
이괴는 잠잠코 있었는데 오히려 대괴가 선뜻 나서며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분부인지 말씀만 하십시오. 우리 형제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만사 제쳐 두고 해올리겠소."
낭랑이 활짝 웃으며 반색했다.
"그럼 좋아요. 먼저 술부터 나누시지요."
섬섬옥수를 들어 여인이 대괴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이괴에게도 술을 권했다. 이괴는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이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술마저 사앙할 수는 없었다. 술잔을 단숨에 비운 이괴가 그가 처음으로 입을 떼었다.
"이제 그 청을 한 번 들어봅시다."
여인은 잠시 우물쭈물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곧 말문을 열었다.
"나는 인간 세상의 영화와 부귀를 다 누리는 사람이지만 한편 남의 시기와 모욕 역시 받고 있는 몸이랍니다. 두 분께서는 모두 천하 호걸들인데 나를 도와 이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여인의 말에는 애절하고도 촉촉한 슬픔이 담겨져 있는 듯했다. 무슨 어려운 부탁을 하려고 저러는가 싶어 여인의 입만 쳐다보고 있던 두 사람은 동시에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감지했다. 한잔 술에 벌써 취하는가 싶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정신이 몽롱하고 눈앞이 가물거리는 것이 이상했다.
여인이 면사포를 벗겨 냈다. 그리고 얼굴을 두 사람 가까이 들이대며 향기로운 입김을 토했다.
"두 분께서는 날마다 저를 보시기를 원하시겠죠?"
여인의 눈빛에 끌린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치 애욕에 불타고 있는 눈빛으로 두 사람은 당장이라도 이 여인을 안아 주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여인이 이괴의 입술 가까이로 자기 입술을 갖다대며 다시 향기로운 입김을 불었다.
"날 꼭 도와주셔야 해요."
이괴는 코끝을 간지럽히는 여인의 향기에 맥을 못 추었다.
"무…… 물론이지요."
"그럼 난 이제 다시는 울지 않을 거예요."
"울긴 왜 운단 말이요. 우리 두 형제가 이렇게 있는데. 걱정 마시고 우리들만 믿으시오."
대괴가 자신 있게 장담을 했다.
"정말 고마워요."
자리에서 일어난 여인이 두 사람의 손을 맞잡고는 천천히 뒤쪽으로 이끌었다.
"어디로 가는 거요?"
이괴가 눈앞으로 달려든 현기증을 팔로 휘저어 내쫓으며 물었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재미를 드리려고 해요."
더욱 요염한 자태를 뽐내며 여인이 두 사람의 팔을 잡아당겼다.
갑자기 사수양괴의 눈이 커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들을 에워쌌던 것이다. 사수양괴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했다. 이렇게 많은 여인들 속에 파묻히다니. 여인들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꿇은 자세로 열심히 혀끝을 놀려댔다. 그 혀는 양수양괴의 몸을 간지럽히며 때로는 짜릿한 전율마저 느끼게 해 주었다. 이들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여쁜 여인들은 하나같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얇은 망사로 된 옷만을 걸쳤을
뿐이었다. 백옥 같은 살결에다 보기만 해도 저절로 달아오를 듯한 풍만한 젖가슴…….
이들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골짜기로 하염없이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눈을 떠보니 눈앞에는 자그마하게 생긴 계집 하나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이들은 이제서야 자기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꿈이란 말인가?
"너희 낭랑은 어디에 있느냐?"
이괴가 오도카니 서 있는 계집에게 물었다.
"당신네들과 함께 계셨잖아요?"
오히려 되묻는 계집의 태도에 이괴가 발끈했다.
"잔소리 말고 어디롤 갔는지 어서 말하거라!"
그러나 계집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우리 낭랑이 뭐 당신네들 놀잇감인 줄 아시나요? 함부로 부르지 마세요."
"뭐라고!"
조그마하게 생긴 계집은 줄곤 쌀쌀맞은 태도로 일관했다.
"이제 다시는 낭랑을 볼 수 없어요. 또 한 번 보겠다고 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거예요."
이괴가 화를 벌컥 내며 계집을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괴는 맥없이 푹 고꾸라졌다. 오금조차 제대로 펴지 못하고는 누운 채로 버둥대기만 했다. 명치 끝이 칼로 쑤시는 듯하여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아악! 아이구!"
이괴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계집이 종알거렸다.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나 아세요? 강남 구신산(九呻散)을 먹었어요. 또 한 번 더 기운을 써보시지요.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구. 흥!"
이들은 심한 자괴감에 몸을 떨었다. 강호에서 알아준다는 자신들이 한탄 계집 앞에서 수모를 당하다니 하는 생각에서였다.
"너희들의 정체를 밝혀라! 혹시…… 강남 모용씨네 사람이 아니더냐?"
이괴가 아픔을 참아 가며 소리질렀다.
"그래도 아직 앞가름할 정신은 있나보죠? 알았으면 됐어요. 그리고 한 가지 몸을 쓰려고 하면 안 돼요. 화도 내지 말고 운기(運氣)나 연공(練功)을 써도 안 돼요. 열흘 동안 가만히 있어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당장 죽음을 부른다는 걸 명심하세요!"
자그마하게 생긴 계집의 입에선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지독한 함정에 빠진 것을 깨달은 대괴가 이괴의 손을 부여잡고는 통곡을 했다.
"아이고, 동생, 모두가 내 탓이야. 내가 그만……."
"형님을 탓할 수는 없소. 내가 경고망동을 해서……."
두 사람은 얼싸안고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계집의 싸늘한 목소리가 두 사람을 덮쳤다.
"이제부터 당신들은 모용세가의 사람이 된 줄 아세요. 이제부터는 대연국의 신하랍니다. 당신들의 시중은 내가 들어요."
계집이 무척이나 무표정하게 옷을 벗기 시작했다. 곧 강에서 방금 건진 물고기와도 같은 매끄러운 몸매가 드러났다. 계집이 두 사람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갖은 교태를 다 부렸다.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망각의 골짜기를 향해 들어섰다. 물리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두 사람은 서서히 계집을 껴안고는 욕정의 늪 위를 뒹굴었다.
최근 며칠 사이 영주에서는 밤마다 강호객들이 꽤나 없어지는 일이 벌어졌었다. 지금까지 무려 30여명이 넘는 호객들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는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어디로 갔으며 누가 데려갔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중양과 임조영은 기이한 모습을 하고 뭇사내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여인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다름아닌 둘째 아우 모용준의 여인인 자지였던 것이다. 자지가 왜 이곳 영주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무림대회에 참가한 모용준을 따라왔는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도 확실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모용준과도 헤어진 지 이미 오래라 그것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 모용준의 행방도 묘연한 지금 자지를 보게 된 것이 이들에게 기쁨이기는 했지만
모용준을 찾을 길 없어 내심 안타까웠다.
일단 두 사람은 모용준을 찾는 일이 급선무라 판단했다. 그래서 벌써 영주의 객점들을 모두 돌아보았다. 그러나 모용준은 없었다.
"둘째는 돌아간 게 분명해. 차라리 강남에 가서 둘째를 찾는 게 낫지 않을까?"
왕중양이 힘없이 말하자 임조영이 그러자고 했다.
이들은 곧 영주성을 나와 드넓은 평야 위를 걸었다. 인연이 묘해서 그랬는지 이들은 공교롭게도 대형 막사가 세워져 있는 그 앞을 지나게 되었다. 왕중양은 어느 부호가 노숙하고 있는 것이라 여겼다. 왕중양이 유심히 그쪽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괜한 말썽이 생길지도 모르니 우린 돌아서 가는 게 좋겠어."
임조영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어디선가 불현듯 요란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하하핫! 큰공자님과 셋째 공자님이 아니신가요? 왜 여기까지 와서 들어오시지 않고 그냥 지나치려 하십니까요?"
황급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니 뜻밖에도 일기충천 지청이었다. 두 사람은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 의아스럽기도 했다.
"우리 공자님께서 두 분을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두 분을 만나지 못하면 떠나지 않겠다고 하셨죠. 그런데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정말 반갑습니다요."
지청이 두 사람을 모용준의 처소로 안내했다. 막사 안에 있던 모용준은 두 사람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달려나왔다.
"아니 형님, 제가 얼마나 찾았는 줄이나 아십니까? 셋째도 역시……."
모용준이 두 사람을 막사 안으로 이끌며 사람들에게 일렀다.
"어서 주안상을 푸짐하게 차려 오너라! 우리 삼형제가 오늘 모처럼만에 회포를 풀어야겠다!"
세 사람은 마주 앉아 흥겹게 술잔을 들었다. 모용준이 두 사람에게 있었던 그동안의 일에 대해 궁금해했다. 왕중양이 사가자와 싸운 이야기를 하자 모용준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중원에서 뱀을 다루는 자가 몇 있지만 모두 개방 사람들인데 사가자란 이름은 처음 들어 봅니다. 중원 무림의 사람이 아니기 쉽군요."
"무심 공자를 따라다니는 걸 봐선 몽골에서 데리고 온 작자일 가능성도 있지."
왕중양의 발언에 모용준이 수심어린 낯빛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앞으로 그 자를 만나면 조심해야 할 겁니다. 타관에서 온 그런 자들은 중원의 뱀을 부리는 사람들과는 달리 더욱 사악할 테니까요."
술잔을 들려다가 멈춘 모용준이 말을 이었다.
"형님과 동생도 내 이 모용준이란 사람을 잘 알고 계시겠지만 난 목우와 주정의 일에 대해 분노하고 있습니다. 감히 형님을 해치려 들었다니 정말 화도 나지만 부끄럽기도 합니다. 처음엔 두 놈이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길래 정을 생각해서 멀리 쫓아버렸지요. 그러나 생각할수록 괘씸해서…… 그래 부하들을 시켜 이 두 놈을 다시 잡아오라 일렀지요. 하늘이 도왔는지 두 놈의 덜미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모용준이 기침을 두번 하자 일기충천 지청과 절금수 허불잉이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두 사람을 앞으로 밀치며 들어섰는데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뻔했다. 주정과 목우였다.
"자지가 저와 혼례를 치른 뒤 많은 일을 도와주었답니다. 역시 이번도 큰일을 했답니다. 영주에 와서 나름대로 방법을 써 저 두 놈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날 저 두 놈이 주루에 나타난 것을 잡을 수가 있었죠."
왕중양과 임조영은 모용준의 말에 퍼뜩 깨달은 것이 있어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그들은 말이 없었다.
"이 놈들, 어디 말해 봐라. 너희들에게 내가 섭섭하게 한 것도 없는데 어찌 형님을 해치려고 하였느냐?"
모용준이 곧 목이라도 칠듯 험악하게 꾸짖었다.
"흥, 그때 난도질을 해서 태호에 쳐박았어야 하는 건데. 그랬더라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테고……."
주정이 뉘우침 없이 고개를 뻣뻣하게 들더니 대들었다.
"난 공자님 혼자서 천하를 독차지하시라고 저 사람을 죽이려 했던 겁니다. 가만 놔두었다가는 필시 공자님과 천하를 다투게 될 테니 알아서 하십시오!"
이것은 목우의 협박에 가까운 말이었다.
"뭐, 내가 천하를 독차지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공자님의 속셈을 제가 모를 줄 압니까? 천하를 차지하려는 일념으로 모든 쾌락도 다 저버리고 있다는 걸. 에잇, 내가 그때 저놈을 한칼에 베어버렸어야 하는 건데……."
"이놈! 닥치지 못하겠느냐? 내 너희들을 수족보다 더 가깝게 여겼거늘 형님과 동생을 해치려 들다니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다시 뭐라고 말을 하려 했다. 그러자 모용준이 소리치며 외면했다.
"난 이제부터 너희들과 형제가 아니다!"
그리고는 어서 데리고 나가 목을 치라고 지청에게 명령했다. 지청으로서는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이들과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 사이로 지낸 터라 영 내키지 않았다.
"공자님, 이번만은 너그럽게……."
지청이 사정을 하자 모용준은 더욱 대노하며 두 눈을 부릅 떴다.
"듣기 싫다! 내 말을 거역한다면 너 역시 형제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동생, 그렇게 하게나. 저들을 용서해 주게나."
왕중양이 너그럽게 말하자 임조영도 거들었다.
"결과적으로는 우리들이 이렇게 무사하니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저들에게 이곳을 떠나 제 갈길로 가라 이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모용준이 흥분을 가라앉히더니 검을 쑥 뽑았다. 주정과 목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놈들! 똑바로 보거라. 이제부터 너희들과 나는 형제가 아니다. 이 검과 같이 제각기란 말이다!"
하고는 검을 두 동강내 버렸다.
"어서 사라져라!"
모용준의 말이 떨어지자 곧 이들은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고는 휭하니 나갔다.
모용준이 왕중양과 임조영을 향해 어두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왕중양이 이해한다는 뜻으로 지긋이 눈을 감았다.
지청이 화들짝 놀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고, 내 정신 좀 봐. 깜박 잊을 뻔했네. 70년이나 묵은 좋은 술이 있어요. 강남 홍사장(紅蛇杖) 여노파의 성친주(成親酒)이지요. 이렇게 삼형제가 모였으니 그 술을 마시며 마음껏 즐겨 보십시오."
잠시 후 지청이 고색이 만연한 술병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겉만 봐도 보통의 술이 아니라는 게 확연했다.
"예전의 강호 사람들은 그 괴상한 노파가 화김에 집을 몽땅 불살라버린 일을 모두 알고 있지요. 그 노파는 성깔도 그렇게 괴퍅하지만 술 만드는 법도 괴상하답니다."
지청의 말에 흥이 오른 모용준이 받아쳤다.
"그래? 어떻게 만든단 말이더냐?"
"예, 알려드리지요."
하며 지청이 그 술에 얽힌 이야기를 줄줄 외워 나갔다.
몇십년 전 무림에는 여소화(余小花)라는 기이한 여인이 살았다. 그녀는 송나라의 충신인 양계업(楊계業)의 부인 여색화(余색花)를 가장 흠모하였다. 그래서 이름을 여소화라 지은 것이다. 한창 피어나는 처녀 시절엔 이 이름이 좋았지만 늙어 주름이 가득하게 되자 걸맞지 않아 웃음거리로 남았다. 하지만 이 여소화라는 노파는 술빚는 기술이 특이하여 소문이 나게 되었다. 천하의 다른 술은 마시지 않을지언정 소화네 술은 꼭 마셔야 한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정말 그렇게 유명했단 말이냐?"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모용준이 묻자 지청이 제법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또한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여소화가 혼례를 치를 때 몸소 술을 스무 단지나 빚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요."
지청이 자신 있게 다시 술병을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이사람아, 스무 단지나 빚었다면서 뭐가 그리 값지단 말인가?"
왕중양도 모용준이 즐거워하자 한마디 던지며 기쁨을 함께하고자 했다.
"아닙니다. 열아홉 단지는 이미 남들이 다 마셔 버린 뒤고 유독 이 단지만 남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정말 귀한 술이겠네요?"
임조영이 짝 박수를 쳤다.
곧 지청이 옥으로 만든 술잔도 가져왔다.
"꼭 옥배로 써야 하나?"
왕중양의 물음에 지청이 또 씨익 이빨을 내보이며 웃었다.
"자, 술을 부을 테니 한 번 그 색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청이 네 개의 술잔에 찰랑찰랑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어때요? 이 술이 다른 술과 다르지 않습니까? 무엇이 다른지 한 번 자세히 살펴보세요."
지청이 너스레를 떠어대며 세 사람을 술잔 속으로 끌어들였다.




제21장 드러난 모용준의 야심
그 술은 정말 귀하고 값진 술이었다. 지청이 옥으로 만든 잔에 부은 술은 곧 호박(琥珀)이나 마노(瑪瑙)같은 신기한 색으로 변했다.
"공자님들, 이 색을 보세요. 천하의 다른 술은 안 마셔도 이 소하네 술은 꼭 마신다는 말이 사실이죠?"
지청이 열심히 침을 튀기자 모두들 수긍이 갔다. 이들은 곧 술잔을 들어 그맛을 음미해 보기로 했다.
"이젠 우리 삼형제가 헤어지지 말고 함께 지내도록 합시다!"
모용준의 말이었다. 왕중양과 임조영은 그말에 가슴이 복받치는 감동을 받았다.
임조영은 모용준의 우애에 새롭게 탄복했다. 왕중양도 속으로 모용준과 만난 기쁨을 깊이 다졌다.
'내가 이렇게 이들과 의형제를 맺은 게 천만다행이다. 이 동생들이 없었더라면 나 강호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임조영 그녀 역시도 왕중양과 뜻을 같이했다. 이들은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건배를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모용준과 지청은 술잔을 들고만 있을 뿐 입에 데지 않았다. 아까 처음 건배를 했을 때부터 술이 줄지 않은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섣불리 입 밖에 내어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왕중양과 임조영의 가슴에 차가운 바람이 일었다. 이들은 오랜 무인의 생활습관으로 얼른 정상적이지 못한 기운을 감지해 냈다.
"동생은 왜 술을 마시지 않는가?"
왕중양이 망설인 끝에 모용준을 쳐다보며 물었다.
"봐요, 저것들이 또 오는데 내가 어떻게 술을 마시겠어요?"
모용준의 낯빛이 달라지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돌아보니 어느샌가 주정과 목우가 다시 돌아와 있는 게 아니던가. 또한 이들은 왕중양과 임조영의 뒤에 서서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왕중양의 예감은 적중했다. 이들은 구태어 물어보지 않아도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임조영에게 짧게 눈짓을 보낸 왕중양이 몸을 솟구쳐 모용준을 덮쳤다. 그러나 이미 몸에 독기운이 퍼진 상태라 제대로 무공을 쓸 수가 없었다. 워낙 작은 체구의 모용준이 한 발짝만 움직였는데도 왕중양의 손길은 빗나가고 말았다.
바닥에 이마를 찧고 만 왕중양에게로 주정이 다가왔다.
"큰공자님, 여인이 그립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바닥에 입을 맞추려고 그러우?"
그가 왕중양의 목덜미를 잡더니 힘을 주어 일으켜 세웠다.
"태호에서 죽지 않았으면 큰 은혜를 입은 줄 알아야지 또 찾아와서 우리 공자님과 어쩌겠다는 거야? 죽지 못해 야단인가?"
"이 비열한 사람!"
임조영이 모용준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려고 했다. 모용준이 탁자 위에 올라섰다. 그러자 왕중양이나 임조영과 키가 비슷해졌다.
"그래, 난 비열한 인간일지도 모르지. 그리고 영락없는 난쟁이고."
모용준이 싸늘하게 말을 뱉으며 임조영의 얼굴로 손을 내뱉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모용준에게 철썩철썩 두어 차례나 뺨을 얻어맞았다. 그가 이처럼 변해 버릴 줄 몰랐던 두 사람은 이 상황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뺨을 얻어맞은 임조영도 할말을 잃은 채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모용준이 왕중양에게로 몸을 돌렸다.
"왜 내가 그대와 의형제를 맺었는 줄 아나? 난 너를 내 휘하에 두고 이용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헌데 '사별삼일(士別三日)이면 괄목상대(刮目相待)'라더니 그 주제에 천하 무림의 맹주가 되었지. 맹주? 좋은 말이지. 맹주면 무공이 대단할 텐데 어디 얼마나 뛰어나나 볼까?"
모용준의 손이 왕중양의 뺨을 향해 빠르게 들이쳤다. 왕중양의 머리가 심하게 돌아갔다. 그는 너무 어이가 없어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셋째, 우리가 그동안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 보군."
왕중양이 임조영에게 이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짓자 그녀는 치욕에 몸을 떨었다.
"네 이놈! 도대체 우릴 어쩔 셈이더냐?"
더 이상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왕중양의 목줄기가 붉게 변했다. 그러나 모용준은 가소롭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그럼 내가 말해주지. 난 우선 너를 폐인으로 만들 생각이다. 무공을 전폐시키고 내 말만을 듣는 꼭두각시로 만들 셈이다. 그렇게 되면 무림의 맹주는 사람이 바뀌겠지. 또한 난 언제부터인가 임조영이 사내가 아닌 것을 알았다. 비록 그녀가 자신을 내보여 그 의문을 확실하게 털어버릴 수는 있었지만 난 그전에 눈치채고 있었어. 덧붙여 말한다면 난 임조영의 미색에 마음을 두고 있는 지 이미 오래다. 하하하!"
모용준의 뒤에 장벽처럼 버티고 있는 네 사람도 냉소를 씹어댔다. 지청과 허불잉 그리고 다시 나타난 주정과 목우까지. 모용준이 허리를 굽혀 탁자 위에 있던 술잔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 술은 진짜 여소화네 술이지. 허나 좀 다르다면 내가 이 술에 약간의 약을 넣었다는 것. 그러니 너는 곧 몸에 지니고 있던 무공을 잃게 될 것이다. 고수라는 소리도 이것으로 영원히 끝이지. 하하하, 넌 범부속인(凡夫俗人)에 지나지 않게 될 텐데 심정이 어떠한가? 그 대신 맹주 자리는 그대로 갖고 있어도 좋아. 왜냐하면 그 자리에 앉아 내가 시키는 대로 일처리를 해야할 테니까."
다시 모용준이 썩 유쾌한 듯 허리를 펴고는 웃어댔다.
"대연의 복구가 비록 어렵다 할지라도 이 모용준이 무림 천하만 손아귀에 넣게 되면 어려울 것도 없으리라!"
모용준이 웃음을 거두고는 상기된 낯색을 보이자 네 사람이 무릎을 꿇고는 입을 모았다.
"폐하의 말씀 참으로 영명하나이다!"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두 눈을 조용히 감은 채 왕중양은 자신 앞에 닥친 난국에 대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먼저 배신감에 씁쓸하기만 했다. 어떻게 얻은 선천신공인데 제대로 한번 써 보지도 못하고 믿었던 사람에 의해 폐해진단 말인가. 왕중양은 슬픈 어조로 중얼거렸다.
"셋째, 입맛이 쓴 것이 달콤한 꿀이라도 마시고 싶군."
임조영은 애써 평정을 되찾으려는 왕중양의 심기를 읽어내고는 더욱 암담해졌다.
"모용준, 너 같은 소인배가 천하를 차지하겠다고?"
매서운 눈초리로 임조영이 쏘아보자 모용준이 허옇게 이빨을 드러내며 비웃었다.
"임조영, 그대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네 술에 탄 것은 또 다른 약이지. 우리 모용세가에서 전해져오는 구신산(九呻散)이라는 독약이야. 내 말을 따르면 너를 황후로 봉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 말에 추호의 거역을 보인다면 너 역시 왕중양과 마찬가지로 무공을 뽑아내 한낱 나약한 여인으로 만들 것이다."
"흥, 네가 나를 차지하겠다고?"
임조영의 반응에 모용준은 몹시 흥분되었다. 자신의 말을 거역하려는 사람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닥치거라!"
"너 같은 추악한 속물이 나를 얻을 수 있을까?"
"천하에서 내가 길들이지 못하는 계집은 없다. 그렇다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거라. 저게 누구인지를!"
모용준이 막사 밖에다 대고 소리치자 곧 누군가 들어왔다. 왕중양과 임조영의 눈동자가 심하게 동요했다. 그녀는 바로 자지였던 것이다. 그녀는 왕중양과 임조영이 처한 입장을 단번에 헤아리고는 모용준에게 따져 물었다.
"너무 하는군요. 제게 약속했잖아요. 이 두 분은 해치지 않겠다고."
모용준이 시선을 피한 채 내뱉었다.
"난 이들을 해치지 않았어. 난 오직 임조영에게 황후가 되라고 하였고 또 왕중양에게는 내 말을 듣겠냐고 했을 뿐이지. 아니 왕중양에게는 무림의 맹주가 꼭 되라고 했지."
자지는 피를 토하듯 울컥 치밀어오르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울었다.
"내가 잘못이야. 내가 먼저 알려 주었다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흑!"
임조영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모용준이 다가와 자지의 턱을 들어올렸다.
"자지, 그대는 나의 낭랑이 아니던가? 나와는 이미 일심동체의 관계인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 말만을 들어야 해. 알겠지?"
"아니야. 당신은 날 속였어요. 지금도 날 속이려 하고 있다구요!"
그녀가 더 서럽게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모용준이 지청에게 일러 뒤를 따라가 보라고 일렀다.
"형님, 죄송합니다요. 그동안 제가 자지를 너무 버릇없게 만들어놨군요. 용서하시지요."
넉살좋게도 모용준은 이렇게 지껄이며 왕중양의 눈치를 엿보았다.
"점점 악인의 모습을 닮아 가고 있구나!"
왕중양이 다시 눈을 감으며 탄식했다.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요? 무림의 맹주가 해야할 일을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 잔말 말고 내 말대로 하시오!"
그리고는 얼른 왕중양의 품 안에 있던 죽편(竹片)을 꺼냈다. 이것은 홍칠이 왕중양에게 준 무림 맹주의 신표였다. 이것을 지닌 채 무림의 사람들을 부르면 장강 남북의 호걸들은 모두 불러모을 수가 있기도 했다.
"임조영, 그대는 아직도 황후가 될 생각이 없는 건가?"
모용준이 임조영을 향해 음흉스런 눈빛을 뿌렸다.
"더러운 놈, 내 평생 사내를 만나지 못하는 일이 생겨도 너 같은 추물에게는 시선조차 줄 수 없다!"
"사내를 만나지 않겠다는 건 참 좋은 일이지. 하지만 나는 상대해야 될 것이다."
그는 왕중양과 임조영을 번갈아 가며 괴롭혔다. 이번에는 또 왕중양에게로 몸을 돌리며 씨부렁거렸다.
"형님, 내 말을 잘 들어 보우. 눈앞의 천하가 크게 어지럽고 무림의 인사들도 모래알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현실이오. 무림의 인사들이란 원래 모두 자기의 문파와 처세를 위해서만 목청을 뽑는 그런 인간들입니다. 형님이 비록 무림 맹주가 되었을지라도 기실 형식에 불과한 일이오. 형님이 호령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따를 것 같소? 어떻게 금나라 오랑캐를 내몰 수가 있겠소?"
왕중양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모용준의 짓은 쳐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지만 지금 하고 있는 말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묻어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강남 일대에 있는 금군은 몇십만을 헤아리는데 그들 대부분은 중심부에 몰려 있고 나머지는 분산되어 있는 형편이오. 그러니 각개격파를 한다면 그들을 치는 것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거라 보오. 물론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는 뒷짐을 진 채 제법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네 사람의 사내들이 그를 탄복과 경의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비록 난쟁이였지만 그의 통솔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떤 방법을 썼던지 간에 네 사람의 건장한 사내를 이토록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형님, 그러나 형님이 염려할 일은 아닙니다. 나에게 다 방법이 있으니까요. 강남에 있는 금군을 모두 소멸해버릴 방책이 있다고요."
한동안 입을 다물고 그의 말만 듣고 있던 왕중양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네가 금나라 오랑캐를 물리칠 수만 있다면 내가 맹주 자리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네가 만약 진심으로 그런 일을 한다면 난 기꺼이 너에게 자리를 양보하겠다."
그러나 임조영이 막아섰다.
"안돼요. 저 사람의 말을 믿지 마세요. 저 모용세가 사람들은 대대로 오직 황제가 되어보겠다는 야심으로 눈이 먼 사람들이예요!"
"정말 바보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모용준이 임조영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나 모용준은 어떤 선조들보다 총명하다는 걸 알아야지. 난 황제가 되기 전에 먼저 만백성을 위하여 좋은 일부터 많이 해놓으려는 사람이야. 내가 좋은 업적을 쌓아 두면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황제로 모실 게 아닌가."
모용준의 자신에 찬 웃음 소리가 다시 막사를 뒤흔들었다.
강남 강북의 모든 무림호걸들은 무림의 청첩을 한 장씩 받게 되었다. 각 무림의 제일인자들은 다음달 보름날밤에 정강(靜江)의 모용산장에 모여 좋은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어 보자는 내용이었다. 신임 맹주인 왕중양이 돌린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은 왜 하필이면 모용씨네 산장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강호의 많은 사람들은 모용세가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모용세가는 대대로 무림을 제 손아귀에 넣을 것만 염두에 두었기에 이들은 경계를 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신임 맹주 왕중양이 모용준과 의형제를 맺었으니 모용세가로 모이라고 한 것이 그리 무리는 아닌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배를 타고 또 걸어서 9월 15일 전에 모두 정강에 도착하였다. 모용산장으로 이들이 들어서자 가신들이 달려 나와 허리를 굽혔다. 지청과 허불잉 그리고 주정과 목우였다. 이 때문인지 모용세가에 대한 좋지 못한 평판을 말끔이 씻어 버리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은 비로소 마음을 놓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차츰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데 왕중양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신들과 이들을 부리는 모용준만이 보일 뿐이었다.
"모용 공자님, 왕중양 맹주님은 어디에 계시나요?"
한 사람이 어렵게 입을 떼었다.
"큰형님은 요 며칠 동안 새로운 무공 한 가지를 연마하느라 피곤한 탓인지 쉬고 계시지요. 대신 저희가 정성을 다해 모시겠으니 안심하시지요."
모용준의 태연스런 말에 사람들은 더 이상 묻지를 않았다.
강남에서 가장 성미가 불같아서 한곳에 오래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름아닌 흑도(黑道)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곳 모용세가에 와서 술이나 마시며 종일 앉아 있으려니 갑갑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중 조평(祖平)이란 자가 참다못해 지청에게 청을 했다.
"형님, 우리 답답해서 죽을 것 같소. 어디 좀 나가 놀 데가 없소?"
지청이 곧 이들의 뜻을 헤아리고는 반색했다.
"왜 없겠소. 저기 뒷산에 가보면 꽤나 흥미로운 곳이 있소."
조평이 이 말에 늑장을 피울 수가 없었다. 구미가 당겨 한 걸음에 지청이 일러준 뒷산으로 향했다. 대나무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몇 굽이를 돌려는데 웬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안 돼! 그러면 안 되지. 다시 해요."
이어서 깨르르 하고 웃는 여인들의 소리도 들려와 조평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는 삽시간에 가빠진 숨을 고르며 좀더 가까이 다가갔다. 대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그쪽을 살피던 조평의 입이 벌어졌다. 그곳에는 녹림 호걸 몇몇이서 역시 어여쁘게 생긴 여인들을 양쪽에 끼고 앉아 술판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여인들은 알몸이나 다름없는 얇디얇은 천조각만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조평은 헉 하고 차오르는 숨을 애써 누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바람에 여인들이 두르고 있는 천이 하늘거렸다. 그럴 때마다 여인들의 은밀한 부분이 보일락말락 해서 더욱 애간장을 녹였다.
'오, 이렇게 신나는 곳이 있어서 지청이 이곳으로 나를 보냈구나!'
조평이 옷미무새를 매만지며 헛헛 헛기침으로 자신을 알렸다. 그리곤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이 조평만 적적하게 떨구어 놓고 모두 이곳에서 재미를 보고 계셨군요? 나도 좀 끼여 주시구려."
그러자 퍼질러 앉아 여인들에게 지분거리고 있던 사내들이 환영을 했다.
"조평이로구만. 어서 오게나. 자네 몫으로 한 게집을 덜어 주면 되니까 어서 객고나 풀라구."
조평이 조목조목 아까이서 여인들을 감상했다. 모두가 천하일품의 미색을 갖춘 여인들이었다. 경성 회모루의 기생보다 더 요염하고 나긋나긋한 것이 사내들 애간장을 수없이 녹였을 그런 여인들이었다. 알몸으로 앉아 있는 것에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는 여자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조평은 그저 넋을 놓을 따름이었다.
그중 얼굴이 동글납작하게 생긴 한 여인이 다가와 양팔로 조평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으리, 반갑네요."
그러면서 그녀는 풍만한 젖가슴을 조평의 가슴에 바싹 들이밀었다. 뭉클한 것이 전해지자 조평이 꼭 소변을 보고난 사람처럼 후득 어깨를 한차례 떨었다.
"나으리, 가죽잔으로 술을 자셔보시지 않겠어요?"
여인이 애교를 떨어가며 조평에게 술을 권하려 했다.
"있는 재간을 어디 한 번 부려봐라."
"호호호, 나으린 시원시원하셔서 마음에 들어요."
여인이 호들갑을 떨며 잔에 가득 술을 부었다.
"나느리, 이 술을 어서 드셔보세요."
"물론 마시고 말고."
여인이 술을 한 모금 입에 물었다. 그리곤 입술을 오무려 내밀더니 조평의 입 속으로 뿜어 주었다. 술을 맏아 마신 조평이 감탄을 했다.
"허, 그 술맛 참으로 별미네!"
"근데 아직 가죽잔 맛은 못봤을 테지? 잘못하면 껌벅 취해 쓰러지는 수가 있다구."
강호객들이 이렇게 떠벌이며 웃어댔다.
"취하면 좋지요. 취한 상태로 여인을 안아야 제 맛이지."
조평이 히죽거리자 얼른 여인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인의 거동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조평의 눈이 찢어질듯 점점 커졌다. 여인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양쪽 젖가슴 밑을 모아 쥐었다.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하고 조평은 더욱 호기심이 동해 침을 소리나게 삼켰다. 여인이 다른 손으로 술주전자를 들더니 젖가슴 사이로 술을 부었다. 곧 그 계곡에는 큰잔 정도의 술이 고였다. 강호객들이 손뼉을 치며 흥을 돋구었다.
"허, 그 술잔 한 번 크네!"
한 강호객이 이렇게 말하자 여인이 가볍게 눈을 흘겼다.
"그럼 마실 땐 몰랐단 말이예요?"
곧 조평이 상체를 굽혀 여인의 젖가슴 사이에 부어놓은 술을 혀로 핥고 들이마시며 열을 올렸다. 그럴 때마다 여인이 간지럽다며 몸을 비비 꼬았다. 조평은 정신없이 여인의 젖가슴 사이에 코를 박고는 감빨아댔다. 여인의 체취와 어우러진 술맛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그래, 또 무슨 재간이 있더냐?"
입가에 술범벅을 한 조평이 신이 나서 여인에게 재촉했다. 여인이 생글 웃었다.
"나으리께서 좋다시면 제가 광기를 부리고 싶은데 역정내시지 않겠지요?"
"암, 어떤 재간이든 마음놓고 부려 보거라!"
여인이 곧 심부름하는 계집에게 물 한 대야를 떠 오게 했다. 조평이 다시 입맛을 다시며 여인의 행동거지에 눈길을 빼앗겼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여인은 민망하게도 여러 사람들이 빤히 보고 있는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밑을 씻는 게 아니던가. 그것도 뽀득뽀득 하는 소리를 내가며 정성스레 다리 사이를 물로 씻었다. 그러더니 여인이 훌쩍 물구나무를 섰다. 그런 다음 다리를 쫙 벌리고는 조평을 거꾸로 바라보았다.
조평의 눈을 커질 대로 커져서는 움직이질 않았다.
"나으리, 여기에 입을 맞춰 주시겠어요."
곧 계집이 술주전자를 들고 쪼르르 달려와 그녀의 은밀한 곳에 술을 따랐다. 조평은 처음 당하는 일이고 너무 황당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봐, 산전수전 다 겪어본 사내 대장부가 떨고 있는 건 아니겠지?"
강호객들이 부추기자 조평은 할 수 없는지 쭈뼛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여인에게로 다가간 조평이 다시 주춤했다. 여인의 그곳에 엉키듯 피어난 거웃을 보자 왠지 역겨운 기분이 들어서였다.
"저 힘들어요. 어서요?"
여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조평에게 안달을 했다.
"에라, 나도 광기 한 번 부려보자꾸나. 마시라면 마시는 게지."
하며 조평이 눈을 질끈 감고는 여인의 다리 사이에 코를 박았다. 그리곤 찍찍 주꺽주꺽 하는 요상한 소리를 내며 술을 빨아 마시기 시작했다. 한참 정신없이 술을 빨고 있는데 궤변이 일어났다. 갑자기 여인이 두 다리를 집게처럼 조평의 머리를 꽉 조였다.
조평이 허둥대며 외쳤다.
"어, 이거 왜 이래? 어서 놓지 못해!"
강호객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허리를 꺾었다.
"이봐, 그렇게 오래 있다가는 숨막혀 죽겠네. 자네의 그 재간은 놔두었다가 어디에 쓰려나? 계집의 다리 사이에서 죽었다는 말 듣기 전에 어서 손을 쓰라구."
한 사내가 이렇게 빈정거리자 다시 박장대소가 터졌다. 조평은 여인이 자기에게 묘한 장난을 걸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한편 모용세가에 이처럼 기막힌 재미거리가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미인과 함께 달을 보려고 하였더니 별 하나 없는 칠칠야밤이고, 미인과 함께 글을 쓰려고 했지만 등불이 꺼져 앞이 보이지 않아. 에라, 모르겠수다. 기왕 어두운 밤 남녀간에 할 짓이라고는 이짓밖에 없구나!"
신명이 나서 한차례 입을 놀려댄 조평이 여인의 그곳을 간지럽혔다. 손톱 끝으로 살살 긁어대고 또 꼬집어대자 여인이 두 다리를 풀고는 황급히 달아났다.
"어, 계집이 도망치네! 어서 붙잡지 않고 뭐해?"
한 사내가 깔깔대며 달아나는 여인을 가리키자 조평이 씩씩거렸다. 그런 농담이 아니더라도 여인을 이대로 놓칠 그가 아니었다. 이미 아랫도리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달아오른 그였기에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병아리 채는 매처럼 조평이 여인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와락 여인을 뒤에서 껴안은 조평이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다.
"요 불여우 같은 계집아, 가긴 어딜 간단 말이더냐. 나와 신명나게 놀아 보자구."
강호객 몇몇이 모용준을 찾아왔다. 이들은 모용세가의 공자와 함께 뒷산에 가 달빛을 즐기고 싶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 그 달빛 아래에서 여인들을 끼고 진탕 재미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모용준의 방에 들어선 이들은 놀라움과 먼저 마주치게 되었다. 모용준은 그 좋은 흥미거리를 마다하고는 혼자 앉아 사색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강호객들은 이해가 되지 않아 조심스레 물었다.
"공자님, 한 나라와도 견줄 만한 재부를 갖고 계시면서도 이렇게 고독하게 계실 게 뭡니까?"
그말에 모용준이 깊은 사색을 털어내며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난 이렇게 혼자 있는 게 좋소. 나의 선조들 역시도 이렇게 청빈한 자세를 잊지 않고 살아왔소이다. 내가 선조들 만한 위업은 못 이룬 채 오히려 그들보다 더 큰 향락만을 누린다면 그게 도리겠소?"
그런데도 강호객들은 강가의 모래알보다 많은 날들이 있는데 어떠냐, 대사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은 나가 놀자며 모용준을 회유했다. 모용준의 고집은 대단했다. 그는 침대 위에 앉은 자세를 풀지 않고 끝까지 이들의 말을 거부했다. 강호객들이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는 돌아나왔다.
강호객들이 나간 뒤에도 모용준은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주위는 고요했다.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뜬 그가 사위를 슬쩍 살폈다. 그리곤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만졌다. 그러자 침대가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 후 침대는 다시 제 위치로 올라왔지만 이미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용준은 지하에 있는 궁전으로 향했다. 수많은 여인들이 그를 반겨 주었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여인 중 몇몇이 자리를 비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강호객들은 모두 잘 녹여 놓았겠지?"
모용준이 묻자 한 궁녀가 허리를 숙였다.
"폐하, 그들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옵니다."
"강호의 인간들이란 쉽게 녹아버리고 또 나가떨어지는 법이니라. 그러나저러나 금군은 지금 어디에 있다더냐?"
이번엔 다른 궁녀가 아뢰었다.
"신첩이 염탐해온 대로 말씀을 올린다면 금군은 지금 여기서 60리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사옵니다. 기껏해야 사오백 명 안팎이라 그닥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물리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모두 전멸시켜버려야 하는데 겨우 그 정도의 무리밖에는 모여있지를 않다는 말이더냐?"
모용준이 아쉽다는 투로 인상을 썼다. 또 다른 궁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앞으로 나섰다.
"폐하를 따르면서부터 지금까지 신첩은 하루도 그 원수를 잊어 본 적이 없사옵니다. 오늘 폐하께서 오랑캐 무리들을 치러 가신다면 이 신첩은 기필코 앞장을 서 놈들을 무찌르겠습니다."
단호한 자세를 보이는 궁녀를 따라 모두가 이궁동성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허리를 숙였다.
"금나라 오랑캐들은 우리 중원을 침범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죽였다. 그 해를 입은 집안이 어디 너희 뿐 이겠느냐? 난 중원에 침노한 오랑캐 무리들을 전멸함으로써 너희와 중원 모든 백성들의 원한을 갚을 것이다!"
결의에 찬 모용준 앞에서 모두들 숙연해졌다.
"낭랑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모용준이 물었다.
"지금 후궁에 계시옵니다만 요사이 심기가 좋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음…… 짐이 후궁으로 가봐야겠다."
후궁 역시 지하통로로 이어져 있어 깊고도 음침한 분위기에 덮여 있었다. 이 후궁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개의 방을 거쳐야 하는데 이곳에는 모용준의 총애를 기다리고 있는 궁녀들이 기거를 했다. 그리고 이 방들 가운데 조금 다른 형태를 하고 있는 곳도 있었다. 사각으로 된 방으로 조롱처럼 철창이 나 있어 자유스럽지 못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는 한 여인이 조각상처럼 꼼짝 않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로 다가온 다른 여인이 철창 안에 대고 말을 건넸다
"어떠세요?"
철창 안에 앉아 있는 여인, 즉 임조영은 지금 정력을 써 운공(運功)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방금 자신에게 말을 건넨 여인을 거들떠보지도 않고는 싸늘하게 뇌까렸다.
"난 너와 말하고 싶지 않다."
임조영의 냉대에도 자지는 애써 미소를 잃지 않았다.
"화를 푸세요. 그리고 저는 긴밀한 말을 전하려고 이렇게 찾아왔답니다."
"할말이 없다는데도!"
임조영의 온몸에서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저 역시 처음엔 그 사람이 좋은 분인 줄로만 알았어요. 처음 그는 중원에서 자기가 큰일을 해낼 테니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웃기는 소리군. 그따위 인간이 큰일을 한다구?"
"그건 모르는 말씀이예요. 모용 공자님은……."
"듣기 싫다. 그 소인배와 다름없는 자의 이름을 꺼내 내 귀를 더럽히지 마라!"
임조영이 언성을 높였다.
"제 말을 들어보세요. 그 사람이 하려는 큰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금나라 오랑캐들을 몰아내고 중원을 회복하자는 거예요. 그는 또 중원의 여러 주(州)의 수재민들을 구제하는 등 좋은 일들을 적지 않게 했답니다. 비록 그의 수단이 옳지는 않지만……."
"넌 정말 그 사내에게 홀려도 단단히 홀린 모양이로구나.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가는 그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제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아요. 난 오로지 언니가……."
언니? 임조영은 자지의 말에 당황했다. 또한 조금 마음이 흔들리려고 했다. 그러나 얼른 그같은 미온적인 태도를 털어냈다.
"왜?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다고 하더냐?"
"그런 말은 아직 못 들었어요. 그렇지만 난 그 사람의 성미를 알아요. 언니가 말을 끝내 듣지 않으면 해칠지도 몰라요. 그 사람은 언니가…… 다른 사내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자지의 한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입을 굳게 다물고는 있는 임조영 역시도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하하, 역시 서궁낭랑은 다르다니까! 내 마음을 어쩌면 그토록 잘 헤아리고 있는지."
호탕한 웃음을 앞세우며 나타난 사람은 모용준이었다.
"동생, 좀 어떤가?"
그는 기분이 좋은지 임조영에게 툭 내뱉으며 다가왔다. 임조영은 자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시선조차 주지 않고는 발끈했다.
"어서 날 풀어줘라! 그렇지 않으면 난 너와 사생결단을 내릴 것이다!"
모용준도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손을 들어 궁녀들을 불렀다. 궁녀들은 벌써 모용준의 의도를 간파하고는 의자 하나를 재빨리 대령했다. 그 의자 위로 거드름을 피우며 앉은 모용준이 다시 입을 벌렸다.
"동생……."
"집어치워! 동생은 누가 동생이란 말이요?"
"우리가 의형제를 맺은 걸 벌써 잊었나?"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동생, 그러지 말고 나를 이해하게. 잘못하는 점이 있다면 내 기꺼이 반성을 하겠네.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이 더욱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정말 뻔뻔한 사람이로군요?"
임조영이 코웃음을 쳤다.
"하하하, 그래 난 뻔뻔한 사람일런지도 모르지. 또 우리 모용세가가 아직도 망하지 않고 있는 이유도 이 뻔뻔함 때문일 테고……."
모용준은 임조영의 반응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슬쩍 자지를 껴안았다. 자지가 그를 뿌리치려고 애를 썼다.
"난 그대 임조영을 처음 보았을 때 속으로 다짐했었지. 만약에 여인이라면 꼭 자지와 함께 내 손에 넣고 말겠다고. 그 바램과 추측은 운좋게도 맞아떨어졌지 뭔가? 지금 이렇게 두 사람을 곁에 두고 있으니 하하하!"
"꿈을 꾸고 계시는군!"
"하하하, 그리고 또 한 가지 난 그대와 이 자지를 동시에 황후에 봉하려고 하지."
그러더니 모용준이 자지의 볼을 어루만지며 히죽거렸다.
"어서 내 앞에서 사라져!"
"아니, 나더러 어디로 가란 말이야?"
철창을 부여잡고 있는 임조영의 손이 떨렸다. 이 철장만 없었더라면 벌써 모용준의 가슴에 검을 박았을 것이다.
"내 그만 농짓거리를 거두고 한 가지 묻겠는데 대답할 수 있겠소?"
모용준이 안색을 싹 바꾸며 조용히 물어왔다. 그러나 임조영의 가슴에는 이미 그가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임조영이 화기를 내리눌렀다.
"강호 무림을 위해 큰일을 해볼 생각이 없소?"
뜻밖의 제의였지만 임조영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또 악인의 탈을 쓰고 술수를 부리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지금 무림에서 가장 시급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 금나라와 맞서 싸우는 것이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를 도와 금을 물리치는 일에 힘을 쓰지 않겠소?"
점점 가관이 아닐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성미가 곧은 그녀로서는 어떠한 말도 곧이 들리지 않았다.
모용준의 말은 계속되었다.
"셋째, 난 큰형님과 언약이 이미 다 돼 있다네. 큰형님은 내가 무림을 지휘하여 금나라와 대적하는 것을 찬성했다고. 또한 그렇게만 하면 전에 있었던 일은 모두 잊는다고 다짐까지 하셨다네."
그러나 그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임조영이 자지의 태도를 은근히 살폈다. 자지의 고개가 아래위로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왕중양이 정말 이 비열한 인간과 손을 잡겠다고 했다는 말인가. 임조영은 혼란스러웠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모용준에게 맹주 자리를 대신하게 하여 사람들을 제멋대로 지휘한다면 큰 낭패만 불러올 게 분명했다.
"솔직히 말해 난 이번 일로 큰형님에 대해 대단한 존경심을 지니게 되었지. 허나 큰형님은 무공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어 안타까울 뿐이라네. 하지만 내가 약속을 드렸지. 오랑캐를 물리친 다음에 꼭 형님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천하 무림에 어느 누가 있다고 해도 이 일을 성사시킬 수는 없지. 나와 큰형님을 제외하고는 절대 성공할 수가 없어."
임조영의 눈에는 그저 자신의 열등감에 사로잡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비칠 뿐이었다. 임조영이 열쩍은 태도로 일관하자 다시금 모용준이 물었다.
"정말 내 황후가 되기 싫은가?"
"꿈에서 어서 깨어나시지!"
"하하하! 정말 바보로군. 세상의 여인들이 모두 내 발에 입을 맞추려고 안달인데 이해할 수가 없어."
차라리 미친 사람이라고 해야 옳을 듯싶었다. 갑자기 우울해진 모용준은 자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훌쩍거렸다. 그러면서 울음기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럼 왕중양만을 생각하겠단 말이지?"
임조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군. 하지만 이젠 소용이 없어. 그 잘난 왕중양은 이제 폐인이나 다를 바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야. 나약한 궁녀 하나만 보내도 그를 죽일 수 있게 만들었으니 이 일을 어쩌지?"
겉으로는 빈정대는 모습이었지만 그 속에는 형용할 수 없는 분노와 증오가 번뜩거렸다. 그런 모용준의 모습을 바라보는 임조영의 가슴 역시도 분노로 타올랐다.
자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그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를 한쪽 팔로 안아주고 있는 자지 역시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어린아이를 품에 넣은 어머니와도 같은 자애로운 표정이었다.
"가서 그만 쉬도록 하세요. 지쳐 보여요."
스스럼없이 따뜻한 말을 흘리고 있는 자지에게서 임조영은 낯설고도 섬뜩한 기운을 감지했다.
모용준이 떨리는 손으로 자지의 앞가슴을 더듬었다. 자지의 봉긋한 젖가슴을 손에 넣은 모용준이 정신없이 주물러댔다. 그러면서도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자지가 모용준을 감싸 안은 채 지하 통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




제22장 철의법왕과 맞선 왕중양
보름날 밤이 되었다. 모용세가에는 이미 강호의 호걸들이 흑도와 백도를 가리지 않고 몰려든 상태였다.
"이렇듯 많은 강호의 인사들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왕중양의 공덕이요!"
소림사에서 온 지비 대사(智悲大師)가 이렇게 감탄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무당파(武堂派) 운심도장(雲心道長)이 그의 말에 쌍지팡이를 짚고 나섰다.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니요. 왕중양이 아니라 지비 대사께서 불렀어도 금나라 오랑캐를 치자는 것인데 누군들 오지 않겠소?"
여기저기서 껄껄 웃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두 사람의 말이 다 일리는 있지만 어쨌든 뜻은 하나라 괘념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모용 공자가 미인계를 써서 흑도 사람들을 꼬드겨 내고 있다는데 사실인지 모르겠소?"
지비 대사가 의문을 제시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흑도의 사람들이야 우리와는 좀 다르지 않습니까? 무슨 짓을 하든 간에 금나라 오랑캐를 족치겠다면야 상관할 게 못 되지 않소?"
운심도장의 시큰둥한 대답에 지비 대사가 맞장구를 쳤다.
"하긴 제형의 말씀도 일리가 있소이다."
상좌에 있던 모용세가의 가신 일기충천 지청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러 영웅님들, 좀 조용히 합시다!"
그러자 좌중에서 웅웅대던 말소리들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모두들 앞쪽을 향해 주목했다.
무림의 맹주 왕중양은 한복판에 앉아 있고 그 곁에는 모용준이 위엄 있는 자세로 서 있었다. 자격을 굳이 따지자면 모용준이 왕중양 곁에 서 있을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이곳이 모옹세가이고 또 그에게 페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여러분, 맹주님께서는 요 며칠 무예를 연마하시느라고 지치셨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저희 모용 공자님께서 대신 말씀이 있겠습니다."
지청이 다시 좌중을 넓게 돌아보며 주의를 모았다. 왕중양이 힘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곧 만면에 희색을 띤 모용준이 몇 걸음 나서더니 사람들을 향해 읍을 했다.
"저희 모용세가가 이런 백년일우(百年一遇)의 대사로 여러분들을 이렇게 모시게 되어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모용준이 한껏 겸손한 인사말을 내뱉자 좌중에서 누군가 이죽거렸다.
"그런 인사치례는 그만두고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시오!"
모용준은 도량이 깊은 사람처럼 쓰윽 그쪽을 돌아보며 의연한 자세를 잊지 않았다.
"일깨워주셔서 고맙소.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밤 달빛이 휘엉청 밝으니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하실 줄 압니다……. 여러분, 맹주님의 분부가 계셨습니다. 오늘밤 정강부(靜江府)에 다녀와야겠소이다!"
사람들은 그게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오늘밤 진정 거사를 치룰 작정이로구나. 하는 긴장된 가운데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강호에서 난다 긴다 하던 사람들인데 며칠 동안 하는 일 없이 빈둥대다보니 좀이 쑤셨던 차였다. 그러니 거사가 임박했다는 말에 이들이 흥분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곳에 금나라 오랑캐들이 도대체 얼마나 있다고 합니까?"
누군가 큰소리로 물어왔다.
"그곳의 금군은 사오백 남짓밖에는 되지 않지만 제법 지위가 높은 장수가 몇 있습니다. 우선 그놈의 목을 따서 금군들의 전의를 떨어뜨리는 것도 좋은 계략이 될 겁니다!"
모용준이 소신 있는 의견을 내놓자 좌중에서 찬동을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옳소! 놈들을 편히 잠자게 내버려둘 수는 없소. 당장 쳐들어가 가차없이 놈들의 염통을 창에 꿰어 큰거리에 걸어 둡시다!"
기다렸다는 듯이 모용준이 맹주의 영기(令旗)를 들어 보이며 목청을 뽑았다.
"우리 형님의 분부입니다. 한 갈래 사람들이 먼저 정강부 앞에 이르러 불을 지르고 성문을 열도록 합시다. 그 다음 모두 돌격해 들어가는 겁니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불붙는 사이 다른 곳에선 도적질을 한다는 식이 되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발각된다면 당장 목을 베어버릴 테니 그리 아시오!"
모두들 엄숙한 자세로 모용준의 말을 경청했다. 모용준은 맹주 왕중양의 명령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사람들에게 일곱 갈래로 나누어 진공하게 일렀다. 이 전략을 들은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왕중양의 능력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보름달은 정강부의 하늘에도 높이 떠 한층 밤을 무르익게 만들었다. 정강부의 지부(知府 ; 관명) 여광(呂광)은 금군 장수 셋을 불러 여흥을 베풀었다. 네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자 지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세 분 장군님들께서 오늘 저녁을 마음껏 즐기도록 제가 계집 몇을 부를까 하옵니다만……."
몸집이 우람한 금군 장수 올리요(兀里夭)가 그말에 입이 떠억 벌어졌다.
"하하하, 그런데 지부 어른께서 우리의 취향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마 모른다고 할 수 없었던 지부가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알지요. 알다뿐이겠습니까? 그저 분부만 내리시지요."
"이 사람은 술도 좋아하고 미녀도 좋아하지요. 그러니 술도 주고 미녀도 주되 살점이 넉넉한 계집으로 안겨 주시오."
울리요가 자기 편 장수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껄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장수 역시도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이 동생은 좀 다르외다. 허리가 가는 미녀만 있으면 되는 사람이지요. 허리가 가늘면 가늘수록 좋아한다니까요. 그리고 나는 하나 갖고는 안 되니까 둘을 주시오. 둘! 하하핫!"
지부는 이들의 비위를 마주느라고 즉 관기 넷을 불러들였다.
송나라 때 부(府)마다 교방(敎坊)이 있었는데 바로 관기들이 있는 곳이었다. 관기들은 대부분이 죄를 범한 관리들의 처나 딸이었다. 그리고 더러는 백성들 중 호구지책으로 자원해 들어온 여인들도 끼여 있었다. 그들은 보통 때는 술좌석에 나와 기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거나 술시중을 드는 일을 했지만 몸마저도 마다않고 내주었다.
오늘 이 오랑캐 장수 셋은 노래나 기녀들의 연주를 듣자고 부른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기꺼이 객고를 풀 요량으로 기녀들을 청한 것이었다.
이윽고 기녀들이 엉덩이를 흔들어 대며 나타났다.
한층 술판은 흥이 뜨겁게 무르익어 갔다. 몇 순배 술잔이 돌자 올리요가 더는 못 참겠다며 죽는 소리를 했다.
"안 되겠어. 어서 한 번 진탕 놀아보자구."
"장군님은 어떻게 노시겠습니까요?"
지부가 옆에서 부추겼다.
"저 달을 보라구. 저 밝은 달빛 아래서 한바탕 놀아 보는 거야."
올리요가 두 명의 기녀들을 덮쳤다.
"어머, 안으로 들어가서 이러셔야죠? 호호호."
몸이 실한 기녀가 억지웃음을 말끝에 달았다.
"안돼! 난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게다."
올리요는 벌써 기녀의 품안으로 머리를 들이밀고는 열심히 더듬어 갔다.
"장군님, 무엇을 그리 찾으십니까?"
지부가 물었다.
"달…… 달을 찾고 있지."
"달이야 저 하늘에 떠 있지 않습니까?"
"야! 찾았다! 봐 이게 여인의 달이라구."
올리요가 기녀의 젖꼭지를 손으로 집어 들어 보였다.
"동그랗게 생긴 달이 여기도 있잖은가?"
그말에 지부가 히히히 이빨을 내보였다.
이즈음 금군의 진영에서는 수상한 그림자가 달빛에 희끔희끔 드러나고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였는데 진영 안을 기웃거리다가 파수꾼에게 발각이 되고 말았다. 놀란 파수꾼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누구얏!"
그러는 사이 그림자 하나가 번개같이 날아 소리지른 파수꾼의 가슴에 칼을 박았다.
"도적이야!"
그가 쓰러지면서 비명을 지르자 다시 다른 그림자가 장을 날려 놈의 머리를 박살냈다. 이것이 신호였다. 일단 파수꾼을 내친 그림자가 신호를 보내자 수많은 그림자가 진영 안으로 물밀듯이 밀려 들어갔다.
한창 정신없이 술을 마셔대던 금군들은 미처 취한 몸을 일으켜 세우기도 전에 비명을 남기며 고꾸라졌다. 어떤 자들은 그래도 자세를 수습하고는 칼과 창을 내던졌다. 하지만 돌격해 들어오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게는 역부족이었다.
"자, 받아랏!"
돌격해 들어오던 무리에서 장이 뿜어졌다. 창을 막 던지려던 자는 그 자리에서 머리가 터져 널브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금군은 모두 쓰러졌다. 이 싸움을 지휘한 사람은 일기충천 지청이었다.
"놈들의 수금을 싸 갖고 갑시다!"
지청이 말하자 사람들이 금군의 막사를 칼로 베어내어 놈들의 머리들을 챙겼다. 금군의 진영에서 나온 지청과 강호객들은 막사에다 불을 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올리요가 기녀를 끌어안고 한바탕 열을 올리고 있는데 지부가 혼겁하여 소리쳤다.
"저길 봐요! 저…… 길!"
지부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는데 곧 아래로 허물어질 듯했다. 그 바람에 올리요는 벌거벗은 채로 우뚝 몸을 일으켰다. 병영 쪽에서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이 보였다.
"우리 진영이다!"
나머지 사람들도 그말에 기겁을 하고는 서둘러 병장기를 집어 들었다.
이때 이들 앞으로 낯선 사람들 몇이 불쑥 나타났다. 이들은 말도 없이 서서 오랑캐들이 옷을 주워 입기를 기다렸다. 이들 속에는 도사도 있고 중도 끼여 있었으며 험상궂게 생긴 강호객들의 모습도 더러 보였다.
올리요가 낭아봉을 거머쥐고는 호통을 쳤다.
"뭣하는 놈들이냐!"
그러나 나머지 두 놈들도 재빨리 칼을 들이댔다. 놈은 먼저 앞에 서있는 소림사의 지비 대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지비 대사는 태연하게 나무아미타불을 읊으며 두 손을 마주하고 합장했다. 놈이 내리친 칼은 어느새 그 손바닥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얼마나 큰 힘이 들어갔는지 놈은 칼을 거두지도 못했다.
"내 칼을 받아랏!"
다른 놈이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다. 지비 대사가 얼른 잡고 있던 칼날을 작신 부러뜨렸다. 이것을 본 다른 놈이 주춤 걸음을 세웠다.
올리요는 사태가 범상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너희놈들은 도대체 누구냐? 누구인데 감히 대금국의 장수들에게 덤비려는 거냐?"
낯선 사람들 중 하나가 툭 하고 가지고온 보따리들을 그의 앞으로 내던졌다. 피가 흠뻑 젖어있는 그 보따리가 흩어지면서 데굴데굴 금군의 머리가 굴러 나왔다.
"자 똑똑히 봤을 테니 각오들 해라!"
이 말에 올리요가 떨리는 손으로 낭아봉을 꽉 움켜쥐었다.
"네 놈이 누군데 대금국에 맞선단 말이더냐?"
"이놈아, 중원무림이 오늘 맹주의 명령 아래 금나라 오랑캐를 멸살시키려 왔다!"
이 무리의 통솔자로 보이는 사내는 득의양양하게 외쳤다. 올리요는 약이 올라 두 눈을 매섭게 뜨더니 낭아봉을 휘둘렀다. 그러자 통솔자로 보이는 사내가 어깻죽지를 감싸 쥐고는 약간 비틀거렸다. 칠십 근도 더 되는 올리요의 낭아봉에 맞았는데 어찌 그 충격이 크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사내는 곧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울리요를 노려보았다. 오히려 몸을 사린 것은 올리요였다.
"네 놈은 누…… 구길래 내 낭아봉을 맞고도……."
그러자 사내의 찌렁찌렁한 목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그깐 낭아봉으로 나를 칠 수 있겠느냐!"
올리요가 도망치려 하자 지부가 그의 옷자락을 잡고는 늘어졌다.
"장군님, 가시려거든 저와 함께……."
올리요가 지부를 떠밀었다.
"어쿠!"
뒤로 나가떨어진 지부가 허둥대는 틈을 타 올리요가 내빼려고 했다.
"어디 가려고!"
올리요 앞에 웬 사내가 산맥처럼 막아 섰다. 올리요는 다리를 심하게 떨며 그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폈다. 사내가 올리요의 덜미를 잡아 허공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이 놈! 네 놈이 그 사악하기 그지없는 오랑캐 놈이렷다!"
그러나 올리요는 끝까지 체면을 차리려는지 데롱데롱 매달린 채로 거만을 떨었다.
"난 대금국의 장수이다. 나를 죽였다가는 된통 당하게 될 줄 알아라!"
사내가 가소롭다는 듯 목젖을 드러내며 웃어댔다.
"하하핫! 입까지 더러운 놈이로구나!"
올리요의 정수리를 콱 움켜쥔 사내가 용트름을 했다. 막 공중으로 빙글 빙글 돌리려고 하자 올리요가 빌었다.
"아이고, 제발 목숨만 살려 주소."
땅에 엎드린 지부도 손이 보이지 않게 싹싹 빌어 댔다.
"너같은 놈들은 개만도 못한 인간이다!"
사내가 지부의 머리를 장으로 내리쳤다.
"욱!"
다시 뒤로 나자빠진 지부의 입에선 선혈이 꾸역꾸역 쏟아졌다.
정강에 있던 금나라 군대는 일망타진되고 세 명의 장수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태자(太子) 납한(衲罕)은 대로했다. 그는 곧 호국선사(護國禪師)인 철의법왕(鐵衣法王)을 불러 대책을 논하기에 급급했다. 이 자리에는 무심도 동석해 있었다.
철의법왕이 예를 올리며 심각하게 물었다.
"태자님께서 어인 연고로 소승을 부르셨나이까?"
"우리 금나라 대군은 지금껏 송나라를 걸림돌 하나 없이 쳐들어갈 수가 있었소. 그런데 무심 공자가 전해온 말로는 송나라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고 하오. 그 사람의 무공은 최고로 고강하여 천하 기인인 동사 황약사도 그를 이기지 못한다고 하오. 이름은 왕중양이라고 하는데 어떤 문파의 사람이기에 그렇게 강한지 알 길이 없소이다. 또한 그가 무림 인사들을 휘동하여 정강에 있는 우리 군사들을 전멸시켰니 내 밤잠을 잘 수가 없는 지경이오."
납한의 장황한 탄식을 다 듣고 난 철의법왕이 여유를 부렸다.
"소승이 너무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는 중에 그런 호수가 중원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이제야 때를 만난 것 같아 즐겁기만 합니다. 오랜 만에 대적할 상대가 나타났다니 더없이 반갑습니다."
그러나 말은 이렇게 하였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겁이 났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약사의 무공마저도 뛰어넘는 상대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철의법왕은 일전에 바다를 건너 도화도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황약사와 맞붙게 되었었다. 철의법왕이 먼저 싸움을 걸었는데 시체만 남겨놓을 뻔했었다.
철의법왕이 도화도에 이르자 누군가 개탄을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이 도화도엔 무얼 찾아 먹겠다고 오는가? 목숨을 바치러 오는 모양이로군."
이에 철의법왕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는 법장(法杖)을 세워들었다.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꽃이 만개한 복숭아나무들만 눈에 띌 뿐 사람의 그림자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다시 개탄의 소리가 들려 왔다. 방금 전에 들렸던 같은 목소리의 같은 내용이었다.
화가 난 철의법왕은 곧장 복숭아밭으로 뛰어들었다. 그렇지만 소리를 낸 사람을 찾지 못하고 미궁에 빠진 듯 그속에서 헤매게 되었다. 그는 법장을 마구 휘둘러 복숭아나무를 쓰러뜨리기에 이르렀다. 삽시간에 복숭아밭을 망가뜨린 그는 그 위에 있는 한 돌집으로 올라갔다.
그 돌집 앞에 이른 철의법왕은 기묘한 광경에 경악했다. 고요한 평화가 깃들어 있는 돌집에 웬 어여쁜 낭자가 동요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
암초는 돌인데
바다도 암초요
인생도 암초지요
사람이 죽은것도
암초와 같아요
모두들 죽으면
만사를 잊는다지만
그러지를 못하여
눈물을 남기니
가족들의 애간장을
찢어놓고 있네요…….
철의법왕은 여인에게서 범상하지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 여인은 자기 앞에 그가 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 했다. 그녀는 세상에는 어린아이밖에 없다는 식으로 요람 속에 든 갓난아이만 들여다보았다.
"시주님, 빈승이 인사를 올립니다."
건성으로 합장을 한 철의법왕이 큰소리로 말을 건넸다.
비로소 고개를 든 여인이 미소를 띄우며 되물었다.
"대화상(大和尙)께선 이 섬엔 무슨 일로 오셨나이까? 칼부림을 하시로 오셨나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찌 대화상의 얼굴엔 살기가 그득하나요? 우리 딸애의 고요한 눈가에 그 어두운 빛이 들까 심히 근심스럽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도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여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철의법왕은 그것을 여인의 웃음이라 여겼다.
"대화상께선 어떤 법력(法力)을 갖고 계시나요?"
"그건 알아서 무엇 할 것이오?"
철의법왕은 놀림을 받는 기분이 들어 목에 힘을 주었다. 여인이 실망한 낯빛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법력이 없으시다면 할 수 없군요. 저는 이 섬에서 지금까지 내 딸 용아(蓉兒)를 위하여 불법을 빌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화상께서 오신 김에 법력을 빌어 볼까 했는데 힘들겠군요."
철의법왕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도화도의 황약사가 꽃같이 아름다운 여인을 데리고 산다는 말이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황약사의 처란 말인가? 그리고 요람의 아기는 황약사의 딸……?
철의법왕이 천천히 요람 앞으로 다가가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희고 볼에 살이 토실토실 붙은 아기가 방굿 웃었다.
"대화상께선 정령 법력을 쓸 줄 모르시나요?"
여인이 힐금 그를 훔쳐보며 다시 물었다.
"쓸 줄은 압니다만……."
철의법왕은 저도 모르게 대답하게 되었다. 아기가 다시 옹알이를 하며 방실방실 웃어댔다. 그 웃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철의법왕은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속으로 그는 아이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뜻 마음이 내키지가 않았다.
"대화상은 벌써 일곱번이나 그 애를 칼로 내리칠 마음을 가졌지요?"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자신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사실보다는 그 목소리가 여인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 더욱 놀란 것이다. 그가 깜짝 놀라 소리나는 쪽을 휙 돌아보았다. 황약사가 어느샌가 뒷짐을 지고 뒤에 떠억 버티고 있는 게 아니던가.
그후 철의법왕은 황약사와 겨루었는데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 그는 도화도 도주 황약사의 무공이 천하 제일이라는 것을 자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이후부터 내심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중양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법왕님, 제가 보건데 왕중양이란 사람은 홍칠이나 황약사보다 더 무서운 인물인 듯하옵니다."
"음…… 그래?"
철의법왕의 눈꼬리가 길게 위로 올라갔다. 그게 사실이라면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었다. 무심이 말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다른 방법으로 내쳐야 합니다. 그의 마음에 꼭 드는 물건을 골라 유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식은죽 먹기가 되겠죠. 그리고 황약사도 그리 두려워할 건 못되지요. 그 사람은 고고하여 남과 휩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의 일에 나서는 것도 싫어한다고 들었습니다. 대송이니 대금국이니 하는 남의 일에 섣불리 나설 위인이라고 보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그 사람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되는 겁니다. 또한 홍칠은 미식가이고
대식가로 알려져 있기에 음식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약점이 있습니다. 먹는 일에 정신을 쏟다가 언젠가는 크게 일을 망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자기 손가락을 끊으며 맹세까지 하였다지 뭡니까? 문제는 왕중양인데…… 아직 그에게 어떤 단점이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만."
"왕중양의 무공이 그렇게 출중하다면……."
철의법왕의 눈빛이 차츰 흐려졌다. 중원에 기인이 또 하나 생기게 되었다는 말인데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왕중양도 이전에는 무공이 대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선천신공을 익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심의 말에 철의법왕이 어깨를 들먹이며 웃어댔다.
"하하핫! 나 역시 그 선천신공 비본(秘本)을 하나 얻었었지. 후에 버리고 말았지만 말이야. 그 이유를 알겠는가?"
무심이 슬쩍 웃음을 감추었다. 그 이유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자기 입으로 토설을 한다면 철의법왕에게 노여움을 사게 되어 모른 척하려고 했다.
"그 비본이 누구 손에 들어간다고 해도 사실 무용지물이나 다름이 없거든. 그 비본에 무어라 씌여있는 줄 아나? 이 무공은 비록 신기에 가까운 것이지만 반드시 물속에서 연마하여야 한다고 되어있지. 그 물은 잡것이 섞여 있지 않은 깨끗한 물이어야 하며 또 얼음같이 차지만 얼음이 들어 있어서도 안 된다고 했지. 허허, 그러나 그런 물을 어디 가서 찾을 것이며 또 찾는다고 해서 누가 선뜻 그 속에 들어가겠는가? 모르긴 해도 왕중양도 힘들었을 텐데, 혹시 그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는지도 모르지."
"그 무공의 힘은 어느 정도지요?"
무심의 말에 철의법왕이 눈을 가만히 감았다.
"그 무공을 연마하게 되면 대단한 힘을 얻게 된다네. 마치 땅과 하늘의 온 정기를 받아 안은 것처럼 무궁무진한 힘을 소유하게 되지."
무심의 눈이 부러움과 두려움으로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그래, 자네가 똑똑히 눈으로 보았는가? 정말로 선천신공이 틀림없다는 말이지?"
철의법왕이 무심을 향해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무심이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철의법왕이 벌떡 일어나 태자에게 읍하며 단호한 기색을 내보였다.
"태자님, 대왕님께 전해주십시오. 소승이 중원으로 달려가 왕중양의 머리를 가져오겠다고 말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태자님도 대왕님도 만나뵙지 않겠습니다."
태자는 그의 말에 흐뭇해져서 당장 떠날 것을 윤허하였다.
철의법왕은 곧 무심과 챵바를 불러 중원으로 향했다.
이들 일행은 밤낮을 걸어 정강부에 이르렀다. 지부의 막사에 들어가니 새로 부임해 온 지부가 대금국 국사인 철의법왕을 보고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 새로 부임해 온 지부의 속셈은 따로 있었는데 철의법왕을 한껏 이용해 먹을 계산이었다. 그래야만 자기가 지부 노릇을 무사히 이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부가 격양된 목소리로 철의법왕에게 보고를 했다.
"전에 놈들이 우리 대금국의 관병들을 죽이고 지부까지 도륙한 후부터 강호의 무리들이 더욱 날뛰고 있습니다. 금나라 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죽여서 이 정강 일대에서 함부로 나다닐 수도 없게 된 실정이지요."
철의법왕이 킁! 하고 알 수 없는 코방귀를 뀌었다.
"왕중양이란 작자는 지금 모용세가에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철의법왕의 콧소리에 잠시 위축되었던 지부가 다시 안면근육을 실룩거리며 굽신댔다.
"예, 예, 그러하오이다. 국사님은 정말 훤히 내다보시고 계시는군요. 헌데……."
"뭔가?"
마뜩찮게 바라보는 철의법왕을 슬쩍 살핀 지부가 또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예, 모용세가는 몇백 년의 기틀을 지니고 있는 무림세가입지요. 그러니 그곳에는 별의별 재간과 초수를 익힌 놈들이 모여 있답니다. 대사님께선 부디 몸조심을 하셔야……."
철의법왕이 탁자를 꽝 내리치며 화를 냈다.
"쓸데없는 소리! 그럼 여기서 더 지체할 것 없이 난 모용세가로 가 봐야겠다."
철의법왕은 뻗친 기운에 차 한잔 마시지도 않고 곧장 지부의 막사에서 나왔다. 쉴 겨를도 없는 상황이라 판단한 철의법왕은 걸음을 재촉해 모용세가로 향했다.
모용세가가 멀리 보이는 곳까지 당도한 이들은 정자 곁에서 배를 기다렸다. 호수 너머로 보이는 모용세가의 위풍을 거만한 눈길로 보고 있는데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말로는 원수라지만
꿈에도 서로 못잊네
만나면 그들 서로
아는척도 안하면서
언제나 쌀쌀한 표정으로
냉담한 말 한마디
'간밤 찬비 내렸네'
노랫가락에 맞춰 고개를 까닥이던 무심이 탄성을 질렀다.
"좋다! 그 가락 한 번 좋구나!"
챵바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 말을 걸고 넘어졌다.
"잘하기는 개뿔이 잘해? 구성지기만 한 게 온몸이 다 꾸물꾸물하네."
"네가 뭘 안다구 그래? 노래나 들을 줄 아느냐고?"
발끈한 무심이 챵바를 노려보았다. 챵바도 주먹을 들어 그를 내치려다 그만두었다. 또 사부의 당부가 머리 속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무심이 가는 데로 따라가고, 무심이 하는 대로 하라는 말…….
그러나저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배는 오지 않았다.
"이거 낭패인걸!"
철의법왕이 강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 큰 모용세가에 손님을 맞는 배 한 척이 없겠어요. 좀더 기다려 보시지요."
무심이 생각 없이 내뱉자 철의법왕이 화를 벌컥 냈다.
"기다려 보라고! 그럼 없는 배가 생기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이때였다. 버들숲으로 가려진 저쪽으로부터 작은 배가 서서히 떠내려왔다. 그 배 위에 타고 있던 자그마한 계집 하나가 이쪽에 대고 큰소리로 물어 왔다.
"모용세가로 가시는 분들이세요?"
이들은 곧 배에 올라탔다. 이들은 모두 적지 않은 체격인데도 나비처럼 사뿐히 몸을 날려 배 위로 오르자 계집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쩜, 모두들 무공이 뛰어나시네요?"
그러자 이들은 제각기 목에 힘을 주고는 어서 노를 젓기나 하라고 딴청을 부렸다. 배가 호수 복판으로 이르니 먼곳에서 다른 배들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우리 공자님을 뵈러 오시는 길이죠? 요사이 공자님을 배알하러 오시는 강호객들이 줄을 서고 있다구요."
종알대는 계집의 말에 무심의 심기가 뒤틀렸다.
"너희 공자라는 게 누구냐? 모용준인가 하는 난쟁이가 맞지? 우리 국사님은 그런 어린애 만한 난쟁이를 보러 가시는 길이 아니다."
"그럼 누구를 보러 오신 거죠?"
"우리 국사님은 명성이 있다는 대협 왕중양을 만나실 생각이시다."
"그래요? 그분은 우리 큰공자님이신데……."
계집이 이를 감추며 살짝 미소 지었다. 무심도 왕중양과 모용준이 의형제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큰공자님이라고? 누가 말이더냐?"
"말씀드렸잖아요. 왕중양 공자님이라구요. 큰공자님은 참으로 좋은 분이세요. 또 그분은 아무일도 하지 않지만 공자님과는 아주 정답게 지내신답니다."
챵바가 불쑥 끼여들며 물었다.
"임 아무개라고 하는 여인도 있지?"
무심이 뱀눈을 만들자 계집이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요. 난 그런 여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배가 기슭에 닿자 철의법왕이 무심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무심이 계집의 머리채를 틀어쥐며 윽박질렀다.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어서 길이나 안내해라! 우리 국사님이 그 큰공자라는 작자와 무예를 겨루어 볼 것이다!"
"우하하하핫!"
호수의 물이 출렁일 만한 벽력같은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위풍도 당당한 공자님께서 한낱 계집과 그러시다니 남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소이까?"
그는 일기충천 지청이었다.
"이봐. 네가 무공깨나 쓴다고 들었지만 나와는 적수가 되지 못해!"
무심이 대뜸 지청을 향해 비아냥댔다.
"글쎄, 그럴 수도 있을 테지. 헌데 무심 공자가 계집에게도 손을 대는 것을 보니 믿어지지가 않는데."
철의법왕이 이들의 말싸움이 듣기 싫었는지 인상을 구기며 끼여들었다.
"뭘 하는 놈이지?"
무심이 얼른 허리 숙이며 답했다.
"모용세가를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놈이지요. 저 녀석을 해치운다면 모용준과 왕중양은 제 발로 뛰쳐나오고 돼 있습니다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득달같이 지청에게로 몸을 던진 철의법왕이 괴성을 내질렀다.
"야아압!"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지청은 미처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고스란히 당하고 말았다. 어깨에 무언가 쾅 하며 부딪쳤는데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악!"
지청이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비틀거리자 아닌게아니라 곧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주정과 목우가 여러 사람을 이끌고는 한 걸음에 달려들었다.
"어서 공자님을 불러오너라!"
지청이 이렇게 울부짖자 주정과 목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적을 앞에 두고 다른 사람을 더군다나 공자를 불러오라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앞에 있는 중이 누구길래 저럴까 하고 있는데 모용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사께서는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모용준이 철의법와 앞으로 가더니 읍했다.
"지옥에서 왔다!"
철의법왕은 인사도 받아 주지 않은 채 뇌까렸다.
"허허, 지옥에서 오셨다고 하셨습니까?"
"난 네 놈을 지옥 구경을 시켜 주려고 왔다. 또한 다른 한 놈도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이라니……?"
"이놈! 어서 왕중양을 불러오지 못할까? 난 그놈의 무공을 보러 이곳까지 오신 귀한 몸이시다!"
철의법왕이 호통을 치며 발을 바닥에 힘껏 굴렸다. 물기에 밴 모래흙이었지만 어찌나 위력이 센지 먼지처럼 흙이 먼곳까지 풀풀 날렸다.
"형님은 지금 없으니 일단 저와 대화를 나누시지요?"
모용준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지만 무심이 대신 빈정댔다.
"흥, 우리 국사님께서는 왕중양의 무공을 눈으로 확인하러 오신 것이다. 만약 그가 국사님을 이긴다면 우리는 전에 있었던 일을 용서해 줄 수도 있다!"
"어떤 일을 두고 하는 말인가요?"
모용준이 태연스럽게 나오자 무심이 노발대발했다.
"뭐라고! 수백 명이나 되는 생명을 해친 일을 벌써 잊었단 말이더냐?"
"허허, 정 그렇다면 내 큰형님을 모셔오지요. 허나 승부는 나와 내야 할 것이오. 왜냐하면 형님은 겨룰 수가 없는 처지요."
잠시 후 모용세가에 머물던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소식을 전해들은 강호객들이었는데 얼추 봐서 일백 명은 넘을 듯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무심은 약간 겁을 먹었다. 철의법왕이 전음입밀법으로 무심에게만 들리도록 혀를 놀렸다.
"준마는 한 필만 있어도 하루에 천 리를 가니 걱정 말아라."
자기 혼자서도 얼마든지 무리칠 수가 있다는 호언장담이었다.
무심을 본 조평이 씹어먹을 듯 고함을 질렀다.
"전번에 내가 왜 너를 죽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이번 기회에 네 놈의 사지를 찢어 저 호수에 던지리라!"
무심이 한 걸음 나서려다 철의법왕을 보았다. 그는 다리를 벌리고 서서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는 왕중양을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철의법왕의 소원은 곧 이루어지게 되었다. 저쪽으로부터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바로 왕중양이었다.
왕중양이 가까이 오자 철의법왕은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자네가 말한 사람이 맞는가?"
"예,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이상하군……."
다시 왕중양의 표정을 힐끔 확인한 철의법왕은 역시 알 수 없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의 판단으로는 전혀 싸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그런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살기가 느껴지기는커녕 무공이라고는 손가락 끝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혹시 무공을 섣불리 나타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다는 뜻일까?'
철의법왕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잠깐만요!"
한 사내가 숨이 턱까지 차도록 뛰어오는 게 아닌가. 왕중양과 엇비슷한 연배로 보였는데 몸집이 우람한 사내였다. 난데없이 나타난 그는 넙죽 왕중양 앞에서 엎드리며 애원을 했다.
"사부님, 부디 저를 사부님의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왕중양으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철의법왕의 손에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왕중양은 눈앞에 일어난 일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는 모용준이 철의법왕이 자기와 겨루려고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무기력해진 자신이 죽어 강호의 무림들에게 적개심을 더욱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려 했었다.
"전 이제껏 여러 사부님을 모셔 왔으나 천하의 으뜸으로 칠 수 있는 분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언젠가 마주친 일이 있는 사내였다. 왕중양이 기억을 더듬으며 사내의 청을 정중하게 물리쳤다.
"노완동, 난 동생의 사부가 될 수가 없다네."
그러니 노완동은 으레 사양을 하는 것이겠거니 생각하고는 더욱 집요하게 매달렸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황약사가 제게 일렀습니다. 스승을 섬기려거든 천하의 고수를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은 최고의 고수는 못 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사부님은 무림의 맹주이시자 천하 최고수란 사실을 누구도 거역하지 못합니다. 저를 사양 마시고 부디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노완동이 연신 큰절을 하며 왕중양의 승낙을 얻어내려고 했다.
"아니오. 난 그럴 만한 힘이 없으니 다른 사람을 찾아 가게나."
왕중양은 도저히 노완동의 청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이를 모고있던 철의법왕이 가소롭다는 투로 한마디 던졌다.
"왕중양, 너 같은 놈이 맹주라고? 웃기지 말고 어서 나와 사생결판을 내보자!"
왕중양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쾌히 도전을 받아주었다.
"좋소!"
"허허, 일단 시원시원해서 그 점은 마음에 드는군!"
"무엇부터 겨루어 볼까요?"
왕중양의 말에 철의법왕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시선을 뚝 한곳에 박았다.
"저기 보이는 둥근 연자 위에 올라서기를 해 보는 거요. 누가 더 오래 서 있을 수 있나 해 봅시다."
왕중양이 그 연자를 보며 다시 쓴웃음을 입가로 피웠다. 무공만 잃지 않았으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위에 올라서자마자 떨어질 게 분명하리라. 그러나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응수했다.
"한 가지, 꼭 나하고만 겨루어 본다고 약속하시오."
"좋다. 네 말대로 해주마."
철의법왕이 먼저 연자 위로 뛰어올랐다. 뛰어난 경공으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물론 나는 새와 같이 날랜 동작이었다. 왕중양도 천천히 연자 곁으로 걸어갔다.
"역시 대단한 경공이로군!"
이게 무슨 기이한 일인가? 아직 경공도 쓰지 않았고 또 쓸 수도 없는데 철의법왕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역시 대단해. 저처럼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만 봐도 알겠어."
이렇게 혼자 중얼거린 철의법왕이 긴 소맷자락을 높이 들었다. 곧 소맷자락은 강한 바람을 안은 돛처럼 부풀려졌다. 그는 그것으로 왕중양을 향해 내뿜으려 했다.




제23장 임조영과의 이별
지하궁전의 궁녀들은 모여앉아 여유럽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사실 이 여인들에게는 밤과 낮의 구별은 필요가 없었다. 지하에는 낮도 밤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리라. 그녀들은 답답하면 이렇게 서로 모여앉아 시간을 보냈고 피곤하면 누워 잠을 잤다. 웃기도 하고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으로 되묻기도 하며 한창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웬 그림자가 비쳤다. 퍼뜩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에 놀란 한 궁녀가 소스라치며 소리질렀다.
"누구얏!"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개미의 그림자도 찾을 길이 없었다. 가뜩이나 어슴프레하니 분위기가 묘한 궁전 안이었다. 덜컥 겁이 난 궁녀들은 그 자리에 굳어져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
다른 방에 갇혀있던 임조영도 그 그림자를 발견했다. 눈앞으로 무언가 빠르게 스쳐지나가는가 싶더니 곧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멀건히 임조영을 바라볼 뿐 한동안 숨소리조차도 내지 않고 서 있기만 했다. 임조영이 먼저 물었다.
"누…… 구세요?
지옥의 도깨비와도 같은 흉칙한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꽤나 혐오스런 모습이었다.
"나지 누구겠소."
그 가면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웃음기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난 당신을 구해 주러 왔소."
"누가 그런 부탁을 하던가요?"
임조영이 경계를 늦추지 않자 그가 잠시 우물거렸다.
"글쎄, 그런 부탁을 받은 일은 없지만……."
"무슨 이유로 나를 구한다는 거죠?"
"어허, 배짱 한 번 두둑한 여인이로군!"
그가 갑자기 몸을 돌려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더니 몇 발짝 내딛던 걸음을 멈추고는 얼굴을 다시 임조영에게로 돌렸다.
"가만, 이 정신 좀 보게. 한 가지 잊을 뻔했네. 지금 왕중양이……."
"왕중양이 어떻게 되었다는 말인가요?"
임조영은 불길한 예감이 스쳐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왕중양이 위기에 빠져 있소. 그래서 내가 이렇게 온 것이오. 어서 서둘러 구하지 않으면 그는 죽게 되오."
"왕중양이 죽게 된다고요? 그럴 리가…… 모용준이 그를 이용하여 자기의 야심을 채우고는 있지만 섣불리 죽일 수는 없을 텐데……."
"왕중양을 해치려는 사람은 그가 아니오. 그런데 모용준을 그렇게 믿고 있는 거요? 만약 그가 왕중양을 해치러 온 사람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어찌 하겠소?"
그 말은 임조영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하기에 충분했다.
"왕중양을 해치러 왔다니?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죠?"
임조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왕중양이 위기에 봉착했다는 말에 그녀는 철창이 휘어지도록 손을 부르르 떨었다.
"굼나라 국사인지 뭔지 하는 철의법왕이라는 사람이오."
"어떻게 그를 구할 수 있을까요?"
"왕중양에게 그대와 같은 위인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천운이오."
사내가 넉넉한 웃음을 날렸다.
"저를 여기서 나가게 해 주세요!"
임조영이 애를 태우며 철창을 뒤흔들자 그가 가까이 왔다. 그가 손가락 하나로 철창을 건드리자 놀랍게도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또 다른 쪽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휘어졌다. 그 사이로 임조영이 재빨리 빠져 나왔다.
"그들이 지금 어디 있죠?"
임조영이 묻자 그가 앞장을 서며 손짓했다.
"나를 따라 오시오."
계속 긴장을 하고 있던 궁녀들은 또 한 번 가슴을 어루만졌다. 자기들 눈앞으로 이번엔 그림자 둘이 이어서 휙 휙 하고 지나가는 게 아닌가. 정말 도깨비라도 나타난 게 아닐까 하고 궁녀들은 가슴을 조이며 몸을 떨었다.
'쿠 웅!'
철의법왕의 소매에서 강한 돌풍이 쏟아졌다. 그 힘은 집채만한 바위도 간단히 가루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일단 한차례 겁을 주려는 듯 공중을 향해 강풍의 위력을 보인 철의법왕이 기분 나쁜 웃음을 토했다.
"우하하하하!"
이번엔 왕중양의 정면에 대고 강풍을 날릴 차례였다.
"얏!"
그대 큰소리로 기합을 내지르며 연자 위로 뛰어오른 사람은 왕중양이 아닌 모용준이었다.
"하하하, 너같은 중 놈이 감히 큰형님과 시합을 벌이겠다고? 형님의 명성만 더럽힐 뿐이다. 네가 죽기가 그리 소원이라면 나와 해 보자. 어떤 시합이든 기꺼이 받아 주겠다!"
"흥, 너 같은 난쟁이 족속과는 말도 하기 싫다. 저리 꺼지지 못하겠느냐?"
철의법왕도 만만하지 않았다. 아니 한술 더 떠서 그는 모용준을 말 그대로 하찮은 난쟁이로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뭣이라고!"
모용준이 천군횡권(千軍橫卷)이라는 초수를 써 장을 날렸다. 이것 역시 대단한 위력을 지닌 것으로 일진광풍이 철의법왕을 향해 퍼부어졌다. 그러나 철의법왕이 내지른 돌풍에 걸려 좌절되고 말았다. 공중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괴력은 요란한 굉음을 남기며 흩어졌다.
"난쟁이 주제에 제법 용을 쓰는군!"
다시 소매를 높이 치켜든 철의법왕이 돌풍을 만들었다.
"윽!"
모용준은 그만 연자 밑으로 떨어졌다. 철의법왕은 무쇠 같은 몸에 36육식라살대도(三十六式羅煞大道)를 수련하여 강철이라도 꿰뚫을 만한 무공을 갖고 있었다. 모용준이 그의 장풍에 쓰러지자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왕중양을 향해 거들먹거렸다.
"자, 이번엔 네 놈 차례다!"
왕중양의 심정은 어느 때보다 담담한 상태였다. 아무런 욕심도 없었고 생에 대한 미련 따위도 벗어 던진 지 오래였다. 철의법왕의 돌풍이 차라리 기다려졌다. 다행히 정강부의 금군을 물리쳐 항금의 봉화를 올렸으니 바랄 것이 없었다. 이제 조금만 더 추진한다면 전국적인 항금의 깃발이 오르게 될 것이다. 이제 눈감고 죽음을 맞이하는 일만 남은 것이리라.
"형님, 우리들의 위업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모용준의 하는 말은 일단 목숨을 살리고 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철의법왕의 손에 죽으면 죽었지 항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왕중양은 고개 들어 철의법왕의 소매를 응시했다. 그는 그 소매로 열두 가지 초수를 부릴 줄 알았다. 사실 지금은 철의법왕이 왕중양에게 열두 가지 초수가 아니라 그중 하나만을 써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막을 모르는 철의법왕은 괜시리 망설여졌다. 행여 왕중양이 저러고 있다가 무공을 쓰기 시작한다면 도리어 당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왕중양을 물리치는 방법이라고는 선제공격밖에는 없었다.
"야아."
철의법왕은 두 팔을 들어 계속 강한 바람을 끌어 모았다. 바람이 어떤 칼과 검보다 위력적인 힘이 될 때까지 그는 온 기를 모았다. 이를 지켜 보던 강호객들은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왜 저토록 왕중양이 무기력하게 서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한 사내가 참다못해 소리치며 앞으로 나섰다.
"맹주님, 검을 써요 검을!"
그러나 차고 있는 검 역시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무공이 사라진 왕중양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물건일 따름이었다.
'어서 나를 죽여라!'
그는 속으로 이렇게 주문하고 있었다.
철의법왕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다. 그는 왕중양의 의연한 모습에서 서서히 전의를 잃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철소매의 위력을 막을 수 있는 자신이 있기에 왕중양이 저러고 있는 거란 생각에 은근히 두려움마저 생겨났다.
이때 왕중양의 귓가로 반가운 소리가 들려 왔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왕중양의 귀가 번쩍 뜨였다.
"왕 공자님!"
임조영의 음성이었다. 그녀의 애타는 마음이 다시 왕중양의 귓가로 전해졌다.
"어서 소리를 지르세요. 철의법왕이 손을 쓰지 못하도록 어서 소리를 치세요!"
눈을 감고 있는 왕중양은 그녀가 볼 수 있도록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가 계속 들려 왔다.
"어서 제 말대로 소리를 지르세요!"
왕중양은 소용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가슴을 부풀렸다. 임조영이 시키는 대로 그는 소리를 내질렀다.
"꼼짝 마라!"
왕중양이 괴성을 내지른 것과 거의 동시에 철의법왕이 돌풍을 뿌렸다. 철의법왕이 깜짝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왕중양이 드디어 무공을 쓰려는구나 하는 두려움 탓이었다.
"으……."
그러나 돌풍에 얻어맞은 왕중양이 비틀비틀 몇 걸음 밀려났다. 이를 본 철의법왕이 흐흐흐 웃었다.
'네 놈이 지금 나를 속이려고 교묘한 술책을 쓰고 있구나. 힘이 없는 척 그러고 있다가 내게 한차례 당하고 만 꼴이렷다. 내가 네 놈의 술책에 넘어갈 성싶으냐!'
그는 왕중양이 속임수를 쓰고 있다고 믿었다.
"이건 또 누구야!"
갑자기 철의법왕이 두리번거리며 당황했다. 그의 귀에 주인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당신은 이제 죽은 목숨이다!"
한참을 어미 잃은 새끼오리처럼 허둥대던 그의 시선이 한곳으로 가 멎었다. 예상 밖으로 그곳은 왕중양이 서 있는 자리였다. 왕중양이 내는 소리로 믿은 그도 전음입밀법을 이용해 중얼거렸다.
"그래, 네가 나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이렷다!"
"그렇다. 전에도 내게 진 적이 있지 않는가?"
그 말에 철의법왕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진 일이라고는 오로지 한 번, 도화도에서의 일밖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왕중양이 그 당시 도화도에 있었다는 말인가? 다시 철의법왕의 귓가로 말소리가 들려 왔다.
"넌 죽는다. 죽는다고 경고를 하는데도 그러고만 있을 건가. 왕중양이 손을 쓰는 날이면 너는 송장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이 왕중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철의법왕은 더욱 주위를 살피며 몸을 사렸다.
"누구요? 당신의 정체는……."
"너는 그 사람의 적수가 못된다니까."
철의법왕은 강호객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눈길을 돌려 찾아보았다. 그러나 짐작이 가는 사람조차 발견해낼 수가 없었다. 한편 갑자기 허둥대는 철의법왕을 지켜 보던 무심의 심정은 차츰 꼬여갔다. 오늘따라 철의법왕이 하지 않던 행동까지 보이고 있어 내심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국사님, 망설이지 말고 어서 놈을 꺾어 버리세요. 지금 뭘하고 있는 겁니까?"
무심이 소리치자 철의법왕이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렇지. 내가 저놈을 죽이지 않으면 종국에는 내가 죽고 말 것이다. 어느 놈이 떠들고 있건 간에 난 어서 저놈을 죽여야 한다!'
철의법왕이 이를 윽물고는 앞으로 조심스레 한 걸음 나섰다. 그러나 다시 귓전을 울리는 소리에 그만 어깨를 움츠렸다.
"철의법왕, 내 시 한수 읊어 드리리다."
하지만 철의법와의 가슴엔 오로지 왕중양을 죽여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이런 철의법왕의 살기로 싸늘해진 가슴과는 관계없이 목소리가 계속 들려 왔다.
암초는 돌인데
바다도 암초요
인생도 암초지요
사람이 죽는 것도
암초와 같아요
모두들 죽으면
만사를 잊는다지만
그러지를 못하여
눈물을 남기니
가족들의 애간장을
찢어 놓고 있네요……
철의법왕의 낯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도화도에서 있었던 굴욕이 되살아나 그의 가슴은 더욱 얼음장으로 변해갔다. 그는 황약사를 천하에서 가장 흉악한 인간으로 믿었다.
"좋다, 어디 두고보자!"
상황이 이렇게 된 판에 체면 따위를 차릴 겨를이 없었다. 철의법왕은 두말없이 돌아서 달아나버렸다. 무심과 챵바는 갑작스런 일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왕중양을 곧 쓰러뜨릴 것처럼 큰소리를 치던 철의법왕이 꽁무니를 감추고 달아나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들도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행랑을 놓았다.
이 광경을 지켜 보던 모요준은 내심 깜짝 놀랐다. 무공이 완전 폐해진 게 아니란 말인가? 그러나 모용준은 내색하지 않고 다가와 왕중양을 부축했다.
"큰형님, 형님의 무공은 정말 대단합니다. 나도 그 늙은 중 놈을 감당해 내지 못했는데 형님은 손 한 번 쓰지 않고 물리치셨군요."
"아니, 내가 이긴 게 아냐."
왕중양의 말속에서는 날카로운 가시가 도사리고 있었다. 모용준의 태도가 역겨웠으며 한편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일로 인해 심경이 혼란스러웠다.
"여러분들, 오늘 우리 큰형님은 철의법왕을 멋지게 물리쳤습니다. 천하에 보기 드문 최고의 무공이었습니다. 난 비로소 무형의 공격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으며 고수들의 참된 무공이 어떤 것인지도 똑똑히 깨달았습니다."
모용준이 뻔뻔스럽게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모용준의 말에 따라 찬사를 보낼 뿐이었다. 무림의 사람들은 경외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왕중양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예를 다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구성진 퉁소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들은 주위를 휘둘러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모용준, 날 모르겠나?"
귀신이라도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 말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휙하는 그림자가 눈앞을 스쳐 지나가 어느샌가 모용준 앞으로 누군가 나타났다. 임조영이었다. 그녀는 손에 옥녀검을 쥐고는 당장이라도 모용준을 내리칠 기세였다.
모용준은 지하궁전에 갇혀 있는 줄로만 알았던 그녀가 자기 앞에 나타나자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얼른 교활하게 처신했다.
"동생은 왜 이제서야 오는 겐가? 방금 좋은 구경거리가 있었는데. 큰형님이 강적 하나를 통쾌하게 물리쳐 내쫓았거든……."
임조영이 말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모용준이 너스레를 떨어댔다. 그것을 깨달은 임조영이 얼른 말을 막았다.
"모용준. 허튼소리 그만해!"
모용준이 급히 몸을 움직였다. 그는 왕중양을 끌고는 그녀 앞으로 바투 다가섰다. 모용준의 손가락은 어느새 왕중양의 맥문(脈門)을 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사람들이 의아해 하는 시선으로 이들을 주시했다. 임조영은 섣불리 입을 뗄 수 없는 지경에 빠져 버렸다. 만약 그녀가 지하궁전에 있었던 일을 조금이라도 실토한다면 당장 왕중양은 죽게 될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고 있는데 왕중양이 대신 말문을 터주었다.
"동생, 이렇게 나를 구해 주러 와서 정말 고맙네."
왕중양의 말에 사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모용준은 왕중양이 철의법왕을 물리쳤다고 했었다. 그렇지만 왕중양은 임조영이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이며 그것에 감사를 한다니 사람들은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임조영은 왕중양을 위해 모용준에게 애써 웃음까지 띠우며 청을 했다.
"왕 공자님과 저는 이제 이곳을 떠나겠어요. 괜찮겠지요?"
"무슨 소리! 형님은 지금 막중한 소임을 맞고 계시는 분인데 가긴 어딜 간다는 말인가? 저 여러 호걸들과 같이 또 대사를 치러야 하는 상황에 그 무슨 철없는 소리야. 가겠다면 동생 혼자 가게나."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녀에게 꽂고 있는 모용준의 눈빛은 살기로 번뜩였다. 임조영은 그 눈빛의 의미를 읽었다. 일을 그르치면 왕중양을 죽여버릴 수도 있다는 협박이었다.
고개를 떨구고 있던 왕중양이 임조영에게 눈길을 주었다.
"동생, 무엇보다 금나라를 내치는 일이 가장 크지 않는가?"
임조영은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지금 왕중양이 어떤 모욕과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언제까지나 왕중양을 모용준의 마수에서 허덕이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필요없어요. 어서 저를 따라가기나 해요."
그러나 왕중양은 이미 미래를 포기한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말했다.
"동생, 가려거든 동생이나 가게. 난 아무래도 둘째와 함께 있어야 할 것 같네."
왕중양은 다른 것을 몰라도 모용준이 금나라와 맞서 싸우려 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굳게 믿었다. 그렇기에 비록 자기가 그로 인해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 대의를 이룰 수만 있으면 기꺼이 모욕을 감수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는 터였다.
"이번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요."
고심을 하고 있던 임조영이 격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녀는 가슴은 이미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이라도 왕중양이 따라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그녀의 흐려져 가는 두 눈을 바라보는 왕중양의 가슴도 메어졌다.
'나느 갈 수가 없다. 임조영과 같이 떠난다면 난 오히려 그녀에게 부담만을 안겨 줄 뿐이다. 난 이미 무공마저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던가!'
왕중양이 세게 머리를 저었다.
"그럼 어서 떠나게. 인연이 있다면 또 만나게 되겠지."
그녀의 마음이 나약해지기 전에 어서 임조영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왕중양은 단호하게 말했다. 임조영의 눈빛이 더욱 흐려졌다. 임조영은 조용히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어리석은 여인일지도 몰라. 저 사내가 없이는 살지 못하는 여인처럼 행동하고 있다니…….'
왕중양과 모용준을 번갈아 보던 임조영은 이제 길을 정해야 할 때라는 것을 절감했다.
"뜻이 다르면 서로 돕지 못하는 법. 이제부터 난 당신들과 절교를 할 생각이오. 다시는 찾지 않을 것이오!"
왕중양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임조영에게 할말은 많았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모용준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용준은 임조영의 단호한 결심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럴 것까지는 없잖은가?"
그러나 임조영은 돌아서 이들과 작별을 하고 돌아섰다. 그녀는 쓰린 가슴을 부여안고 달려갔다. 강한 맞바람에 그녀의 머리가 말의 갈기처럼 휘날렸다.
벼랑 끝에까지 다다른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는 자신을 달랬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임조영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가면을 쓴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 푹 빠져 있는 그녀는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무정한 사람에게 혼자 정을 주었으니 그러지?"
사내가 임조영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서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사내를 알아본 임조영이 말을 받았다.
"당신이었군요?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뭐죠? 왜 저를 구해주시고 또 왕중양까지……."
"하하하! 눈매가 무섭군. 나와 결투라도 해 볼 생각이요?"
"누가 무서워할 줄 아시오. 당신은 나를 구해준 은인이니 내가 이겨도 목숨만은 살려 드리리다. 그것으로 서로의 빚은 상쇄되는 것이니까."
임조영이 검을 쑥 뽑아들었다. 숙녀요죽(淑女요竹) 초수로 검끝에 기를 모으며 서서히 사내에게 접근했다.
"얏!"
임조영이 뻗은 검을 옆으로 슬쩍 흐르게 한 그가 껄껄 웃어댔다.
"난 평소 여인을 깔보는 사내는 아니지만 그대같이 오만무례한 사람은 처음인데?"
임조영이 다시 검을 정신없이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녀는 대단히 화가 나 있어 발에 채인 돌덩이들이 멀리까지 날아갔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 있다는 증거로 결코 완벽한 초수를 구사할 수가 없기도 했다. 괴보법(怪步法)을 쓴 그가 임조영의 검을 피하며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저 아래로 떨어져 뼈가 박살이 났을 거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절벽 중간쯤까지 떨어지던 그가 삐죽 돌출되어 있던 바위를 박차고는 다시 튀어오른 것이다. 이는 실수가 아니라 임조영에
게 자신의 무공을 보이려는 행동이었다. 그리곤 빠르게 몸을 날려 번쩍 번쩍 정신없이 자리를 옮겨가며 임조영을 현혹시켰다.
"괴보법! 낙영검법(落英劍法)이라는 괴보법?"
임조영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그가 흡 하고 약간 놀라는 동작을 보였다.
"이건 도화도의 절기인데 그대가 어찌 알고 있지?"
"그럼…… 당신은 황약사……!"
임조영은 말을 다 잊지 못했다. 그가 가면을 벗었다. 임조영의 말대로 그는 도화도에서 온 황약사가 틀림없었다. 임조영의 안색이 밝아졌다. 동사 황약사를 만났다는 사실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더한 일이었다. 그러나 과연 황약사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그녀는 다시 먹구름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그가 무슨 이유로 왕중양을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녀가 반가움과 걱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에 황약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 행여나 하는 생각에 임조영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웬 사람 하나가 바위처럼 앉아 낚시질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절벽에 튀어나와 있는 바위들을 다리삼아 아래로 내려간 임조영은 그에게 조용히 접근했다. 임조영의 발걸음에 자갈이 딱딱 하고 소리를 내자 그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중얼거렸다.
"허허, 낭자가 오는 바람에 음수어(陰水魚)는 다 잡았군……."
음수어라니? 정강에는 수많은 물고기가 살고는 있다지만 음수어라는 이름은 처음 들었던 것이다. 사내의 낯이 매우 익어 임조영이 눈망울을 굴렸다. 다름아닌 개방의 방주 홍칠이었다.
'왜 홍칠이 여기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아까 황약사가 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 때 잠시 내려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언제……?'
홍칠이 낚시대 끝에 둔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다시 종남산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오. 가서 자신의 무예나 더 연마하고 있으시오. 내가 보건데 왕중양의 지혜와 재간으로 그 난쟁이에게 크게 해를 입지는 않을 것 같소."
"아니예요. 모용준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예요. 더군다나 그 사람은……."
임조영은 차마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이 더 확대되기 전에 막아야 했다. 왕중양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도 했다.
"그 사람은 지금 황제가 될 꿈에 젖어 있어요."
"하하하! 황제는 나 또한 되고 싶소. 난 황궁의 대내(大內) 어선방(御膳房)에 들어가 원앙오진회(鴛鴦五珍膾)를 몰래 먹어본 적이 있거든. 참, 황궁의 다섯 요리사를 들어보셨소? 그들도 이름깨나 있는 명인들인데 요리 솜씨가 일품이죠. 난 그들의 요리를 먹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가 내게는 가장 좋은 시절이었지."
홍칠은 갑자기 얼빠진 사람처럼 넋을 놓았다. 온통 먹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이 아무래도 모자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게 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천하 제일 개방에서 다음 방주감이라 말하는가. 무공만 뛰어나다고 방주 노릇을 할 수는 없을 텐데. 이런 사람은 자기 목에 칼이 들어와도 요리 생각만 할 것이고, 잘려진 머리에는 온통 먹는 일로만 가득할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했다. 임조영이 막 돌아서 가려는데 홍칠이 불렀다.
"내 말을 마저 들어 보시오. 거 원앙오진회는 말이지……."
하며 홍칠이 그녀를 뒤따라왔다. 귀찮고 실망이 큰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치달았다.
임조영이 멀리 사라지자 홍칠이 혼잣말을 즐겼다.
"여인들이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그리고는 하던 낚시질이나 계속 할 요량으로 자리에 앉는데 누군가 급히 뛰어왔다.
"방주님, 방주님!"
"내가 몇 번 말해야 알아듣겠는가? 이거 음수어가 또 놀라서 도망을 쳤잖아!"
홍칠이 펄쩍 뛰며 언성을 높였다.
"방주님, 저 모용세가에 괴상한……."
"범 장로,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소. 모용준의 집에는 오묘한 데가 많으니 제자들 몇을 더 데리고 가 잘 살피라고. 그곳 어딘가를 찾아보면 음수어 몇 마리쯤은 구할 수가 있을 테니."
범 장로가 어리둥절해 물었다.
"음수어라니요?"
"어서 가기나 해요. 음수어를 찾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일랑 말고!"
범 장로가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며 돌아가자 홍칠이 다시 낚시대를 잡았다. 잠시 후 낚시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수면 위로 무언가가 치솟으려고 했다.
"오냐, 이놈의 음수어가 이제야 잡힐 모양이로구나. 열흘이 넘도록 기다린 보람이 있어!"
홍칠이 곧 낚시대를 잡아당겼다. 얼마나 큰놈이 걸렸는지 좀체 달려 나오지를 않았다. 힘껏 잡아당기자 정말 팔뚝만한 음수어가 걸려 나왔다. 신이 난 홍칠은 낚싯대를 드리우고 음수러을 옆에다 놓았다. 운이 좋은 날인 모양이었다. 또 낚시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런데 이번엔 좀 이상했다.
"이상한데! 음수어가 이렇게 무거울 리는 없는데……."
더욱 힘을 주어 낚시대를 채던 홍칠의 눈이 왕망울 만해졌다.
"이크!"
음수어 대신 물 속에서 온몸이 흠뻑 젖은 웬 사내가 불쑥 솟구치는 게 아닌가. 황약사였다.
"난 재수가 없는 놈이군. 꼭 맛있는 음식만 생기면 곁다리 붙는 사람이 생기거든. 우리 이렇게 하지. 내가 이 물고기를 다 먹을 때까지 그쪽에 가만히 있으리구."
"허허,. 이 거렁뱅이야! 강호를 돌보느라 또 먹을 것을 챙기느라 바빠서 언제 잠을 자지?"
"자네 말대로 난 바쁘니 대신 강호의 일 좀 봐 주겠나?"
"이 거렁뱅이야, 먹는 일이라면 몰라도 강호의 일은 나도 간섭하기 싫다네."
"그런 사람이 왕중양을 생각하고 또 그 여인까기 구해 주었나?"
홍칠 앞으로 나온 황약사가 씨익 웃었다.
"지하궁전에서 내 눈앞을 어지럽히며 어른대던 그림자가 바로 너 거렁뱅이였구만!"
"벌거벗은 여인들에게 한눈을 파는 줄로만 알았는데 용케도 나를 보았군?"
"하하, 내 마누라가 들었더라면 눈이 뒤집혀졌을 텐데."
"입담 한번 걸쭉하군."
홍칠이 누가 빼앗을까 봐 물고리를 날것으로 와작와작 씹어먹기 시작했다. 그런 홍칠을 바라보는 황약사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져 갔다.




제24장 손잡은 두 난쟁이
금나라에 항거하기 시작한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왕중양은 군사 몇만을 모았다. 그는 모용준과 더불어 파죽지세를 몰아 북상할 것을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난 악비의 그 만강홍(滿江紅) 이란 가사가 떠오르네. 정말 피눈물로 찍어 쓴 글이지. 우리가 악비의 그 염원을 따른다면 중원 사람들의 기개를 널리 떨치게 되는 셈이기도 하지 않나?"
왕중양의 말에 모용준이 적극적으로 찬동했다.
두 사람은 이어 성을 빼앗고 잃은 영토를 수복하려면 먼저 개방을 시켜 더 많은 호걸들이 동참하도록 알리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되면 성 몇 개를 쉬지 않고 공격할 수 있어 기대보다 큰 성과를 올릴 수도 있을 거라 믿었다. 먼저 정강, 영주, 침주 등이 연합하여 금나라 오랑캐들을 공격하기로 작전을 폈다.
개방의 사람들도 대부분 강남에 와서 정강 부근에서 활동을 개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또한 무림의 각 큰 문파에서도 사람들을 파견하여 왕중양이 벌이는 대사에 일조를 했다.
"아야 강릉(江陵)까지 밀어부치고 건강(建康)과 임안(임安)을 위협하여 대송 황제도 혼이 좀 나게 했으면 더욱 좋겠는데……."
모용준의 말이었다. 그러자 왕중양이 반대의사를 보였다.
"대송 황제까지 훈계할 겨를이 없네. 쉬지 말고 균주(均州)와 양양(襄陽)을 치고 또 변경(邊境)까지 올라가 대명(大名)과 진정(眞定)마저 내쳐야 하네. 대정(大定)만 정복하면 금나라는 끝장이지."
다시 두 사람은 뜻을 모아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정강은 이즈음 의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각지에서 온 의군들은 정강에 모여 있다가 진군의 나팔소리에 맞춰 적을 물리쳤다. 왕중양은 의군의 영기(令旗)를 들고 진군의 명을 내렸다. 그리고 모용준은 분주히 뛰어다니며 구체적인 전술과 그밖의 일들에 전력을 다했다.
싸움을 마치고 자기 처소로 돌아온 모용준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피로가 겹쳐 나른한 몸이었지만 마음 편히 누울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곧 진군을 위해 몸을 움직여야 했다. 모용준이 있는 처소로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모두 강호의 정의지사(正義之士)들이었다.
"공자님, 이걸 좀 보시오."
이들은 제각기 들고온 비단조각 하나씩을 꺼내 모용준에게 보였다.
모용준 네 놈은 천하 보기 드문 악인이다. 그러나 나보다는 결코 못하다!
거기에는 이런 웃지 못할 글귀가 적혀있었는데 열 개나 되는 것이 한결같았다. 그러나 필체는 모두 같아 한 사람이 쓴 것으로 추측되었다.
"어느 놈이 또 나를 모함하려고 드는 것이지!"
모용준은 적이 놀라워하며 한마디 툭 내뱉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곧 담담하게 말했다.
"허허, 이런 엉터리가 어디 있나? 나를 악인이라고 욕하면서 또 자기는 더 악랄한 악인이라니? 필시 미친놈의 짓이 분명하리라."
소림사에서 온 지비 대사가 예를 올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소승이 보건데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닌 듯싶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사자우란 사람이 강호를 떠돌며 그같은 말을 남긴다고 합니다. 혹시 그 자의 소행이 아닐까 합니다만……."
"그럴 리가 없소. 그 사람과 나는 원한을 품을 만한 사이도 아닌데 무슨 이유로 나를 모함하겠소?"
모용준이 발끈 달아올라 성을 내자 이번에는 운심도장이 나섰다.
"행여 그자의 소행이라면 각별히 경계를 해야 합니다."
"경계할 것도 없소. 우리 모용세가가 그 사람에게 원한을 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적대시한다는 말이요? 이같은 일은 우리의 대사와는 상관없으니 잊어 버립시다. 더군다나 그 사람은 나와 같은 난쟁이인데……."
그렇지만 그밖의 사람들까지 입을 모아 조심하라고 권했다. 모용준이 쓸데없는 말 듣기 싫다며 당장 물러가라 했다. 지비 대사와 운심도장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들은 모용준이 조심하지 않으면 큰 일을 당하게 될 거라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다시 혼자 남겨진 모용준은 침대 위에 앉아 고심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사자우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은 없었다.
모용준 네 놈은 천하 보기 드문 악인이다. 그러나 나보다는 결코 못하다!
그는 사자우가 전해온 그 글을 되씹어 보았다. 모용준은 사자우의 도전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 더 쉽게 말해 그의 도전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좀도적은 남의 집 물건을 훔치지만 큰 도적은 나라를 훔친다는 말이 생각났다. 이것에 비추어본다면 사자우는 좀도적에 불과하다는 게 모용준의 생각이었다. 자신처럼 나라를 훔치려는 게 아니라 시시하게 비단조각이나 내던지는 그가 불현 우습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정말 가소롭군. 나는 대송의 천하뿐만 아니라 금나라와 대리(大理) 그리고 토번(吐番 ; 지금의 티베트)마저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는데…….'
하지만 몽골은 흩어진 모래알 같아서 한데 모으기가 어렵고, 토번은 황량하여 쓸모가 없었다. 문제는 금(金)나라였다. 지금 금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땅은 원래 송나라의 금수강산이었다. 그러므로 이것부터 소유해야 했다. 그래야만 새롭게 태어난 연(燕)나라의 황제가 되는 것이다.
모용준이 지청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모용준 앞으로 걸어온 지청이 읍을 했다.
"중요한 일 한 가지를 그대와 의논하고자 불렀네.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모용준의 설명을 잠자코 듣고 난 지청이 열쩍은 태도를 보였다.
"글쎄, 상서롭지 못한 일인 것 같습니다만. 사자우란 사람은 아주 고약한 인간이라서 한 번 원수를 지면 상대를 죽이기 전까지는 쉽게 물러서지 않는답니다. 그러니 부디 그자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게……."
"그놈이 나를 먼저 해치려 들고 있으니 더 큰 문제가 아닌가?"
모용준은 골머리가 아파 왔다.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의논하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인기척이 났다.
"모용준, 거 말소리 좀 높이게.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올려다보니 대들보 위에 한 사람이 걸터앉아 두 다리를 건들거리고 있었다.
"네가 얼마나 현명하기에 그 거렁뱅이가 그렇듯 칭찬을 하는지 모르겠군. 내가 보건데 넌 대장부도 못 되지. 무슨 일을 하려거든 내놓고 할 것이지 그게 뭔가? 나를 좀 본받으라고!"
지청의 머리칼이 쭈삣 곧두섰다. 대들보 위에까지 올라와 있는 걸 보면 이미 모용준과 나눈 말도 알고 있으리라. 아니 그 전부터 저러고 있었다면 이곳의 비밀까지……. 모용준의 침대에 있는 비밀까지 훤히 알고 있는 뒤라면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지청은 무겁게 내리누르는 근심과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모용준, 자네도 저 지청처럼 우거지상을 해야 정상이 아닌가?"
이젠 다른 도리가 없었다. 사자우와 맞닥뜨린 이상 슬기롭게 대처해야겠다는 게 모용준의 판단이었다.
"이게 누구요! 사자우님이 아니신가요? 미처 인사를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모용준이 예상 밖으로 공손하게 나오자 사자우는 잠시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얼른 본래 자신을 되찾으며 손가락으로 모용준을 가리켰다.
"네 이놈! 그 알량한 수작을 그만두지 못할까? 내가 네 놈의 꾀에 넘어갈 그런 바보로 보이느냐?"
"사자우님, 저와 벗을 할 의양은 없으신지요?"
모용준은 계속 아첨하는 투로 말하자 사자우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걸까?'
사자우가 얼른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자 다시 모용준이 회유하기 시작했다.
"전 사자우님의 일거일동이 모두 깊은 뜻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자우님도 남의 밑에서 일하기는 싫어한다는 것도 전 잘 알고 있지요. 이렇게 저희 모용세가에 오신 것도 그 뜻이 깊을 줄 압니다만 너무 거리가 멀군요. 어서 내려오셔서 저에게도 그 깊은 뜻을 전해 주시는 게……."
"난 이런 곳에서 너와 나를 말은 없다. 지하에 화려한 궁전이 있다는데 왜 날 이런 너절한 곳에서 대접하려 드느냐?"
사자우가 입을 실룩거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모용준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럼 가시지요, 사자우님."
사자우가 신이 나서 얼른 대들보에서 내려왔다.
"좋다. 가서 너의 악행을 한 번 보겠다. 과연 나보다 더 한지 내 꼭 확인을 해야겠다."
모용준이 사자우에게 손짓을 했다. 자기가 있는 침대 위로 올라오라는 뜻이었는데 사자우는 모슨 뜻인지 몰라 멀뚱한 눈으로 되물었다.
"뭔가?"
"자, 이리로 올라오시지요."
사자우가 침대 위로 오르자 곧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바닥에 도착하자 모용준이 능청을 부렸다.
"사자우님, 이 지하통로에는 아흔아홉 개의 비밀장치가 있는데 무사히 통과하느냐 못하느냐는 사자우님 재수에 달렸습니다."
"비밀장치? 비밀장치를 논하자면 넌 내 손자뻘도 되지 못해."
모용준이 껄껄 웃으며 앞장을 서고 사자우가 그의 뒤를 따랐다.
"어디 어디에 비밀장치가 있는지 가르쳐 드릴까요?"
모용준이 다시 능청스런 웃음을 사자우에게 던졌다.
"이놈아, 내 걱정말고 너나 조심해라!"
사자우가 슬슬 약이 오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자우님께서 비밀장치에 걸려 해를 입으시기라도 하면 어쩌죠? 공연히 나만 못된 놈이라 욕하실 게 뻔하지 않습니까요?"
"걱정 말아라. 내가 죽으면 너 역시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없을 테니."
"사자우님께서 잘못 되면 제 처지가 매우……."
모용준이 빙긋빙긋 웃어가며 사자우를 더 안쪽으로 이끌었다. 모용준이 발로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갑자기 한쪽 벽이 흔들리면서 쿠릉 하는 소리를 냈다. 모용준이 급히 몸을 돌리며 사자우를 얼싸안았다. 그 벽을 보니 독이 묻은 화살 수십 개가 사자우를 겨눈 채 바르르 촉을 떨었다.
"조심하세요. 제가 먼저 지나갈 테니 조심해서 따라오십시오."
모용준이 허리를 숙이고는 한 걸음 앞으로 옮기려 할 때였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화살 몇 개가 모용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모용준은 이 화살들의 방향을 이미 꿰뚫어보고 있는 터라 피할 수 있었다. 문제는 사자우였다. 두 사람 간격은 어느새 네댓 걸름이나 차이가 생겨 사자우 혼자 많은 화살을 감당해야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죽음을 기다릴 사자우가 아니었다. 그는 바닥을 강하게 박차고는 뛰어올라 모용준의 한쪽 어깨를 잡았다. 어깨가 아스라지는 것
같아 모용준이 비명을 질렀다.
"아악!"
"이놈, 나를 두고 혼자만 살 작정이냐?"
순간 화살이 날아들었다. 사자우가 얼른 모용준의 뒤로 몸을 숨기며 화살을 피했다. 말하자면 모용준이 방패가 돼 버린 꼴이었다.
탁 탁 탁…….
여러 개의 화살이 정확히 모용준의 가슴에 와 박혔다. 그러나 모용준은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피 한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는 모용세가 전가지보(傳家之寶)인 얇은 갑옷 연갑(軟甲)을 속에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살이 모용준의 가슴에 맞고 아래로 힘없이 떨어지자 사자우가 혀를 찼다.
"어허, 빈틈이 없는 놈이군. 하나 그런 것을 입고 지하궁전에서 어떻게 견디겠느냐? 더운 건 둘째치고 여인을 안을 때마다 거추장스러울텐데. 하하핫!"
그러면서 사자우는 모용준의 갑옷을 뜯어 팽개쳤다. 모용준이 목청을 길게 뽑았다.
"행삼퇴이! 행삼퇴이!"
이것이 지하통로를 통과할 수 있는 암호였다. 이 암호를 모르면 곧장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망할 놈, 그 소리만을 내면 될 것을 이 야단을 떨었어? 이젠 나도 알았으니 어서 가자."
사자우가 모용준의 뒷덜미를 움켜쥐더니 앞세우고 계속 걸어 들어갔다.
"방금전에 사자우님이 어찌 될까 봐 조마조마했었는데 다행입니다."
모용준이 눙치는 어조로 말하자 사자우가 버럭 고함을 쳤다.
"이 놈! 내가 네 놈같은 난쟁이에게 당할 사람으로 보이더냐?"
사자우는 거드름을 피우며 계속 모용준을 다그쳐 안으로 걸어갔다. 곧 눈앞으로 또 다른 통로가 나타나자 모용준이 걸음을 멈췄다.
"더 갔다가는 위험합니다요. 그러니 이쯤해서 돌아가시지요?"
사자우는 모용준의 말에 발끈해서 주먹으로 내리치려고 했다.
"이놈, 너나 조심해라. 네 놈이 먼저 죽어 자빠질까 걱정이다!"
"저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사자우님의 손에 죽는다면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점점 가관이었다. 모용준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이런 소리들을 줄줄 외어 댔다. 사자우는 왜 모용준이 멍청하게 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저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주시할 뿐이었다. 모용준은 조금도 주눅이 든 것 같지 않았다.
'이놈도 악인은 악인이야.'
이들은 어느새 지하통로 중앙까지 이르렀다. 모용준이 다시 넉살좋게 입을 놀려 댔다.
"만일 제가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왔다면 일일이 설명을 했을 겁니다. 어디에 함정이 있고 또 어느 곳을 밟으면 독사굴로 떨어진다는 것들을 말입니다. 허나 사자우님께 이런 귀뜸을 해 드렸다면 웃음이나 살 것같아 그만두겠습니다."
모용준이 떠벌이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사자우는 그의 뒤로 바싹 붙으며 주위를 살폈다.
"이러지 말고 좀 물러서세요. 한 발짝만 떨어져 오시라니까요!"
사자우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정말 한 걸음만 뒤로 쳐져 그를 따르면 아무 일도 없을 줄로만 알았다. 사자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막 뒤로 물러서자 그만 발밑이 풀썩 꺼지고 말았다.
"악!"
어떻게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사자우는 함정 속으로 떨어졌다. 독사가 득실대는 뱀굴이었다.
"저런, 내가 잘못 알려줬네!"
모용준이 떨어진 사자우를 내려다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굶주렸던 독사들은 사자우를 향해 쉭쉭 기어들었다. 사자우가 손사레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모용준은 몸을 굽혀 함정 안에다 대고 제법 애처로운 소리를 했다.
"이 일을 어쩌죠? 그 독사들은 내가 먹이를 통 주지 않아 잔뜩 독이 올라있을 텐데. 사자우님,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다는 말인가요?"
모용준은 울먹이기까지 하며 계속 사자우에게 공포감을 불어넣었다. 함정 안은 온통 독사들의 배설물로 역한 냄새를 풍겼다. 이때 벽으로 기어오르고 있던 독사 두 마리가 사자우의 머리 위로 툭 떨어졌다. 사자우가 "앗!" 하는 소리를 질렀다. 사자우가 국자와 갈고리 등이 달린 병장기를 꺼내 뱀을 향해 휘둘러 댔다. 가히 대단한 무기였다. 어느 샌가 바닥에 깔려 있던 독사의 절반이나 해치운 것이다. 나머지 뱀들은 슬금슬금 꼬리를 흔들기만 할 뿐 선뜻 대들지를 못
했다.
방금 전까지 징징 우는 소리로 너스레를 떨던 모용준의 눈빛이 돌변했다. 사자우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그가 얼른 다른 묘책을 생각해 냈다.
"참, 이제서야 생각이 났어요. 내 올라오는 장치를 가동시킬 테니 걱정 마십시오!"
하며 모용준이 뜨르륵 뜨르륵 장치를 열심히 돌려 사자우를 위로 올렸다.
"이 고약한 놈! 네가 감히 나를 놀리다니!"
올라오자마자 사자우가 모용준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높이 치켜들었다. 사자우는 모용준을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한 기세였다. 모용준이 황급히 양손을 허우적거리며 버둥댔다.
"아이고, 억울합니다요. 정말 억울해요."
"억울해? 얼울하긴 뭣이 억울하다는 말이냐?"
"왜 제 말씀을 잘못 이해하셨어요?"
닭 모가지 비틀듯 단박에 숨통을 조이려던 사자우가 다시 눈을 흡떴다.
"뭐야! 그건 또 무슨 말이더냐? 감히 누굴 속이려 들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요? 전 사자우님을 속이지 않았어요. 전 사자우님이 있어야 세상일이 골고루 평안해진다고 믿고 있는 사람올시다. 특히 제가 두다리 쭉 뻗고 살 수 있지요."
"허, 그건 또 무슨 수작이냐? 내가 있고 없고가 네 놈에게 어떤 의미라도 있다는 말이더냐?"
모용준이 울상이 되어 애원을 했다.
"사자우님께서 계시면 세상사람들이 저를 함부로 업신여기지 못한다는 뜻이죠. 그러나 사자우님이 제 곁에 없다면 전 한시도 살아갈 수가 없어요."
모용준의 이같은 부추김은 사자우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하핫! 고놈 생긴 것은 볼품없지만 말끝에 꿀이 그득하구나! 알았으니 그만 나불대고 어서 앞서 걷기나 해라!"
모용준도 흐뭇한 미소를 잊지 않았다. 그는 사자우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게 되었다. 사자우를 잘만 이용한다면 천하를 얻는 일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두 사람은 드디어 지하궁전 안에 아르게 되었다. 예고도 없이 나타나서였을까. 궁녀들은 저희들끼리 마주앉아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모용준이 웬 낯선 사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자 벌떡 일어났다. 궁녀들의 눈에는 이 사자우가 의미 있게 비쳤다. 원래 모용준은 사대 가신들이 큰 공을 세웠을 때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사대가신들은 자기들이 세운 공에 대한 상으로 이 궁녀들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궁녀
들은 사대 가신도 아닌 처음 보는 사내가 왜 이곳에 들어왔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모용준과 같은 난쟁이라 그녀들의 눈빛은 한층 호기심으로 변해 갔다.
모용준이 가까이 다가서자 궁녀들이 허리를 굽히며 입을 모았다.
"폐하의 만강을 축원합니다!"
"오냐, 별일은 없었겠지?"
모용준이 의연한 자세로 그녀들의 인사를 받았다. 궁녀들의 시선은 서서히 사자우에게로 옮겨졌다. 특히 그중 두 명의 궁녀는 사자우를 향해 넋을 놓기까지 했다. 아마도 같은 난쟁이인 모용준이 보여 주었던 불 같은 정력을 떠올리는 눈치였다.
사자우의 눈도 끈적끈적한 빛을 토했다. 이 궁녀들은 한결같이 국부만을 살짝 가린 채 거의 알몸으로 있지를 않은가. 사자우의 가슴도 싱숭생숭 요동을 쳐댔다.
"그래, 마음에 드느냐?"
그녀들을 향해 모용준이 슬쩍 물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모용준을 의식하여 감히 진심을 보이지 못하고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모용준이 갑자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른 것은 이때였다. 그는 또 두 궁녀의 뺨을 찰싹찰싹 후려쳤다.
"축하한다. 너희들이 오늘밤 이 분을 모셔야 한다."
그러자 사자우가 화를 냈다.
"아니, 내가 계집에게 걸신든 사람으로 보이냐?"
모용준이 반죽좋게 사자우의 노기를 가라앉혔다.
"아닙니다요. 귀신은 속일 수 있어도 제 눈은 속일 수가 없을 겁니다. 무릇 우리 같은 난쟁이들이라고 여인을 멀리할 수는 없는 법, 모르긴 해도 사자우님도 꽤나 여인을……, 헤헤 ……,"
모용준의 웃음 소리가 귀에 거슬린 사자우는 미간을 오므렸다.
"왜 여인들의 뺨은 후려치는가?"
"그거야 이 계집들이 저보다 사자우님을 더 흠모하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화가……. 허나 사자우님을 모시겠다는 마음이 지극해 기분이 좋습니다."
"어허, 정말 못 당해 낼 놈이로구나."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요?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어쩔지 모르겠지만 사자우님께 직접 들으니 이거 황송해서 몸둘 바를……. 제가 사자우님이었다면 이 세상이 벌써 모용씨네 마당이 되었을 것이고 선조들도 한을 품고 눈을 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요."
그는 모용준이 하는 말이 밉지 않아 슬슬 기분이 좋아졌다.
"네 놈이 난쟁이만 아니었더라도 지금보다는 큰 인물이 되었을 텐데……."
사자우가 유쾌해져 마음에 없는 말까지 내뱉었다.
"옛날 제나라 재상 안영(晏영)도 난쟁이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모용준이 슬그머니 이렇게 받아치고는 곧 궁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궁녀 둘이 사자우 앞으로 와 교태를 부리며 은근슬쩍 암내를 풍겼다. 그 암내는 진한 향수였는데 사자우가 코를 벌름거리며 입맛을 쩍 다셨다.
"좋구나. 넌 어떻게 이런 감칠맛 나고 순한 계집들을 구했느냐? 내 산장에 있는 계집들은…… 말도 말아야지."
모용준이 궁녀들을 향해 당부를 잊지 않았다.
"오늘 모시고 온 이 분은 아주 귀한 손님이다. 너희들은 정성을 다해 귀빈 대접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너희들이 잘해야 나 또한 강호에서 대접받게 되는 것이다. 그럼 너희들이 먼저 이분께 나를 보살펴 달라고 아뢰어라!"
그러자 알몸의 여인들이 사자우 앞에 조아렸다.
"앞으로 우리 황제님을 더욱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하도 기이한 광경이라 모용준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허, 네 놈도 보기 드문 괴짜인데……? 어떻게 길을 들여 놨기에 이 계집들이 이러느냐?"
모용준이 사자우의 귀를 빌려 속삭였다.
"약을 썼지요. 처음의 약은 미약(媚藥)으로 달콤한 말로 살살 구슬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미약(迷藥), 즉 춘약(春藥)으로 진짜 약인데 여인들의 칠정육욕(七情六慾)이 모두 드러나게 하는 거죠. 또 세 번째는 정약(情藥)으로 은정을 조금 베풀어 주어 여인들이 감지덕지하게끔 만들고, 마지막으로 쓴 약은 욕약(慾藥)인데, 즉 금은재물을 담뿍 주고 또 관직에도 앉히는 것입지요. 이렇게 여러 가지 약을 쓰는 데야 넘어가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사자우는 크게 깨우친 바가 있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하였다.
"좋아, 넌 정말 훌륭한 난쟁이다!"
"사자우님에 비하면 전 아무것도 아니지요."
두 사람은 뱃가죽이 쓰리도록 한바탕 웃었다.
모용준은 다시 한 무리의 궁녀들을 불러 사자우에게 선보였다.
"어느 궁녀이든 이분께 총애를 받게 되면 난 그녀를 북궁낭랑(北宮娘娘)에 봉할 것이다!"
대단히 구미가 당기는 말이었다. 모용준이 이렇게 외치자 궁녀들의 몸짓이 달라졌다. 사자우 앞에서 온갖 교태를 짜내며 그의 마음에 들려고 애를 썼다.
사자우는 벌써 열이 넘는 여인들을 그대로 지나치게 했다. 썩 마음에 드는 여인이 없었다. 그러다가 아주 여위고 자그마하게 생긴 여인 하나가 사자우 앞으로 다가섰다. 사자우는 망설일 것도 없이 그녀의 손목 덥석 잡았다.
"네 이름이 무어냐?"
대신 모용준이 나서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자우님, 이 애는 키가 삼 척도 안 되는 부실한 아이랍니다.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노신다면 몰라도 그 일을 하기엔 좀……. 그렇지만 이 아이의 혀끝은 아주 일품이지요."
"어허, 나 역시 크기가 고만하니 잘된 일이 아니더냐?"
벌써 이 자그마하게 생긴 여인이 사자우에게로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그래, 네가 북궁낭랑이 되고 싶다는 말이냐?"
모용준이 그녀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낄낄댔다. 모용준의 궁전에서는 어느 궁의 낭랑이 된다해도 누릴 수 있는 특혜가 무궁무진했다. 그래서 궁녀들은 너나할것없이 낭랑이 되고자 기를 쓰는 중이었다.
"그거야 폐하의 관심과 이분의 사랑에 달린 일이지요."
꾀꼬리같은 목소리를 내며 여인이 눈을 내리깔자 사자우가 물었다.
"그래, 이름부터 말해 보거라."
그러자 여인이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에 대고 '담화(曇花)'라는 두 글자를 써갈겼다.
"운화(雲花)? 구름에 무슨 꽃이 있다는 게냐?"
사자우가 의아해하자 여인이 미소를 살짝 머금었다.
"운화가 아니라 담화랍니다. 담화일현(曇花一現)이라 할 때의 담화예요. 햇빛에 피는 꽃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갑자기 뒤통수에 철퇴라도 얻어맞은 사람처럼 사자우가 움찔했다. 그는 여인에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더니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맞아! 네가 진정한 내 짝이로다!"
"알겠습니다. 사자우님께서는 왜소한 계집에게 흥미를 갖고 있었군요? 어쩌면 저와 취향이 같으신지요?"
모용준은 사자우가 겸연쩍어할까 봐 한껏 눙쳤다. 하지만 사자우의 귀에는 반대로 웃음거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난쟁이인 자신과 모용준이 왜소한 여인을 좋아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길쭉하게 생겨 먹은 여인을 눕혀 놓고 과연 난쟁이 모용준이 무슨 재주로 여인을 즐겁게 해줄 것인가. 또…… 이런 생각을 줄줄이 엮어 가던 사자우가 양미간을 찡그렸다.
"듣고 보니 이상하네! 그렇다면 이 여인을 내놓지 못하겠다는 말이냐?"
모용준이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달리 굽혔던 상체를 곧추 펴더니 대들었다.
"너무 지나치군. 이 궁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한꺼번에 죽을 수도 있는 방법을 내가 몇 가지 갖고 있소이다! 그러니 담화를 포기하고 다른 여인을 고르시지요."
그러나 사자우는 외눈 하나 실룩거리지 않고 맞섰다.
"나는 담화를 차지하기 위해 사생결단으로 싸울 것이다!"
모용준이 궁녀들에게 일렀다.
"너희들은 왜 그러고만 있지? 어서 몰살당하기 전에 담화를 포기하라고 어서 이분에게 빌지 못하겠어?"
사자우는 모용준이 허튼소리를 하고 있다고 여겼다. 과연 모용준이 계집 하나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 놈아, 개수작 그만 하거라!"
사자우가 다시 으름장을 놓았다.
"이 놈, 잘 생각해 봐라. 황제가 되려는 꿈을 잊지 말고!"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아직도 빌지 않고 뭣들 하는 게냐?"
모용준은 사자우의 서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궁녀들이 일제히 사자우 앞으로 달려와 엎드렸다. 담화를 놔주어 어서 자기들의 목숨을 구해 달라며 통사정을 했다. 사자우가 담화를 어린아이 안듯 한 손으로 번쩍 들어올리며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어울리는 짝을 찾았으니 너희들이 죽고 사는 문제는 괘념할 바 아니다!"
"정말 담화를 아내로 삼을 작정이요?"
모용준이 눈을 내리깔며 묻자 사자우가 이를 갈았다.
"그렇다!"
"사내 대장부라면 친구가 자기의 소중한 물건을 요구해도 선뜻 내주어야지만, 담화를 놓고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전 담화가 곁에 있어야 밤에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지요. 담화를 데리고 간다면 전 이 긴 밤을 적적해서 어찌 지낼 수 있겠는지요?"
모용준의 청승맞은 술수가 시작되려 했다.
"사자우님께서 내 여인을 빼앗아 간다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손가락질을 하겠습니까? 천하 최고의 악인이라 욕을 할 겁니다."
"하하핫! 그래 맞다. 난 악인이다. 천하 최고의 악인이다. 그러나 하늘은 나를 용서할 것이다!"
사자우가 한 손에 담화를 그리고 다른 손에는 사장을 움켜쥐고는 소리쳤다.
"내 곁으로 다가서지 마라! 다가서면 당장 머리통을 부셔 놓을 것이다!"
모용준의 입에서 얼음장보다 차가운 웃음이 흘러 나왔다.
"흐흐흐, 내 그 여인을 빼앗길지라도 할말은 해야겠소."
"무슨 말이냐?"
"정 그렇다면……."
"무슨 수작을 하려는지 어서 말해 봐라!"
"대신 난 세 가지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세 가지가 아니라 백 가지라도 좋다!"
"흐흐, 후회 따위는 안 하시겠죠?"
"내가 왜 후회를 해? 염려 말고 그 세 가지를 대봐라!"
그러자 모용준이 지금까지의 탈을 벗어 던졌다. 그는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대장군의 위풍을 되찾았다.
"첫번째 부탁은 다시는 날 죽이려 하지 말라는 것이오!"
이말에 사자우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모용준이 자신을 극히 두려워하고 있다고 믿었다.
"염려 마라. 난 너를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너에게 손을 대는 것도 막아 주겠다."
그는 한 번 자기 입으로 다짐한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한 가지는 나를 도와 강호 사람들을 다스려 주시오. 내가 누구를 치겠다고 하면 선배님은 꼭 일조를 하셔야 합니다."
"그럼 내가 너의 명령에 따르라는 말이냐?"
사자우가 병장기 끝으로 모용준을 내리치려는 시늉을 했다. 모용준이 턱짓으로 담화를 가리키자 사자우는 멈칫했다.
"강호 사람들을 두려워할 건 없습니다. 황약사가 두렵습니까? 아니면 홍칠이가 겁이 납니까?"
"이 놈아,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
사자우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였다. 자신이 누구를 두려워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피가 거꾸로 흐르고 오장육부가 뒤틀렸다.
"그렇지요? 선배님도 저와 같이 용기와 슬기가 무궁한데 누구를 겁내겠습니까? 그걸 모르는 제가 아닙니다. 저와 손을 잡자고 드리는 말씀이지요. 그러면 선배님은 천하 제일의 고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천하 제일의 고수가 되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사자우였다. 누구보다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던 그는 귀가 솔깃했다.
"우하하하핫!"
당장 천하를 얻은 듯 사자우가 크게 웃음을 토했다. 얼마나 큰 내력을 써서 웃는지 지하궁전 전체가 들썩일 지경이었다. 웃음 소리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간파한 모용준이 물었다.
"천하 무림의 일등 고수가 싫다는 뜻입니까?"
"난 꼭 천하 제일의 고수가 되고 싶다. 모용준, 나를 천하 무림의 고수가 될 수 있게 해 준다면 자네를 어버이라고 부르겠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이 후배가 선배님을 어버이라 부른다면 몰라도 당치 않은 말씀이지요. 꼭 그렇게 되실 겁니다. 선배님이 고수가 되시면 제가 기꺼이 어버이로 섬기겠습니다."
두 사람은 다시 하나로 뜻이 통하자 또 한 번 크게 웃어젖혔다.
"좋다, 나머지 부탁도 들어줄 테니 어서 말해 봐라."
모용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저를 도와 대연국을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선배님도 평생 못 다 누릴 영화를 얻게 되지요."
"너는 황제가 되어 좋겠다만 내가 기뻐할 게 있더냐? 행여 네 놈이 토끼를 잡으니 사냥개를 잡아먹는 사냥꾼이 될지 누가 아느냐?"
마지막 말은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너무 욕심을 부린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모용준은 위축되었다. 하지만 이왕 벌인 일이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었다. 속으로 다짐을 한 모용준이 사자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를 쳐다보고 있는 사자우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음을 깨달은 모용준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모용준이 뻣뻣하세 따져 물었다.
"날 그렇게 노려보는 이유가 뭐요?"
"흥, 어쩔 수 없이 난 너를 죽여야겠다. 네 놈을 살려 준다면 하루도 편하게 잠잘 수가 없을 거다!"
이렇게 대꾸하며 곧이어 사자우의 손이 날아들었다. 미리 알고 피하려 했지만 모용준의 짧은 다리로는 어림도 없었다. 비록 엇비슷한 키였지만 사자우가 멱살을 틀어쥐고 높이 쳐드니 모용준은 별 수없이 매달리고 말았다. 공중에 매달린 모용준이 캑캑거렸다.
상황이 돌변하자 궁녀들이 하나 둘씩 도망치려 했다.
"어느 년이 내빼! 한 발짝만 움직이면 그 자리가 무덤이 될 줄 알아라!"
사자우가 시퍼런 서슬로 노려보자 모두들 벌벌 떨기만 했다. 그런데 멀찌감치 물러서 있던 한 궁녀는 사자우의 호통에 코웃음을 쳤다.
'네가 그런 자세로 어떻게 날 죽일 수 있다는 말이냐? 한 손에 담화를 그리고 한 손에 황제를 쥐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사리판단을 마친 그녀가 보란 듯이 달아났다. 그러나 어설픈 판단에 불과했다. 얼마 뛰어가지도 못하고는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고 말았다. 번개같이 날아든 금봉채가 그녀의 뒷목을 꿰뚫은 것이다. 사자가 담화를 허공으로 던지는 순간 그녀 머리에 꽂혀 있던 금봉채를 뽑아 날린 것이었다. 그리곤 떨어지는 담화를 다시 팔로 안으며 궁전이 울리게 소리쳤다.
"누구든지 죽고 싶으면 도망을 치거라!"
제1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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