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5-2

3학년2반 | 2022.03.05 07:46:43 댓글: 0 조회: 541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3064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5 권


제 3 장 발가벗은 미녀(美女)


이날 오후 장무기 일행은 마차 세 대에 분승하여 북쪽으로 향했
다. 하루도 채 못 되어 이들은 원조(元朝)의 경성(京城)인 대도
(大都)에 당도했다. 당시 몽고인의 철기(鐵騎)가 동서양을 거의
다 정복하여 유례없는 광활한 국토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들이
경성으로 정한 대도가 바로 훗날의 북경(北京)이다.

황제가 기거하는 경성이니만치 여러 작은 나라와 각 부족에서
파견한 조공사신들이 부지기수였다. 장무기 일행이 성문 안으로
들어서 보니, 가는 곳마다 행인이 북적거리며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을 지닌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네 사람은 서성(西城)에 당도해 객점을 찾아들었다. 양소는 거
상(巨商)을 흉내내기 위해 씀씀이가 컸다. 그는 시설이 잘 돼 있
는 객방 세 칸을 빌려 점원에게도 돈을 넉넉히 뿌렸다. 점원은
자연히 그들을 신주 모시듯 하며 깍듯이 모셨다.

양소는 성 안의 명승고적에 대해 거론하다가 자연스럽게 고찰사
원(古刹寺阮)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점원은 가장 먼저 서성 부
근에 있는 만안사(萬安寺)를 꼽았다.

"만안사는 정말 규모가 대단합니다. 주위는 온통 숲으로 둘러싸
여 있고, 사내에 동(銅)으로 만든 불상 세 개가 있는데, 아마 세
상에서 그보다 더 큰 불상을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물론 구경
할 만한 곳이지만 어르신네들은 때를 잘못 잡았습니다. 반 년 전
부터 서역의 번승(番僧)들이 상주한 후로부터 일반 사람들은 얼
씬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양소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말했다.

"번승이 있다고 해서 구경을 가지 말라는 법은 없잖는가?"

점원은 혀를 날름거리며 주위를 두리번 살피더니 나직한 음성으
로 말했다.

"소인이 공연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르신네들은 아마 경성
이 초행길인 모양인데 언동을 조심해야 할 겁니다. 그 번승들은
자기네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후려패고 심지
어는 죽이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게다가 예쁘장한 여인이 눈에
띄기만 하면 나이를 불문하고 잡아가 갖은 방법으로 욕심을 채운
답니다. 그들은 황제를 등에 업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감히
불행을 내색할 수 없습니다."

서역의 번승들이 몽고인의 세도를 등에 업고 갖은 악행을 일삼
고 있다는 걸 양소 등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점원과 더 이상 긴 얘기를 늘어놓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은 운공조식을 하며 이경이 될 때를
기다려 창문을 뛰어넘어 만안사를 찾아나섰다.

만안사는 사층 누각으로 되어 있고 뒷편에 십 삼층이나 되는 보
탑이 있어 멀리서도 쉽게 확인할 수가 있었다.

장무기, 양소, 위일소 세 사람은 경공술을 전개해 순식간에 사
찰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손짓을 하더니 재빨리 사
찰 왼쪽으로 돌아 보탑 위로 오르려 했다. 일단 높은 곳에 서서
주위의 상황을 살펴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답에서 약 이십여
장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을 때, 그들은 계획을 변경해야만 했다.
답 주위에 이 삼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을
뿐 아니라, 매층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순시를 돌고 있는 게
시야에 잡혔다.

장무기 등은 내심 놀라는 한편 한 가지 새로운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탑 주위에 철통 같은 경계망이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소림, 무당 등 각 문파의 사람들이 갇혀 있는 게 분명했다. 이젠
더 이상 그들의 행방을 찾는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
렇다고 해서 섣불리 행동을 취할 입장도 못 되었다. 공문대사,
송원교 등이 제압당한 것을 보면 상대방의 실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였다. 보탑 육층에서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며 열 명 가량이
손에 횃불을 들고 천천히 이동하는 게 보였다. 횃불은 육층에서
오층으로, 다시 사층으로 옮겨지며 결국 맨 아랫층으로 내려와
보탑 정문을 빠져 나오더니 사찰 뒷편으로 직진했다.

양소의 손짓에 따라 세 사람은 측면으로 조심스레 접근해 갔다.
만안사 뒷쪽은 아름드리 고목이 우거져 있어 세 사람에게는 좋은
은폐물로 이용될 수 있었다. 워낙 경공술이 뛰어난 세 사람이지
만 그래도 신중을 기하기 위해 낙엽이 떨어지는 순간에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곤 했다.

그렇게 이십 장 가량 접근해 가자 비로소 상대방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들은 황색 창포를 입은 사내들로서 제각기 횃불
과 무기를 쥔 채 한 노인을 압송하는 중이었다.

압송당하는 노인은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우연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장무기는 즉시 그를 알아보았다. 바로 곤륜파의 장
문인 철금선생 하태충이 아닌가!

황색 장포를 입은 사내들은 하태충을 앞세워 으슥한 뜨락안으로
들어갔다. 장무기 등은 잠시 주위를 살펴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담장을 뛰어넘었다. 뜨락은 제법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곳곳에 불당이 세워져 있어 흡사 소림
사를 연상케 했다. 이때 한복판에 위치한 대전(大殿) 안에서 불
빛이 새어나왔다. 하태충이 그곳으로 압송된 게 분명했다.

장무기 등은 대전 앞으로 바짝 접근해 갔다. 양소와 위일소는
좌우로 갈라져 망을 보고, 장무기는 창문 틈새를 통해 대전 안을
엿보았다. 이곳이 용담호혈이니 만치 비록 절정무학을 지니고 있
는 세 사람일지라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창문 틈이 워낙 좁아 하태충의 하반신만 보일 뿐 장무기는 다른
사람의 모습은 탁자등에 가려서 볼 수 없었다. 곧 하태충의 노기
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들 손에 함락된 이상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러니
나더러 오랑캐 조정에 협력케 할 생각은 아예 포기하는 게 현명
할 것이다. 한민족(漢民族)을 위해 이바지 못할 망정 내 어찌 몽
고 오랑캐의 앞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

장무기는 그의 말을 듣고 암암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철금선생은 비록 정인군자라 할 수 없지만, 일파의 장문인
다운 기개는 지니고 있군.'

곧이어 한 남자의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정녕 옹고집을 부린다면 더 이상 강요를 하지 않겠다. 그
대신 이곳 주인이 정한 규칙을 알고 있으렸다!"

하태충은 냉소를 날렸다.

"흥! 내 열 손가락이 전부 절단된다 해도 결국 투항을 하지 않
을 것이다."

"좋다.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겠다. 네가 만약 우리 세 사람을
이길 수 있다면 즉시 풀어주겠다. 그 반대로 네가 패한다면 손가
락 하나를 절단시켜 한 달을 더 감금시킨 연후에 투항 여부를 다
시 묻겠다."

"난 이미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됐으니 하나가 더 끊어진들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어서 검을 갖고 와라!"

"흐흣.....! 열 손가락이 모조리 없어진 후에는 설령 투항을 한
다 해도 폐물이나 다름없으니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자, 검을
갖다 줘라. 그리고 마가파사(魔訶巴思), 자네가 먼저 그와 몇 수
놀아 보게."

다른 한 굵직한 음성이 대답했다.

"네."

장무기는 손가락 끝에 신공을 운용해 창문 틈을 조금 넓혔다.
시야가 좀전보다 많이 트였다. 하태충의 손에는 한 자루의 목검
이 쥐어져 있는데 검끝은 헝겊으로 돌돌 말아 상처를 입힐 수 없
게 해 놓았다. 그의 맞은편에 서 있는 자는 체구가 우람한 번승
으로 손에 시퍼런 광채가 번뜩이는 계도를 쥐고 있었다. 두 사람
이 구태여 겨룰 필요도 없이 무기만으로도 승패를 판가름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태충은 위축되는 기색없이 당당하게 목검을 들어 올렸
다.

"자, 어서 공격해라!"

그는 말을 내뱉기 무섭게 일검을 떨쳐냈다. 그 검세는 날카롭기
이를데 없었다. 곤륜검법은 과연 독특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번승 마가파사는 우람한 몸집에 비해 행동이 매우 민첩했다. 그
는 계도를 종횡무진으로 떨치며 계속 하태충의 급소만 노렸다.

'철금선생의 걸음이 왜 저렇게도 맥이 없을까? 내력(內力)을 전
부 상실한 것 같기도 하고.....'

하태충의 검법은 정교했지만 내력이 뒷받침해 주지 못하므로,
그 위력을 제대로 나타낼 수 없었다.

번승의 무공은 어느 면으로 보나 그보다 두 수 가량 뒤떨어졌
다. 그는 거듭 맹공을 펼쳤지만 번번이 하태충의 절묘한 검초에
기선을 빼앗겼다. 약 오십여 초식을 겨루자 하태충의 입에서 짤
막한 기합이 터졌다.

"받아라!"

그의 목검이 동쪽으로 떨쳐지는 듯 싶더니 어느새 서쪽으로 방
향을 꺾어 전광석화같이 빈승의 옆구리를 찔렀다. 만약 그의 손
에 예리한 검이 쥐어져 있었거나 내력을 상실하지 않았다면 번승
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게 됐을 것이다.

즉시 그 냉랭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마가파사는 물러나 온와아(溫臥兒)가 공격해라!"

장무기는 그 냉랭한 음성이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히끗
히끗한 수염이 마치 숯칠을 한 듯한 거무죽죽한 얼굴이 눈에 들
어왔다. 바로 현명이로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뒷짐을 쥔 채
서서 눈을 게슴츠레 접고 목전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전
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다시 그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 비단으로
씌운 앉은뱅이 걸상이 놓여 있고, 그 걸상 위에는 한쌍의 맨발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나이 어린 비녀가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맨발의 발톱을 정성스레 다듬어 주고 있었다. 걸상 옆에 가지
런히 놓여 있는 비단신에는제각기 붉은 구슬이 박혀 있었다.

장무기는 이내 가슴에 와 닿는 게 있었다. 손아귀에 쏙 들어올
만큼 그 발은 작은데다가 뒤꿈치의 선이 원만하며 상아를 다듬어
놓은 듯 티끌만한 흠도 찾아볼 수 없이 매끄러웠다. 실로 예쁜
맨발이었다.

장무기는 첫눈에 그 맨발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예전에 녹
류장에서 자기가 손에 쥐어 보았던 조민의 발이었다. 무당산에서
그녀와 대면했을 때는 서로 적대 감정이었지만, 지금 비단 걸상
위에 올려져 있는 그녀의 맨발을 보자 웬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가슴이 마구 뛰었다.

조민은 오른발을 비녀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하태충과
온와아가 겨루는 것을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차 한 잔 마시는 시간이 경과되었을까. 하태충의 짤막한 기합소
리에 이어 조민이 발 끝으로 갑자기 비녀를 밀어 냈다. 온와아마
저 패하고 말았다. 얼굴이 시꺼먼 현명노인의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온와아는 그만 물러나고 흑림발부(黑林鉢夫)가 실력을 보여 줘
라!"

장무기는 하태충의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연거푸 두
사람을 상대해 왔으니 몹시 지친게 분명했다. 삽시간에 다시 악
투가 벌어졌다. 흑림발부는 육중한 철장(鐵杖)을 무기로 사용했
다. 그가 철장을 전개할 때마다 거칠은 바람이 일며 거기에 따라
촛불이 어두워졌다 밝아지며 덩달아 춤을 추었다.

홀연, 몇 자루의 촛불이 일제히 꺼지며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목검이 부러졌다. 하태충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부러진 목검을
바닥에 팽개쳤다. 이번에는 패하고 만 것이다. 현명노인이 으례
그 감정없는 말투로 물었다.

"철금선생, 그래도 항복하지 않겠나?"

하태충은 앙연히 대꾸했다.

"항복할 수도 없거니와 승복할 수도 없다! 내력만 상실하지 않
았다면 저런 번승 따위가 어찌 나의 적수가 될 수 있겠느냐?"

현명노인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차갑게 명령했다.

"그의 왼손 무명지를 잘라 다시 탑으로 데려가라!"

장무기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양소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고
개를 내둘렀다. 지금 대전 안으로 뛰쳐 들어가면 큰일을 망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곧이어 대전 안에 새로 촛불이 밝혀지고 손가락을 절단하고, 다
시 약을 발라 치료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하태충은 신음은 고
사하고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비녀는 정성스레 조민의 발을 씻어 주고 나서 꽃신을 신겨 주었
다. 황의인들은 다시 하태충을 보탑으로 데려갔다.

장무기 등은 담구석에 몸을 숨긴 채 횃불이 비친 하태충의 안색
이 백지장처럼 창백하면서도 분노로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었
다.

일행이 떨어져 가자 대전 안에서 조민의 간드러진 음성이 들려
왔다.

"녹장선생(鹿杖先生), 곤륜파의 검법은 과연 대단하더군요. 그
가 마가파사를 제압했던 그 초식은 처음에 왼쪽으로 이렇게 떨쳐
내다가 다시 이렇게 오른쪽으로 돌려....."

장무기는 궁금하여 다시 창문 틈으로 살펴보니 조민이 손에 한
자루의 목검을 쥔 채 하태충의 검법을 흉내내고 있었다.

그녀가 녹장선생이라 부르는 자는 바로 얼굴이 시커먼 현명노인
이었는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주인의 총명함은 따를 자가 없습니다. 그 초식은 거의 한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조민은 계속하여 그 검초를 연습하고 나더니 다시 하태충이 온
와아에게 전개했던 절초를 골라 진지하게 모방해 나갔다. 녹장선
생은 옆에서 간혹 틀린 데가 있으면 자세히 시정해 주었다.

장무기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알고
보니, 조민은 각 문파의 고수들을 이곳에 가두어 약물로서 내력
을 잃게 한 후 투항하여 조정에 협력하라고 강요했다. 군호가 완
강히 거절하자 다시 교활한 수를 써서 각 문파의 절초를 차례로
훔쳐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실로 악랄하고 무서운 음모가 아닐
수 없었다.

이어 조민은 흑림발부를 불러내 그와 대련을 하더니 나중에 이
르러 초식이 둔해졌다.

"녹장선생, 이렇게 하는 게 맞나요?"

녹장객(鹿杖客)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고개를 돌려
한 마디 내뱉었다.

"학형(鶴兄), 난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혹시 기억하고 있나?"

그러자 대전 왼쪽 구석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보다 고대사(苦大師)가 더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걸세."

조민이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그의 말을 받았다.

"고대사, 수고스럽지만 가르침을 주시겠어요?"

그러자 대전 오른쪽 구석에서 한 사람이 소리없이 걸어나왔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두타(頭陀)로서 몸집
이 우람하며 얼굴이 온통 칼자국으로 얼룩져 추악하기 이를데 없
었다. 게다가 머리카락이 붉으스름한 것으로 보아 중원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조민의 손에서 목검을 받아
재빨리 흑림발부에게 공격을 전개했다. 바로 하태충이 전개했던
것과 똑같은 곤륜검법이었다.

이 고대사라고 일컬어지는 추하게 생긴 두타는 역시 하태충을
모방하여 내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흑림발부는 좀전과 마찬
가지로 전력을 다해 첫장을 전개해 나갔다. 막바지에 이르러 그
가 철장을 가로쓸자 주위에 촛불이 일제히 꺼졌다. 하태충은 바
로 이 초식에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어 마지못해 목검으로 철장과
맞부딪치는 바람에 목검이 부러져 패배를 시인해야만 되었던 것
이다. 그러나 이 고대사는 절묘하게 목검의 방위(方位)를 바꾸어
살짝 떨쳐내자 흡사 바다제비가 수면을 스치고 지나가듯 철장에
붙은 상태로 베어나갔다. 흑림발부는 철장을 쓸며 미끄러져 오는
목검이 손가락에 닿는 순간, 호구혈(虎口穴)이 마비되며 이내 철
장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얼굴이 빨개졌다. 만약 상대방이 사용
한 게 목검이 아니라 철검이었다면 영락없이 손가락이 잘라졌을
것이다. 그는 황급히 몸을 숙여 정중하게 말했다.

"정말 탄복했습니다."

그가 철장을 주워 뒤로 물러나자 고대사는 목검을 조민에게 건
네주었다.

조민은 활짝 웃으며 물었다.

"고대사, 마지막 초식을 정말 절묘했어요. 그것도 역시 곤륜파
의 검법인가요?"

고두타(=고대사)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조민이 다시 말했다.

"그래서 하태충이 구사하지 못했군요. 고대사, 그 초식을 저에
게 가르쳐 주세요."

고두타는 손을 검으로 삼아 허공에다 초식을 그려냈다. 조민은
그대로 따라서 했다. 세 번째 연습을 마치자 고두타의 동작이 갑
자기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라졌다. 조민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
었다. 그러나 검초가 느릴 뿐 여전히 흉내를 내갔다. 고두타는
갑자기 몸을 젖혀 쌍장을 쭉 밀어내더니 모든 동작이 정지되었
다. 장무기는 내심 갈채를 금치 못했다.

'앗! 정말 대단하군!'

조민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으나, 고
두타의 자세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이내 깨닫고 물었다.

"앗! 고대사, 만약 당신의 손에 철장이 쥐어져 있다면 그 자세
로서 필시 내 팔을 적중시켰을 텐데, 나는 그 위기를 어떻게 벗
어나야 하죠?"

고두타는 고정시켰던 자세를 풀며, 새로이 오른손에 검을 쥔 자
세를 취하는 동시 왼손으로 허공에 반원을 그려 철장을 나꿔잡으
며 왼발을 걷어차 냈다. 그 즉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이미 상
대방의 철장을 나꿔채고, 상대방을 걷어차 낸 것이다. 그의 몇
가지 동작은 둔해 보였으나 사실을 절묘한 변화가 담겨져 있는
외문절예(外門絶藝)였다. 조민은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대사, 그 절초를 좀더 자세히 가르쳐 주세요."

그녀의 요염한 웃음은 뭇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장무기는 다시 가슴이 뛰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내력이 부족한 주제에 그 절초를 어떻게 배울 수 있단 말인가?
계속 가르쳐 달라고 졸라 대면 상대방이 매우 난처해질 텐데....
...."

고두타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두 가지 손짓을 해 보였다. 그 뜻
은 "당신의 내력이 부족하니 배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곧 몸을 돌려 물러가며 더 이상 조민을 거들떠 보지 않았다.

장무기는 고두타의 정체에 대해 매우 궁금하게 느껴졌다.

'고두타의 무공은 현명이로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손짓만 할 뿐 말을 하지 않는 것일까? 혹시 듣기만 하
고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란 말인가? 조 낭자가 예의로서 그를
대하는 것을 보면 상당한 내력(內力)을 지닌 인물임에 분명한
데.....'

조민은 고두타가 자기의 청을 거절했는데도 전혀 화를 내지 않
고 빙긋이 웃었다.

"이번엔 공동파의 당문량을 불러오세요."

그녀의 분부에 따라 얼마 후 당문량이 끌려왔다. 녹장객은 다시
세 사람을 시켜 그와 세 판을 겨루게 했다. 당문량은 장풍으로
연거푸 두 사람을 깨었으나 세 번째 상대가 정면으로 내력(內力)
을 전개해 오자 속수무책이었다. 그 역시 손가락 하나가 잘려져
나갔다.

이번에는 조민이 공동파의 장법을 그대로 모방해 펼쳤고 녹장객
이 옆에서 가르침을 주었다. 장무기는 새삼 깨달은 바가 있었다.
조민은 자신의 내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내력을 쌓는데 세월
이 많이 걸리므로 가가 문파의 절예를 배워 짧은 시간 내에 일류
고수 대열에 끼려는 속셈임에 틀림없었다.

조민은 장법을 거듭 연마하고 나서 다음 상대를 골랐다.

"가서 멸절 늙은이를 불러오세요!"

한 황의인이 얼른 대답했다.

"멸절은 단식한 지 이미 닷새가 됐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고집을 부리고 있기 때문에 분부에 따르지 않을 겁니다."

조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굶어 죽게끔 내버려 두세요. 참, 아미파의 그 주지약이라
는 계집을 불러오면 되겠군요!"

그녀의 부하가 곧 대답을 하고 대전 밖으로 나갔다. 장무기는
주지약이란 이름에 가슴이 철렁했다. 잠시 후 한 무리의 황의인
이 그녀를 끌고왔다. 장무기의 시선은 조민으로부터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주지약은 예나 변함없이 청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
었다. 단지 광명정에서 보았을 때보다 다소 초췌해 보였다. 녹장
객은 그녀에게 항복여부를 물었지만 태연하게 고개를 내둘러 거
절했다. 생사 따위를 안중에 두지 않는 초연한 자세였다.

녹장객이 사람을 시켜 그녀와 검법을 겨루게 하려는데 조민이
입을 열었다.

"주 낭자, 그렇게 젊은 나이에 아미파의 절학을 익혔으니 정말
부럽군. 물론 이곳의 규칙을 잘 알고 있겠지? 우리중 세 사람만
꺾으면 무사히 보내주겠다는데 영사인 멸절사태는 왜 고집을 부
리는지 모르겠어."

주지약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스승님께선 목숨을 내놓을 망정 굴복을 하진 않을 겁니다. 당
당한 아미파의 장문인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당신네들과 같은
음독한 소인배와 겨룰 수 있겠습니까?"

조민은 화를 내지 않고 입가에 묘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럼 주 낭자의 생각은 어떠한가?"

주지약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어찌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스승님
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싸우지 않겠다는 뜻인데, 영사는 대관절 무엇
때문에 우리와 싸움을 피하려는 거지?"

"아미파의 검법은 비록 천하 제일의 절학은 아니지만, 중원에
널리 알려진 정통 무학임엔 들림없어요. 그런데 어찌 파렴치한
번승 오랑캐 따위가 그것을 훔쳐 배우게끔 도와줄 수가 있겠습니
까?"

그녀의 표정은 진지 했으나, 한 마디 한 마디가 상대방의 정곡
을 찌르는 비수와 같았다.

조민은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입가에 미소를 띄우는 여유를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었다. 멸절사태가 자신의 속셈을 꿰뚫어보고
있을 줄이야. 그녀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주지약
이 "음독한 소인배"니, "파렴치한 오랑캐"라고 서슴없이 말하자
은근히 화가 치밀어 대뜸 의천검을 뽑아 쥐었다.

"우리들더러 파렴치하다고 했는데, 그럼 한 가지 묻겠다. 이 의
천검은 우리 집안의 가전지보(家傳之寶)인데 어떻게 해서 아미파
가 훔쳐가게 되었지?"

주지약은 담담하게 말했다.

"의천검과 도룡도는 처음부터 중원의 신검보도(神劍寶刀)로 알
려졌을 뿐 오랑캐와 관계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
다."

조민은 이내 얼굴이 빨개지며 냉소를 날렸다.

"흥! 이제보니 입만 살았구나! 정말 출수하지 않기로 결심했느
냐?"

주지약은 고개를 내둘러 대답을 대신했다. 조민의 눈동자에 갑
자기 매서운 살기가 번뜩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손가락 하나만으로 충분하겠지만, 너는 그 반
질한 얼굴을 믿고 고집을 부리는 모양인데 다른 방법을 써야겠
다."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고두타를 가리켰다.

"저분 대사처럼 얼굴에 칼자국을 그을텐데, 그래도 건방을 떠는
지 봐야겠군!"

그녀가 손을 살짝 휘두르자 황의인 둘이 달려와 주지약의 팔을
뒤에서 꺾어 조민 앞에 무릎을 꿇게 했다.

조민은 태연하게 웃었다.

"너의 얼굴을 귀신탈바가지처럼 만드는데는 그 무슨 아미 검법
이 필요없겠지?"

주지약은 눈물이 글썽거리며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의
천검의 검 끝이 바로 코앞에서 어른거리고 있으니 악마와 같은
상대방이 살짝 손목만 놀려도 영락없이 고두타처럼 추한 모습으
로 변할 것이다. 조민은 그녀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즐기는 듯 잠
시 지켜보고 나서 퉁명스레 물었다.

"두렵느냐?"

주지약은 더 이상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러자 조민이 다시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그럼 항복을 하겠느냐?"

주지약은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항복하지 않겠다! 차라리 날 죽여라!"

조민은 구석에 몰린 쥐를 희롱하는 고양이처럼 여유만만했다.

"나는 살인을 하지 않는다. 단지 너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싶을
뿐이다."

말을 끝내기 무섭게 그녀는 손목을 떨쳤다. 그 순간, 난데없이
대전 밖에서 작은 물체가 날아와 의천검에 적중되었다. 그와 동
시에 창문이 박살나며 한 사람이 뛰쳐 들어왔다. 주지약을 잡고
있던 두 사람은 엄청난 회오리에 밀려 좌우로 벌렁 나자빠졌다.
창문을 뚫고 들어온 사람은 재빨리 주지약을 왼팔로 끌어안으며
녹장객과 일장을 교환했다.

펑!

쌍방은 제각기 뒤로 두 걸음씩 물러났다.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제서야 침입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명교의 교주인 장무기였다. 그는 마치 하늘에서 내
려온 천장군(天將軍)같았다.

놀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명이로 같은 일류 고수들
도 사전에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조민의
앞을 가로막고 장무기와 일장을 교환한 것이다. 그가 뒤로 두 걸
음 물러난 것은 고사하고 온몸이 갑자기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
는 것을 느끼고 내심 크게 당황해 했다.

한편 주지약은 위기일발의 순간 느닷없이 한 사람이 나타나 자
기를 도와 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장무기의 품
안에 안긴 채 남정네의 짙은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이어 장무
기임을 확인하자 놀라움과 기쁨이 엇갈려 순식간에 온몸이 솜처
럼 풀려 까무라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여지껏 남자의 품에 안겨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상대방은 오매불망해 오던 의중지인(意
中之人)이 아닌가! 그녀는 벅찬 기쁨을 무엇으로 형용해야 좋을
지 몰랐다. 주위에 비록 많은 강적들이 있지만 그녀는 그저 마음
이 든든했다.

양소와 위일소도 교주가 예고없이 대전 안으로 뛰어들자 잇따라
몸을 번뜩여 장무기 뒤편 좌우에 내려섰다.

조민의 수하 고수들은 창졸간에 일어난 변화에 처음엔 당황하는
듯했으나, 이내 포위망을 구축해 장무기 등의 퇴로를 완전히 차
단한 채 조민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조민은 놀라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지 멍하니 장무
기를 바라보다가 대전 한쪽 구석에 떨어져있는 금빛 찬란한 물건
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장무기가 의천검을 막기 위해 창졸간에
던져낸 물건으로서 바로 조민이 주었던 황금합이었다. 그 금합은
의천검의 예리한 날과 맞부딪쳐 이내 두동강이로 변해 있었다.
조민은 잠시 동안 그것을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 금합이 그렇데도 싫었나요? 이런 식으로 파괴해야만 속이
시원한가요?"

장무기는 그녀가 성난 음성으로 다그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눈
동자에 울적한 빛이 띄어져 있는 것을 보자 절로 멍해지며 미안
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몸에 암기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급한 나머지
품속에 집히는 물건을 꺼내 던진 것뿐이오. 고의가 아니니 양해
해 주시오."

조민의 눈동자에 야릇한 광채가 번뜩였다.

"그럼 이 금합을 늘 품 속에 간직하고 있었단 말인가요?"

"그렇소."

장무기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조민이 계속 야릇한 눈길로 장
무기를 주시했다. 장무기는 비로소 자기가 계속 왼팔로 주지약을
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이 약간 붉어지며 팔을 풀었
다.

조민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주 낭자가 당신의..... 친한 친구인 줄은 몰랐어요. 진작 알았
다면 그녀를 거칠게 대하지 않았을 거에요. 이제보니 두 사람
은....."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장무기는 자신도 모
르게 변명을 했다.

"사실 나는 주 낭자와 별로..... 별로....."

그는 말을 더듬거리며 제대로 잇지 못했다. 조민은 두 쪽으로
갈라진 채 버려진 금합을 다시 응시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지약은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저 여마두가 혹시 그에게 정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장무기는 그녀만큼 생각이 세세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조민이
준 금합으로 유대암과 은이정의 불치병을 치료했는데, 금합을 파
괴했으니 그저 미안한 생각만 앞섰다. 하여 한쪽 구석으로 걸어
가 잘라진 금합을 주워 정색을 하고 말했다.

"솜씨 좋은 장인(匠人)을 찾아 이 금합을 원상복귀시키겠소."

조민은 얼굴이 활짝 필 정도로 좋아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내심 투덜거렸다.

'무수한 영웅호걸들을 통솔하고 있는 자가 이런 금합 따위에 집
착하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역시 여자니까 시시콜콜한 것까
지 공연히 신경을 쓰는군.....'

그가 잘라진 금합을 다시 품 속에 갈무리하자 조민이 낭랑한 음
성으로 말했다.

"이젠 떠나도 좋아요."

장무기는 대사백 등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대로 떠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네 쪽 세 사람만으로 뾰족한 수가 있
는 것도 아니었다.

"조 낭자, 나의 대사백님 등을 어떻게 하실 작정이오?"

조민은 원래의 여유를 되찾았다.

"나는 호의를 베풀어 그들이 조정에 협력하여 각자 부귀영화를
누리라고 설득했어요. 한데 그들은 거절했어요. 나로서도 더 이
상 강요할 수 없으니 스스로 마음을 돌릴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예요."

장무기는 가볍게 냉소를 날리더니 다시 주지약 곁으로 걸어갔
다. 주위에 많은 고수들이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전혀 제
약을 받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행동했다. 그는 주위를 한 번 훑어
보고 나서 냉랭하게 말했다.

"정녕 그렇다면 우린 일단 떠나겠소이다."

이렇게 말하며 주지약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나가려 했다. 그
러자 조민이 대뜸 싸늘하게 외쳤다.

"당신이 떠나는 것은 좋지만 주 낭자를 데려갈 수 없어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즉시 현명이로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학
필옹(鶴筆翁)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음침하게 말했다.

"장교주, 한 수 보이지도 않고 그냥 사람을 데려간다면 우리 체
면이 뭐가 되겠소?"

장무기는 학필옹의 음성을 알아듣고 노기가 끓어올랐다.

"내가 어렸을 때 당신에게 잡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는
데, 무슨 낯으로 다시 내 앞에 나서는지 모르겠군요!"

말을 내뱉기 무섭게 대뜸 학필옹을 항해 일장을 뻗어냈다.

녹장객은 조금 전에 장무기와 직접 일장을 겨룬 바가 있으므로
학필옹 혼자의 힘으로는 그의 적수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앞을
다투어 일장을 격출해 냈다. 장무기는 오른손으로 학필옹을 노렸
으므로 왼손을 떨쳐내 녹장객을 맞이했다. 이것은 진력 대 진력
의 정면대결이니 만치 중간에서 몸을 피하거나 다른 얕은 수법을
쓸 만한 여지가 없었다.

세 사람의 장심(掌心) 네 개가 맞부딪치는 순간, 제각기 몸이
한 차례씩 휘청거렸다.

그날 무당산에서 현명이로는 쌍장으로 장무기의 쌍장과 맞부딪
치며 다른 쌍장으로 그의 몸을 공격한 바가 있었는데, 오늘도 똑
같은 수법을 전개했다. 그러나 장무기는 그날처럼 당하지 않았
다. 그는 즉시 건곤이위신공을 펼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학필
옹의 왼손이 녹장객의 오른손과 맞부딪치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
로 건곤이위신공의 묘미가 아니던가!

현명이로는 같은 스승 밑에서 무학을 쌓았으므로 장법이 같은데
다가 공력도 비등했다. 두 사람 모두 이내 심한 충격을 느끼며
아연실색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비록 무공이 뛰어났지만 어째서
갑자기 자기네끼리 장력을 맞부딪치게 되었는지 영문을 몰라 어
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들이 자세히 생각을 굴릴 여유도 없이 이번에는 장무기가 쌍
장을 뻗어내 선재공격을 했다. 현명이로는 여전히 쌍장을 격출해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펼쳤다. 조금 전에 전개했던 장법과는 판
이하게 달랐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 있으랴! 장무기가 건곤이위
신공의 묘미를 살려 다시 녹장객의 좌장이 학필옹의 우장에 적중
되게 만들었다. 이 건곤이위심법의 절묘함은 실로 불가사의했다.

현명이로는 또 한 번 아연실색을 해야만 했다. 장무기의 세 번
째 장풍이 뻗쳐오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제각기 한 쪽 손만
뻗어내 맞이했다. 세 사람의 진력이 정면으로 맞부딪쳐지자 현명
이로는 상대방의 장력 속에 한 갈래의 순양지기(純陽之氣)가 걷
잡을 수 없는 기세로 휘몰어쳐와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

장무기의 공격은 질풍 노도와 같았다. 어렸을 적에 학필옹의 현
명패천장을 맞아 그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죽을 고생을 겪어야
만 했던가! 하여 녹장객에게는 다소 사정을 보아 주었으나 학필
옹에게는 숨돌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십여 초식이 지나자 학필옹의 푸르스름하던 얼굴이 뻘겋게 상
기되었다. 상대방의 장력이 다시 앞으로 뻗쳐오자 황급히 왼손으
로 원을 그리며 와해시키려 했다. 동시에 오른손을 비스듬히 밀
어냈다. 다음 순간, 팍! 팍! 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며 학필옹
의 오른손이 엉뚱하게도 녹장객의 어깨쭉지를 강타했고, 장무기
의 일장을 끝내 막아내지 못해 가슴에 맞고 말았다. 그 즉시 학
필옹은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내며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장무기가 그 틈을 타서 다시 일장을 뻗쳐낸다면 영락없이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나 장무기는 오늘 만큼은 인명 피해를 내고
싶지 않았다. 녹장객도 어깨에 일장을 맞아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현명이로는 조민의 수하 중에 가장 걸출한 인물인데, 이십 여
초식만에 제각기 부상을 입게 된 것이다. 조민의 수하들은 당연
히 대경실색했지만 양소와 위일소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날 무당산에서는 장무기가 현명이로에게 부상을 입었는데, 불
과 몇 달 안에 상황이 뒤바뀌어진 것이다. 실로 경탄할 발전이었
다. 양소와 위일소는 이내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장무기
가 무당산에 머무는 몇 달 동안 장삼봉의 심오한 가르침을 받아
드디어 구양신공과 건곤이위신공, 무당의 절학인 태극신공 등 이
세가지 무상무학(無上武學)을 혼연일체로 융합시킨 게 분명했다.

양소와 위일소는 장삼봉의 고심막측한 무학 진리에 새삼 경탄을
금치 못했다.

현명이로는 장풍을 겨루어 패하자 즉시 무기를 전개했다. 녹장
객의 무기는 한 자루의 짧은 괴장(拐杖)으로 머릿부분이 갈라져
녹각(鹿角) 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가무잡잡한 윤기가 흐르는 것
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학필옹의 손에는 한 쌍의 붓이 쥐어져 있었다. 붓 끝이 학의 주
둥아리처럼 묘하게 생겼으며 한광이 번쩍였다.

현명이로는 조민을 따른 지 오래 되었지만 조민도 그들이 무기
를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일단 무기를 전개하자
한 갈래 흑기(黑氣)와 두 줄기의 백광(白光)이 허공을 수놓으며
장무기를 완전히 포위해 버렸다.

장무기는 빈손으로 그들을 상대해야 했으므로 상황이 다소 불리
했지만,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자
신의 무공을 시험해 볼 양으로 좌충우돌 맞서나갔다.

이때 조민이 손뼉을 쳐서 신호를 하자, 대전 곳곳에서 싸늘한
기합이 터지며, 세 사람은 양소를 겨냥해 덮쳐갔고, 네 사람은
위일소를 협공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은 공력을 잃은 주지약
을 제압했다.

양소는 잽싸게 상대방에게서 검을 한 자루 빼앗아 번개같은 검
광을 뿌려내자 황의인 한 명이 부상을 입고 물러났다.

위일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공술을 바탕으로 하여 현음면
장(玄陰綿掌)을 전개해 삽시간에 두 사람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상대방의 수가 많아 한 사람이 쓰러지면 즉시 두 사람이 덮쳐왔
다.

장무기는 현명이로를 상대하느라 좀처럼 그들을 도울 틈이 없었
다. 물론 양소와 위일소가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어려
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지약을 구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했
다. 그들이 어떻게 해야 좋을 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홀연 조민의 차가운 외침이 터졌다.

"모두 손을 거두세요!"

그녀의 수하들은 일제히 공격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양소는 장검을 바닥에 팽개쳤고, 위일소는 한 자루의 단도를 원
래 임자에게 던져주며 광소를 터뜨렸다.

장무기는 한 사나이가 비수로 주지약의 등을 겨냥하고 있는 것
을 보았다.

주지약은 그를 쳐다보며 울적하게 말했다.

"장공자, 세 분께선 어서 이곳을 떠나세요. 세 분의 고마운 뜻
은 결코 잊지 않을 거예요."

조민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말을 이어 장무기에게 말했다.

"장공자, 저 달덩어리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당신의 정인(情人)
인가요?"

장무기는 그녀의 노골적인 물음에 오히려 쑥스러워졌다.

"주 낭자는 나하고 소시적부터 아는 사이였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학필옹을 힐끗 노려보고 나서 다음 말을 이
었다.

"내가 현명패천장을 당해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서, 주 낭자는 나를 보살펴 주었소. 난 아직도 그 은덕을 잊을
수 없소."

"그렇다면 죽마고우였겠군요. 혹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려는
게 아닌가요?"

장무기는 웬지 당황해졌다. 그 당황함을 감추기 위해 단호하게
말했다.

"산하(山河)를 되찾기 전에 내 어찌 한 몸 편하고자 가정을 이
루겠소!"

조민은 이내 얼굴에 냉기가 감돌았다.

"끝까지 나하고 맞서 나를 죽음의 궁지로 몰아넣어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뜻이군요?"

장무기는 고개를 내둘렀다.

"나는 아직도 낭자의 진정한 신분을 모르고 있소. 비록 몇 번
다툼이 있었지만 언제나 낭자가 나 장무기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
었지 내가 낭자에게 트집을 잡은 적은 없소. 지금이라도 낭자가
나의 대사백님을 비롯한 각 문파의 협의지사들을 풀어준다면 적
대시하지 않을 것이오. 더군다나 낭자의 분부에 따라 세 가지 일
을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있소."

조민은 그의 진지한 태도에 매우 만족해 하며 활짝 웃었다.

"아직 잊지 않고 있었군요."

이어 주지약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계속했다.

"저 주 낭자가 당신의 정인도 아니고 사매도 아니니, 내가 그의
얼굴을 추하게 만들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겠군요?"

그녀는 즉시 현명이로에게 눈짓을 보냈다. 녹장객과 학필옹은
그녀의 눈짓에 따라 주지약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다른 사나이가 예리한 칼날로 주지약의 얼굴을 겨냥했다.
장무기가 그녀를 구하려면 우선 현명이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민이 다시 냉랭하게
말했다.

"장공자, 내가 사전에 말을 분명하게 밝혔으니 날 원망하지 않
겠죠?"

이때 위일소가 갑자기 손에다 침을 뱉더니 그 손으로 신발 밑창
을 쓱쓱 문질렀다.

"으하하핫.....!"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도 이상했지만 난데없이 광소를 터뜨리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모두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데, 돌연 청색 그림자가 번뜩였다. 그 순간, 조민은 양쪽 뺨이
싸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흠칫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위일
소는 이내 제자리에 서 있었다. 단지 종전과는 달리 그의 손에
두 자루의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누구의 허리춤에서 빼앗아 왔
는지는 알 수 없었다.

조민은 직감적으로 느끼는 바가 있어 내심 아뿔싸를 토했다. 그
녀는 감히 손으로 뺨을 만지지 못하고 얼른 손수건을 꺼내 얼굴
을 닦았다. 과연 그녀의 불길한 느낌이 적중했다. 수건에 시커먼
때가 묻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위일소의 침과 신발 밑창의 흙이
라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위일소의 퉁명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조 낭자, 정녕 주 낭자의 얼굴을 못쓰게 만들겠다면 맘대로 해
보시지! 그대신 나도 조 낭자의 얼굴을 그냥 내버려두진 않을 거
야. 주 낭자 얼굴에 칼자국을 하나 내면 난 두 배로 갚아줄 것이
고, 그녀의 손가락 하나를 자른다면 나 역시 조 낭자의 손가락뿐
만 아니라 발가락까지 싹둑 잘라 보답을 해야지."

여기까지 말한 그는 두 자루의 단도를 한 번 맞부딪치고 나서
느긋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물어보면 잘 알겠지만 나 위일소는 한 번 한다면 꼭 하는 사람
이야. 여지껏 내가 장담을 해서 실천에 옮기지 못한 일이 없지.
물론 석 달 열흘쯤은 용케도 피해 다니겠지. 그러나 삼, 사년 혹
은 십 년 넘게 내 칼을 피하진 못할걸. 미리 선수를 쳐서 고수를
시켜 날 죽이려고도 하겠지만 내가 도망치겠다고 작심한 이상 아
무도 날 쫓아오지 못할 거야. 자, 그럼 난 이만 가봐야겠어."

말을 끝내는 순간 그림자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그의 모습이 온
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단지 팍팍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쥐고
있던 단도가 나란히 천장 대들보에 꽂혔다. 그뿐만 아니었다. 잇
따라 두 마디의 짤막한 비명이 들리며 대전 문쪽에 서 있던 두
번승이 천천히 쓰러졌다. 그들이 쥐고 있던 장검은 이미 연기처
럼 사라졌고, 모두 혈도가 찍힌 것이다.

위일소는 느긋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결코 형식적인 위협이 아
니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조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
다. 위일소가 얼굴에 오물을 묻히는 순간 손에 비수가 쥐어져 있
었다면, 지금쯤 양쪽 뺨에 칼자국이 나 있을 게 분명했다. 위일
소의 귀신 같은 신법에는 실로 따를 자가 없었다. 설령 장무기라
할지라도 장시간 동안 경합을 벌인다면 모를까, 순간적으로 전개
하는 신법에 있어서는 도저히 그를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장무기는 정중히 공수의 예를 취했다.

"조 낭자, 오늘은 실례가 많았소.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하오."

그는 양소와 함께 태연히 대전 밖으로 걸아 나갔다. 위일소가
간담이 싸늘할 정도로 위협을 주었으니, 조민은 더 이상 주지약
을 가해하지 못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조민은 분노와 수치로 이글거리는 시선을 그의 뒤통수에 꽂을
뿐 감히 앞을 가로막으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장무기와 양소가 객점으로 돌아와 보니, 위일소가 기다리고 있
었다. 이날 밤 세 사람은 얼굴을 맞대고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했
으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날 동이 틀 무렵, 장무기는 창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즉시 잠에서 깨어났다. 순간 창문이 스르르 열리며 한 사람이 얼
굴을 들이밀며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장무기는 흠칫하여 침상의
휘장을 젖히고 유심히 살펴보니, 상대방은 다름아닌 그 추하게
생긴 고두타였다. 그를 확인하자 놀라움이 더욱 컸다. 장무기는
벌떡 침상에서 일어났으나 고두타는 여전히 귀신 탈바가지같은
얼굴로 그를 응시하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의 추한 얼굴이 갑자기 창 밖에서 사라졌다.

장무기는 즉시 창문을 뚫고 나갔다. 고두타가 성큼성큼 문 밖으
로 걸어나가는 게 보였다. 이때 양소와 위일소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달려왔다. 세 사람이 주위를 살펴보니 고두타 외에
다른 적은 보이지 않자, 곧 고두타의 뒤를 쫓아갔다.

고두타는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세 사람이 뒤쫓아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즉시 북쪽을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장무기 등
도 눈빛을 교환하며 신법을 펼쳤다.

동이 텄지만 서편 하늘에는 여전히 조각달이 떠 있고 주위는 어
슴푸레했다. 이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신법을 전개해 얼
마 후에 북문을 벗어났다. 고두타는 쉬지 않고 황량한 산길을 택
해 다시 칠, 팔 리 가량 달려 으슥한 돌산으로 접어들자 비로소
신법을 멈추었다.

장무기는 예리하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날이 이마 완전히 밝았
고 시야가 확 트여 적이 매복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두타가 무엇 때문에 우릴 이곳까지 데려온 것일까?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혼자서 우리 셋을 상대하기엔 불리할텐데..... 보
아하니 악의는 없는 것 같군.....'

그가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고두타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가슴 앞에 세워 불길 모양을 만들고 장무기에게 큰절을 올
렸다.

"소인 광명우사(光明右使) 범요(范遙)가 교주께 인사를 올립니
다."

벙어리로만 알았던 그가 갑자기 입을 열자 모두는 놀랐다. 더욱
놀란 것은 그가 스스로 광명우사라고 밝힌 일이었다.

장무기는 놀라움에 이미 어리둥절하며 얼른 그를 부축해 일으켰
다.

"정녕 그대가 본교의 광명우사라면 이보다 반가운 일은 없을 것
이오. 어서 일어나시오."

사실 그보다 더욱 놀란 것은 양소와 위일소였다. 양소는 그의
얼굴을 잠시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자네가.....자네가 정말 범형제란 말인가? 이게 대관절.....!"

범요는 무너지듯 양소의 몸을 끌어안았다.

"형님! 이제 교주께서 예사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습니
다. 이 모든 것이 명존의 보살핌입니다. 훌륭한 교주가 탄생하기
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양소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런데 자네의 얼굴이 어찌 이 모양으로 변했나?"

범요의 일그러진 입가에 한 가닥의 쓴웃음이 띄어졌다.

"내가 스스로 얼굴을 이 모양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벽력
수 성곤, 그 간교한 놈의 눈을 속일 수 있었겠습니까?"

세 사람은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적진에 잠입하
기 위해 스스로 얼굴을 난도질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소는 더 가슴이 아팠다.

"범형제,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나!"

양소와 범요는 왕년에 강호에서 소요이선(遡遙二仙)이라 일컬어
질 만큼 모두 영준한 미남자였다. 그런데 범요가 대의(大義)를
위해 스스로 얼굴을 목불인견의 흉한 꼴로 만들 줄이야! 위일소
는 예전에 범요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 그
에게 심히 감동되어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범우사, 나 위일소는 오늘 진심으로 당신에게 탄복했소."

범요도 무릎을 꿇고 답례했다.

"위복왕이 경공은 변함없이 독보천하이며, 명확한 상황판단은
전보다 훨씬 고명해졌다는 걸 어젯밤에 새삼스레 느꼈소이다."

양소는 주위를 한 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곳은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으니, 자리를 옮겨 자세한
얘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네 사람은 다시 십 리 밖으로 벗어나 어느 토산 위로 올랐다.
이곳에선 몇 리 밖을 한눈에 바라볼 수가 있으므로 누가 엿듣는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멀리선 이곳을 자세히 볼 수
없는 잇점도 있어 넷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범요가 먼저 얘기 보
따리를 풀었다.

왕년에 명교의 교주였던 양정천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자, 명교의
고수들은 서로 교주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웅다웅하다가 사
본오열되는 결과를 맞았다.

당시 범요는 교주가 어디엔가 살아있다는 확신을 갖고 혼자 강
호로 나와 방방곡곡을 모두 다니며 교주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
는 사이에 몇 년이 흘렀고, 결국 교주를 찾아내지 못한 범요는
개방을 의심하게 되어 암암리에 개방의 여러 중요 인물들을 잡아
고문을 했으나, 여전히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단지 적지 않은
개방고수들만 억울하게 살상을 당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양교주 부인의 사형인 성곤을 보게 되었
다. 당시 무림은 살인자 혼원벽력수로 인해 발칵 뒤집혀져 있을
때였다. 범요는 그 일의 진상을 캐고 또한 성곤을 통해 어쩌면
양교주의 행방을 알아낼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멀찌감치 떨어져
성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성곤은 어느 주루로 들어갔다. 주루에는 두 명의 노인이 기다리
고 있었는데 바로 현명이로였다. 범요는 성곤의 무공이 고강하다
는 것을 알고 멀찌감치 떨어져 술만 마시는 척하면서 그들의 대
화를 엿들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놀라운 얘기를 접하게 된 것이
다. 그들은 명교를 멸망시키고 광명정을 파괴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범요는 이 사실을 안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어 다시 암암리에
그들의 뒤를 미행했다. 뜻밖에도 그들은 여양왕부(汝陽王府)로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현명이로는 여양왕이 고용한 무사
중에 핵심인물이었다.

여양왕 찰한특목이(察罕特穆爾)는 태위(太慰)라는 벼슬에 앉아
천하의 병권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인물로서 현재 조정에서 첫손을 꼽는 실력자였다. 그 동안 천하
방방곡곡에서 의병(義兵)들이 궐기했지만 번번이 그로 인해 실패
로 끝나고 말았다.

장무기 등도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을 들어왔는데, 지금 범요의
입을 통해 녹장객과 학필옹이 그의 부하라는 것을 알자 모두 멍
해졌다. 양소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조 낭자는 누구인가?"

범요가 대답했다.

"바로 여양왕의 딸입니다. 여양왕에게 아들 하나와 딸이 있는
데, 이들은 고고특목이(庫庫特穆爾)라고 하며, 조민은 그의 딸로
서 몽고 이름은 민민특목이(敏敏特穆爾)라고 합니다. 고고특목이
는 여양왕 세자이니 장차 왕작(王爵)을 계승하게 될 것이라, 조
민은 소민군주(紹敏郡主)로 봉해져 있습니다. 그 두 젊은이는 모
두 상당한 무공을 터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인(漢人)차림
을 즐겨하며 한인의 말도 유창할 뿐 아니라 제각기 이름도 한인
처럼 지어 고고특목이는 왕보보(王保保), 소민군주는 조민이라
합니다."

위일소가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정말 맹랑한 오누이구료. 한 사람은 성이 왕이고 한 사람은 조
이니, 만약 우리 한인이라면 그보다 더 망신스러운 웃음거리가
또 어디 있겠소?"

범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그들의 성은 모두 특목이죠. 단지 몽고 오랑캐족은 풍습
에 따라 이름을 성(性) 앞쪽에 놓은 것뿐이오. 그 여양왕 찰한특
목이도 한인 성을 갖고 있는데 이(李)라 하던가.....?"

여기까지 말하자 네 사람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 註 : [新元史] 제 이백 이십 권 [찰한특목이전(察罕特穆
爾傳)]에 의하면 찰한특목이의 증조부는 활활대(闊闊坮)라 하고
조부는 만대(蠻坮), 부친은 아노온(阿魯溫)으로서 나중에 성을
이(李)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고특목이는 비록 세자(世
子)로 봉해졌지만 사실은 찰한특목이의 조카라고 한다. 이는 본
소설의 내용과 관계없으므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

양소가 한 마디 했다.

"그 조민이란 계집은 생김새가 한인 같지만 행동 하나하나에 오
랑캐의 거칠은 야성이 담겨져 있는 것을 보면 역시 피는 속을 수
없는 모양일세."

장무기는 비로소 조민의 진정한 신분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녀
가 조정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천하의
병권을 거머쥐고 있는 여양왕의 딸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범요가 다음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았
다.

그가 계속 암암리에 알아본 결과 여양왕이 강호의 모든 문파를
없앨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첫 번째 표적이 바로
명교였다. 그것은 성곤의 의견에 따른 결정이었다.

범요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교내
에선 계속 분쟁이 일어나고 적의 세력이 엄청나게 강하므로 이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여양왕부로 잠입하는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성곤이 버티고 있는 한 변장을 하여 잠입한다
는 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궁리 끝에 범요는 남들이 상상을
못할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얼굴을 난도질하고 약물로 머리카락마저 염색
했다. 그리고 서역에 위치한 화자자모(花刺子摸)라는 작은 나라
로 들어갔다. 그가 여양왕부와 만 리 길이 떨어진 화자자모국으
로 건너간 것은 계획의 치밀성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화자자모국에서 적당한 기회를 잡아 무공을 과시하자 그곳
의 몽고 왕공(王公)이 즉시 그를 보아서 받아들였다. 당시 여양
왕은 방방곡곡에서 무사들을 초빙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화자
자모국의 왕공은 여양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범요를 왕부로 보냈
다.

범요의 치밀한 계획은 척척 들어맞아 갔다. 그는 서역 하자자모
국에서 바쳐온 무사인데다가 얼굴이 완전히 달라지고 또한 벙어
리 흉내를 내므로 성곤이 제아무리 하늘을 날으는 재간이 있다
해도 그의 정체를 간파할 수 없었다. 여양왕부로 잠입한 범요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곤을 암암리에 죽이려 했다. 그러나 그 때 성
곤은 이미 왕부에 없었다.

범요는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성곤이
교주 부인의 사형이면서 무엇 때문에 여양왕을 등에 업고 명교를
멸망시키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여기까지 들은 양소는 곧 성곤이 어떻게 하여 명교와 원한을 맺
게 되었으며 어떻게 광명정을 기습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장무기
가 그 위기를 맞은 경위와 은야왕이 장력을 겨루어 성곤을 죽인
상황을 얘기해 주었다.

범요는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입이 딱 벌어졌다. 그는 비로소 많
은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는 심한 격동을 느끼는 동시에 장무기
에 대한 존경이 더욱 깊어져 곧 몸을 일으켜 장무기를 향해 공손
하게 말했다.

"교주, 한 가지 사죄할 것이 있습니다."

"범우사,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앉아서 차근차근 얘기하십시
오."

"저는 여양왕부에서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해 친히 본교의 향주
세 명을 죽였으니, 그 죄 값을 보상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갑자기 양소의 장검을 뽑아 자신의 오른손 손
가락 두 개를 잘라 버렸다. 장무기 등이 말릴 새도 없었다. 장무
기는 깜짝 놀라 황급히 그의 손에서 장검을 빼앗았다.

"범우사, 이게..... 구태여 이럴 필요가 있겠소?"

범요는 진지하게 말했다.

"본교의 무고한 형제들을 죽였으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없을 겁
니다. 응당 목숨을 내놓아야 마땅하겠지만, 지금은 할 일이 남아
있어 우선 손가락 두 개 잘라 죄 값을 대신합니다. 차후 모든 일
이 마무리되면 다시 나의 목을 바치겠습니다."

장무기는 그의 과격한 성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그가 또 어떤 과격한 행동을 취할지 걱정이 앞섰다. 그는 얼른
약을 꺼내 발라 주고 옷자락을 찢어 손가락을 동여 매 주었다.

"범우사가 본교 형제들을 죽인 것은 바로 본교의 존망을 고려하
여 취한 부득이한 행위였거늘, 내 어찌 나무랄 수가 있겠소? 정
녕 범우사가 다시 자신의 몸을 상대한다면 나의 무덕무능(無德無
能)으로 간주해 나 역시 똑 같은 죄값을 치룰 생각이오!"

양소는 눈물을 글썽이며 범요의 손을 잡았다.

"소림사의 나한상들을 돌려놓은 것이 혹시 자네의 짓이 아니었
나?"

범요는 히쭉 웃었다.

"군주가 나한상 등에다 본교에게 화를 전가시키는 말을 남기는
것을 보고 나중에 다시 소림으로 잠입해 슬쩍 나한상을 돌려 버
렸소. 형님, 그 때는 차마 내가 한 짓이라곤 생각지 못했겠죠?"

"물론일세. 적진의 어느 고수가 암암리에 우릴 돕고 있다는 생
각은 들었지만, 그게 바로 나의 단짝이었던 자네였을 줄이야 죽
었다 깨어난들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네 사람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양소는 명교가 이미 육대문파와 손을 잡고 몽고에 대항하기로
결정한 일을 설명해 주었다. 각 문파의 고수들을 구해내야 한다
고 강조했다. 범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우리 네 사람의 힘만으론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십향연근산의 해약을 구해 그들
에게 복용시켜 공력이 회복된 후 함께 함을 합쳐야만 합니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범우사의 말에 찬성하지만, 해약을 구하는 게 문제가
아니겠소?"

범요도 난처해 했다.

"나는 벙어리 행세를 해왔기 때문에 군주는 비록 나를 깍듯이
대해 왔지만 중요한 일을 상의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해약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죠. 단지 현명이로 중 한 사람이 해약을,
또 한 사람이 독약을 갖고 있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장무기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렇다면 그들 두 사람 중에 누가 해약을 갖고 있는가 부터 알
아내야 할 텐데, 그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군요."

잠자코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양소가 불쑥 끼어들었다.

"범형제, 현명이로가 평상시 어떤 취미를 갖고 있는지 알고 있
나?"

범요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녹장객은 여색을 즐기고 학필옹은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죠."

양소가 이번에는 장무기에게 물었다.

"교주, 십향연근산과 비슷한 약을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장무기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비슷한 증세를 나타나게 하는 약은 만들어 낼 수 있겠지만, 약
효가 반 시진밖에 유지되지 않을 것이오."

양소는 매우 만족해 했다.

"반 시진이면 충분합니다. 나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는데, 과연
효과를 거두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까놓고 보면 아주 간단한 방
법이죠. 범형제가 우선 학필옹에게 술을 청해 암암리에 술에다
교주께서 만든 약을 풀어넣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범형제가 학
필옹에게 십향연근산에 당했다고 생트집을 잡으면 해약이 누구
손에 있는지 자연히 알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 방법을 강구해
그 해약을 빼앗아오면 되잖겠습니까?"

장무기는 신중을 기했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학필옹이 어떠한 태도로 나오느냐
에 따라 성패가 결정될 것이오. 범우사의 생각은 어떻소?"

범요는 지그시 눈을 감고 앞뒤를 한번 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
다.

"지금으로선 그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학필옹은 성질이 악
랄하지만 녹장객처럼 음흉하지 못해 만약 해약이 학필옹 몸에 있
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앗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소가 한 마디 물었다.

"만약 녹장객이 해약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범요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일이 한결 어려울 겁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뒷짐을 준 채 토산 위에서 한참동안 왔다갔다
서성거리더니 문득 좋은 수가 떠올랐는지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
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녹장객의 결정적인 약점을 확보할 필요
가 있습니다. 그 약점을 이용해 그를 굴복시키는 외에 다른 방법
은 없을 겁니다."

양소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 늙은이가 자네에게 잡힐 만한 약점을 갖고 있나?"

"금년 봄에 여양왕이 새로 애첩을 얻게 되어 주연을 베풀었는
데, 그 자리에서 녹장객이 천하일색인 그 여양왕의 애첩에게 군
침을 흘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허허..... 단순히 군침을 삼켰다고 해서 그게 약점이 될 순 없
잖는가?"

"약점이 아닌 것을 약점으로 만드는 게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
입니다. 이번 일은 위형께서 수고를 해 줘야겠습니다. 그 뛰어난
경공술을 이용해 여양왕의 애첩을 납치하여 녹장객의 침상에 갖
다 놓기만 하면 됩니다. 그 늙은이는 틀림없이 음욕이 발동해 한
바탕 일을 벌일 겁니다. 설령 그가 욕정을 억제한다 해도 내가
적시에 그의 방 안으로 들어가 변명할 여지가 없게끔 만들어 버
릴 테니, 그쯤 되면 해약을 내놓지 않고는 못 버틸 겁니다."

양소와 위일소는 일제히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올렸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야! 녹장객 그 늙은이는 덩굴째 굴러들
어온 호박을 맛보게 되었군. 하핫.....!"

장무기는 우습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자기로선 도
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데, 부하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
해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이독공독(以毒攻
毒)이라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그 여양왕의 애첩이 죄없이 당하는 게 마음에 걸리는군요."

범요가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큰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선 사소한 일에 신경을 써선 아니됩니
다."

네 사람은 다시 자세한 계획에 대해 상의했다. 일단 해약을 탈
취하면 범요가 직접 탑에 올라 소림, 무당 등 각 문파의 고수들
에게 나누어 주기로 했다.

장무기와 위일소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범요가 만안사에다
불을 지르면 즉시 사찰 주위 곳곳에 불을 질러 군호들이 달아나
기 편리하게끔 혼란을 조성하기로 했다.

양소는 서문 밖에 여러 대의 마차를 대기시켜 군호들이 마차에
나누어 타고 놈들의 추격에서 벗어나 창평(昌平)에서 다시 회합
하도록 돕는 임무를 맡았다.

네 사람은 결정을 하고나서 제각기 흩어졌다. 양소는 마차를 구
하러 갔고, 장무기는 약을 만들기 위해 바삐 움직여야 했으며,
위일소는 커다란 포대를 구해 여양왕부로 잠입해 애첩을 납치해
오기 위해 날이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범요와 현명이로는 육대문파의 고수들을 지키기 위해 모두 만안
사에 상주하고 있었다. 조민은 황부에서 기거를 하며 매일 밤 무
공을 배우기 위해 마차를 타고 사찰로 올 뿐이었다.

범요는 장무기가 만들어 준 약을 갖고 만안사로 돌아왔다. 이
십여 년 동안 사분오열되었던 명교가 이제 중흥의 길로 접어들게
된 데에 대하여 무한한 기쁨을 느꼈다. 그 동안 숱한 고생을 겪
어온 것이 지금에서야 보람을 갖게 되었다. 장교주는 비단 무공
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사람됨이 인후하여 마음속으로부터 존경
심이 우러났다. 단지 수단이 악랄하지 못하고 매사에 정도만 취
하려는 게 옥의 티였다.

범요는 서쪽 상방(廂房)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현명이로는 뒷
뜰 보상정사(寶相精舍)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평상시 범요는 행
여나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 봐 그들과 별로 접촉을 하지 않았
다. 그래서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져 방을 정한 것이다. 이제 만
반의 준비가 끝났는데, 학필옹을 불러내 술자리를 함께 하는 것
이 문제였다.

창문을 통해 뒤뜰을 바라보니, 해가 뉘엇뉘엇 서산마루로 기우
는 가운데 조용하기만 했다. 십 삼층 보탑도 나른한 햇살에 잠겨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범요는 적당한 구실이 떠오르지 않아 방 안에서 서성거리다가
일단 뒤뜰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그런데 마침 어디선가 고기
삶는 향내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범요는 코를 벌름거리며 그 향
내의 출처를 찾았다. 알고보니 바로 현명이로가 머물고 있는 보
상정사 맞은편 상방에서 풍겨오는 냄새였다. 그곳에는 신전팔웅
중에 손삼훼와 이사최가 기거하고 있음을 범요는 잘 알고 있었
다.

범요는 문득 묘안이 떠올라 성큼성큼 상방으로 걸어가 무턱대고
문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예측했던 대로 이사최가 화
로에 고기를 삶고 있었다. 손삼훼는 한쪽에서 젓가락과 술잔을
탁자에 올려놓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고두타가 예고없이 나타난 것을 보자 모두 멍해졌다.
동시에 고두타의 냉랭한 표정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그들은
오늘 행길에서 황견 한 마리를 잡아와 몰래 방안에서 삶고 있는
중이었다. 만안사는 어쨌든 사실이니 만치 개고기를 삶아 먹는다
는 것이 떳떳한 일이 못 되었다. 게다가 고두타는 명색이 불문의
제자이니, 만약 그가 성질을 부린다면 자기네들로선 당하는 수밖
에 없을 것이다.

한데 고두타는 곧장 화로 앞으로 걸어가 솥뚜껑을 열더니, 코를
벌름거리며 숨을 길게 들이키는 게 아닌가? 고기의 향기를 음미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끓는 물에 불쑥 손을 넣어 개
고기 한 덩어리를 집어 게걸스럽게 뜯어 먹었다. 게눈 감추듯 고
기 한 덩어리를 씹어 삼키고 나서 입언저리에 묻은 기름기를 소
매로 쓱 문지르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멍하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두 사람은 이내 얼굴을 활짝
펴며 굽신거렸다.

"고대사,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개고기를 좋아하는 줄 미처 몰
랐습니다."

고두타는 권하는 자리에 앉을 생각도 않고 다시 개고기를 집어
화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 굶어 죽은 귀신처럼 게걸스럽게 뜯기
시작했다.

손삼훼는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발에다 술을 가득 따루어 대
령했다. 고두타는 사양 않고 술을 한 모금 들이키더니 갑자기 바
닥에다 전부 뱉어냈다. 이미 왼손으로 코를 움켜쥐며 오만상을
찡그린 채 고개를 내둘렀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손삼훼와 이사최는 그가 화를 내며 나가 버리자 다시 불안해졌
다. 그런데 고두타는 곧 큼직한 술호로를 갖고 나타나자 얼른 반
색을 했다.

"맞습니다. 우리의 술은 질이 좋지 않아 고대사의 입에 맞지 않
을 겁니다."

두 사람은 얼른 고두타를 상석에 모시고 개고기를 먹음직스럽게
접시에 담아왔다. 고두타는 무공이 고강하여 군주의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 중에 한 사람이다. 평상시 신전팔웅은 그를 우러러 보
아야만 했다. 그런데 오늘 술좌석을 함께 하게 되니 손삼훼와 이
사최는 그저 황송하기만 했다.

고두타는 호로병의 마개를 열어 세 사발을 따루었다. 끈적끈적
한 술이 사발에 가득 차자 그 향기가 코를 찔렀다. 손삼훼와 이
사최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새어나왔다.

"왓! 정말 좋은 술이군요!"

범요는 내심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현명이로가 방 안에 있는지 모르겠군. 만약에 외출했다면 내
계획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갈 텐데.....'

그는 술이 담긴 사발을 펄펄 끓는 솥에다 띄웠다. 술을 뜨끈하
게 데워 마시기 위해서였다. 술이 데워지자 그 향기가 더욱 짙어
졌다. 손삼훼와 이사최는 군침을 삼키며 술을 마시려 하자 범요
가 손짓으로 만류하며 뜨겁게 데워서 마시라 했다.

세 사람이 번갈아가며 술을 데우자 그 향기가 계속 밖으로 새어
나갔다. 학필옹이 맞은편 정사에 없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을 경
우 틀림없이 주향을 맡고 달려올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맞은편
보상정사의 문이 삐걱하고 열리며 학필옹의 음성이 들려왔다.

"카, 거 술냄새 좋다!"

그는 주저함도 없이 성큼 한걸음으로 다가와 문을 열고 들어왔
다. 그는 고두타가 손삼훼, 이사최와 더불어 푸짐한 술판을 벌이
고 있는 것을 보자 멍해지더니, 곧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고대사, 당신도 이런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을 줄이야 실로 뜻
밖이오."

손, 이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공공, 어서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고대사께서 직접 갖고 온
미주(美酒)인데 맛이 기가 막힙니다."

학필옹은 고두타의 맞은편에 앉아 거침없이 술을 벌컥벌컥 들이
켰다. 손과 이는 부지런히 개고기를 대령하며 그들의 시중을 드
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쯤되면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네 사람이 흥이 나서 마시다 보니 곧 거나하게 술기운이 올랐
다. 범요는 내심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사발에다
술을 찰랑하게 따르고 나서 마개를 막더니, 태연히 술호로를 거
꾸로 세워놓았다. 알고보니 그는 마개 한복판에 공간을 뚫어 장
무기가 만들어준 미약을 쑤셔넣고는 마개를 헝겊으로 쌌다. 술호
로를 바로 세워 놓을 시에는 약가루가 쏟아지지 않지만, 일단 거
꾸로 세우면 술이 헝겊을 침투해 가루약이 용해되면서 남은 술이
이내 독주(毒酒)로 변한다.

호로병은 원래 중간 허리 부분이 잘룩하고 위 아래가 균등하게
볼록하기 때문에 유심히 지켜보지 않는 한 거꾸로 세워놓아도 이
상하게 느끼는 사람이 없었다. 더군다나 학필옹 등 세 사람은 이
미 기분 좋은 상태로 술기운이 올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범요는 학필옹이 술사발을 비우자 곧 마개를 열어 호로병을 건
네주자 학필옹이 스스로 술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는 손과 이에
게도 넘실거릴 정도로 따라 주었다. 그 범요의 사발에 술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호로병을 내려 놓았다.

네 사람은 다시 사발을 들어올려 꿀꺽꿀꺽 들이켰다. 범요를 제
외한 세 사람은 모두 독주를 마신 셈이었다. 손삼훼와 이사최는
내력이 비교적 약해 독주를 마시자마자 손발이 흐물흐물해지며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손삼훼는 고개를 갸우뚱거리
며 이사최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아우, 뱃속이 좀 이상한데......?"

이사최도 낮빛이 변했다.

"나.....나도..... 중독된 것 같은데......"

이때 학필옹 역시 체내의 진기가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절로 안
색이 크게 변했다. 범요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것도 바로 이때
였다. 그는 다짜고짜 학필옹의 멱살을 잡으며 입으로 이상한 소
리를 냈다. 손삼훼는 그의 행동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고대사, 왜 그러십니까?"

범요는 손가락으로 술찌꺼기를 찍어 탁자에다 다섯 글자를 썼
다.

----- 십향연근산(十香軟筋散) -----

손삼훼와 이사최는 현명이로가 십향연근산을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 고두타와 자기 형제
들은 모두 십향연근산에 당한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은 서로 눈빛
을 교환하더니 학필옹에게 몸을 숙였다.

"학필옹, 우리 형제는 어르신네께 잘못한 점이 없으니, 제발 자
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들 형제는 학필옹이 고두타를 겨냥해 십향연근산을 전개한 것
인데 자기네들이 공연히 덩달아 화를 당한 것이라 간주했다.

사실, 가장 놀란 것은 학필옹 자신이었다. 십향연근산은 자기가
갖고 있으며, 분명 왼손으로 사용하는 붓 속에 숨겨 두었다. 그
리고 그는 항시 그 붓을 몸에 지니고 다녔으니, 누가 그 십향연
근산을 훔쳐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대사, 노여워 마시오. 우린 서로 형제나 다를 바 없는데 내
가 왜 고대사를 해치려 하겠소. 사실 나도 온몸이 나른해져 도저
히 힘을 쓸 수 없소. 누가 이 따위 짓을 했는지 나도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오."

범요는 다시 술찌꺼기를 찍어 탁자에다 두 글자를 썼다.

----- 해약(解藥)! -----

학필옹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우선 해약을 복용하고 나서 우리에게 수작을 부린 놈
을 찾아 냅시다. 해약은 녹사형이 갖고 있으니 우리 함께 갑시
다."

범요는 내심 기뻐했다. 양소의 계책이 바라던 대로 효과를 거든
것이다. 그는 왼손으로 학필옹의 손목을 움켜쥐고 일부러 비틀거
리는 걸음으로 그와 함께 뜨락을 가로질러 보상정사로 갔다.

정사는 모두 두 칸으로 나뉘어졌는데, 녹장객은 북쪽 상방을 사
용했다. 그런데 북쪽 상방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학필옹이
소리 높여 외쳤다.

녹장객은 분명 방 안에서 대답을 했는데 좀처럼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사형, 어서 문을 열어 주시오! 아주 괴이한 일이 생겼소!"

녹장객은 다소 당황하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무슨 일인가! 난 지금 무공을 연마하고 있으니 방해하지 않았
으면 좋겠네."

학필옹은 녹장객과 동문 사형제로서 무공은 막상막하지만, 녹장
객이 늘 사형으로 자처하며 또한 심계가 깊어 학필옹은 그의 말
을 감히 거역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다급해진 것은 범요였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수포로
돌아갈 것이 뻔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어깨로 힘껏 문을 밀어
부쳤다. 그러자 안에서 걸어 잠그었던 문빗장이 부러지며 문이
활짝 열렸다.

녹장객은 침상 앞에 엉거주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있다가 문이
갑자기 열리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함
과 어색함이 역력했다. 범요는 침상에 반나(半裸)의 여인이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여인의 몸은 이불에 똘똘 말려져 묶여 있었지
만 백옥처럼 흰 목덜미와 원만한 곡선을 이룬 어깨가 이불 위쪽
에 노출돼 있고, 종아리에서부터 하얀 맨발이 이불 아래쪽에 드
러나 있었다. 이불에 싸여진 그녀의 몸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구름처럼 늘어뜨린 여인은 빼어난 미모
를 지니고 있었는데, 바로 여양왕의 애첩인 한(韓)씨였다. 범요
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위복왕의 솜씨는 정말 놀랍군. 단신 홀몸으로 왕부로 잠입해
저 계집을 이곳까지 납치해 오다니.....'

사실 여양왕부의 경비는 매우 삼엄했다. 그러나 위사들은 왕야
와 세자, 군주를 호위하는데 전력을 기할 뿐, 여양왕은 애첩이
많으므로 그녀들에 대한 경호는 다소 소홀했다. 게다가 위일소의
경공술이 신출귀몰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해 올 수 있었다.

오히려 납치해 온 계집은 녹장객의 방 안에다 갖다 놓는 것이
어려웠다. 그는 한참동안 기다려 녹장객이 뒷간에 가는 틈을 타
서 잽싸게 일을 해치우고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녹장객은 방으로 돌아와 웬 여인이 이불에 싸인 채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지붕 위로 올라가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녹장객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와 여인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만 눈이 휘둥그래졌
다.

예전에 여양왕부에서 한씨를 보고 순간 넋을 잃고 강한 욕정을
느꼈었다. 그는 워낙 여색을 좋아하여 여지껏 그의 손에 몸을 망
친 양가의 부녀자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여양왕의 애첩 한씨이
니 당시 그는 군침만 삼켰을 뿐 감히 어떠한 행동을 취하지 못했
었다. 한데 한씨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선녀인 양 자신의 침상
에 알몸인 채로 누워 있으니, 그는 놀라는 한편 야릇한 충동을
느꼈다.

잠시 생각을 굴린 녹장객은 틀림없이 자기의 수제자인 오왕아보
(烏旺阿普)가 자기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한씨를 납치해 온 것이
라 간주했다. 그 외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었다.

이불 밖에 노출돼 있는 목덜미와 백설보다 더 흰 어깨, 그리고
야들야들한 종아리와 맨발이 그를 욕정의 늪으로 끌어당겼다. 게
다가 이불 속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상상하자 단
전으로부터 뜨거운 피가 끓어올랐다. 그는 한씨의 발을 가만히
움켜쥐며 고개를 묻으려는 순간 학필옹이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당황해 했다. 그리고 범요가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이다.

이 뜻밖의 변화에 녹장객은 입장이 난처해졌다. 그가 한씨를 숨
기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그는 왕부에서 한씨가 납치된 것을
발견해 고두타를 시켜 자기를 잡으러 온 것으로 생각했다.

지금의 상황으로는 도저히 변명할 여지가 없으므로 그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게 상수라고 판단해 즉시 녹각을 뽑아쥐고 왼손으
로 한씨를 안아 창문으로 달아나려 했다.

학필옹이 적시에 소리쳤다.

"사형, 어서 해약을 내놓으시오!"

녹장객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해약이라니?"

"소제와 고두타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십향연근산의 독을
당했소!"

"뭐라고?"

학필옹이 다시 한 번 얘기하자 녹장객은 만면에 의아한 표정을
띄우고 말했다.

"십향연근산을 자네가 갖고 있지 않나?"

"글쎄, 소재는 어떻게 된 건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소! 멍청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중독되었소.
우선 해약을 복용해야 하니, 어서 해약을 주시오."

녹장객은 여기까지 듣자 일단 안심이 되는지 한씨를 다시 침상
에 내려놓았다. 학필옹은 사형의 침상에서 여인을 본 적이 많으
므로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씨를 알아 보지도 못
했다. 녹장객은 일단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내쫓을 생각으로,

"고대사, 우선 나의 학사제 방으로 가서 좀 기다려 주시오. 내
가 곧 해약을 갖고 가겠소."

하고 말하며 두 사람을 살짝 밖으로 밀었다. 그러자 학필옹은
비틀거리며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범요도 역시 비틀거리며 일
부러 내력을 상실한 척했지만, 원래 내력이 심후하여 외부의 힘
이 몸에 와 닿으면 자연적으로 저항력이 생긴다.

녹장객은 두 사람을 밀어내면서 학필옹의 내력은 전부 상실되었
지만, 고두타는 일부러 위장하고 있다는 걸 이내 알아차렸다. 그
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밀었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
다.

워낙 심계가 깊은 녹장객인지라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고 웃으
며 말했다.

"고대사,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이렇게 말하며 범요를 부축하는 동시에 손목 부위 회종(會宗),
외관(外關) 두 혈도를 노렸다. 그 순간 고두타는 자신의 위장이
탄로난 것을 알고 잽싸게 왼손을 떨쳐 학필옹의 등심 혼문혈(魂
門穴)을 강타했다. 학필옹은 그 즉시 온몸이 솜처럼 풀려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일단 학필옹을 제압했으니 최악의 경우 녹장객만 상대하면 되므
로 범요는 대담하게 냉소를 날렸다.

"흥!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군. 감히 왕야의 애첩을 납치해
와 욕심을 채우다니!"

그가 갑자기 입을 열자 현명이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은
고두타와 십 오, 육 년간 알고 지내왔지만, 줄곧 벙어리인 줄만
알았다. 녹장객은 고두타가 무슨 속셈으로 그 동안 벙어리 흉내
를 해 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필시 무서운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이란 예감이 퍼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보니 고대사는 벙어리가 아니었군. 그 동안 노심초사 우리
를 속여온 이유가 무엇이오?"

범요는 잽싸게 생각을 굴리며 낭랑하게 말했다.

"왕야께선 당신이 언제 배반할지 모르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벙어리 흉내를 내게 하여 당신을 철저히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렸
소."

이 말은 사실 이치에 닿지도 않았다. 그러나 녹장객은 한씨와
함께 침상에 있는 것이 발각되었으므로 캥기는 게 있어 믿지 않
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여양왕이 부하들에게 가끔 엉뚱한 수
단을 부린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녹장객인지라, 범요의 말을 듣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럼 왕야의 명령에 따라 날 잡으러 왔단 말이오? 흐흐.....
날 이대로 잡아가기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이렇게 말하며 녹각장을 들어올려 공격 자세를 취했다. 범요가
음침하게 웃었다.

"녹형, 막상 싸움이 벌어지면 설령 내가 패한다 해도 일, 이백
초식을 능히 버틸 것이오. 한데 녹형은 왕야의 애첩을 보살피랴
사제도 구해야 할 입장이니 신중히 생각한 연후에 결정을 내리는
게 현명할 거외다."

녹장객은 사제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두타의 말이 형식적인 위
협만은 아니었다. 그들 사형제는 어릴 적부터 무예를 같이 익혀
오며 지금까지 단 하루도 헤어진 날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처
자식이 없어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왔다. 한데 이런 상태에서 어
찌 자기만 살겠다고 달아날 수 있단 말인가?

범요는 그의 마음이 동요되는 것을 재빨리 간파하고 손삼훼와
이사최를 소리쳐 불러들이더니, 방문을 닫았다.

"녹형, 이번 일은 아직 외부에 누설되지 않았소. 원한다면 내가
모든 것을 덮어 주겠소."

녹장객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덮어 주겠다는 거요?"

범요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이와 손의 아혈(啞穴)과 연마혈(軟
麻穴)을 찍어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그 수법의
정확함과 신속함은 녹장객마저도 감탄할 정도였다. 고두타가 다
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스스로 입방아를 찧지 않으면 사제는 자연히 입을 다물
것이고, 나는 여지껏 벙어리였듯이 앞으로도 말 못하는 벙어리일
뿐이요. 저 두 녀석은 아혈을 찍어 영원히 입을 봉하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할 게 아니겠소?"

손과 이는 대경실색했다. 개고기를 먹으려다 이런 화를 당하게
될 줄이야 어찌 죽어도 생각이니 했겠는가?

범요는 다시 한씨를 가리켰다.

"저 여인을 처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소. 죽여서 쥐도 새도
모르게 치워 버리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수시로 즐거움을 누리
는 방법이오. 물론 두 번째 방법은 위험 부담이 있겠지만 녹형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비밀이 지켜질 것이오."

녹장객은 한씨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씨는 비록 혈도가 찍혀 꼼
짝 할 수 없는 신세지만, 지각은 살아 있었다. 그녀는 녹장객에
게 애원의 눈빛을 던지며 두 번째 방법을 택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 같았다. 녹장객은 솔직히 말해 단칼에 그녀를 죽이기가 아까
왔다. 그는 절로 마음이 흔들렸다.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소. 그런데 아무 조건없이 날 도
와주진 않을 텐데....."

그는 고두타가 틀림없이 조건을 내세우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범요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꾸며 댔다.

"아주 간단한 조건이오. 아미파의 장문인 멸절사태는 나하고 깊
은 관계를 맺어 왔소. 그 주씨 성을 가진 젊은 계집은 바로 나와
멸절사태에게서 태어난 사생아요. 부탁컨대 해약을 주어 그들을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해 주시오. 군주에게는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해명하겠소. 만약 녹형에게 눈꼽만치라도 누를 끼친다면 이
고두타와 멸절사태는 날벼락을 맞아 비명횡사할 것이오!"

그는 녹장객이 풍류를 즐기므로 일부러 남녀 관계에 얽힌 거짓
말을 꾸며낸 것이다. 게다가 양소로부터 명교의 형제들이 멸절사
태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그녀의 명예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쪽으로 거짓말을 꾸며 냈다. 그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매사에 편법을 써왔기 때문에 이 정도의 거짓말쯤은 예사로 생각
했다.

녹장객은 그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멍해졌으나, 곧 입가에 회심
의 미소가 떠올랐다.

'음..... 네놈이 이런 일을 꾸며 날 위협하는 것은, 이제보니
늙은 정인과 친딸을 구하기 위함이었군. 그야 인지상정이지. 이
번 일은 좀 위험스럽지만 절세가인을 손아귀에 넣게 되었으니 전
혀 댓가가 없는 것도 아니지.....'

그는 고두타가 오히려 자기에게 사정투로 나오자 마음이 느긋해
졌다.

"그렇다면 왕야의 애첩을 이곳으로 납치해 온 것도 바로 고대사
의 걸작이겠구료?"

"이런 중요한 부탁을 어찌 빈손으로 할 수 있겠소?"

녹장객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떠올라 얼른
물었다.

"그런데 나의 사제는 어떻게 해서 십향연근산의 독을 당하게 됐
소?"

범요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야 간단한 일이 아니겠소? 그가 독약을 관리하고 있으니 그
가 거나하게 취한 틈을 타서 훔쳐내는 것 쯤이야 누워서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소?"

녹장객은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았다.

"좋소. 고대사, 앞으로 당신을 친구로 생각할 것이며 절대로 배
신을 하지 않겠소. 다시는 날 이런 식으로 골탕먹이지나 마시
오."

범요는 한씨를 가리키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럼, 녹형이 기회를 봐서 나에게 이런 골탕을 먹여 주었으면
고맙겠소. 나도 굴러들어온 호박 맛이 어떤 건지 직접 음미해 보
고 싶소이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제각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물론 녹장
객은 나름대로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이 위기만 넘기면 무슨 수
를 써서라도 고두타를 없앨 생각이었다. 범요 역시 속으로 주판
알을 튕기고 있었다. 현명이로는 한씨 일을 마무리지은 뒤에 틀
림없이 자기에게 출수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쯤이면 육대문
파의 고수들이 모두 구출될 것이다. 자기는 엉덩이를 털고 떠나
가면 그뿐일 것이다.

범요는 녹장객이 해약을 빨리 내주지 않자 내심 조급했지만, 겉
으로는 느긋한 척하며 자리에 앉았다.

"녹형, 한씨의 혈도를 풀고, 우리 같이 한 잔 마시는 게 어떻겠
소? 미인과 더불어 한 잔 마시는 것도 인생의 큰 즐거움이 아니
겠소?"

녹장객은 그처럼 여유를 보일 수 없었다. 자기는 왕야의 애첩과
함께 있기 때문에 한시도 더 지체하고 싶지않았다. 그는 녹각장
을 꺼내 한쪽 녹각을 돌려 작은 잔에다 가루약을 조금 쏟아넣었
다.

"고대사, 이것이 해약이니 어서 갖고 가시오."

범요는 고개를 내둘렀다.

"이 정도 소량의 해약을 갖고 가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 정도면 두 사람이 아니라 대여섯도 구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인색하지 말고 좀더 줄 수 없겠소? 솔직히 말해 녹형은
워낙 심계가 깊기 때문에 혹시 내가 당할까봐 이러는 거요."

녹장객은 그가 많은 해약을 요구하자 갑자기 의심이 생겼다.

"고대사, 혹시 구하려는 사람이 멸절사태와 딸 말고 또 있는 게
아니오?"

범요가 변명을 하려는데 갑자기 뜨락 밖에서 요란한 발자국소리
가 들리더니, 칠, 팔 명이 뛰쳐들어왔다. 곧 그 중에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발자국이 여기까지 연결되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녹장객은 이내 안색이 변하며 해약을 쏟아넣은 잔을 얼른 품 속
에 갈무리했다. 범요는 그에게 침착하라는 손짓을 하며 우선 홑
이불로 한씨의 몸을 덮었다. 그러자 문 밖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녹선생, 집에 계십니까?"

범요는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자기는 벙어리이니 녹장객더러
대답하라는 뜻이었다. 녹장객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일인가?"

"왕부에서 한씨 부인이 누구에게 납치되었는데, 발자국이 여기
까지 연결돼 있습니다. 혹시 수상한 자를 보지 못했습니까?"

녹장객은 범요를 한 차례 노려보았다. 그의 솜씨로는 발자국을
남길 리가 없는데, 일부러 그런게 아니냐는 뜻이었다. 범요는 히
죽 웃으며 어서 상대방을 따돌리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속으
로 위일소가 이곳까지 발자국을 남긴 처사에 대해 혀를 내둘렀
다.

녹장객은 냉소를 날렸다.

"여기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어서 다른 곳을 찾아보도록 해라!"

그의 지위와 무공을 모두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은 곧
대답을 하고 물러갔다. 그들은 만안사를 샅샅이 뒤질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녹장객이 한씨를 숨기는 일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
다. 그는 절로 눈살을 찌푸리며 고두타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그러자 범요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녹형, 당신의 계집을 숨길만한 적당한 장소가 있소."

"그게 어디란 말이오?"

"바로 저기요."

범요는 창 밖으로 보이는 높은 보탑을 가리켰다.

녹장객은 머리가 빨리 돌아가므로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
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료."

보탑에는 육대문파의 고수들이 감금돼 있고, 녹장객의 수제자인
오왕아보가 경비를 총책임지고 있었다. 다른 곳이라면 혹시 의심
을 품을지 모르지만, 왕야의 애첩을 경계가 가장 삼엄한 보탑으
로 납치해 갔으리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범요가 재촉
을 했다.

"지금 뜨락에 아무도 없으니 어서 행동을 취하시오."

그는 한씨를 싼 홑이불의 네 귀퉁이를 묶어 큰 봇짐으로 만들어
녹장객에게 건네주었다.

녹장객은 주저했다. 만약 자기가 한씨를 둘러메고 나가다가 고
두타가 엉뚱한 마음을 먹고 소리라도 치는 날에는 물증이 뚜렷하
므로, 영락없이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될 것이다. 그는 이 순간까
지도 고두타를 믿지 않았다. 고두타는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았
다.

"삼 년 상까지 봐주라는 말이 있으니, 내가 다시 한번 녹형을
도와 호화사자(護花使者)가 되어 드리리다."

이렇게 말하더니 봇짐을 짊어지고 밖으로 나가며 나직이 말했
다.

"녹형이 앞장서 줘야겠소. 만약 누가 앞을 가로막고 봇짐보자고
하면 그 자리에서 없애 버리시오."

녹장객은 몸을 번뜩여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행여나 범요가 기
습해 올까 봐 등을 노출시키지는 않았다. 범요는 문을 닫고 보탑
으로 향했다.

이때는 날이 어두워져 탑 밖에는 경비병 외에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경비병들은 녹장객과 범요가 나타난 것을
보자 일제히 몸을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두 사람이 탑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오왕아보가 전갈을 받고 달려나왔다.

"스승님, 어서 오십시오. 오늘 밤은 탑을 한 바퀴 돌아보실 생
각입니까?"

녹장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범요와 함께 탑 안으로 들어가
려는데, 홀연 보탑 동쪽 월동문에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뜻밖에도 조민이었다.

녹장객은 캥기는 게 있으므로 조민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
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고두타 등과 함께 앞으로 나가 그녀를
맞이했다.

어젯밤 장무기 등이 나타나는 바람에 조민은 명교가 대거 진격
해 올 것을 대비하여 친히 순시를 나온 것이다. 그녀는 범요를
보자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고대사, 그렇지 않아도 대사를 찾고 있었어요."

범요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민이 다시 말했다.

"나하고 함께 가야 할 곳이 있어요."

범요는 내심 아뿔싸를 토했다. 간신히 녹장객을 보탑까지 유인
해 와 이제 해약만 빼앗아내면 계획이 성공리에 끝날 텐데, 대관
절 조민이 이런 판국에 자기와 어디를 같이 가자는 것일까?

범요는 핑계를 대어 빠지고 싶었지만, 적당한 구실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벙어리 행세를 해야 하므로 입을 뻥긋할 수도 없
는 입장이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녹장객에게 방법을 강구하라고 떠맡겨야지!'

그는 곧 봇짐을 한 번 흔들어 보이며 턱으로 녹장객을 가리켰
다. 녹장객은 흠칫 놀라며,

'이런 죽일놈 좀 보게!'

하고 내심 욕설을 터뜨렸다.

조민은 영문을 몰라 녹장객에게 물었다.

"녹선생, 고대사가 들고 있는 봇짐을 무엇이죠?"

녹장객은 얼른 얼버무렸다.

"저..... 고대사의 이불보따리요."

조민은 이상하게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이불보따리라뇨? 왜 갑자기 이불을 쌌죠?"

이렇게 묻고 난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스스로 다음 말을 이었
다.

"고대사는 내가 너무 우둔해, 무공을 가르치는데 애를 먹기 때
문에 떠날 작정으로 이불보따리를 싼 건가요?"

범요는 고개를 내두르며 한쪽 손으로 아무렇게나 몇 가지 손짓
을 했다.

'녹장객이 알아서 거짓말을 하겠지. 이런 때는 벙어리가 더 유
리하단 말야.'

조민은 그의 손짓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녹장객
을 쳐다보았다.

녹장객은 재빨리 생각을 굴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이렇게 된 겁니다. 어젯밤 몇몇 마두들이 나타나 소란
을 피우는 바람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므로 우리 형제와
고대사가 상의하여 이곳으로 옮겨와 기거하기로 했습니다.

조민은 크게 기뻐했다.

"나도 역시 녹선생과 학선생이 직접 탑을 지켜주길 은근히 바라
고 있었어요. 단지 너무 수고를 끼치는 것 같아 차마 청을 드리
지 못했는데, 세 분이 이렇게 자청해 주시니 정말 기뻐요. 이젠
마두들이 감히 보탑 부근에 얼씬도 하지 못할 거예요. 고대사,
우린 어서 가요."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서슴없이 범요의 손을 잡았다.

범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녹장객을 곤경으로 몰아넣을 수
도 있지만, 자기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가 봇짐을
넘겨 주자 녹장객은 어쩔 수 없이 받아야만 했다.

"고대사, 난 탑에서 기다리겠소."

이때 오왕아보가 얼른 나섰다.

"스승님, 그 이불봇짐을 저에게 주십시오."

녹장객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다. 이건 고대사의 이불이니 내가 직접 갖고 가겠다."

범요는 히쭉 웃으며 봇짐을 살짝 내리쳤다. 정확하게 한씨의 엉
덩이를 후려친 것이다. 한씨는 혈도가 찍혀 비명을 지를 수 없었
지만, 녹장객은 놀란 나머지 안색이 변했다. 그래도 그는 감히
주춤할 수 없어 얼른 조민에게 인사를 올리고 탑 안으로 들어갔
다.


----- 제 5 권 3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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