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5-3

3학년2반 | 2022.03.05 07:47:49 댓글: 0 조회: 440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3065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5 권


제 4 장 보도(寶刀)에 숨겨진 비밀(秘密)


범요는 조민에게 손이 잡힌 채 곧장 만안사 밖으로 나왔다. 그
는 초조하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했다. 대관절 자기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일까? 드디어 조민이 스스로 입을 열었다.

"고대사, 우리 그 장무기라는 작자를 만나러 가요."

범요는 다시 놀라야만 했다. 조심스레 조민의 표정을 살펴보니
눈동자에 생기가 감돌고 양볼이 불그스름한 것이 수줍음과 희열
이 엇갈려 있었다. 절대 자기의 계략을 간파한 눈치가 아니었다.

범요는 일단 안심을 했다. 아울러 야릇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혹시 군주가 우리 교주에게 은근히 흠모의 정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한데 왜 나더러 함께 가자는 거지? 자신의 심복인
현명이로를 부르지 않고..... 맞아 이런 일은 노출시키는 게 좋
지 않으므로 벙어리인 내가 적격이겠지.'

앞장선 조민은 얼마 후 장무기가 유숙하고 있는 객점 앞에 당도
했다. 범요는 다시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교주가 머물러 있는 곳을 즉시 알아내다니, 역시 보통 여자가
아니야.....'

범요는 그녀를 따라 객점 안으로 들어갔다. 조민은 주인장에게
대뜸 <증아우>를 찾았다. 장무기는 객점에 투숙하면서 증아우라
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점원이 곧 가서 알렸다.

장무기는 운공조식을 하며 만안사에서 불길이 치솟기만 기다리
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찾아왔다는 전갈에 멍해졌다. 그는 객당
으로 나와 방문객이 범요와 조민이라는 것을 보자, 내심 아뿔싸
를 토했다. 틀림없이 조민이 범요의 정체를 알아차려 자기에게
따지러 온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는 일단 공수의 예를 취하며 태
연하게 말했다.

"조 낭자, 무슨 일로 이곳까지 날 찾아왔소?"

"이곳에선 얘기하기가 불편하니 장소를 옮겼으면 좋겠어요. 저
쪽에 있는 작은 주막으로 가서 한 잔 하시지 않겠어요?"

장무기로선 거절할 수 없었다.

"좋소."

조민이 앞장서 객점에서 다섯 집 건너에 위치한 작은 주막으로
들어갔다. 주막 안에는 드문드문 몇 개의 식탁이 놓여 있을 뿐
초라했다. 밤이 깊은 탓인지 손님이 전혀 없었다. 조민과 장무기
는 식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범요는 손짓으로서 자기는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조민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간단한 요리 두 접시와 백주(白酒)
두 병을 시켰다.

술이 세 순배 돌자 조민은 나직하게 물었다.

"장공자, 당신은 내가 누군지 이젠 알고 있겠죠?"

장무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여양왕부의 군주라는 것을 알았소."

"당신은 내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겠죠?"

"내가 낭자를 미워한다면, 이렇게 함께 앉아 술을 마시지 않았
을 것이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
오. 난 여지껏 살아오면서 혼원벽력수 성곤을 가장 미워했는데,
그가 죽은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오히려 그가 불쌍하게 여겨지
며 죽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바램도 없지 않소."

조민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만약 내가 내일 죽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 건가요? 건방
지고 흉악한 계집이 죽었다고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겠죠?"

장무기는 자신도 모르게 음성을 높이고 힘주어 말했다.

"아니오! 난 절대 낭자가 죽는 걸 바라지 않소. 위복왕이 낭자
의 얼굴에 칼자국을 내겠다고 위협했을 때 난 속으로 은근히 걱
정을 했었소."

조민은 생긋이 웃으며 양볼이 불그스름해졌다.

장무기는 진지하게 말했다.

"조 낭자, 다시는 우리와 맞서지 말고 육대문파의 사람들을 모
두 풀어 주시오. 모두 화기애애하게 친구로 지내면 얼마나 좋겠
소."

조민은 활짝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맞아요. 내가 바라는 것도 바로 그것이예요. 당신은 명교의 교
주이니 설득력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 그들에게 항복하여 조정에
협력하라고 전해 주세요. 모두들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될 거
예요."

장무기는 천천히 고개를 내둘렀다.

"우리 한인은 누구나 똑같은 염원을 갖고 있소. 그것은 당신네
몽고인이 물러가 조길 바라는 마음이오!"

조민은 벌떡 일어섰다.

"뭐라고요! 그런 대역무도한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 건가요?"

조민은 한참 동안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얼굴에 띄어졌던
분노의 표정이 차츰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혼잣
말처럼 중얼거렸다.

"결코 우리는 적대시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요?"

그녀의 표정은 갑자기 울적하게 변했다. 장무기는 웬지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해주려 했으나, 적당
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묵묵히 앉아 침
묵을 지켰다.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장무기였다.

"조 낭자, 밤이 깊었으니 이제 돌아가야 하지 않겠소?"

"나와 함께 이곳에 앉아있는 게 싫은가요?"

"아니오. 낭자만 괜찮다면 난 상관없소."

조민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내가 만약 몽고인도
아니고 군주도 아닌 그저 주 낭자처럼 평범한 여자라면, 당신과
좀더 가까와질 수 있을 거라고 말이에요. 장공자, 솔직히 말해
보세요. 내가 예쁜가요? 아니면 주 낭자가 더 예쁜가요?"

장무기는 그녀가 노골적으로 이러한 질문을 해 오리라곤 뜻밖이
었다. 희불그레한 등잔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실로 요염하면서
도 아름다왔다. 그는 느낀 그대로를 털어놓았다.

"물론 낭자가 더 아름답소."

조민은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손등 위에 얹으며 눈동자에 기쁨
이 넘실거렸다.

"장공자, 나하고 가끔 만나지 않겠어요? 만약 내가 다시 이곳으
로 불러내 함께 술을 마시자고 청하면, 응해 주겠어요?"

장무기는 손등을 통해 그녀의 따사로운 체온을 느끼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이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소. 며칠 후면 남쪽으로 다시
가야 하오."

조민의 표정은 다시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녀는 창 밖에 걸려
있는 초승달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내 세 가지 부탁을 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아직 잊지 않았겠
죠?"

"물론이오. 낭자의 분부가 있으면, 전력을 다해 이바지할 것이
오."

조민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 첫 번째 부탁을 드리겠어요. 나는 도룡도를 원해요."

장무기는 그녀의 세 가지 요구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첫 번째부터 난제를 내놓을 줄은 실로 뜻밖
이었다.

조민은 그가 난처해 하는 것을 보자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어때요? 설마 거절하는 것은 아니겠죠? 이번 일은 협의도에 위
배되지 않고, 당신의 능력으로 해낼 수 없는 일도 아니잖아요."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의부께서 도룡도를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모든 강호인이 알고
있으니, 구태여 숨길 필요는 없겠지.....'

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도룡도는 나의 의부이신 금모사왕의 소유이거늘, 내 어찌 의부
를 배반하고 그 보도를 낭자에게 갖다 줄 수 있겠소?"

"당신더러 그 보도를 훔쳐오거나 빼앗아 오라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내가 그 보도를 갖겠다는 뜻도 아니에요. 단지 그 보도를
한 시진 동안만 빌리자는 것뿐이에요. 그것도 협의도에 어긋나나
요?"

"그 보도는 비록 강호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별로 구경
할 만한 것이 못 되오. 단지 다른 칼에 비해 무겁고 예리할 뿐이
오."

"나 역시 다른 뜻은 없어요. 의천검이 내 수중에 있기 때문에,
그와 쌍벽을 이루는 도룡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것뿐이에요. 만약 안심이 되지 않는다면 내가 보도를 살필
때 곁에 서 있으면 되잖아요? 당신의 실력으로 내가 그 보도를
가로채게 하겠어요?"

그녀의 말에 장무기는 다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육대문파의 고수들을 구출한 후, 어차피 의부를 중원으로 모셔
와 교주의 직책을 넘겨드려야 한다. 조 낭자가 보도를 한 시진만
빌려 달라는데는 물론 어떤 흉계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
지만 내가 옆에서 지키고 있는 한 그 보도를 가로채지는 못할 것
이다. 단지.....'

장무기는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의부의 말을 빌리
면, 도룡도에 무림절학에 관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의부
는 실명하기 전에 그 보도를 수중에 넣어 오랜 세월동안 노심초
사했지만, 그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다. 혹시 이 조 낭자는 짧은
한 시진 동안에 그 비밀을 캐내는 게 아닐까?

'조 낭자가 제아무리 영특하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할 거야. 그
리고 의부와 헤어진 지 벌써 십 년이 되었으니, 그 동안 의부께
서 홀로 고도에 남아 이미 보도의 비결을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조민은 그가 대답을 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
자,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다시 말했다.

"싫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다른 부탁을 하는 수 밖에요.
하지만 훨씬 어려운 부탁이 될 거예요."

장무기는 상대방이 심계가 깊고 매우 엉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어려운 문제를 내놓는다면 자기로선 더욱
곤경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내 낭자의 요구대로 도룡보도를 빌리러 가리다. 하지
만 사전에 말을 분명히 해 두겠소. 단 한 시진만 빌려 주는 것뿐
이오. 만약 보도를 강점할 생각을 한다면, 난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조민은 매우 기뻐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염려 마세요. 나는 칼을 사용하는 초식도 배우지 않았는데 그
렇게 무거운 칼을 빼앗아서 무엇에 쓰겠어요. 틀림없이 공손하게
돌려드릴 것을 약속하겠어요. 언제쯤 출발할 생각인가요?"

"며칠 후에 바로 출발하겠소."

"나도 빠를수록 좋아요. 나는 돌아가는 즉시 모든 떠날 채비를
갖추어 놓겠어요. 당신이 준비되는 대로 연락을 주세요."

장무기는 안색이 변했다.

"낭자도 함께 가겠단 말이오?"

"물론이에요. 소문에 의하면 당신의 의부께선 고도에서 한사코
중원으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했다는데, 이번에도 고집을 부리신
다면 당신이 불원천리 고도로 가서 보도를 갖고 와 나에게 한 시
진 동안 보여준 후, 다시 그 먼길을 무릅쓰고 보도를 돌려 주기
위해 다시 떠나야 하잖아요? 그건 너무 번거로운 일이에요."

장무기는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느껴졌다. 북해(北海)는
파도가 거세고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 망망대해에서
과연 빙화도를 다시 찾아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는
데, 왕복을 하고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더
군다나 의부께서 끝까지 중원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고집하시
면, 자기가 보도만 갖고 중원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문제점이 많
았다.

"낭자, 바다에는 풍랑이 거세고 언제 무슨 위험이 닥칠지 모르
는데, 구태여 그런 무리를 할 필요가 있겠소?"

조민은 입을 삐쭉거렸다.

"당신이 위험을 무릅쓸 수 있다면, 나 역시 못할 게 없죠."

장무기는 다소 망설여졌다.

"영존께서 과연 허락하시겠소?"

"아버님은 나더러 강호의 호객들을 통솔하라고 하셨어요. 요 몇
년 동안 내가 어디를 가도 한번도 참견한 적이 없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창 밖에 붉은 불빛이 비치며 멀
리서부터 왁자지껄한 고함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맙소사! 만안사 보탑에 불이 났어요. 고대사! 고대사! 어서 이
리 와 보세요!"

그녀는 연방 불렀으나 고대사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미
혼자서 떠난 게 분명했다.

장무기는 불길이 거센 것을 보고, 공력이 회복되지 않은 송사백
등의 안위가 염려되어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낭자, 난 먼저 실례해야겠소!"

말을 내뱉기 무섭게 밖으로 몸을 날렸다.

조민이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잠깐만! 함께 가요!"

그녀는 주막 밖으로 뛰쳐나갔으나 장무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다.

녹장객은 고두타가 군주와 함께 떠난 후, 즉시 보탑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곳은 불상과 경전, 사리 등 귀중한 물건을 모셔놓은
성역인지라, 아무나 함부로 들락거릴 수 없었다. 그는 제자인 오
왕아보에게 아무도 올라오지 못하도록 신신당부를 해 놓고 나서
문을 잠그어 걸고 봇짐을 풀어 한씨를 내려놓았다. 한씨는 겁에
질려 안색이 창백했다. 녹장객은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부드럽
게 말했다.

"이제는 두려워할 것 없다. 앞으로 넌 좋으나 싫으나 내 시중을
들어줘야 할 것이다. 나 역시 너를 섭섭하게 대하진 않을 거야."

그는 한씨의 몸을 감싼 이불을 풀었다. 웬지 모르게 손이 떨렸
다. 여지껏 숱한 계집을 데리고 놀았지만, 이번처럼 가슴이 두근
거린 적은 없었다.

한씨는 혈도가 찍혀 소리를 지를 수도 몸부림을 칠 수도 없었
다. 이 마두에게 걸려든 이상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해야만 했
다. 그녀는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이불이 벗겨지자 예상했던 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동
신(胴身)이 드러났다. 녹장객의 입에서 절로 나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백옥을 다듬어 놓은 듯한 완벽한 나신이었다. 나신 위로
녹장객의 뜨거운 눈길이 훑고 지나갔다. 녹장객의 눈에서 급기야
원시적인 불길이 피어올라, 한씨의 나신을 불태우듯 이글거렸다.
한씨는 눈을 감은 채 상대방의 거칠은 숨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가 있었다. 곧이어 뱀에게 물린 듯 그녀의 알몸이 한 차례 움찔
했다. 녹장객의 손길이 금단의 문을 여는 첫 신호를 울렸다.

서늘한 느낌이 한씨의 목덜미에 잠시 머물다가, 둥그스름한 어
깨로 흘러내렸다. 한씨의 귓전에 뜨거운 입김이 와 닿았다. 그
입김은 그림자처럼 손길을 쫓았다. 그러나 탐닉의 손길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녹장객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씨의 몸에 이불을 덮
어 주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제자에게 다시 한 번 아무도 얼
씬 못하게 일러두고 나서 보탑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그 나름대
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욕심을 채우는 일을 뒤로 미룬 것이다.

'이번 일은 고두타가 비밀을 지켜줘야 하니, 그가 원하는 일을
마무리지어야겠다. 어젯밤에도 그 마교의 교주 녀석이 주 낭자를
구해 가려 했으니, 멸절사태와 그 계집이 함께 사라지면 군주는
우선 그 녀석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녀석의 무공이 워낙 고강하
니, 군주도 우리가 경계를 소홀히 했다고 나무라진 못할 거다.'

아미파의 여제자들은 모두 보탑 칠층에 갇혀 있었다. 멸절사태
는 일파의 장문인이니 만치 따로 작은 독실에 감금돼 있었다. 녹
장객은 문을 열게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멸절사태는 여러 날
동안 단식을 해왔기 때문에, 모습이 매우 초췌하여 더욱 꼬장꼬
장해 보였다. 녹장객이 점잔을 빼고 입을 열었다.

"멸절사태, 기분이 어떻소?"

멸절사태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기분이 어떻다고 대답하길 원하느냐?"

녹장객은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 고집불통이니, 어떻게 살아남길 원할 수 있겠소? 정말
딱하구료."

"여러 소리할 필요없다. 아마 날 죽이러 온 모양인데, 내 스스
로 목숨을 끊을 테니 비수를 갖다 줘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청이 있다. 나의 제자인 주지약을 불러줬으면 고맙겠다. 그
애한테 몇 마디 당부할 말이 있다."

녹장객은 그녀의 청을 들어주기로 하고, 밖으로 나가 사람을 시
켜 주지약을 데려오게 했다.

'음..... 역시 모녀의 정은 피만큼이나 짙군. 이미 죽을 각오가
돼 있는 상황에서 수제자를 부르지 않고 주지약을 부르니.....'

주지약은 스승님을 보자마자 품안으로 뛰어들며 흐느꼈다. 멸절
사태는 정색을 하고 녹장객에게 말했다.

"이 애와 단둘이 얘기를 하고 싶으니, 잠깐 자리를 비켜 주겠
소?"

녹장객이 밖으로 나가자 멸절사태는 주지약의 고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러나 이내 엄숙한 표정을
회복했다.

주지약은 어젯밤 장무기가 나타나 자기를 구해 주려 했던 일을
대충 얘기해 주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멸절사태는 눈살을 찌푸
린 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그가 왜 유독 너만 구하려고 했을까? 그날 너는 광명정안에서
그에게 일검을 찔렀는데, 무엇 때문에 오히려 너를 구하려고 했
지?"

주지약은 양볼이 약간 붉어지며 고개를 떨군 채 나직이 대답했
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멸절사태는 냉소를 날렸다.

"흥! 그 녀석은 너무 음험하고 독랄해. 틀림없이 무슨 무서운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

주지약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별다른 흉계가 없는 것 같아요."

멸절사태는 버럭 화를 냈다.

"닥쳐라! 너도 기효부와 마찬가지로 마교의 음도(淫徒)에게 마
음을 빼앗긴 게 아니냐!"

주지약은 놀란 나머지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니에요. 제자가 어찌 감히....."

멸절사태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엄숙했다.

"정녕 너의 마음이 바위처럼 확고하다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를 해라."

주지약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으나 어떻게 맹세를 해야 좋을
지 몰랐다. 그러자 멸절사태가 한 자 한 자 뚜렷하게 내뱉었다.

"이렇게 맹세를 해라. 나 주지약은 하늘에 두고 맹세컨데, 앞으
로 만약 마교의 교주인 장무기 음도에게 마음을 주거나 부부의
연을 맺는다면, 구천에 계신 부모님의 시신이 편안을 얻지 못할
것이며, 나의 스승인 멸절사태도 필시 죽어 귀신이 되어 평생 동
안 나를 따라다니며 저주할 것입니다."

주지약은 크게 놀랐다. 그녀는 천성이 온순하여 이런 독랄한 저
주가 담긴 맹세 따위는 아예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그러나 스승
님이 형형한 눈빛으로 무섭게 자기를 노려보자, 절로 머리가 어
지러워지며 그대로 맹세를 따라 했다.

멸절사태는 맹세를 마치자 무섭게 굳어졌던 안색이 풀리며 부드
럽게 말했다.

"얘야, 내가 일부러 너를 위협하는 게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너
를 진심으로 위하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기효부의 전철을 밟는
다면, 내 어찌 구천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겠느냐? 더군다나 나는
너에게 본파를 중흥시킬 중임을 맡겨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왼손 식지에 끼고 있는 구리반지를 빼내
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숙연하게 말했다.

"아미파 여제자 주지약은 무릎을 꿇고 문중의 유시를 받들라."

이렇게 말한 그녀는 반지를 높이 쳐들고 힘주어 다음 말을 이었
다.

"아미파 제 사대 장문 제자 멸절이, 본교 장문인의 직책을 제
사대 여제자인 주지약에게 전승시키는 바입니다."

주지약은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어지러웠던 차에 자기에게 장문
인의 자리를 전승시키겠다는 말을 듣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넋
을 잃고 말았다.

멸절사태는 뚜렷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주지약은 본문 장문인을 상징하는 아미철지환(峨嵋鐵指環)을
받도록 해라. 어서 왼손을 내밀어라."

주지약은 얼이 빠진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왼손을 내밀자, 멸절
사태가 반지를 그녀의 식지에 끼워 주었다.

주지약은 비로소 제정신을 되찾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스승님, 제자는 나이도 어린데다가 입문도 늦거늘, 어떻게 이
런 중책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스승님께선 필시 이번 위기를 모
면할 수 있을 겁니다. 제발 분부를 거두어 주십시오!"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스승님의 다리를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렸
다.

녹장객은 밖에서 기다리다 못해 짜증이 났다. 게다가 울음소리
가 들리자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이봐요! 얘기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소? 앞으로 얼마든지 시간
이 있으니 할 얘기가 있으면 나중에 하도록 하시오."

멸절사태는 대뜸 호통을 쳤다.

"입 좀 다물지 못하겠느냐?"

이어 주지약에게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네가 감히 스승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주지약은 스승님의 악에 받친 모습을 보자 덜컥 겁이 났다.

"제자는 절대.....!"

멸절사태의 표정은 더욱무섭게 변해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네가 내 말을 거역하다면, 그것은 문규에서 가장 큰 금기인 기
사멸조(欺師滅祖)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주지약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멸절사태는 그녀의 가냘픈 모습에서 연민의 정을 느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난 후, 이 온순하고 연약한 애가 어떻게 문중의 중임을
이끌어 갈 것인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하
고 아미파 제자 중에 장문인의 자리를 계승할 만한 인물이 없었
다. 주지약은 오성(悟性)이 가장 높아 자신도 터득 못한 문중비
학을 연성할 수 있는 유일한 적격자였다. 그러나 그 위업을 달성
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될 것이다. 멸절사태는
웬지 콧등이 시큰해지며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품안에 껴안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지약아, 내가 너에게 장문 자리를 물려 주는 것은 여러 사저들
보다 너를 편애하기 때문이 아니다. 문중 제자들 중에서 너만이
무림 군웅을 능가하는 절세무학을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약은 고개를 세차게 내둘렀다.

"제자가 앞으로 열심히 무공을 연마한들, 어찌 사저들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멸절사태의 입가에 한 가닥의 교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들의 자질은 한계가 있다. 지금 이미 한계에 도달해 더 이상
의 진전을 바라보기가 어렵다. 반면 너는 비록 현재로선 그들과
비교해 뒤떨어지지만, 앞날이 무궁무진하다. 그래! 무궁무진하고
말고!"

주지약은 이해가 가지 않아 그저 망연히 스승님을 쳐다보았다.

멸절사태는 갑자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나직하게 말했
다.

"너는 이제 본문의 장문인이니, 내가 본문의 한가지 커다란 비
밀을 얘기해 주마. 본문의 창파시조이신 곽여협은, 바로 왕년의
천하제일 대협이라 일컬어지던 곽정의 작은 따님이었다. 곽정대
협이 당시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두 가지 병법(兵法)이
며, 또 하나가 무공이었다. 곽대협의 부인이신 황용여협은 누구
보다도 지혜가 뛰어나 원병(元兵)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커져 양
양(襄陽)을 고수할 수 없음을 알고 죽음으로서 보국(報國)하기로
뜻을 굳혔단다. 그러나 곽대협의 절예가 실전되는 게 아까와 천
하에서 으뜸가는 장인(庄人)을 모셔와 양과(楊過) 양대협이 본문
사조께 주신 한 자루의 현철중검(玄鐵重劍)을 녹여, 다시 십방정
금(十方精金)을 혼합해 도룡도와 의천검을 만들었단다."

주지약은 도룡도와 의천검의 소문을 많이 들어왔지만, 이제서야
그 한 쌍의 도검이 바로 본문 사조이신 곽양여협의 생모께서 만
든 신병이기(神兵利器)임을 알았다.

멸절사태의 말이 계속됐다.

"황여협은 도검을 만들기 앞서, 곽대협과 심혈을 기울여 병법과
무공의 정요(精要)를 각각 도검 속에다 숨겨 두었다. 도룡도에
병법이 숨겨져 있으며 그 이름을 도룡(屠龍)이라 명명했던 것도
용(龍), 즉 황제를 죽일 수 있다는 뜻이다. 훗날 그 속에 숨겨진
병법을 수중에 넣는 자가 몽고 오랑캐의 황제를 죽여 천하를 얻
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천검에 숨겨진 무학 중에 가장
걸출한 것은 구음신경(九陰身經)과 항마십팔장(降魔十八掌)의 장
법으로서, 후인이 그 무학을 터득하면 천하 무림을 호령할 수 있
다고 하셨다.

주지약은 들을수록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거짓말 같은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멸절사태의 입에서 계속 엄청난 비밀이 이어졌
다.

"곽대협 부부는 한 쌍의 도검을 완성한 후 보도를 아들인 곽공
(郭公) 파로(破虜)에게 주었고, 보검을 본파의 곽조사께 주었다.
물론 곽사조께선 부모님으로부터 무공을 전수받은 바 있었고, 곽
공도 역시 병법을 전수받았다. 그런데 곽대협 부부와 곽공 파로
는 양양성이 무너지는 날 함께 순국을 하셨다. 곽사조의 성품은
부친의 무학과 맞지 않아 나름대로 많이 변형시켰기 때문에, 본
문의 무학이 왕년 곽대협의 무학과 같지 않는 것이다."

주지약은 그저 스승님의 얘기에 넋을 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멸절사태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백 년 동안 무림에 많은 풍파가 생겨 그 한 쌍의 도검의 주인
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후진들은 단지 도룡도가 무림지존이며
의천검만이 필적할 수 있다는 것만 알 뿐, 어째서 무림지존인지
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곽공 파로께서 순국하실 당시 나이가 젊
어 전인이 없었다. 그래서 도검의 비밀은 단지 본문의 곽사조를
통하여 전해져 내려왔을 뿐이다. 그 어르신네는 생전에 도룡도의
행방을 찾는데 전력을 기울였지만, 결과를 거두지 못하셨다. 세
상을 떠나기 앞서 그 비밀을 나의 은사이셨던 풍릉사태(風陵師
太)께만 비밀리에 구전해 주었으며, 나의 은사 역시 곽사조의 유
명에 따라 백방으로 도룡도의 행방을 찾았으니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은사가 돌아가시자 내가 그 유지를 이어받게 되었다. 내
가 장문직을 맡은 지 얼마 후에, 너의 사백이신 고홍자가 마교의
젊은 고수와 원한을 맺게 되어 쌍방이 단둘이서 생사결단을 내기
로 약정했다. 너의 사백은 상대방이 비록 나이는 젊지만, 무공이
고강하다는 것을 알고 나에게서 의천검을 빌려 갔었다....."

주지약은 마교의 젊은 고수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당시 장무기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멸절사태는 쉬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이제 밖에서 기다리고 있
는 녹장객도 재촉을 하지 않았다.

"당시 그 싸움에서 너의 사백은 상대방의 간계에 걸려들어 가슴
에 일장을 맞고, 의천검을 뽑기도 전에 그 마두에게 빼앗기고 말
았다. 네 사백의 말을 빌리면, 그 마두는 광소를 터뜨리면서 의
천검 따위는 자기 눈에 한낱 녹슬은 쇠붙이에 불과하다면서 땅에
팽개치고 유유히 떠나갔다는 거다. 너의 사백은 검을 주워 문중
으로 돌아와 나에게 돌려주려 했는데, 워낙 자존심이 강한 위인
이라 생각할수록 분이 끓어올라 사흘 뒤에 그만 중병을 알아 일
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의천검은 그 고을 관리에 의해 조정
에 바쳐지게 되었다. 너의 사백이신 고홍자를 개죽음 당하게 한
그 마교의 악도가 누구인지 아느냐?"

"모.....모릅니다."

"바로 그 나중에 너의 기효부 사저를 죽음의 궁지로 몰아넣은
대마두 양소란다! 그 놈만 아니었더라면....."

멸절사태는 이를 갈아부치며 다음 말을 이었다.

"나중에 오랑캐 황제가 그 의천검을 여양왕에게 시사한 것을 내
가 여양부로 가서 빼앗아 왔는데, 이번에 불행하게도 간계에 걸
려들어 다시 마교 손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주지약은 자신도 모르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게 아니라 여양왕부의 조 낭자가 빼앗아간 거예요."

멸절사태는 대뜸 눈을 부라렸다.

"그 계집이 바로 마교의 교주와 한 패거리다. 너는 지금까지도
이 스승의 말을 믿지 못하겠느냐?"

주지약은 믿기 어려웠으나 감히 스승님께 말을 할 수 없었다.
멸절사태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내가 너에게 장문직을 계승시킨데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난 아무래도 살아서 이 탑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그
장무기라는 음도는 너에게 엉뚱한 속셈을 품고 있기 때문에 절대
해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에게 거짓으로 정을 주는 척하면서
의천검을 빼앗아 와라. 그 도룡도도 그놈 의부 손에 있으므로,
네가 미색으로 유혹하면 수중에 넣는 일이 결코 어렵지 않을 것
이다. 물론 그것은 협의도에 사람이 할 짓이 못 되지만, 대(大)
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도리밖에 없다. 너도 생각해 보면 알
겠지만, 지금 그 조민이란 계집이 의천검을 갖고 있으며 도룡도
는 아직 사손의 손에 있으니, 그들이 의기투합하여 손을 잡는 날
에는 곽대협이 남긴 병법과 무공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생명을 잃게 될 것이며,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괴될 것인지 능히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군다나 몽고 오랑캐를 중원에서 몰아내는 대업은 영영 달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약아, 나도 이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모
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기필코 이
일을 성사시켜야만 한다. 지약아, 내가 천하의 백성들을 대신하
여 너에게 부탁하는 바이다."

여기까지 말한 멸절사태는 갑자기 주지약에게 무릎을 꿇었다.
주지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도 황급히 무릎을 꿇고 소리쳤
다.

"스승님, 이러시면.....!"

"조용히 해라. 밖에 있는 악적이 들으면 큰일난다. 내 부탁을
들어줄 것이냐? 만약 들어주지 않는다면 난 일어나지 않을 것이
다!"

주지약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장무기에게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라더니, 다시 자기더
러 장문직을 맡으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자기에게 미색으로 장무
기를 유혹해 도룡도와 의천검을 빼앗아오라고 하지 않는가! 주지
약은 한꺼번에 쏟아진 부담을 도저히 견뎌 낼 수 없어 머리가 어
지러워지며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갑자기 그녀는 인중혈에 극심한 아픔을 느끼며 눈을 번쩍 떴다.
스승님이 여전히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자 주지약
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스승님, 어서 일어나십시오."

멸절사태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다그치듯 물었다.

"그럼 나의 부탁을 승락하겠다는 거냐?"

주지약은 눈물을 흘리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다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멸절사태는 대뜸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도룡도와 의천검을 수중에 넣은 후, 은밀한 장소를 찾아 한 손
에 보도를 한 손에 보검을 쥐고 내력을 끌어올려 도검을 맞부딪
치면 도검이 동시에 부러질 것이다. 그럼 도신과 검신 속에 숨겨
져 있는 비급을 취할 수 있다. 그것이 비급을 취할 수 있는 유일
한 방법이다. 보도와 보검은 그로서 파괴되어 다시는 세상에 존
재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똑똑히 기억하겠느냐?"

그녀의 음성은 비록 나직했으니, 지극한 위엄이 담겨 있어 주지
약은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멸절사태가 다시 말했다.

"이것은 본문의 가장 큰 비밀이다. 앞으로도 너의 뒤를 이을 본
문의 장문인만이 이 비밀을 알 수 있다. 그 도룡도와 의천검은
모두가 탐내는 신병이기이니 만치, 설령 누가 동시에 수중에 넣
었다 해도 파괴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너는 병법을 얻은
후, 천성이 착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투철한 지사(志士)를
선택해 병법을 전수해 주어 그로 하여금 몽고 오랑캐를 몰아내는
위업을 달성토록 하여라. 그리고 무공비급을 네가 연마해라. 항
룡십팔장은 순양강맹(純陽剛盟)한 무공이니 네가 연마하기엔 어
렵겠지만, 구음진경은 충분히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곽사조께
서 나의 은사께 남긴 유언에 의하면, 구음진경의 무학은 심오하
고 광대무변하여 원래는 속성할 수 없지만, 황여협께서 몇 가지
속성의 방법을 적어 놓았다고 한다. 물론 그 속성책은 임시변통
에 불과하며 진정 천하무적의 무학을 이룩하려면 기초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려야 한다. 이 점 각별히 유의하도록 해라."

주지약이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멸절사태는 길게 숨을 들
이켰다.

"나는 평생 두 가지 소원밖에 없었다. 첫째는 몽고 오랑캐를 몰
아내 우리 한인의 산하(山河)를 되찾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미
파의 무학이 소림, 무당을 능가해 중원 무림의 제일 문파가 되는
것이다. 나의 소원은 달성하기 어렵지만, 이제 한 가지 길이 뚫
렸다. 네가 나의 분부에 따라 움직여만 준다면 언젠가는 그 두가
지 일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쯤 나는 구천에서도 눈물
을 흘리며 너에게 감사를 할 것이다."

그녀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멸절사태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다했다.

"이젠 들어와도 좋다."

곧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여왔는데 녹장객이 아닌 고두타였
다. 멸절사태는 그들이 모두 한통속이므로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
지 않았다.

"어서 이 얘를 데려가라."

그녀는 주지약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결하고 싶지 않았다. 주지
약이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고두타는 가까이 걸어와 나직하게 말했다.

"이것은 해약이니 어서 복용하시오. 잠시 후 밖에서 소리치면
모두들 일제히 달려나와 생사결단을 냅시다."

멸절사태는 비로소 이상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귀하는 대관절 누군데 나에게 해약을 주는 거요?"

고두타는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나는 명교의 광명우사 범요라 하오. 놈들에게서 해약을 훔쳐왔
으니 어서 복용하시오."

멸절사태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성난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마교의 악도! 끝까지 나를 희롱하려 하느냐!"

범요는 히죽 웃었다.

"좋소. 내가 희롱했다고 합시다. 이것도 독약이니 배짱이 있다
면 당장 복용해 보시오. 한 시진 이내에 오장육부가 토막토막 끊
어져 비참하게 죽을 테니!"

멸절사태는 아무 말 없이 가루약을 받아 입 안에 털어넣었다.

주지약은 소리쳤다.

"스승님!"

범요는 황급히 그녀를 제지했다.

"조용히 하라. 자, 너도 어서 독약을 복용해라."

주지약이 어떠한 행동을 취할 겨를도 없이 범요는 그녀의 양쪽
아관혈을 눌러 입을 강제로 벌리게 만들더니, 가루약을 쏟아넣고
는 옆에 있는 물병을 집어 다시 물을 몇 모금 마시게 만들었다.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억지로 약을 복용시키고 말았다.

멸절사태는 화들짝 놀랐다. 주지약이 죽으면 자신의 모든 계획
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녀는 사력을 다해 범요에게 덮쳐가
며 일장을 후려쳐 냈다. 그러나 공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무
모한 행동에 불과했다. 범요가 살짝 밀자 그녀는 담벽에 쿵 하고
등을 부딪치며 쓰러졌다.

범요가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림과 무당의 제자들도 모두 내가 준 독약을 복용했으니, 결
과가 흉인지 복인지는 잠시 후에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그는 껄껄 웃으며 밖으로 나가더니 문을 닫았다.

범요는 주막 밖에서 기다리지 않고 곧장 만안사로 달려온 것이
다. 그가 보탑 꼭대기에 오르자 문 밖에 서 있던 오왕아보가 공
손하게 그를 맞이했다.

"고대사, 이제 돌아오십니까?"

범요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웃음이 나왔다.

'빌어먹을, 제자더러 망을 보라 하고 늙은 것은 방 안에서 왕야
의 애첩과 한창 운우지락을 즐기고 있겠군. 이 틈을 이용해 방
안으로 뚫고 들어가 불의의 기습을 가해야지만 해약을 수중에 넣
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곧 구부정한 자세로 오왕아보의 곁을 지나면서 갑자기 지
풍을 날려 그의 아랫배 혈도를 찍었다. 불의의 기습이었다. 설령
오왕아보가 경계를 하고 있었다 해도, 그의 지풍을 피하진 못했
다. 혈도가 찍힌 오왕아보는 이내 몸이 굳어지며 크게 의아해 했
다.

그 순간 범요는 문을 밀고 들어가 다짜고짜 침상을 향해 쌍장을
떨쳐냈다. 그는 녹장객의 무공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일격에 치명
적인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 자신들의 계획이 틀어질 것이라 생각
했다. 그래서 이 일격에 십성의 공력을 주입시켰다.

팍!

그의 쌍장이 적중된 곳에 이불이 파열돼 솜이 흩날리며 회오리
바람이 일었다. 그는 얼른 이불을 젖혔다. 그러자 한씨만 알몸인
채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있을 뿐 녹장객의 모습은 보이
지 않았다.

범요는 잽싸게 오왕아보를 끌고 와 침상 밑에 쑤셔넣고 문을 닫
자마자, 밖에서 녹장객의 성난 음성이 들려왔다.

"아보! 아보! 녀석이 대관절 어디로 갔지?"

녹장객은 멸절사태가 감금돼 있는 방 밖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주지약이 나오지 않자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해서 고두타를 생
각해 감히 거칠은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한씨가
염려되고 또한 그녀를 빨리 품안에 안고 싶은 욕심에 다시 보탑
위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오왕아보가 보이지 않자 혼자 투
덜거리며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가 나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씨는 여전히 이불을 덮은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녹장객은 우선 방문을 안에서 잠그어 걸고 침상 앞으로 다가와
음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귀여운 것아, 이젠 혈도를 풀어 줄 테니 소리를 지르면 안 된
다."

이렇게 말하며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한데 그의 손이
한씨의 등에 닿자마자 돌연 손목이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전신
에 힘이 쭉 빠졌다. 다음 순간 이불이 젖혀지며 머리카락이 치렁
치렁한 자가 불쑥 일어났다. 바로 고두타였다.

범요는 녹장객의 맥문을 이미 나꿔잡은 상태에서, 왼손으로 지
풍을 날려 연거푸 열 아홉 군데의 혈도를 찍었다.

녹장객은 뼈마디가 녹아내리듯 흐물흐물 그 자리에 쓰러져 꼼짝
도 할 수 없었다. 대신 그의 눈에는 분노의 빛이 이글거렸다.

범요는 비로소 그에게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밝혔다.

"노부는 명교의 광명우사 범요다. 오늘 떳떳하지 못한 수단으로
너를 제압했으니, 죽이지는 않겠다. 억울하면 나중에 날 찾아와
라, 언제든지 너의 도전을 받아 주겠다."

그는 곧 녹장객의 옷을 벗겨 한씨의 시체 위에 포개놓고 짖굿게
웃으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어 해약을 갖고 각 감옥으로 찾아가 공문대사, 송원교, 유연
주 등에게 복용시켰다. 맨 마지막으로 멸절사태의 방에 들려 상
대방이 해약임을 믿으려 하지 않자 아예 독약이라고 위협을 한
것이다.

이제 모든 사람에게 해약을 나누어 주고 스스로 득의해 있는데,
갑자기 보탑 아래서 왁자지껄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에서
가장 뚜렷한 고함은 학필옹이었다.

"저 두타는 첩자다. 어서 놈을 잡아라!"

범요는 내심 산통이 깨졌구나 하고 생각했다.

'젠장, 누가 저 녀석을 구해 줬지?'

보탑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미 무사들이 새까맣게 깔려 탑 주위
를 완전히 포위한 상태였다. 그 중에는 손삼훼와 이사최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욕설을 터뜨렸다.

"이 똥물에 튀겨 죽일 두타야! 이젠 네 놈이 당할 차례다!"

혈도가 찍힌 그들 세 사람은 운이 좋았다고 봐야만 했다. 여양
왕부에서 보내온 병사들은 만안사를 모두 뒤졌으나 한씨를 찾아
내지 못하자, 한 사람이 문득 녹장객의 엽색행각이 상기되어 다
시 그가 기거하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감히 섣불리 접근
하지 못하고 한 졸개를 시켜 문을 두드리게 했다. 혹시 군주가
들리지 않았느냐는 핑계를 떨 심산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학필옹 등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학필옹은 혈도가 풀리자마자 고두타의 행방을 물어 즉시 무사들
을 이끌고 보탑을 포위한 것이다.

'빌어먹을! 화상 등이 해약을 복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공력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인, 지금으로선 시간을 끄는 도리밖에
없군.'

그는 곧 녹장객과 한씨를 함께 이불에 싸서 들고와 높이 쳐들며
소리를 질렀다.

"학필 늙은이야! 네가 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다면 당장 이
년놈들을 아래로 던져 버리겠다!"

무사들은 손에 횃불을 들고 있었으므로, 주위가 대낮처럼 밝았
다. 물론 보탑 꼭대기까지 그 불빛이 미치지 못했으나 학필옹은
녹장객과 한씨의 모습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다.

학필옹은 질겁을 하며 소리쳤다.

"사형! 사형! 별고 없소?"

그가 몇 번 외쳤지만, 녹장객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고두타의
손에 죽은 걸로 생각했다.

"고두타! 네놈이 나의 사형을 죽였다면, 목숨을 걸고 네놈과 생
사결단을 내겠다!"

범요는 동시에 녹장객의 아혈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녹장객은
대뜸 욕설을 터뜨렸다.

"학필, 늙은이, 너의 사형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왕야의 애첩을 납치해 왔다. 그래서 내가 그들이 놀아나는 현장
을 덮쳐 모두 사로잡은 것이다. 그래도 네놈은 사형을 두둔할 작
정이냐? 총관대인, 어서 저 늙은이를 체포하시오! 그들 사형제는
반모를 꾀하려 했으니, 체포하면 왕야께서 후한 상을 내릴 것이
오!"

총관은 곁눈질로 학필옹을 쳐다보았다. 고두타가 갑자기 입을
연 것에 대해 이상하게 느껴졌으나, 녹장객과 한씨가 알몸인 채
같이 이불에 싸여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학필옹에게 출수를 할
순 없었다. 그는 엉거주춤하다가 탑 위를 향해 소리쳤다.

"고대사, 어서 내려오시오. 우리 함께 왕야에게 가서 시비를 가
립시다!"

범요는 원래 겁이 없었다. 지금 함총관, 학필옹 등과 왕부로 가
서 시비를 가린다면 그 동안 군호들의 공력이 충분히 회복될 것
이라 생각했다.

"좋소이다. 이번 기회에 나도 왕야께 후한 상을 받아야겠소. 총
관대인, 그 늙은이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단단히 지켜 주시오."

바로 이때였다. 홀연 요란한 말굽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인마가
질풍처럼 보탑 앞으로 달려왔다. 주위에 있는 무사들은 일제히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터주며 공손히 몸을 꺾었다.

"소왕야!"

뜻밖에도 여양왕의 세자인 고고특목이가 고수들을 이끌고 나타
난 것이다.

고고특목이, 즉 왕보보는 냉랭하게 다그쳤다.

"납치자는 대관절 누구냐? 부왕께서 노발대발하시기에 내가 친
히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달려왔다."

총관이 얼른 앞으로 다가가 아뢰었다.

"녹장객이 한 부인을 납치해 왔는데, 지금 고대사께서 사로 잡
았습니다."

옆에 있는 학필옹이 황급히 변명을 했다.

"소왕야! 그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입니다. 고두타는 적의 첩자
로서 사형은 그의 음모에 걸려....."

왕보보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소리쳤다.

"고대사와 녹장객더러 모두 내려와 진상을 밝히라고 해라!"

범요는 왕부에서 오랫 동안 머물며 왕보보의 영특함이 부친에
못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탑 아래로 내려가면 자
신의 모든 모략이 금방 탄로날 게 뻔했다.

"소왕야, 제가 녹장객의 음계를 파헤쳤기 때문에, 만약 아래로
내려가면 학필옹이 틀림없이 날 죽이려 할 겁니다!"

범요는 여전히 시간을 끄는 원칙을 고수했다. 군호들이 공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왕보보는 막무가내였다.

"어서 내려오시오! 학필옹이 절대 당신에게 공격을 취하지 못할
것이오!"

범요는 고개를 내두르며 다시 소리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이곳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할 것 같습니
다. 소왕야, 나는 여지껏 벙어리 행세를 해 왔지만 오늘 왕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부득이 입을 열게 되었소! 내 말을 정녕
믿지 못하겠다면 당장 아래로 뛰어내려 죽음으로서 진심으로 증
명해 드리겠소!"

왕보보는 그의 허황된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가
일부러 시간을 끌려 한다는 것도 눈치챘다. 왕보보는 곧 나직이
총관에게 물었다.

"저 자가 무슨 속셈으로 시간을 끄는지 알고 있소?"

총관은 망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둘렀다.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학필옹이 얼른 끼어들었다.

"소왕야, 놈은 나의 사형에게서 해약을 빼앗아 탑에 갇혀 있는
역도들을 구해 주려는 속셈이 분명합니다."

왕보보는 이내 짚이는 바가 있어 시치미를 떼고 보탑 위를 향해
소리쳤다.

"고대사, 당신의 공로를 잘 알고 있으니, 어서 내려오시오. 후
한 상을 내리겠소."

범요는 그의 말을 따를 리가 만무했다.

"소왕야, 나는 녹장객과 싸우다가 다리가 부러졌소. 지금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운공료상을 한 후에 내
려가겠소."

왕보보는 즉시 총관에게 명령했다.

"총관, 어서 사람을 탑 위로 올려 보내 고대사를 업고 내려오라
하시오!"

범요는 그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안 됩니다! 지금 상태에서 누가 내 몸을 건드리기만 하면 다리
를 영원히 못 쓰게 될 겁니다!"

왕보보는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한씨와 녹장객이
함께 이불에 싸여 있는 것을 보자 설령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해도, 부왕께서 더 이상 한씨를 받아들이지 않
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곧 결단을 내렸다.

"총관, 탑에다 불을 지르시오. 그리고 궁수들을 대비시키고 누
구를 막론하고 탑에서 뛰어내리면 사살토록 하시오."

총관은 대답을 하고 즉시 명령을 내리자, 궁수들이 만반의 태세
를 갖추어 탑을 포위하고 일부 무사들은 불을 지르기 위해 분주
하게 움직였다.

이렇게 되자 놀란 것은 학필옹이었다.

"소왕야, 나의 사형이 탑 위에 살아 있습니다."

왕보보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

"고두타는 저 위에서 평생을 머물 수 없으니 불을 지르면 자연
히 내려올 것이오."

"그가 만약 나의 사형을 아래도 던지면 어떻게 합니까? 소왕야,
절대 불을 지르면 안 됩니다."

왕보보는 냉소를 날리며 그를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았다.

삽시간에 무사들이 마른 장작과 짚단을 탑 주위에 잔뜩 쌓아올
려 기름을 붓고 불을 지폈다. 학필옹은 다급해져 이내 몸을 날려
불을 지피려는 무사들을 공격했다. 그러자 왕보보가 싸늘하게 외
쳤다.

"감히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다니! 놈을 잡아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다섯 명의 홍의빈승이 일제히 계도(戒刀)
를 뽑아들고 학필옹을 포위했다.

학필옹은 사형의 안위가 염려되고 극도로 분노한 나머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즉시 왼쪽에 있는 빈승의 계도를 나꿔
채 갔다. 그 빈승은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잽싸게 계도를 떨치며 오히려 학필옹의 어깨를 베어갔다. 그와
동시에 다른 빈승들도 일제히 공격을 전개했다. 이때 탑 주위에
거센 불길이 치솟아 오르며 삽시간에 불바다를 이루었다.

왕보보의 부하들 중에 열 여덟 명의 무공 고수들이 있었다. 그
들은 모두 십팔금강(十八金剛)이라 일컬어지며 오도(五刀), 오검
(五劍), 사장(四杖), 사발(四拔)로 나누어졌다.

이 다섯 명의 빈승은 오도금강(五刀金剛)이었다. 그들 개개인의
무공은 학필옹에 비해 차이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합세하면
그 위력이 대단했다. 학필옹은 비록 무공이 고강하지만 하루 전
에 장무기에 의해 각혈을 하는 부상을 입어 내력이 크게 손상되
었다. 더군다나 불길이 거세질수록 사형의 안위가 염려되어 정신
을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

왕보보의 부하들은 계속 마른 장작을 던져 넣었다. 불길은 갈수
록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범요는 녹장객을 버려두고 무당파의 제자들이 갇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지금 탑이 불타고 있소! 여러분들은 공력이 회복되었소?"

그가 소리쳤으나 송원교, 유연주 등은 제각기 가부좌를 틀고 앉
아 운공조식을 할 뿐,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공력이 회
복될 긴박한 상황에 도달해 있는 모양이었다.

군협들을 지키고 있던 몇몇 무사들이 달려와 공격을 시도했으
나, 범요에 의해 모두 탑 아래로 내던져져 죽음을 당하거나 불길
을 뚫고 아래로 달아나 버렸다.

얼마 후 불길이 사층으로 번졌다. 사층에 감금돼 있는 화산파의
고수들은 공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허겁지겁 오층으로
달아났다. 불길은 계속 위로 번져갔다. 오층에 있는 공동파의 사
람들도 피신해야만 했다.

범요가 속수무책일 때 홀연 한 사람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범우사, 받으시오!"

바로 위일소의 음성이었다. 범요는 크게 기뻐하며 소리가 들려
온 쪽을 바라보았다. 위일소가 만안사 후전 지붕위에 서서 기다
란 밧줄을 던져 주었다. 범요는 잽싸게 그것을 받았다. 위일소가
다시 외쳤다.

"어서 밧줄을 난간에 묶어 구름다리로 삼으시오!"

범요가 그의 말대로 밧줄을 묶자마자, 신전팔웅 중에 조일상이
화살을 날려 정확하게 밧줄을 끊어 버렸다. 범요와 위일소는 동
시에 욕을 터뜨렸으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구름다리를
놓으려면 우선 신전팔웅을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다.

위일소는 즉시 장검을 뽑아쥐고 몸을 날렸다. 그가 땅에 떨어지
자마자 다섯 명의 청의빈승이 검을 들고 포위해 왔다. 그들은 바
로 왕보보의 부하 중에 오도금강이었다. 다섯 명은 날카롭게 장
검을 떨치며 위일소를 협공했다.

학필옹은 고전을 하며 다시 소리쳤다.

"소왕야, 어서 불을 끄라고 명령하지 않으면, 나도 마지막 수단
을 쓰는 도리밖에 없소!"

왕보보는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손에 선장을 쥔 네 명의
빈승이 즉시 왕보보를 에워쌌다.

학필옹은 초조해졌다. 그는 쌍방을 떨쳐 앞쪽에 있는 빈승 셋을
물리치더니, 진기를 끌어올려 담 앞으로 몸을 날렸다. 다섯 명의
빈승이 그림자처럼 그를 쫓아왔다. 학필옹은 지체하지 않고 재차
몸을 솟구쳐 보탑 일층 지붕 위로 올랐다. 다섯 명의 빈승은 불
길이 너무 거세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학필옹은 단숨에 보탑 사층까지 올라갔다. 그 순간 범요가 칠층
에서 빠끔히 고개를 내밀어 그를 확인하더니 녹장객의 몸을 다시
번쩍 들어올렸다.

"학필 늙은이, 더 이상 접근해 오면 한 사람이 핏덩어리로 변하
게 될 것이다!"

학필옹은 과연 더 이상 행동을 취하지 못한 채 소리를 질렀다.

"고대사, 우린 당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소. 정녕 당신의 정인
멸절사태와 딸 주 낭자를 구할 생각에서 그런다면 마음놓고 가서
구하시오. 난 절대 방해를 하지 않을 것이오!"

멸절사태는 고두타가 준 해약이 정말 독약인 줄 알고, 주지약마
저 죽게 됐다고 생각하며 절망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고두타와 학필옹이 입씨름을 벌리고, 왕보보가 탑에 불을 지르도
록 명령하는 것을 똑똑히 듣고는 내심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귀신같이 생긴 두타가 정말로 나를 구하려 왔단 말인가?'

그녀는 공력을 끌어올려 보니, 즉시 단전으로부터 한 갈래의 뜨
거운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이레동안 단식을 해 왔기 때문에, 뱃속이 텅텅 비어 약
력이 다른 사람보다 빨리 흡수되었다. 게다가 원래 송원교, 하태
충 등보다 공력이 심후해 그 사이에 공력이 절반 이상 회복되었
다.

그녀가 운공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홀연 학필옹이 자기가 고
두타의 정인이고 주지약이 딸이라고 하는 말을 듣자 화가 머리끝
까지 치밀어 대뜸 밖으로 뛰쳐나가 호통을 쳤다.

"이런 천벌을 받을 악적아, 지금 무슨 잠꼬대를 하는 거냐?"

학필옹은 자세한 내막을 모르므로 한 술 더 떠 멸절사태에게 통
사정을 했다.

"노사태, 제발 당신의 옛 정인을 설득해 우선 나의 사형을 놓아
주도록 해주시오. 그러면 당신네 세 식구가 무사히 이곳에서 떠
날 수 있도록 도와주겠소. 약속을 하리다."

멸절사태는 더욱 오장육부가 터질 것 같았다.

"뭐.....뭣이라고? 세 식구.....?"

범요는 비록 위경에 처해 있었지만, 멸절사태가 발끈하여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자 매우 통쾌해 하며 광소를 날렸다.

"노사태, 학필 늙은이는 당신이 나의 옛 정인이며 주 낭자가 우
리 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라고 하니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
오?"

멸절사태는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녀가 다시 호통을 치
려는데, 갑자기 탑 아래서 고함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순간 불길
속에서 한 줄기의 인영이 종횡무진으로 번뜩이는 가운데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빈승이나 무사나 할 것이 없이 분분히 무기를 떨
어뜨리며 뒤로 밀러났다. 명교의 교주 장무기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장무기가 출수하자 위일소를 협공하던 오도금강의 장검이, 일제
히 허공으로 날았다. 위일소는 크게 기뻐하며 즉시 장무기의 곁
으로 몸을 번뜩여 나직이 말했다.

"내가 여양왕부로 가서 불을 지르겠소."

장무기는 그의 뜻을 이내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부
에 불이 나면 무사들은 왕야를 보호하기 위해서 모두 왕부로 달
려갈 것이다. 실로 절묘한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였다.

위일소는 즉시 한 줄기의 바람으로 화해 높은 담장을 뛰어 넘어
사라졌다.

장무기는 주위의 상황을 한 번 훑어보며 낭랑한 음성으로 물었
다.

"범우사, 어떻소?"

범요가 소리쳐 대답했다.

"큰일났습니다. 출로가 불길에 싸여 한 사람도 빠져나갈 수 없
는 상황입니다."

이때 왕보보의 부하 중에 열 네 명이 장무기를 포위했다. 장무
기는 그들을 제압해도 보탑이 잿더미로 변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불길을 잡으려면 우선 왕보보를
제압해야만 했다. 그는 곧장 한 줄기의 빛이 되어 왕보보에게 접
근해 갔다.

이때 왼쪽에서 한 갈래의 싸늘한 검기가 뻗쳐와 장무기는 얼른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여인의 앙칼진 음성이 들려왔다.

"장공자, 저의 오빠에게 상처를 입히면 안 돼요!"

바로 조민이었다. 그녀는 손에 의천검을 쥔 채 장무기를 응시하
고 있었다. 장무기보다 한 발 늦게 당도한 것이다.

장무기는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불을 끄라고 명령을 내리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 역시 가
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조민은 그의 청을 거절했다. 그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
였다.

"십팔금강은 들으세요. 이 자의 무공은 대단하니 금강진을 펼치
세요!"

십팔빈승은 즉시 왕보보와 조민을 중심으로 하여 원을 그리며
돌았다. 동시에 사발금강이 양 손에 쥐고 있는 동방(銅방)을 맞
닥뜨려 요란한 음향을 터뜨렸다. 그들은 장무기가 왕보보와 조민
에게 공격을 전개하지 못하게끔 철저한 보호벽을 구축한 것이다.

장무기는 그들이 원을 그리며 회전하는 보법이 매우 특이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열 여덟 명이 구성한 인의 장벽에는 많은 변화
가 숨겨져 있었다.

장무기는 금강진을 파괴해 그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쿵 하는 굉음과 함께 보탑
의 굵은 기둥 하나가 무너져 버렸다.

장무기가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불길이 이미 칠 층까지 번졌다.
화마에 휩싸인 가운데서 두 사람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
데, 바로 멸절사태와 학필옹이었다. 소림, 무당 등 무림의 군호
들은 모두 십 층으로 피신해 있었다. 그들은 아직 공력이 회복되
지 않았다. 설령 공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지면에서 십여 장이나
떨어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장무기는 재빨리 뇌리로 생각을 굴리더니, 갑자기 전광석화같이
신법을 전래해 좌충우돌하며 신전팔웅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뿐
만 아니라 손에 활을 갖고 있는 무사라면 모두 혈도가 찍혔다.
실로 신속무비한 공격이었다.

삽시간에 그들을 제압한 장무기는 소리 높여 외쳤다.

"여러분들, 내가 아래서 받아줄 테니 어서 차례로 뛰어내리시
오!"

탑 위에 있는 군호들은 모두 멍해졌다. 십여 장 높이에서 뛰어
내리면 몸의 무게가 가속되어 그 힘이 천 근이 넘을 텐데, 무슨
수로 받아낸다는 것일까?

곤륜파와 공동파의 제자들 중에 몇몇이 소리쳤다.

"저 녀석에게 속으면 안 됩니다. 절대 뛰어내리지 마십시오. 우
리를 분신쇄골 시킬 속셈입니다!"

장무기는 안타까왔다. 더 이상 지체하면 군호들이 모두 화마에
휩싸여 개죽음을 당하게 될 게 뻔했다.

"유백부님! 백부님도 소질을 믿지 못하겠습니까? 백부님이 먼저
뛰어내리십시오!"

유연주는 비록 장무기를 믿어왔으나 이번만큼은 회의를 갖고 있
었다. 장무기의 무공이 제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절대 자기를 받
아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불타 죽기를 기다
릴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차라리 뛰어내려 죽겠다는 생각에 소
리쳤다.

"좋아! 내가 먼저 뛰어내리겠다."

그는 서슴없이 보탑 아래로 몸을 던졌다.

장무기는 그가 떨어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지면에 가
까와지는 순간 허리를 향해 살짝 일장을 뻗어냈다. 이 일장은 바
로 건곤이위신공의 절정무공으로서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막강한
힘을 분산시키는 작용을 했다.

유연주의 몸은 장무기의 일장으로 인해 방향을 꺾으며 일장(丈)
남짓 날아갔다. 그는 공력이 칠, 팔 성 가량 회복되었으므로 허
공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사뿐히 땅에 내려설 수 있었다.
그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가까이 있는 몽고 무사에게 일장을 떨쳐
쓰러뜨리며 탑 위를 향해 소리쳤다.

"대사형, 사제, 어서 뛰어 내리시오!"

탑 위에 있는 사람들은 유연주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송원교는 아들에 대한 정이 깊어 그로 하여금 먼저 위험에서 벗
어나게 했다.

"청서야,네가 먼저 뛰어내려라!"

송청서는 감방에서 나온 후 줄곧 주지약 곁에 서 있었다.

"주 낭자, 낭자가 먼저 뛰어내리시오."

주지약은 공력이 회복되지 않아 한창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
는 스승님을 도와줄 수 없었다. 물론 자기만 살겠다고 뛰어내릴
수도 없어 송청서에게 고개를 내둘렀다.

"저는 스승님을 기다리겠어요."

이때 하태충과 반숙한이 이미 선후로 뛰어내렸다. 장무기는 건
곤이위신공을 전개해 그들이 모두 무사히 착지하게끔 도와주었
다.

하태충 부부는 비록 공력이 오, 육성밖에 회복되지 않았으나,
그 정도만으로 능히 빈승, 무사들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들은 유연주와 합세해 장무기의 주위를 호위해 주었다.

탑 위에선 계속 사람들이 뛰어내렸다. 군호들은 그 동안 갖은
수모를 겪었으므로 땅에 내려서자마자 모두 목숨을 도외시하고
살수를 펼쳤다. 그 바람에 삽시간에 이십여 명의 무사가 죽음을
당했다.

왕보보는 상황이 갈수록 불리해지자 명령을 내렸다.

"속히 가서 나의 친위대를 불러와라!"

총관이 대답을 하고 막 떠나려는데 돌연 왕부쪽에서 불길이 치
솟았다. 총관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소왕야! 왕부에 불이 났습니다. 속히 달려가 왕야를 보호하는
게 시급할 것 같습니다."

왕보보는 부친의 안위가 중요하므로 반도들의 일을 일단 뒤로
미루어야만 했다.

"동생, 난 왕부로 달려가 봐야 하니 이곳은 네가 맡아라."

그는 조민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곧장 왕부를 향해
달려갔다. 십팔금강도 그의 뒤를 따랐고, 무사도 거의 태반이 떠
나갔다. 그들은 왕부의 실화가 단지 위일소 한 사람의 짓이었다
는 것을 꿈에도 생각 못했다. 틀림없이 반도들이 대거 진격해 온
것이라 간주해서 허겁지겁 달려간 것이다.

이때 송원교, 송청서, 장송계, 막성곡 등도 뛰어내렸다. 쌍방의
강약지세는 더욱 역전되었다. 이어 공문대사, 공지대사 등이 뛰
어내리자 조민의 부하들은 도저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민은 대세가 기운 것으로 판단했다. 자칫 꾸물대다가 오히려
자기가 포로로 잡히게 될지도 모른다.

"모두들 철수해라!"

그녀는 명령을 내리고 나서 장무기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일 황혼 무렵에 다시 술을 대접할 테니, 그 장소로 나오세
요."

장무기가 멍해지며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조민은 생긋이 웃
어 보이며 만안사 후원으로 물러갔다.

이때 탑 위에서 범요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주 낭자, 어서 뛰어내려! 꾸물대다가는 목숨을 잃게 될 거야!"

주지약은 고집을 부렸다.

"스승님과 함께 있겠어요!"

멸절사태는 학필옹과 계속 치열한 싸움을 벌이며 불길을 피해
위로 올라가다 보니, 드디어 보탑 꼭대기 구석까지 옮겨 오게 되
었다. 그녀의 공력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죽음을 도
외시한 상태이므로 수비에 신경을 쓰지 않고 이직 맹렬한 공격만
퍼부었다.

한편, 학필옹은 사형의 안위가 염려되어 좀처럼 기선을 잡지 못
했다.

멸절사태는 주지약의 말을 듣자 호통을 치듯 외쳤다.

"지약아, 어서 뛰어내려라! 난 이미 이 음적과 죽음을 같이 하
기로 작심했다."

학필옹은 내심 초조해졌다.

'이 할망구는 죽으려고 환장했지만 난 사형을 구하는 일이 시급
하다.'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멸절사태, 그 말을 고두타가 한 것이지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
이 없소!"

멸절사태는 공격을 거두고 대뜸 범요에게 몸을 돌렸다.

"두타, 당신이 그 따위 미친 소리를 했소?"

범요는 능글맞게 웃으며 반문했다.

"미친 소리라니, 무슨 말을 했다는 거요?"

그는 일부러 반문을 한 것이다. 멸절사태의 입을 통해 자기가
한 얘기를 다시 반복하게끔 하기 위한 속셈이었다. 그러나 멸절
사태가 어찌 '옛정인'이니 '사생아' 같은 말을 직접 입 밖에 낼
수 있단 말인가? 멸절사태는 범요의 언동에서 학필옹의 말이 사
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울화가 치밀어 온 몸이 부들부들 떨
렸다.

학필옹은 멸절사태가 자기에게 등을 돌리고 있자 기습하기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때마침 시꺼먼 연기가 바람에 실려 오자 멸
절사태의 등을 향해 쌍장을 떨쳐냈다.

주지약과 범요는 그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소리쳤다.

"스승님, 조심하세요!"

"늙은이, 조심하시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녀가 재빨리 몸을 돌려 반격을 하
려는 순간 학필옹의 쌍장이 등심에 적중되었다. 현명패천장의 위
력은 대단했다. 멸절사태는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 쓰러지려는 것
을 주지약이 황급히 부축했다.

범요는 대노하여 호통을 쳤다.

"이런 비겁한 놈!"

그는 녹장객과 한씨를 싼 이불보따리를 냅다 탑 아래로 던져 버
렸다.

학필옹은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자세히 생각을 굴릴 겨를도 없
이 몸을 날려 이불보따리를 나꿔채려 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고 시간적으로도 너무 늦었다. 그의 손이 이불 귀퉁이를 잡는
순간 몸의 중심을 잃고 함께 탑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한편, 장무기는 탑 아래 서서 시꺼먼 연기를 뚫고 육중한 물체
가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자 본능적으로 건곤이위신공을 전개할
준비를 갖추었다. 육중한 물체가 지면에서 가까이 떨어져 내리자
장무기는 비로소 학필옹 등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자기가
그들로 인해 숱한 고생을 겪었고, 또한 부모의 죽음마저 그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차마 그들이 분신쇄골 되게끔
수수방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즉시 쌍장을 떨쳐내 이불보다리와
학필옹을 제각기 좌우 이 장 밖으로 밀어냈다.

학필옹은 허공에서 몸을 한 번 회전시켜 사뿐히 땅에 내려 설
수가 있었다. 비록 무사히 목숨을 건졌지만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울러 장무기가 원한을 덕으로 갚은 행동에 대해
크게 의아해 했다.

다음 순간, 그는 사형이 떨어진 곳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소스라
치게 놀랐다. 장무기가 일장을 전개하는 바람에 이불 보따리가
풀어져, 그 속에서 굴러나온 두 개의 알몸이 공교롭게도 불더미
에 휩싸여 있었다. 녹장객은 혈도가 찍여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
므로 이내 머리카락에 불이 붙었다.

학필옹은 질겁을 하며,

"사형!"

하고 소스라치는 동시에 불더미 속으로 달려가 녹장객을 구출했
다.

이때 유연주가 싸늘하게 외쳤다.

"일장을 받아라!"

그는 왼손으로 학필옹의 어깨를 강타해 갔다. 학필옹은 알몸인
사형을 안고 있으므로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는 황급히 옆
으로 미끄러지며 피했으나 유연주의 일장도 도중에서 방향을 꺾
으며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학필옹은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이마에 구슬땀이 돋았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녹장
객을 안은 채 몸을 날려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이 무렵, 탑은 온통 불길에 휩싸여 기둥이 무너지며 벽돌이 분
분히 떨어져 내렸다. 이젠 탑 전체가 흔들거리며 언제라도 폭삭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불길 속에서 멸절사태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약아! 어서 뛰어내려라!"

"스승님! 스승님께서 먼저 뛰어내리셔야만 저도 뛰어내리겠어
요!"

이때, 범요의 장소가 들리며 탑 아래도 뛰어내렸다. 장무기가
일장을 격출해 그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범우사, 성공이오! 정말 수고가 많았소."

범요는 몸을 바로 세우고 그의 말을 받았다.

"교주의 절세신공이 아니었더라면, 우린 모두 탑 속에서 개죽음
을 당했을 겁니다."

멸절사태는 갑자기 주지약을 껴안더니 아래로 뛰어내렸다. 지면
이 가까와지자 그녀는 양팔에 공력을 끌어올려 힘껏 주지약을 위
로 던져 버렸다. 이렇게 되자 주지약은 몇 장 높이 허공에서 떨
어지는 격이 되었다. 그 반면, 멸절사태의 떨어지는 기세는 더욱
가속될 수밖에 없었다. 장무기는 얼른 앞으로 달려가 건곤이위신
공으로 그녀의 옆구리를 향해 장풍을 뻗쳐냈다.

그런데 멸절사태는 이미 죽을 결심을 굳혔고, 또한 명교의 은혜
를 눈꼽만치도 받지 않겠다는 생각에 장무기의 장풍이 뻗쳐오자
전신에 남은 여력을 모두 일장에 실어 떨쳐냈다.

순간, 쌍방의 장풍이 허공에서 격돌되며 펑! 하는 굉음이 터졌
다. 장무기의 장풍은 그녀의 일장에 의해 방향을 바꾸었으며 멸
절사태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졌다. 그녀의 칠공(七孔)
에서 이내 피가 쏟아져 나왔다. 축 늘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전
신의 뼈마디가 분쇄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직 숨
이 붙어 있었다.

멸절사태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지약은 스승에게 달려가며 울음을 터뜨렸다.

"스승님!"

나머지 아미파의 제자들도 스승님의 주위를 에워쌌다.

멸절사태는 힘없이 눈을 떴다.

"지약아, 오늘부터 너는 본문의 장문인이다. 내가 당부한 일
을..... 명심하겠지?"

주지약은 울먹이며 대답했다.

"네, 스승님!"

멸절사태의 피로 얼룩진 입가에 한 가닥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난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다....."

장무기는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맥을 짚었다. 순간, 멸절사태는
갑자기 손목을 젖혀 장무기의 손을 갈퀴처럼 나꿔잡으며 싸늘하
게 소리쳤다.

"마교의 음도야! 네가 만약 내 제자의 청백을 더럽힌다면, 죽어
귀신이 되더라도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

그녀는 마지막 한 자를 내뱉지 못한 채 그만 숨이 끊어지고 말
했다. 그녀의 손톱이 장무기의 손목 살갗 속으로 파고 들어 피가
배어 나오게 했다.

범요가 얼른 소리쳤다.

"모두들 나를 따르시오! 서문 밖에서 회합해야 하니 더 이상 지
체하면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오!"

장무기는 멸절사태의 시신을 안고 나직이 말했다.

"갑시다."

주지약은 그에게서 스승님의 시신을 받아 장무기를 아예 쳐다보
지도 않고 앞장서 사찰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때 곤륜, 공동, 화산파의 제자들도 벌떼처럼 밖으로 뛰어갔
다. 단지 소림의 공문, 공지 두 고승만이 선배고인의 풍도를 잃
지 않고 장무기에게 다가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장무기는 건곤이위신공으로 육파 고수들을 구하느라고 내력이
많이 소비되었다. 그는 공문 등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역시
걸음을 옮겨갔다.

날이 밝을 무렵, 군호들은 서문에 당도해 성문을 지키는 관병들
을 쫓아 버리고 곧장 서북쪽으로 몇 리쯤 달려가자 양소가 마차
의 행렬을 준비한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소는 중인에게
일일이 축하한다고 인사를 했다.

공문대사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오늘 명교의 교주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중원 육파의 운명을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오. 그 은혜는 나중에 갚기로 하고, 이제
부터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장교주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바이오."

장무기는 겸손하게 말했다.

"저는 아직 견식이 미천하니, 역시 소림방장께서 진로를 제시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공문대사는 한사코 사양을 했다. 그러자 장송계가 나섰다.

"이곳은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으니, 왕부의 불길을 잡은
후에 많은 병마가 쫓아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단 이곳에서 멀
리 벗어나 차근차근 대책을 의논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하태충이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놈들이 쫓아오면 한바탕 싸움을 벌여 그 동안 당했던 수모를
갚읍시다."

장송계는 고개를 내둘렀다.

"모든 분의 공력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 정면 대결
을 뒤로 미루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공문대사가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장대협의 말일 맞습니다. 오늘 설령 많은 적을 살상하다해도
우리 역시 적지 않은 희생을 치루게 될 겁니다. 일단 이곳을 피
하는 게 상책인 것 같소."

소림 장문인의 말을 역시 비중이 컸다. 더 이상 이의를 제시하
는 사람이 없자 공문대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장대협, 당신의 의견은 우리가 당분간 어디로 피했으면 좋겠
소?"

장송계는 이미 생각해 놓은 바가 있었다.

"몽고 오랑캐들은 우리가 남쪽, 혹은 동남쪽으로 갈 것이라 생
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 반대 방향을 택해 서북쪽으로 가
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중인은 모두 멍해졌다. 그러나 양소는 손뼉을 치며 찬성했다.

"역시 장대협의 생각은 깊소. 서북지방은 땅이 넓고 사람이 적
으니 아무 황산(荒山)을 찾아들어가도 당분간 피신할 수 있을 것
이며, 오랑캐들은 전혀 예측을 하지 못할 것이오."

중인은 장송계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하고 곧 북쪽으로 출발했
다. 약 오십 리쯤 벗어나자 군호들은 어느 골짜기로 접어들어 휴
식을 취했다. 양소는 이미 각종 물품을 구입해 놓았기 때문에 군
호들이 요기를 채우는 데는 불편이 없었다. 중인은 그간의 경과
를 얘기하며 장무기와 범요의 도움에 대해 새삼 고마움을 느꼈
다.

한편, 주지약을 비롯한 아미파의 제자들은 멸절사태의 시신을
화장했다. 공문, 공지, 송원교, 장무기 등은 일일이 큰절을 올리
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멸절사태는 비록 성품이 괴팍하지만 평생 협의도에 서서 의연하
게 자신을 지켜온 일대여협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다. 아미
파의 제자들은 방성통곡을 했고 군호들도 기분이 울적했다.

공문대사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죽은 자는 다시 소생할 수 없으니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오랑캐를 몰아내는 것만이 멸절사태를 위한 복수
가 될 것이오."

공지대사도 한 마디 했다.

"중원 육대문파는 원래 명교와 적대시해 왔으나, 이번 일을 계
기로 하여 쌍방이 모든 원한을 말끔하게 씻어 버립시다. 앞으로
오직 오랑캐를 섬멸하는데 협심동력합시다!"

군호들은 모두 그러자고 호응했다. 그러나 복수하는 방법에 대
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공문대사가 다시 나섰다.

"이 일은 서둘러서 성사되는 게 아닌 만큼, 우선 며칠간 휴식을
취한 연후에 대책을 상의하도록 합시다."

중인은 모두 찬성했다.

장무기는 정색을 하고 늠름하게 말했다.

"나는 개인적인 일이 있어 다시 대도로 들어가야 하니, 여러분
과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앞으로 여러분들과 손을 잡고 오랑캐
와 생사결전을 치를 것을 이 자리를 빌어 다시 다짐하는 바입니
다."

군호들은 입을 모아 소리쳤다.

"오랑캐를 몰아 냅시다!"

그들의 함성은 산골짜기를 진동시키며 멀리 메아리쳐 퍼졌다.

장무기는 작별을 고했다. 양소가 그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교주, 교주는 천하영웅들의 희망이오. 부디 몸조심하시오."

장무기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를 해 주셔서 고맙소."

그는 곧 말을 몰고 남쪽으로 질주해 갔다.


----- 제 5 권 4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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