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신조협 양과후전 2

3학년2반 | 2022.02.25 07:04:08 댓글: 0 조회: 479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1022
제5장 취중에 한 결혼
총명한 양과는 더 관찰하지 않고서도 그 영문을 알 수 있었다. 오자겸이 저쪽에서 흥정을
하면서 무채접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무채접이 웃는 얼굴을 지으면 오자
겸은 그대로 돈을 지불하고 무채접이 근심스런 표정을 하면 오자겸은 값을 깎으려 했다. 그
러다가 무채접이 웃음을 지어야 오자겸은 값을 더 깎지 않고 그걸 사들였다. 그런데 양과는
젊고 예쁜 미인을 옆에 놔두고 속이 근질거려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꾸 무채접한
테 말을 걸었다.
눈짓으로 오자겸의 흥정을 조종하고 있던 무채접은 양과의 말에 그저 건성으로 대답했다.
양과는 그것이 괘씸해서 심술을 부렸다.
"아가씨는 참 예뻐, 참 예쁘다니깐. 내 애인이 돼주지 않겠소? 어떻소?"
여전히 무채접은 양과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지요' 하고 대답했
다. 양과는 껄껄 웃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이 있나? 내 바로 가흥에 가서 객방 하나를 구해놓겠소."
무채접은 그제서야 양과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방금 애인이 돼달라 어쩌라 하고 수작하
던 것 같았다. 무채접은 얼굴이 빨개져 양과를 흘겨 보았다.
"또 그따위 소리 해봐요."
마침 이때, 무이산 산사람이 단장초 씨앗을 한 봉지 내놓으며 아무리 적게 받아도 은 백 냥
은 받아야겠다고 값을 불렀다.
오자겸은 무이산 산사람이 부르는 값을 듣고 기뻐했다. 그런데 무채접의 기색을 보니 별로
였다. '웬일이지? 이런 좋은 장사를 왜 마다하는 게지?' 무채접이 지금 양과에게 화를 내고
있는 이유를 알 길 없는 오자겸은 무채접이 동의하지 않는 줄 알고 무이산 산사람에게 고개
를 가로저었다. 그런 값으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때 무채접에게 면박을 당한 양과는 얼른 화제를 바꿨다.
"핫하하, 아가씨께서 잘못 들었군요., 난 그저 농담을 해본 것 뿐인데."
"누가 그 따위 농담하재요?."
무채접은 이렇게 내쏘고는 고개를 홱 돌려 오자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양과는 계속 치근거렸다.
"그건 농담이었고,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들려드리지요. 안 듣겠소? 거참, 이런 이야기
는 들어 두는 게 좋을텐데. 그렇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거요."
'흥, 또 그 따위 수작에 내가 상대하나 봐라.' 무채접은 그러면서도 양과의 말에 귀가 쏠렸
다. 처녀들이란 호기심이 많은 법이다. 양과가 실없는 수작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도 무슨 소리를 하나 들어보고 싶었다.
"하루는 말이오. 내가 거리를 산보하는데 두 사람이 내기를 거는 것이 눈에 띄더군요. 한 사
람은 도련님이고 또 한 사람은 그 하인인데 '나리, 저 앞에 오는 처녀 예쁘지요?' 하고 하
인이 말했죠. 도련님은 '예쁘기야 예쁘지. 그런데 저런 예쁜 아가씨들은 나같이 돈 있는 사
람을 좋아하지 너같은 가난뱅이는 싫어할 거다. 웃음 한번 보여주기 싫어할거다' 하고 말했
소. 그러자 하인이 '정말요? 저 아가씨가 나보고 웃으면 어쩔래요? 무슨 상을 주시겠어요?'
하고 내기를 걸었지요. '은 스무냥을 주지.' 하는 도련님의 대답에 하인은 또 '제가 저 아가
씨 약을 올려 화를 내게 하면 또 어쩌실래요?' 하고 물었죠, '그럼 또 은 스무냥을 상으로
주마.' 했죠. 하인은 좋다고 그 아가씨와 마주보고 걸어갔지요. 그 아가씨에게서 네댓발짝
떨어진 곳까지 다가간 하인은 갑자기 돌아서서 개 한 마리를 보고 뛰어가면서 '아버님, 아
이고 아버님!' 하고 개를 불렀지요. 다 큰 사내가 개를 보고 자기 아버지라고 하니 얼마나
우스운 일이오? 그래 그 아가씨가 입을 싸쥐고 깔깔 웃었지요. 그런데 그 하인이 그 아가씨
앞에 무
릎을 털썩 꿇으며 '어머니!' 하고 부르더란 말입니다. 그러자 그 아가씨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달아났지요."
무채접은 그 이야기를 채 다 듣지도 않고 우습다고 배를 끌어안고 웃어댔다. 하마터면 의자
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때 앞에서는 무이산 산사람이 자기 단장초 씨앗 값을 다시 흥정하고 있었다. 방금 그는
은 백 냥을 받겠다고 하는데 오자겸은 그렇게는 못 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이산 산사람
으로서는 은 백 냥을 안 받고서는 절대로 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단장초 씨앗을 팔
생각이 없어져 심술을 부렸다.
"제길, 백은 10만 냥에 황금 천 냥을 내시오. 그러면 팔겠소."
미친 소리였다. 뭇 사람들이 킥킥거렸다. 오자겸은 어이가 없어 무채접을 바라보았다. 그런
데 무채접이 크게 웃고 있지 않는가.
이게 어찌된 일이지? 방금 은 백 냥으로 흥정할 때는 동의하지 않더니, 지금 무이산 산사람
이 엄청나도 한심하게 엄청난 값을 부르는데 오히려 웃다니…… 옳아, 이 단장초가 아가씨
에겐 극히 긴요한 물건이기에 남을 속이고 싼 값에 사기를 원치 않는 모양이다. 그럼 제길,
값이 엄청나도 사지 뭐. 무이산 산사람에게 오자겸은 은표 10만 냥을 척 내줘버렸다.
무채접도 멀리서 그것을 보았다. 그러나 허리를 구부리며 웃어대던 웃음을 바로 그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무이산 산사람이 은 10만 냥 짜리 어음을 두루마기에 넣는 것을 보았다. 한
참만에야 웃음을 그친 그녀는 양과를 쏘아보며 입술을 내밀었다.
"당신, 거기서……."
"무슨 일로 그러시죠?"
양과는 웃음을 참고 정색하며 물었다.
무채접은 자기와 오자겸 사이의 일을 말할 수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아니, 이러면 안되지. 이 아가씨를 그냥 화나게 해서는 안 되지. 이 아가씨 언니가 어디 있
는지 알아내야 하는데 화나게 하면 알려줄 리가 있겠나? 이거 공연한 일에 재미가 붙어 그
만 여기 온 목적을 잊어버렸구나.'
양과는 고개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횡재를 바라며 다투고 흥정하는 사람들만 보일 뿐
백의 여인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반나절이나 떠들썩하고 나서야 장사가 마무리 되었다.
매매한 쌍방은 각기 이득이 있었지만 그래도 제일 기뻐하는 사람은 장주 오자겸이었다. 그
는 강남 강북에서 나는 60여종의 기이한 독물들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명
하여 취현청에 큰 연회를 베풀고 군웅들을 잘 대접하도록 했다.
술이 세 순배쯤 돌자 오자겸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술잔을 들고 호탕하게 웃었다.
"오늘 거와회의는 여러분들이 도와주셔서 그만하면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라던 대로
천하삼절독을 보충하지는 못했지만 각 처의 사독고수(使毒高手)들이 한데 모여 각자 재주들
을 보여 주어서 나 같은 늙은이도 견식을 크게 넓혔소이다."
그러자 소염라 부방이 한마디 했다.
"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시오. 여기에 있는 사람은 모두 성미 소탈
하고 말하면 말한대로 행하는 강호 호걸들입니다. 서슴없이 말씀하십시오."
오자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러지요. 여러분에게 보낸 청첩에도 했다시피 오늘 또 한 가지 개인적인 일이 있는
데……."
"거 따님께서 신랑감을 고르는 일이 아닙니까? 이거 목이 빠지게 기다렸는데요."
누군가 소리치자 폭소가 터졌다.
"예, 바로 그 일입니다. 제 딸 오군영은 규방 규수라 세상 물정을 잘 모릅니다. 나이는 스물
아홉이 되었는데 아직도 배우자가 없으니 이 늙은 것 마음이 편하지를 못하오."
오자겸의 말에 벽사신군이 쓰쓰쓰하고 괴상한 소리로 웃었다.
"따님 이름은 강호에 널리 퍼진지 오랩니다. 멀리 대리국에 있는 나도 다 들었으니깐요. 그
런데 그건 따님 눈이 높아 그렇질 않습니까?"
"오장주님의 따님은 용모도 아름답지만 무공도 출중해서 재색(才色)을 모두 갖추고 있다네."
누군가 이렇게 말하자, 귀두방의 이후아가 소리쳤다.
"우리 귀두방은 독물은 쓸 줄 모르오. 이번에 온 목적은 순전히 송방주님의 배필을 정하러
온 것이오."
풍노사도 덩달아 고함쳤다.
"우리 송방주님께선 당신 따님에게 마음이 동했소. 그러니 어서 따님을 송방주님 부인으로
내주시오."
"무엇이 어째?"
오군량이 풍노사에게 눈을 부릅떴다.
"화내면 어쩔텐가? 우리 귀두방이 무서워할 줄 아나? 강도질 하는 우리가 그 정도 담도 없
겠나?"
"그럼 우리가 말을 듣지 않으면 빼앗아가겠다 이건가?"
"그럴 수도 있지. 귀두방 사람이 삼백 명이 넘는데 여인 하나 뺏어가는 거야 여반장이지. 우
리가 이렇게 여럿이 와서 구혼하는 건 임자들 면목을 봐주기 위해서야. 뭐 알아?"
오군량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싸우려는 듯이 검을 쫙 뽑았다. 그러는 것을
오자겸이 꾸짖어 말렸다. 귀두방 방주 송무적도 풍노사를 꾸짖어 물러서게 했다.
"두목이 구혼하는데 왜 네 놈이 나서서 난리냐?"
풍노사는 자리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순순히 내주지 않으면 빼앗겠다고 했잖소? 이제 와서 왜 그래요? 제가 잘못 말했습니까?"
송무적은 풍노사를 험악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군웅들이 보고 있는 참이라 더 말
할 수가 없었다.
귀두방 무리들이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좌중들은 술맛이 떨어졌다. 군웅들은 술상을 떠나
제자리에 가서 앉았다.
양과가 옆에 앉은 무채접에게 속삭였다.
"아가씨도 거와장 따님에게 장가들고 싶어 남장을 한거요?"
그러자 무채접이 힐끗 눈을 흘겼다.
'모용협이란 명성 때문에 봐주니까 자꾸 치근덕거리네? 버릇 좀 고쳐줄까?'
그러다가 그녀는 오는 길에 모용공자가 자기에게 발길에 차였던 일이 떠올랐다. 모용협이
왜 무공을 모르는 사람처럼 그랬을까? 정말 모를 일이었다.
소룡녀의 일이 궁금한 양과는 다시 무채접에게 물었다.
"아가씨 언니는 지금 어디 있소? 거와장에 같이 온거요?"
"모용세가에 이런 추잡한 사람이 있었는 줄은 정말 몰랐네요. 강호영웅들 체면이 깎이네요,
원 참."
그러나 양과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끈질기게 백의 여인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자 무채접은
아예 양과를 치한 취급하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양과도 어쩔 수가 없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두고보자. 어딜 가도 내가 늘 따라 다닐테니까. 그러면 그 언닌가 하는 여자가 나타나겠
지?'
주석에 앉은 오자겸이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사실 우리집 딸애는 강호에 소문난 것처럼 그렇게 선녀처럼 예쁜 것은 아니오. 그렇다고
못난 것도 아니지만 말이오. 무공도 우리 아들의 절반에도 못 미칩니다. 에……."
그런데 확도가 또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우린 오장주의 겸사말을 들으러 온 게 아니오."
오자겸은 이맛살을 찌푸렸으나 그래도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확도 왕자님 말이 맞습니다. 그럼 인사말은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우리집 딸애가 오
늘 신랑을 고르는데는……."
확도가 또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무공으로 골라야지요. 자고로 무림에선 무공으로 겨뤄 혼사를 정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습
니까?"
"무공으로 한다면 여기 계신 분 모두가 우리 딸애를 능가하실 것입니다."
오자겸의 말에 군웅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공으로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신랑감
을 고르겠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 보고 글이라도 짓게 할 작정이오?"
촉산 괴걸 능소(凌 )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다른 이들도 따라 웃었다. 능소는 사천사람
으로 독화살을 쓰는데 능했으며 고인에게 통비권(通臂拳)을 전수받아 사천 땅에서는 첫손가
락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오자겸은 좌중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말했다.
"문장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것입니다. 딸애 군영은 글을 좀 배웠기에 문무겸
비한 강호 협객을 신랑으로 고르겠다고 합니다. 이 늙은 것도 딸애의 바람을 저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확도가 또 건방지게 웃었다.
"내 비록 재간은 없지만 중원에 유학해서 글을 좀 배우기는 했소. 오장주께서 제목을 내시
오. 내 한번 글을 지어 보리다."
"뭐 제목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우리 딸애가 지은 시구절에 화답하는 시구를 하나 써 보
십시오. 그러면 딸애의 배필이 가려질 것입니다."
확도는 기다리다가 답답했던지 재촉했다.
"어서 그 시구를 불러 보시오."
"그러죠. 규각일녀임장경사목단영(閨閣一女臨 鏡四目單影 : 규방의 아가씨 거울 보고 화장하
니 사람은 하난데 눈은 네개네)."
오군영은 규방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적적하기 그지없어 이런 시구를 지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한 확도는 잠깐 생각을 정리하다가 소리높여 말했다.
"창외양남규홍안팔족이심(窓外兩男窺紅顔八足二心 : 창밖의 두 사내가 홍안을 엿보니 발은
여덟이고 마음은 둘이네). 어떻소?"
"엉터리야, 엉터리."
벽사신군이 손을 내저었다.
"왜 엉터리야? 하나와 둘이 대구(對句)되고, 네개와 여덟이 대구되는데, 왜 엉터리야?"
"이 집 따님이 쓴 시구가 무슨 뜻인 줄이나 아오? 규방 규수가 거울을 앞에 두고 보니 거울
안팎에 눈이 네개다. 즉 배필을 구하지 못해 아주 외롭다 이 말이요. 그런데 팔족이심? 그게
도대체 뭔 소리요?"
군웅들도 이해가 안갔다.
확도는 히쭉 웃었다.
"두 사내가 담을 넘어 처녀를 만나려니 원숭이나 개처럼 팔다리를 모두 쓸 게 아니오? 그러
니 팔족이란 말이오. 그리고 두 사내가 저마다 딴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이심이란 말이오."
그러자 비웃는 소리가 사방에서 났다.
"우리 송나라는 예의지국(禮儀之國)이오. 그따위 너절한 시구는 몽고 사람에게나 어울릴 것
이오."
"남의 규수네 담장을 넘어가다니? 그건 좀도둑들이나 할 짓이지."
"그 훌륭한 시구에 저런 너절한 시구를 붙이면 뭐가 되나?"
확도는 비록 중원에 유학했다고는 하지만 실은 문장 실력이 형편없었다. 그러면서도 적반하
장으로 얼굴이 대노하여 투덜거렸다.
"제기랄, 누가 더 좋은 것을 지어봐. 흥, 어디 한번 보자구."
"내가 하나 지어보겠소. 열일이기(烈日二騎)……축(逐)……원산(遠山)……."
그러자 풍노사는 문자속도 모르고 좋다고 소리쳤다. 군웅들도 그 일곱자까지는 괜찮다고 생
각했다. 송무적은 계속했다.
"팔제(八蹄)……팔제……양마(倆馬)."
풍노사는 무작정 좋다고 소리를 쳤다.
"거 멋있네. 대단히 멋있어. 오장주님 어떻습니까? 이젠 더 할 말이 없지요?"
군웅들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자겸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이 두필이니 과연 발은 여덟개지요. 우리 딸이 지은 시구에는 한 사람의 눈이 네개란 말
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눈까지 합해서 네개라는 말이오. 그러니 대구가 부자연스럽소. 그리
고 마지막 두자는 더욱이…… 말씀 드릴 수가 없군요."
송무적은 스스로 자기 글재주가 없음을 알고 제자리에 털썩하고 앉아버렸다.
그 뒤에도 몇사람이 시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대구가 잘 되지 않거나 말이 상스러워 모두
퇴짜를 맞았다. 오자겸의 눈길이 좌중을 향해 한바퀴 휘둘러보다가 양과에게 멎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모용공자님, 공자님 가문은 문무가 모두 대단하신데 어디 한 번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모용협께서 문무 겸비하심은 강호에 소문이 퍼졌는데 가만 있지 마시고 한번 본때를 보이
시오."
촉산괴걸 능소가 덩달아 부추겼다.
"정말이야? 그 유명한 모용공자가 있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누군가 이렇게 떠들었다.
하는 수 없이 양과가 일어섰다. 어렸을 때 황용에게 글을 배우기는 했지만 시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기에게 집중되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렸을 때 황용에게서 글을 좀 더 배워둘걸 하는 후회스런 생각이 들었다. 양과는 콧잔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것을 본 무채접이 냉소하며 소곤거렸다.
"모용공자는 색만 밝히는 줄 알았더니 허명도 좋아하는 사람이군요."
양과는 자기가 그럴듯한 시를 못 짓는다면 자기보다 진짜 모용협을 망신시키리라는 자책감
이 들었다. 그러자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그는 창밖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행여나 뜻밖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러니까 주백통이라도 다시 와서 난리를 피운다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텐데 하는 이런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양과는 속으로 주백통을 죽어라고 욕했다. 나타나야 할 때는 안 나타나고 그저 필요 없을
때만 골라 촐랑대며 나타나더니.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그저 수군거리기만
했다.
오자겸이 위엄을 지키며 헛기침을 몇 번하더니 좌중을 향해 근엄하게 말했다.
"모용공자께서 지금 깊이 생각하고 계시니 모두 조용히 하십시다."
그런데 이때 양과의 눈이 번쩍했다. 창밖 호수 위에는 작은 섬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무
지개 다리로 호숫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 다리 위에는 두 여자애들이 무엇인가 서로 가지
겠다고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것을 본 양과는 섬광처럼 문득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양
과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읊었다.
"사교이주쟁사건팔수쌍백(斜橋二姝 爭絲巾八手雙 : 무지개 다리 위의 두 아가씨 손수건을
서로 빼앗으려 하니 손은 여덟이요 수건은 둘이라)."
군웅들은 잠시 잠잠했다가 일제히 환성을 울렸다. 확도까지도 그 시가 잘됐다고 찬탄했다.
오자겸은 눈이 안보이도록 흡족하게 웃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우리 딸애의 시구보다 낫소. 하하하."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환성 속에 불만에 가득찬 목소리가 하나가 불거져 나왔다. 높지는 않
으나 내공이 매우 심후한 목소리여서 분명히 들렸다.
"이건 불공평해."
몽고 왕자 확도의 목소리였다.
확도가 내력을 쓰며 이야기하는 것을 본 군웅들은 적이 긴장했다.
"모두들 천하삼절독이나 이 집 따님의 혼사일로 여기에 왔잖소? 그런데 오장주는 사소한 시
구로 배필을 정하려 하다니 군웅들이 납득하겠습니까? 난 납득이 안 되오."
"그렇다면 어쩌겠다는거요?"
오군량이 노려보았다.
확도는 접선을 딱하고 펼치더니 몇 번 부채질을 했다.
"송방주도 신부를 뺏어가겠다는데 나라고 그렇게 못할까?"
"뺏어가? 어디 그래보시지."
오군량이 검을 확 뽑아들었다.
확도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지 마시오 소장주, 그런 검술로는 내 적수가 되지 못하니 자중하시오. 내 사대제자들도
이기지 못할 거요. 난 무력을 쓸 생각 없소. 오장주께서 어차피 공평하게 결정하실테니까."
군웅들 중에서 오자겸 과의 흥정에서 이익을 본 사람들은 가만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확
도와 공감하는 터라 찬동의 의사를 표했다.
오자겸은 손을 내저어 조용하게 만든 다음 말했다.
"물론 본인도 공평하게 처리하려고 합니다. 우리 딸애가 이런 시구를 지은 것은 여러분과
한번 흥을 돋워 보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흥을 돋운다고? 그건 너무한 말이다. 계속 이러다가는 살인이 나는 것은 둘째치고 잘못하다
간 거와장이 뒤집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자겸이 말을 이었다.
"일을 공평하게 하고자 딸애는 이런 글을 내게 써주었습니다. 읽어 드리지요. 소녀의 남편감
은 취현청 오른편의……."
그러자 군웅들은 모두 취현청 오른쪽으로 몰려갔다.
"앞에서부터 셋째줄……."
그러자 또 군웅들은 세번째 줄로 몰려들었다. 그 줄에 앉아 있던 사람들 중에 무공이 좀 낮
은 사람들은 대번에 밀려났다.
오자겸은 빙긋 웃었다.
"그 줄에서도 열여덟번째 자리……."
그러니 그곳에 앉아 있던 무이산 산사람이 호탕하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으하하하, 복이 터졌네. 여복이 터졌어."
그러나 그는 의자에서 끌려나와 엎어졌다. 그 대신 소염라 부방이 그 자리에 앉았다.
"자식, 내 미인을 뺏어가려고? 말도 안 된다."
무이산 산사람은 대노하여 부방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부방은 후심추(後心錐)의 초
식으로 팔꿈치를 써서 무이산 산사람의 가슴을 쳤다. 그는 어이쿠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 떨어졌다.
그런데 소염라 부방이 그 자리에 다시 앉기도 전에 민강(岷江)의 쌍룡형제들에게 맞아 나가
떨어졌다. 또 그들은 촉산괴걸 능소에게 한손에 하나씩 번쩍 들리어 창밖으로 내던져졌다.
이렇게 엎치락 뒤치락 하다가 마침내는 숫자가 많은 귀두방의 무리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방주 송무적이 그 자리에 앉고 그 무리들이 주위에 쭉 둘러서니 다른 사람들은 어
쩔 수가 없었다. 송무적은 의기양양하게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가 끝나자마자 발 밑에서 스르륵 스르륵 하는 소리가 들리며 무엇인가
다리 위로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귀두방 무리들이 내려다보니 난데없이 벽사 수십 마리가
기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무공은 높지만 독사를 대단히 무서워하는 송무적은 마침 잠시 전에 벽사신군의 벽사진(碧蛇
陣)에 놀랐던 터라 기겁을 하며 석 장 밖으로 뛰어 날아갔다.
군웅들은 독물들을 거의 다 오자겸에게 팔아버려서 벽사를 당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멀리
피해 물러섰다. 벽사신군은 신이 나서 뱀무리를 거느리고 의자에 가서 버젓이 앉아 거드름
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 졸렬한 수법으로 자리를 차지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누군가가 큰 소리로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벽사신군은 쓰쓰쓰 하며 괴상한 웃음을 터뜨렸다.
"졸렬한 수법? 미인을 안을 수만 있다면 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지. 장인어른, 이젠 신부
를 내주셔야죠."
그는 벌써 거와장의 사위가 된 것처럼 거만을 떨었다.
군웅들은 그를 노려보았다. '저런 구역질나는 놈과 예쁜 오씨네 아가씨가 맺어지다니 하늘
도 무심하시지.' 하고는 그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한탄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송무적은 그저 가슴이 터지는듯 했다.
그는 얼굴이 파랗게 변해 벽사신군을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혼나고 싶지 않으면 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라!"
"왜 내가? 안되지. 안돼. 네가 그러면 그럴수록 안되지. 그렇다고 네 따위가 어쩔 셈이냐?"
그러자 송무적은 등에 차고 있던 귀두도를 탁탁 쳤다.
"이게 보이지? 대리 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그 따위로 계속 주둥아리를 놀려라."
풍노사를 비롯한 귀두방의 무리들도 덩달아 소리쳤다.
"더러운 녀석, 뱀이나 기르는 지저분한 놈. 회를 쳐놓을까보다."
벽사신군은 예의 그 이상한 웃음을 지었다.
"난 이집 아가씨를 가진 다음 거와장을 떠나지 않을 작정이다."
그때 확도가 여러 사람을 헤치고 나와 벽사신군에게 읍을 했다. 그리고는 접선으로 부채질
을 했다.
"신군형, 축하드리오."
그러자 벽사신군의 파란 얼굴에 금방 음흉스런 웃음이 흘렀다.
"고맙네 고마워. 이 형님이 거와장 사위가 되면 자네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걸세."
방금까지만 해도 확도를 형이라고 하던 것이 어느새 입장이 바뀌어버렸다. 그러나 확도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바닥에 이렇게 독사가 많아서야 어디 새 형수님이 오시겠소? 보기만 해도 기겁할 거요."
"거 참, 그렇지. 뱀들을 거둬들여야겠군."
벽사신군은 입으로 쓰쓰쓰 하고 신호를 보냈다. 뱀들은 눈깜짝할 사이에 창문을 통해 밖으
로 사라졌다.
귀두방 사람들은 씩씩거리며 벽사신군이 거와장을 떠나면 죽여버릴 생각만 했다.
확도가 벽사신군의 옆에 와 앉았다. 벽사신군은 확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좋아했다.
"아우, 우리 손잡고 한번 일을 해보세. 우린 큰 일을 할 수 있을거네."
확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럴 생각이오. 형님과 손잡으면 천하게 무서울 것이 없지요."
벽사신군은 좋다고 목젖이 보일 정도로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바로 그때 확도가 돌연 접선으로 벽사신군의 유근혈(乳根穴)을 쿡하고 찔렀다. 그것을 본 군
웅들은 놀랐다. '아니 방금까지 호형호제하더니, 이게 무슨 일이람?'
미인을 끌어안을 생각에만 빠져 있던 벽사신군은 불의의 습격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손쉽게 벽사신군의 유근혈을 찌른 확도는 연이어 곡택(曲澤), 중정(中庭), 양문(梁門) 등의
혈도를 짚었다. 벽사신군은 여러 대혈들이 막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자네가 왜…… 이보게 아우."
확도는 벽사신군의 두루마기 안에 숨어 있을 벽사가 두려워 손을 쓰지 않고 접선으로 혈도
를 누른 것이다. 지금 벽사신군이 꼼짝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조심했다. 그는 접선으로 벽
사신군의 겨드랑이를 찔러서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멀찌감치 집어던져 버렸다. 벽사신군은
군웅들의 머리 위를 지나 취현청 한가운데 쿵 하고 떨어져 버렸다.
확도는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는지 의자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이젠 뱀이 없습니다. 사부님, 안심하고 앉으시지요."
제자 진웅의 말을 듣고서야 확도는 거드름을 부리며 의자에 앉았다. 진웅, 장기, 연무, 임맹
네 제자들이 검을 꼬나쥐고 확도의 주위를 빙 둘러섰다.
벽사신군은 땅에 떨어져서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자 발버둥치며 마구 욕을 퍼부어댔다.
"이런 죽일 놈, 나와 환난을 같이 하겠다던 놈이, 손잡고 독주여니를 없애자던 놈이, 날 배
반해. 이 신의도 모르는 놈아!"
강호 사람들은 신의를 제일 중요시한다. 벽사신군의 말에 군웅들은 모두 확도에게 멸시의
눈길을 보냈다. 강도질을 일삼는 귀두방의 무리들도 신의를 제일로 여기는데 확도 같은 인
간이 버젓이 강호를 활보하다니? 이것은 무림의 수치라고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확도
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독사처럼 성이 난 벽사신군을 바라보았다.
"넌 뱀을 잘 부리지만 난 계책을 잘 쓰지. 이걸 병불염사(兵不厭詐)라고 하지. 너같이 무지
막지한 놈은 병법이 뭔지도 모를 거다."
그러자 좌중이 술렁거렸다.
"오장주님, 저렇게 겉과 속이 다른 자에게 딸을 내줘서는 안됩니다."
능소가 소리치자 부방도 연이어 소리쳤다.
"확도는 몽고놈이오. 오랑캐란 말이오. 우리 천조(天朝)의 여자를 어떻게 오랑캐에게 준단
말이오?"
그러자 군웅들은 송나라 금수강산이 몽고에게 침략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비록 그
들 모두가 우국지사는 아니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확도에 대한 증오심이 가중되었다. 그
들은 분분히 일어나서 오자겸에게 딸을 내주면 안 된다고 소리쳤다. 만약 오자겸이 그 말을
듣지 않고 딸을 확도에게 내준다면 당장이라도 무력 행사를 할 것만 같은 살벌한 분위기였
다.
양과는 거와장의 혼사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어 그냥 심드렁하게 취현청 왼편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채접도 여자이기에 그냥 양과 옆에 앉아 있었다. 완안방방은 원래 왼쪽에 앉아 있
었지만 확도의 행동을 감시하느라고 혁중달을 데리고 우측으로 옮겨앉아 있었다.
그래서 왼쪽에는 양과와 무채접만이 앉아 있었다.
양과는 원래 확도를 인간 취급하지 않고 있었기에 코웃음을 쳤다.
"잘들 놀고 있다. 소인배들은 저렇다니까."
무채접은 양과를 무시하려고 했으나 어쩐지 입이 간지러워 가만 있지를 못했다. 그녀는 양
과를 놀려주려는듯 한마디 했다.
"내가 보기에는 둘 다 호색 소인배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요? 저 인간은 미색을 보면 가로채서 마구 유린하려 하지만 이 양과는 비록
미색을 좋아하기는 하나 음란한 짓은 절대 안하오. 우리 둘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나오."
"그러면 우리 언니를 만나보겠다는 것도 오직 미색을 좋아하기 때문이지 다른 음란한 뜻은
없다 그 말예요?"
양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무채접은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을 수가 없군요."
"믿을 수가 없다니? 내가 그런 비속한 호색한이라면 왜 여기에 앉아 있겠소? 저기 저 자리
를 빼앗지. 모르긴 해도 이곳에 내 무공과 명망을 따를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오."
무채접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말은 잘 하네요. 모용공자는 오른팔에 중상을 입었잖아요? 그런 팔로 확도같은 이와 싸우
다간 망신당할 걸요. 그러니까 가만 있는 것 아녜요?"
양과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무채접은 양과의 속마음을 맞혔다고 좋아서 깔깔거렸다.
"그렇죠? 할 말이 없죠? 부끄럽죠?"
그때 오자겸이 소리쳤다.
"여러분, 조용히 해주시오. 딸애의 글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럼 아직 다 안 읽었다는 말씀이오?"
소염라 부방이 물었다.
"그렇소이다. 딸애는 여기에 '조금 쉬었다가' 이렇게 써놓았지요. 그래서 쉰건대 이제 때가
된 것 같으니 마저 읽겠습니다."
그러자 군웅들은 환호성을 울렸다. 확도같은 자에게는 거와장 아가씨를 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마음이었는데 마침 잘됐다는 의미였다.
오자겸이 읽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쯤 여러 영웅들께선 이미 취현청 오른쪽으로 옮겨 소녀와 인연을 맺고저 할
것입니다. 소녀는 감사하여 마지않습니다."
말하자면 오군영은 군웅들이 그럴줄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군웅들은 자기 행동을
생각하고서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데 소녀는 평범한 일개 아녀자로 세상에 나서서 명성을 떨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소녀는 오직 본분을 지키는 보통 사나이를 부군으로 맞을 생각 뿐입니다. 취현청 오른편에
모이신 분들이 실망하실까봐 소녀는 불안하기 그지 없습니다."
군웅들은 듣고 창피함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외유내강한 오군영의 계략에 탄복하기도 했다.
오자겸은 계속 읽어갔다.
"소녀의 미래의 낭군은 취현청 오른쪽에 앉아 있는 미색에는 담박한 군자들 중에서 선택될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오자겸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쥐며 읍을 했다.
"죄송합니다만 딸애의 뜻이 이러하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신랑은 취현청 좌측에 계시는 분
들 중에서 선택될 것입니다."
그러자 확도는 그쪽으로 훌쩍 날아갔다.
"그럼 나도 좌측으로 갈테요."
오자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됩니다. 딸애의 글에는 이미 우측으로 간 사람은 제외한다고 분명히 씌어 있습니다.
확도 왕자님께서는 이해해 주십시오."
아무리 철면피인 확도라 해도 더 이상 억지를 부릴 수는 없었던지 물러섰다.
취현청 왼쪽에는 양과와 무채접만이 남아 있었다. 양과는 다급해졌다. 이대로 달아나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무채접이 먼저 일어났다.
"저는 집에 삼처사첩(三妻四妾)이 있으니 다시 더 장가들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채접은 취현청 오른쪽으로 건너갔다.
양과도 일어섰다.
"저도……."
그런데 오자겸이 웃으며 말을 잘랐다.
"더 말하지 마시오. 모용공자께서 미혼임을 강호에서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소? 딸 군영을
공자님께 내주겠소."
군웅들은 갈채를 보냈다. 여하간 자기들은 가망성이 없었고 확도의 괘씸한 시도도 실패했으
니 모용공자가 선택된 것을 환영해야 한다는 심정이었다.
군웅들의 시선이 모아지자 양과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양과는 소룡녀를 제외하고는 어떤 여자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기로 결심했기에 설사 오군영
이 소룡녀보다 아름답다고 해도 양과는 오군영에게 장가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군웅들은
양과가 멍하니 서 있자 너무 기뻐서 그러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때 취현청 밖에서 한 여인이 불쑥 나타났다. 백의 여인이었다. 무채접은 어느새 취현청 밖
에 나가 있었다. 그녀는 백의 여인에게 양과를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백의 여인은 멀리서 양
과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을 본 양과가 부르짖었다.
"용녀, 여보 용녀!"
그러나 떠들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애가 탄 양과는 취현청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백의여인과 무채접은 어디론지 출연히 사라져 버렸다.
"여보, 여보∼"
오군량과 장정 몇이 달려와 양과를 붙잡더니 비단 두루마기를 입히고 꽃을 달아 주었다.
양과는 백의 여인 생각으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백의 여인은 가버렸다. 용녀
가 가버린 것이다. '분명 나를 원망하며 갔을 것이다. 내가 오군영을 아내로 맞는 줄 알고
서러워서 가버렸을 것이다. 아! 내가 왜 이런 일에 끼어든거지? 거와장 사윗감을 고르는데
부질없이 왔다가 용녀에게 이런 오해와 버림을 받다…….'
양과는 마음이 괴롭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신랑 복장으로 두루마기를 입힌 것도 몰랐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양과가 너무 기뻐 그만 정신이 나간줄 알고 그저 떠들기만 하고
있었다.
이윽고 취현청에는 혼례식에 필요한 모든 물건들이 갖추어졌다.
사실 오자겸은 처음부터 딸을 모용협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모용세가의 명망이 거
와장을 훨씬 능가하기에 모용협이 말을 안 들을까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생
각 끝에 거와회의를 열고 모용협을 청해 오기로 했다. 그리고 사전에 오자겸 부자는 모용협
을 사위로 삼을 방법을 의논했다. 모용협은 강호의 젊은 세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
며 신의와 언약을 무엇보다도 중히 여긴다. 그러므로 이번 회의에 참석했다가 선택되면 다
른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선택되게 할 것인가? 오자겸은 궁리 끝에 딸에게
앞서 말한 그런 글을 쓰게 했던 것이다. 오자겸의 짐작으로는 모용협이 호색한이라고 할지
라도 명성과 체면을 중히 여겨 다른 사람들 같이 자리 뺏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됐다. 그래서 우측으로 간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용협과 몇몇만이 남게 될 것이고 그때
또 다른 방법을 쓰면 모용협이 빠져나가지 못하리라는 생각하에 주도면밀하게 계책을 세운
것이었다.
그 결과 그들의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 모용협은 다른 사람들 같이 자리 뺏기를 하지 않고
점잖게 좌측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묘한 것은 좌측엔 무채접과 모용협만이 앉아 있
었다. 무채접은 물론 장가들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거와장 사위에는 모용협이 선택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군량은 자칫 손을 늦추었다가 모용협이 후회하면 큰일이 날까봐 다른 일이 생기기 전에
재빨리 해치우려고 장정들을 시켜 신랑 옷을 입히고 또 번개같이 혼례식을 준비했던 것이
다. 그리고 이미 단장을 하고 기다리고 있는 신부를 부축해다가 모용협과 같이 천지신명 앞
에 무릎 꿇고 절하게 하며 혼례를 치르게 해버렸다.
오자겸 부자는 신랑 신부를 신방에 들여보내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모
용세가와 사돈이 되었으니 거와장의 위세가 강호에 떨칠 날도 멀지 않았구나. 오자겸 부자
는 흐뭇했다.
그러나 그 꿈이 곧 산산조각 날 줄을 그 누가 알았으랴! 그들은 모용협이 실은 신조협 양과
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혼례식에서도 양과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군웅들이 양과에게 술을 권해오자 그는 술맛도 모른
채 그저 주는대로 받아 마셨다. 아마 삼사십 잔은 들이켰을 것이다.
확도는 미인을 얻지 못하자 당장 양과가 모용협으로 가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려고 했
다. 그러나 양과의 무공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다. 물론 양과가 지금 채설주 독에 중독된 것
을 알았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완안방방이 양과와 손잡고 자기를 공
격할까봐 겁이 나기도 했다. 양과 한 사람도 대적하기 힘든데 완안방방까지 나서면 확도는
살아남기 어려웠다. 그리고 양과가 오군영을 얻게 되면 소룡녀와 반목이 생길 것이니 괜찮
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앞으로 양과의 일이 들통나면 거와장 사람들은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테니 이것도 즐거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도는 속으로 기
뻐하며 마음껏 술을 마셨다. 그의 제자들 넷도 사부가 기분이 좋아진 것을 보고서는 자기네
들도 마구 술을 마셔댔다.
이제 거와장도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고 오자겸 부자는 기쁨에 도취되어 양과의 표정
은 주의깊게 살피지 않았다.
이렇게 일이 우습게 풀려 양과는 드디어 신방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시녀들은 물러가
며 문을 밖에서 잠가버렸다.
고주망태가 된 양과는 눈앞이 몽롱했다. 그는 침대맡에 붉은 면사포를 쓴 여인을 어슴푸레
하게 보고는 중얼거렸다.
"소룡녀, 소룡녀요?"
고묘에서 소룡녀와 혼례식을 올리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 소룡녀도 아래 위 모두 붉은 옷을 입고 붉은 면사포를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군영은 그 소리에 신랑이 들어온 줄 알았다. 그녀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부끄러워 말도 못
했다.
'소룡녀라니? 무슨 말을 하는거지? 내게 장난을 치는 걸까? 실없으시기는…….'
그런데 쿵하고 사람이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오군영은 살며시 면사포를 들고 바라보았다.
낮에 아버지 서재에서 만났던 그 영준한 남자가 바닥에 넘어져 있지 않겠는가? 몸에서는 온
통 술냄새가 났다.
아버지와 오빠는 어쩌려고 모용공자를 저렇게 고주망태로 만들어 놓은 거지? 술에 흠뻑 취
한 가짜 모용공자 양과는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그것은 생각 뿐 도무지 몸이 말
을 듣지 않아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오군영은 신랑을 부축해 일으킬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처녀의 부끄러움이 앞섰던 것이다. 그
러다가 양과가 몇 번이나 일어나려고 애쓰는 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면사포를 자기
손으로 벗고는 양과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그냥 두자니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사전에 오자겸은 모용협의 오른팔이 상한 팔이라고 딸에게 당부했었다. 그래서 오군영은 양
과의 왼쪽 겨드랑이를 부축했다. 그래서 양과의 오른팔이 천으로 감아 만든 가짜임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오군영은 양과를 침대에 누이고 해장탕을 먹였다. 게다가 양과는 술기운을 내모는 내공이
있었기에 점차 술이 깼다. 양과는 선녀처럼 예쁜 처녀가 자기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적
이 놀랐다.
낮에 서재에서 보았을 때 오군영은 화장도 하지 않고 옷도 수수하게 입었기에 양과는 오군
영의 미모를 그리 주의깊게 살펴보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말끔히 단장을 하고 있는 오
군영을 보니 천하일색이었다. 아미봉안(蛾眉鳳限), 호치주순(皓齒朱脣), 분면홍조(粉面紅潮),
화용월태(花容月態)…… 뭐라고 표현해도 과분하지 않을 성싶었다. 그런 미모에 늘씬한 자태
까지 겸하니 양과는 가슴이 울렁거려 눈앞이 다 몽롱해졌다.
술이 깬 양과는 그래도 신부를 소룡녀로 착각하고 중얼거렸다.
"여보, 정말 당신이 소룡녀요?"
그러나 다시 자세히 보니 용녀가 아니기에 실망하여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오군영은 신랑이 술에서 깨고서도 엉뚱한 말을 계속 하자 무슨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 앉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당신은 누구요? 여기는 또 어디고?"
그러면서 양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긴요? 우리들……신방이……."
오군영이 겨우 한마디 했다. 마지막 말은 마치 모기소리처럼 가늘었다.
"신방?"
양과는 일어났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내가 왜 남의 신방에 들어온 걸까?
그러나 양과에게서 술냄새와 사나이를 체취를 맡은 오군영은 황당하기도 했지만 기뻐하기도
했다. '이제…… 이제 당장 나를 껴안고…… 아이, 난 몰라.'
그런데 양과가 침대에서 내려서다가 또 넘어져버렸다.
오군영이 급히 그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당신, 취하셨으니 앉아서 얘기하세요?"
"뭐, 당……당신이라구?"
"이미 혼례까지 치르고 이렇게 부부가 되었는데 당신이라고 부르면 어때요?"
오군영은 그가 아직 술이 덜 깬 줄로 알고 이렇게 말하며 방긋 웃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앉은 양과는 이상해서 중얼거렸다.
"뭐? 식까지 올리고 부부가 되었다구? 그래 도대체 아가씨는 누구요?"
오군영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음악도 익힌 문재(文才)였다. 게다가 무공도 대단
했다. 오로지 규방에만 있었기에 세상에 그녀의 재주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뿐이었다. 문
무를 겸비한데다가 재간이 있는 여자이기에 또 그만큼 오기도 있었다.
그녀는 양과가 무턱대고 누구냐고 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소녀는 소년 협사(少年俠士)인 모용공자님을 존경해 왔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안하무
인하실 수가 있는거죠?"
양과는 자기를 모용공자라고 부르는 말에 그만 정신이 번쩍들었다. 그제서야 기억이 되살아
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붉은 면사포를 한 여인과 혼례식을 치른 일이 어렴풋이 떠오르자 그
여인이 바로 이 눈앞에 앉아 있는 처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과는 번쩍하고 정신이 들었다.
"그럼 아가씨가 오장주 따님이시오?"
양과는 몸이 다 오싹해졌다.
"죄송합니다. 이것은 다 오해라니까요."
양과는 벌떡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왜 그러세요?"
오군영이 그를 막았다.
"죄송합니다. 내가 얼떨결에 그만 잘못을 한거요. 난 갑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
다."
그래도 오군영은 양과가 농담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여보세요. 농담을 하셔도 신혼 첫날밤에 이런 농담을 하십니까?"
"이러지 마시오. 내가 당장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아가씨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될거
요. 어서 비키시오. 꼭 나가야 합니다."
양과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 앞의 이 아가씨는 모용세가의 모용공자를 배필로 고른 것이지 이 양과는 아니다. 내가
이대로 있다간 이 아가씨의 신세를 망치게 된다. 단 한순간이라도 지체할 수 없다. 어서 나
가자.'
그런데 오군영은 또 자기 나름대로 양과의 행동을 해석하고 있었다. 이번 혼사를 모용공자
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을 눈치챈 아버지가 모용공자를 흠뻑 취하게 만들
어 취중에 신방에 들어오게 한 모양이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혼사를 기어이 성사시키려
한 모양이다. 그래서 모용공자가 술이 깨자 가려하는 것 아닌가?
오군영은 문을 막고 서서는 비켜주지 않았다.
"우리 아버님께서 잘못했다고 해도 이미 우리는 천지신명에게 무릎꿇고 절까지 한 부부사이
예요. 이래놓고 그냥 가신다면 전 뭐가 됩니까? 내 처지는 어떻게 되느냔 말예요?"
날 버리고 가더라도 천하 영웅들 앞에서 자기가 아직 숫처녀임을 밝히고 가야한다고 오군영
은 생각했다.
양과는 애가 타서 말을 돌렸다.
"참, 야단났네, 솔직히 말하겠소. 난 모용협이 아니오, 난……."
'흥, 모용협이 아니라구? 그런 소리로 날 속이고 도망치려구? 밖에 각지에서 온 영웅들이
수백 명인데, 그들이 눈이 멀었다고 엉뚱한 사람을 모용협이라고 여기까지 데려 왔을까? 말
도 안되는 소리지.'
오군영은 생각할 수록 화가 났다.
"여하간 이렇게 된 바엔 취현청으로 가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해요. 모용협이든 아니든
저와 같이 우리 아버님께 가서 말씀하세요."
그러자 양과는 문밖으로 나설 수 없었다.
'오자겸과 군웅들이 내가 가짜 모용협인 줄 알면 가만 두겠는가? 목숨이 날아갈 것은 물론
이거니와 죽어도 씻지 못할 오명을 남기게 되리라. 그리고 이 소문이 소룡녀의 귀에 들어가
면 소룡녀가 날 얼마나 욕하겠는가?' 사랑을 배반한 자라는 말을 용녀에게 들을 수는 없었
다.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양과는 다급히 말했다.
"아가씨 난, 난 정말 모용협이 아니오."
오군영은 눈썹을 곤두세웠다.
"여하간 취현청에 가서 여러 영웅들 앞에서 말씀하세요."
"뭇사람들 앞에서? 가령 그래서 내 신분이 밝혀진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가씨의 명예는 어
떻게 됩니까?"
'그렇다. 저 사람이 나를 속이고 결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날에는…….' 이 생각이 미치
자 오군영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가만히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양과는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는 그 틈을 타 또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나를 보내 주시오. 남 모르게 슬쩍 가버리면 그만 아니오?"
"안돼요. 그렇게 가시면 전 어떡해요? 내일 아침 아버님께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양과는 잠깐 생각하다가 미봉책이 떠올랐는지 타이르듯 말했다.
"내가 고주망태가 돼 그냥 웩웩하고 토하기만 해서 거와장 밖으로 쫓아내버렸다고만 하시
오. 그러면 기껏해야 아가씨의 성미 사납다는 말이나 듣게 되겠지요. 다른 일은 더 없을 것
입니다."
오군영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물었다.
"모용공자님, 이 군영이가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나요?"
양과는 오군영이 그토록 불쌍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양과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난 정말로 모용협이 아니오."
"그렇다면 당신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히 말씀드리겠소. 난 양과라는 사람이오."
"양과…… 양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강호에선 신조협이라고 부르지요."
그러자 오군영의 눈이 대번에 밝아졌다.
"어머나 당신이 신조협이세요? 대협 곽정, 여걸 황용과 더불어 원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양
양을 지키셨다지요?"
"양양 사수는 내 공로가 아니오."
곽정 백부님의 명성을 이 아가씨까지 알고 있으니 백부님이야말로 정말 떳떳한 대협객이시
다. 양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군영이 갑자기 소리쳤다.
"틀려요. 신조협은 외팔이라고 하던데……."
"이건 가짜요."
양과는 자기 오른팔을 툭툭 쳤다.
오군영이 다가와 만져보니 정말 가짜였다. 오군영은 기뻐서 다시 한번 양과를 유심히 살펴
보았다. 미모의 처녀가 그렇게 자기를 찬찬히 훑어보는 바람에 양과는 오히려 부끄러워졌다.
"다들 신조협이 미남 중에서도 미남이라고 하더니 정말……."
오군영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늘씬한 그 자태가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양과는
가슴이 뛰었다. '이런 미녀를 아내로 맞는 것보다 큰 복은 없으리라!' 그러나 그때 양과의
뇌리에는 사랑하는 아내 소룡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소룡녀가 그를 향해 웃고 있는 것 같았
다.
양과는 스스로 창피해서 자기 뺨을 때렸다.
"왜 왜 그러세요?"
양과는 감히 오군영을 바라보지 못했다. 방금의 생각이 또 들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소. 거와장에 잘못 와서 모용공자로 오인받는 바람에 결국은 아가
씨와 혼례식까지…… 죄송하기가 이를데 없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오군영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양과는 이곳을 떠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양공자님께서 기어이 가시겠다면 소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만……."
오군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난 가겠소."
마음이 가벼워진 양과는 문을 열려고 했다.
"잠깐만요."
오군영이 막았다.
'이 여인이 왜 또 그러지?' 양과는 멈칫하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우린 우연히 만난 사이지만 이미 천지신명께 절을 하고 혼례식을 치
른 상태 아닙니까? 싫어도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오군영이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이 소녀의 비속함을 탓하지 않으신다면 전 그냥 공자님의 시중을 들겠어요."
물론 양과는 이 아가씨가 비속하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이 아가씨는 천하일색이
다. 그러나 소룡녀를 아내로 삼은 몸이니 양과는 어쩔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전 이미 아내가 있어서……."
"종남산 활사인묘에 있던 소룡녀 말이죠?"
"아가씨가 어떻게 알죠?"
"소룡녀 말고 또 다른 처가 있나요?"
양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오군영의 얼굴빛이 환해졌다.
"소룡녀는 이미 실종되었다면서요? 정말예요?"
"그러고보니 아가씨는 이미 다 알고 계셨군요."
양과는 한숨을 지었다.
거와는 천하삼절독 중의 한 가지다. 그래서 거와장 사람들은 다른 두 가지 절독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자겸은 서역과 절정곡에 사람을 보내 소식을 알아오게 했는데 그
러다보니 자연히 양과와 소룡녀의 일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오군영은 소룡녀가 절정곡에 16년 후에 다시 만나자고 글을 써놓은 것도 알고 있었다. 오군
영은 소룡녀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오군영이 방굿 웃으면서 말했다.
"소룡녀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미인이죠. 소녀같은 것은 비할 나위도 없죠. 그러나 소룡녀는
이미 실종되고 지금은 공자님 홀로 외로이 지내시잖아요? 소녀는 공자님 곁에서 그 적적함
을 풀어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양과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소룡녀를 만날 때까지 그녀를 기다려야 하오."
"소룡녀와 약속한 시간은 아직 십년이나 남았잖아요? 전 그 십년 동안만이라도 공자님의 시
중을 들어도 만족해요. 그러다가 소룡녀가 남해신니에게서 돌아오면 전 공자님 곁을 떠나겠
어요. 그러면 안되겠어요?"
그러면서 오군영은 애원의 눈길로 양과를 바라보았다.
십년 후에 어찌 될 줄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었다. 그녀는 십년 후면 자기가 소룡녀를
능가하면 능가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했다.
천성이 오만한 편인 그녀는 영웅도 보통이 아닌 대영웅, 호걸도 대 호걸에게 시집가려고 결
심해왔다. 그러기에 아버지가 자기를 모용공자와 엮어주려고 하자 기뻐하며 계책까지 내놓
았던 것이다.
비록 일이 우습게 되어 모용공자가 아닌 양과를 만나기는 했지만 그 역시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일대영웅 신조협이 아닌가. 게다가 비록 외팔이기는 하지만 얼마나 영준하고
늠름한가? 춘심이 동한 오군영은 이 이상적인 사내를 결코 놓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용녀를 잊지못하는 양과의 태도 역시 분명했다.
"아니오. 난 반드시 이곳을 떠나야 하오."
양과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 몰랐던 오군영은 몹시 놀랐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른 방법을 쓰려고 했다. 그녀는 봉관(鳳冠)을 벗고 검은 머리를 풀었다. 두 눈에선
구슬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렸다. 그녀는 또 옷을 벗기 시작했다. 분홍색 속옷이 그녀의
아리따운 몸매를 돋보여 주었다.
오군영이 목메여 말했다.
"소녀는 공자님을 끝까지 따르려고 합니다. 만약 공자님께서 기어이 저를, 저를 버리시겠다
면 소녀는, 소녀는 이 자리에서 자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가위를 들어 자기 목을 찌르려 했다.
양과는 크게 놀라 급히 장풍으로 그녀의 손을 밀어내면서 가위를 빼앗았다.
"이러지 마시오, 제발 이러지 마시오."
"왜 막는거예요? 왜?"
"이러시면 이 양과는 천고의 죄인이 되는 것이오."
"당신은 신조협이시니 저같이 유약한 여자가 죽고 사는 것이 무슨 상관이시겠어요? 가세요.
남의 일 간섭말고 어서 가세요."
양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인들에게 고통을 주기 싫어하는 양과였다.
"내 말 좀 들으시오. 나는 소룡녀를 찾으면 재취를 안할 사람이오. 제발 자비를 베풀어 나를
놓아주시오."
그러자 오군영이 발끈하여 문을 탕하고 열었다. 그리고 목메인 소리로 부르짖었다.
"가세요 가. 누가 말려요? 난 안 말려요. 가세요."
양과는 가지도 있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입장이 되었다. 자기가 문 밖에 나서기만 하면 그녀
는 당장 자살할 것같이 보였다.
그런데 문밖에서 사람 머리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흰머리, 흰수염, 익살스러운 얼굴! 바로
노완동 주백통이었다. 주백통은 놀리는듯한 얼굴로 히죽거리고 있었다.
"여보게 아우. 자네 변덕이 죽끓듯 하는구만. 낮에는 그 남장을 한 처녀에게 치근덕거리더니
밤에는 오씨네 아가씨를 얻는다?"
물론 그가 말하는 남장한 처녀는 무채접이었다.
양과와 오군영은 주백통을 보고 크게 놀랐다.
"형님은, 형님은 아직도 안가고 여기 계셨소?"
"내가 가긴 왜 가? 좋은 구경거리가 있는데."
"좋은 구경거리라뇨?"
"하하하, 자네가 모용협을 가장해서 오장주의 금지옥엽을 꼬셨는데 이게 탄로나면 좋은 구
경거리가 생기게 되는거지. 꼭 탄로가 나서 구경거리가 생길거야. 자네 내 충고 좀 듣게. 제
발 또 아내를 얻지는 말게."
"왜요.?"
양과의 물음에 주백통이 발을 굴렀다.
"이 사람아, 자네가 사람이 좋아서 충고하는 말이네만 난 자네가 소룡녀와 갈라섰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 축하를 했네. 그런데 여기 와서 재취를 하다니 어리석은 짓이야. 여자들이란 가
까이 할 게 못된다니까. 내 말 안들으면 자네 큰코 다칠거야."
실연의 아픔을 겪은 주백통은 사람만 만나면 장가들지 말라고 했다. 두서없이 지껄이는 그
의 말을 양과는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형님, 제자는요?"
양과가 물었다.
주백통은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한심했다. 양효비는 입에 재갈이 물린 채 그의 등에 묶여 있었다. 그에게 양효비를 보살펴
달라고 한 미랑의 부탁이 이 지경이 되다니? 미랑이 사람을 잘못 짚은 것이었다. 그러나 주
백통은 보란듯이 말했다.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네. 무겁기는 하지만 그 대신 안전하거든. 이만하면 미랑의 원귀가
찾아오지 않을거야."
"공자님, 저 사람은 누구죠?"
오군영이 물었다.
"과거 천하 제일이었던 전진교 중양진인(中陽眞人)의 사제 주백통이오."
오군영의 얼굴에는 놀라는 기색이 보였다. '주백통 같은 무림의 기인이 거와장에 다 나타나
다니?'
오군영은 주백통에게 사뿐히 절까지 했다.
"소녀 오군영이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선배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저 노완동이라고 하시오."
주백통은 좀 퉁명스럼게 말했다.
"선배님께선 여태 우리 거와장에 계셨나요?"
오군영의 물음에 주백통은 눈을 흘겼다.
"왜? 그러든 말든 상관할 게 뭐냐?"
오군영은 별 이상한 사람 다보겠네 하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그래도 할 말이 있었기에
웃는 얼굴을 보였다.
"선배님께선 소녀와 양공자님이 혼례식을 치르는 것을 다 보셨겠네요?"
그러자 주백통이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보지 않구. 내가 왜 못 봤겠어. 난 대들보 위에서 죄다 봤다구. 오자겸 부자가 내 아우에게
잘도 속고 있구나. 딸을 엉뚱한 사내에게 주면서도 기뻐하고 있구나 하면서 구경 한번 잘했
지. 난 웃음을 겨우 참았다구. 지금도 웃음이 나와. 생각만 해도 우스워 죽겠어. 킬킬킬."
주백통은 허리를 비틀며 웃어댔다.
"선배님께서는 모두 보셨군요."
오군영은 한숨을 지었다.
"물론, 물론 다 봤지. 방금 임자들이 방안에서 옥신각신하는 것도 다 봤지. 흐흐흐, 아주 재
미있대. 세상에 그렇게 재미있는 것 처음 봤어."
주백통은 또 킬킬거렸다.
그러자 오군영이 양과를 돌아보며 말했다.
"공자님, 주백통 선배님 말씀을 들었나요? 선배님은 공자님이 신조협인 줄도 알고 우리 둘
이 혼례를 올린 것도 알고 계세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신조협이 거와장에서 혼례를 올렸다
는 소문이 강호에 쭉 퍼질텐데 그럼 전, 전 어떡해요?"
오군영이 또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양과는 오군영이 왜 주백통에게 그렇게 캐어 물었는지 알게 되었다. 지모가 보통
이 아닌 아가씨구나! 양과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긴 오군영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아무
소리나 막 해대는 주백통이 아닌가? 주백통은 거와장에서 본 일을 강호에 금방 소문낼 게
틀림없었다.
"한심하군. 이젠 방법이 없게 됐군."
양과는 탄식했다.
그런데 앞쪽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고함을 쳤다.
"그 놈을 절대 놓치지 말아라!"
"모용공자로 가장한 놈을 반드시 붙잡아라!"
그 소리에 주백통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잘 돼간다. 여보게 아우. 삼십육계 줄행랑이 이럴 때는 제일이야. 아니면 내가 오랏줄로 묶
어 관가로 끌고 갈까? 양갓집 숫처녀를 속인 죄가 보통 죄인 줄 아나? 킬킬킬."
제6장 홧김에 선택한 남편
신랑 신부를 신방에 들여놓은 오자겸은 취현청으로 돌아와서 군웅들과 더불어 또 술을 마셨
다. 그러는 사이에 아가씨를 차지하지 못해 기분이 나쁜 사람들과 독물을 팔아 은자를 많이
챙겨 늦어지면 무슨 변고를 당할까봐 걱정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런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
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떠나버렸다. 그래도 취현청에는 아직 강호 호걸들이 칠팔십 명
정도 남아 있었다. 벽사신군, 소염라 부방, 촉산괴걸 능소 그리고 확도같은 이가 남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확도는 거와장 사위가 가짜 모용협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결말을 보
기 위해서 남아 있었고 독주여니는 기회를 봐서 확도를 해치우려고 남아 있었다.
이미 밤이 깊었다. 거와장은 불빛을 밝히고 하인들도 모두 술을 실컷 마시고 있었다. 떠들썩
한 분위기에 몇몇 아부하는 무리들이 오자겸 부자에게 자꾸 술을 권했다. 그들은 심기가 좋
아서 권하는대로 술을 마셨다.
그런데 장정 하나가 급히 들어오더니 오자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수군거렸다. 오자겸의 얼
굴색이 노랗게 변했다. 오자겸이 급히 뭐라고 명하려는데 어느새 젊은 공자 둘이 들어섰다.
둘은 모두 장삼에 옥띠를 둘렀는데 왼쪽에 있는 얼굴이 백옥같은 젊은이는 자주색 옷을 입
었고, 오른쪽의 창백하고 여윈 젊은이는 흰색 옷을 입고 있었다. 왼쪽 젊은이는 호방한 모습
에 생김새가 영준했다. 오른쪽 젊은이는 검집없는 녹슨 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둘은 모두
지쳤는지 이마엔 땀방울이 돋아 있었다.
오자겸이 일어나 오른쪽 젊은이에게 읍을 했다.
"탁장청 공자님,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오른쪽 젊은이가 바로 절정공자 탁운백의 둘째 아들 탁장청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는 절정검법을 제법 익히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만큼이나 성격이 쌀쌀했고 옷차림새도 비슷
했다. 허리엔 과거 절정공자 탁운백이 강호에 이름을 날릴때 쓰던 그 녹슨 검을 차고 있었
다.
"도중에 강도를 만나 싸우다 보니 이렇게 늦었소이다."
'탁장청'이란 이름에 군웅들은 조용해졌다.
"이 분은……."
오자겸은 왼쪽의 젊은이를 보며 물었다.
"이 사람은 내 친구 모용세가의 모용공자입니다."
탁장청이 그렇게 소개하자 그 젊은이도 오자겸에게 인사를 했다.
"모용협입니다."
방금 장정이 들어와 소곤거리며 보고한 일이 바로 이 일이었다. 탁장청과 자칭 모용협이라
는 젊은 공자 둘이 왔는데 가지고 온 청첩도 모용세가에 보낸 그 청첩이 틀림없다는 것이었
다. 뭔가 이상하게 되어간다고 생각했던 오자겸은 탁장청의 소개를 직접 듣고 나니 갑자기
앞이 캄캄해졌다. '탁장청은 모용협과 친한 사이다. 그러니 지금 온 사람이 바로 모용협이
틀림없었다. 그럼 딸애와 같이 지금 신방에 있는 모용협은…….'
오자겸은 애써 태연한 척 가장하고는 가까스로 웃으면서 말했다.
"난 늙어서 귀가 좀 멀었소. 공자 명호가 뭐라고 했던가요?"
사실 이 사람이 바로 모용협이었다.
오는 길에 그는 불의의 습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가 오른팔을 다치고 또 먼 길을 떠나는 기
회를 이용해서 전에 원수진 놈들이 무리지어 덤빈 것이었다. 그들과 악전고투를 하다보니
이렇게 늦게 도착했던 것이다. 친구 탁장청을 데리고 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큰 변을 당할 뻔했다.
모용협은 거와장에 와서도 곳곳에 높이 달려 있는 붉은 등을 보고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오자겸의 반문에 노인이 정말 귀가 먹어서 그러나 보다 싶어 다시 똑똑
히 대답했다.
"모용협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군웅들은 놀라 술렁거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이람? 모용협이 둘이라니? 신방에 있
는 모용협과 방금 온 모용협, 그 누가 진짜인가?'
"정말 모용세가 삼대 단전(單傳) 모용협 공자님이십니까?"
오자겸이 확신을 얻으려는 듯 또 물었다.
수양이 깊은 모용협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탁장청도 비틀거리는 오자겸을 부축하며 덧붙였다.
"모용공자는 제 친구입니다. 틀릴 리가 있겠습니까? 모용공자가 가짜라면 저도 가짜가 되겠
지요?"
우둔한 무이산 산사람이 먼저 그 영문을 깨달았다. 그는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이 집 따님은 가짜 모용협에게 속은 것이 분명합니다. 진짜 모용협은 미인을
얻지 못하고 가짜 모용협이 미인을 얻다니? 그거 재미있군. 하하하……."
모용협과 탁장청은 영문을 몰랐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내 모든 것을 깨달았다.
확도가 흐흐흐 하고 조소에 가까운 웃음을 웃었다.
"이 집 따님이 내게 시집 왔더라면 무궁한 부귀영화를 누렸을 건대 애석하군. 가엾어라. 사
기꾼에게 속아 추풍낙엽의 신세가 되었구나. 이젠 틀렸어. 이제 내게 만 냥을 주며 살겠다고
해도 난 싫어."
그러면서 또 큰소리로 웃었다. 그의 제자 넷도 덩달아 앙천대소했다.
"사부님께서는 왕자의 몸이신데, 어찌 거와장의 딸을 취하시겠습니까? 전 벌써부터 이해가
안 갔습니다."
장기가 이렇게 말하자 임맹도 거들었다.
"그렇고 말고, 사부님 배필이 되실 분은 마땅히 왕공 귀족의 장중보옥같은 공주라야 제격이
지."
그러자 연무와 진웅도 차례로 떠들어댔다.
"사부님께서 이 집 딸을 얻으면 난 사모님 소리를 절대 안 하겠다고 이미 결심했다네."
"오소저가 사기꾼에게 시집가는 바람에 우린 체통을 지키게 된거지 뭐. 이것을 전화위복이
라고 한다지."
정말 웃지도 울지도 못할 노릇이었다. 낮에는 그렇게 오소저를 데려가려고 난리를 치더니
이젠 뻔뻔스럽게 상스러운 말을 함부로 지껄이다니? 확도는 저런 제자들을 어떻게 데리고
다니는 걸까하고 뭇 영웅들은 내심 생각했다.
완안방방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인데 스승이 저러니 제자들도 마찬가지지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들 다섯을 싸잡아 속으로 욕하고 있었다.
벽사신군도 확도를 힐끔보며 조소했다.
"포도를 못 먹게 되니 포도가 시다는 건가? 그렇게 고명하신 분이 왜 사기꾼에게 패하셨
지?"
확도에게 혈도를 봉쇄당했던 그는 오군량이 혈도를 풀어주어 지금은 멀쩡했다. 그래서 지금
오자겸 부자 편을 들며 확도를 조소하고 있었다.
확도는 벽사신군에게 창피를 당하자 화가 났다.
"뱀같은 놈아, 또 대혈을 막혀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그러자 벽사신군은 쓰쓰쓰 하는 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낮에는 네놈에게 속아 방비를 못했지만 이젠 네놈 본성을 알아 나도 정신을 차렸다. 벽사
가 날 보호하고 있는데 네가 날 어쩔테냐?"
그리고 두 팔을 확 펼치자 숱한 뱀들이 옷 여기저기에서 머리를 내밀며 소름끼치게 혀를 날
름거렸다.
확도는 그 뱀들도 무서웠지만 완안방방이 기회를 봐서 자기를 공격할까봐 감히 벽사신군에
게 대들지는 못했다. 참을 수밖에 없었다.
"오장주님, 거와장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진짜 모용공자니 가짜 모용공자니 하는
말은 또 무슨 말입니까?"
탁장청이 물었다. 그도 오군영의 일이 잘못된 것이라고 추측은 했지만 입에 담지는 않았다.
뜻밖의 일을 당한 오자겸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탁장청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도 몰랐다.
그래도 오군량는 두뇌가 명석한 편이었다.
"탁공자님, 낮에 오른팔을 다친 한 사람이 와서 모용공자를 자칭하기에 저희들은 정말로 믿
고 누이동생을, 누이동생을 그 자와 결혼시켰지요. 지금 그들은 신방에 있습니다."
원래는 그가 양과를 모용협으로 오인해 벌어진 일이었지만 지금 사태가 엄중해지자 오군량
은 그것을 몽땅 양과에게 뒤집어씌웠다.
이 일이 자기 때문에 생긴 것을 아버지가 알면 노발대발하실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뭐라구요? 모용협이라고 자칭한 사람이 있었다구요?"
모용협이 물었다.
"예, 그 사람은 모용협이라고 자칭했을 뿐만 아니라 젊은 나이에 모습도 영준하고 의젓하기
에 저나 아버님은 물론 여기 있던 군웅까지도 그만 감쪽같이 속았습니다."
오군량의 말에 군웅들은 이맛살을 찡그렸다. '자기네 부자가 사람을 잘못 보고서는 왜 우리
들을 끌어들인담? 우리가 뭐 자기들같이 딸 팔아서 모용세가의 덕을 보려는 사람들인가?'
모용협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오군량은 한숨부터 쉬었다.
"누이동생과 같이 신방에 있다니까요."
모용협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진상이 이미 밝혀졌는데 왜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까? 어서 그 자를 붙잡아 내야지 이러다
가 아가씨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강호에 이름난 소년 협사 모용협답게 그는 침착하게 지시했다.
오자겸 부자는 그제서야 급히 장정들에게 명하여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목을 막게 하는 한
편 일부 장정들을 데리고 취현청 밖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다른 군웅들도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며 와! 하고 따라나섰다. 확도도 따라가면서 히죽 웃었다.
"신랑이 들어간 지 벌써 얼마인가? 이제 다 쑨 죽이 밥이 될까? 애석하도다. 꽃같고 옥 같
은 숫처녀가 그만 깜빡 속아 부랑배의 노리개가 되다니. 거와장도 한심하군. 이제 강호에 무
슨 낯으로 다닌담?"
이 말은 오자겸 부자에게는 불붙은 곳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그들은 오군영이 몸가짐을 조심해서 아직 사기꾼에게 당하지 않고 있기만을 바라고 달려갔
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희망 사항이었지 벌써 밥 한솥 다 지을 시간이 지났는데 그 사기꾼이
예쁜 색시를 앞에 두고 가만히 있을 리 있겠는가? 확도의 말대로 벌써 끝났는지도 모른다.
양과를 잡으러 오는 것을 본 주백통은 신나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양 문밖에 있는 고목나무
위로 훌쩍 날아올라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감췄다.
양과는 도망가버릴까 하다가 그만뒀다. 지금 달아나면 오군영의 입장이 더욱 곤란해지지 않
겠는가? 자기의 순결을 말하기가 더 어렵지 않겠는가? 그래서 양과는 오자겸 부자 앞에서
자기가 오군영에게 손댄 사실이 없다는 것을 떳떳하게 밝히고 떠나도 떠나겠다고 작심했다.
오군영은 또 자기 나름대로 양과를 걱정하고 있었다.
"빨리 떠나세요. 아버님이 오시면 큰일나요. 아버님은 화가 잔뜩 나셨을텐데……."
"난 떳떳한 사람이오. 아가씨께 누를 끼치는 일은 절대 안하겠소."
그러는 사이 오자겸 부자가 장정들을 거느리고 문앞에 당도하여 떠들썩했다.
"동생 어서 나와, 그 사내는 모용공자가 아니야, 사기꾼이야!"
오군량이 소리쳤다.
오군영은 양과를 뒤창문으로 밀었다.
"어서 빠져나가세요. 거와장에 결혼한 아내가 있다는 사실만 잊지 마세요. 전 그러면 더 바
랄 것이 없어요."
그리고 오군영은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되자 양과는 더더욱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나만 살겠다고 남의 집 규수의 절개와 명예에 누를 끼친다면 그게 어디 사내 대장부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한 양과는 정색하며 말했다.
"내가 한 일은 내가 감당할 것이오. 아가씨는 걱정하지 마시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누
를 끼칠 그런 사람은 아니오."
그리고 문을 열고 떳떳이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엔 등불이 대낮같이 밝았다. 오자겸 부자와 장정들은 각기 손에 병장기를 들고 험상궂
은 얼굴로 살기등등하게 서 있었다.
오자겸이 검 끝으로 양과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고얀 놈! 어서 우리 딸을 내놓아라!"
"이 놈 우리 누이동생을 망쳐놨지?"
오군량도 소리쳤다.
내심 자책감을 느끼고 있던 양과였으나 이런 광경을 접하자 도리어 의연해졌다.
"오소저는 아무 일 없소. 난 당당한 사내 대장부라 함부로 여인을 망칠 그런 사람이 아니
오."
"일남일녀가 예식까지 마치고 한방에 들었는데 가만 있었단 말이냐? 운우지정을 나눴어도
벌써 열번은 나눴을 것이다."
확도가 코웃음쳤다.
양과는 화가 나서 낯빛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그런 허튼소리는 집어치워. 내가 너같은 줄 아느냐? 사문을 배반한 의리없는 녀석! 너 같은
소인배는 군자의 신의를 모르는 법이다."
"군자? 그래 성인군자가 왜 남의 집 규수를 속여 한방에 든 거지?"
"내가 얼떨떨한 차에 잘못된 일이지 일부러 속인 것은 절대 아니다."
"아니, 네 입으로 스스로 모용협이라고 했잖아? 여기 군웅들이 다 들었다. 그래 놓고도 변명
이냐?"
"그렇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러자 오자겸이 소리쳤다.
"잔말말고 어서 딸을 내놓아라."
"아가씨는 방안에 있소. 마음놓고 들어가 보시오."
"군영아, 어디 있니? 방안에 있느냐?"
오자겸이 방안에 대고 소리쳤다.
조금 후에 오군영이 천천히 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오자겸은 반갑게 말했다.
"어서, 어서 이리 오너라."
오군영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듯이 물었다.
"아버지 오빠. 도대체 왜 그러세요?"
"군영아, 우린 저자에게 속았다. 저 자는 모용공자가 아니다."
오군량이 소리쳤다.
오군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저도 아는 일인데요."
사람들은 그 말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알고 있다고?"
오자겸이 다시 물었다.
"네, 그래요."
오군영은 살며시 웃기까지 했다. '저 애가 아마 저 녀석에게 당해서 머리가 잘못됐나 보다.'
오자겸은 그런 생각으로 급히 딸을 불렀다.
"얘야 얘야, 어서 이리로 오렴."
오군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버지. 오늘은 이 딸의 혼삿날인데 왜 그러세요? 이런 난사스러운 일이 어디 있어요? 다
들 돌아가세요. 어서요."
오군영이 왜 이럴까?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은 양과 뿐만 아니었다. 모두들 그랬다.
"얘야, 저 자는 모용공자가 아니다. 알겠느냐?"
오자겸이 또 말했다.
"알고 있다니까요. 이 분은 확실히 모용공자가 아녜요."
"그걸 알면서 넌 왜……."
오자겸은 도무지 이해가 안갔다.
"그건 저와 이 분이 사전에 꾸민 계책이에요. 이 분이 모용공자로 가장해 와야 저와 일을
성사시킬 수 있었거든요."
"그럼 너희들은 이미 아는 사이였단 말이냐?"
오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말 다했지 않은가? '오소저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내와 미리 밀약을 해놓고선 신랑
선택이란 연극을 벌였던 것이니까? 그런 것도 모르고 우린 각기 욕심을 부리며 서로 아웅다
웅 하다니? 이런 한심한 일이 있나?' 군웅들은 기가 막혔다.
"오소저가 지아비를 따로 놔두고 있는 것도 모르고 우리는 먼 곳에서 와서 헛고생만 한 거
구만.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겠어?"
확도가 그렇게 말하자 오자정의 얼굴이 시뺄개졌다.
"얘, 그게 정말 정말이냐?"
"네, 정말이에요. 이 분은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에요. 전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그랬어요."
오군영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확도를 손가락질했다.
"그런데 저 사람은 강호 영웅이라고 자처하면서 무례한 언사를 하네요. 전 일개 소녀에 불
과하지만 예의범절은 알고 있어요. 예의에 벗어나는 일은 해본 적이 없다구요. 제 몸은 아직
까지 빙청옥결(氷淸玉潔)해요. 그래 한 가지 물어보죠? 도대체 왜 사람을 함부로 욕하는 거
죠? 강호 영웅이라면 영웅답게 구세요. 다른 강호인들의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요."
오군영의 당찬 말에 군웅들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확도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오자겸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젠 낯이 서게 되는가 보다. 그는 딸에게 물었다.
"그럼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성은 양이고 이름은 과예요. 강호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신조협 양과를 모르세요?"
오군영의 말에 군웅들은 깜짝 놀랐다.
신조협이라면 모용협보다 더 유명한 협객이다. 종적도 없이 신출귀몰하게 다니는 그 신비성
만으로도 모용협의 명성을 훨씬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 신조협 양과란 말이지?"
오자겸이 물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양과도 어쩔 수 없었다.
"예, 사실 저는 양자입니다."
"아니오, 신조협은 외팔이라는데 저 자는 두 팔이 온전하잖소?"
오군량이 소리쳤다.
양과는 당장 가짜 팔을 뜯어 버렸다.
오자겸은 신뢰가 일기 시작했다.
신조협을 사위로 맞아도 좋은 일이지. 딸애의 마음에 들고 서로 좋아한다면 아예 그들 뜻대
로 성사시켜 줌이 마땅하지 않은가? 오자겸은 좋아서 웃었다.
"뜻밖이지만 잘된 일이다. 이 일도 무림에서는 한 토막 얘깃거리가 되겠구나. 하하하."
확도는 심술이 났다. '이 영감태기, 내가 좀 훼방을 놓아야지.' 확도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
다.
"나 확도는 신조협과 안면이 좀 있는 사람인데, 내가 아는 신조협은 남루한 옷에 허리에는
칠십 근짜리 현철중검을 차고 신조 독수리를 데리고 다니는데 그 기백이 대단하지요."
그리고는 말을 그쳤다. 그는 이 외팔이가 신조협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었던 것이다.
"확도 왕자의 말은 저 사람이 신조협이 아니라는 거요?"
오자겸이 물었다.
옳지, 이 영감이 또 내게 말려드는구나. 확도는 웃었다.
"내가 아는 신조협은 절대 저런 모습이 아니오. 저 사람은 분명 신조협이 아니오."
"너 확도와 나는 서로 원수지간, 서로 모를 리가 없는데 왜 지금 모르는 척하는 거냐? 그러
고서도 사내 대장부라고 할 수 있는거냐?"
양과가 화를 내며 확도를 꾸짖었다.
"신조협이라고 하면서 왜 신조 독수리가 없는 거요?"
확도의 그 말에 뭇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정말 신조 독수리가 없네. 신조협 양과는 신조 독수리로 유명한데, 저 자는 신조 독수리가
없잖아."
군웅들 거의 모두는 양과를 또 가짜 신조협으로 생각했다.
오자점도 의심이 생겼다. 그는 딸을 한쪽으로 당겨서 소곤거렸다.
"얘야, 저 사람이 신조협이라는 것을 확인할 방법이 있느냐?"
"글쎄요. 저 사람이 양과라고 하니 양과인 줄 알았죠 뭐. 그러나 예의는 아는 분예요. 절대
악한은 아녜요."
오군영도 확도의 말에 의심이 생겼던 것이다.
"음……."
오자겸은 머리를 주억거렸다. 한 가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신조협은 절세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어디 봅시다. 나하고 세합만 겨뤄 봅시다.
그래서 날 이기면 믿겠소."
오자겸은 양과에게 소리높여 말했다. '정말 신조협이라면 나같은 사람은 세합이 아니라 단
일합에도 이기겠지만 가짜라면 세합을 못넘기고 내게 죽음을 당할 것이다. 만일 이 자가 비
록 신조협은 아니지만 무공이 대단해서 나를 이긴다면 어떡할까? 그럼 사위로 삼으면 되지
뭐. 거와장에 붙들어 두고 부려먹으면 손해가 없으렷다.' 오자겸은 그렇게 계산하고 공격 자
세를 취했다.
그런데 확도가 소리쳤다.
"오장주 조심하시오. 저 자는 아까 모용공자라고 자칭하고 지금은 또 신조협이라고 하니 보
통 못되먹은 놈이 아니오. 잘못하다가는 되레 당할 것이오."
그 말에 오자겸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는 칠성의 공력을 모았던 것을 아예 사람 하나 잡
을 작정을 하고 십성의 공력을 모아 혼신의 힘을 냈다.
오자겸이 살기등등하게 덤벼드는 것을 보고 양과는 확도를 욕했다.
오자겸의 신법은 조용했지만 눈에는 날카로운 빛이 감돌았다. 그의 무공은 아들을 훨씬 능
가하는 것이었다. 채설주 독으로 무공이 태반이나 줄어든 양과는 오군량 정도는 문제없었지
만 오자겸은 무리일 성 싶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확도와 독주여니도 양과의 무공이 줄었음을 알고 그냥 두려 하지 않을 것
이다. 양과는 그것이 걱정되었다.
양과는 뒤로 몸을 움츠리며 오자겸의 장풍을 피했다. 대단한 위력이었다. 스치는 장풍에 뺨
이 다 얼얼했던 것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제 일격이 성공 못하면 다시 힘을 모아 제 이격을
날리는 법이다. 그러면 그 사이 상대방은 숨돌릴 틈이 있게 된다. 그러나 오자겸은 그렇지
않았다. 오자겸의 제 일격은 실제적인 공격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허수였다. 그는 제 일격을
가하자마자 양과의 단전에 발길을 날렸다. 이 발길이 오자겸의 주공격이었다. 군웅들은 놀라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양과는 오군량의 괴이한 검법을 보았을 때 이미 거와장의 무공이 보통 중원의 무공
과 다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주의하는 한편 완전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즉각 뒤로 번개같이 물러나면서 오자겸의 발길을 피했다.
오자겸의 무공은 어쩐지 거와장으로 오는 길에서 본 무채접의 무공과 비숫했다. 그러나 사
정이 급한 때라 양과는 그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좋소. 그럼 두 번째 공격을 받아 보시오."
자기의 공격을 피하는 것을 본 오자겸이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 도리어 양과가 공격 자세를 취하면서 소리쳤다.
"난 이미 오장주의 허점을 간파했소."
그 바람에 오자겸은 흠칫했다. 내가 아직 출수도 안했는데 허점을 간파했다니? 그 사이 양
과가 공중제비를 넘어 한 장 밖으로 날아갔다.
"죄송하지만 난 가겠소."
그제서야 오자겸은 양과가 달아나려고 한 수작임을 알아차렸다.
"가긴 어딜 가? 게 섰거라!"
오자겸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오장주, 나중에 또 봅시다."
양과는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날렸다. 그는 단번에 또 서너장 거리를 날아갔다. 대단한 경
공이었다. 고묘파 경공을 처음 본 군웅들은 입이 딱 벌어졌다.
그때 신방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던 거와장 장정들은 양과가 달아나자 그를 막으려 했다. 양
과는 또 훌쩍 몸을 솟구치며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장정들이 급히 검을 올려 질렀으
나 허공만 찌를 뿐이었다. 양과는 이미 멀리 가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양과 앞에 나타나 깔깔대며 웃었다.
"신조협, 예쁜 색시가 기다리고 있는데 신방에 들지 않고 가기는 어딜 갑니까?"
독주여니 완안방방이었다.
군웅들과 함께 있던 그녀는 양과가 달아나려고 하자 대뜸 양과를 막고 나섰다. 양과 때문에
육가장 일을 망쳤다고 생각한 완안방방은 오늘 거와장 사람들의 손을 빌려서라도 양과를 없
애버리려고 작정했다.
양과는 지금 자기가 완안방방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를
해치우고 달아날 엄두도 못냈다. 다급해진 그는 웃으며 빈정거렸다.
"아직도 채설주를 가지고 있소? 왜 내놓지 않는 거요?"
그 말에 완안방방은 의심이 생겼다. '육가장에서 양과가 분명히 채설주에게
물렸는데 죽기
는 커녕 얼굴빛도 변하지 않다니? 그가 무슨 특이한 해독법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이번
에 가지고 온 채설주가 얼마 안되니 마구 쓰지는 말아야겠군.'
그때 오자겸 부자와 장정들이 달려와 양과를 다시 에워쌌다.
"달아나긴 어딜 달아나려 하느냐?"
오군량이 검으로 내찔렀다.
양과는 얼른 피하며 슬쩍 오군량의 검을 빼앗았다. 그 초식이 주백통보다는 못했지만 그래
도 상당한 수준이라 뭇사람들은 눈을 크게 떴다. 확도나 완안방방 같은 무림 고수들도 자기
능력밖의 것이라고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이 초식은 소룡녀가 가르쳐 준 천라지망세(天羅
地網勢)를 변형시킨 것이었다. 과거 소룡녀에게 그 초식을 배울 때 참새 81마리를 풀어놓고
연습했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두 손으로 연이어 내치는 장풍이 천갈래 만갈래로 엇갈려 81
마리 참새가 아무리 빠져나가려 해도 그럴 수 없는 포위망을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은 고묘
파의 기초 무공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무공이 줄어든 지금에도 그때보다 몇 배 높은
수준을 보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양과는 오군량에게 검을 돌려주면서 말했다.
"죄송하오만 내가 이러지 않으면 양과라는 사실을 믿지 않을 것 아니오?"
오군량은 얼굴이 빨개졌다. 상대방이 자기와 나이도 비슷한데 일합에 검을 뺏겼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오군량은 부끄럽기도 했지만 화도 났다.
"흥, 나를 깔보지 마라."
오군량은 다시 검을 내찔렀다. 양과의 단전을 노리는 것같던 검 끝이 어느새 양과의 오른쪽
귀밑을 향했다. 바로 아까 주백통과 싸울 때 쓰던 초식이었다. 무공이 줄어들기는 했어도 오
군량보다는 눈도 빠르고 손도 빠른 양과였다.
양과는 허점을 간파하고 그대로 서 있다가 불시에 손을 내밀었다. 양과의 손은 바람을 일으
키는 검날을 피하며 번개같이 오군량의 검자루를 붙잡았다.
오군량은 또 양과에게 검을 뺏겼던 것이다. 오군량은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 이런 망신을 당
하다니? 하루 동안 두 사람에게 두번이나 이런 망신을 당하다니? 십수년 간 갈고 닦은 결
과가 이 모양이란 말인가? 오군량은 맥이 탁 풀렸다.
"이젠 다시는 검을 잡지 않겠다."
양과가 검을 돌려주며 말했다.
"소장주,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소장주의 검술은 날카롭고도 기묘해서 장차 무림에 이름을
떨칠 것이오. 그런데 한번 패했다고 그렇게 낙담해서야 되겠소? 난 지금까지 몇 번이나 패
했는지도 모르오. 그게 어찌 한두번이겠소? 그때 내가 소장주처럼 생각 했더라면 아마도 오
늘날의 이 양과는 없었을 것이오."
"검을 빼앗고도 나를 죽이지 않은 그 은혜 잊지 않겠소."
양과의 진정어린 충고에 오군량은 이렇게 말하고 물러섰다. 자기 아들을 양과가 죽이지 않
는 것을 보고 오자겸은 생각을 바꿨다.
'저 자가 비록 우리를 속여 이 소동을 일으켰지만 군영에게 무례한 짓을 안했다고 하고 군
량도 죽이지 않았으니 나도 사정을 좀 봐줘야겠다.' 오자겸은 양과를 그대로 놔주기로 작정
했다.
그런데 그때 모용협이 앞으로 나서며 양과에게 읍을 했다.
"무공만 봐도 대단한 분이신데 하필이면 왜 이 모용협으로 가장하여 남을 속이셨습니까?"
양과가 바라보니 자주색 옷을 입은 영준한 젊은이가 앞에 서 있는데 그 기상이 늠름했다.
"그대는 누구시오?"
"이 분이 바로 모용협 공자시오."
탁장청이 말했다.
그제서야 양과는 왜 뭇사람들이 사건의 본말을 알게 되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사정이 어떻
든 그런 일은 협객이 할 일이 아니었다. 양과는 얼굴이 붉어지며 순간 말문이 막혔다.
모용협이 빙그레 웃었다.
"귀하께선 이 모용협으로 가장하셨지만 재물도 여인도 가지려 하지 않으신 걸 보면 필시 무
슨 곡절이 있을 듯한데……."
소인배라면 이런 경우 양과에게 상스러운 소리부터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용협은 그렇
지 않았다. 도리어 양과를 두둔해 주는 입장에서 말했던 것이다. 군웅들은 모용협의 넓은 도
량에 내심 감탄했다.
모용협이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제 명성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대로 내 이름을 빌려 남을 기만하
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허락한다면 모용세가의 명예가 남의 손에 더럽혀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빈틈없는 말이었다. 군웅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만한 양과의 천성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모용공자께선 이 양과를 어쩌겠다는 거요?"
"어쩌긴 뭘 어째? 무릎 늙고 잘못했다고 빌어야지. 군웅들이 보는 앞에서 싹싹 빌란 말이
야."
확도가 소리쳤다.
완안방방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녀도 모용공자의 손을 빌려 양과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모용세가의 명예를 더럽힌 대죄를 지었는데 무릎 꿇고 사죄만 해서야 되나요? 그러다가 모
용세가는 모두 호색한이라는 오명이 강호에 퍼지면 어쩌겠어요?"
모용협은 완안방방과 확도를 흘낏 보았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일남일녀였다. 허나 별로 좋은 사람들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들의 말은 모용협의 마음에 들었다.
"그러긴 하지만 협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무릎 꿇고 사죄하는 것은 그만둡시다. 그 대신 무
예를 겨뤄보는 것이 어떻겠소? 그래야 나도 귀하가 어디서 뭣하는 분인지 알고 나중에 강호
의 친구들을 만나도 할 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양과도 모용협의 무공에 관해 들은 바가 있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모용세가의 무학을 전수
받은 그는 나이는 연소하지만 무공은 일류급으로 당금 개방 방주 야율제도 능가한다는 것이
었다. 양과는 무공이 줄어든 지금이 아니라면 그래도 승산이 있었지만 무공이 태반이나 줄
어든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오군량 같은 이는 대수롭지 않았지만 모용협 같은 고수에게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물러설 양과가 아니었다.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그 성격 때문에 누차 고생을 했지만
그러면서도 그 성격을 고치지 못하는 양과였다. 그는 거만하게 말했다.
"모용공자의 넓은 도량에 감탄했소이다. 무공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목을 내놓으라고 해도
달갑게 받아들일 양과올시다. 정 그러시다면 겨루어 봅시다."
과연 영웅답군. 모용협도 내심 이렇게 찬탄하면서 허리에 두른 끈을 조이며 발에 힘을 주었
다. 그리고 발도 움직이지 않은 듯했는데 어느새 양과 앞에 다가섰다. 모용세가는 경공과 암
기로 천하에 유명했다. 탁장청이 박수를 쳤다.
"죄송합니다."
모용협이 빙그레 웃더니 오른손으로 양과를 향해 천천히 장풍을 날렸다. 언뜻 보기엔 아무
런 힘도 실려 있지 않은 듯했다.
관대한 모용협이 양보하는 건가? 군웅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양과만은 이 장풍 뒤에 흉맹한 다른 장풍이 따를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극히 피하
기 어려운 예리한 장풍이 뒤따를 것이다. 동해에서 열심히 수련한 결과 무공이 천하 일류급
이 된 양과는 천하의 모든 무예의 기법과 비결을 거의 다 알고 있다시피 했다. 그러기에 모
용협이 손을 쓰자 즉각 그 오묘함을 간파했던 것이다.
양과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동사 황약사에게 배운 탄지신공(彈指神功)을 썼다. 왼손 엄지손
가락으로 식지를 눌렀다가 모용협의 장심(掌心)을 겨누고 식지를 탁하고 튕겼다.
양과가 그러지 않고 피했다면 모용협은 즉시 두번째 장풍을 날렸을 것이고 양과가 숨돌릴
틈도 없이 연거푸 장풍을 계속 날렸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양과로서는 다섯합을 넘기지
못하고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양과는 피하지 않고 도리어 탄지신공으로 모용협의
장심을 노렸던 것이다. 그 바람에 모용협은 두번째 장풍을 날리지 못하고 도리어 양과를 막
아야 했다.
모용협은 장풍을 날렸던 손을 얼른 거둬들이면서 다른 한손은 허리에 갖다붙여 양과의 공격
을 막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양과는 공격을 멈췄다.
모용협은 알 수 없었다. '지금 공격하면 내가 당할 수도 있는데, 왜 저러는 걸까? 그래, 이
좋은 기회를 모르는 모양이군. 게다가 내 무공이 두려워 감히 모험을 못하는 거구나.'
사실 양과가 그 절호의 기회를 모를 리 없었다. 양과는 다만 무공이 줄어든 지금 공격을 계
속했다가 결과가 불리해질까봐 그만둔 것이었다. 단병상접(短兵相接)의 형세가 되면 모용협
에게 자기의 처지를 간파당하기 쉬웠다.
모용협은 또 장풍을 날렸다. 칠성공력을 사용한 장풍이었다. 구경하는 사람들 귀에까지 쌩하
는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모용협의 세찬 장풍에 군웅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자겸의 옆에 서 있던 오군영은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조심하세요!"
오군영이 부르짖었다.
오자겸은 딸에게 눈을 흘겼다.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바보 같은 계집애 같으니라구.'
모용협이 세찬 공격을 감행하자 양과는 다급해졌다. 무공이 태반이나 줄어든 지금 양과는
본격적인 싸움이 두려웠던 것이다. 바로 자기의 줄어든 무공이 들통나기 때문이었다.
모용협도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장력이 맹렬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아직
까지는 탐색적인 성질이 강했다. 양과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모용협의 초식 중에 약
점을 간파하고 기다렸다가 모용협의 장풍을 옆으로 살짝 피하면서 그의 옆구리를 슬쩍 후려
쳤다.
'이 자가 어떻게 내 약점을 이리도 빨리 간파했담!' 모용협은 놀라면서 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양과는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모용협은 놀라 가슴이 뛰었다.
'내가 쓴 운하횡공(雲霞橫空)이란 초식은 몇 대를 내려오면서 다듬어진 초식이라 오로지 옆
구리에 약간 약점이 있을 뿐이다. 그것도 잠깐뿐이다. 그런데 저 자는 단번에 그 약점을 간
파했으니 보통 인물이 아니다.' 모용협은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양과를 바라보았다.
실은 어떠한 초식도 아무리 교묘하다 할지라도 다 나름대로의 약점이 있게 마련이다. 인무
완인 금무족적(人無完人 金無足赤)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다른 게 있다면 무림 고수들은
그 약점을 교묘하게 가리고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간파하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그러
기에 흑호도심(黑虎淘心) 같은 간단한 초식도 평범한 사람들이 쓰면 약점이 많이 나타나지
만 고수들의 경우에는 약점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고수가 고수인 것은 바로 이런 이
유 때문이다. 마치 글을 씀에 있어 보통 선비들이 쓰면 그저 그렇지만 대유(大懦)들이 쓰면
세인을 놀라게 하는 것이나 같다고 할까? 고수들의 무예 겨루기는 상대방의 급소를 건드려
보는 것으로 그만둔다. 그러기에 양과가 멈춘 것이었다.
모용협은 비록 양과와 결판을 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 한번으로 양과의 무공이 자기보다 결
코 못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도 더 해볼 생각이 없어졌다.
"대단한 무공이십니다. 탄복하지 않을 수 없군요."
모용협이 웃으며 말했다.
양과가 바라던 바였다. 그는 모용협이 계속 싸우려 들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양과가 얼른 대
답했다.
"부끄럽습니다. 모용공자님의 무공이야말로 천하 명문의 무공입니다. 진심으로 탄복했습니
다."
"그대가 신조협이신 것은 틀림없겠지요?"
모용협이 물었다.
"예, 그렇소이다."
양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신조 독수리는……."
"제가 고향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그러자 오자겸은 또 양과를 사위로 삼을 생각이 들었다.
"이젠 모든 것이 밝혀졌군요. 모두들 계속해서 잔칫술을 마십시다."
그리고 오자겸은 양과 옆으로 와서 웃으며 말했다.
"여보게 사위! 이제 들어가 쉬게나."
양과가 오군영을 돌아다보니 애정어린 눈길로 양과를 바라보고 있었다.
양과는 이러다간 오해가 더욱 깊어지리라고 생각했다.
"전 집에 처가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일은 순전히 오해로 생긴 일입니다."
그러나 오자겸은 양과가 거와장을 업신여기고 하는 소리로 생각하고 화를 냈다.
"뭐 아내가 있다구? 그런데 왜 우리 딸애와 혼례식을 했나? 이게 아이들 장난인 줄 아는
가?"
그때 누군가 머리 위쪽에서 너털웃음을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양효비를 등에 업은 노완동
주백통이 날아내려오며 오자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여보시오 오장주, 당신은 속았다니까. 여기 있는 여러 사람도 속고."
오자겸은 주백통을 보고 질색했다.
"속긴 어떻게 속았다는 말입니까?"
"저 양과는 말이외다. 자기 아내 소룡녀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외다. 소룡녀와 어릴 때
부터 함께 자랐죠, 이걸 뭐라고 하는지 아시우? 청매죽마(靑梅竹馬)! 그런 사이인데 또 다른
여자를 얻겠소? 게다가 소룡녀는 천하절색이지요. 바로 하늘의 선녀외다. 그런데 양과가 어
떻게 당신네 못난 딸애를 처로 맞으려 하겠소?"
사실 오군영의 미모가 소룡녀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미인은 미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강
호의 이 많은 호걸들이 구혼하러 왔겠는가? 주백통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순전히 실없는 농
담이었다.
"양공자님, 그게 정말이오?"
오자겸은 그 말을 진짜로 생각했던지 양과에게 물었다.
양과는 더 이상 머무르다가는 커다란 후환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 그렇습니다. 난 재취할 수가 없습니다. 난……."
오자겸이 또 발끈했다.
"뭐라고? 이 사람이? 신조협이고 나발이고 사람을 이렇게 무시하는 법이 어디 있나? 네가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 한들 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여봐라, 어서 저자를 포박하라!"
그러자 여러 장정들이 달려들었다.
"잠깐!"
오군영이 소리쳐 장정들을 세웠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양과를 쳐다보았다.
"우린 이미 천지신명께 절하고 혼례를 마친 사이 아녜요? 그런데 그런데도 저를 버리시겠다
는 말씀인가요?"
양과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떨구며 한숨 지었다.
"난, 난 재취를 할 수 없어요. 아가씨 이해해 주시오. 죄송……."
"공자님……."
오군영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오자겸은 노하여 딸을 꾸짖었다.
"이 바보 같은 년아, 싫다는데도 징징거려?"
그때 확도가 접선으로 부채질하며 빈정거렸다.
"저 자는 본성이 원래 그런 자요. 오소저는 지금도 저 자의 본질을 모르겠소? 저 자에게 당
하고 버림받은 여자가 부지기수인데 아가씨가 오늘 당한 일은 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
오.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오소저같이 미모와 재주를 겸비한 여자라면 한두 번 당한 몸이라
도 시집은 갈 수 있을 것이오?"
그 소리에 오가네 집 세 사람은 모두 얼굴아 빨개졌다.
"허튼소리 말아요. 난 빙청옥결(氷淸玉潔)한 몸이에요. 누구를 모욕하려고 그래요?"
오군영이 내쏘았다.
"입 못 다물겠니? 네 말을 누가 믿으려 하겠니? 이 애비는 네가 시집 못 갈까봐 걱정이다."
오자겸이 딸을 꾸짖었다. 아무리 화가 났다 해도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
오군영은 눈물을 글썽이며 발을 굴렀다.
"못믿겠으면 그만두세요. 그렇지만 제 말을 믿는 사람이 꼭 있을 거예요."
오군영은 군웅들을 둘러보았다.
"어느 호걸이 제 말을 믿어 주시겠어요? 저 오군영의 몸이 아직 빙청옥결함을 믿어주시는
분이 계시면 당장 그 분에게 시집가겠어요. 거짓말이 아녜요. 진짜라니까요."
그러나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양과와 그녀 단 둘이서 신방에 있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절반이었고, 오군영이 화가 나서 뱉은 말이니 곧 번복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절반이었다.
한동안 기다려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오군영은 얼굴을 감싸쥐며 흐느꼈다.
"사람들이 다 왜 이래요? 도대체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는 거죠? 정말…… 정말, 내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그녀는 목이 메어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오자겸 부자는 한쪽에서 한숨을 지었다. 양과는 속이 켕겼다. 그래서 다가가 오군영을 달래
주려고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때 주백통의 뇌리를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급히 양효비의 입을 막고 있던 헝
겊뭉치를 꺼냈다.
"얘, 장가들고 싶지 않니?"
주백통의 등에 묶여 고통이 말이 아닌 양효비는 사부님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었고 또 오군
영이 절색이라 급히 소리쳤다.
"난 장가가고 싶어요. 저 아가씨에게 장가가고 싶어요."
오랫동안 막혔던 입이 불시에 터지니 그 목소리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장정들도 분명히 들
을 수 있을 정도였다. 주백통은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꾸짖었다.
"악은 왜 써? 귀청 떨어지겠다."
그들 사제간이 피우는 소란에 군웅들은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가뜩이나 어지러운데
별 미친놈들이 와서 떠드는구나 할 뿐이었다.
그러나 괄괄한 성격에 약이 바짝 오른 오군영은 양과를 노려보았다.
"난 일개 아녀자에 불과하지만 누구처럼 신의없이 요랬다 저랬다 하진 않아. 난 말했으면
한대로 해!"
양과는 자책감에 머리를 숙였다.
양과가 생각을 돌리지 않는 것을 본 오군영은 입을 앙다물었다.
"이제부터 난…… 난……."
양효비의 이름을 모르는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난 저 사람의 아내예요. 욕을 먹어도 매를 맞아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어딜 가도
전 따라 다닐거예요."
그러자 주백통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괜찮았어. 멋져! 노환동의 제자가 강호에 나 오자마자 미인을 얻는다. 핫하하."
오군영은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선배님, 저 제자분의 존성대명은?"
"선배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내가 늙었는지 알아? 안 늙었다니까. 그저 노완동이라고 불
러요. 그리고 이 자식은 뭐 존성대명이라고 할 것도 없지 뭐. 양효비야. 양효비라고 불러. 흐
흐흐, 이제부터 부부끼리 서로 의지해서 아들딸 낳고 잘 사시오. 흐흐흐."
오군영이 생면부지의 사내에게 선뜻 몸을 맡길 줄 몰랐던 군웅들은 오군영의 행동에 무척
놀랐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오군영이 주백통의 제자에게 시집가는 거나 모용세가에 시집
가는 거나 무림 명문에 시집가는 것은 매 한가지라고 생각했다.
오자겸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웃음을 띠며 주백통에게 읍을 했다.
"주백통 선배님께서 기꺼이 우리 거와장과 사돈을 맺겠다고 하시니 정말 영광입니다."
'허허, 이 두상이 내 계교를 알 리가 없지?' 주백통은 내심 오자겸을 비웃으면서도 겉으로
는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이다. 고마워요."
양효비는 장가드는 일보다 우선 주백통의 등에서 풀려나는 일이 더급했다.
"사부님, 어서 이걸 풀어줘야 오소저와 혼례식을 하지요. 이렇게 묶여서는……."
주백통은 오냐하며 양효비를 묶었던 끈을 풀었다.
"이제부턴 여기 거와장의 사위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살아라. 알았지?"
양효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쥐가 오르는듯 수족을 꼼지락거리고 나선 우선 양과에게
가 고개를 숙이고 절을 했다.
"두번이나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대협객님께서 무슨 일을 시키셔도 어김없
이 따르겠습니다."
취현청에서 양과가 양효비를 구해준 일이나 육가장 일을 모르고 있던 군웅들은 의아하게 여
겼다.
"그런 일을 가지고 뭘 그러나."
양과는 담담히 말했다.
양과는 양효비에게는 호감이 없었다. 그러나 양효비가 이제 오군영의 남편이 된 이상 그를
도와주어야 했다. 그래야 오군영에게 미안하지 않게 된다. 양과는 어떻게 해서라도 양효비를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작심했다.
양효비는 오자겸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
"장인 어르신, 사위 양효비 인사드립니다. 절 받으십시오."
양효비가 인물이 의젓한데다가 예절까지 바른 것을 본 오자겸은 기뻐하며 그를 부축해 일으
켜 세웠다.
"됐네. 그만하고 일어나게."
주백통이 양효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젠 예쁜 색시하고 장인 모시고 여기 있어라. 난 가볼 곳이 있다."
주백통의 계교란 바로 이것이었다. 여색으로 양효비를 홀려 거와장에 남계 하고 자기는 슬
쩍 빠져나가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닐 생각이었던 것이다.
총명한 양효비는 그 동안 주백통의 성격을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기에 역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사부님. 그러시면 큰일나요."
"큰일 나다니?"
양효비는 아주 신비스럽게 속삭였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이미 귀신이 되어 우리를 따라다니고 계세요. 만약 사부님이 저를 버리
고 떠나신다면 우리 어머님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제게 가장 좋은 무예를 가르쳐주지 않
았다고 사부님을 책망할 거예요."
그 말에 주백통은 두려운 기색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람들만 보일 뿐 귀신은 보이지 않
았다.
'요 녀석이 날 속이려고?'
"네 에미 어디 있냐? 어째서 내겐 보이지 않는 거지?"
"참, 사부님도. 인간 세상과 귀신 세상은 따로 있잖아요. 귀신은 사람을 볼 수 있지만 사람
은 귀신을 볼 수 없죠. 방금 사부님 등에서 깜빡 잠이들어 꿈을 꾸었는데 어머니께서 나타
나셔서 제가 무림의 일류 고수가 못되기만 하면 우리 사제들을 몽땅 목졸라 죽여버리겠다고
하셨어요."
주백통은 당장 목이 조여오는 것처럼 겁이 났다.
"그, 그러면 어쩌지?"
"그러니까 사부님도 여기 남으셔서 제자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시고 편안히 말년을 보내셔
야……."
"아니, 그건 안될 소리! 이 좁은 동네에서 난 갑갑해 죽을거야."
주백통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들 사제지간의 말을 엿듣기 위해 군웅들은 귀를 곤두세웠으나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오자겸이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 취현청으로 가셔서 말씀하십시다. 우리 딸애와 영고족(令高足 : 상대방의 제자를
높이 부르는 말)의 혼례식은 오늘 밤에 할 수 없으니 길일을 따로 택해 성대하게 치르기로
하십시다. 각처 영웅들을 모셔오고, 청실홍실 드리우고, 어떻습니까? 선배님."
"안돼, 그건 안돼. 이 노완동의 제자가 어떤 신분이라구. 구처기나 마옥같은 사람들도 저 애
를 사제라고 불러야 하는 판에 여기에 있다니……."
"그럼 선배님의 의사는?"
오자겸은 어정쩡해져서 물었다.
"이번 혼사는 파혼이야 파혼! 이 노완동은 제자를 데리고 가겠소."
그리고 주백통은 당장 양효비를 끌고가려 했다. 양효비는 오군영같은 미인에게 장가들고도
싶었지만 그보다도 주백통을 따라 다니며 무공을 배우고 싶은 심정이 더 간절했다. 그래서
군소리 없이 주백통을 따라 나섰다.
"아니, 이건…… 이건……."
오자겸은 그러면서도 감히 막지는 못했다.
그런데 오군영이 주백통과 양호비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말 가시려구요?"
주백통이 눈을 부라렸다.
"그래, 정말 막을 셈이냐?"
오군영은 눈물을 글썽이며 양효비를 바라보았다.
"양…… 양효비 공자님. 저하고 결혼하시겠다더니 그새 변하셨나요?"
"그 그런게 아니오. 아가씨 같은 미인을 아내로 삼으면 얼마나 좋겠소만 우리 사부님이, 우
리 사부님이 왜 그러시는지……."
양효비는 시원스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때 양과가 다가왔다.
"형님, 선배 분으로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일구이언도 분수가 있지?"
"여보게, 그런 소리 말어. 이 노완동은 말한대로 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왜 이러십니까? 제자 혼사를 형님 입으로 대답해놓고 이렇게 파혼이라고 하시다니
말이 됩니까?"
주백통은 말문이 막혀 두 눈만 끔뻑거렸다.
"형님께서 양효비와 오소저의 혼사를 응낙한 일은 내가 증인이오. 알겠어요?"
주백통은 또 눈을 끔뻑거렸다.
"자네가 옳은 말만 하니 난 더 할 말이 없네."
"그래도 가시겠습니까?"
양과가 물었다.
"가야지. 그래도 가야지. 난 이런 데는 답답해서 못 있어."
양과는 그제서야 노완동이 거와장에 매여 있기 싫어서 그런다는 것을 알았다. 난감한 일이
었다.
그러자 양효비가 오군영에게 말했다.
"봤지요? 우리 사부님이 여기 있기 싫어하신단 말예요. 그리고 난 할 수 없이 사부님을 따
라가야 하고요. 그렇지 않으면 색을 탐해서 스승을 배반했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휴∼ 아
가씨와 같이 있지 못하는 것이 평생의 한이 되련만은 내가 어쩌겠어요?"
"그럼 다른 묘책이라도 없을까요?"
오군영은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양효비는 문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빙긋 웃었다.
"아가씨가 거와장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나와 같이 강호로 나설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 천
금같은 옥체로 어떻게 강호의 풍상고초를 견뎌낼지요? 아버님과 오빠도 허락하지 않으실 것
이오."
얼핏 들으면 오군영을 염려하는 말인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오군영을 떨쳐버리려는 말
이었다. 이 말에 오군영이 따라 나서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군영 탓이니까 자기를 원망할 수
는 없으리라.
그러자 주백통은 양효비를 끌고 그 자리를 떴다. 어깨에 힘을 주고 오자겸 부자와 군웅들
앞을 무인지경처럼 걸어나갔다.
이에 크게 분개한 사람은 모용협이었다. 그는 소리없이 날아가 주백통과 양효비의 앞을 가
로막았다.
"이게 누군데 감히 노완동의 앞을 가로막지?"
주백통이 눈을 부라렸다.
양효비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모용세가의 모용공자님입니다. 무공이 대단하죠."
"내가 모용공자인 줄 몰라서 그러나? 남들이 다 아는데 내가 왜 몰라? 모용세가? 모용세가
면 어때. 내 눈에 개 밥그릇으로밖엔 안보여."
주백통이 떠들어댔다.
"사부님 언성을 낮추세요. 다 듣겠어요."
그러자 주백통은 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들으려면 들으라지. 제깟 녀석이 아무려면 도화도 황약사보다 강할까?"
주백통이 항상 덜렁대며 매사에 실없는 짓을 잘 한다는 말을 들어온 모용협은 모용세가를
모독하는 말을 듣고서도 화내지 않았다.
"우리 모용세가는 강호 벗들의 도움으로 자그마한 이름을 갖게 되었으니 그리 대단한 가문
은 아닙니다만 주백통 선배님께서 유약한 한 여인의 명예를 장난으로 여기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안갑니다."
그러자 주백통은 오히려 히죽하고 웃었다.
"그렇다면 어쩌겠다는 건가? 날 치겠다구? 그럼 쳐봐. 어디 쳐보란 말이야."
정말 아이들이 노는 것 같았다.
"후배가 어떻게 감히 선배님에게 손을 대겠습니까?"
모용협의 말은 여전히 점잖았다.
"괜찮아, 치라구. 못 치겠어? 그럼 내가 맞으러 가지."
주백통은 양효비를 남겨두고 모용협에게 다가갔다. 또 한번 재미있게 놀아볼 심산이었다.
모용협이 비키지 않으면 서로 마주칠 참이었다.
모용협은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너무 겁주지 마시오."
"겁준다구? 그래 겁준다 어쩔래?"
주백통은 마치 소처럼 모용협을 떠받으려고 했다.
이번엔 모용협은 피하지도 공격하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주백통과 부딪쳤다.
주백통이 당세 정상급 고수임을 알고 있는 모용협은 떠밀려 넘어질까봐 전력을 다해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마치 허공을 떠미는 것 같았다. 그는 그만 자기 힘에 앞
으로 엎어져 버렸다.
주백통이 또 장난을 친 것이었다. 상대방과 맞부딪치는 순간 그는 칠십이로공명권(七十二路
空明拳)의 공명경력(空明勁力)을 이용하여 상대방이 전력으로 내밀 때 갑작스레 몸을 빼버
렸던 것이다.
땅 위에 엎어지는 순간 모용협은 급히 두손으로 땅바닥을 향해 장풍을 일장 갈겼다. 그 반
동력으로 몸을 세우면서 요자번신( 子飜身)의 초식으로 공중제비를 한번 돌았다. 그리고는
가볍게 착지했다.
군웅들이 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그새 어디로 갔는지 주백통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누군가 그의 어
깨를 툭툭 쳤다. 돌아보니 주백통이 거거 서서 히죽히죽 웃고 있지 않은가?
"이 사람 모용협. 자네 재간으로는 날 못 막는다네."
"선배님께서는 사실 꾀를 써서 나를 이겼을 뿐입니다. 대장부라면 정정당당하게 이겨야죠."
"좋아, 그럼 또 해보지 뭐. 이번엔 아무 소리도 못하게 해야지."
그리고 주백통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자, 모용협. 똑똑히 보라구. 이제 간다앗!"
다시 주백통은 모용협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주백통을 피할 수는 없다.' 이렇게 작심한 모용협은 온 몸에 진
기를 끌어 올렸다.
바람처럼 달려온 노완동은 모용협과 또 꽝하고 부딪쳤다.
젊은 후배들 중에서 최상급 고수인 모용협이지만 주백통의 상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
다. 모용협은 한 장 거리나 멀게 튕겨나갔다. 그 어떤 육중한 쇠붙이에 맞기라도 한 듯 온
몸이 아파 왔다. 그는 가까스로 몸을 지탱했다. 넘어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겨우
숨을 돌린 모용협은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그래도 선배님은 나를 지나간 것은 아니오."
"그으래? 좋아. 또 한번 해보자."
주백통은 또 모용협에게 부딪혔다.
모용협은 한 장 반이나 튕겨 나갔다. 비틀거리다가 겨우 몸을 가눈 모용협은 얼굴이 창백해
져서 말했다.
"그래도 역시 지나가지 못한 것입니다."
'이상한데, 내가 팔성의 공력을 사용했는데도 이 자가 꽤 견디다니?' 주백통도 내심 감탄하
고 있었다.
"이보게 모용협! 길을 비켜주는 게 좋다니깐. 내가 전력을 다한다면 자넨 내상을 입게 돼,
알겠나?"
그 말에 모용협은 깜짝 놀랐다. 노완동이 전력을 다 쓰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면 전력을
다 한다면 그 힘이 대단할 것이다. 역시 노완동의 내공은 보통 사람으로는 가늠할 수가 없
는 것이었다.
모용협은 호탕하게 웃었다.
"불공평한 일을 보고 뛰어들어 도와주는 것은 대장부가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오소저의 청백함을 보호할 수만 있다면 저는 목숨도 내놓겠습니다."
그러자 주백통은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지었다.
"임자의 무공을 보면 십년 후엔 일대 고수가 될 사람인데 일개 아녀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
겠다니? 그런 개죽음을 할 게 뭔가? 후우, 천하 여자는 다 화액인데……."
"형님, 모용공자를 그냥 두시오."
양과가 말했다. 양과도 비록 모용협과 싸운 적이 있지만 속으로 그는 모용공자를 대장부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주백통에게 모용공자가 당하는 것을 보고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주백통은 막무가내였다.
"아우는 왜 남의 편을 들고 야단이야? 그런 소리 말게, 이 노완동이 젖비린내 나는 후배에
게 질 수야 없지?"
주백통은 또 달려들려고 했다.
그런데 오군영이 고성을 지르며 달려와 주백통을 막았다.
"선배님께선 이곳을 떠나려고 그러시는 거죠? 그렇죠?"
"그렇지. 그러나 난 여자들과 다투지는 않는 사람이야."
오군영이 이렇게 달려든 데는 나름대로의 결심이 있어서였다. 오늘 밤의 소동이 천하에 알
려진 이 마당에 자기 혼자 거와장에 남아 있는다면 앞으로 그 수치와 모욕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양효비를 따라갈 결심을 했다.
"이러지 마세요. 더 싸우지 마세요. 제가 양효비 공자님을 따라가겠어요."
주백통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양효비 공자님에게 시집가기로 결정한 이상 그이를 따라 동고동락 하겠어요. 그이를 따라
강호에 나서겠단 말예요."
주백통은 그 말에 놀라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야단났네, 야단났어, 양효비 하나만 해도 귀
찮아 죽겠는데 이 계집애까지 따라오겠다구?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됐구나.'
"그건 안돼. 절대 안돼."
주백통은 안달이 나 소리쳤다.
"아니오. 전 이미 결심했어요. 말리지 마세요."
오군영의 표정은 자못 진지했다.
주백통은 억지가 안 통할 것 같자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기 시작했다.
"아가씨, 내말 들어요. 우리 사제 둘은 말이요,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다닌다니까. 굶기를 밥
먹듯 하고 하늘을 이불삼아 노숙할 때도 많고 돈이 없어 거지들처럼 문전걸식하다 개들에게
쫓길 때도 많고……. 그 고생을 말로 다 할 수 없지. 집에 있으면 아무 걱정없을텐데 왜 우
리를 따라 고생을 하겠다는 것이오?"
"얘, 정말 집을 떠날 작정이냐?"
오자겸이 다가와 물었다.
오군영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전 여기 남아 있을 수가 없어요. 바늘 가는데 실 간다고 이제 남편 양효비 공자님을 따라
갈래요. 전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오자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와장을 떠
나면 딸애의 고생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겠지만 이왕 일이 이렇게 됐으니 보내고 볼 일이
었다. 앞으로의 일은 또 그때 가서 보기로 하고.
양효비의 기쁨은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선녀같이 예쁜 색시가 자기에게 이처럼 정이 깊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고맙소 아가씨. 잊지 않으리다. 이 정, 이 사랑!"
일이 이 지경이 되자 노완동도 막을 수가 없었다. 자기 입으로 한 말이 있지 않은가! 제기
랄 '재수 옴 붙었다.' 노완동은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다.
오군영은 잠시도 머물러 있기가 싫어졌다. 그녀는 서둘러 행장을 꾸리고는 부모형제와 작별
했다. 양과도 노완동 주백통을 따라 거와장을 나섰다. 완안방방이나 확도같은 적들이 노리고
있었기에 거와장에 더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의 여인을 찾는 일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제7장 흩어잔 사랑
거와장을 나서자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형님은 어디로 가시려오?"
양과가 물었다. 주백통은 뒤따라오는 양효비와 오군영을 돌아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난 내 마음대로 다니는 게 소원인데 저런 혹을 두 개나 달고 다녀야 하다니. 아우, 자네 무
공도 높잖나? 양효비를 제자로 삼을 생각 없나?"
"허,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양과가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 아니야. 정말이야. 정말이라니까."
"이러지 마세요. 그건 안됩니다."
"안되다니? 왜 안돼?"
주백통은 속이 상했다.
"양효비와 제 나이를 생각해 보세요. 거의 동년배인데 어떻게 제자로 삼습니까? 양효비도
싫어할 걸요."
"싫어한다고? 그러면 내가 혼내 줄 거야. 그러면 견뎌낼 수 있겠어?"
양과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주백통은 일심으로 두 혹을 떼어 버리려고 양과에게 애걸했
다. 심지어는 양과를 형님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양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백통은 화가 나서 양과와 말도 하지 않았다.
노완동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양과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양과는 오군영에게 미안한 일을 했으므로 마땅히 그녀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
나 마치 개구쟁이처럼 구는 노완동은 양효비에게 일류 무공을 전수해 줄 수는 있지만 그를
정직한 사람으로 길러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양효비가 잘못된 길로 빠진다면 오군영
에게도 누가 미칠 것이다. 그러면 이 양과도 세인들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 모든 일
은 사실 원인을 따지자면 바로 양과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을 한 양과는 주백통을 툭툭 건드렸다.
"내 말 좀 들어봐요."
"그래 양효비를 제자로 받겠다, 그건가?"
주백통은 기뻐하며 얼굴을 돌렸다.
양과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요. 양효비를 제자로 받을 수는 없지만 형님을 도와 무공을 가르쳐 줄 수는
있지요."
주백통은 실망했지만 그래도 도와주겠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 마치 애들처럼 양과와 새끼손
가락을 걸고 말했다.
"약속은 틀림없이 지키기!"
양과는 그 모양이 우스워 속으로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무척 아파왔다. 채설주 독이
또 발작한 것이다. 그는 급히 운기조식을 하며 그것을 내리눌렀다.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다.
주백통은 양과의 얼굴빛이 파랗게 변한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
"왜 그러나? 아우."
"중독되었어요. 괜찮을 겁니다."
양과는 아픔을 참으면서 가까스로 웃었다.
"내가 해독을 시켜주지."
주백통은 운기를 시작하려 했다.
"그러지 마세요. 이것은 기괴한 독이라 그런 운기는 소용이 없어요."
"그럼 어쩌나?"
양과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형님에겐 옥봉이라는 벌이 있잖아요?"
"몽땅 달아나 버렸어. 그 놈들은 도통 내 말을 안듣는다구."
주백통은 소룡녀에게 벌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양과는 길게 탄
식하고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자네, 채설주 독에 중독되었나? 그래서 옥봉으로 해독하려는 건가?"
주백통이 양과를 살펴보며 물었다.
이미 옥봉이 달아나 버린 이상 해독할 방법이 따로 없는 마당에 공연히 주백통이 걱정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양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용녀 생각이 나서 대신 옥봉이라도 한번 볼까 해서요."
종남산의 특산물인 옥봉은 원래 소룡녀가 길렀던 것이다. 그후 양과와 소룡녀가 강호에 나
오자 옥봉은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주백통이 기르던 옥봉도 종남산에서 온 것이었다. 그
래서 소룡녀 생각이 나서 옥봉이라도 보려 한다는 양과의 심정을 주백통은 이해할 수 있었
다. 그러나 아무리 소룡녀가 그립다고 해도 오만상을 찌푸리며 괴로워하는 것은 정말 이해
할 수 없었다. 천하에 못믿을 것이 계집들인데, 그 때문에 마치 금방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
다니, 기가 막히는군! 양과가 채설주 독 때문에 그런 줄은 꿈에도 모르는 주백통은 개탄스
러웠다.
양효비와 오군영은 몇 발짝 뒤처져서 따라오고 있었다.
뜻밖에 예쁜 아내를 얻은 양효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모든
정을 오군영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양효비는 마냥 오군영에
게 속삭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생면부지인 양효비에게 시집오게 된 오군영은 좋은건지 나쁜건지 자신도 자기
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양효비가 주절대는대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양효비는 그것을 처녀의 수줍음으로 판단하고 무지한 촌구석 처녀들을 대할 때처럼 계속해
서 히히덕거리며 지껄였다.
마침내 양효비는 참을 수가 없어 오군영의 허리를 한 손으로 슬쩍 끌어안으려고 했다. 오군
영은 양효비의 손을 뿌리치며 옆으로 피했다. 만약 거와장에서 누군가 그런 짓을 했다면 당
장 욕을 퍼붓든가 주먹다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 사내들 틈에 끼어서 걸어가는
그녀는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양효비는 오군영이 의지할 데 없이 홀로
나온 몸이라 만만하게 여기고 있는 데다 이미 자기 아내가 됐다는 명분으로 꽉 끌어안으면
서 히죽 웃었다.
"우린 부부간인 데 부끄러워할 게 뭐 있나?"
그러나 오군영은 또 양효비의 손을 뿌리쳤다.
"부부간이라도 예의를 갖추세요. 자중하세요."
오군영에게 꾸지람을 들은 양효비는 기분이 상했다.
"대갓집 규수라면 부인의 도리를 배웠을 것 아니오? 지아비에게 복종하는 것이 도리 아니
오?"
그리고선 오군영을 마구 껴안고 억지로 입을 맞추었다.
"아이고 좋아라."
대노한 오군영은 양효비의 뺨을 후려갈겼다.
"또 그랬단 봐. 이젠 사정 봐주지 않을 거야."
그녀는 주백통과 양과에게 들킬까봐 세게 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양효비
는 그녀가 자기가 두려워 세게 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달라붙으며 히히덕거렸
다.
"여보, 왜 정떨어지게 그러는 것이오?"
양효비가 자기를 여보라고 부르자 오군영은 귓볼이 빨개지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양효비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황홀경에 빠진 나머지 벅찬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또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당신 정말 예뻐."
그리고는 오군영의 앵두같은 입술을 쭉쭉 빨더니 젖가슴까지 주물렀다.
평생 처음 당하는 일이라 오군영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다 양효비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며 속살을 만지려 하자 황급히 탁하고 떨쳐냈다. 그와
동시에 양효비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무공을 익힌 그녀가 화가 나서 친 것이라 비록 삼
성의 공력밖에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양효비의 정신을 차리게 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양효비는 '어이쿠' 하고는 얼굴을 감쌌다.
"아니, 지아비를 치는 년이 다 있어?"
양효비의 뺨은 대번에 뻘겋게 부어 올랐다. 거기에는 손자국까지 있었다. 오군영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까불라고 했나?"
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추동에게 배운 무공을 믿고 날뛰던 양효비는 육가장 일대에서는 거의 남에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오군영에게 뺨이 퉁퉁 붓도록 맞았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는가? 화
가 난 양효비는 그가 늘상 쓰는 흑호도심의 초식으로 오군영의 아랫배를 내질렀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양효비의 주먹에 얻어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대로 내려오는 전가비전
의 무공을 익힌 오군영의 눈에는 흑호도심같은 초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군영은 허수
공격에 속지 않고 슬쩍 피하면서 한 손으로 양효비의 오른 주먹을 살짝 밖으로 내쳤다. 그
와 동시에 발길을 날렸다. 양효비는 그 발길에 채여 대여섯 발자국이나 뒤로 날아가 벌렁
나자빠졌다.
양효비는 허우적대다가 이어타정(鯉魚打挺)의 초식으로 벌떡 일어났다.
"네 이년, 나한테 어디 죽어봐라."
양효비는 얏하고 기합을 지르며 오군영의 머리를 향해 일장을 내리쳤다.
이 초식은 추동에게 배운 태을교장법(太乙敎掌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선학탁(仙鶴啄)이
었다. 고수들이 이 초식을 사용할 때는 첫 장부터 마치 학의 부리처럼 날카롭게 그리고 바
로 연이어 두번째 장을 친다. 그러면 대부분의 상대방은 피할 사이도 없이 얻어맞고 만다.
그러나 양효비의 선학탁 초식은 원래 그 위력의 십분의 일에도 못미쳤다. 추동이 제대로 가
르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양효비의 수준도 그저 그래서 태을장법의 진짜 위력을 낼 수 없었
던 것이다. 오히려 흑호도심 초식만 못했다.
오군영의 무공도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명사(名師)의 가르침을 받았었기에 양
효비의 그 서투른 무공 정도는 제압할 수가 있었다. 오군영은 코웃음을 치며 발로 양효비의
장을 걷어내며 어느새 그의 뒤편으로 돌아가 등을 쿡하고 밀었다. 양효비는 앞으로 푹하고
고꾸라져 얼굴이 흙투성이가 되었다. 다시 일어난 양효비는 오군영과 사생결단을 내려는 듯
달려들었다.
그때 주백통과 양과가 그들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잘 한다 잘 해. 부부끼리 싸워라 싸워."
주백통은 손뼉을 치며 웃더니 근처 나뭇가지 위로 훌쩍 날아 올라가 걸터앉았다. 그는 두
다리로 나뭇가지를 탕탕 차며 양과를 불렀다.
"여보게 아우. 이리 올라오게나. 여기 앉아 구경이나 좀 하자구. 내 제자가 이기나 새색시가
이기나."
양과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양효비를 말렸다.
"신혼부부가 이게 무슨 짓인가? 왜 싸우는거야?"
양효비는 씩씩거리느라 제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자기네 가문이 좋다고 날 깔보지 않겠어요? 같이 얘기 좀 하자는데 이렇게 신랑을 패지 않
나?"
그러면서 양효비는 부은 뺨을 내보였다. 아직 손자국이 남아있는 것을 본 양과는 좀 심하다
는 생각이 들어 오군영에게 말했다.
"오소저가 좀 과했군요."
오군영은 양과가 양효비의 말만 듣고 자기를 나무라자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자기와 혼례
식까지 올리고 변심한 양과에게는 말하기도 싫었다. 그녀는 쓸쓸히 쓴웃음만 지었다.
양효비의 말보다 오군영에게 진상을 알아보려던 양과는 그녀가 함구무언하자 생각이 달라졌
다.
저 여자가 말을 못하는 것을 보면 아마 양효비의 말이 사실인가 보다. 그래서 양과는 좀 엄
하게 말했다.
"오소저는 바늘 가는데 실 가듯 양효비를 따르겠다고 했잖소? 양효비가 비록 아직 명성이
없다 하나 주백통 선배님 제자요. 앞으로 반드시 대성할 것입니다. 주백통 선배님의 체면을
봐서라도 그렇게 손을 대서 되겠소?"
그러자 양효비가 억울하고도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또 얼마 전에 어머니까지 잃어 의지할 데가
없는 몸이오. 그래
서 소저에게 집도 옷도 사줄 돈이 없소. 소저를 사랑하는 마음 간곡하지만 이런 일을 당할
줄을 어떻게 알았겠소? 휴, 소저께서 이 혼사를 파기하고 거와장으로 돌아가 부귀영화를 누
리겠다면 난, 난 말리지 않겠소."
그 말에 양과도 감동했다.
"이봐요. 오소저. 양효비의 뜻을 알지 않았소? 그만 용서해 주시오."
어려서부터 집 문밖을 나서본 적이 없는 오군영은 양효비의 말에 감동했다. 험악한 강호, 헤
아리기 어려운 인심이란 말을 듣기는 했지만 난생 처음 이런 말을 들은 오군영은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할 수 없었다. 거와장에는 그런 감언이설로 오군영을 속인 사람이 없었던 탓이
기도 했다. 오군영은 한숨을 지으며 양효비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나를 예의바르게 대한다면 내가 왜 떠나겠어요?"
양효비는 속으로는 화가 났으나 겉으로는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선녀같은 당신을 내가 왜 잘못 대해주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자, 길이나 떠납시다."
신혼부부가 싸우는 것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자 노완동은 흥이 깨져 나무에서 훌쩍 뛰어
내렸다.
"제기랄, 싸우겠다던 것들이 왜 안싸워? 내가 속았어, 안싸우려면 가자 가."
노완동이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양과가 그 뒤를 따랐다.
양효비는 오군영에게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여보, 방금은 내가 잘못했어. 이해해줘. 너무 화내지 말고, 화내면 몸만 상한데."
"그보다 제 성미가 못돼서…… 아직 아파요?"
양효비가 다정하게 속삭이자 오군영도 화가 풀려서 양효비의 뺨을 쳐다보면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맞은거면 아프겠지만 색시에게 맞은건데 뭐. 아파도 기분은 좋아."
그 말에 오군영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양효비는 급히 말을 보탰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는 말이 있잖소? 싸워야 정이 든다는 말도 있고, 아내에게 맞았
다고 원한을 품는다면 속이 좁은 사람이지. 안그렇소?"
오군영의 얼굴에 웃음이 돌자 그는 슬그머니 그녀의 섬섬옥수를 잡았다. 오군영은 손을 살
짝 빼려고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사과처럼 빨개졌다. 힘껏 잡아빼면 안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러면 양효비가 실망할 게 아닌가? 그래서 또 시끄러워지면 주백통과
양과의 웃음거리가 될 것 아닌가?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양효비와 나는 비록 초면이지만 이미 부부가 된 이상 그리고 양효비가 나를 이처럼 아껴주
는 이상 에라 모르겠다 그냥 놔두자.
이렇게 작심한 오군영은 양효비에게 손목을 잡힌 채 묵묵히 걸었다.
일행은 두어 시간 걸어서 한 산자락 밑에 이르렀다.
빈 집이 몇 채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침상과 솥, 그릇까지 있었다. 오랫동안 비워둔 모양
인지, 가구 위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이구 졸려 사흘을 안 잤더니 졸려 죽겠다."
그러면서 노완동은 먼지가 수북이 쌓인 그 침상 위에 벌렁 누워버렸다. 그러자 먼지가 뽀얗
게 일었다. 오군영은 코를 싸쥐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양과와 양효비도 뛰어나왔다.
"형님도 나오시오. 그 먼지……."
양과가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도화도 산굴이 그렇게 더러워도 난 십수 년을 버텼어. 황약사도 날 어쩌지 못했단 말이야."
주백통이 소리쳤다. 마치 자지가 스스로 도화도 산굴에 들어갔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때 주백통파 황약사는 내기를 했다. 그래서 주백통은 어쩔 수
없이 굴에 들어가 십수년을 지냈던 것이다. 주백통은 황약사를 인정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
다. 그래서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영웅문 을 보라).
주백통이 계속 소리쳤다.
"편안하군! 도화도에 비하면 열배나 깨끗하고 편하다니까. 으하하하, 야, 참 좋다."
양과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가 소룡녀와 고묘 안에 있었을 때 물건들은 비록 낡고
헐었지만 소룡녀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청소를 하곤 했었다. 그 때문에 양과도 깨끗한
것을 좋아했다. 이런 곳에서는 양과도 절대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노완동의 고성대명을 흠모해 오던 오군영은 그의 성격이 천진난만하고 소탈하며 구김살이
없는 것을 보고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수건을 뒤집어 쓰고 안으로 들어갔다.
"선배님, 일어나세요."
그러자 주백통은 벽쪽으로 돌아누우며 투덜거렸다.
"말 시키지 말고 날 건드리지도 마. 난 여자들이 제일 질색이야!"
"선배님은 왜 그렇게 여자들을 미워하시죠?"
오군영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여자들은 모두 못된 것들이야. 잔대가리만 굴린단 말이야."
주백통은 가슴아픈 과거가 떠올라 격분해서 지껄였다.
오군영은 더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전 선배님께서 편히 주무실 수 있게 할 방법이 있어요."
"정말?"
"그렇다니까요."
주백통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만둬. 내가 속을 줄 알아?"
"이것 보세요. 전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부드러운 이불을 펴고 향불도 피워서 선배님이
편히 주무시게 할 작정이었는데, 싫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나가서 다른 방이나 깨끗이
치워 두 공자님이나 들게 해야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문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주백통이 어느새 문을 막으며 소
리쳤다.
"거 참 좋은 생각이다. 하하하."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오군영의 귀에 속삭였다.
"내 방만 깨끗이 치워요, 저것들 모르게. 저것들 방은 그대로 두라구, 못자게 말이야. 흐흐
흐."
그리고 손으로 입을 싸쥐며 킬킬거렸다. 꼭 철부지 아이들이 장난치는 것 같았다.
오군영은 노완동이 하는 짓이 우스웠다. 그러나 그 앞에서 그의 장난섞인 말에 반대할 수는
없었다.
"그럼 그러죠 뭐. 선배님 방만 청소해 드리죠."
노완동은 기뻐서 큭큭큭하고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 같은 웃음을 자아냈다.
"거 참 듣기 좋네. 자낸 심성이 착한 여자야. 사실 황용 그 계집애도 마음은 나쁜 게 아닌데
잔머리를 너무 굴려."
그 말에 오군영은 기분이 좋아졌다. 황용이라면 동사 황약사의 딸이자 전임 개방 방주 아닌
가? 그녀의 무공과 총명함이 출중하다는 것은 오군영도 들어서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런
데 지금 주백통이 황용보다 자기를 더 칭찬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어깨가 으쓱해짐을 느
꼈다.
"그런데 날 그렇게 부르면 안돼."
주백통이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럼 어떻게 불러요?"
"날 선배님 선배님 하는데 내가 그렇게 늙어 보여? 그저 노완동이라고만 해."
"후배가 그러면 되나요? 전 그렇게는 못 불러요."
"아니, 내가 그렇게 늙어 보여? 선배님이 뭐야? 황용도 날 그냥 노완동이라고만 불렀어. 황
용도 그렇게 불렀는데 너라고 왜 못해? 황용과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부르겠어요."
"노완동이라고 부르기 싫으면 그만둬. 이제부터 난 너하고 말도 안할거다."
그리고는 휑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집안 청소를 하며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심한 일이었다. 주백통이 누군가? 양효비의 사부님
아닌가? 난 양효비의 아내인데 어떻게 지아비의 사부님을 노완동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실
례라기보다는 거의 욕이다. 그리고 아버지마저 그를 존중하여 선배님이라고 하는데 내가 어
떻게 노완동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그러나 저 성미에 노완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노발대
발하기 십상이다. 그래 뭐, 방법이 있나? 그때 그때 임기응변으로 때워야지.
뜰에 나와 양과와 양효비를 본 노완동은 낮은 소리로 세번 웃고 또 큰소리로 세번 웃었다.
양효비와 양과는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형님, 왜 웃는거요?"
양과가 이렇게 묻자 양효비도 한마디 거들었다.
"사부님께선 즐거운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한번 웃음에 십년 젊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사부
님께선 장수하시겠습니다."
"넌 아부할 줄 밖에 모르냐?"
주백통은 양효비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는 우쭐해서 목을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난 말이야, 이제 깨끗한 방에서 자게 되었거든. 너희 둘은 그 더러운 방에서 모기에게 물리
고 빈대에게 뜯길테지만.'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양과는 주백통을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양효비는 주백통의 심기가 좋은 것을 보고 옆으로 다가갔다. 그는 히죽거리며 웃었
다.
"사부님, 사부님의 무공은 정말 굉장하시던데요. 뭇사람들이 그렇게 높이 보던 모용협도 사
부님에겐 꼼짝도 못하대요. 슬쩍 미는 것처럼 보였는데 열 장도 넘게 날아가던데요."
"거 모용협이란 녀석 이름뿐이야. 내가 그 녀석 나이 땐 무공이 몇 배나 됐는지도 몰라."
양효비는 얼른 한술 더 떴다.
"그랬을 거예요. 여하튼 우리 사부님 무공은 천하 제일이라니까."
주백통은 좋아서 크게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쳤다.
"네가 보기에 내 무공이 황약사에 비해서 어떤 것 같냐?"
양효비는 생각도 않고 즉시 대답했다.
"사부님 무공은 신공인데 황약사 같은 사람이 어떻게 따르겠어요? 사부님의 발끝에도 못미
칠 것입니다요."
"그렇지. 그렇고 말고. 네 말이 맞아. 황약사 제가 아무리 날뛰어도 내 발밑에도 못 미치지.
암 그렇고 말고."
"사부님이 뒷발질만 슬쩍 해도 황약사는 그만 멀리 날아가 똥통에 처박힐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서 헤어나지도 못할 거예요."
둘은 마주보며 좋다고 웃어댔다.
황약사의 도움을 많이 받은 양과는 그들의 빈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는 혼자 뜰 밖에 있는
나무 아래로 가서 몸을 기대고 앉았다.
한참 웃어대던 주백통이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 물었다.
"가만있자, 넌 황약사를 보지도 못한 녀석인데,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지? 오 알
았다. 네 놈이 또 내게 아부하려는 거지?"
주백통에게 속셈을 들킨 양효비는 히히 웃으며 비위좋게 말했다.
"보지 않았어도 추측으로 알 수 있지요 뭐. 그런 것은 추측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거
지요."
주백통은 그 말에 기분이 좋아져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때 난 우연히 무림 일대 기서(奇書)인 구음진경(九陰眞經)의 무공을 익혔거든. 그러
니 황약사가 날 당해낼 재간이 있어야지. 그러나 난 장문 사형에게 구음진경의 무공은 절대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기에 이젠 그걸 다 잊어버렸어."
"정말 아깝네요. 이미 익힌 그 고명한 무공을 억지로 잊어버리다니요?"
"장문 사형의 말을 들어야 했던 거야."
"그렇다면 황약사에게 진 적도 있었겠네요? 구음진경을 잊었으니까요."
"뭐? 내가 황약사에게 졌다구? 구음진경을 안써도 내가 창안한 좌우호박지술(左右互搏之術)
과 칠십이로공명권(七十二路空明拳)이 있는데 내가 져? 황약사 같은 건 그것만으로도 꼼짝
못해, 알았어?"
"정말 사부님은 대단하십니다. 진인(眞人)이십니다."
양효비는 손뼉까지 쳤다.
그런데 주백통이 눈을 끔뻑거리다가 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내 암만봐도 이상하다. 오늘 네가 왜 나한테 자꾸 아부하는 거지? 꼭 내게 무슨 부탁할 것
이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렇지?"
"정말 귀신같이 알아 맞히시는데요. 대번에 제자의 속셈을 짚어내시는군요."
양효비가 쑥스러운 듯 히죽거리며 웃었다. 주백통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만한 재간도 없이 너같이 약은 놈의 사부 노릇을 어떻게 하냐? 그래 무슨 부탁이냐? 어
디 말이나 해봐라."
사실 주백통은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속으로 제자의 부탁을 들어줄 작정을 했다. 그것을 눈
치챈 양효비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야 주백통이 안달이 난다. 이제 양효비는 주백통
의 그런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닐세라 주백통이 속이 달아 다그쳐 물었
다.
"도대체 무슨 부탁이냐? 말해야 알지."
"글쎄요, 사부님이 해 내실 수 있을지……."
양효비는 일단 이렇게 말하고는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주백통이 펄쩍 뛰었다.
"뭐? 내가 못 해내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어? 걱정말고 해봐. 내가 꼭 들어줄테니까."
"정말이에요? 꼭 해 주실 수 있지요?"
"물론, 물론이지. 해주고 말고, 무슨 일이냐? 어서 말해 봐라."
양효비는 더 이상 끌다가는 주백통이 벌컥 화를 낼 것 같아서 얼른 두 무릎을 털썩 꿇었다.
"사부님, 그 좌우호박지술과 칠십이로공…… 공심권을 이 제자에게 전수해 주십시오."
'아차, 내가 이 녀석에게 속았구나.' 하며 주백통은 흠칫했으나 일구이언을 할 수는 없는 노
릇이었다.
"공심권(空心拳)이 아니고 공명권이야."
양효비는 주백통이 자기 부탁을 받아들였음을 알고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드렸다.
이때 오군영은 이미 집안을 깨끗이 청소해 놓았다. 노완동이 들어가 보자 침상 위에 비단이
불까지 펴 있는지라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이불은 어디서 난 거지?"
오군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여기는 거와장에서 이삼십리 밖에 안되는 곳이죠. 여기 이 집들은 우리 거와장 것들
이에요. 매년 가을이 되면 아버지께서 오빠와 저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사냥을 하곤 하셨지
요. 그래서 집안에 필요한 물건들을 갖추어 놓고 있었던 거죠. 이 이불들은 저 벽 사이에 놓
아둔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한쪽 벽모서리에서 벽돌 한장을 뽑아냈다. 그러자 벽이 스르륵 하고 열렸
다. 그 안에는 옷과 이불이 무척 많았다. 사람 서넛은 숨어 있을 만한 넓이였다.
주백통은 기뻐서 침상 위에 벌렁 누웠다.
"이 방은 내 방이다."
오군영은 웃으며 문밖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마침 들어오는 양효비와 맞부딪쳤다.
오군영은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푹 숙이더니 얼른 한쪽으로 비켜섰다.
"덤비긴……."
양효비는 오군영이 수줍어하는 모습이 더욱 예뻐 보였다.
"난 사부님께 무공을 전수해달라고 부탁하러 오는 길이오. 그래야 당신에게 무시당하지 않
지."
양효비는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노력하는데 누가 무시해요?"
오군영이 한마디 하며 뛰어나갔다.
양효비는 그녀의 예쁜 뒷모습을 바라보며 방금 들은 그녀의 말을 되새겨보았다.
이제 난 한이 없어 죽어도. 저런 예쁜 아내가 있으니. 양효비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침
대로 다가갔다.
"사부님."
한잠 자려던 주백통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왔어?"
양효비는 절을 하며 말했다.
"저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시겠다고……."
"아니, 내가 자려고 누운 걸 못봤어? 나가, 어서 나가."
"무공을 전수하는 일은……."
"잔 다음에 보자."
주백통은 눈을 감았다.
양효비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더 말을 했다가 주백통이 화를 버럭 내면 큰일이었
다. 그는 살그머니 물러나와 방문을 닫았다. 기분이 안 좋아 뜰로 나와 보니 오군영은 나머
지 방을 청소하러 가고 양과만 있었다.
"대협객님, 우리 사부님이 정말 무공을 제게 전수해 줄까요?"
양효비가 양과에게 미심쩍은 듯 나직이 물었다.
"주백통 형님이 성미는 좀 괴팍하지만 속이지는 않을거요."
양과는 속으로 이미 주백통을 도와 양효비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겠다고 말한 적이 있으니
식언하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양과는 신의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양효
비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는 일로 오군영에게 보상하려고 했다.
"우선 내가 전진교의 입문 무공을 가르쳐 주면 어떻겠소?"
물론 양효비에겐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양효비는 얼른 절을 했다.
"대협객님께서도 사부님이 되어 주십시오."
양과는 그를 일으켜 세우며 웃었다.
"우리는 나이도 비슷하니 그저 형제로 지냅시다. 내 무공은 잡다해서 남의 스승은 못되니
까."
그러면서 양과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양효비는 잔대가리를 많이 굴리는 애다.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면 소룡녀가 싫어할 것이다. 양효비에게 일종의 편견이 있는 양과는 절대로 그의
스승은 되지 않겠다고 작심했다. 전진교의 입문 구결(口訣)은 가르쳐도 실제적인 권법을 가
르쳐주지 않으면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양효비는 자질이 총명했기에 대협객 양과의 한마디 한마디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는
주의깊게 기억했다. 그래서 차 한잔 식을 무렵이 되자 전진교의 입문 심법(心法)의 구결을
거침없이 외워 버렸다.
과거 전진교에서 양과는 며칠이 걸려서야 그 구결을 외웠는데 오늘 양효비는 반 시간도 못
되어 외워냈으니 기억력이 보통은 아니었다.
이 녀석 기억력이 나보다 훨씬 좋은 걸. 황용 백모님보다 좋은 것 같아. 전도가 창창하겠군.
양과는 그의 총명함에 감탄했다.
대저 스승들은 자기 제자가 총명하고 부지런하여 자기를 능가하기를 바라는 법이다. 양과도
그랬다. 비록 양효비를 제자로 삼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총명함을 기뻐했으며 그러기에 전
진교의 내공심법까지 몽땅 전수해 주었다. 양효비는 그것도 반 시간이 못되어 모두 암기해
버렸다.
양과는 심히 염려되는 바를 조심스럽게 일러주었다.
"도가의 내공은 그 진경(進境)이 비록 느리지만 가장 정통적이다. 오직 그 구결만 조심해 엄
수한다면 주화입마(走火入魔)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문파들의 내공은 그렇지
않다. 어떤 것은 그 진경이 신속하기는 하지만 위험성이 높아 조금만 잘못해도 주화입마되
어 여태까지 들인 공력이 허사가 되거나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그러기에 그런
문파의 무공을 정상까지 수련하는 사람은 극히 적고, 신공을 수련한 고수들도 자기 문파 무
공의 제한성으로 끝내 극치에 도달하지 못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동사 황약사, 서독 구양봉,
남제 일등대사나 북개 홍칠공 같은 당대 사대 절정고수들도 그 자질은 세상 사람들이 결코
따를 수 없지만 무공은 끝내 전진교 시조 중양진인을 따르지 못했던 것이야."
그리고 양과는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지금 말한 도리는 양과가 동해에서 검술을 연마하면서 깨우친 것이다. 그러나 그때 이미 양
과는 도가의 내공을 떠나 다른 문파에 가입했기 때문에 다시 바꿀 수가 없었다. 이제 양과
는 아무래도 중양진인의 경계에는 도달할 수가 없었다. 한스러운 일이었다.
양효비는 양과의 말이 진심인 줄은 알았으나 수련 부족으로 양과의 심정과 그 가르치는 바
를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진교 내공의 진경이 그렇게 늦다면 언제까지 수련해야 양과나 주백통처럼 될 수 있단 말
인가? 내 나이 벌써 스물인데, 차라리 진경이 더 빠른 무공을 배우는 것이 낫겠다. 주화입마
의 위험성은 있지만 내 총명함과 재간으로 그까짓 것을 못 면하랴?'
양과가 덧붙여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추동이 자네에게 가르쳐 준 무공은 전진교와 같은 면이 있어. 백년 전엔 하
나의 문파였을 수도 있지. 그러니까 내가 가르쳐 준 내공심법으로 그걸 연마해 보라구."
전진교와 태을교는 원래 하나였다. 작금에 와서 그 초식들은 많이 달라졌지만 내공심법만은
서로 큰 차이가 없었다.
양효비는 추동에게 내공을 좀 배운 데다가 지금 전전교의 내공심법까지 익혀 즉시 그 묘한
이치를 알게 되었다. 양효비는 신이 나서 태을교 장법을 연습했다.
양과가 보니 그 초식들은 여전했지만 그 힘과 신속함은 이전과 비할 바가 못되었다. 양과는
양효비의 총명함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양효비는 한참 동안 태을교 장법을 연습했는데도 이마에 땀방울이 약간 맺혔을 뿐 조금도
피곤한 기색을 느낄 수 없었다. 이전 같았으면 땀투성이가 되어 헐떡거렸을테지만 지금은
오히려 힘이 더 나는 것 같았다.
"대협객님, 전수해 주신 심법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때 이미 다른 방들의 청소를 끝낸 오군영이 조용히 옆에 와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양효비
의 무공이 양과의 가르침으로 크게 진보했음을 보고 무척 기뻐했다. 그리고 양과를 당세의
무림고수라고 내심 탄복했다. 그녀는 물수건을 양과와 양효비에게 각각 건네주며 방굿 웃었
다.
"이제 제대로 되는 것 같군요."
"이제라니? 이전엔 못했나 뭐."
양효비도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전엔 그게 어디 무공인가요? 시골애들 주먹싸움이지."
그리고 오군영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가만 있어. 어디 나하고 해보자구. 아마 이젠 내 적수가 안될 걸?"
양효비는 대련 자세를 취했다.
오군영은 입을 비쭉 내밀었다.
양과가 그들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 보고는 소리없이 웃었다.
"오소저의 무공 바탕은 자네보다 튼튼하네. 오소저를 이기려면 적어도 석달은 더 연마해야
할걸세."
"예? 석달이 나요?"
"그렇고 말고. 오소저도 그 사이 계속 수련한다면 자네 자질로는 일 년이 지나야 겨우 비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이고, 그럼 난 어떡해? 일년 동안이나 아내에게 무시당해야 하나요?"
"그저 매 버는 소리만 해요."
오군영은 얼굴이 빨개져 눈을 흘기고선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양과와 양효비는 큰소리로 웃었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 했어? 나도 좀 웃자."
잠에서 깬 주백통이 뛰어나왔다.
"형님 제자가 무공에 큰 진보가 있어요. 축하드립니다."
"뭐 진보가 크다구? 난 잠을 잤는데, 내가 꿈 속에서 전수했나?"
"그럴 수가 있나요? 그런데 사부님은 무슨 잠을 그렇게 퍼뜩 자고 일어나신 겁니까?"
"이게 무공이 높은 사람의 잠이지. 이 사부님은 사흘 밤낮을 안 자다가도 이렇게 퍼뜩 한
시진만 자고 나면 정신이 번쩍 나거든. 너희들이 하루종일 잔 것보다 낫단 말이야."
"그게 정말입니까?"
양효비가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무공이 높은 분일수록 잠이 적어지지. 소림사 달마대사는 십년 면벽에 잠 한 번 안 잤다
네."
양과의 말에 양효비는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추동도 매일 두세 시간 밖에 안 자고 일어나 무공을 연마했구나."
양과는 양효비에게 주백통 앞에서 장법을 다시 연습하게 했다.
"형님, 어떻소?"
"과연 진보가 크구만."
주백통은 심히 기뻐하면서 양효비에게 전진교 입문 장법을 전수해 주었다. 양효비는 열심히
배워 그것도 두 시간이 못되어 익혀버렸다.
점심 때가 되자 오군영이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밥과 반찬을 마련해 왔다.
"쌀과 채소는 어디서 난 거지?"
주백통이 물었다. 양과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모두 지난 가을에 남겨두었던 거예요. 채소는 집 뒤 산자락에 둔 거구요. 매년 이 곳으로
사냥오면 늘 이렇게 먹지요."
"고기 반찬이 없어 글렀어."
주백통이 그렇게 투덜거리자 오군영이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먹음직
스런 고기 한 접시를 가지고 들어왔다.
"에고, 고소한 냄새! 정말 손이 빠르군. 언제 이렇게 맛좋게 삶았다지? 이게 무슨 고긴가?"
주백통은 얼른 그 고기를 한움큼 뜯어먹으면서 물었다.
"노루고기예요. 아직 제 철이 아니라 살이 붙진 않았어요."
"이만해도 충분해."
넷은 포식을 하고는 배를 내밀고 잠깐 휴식을 취했다. 양효비는 또 주백통에게 무공을 전수
해 달라고 했다. 배가 부른 주백통은 기분이 좋아 흔쾌히 대답했다.
양효비는 원래 게으르기 짝이 없어 글을 배우거나 무공을 연마함에 있어서도 공력을 들이지
않았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집안 식구들이 몰살당하는 재난을 당한 데다가 아내에
게 수모까지 겪자 사람이 백팔십도로 달라졌다.
육가장에서는 그만한 재간으로도 우쭐거릴 수가 있었지만 이젠 어머니와 추동도 없으니 이
전의 무공으로는 어디 가서도 남에게 무시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심을 하고 무공을 배우려고 했다. 그것도 보통의 무공이 아니라 정상의 무공을 배우기로
했던 것이다.
총명한 자질에 노력까지 겸비하자 주백통이 전수한 장법을 금방 터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익히자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양효비는 너무 어려워 진력이 나는지 손을
멈췄다.
"사부님, 이제 이 장법은 익혔으니 다른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아직 제대로 익힌 게 아냐. 배우기 싫으면 관둬. 안 가르쳐 줄거야."
주백통은 일어나서 가려고 했다. 양과는 얼른 주백통의 소매끝을 붙잡았다.
"그러지 마세요. 제자 성미만 급한 줄 알았더니 사부 성미도 급하네요."
그러면서 양과는 양효비에게 눈짓을 했다. 양효비는 눈치를 채고 주백통에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사부님,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재빨리 일어나 무공 연마를 계속 했다.
그런데 밥 한솥이 다 될 시간이 못돼 양효비는 또 멈추어 서서 주백통에게 물었다.
"벌써 여섯 번이나 연습했는데도 왜 진보가 없을까요?"
"네 놈이 열심히 하지 않는데 무슨 진보가 있겠느냐? 여기 앉아서 구경하는 내가 더 고달프
다. 건성으로 하는 것을 보니 잠이 온다 이 말이야."
주백통이 꾸짖었다. 장난만 즐기는 주백통은 제자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방법을 잘 모른다.
그저 양효비가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고 나무랄 뿐이었다. 양효비는 억울하다는 듯 양과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을 느낀 양과가 타이르듯 말했다.
"무공을 익히는 것도 검을 벼르는 것과 같이 필요한 온도가 되어야 하는 법이네. 계속 반복
해서 연습하면 그런 온도에 도달하게 되는 거지. 그때가 되면 느는 느낌이 금방 오지. 오소
저도 무공을 연마한 사람이니 물어보게나."
오군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아주 익숙해져야 묘리가 트이는 법이에요. 그런 묘리가 트여야 실전에서 모든 동작
이 뜻대로 된다니까요."
그 말을 듣고 양효비는 다시금 열심히 연마하기 시작했다.
저녁해가 서산을 넘어가려고 할 무렵 네 사람은 산책을 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선 냇물이
흐르고 풀밭에선 벌레들이 다투어 울고 있었다.
"이 시냇물은 거와장의 호수로 흘러드는 물이에요. 물은 깊지 않지만 고기는 많답니다. 내일
은 물고기 요리를 해드리지요."
"거 참 군침나는 이야기네. 이 노완동은 물고기를 제일 좋아하지."
주백통은 이렇게 말하다가 문득 짓궂은 생각이 들어 몇마디 덧붙였다.
"가만, 이 냇물에다 독약을 풀어넣으면 거와를 죽일 수도 있겠네. 이 냇물이 거와장으로 흘
러 간다니까 말이야."
오군영은 장난삼아 지껄인 말인 줄을 알면서도 기분이 언짢아 쌀쌀하게 대꾸했다.
"거와는 천하삼절독 중의 하나라 보통 독약으로는 죽이지 못해요. 그러나 독약이 흘러들면
거와장의 모든 사람들이 죽고 말겠죠."
"그래, 그걸 생각 못했군."
주백통이 어린아이마냥 천진스럽게 두 눈을 끔벅거렸다.
양과가 그 모습을 보고는 우스갯소리로 한마디 거들었다.
"형님, 살인 강도짓을 할거요? 내가 관가에 고발할테요."
그러자 주백통은 급히 두손을 내저었다.
"그러지 말어. 그러지 말라니까. 독약을 안 넣으면 그만 아닌가."
"인의를 중시하는 사부님께서 그런 일을 하실 리가 없지요. 절대로 말입니다."
양효비가 알랑거렸다. 그 말에 주백통은 너털웃음을 웃고는 다시 한번 제자를 돌아다보았다.
"옆에 늘 알랑거리는 제자가 있으니 좋기는 좋다. 이 또한 인생의 즐거움 아닌가."
얼마를 그렇게 거닐다가 양과가 그만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주백통이 반대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세 사람만 돌아가려고 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말 나만 놔두고 갈거야? 제길, 한창 놀기 좋은 땐데."
주백통은 그들 셋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투덜거렸다. 혼자서는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주백
통도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오군영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네칸 집이라 한 사람이 방 하
나씩을 차지했다. 주백통도 자기 방으로 갔고 양과도 방 하나를 차지하곤 조용히 앉아 운기
하면서 체내의 독을 눌렀다.
뜰에 혼자 남은 양효비는 오군영 방의 불빛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우린 부부인데 한 방에서 자야지.'
그러나 오던 길에 오군영에게 뺨을 맞은 일이 생각나서 머뭇거렸다. 양효비는 한동안 주저
하다가 드디어 용기를 내서 오군영의 방문을 가만히 두드렸다.
"누구세요?"
오군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보, 나야 나."
양효비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방안에는 잠시 움직임이 그쳤다. 그러더니 오군영의 떨리는 목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무슨 일예요?"
불안해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오히려 양효비는 담이 커졌다.
"여보, 문을 열어야지. 나도 들어가 쉬게."
"당신 방이 있잖아요?"
"부부간에 따로 자는 법이 어디 있소? 남들이 알면 웃어요."
오군영은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말했다.
"난, 잠들었어요."
"여보, 농담하지 말고 어서 문이나 열어요."
그러나 오군영은 불을 꺼버리고 아무 말도 안했다.
양효비는 잠시 기다렸다가 또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안 열어 주면 사부님과 양대협을 찾을 거야."
오군영의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양효비도 한숨을 지었다.
"문을 안 열어 주면 이 앞에서 밤을 새우겠소. 찬바람이 불고 모기떼에게 뜯겨도 그냥 서
있을거요, 그래서 남편의 정성을 보여줄 참이오."
그러면서 마치 찬바람에 감기라도 걸린듯이 기침소리를 냈다.
오군영은 마음이 약해져 살며시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양효비가 다짜고짜 와락 끌어안고 방안으로 들어가선 얼른 문을 닫아걸었다.
"당, 당신 왜 이래요?"
오군영은 질겁을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겉옷을 이미 벗고 있는 오군영의 탄력 있는
몸매를 본 양효비는 정욕이 들끓어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여보, 날 좀…… 날 좀 살려 달라니까."
또 양효비는 오군영을 와락 껴안으려고 했다.
"이러지 마세요. 이러면 안돼요."
오군영이 급히 피했다.
"부부끼린데 왜 이러오? 부끄러울 게 뭐 있소? 자, 나 좀 살려주구려."
양효비가 한발 한발 다가왔다. 뒤로 물러서던 오군영은 침대에 걸려 자빠졌다. 그 틈에 양효
비는 얼른 달려들어 오군영을 확 짓누르고는 입을 맞추며 몸을 마구 주물렀다.
지금까지 남자와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오군영이었기에 사내의 체취가 물씬하고 또 사
내가 자기 몸을 만져대자 숨이 차고 몸이 달아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오군영이 더 반항하지 않자 양효비는 더욱 대담해졌다. 그는 오군영의 허리띠를 풀고 그 아
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오군영은 깜짝 놀라 급히 그의 손을 틀어잡았다.
"안…… 안돼요. 이러시면 안…… 안된다니까요."
"손도 잡고 입도 맞췄는데, 왜 이래? 안되긴 뭐가 안된다는거요?"
오군영의 입술은 온통 양효비의 침으로 범벅돼 있었다.
오군영은 내공을 써서 양효비를 콱 밀쳐 버리고 일어나 옷깃을 여몄다.
"이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억지라니? 부부끼린데. 부부간에 이런 일은 밥먹고 옷 입듯 아주 자연스러운 것인데 왜 그
러오? 여보, 내가 하자는대로만 하라니까."
그리고는 또 껴안으려고 했다. 오군영이 물러서면서 말했다.
"또 무례하게 굴 셈이에요? 난, 난 죽어도 싫어요. 죽어도 싫다니까요."
그러더니 오군영은 베개 밑에서 시퍼런 비수를 꺼내 자기 가슴을 겨누었다.
"아니, 이러지 말어. 이러지 말라니까."
양효비는 뒷걸음질치며 두 손을 황급히 내저었다.
"그럼 어서 나가요. 어서요!"
오군영의 돌연한 반응에 기가 질린 양효비는 그만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여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요?"
오군영은 눈물을 훔쳤다.
"당신의 무공은 아직 튼튼한 바탕이 없어요. 그런데 이러시면 몸을 상해요.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당신 몸이 잘못 되는 것은 볼 수 없어요."
그 말에 양효비가 빙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소같이 튼튼한 사람이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왔다. 오군영은 또 비수를 들었다.
"저리 물러가요."
오군영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양효비는 그녀가 자결이라도 할까봐 겁이 나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여보, 도대체 왜 그러는거요?"
"우린 아직 혼례식을 올리지 않았어요. 내가 이렇게 엉겁결에 몸을 맡기면 남들의 웃음거리
가 돼요."
"혼례식? 천지신명께 절하는 것 말인가? 그거 쉽지. 지금이라도 우리 둘이 무릎 꿇고 천지
신명께 절하면 될걸 가지고."
"그렇게 간단히 하는게 아녜요."
오군영이 고개를 저었다. 양효비는 부아가 치밀었다.
"이래도 안된다, 저래도 안된다. 그렇다면 어쩌자는 거요. 흥, 알았어. 한마디로 내가 싫다
이거지?"
오군영은 고개를 숙이고 말을 못했다. 양효비는 약이 올라 이를 갈았다.
"혼례식을 해야만 부부다, 알겠어. 양과하고 혼례식을 치렀으니까 기어이 양과에게 시집 가
겠다 이거지?"
"허튼소리 말아요. 내 이미 당신의 아내가 되겠다고 서약한 이상 변할 리 없어요. 양대협님
께서는 당신같이 이렇게 횡포스럽게 굴지는 않았어요. 신방에 같이 들기는 했지만 내 손가
락 하나 건드리지 않았어요."
오군영의 말에 양효비는 야비하게 웃었다.
"흥, 알았어. 신조협인데다가 예절도 바르니 양과밖에 없다 이거지? 양과하고 다시 살겠다
이 말인가? 확도 왕자 말이 생각나는군. 남녀가 신방에서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을까? 아무일 없었다고 누구를 속이려고?"
"그런,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세요."
오군영이 울먹였다. 그럴수록 양효비는 더 야단이었다.
"그러나 기억해 둬. 그 사람은 강호에 이름이 난 신조협이야. 처도 있어. 너같은 것과 결혼
할 리 있겠어? 그러니 나하고 가짜 결혼을 해서 암암리에 양과에게 들러붙겠다 이거지?"
양효비는 흥분해서 해서는 안될 얘기까지 지껄이고 있었다.
"내 말이 틀려? 양과도 봐. 거와장을 나와 자기 처를 찾으러 가지는 않고 오히려 우리를 따
라오다니. 양과도 네게 마음이 있어 그러는 게 아니고 뭐야?"
"됐어요. 그만 둬요. 그따위 소리 집어치워요."
오군영은 너무나 분해 눈물까지 흘렸다.
"흥, 아픈데를 찔렸다 이거지?"
양효비가 냉소를 지었다.
"아녜요. 아녜요. 내 비록 일개 아녀자에 불과하지만 어려서부터 사서를 읽고 엄한 교육을
받았기에 무엇이 수치인지는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양대협은 광명정대한 분이에요. 그를 모
욕하지 마세요."
"과연 정이 깊군! 남편 앞에서까지 간부를 두둔하다니."
양효비가 쌀쌀맞게 말했다.
"어쩌면 믿겠어요?"
오군영이 발을 굴렀다.
"믿어? 뭘 믿어?"
"양대협님과 내 사이가 청백함을 어떻게 해야 믿겠냔 말예요?"
"그거야 쉽지. 나하고 한번만 자 보면 알 거 아닌가? 처녀인지 아닌지 내가 직접, 직접 검사
해 보면 되지."
오군영은 얼굴이 빨개져 분연히 소리쳤다.
"믿지 않으려거든 그만둬요. 손가락 하나 건드릴 생각하지 말아요."
양효비도 화가 날대로 났다.
"좋아. 나도 남이 건드리다 만 찌꺼기를 만지기는 싫어."
"뭐라구?"
"남이 건드리다 만 찌꺼기는 싫단 말이야."
오군영은 그 말에 너무도 화가 나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천하 영웅들 앞에서 나의 빙청옥
결을 믿는다 하고 나를 거와장에서 데리고 나온 사람이 양효비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나를 이렇게 모욕하다니? 이럴줄 알았으면 애당초 내가 왜 따라나섰겠는가? 이런 옹졸한
인간을 따라나선 내가 바보지.
생각할 수록 화가 끓어오른 오군영은 참다 못해 양효비에게 덤벼들어 귀뺨을 또 한번 호되
게 후려쳤다.
"이, 이년이 또 사람을 친다."
양효비는 뺨을 싸쥐며 눈을 부라렸다. 오군영도 양효비를 매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또 날 모욕해 봐라. 아예 죽여버릴테다."
양효비는 화가 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좋아. 어디두고 보자. 지금은 너를 이길 수 없지만 언젠가는 복수할 때가 올거야."
그리고 창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던 오군영은 그를 쫓아가 붙들려고 했으나 그가 내던진 말을 생각하
니 화가 나서 그만 주저앉아 흐느껴 울고 말았다.
그런데 누가 문을 두드렸다.
"오소저, 무슨 일이오?"
양과의 목소리였다. 오군영은 대답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이 없자 양과는 나쁜 놈이 들어와 무슨 짓을 했나 싶어 장풍으로 문
을 열었다.
방안에는 옷이 흐트러진 오군영이 흐느껴 울고 있었다. 방안의 물건들은 난잡하게 널려 있
었고 뒤창문은 부셔져 있었다.
"강도가 뛰어들었소?"
그 말에 오군영은 와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양과가 다가와 달랬다.
"두려워 마시오. 이 양과가 있지 않소?"
오군영은 그만 와락 양과의 품에 안기며 목놓아울었다.
양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오군영을 밀쳐내자니 측은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양과
는 그저 부드러운 말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양효비는 창문 밖에 숨어 있었다. 창문을 박차고 나갈 때는 멀리 가 버릴 생각이었으
나 그는 이어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군영이 쫓아 나올지도 모른다. 만약 그러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녀가 진심으로 나를 붙잡
는다면 내가 달아날 필요가 뭐가 있는가? 그러면 화해하고 한 이불에 들어야지.
그래서 가지 않고 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울음소리만 들릴 뿐 오군영은 쫓아나오지 않았
다.
원래 대갓집 천금소저(千金小姐)로 자랐으니 저런 오기를 부리는 것쯤은 이해해줘야지. 이제
울다가 그치면 들어가 달래줘야지. 그럼 화가 풀릴지도 모르지. 사실 오군영과 양과는 광명
정대한 사람들이기에 별일 없었을 것인데 내가 믿지 못한다면 남들이 나를 옹졸한 인간으로
여길 것이다. 그래서 양효비가 다시 들어가려고 하는데 양과가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양효비는 얼른 몸을 숨기고 귀를 기울였다. 양과의 부드러운 목소리만 들리기에 슬며시 고
개를 들어보니 오군영이 양과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있지 않은가? 과연 내 추측이 옳았구
나. 너희들이 그런 사이였구나. 내가 그냥 가 버렸다면 몰랐을 뻔했구나.
양효비는 당장 뛰어들어가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자기 혼자 그들을 대적하기에
는 아무래도 어려웠다. 그들이 사람을 죽여 입을 막으려고 한다면 오히려 목숨이 위태롭다.
양효비는 부글거리는 분노를 가까스로 누르고 뒷산으로 살며시 빠져 나갔다.
방안의 두 사람은 하나는 울고 하나는 긴장해 있느라 창문 밖의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
다.
오군영은 서럽게 울었다. 너무 울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양대협님,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
오군영이 애원했다. 양과는 흠칫 놀라 손을 놓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오군영이 일어섰다.
"양대협님이 정인군자(正人君子)임을 전 알고 있어요. 양대협님은 절 무시하지 않겠죠, 네?"
양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모르게 그랬던 것이다.
"저도 사실 첫눈에 양대협님이 마음에 들었어요."
오군영의 말에 양과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오."
"양대협님,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저는 양대협님에게 정실이 있는 것을 꺼리지 않아요. 전
소실로 들어가 대협님을 모시겠어요. 절 데리고 가주세요. 우리 멀리 떠나요."
양과는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돼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소저, 자중하시오."
"정말 전 모르겠어요. 어떤 남자들은 너무 탐색해서 문젠데, 대협님은 왜 이리도 용기가 없
으실까? 뭐가 그리 겁나세요? 강호인들에게 손가락질 당할까봐 그러세요? 부인에게 욕을
먹을까봐 두려우세요?"
오군영은 한참을 그러더니 천천히 다가와 빙그레 웃기까지 했다.
"난 무섭지 않아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절 데리고 가주세요. 절 가지세요."
그리고 옷을 벗었다. 달빛에 비친 그녀는 그렇게 아름답고 황홀할 수가 없었다. 분같이 부드
러운 두 어깨, 봉긋하게 솟아오른 탐스런 젖가슴, 매끄러운 살결, 개미처럼 가는 허리. 그녀
의 알몸에서는 사내들을 취하게 하는 향기로운 체취가 물씬 풍겼다.
이 몇년 동안 여인을 가까이 하지 못한 양과는 그녀의 아리따운 자태에 온몸이 달아 올랐
다.
오군영은 양과 곁으로 더 바짝 다가왔다. 그 보드라운 두 팔로 양과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탱탱한 몸으로 양과의 몸을 덮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양과는 불끈불끈 치솟는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몸을 했다.
"양대협님."
오군영은 눈을 뜨고 양과를 바라보았다. 몹시 서운하고 원망에 찬 눈길이었다.
양과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오군영의 눈길을 마주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소저는 이미 양효비의 처실임을 잊지 마시오."
오군영은 몸을 떨었다.
"그 사람은 절, 저를 믿지 않는 사람이에요."
양효비가 여기 왔다 갔단 말인가? 양과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양효비는 지금 어디 있소?"
오군영은 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그 사람은 저를 건드리다 남은 찌꺼기라고 욕하고는……."
양과는 그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오군영은 분 같은 자기 피부를 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 모두 대장부가 아니야."
그녀는 다시 옷을 입고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그런데 등에 배기는 것이 있었다. 더듬어보니
호신용으로 쓰는 비수였다.
한 사람은 내 결백을 믿지 않고 또 한 사람은 나를 가지려 하지 않으니 의지할 곳도 없고
정줄 곳도 없게 된 나,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리 차라리…….
오군영은 비수를 들어 자기 가슴을 겨누었다.
제8장 숲속의 혈투
불타는 듯한 아침 노을, 울긋불긋 피어나는 산꽃들, 아침 햇살이 온 누리에 퍼진다.
양과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아침해를 바라보며 산꽃들 사이로 걸어갔다. 아침의 산야는 사
뭇 조용했다. 그러나 양과의 마음은 평온할 수가 없었다.
간밤에 그는 오래도록 산속을 헤맸으나 양효비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산자락에 있는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또 노완동 주백통과 오군영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집은 텅
비어 있
었다.
양과는 산꼭대기로 치달아올라 목청껏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듣고 주백통이 대답할 줄 알았
다. 그러나 소식이 없었다. 양과는 크게 실망했다.
주백통 형님은 비록 생각은 단순하나 무공이 출중하고 강호를 그냥 제 마음대로 누비고 다
니는 사람이니 근심할 것 없고 양효비도 재질이 출중하니 크게 근심할 것이 없지만 문제는
여태까지 강호에 나서 본 적이 없는 천금소저 오군영이었다. 오군영의 신상에 불미스런 일
이 일어난다면…… 어젯밤 오군영의 정상적이 아닌 행동을 돌이켜본 양과의 심정은 심히 불
안했다.
양과는 거와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군영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면 도중에서 그녀
를 따라잡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와장이 눈 앞에 보이는 데도 오군영은 보이지 않았다.
양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성한 수림 위엔 아침 안개가 감돌 뿐 인적은 없었다.
그런데 왼쪽 수림에서 병장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군영이 집으로 가다가 악당들을 만난 것일까?
양과는 그쪽으로 뛰어갔다. 싸우는 소리 속엔 과연 여자의 목소리가 들어 있었다.
오군영이 잘못되면 큰일이다. 거와장 오 장주에게 뭐라고 말하겠는가?
양과는 경공을 써서 나무 위로 날아올라 이어 그 나뭇가지를 디디며 청정점수( 點水)의 초
식으로 몸을 솟구쳐 수림 위를 열여덟 장이나 날아갔다. 그리고는 사람이 보이는 거리에 소
리없이 내려 나무 뒤에 몸을 감추었다. 앞은 잡초가 깔린 수림 속의 빈터였다. 거기서 일남
일녀가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을 자세히 본 양과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 여자는 오군영이 아니라 독주여니 완안방
방이었다. 그녀와 확도가 죽일 기세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혁중달이 마흔 근짜
리 낭아봉을 들고 긴장한 채 서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진웅, 장기, 연무, 임맹 등 확도의
사대제자들이 서서 자기네 사부를 위해 소리쳐 응원하고 있었다.
완안방방의 검은 며칠전 육가장에서 양과한테 두 동강 났는데 그 사이 어디서 어떻게 얻었
는지 새 검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위력있는 서역검술로 연신 확도를 공격했다.
확도는 접선을 썼는데 초가 쓰는 초식도 서역무공의 초식이었다.
하나는 검을 쓰고 하나는 접선을 썼지만 둘다 서역 무공이었고 또 둘다 극히 무공이 높아서
벌써 백여 합을 싸웠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확도는 갑자기 접선을 탁하고 모아 그 끝으로 완안방방의 천계(天溪), 신봉(神封), 대포(犬
包), 석문(石門) 등의 대혈을 번갈아 찔러왔다. 완안방방은 검을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확
도의 부채 끝을 연속 내쳤다.
"이 반역자야, 네 사부님인 금륜법왕은 내 사형이다. 그런데 내가 네 그 잘난 점헐수법(點穴
手法)을 모를 줄 아냐?"
완안방방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검술을 돌연 바꿨다. 돌아가는 검빛이 무지개를 이루며
무형의 방패를 이루었다. 확도는 십수번이나 초식을 바꾸며 공격해도 그 방패를 궤뚫을 수
가 없었다. 완안방방의 이 검술은 확도의 그 판관필법(判官筆法)을 가장 확실하게 막아내는
검술이었다.
그러나 완안방방은 방어만 하지 않았다. 문득문득 재빠른 기습공격을 들이대곤 하는데 확도
는 그럴 때마다 황망히 물러나며 접선을 펼쳐 완안방방의 검을 막곤 했다.
확도의 접선은 그 살이 강철로 되어 있다. 그래서 완안방방의 검과 마주치기만 하면 땡땡
소리가 났다.
확도는 점점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연신 후퇴했다.
완안방방은 사정을 두지 않고 계속 공격했다. 아예 죽여 버릴 심산이었다. 그것을 본 사대제
자들이 병장기들을 꼬나들었다.
"사부님 힘내세요. 제자들이 여기 있어요."
장기가 소리쳤다. 임맹도 손에 든 큰 칼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칼을 써요 칼! 사부님 힘이 그 여자보다 더 세잖아요?"
"칼은 안 돼.저 비구니는 내력을 채 다 쓰지 않았어. 칼로 못 제압하면 저 비구니의 검에 당
할 수도 있어."
연무가 임맹의 말을 부정했다.
"자넨 검을 쓰는 사람이니까, 검술을 잘 알겠지만 그렇다고 칼이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
어? 매번 자네는 내 칼에 지잖아?"
"뭐? 내가 매번 양보를 했더니 정말로 지는 줄 알아?"
연무가 화를 냈다. 그러자 임맹이 칼을 들며 대들었다.
"그래 여기서 한번 해볼까? 자네 검술이 나은가 내 칼이 나은가 한번 겨루어볼까?"
연무가 가소롭다는듯이 코웃음을 치며 검을 꼬나들었다.
"해볼테면 해보자. 내가 무서워할 줄 알았더냐?"
그러나 사대제자 중 첫째인 진웅이 그들 둘을 나무랐다.
"사부님께서 생사박투를 하고 계시는데 이게 무슨 짓들이냐? 가만 있지 못하겠어?"
그제서야 연무와 임맹은 상황을 판단하고는 가만 입을 다물었다.
"사부님 무공이 저 완안방방보다 높으니 너무 걱정말게. 꼭 이긴다."
진웅이 낮게 말했다.
"그런데 왜 사부님이 밀리는 거죠? 손발놀림이 난잡해졌잖아요?"
장기가 물었다.
"사부님께서 백에 하나로 골랐다는 제자들이 말하는 것 좀 보게. 그래 아직도 모르겠어?"
확도와 같은 접선을 손에 든 진웅이 이렇게 아우들에게 빈정거렸다. 연무와 임맹은 잠시 생
각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글쎄 우리들은 머리가 둔해서, 형님이 어디 가르쳐 주구려."
"내가 가르쳐줄 것도 없다. 보고 있자면 자연 알게 될거다."
진웅은 우쭐해서 말했다. 사대제자들은 말을 그치고 앞을 바라보았다. 확도가 무엇에 걸린
듯 비 틀하더니 옆으로 넘어졌다. 완안방방이 그 기회를 놓칠세라 뛰어나오며 검으로 내찔
렀다. 이쪽에서 연무와 임맹이 놀란 소리를 지르고 저쪽에서는 혁중달이 환성을 울렸다.
그러나 나무 뒤에 숨은 양과는 냉소를 보냈다. 확도가 그렇듯 쉽게 당할 수 없음을 알고 있
었기 때문이다. 여기엔 확도의 간교한 궤계가 들어 있다. 양과는 이렇게 생각하며 완안방방
과 확도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 개싸움에서 그 어느 하나가 죽어도 무림에 이익이 되면 되었지 해는 없었다.
양과의 예측대로 확도는 넘어지는 척했을 뿐이다. 이런 방법으로 완안방방을 유인해서 완안
방방의 검이 찔러오자 즉각 접선을 들어 땅하고 막아쳤다. 그러면서 동시에 완안방방의 단
전을 겨냥하여 발길을 힘껏 날렸다. 와룡파미(臥龍擺尾)란 초식이었다. 이 초식은 서역의 초
식이 아니다. 확도가 남북의 퇴법(腿法)을 참조하여 스스로 창안해낸 것이다. 자신감에 차
있는 적이 긴장을 풀 때 쓰는 초식이었다.
불시에 확도의 발길이 날아오자 완안방방은 대경실색해서 급히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
나 이미 앞으로 돌진하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급히 단전에 진기를 몰아넣었다.
그러는 순간 확도의 발끝이 완안방방의 단전에 닿았다. 그 찰나 완안방방은 몸을 솟구쳐 확
도의 머리 위로 날아 넘어갔다.
다행히 이렇게 재빨리 행동했기에 완안방방은 확도한테 약간 채였을 뿐이다. 그러나 확도는
그녀를 죽일 작정으로 전력을 다썼기에 그 발길질의 힘은 대단했다. 완안방방은 약간 채였
지만 아랫배가 끊어지는 듯했다.
확도의 사대제자들 앞에 떨어진 그녀는 우선 체내에 흩어지는 진기부터 수습하려 했다. 그
런데 확도의 사대제자들이 병장기를 들고 그녀를 에워쌌다.
진웅은 완안방방의 배에 있는 신궐(神闕)혈을 겨누고 접선을 내찔러 왔으며 연무와 장기는
검으로 그녀의 좌우 옆구리를 각각 찔러왔고 임맹의 칼은 완안방방의 뒷덜미를 향해 내리쳐
왔다.
보통 때 같으면 그까짓 사대제자들의 공격 같은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확도에
게 채여 진기가 잘 돌지 않는 이때, 그리고 방금 죽음에서 벗어난 그 놀라움이 아직 가라앉
지 않은 이때, 그녀는 그들과 무모하게 맞부딪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검을 휘둘러 사대제자
들의 공격을 물리치는 한편 사대제자들을 겨누고 허위공격을 몇 번 했다.
내심 완안방방의 무공에 겁을 먹고 있던 사대제자들은 완안방방의 허위공격에도 흠칫하여
손을 멈추었다. 그 순간을 타고 완안방방은 사대제자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이때, 이미 땅에서 튀어 일어난 확도가 완안방방을 막았다. 그는 접선을 펼쳐 완안방방을 엇
비스듬히 내리쳤다. 완안방방은 급히 검으로 접선을 막았으나 오히려 몸은 뒤로 튕겨나 비
틀거렸다.
확도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내 오늘 네년을 지옥으로 보낼테다."
그러면서 접선으로 완안방방을 계속 내리쳤다. 완안방방은 내심 탄식을 했다. 이젠 죽나보
다. 단 한번의 실수로 이렇게 죽는구나. 그런데 그 순간 혁중달이 번개같이 달려나오며 낭아
봉으로 확도의 뒤통수를 내리쳐 왔다.
"우리집 아씨를 다치게 하지 말아."
뒤에서 이는 바람소리만 들어도 그 힘이 굉장함을 느낀 확도는 완안방방은 그냥 두고 얼른
몸을 비켜 낭아봉부터 피했다. 그리고는 혁중달의 겨드랑이 밑에 있는 극천혈(極泉穴)을 겨
누고 접선을 내찔렀다. 혁중달은 그 접선을 피하며 또 낭아봉을 휘둘렀다.
금나라 장군이었던 혁중달이 원래 배운 것은 말타고 싸우는 기마무공이었다. 무림의 여러가
지 무공과 내공은 후에 완안방방에게서 배웠다. 그러니 혁중달의 무공이 이십여 년이나 연
마한 확도의 무공을 따를 수는 없었다. 혁중달은 확도와의 싸움에서 열세에 처했다.
자기네 사부가 우위를 차제하자 사대제자들은 마음놓고 구경했다. 그들은 완안방방을 쫓아
가 싸울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완안방방의 무공이 무서워 그만두고 자기들 사부를 옆에서 응
원하기만 했다.
완안방방은 이 기회에 얼른 진기를 수습했다. 그리고는 얏 하는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어 확
도와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혁중달은 방금 사대제자들에게 조롱당한 것이 분해서 사대제자들에게 덮쳐들었다.
"이 꺽다리 같은 자식이 죽고싶어 환장했나?"
임맹은 해저노월(海底擄月)의 초식으로 칼을 써서 혁중달의 낭아봉을 막았다. 칼과 낭아봉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병장기들도 튕겨나고 그들도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힘깨나 쓰는 놈이구나, 어디 내 낭아봉을 또 한번 받아봐라."
혁중달은 두 눈을 부릅뜨더니 또 낭아봉을 휘두르며 임맹에게 달려들었다.
임맹은 급히 뒤로 뛰어 피했다. 방금 혁중달과의 첫번째 싸움에서 그는 자기 힘이 혁중달을
못 당함을 알았다. 그때 부딪친 충격에 임맹은 두 어깻죽지가 아직도 저려 팔을 마음대로
놀릴 수가 없었다. 임맹은 하는 수 없이 잔재주를 부리며 혁중달에게 대적하려고 했다. 그러
나 완안방방을 따라 십수 년 무예를 익힌 혁중달의 낭아봉이 신출귀몰해서 임맹은 아무래도
혁중달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그것을 본 장기가 검을 꼬나들고 나섰다.
"내 검을 받아라."
혁중달은 장기와 임맹 둘이서 달려드는 데도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낭아봉을 휘두르며 용
감히 싸웠다. 장기와 임맹은 둘의 힘으로도 감당할 수가 없어 뒷걸음질쳤다.
그때 진웅과 연무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넷이 혁중달을 에워쌌다.
혁중달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꺽다리 같은 놈, 웃긴 왜 웃어?"
그들 넷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혁중달은 싸우는 한편 그들에게 욕지거리를 했다.
"몰염치한 놈들! 이 장군은 너희들이나 너희들 스승이나 모두 염치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비
웃는 거다. 스승이란 놈은 사문을 배반한 반역자고 제자란 놈들은 수효만을 믿고 아무한테
나 덤벼들고……."
"우리 힘을 모아 저 자식을 때려눕혀 강호에서 머리를 못들고 다니게 하자."
진웅이 그렇게 말하자 셋은 의기투합되어 고함을 치며 각기 힘을 다해 혁중달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 넷도 혁중달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무거운 낭아봉이 바람을 일으키며 이리치
고 저리 치는데 넷의 재간으로는 도무지 접근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가만, 에워싸고만 있어라. 저놈이 힘이 다 빠지면 일제히 공격하자."
진웅이 소리쳤다.
확도와 완안방방의 싸움도 굉장했다. 각기 모든 재주를 다써서 상대방을 죽이려고 날뛰었다.
그런데 완안방방은 확도보다 몇년 늦게 입문한데다가 여자의 몸이라 힘도 확도만은 못했다.
완안방방은 계속 이렇게 싸우다가는 자기가 먼저 지쳐 버릴 것 같았다. 그러면 확도에게 죽
는다. 완안방방은 자기 문파의 절기(絶技)를 쓰기로 했다.
그녀는 초식을 돌변시켜 서역 검법의 절학(絶學)인 삼십구로(三十九路) 난피풍(亂披風) 검법
을 썼다.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귀청을 찢는 속에 완안방방의 검은 천자루 검이 휘둘
러대는 듯한 환각을 자아냈다. 단번에 무수한 검날이 확도에게 비바람처럼 날아오는 것 같
았다. 확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확도는 대경실색하여 어쩔 바를 몰랐다. 과거 금륜법왕에게 무예를 배울 때도 이런 검법은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금륜법왕이 이런 절기를 자기에게는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금륜
법왕을 원망했다. 그러나 이건 금륜법왕에게는 아주 억울한 욕이었다. 사실 이 '난피풍'이란
검법은 금륜법왕도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확도에게 전수해 줄 수 있었겠는
가? 이 검법은 서부신교(西部神敎)의 교주만이 알고 있는 검법인데 완안방방이 어떻게 연마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난피풍이라는 검법이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여태까지 보지 못한 확도는 완안방방의 검법이
위력 무쌍한 데 크게 놀랐다. 그것이 자기 문파의 절학임을 추측하고 두려운 기색으로 물었
다.
"교주한테서 배운 거로구나?"
"교주님 검법인 줄 알았으면 잔말 말고 꿇어 엎드려라."
"흥, 그따위 소리에 놀랄 내가 아니다."
완안방방은 공격하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교주님과 난 너 같은 반역자를 없애려고 이번에 같이 왔다."
확도는 그말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조는 완안방방의 검을 막는 한편 힐끔힐끔 사방을 살폈
다.
"거짓말. 교주님은 원래 중원에 오기 싫어하는 분인데, 누가 모를 줄 아느냐?"
그 말에 완안방방은 차디차게 웃었다.
"서부신교 삼백 년에 너같이 제자가 스승을 배반한 예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그런데도 교주
님이 너 같은 배신자를 가만놔둘 줄 알았더냐?"
확도는 금세 얼굴빛이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완안방방의 난피풍 검법도 막기 어려운데 정
말 교주까지 자기를 잡으러 왔다면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자기가 금륜법왕을 배반하고
숨어다닌 지 이미 이십 년이 된다. 생사를 건 치열한 싸움에서도 그는 추측하기를 교주가
제자들을 풀어 자기를 붙잡게 해놓았을 수도 있었고 교주가 직접 자기를 붙잡으러 왔을 수
도 있지 않은가.
그의 초식이 문란해짐을 본 완안방방은 더욱 공격을 강화해서 마침내 확도의 가슴팍을 반
자나 길게 찢어놓았다. 완안방방의 무공이 조금만 높았더라면 확도의 심장을 찔렸을 것이다.
확도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급히 뒤료 물러나더니 수림 속을 향해 천방지축 달아났다.
"이놈, 가긴 어딜 가!"
완안방방은 기세등등하여 소리치며 쫓아갔다.
사대제자들도 사정이 불리해지자 혁중달을 그냥 두고 확도를 따라 달아났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서 두 사람이 나타나더니 확도의 제자들은 내버려두고 완안방방과 혁중
달을 막아섰다.
모용세가의 모용협과 그의 친구 탁장청이었다. 양과는 계속 나무 뒤에 숨어서 그들을 살펴
보았다.
완안방방은 그들 사이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바짝 모아서며 완안방방을
막았다. 완안방방은 미간을 찡그리며 그들을 비켜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 둘은 갈라지면서
완안방방을 또 막아섰다.
"왜 내 길을 막아서는 거요?"
완안방방은 화가 나 소리쳤다.
"황야 수림 속에 길이 어디 있기에 길을 막는다는 거요?"
모용협은 빙그레 웃기까지 했다.
"우리 문하에서 생긴 반역자를 추살하는 길인데 당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날 막는거
요?"
"그래요? 우린 거기서 누구를 쫓는 건지 알지 못했소이다. 우린 아침 공기가 시원해서 수림
속에 나와 산책을 하던 중이지요. 그런 일을 방해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모용협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쥐며 읍을 했다.
완안방방은 이 두 사내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공도 높을 뿐만 아
니라 각자의 가문의 세력도 굉장하다. 그래서 노기를 억지로 참고 혁중달과 같이 그들을 지
나치려고 했다. 그런데 모용협과 탁장청이 또 그들을 막아서는 것이 아닌가?
"어디 이런 것들이 다 있어?"
혁중달의 눈에서 불이 일었다. 그러나 모용협은 예사롭게 웃었다.
"난 남의 불공평한 일에 나서기를 잘하는 사람이외다."
혁중달은 낭아봉을 한번 흔들며 고성을 질렀다.
"안 비켜? 내 이 낭아봉은 사정을 몰라!"
여태까지 아무 소리도 안하고 있던 탁장청이 차디찬 음성으로 한마디 했다.
"거기가 사정 없으면 우리도 사정 없을 거요."
성미가 얼음같이 찬 그는 창백한 얼굴에 흑백이 분명한 두 눈을 가졌는데 그 눈길도 십분
차가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두려워할 혁중달이 아니었다.
혁중달은 야―앗 기합을 지르며 낭아봉을 휘둘렀다. 마흔 근이나 되는 낭아봉에 초인적인
혁중달의 힘까지 보태지자 그 위력은 천근이 넘는 듯 보였다.
탁장청과 모용협은 그 바람에 못이겨 뒤로 물러섰다.
탁장청은 오른손으로 허리에 찬 녹슨 검의 검자루를 틀어쥐었다. 손등엔 힘줄이 퍼렇게 불
거졌다.
"죽고 싶으냐!"
탁장청의 목소리는 얼음같이 찼다. 창백한 얼굴, 차디찬 눈길, 흩날리는 흰 옷자락! 마치 저
승사자 같았다.
"정말 누가 죽고 싶어 환장하는지 모르겠다."
혁중달은 낭아봉을 휘둘러 내리치려고 했다.
그러는 것을 완안방방이 말렸다.
상황 판단이 빠른 완안방방은 자기와 혁중달의 재간으로는 앞에 있는 두 젊은 협객을 당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지독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예부터 자신없는 일을 무모하게 해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녀는 갑자기 깔깔대며 웃었다.
"모용공자와 탁공자께서 확도를 비호하고 나서니 나 같은 여승이야 물러서야겠군요. 두 공
자님의 안면을 봐서 확도를 잠시 놔두지요."
"아씨, 저것들이 사람을 깔봐도 너무 깔봅니다."
혁중달의 말에 완안방방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여긴 우리 서역이 아니에요. 남의 집 문 앞이니 될 수 있는대로 조심해야 해요."
그말에 모용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오. 우리 중원 무림엔 중원 무림의 법이 있지요. 다른 고장 사람들이 와서 난동
을 부리며 난장판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양해하시오."
"그래 중원 무림에선 자기 문파를 배반한 자들을 가만 놔두나?"
혁중달은 노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채 물었다.
"중원 각 문파도 법이 엄합니다. 문파를 배반한 자들은 가만 놔두질 않지요. 두분께서 기어
이 그 배반자를 없애 버리겠다면 저한테 맡기십시오. 확도를 붙잡으면 서역으로 압송해 보
내리다. 어떻습니까?"
모용협의 말에 완안방방은 깔깔 웃었다.
"확도는 무공이 고강할 뿐만 아니라 위인이 간교하기 그지 없는데 오늘 호기를 잃었으니 그
쪽에서도 방법이 없을 겁니다."
그 말은 '모용협 네가 확도를 붙잡아 봐라' 하고 조롱하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나는 무공이 평범하지만 우리 중원에는 뛰어난 인재가 부지기수입니다. 확도를 이길 사람
이 어찌 천 명만 되겠습니까? 그러니 그건 두 분께서 걱정마시고 어서 서역으로 돌아가 주
십시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완안방방이 물었다.
"중원엔 문파들이 많은 데다 내부의 싸움까지 빈번한데 만약 두 분께서 잘못 휘말리기라도
된다면 온전히 빠져나올 수가 있을지 걱정입니다. 더욱이 중원 사람들은 본래 다른 민족 사
람들을 배척하는 습관이 있는데 자칫하면 큰 봉변을 당합니다. 그러면 나라고 마음 편할 리
있겠습니까?"
모용협의 말은 완안방방과 혁중달을 어서 가라고 쫓아내는 말과 다름 없었다. 셈이 빠른 완
안방방이 그 뜻을 모를리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나 완안방방을 그렇게 업신여기지 마라. 언젠가 내게 혼날 줄
알아라.' 그러면서도 완안방방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모용공자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빈승은 십년 공부를 한 것보다 더 많이 알았습니다. 그럼
우리 둘은 서역으로 돌아가 모용공자께서 확도를 압송해 보내는 것만 기다리겠습니다."
―제20권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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