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중신통 왕중양6

3학년2반 | 2022.02.24 07:48:25 댓글: 0 조회: 448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0810

제31장 종남산의 혈투
사자우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껄끄러운 존재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 거렁뱅이 놈아, 내 일을 방해하지 마라!"
사자우가 욕설을 퍼붓자 홍칠은 여전히 헤죽거리며 맞받아쳤다.
"이 천하의 몹쓸 난쟁이 놈아, 네 농은 여기 오면 무슨 좋을 일이라도 있을 거라 믿었더냐? 오늘 이 홍칠에게 혼 좀 나 봐라!"
홍칠이 온 젓을 안 임조영은 속으로 안심을 했다. 모용준을 향해 분노의 검을 힘껏 휘두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모용준은 검을 피하느라 허둥댔다. 임조영이 바싹 접근하며 검끝에 힘을 주어 내리쳤다. 그러자 모용준의 소맷자락이 부욱 찢어지면서 너덜거렸다.
"난 네 지아비인데 이럴 수가 있느냐?"
모용준은 끝까지 임조영의 심기를 어지럽힐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서 모용준의 숨통을 끊어 놓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홍칠과 사자우는 오랫동안 서로를 향해 살기 띤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나 사자우는 지금 자신이 불리한 위치해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 단지흥이 데리고 온 사대시위들 역시 자신을 향해 접근해 오고 있는 게 아닌가. 단지흥은커녕 왕중양도 죽일 수 없게 되자 사자우는 바짝 애가 탔다. 슬쩍 모용준을 돌아보며 그가 말했다.
"이봐, 왜 아직도 자리를 피하지 않고 있나?"
그가 모용준에게로 뛰어갔다. 모용준은 자기를 도우러 온 줄 알고 내심 안심을 했다.
"나를 따라가지 않겠나? 동궁이 비어 있다구."
조금 여유로워진 모용준이 임조영에게 다시 수작을 부렸다.
"모용준 이 놈, 당장 죽을 놈이 무슨 말이 그리도 많더냐?"
임조영의 입에서도 욕설이 터졌다.
"재수가 없을라니 계집까지 나서 귀찮게 구는구나!"
사자우가 병장기를 거칠게 내둘렀다. 병장기가 그녀의 몸 가까이서 윙윙거리자 왕중양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조심하시오!"
왕중양의 목소리를 들은 임조영은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을 여전히 살갑게 대해 주고 있는 그에게서 깊은 정을 느꼈다. 그러나 위기는 더욱 심각하게 임조영을 조여 왔다. 사자우가 필사의 방법으로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술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가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에서 독사 두 마리를 꺼내는 게 아닌가? 독사들은 지체할 것도 없이 곧장 임조영의 머리와 어깨로 건너왔다. 질겁을 한 임조영이 뱀을 검으로 내리쳤다. 그중 한 마리가 검에 맞아 멀리 날
아갔다. 그러나 뱀은 상처 하나 입지를 않았다.
"아니!"
이를 본 임조영은 더욱 놀라고 말았다. 그런데 다른 독사 한 마리가 자신의 어깨 위에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사이 독사가 그녀의 어깻죽지를 물어 버렸다.
"네 년은 지금 독사에게 물렸다.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면 될 것이다."
사자우가 비웃음을 남기고는 모용준과 함께 서둘러 자리를 떴다. 바위를 박차고 뛰어오른 사자우가 고함을 질렀다.
"거렁뱅이 놈아, 조만간에 다시 네 놈을 찾아올 것이다. 어디 두고 보자!"
임조영은 서서히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이마에는 검은 줄이 한 가닥 새겨졌다. 그 줄은 차츰 수를 더해 가며 눈썹 바로 근처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독이 많이 번졌어!"
단지흥이 놀라 소리치자 홍칠이 사람들에게 일렀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하오!"
왕중양의 눈빛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졌다. 임조영이 비로소 고개를 들고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녀가 부리는 사화를 계집이 쪼르르 달려오더니 역시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임조영이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사내놈이 풀어놓은 독사에 물렸다. 이제 곧 죽을 것이다. 그러니 네가 나를 업어 집까지 옮겨 줄 수 있겠느냐?"
계집은 몸피도 작고 몹시 여위었지만 임조영의 명을 거역하려 들지는 않았다.
"사부님의 말씀 잘 알아들었어요. 사부님께서는 이 더러운 사내놈들이 지켜 보는 데서 고통을 당하고 싶지 않으시다는 말씀이지요?"
계집의 말이 당돌하기는 했으나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임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이마에는 검은 빛을 띤 땀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혔다. 모두들 그녀의 땀방울이 검은 색인 것으로 보아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걸 알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계집이 임조영을 업자 단지흥이 왕중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빨리 구하면 목숨을 건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는 사대시위에게 그녀를 옮기지 못하게 명령했다. 계집의 등에 업힌 임조영이 뇌까렸다.
"사내들은 모두 나쁜 놈들이야. 넌 이것을 잘 알아야 해."
계집이 눈물을 흘리며 임조영의 말에 순종했다. 계집은 임조영이 시킨 대로 그 말을 중얼거리며 계속 걸음을 때었다.
"사내들은 모두 나쁜 놈들이야!"
왕중양이 앞을 가로막았다.
"고집을 피우지 말고 어서 치료를 받게나."
그러나 임조영은 왕중양을 거들떠보지 않고 계집에게 명했다.
"내 검을 집어라!"
계집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럼 그 검으로 내 가슴을 겨누어라. 만일 저자들이 물러서지 않으면 넌 나를 찔러야 한다! 그 다음엔 너도 찌르고……"
임조영이 단호한 기색을 나타냈다. 계집과 임조영 사이에 오고 가는 말을 듣고 있는 왕중양은 가슴이 쓰렸다. 그는 표독스럽게 변해 가는 그녀의 눈길에서 증오를 읽었다. 그것은 사내에 대한 깊은 저주의 기운이었다.
계집은 임조영을 추스려 업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왕중양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 들며 홍칠에게 조용히 부탁을 했다.
"길을 비켜 줍시다."
계집의 걸음이 비칠대는 것이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계집은 힘겹게 몸을 움직여 초막으로 들어갔다. 왕중양은 달려가서 임조영을 부축하고 싶었으나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변해 버린 그녀의 태도 때문에 선뜻 용기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홍칠이 왕중양에게 말을 건넸다.
"지난번엔 꽤 고생을 했었겠군요? 그 사자우란 놈이 갑자기 보이지 않아 한참을 찾아다녔지요. 그 놈이 벼랑에서 그 짓을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날 그는 얼른 왕중양에게로 되돌아오려고 했었다. 그런데 없어진 모용준을 찾아 헤매다 의군들이 오합지졸로 흩어져 금나라에 당하게 되자 그걸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사자우가 왕중양을 싸들고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왕중양은 그저 넉넉한 미소로 홍칠의 말을 받아 주었다. 그는 자신을 벼랑 아래로 떨어뜨린 자의 정체를 알아낸 것으로 만족한다는 태도였다.
"과연 무림의 맹주답군요."
홍칠의 칭송에 왕중양이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제부터는 무림의 맹주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소. 제 한 몸만 살면 되는 거지 날마다 바쁘게 뛰어다녀서 뭘 하겠소?"
홍칠과 단지흥은 얼빠진 모습으로 왕중양을 주시했다.
"의군이 패하기는 했어도 의군이 사라진 것은 아니오. 우리들이 형제들을 다시 모아 일어서면 될 것이오."
홍칠이 의연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왕 대협이 맹주 자리에 있었기에 기세가 그만했던 것이오. 이번에도 대협이 나서시오. 그러면 우리 개방의 형제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대협을 받들테니."
"그건 안 되오. 이번엔 개방에서 하는 게 옳소. 개방은 천하에서 세력이 가장 크니 그대나 아니면 개방의 방주가 하는 것이 적당하오."
왕중양이 단호하게 거절을 하자 홍칠이 언성을 높였다.
"그렇게 되면 대협께서 나를 해치는 것이오. 나란 놈이 얼마나 어리석다는 걸 모르오? 또한 개방에는 강호객 전체를 이끌 만한 인물이 없소. 더욱이 방주인 소씨 거렁뱅이는 아다시피 성격이나 성품으로 보아 적당하지 않소."
그러나 왕중양은 이미 마음을 굳힌 뒤였다.
"자기가 못하는 일을 왜 남에게 떠맡기려 하는 것이오? 벼랑에서 떨어진 후로 난 이미 두 세상을 살아 본 사람이 되었소. 허나 다시는 무림의 맹주 노릇은 하지 않겠소!"
홍칠이 다시 왕중양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단지흥이 눈빛으로 그만두라는 뜻을 보내 왔다.
한 해가 지나고 여름이 들어설 무렵에 사람들은 왕중양이 종남산에 전진교라는 새로운 교파를 세웠다는 말을 종종 입에 올렸다. 이는 떠도는 풍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전진교에서는 6월 초여샛날 종남산에서 전진교 창립대회를 가지기로 했다. 이 대회 기간에 강호의 영웅호걸들이 다 모일 거라는 말이 나돌자 종남산으로 통하는 길목마다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편 그 길목마다에 서 밤낮으로 출몰하던 녹림의 화적떼들도 얌전해졌다.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으나 왕중양이 벌이는 일이라니 화적떼들마저 숨죽인 모양이었다. 호걸들뿐만 아니라 화적떼들도 왕중양의 인품을 높이 받들고 있는 터였다.
유월 초여샛날이 훤히 밝았다. 사람들은 이른 새벽부터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종남산으로 몰려들었다. 산속에는 중양궁(重陽富)이라는 새 궁궐을 지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전부터 있었던 낡은 절을 단장한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사람의 손이 많이 가고 보니 새롭게 지은 궁궐 못지 않은 기품과 웅장함이 엿보였다. 궁 앞에는 구리로 만든 거대한 종이 걸려 있기도 했는데 도사들의 아침공부를 알릴 때 주로 썼다. 또한 구리종 옆에는 역시 큰 북이 있어 종과 쌍을 이루었
다.
종소리가 크게 세 번 울리자 중양궁에서 사람들의 행렬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모두 도복(道服)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중 붉은 도포를 입고 있는 사람이 왕중양이었다. 그는 오직 땅만 내려다보며 걸었다. 바닥에 자신이 풀어야 할 수많은 과제들이라도 널려 있는지 그는 줄곧 숙인 머리를 들지 않았다. 그의 뒤로 전진교의 일곱 제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 일곱 제자들이 바로 후에 강호에서 이름을 크게 떨친 전진칠자였다.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자면, 으뜸으로 치는
제자 단양자(丹陽子) 마옥, 둘째인 장진자(長眞子) ,담처단(譚處端), 그리고 셋째인 장생자(長垈子) 유처현(劉處玄)과 넷째인 장춘자(長春子) 구처기(丘處機)였다. 또한 키가 작고 뚱뚱한 옥양자(玉賂子) 왕처일(王處-)과 광녕자(廣寧子) 학대통(諦大通) 그리고 마옥의 아내인 청정산인(淸淨散人) 손불이였다.
이들의 기풍을 본 사람들은 모두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한 사내가 불만스러운지 다분히 얕잡아 보는 투로 투덜댔다.
"마옥, 자넨 원래 직검 마옥이 아니던가? 또 저 뒤꽁무니에 졸졸 따라오는 건 자네 마누라 손불이가 맞지? 자네 부부가 한 교파에 들었으니 전진교라기보다는 부부처처교(夫夫妻妻敎)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나? 그래 가지고도 도사요 도고(道姑)라 할 수 있는가?"
이 말이 끝나자 또 다른 사내가 비아냥댔다.
"여보게 마옥, 자네는 전진교에 들어갔으니 다음부터는 뭐라고 불러야 하지? 그리고 자네 마누라는 여전히 마누라가 맞는가?"
그러나 마옥은 좀체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정중히 읍을 했다.
"나는 원래의 직검 마옥이 아니라네. 지금 나는 전진교파의 첫째 제자인 단양자 마옥일 뿐이지. 손볼이도 오늘은 나의 마누라이기 전에 우리 사부님의 문하에 함께 있는 제자라네."
말에 강한 힘을 주어 대답을 하는 마옥의 태도에 사내들이 물먹은 벙어리가 돼 버렸다.
그런데 이번엔 사내 중 하나가 난데없이 왕중양을 불렀다.
"왕중양, 듣자하니 그대는 금나라 놈들을 반대하는 의기를 들고 용감히 싸우던 호걸이라고 하더군. 그러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전진교 교주가 돼 버린 연유가 무엇이오?"
마옥이 왕중양 대신 읍을 하며 설명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무림을 빛내기 위해 더는 대사에 참견하지 않을 것이네. 오로지 이 산중에서 무공을 연마하며 도가의 도를 연구하는 것으로 낙을 삼으실 걸세."
곳곳에서 사람들의 코웃음이 픽픽 터져 나왔다. 이들은 왕중양을 비롯한 이들이 무슨 해괴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말이 청산유수로 술술 쏟아지자 더욱 사기성이 농후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품었다. 무림에 숱한 괴변이 일어났고 금이 송의 강산을 반을 넘게 갉아먹고 있는 때라 사람들의 이 같은 추측도 무리는 아니었다. 단순히 교를 연구하고 무공을 익히는 것만은 아닐 거라며 서로 수군거렸다.
괴상한 웃음소리가 사람들 속에서 들려 온 것은 이때였다. 누군가에게 숨통을 잡힌 것처럼 그 웃음 소리는 컥컥대다가는 다시 한 줄기로 길게 뽑아졌다. 왕중양의 인상이 험악하게 돌변했다.
"또 여기서 만나게 되는군요!"
그는 자신에게 눈길을 돌린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몸을 빙그르 돌리며 예를 올렸다. 사람들도 적이 놀라는 눈치였다. 죽었다고 믿은 왕중양이 살아서 전진교의 교주가 되었다는 사실만큼이나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 사내는 왕중양처럼 죽었든지 아니면 종적을 감춘 것이라 알려졌던 모용준이었다. 살아 있는 왕중양에게서 한 번 놀란 사람들은 지금 다시 똑같은 놀라움에 중심을 잃을 지경이었다.
"모용준이 놈! 무슨 낯짝으로 여기까지 기어들어왔느냐?"
왕중양이 거침없이 꾸짖자 모용준이 조막손을 휙 내저으며 대꾸했다.
"그렇게 무턱대고 성질을 부리면 곤란하오. 내가 뭘 하러 왔느냐고? 여기 올 때 난 거듭 생각을 했었소. 과연 가야 하는가 아닌가를……. 많은 고심 끝에 결국 이렇게 온 것이오!"
"네 놈이 어떤 결정을 내렸든 난 상관하지 않는다!"
생각 같아서는 단숨에 모용준의 목을 두 동강 내고 싶을 따름이었다.
"왕중양, 온 천하가 다 알고 있소. 나와 그대가 손을 잡고 오랑캐들과 싸운 일을 말이오. 후에 우리가 패한 건 하늘의 뜻이었소. 사람의 힘으로는 어려웠다고 보면 될 것이오. 그런데 당신은 왜 의군이 패한 책임을 남에게 씌우려고 하시오?"
"모용준이 놈! 그 주둥이를 다물지 못할까? 네 놈은 무림의 수많은 형제들을 팔아먹고 우리 의군 수만 명의 목숨도 내버리지를 않았느냐?"
모용준이 깔깔대며 소인 특유의 가냘프고 여린 웃음을 토했다.
"그대는 아직도 자신이 대단한 인물로 알고 있는가 보군. 그대가 무슨 권리와 자격으로 나를 질책한다는 말이오? 그대가 의군의 두령이었다는 것은 사실이 오만 금나라 놈들을 벌벌 떨게 한 것은 누구였소? 바로 나 모용준이란 말이외다."
모용준이 이처럼 기고만장했지만 한때 술렁이던 강호객들은 입을 굳게 다물 뿐이었다. 사실 수많은 강호객들 중에서 왕중양과 모용준처럼 의군에 참여했던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그래서인지 모용준이 떠벌리는 말에 어떠한 사족도 달 수 없는 입장이었다.
"모용준, 어서 물러가지 못할까! 네 놈과 나는 이미 남남이 된 지 오래이다!"
왕중양의 호령에도 모용준은 외눈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대는 내 형님이었지 않소? 난 크대와 함께 죽으려고 하오. 함께 태어나지는 못했어도 한날 한시에 죽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기쁜 일이겠소?"
"가증스러운 놈! 귀찮게 굴지 말고 네 갈 길이나 찾아가거라!"
"왕중양, 그대는 교주가 되시오. 난 강호의 악인이 될테니. 난 그대의 전진교를 두려워하지 않소!"
모용준이 낮고 짧게 휘파람을 불자 그의 뒤로 사내들이 모여들었다. 일기충천 지청의 부하 홍분전두(紅粉纏頭)와 날마다 발이 차다고 입버릇처럼 떠드는 계수수(計水水), 그리고 모용준처럼 키가 매우 작은 사내, 사자우였다.
홍칠과 단지흥이 격분한 눈길로 그를 지켜 보았다. 모용준이 왕중양에게 다시 입을 놀려댔다.
"그대와 난 형제 간이오. 그대가 나를 모른다고 해도 셋째야 알겠지?"
'또 네 놈이 임조영에게 무슨 마수를 뻗으려고 하는 것이냐?'
왕중양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또다시 임조영에게 입방아를 찧었다가는 용서하지 않겠다!"
먹혀들지 않을 거라 여기 면서도 왕중양은 속에서 치받치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내뱉었다. 모용준은 그런 왕중양을 비웃기라도 하듯 계속 이죽거렸다.
"난 임조영을 내 황궁의 동궁마마로 맞이할 생각이오. 동궁이 비어 있는 탓에 늘 유감스러웠는데 잘된 일 아니오?"
왕중양은 모용준 같은 철면피의 악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암담하기만 했다.
왕중양과 모용준이 주고받는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듣고 있던 홍칠이 끼여들며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사자우, 내가 알기로는 너에게 뱀 두 마리가 있더구나. 내가 왕지네 두 마리를 줄 테니 그 뱀과 바꾸지 않겠는가?"
홍칠이 왕지네 두 마리를 들어 보였다. 이를 본 사자우는 은근히 구미가 당겼다.
'저 왕지네는 예사로운 지네는 아닌 것 같군. 허나 이 사자우는 남과 물건을 갖고 흥정하지는 않는다!'
"그럼 그 지네를 여기로 던져라!"
사자우가 쉽게 넘어오지 않자 홍칠이 선선히 지네를 그의 앞으로 던졌다. 사자우는 나름대로 독물을 다루는 데 있어 자신만만한 인물이라 곧 지네의 진가를 알아보았다.
"참 훌륭한 지네로군! 소금에 절여진 육포냄새 같기도 하고 오줌냄새 같기도 하고……. 적어도 일곱 가지의 냄새가 한데 얽혀 있는 것 같구나."
그는 지네를 집어 자기 봇짐 속에 넣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자우가 갑자기 몸을 비틀며 비명을 내질렀다.
"사자우, 이 거렁뱅이의 꼬임에 결국 넘어갔구나! 네 놈만이 독물을 길들이는 것은 아니다!"
홍칠이 그의 찌그러진 면상을 들여다보며 놀려댔다.
"네 이 놈! 불쌍히 여겨 살려 두었더니 끝까지 골칫거리로 나서는구나!"
"잔소리 말고 어서 난쟁이 독종과 거렁뱅이 중 누가 센지 겨뤄 보자꾸나."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맨손이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곧 이들은 계곡을 넘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경공을 써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모용준의 뒤에는 또 한 사내가 버티고 있었는데 얼굴이 삿갓에 가려져 있었다. 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를 대뜸 알아 본 사람은 왕중양이었다. 삿갓을 쓰고 나타난 사내는 무심이었다. 무심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두 사람이 뒤따랐는데 역시 예상대로였다. 무심의 뒤로 귀낭자와 창바의 모습이 드러났다. 뒤에 서 있는 창바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산맥을 뒤흔들었다.
"왕중양 이 놈아! 우리 사부님께서 허락을 하셨다. 네 놈과 함께 술을 한 번만 마시라고 말이다!"
덩치에 걸맞게 상황 판단에 어두운 창바였다. 느닷없이 술타령을 늘어놓는 그를 외면한 왕중양은 무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종남산에 나타난 무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하는 눈빛이었다.
"축하합니다!"
무심이 불쑥 이렇게 말을 꺼내더니 왕중양의 눈치를 살폈다. 왕중양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그가 다시 너스레를 떨어댔다.
"왕중양님께서는 금나라와 맞서 싸웠지만 금나라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지를 않는다더군요. 또 들리는 말로는 금나라의 납한(納罕) 태자가 그대의 전진교를 모두 금나라의 관할 밑에 두고자 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요?"
어이가 없는 왕중양이 쓴웃음을 흘렸다.
"달갑지 않은 소리군."
"그 말을 거역했다가는 후일을 기약할 수 없을 텐데요? 오늘은 이처럼 거대한 창립을 이루었지만 내일은 강호에 전진교는 사라질 것이오. 그렇게 되면 그 얼마나 비참한 노릇이겠소? 하하하!"
'이들의 행동거지를 보니 단단히 벼르고 온 모양이로구나. 모용준과 사자우를 앞세워 온 것만을 봐도 알겠다. 이젠 더 이상 피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마음을 다진 왕중양이 무심을 쏘아보았다.
"좋네, 오늘 내가 지면 난 약속한 대로 고분 속에 들어가 활사인 노릇을 하겠네. 허나 무심 공자가 진다면 어찌하겠는가?"
코웃음조차 치기 아까운 듯 무심이 빈정댔다.
"그대와 분부를 따르겠소."
"그럼 다시는 종남산 근처에는 걸음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나."
무심이 손뼉을 딱 쳤다.
"좋아! 장부일언은 중천금이라고 했으니……."
드디어 이들은 두 무리로 갈라졌다. 왕중양과 여러 호걸들의 마음가짐은 색달랐다. 금나라의 원한이 남아 있는 터라 오늘 무심을 기필코 꺾어야만 했다. 금나라의 뜻을 받들고 전진교를 해산시키려고 온 무심을 향해 살기의 눈빛들이 쏟아졌다.
이들은 5전 1승으로 승부를 가리기로 했다. 무심 쪽에서 먼저 나선 자는 유명한 건달꾼이었다. 그는 우쭐거리며 왕중양에게 욕설부터 던졌다.
"이 놈아, 네 놈이 무엇을 믿고 무심 공자님을 넘보는 게냐?"
이자로 말할 것 같으면 강남 땅에서 악명이 자자한 건달꾼 진옥(素玉)이었다. 악독한 짓거리를 골라 하는 이자에게 호감을 갖고 손을 뻗친 것은 무심이었다. 무심은 이자를 자기 문하에 넣어 오늘을 기다렸던 것이다.
"네 놈이 대관절 무슨 재간이 있기에 그리도 날뛰는 게냐?"
왕중양 쪽에서도 한 사내가 나섰는데 바로 구처기였다. 그는 전진교 제자들 중 무공이 제일 뛰어난 인물이었다. 게다가 성미마저 불 같아 진옥이 왕중양을 헐뜯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구처기는 곧장 검을 꼬나든 채 진옥을 향해 흙먼지를 일으키며 쫓아갔다. 진옥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구처기의 검을 보고 놀란 것이었다. 그의 검은 구혼색(句魂索)이라는 무서운 병장기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이 구혼색이라는 검은 곧게 펴지기도 하고 때론 갈고리처럼 끝이 휘어지기도 했다. 이 검에 걸리기만 하면 상대의 병장기는 힘없이 손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진옥은 이 같은 구혼색의 위력을 주시하면서 장검을 뽑아 들었다. '공공탈봉(共工奪蜂)'이라는 초수로 맞섰다. 진옥의 초수도 만만치가 않아 구처기는 쉽게 그의 장검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구처기가 아니었다. 그는 옆걸음질을 치며 기회를 노렸다. 진옥이 막장검을 들고 한 발 앞으로 전진하려고 할 때였다. 구처기가 진옥의 가슴을 검으로 연거푸 내질렀다. 흡 하고 놀란 진옥이 꽁무니를 사리고 달아났다.
갑자기 왕중양이 구처기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조심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왕중양을 돌아보던 구처기가 순간 몸을 웅크렸다. 도망을 치는 듯싶던 진옥의 몸에서 일순 몇십 개의 암기(暗器)들이 쏟아졌다. 이 암기들은 일제히 구처기에게로 뿌려졌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구처기는 천천히 선회하면서 암기들이 지나가 주기를 기다렸다. 다시 땅으로 내려온 구처기가 검을 움켜쥐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진옥이 웃어댔다.
"하하하, 구처기 이 놈아! 넌 내 암기에 맞았다!"
"허튼수작 말아라!"
모두들 진옥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다만 왕중양과 홍칠만이 구처기를 근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구처기의 등짝에 호접표(蝴蝶票) 한 매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때 귀낭자가 실록실록 가는 허리를 뽐내며 왕중양에게 말을 건넸다.
"왕중양을 저승길까지 바래다줄 사람이 없나요? 그럼 제가 나서지요."
순간 왕중양은 마옥을 건너다보았다. 아무리 견주어 보아도 그가 귀낭자를 당해 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응수를 하지 못하면 전진교의 위풍은 땅에 떨어질 게 분명했다. 마옥도 어두워지는 왕중양의 낯빛을 슬쩍 확인하고는 자신 있게 말했다.
"사부님, 마음을 놓으십시오."
그는 느린 걸음으로 귀낭자 앞으로 걸어갔다. 이를 본 귀낭자의 입에서 냉소가 흘렀다.
"마 서방님, 듣자하니 마 서방님의 아내가 참으로 미인이라고 하더군요. 만일 마 서방님께서 침대 위에서 계집을 다루는 솜씨가 괜찮다면야 왜 도사 노릇을 자청했겠어요? 제가 손불이와 함께 서방님을 모실랍니다. 사내하고 어떻게 살을 섞어야 하는지 내가 손불이에게 단단히 교육시켜 드리지요. 왕중양 같은 얼간이를 사부로 모시지 말고 두 부부가 나를 사부로 받들기만 하면 부귀영화는 보장될 것인데……"
귀낭자가 나불거리는 수작을 듣고 있던 마옥이 읍을 했다.
"그럼 가르침을 달갑게 받겠소이다!"
자기의 계산과는 다르게 나오는 마옥을 보자 귀낭자는 내심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바탕 약을 올려 흔들리는 마옥을 칠려고 했었는데 예상과 빗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귀서생(五鬼書生)의 아내였다. 그래서 그녀가 쓰는 병기에도 '귀동귀서(鬼東鬼西)'라는 괴상한 이름이 따라다녔다.
야릇한 미소를 보인 귀낭자가 다시금 마옥을 향해 입에 담기에 낯뜨거운 음담패설까지 퍼부으며 모욕감을 주려 했다. 그러나 마옥은 나무에 박힌 옹이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마옥의 이마 위로 차가운 물체가 닿았다. 불현 하늘에서 가느다란 보슬비가 잔잔히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단비와도 같았고 목을 적실 수 있는 샘물처럼 달콤하기도 했다. 보슬비는 마옥의 눈에 더 없이 현란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이것이 바로 귀낭자의 그 유명한 귀동귀서의 효력이었다. 문득 눈앞에 서 있는 그녀가 꽃처럼 탐스럽고 어여쁘게 보인 것도 이 순간부터였다. 마옥은 눈앞에 씌워진 헛겁을 떨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귀낭자의 귀동귀서를 본 사람은 그리 많
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무릇 보고 난 사람은 거의 죽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옥은 순간 번쩍이는 섬광을 보았다. 그의 몸은 경련을 일으키며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마옥이 귀낭자를 향해 정신없이 뛰어갔다. 그는 회오리바람이 이는 곳에서 붉은 점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깨부수겠다고 돌진한 것이다. 마옥의 눈에는 그 붉은 점이 귀낭자로 보였다.
사람들은 마옥이 왜 갑자기 해괴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귀낭자가 있는 쪽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마옥이 빨려 들어가고 있으니 모두들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 붉은 점의 정체는 귀동귀서가 만들어 낸 핏빛의 안개에 불과했다.
불길한 조짐을 감지해 낸 왕중양이 손을 쓰려고 하는데 갑자기 실성한 사람의 울음 소리가 들리며 한 사내가 끼여들었다. 그는 귀낭자가 쳐놓은 마수의 그물에서 마옥을 위기일발로 끌어냈다. 마옥은 이미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동자도 풀려 있는 뒤였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그의 운명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옥은 홍칠의 무릎 위에 축 늘어진 채로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를 구해 준 사람은 바로 홍칠이었다. 사자우와 싸우던 홍칠이 이
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수상한 기미를 눈치채고는 달려든 것이다.
"왕중양, 이번에는 자네가 졌네!"
무심이 자만심에 빠진 말을 툭 왕중양 앞에게 던졌다.
"그럼 다음 판을 보기로 하세!"
왕중양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남편을 죽이려고 한 무리들에 대한 보복으로 손불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탄력이 배어 있어 보기에도 시원했다.
"그따위 귀신 놀음으로 우쭐대지 마라!"
귀낭자를 향해 한껏 비웃자 그녀가 호들갑을 떨어댔다.
"아고, 난 또 누구신가 했지. 마 서방님의 부인이시구만요. 방금 알아보니 그집 서방님은 나와 한 침대에 올라 재미를 보는 걸 그닥 좋아하시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내 미련 없이 돌려보내 드렸지요. 서방님이 도사 노릇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가만 내버려두는 수밖에. 하지만 그대는 부득불 남편이 하는 대로 할 필요야 없잖아요? 전진교라? 계집과 사내가 한 봉당에서 뒹구는 게 무슨 전진교야. 전진교라기보다는 음굴구동(淫齋拘洞)이라고 하는 게 낫잖아요?"
귀낭자의 모욕적인 언동에 더는 참을 수 없었던 학대통이 뛰쳐나왔다. 그런데 학대통을 가로막는 사내가 있었다. 일기충천 지청이었다. 그는 꾀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명성과는 달리 병장기만 휘두르며 학대통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병장기는 무정자(無情剌)라는 것이었는데 창으로도 변할 수 있고 칼과 몽둥이로도 쓸 수 있는 거였다. 학대통은 일곱 제자들 중에서 무예가 결코 뒤지지 않는 편이었다. 마옥과 구처기 그리고 왕처일 다음으로 알아
준다는 실력파였다. 그는 검을 들고 지청과 맞섰다.
"야압!"
검과 무정자가 굉음을 내며 공중에서 힘을 겨루었다. 그런데 무정자가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옆으로 새로운 가지 하나를 세웠다. 그 가지가 곧추 학대통을 향해 날카로운 각을 꺾었다. 학대통이 뒤늦게 몸을 피하기는 했지만 푹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살을 파고들었다. 뼈를 들쑤시는 통증이 전신으로 퍼졌다. 허리를 숙인 학대통이 반대로 몸을 돌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욱!"
그 주먹이 보기 좋게 지청의 면상에 떨어졌다. 치명적이지는 못했지만 지청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고 말았다. 홍칠이 소리쳤다.
"이번은 비겼소이다!"
두 사내는 투덜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왕중양 쪽에서 다음 차례로 나온 것은 왕처일이었다. 두 다리를 어깨보다 넓게 벌린 채 버티고 선 그는 상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왕처일의 상대로 나선 것은 모용준이었다. 모용준이 거만하게 씨부렁댔다.
"난 원래 큰형님과 겨뤄 보려고 했었네, 하지만 난 큰형님의 상대가 안되지. 그래서 만만한 왕처일과 대결하려는 게요."
왕처일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우리 사부님께서 네 놈을 박하게 대해 준 적이 없을 텐데 왜 그렇게 배은망덕하게 구는 거냐? 악독한 짓거리만 골라 해놓고도 천벌이 두렵지 않다는 말이냐?"
왕처일이 근엄하게 꾸짖자 모용준이 낄낄 웃어댔다.
"헛헛헛, 네 놈들은 왜 하나같이 그 모양이냐? 모두 사부를 닮아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자기 사부를 욕하는 언동을 참아낼 위인은 없으리라. 피를 토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왕처일이 검으로 모용준을 찔렀다. 재주넘기로 훌쩍 물러선 모용준이 계속 떠벌렸다.
"네가 왕중양의 제자라? 그럼 난 너의 사숙이 되는 셈이로군. 네 사부가 아직 일러주지 않은 모양인데 그럼 내가 버릇을 고쳐 놓아야겠구나!"
말을 마친 모용준이 손을 높이 들었다. 그의 소맷자락 속에는 단검이 감춰져 있었는데 그것을 쓸 생각이었다. 소맷자락 속에서 단검을 뽑아 낸 그가 왕처일을 향해 그어댔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왕처일이 급히 몸을 사렸다.
"사숙님이 가르치는 걸 무서워 말라구."
모용준이 다시 지껄이며 단검을 이쪽저쪽 소맷자락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잔재주를 부렸다.
'따지고 보면 오늘을 기약하기 위해 저 모용준이 나와 의형제를 맺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실 내가 저 자와 의형제를 맺은 이유는 모두 임조영과 가까워지려는 마음에서였는데……. 그런데 결과적으로 저 놈에게 우롱당하게 된 꼴이니 한심하구나! '
왕중양은 속으로 뒤늦은 후회를 곱씹었다. 모용준은 더욱 사나운 기세로 왕처일을 몰아붙였다. 그가 소맷자락을 휘젓기만 하면 단검이 화살처럼 솟아 나와 왕처일의 눈앞에서 독사처럼 변했다.
"그 재간으로 어찌 전진교의 제자라고 하겠느냐?"
한껏 비웃던 모용준이 회심의 일격을 왕처일의 가슴에 꽂았다. 왕처일은 모용준의 장을 얻어맞고는 뒤로 멀리 밀려 나갔다. 왕처일의 입에서 선혈이 쏟아졌다.
모용준이 왕중양을 보고 읍을 하며 이죽거렸다.
"큰형님, 제자들을 엉터리로 가르쳤군요. 저 놈들에게는 뛰는 놈 위에 반드시 나는 놈이 있다는 걸 알려 줘야 할 겁니다."
왕중양을 향해 던지는 도전적인 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구처기와 유처현이 대노하여 모용준 앞으로 나왔다.
"자네들이 졌어! 지고도 인정을 하지 않는다면 전진교는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이렇게 그들의 나섬을 한마디로 제지한 것은 무심이었다.
드디어 왕중양이 일어섰다.
"좋다. 내가 자네와 한판 겨루어 보겠네. 우리 전진교가 종남산에서 발을 붙일 수 있겠는가 어디 시험해 보겠네."
무심은 왕중양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며 소리쳤다.
"전진교가 살아 남을 거라 믿는가? 중원의 무림이 우리 금나라에 투항하지 않으면 발붙일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
"자네가 우리 전진교를 없앤다고 쉽게 그렇게 될 줄 아나?"
무심이 무림 호걸들을 둘러보며 거들먹거렸다.
"자네들이 무림에서 좀 행세하고 살려면 금에 투항해야만 해!"
이 소리에 모두 대노하여 들고 일어설 태세였다.
무심이 흥 하는 콧소리를 내며 왕중양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먼저 손을 쓰시지."
일제히 사람들의 눈길이 왕중양에게로 쏠렸다. 왕중양이 천천히 손을 내밀더니 손가락 끝으로 무심을 겨누었다. 그러자 무심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뒤로 물러났다.
"내가 자네와 맞선다는 건 우리 금나라 주인의 신분을 욕되게 하는 거네. 그래도 사자우 선생과 자네가 맞붙는 게 낫지."
사자우가 슬슬 걸어 나왔다. 그가 병장기를 왕중양에게 뻗으며 싸움을 걸어 왔다.
"왕중양, 넌 조만간 내 손에 황천객이 될 것이다. 전번에 내가 널 벼랑에서 떨어뜨렸는데 용케 살아났지만 이번엔 어림없다!"
사자우가 몸을 한차례 꿈틀대자 곧 병장기가 왕중양에게로 길게 뻗쳤다. 막 몸을 쓰려던 왕중양은 먼곳에서 움직이는 한 물체를 발견했다. 임조영이었다. 임조영이 와 주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그녀, 아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린 그녀가 와 주다니……




제32장 활사인 묘로 들어간 왕중양
왕중양과 사자우의 맞대결에서 누가 승자로 남을 것인가? 사자우는 오래 전부터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왕중양을 기필코 꺾어 보고 싶었다. 비록 왕중양이 무림의 맹주 자리에 다시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는 했지만 그 명성은 매우 드높았기 때문이었다.
사자우의 병장기가 획획 바람을 가르며 왕중양에게로 내리꽂혔다. 그는 왕중양의 명문대혈(命門大穴)을 겨눈 채 조금도 숨돌릴 겨를을 주지 않았다.
그의 공격은 더욱 위력이 붙어 무서운 소리를 질렀다. 이를 지켜 보는 단지흥과 홍칠의 손바닥에 땀이 흠뻑 배였다. 왕중양이 차츰 불리하게 전개돼 갔다. 왕중양의 검은 처음엔 흐르는 물과 구름처럼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사자우가 거세게 날뛰자 서서히 흐름을 잃어 갔다.
"왕 형, 검에 좀더 힘을 주시오!"
단지흥이 안타깝다는 듯 소리를 지르자 홍칠도 거들었다.
"저 난쟁이의 공격이 빨라지면 왕 공자의 검은 느려야 하고, 공격이 뜸해지면 검은 빨라져야 하지요."
"아니오, 공격에 따라 검도 그 속도를 맞춰 가야 하오."
단지흥이 홍칠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홍칠은 단지흥을 슬쩍 돌아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허허허, 폐하께서 잘못 보셨소이다. 공격이 빠르면 검은 느려져야 하지요."
두 사람이 논쟁을 하니 옆에 있던 사대시위 중 주자류(朱子柳)라는 선비가 느끼는 바가 있어 의미 있는 눈빛을 지었다. 그는 네 사람의 시위 가운데 가장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두사람이 나누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왕중양과 사자우가 한창 어우러져 불꽃을 튀기는데 갑자기 모용준이 끼여들었다.
"셋째 동생, 그저 보고만 있지 말고 우리 둘도 한판 불어 보지 않겠나?"
그는 임조영을 향해 싸움을 걸어 왔다.
"후회만 하지 않는다면!"
임조영이 쏘아 붙이자 모용준이 음흉스럽게 웃었다.
"난 오늘 왕중양과 결판을 내야겠지만 셋째와도 그렇게 할 생각이다. 오늘부터 동생은 내 마누라가 될 준비나 하라구."
순식간에 모용준의 사대 가신들이 임조영에게 덮쳐 들었다. 이들은 임조영을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모용준이 아무리 회유를 해도 말을 듣지 않으니 아예 없애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들 중 주정과 목우는 임조영의 실력을 잘 알았다. 그래서 선뜻 달려들지 못하고 기회만 엿보았다. 반면에 임조영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지청과 허불잉은 단번에 제압하겠다고 날뛰었다. 그러나 임조영이 부리는 검날에 주춤 걸음을 세운 이들은 등줄기를 뒤흔드는 두려움에 잠시 몸을 떨었다. 지청은 갑자기 자신의 정수리가 싸늘해짐을 느꼈다. 임조영의 검이 그의 정수리에 있는 살가죽을 쓰윽 베어 버린 것이다. 처음엔 통증이 없어 몰랐으나 바람결이 벗겨진 살가죽
에 닿자 뼈를 가는 아픔이 엄습해 왔다.
"으……."
지청이 이를 악물며 아픔을 참아냈다. 뒤에 있던 허불잉이 앞으로 나가며 장을 내갈겼다. 그런데 손을 내뻗기도 전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눈을 떠보니 어느 틈엔가 팔뚝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잘려 나간 팔에서 피가 샘솟듯 했다.
"사, 사람 살려!"
허불잉은 자기 팔을 잡지도 못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악에 받친 허불잉은 몸을 돌리더니 남은 손으로 임조영의 젖가슴을 움켜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임조영의 몸에 손을 대기도 전에 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지청이 곧바로 칼을 보나들고 앞으로 나왔다. 임조영이 싸늘한 눈빛을 내쏘며 검으로 그의 칼을 내리쳤다. 뒤로 훌쩍 물러선 지청 때문에 쓰러졌던 허불잉은 임조영의 검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임조영은 놈들이 도망치려는 것을 알고는 몸을 날려 옥녀심경에 있는 '심냉신담(心冷神淡) '이라는 검법으로 주정을 힘껏 찔렀다.
"아악!"
검에 찔린 주정도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너무 우쭐대지 마라!"
모용준이 임조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한편 왕중양과 사자우는 벌써 백여 합을 넘게 싸웠으나 승부를 내지 못했다. 서로는 질긴 싸움에 서서히 상대에게 두려움을 품었다.
왕중양이 속으로 뇌까렸다.
'과연 난쟁이들은 기인이야. 무공 역시 예측하기가 어려워……'
사자우는 원래 왕중양이란 인물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는 않았었다. 그렇지만 쉽게 물러서지 않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그도 적이 놀라고 있었다. 단지흥이나 홍칠보다도 세련된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쉽게 그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서로에게 두려움을 품은 두 사람의 동작은 자연스레 느려졌다.
"쾅!"
이때 난데없이 포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뒤를 이어 종남산 기슭으로부터 고함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중원 무림의 역도들아! 도망칠 생각일랑 말아라!"
사람들은 모두 아연실색하여 허둥대기 시작했다. 무심이 앞으로 뛰어나와 호걸들에게 호통을 쳤다.
"들었느냐? 산 아래는 이미 대군들이 물샐틈없이 너희들을 에워싸고 있다. 금나라에 투항하려는 자는 목숨을 살려 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모두 개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궁 앞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욕설을 퍼붓는 자가 있는가 하면 슬그머니 줄행랑을 치려는 이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멀리 달아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이미 금군이 새카맣게 몰려들어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돼 버렸다.
사자우가 싸움을 멈추며 왕중양에게 독기 어린 소리를 질렀다.
"후에 다시 겨루기로 하자!"
호걸들은 후퇴하면서 물에 빠진 사람들처럼 계속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산기슭에서 울려 오던 말발굽 소리는 차츰 가까워지고 금군의 외침 소리도 더욱 어지럽게 메아리쳤다.
왕중양이 전진교의 제자들을 한곳에 모이도록 했다. 홍칠도 자신이 데리고 온 개방의 여러 제자들을 모았다. 단지흥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둘러 대책을 강구했다.
이윽고 금군의 무리가 나타났다. 진두에 나선 포악스럽게 생긴 한 장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두 팔로 쌀가마니 천식을 들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마력수(馬力首)였다. 그가 손을 내뻗으며 벽력같은 호령을 했다.
"왕중양은 어서 앞으로 나와라!"
왕중양이 기풍당당하게 나섰다.
"네가 금나라의 장수인가? 할말이 있으면 하라!"
마력수는 거만한 눈으로 왕중양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타고 있는 말이 성을 내며 앞발을 치켜 들었다.
"네가 왕중양이냐? 그럼 잘 들어라. 납한 태자님께서 영을 내리셨다. 전진교를 해산시키라는 분부시다!"
"너희 태자가 무슨 권리로 그런 말을 하였느냐?"
왕중양은 죽더라도 비굴함은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이런 왕중양을 말리며 나선 것은 모용준이었다.
"큰형님!"
왕중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좋소. 하지만 이 말만은 꼭 해야겠소. 영주 들판에서 우리가 모였을 때 한 맹세는 잊지 않았겠지요? 금군과 싸워 이기지 못하면 천하의 대사에는 간섭하지 않고 스스로 활사인이 되겠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모용준이 그 말을 새삼 들추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심이 모용준의 의도를 간파하고는 대뜸 한마디했다..
"당신이 떳떳한 사내 대장부라면 맹세한 것을 지켜야 하오.!"
"아무렴, 사내 대장부가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하면 끝장이지."
왕중양이 선뜻 이렇게 받아치자 모용준이 실눈을 떴다.
"무심 공자, 우리 큰형님을 어떻게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오? 우리 큰형님은 천하 무림의 맹주가 아니오. 필부의 말도 일언이 중천금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영응호걸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회피하겠소이까? 만일 자기가 한 말대로 하지 않는다면 야 전진교의 교주 노릇은 어찌하겠소?"
왕중양은 그 말들이 자신을 올가미에 질어 넣으려고 하는 수작임을 모르지 않았다.
"모용준이 놈! 허튼수작 집어치워라!"
왕중양이 피를 토할 듯 울부짖자 모용준과 무심이 마주 쳐다보며 킬킬댔다. 무심이 고개를 돌리며 눈을 부릅떴다.
"왕중양, 우리 금나라의 태자님께서는 네가 전진교를 만드느라고 애를 쓴 것은 높이 사고 계신다. 그래서 네가 활사인이 되기를 자청한다면 수많은 강호객들은 살려 주신다고 하셨다."
강호객들 중에는 그 인품이 뒤떨어지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이런 자들은 금나라와 그다지 큰 원한이 없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은 애초에 송이든 금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알량한 영웅심으로 우리들까지 죽이려 하지 마시오!"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소리치는 자도 있었다.
"잠깐, 내 말을 들으시오!"
사태를 수습하고자 나선 것은 홍칠이었다. 홍칠이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숨을 토하며 말을 이었다.
"자네들은 모두 중원 사람들이 아닌가? 금나라 놈들과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할 자네들이 아닌가? 사람이 한번 세상에 태어났다면 언제가는 죽는 법, 무엇이 두렵다는 말인가?"
여러 호걸들이 홍칠의 말에 수긍을 했지만 일부는 여전히 반기를 들었다.
"금나라 사람들과 싸우는 건 왕중양의 일이지 우리와는 하등 상관이 없소!"
무심이 크게 팔을 휘저으며 목청을 높였다.
"다들 보아라! 금나라는 병마가 강하고 백발백중의 궁수들로 가득하다. 만일 자네들이 불복한다면 고슴도치 꼴이 되어 죽을 것이다!"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과 골짜기에는 금나라 군사들이 피어난 풀꽃들처럼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또한 팽팽하게 시위를 당기고 있는 궁수들 때문에 더욱 긴장감이 맴돌았다.
홍칠이 단지흥에게 속삭였다.
"산 아래로 어서 내려갑시다!"
그러나 단지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반대를 했다.
"그건 안 돼. 물론 나나 자네는 별 근심이 없겠지만 무림의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화살에 목숨을 잃게 될 걸세."
단지흥의 말은 당연한 것이라 홍칠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마옥이 왕중양에게 비장한 목소리를 건넸다.
"사부님, 오늘 금나라 군사들이 들이닥친 것은 우리 전진교를 없애고자 함입니다. 더군다나 그 물결을 밀어 중원의 무림도 일망타진할 속셈인 것 같은데 최후의 결전까지 싸워야 합니다!"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는 금나라 군사들을 풀러보던 왕중양은 고심했다. 중원 무림이 금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해도 좋은 결과가 있을 수는 없었다. 중원 무림의 여러 영웅호걸들이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단합된 금군을 이기기란 쉽지 않으리라.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온 왕중양이 무심을 향해 물었다.
"무심 공자, 어쩔 생각이오? 어서 말을 하시오!"
무심과 모용준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무심이 입을 열었다.
"우리들도 중원 무림의 여러분들과 싸우려고 온 것은 아니오. 그저 왕중양의 대답을 받고자 왔을 뿐이었소. 이전에 왕중양은 자기가 금나라를 이기지 못하면 활사인이 ,되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소. 우리들은 바로 그 약속을 지키라고 찾아온 것이오."
사람들 속에서 다시 소란이 일었다. 어떤 자들은 왕중양에게 빨리 대답하라고 채근하기도 했다. 또 어떤 자는 대답을 해서는 안 된다며 금군과 맞싸울 것을 다짐했다.
왕중양이 손을 흔들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난 확실히 그 맹세를 한적이 있다. 나에게 활사인이 되라고 하는 그 물음에 대답을 하겠다. 하지만 난 어떻게 활사인이 되는지를 모른다!"
히죽 웃으며 무심이 모용준을 쳐다보았다.
"모용 공자님에게 훌륭한 생각이 있었지. 내게만 말하지 말고 어서 왕중양에게도 알려 주도록 하게나."
무심이 다시 왕중양에게로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왕중양, 자네의 동생 모용준에게 좋은 생각이 있네. 그 생각이 곧 내 뜻이니 잘 새겨듣도록 하게나."
사람들은 이윽고 난쟁이 모용준이 걸어 나오는 것을 지켜 보았다. 사람들은 모용준이 난쟁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눈에 모용준이 난쟁이로 보이지가 않았다. 모용준이 보여 준 큰 위력 때문이었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모두들 궁금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겁먹고 있는 눈치였다.
모용준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고는 그가 예전에 보여 주었던 미소와는 다르게 냉기가 스며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 한마디에 왕중양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다는 현실에 모두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눈길을 주었다.
"큰형님, 이 동생이 형님 때문에 인심을 제법 써 왔다는 것을 형님은 모를 것이오. 이번에도 형님을 위해 여러모로 궁리를 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소. 형님은 졌으니 순리대로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야 할 것이오. 금나라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는 말이오. 허나 그곳은 날씨가 몹시 춥고 땅이 거칠어서 고생이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이 동생의 마음도 즐겁지마는 않을 거요. 또한 형님이 지닌 무공은 다시 사라지고 무림의 일에는 두 번 다시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이 동생은 원하지를 않아요. 한때는 형제간으로 지내던 우리가 이처럼 원수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모용준은 자신의 속셈이라도 털어놓듯 감정에 치우쳐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사람들은 모용준의 간괴한 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모습에 역겨움을 느꼈다.
"모용준, 도대체 어쩌겠다는 것이냐? 왕중양을 네 집으로 모셔다가 잘 공대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누군가 모용준을 비꼬았다. 모용준은 그 말을 한 귀로 흘리더니 다시 왕중양을 쳐다보았다.
"큰형님, 생각 끝에 나는 큰형님에게 이런 말씀을 드릴 것을 결정했소. 이 뒷산에 있는 굴을 활사인 묘로 정해……"
모용준의 말은 곧 실행에 옮겨졌다.
사람들은 모두 모용준이 말한 뒷산으로 향했다. 이들은 종남산에 이런 굴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심지어 이곳에서 제법 오래 머물고 있었던 임조영마저도 몰랐다. 아무도 모르게 무심이 이곳에 굴을 하나 파놓은 것인데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굴 어귀에 몰려든 사람들은 저마다 안을 들여다보며 탄성을 질렀다.
모용준이 비웃음을 띤 채 말했다.
"큰형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맹세를 해 보시오. 지킬 수 없는 맹세라면 아예 꺼내지도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왕중양은 무거운 한숨만 내될 따름이었다.
"난 형님을 위해 몇 달 동안이나 명당자리를 찾아 헤매었소. 여러 곳을 둘러보았으나 그래도 종남산이 가장 명당이더군요. 게다가 하늘이 도왔는지 찾으려고 애를 썼던 고분도 하나 만났지 뭐요. 그 안에는 방들이 가득하고 웬만한 살림도구들도 갖추어져 있어요. 무심 공자님은 워낙 인심이 후한 분이라 형님을 위해 그 많은 물건들을 장만해 주신 것이오. 큰형님은 이곳에 들어가 다시는 강호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만사대길일 것이오!"
이제야 모용준이 오래 전부터 꾸며 온 거미줄에 걸린 것을 알고는 사람들은 분노를 씹었다. 이곳에 들어가면 전진교의 제자들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자기가 세운 중양궁도 언제든지 바라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모든 것이 지척에 있는 이 현실이 더욱 왕중양에게는 괴로움이었다. 이런 고통까지도 모용준은 계산에 넣었을 거라 생각하니 더욱 치가 떨렸다. 무덤 속에 갇혀 버린 왕중양은 곧 미쳐서 죽고 말 게 분명했다.
모용준의 미소가 일순간 사라져 버린 것은 이때였다. 뜻밖에도 왕중양은 굴 안을 들여다보며 호탕하게 웃는 게 아닌가?
"수고 많았네, 정말 고마워!"
왕중양이 치하를 하며 대뜸 굴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왕중양의 거동을 본 모용준은 망연해졌다. 왕중양의 말뜻을 얼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의군은 망했고 임조영과도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는데 고맙다니…….
왕중양은 무심에게도 한마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이 안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면 군사들을 물리겠소?"
눈을 크게 뜨던 무심이 얼른 얼굴색을 고치며 껄껄 웃었다.
"하하하! 여부가 있겠소. 헌데 그대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언제나 남을 먼저 생각하니 말이야. 한데 나는 오합지졸의 무리보다는 자네 한사람이 더 중요하지. 자네가 만일 이 굴 속에 들어가서 다시 나오지 않는다면 내 그 약속은 지키겠네,"
왕중양이 사람들과 말없이 눈길을 주고받았다. 자신이 그대로 강호에 남아 있어 주기를 바라는 눈길도 더러 보았다. 특히 단지흥과 홍칠은 더더욱…….
왕중양은 문득 지금의 송나라를 되짚어 보았다. 절반밖에 남지 않는 강산은 뒷전이고 주색잡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황제와 신하들……. 이러한 판국에 왕중양 혼자서 무거운 멍에를 짊어진다는 것은 매우 힘이 들었다.
사람들 뒤에 서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한 여인 임조영. 왕중양은 고개를 옆으로 틀며 그녀를 찾았다. 왕중양 가슴에 가장 큰 미련으로 자리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지금껏 그 어떠한 마음을 전한 적도 없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 본 일도 없는 여인이지만 대협 왕중양의 가슴에 깊이 각인된 사람이었다.
자신을 향해 엎드려 있는 일곱 제자들을 둘러보던 왕중양은 그만 울컥 눈물을 쏟을 뻔했다. 모두 자신만을 믿고 충심을 보여 주던 사람들이 아닌가.
마옥이 엎드린 채 침통한 목소리로 만류했다.
"사부님, 그곳에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전진교가 일어서려면 사부님께서 계셔야 합니다!"
"내가 이곳에 들어간다 해도 전진교는 여전히 발전할 걸세. 내가 들어가지 않으면 오히려 전진교는 무너지는 거네. 전진교의 수제자라는 네가 이만한 이치도 분별하지 못한단 말이냐?"
짐짓 화를 내는 왕중양의 가슴은 천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마옥은 왕중양의 옷자락을 거머쥐고는 놓지 않았다. 구처기와 유처현도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왕중양이 이들에게 조용히 당부의 말을 주었다.
"마옥, 오늘부터 네가 교내의 대사들을 맡아서 처리하거라. 모든 일들은 내 뜻을 따르게 하여 교내의 법도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소림사의 방장(方丈)인 지심(智心) 법사가 왕중양에게 합장을 해 보였다.
"왕 진인께서는 그야말로 지조가 높으시고 고귀한 분이로군요. '이 굴이 있으면 내가 곧 굴이요, 굴이 내 속에 있으면 굴이 아니다.'소승이 왕 진인께 이런 말씀을 선사하고 싶소만……. 왕 진인께서는 내가 한 이 말을 믿으시는지요?"
왕중양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이미 이 말속에 든 참뜻을 헤아리고 있었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살을 해 버렸지 굴속에 들어가겠다고 자청을 했겠는가? 지심 법사를 향해 왕중양이 덤덤한 어조로 내뱉었다.
"내가 굴속에 들어가면 굴이요, 네가 굴속에 들어가는 것과 한가지라네. 물이 있어야 마음이 생기고,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한 가지가 이루어지네."
"하하하핫!"
지심 법사가 크게 웃어젖혔다. 그리곤 마옥을 향해 이렇게 일렀다.
"왕 진인께 축복을 드리게나. 굴속에 들어가도 편안하게 복을 받을 테니까."
지심 법사가 왕중양이 굴속에 들어가는 것을 마치 동천복지(洞天福地)에 들어가기라도 하듯 여기니 마옥은 도통 그 영문을 몰랐다.
"자네들은 더는 비통해 하지 말게나. 왕 진인께서 굴속에 들어가시는 것을 붙잡아서는 안 돼."
지심 법사가 다시 여러 제자들에게 일침을 놓듯 힘주어 말했다.
왕중양은 다시금 고개를 들어 임조영을 찾았다. 그녀의 심정을 알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여러 사람들 틈에 묻혀 있어 보이지가 않았다. 왕중양이 천천히 굴속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사람들은 굴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 보며 끝없는 슬픔에 잠겼다. 지조와 덕성에 있어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천하 협객의 운명이 이렇게 끝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왕중양이 굴안으로 들어간 지 며칠이 지났다. 강호의 호걸들은 제각기 흩어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굴 어귀에 지켜 서서 왕중양이 행여 굴 밖으로 나오지 않을까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일곱제자들은 하루나 이틀 건너씩 굴속에 들어가 필요한 물건들을 건네주었다. 그렇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이렇게 다시 여러 날이 흘렀다. 왕중양의 말대로 전진교는 오히려 흥성해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왕중양이 굴속으로 들어간 소식을 듣고는 탄복하여 일부러 찾아와 전진교에 가담했다. 그리하여 전진교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모여들었고 강호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기에 이르렀다.
고분 속에 들어간 왕중양은 우선 그 안을 살펴보았다. 모용준의 말은 또 한 번 거짓임이 드러났다. 그의 말처럼 무심이 사람들을 시켜 고분 안을 손본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이름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고분을 발견하고는 왕중양을 가둘 속셈으로 꾸민 말이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왕중양은 그중 하나를 침실로 정하고 다른 한 곳은 무공을 연마하는 장소로 삼았다. 다른 방들은 별로 쓸모가 없어 보였다. 제일 아래층에 가 보니 돌로 만든 석관 몇 개가 놓여져 있었는데 매우 견고하고도 거대한 것이었다.
'이곳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군. 죽을 때 남들을 부르지 않아도 되겠어. 이 돌관속에 누우면 그만일 테니까……'
별로 할일이 없어진 그는 맡은 시간을 무공을 연마하는 일에 전념했다. 잠을 잘 때는 불현듯 원숭이가 떠올라 마음이 허전해지기도 했다.
'원형, 꼭 다시 찾아가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사정이 이렇게 되었소. 내 마음만은 형을 그리고 있으니 너무 야속하게 생각 마오.'
한편 그는 이따금 찾아오는 마옥과 구처기 등에게 무예를 전수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일곱 제자들의 내공심법(內功心法)과 무공은 날로 늘어만 갔다.
어느 날, 왕중양이 무덤 안에서 한가로이 앉아 있는데 홀연 어디선가 사람의 외침이 들려 왔다. 굴 어귀까지 나가 본 왕중양은 그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준과 무심이 찾아왔던 것이다. 이들이 타고 온 듯싶은 가마도 그 뒤로 보였다.
"형님, 나와 무심 공자는 함께 임안에 다녀왔소. 거기서 아주 재미있게 놀았지요. 임안의 사루라고 불리는 회모루, 유작루, 청고루 그리고 대백루는 정말 일품이었소!"
모용준이 침까지 튀기며 열을 올렸으나 왕중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제 할말이 없으면 난 그만 굴속으로 들어가겠네.
왕중양이 막 몸을 돌리려고 했다.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소. 그 회모루에 취아(翠兒)라고 부르는 계집이 하나 있었는데 자꾸만 형님의 이름을 부르더군요. 청루의 여인들이 그토록 사모하고 있는 걸 보면 형님도 재미를 많이 보신 모양이군요?"
왕중양은 모용준이 취아라는 이름을 들먹이자 표정이 금세 달라졌다. 어느새 그의 표정의 변화를 읽은 모용준이 속으로 궁리했다.
'왕중양은 대단한 인물이다. 그가 무공을 잃어버렸을 때도 그 누구도 만만하게 보지 못할 정도였다. 지금은 무공이 더욱 견고해졌을 것이다. 그러니 나와 무심은 조심을 해야 한다.'
애당초 모용준과 무심은 왕중양을 협박하여 강호의 일에서 손을 떼게 만들 요량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사자우를 끌어들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사자우의 역할은 이제 끝이 났다. 모용준은 그에게 후한 은자들을 주어 떠나게 했다. 또한 꿈이 이루어지면 꼭 대연제국의 중요한 소임을 맡게 해 주겠다고 약속도 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모용준으로서도 더는 계략을 꾸밀 수가 없었다. 만일 더 심한 압력을 가한다면 그의 일곱 제자들이 들고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일단 왕중양을 이 굴안에 집어넣는 것에는 성공을 한 셈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 따져 보니 계산착오를 범한 게 분명했다. 오히려 왕중양에게 시간을 벌어 준 결과가 아닌가.
모용준은 얼른 다른 수작을 펼치려고 왕중양의 심중을 슬쩍 떠 보았다.
"나와 무심 공자는 납한 태자님에게 찾아가서 형님의 행적들을 말씀드렸소. 태자님께서는 형님에 대해 매우 탄복하셨소. 그래서 꼭 형님을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겠소. 만일 형님도 만나 뵐 의향이 있으시다면 내가 그렇게 태자님께 여쭈어 드리리다."
"이제는 이 굴속의 생활이 몸에 배어 낯선 사람은 만나기도 싫다."
왕중양이 단숨에 거절을 하자 모용준이 다른 사람을 들먹였다.
"형님, 이 한사람을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형님이 보시기만 하면 단번에 알아볼 것이오."
이들이 타고 온 가마 안에서 한사람이 걸어 나왔다. 여인이었는데 걸음걸이가 매우 이상했다. 여인을 보는 순간 왕중양은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녀는 바로 왕정아였던 것이다. 태호에 있을 때 잠깐 인연을 가졌던, 육욕에 눈이 멀어 사내의 품을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이곳까지 왔을까? 왕중양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자신을 찾아왔다가 모용준에게 걸려든 것은 아닌지. 왕중양은 여러모로 추측을 해 보았다. 왕정아가 비틀거리며 왕중양이 있는 어귀까지 와서는 목을 놓아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이곳에 계시나요?"
오라버니라는 말에 왕중양의 가슴을 쓰라렸다. 불현 애틋한 정감이 이는 것 같아 그는 감동하고 말았다. 그저 육욕을 찾던 왕정아가 아닌 그의 회복을 위해 밤새 간호를 아끼지 않던 여인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정말 온 힘을 다해 왕중양의 회복을 애썼고 밤을 새우기도 했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왕정아의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어렸다.
"오라버니가 이곳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안 보이죠? 오라버니는 이름이 드높은 협객이 아니랍니다. 그런 오라버니는 이런 굴속에서는 살 수가 없어요. 혹시 나를 속이려는 게 아닌가요?"
"속이긴 누가 속아!"
모용준이 자기 뒤쪽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그녀에게 침을 뱉듯 한 마디 던졌다. 드디어 왕정아가 어둠 속에 가려져 잠시 보이지 않던 왕중양을 발견했다. 오매불망 그리던 왕중양을 본 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오라버니, 그동안 별고 없으셨나요?"
왕중양은 그녀의 뒤에 바싹 붙어 서 있는 모용준이 신경에 거슬렸다.
"어서 물러서지 못해욧!"
그녀 역시도 왕중양의 눈빛을 읽었는지 고개를 돌리며 쏘아붙였다.
"난 힘들게 오라버니를 만났어요. 오라버니와 긴히 나눌 말이 있으니 썩 물러나세요!"
왕정아의 얼굴은 몹시 초췌해 보였다. 그녀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전 그 사내를 버렸답니다. 오라버니가 떠난 뒤 이내 헤어지고 말았어요. 전 지금까지 홀로 지내면서 자나깨나 오라버니 생각만 했어요."
왕중양이 묵묵히 팔짱을 끼고 서 있자 그녀가 다시 애원을 하듯 매달렸다.
"오라버니, 제가 왔으니 이제부터는 외롭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사실은…… 전 오랫동안 사내의 품을 떠나 있었어요. 너무 오랫동안……."
그녀는 그동안 참았던 온갖 애교와 교태를 한꺼번에 늘어놓을 심사였다. 왕중양의 머리 속에서는 낯설지 않은 광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왕정아가 보이는 행동은 모두 그 배 위에서 했던 말이나 몸짓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조금 전 느꼈던 다감한 감정은 사라지고 또다시 육욕에 눈이 먼 한 탕부와 마주하고 있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다가들며 왕중양의 손을 잡으려 했다.
왕중양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더듬더듬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난…… 난 도사의 몸이오……."
"그럼 나도 도사가 되면 되겠지요? 낮에는 도사 노릇을 하고 밤이면 오라버니의 따뜻한 이불이 되어 드리겠어요. 도사들에게는 원래 좋은 이부자리가 없는 법, 밤이면 얼마나 한기를 느끼겠어요?"
그녀는 마치 꿈을 꾸듯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왕중양이 그저 목석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녀는 더욱 노골적으로 매달렸다.
"오라버니가 싫다면 어쩔 수야 없겠지만…… 하지만 저를 한 번만 보기라도 해 주세요. 제 살결이 어때요? 희지요? 얼굴은 또 어떠세요?"
이처럼 곤혹스런 순간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왕중양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녀가 또다시 거머리처럼 달라붙으려 하자 모용준이 불쑥 끼여들었다.
"형님, 원래 저는 형님을 도우려 했었소이다. 형님을 대신해서 사내에게 굶주린 이 여인의 욕망을 채워 주고자 했지요. 허나 죽어도 싫다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더군요. 오로지 형님만을 만나겠다는 게 아니겠어요? 그 정을 봐서라도 매몰차게 뿌리치지는 못할 겁니다."
이제는 모용준까지 합세하여 왕중양을 밑둥에서부터 마구 뒤흔들어 놓을 작정이었다. 왕중양이 줄곧 부처님인 양 눈을 감은 채 가슴을 닫아 버리자 모용준은 집요하다 못해 발악을 해댔다.
"형님, 형님은 아마도 굴속에서 나오는 게 나을 겁니다. 납한 태자님을 만나 뵈면 형님은 태자님의 상빈으로 대접받을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이 여인과의 혼사도 원만하게 치를 수 있을 겁니다."
이 말에 가장 기뻐 날뛴 것은 왕정아였다.
"오라버니는 이 굴속이 그리도 좋다는 말이에요?"
"정아, 어서 여기를 떠나 주오."
드디어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침통한 목소리였다.
"이 굴속에서 난 나만을 위해 목숨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니오."
"오라버니가 정 나오지 않겠다면 내가 들어갈 수도 있잖아요?"
"정아, 제발 여기를 떠나주오.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것만이 나를 위하는 길이오. 난 정아를 돌볼 겨를이 없소. 난 전진교의 교주……."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더 이상 애원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왕중양의 굳은 뜻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왕중양이 무슨 일이 있어도 굴속에서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녀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오라버니는 훌륭한 사내예요. 오라버니가 떠난 후 난 매일 밤마다 꿈을 꾸었답니다. 난 오라버니가 세상을 떠난 줄로만 알았어요. 후에 소문을 들으니 한 사내가 금나라 놈들에 저항하며 싸우고 있다고 하더군요. 모두들 중원 땅에서 으뜸가는 사내 대장부라고 칭찬을 했어요. 그런데 그의 이름이 왕중양이라는 말을 듣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아세요? 그분이 내 오라버니라고 자랑했더니 모두들 믿어 주지를 않았어요……."
왕정아의 서러움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녀는 눈가를 훔치며 돌연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어요. 이것으로 우리는 영원히 이별을 해야 하는 건가요.? 저승에서나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고개를 돌린 그녀가 모용준에게 공손한 태도로 말을 건넸다.
"당신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지만 헛수고만 한 셈이네요. 그러나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해요."
말을 마친 그녀는 갑자기 몸을 획 한쪽으로 돌리더니 나는 듯 달려갔다. 왕중양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강한 빛을 냈다. 그녀가 돌문에 자기의 머리를 박고 만 것이다. 머리가 부서 졌는지 그녀의 머리에서는 피가 계속 쏟아졌다. 그녀는 맥없이 땅바닥에 쓰러져 경련을 일으켰다. 왕정아는 겨우 머리를 들고는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난 마지막으로 오라버니를 보고 싶어요, 오라버니, 그…… 그 눈 언저리가 아……직도 젖어 있지 않나요?"
왕중양은 안개가 긴 듯 흐릿한 시선 속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죽어 가는 그녀를 향해 어떤 말을 해줄 수가 있겠는가. 그녀는 이미……이미 죽었다. 왕중양은 잠시 손을 들어 무언가를 잡으려는지 허우적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손은 맥없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형님의 인품에 다시 한 번 고개가 숙여지는군요 저에게는 왜 이토록 진심으로 대해 주려는 계집이 없는지……."
모용준의 탄식 소리를 들으며 왕중양은 더 무거운 숨을 쉬었다. 문득 모용준만 아니었다면 정아 역시도 이렇게 죽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에 주먹이 저절로 모아졌다.
"모용준이 놈! 난 네 놈을 꼭 죽이고 말 것이다!"
모용준이 깜짝 놀라며 왕중양을 설득하려 했다.
"형님, 한낱 계집에 불과한 목숨인데 뭘 그러시우. 이런 말도 있지 않소. 형제는 수족과 같고 마누라는 옷과 같다고 말이오. 수족은 바꿀 수 없어도 옷이야 얼마든지……."
"네 놈을 언젠가는 죽이고 말테다!"
왕중양의 독기 어린 눈빛에 모용준은 은근히 겁을 집어먹었다. 그러나 철창에 갇힌 호랑이일 뿐이란 사실을 상기하며 얼른 자세를 가다듬었다.
"형님, 난 아직도 형님의 동생이 아니오? 동생들에게 너무 매정하게 굴지 마시오. 그러니 셋째는 코빼기도 내밀지 않는 게 아니겠소? 난 날마다 형님이 얼마나 고독해 할까 걱정이 돼서 잠이 다 오지 않는단 말이오."
가슴이 쓰리고 입 안으로 쓴맛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더는 가증스런 모용준과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왕중양은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도적놈은 제 발이 저린 법이지."
"그 말씀이 맞소. 그리고 난 오랫동안 궁리를 했었소. 형님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를 말이오. 오늘 내가 그걸 형님에게 드릴려고 가져왔소이다."
또 무슨 얄팍한 수로 원성을 쌓으려고 하는지 왕중양은 내심 부아가 치밀었다.
모용준이 뒤에 있던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수하들이 다른 가마를 들고 다가왔는데 그들의 동작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이건 내가 형님에게 드리는 선물이오. 어서 받으시지요."
다시 모용준의 신호에 따라 가마 안에서 한 여인이 가볍게 걸어 나왔다.
"아니, 저 여인은!"
여기서 자지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놀라움을 추스리기도 전에 모용준이 다시 입을 놀려댔다.
"형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두 계집이었소. 하나는 임조영이었지만 소유하지 못한 게 한으로 남을 뿐이오. 허나 자지는 얻었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니겠소. 하하, 한 가지 궁금할 것이오. 처음부터 자지가 나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소. 내가 손을 썼지요."
왕중양은 뜻하지 않게 이어진 충격의 여파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모두가 모용준이 꾸민 짓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치가 떨렸다.
"형님, 왜 후회를 하고 계십니까요? 원래 형님의 몫이었던 옷을 내가 입은 셈이지요. 막상 옷을 빼앗아 입고 나니 차츰 후회가 들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오늘 이렇게 형님의 옷을 돌려드리려 합니다. 형님께서는 꼭 받으셔야 합니다. 이 굴속의 밥은 몹시 추울 테니까요."
"자지, 어서 말을 해 봐라!"
모용준은 대답 없는 왕중양 대신 자지를 채근했다.
"큰공자님……."
자지는 왕중양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과연 부럽소이다. 모든 여인들이 형님에게는 마음을 쉽게 열어주니 또 한 번 감탄하고 또 내 자신이 미워지는군요."
모용준이 혼자서 탄식을 했다.
자지가 이때 왕중양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왕중양의 눈에는 오히려 자지의 좋지 않은 안색이 염려되었다. 아무래도 무슨 시름에 싸여 있는 것만 같았다.
"혹시, 나쁜 독에 중독된 것은 아닌가?"
왕중양도 목소리를 죽여 묻자 자지가 더욱 슬피 울며 어깨를 들먹였다.
"저자가 독약을 먹였어요. 미약이라 하는데 독성이 강하고……, 또 내가 발작을 할 때면 저자는 나에게 임조영이라 자칭하라며 못살게 굴기도 해요. 흑……"
왕중양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뼈마디가 으스러질 정도로 그는 주먹을 틀어쥐며 이를 갈았다. 자지의 눈물은 왕중양의 가슴에 불을 당기기에 충분했다.
왕중양이 모용준에게 말 하나하나를 짓씹듯 물었다.
"모용준, 네가 자지를 내게 주겠다고 했지?"
"그럼요. 형님께서 굴에 들어가도록 허락만 하시면 이내 드리리다."
말을 끝낸 모용준이 무심과 눈을 맞추며 낄낄거렸다. 그러나 왕중양은 선뜻 그럴 수가 없었다. 왕중양이 여인을 굴속으로 불러들인다면 그의 명성은 더러워질 게 뻔했다. 한편 들여 놓지를 않는다면 왕중양이 죽기 일보 직전의 사람을 돌보지 않았다는 소문으로 떠돌게 될 것이다. 왕중양이 갈등을 겪으며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모용준이 소매 안에서 단검을 꺼내 자지를 위협했다.
"자지, 어서 빌어라. 만약 너를 구해 주지 않으면 난 너를 죽여 버릴테다!"
단검을 빙빙 돌리며 모용준은 자지를 더욱 매섭게 위협했다. 그를 주시하고 있는 왕중양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왕중양이 화기를 가라 앉히며 어렵게 입을 때었다.
"좋다. 네 말대로 할 테니, 어서 이 안으로 들여보내라."




제33장 모용준의 최후
왕중양의 태도에 모두들 놀라고 말았다. 왕중양이 이렇게 나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방금 전 왕정아가 찾아왔을 때도 그녀를 굴 안으로 불러들일 수도 있었는데…… 그랬더라면 그녀의 목숨은 구했을 것 아닌가? 혹시 자지도 그녀처럼 돌에 머리를 찧어 죽을까 봐 그런 것인가?
모용준은 속으로 온갖 잡생각을 다해 보았지만 얼른 하나를 집어 낼 수는 없었다.
자지의 눈에는 왕중양이 몹시 초조해 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 자기 때문에 그가 불안에 떨고 있는 것 같아 조심스러워졌다.
"큰공자님, 전…… 전 들어가지 않겠어요."
그녀는 앞으로 닥칠 일들이 모두 불길할 거라 예감하고는 몸까지 떨어댔다. 죽는 한이 있어도 굴속으로는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왕중양이 애써 미소를 보이며 설득하려고 했다.
"자지, 그 임안의 치모루에 나와 임조영이 그대를 찾아갔었던 걸 아는가? 우리는 그대를 구해 내려고 했었소."
"알고 있어요."
자지의 눈가엔 다시금 눈물이 비치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그때 몇몇 여인들은 구해 내지를 못했지.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오."
말을 중단한 왕중양이 긴 한숨을 쉬었다.
"쯔쯧, 우리 형님은 언제 봐도 저렇게 정이 많다니까. 그런데 불행히도 굴속에 갇혀 있으니 형님의 귀중한 세월들이 다 흘러가 버리는구나."
무심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만 미인이 굴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자네 형님도 이제부터는 살맛이 날 게 아닌가? 그리고 자네는 동생으로서의 처신을 다한 게 되지 않겠어?"
두 사람은 마음이 잘 맞는지 이렇게 떠벌리고는 낄낄 웃어댔다.
"자지 처녀, 굴속으로 어서 들어와."
왕중양이 다시 권유를 하자 자지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서 왕중양은 첫사랑이었다. 반화대회 때 그녀는 첫눈에 왕중양을 진정한 사내로 마음에 접어 두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모용준의 마수에 걸려들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알겠어요."
그녀가 굴속으로 들어갔다. 자지가 굴속으로 들어가자 왕중양에게 거듭 예를 올린 모용준이 한마디했다.
"내가 입었던 옷이라고 꺼림칙하게 생각 마시오. 아무쪼록 즐겁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지가 발작을 하게 되면 형님은 땀깨나 뿌려야 할 것이오. 헤헤헤."
모용준은 자신의 계략대로 일이 진행돼 가고 있어 매우 흡족해 했다.
초막 안에 앉아 있는 임조영, 그녀는 아직 뱀독이 가시지 않은 몸이라 거동이 불편했다. 커다란 돌침대 위에 앉아서 천년한담(千年寒痰)에서 주워 온 옥돌로 뱀독을 뽑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한참 뱀독을 뽑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그녀의 사화꾼 계집의 앙칼진 목소리가 터졌다.
"냉큼 물러가요! 천하의 사내 놈들은 다 나쁜 놈이야! 순순히 가라고 할 때 가지 못하겠어?"
뒤를 이어 모용준의 간사스런 음성도 들려 왔다.
"쥐방울만한 계집의 입이 어찌 그리 더럽더냐? 사내를 그렇게 욕하는 네 년도 언젠가는 사내 앞에서 다리 벌리고 달달 떨 때가 올 것이다!"
그 말에 사화꾼 계집은 화가 치민 모양이었다.
"이 검을 받아랏!"
임조영은 움직이지 않고 치료에만 전렴했다. 곧 무심의 웃음 소리도 이어졌다.
"너희 집 아가씨가 집안에 사내를 숨겨 둔 것은 아니냐? 사람이 오는 걸 이렇게 경계하는 걸 보니 수상해!"
"허튼 소리 마시오! 우리 사부님께서는 지금 치료에 전렴하시고 계신다. 방해하지 마시오!"
"한창 치료중인데 우리가 들어서면 두 가지 나쁜 짓을 범하게 되겠네?"
모용준의 너스레 뒤로 무심의 웃음소리가 또 들렸다.
"두 가지 나쁜 짓이라니 ? 다른 한 가지는 뭐지?"
"우리가 들어서면 미인의 빙옥 같은 몸을 보게 되지 않소?"
이렇게 나불거리던 모용준이 큰소리로 임조영을 불렀다.
"셋째 동생, 내가 왔소!"
그의 목소리에는 다분히 장난기가 들어 있었다. 임조영을 노리갯감 정도로 여기고 있음을 단면으로 드러내는 일이었다. 더욱 울상이 된 사화뿐 계집이 다시 검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검이 두 사람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그녀의 검은 곧 모용준의 발길에 채여 먼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무심이 계집의 손목을 잡아끌면서 모용준과 함께 초막 안으로 들어섰다. 못박인 듯 앉아 있는 임조영의 정수리에서는 흰 안개 같은 기운이 조용히 피어 올랐다. 이 광경을 본 모용준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떨렸다. 모용세가에 있는 기이한 기공이었는데 그렇다면 임조영 역시도 그것을 연마했다는 뜻이리라. 이 기공을 기경공부(寄經功夫)라고 하는데 깨끗한 여인들만이 연마해 낼 수가 있는 특별한 것이었다. 보아하니 임조영은 이미 몸에 익숙해 있어 자유자재로 부리고
있는 듯싶었다. 모용준이 짐짓 목에 힘을 주어 인사를 건넸다.
"셋째 동생, 대단한 기공을 연마한 것을 축하하네. 허나 그저 깨끗한 여인의 몸으로 늙기에는 너무 아까워. 고집부리지 말고 내게 오라구. 그대는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국모가 될 테니까……."
임조영은 두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를 않았다. 멋쩍어진 모용준이 무심에게 얼굴을 주었다.
"무심 공자, 다들 군자는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고 하던데, 내가 군자다운가?"
"자넨 군자가 아니네."
문심이 대뜸 면박을 주자 모용준이 박수를 딱 하고 쳤다.
"그래, 그래 ! 난 군자가 아니지. 군자가 아닌 내가 괜히 군자인 척할 필요가 있나! 우리 셋째 동생의 몸에 나를 강제로 쑤셔 넣으면 문제는 해결이 되겠지. 이미 엎질러진 물일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자네가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내가 하겠어. 그러면 이 무심의 마누라가 되는 셈이지."
모용준이 임조영에게로 바싹 다가들며 말을 건넸다.
"셋째, 내가 동생을 못살게 구는 게 아니야. 만일 내가 동생을 차지하지 못하면 저 무심이 손을 쓰게 돼. 난 동생을 무심에게 빼앗기고 싶지는 않거든."
모용준이 양팔을 벌리더니 임조영을 끌어안았다. 그는 임조영이 단전을 하고 있는 중이라 손을 쓰지 못한다는 것도 계산에 넣고 있었다. 그가 임조영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돌침대 위에 오래 앉아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처음으로 잡아 보는 그녀의 손목이라 모용준은 날듯이 기뻤다.
그토록 원하던 임조영을 손 안에 넣었다고 생각한 모용준은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가 무심을 향해 말했다.
"무심 공자는 그만 물러가게나."
이때였다. 이렇게 지껄이던 모용준의 입이 갑자기 옆으로 틀어 지면서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입을 실룩거려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슴에서 둔탁한 아픔이 일었다. 어느 틈엔가 임조영이 소맷자락에 숨겨 두었던 단검으로 그의 가슴을 찔렀던 것이다. 자신의 가슴과 임조영을 번갈아 보던 모용준의 두 눈이 사납게 돌변했다.
"네가 나를…… 나를 죽이면 우리 가문의 대가 끊어진다! 내 아들을 낳아주고 나서 나를 죽여라!"
모용준이 고통을 참아 가며 무심을 행해 고개를 돌렸다.
"이 계집이 나를 죽이려 하네. 자네도 아는가? 옥녀심경을……."
무심이 옆에 있던 사화군 계집의 혈도를 눌러 놓고는 대꾸했다.
"자넨 이만하고 가보게. 임조영은 이제 내 것이니까. 그리고 자네가 말한 옥녀심경은 매우 차가운 검법이지. 그것을 오래 연마하다 보면 자연히 사람도 검도 다 무정해지고 속세의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욕망조차 사라져 버리지. 이제 자넨 끝장이겠군!"
"아냐, 난 죽지 않아!"
단발마의 외침이 모용준의 작은 입에서 솟구쳤다. 그는 음욕로 물들어 가는 무심의 얼굴을 쏘아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넌 임조영을 가질 수 없다. 임조영은 내……."
모용준의 목소리가 차츰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모용준의 가슴은 피로 낭자했다. 그는 거의 숨이 넘어갈 듯 할딱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임조영의 분노는 식지를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모용준은 원수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왕중양과의 사이를 벌어지게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왕중양의 대사까지 망쳐 놓은 인물이라 죽이고 싶었다. 임조영이 다시 모용준의 가슴에 단검을 쑤셔 박았다.
"윽!"
모용준이 고개를 꺾었다. 무심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훌륭하오! 정말 강호에 이름을 떨친 여협답소이다! "
"당신도 이자를 죽일 마음이었소?"
임조영의 물음에 무심이 대답을 피했다. 그는 가물가물 숨결을 이어 가고 있는 모용준을 힐끔 쳐다보더니 한참후에야 입을 열었다.
"날마다 황제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는 자를 어느 누가 곁에 두고 싶어하겠나?"
무심만이 아니라 태자 납한도 모용준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언젠가는 버릇을 고쳐 놓으리라 이미 작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으……."
모용준은 급기야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절명하는 모용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무심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친구를 이렇게 죽이기까지 하는 너를 용서할 수는 없다!"
무심이 밖에 대고 소리치자 사내 몇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임조영과는 이미 안면이 있는 사내들이었다. 지청과 목우와 계수수였다.
지청이 간죽거렸다.
"원래 우리는 모용세가의 사람들이었지. 무심 공자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말이야. 무심 공자께서 우리에게 하신 한 말씀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이지."
그는 임조영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손짓을 해 가며 설명을 했다. 계수수가 말을 받았다.
"무심 공자께서 우리들에게 하신 그 말씀이 뭔지 알고 싶은가?"
임조영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계수수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일러주었다.
"무심 공자께서는 이렇게 허락하셨지. 궁 안의 여인들을 마음대로 하라고 말이야. 헤헤헤."
무심이 몇 걸음 임조영 쪽으로 옮기며 말했다.
"임 소저, 난 임 소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꼭 내 손에 넣기로 다짐했었소. 그래서 아주 거대한 계략을 만들었었지. 첫번째로 왕중양을 무너뜨리고 두 번째로는 모용준을 제거하는 것이었소. 하하하, 그런데 그 모두가 생각처럼 되었으니 이 무심이야말로 대단한 인물이 아니겠소?"
모용준보다 더 음험하고 악독한 자가 아닐 수 없었다. 평소에는 모용준의 뒤에 서서 어리숙하게 행동했던 것도 모두가 이런 일을 이루기 위한 계산 속이었던 것이다. 임조영은 모용준의 죽음으로 가라앉으려 하던 분노가 다시금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우리들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사실 임 소저에게 한 가지 알려 줄 것이 있어서였소."
임조영은 이들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막 깨어난 사화꾼 계집이 몸을 비틀어대고 있었다. 그녀는 지청의 손에 잡혀 젖가슴을 내맡기고 있는 꼴이었다. 지청이 그녀의 젖가슴을 마구 주무르며 눈을 까뒤집었다.
"그 애에게서 손을 떼면 들어주겠다!"
임조영이 이들의 요구에 순응하려 하자 계집이 손을 내저었다.
"사부님, 전 이 놈들 손에 죽어도 괜찮아요. 다만 제 원수를 갚아 주세요!"
입맛이 쓰다는 투로 계집을 노려보던 무심이 뇌까렸다.
"네 년의 말이 쉬울 것 같으냐? 네 년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실컷 가지고 놀 테다!"
무심의 말이 떨어지자 사내들의 눈길이 득달같이 계집의 젖가슴과 허리 쪽으로 달려 들었다. 계수수가 징그러운 웃음을 앞세웠다.
"흐흐흐, 이 홍분전두가 첫 맛을 봐야겠다. 너희들은 좀 비켜라!"
계수수는 임조영이 보는 앞에서 계집을 강제로 욕보이려 했다.
"네 놈들이 그 아이 몸에 손을 댔다가는 이 검으로 염통을 꿰어 놓을 것이다!"
임조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살기 어린 눈빛을 사내들을 향해 쏘았다. 무심이 사내들의 행동을 중지시키고는 임조영에게 제의했다.
"난 임 소저에게 한 가지 일만 말하고 싶소. 임 소저가 들어주겠다면 이 애는 놓아줄 것이오."
"들을 테니 어서 말해 봐라!"
무심이 손짓을하자 계수수가 계집의 가랑이 속으로 집어넣었던 손을 빼며 투덜거렸다. 풀려난 계집의 두 눈에서도 살기가 뻗어 나왔다.
"내게는 한 가지 부탁밖에는 없소. 나와 함께 왕중양을 만나 보는 것이오."
무심의 말에 임조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왕중양을 만나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불현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작은 부탁도 있소. 그 고분에 가서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되오. 왕중양을 보기만 하면 되오. 그 인품이 높다고 하는 대협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만 하라는 뜻이오."
임조영의 가슴에는 무수히 많은 의혹의 물결이 일었다. 도대체 왕중양이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기에 이러는가. 그녀로서는 쉽게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심의 말을 순순히 들어주고 싶지 는 않았다. 아무래도 또 어떤 모략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아서였다.
"싫소!"
무심이 다시 임조영을 설득하고자 애를 썼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오. 그대는 꼭 왕중양의 지금 모습을 눈으로 봐야 하오. 또한 아까 한 약속을 우리가 지킬 수 있게 하려면……,"
말끝을 흐린 무심이 계수수에게 눈길을 돌렸다. 우쭐해져서 어깨를 흔들던 그가 뱀눈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 계집을 맡아 잘 보살피겠소!"
임조영은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와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하오."
무심이 다시 임조영과 약속을 했다. 계집에게 임조영이 당부했다.
"넌 여기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라. 얼른 다녀올 테니."
임조영이 검을 챙겨 들고는 앞장을 섰다.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왕중양을 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어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아직 그녀의 가슴에는 왕중양이 깊고 큰 자리로 들어 있었다.
자지와 마주앉은 왕중양은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그녀에게 물 한잔을 따라 주며 왕중양이 걱정의 말을 했다.
"지친 것 같은데 물을 좀 마시고 쉬지."
"왕 공자님, 전 나쁜 여자예요. 정말 나쁜 여자!"
자지가 자신의 머리를 잡고는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너무 지치고 놀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한 왕중양은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푹 쉬시오. 여긴 안전하니 마음을 놓고 어서……."
"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전 지금 반화대회 때 느꼈던 암담한 심정과 마찬가지예요. 앞으로 전 어떻게 될까요?"
자지의 모습에서 왕중양은 맑고 투명한 빛을 보았다. 그것은 여리고 해맑은 여인에게서 풍기는 아름다움이었다. 왕중양이 자지 옆으로 다가앉았다.
"난 가서 무공을 연마해야겠소. 자지 처녀는 여기서 마음놓고 쉬도록 해요."
자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왕중양을 빤히 쳐다보았다.
"왕 공자님, 전 어쩐지 자꾸만 무서워요……"
"이 굴속에는 나 혼자뿐이오. 무서우면 나를 부르면 되지 않소?"
입술을 가볍게 문 자지가 다시 알았다는 고갯짓을 했다.
이즈음 무심과 그의 일행들은 고분이 있는 뒷산 기슭에 당도했다. 무심이 사내들에게 명령했다.
"이걸 옮겨 놓아라!"
네 명의 사내가 달려들어 커다란 무쇠 지렛대로 육중한 바위를 옮기기 시작했다. 넷이 한꺼번에 힘을 주자 바위가 한쪽으로 젖혀졌다.
"임 소저, 여기가 바로 석실의 입구요. 나와 함께 왕중양을 만나러 갑시다."
무심과 어두컴컴한 굴속을 번갈아 보고 난 임조영은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약속을 파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무심의 뒤를 따라 굴 안으로 들어갔다.
굴 안은 구불구불한 암굴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꽤 오래 걸어 들어간 이들은 어느 방 앞에 이르렀다. 굴 안을 둘러보는 임조영의 마음은 쓰리고 아팠다. 왕중양이 이런 곳에 갇혀 있다니. 왜 모용준이나 무심처럼 처신하지 못할까? 그러나 그것이 어쩌면 왕중양만이 할 수 있는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바닥에 놓여진 석관들에 눈길을 주었다.
"왕중양이 늙어 죽는다 해도 걱정은 없겠네. 하하하……."
석관을 보며 하는 무심의 말에 임조영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시 안쪽을 향해 걷던 무심이 걸음을 세웠다.
"다 왔어. 저길 보라구!"
무심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과연 왕중양이 앉아 있었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는데 임조영의 눈에는 의연한 모습으로 비쳤다. 언제나 저렇게 앉아 무공 연마에만 힘을 쓰고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드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저 목석 같은 사내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저렇게 앉아만 있는 왕중양, 그를 향한 이제껏 시간 앞에서 어찌 아무런 느낌이 없겠는가.
다른 방에 혼자 남겨진 자지의 몸은 서서히 뜨거운 열기로 달아 올랐다. 처음에는 가슴속에 미미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의 가슴을 뒤집어서 돌판 위에 꺼내 놓고 식히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신음을 하면서 자기의 얼굴을 차가운 석벽에 가만히 댔다.
'내 가슴은 불타는 듯 뜨거워 오르는데 이 석벽은 얼마나 찬가? 내 가슴도 이 석벽처럼 식었으면 좋을텐데……. 하지만 이 석벽마저 곧 뜨거워질지도 모른다.'
자지의 머리 속은 이미 혼미해진 뒤였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왕중양을 행해 뜨거운 가슴을 내밀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안 돼! 내가 왕 공자님에게 이 불타는 가슴을 보일 수는 없다. 그분은 어지신 분이야!'
그렇게 자신을 꾸짖으면 꾸짖을수록 그녀는 점점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더욱 가무러지는 정신을 가다듬고는 석벽을 마주한 채 중얼거렸다.
"왕 공자님은 혼자 이곳에 계신다. 얼마나 고독하실까? 하지만 나 역시 고독해, 난 그분에게 가야 해!"
그녀는 비틀거리며 맞은 편에 있는 석실로 향했다. 그곳에 가면 왕중양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그곳에 없다면 온 고분 안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그를 만나야 했다.
왕중양은 무공을 연마하는데만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그의 무공은 지금 천하에서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최고수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욱 무공을 갈고 닦았다. 이런 왕중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임조영의 가슴에서는 새롭게 정이 샘솟았다.
'어서 달려가 저 사람과 말을 나누어야 하는 게 아닌가. 지금껏 단 한번도 나누지 못했던 말들을 주고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비틀거리며 들어서는 게 보였다. 옷매무새가 온통 흐트러져 있고 걸음마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곧 쓰러질 듯했다. 그녀는 왕중양 앞으로 다가가 섰다. 순간 임조영의 눈이 커졌다. 자세히 보니 바로 자지가 아니던가? 자지는 왕중양의 품에 무너지듯 안겼다.
"왕 공자님, 전 공자님을 처음부터 사모하고 있었어요."
"자지 처녀, 왜 이러는 건가?"
왕중양은 무척 당황했다. 그렇지만 자지는 왕중양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눈물까지 흘리며 더욱 집요하게 왕중양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제 팔자는 왜 이다지도 기구한가요?"
"자지, 내가 그대를 도와줄 테니 걱정 마시오."
"그래요, 전 바로 공자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이렇게 찾아온 거예요. 공자님도 알고 있다시피 전 모용준이 먹인 미약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요. 제가 음탕한 계집으로 보이시나요?"
"자지 처녀는 음탕한 여인이 아니오. 다만 모용준 때문에……."
"호호호호!"
자지가 갑자기 깔깔대며 왕중양의 옷 속으로 손을 쓰윽 집어 넣었다. 그녀가 왕중양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서 제발 저를 살려 주세요!"
온몸을 떨고 있는 자지가 애처로웠다. 그녀는 목이 마른 사람처럼 혀로 입술을 적시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 광경을 말없이 지켜 보고 있는 임조영에게 무심이 슬쩍 말을 걸었다.
"바로 이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오자고 한 것이오. 사러와 계집이란 자기들만의 공간이 생겼다고 여기면 언제나 저런다니까."
그녀는 대답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녀는 지금 눈앞으로 흐르고 있는 욕정의 강물에 몸을 적시고 있는 중이었다. 엉뚱하게도 왕중양과 자신이 알몸으로 한데 엉겨 붙어 있는 형상이 보이는 듯했다. 왕중양과 자지가 나누는 말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자지 처녀, 여기로 앉아요. 내가 치료해 줄 테니 걱정 말고……."
왕중양은 자지를 품에서 떼어낸 후 모용준이 쓴 미약을 제거하려고 했다. 그가 손을 홱 뿌리치자 자지의 몸은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가볍게 다시 왕중양 앞으로 내려왔다. 자지는 왕중양에게 등을 보이고 앉았다. 왕중양이 그녀 등 뒤에서 말했다.
"자지, 사람이란 가슴이 뜨거워질 때는 흔히 황당한 일들을 벌이게 되는 것이오. 그리고는 후회를 하게 되는데 자지는 절대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해서는 안 되오."
왕중양은 진심 어린 충고로 달래려고 했지만 자지는 막무가내였다.
"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훗날에 가서도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전 오로지 공자님의 훌륭한 아내가 되기만을 원해요. 그러니 부디……‥."
입을 굳게 다문 왕중양은 두 손바닥을 자지의 등에 대고는 내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망가진 자지의 몸을 원래대로 회복시키고 싶었다. 자신이 지닌 기력을 다 쏟아내는 한이 있어도 자지만은…….
시간이 꽤 흘렀다.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고 있는 무심은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꽃 같은 여인이 품속을 파고들어 교태를 부리는데도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는 왕중양의 도고한 기품에 기가 눌렸다. 그는 자신의 계산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에 당황하고 있었다. 임조영을 데리고 와 왕중양과 자지가 나누는 욕망의 활화산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결과는 전혀 엉뚱하게 전개되어 갔다. 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지금 임조영이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거였다.
그녀가 눈물을 거두며 무심에게 물었다.
"무엇을 보라는 것이오?"
그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그녀 역시도 왕중양의 참모습을 재확인한 것에 감동이 되었던 것이다.
자지의 음성이 조용히 석벽을 타고 들려 왔다.
"공자님은 제가 싫으세요? 어서 말씀을 해 보세요. 저는 싫고 임조영만 좋아한다는 거죠?"
자지의 얼굴에는 원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자지 처녀의 말이 맞아. 난 임조영, 그녀만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내라오."
"하지만 저도 아껴 주실 수 있잖아요?"
자지의 발작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녀는 왕중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을 하는가 하면 신음을 토하며 마구 뒹굴기도 했다.
"안 돼요! 아무리 제게 공력을 넣는다 해도 저를 달래 줄 수는 없어요!"
고통을 이기지 못한 자지는 이리저리 뒹굴며 신음했다. 저러다 석벽에 머리를 찧을까 봐 왕중양은 걱정이 되었다.
"공자님이 공력을 넣을수록 전 점점……."
임조영이 무심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무심 공자, 도대체 나더러 무엇을 보라는 거요?"
무심이 흡뜬 두 눈을 왕중양에게로 던졌다. 자지를 본 체도 하지 않는 왕중양의 태도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왕중양은 사람도 아냐. 사내도 아니라구!"
저 혼자서 중얼거리던 무심은 매우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걸어 나가던 임조영이 무심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난 왕중양의 태도를 보고 싶어. 이 활사인 묘에 내가 찾아왔는데 왕중양이 과연 어떻게 할지를……."
"알려서는 안 돼!"
급히 손사레를 치며 무심이 임조영을 잡았다. 임조영을 가로막고 서는 찰나 그의 코앞으로 시퍼런 검이 번뜩였다.
"네 놈이 순순히 물러가지 않으면 난 왕중양에게 알릴 것이다. 왕중양과 합심해 너를 꼭 죽이고 말겠다!"
무심과 뒤에 떨어져 있던 사내들은 곧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왕중양의 노여움을 샀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활사인 묘가 아닌가. 이곳에 함부로 들어온 것 만으로도 죽음을 면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자지의 몸에 내력을 불어넣고 있는 왕중양의 머리 위에서도 흰 기운이 피어 올랐다. 그런데 자지의 열은 쉽게 가실 줄을 몰랐다. 왕중양의 가슴에도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왕중양의 눈앞으로 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는데 공교롭게도 왕정아였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여전히 자기가 섬기고 싶은 사내는 하나뿐이라는 말을 했다.
"네가 그렇게 앙탈을 부린다고 뜻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으냐?"
난데없이 들려 온 여인의 목소리에 왕중양은 혹시 죽은 왕정아의 혼백이라도 나타난 게 아닌가 싶어 어리둥절해졌다. 주위를 돌아보던 왕중양의 시선에 한 여인의 모습이 깊이 와 박혔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임조영이 아니던가? 임조영이 가까이 오더니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중독이 된 게 아니오. 그러니 아무리 내력을 넣어 주어도 소용이 없어요. 오히려 가슴속에 차 있는 욕정의 불길에 부채질을 해 주는 셈이에요. 자지를 구하는 길은 오직 하나, 저보다 그 방법을 잘 아시고 계실 텐데요."
임조영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침착성을 잃지 않아 차갑게 들렸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왕중양이 잠시 망설이자 다시 임조영이 미소를 지었다.
"과연 무슨 방법으로 자지를 구하겠어요? 죽어 가는 사람을 그저 보고만 있을 건가요?"
왕중양은 다른 선택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지를 자기 쪽으로 돌리고는 끌어안았다. 자지가 왕중양의 옷 앞자락을 움켜잡았다.
"공자님, 저나 임조영 언니나 모두 공자님을 사모하고 있어요. 그러니 공자님은 누구하고나 살 수가 있는 거예요."
왕중양이 임조영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는 임조영의 마음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임조영 역시 자지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누구보다 그녀를 아끼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자지가 차츰 욕정의 불길을 스스로 꺼뜨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왕중양은 자기 가슴속에서 욕정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는 것도 절실하게 감지해 냈다. 임조영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그저 지켜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현재 자신의 심정이 어떤지조차 헤아릴 수가 없는 상태였다. 두 사람이 곧 알몸이 되어 뜨겁게 하나로 엉키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은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서 사화꾼 계집이 기다리고 있는
초막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왕중양은 흥분을 이기지 못했다. 이윽고 자지의 온몸을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왕중양은 상체를 활처럼 구부려 자지의 하복부와 젖가슴을 입술로 더듬었다. 복사꽃처럼 알맞게 익은 두 볼과 입술도 혀로 핥고 빨았다. 차츰 왕중양의 몸은 허공으로 떠올라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날이 밝았다. 하지만 왕중양은 날이 밝았는지 밤이 되었는지 쉽게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곳까지 햇빛이 들어올 리가 없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는 간밤에 꿈속을 지배했던 한 여인을 생각하며 옆자리를 더듬었다. 그가 마음속으로 가장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는 여인. 그 여인은 바로 임조영이었다. 잠에서 덜 깬 왕중양이 신음을 했다.
"임조영, 임조영……."
먼저 눈을 뜬 것은 자지였다. 그녀는 잠꼬대를 하는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왕중양에게로 기어갔다. 입술이 말라 버려 왕중양의 입술을 빨기 위해서였다. 막 그와 입술을 더듬으려 하는데 다시 그 잠꼬대가 들려 왔다. 분명 자신이 아닌 임조영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였다
'어쩌면 왕 공자님은 나를 위해 마음에도 없는 욕정을 피웠는지도 모른다. 맞아. 그것은 오직 나를 위해 보여 주었던 허깨비의 장난에 불과할 것이다. 난 그것을 왕 공자님의 사랑으로 믿었으니…….'
이런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데 또 왕중양의 잠꼬대가 들렸다.
"임조영, 난 정말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눈물을 애써 참은 자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활사인 묘를 조용히 빠져 나왔다. 그녀는 평생이라도 왕중양만 곁에 있다면 활사인 묘가 아니라 더한 구렁텅이에서도 살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난 상태였다. 왕중양은 오로지 임조영만을 가슴에 묻어 두고 있는 사내였던 것이다.
무작정 산길을 걷던 그녀가 희미한 불빛을 발견한 것은 날이 다시 어두워졌을 무렵이었다. 그 불빛은 임조영의 초막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임조영이 아직 이 곳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자지는 더욱 우울한 기분이었다. 그녀 역시 왕중양 때문에 멀리 갈 수 없는 몸이라는 사실이 새삼 마음을 아프게 했다.
문을 두드리자 사화꾼 계집이 달려 나와 열어 주었다. 자지의 손과 얼굴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산길을 헤맬 때 입은 것들이었다.
"누구시죠?"
"임조영 언니를 찾아왔어요."
계집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세요!"
계집의 손목을 쥐며 자지가 사정을 했다.
"그럼 이 말을 전해 줘요. 자지가 꼭 전할 말이 있단다고."
사정한 끝에 겨우 안으로 들어선 자지는 임조영을 보자 가까스로 웃었다. 그러나 임조영의 태도는 쌀쌀하기만 했다.
"날 찾아올 이유가 있었나?"
자지가 흐느끼며 임조영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분은 언니만을 생각하고 계신답니다. 꿈속에서도 오직 언니만을……."
임조영이 냉소했다.
"흥, 한 번 왕중양과 살을 섞더니 자비심마저 생겼나 보지.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
순간적으로 자지는 임조영을 찾아온 자신을 후회했다. 그냥 이들에게서 떠나는 것이 나을 뻔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왕중양의 처사는 언제나 남들의 존경을 받을 만하지. 그분이 너를 구해 주었으니 넌 그분의 사람이 된 거야. 그러니 가서 그분의 시중이나 잘 들으며 살라구. 그분이 나를 찾는 것은 단지 의형제를 맺었기 때문이야."
"자신을 속이고 있군요. 전 알아요. 언니가 왕 공자님을 끝없이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왜 어제는 저를 말리지 않았나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어서 왕 공자님에게 달려가세요. 전 이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여인일 뿐이에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왕 공자님은 결코 저를 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임조영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건 무슨 눈물이죠? 제 말이 맞다는 건가요, 아니면 끝까지 자신을 숨기려고 하는데 고통스러워 흘리는 눈물인가요?"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한동안 눈물을 흘리던 임조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지, 난 솔직히 너를 원망하지는 않는단다. 그러니 어서 왕중양에게로 돌아가."
"언니는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단 한 가지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군요."
말을 마친 자지가 갑자기 탁자 위에 놓여진 검을 들어 자기의 목을 깊이 찔렀다. 그녀의 목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자지가 쓰러지자 임조영이 달려들어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부르짖었다.
"자지! 자지! 왜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자지가 눈을 뜨지 못한 채 겨우 입술을 떨며 말을 쏟았다.
"언니도 바보예요. 한…… 사내를 사랑하면서 자기 마음을 끝까지 숨기려는…… 그런 바보……."




제34장 주인 바뀐 활사인 묘
강호객들은 하나같이 고독감과 쉽게 털어낼 수 없는 허탈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왕중양과 같은 보기 드문 대협은 더는 나오지 않을거란 위기감 때문이었다. 이제 금나라와 맞서 싸웠다는 소문도 더 이상은 들려 오지 않았다.
이들은 날마다 술독에 빠져 세월을 보냈고, 자신들의 신세만을 한탄하기에 이르렀다. 몇만 리 중원 땅을 주름잡던 영웅들의 뜻과 기백은 사라지고 남은 것이라고는 고독감과 씻을 수 없는 허탈감밖에는 없었다.
이 무렵 강호에는 이렇다 할 영웅이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중 팔월 보름날이 가까워지자 강호객들의 손에는 생각 밖으로 영웅첩(英雄貼)들이 각각 전해졌다. 이 청첩은 무림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문파인 소림파(少林派)에서 돌린 것이었다. 청첩에 적혀 있는 내용은 이러했다.
팔월 보름날 활사인 묘에 있는 왕중양과 무공을 겨루겠다고 한 사람이 도전장을 냈으며 만일 왕중양을 이기면 자신이 대신 활사인 묘에 들어가 살겠다는 것이었다.
이 청첩을 본 강호객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도전을 해 온 사람이 다름 아닌 임조영이었던 것이다. 강호객들은 임조영의 활약상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모용준을 죽이고 무심마저도 내쳤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략도 밝혀 냈다는 것을. 또한 왕중양과 임조영이 서로 원하는 사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 임조영이 왕중양에게 도전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무튼 이 청첩으로 인해 잔잔하던 강호에 다시금 파문이 일기 시작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팔월 보름날, 강호객들은 무리를 지어 종남산에 모여들었다. 오랜 시일이 지난 뒤 다시 와 보니 활사인 묘는 이미 세월의 더께와 잡초들로 무성했다. 사람들은 이 모습 앞에서 감회가 새로웠다.
해가 하늘 복판에 높이 떠올랐을 무렵 산기슭의 초막에서 두 여인이 걸어 나왔다. 앞에서 걷고 있는 여인이 임조영이었다. 그러나 임조영은 어제의 젊고 아름다운 처녀의 모습은 아니었다. 활사인 묘 앞에 이른 그녀는 고분의 돌문을 두드렸다.
"왕중양, 어서 나오세요!"
활사인 묘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사내 역시 탄력을 잃은 피부를 보아 세월의 덧없음을 느끼게 했다. 그는 자기 앞에 선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옷차림과 자태는 그대로였지만 꽃 같은 여인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는 느낌은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마주서자 종남산 산자락에서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불어왔다. 나지막이 들리는 두 사람의 한숨 소리만 한동안 자리했다.
"왕중양, 듣자하니 당신은 기이한 무학경서를 얻어서 천하에 보기 드문 무공을 많이 익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도전을 한 거랍니다. 만일 당신이 이기면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당신이 제게 지면 이 활사인 묘를 넘겨주셔야 해요. 제가 이곳에서 살 생각이에요."
임조영이 먼저 말문을 열자 왕중양이 탄식을 했다.
"난 살아 있는 송장이나 다름이 없소. 그대가 이곳에서 살겠다는 건 무슨 의미요?"
말을 마친 왕중양은 다시 활사인 묘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임조영은 왕중양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 어떠한 제지도 못했다. 왕중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녀가 옆에 있던 계집에게 분부했다.
"저기 저 돌을 주워 오너라. 내가 깔고 앉아 있을 것이다."
임조영의 태도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왕중양은 임조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시 굴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임조영은 그 앞에 돌을 깔고 앉았다.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광경들이 의아하게만 비쳐졌다. 사화꾼 계집도 이제는 어린 소녀가 아니라 성숙한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가 가져온 돌 위에 앉은 임조영은 조용히 왕중양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볼수록 이상해 옆사람과 귓속말을 나누기에 바빴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사화꾼 계집이 장작 더미를 안고 왔다. 임조영은 모닥불을 피워 놓고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태세였다.
이렇게 사흘이 지났다. 사람들은 더욱 호기심이 커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궁금증만 더해 갔다. 전진교 사람들이 왕중양에게 줄 음식들을 날라왔다. 그럴 때마다 임조영이 모두 빼앗아 한쪽으로 던져 버렸다. 전진교도 그 세력이 매우 강해져 있었지만 차마 임조영을 어쩌지는 못했다. 그녀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서 왕중양을 기다렸다. 무림의 사람들은 갈수록 호기심이 의문으로 변해 가는 것을 느꼈다. 임조영이 과연 노리는 것은 무엇
인지 분명 말못할 이유가 있을 거라 믿었다. 임조영이 계집을 시켜 석굴 입구에 가서 안에 대고 욕설을 퍼부으라고 했다. 계집은 '왕중양은 졸장부요, 겁쟁이!'라는 따위의 욕을 마구 퍼부었다.
한창 욕설을 퍼붓고 있는데 석굴 안에서 전진교 수제자인 마옥이 나왔다.
"우리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무리 욕설을 퍼부어도 소용이 없다고. 네 사부에게 돌아가 쉬라고 일러라."
계집이 임조영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머리를 숙이고는 꼼짝하지 않았다. 왕중양을 보지 않고는 죽어도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계집이 다시 욕설을 퍼부어댔다.
이를 지켜 보던 사람들 중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저 계집의 위풍이 대단하군. 아마도 왕중양이 맞설 용기가 없나보지."
"소문을 들으니 왕중양은 《구음진경》을 얻었다더군. 그래서 지금 세상에는 누구도 왕중양을 이기지 못한다더군. 이런 왕중양이 임조영 같은 계집을 무서워하다니 말도 안 돼."
누군가 반박을 하자 다시 한 사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자넨 내막을 모르고 하는 소릴세. 사람들 사이에 정이 오가면 싸우더라도 너무 무정할 수는 없는 거네. 왕중양은 임조영에게 미안한 일을 한 적이 있다네. 말하자면 빚을 졌다는 말이지. 정이란 빚을. 그러니 어찌 임조영과 칼부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때 한 다른 한 사내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왕중양이 이처럼 응답하지 않고 있다가는 임조영이 기다리다 죽고 말지."
사람들이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고 있는데 저쪽에서 계집이 다시 걸쭉한 욕설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이번엔 전진교를 향한 욕설을 터뜨렸다. 전진교의 놈들은 모두 거북이처럼 대가리를 갑 속에 숨긴 채 눈치만 본다, 혹은 천하의 사내들이란 한결같이 더러운 놈이라는 등 별의별 욕을 다 해댔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전진교 제자들도 나중에는 은근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워낙 불 같은 성미인 구처기가 참다못해 뛰쳐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임조영, 욕은 그만두고 나와 한판 겨루어 보자. 우리 전진교의 참맛을 보여 주마!"
그러자 마옥이 구처기의 옷자락을 잡았다.
"사존(師尊)님의 말씀도 안 듣고 이게 뭐야? 넌 그래 우리 사문(師門)을 배반할 셈이냐?"
구처기가 주먹으로 땅을 치며 원통해 했다. 학대통이 구처기를 위로했다.
"사형, 진정하시오. 이게 무슨 꼴이오?"
손불이도 임조영에게 독기가 서린 눈길을 보냈다.
"만일 사부님을 괴롭힌다면 난 네 년과 사생결단을 내겠다. 네년의 손에 죽는 한이 있어도 꼭 그렇게 할 것이다!"
지금의 전진교는 강호에서 하나의 큰 교파를 이루고 있는 입장이었다. 소림을 제외하고는 아마 천하에서 전진교를 따라잡을 교파나 문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천하의 모든 강호객들이 모인 마당에 임조영이 이처럼 전진교를 업신여기니 이들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전진의 칠대 제자들이 일제히 대로하여 이를 갈기에 이르렀다.
"북두칠성진(北斗七星陳)을 쳐라!"
마옥이 명을 내리자 이들은 몸을 솟구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학처럼 공중에서 유영을 하던 이들은 곧장 임조영 앞으로 내렸다. 이들은 왕중양에게 이 진을 치는 법을 전수받았는데 마치 북두칠성을 연상하게 했다. 마옥이 앉은 채로 임조영을 꾸짖었다.
"임 여협님, 옛날부터 스승은 모욕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임 여협께서 우리 사존님을 모욕하고 전진교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려 합니다. 그러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우리 사존님을 대신하여 그대를 상대하려 하오."
그러나 마옥은 속으로 애를 태웠다. 사부인 왕중양과는 결코 멀지 않은 사이인 임조영이라 사실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는 싸우더라도 임조영에게 져줄 수밖에 없다는 생각까지 품고 있는 처지였다. 이런 마옥의 심정을 모르는 임조영은 차갑게 말을 내쏘았다.
"자네들의 무공이 썩 월등하다고는 하지만 아직 나와는 상대가 되지 못해. 난 자네들을 상대할 마음이 없으니 어서 사부를 데리고 와라!"
휘파람을 여유 있게 불던 구처기가 거들었다.
"임 선배님, 이 후배가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뎁쇼?"
검을 뽑아 든 그가 임조영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구처기, 네 재주가 아무리 좋아도 내 상대로는 부족하다!"
말을 끝낸 임조영이 몸을 날려 높이 올랐다. 바위 위에 백년 묵은 노송처럼 묵묵히 앉아 있던 전진칠자들도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공중에서 이들은 방어태세를 취하며 임조영과 맞섰다. 이 괴상한 진법을 본 임조영은 몹시 당황했다. 이 진법은 얼마 전 서역의 제일인자로 떠오른 합마공과 봉황력을 전수받았다는 구양봉이 찾아와 방해를 할까 봐 왕중양이 고안해 낸 것이었다. 강호에서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많은 호수들이 《구음진경》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거였다.
그 중에서도 구양봉의 이름이 심심지 않게 거론되고 있어 왕중양은 조심스레 준비를 해 왔던 것이다. 언젠가는 그가 나타나 《구음진경》을 놓고 피를 뿌리게 될 거라 왕중양은 예감했었다. 그래서 마옥을 비롯한 이들은 전진교를 지켜 내는 천강북두대진 (天送北斗大陣)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자기 앞에 웅장하게 펼쳐진 북두대진을 보며 임조영은 골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범상치 않은 진법만 봐도 왕중양의 진가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 진을 격파하지 못하면 활사인 묘를 차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휘이― 임조영이 입으로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 소리는 전진칠자들의 휘파람 소리와는 달랐다. 임조영의 공력이 전진칠자보다 더 세고 높았기에 그 소리는 산천을 진동시키고 사람들의 전신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왕중양이 만든 그 진법을 내가 한번 쳐 보겠다!"
임조영이 전진칠자를 향해 나아갔다.
마옥이 미소를 지으며 자만했다.
"우리 사부님께서 만드신 이 진법은 함부로 깰 수가 없을 것이오!"
곧 임조영의 검이 검푸른 빛을 토하기 시작했다. 동서남북으로 검에서 뿜어지는 빛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를 보는 전진칠자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조영의 검에서 쟁강 하는 소리가 난 것은 이때였다. 허공으로 한 줄기의 섬광이 번뜩였다. 이 섬광은 곧 번개같이 구처기를 향해 뻗어 갔다. 구처기는 북두칠성 중 천권성이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가 이 위치에 있게 된 것은 무학에 대한 조예가 가장 깊었기 때문이었다. 천권성의 구처기가 공격을 받게 되자 천기성(天竣星)의위치에 선 왕처일과 천구성(天樞星) 위치에 있던 마옥은 모두 검으로 임조영의 대혈을 겨누기에 바빴다. 이 진법은 머리와 꼬리가 서로 호응하
면서 동시에 공격을 하기도 해 임조영은 도저히 기회를 노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전진칠자들을 물리치려면 이 진법을 꼭 깨야만 한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그럴수록 진법의 위력은 더욱 강해지기만 했다. 이미 그녀는 진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형편이라 위기감만 고조될 뿐이었다. 검을 치켜 든 그녀는 일곱 사람을 고루 겨루면서 달려 들었다. '창송영객(蒼松迎客)'이라는 검법이었다.
손불이를 먼저 공격하자 개양성(開陽星) 위치에 있던 학대통은 그녀가 위기에 처할까 봐 검을 휘두르며 막아섰다. 깊이 찌른 검을 거둔 임조영이 이번엔 옥형성(玉衛星) 위치에 있는 유처현을 내리쳤다. 유처현은 일곱 제자 중에 가장 침착한 사람이라 천천히 검을 들어 막아 냈다. 옆에서 갑자기 나타난 구처기가 검으로 임조영의 앞가슴을 내쳤다.
살짝 피하며 뒤로 물러선 임조영이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이들이 부리고 있는 진법은 어느 정도 임조영을 막아낼 수는 있었지만 검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모두의 검은 임조영의 옷깃조차도 건드리지도 못했다. 뒤로 일단 물러섰던 임조영이 재빠르게 검을 틀며 구처기를 향해 크게 그었다.
"악!"
구처기의 팔에서 피가 튀었다. 인상을 잔뜩 쓴 구처기가 검을 단단히 틀어쥐고는 임조영을 향해 공격을 하려 했다. 마옥의 휘파람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더니 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낱아와 구처기의 검을 내리 눌렀다.
"사형, 왜 이러시오?"
화가 난 구처기가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일곱 사람 중 온 힘을 다해 임조영과 맞서고 있는 것은 자기와 손불이밖에는 없다는 생각에 더욱 화가 갔던 것이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보아하니 이들은 일부러 사력을 다해 공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임조영을 이긴다면 왕중양이 계속 활사인 묘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계산을 한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임조영에게 져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되면 전진교
의 북두칠성진은 무용지물에 불과한 것으로 남게 되기 때문이었다. 구처기는 고개를 돌려 손불이를 보았다. 그녀 역시도 이런 내막을 모르고 사력을 다해 임조영과 검술을 교환하고 있는 게 아닌가. 허공에서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혔다. 손불이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아 검으로 전해진 충격에 시달리는 듯했다. 임조영의 검이 다시 높이 들리자 구처기가 달려가 막았다.
멀리 물러선 임조영이 옆에 있던 마옥에게 접근했다. 마옥은 임조영의 검법을 보고는 그녀가 매우 조급해 한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러나 임조영은 그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얼른 진 밖으로 빠져 나왔다.
"우리가 어리석었군. 사부님의 진법이 욕을 당했으니 어쩔 수 없다. 내가 굴 안으로 들어가 이런 사실을 사부님께 알릴 테니 모두들 여기서 임조영을 지키거라!"
마옥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굴 안으로 들어갔다.
왕중양 앞에 이른 마옥이 무릎을 꿇으며 침통한 얼굴을 했다.
"사부님 저희들이 임 여협과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왕중양은 등을 보인 채 대답이 없었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왕중양이 조용히 물었다.
"북두칠성진법을 썼느냐?"
마옥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왕중양은 이미 예상을 하고 있는 눈치였다.
"죄송합니다. 사부님께 괴로움만을 안겨 드려서……."
"그만하고 일어나거라."
왕중양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래 임조영이 어떻게 검을 쓰던가?"
마옥이 임조영이 쓴 검법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말을 다 듣고 난 왕중양이 길게 탄식을 했다.
"나는 내가 이 굴 속에서 몇 년 지내 온 것이 아주 긴 세월로 생각하는 모양이로구나?"
마옥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사부님께서 나가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 전진교나 강호의 무림의 숱한 대사들이 사부님께서 나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넌 나의 고충을 모른다."
그는 임조영을 자신이 오랜 세월 지내 왔던 이곳으로 불러 들일수가 없었다. 만약 임조영을 이긴다 해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평생 이곳에서 살겠다고 한 약속을 어기는 것이라 사내로서는 차마 내키지가 않았다. 왕중양은 임조영과의 싸움을 피할 수도 그렇다고 원할 수도 없는 난처한 처지였다. 마옥 역시 이런 왕중양의 심기를 충분히 이해했다. 마옥은 수제자였기에 왕중양의 속내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강호객들의 말소리가 굴 안까지 울렸다. 몇몇 강호객들이 임조영의 편에 서서 의기양양하게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임 여협은 물론 사부님께서도 아무 것도 드시지를 않았습니다. 이러다가는 곧 쓰러지고 맙니다. 우리 전진교를 생각하셔서 고집을 버리시는 게……."
왕중양의 표정이 굳어졌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내가 임조영을 이겨야 할지 아니면……."
왕중양이 얼마나 심사숙고하고 있기에 이토록 괴로워하나 하는 생각에 마옥은 더욱 가슴이 쓰렸다.
"제 생각으로는 사부님은 어느 쪽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왕중양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해."
왕중양의 말이 옳았다. 어느 쪽이든 승부가 나야만 했다.
"아무래도 내가 나가 봐야 할 것 같다. 일단 임조영의 도전을 받아들여야겠어. 도중에 다른 묘안을 써 수습하는 일이 있어도 일단은……."
왕중양이 드디어 굴 밖으로 나왔다. 맞은편에 버티고 선 임조영에게 그가 읍을 했다. 왕중양을 본 그녀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난 굴속에서 세상의 일과 담을 쌓고 지냈지만 무공을 연마하는 것만은 게을리 하지 않았소. 그러니 조심을 해야 할 것이오."
"그럼 먼저 손을 써 보시지요."
왕중양은 내키지 않은 싸움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맞붙자 강호객들의 눈동자는 휘둥그래졌다. 두 사람이 부리는 무공은 실로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보라구. 왕중양의 무공은 전혀 빈틈이 없어. 저 정도에 이르자면 보통의 머리를 갖고서는 힘이 들지."
왕중양은 임조영과 비록 무공을 겨루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흐뭇했다. 그는 임조영의 무공에 박수를 보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예상과는 다르게 전력을 다한다 해도 임조영과는 우열을 가리지 못할 것만 같았다.
"훌륭하군!"
왕중양이 감탄사를 내자 임조영도 웃음으로 받아쳤다.
"어때요? 제가 활사인 묘를 차지할 만한가요?"
"그런데 난 정말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세상에는 좋은 곳이 많을텐데 왜 하필이면 내 무덤을 빼앗으려는 거지?"
"제가 익히고 있는 무공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바로 옥녀심경이지요. 그러니까 난 이 고분을 꼭 차지해야만 해요. 어때요, 제게 양보하지 않으시겠어요?"
왕중양은 그 말에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 고분은 그때 당신이 무심의 무리들과 겨루어 패한 대가로 차지한 게 아닌가요? 그러나 오늘만큼은 당신은 져서는 안 돼요."
왕중양이 속으로 임조영의 심중을 헤아렸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그 마음을 알지. 그대가 이 고분을 한사코 빼앗자는 것은 나를 나오게 할 생각이라는 것을. 헌데 내가 이 고분에 남기 위해서는 그대를 이겨야 하니 이 얼마나 비참한 노릇인가.'
왕중양과 임조영은 지금 서로의 마음을 너무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짓이 종국에는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일이란 것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내막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구경거리요,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비쳐질 게 분명했다. 수백여 합을 싸운 두 사람은 그러나 쉽게 승부를 내지 못했다.
"잠깐 멈추시오. 내가 할말이 있소!"
왕중양이 손을 들자 임조영이 뒤로 물러섰다.
"우리가 질리도록 무공을 견주어 보았으나 승부를 낼 수가 없소. 그러니 이제부터는 무공이 아니라 문장으로 승부를 걸어 보는 게 어떻소? 더군다나 그대는 곡기를 끊은 지 오래라 몹시 지쳐 있을거요."
왕중양은 끝까지 임조영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좋아요. 오늘은 서로가 지쳤을 테니, 그럼 내일 다시 보기로 하지요."
임조영이 트집을 잡지 않고 왕중양의 제의에 순순히 응했다.
이튿날 두 사람은 다시 석굴 어귀에서 마주했다.
"오늘은 약속한 대로 문장으로 실력을 겨뤄 보는 거예요. 하지만 먼저 그 결과에 대한 조건을 정해 놓아야 하지 않겠어요?"
임조영이 먼저 말을 건네 왔다.
"무슨 조건이오?"
"제가 지면 이 자리에서 검으로 목을 잘라 자결을 할 것입니다. 영원히 당신과 만나지 못하게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기면 활사인 묘는 양보하셔야 합니다. 또한 평생 제 말을 따르되 절대로 거역해서는 안 됩니다. 도사가 되든지 중이 되든지 반드시 이 산 위에 전진교를 세우고 십 년 동안 저와 가까이 지내야 하는 것도 명심하세요."
이 말을 듣고 난 왕중양은 더욱 깊은 곤혹스러움에 빠져 버렸다. 만일 자신이 이기면 임조영을 죽이는 꼴이 되지를 않는가? 그렇게 되면 어찌 남은 생을 편한 마음으로 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한편 반대로 임조영에게 져 준다면 그녀의 뜻을 따라야 하니 이것도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온갖 묘안을 떠올려 보았지만 선뜻 짚이는 것이 없었다.
"그럼 문장 겨루기를 하도록 합시다."
왕중양이 오래 다물고 있던 입을 열자 임조영이 한곳을 가리켰다.
"저기를 보세요. 저 바위에다 글을 새기기로 하지요. 누가 더 잘 새기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왕중양은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선천신공과 《구음진경》을 동원한다 해도 만족하게 해낼 것 같지가 않았다. 맨손으로 어떻게 바위에 글을 새긴단 말인가? 임조영이 한껏 웃으며 말했다.
"이건 손재주를 시험하는 거랍니다. 누가 더 깊게 새길 수 있나를 보자구요."
바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간 왕중양이 손으로 만져 보았다. 공교롭게도 무쇠보다도 더 단단한 청석(靑石)이었다.
"신선도 아닌 내가 어떻게 맨손가락으로 이 바위에 글을 새길 수 있겠소?"
왕중양이 솔직히 털어놓자 임조영이 비웃듯 되물었다.
"호호호, 신선도 아닌 당신을 그럼 왜 제자들이 장생패위 (長生牌位)로 모신답니까? 만일 제가 새긴다면 졌다고 손을 드시겠어요?"
왕중양으로서는 그 누구도 바위에 글을 새기지 못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임조영도 죽지 않고 또 자신도 활사인 묘를 양보하지 않아도 되게 …….
"그대에게 그런 재주가 있다면 내가 진 것은 불 보듯 하지. 그러나 그대 역시도 해낼 수 없다면 우리는 비기게 되겠지."
임조영의 눈에서 광채가 일었다. 그녀는 왕중양의 가슴속에 들어 있는 깊은 속뜻을 들여다보려 했다. 그녀 생각으로는 왕중양은 자신이 죽는 것은 원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함께 살 마음은 없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종남산에서 저와 이웃해 사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녀가 글을 새기기 위해 자세를 취했다. 왕중양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손끝을 주시했다. 임조영은 바위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무슨 글들을 새겨야 하나? 집을 버리고 강호에서 떠돈 사람들 속에서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 사람은 장자방(張子房)이지. 잔혹하고 포악한 진시황에게 반항을 하고 명예도 사리도 탐내지 않은, 당신의 선배님이 되시는 분이에요."
그러더니 오른손 식지를 꼿꼿이 편 그녀는 바위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서서히 돌가루들이 부스스 떨어지면서 바위 위에 한치 깊이나 되는 글자들이 새겨졌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왕중양이 놀란 눈길로 그녀가 새긴 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자방은 진을 멸할 굳센 뜻을 품었건만
노옹이 떨어뜨린 초신을
세 번이나 다리 밑에 내려가 주워 왔네
좌한(佐漢)이 대사를 도모하니
그 이름 하늘에 닿을 만큼 우뚝 솟아 있네
적송(赤松)을 동무하여 거닐며
무공을 이룩한 후에 몸을 숨겨야 하리
이인(異人)과 이서(異書)는 하늘이 쉬이 내지 않는다네.
왕중양은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붓으로 써 갈긴 듯한 또렷한 글자들은 필체 역시 흠잡을 데가 없었다. 과연 어떻게 글자를 바위에 새겨 넣을 수 있었단 말인가? 왕중양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비결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가 다가가 만져 보려 하자 임조영이 웃으며 앞을 막았다.
"이제는 졌다는 걸 인정하시겠죠?"
그는 믿어지지 않아 직접 만져 보기로 했다. 청석을 만져 보니 역시 무쇠처럼 단단했다. 무공으로 따지면 임조영은 결코 자신보다 내력이 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다는 것인가.
읍을 한 왕중양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대보다 못하오. 내가 졌소. 오늘 저녁에 고분에서 나오도록 하겠소."
이렇게 승부가 끝이 나자 강호객들은 모두 흩어졌다. 그리고 왕중양도 약속대로 고분에서 나왔다. 왕중양 대신 무덤 속에 들어간 임조영은 은근히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왕중양은 그녀를 찾아와 주지를 않았다.
중양궁으로 돌아온 왕중양은 그동안 처리하지 못한 일들에 매달려 바쁜 일정을 보냈다. 마옥이 전진교의 일을 대신 맡아볼 때는 감히 대사는 염두에 두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왕중양이 돌아온 뒤부터는 교문 안의 분위기가 일신되어 활기가 넘쳐났다.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히 뛰어다니며 급한 일들을 처리해 냈다.
이날은 마침 보름이라 하늘에는 탐스러운 달이 떴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임조영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고분에서 어떻게 지내고있는지 궁금했으며 찾아가 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오랜 세월 임조영과 지낸 탓인지 사화꾼 계집은 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녀가 임조영을 위로했다.
"조금 있으면 왕 진인께서 오실 거예요."
임조영이 쌀쌀맞은 어투로 신경질을 부렸다.
"그 사람이 오든 안 오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계집은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왜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왕중양이 오기만 하면 임조영의 얼굴에 화색이 돋아나고 기쁨의 눈물까지 흘릴 게 분명한데…….
왕중양을 기다린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임조영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를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할일이 많아 그럴 거라 임조영은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했다. 임조영은 별수없었다. 자신도 고분 속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을 수밖에…… 그것으로 왕중양의 생각을 지우려고 했다. 이런 다짐을 속으로 하고 있는데 누군가 돌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어서 밝혀라!"
계집이 소리를 치자 밖에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달도 밝고 공기도 시원한데 이야기나 나누지 않겠소?"
왕중양이었다. 임조영의 눈빛이 금방 달라졌다
"우리 사부님은 주무시고 계세요."
계집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후일 다시 오겠소이다."
왕중양은 임조영이 들을 수 있게 짐짓 목청을 높였다. 그러자 계집이 돌문을 열어 젖히더니 밖으로 나가 왕중양을 대뜸 불러 세웠다.
"우리 사부님께서 만나기 싫어하는 걸 알면서 왜 찾아오셨어요? 천하의 사내들이란 모두 똑같아요. 모두 나쁜 놈들이라구요. 당신이라고 다를 바 없어요."
왕중양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계집을 바라보기만 했다.
"허허, 이 왕중양이 나쁜 놈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인데 굳이 입으로 떠벌릴 건 또 뭔가?"
그렇다고 수그러들 계집이 아니었다.
"알고 있다면 양심이라도 있어야지요. 자기 대신 남을 으시시한 고분 속에 처박아 넣고는 희희낙락 달구경이나 하고 있어요?"
계집은 제풀에 격해져 마음대로 지껄였다.
"난 당신이 미워요. 우리 사부님께서도 당신을 미워하니까 다시 찾아오지 마세요!"
왕중양이 임조영과 몇 마디의 말을 나누었다면 두 사람 사이에 얽힌 매듭을 풀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왕중양은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뒤돌아서고 말았다.
'임조영과 나는 완전하게 마음을 합일시켜 본 적이 없구나. 또한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번번이 짐작해 낼 수조차 없었다. 아마 우리 둘 사이에는 확실한 연분이 없나 보다. 그런데도 왜 나는 그녀와 함께 있고만 싶을까…….'
그는 마음이 괴로웠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심드렁하게만 비쳐졌다. 모두 그녀 임조영 때문이었다. 그의 걸음은 어느 때보다 맥이 없어 보였다.
왕중양의 목소리가 들려 올 때마다 임조영은 그에게로 뛰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왕중양이 돌아설 때까지 자는 척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싫었고 또 계집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그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제 왕중양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에 그녀는 가슴 한켠이 휑하니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계집의 울음 소리가 들려 온 것은 이때였다. 등을 돌린 채 누워있던 임조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울긴 왜 울어!"
계집은 계속 흐느끼기만 했다.
"제가 왕 진인을 쫓다시피 했어요. 좋은 말로 돌려보낼 수도 있었는데……."
"내가 평소 어떻게 일렀느냐? 모든 일에 후회는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계집이 임조영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천하의 사내들은 모두 더럽고 나쁜 놈들이라고 가르치셨어요……."
"그래 영원히 기억할 수 있겠느냐?"
"전 죽을 때까지 그 말을 잊지 않을 겁니다."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임조영이 계집에게 일렀다.
"가서 붓을 가져오너라!"



제35장 임조영의 죽음
계집이 붓을 대령하자 임조영은 종이 위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주 숙달된 솜씨로 윤곽을 그려 냈다. 마음속으로 이미 수천 수만 번이나 그려 보았던 것처럼 그녀는 거침없이 붓을 놀렸다. 곧 종이 위로 도포를 걸친 한 사내가 나타났다. 아직은 윤곽뿐이었지만 이 사내가 왕중양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붓으로 좀더 다듬자 종이 위로 나타난 사내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사람처럼 생기를 얻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인품마저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왕중양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임조영이 계집에게 불쑥 물었다.
"넌 내가 주워다 기른 아이다. 넌 그걸 알고 있느냐?"
무슨 중요한 말을 하려는 것이리라 짐작한 계집이 얼른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저는 한평생 사부님만을 따르겠습니다."
차가운 웃음으로 바꾼 임조영이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네가 모시지 않아도 난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난 네게 한 사람을 보여 주겠다. 내가 그린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느냐?"
"전진교의 교주 왕중양이 아닙니까?"
"그렇다. 이 사람이 전진교를 만든 사람이다. 사내다운 사내이지. 예전에 나는 이 사람만은 착한 사내라 믿었었다. 그런데 역시 양심도 없는 사내였다. 그 전진교 때문에 이 임조영을 잊은 몰인정한 사내일 뿐이다."
임조영이 이렇게 입 밖으로 왕중양을 원망하는 것을 처음 본 계집은 긴장했다. 증오로 변해 가는 임조영의 눈빛을 보며 계집은 또다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왜 또 우느냐? 기억해 두거라. 앞으론 절대 세상의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우리 고분파(古墳派)는 원래 눈물과는 인연이 없다. 눈물을 흘리면 빨리 늙고, 또한 빨리 죽게 된다!"
'고분파, 고분파…… 우리는 고분파다!'
속으로 여러 번 되뇌이던 계집은 임조영을 올려다보았다. 임조영도 극도의 비통함 속에서 부대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화상을 저기 복판에다 걸어라."
임조영의 말대로 계집이 화상을 걸었다. 늠름하게 서 있는 왕중양의 화상을 보며 계집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사부님은 말씀하시는 것과 행동하시는 것이 전혀 달라. 왕중양을 그토록 저주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미련을 두고 있는 게 분명해. 화상을 가장 눈에 잘 띄는 한복판에 걸어 두었으니 시시각각으로 마주할 수가 있지 않은가.'
한숨을 길게 내쉰 임조영이 이런 명령을 했다.
"됐다. 그럼 네가 저 화상에다 침을 뱉어라!"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계집이 망설이자 임조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귀가 먹었느냐?"
"그게 아니라……."
계집은 황망히 달려가 왕중양의 화상에 침을 탁 뱉었다. 그녀는 자기 사부를 괴롭히는 왕중양을 미워해야만 했다.
"됐다. 넌 내 뜻을 몰랐더냐?"
"아닙니다. 사내들은 모두 더럽고 치사한 놈들이에요."
얼굴이 창백해진 임조영은 돌침대에 기대어 계집에게 다시 느리게 말했다.
"내 몸엔 사자우의 뱀독이 아직도 남아 있어. 이제 얼마 살지를 못할 것 같다."
계집은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임조영 곁을 떠나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바닥에 엎드린 그녀가 울먹였다.
"사부님,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 주세요."
"세상에 더는 미련이 없다."
이 말에 계집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실망만을 안고 있는 임조영이 안타깝기만 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네게 가르쳐 준 것은 모두 우리 고분파의 무공이다. 우리 고분파에 다시 제자가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분파의 제자는 반드시 여인이어야 한다. 그리고 고분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 되지. 한평생 사내와 멀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사내가 달갑게 우리 고분파의 여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할 때는 문제가 다르지만……. 하지만 세상에 어디 그런 사내가 있겠느냐? 절대로 있을 수 없단 말이다. 왕중양 같은 사내마저
여인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려 들지를 않아. 그러니 이세상에 여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돼 있는 사내는 없다!"
한탄에 빠진 그녀는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너는 고분파의 제자다. 그러니 잘 기억해야 한다. 우리와 왕중양의 전진교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그자들은 앞산에 우리는 뒷산에 있으니 서로 왕래를 끊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계집이 고개를 끄덕이자 임조영이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세상의 사내들은 모두가 나쁜 놈들이야. 고분파의 여인들은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부터 절대 사내들과 인연을 가져서는 안 된다."
계집이 다시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임조영의 숨결은 점점 미약해졌다. 그녀는 혼자의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누운 채로 계집에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나는 이 고분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 그래도 왕중양에게 감사를 해야겠어. 이처럼 훌륭한 곳을 넘겨주었으니……. 난 여기서 편안히 죽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계집의 부축을 받으며 지하에 있는 석실로 내려갔다. 네 개의 석관이 놓여져 있는 곳이었다.
"난 임종시에는 꼭 여기에 와서 누울 것이다. 두 눈을 감으면 더는 근심과 걱정이 없을 테니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우리 고분파에서는 제자를 더 받을 수는 있어. 하지만 반드시 무덤 속에서 한평생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결심이 없으면 아예 받아들이지도 말거라."
쓸쓸하게 웃고 있는 임조영의 눈가에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녀는 천천히 석관 속으로 들어가 편히 누웠다.
"사람이란 비로소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인생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느끼게 되는 법이지……."
계집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무정한 왕중양에 대한 저주의 화살을 마음속으로 쏘았다.
임조영이 잠이 들자 계집은 조용히 일어나 앉아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산 아래로 내려가 필요한 물건들을 구해 오겠다고 말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앞산의 중양궁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녀는 왕중양을 죽여 사부의 원한을 풀어 줄 마음에서였다.
조심스럽게 고분을 빠져 나온 그녀는 앞산으로 향했다. 경계가 삼엄했지만 그녀는 걸음에 신경을 쓰며 중양궁 안으로 조심조심 기어 들어갔다. 이곳저곳을 헤맨 끝에 그녀는 방석에 앉아 두 눈을 감고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 왕중양을 발견하게 되었다.
'왕중양이 놈아! 바로 네 놈이 우리 사부님을 사경에 빠지게 했다. 난 네 놈 역시 살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네 놈을 죽여 사부님의 한을 풀어 드릴 것이다!'
비장한 결심을 한 그녀는 숨을 한껏 들이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소리 없이 접근한 그녀가 검을 들어 왕중양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검은 왕중양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어느새 손을 든 왕중양은 검을 한 손으로 집어 위로 끌어올리며 자신도 일어섰다. 그녀는 검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엄청난 힘이 검에 가해지고 있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검을 놓아라!"
계집이 소리를 치며 결사적으로 검을 빼내려고 했다.
"난 오늘 네 놈을 죽여야 한다!"
"네 사부도 왔느냐?"
"사부님께서는 다시는 네 놈을 보지 않겠다고 하셨다. 다시 네놈을 만나는 날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하셨다. 네 놈이 우리 사부님을 망쳐 놓았어!"
욕설을 터뜨리던 계집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구처기와 유처현이 울음소리를 듣고는 달려 들어왔다. 이들이 계집을 끌어내려고 하자 왕중양이 제지했다.
"그냥 두어 라!"
이들이 주춤하자 왕중양이 일렀다.
"너희들은 물러가라. 이 계집과 내 할말이 있다."
두 사람이 물러가자 왕중양이 검을 계집에게 돌려주었다.
"네 사부는 내게 은혜를 준 사람이다. 네가 그 사람을 대신하여 나를 죽인다 해도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래, 그 검으로 나를 찔러라."
왕중양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서 날 죽여라!"
계집이 왕중양의 숨통을 겨누며 말했다.
"그럼 좋다. 난 너를 죽이겠어. 너를 죽이면 이 세상에서 사내하나가 사라질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 가득했지만 그녀는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얼굴을 감싸 쥔 그녀는 서럽게 울었다.
"사부님, 손이 떨려서 죽일 수가 없어요!"
그녀는 스스로를 원망하면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울음을 쉽게 멈추지 않는 그녀를 바라보며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돌아가서 사부님을 잘 보살피거라."
말없이 몸을 돌린 그녀는 중양궁을 빠져 나왔다.
임조영을 생각하고 있는 왕중양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임조영이 자신을 그토록 증오하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면서 의문이 생기는 것은 그토록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면서 왜 활사인 묘를 빼앗아 갔는가 하는 점이었다. 임조영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몸을 일으킨 왕중양은 뒷산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찬바람이 부는 한밤중이라 활사인 묘는 더욱 처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돌문을 두들기자 안에서 계집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들려 왔다.
"누구냐? 사내냐 계집이냐?"
쓴웃음을 지으며 왕중양이 대답했다.
"왕중양이다."
"……물러가세요. 사부님은 당신을 만나지 않을 거예요.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겁니다."
"난 네 사부와 몇 마디만 나누고는 돌아가겠다."
"다 이상 사부님을 괴롭히지 마세요."
왕중양은 가슴 한 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임조영과의 인연을 마감해야 하는가. 그동안 있었던 그녀와의 짧고도 길었던 만남에 대해 되새겨 보았다. 이렇게 끝을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순간 활사인 묘에 뒷문이 하나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무심이 그 뒷문으로 들어와 자신을 만나곤 했던 일이 뒷머리를 스쳤던 것이다. 왕중양은 고분 뒤에 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를 찾아냈다. 그러나 맨손으로 바위를 옮겨 놓을 수는 없었다. 난감해진 왕중양이 그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사부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마옥이었다. 그 뒤로 왕처일의 모습도 보였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네들은 이 바위만 옮겨 놓고는 돌아가게."
두 사람은 왕중양과 함께 바위를 한쪽으로 옮겨 놓았다.
"자, 이제 돌아들 가게."
이렇게 말을 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마옥과 왕처일은 왕중양이 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 보았다. 이들은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굴 안으로 들어간 왕중양은 곧바로 석관이 놓여져 있는 방으로 향했다. 다시 굴 안으로 들어와 보니 더욱 음침하게만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임조영이 지내고 있다는 생각에 새삼 마음이 무거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중양은 천년 옥돌로 만든 침대 앞에 이르렀다. 그 위에 임조영이 움직임이 전혀 없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내가 왔소."
그녀가 왕중양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콧등이 시큰해졌다.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직였지만 불가능했다. 그녀는 속으로 왕중양이 바위를 옮겨 놓고 들어왔을 거라 짐작했다. 또한 혼자의 힘으로는 어려우니 필시 제자들의 도움을 받았을 거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돌아가세요. 당신이 이곳에 왔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제가 어떻게 되겠어요?"
마음속에 맺힌 수많은 말들을 틸어놓으려고 온 왕중양은 그만 온몸의 기운이 달아나는 것만 같았다. 여전히 임조영은 냉담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지 않은가.
"임조영, 우리가 이렇게 서로의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지내 온 것도 십여 년이 지났소. 이제 그만 나하고 이곳을 나갑시다. 우리옛날처럼 강호를 떠돌며 인간 속세를 등지고 자유롭게 살도록 합시다."
만일 이런 말을 조금만 일찍 했더라면 임조영은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너무 허무하지 않는가. 임조영이 힘없이 눈을 껌뻑였다.
"왕중양, 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줄 아셨나요?"
"임조영, 그동안 많이 야위었군."
왕중양은 다른 말을 하면서 조금 전 자신이 느꼈던 서운함을 털어내고자 했다. 그런데 임조영이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말씀드릴 게 있어요. 난 오늘 고분파를 만들었어요. 내 제자들은 모두 여인들이죠. 제자들은 이 고분을 나서서는 안되지요. 또 내가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게 했는지 아세요? 우리 고분파에 들어오면 저기에 있는 사람을 향해 침을 뱉어야 해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저주하는 사람이지요."
왕중양은 임조영이 말한 사람은 분명 모용준일 거라 믿었다. 그러나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한 왕중양은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바로 자신이 아니던가. 고개를 돌린 왕중양은 그녀를 한동안 주시했다. 온몸에 차가운 기운이 엄습해 오는 것처럼 싸늘하게 떨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오?"
"전 이제 얼마 살지 못해요. 더 이상 당신과 옳고 그름에 대해서 논하고 싶지도 않아요."
"난 《구음진경》을 얻었소, 이것만 있으면 당신을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소. 당신을 살리게 되면 내 무공은 사라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상관하지 않아."
왕중양이 품속에서 《구음진경》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나에겐 천 년이나 묵은 한옥(寒玉) 침대가 있어요. 이것만으로도 난 만족해요. 다시는 당신에게 도움받기 싫어요."
"임조영, 제발 부탁이오. 내 말을 한 번만 들어주오."
임조영의 태도는 여전히 냉랭했다.
"당신은 누군가요? 천하의 으뜸가는 협객 왕중양이 아닌가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장생패위를 모시고 있어요. 그것만 모시면 무슨 일을 하든 신심이 생긴다고 하더군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당신에게 빌었지 어디 당신이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빌어 본 적이 있나요? 나 같은 여인은 이제 꺼져 가는 촛불에 불과해요. 나 같은 사람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은 당신 체면에 손상이 가는 일이 아닌가요?"
왕중양으로서는 할말이 없었다.
"이제는 좋은 세월이 다 지나갔어요. 나는 이제부터 죽을 날만 기다리겠어요. 당신의 제자들이 내 제자들을 귀찮게 하지만 않으면 그 이상 바랄 게 없어요."
그러나 왕중양은 치료를 하자며 계속 고집을 부렸다. 그것은 고집이 아니라 왕중양의 진심이었고 그녀에게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이었다.
"당신의 그 경서가 나를 구할 수 있다고 해도 난 도움을 받지 않겠어요. 난 이제는 살기조차 지겨워요. 그저 죽을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고요."
왕중양은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왕중양의 눈에서도 한 줄기 눈물이 떨어졌다. 이제껏 그의 눈물을 본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지금에서야 임조영과의 인연이 끝나 가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중이었다. 이 음침한 석굴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임조영을 상상하니 더욱 가슴이 메었다.
임조영이 고개를 들었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당신에게 드릴 선물이라고는 이 말밖에는 없네요."
왕중양이 고개를 떨구고는 뒤쪽에 있는 석실로 들어갔다. 이 석실은 원래 그가 무공을 연마하는 장소로 쓰던 곳이었다. 임조영도 이 방에서 무공을 닦을 게 틀림없었다. 왕중양은 이곳에다 《구음진경》의 경문을 새겨 놓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나중에 이것을 보고 스스로 몸을 추스릴 수 있게 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믿었다. 그렇게 되면 임조영은 꼭 회복될 수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의 매듭을 지은 왕중양은 저절로 힘이 나는 듯했다. 그는 검을 빼들고는 천장으로 뛰어올랐다. 천장에 박쥐처럼 매달린 그는 심호흡을 하고는 경문을 정성껏 새기기 시작했다. 훗날 소룡녀(小龍女)와 양과(楊通)는 이 고분 속에서 《구음진경》의 경문을 얻어 절세의 무공을 몸에 익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왕중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흘 낮밤을 새워 가며 그는 이곳에 경문을 모두 새겼다. 팔의 근육들이 경련을 일으키고 차츰 감각마저 잃어 갔다. 그러나 고통을 참으며 그는 결국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임조영이 이 천장만을 바라보아도 대단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 다음 그는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고분을 나왔다.
고분 밖에 있던 마옥과 왕처일 역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들은 다른 제자들에게도 알려 매일같이 이곳을 지키게 했다.
왕중양이 드디어 밖으로 나오자 이들은 비로소 안심하는 눈치였다. 왕중양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감히 왕중양의 심정에 대해 물어 볼 수가 없었다. 겉모습은 지치고 초췌해 보였지만 왠지 표정이 밝아진 왕중양을 부축하여 중양궁으로 향했다.
중양궁으로 다시 돌아온 왕중양은 벌써 며칠째 아무 일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선뜻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대부분의 일처리를 마옥에게 일임한 채 그는 홀로 앉아 넋을 놓고 지냈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왕중양이 구처기를 불렀다.
"뒷산의 그 사화꾼 계집은 요즘 무엇을 하며 지내는가?"
"사부님, 그 계집은 굴속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보름은 족히 될 겁니다."
왕중양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사부님, 임 여협의 병세를 알아오도록 사람을 보낼까요?"
옆에 있던 마옥이 근심 어린 표정을 하자 왕중양은 고개를 흔들었다.
"오직 한 가지 기회밖에는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이 말을 들으려 할는지 모르겠어."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는 왕중양의 심기를 헤아리며 마옥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사부님, 제가 보기에는 임 여협의 상처가 매우 심각한 것 같습니다. 더 지체했다가는 치료가 영 불가능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사부님께서 한 번 더 설득을 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나라고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느냐? 허나 본인이 극구 고집을 피우기에 어쩔 수가 없다네."
왕중양의 시선은 임조영이 있는 뒷산 쪽으로 멀리 날아갔다. 시선을 그쪽에 고정시킨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의 운명은 오로지 하늘에 달려 있네."
왕중양은 그녀의 상태를 하루에 한 번씩 확인했다. 날이 가고 달이 바뀌자 그도 더는 물어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눈물만 삼킬 뿐이었다. 임조영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예감한 그는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불길한 예감은 오래지 않아 왕중양에게로 달려오고 말았다.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구처기는 오랫동안 말문을 열지 않고 왕중양 곁에 서 있기만 했다. 왕중양도 구처기의 태도에서 무언가를 감지했기에 먼저 물어 보고 싶지가 않았다. 구처기는 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왕중양이 고개를 힘없이 숙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 사람이 죽었는가?"
민망한 구처기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두리번거렸다.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 뒷산에 가보니 고분 앞에는 지전(紙錢) 한 꾸러미가 걸려 있었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강한 충격에 왕중양은 중심을 잃었다. 겨우 몸을 일으킨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구처기에게 말했다.
"알았네. 자넨 그만 내려가 보게."
밖으로 나온 구처기는 그러나 이대로 왕중양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는 마옥과 몇몇 사형들을 불러 함께 밖에서 왕중양을 지켰다. 이들은 왕중양이 임조영에게로 갈 것이라 생각하고는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반나절이 지나도록 왕중양에게서 아무런 분부가 나오지를 않았다. 왕중양은 끝내 임조영을 찾아가지를 않았다. 도저히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마음속으로 그녀의 명복을 비는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도장으로 들어간 왕중양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슬픔을 잊고자 했다. 검을 정신없이 휘두르던 그는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오열을 토했다.
"임조영, 왜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이오!"
그는 쉽게 멈출 것 같지 않은 통곡 속으로 빠져들었다.
종남산으로 구척 장신의 그림자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구양봉이었다. 그는 발걸음을 죽여 가며 용케도 왕중양이 쓰러져있는 도장 근처까지 접근해 왔다. 구양봉은 왕중양의 《구음진경》을 빼앗으려고 찾아온 길이었다. 5년 전인가 그는 왕중양을 비롯하여 황약사, 단지흥,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 등이 모여 그 《구음진경》을 놓고 화산에서 무예 시합을 벌이자는 말을 몰래 숨어서 엿들은 적이 있었다. 화산의 무예 시합이 가까워 오자 그는 홀연 찾아와 먼저 그
것을 손에 넣을 속셈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손을 뻗치기 전에 《구음진경》을 차지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의 추측으로는 왕중양이 도장에서 《구음진경》을 익히고 있을 거라 판단하고는 여기까지 몰래 들어온 것이다.
도장 안으로 들어선 구양봉은 웬 사람이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고는 몸을 사렸다. 천하 무적의 왕중양이 구슬피 울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구양봉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내에게로 가까이 접근했다. 뜻밖에도 왕중양이 엎드린 채 통곡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오늘은 재수가 좋은 날이로군 이곳까지 들어오는데 사람들의 눈에 띄지를 않았고, 또 먹이가 고스란히 눈앞에 놓여져 있다니…….'
속으로 쾌재를 부른 구양봉은 왕중양 뒤에 선 채로 기다렸다. 그의 판단이 맞아떨어졌다. 슬픔 속에 잠겨 있던 왕중양은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지쳤는지 혼미한 지경에 놓여 있었다. 이 틈을 이용해 구양봉은 도장 안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천하의 기서를 찾아낼 욕심으로 혈안이 되어 몸을 움직였다.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구음진경》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왕중양의 품속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순간 구양봉의 두 눈이 커졌다. 《구음진경》이 손끝에 잡혔던 것
이다. 경서를 손에 쥔 그가 이제 왕중양을 죽이려고 하는데 갑자기 벼락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 생쥐 같은 놈아!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왔느냐?"
휙휙 바람이 일며 검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구양봉이 몸을 바닥에 굴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손에 들어왔던 《구음진경》이 다시 왕중양의 품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구인가 확인을 한 구양봉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그곳에는 구처기가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밖에 있던 구처기는 도장 안의 낌새가 이상해 막 들어서던 길이었다. 뒤에 나타난 마옥도 검을 뽑아 들며 급히 휘파람을 불었다. 이 휘파람 소리는 적이 들어왔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두 사람은 구양봉을 에워싸며 접근해 왔다. 그러나 구양봉은 여유롭게 두 사람을 번갈아 살피며 미소지었다. 구양봉의 사장이 번쩍하자 구처기의 검은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허공
을 갈랐다. 구처기가 검을 머리 위로 돌리며 이번에 구양봉의 다리를 공격했다. 공중으로 솟아오른 구양봉이 멀리 물러서며 이죽거렸다.
"과연 왕중양의 제자답구나. 재주가 만만치 않은데! 하지만 이 구양봉 나으리를 당해 내지는 못할걸."
마옥은 그자가 구양봉이라는 말에 잔뜩 긴장했다. 그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던 터였고, 왕중양 역시 경계하지 않았던가.
다시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른 구양봉은 사장을 길게 내밀며 마억을 노렸다. 자신의 공격이 빗나가 침통해 있던 구처기가 먼저 달려와 사장을 막아냈다.
"내 검을 받아랏!"
이들이 살기가 튀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나머지 제자들도 왔다. 이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왕중양을 보자 경악했다.
"사부님, 사부님!"
손불이가 소리치며 왕중양에게로 달려갔다. 구양봉이 왕중양을 해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마옥의 목소리가 터졌다.
"사부님은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이야. 무사하시니 우선 저 독종부터 죽여야 해!"
이 말에 모든 제자들이 흥분을 하며 구양봉을 협공하기 시작했다. 왕중양에게 천강북두대진을 익힌 뒤로 구양봉과 맞서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좋은 기회로 삼을 작정이었다. 비록 임조영에게는 통하지 않았으나 구양봉은 꼭 물리치리라 무언으로 다짐을 했다.
마옥의 휘파람 소리가 울리자 일곱 사람들은 일제히 진을 형성했다. 구양봉은 이들이 검을 빼들고 요상한 동작을 취하자 내심 걱정이 되었다. 공격은 하지 않고 이리저리 위치를 바꾸는 것이 아무래도 수상했다. 사장을 휙휙 넓게 돌리며 구양봉이 이들의 동작에 눈을 맞추었다. 전진칠자들은 모두 제 위치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너무 당황한 탓인지 천권성 위치에 있어야 할 구처기 대신 유처현이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이들 중 가장 무공이 떨어지는 유처현이라
모두들 긴장을 했다.
"흥, 나를 포위하려고 하는 게로구나! 아무튼 다시 한 번 왕중양의 진가가 나타나는군."
냉소를 씹으며 구양봉이 사장을 더욱 세차게 돌렸다. 마옥이 화기를 누르지 못하고 구양봉에게 울분을 토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네 놈이 언젠가는 찾아올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 진법을 익혀 둔 바 오늘은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구양봉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는 당당하게 받아쳤다.
"왕중양이 아니라 그 애비라도 나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그따위 진법으로 나와 대적하겠다니 우습구나!"
구양봉이 사장을 빙글빙글 돌리며 진을 흐트러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진은 단단했다. 구양봉이 유처현을 향해 사장을 찔렀지만 천추성의 마옥과 천기성의 구처기가 협공을 해오는 바람에 막히고 말았다. 전진칠자들은 결코 단독으로 나서지를 않았다. 옆사람과 힘을 모아 구양봉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기에 더욱 견고한 진을 지킬 수가 있었다.
"거머리 같은 놈들!"
공격을 하다가 지쳐 버린 구양봉이 신경질을 냈다. 벌써 몇십 합을 싸웠으나 구양봉의 기력만 빠지는 결과였다. 차츰 진을 좁히며 구양봉을 아예 거꾸려뜨리려고 할 때였다.
그때 어디선가 서로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려 왔다.
"저 독종이 과연 진을 빠져 나올 수 있을까?"
"글쎄, 절대로 나을 수가 없을걸. 진을 칠 때 좀 위치가 바뀌기는 했지만 어림도 없을 걸세."
"허허허, 저 독종 놈의 살껍질을 벗겨 방석이나 만들어야겠군."
이윽고 문밖으로부터 두 명의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이 두 사내가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들을 본 전진칠자들은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은근히 경계가 되기도 했다.
이들 중 하나는 개방의 방주 홍칠이었고 다른 하나는 도화도의 도주 황약사였다. 황약사는 언제나 강호에 나타날 때는 청동으로 만든 탈을 쓰고 다녔기에 그 모습은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일인지 맨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홍칠은 눈앞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어디서 구했는지 불에 구운 닭 한 마리를 들고는 열심히 뜯고 있었다. 두 사람의 등장으로 가장 맥이 풀린 것은 구양봉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방해를 놓는 이
들이 내심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것이다.
"여보게 황약사, 저기 왕중양의 품에 있는 게 뭔지 아나? 바로 《구음진경》일세. 자네가 빼앗으면 나와 절반씩 나눠 갖기로 하는 게 어떤가?"
황약사가 왕중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의 품에는 책 한 권이 드러나 있었는데 분명 《구음진경》이었다.
"이보게 독종, 나도 저 책이 탐이 나긴 하지. 허나 그대와 손잡고 빼앗을 마음은 없네. 내게도 손은 있거든."
황약사가 빈정대자 구양봉이 발끈했다.
"내가 먼저 왕중양을 찾아왔으니 저것은 내 것이네."
"그대가 빼앗는 것과 내가 빼앗는 것은 근본부터가 다르지."
"뭐야! 이 놈아, 네 놈은 뱀처럼 혀가 두 가닥이라도 되느냐? 왜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야. 네 놈이 빼앗는 것은 어떻게 다르다는 거냐?"
황약사는 점점 구양봉의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넌 남의 물건이 탐이 나서 무턱대고 빼앗으려는 날강도에 지나지 않아. 그렇지만 난 네 놈의 손에 든 것을 빼앗을 생각이니 어찌 똑같을 수가 있느냐?"
구양봉의 목줄기에서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닥쳐라! 네가 아무리 개소리를 쳐도 너 역시 도적놈일 뿐이다!"
"내가 만약 저 책을 탐낸다면 왕중양과 정정당당히 무공을 겨룰 것이다. 왕중양이 지면 그때는 내가 저 《구음진경》을 차지할 수가 있는 거지."
전진칠자들은 이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구양봉이란 천하의 독종이 날뛰는 것 만으로도 힘에 부칠 지경인데 이제는 황약사마저 《구음진경》을 노리다니 정말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구양봉 혼자라면 몰라도 황약사까지 물리치기에는 약간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는 이들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마옥은 순간 왕중양이 늘 입버릇처럼 뇌까리던 말을 상기했다.
'《구음진경》은 세상에 복을 가져올 수도 있고 화를 부를 수도 있느니라!'
바로 그 말이 새삼 지금의 상황과 맞아 떨어지고 있음에 마옥은 눈을 감았다.
"여보게 거렁뱅이, 자넨 도대체 무엇하러 온 사람인가? 경서를 빼앗으러 왔는가, 아니면 그 닭다리를 자랑하고 싶어 왔는가?"
황약사가 홍칠을 향해 면박을 주었다.
"다들 탐을 내는 걸 보니 저 책이 보배이긴 한 모양이군. 그럼 나도 한번 욕심을 내볼까. 사발이 뛰는데 가마솥이라고 뛰지 말라는 법이 있나?"
뜻밖의 일이었다. 전진칠자들은 홍칠마저 이렇게 나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적어도 위기에 처한 왕중양을 도와 이들을 물리쳐 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홍칠까지도 구양봉과 황약사 편에 서서 왕중양을 업신여기려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뻔뻔한 놈아, 네 놈마저 도적질을 일삼으려 하느냐?"
구처기가 참을 수 없어 홍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홍칠이 머리를 장난스럽게 내저으며 대꾸했다.
"넌 나를 잘못 보았다. 이중에서 도적 놈은 나를 뺀 이 두 사람이라고."
홍칠의 말에 황약사의 얼굴빛이 붉게 변했다.
"거렁뱅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우물거리지 말고 말을 하려면 분명히 하라구!"
"하하하핫!"
홍칠이 한껏 웃으며 황약사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여보게, 자네를 꽤나 총명한 사람으로 봤는데 전혀 딴판이로군. 이 거렁뱅이의 말뜻을 그렇게도 모르겠나? 난 거렁뱅이야. 한평생 동냥으로 살아왔으니 천하에서 가장 낯짝이 두꺼운 사람이지. 그리고 저 독종은 제 형을 죽이고 형수를 겁탈한 놈이라구. 그러니 우리들 중 가장 낯짝이 얇은 사람은 바로 자네뿐이란 뜻이네."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그런데 낯짝이 흐물흐물한 자네가 어째서 오늘은 이처럼 철면피로 구는가?"
불현 찬물을 끼얹자 황약사의 눈빛이 또 돌변하고 말았다.
"뭐라고!"
"원래 왕중양은 저 경서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려고 했었네. 대리국의 단지흥이 말하기를 마땅한 사람이 아직 나타나지 않아 망설이고 있다는 거야, 그런데 자네가 느닷없이 튀어나와 빼앗으려 든다면 모두들 자네를 욕하지 않겠는가? 왕중양이 판단하여 자네에게 순순히 넘겨준다면 몰라도 그건 철면피나 하는 짓이지."
"거렁뱅이, 나는 줄곧 자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경서를 욕심내지 않는 위인이라 믿었네. 자네가 아무리 말을 돌려도 자네가 왕중양과 한패라는 걸 숨길 수는 없어. 만약 나와 구양봉이 힘을 합쳐 경서를 빼앗겠다면 어쩔 셈인가?"
말을 마친 황약사가 경서를 빼앗을 듯 몸을 움찔거렸다. 홍칠은 속으로 뜨끔했다.
'말로서는 통하지 않는 위인이로구나. 황약사까지 나서니 정말 낭패야. 무슨 일이 있어도 황약사만은 물고 늘어져야 한다. 그러면 전진칠자들이 구양봉 한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낼 수 있으리라 '
이렇게 마음을 다진 홍칠이 다시 황약사에게 눈길을 주었다.
"자네가 경서를 차지하고 싶다면 우선 내게 허락을 받아야 할걸세."
"아무렴, 여부가 있겠나. 먼저 자네를 죽이고 나서 경서를 손에 넣을 생각이니 너무 재촉하지 말게나. 일이야 조금 번거롭겠지만 자네가 원하는 일이니 어디 마다할 수가 있겠는가?"
이들의 싸움에 가장 신바람이 난 사람은 구양봉이었다. 구양봉은 옆에서 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또 한 번 쾌재를 불렀다.
"여보게, 뜸을 들이지 말고 어서 거렁뱅이 놈을 내치게나. 그리고 나서 우리 두 사람이 공평하게 경서를 나누자고. 히히히."
구양봉이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자 황약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헛헛헛, 넌 정말 바보로군. 내가 거렁뱅이를 죽일 수 있는데 어찌 네 놈이라고 살려 두겠느냐?"
"하하핫!"
구양봉도 굴하지 않고 웃음으로 맞받아쳤다.
"네 놈이 나를 죽이겠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마라!"
구양봉이 가슴을 펴고 지껄이고 있는 사이 황약사가 날쌔게 몸을 날렸다. 갑자기 날아든 황약사를 피하며 홍칠이 얼른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황약사의 무공은 번개같이 빠르고도 힘이 담겨져 있었다. 춤을 추듯 우아하고 멋들어진 면도 없지 않았으나 대단한 내력이 숨겨져 있어 언제나 상대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구양봉에게서 눈을 떼지 마라! 저 놈이 사부님께 접근하는 걸 지켜 봐야 한다!"
마옥이 나머지 제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구처기가 쏜살같이 구양봉에게로 달려가 먼저 일침을 갈겼다. 비록 사장에 막혀 구처기의 공격은 무의로 끝났지만 구양봉을 왕중양으로부터 물러서게 한 결과였다.
구양봉이 사장을 거두며 슬금슬금 자세를 묘하게 잡으려 했다. 전진칠자들은 구양봉의 합마공을 알고 있었기에 겁이 났다. 이들은 구양봉의 동작을 주시하며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왕중양 쪽으로 다시 다가온 구양봉이 사장을 들어 그를 내리치려고 했다. 전진칠자들이 한결같이 몸을 날려 왕중양을 덮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천 근도 넘는 사장이 왕중양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제36장 《구음진경》의 진정한 주인
구양봉의 사장이 떨어지면 왕중양은 끝장이었다. 그런데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갑자기 휘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쓰러져있던 왕중양이 몸을 솟구치며 일어섰다. 몸을 피한 왕중양이 날아드는 사장을 움켜쥐었다. 그리곤 다른 한 손으로 구양봉의 가슴을 향해 힘껏 내질렀다.
"악!"
뒤로 멀찌감치 물러선 구양봉이 이를 갈며 노려보았다.
"왕중양 이 놈, 내 오늘 기필코 너를 꺾어 놓겠다!"
"너 같은 악종이 살아 있는 한 나 역시 죽을 수 없다!"
"왕중양, 제자들 앞이라고 너무 큰소리치지를 마라. 넌 할말이 없는 놈이다. 임조영을 가슴 태워 죽였고, 의군들 역시 금나라에 팔아먹은 놈이 아니더냐? 또한 고분 속에 들어가 죽지 못하고 왜 뛰쳐 나왔더냐?"
다른 것은 몰라도 임조영에 대한 말을 들먹이는 부분에서 왕중양은 가슴이 쓰렸다. 잊으려고 했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금 깊이 눈앞에 새겨졌다. 가슴이 막히는 듯하더니 왕중양은 입으로 피를 왈칵 토하고 말았다.
잠시 동작을 멈추고 이를 지켜 본 홍칠은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얼마나 가슴에 맺힌 것이 많기에 저토록 시커먼 어혈이 생겼을까. 왕중양의 가슴을 달래 주지 않으면 저절로 죽어 버릴 거란 위기감이 느껴졌다.
"황약사, 우리의 싸움은 여기서 잠시 멈추도록 하세. 내 왕중양에게 전할 말이 있다네."
그러나 황약사는 홍칠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려 했다.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말고 어서 목이나 내놓아라. 왕중양처럼 무정한 사내는 죽어야 해. 그래야 세상의 여인들이 품고 있는 한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 역시도 왕중양이 임조영을 죽였다고 믿고 있는 눈치였다. 홍칠은 더욱 애가 탔다.
한편 왕중양은 한 가지 상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래, 난 임조영을 죽게 했고 몇만 명의 아군들까지 해친 죄인이다. 그들은 모두 나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이야. 그런 내가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죽음으로써 이 죄를 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왕중양은 괴로웠다. 이 손으로 머리를 치면 자신은 죽게 될 것이다. 이 모습이 마옥에게 이상하게 비친 모양이었다. 마옥이 왕중양을 만류했다.
"사부님,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십시오. 사부님이 먼저 가시면 저희들과 교내의 일들은 어떡한단 말입니까?"
왕중양이 넋을 놓은 채로 중얼거렸다.
"마옥,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없어도 너는 전진교를 훌륭하게 이끌어 나가야 한다. 저승에 가서 임조영을 만나는 것만이 내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 같다."
임조영의 일로 인해 왕중양이 실의에 빠진 것을 보고는 구양봉이 좋아했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도 그는 느끼고 있었다. 그는 왕중양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천하의 기서를 차지할 욕심에 몸이 뜨거워졌다.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왕중양을 죽이려고 구양봉이 날뛰기 시작했다.
구양봉이 성큼 앞으로 나서자 마옥이 검을 들었다.
"천강북두!"
마옥의 검이 구양봉을 향해 득달같이 날아들었다. 구처기도 그의 뒤를 따라 용맹스럽게 검을 들고는 질풍같이 달려 들었다. 유처현도 구양봉의 머리를 겨누고는 검을 휘둘렀다. 뒤를 이어 왕처일과 손불이도 합세했다. 일단 구양봉의 사장을 왕중양에게서 멀리 몰아낸 뒤 이들은 왕중양을 살폈다. 손불이가 왕중양을 부축하며 안간힘을 썼다.
"손불이, 넌 마옥의 마누라가 아니더냐? 그런데 왜 왕중양을 껴안고 난리를 치지?"
구양봉다운 말이었다. 손불이는 구양봉의 말에 화가 정수리를 뚫고 오를 듯 치밀었다. 손불이가 왕중양을 부축하고 있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구양봉에게 기회를 주게 되었다. 구양봉의 사장이 날아들었는데 손불이와 왕중양 어느 쪽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앞가슴을 얻어맞은 왕중양은 피를 토하며 다시 옆으로 쓰러졌다.
"사부님을 보살펴라!"
마옥이 소리쳤다. 손불이는 자기 때문에 왕중양이 당한 것을 분해 했다. 그녀가 왕중양을 섬기는 마음은 각별했다. 그녀는 원래 무공이 좀 뒤떨어졌고 성미마저 급하여 왕중양이 평소 신경을 써주곤 했었다. 소맷자락이 없는 고루도포(館懼道檀)를 그녀에게 주어 인생의 도의(道義)를 깨닫게 해 주기도 했다. 그런 탓인지 그녀는 왕중양을 자기 어버이처럼 존경해 왔던 것이다. 그처럼 섬겨왔던 왕중양이 구양봉에게 당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너무 앞서 손불이는 구양봉에게 걸려들고 말았다. 손불이의 검을 한 손으로 거머쥔 구양봉이 사정없이 비틀어 버렸다. 손불이의 검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구처기와 유처현의 검을 차례대로 막아낸 구양봉이 손불이를 잽싸게 품에 안았다.
"마옥, 네가 이 계집을 버린다면 난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백타산장에 가두어 두었다가 심심할 때면 불러내 재미를 보련다!"
그는 손불이의 앞가슴을 방패삼아 검을 막아낼 속셈이었다. 전진교의 나머지 제자들은 구양봉을 완벽하게 포위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할말이 있다!"
이때 나선 것은 왕중양이었다. 왕중양이 나서자 모두들 동작을 멈추고는 그를 지켜 보았다. 홍칠과 황약사도 마찬가지였다.
"난 《구음진경》을 가지고 있네. 이 책은 천하에 둘도 없는 기서지. 나는 원래부터 이 책을 혼자만 독차지할 생각은 없었네. 언제든지 이 책과 인연이 닿는 사람이 나타나면 넘겨주려고 생각해 왔네. 그런데 이렇게 모두 몰려들어 서로 빼앗겠다고 아귀다툼을 벌이니 어쩌란 말인가?"
구양봉이 입술을 옆으로 휙 틀며 비웃었다.
"흐흐, 어쩌긴. 자네의 제자가 내 손에 있으니 알아서 하는 수밖에."
왕중양이 쓴웃음을 던졌다.
"내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그 동굴 속 석벽에 유명한 말씀을 새겨놓으셨네. 자네는 그 두 가지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왕중양이 정색을 하고는 조용히 읊조렸다.
"《구음진경》은 세상에 복을 가져다 줄 수도 있고 또한 화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이렇게 적혀 있다네. 그런데 자네에게 이 책을 준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재화가 넘쳐나 사람들은 더이상 땅에 발붙이고 살 수가 없게 될 걸세."
구양봉이 한층 더 기고만장해져서 빈정댔다.
"왕중양, 자넨 내 몽둥이에 맞았네. 죽지는 않겠지만 이미 속 깊이 골병이 들었단 말씀이지. 앞으론 내 상대가 될 수 없어. 그런 몸으로 나를 가르치겠다는 거냐?"
"네 놈을 가르칠 어른은 여기에 계신다!"
뒤에서 이런 말이 들려 오자 구양봉이 흠칫 놀라며 돌아섰다. 황약사였다. 구양봉은 원래 황약사를 자기 발에 붙은 나뭇잎보다 못하게 여겨 왔던지라 대뜸 엄포를 놓았다.
"황약사, 괜히 나서지 말게!"
황약사가 왕중양을 향해 진심인지 모를 동작을 취했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는데 아무래도 그 속에는 그만이 아는 음모가 도사리고있는 듯했다.
"왕 진인, 그 책을 내게 넘겨주시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왕중양이 대답했다.
"안 되오. 당신의 인품이나 행동거지에 대해서도 나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까닭이오."
평소 왕중양은 결코 거짓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황약사로서는 화가 나는 일이었다.
"왕 진인, 자넨 이제 곧 죽을 목숨이 아닌가? 그리고 제자까지 남의 손에 잡혀 있는데 아직도 큰소리만 칠 셈인가?"
한숨을 내쉰 왕중양이 그를 노려보았다.
"천하에 이 《구음진경》이 나오니 재화가 많구나. 내 손에 이 경서가 없었더라면 지금보다는 한결 태평했을텐데……."
품속에서 경서를 꺼낸 왕중양이 말을 계속했다.
"구양봉, 네가 손불이를 놓아주면 이 경서를 태워 버리지는 않겠다. 그러나 계속 고집을 피우면 난 이것을 가루로 만들 것이다!"
구양봉은 속으로 궁리를 해 보았다.
'그것을 태울 수 있는 용기가 과연 네 놈에게 있을까? 흥, 믿을 수 없어.'
왕중양이 경서를 태울 수 없다고 판단한 구양봉이 자신 있게 호통을 쳤다.
"경서를 태우기만 해 봐라. 난 네 제자를 죽여 버리겠다!"
"천하의 무림이 네 놈의 손에 유린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구양봉이 손불이의 팔을 더욱 세게 조이며 꼼짝못하게 만들었다. 황약사가 구양봉을 나무랐다.
"이 독종아, 어서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아무래도 네가 놓아주는 편이 나을 거다. 여인을 인질로 잡아 놓고 있는 네 모습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황약사,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독종아, 네 속이 밴뎅이처럼 좁아 터졌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넌 지금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느니라. 한번 어긋난 생각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법이지."
"내가 후회할 게 뭐가 있느냐?"
구양봉은 조금도 자신을 깨달으려 하지 않았다. 황약사가 이번에는 눙치듯한 말로 그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왕중양은 저 《구음진경》을 손에 넣은 지 이미 오래이네. 말하자면 눈을 감고도 훤히 외울 수가 있다는 말이지. 그런데 네가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왕중양이 경서를 태워 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구. 이미 머리 속에 넣어 두고 있는 왕중양에게는 필요가 없으니까 너만 손해를 보는 셈이지."
황약사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아니 황약사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으니까 왕중양이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경서를 태우겠다는 으름장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음, 그렇다면 내가 경서를 얻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도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이네?"
이때 홍칠이가 황약사에게 말을 걸어 왔다.
"황약사, 자네 오랜만에 근사한 말 한번 했네."
잠시 말을 중단한 홍칠이 이번엔 구양봉을 보며 말을 이었다.
"독종아, 내가 보기에는 황약사의 말이 백번 옳은 것 같아."
홍칠이 일조를 해 주자 황약사가 빙그레 웃었다. 더욱 신명이 난 황약사가 다시금 구양봉을 녹이려 들었다.
"구양봉, 자넨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네. 해야 할 일이란 별게 아니야. 지금 당장 왕중양에게 이렇게 말을 하게나, 만일 대답하지 않으면 세 가지 일을 하겠다고 말이야. 그러면 왕중양이 대답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지."
구양봉의 마음은 괜시리 조급해져서 앞뒤를 가릴 겨를이 없었다. 경서만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하면 손쉽게 왕중양의 품속에 든 경서를 빼앗을 수 있을까만 골몰하던 그에게 황약사의 말은 달콤하기만 했다. 고심을 하고있던 판에 황약사가 던져 준 방법은 정말 반갑기 그지없었다.
"황약사, 내가 만약 저 경서를 차지하게 되면 자네에게도 기꺼이 보여 주겠네."
저도 모르게 불쑥 말을 해놓고 구양봉은 후회를 했다. 경서를 차지하고 난 다음에 그것을 결정해도 늦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혼자 독점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괜히 입맛이 썼다. 구양봉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황약사는 빙그레 웃으며 알았다는 뜻을 보였다.
"구양봉, 자네는 먼저 전진교를 도륙해야 하네. 전진교의 제자들의 씨를 말려 놓으면 왕중양도 용빼는 재주야 부리겠나?"
황약사가 이처럼 자세한 방법까지 일러줄 줄은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다.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은 그 고분 안에 들어가 임조영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놓는 것이다!"
"정말 대단해. 아니 천하에 둘도 없는 훌륭한 계략이로군!"
구양봉은 박수까지 치며 황약사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황약사는 구양봉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쉬지 않고 설명해 나갔다.
"세 번째의 일은 자네가 왕중양으로 가장하여 강호에서 살벌한 싸움을 일으키는 걸세. 그리하여 일곱 문파들이 서로 살육전을 벌이게 해야만 하네, 사람들이 모두 왕중양을 저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게지. 죽어서도 마음이 편치 못하도록 철저하게 일처리를 매듭지어야 함을 명심하게나."
왕중양 역시도 황약사의 발언에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황약사를 둘러싸고 있는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도 더러 있었지만 이토록 악인의 탈을 뒤집어쓴 인물일 줄은 몰랐다. 황약사의 뱃속에는 온갖 악독한 궁리들만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은 아닌지 옆에 있는 구양봉이 무색할 정도였다.
"황약사, 왜 나를 해치지 못해 안달을 하는 건가?"
왕중양이 황약사에게 근엄한 자세로 물었다.
"왕 진인, 자네가 천하의 기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게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네. 내가 만약 그 책을 미리 보았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지. 그 책에 내가 원하는 것이 들어 있지 않다면 난 누구도 해칠 마음을 먹지 않았을 테니까……."
한층 기세가 드높아진 구양봉이 지껄였다.
"왕중양, 황약사의 말을 잘 들었겠지? 그 경서를 내게 던져라, 그럼 이 제자를 살려 준다."
"주면 안 되오! 이 거렁뱅이도 경서를 차지하고 싶다. 차라리 내게 주는 한이 있어도 저 두 망나니들 손에 들어가서는 절대 안 된다!"
홍칠이 달려와 왕중양 앞을 자기 몸으로 막았다. 황약사는 홍칠의 속내를 훤히 읽고 있는 터라 여유 있게 비웃었다.
"이 거렁뱅이 놈아, 나와 싸움을 하다 말고 어디를 가느냐?"
왕중양이 발버둥을 치고 있는 손불이에게 안타까운 눈길을 주었다.
"너를 구할 수 없어 미안하구나!"
왕중양은 경서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고 경서 역시 생명을 다한 것이라 여겼다 그렇지만 구양봉이 제아무리 날뛴다 해도 경서를 넘겨줄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왕중양이 《구음진경》을 예사롭지 않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내력으로 단번에 태워 버리려고 할 때였다
"나무아미타불!"
난데없이 염불 소리가 들려 온 것이다. 어찌나 맑고 쟁쟁하게 울리던지 왕중양의 가슴속에서 오랫동안 메아리로 남았다. 한 중년의 사내가 모습을 보이며 여러 사람들에게 차례대로 예를 올렸다.
"여기는 정말 흥성흥성해서 좋군요. 단지흥 인사를 올립니다."
공손하게 예를 올리는 단지흥을 보는 구양봉의 가슴은 싸늘해졌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단지흥까지 나타났으니 경서는 더더욱 차지하기 어렵게 된 것이 아닌가. 씁쓰레한 입맛이 감돌자 구양봉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멀고도 먼 대리국의 임금께서 어떻게 이곳까지 오셨소이까? 남의 경서를 빼앗으려고 온 거는 아니겠지요?"
다분히 비꼬는 말투였지만 단지흥은 짐짓 모르는 체했다.
"난 이곳이 하도 떠들썩하기에 흥미가 끌려 찾아온 길이오. 자네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중이기에 이토록 아수라장인가? 아귀다툼을 하는 것을 보니 무슨 금은보화라도 감춰 둔 것인가?"
"단지흥, 혀 짧은 소리 집어치워라! 네가 그렇게 빙빙 말을 돌린다고 내 모를 줄 아느냐? 너 역시 《구음진경》때문에 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구양봉이 턱을 치켜 들며 으르렁대자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하하핫! 여보시오, 왕 형. 그 《구음진경》이야 왕 형이 예전에 내게 준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오?"
갈수록 태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왕중양은 단지흥의 입가에 채 가시지 않고 남아 있는 미소의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분명 다른 속뜻이 숨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왕중양이 얼른 대꾸했다.
"물론이었소. 그래서 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는데 잘되었소."
단지흥과 왕중양이 나눈 이 한마디는 일대의 돌풍이었다. 모두들 혼백을 도둑맞은 사람들처럼 멍한 상태가 돼 버렸다. 단지흥이 매우 유유작작한 동작으로 사람들을 크게 둘러보며 말했다.
"《구음진경》은 천하의 기서요. 왕 형이 이런 귀중한 경서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내게 넘겨준다면 자네들은 아무렇지도 않겠는가?"
기다렸다는 듯이 구양봉의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아? 네가 우리보다 어디가 잘났다고 기고만장한지 모르겠다. 네게 일양지가 있으면 내게는 합마공이 있다!"
황약사도 경박하지 않게 그러나 말속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나도 자네가 그 경서를 갖는다는 것에 반대를 하네."
홍칠도 빠질 수가 없었다.
"이 거렁뱅이가 한평생 살아오면서 감복을 한 사람은 왕중양 하나뿐이네. 하지만 단지흥, 그대 역시도 왕중양과 대등한 인품을 가졌소."
그윽하게 한차례 웃음을 보인 단지흥이 대답했다.
"저 경서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탐을 내고 있으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걸세.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을 테지."
'왕중양은 지금 경서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 기회에 빼앗지 않으면 영영 내 눈앞에서 경서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내가 설사 전진교의 제자들을 몰살시킨다 해도 경서를 차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만 하나……?'
남모르게 궁리를 해대느라 구양봉의 심기는 복잡하기만 했다.
"구양봉, 자넨 예전에는 말과 행동이 곧고 정직한 사내였네. 물로 일부 사람들이 비난은 했지만 자네는 언제나 솔직한 점이 더 많았지, 그런데 오늘 보니까 자넨 그때의 구양봉과는 달라. 남의 경서를 가로채려면 떳떳하게 본인에게 손을 쓸 것이지 왜 제자를 인질로 잡고 괴롭히는 건가? 그건 구양봉답지 못한 행동이지."
단지흥의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말에 구양봉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나 얼른 그런 기운들을 훌훌 벗어 던지며 악한 구양봉의 모습을 되찾았다.
"내가 이 계집을 괴롭힌다고? 내 산장엔 어여쁜 계집이 가득하다. 이따위 낡아빠진 계집을 두고 내가 군침을 삼킬 거라 보는가?"
이를 뿌드득 갈던 구양봉이 손불이를 앞으로 힘껏 밀었다. 중심을 잃고 거의 구르다시피 한 손불이는 왕중양 앞까지 밀려갔다. 구양봉이 노린 절호의 기회란 바로 이때였다. 중심을 잃고 달려오는 소불이를 왕중양이 잡으려는 순간 몸을 날려 경서를 가로채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단지흥이 이런 얄팍한 구양봉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단지흥은 재빨리 손가락을 곧추 펴 손불이를 향해 내력을 발사했다. 손불이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며 왕중양의 옆으로 옮겨지더니 순
간 멈칫 서 버렸다.
전진교의 수많은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온 것도 이때였다. 이들은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고 중양궁 밖에서 잠시 대기를 했다.
이를 안 왕중양이 마옥에게 넌지시 명령을 내렸다.
"다들 물러서라고 하게. 다 모인다해도 소용이 없어. 자칫 잘못했다가는 여러 사람이 다칠 뿐이네."
왕중양의 뜻이 전달되자 전진교의 제자들은 뒷짐을 지고는 자기 자리를 지켰다.
찾아온 강호객들과 막 싸움을 벌이려던 찰나였다.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왕중양이 제의했다.
"이렇게 우리 종남산에 찾아들 왔으니 모두 나의 손님들이오. 다들 앉아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합시다!"
모두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구양봉만 여전히 가슴에 불씨를 남겨 두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홍칠은 또 품속에서 꺼낸 닭을 소리를 내 가며 뜯기 시작했다. 몰골이 말이 아니게 수척해진 왕중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황약사의 눈빛은 이들과 달랐다. 보아하니 왕중양은 강호에서 수군대는 소문처럼 박정한 사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왕중양의 초췌해진 얼굴에서 임조영에 대한 식지 않은 애정을 어렴풋이 읽었다.
사실 황약사도 왕중양을 두고 떠도는 소문 때문에 화가 났었다. 그런데 막상 왕중양과 직접 대면하고 보니 처음 품었던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여러 강호객들을 둘러보다가 말문을 연 것은 단지흥이었다.
"왕 진인, 나의 소견으로는 당신은 너무 비감에 잠길 필요는 없다고 보오. 사람이 살고 죽고 하는 것은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오……."
뇌리에 깊숙이 박힌 임조영 때문에 왕중양은 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난 임조영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혼자 전전긍긍 고통만을 안고 살아왔었소. 뒤늦게나마 알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사람의 마음에 더 깊은 상처만을 남겨 준 꼴이 되고 말았소. 난 《구음진경》이 행여 그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끝내 거들떠보지도 않은 모양이오. 그래서 그 사람은 세상을……."
말을 못 잇고 한 줄기의 뜨겁고도 애절한 눈물을 흘리자 왕중양의 눈물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구양봉마저 입을 다문 채 멋쩍은 듯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나도 모용쟁이 죽은 뒤 한동안 잠을 이를 수가 없었지. 그런데 왕중양은 나보다 더 여인에 대한 정이 깊은 사내로군. 한 번도 살을 섞은 적이 없다고 하던데 무엇 때문에 저리 슬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
왕중양이 천천히 입을 열어 자신의 결심을 알렸다.
"난 《구음진경》을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내게는 일곱 명의 제자가 있기는 하지만 누구도 이 경서를 가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의 손에 남겨지면 그 다음날로 아니 그날로 당장 누군가에 의해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제자들은 이런 내 심정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구양봉이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황약사는 혼자만의 꿍심에 취해 있었다.
'내 제자들에게 넘겨준다면 천하의 드문 명수들이 될 수 있을텐데……. 그중 수제자인 진현풍과 둘째 매초풍은 아마 경서만 독파하면 천하에서 으뜸가는 무학대가로 성장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왕중양의 제자들보다 나의 제자들이 월등하다는 말인가.'
홍칠은 왕중양이 어떤 말들을 이어 나갈까 그것이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왕중양이 만약 경서를 넘겨준다면 단지흥이 가장 제격이라고 나름대로 판단해 보기도 했다. 그것이 세상을 평온하게 만드는 첩경일 것이다. 홍칠의 눈에는 구양봉은 물론 황약사까지도 좋게 보이지가 않았다. 황약사는 언제나 희노무상(喜怒無常)하고,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도 뜨거웠다 차가웠다 종잡을 수가 없었다.
"왕 진인, 그 경서를 단지흥에게 넘겨주겠다고 혹 마음에 두고 있다면 옳게 판단한 것이오. 그렇게 결정된다면 난 이의가 없소!"
홍칠의 말에 사색이 된 구양봉은 슬쩍 황약사의 얼굴빛을 훔쳐보았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고 있는 기색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황약사는 속으로 또 자기만의 속셈을 펼쳐 놓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서를 왕중양이 주고 싶다고 해서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왕중양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 보도록 해야겠다.'
머리를 숙인 왕중양은 막상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질 수가 없어 괴로운 심정이었다. 과연 누구에게 《구음진경》을 넘겨준다는 말인가? 어서 대상을 물색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물론 전진칠자들마저도 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전진교를 우습게 볼 것은 뻔한 일이었다.
"난 지금 몹시 혼란스럽소. 여러분들은 이 중양궁에서 하룻밤만 머물며 나에게 시간을 주시오. 내일 신중히 고심한 끝에 그 결과를 말씀드리리다."
"좋소. 모두들 지친 모양인데 그럼 내일 다시 의논해 봅시다!"
먼저 흔쾌히 동의하고 나선 것은 의외로 황약사였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거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양봉은 어서 단박에 결정을 하라며 왕중양을 채근했다. 홍칠이 또 구양봉을 가로막고 나섰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던 끝에 이들은 왕중양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이곳 주인인 그의 의견을 존중해주자는 말이 나오자 어쩔 수가 없었다.
모두들 제각기 쉴 곳을 찾아 자리를 떴다. 왕중양은 조용히 앉아 자신의 발자취를 곰곰 되짚어 보았다.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또 헤어지며 지금의 자신이 있었다는 상념에 빠져든 왕중양.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여인 임조영, 그리고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었던 모용준과 비참한 최후를 마친 자지 처녀……. 그중 유독 머리 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 모습이 있었다. 어쩌면 임조영만큼이나 절실하게 자신의 가슴을 지배해 왔던 존재, 바로 벼랑 아래에서 만났던 원숭이였다.
원형(猿兄)이 아직도 살아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지금 그 원형이 미치도록 보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왕중양은 자신을 만나면 눈물을 흘리며 좋아할 원형을 그려 보았다. 왕중양의 상념은 또다시 임조영에게로 옮아갔다. 꿈속에서라도 한 번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왕중양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더욱 커다란 무게는 바로 《구음진경》이었다. 과연 누구에게 넘겨주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인가. 혼자 오랜 시간 고심하고 있는데 제자들이 다가왔다.
"사부님, 제 소견으로는 《구음진경》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구처기가 허리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그래, 마옥의 생각은 어떤가?"
마옥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밝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세상에는 5대의 호수(好手)가 있습니다. 남쪽에는 남제(南帝), 북쪽에는 북개(北琴), 동쪽에는 동사(東邪), 그리고 서쪽에 있는 서독(西毒)이 바로 그들입니다. 또한 그 한복판에 있는 분이 사부님입니다. 사부님께서 예전처럼 자신을 지킬 수만 있다면 이들을 모두 제압할 수 있다고 봅니다. 허나 사부님께서 자신을 잃으신다면 저희들은 전진교를 이어 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곧 저희에게 죄인이 되라는 말씀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네 의견을 들어 보고 싶구나."
그러자 구처기가 대신 대답하였다.
"사부님, 그 《구음진경》을 저희 일곱 형제들에게 물려주실 수는 없는지요?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저희는 목숨을 다해 끝까지 지킬 자신이 서 있습니다."
왕중양의 탄식이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너희들은 한계가 있다. 경서를 따라 무공을 익히다 보면 재앙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늘 입에 달고 다니던 그 말을 잊었느냐? 화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세상에 화를 내리는 줄 아느냐? 우선 그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 미친다는 뜻이다. 난 이 책을 불태우려고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이것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 사람의 마음으로 어쩔 수가 없는 게다."
왕처일이 조심스레 물었다.
"사부님의 말씀은 천하의 5대 호수에 속하는 사람이여야만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바로 그렇다. 그 중에서도 단지흥이 지니고 있는 게 가장 나을 것이다. 그 사람은 황제 노릇까지 해 본 사람이지만 욕심이 없다. 또한 무공이 뛰어난 그가 갖고 있는 이상 함부로 빼앗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단지흥이 이 경서를 그다지 탐내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
근심에 빠져 있는 왕중양인 걱정스러운지 마옥이 조심스레 물었다.
"만일 개방의 방주 홍칠공이 갖게 된다면 어떨까요?"
"홍칠공은 괜찮은 인물이긴 하지만 한 가지 홈이 있어. 먹는 것에 너무 빠져 있다는 것이지."
"그럼 황약사는……."
황약사를 들먹인 것은 유처현이었다.
"그 사람에 대해 난 지금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그 사람에 대해 비난의 소리를 하곤 있지만 떳떳하고 늠름한 사람인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 하지만 경서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지는……."
경솔하게 처리해서는 안 될 문제였다. 덕이 없는 인물이 소유하게 되면 천하에는 재앙만이 넘칠 게 분명했다.
왕중양이 중대한 명을 내린다고 하자 제자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저희들은 사부님의 말씀이라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돼 있습니다."
왕중양이 짐짓 소리를 죽이며 말문을 열었다.
"이 일은 매우 중대하다. 매사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경서는 내가 죽거든 너희들 사숙인 노완동에게 맡겨 간수하게 하거라. 그런데 노완동의 행방을 아는 사람 있느냐?"
"글쎄요, 또 밖을 쏘다니고 있는지……."
마옥이 열쩍은 표정으로 대꾸하자 손불이가 극구 만류했다.
"사부님, 그 사람처럼 자유분방한 인물에게 귀중한 경서를 어떻게 맡깁니까?"
"글쎄, 나도 그 사람의 성미를 모르지는 않다. 허나 내가 보기엔 우리 전진교에서 그 사람의 깨달음이 가장 강한 것 같다. 너희들도 나중에는 그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될 것이다. 그가 없으면 전진교는 존속되지 못할 것이야."
그러나 누구도 왕중양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언젠가 노완동을 사제로 받아들이자 제자들은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노완동이 전진교의 기둥이 된다니 제자들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고 또 화가 나기도 했다. 노완동은 전진교에서 그 누구의 간섭도 받으려 하지 않는 안하무인에 가까운 존재였다. 심지어 왕중양조차도 함부로 간섭을 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때 장난기가 담뿍 어려 있는 사내의 목소리가 끼여들었다.
"사형, 무슨 재미나는 놀이라도 하는 거요? 밤늦도록 놀면서 왜나는 부르지 않았소?"
노완동이었다. 그는 왕중양을 언제나 사형이라고 불렀다. 그는 여러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니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러고들 있는 거냐? 이거 나도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건가, 사형?"
그가 엉거주춤 허리를 숙였다.
"모두 일어나거라!"
왕중양이 제자들을 일으켜 세웠다. 침울해 있는 왕중양을 보는 노완동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임조영이란 여인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믿고 있는 것이 그랬고, 또 여인 때문에 항상 우울해 하는 왕중양의 심기가 그랬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불현 영고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노완동은 아무도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 그녀 사이에 있었던 일이 가슴에 밟힐 때면 그는 몹시 초조하고 불안했다.
정색한 왕중양이 노완동을 바라보았다.
"여보게 동생, 자네에게 대사를 맡기려 하는데 어떤가?"
왕중양의 태도가 사뭇 진지했다. 지금껏 자신에게 이처럼 정색을 하며 부탁의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엉겁결에 그도 무릎을 꿇고 말았다.
"형님, 분부만 내리십시오. 내가 당장 해결해 드리겠소이다."
호칭도 사형에서 형님으로 단번에 바뀌고 말았다. 왕중양은 《구음진경》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들을 소상히 말해 주었다. 덧붙여 자신이 죽거든 그것을 잘 간수해 달라는 부탁의 말도 했다.
"그 대신 경서 속의 내용은 한 글자도 보지 않겠다고 맹세를 할 수 있겠는가?"
"예."
대답을 해 놓고는 노완동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은 아직 펄펄하신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요?"
"내 마음은 이미 죽었네."
밤은 더욱 무르익어 가고 있었으나 황약사는 쉽게 잠들지를 못했다. 그는 방에 앉아 경서만을 떠올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경서를 얻게 된 다음 그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아형을 찾을 생각이었다. 밤이 깊어 가자 아형의 생각에 더더욱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경서를 구양봉에게 빼앗기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 또한 거렁뱅이 홍칠 역시도 경서를 넘보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황약사가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는 이 시각에 홍칠이 왕중양의 부름을 받았다. 홍칠이 평소와는 다르게 점잖게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홍칠공,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물어 볼게 있어서요. 홍칠공은 《구음진경》을 얻어 무엇을 할 생각이오?"
홍칠은 머뭇대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하하하, 당신은 나를 잘못 보았소. 내가 그 경서를 아직도 탐내고 있다고 믿고 있소?"
"묻는 말에나 대답을 하시오!"
"난 당신과는 다르오. 난 의군의 통수요 뭐요 하는 따위의 소리는 듣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외다. 원래 게으르다 보니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의욕이 나질 않거든. 만일 내 사부인 소씨 거렁뱅이만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난 이 방주 노릇도 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 경서 역시 내게는 하등 흥미도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나 주시오."
용건이 그것뿐이라면 그만 가 보겠다며 일어섰다. 왕중양의 말이 그의 걸음을 세웠다.
"홍칠공, 그대의 뜻대로 조용한 곳에 가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소.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대는 한평생 떠돌이로 고생을 할 팔자요."
그러나 홍칠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휭하니 나가 버렸다.
다음에 왕중양이 부른 것은 구양봉이었다. 왕중양 앞에 버티고선 그는 앉으라고 권하는 것도 뿌리쳤다.
"난 자네에게 한 가지만 묻겠네. 자네는 경서를 갖게 되면 무엇을 할 작정인가?"
왕중양의 태도를 보아 농담하고 있지는 않다고 결론지은 구양봉이 가슴을 확 폈다.
"《구음진경》을 얻으면 곧 천하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때는 내 마음대로 천하를 호령하며 마음껏 살 수가 있다는 말이네. 누구든 내 말을 거역하는 자는 가차없이 목을 베어 버리겠어, 자네 왕중양도 예외는 아니지!"
왕중양은 대답 없이 한동안 입을 굳게 다물었다. 싱겁게 왜 기껏 물어 봐 놓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나 싶은지 구양봉은 왕중양의 반응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윽고 고개를 든 왕중양이 한숨을 내쉬었다.
"됐네. 그만 쉬게나."
문어귀까지 터덜거리며 걸어가던 구양봉이 고개를 돌리며 협박의 말을 덧붙였다.
"네가 그 경서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날엔 네 놈의 목숨은 각오해야 한다. 만일 네가 순순히 내게 준다면 체면만은 살려 주겠어. 네가 죽은 뒤에도 제자들만은 못살게 굴지 않겠다는 말이다!"
단지흥도 왕중양의 부름을 받고 왔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그는 왕중양과 마주앉자마자 먼저 질문을 던졌다.
"왕 형,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법. 왜 스스로 제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오?"
억지로 미소를 띄운 왕중양은 아직 가시지 않은 어두운 그림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욕심이 곧 고해(苦海)라는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그 고해를 건너기는 쉽지가 않소. 지금까지 그 고해를 건너간 사람이 몇이 나 된다고 보시오?"
단지흥은 잠시 개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과 영고 그리고 노완동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이 스쳤던 것이다.
"이 왕중양이 이제는 쉬어도 될 때가 된 것 같소만."
"속세의 인연과 대사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디서 쉴 수가 있다는 말이오?"
단지흥의 반문에 왕중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환희를 맛보았다. 가슴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었다. 단지흥과는 대화가 통하는 것일까? 왕중양으로서는 어쨌든 모처럼만에 유쾌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왕 형은 아직 한 가지 일을 끝내지 못했으니 절대 손을 놓아서는 안 될 것이오."
"깊으신 가르침만을 바랄 뿐이오."
"왕형의 전진교는 지금까지는 중원 땅에 그 뿌리를 깊이 내리지를 못했소. 전진교는 아직까지 당신의 힘을 빌려도 세력이 모자라는 형편이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속세에서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오."
새로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왕중양은 단지흥의 말에 크게 깨달은 것이 있어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무림의 맹주로서의 위업도 달성해 놓지 못한 자신이 어찌 전진교를 부흥시킬 수 있겠는가? 단지흥의 충고대로 아직 많은 일들을 해결해야만 했다.
"왕 형은 지금 천하의 기서인 《구음진경》을 갖고 있소. 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내주라고 하늘이 왕 형에게 준 것은 아닐 것이오."
"단 형만큼은 내가 안심을 할 수 있을 것 같소."
"난 무슨 일을 하든지 격식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소. 난 언제나 다른 사람을 보필했지 내가 어떤 일을 관장한 적은 없었단 말이오. 달리 말하자면 난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무림의 대사까지 신경을 쓸 경황이 없다는 것이오."
"그렇다면 이 부탁은 들어주시겠소? 난 당신의 대리 단씨의 가학(家學)인 '일양지'를 배우고 싶소이다. 그 대신 난 당신에게 선천신공을 전수해 주겠소."
단지흥은 왕중양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는 자신의 선천신공이 세상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에 두려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왕중양에게 예를 올린 단지흥이 선선히 대답했다.
"알겠소. 내 당신의 뜻을 십분 이해했소이다."
날이 거의 밝을 무렵 왕중양은 마지막으로 황약사를 불렀다.
"아닌 밤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왜 곤히 자는 사람을 깨워?"
이렇게 혼자 투덜대며 황약사가 안으로 들어섰다. 왕중양은 황약사가 비범한 인물임을 자각하고는 정신을 바싹 차렸다.
"만약에 그대가 《구음진경》을 갖게 될 경우 제일 먼저 무엇을 하겠나?"
"솔직히 말해도 괜찮겠나?"
"좋도록 하게."
"난 그 경서를 얻으면 세상에 널려 있는 무심한 자들을 모두 없애 버리겠어. 물론 자네도 포함이 되겠지. 자네같이 양심이 없고 무정한 사내들을 난 경멸하네."
황약사가 왕중양의 아픈 곳을 찔렀다.
"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데 구태여 자네가 손을 쓸 것은 뭔가?"
"자넨 정말 쓸모가 없는 사내일세. 이 세상에 아마 자네 같은 인물도 없을 거네. 임조영이 자네를 어떻게 섬겨 왔는지 모르나? 왜 자네를 그토록 사모했는지 알기나 하냐고?"
임조영이란 말이 나오자 왕중양은 다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
왕중양은 그 어떠한 말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임조영이 자네를 원망한 것은 결코 자네가 무정하게 굴어서가 아니네. 자네는 대사를 더 중히 여기는 사내였거든. 그런 자네를 임조영도 이해는 했었지. 그러나 자네는 끝내 임조영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게 결정적인 원인이네. 왕중양, 내 말을 잘 들어 보게나, 천하의 대사는 사내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네. 자넨 떳떳한 사내 대장부였어.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구음진경》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려는 짓을 하고 있지. 경서가 아니라 재앙을 남에게 씌우려고 한단 말
이네.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지금 황약사가 무슨 말을 늘어놓으려 하는 것인가? 왕중양은 소스라쳐 정신을 차렸다. 황약사의 입에서는 흐르는 물처럼 걷잡을 수 없는 질책이 흘러 나왔다.
"자네는 예전처럼 당당하게 처신을 해야 하네. 설사 다른 사람에게 경서를 넘겨주는 일이 있어도 마음을 놓을 수 있게 한 다음 절차를 밟아야 하지. 몇 년 전 내가 말했던 것을 잊었나? 아니, 우리 모두 약속한 일이지. 경서를 가지려는 사람들이 서로 겨뤄 이긴 자에게 경서를 주자고 약속하지 않았나? 십 년씩 주기를 갖고 다시 다른 사람에게 경서를 넘겨주는 방법을 택해도 좋지. 바로 그때가 임박해 온 것이네. 벌써 약속한 5년이 다 되었지 않은가? 그런데 자네는 스
스로를 천하 제일의 무공을 지녔다고 자부하나?"
그렇다. 5년 전 그들은 분명 그런 약속들을 했었다. 《구음진경》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무공을 겨루어 보자는……. 왕중양은 그의 마지막 물음에 답했다.
"난 아니야, 으뜸인 사람이 있었지만 죽었다네."
임조영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기필코 경서를 차지하려고 찾아왔을 게 분명했다. 황약사가 이런 왕중양의 심중을 훤히 들여다보았다.
"자네가 만약 임조영에게 아직 정을 두고 있다면 천하의 으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네. 그래야 임조영도 황천에서나마 자기가 일생 동안 사모했던 사내가 바로 자네라는 사실에 기뻐할 걸세. 그런데 넋을 놓고 있는 지금의 자네를 본다면 얼마나 실망을 하겠는가?"
왕중양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황약사는 자기 말만을 남긴 채 바람처럼 나가 버렸다.
날이 밝았다. 왕중양은 중양궁 앞에 사람들을 한곳에 불러모았다. 황약사를 본 홍칠이 대뜸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황약사, 난 어제까지만 해도 자네를 크게 오해했었네. 이해하게나."
옆에 있던 구양봉이 눈을 부라렸다. 자기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두 사람이 주고받으니 신경질이 난 것이다. 황약사가 구양봉을 피해 홍칠에게 담담한 미소를 보냈다.
왕중양이 좌중의 시선을 모으고는 입을 열었다.
"천하의 기서 《구음진경》은 내 손에 있소이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각자의 실력을 겨뤄야 하오. 그건 이미 5년 전에 한 약속이었소. 지금부터 난 다시 한 번 공식적으로 제의를 하겠소. 오는 9월 9일 중양절에 누구든지 화산에 올라 무공을 겨룰 수가 있소. 그 화산에서 천하 으뜸의 호수로 인정을 받게 되는 사람에게 이것을 넘겨주겠소. 만일 내가 호수로 뽑히면 이 경서는 나의 소유가 되는 것이오!"
황약사가 불쑥 물었다.
"왕중양, 자네는 이미 경서를 갖고 있으니 천하 으뜸의 호수는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우리가 어찌 자네와 겨룰 수가 있다고 보는가?"
"난 다시는 경서를 보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경서에 있는 무공은 절대 쓰지 않을 것을 맹세하오!"
알겠다는 듯이 황약사가 왕중양을 향해 읍을 했다.
"이 세상에서 신의를 잘 지키는 사람 중 하나가 왕중양이라 믿고 있소."
가만히 지켜 보던 구양봉으로서는 화가 날 뿐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경서를 손에 넣지 못한다는 말이 아닌가. 결국 9월 9일 중양절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구양봉은 허탈해졌다.
"좋소, 그럼 중양절에 화산에서 다시 만납시다!"
여기저기서 왕중양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구양봉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구양봉은 끝까지 악인의 자세를 지켰다.
"황약사, 내게 혼줄이 나지 않으려면 준비를 잘해 두라구."
"네 놈의 재간으로 날 죽이겠다니 우습군!"
황약사도 지지 않고 큰소리로 맞받아쳤다.
모두 중양절에 다시 모이기로 하고 흩어졌다. 그러자 왕중양은 서둘러 행장을 꾸리고 중양궁을 나섰다.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홀로 단신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나 여전히 벼랑은 그대로였다. 아래를 굽어보니 천 길 낭떠러지 끝으로 푸른 강물이 남실대며 흘렀다. 벼랑 아래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내가 소리 높여 누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원형! 원형! 내가 찾아왔소!"
잠시 후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길게 울렸다. 곧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저 아래에서 원숭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원숭이는 벼랑위로 훌쩍 달라붙더니 아주 익숙한 솜씨로 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사내가 있는 벼랑 위까지 오른 원숭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비쳤다. 사내도 역시 감회에 젖은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왕중양과 원숭이는 뜨겁게 서로를 얼싸 안았다.
-제16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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