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풍류여마 매초풍 3

3학년2반 | 2022.02.24 07:52:56 댓글: 0 조회: 811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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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華山論劍) 제17권 6부 풍류여마 매초풍 II
제목: 화산논검 제17권 (전22권)
지은이:
옮긴이: 박영창
- 차례 -
제8장 여혈의를 구해 준 매초풍
제9장 흑풍쌍살의 결별
제10장 해검계의 무예시합
제11장 오혈궁의 비밀
제12장 변홍의와 매초풍의 만남
제13장 동굴 속에 갇힌 소.궁주
제14장 오혈궁 제자가 된 매초풍
제15장 끝없는 내란과 음모
제8장 여혈의를 구해 준 매초풍
매초풍과 진현풍은 태호 가의 풀밭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요. 며칠 동안 고심했던 일이 헛되지 않게 되어 그들 두 사람의 기분은 아주 유쾌하
였다. 하지만 진현풍은 내심 좀 찜찜한 게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비록 무고한 사람들을 제
멋대로 죽이긴 했을망정 간계를 꾸며 연약한 여인을 해치는 일은 탐탁치 않았기 때문이었
다. 여소교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아주 흡족해 한 사람은 매초풍뿐이었다.
매초풍은 말 한마디 없이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또 약은 꾀를 짜내 새 사건을
저지를 궁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매초풍이 진현풍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우리 어서 가요."
"어딜 가자고 그러는 거요? 반나절이나 싸움을 했는데 원기나 회복하도록 좀 쉬어야 하지
않겠소?"
"그럴 시간이 없어요. 우린 다시 소요관으로 돌아가야 돼요."
"소요관으로 돌아가다니!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거야?"
매초풍이 진현풍의 손을 탁 때리며 쏘아붙였다.
"당신이야말로 허튼소릴 하고 있어요!"
"내가? 당신이 하는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라구? 그럼 농담이겠지."
그러자 매초풍이 흘겨보면서 소리 질렀다.
"정말 안 갈 거예요? 그럼 좋아요. 저 혼자라도 가겠어요!"
매초풍은 이렇게 말하더니 휙 돌아서서 종종걸음을 쳤다. 할 수 없이 진현풍이 급히 뒤쫓아
가며 물었다.
"여보, 당신 정말 소요관으로 돌아가려는 거요?"
"물론이죠. 내가 언제 당신한테 거짓말한 적 있었나요? 난 여소교가 보고 싶어졌어요."
"여보, 우리가 소요관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으니 악가란 놈은 우리에게 이를 갈고 있을 거
요. 소요관에는 숱한 고수들이 있단 말이오. 팔대 금강들만 해도 대적하기 어려운 판인데 다
시 그곳으로 가는 건 호박 쓰고 돼지 굴에 들어가는 격이오. 게다가 여혈의도 아직 그곳에
있는데 우린 그자의 적수가 못 되지 않소. 또 철선서생 하종과 철권패왕 노위까지 있단 말
이오."
"그들끼리 싸우도록 내버려두고 우린 여소교만 가만히 구해 가지고 나오면 돼요."
"여보, 당신은 또 여소교를 해치려고 그러오?"
매초풍이 남편을 노려보더니 탄식하듯 말하였다.
"오, 이처럼 가슴 아파하는 이도 있다니……! 여소교는 정말 복도 많은 여자야."
매초풍은 다시 앙칼진 어조로 바꾸어 말을 이었다.
"만일 누구든 여소교를 해치려 든다면 가만 놔두지 않겠어요!"
진현풍은 그게 자기를 비꼬아서 하는 말임을 알아차리고 웃으면서 대꾸하였다.
"이 진현풍도 가만 놔두지 않겠소?"
그들 부부는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속궁리를 하면서 소요관 쪽으로 발
길을 옮겼다.
멀리서 바라보니 소요관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피비린내 나는 살육 장면이 언제 있었
냐는 듯이 평온해 보였다. 소요관 대문 앞에는 파수를 보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흑풍쌍살은 뒤로 돌아가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그들이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옆방에서 남
녀 한 쌍이 손에 검을 들고 뛰쳐나왔다.
동시와 철시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소요관의 경계가 이처럼 삼엄하단 말인가? 여소교를 구출하려면 좀 힘이 들겠는걸.'
한 쌍의 남녀가 달려들자 동시는 맞받아 나가면서 왼손으로 몸을 막고 오른쪽 장을 곧추 내
밀면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진현풍의 오른쪽 장에 얻어맞은 사나이는 무공이 보
잘것없는지 미처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심장이 파열되어 죽어 버렸다. 뜻밖의 상황에 어리
둥절해진 진현풍은 자기 손바닥을 보다가는 쓰러져 죽은 시체를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번에는 철시 매초풍이 다섯 손가락의 갈고리로 여인의 두개골을 걸어 채었는데 그 여인도
아무런 반항을 못하고 죽어 버렸다.
흑풍쌍살은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죽은 남녀가 등에 보따리를
하나씩 메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찢어진 보따리 사이로 금은 보물들이 삐져 나와 있었다.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진현풍이 웃음을 터뜨렸다.
"후훗, 도적들이었군 그래!"
두 사람이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그들은 급히 꽃밭 속
으로 몸을 숨겼다.
뒤미처 몇몇 남녀들이 손에 병장기를 들고 잔등에 보따리들을 짊어진 채 황급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 남녀들이 멀리 가버리자 진현풍이 의아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여보, 소요관에 웬 도적들이 이리도 많소? 보아하니 소요공자라는 건 헛소문뿐이고 자기
집도 변변히 지킬 줄 모르는 놈이었나 보오."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일이 아니에요."
그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좀 전의 그 남녀들이 되돌아오며 지껄여대는 것이었
다.
"재수 없어. 정문으로는 나가지 못하겠군!"
"허 참, 모든 문은 다 파수를 보고 있으니 어떡하면 좋을까?"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 사내가 말하였다.
"공자까지 도망쳐 버린 판국에 이 소요관의 문지기들은 그래도 자기 직분을 지키려고 저러
고 있단 말인가. 제길, 재수가 없으려니……."
그러자 한 여인이 재촉하였다.
"무슨 좋은 수가 있는지 어서 말씀해 보세요."
그 나이 많은 사내가 여인의 볼을 꼬집으며 대답하였다.
"임자가 나하고 하룻밤 같이 잔다면 내가 임잘 데리고 빠져 나가 주지."
그러자 몇몇 여인들이 웅성거렸다.
"얘야, 어서 그러겠다고 대답해라. 사내란 다 한가지인데 누구하고 살을 섞든 무슨 상관이
니? 다 똑같아."
"그렇찮구. 생강은 늙은 것일수록 매운 맛이 더 난다더라. 넌 오히려 행운을 만난 줄 알아!"
그 여인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좋아요. 그러면 그렇게 하지요. 당신이 절 데리고 이 소요관을 빠져 나간다면 하룻밤이 아
니라 열 밤이라도 함께 잠자리에 들지요."
나이 많은 사내가 너무 좋아서 실눈을 만들었다.
"좋아. 군자 일언은 중천금이지."
여인이 그 사나이의 손바닥을 치면서 재촉하였다.
"그럼 빨리요!"
"그러다가 후회하면 어떡할래?"
그러자 여러 여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우리들이 가만 놔두지 않겠어요!"
그들은 흥정이 끝나자 곧 그 자리를 떠났다.
매초풍이 득의양양한 기색으로 말하였다.
"아마 악처후가 여혈의한테 놀라서 도망간 모양이에요. 지금 소요관에서는 모두 무서워 벌
벌 떨고 있으니까 우리가 들어가기 안성맞춤이에요."
흑풍쌍살이 꽃나무 숲을 헤치고 나와 보니 앞에 정자가 하나 보였다. 좀더 앞으로 걸어가니
소요루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때 갑자기 사람들이 벅적대는 소리가 났다. 흑풍쌍살은 다시 몸을 숨기는 수밖에 없었다.
좀 전에 소요관을 빠져 나가려던 사람들이 쫓겨오고 있었고, 그 뒤로 두 사내가 욕설을 퍼
붓고 때로는 발로 걷어차면서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 두 사내란 다름아닌 늙은 자라와 작은
게였다.
정자 안에 들어서자 작은 게가 그들을 멈춰 세웠다.
"무릎을 꿇어!"
늙은 자라가 소리치자 그 사람들은 재빨리 꿇어 엎드렸다.
작은 게가 그 사람들 주위를 몇 바퀴 돌다가 갑자기 그 중에서 나이 많은 사내 앞에 멈춰
섰다. 작은 게가 주먹을 흔들다가 불시에 그 사람의 면상을 갈기자 대번에 앞니 몇 대가 부
러졌다. 나이 많은 사내는 그처럼 호되게 얻어맞고서도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어서 말해, 누가 이 못된 짓을 하자고 했지?"
작은 게의 물음에 나이 많은 사내가 입에서 흐르는 피를 삼키며 대꾸했다.
"나으리, 제가 아닙니다."
그러자 작은 게는 또 한 방 주먹을 안기었다.
"늙다리 같으니. 말도 못 알아듣는군. 누가 못된 궁리를 해냈는가를 물은 거지 네가 했냐,
안 했냐를 물은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내가 얼른 손가락질하며 가리켰다.
"저 사람들이 못된 궁리를 내 놓았지요."
그러자 모두들 불만스레 떠들어댔다.
"너구리같은 두상, 네 놈이 이런 궁리를 내어놓고도 일이 안되니까 우리한테 들씌우려고
해? 얻어맞아도 싸지!"
아까 나이 많은 사내더러 빠져 나가게 해달라고 사정하던 여인이 머리를 쳐들었다.
"나으리, 모두 저 늙다리가 우리한테 강요한 짓이에요. 저 늙다린 밖으로 나간 뒤 저와 열흘
동안 한 잠자리에 들겠다고 야단이었어요. 정말 늙은 색마라니까요."
작은 게가 머리를 돌려 늙은 자라한테 눈을 끔뻑거려 보이고는 히죽히죽 웃어댔다.
"군자는 여인을 건드리지 않는 법이야."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난간 옆에 가 앉았다.
늙은 자라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그 여인 앞에 와 섰다. 그는 투박한 손으로 그 여인의 턱
을 쳐들며 을러대었다.
"나쁜 년 같으니. 그래 저 놈이 정말 네 년과 열흘이나 한 잠자리에 들겠다고 말했느냐?"
그 여인은 겁먹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나이가 항변을 했다.
"나으리, 저 년이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 년이 자기를 빠져 나가게 해주면 열흘 동안
한 잠자리에 들겠다고 했습지요."
"더러운 늙다리 같으니, 내가 아무리 천한 년이라도 네 놈과 잠자리를 같이할 줄 아느냐?
나으리, 저 놈의 말을 믿지 마세요."
그 여인은 질세라 앙탈을 부렸다.
늙은 자라가 대충 사태를 짐작한 모양인지 을러대기 시작했다.
"이 년아, 누가 너더러 말하라고 했느냐? 평소에 이 늙은이가 네 년에게 좀 친근하게 다가
가면 네 년은 미꾸라지처럼 나한테서 빠져 나가서는 낯이 반반하게 생긴 젊은 놈들만 찾아
다니지 않았느냐? 이 년아, 그래 오늘은 어쩔테냐?"
여인은 눈웃음을 살살 치며 늙은 자라에게 알랑거렸다.
"그저 나으리께서는 분부만 내려 주세요. 만일 나으리에서 절 내다바치면 전 죽는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절 남겨 주기만 한다면…… 전……."
늙은 자라가 여인한테 몸을 가까이 가져가면서 슬쩍 떠보았다.
"그래 어쩔테냐?"
여인은 교태를 부리면서 대답했다.
"그럼 전 나으리의 사람이 되겠어요."
늙은 자라가 기뻐서 훌쩍 뛰더니 그 여인을 잡아 끌고 가면서 소리쳤다.
"작은 게, 그 나머지 놈들은 모두 자네가 맡아 처리하게!"
"영웅도 여색 앞에선 맥을 추지 못하는 판인데 영웅도 아닌 늙은 자라야 더 말할 게 뭐 있
겠는가!"
작은 게는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리더니 꿇어 엎드려 있는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난 너희들을 법으로 다스리게 할테다!"
그러자 사람들은 황급히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나으리,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자 작은 게가 눈알을 희번득거리며 마치 혼잣말을 하듯 씨부렁거렸다.
"내가 너희들을 내다바친다 해도 나한테 주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내가 너희들을
내다바치지 않는다 해도 나한텐 주어지는 게 없단 말이야. 늙은 자라는 그래도 미인을 얻어
갔는데 난 그것도 없단 말이야……."
엎드린 사람들 속에 끼여 있던 두 여인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하였다.
"우리 두 자매가 비록 미인은 아니지만 나으리님의 시중을 들어드리지요."
그 두 여인을 힐끔 쳐다본 작은 게는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는 듯이 지껄였다.
"이 나으리가 계집이 없어 그러는 줄 아느냐? 그래 네까짓 암탉들이 내 여편네 노릇을 하려
구?"
나이 많은 사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으리, 제가 나으리를 위해 공을 세우렵니다."
작은 게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야? 어서 말해! 만일 그게 대수롭지 않은 것이면 네 놈의 껍질을 벗길테다!"
"제가 감히 나으리를 속일 리야 있겠습니까? 나으리, 공자님을 쫓아낸 그 젊은 미남자를 아
시죠?"
정자 밖에서 동시와 철시가 서로 마주 쳐다보며 같은 생각을 하였다.
'아마 여혈의를 말하려는가 보구나. 그래 여혈의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동시와 철시는 귀를 바짝 세우고 나이 많은 사내가 하는 말에 귀기울였다.
한참 후 작은 게가 손을 내저으면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무슨 여혈의인가 하는 놈이 오혈궁 사람이고 그가 공자가 가지려는 계집애를 빼앗았다
구? 그래 넌 놈들의 위풍을 높여 주고 우리 자신을 내리깎느라고 그따위 소리를 하는 거
야? 젠장할 놈 같으니!"
작은 게는 나이 많은 사내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나이가 간교한 웃음
을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아니올시다. 지금이야말로 그 놈의 위풍을 납작하게 만들어 놓고 나으리의 위신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그 말씀입니다."
"늙다리야, 빙빙 돌리지 말고 직접 말하거라."
"며칠 전에 공자님께서 장인을 불러다 덫을 만들지 않았습니까요? 호랑이 두 마리를 사들여
서 집에서 호랑이를 사로잡는 유희를 즐기려고 말입니다."
작은 게가 뺨따귀를 한 대 올려붙이며 을러대었다.
"제기랄, 네 놈은 또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고 있구나. 빙빙 에돌지 말고 직접 말하라
는데도 그러는구나."
나이 먹은 사내가 또 억지 웃음을 지었다.
"이 늙은 것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요? 공자님께서 그 덫으로 두 마리의 호랑이를 잡는
놀음을 미처 하기도 전에 사람 둘을 먼저 사로잡았는데 하나는 사내인 미남자이고 다른 하
나는 여인인데 경국지색이지요.……."
작은 게가 뺨따귀를 또 갈기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련한 늙다리야. 넌 계속 빙빙 말을 돌려 내 부화를 돋을 셈이냐! 그 남녀가 누구냐?"
"바로 여혈의와 또 공자님께서 탐내던 그 계집이지요."
정자 밖에서 엿듣고 있던 흑풍쌍살은 멍해지고 말았다. 여혈의는 대단한 고수인데 범 잡는
덫으로 그를 사로잡았다고 하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제야 작은 게도 놀란 기색으로 황급히 물었다.
"그래 여 아무개와 엽청청을…… 사로잡았단 말이냐?"
그 사나이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면서 대답했다.
"정말입니다요! 그 두 사람을 나으리께서 사로잡으면 대공을 세운 셈이 아니고 뭡니까요?"
작은 게는 그 말을 듣자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래, 대공을 세운 셈이고말고. 여혈의와 엽청청을 사로잡게 되면 공자님께서 꼭 나한테 후
한 상을 주실 거야. 그러면 그 뒤론 소요관에선 누구도 이 작은 게를 업신여기지 못하겠지,
그렇지 않나? 헤헤헤."
그는 너무나 기뻐서 두 번이나 재주넘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나이 많은 사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렇다면 넌 왜 이런 대공을 세우는 걸 싫어하는 거지? 흥, 네 놈이 감히 날 속이려구?"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요. 저라고 왜 대공을 세우는 걸 마다하겠습니까? 하지만 전 대공을
세우지 못할 것이니까 그러는 거지요. 여혈의란 놈이 덫에 갇혀 있긴 하지만 한쪽 다리가
밖으로 나와 있어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발로 걷어찬단 말입니다."
"네 놈은 손에 든 병장기로 왜 찍지 못했느냐?"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우린 무공이 형편없지요. 병장기로 찍기는 했으나 오히려 그자가 발
로 차는 바람에 병장기가 날라가 버렸습니다. 밥 짓는 후씨와 주씨가 잽싸게 식칼을 들고
달려들었지만 그자가 발길질을 하여 식칼을 날려 버린 다음 다시 발길질을 했는데 주씨는
발길에 채여 두 장도 넘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떨어져 피를 토하고 죽어 버렸고, 후씨도
얼른 피하느라고는 하였지만 두 다리가 발길에 채여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어찌나 날
쌔고 용맹한지 우린 머리를 싸쥐고 도망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 말을 들은 작은 게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젠장, 믿어지지 않아! 아무리 무서운 놈이라 할지라도 제깟 놈이 다리 하나로 어쩐단 말이
냐! 가자, 내가 가서 없애 버릴테다!"
그가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하자 모두들 그 뒤를 따라갔다.
그들이 떠나가자 진현풍이 그들을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여보 우리도 가서 돕지 않겠소?"
"누굴 돕는단 말씀이에요?"
"물론 작은 게를 도와야지. 당당한 방게 나으리를 말이오."
"물론 가야지요."
매초풍도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생각되어 그의 말에 동의했다.
두 사람은 가만히 그들의 뒤를 밟았다. 작은 게의 무리들은 흑풍쌍살에 비하여 무공이 형편
없이 약했던지라 누가 자기들의 뒤를 밟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소요공자 악처후가 여혈의한테 쫓겨 소요관을 떠나 도망하자 소요관에서는 일대 혼란이 일
어나 도망칠 놈은 도망치고 숨을 놈은 숨느라고 야단법석이었다. 악처후가 평소에 총애하던
호위대원들만이 직분에 충실하여 작은 두목들의 지휘하에 소요관의 주요한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니 소요관 내의 몇몇 관문들에는 파수를 보는 사람이 없었다. 흑풍쌍살은
작은 게 무리의 뒤를 따라 거침없이 소요관 내의 중심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작은 골목을 지나 한 뜨락에 들어서니 평평한 청석판 위에 사람의 키만큼한 높이에 한 장
너비를 가진 괴상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쇠붙이, 나무, 돌, 밧줄 따위와 다른 이름
모를 물건들을 서로 빽빽하게 혹은 헐렁하게 한데 이어 만든 것이었다.
이 괴상한 물건 속에 두 사람이 꼼짝달싹 못하고 갇혀 있었는데 바로 여혈의와 엽청청이었
다. 이 괴상한 물건이 바로 악처후가 장인을 청해다 만든 호랑이 잡는 공구였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뜨락에 들어서자마자 관목 숲 속에 몸을 숨겼다.
작은 게가 범 잡는 덫에 치인 여혈의와 엽청청을 보더니 너무 기뻐 나이 많은 사내의 어깨
를 철썩 치면서 웃어댔다.
"네 놈이 정말 속이지는 않았구나!"
"세상에 어떤 놈이 감히 나으리를 속이겠습니까요? 아마 그런 놈은 몇 안 될 겁니다요."
작은 게가 그 말에 두 눈을 부릅뜨자 나이 많은 사내가 금방 굽실거리며 말을 바꾸었다.
"아니, 그런 놈은 한 놈도 없을 겁니다요. 감히 속이려 드는 놈이 있다 해도 어미 뱃속에서
나으리의 호랑이 위풍을 보고는 질겁하여 나오지도 못할 겁니다요."
관목 숲 속에서 그 말을 들은 매초풍은 속으로 우스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저 늙다리가 발라맞추는 재간은 대단하군. 추어주는 척하면서 은근히 비꼬기까지 하는구
나.'
하지만 작은 게도 사내의 숨은 뜻을 알아차렸는지 또다시 두 눈을 부릅떴다.
"제기랄 녀석! 범 잡는 덫 앞에서 내가 호랑이 위풍을 갖고 있다고 말하다니……. 그래 내가
저 덫에 치이기를 원하는 거냐?"
그 말을 들은 매초풍이 또 속으로 비웃었다.
'저 늙다리가 발라맞추다가 밑창이 드러났구나.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깐 셈이지.'
아니나다를까, 나이 많은 사내는 또 한 번 뺨따귀를 얻어맞았다. 그는 작은 게한테 얻어맞아
얼굴이 시퍼렇게 피멍이 들었다. 얼굴이 퉁퉁 부어 오르니 얼굴에 가득했던 주름살들이 펴
져 한결 젊어 보였다.
작은 게가 범 잡는 공구 앞으로 다가가 빈정거렸다.
"여 공자, 엽 아씨. 너희 연놈들이 내 손아귀에 들었구나. 소요공자님이 돌아오시면 너희 연
놈들의 꼴을 보여드릴테다."
엽청청이 몰려온 사람들을 보고는 놀라 더듬거렸다.
"오빠, 저…… 저 놈들이 왔군요!"
여혈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작은 게를 쏘아보았다. 작은 게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
다. 그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저 놈의 무공이 대단하여 소요공자마저 당해내지 못했으니 각별히 조심해야겠다. 아까 모
두들 저 놈의 퇴공(腿功)이 무섭다고들 말하였지. 덫 밖으로 삐죽 나온 저 놈의 발을 조심해
야겠군.'
여혈의가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왜 와서 날 잡지 못하느냐? 넌 누구냐?"
엽청청이 말하였다.
"오빠, 저 놈을 보니 무공이 약간 있음 직한 놈이에요. 소홀히 대하지 마세요."
엽청청이 걱정스럽게 말하자 여혈의는 머리를 돌려 부드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은 게가 코방귀를 뀌더니 입을 열었다.
"난 소방게라고 부른다. 소요관의 규칙에 따라 소요공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방
게 나으리'라고 불러야 한다. 네 놈도 예외가 아니야. 헤헤헤, 알아들었으면 어디 한 번 불
러 봐라!"
여혈의가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나으리!"
예상 밖으로 무예가 대단한 고수가 자기를 '나으리'라고는 부르자 작은 게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짜식,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군!"
"난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사람이오. 어릴 적부터 말을 잘 들었지. 나으리, 당신 말을 잘
들을 테니 이리로 가까이 오시오."
"그래?"
작은 게가 천천히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만일 임자가 고분고분 말을 듣는다면 이 나으린 임잘 괴롭히지 않겠어."
여혈의가 보일 듯 말 듯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띄웠다.
"나으리, 그 놈은 아주 음험하니 조심해야 합니다!"
나이 많은 사내의 말에 작은 게는 깜짝 놀랐다. 자기가 여혈의의 오른발이 움직일 수 있는
사정거리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작은 게는 등골에 식은땀을 좌악 흘리면서 황급
히 뒤로 물러섰다.
"왜, 나를 두려워하는 거요?"
작은 게는 이를 악물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누가 저 놈의 다리를 베어 버리겠느냐?"
하지만 두려워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그러자 작은 게가 나이 많은 사내를 잡아 끌며
말하였다.
"네 놈이 나서거라."
그러자 나이 많은 사내가 손을 내저었다.
"안 됩니다. 나으리, 이 늙은 것은 저 놈의 적수가 못 됩니다!"
"그럼 넌 나의 적수는 된단 말이더냐?"
작은 게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분수자(分水刺)를 꺼내더니 나이 많은 사내의 가슴에 갖다 댔
다. 나이 많은 사내는 하는 수 없이 여혈의한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서며 칼을 빼어 들었
는데 칼 잡은 두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작은 게는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며 머리를 굴렸다.
'여혈의가 다리를 어떻게 놀리는가를 살펴보고 나면 방법이 생기겠지.'
나이 많은 사내가 범 잡는 공구 앞으로 다가가더니 밖으로 삐죽 나온 여혈의의 발을 칼로
힘껏 내리찍었다. 칼날이 여혈의의 다리에 거의 닿을 무렵 갑자기 그 다리가 칼 밑이 아니
라 칼 위에 놓이면서 나이 많은 사내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그 동작이 어찌나 번개같이 빠
른지 작은 게는 여혈의의 발놀림은 보지도 못하고 다만 나이 많은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나
가떨어지는 것만을 보았다. 나이 많은 사내는 코와 입으로 선지피를 콸콸 토하더니 이내 죽
어 버렸다.
작은 게는 나이 많은 사내가 죽은 건 대수로이 생각지 않고 여혈의의 오른쪽 다리를 어떻게
하면 베어 버릴 수 있을까만 골똘히 생각하였다.
여혈의가 다리로 어떻게 적수를 차 죽이는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작은 게는 연거푸 두 사람
이나 협박하여 여혈의의 다리를 자르게 하였지만 그들도 나이 많은 사내와 꼭 같은 결말을
보고 말았다. 그렇지만 작은 게는 여전히 여혈의의 다리 쓰는 초수를 알 수가 없었다.
이때 진현풍과 매초풍이 관목 숲에서 쏜살같이 뛰쳐나왔다. 진현풍은 훌쩍 공중으로 몸을
날려 대번에 남녀 몇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해놓았다. 작은 게는 뒤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은
들었지만 미처 머리를 돌리기도 전에 매초풍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그는 곧 몸이 마비
되는 것 같더니 꼼짝달싹할 수조차 없었다.
매초풍이 깔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으리, 축하해요. 오혈궁의 세 사형 중의 한 사람인 여혈의를 잡았고 또 소요공자가 사랑
하는 엽청청을 잡았으니까요. 하지만 나으린 황천으로 가야겠어요."
작은 게는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매초풍을 보고 하마터면 기절초풍을 할 뻔했다. 좀 전까지
도 우쭐거리며 위풍을 부리던 그는 아첨을 부리는 소심한 작은 게로 변해 버렸다.
"아이구, 노마님이셨군요. 이 작은 게가 멀리 나가 영접하지 못하여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작은 게는 이빨까지 딸그락거렸다.
갑자기 진현풍의 우렁찬 소리가 끼여들었다.
"여기 너의 할아비가 있는 걸 보지 못하느냐!"
작은 게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예, 나리…… 마님."
작은 게는 나리라고 불러야 할지 마님이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두 가지 호칭을 다 쓰고 말
았다.
매초풍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나으리, 당신은 학질에 걸렸나요? 떨기는 왜 그렇게 떠나요?"
"제발 나으리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그러자 진현풍이 매초풍한테 질책하듯 말하였다.
"여보, 저 놈이 그러지 말라는데 왜 나으리라고 부르는 거요?"
매초풍이 그 말을 듣더니 안색을 확 바꾸었다.
"이 몰상식한 놈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아야지."
매초풍은 욕설을 퍼붓고는 그의 뺨을 번갈아 가며 네 번 갈겼다. 작은 게의 볼은 금방 솥뚜
껑만큼 부어올랏다.
작은 게는 너무 아파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잘 때리셨습니다. 잘 때리고 말고요."
"잘 때렸다니까 나도 때려 주지."
진현풍이 웃으면서 뺨따귀를 네 번 올려붙였다.
작은 게는 입가로 피를 흘리면서 대꾸하였다.
"잘 때리는 게 아닙니다! 때리지 마십시오!"
"이 할아비가 널 예뻐하니까 이렇게 때려 주는 거다! 그런데 감히 때리지 말라고 말하다니!"
진현풍이 눈을 부라리며 또다시 그의 뺨을 네 대 더 때렸다.
작은 게는 하늘 땅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눈에 별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곧 코와 입으로
피를 흘리면서 기절하고 말았다.
범 잡는 덫에 치인 여혈의가 이 광경을 보고 나서 통쾌한 듯이 웃었다.
"흑풍쌍살, 멋지게 때렸소. 속이 다 후련하오. 이제 이 여 모가 당신들 손에 죽더라도 감사
하게 여기겠소."
매초풍이 여혈의의 발길이 미치지 못할 거리까지 다가가서 생글거리며 물었다.
"우리가 당신을 죽이리라고 생각되나요?"
"내가 당신들한테 원수를 갚으려 하기 때문에 당신들은 날 살려 둘 이유가 없지 않소. 당신
들이 날 죽이지 않더라도 악처후란 음적이 돌아오면 날 꼭 죽일 거요. 어차피 죽을 바엔 당
신들 같은 영웅의 손에 죽는 게 낫소."
매초풍이 숨넘어가듯 웃어댔다.
"호호호……! 동시와 철시는 강호에서 악명이 자자한데 영웅이라니오?"
"재간을 가지고 밥을 먹는 사람이나 사람을 죽여도 주위 놈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사람이
영웅이지 별것이 영웅이겠소!"
엽청청은 여혈의가 죽기로 작정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애걸하였다.
"언니, 이 오빠를 죽이지 말아요. 이 오빠는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만일 나의 상처
때문에 지체하지 않았더라면 이 그물에 걸려들지 않았을 거예요."
매초풍이 고개를 돌려 엽청청을 바라보았다.
"넌 정말 맘씨 좋고 선량한 처녀야. 여 공자가 널 맘에 들어하는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지.
내가 사내라도 너한테 반했을 거다."
여혈의의 얼굴이 벌개졌다.
"매초풍, 죽이려면 어서 죽일 것이지 엽 사매의 명성을 더럽힐 건 뭐냐? 엽청청은 청백한
처녀다!"
매초풍이 여전히 웃음을 흘리며 그들을 놀려댔다.
"여보, 저 두 사람을 좀 보세요. 마치 결혼 직전의 한 쌍의 남녀를 보는 것 같지 않아요?"
엽청청이 부끄러워하면서 말하였다.
"언니, 언니께서 날 이곳에 데리고 왔기에 난 악처후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어요. 난 그 점에
대해선 아주 감사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남을 함부로 헐뜯지는 마세요."
"동시, 철시. 나는 당신들과 원수지간이고 싸운 적도 있지만 엽청청은 아무 상관없잖소. 당
신들이 날 죽이는 건 마음대로 해도 좋지만 절대로 이 엽 사매는 해치지 마시오!"
매초풍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혈의, 나한테 용서를 빌겠어요?"
여혈의가 놀란 얼굴로 엽청청을 돌아보더니 딱 잘라 말하였다.
"이 여혈의는 평생 남한테 용서를 빈 적이 없소. 더군다나 여인 앞에서 용서를 빌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그러자 매초풍이 코방귀를 뀌었다.
"여혈의, 당신은 나한테 용서를 빈 적이 있다는 걸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해요. 이 매초풍이
당신을 가련하게 여겨 당신의 요구를 들어주는 거예요."
여혈의는 비로소. 안심이 되는지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좋소. 어서 마음대로 하시오. 난 반격하지 않겠소."
그러자 엽청청이 울음을 왈칵 터뜨리렸다.
"언니, 날 죽이더라도 저 오빠는 죽이지 마세요!"
매초풍이 열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굽혔다가 천천히 폈다.
"얘야, 울지 마라. 누가 저 사람을 죽인다더냐?"
엽청청이 눈물을 닦으며 반신반의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언니, 정말 저 오빠를 놓아주실 건가요?"
그러자 진현풍이 매초풍한테 따져 물었다.
"여보, 왜 이러는 거요? 그래, 호랑이를 산으로 놓아 보낼 셈이오?"
"저도 생각이 있어요."
여혈의가 눈을 뜨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철시, 당신의 손은 어쩔 수 없는 여인의 손이라 부드럽고 무르지 않을 수 없는가 보군 그
래."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면 기뻐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요?"
"유감스럽게도 난 당신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소. 이 여 모는 항상 목숨을 초개같이 여겨 온
사람이라오."
매초풍은 그 말을 듣고 전율을 느꼈다.
'자기 목숨도 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니 남의 목숨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 이런 자가 가
장 냉혹하고 두려운 거야.'
매초풍이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하지만 당신을 살려 주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매초풍과 여혈의는 한참 동안이나 서로를 쏘아보았다. 이윽고 여혈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의 여혈의도 여기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가 보군요."
엽청청이 다급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언니, 저 오빠를 괴롭히지 마세요."
"당신들 사형과 사매가 그렇게 서로 돌보아 주니 참 질투가 나는군요. 청청아, 안심해라. 내
가 너의 사형을 괴롭히지는 않을 테니. 나는 다만 저 사람의 퇴공을 좀 보고 싶을 따름이
다."
매초풍은 갑자기 여혈의의 오른쪽 다리의 무릎 아래를 손으로 자르려고 들었다. 여혈의가
매초풍의 공격을 느꼈을 때는 벌써 매초풍의 장이 다리에 거의 닿을 무렵이었다. 여혈의가
다리를 번개같이 놀려 반원을 그리더니 어느 사이에 그의 발이 매초풍의 손 위에 놓이면서
걷어차려 하였다.
"퇴공이 대단하군요!"
매초풍이 감탄하며 얼른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 여혈의의 공격 범위를 벗어났다. 그녀는 고
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세 사람을 죽인 게 과연 우연한 일은 아니었군요."
여혈의가 발을 옆으로 움직이자 매초풍은 발끝으로 여혈의의 독비혈(犢鼻穴)을 걷어찼다. 여
혈의가 곧 다리를 움츠렸다가 발끝으로 매초풍의 발끝을 힘껏 걷어찼다.
매초풍은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조금 비틀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두 발로 연거
푸 여혈의를 걷어찼다. 그는 그녀의 공격을 용케 피하면서 또다시 발길질을 하였다. 매초풍
은 몸이 공중에 솟았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악념이 되살아나 마공인 구음백골조의 초수로 여
혈의의 다리를 공격하려 하였다.
여혈의는 매초풍이 갈고리 같은 손가락으로 할퀴려 들자 '천변만화마환퇴(千變萬化魔幻腿)'
의 초수를 부리며 바람 소리가 나도록 다리를 휘둘렀다.
구음백골조의 초수는 정채로우면서도 외문(外門)의 무공이라 적수가 강하게 나올수록 점점
더 강하게 맞서는 특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매초풍은 한참 동안 쌍갈고리 손을 휘둘렀으
나 여혈의의 다리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매초풍은 조급해졌다. 여혈의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자기 체면이 깎여도 여간 깎이는 게 아
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기를 쓰고 덫에 가까이 다가가더니 한 손으로는 가슴을 막고 다른
한 손은 덫 밑에 넣어서 여혈의의 다리를 틀어잡는 데 성공했다.
여혈의가 코방귀를 뀌면서 투덜거렸다.
"이기긴 하였지만 무공답지 못하군……."
"이기면 이긴 거고 지면 진 거지 무슨 잔소리예요? 무슨 수단을 쓰든지 상관없는 거에요."
여혈의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매초풍의 비굴함을 비웃는 것인지 자기의 처지가
한심하여 그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마침내 탄식조로 말하였다.
"내가 졌소."
"승패는 병가지상사지요."
"지면 진 거요."
드디어 매초풍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기색이 떠올랐다.
"당신은 기필코 나를 이길 그날을 생각하고 있겠지요?"
"그렇소. 내가 이 덫에서 놓여 나가기만 하면 꼭 당신한테, 아니 흑풍쌍살한테 도전할 거요.
난 이길 수 있다고 보오."
매초풍이 한바탕 웃어대더니 말하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지금 아무런 승산도 없어요. 듣자니, 여 공자께서는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지요, 그런가요?"
여혈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할 따름이었다. 그가 어두운 낯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요."
"나도 그 말을 믿어요. 그러기에 당신은 덫에서 나오면 반드시 나와 싸워 이기려 할 거예요.
그렇잖으면 당신은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테니까요."
여혈의가 쌀쌀하게 대꾸하였다.
"철시, 당신은 그 젊은 나이에 그런 맘을 먹다니 실로 무서운 일이오. 이 여 모는 강호에서
그대가 유일한 여중호걸이라고 인정하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난 당신을 풀어 드리고 싶지만 먼저 세 가지 조건에 대답해야 해
요."
"무슨 요구 조건인지 좌우간 말해 보오."
"첫째, 당신은 해검계(解劍溪) 무예시합의 전후 관계를 알려 주어야 해요. 조금이라도 속여
서는 안 돼요."
"그거야 쉬운 일이지."
이때 엽청청이 끼여들었다.
"오빠, 궁주께서는 우리들더러 해검계 무예시합의 비밀을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하셨
어요."
여혈의가 그녀한테 머리를 돌리며 말하였다.
"궁주께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시끄럽게 굴까 봐 싫어하시지만 오늘 우리 두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말했다면 용서하실 거야."
매초풍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둘째, 내가 당신을 풀어 준 뒤 바로 우리들을 찾아 겨루려고 해선 안 돼요. 적어도 해검계
무예시합이 있은 뒤에나 겨루기로 해요."
"좋소. 그렇게 하겠소."
"셋째, 당신은 영원히 우릴 해쳐서는 안 돼요. 더더욱 남을 도와 우리 부부와 대적해선 안
돼요."
"당신은 역시 주도면밀하군. 좋아. 그 세 번째 조건도 동의하오. 그러니 어서 우리들을 풀어
주시오."
매초풍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빈말로는 안 돼요. 맹세를 하세요."
그 말을 들은 여혈의는 잠시 고민하였다.
'저 년을 속여서라도 덫에서 풀려나기만 하면 단번에 때려죽이려 했는데 저 년은 여우보다
도 더 교활하구나. 나더러 맹세를 하라고 하다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망설이는 여혈의를 보고 매초풍은 그 속을 꿰뚫어 보았다.
"당신은 덫에서 풀려나자마자 날 죽일 생각이지요? 흥, 어림도 없는 소리! 여 공자, 그래 맹
세를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엽청청이 다시 끼여들었다.
"오빠, 매초풍 언니는 좋은 사람이에요. 이 지경이 된 지금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겠다고 대
답하세요."
엽청청이 애원하는 바람에 여혈의는 매우 동요하였다.
'청청이가 처음으로 나한테 하는 부탁인데 들어주지 않을 수 없구나.'
여혈의는 드디어 결심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흑풍쌍살, 이 여혈의는 당신들이 내어놓은 세 가지 조건을 다 들어주겠소. 만일 나의 결심
을 후회한다면 벼락을 맞아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이 세상에 다신 나오지 않겠소."
그때는 미신이 풍미하던 때라 여혈의는 맹세를 하면서 저도 모르게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매초풍이 손뼉을 치면서 말하였다
"통쾌하군요. 역시 호한은 달라. 좋아요. 먼저 해검계 무예시합의 비밀부터 털어놓으세요."
"내가 이미 맹세를 했으니 자연히 비밀을 털어놓을 건데 먼저 우리들을 덫에서 풀어 주어야
할 게 아니겠소."
매초풍이 진현풍을 잡아 흔들며 물었다.
"여봐요. 내가 저 사람들을 풀어 주겠다고 했나요?"
그러자 진현풍이 맞장구를 쳤다.
"난 들은 일 없는데."
"당신은 들은 일 없고 나도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단 말이에요. 제가 어디 저 사람처럼 맹
세를 하였던가요?"
여혈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가 다시 해쓱해지면서 이를 악물었다.
"매초풍, 당신은 왜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요? 여인들의 마음은 다 그렇게 지독하오?"
"아무리 지독하다 해도 여 공자가 한 맹세보다는 지독하지 않지요."
여혈의는 속으로 화가 치밀었으나 덫에 치인 몸이라 그저 눈을 감고 화를 삭이는 수밖에 없
었다.
매초풍이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멍텅구리처럼 쉽사리 속아넘어가는군요. 염려 마세요. 난 당신을 구해 줄 거예요. 그러니
어서 해검계 무예시합의 비밀을 얘기해 주세요."
엽청청이 조급한 기색으로 여혈의를 바라보았다. 여혈의가 눈을 번쩍 뜨더니 쌀쌀한 어조로
말하였다.
"이제 보니 당신이 이 덫을 풀 수 있을는지 의심스럽군."
순간 매초풍은 가슴이 뜨끔하였다.
'난 이 덫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는데 만일 풀지 못하면 이거 망신인데…….'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매초풍은 큰소리를 쳤다.
"그런 재간도 없이 어떻게 조건을 내걸었겠어요!"
그러고 나서 매초풍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덫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진현풍이
매초풍의 심사를 알아차리고는 그녀를 거들기 위해 일부러 말머리를 돌렸다.
"여혈의, 당신은 우리가 누구의 제자들인지 알고 있소?"
"도화도에서 도망쳐 나온 황약사의 두 제자라는 건 강호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
실이오."
"황약사께서 덫을 만들고 푸는 재간이 천하에서 제일이라는 것쯤이야 알고 있겠지요?"
매초풍이 그의 말을 얼른 받았다.
"그분의 제자들이니까 아주 형편없지는 않겠죠."
그녀는 이미 덫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던 것이다.
"좋소., 당신을 믿겠소. 해검계의 무예시합은 삼 년 전 우리 오혈궁의 묘 궁주와 절정공자
탁운백 간의 사건에서 유래된 거요."
여혈의가 이렇게 운을 떼자 매초풍이 아는 척 끼여들었다.
"그건 저도 알아요. 묘상이 탁운백이 사랑하던 여인 유정아를 꾀어 갔지요. 그래서 화가 치
민 탁운백이 무예시합을 신청했구요."
"흥, 자신의 별호를 절정이라고까지 지은 탁운백이 째째하게 여인 하나 때문에 목숨 걸고
싸운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지."
"그럼 다른 이유가 있었단 말인가요?"
"유정아가 술 마시고 오입질하고 도박을 일삼는 탁운백의 악습에 아주 불만을 느꼈던 거요.
하지만 묘 궁주는 호걸다운 영웅 남아였소. 그러니 유정아가 묘 궁주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었겠소? 미인이란 영웅을 좋아하는 법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 유정아는 욕심사
납게도 탁운백을 떠날 때 그 집에서 조상때부터 물려 내려온 보물인 천 년 묵은 산삼을 훔
쳐 가지고 갔단 말이오."
동시와 철시가 언뜻 생각나는 게 있는지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루에서 철권패왕도 천 년 묵은 산삼 이야기를 하였었지.'
여혈의가 말을 이었다.
"천 년 묵은 산삼이라 하지만 천 년까지야 자랐을 리 있겠소? 하지만 팔구백 년은 자란 것
인데 사람의 모양을 꼭 닮아 오관과 사지가 다 갖추어져 있고, 그 주위에는 팔괘와 똑같은
위치께 작은 산삼이 마치 여덟 동자(童子)처럼 둘러싸고 있어 정말 희한한 보물이었소. 묘
궁주의 말씀에 의하면, 천 년 묵은 산삼과 여덟 개의 동자삼을 복용하면 삼백 년을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십팔 년이라야 닦을 수 있는 일급 고수의 공력이 생긴다고 하오."
매초풍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천 년 묵은 산삼에 그런 효능이 있다면 탁운백은 무엇 때문에 그걸 복용하지 않고 갖고 있
었나요? 그리고 묘 궁주는 왜 그걸 복용하지 않은 거죠?"
"그 천 년 묵은 산삼이 그런 기막힌 효능을 갖고 있다지만 그걸 복용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
이 없지요. 보통 산삼도 양기를 너무 성하게 만들기 때문에 잘 복용하지 않으면 음이 허해
져서 열이 나고 코피를 흘리게 되거늘 천 년 묵은 산삼은 더할 게 아니겠소. 그러니 절대
함부로 복용할 수 없는 거지요. 탁운백도 무공을 닦는 사람이라 공력을 늘리고 싶어하면서
도 그 산삼을 복용하지 못한 걸 보면 아주 신중히 대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오. 잘못하면
목숨까지 위태로운 일이니까……."
진현풍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러면 그 무예시합이 천 년 묵은 산삼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 말씀이군요?"
"그렇소. 탁운백은 자신의 별호처럼 절정을 할 수는 있어도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대물림 보
배를 찾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요. 그래서 삼 년 전에 그는 묘 궁주와 이 무예시합을 하기
로 약정하고, 만약 그가 이기면 그 산삼을 돌려받고 묘 궁주가 이기면 산삼을 포기할 뿐더
러 오혈궁을 원수로 여겨서도 안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던 거요."
매초풍이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물었다.
"그럼 무예시합에 유정아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말씀이군요."
"유정아는 이젠 묘 궁주의 일곱 번째 부인인데 탁운백이 그녀를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
소."
잠시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저마다 생각에 잠겼던 것이다. 여혈의가 그 침묵을 깨듯
매초풍을 쏘아보며 말하였다.
"철시, 이젠 약속을 지키시오!"
매초풍이 꿈속에서 깨어난 듯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손으로 널빤지 한 개를 두 번 두드리니
그 널빤지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뿌지직―!
큰소리가 한 번 울리더니 범 잡는 덫이 쫘악 벌어지면서 여혈의와 엽청청의 모습이 완연히
드러났다. 여혈의가 엽청청의 손을 잡고 한 장 남짓 훌쩍 뛰어나왔다. 머리를 돌려 살펴보니
그 덫이란 청석판 위에 놓여진 하나의 큰 쇠침대였던 것이다.
매초풍은 범 잡는 덫이 그처럼 교묘한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그들을 놀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 공자께서 청청이와 함께 이 침대에서 쉬려고 하다가 이 꼴을 당한 게로군요."
엽청청은 아직도 얼굴이 창백하긴 하였으나 조금은 안심이 되는 듯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언니는 정말 귀신같이 알아맞추는군요……."
여혈의가 진현풍한테 혈도를 찔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몇몇 남녀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
갔다.
"네 놈들이 이 여혈의를 사로잡으려고?"
그는 주먹질과 발길질 몇 번에 그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엽청청이 깜짝 놀라 물었다.
"오빠, 그 사람들은 왜 죽이는 거예요?"
흑풍쌍살도 내심 깜짝 놀랐다.
'우린 <구음진경>에 기재된 무공을 배우느라고 사람들을 죽였지만 여혈의는 때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구나. 실로 절정공자보다 더 절정(絶情)인 인간이로구나.'
매초풍은 한편으로 여혈의가 맹세를 지키지 않을까 봐 근심은 되었지만 웃음 띤 얼굴로 말
하였다.
"여 공자, 어서 청청이를 데리고 가세요. 청청은 내상을 입었으니까 조리를 잘해야 할 거에
요."
여혈의가 매초풍을 노려보았다.
"이 여씨는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오. 난 당신들을 죽이지 않을거요. 매초풍 당신은 정말 알
수 없는 여자야."
여혈의는 엽청청을 데리고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여혈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매초풍의 가슴속에 어떤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그
녀가 혼자 중얼거렸다.
"당신도 알 수 없는 사내이지요."
매초풍은 그 마음을 떨어버리듯 진현풍한테로 돌아섰다. 진현풍도 똑바로 매초풍을 바라보
았다. 그녀가 불쑥 물었다.
"내가 정말 알 수 없는 여자인가요?"
진현풍이 대답은 하지 않고 말문을 돌렸다.
"우리가 이리로 온 목적을 잊지 말아야지."
제9장 흑풍쌍살의 결별
흑풍쌍살이 소요루에 들어갔을 때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방안마다 온통 수라장이 되어 있는데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소교가 소요관을 빠져 나간 모양인데 빨리 찾아봐요."
그들은 한참을 뒤지다 계집종 하나를 발견했다. 그 계집종은 매초풍과 진현풍을 알아보고는
겁에 질려 목소리를 심하게 떨었다.
"여 소저가 도, 도망하려고 저쪽…… 저쪽……."
계집종은 숲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매초풍이 계집종의 멱살을 잡고 손아귀에 힘을 주어 목줄을 끊어 놓고서는 진현풍과 함께
그 숲으로 쫓아갔다.
담장 곁에 이르러 보니 네 파수꾼이 봉두난발이 된 여소교를 넘어뜨려 놓고 막 욕을 보이려
는 참이었다. 여소교는 속수무책으로 비명만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진현풍이 화가 나서 달려가려고 하자 매초풍이 제지하였다.
"저 년이 고통당하는 게 가슴 아픈가요, 그렇지요?"
진현풍이 인상을 찌푸리며 매초풍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정말 여인인지 의심스럽소."
진현풍은 매초풍의 곁을 떠나 두세 걸음 만에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손을 멈추어라!"
네 파수꾼은 암내 맡은 짐승처럼 발광하느라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여소교의 옷을 마구
찢어 헤치고 있었다.
진현풍은 손으로 나뭇가지 하나를 쳐서 떨어뜨렸다. 그 굵은 나뭇가지가 한 파수꾼의 머리
에 맞아 파수꾼은 그 즉시 피를 흘리며 죽었다. 그제야 나머지 세 파수꾼이 진현풍을 의식
하고는 벌떡 일어나 그에게 덮쳐들었다. 진현풍이 최심장으로 한 파수꾼의 가슴을 들이쳤다.
그 파수꾼은 심장이 파열되어 죽어 버렸다. 나머지 두 파수꾼은 그가 용력이 대단한 것을
알고 한 놈은 양은창(亮銀槍)을 꼬나잡고 한 놈은 요도(腰刀)를 뽑아 들었다.
진현풍이 요란한 함성을 지르면서 빈손으로 그 두 놈과 대적했다. 그는 어느결에 한 놈의
창대를 틀어잡고 힘껏 끌어당겨 그것으로 또 한 놈의 칼날을 막았다.
창을 쥔 놈이 가까이 끌려오자 진현풍은 왼손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구음백골조의 초수로 그
놈의 아랫배를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 놈의 배가 갈라지고 창자가 주르르 흘러내
렸다. 그 놈은 모진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그러자 칼 든 놈이 당황하여 도망가려 하였
다. 진현풍은 창으로 그 놈의 잔등을 힘껏 내찔렀다.
연거푸 네 파수꾼을 죽인 진현풍은 손에 묻은 피를 닦은 다음 여소교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
축하여 일으켰다. 여소교는 너무 놀라 제정신이 아닌지라 진현풍이 하는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녀는 옷이 다 찢어져 뽀얀 젖가슴과 새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있는 상태였다. 진현풍은
지난날 여소교가 자기한테 젖가슴을 드러내 보이던 일이 생각나 감히 더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매초풍이 천천히 걸어오더니 조소를 던졌다.
"옛사랑을 만난 셈인데 내가 이곳에 있으면 방해되겠죠?"
진현풍이 여소교를 매초풍한테 맡기려 하였다.
"여보, 당신이 이 여인을 구하자고 했기에 내가 구해 준 거요. 이젠 내가 할 일은 다한 셈이
오."
하지만 매초풍은 여소교를 받아 안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담장 밑으로 걸어가
며 말하였다.
"당신은 그 여잘 안고 싶어하지 않았나요? 그러니 마음껏 안아 보시구려."
매초풍은 담장 위를 훌쩍 뛰어넘어 건너편으로 내렸다.
진현풍은 할 수 없이 여소교를 안고 소요관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밀림에 들어서서야 여소교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자기가 진현풍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안
그녀는 당황하여 몸부림을 쳤다.
여소교는 힘껏 옷자락을 잡아당겨 드러난 몸을 가리려고 했지만 이미 이곳저곳 찢어져 있는
상태여서 그녀가 옷자락을 잡아당기자 '북―' 하고 더 찢어졌다. 여소교는 하는 수 없이 두
팔로 가슴을 가리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겁먹은 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절 어쩔 셈이죠?"
"여소교, 방금 난 네 파수꾼의 수중에서 아가씰 구해 냈는데 기억이 안 나오?"
여소교는 그제야 조금 전 일어났던 일들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녀의 눈에서 통한의 눈물
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한참 만에야 그녀는 울먹이며 진현풍에게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매초풍이 비꼬는 투로 말하였다.
"그저 고맙다고만 하면 돼? 너의 몸으로 은혜에 보답해야지."
진현풍이 두 눈을 부라리다 말고 한숨을 쉬더니 한 나무 밑으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매초풍이 웃는 얼굴로 등에 지닌 행장 속에서 자기 옷을 꺼내더니 여소교의 앞으로 다가왔
다.
"얘야, 울지 말아라. 이 언니가 가슴이 아프구나. 아까 한 말은 농담이니 달리 생각지 마. 이
건 나의 옷이야. 소요공자가 너한테 준 옷보다야 볼품이 없겠지만 몸을 가릴 수는 있을 거
야. 허물이 되지 않는다면 바꿔 입으렴."
여소교는 하는 수 없이 매초풍이 내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흐느낌을 멈
추지 않았다.
"악처후가 난봉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언닌 무엇 때문에 날 속였나요? 그게 무슨 심보예
요?"
옷을 갈아입은 여소교는 발끈하여 매초풍에게 따져 물었다.
"이 언니가 널 속인 게 아니라 그 놈을 좋다고 한 건 너 자신이야. 내가 널 소요관으로 보
내 주겠다고 하니 넌 기뻐서 날뛰지 않았니? 그때 내가 너한테 악처후가 나쁜 놈이라고 말
했더라면 넌 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을 거야. 휴, 사내들이란 모두 여인을 희롱하는
걸 즐긴단 말이야. 악처후로서는 들꽃 한 송이를 더 꺾은 셈일 따름이니 넌 울고불고 할 것
도 없어."
여소교가 이를 갈며 말하였다.
"그 놈이 나한테 장가들겠다고 속였지요."
"그 놈이 널 속인 게 아니라 정말 너한테 장가들려고 했을 수도 있어. 다만 너를 스물 몇
번째나 서른 몇 번째 첩으로 삼으려 했겠지."
"난 당당한 대갓집 아가씨인데 어찌 첩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이에요? 그 놈은…… 사람도
아니에요!"
여소교가 제 설움에 겨워 또 통곡하기 시작하자 매초풍은 한숨을 쉬는 척하였다.
"이미 난 그 놈이 널 속이고 있는 줄 알았었다. 너의 몸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너의 소녀공
도 빼앗을 속셈이었지. 하지만 무공을 익히는 사람치고 소녀공을 탐내지 않는 사람이 없으
니 그것은 조금도 탓할 일은 못 되긴 해."
여소교는 그 말에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소녀공이 그렇게도 유용한 무공인가요?"
"아주 유용한 무공이기는 하지만 너한테야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지."
그러자 여소교가 매초풍의 손을 꼭 쥐며 간곡하게 말하였다.
"나도 무예를 배우고 싶어요."
"무예를 배워 뭐하려구?"
여소교가 힘주어 말하였다.
"복수를 하겠어요!"
그 말을 들은 매초풍이 화들짝 놀랐다.
"얘야, 너 이 언니한테 복수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
'내가 무공을 익히기만 하면 물론 널 찾아 복수를 하고 말거다. 하지만 먼저…….'
여소교는 속마음과는 달리 얼굴에 웃음을 처발랐다.
"언니가 나한테 무예를 가르쳐 주면 난 그 악처후란 음적을 찾아 복수하겠어요. 사실 언니
네와 우리 두 집 사이는 서로 해친 적이 있어 피장파장이니 복수할 것도 없어요."
매초풍이 여소교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탄식하듯
말하였다.
"유감스럽게도 무공이란 게 하루아침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배워야 하는
거야. 너가 이 나이에 이십 년을 배운다고 해도 악처후를 이길 수는 없을 거다. 더구나 그
악처후란 놈도 매일같이 무예를 닦지 않겠느냐?"
여소교는 매우 실망한 듯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렇죠. 난 아마도 복수를 하지 못하고 말지도 모르지요."
"추호의 희망도 없는 건 아니지."
"그럼 어서 말씀해 보세요!"
여소교의 얼굴에 희망과 기대의 빛이 떠오르자 매초풍은 그녀가 자기의 낚시에 걸린 줄 알
고 옅은 미소를 띄웠다.
"단시일 내에 닦을 수 있는 무공도 있단다. 그 무공은 다른 정상적인 무공보다 몇 배, 심지
어 몇십 배 빨리 익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의 즐거움도 향유할 수 있지."
"무슨 무공인데요?"
매초풍이 그녀의 팔을 잡고 진현풍한테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끌고 왔다. 매초풍은 그녀를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귓속말로 말하였다.
"바로 여인의 소녀공이 그러하단다."
"소녀공이라뇨? 아까 말한 그 소녀공 말인가요?"
"그래, 소녀공은 아주 무서운 무공인데 반드시 여자라야 닦을 수 있단다. 네가 몸을 버리기
전에는 나도 그걸 말해 주기 어려웠지만 이젠 몸을 버린 신세이니 말해도 무방하리라 생각
한다. 언니도 널 가르치고 싶고 너도 배우기를 원하니까 말이다."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리 고생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꼭 소녀공을 배워 내고 말겠어
요."
"네 뜻은 알겠다만 들은 다음 후회할까 봐 걱정이구나."
매초풍은 몇 번 다짐을 하고서는 소녀공의 요점을 대강 이야기해 주었다.
여소교가 듣고 보니 소녀공이란 여인이 음으로 양을 보충해 주는 음사공부(淫邪功夫)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져 머리를 떨어뜨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신기한 소녀공을 이 언니도 남편이 없었던들 닦아내기 힘들었을 거다. 나의 공력으
로는 소녀공을 일년 반이면 닦을 수 있고 악처후 같은 놈은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죽여 버
릴 수 있지."
"만일 내가 그걸 닦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넌 근골(根骨)이 좋은 편이니 길어야 일년이고 빠르면 팔 개월이면 악처후와 비길 수가 있
을 거다. 만일 네가 운이 좋아 내공이 대단한 사내를 만나 그의 진기를 받아들일 수만 있다
면 석달 만에 일류 고수가 될 수도 있어."
여소교는 눈이 번쩍 뜨였다.
'내 운명이 기구하여 불행하게도 악처후란 음적한테 몸을 망쳤으니 이제 행복이니 뭐니 찾
을 것 없이 앞으로 무공의 고수가 되는 거야. 그래서 악처후를 죽이고, 또 이 흑풍쌍살을 죽
여 버릴 수만 있다면 소원이 성취되는 셈이 아닌가.'
"좋아요. 언니. 배우겠어요. 언니께서 가르쳐 주세요."
매초풍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여소교야, 네가 소녀공을 닦으려면 추악한 사내들의 시달림을 얼마나 받아야 하는지 알고
나 있느냐? 이건 너희네 여씨 가문이 불인불의(不仁不義)한 데 대한 보응이다. 내가 초수를
약간 고쳐 놓기만 하면 너는 빨아들인 진기를 써먹지도 못해. 그때면 넌 하늘 땅에 하소연
해도 소용이 없게 되고 부끄러워 자살할 수밖에 없을 거다. 아, 그때 난 얼마나 기분이 좋을
까!'
매초풍은 여소교에게 소녀공을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여소교가 사내의 원양(元陽)
을 받아들인 다음 써먹을 수 없게끔 중요한 대목은 고쳐서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여소교 역시 아주 총명한 여인이어서 매초풍이 지어내 사리에 어긋나게 설명하는 것
같은 대목은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
매초풍은 무공을 전수해 주고 나서 해검계의 무예시합에 대한 일을 그녀에게 귀띔해 주었
다. 그리고는 덧붙여 말하였다.
"그때 수많은 호한들이 모여들게 될 것인데 그중에는 내공이 대단한 사나이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다. 그때 네가 그런 사나이들을 사귀어라. 사내들을 많이 사귈수록 더욱 많은 진기를
받아 들일 수 있으니까. 그러면 내공도 더욱 빨리 늘어나게 된다. 넌 똑똑한 애니 어떻게 하
는 게 좋은지 잘 알거다."
매초풍이 말을 마치고 떠나가려 하자 여소교가 쫓아가 애원하였다.
"언니, 날 시가지로 데려다 주세요. 난 지금 아무런 무공도 닦지 못한 몸이니 어디 가든 마
찬가지예요."
매초풍이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시가지에 가면 여소교는 뭇사내들에게 능욕을
당하게 될 판이었다. 매초풍은 흔쾌히 그녀의 팔을 끌고 진현풍과 함께 경공을 써서 시가지
로 날아갔다.
시가지에는 강호객들이 퍽 많았다. 찻집과 술집마다 강호객이 없는 곳이 없었다. 가장 눈에
많이 뜨이는 강호객들은 개방의 제자들과 오혈궁 문하의 제자들이었다. 개방의 제자들은 남
루한 누더기를 걸치고 다녔고 오혈궁 문하의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다녀 선명한 대조
를 이루었다.
이런 데서 객점을 찾아 묵는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할수 없이 흑풍쌍살은 빈 묘를 찾
아들었다.
"소교야, 이젠 네가 어떻게 하는가 두고 볼테다. 어서 가 보거라."
매초풍의 말에 여소교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는 곧 묘 밖으로 나가더니 인파 속으로 사라
졌다.
진현풍이 걱정되어 매초풍한테 물었다.
"여보, 여소교를 어디로 보냈소?"
"그 애가 당신의 누이동생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신경 써요? 남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
요. 나가서 시가지의 동정이나 살피자구요. 혹시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지 모르
잖아요."
진현풍이 장삼을 향안(香案) 위에 펴놓고 거기에 벌렁 드러누웠다.
"당신이나 가 보오. 난 생각이 없소."
"당신은 여소교가 무슨 짓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보군요."
그러면서 매초풍은 혼자 휭하니 가 버렸다.
삐걱―!
진현풍이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여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매초풍으로 짐작한 진현풍은 눈을 감은 채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언니가 아니고 저예요."
낯선 목소리에 진현풍이 놀라 눈을 떠보니 매초풍이 아니라 여소교가 서 있었다.
"여소교, 당……당신이 왜 또 돌아왔소?"
"언닌 어디 갔나요?"
"거리로 나갔는데 금방 돌아오지는 않을 거야."
여소교가 방안을 휘돌아보는데 진현풍이 일어나 앉으며 덧붙였다.
"그 사람은 거리로 나가기만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싸돌아다녀서 탈이야. 무슨 새 구경
거리가 없나 하고 여기저기 돌아 다니거든. 아직도 그 버릇을 못 고치고 있지."
여소교가 다가와 향안 위에 앉았다. 진현풍은 강한 분 냄새와 갓 목욕하고 난 뒤의 소녀의
상큼한 체취를 느꼈다.
'도대체 여인들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모양이 달라지니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여소교가 진현풍에게 다가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오빠, 저 때문에 언니와 싸우게 하여 정말 미안해요."
여소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온몸을 간지럽혔다.
"아냐, 아무 일 없었어……."
당황한 진현풍이 말을 얼버무렸다.
온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진현풍은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여소교
가 새빨개진 얼굴로 용기를 내어 더욱 바싹 다가앉았다.
"오빠, 전 오빨 좋아해요."
진현풍이 여소교의 나긋나긋한 살결을 피부로 느끼자 슬며시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
다. 진현풍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당신을 좋아해."
여소교가 응석을 부리는 듯한 소리를 내자 진현풍은 더는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여소교의 허리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고 마구 입을 맞추었다. 그의 손은 이미 그녀의 옷자
락을 더듬고 있었다. 그는 여소교의 단추를 끄르고 손을 밀어넣어 몽글몽글한 젖무덤을 주
무르기 시작했다.
진현풍은 온몸이 화로처럼 달아올라 여소교를 향안 위에 눕히고는 미친 듯이 그녀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 자기도 옷을 벗어 던지고 그녀의 몸 위를 덮쳤다.
여소교는 눈을 꼭 감고 이를 악물며 생각을 더듬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난 결코 모욕당하러 찾아온 건 아니다. 난 복수하기 위해 이
놈의 진원을 빨아들이러 온 거다.'
여소교는 마음을 가다듬고 소녀공에서 배운 대로 음공(淫功)을 써보았다.
진현풍은 즉시 단전 속의 진기가 스르르 내려가 체외로 배설되면서 기막힌 쾌감을 맛보았
다. 쾌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진기는 더욱 빠른 속도로, 끝없이 깊은 동굴 속으로 거센 물결
이 밀려들어가듯이 밀려 나갔다. 그는 정지해 보려고 하였으나 이미 억제할 수가 없었다. 연
거푸 들이닥치는 미묘한 쾌감에 도취된 그는 그 쾌감을 마음껏 향유하려 들었다.
진현풍은 드디어 탈진상태에 빠져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여소교는 진현풍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매초풍이 가르쳐 준 대로 좌선을 한 채 빨아들인 진
기를 단전까지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잘되지 않았다. 그녀는 매초풍이 이 중요한 대목을 제
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소교는 소녀공을 맘속으로 곰곰이 되새기면서 의심스러운 대목에 가서는 자기 식대로 해
석을 해보았다. 그것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비슷하여 진현풍의 체내에서 빨아들인 원
앙을 단전에까지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정신이 맑아지고 기가 충만해지자 여소교는 얼른 옷을 입고 가볍게 향안에서 뛰어내렸는데
마치 가벼운 구름을 탄 것처럼 몸이 둥둥 떠오르는 바람에 땅에 내릴 때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였다. 소녀공의 신효(神效)를 체험한 여소교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머리를 돌려 살펴보니 진현풍은 아랫도리를 벗은 채로 세상 모르고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
다. 가만 보니 상반신의 적삼 밖으로 얇은 책자가 삐져 나와 있었다. 여소교는 그에게 다가
갔다. 살며시 그 책을 뽑아 보니 표지에 '구음진경'이라는 네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 여소교
는 그것이 출가한 사람들의 경서인 줄로만 알고 도로 밀어넣었다. 그 책이 무림의 으뜸가는
기서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여소교는 진현풍을 죽이려고 칼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진현풍의 독룡금편
만 눈에 띄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섬약한 두 손으로 진현풍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러
나 음공을 갓 익히기 시작한 터라 그녀는 초수를 제대로 쓰지 못하여 제대로 힘을 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칼이나 도끼 같은 쇠붙이를 찾으려고 밖으로 나갔다.
그때 갑자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여소교는 기겁하여 뒤쪽으로 빠
져 도망을 쳤다.
매초풍이 삶은 소고기 한 봉지와 고기소를 넣은 진빵 한 봉지, 그리고 소홍술 한 단지를 가
지고 유쾌한 기분으로 묘 안에 들어섰다.

"여보, 배고팠죠?"
매초풍은 이렇게 말하다가 진현풍이 아랫도리를 벌거벗은 채로 땅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보
자 황급히 음식물을 한켠에 내려 놓았다. 매초풍은 진현풍을 부축하면서 놀란 목소리로 물
었다.
"여보, 이게 무슨 일이에요?"
매초풍은 주위에 맴돌고 있는 여인의 분냄새며 또 향안 위에 구겨진 장삼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이 작자가 날 배신하고 계집질을 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매초풍은 진현풍의 인중혈(人中穴)을 눌렀다. 진현풍
이 차츰 정신을 차리더니 중얼거렸다.
"요 귀염둥이야, 내가 어떻게 된 거야?"
매초풍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진현풍을 홱 밀쳐 버렸다.
"누가 당신의 귀염둥이란 말이에요? 좀 똑똑히 보기나 하고 말하세요!"
진현풍이 다시 땅바닥에 쓰러져서 벌벌 기었다.
"여 아가씨, 왜 날 밀치는 거요?"
그러면서 두 눈을 뜨고 쳐다보니 서릿발같이 차디찬 표정을 한 매초풍이 쏘아보고 있었다.
진현풍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쫙 흘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보, 어느 여 아가씨와 만났단 말이에요?"
진현풍이 재빨리 일어나더니 바지를 찾아 입으며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아니오. 그건 그렇고 여보, 오늘은 빨리 돌아왔군."
"다른 데로 말 돌리지 말고 어서 말해요. 어느 여 아가씨란 말인가요?"
이렇게 따져 묻던 매초풍은 갑자기 짚이는 게 있어 놀라 소리쳤다.
"그래, 여소교란 말인가요?"
진현풍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머리를 떨어뜨렸다.
"내가 잠시 어리석은 탓에……."
매초풍이 세차게 그의 뺨을 갈겼다.
"진현풍, 네 놈이 여소교와 이런 짓거리를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죽는 날까지 함께하려 했더
니 이런 짓을 할 줄이야!"
매초풍은 욕설을 마구 퍼붓고 나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진현풍이 급히 뒤따라 나가며 그녀
를 애타게 불렀다.
"여보, 날 때리고 욕하는 건 좋지만 제발 내 곁을 떠나지 마오!"
매초풍이 자기를 잡아당기는 진현풍의 손을 뿌리치며 울부짖었다.
"더러운 손으로 날 만지지 말아요!"
"그 년의 꾐에 내가 넘어간 거요. 요 며칠 당신은 바삐 돌아다니기만 하고 나에겐 신경 쓰
지도 않았잖소. 그래서 난 참지 못하고……."
"내가 신경 쓰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이 여소교란 년을 좋아하다 보니 날 배반했겠죠. 난
당신이 미워요!"
진현풍은 계속 뒤따라가며 그녀의 어깨를 잡고 애원했다. 그러나 매초풍은 기어이 그의 손
을 뿌리쳤다. 그 바람에 여소교한테 진기를 빼앗긴 진현풍은 일곱여덟 발자국이나 밀려나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의 몸은 최소 두 달은 지나야 회복될 수 있었다.
진현풍이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매초풍은 어느새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매초풍은 묘에서 나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도 관계치 않고 경공으로 앞을 가로막는
집의 지붕들을 훌쩍훌쩍 뛰어넘어 시가지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녀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 이르렀다. 그녀는 어느 큰 나무 밑에 엎드려 이제껏 참았
던 울음을 터뜨렸다.
매초풍은 도화도에서 소녀의 가장 소중한 정조를 진현풍에게 바친 뒤로 진심으로 그를 사랑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현풍을 자기의 한 생에서 유일한 사내로 맞아 살면서 그에게 절대로
미안한 일을 하지 않으려 했던 것만큼 진현풍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진현풍은 그녀를 배반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그녀의 원수인 여소교와 그런
짓거리를 하지 않았는가. 매초풍은 남편의 행위를 결코 용서할 수가 없었다.
너무도 서럽게 울다 보니 그 아름답던 눈이 퉁퉁 부어 올랐다. 그녀는 두 주먹으로 나무줄
기를 두드리면서 하늘의 무심함을 원망하였다.
그녀는 자기가 여소교의 손에 패배를 당했다고 생각하자 이 치욕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
다. 그녀는 여소교를 빠뜨릴 함정을 파놓았다가 결국 그 함정에 여소교가 아니라 자신이 빠
지고 만 꼴이 된 것이다. 이런 치욕적인 실패는 진현풍이 계집질을 한 것보다 더 참아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여소교를 사로잡아 실컷 매질을
하고 싶었다.
철시 매초풍은 서둘러 시가지로 돌아와 객점들을 하나하나 훑어 가며 여소교의 행적을 찾았
다. 그러다가 문득 모든 객점들이 이미 만원이 되어 여소교가 객점에 들었을 리가 만무하다
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다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여소교가 떠나기 전에 매초풍은 그녀의 몸에서 값진 물건이란 물건은 모조리 빼앗았다. 따
라서 여소교가 생명을 부지하려면 몸을 파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매초풍은 비로소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음식점과 술집을 하나하나 훑기 시
작하였다. 그것은 여소교가 하루 종일 굶었고 또 진현풍과 그 짓거리까지 하였으니 배가 고
픈 김에 꼭 어디선가 밥을 먹고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한 여소교가 꼭 잠자기 알
맞은 어떤 사내의 곁에 앉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여소교를 찾는 데 혈안이 된 매초풍을 주시하는 세 사나이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붉은 마고자를 입고 과피모(瓜皮帽:수박 모양으로 헝겊 여섯 조각을 묶어 만든 모자인데 정
수리 쪽에 꼭지가 달려 있는 중국식 모자)를 썼으며 탐욕스럽고도 음탕한 눈길을 번뜩이고
있었다.
매초풍은 여소교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에 지금 자기 뒤를 세 사나이가 밟고 있는 줄을 전혀
알지 못했다.
매초풍이 여섯 번째 술집으로 갈 때였다.
세 사나이 중에서 뚱뚱한 자가 그녀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뚱뚱보가 번들거리는 낯에 웃음
을 바르며 말을 걸었다.
"아가씨, 술 생각이 나거들랑 이 도련님이 한턱 내겠소!"
매초풍이 쌀쌀한 눈길로 쏘아보며 대꾸했다.
"난 당신을 모르는데요."
그 뒤로 삐쩍 마른 키다리와 얼굴이 누르끼리한 자가 따라왔다. 그중 얼굴이 누르끼리한 자
가 걀걀거리는 목소리로 수다스럽게 말하였다.
"우린 이 고장에서 이름이 뜨르르한 사람들인데 내가 손대소(孫大少)이고 저 사람은 주대소
(朱大少), 또 저 사람은 이대소(李大少)라고 하오."
그러자 주대소가 히히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고장에서 장사를 하는 집이 사오십 짚이 되지만 거지반 우리 세 가문의 것이라오. 아가
씨가 우리 눈에 든 건 복이 굴러 떨어진 셈이오!"
그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손으로 매초풍의 얼굴을 어루만지려고 들었다.
매초풍이 옆으로 살짝 피했다. 그러잖아도 화풀이할 곳이 없어 답답하던 그녀는 이자들을
한번 손봐 주고 싶어졌다.
"손대소, 이대소, 주대소. 당신들 세 사람은 정말 날 좋아하는 거죠?"
"그렇고말고!"
"그런데 여잔 한사람이고 당신들은 셋이니 안 되겠군요."
그러자 이대소가 유들유들하게 말을 받았다.
"안 되긴 왜 안 돼? 우리 셋이 함께 놀면 되는 거 아니야? 아가씨는 값을 부르기만 하면 되
는 거야……."
매초풍은 이 세 음적들을 당장 쳐죽여 버리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가만 보니 세 분은 미인을 좋아하는 모양이군요. 이럽시다. 저한테 외사촌 여동생이 있는데
자색으로 말하면 전 그 애의 십분의 일도 안 돼요. 세 분의 의향은 어떠하신지……?"
세 사나이는 또 하나의 미인이 있다는 말을 듣자 너무 좋아서 떠들어대었다.
"두말 하면 잔소리지. 그 여동생을 불러다가 우리와 재미있게 놀잔 말이야!"
매초풍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전 그 애와 헤어졌어요. 그 앤 분명 이 부근 어느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있을텐
데……. 세 분께서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와 함께 그 애를 찾아보겠어요?"
세 사나이는 선선히 대답은 하였으나 매초풍이 도망갈까 봐 그녀 뒤를 바싹 따랐다.
매초풍은 드디어 아주 작은 술집의 한구석에서 밀국수를 먹고 있는 여소교를 찾아냈다. 그
녀의 탁자 위에는 돈주머니 한 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진현풍의 돈주머니가 분명하였다.
여소교는 매초풍이 세 사나이를 데리고 뛰어드는 것을 보자 깜짝 놀라 도망가려고 하였다.
매초풍이 여소교의 앞을 얼른 가로막았다.
여소교를 본 세 사나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저 미인은 여우귀신이 아닌가!'
매초풍이 탁상 위에 놓여 있던 돈주머니를 집어 들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 사람이 널 끔찍이도 생각하는구나. 은자까지 이처럼 척척 내어 주니 말이다."
여소교가 애써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언니, 언니가 전수해 준 무공이 과연 효험이 있더군요. 그 오빠는 저와 아주 배합이 잘되던
데요."
그 말을 들은 매초풍은 깜짝 놀랐다.
'이 년이 결국 진현풍에게 소녀공을 써먹었구나. 그러니 그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야. 아무튼 그이가 나한테 불충하였으니 한 번 교훈을 톡톡히 준 셈이로
군.'
매초풍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겉으로는 애써 여유를 부렸다.
"잘했어. 잘했구말구. 나도 기쁘단다."
여소교는 매초풍의 눈길이 매섭게 변해 가는 것을 보자 자기가 조금은 복수를 했다고 생각
되어 통쾌했다.
"그 오빤 참 힘이 좋은 사내더군요. 그분은 저한테 젖 먹던 힘까지 다 써서 진기를 주입해
주었지요. 그런데 언니가 알려 준 방법이 어쩐지 잘 먹혀 들어가지 않더군요."
"얘야, 네가 그토록 사내를 밝히게 되었으니 여기 세 사나이가 또 왔느니라."
매초풍이 손짓을 하자 세 사나이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아씨, 이 여자가 아씨의 외사촌 여동생이오? 히히히, 과연 미인이구만. 그런데…… 아씨보
다 좀 못하구먼."
이해소가 기분이 좋은 듯 싱글벙글하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런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오. 우리 오늘 함께 잘 놀아 보자구!"
매초풍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좋아요. 저의 동생은 중고수(中高手)쯤은 되니까 힘을 좀 내야 할 거예요."
매초풍은 여소교의 팔을 잡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주대소가 좋아 어쩔 줄 모르며 웃어대었다.
"미인의 배 위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놀아 보아야지."
그 말에 세 사나이가 한바탕 요란하게 웃어제꼈다.
매초풍은 여소교를 끌고 세 사나이를 따라 어느 큰 저택으로 들어갔다. 왼쪽, 오른쪽으로 이
리저리 돌아 아주 멋지게 꾸며진 한 침실에 이르렀다.
매초풍이 여소교를 침대에 넘어뜨려 놓고 세 사나이에게 명령조로 말하였다.
"잘 들어 두세요. 만일 나의 여동생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간 이렇게 될 줄 알아
요!"
매초풍이 장으로 의자를 가볍게 건드리고는 머리를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세 사나이는 웬 영문인지 몰라 그 의자를 만졌더니 나무의자가 수백 개의 조각으로 부서져
버리는 것이었다. 세 사나이는 깜짝 놀랐다.
밖에서 매초풍의 차디찬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이대소, 주대소, 손대소. 내 말을 똑똑히 기억해 두지 않았다가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줄
알아!"
세 사나이는 한참 동안이나 멍청하게 서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허겁지겁 번갈아 가며 여소교에게 덮쳐들었다.
매초풍은 밖에서 여소교의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리고는 곧 나는 듯
이 그 자리를 떴다.
매초풍은 큰 저택을 빠져 나오자마자 곧 뒤쫓아온 진현풍과 맞닥뜨렸다. 단지 한 시각이 지
났을 뿐인데 그는 무척 여위고 늙은 듯싶었다.
"여보, 당신더러 날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소. 다만 내 곁을 떠나지만 말아 주오."
"우린 서로 원해서 부부로 결합되었고 또 서로 원해서 그 관계를 끊은 거예요. 오늘부터 우
리는 남남이에요."
매초풍은 성도 내지 않고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의 성미를 잘 알고 있는 진현풍은 그
말을 듣자 가슴속으로 돌덩이가 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기분이 차분하면 차분할
수록 그녀의 결심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난 듣고 싶지 않으니 자꾸 이야기하지 마세요. 하지만 당신이 전에 내게 잘 대해 주던 일
만은 잊지 않을 거예요."
매초풍은 그 말을 던지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버렸다.
그녀를 쫓아가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진현풍은 그저 슬픈 얼굴로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비록 흑풍쌍살이 강호를 넘나들면서 수많은 인명을 해쳐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
긴 했지만 그들 두 사람은 아직은 그리 큰 인물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기들 눈앞에 벌어
지는 더 큰일들에 신경 쓰기 바빴기 때문에 흑풍쌍살이 갈라지거나 합치는 일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제10장 해검계의 무예시합
해검계의 무예시합이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해검계는 태호에서 이십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라 경공이 고명한 자는 순식간에 가
닿을 수 있었다. 해검계는 자그마한 시냇가로 길이가 세 치밖에 안 되는 초어들이 자유롭게
노닐고 있는 것이 똑똑히 보일 정도로 물이 맑았다.
시냇물의 주위는 한 치 가량 자란 청초들이 수십 장 너비의 풀밭을 이루고 있었다. 해검계
의 다른 한 기슭에는 벌거숭이 바위들이 들어서 있고 구불구불하게 생긴 소나무와 잣나무들
이 듬성듬성 서 있었는데 어떤 것은 수백 년이나 되는 것도 있었다.
해검계로 무예시합을 구경하러 오는 강호객들은 저마다 이 괴이한 인상을 주는 '해검'이란
이름의 유래를 알고 싶어했다. 누구의 검을 풀어놓게 했다는 것인가? 도대체 무슨 검을 풀
어놓게 했다는 말인가?
해검계로 통하는 길목에 한 늙은이가 자리잡고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평소
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적어 잡초들이 무성하기 때문에 다니기도 퍽 불편한 좁은 길이었다.
늙은이는 길 옆에 있는 큰 청석 위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싼 이십여 명 되는 사람들에게 이
야기를 하고 있었고 청중들은 그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 노인의 나이는 알 수 없으나 가슴까지 길게 드리운 흰 수염은 적어도 삼십 년은 자란 것
같았다. 노인은 기력이 정정해 보였고 왼쪽 켠에 반들반들한 까만 용두괴(龍頭拐)를 끼고 있
었다.
그 용두괴가 산동의 호협 석산공(石山空)의 병장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사십
년 전에 이 용두괴로 열세 개나 되는 흑도의 산채들을 연거푸 절단내었고, 삼십 년 전에는
황하가에서 하투십팔괴를 죽여 버렸으며, 이십 년 전에는 용두괴를 십 합도 안 써 진남 대
리국 국사를 요절냈었다.
최근 십 년 동안은 강호에서는 석산공과 용두괴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석산공이 이
제는 나이가 많아 산속에 은둔하여 복을 누리고 있다는 사람도 있고. 석산공이 비밀리에 개
방과 손을 잡고 금나라에 항격하고 있다는 사람도 있었다. 또는 아픈 데 없이 조용히 별세
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찌 됐든 지금 용두괴는 확실히 태호 가에 나타났고 석산공은 청석 위에 앉아서 큰소리로
해검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석산공이 입을 열었다.
"어느 해인가 월왕(越王) 구천(勾踐)이 오나라를 패배시킨 뒤 향락에 빠지기 시작하였답니
다. 그 수하의 으뜸가는 공신인 범려(范 )가 여러 번이나 충언으로 간하였으나 구천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 버렸지요. 화가 난 범려는 벼슬을 버리고 미녀 서시(西施)를 데리고 떠
났답니다. 월나라 왕 구천은 범려가 떠난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가버리자 대로하여 병졸 만
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였지요."
개방의 삼대 제자가 불쑥 끼여들었다.
"범려가 월나라 왕을 도와 치욕을 씻고 나라를 되찾았으니 대단한 충신인데 월나라 왕은 배
은망덕하게도 범려를 추격하여 잡아죽이려 하였으니 우매하기 그지없는 임금이오."
그 말에 석산공이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너의 말이 옳다. 하지만 토끼를 다 잡은 뒤에는 사냥개를 잡아먹고 새를 잡은 뒤에는 활을
집어 던지는 것처럼 적국을 멸한 뒤에는 공신이 망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마치
악비(岳飛)가 금나라를 항격하고 나라를 지키는 일에 세상에 으뜸가는 공을 세웠지만 결국
옥에 갇혀 터무니없는 죄명을 쓰고 억울하게 풍파정(風波亭)에서 죽은 것과 같은 것이지."
"그거야 간신 진회(秦檜)가 충신을 모해했기 때문이지요. 그런 간신들은 잡아죽여야 하지
요!"
"물론 그 진회란 놈은 가증스러운 자다. 하지만 화근은 바로 고종(高宗)황제 자신이었느니
라. 생각해 보아라. 휘종(徽宗)황제와 흠종(欽宗)황제가 북국에 잡혀가 모욕을 받고 있을 때
만일 악비가 황용부(黃龍府)를 쳐들어가 두 황제를 맞아 온다면 고종 황제가 자리를 내놓아
야 한단 말이다. 허허허, 하지만 고종황제는 자리를 내놓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 개방의 제자는 주먹으로 나무줄기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선배님은 실로 혜안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렇지요. 고종황제가 나라를 팔아먹으면서까지
황제 자리를 잃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도탄 속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쳇,
그런 황제라면 아무 소용이 없단 말입니다?"
한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 국사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지 말기로 합시다. 오늘 우리는 두 고수의 무예시합을
구경하러 왔습니다. 석 선배님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 봅시다."
모두들 그 말에 머리를 끄덕이자 석산공이 목청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월나라 왕 구천이 일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쉴 새 없이 말을 달려 드디어 태호 가에 이
르러 범려와 서시를 사로잡았답니다. 월나라 왕 구천이 두 사람더러 왜 반역하고 도망을 하
는가고 다그치자 범려는 자기는 이젠 궁냥이 짧아 더는 대왕님을 보좌해 드릴 힘이 없어서
그런다고 대답하였지요. 서시도 대왕님께서 당년에 오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자유로운 몸
이 되도록 놓아주시겠다고 하지 않았는가고 말하였지요. 하지만 범려가 충언으로 간하는 것
에 염오를 느껴 쫓아낼 생각을 갖고 있었던 구천은 더는 범려를 신하로 두고 싶지 않았습니
다. 문제는 월나라 왕 구천의 심사가 전적으로 미녀 서시한테 있었다는 거지요."
그러자 개방의 제자가 손뼉을 쳐대면서 말하였다.
"알 만하군요. 월나라 왕 구천은 이제 배불리 먹고 등 뜨시게 지내니까 계집질이나 할 생각
이 난 거지요. 흥, 고금의 황제치고 그렇지 않은 황제가 어디 있었나요?"
"그 말이 옳아. 구천은 벌써부터 서시에게 군침을 흘려 왔던 겁니다. 이전에는 자기가 망한
나라의 임금이어서 나라를 되찾으려는 생각에만 빠져 있었는데 이젠 월나라가 강성해졌으니
그는 서시를 후궁에 데려다 귀비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서시는 월나라를 위해
치욕을 무릅쓰고 오나라 왕을 시중들었던 건데 이젠 월나라 왕이 그녀에 대하여 딴맘을 품
으니 실로 하늘이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지요."
석산공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자 모두들 눈빛을 반짝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월나라 왕 구천은 그래도 양심을 몽땅 저버리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제왕
으로서의 자기 체면을 생각해서 범려와 서시가 반역을 하여 도망하였다고 꾸짖으면 그들 두
사람의 죄를 인정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들 두 사람을 끌고 월나라로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 두 사람은 버티면서 도리를 따졌고, 범려는 드디어 용천보검(龍
泉寶劍을)을 끌러 내어 구천에게 바친 다음 아무 말 없이 시냇물에 빠져 떠내려갔던 것이지
요. 구천은 멍청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 불쑥 물었다.
"선배님, 그 용천보검이 무슨 유별난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구천은 그들을 놓아주었습니
까?"
"용천보검은 구천이 나라를 되찾기 전에 범려한테 선물했던 것이지요. 그때 구천은 범려가
후에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이 검을 보기만 하면 죄를 용서해 주겠노라고 약조를
했던 것입니다. 구천은 그 용천보검을 어루만지면서 범려가 자기와 함께 대업을 이룩하던
때를 생각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천은 용천보검을 물 속에 떨
어뜨리고 나서 슬그머니 월나라로 돌아오고 말았지요."
개방의 제자가 웃는 얼굴로 끼여들었다.
"아하, 그래서 이 시냇물의 이름이 해금계가 되었군요."
"개방의 젊은이가 확실히 총명하다니까. 그러니 금나라 개놈들이 개방의 이름만 들어도 멀
리 도망가는 게 우연한 일이 아니지. 휴, 옛날 월나라 왕은 서시를 손에 넣기 위해 해금계에
서 범려와 결렬했는데 오늘 오혈궁 궁주와 절정공자도 이곳에서 미녀 때문에 싸움을 하게
되니 하늘의 조화라 아니할 수 없네."
개방의 제자가 또 말을 받았다.
"듣자니 절정공자는 여인을 매우 증오하여 여인만 보면 주먹질을 한다더군요. 그러나 제가
보기엔 그가 여인 때문에 이곳으로 오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러자 한 사람이 참견하였다.
"그 사람은 천 년 묵은 인삼 때문에 온답니다. 탁운백으로 말하면 미인을 얻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저 가볍게 손가락으로 걸어 당기기만 하면 여인들이 품속에 뛰어들
텐데……."
이때 한 여인이 쌀쌀한 어조로 말하였다.
"당신들은 탁 공자님을 모욕하지 마세요. 그분이 절정이란 호를 가진 것이야말로 절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절정'이란 두 글자로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려는 것이지요."
그 말에 석산공이 머리를 끄덕였다.
"사리에 맞는 말이오. 이 늙은이도 탁운백이 진짜로 절정을 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소."
모두들 머리를 돌려 보니 방금 말한 그 여인은 얼굴을 온통 흰 면사포로 가리고 아름다우면
서도 우울해 보이는 큰 눈만 내어놓고 있었다. 그 여인은 온몸이 하앴다. 옷도 흰색일 뿐만
아니라 횐 꽃신에 수놓은 나비조차도 하얀 색이었다.
한 사나이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그 여인 앞에 다가가 읍을 하면서 정중하게 물었다.
"아씨께선 이름을 어떻게 부르시오? 나도 아씨와 같이 절정공자가 결코 절정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나이를 알아본 한 사람이 옆사람에게 소곤거렸다.
"저 사람을 좀 보란 말이야. 저분이 바로 소문난 금도채의 대채주 금도 임청이란 분일세."
우람한 체격을 가진 한 사나이가 임청 곁으로 다가가서 금칼을 안은 채 옹골찬 목소리로 말
하였다.
"이분은 바로 우리 산채의 대채주님이시지요."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임청을 아래위로 뜯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임 채주께서 탁 공자님을 위해 공정한 말씀을 하시어 정말 반갑습니다."
여인의 목소리는 감격에 젖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임청은 그 여인이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자 맘속에 무슨 고충이 있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더
는 캐묻지 않았다. 그가 그 여인에게 절정공자 탁운백이 도대체 이곳으로 올지 안 올지를
물으려는 순간 멀리서 떠들썩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태호오교로 불리는 다섯 사람으로 낭리교 주지청, 농조교 서구광, 번파교 오비
용, 수상교 하아무, 교중교 이명도였다. 그들은 멀리서부터 임청을 소리쳐 부르며 뛰어왔다.
임청은 급히 그들을 마중하면서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그들 가운데 이명도가 임청을 만나자마자 분노를 터뜨렸다.
"제길, 얼마 전 술집에서 오혈궁 문하의 놈이 감히 우리 형제를 여러 명이나 죽였단 말이오.
임 채주님이 시가지에 파견한 두 사람도 그 오혈궁 문하의 제자에게 맞아 죽었단 말입니
다."
임청이 물었다.
"누가 오혈궁 문하 사람들을 건드렸나요?"
낭리교 주지청이 상황 설명을 했다.
"우리 수하의 형제들이 이번 무예시합에서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가 하는 승패를 놓고 도박
을 걸고 있는데 오혈궁의 제자들이 시비곡직도 가리지 않고 사람을 함부로 죽였소. 이건 우
리를 아주 업신여긴 거지요!"
그러자 얼굴을 면사포로 가린 여인이 다가와 물었다.
"알려 주세요. 오혈궁의 어느 제자가 함부로 사람을 죽이던가요?"
낭리교 주지청이 따지듯 말했다.
"가르쳐 주면 아가씨가 그 놈을 어떻게 해주겠소?"
임청이 주지청에게 눈짓을 주었다.
"주 형, 이 처녀는 호의로 이렇게 묻는 겁니다."
농조교 서구광이 큰소리로 비꼬았다.
"암만 호의를 품었어도 무슨 소용이 있나? 우리 형제들은 벌써 죽었는데!"
그 여인이 약간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서 그 흉수의 이름만 알려 주면 제가 여러분을 위해 공정한 도리를 주장하겠어
요."
그러자 주지청이 한숨을 길게 토했다.
"지금 천하의 으뜸가는 네 고수들인 동사, 서독, 남제, 북개가 손을 잡고 우리의 원수를 같
아 준다고 할지라도 유감스럽지만 우린 모두 그 오혈궁 제자의 이름을 모르고 있단 말이
오!"
임청이 끼여들었다.
"설사 이름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누가 감히 공공연히 오혈궁과 척을 지려 하겠습니까?"
오혈궁이 이처럼 두려운 것은 오혈궁의 제자들 가운데 고수들이 아주 많을 뿐 아니라 그들
은 아주 신출귀몰하여 오혈궁이란 곳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
었다.
이때 숲 속에서 칠팔 명 되는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저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혈궁의 제자들이 분명하였다. 우두머리는 한 쌍의 남녀였는데 다름아닌 강금의와 반
채의였다.
이 한 쌍의 남녀는 한 사람같이 꼭 붙어 걸어오더니 그중 강금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느 놈이 우리 궁의 흉을 보았느냐?"
반채의가 강금의의 팔을 낀 채 소리쳤다.
"조심해라. 내가 그 놈의 혓바닥을 잘라 놓기 전에!"
"흥, 오혈궁 제자들은 함부로 사람을 죽여도 아무 상관없고 우린 원망하는 소리도 못한단
말이오?"
태호오교의 하아모가 푸르르 항의했다.
그러자 강금의가 반채의한테서 떨어져서 하아모에게 다가갔다.
"개자식, 감히 말대꾸를 할 셈이냐?"
강금의가 장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하아모가 얼른 그것을 피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감히 나으리를 치려구?"
하아모가 주먹으로 반격을 했다. 그런데 그 주먹은 괴상하게도 강금의의 왼쪽 얼굴을 겨냥
하고 나가는 듯하더니 갑자기 상대방의 어깨 가까이에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 강금의의
왼쪽 옆구리를 때렸다. 그것은 바로 태호오교들의 '신교권(神蛟拳)' 중의 하나인 '니추찬동
(泥 鑽洞)'이란 초수였다.
강금의가 비명을 내질렀다. 반채의가 급히 다가가 부축하며 물었다.
"여보, 괜찮아요?"
강금의가 주먹에 맞은 왼쪽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화가 난 듯이 대꾸하였다.
"당신은 주둥이만 놀리지 말고 저 놈을 어떻게 좀 해보란 말이오."
욕을 먹은 반채의는 억울하다는 듯이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더니 하아모를 쏘아보았다.
"네 놈이 감히 저이를 때리다니, 내 네 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
반채의가 하아모에게 덮쳐들며 팔장(八掌)을 날렸다. 이 팔장은 오혈장(鳥血掌) 중에서 가장
정채로운 초수인 '팔장액객(八掌扼客)'이었다. 그것은 휘두르는 장마다 실속이 있고 또 동작
이 저마다 연계되어 있어 그중의 어느 한 장에 맞기만 하면 중상을 입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을 정도로 그 위력이 대단했다.
수상교 하아모가 숨돌릴 틈도 없이 공격을 받게 되자 주지청과 이명도가 좌우에서 달려들어
겨우 하아모를 구해 내었다.
낭리교 주지청이 대로하여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년, 네가 감히 사람을 죽이려 든단 말이냐?"
반채의는 평소에 오혈궁 안에서도 우쭐거리기 좋아하는 성미라 외부 사람들 앞에서는 그야
말로 안하무인이었다. 그녀가 두 손을 양 허리에 얹고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내가 죽이고 싶으면 죽이는 거다. 그런들 네 놈이 감히 어쩔 테냐?"
주지청도 소위 패주인데 그런 업신여김을 받고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그가 한 쌍의 작살
을 꺼내 들자 금도 임청이 급히 말렸다.
"형님, 하필 저런 여자와 맞설 게 뭡니까? 좀 있다가 절정공자가 우리 대신 화풀이를 해줄
겁니다."
주지청은 코방귀를 뀌면서 반채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더는 무어라 말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계집년 같으니. 아무때고 이 나으리 손에 걸려들기만 해봐라. 우선 채
찍으로 삼백 대를 갈긴 다음 태호의 기생집에 팔아넘겨 천만 사내한테 주물림을 당하게 할
테다!'
상대방의 수가 많은 것에 약간 두려움을 느낀 반채의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듯이 강금
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강금의가 눈짓을 하면서 슬그머니 칼을 집어들자 반채의도 칼을 잡았다. 그들 두 사람은 훌
쩍 몸을 날려 한칼에 태호오교와 임청을 찍으려고 달려들었다.
태호오교는 미처 방어할 겨를이 없어 후닥닥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임청은 장수답게 조금
도 당황해 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옆에 있는 사나이의 품에서 날이 넓다란 금도를 뽑아
들고 맞섰다.
반채의는 태호오교가 낭패를 당한 것이 아주 고소하다는 듯 손뼉을 쳐가며 웃어대었다.
"정말 재미있는데? 태호오교란 풀밭의 다섯 지렁이에 불과하단 말이야!"
그 말을 들은 태호오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각기 작살을 들고 공격을 시작
하였다. 이 태호오교는 모두 격전 가운데서 나날을 보낸 사람들이어서 실수가 없고 초수마
다 매섭기 그지없어 동시 진현풍도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니 강호에 나선 지 오
래지 않은 반채의와 강금의가 그들을 당해 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금도 임청이 칼을 잡은 채 뒤로 물러나 구경하였다. 화가 치민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태호오교들이 저 두 연놈의 버르장머리를 가르쳐 놓는 것도 괜찮은 일이야. 오혈궁 문하의
놈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남을 업신여기기 좋아하거든.'
금도 임청은 오혈궁의 다른 다섯 제자들의 동정을 살피면서 그자들이 덤벼들면 자기도 손을
쓰려고 하였다.
그러자 모두들 해금계의 유래에 대한 논쟁은 그만두고 다가와서 그들의 싸움을 구경하였다.
강금의와 반채의는 싸우면 싸울수록 간담이 서늘해졌고 칼을 잡은 손의 맥이 풀려 갔다. 그
들 두 사람은 여러 번이나 태호오교의 작살에 찔릴 뻔하였다. 반채의가 하는 수 없이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우릴 좀 구해 줘요!"
싸움을 구경하던 다섯 오혈궁 제자들 가운데서 백포(白袍)를 걸치고 손에 칼을 든 사람이
천천히 싸우는 사람들 속으로 다가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아주 굼떴으나 사처에서 휘둘러대
는 작살과 칼이 한 번도 그를 명중시키지 못했다.
그가 싸움터의 복판에 서더니 대수롭지 않게 칼을 한 번 휘둘러 작살 한 개를 물리치고 연
이어 작살 두 개를 물리쳤다. 그 바람에 오비용과 서구광은 대여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서야
했다.
금도 임청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도 그 사람의 도법이 아주 멋지다고 생각하였다. 몸놀림과
보법은 강금의, 반채의와 비슷하였으나 그 기세는 대단하였다. 그는 그 사람의 초수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이 사람이 바로 오혈궁의 세 사형제들 가운데서 둘째인 초천의(楚天衣)였으며 사람들은 그
를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고 불렀다. 이 사람은 궤계가 많아 방어해 내기가 힘이 들었다.
초천의가 싸움에 가담하면서 태호오교는 점점 밀리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태호오교 다섯 사
람은 초천의, 강금의, 반채의 세 사람한테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금도 임청이 싸움을 도우려고 달려나갔다. 그는 '역벽화산(力劈華山)'의 초수를 쓰면서 칼로
초천의의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초천의는 칼날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자 머리도 돌리지 않은 채 칼로 임청의 금도를 막으면
서 왼쪽 장으로는 서구광을 치고 오른쪽 발로는 오비용의 무릎을 걷어찼다.
칼과 칼이 맞부딪치자 임청은 팔이 찡 저려옴을 느꼈다.
'이 사나이의 팔힘이 이리도 세단 말인가?'
임청은 칼을 휘두르면서 물었다.
"귀하의 성함은 무엇이라 부르오?"
그러자 강금의가 대신 대답했다.
"이분은 본 궁의 세 사형제 중 초천의라고 부르는 사형이시다. 흥, 너희들의 그까짓 재간으
로 우리 사형과 겨루어 보려구? 어림없는 일이지!"
임청은 '세 사형제'가 누구 누구인지는 잘 몰랐으나 초천의의 무공이 흑풍쌍살보다 결코 약
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 밖의 네 오혈궁 제자들도 임청이 상대방을 돕는 것을 보자 달려와 임청을 삥 둘러쌌다.
이제 태호오교들은 여차하면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했다. 뿐만 아니라 금도 임청도 자신을
지켜내기 어렵게 되었다.
구경하던 석산공과 개방의 제자들은 싸움을 말리고 싶었지만 제 집안일이 아닌지라 참견할
만한 구실이 없었다.
석산공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 말로 해야지 꼭 병장기를 휘두를 필요 있소? 그러다가 누구 하나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겠소?"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싸움은 점점 더 치열해져 보는 이들로 하여
금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그런데 얼굴을 면사포로 가린 여인이 불쑥 싸우는 그들 앞으로 나서며 호통을 쳤다.
"너희들은 담도 크구나! 궁주님의 명령도 없이 사단을 일으킨단 말이냐? 어서 물러서지 못
할까!"
여인의 목소리에 위엄이 서려 있었다.
초천의, 강금의, 반채의는 얼굴을 가린 여인을 쳐다보더니 기만동작을 몇 번 해보이고는 고
분고분 물러섰다.
금도 임청과 태호오교들도 눈앞이 아물아물해져 더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큰소리를 쳐댔다.
"태호오교들은 하늘 땅도 무섭지 않고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는다. 감히 오혈궁 놈들이 우릴
이겨 보겠다구?"
"오혈궁 놈들이 다른 사람은 업신여길 수 있겠지만 우리가 그런 수작에 먹혀들 것 같으냐!"
임청은 오혈궁의 제자들이 얼굴을 가린 여인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것을 보자 어리둥절해졌
다.
"일곱째 부인님, 어찌하여 이곳으로 오셨습니까? 도처에 강호의 사나이들이 널려 있어 아주
위험합니다."
초천의의 말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절정공자의 편을 들어 말하던 얼굴 가린 여인이 오혈궁
의 일곱째 부인이라니? 그렇다면 궁주인 묘상의 여인이란 말이 아닌가?
일곱째 부인이 차가운 어조로 대꾸했다.
"난 이곳에서 석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아무 위험도 없었다. 나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작살을 들고 덤벼드는 사람도 없었단 말이다. 흥, 너희들은 무예를 좀 안
다고 그리 우쭐대는 게냐?"
초천의는 세 사형제 가운데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묘상이 아끼는 사람이었다. 이 여인을 '
일곱 번째 부인'이라고 부른 것이 그로서는 체면을 충분히 보아준 셈인데 이렇게 여인의 꾸
중까지 받고 보니 속으로 울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의연히 웃음
을 띄웠다.
"일곱 번째 부인께서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오늘은 궁주님께서 절정공자와 무예를 비기는
날이니 웬만하면 사단을 일으키지 말아야지요."
초천의는 태호오교와 임청을 흘겨보면서 한마디 을러댔다.
"버릇을 한번 가르쳐 놓은 셈 치겠다. 후일 다시 보자!"
일곱째 부인이 여전히 쌀쌀한 기색으로 말하였다.
"도리를 알았다면 이젠 어서 돌아가도록 하여라!"
초천의가 약간 톤을 높였다.
"너무 관대하게 처사하시는군요. 전 해검계 부근의 치안을 책임진 사람인데 저더러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말대꾸를 하는 거냐? 그러다간 내가 궁주님께 일러바칠 줄 알아라."
초천의는 머리를 돌리고 못 들은 척하였다. 그러자 반채의가 일곱째 부인한테로 눈웃음을
치며 다가왔다.
"일곱째 부인, 오빠가 어찌 부인님께 말대꾸를 하겠어요. 우린 어서 가요. 그러다 궁주님께
서 부인께서 없는 것을 알게 되면 성을 내실 거예요. 궁주님께서 성을 내시면 얼마나 무서
운지 부인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일곱째 부인은 초천의를 흘겨보더니 반채의를 따라 발을 옮겼다. 강금의도 반채의의 뒤를
따랐다.
무예시합 시간이 가까워 오자 사람들은 저마다 일어나서 해검계 시냇가로 몰려갔다.
푸른 풀밭에는 이미 사십여 명 되는 무림 인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개방의 제자들만 해도
십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은 차림새가 후줄근해서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다.
개방 사람들 가운데서 좀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이 석산공에게 다가와 읍을 하였다.
"선배님, 한대웅이 인사를 드립니다."
석산공이 절하려는 것을 말리며 일으키려 하는데 한대웅은 한사코 절을 하려 하였다. 석산
공은 한대웅이 자기와 무공을 비겨 보느라고 이런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한대웅은 자
기가 대번에 들리는 감을 느껴 하는 수 없이 일어섰다. 만일 그가 얼른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벌렁 자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한대웅은 내심 크게 탄복하여 다시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선배님의 공력은 역시 대단하시군요. 놀랍습니다."
석산공은 가슴까지 드리운 은빛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하하하, 개방은 실로 으뜸가는 대방(大幇)이 되기에 손색이 없네. 자넨 개방의 칠대 제자인
데도 이처럼 대단하니 개방엔 고수들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 있지 않겠나. 실로 다행한 일이
네."
그런데 어디선가 불쑥 차가운 목소리가 끼여들었다.
"개방에 고수들이 운집해 있다고 하지만 그 허실은 알 수 없소이다. 이 초 모가 한 수 가르
침을 받고자 합니다."
모두들 머리를 돌려 보니 오혈궁의 초천의 무리들이 우쭐거리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초천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듣자니, 한 칠대께서 하룻밤 사이에 금나라의 총병(總兵:무관 벼슬 이름) 하나와 일곱 무사
들을 찔러 죽였다니 과연 영웅답습니다. 강호의 벗들 속에서 소문이 자자하지요."
한대웅이 타구봉을 땅에 짚고 서서 대답하였다.
"한 모가 비록 무공은 보잘것없으나 원수를 죽여 나라에 보답하며 강포한 자를 제거하고 약
한 자를 도울 줄은 아옵니다. 우리 개방의 제자들은 모두 그렇습니다. 무공이 좀 있다 하여
약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심지어 쥐똥만큼의 이기심 때문에 도적을 애비로 섬기고 나라를
팔아먹는 짓을 서슴지 않는, 그런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과는 다르지요."
강호의 중문에 의하면, 오혈궁에서는 백은 십만 냥 때문에 고수들을 파견하여 송나라 변경
을 지키는 장수들을 살해하려 한 적이 있었는데 한대웅이 이 일을 빗대어 말한 것이었다.
모여 있던 사람들 중에 이 일로 오혈궁 문하의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송나라 변경을 지키는 장수를 살해한 사람이 바로 초천의였다. 그는 군웅들이 자기를
멸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부끄럽다 못하여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한 칠대, 허튼소린 작작하고 담력이 있으면 이 초 모와 한번 겨루어 보자. 너희들의 개방이
무서운가 아니면 우리 오혈궁이 고명한가 한번 비겨 보잔 말이다!"
초천의는 칼을 빼들더니 한대웅의 앞에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곧 '혈온욕박(血蘊欲搏)'이라
는 초수를 쓰려고 자세를 취하였다.
한대웅은 원래 불 같은 성미인데 수십 년간 무공을 닦은 경력으로 함부로 화를 내지 않을
뿐더러 일처리에 있어서도 주도면밀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개방의 칠대 제자
노릇을 하면서 수하에 이백여 명이나 되는 제자들을 거느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오늘 초천의가 기세 사납게 개방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니 한대웅도 그냥 참고 넘어
갈 수가 없었다. 그가 큰소리로 응수했다.
"내가 네 놈을 두려워할 것 같으냐?"
그런데 갑자기 한 거지가 뛰쳐나왔다.
"한 칠대님,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습니까? 저 놈이 다시는 우리 개방을 깔보
지 못하도록 이 제자가 버르장머리를 가르쳐 놓겠습니다."
한대웅이 바라보니 바로 수하의 육대 제자 상승(常勝)이었다. 그는 오금권(五禽拳) 문하에서
훌륭한 권술을 배운 사람이기는 하였으나 한대웅은 그가 초천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
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말리려고 하는데 상승이 화살같이 달려가 초천의 앞에 우
뚝 섰다.
"내가 한 쌍의 주먹으로 널 이겨 주마."
상승이 말을 마치자마자 땅에서 훌쩍 뛰더니 왼손으로 계형권(鷄形拳) 중의 '삽혈욕비(揷
欲飛)' 초수를 쓰고 뒤이어 오른손을 내밀었다.
초천의가 옆으로 피하면서 비아냥거렸다.
"닭새끼 같은 놈이 나의 칼과 겨루어 보려구?"
초천의는 칼을 거두더니 상승의 오른팔을 잡고 팔굽으로 그의 가슴을 들이치려 하였다. 그
러자 상승이 몸을 솟구쳐 '창응횡공(蒼鷹橫空)'의 초수를 써서 곤두박질을 쳤다. 상승은 오
른팔을 빼내고는 초천의의 등뒤에 서서 발로 그의 허리를 걷어찼다. 이것은 아형권(鵝形拳)
의 '야아번권(野鵝飜拳)'이라고 부르는 초수였다.
그러나 초천의가 앞으로 뛰어나가며 뒷발질을 하여 상승의 발을 차자 상승은 그대로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으으……윽."
초천의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네 놈을 죽여 거지닭들이 쪼아 먹게 모이로 주고 싶지만 내가 네 몸이 하도 더러워서 손을
안 대겠다."
오혈궁 시람들이 그 말에 폭소를 터뜨렸다. 반채의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조소를 던졌
다.
"저 거지 몸은 아마 온통 이투성이일 거예요. 불에 태워 죽이려 해도 이들이 막 기어 나올
까 봐 끔찍하군요."
강금의도 한마디 덧붙였다.
"사매는 잘 모르는군 그래. 군 닭요리를 해먹을 땐 먼저 진흙을 닭의 몸뚱이에 발라야 하는
거야. 그러면 이고 빈대고 한 놈도 기어 나오지 못하거든."
"그럼 군 닭요리를 해 잡수세요. 하지만 저게 어디 군 닭이에요. 군 이고 군 빈대죠. 오빠,
저런 놈은 구역질이 나 난 손도 못 대겠어요."
강금의와 반채의는 정말 구역질이 나서 못 견디겠다는 시늉을 하며 입을 싸쥐고 웃어댔다.
심한 모욕을 당한 상승이 잉어처럼 펄떡 뛰어 일어나더니 오금권법인 계형권, 응형권(鷹形
拳), 학형권(鶴形拳), 압형권(鴨形拳), 아형권의 기묘한 초수를 엇바꾸어 쓰면서 초천의에게
연속적으로 공격을 해대었다.
그의 무공이 자기보다 한참 떨어진다는 것을 안 초천의는 반격도 하지 않고 슬슬 피하기만
하였다. 그는 민첩한 몸놀림과 기묘한 보법으로 상승을 따라 이리저리 오가기만 하였다.
상승은 초수를 엇바꾸어 가면서 죽어라고 공격을 들이대었으나 초천의의 옷자락조차 건드리
지 못하였다. 상승은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솟은 그는 손을 멈추고
씩씩거리며 말했다.
"초천의, 담력이 있거든 그렇게 피하지만 말고 결사적으로 싸워라!"
"좋아, 네가 때리지 못하니 내가 때려 주지!"
초천의는 실실 웃어 가며 공격을 시작했다. 상승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맞받아 싸우려 했으
나 주먹을 채 내밀기도 전에 초천의의 장이 가슴에 와 닿았다.
뻥―!
요란한 소리가 터지면서 상승은 한 장 남짓 뒤로 날라가 해검계의 물 속에 떨어졌다.
한대웅과 몇몇 개방 제자들이 급히 상승을 건져 내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얀 상승은
입가로 선지피를 토하였는데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하였다. 한대웅은 급히 두 제자에게 상
승을 데려가 치료시키라고 명령하였다.
초천의가 득의 양양한 기색으로 말하였다.
"한대웅,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당신들 개방의 고수들이 나의 장을 단 한 개도 막아내지 못
할 줄 어찌 알았겠소. 허 참, 천하의 으뜸가는 대방인 개방도 허명뿐이로군."
그러자 한대웅이 타구봉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
"초천의, 너무 우쭐거리지 말아라. 이 한모가 대신 나가겠다!"
초천의는 두 손을 마주잡고 사방을 향해 읍을 하였다.
"각로의 영웅호걸 여러분, 이 초천의가 두 주먹으로 개방의 칠대 제자를 때려눕힐 테니 똑
똑히 보아 주십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초천의는 쌍장으로 한대웅을 공격했다. 이에 한대웅은 타구봉을 틀어쥐고
'봉도구와(棒搗狗窩)'의 초수로 찔러대기 시작하였다.
"멋지게 찌르는군!"
초천의는 여유를 부리면서 일부러 양팔을 벌려 가운데로 틈을 내주었다. 그것을 본 한대웅
은 깜짝 놀랐다. 상대방이 속임수를 쓰는 것이라고 짐작은 하면서도 기회가 너무 좋았다. 그
는 잠시 망설이다 초천의의 가슴팍을 타구봉으로 쿡 내질렀다.
아니나다를까 초천의는 재빨리 두 손으로 타구봉의 끝을 잡아 쥐었다. 타구봉 끝을 잡지 못
하면 가슴에 구멍이 날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으나 초천의의 무공은 한대웅보다 훨씬 나았던
것이다.
한대웅은 속으로 깜짝 놀랐으나 침착하게 발길을 날려 초천의의 손목을 걷어찼다. 초천의도
타구봉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김과 동시에 내리누르면서 한대웅의 오른발을 막았다.
그러자 초천의와 한대웅의 거리가 가까워져 사이가 한 자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갑자기 초
천의가 손을 놓더니 오른쪽 장으로 한대웅의 목을 치고 왼주먹으로 아랫배를 들이 질렸다.
한대웅은 손에 타구봉을 쥐고 있었으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휘두를 수가 없었다. 재빨리
봉을 버리긴 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당장 초천의의 주먹에 맞아죽게 되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죽기만을 기다렸다.
바로 이때 초천의의 정수리에서 가늘지만 강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한대웅의
몸이 훌쩍 뒤로 밀려갔다.
초천의가 바람 소리에 놀라 옆으로 피한 다음 살펴보니 노영웅 석산공이 지팡이를 들고 달
려들려고 하였다. 그 지팡이, 즉 용두괴는 무게가 스물일곱 근이나 되어 내리치면 천 근의
힘이 되는 것이었다.
초천의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석산공, 난 당신을 연세가 많고 덕이 있다고 존경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오?"
석산공이 지팡이를 비껴 든 채 빙그레 웃었다.
"젊은 사람이 너무 망령되게 굴면 못써. 무예를 겨루더라도 남한테 여지를 좀 주어야 하는
법이야."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한대웅은 자기를 구한 사람이 개방의 사대 장로에 속하는 노유각(魯
有脚)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였다.
"노 장로께서 목숨을 구해 준 은혜 고맙게 생각합니다."
"한집안 사람끼리 감사를 할 필요가 뭐 있나?"
한대웅은 다시 한 번 머리를 깊숙이 수그렸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나이가 오십이 된 이 거지가 개방의 노장로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
다. 그들은 오늘의 해검계 무예시합이 개방의 장로까지 끌어들였을 줄은 알지 못했던 것이
다.
지금 무림의 으뜸가는 고수는 동사, 서독, 남제, 북개였다. 개방의 방주인 북개 홍칠공은 소
탈하고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개방의 모든 일을 네 장로에게 떠맡기고는 사처로 떠돌아다니
고 있는 터였다. 그러므로 개방을 통솔하는 사람은 사실상 네 명의 장로였던 것이다.
개방은 최근에는 주로 강북(江北)에서 금나라를 항격하고 있었으므로 강호의 일에는 거의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런데 이 해검계의 무예시합에 개방의 장로가 친히 참가하였으니 군웅
들은 심상치 않은 일로 여겨져 불안을 느끼면서도 몹시 흥분되었다.
사람들 중에 평소에 나쁜 짓을 일삼던 자들은 겁이 나서 뒤로 슬슬 물러섰다. 그들은 협의
의 도를 이행하는 노유각이 혹시나 자기들을 건드릴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개방의 장로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초천의는 조금은 경계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귀하가 바로 노 장로이십니까?"
"그렇소, 내가 노유각이요. 나의 제자가 당신한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죽이려고 들었소?"
"싸움을 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별 희한한 질문을 다 보겠네!"
초천의의 이런 오만한 대답을 듣자 군웅들은 노유각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
다. 하지만 그들은 이 개방의 장로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랐으므로 이 오혈궁의 사
형을 능히 이길 수 있을지를 단정짓지 못했다.
노유각은 손에 들고 있던 타구봉을 내려놓더니 뜻밖에 말을 하였다.
"난 이곳에 당신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니오. 묘 궁주와 절정공자가 놀아야 할 배역을 어찌하
여 당신이 가로채어 가지고 이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거요.?"
말속에 가시가 있어서 초천의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으나 어찌 하는 수가 없었다.
군웅들은 사태의 발전을 주시하느라고 한 미녀가 가만히 사람들 속에 끼여드는 것을 알지
못했다. 뒤이어 얼굴이 누르끼리하고 얼빠진 듯한 사나이가 멀리서 따라오더니 그 여인한테
서 여남은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서 멍청하니 바라보는 것이었다.
"흑풍쌍살이에요!"
누군가 갑자기 소리쳤다. 여자의 음성이었다.
태호오교는 흑풍쌍살한테 곤욕을 치렀으므로 흑풍쌍살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이 두 사람이 동시 진현풍과 철시 매초풍이다!"
하지만 그들은 흑풍쌍살의 마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나서지 못하고 먼 곳에서 욕
설만 퍼부었다.
강호에서는 흑도(黑道)이거나 백도(白道)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흑풍쌍살을 미워하고 두려
워하였다. 그런데 이 남녀가 동시와 철시라는 말을 듣자 모두 급히 물러서면서 분분히 병장
기를 꺼내어 드는 바람에 진현풍과 매초풍은 포위된 꼴이 되고 말았다.
"다 같이 이 두 마귀를 죽여 버립시다!"
수상교 하아모는 이렇게 소리치며 한 쌍의 작살을 들고 당장 덮쳐들 듯이 요란을 떨었으나
진짜로 나서서 싸우지는 않았다.
군웅들 역시 멀찌감치 서서 바라만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모두들 오늘은 오혈궁 궁주 묘상
과 절정공자 탁운백 간에 진행되는 무예시합이나 구경하고 다른 시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
던 것이다. 자칫 잘못하여 구음백골조의 초수에 걸려 머리에 다섯 개의 구멍을 내고 죽고
싶지 않았다.
매초풍이 깔깔 웃어대며 다가왔다.
"태호오교, 우린 구면인 셈이죠."
태호오교는 노유각과 석산공의 뒤로 비실비실 물러나며 큰소리쳤다.
"흥, 네 년이 연약한 여인이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린 벌써 네 년의 몸에 작살로
구멍 사십 개쯤은 뚫어 놓았을 거다!"
한 발 한 발 다가서던 매초풍은 노유각과 석산공을 알아보자 꺼림칙해 하며 발길을 멈추었
다.
"그럼 내가 당신들 오교가 날 죽이지 않은 은혜에 감사를 드려야겠군요."
번파교 오비용이 떠들었다.
"감사할 필요는 없어. 우리 태호오교 호남아들은 여인하고는 다투지 않아."
매초풍은 아무 말 없이 날카로운 눈길로 군웅들을 훑어보았다.
아까 들은 여인의 목소리가 여소교의 목소리와 아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
지만 사람들 속에 여소교는 없었다. 매초풍은 분명 그녀가 군중들 속에 숨어 있으리라 생각
했다.
매초풍은 머리를 돌려 문득 진현풍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한평생 날 따라다닐 참이에요?"
"그렇찮구, 난 당신을 떠날 수 없소."
"당신도 들으셨겠죠? 방금 소리 지른 년이 바로 당신의 여 아씨란 말이에요. 왜 찾지 않는
거죠?"
"그 여잔 우릴 해치려고 들었소. 그런데 난……."
"뭐 우리라구요? 난 나고 당신은 당신이에요. 우린 이제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여보, 나의 맘속엔 당신밖에 없다는 걸 알아야 하오. 그땐 내가 정말 정신이 나갔었다니
까."
군웅들은 흑풍쌍살의 이런 대화를 듣고 얼떨떨해졌다. 그들은 동시와 철시 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태호오교와 금도 임청은 흑풍쌍살에게 무슨 갈등이
생겼다고 보지 않고 두 남녀가 꾸며대는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모두의 관심을 끄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찌국…… 찌국…… 찌국…….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절름
발이였다. 그는 쌍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찌국거리는 소리는 그가 지팡이로 땅을 짚을 때
나는 소리였다.
동시와 철시의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한대웅이 그들 앞으로 달려가 기쁜 얼굴로 맞이하였다.
"육 장주님, 막 장문님. 두 분께서도 무예시합 구경을 오셨습니까?"
육승풍과 막여인이 군중들 앞으로 다가왔다. 군웅들은 이 두 사람을 모르지만 이 두 사람도
역시 개방의 사람이리라고 추측하였다. 하지만 육승풍과 막여인 두 사람의 옷차림새와 행동
거지는 정결하고 점잖아 누더기를 걸치고 얼굴에 때가 가득한 개방 제자들과는 딴판이었다.
막여인이 한대웅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이상하단 말이야, 누구인가가 편지 한 통을 우리 마을에 보내왔소. 해검계에서 전례없던 고
수간의 무예시합이 벌어지는데 그 쌍방은 절정공자 탁운백과 오혈궁 궁주 묘상이라고 그러
더군. 편지를 보니 필적도 깨끗하고 거짓말 같지가 않아 이렇게 구경하러 온 걸세."
육승풍이 물었다.
"한 칠대, 오늘 정말 그런가?"
한대웅이 군웅들을 가리키며 대답하였다.
"이 호한들도 모두 구경을 온 사람들입니다."
한대웅은 그들을 노유각, 석산공에게 인사를 시켰다.
육승풍이 쌀쌀한 눈길로 매초풍과 진현풍을 바라보았다.
"무예시합을 하는 게 사실이라면 동시와 철시가 꼭 오리라고 생각했었지. 동시와 철시가 과
연 이곳에 와 있으니 이 육 모가 헛걸음을 한 셈은 아니야."
매초풍이 조소를 지었다.
"육 사제, 한대웅이 당신을 보고 육 장주라 부르던데, 그래 가업을 새로 일으켜 세운 모양이
로군요?"
"도화도의 변절자를 잡아죽이는 건 하루 이틀 사이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그 사이
에 더러 쉬기도 하고 은냥을 수입하여 노자로도 써야 하지."
"육 사제가 가업을 일으켜 세웠다니 정말 잘됐군요. 이 사저(師組)는 의지할 데가 없어 풍찬
노숙(風餐露宿)을 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하고 있어요. 이 사저를 좀 도와주구려."
그러자 육승풍이 웃으면서 비꼬았다.
"매 사저, 만일 도망하다 피로하면 우리 집에 들러 며칠 쉬어도 좋아. 우리 집은 태호 가에
있으니 수시로 영접해 들일 준비가 되어 있거든."
"육승풍, 당신은 하필 이 사저 때문에 그다지도 심려하시나요? 당신이 사부님한테서 적지
않은 포진술(布陳術)을 배웠을 텐데 이 매초풍이 아무리 둔하기로서니 당신 집에 가서 스스
로 그물속에 갇히겠어요?"
그러자 막여인이 말하였다.
"매초풍, 진현풍. 임자들 말이 맞아. 육가장에는 도처에 미혼진과 함정을 설치해 놓아 들어
올 수는 있어도 나갈 수는 없지. 임자들도 감히 찾아오지는 못할 거네."
진현풍이 코방귀를 뀌었다.
"이 놈아, 격장법은 아무데서나 쓰는 게 아니야. 우리 부부는 네 놈한테 절대 속지 않는다!"
그러자 매초풍이 진현풍을 흘겨보며 쏘아붙였다.
"뭐가 우리 부부예요? 진현풍, 난 당신한테 시집간 일도 없으니 허튼소리 말아요!"
진현풍은 말문이 막혀 머리를 수그렸다.
그러자 육승풍이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놀려댔다.
"진 사형, 매 사저. 임자들이 도화도에서 사부님 모르게 치정 관계에 빠진 일은 더 말하지
않겠어. 지금도 천하의 영웅들 앞에서 여전히 그 수작질이군. 임자들은 이 자리에 있는 뭇영
웅들을 바보로 아는 거야?"
육승풍은 될수록 군웅들과 흑풍쌍살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했다. 군웅들은 서로 이마를 맞대
고 수군거렸다. 육승풍이 붙는 불에 키질 하는 격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다른 사람들은 말하지 않겠다. 매 사저, 진 사형, 이곳에는 개방의 노 장로와 노영웅 석 선
배도 계시는데 임자들은 이 두 분도 안중에 없단 말이냐?"
매초풍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육승풍, 난 이미 진현풍과 관계를 끊었어요. 절대 거짓말이 아니에요!"
그 말을 들은 육승풍은 다시 생각해 보았다.
'매초풍과 진현풍의 기색을 보니 사이가 벌어진 게 틀림없어. 그런데 왜 이곳에 함께 있는
것일까?'
태호오교는 육승풍의 말이 아주 불만스러웠다. 불만을 참지 못하고 교중교 이명도가 한마디
던졌다.
"다른 사람들은 말하지 않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그래 우리 태호오교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오? 누구든 우리 태호오교를 업신여기다간 돌을 들어 자기 발등을 까게 된다는 걸 기억
해 두시오!"
노조교 서구광은 이름을 찍어 가면서까지 욕설을 퍼부었다.
"육승풍, 당신은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도 태호를 끼고 밥을 먹고 사는 신세에 우리 태호
오교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볼 수 있단 말이오?"
육승풍은 미간을 찌푸리고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난 한마음으로 저 흑풍쌍살을 대적하려고 그러는데 너희들 태호오교들은 이처럼 되지못하
게 노는구나.'
육승풍은 속마음은 접어 두고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오해하지 마오. 모두 한 고향 사람들인데 말 몇 마디에 얼굴을 붉힐 건 없지 않
소."
막여인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잖구. 다섯 분께서 마음을 좀 넓게 써 주시오."
낭리교 주지청이 비웃는 투로 말하였다.
"넌 어떤 물건짝이기에 감히 우리 앞에서 사설을 늘어 놓느냐!"
육승풍이 화가 나서 불쑥 나서려고 할 때 막여인이 그러지 말라고 눈짓을 하고 나서 웃는
얼굴로 정중하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이 미꾸라지 같은 다섯 놈을 조만간 없애 버려야겠다.'
육승풍이 겨우 분을 삭이면서 다짐하였다. 잠시 숨을 고른 뒤 그는 큰 목소리로 군중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여러 영웅들! 흑풍쌍살은 건장한 사람들을 골라 자기들의 마공을 닦는 과녁으로 삼고 있습
니다. 특히 무공을 닦은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 수단이 악랄하기로 고금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지요.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났으니 여러분들이 일심 협력하여 이 두 마귀를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해도 쓸데없게 뒹니다!"
군웅들은 그 말이 사리에 맞는 말이라고 여겼고 심지어는 병장기를 꺼내 드는 사람들도 더
러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으로는 동감하면서도 목을 움츠려뜨렸다.
진현풍이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 질렀다.
"누구든지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의 맛을 보고 싶으면 덤벼라. 이 진현풍이 본때를 보여주겠
다!"
그가 흉악한 몰골을 드러내자 아무도 찍소리를 하지 못하였다.
"쳇, 여우가 호랑이 탈을 쓰고 우쭐거리는 그런 수작을 또 부리려구? 다른 사람은 그걸 몰
라도 이 육승풍은 네 놈의 내막을 빤히 알고 있다."
육승풍은 석산공, 노유각 두 사람 앞에 가서 읍을 하였다.
"두 선배님, 지금이야말로 두 분께서 천하의 백성들을 위하여 정의를 지킬 때입니다. 두 분
께서 저 두 악마를 없애 주시기를 바랍니다."
석산공과 노유각은 서로 마주보면서 머리를 저었다. 그러자 육승풍이 안타까운 듯 말을 이
었다.
"그래 두 분께선 흑풍쌍살이 저처럼 우쭐거리게 내버려둘 작정이십니까? 두 분께서는 저 흑
풍쌍살이 두려워 그러십니까?"
그러자 노영웅 석산공이 대답하였다.
"내가 그까짓 두 놈을 두려워할 턱이 있나!"
"그럼 노인께선 왜 손을 쓰려 하시지 않습니까?"
석산공이 안타까운 듯이 노유각을 건너다보자 노유각이 입을 열었다.
"육 장주,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게. 저 흑풍쌍살을 없애 버리는 건 우리 선배들이 해야
할 의무야. 그래 육 장주도 먼저 묘 궁주와 탁 공자의 무예시합을 보아야 하지 않겠나?"
육승풍은 한 가닥 기대를 걸고 막여인을 물끄러미 건너다보았지만 막여인도 막연한 기색으
로 앉아 있었다.
이때 한대웅이 소리를 질렀다.
"어서 보게나. 오혈궁 궁주께서 오시네!"
먼 곳의 밀림 속으로부터 오혈궁의 제자들이 두 줄을 지어 오고 있었는데 그 복판으로 자그
마한 가마 두 대가 보였다. 가마는 차체며 휘장이 온통 새빨갰는데 그것을 멘 여덟 가마꾼
들도 온통 새빨간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푸른 풀밭에서 새빨간 핏덩이가 굴러오는 듯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피비린내를 느끼게 하였다.
그 핏덩이들이 드디어 해검계 시냇가에 당도하였다. 두 가마가 멈춰 서자 뒤에 있는 가마의
휘장이 열리더니 온몸에 소복 단장을 한 아름다운 부인이 내렸다. 그 모습은 더러운 핏못
속에 빠진 한 떨기의 백합화 같았다.
미인은 몸매가 날씬하고 두 눈이 아주 어글어글하였는데 걸음걸이는 흐르는 시냇물처럼 아
주 잔잔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커다란 눈은 웬지 우울하고 불안해 보였다.
개방의 삼대 제자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일곱째 부인이군요!"
석산공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미인의 자태를 보고 금세 그녀가 묘상의 일곱째 부인임을
알아차렸다.
몇몇 오혈궁의 제자들이 재빨리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팔선상과 겉에 불여우 가죽을 씌
운 의자를 갖다 놓았다. 팔선상 위에는 참주전자 한 개와 찻잔 한 개가 놓여졌다.
사람들은 곧 짙은 차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한 오혈궁의 제자가 어디에서 끄집어냈는지 볏이 커다란 수탉을 들고 나와 칼로 닭의 모가
지를 자르고는 찻주전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의 피를 받았다.
그 일이 끝나자 한 강호객이 입을 열었다.
"저 주전자 안에 꼭 열 방울의 피가 들어갔어. 아마도 오혈궁 묘 궁주의 운수가 완미하기를
바라는 모양이야."
불여우 가죽을 씌운 의자에 뚱뚱하지도 여위지도 않은,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젊지도 늙
지도 않은, 영준하게도 추하게도 생기지 않은, 사나워 보이지도 선량해 보이지도 않는, 출중
해 보이지도 속되어 보이지도 않는 사내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의 나이를 가늠해 낼 만한 사람도 없거니와 오혈궁의 궁주가 이처럼 너무나도 평범
해 보이는 보통 사람이리라고 짐작한 사람도 없었다.
대단한 명성을 갖고 있는 묘상이 너무나도 평범하게 생긴 까닭에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다
른 사람에게 그의 생김새를 말하기가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얼마 안 지나서 그가 어
떻게 생겼는지 깡그리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범상치 않은 점이라면 묘상이 입은 새빨간 비단 두루마기와 머리에 쓴 적금홍옥관
(赤金紅玉冠)뿐이었다.
피가 섞인 차가 철철 넘치게 찻잔에 부어졌다. 묘 궁주는 그 차를 여덟 모금에 마셨다. 그러
자 다시 철철 넘치게 찻잔이 채워졌다. 그는 마치 세상에 자기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듯이 멍하게 앞을 바라보며 천천히 차를 마시기 시작하였다. 너무나도 태연
하게, 그리고 아주 천천히.
묘상이 그러는 동안 그의 제자들은 부지런히 여러 가지 과일과 과자들을 상 위에 가득 가져
다 놓았다.
일곱째 부인은 묘상의 뒤에 서 있었다. 모든 것이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듯한 표정
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한 가닥의 비웃음이 내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묘상의 무
딘 감각과 냉담한 자태, 그리고 제자들의 소심성과 분주히 서두는 꼴―을 비웃는 듯하였다.
드디어 묘상이 입을 열었다.
"천의, 탁운백은 왜 아직도 안 오냐?"
초천의가 예를 올리고 나서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글쎄, 아직도 안 오는군요."
"과연 빈틈없는 대답이로군. '안 온다'는 그 대답은 참 묘하군 그래. 이 궁주는 더 물을 방
법이 없단 말이야. 하하하, 참 묘하군!"
궁주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군웅들을 둘러보다가 이제야 그들을 발견이나 한 듯이 물었다.
"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였나? 천의, 임잔 또 빈틈없이 대답할 수 있겠나?"
초천의가 웃음을 처발랐다.
"영명한 궁주님께서 내놓으신 물음에 소인은 늘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빈틈
없는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천의, 솔직히 말하게. 무엇 때문에 무예시합을 한다는 걸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나
말이야?"
초천의가 난색을 지으며 대답하였다.
"궁주님께서 소식이 새나가지 않도록 하라고 엄령을 내리셨는데 본 궁의 제자들이 어떻게
감히 그 소식을 누설하였겠습니까?"
"임자 보기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모인 것 같나?"
"소인이 보기엔, 보름 사이에 강호의 수많은 인물들이 청첩을 받고 해검계로 무예시합 구경
을 온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
묘상은 손을 흔들어 반채의를 불렀다. 반채의가 달려가 만복을 빌면서 인사를 드렸다.
"궁주님, 무슨 분부가 있나이까?"
그녀의 어조는 아주 간드러졌다. 묘상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어루만지면서 물었다.
"채의야, 넌 이 일에 대해 들은 적 있느냐?"
반채의가 머리를 끄덕 이면서 대답하였다.
"소인은 의심스럽게 생각되나이다. 탁운백이 언약을 지키지 않은 게 아닐까요? 자기가 궁주
님의 적수가 되지 못하니까 무림의 인물들을 많이 초청해다가 응원하도록 한 것인지도 모르
지요. 궁주님께서 탁운백을 격패시키는 걸 이 사람들이 지켜보게 될 테니까 죽이기까지 하
자면 멋쩍어지겠지요. 탁운백은 바로 이 점을 생각한 것 같아요."
묘상이 그 말을 듣고 머리를 끄덕이며 웃었다.
"사리에 맞는 말이야. 채의는 갈수록 공손해 지는구나. 자, 이리와 과일을 좀 먹어라."
반채의가 팔선상 곁으로 다가가서 방금 따온 신선한 과일을 집어들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
들 앞에서 체면도 없이 마구 먹어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보니 온 얼굴과 손에 과일즙이
잔뜩 묻었다. 그녀가 걸신들린 것처럼 마구 먹어대자 묘상은 기분이 좋아서 손뼉까지 쳐대
는 것이었다.
초천의가 다시 궁주 가까이 와서 말하였다.
"무예시합 시간이 다 되었는데 탁운백은 왜 안 올까요?"
"넌 어떤 놈이기에 방종하게 구는 거냐?"
바로 이때 멀리서 카랑카랑한 소리가 들려 왔다.
그 목소리는 높지는 않았으나 마치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모두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수십 장 되는 곳에서 흰 그림자 하나가 이곳을 향
하여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절정공자 탁운백이었다. 그는 온몸에 소복 단
장을 하고 발에는 나막신을 신고 있었다. 그 사람은 보폭이 그리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달리는 것보다도 더 빨리 걸었으며 옷자락이 펄펄 날렸는데 그야말로 신선이 날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군웅들 앞까지 온 탁운백은 찬바람이 돌 정도로 매서운 눈길에 허리에는
여전히 칼집 없는 녹슨 검을 차고 있었다.
초천의는 탁운백한테 크게 혼난 적이 있었으므로 묘상을 비롯한 동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서도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꽉 움켜잡았다.
오혈궁 궁주 묘상이 웃는 얼굴로 말하였다.
"절정공자께서 절정은 하였어도 약속만은 지키셨군요. 좋습니다. 본 궁주는 아주 만족하게
생각합니다."
탁운백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묘상의 뒤에 서 있는 일곱째 부인을 쏘아보며 인사를 건
넸다.
"정아, 삼 년 동안 잘 지냈소?"
그의 어조는 쌀쌀하였으나 어딘가 모르게 정이 어려 있었다.
일곱째 부인은 눈썹을 약간 움직였을 뿐 앵두 같은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매초풍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이 아름다운 일곱째 부인이 탁운백의 옛 연인 유정아로구나. 묘상이 이 여인을 데려온 건
십중팔구 탁운백을 괴롭히려는 것일 거다. 고수들의 무예시합이니 조금만 실수해도 신세를
망치게 될 거다. 묘상이 겉으로는 저렇게 고분고분한 것 같지만 속에는 뭔가 응어리가 맺혀
있어.'
석산공, 노유각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절정공자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상하게 되면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은 상상하기조차도 어려운지라 모두들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었다.
묘상은 자기 뒤에 있는 유정아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웃는 낯으로 말하였다.
"탁 공자님의 관심에 감사를 드립니다만 나의 일곱째 부인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혈궁에
서 일곱째 부인은 여주인이라 금은보화가 넉넉하고 하늘의 달과 별을 빼놓고는 무엇이나 다
있지요.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은 모두 당세의 영웅이란 말입니다. 만일 당신이 나한테 청구하
기만 한다면 나는 섭섭하지만 유정아를 당신한테 돌려드리렵니다. 하하하!"
창백하던 절정공자의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졌다. 그는 숨결이 거칠어지는 것 같더니 소리쳤
다.
"묘 궁주의 관심에 이 탁 모는 감사를 드리오. 하지만 이 탁 모가 요행이나마 묘 궁주를 이
기게 된다면 유정아는 자연히 나한테 속하게 되는 거요."
묘상은 그가 화는 내는 것을 보자 은근히 득의양양해 하면서 여유를 부렸다.
"그야 물론이지요. 천 년 묵은 산삼과 유정아는 우리 두 사람이 도박을 걸어 이기는 사람한
테 속하게 된 게 아닙니까? 휴, 삼년 전에 탁 공자가 계율을 타파하고 먹고 마시고 오입질
하고 도박하는 네 가지 재미를 제대로 볼 줄 알았더라면 오늘 이곳에서 목숨을 내걸고 싸우
게 되지는 않았겠지요."
유정아의 얼굴에 조소의 빛이 어렸다. 그녀는 탁운백을 조소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조소
하였다. 그녀는 자기의 운명이 두 사나이의 도박에 달려 있는 데 대하여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탁운백이 묘상이 마주앉은 팔선상을 건너다보며 말하였다.
"도박은 두 가지, 즉 유정아와 천 년 묵은 산삼 때문에 하는 거요. 탁 모는 무예시합을 하기
전에 우리 가문의 대물림 보배가 제대로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겠소."
오혈궁 궁주 묘상이 만면에 웃음 떤 얼굴로 대답했다.
"탁 공자께선 본 궁주를 믿지 않는구려. 이리 오너라. 가서 천 년 묵은 산삼을 가져오너라!"
오혈궁의 두 제자가 즉시 가마에 가서 새까만 나무함을 가져 왔는데 폭과 길이가 석 자나
되고 두께가 반 자쯤 되는 것이었다. 묘상이 손을 들어 한 번 붉은 소맷자락을 날리자 팔선
상 위에 가득 놓여 있던 과일들이 폭풍을 만나기나 한 듯이 날아가 삼 장이나 떨어져 있는
해검계에 떨어졌다.
그것은 탁운백과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한 짓임이 틀림없었다. 이 일
은 묘상의 내공이 극한에 이른 정도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군웅들은
모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절정공자마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삼 년 사이에 묘상의 무공이 또 대단히 늘었구나.'
묘상이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먼저 공자님께 보인 다음 상 위에 놓거라."
두 제자가 나무함을 탁운백 앞으로 가져갔다.
"묘 궁주께선 이처럼 이 탁 모를 믿으시오? 만일 이 탁 모가 보물을 가지고 도망간다면 묘
궁주는 큰 낭패가 아니겠소?"
묘상이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정아는 당신을 믿지 않았지만 이 묘상은 당신을 믿고 있소. 탁 공자처럼 이름난 영웅이 어
찌 천하의 비웃음을 살 일을 하겠소?"
탁운백이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나무함을 받아 들었다.
"좋아, 아주 좋소. 이 탁 모는 스스로 별호를 절정이라 지은 것만큼 그까짓 유정아 따위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소. 오늘 천 년 묵은 산삼이 이렇게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이 무예시합
을 취소하겠소."
탁운백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탁운백이 십여 보 걸어간 뒤에야 묘상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하였다.
"탁 공자, 당신도 마찬가지로 나를 믿어 주어야 하지 않겠소?"
탁운백이 걸음을 멈춰 서더니 돌아서서 대꾸했다.
"물론 믿겠소. 유비(劉備)가 조조(曺操)를 믿듯이 말이오."
그리고 나서 탁운백은 나무함을 해검계의 물 속에 집어 던졌다. 나무함은 물결을 따라 아래
로 떠내려갔다.
묘상이 손뼉을 마주치며 말하였다.
"탁 공자는 과연 총명한 사람이로군. 당신은 나무함 속에 든게 천 년 묵은 산삼이 아니라고
생각되오?"
"만일 오혈궁 궁주가 이처럼 쉽사리 천 년 묵은 산삼을 탁 모의 수중에 넘겨준다면 이 아니
천하의 웃음거리겠소? 당신이 근본적으로 날 믿지 않는데 내가 왜 당신을 믿겠소?"
묘상이 훌쩍 뛰어 해검계 위를 떠가는 나무함을 손으로 건져 가지고 소맷자락을 펄럭여 그
힘으로 제자리에 가볍게 돌아와 앉았다. 그 경공을 보고 군웅들은 또 한 번 탄성을 질렀다.
갑자기 탁운백의 안색이 변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묘 궁주, 그렇다면 그 나무함 속의 것이 진짜요……?"
묘 궁주가 득의양양하게 대답하였다.
"나도 당신이 믿지 않으리라는 걸 짐작했었소."
묘상은 함 뚜껑을 열어 함을 팔선상 위에 놓았다.
탁운백이 가까이 가서 보니 나무함 속에는 확실히 그의 가문의 대물림 보배인 천 년 묵은
산삼이 들어 있었다. 사람의 모양을 닮은 그 산삼은 오관이 똑똑히 나타나 보였고 여덟 개
의 동자삼도 팔괘의 위치대로 큰 삼 주위에 분포되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난 그는 얼떨떨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탁운
백의 기세가 다소. 눌리고 말았다.
묘상이 일어나 한복판으로 나오더니 입을 열었다.
"탁 공자, 더 긴 말 할 필요는 없소. 어서 무예시합을 시작합시다."
"좋소. 말을 많이 하면 쓸 말이 적어지는 법이오!"
탁운백은 말을 하자마자 달려가면서 주먹으로 묘상의 면상을 갈겼다. 그 주먹질은 옆에서
보기에는 대수로워 보이지 않았으나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힘이 있었던지 마치 작은 산이
밀려오는 듯해 그 주먹에 맞으면 치명상을 입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오혈궁 궁주 묘상도 그대로 맞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른쪽 옷소매를 날려
탁운백의 주먹이 빗나가게 하는 한편 왼쪽 장을 탁운백의 아랫배를 향해 내질렀다. 탁운백
은 오른쪽 주먹이 빗나가자 그 주먹을 끌어당기면서 다시 묘상의 면상으로 내뻗었다. 탁운
백의 그 주먹만 아니었다면 묘상이 내지른 왼쪽 장이 먼저 탁운백의 아랫배를 격중할 수 있
었다. 하지만 탁운백의 오른쪽 주먹이 계속 자기 면상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묘상은 그
것을 막는 데 정신이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양쪽 다 손해를 보게 하는 초수였다. 묘상은 속으로 화가 났지만 하는 수 없
이 반 발자국 물러서면서 탁운백의 주먹을 피했다. 탁운백은 맹렬하고 사나운 '절정권법'을
구사하여 연속적인 공세를 들이대었다.
탁운백보다 공력이 뛰어난 묘상은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탁운백은 연거푸 나의 계교에 넘어가 심리적인 자극을 받지 않았던가? 그래서 오히려 초수
가 혼란해져 일격에 무너져 버리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맞붙어 보니 나보다도 침착하구
나. 왜 이럴까?'
절정공자는 묘상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십여 합을 싸우고는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는 묘
상의 장을 두 주먹으로 막음과 동시에 '절정권각십팔절(絶情拳脚十八絶)'이란 초수를 썼다.
그는 두 발로 땅을 구르며 석 자나 훌쩍 뛰어올라 두 발끝으로 묘상의 가슴과 아랫배의 단
전을 걷어찼다.
묘상은 방장이 위에 있는지라 미처 막아낼 겨를이 없어 급히 한 장 남짓한 높이로 뛰어올랐
다. 탁운백은 상대방이 그렇게 할 것을 미리 짐작했던 듯이 두 발을 공중에 두고 두 주먹으
로 땅을 짚어 팔힘으로 다시 훌쩍 솟으면서 두 발끝으로 묘상을 올려 찔렀다.
묘상은 깜짝 놀라 두 팔소매를 저어 그 힘으로 곤두박질을 쳐 뒤로 물러났다. 절정공자도
공중에서 몸을 날려 일으켜 세우더니 두 주먹으로 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빵! 빵―!
묘상이 쌍장을 내밀어 절정공자의 주먹과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두 사람
은 땅에 내려섰다.
땅에 내려서자마자 탁운백이 두 다리로 묘상의 요해처를 향해 발길질을 계속하는 바람에 묘
상은 하는 수 없이 한 발 한 발 뒷걸음질하다가 드디어는 한 장이나 되게 훌쩍 뛰어 물러섰
다.
묘상이 씩씩거리면서 말하였다.
"삼 년 전에는 절정권각십팔절로 나와 맞설 수 없었을 거야. 왜 삼 년 전에 나한테 덤벼들
지 않았는지 유감스럽군. 그런데 삼 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여전히 당해내지 못하는구먼 그
래."
그러자 탁운백도 지지 않고 한마디 쏘아 주었다.
"탁 모는 당신이 천 년 묵은 산삼을 얻었으니 무공이 대단히 늘어난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 꼴이 그 꼴이로군. 오히려 삼 년 전만 못해졌어."
그 말에 묘상이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
"뭐, 천 년 묵은 산삼을 얻었다구? 임자네 탁씨 가문에선 세세 대대로 이 보물을 전해 내려
오면서도 감히 복용을 못하잖았는가? 그러고서도 나를 비웃는단 말인가?"
탁운백이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놀려 주었다.
"보물을 얻고서도 쓸 수가 없어 매일 보기만 했으니 이거야말로 신을 신은 채 발을 긁는 격
이 아니고 뭔가. 이런 맛을 묘 궁주는 삼 년 동안이나 보았으니 견디기 무척 어려웠을걸?"
묘상은 맘속의 아픈 점이 찔리자 화가 나서 펄펄 뛰었다.
"탁 공자, 만일 내가 천 년 묵은 산삼을 이 장소에 있는 한 영웅한테 선물한다면 임잔 더욱
우쭐거리겠군!"
그 말에 탁운백은 안색이 확 달라졌다. 그는 이 묘상이 변덕이 죽 끓듯 하여 흔히 남이 생
각지 못하는 엉뚱한 짓을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묘상이 정말 탁씨 가문의 이 천
년 묵은 산삼을 제멋대로 남한테 주어 버린다면 그것은 실로 조상들에게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급해진 탁운백이 소리 질렀다.
"묘 궁주, 천 년 묵은 산삼은 우리 두 사람 간의 도박으로 귀추가 결정되어야지 절대 남한
테 내주면 안 된단 말이오!"
오혈궁 궁주는 일부러 어긋나게 말하였다.
"내가 임자네 가문의 대물림 보배를 남한테 내어준들 자네가 날 어쩔 셈인가?"
묘상은 제자리에 돌아와 앉아 좌중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 장소에 앉아 있는 여러 영웅 호한들, 오늘 본 궁주는 기쁘게 이 천 년 묵은 산삼을 남
한테 선물하겠소. 이미 입 밖에 낸 말을 걷어들일 수는 없소. 만일 그런다면 천벌을 받겠
소!"
그러자 군웅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서로 귓속말을 하면서 의론이 분분하였다. 몇몇 탐
욕스러운 자들이 떠들어댔다.
"묘 궁주님, 그 천 년 묵은 산삼을 누구한테 선물하시렵니까?"
"묘 궁주, 저는 줄곧 오혈궁을 맘속으로 높이 모시고 있습니다. 그걸 소인에게 주십시오!"
장 내에서는 별별 추태가 다 벌어졌다.
석산공이 노유각을 바라보니 노유각은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두 사람은 긴장한 시선으로
절정공자를 주시하였다.
탁운백의 기색은 갈수록 험상궂어 갔다. 그는 한마디 한마디를 씹어 뱉듯이 말하였다.
"누구라도 이 탁운백의 일을 방해한다면……."
탁운백이 검을 빼들어 하늘로 추켜 들자 검끝에서 서릿발이 번뜩였다. 그것을 본 군웅들은
깜짝 놀라 더는 찍소리 하는 사람이 없었다.
묘상이 그 광경을 보고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어느 호한이 나와 당장 이 산삼을 먹어 버리겠소? 그러면 절정공자도 어찌할 방법이 없을
거요!"
그러자 좌중은 또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한편 매초풍은 여전히 자기에게 시선을 꽂고 있는 진현풍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진현풍, 천 년 묵은 산삼은 천하의 군웅들이 다 탐내는 보물인데 당신은 욕심이 안 나요?"
진현풍이 암담한 심정으로 대답하였다.
"내 맘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당신뿐이오. 당신을 위해서라면 난 불바다에라도
뛰어들겠소."
매초풍이 깔깔 웃더니 말하였다.
"불바다에 뛰어들 것까지는 없어요. 보세요. 천 년 묵은 산삼은 양기를 돕고 열을 더해 주는
천하에서 으뜸가는 보약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보통 산삼 한 뿌리를 복용하고도 견뎌내지
못하는데 천 년 묵은 것을 날것으로 씹어먹으면 반드시 죽고 말 거예요."
그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진현풍을 쳐다보며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더러 저리로 가서 산삼을 씹어 자시라고 하면 당신은 그대로 할 건가요?"
진현풍은 아무 말도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매초풍이 깔깔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불바다에라도 뛰어들겠다구요? 당신의 맘속엔 여소교밖에 없는데 아직도 날 속이려구
요?"
동시 진현풍은 매초풍이 시답지 않아 하자 고민하였다.
'여보, 당신이 날 믿지 않고 오해하고 있는데 내가 이 세상에서 무슨 살맛이 나겠소? 내가
죽음으로써 당신한테 나의 마음을 보여주겠소.'
이렇게 결심하고 난 진현풍은 아무 말 없이 군웅들의 머리 위를 훌떡 뛰어넘어 팔선상 앞에
와 섰다.
"묘 궁주, 내가 천 년 묵은 산삼을 먹겠소. 당신 말을 신용할 수 있소?"
묘상은 얼떨떨한 기색으로 진현풍을 바라보았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런 미친
사람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묘상은 머리를 끄덕 이면서 대답하였다.
"본 궁주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오. 이 자리에서 먹으시오. 하지만 본 궁주는
귀하의 이름을 알아야겠소. 난 무명지졸을 죽이고 싶지 않단 말이오."
"내가 바로 흑풍쌍살 중의 동시 진현풍이오. 이름은 묘 궁주만큼 뜨르르하지 못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있을 거요."
"당신이 동시였구만 그래! 하하하……! 좋소, 이 천 년 묵은 산삼은 당신 거요!"
진현풍은 그 자리에서 함 속에서 두 개의 동자삼을 꺼내어 입에 넣고 와작와작 씹었다. 그
는 무를 씹어먹듯이 두 개의 동자삼을 두세 입에 다 먹어치웠다.
그것을 본 군웅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절정공자가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려 했으나
묘상이 가로막았다. 노유각과 석산공도 섣불리 참견하고 앞에 나설 수 없어 초조해 하기만
했다.
진현풍이 진짜 천 년 묵은 산삼을 씹어먹는 것을 보자 매초풍은 깜짝 놀랐다. 진현풍이 무
정하다고 미워했지만 그래도 부부간이었고 동문의 형매(兄妹)지간이었다. 다급해진 매초풍이
소리질렀다.
"진현풍, 당신 정말 죽고 싶어 그러는 거예요? 나 때문에 그럴 필요가 어디 있어요. 우린 이
제 남남끼린데!"
진현풍은 자기가 이렇게 하면 매초풍의 마음도 돌아서리라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듣자 정말
죽어 버리고 싶어 나머지 여섯 개의 동자삼도 와작와작 씹어먹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여덟
개의 동자삼을 몽땅 먹어 버린 진현풍은 사람처럼 생긴 큰 산삼을 집어 들었다. 그는 숱한
사람들이 아우성을 지르는 가운데 그 큰 산삼을 와작와작 씹어먹었다.
매초풍은 진현풍이 정말 천 년 묵은 산삼을 다 먹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프고 화도 났지만
숱한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달려가 구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
고 애간장만 태웠다.
한편에서는 약속을 저버린 데 대해 화가 난 절정공자 탁운백이 손에 검을 들고 오혈궁 궁주
와 싸우고 있었다. 오혈궁 궁주는 시뻘건 오혈도를 빼들고 탁운백을 맞아 싸우는데 칼과 검
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진현풍이 몸을 돌려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매초풍을 흘겨보며 울부짖었다.
"여보, 당신이 날 이해해 주지 못하니 난 죽을 수밖에 없소!"
진현풍은 뱃속이 화로 속처럼 뜨거워지더니 열기가 사지와 온 몸으로 뻗치는 감을 느꼈다.
목 안과 혓바닥이 마르고 목구멍에 연기가 들어찬 듯이 매캐한 느낌을 받았고 머리에서는
더운 김이 무럭무럭 피어 올랐다.
군웅들은 모두 눈을 화 등잔만하게 뜨고 진현풍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진현풍이 어떻
게 죽는지 무척 궁금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이제 묘상과 탁운백 두 사람의 싸움은 안중에
없었다.
이때 사람들 속에서 한 젊은 여인이 걸어 나왔다. 그 여인은 녹색 옷을 입고 서글서글한 눈
매로 진현풍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뼉을 치며 웃어대었다.
"현풍 오빠, 모두들 오빠가 죽을 줄 알고 있는데 오빠는 끄떡도 않는군요. 보세요, 당신의
머리에서 김이 무럭무럭 오르고 있어요."
그 여인이 여소교인 것을 알아본 매초풍은 달려가서 단매에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여소교를 알아본 진현풍이 괴성을 지르면서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에게로 달려들었
다.
여소교는 키드득 웃더니 몸을 돌려 사람들 속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녀는 몸체가 작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들 속에 묻혀 버렸다. 진현풍이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
위로 날아 넘었다. 그는 여소교를 붙잡으려 혈안이 되었다. 여소교는 몸놀림이 그다지 빠르
지 못했지만 한 번에 일여덟 발자국은 뛸 수 있는데다가 먼저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서너
번을 건너 뛰자 밀림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진현풍은 수림 가에까지 쫓아왔다. 그는 조급한 나머지 쌍장으로 작은 나무 두 그루를 쳐서
꺾어 버리고는 계속하여 수림 속으로 쫓아 들어갔다.
여소교는 소녀 공으로 진현풍의 진기를 약간 빨아들이기는 했으나 공력이 모자라서 십여 장
가량 밀림 속으로 들어와 결국 진현풍한테 붙잡히고 말았다.
진현풍이 장을 쳐들고 소리 질렀다.
"더러운 년, 네 년이 나와 매초풍 간에 오해를 만들었으니 내가 죽기 전에 너부터 때려죽이
고 말겠다!"
여소교는 그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고 술 취한 사람처럼 얼굴이 붉고 온몸에서 열기와 약
냄새가 확확 풍기는 것을 보자 몹시 당황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부드러운 목소리
를 홀리며 그를 유혹하였다.
"오빠, 난 정말 오빠를 좋아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오빠와 그런 짓을 했겠어요?"
그러나 그의 태도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그가 울부짖듯이 소리쳤다.
"내 맘속에는 오로지 매초풍 한 여자뿐이야. 난 여하를 막론하고 널 죽여야겠다!"
여소교는 이젠 죽었구나 생각하고 눈을 감고 죽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젠 여부
의 여 아가씨가 아니었다. 그녀는 흑풍쌍살한테 이끌려 강호를 돌아다니면서 몸서리치는 일
들을 숱하게 겪은지라 어떤 것도 무섭지 않았다.
그녀는 소요공자한테 속아 몸을 망쳤으며 세 차례나 유린을 당하면서 체면과 염치 같은 건
찢어 버린 지 오래였다.
죽음에 처한 여소교는 곧 침착한 자태를 되찾았다. 그녀는 얼굴에 교태 어린 웃음을 띄우며
재빨리 녹색 적삼을 헤치고 백설같은 살결을 드러내었다.
진현풍은 세 번째로 그녀의 젖무덤을 가까이 에서 보게 되었다. 탄력 있는 젖무덤 위에서
두 개의 젖꼭지가 앵두같이 불타고 있었다. 그녀의 고혹적인 육체를 대하자 죽이고 싶었던
마음은 씩은 듯이 사라지고 천 년 묵은 산삼의 열기가 진현풍의 온몸을 휘감아 당장이라도
몸뚱이가 작열할 것만 같았다. 그의 눈빛이 벌겋게 이글거리며 심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진현풍은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자기의 옷자락을 힘껏 찢어 버렸다. 그리고는 우악
스럽게 여소교를 끌어안고 풀밭에 쓰러져 정신없이 뒹굴었다.
매초풍은 진현풍이 미친 듯이 여소교를 쫓아가는 것을 보고 그가 이젠 죽는구나 생각했다.
그 뒤를 쫓아가 그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애써 눌러 참았다.
'그이가 날 배반한 것이지 내가 그일 배반한 건 아니야. 그러니 내가 그 사람 일에 신경 쓸
필요 없어.'
군웅들의 눈길은 다시 묘상과 탁운백한테 집중되었다.
묘상은 몸을 솟구쳐 공중에서 오혈도를 휘두를 때마다 온 하늘에 핏빛이 번쩍거렸다. 탁운
백도 태산처럼 땅을 딛고 끄떡없이 서서 '해저노월(海底노月)' 초수인 치명적인 '절정검법'
으로 견결히 맞섰다. 그러자 불똥들이 무섭게 튕겼다.
묘상은 자기의 오혈도가 탁운백의 검에 막히자 왼쪽 장을 휘두름과 동시에 두 발로 탁운백
의 양 옆구리를 걷어찼다. 탁운백은 상대방의 발길질을 피하여 땅바닥에 얼른 누웠다가 후
닥닥 일어나면서 검으로 허리를 들이쳤다. 묘상도 즉시 칼로 검을 막으면서 칼끝으로 탁운
백의 목을 겨누고 힘껏 밀었다. 탁운백이 몸을 살짝 피하면서 다시 검으로 묘상의 화개혈
(華蓋穴)을 들이 찔렀다.
탁운백이 연속 검으로 공격을 들이대자 묘상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땅바닥으로 뒹굴면서 발
로 검을 든 탁운백의 팔목을 걷어찼다. 그것은 패배할 국면에서 역전승을 시도하는, 즉 위험
속에서 교묘한 반공격을 시도하는 묘한 초수였다.
두 사람은 서로 왔다갔다하며 부단히 초수를 엇바꾸어 썼다.
군웅들은 두 사람의 싸움에 푹 빠져서 정채로운 동작이 나올 때마다 박수갈채를 보냈다. 어
떤 호걸들은 그들 두 사람의 초수를 배우려고 동작을 흉내내려 하였으나 두 사람의 동작이
너무나도 빠른 까닭에 한 동작도 제대로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노유각, 석산공, 매초풍 등 소수의 고수들만이 두 사람의 동작들을 보면서 그들의 기
본 의도를 파악하려 했다.
두 사람은 칠팔십 합이나 싸웠지만 승부를 가르지 못하였다.
벌써 해가 서산에 기울기 시작하여 한 시진 남짓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갑자기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웃음 소리가 들려 오더니 여소교가 밀림 속에서 달려나왔다.
비록 보법은 아직 서툴러도 달리는 속도는 아까 밀림 속으로 뛰어들어가던 때보다 훨씬 빨
라 경공 호수(好手)들에 못지않았다.
매초풍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 년은 무공도 닦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만큼 빨리 달릴 수 있는 거지? 어쩌면 깊은 내공
에서 나오는 힘 때문일지도 몰라.'
여소교가 삼사 장 앞서 달려나온 그 뒤로 진현풍이 쫓아나오고 있었다. 진현풍은 큰소리로
계속 욕설을 퍼부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얼굴빛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
놀림은 여소교보다 삼사 장이나 떨어질 정도로 무척 둔했다. 여소교는 일부러 발걸음을 늦
춰 가면서 진현풍을 놀려대고 있는 것 같았다.
매초풍은 더욱 깜짝 놀랐다.
'진현풍은 경공이 아주 뛰어난 사람인데 어쩌면 발걸음이 저렇게도 느리단 말인가?'
무슨 꾀임에 빠져 든 것이 분명하였다. 하자만 매초풍은 그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약간 위안을 얻었다.
군웅들 역시 어리벙벙해졌다. 진현풍이 분명 천 년 묵은 산삼을 먹었는데 왜 아직도 죽지
않았단 말인가? 내공이 대단하여 천 년 묵은 산삼도 소화해 낸단 말인가? 사람들은 여간
궁금하지 않았다.
사실 진현풍은 천 년 묵은 산삼의 약효로 반혼미 상태에서 여소교와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여소교는 진현풍을 해칠 생각으로 소녀공을 써서 그의 체내 속에 있는 원양을 마음껏 빨아
들였다. 그녀는 진현풍이 어차피 죽을 것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두 사람은 약 한 시진 동안이나 맞붙어 살을 섞었다. 그들은 천 년 묵은 산삼의 양기가 여
소교의 체내에 몽땅 흘러들어간 후에야 정사를 끝냈다.
그러나 진현풍 체내에 있던 산삼의 양기가 도도한 대하의 물결처럼 여소교의 체내로 흘러드
는 바람에 그는 평형을 유지하고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여소교는 이로 인해 무
림에서 이십 년의 공력을 닦은 것만큼 내력이 커졌다. 만일 그 양기가 그대로 여소교의 체
내에 흘러 들어갔다면 그녀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터득한 소녀공으
로 그 양기를 단전에 받아들였던 것이다.
여소교는 정사를 끝내고 옷을 입은 다음 단도를 꺼내어 진현풍을 죽여 버리려 하다가 생각
을 바꾸었다. 그것은 진현풍이 진원(眞元)이 풍족하여 앞으로 몇 번 더 양기를 빨아들인 다
음에 죽여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진현풍을 불러 깨웠다. 그리고는 이렇게 숨박꼭질하듯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여소교
는 뛰다가 멈춰 섰다 하면서 진현풍의 부아를 돋워 가며 점점 해검계를 멀리 떠나 다른 곳
으로 끌고 갔다.
제11장 오혈궁의 비밀
오혈궁 궁주와 절정공자 간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져만 갔다.
병장기를 쓰는 두 사람의 동작은 시간이 갈수록 느려졌지만 매번의 동작마다 더욱 힘이 있
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내리치는 칼과 검이 한데 맞닿았다. 두 사람은 서로 밀면서 조금도 비
키려 들지 않고 내력을 겨루었다.
군웅들과 오혈궁 문하의 제자들은 모두 긴장하여 숨을 죽이고 그들 두 사람을 주시했다. 사
위는 쥐죽은듯 조용하였고 해검계의 물 흐르는 소리만이 졸졸졸 들려 왔다.
약 한 시간쯤 지나자 탁운백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고 그의 왼발이 조금 뒤로 옮겨졌다.
모두들 손에 땀을 쥐었다. 탁운백의 낯색은 이제 점점 창백해져 갔다. 밥 한끼 먹을 만한 시
간이 지나자 얼굴빛이 다시 새빨개지면서 탁운백은 또 조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묘상은 태연자약한 기색인 걸로 보아 그의 공력이 탁운백보다 좀더 세다는 것이 드
러났다. 시간이 길어지기만 하면 탁운백이 패하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오혈궁의 제자들은 약간 시름을 놓게 되었다. 강금의와 반채의는 서로 꼭 틀어쥐
었던 손을 놓았다. 초천의가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향 한 대 피울 시간이면 탁운백이 패하여 꺼꾸러질 거야."
결사적으로 내력을 비기게 되면 기필코 승패가 갈라지게 되는데 패한 자는 중상을 입거나
죽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깊은 원한이 없는 한 무림 사람들은 대체로 내력을 겨루지는 않
았다.
화산의 무예시합에서도 동사 황약사, 남제 단지흥, 북개 홍칠공, 중신통 왕중양 등 네 사람
의 절세의 고수들도 <구음진경>을 쟁탈하기 위하여 밤낮 이레 동안이나 싸웠으나 서로 결
사적으로 내력을 겨루지는 않았던 것이다.
칠대 제자 한대웅이 노유각의 옷소매를 살며시 당기고는 귓속말로 몇 마디 하였다. 그러자
노유각은 머리를 가로 젓고는 묻는 듯한 눈길로 노영웅 석산공을 건너다보았다. 석산공은
초조한 마음으로 오솔길 쪽을 바라보며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절정공자 탁운백은 또 연거푸 두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그의 낯빛은 이제 붉다 못하여
자줏빛이 되었다. 노유각, 석산공 등 몇몇 고수들은 극도로 긴장하여 저도 모르게 병장기들
을 꼭 틀어쥐었다.
일곱째 부인 유정아의 얼굴에도 관심 어린 기색이 나타났다. 수건을 꼭 잡고 있는 그녀의
섬섬옥수가 저도 모르게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 오솔길로 일곱 사람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전진파의 전진철자인 단양자 마옥, 장
진자(長眞子) 담처서(譚處瑞), 장생자(長生子) 유처현(劉處玄), 장춘자 구처기, 옥양자(玉陽
子) 왕처일(王處一), 광녕자(廣寧子) 학대통( 大通), 청정산인 손불이였다.
마옥이 앞장서서 걸어오며 신선 같은 풍채로 시 한 구절을 읊었다.
"집안에서 두문불출한 지 몇십 년이라……."
담처서가 그 뒤를 이어 읊었다.
"봉두난발이 길어져 땅에 끌리누나."
그의 목소리는 아주 우렁찼다. 우람한 체격에 씩씩해 보이는 얼굴, 어글어글한 눈을 가진 그
는 내외(肉外) 두 가지 공력을 다 닦았으나 그중에서도 외공이 대단하였다.
세 번째 도인은 왜소한 몸집에 잔나비 상통을 한 장생자 유처현이었다.
"해당정 밑에 선 왕중양은……."
장춘자 구처기가 뒤를 이었다.
"연잎 위의 태을선(太乙仙:북송의 명화가 이공린의 그림 <태일진인도>에서 온 말인데, 그
그림에는 진인이 큰 연잎 위에 누워 책을 보는 장면이 그려져 있음) 같아라."
옥양자 왕처일이 뒤이어 읊었다.
"껍질 떠난 물건이 없듯이……."
그는 언젠가 남과 도박을 걸고 외발로 서 있게 되었는데 만 장이나 되는 산벼랑 꼭대기에서
옷소매를 펄펄 날리면서 앞뒤로 기우뚱거려 산동 하북의 수십 명 되는 영웅 호한들을 놀라
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철각선(鐵脚仙)'이란 별호를 가지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 광녕자 학대통이 읊조렸다.
"누군들 나기 전부터 깨달을 수 있으랴!"
청정산인 손불이가 낭랑하게 읊었다.
"문을 나와 한바탕 웃으니 천하에 거리낄 것이 없구나."
그러자 마옥이 다시 받아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읊었다.
"허황할시고, 서호의 달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군웅들은 일곱 사람들의 목소리로 보아 누구나 기력이 튼튼하고 내력이 충만되어 있어 전진
철자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이 정말 우연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진철자 뒤에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손에 접이부
채를 들고 있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우람한 체구에 커다란 두 주먹을 갖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바로 철선서생 하종과 철권패왕 노위였다.
유명한 협객 두 사람과 전진교 도사들이 오자 구경을 하던 오혈궁의 초천의는 더럭 의심이
생기고 불안해졌다. 그는 오혈궁의 제자들에게 경계를 잘하라고 각별히 분부하였다.
개방 장로 노유각과 노영웅 석산공이 마주 걸어 나가서 전진칠자들과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전진칠자들이 천천히 검을 빼들더니 오혈궁의 제자들한테로 다가갔다.
초천의가 큰일났다고 생각되어 칼을 빼들고 묘상을 도우려고 했다. 어느 사이에 전진칠자가
오혈궁 제자들과 묘상의 사이를 막아섰다.
초천의가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전진철자, 당신들은 왜 이러는 거요?"
구처기가 장검으로 그의 가슴을 겨누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오혈궁 놈들이 여러 해나 무림을 해쳤기에 전진교의 도사들과 개방의 호한들이 네 놈들을
없애 버리러 왔다!"
구처기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으로 들이찔렀다. 초천의가 칼로 검을 물리치며 소리쳤다.
"여러 형제들, 이 전진교의 잡종들과 더러운 거지 녀석들을 죽여 버려라!"
오혈궁 문하의 삼사십 명 제자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가 전진칠자와 개방의 제자들과 싸웠다. 전진칠자와 개방의 제자들은 오혈궁의 제자들
을 막으면서 그들이 결사적으로 내력을 겨루고 있는 묘상과 탁운백의 신변으로 접근하지 못
하게 막았다.
구처기와 왕처일은 적개심에 북받쳐 오혈궁의 제자들을 마구 해치기 시작하였다. 오혈궁 제
자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동료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
라 더욱 미쳐 날뛰었다.
무예시합 장소가 사람을 죽이는 싸움터로 변하자 구경하던 군웅들은 아연실색하였다. 양쪽
이 다 기를 쓰고 결사적으로 싸우는지라 군웅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분분히 뒤로 물러섰다.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그들은 남의 싸움에 말려들어 화를 당할까봐 겁이 났던 것이
다.
오혈궁 궁주 묘상은 이 장면을 보았으나 한창 내력을 겨루고 있는 터라 몸을 뺄 수가 없었
다. 오혈궁의 제자들이 연거푸 죽어 나가는 것을 본 묘상은 이 전진철자와 개방의 제자들이
오혈궁의 제자들을 물리친 다음에는 기필코 자기와 대적하리라는 것을 짐작하였다. 묘상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묘상의 마음이 약간 분산되어 오혈도를 잡은 손에 힘이 좀 약해졌다. 탁운백이 그 틈을 타
내력으로 좀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탁운백이 한 발자국 내밀자 묘상은 급히 정신을 집중하
여 겨우 불리하게 변하기 시작한 국면을 돌려세웠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석산공, 노유각, 하종, 노위 이 네 사람의 일류가는 고수들이 함께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석산공은 용두괴를 휘두르고 노유각은 타구봉을 휘둘렀으며 하
종은 철산을, 노위는 두 주먹을 틀어쥐었다.
석산공이 의견을 내놓았다.
"저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내력을 겨루고 있기 때문에 진기가 주위에 가득 차 있소. 그러므
로 우리가 출격하는 힘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튕겨나오는 힘 또한 매우 클 거요. 하지만
우리 네 사람이 일시에 공격했다가 재빨리 피하면 상하지 않을 수 있소."
그 말에 노유각이 머리를 끄덕이며 찬성하였다.
"우리가 합심하여 일제히 공격하게 되면 묘상이 내보내는 진기가 큰 진동을 받을 것이니 그
렇게 되면 절정공자가 내보내는 힘으로도 얼마든지 묘상을 죽이거나 상하게 할 수 있지요."
멀찍이 물러나 지켜보고 있던 육승풍은 비록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말을 듣지는 못하였지만
기필코 오혈궁 궁주 묘상한테 불리할 것이라고 추측하고는 막여인을 건너다보았다.
막여인이 귓속말을 하였다.
"우리도 한판 끼여듭시다. 이 기회에 고수들과 가까워지면 후에 그들과 손을 잡고 흑풍쌍살
을 없애 버리는 데 유리하겠지요."
육승풍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리하여 육승풍과 막여인도 달려왔다.
흉악한 적수를 없앨 때는 협조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육대 고수들이 합심하여
공격한다면 왕중양이 살아 있더라도 묘상의 목숨을 구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묘상은 사태가 위급하자 갈범의 소리를 지르면서 오혈도를 앞으로 힘껏 내밀었다. 그 바람
에 곤두박질하여 불여우 가죽을 씌운 의자에 와 앉았다. 탁운백은 자기 쪽으로 밀려오던 상
대방의 내력이 갑자기 없어지자 앞으로 푹 꼬꾸라지면서 막여인의 귀두도에 맞부딪치게 되
었다. 다행히도 막여인이 눈치 빠르게 얼른 칼을 치워 탁운백은 상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 없이 노르끄레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는 묘상의 두 입술이 새파래졌다. 그는
요행히 위험에서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갑자기 몸을 피하는 바람에 탁운백의 내력이 체내로
밀려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묘상의 체내에서 기혈이 부글부글 끓고 오장이 뒤틀리는 중한
내상을 입었다.
묘상은 체내의 기를 조절하느라고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기라도 하면 기혈이 혈맥을 터뜨리고 나갈 위험이 있었다.
석산공, 노유각 등은 묘상의 상태를 모르다 보니 그의 내공이 두려워 섣불리 다가서지 못하
였다.
휙―.
그때 갑자기 암기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그것은 해검계 맞은편 기슭의 난석(亂石) 속에
서 묘상의 목을 겨냥하고 던진 것이었다. 묘상은 한창 앉아서 기를 운행시키는 중이었으므
로 몸을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 암기는 약간 빗나가 인후를 명중하지 못하고 그의 기관 옆에 꽂혔다. 뭇사람들이 바라보
니 그것은 아주 좁은 유엽표(柳葉 )였다. 만일 날이 좀 넓은 칼에 그렇게 찔렸더라면 경동맥
이 끊어져 그대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초천의는 묘상이 두 번이나 요행으로 살아난 것을 보자 기쁘기도 하고 조급하기도 하여 소
리쳐 궁주를 위로했다.
"궁주님,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이 제자가 궁주님을 구하겠습니다!"
하지만 장춘자 구처기가 검으로 계속 공격해 오는 통에 초천의는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그
는 구처기의 공격에 몰려 여러 차례 위험 속에 빠졌다.
뭇사람들은 그 유엽표창이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알지 못했으나 묘상에게 불리한 것을 보고
기필코 협객들이 한 일이리라고 짐작했다. 뭇사람들은 묘상이 유엽표창 하나도 피하지 못하
는 것을 보고 이미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시에 달려들
어 묘상을 요절내려고 하였다.
위기를 느낀 묘상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소리쳤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그는 일대 효웅(梟雄)으로서 사면초가에 빠진 몸이 되었지만 여전히 위엄이 있었다. 사람들
은 놀라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묘상이 탁운백 바라보았다.
"탁 공자, 이리로 오시오."
탁운백이 그한테로 걸어갔다.
"해검계의 무예시합은 본 궁의 제자들 외에 당신 혼자만 알고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오늘 이
장소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왔군요."
탁운백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탁 모의 청첩을 받았으므로 두 고수가 무예시합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
을 거요. 뿐만 아니라 그것이 보물과 미녀를 쟁탈하기 위한 것인지라 그들은 만사를 제쳐놓
고 이렇게 모여든 것이오."
"그건 당신이 우리가 사람 숫자가 많은 걸 이용해 승리를 빼앗아 갈까 봐 군웅들을 청해다
증명을 서게 하려는 것임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소. 문제는 나를 죽이려는 이 사람들이……."
묘상이 예까지 말하자 탁운백이 가로채었다.
"이 사람들은 탁 모의 벗들이요."
묘상은 놀라 잠시 멍해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당신은 나를 암해하려 들었구만?"
탁운백이 좀 겸연쩍어하는 기색을 지었다.
"탁 모는 자신의 무공이 당신보다 못하다는 걸 알고 있소. 하지만 탁 모는 절대 자기 잇속
만 채우는 자가 아니오."
탁운백은 머리를 쳐들고 우렁찬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강호의 안녕을 위하여 살인마를 없애 버리려고 탁 모는 약속을 어기는 소인배 노릇도 달갑
게 하는 거요!"
묘상은 대로하여 안간힘을 쓰면서 일어섰다. 그러자 뭇사람들은 당황하여 몇 걸음 뒤로 물
러났다. 묘상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탁운백을 가리켰다.
"너…… 너 이랬다저랬다 하는 쥐새끼 같은 놈아!"
그런데 그가 갑자기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의자 뒤에는 일곱째 부인
유정아가 여전히 서 있었다. 묘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네 년도 날…… 죽이려구?"
묘상의 허리에는 단도 한 자루가 자루가 안 보일 정도로 깊숙이 박혀 있었다.
유정아의 눈가와 입가에 한 가닥의 조소가 내비쳤다.
"네 놈과 삼 년 동안 같이 산 것은 오늘 네 놈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그녀의 얼굴에 어렸던 조소의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묘상이었던 것이다. 묘상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중얼거렸다.
"참 모를 일이야. 넌 나한테로 도망쳐 와 오혈궁에서 근심 걱정 모르고 살아왔는데 무엇 때
문에 갑자기 날 죽이려 드는 거냐?"
유정아가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묘 궁주, 이 모든 건 속임수란 말이에요. 오늘 당신은 드디어 올가미에 목이 걸리고 말았지
요."
"그럼 넌 나한테로 진짜 도망쳐 온 게 아니란 말이냐?"
유정아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탁운백의 곁으로 가서 그의 팔을 끼었다.
"이렇게 맘에 드는 낭군님이 계시는데 이 유정아가 당신 따위를 좋아할 줄 아세요?"
"넌 탁운백와 맞지 않고 그에 대해 큰 실망을 느꼈다고 하면서 나야말로 진짜 호한이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게 모두 거짓말이었구나!"
"당신이 한 말은 사실이에요. 조금도 틀림이 없어요. 무림의 협객들은 당신 같은 악마를 제
거하기 위해 숱한 애를 써왔지만 성공하지 못했었죠. 그 뒤 우연한 기회에 개방 제자가 소
주(蘇州) 천향루(天香樓)의 한 기생의 입을 통하여 당당한 오혈궁의 궁주가 사실은…… 사
실은……."
유정아가 머뭇거리자 탁운백이 말을 이었다.
"사실은 태감(太監:궁궐의 내시)과 마찬가지로 폐인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게지."
묘상의 낯색은 붉으락푸르락해졌고 혓바닥이 뻣뻣해졌다.
"너희들…… 너희들은……."
유정아가 새하얀 얼굴에 홍조를 띠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나와 탁 공자께서는 대담하게 미인계를 쓰게 되었던 거예요. 당신이 사내 구실도
못하는 처지에 색마인 척하는 사람이니 낚시에 쉽게 걸려들 게 당연하지요. 당신이 날 오혈
궁에 두고 먹여 살리는 건 자기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거예요. 제자들에게 아주 정상적이
고 건강한 사내로 보이고 싶기 때문이었지요."
탁운백이 비웃는 투로 말하였다.
"심지어 넌 남아의 의기로써도 여인의 사랑을 이겨내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척하려고
정아를 위해서 삼 년 뒤 오늘 이 곳에서 무예시합을 할 약속까지 선선히 하였었지."
묘상은 입술을 바르르 떨다가 한참 만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너희들…… 너희들은 협의를 행한다고 떠들어대면서도 이처럼 상스러운 짓을 한단 말이
냐……!"
그러자 노유각이 참견했다.
"묘상, 오혈궁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초개로 알고 제멋대로 사람을 죽이고 있는데 네 놈이
이제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아느냐? 그래 네 목숨만 중하고 남의 목숨은 아무것
도 아니란 말이더냐? 네 놈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묘상이 그 말에 대꾸하였다.
"하지만 나는 신의를 지키고 배신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석산공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승냥이는 풀을 먹지 않고 고기만 먹는 법이야. 승냥이 같은 네 놈이 선량하다고 해서 누가
곧이듣는단 말이냐?"
"아버지!"
그때 한 처녀가 나는 듯이 달려와 묘상에게 매달렸다.
철선서생 하종이 놀라서 소리쳤다.
"청청이……!"
그는 엽청청이 어찌하여 급작스레 나타났고 무엇 때문에 그녀가 묘상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지 영문을 몰라 했다.
탁운백이 검을 들고 찌르려 하자 유정아가 가로막았다.
"여봐요, 청청이는 다른 오혈궁 제자들과는 달라요. 저 처녀는 맘씨 고운 좋은 처녀예요."
엽청청이 묘상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어떻게 된 일이에요? 돌아가시지는 않겠지요?"
이때 갑자기 또 스무 명 남짓한 오혈궁 제자들이 싸움에 뛰어 들었다. 초천의네 패들은 여
지없이 밀리다가 증원병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니 사기가 부쩍 올랐다. 그러자 전진칠자와 개
방 제자들이 오히려 몰리기 시작했다.
노유각은 급히 나머지 일곱 제자들을 불러 함께 싸우면서 불리한 국면을 돌려 세우려고 하
였다. 군웅 중에 금도 임청이 태호오교들과 함께 뛰어들어 오혈궁의 제자들을 대적하였다.
철권패왕 노위가 말하였다.
"하 공자, 우리도 저 싸움에 끼여듭시다."
하지만 하종은 그 말은 들은 척만 척하고 울고 있는 엽청청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노위
는 하는 수 없이 혼자 싸움 속에 뛰어들어 오혈궁의 제자들이 눈에 보이기만 하면 주먹을
휘둘렀다.
묘상이 엽청청의 머리를 쓸면서 탄식하였다.
"청이야, 넌 어찌하여 날 아버지라 부르느냐? 넌 참말 철이 없구나!"
엽청청은 계속 흐느끼며 대답하였다.
"아버진 절 생각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군요. 오혈궁에 사단이 생기면 이 딸이 연루될까
봐 그러시지요? 하지만 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저 사람들이 아버질 죽이지 못하게
하겠어요!"
모두들 놀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청청아, 묘상은……. 거세한 사람이어서 후대를 낳지 못하느니라. 절대 그한테 속아넘어가
선 안 된다!"
유정아는 엽청청이 측은하게 느껴져 한마디했다. 그러자 엽청청이 벌떡 일어나 그녀를 손가
락질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은 지독한 여인이에요. 왜 우리 아버질 해치려는 거죠? 당신은 아버지가 남편 구실을
할 수 없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 왜 시집와서 삼 년 동안이나 속이며 살았나요? 난 당신이
가증스러워요!"
묘상이 엽청청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 다음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본 궁주는 오늘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지만 부탁할 일이 있소. 나는 그동안 무수한 사
람들을 죽여 두 손에 피가 가득 묻어 있지요. 하지만 나의 이 딸은 선량하고 순박한 아이니
여러분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며 나처럼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기 바랍니다."
유정아는 이처럼 악한 애비가 어찌 저런 선량한 딸을 낳을 수 있었을까 하고 탄식하였다.
유정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묘 궁주, 시름을 놓으세요. 내가 청청이를 친동생처럼 보살필테니까요."
석산공도 수염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엽청청이 지옥에서 자라난 여인이면서도 오염이 안 된 건 실로 고귀한 거요. 누가 이 처녀
를 해친다면 이 늙은 것이 용서하지 않겠소."
묘상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읍하였다.
"노영웅께 감사를 드리오. 그렇다면 탁운백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그는 탁운백의 대답을 듣기 전에 이렇게 덧붙였다.
"절정공자는 스스로 절정이라고 호를 지었는데 그건 나를 속이기 위한 것이었소. 기실은 결
코 절정을 한 게 아니지, 그렇지 않소?"
"만일 당신이 자기 딸에 대하듯이 천하의 창생들을 대해 왔더라면 오늘 이런 끝장을 보지는
않았을 거요. 시름을 놓으시오. 이 탁 모는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소."
"그렇다면 나는 아무런 유감도 없소이다."
탁운백이 검을 치켜들었다.
"묘상, 당신은 이젠 죽어야겠소."
묘상이 오연한 기색으로 말하였다.
"천하에 묘상은 한 사람밖에 없으니 죽어도 내 손으로 죽겠소."
묘상이 장으로 자기 이마를 갈기려 했다. 그러자 엽청청이 그의 팔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
며 말렸다.
"아버지, 죽어선 안 돼요!"
"얘야, 애비가 어찌 저절로 죽겠느냐. 이젠 여러 호한들과 할 말을 다 했구나. 다만 죽기 전
에 네 어미 얼굴을 한 번 보지 못하는 게 유감스러울 뿐이다."
엽청청은 눈물을 닦으면서 말하였다.
"아버지, 어머니의 무공이 아버지보다 더 높다고 늘 말씀하셨죠. 그런데 어머닌 줄곧 우리와
관계하지 않았고 지금 생사관두에 처했는데도 여전히 나 몰라라 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어
머닐 생각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
탁운백이 검을 묘상의 가슴팍 가까이에 들이대며 소리쳤다.
"묘 궁주, 이 탁 모가 손을 쓰라는 말인가? 아니면 당신 스스로 손을 쓰겠는가?"
엽청청이 노한 눈길로 쏘아보더니 칼을 뽑아 내리찍었다. 탁운백이 검으로 가로막자 그녀의
칼이 튕겨나갔다. 엽청청은 자기가 근본적으로 탁운백의 적수가 못 되는 것을 알고는 주위
를 둘러 보았다. 철선서생 하종이 보였다.
"하 공자, 당신은 인자한 분이시지요. 어서 저 사람이 우리 아버질 죽이지 못하게 해주세
요."
하종은 엽청청의 가련한 모양을 보고 동정심이 갔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선한 자는 선한 보응을 받고 악한 자는 악한 보응을 받기 마련이오. 청청이, 이리로 오오.
이 일에 더 관계하지 마오."
엽청청은 이를 악물고 몸으로 탁운백의 검을 막아섰다.
"죽이려면 저부터 죽이세요."
그런데 갑자기 사람 그림자가 언뜻 하더니 한 자루의 칼이 탁운백의 검을 물리쳤다. 순간
엽청청의 표정이 밝아졌다.
"여혈의 오빠시군요!"
여혈의가 묘상 부녀를 호위하며 탁운백을 쏘아보았다.
"묘 궁주가 어떤 분이기에 당신이 해치려 하는 거요!"
그러자 또 한 사람이 뛰어와 묘상을 호위하였다. 엽청청은 너무 기뻐서 손뼉을 치며 울먹였
다.
"노로의 오빠군요. 오빠까지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지요."
노로의가 장삼자락을 펄럭이면서 침착하고 노련한 자태로 말하였다.
"여봐 청청이, 이 노 모가 있으니 임잔 물러나도 돼. 칼이란건 사정이 없으니까 상하지 말아
야지."
"사형, 우리 이제부터 청청을 소궁주라 부릅시다."
여혈의의 갑작스런 제의에 노로의가 얼떠름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건 왜 그러오?"
묘상은 성미가 강직한 사람이라 더는 속일 수가 없어 입을 열었다.
"노로의, 임자도 줄곧 갑갑해 하던 일이 아닌가? 본 궁 제자들은 이름의 마지막 자가 '의'자
지만 청청이한테는 '의'자가 없지 않은가?"
노로의가 시큰둥하니 대꾸했다.
"궁주께서 청청이를 각별히 총애하셨기 때문이지요."
묘상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임잔 잘못 생각했어. 그건 청청이가 나의 친딸이기 때문일세."
노로의가 그 말을 듣고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다.
"궁주님께 축하를 드립니다!"
또 엽청청한테로 돌아서서 인사를 올렸다.
"소궁주께 축하를 드리오!"
엽청청이 약간 부끄러운 기색으로 급히 답례를 하였다.
"당신은 그래도 저의 큰오빠에요."
여혈의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오. 먼저 궁주님을 호송하여 돌아가도록 합시다."
노로의가 먼저 묘상의 상처에 지혈을 시키고 나서 잔등에 업었다.
이때 석산공, 탁운백, 하종, 유정아 등이 병장기를 들고 사면을 둘러쌌다. 유정아가 한 쌍의
아미자(蛾眉刺)를 들고 소리 질렀다.
"묘상, 넌 도망할 수 없어!"
묘상이 노로의의 잔등에 업힌 채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죽지 않을 거야. 허허허, 삼 년 동안이나 함께 살면서도 임자가 무예를 알고 있는 줄
은 전혀 몰랐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임잔 아까 나한테 치명상은 입히지 못했어."
유정아가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내가 당신을 불쌍히 생각해서 그렇게 찌른 줄 알아요? 흥, 난 당신이 죽기 전에 고통을 좀
더 받으라고 그렇게 찌른 거예요."
그 말에 묘상은 대로하였다. 이젠 노로의, 여혈의 두 고수가 자기를 호위하기 때문에 생명을
끝을 위험이 없다고 느껴지자 조포한 성미가 발작하여 완전한 딴사람이 되었다.
"여혈의, 저 년을 죽여 버려라!"
여혈의가 두 눈에 쌍불을 켜고 서릿발이 번뜩이는 칼을 든 채 달려들자 유정아가 뒤로 물러
나며 두 손에 든 아미자로 여혈의의 칼을 막았다. 여혈의가 초수를 바꾸어 칼끝을 아래로
향하였다가 갑자기 위로 튕기며 유정아의 목을 찌르려 하였다. 탁운백이 급히 검으로 여혈
의의 칼끝을 쳐 칼이 빗나가게 하였다.
유정아는 내심 매우 놀랐다.
'평소에 여혈의가 도법을 익히는 걸 보면 노로의와 별 차이가 없었는데 며칠 보지 않은 사
이에 도법이 이처럼 늘었단 말인가?'
노영웅 석산공은 노로의와 한켠에서 싸우고 있었다. 두 사람의 무공은 워낙 어슷비슷하였지
만 노로의가 묘상을 등에 업고 있다보니 몸놀림이 불편하여 방어를 주로 하면서 자신을 보
호하는데 신경을 썼다.
철선서생 하종이 석산공을 도우려다가 엽청청한테 가로막혔다.
"청청이, 길을 비키시오."
엽청청이 길을 내주지 않자 하종은 옆을 에돌아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또 길을 가로
막으며 간절하게 말하였다.
"하 공자, 당신은 절 구하기 위해 흑풍쌍살과 악전고투를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지요. 전
이 점에 대해 아주 감사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오늘 아버지를 위해서 부득불 실례해야겠어
요."
그러면서 엽청청은 장으로 하종의 가슴을 내질렀다. 하종이 몸만 비키고 반격은 하지 않았
다.
"청청이, 임잔 날 이겨낼 수 없을 거요."
엽청청이 손을 멈추었다.
"하 공자, 내가 손을 쓰는데 왜 가만히 있는 거예요? 내가 당신한테 맞아 상하거나 죽을까
봐 그러시나요? 전번에 날 구해 준 인정 때문에 양보하는 거죠."
철선서생은 그녀가 상할까 봐 피하기만 하는데 엽청청은 여전히 고집스레 길을 막았다. 하
종은 석산공이 오랫동안 싸워도 상대방을 제압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만 속이 바질바질
탔다. 하종은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다.
"청청이, 조심하오!"
그러면서 그는 엽청청의 왼쪽 손목을 잡아 뒤로 낚아챘다. 엽청청이 앞으로 푹 꼬꾸라지자
하종은 그 틈을 타서 철선으로 묘상의 뒷잔등을 찔렀다. 하지만 뒷잔등을 찔린 사람은 묘상
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한 오혈궁의 제자가 혼전하는 사람들 속을 뚫고 나오다가 궁주
가 위험한 고비에 처한 것을 보자 나는 듯이 뛰어들어 자기 몸으로 막았던 것이다.
하종은 자기의 철선이 오혈궁 제자의 가슴패기를 뚫자 급히 철선을 뽑았다. 철선에 선혈이
가득 묻은 것을 본 하종은 시체가 된 오혈궁 제자를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묘상한테로 달려
들었다.
엽청청이 땅바닥에서 기어 일어나 다시 하종을 붙잡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하종의 오른쪽
다리를 꽉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철선서생은 서른 살이 되도록 노총각으로 있었으며 종래로 여색을 가까이 한 일이 없었다.
송·금 두 나라가 해마다 전쟁을 하고 있는 바람에 협객인 하종은 한마음으로 나라에 보답
하려고 가업을 돌볼 사이가 없었던 것이다.
마음이 끌린 여인한테 다리를 꽉 붙잡힌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벌겋
게 달아올랐다. 하종은 난처한 기색을 지으며 더듬거렸다.
"청청이, 어서…… 손을 놓으시오!"
엽청청은 굵은 눈물 방울을 뚝뚝 흘리면서 말했다.
"당신이 아버지를 놓아주지 않는다면 난 죽어도 이 손을 놓을 수가 없어요!"
하종은 잡힌 발을 걷어차고 싶었으나 어쩐지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그는 속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남아의 의기도 여인의 사랑은 못 막는다고 했었지. 이 하종은 강호를 넘나든 후부터 누구
나 나를 억센 사나이라고 칭찬했거늘 오늘 어찌하여 이처럼 우유부단해지는 것일까?'
엽청청이 울고불고 하면서 말을 늘어놓았다.
"전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도망가는 바람에 아버지한테서 자랐어요. 우리 아버진 참 불쌍한
분이에요."
눈물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은 마치 이슬 먹은 연꽃처럼 청정하면서도 귀여워 보였다. 그런
까닭에 하종은 엽청청이 이미 기진맥진해 있는 상태라 쉽사리 다리를 뺄 수 있음에도 불구
하고 웬일인지 다리를 뺄 힘조차 나지 않는 것이었다.
'미인이 화근이라더니, 이 하 모가 한 여인을 죽이지 못하여 친구들을 볼 낯이 없구나!'
하종은 훌쩍 몸을 솟구치더니 경공으로 어딘가로 사라졌다.
엽청청이 땅바닥에 퍼질러 앉은 채로 하종의 뒷그림자를 바라보며 스스로 자신을 원망하였
다.
'하 공자, 당신은 정말 보살 같은 맘을 지닌 사내군요. 그런데 당신의 은혜에 난 어떻게 보
답했던가요?'
여혈의가 갑자기 엽청청에게 와서 그녀를 잡아 끌었다.
"어서 가잔 말이오!"
그는 노로의와 궁주 묘상과 함께 급급히 도망하였다. 그들은 십여 명 오혈궁의 제자들이 초
천의의 영솔하에 포위를 뚫고 들어와 탁운백, 유정아와 석산공을 견제하였던 까닭에 그 틈
을 타서 도망할 수 있었다.
초천의는 궁주와 그를 호위하던 사람들이 사라진 것을 보고서야 개방의 제자 두 사람을 베
어 눕히고는 포위를 뚫고 나왔다. 강금의, 반채의 등 경공이 훌륭한 오혈궁의 제자들도 초천
의를 따라 도망하였다.
노유각과 개방의 제자들 그리고 전진철자들은 추격하지 않고 남아 있는 오십여 명의 오혈궁
제자들을 몽땅 죽여 버렸다. 일이 끝난 뒤 살펴보니 개방의 제자들은 두 사람이 죽고 일곱
사람이 부상당하였다. 태호오교들 가운데서 농조교 서구광, 수상교 하아모, 교중교 이명도
등은 각기 약간의 상처를 입었고, 임청을 위해 금도를 관리하던 사내가 불행히도 죽고 말았
다.
군웅들은 뒷처리가 끝난 뒤 묘상이 살아서 도망간 데 대하여 저마다 한탄하였다. 철선서생
하종이 중도에서 말없이 빠져간 것을 나무라는 사람도 있었다. 노위는 친구를 위해 변명하
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한 채 하종을 찾아 떠났다.
탁운백이 얼굴에 웃음을 띄우자 유정아가 나무랐다.
"묘상이 도망했는데도 당신은 웃음이 나와요?"
개방의 육대 제자 상승이 우스갯소리로 말을 받았다.
"탁 공자가 삼 년이나 애타게 기다리다가 이제 겨우 가인을 만났는데 왜 기쁘지 않겠습니
까?"
유정아는 숫처녀처럼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마구 뛰는 가슴으로 가만히 탁운백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탁운백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노 장로님과 석 선배님께서 주의하여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묘상의 목에 박힌 그 유엽
표창이 아주 치명적인 겁니다."
노유각이 물었다.
"저도 그걸 물으려던 참이었습니다. 표창을 던진 사람의 팔힘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이 장소에 있는 어느 호한이 청해온 고수가 아닐는지요?"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도리질했다. 노유각이 다시 말하였다.
"참 괴상하군요. 묘상을 죽이려고 해검계 건너편 기슭에 있는 난석들 속에 누가 매복해 있
었다니……."
탁운백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건 잠시 말하지 맙시다. 그런데 표창을 맞은 묘상의 상처 주위가 즉시 시꺼멓게 변하는
것을 나는 주의해 보았지요. 아마도 표창 끝에 극약이 발라져 있는 것 같습니다."
석산공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 늙은 것도 생각나는군요. 그때 형국이 너무 급해 놔서 미처 말할 사이가 없었지요. 보아
하니 표창을 던진 사람은 기어이 묘상을 죽이려고 한 것 같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린 이
영웅과 만날 연분이 없구만요."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해검계 건너편 언덕의 난석속에서 한 여인의 요란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모두들 머리를 돌려 보니 철시 매초풍이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녀의 적삼과 치마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고 치렁치렁한 머리칼과 은쟁반 같은 얼굴은 마치
선녀 같아 보였다.
이런 미모의 여인이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여마귀 철시라는 데 대하여 이
건 인간에 대한 조물주의 조롱이라고 모두들 한탄해 마지않았다.
매초풍이 오른팔을 쳐드니 가느다란 두 손가락 사이에 표창 한 개가 끼여 있는 것이 보였
다. 그것은 묘상이 맞은 표창과 꼭 같은 것이었다.
매초풍이 한바탕 요란하게 웃어대더니 이들 앞에 와 섰다.
"이 매초풍이 여러분들을 도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지요?"
장춘자 구처기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매초풍, 임자가 이처럼 무림에 유익한 일을 했으리라고는 난 믿지 않아."
하지만 유엽표창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데야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 도장, 그런 억지 부리지 말아요. 내가 표창으로 묘상을 상하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일후
그의 상처가 다 낫게 될 때 당신들은 꼭 하나하나 그 놈의 마수에 걸려들 거예요. 이 매초
풍이 이런 일을 한 건 딴 목적이 없어요. 여러분들이 이후 나라는 이 연약한 여인한테 시끄
럽게 굴지 말기를 바라는 것뿐이에요."
워낙 인품이 인자한 마옥이 입을 열었다.
"매초풍, 임자가 이후부터 악한 짓을 그만두고 개과천선을 한다면 우리는 자연히 임잘 나쁘
게 여기지 않을 거요."
육승풍이 그 말을 듣더니 소리 질렀다.
"마 도장, 그리고 여러 호한님들. 절대 저 년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저 년은 궤계가 많은
년입니다. 전 여러분이 합심하여 저 년을 죽여 버려 후환을 없애 버리기를 바랍니다."
전진칠자, 노유각 그리고 석산공 등은 모두 육승풍의 말이 사리에 맞는 말이라고 느끼기는
했지만 매초풍이 방금 대공을 세운 터라 이 자리에서 걸고 들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입
을 다물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막여인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바른 것과 사악한 것은 종래로 물과 불처럼 서로 용납을 못하는 법이오. 여러분, 마음이 약
해져서는 안 뒹니다."
막여인이 이렇게 말했는데도 모두들 까딱하지 않았다. 매초풍이 득의양양하여 말하였다.
"육 사제, 당신은 정말 심보가 나쁘군요. 심지어 외인들까지 부추겨서 사저를 죽이려 하다니
요. 흥, 난 당신 같은 사람과 실랑이하고 싶지 않아요."
이 말을 하고 매초풍은 경공으로 나는 듯이 달려가며 한마디 더 던졌다.
"매초풍은 떠나가요. 앞으로 여러분은 저와 싸우려면 잘 생각해 보고 해야 할 거예요. 아니
면 매초풍이 무정하다고 원망하지 말든가요!"


제12장 변흥의와 매초풍이 만남
매초풍은 해검계를 떠나자 진현풍이 생각났다.
그가 자기를 위해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무릅쓰고 천 년 묵은 산삼을 먹고 그 뒤에는 여소
교를 죽여 버리겠다며 쫓아가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던지라 자기에 대한 진현풍의 마음이 진
심이라고 여겨졌다.
불현듯 매초풍은 진현풍에게 진한 연민의 정을 느꼈다.
'참, 천하의 사내들이란 모두 이런가 봐. 나비가 꽃을 찾듯이 여인을 보면 건드리고 싶은 건
아마도 사내들의 천성인 모양이야. 더군다나 그 여우 같은 여소교가 꼬드겼으니 얼떨떨한
김에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지.'
그러자 진현풍과의 애틋한 정이 그녀 가슴속에 새롭게 피어 올랐다.
매초풍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시가지로 들어갔다. 지난 번 그 묘 쪽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마
치 진현풍과 첫 밀회라도 하는 듯이 가슴이 콩콩 뛰고 온몸이 떨렸다.
이윽고 묘 앞에 이르렀다. 그녀는 문을 가볍게 밀어 보았다. 열려 있었다. 진현풍이 묘 안에
있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열려진 틈으로 살짝 들여다보다가 그만 온몸이 굳어져 버리고 말았
다. 그녀의 가슴은 천만 길 되는 절벽에서 떨어져 내렸고 눈앞이 아찔했다.
묘 안의 향안 위에서 긴현풍과 여소교가 나체로 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여소교는 몸에 실
한 오리 걸치지 않고 진현풍의 몸을 타고 앉아 낑낑거리고 있었고, 진현풍은 웃옷을 입은
채 죽은 사람처럼 두 눈을 꼭 감고 누워 있었다. 매초풍은 진현풍이 <구음진경>의 후반부
가 들어 있는 웃옷을 웬만해서는 벗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로소 매초풍은 모든 것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여소교가 진현풍의 체내의 원양과 천 년
묵은 산삼의 양열지기(陽熱之氣)를 빨아들였기 때문에 경공이 대단한 호수들처럼 빨리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두 남녀가 분명 해검계에서 운우지정을 나누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진현풍에 대한 매초풍의 애틋한 정은 순식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머리 끝까지 화
가 치민 매초풍은 달려들어 수치도 모르는 이 한 쌍의 남녀들을 마구 때려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는 이미 진현풍과의 관계를 단절해 버렸으므로 그가 다른 여
인과 유쾌하게 보내는 것을 나무랄 바가 못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 일이 자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따라서 성을 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매초풍은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또다
시 고개를 쳐들었다.
'진현풍, 당신이 그 여자와 재미를 보는데 나라고 그런 짓을 못할 줄 알아요? 난 왜 이런
사내를 그처럼 아껴 주었던가?'
매초풍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데 앞에서 오혈궁 제자 몇이 급급히 달려오고 있
었다. 모두들 당황한 기색으로 말 한마디 없이 시가지 밖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매초풍은 그들이 곁을 지나갈 때 맨 뒤의 오혈궁 제자의 발을 걸어 그를 넘어뜨렸다.
오혈궁 제자가 훌쩍 일어서더니 눈을 부라리며 주먹으로 매초풍을 때리려고 들었다. 매초풍
은 코웃음을 치며 오른손으로 그의 팔목을 잡고 왼손으로 팔꿈치의 곡지혈과 소해혈(小海
穴)을 가볍게 눌러 제압하였다.
오혈궁 제자는 오른팔을 쓰지 못하게 되어서야 이 여인이 고인(高人)이라는 것을 알아차렸
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의연한 자세로 소리 질렀다.
"빌어먹을 년, 감히 오혈궁 문하 사람을 건드리고도 살아 남을 듯싶으냐!"
매초풍은 그의 몸에 있는 혈도 몇 곳을 더 찔러 놓은 다음 그를 끌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누가 빌어먹을 년이란 말이냐?"
오혈궁의 제자는 그제야 미모의 이 여인의 무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금세 기가 죽었다.
"날 어쩔 셈이시오?"
매초풍은 손바닥을 그의 가슴에 갖다 대고 다시 물었다.
"어서 말해! 누가 빌어먹을 년이란 말이냐?"
오혈궁의 제자는 가슴이 아프고 숨이 막혀 애원조로 말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고분고분 말을 들어야지. 내 말에 고분고분 대답하면 고통을 당하지는 않게
돼."
오혈궁의 제자는 평소 오만무례하기 그지없는 자였으나 지금 매초풍의 손아귀에서는 비굴하
기 짝이 없는 소인배였다.
"예, 소인은 꼭 아씨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매초풍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너희들은 방금 전 당황한 기색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묘 궁주께서 해검계에서 암해를 받아 중상을 입었지요. 그래 여혈의 사형께서 사람을 파견
하여 시가지에 있는 제자들더러 급히 철거함으로써 사악한 자들에게 잡혀 죽지 않도록 하라
고 영을 내리셨습니다."
매초풍은 깔깔거리며 웃다가 감개무량한 듯이 입을 열었다.
"휴, 삼십 년을 하서(황하 서쪽을 가리킴)에서, 삼십 년을 하동(황하 동쪽을 가리킴)에서 풍
운을 주름 잡으며 흥성하던 오혈궁이 하루아침에 망할 줄 어찌 알았으랴!"
그러자 그 오혈궁의 제자가 언성을 높였다.
"묘 궁주께서 암해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분의 신공(神功)은 세상에 으뜸이라 동사, 서독, 남
제, 북개 이 사대 고수들과 어깨를 겨누지 않습니까? 묘 궁주께서 상처가 나으시면 꼭 그
놈들을 찾아 원수를 같을 것입니다."
"묘상이 치료를 해도 상처가 낫지 않고 죽으면 어떻게 할테냐?"
오혈궁의 제자는 그 말에 두 눈을 부릅떴다. 당장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남의 손아귀에
든 몸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묘 궁주의 상처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분한테는 제자들이 많습니다. 그중
여혈의 사형의 무예는 아주 고강하여 그런 놈들 따위는 적수가 되지 못할 겁니다."
매초풍은 오만하고 안하무인인 이 오혈궁 제자의 대답이 여간 재미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
를 빤히 쳐다보며 또 물었다.
"여봐, 임잔 이름이 뭐야?"
"전 변홍의(卞紅衣)라고 부릅니다."
"오 변홍의라. 거 듣기 좋은 이름이군. 그런데 변이라는 성은 좀 괴상하군 그래."
"변씨 성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지만 영웅 호한들이 적지 않답니다!"
"임자네 변씨 가문엔 도대체 어떤 영웅 호한들이 있나?"
"첫번째의 호한은 천하 군웅들이 듣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탈명한추(奪命寒錐)'이지
요."
"임잔 탈명한추 변청교(卞靑郊)를 말하는 것이겠지?"
"아씨 같은 젊은 여자도 견식은 있구만요."
"그런 소린 그만둬. 듣자니 탈명한추 변청교는 천하에서 암기 쓰는 데는 으뜸가는 고수라더
군."
"맞았어요. 그분의 이름난 암기 '탈명한추'는 무게가 석 냥 석 돈 삼 푼이고 길이가 세 치
삼 푼 삼 리인데, 뿌리면 유성과도 같이 빨라 천하에 그것을 막아내는 사람이 없지요. 한번
은 유주(幽州) 십팔거도(十八巨盜)들이 매복하여 그분을 사경에 몰아넣으려고 했지요. 참,
그런데 그 놈들은 미련하게도 변청교를 둘러 쌌답니다."
"유주 십팔거도가 함께 공격하면 당해 낼 사람이 적은데 왜 미련하다고 하나?"
"제 뜻은 유주 십팔거도들이 자기 힘을 잘 모른다 그 말입니다. 그 놈들이 어찌 탈명한추
변청교의 적수가 된단 말입니까? 변청교는 살펴보니 모두 무명소졸들이라 그들을 안중에 두
지도 않아 그 유명한 암기도 꺼내지 않았지요. 그분은 다만 표낭에서 열여덟 대의 마름쇠를
꺼내 뿌렸지요."
흥이 난 변홍의는 손시늉을 하면서 설명하려고 했지만 몸의 혈도들이 막혀 있었으므로 그럴
수가 없었다.
"당신 같은 아씨는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 수 없지요. 먼 곳에서 싸움 구경을 하던 십
팔거도의 서른여섯 분의 압채부인(押寨夫人)들이 모두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변청교
더러 거두어 달라고 간청하였지요. 에 참, 그 서른여섯 분의 여인들은 모두 꽃같이 아름다운
부인들이었는데 물론 아씨 같은 경국지색에 비기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자색이 뛰어난 여인
들이었지요. 하지만 변청교는 그녀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버렸지요."
그는 그때 일을 아주 감회 깊게 그려 보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아름다운 부인들은 변청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슬피 눈물을 흘렸지요. 그녀들은 그의
발자국에 입까지 맞추었답니다. 참…… 얼마나 위대한 영웅입니까!"
매초풍은 변홍의의 말에 매혹되어 저도 모르게 그 탈명한추 변청교의 영웅적 자태를 그려
보았다. 하지만 매초풍 역시 강호를 주름잡고 돌아다닌 경력이 풍부한 여인이라 금세 정신
을 차렸다.
"변홍의, 임잔 유주 십팔거도가 어떻게 되었다는 얘길 안했어. 내가 듣기에는 십팔거도들이
악랄하고 무공도 괜찮다고 하던데 그렇게 쉽사리 죽어 버렸단 말인가?"
"만일 제가 아씨를 눈은 있어도 망울이 없다고 말한다면 아씨는 꼭 화를 내실 거고 저의 귀
싸대기까지 때릴 겁니다."
매초풍은 과연 변홍의의 귀싸대기를 본때 있게 후려쳤다.
"날 감히 욕하다니!"
"여인한테 미움을 사지 말아야지요. 꽃같이 아름다운 여인한테는 더군다나 미움을 사선 안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변청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열여덟 개의 마름쇠를 자기 주위의 열
여덟 유주 도적들한테 뿌렸는데 마름쇠들이 모두 도적들의 미간에 있는 인당혈(印堂穴)을
명중했다고 합니다. 그게 어찌나 정확하든지 방금 아씨가 나의 혈도를 찌른 것보다 더 정확
했지요."
그는 연거푸 마름쇠 열여덟 개가 박히는 소리를 흉내냈다.
"거의 동시에 열여덟 사람의 미간에 있는 인당혈을 명중했고 또 거의 동시에 그들의 두골에
구멍이 나면서 마름쇠가 뇌 속에 박혔다 그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 열여덟 사람은 미처 어
쩔 사이도 없이 거의 동시에 거꾸러졌지요."
변홍의는 숨을 들이쉬고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아씨께서 만일 그때 작은 새가 되어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면, 열여덟 사람이 한
영웅을 둘러싸고 있다가 모두 뒤로 넘어져 그 모양이 해바라기꽃이 피어 있는 듯했을 겁니
다. 그들이 넘어질 때 먼지도 거의 동시에 날렸고 서른여섯 분의 압채부인들도 거의 동시에
변청교의 풍채에 감복되어 엎드렸지요."
"임자가 그처럼 상세하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마치 그 십팔 명의 도적을 변청교가 아니라
변홍의가 죽이기라도 한 듯하군."
"제가 아씨를 속이는 게 아닙니다. 제가 바로 변청교의 친동생이니 물론 형님의 일을 잘 알
지요."
"임자가 탈명한추 변청교의 동생이라구?"
매초풍은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변홍의는 그녀의 놀라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는 신이 나 떠들었다.
"변청교한테 나같이 위무당당하고 영준하게 생긴 동생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매초풍이 참지 못하고 키드득 웃으며 면박을 주었다.
"절로 제 자랑을 늘어놓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부끄럼은 여인들이나 탈 것이지 나야 당당한 사내 대장부인데 뭐가 부끄러워요? 변씨 가문
에서 나온 영재들은 모두 떳떳하고 광명정대한 호한이지요."
"임잔 변청교를 변씨 가문이 낳은 첫번째 영웅 호한이라고 하였는데 그래 변씨 가문엔 또
어떤 영웅 호한이 있는가?"
"변씨 가문의 두 번째 영웅은 저 변홍의지요."
매초풍은 손가락으로 변홍의의 얼굴을 찌르면서 웃어젖혔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놈아! 온 천하를 다 돌아다녀도 너처럼 제 자랑 하기 좋아하는 허수
아비 영웅은 없을 거다. 나 같은 연약한 여인도 이기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영웅이란 말이
냐?"
변홍의도 쑥스러운지 헤헤 웃어댔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가 있는 법이고 세상엔 상승장군이란 없는 법입니다. 이 변홍의가 지금
보잘것없지마는 이제 머지않아 절세의 신공을 갖게 될 것입니다."
"임자의 그 탈명한추 형님이 절기를 전수해 주려 한단 말이지?"
변홍의는 그 말에 갑자기 시무룩해져서 대꾸했다.
"누가 형님의 탈명한추 초수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줄 아십니까? 형님한테서 무예를 전수받
기란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힘든 일이지요."
사실 그가 형님의 절기를 대단하게 생각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근본상 배워 낼 수가 없
었던 젓이다.
'포도를 따먹을 수 없게 된 여우가 그 포도가 시고 맛이 없다고 푸념을 늘어 놓았다는 우화
가 꼭 이자를 두고 한 말이군.'
"여봐, 자네 형님은 왜 동생인 자네한테 무공을 가르치려 하지 않나?"
"형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성미가 사나워 사람 죽이는 일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니까 무공
을 배우면 함부로 사람을 죽여 조만간에 큰 재앙을 입어 죽고 말리라고 말씀하셨지요. 사람
좀 죽이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 돼서 그랬겠습니까? 분명히 구실을 만들어 절기를 나한
테 가르치지 않으려고 그런 거지요."
그는 형님한테서 무공을 전수받지 못하게 되어 오혈궁에 들어 갔던 것이다. 본래부터도 그
런 여지가 있던 그는, 여러 해 동안 오혈궁 제자로 있으면서 오혈궁 사람들이 개미를 밟아
죽이듯이 사람을 제멋대로 죽이는 것을 보고는 다른 사람의 목숨쯤은 초개로 알게 되었다.
매초풍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사람을 죽이는 무공을 닦기 위한 것인데 오혈궁의 제자들은 완전히 심심풀이로 사람
을 죽이는구나. 그러니 절정공자 탁운백, 유정아, 전진철자 그리고 개방 사람들이 한마음같
이 오혈궁 사람들을 대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로구나.'
이때 골목 저쪽에서 세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들은 전진칠자 중의 마옥, 구처기와 손
불이였다. 세 사람은 매초풍을 만나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구처기는 성미가 불 같은 사람이라 대번에 검을 뽑아 들었다.
"철시, 네 년은 또 남을 상하게 만들었구나. 이 구 모는 네 년을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이렇게 소리치며 검으로 매초풍의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매초풍은 그 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걸음 썩 나서서 왼쪽 장으로는 구처기의 오
른쪽 팔목을 치고 오른쪽 손은 갈고리처럼 만들어 가지고 그의 목줄띠를 끌어 잡으려고 하
였다.
이 초수는 공격하면서 방어하는 구음백골조 중의 무서운 초수였다. 구처기는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동생, 그래도 영문이나 물은 다음에 손을 쓰는 게 옳은 일이었네."
마옥이 구처기를 잡아당기며 나무라고 나서 매초풍에게 말했다
"철시, 빈도(貧道)는 임자가 더는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대답한 적이
있었어. 그런데 임잔 그 나쁜 버릇을 아직 고치지 못하는구만."
"마 도장, 당신은 오해를 하고 있군요. 이 놈은 오혈궁의 제자인데 나한테 잡혔어요. 그래
지금 내가 나쁜 짓을 그만두고 선량한 사람이 되라고 권고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렇지 않은
가, 변공자?"
매초풍은 변홍의를 흘겨보면서 말하였다.
변흥의는 자기를 붙잡은 여인이 흑풍쌍살 중의 철시라는 것을 알고는 벌벌 떨었다.
"그렇죠. 매초……풍, 저 여인은 나더러 나쁜 짓을 하지 말고 바른 길을 걸으며 사람을 함부
로 죽이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마옥이 살펴보니 변홍의는 확실히 오혈궁 사람들의 복색을 하고 있었고, 이런 말까지 들으
니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매초풍, 임자의 스승님인 황 선배께서는 동사라는 별호를 갖고 있고 행위가 아주 괴상하기
는 하지만 무분별하게 살인하는 일은 없지 않은가? 임자가 개과자신을 한다면 도화도의 명
성을 더럽히지 않게 되는 셈이야."
구처기는 속으로 반신반의하였으나 매초풍이 나쁜 짓을 하였다는 근거를 잡을 수 없었으므
로 침묵을 지켰다. 손불이는 매초풍을 조금도 믿지 않았으나 마옥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더 이상 참견할 수가 없었다.
매초풍이 전진칠자를 바라보며 능청스럽게 말하였다.
"세 도장께서는 이 여인이 저 놈한테 설교하는 것을 들으시렵니까?"
그러자 마옥이 웃는 얼굴로 대답하였다.
"임잔 여기 그대로 남아 저 사람한테 권고를 하도록 하게. 구 사제, 손 사매, 우린 가세나."
세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났다.
둘만 남게 되자 변홍의가 놀란 기색으로 불쑥 물었다.
"당신이 정말 철시 매초풍인가요?"
"왜, 내가 철시 같질 않아 보이나?"
"듣자니 흑풍쌍살은 사람을 과녁으로 삼아 무공을 익히며 악독하기 그지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 철시가 아주 무섭게 생긴 여인인 줄 알았거든요. 후에 듣자니 몇몇 동료들이 말
하기를 철시가 미인이라고 하더군요. 전 그 말을 믿지 않았지요."
"이젠 믿을 만한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당신은 실로 하늘 땅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미인이군요.
옥장(玉 )이 다시 살아오고 초비(貂婢)가 세상에 살아 있다 하더라도 아씨한테는 발뒤꿈치
에도 못 따라갈 것입니다."
매초풍은 변홍의가 일부러 자기를 추어주느라고 그런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
았다.
"임잔 남의 비위를 맞출 줄 아는 재주를 가졌어."
"제가 한 말은 참말입니다."
그러자 매초풍은 낯색을 바꾸면서 비웃었다.
"흥, 임잔 감언이설을 늘어놓기 좋아하는 사람이야. 소요공자 악처후를 찜쪄 먹을 인간이
야."
변홍의는 그녀가 갑자기 성을 내자 깜짝 놀라 대번에 자라목처럼 움츠리고는 말을 더 이상
하지 못했다.
매초풍은 머리를 돌리다가 뜻밖에 여소교가 골목길에 나타난 것을 보게 되었다.
'나쁜 년, 그 더러운 놈과 재미를 실컷 본 모양이로구나. 걷는 꼴만 봐도 구역질이 난다.'
뒤미처 매초풍은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진현풍이 여소교를 뒤를 따라 머리를 숙인 채 맥없
이 걷고 있었던 것이다. 변홍의는 매초풍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봉긋한 젖무덤이 세
차게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매초풍이 갑자기 변홍의 앞에 가까이 달려와 그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불쑥 말
했다.
"오관이 단정한 게 영준하게 생겼구나! 가자, 날 네가 묵고 있는 객점으로 인도해라!"
그러더니 매초풍은 그의 두 다리에 있는 혈도를 풀어 주었다.
변홍의가 영문을 몰라 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입 다물엇! 더 지껄이면 죽여 버릴테다!"
변흥의는 질겁하여 부들부들 떨면서 골목길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매초풍을 자기가
묵고 있는 객방으로 인도했다.
이 객방에는 원래 오혈궁의 제자 네 사람이 들어 있었는데 나머지 세 사람은 벌써 도망했으
므로 방안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매초풍은 문을 닫아건 뒤 문발을 쳐놓았다. 그런 다음 변홍의 앞에 다가오더니 다짜고짜로
허리띠를 잡아 끊고 장삼을 벗겼다.
변홍의는 상반신은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침상 곁으로 물러서면서 놀라 더듬거렸다.
"아……아씨, 당신은 날 과녁삼아…… 공력을 닦으려는 게 아닙니까?"
매초풍은 머리를 저으면서 천천히 자기 옷을 벗었다.
변흥의는 멍청한 표정으로 매초풍의 백설 같은 피부와 봉긋 솟은 젖무덤을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변홍의는 온몸이 굳어지면서 한 가닥의 뜨거운 기운이 아랫배로부터 얼굴로 뻗쳐 오
르는 것을 느졌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여인의 나체를 보았던 것이다.
변홍의는 사람을 유혹하는 여인의 사타구니를 쳐다보았다. 옷을 벗고 난 매초풍이 변홍의
앞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변홍의, 임자 보기엔 나의 몸매가 어때?"
"아름답지요. 기막히게 아름답고 말고요."
변홍의는 그녀의 풍만한 젖무덤, 가는 허리, 아름다운 다리 등을 감상하기에는 자기의 눈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매초풍이 냉소하듯 물었다.
"변홍의, 임잔 내 몸을 가질 생각이 없나?"
"왜 싫겠어요. 아씨를 노엽힐까 봐 두려워 그럴 뿐이지요."
매초풍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집어 던졌다. 변
홍의는 찻잔에 맞자마자 봉해졌던 혈도가 모두 풀렸다. 그는 팔을 놀려 보면서 이불 위로
얼굴만 내민 매초풍을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임잔 내가 싫나? 왜 가까이 오지 않는 거야? 사내라는 게 나보다도 더 부끄러워하다니
……."
변홍의의 가슴은 후둑후둑 뛰었다. 그는 매초풍의 핀잔에 시름을 놓고 바삐 옷을 벗은 뒤
침상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서둘러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변홍의는 매초풍의 몽글몽글한 살결이 닿자 전기에 댄 듯이 부르르 몸을 떨며 움츠러들었
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변홍의는 그제야 용기를 가다듬고 손으로 그
녀의 풍만하고 부드러운 젖무덤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변흥의의 하신에서는 기막
힌 반응이 일어났고 그의 호흡이 가빠졌다.
삽시에 온몸의 피가 끓어오른 그는 매초풍의 부드러운 몸 위를 덮쳤다. 매초풍도 처음에는
긴장하더니 뒤미처 가느다란 신음을 토했다.
'진현풍, 내가 당신한테 보복을 하겠다고 말하지 않던가요. 당신이 여인을 가지고 장난하면
나도 사내를 가지고 놀겠어요.'
변홍의는 처음으로 여인과 살을 섞는 일을 하는지라 접촉하자 마자 사정해 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 느낌이 그렇게 좋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는 사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매초풍에게 치근덕거렸다.
매초풍은 변홍의를 침대 밑으로 와락 떠밀고는 버럭 화를 냈다.
"물러갓! 물러가란 말이야!"
이렇게 소리치고 나서 그녀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변홍의는 천천히 기어 일어나서 어두운 방안 한쪽 구석으로 갔다. 그는 옷을 주워 입지 못
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다시는 침대 곁으로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연신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방바닥에 널려 있는 옷을 주워 들었다.
매초풍이 물기 어린 음성으로 명령했다.
"옷을 입지 말어!"
변홍의는 깜짝 놀라 의복을 도로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우두커니 선 채 겁먹은 얼
굴로 통곡하는 매초풍을 쳐다보았다.
약 반 시진쯤 지나자 날씨가 어두워졌다. 변홍의는 캄캄해진 방안에서 추위에 덜덜 떨었으
나 감히 옷을 입지 못하였다.
매초풍이 울음을 멈추고 속으로 탄식하였다.
'남을 원망할 게 아니다. 내가 진현풍한테 보복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왜 이리도 괴
로울까? 내가 아직도 진현풍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인가? 이런들 어떻단 말인가. 그 배신자
가 없어도 난 얼마든지 사내를 찾아 낙을 누릴 수 있어.'
매초풍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이 사내는 진현풍보다 더 영준하고 또 퍽 젊다. 나와 함께 한 침대에서 즐길
만한 사내다.'
매초풍은 자기와 살을 섞을 때 열광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시 마음이 동한 매초풍이
입을 열었다.
"이리 와!"
변홍의는 멍하니 매초풍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은 마치 '저 말인가요?' 하고 묻는 듯했다.
매초풍은 이불 속에서 손을 내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변 공자, 이리로 와요."
갑자기 부드러워진 매초풍을 보자 변홍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갔
다. 매초풍이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러고는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
제야 변홍의도 그녀의 가는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반나절이나 얼었던 몸이 매초풍의 따
뜻한 몸에 닿자 음성(淫性)이 또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그렇게 마구 덤비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속의 온갖 시름을 털어버리고 마음껏 즐기려 했다.
두 사람은 몇 번이나 미친 듯이 즐겼다. 두 사람은 기진맥진해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비로
소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변홍의는 남녀 사이의 쾌락을 한껏 맛보고 나서는 피곤했던지 곧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매초풍은 한 시간쯤 자고 나서 변홍의를 흔들어 깨웠다.
"당신에게 물어 볼 게 있어요."
변흥의는 비록 그녀의 몸은 차지하였으나 그녀의 마음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매초풍이 지
독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정신을 바짝 차렸
다.
"무슨 일인지요? 아는 대로 다 대답하지요."
매초풍이 가느다란 손가락 끝으로 변홍의의 가슴을 이리저리 긁으면서 말하였다.
"아까 낮에 당신이 하던 말을 똑똑히 모르겠군요. 당신이 절세의 신공을 갖게 될 거라고 말
했는데,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죠?"
변홍의는 눈을 껌벅거리기만 할 뿐 금방 입을 열지 않았다. 매초풍이 부드러운 팔로 그의
목을 껴안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가 당신한테 몸까지 주었는데도 날 속이려 드는 거예요? 어서 말해 봐요."
"무슨 말 못할 것은 아니지요. 천산(天山)의 마귀할멈이 절 제자로 받기로 했어요."
"천산의 마귀할멈이라니? 당신 또 거짓말하는 것 아니에요?"
매초풍이 뾰로통한 기색으로 그를 살짝 흘겨보았다. 변홍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엽게
느껴져 매초풍의 입을 맞추었다.
"내가 어찌 당신을 속일 수 있겠어요. 강남에서는 천산의 마귀 할멈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적
을 뿐만 아니라 그 마귀할멈을 아는 사람들 반은 죽고 말았지요."
"저의 사부님인 동사 황약사는 당세의 고인이어서 강남의 일에 대하여 모르는 게 없지요.
그 어른께서 강남의 일들을 늘 우리한테 얘기해 주었지만 천산의 마귀할멈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의 말씀도 없었어요."
"천산의 마귀할멈은 오혈궁보다도 신비하답니다. 황 도주께서는 그 할멈이 어떤 점이 괴상
한지를 모르고 계신 거지요. 오혈궁 사람들 가운데 오로지 사형 여혈의 한 사람만이 천산의
마귀할멈에 대하여 알고 있지요."
"여혈의가 알고 있다구요?"
"사형 여혈의도 아주 신비한 사람이지요. 그 사형은 나와 함께 오혈궁에 들어와 무예를 배
웠는데 난 지금도 보통 제자로 있지만 그 사람은 사형의 보좌에 앉았지요. 뿐만 아니라 그
사형은 무공에 진보가 빨라 묘 궁주조차 깜짝 놀라고 있답니다."
"아마 그 사람은 워낙 체력이 좋은데다 부지런히 연마하였기에 그런 성과를 거둔 거겠지
요."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지요. 사형 노로의가 말하는 것에 의하면 오혈궁의 무공은 단시
일 내에 배워 낼 수 없고 아무리 체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십 년 정도 해야 기초를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사형 초천의는 십오 년을 배웠고, 사형 노로의는 삼십 년을 배워서
야 그만큼의 공력을 닦았다고 합니다. 묘 궁주께서는 타고난 무인이라 하지만 이십삼 년이
나 무예를 닦아서야 무림의 고수가 되었지요. 그런데 사형 여혈의는 나이가 젊은데도 무공
이 노형과 초형을 초과하였고 묘 궁주한테도 별로 뒤지지 않거든요."
"알 만해요. 반드시 여혈의가 그 밖에 무슨 사파의 무공을 배웠기에 이처럼 진보가 빠른 걸
거예요."
"아씨는 과연 대단히 총명하군요. 바로 알아맞혔어요. 여혈의의 무공은 천산의 마귀할멈한테
서 얻은 거죠. 그런데 천산의 마귀할멈은 그한테 내공만 가르쳐 그가 겉으로는 오혈궁의 장
법과 도법을 쓰게 했지요. 그러므로 묘 궁주와 사형 노로의는 비록 의심을 가지기는 하였지
만 아무런 근거도 잡지 못했지요. 그리고 여혈의가 오혈궁의 일을 위해 전심전의로 힘쓰고
수차 공로를 세웠기에 궁주와 노로의는 더 캐고 들지 않았던 거지요."
"문제는 이 일을 당신한테 들키고 만 거군요."
"그렇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난 여혈의와 천산의 마귀할멈 간의 비밀을 알게 되었지요."
그러자 매초풍이 혀를 차면서 말하였다.
"내가 당신을 만난 건 묘한 인연이군요."
그 말을 들은 변홍의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한참이나 매초풍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그
는 아주 격앙된 얼굴로 매초풍을 꼭 끌어안았다.
"아씨, 당신은 선녀같이 예쁜데다 무공도 대단하군요. 난 당신한테 장가들고 싶은데 나한테
시집오겠어요?"
너무도 뜻밖의 물음이라 매초풍은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러자 변홍의가 금세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탄했다.
"내가 아씨와 짝이 기운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아씨가 나와 한 침대에서 자게 된 건 일시
적인 기분 때문일 거예요. 내가 주제 넘은 생각을 한 건지도 모르지요."
매초풍이 눈을 깜박거리면서 손으로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당신이야말로 일시적인 기분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이 어찌 나 같은 여자한테
장가를 들겠어요?"
변홍의가 매초풍을 힘껏 껴안으며 부르짖었다.
"아씨, 난 참말로 아씨를 좋아해요! 진심으로 말입니다……!"
매초풍은 그가 진심인 것을 보자 약간 망설이다가 말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어서 말씀하십시요. 무슨 조건이든지 전 다 동의해요."
변홍의가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것을 보자 매초풍은 그를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
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한테 장가들려면 나를 오혈궁에 데리고 들어가야 해요. 그렇찮으면 난 밖에서 독수공방
을 해야 하니 너무나도 쓸쓸하지 않겠어요?"
"오혈궁엔 본 문의 제자들만 드나들기로 되어 있는데 아씬 변홍의가 난색을 짓자 매초풍이
얼른 말하였다.
"나도 오혈궁에 가입하면 되잖아요."
"오혈궁에서는 열다섯 살이 넘은 사람을 제자로 받은 일이 없어요. 더군다나 소문난 강호객
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답니다."
"그건 근심할 것 없어요. 당신이 여혈의를 불러내다 나와 만나게 해주기만 하면 난 즉시 오
혈궁의 제자가 될 수 있어요. 어때요, 변랑?"
매초풍이 애교 있게 그를 '변랑(卞郞)' 하고 불러 주었다. 변홍의는 흐뭇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는 그 어떤 위험이 닥쳐오더라도 피할 생각이 없는지라 선뜻 대답하고 말았다.
이튿날 그들 두 사람은 행장을 수습하고 시가지를 떠나 서남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한 남녀가 나는 듯이 시가지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다름아닌 여소교와 진현풍이었다.
여소교의 몸놀림은 어제보다도 민첩하였고 속도도 매우 빨랐다. 옷매무새가 말이 아닌 진현
풍은 두 손으로 허리춤을 쥐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는 허리띠가 없어 바지춤을 잡고 쫓
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오빠, 날 따라잡아요. 날 따라잡으란 말이에요."
여소교가 깔깔거리며 수림 속으로 달려갔다.
진현풍은 힘에 부친 모양인지 몹시 헐떡거렸다 여소교한테 너무나도 많은 진기를 빼앗긴 것
이 틀림없었다. 진현풍의 경공은 평소의 삼 할밖에 되지 않았다. 진현풍이 뒤쫓아가면서 큰
소리를 질러댔다.
"이 년, 네 년이 날 해쳤어. 내가 네 년을 죽여 버릴테다!"
매초풍이 이미 옷을 갈아입고 얼굴에 면사포까지 쓴 탓에 진현풍은 그녀 옆을 지나가면서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순간 매초풍은 가슴이 후둑후둑 뛰었다 그러나 곧 화가 치밀어 올랐다. 변홍의가 웃으며 말
하였다.
"이 두 미치광이는 정말 체면도 없군요. 아씨! 저 놈들을 관계치 말아요."
그러자 매초풍이 톡 쏘아붙였다.
"당신이야말로 미친 놈이고 체면이 없어요."
변홍의는 진현풍과 여소교를 모르기 때문에 매초풍이 왜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
만 맘을 몽땅 매초풍한테 빼앗긴 그는 금세 기가 죽어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그녀는 웃음을 머금고 변홍의의 손을 살그머니 잡았다.
"아직도 성이 났어요?"
"아니에요, 난 성을 내지 않아요."
"당신이 기쁘시다면 됐어요."
변홍의가 빙그레 웃었다. 매초풍도 미소를 살짝 띄우면서 그의 팔을 끼고 응석을 부렸다. 그
러면서 속으로 생각을 더듬었다.
'여혈의가 그 젊은 나이에 그처럼 높은 무공을 갖고 있는 데 대하여 나는 벌써부터 의심을
가졌었지. 내가 황약사한테서 도망쳐 나올 때 <구음진경>을 훔쳐 가지고 나와 매일같이 부
지런히 무예를 닦았는데도 그를 이기지 못하지 않았던가. 알고 보니 여혈의는 천산의 마귀
할멈한테서 기공을 배운 거로구나.'
그녀는 변홍의를 힐끔 쳐다보면서 속다짐을 하였다. 기어이 여혈의에게 접근하여 그를 통해
천산의 마귀할멈을 스승으로 모셔 그 신공을 배우리라고 결심했다.
'그렇게만 되면 천하에 위세를 떨칠 수 있고 누가 감히 나에게 시끄럽게 굴 수 있겠는가!'
변흥의가 갑자기 매초풍을 붙잡으면서 말하였다.
"저 앞에 나쁜 놈들이 있군요!"
매초풍이 건너다보니 멀지 않은 곳에 밋밋한 산등성이가 있는데 한 절름발이가 쌍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육승풍이었다. 그 옆에는 막여인이 손에 귀두도를 들고 서 있었
다.
매초풍이 그들 두 사람을 보고 비웃는 투로 말하였다.
"육 사제, 막 장문, 어제 해금계에서 전진칠자, 개방의 장로 그리고 석 선배께서 말씀하시었
는데 무림의 사람들은 이제 더는 이 매초풍을 괴롭히지 않는다면서요?"
육승풍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 질렀다.
"흥, 도화도의 제자들은 바깥 사람을 안중에 두지도 않는 거야. 이 육 모는 잔폐가 되긴 하
였어도 무슨 일이나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어!"
동사 황약사는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으로서 확실히 세상이 놀랄 만한 무공을 갖고 있는 기
재였다. 세상에 이름이 난 뒤 그는 안하무인이었고 세속의 예법을 개방귀처럼 여겼으며 남
이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대로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수하에 있는 제자들도 점차
그를 닮아 가서 성미가 다소 포악하였다.
매초풍이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육 사제는 아직도 나를 도화도로 잡아가 공을 세울 셈인가요?"
"그렇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기어이 방법을 대어 네 년을 잡아다가 사부님한테 바칠테다. 그
리하여 사부님의 노여움이 가셔지면 우리 네 사형제는 다시 사부님의 문하에 돌아갈 수 있
을 거야."
"좋아, 육승풍. 내가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 어서 잡아 보란 말이야. 그 병신이 된 다리를 가
지고 덤벼들겠다니 내가 경공으로 놀리지마는 않을걸."
막여인이 귀두도를 들고 소리쳤다.
"매초풍, 너무 우쭐거리지 말아라. 이 막 모가 오늘 여씨 문중을 위해 원수를 갚을테다!"
"그 무슨 쓸데없는 고생을 사서 하는 건가? 당신은 당당한 한 무술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여
부의 뜨락에서 무술 선생 노릇을 하고 지금은 또 남 대신에 죽으려 든단 말이오. 정말 노복
의 근성이 골수에 배인 자로군."
변홍의가 그들의 말을 얼마간 들어 보더니 영문을 좀 알아차렸는지 매초풍에게 아첨을 떨면
서 큰소리를 질렀다.
"이 놈들아, 네 놈들이 감히 이 아씨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내가 너희들의 껍질을 벗
겨 신바닥을 만들테다!"
"속시원하게 욕 한번 잘했어!"
매초풍이 한바탕 웃어대더니 막여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막 장문, 임자가 여씨 가문의 원수를 갚는다면서 왜 어제 해검계에서 여소교를 보았을 때
구해 주지 않았어?"
어제 막여인은 확실히 여소교를 보았다. 그런데 여소교의 경공이 괜찮은 것을 보자 그녀가
고인을 만나 도움을 받은 줄로만 알았다. 그는 또 여소교가 진현풍을 놀려대고 진현풍이 부
아가 치밀어 여소교를 추격하였지만 근본적으로 따라잡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시름을 놓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육승풍을 보살펴야 했으므로 여소교를 뒤쫓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매초풍이 여소교의 이야기를 꺼내자 막여인은 여소교가 소요공자 악처후의 구원을 받아 그
를 따라간 일이 생각났다. 그리하여 막여인을 여소교의 경공은 악처후한테서 배운 것으로
짐작했다.
막여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소요공자가 여소교 아씨를 보호하고 있으니 이 막 모는 완전히 시름을 놓고 있는 거야. 흥,
그러니 너희들 흑풍쌍살인들 어쩔 수가 없지."
매초풍이 비웃듯 깔깔 웃어댔다.
"아마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요. 여소교는 악처후한테 몸을 망치고 나서 소요관에서 쫓겨났
지. 이젠 몸으로 생계를 이어 나가고 있단 말이야. 휴, 연약한 여인이란 혼자 나돌아다니게
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지. 막 장문, 그렇지 않은가?"
"매초풍, 넌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지?"
막여인이 뒤통수를 얻어맞기나 한 듯이 멍하니 있다가 이렇게 말하자 매초풍이 여전히 깔깔
거리며 대꾸하였다.
"호호호, 믿어지지 않으면 육승공한테 물어 보란 말이야. 저 사람은 소요공자가 어떤 물건짝
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막여인이 육승풍을 바라보며 따져 물었다.
"육 공자, 저 말이 사실이오?"
육승풍이 무표정한 얼굴로 설명을 해주었다.
"소요관에는 소요루란 집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열흘에 한 번씩 처녀를 바꾸어 들이고 있다
오. 그러니 악처후란 놈이 어떤 물건짝이라는 게 뻔하지 않소?"
막여인은 육승풍의 말을 듣고 따지듯 말을 내뱉었다.
"육 공자, 당신…… 당신은 왜 진작 말하지 않았소? 내가 만일 그 악처후란 놈이 음적인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 놈이 여소교를 소요관으로 데려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요."
"흑풍쌍살이 여소교를 악처후한테 보내어 희롱당하게 하려고 작심하였는데 당신이 그걸 막
아낼 수 있단 말이오? 여소교가 소요관에 갇혀 있는데 당신이 그곳에 뛰어들어갈 수 있단
말이오?"
막여인이 화가 나서 귀두도를 휘두르며 산등성이에서 달려 내려왔다.
"매초풍, 내가 네 년을 죽여 버릴테다!"
매초풍이 미처 나서기도 전에 변홍의가 칼을 뽑아 들고 막여인을 막았다. 두 사람은 서로
탐색전으로 몇 번 초수를 써보더니 한 덩어리가 되어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하였다.
매초풍은 변홍의의 도법이 이만저만이 아니고 무공이 만만치 않은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
다.
'어제 내가 불의에 기습했었기에 저 사람을 손쉽게 사로잡을 수 있었지 정면으로 맞닥뜨렸
더라면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을 거다.'
변홍의가 싸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놓인 매초풍은 육승풍을 돌아보며 빈정거렸다.
"육 사제, 사제는 왜 날 붙잡지 않소? 내가 두려운 거지요."
매초풍의 조롱에 화가 난 육승풍은 쌍지팡이를 짚으면서 천천히 산등성이에서 내려왔다.
"매초풍, 이 육 모는 비록 너의 적수가 되지 못하지만 우리 일곱 사람이 함께 싸우면 네 년
은 당해 내지 못할 거야."
'막여인까지 합해야 둘뿐인데 일곱 사람이라니……?'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매초풍이 뒤를 돌아보고는 신음을
내뱉었다.
"아뿔싸!"
태호오교와 금도 임청이 달려오더니 육승풍과 함께 매초풍을 에워쌌다. 해검계에서 육승풍
은 태호오교들과 하마터면 다툴 뻔했었다. 하지만 육승풍은 태호오교들이 흑풍쌍살을 없애
버리려 한다는 것을 알자 옛날 일은 잊어버리고 그들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임청은 태호에
와서 오교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터라 그들을 도와주고자 따라온 것이었다.
무수한 싸움에서 시련을 겪은 철시 매초풍은 당황하지 않고 즉시 손발을 번개처럼 놀려 눈
깜짝할 사이에 삼사십 장을 휘둘러 포위전을 흐트려뜨렸다.
"저 년을 둘러싸라! 그러치 않다간 하나하나 모두 격파되고 만다!"
태호오교와 임청은 흑풍쌍살한테 혼이 난 적이 있는지라 포위권이 흩어지기만 하면 그녀가
자기들을 몽땅 해치울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잘 협력하여 결
사적으로 싸웠다.
매초풍은 손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휙휙 소리를 내면서 구음백골조의 초수로써 육승풍을 끌
어 잡으려 했다. 육승풍은 지팡이로 미처 반격할 겨를이 없게 되자 황급히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매초풍은 먼저 우두머리부터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육승풍에게 공격의 예봉을 돌렸
다. 육승풍은 물러서는 한편 오른쪽 지팡이로 그녀의 아랫도리를 갈겼다. 매초풍은 민첩하게
지팡이를 훌쩍 뛰어넘으면서 손으로 육승풍의 정수리를 끌어 잡으려 했다.
육승풍이 깜짝 놀라 급히 왼쪽 지팡이로 위쪽을 갈겼다. 매초풍이 양쪽 지팡이를 장으로 내
리쳤다. 그 바람에 두 지팡이가 모두 땅에 떨어진 육승풍은 그대로 땅바닥에 넘어지고 말았
다.
그 틈에 매초풍은 수리개가 땅으로 내리덮치듯이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으로 육승풍의 정수
리를 끌어 잡으려 했다. 그녀가 구음백골조의 공력을 제대로 안 쓴다면 정수리에 구멍이 펑
뚫리지는 않더라도 두개골이 깨지고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다.
육승풍은 쌍장으로 매초풍의 공격을 막았다. 매초풍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아래로
내리꽂혔다.
임청이 제때에 달려와 금도로 매초풍의 허리를 갈겼다. 매초풍이 그 기세대로 육승풍을 공
격하면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었으나 자기도 금도에 맞아 허리가 동강이 날 판이었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흑풍최림(黑風催林)'의 초수를 쓰면서 왼손을 뒤로 돌리더니 금도의
칼끝을 붙잡았다. 그녀는 구음백골조의 초수를 오랫동안 연마하였기에 두 손이 겉보기에는
섬약하게 보이지만 창칼에도 베어지지 않았다.
이때 낭리교 주지청, 번파교 오비용이 동시에 들이닥쳐 각기 양쪽으로 매초풍의 양 옆구리
에 네 개의 작살을 들이찔렀다. 매초풍은 비록 외문의 무공을 익혔으나 아직 마공은 이루지
못한지라 몸뚱이에 창칼이 박히지 않을 정도까지는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작살을 막
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자 매초풍은 '일비충천(一飛沖天)'의 초수로 두 장 남짓한 높이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
녀가 뛰어오르자마자 앞뒤에서 열 개의 작살, 한 자루의 금도, 하나의 지팡이가 요란하게 한
데 맞부딪쳤다.
매초풍은 공중에서 독룡은편을 꺼내더니 사방으로 마구 휘두르며 땅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육승풍, 임청과 태호오교들은 그 사나운 채찍을 당하기 어려워 분분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
했다.
육승풍이 큰소리를 질렀다.
"여러분, 필경 철시는 여인이므로 힘이 모자랄 거요. 뿐만 아니라 저 년은 내공이 잘 다듬어
지지 않았으니 오래 견뎌 내지 못할 거요. 우리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분명 저 년이 기진
맥진해질 때가 있을 거요!"
그 말에 매초풍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육승풍, 네 놈은 참 지독하구나! 도화도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동문을 죽이는 것도 마다
하지 않는구나! 좋아, 네 놈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해보자!"
매초풍은 채찍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맹공격을 해댔으나 육승풍과 임청 그리고 태호오교는
그녀를 둘러싼 채 그녀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그들은 매초풍이 기진해진 다음에 공격할
생각이었다. 매초풍은 그들한테 공격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하여 힘껏 채찍을 휘두르는 수밖
에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연 육승풍이 짐작했던 대로 매초풍은 기진맥진해졌다. 매초풍은 그냥
이러고 있다가는 지쳐 죽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어 채찍을 휘두르면서 몸을 앞으로 이동하여
포위를 뚫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들도 쉽게 틈을 내주지 않았다.
매초풍은 오래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자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는
채찍을 휘두르고 왼손으로 육승풍의 뒤를 가리키면서 부르짖었다.
"여보, 나와 함께 이 놈들을 죽여요!"
육승풍은 비록 흑풍쌍살이 해금계에서 서로 사이가 벌어진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믿
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매초풍이 '여보!' 하고 부르자 진현풍이 뒤로 달려드는 줄 알고
멈춰 서서 더 물러서지도 못했고 매초풍의 채찍 때문에 뒤를 돌아다 보지도 못하였다.
금도 임청은 육승풍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매초풍이 꾀를 부린다는 것을 알았다.
"육 공자, 철시의 꾀에 넘어가지 마시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매초풍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채찍을 뒤로 휘둘러 임청과 태호
오교들을 물러가게 하는 한편 왼손으로 육승풍의 면상을 끌어 잡으려고 하였다.
육승풍이 임청의 일깨움으로 형편을 알아차리고는 급히 지팡이를 내질렀다. 그러나 매초풍
이 지팡이 끝을 잡아쥐고 옆으로 낚아채자 육승풍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옆으로 나뒹굴었
다.
매초풍이 육승풍이 넘어진 틈을 비집고 빠져 나가 보니 변홍의가 한창 막여인과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매초풍은 나는 듯이 달려가 막여인의 목을 채찍으로 후려쳤다.
막여인이 급히 귀두도로 채찍을 가로막으려 하는데 채찍 끝이 살짝 위로 올라가며 눈으로
날아오는 것이었다. 막여인은 급한 나머지 뒤로 한 장이나 물러났다.
막여인이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공격을 하려 했을 때는 이미 매초풍이 변홍의를 끌고 서쪽
으로 도망가고 있는 중이었다.
태호오교와 임청이 그 뒤를 바싹 추격하기는 하였으나 매초풍이 계속 채찍을 후려치는 바람
에 더 이상의 접근은 어려웠다.
매초풍은 변홍의보다 경공이 아주 높아 왼팔로 그의 허리를 밀어 주면서 두 사람은 눈 깜짝
할 사이에 멀리 도망하였다. 두 사람은 밀림 속을 이리저리 헤쳐 나가면서 기를 쓰고 도망
했다.
이십여 리나 도망하고서야 그들 두 사람은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뒤를 돌아보니
온통 황야였고 망망한 바다처럼 펼쳐져 있는 수림에는 정적이 깃들어 있었다.
변홍의는 몹시 지쳤던지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이 악한들이 감히…… 오혈궁의 제자를 죽이려 들다니! 개자식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막여인을 내어놓고 그 나머지 놈들은 모두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이에요. 그 놈들은 당
신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모두 나한테 덤벼들었단 말이에요."
"당신을 죽이게 되면 그건 날 죽인 것과 같지요. 우리 둘의 운명은 한데 이어졌기에 이승에
선 이젠 갈라놓을 수 없어요."
"당신 말솜씨 하나만큼은 알아주어야겠네요."
변홍의가 매초풍을 억세게 껴안더니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난 당신을 사랑해. 영원히 당신을 아끼고 싶어요."
매초풍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면서 눈을 흘겼다.
"대낮에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다시 이래선 안 돼요!"
변홍의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이죽거렸다.
"예잇, 이 아들은 꼭 어미 말을 잘 듣겠습니다."
그 말에 매초풍은 그의 귀싸대기를 한 대 갈겨 주고 싶었지만 참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왜 내가 이 사람 귀싸대기를 때리지 못하는 거지? 이 역겨운 사내한테 반했기 때문일까?
아니야, 나는 다신 다른 사내한테 반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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