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풍류여마 매초풍 1

3학년2반 | 2022.02.24 07:50:14 댓글: 0 조회: 706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0811
화산논검(華山論劍) 제16권 6부 풍류여마 매초풍 I
제목: 화산논검 제16권 (전22권)

제1장 여씨네로 몰려드는 사람들
제2장 여인의 피맺힌 원한
제3장 추격당하는 흑풍쌍살
제4장 흑풍쌍살의 무공연마
제5장 소녀공을 얻은 매초풍
제6장 소녀공을 얻은 매초풍
제7장 소요관의 결투


제1장 여씨네로 몰려드는 사람들

방원(方圓)에서 여(廬)씨 가문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고 또한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도 없었다. 이곳의 산과 들
은 물론 날아다니는 새까지 여씨네 소유이며, 심지어는 강물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
마저 여씨네 것이라는 노래가 불려질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백 리 이내에 집이라고는 오직 여씨네 하나뿐이라는 거였다. 전에는 여
써 성을 쓰는 집이 여러 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다른 성씨로 고쳐 버렸고 끝내
고집을 부리던 사람들도 결국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거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이 방원 백 리의 중심에는 그리 크지 않은 읍이 하나 있었다.
그 읍을 여가집(廬家集) 불렀다. 이 여가집의 한복판에는 황궁보다는 못하지만 굉장히 호화
로운 여부(廬府)가 있었다. 그 곳에는 여원외(廬員外) 비롯해 그의 세 아들과 딸 하나가 살
고있었다.
아들은 여승(廬勝), 여퉁(廬通), 여강(廬强)이었고 고명딸은 여소교(廬小嬌)였다. 여승, 여통
그리고 여소교는 본처의 소생으로 적자(嫡子)였고 셋째 여장은 서자(庶子)였다. 그래서인지
여강은 여러모로 형제들 사이에서 설움을 많이 당했다. 하지만 그는 생모가 근방에서는 알
아주는 미인이었던 덕으로 인물만큼은 그중 가장 나았다.
그는 두 형들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영준한 외모 때문이었다. 두 형들의
냉대를 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의 인물은 아주 뛰어났다.
여원외의 첫째 소실인 여이부인(廬二夫人)은 총명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아들이 집에서 멸시
를 당하는 것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조처를 취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을 백
리 밖에 신비스럽다고 소문난 방파(幇波)에게 보냈다. 배워서 성공만 하면 여씨네 새 주인으
로 앉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도 한몫 했다.
이 여씨네 가문에는 강자가 주인이 되는 법 아닌 법이 있었다. 자손들은 서열을 가리지 않
고 오직 가장 능력이 뛰어난 자가 주인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여씨네 가문이 백여
년 동안 번 영을 유지해 온 가장 큰 밑거름이기도 했다.
그러자 여원외의 본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녀 또한 여씨 가문의 가업이 장차 소실의 자
식에게 넘어가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사와 늙은 유생을 데려다가 여승
과 여통을 가르쳤다. 그들을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서자 여장
을 누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환경이 좋으면 좋을수록 인재가 나지 않
고 둔재만 만들어지는 법인지 두 아들은 그녀의 뜻과는 영 딴판으로 놀았다. 두 아들은 먹
고 마시고 도박하고 여색을 밝히는 데에만 신경을 쏟을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그나마 총명함과 슬기를 필요로 하는 게 도박인데 두 아들은 이것을 가장 못했
다. 그래서 도박꾼들은 심심치 않게 찾아와 두 아들에게서 넉넉한 돈을 얻어 가곤 하였다.
여씨네에는 늘 은자가 풍족하기 때문에 도박으로 흘러 나가는 은자쯤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
다. 하지만 그 때문에 여씨 가문의 위신이 깎이고 있다는 게 더 큰 골칫거리였다.
여원외는 자식들이 이렇게 나가다가는 큰일나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두 아들을 불러
도박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시켰다.
아버지에게 심한 지청구를 듣고 난 여승과 여통은 입이 퉁퉁 부어 밖으로 나왔다.
"이봐 아우, 아버지께서 후회할 일이 생긴다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일까?"
"아무렴, 아버지가 우릴 잡아먹기야 하겠소 염려 마시오. 괜히 해보는 소리일 것이니…….
아, 그 독한 범도 제 새끼는 잡아먹지 않는다는 말도 모르슈."
형 여승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기껏 잃어 봐야 은 몇천 장인데. 영감 모르게만 하면 되겠지."
이때 마침 두 아들이 주고받는 소리를 들은 여씨 부인이 호통을 쳤다.
"이것들아, 글을 못 배우고 무공 또한 익히지 못해도 좋다. 하지만 절대 아버지의 비위를 거
슬려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왜죠?"
여통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멍청하게 물었다.
여씨 부인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놈들아, 이제 여강이 무공을 익혀 가지고 돌아오면 어쩔 셈이야? 그걸 보고 네 아버지가
그 녀석만 품에 안게 되는 날이면 이 집은 몽땅 그 놈에게 넘어간다구"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여전히 맹한 얼굴을 한 여통이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늘 뭐라고 하였더냐? 아버지한테 효성을 보이며 좀 곰살궂게 굴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버지 비위를 잘 맞춰야 한다. 아버지를 늘 즐겁게 해주는 것만이 너희들이 살아 남는 길
임을 명심해라!"
"어떻게 해야 아버지가 즐거워하실까요?"
이번엔 여승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 질문에 여씨 부인은 갑자기 화를 냈다.
"너희들은 이제껏 아버지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냐? 그것까지 이 어미가
일일이 설명해 줘야겠니?"
벌컥 화를 낸 여씨 부인은 핑하니 돌아서 가 버렸다.
두 형제는 머리를 맞대고 골똘히 궁리해 보았다. 도대체 아버지가 좋아하는 게 무엇일까?
아버지에게는 부족한 게 없었다.
그러다가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를 바라보며 외쳤다.
"그래, 미인이다!"
두 형제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상에 미인을 마다하는 사내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자신들의 아버지처럼 부자인 사내는
더더욱 여색을 밝히기 마련이라고 결론지었다.
아버지 여원외에게 두 가지만큼은 늘 부족할 거라고 이들은 믿었다. 하나는 돈이고 다른 하
나는 바로 미인이었다. 이제 돈은 어느 정도 모았으니 아직도 부족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직
미인뿐일 거라고 여겼다.
여원외에게는 첩이 무려 열여섯이나 되었다. 사방에서 미인이란 미인은 모두 모아 놓은 셈
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미인 을 밝혔다.
속담에 싸리 끝에 싸리가 나고 대 끝에는 대가 난다는 말이 있다. 호색한의 아비를 둔 두
아들 역시 그에 못지않은 호색가였다. 때문에 두 형제는 아버지가 얼마나 여색을 탐하고 있
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들은 깊이 생각해 보다가 드디어 아버지의 요즘 심기가 별로 좋지 않은 이유를 알아냈다.
사흘 전의 일이었다.
여씨네 부자 셋은 한적하게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군방원(群芳圓)에 이르렀을 때였다. 마침
예쁘장하게 생긴 아삼(阿三)이 문 밖에 나와 서 있었다. 아들 형제는 그녀에게 다가가 몇 마
디 수작을 건넸다.
군방원은 기생집 중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집이었다. 안에 있는 기생들은 모두 스무 살이
못 된 앳띤 여인들인데 한결같이 사내들의 간을 빼먹고도 남을 정도로 미인이었다. 그중에
서도 으 뜸가는 미인이 바로 아삼이었다.
호색한인 여원외가 이런 미인을 두고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한다하는 여부의 주
인으로 기생집을 출입한다는 것이 어쩐지 체신을 깎는 일 같아 망설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날도 여 원외는 군침을 삼키며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산째로 삼킨다 해도 비린내
하나 안 날 계집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안달을 할 뿐이었다.
두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슬쩍 비웃었다. 아삼이 기생만 아니었다면 벌써 영감의 열
일곱 번째 첩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처럼 자신들이 마음놓고 아
삼과 수작을 나눌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두 형제는 바로 그 아삼을 영감에게 선물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머리가 둔한 그들도
이해타산에는 눈이 밝았다. 계집 하나를 주고 아버지 아니 영감의 환심을 살 수만 있다면
순전히 보리알로 잉어를 낚는 게 아닌가. 전재산을 차지하고 나면 아삼 보다 몇 배 고운 계
집들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계산도 벌써 마음속으로 꿍쳐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군방원으로 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머리에 화려한 장식을 한 기생어미가 쪼르르 달려나왔다.
"아이구 도련님들 아니세요? 어제는 왜 안 오셨소? 아삼이 목이 빠지게 기다렸답니다. 그
곱던 얼굴이 도련님들 때문에 영 말이 아니랍니다. 오늘도 오지 않았다면 아마 아삼인 침식
을 잃고 드러누웠을 거라구요."
그녀의 호들갑에 여통이 빙긋 웃어 보였다.
"우리 영감이 지키고 있어서 사경오서인지 나발인지를 읽느라고 꼼짝도 못했지."
"사경오서가 아니라 사서오경이야."
여승이 아우의 무식을 바로잡아 주었다.
"어떤 경이면 어떻소 난 오늘 아삼이 월경만 안하고 있으면 좋겠소."
"하하하……, 그러니 네가 아버지한테 늘 욕을 먹지. 아삼이 달거리를 하든말든 너하고 무슨
상관이냐?"
그러자 기생어미도 킥킥 웃었다.
"호호호 아니 왜 상관이 없습니까요? 아삼은 지금 고것이 막 끝난 뒤라서 봄날 발정 난 고
양이 같다구요 둘의 힘으로도 그 애의 욕심을 만족시킬 수 없을 테니 알아서 하시구려."
여승이 여통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아우, 하루나 참았는데 그 사타구니는 온전한가?"
"글쎄요, 오히려 아삼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흐흐흐……."
"그럼 춘아도 들여보낼까요?"
기생어미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교활하게 웃었다.
"춘아만으로도 어렵지. 추월이하고 동련이까지 와야 겨우 해 결이 될걸."
"어머, 넷이나 데리고 노시겠다구요? 무슨 묘약이라도 잡숫고 오셨나 봐. 호호……, 하룻새
에 살방아 찧는 힘이 부쩍 느신 모양이네. 어떤 묘약이죠?"
"그건 비밀! 누설을 하고 싶어도 자네한테는 곤란하고 계집들에게만 할걸세."
여통의 말에 여승이 거들었다.
"누설을 한다고? 혹시 설 자가 샐 설(泄) 자가 아닌가? 그럼 곤란하지. 아무리 급해도 기생
어미에게 주기는 아깝지 않은가?"
두 사람은 한바탕 웃었다. 이들이 주고받은 '설'은 바로 사정(射精)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승은 아우 여통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반달문을 지나니 길 왼쪽에는 무성한 푸른 잎 위에 연꽃들이 곱게 핀 푸른 늪이 나왔다. 오
른쪽에는 용과 봉을 어우러지게 새기고 산뜻한 색을 입힌 아담한 정자가 있었다. 정자 안에
는 돌로 만든 탁자와 의자가 있어 더운 여름철에는 여기에 앉아 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
았다.
늪 위에는 반 자 정도 되는 금붕어가 한가롭게 놀고 있었고 그 아래는 녹모구(綠毛龜)라는
거북이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이 거북이는 달포 전에 여승과 여통이 아삼에게 준 선물이
었다.
두 형제는 자갈이 깔린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문득 정자 쪽에서 남녀가 소곤거리는 소
리가 들려 왔다. 두 형제는 소리나는 곳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정자 위에는 남녀 한 쌍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위에는 분홍색의 비단 저고리를 입고 아래는 노란 색의 긴 치마를 입은 여자가 손으로 얼굴
을 바치고는 사내의 말을 정신 놓고 듣고 있었다. 그 여인은 바로 아삼이었다. 흘러내린 팔
소매로 백설같이 회고 고운 팔이 드러나 보였다. 사내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이 애틋
한 정과 불타오르는 색정으로 매우 고혹적으로 느껴졌다.
사내는 서른 살쯤 되어 보였다. 옥관춘삼(玉冠春衫)에 복장은 말할 것도 없고 탁자 위에 올
려놓은 보검만 봐도 보통집 자제가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어느 부잣집 자제
가 틀림없었다. 검집은 상어 가죽으로 만든 것이요, 자루 끝에는 백금과 오색찬란한 구슬이
박혀 있었다.
여승과 여통의 눈에 차츰 불이 붙기 시작했다.
'망할 놈……, 네 놈의 목은 몇 개가 되길래 남의 계집을 넘보고 있는 게냐?'
군방원의 법대로 한다면 기생들이 허락해야 손님이 원하는 기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분명 타관 사람으로 보이는 사내는 이미 정식으로 아삼에게 허락을 받은 게 분명했다. 두
형제는 그 점이 더욱 억울해서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두 형제는 화가 나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들은 이성을 찾고 어쩌고 할 계제가 아니었
다.
"네 이 놈!"
다짜고짜 정자로 뛰어 들어간 두 형제는 그 사내의 양쪽 팔을 하나씩 잡고는 정자 밖으로
집어 던졌다.
워낙 타고난 힘이 좋은데다가 비록 무공에는 흥미를 못 느껴도 그동안 얼마간의 무공 지도
를 받아 흉내는 낼 수 있는 두 형제에게 이 정도는 식은죽 먹기였다.
"어머!"
아삼이 기겁을 하며 일어섰다. 사내는 정자 밖 연못가에 있는 태호괴석(太湖怪石)으로 날아
갔다. 거기에 부딪치면 영락없이 즉 사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내가 순간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게 아닌가. 그는 높이 치솟더니 다시 천
천히 그 괴석 위로 내려앉았다. 그 사내는 아주 여유만만한 웃음을 입가에 띄우고 있었다.
그제야 두 형제는 오늘 만만치 않은 적수를 만났다고 여겼다. 은근히 가슴이 옥죄어들며 조
마조마해졌다. 아무런 병장기도 가지고 오지 않아 그 두려움은 배가 되었다.
그 순간 두 형제는 탁자 위에 놓여져 있는 사내의 검을 발견했다. 동시에 그것을 덮치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어……?"
형제가 검을 향해 몸을 움직이는 순간 검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하하하……!"
사내의 차디찬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두 형제가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보검은 어느새 사
내의 손에 들려 있었다.
두 형제는 두렵기보다는 수치감과 분노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은 싸울 태세를 취하며 사내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버러지 같은 놈아, 감히 남의 계집을 희롱하다니 어서 무릎을 꿇고 빌지 못하겠느냐?"
아삼은 정자 난간에 기댄 채 말없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누가 이길지 구경만 하겠다는
표정이없다.
괴석 위에 서 있던 사내가 대답했다.
"가만히 보니 너희들은 막가권파(莫家拳派)의 제자들인 모양이구나. 하하하, 그까짓 막가권
을 갖고 그 야단들이냐? 막가권은 강호에선 알아주지도 않는다!"
여승이 흠칫 놀라며 눈빛을 굴렸다.
'저 놈이 어떻게 우리 형제가 쓰는 막가권을 눈치챘을까?'
그러나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막가권은 소림권과 다를 바 없이 알아준다!"
여통도 뒤질세라 고함을 질러댔다. 이것은 모두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한 수작이었다. 두 형
제는 방원 백 리 이내에서 막가권을 알아주고 있으니 온 천하가 그런 줄 알고 있었다. 그래
서 뛰어난 실력을 가지지는 못했어도 두 사람이 함께 대적한다면 그것에 상대가 무서워하리
라 여겼던 것이다.
사내는 두 형제의 실력을 알아보고는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어서 쫓아버리고 싶은 마음뿐
이었다.
"너희들 말처럼 막가권을 알아 준다고 치자!"
여승이 사내의 말을 오해했다. 자신들을 두려워하는 줄 착각했던 것이다. 그는 막가권의 자
세를 다시 취하며 왼발로 자갈 바닥을 탁 구르더니 외쳤다.
"잘 알면서 왜 그러고 있느냐? 어서 용서를 빌지 못할까?"
여통도 덩달아 목청을 높였다.
"우물쭈물하다가는 피를 토하게 될 줄 알아라. 내가 셋을 세기전까지 어서 내려와 무릎을
꿇어라! 하나……."
그러나 셋을 다 셀 때까지도 사내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래도 내려오지 못하겠느냐?"
"하하하, 너희들이 날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오게 해놓으니 어디 겁이 나서 내려갈 수가
있어야지."
"저 놈은 주둥이만 살았구나!"
여통이 화를 내며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리곤 주먹을 뻗어 사내를 치려고 했다. 막가권 중
횡공박응(橫空博應)이라는 초수였다. 하지만 생각처럼 높이 뛰어오르지는 못해 겨우 사내의
발목을 건드렸을 뿐이었다. 그런데다가 사내가 히죽 웃으며 발로 장난을 치는 바람에 여통
의 주먹은 흙투성이가 되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두 형제가 머리를 맞대고는 무슨 말을 주고받았다.
"안 되겠다. 한꺼번에 공격하자. 놈의 두 다리를 함께 치면 놈도 별수 없을 거야."
두 형제는 양쪽으로 갈라졌다가 동시에 뛰어올랐다. 역시 주먹으로 공격을 했다. 그러나 이
번에도 그들의 주먹은 사내의 발바닥을 때렸을 뿐이었다.
'거 참, 저 높고 위태로운 곳에서 발재간을 부리는 게 보통이 아닌걸…….'
여승이 두 눈을 꿈벅거리며 아우에게 물었다.
"너도 봤지?"
여통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무엇을 봤냐는 게요?"
여승이 허리를 굽히더니 돌멩이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어서 썩 내려오지 못하겠느냐?"
한차례 고함을 더 지른 여승이 사내를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여통도 형을 따라 돌을 집어
힘껏 뿌렸다. 그러자 사내는 덩실덩실 춤을 추듯 하며 돌팔매질을 모두 피했다.
두 형제는 이번에는 여러 개의 돌멩이를 한꺼번에 던지기로 했다.
"얏!"
수많은 돌멩이가 괴석 위의 사내에게로 날아갔다.
사내는 괴석 위에서 몸을 띄우며 아래로 날아드는 돌은 피하고 양손으로 가슴을 향해 날아
드는 돌멩이를 척척 잡아냈다.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해 돌멩이를 던졌지만 사내는 매번 힘들
이지 않고 받아내는 것이었다.
'저 놈의 손은 강철로 만들었단 말인가!'
두 형제는 맥이 빠지는 걸 느끼며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림 이제 내 돌을 받아랏!"
사내가 갑자기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들을 아래로 뿌리기 시작했다. 두 형제가 질겁하여 줄
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탁탁탁……!
돌멩이들은 정확하게 두 형제의 발부리 앞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크, 정통으로 맞았더라면 죽을 뻔했네!'
여승은 속으로 흠칫했다. 그러면서 사내가 자기를 맞추지 않는 것을 봐서는 적의를 갖고 있
지는 않다고 믿었다.
아직 기가 살아 있는 여승이 사내를 향해 떠벌렸다.
"어디 정식으로 한번 겨루어 보자!"
이윽고 사내가 괴석에서 뛰어내렸다. 두 형제 앞으로 사뿐히 내려선 사내가 빙긋 미소를 지
었다.
"그 잘난 재간으로 뭐 어쩌겠다고?"
여승은 이 사내의 무공이 대단할 거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삼이 지켜보고 있는데서 맥없이 물러선다는 컷은 치욕스런 밀이었다.
"나는 며씨 문중의 맏공자 여승이고 이 사람은 둘째 여통이오. 오늘 그대와 자웅을 겨루어
보고 싶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들으면 사내가 주눅이 들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틈을 주지 많고 곧바
로 사내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사내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슬쩍 피했다. 그러면서 두 손가락으로 여승의
손목을 잡았다. 여승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여승은 팔 전체가 저려서 도무지 움직일 수
가 없었다.
"어어……."
여통은 형 여승이 왜 그러는 줄 모르고 자기도 공격을 했다. 재빠르게 발로 사내의 사타구
니를 내지른 것이다. 순간 사내가 두 다리를 오므렸다. 여통의 발이 덫에 걸린 것처럼 다리
사이에 끼여 꼼짝도 못했다.
"형님, 나 좀 살려 줘요!"
울상이 된 여통이 소리쳤다.
'임마, 나 역시 지금 괴롭다.'
여승 역시 죽을 맛이었으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두 형제는 그제야 사내가 고수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저 질러진 일이 아닌가. 형제는
여전히 입을 놀렸다.
"네 놈이 감히 우리 가문에 도전을 할 셈이더냐?"
"하하하!"
사내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먼저 여승의 손목을 놓아주고 나서 여통의 발도 풀어 주
었다.
"이 악(鄂)씨는 원래 시비를 걸 생각은 없었소이다."
사내가 웃음기를 지우고 약간 정중하게 말했다.
여승과 여통은 열심히 수족을 움직여 보면서 울분을 참지 못했다. 그만한 정도에서 놓여난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면서도 아삼에게 우스운 꼴만 보인 것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
다. 하지만 무공으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으니 일단 이 자리를 서둘러 빠져 나가는 것이
상책이다 싶었다.
"흥, 그런데 우리가 데리고 노는 꽃기생을 가로채? 어디 두고 보자!"
두 사람은 한번 으름장을 놓고는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재빨리 달아났다.
성이 악씨라는 사내가 정자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삼이 한들한들 걸어와 그 보드라운 손
을 사내의 어깨 위에 살포시 얹었다.
"호호호……, 나리께서 그런 대협객인 줄은 정말 몰랐어요."
사내가 덥석 아삼을 품에 끌어안았다.
"난 두 가지 재주를 갖고 있는데 무공이 그중 하나지."
"그럼 다른 하나는 무엇이지요?"
"그건 무공보다 더 훌륭한 것인데……."
사내가 아삼의 볼에 입을 맞추며 뜸을 들였다.
"호호호……, 어서 말씀해 보세요. 또 뭐죠?"
그러자 사내가 입을 아삼의 귀에 바짝 갖다 대고 소곤거렸다. 아삼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작은 주먹으로 사내의 가슴을 쳤다.
"아이, 나쁜 사람!"
"허허, 누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더냐?"
사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삼은 사내의 눈을 실눈으로 쳐다보며 손으로는 그의 넓은 가슴을 어루만졌다.
"무공이 그렇게 센 걸 보니 이불 속의 무공도 보통이 아니겠어요. 정말 그래요?"
"내 기회가 닿으면 한 번 보여주지. 그 맛을 직접 보면 알게 아니냐?"
사내의 손이 불쑥 아삼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아삼은 일부러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며 허
리를 비틀었다. 그러나 눈빛은 욕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임자도 이 재간이 뛰어날 것 같은데?"
사내의 손이 점점 아삼의 허리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럴수록 아삼의 몸은 물고기마
냥 파닥거렸고 그녀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교성이 흘러 나왔다.
이때 갑자기 밖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났다.
"그 악씨라는 놈을 놓치지 마라!"
그 뒤로 누군가 고함을 질러댔다.
악씨라는 사내와 아삼이 얼른 떨어지면서 옷매무새를 고쳤다.
어느새 살기등등한 사내들이 정자로 몰려들었다. 여승과 여통이 데려온 사내들이었다.
두 형제는 집으로 뛰어가 자기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무사 셋과 무공을 쓸 만한 하인 넷을
급히 데리고 온 것이었다. 악씨라는 타관붙이를 흠씬 두들겨 패놓지 않고서는 잠을 못 이룰
것만 같아서였다.
"바로 저 놈이오. 저 놈이 요술을 부려 우리를 괴롭혔소."
여통이 악씨라는 사내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세 명의 무사는 그가 들고 있는 보검을 보고는 보통 인물이 아님을 눈치챘다. 머리에 검은
두건을 두른 무사가 귀두도(嵬頭刀)를 거꾸로 들고는 그에게 읍을 했다.
"악씨라는 성씨를 쓴다지요?"
"그렇소 난 악처후(鄂處侯)라고 하는 사람이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악처후라……? 강호에 그런 인물이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인데…….'
검은 두건의 무사는 다소 높은 음성으로 따져 물었다.
"그런데 왜 우리 집 공자님을 욕보였소?"
그러자 몸집이 크고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무사가 그의 대답은 듣지 않고 끼여들었다.
"형님, 저런 놈하고 무슨 말을 나누시오. 어서 내려와 우리들 칼이나 받으라고 하시오."
나머지 다른 한 무사도 한마디 거들었다.
"무부(武夫) 형님의 말이 백 번 옳소 나 나비(羅飛)는 요술쟁이를 가장 증오하오. 난 그런
놈들은 보이는 족족 죽여야 직성이 풀린다구요."
나비라는 무사는 얼굴빛이 시퍼렇고 아래위로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 얼핏 보면 도깨비와도
같았다. 도깨비같이 생긴 자가 요술을 증오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자 악처후는 웃음이 나왔
다. 그러나 웃음을 섣불리 밖으로 내비치진 않았다.
악처후가 뒷짐을 지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게 되었소."
무부라는 무사가 말했다.
"이분은 우리 형님으로 막여인(莫與人)이라고 부르지. 막가권 제9대 종사(宗師)인데 별호
는……."
"별호는 호한막견(好漢莫見)인데 그 뜻인즉 호한들은 막여인을 만나지 않는 게 좋다. 만나
싸우면 다시는 호한 짓을 못하게 된다. 이런 뜻이 아니오?"
악처후가 무부의 말을 가로채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알았으면 됐다!"
무부가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한마디 내뱉었다.
"그런데 막 선생을 만나면 호한이 호한 노릇 못하게 된다는 게 무슨 뜻이지?"
여통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것도 모르나? 너희 막 선생의 무공이 대단하여 어떤 호한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
냐."
악처후가 대신 웃으면서 여통에게 설명해 주었다.
"훌륭하군. 우리 막 선생의 무공은 정말 천하무적이야!"
그러자 무부가 이번에는 얼굴빛이 시퍼런 자를 가리켰다.
"또 이분은 말이야……."
다시 악처후가 나섰다.
"이름은 나비, 별명은 살귀(殺鬼). 즉 살귀 나비라고 하지. 경공이 뛰어나며 무영표를 쓰는
재간도 좋아. 십이 년 전 살귀 나비는 혼자서 무영표 다섯 개로 오호방(五虎幇)을 아예 죽은
범으로 만들었지. 그리고 삼 년 전엔 대도(大盜) 동(疼)씨 형제가 살귀 나비의 의형제를 모
욕하였다고 해서 그는 칠백 리를 쫓아가 그들을 죽여 버렸지. 강호에서 동씨 형제의 이름을
아예 지워 버린 셈이지."

"그런 사실들을 모두 알고 있었군!"
무부의 눈이 또 한 번 휘둥그래졌다.
악처후가 여유 있게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자네 무부는 별호를 신권무적(神拳無敵)이라고 하던가? 무모한 용기만 있는 일개
무부라는 뜻이지. 그러면 그 주먹도 결코 무적일 수가 없겠지만…….'
이런 말을 덧붙이려다가 악처후는 그만두었다.
"나 무부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나?"
무부가 물었다. 악처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난 양산(梁山) 호걸 무송(武松)은 알고 있지만 그 밖의 무씨 성을 쓰는 호걸은 들어 보지
못했네."
악처후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무부가 눈을 부릅떴다.
"이 신권무적 무부의 이름도 아직 못 들어 봤단 말이냐? 그렇다면 넌 강호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애숭이로구나!"
여승이 곁에서 무부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더니 입을 실룩거려 가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무 선생이 어떤 분인지 알기나 하고 그 따위 소리를 하는 게냐? 이분은 큰 황소도 한
주먹에 쓰러뜨리는 분이시다. 그리고 기왓장 열 장을 포개 놓고 손가란 하나로 가루로 만들
고 밥통같이 굵은 말뚝도 발길질 한 번에 뚝 끊어 버리시는 분이라구."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아삼이 끼여들었다. 그녀는 여승에게 밉게 보이고 싶지 않은
지 그의 말을 동조하고 나섰다.
"큰 공자성의 말씀이 사실이에요. 저도 보았는 걸요."
"하하하, 기생년까지 나서는 걸 보니 실로 영웅은 영웅인 모양이다!"
악처후는 허리를 뒤로 젖혀 한바탕 웃어대며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화가 난 무부가 황소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는 정자 기둥을 주먹으로
쾅 하고 내리쳤다. 그리고도 성이 차지 않는지 정자 기둥을 향해 서너 번 발길질을 했다. 기
둥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지붕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앗!"
아삼의 비명 소리와 함께 정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미 악처후가 사색이 된 아삼을 안고 정자 밖으로 날아간 뒤였다. 그는 아삼을 가볍게 내
려놓았다. 겁에 질린 아삼은 아직도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하하하, 가만히 있는 정자 하나를 무너뜨리는 데 죽을 힘까지 쓸 건 또 뭔가? 하인 몇을
불러 시키면 수월하게 처리할 수도 있을텐데……."
악처후가 계속 이기죽거렸다.
무부는 그의 동작이 생각보다 아주 민첩한 것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무부는 그가 아삼을
안고 날아간 것을 미처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부는 더 이상 그를 가만 놔들 수 없다고
판단했다.
"간다!"
곧장 주먹을 휘두르며 악처후에게로 돌진해 갔다.
'흠, 대단한 주먹이야…….'
악처후는 얼른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왼팔로 무부의 공격을 막으면서 오른손으로는 재빨리
장으로 그의 주먹을 허공으로 쳐 올렸다. 동시에 손을 쭉 내뻗어 순수견양(順手牽羊) 초수로
무부의 오른팔을 잡아챘다. 무부가 고꾸라질 듯 비틀거렸다. 악처후의 이 초수는 그를 단번
에 죽일 수도 있을 정도로 위력이 대단한 것이었다.
무부는 더욱 악에 받쳐 이를 갈았다. 두 주먹을 불끈 모아 쥔 그는 다시 악처후를 향해 치
달렸다. 악처후의 가슴을 향해 무부의 주먹이 날아갔다. 악처후는 몸을 획 돌리며 역시 같은
초수로 무부의 손목을 잡아 옆으로 뿌렸다.
"아악!"
무부는 멀리 날아가 꽃밭 위로 떨어졌다. 무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악처후는 여유롭게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곤 사정없이 무부를
집어 던졌다.
"땀깨나 났을 텐데, 미역이나 감아라!"
무부의 몸은 늪 속으로 처박혔다.
흙탕물을 마신 무부는 캑캑거리며 정신없이 허우적거렸다. 그는 헤엄을 칠 줄 몰라 당황했
는데 다행히 늪이 깊지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물은 가슴밖에 차지 않았다. 그 바람
에 더욱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밖으로 기어 나온 무부가 분통을 터뜨리며 악처후에게
욕을 해댔다.
"한 가지 초수밖에는 모르는 놈이로구나!"
하지만 더는 함부로 달려들지 않았다.
"아우!"
막여인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무부를 불렀다. 무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그는 악
처후에게 시선을 던졌다.
"악 공자는 '순수견양'이라는 한 가지 초수만으로도 무부를 이겼으니 정녕 무공이 대단하
오."
막여인이 비웃음 섞인 투로 말했다.
"무 선생은 힘은 좋으나 경공이 좀 모자라지요. 그래서 한 가지 초수만으로도 이길 수 있었
던 겁니다. 그러니 큰 재간이 있어 서는 아니겠지요."
이때 여통이 불쑥 나섰다.
"막 선생님, 저 놈이 요술을 부립니다."
그 말에 살귀 나비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어디 또 그 잘난 재간을 부려 봐라!"
나비가 악처후의 머리 위로 쏜살같이 날아왔다. '천라금선요지부십삼퇴(天羅金仙僥地付十三
腿)' 초수로 악처후를 마구 공격했다. 그의 장기인 발길질이었다. 나비는 경공도 그런대로
좋을 뿐더러 특히 발길질이 뛰어났다.
휘잉―.
날카로운 그의 발길질은 바람 소리를 내며 빠르게 움직였다.
악처후는 나비를 만만하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나비의 발공격을 피하며 기회만을 엿
보았다.
"각오해랏!"
나비는 더욱 집요하게 악처후를 향해 발길질을 해댔다. 악처후의 눈빛이 어느 순간 반짝 빛
을 냈다.
"어!"
그가 번개 같은 솜씨로 나비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곤 힘껏 내던졌다. 나비가 허공으로 날
아가더니 갑자기 공중제비를 하며 태호 괴석을 껴안았다. 괴석 위에 우뚝 선 나비가 낄낄
웃었다.
"좋은 재주로군!"
악처후가 감탄을 했다.
"히히히, 별말씀을. 헌데 그대 역시 좋은 무공을 가졌군."
악처후의 인사를 여유 있게 받아넘기며 나비는 다시 그에게 공격할 태세를 취했다.
"아우, 이제 좀 쉬게나. 저 하인들은 놔두었다가 뭣에 쓰려나."
막여인이 소리쳤다. 나비는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여겨졌다. 네 명의 하인들을 시켜 악처
후를 공격하게 하면 그의 초수가 드러날 것이다. 그 다음에 자신이 나서도 나쁠 건 없었다.
나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괴석에서 내려왔다.
막여인이 손짓을 하자 하인 넷이 무리를 지어 악처후에게 달려들었다.
악처후의 입장에서는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감히 하인들과 대적하게 하다니…….'
그러나 일단 저들의 공격을 막는 게 급선무였다. 그는 자신의 문파의 절학(絶學)인 '장분팔
방(掌分八方)'을 쓰며 바람개비처럼 돌았다. 그의 손에서 장이 뿌려지면서 하인들이 맥없이
날아갔다.
"아악!"
겨우 일어서는 하인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시는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네 놈들을 여지껏 밥 먹여 준 게 분하구나! 겨우 그 정도냐?" 여승이 하인들을 다그치며
마구 발로 찼다.
"그럼 어쩝니까요? 저희는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하는데……."
"이 놈들아, 머리를 좀 써야지. 주먹으로 안 되면 다른 걸 써야지. 그 칼은 뭣하려고 차고만
있냐?"
옆에서 막여인이 쌀쌀맞은 어조로 한마디했다.
그제야 칼을 뽑아 든 하인들이 다시 일시에 달려들었다. 이들은 늘 연습을 넷이 함께 해온
터라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들은 악처후의 급소 여기저기를 위협적으로 공격했다.
"옳지, 잘한다!"
여통이 박수를 치며 신나 했다.
이때 악처후가 양손으로 한 놈의 칼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발로 다른 놈의 칼을 차버렸다.
양손으로 쥐었던 칼을 힘주어 두 동강 내버렸다. 그 힘이 대단해서 하인은 자기 손목을 쥐
고는 비명을 질러댔다. 반으로 잘려진 칼 조각 하나가 마침 거북이 등위로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거북이가 머리를 얼른 껍질 안으로 집어 넣었다.
여승과 여통도 거북이 꼴로 잔뜩 움츠러들었다. 하인들이 여지없이 당하자 오금이 저렸던
것이다.
막여인이 악처후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대는 전진교(全眞敎) 장문인 왕중양을 뭐라고 부르오?"
"아니 그럼 저자가 전진교의 제자라는 말씀이오?"
나비가 눈을 크게 뜨며 악처후를 응시했다.
화산의 무공시합에서 왕중양이 이겨 천하 제일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전진교의
이름도 크게 알려져 소림파와 개방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왕중양 밑에는 일곱 제자가 있는데 이들을 전진칠자(全眞七子)라 불렀다. 명문의 제자들인
그 일곱 명 역시 무공이 출중하여 전진교의 명망을 한층 드높였다.
막가권 제9대 종사로서 강호를 오랫동안 편렵한 막여인은 명문대파(名門大派)의 무공을 각
별히 살펴왔다. 그는 금방 악처후가 쓰는 장법이 전진교파의 수법이 분명했으나 그 몸동작
이 특이해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어 악처후에게 직접 물어
본 것이었다.
더욱이 전진교의 교도들은 모두 도사들로 규율이 엄하여 절대 기생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악처후는 기생집을 드나들고 있으니 대체 그의 신분이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악처후의 눈썹이 위로 치켜올려졌다.
"전진교 교주 왕중양과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소."
"그럼 지금 악 공자가 쓰는 장법은 어떻게 된 것이오?"
"핫하하하……, '천하무공수도동귀(天下武功殊途同歸)'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있소? 내 장법
이 전진교 장법과 비슷할 수도 있지 않소."
"그렇다면 정녕 그대는 전진교 제자가 아니란 말이오?"
"당신이 보기엔 내가 출가한 도인 같소?"
막여인은 적이 안심하는 눈치였다. 전진교 세력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전
진교 제자들을 건드리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의문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보아도 전진교 무공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전진교와의 관련
을 부인하는 악처후의 태도 또한 의심스러웠다.
막여인이 웃음기를 섞어 가며 물었다.
"그럼 공자는 어디 출신이오?"
"강호에 두 공자가 있다는 말은 들었겠지요?"
"두 공자? 그럼 그대가 그 절정공자(絶情公子)란 말이오?"
악처후의 속이 순간 꿈틀거렸다.
"왜 나를 절정공자라 하는 게요?"
악처후의 미간이 파도를 타듯 꿈틀거렸다.
"강호에는 절정공자와 소요공자(逍遙公子)가 있는데 소요공자는 세상을 소요하고 절정공자
는 속세의 모든 정을 단절하였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소. 듣건대 이 두 공자의 무공은
모두 뛰어 나지만 절정공자가 조금 위라고 하오. 그대의 무공이 매우 출중하기에 혹 절정공
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소."
그 말에 악처후는 기분이 약간 언짢아졌다.
"그런 허튼소리를 믿는단 말이냐? 막가권의 장문이 그런 소릴 믿는다고? 아무래도 내 솜씨
를 보여줘야겠구나!"
갑자기 악처후의 말투가 돌변했다. 그러더니 그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막여인의 왼쪽 어깨를
겨냥해 순식간에 한 장을 내리쳤다. 막여인이 겨우 피하자 이번에는 그의 배를 공격했다. 그
동작은 매우 빠르고 정확했다.
순식간에 장법을 바꾸며 공격해 오는 악처후 때문에 막여인은 당황했다. 그가 두 손으로 급
히 몸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간다!"
악처후는 다시 소리를 내지르며 번개같이 돌진해 왔다. 악처후의 장이 막여인의 배를 때렸
다.
"헉!"
막여인은 뱃속에 불덩어리가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뒤로 밀려난 그가 다시 몸을 추스렸다.
방어 자세에서 공격 자세로 바꾸려는데 악처후가 무섭게 달려왔다. 악처후는 계속 막여인의
배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막여인은 기공을 끌어모을 여유가 없었다. 한 대 얻어맞은 충격으로 그는 아직 몸을 가누지
를 못했다. 이젠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때였다. 순간 바람을 가르는 무영표 하나가 악처후의 뒤통수 옥침혈(玉枕穴)을 향해 날아
들었다. 악처후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몸을 약간 틀었다. 무영표는 그가 등뒤에 메고 있는
보검 자루에 맞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하하, 그 정도로 나를 잡으려 들다니!"
비웃음이 터지면서 다시 막여인을 향해 장을 뿌렸다. 그런데 다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이
어졌다. 뒤를 이어 살귀 나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각오해라!"
나비의 손에서 벗어난 무영표는 세 개였다. 무영표는 길이가 두 치밖에 되지 않았는데 반짝
이는 점으로 보였다. 눈에 잘 띄지 않아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었다. 무영표는 강호에서
유명한 표창 중 하나였다.
악처후가 갑자기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그는 반듯이 누운 자세를 취하더니 두 발로 그것들
을 멀리 차버렸다. 악처후가 다시 자세를 바로하자 나비와 무부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무부
는 여전히 두 주먹을 마구 휘둘러댔다. 나비 역시 한 주먹으로 악처후를 공격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세 자 가량 되는 검을 슬쩍 뽑아 들었다.
악처후가 다시 순수견양 초수로 무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 바람에 무부는 늪 속으로 곤두
박질쳤다. 흙탕물을 실컷 먹고 일어서는 무부의 머리 위에는 푸른 연인이 삿갓처럼 잔뜩 덮
여져 있었다.
그 사이에 나비가 검으로 악처후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크!"
악처후가 훌쩍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그러면서 나비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가볍게 장을
날렸다.
퍽!
'대금나(大擒拿手)'란 초수였다. 나비는 오른쪽 어깻죽지가 떨어져 나가는 통증에 신음을 내
뱉었다.
"으으……."
나비가 슬금슬금 도망치기 시작했다.
악처후가 그를 뒤쫓으려는데 막여인이 막아섰다.
"기다려라!"
그는 벽산개석(劈山開石), 평야축록(平野逐鹿), 오악압정(五岳壓頂) 등 막가권에서 가장 뛰어
나다는 초수들을 연거푸 내보였다. 늪에서 나온 무부도 악에 받쳐 아우성을 치며 합세했다.
악처후가 두 사람을 상대로 싸우려고 할 때였다.
"너희들은 뭘 하느냐? 어서 함께 싸워라!"
여통이 소리쳤다. 구경만 하고 있던 하인들이 다시 칼을 들고 미친 듯이 달라붙었다.
"정말 죽기 위해 환장한 놈들이구나!"
높이 날아오르며 악처후가 두 발로 번갈아 네 명의 하인들을 걷어찼다.
"학!"
"어억!"
하인들은 그의 발에 얻어맞고는 저 멀리 날아갔다.
바닥으로 내려선 악처후가 무부의 어깨를 붙잡아 막여인에게로 밀어 버렸다.
자신에게로 중심을 잃은 채 날아오는 무부를 막여인은 받을 수가 없었다. 고를 받다가는 자
신이 넘어질 판국이었다. 그렇다고 피해 버릴 추도 없는 상황이었다. 무부는 속도 때문에 충
돌하여 죽지 않으면 심한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막며인은 하는 수 없이 한쪽으로 피하면서 무부의 옆구리에 장을 내밀었다. 막여민의 장물
맞은 무부가 옆으로 뒤집히면서 떨어졌다.
"으으……."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진 부부가 천천히 밀어섰다.
"아니, 이젠 형님까지 날 치기요?"
그는 억울하다는 눈초리로 막여민을 쏘아보았다. 나비가 곁에 있다가 설명을 해주었다.
"오해하지 말게나. 형님이 그러지 않았다면 자넨 벌써 저 세상으로 가거나 크게 다쳤을 거
라구."
"그랬었군요. 아무튼 고맙습니다요, 형님!"
무부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히죽 웃었다.
막여인은 악처후에게 몰리는 판이었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르렀다. 이젠 별수없이 악
처후에게 혼줄이 나는가 싶었다. 그가 절망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악처후가 손을 거두고는
한쪽으로 뛰어가더니 우뚝 섰다.
악처후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보통의 무사는 아니군요 감탄했소이다."
막여인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 역시 예를 갖추어 달했다.
"저야말로 공자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군요. 공자께서 이렇게 내 체면을 세워 주시니 오히려
영광이오."
악처후가 품에서 약 두 봉지를 꺼내 무부와 나비에게 던져 주었다.
"그건 내가 직접 만든 질타산(跌打散)이오 반은 먹고 나머지 반은 바르시오. 그 정도면 효험
을 볼 수 있을 것이요."
"누가 이따위 것을 받겠다고 했느냐?"
아직도 울분이 가시지 않은 무부는 약 봉지를 도로 악처후에게 던지려고 했다. 막여인이 무
부의 행동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러지 말게. 악 공자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무시하면 쓰겠나?"
그는 악처후가 내민 약이 보통의 약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막여인이 정중히 읍을 했다.
"참, 아까 악 공자에게 절정공자 운운했던 것은 제 실수인 것 같소. 잘못 알고 물었으니 너
그럽게 이해하시오."
마음이 좀 풀린 듯 악처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요공자가 아무리 무공이 뒤떨어진다 해도 절대 절정공자로 행세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때서야 막여인은 이 사내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있었다.
소요공자. 악처후는 바로 소요공자였던 것이다. 막여인은 지금까지 그가 화를 냈던 것은 절
정공자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요공자와 절정공자는 모두 무공이 뛰어나 강호에서 이름난 자들이었다. 세인들은 한결같
이 두 사람 중 절정공자의 무공이 더 뛰어나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여인이 소용공자
악처후를 절정공자가 아닌가 하고 물었으니 그의 심기를 건드린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막여인은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고는 후회했다. 절정공자는 세속의 모든 정과 단절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는 어버이의 정조차 모를 뿐더러 여색은 아예 증오하는 사내로
알려져 있었다. 그것을 처음부터 생각했다면 막여인은 결코 이같은 실언은 하지 않았을 것
이었다.
막여인과 나비 그리고 무부는 큰 봉변은 당하지 않게 되었다. 모두가 악처후가 그들의 사정
을 봐준 덕분이었다. 싸움은 더 이상 이어질 수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가장 무안해진 것은 여승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데리고 그 자리를 빠져
나가려 했다.
소요공자가 그들의 앞을 막으며 웃음을 베어 물었다.
"왜 그러시오!"
여승이 불안한 기색으로 주춤 물러섰다. 막여인과 두 무사도 잔뜩 긴장했다. 그런데 악처후
가 여승에게 정중히 읍을 하는 게 아닌가.
"사실 나는 여씨 가문이 인재를 배출하고 인걸이 모이는 곳이란 소문을 듣고 이렇게 귀하와
친교를 맺고자 찾아온 길이었소"
"그런데 오자마자 왜 꽃기생은 가로채서……?"
볼멘소리로 여승이 따져 물었다.
"그 기생은 내 거란 말이오!"
여통도 한마디 쏘아댔다.
여통의 말에 악처후가 다시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실은 그것도 내 계획이었소."
"계획이라니?"
"재간이 없고 덕이 없는 내가 어떻게 공자님들을 만날 수 있겠소. 무모하게 찾아갔다가 문
전박대라도 받게 되면 그 얼마나 수치스런 일이었겠소?"
여승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해서 난 그대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을 찾아 그 출구를 마련하려고 했던 것이
오."
"그게 누구요?"
악처후가 아삼을 가리켰다.
"바로 저 소저요."
"아니, 그게 저 아삼이라고?"
여승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왜, 전 안 되나요?"
아삼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이 소저와 얘기를 한창 하는데 두 공자께서 뛰어든 것이오."
"우린 그대가 아삼과 그 짓을 하려는 줄로만 알고……."
여통이 멀뚱히 두 눈을 위로 뜨며 중얼거렸다.
"그 짓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악처후가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
"거, 뭐냐? 거 있잖소. 아무튼 난 그러는 줄 알았다니까."
여통이 히죽 웃었다.
아삼이 쪼르르 달려와 여통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누가 당신 같은 줄 아나 봐. 저분은 예의도 있고 인정도 많은 공자님이시라구요."
악처후가 무공이 뛰어날 뿐 아니라 아주 겸손한 태도를 보이자 여승은 갑자기 다른 마음이
들었다. 그를 자기에게 끌어오고 싶었다.
'악처후까지 날 돕는다면 여장이 어떤 무공을 연마해 와도 겁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결심한 여승은 악처후의 손을 잡으며 더욱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사내들은 한번 싸워야 그 친분이 두터워진다는 말도 있지 않소 악 형께서 달리 생각지 않
는다면 우리 벗으로 지냅시다. 이 경사로운 날을 술을 마시며 축하하는 게 어떻겠소?"
그러나 나비는 아직도 그에게 당한 모욕감에 배알이 뒤틀려서 눈을 흘겼다.
"공자님, 벗도 골라 가면서 사귀셔야 합니다. 이름이 하늘 같은 소요공자가 무슨 이득이 있
다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거들떠보겠습니까?"
여승의 귀에는 나비의 말이 들리지가 않았다.
"자, 어서 주루로 가서 술을 드십시다."
그는 곧 일행을 데리고 여가주루(麗家酒樓)로 갔다.
귀빈석을 차지하고 앉은 그들은 진수성찬을 한 상 주문했다.
아삼을 시켜 기생들을 불러다가 옆에 끼고는 흥겨운 술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검은 쌍지장이를 짚은 웬 사람이 머리를 숙인 채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말없
이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술을 청한 그는 혼자서 술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무부가 술잔을 들고 떠들었다.
"악 공자님의 무공은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와 같이 여씨 가문에서 무사일을 보지 않겠소?"
무부는 약간 둔한 면이 있지만 성미가 호방했다. 그는 술이 거나해지자 이렇게 취중진담의
말을 내뱉었다.
여승도 그 말에 흐뭇해졌는지 술잔을 높이 들었다.
"글쎄 작은 절간에 고승을 모시는 기분이 좀 들긴 하지만……. 악 공자 의견은 어떠시오?"
여승의 말에 나비가 걸고 넘어졌다.
"남부러울 게 없는 소요공자가 이 산간 벽지에서 구차스럽게 무사 노릇을 하려고 하겠소?
절정공자가 들으면 앙천대소를 하겠소이다."
악처후의 낯빛이 돌연 상기되었다.
"그대는 왜 남의 비위를 거슬리는 소리만 하는 게요?"
"비위에 거슬린다고? 그래 날 어쩔 셈이오?"
"이 놈이!"
악처후가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접시 위에 있던 닭고기 살점들이 튀어
나비에게로 날아갔다. 나비가 머리를 숙여 피하는 바람에 그 살점은 낯선 사내의 탁자 위로
떨어졌다. 살점들은 그가 먹고 있는 술잔과 안주 접시에 골고루 떨어졌다.
사내가 머리를 들더니 날카로운 눈초리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금세 눈빛이 어두워졌
다. 그는 서른 살 정도로 보였으나 풍기는 것은 보다 더 들어 보였다. 회색의 무명 장삼을
입은 그의 두 다리는 무릎 아래가 모두 잘려 나간 상태였다.
악처후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나비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그의 주먹이 쏜살같이 악처
후의 면상을 향해 뻗었다. 악처후가 잽싸게 나비의 손목을 비틀어 잡더니 한쪽으로 던졌다.
나비는 공교롭게도 또 절름발이 사내에게로 날아갔다.
"어쿠!"
순간 절름발이가 지팡이 하나를 들어 날아오는 나비의 등을 살짝 쳤다. 나비는 바람에 휩쓸
린 낙엽처럼 맥없이 공중으로 약간 떴다가 떨어졌다.
겨우 일어난 나비가 악처후에게는 대들지 못하고 절름발이 사내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다리 병신 주제에 눈깔까지 삐었나?"
순간 사내의 안주 접시 위에 떨어졌던 닭고기 살점이 나비의 입 속에 틀어박혔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살점을 삼킨 나비가 컥컥대며 양손을 버둥거렸다.
다시 나비가 악을 쓰며 소리치려고 하자 이번엔 술잔 속에 있던 살점이 날아왔다. 역시 나
비의 입 속으로 정확히 들어갔다.
살점을 내뱉으며 나비가 두 주먹을 휘둘러 댔다. 사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젓가락 한
쌍으로 나비의 손목을 집었다. 마치 고깃점을 집어 탁자 위에 내려놓듯 나비의 손목을 슬쩍
아래로 떨어뜨렸다.
나비는 주먹을 빼려고 안간힘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갑자기 사내가 젓가락을 벌리자
나비는 자기 주먹에 면상을 얻어맞고 말았다. 그 바람에 앞니 두 개가 부러져 버렸다.
"아이고!"
나비는 죽을 맛이었다. 나비가 단검을 뽑아 든 채로 사내에게 다시 돌진해 갔다. 사내가 다
시 젓가락으로 단검을 막았다. 대나무로 만든 젓가락이라 검을 당할 수는 없었다. 젓가락은
곧 두 동강으로 잘려졌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나비가 단검으로 그의 가슴을 찔렸다. 사내는 여유 있게 지팡이를
들어 공격을 막았다. 요란한 소리가 나며 나비의 단검이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나비가 뒷걸음질치며 소리쳤다.
"저건, 쇠지팡이!"
그러자 여승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사내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이 병신 같은 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구나!"
사내가 매섭게 여승을 쏘아보았다. 그 눈길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여승은 자기도 모르게 몸
을 한차례 후득 하고 떨어댔다. 그러나 기는 죽지 않아 여전히 입을 놀렸다.
"어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지 못할까? 그렇지 않으면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흐흐……."
사내가 조소를 보내왔다.
"저런 놈에게 강호의 도리 같은 것을 말해 봐야 소용없어요. 어서 잡아다가 주리를 틉시다!"
여통은 자기가 직접 나서서 어쩌지는 못하고 막여인을 바라보았다. 막여인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저 절름발이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다. 오늘은 정말 기이한 날이로군. 뛰어난 고수를 두 명
씩이나 만나게 되다니…….'
막여인은 속으로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악처후에게 느닷없이 읍을 했다.
"저자의 무공이 대단하군요. 나는 적수가 못 될 것 같으니 악처후 공자께서 좀 수고를 해주
실 수 없겠습니까?"
명석한 악처후가 막여인의 내심을 모를 리 없었다.
'흥, 괜히 다치긴 싫다 이거렷다. 내가 이것들을 진정으로 탄복하게 만들어 훗날 시끄러운
일을 없애야겠다!'
악처후가 돌연 반색을 하며 말했다.
"여러분과는 벌써 인연을 맺은 처지인데 마다할 수야 없지요."
그는 일어서서 절름발이 사내에게로 성큼 걸어갔다. 읍을 한 악처후가 물었다.
"존함을 어떻게 쓰시는지요?"
그러자 뒤에 있던 여통이 고함을 질렀다.
"형님, 그런 놈은 예의를 차릴 필요 없어요. 단번에 날려 버리라니까요!"
절름발이 사내가 머리를 들었다. 칼날과도 같은 날카로운 눈길에 악처후는 순간 가슴이 섬
뜩했다.
"나 말씀이오?"
그 목소리에는 마치 지옥 불길을 타고 들려 오는 듯한 싸늘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악처후
의 등줄기로 오싹하니 찬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흐흐, 또 누가 있는가?"
악처후는 자신을 강하게 다지면서 냉소를 보냈다. 사내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요?"
"난 악처후란 사람이오."
"그대는 지금 나를 죽이고 싶겠지요?"
악처후가 뜻 모를 웃음을 흘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왜 생면부지의 그대를 죽인다는 게요?"
그러면서 악처후는 어느새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는 사내의 목을 겨냥해 힘껏 내리쳤다.
잠 끝이 사내의 목에 막 박힐 찰나였다. 순간 그의 검은 동작을 멈추었다. 악처후는 검으로
사내의 얼굴을 중심으로 해서 마음껏 희롱하기 시작했다. 그 동작이 번개 같아 보는 사람으
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였다.
막여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오호, 놀라운 솜씨다. 저런 솜씨로 우릴 상대했다면 우린 벌써…….'
막여인의 심기는 이상하게도 절름발이 사내를 동정하는 쪽으로 변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사내를 위해 땀이 나도록 주먹을 쥐었다.
바람을 가르며 악처후의 검은 사내의 얼굴 앞에서 춤을 추어 댔다.
그러나 사내는 요지부동으로 꼼짝을 않고 앉아 있기만 했다. 젊은 나이의 객기로 보기에는
너무 지나칠 정도의 의연함이었다. 반면에 악처후는 조급함으로 서서히 눈꼬리가 위로 올라
가고 있었다. 자신의 검에 이토록 태연함을 보이는 사내에게서 그는 알 수 없는 위축감을
느꼈던 것이다.
"얏!"
막 악처후의 검이 사내의 목젖을 향해 파고들 때였다. 갑자기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악처후의 보검이 옆으로 튕겨 나가 기둥으로 날아가 꽂혔다.
사내는 시커먼 지팡이를 쳐든 채 악처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조소가 매
달려 있었다.
조소를 참을 수 없는 악처후가 기둥에 박힌 검을 재빨리 뽑아 들었다. 동시에 연환삼검(蓮
環三劍)의 초수로 사내를 공격했다. 사내는 쇠지팡이를 가볍게 휘두르며 악처후의 공격을
쉽게 막아냈다.
"전진교 검법을 제법 쓸 줄 아는군. 하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사내의 말에 막여인의 양미간이 요동을 쳤다. 악처후의 초수가 확실히 전진교 검법의 하나
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악처후는 끝까지 전진교 제자가 아니라고 했을까? 막여
인은 아리 송했다. 전진교는 지금 불붙은 태양 같아서 추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런데 왜 악처후는……?
악처후가 소리쳤다.
"자, 간다!"
"잠깐!"
사내가 손을 들어 악처후를 막았다.
"왜, 두려운가?"
"우리 도화도 제자들은 두려움이란 모르고 있다. 난 오직 우리 사부와 왕중양 사이의 교분
을 생각해서 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도화도 황약사의 제자란 말인가?"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우리 사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왕중양과의 교분이 아니었다면 넌 벌써 죽었다!"
그러자 악처후가 껄껄 웃었다.
"하하하, 왕중양? 그하고 내가 무슨 연관이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내가 왕중양의 이
름을 빌려 강호를 떠도는 멍청인 줄 아느냐?"
"그럼 전진교 제자가 아니란 말이냐?"
"이 소요공자가 강호를 소요하는데 누가 감히 내 사부임을 자청한단 말이더냐?"
"아니다. 무공으로 봐서는 넌 필시 전진교 제자가 분명해. 그리고 전진교의 무공을 완벽하게
익힌 것을 봐서는 넌 분명 버려진 제자야. 원래 전진교에선 무공을 완벽하게 전수해 주지
않거든."
"흥, 버림받은 제자가 있기는 하지. 그건 바로 자네일세."
"뭣이!"
"황약사 문하에 제자 여섯이 있는데 그중 하나인 육승풍(陸乘風)이 분명하렷다!"
"내 이름을 알았으니 그대는 영광으로 여겨야 할 걸세."
"그런데 내 듣기로는 도화도에 큰 변고가 났었다고 하더군. 황약사의 제자 중 남녀 제자 하
나씩이 무공은 게을리 하면서 이불 속의 일만을 파고들었다던데?"
나비가 그 말에 히히 웃으며 끼여들었다.
"황약사의 별명이 바로 황노사(黃老邪)가 아니겠어. 요귀스럽고 괴상하게 논다는 사(邪)거든.
그러니 그 제자들이 이불 속에서 익히고 있는 것도 그가 직접 가르쳤을 거라구……."
이 말에 다른 사람들도 한바탕 폭소를 터뜨렸다.
육승풍은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낯색이 확 변했다. 그는 왼손으로 탁자
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술잔 하나가 치솟더니 웃고 있는 나비의 입을 때렸다. 술잔이 박살
이 나면서 나비의 입술이 터져 버렸다. 피를 내뱉으며 나비가 펄펄 뛰었다. 그러나 감히 대
들지는 못했다.
육승풍이 나비를 외면하며 다시 악처후를 바라볼 때였다. 나비가 슬쩍 무영표 세 개를 꺼내
날렸다.
피잉―.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무언가를 느낀 육승풍이 쇠지팡이를 가슴 높이로 올렸다.
탁탁탁!
무영표는 쇠지팡이에 막혀 모두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머지 이빨마저 모두 부러지고 싶은 게로구나!"
그가 나비를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나비는 찍소리 못하고 막 여인의 등뒤로 얼른 숨어 버
렸다.
악처후가 육승풍의 시선을 돌렸다.
"이봐, 그대는 도화도의 제자가 아니오. 이런 무명 무사와 실랑이를 해서는 체면이 아니지."
무부가 나비의 옆구리를 죽 찔렀다.
"너를 욕하고 있는데……?"
나비도 그 말을 들었다.
"넌 상관 마!"
악처후가 다시 육승풍에게 빈정거렸다
"도화도의 그 남녀 제자는 규율을 어겼을 뿐 아니라 황약사가 보배처럼 간직하고 있던 <구
음진경(丸陰眞經)>까지 훔쳤다면서? 히히히……."
"뭐라구?"
"황약사라고 하면 천하 오대 고수 중 하나로 그의 가장 뛰어난 재간은 기문수술(奇門數術)
이지."
악처후의 말에 육승풍은 사부인 황약사를 잠시 떠올렸다.
"그렇다. 우리 사부님은 기문수술을 신선같이 쓰고 계신다. 제갈무후가 살아 있어도 우리 사
부님과는 상대가 못 될 것이다!"
무부가 나비에게 물었다.
"기문수술이 뭐지? 권법인가. 내 신권(神擧)보다 센 건가?"
"그게 아니라 소가죽 석 장을 한 번의 입김으로 찢어 버리는 초수야."
"그렇다면 내공이군. 내공이 그렇게 세다구?"
두 사람이 지껄이는 말이 육승풍의 귀를 거슬렸다. 그가 다시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안주
접시가 솟았다. 그 위에 담겨져 있던 은행알이 무부에게 우박이 되어 날아가고 접시는 나비
를 향했다. 은행알이었지만 내공이 실린 탓인지 마치 쇠구슬처럼 강하게 날아들었다.
무부와 나비가 얼른 탁자 밑으로 숨었다. 뒤에 있던 막여인이 날아오는 접시를 가볍게 받아
자기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육승풍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흠, 이백 년을 이어 온 막가권이 다르긴 다르군!"
"우리 같은 보잘것없는 문파가 도화도 황약사의 제자의 칭송을 들으니 영광이오."
막여인의 말에 악처후가 코방귀를 뀌었다.
"듣건대 황약사가 도화도를 철통처럼 방비를 하게 하였다며?"
육승풍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사부님은 천인(天人)을 따라 배워 도화도의 돌과 나무들로 적을 막을 수 있는 진
을 만들었다. 또한 도처에 방어 장치들과 미혼진(迷昏陳)을 만들어 놓았지. 개미 한 마리 얼
씬 못하게 말이다."
"정말 기문수술이 그토록 신비한 것이냐?"
"왕중양도 우리 사부님의 진법은 따라올 수 없을걸."
악처후가 눈을 꿈벅이며 입꼬리를 찢었다.
"흐흐 그런데 철옹성같이 방어를 한 도화도를 그 정분 난 두 제자들은 어떻게 빠져 나갔을
까? 정말 모를 일이야."
악처후가 비꼬자 육승풍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놈이 그 말을 하려고 슬슬 말을 돌렸구나!'
육승풍이 언성을 높였다.
"왕중양의 이름을 봐서 참으려고 했더니 안 되겠구나!"
"하하, 나 역시 절름발이 병신이 가엾어서 가만있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육승풍이 지팡이를 양손에 나눠 들었다. 하나는 바닥을 짚고 다른 하나는 검처럼 악처후의
가슴팍을 겨누었다.
"이 놈!"
육승풍이 지팡이를 뻗으며 악처후를 몰았다. 악처후가 옆으로 얼른 피하면서 검으로 그의
허리를 쳤다. 나머지 지팡이가 검을 막아냈다.
두 사람은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자리를 옮겨 가며 동작을 부릴 때
마다 탁자가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육승풍이 지팡이 두 개로 몸을 의지하며 다
리를 철퇴처럼 휘둘렀다. 악처후도 날쌔게 몸을 날리며 검을 그어댔다.
몇 합을 싸우는 동안 악처후는 그의 초수에 감탄하긴 했지만 절름발이라는 것을 상기하며
그를 얕잡아 보았다.
과연 육승풍은 이십여 합이 지나자 기진맥진해졌다. 쇠지팡이를 쓰는 것도 민첩하지가 못했
다. 보법 역시 굼뜨게 보여 그가 지쳐 있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자꾸만 헛손질을
해대던 육승풍은 식은땀을 흘렸다.
악처후는 이때라고 생각하고는 검을 가슴으로 당겼다가 화살처럼 튀어나갔다. 검으로 육승
풍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찔렀다.
위기를 느낀 육승풍이 쌍지팡이를 바닥에 대고는 공중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리곤 달아나기
시작했다.
"섰거라!"
악처후가 쫓아갔다. 창가까지 달려간 육승풍이 갑자기 지팡이를 바닥에 구르더니 몇 장 밖
으로 날아가 버렸다.
놀라운 경공이었다.
이때 여승과 여통이 달려왔다. 여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놔두시오 다시는 오지 않을 겁니다."
여통은 육승풍의 무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리 잘린 병신이 그토록 날쌔다니……. 쇠지팡이 쓰는 솜씨는 또 어떻고."
이때까지 한쪽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아삼이 한들한들 엉 덩이를 흔들며 다가왔다.
"흥, 그게 어디 사람이에요?"
"그럼 뭐야?"
여통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 눈을 못 봤어요? 꼭 짐승처럼 무서운 게……."
그러더니 아삼은 공연히 한숨을 휴 하고 내쉬었다.
"그엔 야성적인 사내를 좋아하지 않나? 혹 마음속으로 아까 그 놈을 찍어 둔 거 아냐?"
여승이 야비한 이빨을 내보이며 물었다. 아삼이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아이고, 그 쇠지팡이에 맞아 뼘은 개구리꼴이 되라고?"
술판은 이미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모두들 흥에 깨져 그만 주루를 나왔다.
모두를 이끌고 접으로 돌아온 두 형제는 악처후를 귀빈으로 모셨다.
두 형제는 아삼을 아버지 방에 들어보내기 위해 잠시 숨겨 두었다. 그런 다음 다른 사람들
을 데리고 후원으로 나왔다.
반달문까지 와서 두 형제와 악처후는 서로 앞서 걸으라는 예의를 보였다. 몇 번 사양하던
악처후가 앞서 걸어가는데 문 안에서 히히덕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곧 한 사람이 뛰어나
오다 악처후와 부딪쳐 그의 가슴에 안긴 꼴이 되었다.
향내가 물씬 하는 바람에 놀라 내려다보니 웬 소녀였다. 소녀도 머리를 들다가 생면부지의
사내임을 알고는 얼굴을 붉혔다.
"어머나!"
소녀가 얼른 악처후를 밀치며 어디론가 달아났다.
악처후는 소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얼핏 본 소녀의 얼굴이 매우 어여쁘다
고 느꼈다. 그가 소녀에 대해서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노란 색 저고리에 푸른 색의
치마, 그리고 매혹적으로 흐느적거리는 가느다란 허리였다.
악처후가 아쉬운 듯 눈길을 계속 소녀가 사라진 쪽으로 던졌다. 그의 그런 몸짓을 눈치가
빠른 여승이 놓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저 소저는 누구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지 악처후가 넌지시 물었다.
"내 누이동생이랍니다. 소교라고 하는데 매일 저렇게 너펄거리며 사내아이처럼 뛰어다니지
요."
여승의 대꾸에 악처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주 이쁘군……!"
"뭐라고 했소?"
여통이 대뜸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소저가 아주 귀엽게 생겼다고 했소. 활달하기도 하고.……."
"활달하긴 하지만 귀엽지는 않소이다."
여통이 한숨처럼 내뱉자 여승도 거들었다.
"아주 골칫거리지요."
악처후는 알 수 없었다. 저렇게 사랑스런 소녀가 왜 골칫거리가 되었는지를. 그러나 더 자세
하게 캐물을 수가 없었다.
여승은 악처후를 처소에 데려다 주고는 막여인과 다른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곤 여초교
의 방으로 갔다.
여소교는 혼자 방안에 앉아 있었다.
"너 오늘 아주 큰일을 치를 뻔했다."
"왜요?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아까 너와 부딪친 사람이 누군지나 알아?"
"내가 알게 뭐예요. 헌데 그 사람 참 미남이던데요."
"그래서 네 마음에 들더란 말이더냐?"
"오라버니는 그저 그런 소리밖에 모르더라. 내가 뭐 잘난 사내만 보면 미치는 계정인 줄 아
시나 봐."
여소교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그 사람이 매분가 된다면 나쁠 것도 없지."
"정말 나를 놀릴 셈이에요?"
"놀리다니? 감히 너를 놀려? 아무튼 그 사람은 무공이 대단해."
"흥,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죠? 난 그 사람이 목석처럼 보이던데."
"그래? 정말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참, 나를 좀 도와주지 않겠니?"
"그 대신 무엇을 줄 건데요?"
잠시 궁리를 하던 여승이 은 구슬 하나를 품에서 꺼냈다.
"나를 도와만 준다면 이 구슬을 주지."
잽싸게 구슬을 가로챈 여소교가 희색이 만연하여 물었다.
"그런데 그토록 아끼던 이 구슬까지 날 주며 부탁하려는 게 뭐죠? 또 어느 집 처녀를 꾀어
오라는 건 아니겠죠?"
"그런 짓은 이젠 안한다. 전번에 처녀를 데리고 오랬더니 그 집 늙은 어멈을 데려다 줘서
얼마나 혼이 났는 줄 아느냐?"
"호호호, 발정 난 암퇘지를 데리고 오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요."
"글쎄, 이번에는 그런 일이 아니야. 매우 중요한 일이지."
"대체 무슨 부탁이에요?"
"네가 아까 만난 그 악처후만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거야. 그게 날 돕는 길이란다."
"흥, 내게 사과도 하지 않는 그런 사내를 내가 왜 관심을 두겠어요."
"그럼 좋다. 히히히……!"
기분이 좋아진 여승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란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 여승이 한번 그런 말을 비치자 여소교는 은근
히 악처후에 대해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당장 몸종을 시켜 그의 숙소를 알아 오게 했다. 그리곤 살그머니 방을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불렀다.
"어딜 가느냐?"
돌아보니 어머니가 웃으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왜요?"
어머니가 그녀의 손목을 억세게 잡았다.
"왜 한번 보자는데 그렇게 퉁명스럽니? 이젠 다 컸다고 어미를 무시하는 거냐?"
"아이, 어머니도 어머니는 밖에 잘 나오시지 않는데 갑자기 나를 부르니 그러죠?"
"네가 보고 싶어 이렇게 나왔단다."
"알아요 어머니는 날 늘 귀여워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얼마나 외웠지?"
"그 말씀 하실 줄 알았어요."
여소교의 입이 뾰로통해졌다.
"난 벌써 반년이나 그걸 너에게 읽게 하였는데……. 앞으로는 네가 게으름을 피울까 봐 사
흘에 한 번씩 일깨워 주기로 했다."
"그 잘난 건 외워서 어디에 쓴다고 그러세요?"
"얘야, 그건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거야. 벌써 일곱 대째 내려오는 건데 딸자식한테만 물려주
고 다른 사람에게는 물려줄 수가 없단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언젠가는 유용하게
쓸 데가 있을 게다."
"정말 미치겠어요. 밤마다 그 소녀공(素女功)을 외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여소교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진저리를 치는 시늉을 했다.
제2장 여인의 피맺힌 원한
"얘가 점점……. 조상한테 물려받은 걸 그럼 버릴 셈이냐?"
어머니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안 된다. 어서 내 앞에서 외워 봐라."
여소교는 내키지 않았지만 외워 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소녀공(素女功), 천지생(天地生), 음포양(陰抱陽), 신공성(神功成), 분향밉실(焚香八室), 정좌
명심(靜座冥心), 고치집신(叩齒集神), 정의마(定意馬), 복심원(伏心猿), 수일처(收一處), 방단
전(放丹田),서온윤(敍溫潤)……."
"좋구나.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어."
어머니 여씨 부인은 기분이 흡족해서 미소를 띄웠다.
"어머니, 이 소녀공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고 제게 자꾸 강요하시는 거예요?"
여소교가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벌써 몇 번이나 이런 질문을 했었다. 여
씨 부인 역시 딸애의 질문을 여러 번 자문해 보았었다. 하지만 자신조차도 명확한 답을 찾
지 못했다. 그럴 때하다 여씨 부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밖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여하튼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언젠가는 소용이 있을게다. 그러니 버리지 말로 꼭 잘
외워 둬야 한다. 너만 외워 두지 말고 이 다음 네 딸에게도 물려줘야 해. 그렇지 않으면 조
상에게 불공이 죄가 될 것이다."
"호호호……, 내 딸이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이것아, 시집은 안 갈 생각이냐? 시집가면 아들딸이 생기는 법 아니니?"
"어머, 누가 시집을 간다고 그래요? 난 안 가요!"
낯을 붉히며 여소교가 소리를 빽 질렀다.
"말은 잘하는구나. 하지만 때가 돼 봐라. 가지 말라고 잡아도 목을 매니 어쩌니 난리를 칠
것이……."
"난 그런 말 딱 질색이에요."
여소교는 뜨락으로 달려갔다.
여소교는 오른편으로 굴러 돌아 긴 장랑(長廊)을 지나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창가로 살금살
금 다가가 열려진 들창 안을 들여 다보았다.
안은 매우 조용했다. 왼쪽 벽 아래에 침대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 그 위에 한 사내가 눈을
감은 채 잠을 자는지 꼼짝 않고 누워 있는 게 보였다.
휘장이 드리워져 있지 알아 여소교는 그 사내를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마주 잘생긴 사내
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헤쳐진 앞가슴의 근육이 아주 단단해 보였다. 영준한 모습에 야
성적인 면까지 엿보이는 사내였다.
순간 여소교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급하게 몸을 돌려 물러서다가 그만 화
분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에그머니나!"
부랴부랴 몸을 일으키려는데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이 불쑥 그녀의 눈앞으로 나
타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악처후가 그윽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자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잠을 깨우는데 누가 편히 자겠소. 그럼 내가 자는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군. 그래,
어떻든가? 마음이 살살 동하든가?"
악처후가 내밀었던 손을 거두며 능청스럽게 말을 붙였다.
여소교는 다른 때 같았으면 벌써 성질을 부리고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악처후 앞에서는 오히려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별소리를 다하시네요……."
그녀가 살짝 얼굴을 외로 꼬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자, 어서 일어나지."
악처후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여소교는 악처후를 흘깃 바라보더니 그의 손을 잡았다. 억센
사내의 손이 그녀를 잡아당겼다.
여소교는 악처후의 손가락 힘이 매우 센 것에 깜짝 놀랐다.
"왜 나를 그렇게 뚫어지게 보는 거지? 내 얼굴에 꽃이라도 피었나?"
"꽃은 무슨 꽃……?"
키득키득 웃으며 여소교가 악처후의 시선을 피했다.
"난 정말 내 얼굴이 꽃이었으면 좋겠어."
악처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건 왜죠?"
"그래야 소저가 계속 나를 바라볼 게 아니겠어. 난 아름다운 소녀들에게 그렇게 주목을 받
는 것이 가장 즐겁거든."
그녀는 그제야 아직도 자신의 손이 악처후에게 쥐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부끄
러워진 그녀는 얼른 손을 빼며 살짝 눈을 흘겼다.
"흥, 정말 싱거운 사내야. 미워 죽겠어!"
여소교는 왔던 길로 부리나케 사라져 버렸다.
"어허, 저 계집이 왜 저럴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순한 양 같더니 갑자기 성난 살쾡이가 되
었으니……."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혼자 푸념을 늘어놓았다.
잠시 후 악처후에게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여원외였다. 그는 달려가는 딸의 모습을 보며 한
껏 웃고 있었다.
"저 애가 공자를 시끄럽게 한 모양이군요."
악처후가 급히 허리를 숙여 그에게 예를 올렸다.
"글쎄요, 내가 뭐 잘못한 일도 없는데 저러는군요."
"하하하,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저 애는 어렸을 때부터 응석받이로만 커 와서 고삐 풀린 망
아지 같답니다. 그저 자기밖에는 없는 아이죠."
"나더러 싱겁다면서 눈을 흘기더군요. 또 밉다고도 하더군요."
"허허허, 계집아이들이란 정말 미운 사람에게는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는 법이지요. 계집애
들은 왕왕 마음과 말을 반대로 할 때가 많답니다."
"그래도 화가 난 것 같던데……."
그 말에 여원외가 다시 껄껄 웃었다.
"그건 모르는 말씀입니다. 우리 저 애는 정말 화가 나면 이 집이 남아나지를 않습니다. 그릇
과 접시들이 박살이 나지요. 그러나 들어 보세요. 어디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립니까?"
"그렇다면 화가 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그렇지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왔다. 뒤이어 하인
하나가 허둥지둥 뛰어들어왔다.
"큰일났습니다. 사람이 죽었어요!"
"뭐라구?"
여원외가 번개라도 맞은 사람처럼 전신을 떨었다.
"도조를 받으러 갔던 장이와 이성이 죽었습니다."
"아니 죽다니, 어떻게 죽었단 말이더냐?"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시체들을 저기에 가져다 놨습니다. 어서 가 보세요!"
여원외는 하인을 앞세우고 바삐 앞뜰로 향했다. 그 뒤로 악처후도 따라갔다.
장이와 이성의 시체 곁에는 벌써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여승과 여통 그리고 막여인
과 무사들도 와 있었다. 그 밖에 하인과 그의 가족들도 무슨 좋은 구경이라도 난 듯 삼삼오
오 몰려들어 시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막여인이 시체에 코를 박고 열심히 조사를 하고 있었다. 여원외와 악처후도 시체를 확인했
다. 시체는 목줄기가 끊어진 채 피범벅이었다. 막여인이 그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여원외가 막여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죽은 것인가?"
"맥을 정확하게 끊어 놓은 걸 봐서는 산짐승에게 당한 것 같기도 한데……."
그러자 여승이 나섰다.
"그 근방에 맹수들이 출몰한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그렇긴 하오. 맹수의 짓이라면 왜 죽이기만 했겠소."
막여인이 여승의 말에 동조를 했다.
"그래요. 형님 말띠 옳아요. 맹수가 사람을 물 때는 그 고기를 먹자고 하는 짓인데 왜 죽이
기만 했을까요? 어쩌면 이 두 놈들이 너무 말랐기 때문에 그냥 가버렸는지도 모르지만
……."
여통이 자기가 잘 안다는 듯이 혀를 차며 한마디 보탰다.
여승은 하나마나한 동생의 말을 무시하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악처후에게 시선을 던
졌다.
"소요공자께선 견식이 아주 넓은 분으로 알고 있는데 의견이 어떤지요?"
죽은 사람들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있던 악처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 다섯 개로 뚫은 것 같군."
"글쎄, 나도 그렇게 보이기는 한데……."
막여인도 자기 생각을 말했다.
"두 사람의 목을 보세요 목이 거의 살가죽만 남았는데 무슨 손가락 힘이 그렇게 세단 말이
오?"
나비가 툭 끼여들었다. 악처후가 나비를 향해 한마디 냉소를 던졌다.
"정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걸 모르는군. 그대가 할 수 없다고 다른 사람도 안
된다는 생각은 버리게."
나비가 눈을 흡뜨더니 대들려고 했다. 그 사이를 막여인이 막고 나섰다.
"또 왜들 이러나? 내 소견에도 이건 보통의 사람이 한 짓이 아니야. 다른 문파의 고수들이
한 짓이 분명해. 응조문(應爪門)의 고수들 속엔 소가죽도 손가락만으로 북북 찢어대는 자가
있었는데 그건 벌써 사십 년 전의 일이고……, 용형파(龍形派)도 수공(手功)으로 유명하지만
아직 그런 일류급 고수들이 나오지 못했고……, 오지문(五指門), 금강수(金剛手), 대력신조
(大力神爪) 등 수공으로 이름있는 문파들에서도 아직 그렇게 뛰어난 고수들은 나오지 않았
거든."
눈썹을 잔뜩 실룩거리고 있던 악처후가 덧붙였다.
"그리고 다른 문파들은 수공에 능숙하지가 못하지. 지금 천하 오대 고수들 중 북개 홍칠공
도 장력(掌力)은 막강해 강룡십팥장(降龍十八掌)을 쓰고 있지만 조공(爪攻)은 영……."
"난 천하 무림의 문파들의 무공을 십여 년이나 연구한 사람이지만 이렇게 손가락으로 상대
의 목을 따는 솜씨는 보지 못했소."
"그렇다면 이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고수가 우리 여씨 가문을 해치려고……? 이
일을 어쩌나!"
여원외가 갑자기 부들부들 떨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느 무림인이 길을 가다가 이들과 시비가 붙어 그런 짓을
순간적으로 저질렀을지도 모르죠."
막여인이 여원외를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여원외는 장이와 이성의 가족에게 은 오십 냥씩을 보내주었다. 또한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
주라고 관리인에게 지시했다.
"아버지, 몇 사람을 보낼까요?"
여승이 불쑥 물었다.
"날도 어두워졌는데 많이 보내거라."
"그 집 사람들을 오라고 해서 시신이라도 보게 해야겠지요?"
여통의 말에 여원외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가족들이 와서 저 참상을 보면 여기서 울며불며 난리를 칠 게 아니냐?"
모든 사람들이 다 돌아간 후 여승은 아버지를 따라 서재로 들어왔다.
"아버지!"
"왜?"
"글쎄 별일이 다 있지 뭡니까? 꼭 아버지를 만나 뵙겠다는 사람이 있거든요."
"누군데?"
"여인이에요. 선녀같이 예쁜 열일곱 살 숫처녀라니까요."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여원외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여승이 계속 변죽을 울렸다.
"정말입니다. 이 놈이 아무리 버릇이 없어도 아버지 앞에서 허튼소리를 지껄이겠습니까. 그
여인이 아버지를 뵙는 것을 평생 소원으로 여기고 있다며 간절히 청을 하지 뭡니까?"
그 말에 여원외는 슬슬 구미가 당기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점잖게 물었다.
"그 여인이 지금 어디 있다는 거냐?"
"어머니께서 알면 경을 칠까 봐 남모르게 아버지 침실에 데려 다 놨습니다."
"어허험, 고얀 놈 같으니라구! 아버지 체면은 생각지도 않고 으흠!"
여원외는 짐짓 노한 낯빛을 보였다. 그러자 여승도 겸연쩍은 얼굴을 하면서 말했다.
"정 아버지께서 원하지 않는다면 당장 그 여인을 쫓아 버리고 오겠습니다."
그러면서 슬쩍 밖으로 나가는 척했다. 여원외가 급히 여승을 잡았다.
"가만 좀 있어 봐라. 어떤 계집인지 그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
못 이기는 척하며 여원외는 급히 침실로 갔다.
'흐흐, 그럼 그렇지. 그 좋은 떡을 개 줄 리 있나.'
여승은 속으로 비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영감이 아삼을 보면 가만있지를 못할 것이
고 그렇게 되면 영감은 자신에게 고마움을 느껴 여부(廬府)의 주인 자리를 내줄 것이라 믿
었다.
여원외는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허리가 호리호리한 여인의 뒷모습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
이와는 다르게 가슴이 울렁거려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여원외가 한껏 목소리를 부드럽게 꾸
몄다.
"나를 만나러 왔다지?"
아삼이 돌아서며 여원외를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여원외는 그녀의 외모에
홀딱 반해 버렸다.
'이 계집은 여승과 여통의 꽃기생이지 않은가? 두 놈들이 나에게 아첨을 하려고 데려다 놓
았구나. 어쨌든 잘되었다. 내 오늘 저 꽃 같은 어린 계집과 진탕 놀아 봐야겠다.'
그는 연신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잘 왔네. 그러지 않아도 난 임자 생각을 많이……."
아삼이 흐느적거리며 여원외에게로 다가왔다. 그 보드랍고 흰 손으로 여원외의 입술을 지그
시 누르며 말문을 막았다. 그녀는 교태 어린 웃음을 흘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녀도 마찬가지랍니다. 헌데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무슨 말인지 어서 해봐라."
아삼의 희디흰 손목을 부여잡은 채 여원외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생각만 해도 오장육부가
슬슬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삼이 몸을 비비꼬며 말했다.
"이 좋은 밤에……."
그리고는 손을 살짝 빼더니 옷고름을 풀었다. 사르르 저고리가 벗겨지며 알몸이 드러났다.
봉긋한 젖가슴을 가린 붉은 색의 천이 더욱 육감적으로 보였다.
"오냐, 이 좋은 밤 한순간은 천 금보다 더 귀하다고 하였지."
아삼에게 넋을 빼앗긴 여원외는 물씬 풍겨나는 향기에 매료되어 그녀의 허리를 와락 껴안았
다. 그리고 급히 그녀의 가슴을 살짝 가리고 있는 천을 잡아당겼다. 탐스러운 젖가슴이 드러
났다. 그는 주름살투성이의 얼굴을 그녀의 젖가슴 속에 묻고는 어린아이처럼 빨고 문지르고
깨물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아……!"
아삼이 속으로 삼키는 듯한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계집종 하나가 문밖에서 여원외를 찾았다.
"나으리, 마님께서 진지 잡수시라고 하십니다!"
발끈 화가 난 여원외가 발악을 하듯 소리쳤다.
"혼자 많이 처먹으라고 해. 난 먹었으니까!"
그는 아삼을 번쩍 안아 가지고 침대에 눕혔다. 그는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다. 거친 숨을 내
쉬며 아삼의 치마와 속옷을 마구 벗기기 시작했다.
이런 일에 만성이 돼버린 아삼은 알몸뚱이를 훤히 내보이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방글방글 웃음을 띄우며 그를 한껏 유혹했다.
"어머, 옷 벗기는 솜씨가 대단하시네요!"
마음이 바쁜 여원외는 자기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아삼의 몸 위로 쓰러졌다.
"그 솜씨 만인가 어디? 주물러대는 솜씨는 또 어떤데……?"
여원외는 황급히 휘장을 쳤다.
한동안 침대가 무너질 듯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늙은 여원외의 거친 숨소
리와 아삼의 숨넘어가는 교성이 뜨겁게 어우러졌다.
"어구, 죽겄다!"
"아……! 호호호……!"
여원외는 지칠 줄 몰랐다. 그 나이에 무엇을 먹고 그런 힘이 나오는지 벌써 몇 차례나 아삼
을 죽음에 가까운 골짜기로 몰고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또 뜻하지 않게 방해꾼이 나타났다.
"아버지, 큰일났어요. 어서 나와 보세요!"
여통이 창 밖에서 불러대고 있었다. 한참 방아를 찧어대고 있던 여원외는 부아가 치밀었다.
"이 놈, 어디 벼락이라도 떨어졌느냐? 자리에 누웠으니 볼일이 있거든 날이 밝으면 오너라!"
"아이구 아버지! 정말 벼락 같은 일이에요. 또 사람이 죽었어요!"
"뭣이!"
아쉽지만 여원외는 아삼에게서 몸을 뗄 수밖에 없었다.
"장이와 이성을 묻으러 갔던 하인들 여덟이 또 죽었어요."
"가만있거라."
그는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과연 여덟 구의 시체가 마당에 가지런히 눕혀져 있었다. 여씨집 하인들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소상히 말해 보거라?"
"날이 어두웠는데도 돌아오지 않길래 제가 사람을 보냈어요. 그런데 모두 이렇게 죽어 있더
랍니다. 장이와 이성은 다 묻어 놓고 말이에요."
막여인이 설명했다. 여원외가 시체들을 살폈다.
"그런데 이번엔 상처가 다른데……?"
막여인이 시체의 앞가슴을 활짝 열어 보였다. 그러자 앞가슴에 시퍼런 손자국이 드러났다.
"음, 각자 이런 손바닥 자국이 하나씩 있습니다."
"그럼 장 한 방에 모두 죽었다는 건가?"
막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장력이 비범한 놈들인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뼈는 상한 데가 없는데
살에 피멍이 들어 절명하였습니다."
막여인의 말에 악처후도 한마디 던졌다.
"보통의 위력이 아닙니다. 장력을 맞아 내장이 터지는 바람에 죽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겉이 멀쩡한데 이해가 안 가는군."
여원외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막여인이 눈빛을 반짝였다.
"그러니까 대단하다는 거죠. 놈들의 장공(掌功)이 아직 완벽하지 않기에 이렇지 원래는 피멍
조차 남기지 않았을 겁니다."
여승이 혀를 찼다.
"오, 그렇게 무서운 무공도 다 있었나?"
"참을 수 없다. 우리 집 사람들을 죽이는 걸 보니 분명 우리 가문에 도전을 해오려는 놈들
이 분명하다!"
여통이 가슴을 내밀며 큰소리를 쳤다.
막여인이 여원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림의 그 누구와 원수진 일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여원외는 한마디로 부인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소. 우리 여씨 가문은 무림인 들을 존경해 왔소. 내가 여러
분들을 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소. 그리고 무림인들과 원수를 지고 싶어도 내가 무
공이 없으니 어디 엄두나 내겠소?"
막여인이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림 다른 어떤 사람들이 원수로 잘못 여기고 싸움을 걸어 온 게 아닐까요?"
여원외가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입을 열었다.
"그럴 가능성도 없소. 우리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가 못사는 집들인데 어
림도 없지. 무슨 돈이 남아돌아서 무림의 고수들을 불러오겠소?"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원수진 일도 없는데 누가 이런 짓을……."
막여인이 알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여통이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맞아, 재물 때문이오. 우리 집안이 잘사니까 재물이 탐나서 그랬을 것이오."
"재물을 탐내서 그런다면 왜 무고한 하인들을 죽이겠소 더군다나 장이와 이성이 지니고 있
던 은냥은 왜 되는데도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단 말이오."
모두들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해보았지만 도저히 그 연유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시체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악처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렇군!"
"아니, 뭐라도 알아냈소?"
여원외가 눈을 크게 뜨며 악처후를 바라보았다.
"또 허튼소리를 하려구?"
나비가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악처후는 못 들은 척 말을 계속 했다.
"놈들은 모두 둘이오."
"어떻게 아시오?"
"이걸 좀 보시오. 손바닥 자국이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지 않소. 필시 두 사람의 소행이 분
명하오."
"과연 그렇군. 작은 것은 여인네 손자국같이 보이는데?"
막여인이 동조를 하자 무부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난 이런 무공을 지닌 여인은 본 적이 없소."
"무부가 보지 못한 여인이야 많지."
막여인이 비웃었다. 악처후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정말 두 사람의 고수가 한 짓이라면 우리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소."
"두려울 게 뭐요? 칼 쓰는 놈이 오면 칼로 막고 몽둥이 쓰는 놈이 오면 몽둥이로 막으면 그
만이지. 내 신권무적이 있는데 그 까짓 놈들쯤은 문제도 아니라구!"
무부가 떠들었다. 그러자 여통도 덩달아 주먹을 내보였다.
"우리 가문엔 하인만 해도 백이 넘는데 무슨 걱정이야?"
악처후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졌다.
'그 두 고수들이 쳐들어오면 백여 명의 하인들은 소용없다. 눈 깜짝할 사이에 쓰러질 텐데,
막여인과 나 같은 사람이 둘만 더 있다면 모르겠지만…….'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원외는 막여인에게 사정을 했다.
"막 선생, 막 선생은 무공이 가장 뛰어난 분이 아니시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우린 막 선생
이 하자는 대로 할 테니 어서 방안 을 강구해 보시오."
산전수전 다 겪는 막여인은 이런 상황에서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지금 놈들은 숨어 있고 우리는 이렇게 노출된 상황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소 눈에 보이는 창
은 막기 쉬우나 몰래 날아드는 암전(暗箭)은 막기 어렵다는 말이 있소이다. 그러니 우리는
각별히 조심을 하는 수밖에 없소. 밤에는 집 밖으로 절대 사람이 나가지 않게 하고 낮이라
도 떼를 지어 다니게 하시오."
"막 선생 말대로 하리다."
여원외가 허리까지 굽히며 대답했다.
"그리고 또 밤에는 하인들을 배로 늘려 횃불을 들게 하고 야습에 대해 만반의 대비를 하시
오."
막여인이 악처후를 쳐다보았다.
"공자성은 어찌할 생각이시오?"
"내 생각에는 놈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방어하기가 어렵다고 봅니다.
지금 놈들이 더 구체적으로 공격해 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봐서는 그만한 방어가 있다고 판
단했을 겁니다."
그때 하인 두 사람이 후원으로부터 뛰어들어왔다.
"큰일났어요. 뒤채에 있는 계집 셋이 또……."
모두들 후원으로 달려갔다. 나이 어린 계집종들이 피칠갑을 한채 죽어 있었다. 계집종의 머
리엔 구멍이 각각 다섯 개씩 뚫려 있었다. 그곳으로 검붉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악처후가 손가락들을 그 구멍에 맞춰 보았다.
"음, 다섯 손가락으로 뚫어 죽인 게 분명하군!"
"손가락이 뭐 송곳이라도 되는가? 그 단단한 두개골을 무슨 수로 뚫어?"
나비가 또 빈정댔다.
"공자님, 강호에 그런 잔혹한 무공을 쓰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소이까?"
막여인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악처후가 도리질을 했다.
"듣지는 못했습니다. 이 광경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나 역시 믿을 수 없었을 것이오. 이처럼
악독한 무공이 존재한다는 건 금시초문이오."
이때 소식을 듣고 뒤늦게 달려온 여소교가 질겁을 했다. 바로 자신이 부리는 몸종들이었다.
"아니, 얘들아! 어떻게 된 거예요?"
"머리에 구멍이 나서……."
여승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여소교가 악처후의 팔에 매달리며 오열을 터뜨렸다.
"모두들 공자님의 무공을 높이 사고 있어요. 이 아이들의 원한을 꼭 갚아 주세요, 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소교의 얼굴이 이슬을 머금은 도화꽃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그 모습
에 도취된 악처후가 대답했다.
"소저, 염려 마시오. 내 소저의 말을 명심하리다."
모두들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날이 밝자 또 사람들은 관을 사들이는 등 죽은 사람을 매장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원외와 그의 부인들은 사색이 되어 집안에 숨어 나오지를 못했다. 장정 스무 명과 무사
다섯이 그 집 둘레를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여승과 여통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꽁무니를 뺄 수만은 없었다. 악처후나 막여인이 곁
에 있는데다가 아버지 앞에서 그런 모습은 보이기 싫어 그들 역시 바쁘게 돌아다니며 집안
일을 지휘했다.
그런가 하면 평소 제멋대로 행동하던 여소교는 악처후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칭얼
댔다. 죽은 몸종들의 원수를 갚아 달라는 뜻이었다.
아침을 먹고 난 후인데도 집안은 쥐죽은듯 고요했다.
악처후는 좀 쉬려고 조용한 곳으로 갔다. 그가 앉자마자 어디선가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
려 왔다. 그는 여소교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일부러 모른 체했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여소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뒷덜미를 간지럽혔다. 악처후가 미소를 머금으며 뒤를 돌아다
보았다.
"수고랄 게 뭐 있소. 남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게 우리 강호 사람들의 도리인데."
"난 어쩐지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요. 전 공자님만 믿겠어요."
악처후는 여소교가 나이는 어리지만 여승이나 여통보다는 총명하다고 판단했다.
"너무 염려 마시오. 놈들은 겁을 먹고 벌써 멀리 도망쳤을 거요."
여소교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생글생글 웃었다.
"호호호, 괜한 근심으로 골치를 썩일 필요는 없겠죠."
"소저는 여인이지만 호걸처럼 성미가 대범하여 참 좋소. 강호에 나가면 크게 이름을 떨칠
것이오."
악처후도 화답을 하듯 밝게 웃었다.
"사람 그만 놀리세요. 난 무공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몸에 절기를 지니고 있는데 함부로 내놓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러면서 악처후가 껄껄 웃자 여소교도 덩달아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흘렸다.
"내가 정말 그런 절기를 지니고 있다면 벌써 나가 놈들을 물리쳤을 거예요."
"옳으신 말씀. 그런데 정말 무공을 전혀 모르오?"
여소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남들은 모두 여씨네 여인들이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하던데……."
"호호호, 누가 그런 소리를 해요? 어떤 미친 사람이 그래요?"
"글쎄, 집안 여인들이 몸 보양으로 하는 공법을 보고 그러는지도 모르지."
"피, 난 그런 거 몰라요."
"몸 보양하는 어떤 공법은 경문같이 그저 외우기만 하면 되지. 외우기만 하면 저절로 몸 보
양이 되는 게지."
"오, 알겠어요. 그런 게 제게 있는 것 같아요. 어머니가 내게 소녀공인지 뭔지를 외우라고
닦달을 하거든요.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천여 자나 되거든요."
"소녀공?"
악처후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예, 아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고 오로지 딸에게만 물려준대요. 이미 몇 대째 내려오고 있는데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 윽박지르기까지 하신다구요."
"다 외울 수 있소? 어디 한번 들어 봅시다."
대수롭지 않은 듯 여소교가 한차례 외웠다. 다 듣고 난 악처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맞았어? 바로 그거야. 틀림없다니까."
"뭐가 틀림없다는 거죠?"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소녀공은 확실히 도가(道家)의 양생지공(養生之功)으로써 매일 외우
면 백 살까지 살 수 있을 것이오."
"백 살까지 살아서 뭘 하겠어요? 늙고 추한 몸뚱이로 무엇을 찾아 먹겠다고……."
"하하하, 하지만 어떤 사람은 오래 살기를 바라고 있지."
"누가, 공자님이오?"
"맞았소 바로 내가 그렇소."
"공자님 같은 대영웅이 장생불로를 바란다구요?"
여소교가 알 수 없다는 듯이 눈망울을 요리조리 굴렸다.
악처후가 웃으려다가 돌연 탄식을 했다.
"그 이유를 말해 줄까?"
"예."
"난 올해로 서른 살이 되었소 '삼십이립(三十而立)이란 말이 있는데 불행히도 난 아직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일이 없소."
"강호에서 소요공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던데 뭘 그래요?"
"내가 바라는 것은 명성과 어떤 이득이 아니오."
"그럼 뭐죠?"
악처후가 그녀에게 흘깃 눈길을 한 번 던지더니 느린 어조로 말했다.
"난 지기를 바라고 있소이다."
"지기? 어떤 지기죠?"
"홍안지기(紅顔知已)를 두고 하는 말이오."
그러면서 악처후가 여소교를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여소교의 낯이 갑자기 붉어졌다.
"나는 오랫동안 강호를 떠돌아다니느라 벌써 얼굴엔 주름살이 깊어지고 있소. 이러다간 아
름다운 여인과 지낼 만한 시간도 없을 것 같소 그래서 항상 조급한 심정이지. 그래서 이젠
홍안지기나 얻어 오래 살며 인간의 향락을 누려볼까 하오."
"그런 뜻이었군요."
순간 악처후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난 소저의 눈부신 자태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해 버렸소 허나 소저는 십팔의 꽃다운 나이
인데 나는 이미 서른이라 배필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악처후가 그답지 않게 자신 없는 목소리로 얼버무렸다.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그의 이야
기를 귀담아듣고 있는 여소교의 얼굴이 점점 더 홍조를 띠었다.
"나이야 뭐……. 공자님은 지금이 한창인데 오히려 내가 부족해서……."
여소교는 떨리는 어조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하하, 그럼 그런 마음은 접어두고 서로 사랑하면 얼마나 좋겠소. 소저의 그 소녀 공으로
우리 두 사람이 늙지 않는다면 백 년을 원앙같이 살수 있을 게 아니오?"
그 말에 여소교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런 영웅을 낭군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세상
에 부러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여소교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악처후가 두 팔을 벌려 그녀를 껴안았다.
"우리 함께 백년해로 합시다."
여소교가 머리를 더욱 필이 숙이며 허리를 비꼬았다.
"그게 어디 제 마음대로……. 허나 이젠 어쩌겠어요."
악처후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소저는 소녀공의 뜻을 모른다고 했소? 그럼 어디 그 뜻을 풀이해 줄 테니 한 번
더 읊어 보시오."
"하지만 소녀공은 오직 딸에게만 알려 주고 남에게는 절대 알려 주지 말라고 하던데요?"
악처후의 얼굴이 순간 긴장감으로 굳어졌다.
"나 악처후를 어떻게 보고 그러시오. 내 비록 무공이 천하 제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일류 고
수는 되오. 그런데 여인들이 몸 보양하는 그까짓 공법을 노리겠소. 난 소저에게 그것을 정확
하게 연마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을 따름이오. 난 절대 소녀공에 관심이 없소."
그녀는 단호하게 말하는 악처후의 태도에 그를 믿기로 했다.
"하긴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런데 왜 어머니는 소녀공을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시는
지 모르겠어요?"
"소녀공,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소. 그것은 여자들이 하는 공법이란 말이오. 사내들은
그걸 연마하려 해도 할 수가 없소."
"알겠어요. 공자님은 모두 저를 위해서 그러시는 거죠? 그럼 시작할 게요."
여소교가 소녀공을 천천히 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녀가 서너 구절쯤 외웠을 때 갑자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급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여원외가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여소교는 달려가 아버지를 어루만졌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너의 일곱째 서모와 열 번째 서모, 그리고 열두 번째 서모, 또 열다섯 번째 서모가 모
두……, 아이고, 몽땅 죽었단 말이다!"
"예? 또 그 놈들이 한 짓인가요?"
여소교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필시 그 놈들의 짓이 분명하다. 서모들 넷은 방금 사온 대추를 먹고 흰거품을 뿜으며 죽어
갔다."
여승이 옆에서 설명해 주었다. 여소교가 분노로 치를 떨며 소리 질렀다.
"그럼 어서 대추를 사온 하인을 잡아와요!"
"대추를 사온 두 계집도 그것을 먹고는 죽어 버렸어."
그 말에 여소교는 주먹을 불끈 쥐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럴 수가! 놈들이 우리 집을 몰살시킬 셈인가?"
"안 되겠어. 어디로 피신했다가 잠잠해지거든 와야지."
여통이 가슴을 가리며 여인네처럼 무서워했다.
"정말 둘째 오라버니는 너무해. 우리 가문이 놈들 때문에 몸을 숨겨요?"
"누이, 지금은 용기만으로 버틸 때가 아니라구. 그러다간 모두 죽어. 그러니 이 오라버니 말
을 들어라."
여승도 피신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자 여소교는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다 가욧! 난 죽어도 여기서 죽겠어요. 난 그 사악한 놈들의 정체를 눈으로 똑똑히 보고 죽
겠어요!"
여소교는 두 오라버니들을 경멸하는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자 이러지들 말고 자세한 말을 들어 봅시다."
막여인이 중간에 끼여들었다.
여원외가 울음을 그치며 힘없이 말했다.
"어쩌겠어. 놈들은 숨어 있고 우리는 이렇게 노출되어 있으니. 이러다가 차례대로 죽기밖에
더 하겠어. 그러니 피해야 한다."
악처후도 그의 말에 수긍의 뜻을 보냈다.
"어르신 말씀을 따릅시다. 나와 막 선생이 호위를 할 테니 잠시 이곳을 떠났다가 기회를 봐
서 돌아오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막여인도 찬동을 했다.
"난 그럴 수 없소!"
살귀 나비가 또 걸림돌을 자청하며 삐죽 불거져 나왔다.
"이 사람아, 우리가 모두 여기에 있으면 놈들과 싸우랴 이곳 사람들을 보호하랴, 너무 벅차
다구."
막여인이 나비를 설득하려고 했다.
"맞소. 무공을 모르는 우리가 있으면 오히려 그대들이 싸우는데 부담만 되지."
여원외의 말에 여소교도 끝내는 악처후를 두둔하고 나섰다.
"악 공자님 하자는 대로 해요."
이제는 악처후의 말이라면 모두 옳은 것으로 여기는 여소교였다.
여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은 떠날 준비로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충 중요한 짐만 골
라 싼다고 했는데도 열여섯 마차가 넘었다.
"어르신, 이게 무슨 피난입니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한 사람은 막여인이었다.
"금은 보화들만 골라 쌌는데 이렇게 많네, 참……."
여통이 머리를 긁적이자 여씨 부인이 단호한 기색을 비쳤다.
"아무리 피신을 한다지만 가져갈 것은 다 가져가야지. 남겨 놓았다가 누구 좋은 일 시키라
구!"
여원외의 여러 부인들도 서로 짐을 싸느라 수선을 떨었다. 그런데 여강의 생모, 즉 여원외의
큰첩만은 말도 없이 쓰디쓴 웃음만 짓고 있었다.
"임잔 왜 그러고 있지?"
여원외가 보다못해 눈길을 주었다.
"이 많은 물건을 가져간다고 놈들이 따라오지 않을 것 같아요?"
"뭐야, 무슨 방정맞은 소리야? 난 죽을지라도 가져가면 가져갔지 놈들에게는 남겨 둘 수 없
어!"
여씨 부인도 여강의 생모를 매서운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여강의 생모는 그러나 여전치 불
만 어린 어조로 말했다.
"죽기가 정 소원이시면 그렇게 하세요."
"흥, 죽음이 겁난다고 아까운 재물을 내버려?"
여씨 부인이 대신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그러면 여기 남아서 집을 지키시면 되잖아요? 이 큰 집을 하인들에게 맡기고 가려니 마음
이 놓이질 않아요."
"이 년이……?"
여원외가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
"됐소, 이제 그만 떠드시오. 두말 말고 막 선생 말대로 해. 은냥은 몸에 지닐 수 있는 대로
지니고 다른 물건은 다 놔두고 갑시다. 놈들이 두 놈뿐이라니 가져간들 얼마나 가져가겠소.
그래도 남아 있는 게 더 많을 거요."
아까보다는 짐이 많이 줄어들었다. 부인들과 여소교는 두 마차에 나눠 타고 여원외와 두 아
들은 한 마차에 함께 탔다. 악처후와 막여인 등 무사들은 말을 타고 호위를 하고 무공을 좀
익힌 하인 사십여 명은 병장기를 들고 앞뒤에서 호위하기로 했다.
집을 나서자 그들은 빠른 속도로 서쪽을 향해 달려나갔다.
악처후는 중간에 가는 마차 옆에서 말을 타고 가며 수시로 여소교를 주시했다. 여소교는 겉
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으나 속은 누구 못지않게 떨고 있었다. 그녀는 악처후가 곁에서
따라오는 것을 보고서야 마음을 조금 놓는 듯싶었다.
그런데 오 리도 채 못 가서 하인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저길 보세요. 집에 불이 났어요!"
모두들 돌아보니 여씨네 집은 화염으로 휩싸여 있었다. 조상이 물려준 모든 것이 일순간 잿
더미로 변하고 있었다. 여원외의 가슴은 터질 듯 아파 왔다. 그는 대성통곡을 하며 제 가슴
을 쳤다. 그러자 부인들도 따라서 오열을 터뜨렸다. 울음소리가 마치 초상집과도 같은 분위
기였다.
"아이구, 어떤 놈이 우리하고 무슨 철천지 원수를 졌길래 저런 몹쓸 짓을 한단 말이냐?"
여원외가 넋두리를 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고정하십시오. 방원 백 리가 모두 어르신 것인데 그까짓 집 한 채 타는 것 같고 뭘 그러세
요. 놈들이 나머지까지 다 태울 수 는 없지 않겠습니까?"
막여인이 그를 위로하고 있는데 앞에 서 있던 하인이 또 소리 쳤다.
"누구야!"
막여인이 급히 말을 몰아 앞쪽으로 달려갔다.
절름발이 둘이 앞길을 떡하니 막고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쇠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중
키가 큰 사내는 전에 한 번 싸워 본 적이 있는 도화도 제자 육숭풍이었다.
'그렇다면 저 놈들이……? 아니다, 황약사의 무공으로 보이지는 않아!'
막여인이 속으로 사태를 따져 보았다. 이때 나비가 뒤에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뛰쳐나왔다.
"이 놈, 또 덤비겠다는 게냐?"
동시에 무영표가 육승풍의 안면으로 날아갔다. 육승풍은 그대로 서 있었다. 대신 그 옆에 있
던 다른 사내가 무영표를 손으로 간단히 잡았다. 나비는 너무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이 놈!"
나비가 머리 끝까지 발끈 달아올라 이번에는 세 개의 무영표를 던졌다. 무영표를 잡은 사내
가 그것을 반대로 나비를 향해 뿌렸다.
쨍―.
공중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순간 사내가 던진 무영표는 나비의 무영표 중 하나를 반으
로 쪼갰다. 그러면서 조각난 것들이 나머지 두 개를 때렸다. 나비의 무영표는 엉뚱한 방향으
로 날아가 버렸다.
나비는 눈을 휘둥그래 뜬 채 할말을 잃었다.
"하하하, 대단한 솜씨요!"
막여인이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 육승풍 옆에 있는 사내는 이제 이십칠팔 세 정도 돼 보
였는데 육승풍보다는 체구가 작았다. 그러나 눈이 몹시 날카로워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살기가 느껴졌다.
"난 곡령풍이오."
사내가 읍을 했다. 그러자 육승풍이 말했다.
"내 사제가 되는 분이오. 아우, 저분은 막가권의 장문 막 선생이시다."
악처후의 눈꼬리가 심상치 않게 뒤틀렸다. 황약사의 제자 여섯 중 곡령풍의 무공이 가장 높
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막여인은 속으로 도화도 제자들은 왜 한결같이 병신들일까 의아해 했다.
막여인이 그들에게 피신을 하고 있는 연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혹시나 하는 의심의 시선
으로 그들을 주의깊게 살폈다.
막여인의 말을 다 들은 육승풍은 자신들과는 아무 연관도 없다며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최근 흑풍쌍살(黑風雙살)이라고 하는 두 마귀 같은 남녀가 강호에 나타났다는 말을 못 들
었소이까?"
"그럼 바로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막여인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육승풍이 좌우 돌아보더니 다음 말을 이었
다.
"여긴 사람들이 많으니 저기로 가서 이야기합시다. 소요공자도 함께 같으면 좋겠는데……."
길 옆 숲 속으로 들어가자 막여인이 물었다.
"그 흑풍쌍살이란 자들이 도대체 누구요? 강호에서 무고한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며 갖은 악
행을 일삼는다는 그들이 도대체 사람들이오?"
"그런 짓을 하는 놈들 때문에 우리까지 화를 입어 이 모양이 되었소이다. 아우가 그 다음은
설명해 드리게."
치를 떨며 말하던 육승풍이 곡령풍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는 육승풍보다는 조금 침착한 면
이 엿보였다.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도화도에서 그런 배신자가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럼 흑풍쌍살과 도화도가……?"
악처후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곡령풍이 말을 계속 이었다.
"흑풍쌍살은 원래 도화도 황 사부님의 제자였소. 하나는 이름이 진현풍(陳玄風)이고 다른 하
나는 매초풍(梅超風)이지요. 강호에서는 그들을 각각 철시(鐵尸)와 동시(銅尸)라고도 부릅니
다."
별호만 들어도 그들이 얼마나 악독한 자들인지를 알 수 있었다. 막여인은 죽어 나간 시체들
의 형상을 떠올리며 그의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동시 진현풍은 도화도 여섯 제자들 중에서 두 번째이고 철시매초풍은 세 번째인데 여인이
지요."
막여인은 시체에 난 손바닥 자국을 보고 남녀라고 했던 것을 상기했다.
"진현풍과 매초풍이 도화도에서 사부님의 말씀에 따라 무공을 열심히 배웠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오. 그런데 그들은 사부님을 거역하고 말았습니다. 정말 두 사람이 사랑한다면
사부님께서 축복을 해주셨을지도 모릅니다만, 사부님께서 그들이 그러는 걸 막은 것은 진현
풍이 선천동자공(先天童子功)을 연마하기를 바랐던 까닭이었습니다."
악처후는 문득 <구음진경>을 떠올렸다.
'강호에서 떠도는 말에는 황약사의 제자 중 남녀가 그것을 훔쳐 달아났다는 말이 있다. 그
렇다면 이 흑풍쌍살의 짓이었구나!'
곡령풍이 침통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허나 그들은 결국 도화도에서 도망을 쳤습니다."
곡령풍은 그들이 <구음진경>을 갖고 도망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일은 도화도와 전진
교의 관계에 연관되는 일이었다. 또한 사부인 황약사의 성망에 관련된 일이기도 했기에 세
인들에게는 가급적 알려지지 않는 게 좋을 듯싶었던 것이다.
"그들이 달아나자 사부님은 노하셨습니다. 사부님은 결국 나머지 우리 넷에게 화풀이를 하
셨지요. 사부님은 우리를 이렇게 병신으로 만들어 도화도에서 추방을 시켰던 것입니다. 바로
그 연놈들 때문에 우리가 이런 꼴이……."
곡령풍은 다시 분노가 치솟는지 이를 바드득 갈았다.
'황약사도 정말 한심하군. 배신해 달아난 제자는 잡지 않고 멀쩡한 제자들을 병신으로 만들
다니……!'
속으로 황약사를 비웃고 있던 악처후는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사실 황약사는 다시는 도화도를 떠나지 않는다고 맹세한 일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제
자를 잡으러 도화도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황약사가 도망간 두 사람을 잡으러 나
왔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때 황약사가 이성을 잃고 화를 낸 것
은 제자가 도망을 쳤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잃어버린 <구음진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음진경>은 선인들이 쓴 무림의 천하 제일의 기서였다. 그러니 가까스로 손에 털은 그
귀중한 기서를 제자들에게 빼앗겼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육승풍이 인상을 쓰며 곡령풍 대신 말을 이어 갔다.
"그렇게 되어 우리 사형제 넷은 모두 이 모양이 되었지요. 이게 모두 그 연놈들 때문이오.
그래서 우린 이렇게 그들을 잡으려고 나왔습니다. 우린 기필코 그들을 잡아 도화도로 데리
고 갈 생각이오."
그리고는 동해 쪽을 향해 정중하게 읍을 했다.
"사부님께서 우리의 이같은 마음을 알아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소."
"하하하……!"
악처후의 웃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모두들 악처후를 응시했다.
"그대들 사부도 지독한 사람이오. 그런 사람에게 그런 지성을 드린다니 참으로 한심하오."
육승풍이 눈을 부릅떴다.
"뭣이, 사부님의 은혜는 태산과도 같소이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 여섯 제자는 벌써 황천
객이 되었을 것이오. 난 그런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오!"
악처후가 뭐라고 반박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그들을 잡으러 이곳까지 왔다는 말이오?"
악처후의 입장을 고려하여 막여인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렇소 그런데 수림이 무성한데다가 우린 다리가 온전치 못해 그만 연놈들을 놓치고 말았
소. 하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여부의 사람들을 연달아 죽이는 것을 털고는 이렇게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오."
"음……."
"그들은 우리가 추격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숨어 다니고 있습니다."
막여인이 물었다.
"그들이 그대들을 피해 숨어 다닌다면 왜 아직도 이곳에 머물러 있는지 모르겠소. 그들이
대체 여씨 가문과 무슨 원한이 있기에……?"
"그건 우리도 잘 모릅니다. 우리는 사부님이 매초풍을 여가집에서 데려왔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혹 그 년이 소녀 시절 그 집과 무슨 원수진 일이라도 있는지 모르겠소이다."
"매초풍의 나이가 어떻게 되었소?"
곡령풍이 입을 열었다.
"나보다 먼저 들어왔기에 누님이라 불렀지만 나이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스무 살 안팎이
지요"
도화도에 있을 때 황약사는 제자들에게 선천동자공을 익히게 하려고 남녀 제자간의 접촉을
불허하였다. 그래서 곡령풍과 육승풍은 매초풍에 대해 아는 바가 극히 적었다.
"그림 매초풍이 언제 제자로 들어갔소?"
육승풍이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대답했다.
"한 칠팔 년 전쯤 될 겁니다."
"그렇다면 열두서너 살 때인데 그 어린 나이에 무슨 원한을 품었을까?"
막여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때였다.
숲 밖에서 소름이 돋을 듯한 비명 소리와 함에 무사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네 사람은 급히 그곳으로 뛰어갔다. 마차 주변의 하인 칠팔 명이 벌써 쓰러져 있었다. 암기
에 급소를 맞고서 당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마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사했다. 악처후가 다급하게 여소교에게로 달려갔다.
"다친 데는 없소?"
"예, 전 무사해요. 놈들은 숨어서 계속 못된 짓만을 하고 있어요."
여소교는 공포에 질려 몸을 작게 움츠리고는 모깃소리만하게 대답했다.
막여인은 놈들이 생각보다 빨리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벌써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놈들의 경
공 역시 뛰어날 거라고 짐작했다.
막여인이 여원외에게 물었다.
"혹시 예전에 한 열두서너 살 되는 소녀에게 무슨 원한을 진일이 있습니까?"
여원외는 하도 말 같지 않은 소리라 피식 웃었다.
"그런 어린 계집애와 내가 무슨 원한을 지겠소?"
"곰곰 생각해 보십시오. 칠팔 년 전에 매초풍이라는 어린 계집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매초풍? 그러고 보니 성이 매씨인 집이 있었지만 그 집 계집애는 매초풍이 아니지. 아마
매약화(梅若華)라고 그했을걸."
"맞습니다. 매약화가 맞아요. 매초풍은 사부님이 지어 준 이름입니다."
곡령풍이 소리쳤다.
"그렇다면 그 잔인한 계집이 매약화란 말이오?"
"그 매약화인지는 모르겠으나 철시 매초풍의 원명은 분명 매약화가 맞습니다."
그러자 여원외의 낯색이 갑자기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계집애가 아직 살아 있다니……! 그럼 그 애가 복수를 하기 위해……?"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막여인이 긴장된 어조로 물었다. 여원외가 흠칫 놀라며 언성을 높였다.
"없어! 난 그 애를 알지 못해!"
막여인은 대강 짐작이 가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막여인은 곧 길을 떠나자고 하인들에게 분부를 내리고 나서 곡령풍과 육승풍에게도 동행할
것을 권유했다.
"아니오. 우리까지 있게 되면 그들은 겁이 나서 접근하지 못하고 아예 멀리 사라질지도 모
르오. 그러면 그들을 잡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이오."
이렇게 의사를 밝힌 두 사람은 표표히 사라졌다.
여원외 일행이 탄 마차 역시 달리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서야 그들은 사오십 리 정도 떨어져 있는 한 마을에 이르렀다. 길 옆 작은 객점
앞에 마차를 멈추었다.
막여인이 여원외에게 정중하게 설명을 했다.
"어두운 밤엔 길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여원외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들은 칼과 창을 쥐고 객점 밖을 지켰다. 여씨네 사람들은 객점 안으로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황야의 객점이라 별로 크지는 않았다. 탁자가 겨우 서너 개밖에는 놓여 있지 않았다. 객점
주인은 늙은이였다. 심부름을 하는 처녀 아이는 아주 못생긴 것이 그다지 인상이 좋지 않았
다.
"난 항상 떠돌아다니는 사람인데 주인장을 이 객점에서 본 것 같지가 않소이다."
막여인이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영감은 흐릿한 눈을 꿈벅이며 막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손님을 처음 보는뎁쇼."
그러자 무부가 탁자를 소리나게 쳤다.
"저 영감이 눈이 삐었나? 이분은 여부의 일등 무사로 막 선생님이시다!"
그러자 영감이 급히 허리를 굽실거렸다.
"아이구 죄송합니다요. 이 늙은이가 이젠 눈이 침침해서 그만……. 이 객점의 원래 주인이
하단 말이 생각납니다요. 그 진 영감 하는 말이 막 선생님을 방원 백 리 안에서 일등가는
호걸이라고 하시더군요."
주인은 얼른 계집을 시켜 술과 안주를 내오게 했다.
"그 진 영감은 어디 갔소?"
막여인이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 사람은 한 달포 전에 이 객점을 은 열 냥에 우리에게 팔고 고향 복주로 돌아갔지요. 이
객점이 장사가 잘된다고 하도 그러길래 샀더니……, 잘되기는커녕 몇 날 며칠을 기다려도
지나는 사람 하나 없으니. 오늘처럼 손님들이 이렇게 많이 오시기는 처음입니다요."
"은자 열 냥으로 인수받은 객점이 장사가 되면 얼마나 잘되겠어? 그걸 믿고 바라는 사람이
바보지."
나비가 비웃었다.
"영감은 그 진 영감에게 속은 거라구!"
무부 역시 맞장구를 치며 히죽거렸다.
"글쎄 누가 그럴 줄 알았겠소. 은자까지 치렸으니 객점은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되었소."
주인이 쓴웃음을 날렸다.
"영감, 좋은 술과 맛있는 요리만 내오게. 내 값을 후하게 쳐줄 테니."
여승의 말에 주인은 처녀에게 손님 시중을 잘 들라고 당부했다. 처녀가 대답하는 것으로 보
아 주인의 손녀인 듯했다.
처녀는 얼굴이 검붉고 큰 두드러기 같은 것이 나 있어 보기만 해도 역겨웠다. 그러나 이상
하게도 손은 매끈한 것이 희고 고왔다.
"저 아이는 얼굴에 지저분한 게 나서 참 아쉽게 되었어."
여통이 이빨을 내보이며 불만스러워했다. 여승이 그녀의 손을 가리켰다.
"얼굴만 보지 말고 저 아이의 손을 보라구. 얼마나 이쁜가. 말 그대로 섬섬옥수 아니냐구?"
그때 마침 처녀가 그들이 앉아 있는 탁자로 왔다. 그러자 여승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처녀가 부끄러워 얼른 손을 뽑고서는 술을 가지러 달아났다.
"술부터 들고 계세요. 안주는 곧 나올 겁니다."
잠시 후 술병을 가져온 처녀가 말했다. 여승이 또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려고 했다. 처녀가
막여인 뒤로 가 숨었다.
"어허, 손 좀 잡아 보자는데 왜 이리 앙탈이냐!"
여승이 허허 웃으며 처녀를 희롱하자 여소교가 다가와 그를 나무랐다.
"오라버니, 지금이 어느 때예요. 우린 지금 쫓기는 몸이라구요?"
여원외도 아들의 경고망동을 타일렀다.
"얘야, 조용히 있거라."
그러자 여승과 여통은 조용하게 악처후와 막여인 등의 무사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런데
술이 시금털털한 게 영 맛이 없었다.
"에이, 이 술은 도저히 못 마시겠다. 다른 술 없느냐?"
여승이 언성을 높이자 처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화조(花雕) 술이 두 단지 있기는 한데 손님들 구미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화조 술?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내 왔어야지. 그런 값비싼 술은 우리말고는 먹을 사람이 없
을 테니 잔말 말고 빨리 가져와."
잠시 후 처녀가 술 두 단지를 안고는 돌아왔다. 하나는 부인들이 앉아 있는 탁자 위에 놓고
다른 하나는 여승 등이 앉아 있는 탁자에 놓았다. 여원외만 그 술이 돌아가지 않은 꼴이었
다.
"나는 왜 안 주는가?"
여원외가 부아가 치밀어 처녀를 불러 따졌다.
"나으리께서는 매우 고단해 보이는 것 같아서 그래요. 먼저 안주와 떡을 잡수시고 나중에
술을 드시는 게 어떨까요? 공복에 술을 드시면 취하기 쉽지요."
"오호, 네 말이 그럴듯하구나. 꽤 영특한 아이로구나. 내 나중에 은냥을 상으로 주겠다."
"고맙습니다."
처녀가 머리를 조아리며 좋아했다.
여승은 단지 위를 봉한 흙을 걷어내고 사발로 술을 떠서 한 사림씩 돌렸다.
"여러분, 우리 가문의 안전을 위하느라 수고가 많소. 그 감사의 뜻으로 술을 권합니다."
술사발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채 술을 마시기도 전에 하인 하나가 방정맞게 뛰어들어왔다. 하인은 사색이 된 얼굴
로 여원외를 찾았다.
"나으리, 큰일났습니다. 밖에 웬 연놈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여원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흑풍쌍살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나가 보겠습니다."
막여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부도 함에 뒤를 따랐다.
객점 문 앞에서 하인들이 그들과 대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스무 살 안팎의 젊은이
였는데 사내가 조금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사내는 귀공자처럼 호화로운 옷을 입고 등에는
칼을 메고 있었다. 무림인이 분명했다. 여인은 살결이 좀 검기는 하나 어여쁜 용모에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 역시 등에 칼을 메고 있었다.
막여인이 나오자 하인들이 길을 비켰다. 막여인은 두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두 분께서는 무슨 용건으로 오셨소?"
사내가 눈을 내리깔며 막여인을 훑어보았다.
"알면서 왜 묻나? 우리가 유람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아는가?"
사내의 말투가 몹시 거칠었다. 옆에 서 있던 여인이 눈을 치켜 뜨며 재촉했다.
"어서 들어가기나 합시다. 이자들이 우릴 막을 수나 있겠어요."
막여인은 이들이 흑풍쌍살이라고 단정지었다. 듣던 것보다는 근사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대들은 참으로 무례하군. 가만히 있으니까 허수아비로 보이는가?"
"흥, 그렇다면?"
여인이 대들 듯이 소리쳤다.
"사매(師姝), 함부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래?"
사내가 여인을 잡았다.
"무섭다는 건가요? 그럼 어서 돌아가세요!"
"사매를 버리고 혼자 어디를 가겠어.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나?"
"흥!"
여인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사매, 난 진정으로 사매를 사랑하고 있어."
"말은 잘하지. 그런데 어제 엽(葉) 사매를 만났을 때는 잘만 히히덕거리던데요. 내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사내는 그 말에 얼굴이 상기되며 허둥댔다.
"참, 이거 속마음을 꺼내 보일 수도 없고. 어떻게 하면 믿어 주겠어?"
"시키는 대로 한 가지만 해봐요. 그러면 믿겠어요."
막여인은 두 사람의 수작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은근히
화가 솟구쳤다.
'이런 개종자들이 다 있어. 안하무인도 분수가 있지. 여기가 어디라고 수작들이야. 아무리
황약사의 제자들이라고는 하지만 한심하다. 나 역시 너희들 같은 것들은 겁나지 않는다!'
막여인이 더는 참지 못하고 발끈했다.
"더러운 수작들 집어치워. 어서 내 칼이나 받아랏!"
그래도 사내는 요지부동이었다. 막여인을 향해 손을 한 번 들어 보이더니 계속 여인과 수작
을 부렸다.
"사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칼로 만든 산이라도 오르겠어."
그러자 여인이 빙긋 웃었다.
"좋아요 내가 칼산에 오르라는 말은 못하겠지만 그럼 저기 사람들 중에 먼저 셋만 죽여 제
분풀이를 해주세요."
막여인의 눈꼬리가 꿈틀꿈틀 요동을 쳤다.
'망할 년, 사람 셋을 죽여 분풀이로 삼겠다고 이 연놈들이 정녕 살인 백정들이 틀림없구나!'
사내는 잠시 주저하는 것 같더니 이내 결심이 섰는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사내가 칼을
뽑았다. 칼날이 암흑색이었다. 암흑색 칼날이 번뜩 하는가 싶더니 곧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아악!"
하인 하나의 목이 떨어졌다.
사내는 이어서 칼을 옆으로 휘두르며 한걸음 나섰다. 하인의 허리가 두 동강이 나 버렸다.
나머지 하인도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막여인도 미처 손
을 쓸 수가 없었다.
"어때? 이젠 내 마음을 알겠지. 난 사매의 말이라면 지옥에라도 가겠어."
"이 놈들!"
무부가 하인에게서 쇠몽둥이를 빼앗아 들고는 사내에게로 돌진해 갔다. 사내는 무부를 거들
떠보지도 않은 채 피 묻은 칼을 시체 위에다 쓱쓱 닦았다.
순간 무부의 쇠몽둥이가 사내의 머리 위로 떨어질 찰나였다. 사내가 몸을 옆으로 기울이며
무부의 공격을 슬쩍 피했다. 그러면서 왼손으로 쇠몽둥이를 잡았다. 무부는 자신의 힘이 세
다는 것을 믿고는 두 손으로 쇠몽둥이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놔라!"
사내는 찬웃음을 지으며 왼손을 놓아 버렸다. 그 바람에 무부가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막여인이 뛰어들어 무부의 허리를 안았다.
"호호호호……!"
여인이 재미있어 했다.
"무공을 좀 하는 모양인데 어서 죽여요. 그러면 제 속이 더 시원해지겠는 걸요."
그러자 사내가 여인에게 확실히 잘 보이려고 하는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좋지."
사내가 칼로 막여인을 내리쳤다. 역벽화산(力劈華山)이란 초수였다. 막여인도 소리치며 해저
노월(海底撈月) 초수로 맞섰다. 사내의 칼이 공중으로 올라갔다. 막여인의 힘도 보통은 넘었
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사내가 허리를 굽히며 막여인의 등을 후려쳤다. 얼른 이랑담산(二郎
擔山) 초수로 바꾼 막여인이 사내의 칼을 옆으로 막으며 다시 유운사방(流雲四方) 초수로
공격했다. 사내 역시 만만치 않게 완강히 반격해 왔다.
두 사람은 여러 합을 싸우는 동안 줄곧 살기 어린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이 한창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악처후를 비롯한 무사들이 뛰어나왔다.
"저 놈들은 누구요?"
"바로 흑풍쌍살이 아니겠소!"
순간 여인이 무부의 앞가슴에 있는 복중혈(腹中穴)을 겨냥하여 장을 내뿜었다. 여인의 동작
이 어찌나 빠른지 무부는 미처 피할 겨를이 없었다. 이 순간 나비의 무영표가 여인에게로
날아갔다. 여인이 그것을 피하고자 상체를 숙였다. 때문에 그녀의 장이 약간 빗나가고 말았
다. 그러나 무부는 왼쪽 어깻죽지에 강한 장을 얻어맞고 말았다.
"으으……."
무부의 왼쪽 팔이 단번에 끊어졌다. 무부는 비명을 지르며 오른손으로 상처를 싸잡고는 맴
을 돌았다.
'장력이 대단하군. 그런데다가 악독한 장공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마침 나비가 무영표를
던졌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무부는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악처후는 여인을 상대할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쏜살같이 달려들어 여인의 얼
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여인은 팔로 악처후의 주먹을 막았다. 그리곤 다른 손은 갈고리처
럼 만들어 그의 옆구리를 할퀴려고 했다.
"이크!"
악처후가 급히 물러났다.
'저것이 바로 두개골에 손가락을 박아 죽인 그 조공이라는 건가? 저 손에 걸리면 끝장이
다!'
여인은 악처후가 겁을 먹고 물러서자 더 만만히 보고 연거푸 공격해 왔다. 악처후는 여인의
무공이 생각보다 세지 않다는 것을 차츰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방어 자세에서 공격 자세
로 전환했다.
"하하하, 매초풍! 난 네 년의 재간을 높이 생각했었는데 겨우 그거냐?"
"무슨 소리? 엉뚱한 소리 말고 장을 받아랏!"
"그럼 네 년이 매초풍이 아니란 말이냐?"
"그게 무슨 상관이냐?"
"흐흐, 내 손에 잡힌 다음에도 그런 말을 나불대는지 두고 보자!"
악처후가 막 공격을 가하려고 했다.
"형님, 그 년을 당장 죽여 버리시오!"
여통이 소리쳤다.
"이 계집을 사로잡아 드릴 테니 공자님들 마음대로 하시오!"
여통이 손을 내저었다.
"저런 연놈들에게는 강호의 의리를 베풀 필요가 없소 나비는 막 선생을 도와 어서 저 사내
놈을 잡으시오."
그러자 살귀 나비가 칼을 뽑아 들고 사내와 맞붙었다. 두 사람은 차츰 열세에 몰리기 시작
했다.
위기에 몰린 두 사람은 급하게 되었다. 여인이 갑자기 품에서 천 같은 것을 꺼내더니 악처
후를 향해 몇 번 털었다. 횐 연기 같은 것이 그에게로 날아갔다. 그는 숨을 멈추고는 뒤로
물러섰다.
"찢어 죽일 년!"
여인이 뿌린 것은 미혼약이었다. 여인이 한쪽으로 뛰어가며 깔깔 웃어댔다.
"나를 깔보다가는 그런 꼴이 되고 만다!"
사내도 그 틈을 이용해 여인 곁으로 뛰어왔다.
"역시 사매의 솜씨는 최고야!"
악처후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주 형편없는 무공은 아니었지만 소문과는 매우 달랐다.
차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대체 너희들의 정체는 뭐냐?"
악처후가 물었다.
"알아서 뭣하게!"
무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것들이 틀림없는 흑풍쌍살일 테니 어서 죽여 버리시오!"
여씨 두 형제도 입을 모았다.
"저 연놈들의 살가죽을 벗겨 까마귀에게 던져 줍시다!"
여인이 질겁을 했다.
"이것들이 눈이 멀었나. 우릴 왜 자꾸 흑풍쌍살이라고 하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 형제들을 죽여?"
하인 하나가 대들었다.
"우리가 요기 좀 하려고 객점 안으로 들어서는데 왜 막아섰어?"
"막지 않으면, 우리 주인님과 그 가족들이 안에 있는데!"
하인이 뒤질세라 말대꾸를 했다.
"하인 놈이 저러니 그 주인은 뻔하겠다! 모두 죽여 버립시다."
여인이 눈에 힘을 주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좋았어. 우리 오혈궁(烏血宮) 사람들을 막는 놈들은 용서할 수 없어!"
이 말에 막여인이 놀라며 앞으로 몇 걸음 나섰다.
"그대들이 오혈궁 사람들이란 말이오?"
막여인의 물음에 사내는 이렇게 된 바에야 다 털어놓겠다는 기색이었다.
"그렇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면 네 놈들은 고개를 숙이겠지. 우린 오혈궁의 제자들이다. 나
는 강금의(江錦衣)이고 내 사매는 반채의(潘彩衣)라고 한다."
그 말에 정말 모두들 놀라고 말았다.
오혈궁. 삼십 년 전부터 강호에서 가장 신비스런 교파로 알려져 왔다. 오혈궁의 제자들은 모
두 악행을 일삼았으며 그 수단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지독했다. 그런가 하면 행동들이 괴이
한 한편 용감무쌍했다. 그들은 죽음을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았다.
강호의 각 문파들은 그들을 독사보다 더 무서워했으며 그들과의 대적을 가급적 피하려고 했
다. 소림파나 개방, 그리고 전진교 같은 명문 대파들조차도 오혈궁파를 커다란 골칫거리로
여기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정체를 알고 난 막여인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들을 다치지 않게 만
든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그들을 죽였다면 오혈궁파와는 원수지간이 되어 더 시끄러운 일
이 발생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그러고 보니 오혈궁의 일등 제자분들이었군요. 오해를 해서 미안하오."
막여인이 급히 읍을 하며 사과를 했다. 반채의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정말 그 두 사람이 이 부근에 나타났단 말이오?"
"그렇소 그래서 그런 오해가 생긴 것이오."
"흑풍쌍살이 이곳에 있다고……? 그림 우린 이만 갑시다."
반채의가 강금의를 잡아끌었다. 강금의의 낯색도 좀 전과는 달리 무언가에 질린 듯했다.
"그래, 어서 가자구."
두 사람은 서둘러 나는 듯이 자리를 떴다.
'오혈궁의 제자들까지 흑풍쌍살을 두려워하다니……. 흑풍쌍살이 그렇게 센가?'
막여인은 웬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사람들은 다시 객점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아직도 밥과 요리가 준비 안 됐어?"
여통이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면서 큰소리 쳤다.
"예, 금방 됩니다요. 먼저 술을 드시고 계십시오."
처녀가 웃으며 달려왔다.
"그래, 술도 채 마시지 못하고 난리법석을 떨었지. 자, 그럼 술 한잔씩 합시다."
여승이 첫잔을 들이키자 다른 사람들도 술을 비웠다.
이때 악처후는 술을 입까지 가져갔다가 퍼뜩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어 곁에 있던 막여인의
술잔을 잡았다.
"잠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술을 마신 뒤였다.
"왜 그러시오, 악 공자?"
막여인이 눈을 꿈벅이며 물었다. 악처후가 술단지를 가리켰다.
"이상하지 않소? 은자 열 냥으로 샀다는 이 초라한 객점에서 어떻게 이런 귀한 술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그 말에 사람들은 숨을 멈추고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그렇다면 이 객점 주인이 수상하단 말입니까?"
여승이 인상을 잔뜩 구기며 물었다. 악처후가 그 말에 묵묵히 객점 주인을 불렀다. 주인 대
신 처녀가 먼저 나오자 악처후가 술잔을 내밀었다.
"한잔 마셔 봐라."
"소녀같이 미천한 계집이 어떻게 나으리의 술을 받겠습니까?"
그러는데 뒤따라 나온 주인이 허리를 숙였다.
"노여움을 푸시죠. 요리가 금방 될 겁니다."
"그럼 영감이 대신 이 술을 받으시오."
"고맙습니다."
주인이 술잔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마시지는 않고 한 옆으로 내려놓았다.
"이 귀한 술은 소인도 이따금 조금씩 맛을 볼 때가 있습니다. 워낙 귀한 술이니 아껴 두었
다가 이따 잠들기 전에 마시겠습니다."
"그럴 것 없소 지금 당장 마셔 보시오!"
악처후가 눈을 부라렸다.
"그렇지 않으면 이 객점을 불태워 버리겠다!"
막여인도 위협을 가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주인이 느린 동작으로 술잔을 들었다.
그때 곁에 있던 부인들이 신음 소리를 내며 얼굴을 탁자 위에 떨어뜨렸다.
"무슨 일이오?"
여원외가 일어서며 소리쳤다.
"배가…… 배가 끊어지는 것 같아요 아이구 나 죽네!"
부인들은 배를 끌어안고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이 술에 독이 들어 있다!"
악처후가 소리치며 달려갔다. 그러더니 여소교를 품에 안고는 방어 자제를 취했다.
"흐흐흐……."
주인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는 손에 들었던 술잔을 막여인에게 내던졌다. 막여인이 손바
닥으로 날아드는 술잔을 쳤다. 나비를 비롯한 다른 무사들과 두 형제는 모두 독이 든 술에
중독이 되어 바닥을 기어다녔다.
처녀가 깔깔 웃으며 주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라버니, 내 죄가 어때요?"
그러자 주인이 흡족해 하며 허리를 쭉 폈다.
"사매는 정말 총명해. 난 못 당하겠어."
갑자기 그들의 목소리가 젊은 사람처럼 힘이 들어가 있었다.
"너희들의 정체는……?"
전신을 떨고 있는 여원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처녀가 여원외를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았다. 그리곤 젖은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검붉은 얼굴색이 지워지고 그 흉칙하던 두드러기도 사라졌다. 그 대신 희디흰 얼굴이 드러
났는데 절세 미인이었다.
"이 영감탱이야, 그래도 나를 모르겠느냐?"
처녀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처녀를 유심히 보던 여원외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넌…… 매, 매약화가 아니더냐!"
"오호호 알아보는구나. 그렇다, 난 매약화다. 지금은 매초풍으로 불리고 있지. 그리고 이 사
람은 내 남편 진현풍이다!"
진현풍도 가짜 수염을 떼내며 웃었다.
"우화하하, 너도 흑풍쌍살의 명성은 들어 알고 있겠지? 모르긴 해도 곡령풍과 육승풍이 우
리들의 일을 네 놈들에게 다 말해 주었을 테니까."
막여인이 중간에 나섰다.
"두 사람은 들으시오. 사람을 그만큼 해쳤으면 이젠 되지 않았소? 그만하면 원수를 갚은 셈
이니 이제 돌아들 가시오!"
"넌 누구나?"
진현풍이 코웃음을 쳤다. 매초풍도 냉소를 던졌다.
"흐흐흐, 저 영감에게 물어 보시지. 우리 매씨 집안에 진 피빛이 얼마나 되는가를?"
구경하고 있던 여소교가 악을 썼다.
"이 천벌을 받을 마귀들아. 어서 우리 가족들을 살려내라!"
매초풍이 여소교를 향해 차가운 웃음을 뿌렸다.
"오호호호, 술에는 맹독이 들어 있다. 한 시간 내에 해독약을 먹지 않으면 영락없는 저승길
이지."
"그 해독약이 어디 있소?"
막여인이 사정을 하듯 물었다.
"이곳 이백 리 안에는 해독약이 절대 없다. 이백 리 밖에 해독약을 갖고 있는 의생이 하나
있긴 한데, 정 급하다면 한번 그를 찾아보시지."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그건 시간상 불가능하오."
매초풍이 약을 올렸다.
"계산이 그렇게 빠른 사람이 왜 여씨네에 빌붙어 사시나?"
여씨 부인은 여승과 여통의 몸 위로 쓰러지며 통곡을 했다. 그것을 본 여소교가 울면서 어
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어서 이리로 오세요."
그러나 이미 늦어 버렸다. 매초풍이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리더니 여씨 부인을 덮치려고
했다. 막여인이 달려들어 그녀의 손목을 발로 찼다. 얼른 발을 피한 매초풍이 손가락으로 그
의 종아리를 그었다.
"으……."
그의 종아리에서 피가 쏟아졌다. 얼른 피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다리가 끊어졌을
게 분명했다.
"잘 봐라. 네 놈도 아들을 잃고 부인을 잃은 맛을 보게 해줄테니!"
매초풍이 여원외를 노려보더니 곧 여씨 부인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여씨 부
인의 두개골에 박혔다.
"악!"
여씨 부인은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어머니!"
여소교가 울부짖었다.
매초풍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가락으로 여원외를 가리켰다.
"아직도 살고 싶으냐?"
제3장 추격당하는 흑풍쌍살
부인이 처참하게 죽자 여원외는 눈앞이 캄캄했다.
"이 악독한 계집, 넌 정녕 독사보다 더 지독한 년이구나!"
여씨네 집안은 한순간 풍지박산이 날 위기였다. 여승과 여통은 벌써 숨이 끊어졌고 여씨 부
인마저 죽었다.
한편 큰 소실은 그들이 죽자 은근히 속으로 기뻐했다. 이젠 아들 여강과 자신이 가문을 떡
주무르게 되었다는 안도감에서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행히
술을 마 시지 않은 것을 천행으로 알았다. 그녀는 여원외를 위로하기에 바빴다.
"고정하세요. 그러다간 몸만 더 상해요."
하인들이 매초풍을 공격한 것은 이때였다. 하인들이 칼을 휘두르며 결사적으로 덤볐다. 그러
나 처음부터 역부족이었다. 매초풍과 진현풍이 가볍게 내민 장에 밀려 전부 뒤로 쓰러졌다.
그들은 목과 허리가 부러져 모두 죽어 버렸다.
매초풍이 다시 여원외를 노려보았다.
"네 놈도 알 것이다. 우리 다섯 식구가 이곳으로 이사와 얼마간은 즐겁게 살았다. 그런데 언
니가 시집을 갈 때 비용으로 쓰려고 네 놈에게 은 열 냥을 빌렸었지. 가을에 갚기로 하고
말이다. 헌데 네 놈은 갑자기 그 약속을 파기하고 며칠 후에 받으러 왔었다. 기한이 되었다
면서 이자까지 합쳐 은 스물네 냥을 내라고 협박을 했었다."
매초풍이 격정에 찬 자신을 달래려고 숨을 몰아쉬었다.
"네 놈은 우리 아버지가 무식하다고 해서 그런 엉터리 빚문서를 만들었지? 우리 형편에 그
많은 돈을 갑자기 어디서 구할 수 있었겠느냐? 네 놈은 결국 하인들을 시켜 아버지를 때려
죽였다. 아버지는 그렇게 참혹하게 죽어 갔다……."
그녀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한참을 오열하던 그녀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말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네 놈은 우리 집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사를 하는데 네 놈은 우리 언니를 첩으로 데려가겠다고 했지. 언니는 이미 유부녀였는데
네 놈은 언니의 남편까지 죽이고 데려가 강제로 욕을 보였다. 결국 언니는 그 후 자살을 하
고 말았다."
매초풍이 눈물을 훔쳤다.
"오라버니가 관가에 고발하러 갔었는데 네 놈이 도중에 오라버니까지 죽이고 말았지. 네 놈
은 그때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나마저 강제로 욕을 보이려고 했었다. 어머니가 나를 빼앗
기지 않으려고 하자 네 놈은 어머니까지 칼로 찔러 죽였다. 나는 겨우 도망을 치다가 다행
히 사부님을 만나 이렇게 살아날 수 있었던 거다."
그녀의 말에 막여인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여원외가 그런 악행을 했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여원외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매초풍을 가리켰다.
"막 선생……, 저 마귀 같은 년을 어서, 어서 죽여 버리시오! 저 년의 말은 모두가 거짓이
오!"
"죽여? 네 놈들이 누굴?"
진현풍이 고함을 쳤다. 그 서슬에 여원외가 목을 자라처럼 쑥 감추었다.
"매, 매약화……, 내 처와 두 아들을 죽였으니 이제……."
여원외가 말을 더듬으며 애원했다. 그러나 매초풍은 여전히 냉소적이었다.
"흥, 흥정을 하자는 게냐? 내가 장사꾼으로 보여?"
"난 이미 육십이 다 돼가는 노인이야……."
"그래서, 아직도 목숨이 아깝다는 게냐?"
매초풍이 막 여원외를 내리치려고 했다.
"사매, 딸년이 보이지 않는다!"
진현풍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여소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를 보호하
고 있던 악처후의 모습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인들이 달려들 때 악처후가 여
소교를 데리고 도망을 쳤던 것이다.
"소교야, 어디에 있느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여원외가 자기 딸을 찾았다.
"악 공자가 데리고 어디로 피한 모양입니다."
막여인이 귀띔을 하자 여원외가 눈을 사납게 치떴다.
"아니, 그자가 우리를 버리고 소교만 데리고 갔다고? 우리 딸아이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아이고!"
"흥, 네 놈도 딸이 남에게 당하는 꼴을 봐야 한다!"
매초풍이 저주를 보냈다. 순간 그녀의 입꼬리가 묘하게 변했다. 사실 복수도 복수지만 소녀
공을 빼앗으러 왔던 길이었다. 그녀의 추측으로는 여소교가 시집갈 나이가 되었으니 분명
그것을 전수했을 거라 여겼던 것이다.
매초풍이 진현풍에게 말했다.
"막가라는 자를 맡아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진현풍이 주먹으로 막여인을 공격했다. 막여인은 침착하게 그의 주먹
을 막았다. 막여인은 금세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내공이 아주 강하다는 걸 알았다. 워낙 무공
이 뛰어난 진현풍이라 막여인은 뼈 속까지 파고드는 충격에 정신을 차 릴 수가 없었다.
막여인이 경령공(輕靈功) 초수를 썼다. 그런데 이것은 동사 확약사의 제자인 진현풍이 원래
지니고 있는 무공이었다. 그러니 진현풍에게 들어먹힐 리가 없었다. 막여인은 몇 합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진현풍이 막여인을 궁지로 몰아넣는 것을 본 매초풍이 마음놓고 여원외에게로 다가갔다. 겁
에 질린 여원외는 뒷걸음질치며 하인들을 불렀다.
"어서 이 년을 막아라!"
그러나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 살아 남은 자들은 모두 줄행랑을 치고 아무도 없었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매초풍이 여원외의 손목을 으스러질 정도로 꽉 쥐었다. 으드득하는 소리가 나더니 여원외의
손목이 부서졌다.
"으으……."
여원외가 비명을 내 지르려는데 그녀는 그의 다른 손목도 마저 부서뜨렸다.
"무슨 짓이냐!"
막여인이 소리치며 여원외를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진현풍의 발길에 채어 넘어지고 말았다.
진현풍이 막 막여인에게 치명타를 입히려고 할 때 의외로 매초풍이 그의 죽음을 막았다.
"그자는 죽이지 말아요!"
"왜 그래?"
"보아하니 원래는 순박한 사람인데 여원외의 꾀임에 넘어가 무사가 된 게 분명해요"
그러나 막여인은 쓰러진 채 두 사람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매초풍은 아랑곳하지 않고 막
여인을 응시했다.
"풀어 주기 전에 좋은 구경이나 해라!"
그녀가 여원외의 두 다리를 작신 끊어 버렸다.
"아악!"
듣기에도 처참한 비명 소리가 터졌다. 그는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을 해버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 죽이려면 곱게 죽일 것이지 노인을 이렇게 해도 되느냐? 그리고도 영웅
호걸을 자청하느냐?"
막여인이 끝까지 대들었다.
그때 밖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 왔다.
곧이어 사내 둘이 급히 들어섰다. 곡령풍과 육승풍이었다.
"아니 이게 누군가? 곡 사제와 육 사제가 아닌가?"
진현풍과 매초풍이 정도 이상으로 반색을 하며 웃었다.
"잘 왔네. 내가 원수를 갚는 것을 구경하러 왔는가?"
매초풍이 슬슬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육승풍은 그녀를 노려보며 쌍지팡이로 바
닥을 세게 쳤다.
"이 뻔뻔한 것들, 이제야 만나게 되었구나. 어서 무릎을 꿇고 오라를 받아라!"
그러나 매초풍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호호호, 몇 년 동문수학한 사이 들인데 내가 원수를 갚는 시간은 줄 수 있겠지?"
곡령풍과 육승풍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곡령풍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다려 주지. 그러나 우리의 인내심도 한도가 있다는 걸 명심해라."
기절해 넘어져 있던 여원외가 고통스럽게 신음을 토하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저 악마들의 짓거리를 구경만 할 셈이오?"
그 말에 곡령풍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한 같은 것은 우린 상관하지 않소. 하지만 막 선생을 해치려고 한다면 우린 가만있지 않
을 것이오! 용서하시오."
매초풍이 여원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서서히 고통을 주며 죽이려고 했더니 안 되겠다. 당장 숨통을 끊어 주마!"
그녀가 손가락을 매의 발처럼 만들어 그의 머리 가까이에 들이댔다.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여원외의 머리에 깊이 박혔다가 빠졌다. 여원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여원외의 옷자락에 손가락의 피를 닦던 그녀가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백지장처
럼 하얗게 질려 버린 여원외의 둘 째 부인, 즉 큰 소실이 서 있었다. 그녀는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무릎을 꿇는다고 살려 둘 것 같으냐?"
매초풍이 이빨을 갈며 쏘아붙였다.
"난 죽음이 두렵지 않다!"
의외로 둘째 부인은 대담하게 대꾸했다.
"그래?"
매초풍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여원외가 강제로 데리고 온 사람이라 그를 좋게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네가 입은 옷을 보니 그래도 잘살고 있었는데……?"
"그건 그렇다. 하지만 내 마음은 여씨네로 끌려온 그날부터 죽어 있었다. 나는 그저 아들 여
강이만을 바라보고 지금까지 모진 목숨을 이어 왔다."
"아들이 있다고?"
"그렇다. 여강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다."
"지금 어디 있느냐?"
매초풍이 그녀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유롭게 웃었다.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돌아올 것이다. 여씨네 가문은 그 애밖에는 대를 이를 사람이
없어졌다. 또한 이제 모든 재산이 그 애 여강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이것은 여씨네 가문을 몰살시키려던 매초풍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사실이었다.
"어디에 있는지 말해 준다면 네 아들 여강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흐흐, 네 말을 어떻게 믿느냐?"
"좋다. 그럼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죽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맛보게 하겠다."
매초풍이 물어뜯을 듯이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코웃음을 쳤다.
"여장아, 이 원수를 록 갚아 다오!"
그녀는 비장하게 한마디 하고는 갑자기 자기 혀를 깨물고 죽어 버렸다.
매초풍은 아차 싶었다. 여강이 있는 곳을 알아내지 못한 채 끝나 버렸으니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육승풍이 소리쳤다.
"이제 원수는 다 같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할 셈이냐?"
진현풍이 막여인을 놓아주며 말했다.
"사제는 우리를 어쩌려고 그러지?"
"사제? 누가 너희들 사제냐? 너희들은 사부님한테서 쫓겨난 놈들이 아니냐?"
"흥, 너희들 역시 마찬가지야. 지금도 도화도 제자인 줄 아느냐?"
"더러운 너희들이 <구음진경>을 훔쳐 달아났기에 우리가 이렇게 화를 입었다. 그렇지 않고
서야 왜 사부님이 우릴 병신으로 만들어 쫓아냈겠느냐?"
육승풍은 분한 생각에 지팡이를 들어 진현풍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진현풍이 슬쩍 피하
며 탄식했다.
"사부님도 너무 지독하게 구셨어."
매초풍도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우리 잘못이지. 그러나 사부님도 너무하셨다구. 아무리 화가 나신다고 모두 다리 병신
을 만들 건 뭐람. 사실 우리도 사부님 생각을 하며 후회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사모님은 나
를 친딸같이 여기셨는데……."
매초풍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막여인은 아무리 악행을 저지르며 돌아다니는 여인이지만 감정은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네 연놈들 때문이야. 너희들이 아니었다면 사모님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곡령풍이 울부짖듯 내뱉었다.
"아니, 사모님이 죽었다구? 젊은 사모님이 왜?"
그녀와 사이가 좋았었던 매초풍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모님은 나보다 나이는 별로 많지 않지만 친어머니처럼 아껴 주셨는데……. 하지만 난 사
모님을 죽게 한 적은 없어!"
곡령풍이 울먹이는 어조로 말했다.
"사모님은 우리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했다. 너희들도 알 것이다. 사부님이 <구음진경>을 가
지게 된 데는 사모님의 공로가 컸다는 것을……."
"그런데 그것과 사모님이 돌아가신 일과 무슨 상관이 있지?"
진현풍이 얼른 물었다. 육승풍이 대꾸했다.
"<구음진경>을 읽은 사모님은 그 기억만으로 우리들에게 전했다. 전진교를 감쪽같이 속이
고 말이다. 그런데 네 놈들이 <구음진경>의 하반부를 훔쳐가는 바람에 사부님은 침식을 잃
으셨다. 그래서 사모님이 다시 기억을 더듬어 하반부를 만들고자 했으나 쉽지가 않았다. 겨
우겨우 기억들을 되살려 보았으나 자꾸만 끊어져 제대로 이어지지가 않았다. 사모님은 그때
임신을 하여 가뜩이나 몸이 약해져 있었던 터라 너무 과로한 나머지 딸을 낳고는 그만 세상
을 뜨셨다."
매초풍이 그 말에 대성통곡을 했다.
"사모님, 내가 사모님을 죽였구나! 혹……."
진현풍도 비통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죄를 스스로 안다면 우리와 함께 도화도에 가서 사부성의 처벌을 달갑게 받아라!"
육승풍의 엄포에 매초풍이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냉정하게 한 마디 던졌다.
"그럴 수는 없어. 돌아가면 우린 사부님께 죽어!"
진현풍도 치를 떨었다.
"사부님께서는 사람의 목숨을 질질 끌면서 죽이는 방법을 구양봉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시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곡령풍과 육승풍은 그들을 잡아 가지고 도화도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그것으로 황약사에
게 다시 신임을 얻고 싶었다. 진현풍과 매초풍 역시 두 사람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다.
네 사람은 옥신각신하다가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진현풍과 매초풍의 무공이 너무나 새롭게 변모가 되어 있어 두 사람은 내심 매우 놀
랐다.
"흠, 네 놈들이 <구음진경>의 무공을 익힌 모양이구나."
곡령풍의 말에 매초풍이 웃었다.
"오호호 잘 아는구나. 우리 두 사람은 지금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와 최심장(催心掌)을 수
련하고 있다. 우리가 <구음진경>의 무공을 모두 연마하는 날엔 강호 무림에서 우릴 당할
자가 없을 것이다!"
곡령풍이 쇠지팡이를 움켜잡았다.
"<구음진경>의 무공은 사부님도 배우지 않고 계시는데 네 놈 들이 감히……!"
황약사는 꾀를 써서 전진교로부터 <구음진경>을 손에 넣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무공을 배
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구음진경> 같은 무림 최고의 기서를 갖고 있는 것에 만족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초풍이 비꼬듯 말했다.
"만약에 사부님이 <구음진경>의 무공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었다면 우리 도화도는 벌써
천하 제일의 대문파가 되었을 게 아니냐?"
곡령풍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쌍지팡이를 휘두르며 두사람과 싸우기 시작했다. 탁자
와 의자들이 산산조각이 나 멀리 날아갔다.
막여인은 그들의 뛰어난 무공에 연신 감탄하며 지켜보았다.
"아악!"
곡령풍과 육승풍은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결국 두 사람은 더는 저항할 수가 없게 되었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그들을 살려 둘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 고심했다. 잠시 후 매초풍은 곡령
풍의 어깨를 향해 장을 한차례 날리고는 진현풍을 쳐다보며 말했다.
"난 사람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지만 동문수학하던 형제들을 죽일 마음은 없어."
진현풍도 육승풍을 획 내던지고는 매초풍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연놈들 어디를 도망쳐!"
곡령풍과 육승풍이 다시 일어서며 달려들었다. 그 말에 매초풍이 몸을 돌려 그들을 죽이려
고 하자 진현풍이 말렸다.
"내버려두고 어서 가기나 하자구."
두 사람은 경공을 써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 버렸다.
곡령풍은 큰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매초풍의 장 때문에 속의 경맥(經脈)들을 다치고 말았다.
육승풍이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서 우가촌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아야겠소 나 때문에 아우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난 안 되겠으니 형님 혼자 어서 놈들을 추격하시지요. 전 몸
을 추스리는 대로 뒤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곡령풍은 곧 주저했다. 육승풍 혼자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육 공자께서 마다하지만 않는다면 내가 도와드리겠소."
막여인이 거들고 나섰다.
두 사람은 막여인의 뜻에 감사를 보냈다. 곡령풍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보다 많은 무림의 형제들을 모아서 연합하여야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흑풍쌍살을 잡을
수가 없을 겁니다."
육승풍과 막여인도 그의 뜻에 찬동했다.
그들은 우선 곡령풍을 우가촌으로 데리고 갔다. 그를 치료하게 남겨 두고는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떠났다. 육승풍과 막여인은 무림의 협객들을 모아 그들과 함께 흑풍쌍살을 잡기 위해
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이십여 리쯤 가서야 걸음을 멈췄다.
"사매, 내 생각으론 악처후가 멀리는 가지 못한 것 같아."
"제 아무리 경공이 뛰어나다 해도 계집을 끼고서는 힘들 거예요."
"그런데 어디로 갔는지 방향을 잡을 수가 있어야지. 소요공자의 집은 동쪽이지만 그 꾀 많
는 자가 그쪽으로 갔을 리는 없고……."
"그럼 어디로 간 것 같아요?"
"서쪽……."
"왜죠?"
"우리를 따돌리기 위해서겠지. 우리를 지치게 한 다음 다시 동쪽으로 갈 생각일 거야."
"우리가 그를 잡자는 것은 소녀공 때문이에요 악처후는 자기만이 소녀공의 내막을 알고 있
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에요. 꼭 그를 잡아야 해요."
"하지만 그자의 집인 소요관(逍遙館)에는 고수들이 모여 있어. 악처후말고라도 우린 그들 때
문에 벌집이 되기 십상이야."
두 사람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진풍현이 매초풍을 살그머니 끌어안았다.
"기억나지? 우리가 처음 안았을 때가 도화도의 큰 복숭아나무 아래서였지 주위엔 분홍색 꽃
잎들이 만발했고 당시의 얼굴은 복숭아꽃보다 더 아름다웠지. 그런데 여기……."
"여기도 많은 나무들이 우리를 보며 웃고 있잖아요."
매초풍이 살짝 미소 지었다.
진현풍이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희디흰 살을 드러내며 바르르 몸을 떨었
다. 진현풍의 손길이 그녀의 젖가슴 위를 쓸었다.
한차례 격정으로 떨던 두 사람은 잠시 후 떨어졌다.
"오늘은 어디로 가서 밤을 보내죠?"
석양을 올려다보며 매초풍이 나직하게 말했다.
"악처후가 소녀공을 얻었다면 여소교를 데리고 갔을 리가 없어. 그녀를 데리고 간 걸 보면
아직 얻어내지 못한 게 분명해. 그렇다면 그녀를 설득해 소녀공을 얻어내기 위해서라도 객
점이나 집으로 찾아 들어갔을 거야. 어려움 모르고 자라 온 그녀로서는 계속 밤길을 가는
건 무리일 테니까……. 서쪽으로 육십 리쯤 가면 사냥꾼들이 있는 집이 있어. 이 부근의 지
형도 살펴볼 겸 그들도 찾아볼 겸 그리로 가자구."
두 사람은 다시 경공으로 서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수림 속 공지에 있는 예닐곱 채의 초가들은 우중충한 분위기 속에 휘감겨 있었다. 집집마다
불 하라 켜 있지 않아 주위는 괴괴하기만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 왔다. 울음소리는 초가의 맨 끝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서로 눈짓을 하고는 그곳으로 살금살금 접근해 갔다.
두 사람은 불현 초가 안에서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것에 질겁을 했다. 진현풍이 조심스럽
게 문을 열자 더욱 그 냄새가 진동했다. 안에는 가슴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사내 시
체가 하나 보였다. 흘러내린 피는 이미 응고돼 있었다. 사내가 죽은 지 적어도 한 시간은 지
난 듯했다.
안의 광경은 더욱 참혹했다. 침대 위에는 한 여인이 쓰러져 있는데 역시 죽은 채였다. 그 곁
에는 목이 잘린 머리가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머리 곁에는 목이 반쯤 파헤쳐져 있는 서
너 살 짜리 아이의 시체도 있었다.
두 사람은 묵묵히 다른 집으로 갔다. 역시 마찬가지로 모두들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채였다.
"혹, 악처후가……?"
진현풍이 속삭였다.
"인정 사정 모르기는 절정공자보다 더 하니까……."
매초풍의 말에 진현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네 행동이 누설될까 봐 이런 짓을 했을지도 모르지."
매초풍이 아직 살펴보지 않은 한 초가를 응시했다.
"저기에……?"
여인이 흐느끼는 소리가 계속 들려 왔다.
두 사람은 그곳으로 가 각각 창과 문 앞에서 귀를 기울였다. 안에서 사내의 음성이 새어 나
왔다.
"이제 그만 울어요. 아니 아직도 내 진심을 못 믿겠다는 건가?"
"난 믿을 수 없어요. 왜 날 이곳으로 데리고 왔죠?"
여인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늘이 증명할 것이오. 내가 만약 두 가지 마음을 갖고 있다면 천벌을 받을테니."
"그런 소리는 왜 하죠? 그 사악한 계집을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정말 의심이 끝이 없군. 난 그대만을 사랑하고 있소."
"당신의 가슴은 너무 얕아요. 이리저리 잘 흔들린다구요."
창 밖에 있던 매초풍이 속으로 웃었다. 수많은 여인의 환심을 사고 있는 소요공자도 억지를
부리는 어린 계집 앞에서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다시 사내의 음성이 들려 왔다.
"그만 좀 울라니까. 흑풍쌍살이 그 소리를 듣고 오면 어쩌겠어?"
순간 여인의 울음 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사내의 말에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이 악처후 놈아, 이젠 도망치지 못하겠지!"
매초풍이 창을 통해 몸을 날리며 들어섰다. 동시에 진현풍도 문을 걷어차며 안으로 뛰어들
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만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 자리에 서 버렸다. 안에 있던 남녀는 악처후
와 여소교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은 등에 칼을 메고 있었기에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은 아닐 거라는 추측만 가능했다.
"너희들은 누구나!"
진현풍이 두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이들은 바로 여씨네 하인들을 죽인 바 있는 오혈궁의 제자 강금의와 반채의였다. 흑풍쌍살
이 부근에 출몰한다는 말에 그들은 거기서 달아나 서쪽으로 달리다가 이곳에 머물게 된 것
이다. 그들은 여기서 사냥꾼들에게 밥을 얻어먹고 자신들의 정체가 알려 질까 봐 모두 죽여
버린 것이었다.
흑풍쌍살의 얼굴을 전혀 모르는 반채의가 되물었다.
"너희들 정체부터 밝혀라?"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진현풍과 매초풍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악처후와 여소교가
아닌 것에 화가 난 그들은 분풀이로 그들을 죽이려고 했다.
"어서 이름이나 대고 저승 갈 준비나 해라!"
매초풍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간다!"
강금의가 달려들었다. 그는 오혈궁의 질풍팔티(疾風八打)를 쓰며 주먹과 장을 번갈아 뿌렸
다. 매초풍도 뒤질세라 장계취계(將計就計) 초수로 맞섰다.
두 사람은 서로 죽일 듯이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저 아름다운 계집을 당신은 차마 죽이지 못할걸."
반채의가 빈정거렸다. 그 말에 강금의가 그렇지 않음을 보이려는 듯 악귀번신(惡鬼飜身)과
흑호입림(黑虎入林) 초수를 연속적으로 쓰며 안간힘을 다했다.
매초풍의 심기가 더욱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때 진현풍이 한마디 던졌다.
"사매, 왜 꾸물거리고 있는 거지?"
"서로간에 유언이나 남기라고 시간을 좀 주었지요."
매초풍이 대답을 하고는 강금의의 발길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강금의는 매초풍을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차츰 그녀의 무공이 살아나는 것을 느끼고는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구음진경>의 무공들은 상대방이 우위를 점하고 자신만만할 때 반격을 가하는 초수들
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헉!"
예상대로 메초풍이 내민 장에 강금의가 막고는 쓰러졌다. 반채의가 얼른 쓰러진 강금의를
벽 아래로 끌고 갔다. 메초풍은 냉소만 보낼 뿐 더는 쫓아가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강금의의 오른쪽 다리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반채의가 급히 그의 바지
를 찢었다. 장단지의 살점들이 뚝뚝 떨어져 나가 그곳에서 그칠 줄 모르고 혀가 틀렸다. 탄
채의는 서 둘러 점혈법으로 지혈을 시키고 약을 발랐다.
뼈를 쑤시는 듯한 통증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강금의는 매초풍을 노려보았다.
"내 무공이 모자라 진 것은 아니다. 네 년의 잔꾀에 내가 넘어 갔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매우 놀라고 있었다.
'저 가녀린 손가락이 내 다리를 그냥 꿰뚫을 정도의 힘을 가지다니…….'
"그래도 사내라고 졌다는 말은 하기 싫은 모양이지? 그럼 저 사매랑 함께 공격해 보시지?"
매초풍이 빈정거리자 발끈한 반채의가 공격을 했다. 매초풍이 그녀의 공격을 막으면서 초수
를 눈여겨보았다. 강호 무림의 무공이 아니었다.
반채의는 강금의의 사해이지만 무공은 그보다 나은 편이었다. 오혈궁 궁주(宮主)의 사랑을
받아 절기인 오혈장(烏血掌)까지 익히고 있었다. 그녀는 강금의를 위해 복수를 하려는 마음
도 있었지만 매초풍에 대한 질투심이 더욱 작용했다. 유독 얼굴빛이 검은 그녀는 흰 살결을
갖고 있는 여인들을 보면 무조건 질투하는 버릇이 있었다.
몇십 합을 싸운 끝에 매초풍은 자신의 최심장을 깼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
는 반채의는 매초풍의 장을 곧바로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매초풍의 힘이 얼마나 센지 도리
어 뒤로 밀려났다. 결국 강금의 곁에 쓰러지고 말았다.
매초풍은 반채의를 죽이려는 의도가 없었기에 그녀의 신체는 상하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최심장의 기운이 반채의의 몸 속으로 스며들어 경맥을 다치게 했다. 아니나다를까 조금 후
반채의는 체내의 진기(眞氣)가 요동을 하는 바람에 비명을 내질렀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하
고 오른팔이 저리고 아파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괜찮아?"
강금의가 반채의를 안으며 물었다. 내상을 입은 반채의는 얼굴색이 금방 상기되어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난…… 괜찮아……. 저 년의 장법이 보통이 아니……."
매초풍은 두 사람을 아예 죽여 허릴까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끌어안고 있는 것
을 보자 마음이 착찹해졌다. 자신이 진현풍과 사랑을 나눌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진현풍이 대신 나섰다.
"그만둬요!"
매초풍이 진현풍을 제지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강금의와 반채의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느 문파지?"
반채의가 눈을 무섭게 치켜 뜨며 말했다.
"혼나고 싶지 않으면 잔말 말고 어서 도망치기나 해. 우리 사람들이 오면……."
강금의가 대신 대답했다.
"우린 오혈궁의 제자들이다. 난 강금의라고 하고 내 사매는 반채의다. 너희들도 우리의 명성
을 들었을텐데……."
매초풍의 눈빛이 조금씩 변해 갔다.
'오혈궁은 행동이 괴팍하기로 이름이 나 있는 문파다. 시부님도 오혈궁이라면 이맛살을 찌
푸리곤 하셨는데……. 오늘 오혈궁 제자들을 상하게 만들었으니 결국 또 하나의 강적을 만
든 셈이로군!'
이때 진현풍이 매초풍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예 죽여서 불씨를 없애자."
그러더니 두 사람을 노려보며 진현풍이 다가갔다. 놀란 반채의가 강금의의 품으로 기어들며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오지마……!"
강금의가 반채의를 세게 껴안았다.
"사매, 우린 오혈궁의 제자들이야. 우린 두려워하지 않잖아. 이러면 안 돼. 이러면 남들이 우
릴 겁쟁이로 알고 비웃는다니까!"
반채의가 겨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난 겁 안 나. 여태까지 그 화씨라는 계집을 늘 질투하며 당신에게 괴로움을 주었어.
나를 용서해."
"자, 이젠 모든 것을 잊자구."
강금의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반채의를 바라보았다. 죽음을 앞 둔 반채의의 목소리도 한껏
수그러들었다.
"내가 왜 그녀를 미워했는지 알아요? 너무너무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젠
행복해요. 우린 함께 죽게 되었으니……."
"우린 영원히 함께 있을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반채의의 얼굴에는 정말 행복한 빛이 어렸다.
진현풍이 능글맞게 웃었다.
"보기 좋은 한 쌍이군. 좋다, 소원을 들어주마."
반채의는 조용히 눈을 내리감았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정체가 뭐냐? 죽더라도 알고나 죽자?"
"알려 줄지. 우린 흑풍쌍살, 동시 진형풍과 철시 태초풍이다!"
강금의와 반채의는 내심 몹시 놀랐다. 그러나 반채의가 담담하게 말했다.
"원래 우리가 너희들을 무서워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죽음을 앞둔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흑풍쌍살이 아니라 서독 구양봉이 앞에 있어도 조금도 두렵지 않다!"
강금의도 단호한 기색으로 한마디했다.
이때였다.
"어서 가요!"
갑자기 매초풍이 진현풍을 끌고는 밖으로 몸을 날렸다.
"사매, 무슨 일이지?"
두 사람이 정신없이 뛰고 날고 하여 꽤 먼 곳까지 왔을 때 진현풍이 사방을 둘러보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하늘엔 검은 구름이 흐르고 있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
에서는 귀곡성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매초풍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그들이 사랑을 주고받는 것을 보니 도화도에서 있었던 우리들의 일이 떠올랐어요."
두 사람은 날이 밝을 때까지 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어느덧 아침 안개가 숲 위로 피어 오르고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했다.
"새들이 둥지를 찾고 있어요."
매초풍이 머리를 들며 말했다. 진현풍이 한탄하듯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우리는 찾아갈 집도 없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을 수련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어요. 그것을 수련
하려면 산 사람을 수없이 잡아 써야 하잖아요. 한곳에 정착하면 어디서 그 많은 사람들을
잡아 시험할 수 있겠어요?"
"우리 그까짓 무공은 이제 집어치우고 어디 가서 편히 살면 안 되겠소?"
"그런 말이 나을 줄 알았어요. 싫으면 지금이라도 가세요. 난 혼자라도 기필코……!"
"안 돼. 우린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해!"
진현풍이 발끈하자 매초풍이 보이지 않게 웃었다.
"우리가 그동안 죽인 사람도 이삼백이 훨씬 넘어요. 그러니 모든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 죽
이지 못해 광분하고 있을 거예요."
매초풍이 진현풍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다행히 지금 송나라와 금나라가 싸우고 있는 바람에 천하가 어지러워 그나마 강호 무림을
떠돌 수 있는 거라구요."
매초풍은 진현풍의 손을 끌어 와 자신의 젖가슴 위에 얹었다.
"아직도 화가 났어요?"
매초풍을 와락 끌어안은 진현풍이 한숨을 쉬었다.
"내 목숨은 그대에게 맡긴 지 오래야."
이때 멀리서부터 무슨 소리가 들려 왔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급히 몸을 솟구쳐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두 사람은 무성한 나뭇잎 사이
로 얼른 몸을 숨겼다.
잠시 후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두 개의 담가를 메고 나타났다. 담가 위에는 강금의와 반채
의가 누워 있었다. 중간에서 걸어 오는 마흔 살 안팎의 구레나룻을 기른 사내가 어깨를 으
쓱해 보였다.
"왜 그때 즉시 신호를 보내지 않았나. 그러면 흑풍쌍살한테 이렇게 당하지는 않았을 게 아
냐?"
"형님, 그때 누가 그들이 흑풍쌍살인지 알기나 했어요. 모두 마귀처럼 생긴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들도 사람이더군요."
강금의의 말에 반채의가 누운 채 질투 어린 소리를 내뱉었다.
"흥, 여느 사람과 같긴 뭘 같아요? 매초풍은 백에 하나 나올까말까 하는 미인인데다 요염하
기까지 하던데. 그런 매초풍에게 눈길을 빼앗기다가 그렇게 당한 것 아닌가요?"
강금의는 화가 났지만 차마 답변을 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오혈궁에서 자란 터라 사람 죽이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그래도 그
는 그중에서 마음이 어진 편이었다. 그는 어젯밤 생사의 갈림길에서 반채의가 자신에게 주
던 사랑과 오늘의 이 질투를 비교하면서 속으로 한숨만 쏟을 뿐이었다.
"됐어요 나 강금의는 앞으로 어떤 여인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겠어. 그러면 만족하겠지?"
골이 나서 내뱉는 강금의 말에 반채의는 화압지(花壓持)가 그에게 보냈던 추파를 상기했다.
그런데다가 그녀는 자신이 입은 내상까지 떠올라 갑자기 슬퍼졌다.
"좋아요. 이젠 나하고도 한마디 말조차 하지 않겠다는 거죠? 내가 어젯밤 매초풍에게 죽었
더라면 좋았을 테죠?"
"그런 소리 하지 마!"
반채의가 와락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강금의는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
서 그녀에게 사정하기는 싫었다.
"어제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 사람이 되어 뒹굴더니 이제 또 다투긴가?"
구레나룻이 시커먼 사내가 껄껄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말을
받았다.
"너무 그러지 마. 꼭 사람 많은 데서 사랑싸움 해야겠어. 이거 어디 부러워 견디겠나?"
주위에 선 모든 사람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강긍의와 반채의는 무안해
낯을 붉히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달이 없었으니 흑풍쌍살이 먼 곳으로 가지는 못했을텐데."
구레나룻이 난 사내가 갑자기 떠오른 듯이 말했다.
"큰형님께서 여러 사람을 보내 추격하게 했잖아요. 그러니 그들을 곧 잡을 겁니다."
이때 서쪽에서부터 향전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저건 초천의(楚天依) 형님께서 보내는 신호입니다. 놈들을 발견했다는 거죠."
구레나룻을 기른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천의는 궁주의 신임을 받을 만한 사람이야. 매번 자기 일을 꼭 책임지고 잘 해내거든."
"그러니 남들이 모두 그를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고 하죠."
구레나룻이 서쪽 하늘을 향해 휘파람 소리를 길게 냈다. 그리 높은 소리는 아니었지만 아주
먼 곳까지 날아갔다. 사내의 내공은 보통을 넘어서고 있었다.
잠시 후 서쪽에서도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를 들어보니 그쪽 사람 역시 내공이
엄청난 듯했다.
나무 위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진현풍과 매초풍은 적이 놀라고 있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물리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구레나룻을 기른 사내를 이긴다고 해도 그
사이 초천의까지 달려와 합세를 하게 되면 큰 낭패였다. 그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잔뜩
숨을 죽였다.
서쪽에서 나던 휘파람 소리는 점점 가깝게 들려 왔다.
이윽고 흰 도포를 입은 사내 하나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가 두 손을 맞잡고는 읍을 했다.
"우리가 남녀 한 쌍을 잡았소. 그런데 흑풍쌍살 같지가 않소."
구레나룻이 다가가 사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대는 천의무봉이란 별호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야. 매번 노획물을 얻어 오거든."
그러자 뒤에서 네 명의 사내들이 남녀 한 쌍을 밀치며 나타났다.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매초풍은 웃음이 나왔다. 그들이 잡아온 남녀는 바로 악처후와 여소교였던 것이다.
악처후는 오혈궁파에 잡힌 줄을 모르고 있는지 한껏 웃음을 띄우며 고개마저 빳빳하게 쳐들
고 있었다. 여소교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악처후의 몸에 바싹 달라붙어 있었다.
경험이 많은 초천의는 악처후는 젖혀두고 우선 여소교를 응시하며 웃었다.
"흐흐 어디 사람이지?"
"이 사람은 내 아내가 아니라 내 여인이오."
악처후가 대신 대꾸했다. 여소교가 처녀의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
다. 부부로 가장하려고 했었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넌 좀 빠져!"
초천의가 악처후를 향해 고함을 빽 질렀다. 그래도 악처후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둘은 누구에게 물어도 한가지요. 곧 한집안이 될 사람들이니까, 안 그렇소?"
악처후가 여소교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수그렸다.
초천의가 코웃음을 치며 악처후에게 윽박질렀다.
"그럼 넌 누구나!"
"난 호남 사람으로 성은 후(候)이고 이름은 림(林)이오."
그러자 구레나룻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보검을 지니고 있는 걸 보니 무림의 인물이 분명한데?"
"서투른 재간으로 겨우 들고 다닐 뿐이죠."
악처후는 여전히 능청맞은 얼굴로 맞섰다.
이때 강금의가 담가 위에서 부르짖었다.
"저 놈은 바로 우리와 싸웠던 놈이오. 놔주지 마시오!"
비로소 강금의와 반채의를 발견한 악처후가 당황했다.
강금의의 외침에 오혈궁 제자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 그들은 빠른 동작으로 악처후
와 여소교를 에워쌌다. 초천의가 으르렁댔다.
"네 놈의 정체를 밝혀라!"
"말해 주지. 난 악처후다!"
"악처후? 그렇다면 강호에서 명성이 자자한 소요공자란 말이오?"
구레나룻이 놀란 기색으로 주춤 물러섰다.
"이거 어딜 가나 환영을 받는군! 그대의 이름도 밝히시오?"
그러자 구레나룻이 입을 열었다.
"성은 노(盧)씨고 이름은 로의(老衣)요. 오혈궁의 제자요."
구레나룻 바로 옆에 있던 사내가 나섰다.
"우리의 큰 사형이신데 궁주의 신임을 가장 두텁게 받고 있는 분이오!"
악처후가 읍을 하려는데 초천의가 입을 삐죽 내밀며 끼여들었다.
"우리 오혈궁 제자들은 강호에 나다니는 법이 극히 드물지. 그런데 우리 큰형님의 이름을
언제 들었다고 그런 태도를 취하는가?"
악처후는 대답이 궁해지자 난처한 기색을 지었다. 그는 초천의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오혈궁 제자들은 오혈궁의 명성을 믿고 항상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오혈궁 궁주의 심복인
초천의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오만하게 다시 악처후를 불렀다.
"그래 소요공자는 소요관에 박혀 있지 않고 원하러 싸돌아다니는 거야? 우리 오혈궁 제자들
과 싸우러 왔는가?"
평소 같았으면 악처후 성미에 가만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숫적으로 열세이고 여소
교까지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악처후가 허리를 숙이며 만면에 웃음을 칠
했다.
"오혈궁 제자님들과 무슨 원한이 있다고 싸웁니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오. 여러분들
도 흑풍쌍살을 잡고자 하는 것 같은데 사실 나도 그 놈들에게 피해를 본 사람이오. 믿지 못
하겠다면 저 두 사람에게 물어 보시오."
그는 강금의와 반채의를 가리켰다. 그러자 강금의가 조용히 머리를 끄덕여 주었다.
"그건 맞소 그때 저 사람들은 우리 둘을 흑풍쌍살로 잘못 알고 싸웠던 것이오. 그러나 어쨌
든 우리 오혈궁 제자들에게 감히 손을 댔다는 것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소."
악처후는 그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들이 이렇게 억지를 쓰며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나무 위에 있던 매초풍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악처후가 오혈궁 제자들에게 어떻게 당하
는지 그 꼴을 보게 된 것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럼 사제는 이 악처후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나?"
초천의가 강금의의 의사를 물었다.
"흐흐 적어도 팔 하나쯤은 부러뜨려야겠지요."
반채의가 손을 내저었다.
"그 정도로는 안 돼. 사지를 다 부러뜨려도 모자라!"
그녀는 흑풍쌍살에 대한 분풀이를 모두 악처후에게 쏟아부으려고 했다.
"여보시오, 난 그대들과 작은 오해가 한 번 있었을 뿐인데 너무하지 않소?"
악처후가 반발을 하자 초천의가 두 눈을 매섭게 치떴다.
"어서 저 놈의 혓바닥부터 잘라라. 그 다음 양팔을 베어 버려. 우리 오혈궁이 어떤가를 깨닫
게 만들어야겠다!"
초천의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오혈궁 제자들 넷이 칼을 들고는 악처후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보법이 무겁고 둔한 것을
느낀 악처후는 다소 안심을 했다. 그들의 무공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었다.
"간다!"
악처후는 조급해 하지 않았다.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번개처럼 허리를 굽혔다.
"어어쿠!"
네 명은 단번에 힘없이 거꾸러졌다.
악처후의 다리 기술은 남달랐다. 오혈궁 제자들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악처후의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
초천의가 발끈하여 나섰다.
"재간이 좋군. 그럼 이번엔 나하고 해볼까?"
초천의가 직접 나서자 오혈궁 제자들이 얼른 뒤로 비켜났다. 악처후가 뒷짐을 지고 서 있자
초천의가 화를 버럭 냈다.
"왜 그런 수작을 부리지? 싸우기 싫다는 말인가?"
"그런 게 아니라 난 이렇게 내 여인을 보호해야 하는 처지요."
"흐흐, 그림 좀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하면 될 게 아닌가?"
그러나 악처후는 오히려 여소교를 끌어안으며 한숨만 내쉬었다.
"닭의 모가지조차 비틀 힘이 없는 여인을 어떻게……?"
"내가 너와 싸우는 동안 우리 형제들이 어떻게 할까 봐서 그러는가?"
"글쎄 그런 일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소만……."
곁에 있던 노로의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점잖게 끼여들었다.
"무공을 겨루면서 그런 일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지. 소요공자, 그 여인의 신상은 내
가 책임질 테니 마음을 놓으시오."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악처후가 희색을 띠었다.
"노 형, 고맙소."
그런 다음 여소교에게 잠시 한쪽으로 피해 있으라고 했다.
이윽고 초천의가 흔들흔들 악처후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순간 그가 발끝으로 땅을 구
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는 악처후의 머리를 향해 곧장 날아왔다.
'저건 무슨 수작인가?'
악처후는 좀 얼떨떨해서 잠시 긴장을 했다. 이때 초천의가 두 주먹으로 악처후의 머리를 내
리쳤다.
"이크……!"
악처후는 얼른 그의 공격을 피했다. 초천의의 공격이 너무 갑작스럽게 있었고 아직 초수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공격할 생각을 안했다.
초천의는 오른쪽 손바닥은 위로하고 왼손 주먹은 아래로 하여 달려들었다. 악처후의 상체와
허리를 동시에 겨낭한 초수였다.
"얏!"
악처후가 재빨리 양손으로 장을 내밀며 공격을 막았다.
두 사람의 무공은 막상막하였다. 수십여 합이 지났지만 어느 쪽도 우위를 차지하지는 못했
다.
오혈궁 제자들이 초천의를 응원했다.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있는 진현풍과 대초풍 역시 악
처후가 보기좋게 고꾸라지기를 간절히 빌었다.
악처후를 응원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여소교뿐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쉽게 승부를 내지 못했다. 조급해진 것은 악처후였다. 얼른 싸움을 끝내야
만 했다. 시간을 끌다가는 오혈궁 제자들이 또 떼거리로 몰려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악처
후는 장법을 바꾸어 아주 세련된 전진교 장법을 쓰기 시작했다.
"아니……?"
서서히 초천의가 밀리기 시작했다. 초천의 역시 오혈궁에서 으뜸가는 오혈장(烏血掌)을 사용
했다. 태산 같은 힘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검날처럼 예리한 장이었다.
슈우우우웅―.
두 사람 사이에는 무서운 광풍이 오고 갔다. 두 사람은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지만 승부
는 여전히 쉽게 나지 않았다.
초천의가 옆으로 물러서며 외쳤다.
"승부가 나지 않는다. 이번엔 병장기로 겨루어 보자!"
초천의가 먼저 칼을 뽑아 들었다. 악처후도 보검을 소리 없이 뽑았다. 전진교 검법을 쓰며
악처후가 공격했다.
이때 노로의가 뛰어나와 칼로 두 사람의 병장기를 내쳤다.
"잠시 공격을 멈추게!"
두 사람이 노로의를 바라보았다.
"전진교 제자요?"
노로의가 악처후에게 물었다. 악처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검법과 장법이……?"
"하하하, 전진교 무공을 안다고 꼭 전진교 제자라는 법은 없소. 전진교의 제자들은 내 뒤꿈
치도 못 미친다구요."
그의 목소리가 하도 커서 오혈궁 제자들이 모두 듣게 되었다.
전진교에 대한 멸시가 가득 찬 그의 말을 듣고도 노로의는 의심을 풀지 못했다. 전진교 제
자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그 무공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지 의문투성이였다.
이때 먼 곳으로부터 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체 어떤 사람이 우리 전진교를 멸시하고 있느냐?"
순간 한 도사가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섰다. 차림은 도사였지만 이제 스무 살을 조금 넘긴
사내였다. 두 눈썹은 위로 사납게 올려졌고 붉은 얼굴은 둥글넓적했다. 등에는 장검을 메고
있었다.
악처후를 발견한 도사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사형이 아니오?"
"그래, 나다."
악처후가 대꾸했다.
"그런데 방금 전 전진교를 욕한 사람이 누구요?"
"바로 나다. 그러나 그 말이 전진교를 욕한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악처후가 냉소가 섞인 투로 말했다. 도사는 그 말에 몹시 화가 났지만 애써 부아를 눌러 참
으며 악처후에게 따졌다.
"사형, 왜 그런 말을 하시오?"
"사형? 난 네 사형이 아니다. 나 소요공자의 무공은 스승의 가르침이 없이 혼자서 익힌 것
이다. 그런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노로의가 불쑥 끼여들어 도사 차림의 사내에게 호통을 쳤다.
"그대는 누군데 감히 여기서 큰소리를 치는가?"
"노형은 잘 모르겠지만 저 도사는 그래도 이름이 꽤나 알려진 사람이요. 현재 항금대의사
(抗金代義土)인데 이름은 구처기(丘處機)이고 도호(道號)는 장춘자(長春子)라고 하지요. 전진
교에선 일등가는 제자요."
악처후의 설명에 노로의가 두 주먹을 바투 쥐었다.
"도사가 정녕 전진교의 장춘자인가?"
구처기가 읍을 하며 대답했다.
"그렇소. 내가 구처기요."
전진교 일곱 제자 중에서 가장 이름이 크게 난 사람이 바로 구처기였다. 그 다음이 옥양자
왕처일이었다. 일곱 제자들 중 두 사람의 무공이 가장 뛰어났다. 그러나 왕중양은 구처기가
출가하여 도를 닦는 사람답지 않게 살기가 너무 등등하여 늘 걱정을 했었다. 그 대신 왕중
양은 맏제자 마옥을 가장 신임했다. 마옥은 성미가 조용하고 참을성이 많아 항상 교의(敎義)
를 존중했다. 그래서 왕중양은 마옥을 전진교의 후계자로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구처기는 의협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강남 강북을 돌아다니며 항금의사(抗金義士)들을
연락하다가 이곳을 지나게 되었던 것이다.
"소요공자, 구 도사와 무슨 감정이 있다면 그와 먼저 겨루어 보시오. 그런 다음 초천의와 맞
붙어도 늦지는 않을테니."
노로의는 악처후와 구처기를 먼저 싸우게 할 욕심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나와 악 공자는 동문수학을 한 사이요. 무슨 감정이 있다는 게요?"
구처기가 대뜸 대들었다.
악처후도 노로의의 음험한 계략을 간파했다. 지금 그로서는 구처기를 자기 편으로 만들어
오혈궁 사람들과 싸워야 했다. 그는 웃으며 구처기의 손목을 잡았다.
"사제, 내가 소개를 하지. 이 호한은 오혈궁의 수제자인 노로의라는 분이고 이 사람은 초천
의, 그리고 이 사람은……."
구처기가 갑자기 놀라며 검을 꼬나쥐었다.
"형님, 형님은 어떻게 우리 전진교의 적들과 함께 있는 것이오?"
"함께 있는 게 아니라 초천의와 무공을 겨루고 있었지. 저자가 나를 이기지 못하면 그때서
야 나를 놔주겠다고 하지 않겠나. 하하하……!"
악처후도 전진교와 오혈궁이 적대관계에 있음을 모를 리 없었다. 노로의는 두 사람이 자기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규합하는 것을 보고는 뜨끔했다.
"그럼 좋다. 여봐라, 어서 전진교 두 놈을 잡아랏!"
노로의의 외침이 떨어지자 오혈궁 제자들이 와아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악처후와 구처
기는 서로 등을 맞댄 채 그들과 상대했다. 그러나 오혈궁 제자들은 그 둘의 상대가 되지 못
했다. 순식간에 오혈궁 제자들이 낙엽처럼 쓰러졌다.
그러자 노로의가 소리를 지르며 구처기의 칼을 내리쳤다. 구처기가 피하면서 연거푸 칼을
뻗었다. 전진교 검법 중 건곤삼재(乾坤三才) 초수였다.
노로의가 다행히 막아내자 구처기는 다시 연달아 일곱 번을 뻗으며 전진했다. 일곱 개의 빛
이 여러 각도에서 쏟아졌다. 노로의는 눈을 크게 떴다. 그중 하나만이 진정한 검빛이었다.
노로의는 입꼬리를 한차례 씰룩거리더니 칼을 휘둘러 구처기의 공격을 막아냈다.
"얏!"
노로의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는 공중에서 구처기를 향해 칼을 그어댔다. 번뜩이는 칼날이
어지럽게 난무했다.
순간 노로의가 발로 구처기를 찼다. 구처기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라 그대로 얻어맞
고는 멀리 밀려갔다.
악처후도 초천의와 힘겹게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게다가 쓰러 졌던 제자들이 다시 무리를
지어 공격하는 바람에 악처후는 차츰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곁에서 오들오들 떨기만 하
는 여소교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를 바라다볼 뿐이었다.
나무 위에 있던 매초풍이 냉소를 지었다.
"우리가 내려가 마무리를 지을까요?"
그러더니 두 사람이 소리 없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들이 간 곳은 여소교가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듯 그녀를 끼고는 먼 곳으로 날아갔다.
여소교의 비명 소리를 들은 악처후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흑풍쌍살을 발견한 그가 뒤쫓으려
고 했다.
"달아날 셈인가?"
초천의가 악처후의 앞을 막으며 계속 공격해 왔다. 그의 공격을 막으며 악처후가 소리쳤다.
"흑풍쌍살이 내 여인을 데리고 갔단 말이다!"
"흑풍쌍살이라니?"
그 말에 모두들 아연실색하여 동작을 범췄다.
"흑풍쌍살이 어디 있느냐?"
노로의가 놀라 물었다.
"흑풍쌍살이 악 공자의 약혼자를 데리고 달아났어요."
담가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강금의가 대답했다.
노로의가 살펴보니 숲 한가운데로 사람의 그림자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네 명만 남아 강 사제와 반 사매를 보호하고 나머지는 나를 따르라!"
노로의는 흑풍쌍살을 추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악처후는 벌써 흑풍쌍살을 뒤쫓아 몸을 날린 뒤였다.

제4장 흑풍쌀살의 무공 연마
여소교를 번갈아 안으며 진현풍과 매초풍은 한참을 날았다.
경공을 쓰며 쉬지 않고 날던 이들은 날이 어두워져서야 멈춰 섰다. 아혈(啞穴)을 눌린 여소
교는 몹시 놀란데다가 지쳐 있어 아예 인사불성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매초풍에게 있어서 여소교는 보배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여소교의 아혈을 풀어 주고
또 운기(運氣)시키느라 부산을 떨었다. 조금 후에야 여소교가 신음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매초풍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네가 죽었더라면 십 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될 뻔했지."
여소교는 눈을 감은 채 악처후를 불러댔다. 그러다가 번쩍 눈을 떴다. 그는 악처후 대신 매
초풍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벌떡 일어나 앉으며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매초풍은 그녀가 또 기절해 의식을 잃을까 봐 목소리를 부드럽게 고쳐 말했다.
"두려워 마라. 내가 널 구해 주지 않았다면 넌 벌써 오혈궁 놈들에게 죽었을 거야. 또 그냥
죽이기나 했겠어?"
"그런 소리 집어치워요. 우리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나까지 해치려고 하는 걸 모를 줄 알
구? 난 너와 죽기 살기로 싸울테다!"
여소교가 이를 갈았다.
"왜 이래? 그러지 말고 구음백골조를 배워 보지 않겠어?"
매초풍이 징그러운 웃음을 매달며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여소교는 손목이 조여드는 것
같아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여소교가 매초풍이 말한 것을 되뇌어 보았다.
"구음백……?"
매초풍이 깔깔대며 진현풍을 돌아보았다.
"이봐요, 이 애가 얼마나 재미있나 한번 봐요. 수양딸이라도 삼고 싶다구요."
"허튼소리. 네가 몇 살인데 그런 소리를 해! 이 악마 같은 년아!"
여소교가 욕설을 퍼부었다. 매초풍이 발끈하여 그녀의 뺨을 두어 번 후려쳤다.
"이것이 은공도 모르고 함부로 지껄여!"
"사매, 그러다가 소저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쩔려고……."
진현풍의 말에 매초풍이 더욱 날뛰었다.
"왜, 가슴이 아파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이제 저에게 싫증이 났다는 뜻이겠죠?"
"당신은 화를 낼 때가 더 이쁘단 말이야."
진현풍이 얼른 말을 눙쳤다.
"흥, 여인들 어르는 것은 천하 일품이라니까!"
매초풍도 싫지 않은 기색을 내비쳤다. 진현풍이 그녀를 세게 껴안았다. 그녀의 볼에 입을 맞
추며 진현풍이 속삭였다.
"요망한 것들……!"
두 사람이 노는 꼴을 보고 있던 여소교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들에게 가문이 몰살당한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지랄들 하고 있군!"
여소교가 툭 내뱉었다.
"이 년이 정말 죽지 못해 환장을 했나?"
진현풍도 더는 인내심을 발휘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주먹으로 여소교를 치려고 했
다. 여소교는 각오를 했다는 듯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서 죽여라!"
그런데 망측하게도 여소교의 뱃속에서 꾸르륵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그 바람에 매초
풍이 배꼽을 움켜쥐고 웃었다.
"오호호호,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년이 배가 고프다고 하나?"
"그게 뭐가 우습다고 그래? 왼종일 밥도 안 먹고 시달렸는데……."
여소교가 매초풍에게 눈을 흘겼다.
"자, 우리 이러지 말고 어디 먹을 것을 구해 보자구. 이러다간 모두 굶겠는걸. 아니 저 년이
또 성화를 부릴까 봐 겁이 나."
매초풍이 그녀를 놀려댔다. 여소교는 매초풍의 혀를 잘라 버리고 싶은 충동에 치를 떨었다.
얼마 가지 않아 작은 읍이 하나 나타났다. 작은 읍이긴 하지만 객점은 무려 여덟 군데나 되
었다. 날이 저물어 객점 문 앞에는 등이 걸려 있었다.
흑풍쌍살은 가장 좋은 객점을 골라 들어갔다. 객점의 심부름꾼의 안색이 갑자기 돌변했다.
세 사람의 차림은 비록 남루하고 지저분하나 보통 사람 같지가 않아서였다.
더군다나 두 여인은 모두 보기 드문 미인들이었다. 그중에서 조금 더 젊어 보이는 여인은
값비싼 진주 보석들을 손목과 목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부잣집 여인이 분명하다고 그
는 믿었다. 그런 반면 부잣집 여인이 왜 그런 꼴로 다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경험이 풍부한 심부름꾼은 분명 그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고 여기고는 정중히 맞이했다.
세 사람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자 심부름꾼이 웃는 얼굴로 달려왔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오늘 밤은 예서 묵으실 거죠?"
진현풍이 말없이 고개짓을 했다.
"깨끗한 방이 있나?"
"그럼요."
"그럼 먼저 사간과(國于果)와 이함산(二咸酸)을 가져와요."
매초풍이 주문했다. 심부름꾼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게 뭐죠?"
매초풍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아무리 촌구석이지만 그런 것도 모른단 말인가?"
"알아듣게 설명을 해줘야지. 당신은 사부님한테 무공은 젖혀 두고 말재간만 배웠나?"
진현풍이 은근히 비꼬았다. 그리고 심부름꾼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풀어서 말하지. 사간과란 계원, 여지, 살구씨, 대추 이 네 가지 과실을 말하는 거고,
이함산이란 앵두와 청매를 일컫는 거요."
그때서야 심부름꾼이 알아들었다는 듯이 안면을 활짝 폈다. 주인에게서 대처 사람들이 그런
음식을 먹는다는 소리를 들었던지라 그는 한편 반갑게 여겼다.
"또 다른 건 필요 없나요?"
"고급은 없을 테니까 그저 술안주가 될 만한 것을 내오게나. 이를테면 원앙우근(鴛鴦牛筋 :
소 힘줄로 만든 요리), 초압장(秒鴨掌 : 오리 발로 만든 요리), 폭장퇴(爆獐腿 : 노루 다리고
기로 만든 요리), 수정토사(水晶兎絲 : 토끼 고기로 만든 요리) 같은 걸로 말이오."
"아니 그렇게 비싼 걸……. 다행히 우리 객점에서 만들고는 있지만 값이 대단히 비쌉니다
요."
"누가 메어먹고 달아날까 봐 그러나? 자……."
진현풍이 품 속에서 은괘 다섯 냥짜리를 하나 꺼내 탁자 위에 보란듯이 내려놓았다.
심부름꾼의 허리가 깊숙이 숙여졌다. 그가 그것을 받아들고 가려는데 매초풍이 다시 불러
세웠다.
"여아홍주(女兒紅酒)가 있으면 두 각(角)만 가져와요."
주문한 것들이 나오자 세 사람은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배를 채운 세 사람은 심부름꾼을 따라 객방으로 갔다. 방은 깨 했지만 침대가 두 개밖에 없
었다.
"조금만 계시면 제가 침대 하나를 더 들여오겠습니다. 헤헤, 죄송합니다. 오늘따라 손님들이
많아서……."
심부름꾼의 말에 진현풍이 언성을 높였다.
"아까 밥 먹을 때만 해도 몇 안 되는 것 같던데 무슨 소린가? 이 객점에는 적어도 객방이
이삼십 칸 되는 걸로 아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객점의 대부분의 객방들을 이미 사흘 전에 맡아 놓은 사람들이 있
었습니다. 이 객방이 그리고 남은 빈방이지요. 세 분께서 조금만 늦게 오셨더라면 이 방마저
없었을 겁니다요."
매초풍은 이상한 예감이 스쳤다.
"이 작은 읍에 무슨 손님들이 그리 많소?"
"글쎄 말입니다. 저도 모르겠어요. 요 며칠 사이 어찌 된 일인지 내왕하는 손님들이 갑자기
많아졌어요. 다른 객점들도 마찬가지입니다요."
여소교가 가볍게 매초풍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난 다른 사람과 한 방에서 자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더군다나……."
그녀가 진현풍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매초풍이 둘러댔다.
"친오라버니인데 뭐 어때? 내가 너와 한 침대에서 자면 되지."
여소교는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자기 신분을 밝히기만 하면 단칼에 죽여 버리겠다고
매초풍이 여러 번 위협을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불편하시다면 객점 지하에 방이 하나 있긴 합니다만……."
심부름꾼의 말을 매초풍이 싹뚝 잘랐다.
"됐으니 나가 봐요. 여인들은 함께 있는 게 더 안전하니까."
심부름꾼이 알겠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나가 버렸다.
침대 위에 걸터앉은 진현풍이 매초풍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사실 나도 이렇게 자는 게 습관이 안 돼놔서……."
"그러면 이 소저와 한 침대에서 자지 그래요? 그러면 습관이 될테죠?"
매초풍이 쏘아붙였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난 그런 뜻이 아닌데……."
매초풍이 여소교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저 사람이 너와 함께 자고 싶어하는데 네 생각은 어떻지?" 여소교는 두 사람이 자기를 능
욕하려고 그러는 줄 알고 기겁을 했다.
"난 싫어요. 제발 그러지 말아요. 내겐 이미 사내가 있단 말이에요."
"흥, 내가 알기로는 시집을 안 갔다고 알고 있는데 무슨 수작 이야."
"바로 소요공자 악처후예요."
이에 놀란 두 사람은 사로 멍하니 얼굴을 마주했다.
"그게 사실이야?"
"예, 그분은 꼭 내게 장가를 들겠다고 맹세까지 했는걸요."
매초풍이 픽 바람이 새듯 웃었다.
"바보 같은 계집애. 소요공자의 말을 정말로 믿어? 너를 속인 거라구."
여소교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들이 그와 적대관계에 놓였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거죠?"
매초풍이 정색을 하며 타이르듯이 설명했다.
"악처후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네가 갖고 있는 소녀경을 얻어내기 위해 그런 거라구. 생각
해 봐. 그렇지 않았다면 왜 너의 부모는 구하지 않고 너만 꿰차고 도망을 쳤겠어?"
이제껏 사내를 모르고 있던 여소교는 악처후에게 완전히 빠져 버린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이런 말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나 하나만 구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 일인데 어떻게 부모까지 구해요?"
그녀는 오히려 악처후를 두둔하고 나섰다.
매초풍의 입꼬리가 묘하게 뒤틀렸다.
'여씨네 가문 때문에 지금까지 온갖 고생을 다했는데 종자를 남겨 둘 수는 없어. 하지만 그
냥 죽이지는 않겠어. 마음 고생을 실컷 하다가 서서히 죽게 만들테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미소를 보였다.
"이 사랑에 푹 빠진 계집애야, 네 말을 들으니 은근히 질투가 나는걸. 나도 너같이 정 많은
공자님이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겠니?"
진현풍이 얼른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런 진현풍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매초풍이 새로운 제의
를 했다.
"말을 듣고 보니 딱하군. 내 악처후를 다시 만나게 해주겠어."
"그럼 날 풀어 주겠다는 말인가요?"
매초풍이 여소교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친절하게 말했다.
"한 가지만 대답하면 난 네가 악처후를 만나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어. 아니 내가 직접 그를
만나 너를 넘겨줄 수도 있어."
여소교는 반신반의했다.
이때 밖에서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가 났다. 객방을 미리 맡아 두었다는 사람들이 온 듯했다.
진현풍이 얼른 문틈으로 밖을 살폈다.
여러 명의 사내들이 등에 칼을 차고 걸어오고 있었다.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여윈 몸에
누런 소매 없는 겉옷을 걸쳤다. 길죽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의 낯색은 약간 검은
편이었다. 동그란 눈은 작은 듯했지만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가 사내들의 두목인 것 같
았다.
그 곁에는 가죽집에 넣은 큰 칼을 가슴에 안은 거인이 씩씩거리며 걷고 있었다. 칼자루를
감은 누런 비단이 눈부셨다.
진현풍은 가만히 돌아서며 매초풍에게 속삭였다.
"사매, 저 사람들이 누굴까?"
밖을 살펴본 매초풍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상관 말아요.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이니 잠자코 있기나 해요."
"난 곡령풍과 육승풍이 무림 사람들을 끌고 와 우리를 공격할까 봐 걱정되는데……."
매초풍이 입을 씰룩거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도화도 제자들은 한결같이 자존심이 강해요. 그런데 그들이 과연 남
의 도움을 받아 일을 해결하려 들 것 같아요?"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그들은 곧 여소교의 혼수혈(昏睡穴)을 눌러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혀 놓았다. 그리고 자기들은
한 침대에 누워 밤늦도록 쾌락을 나누다가 지쳐 잠들었다.
이튿날 새벽 그들은 뜨락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눈을 떴다. 얼른 옷을 입고 문틈으로 밖을
살펴보았다.
어젯밤에 온 그 무리들이 두 사람씩 하나가 되어 무공 연마를 하고 있었다. 우두머리로 보
이는 그 여윈 사내는 황색 비단 바지저고리를 입고는 나머지를 지휘하고 있었다.
"공력을 들인 무공인 듯싶은데 누군지는 잘 모르겠군."
진현풍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매초풍도 밖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권법이 날쌔고 주먹에 힘은 있는데 초수가 너무 밋밋해."
순간 그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몸을 급하게 빼며 말했다.
"혹시, 자기들의 비법은 숨겨두고 있는지도……. 사람들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 비밀 무공을
연마하겠어요?"
진현풍이 그 말에 수긍이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조련을 하는 걸 봐서는 싸우러 가는 길인지도 모르지."
"난 지금 손이 근질거려 미치겠어요. 어서 몇을 잡아다가 구음 백골조나 최심장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공이 어느 정도 있는 상대라야 우리 수련이 효과가 있을텐데 말이에요."
진현풍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상대의 무공을 모르고 무작정 덤빌 수는 없는 노릇이
었다.
매초풍이 여소교가 아직 자고 있는 침대로 접근했다. 해당화처럼 붉게 상기된 채 여소교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매초풍이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도 원래는 여소교처럼 평온한 생활을 누리려고 했었는데……. 그 모든 것이 이젠 꿈으로
도 찾을 수 없으니……. 그녀의 손은 이미 무공 연마에 각이 지고 볼품없이 망가져 있었다.
그녀는 당장 여소교의 머리를 박살내 죽이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대신 그녀의 혼수혈을
풀어 주었다.
잠에서 깨어난 여소교는 매초풍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알고는 몸을 사렸다. 매초풍이
얼른 미소로 바꾸며 말했다.
"잘 잤어?"
여소교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넌 참 아름다워. 소요공자가 반할 만도 하지."
그 말에 기분이 좋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기를 조롱하고 있는 것 같아 떨떠름한 표정으로
여소교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사실 그쪽도 예뻐요."
매초풍이 그 말에 방긋 웃었다.
"정말?"
"그래요."
"호호호, 그건 그렇고 듣자하니 여씨네 가문의 여인들은 모두 소녀공 비법을 알고 있다던데
정말 그런가?"
순간 여소교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것을 익히면 마음에 드는 사내를 손아귀에 넣고 주무를 수 있다며?"
여소교가 두 눈을 꿈벅이더니 말했다.
"어머니는 소녀공을 배워 주면서도 그런 말씀은 한 번도……."
여소교가 자신의 술수에 걸려들어 조금씩 실토하고 있다는 것을 안 매초풍이 속으로 웃었
다.
"남녀간의 일은 모녀간이라도 함부로 주고받을 수가 없어서 그렇겠지. 하지만 언니 같은 내
게 말 못할 건 없잖아?"
매초풍이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여소교가 무언가를 떠올리다가 그만 피식 하고 웃었다.
"왜 웃지?"
"그런데 소요공자님은 글쎄 소녀공이 몸 보양하는 장수공(長壽功)이라고 하지 뭐예요. 그 말
이 틀리다면 사내가 배워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을텐데……."
매초풍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과연 악처후도 소녀공을 얻으려고 했었구나. 그런 속셈이 없고서야 여씨네를 도와줄 리가
없지!'
매초풍이 상념을 떨쳐버리며 다시 미소를 건넸다.
"그 사람이 널 좋아하고 또 너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네가 남녀간의 방사를
잘 모를까 봐 걱정이 돼서 그랬겠지. 소녀공을 우선 연구한 다음 그 비법을 네게 가르쳐 주
려고 그랬을 거야."
그러자 여소교는 볼이 빨개지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사람은 그런 생각밖에 모르나 봐."
"그것은 결코 나쁜 게 아냐."
"그런데 저분은 언니를 사랑하고 있나 보죠?"
여소교는 차츰 매초풍에게 빨려들고 있었다.
"피, 저 사람은 무공밖에는 몰라."
진현풍은 아직도 문틈으로 사내들의 무공 연마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래서 소녀공을 배워 저분의 마음을 잡아 보겠다는 건가요?"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여소교가 미소를 내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금방 난처한 기색이 되고
말았다.
"헌데 소녀공을 남에게 전수해서는 안 된다고 어머니께서 신신 당부를 하셨는데……."
"걱정 마. 넌 그저 그걸 세 번만 입으로 외우면 돼. 나는 곁에서 듣기만 할 테니까. 그건 전
수하는 게 아니잖아?"
"사람이 없는 데서만 소리내어 외우라고 하셨어요."
이때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채주님, 한번 본때를 보여주시오!"
밖을 내다보고 있던 진현풍이 급히 손짓을 했다.
"사매, 그 사내가 무공을 보일 모양이야!"
아쉽지만 매초풍은 일단 소녀경은 접어두고 그쪽으로 갔다.
야윈 사내가 큰 칼을 안고 있는 사내에게 접근했다. 칼자루를 쥐더니 칼을 쑥 뽑아 든 그가
눈을 부라렸다. 칼등이 두껍고 날 이 넓은 금도(金刀)였다. 그가 그것을 거꾸로 쥐고는 읍을
했다.
"여러 아우님들, 이 형님이 한번 해보이겠소."
칼을 척척척 휘두르며 그가 칼솜씨를 보이기 시작했다. 금빛이 번뜩일 때마다 갈채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는 전후좌우 여덟 번을 내리쳤다. 객영팔방(客迎八方)이라는 초수였다. 맹호
처럼 날쌘동작이었다.
차츰 구경꾼들이 물려들었다. 진현풍도 그 틈을 타서 밖으로 나갔다. 심부름꾼 옆에 가 선
진현풍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구경에 정신이 팔린 심부름꾼이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저 호걸도 모른단 말이에요? 저 사람은 금도채(金刀寨)의 채주인 금도(金刀) 임청(林靑)이
랍니다."
진현풍은 그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금도 임청은 금도 일백영팔식(金刀一百零八式)을
잘 써 이름이 났는데 그 초수들은 송나라 명장 금도영공(金滯令公) 양계업의 금도도법(金刀
刀法)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임청이 보이는 것은 강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임청
의 손에서는 위력 있게 보였다.
무공을 보인 그는 부하들과 함께 아침을 먹더니 어디론가 말을 타고 가버렸다.
뒤늦게 세 사람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누군가 문어귀로부터 걸어 들어왔다. 횐 옷을 입은 사내였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햇볕에 그
을린 듯 새까만 발에는 나막신을 신고 있었다. 겉모습만 봐도 기이한 사내였다. 허리에 찬
검도 검집이 없는 녹슨 검이었다. 검날만 예리하게 갈아 놓은 듯했다.
그가 자리에 앉자 심부름꾼이 달려가 허리를 넙죽 숙였다.
"무엇을 드릴까요?"
"난 술이면 돼."
아침부터 술을 찾는 것도 괴이했다.
"아침부터 술을 찾는 손님은 삼 년 만에 처음인데요. 삼 년 전에도 손님과 용모가 비슷한
분이 오셔서 술을 찾았어요. 아주 아리따운 처녀도 데리고 왔었죠."
"그 사람은 이미 죽었다."
사내가 말했다.
"그렇게 마음씨 좋던 본이 죽었어요?"
"기억을 하고 있으니 묻겠는데, 그 사람이 데리고 온 소저가 너에게 술 한 잔을 상으로 부
어 준 일도 잊지 않고 있겠군?"
"그럼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요. 그 아가씨는 참 꽃같이 아름다웠어요. 마음씨도 비
단결을 닮았구요. 제가 술을 좋아하는 줄 알고 상으로 주신 거죠. 그런데 손님이 어떻게
……?"
"이 사람아, 술은 언제 주려고 그래?"
"아이구 죄송합니다. 근데 무슨 술로……?"
"행화촌주로 네 각 가져와."
"그때 손님도 그 술을 달라고 하셨는데……."
심부름꾼은 그때 손님과 어떤 관계일지 사뭇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행화촌주는 매우 독한 술이었다. 그런데 괴인은 그 독한 술을 혼자 다 마셨다. 그 독주가 들
어가면 갈수록 얼굴이 붉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창백해졌다.
그자를 살펴보던 매초풍이 감탄을 했다.
"호걸남아야!"
그 괴사내가 다시 심부름꾼을 불렀다.
"여기 산녹사(酸綠絲) 한 접시하고 용봉양양(龍鳳兩兩) : 중국 장 아찌), 그리고 죽순 한 접
시와 물고기 생회 한 접시를 더 가져오지."
"손님께서도 그 손님과 식성이 같으시군요."
괴인은 아무 대답 없이 술을 마셨다.
"정녕 너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느냐?"
그 말에 심부름꾼이 사내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휘둥그래 떴다.
"손님이 그럼 바로…… 삼 년 전 그 손님!"
괴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삼 년 전의 그 호방한 젊은이는 삼 년 전에 죽었네.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지."
"이렇게 멀쩡히 살아 계시면서 그건 또 무슨 해괴한 말씀입니까요? 그럼 그때 그 소저
는……?"
괴인이 약간 떨리는 손으로 술사발을 집었다. 급히 술을 비운 그가 시를 읊조렸다.
주가가 어디 있냐 물었더니
목동은 행화촌을 가리키네
허허, 미주는 여전하건만
미인은 영영 떠나가 버렸네.
그리고는 괴인은 다시 술을 들이마셨다. 심부름꾼은 그가 그 여인을 잃었기 때문에 사람이
변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저,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여인들이란 원래 다……."
순간 괴인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눌렀다. 탁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났다.
"넌 모른다.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아느냐? 여인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으로 보이냐구?"
매초풍은 괴인의 내공에 내심 크게 놀랐다. 그녀는 그의 내공으로 보아 그가 아주 총명한
사람임을 알았다. 사부가 그를 보았다면 반드시 제자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의 괴팍
한 성미가 꼭 자신의 사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진현풍이 매초풍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아. 저 내공을 보라구."
"얼른 먹기나 해요. 우린 떠나면 그만이니까."
다시 괴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삼 년 전엔 내가 또 술 두 각을 더 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손님, 기억력도 참 대단하십니다요."
그는 얼른 술을 날라 왔다. 괴인은 그 심부름꾼을 자기 앞에 앉혔다.
"저같이 미천한 놈이 어떻게……."
"하지만 정아(瀞兒)보다는 보기 좋아. 그 여인은 나와 같이 술을 마셨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남의 여인이 돼 버렸지."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요. 여인들이란 그저……."
괴인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심부름꾼은 겁을 집어먹고 몸둘 바를 몰라했다. 괴인이 눈에
힘을 풀며 말했다.
"아냐, 정아는 그런 방탕한 여인이 아니었어. 내게 처녀도 바쳤고 혼인 준비도 하고 있었다
구."
밥을 다 먹은 세 사람은 그러나 호기심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왜……? 그 여인이 다른 데로 시집이라도 갔나요?"
심부름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술주정뱅이라서 그랬지."
"아, 예."
"문제는 술을 먹고 그녀를 때리질 말았어야 했는데……, 그게 후회가 되는군."
괴인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난 술이 깨어서는 묻곤 했지. 그 상처는 어디서 다친 상처냐고? 내가 그런 줄도 모르고 말
이야."
그는 계속 술을 마셔 댔다.
"정아는 내가 돈을 마구 쓰는 것을 싫어했어. 난 이틀도 못 가 은 백만 냥을 다 써버린 적
도 있었으니까."
심부름꾼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도 그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그녀는 내게 네 가지 죄목을 열거하더군.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 버렸어."
"네 가지 죄라니요?"
"먹기 좋아하고, 마시기 좋아하고, 계집질 좋아하고, 도박 좋아하고……."
괴인은 이제 주정처럼, 그러나 자신의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을 듯 계속 지껄였다.
"나는 가장 좋은 객주집만 가고 가장 비싼 것만 골라 먹으면서 아우에게나 겨우 은자 몇 푼
을 쥐여 주곤 했지. 정아는 그런 나를 나쁜 버릇을 가졌다고 꾸짖었어. 하지만 난 돈이란 죽
으면 가져가지도 못하는 것이라 여기고는 내 멋대로 행동한 거야."
심부름꾼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는 한푼의 은자를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
기 때문에 속으로 한껏 괴사내를 비웃었다.
괴인의 침통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녀는 내가 기생집에 가서 기생들과 놀기를 좋아한다고 화를 냈지. 난 기생집에 갔어도
그녀들과 웃고 떠들기 위해서 가는 거였어. 한 번도 그녀들과 살을 섞은 적이 없었지. 내가
도박에 빠졌던 것도 사실이야. 욕을 먹어도 싸지. 한 번은 그녀까지 북방에서 온 투전꾼에게
빼앗기고 말았거든."
"아니 사랑하는 여인을 걸고 투전을 했다는 말씀인가요?"
"사실 그때는 오기가 생겨서 그랬지만 나중엔 후회가 들었지."
"그래서 여인까지 빼앗겼단 말이에요?"
심부름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괴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계속했다.
"난 몽땅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었지. 나중에 곁에서 구경하던 한 사내가 백은 오만 냥과
구슬 백 개를 내놓아 정아를 다시 찾아 주었어. 대단해. 생면부지인 남의 여인을 그것들과
바꿔 주었던 그 사내는 정말 내겐 귀인이었지. 난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어. 나하고 강호에
나서길 원한다면 좋은 벗으로 평생 지낼 생각도 했었지. 그런데 실수였어. 정아가 그에게 시
집을 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한 거야. 할 수 없이 난 그 사람과 결투를 벌였지. 결과는 참
패였어. 그전에 술을 잔뜩 마셨던 게 원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취하지만 않았다면 이길 수도 있었겠지요."
갑자기 괴인의 말을 가로막고 나선 것은 매초풍이었다. 괴인이 매초풍을 노려보았다. 매초풍
도 범상치 않은 눈길을 보냈다.
"그렇다면 그대가 탁운백(卓雲白), 절정공자란 말이에요?"
매초풍이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매초풍이 그 말에 웃음을 살짝 띄웠다.
"난 지금 절정공자를 이긴 사람이 도대체 누굴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큰 인물이지. 아주 신비스런 인물……. 그가 정아를 데리고 간 다음에야 알았지만 그는 오
혈궁 궁주인 묘상(苗尙)이었소."
"오혈궁 궁주?"
매초풍이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순간 여소교는 머리 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탁운백과 악처후는 이름하여 강호의 양 공자가 아니던가. 서로 교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탁 공자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전 소요공자의 아내랍니다."
그녀가 탁운백에게 울부짖으며 달려가려고 했다.
"가만있지 못해!"
매초풍이 그녀의 덜미를 잡아챘다. 그리고는 그녀의 아혈을 눌러 말을 못하게 하고는 탁운
백을 주시했다. 절정공자 탁운백은 냉소를 머금은 채 여소교를 바라보았다.
"소저는 이 탁운백의 별호가 뭔지 아시오?"
말을 못하게 된 여소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별호가 절정공자임을 아시는데 왜 그러시오. 나 절정공자는 이젠 모든 여인들과는 연관
이 없게 된 사내요. 모든 정을 끊었다는 뜻이오."
"이봐요. 그대는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게 좋겠소?"
진현풍이 한마디 끼여들었다. 탁운백의 두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대들의 일에 대해 간섭하지 많겠소. 난 내 일만 생각할 뿐이오. 그리고 난 취했소. 취하
면 사람을 때리는 버릇이 있는데 아직까지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소이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요?"
"난 내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죽이고 싶소! 특히 무공을 할 줄 아는 여인들이 가장
눈에 거슬리지."
"오, 알 만하군. 정아란 여인이 무공을 할 줄 알았나 보지. 그래서 그 분풀이로 무공을 익히
고 있는 여인들을 모두 미워하고 있군 그래."
매초풍이 비웃자 탁운백이 고함을 질렀다.
"그 여인은 끌어들이지 마!"
순간 술사발들이 일제히 매초풍에게로 날아갔다. 매초풍이 얼른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술사
발들이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탁운백은 그녀의 경공에 은근히 놀라는 눈치였다.
"무공이 뛰어나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대는 여인이야. 난 여인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
어."
진현풍이 두 손으로 탁자를 집어들더니 탁운백을 향해 힘껏 던졌다. 너털웃음을 토하던 탁
운백이 일순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머리 위에서 웃음 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어느새 대들보 위에 올라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매초풍이 여소교의 혈도를 몇 곳 더 눌러 한쪽 구석으로 밀어 놓았다.
"간다!"
진현풍과 함에 몸을 날리며 탁운백을 향해 최심장을 날렸다. 탁운백이 그들의 공격을 피해
아래로 내려왔다. 두 사람도 내려서며 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탁자와 의자들이 마치 폭풍에
휘감긴 나뭇잎처럼 휘날렸다.
"대단한 장법이야. 처음 보는 장법인데?"
탁운백이 감탄을 하자 진현풍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당연하지. 흑풍쌍살의 절기를 네 놈이 알기나 하겠어?"
"이제 알겠다. 너희들이 그 흑풍쌍살이로구나. 하지만 생각보다는 무공이 형편없는걸."
매초풍이 두 손을 매의 발톱처럼 만들어 달려들었다. 그녀는 일시에 탁운백의 등짝을 움켜
쥐려고 했다. 탁운백이 급히 몸을 돌리며 주먹을 뻗었다.
"절정권(絶情拳)!"
탁운백의 주먹이 연달아 허공을 갈랐다. 어떤 것이 진짜 주먹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 도화도 황약사가 자랑하는 낙영신검장(落英神劍掌)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는 초수였
다. 물론 황약사를 따를 수는 없었지만 그 강한 내공만은 매초풍을 곤경에 밀어넣기에 충분
했다.
진현풍이 얼른 매초풍을 도와 합세했다. 탁운백은 날쌘 동작으로 그들의 공격을 피했다. 술
에 취해 보법이 불안전해 보였지만 공격과 방어는 철두철미했다.
다급해진 진현풍이 소리쳤다.
"사매, 어서 병장기를 써!"
매초풍이 허리에서 은빛으로 번쩍이는 긴 채찍을 풀어 한차례 바닥에 내리쳤다.
휘이익― 탁!
그러더니 곧장 탁운백을 향해 뱀의 혀처럼 휘어지는 채찍을 휘돌리기 시작했다.
"음……."
탁운백은 그 채찍을 손으로 잡아 오히려 그녀를 쓰러뜨리려고 했다. 하지만 채찍에 갈고리
같은 것들이 잔뜩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포기했다.
탁운백이 다시 대들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한 손으로 대들보를 잡고 다른 손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녹슨 검을 뽑아 들었다.
진현풍에게도 금빛이 나는 채찍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독룡금편(毒龍金鞭)이라고 하였
고 매초풍의 채찍을 독룡은편(毒龍銀鞭)이라 불렀다. 모두 길이가 넉 장(丈)씩 되었다.
그들은 동시에 탁운백을 채찍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탁운백이 검으로 채찍을 막아냈다. 그는 자신의 검을 자신했다. 그런데 채찍은 쉽게 끊어지
지가 않았다. 그들의 채찍은 천 년 묵은 구렁이 껍질로 만들었고 겉에는 백금까지 입혀져
있어 보기보다 질겼다.
탁운백은 안 되겠다 싶어 얼른 집 밖으로 날아갔다. 두 사람도 탁운백을 쫓아 밖으로 나갔
다. 탁운백의 절정검법은 그 초수가 특이하여 지금까지 남에게 져본 일이 거의 없었다. 그에
못지않게 황약사의 무공을 전수받은 흑풍쌍살의 채찍질 또한 천하에서 알아주는 절기였다.
흑풍쌍살이 채찍을 휘두르며 한꺼번에 공격하자 이제는 탁운백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한창 싸우고 있는데 멀리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이윽고 수십
기의 사람을 태운 말들이 객점 문 앞에 이르렀다.
금도채의 호한들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뜨락으로 성큼 들어서며 세 사람
이 싸우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맨 앞에서 걸어오던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이, 놈들, 이게 무슨 무엄한 짓이냐?"
그 벽력같은 소리에 세 사람이 동작을 멈췄다. 탁운백이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사내의 말을
받아쳤다.
"네 놈들은 누군데 어른신들 싸움에 나서느냐?"
"이 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순간 딱 소리가 나며 그의 뺨을 탁운백이 후려갈겼다. 그의 뺨은 순식간에 부어 올랐다. 사
내가 화를 버럭 내며 칼을 높이 쳐들었다. 누군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바로 금도 임청이었
다.
"채주님, 저 놈들이 글쎄……."
"저리 가 있거라."
임청미 점잖게 말했다.
아침에 객점을 떠난 그들은 남에게 줄 선물을 놔두고 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러 서둘러 돌아온 길이었다.
임청이 탁운백에게 읍을 하며 사죄하는 투로 말했다.
"내 부하의 잘못을 용서하시오. 그런데 그대도 너무한 것 같소아다."
"그래서 어쩔 셈이오?"
탁운백은 여전히 독기를 품은 낯빛이었다.
임청은 그 말이 귀에 거슬렸으나 참기로 했다. 괜한 싸움에 말려들었다가 자신들의 일을 그
르칠까 봐서였다.
"그럼……."
집 안으로 들어 가려는데 탁운백이 앞을 가로막았다.
"날 무시하겠다는 게요?"
임청이 한번 사나운 눈초리를 돌렸다가 이내 옆으로 비꼈다. 오히려 발끈하고 나선 것은 그
의 부하들이었다.
"채주님, 저 병들어 죽은 귀신같이 생긴 놈을 혼내 줍시다!"
"저 놈의 다리를 한칼에 잘라 버리겠다!"
"죽여!"
부하들이 모두 탁운백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을 부렸다.
탁운백의 낯색이 돌연 창백해졌다. 그의 가슴속에서 살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감정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다. 인간의 모든 정과 감정들이 사라지게
되자 그는 피를 마시려고 했다. 그것도 사람의 피를 마시려 했다.
차츰 임청의 기색도 험악해졌다. 다른 부하들이 으르렁대고 탁운백의 창백해진 낯색을 그가
겁먹은 것으로 여긴 임청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임청이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가 천천히
금도를 뽑아 들었다.
매초풍은 팽팽하게 감도는 긴장감에 목이 탔다. 그녀는 가만히 진현풍의 옷자락을 잡아끌었
다. 그리곤 여소교를 옆에 끼고는 뒷문으로 빠져 나왔다.
때를 같이하여 탁운백이 녹슨 검을 임청에게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을 예리하게 가
르며 그의 검이 살기를 내뿜었다. 절정검법 중에서도 절정검 초식이었다. 다른 예비 동작은
전혀 없이 곧바로 상대를 향해 공격하는 초식이었다. 비교적 간단하게 보이지만 사실 치명
적인 초식이 아닐 수 없었다.
긴장한 입청은 평생 익혀 온 금도팔식(金刀八式)을 쓰며 녹슨 탁운백의 검을 막았다. 순간
탁운백의 검은 어느새 임청의 금도를 비껴 지나 그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임청이 그만 칼을 떨어뜨리며 한숨을 지었다. 겉으로 본 탁운백의 얼굴색과는 전혀 다르게
승패가 결정 난 것이었다.
"날 죽이더라도 내 부하들은 살려 주시오."
탁운백이 그 말에 검을 거두었다. 임청이 약간 의외라는 눈길로 탁운백을 응시했다.
"그대는 너무 경솔하였소. 금도 일백영팔식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이해가 안 가는군. 세
상 누구도 그 초식을 패배시키지 못하는데……."
탁운백이 무표정하게 내뱉었다. 이제 살았다고 믿은 임청이 미소 지었다.
"잘 보았소 그대의 마음은 그대의 검보다 인정이 있소이다."
"우리들의 싸움은 이제부터요."
탁운백이 다시 검을 쳐들었다. 임청의 얼굴빛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꼭 싸워야 한다면 그전에 한 가지 물어 볼 게 있소? 내 금도는 아직 이름도 모르는 상대를
죽인 적이 없소 또한 나 역시 이름도 알지 못하는 자에게 죽고 싶지는 않소."
"난 절정공자 탁운백이라고 하는 사람이요."
그 말에 임청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 임청이 눈이 없어 탁 공자님을 몰라 뵈었소이다. 부디 용서하시오."
나머지 부하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사실 제가 이곳으로 돌아온 이유도 탁 공자께 드리려던 선물을 깜박 잊고 놓고 갔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님을 뵙게 될 줄이야. 여봐라, 어서 그 선물을 가져와라!"
부하 하나가 누런 비단에 싼 것을 들고 와 탁운백에게 건넸다.
"부족한 선물이지만 받아 주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임청이 직접 그것을 풀렸다. 보자기 속에서 자담목으로 만든 나무상자가 나왔다. 그 뚜껑을
여니 눈부신 진주 보물들이 가득 했다.
"공자성의 이번 길이 순탄하게 성사되기를 바라며 드리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오직 그 뜻입니다.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흑풍쌍살은 여소교를 끌고 벌써 삽십 리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비로소 안전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렸다. 매초풍은 여소교를 땅에 내
려놓고 혈도를 풀어 주었다.
"망할 놈의 계집, 왜 그런 소리를 지껄인 거야?"
여소교가 가볍게 눈을 치뜨며 매초풍의 말에 대들었다.
"내가 가만히 있겠어요. 난 당신들에게 이런 시달림을 받고 싶지가 않다구요!"
매초풍이 소름 끼치게 웃었다.
"오호호호, 넌 절정공자가 네 편을 들어줄 거라고 믿었더냐? 소요공자와 절정공자는 벗이
아니라 적이란다. 소요공자가 절정 공자의 출중한 무공을 얼마나 시기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한 번만 더 허튼 짓거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을테다!"
진현풍도 눈을 부릅뜨고 협박을 했다.
"당신들은 나를 윽박지르고 어르고 하는군요. 그 목적이 무엇인지 난 알아요. 소녀공을 얻자
는 속셈이죠? 흥, 소녀공을 쓰면 사내들이 어떻게 된다구요?"
"그건 사실이다."
"그만둬요. 누굴 속이려고 그래요? 그런 말은 삼척동자도 믿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말하지 않겠다는 게냐? 네가 그것을 토설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
매초풍이 여소교의 정수리에 있는 백회혈(百會穴)을 눌렀다. 이제 내력만 가하면 여소교는
죽은 목숨이었다. 여소교는 그것도 모른 채 깔깔 웃어댔다.
"날 죽일려구? 그렇게 되면 소녀공은 끝장이지. 소녀공 때문이라도 날 죽이지 못할걸?"
매초풍이 손을 거두며 그녀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분노를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럴
수록 여소교는 득의에 찬 행동을 보였다.
세 사람은 다시 길을 떠났다.
"사매, 요 며칠 무공을 연마하지 않았는데 오늘 밤은 한번 해 보아야 하지 않겠어?"
진현풍이 물어 왔다.
"이곳은 인적이 드물잖아요. 연마를 하려면 어서 인가를 찾아야 할텐데."
그 말에 여소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공을 연마하는데 왜 인가가 필요한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한 오리쯤 더 가니 푸른 들판 끄트머리에 작은 마을 하나가 낮게 자리잡고 있었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오는 조용한 전원 마을이었다.
흑풍쌍살은 여소교를 이끌고 남쪽에 있는 돌산으로 올라갔다. 해가 지고 노을이 번지는 것
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그런 저녁이었다.
"저 애를 잘 지키고 있어요. 내가 다녀올테니."
매초풍이 돌아서려고 했다.
"조심하고 젊고 건장한 것들을 많이 찾아보라구."
"알았어요."
매초풍은 마을로 내려갔다. 매초풍은 먹을 것도 얻을 겸 구음 백골조와 최심장을 연마할 상
대도 고를 생각이었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머리도 단정히 벗었다. 그녀는 얼굴이 반반해서 이런 일은 언제
나 도맡아서 했다.
한 농가에 이른 그녀는 문밖에서 부드럽게 주인을 불렀다.
"계십니까."
곧 젊은 여인이 갓난아기를 안고 나왔다.
"지나가는 길손인데 물 좀 얻어 마실 수 있겠어요?"
"들어오세요"
젊은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매초풍은 그만하면 건강한 몸이라 여겼다. 그런데 사내는 어떨
까?
마침 집 안에서 얼굴이 검붉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걷어올린 팔뚝에서는 단
단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사내가 매초풍에게 눈길을 빼앗겼다. 그러자 얼른 젊은 여인이 사
내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봐요. 어서 들어가 불이나 떼지 않고!"
사내가 히죽 웃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여인이 휘어잡고 사는 집안이군!'
매초풍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그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녀는 물을 마시면서 부부 모
두가 건강하니 사내는 최심장을 연마하는 데 쓰고 부인도 데리고 가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
다.
"혹시 이 마을에 부잣집이 있나요?"
매초풍이 묻자 여인이 대꾸했다.
"있지요. 동쪽에 있는 시대관인부(柴大官人府)는 근방에서 소문난 갑부랍니다. 이 마을 사람
들 모두가 그 집 땅을 부쳐 먹고 살고 있거든요."
매초풍은 속으로 은근히 흡족해 했다. 부잣집이면 건장한 사내와 여인들이 적지 않을 거란
판단 때문이었다.
"대개 부잣집 주인을 원외라고 하는데 왜 그 집은 대관인이라고 부르지요? 무슨 큰 벼슬이
라도 했던 집안인가요?"
"글쎄 지금은 벼슬이 없지만 전에 한 분이 황하 북쪽 어디선가 지부(知府)로 있었대나 봐요.
그러다가 금나라와 내통한 일이 발각돼서 송나라 명장 악비 장군 밑에 있는 대장 양재홍에
게 죽음을 당했대요. 양 장군이 그의 가문까지 멸살시키려는 바람에 이곳까지 도망쳐 와 살
고 있지요. 벌써 오래 전의 일이랍니다."
매초풍은 그 집에 금은 보화가 많을 거라는 계산도 하고 있었다. 젊은 여인이 다시 말을 이
었다.
"시씨네가 금나라와 내통했으니 관가에서 가만 놔두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외딴 곳에 처박
혀 있으니 어쩌겠어요. 포졸들이 몇 번 내려오기는 했었지만 그 집 장정들에게 오히려 떼죽
음을 당하고 말았지요."
"그 집 장정들의 무공이 대단한가 보죠?"
"난 그런 거 잘 모르지만 남들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장정 넷이서 포졸 수십 명을 때려죽였
다고 했어요."
매초풍은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 같지 않다는 걱정이 들었다. 여인은 또 관병들마
저 그 집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집엔 궁노(弓弩)를 수없이 준비해 왔거든요. 하인들이 모두 그걸 쏠 줄 안다고 들었어
요. 그러니 관병들이 쉽게 접근할 수가 있었겠어요. 그러다가 가장 힘센 사람 하나가 포위를
뚫고 나가 열 명의 무사들을 데리고 왔지요. 그리곤 관병들을 모조리 쓸어 버렸죠."
"그때 데리고 온 사람이 어디 사람이라고 하던가요?"
"내가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어요."
매초풍은 그 젊은 부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농가를 나왔다. 그녀는 마을 동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농민들이 그녀를 보자 한결같이 걸음을 세우고 넋을
놓았다.
마을 동쪽으로 가보니 정말 으리으리한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문 앞에는 양쪽에 돌사자
하나씩이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었다.
매초풍은 시씨네 소작인 하나만 잡아 돌산으로 급히 올라왔다. 소작인을 협박하여 시씨네
집 내막을 대충 알아냈다. 시대관인네 집에 있는 장정 중 우두머리 격은 시대(柴大), 시이
(柴二), 시삼 (柴三), 시사(柴四)라고 했다. 그들은 한 사부 밑에게 삼 년 동안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그런데 시대관인을 도와 관병들을 물리친 그 열 사람에 대해서는 소작인도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매초풍은 시대관인부의 일을 캐묻고 나서 손바닥으로 소작농의 뒷덜미 대추혈을 쳤다. 소작
농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뻗어 버렸다.
"아무래도 그 집이 강호의 어느 방파와 연계가 있는 것 같아. 사매, 오늘 무공 연마는 그만
두는 게 어때?"
진현풍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고집이 센 매초풍은 반대를 했다.
"난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보고 싶어요."
사실 그녀는 무공을 연마하는 것보다 여소교에게서 소녀공을 얻어내는 게 더 급했다. 물론
두 가지 일은 서로 연관이 있었다.
삼경 무렵, 매초풍과 진현풍은 야행복으로 갈아입었다. 여소교는 더 이상 혈도를 누르지 않
아도 좋을 만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매초풍은 그녀의 손발을 묶어 놓고 입에는 재갈을 물
렸다.
흑풍쌍살은 부엉이처럼 마을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들이 시대관인 담장을 넘어 소작농에게서 알아낸 길을 따라 북쪽 사랑방으로 접근해 갔
다.
두 사람은 나무 아래 몸을 숨기고는 동정을 살폈다.
매초풍은 작은 돌조각 하나를 집어 창문을 향해 던졌다. 그런데도 집 안에서는 오랫동안 기
척이 없었다.
'원래 무공이 뛰어난 사람은 작은 소리에도 잠을 깨는 법인데……, 그렇다면 너무 조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진현풍이 가만히 창문을 밀어 보았다. 창문은 잠겨져 있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창문을 밀고
들어가려고 했다. 매초풍이 그를 잡았다. 그녀는 침을 발라 창호지에 구멍을 내고는 안을 들
여다보았다.
넓은 실내에는 침대가 두 개 놓여져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다른 방으로 연결된 문이 있었다.
그리고 벽에 네 개의 칼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는 것도 보였다. 창문 바로 앞에는 긴 탁자가
있었는데 찻주전자와 먹다 남은 찻잔이 열 개 가까이 놓여져 있었다. 왼쪽에도 침대가 두
개 더 있었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흔적이 역력했다.
창문 사이로 역한 술냄새와 고리타분한 냄새들이 섞여 확 풍겼다. 두 사람은 살며시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매초풍은 곧장 왼쪽 침대로 가서 휘장을 걷었다. 침대 위에서 정신없
이 자고 있던 사내들의 혈도를 눌렀다.
다음 침대로 가려고 할 때였다. 한 사내가 깨어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매초풍이 얼른 사내
의 인후를 눌러 찍소리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다시 대혈(大穴)을 짚자 사내는 꼼짝도
못하고 늘어졌다. 진현풍도 나머지 두 사내의 혈도를 각각 눌러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다시 집 밖으로 나와 야경꾼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모두가 나이가 들고 몸이
약한 자들이라 실망이 되었다. 무공 연마에는 합당하지 않은 대상들이었다.
다른 사내들을 찾아 몸을 돌리려는데 한 방에서 인기척이 나며 불이 켜졌다. 매초풍과 진현
풍은 얼른 장미 숲 속으로 몸을 날렸다.
말소리가 가깝게 들려 왔다.
"이봐, 사제. 내가 뭐라고 하던가? 술을 그렇게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벌써 얼마나 마셔 댔
어?"
사제로 불린 사람이 웃으며 대꾸했다.
"난 술을 안 마셔도 밤중엔 꼭 일어나야 하오. 잠을 깨워서 미안하외다."
곧이어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스물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사내 하나가 내의 바람으로
나왔다.
"좋은 술에 좋은 안주에 어여쁜 종년까지 품에 안겨 주는데 왜 안 마셔? 그렇게 못하는 게
바보지!"
사내는 혼자 중얼거리며 흑풍쌍살이 숨어 있는 장미 숲으로 걸어왔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이
고는 땅에 바싹 엎드렸다.
사내가 오줌을 깔기기 시작했다. 오줌발이 세차게 뿜어지며 매초풍의 얼굴로도 몇 방을 튀
었다.
'저 놈이……? 당장 잘라 버릴테다!'
매초풍이 이를 갈며 사내를 노려보았다. 사내가 시원하게 방뇨를 마친 다음 돌아섰다. 이때
매초풍이 솔개처럼 몸을 날려 사내의 뒷덜미를 잡아채려고 했다. 사내가 그것을 눈치채고는
얼른 몸을 엎드렸다. 그러나 매초풍은 오른쪽 손바닥으로 사내의 등에 있는 영대(靈臺)와 지
양(至陽)의 혈도를 눌러 버렸다.
사내는 집채와도 같은 큰 힘이 체내로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겁이 나서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매초풍은 사내를 움직이지 못하게 잡아 놓았다.
이때 집 안에서 다른 한 사내의 웃음 소리와 여인의 교성이 들려 왔다. 그러더니 사내가 밖
에 대고 소리쳤다.
"사제, 우린 침대를 바꿨다. 우리 계집들을 한번 바위서 놀아 보자구!"
그러자 다시 여인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호호호, 이러지 말라니까요. 사형제끼리 이러면 어떡해요? 망측하게……."
"망측하긴, 이래야 진짜배기 재미가 있다구."
매초풍과 진현풍이 살금살금 문 쪽으로 다가갔다. 인기척이 나자 안에 있던 사내는 오줌 누
러 갔던 사제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사제, 윌 꾸물거리고 있어? 어서 들어오라구. 우리 누가 더 센가 한번 내기해 보자구."
매초풍이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침대 위에는 한 여인이 젖가슴을 드러내 놓고 누워 있었다.
다른 침대에는 남녀 한 쌍이 역시 벌거벗은 채 서로 끌어안고 빨아대고 있었다.
"아니……?"
사내가 매초풍을 발견하고는 기겁을 했다. 매초풍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런, 또 하나 들어왔네!"
그는 계집종으로 착각한 듯했다. 매초풍이 냉소를 던졌다.
"난 이 집 종년이 아니라 네 놈의 할머니시다!"
그제야 사내는 매초풍을 수상한 눈초리로 주시했다.
매초풍 뒤로 진현풍이 모습을 나타냈다.
"흐흐……!"
매초풍이 곧 갈고리처럼 손을 만들어 달려들었다. 그러자 사내가 그때까지 품에 안고 있던
계집을 얼른 방패처럼 돌려 막았다.
그렇다고 물러설 매초풍이 아니었다. 그녀는 주춤하지 않고 다섯 개 손가락에 힘을 주어 계
집종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녀의 손가락이 박히며 피가 뿜어졌다. 정확히 계집종의 심장을
찌른 것이었다.
"아악……!"
계집종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그러자 다른 침대에 있던 계집이 튀어오르듯 일어났다.
"아아……."
그녀가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도망치려고 했다. 매초풍의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자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가 문 쪽으로 달려가자 매초풍이 장을 날렸다.
"헉!"
등짝을 얻어맞은 계집종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녀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사형이라는 자는 매초풍이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엉거주춤 일어섰다.
"어디 이 할미하고 놀아 보자."
매초풍이 징그럽게 웃으며 가까이 갔다.
"으아악……!"
사내는 귀신이라도 본 듯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그는 알몸으로 막 창문을 향해 몸을 날리
려 했다. 그런데 그만 시커먼 물체에 가로막혀 도망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진현풍이 달려와
그의 앞에 버티고 선 것이다.
매초풍이 그자의 뒷덜미를 움켜쥐며 말했다.
"허튼 짓하면 모가지를 비틀어 놓겠다!"
사형이란 자는 사지를 벌벌 떨며 알겠다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가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자 매초풍이 그의 혈도를 눌러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불을 끄고 한 사람이 하나씩 사내들을 옆구리에 끼고는 밖으로 나왔다.
돌산으로 돌아온 그들은 축 늘어진 사내들을 여소교 곁에 눕혀 놓았다. 여소교는 아직도 움
직이지 못하고 늘어져 있었다.
그들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다시 시대관인부로 가서 한 번에 두 사람씩 데려왔다. 그중
에서도 몸이 건장하고 무공이 뛰어나 보이는 자들만 골라 열심히 날랐다.
"이제 낮에 만났던 그 농가의 젊은 부부만 잡아오면 여덟이 돼요. 그런 다음 무공 연마를
하기로 해요."
그들은 다시 마을로 내려갔다. 그들은 농가집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들어 있던 젊
은 부부는 소스라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느닷없이 닥친 두 사람에게 혈도를
빼앗겨 반항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갓난아이가 잠에서 깨어 울기 시작했다. 진현풍이 죽이려고 손을 번쩍 들었다.
"놔둬요. 어린애는 내게 필요해요."
매초풍이 아이를 품에 안았다.
돌산으로 돌아온 매초풍은 아이를 살폈다. 아이는 숨이 막혀서 인지 기절을 한 상태였다. 매
초풍은 아이에게 진기를 불어넣으며 한동안 아이의 전신을 주물러댔다. 잠시 후 아이가 우
렁찬 울음 을 토했다.
매초풍은 또 여소교의 입에 채웠던 재갈을 풀고 철도도 회복시켜 주었다. 그런 다음 아이를
여소교에게 안겼다.
"이 아인 누구죠?"
울어대는 아이를 연신 추스리며 여소교가 눈을 왕방울만하게 만들었다.
"왜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너하고 닮은 구석이라도 있느냐? 혹 네가 낳은 아이는 아니냐?"
"어머, 해괴망측하게 그런 소리를……."
여소교가 토라지듯 고개를 홱 돌렸다.
매초풍이 싱긋 웃으며 진현풍을 돌아보았다.
"이제 시작해요. 무엇부터 먼저 할까요? 구음백골조를 먼저 할까, 아니면……?"
"모두 신체가 건장한 사람들이니 우리의 수준으로는 구음백골조가 좀 부족할지도 몰라. 단
번에 손가락이 두개골을 꿰뚫지 못 하면 낭패거든. 오히려 최심장을 써보는 게 좋을 것 같
군."
매초풍도 그 말에 동조를 했다.
"한 사람이 한 명씩 맡아 가장 약한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구음진경>에 적혀 있다면서
요?"
매초풍의 말에 진현풍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구음진경>의 글은 알아보기 힘들어 잘은 모르지만 내가 체험한 바로는 그래."
"그렇다면 오차가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그렇지는 않아. 우린 처음부터 내가 깨달은 초식대로 연마했었잖아. 그래도 무공이 날로 발
전되어 갔지 언제 실패해 본 적이 있었나?"
진현풍이 자신하며 가슴을 내밀었다. 그러자 매초풍도 안심을 하는 눈치였다.
동사 황약사는 한번 보면 잊어버리지 않는 아내의 총명한 기억력에 의해 <구음진경>의 하
반부를 얻어냈었다. 그러니 흑풍쌍살이 훔쳐낸 것 역시 전부가 아니라 그 하반부일 뿐이었
다.
하반부에는 모두 적을 이길 수 있는 실용적인 초수들이 적혀 있었다. 그 초수들은 위력이
대단했다. 하지만 기초를 쌓는 비결에 대한 구절은 없었다. 그것은 <구음진경>상반부에 있
었다. 상반부에는 내공을 수련하는 도가의 큰 도리들, 그리고 권경(拳經)과 검리(劍理)들이
적혀 있었다. 그 대신 상반부에는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초수들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를 다 익혀야지만 완벽한 <구음진경>의 절묘한 무공을 얻을 수 있는 것
이었다. 왕중양은 유언으로 그 기서의 상반부와 하반부를 따로 감춰 두라고 했었다. 그 목적
은 바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상반부를 읽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약에 흑풍쌍살에게 <구음진경> 전체가 전해졌다면 강호 무림에 어떤 일이 생겼을지 아무
도 짐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글이 어려워 해독하기 어려운데 그것을 잘못 이해하고 연마했다가는 도리어 화를 불러올 수
도 있었다. 진현풍은 그런 믿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때문에 하나하나 연마해 나갈 때마다 신
중하게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곤 했다.
매초풍도 진현풍이 책을 많이 접해 자기보다 학식이 높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에게
먼저 경문을 파악하게 하고 그것을 토대로 전수를 받고자 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젊은 여인과 그의 남편의 혈도를 풀었다. 매초풍이 그녀의 멱살을 잡으며 진현풍
을 돌아보았다.
"아이를 낳은 지 석 달도 안 되고 젖도 있기에 고른 거예요. 뼈가 좀 연해졌을 수는 있지만
원기는 그런대로 충만하니 구음 백골조를 사용하기에 적합할 것 같아요."
"글쎄, 그건 사매 마음대로 하라구."
진현풍도 젊은 사내를 일으켜 세웠다. 사내는 계속 떨기만 할 뿐이었다. 한편 그의 아내인
젊은 여인은 아이가 낯모르는 처녀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고는 울부짖었다.
"그 애를 돌려줘요!"
매초풍이 웃었다.
"저 계집은 그래도 규방의 처녀이니 아이를 잘 건사할 거다."
그제야 젊은 여인은 매초풍을 알아보았다.
"아니, 낮에 우리 집에 와서 물을……. 그런데 왜 우리를……?"
"무공 연마를 위해 필요해서 모셔 왔지."
그녀가 다시 깔깔대며 젊은 여인을 돌려 세웠다. 한 손으로 그녀 뒷덜미의 대추혈을 쥐고
다른 손바닥을 허리 뒤에 있는 명문 혈(命門穴)에 갖다 댔다.
젊은 여인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아기는 절대 건드리지 마세요!"
매초풍이 그녀를 눌러 앉히고는 자신도 그 뒤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매초풍이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추천 (0) 선물 (0명)
IP: ♡.221.♡.30
23,511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4-03
0
72
나단비
2024-04-02
0
60
나단비
2024-04-02
0
68
나단비
2024-04-02
0
62
나단비
2024-04-02
0
45
나단비
2024-04-02
0
71
나단비
2024-04-01
0
70
나단비
2024-04-01
0
72
나단비
2024-04-01
0
101
나단비
2024-04-01
0
64
나단비
2024-04-01
0
57
나단비
2024-03-31
2
69
나단비
2024-03-31
2
112
나단비
2024-03-31
2
84
나단비
2024-03-31
2
97
나단비
2024-03-31
2
65
나단비
2024-03-30
2
64
나단비
2024-03-30
2
64
나단비
2024-03-30
2
84
나단비
2024-03-30
2
63
나단비
2024-03-30
2
148
나단비
2024-03-29
2
166
나단비
2024-03-29
1
66
나단비
2024-03-29
1
63
나단비
2024-03-28
1
69
나단비
2024-03-28
1
52
나단비
2024-03-28
1
50
나단비
2024-03-27
1
54
나단비
2024-03-27
1
66
나단비
2024-03-27
1
76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