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중신통 왕중양5

3학년2반 | 2022.02.24 07:46:02 댓글: 0 조회: 410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0809

제25장 계속되는 음모의 소용돌이
의군은 파죽지세로 진군을 계속했다. 어느새 십여만의 대군으로 늘어난 의군의 기세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들은 왕중양의 명을 받아 모용준을 군사(軍師 ;총참모장에 해당)로 삼고 평양(平隆)까지 밀고 들어갔다. 평양성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 때였다.
왕중양은 용솟음치는 열기를 애써 누르며 모용준을 쳐다보았다.
"이보게, 이제 진정 (眞定)과 대정 (大定)을 수복하면 우리는 악비가 하지 못한 일을 모두 이루게 되는 거네."
모용준이 대답 대신 모호한 웃음을 던졌다. 사실 왕중양도 모용준이 속으로 다른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금나라와 한창 싸우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모용준이 의군을 등지고 다른 짓은 못하리라 믿었다. 모용준의 야심은 의군이 승리를 거둔 다음 다시 송나라와 천하를 놓고 한바탕 겨뤄 보자는 것이리라. 물론 그때 가선 왕중양도 수수방관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모용준의 계략을 막아야만 하리라. 그가 송나라
강산을 넘보지 못하도록…….
송나라의 황제가 부패 타락하고 그 자격조차 의심스러울지라도 강산은 지켜야 한다는 게 왕중양의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임금은 없어도 강산만은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기세 좋던 의군 쪽에 문제가 생겼다. 바로 눈앞에 둔 평양성이 난공불락이었다. 평양성은 비교적 오래 된 성이었다. 성곽이 높고 견고해서 연일 공격을 퍼부어도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금나라의 수성장인 미이도(米爾圖) 역시 용감하고 병법에 능한 자였다. 그는 겨울 추위를 이용해 성 밑에 물을 부어 얼음판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의군들은 가파롭고 미끄러운 성 주변에서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하고 애를 먹었다. 그러다 보니 의군의 피해만 늘어갔다.
드디어 왕중양이 이 문제를 놓고 모용준과 대책을 논하기에 이르렀다. 왕중양이 성을 함락시킬 대책을 묻자 모용준은 열쩍은 기색을 보였다.
"우리 의군은 너무 자신만만했어요. 지금까지 모두 식은죽 먹기로 성들을 함락시켜 왔는데 정말 한심하군요. 고금을 보면 제왕의 기업을 닦는 사람 모두가 땀과 피를 흘리고 또 홀려 조금씩 천하를 차지했었습니다."
모용준의 말이 언중유골(言中有骨)이란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왕중양은 그의 속마음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묵묵히 듣기만 했다.
모용준이 말을 이었다.
"물론 평양성을 깨뜨릴 수 없는 건 아니지요. 그러나 이렇게 무모하게 공격만 해서는 안 됩니다. 진공을 며칠 멈추고 일단 몇 리 밖으로 의군을 철수시킵시다. 평양 사람들이 다시 마음놓고 성밖으로 드나들게 해놓은 다음 대책을 연구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일단 모용준의 의견에 대의를 맡기기로 했다. 의군은 곧 후퇴하기 시작했다. 모용준의 예견이 들어맞았다. 삼사 일이 지나자 성문이 다시 열리고 백성들도 자유롭게 드나들게 되었다.
모용준은 손과 발이 빠른 개방의 제자 몇을 나무꾼으로 가장시켜 그들 틈에 잠입시켰다. 이들이 맡은 임무는 성안으로 들어간 뒤 어두워지면 성문을 몰래 열어 두는 것이었다. 그때를 이용해 의군이 성안으로 돌격한다는 전략이었다.
개방의 제자들이 성안으로 들어간 지 이틀 후 신호가 왔다. 성 위에 휜 깃발(풍향을 알리는 깃발)이 나부꼈다.
"드디어 때가 왔군!"
모용준은 즉시 군사를 소집하여 평양성으로 향했다. 이들은 야음을 틈타 성문 앞까지 이르렀다. 몸을 숨기고는 결정적인 시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수성 금군은 찬바람을 피하기 위해 어디론가 몸을 숨겼는지 성곽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악!"
성문 안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짧게 울렸다. 그러더니 사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성문이 열린 것은 조금 뒤였다. 십여 명의 무림 고수들이 의군을 이끌고는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이들의 수는 겨우 수백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두 결의에 찬 모습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징소리가 들려 왔다. 함정에 빠진 것이다. 성루 위에서 누군가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왕중양을 생포하랏!"
그 소리와 더불어 성루 위로 수많은 횃불들이 밝혀졌다.
그러나 선봉에 섰던 운심도장은 물러서지 않고 의군을 향해 명령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돌격하라!"
금군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쓰러지는 앞 사람들을 밟으며 구름떼로 몰려들었다. 일대 혼전이 시작되었다. 이 같은 혼전 속에서는 제대로 싸움을 벌일 수가 없었다.
"성문 밖으로 나가라! 성문 밖으로!"
운심도장은 뒤늦게야 이런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성문은 굳게 닫힌 뒤였다. 의군은 어느 쪽으로도 이동할 수 없게 되었다. 퇴로가 차단된 의군은 더욱 결사적으로 싸우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금군 장령 미이도가 성루 위에 버티고 서서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그의 신변에는 창칼을 꼬나든 수하 장수들과 군사들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다. 운심도장은 몇 번이나 쳐 올라가 금군의 주장(主)을 치려고 했지만 매번 그들에게 밀렸다. 사태는 더욱 불리하게 전개되어 갔다. 이제는 성안으로 진입한 의군들이 거의 전멸되기에 이르렀다.
성밖에 있던 왕중양과 모용준은 속히 방안을 모색했다.
"낭패로군. 입성한 사람들이 전멸당할 것 같은데 급히 증원을 요청하든지 해야 할 게 아닌가?"
왕중양이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모용준은 냉소를 띤 얼굴로 대답했다.
"저 사람들은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게 소위 군사라는 사람이 할 소린가? 수하들을 성안에서 전멸을 당하게 만들어 놓고 그런 소리를 하다니. 자네의 실책을 아직도 모르는가?"
"그런 형님은 언제나 승리만을 안았단 말씀이오? ……그럼 이렇게 하십시다. 앞으로 성공하는 일은 모두 형님에게 돌리고 실패한 일은 내가 책임지겠소. 이러면 되겠소?"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악전고투를 하면서 증원군이 올 때만을 기다리고 있을 걸세. 우리는 싸움에 지더라도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야."
모용준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지만 왕중양은 급한 것부터 돌보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모용준을 설득해 증원군을 보내야만 했다.
"형님, 누군 그러고 싶지 않아 이럽니까? 도대체 얼마를 보내야 저 성을 함락시키겠습니까? 전군이 다 몰려가도 도리어 참패만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십여만이 넘는 대군에서 몇백 명쯤 손실을 보는 것이야 각오를 해야 합니다."
"자넨 장수는 수하를 아끼고 자기 목숨처럼 돌봐야 한다는 도리를 정령 모르는가?"
참다못한 왕중양이 언성을 높였다.
"왜 모르겠소.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라는 말도 알고 있소이다. 한 장수의 성공은 만 군사의 해골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지요. 이 말뜻을 아십니까? 큰일을 도모하려면 피가 강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금국을 내몰려도 피가 강을 이루어야 하고 대연국(大燕國)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그만큼의 피가 필요한 것입니다. 형님처럼 자비심만 갖고서야 어디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소이까? 아무 일도 못 해낸단 말이오!"
두 사람이 언쟁을 하고 있는데 막사 밖으로부터 소림사의 지비대사가 몇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맹주님, 꼭 구원병을 보내 운심도장을 구해 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의군이 매우 불리하게 됩니다."
그의 말에 왕중양은 모용준의 표정을 살폈다. 지비 대사까지 이렇게 나오는데 모용준이 무슨 방안을 내놓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곁에 있던 사람들의 눈길이 모용준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모용준의 말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글쎄, 구해야겠지요. 운심도장은 우리 의군에서 가장 열성적인 분인데 꼭 구해 내야지요. 헌데 그게 그리 쉽지마는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 맹주님의 말씀이나 들어봅시다."
왕중양은 책임 전가를 하려는 듯한 그의 태도에 어이없는 얼굴로 모용준을 바라보았다. 모용준이 정색을 하며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이건 대사이니 아무래도 맹주님의 결단을 들어야 합니다."
잠시 골몰하던 왕중양이 사람들을 향해 일단을 내렸다.
"좋소. 우리가 운심도장을 구해 냅시다!"
이때 막사 밖에서 대성통곡이 들려 왔다. 확인해 보니 운심도장의 머리가 막 성루 위에 달렸다는 것이었다.
"살진 재물을 보내 주어 고맙도다!"
금군 군사들이 성 위에서 외쳐 대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나무아미타불!"
비통에 잠긴 지비 대사가 머리 숙여 합장을 했다. 지비 대사의 뒤에서 왕중양을 불만스럽게 노려보고 있던 조평이 울부짖었다.
"당신들은 처음부터 운심도장을 구할 생각이 없었지? 난 당신들을 저주하오!"
막사 밖으로 뛰쳐나간 그가 장탄식을 했다.
"난 지금껏 사내 대장부를 따르고 있는 줄 알았더니 죽음을 두려워하는 졸장부의 꽁무니만 보고 있었구나!"
그러자 모용준이 천천히 다가가 조평 앞에 섰다. 조평은 아랑곳하지 않고 땅을 쳐다보며 계속 한숨을 쏟았다.
"왕중양도 죽기를 두려워하고 모용준도 마찬가지다. 운심도장을 구하러 갈 생각은 하지 않고 막사 안에 틀어박혀 입방아만 찧고 있으니 앞으로 누굴 믿으란 말이냐!"
왕중양이 여러 사람들에게 사과를 했다.
"내가 처사를 잘못했소이다. 다 내 탓이오. 나도 운심도장을 구해 낼 생각이었지만 무작정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소. 오히려 그들에게 당하기만 한다면 더 큰 피해가 우려되기에 하는 수 없었소."
조평이 세게 코방귀를 뀌며 모용준을 나무랐다.
"흥, 모두 저 난쟁이 탓이다. 평소엔 오만무례해 아무 일이나 다 해낼 것처럼 굴더니 오랑캐 앞에선 찍소리도 내지 못하는군."
원래 성미가 불 같은 강호객들이라 조금만 불씨를 품어도 금세 발끈하기 일쑤였다. 조평이 계속해서 큰소리로 따지자 다른 강호객들도 우르르 몰려들어 그를 두둔하고 나섰다. 왕중양의 가슴은 더욱 무거워졌다.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대정까지 쳐들어 간다고 해도 큰일은 도모할 수가 없을 것 같구나. 대정까지 쳐들어갈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구나
그런데 갑자기 조평을 꾸짖는 모용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같은 놈을 거느리고 금나라를 물리치겠다고 한 내가 한심하다. 금을 전멸시키기도 전에 너 같은 놈 때문에 의군의 기강이 해이해질까 염려된다!"
조평도 맞서 대들었다.
"너 모용준은 무슨 덕이 있다고 우리를 휘동(蜜動)하려 드느냐? 왕중양은 그래도 민심을 좀 얻었기에 맹주로 그리고 의군의 주장으로 우리가 추대하였다. 허나 너 같은 경망한 소인배가 우리를 통솔하겠다고 하니 우습지도 않구나!"
모용준은 무슨 생각인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잠시 후 그가 머리를 들었을 때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조평 아우, 내가 자격이 안 된다면 다른 사람을 뽑아 맹주님을 도우게 하면 될 게 아니오. 난 맹주께서 너무 힘겨워하는 것 같아 형제지간의 도리로 도와주었을 뿐이오. 그런데 자네들이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한층 누그러진 기색으로 입을 연 모용준이 왕중양을 돌아보았다.
"형님, 난 이만 가 봐야겠소. 평양성에서 죽은 사람들의 가족들을 어떡하겠어요. 아무래도 내가 가서 위로를 해야……."
이에 강호객들의 반응이 금세 달라졌다. 모용준이 이렇게 나오자 이들은 오히려 그와 도량에 탄복했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기도 했다. 한 강호객이 조평을 말렸다.
"조평 아우, 실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란 말도 있거늘 어쩌겠나. 맹주라고 실책이 없겠나. 이기면 기뻐하고 지면 원망하는 것만이 도리는 아니지. 막사 안에 들어가 술이나 떠놓고 운심도장의 혼백이나 위로해 주세."
"난 싫소!"
조평은 아직 가슴속의 응어리를 풀지 못한 상태였다. 운심도장과 교분이 가장 두터웠던 조평으로서는 모용준과 왕중양의 처신에 이가 갈릴 뿐이었다. 그는 여러 강호객들이 끈질기게 설득하자 한참 망설이다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술에 흠뻑 취한 조평은 막사 안에 누워서 혼자 훌쩍였다. 그는 이렇게 오랫동안 울다가 화를 내다가 하더니 스르르 잠이 들어 버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누군가 자기 귀에 대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조평, 어서 일어나. 일어나라구."
조평이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보니 눈앞에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버티고 서 있는 게 느껴졌다. 자그마한 사내였는데 그 짧은 허리를 구부리고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날카로운 눈빛……. 모용준은 아니었다. 조평은 곧 사내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머리가 쭈뼛하게 곤두서는 전율에 몸을 떨었다. 그는 바로 사자우였다. 조평이 얼른 자기 호위병을 부르려 했으나 돌아보니 막사 어귀에 이미 싸늘하게 죽어 있는 상태였다. 사자우가 어떤 연유로 이 막사까지 들
어왔을까? 그는 의군과는 직접적인 연관도 없는데 여기는 왜 찾아왔을까? 조평은 의심이 들었다.
강양대도(江洋大盜)인 조평은 매우 약삭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왕중양과 모용준에 대해서는 욕할 수는 있어도 대사와 연관이 없는 이 사자우의 비위는 건드릴 수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조평, 난 네가 왕중양과 모용준에게 크게 모욕을 당한 일을 알고 있지. 어떤가, 복수를 하고 싶지 않은가?"
사실 술에 취해 한숨 자고 일어난 조평은 그새 모욕이고 뭐고 잊어버린 뒤였다. 그가 망연히 물었다.
"복수는 무슨 복수입니까?"
"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도 복수할 마음이 없다고?"
"난 어떤 모욕을 당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데요."
"이봐, 난 그들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죽일 수가 있어."
사자우가 음흉스런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사자우가 하는 말이라 조평은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나를 돕겠다는 겁니까?"
"내가 보기엔 자낸 줏대가 있는 사람이야. 난 그런 사람이 좋거든. 그래서 돕겠다는 거지."
조평은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한동안 고심했다. 어쨌든 사자우의 비위를 거스를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말대로 왕중양과 모용준을 해칠 수도 없었다. 그들과 한때 좋지 않은 관계를 가졌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금나라를 쳐부수는 일이었다.
이런 막중한 일을 목전에 두고 내분의 불씨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한 일이다. 그런데 사자우는 어떤 인물인가. 결코 범상한 사람은 아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의 손에 송장 신세가 될 게 뻔했다. 허리를 숙인 채 조평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자우의 손엔 이상하게 생긴 병장기가 둘려져 있었다. 이제라도 그것으로 그를 내리친다면 조평은 보기 좋게 두 토막으로 잘라져 버릴 것이다.
"좀 앉으시지요?"
조평이 조심스레 사자우에게 권했다.
"내가 앉을 데는 이곳이 아니지. 그래, 어서 가부를 결정하게나?"
"전…… 그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아요."
"왜? 그들이 그렇게 너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겼는데도 그들을 옹호하겠다는 말인가? 이유가 뭐지?"
사자우가 병장기를 흔들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것을 본 조평이 눈을 질끈 감고는 어쩔 수 없이 실토를 했다.
"그들도 일단 금나라를 물리치겠다는 일념 때문에 그런 것일 겁니다. 사사로운 문제는 그때 가서 거론한다 해도 늦지 않는다고 봅니다만……."
"오호, 자넨 정말 대단한 의협심을 갖고 있는 협객이구먼!"
그러나 사자우의 말속엔 찬바람이 휑하니 일었다. 사자우의 심기가 뒤틀린 모양이었다. 대번에 조정의 뒷덜미를 움켜쥔 그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 놈! 이 사자우가 하는 일을 네가 감히 막겠다는 거냐?"
조평은 사자우에 의해 허공으로 번쩍 들리고 말았다. 조평도 무공이 대단한 편인데 어쩐 일인지 기가 손끝으로 모아지지가 않았다. 사자우에 의해 가죽 벗겨진 호랑이처럼 매달리자 일순 온몸의 맥이 나른하게 풀렸다. 무공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그저 입으로만 대항하는 형편이었다.
"난 갈 수 없소이다. 당당한 사자우란 분이 이처럼 억지를 부릴 수 있습니까?"
조평의 말은 그런 일은 할 수 없다는 뜻이었는데 사자우는 다르게 해석했다. 왜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남에게 일을 맡기는가? 그리고도 사내 대장부라 할 수 있는가? 이런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럼 좋다! 내가 직접 해 볼 테니 넌 곁에서 구경이나 하거라."
조평이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자 사자우가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다짜고짜 조평을 밖으로 끌고 나간 사자우는 본영의 막사로 향했다.
막사 주변에는 순라꾼들이 돌고 있었지만 사자우는 바람같이 몸을 놀려 이들의 눈을 피했다. 조평을 끌고 사자우가 모용준의 막사안으로 들어섰다. 앞장서서 막사 안으로 들어선 조평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사자우 선생, 왜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이오?"
조평이 볼멘소리를 내자 이를 본 모용준이 당황하며 일어섰다.
"선배님이 아니시오? 그런데 대관절 무슨 일이시오?"
모용준이 가까이 다가서려고 하자 조평이 밀쳐 냈다.
"얼른 자리를 피하시오! 당신마저 이자가 죽일 것이오!"
"어허, 왜 까닭 없이 나를 해치겠나?"
모용준이 겉으로 미적거리는 시늉을 하며 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조평은 입술이 타들어갔다. 조평이 다시금 모용준을 향해 핏발을 세웠다.
"두말 말고 어서 자리를 피하란 말이오. 사자우는 내가 맞서 보겠소!"
고함을 내지르며 조평이 검을 쓰윽 뽑아 들었다.
"받아랏!"
순식간의 일이었다. 검을 뽑아 드는 것과 동시에 조평은 사자우의 가슴팍을 향해 깊이 검끝을 꽂았다. 그러나 사자우의 동작도 만만하지가 않았다. 턱밑까지 들어온 검을 슬쩍 피하며 난쟁이 특유의 가는 웃음을 터뜨렸다.
"헤헤헤! 가소롭구나!"
조평이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려는데 순간 번쩍이는 섬광을 보았다. 그리곤 묵직한 통증이 왼쪽 가슴으로 전해졌다. 모용세가의 서슬 푸른 단검이었다.
"으……."
가슴을 움켜쥐며 조평이 휘청거렸다. 모용준과 그의 가신들이 시선 속에 들어왔다. 그들은 죽어 가는 사람을 덤덤한 얼굴로 지켜 보고만 있었다. 그제야 조평은 모용준의 속셈을 확연히 알아차렸다. 강호의 호걸들을 제 손아귀에 넣으려고 갖은 모략을 일삼던 모용준이 결국은 본색을 드러낸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조평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한 가지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되었으나 도무지 입을 열어 알릴 수가 없었다. 심장에 정통으로 맞은 단검이 쏟아지
는 피로 다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갑자기 막사 밖에서 누군가 실랑이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잔말 말고 저리 비켜! 둘째를 만나러 왔는데 왜 안 된다는 건가? 모용세가 사람들은 이렇게 무례하다는 말인가?"
"저희 공자님과는 친형제나 다름없이 지내시는 줄은 압니다요. 하지만 오늘만은 참으시고 내일 공자님의 기분이 돌아선 다음에 만나시는 게 어떠신지요?"
왕중양은 모용준에게 했던 말들이 마음에 걸려 찾아온 길이었다. 모용준에게 위로의 말도 하고 또 권유할 것도 있어 찾아온 것인데 문지기가 결사적으로 막아 서니 은근히 짜증이 났다. 안 되겠다고 판단한 왕중양이 문지기를 밀치고 막사 안으로 뛰어들었다. 사자우는 벌써 자취를 감춘 뒤였다. 왕중양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막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매우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가 막 뛰어들었을 때 피를 흘리고 있던 조평이 검을 세우고는 온 힘을 다해 모용
준에게로 달려들었는데 가신들이 끼여들어 그를 난도질해 버렸던 것이다. 조평은 허공을 향해 크게 입을 벌리고는 바닥으로 푹 고꾸라졌다.
"조평!"
왕중양이 부르짖으며 그에게로 달려갔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조평의 머리는 몸뚱이를 떠나 저 멀리 굴렀다. 왕중양은 하도 어이가 없어 말문이 열리지가 않았다.
"형님, 강호에서 굴러먹던 사내들이란 군율의 다스림을 받은 관군들과는 다른 모양입니다. 툭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칼부림을 하고 또 자결을 하려고 드니……. 감히 나를 훈시하겠다고 나서지 않겠소?"
모용준이 이렇게 둘러댔다.
"여러 호걸들에게 조평의 죽음을 어떻게 알려야 하겠나?"
왕중양이 난감한 표정으로 묻자 모용준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형님도 보셨지만 나를 죽이려고 한 놈인데 어찌하겠소?"
왕중양이 모용준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막사 앞 수자기(帥字旗)가 높이 휘날리고 있는 그 아래에는 왕중양과 여러 호걸들이 마주했다. 호걸들이 계속 술렁거리는 것을 보아 조평의 죽음에 불만이 서려 있는 듯했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조평이 먼저 모용준에게 달려들었소. 그래서 조평은 가신들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오. 아무튼 이런 불행이 우리 대 본영에서 벌어졌다는 것은 불행이오. 나는 여러분들이 이번 참사를 교훈으로 삼아 일심 협력하기를 바라는 바이오."
그러나 호걸들은 화기를 누르지 못했다. 이들 중 태반은 강호의 도적 출신들이라 과격하게 반응했다. 쾌도(後刀) 오풍(吳風)이란 자가 나서며 의문을 제기했다.
"아무리 조평이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여럿이 달려들어 난도질을 하다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정령 그가 죄를 범했다면 우리 모두가 보는 앞에서 논죄하고 처단해야 마땅한 처사가 아니었소?"
오풍이 조평의 관 위로 오르더니 관 뚜껑을 열어 젖혔다. 조평의 잘려 나간 머리를 칼로 찍어 올린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러 형제들! 이 조평의 처참한 모습을 보시오. 그처럼 익살스럽고 호탕하던 조평이 눈도 감지 못하고 죽었소이다!"
여러 강호객들이 조평의 처절한 몰골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핏자국이 역력한 시커먼 얼굴이었다. 입술은 험상궂게 일그러졌고 두 눈은 누구를 쏘아보는지 부릅뜬 채로였다. 호걸들 속에서 누군가 소리를 쳤다.
"모용준, 너무 위세 부리지 마시오. 듣기로는 말대꾸 몇 마디 했다구 조평을 다그쳤다는데 이거 너무하지 않소? 또한 화가 나 달려드는 조평을 가신들을 시켜 저토록 난자를 한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모용준은 먼 산만 바라볼 뿐이었다. 다시 누군가 모용준을 닦달했다.
"난 그 말을 믿을 수 없소. 정말 어떤 연유로 그를 죽였는지 모용준의 입을 통해 똑똑히 듣고 싶소."
여전히 먼 산만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자 모용준 대신 왕중양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러 형제들! 조용히들 하고 내 말을 들으시오!"
그런데 왕중양마저 사태를 무마시키려 드는 것으로 판단한 다른 강호객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
"왕중양, 우리 모두가 당신을 받들어 무림의 맹주로 모셨소. 그런데 도리어 모용준을 사주하여 무림의 영웅들을 죽이게 하는군요. 당신도 필경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닌가 하오."
그러자 비로소 묘용준이 소맷자락을 획 앞으로 내저으며 몸을 돌렸다.
"사람이 죽은 것은 내 막사인데 왜 큰형 님에게 무례하게 구느냐!"
왕중양을 다그쳤던 사내가 모용준을 향해 오금을 박았다.
"큰 형님은 맹주가 아니던가? 맹주인 이상 전후시발을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야 해!"
"사실 이 사건을 끝까지 파고들면 우리 의군의 명예만 더럽히게 될 뿐이야!"
모용준이 성의 없게 대꾸하자 좌중은 더욱 크게 술렁였다.
"아니, 의군의 명예를 더럽힌다니? 그런 아리송한 말은 집어치우고 어서 조평을 왜 죽였는가 사실을 밝히시오!"
모용준이 낭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동정을 구했다.
"세상에 이렇게 수치스러운 경우가 어디 있는가! 아,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혼자말처럼 중얼대는 소리를 들은 지청이 민망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공자님, 공연히 의심과 원망을 살 게 뭡니까? 아픈 가슴은 시원히 펼쳐 보여야 뒤탈이 없는 법이지요."
"나 하나가 의심을 받고 원망을 사는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지. 금나라를 몰아내고 강호를 수복한다면 난 능지처참을 당해도 할말이 없어."
모용준의 발언에 사람들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모용준이나 왕중양이 이렇게 앞장을 서 금나라와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한 강호객들이 머리를 숙였다. 모용준이 가슴속을 다 훑어내듯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니오. 당년에 악붕거(岳鵬擧)는 군사를 휘몰아 강남에서 주선진(朱仙鎭)까지 쳐들어 갔었소. 악붕거는 장수들을 불러 놓고 말하기를, '승승장구로 황룡부를 깨뜨리고 그대들과 더불어 만취해 보리라! '라고 하였소. 허나 당년의 썩어빠진 조정은 악붕거의 뜻을 받아 주지 않고 오히려 회군하라는 영을 내렸소.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이 아니겠소? 우리는 금나라를 물리치고자 방방곡곡에서 모여들었소이다. 우리가 힘을 합쳐 금나라를 쳐부순다면
악붕거의 피 맺힌 한을 풀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눈앞에 둔 적을 물리칠 생각은 않고 이렇게……."
좌중이 숙연해졌다. 고개를 깊이 떨군 강호객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중 하나가 고개를 들어 모용준을 불렀다.
"아마도 조평이란 자가 잘못을 한 것 같소. 그러나 자초지종을 들어야 옳고 그름을 판단할 게 아니겠소?"
"대의를 위해 서로가 참고 지내야 하는데…… 욱하는 평소의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칼부림을 하니 실로 가슴 아픈 노릇이 아닐 수 없소이다. 조평만 보더라도 내가 훈시를 하자 불 같은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덤벼들었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강호객들은 모용준의 말을 믿기로 했다. 오히려 모용준을 동정하고 조평을 원망하는 태도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별안간 좌중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분명 누군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빈정대는 것이었다.
"참, 그럴듯한 고육지계 (苦肉之計)로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휘리릭! 하는 바람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좌중의 머리 위로 날아든 이들은 철의법왕과 무심 그리고 귀 낭자였다. 빈정대던 장본인은 바로 무심이었다. 모용준이 이죽거리고 있는 무심을 향해 철가시가 든 목소리를 쏘았다.
"고육지계라니? 그게 무슨 망발인가?"
무심이 배를 움켜쥐고 웃는 시늉을 하다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당신들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이구먼. 지금 모용 공자는 고육지계로 당신들을 기만하였소. 그러나 모용 공자가 눈물 콧물을 흘릴 듯 하소연한들 진실은 속일 수 없는 것이오!"
그 말에 좌중에서 새로운 일렁임이 생겨났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모용준이 무심을 얕잡아 보는 투로 맞섰다.
"누군가 했더니 무심 공자였었구만. 그래 금나라의 철의법왕을 모시고 이곳까지 어인 일로 오셨소이까? 나를 죽이러 왔소이까?"
모용준의 말에 좌중에서 또 한 번 크게 술렁거렸다. 금나라의 철의법왕이란 말 때문이었다. 철의법왕이 뒷짐을 지며 코웃음을 쳤다. 무심이 받아쳤다.
"그대를 죽일 사람은 없소이다. 다만 우린 그대의 얄팍한 속임수를 들춰내고 싶을 따름이지."
"어허, 그럼 나보다 진실을 더 잘 알고 있는 모양인데 대신 말해 주겠소?"
"내 입이 열리는 순간부터 당신의 입장이 말이 아닐 텐데 관두겠소."
"허튼 소리가 나올 게 분명하니 그리 하는 게 좋을 것이오."
그러자 강호객들 중 하나가 호기심이 동해 일어섰다.
"무심 공자, 할말이 있으면 우리가 다 알아들을 수 있게 툭 털어 놓으시오!"
무심이 빙긋 미소 지으며 모용준을 슬쩍 훔쳐보았다.
"모용준, 이제 내 입이 터지면 당신은 망신살이 뻗치겠지?"
"흥, 주둥이를 놀리는 건 그대의 마음이지만 모가지만은 여기에 남기고 가야 할걸!"
곧 모용준이 곁에 있던 지청에게 재빨리 일렀다.
"자네 넷은 저 무심이 꽁무니를 빼지 못하도록 지켜 서게!"
지청을 비롯한 나머지 가신들이 짧게 예를 올리고는 득달같이 달려가 무심을 둘러쌌다. 무심이 상체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핫! 난 달아나지 않을 데니 마음놓게. 진실이란 어떻게 해서든지 밝혀지는 법. 나 혼자가 아니라 여기에 있는 법왕님과 귀낭자도 함께 본 것이오."
이들이 조평이 죽어 자빠지는 자리를 목격했다는 말에 좌중은 한껏 긴장했다. 철의법왕이 이윽고 앞으로 나섰다.
"조평이 웬 낯선 사내와 함께 모용준의 막사로 들어섰을 때 그의 가슴에 단검을 박은 사람이 있었소. 그게 바로 모용준이오!"
"아니, 그럴 수가!"
"누구 말을 믿어야 하지?"
"사실이라면 모용준은……."
여기저기서 강호객들의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제 보니 조평을 죽인 건 모용준이었구만!"
누군가 좌중의 의견을 한데로 모으려는 듯 외쳤다. 모용준이 슬쩍 몸을 돌리며 철의법왕을 응시했다.
"그대마저 나를 악인으로 몰아세우니 이거 술 한잔 톡톡히 내야겠군. 그러나저러나 그대들은 여기가 어딘 줄이나 알고 와 떠드는 것이오?"
모용준의 말에 세 사람이 잠시 주춤했다. 앞뒤를 맞춰 보면 사실 이들이 나타날 자리가 아니었다. 그때서야 이런 사실을 새삼 깨달은 강호객들도 웅성웅성 불만의 소리를 내기에 이르렀다.
"나무아미타불!"
소림의 지비 대사가 훌쩍 몸을 날리더니 철의법왕 앞에 섰다.
"금나라가 송나라의 강호를 강점하였으니 우리의 원수가 되었소. 오늘 소승은 법왕과 더불어 무예를 겨뤄 보고자 하오."
철의법왕이 높을 가늘게 떴다.
"대사의 재간으로 어찌 이 노승을 당해 내리오? 대사의 처신은 무릇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오. 이토록 사악한 길에 몸을 담고 있으니 어찌 부처님을 섬긴다 할 수 있겠소이까?"
"뭣이오? 소승이 사악한 길에 들어섰다고?"
"대사는 참선은 하지 않고 땅덩어리나 탐내고 눌러앉을 자리나 넘보고 있으니 이 어찌 사악한 짓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양손에 송나라 백성들의 피를 잔뜩 묻히고 있는 그대는 무슨 불법을 닦으셨소?"
"허허허, 노승은 환희선(歡喜禪)에 들고 무망불(無妄佛)을 깨쳤거늘 인명을 해치든 말든 너 같은 놈이 무슨 상관이냐?"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철의법왕이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공중으로 치솟은 그는 곧장 지비 대사를 향해 내리꽂혔다. 철의법왕의 소맷자락에서는 돌풍이 터져 나왔다. 이에 굴하지 않은 지비 대사 역시 높이 뛰어오르며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맞섰다. 반으로 접혔다 곧게 펴지는 소맷자락은 얼핏 춤이라도 추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떠한 철퇴나 검보다도 무서운 괴력을 지닌 무기였다.
"얏!"
철의법왕의 왼쪽 소맷자락이 부챗살처럼 펼쳐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오른쪽 소맷자락이 지비 대사의 면상을 강타했다.
"야압!"
지비 대사도 쉽게 물러설 수 없다는 듯 강력하게 맞받아쳤다. 엉거주춤 몸을 뒤로 뺀 그가 오른쪽 소맷자락에서 갈고리 같은 손가락을 뽑아 들었다. 그것으로 철의법왕의 명치를 향해 내질렀다.
"퍼, 퍽!"
두 사람이 공중으로 치솟아 엇갈릴 때마다 살기가 튀었다. 다시 아래로 내려온 두 사람은 원을 그리며 서로를 주시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은 지비 대사가 좀 밀리고 있음을 알았다. 지비대사가 대력금강지(大力金剛指)에 혼신의 힘을 다 불어넣어 내밀었지만 철의법왕은 그것을 간단히 막아내었다.
"부처님 가라사대, 무조(無阻), 무란(無欄)하면 무심지경(無心之境)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도다!"
철의법왕이 이렇게 불법을 뇌까리자 지비 대사도 한입 가득 물고 있던 피를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그는 철의법왕에게 당한 것을 숨기려고 계속 피를 머금고 있던 중이었다.
"부처님 가라사대, 무욕(無欲), 무식(無識), 무지(無知)이면 부처님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도다!"
두 사람은 도통한 고승이면 이를 수 있는 극경(極境)을 말하고 있었다. 철의법왕은 세상의 모든 일에 달관하고 통달하면 무심의 경지에 이를 수 있고 그것이 곧 극경이라 보았다. 한편 지비 대사는 모든 욕망을 버리고 모든 일에 무심하면 무지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데 이것이 극경이라 여겼다.
모용준이 철의법왕에게 불현 물었다.
"한마디 여쭐 말씀이 있소?"
"하하하,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소. 공자는 나의 도움을 받아 천하를 차지하고 싶은 것이 아니오?"
모용준이 상기된 얼굴로 머리를 흔들었다.
"법왕님은 왜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씀을 하시오. 저희 모용씨 가문의 선조 되시는 모용복 어르신께서는 대연국을 되찾기 위해 노심초사하시다 미쳐 버리셨소. 그 후부터 저희 모용씨 가문에서는 그런 허황한 꿈을 꾸는 사람은 없소."
모용준은 눈물이 많은 사내였다. 자신의 말에 스스로가 서글퍼져 눈물을 짜냈다.
모용준이 말한 미치광이 공자의 이야기는 대략 이러했다.
이 공자는 날마다 무덤 위에 앉아 아이들을 시켜 자기에게 절을 하게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폐하, 소신들의 절을 받으시옵소서!"하고 허리를 굽혔다. 공자는 싱글벙글 웃고는 아이들에게 엿가락 하나씩을 쥐여 주곤 했다. 공자는 평생 장가를 가지 못했는데 우연히 아벽(阿碧)이라는 비녀와 살을 섞고 아들을 보게 되었다. 말하자면 모용준은 바로 그 미치광이 공자의 피를 물려받은 증손자가 되는 셈이었다. 모용준은 자기가 볼품없는 난쟁이로 태어난 것은 대연제국을
되찾으려다 미친 그 공자의 한을 물려받은 것이라 믿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강호객들이 측은한 눈길을 모용준에게 던졌다. 훌쩍이던 모용준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고는 더욱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대송의 쌀을 먹고 대송의 물을 마시며 자란 대송의 백성일 뿐이오. 나는 바로 어버이 같은 대송의 국호 회복을 위해 이 작은 몸뚱어리나마 바치고자 할 뿐인데 왜 그 옛날 대연국을 들먹여 충정을 헐뜯는단 말이오?"
모용준의 눈에선 다시 눈물이 흘렀다. 이 광경을 보던 강호객들의 가슴도 무거워졌다.
"우리도 대송의 백성이다. 개만도 못한 금나라 족속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자!"
급기야는 이렇게 이구동성으로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무심이 모용준에게 피식 냉소를 던지며 지껄였다.
"모용 공자, 실로 옛말이 맞는군. 호랑이도 언젠간 시라소니를 낳는다더니 과연 명성이 드높던 모용세가에서도 당신과 같은 인물을 만들었지 않은가."
이 말에 가뜩이나 불만이 쌓여 가던 강호객들은 우―하고 들고 일어났다.
"저 놈들의 목을 부러뜨립시다!"
강호객들이 병장기를 틀어쥐며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사기가 오른 모용준이 손을 들었다.
"여러 형제들! 내 말을 들어 보시오!"
그러자 누군가 모용준의 말을 잘랐다.
"모용 공자는 팔짱을 기고 구경이나 하시오. 우리가 저 놈들을 요절낼 것이오."
모용준이 유유히 팔을 내저었다.
"왜들 이렇게 흥분을 하시오? 여기는 금나라 땅이 아니라 대송의 땅이오. 그것도 대송 의군의 대본영이란 말이오. 철의법왕이든 금나라 족속이든 이곳에 온 이상 함부로 돌아갈 수는 없소. 그러니 도리를 짚어 가며 죽여도 늦지 않을 것이외다!"
강호객들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두리번거리자 다시 모용준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금나라 오랑캐들과는 한치의 땅이라도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오. 또한 그 놈들은 개나 돼지를 잡듯 눈에 띄는 족족 내쳐야 할 것이오. 허나 이 철의법왕 패거리들은 금나라에 얹혀 살고는 있지만 원래는 강호 출신이오. 그러니 강호의 법대로 해야 합니다."
이번엔 철의법왕에게로 시선을 돌린 모용준이 말했다.
"강호 무림의 법대로 점잖게 무공을 겨룹시다. 만약 우리 사람들이 진다면 그대들을 순순히 돌려 보내겠지만 반대가 되면 모두들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오!"
철의법왕이 비장한 각오를 다지듯 이렇게 응수했다.
"좋도록 하시오!"
"하지만 오늘은 날도 저물고 모두들 시장할 테니 결판을 후일로 미루는 게 어떻소?"'
그러나 모두들 모용준의 태도에 의구심이 생겼다. 왜 일을 미루는 것인지 왕중양을 비롯한 강호객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심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법왕님, 수효만 봐도 우리가 불리하니 후일로 미루자는 말에 응하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귀낭자도 거들었다.
"그래요. 아무 때면 어때요. 저 놈들의 버릇만 고쳐 주면 될 테니까."
"좋다!"
철의법왕이 소맷자락을 휘저으며 휭하니 날아갔다. 그의 뒤를 따라 두 사람도 몸을 날렸다. 멀리 사라지는 이들을 물끄러미 보던 지비 대사가 불만을 터뜨렸다.
"모용 공자, 저 놈들을 왜 곱게 돌려보내는 잣이오? 쇠뿔은 단 김에 빼랬다고 오늘 손을 써 아예 끝장을 내지 않고 이 무슨 알 수 없는 처사요?"
쌀쌀맞은 눈빛을 한 모용준이 크게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러분의 기분을 상하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 철의법왕과 대적할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오?"
한풀 꺾인 몰골로 모두들 옆사람의 눈치를 살피는데 지비 대사가 염불을 읊었다.
"나무아미타불……."
고개를 든 지비 대사가 조용히 뇌까렸다.
"방금 소승이 법왕과 더불어 한판 겨루어 보았지만 확실히 뛰어난 무공이었고. 그러나 소승은 목숨을 걸고 싸울 각오가 돼 있소."
"대사님의 굳은 결의는 높이 사지요. 허나 승산이 있는 싸움이겠소?"
모용준의 일침에 지비 대사의 고개가 다시 숙여졌다.
"승산은 없지만……."
"그런데 어찌 맞붙겠다는 말씀이오?"
모용준의 행동거지가 차츰 사람들의 눈에 가시로 박혔다. 점점 하는 짓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힘을 모아 그들과 맞선다면 승산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만큼 우리 쪽에서도 손해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후일을 도모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후에 감쪽같이 없애 버리도록 합시다."
"철의법왕은 금나라의 기인이라 알려져 있소. 또한 금세 무림의 고수인데 무슨 수로 놈을 칠 수 있단 말이오?"
누군가 큰소리로 물어 왔다.
모용준은 그 말에 대꾸는 하지 않고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제26장 피를 부르는 사람
사자우는 침대에 앉아 담화라는 계집을 탐닉하고 있었다. 그는 담화를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고 실컷 주무르며 음탕하게 웃어댔다. 벌써 반나절이나 계집의 젖가슴이 흐물흐물해지도록 놀았지만 좀체 싫증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쉽게 손에서 뗄 수 없는 놀잇감처럼 사자우는 더욱 집요하게 계집의 젖가슴을 주물러댔다.
담화는 맹수의 발톱에 잡힌 어린 양처럼 오들오들 떨면서 사자우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이 능글맞은 사내는 모용준과 같은 난쟁이지만 분명히 그완 다르다고 생각했다. 모용준은 그녀를 옥처럼 여기며 옷을 조심스레 벗기고 살갑게 애무를 해 주지 않았던가? 또한 그는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속삭여 주기도 했었다.
"요 깜찍한 것아, 조물주께서는 나더러 가지고 놀라고 네 년을 만들었을 게 분명하다."
그럴 때마다 담화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즐거움에 담뿍 싸이곤 했었다. 그러면서도 모용준은 담화의 어린 정조를 함부로 짓밟으려는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자우는 전혀 다른 사내였다. 처음부터 옷을 찢을 듯 와락 벗기고는 억센 손으로 마구 주물러댔다. 사자우의 투박하고 못이 박인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담화는 몸을 사렸다. 그의 손이 마 치 짐승의 더럽고 매서운 발처럼 여겨져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사자우가 다시 야들야들한 담화의 알몸을 탐욕스럽게 훑었다.
"담화야, 내 너를 만나 이토록 즐거운 시간을 보내니 원이 없구나!"
혼자 지껄이던 사자우가 다시 두더지 앞발 같은 손으로 담화의 봉긋한 젖무덤을 덥석 쥐었다. 담화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그러자 사자우가 밀가루 반죽을 하듯 더욱 재게 손을 놀리며 떠들었다.
"옳거니, 바로 이런 소리야. 계집이란 이렇듯 나긋나긋 아양을 떨어야 한다. 좀더 크게 소리를 내보라구. 더 크게!"
사자우는 담화의 젖가슴 사이에 코를 박고는 마구 비벼댔다. 담화가 양손을 들며 빌었다.
"제발 안 돼요. 안 돼요. 전 너무 어리다고요!"
"어리긴 뭐가 어려? 이 젖가슴을 보니 어린아이 대여섯은 족히 먹이고도 남겠는데. 이 어른이 너를 보다 성숙한 여인으로 만들어 줄 테니 걱정 말라구. 이히히히……."
사자우가 손바닥으로 담화의 음부를 툭툭 쳐 가며 아주 만족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아이구, 신바람이 저절로 나는구나. 이 세상에 나와 궁합이 잘 맞는 여인이 있을 줄이야 내 어찌 알았으랴!"
담화를 번쩍 안아 올려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 순간 사자우의 몸이 담화의 가랑이 사이로 깊숙이 박혔다.
"아악!"
담화가 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담화는 어린 나이에 비해 가슴은 제법 풍만한 상태였지만 그곳은 그렇지 못했다. 그런데 난쟁이이긴 하지만 흥분하면 제법 큰 물건이 되는 그것을 사정없이 질러 넣었던 것이다.
여자의 비명 소리에 이 객주에 묵고 있던 사람들이 방문을 열고 튀어나와 두리번거렸다. 그중 중년의 사내가 주인을 불러 놓고 채근했다.
"어서 가 보시오. 아마도 저 방에서 사람을 매달아 죽이려는 것 같소."
그가 사자우가 묵고 있는 방을 가리키자 주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손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 방의 손님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경을 치게 되외다."
그러나 면상이 도마처럼 각이 지고 넓죽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성큼 나섰다. 그가 주인을 흘겨보며 따져 물었다.
"아니 당장 사람이 죽을 판인데 어찌 모른 척할 수가 있소?"
그가 사자우가 있는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렸다.
"이봐요, 방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소? 어서 문을 열어 보시오!"
한창 계집의 몸을 탐닉하고 있던 사자우로서는 김이 팍 새는 노릇이었다. 발끈 화가 치민 사자우의 고함이 튀어나왔다.
"썩 꺼지지 못할까! 이 방 근처에 얼씬하는 놈은 모두 산송장을 만들어 줄 것이다!"
문을 두드린 사내 역시 무림의 호걸이라 순순히 물러서지는 않았다.
"곱게 문이나 열 것이지 웬 잔말이 그리 많아! 이 철퇴나 받아랏!"
품속에서 주먹만한 철퇴를 꺼낸 그가 문짝에 내리찧었다. 문짝에 구멍이 휑하니 뚫리면서 철퇴가 방으로 날아들었다. 그만 기분을 망친 사자우가 핏발을 세웠다.
"나를 건드리는 자는 죽음뿐이다.!"
날아든 철퇴를 발로 차 버렸다. 문밖에 서 있던 사내가 뚫어진 구멍으로 안을 들려다보는 순간 무언가 시커먼 것이 눈앞으로 달려 들었다. 엉겁결에 내민 손도 소용이 없었다. 철퇴는 사내의 손목을 꺾으며 곧장 가슴팍에 와 박혔다.
"욱!"
푹 꺼져 들어간 가슴을 부여잡고 사내가 그대로 허물어졌다.
"저 방에는 필시 악마가 들어 있는 게 틀림없어!"
이렇게 소리친 다른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제 방으로 들어가더니 안으로 문을 잠그기에 바빴다.
사자우가 조금 전 벌어진 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열을 올리며 담화의 몸에 자신을 밀착시켰다. 그러나 담화는 아랫배가 끊어지고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 같아 계속 비명을 내질렀다.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틀자 사자우가 더욱 흥분을 하며 지껄였다.
"좋아, 그대가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비틀수록 기분이 더욱 나는 법이라구. 어서 더 해!"
사자우는 담화의 겨드랑이를 꼬집고 긁으며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담화는 기진맥진하여 더는 몸부림을 칠 기력도 없었다. 담화가 그의 손목을 움켜쥐며 애원을 했다.
"정말 아파요. 이제 그만 하세요……."
"흐흐흐, 내게는 천하에 없는 묘방이 있으니 걱정 말고 나를 잘 받기란 하라구!"
그러면서 엉덩이로는 연신 담화의 복부를 향해 방아질을 하고 양손으로는 젖가슴을 주물렀다.
문짝에는 바람구멍이 뚫렸지만 어느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이 없었다. 담화는 이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정도였다. 아무런 소리가 들려 오지 않자 사자우가 짜증을 냈다.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어서 소리를 지르고 몸을 틀어야 내가 기분이 나지. 안 되겠군. 진주분이라도 먹여야 목청이 트이겠어."
담화가 고개를 한쪽으로 떨구며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녀의 턱을 잡고는 좌우로 흔들던 사자우가 혈도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악!"
의식을 되찾은 담화는 악몽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고는 다시 비명을 토했다. 사자우가 이빨을 내보이며 좋아했다.
"좋은 계집이라면 첫째로 목청이 고와야 하지. 그리고 웃을 줄 알아야 해. 또한 사내의 몸에 친친 감겨 드는 기술이 뛰어나야 하거든. 마지막으로는 암고양이처럼 성을 낼 줄 알아야 해. 알겠어?"
담화의 오똑한 코를 살짝 비틀었지만 그녀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하하하핫!"
다시 사자우가 늦추었던 방아질에 열중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등뒤에서 박수 소리와 함께 웃음이 터졌다.
"선배님께서도 계집을 꽤나 밝히시는군요!"
얼른 돌아보니 뚫어진 구멍으로 모용준의 얼굴이 보였다.
사자우가 웃으며 반겼다.
"마침 잘 왔네. 구경꾼이 없어 쏠쏠한 재미가 달아나려던 참이었는데 어서 들어와 감상이나 하라구."
얼마나 몸이 작았던지 모용준은 사내가 만들어 놓은 그 구멍을 통해 안으로 손쉽게 들어왔다. 창 쪽으로 다가가 벽에 몸을 기대며 모용준이 씨익 웃었다.
"계속 재미를 보시지요. 난 옆에서 구경이나 할테니."
"그래, 실컷 구경하라구."
싱글벙글해진 사자우는 담화를 이리저리 뒤집고 돌리고 하면서 욕심을 채워 갔다. 모용준이 차를 한잔 따라 마시며 중얼거렸다.
"자고로 어진 선비들은 적막공산의 외로운 무덤에 묻히고 말았으되 천하의 절색들을 꽃가지처럼 꺾은 진시황의 이름은 천세만세 전해지리……."
한껏 흥이 오른 사자우가 담화의 몸 위에서 방아개비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그렇구말구. 헌데 그대는 점점 나를 닮아 가는군. 아마도 그대를 내 제자로 삼아야겠어."
"천만의 말씀. 선배님이야말로 이 모용준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오."
모용준이 제 멋에 겨워 키득거리고 있는데 씽 하고 옥비녀가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모용준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다. 사자우가 담화의 머리에 꽃혀 있던 옥비녀를 뽑아 날린 것이었다. 깜짝 놀란 모용준이 한쪽으로 몸을 사리며 볼멘소리를 내질렀다.
"아니 미쳤소? 왜 나를 죽이려 하오?"
"허튼소리! 누가 내 사부가 되겠다는 거냐?"
"이거 내가 모르고 실언을 했으니 용서하시오.'"
모용준이 눈웃음을 섞어 가며 어물쩡 넘기자 사자우도 더는 따지지 않았다. 담화가 숨을 할딱거리며 모용준에게 애걸을 했다.
"공자님……."
그러나 모용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늘따라 네 몸이 탐스럽게 보이는구나. 그분은 귀하신 몸이니 잘 모셔야 한다."
그렁그렁한 눈을 거둔 담화가 다시 사자우에게 매달렸다.
"내일부터 잘 모실 테니 오늘은 이만……."
담화의 하복부에서 새빨간 피가 흥건히 배어 나왔다. 이를 본 사자우가 더욱 미친 듯이 몸을 놀렸다.
"아무튼 고마워. 이렇게 어여쁜 계집을 주었으니. 으흐흐……."
담화는 결국 다시 혼절을 하고 말았다. 모용준이 눈가에 그늘을 만들며 사자우를 달랬다.
"선배님, 조금 더 다루다가는 계집이 죽고 말 것이오."
"젠장, 진탕 놀아 볼 생각이었는데……."
아쉬운 듯 몸을 뗀 사자우가 담화를 한번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그녀의 혼수혈(昏睡穴)에 손가락을 튀기고 나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두 사람이 마주하자 모용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
"조평이란 자를 제거하는 데 큰 도움을 주셔서 고맙소이다."
"그만한 일 가지고 뭘 그러나? 태도를 보니 또 부탁이 있는 모양인데 맞나?"
사자우가 능글맞은 웃음을 보이자 모용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강호의 호걸이랍시고 우쭐대는 자들을 보면 입맛이 써서 영……."
"어떤 놈들인가? 내 모조리 목을 비틀어 버림세."
짐짓 땅이 꺼져라 한숨을 부려 놓은 모용준이 더욱 나지막이 속삭였다.
"일조일석에 그 놈들을 다 제거해 버릴 수는 없겠지만 그 중의 한 놈의 입은 급히 막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큰 우환거리가 될 성싶군요."
"누구……?"
"지난번 선배님과 함께 짜고 성공시킨 조평의 일이 그만 금나라에게 알려졌소. 무심과 귀낭자가 토설을 하면 믿을 사람이 없겠지만 철의법왕의 말이라면……."
"철의법왕? 문제없어. 내 국자 앞에서는 벌벌 떨고 말테니."
"선배님, 듣자하니 철의법왕이란 자는 금나라에서 으뜸가는 고수라고 하던데 정말 자신이 있습니까?"
"아니, 나를 뭘로 보고!"
사자우가 불현 정색을 하며 탁자를 쾅 하고 내려쳤다.
"그따위 중 놈이 다 무슨 고수야? 이 사자우 앞에서는 호랑이앞에 토끼 신세일 뿐이야!"
모용준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아무튼 고맙소이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저희 대연제국을 회복하는 일에 선배님의 힘을 믿겠소이다."
"헌데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저 술잔을 기울이며 계집과 흥청망청 노는 것이 최고지."
모용준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어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모용준이 재차 다짐을 구했다.
"정말 철의법왕은 문제가 없겠지요?"
모용준의 말이 비아냥대는 소리로 들린 모양이었다. 그가 주먹으로 탁자를 쾅 치며 노발대발했다.
"뭐야? 나 사자우는 천하에 제일 가는 고수라구!"
"좋습니다. 그리고 이건……."
간사스럽게 웃으며 모용준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것은 사내의 정력을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담화와 즐기실 때 도움이 될까 해서……."
"그래? 그럼 어디 당장 시험을 해·봐야지."
모용준이 내민 병의 마개를 뜯은 사자우가 서너 알을 꺼내 꿀꺽 삼켰다. 그리곤 인사불성이 되어 있는 담화에게 다가갔다.
잿빛 황혼이 깃을 펴기 시작했다. 모용준은 흐뭇한 기색으로 방을 나오자마자 객주집 주인에게 귀띔했다.
"주인장, 저 방에 든 양반을 잘 모시기 바라오. 잘못했다가는 주인장의 목을 칠 것이오!"
"예, 예, 잘 알겠습니다요."
그는 이미 사자우의 살기 어린 눈빛에 주눅이 든 상태라 굽실거리며 쩔쩔맸다. 모용준은 객주집을 나와 걸음을 재촉했다.
이튿날 날이 희붐하게 밝아 오자 사자우가 담화를 들쳐업고 모용준의 막사로 찾아왔다. 모용준을 만나자마자 그는 대뜸 으름장을 놓았다.
"담화를 한 사나흘 맡겨야겠어. 허나 담화의 몸에 손끝 하나 댔다가는 모용세가를 싹 쓸어 버리겠다!"
모용준은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헤벌렸다.
사자우는 그 길로 경공을 써 멀리 치달았다.
이윽고 평양성에 진을 치고 있는 금군 병영 앞에 이르렀다.
"철의법왕은 나와 내 말을 듣거라!"
그러자 군사 하나가 망루 위에서 꾸짖었다.
"네 놈은 누군데 감히 금나라의 국사를 오라 가라 하느냐?"
"이 놈! 썩 내려오지 못할까? 네 놈이 내려오면 그때 가르쳐 주마."
망루 위에 서 있던 군사가 사라지더니 곧 대여섯 명의 군사들이 밖으로 나왔다.
"대관절 뉘시오?"
군사 하나가 가까이 다가서며 물었다. 대답할 것도 없었다. 사자우가 장을 뻗어 그 군사의 머리를 보기 좋게 날렸다. 비명조차 내지를 사이 없이 군사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나머지 군사들이 달려들자 사자우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놈들아, 난 사자우 어른이시다! 공연히 생죽음 당하지 말고 어서 철의법왕이나 불러와라!"
어찌나 목소리가 크던지 이들은 옴쭉달싹 못한 채 제자리에 멈춰 섰다. 생김새와는 영 딴판인 사자우의 무공에 모두들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이들은 사자우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더니 곧장 병영 안으로 도망을 쳤다.
철의법왕이 모습을 보인 것은 조금 후였다. 그는 무심과 귀낭자를 뒤에 달고 천천히 병영으로부터 걸어 나왔다. 요상하게 생겨 먹은 사자우가 병장기를 휘저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늙은 중 놈아, 내 오늘 너에게 제삿날이 언제인지 알려 주러 왔다!"
철의법왕이 코웃음을 쳤다.
"흥, 이 무례한 놈아, 여기가 어디라고 큰소리냐? 그 짧은 다리를 작신 부러뜨리기 전에 어서 집에 가 젖이나 더 먹고 오너라!"
"허허허, 주둥이는 그만 놀리시고 용기가 있으면 덤비거라. 내 오늘 너에게 고수의 진면목을 보여 주마!"
철의법왕의 낯색이 돌변했다.
"좋다. 그럼 자리를 옮겨 네 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
이들은 병영에서 멀지 않은 한 언덕 위로 옮겼다. 철의법왕이 사자우를 향해 비웃었다.
"사자우라고 했더냐? 내가 만약 지면 내 머리를 송나라에 갖다 바쳐도 좋다. 하지만 네 놈이 지면 다시는 허튼 소리를 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특히 금나라에는 얼씬도 못하게 만들겠다."
철의법왕이 장기인 소맷자락을 하늘 높이 치켜 올렸다. 곧 소맷자락에서 질풍이 쏟아졌다. 사자우가 국자에 몸을 의지해 한쪽으로 이동시키며 약을 올렸다.
"이 늙은 중 놈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을 명심하거라!"
이들은 곧 본격적으로 무공을 겨루기 시작했다. 공중으로 뛰어 오르는가 하면 서로 원을 그리며 빈틈을 찾기 위해 불꽃 튀는 보법을 부리기도 했다. 한차례 공중에서 맞붙었던 두 사람이 갈라서며 매섭게 상대를 쏘아보았다.
"이제 된맛을 보게 될 것이다!"
사자우가 국자를 번쩍 들어 철의법왕을 내리쳤다. 철의법왕은 침착하려고 애를 썼다. 아무리 사자우가 날뛴다 해도 무쇠 소맷자락 앞에서는 소용이 없으리라 믿었다.
"간다!"
철의법왕이 소맷자락을 휘날려 사자우에게 질풍을 쏘았다. 병장기를 들고 있는 사자우의 팔을 겨냥한 것이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사자우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더욱 충격을 받은 것은 철의법왕이었다. 소맷자락을 한번 펄럭이면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던 소가 넘어지고 바위마저 멀리 날아가지를 않았던가. 그런데 사자우는 튀는 흙탕물쯤으로 여기듯 그의 공격을 쉽게 피했던 것이다.
"야앗!"
사자우가 벽력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병장기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어찌나 소리가 드세었던지 금나라 군사들 중 몇몇은 들고 있던 병장기를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소이다. 괜히 이 사자우 앞에 무릎을 꿇고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를 만들지 마시오."
사자우가 부아를 돋우자 철의법왕이 달려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막 앞으로 달려가려고 쳐든 발이 꼼짝을 하지 않는 게 아닌가, 그것은 사자우가 병장기를 수평으로 쳐들고는 내력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의법왕은 한참 동안이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발을 쳐들고 있기만 했다. 겨우 사자우의 내력에서 풀려난 철의법왕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노기를 뿜어댔다.
사자우가 이죽거렸다.
"스님은 이제 죽을 팔자를 면하기 어렵게 되었소. 스님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으니 말이야."
"필경 모용준이란 난쟁이렷다!"
철의법왕은 이미 모용준의 술책을 읽고 있었다. 같은 난쟁이인 사자우가 그의 사주를 받고 찾아온 게 분명했다. 철의법왕은 절에서 내려와 중원 땅을 두루 밟아 보았지만 지금껏 사자우 같은 난쟁이는 처음이었다. 난쟁이들은 그 무공이 한계가 있는 법인데 이 사자우는 그악스러을 정도였다. 아무튼 이 난쟁이에게 진다면 천하 무림의 세계에서 다시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될 것은 불 보듯 했다. 철의법왕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좋아, 오늘 죽든 살든 결판을 내야겠다!"
곧 양쪽의 소맷자락을 쳐든 철의법왕이 몸을 회전시키며 사위를 휩쓸었다. 소맷자락에서는 엄청난 질풍이 몰아쳐 주위의 나무와 바위들을 저 멀리 날려보냈다. '횡불오악(橫拂五岳)'이라는 장법이었다. 이 장법이면 치명타는 입히지 못해도 사자우를 서너 걸음 밀어 버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사자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상태로 복부를 내밀 뿐 요지부동이었다.
다시 철의법왕이 타타타! 하는 소리를 내며 사자우에게로 쏜살같이 달려 들었다. 사자우 바로 앞에서 갑자기 치솟은 철의법왕이 소맷자락을 내밀어 검처럼 앞으로 뻗었다. 순식간에 단단한 몽둥이로 변한 소맷자락은 정확히 사자우의 정수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탕!"
철의법왕의 소맷자락이 병장기에 부딪히며 굉음을 터뜨렸다. 철의법왕의 입에서 가는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공격을 한 순간 어느 사이에 사자우의 국자가 법왕의 가슴에 와 꽂혔던 것이다.
"내가 도와드리리다!"
무심이 막 두 사람 사이에 들어서려고 했다. 그때 귀낭자가 만류했다. 평소 철의법왕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귀낭자는 위기에 처해 있는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지가 않았다. 무심도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구경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철의법왕이 수세에 몰리자 이를 보고 있던 금나라 통수 미르도가 소리를 쳐 군사들을 풀었다.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자 군사들은 사자우를 향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사자우가 병장기를 천천히 돌리다가 우뚝 세우더니 호통을 쳐댔다.
"이 오랑캐 무리들아! 어서 덤비거라. 이 갈고리로 사지를 조각내 주마!"
군사들은 일제히 통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데 돌연 퇴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 왔다. 군사들이 다시 물러서는 것을 본 사자우가 더욱 흥분을 했다.
"이 놈들!"
군사들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싶었는지 미르도가 새로운 명령을 전달했다.
"화살을 퍼부어라!"
곧 사자우를 향해 하늘을 온통 메울 듯한 화살이 쏟아졌다. 사자우는 당황하여 얼른 병장기를 빠르게 돌리며 방어했다. 화살들은 사자우의 손에 들린 병장기의 회오리를 뚫지 못하고 부러지거나 튕겨져 멀리 날아갔다. 왜소한 사자우를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개의 화살이 병장기를 헤치고 사자우의 귀를 살짝 스치며 지나갔다. 깜짝 놀란 사자우가 뒤로 물러서자 군사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사자우가 화살에 맞은 걸로 착각한 것이었다.
사기가 오른 군사들이 사자우를 향해 새카맣게 몰려들었다. 사자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병장기를 휘둘러 순식간에 열 명에 가까운 군사를 쓰러뜨렸다. 더는 접근하지 못하고 군사들이 뒷걸음질을 치려 하자 사자우가 기세를 몰아 앞으로 치달았다. 군사들은 꼬리에 불붙은 개처럼 허둥지둥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자우는 통수 앞에까지 이르렀다. 위기에 처한 통수를 보호하기 위해 무심과 귀낭자가 몸을 날렸다.
"어서 통수님을 보위하라!"
무심이 고함을 치며 미르도 옆으로 다가섰다. 사자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미르도를 향해 빙긋이 웃어 보였다.
"오늘은 이만 솜씨를 보이고 난 돌아가련 다. 어여쁜 계집 생각에 싸움이 싱거워졌거든. 하하핫!"
사자우가 뒤뚱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사자우를 확인한 무심과 귀낭자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심과 귀낭자는 철의법왕에게로 달려갔다. 철의법왕이 사자우에게 입은 가슴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보기보다 상태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뒤늦게 달려온 미르도에게 무심이 심각한 얼굴을 말했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먼저 돌아가십시오. 철의법왕님은 소인과 귀낭자가 돌봐드릴 테니."
더 이상의 아쉬움은 없다는 투로 미르도가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럼 수고하게나."
곧 군사들을 데리고 병영으로 향했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언덕 위에 무심과 귀낭자만이 남아 철의법왕을 돌보고 있었다. 철의법왕의 얼굴은 상기되었으며 한기를 느끼는지 몸을 몹시 떨어댔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철의법왕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죽을 뻔했었군!"
"참, 대단하십니다. 살속 깊이 사자우의 내력이 박힌 것 같은데 견뎌 내시다니……"
무심의 말에 철의법왕이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아냐, 아직 완치를 한 것은 아니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며칠간만 나의 시중을 들어줄 수 있겠나?"
자기 가슴을 한차례 탕 하고 치며 무심이 떠벌렸다.
"대금은 저의 모국이고 법왕님은 대금의 국사님이신데 당연한 말씀이 아닙니까!"
한풀 기가 꺾인 철의법왕이 더욱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고맙네. 가슴의 상처는 하루아침에 아물 수 없다네. 헌데 이 평양성은 어수선해서 좀 조용한 곳으로 가 몸조리를 하고 싶네만…… 수고스럽지만 조용한 곳으로 함께 가 며칠 동안만 내 시중을 들어주게나."
무심과 귀낭자의 눈빛이 순간 야릇하게 변했다.
"글쎄요,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 있기는 한데 여기서 좀 멀지요."
"조용한 곳이기만 하면 멀어도 상관이 없다네."
이때까지 잠자코 있던 귀낭자가 제법 근심 어린 기색으로 한마디했다.
"법왕님, 상처 입은 몸으로 어떻게 먼길을 가시겠어요?"
철의법왕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인상을 썼다.
"괜찮을 거야. 헌데 거기까지는 얼마나 걸리나?"
"반나절이면 충분히 닿을 수가 있습니다."
"음…… 좋아, 어서 그리로 가자구."
어슴푸레한 달빛이 산모퉁이를 포근히 덮어 주고 있는 밤이었다.
세 사람은 칠흙 같은 어둠 속을 헤치고 어느 동굴 입구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상처 입은 몸으로 겨우 이곳까지 걸어온 철의법왕은 매우 지친 상태였다.
괴물의 입과도 같은 어두컴컴한 동굴 안을 들여다보며 철의법왕이 물었다.
"여긴가?"
"그렇소이다."
무심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런데 이렇게 훤히 드러난 동굴에 사람이 없을 리 있겠는가?"
"사람들이란 반대로 이런 곳은 피하고 으슥한 곳에 있는 동굴을 더 찾는 법이지요."
"그렇겠군!"
철의법왕은 무심의 말이 맞을 거란 생각에 별생각 없이 이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달빛이 동굴 안까지 넉넉하게 비쳐 주고 있어 숨어 지내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무심이 철의법왕을 한곳에 편히 앉히며 안심을 시켰다.
"오늘 밤은 여기서 푹 쉬십시오. 저희들이 편히 모시겠습니다."
무심이 곧 귀낭자의 손목을 잡아끌더니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굴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 앉은 철의법왕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 무심과 귀낭자가 서로 주고받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 왔다.
"귀낭자, 지금 무슨 생각을 하지?"
귀낭자가 난데없이 까르르 웃었다.
"호호호, 무심 공자라 이름 그대로 소견머리도 없고 분위기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로군요. 이곳은 우리 둘만이 밀회를 나누는 장소인데 어쩌자고 철의법왕을 모셔 왔어요?"
"법왕이 어디 남인가?"
"그럼 저분이 지켜 보고 있는데 그 짓을 할 생각이세요?"
귀낭자가 뾰로통해져서 입술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저 거추장스러운 철의법왕을 어떻게 하면 좋겠어?"
이들이 나누는 말소리를 모두 듣고 있던 철의법왕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무심의 다음 행동을 잔뜩 긴장하여 주시하였다. 무심이 자리에서 벌떡 밀어나더니 그에게로 다가왔다.
"법왕님을 하늘처럼 믿었는데 왕중양과 모용준 앞에서는 맥을 못 추더군요?"
무심이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철의법왕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려 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말인가?"
철의법왕이 상체를 일으키며 큰소리로 말했다.
"이젠 발톱도 이빨도 모두 빠진 맹수꼴이 되고 말았군요."
"뭐야, 이 배은망덕한 놈들! 비록 차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는 있다만 네 놈들을 겁내지는 않는다!"
귀낭자도 슬금슬금 걸어와 무심의 뒤에 섰다. 그러나 이들은 섣불리 철의법왕을 덮치지는 못했다. 아무리 회복의 가능성이 없을만치 깊은 상처로 신음하고는 있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철의법왕이 가래 낀 소리를 내며 말한다.
"이 놈아! 왜 덤비지를 못하느냐?"
잠시 귀낭자를 돌아보던 무심이 입술을 묘하게 일그러뜨렸다.
"스님,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괜히 젊은 사람들 손까지 더럽혀서야 되겠소? 그러니 스스로……."
"뭣이라고! 음…… 네 놈들이 기어코 나를 죽이겠다는 수작이로구나!"
무심이 예사롭지 않은 걸음을 옮기며 서서히 철의법왕에게로 접근했다. 그런데 귀낭자가 무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무심 공자, 정신 나갔어요. 저 귀신같은 스님이 팔 소매만 들면 우리는 먼지처럼 사라진다고요!"
그러자 무심이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스님 손으로 마무리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네 놈도 대금국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느냐? 죽일 테면 어디 네 놈 손으로 직접 해 봐라!"
"허허, 건망증이 심하시군요. 이 무심 공자는 대금국 사람이 아니라 대몽골 사람올시다."
뒤에 있는 귀낭자를 향해 한쪽 눈을 찡그린 무심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 귀낭자 역시도 대몽골 사람이지요. 아무튼 오늘 스님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처지라는 것만 알아 두시오!"
무심이 품속에서 둥그스름한 철통을 꺼낸 것은 이때였다.
"스님, 이것은 화살 열 개가 들어 있는 쇠뇌입니다. 이것은 귀신도 막아낼 방도가 없는 신기한 물건이지요. 하하하……."
무심이 시위를 당기려고 하자 철의법왕이 손을 들었다.
"잠깐!"
무심이 냉소를 흘렸다.
"부처님을 섬기는 스님이라면 속세에 대한 미련은 접어 두시고 편히 가셔야지요. 계집들처럼 살려 달라고 울고불고하시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순간 화살이 철의법왕을 향해 날아들었다. 급히 앉은걸음으로 몸을 튼 철의법왕이 소매를 내저었다. 화살들은 다행히 소맷자락에 막혀 힘없이 떨어졌다. 그러나 급작스레 힘을 쓴 탓에 철의법왕은 울컥 입으로 피를 쏟고 말았다. 가슴에 맺혔던 피가 일순 거꾸로 솟구친 모양이었다. 때를 늦추지 않고 무심이 다시 열 대의 화살을 힘껏 쏘았다. 이번에는 피할 겨를도 없었다. 철의법왕의 몸에 열 개의 화살이 꽂혔다. 철의법왕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하하핫! 천하의 으뜸이라고 떠들어대던 철의법왕이 이 무심 공자의 손에 죽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 동굴 안으로 두 그림자가 얼핏 비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로 숨을 죽여 말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무심의 귀에 고스란히 들려 왔다.
"세상에 저런 짓을 하고도 웃는 놈이 다 있을까요?"
"무심 공자를 보게. 저렇게 아무도 몰래 철의법왕을 죽이지 않았나."
무심은 더욱 귀를 기울이며 이들의 대화를 탐색했다.
"만약 우리에게 발각된 줄 안다면 저 무심의 반응은 어떨까요?"
"기어이 눈알을 뽑아내기 위해 날뛸 테지."
더는 듣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무심이 그쪽을 향해 고함을 쳤다.
"누구얏! 어서 모습을 드러내거라!"
잠시 후 두 명의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 동시에 무심의 눈이 커졌다. 무심이 평소 가장 꺼려 하던 이들이었다. 한 사내는 지청이었고 또 다른 사내는 모용준이었다.
모용준이 철의법왕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기르던 강아지에게 다리를 물린다더니 끝내는 무심에게 욕을 당하고 말았군!"
철의법왕은 아직 숨결이 남아 있는 상태였지만 이미 송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핏기가 차츰 사라지고 있는 얼굴을 봐서 곧 숨이 끊어질 듯했다. 철의법왕이 모용준을 발견하고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모용…… 공자, 이 노승을 구……해 주면 꼭 보답하리다……."
"그래 무엇으로 보답을 하겠다는 말이오?"
모용준이 천연덕스럽게 받아치며 그에게로 다가섰다.
"대……금국 군사를 출병……치켜 연나라를 복구하는 데 돕겠소."
모용준은 한동안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무심이 빠르게 귀낭자의 눈치를 살폈다. 귀낭자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모용준과 지청을 죽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 무심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용준을 불렀다.
"모용 공자, 내가 누군지 알겠소?"
"내가 알 바 아니다!"
"어허, 나는 대몽골 걸아멸부(乞兒蔑部) 족장의 아들이란 말이오!"
"그래서 나와 무슨 관계라도 있다는 말인가?"
"나는 대몽골 여러 부족들의 청을 받아 중원을 돌며 금나라 사람들의 기세를 꺾어 놓고 있는 중이오."
귀낭자도 거들었다.
"당신들은 금나라 군사가 무서운 줄만 알았지 대몽골 군사의 기풍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군요. 대몽골 군사는 천하 무적이란 사실만 알아 두세요."
무심이 다시 말을 받아 이어 나갔다.
"우리 부족은 대몽골에서도 으뜸가는 부족이오. 우리가 나서기만 하면 당신은 얼마든지 연나라를 되찾고 당당히 군림할 수가 있을 거요."
모용준의 귀가 솔깃해졌다. 지청을 바라본 모용준이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게 소곤댔다.
"내가 대연제국을 회복하는 대업을 이루려고 도움을 청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를 않았다네. 그런데 오늘 이 같은 말들을 들으니 쉽게 판단이 서지를 않아1 누구의 말을 듣는 게 좋을 것 같은가?"
그러자 지청이 심드렁한 반응을 내비쳤다.
"어느 쪽도 도움은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우리 선조인 모용복의 경우도 그랬어. 여기저기에 도움을 청했는데 나중엔 서하(西夏)에까지 가서 빌붙은 적도 있었지. 그러나 누구 하나 도움을 주었던가? 흥, 도움은커녕 거들떠 보려고 하지도 않았어. 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모용준의 말에 위기를 느낀 무심이 단호하게 나왔다.
"흥, 그러나 우리를 죽이지는 못할걸!"
귀낭자도 한 걸음 앞으로 나설 듯 격한 동작을 취하며 맞섰다.
"아무렴, 어디 마음대로 해 보시지!"
무심과 귀낭자가 단검을 뽑아 들었다.
"잠깐!"
무심이 손을 뻗어 귀낭자를 가로막았다. 바로 이 순간 모용준의 뒤로 낯선 그림자가 나타난 것이다. 자세히 보니 주정과 목우 그리고 허불잉이었다.
사태는 점점 무심에게 불리한 지경으로 치달았다. 모용준과 지청과의 싸움이라면 몰라도 숫자가 늘어난 이상 불리한 것은 뻔한 이치였다.
"무심 공자, 이젠 도리가 없겠지. 우선 철의법왕의 남은 숨통을 조이고 너를 쳐죽이겠다!"
철의법왕의 눈빛은 지레 사그라들었다. 모용준이 날이 시퍼런 장검을 뽑아 들고는 달려가 철의법왕의 가슴을 찔렀다.
"나무아미타불……."
철의법왕은 염불을 비명으로 대신하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제27장 왕중양의 위기
모용준은 자기 막사로 왕중양을 청해놓고 술잔을 건넸다장 왕중양은 모용준이 또 무슨 속셈을 품고 있는지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평양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있는 일이 급선무인지라 모용준을 채근하였다.
"동생, 여지껏 평양성을 둘러싸고 온갖 공격을 퍼부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으니 다른 대책을 강구해야 될 것 같네."
"큰형님, 너무 재촉하지 마십시오. 따놓은 당상이나 진배없으니 조만간 기쁜 소식이 있을 겁니다."
"아무튼 평양성을 치고 금나라의 도읍까지 쳐들어가는 것이 이 왕중양의 평생 소원이네."
둘은 술잔을 부딪히며 멋쩍게 웃었다.
모용준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조금 늦었다 싶은 대답을 했다.
"형님, 통수인 형님으로서야 평양성을 에워싸고 있기만 한 지금 몹시 안타깝겠죠. 하지만 정세가 변한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정세가 변하다니? 그래서 평양성을 무너뜨릴 결심을 하지 못하는 건가?"
왕중양이 막 따져 물으려고 하는데 막사 안으로 두 사람이 불쑥 들어왔다. 하나는 무심이고 다른 하나는 귀 낭자였다. 이들의 출현에 왕중양은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심이 왕중양에게 읍을 하며 예상 밖의 말을 툭 던졌다.
"왕 공자, 평양성을 무너뜨리고 대정까지 쳐들어가겠다는 말씀인가요? 허나 그건 어림도 없는 말씀이오!"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선 왕중양이 모용준을 향해 화를 냈다.
"동생, 이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와 함부로 지껄인단 말인가?"
불쾌해 두 눈을 부릅뜬 왕중양을 보며 모용준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형님, 우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십시다. 자꾸만 동생 동생 하는데 앞으로는 모용 공자라고 불러 주시오."
모용준의 말속에 서슬 시퍼런 날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아닌게 아니라 막사 안을 둘러보니 어느새 들어왔는지 구석구석에 지청과 허불잉 그리고 주정이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왕중양, 그대 같은 사내가 무슨 덕이 있고 무공이 있어 감히 대군 통수의 권좌에 앉는단 말이오? 그리고 유감스럽지만 나 모용준은 그대의 대송을 회복시킬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소이다."
왕중양의 심정은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왕중양은 휘청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질 듯 비칠거렸다.
"모용준, 그대가 대송이 아니라 대연을 회복하려고 일을 꾸몄다는 사실은 내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네."
왕중양도 자신의 속마음을 툭 털어놓고 모용준과 단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참 총명하시군요! 남의 속을 손금 보듯이 하는데, 그럼 과연 내가 대연제국을 되찾을 수 있을지 그 결과에 대해서도 아시겠소? 난 누가 뭐라고 떠들어도 그 일만은 꼭 성사시키고 말 것이오."
모용준이 말끝에 힘을 주며 왕중양을 쏘아보았다.
뒤에 서 있던 지청이 음흉스럽게 웃어댔다.
"흣흣, 대연국을 다시 찾으면 재상 자리는 이 일기충천의 것이야!"
허불잉도 뒤질세라 가슴을 턱턱 치며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에 급급했다.
"장수 자리 하나는 꼭 비워 두어야 한다구. 이히히……."
벌써 개국공신이라도 된 듯이 날뛰는 이들의 꼬락서니를 보다못한 왕중양은 실소를 터뜨리며 이들을 향해 단호한 일침을 쏘았다.
"백성들 모두가 대송의 강산을 되찾으려고 하는 건 본디 대송은 완벽하고 통일된 제국이었기 때문이지. 그러나 대연은 작은 나라였고 벌써 먼 옛날에 이슬처럼 사라진 과거 속의 기억일 뿐이야. 그렇기 때문에 대연국을 송나라 땅에 다시 세우겠다는 건 억지에 불과한 망상이다."
"망상이라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주제에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 공자님, 이자를 일찌감치 해치웁시다!"
협박조로 을러댄 것은 지청이었다. 그의 말에 모용준의 눈빛이 잠시 번뜩였다.
"큰형님, 형제간의 우의와 신의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소이다. 형님의 목을 쳐야겠소."
모용준의 배신에 왕중양은 그저 쓴웃음을 베어 물 뿐이었다. 그러면서 이 큰 충격에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지청이 허리를 숙이며 능청을 떨었다.
"왕 공자, 이젠 별 수 없으니 순순히 포박을 받으시오."
모용준이 왕중양과 정면으로 마주섰다. 모용준의 눈가에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살기가 그득했다.
"대연제국의 황제가 될 사람과 의형제를 맺은 것이 잘못이었소."
그가 음흉스럽게 말을 뱉더니 막사 밖에다 대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금세 두 여인이 커다란 가죽을 맞들고 들어섰다.
"형님, 이 가죽주머니야말로 재미있는 물건이지요. '염라구'라고 하는데 가지고 놀기가 여간 흥미롭지가 않소. 하지만 형님은 땀을 좀 쏟아야 할 것이오."
모용준의 지하궁전에서 온 듯한 허리가 잘록하고 미색이 뛰어난 두 여인이 왕중양 뒤로 가 섰다. 가죽주머니를 벌린 여인들은 재빨리 왕중양의 혈도를 누른 다음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하하, 몇 해 전에 웬 행각승에게서 배운 것이 바로 이 염라구를 써서 사람을 죽이는 법이었지."
염라구라 하면 일종의 죄인을 다스리는 형구였다. 그 안에 죄인을 넣고 물을 부은 다음 불에 책이면 가죽이 조여 들었다. 그래서 안에 든 사람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서서히 조여 드는 가죽에 왕중양은 숨조차 내쉴 수가 없었다. 물처럼 흐르던 땀마저 말라 버리고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는 아픔이 뒤를 이었다.
"흥, 그런 꼴로 어떻게 무림의 맹주 노릇을 하겠느냐? 천하 영웅 왕중양이 물러터진 밤송이가 되었으니 말이야!"
모용준의 빈정거림에도 한마디 대꾸할 수가 없었다. 왕중양은 차츰 가늘어지는 자신의 숨결을 헤아리다가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오늘도 변함없이 사자우는 담화를 끼고 종일 재미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모용준이 준 약을 자기뿐만 아니라 담화에게까지 먹인 후로는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사자우의 사타구니는 온종일 뿌듯하였고 담화 역시 온순해졌다. 반듯하게 눕혀 놓은 담화의 알몸을 감상하며 그는 더없는 행복감에 젖었다.
막 담화와 다리를 벌리고 묵직해진 사타구니를 달랠 찰나였다.
"어허, 끔찍도 해라. 사자우 나으리께서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나? 이거 낯이 뜨거워 볼 수가 있어야지."
후닥닥 상체를 일으킨 사자우가 고개를 홱 돌리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누구야! 썩 나오지 못할까?"
"알몸의 계집을 품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들어가겠소. 옷이라도 입혀야 인사를 나누던가 하지."
"들어오든 말든 내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목숨만은 잘 챙기거라."
담화의 귀에 걸려 있던 귀걸이를 떼어 휙 하고 던졌다. 귀걸이는 문밖의 벽에 깊숙이 박혔다. 그러자 문어귀에 숨어 있던 사내가 피식 웃으며 지껄였다.
"사자우, 너무 날뛰지 말라구. 난 그대를 거꾸러뜨릴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흥, 이제야 네 놈이 누군지 알겠군. 홍칠이 이 놈, 왜 또 물귀신처럼 찾아왔느냐?"
"그대가 아무리 악명을 쌓아 간다 해도 이 홍칠에게는 예외이지."
"뭐야?"
홍칠이 방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더니 혀를 끌끌 찼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딸아이 같은 어린 계집을 깔고 뭉개 뭘 어쩌자는 게지?"
아직도 사자우는 담화의 봉긋한 젖무덤을 한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 놈의 거렁뱅이야, 이 담화라는 계집은 천하라 둘도 없는 여인이라구. 여인이란 짜고 여윌수록 고소한 맛이 더 나지."
홍칠공이 쓴웃음을 던졌다.
"밤낮 객주집에 붙박혀 계집과 노느라고 큰일은 못하겠구먼?"
사자우가 눈알을 부라리며 물었다.
"큰일이라니?"
"모용준이란 자를 혼내 주는 것이지!"
"모용준을 다루기가 어디 쉬운가. 같은 난쟁이지만 그는 세상에 둘도 없는 독종이라구."
하기야 개방의 장로가 보낸 제자들 몇이 모용준의 손에 실종된 사실을 알고 있는 홍칠공으로서는 수긍이 갔다. 그중에는 난다 긴다 하는 여섯째 제자도 끼여 있었기에 더욱 실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왕중양이라도 빼내 와야지?"
"왕중양? 흥, 이제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그도 모용준의 손에 죽어 넘어갈텐데."
"뭐야? 천하의 영웅이 난쟁이에게 죽는다고?"
홍칠공이 깜짝 놀라며 몇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러다가 담화의 젖가슴이 두 눈에 들어오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사자우가 열쩍은 태도를 보였다.
"그대가 애간장을 태우든 말든 이젠 소용이 없다구."
왕중양이 죽는다면 의군은 자연 흩어지고 말 게 분명했다. 홍칠공은 적지 않은 위기감에 초조해졌다.
"그렇다고 그저 두고만 볼 수 있는 일이겠는가?"
"왕중양이 내 동생이라도 되는가? 난 그런 골치 아픈 싸움엔 휘말리고 싶지가 않아."
"자꾸 그렇게 나오면 그 계집을 죽여 버리겠다!"
"이 거렁뱅인 놈이 실성을 했나? 감히 누구를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는 거야?"
"죽인다면 죽인다!"
사자우가 침대 옆에 세워 둔 병장기를 집으려다가 손을 멈추었다. 홍칠공이 정말 앙심을 품게 되면 개방의 무리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담화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한 탓이었다. 담화를 잃어 버릴 것을 생각하니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만 같았다.
"좋아, 딱 한 번만 자네의 일을 도와주겠어. 그래,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사자우가 한풀 꺾인 태도를 보이자 홍칠공이 안심을 했다.
"모용준이 해치기 전에 왕중양을 데려오면 돼."
침대에서 일어난 사자우가 느릿느릿 옷을 찾아 입었다. 병장기를 부여잡은 그가 담화를 턱으로 가리켰다.
"알겠네. 내 다녀올 테니 그동안 저 계집을 잘 보고 있으라구."
그러더니 홍칠의 눈치를 보면서 담화를 이불에 한차례 감싸고 혈도를 눌렀다. 담화는 반듯하게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요 귀여운 것아. 내 번개같이 다녀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담화의 볼을 토닥이던 사자우는 곧 문을 차고 밖으로 나갔다.
모용준은 왕중양을 가죽주머니로 쓰러뜨리고 나서 잠시 숨을 돌렸다. 술잔을 기울이며 깊은 생각에 몰입하려는데 막사 밖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지청이 얼른 밖으로 뛰쳐나가며 꾸짖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토록 수선스럽느냐?"
한 군사가 황급히 허리 숙여 고했다.
"난쟁이 하나가 무작정 통수부를 향해 들어오고 있사온데 도무지 막을 수가 없사옵니다!"
심상치 않은 예감이 퍼뜩 든 지청은 그쪽을 향해 뛰어갔다. 사자우였다. 그는 앞을 가로막는 군사들을 터밭의 무 뽑듯 쓰러뜨리며 노도처럼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황급히 그에게로 날아간 지청이 허리를 숙였다.
"이거 사자우 선생이 아니십니까요?"
누군가 훑어보던 사자우가 목청에 힘을 주었다.
"모용 공자에게 일러 직접 나와 나를 맞으라고 해라!"
지청이 달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미안하지만 공자님께서는 군무로 급하셔서 오늘만은 힘들 것 같소이다. 내일로 미루면 어떨지요?"
시답지 않은 소리라고 일축한 사자우가 다시 벼락치는 소리를 내질렀다.
"모용준! 대관절 나올 셈이냐, 아니면 앉은 자리에서 죽고 싶은 거냐?"
지청이 좋게 따돌리려고 하는데 뒤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어허허허! 선배님이 어인 일이시오? 금나라 오랑캐를 치는 우리 의군을 도우러 오셨군요. 이거 정말 감사하외다."
모용준이었다. 그는 한껏 연막을 깔며 사자우의 화기를 누그러뜨리려고 했다.
"모용준, 왕중양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통수부에 없는 걸 보니 여기에 있는 게 분명해."
두 눈에 쌍심지를 켠 사자우가 두리번거리자 모용준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하지만 여러 강호객들이 지켜 보고 있는 입장이라 그에게 무조건 머리를 숙일 수는 없었다. 또한 자신의 대사에 일조를 하겠다던 사자우가 약속과는 달리 나오자 조금은 당황이 되기도 했다. 낭패해진 모용준이 멋쩍게 웃었다.
"낸들 큰형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어찌 알겠소? 믿지 못하겠다면 한 번 찾아보시오."
눈치 빠른 지청이 모용준을 감싸고 나섰다.
"그래요, 제가 모시고 한바퀴 돌아보지요."
그러자 사자우가 앙천대소하며 병장기를 높이 쳐들었다.
"나를 어떻게 보고 하는 수작들이냐? 난 모용준에게 속을 사람이 아니다. 어서 왕중양을 내놓으란 말이다!"
사자우가 병장기를 앞으로 내뻗은 채 막사 끝에 서 있는 모용준에게 달려 들었다. 그러나 네 명의 가신들이 그를 가로막아 섰다.
"이 놈들, 이제 보니 꿍꿍이 수작이 있었구나! 너희들 말대로 막사 안을 살피려는데 어찌 죽기 살기로 막아선단 말이냐?"
처음엔 무슨 영문인지 몰랐던 강호객들도 그제야 그를 찾아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모용준의 태도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모용준은 두 눈을 날카롭게 뜨며 사자우에게 따져 물었다.
"큰형님을 죽이려는 속셈이 아니오? 만약에 형님의 몸에 손끝 하나 댔다가는 알아서 하시오!"
강호객들을 의식한 모용준은 오히려 왕중양을 위하는 척했다. 예상대로 곧 강호객들은 태도를 바꾸어 모용준 편을 들었다. 구경하던 강호객 중 하나가 성큼 나서며 말했다.
"모용 공자, 저 사자우가 공자께 손을 대면 나도 보고만 있지는 않겠소!"
그러나 그들이 사자우와 맞선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와 대적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상황은 모용준 쪽으로 기울고 있는 셈이었다.
사자우가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매서운 눈초리를 번뜩이며 협박했다.
"모용준, 그대가 얼마나 지독하고 엉큼한 자라는 걸 난 알고 있다. 내 입이 터지는 날엔 세상에 다시 고개를 쳐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잔말 말고 왕중양을 내놓거라!"
"모두들 믿을 만한 소리를 하시오. 난 아다시피 금나라를 치려고 일어선 사람이외다. 물론 연나라를 회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잃어버린 송나라의 국권을 되찾을 생각이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모용준은 그만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꺼내게 되었다. 사람들에게는 매우 놀랍고도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도 대연을 꿈꾸고 있다니……. 강호객들은 그런 모용준을 또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일단 사자우의 말대로 막사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강호객 하나가 모용준에게 제의했다. 별 수 없었다. 모용준이 사자우에게 함께 들어가 보자는 손짓을 했다.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사자우는 심상치 않은 얼굴로 코를 벌름거렸다. 요상한 냄새가 풍겨 왔는데 필시 여인의 체취가 분명했다. 아니나다를까 침대 위에는 두 여인이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다가 게으른 동작으로 일어서는 게 보였다. 막사 밖에서 이를 본 강호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준이 여인과 몰래 즐기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지금껏 고집을 부렸구나 하는 기색이었다.
잠시 후 사자우는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가죽으로 된 주머니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 주춤했다. 그 가죽 주머니 사이로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다리가 삐죽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건 뭔가?"
모용준이 태연스레 꾸며댔다.
"글쎄 수상한 자가 병영 안으로 잠입했기에 잡아다가 엄하게 문초를 한 일이 있었소. 그런데 지난 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뭡니까?"
곧 모용준이 문밖에 있던 군사들에게 큰소리로 일렀다.
"왜 이 시체를 아직 이곳에 두었느냐? 어서 내다 버리거라!"
대여섯의 군사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왕중양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메고 나갔다. 그런데 그와 때를 같이하여 사자우의 시선에는 이상한 것이 잡혔다. 네 명의 가신들이 각자의 병장기를 잡으며 여차하면 덤빌 자세를 취하는 게 아닌가. 사자우는 수상한 낌새에 일순 몸을 사리며 주위를 세밀히 살폈다.
군사들이 밖으로 나가고 가신들이 비로소 안심하는 틈을 타 그가 몸을 날렸다. 막사 밖으로 쏜살같이 날아간 사자우가 군사들 앞에 버티고 섰다.
"꿩 대신 닭이라고 했던가! 왕중양이 없으니 대신 이 첩자라도 메고 가야겠다!"
가죽주머니를 둘러멘 사자우가 묘한 보법으로 재빨리 달아났다. 뒤늦게 뛰쳐나온 모용준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어서 저 놈을 잡아랏!"
가신들이 뒤쫓았으나 사자우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객주집으로 돌아온 사자우는 담화의 행방부터 확인했다. 담화는 홍칠공과 마주앉아 있었는데 그를 보자마자 반가워 활짝 웃기부터 했다. 그에게 정이 든 그녀는 깨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홍칠이 덤덤하게 결과를 물었다.
"그게 뭐요? 왕중양을 데려오라니까 모용준이 숨겨 둔 보물이라도 훔쳐온 것이오?"
"내 생각으로는 이 안에 왕중양이 들어 있는 것 같아."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시선이 재빠르게 교차했다. 곧 바닥에 널브러진 가죽주머니를 열어 본 홍칠공이 그만 입을 떠억 벌리고 말았다. 사자우의 추측대로 그 안에서 왕중양이 나온 것이다.
홍칠은 왕중양의 시체를 놓고 고심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강호객들 앞에서 간교하고 악랄한 모용준의 정체를 까발리고 싶었다. 그런데 사자우가 내키지 않아 하자 홍칠이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왜 웃기만 하는 거요?"
"이 시체를 보니 모용준의 됨됨이가 한눈에 보이는군. 하지만 자네 말대로 하면 의군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지 않겠소."
"그럼 어쩌자는 거요?"
"송장 하나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장차 어떻게 36만 개방을 다스린다는 말인가?"
사자우의 표정으로 보아 필시 좋은 계략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는 쉽게 가르쳐 줄 생각은 않고 피곤하다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어서 물러가게나. 난 한숨 자야겠으니."
담화를 끌어안고 누운 그는 곧바로 코를 곯아 가며 깊게 잠이 들었다.
홍칠은 모용준의 잔혹성에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다시는 기를 펼 수 없도록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내 얼른 다녀올 테니 그동안 이 왕중양의 시체를 잘 보라구 "
사자우가 했던 것처럼 홍칠도 한마디 남기고는 청하니 밖으로 나갔다.
"젠장, 진작 나갈 것이지."
사자우는 자는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담화가 울상이 되어 사자우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무서워요. 어떻게 죽은 사람과 함께……."
"망할 놈의 거렁뱅이 같으니라구. 잠깐만 기다려. 내 저 송장을 시궁창에 처박고 올 테니."
사자우가 엄청난 팔힘을 자랑하듯 가죽주머니를 어깨에 메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곧장 객주집 뒤로 길게 난 산길을 치달아 올랐다.
"산사람을 찾으러 갔다가 송장만 안고 온 꼴이로군. 그리고 뭐, 나더러 송장이나 지키고 있으라구?"
그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듯한 벼랑 끝에까지 이르렀다. 가죽주머니를 내려놓으며 또 한 번 홍칠공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홍칠이 네 놈 때문에 이 고생이다. 에이, 산 짐승에게 적선이나 하자."
왕중양의 시체는 벼랑 아래로 까마득히 굴러 떨어졌다.
사자우가 가죽주머니를 빼앗아 가자 모용준은 서둘러 평양성을 공격했다. 평양성 밖에서는 화살이 하늘을 가득 메웠고 합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모용준의 의군들은 여러 갈래로 분산된 채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올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뒤쪽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복문을 통해 슬그머니 빠져 나온 금나라 군사들이 역습을 가해 온 것이다.
모용준이 급히 외쳐 댔다.
"지비 대사, 어서 뒤로 달려드는 적들을 물리쳐 주시오!"
지비 대사가 곧 군사들을 이끌고는 그쪽을 향해 가려는데 사방에서 아우성이 터졌다. 분주, 형주 쪽의 금나라 군사들이 협공을 하기 시작했다.
"왕중양을 놓치지 마라!"
금나라 장수 중 하나가 이렇게 외치자 와! 하는 함성이 터졌다. 금군은 삼면에서 좁혀 들어왔다. 포위망을 뚫으려고 했으나 의군들은 번번이 실패를 했다.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어느새 많은 의군들이 말발굽에 짓밟히거나 금군의 화살에 쓰러져 갔다. 곧 의군의 전멸이 눈앞에 놓인 상태였다.
모용준이 장검을 뽑아 들고는 그의 가신과 함께 앞으로 전진해 갔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돌연 무심과 귀낭자가 달려왔다.
"모용준, 어딜 도망치려 하느냐!"
무심이 비아냥대자 모용준은 느긋하게 받아쳤다.
"무심, 네가 과연 나를 막을 수 있겠느냐?"
무심과 귀낭자는 그러나 공격은 해오지 않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면서 모용준에게 슬쩍 눈짓을 하는 게 아닌가. 무심의 의도를 읽은 모용준과 가신들은 금나라 군사들을 쳐죽이며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개방의 제 장로 역시 제자들을 거느리고 금군과 맞서고 있었다. 금군의 장수 하나가 제 장로의 머리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어찌나 사나운 기세로 덤비는지 제 장로는 이제껏 공격을 막기만 하는 처지였다. 이번에도 제 장로의 몽둥이 위로 칼이 꽂혔다.
'오랑캐의 사기를 올려 줘서는 안 되겠다!'
속으로 자신을 다그친 제 장로는 몽둥이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다시 금군 장수의 육중한 칼이 번쩍하며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제 장로가 몽둥이를 쳐들었다. 그런데 그만 몽둥이가 두 동강이 나 버렸다. 이제는 죽은 목숨이구나, 하는 생각에 두 눈을 질끈 감는데 주위가 이상했다. 눈을 떠보니 그 장수의 칼이 저만치 날아가고 있었다. 홍칠공이 나타나 구해 준 것이었다.
"홍칠공님이 저를 구해 주셨군요!"
홍칠이 다급하게 물었다.
"모용준을 보지 못했소?"
"아까 저쪽에서 싸움을 하는 것 같던데……."
홍칠이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데 금군 장수가 칼을 주워 들고는 막 달려 들었다.
"악!"
그 장수의 정수리에 홍칠의 몽둥이가 정확히 내리꽂혔다. 장수가 쓰러져 버리자 비로소 홍칠이 몽둥이를 높이 쳐들고 있는 게 보일 정도로 일순간의 일이었다.
"날 따르라!"
홍칠이 개방의 무리들을 이끌고 다니며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홍칠이 가는 곳마다 금군이 낙엽처럼 쓰러졌다. 홍칠을 만난 개방의 무리들은 더욱 사기가 충천해 좌충우돌하면서 용맹을 떨쳤다. 그런 와중에서도 홍칠은 보이지 않는 모용준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모용준은 쉽게 눈에 띄지를 않았다. 벌써 이곳을 벗어난 사실을 모르고 있는 홍칠로서는 애가 탈 뿐이었다. 홍칠은 비참한 심정을 달랠 길 없어 자꾸만 한숨을 지었다. 의군의 맹주 왕중양의 비참한 죽음, 또한 그와 모용준이 없는 의군의 장래……, 모든 것이 암담하기만 했다.
살육으로 길들여진 오랑캐들의 창칼 앞에서 의군들은 아우성을 치며 쓰러져 갔다. 홍칠은 모용준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포위망을 뚫기로 마음을 바꿨다. 막 앞으로 달려드는 금군을 쓰러뜨리며 나가려는데 지비 대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금나라 장수 넷과 맞서 악전고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등에 세 개의 화살이 꽂힌 그는 사력을 다해 장을 내뻗었다.
"어억!"
그중 하나가 가슴을 부여안고는 뒤로 넘어졌다. 그런데 다른 장수 하나가 낭아봉으로 지비 대사의 등짝을 힘껏 내리쳤다.
"큭!"
왈칵 피를 토한 지비 대사는 비틀거리며 쓰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홍칠이 번개같이 달려가 한 발로 장수의 머리를 차 버렸다. 그리고 얼른 지비 대사를 부축했다.
"내 걱정은 말고 어서 가시오!"
어설픈 미소를 조금 내비치며 힘겨운 한마디를 지비 대사는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군의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개미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홍칠이 일어서며 제 장로에게 명령한다.
"군령을 내려 어서 후퇴시키시오!"
"누구의 이름으로 군령을 내린단 말입니까?"
제 장로가 난처한 입장을 내보였다.
"답답한 사람 같으니라구. 왕중양의 이름으로 내리면 될 게 아니오?"
이윽고 천여 명밖에 남지 않은 의군들은 후퇴 명령에 따라 대열을 정비했다.
의군과 금군의 시체가 뒤엉켜 있는 싸움터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금군들은 왕중양과 모용준의 시체를 찾기 위해 사방을 뒤졌다. 그들은 병장기들을 수습해 평양성 안으로 들어갔다.
의군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난 홍칠은 개방의 무리들만 데리고 노주(澔州)로 들어갔다. 평지에 가까운 한 언덕 위에 오른 홍칠은 이곳에서 밤을 지내기로 하였다.
홍칠은 날이 밝도록 홀로 앉아 우울한 심사를 달랬다. 왕중양의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려 주먹을 불끈 쥐곤 했다. 천하를 호령할 일대 협객이 소인배의 손에 죽다니 실로 통곡할 일이었다. 왕중양의 시신이라도 정성스레 묻어 주고 싶었으나 이미 멀리 떨어져 있었고 금군들과 맞닥뜨리게 될 염려도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날이 밝자 홍칠공은 무리들에게 모용준이 의군을 배신한 일을 알렸다. 그리하여 천하 무림에 널리 알리는 것은 물론 모용준을 발견하는 즉시 보고하라는 분부까지 다짐해 두었다.
"모용준이란 자가 이처럼 지독하고 배은망덕한 놈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 놈은 우리 의군을 팔아먹은 천하의 나쁜 놈으로 꼭 내 손으로 목을 따고 말리라!"
홍칠이 쓸쓸한 마음을 누르며 바위 곁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데 한 사내가 달려왔다. 그는 임조영이라는 여협객이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다. 홍칠의 가슴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어떻게 그녀에게 왕중양과 모용준의 일을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난감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임조영을 피할 수는 없었다.
곧 임조영이 홍칠공에게로 다가왔다. 임조영이 공손히 읍을 한 다음 물었다.
"홍칠공, 듣자하니 의군이 뜻밖의 난관에 부딪쳐 피해를 보았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그렇소이다."
"그렇다면 그분은 지금……."
홍칠은 지금 임조영이 누구의 소식을 묻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았다. 임조영의 눈에는 애처로운 기운이 가득 차올랐다. 그녀는 왕중양을 찾기 위해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낸 적이 없었다. 언젠가 왕중양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눈앞에 보이는 흉노를 쳐부수지 못하는데 어찌 가정을 이룰 수 있겠소이까.'
그때는 야속한 왕중양을 원망하기도 했었지만 그것은 큰 뜻을 품은 사내로서 기풍 당당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임조영은 그런 왕중양을 그리워하다가 결국 그를 찾으러 나선 길이었다. 그러다가 의군이 크게 패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다.
"홍칠공, 왕 공자님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신다면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홍칠은 속으로 한숨만 부려 놓고 있었다. 그러나 숨길 일이 아니었다. 홍칠은 곧 모용준이 그를 죽였다는 말과 시신은 사자우가 갖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런 일이!"
임조영은 경악했다. 그녀는 시선을 먼 산으로 돌리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데 좀 이상한 생각이 든 홍칠이 물었다.
"임 소저, 왜 눈물을 흘리지 않지요?"
오히려 울먹이고 있는 것은 홍칠이었다. 임조영이 담담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분의 시신이 객주집에 묵고 있는 사자우의 처소에 있다는 말씀이죠?"
"그렇소이다. 헌데 지금쯤 그가 자리를 떠버렸는지도 모르오. 아무리 다급해도 왕 공자의 시신을 돌보고 왔어야 하는 건데……. 아무튼 내 과오를 용서하시오."
"알겠어요.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어요."
이렇게 인사말을 남긴 임조영은 무리들을 헤치고는 표연히 사라졌다. 홍칠은 그녀의 뒷모습을 망연히 주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녀가 시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에 화가 났는지 아니면 왕중양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너무 큰 것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임조영은 대명 (大名)이라는 작은 읍으로 들어섰다. 이른 아침인데도 거리에는 장꾼들과 상점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렸다. 그녀는 찻집과 주루가 눈에 띄면 들어가 사자우의 흔적을 찾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임조영은 한곳에서 술과 안주를 시켜 놓고 잠시 걸음을 쉬게 되었다. 그때 한쪽에 마주앉은 객들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려 왔다.
"그럼 그 양반이 가진 보배란 다름 아닌 계집이란 말이오?"
한 사내가 호들갑을 떨며 좌중의 시선을 모았다. 그러자 좀 늙수그레한 사내가 별안간 언성을 높였다.
"계집이 보배가 아니면 뭐가 보배겠어? 까놓고 말해서 모든 물건은 값을 매길 수가 있지만 유독 아름다운 계집만은 값을 부를 수 없는 거지. 그대가 한번 말해 보게. 천하절색 양귀비의 값은 얼마며 월나라 미인 서시의 몸값은 얼마인가를. 천 냥만 냥으로도 살 수 없는 게 바로 계집이지. 그러니 계집이 바로 보배란 말이네."
"아니, 그 계집이 그렇게 어여쁘게 생겨 먹었단 말이오?"
"아무렴, 천하절색 양귀비보다는 좀 떨어지지만 여하튼 예쁘장하게 생긴 계집이라구.."
형님, 그렇게 어여쁜 계집이라면 슬쩍 꼬드겨 소실이나 삼지 그러슈?"
이 놈, 닥치지 못해! 지금 그 계집을 차지하고 있는 사내가 얼마나 지독한 놈인 줄이나 알아? 상판은 객주집에서 쓰는 도마같이 흉물스럽고 키는 위에서 눌러 놓은 난쟁이지만 무공이 대단해. 잘못 설쳤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한다구."
"좌우간 형님은 그 객주집 신세를 지고 있으니 당분간 눈요기만은 신물나게 하겠네요. 히히."
"예끼 이 사람아, 늙은이 앞에서 점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소리만 할 건가?"
두 사람은 한창 음탕한 말들을 주고받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젊은이가 술값을 치르자 늙은이는 점잖게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밖으로 나갔다. 임조영도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조금 거리를 둔 채 아까 그 늙은이의 뒤를 밟기로 했다. 젊은이와는 헤어졌는지 그는 혼자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큰길을 따라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지더니 오면장(五綿庄)이라는 객주집으로 들어갔다.
객주집 안으로 뒤따라 들어선 임조영이 잠시 안을 살폈다. 찻잔을 받쳐 들고는 호호 불어 가며 차를 마시던 여주인이 그녀를 무심히 쳐다보았다.
"빈방 있소?"
여주인이 임조영의 아래위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이층에 빈방이 있기는 하지만 손님이 묵기는 좀 어렵겠는데요."
"내가 여인이라 그러는 게요?"
임조영이 약간 기분 상한 어투로 되묻자 여주인이 정색하며 소곤댔다.
"사실 이층 북쪽 두 번째 방에 웬 험상궂은 사내가 계집 하나를 데리고 묵고 있는데 개백정 같은 놈이라우. 보아하니 검을 차고 있는 것이 만만한 여인 같지는 않지만 이층에 묵을려면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할 게요. 밤낮이 없어요. 그 계집을 끼고 누워 종일 그 짓만을 한다니까요. 이층에 있는 손님들이 방을 바꿔 달라고 호통을 칠 정도이니 알 만하지 않아요?"
여주인은 침을 튀겨 가며 열심히 이층에 묵고 있다는 사내에 대해 떠벌렸다. 그러면서도 행여 임조영이 다른 곳으로 갈까 봐 며칠 전에 송장 하나를 쳐낸 일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임조영이 그 사내와 가까운 방이라도 좋다고 하자 여주인이 더는 군말하지 않고 안내했다. 방에 들어선 임조영은 침대에 앉은 채 깊은 상념에 잠겼다. 늙은이와 여주인이 말한 자가 필시 사자우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렇지만 지금 그자가 있는 방으로 무작정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계집을 끼고 아직 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임조영도 부족한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우려는데 맞은편 방에서 요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 아파!"
비록 사내와 가까이 한 적이 없는 그녀였지만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았다. 신음 소리는 더욱 생생하게 임조영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느닷없이 가슴이 달뜨기 시작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누군가 그 방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선생, 더운물 가져왔습니다요."
그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아까 주루에서 본 늙은이의 음성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가 무슨 일로 사자우의 방에는 찾아왔을까? 또한 더운물을 떠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가지고 들어와!"
사자우가 안에서 소리치자 늙은이의 발소리가 났다. 그런데도 계집의 신음 소리는 조금도 쉴 줄을 몰랐다. 임조영이 발소리를 죽여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틈으로 건넌방을 엿보는데 다시 사자우의 목소리가 터졌다.
"이 영감탱이야, 어서 나가지 못해!"
후닥닥 밖으로 쫓겨 나온 늙은이는 못내 아쉬운지 이번엔 문틈으로 안을 훔쳐보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저 늙은이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는 결과였다. 임조영이 피식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려는데 잠자기 어이쿠!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곤 임조영의 방문이 안으로 넘어지며 그 늙은이가 뛰어들었다. 늙은이는 두 손으로 눈을 감싸고 있었는데 피가 낭자했다. 가만히 보니 등을 긁을 때 쓰는 대로 만든 갈고리가 눈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게 아닌가.
곧 사자우로 보이는 사내가 씩씩대며 나왔다. 임조영을 발견한 사자우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여긴 여인네들이 출입할 곳이 못 되는데……."
"사자우, 한 가지 묻겠어요. 왕중양의 시신은 지금 어디에 있죠?"
그제야 임조영이 찾아온 이유를 깨닫고는 사자우가 껄껄 웃었다.
"왕중양? 송나라를 구할 것처럼 물첨벙 물첨벙 날뛰다가 죽은 양반 말이지?"
검을 잡고 있는 임조영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애써 마음을 가라 앉히며 임조영이 다시 물었다.
"왕중양을 어디에 두었는지만 말하면 되오?"
사자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양팔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던져 버렸지. 귀찮아서 천 길 벼랑 아래로……"
임조영이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
임조영의 검이 사자우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제28장 《구음진경》을 얻은 왕중양
깎아지른 듯한 층암절벽이 거대한 병풍을 이루고 그 아래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계곡이 나 있었다. 벼랑 위에서 내려다보면 계곡이 꿈속같이 아련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돌멩이를 떨어뜨려도 어찌나 깊은지 그 소리가 나지를 않는다. 이곳에서 떨어진다면 어느 것도 살 수 없으리라. 천운으로 살아난다 해도 어떻게 다시 기어오를 수 있다는 말인가.
계곡 아래는 맑고 푸른 커다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는데 고기떼가 많았다. 이곳에는 메기도 아니고 도롱뇽도 아닌 괴상하게 생긴 고기가 살았다. 머리는 활촉처럼 뾰족하고 입이 두툼한 물고기는 보통 쉽게 대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벼랑 위에서 난데없이 육중한 물체가 이 물 속으로 떨어지자 물고기떼들이 놀라 어디론가 숨어 버렸다. 그런데 그 물체는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떠있었다. 물결이 고요해지자 또다시 모여든 물고기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는 톡톡 주둥이로 쪼아댔다. 생가죽으로 만든 것이라 물고기들에게 훌륭한 먹잇감으로 비친 모양이었다. 물고기떼들은 가죽주머니를 열심히 갉아대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이빨을 갖고 있는 물고기들의 입질로 가죽주머니는 서서히 구멍이 났다. 갑자
기 북 하는 소리와 함께 물 속으로 시커먼 물체가 떨어졌다. 그 바람에 다시 물고기들이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가죽주머니가 찢어지면서 나온 것은 원숭이였다. 매우 큰 원숭이였는데 네 발을 연신 움직여 가죽주머니를 밀고는 기슭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바위 위에 오른 원숭이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가죽 주머니를 마저 찢어발겼다. 이윽고 가죽주머니 안에서 또 다른 시커먼 물체가 쏟아져 나왔다. 왕중양이었다. 낯색은 이미 사자(死者)처럼 검푸르고 전신은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원숭이가 왕중양을 내려다보며 낑낑 우는 소리를 냈다. 한참을 울어대더니 원숭이는 벼랑 아래로 가서 새빨간 산딸기를 따 가지고 왔다. 그 산딸기를 왕중양의 입 속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왕중양의 입이 굳어져 열리지 않자 원숭이는 강제로 그의 입을 벌려 넣었다. 조금 후 왕중양의 가슴이 아주 조금 부풀어 오르자 원숭이가 제 자리에서 통통 튀며 재주넘기를 했다. 그리곤 신이 나는지 다시 산딸기를 따와 왕중양의 입 속에 쑤셔 넣었다.
왕중양의 가슴이 차츰 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조금 후였다. 황혼 무렵이 되어서야 기적적으로 왕중양의 의식이 되살아 났다. 눈을 뜬 왕중양은 이곳이 저승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얼른 알아볼 수가 없었다. 푸른 빛이 감돌고 어딘가 사람의 것으로는 볼 수 없는 한 쌍의 눈이 자기를 보고 있지를 않은가? 필시 저승에 사는 사람들일 거라 믿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건 네 발을 가진 원숭이였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왕중양이 두리번거리자 원숭이가 끙끙 소리를 냈다. 원숭이는 왕중양의 팔을 잡더니 벼랑 쪽을 가리켰다.
"벼랑? 그런데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인가? 모용준은 의군을 이끌고 어디로 갔을까? 그 놈의 행각을 어서 말려야 하는데……."
왕중양은 원숭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자말을 흘렸다. 원숭이를 쳐다보고 있자니 왕중양은 씁쓰레한 웃음이 흘러 나왔다. 이 원숭이보다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생각에 서글퍼졌기 때문이었다.
"네가 날 구해 준 게로구나?"
그러자 원숭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왕중양이 신기하게 여겨져 다시 울었다.
"내가 여기서 얼마나 누워 있었지?"
원숭이가 땅에 떨어져 있는 딸기를 보며 낑낑낑…… 하고 열 번 소리를 냈다. 왕중양은 그것이 열흘 동안 이곳에 있었다는 소리로 알아들었다. 더는 원숭이와 정확한 의사소통은 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왕중양이 발견해 낸 것이 있었다. 원숭이는 지금 몹시 기분이 좋은 상태라는 점이었다.
한참 재주넘기를 하며 뛰놀던 원숭이가 왕중양의 팔을 잡더니 물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맑고 투명한 물이 찰싹찰싹 기슭을 핥고 있었는데 이름 모를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를 본 왕중양은 자신이 이렇게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그 물에 손을 적시려고 허리를 구부리던 왕중양은 그만 눈앞이 아찔해져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였다. 왕중양은 원숭이부터 찾았다. 옆에 우두커니 앉아 자신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있는 원숭이를 발견한 왕중양은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꼈다.
"원형(獲兄), 정말 고맙수. 헌데 배가 터질 듯 아파 오는구려. 아마 더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갑자기 원숭이가 낑낑대며 우는 소리를 내더니 물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앞발을 어설프게 놀려대는 것이 물고기를 잡으려는 모양이었다. 왕중양은 저도 모르게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맑은 물 속에 사는 물고기란 원래 동작이 빠른 법인데 원숭이로서 그런 고기를 잡는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원숭이는 양손을 물 속에 넣고 가만히 물고기의 흐름을 살폈다. 그러더니 순간 원숭이의 몸이 한차례 옆으로 뒤틀렸다. 팔뚝만한 물고기가 왕중양 앞으
로 날아든 것은 그때였다. 고기는 서너 번 펄떡이더니 곧 죽고 말았다. 처음엔 갈색을 띠고 있던 물고기는 차츰 황색과 검은 색으로 변했다. 물에서 나온 원숭이가 다시 낑낑 소리를 냈다. 어서 물고기를 먹으라는 뜻이었다. 왕중양이 머리를 가로로 저었다.
"원형이 잡수시오. 난 이제 죽을 목숨인데 이것을 먹어 무슨 소용이 있겠소?"
원숭이는 예의 그 소리를 내며 제법 눈까지 매섭게 치떴다.
"그럼 원형의 성의를 생각해 내 한입만 베어 먹겠소."
왕중양이 물고기를 양손으로 쥐고는 한입 뜯었다. 입 안이 싸한 것이 별맛은 없었다. 왕중양이 기운이 없어 천천히 바위에 몸을 기대자 원숭이가 대신 물고기의 살점을 뜯어 왕중양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 왕중양이 원숭이의 시중을 받으며 목숨을 이어 가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신세가 하도 한심스러워 왕중양은 눈물을 흘렸다. 어쨌거나 원숭이의 정성으로 왕중양은 물고기 한 마리를 다 먹어치웠다.
"원형, 내 구천에 가더라도 원형의 은혜는 잊지 않으리다."
왕중양은 다시금 깊은 잠속에 빠졌다. 그 후로도 왕중양은 깨어 났다가 다시 의식을 잃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때마다 원숭이는 산딸기와 물고기를 가져와 정성껏 왕중양에게 원기를 불어넣어 주려고 애를 썼다.
이렇게 다시 십여 일이 지나자 왕중양의 몸은 예전처럼 완전히 회복되었다. 원숭이는 그의 회복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껑충껑충 그의 주위를 돌며 요란스럽게 소리를 질러댔다.
원숭이가 왕중양의 팔을 잡아 끌었다. 물 건너에 있는 평지로 가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왕중양은 왠지 내키지가 않았다. 이쪽이 더 시원하고 호젓했으며 건너편은 그늘이 져 있어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원숭이가 계속 고집을 피웠다.
"원형이 나를 구해 주었으니 별수없구려. 헌데 난 원래 헤엄을 못 치니……."
원숭이가 왕중양의 팔소매를 움켜쥐더니 물 속으로 들어갔다. 물은 얼음처럼 찼지만 회복된 몸이라 견딜 만했다. 원숭이는 능숙한 솜씨로 왕중양의 팔을 잡고는 건너편까지 유유히 헤엄쳐 갔다.
기슭에 오르니 갑자기 한기가 전해졌다. 온몸이 떨리고 이빨끼리 따그닥따그닥 요란스럽게 부딪쳤다. 원숭이가 급히 왕중양을 벼랑 아래로 이끌었다. 그곳은 한결 따뜻했다. 볕이 드는 곳에 털썩 주저앉은 왕중양이 원숭이에게 말했다.
"원형, 난 여기에 좀 눕겠소."
그러자 원숭이가 킥킥 소리를 지르며 팔을 잡아당겼다. 계속 어디론가 가자는 몸짓이었다.
"원형도 아다시피 난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아니오? 생각만큼 몸이 움직여 주지를 않는구려."
고집불통의 원숭이였다. 이제는 화까지 내며 더욱 세게 왕중양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는 수 없이 왕중양은 원숭이의 뒤를 따라 평지까지 가게 되었다. 편지에는 푸른 넝쿨들이 뒤엉켜 있었다.
"여기서 도대체 무엇을 하자는 거요?"
원숭이가 넝쿨을 헤치며 안으로 들어섰다. 신기하게도 그 안에는 동굴이 하나 있었다. 원숭이가 이빨을 내보이며 웃는 시늉을 하고는 안쪽으로 성큼 들어섰다. 동굴 안은 넓고 아늑했는데 양옆에 는 옥돌로 만든 탁자와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또한 한복판에는 한 줄기 수정 같이 맑은 샘물이 졸졸 흘렀다. 왕중양은 눈앞의 광경에 탄복을 했다.
"바로 이곳에 오자고 그리 야단이었구려. 여하튼 이곳을 보니 살 것 같소."
옥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침대도 눈에 띄었다. 왕중양이 그 위에 반듯하게 누웠다. 그는 이 침대에서 꼬박 닷새 동안이나 깨지 않고 잠을 잤다.
시들시들해져서 곧 죽을 것만 같았던 왕중양은 자신의 회복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원기는 더욱 왕성해졌고 그럴수록 원숭이에게 끝없는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왕중양은 편히 침대에 누워 원숭이가 잡아 오는 물고기를 한 마리씩 해치웠다. 그러던 중 며칠이 지나자 이젠 한 마리로는 부족할 지경이었다.
"한 마리 더 먹을 수 없겠소?"
왕중양이 좀 미안한 얼굴을 하자 원숭이가 눈동자를 사납게 굴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원숭이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 왕중양은 포기하고 말았다.
밤새 횐 눈이 쏟아졌다. 새벽에 일어난 왕중양은 동굴 어귀에 쌓인 눈을 보고는 놀랐다. 옆을 보니 원숭이는 아직 잠자고 있었다.
"원형, 어서 일어나시오. 새하얗게 눈이 왔소!"
동굴 밖으로 나가자 온통 은세계가 펼쳐져 있어 눈이 부셨다. 바위와 나무들까지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풍경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백설 때문에 더욱 푸르게 보이는 강줄기만 여전히 맑게 흐르고 있었다. 왕중양과 원숭이는 눈밭 위를 구르며 마음껏 뛰놀았다. 더없는 행복감에 싸인 왕중양은 기뻐서 눈물이 다 나왔다. 이 모두가 원숭이 때문이 아니던가. 생각할수록 왕중양은 원숭이에 대한 깊은 고마움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원형, 나를 살리느라 고생이 많았소이다. 이 은공을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원숭이가 고개를 한쪽으로 틀며 끽끽 나름대로 대꾸를 했다. 원숭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왕중양이 진심 어린 말을 건넸다.
"원형, 내가 동굴에서 죽을 때까지 곁에 있어 주는 거지요?"
원숭이가 말을 알아듣고는 머리를 조아렸다.
"원형은 얼마나 좋겠수. 우리야 기껏 백 년이면 이 세상과 하직하는게 원형들은 일천팔백 년은 족히 살아 낼 수 있지 않소?"
동굴로 들어온 왕중양은 들뜬 가슴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원형, 그런데 아직 동굴의 끝까지는 가보지 못했소. 말이 나온 김에 나를 데리고 가 주지 않겠소?"
원숭이가 기꺼이 앞장을 섰다. 왕중양의 생각으로는 이곳에서 영원히 살 것인데 이왕이면 어디에 무엇이 있는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동굴은 들어갈수록 좁아져 나중에는 몸을 낮추고 기어가야만 했다.
한참을 기어가자 잠자기 눈앞이 환하게 트였다. 눈앞으로 훤하게 드러난 옷은 매우 큰 공간이었다. 깜짝 놀란 왕중양이 주위를 둘러보니 웬만한 불교 사원의 도장(道場)과도 맞먹을 규모였다. 바닥에는 마른 풀 포기 하나 없는 것을 보아 사람이 머물다 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계시오!"
혹시 몰라 왕중양이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곳에도 옥으로 만든 의자가 있었는데 검으로 단번에 쳐 만든 것으로 짐작됐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대단한 검법의 소유자가 한 일일 것이다. 의자에 앉은 왕중양은 손을 들어 석벽을 만져 보았다. 그 역시 검으로 다듬은 것으로 유리알처럼 반들거리고 광채가 났다. 다른 쪽의 석벽으로 눈길을 옮겨 가던 왕중양이 멈칫했다. 그곳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
구음진경은 천하에 복을 줄 수도 있고(丸陰眞經福天下)
천하에 화를 줄 수도 있노라(丸陰眞經禍天下).
아무래도 범상치 않은 느낌이 든 왕중양은 유심히 그 글들을 음미했다.
'구음진경?'
무림세계에 비밀리에 전해지는 그 무슨 책자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들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기에 천하 사람들에게 복과 화를 함께 내릴 수 있다는 것인가? 어쩌면 옛 성인들의 말일지도 모른다. 복과 화는 사람의 행실에 따라 받게 되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 '구음진경'이라는 것도 그럴 것이 아니겠는가.
호기심이 동한 왕중양은 옆으로 몇 걸음 옮겨 갔다. 커다란 석실로 통하는 입구가 있어 그 안으로 들어섰다. 다시 작은 석실 하나가 보였다. 그곳으로 천천히 몸을 들이민 왕중양은 경악하며 뒤로 물러 나왔다. 웬 사람 하나가 벽에 기댄 채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 사람은 그린 듯 정좌를 하고 있었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왕중양이 마음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다가섰다.
"이렇게 불쑥 찾아온 것을 용서하시오!"
예를 올린 왕중양은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묵묵부답이었다. 죽은 사람이라 볼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접근한 왕중양은 더욱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죽은 사람이지만 살점 하나 썩어 문드러지지 않았을 뿐더러 얼굴 표정도 그대로였다. 옷모양새를 보니 신선이 아니면 도인이라 예상이 되었다. 앉아 있는 무릎 위에는 끝이 무뎌진 보검 한 자루가 놓여져 있고, 그 바로 앞 바닥에는 역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전진 도인은 평생을 즐거이 살다가
만년에 득도하여 신선이 되노라
구음진경은 복도 화도 줄 수 있으니
후세에 전하여 전진교를 빛낼지어다.
불현 왕중양의 가슴은 바람을 안은 강물처럼 커다란 기운으로 꿈틀대는 듯싶었다. 그는 반평생을 살아오다가 이제야 자신을 발견해 낸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도인의 '구음진경'을 이어받아 후세에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이겠는가!'
그는 꼭 그렇게 하리라 다짐하고는 도인 앞에 꿇어앉았다.
"사부님으로 모시고 한평생 도가 전진이 되어 사부님의 '구음진경'을 천하에 전하겠나이다!"
그러나 문득 왕중양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벗어날 수 없는 깊은 계곡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것이다. 이곳을 헤어나지 못하는 이상 어찌 '구음진경'을 사람들에게 알리며 또 어떻게 도가 전진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때 문득 그의 눈앞으로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임조영이었다. 설사 이 협곡을 벗어날 수 있다 해도 그녀와는 영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는 이미 그녀도 늙은 후가 될 것이란 게 왕중양의 씁쓰레한 예감이었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침울해 있는데 갑자기 도인의 시체가 쿵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그러면서 뒷벽에 새겨진 새로운 글귀가 나타났다. 역시 '구음진경복천하, 구음진경화천하' 라는 글귀였는데 그 밑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왕중양은 기이하게 생각했다. 머뭇거리던 왕중양이 그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있어 꺼내 보았다. 네모 반듯한 상자였다. 상자 뚜껑을 열어 보니 두 권의 고서가 나왔다. 이것이 바로 상편과 하편으로 된 《구음진경》이라는 기서(奇書)였다. 그 책 겉에는 이런 글귀가 씌어져 있었다
마음이 바른가 자문해 보라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이 책은 오히려 너를 해칠 것이고
마음이 바르다면
이 책은 너를 도우리라.
왕중양은 자못 흥분이 되어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 보았다.
'어떤가? 왕중양, 네 마음이 바른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나 왕중양은 다른 것은 몰라도 마음 한 가지만은 똑바른 사람이다. 하늘을 우러러 떳떳이 말할 수 있다.'
그는 숨을 가다듬고 두 손으로 그 책을 들었다. 책 표지에는 '구음진경(丸陰眞經)'이라 씌어 있고 그 밑에 '황상(黃裳)'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아마 그 책을 쓴 도학 스승의 존함인 모양이었다.
다시 꿇어앉은 왕중양은 쓰러진 도인에게 다시 절을 올리고 그 책을 조심스레 펼쳐 들었다. 그다지 두꺼운 책은 아니었다.
왕중양이 천천히 일어서며 원숭이를 돌아보았다.
"원형, 사부님을 밖으로 모셔다가 고이 묻어 드려야겠소."
원숭이가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었다.
"왜……?"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아 그 이유를 묻던 왕중양은 곧 원숭이의 뜻을 헤아리고는 도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사부님, 후일 다시 찾아와 뵙겠습니다."
다시 자신들이 머물던 곳으로 기어 나온 왕중양이 원숭이에게 물었다.
"원형, 나를 제외하고는 아까 그 도인을 본 사람은 없소?"
원숭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중양은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한숨을 쉬었다. 이 원숭이가 사람처럼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해서였다. 그렇다면 누가 자신을 이 협곡 아래로 떨어뜨렸는지도 알 수 있을텐데…….
왕중양은 사소한 일에는 무심하기도 하고 매우 너그러운 편이지만 나라의 운명이 달린 대사는 절대 외면하지 않는 사내였다. 그는 이 협곡을 빠져 나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생각할수록 그의 가슴을 조여 오는 일이 있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나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임조영을 만나는 일이었다. 그녀를 찾아내어 모용준을 믿을 만한 사내라고 주장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용서받고 싶었다. 모용준은 의군의 대업을 외면한 자요, 모든
백성의 뜻을 저버린 자라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곳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날이 갈수록 왕중양의 심기는 편하지가 않았다. 이미 《구음진경》의 깊은 뜻을 가슴에 새긴 뒤라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왕중양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구음진경》을 정독하는 일이었다. 복과 화를 줄 수 있는 이 기서에는 과연 어떤 속뜻이 숨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한 장 두 장 《구음진경》을 읽어 나갔다. 그렇게 시작한 《구음진경》의 정독은 나중에는 식음을 전폐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 낮에는 동굴 속으로 스며드는 햇빛 아래서 책을 읽었고 밤이면 달빛에 비추어 봤다.
원숭이는 왕중양이 자기가 잡아오는 물고기조차 먹지 않고 책읽기에만 몰두하자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왕중양이 용서를 빌었다.
"미안하오. 내가 물고기를 먹지 않아 원형이 고생을 하는구려."
원숭이는 왕중양이 먹지 않고 내버려둔 물고기가 썩으면 다시 강으로 가 고기를 잡아 오곤 했다. 왕중양 곁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물고기가 수북하게 쌓여 갔다.
이런 왕중양의 노력은 곧 결실을 보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왕중양은 《구음진경》을 통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제껏 세상에 떠도는 무림의 비적(祺籍)을 두루 보았지만 이 《구음진경》에 비하면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설사 푸줏간의 백정이라도 이 책만 읽으면 무림의 고수로 자리할 게 분명했다. 이 책을 쓴 '황상'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아무튼 책의 신묘함에 비추어 그 사람은 절세의 기재(奇才)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
었다.
도인의 시신이 있는 쪽을 향해 꿇어앉은 왕중양은 중얼거렸다.
"사부님, 제자는 사부님의 뜻을 이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소이다. 허나 아무래도 어려운 듯싶습니다. 지금 제자는 그 옛날 사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 험난한 골짜기에 떨어져 전혀 솟아날 가망이 없소이다. 그러니 무슨 수로 사부님의 이 《구음진경》을 빛내겠습니까? 또 무슨 수로 천하의 사람들에게 복을 줄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 제자의 안타까운 마음을 굽어살펴 주소서!"
무릎이 시리도록 그는 반나절이나 꿇어앉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왕중양은 갈증이 난 사람이 물을 찾아 마시듯 정신없이 《구음진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어렵고 기이한 무공에 관해 기술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흥분이 되는 자신을 느꼈다. 이 무공이 세상에 나가면 큰 변이 생길 것만 같아서였다. 의롭고 정직한 일에만 쓴다면 탈이 없겠지만 그 반대가 되면 백성은 어려워질 게 분명했다. 왕중양은 다시금 이 《구음진경》이 말하는 복과 화에 대해 음미했다. 천하 무림들 사이에 피를 보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는 천하 제일의 고수가 이 책을 지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을 차지하기 위해 무림의 세계는 피
바다를 이루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왕중양은 이 《구음진경》을 올바르게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했다. 이곳에 곤두박질칠 때 입었던 상처가 아직 남아 있는 그였지만 이대로 협곡에 갇혀 죽어 갈 수만은 없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조각난 뱃속의 창자로 인해 간헐적으로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 그는 이 육신의 아픔을 더는 것과 더 나아가 밝은 빛을 세상에 알리는 대업을 함께 생각해야 했다. 왕중양은 오직 그 길을 열기 위해서는
《구음진경》에 몰입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다시 《구음진경》에 몸과 마음을 쏟았다.
《구음진경》의 전편은 주로 기공을 익히는 기초적인 방법들을 기술하고 있었다. 기묘한 초수와 검법 그리고 장법과 내공운행법은 후편으로 갈수록 자세히 드러났다.
'지금껏 많은 무공을 익혔었지만 그 원류를 몰랐었다. 사실 내가 아는 무공은 전부 이 《구음진경》속에서 나온 것이었구나. 그리고 내가 접해 보지 못했던 무공 역시 수없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지은 황상이야말로 이 왕중양의 더 큰 스승이다!'
모용준의 음모 때문에 잃게 된 왕중양의 무공, 그러나 왕중양은 이렇게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천하 정통파 무공의 일인자로,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무림의 대협객으로…….
석굴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 왕중양은 가슴으로 도인을 불렀다.
'제자 왕중양에게 신묘한 기공법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 기공법으로 협객을 벗어나 《구음진경》의 빛을 널리 전하리다!'
왕중양은 이제 《구음진경》을 자기 목숨보다 더 큰 의미로 받아 들이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한동안 머리를 숙이고 있던 왕중양이 습관처럼 《구음진경》을 펼쳤다. 어디쯤인지 가늠해 보지 않고 한 행동이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장절은 〈요상편(療傷篇)〉이었다. 혹시 도인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 길을 열어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왕중양은 그곳을 가슴에 하나하나 각인했다. 이런 말이 〈요상편〉에 담겨져 있었다.
막힌 물은 터져야 흐르고 흘러야 썩지 않나니
환자의 기를 기르고 운행시켜
그 막힘과 응어리를 소통시키고 터뜨려야 하느니라.
왕중양의 뒷머리로 섬광 같은 것이 들이쳤다. 기공으로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이었다.
그때 산딸기와 물고기를 한아름 들고 들어오는 원숭이에게 왕중양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군. 정말 고맙소."
원숭이는 왕중양의 정중한 인사말에 좋은지 깡총깡총 뛰어다녔다. 왕중양이 다시 원숭이에게 예를 갖추며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원형, 나는 앞으로 기공을 연마해야 하오. 그러니 청하건대 그동안만 나를 위해……."
벌써 알아차린 원숭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해하지 않을 테니 얼마든지 기공을 연마하라는 뜻이었다.
곧 왕중양은 기공 연마에 몰입했다. 지그시 두 눈을 감고 앉아 기를 단전으로 끌어 모으며 허무지경(虛無之境)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왕중양은 한 줄기의 기류가 미려혈로부터 시작하여 등골을 타고 흐르다가 오장육부를 말끔히 씻어내는 느낌을 받았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가슴과 배에서 일더니 차차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났다. 왕중양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왈칵 무언가를 게워 냈다. 그것은 상처를 입은 내장에 응어리져 있던 핏덩어리였다.
이렇게 사나흘 기공을 하자 차츰 전신으로 힘이 전해지고 내력이 강물처럼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왕중양은 다시 태어난 기쁨에 주먹을 꽉 쥐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에 이제 엄청난 기력이 들어차게 된 것이다.
음지에 쌓였던 적설도 녹아 버리고 협곡은 푸르게 새옷으로 갈아 입기 시작했다. 세월이 덧없이 흐른 것에 왕중양은 쓸쓸하고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의군을 일으켰던 강호객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 간교한 모용준은 지금도 의군의 대권을 틀어쥐고 대연을 복구하려고 날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세상이 변했으리라는 생각에 두려움마저 들었다. 무엇보다. 임조영의 소식이 궁금했다. 불현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오르며 사무치게 그녀
가 그리워졌다.
왕중양은 이따금 무서운 꿈에 놀라 잠에서 깨곤 했다. 의군은 복멸되었고 요사스런 모용준이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는 꿈이었다. 왕중양은 금나라에 투항했으며 벌써부터 금과 내왕하던 사이였다고 모용준이 뇌까리는 장면도 보였다. 만약 그것이 꿈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왕중양은 생각만으로도 부르르 치가 떨렸다.
천하 대협, 아니 무림의 맹주 왕중양이 실종된 지도 일년이란 세월이 지나 버렸다. 강호의 호걸들은 아직도 그때의 일을 잊지 않았다. 왕중양의 호령 아래 의군으로 뭉친 호걸들이 금나라와 대적하였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평양성 싸움에서 의군이 끝내 패하기는 했지만 그 기세만은 당당하였다고 이들은 서로를 위안했다.
모용준 역시 실종이 되었는데 왕중양처럼 전혀 소식을 알 수 없었다. 다만 홍칠의 말에 의하면 왕중양은 모용준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사실을 사자우도 알고 있다는데 호걸들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더 이상의 구체적인 내막이 홍칠과 사자우의 입에서 흘러 나오지 않고 있는지라 호걸들은 더욱 애가 탈 뿐이었다. 그같은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는 바로 모용준인데 그도 실종이 된 지라 확실한 것을 알아내기란 힘이 들었다.
모용준이 자기 고향인 고소(姑蘇)로 돌아가 칩거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말이었다. 모용세가의 본은 고소 모용이요, 원래 선조 대대로 그곳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모용씨는 모용준의 부친 때부터 정강(靜江)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무슨 연유로 고소를 떠나 정강에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소문을 듣고 호걸 중 누군가가 고소에 가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모용준은 고사하고 그의 뒤를 따르던 사대 가신들의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모용준이 미쳐 버린 나머지 가신들을 죽이고 자기도 자결했다는 풍문까지 나돌았다.
어쨌거나 모용준에 대한 소문은 차츰 뜸해 갔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지기에 이르렀다.
강호는 종전과 다름없이 고태의연했다. 더군다나 왕중양과 모용준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자 바람이 멎은 호수처럼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왕중양이 실종된 후 임조영은 거의 실의에 빠져 지냈다. 왕중양의 시신이라도 찾아 고인의 명복이라도 빌어 주고 싶었다. 사자우가 왕중양을 내버렸다는 그 벼랑까지 가 보았지만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천 길이 넘는 절벽을 무슨 수로 내려갈 수 있겠는가. 임조영은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며 오랫동안 서 있었다.
"왕 공자, 당신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처럼 시신도 남기지 못하는 몸이 되었나요?"
그녀는 왕중양을 집어삼킨 아득한 저 밑을 응시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곤 다시는 그곳을 찾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속에서도 왕중양은 서서히 잊혀져 가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왕중양은 전설의 인물이 되어 아직 사람들의 삶 속 곳곳에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마치 전설을 들려주듯 술자리에서나 어디에서나 협객 왕중양의 무용담에 흠뻑 취해 지냈다.
왕중양이 천하 무림의 고수로 다시 태어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구음진경》을 독파한 후 무공을 더욱 견고하게 연마해 나갔다. 그러다가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이 협곡이 가슴에 밟혀 침통해지곤 했다. 어떨 때는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원숭이와 한 평생 지내고 싶은 마음도 생겨났다. 왕중양은 심신을 달랠 겸 원숭이와 강물에 뛰어들어 어린아이처럼 놀았다.
한참을 그러고 노는데 하늘에 닿을 듯한 저 계곡 위에서 병장기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순간 왕중양의 심장은 심하게 요동을 쳐댔다. 보이지도 않는 그곳을 향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른 것은 그런 충동 때문이었다.
"여보시오, 내 말이 들리시오!"
옆에 있던 원숭이는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도 왕중양은 계속 위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왕중양의 목소리가 협곡을 울리며 메아리쳤다. 벼랑 위에서 나던 병장기 소리가 뚝 멈추더니 무서운 정막이 흘렀다. 사실 왕중양의 외침 소리는 수면에 반사되어 위로 올라갈수록 기묘한 소리로 변하고 말았다.
위에 있던 사내들은 대협 왕중양이 죽은 자리라는 의미를 새기며 무공을 겨루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괴상한 소리가 들리자 싸움을 중단했다.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득한데다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저건 왕중양의 혼백이 우는 소리일 거야. 아마도 우리가 서로 칼부림을 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겨 저러는가 봐. 어서들 급살맞기 전에 자리를 뜨자구."
이들은 허겁지겁 산을 내려갔다.
기진맥진해진 왕중양은 강기슭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의 소리를 듣고는 지금쯤 밧줄을 가지러 간 것으로 오해를 했다. 그러나 반나절이 지나도록 아무도 나타나 주지를 않았다.
"원형, 여기서 솟구쳐 오를 수만 있다면 정녕 두 번 태어난 셈이겠지?"
천진스런 눈으로 원숭이가 왕중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숭이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왕중양도 원숭이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한숨을 섞어 가며 다시 말했다.
"원형, 아마도 원형이 살기에는 이곳이 제일이겠지. 허나 나는 인간이니만큼 이곳에서 살 수는 없소. 또한 나는 곧 사람들을 만나 해야 할 일도 있고……. 처음 약속과는 다르게 내가 이러는 걸 용서하오."
원숭이가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왕중양이 어깨를 들먹이는 원숭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원숭이가 갑자기 벼랑을 향해 껑충 뛰어오른 것은 이때였다. 원숭이는 한 길이 조금 넘는 곳에 발톱을 박고는 고개를 돌려 왕중양을 내려다보았다.
"낑낑낑……."
이런 소리를 내며 원숭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지만 왕중양은 무슨 영문인지 얼른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미간을 찡그린 원숭이가 다시 훌쩍 땅으로 내려오더니 왕중양의 팔을 잡아 끌었다. 처음 이곳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원숭이는 계속 낑낑대는 소리를 내며 왕중양을 어디론가 이끄는 것이었다.
원숭이가 먼저 절벽 위로 뛰어오르더니 돌에 난 틈을 부여잡고는 왕중양을 내려다보았다. 왕중양은 그제야 원숭이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자기 몸을 발판으로 삼아 한 층 한 층 오르라는 거였다. 왕중양은 그만 가슴이 뭉클하고 목이 메어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도 가슴속에서만 회오리칠 뿐이었다.
왕중양이 몸을 날려 원숭이의 어깨 위로 올라섰다. 그도 원숭이처럼 적당한 틈을 잡고는 두 발로 바위 하나를 넘었다. 다시 원숭이가 몸을 솟구치더니 이번엔 조금 더 높은 옷에 몸을 찰싹 붙였다. 왕중양도 원숭이처럼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뛰어올랐다. 왕중양을 떠받치고 있는 원숭이의 힘은 대단했다. 그러나 도중에 만에 하나라도 힘이 빠져 왕중양을 지탱해 주지 못하면 끝장이었다.
어느새 왕중양은 절벽의 중간까지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그는 원숭이가 지쳐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짐승이 지쳤을 때 내는 소리는 처절했다. 그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참고 있는 듯했다.
"원형, 나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군."
진심으로 미안하고 고마움에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잠시 동작을 멈췄다. 그러나 원숭이는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다시 몸을 어렵게 위로 올렸다. 이러기를 수십 차례 이제 몇 번만 더 반복하면 위에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왕중양과 원숭이는 지칠 대로 지쳐 손가락조차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왕중양은 속으로 가늠을 해 보았다. 조금 쉬었다가 힘을 쓴다면 한 번 정도는 몸을 위로 올릴 수 있으리라. 그 이상은 원숭이도 자신도 무리였다. 원숭이도 그런 왕중양의 마음을 읽은 모양이었다.
그때 원숭이를 쳐다보고 있던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지금 상태는 왕중양이 원숭이보다 한 걸음 정도 위로 올라와 있는 위치였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은 지금까지 해온 방법과는 조금 다른 방법인데 성공할 수 있을는지 는 의문이었다. 또한 얼마나 원숭이가 자신의 의도를 간파해 낼는지도 알 수 없었다.
"원형, 내가 힘껏 원형의 팔을 당길 테니 가능하면 높게 뛰어오르시오. 그리고 쉬지 말고 반동을 이용해 다시 나를 당기는 거요. 그러면 나는 저 위에 나 있는 뾰족한 바위를 잡을 수가 있소. 바로 그곳이 정상이오. 내가 위로 오른 후 한 번만 더 힘을 준다면 원형도 무사히 오를 수가 있을 거요."
원숭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왕중양은 자신의 말을 충분히 알아 들었을 거라 믿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왕중양이 있는 힘을 다해 원숭이를 위로 올렸다. 번쩍 들어올려진 원숭이는 한층 더 높이를 확보하기 위해 왕중양의 어깨를 발로 짚으며 몸을 솟구쳤다. 원숭이가 바위 틈에 손을 넣으며 이번엔 왕중양을 끌어 올렸다. 한 번의 기회뿐이었다. 공중으로 튀어오른 왕중양은 결사적으로 그 바위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차가운 물체가 닿는 것과 동시에 왕중양
은 그것을 움켜쥐었다. 정확하게 그 바위를 잡은 것이다. 다른 손에는 원숭이가 매달려 있었다. 그만 힘이 빠졌는지 원숭이는 다른 한 손으로 잡고 있던 바위틈을 놓치고 말았다. 이제 원숭이는 왕중양에게만 의지한 채 매달려 있는 형편이었다. 한 손으로 자신과 원숭이까지 들어올리기에는 무리였다.
왕중양이 내려다보니 원숭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자기를 그만 놓으라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인지 모를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얏!"
왕중양이 온몸의 기를 한 손에 모은 채로 힘을 가했다. 그러면서 원숭이를 잡고 있는 손을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기적적인 일이었다. 원숭이가 먼저 무사히 위로 오른 것이다. 왕중양이 원숭이를 먼저 던져 놓고 자유로워진 다른 손을 이용해 자신도 올라왔다.
왕중양과 원숭이는 정상에 서서 오랫동안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있었다. 이제 둘은 작별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서로의 체취를 오래 기억하고 싶어했다. 왕중양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형, 이렇게 원형을 두고 가지만 꼭 다시 찾아오리다."
그러나 원숭이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찾아와 이곳에서 소리를 지를 테니 원형이 올라오시오. 혼자서는 힘을 들이지 않고 올라올 수 있을 거요."
원숭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글썽였다. 왕중양이 원숭이에게 정중히 읍을 하며 마지막 인사말을 남겼다.
"원형, 내가 찾아올 때까지 몸조심 잘 하시오."
원숭이도 왕중양이 하는 대로 양손을 맞잡고는 허리를 약간 숙였다. 왕중양의 눈에서도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왕중양이 몸을 돌렸다. 뒤를 돌아다보면 더욱 걸음이 떼어지지 않을 것 같아 왕중양은 뛰다시피 원숭이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왕중양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원숭이가 석양을 등진 채 이쪽을 향해 손을 들어 주었다. 왕중양도 손을 흔들었다.



제29장 강호에 부는 낯선 바람
종남산 기슭에는 한 여인이 자그마한 초막을 짓고 혼자 살고 있었다. 이 여인은 날마다 종남산 뒤쪽에 있는 골짜기로 가 검술을 익혔다. 그런데 여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수심이 가득했다.
하루는 이 초막을 향해 낯선 가마가 천천히 다가왔다. 여인의 눈에 비친 가마꾼들은 모두 신출내기는 아니었다. 가마는 조금의 흔들림도 얼이 아주 평온하게 여인의 발치 앞에까지 이르더니 멈춰섰다.
가마가 땅에 닿자마자 뒤를 따라오던 계집애가 쪼르르 앞으로 나오더니 문발을 거두었다.
"다 왔사옵니다."
계집이 이렇게 아뢰자 가마 안에서 한 절세 미인이 나왔다. 그녀는 초막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보고는 인사부터 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언니가 보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어요."
초막 앞에 서 있던 여인은 임조영이었고 가마를 파고 온 여인은 자지였다. 임조영은 가마에서 내린 여인을 보자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 미친 놈하고는 아직도 살고 있느냐?"
그 말에 자지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임조영 앞에서 할말이 없었다. 한동안 말끄러미 임조영을 바라보던 자지가 입을 열었다.
"언니, 두꺼비에게 시집을 가면 두꺼비를 따라야 하고, 개에게 시집을 가면 개를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나를 두고 한 말이지 뭐예요."
임조영이 자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어여쁜 얼굴은 여전했으나 그 위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모용준과 지내는 그녀가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을 거라는 게 충분히 짐작되었다.
"그런데 여긴 왜 찾아왔지?"
임조영이 갑자기 측은한 생각이 들었는지 약간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자지가 좌우에 둘러 있는 사람들을 슬쩍 보며 대답했다.
"언니와 회포를 나누려고 찾아왔지요. 너희들은 저리로 가 있거라!"
그러자 가마문과 계집들이 뒤로 멀찌감치 물러섰다.
"언니, 풍문에 의하면 왕 공자님이 강호에 나타났다고 하던데 ……"
임조영의 귓전은 큰 종이 한 번 울린 후처럼 먹먹해졌다. 임조영으로서는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사람이 강호에 나타났다구? 그게 사실이란 말이야? 믿을 수 없어……. 그 사람은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내가 거짓말을 꾸며 내겠어요?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긴데 왕 공자님은 지금 중주(中州) 어딘가에 계시대요."
중주를 향해 걷고 있는 왕중양은 어느 때보다 평온한 마음이었다. 비록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원숭이가 눈에 밟혀 가슴이 아팠지만 언젠가는 다시 찾아갈 날이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대로에 들어선 그는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황야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바람이 스치는 마른 풀숲에서 스르륵 스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잔뜩 세우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왕중양은 그것이 누군가가 검을 뽑아 드는 소리라는 걸 알았다.
아니나다를까,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풀숲에서 사내 셋이 튀어 나왔다. 한 사내는 칼을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며 달려들었고, 다른 사내는 손에 붓을 들고는 왕중양을 공격했다. 또 나머지 하나는 청강검(靑鋼創)을 번뜩이며 그의 등뒤로 몸을 옮기며 다가왔다.
왕중양은 거목처럼 우뚝 서서 그들의 움직임만 주시했다. 낯선 사내들은 왕중양을 중심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선회했다.
〈움직일 때는 나는 매와 같아야 하고 가만히 있을 때는 날개를 펴고 유영하는 독수리 같아야 한다.〉
왕중양은 속으로 《구음진경》의 한 구절을 되뇌었다. 뜻을 풀이하면 상대가 움직일 때는 가만히 있다가 상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아 손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건방진 놈이로군!"
검을 든 사내가 왕중양에게로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 들었다. 왕중양은 그 검끝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가 순간 몸을 피하자 그의 목덜미를 스치며 지나갔다. 이어서 한 쌍의 붓이 끝을 세우고는 왕중양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역시 왕중양의 몸에 닿지는 못했다.
"제법이군!"
붓을 들고 있던 사내가 콧소리를 내더니 다시 공격해 왔다. 붓끝이 명치에 닿으려고 할 때였다. 왕중양이 손바닥으로 붓을 툭 내리쳤다. 그런데 보이지 않던 검날이 획 머리를 향해 차갑게 날아들었다. 정신을 차리지 않았더라면 사내는 그 검날에 머리가 날아갔을 것이다. 붓을 든 사내의 등에 식은 땀이 솟았다.
잠시 거리를 둔 왕중양은 이 싱겁고도 명분 없는 싸움을 어서 끝내고 싶었다. 서서히 손을 들어올린 그는 앞으로 내뻗은 채 가볍게 휘젓기 시작했다. 세 명의 사내는 왕중양의 동작을 지켜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중 붓을 들고 있던 사내가 지껄였다.
"손을 보니 어디서 붓이나 잡던 놈 같은데 괜한 수작 부리지 마라!"
왕중양의 희고 가는 손이 그에게 그렇게 보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놈의 눈은 곧 늘란 토끼처럼 변해 버렸다. 왕중양의 손동작이 차츰 속도를 더하며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사내가 왕중양에게로 붓을 내밀었다. 왕중양의 손짓 한가운데로 불쑥 들어간 붓은 멀리 튕겨져 나갔고 사내는 힘없이 쓰러졌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다른 사내들은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검을 든 사내가 나섰다. 그는 '망월거서(望鳶巨雇)'라는 검법을 쓰며 왕중양에게로 접근해 왔다. 사내는 있는 힘을 다해 검끝으로 왕중양의 가슴을 내리쳤다.
"얏!"
왕중양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로 날아드는 검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손가락에 막힌 검은 위잉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높이 솟구쳤다. 사내가위를 보고 있는데 검이 무서운 속도로 아래를 향해 내려왔다. 사내가 몸을 피하자 검이 땅에 꽂히며 반으로 접힐 듯 휘청거렸다.
이제 남은 것은 칼잡이였다. 그는 동료 둘이 모닥불 앞의 낙엽처럼 맥없이 당하자 화가 났다. 약간 두렵기는 했지만 동료들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칼을 머리 위로 치켜 든 그가 멧돼지처럼 크릉대며 달려 들었다. 막 왕중양의 정수리를 향해 칼을 내리찍을 때였다. 위잉! 구름을 뚫을 듯 칼이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 그러더니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땅에 푹 꽂혔다.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그대들은 낙양삼걸이 틀림없겠지? 칼과 검 그리고 붓으로 온갖 재간을 다 부린다는 낙양삼걸에 대해서는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소. 그런데 왜 내게 싸움을 거는 것이오?"
아직 자기 자세 그대로를 고수한 채 왕중양이 물었다. 그러나 쌍붓잡이가 잡아먹지 못해 분하다는 투로 받아쳤다.
"왕중양, 이 놈아! 점잖은 체하지 말어. 네가 한 짓을 아직 모르겠느냐? 죽었다고 사람들을 믿게 한 다음 이렇게 활보를 하다니……."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는가? 그대들의 눈에는 내가 악인으로 보이는가?"
"왕중양, 넌 금나라 군대를 물리치겠다고 또한 송나라 강산을 지키겠다고 얼마나 떠벌려 댔느냐? 그래서 네 말을 믿고 숱한 무림의 영웅호걸들이 몰려 들었는데 어째서 혼자 살아 돌아왔느냐?"
"나 역시 의군이 어떻게 패했는지 모르고 있소. 세 사람이 알고 있다면 나에게 알려 주시오!"
검잡이가 노기를 띠며 비웃었다.
"흥, 의군의 통수 노릇을 했던 네 놈이 의군이 패한 원안도 모른다니 그게 말이나 되느냐?"
칼잡이의 검날이 눈앞으로 획 지나갔다. 왕중양이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손을 들었다.
"정녕 나는 모르고 있소."
"둘째 동생, 셋째 동생, 이 놈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네. 이 놈이 금군과 결탁한 게 분명해. 그랬으니 의군이 패한 것이라고. 어서 이 놈을 죽여 억울하게 희생된 형제들의 넋이나 위로하자구."
맏이인 칼잡이가 울분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검잡이가 다시 왕중양을 향해 소리쳤다.
"왕중양, 넌 만 명도 더 되는 인명을 해쳤다. 그러고도 변명이나 일삼으려 하다니, 어서 내 검을 받아랏!"
검잡이의 신호가 떨어지자 모두들 한꺼번에 땅을 박차고 날아들었다. 몸을 높이 띄운 왕중양은 저 멀리로 날아가 일단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바위 위로 올라선 왕중양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사실 그 계곡을 떠나 온 뒤 제일 먼저 가 본 곳은 의군의 대영이 있던 장소였다. 그러나 바위 몇 개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그 바윗돌은 막사가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게 귀퉁이를 눌러 두었던 것이었다.
세 명의 사내들이 어느새 왕중양이 있는 곳까지 와 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오랫동안 연마해 온 '천지동수(天地同壽)'라는 초수를 쓰고 있었다. 이 초수는 위력이 대단해 당할 자가 드물다고 알려져 있기도 했다. 왕중양이 손을 쓰자 그 검은 심하게 요동을 치며 옆으로 비껴 나갔다. 다시 '평산출유(平山出岫)'라는 초수로 바꾼 검잡이가 사납게 달려 들었다. 등뒤로는 역시 칼과 붓을 들고 다른 사내들이 접근해 왔다. 공중으로 몸을 솟구친 왕중양은 그
저 피하기만 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세 사내의 병장기가 한곳에서 맞부딪쳤다.
이미 왕중양이 자기들의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얼른 자리를 피하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왕중양이 빙그레 웃으며 먼저 몸을 돌리는 게 아닌가. 이들은 천천히 걸어가는 왕중양의 등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왕중양, 네 놈은 강호의 숱한 사람들을 해쳤다. 다시 기회가 생기면 네 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중주에 도착한 왕중양은 어느 객주집에 묵었다. 피곤한 몸을 뉘이고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그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잠결에 주위가 시끄러워 눈을 뜬 것이다. 객주집 마당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 객주집을 뒤져라. 그 놈을 놓치면 안 된다!".
마당에는 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는데 한결같이 병장기를 들고 있는 것이 강호 사람들 같았다. 왕중양이 천천히 일어나 문밖으로 나서려는데 한 사내가 소리쳤다.
"저 놈이 바로 왕중양이다!"
이들 속에는 왕중양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호랑이를 만난 사람들처럼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이때 검을 쥔 한 젊은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제법 위엄 있는 목소리를 내질렀다.
"왕중양, 네 놈은 네가 지은 죄를 알고 있느냐?"
젊은 사내를 유심히 훑어보던 왕중양이 점잖게 대꾸했다.
"이 왕중양이 죄를 지었다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
"그렇다면 내 말해 주지. 나는 무당파(武當派) 옥생(玉生)이고, 내 사부님은 바로 운심도장이시다!"
무당파의 원로이자 강호에서 가장 신망이 높은 운심도장을 들먹이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들은 일제히 왕중양을 꾸짖으며 옥생의 편에 서려 했다.
"왕중양, 내가 네 놈의 죄상을 까발기면 할말이 없을 것이다."
실눈으로 왕중양을 노려보던 옥생이 다시 다그쳤다.
"넌 명색이 의군의 수령이 아니었더냐? 의군들은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는데 네 놈은 살아 남아 아직도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있다는 말이냐?"
왕중양은 난감할 뿐이었다. 언제까지 그런 오해와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겪은 기이한 사연들을 일일이 설명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이 왕중양을 어찌할 생각들이오?"
왕중양이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너 때문에 많은 강호객들이 죽었다. 그러니 먼저 간 그들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네 놈도 죽어야겠다!"
그러나 왕중양은 내심 새롭게 일고 있는 기운을 감지해 냈다.
'운심도장의 이름을 들먹이며 나를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 속에는 무슨 다른 속뜻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한 사내가 빙긋이 웃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왕중양, 네가 무림의 맹주 노릇을 할 때 맹세를 한 적이 있지 않느냐? 금나라 군사들을 중원에서 몰아내지 못하면 스스로 죽음을 택하겠다고?"
결코 잊을 수 없는 맹세였다. 왕중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하하하, 그런데 그대는 이 중주의 거리마다 우글대는 금군들을 보지 못했단 말이냐?"
왕중양이 뭐라고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여기저기서 비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왕중양, 넌 왜 맹세를 저버리려고 하느냐?"
"스스로 자결을 하라구!"
"네가 죽으면 우리들은 강호의 탑에 따라 너를 무림의 맹주로서 장례를 치러 주겠다. 하하하!"
이렇게 왕중양을 향해 냉소의 화살들을 쏘아댔다. 그러자 뒤쪽에서 그럴 수는 없다며 누군가 단호하게 외쳐 댔다.
"그건 안 돼! 내 손으로 직접 저 놈의 목을 따야 속이 풀리겠다!"
사람들이 길을 터주자 한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왕중양은 반가운 마음에 그를 불렀다.
"제 장로님이 아니시오? 그동안 안녕하셨소?"
왕중양이 존경하고 있는 인물 중 한사람이었다. 그런데 제 장로는 대답 대신 서슬이 퍼런 눈으로 왕중양을 쏘아보았다.
"일년 동안 몸을 숨기고 다녔겠지만 강호의 법도는 피할 수가 없소!"
"나는 지난 일년 동안 죽은 목숨이었소. 몸을 숨겼다는 것은 오해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고 싶어도 다 설명하기가 어렵소."
제 장로의 냉소는 매우 차갑고 단호했다.
"그런데 그대는 어제 낙양삼걸을 만난 적이 있소?"
왕중양이 그렇다고 하자 제 장로가 죄인을 신문하듯 계속 캐물었다.
"그대가 그들에게 무공을 썼소?"
역시 틀린 말이 아닌지라 왕중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에 모인 많은 사내들이 폭풍을 만난 바다처럼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제장로가 손짓을 하자 몇몇 거렁뱅이가 손수레를 하나씩 끌고 들어 섰다. 수레는 모두 셋이었는데 그 위에는 시체 세 구가 누워 있다. 바로 낙양삼걸이었다.
큰형인 절명도(絶命刀) 진호(陳浩)는 칼에 앞가슴을 난도질당해 시뻘건 살점들아 마구 파헤쳐진 상태였다. 수레가 멎자 상처에서 다시 검붉은 피가 솟았다. 둘째인 쾌삼검(快三劍) 서성(徐聲)은 칼끝에 목을 찔려 죽어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상처를 발견하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검으로 가볍게 목을 찔러 피를 뽑아 낸 무서운 실력이었다. 그리고 셋째인 쌍붓잡이 이쟁(耳錚)의 가슴팍에는 자신의 붓 두 자루가 꽂힌 채였다. 이들의 모습만 봐도 싸움이 얼마나
잔인했고 끔찍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왕중양으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분명 자기와 싸우다가 그들은 그냥 물러가지 않았던가.
제 장로가 다시 왕중양을 향해 분노에 가득 찬 소리로 외쳤다.
"왕중양, 그대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바이오. 세상에서 낙양삼걸을 이렇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은 그대 밖에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소."
제 장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사내가 선동을 하며 칼을 쳐들었다.
"왕중양을 죽입시다!"
그러자 모두들 그 말에 찬동하는 몸짓을 했다. 사내가 왕중양을 향해 이를 갈았다.
"모용준이란 놈도 함께 죽여야 할텐데. 왕중양! 네 놈은 모용준이 숨어 있는 곳을 알겠지?"
"난 모르오."
"거짓말 말아라! 우리 강호객들치고 네 놈과 모용준이 의형제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냐?"
왕중양은 그것마저 부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답을 하지 않자 묵인한 것으로 여긴 사내가 더욱 의기양양해져 대들었다.
"그렇다면 왜 모용준의 행방을 모른다는 거냐?"
제 장로가 더욱 왕중양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틈을 주지 않고 합세했다.
"그대는 낙양삼걸을 죽인 데 대한 이유를 무림의 영웅들 앞에서 밝혀야 하오. 지금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그 이유를 듣고 싶을 것이오. 난 이미 개방에 생사령(生沈令)을 내렸소. 그대가 그냥 얼버무린다면 천하에는 낙양삼걸을 죽인 자의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될 것이오."
"제 장로도 처음엔 의군에 계시지 않았소? 그러니 후에 의군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소."
왕중양의 난데없는 질문에 사람들이 코웃음을 쳤다. 의군의 통수였던 자가 패한 의군의 소식을 모른다니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중양, 그대는 정말 총명하군. 그렇게 발뺌을 하면 무사할 줄 알았는가? 의군은 바로 그대의 손에 몰살당했지 않은가?"
"나 역시 남에게 모함을 당했던 처지요. 그런 내가 어찌 의군을 팔아먹을 수 있었겠소?"
"그대는 의군의 통수이기에 모용준이 의군을 팔아 넘겼다고 해도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소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왕중양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어쨌거나 자신의 잘못도 컸기에 의군이 그런 운명을 맞은 것이 아니었던가. 처음부터 강력하게 모용준을 제지했어야 했다.
"할말이 없소. 아깝게 목숨을 바친 의군의 혼백을 달래고 싶은 사람은 어서 나를 치시오!"
사실 왕중양의 깊은 속에도 먼저 간 아까운 목숨들에 대한 죄책감이 가득했었다. 그렇기에 그는 여기서 죽는다 해도 헛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왕중양의 머리가 서서히 숙여졌다. 이곳에 모인 사람 가운데는 사실 왕중양을 죽여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고 싶어하는 자들도 없지 않았다.
"이 놈, 우리 형제들의 목숨을 내놓아라!"
이렇게 소리치며 칼을 비스듬히 꼬나들고 나선 사내도 그런 개인적 욕망을 품고 있는 자 중 하나였다. 왕중양은 칼끝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막 사내가 칼을 치켜 들 때 한 사내가 검으로 칼을 막으며 후닥닥 뛰어들었다.
"잠깐만!"
직검 마옥과 그의 아내인 손불이였다. 마옥이 검으로 칼을 막고 있는 상태로 으름장을 놓았다.
"누구든 왕 공자님을 죽이려면 내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다!"
곧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일이 차츰 기묘하고 흥미롭게 꼬여 가고 있어 사람들은 갈대숲처럼 시끄럽게 술렁였다.
"너희가 과연 왕중양의 목숨을 지킬 수 있단 말이냐?"
한 사내가 마옥을 비웃으며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하하핫! 그렇다면 내가 왕중양의 목숨을 지킬 것이다! 내가 대신 네 놈의 칼의 받겠다."
이렇게 자처하고 나선 사람은 마옥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한가운데로 훌쩍 뛰어든 낮선 사내, 그는 다름 아닌 소성산의 의군 두령 구처기였다.
"그대들은 무슨 연유로 왕 공자를 죽이려 하오?"
구처기가 묻자 한 사내가 귀찮다는 투로 대꾸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왕중양이 의군을 몰살시켰기 때문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봤소?"
사내는 머뭇거리지 않고 구처기의 말을 받았다.
"왕중양이 의군의 수령 노릇을 할 때 몇만 명이나 억울한 죽음으로 몰아갔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소?"
구처기가 다시 앙천대소했다.
"하하하핫! 중원에는 영웅호걸들이 많다고 하더니만 오늘 보니 그게 아니었소이다. 그 말을 들으니 내 얼굴이 붉어져 가만히 있을 수가 없소."
"뭣이라고? 어째서 너의 얼굴이 붉어지냔 말이다. 오늘 대답을 하지 않았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
"보건대 황천에 가신 운심도장님이나 모든 의군 형제들은 다 비장한 최후를 마쳤소. 금나라의 오랑캐를 물리치다가 돌아가셨으니 부끄러운 죽음은 결코 아니오. 허나 그대들이 왕 공자님을 이토록 원망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소. 생각해 보시오. 왕공자님이 없었다면 의군을 모아 금나라와 대적할 수나 있었겠소? 아직 혈기가 남아 있다면 어서 달려가 금군들이나 칠 것이지 왜 왕공자님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오?"
불현 주위가 폭풍이 가라앉은 잔잔한 바다처럼 잠잠해졌다. 이들 대부분은 구처기의 말에 공감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고런데 옥생이 구처기의 말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잠깐!"
앞으로 한 발짝 나선 옥생은 구처기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구처기, 자네도 의군의 장수 노릇을 좀 했다고 왕중양을 싸고 도는 것인가? 이를 두고 동병상련이라 하던가?"
심지 약하게 물러설 구처기가 아니었다.
"옥생도장, 그대의 말은 틀렸소. 이 구처기가 금나라 놈들과의 싸움에서 지기는 했소. 하지만 이 중주청을 보시오. 도처에 금나라 오랑캐 놈들로 그득하지 만 모두들 고분고분 순종하고 있지는 않소? 그러나 난 목숨을 건고 싸웠소이다. 내 검에는 오랑캐의 피로 오랫동안 그 빛이 가려질 정도였소. 그런데 그대의 검에도 놈들의 피가 묻어 있소?"
구처기의 말에 옥생뿐만 아니라 거의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가슴으로는 울부짖었지만 실제로 오랑캐와 맞서 싸워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심중은 차츰 왕중양을 이해하는 눈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마옥과 손불이는 왕중양이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마옥이 웃으며 왕중양에게 머리를 숙였다.
"저희 두 사람은 대혐을 사부님으로 모시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앞으로 저희는 사부님만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마옥이 무릎을 꿇고 엎드리자 손불이도 뒤를 따랐다.
"사부님, 제자들의 절을 받아 주십시오!"
왕중양의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서들 일어나게."
이때 구처기도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이 제자도 사부님께 맹세를 하고자 합니다."
더 이상의 감동은 없을 것 같았다. 왕중양은 마땅하게 지금의 심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 우물쭈물했다. 그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모두들 잘 생각하시오. 내 제자 노릇을 한다는 게 그다지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오. 편안한 나날들이 기다리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오."
"아닙니다. 이 구처기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후회를 하지 않을 겁니다."
말을 마친 구처기가 검으로 자기 손가락을 찔렀다. 손가락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 피를 땅바닥에 뿌리며 맹세를 다졌다.
사람들은 하나 둘 돌아가고 마당에는 왕중양을 비롯해 몇 사람만 이 자리를 지켰다. 왕중양이 돌아보니 모두 다섯 사람이었다. 이들은 다시금 왕중양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중 한 사내가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저는 이전부터 왕 대협의 높은 뜻에 감복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옥의 말을 듣고 많은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처음에 대협께서는 모용준의 모함으로 무공까지 잃어버렸지만 나라를 되찾는 일 때문에 다시 손을 잡았다고 하더군요. 그런 사연을 듣고 저는 더욱 대협의 깊은 뜻에 감동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자는 학대통(那大通)이라 부르는 사내였다. 또 그옆에 있는 사내는 왕심일(王尋-)과 유현자(劉玄子)였다. 이들은 후에 모두 왕중양의 제자가 되었는데 왕심일은 왕처일(王處-), 유현자는 유처현 (跳處玄)으로 이름을 고쳤다. 또한 학대통과 마옥 그리고 손불이는 자기 이름을 그대로 썼다. 이들이 바로 훗날 세상에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될 전진칠자(全眞七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다른 패거리들이 몰려와 시비를 걸까봐 마옥이 권했다.
"사부님, 먼저 조용한 곳으로 가 얼마 동안 쉬는 게 좋겠습니다. 일단 준비를 한 다음 금나라 놈들을 찾아 싸웁시다."
"그렇게 하도록 하세. 난 자네들의 말을 따르겠네."
왕중양을 비롯한 이들은 다시금 서로의 믿음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앞으로 금군을 물리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정의를 위해 힘을 아끼지 않을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왕중양은 이들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보다가 문득 지난날을 회상했다.
"모용준이란 사람을 너무 미워하면 안 될 것이네. 그 사람이 없었더라면 의군이 패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 허나 그 사람이 있었기에 의군이 하나로 뭉칠 수도 있었다네."
이 말에 제자들은 다시 한 번 깊은 감격에 머리를 조아렸다. 왕중양이야말로 솔직하면서도 정의로운 가슴을 지닌 사내라고 믿었던 것이다. 모용준의 잘못을 꾸짖으면서도 결과적으로 나타난 그의 충심은 높이 사려는 왕중양의 사려 깊은 마음이 이들을 감동시켰다.
마옥이 왕중양에게 물었다-
"제자는 강호에 오랫동안 몸을 두고 있었으나 사부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지를 못했습니다. 개방의 홍칠공의 말을 듣고서야 사부님의 성품을 알게 죄었지요. 홍칠공은 언제나 사부님을 고금에 둘도 없는 인물이라 하였지요. 이 제자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말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홍칠의 모습을 떠올리는 왕중양의 눈가로 희비가 엇갈렸다. 그가 이토록 자신에 대해 좋게 생각해 주고 있었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불현 임조영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그런데 난 종남산에 가 만나 볼 사람이 있다네. 혼자서도 충분하니 일이 끝나는 대로 우리 다시 만나도록 하세."
왕중양의 심중을 읽어 낸 제자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구처기가 따라가겠다며 한마디했다.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그 사이 여러 형제들은 중주 일대의 호걸들에게 연락을 취해 보게. 다시 의기를 들 가능성이 있는지를 말일세."
왕중양이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만일 내가 종남산에 가 친구를 만나면 푸대접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자네는 절대 내색을 하지 말게나."
구처기가 읍을 하며 잘 알겠다고 대답했다.
종남산에 이른 이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그마한 초막에서 밥짓는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임 여협은 과연 이곳에 계셨군요. 제가 가서 문안을 올릴까요?"
구처기의 말에 왕중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내가……."
왕중양의 마음속은 매우 복잡미묘했다. 왕중양은 임조영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모용준과 손을 잡았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인가. 수많은 의군들을 잃어버리고 지금은 모용준에게서조차 배반을 당한 꼴이 아니던가. 또한 자신은 지난 일년 동안 어떤 고난을 겪었었는가…….
집 앞에 이른 왕중양이 임조영을 불렀다.
"아무도 없소?"
이윽고 한 계집이 나와 왕중양을 아래위로 훑었다.
"어디서 오신 나그네인가요? 누구를 찾으시죠?"
하인으로 보이는 이 계집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갖춘 왕중양이 물었다.
"혹시 임조영이라고 계시오?"
그러자 계집이 쌀쌀맞게 굴었다.
"여긴 오로지 기분이 몹시 상해 있는 사람밖에는 없는데요."
이 말에 왕중양은 내심 기뻐했다. 제대로 찾아왔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미안하지만 가서 여쭈시게나. 옛 친구 왕중양이 찾아왔다고."
계집의 눈빛이 일순 요상하게 변했다. 이 계집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계집이 자리를 비운 사이 왕중양은 초조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실로 얼마 만에 만나는 임조영인가. 그동안 또 얼마나 많은 그리움으로 그녀를 잊지 않고 지내 왔던가.
드디어 임조영이 그 앞에 나타났다. 왕중양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는 어렵게 첫마디를 꺼냈다.
"셋째, 그동안 잘 있었나?"
임조영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 채였다. 그녀 역시 속내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숱한 말들에 시달려 망설이던 중이었다. 그런데 왕중양이 그렇게 인사를 건네오자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모용준과 왕 대협님과 저는 이미 형제지간이 아니지요. 그날 이후로 세 사람은 의형제를 작파했다는 것을 잊으셨나요?"
임조영의 어조는 가슴까지 얼어붙게 할 정도로 냉랭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 사이에는 수천 마디의 말보다 단 한 번의 눈빛이 더 절실했다.
"둘째 동생 아니 그 모용준이라는 자가 의군을 몰살시켰소. 난 그자를 찾아 원한을 갚아야만 하오."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왕중양이 불쑥 모용준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임조영이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왕 대협님, 다시는 의형제를 맺었던 일과 거기에 속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세요."
임조영의 가슴에 애처롭고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절벽 위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이 사람은 알고나 있을까? 아마도 모르고 있을테지. 만일 알고 있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사실 임조영은 나라와 백성의 안녕만을 위해 힘쓰는 왕중양이 내심 미웠다.
"왕 대협께서는 오로지 금나라와 싸울 생각만 하고 있군요? 흉노를 멸하지 않고 어찌 제집만을 돌보랴, 하시던 당신의 명언이 떠오르는군요. 하지만 그 말을 중원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까요?"
임조영은 자꾸만 본심과는 다르게 왕중양에게 미움의 화살을 던지고 있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결코 무리한 생각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얼어 버린 가슴을 쉽게 녹여 버릴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왕중양이 다시 작별을 해야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모용준을 찾는 일과 또 더 많은 일을 위해 그만 길을 떠나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런 왕중양 앞에서 그녀는 할말을 끊었다. 왕중양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안 되리라.'
그러나 왕중양은 속으로의 다짐과는 달리 임조영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냉정하게 대한 그녀의 태도가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그러했다. 왕중양은 걸음을 세우지 않은 채 슬쩍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런데 멀어져 가는 왕중양의 뒷모습에 아쉬운 눈길을 던지고 있던 그녀가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에 막 고개를 떨군 순간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임조영을 본 왕중양의 가슴에서 싸늘한 찬바람이 불었다.




제30장 단지흥의 충고
왕중양은 강호에서 다시금 예전과 같은 일호백야의 위신을 회복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강호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몸이 아니던가. 강호 사람들이 뭐라고 한들 자신은 변할 수 없다는 게 그의 믿음이었다. 그들에게 빛을 주는 자신의 위업만을 생각하리라 다짐했다. 또한 그의 가슴속 어딘가에는 종남산에 숨어 살고 싶은 욕망도 자리했다.
'임조영이 나와 있기를 싫어하지만 난 이곳 종남산에 초막이나 짓고 살련다. 그렇게 되면 아침 저녁으로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 마음만은 편하리라.'
옆에 있던 구처기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난 아무래도 이곳에 남아야겠네. 강호의 지사들이 나를 믿어 주지 않으니 난 그만 혼자 지내고 싶을 뿐이네. 그러니 자네는 제자들을 이끌고 대업을 위해 힘을 쓰게나."
왕중양으로서는 약간 책임감이 결여된 말이어서 내키지 않는 심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임조영의 일 때문만이 아니라 조금 심신이 지쳐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구처기는 왕중양에게 며칠간의 말미를 받아내어 나머지 형제들을 찾아 떠났다. 왕중양은 곧 임조영처럼 초막 한 채를 지어 놓고 은거에 들어갔다.
어느 날 그는 한밤중에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그는 절벽 아래 동굴에서 두 권의 책을 남겼던 황상이라는 사부의 모습을 보았다. 하도 이상해서 깨어 보니 그 《구음진경》은 여전히 품속에 들어 있었다. 다시 잠이 들어 꿈속을 헤매게 되었는데 또 그 사부가 나타나 심하게 꾸짖는 게 아닌가.
"왕중양, 난 너에게 천하의 기이한 경서를 주었다. 그런데 너는 그것을 헌신짝처럼 팽개치려 하니 한심하기 그지 없구나. 지금 금의 세력이 강해 아무리 힘을 써도 혼자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지 않느냐. 그러니 너는 작심하고 보다 무공에 힘쓰도록 하여라."
꿈을 털고 일어난 왕중양은 크게 깨달은 것이 있어 눈에 불을 켰다.
'난 그 동굴 속에서 사부님께 맹세를 했었다. 후일 동굴을 나가게 되면 도교를 빛내는 일을 하겠다고. 나는 기필코 전진도인(全眞道人)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사부님께서 동굴의 석판 위에 새겨 놓은 염원이 아니었던가.'
밖을 내다보니 하늘에는 둥근 달이 휘영청 높이 떠있고 온 세상이 은은한 달빛에 싸여 있었다. 초막을 나와 거닐던 왕중양은 그 달을 쳐다보며 샘솟듯 하는 엄청난 감흥에 젖었다.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다. 왕중양은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끌렸다. 휘파람소리에 담가져 있는 대단한 공력(功力)을 감지한 그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깊은 삼경에 이곳 종남산 심산 속에까지 찾아온 사람은 대관절 누구일까? 혹시 사자우? 아니면 개방의 홍칠공이 찾아온 것은 아닐까?
이윽고 한 그림자가 왕중양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점잖게 생긴 문사(文士)였다. 왕중양에게 그가 읍을 했다.
"야밤에 이렇게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왕중양은 은근히 그를 경계했다. 보아하니 강호를 떠도는 객은 아닌 듯싶었다. 얼굴에는 부귀의 빛이 어려 있었고 예절이 밝은 데다가 범할 수 없는 내공을 온몸에 담고 있는 사내였다. 범상치 않은 사내를 향해 왕중양도 예를 갖추었다.
"누구신지요?"
빙그레 웃던 그가 다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대리 단씨 문중의 단지흥이라고 부르는 사람올시다."
그 말에 왕중양은 놀라움을 금하질 못했다. 대리국이라면 비록 소국이기는 하나 풍요로운 땅이고, 단지흥이라는 훌륭한 임금이 다스리고 있는 나라였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왕중양으로서는 반갑고도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단지흥이란 사람은 문무를 고루 겸비한 보기 드문 무학가라는 소문도 익히 들어왔었다. 특히 그의 '일양지신공'은 세상에 적수가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단지흥이 중원 땅에는 무슨 일로 찾아
왔을까?
"이 산중에 초막을 짓고 은거하고 계신 형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왕 형께서는 세상의 온갖 싸움을 보기 싫어 등을 돌리신 것 같은데 다행일 수도 있겠지요."
왕중양은 단지흥이 술술 풀어놓는 인품 어린 말들을 듣기만 했다. 단지흥은 그의 심중을 꿰뚫고 있는지 이렇게 다음 말을 이었다.
"소문을 듣자하니 왕 형은 중원 땅의 대단한 호걸이라고 하더군요. 우리 대리의 천룡사의 일속(一俗) 사형께서도 늘 왕 형을 대단한 인물이라 하시었소. 그리고 도화도 도주 황약사나 개방의 홍칠공 역시도 왕 형에 대해서 아주 존경하고들 있더군요. 오늘 제가 찾아온 이유는 그런 왕 형을 한 번 만나 보고 싶어서입니다."
첫눈에도 그가 빈틈이 없고 또한 영웅호걸이라 판단한 왕중양은 미소를 띠었다.
"직접 이렇게 찾아 주시니 저로서는 크나큰 영광입니다.
단지흥이 정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왕 형, 저는 왕 형의 높고도 깨끗한 덕성을 흠모하여 이렇게 찾아온 것이오."
"그럼 좋습니다. 우리 허물없이 마주앉아 저 달을 보며 마음속의 말들을 나누어 봅시다."
왕중양은 모용준에게 큰 모함을 당한 뒤 지금까지 마음속에 있는 말을 나눌 상대가 없었다. 일년이란 세월 동안 유일한 벗이 되어 준 원숭이는 있었지만 그의 허전한 가슴을 달래 주지는 못했다. 왕중양은 지금까지 있었던 자신의 일들을 단지흥에게 비교적 소상히 털어놓았다. 다 듣고 난 단지흥이 무릎을 한차례 치면서 말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군요. 왕 형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건 그야말로 천명이올시다. 아마도 왕 형은 그 경서를 통달하게 되면 후세 사람들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되실 겁니다."
하지만 왕중양은 한숨이 터졌다.
"나는 아직도 세속의 일들에서 몸을 빼지 못하고 있는 처지이지요. 때로는 아주 무감각하다가도 한번 그런 일들에 봉착하게 되면 초탈하지 못하고 허둥대곤 합니다. 아마 사부님의 말씀을 따르기에 힘이 부쳐 그런 게 아닌가 합니다."
"저의 말이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건대 왕 형은 세속의 일들에 대해 너무 민감하신 것 같군요. 제왕의 일생이든 강호객의 일생이든 모두 지나고 보면 눈앞에 흘러 지나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지요. 만일 왕 형께서 세속의 잡다한 일들을 그 뜬구름으로 여긴다면 마음이 편해질 겁니다."
단지흥이 잠깐 말을 중단한 채 달빛을 이고 있는 풀숲으로 시선을 던졌다. 왕중양이 그를 재촉했다.
"가르침을 달갑게 받겠습니다. 어서 말씀을 해 주시지요."
두 사람은 밤이 깊어 신새벽이 가까워 오는 것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지흥은 비록 제왕의 몸이었지만 문무가 뛰어난 유사(儒士)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왕중양과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 형, 사실 내가 이곳을 찾을 때는 왕 형과 무공을 겨뤄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소. 내가 너무 당돌했는지 모르지만……."
단지흥의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며 왕중양이 그윽하게 웃었다.
"절벽 아래에서 그런 일이 있은 후로는 마음속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무공을 익히자면 도가 전진의 진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지금 저에게 있어 무공을 겨룬다는 것은 또 그런 승부는 안중에도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훌륭합니다. 왕 형께서는 벌써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오."
두 사람은 일어나 서로를 마주보았다. 단지흥으로 말하자면 덕이 있고 도가 온몸에 배어 있는 무림의 명수였다. 그는 지금 명상에 잠긴 부처님처럼 고요했고 범인들이 미치지 못하는 넓은 가슴을 소유한 듯싶었다.
고즈넉한 산림처사(山林蘿士)와도 같은 왕중양은 어떠한가. 움직임이 없이 평온하기만 한 그의 얼굴은 속세의 모든 번뇌를 씻은 듯 맑기만 했다.
단지흥이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것 같은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전 그동안 유명한 강호객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중 사자우의 온몸에서는 죄악스러운 여기(戾氣)가 풍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홍칠공에게서는 게으른 뇌의 (瀨意)가 흐르고 있었죠. 황약사는 오기(傲氣)가 흘러 넘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 왕형의 온몸에는 조용한 정기(靜氣)가 스며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의 사람들이 지닌 어떠한 기보다 월등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큰일을 앞두고 정기가 있으면 늠름한 풍도를 갖출 수 있다고 했습니다
."
왕중양은 단지흥에게서 깊은 성품을 읽을 수가 있었다. 단지흥이 다시 왕중양을 생각하는 말을 꺼냈다.
"왕 형, 이 보배산에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도록 해주십시오."
"하하하, 원래 비었다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오. 비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비었다는 것이지요."
그러자 단지홍도 크게 웃었다.
"허허헛! 공(空)이 바로 불공(不空)이고 불공이 바로 공이라!"
말을 마친 단지흥이 손가락을 쳐들더니 왕중양을 향해 내질렀다. 이 지법(指法)은 기묘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불지점화(佛指拈花)인가 하면 그게 아니고 남인교직(南人巧織)인가 하면 역시 그도 아니었다. 팍!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의 손가락이 왕중양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흠칫 놀란 왕중양이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단지흥의 손가락은 왕중양의 어느 곳도 다치게 하지를 않았다. 왕중양은 그 사실에 더욱 놀라고 말았다. 완벽하게 힘을 주었는데도 손가락 끝으로 방
향과 힘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대리 단씨의 일양지의 위력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왕중양이 새삼 읍을 하며 말을 계속했다.
"일양지가천하에서 독보한다고 하지만 나의 선천신공을 이길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거요. 아니 그 우열은 아무도 말할 수가 없겠지요."
왕중양이 북두칠성이 그려진 것처럼 그 모양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기합을 넣어 양손을 앞으로 벌리더니 단지흥을 향해 뻗었다. 곧 돌풍에 버금가는 장이 왕중양의 손에서 뿜어졌다.
단지흥이 감탄을 했다.
"과연 대단하군요!"
다시 단지흥이 손가락 하나를 펴 왕중양의 손바닥에 있는 합곡 (合谷)을 찔렀다.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무공을 시험해 보기에 이르렀다.
어느덧 10여 합이나 싸웠는데도 승부는 나지 않았다. 왕중양의 무공은 일사천리로 흐르는 강물과도 같이 거침이 없었다. 그 동작 하나하나는 영양이 벼랑에 뿔을 걸고 숨어서 자듯이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단지흥의 무공 역시 하늘을 찌를 듯했다. 특히 그의 일양지는 바람결에 하느적거리는 버들가지처럼 자연스럽고 유연했지만 때론 절도 있고 빠른 속도가 숨겨져 있기도 했다. 물 속에서 빠르게 헤엄치는 뱀처럼 날쌘 동작이었다.
"잠깐 손을 멈춥시다!"
싸움을 중단시킨 것은 단지흥이었다.
"왕 형, 제가 뭇호걸들과 무공을 겨를 때는 이렇게 감복한 적이 없습니다. 왕형의 선천신공은 확실히 천하에서 으뜸가는 무공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리에는 또 하나의 기이한 무공이 있습니다. 혹 '육맥신검(六脈神劍)'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전에 우리 문중에서 이 검법을 한 몸에 모아 익힌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 단씨의 조상인 단예(段譽)라는 분은 보기에는 아주 우둔한 것 같지만 실은 바람결보다 빠른 분이었죠. 바로 이 분이 육맥신검의 검도(劍道)를 몸
과 마음으로 깨닫고 터득했었습니다. 제가 오늘 우리 단씨의 육맥신검을 가지고 왕형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니 부디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왕중양도 들은 적은 있지만 한 번도 직접 보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단지흥이 직접 그 검법을 쓰겠다니 왕중양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리의 육맥신검을 당해 낸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무공을 알리는 것일 텐데……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
이렇게 자신을 추스린 왕중양이 기꺼이 응수했다.
"임금의 영(令)을 욕되지 않게 하면 다행이겠습니다."
단지흥의 몸가짐과 그 동작은 사뭇 달랐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모든 감각기관들을 하나로 집중시키는 듯했다. 그가 서서히 왕중양을 향해 손가락들을 펴 내밀었다. 단지흥의 손가락들은 하나의 검이었다. 처음에는 소충(少沖), 중충(中沖), 소택(少澤)을 차례로 썼다. 그리고 나중에는 육맥신검을 동시에 쓰기도 했다. 그는 손가락들로 날카로운 빛을 뿌리며 검날처럼 사용했다.
왕중양은 당황하고 말았다. 실로 단지흥의 무공은 대단했다.
"검을 받으시오!"
단지흥이 소리치며 검기를 쏘자 왕중양도 맞받아 장을 날리려 했다. 그 순간 왕중양은 무학지도(武學之道)는 마음에 달렸다는 말을 상기하며 자신의 손에서 검기(劍氣)를 발했다. 그는 단지흥의 손가락들이 검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바꾸어 자신의 손가락 역시 하나의 검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푹―하는 소리와 함께 왕중양의 손이 단지흥의 검기를 막아냈다.
흥이 오른 단지흥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오호, 정말 훌륭한 솜씨로군!"
단지흥의 검기는 다섯 손가락 끝으로부터 각각 뿜어져 나왔다. 소택도 약하지 않았고 중충도 강하지 않아 검기가 합일하는 바람에 어느 것이 어느 맥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왕중양이 그동안 익혀 온 무공에 비할 수는 없었다. 서서히 왕중양은 《구음진경》안에 있는 이런 구절을 떠올렸다.
〈기가 허함은 허기(虛氣)라 부른다. 하지만 실(實)에 힘을 쓰면 허기가 사라진다. 허 (虛)는 바로 실 (實)이고 실 (實)은 곧 허 (虛)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지고무상한 법이다!〉
이 구절의 참뜻을 터득해 낸 왕중양은 기뻤다. 단지흥의 검이 얼마나 기묘하든지 간에 오직 자신의 일변(一變)으로 그의 만변(萬變)에 대처하기로 했다. 왕중양이 하나의 기를 집중시켜 단지흥에게로 뿜었다. 기이한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검기가 교차하고 때론 사방으로 튀었다. 두 사람은 서로 거리를 두고는 멀리 떨어졌다. 왕중양이 먼저 웃자 단지홍도 따라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통쾌한 웃음을 웃고 난 두 사람은 다시 무릎을 맞대고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예로부터 지기(知己)는 만나기 어렵다고들 했다. 두 사람의 무공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지만 마음만은 서로 통했다. 단지흥은 속으로 왕중양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난 원래 남을 대단하게 보지 않는다. 그러나 왕중양만은 내가 존경해도 될 만한 인물이다.'
왕중양 역시 단지흥에 대한 속마음이 남달랐다.
'원래 궁 안이나 관청에는 모두 천치 바보들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처럼 높은 인품을 지닌 사람도 있었다니, 과연 천하에서 손꼽아 줄 만한 인물이로다!'
서로에게서 받은 감격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무언중 서로의 마음이 통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후에 왕중양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히려 제가 가르침을 받아야겠습니다."
단지흥이 흐뭇한 표정을 왕중양에게 주었다.
"제가 보기에 왕 형은 두 가지 점에서 세속에 빠지고 있는 듯합니다. 하나는 너무도 정에 집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람이 너무 정에 집착하다 보면 끝없는 번뇌의 심연에 들게 되는 법이지요. 그러니 왕 형은 될수록 정이란 심연에 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정에 집착을 한다구?'
왕중양은 잠시 자신을 집요하게 지배하고 있는 기억들을 더듬었다. 그러다 불현 눈앞으로 떠오른 얼굴이 하나 있었는데 뜻밖이었다. 바로 자신을 유혹하려고 애를 썼던 왕정아(王亭兒)였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
왕중양의 이런 태도를 단지흥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왕중양이 정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마음고생을 더 해야겠다는 충고까지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라의 일들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보건대 왕 형은 부귀를 누릴 팔자도 아닌 것 같은데 차라리 무공이나 닦으며 살지 그러십니까? 왕 형은 필시 《구음진경》의 힘을 얻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왕중양을 확인한 그가 말을 이었다.
"왕형의 사부님이신 황상이란 분이 일심으로 그 경서를 만들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모르긴 해도 그 경서에는 그분의 일생의 심혈이 스며 있을 겁니다. 그러한 공덕을 계승하도록 왕 형을 선택한 것은 하늘이 굽어본 것일 겁니다. 왕 형께서는 반갑지 않습니까? 동굴 속에서 다진 맹세는 다 거짓이었다는 말인가요?"
"전 분명 동굴 속 사부님의 영령 앞에서 맹세를 하였습니다. 도가전진이 되겠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이미 입 밖에 낸 것이니 주워담을 수야 없지요. 하지만 제게는 아직도 시름거리가 남아 있습니다. 강산은 금나라 오랑캐에게 짓밟히고 있는데 이렇게 숨어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야 어쩔 수가 없소이다. 지금 금나라는 한창세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허나 왕 형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왕 형에게 도가전진이 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힘을 더 길러 출병하는 것도 늦지는 않을 겁니다."
왕중양이 엎드려 단지흥에게 절을 올렸다.
"길을 잃고 헤매는 저에게 광명을 내려 주어 감사합니다."
왕중양은 부패해 가기만 하는 송나라를 부흥시키고 금나라 오랑캐를 중원 땅에서 몰아내는 것에 목숨을 바치기로 했다. 강호가 일시에 혼란에 빠져 다시 호걸들을 모아 출병한다는 것은 단지흥의 말대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일단 도가의 여러 파들을 단합하여 힘을 기르는 게 급선무였다.
이때 두 사람 사이로 불쑥 탄식 소리가 끼여들었다. 여인의 것이 분명했다. 왕중양의 가슴은 일순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누군데 한숨을 짓는 거요?"
단지홍도 여인의 탄식임을 알아차리고는 소리를 질렀다. 교교한 달빛 아래에 아리따운 여인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이십대 후반 안팎의 여인은 원숙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는데 선녀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이 여인이 나타나자 왕중양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본 단지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분이 계시는 줄도 모르고 이 단지흥이 실례를 범했군요."
단지흥이 겸연쩍은 얼굴로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왕중양이 여인을 소개했다. 소개가 끝나자마자 임조영이 바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종남산은 워낙 깨끗하고 조용한 곳이었어요. 그런데 한밤중에 나타나 허튼 소리만 일삼는 사람이 있으니 귀찮아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요. 당신은 도가전진을 좋아한다는데 왜 집을 떠나 도사님이 되지 않으셨지요? 듣자하니 대리국엔 천룡사란 절이 있고, 당신네 단씨의 여러 황제 님들이 머리를 깎고 그 절에 들어가 중 노릇을 하였다는데 대관절 몇 분이나 되지요?"
단지흥은 임조영의 송곳 같은 말에 개의치 않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여협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요. 대리 단씨 문중에는 이 단지흥에 이르기까지 이미 다섯 분이나 되는 제왕님들이 출가를 하여 그 절에서 수도를 하였습니다."
"중 노릇을 하는 일에 인이 박인 집안이로군요? 그래서 남에게도 출가를 하여 도사가 되라고 권유하고 다니시는 건가요? 당신은 절밥을 몇 년이나 드셨나요?"
적이 불쾌해진 단지흥은 보이지도 않는 먼산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 여인이 왜 버릇없이 구는지 그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혹시 옆에 있는 왕중양과 어떤 관계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조영은 왕중양에 대해 아직도 깊은 정을 갖고 있으며 홀로 지내다 보니 은근히 화가 나서 그러는 것일 게다. 단지흥은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왜 왕중양에게 권유한 것이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했을까. 단지흥이
슬쩍 왕중양의 기색을 훔쳐보았다. 왕중양은 매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이들 남녀간에는 풀지 못할 문젯거리가 있는 게로구나.'
단지흥은 짐짓 내심을 감추며 임조영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방금 전에 왕 형과 고금의 옛 야기들을 논하다가 서로 의기가 투합되니 말이 많아진 것 같소. 여협을 귀찮게 해 드렸다면 부디 용서를 하시오."
임조영은 그러나 그의 말에 더욱 심기가 뒤틀렸다.
'네가 나를 아주 바보로 알고 있구나.'
임조영이 슬슬 단지흥의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소문에 의하면 대리국 단씨들의 무공이 대단하다고 하더군요. 보고 싶어도 가볼 짬이 없었는데 오늘 참으로 좋은 기회가 온 것 같네요."
단지흥은 만동(蠻洞)에서 영고와 만났고 또 그녀 때문에 목숨을 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여인들과는 처음부터 적수를 운운해 본 기억이 없는 그였다. 여인이 무공을 얼마나 부리겠느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임조영이 단지흥에게 매서운 눈길을 꽂으며 중얼거렸다.
'네 놈이 먼저 손만 써 보아라. 너의 신분이 어떻든 단단히 혼을 내줄 것이다.'
단지흥이 먼저 일어섰다. 그는 임조영이 어떤 무공을 지니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녀가 모용준의 산장에 갇혀 있을 때 옥녀심경의 검법을 배웠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그것을 익힌 임조영은 차가운 가슴을 갖게 되었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게 되었다.
"내 검을 받아랏!"
임조영이 소리를 내지르며 검을 뻗었다. 섬광이 번뜩였다. 단지흥은 가볍게 손가락으로 임조영의 틈을 노려 몇 번 공격을 했다. 그러면서 임조영의 검끝을 부드러운 동작으로 피했다. 임조영은 검을 자기 코앞으로 치켜 들고는 단지흥을 노려보았다.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그녀의 보법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묻어 났다. 그녀는 거의 허점을 노출시키지 않고 있어 단지흥은 몹시 당황했다. 처음엔 어느 정도인가 슬쩍 그녀의 솜씨를 떠볼 요량이었지만 사태가 심각하게
된 것이다.
임조영의 검이 번개같이 날아들었다. 이를 지켜 보고 있는 왕중양은 애가 탔다. 임조영의 태도를 보아 쉽게 물러설 것 같지가 않았다. 누구 한사람이라도 피를 봐야 싸움이 끝날 것 같았다. 이윽고 싸움은 살기마저 감돌았다. 단지흥이 서서히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단지흥이 임조영의 얼굴을 향해 손가락을 곧추세웠다. 두 사람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얏!"
임조영의 기합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녀의 검이 단지흥의 옷자락을 찢었다. 땅으로 내린 단지흥이 그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임조영이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달려 들었다. 단지흥이 겨우 그녀의 검을 피하며 손가락을 내뻗었다. 육맥신검이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왕중양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데 갑자기 단지흥이 공격을 멈추더니 제자리에 목석처럼 서 버렸다. 임조영이 다시 검을 앞으로 내밀며 쏜살같이
뛰어들었다.
"야앗!"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임조영의 검에 앞가슴을 베인 단지흥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죽었는지 단지흥은 다시 일어서지를 못했다. 왕중양의 얼굴은 사색이 되고 말았다. 단지흥이 이토록 쉽게 쓰러지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임조영보다 못한 무공이 아니었기에 왕중양이 받은 충격은 컸다.
놀란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앞에 피를 흘리며 널브러져 있는 단지흥을 보며 그녀는 손을 떨었다.
"정말로 검을 쓰다니!"
왕중양이 임조영을 향해 처음으로 꾸짖었다. 임조영의 가슴엔 그것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그래요. 당신과 저분은 모두 대단한 사람들이죠."
임조영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왕중양이 당황하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훌쩍 몸을 날려 어디론가 가 버렸다.
왕중양이 달려갔을 때 단지흥의 앞가슴은 이미 선혈로 낭자했다. 왕중양이 옷자락을 찢어 단지흥의 가슴에 댔다. 허둥대는 왕중양을 올려다보며 단지흥이 입을 열었다.
"괜찮소. 이 정도의 상처는 대수롭지가 않아요. 오히려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하군요."
의연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가슴이 아픈 것은 왕중양이었다. 피가 쉽게 멈추지 않는 그의 상처를 보며 왕중양이 다급하게 부축했다.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돌봐 드리겠습니다."
사실 단지홍도 자신이 입은 상처가 치명적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왕중양이 달려와 급하게 상처를 틀어막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임 여협은 그 죄악스러운 여기를 벗어 던져야만 하겠소이다. 그래야만 창생들에게 화가 덜 미치고 왕 형에게도 화가……."
단지흥이 내뱉는 말에 왕중양은 몸둘 바를 몰랐다. 왕중양은 또 한 번 단지흥의 높은 인품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자기가 검에 찔려 죽을지언정 임조영의 예기를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했던 그의 정신을 따르고 싶었다.
"죽지야 않겠지. 죽지만 않으면 되잖아요!"
임조영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이렇게 연신 중얼거리며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단지흥의 상처는 겉으로 보기보다는 심각했다. 왕중양이 그를 치료하기 위해 부축해 앉혔다. 그의 몸은 이미 맥이 사라진 뒤였다. 왕중양이 얼른 그의 등뒤로 가 앉아 기를 불어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웬 사람 하나가 킬킬거리며 냉소를 퍼부어댔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한밤중에 부엉이가 불길하게 울어대는 소리처럼 소름이 확 돋을 정도였다. 저벅저벅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사자우였다. 그는 귀신처럼 불쑥 나타나 천천히 두 사람 앞에까지 와 섰다.
"만일 내가 자네 둘을 못 보았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지."
사자우가 결코 좋은 심보를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은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심각한 상처를 입은 단지흥을 치료하느라 쩔쩔매는 것이 불쌍해서 살려 주었다고 후세 사람들은 입을 모으겠지. 한 놈은 거의 죽어 가고 있고 다른 놈 역시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살려 달라고 하겠지."
혼자 중얼거리듯 비아냥대던 사자우가 갑자기 병장기를 들어 왕중양을 공격했다. 왕중양이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딱! 하는 소리가 울렸다. 사자우는 필시 왕중양의 손마디가 으스러졌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왕중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단지흥의 상처를 치료하기에 몰두하지 않는가. 분명 병신이 되었어야 할 왕중양이 자기의 공격에 꿈쩍도 않고 있다니……. 사자우는 매우 놀랐다. 그가 알고 있는 왕중양과는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 아직 처음 보았던 반화대회 때의 그 섬약하기 그지없는 왕중양만을 떠올리고 있는 그로서는 충격이었다. 그의 병장기가 주공격이며 악인을 자청한 사자우였다. 그는 왕중양을 자신의 손으로 벼랑 밑으로 내던져 버렸지 않은가. 사자우는 이래저래 죽을 맛이었다.
"한 손으로 내 공격을 막아내다니 대단하군! 그래서 너를 무림의 맹주로 추대를 한 모양이로구나?"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사자우가 다시 병장기를 휘두르며 왕중양을 죽이려 들었다. 왕중양은 미처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악인을 자처한 사자우가 정정당당하게 싸움을 할 리가 없었다. 그의 병장기가 크게 원을 그리며 왕중양의 머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쨍!"
사자우의 공격이 옆으로 비껴 갔다. 왕중양은 무슨 일인가 했다. 분명 자신은 손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돌아보니 한 사내가 사자우의 옆에 서셔 육중한 무치 노를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사자우의 병장기는 그 무쇠로 만든 노에 막혔던 게 분명했다.
"하하하! 입금 뒤에는 언제나 한 무리의 졸개들이 따라다니는 법이지. 고기 잡는 뱃놈, 땅 파는 농사꾼놈, 글 읽는 선비놈, 나무하는 나무꾼놈……."
그러자 도끼를 든 나무꾼 차림의 사내가 윽박질렀다.
"이 놈! 잔말 말고 이 도끼나 받아랏!"
나무꾼이 도끼를 머리 위로 치켜 든 채 달려오는데도 사자우는 손을 쓰지 않았다. 이윽고 도끼가 그를 향해 무섭게 꽂혔다. 순간 그가 몸을 틀자 도끼는 돌연 왕중양을 향해 날아갔다. 단지흥의 어깨를 짚은 왕중양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도끼가 땅에 박혔다. 이 틈을 이용해 사자우의 병장기가 왕중양의 등짝에 일격을 가했다. 그런데 다시 팍!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병장기가 공중에서 막혔다. 부채였다. 이 부채에는 '유봉래의(有鳳來儀) '라는 글
자가 씌어져 있었다.
사자우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선비가 나왔으면 이번엔 마지막 한 놈도 있을텐데?"
사자우가 호통을 치자 호미를 든 농부가 달려왔다.
"그래, 여기 있다!"
병장기와 호미가 공중에서 요란한 굉음을 터뜨리며 마주쳤다. 농부의 얼굴은 금세 사색이 되고 말았다. 호미를 쥔 손으로 전해지는 힘에 그는 온몸이 끊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사자우가 병장기 줄로 호미를 휘어감은 다음 멀리 내쳤다. 그러자 농부는 바람에 날리는 마른풀처럼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큰 충격을 받았는지 농부는 쉽게 일어나지를 못했다.
사자우가 히죽거리며 이번엔 옆에 있는 어부를 향해 후려갈겼다. 잠시 쓰러진 농부를 바라보고 있던 어부는 그만 국자에 허리를 맞고는 데굴데굴 굴렀다.
"이걸 받아랏!"
선비였다. 그는 부채를 독수리의 날개처럼 후드득 놀리며 사자우에게로 날아왔다. 사자우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 선비의 부채가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간파했다. 얼른 뒤로 물러선 사자우는 병장기를 쥔 손에 더욱 기를 모았다. 얼떨결에 물러선 자리가 바로 왕중양과 가까운 곳이었다. 사자우가 왕중양을 향해 다시 병장기를 휘둘렀다. 왕중양의 등짝에 병장기가 날아와 박혔다.
"욱!"
왕중양은 피를 왈칵 토하고 말았다. 삽시간에 그의 목과 앞가슴은 피로 얼룩졌다.
"으하하하하! 왕중양, 내일부터 강호에서 너의 이름은 사라질 것이다!"
단지흥을 살리기 위해 기를 모으고 있던 터라 미처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왕중양의 두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는 자신이 손을 거둔다면 곧 단지흥의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아픔을 참아 가며 계속 단지흥의 등에 손을 얹고는 기를 불어넣었다. 선비의 부채가 허공에서 바람을 갈랐다. 사자우가 힐끔 그를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네 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사자우가 갈고리를 선비의 다리 쪽으로 휘어쳤다. 정강이를 얻어맞은 선비가 공중으로 치솟듯 오르더니 곧 나가떨어졌다. 이 사대시위 중에서 벌써 셋이나 사자우의 기묘하게 생긴 병장기에 무너지고 말았다. 남은 사람은 오직 나무꾼뿐이었다.
"그 놈을 물고 늘어져라!"
선비가 쓰러진 채 소리치자 나무꾼이 눈에 불을 켜며 사자우를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그러나 역시 사자우 앞에서는 상대가 되지를 못했다. 사자우가 병장기 끝을 나무꾼에게 내밀자 그는 가슴을 얻어맞고는 떨어졌다. 이제는 왕중양만 해치우면 그만이었다. 그가 왕중양에게로 접근해 오며 잘근잘근 이빨로 냉소를 씹었다.
"이제 너는 무림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거다!"
사자우가 주먹을 모아 쥐며 왕중양을 노려보았다.
잠깐 잠이 든 모양이었다. 잠결에 누군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 눈을 뜬 임조영은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혹시 왕중양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단지흥에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임조영은 지체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중 누구라도 일단 화가 미쳤다면 얼른 손을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 걸음에 달려온 임조영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사자우가 왕중양과 단지흥을 향해 일격을 날리려고 하고 있었다.
"멈추어라!"
소리를 내지른 그녀가 이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그녀보다 한 발 앞서 모습을 나타낸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모용준이었다. 모두들 모용준의 출현에 넋을 놓고 말았다.
왕중양은 당장에 달려가 그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었다. 순간 모용준과 사자우 사이에 묘한 눈빛이 오고 갔다. 모용준이 임조영을 향해 이죽거렸다.
"오랜만이군. 그래 아직도 나의 황비 노릇을 할 마음이 없는 건가?"
임조영은 이를 갈았다. 모든 화근은 바로 이 모용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보기만 해도 치가 떨렸다. 임조영이 검을 뽑아들고 모용준의 숨통을 찔렀다. 재주넘기를 하며 그녀의 검을 피한 모용준이 웃어댔다.
"지아비를 죽이고 황위를 빼앗으려는 속셈이냐? 하하하, 넌 내게 아들 하나를 낳아 주어야 할 몸이야."
임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더욱 큰 살의의 바람이 불었다. 왕중양과 단지흥의 목숨은 풍전등화였다. 사자우의 병장기가 다시금 육중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내리꽂혔다. 사자우는 일단 겁을 주어 두 사람이 떠는 광경을 즐기고 싶어했다. 전의를 잃고 물러서 있던 사대시위들이 일제히 달려 들었다. 사자우가 먹이를 발견한 독사처럼 병장기를 곧추세워 들고는 이들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그의 앞으로 시커먼 물체가 날아들었다. 이 사내는 손과 팔뚝에 맨살이라고는 보이지가 않을 정도로 넝마들을 잔뜩 감고 있었다. 넝마를 두른 이 사내가 사자우를 향해 묘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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