飛狐外傳 비호외전 4

3학년2반 | 2022.03.09 07:21:22 댓글: 0 조회: 566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4001

싹트는 연정(戀情)
원자의는 하룻 사이에 잇따라 남방 무학 종파의 고수 두 명을 패퇴시켰으니
의기양양해지고 우쭐해진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길옆의 나무들이 나는
듯이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고 백마 위에 앉아 흥에 겨워 콧노래를 불렀다.
겨우 두 마디쯤 불렀을까? 갑자기 등이 화끈거리고 이상하여 재빨리 손으로
더듬자 펑! 하는 소리가 나면서 대뜸 몸에 불이 붙었다. 그녀는 놀라 유연투림
(乳燕投林)이라는 일초를 펼쳐 말에서 몸을 날려 길옆의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냇물에서 기어나와 등 뒤를 만져보니 옷자락은 커다란 구멍이 나있었다. 살갗은
다행히 데지 않았지만 내의까지 그을려 싯누래지고 말았다. 원자의는 울화가 치
밀어 어쩔 줄 모르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 좀도적 같은 호비 녀석의 짓이 분명해.]
옷보따리에서 장삼을 꺼내 갈아입으려는 순간, 백마의 엉덩이가 시커멓게 부
어올라 깜짝 놀랐다. 두 마리의 커다란 전갈이 피를 빨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
가? 원자의는 급히 채찍으로 전갈을 땅에 떨어뜨리고 돌맹이로 짖이겨 죽였다.
전갈의 독성은 매우 무서워 말 엉덩이는 부어오르는 곳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
다. 신통한 백마마저도 견디지 못하고 울부짖더니 앞발을 꿇고 땅바닥에 쓰러졌
다.
원자의는 어쩔 줄 모르고 그저 욕만해댔다.
[이 좀도적 같은 호비. 호비......이걸 어쩌지.]
그녀는 젖은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이 독액을 짜내려고 했다. 그러나 백마는
아픈 것이 싫었던지 피하기만 했다. 이때 남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며
세 필의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앞에 타고 있는 사람은 바로 호비였다.
은빛 광채가 번쩍하더니 어느덧 원자의는 연편을 거머쥐고 있었다. 그녀는 몸
을 날려 마주나가며 채찍을 휘둘러 호비의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치며 욕을 했
다.
[야! 이 좀도적아! 치사하게 암습을 하면서 무슨 개나발 같은 호걸은 호걸이
냐?]
호비는 칼을 들고 연편을 밀어내고 웃었다.
[내가 언제 암습을 했다는 거지 ?]
원자의는 손과 팔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고 좀도적의 무공이 강하니 가볍게 여
기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독물로 말을 해치다니! 정말 치사하고도 비열하군.]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소저가 그렇게 욕하는 것은 옳지만, 이 호비가 손을 썼다고 장담할 수 있는
무슨 근거라도 있소?]
원자의는 어리둥절해졌다. 호비의 뒤에는 바로 남진이 모시고 있던 시위들이
있었다. 두 사람은 밧줄에 묶여 고개가 축쳐져 있었다. 호비의 손에는 그들을
묶은 포승이 말고삐와 함께 쥐어져 있었다. 알고보니 두 시위는 그에게 잡혀온
것이었다.
원자의는 집히는 바가 있어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저 두 녀석이란 말이예요?]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의 존성대명과 쟁쟁한 명호를 수고스럽지만 물어도 괜찮을 것이오?]
원자의는 그를 한번 흘겨주며 말했다.
[당신이 말하면 될 것 아니예요?]
[좋소. 불초가 원소저에게 무림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두 인물을 소개하지.
이 분은 소축융(小祝融) 조맹(曺猛)이고, 이 분은 철갈자(鐵蝎子) 최백승(崔百
勝)이외다. 세 분은 잘 사귀어 보시오.]
원자의는 그 사람의 명호를 듣자 즉시 깨닫는 바가 있었다. 소축융은 물론 화
기(火器)에 정통할 것이고, 철갈자는 독물을 풀어놓는데 능할 것이다. 틀림없이
이들은 수모를 당하자 울분이 치밀어 자기와 남진이 격투하고 있을 때 몰래 손
을 쓴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즉시 그녀는 철썩! 철썩! 잇따라 말채찍으로
후려갈겼다. 두 사람은 얼굴과 머리에 선혈이 낭자해졌다. 그녀는 철갈자를 손
가락질하며 호통을 쳤다.
[빨리 해약을 꺼내 말을 치료해요! 꾸물거리면 이번에는 이채찍으로 후려패겠
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연편을 쳐들고 휘두르는 순간 우지끈! 하고 길옆의 버드나무
가 부러졌다.
철갈자는 깜짝 놀라 묶여 있는 두 손을 쳐들어 보였다.
[내가...... 어떻게......]
호비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을 휘둘러 그의 손에 묶인 밧줄을 질풍같
이 잘랐다. 그러나 호비는 칼 힘을 정확히 조절해 살갗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
다.
원자의는 그를 흘겨보며 미미하게 코웃음쳤다.
(자기의 재간을 자랑하려는군. 흥!, 대단할 것도 없네.)
철갈자는 품속에서 해약을 꺼내 백마의 엉덩이에 발라주며 나직이 말했다.
[이 독문(獨門)의 해약을 바르면 반드시 낫게 될 것이외다. 다만 근골을 상하
지 않도록 사흘 동안은 타지 마십시요.]
원자의는 냉랭히 말했다.
[당신은 가서 소축융을 풀어줘요.]
철갈자는 기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채찍에 얻어맞기는 했지만 조형 밖에 본 사람이 없다. 그도 채찍으로 얻어맞
았으니 이 일은 소문내지 않겠지.)
사실 무관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동료들이 보는 가운
데 자신의 위풍이 꺽이는 일이었다. 그가 조맹의 밧줄을 풀어주고 그 자리를 떠
나려고 하자 원자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그냥 가시려구요. 이 세상에 그토록 수월한 일이 어디 있어요?]
철갈자 최백승과 소축융 조맹 두 사람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서로 바라보았
다. 그들 두 사람은 호비에게 일초도 쓰지 못하고 잡히게 되었다. 호비 한 사
람만 하더라도 적수가 되지 못하는데 더군다나 이 무공이 고강한 여자까지 보태
게 된다면 자기들로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말을 세우고
조용히 기다렸다. 원자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축융은 몸에 지니고 있는 화기를 모두 꺼내고, 철갈자는 독물들을 모조리
꺼내요. 만약 한 가지라도 남겨둔다면 이 아가씨의 채찍을 조심해야 할 거예
요.]
그러면서 그녀는 연편을 말아 휘둘러 허공에서 팍! 하는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암기를 모조리 빼앗아 맺힌 한을 풀겠다면 어찌 할 수 없는 노릇이지.)
그들은 암기를 모두 꺼냈다. 소축융의 화기는 용수철이 장치된 철갑(鐵匣)이
었고 철갈자의 손에는 하나의 죽통(竹筒)이 들려 있었다. 죽통 안에는 물론 전
갈들이 잔뜩 들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 죽통은 얼마나 오래 가지고 다니며
만지작거렸는지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났다. 원자의는 죽통에서 사
그락! 하는 소리가 나자 죽통 속에 들어 있을 징그러운 전갈을 상기하고 몸서리
치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이 아가씨에게 독수를 쓰다니 정말 대담하기 짝이 없네요. 본래 다
죽여야겠지만 다행히 이 아가씨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하루에 한 사람만 죽인
다는 관례가 있기 때문에 어찌되었든 당신들은 운이 좋은 거예요......]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오늘 저 소저가 사람을 죽였는지 안죽였는지 모르겠구나.)
원자의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두 사람 가운데에서 한 사람만 죽으면 되요. 어느 분이 죽고 어느 분이 살
것인지 나로서는 결정하기가 어렵군요. 음, 이렇게 하지요. 당신네들이 서로 암
기를 사용하여 먼저 맞는 사람이 죽는 것으로 해요. 피한 사람의 목숨은 살려주
겠어요.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 빌어도 소용이 없어요. 자! 손을 써요. 하
나, 둘, 셋!]
조가와 최가 두 사람은 진의가 무엇인지 몰라 서로 망설였다.
(만약 그가 먼저 선수를 쓴다면 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은 하나같이 심보가 고약하고 수단이 흉악한 도배들이라 즉시 손을 썼
다. 순간 불빛이 번쩍하며 두 사람은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소축융은 목에
커다란 전갈이 한 마리 붙어 있었고, 철갈자의 가슴팍에는 불꽃이 난무하며 수
염까지 불이 붙고 있었다. 원자의는 깔깔거리며 간드러지게 웃고 말했다.
[호호호! 좋아요. 승부가 나지 않았군요. 이제 이 아가씨의 화도 다 풀어졌으
니 모두 다 꺼지도록 해요.]
조가와 최가는 극도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 말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
다. 그들은 독전갈이 목에 매달려 있거나 수염에 불이 붙은 것을 아랑곳하지 않
고 말을 몰아 줄행랑쳤다. 멀찡감치 가서야 겨우 서로 해독을 하고 불을
껐다.
원자의의 웃음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한참 깔깔거리고 있는데 등골이 문
득 서늘했다. 그녀는 옷자락이 타서 등에 구멍이 났다는 것을 상기하고 눈을 돌
려 바라보니 호비가 뒤에서 싱글벙글 웃으며 자기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창피
해 두 빰에 홍조를 띠며 호통을 내질렀다.
[뭘 봐요!]
호비는 머리를 돌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 전갈이 소저를 물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오.]
원자의는 자기도 모르게 진저리치며 속으로 생각했다.
(말이야 맞지. 전갈에 물렸다면 큰일이지.)
그녀는 냉랭히 말했다.
[옷을 갈아입을 테니 좀 비켜주세요?]
호비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넌즈시 물었다.
[아니, 다 큰 처녀가 한길에서 옷을 갈아입으려는 것이오?]
원자의는 화가 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자기가 너무 창피하고
초조한 나머지 말을 잘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매섭게 다시 호비를 한번 흘
겨보고 나무 뒤로 가서 급히 겉옷을 벗고는 행황색(杏黃色)의 장삼으로 바꾸어
입었다. 내의도 젖어 있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불에 탄 옷을 돌돌 말아서
냇물에 던졌다.
호비는 자색의 옷이 물결을 따라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소저의 존성대명은 혹시 원황삼(袁黃杉)이라고 하지 않으시오?]
원자의는 싸늘히 코웃음쳤으나 그가 자기의 원래 이름이 원자의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갑자기 날카로운 음성으로 부르짖었
다.
[어마! 전갈이 내 등을 물었어요!]
그녀는 손을 뻗쳐 자기의 등을 후려쳤다.
호비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게 정말이오?]
그는 전갈을 떼어 주려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러나 원자의가 그렇게 부르짖
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호비가 달려들며 몸을 공중에 솟구치자 원자의는 갑자
기 손을 뻗쳐 힘껏 밀었다. 이 일초는 그야말로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혀 방비를 하지 않은 상태라 대뜸 재주를 넘으며 나가 떨어지게 되었다. 공교
롭게도 냇가의 진흙바닥에 떨어졌다. 몸을 똑바로 세웠지만 두 발이 푹푹 빠지
면서 구린내나는 진흙이 곧장 가슴팍까지 튀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원자의는 손
벽을 치며 깔깔거리며 부르짖었다.
[호호호! 귀하의 존성대명은 혹시 소니추(小泥鰍 : 진흙탕의 작은 미꾸라지라
는 뜻.) 호비가 아닌가요?]
호비는 이렇게 되자 웃지도 화를 내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자기는 호의를 베
풀려고 했는데 그녀가 갑자기 손을 써 진흙창에 빠졌으며, 진흙에 자꾸 빠져들
어 몸을 솟구칠 수도 없었다. 그는 부득이 어그적 어그적 진흙을 잔뜩 묻히고
걸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화가 잔뜩 치밀었지만 원자의의 웃음띤 얼굴이
활짝 핀 꽃과 같아 약간의 얄밉기도 하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썩은 진흙을 묻
힌 두 손을 활짝 펴서 덮쳐가며 호통을 질렀다.
[이 조그마한 계집애, 나는 너의 이름을 원니삼(袁泥杉)으로 바꿔주겠다.]
원자의는 깜짝 놀라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호비의 경신법이 뛰어나 그녀가
동쪽으로 몸을 날리던 서쪽으로 몸을 솟구치건 간에 시종 두팔을 쫙 벌리고 앞
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끊임없이 팔을 벌리고 덮쳐드는데 그녀는 감
히 그와 맞서 손을 쓸수도 없었다. 손을 쓴다면 반드시 몸에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는 진흙을 묻혀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도망칠 수도 없고 손을 쓸 수도 없어 이미 자기로서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오히려 몸을 똑바로 세우고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
었다.
[당신이 감히 나에게 손을 댈 수 있겠어요?]
호비는 본래 그녀를 놀려주려고 한 것 뿐이었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똑바로 세우자 코 속으로 담담하고 그윽한 향기가 한가닥 흘러들었다. 그는 얼
굴이 붉어지며 재빨리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나는 호의를 가지고 당신을 도와주려고 하는데 당신은 어째서 개가 여동빈
(呂洞賓)을 무는 것 같은 못된 짓을 한단 말이오?]
원자의는 웃었다.
[그것은 팔선검 가운데 일초로서 여동빈추구(呂洞賓推拘)라는 거예요. 당신이
믿을 수 없다면 팔선검의 고수인 남가에게 물어보세요?]
호비는 일부러 툴툴거리며 말했다.
[원한으로 은혜를 갚다니. 양심이 없군. 양심이 없어!]
원자의는 침을 뱉는 시늉을 했다.
[퇘! 퇘! 그래도 나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거예요. 그것은 솔직히 시정잡배의
은덕이라는 것이고 가장 나쁜 자식들만이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내 당신에게
묻겠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 두 녀석이 화기를 쓰고 독을 썼다는 것을 알고 두
사람을 잡아 나에게 넘겼죠?]
이 질문에 호비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원래 두 시위들이 그녀의 등에
불씨와 독전갈을 놓을 때 호비는 옆에서 똑똑히 보고 있으면서도 그 당시 이야
기하지 않고 원자의가 떠난 이후에서야 두 사람을 잡아 뒤따라 온 것이었다.
원자의는 입을 열었다.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고맙단 말을 하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더니 코를 막고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아요? 몰라요?]
호비는 퉁명하게 말했다.
[이것은 모두 여동빈이 배풀어준 은덕이지.]
원자의는 미소했다.
[그렇다면 당신 스스로 개새끼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군요.]
그리고 사방을 한번 훑어보더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빨리 냇물로 내려가 씻으세요. 그런 이후에 나는 당신에게 조숙.....조반산
그 녀석의 이야기를 해드리지요.]
그녀는 본래 '조숙부'라고 하려다가 호비가 또 어른으로 자처할까봐 아예 '조
반산 그 녀석'이라는 말로 바꾸어 버린 것이었다. 호비는 크게 기뻐했다.
[좋소. 좋아! 당신은 저쪽으로 가 잠시 쉬도록 하시구려. 내 빨리 씻겠소.]
원자의는 말했다.
[너무 빨리 씻으면 구린내가 다 가셔지지 않을 거예요.]
호비는 씩 웃고는 쏜살같이 몸을 날려 냇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원지의는 몸을 돌려 백마를 바라보니 그 철갈자의 해약은 영험하여 얼마되지
않아 부은 것이 약간 가라앉았다. 백마가 다시 울부짖지 않는 것을 보니 통증
은 많이 가신 것 같았다. 그녀는 멀리서 호비 쪽를 바라보았다. 호비는 옷과 신
발, 버선을 벗어 냇가에 쌓아놓고 십여 장 바깥으로 멀찌감치 헤엄쳐가 몸에 묻
은 진흙을 씻어내고 있었다. 아마도 벌거숭이의 몸이라 자기가 볼까 두려워 하
는 것 같았다.
원자의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자기 보따리에서 낡은 장삼을 꺼내 살
그머니 호비의 옷더미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진흙이 묻은 옷을 몽땅 헌 옷에 말
아 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청마를 타고 백마를 끌며 천천히 북쪽
으로 나아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너무 꾸물거리네요. 나는 중요한 일이 있어 더 기다릴 수가 없네요!]
그녀는 호비가 알몸뚱이로 쫓아올까봐 시종 뒤돌아보지 않고 말을 재촉했다.
뒤에서 호비가 부르짖었다.
[어! 이것 봐요. 원소저! 원소저, 내가 졌소. 그 옷을 남겨두고 가시오 ?]
부르짖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아마도 감히 냇물에서 뛰어나와 쫓아오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원자의는 길을 가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스꽝스러워 참지 못하고 몇 번
이나 웃음을 떠뜨렸다. 그녀는 이번에 호비를 골탕먹인 일은 약간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호비가 모든 것을 돌보지 않고 알몸으로 그녀를 뒤쫓았더라면
오히려 그녀가 겸연쩍었으리라.
원자의는 겨우 십여 리만 가고 객점에 머물렀다. 그녀는 스스로 변명을 하고
있었다.
(철갈자 그 녀석은 백마가 너무 달리면 근골을 상한다고 했지. 더 움직이면
백마가 아플거야.)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호비가 달려와 자기에게 따지기를 바랬다.
하룻밤을 지내도 호비는 종적이 묘연했다. 이튿날도 천천히 나아갔다. 호비가
어떻게 올라와 옷을 어디서 찾아 입었는지 상상을 하자 웃음을 참을 수 없었
다. 그녀는 매일 오륙십 리만 갔으나 호비는 쫓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 속
에서는 오직 온 몸에 구린내나는 진흙을 잔뜩 묻히고 있는 소니추 호비의 모습
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역가만(易家灣)의 소동
원자의는 이날 상담(湘潭)의 북쪽에 있는 역가만(易家灣)에 도착하였다. 이곳
은 이 성(省)의 가장 큰 성(城)인 장사(長沙)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원
자의가 식당을 찾으려 할 때, 선창가에서 사람들이 왁짜지껄하게 떠들고 있었
다.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니 상강(湘江)에 커다란 배가 한 척 정박해 있었다.
뱃머리에는 한 노인이 우뚝서서 선창가에서 전송하는 사람들에게 두 손을 마주
잡고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을 살펴보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림에 몸을 담
고 있는 듯 건장한 채구에 범상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또한 그 노인의 등뒤에는
조정의 무관두 명이 서 있었다.
그녀는 이와 같은 기세를 보자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문파의 장문인인지 모르지만 복대수의 대회에 참가하러 북경으로 가는
모양이군.)
노인은 양쪽 귀밑부리가 희끗희끗 했고 수염은 절반이나 희여졌지만 얼굴은
불그스레 홍광을 띠고 있었고 옷차림도 화려했다. 왼손 손가락에는 커다란 벽옥
(碧玉) 반지를 끼고 있어 수정같이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노인은 포권을
하며 쩌렁쩌렁하게 말했다.
[여러 아우님들, 이제 그만 돌아가시구려.]
그의 신형(身形)이 단정하여 태산처럼 무거워 보였다.
언덕 위의 뭇사람들은 일제히 말했다.
[삼가 노사(老師)께서 가시는 길이 순풍에 돗단 듯 하시기를 비오며, 우리 구
룡파(九龍派)의 명성을 경사에서 맘껏 떨쳐주십시요.]
노인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경사에서 위명을 떨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외다. 아무쪼록 구룡파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일이 없도록 빌겠소.]
노인의 목소리는 우렁차고 기가 충만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말은 겸손
했으나 자부심에 차 있었다.
이때 펑!펑! 하는 요란한 소리가 잇달아 고막을 뒤흔들며 붉은 종이조각들이
상강을 온통 수놓았다. 나루터와 배 위에서는 일제히 폭죽을 터뜨린 것이었다.
원자의는 폭죽을 터뜨리고 나면 배가 곧 떠나리라는 생각을 하고 가볍게 말에
서 뛰어내려 돌맹이 두 개를 집어 폭죽을 향해 날렸다. 두 묶음의 폭죽은 모두
길이가 이 장이 넘었다. 날아간 돌맹이가 줄을 중간에서 잘라버리자 푸시식! 하
며 타고 있던 폭죽이 물 속으로 곧장 떨어져 꺼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부두가에 모인 사람들은 표정이 달라졌다. 폭죽이 꺼지는 것은
아주 불길한 징조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황삼을 입은 소녀가 돌맹이를 던져
폭죽을 꺼뜨리는 것을 똑똑히 목격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육칠 명의 대한들이 달려들어 그녀를 에워싸고 호통을 쳤다.
[넌 누구냐?]
[어느 놈이 훼방을 놓으라고 시켰지 ?]
[폭죽의 줄을 잘라 불을 꺼뜨리다니!]
[호랑이 염통올 삶아먹었나, 감히 구룡파의 역(易)노사를 건드리다니!]
일을 저지른 사람이 아름다운 소녀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벌써 주먹을 휘두르
며 덤벼들었을 것이다.
원자의는 위타문과 팔선검의 무공내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
울 것이 없었지만 구룡파의 내력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 사람들의 험악한 기세를
보자 은근히 겁이 났다. 그러나 그녀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날아다니는 새를 잡으려고 돌을 던졌는데 그만 실수하여 폭죽을 잘아버
리게 되었군요. 정말 미안해요.]
사람들은 그녀의 음성이 맑고 카랑카랑하며 외지 사람의 말투가 섞여있자 중
구난방으로 입을 열었다.
[한 줄이라면 모르겠지만 실수로 어찌 두 줄을 다 자를 수 있소?]
[당신의 이름은 뭐요?]
[역가만에는 뭣하러 왔소?]
[오늘은 황도길일(黃道吉日)인데 당신이 이와 같이 소란을 피웠으니 역노사가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소!]
원자의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두 꾸러미의 폭죽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러세요. 가서 두 꾸러미를 다시 사면
될 것 아니예요.]
그러면서 품속에서 이만 냥쯤 되어 보이는 금덩이를 꺼냈다. 이 금덩이라면
천 꾸러미의 폭죽이라도 살 수 있는 값이었다. 뭇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
며 한결같이 이상한 소녀라고 생각했을 뿐 감히 그 황금을 받으려는 사람은 없
었다.
원자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모두 구룡파의 제자이시겠지요? 저 분 역노사께서는 귀파의 장문
인이 아니오? 그 분은 복대수의 천하장문인 대회에 참가하러 북경으로 떠나시는
모양이군요.]
그녀가 한마디씩 물을 때마다 뭇사람들은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원자의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폭죽이 잘라져 꺼진 것은 매우 불길한 징조예요. 역노사께서는 일찌감치 참
가하시는 것을 포기하고 집에서 편안히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한 사내가 궁금증을 참을 수 없는듯 물었다.
[그건 어째서지 ?]
원자의는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내가 보기에 역노사의 기색(氣色)이 심상치 않네요. 이마에는 검은 그림자가
음침하게 서려있고, 미간에는 살문(殺紋)이 충만하네요. 만약 북경으로 간다면
구룡파의 위명이 땅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역노서께서는 살신지화를 입게 될 거
예요.]
뭇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안색이 변했다. 어떤 사람은
재수없다고 땅바닥에 침을 뱉었고, 어떤 사람들은 욕을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이 여자가 관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인 것 같다는 등 수근수근댔다.
사람들이 서 있는 곳과 뱃머리와는 그리 멀리 떨어진 거리가 아니었고 또한
그녀의 음성이 맑고 우렁차서 한마디 한마디가 역노사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그는 자세히 원자의를 훑어보았다. 몸매가 늘신하고 자태가 아름다운 것이 무공
을 아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녀가 돌맹이로 폭죽을 끊은 솜씨가 교묘하고 타고
온 백마가 신준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는 틀림없이 어떤 목적이 있어 온 사람이
라고 단정하며 두 손을 맞잡아 예의를 차리고 입을 열었다.
[소저, 소저의 성씨가 어떻게 되시는지. 이리로 올라오셔서 이야기를 해봅시
다.]
원자의는 정중히 말했다.
[저의 성은 원씨예요. 역노사께서 배에서 내려오시는 게 어떨까요?]
당시 상남 지방의 풍속으로는 배를 타고 떠날 때 다시 뭍으로 내려오는 일은
금기로 여겼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불길하다고 여기고 여행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역노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그는 무공이 심오하여
한 문파의 장문인까지 하게 되었지만 평소에 점성술이나 관상 혹은 풍수지리(風
水地理) 등을 지극히 숭상하고 믿어왔다. 따라서 폭죽이 젊은 여자로 인해 꺼졌
고, 살신지화를 당하게 된다는 등 불길한 말을 듣자 아예 무시하는 것이 좋겠
다고 생각하고 사공에게 말했다.
[배를 띄웁시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불길한 여인을 보았으니 성(省)에 당도하면 복물(福物)을 사서 액땜을 해야
겠다.]
뱃사공은 소리높여 대답했고 뱃사람들은 닻을 끌어올리고 돛을 올리며 부산을
떨었다.
원자의는 자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이 배를 띄우려고 하자 소리 높여 외쳤
다.
[잠깐만, 잠깐만요! 만약 당신이 나의 권고를 무시한다면 백리를 가지 못해
돛대가 부러지고 배가 뒤집혀 모두 비명횡사할 거예요.]
역노사는 안색이 더욱 굳어져서는 대갈일성을 질렀다.
[나는 어린애와 똑같이 행동하지는 않겠소. 그러나 다시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한다면 그때는 가만 두지 않을 것이오.]
원자의는 훌쩍 몸을 날려 배 위로 올라서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호의로 드리는 말인데 역노사께서는 어찌 이토록 화를 내시는지요. 실
례하지만 역노사의 대명은 어떻게 되는지요? 제가 함자를 풀이해 드리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큰 덕을 입는 셈이예요.]
역노사는 싸늘히 코웃음쳤다.
[필요없소!]
[좋아요. 역노사께서 존호를 알려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당신의 성씨를 가지고
풀이를 해드리겠어요. 으흠, 역(易) 자의 위에는 해 일(日)자고, 아랫쪽은 하지
말라는 물(勿)자예요. 물일(勿日)이란 곧 불일(不日)이니 그 뜻은 목숨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거예요.]
원자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역노사께서 이번 여행길을 수로로 택했죠? 역 자에 한 일자와 물 수자를 더
하면 탕(湯)자가 되는데, 이는 바로 끓는 물속에 들어가고 타는 불길 속에 들
어간다는 뜻으로 쓰이는 부탕도화(赴湯跳火)의 부탕이 되는 것이니 이번 길은
매우 위험한 거예요. 또 이 배는 그릇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탕자 밑에 다
시 그릇 명(皿)자를 보태게 되면, 흔들릴 탕( )이 되어 소위 탕연무존( 然無
存)이라는 글자가 되지요. 이는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뜻이니 배에 탄 사람은
모두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울 거예요.]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뚱했다가 다시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끓은 국이라는 탕(湯)자 위에 초두 변을 더하면 방탕할 '탕(蕩)이 되
요. 옛시에 탕자(蕩子)는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했으니 역노사께서는 이
번 길에 타향객지에서 돌아가실 액운인데, 걱정이 되는군요.]
역노사는 더이상 참고 들을 수가 없는듯 돛대를 후려치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제 할 말이 다 끝났느냐?]
원자의는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역노사께서는 이번 장도에 오르시면 반드시 길리(吉利)를 추구해야 할 판인
데 끝(完)자는 함부로 말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역노사께서 북경으로 가시는 목
적은 여러 사람들과 무공을 겨루고 명성을 날리려고 하는 것인데, 그러자면 주
먹이나 발을 쓰지 않느다면 반드시 칼과 창을 쓰게 될 거예요. 역자에다 발족
(足)자를 더하면 발로 찰 척( )자가 될 것이고, 칼 도(刀)자를 보태면 깍아낼
척(剔)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이번에 당신은 남의 발길에 차일 뿐만 아니라 구
룡파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제거된다는 말이예요.]
역노사는 노기가 끓어 올랐다. 그러나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이치에 맞아
내심 놀라며 억지로 반박을 하듯 입을 열었다.
[나의 이름은 길할 길(吉) 외자이외다. 이는 모든 일이 길하고 상서로우며 매
사에 이익을 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소. 뭐 또 할 말 있소 ?]
원자의는 고개를 가로져었다.
[그거야말로 흉악하고 위험한 뜻을 담고 있네요. 본래 이 길자는 무척 좋은
뜻을 담고 있지만 공교롭게도 역노사에게는 무척 불길한 이름이예요. 역자는 바
꾸자는 뜻인데 길함과 상서로움을 바꾸면 무엇이 되지요? 자연히 불길한 일 아
니겠어요?]
역길은 그만 말문을 열지 못했다.
원자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길자를 풀어 본다면 십일구(十一口)석 자가 되겠지요. 역노사, 뭇사람들
에게는 다만 입이 하나밖에 없는데 당신에게는 열 한 개의 입이 있는 셈이예
요. 그럼 나머지 열 개의 입은 무슨 입일까요? 그것은 상처로 찢어진 것을 말하
는 것이니 바로 칼로 찢어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신은 경
사로 가게 되면 운명적으로 몸에 열 군데의 칼부림을 당하게 되는 것은 물론 죽
은 시체마저도 고향으로 되돌아 오지 못한다는 거예요.]
미신을 믿는 사람일수록 불길한 말은 더욱 들어 넘기지 못하기 마련이다. 역
길은 본시 점잖고 의젓했으며 얼굴이 두리뭉실 한 것이 귀티가 나는 인상을 지
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벼락같이 미간에 살기를 띄우고 원자의를 노려보며
냉소했다.
[좋소. 원소저, 당신의 금쪽 같은 말에 정말 사의를 표하는 바이오. 그런데
당신은 어느 문하의 노사이며 영존은 어떻게 되시오?]
원자의는 웃으며 말했다.
[노사께서도 저의 이름을 풀이해서 저의 운명을 봐주시려고 그러세요? 그렇다
면 저의 사문과 내력까지 아실 필요는 없잖아요 ?]
역길은 냉소했다.
[보아하니 당신은 어리고 또한 우리는 면식이 없는 사이이니 당신은 틀림없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이 역모의 밑부리를 뒤흔들어 놓자는 것 아니겠소? 이 역
모는 '어른은 어린애와 싸우지 않고, 남자는 여자와 다투지 않는다'는 말이 있
듯이 당신을 상대로 싸울 생각이 없으니 당신은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을 불러내
시오. 도대체 누가 몸에 열군데 칼을 맞고 시체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지
두고 봅시다.]
말을 하면서 그는 그녀의 얼굴쪽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당신의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구요?]
원자의는 웃으며 응수했다.
[저의 배후인물이요?]
그리고는 짐짓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언덕 위에는
한 사람이 우뚝서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몸에 거칠은
청색 무명옷을 입고 있어 시골 농사꾼 같았는데 바로 호비였다. 그녀는 언제
여기까지 왔을까 하고 궁금하게 여겼다.
원자의는 역길의 이름을 풀이하는데 정신이 팔려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며 웃엇다.
[저 뒤에 있는 사람 말인가요? 내가 보기에 저 사람은 소를 먹이거나 똥을 퍼
서 밭에 뿌리는 시골 녀석 같군요. 당신은 안목이 영민하시어 제대로 알아 보시
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군요.]
역길은 화를 버럭냈다.
[시치미떼지 마라! 내가 말한 뜻은 당신 배후에서 당신을 이곳으로 보내 훼방
을 놓도록 한 그 사람을 말하는 것이야! 사내 대장부라면 자라처럼 목을 숨기거
나 개꼬리 감추듯 궁싯거릴 필요가 어디 있냐구. 당당하게 나서야지!]
역길은 자기와 원한이 있는 사람이 암암리에 원자의를 교사해서 이곳에서 소
란을 피우도록 만들어 이번 행차를 불길하게 만들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틀림없
이 그 사람은 자기의 성격과 꺼리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주변인물일 것이라고 단
정을 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가 꺼리고 있는 것을 어찌 그토록 환히 알수 있
단 말인가? 원자의는 그가 불길한 말을 하면 할수록 예민한 반응을 보이자 옳거
니 하고 더욱더 있는 말 없는 말을 보태 흉악하고 재앙이 닥친다는 얘기만 늘어
놓고 있었다.
원자의는 그의 말을 받아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역노사, 속담에 양약고구이어병(良藥苦口利於病)이고, 충언역이리어행(忠言
逆耳利於行)이란 말이 있어요. 귀에 거스르는 말을 듣고 안듣고는 당신에게 달
렸어요. 혹 당신이 가시지 않는다면 구룡파를 위하여 소녀가 대신 가도록 하지
요.]
원자의가 뱃머리에 올라선지 얼마되지 않아 호비는 이곳에 도달했다. 그날 냇
물에서 목욕을 하다가 옷을 빼앗겨 알몸으로 물에서 나올 수가 없었지만 다행히
저녁 무렵이라 얼마되지 않아 날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그는 농가에 숨어들어 옷
을 훔쳐 입은 것이었다.
그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권경도보였다. 이 도보는 내
의 주머니에 들어있었는데 그녀는 옷을 가져가면서 함께 가져간 것이엇다. 호비
는 속으로 이 여자가 전에도 보따리를 훔쳤고 또 이번에도 자기 옷을 가져간 것
을 보면 틀림없이 이 도보를 손에 넣으려고 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걱정이 되
고 초조해 재빨리 뒤를 쫓아 다음날 그녀를 따라 잡았다. 그런데 그녀는 말고삐
를 늦추고 천천히 가고 있어 결코 도보를 훔치려는 것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진의를 알 수 없고 또 손을 써서 빼앗으려 한다고
해도 반드시 빼앗으리라는 보장도 없어 뒤를 쫓으며 그녀가 어떤 행동을 보이고
어떤 사람과 접응을 하는지 엿보기로 했다. 그러나 며칠을 따라왔지만 시종 이
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날 역가만에서 또 다시 역길에게 시비
를 걸어 장문인 자리를 빼앗으려 하는 그녀를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저 아가씨는 장문인을 탐내는 괴벽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장문인만 만나면
그 자리를 빼앗으려 하는데 강호에 위세를 떨치려고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어
떤 다른 깊은 뜻이 있는지 알수가 없구나. 보아하니 곧 둘이 싸울 것 같은 데
서로 싸우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어 도보를 뺏어오자.
지금 그녀의 백마를 끌고 가는 것은 손쉬운 일이지만 아무리 좋은 노래도 두번
부르면 실증을 낸다는 말이 있듯이 지난 번과 똑같이 한다면 미꾸라지 같은 호
비 녀석은 그것 밖에 모른다고 욕을 하겠지.)
이윽고 천천히 뱃머리로 다가가 그녀의 등에 메고 있는 보따리를 빼앗으려고
기회를 노렸다.
이때, 역길의 불그스레한 네모난 얼굴이 붉다 못해 자색이 되어 쉰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소저의 뜻은 이 역모가 무능해서 구룡파의 장문인이 될 자격이 없
다는 것이오?]
원자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은 아니예요. 다만 역노사의 이번 길이 불길하기 때문이예요.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소녀에게 장문인 자리를 양보해 주십
사하는 거예요. 소녀는 전적으로 호의를 가지고 당신을 위해 그런 생각을 한 거
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두 명의 대한이 선실에서 구절연편(九節軟
鞭)을 들고 뛰쳐나왔다. 그 중 한 중년의 대한이 입을 열었다.
[이 여자는 재수가 없으니 사부님은 아랑곳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배를 띄울
길시(吉時)를 놓치지 않도록 제자가 그녀를 쫓아버리겠습니다.]
그리고는 왼손으로 원자의의 어깨를 밀려고 했다.
원자의는 그의 팔을 가볍게 밀며 말했다.
[길한 시각은 이미 놓치고 말았어요.]
대한은 대뜸 팔꿈치가 마비되면서 손이 원자의의 어깨에 닿기도 전에 맥없이
팔을 축 늘어뜨렸다.
다른 대한이 호통을 내질었다.
[대사형, 무기를 씁시다!]
두 사람은 일제히 휘파람을 불며 두 자루의 연편으로 동시에 원자의의 무릎쪽
을 때려왔다. 그들은 그녀의 생명을 해칠 듯이 없는지라 급소를 공격하지는 않
았다.
원자의는 그들이 모두 구절연편을 쓰자 마음 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그렇구나. 구룡파라 일컬어지는 것은 바로 이들의 장기가 구절연편에 있었기
때문이구나.)
그녀가 역길과 이러쿵저러쿵 말을 해댄 것은 그의 마음을 흐트러놓으며 또한
그의 무공수법을 알아내려는 데 있었다. 이들이 구절연편을 쓰는 것을 보자 속
으로 기뻐했다.
(좋아. 네 이놈들, 오늘 너희들은 연편의 조상을 만난 셈이다. )
그녀는 두 손을 뻗쳐 번개와 같이 두 구절연편의 끝을 거머쥐고 서로 엉키게
만들었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미소를 머금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두 사내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채찍이 그녀의 때리지도 못하고 오히려 엉
켜버리자 서로 힘껏 잡아당겼다. 그렇게 되자 바로 원자의의 계략에 말려든 꼴
이 되었다. 원래 느슨하게 매어 놓은 연편은 서로 힘껏 당기는 바람에 다시는
풀 수 없을 정도로 꽁꽁 묶여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놀라 멈칫했다가 더욱
힘주어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두 사형제의 힘은 대등해서 서로 끌려가지 않았으
며 구절연편은 더욱 꽉 엉키게 되었다.
역길은 호통을 내질렀다.
[경망한 녀석들 같으니! 빨리 물러서라!]
역길은 역정을 내며 두 손으로 장포의 앞자락을 잡고 바깥으로 냅다 열어젖혔
다. 그러자 뚜드득! 하며 장포에 달린 일곱 개의 단추가 한꺼번에 모조리 떨어
져 나갔다. 이어 그는 왼손을 등 뒤로 돌려 잡아당기자 장포가 벗겨지며 경장차
림으로 되었다. 이 한수는 매우 깨끗했고 위풍이 당당했다.
언덕에 있던 사람들은 대다수가 그의 제자들과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대뜸 커
다란 박수갈채를 보냈다.
원자의는 고개를 가로져었다.
[일부러 허세를 부려 박수를 받으려는 것은 좋지 않아요. 당신의 구변은 변
변치 않은데 장포를 벗어던지는 기세만큼은 정말 일품이로군요. 장포를 벗어던
지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그대는 장포를 벗어서 누구에게 주려는 거예요. 아
마도 당신은 장포를 벗어야 할 운명인 것 같군요.]
역길은 속으로 흠칫하며 그 또한 불길한 조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울화가
치미는지 허리에 손올 짚고 가볍게 떨치자 어느덧 수정과 같은 아홉개의 구슬
이 박힌 구절편 한 자루가 광채를 내쏟고 있었다. 아홉 매듭을 서로 부딪히지
않고 소리도 전혀 내지 않고 뽑아든 것이었다.
원자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이쿠! 야단났구나. 나는 저 무공을 모르는데 아무래도 오늘 일을 그르칠
것 같구나.)
역길의 채찍 매듭은 모두 계란 만큼 굵었다. 그는 체구도 우람하여 마치 뱃머
리에 커다란 철탑(鐵塔)을 세워놓은 것 같았는데 거기에다 커다란 채직을 들고
서 있자 위풍이 매우 당당해 보였다.
이때 사공들이 닻을 올리고 있어 선체가 흔들거렸다. 역길은 손을 떨쳐 구절
편으로 뱃머리의 닻을 감고 다시 휘두르자 풍덩!하며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면서
쇠닻은 다시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적어도 육칠 백 근 이상의 팔힘이 아니고서
는 이렇게 쉽게 닻을 들어올려 물속으로 쳐넣을 수는 없었다. 그의 구절편에는
연편과 강편(鋼鞭)이 두루 갖추어져 있었고, 내력까지 겸비하고 있어 대단한 무
기라 할 수 있었다.
원자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의 팔힘이 엄청나서 채찍을 휘둘러도 흔들림이 없구나. 이 사람은 지혜로
이겨야지 힘으로는 못당하겠구나.)
원자의는 역길의 체구가 우람하고 공력이 심후한 것은 틀림없지만 손놀림은
민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한가지 계책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
다.
[역노사, 여자와 뱃머리에서 싸운다는 것은 승부를 차치하고, 당신의 이번 출
행이 불길해질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다른 곳에서 겨루는 것이 어때요?]
역길은 여자가 배에 오르면 재수없다는 말이 있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다시 뭍으로 오른다는 일도 마찬가지라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원자의는 다시 설득하듯 말했다.
[역노사, 우리들은 미리 분명히 해 두기로 해요. 내가 만약 이긴다면 당신은
구룡파의 장문인 자리를 양보하셔야 할텐데 당신 문하의 제자들이 승복할 수 있
을런지 모르겠네요?]
그렇지 않아도 울화가 치밀어 자색으로 된 역길의 안색은 더욱 화가 치밀어
창백해졌다. 그는 냅다 호통을 질렀다.
[승복하고 싶지 않더라도 승복해야지! 그러나 만약 당신이 지게 된다면?]
원자의는 간드러진 웃음을 흘렸다.
[호호! 당신에게 큰 절을 올리며 당신을 수양아버지로 모시겠어요. 아무쪼록
아버님께서는 이 딸을 귀여워해 주세요.]
그녀는 벼락같이 몸을 솟구쳐 오른발을 돛대를 연결시키는 밧줄을 밟고 튕겨
올랐다. 그 힘을 빌어 즉시 옆으로 뻗쳐난 돛대를 밟고 허리에 있는 은사연편을
풀어 돛대를 휘감으며 몸을 도약시켰다. 그녀는 손을 번갈아 돛대를 잡고 은사
편으로 돛대를 말아 순식간에 일학충천(一鶴沖天)의 신법으로 가뿐히 돛대 위
에 올라섰다.
이 몇 수는 날렵하기 그지없어 선창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갈채를 보
냈다. 그 중에 있던 구룡파의 제자가 부르짖엇다.
[이봐, 그런 재주는 소용없다. 용기가 있다면 내려와서 삼상(三湘)에서 위명
이 쟁쟁한 역노사의 구룡편을 가르침 받도록 하라구.]
원자의는 큰소리로 말했다.
[위에서 무공을 겨룬다면 다른 사람들이 더 똑똑히 볼 수 있을 거예요.]
역길은 싸늘히 코웃음치더니 옆구리에 구절편을 감고 왼손으로 돛대를 거머쥐
며 어느덧 몸을 땅에서 두 자나 뽑아올렸다. 그리고 다시 오른손으로 돛대를
쥐고 두 자를 올랐다. 그 돛대는 큰 대접의 주둥이보다 굵어서 한 손으로 움켜
잡을 수가 없었지만 그의 장력은 막강하여 두 손을 번갈아가며 돛대를 잡고 몸
을 뽑아올렸다. 비록 원자의처럼 신속하고 교묘하지는 않았지만 고수의 입장에
서 볼 때 이 무공은 결코 다른 무공에 뒤진다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원자의는 역길이 돛대 꼭대기에서 일장 남짓 거리를 두게 되자, 그가 더 오른
다면 불리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공격하여 기선을 제압
할 생각으로 은사연편을 흔들며 호통을 내질렀다.
[나의 이 채찍은 구절용편보다 용이 아홉 마리가 더 많은 십팔용편(十八龍鞭)
이예요!]
그녀는 채찍을 허공에서 팍! 하는 소리가 나도록 휘두르며 냅다 그의 머리에
덮어 씌우려는듯 후려쳤다. 역길은 두 손으로 돛대를 붙잡고 있어 어떻게 감당
을 할 도리가 없었다. 만약 피한다면 돛대 위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수밖에 없
었다. 그렇게 되면 일초도 제대로 겨루어 보지 못하고 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파렴치하다!]
[이게 어째서 공정한 시합이냐?]
[이 계집년아, 내려와서 손을 써야지!]
선창가의 뭇제자들은 야단법석이었다. 그런데 역길은 갑자기 머리를 옆으로
비스듬히 비키더니 왼팔로 돛대를 부등켜안으며 오른손으로 구룡편을 휘둘러
은사연편을 쳐내려고 했다. 원자의는 두 채찍이 서로 얽혀진다면 힘이 약하기
때문에 불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재빨리 채찍을 끌어올렸다. 원자의가 다시 채
찍을 휘두르자 역길은 삽화개정(揷花蓋頂)이라는 일초를 펼쳐 머리를 보호하면
서 왼팔을 살짝 풀고 오른팔로 다시 끌어 안으며 몸을 솟구쳐 올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너댓 번 하자 어느덧 그는 돛대 위로 오를 수 있었다.
선창가에 있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그는
유리한 지세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원자의는 옆으로 가로질러 있는 횃대에 있었
다. 그러나 원자의는 그의 힘이 강맹하지만 변화가 없어 자기의 채찍 수법을
따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원자의는 몸을 굽히며 휙! 은사연편을 휘둘렀다. 역길은 지형지세가
유리한 곳이라 수월하게 구절편을 돌려 상대의 채찍을 밀어냈다.
상강의 수면에는 햇살이 비추어 수 만 줄기의 은빛 파동이 일고 있었다. 두
사람이 펼치는 두 채찍은 마치 영사(靈蛇)가 맴돌며 춤추는듯한 장관을 펼쳐냈
다.
물에는 갈수록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들었고 상강을 오르내리던 배들도 대다
수 닻을 내리고 싸우는 것을 구경했다.
역길은 경신법에서 뒤떨어지기 때문에 돛대를 두 발로 끼고 시간을 끌며 기회
를 옅보려고 했다. 원자의는 그와 반대로 이리저리 몸을 날리며 횃대 위에서 가
볍게 몸을 날리며 공격했다. 역길은 채찍을 단순하게 반복하여 휘두르며 상대방
의 은사연편을 얽으려고 했다.
얼핏 보기에 원자의가 우세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로서는 지극히 힘겨운 것
이었다. 지구전으로 나간다면 자칫 헛점을 드러내거나, 힘이 빠져 발을 헛디딜
수도 있는 것이었다. 역길의 의도는 바로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먼저 공격하지
않고 적을 지치게 하여 승리를 취하자는 것'이었다.
원자의는 그의 의도를 알았으나 역길은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만약 평지라면
허공으로 솟구쳐 공격하거나, 컬굴면서 짓쳐들어갈 수 있겠지만 높은 곳에서 이
리저리 움직이는 것은 펼치는 수법은 제한이 있었다.
형세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원자의는 숨소리가 거칠어졌고 몸놀림도 처음
처럼 민활하지 못했다.
역길은 그녀가 지쳤다고 판단하고 채찍이 짓쳐들어오자 갑자기 왼손을 뻗쳐
그녀의 채찍끝에 달린 금방울을 잡으려 했다.
원자의는 깜짝 놀라 연편을 끌어들였다. 뜻밖에도 역길은 구룡편을 원자의의
연편에 걸려고 했다. 그녀가 은사연편을 재빨리 피하지 않았다면 두 채찍은 서
로 얽혀버릴 것 같았다.
역길은 우세를 차지하게 되자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그녀의 채찍이 되돌아
가는 곳을 정확히 겨냥하여 청등전호로(靑藤纏葫蘆)라는 일초를 펼쳐 은사연편
을 얽었다.
원자의는 순간 채찍이 바깥쪽으로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힘으로 맞선
다면 손해라는 것을 알고 즉시 은사연편의 자루를 던져 돛대에 빙글빙글 감기도
록 만들었다. 순간 차르르! 하며 구절편과 은사연편은 놀랍게도 역길의 두 다리
를 오른팔과 함께 돛대에 묶어버렸다.
이와 같은 변고가 일어나리라고 역길이 어떻게 짐작을 할 수 있었겠는가? 역
길은 깜짝 놀라 재빨리 채찍을 풀려고 했다. 순간 원자의는 그의 앞으로 달려
들며 그의 눈을 찍었다. 역길은 급히 채찍을 놓고 손을 들어 막았으나 원자의의
초식는 허초(虛招)였다. 원자의는 오른손을 질풍같이 뻗쳐내 그의 왼쪽 겨드랑
이에 있은 연액혈(淵腋穴)을 짚어버렸다.
역길은 상대방의 허초에 속아 스스로 팔을 들어 상대방이 혈도를 짚도록 도와
준 셈이었다. 그는 힘없이 왼팔을 축 늘어뜨렸다. 경사로 간다고 기세가 등등
하던 사람이 두 다리와 오른팔이 돛대에 꽁꽁 묶여 있으니 그야말로 일패도지
(一敗塗地), 반격할 힘도 없었고 그 낭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호비는 뭍에서 형세를 역전시킨 그녀의 초식이 교묘하기 이를데 없어 막 환호
성을 지르려고 했다. 그 순간 갑자기 금빛 광채가 번쩍하며 아홉 대의 금전표
(金錢 )가 원자의의 등을 노리고 쏜살같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원자의는 역길을 낭패한 꼴로 만들자 득의양양하여 장문인 자리를 내놓도록
강요하고 그를 놓아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누가 암습을 가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금전표들은 원자의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올 뿐만 아니
라 공격부위도 분산되어 옆으로 뻗쳐난 횃대 위에 서 있는 그녀로서는 피하기가
어려웠다. 조금만 걸음을 내딛는다 하더라고 즉시 오륙장이나 되는 높은 곳에서
떨어질 판이나 어떻게 그 아홉 대의 금전표를 피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녀는 몸을 뒤로 젖히면서 곧장 아래로
떨어졌다. 아홉 대의 금전표는 일제히 돛대를 스치며 지나갔다.
뱃머리쪽의 위에 모여있던 뭇 사람들은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순간 그녀는
옆으로 뻗친 횃대에 두 발을 걸고 허공에 꺼꾸로 매달렸다.
언덕에서 암기를 던진 사람은 내친 김이라 꺼꾸로 매달린 원자의에게 다시 세
대의 금전표를 쏘아냈다. 한 대는 그녀의 몸으로 날아갔고, 두 대는 그녀가 매
달려 있는 횃대를 향해 날아갔다. 피한다고 하더라도 횃대가 금전표에 맞아 부
러질 형편이었다.
호비는 더 이상 원자의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는 즉시 세 개의
동전을 쏘아내었다. 그의 경력이 매우 날카로와서 금전표를 앞질러 정확히 적중
시켰다.
원자의는 등골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막 몸을 뒤집어 솟구치려 했을 때
호비가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뱃머리로 뛰어올랐다.
[이게 무슨 짓들이오?]
순간 우지끈! 하며 원자의가 매달려 있는 횃대가 부러지며 원자의는 횃대와
함께 강물로 떨어지고 말았다. 동시에 역길이 묶여있는 돛대도 부러지며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원자의는 꺼꾸로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누가 암기를 던졌고 호비가 어떻게 했
는지 똑똑히 볼 수가 있었지만 횃대가 어떻게 부러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혈도를 짚혀 반신을 움직일 수 없던 역길이 원자의가 꺼꾸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채찍에 묶여있는 오른손을 사력을 다해 뽑아 횃대를 후려친 것
이었다.
이때 호비는 뱃머리 위에 서 있었다. 호비는 원자의가 물로 떨어지면 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즉시 등을 돛대에 붙히고 공력을 모아 뒤로 밀었다. 하지만
돛대가 워낙 굵어 흔들했을 뿐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즉시 칼을 들고 돛대를
후려쳐 역길도 떨어지도록 만든 것이었다.
원자의와 역길이 각자 커다란 나무에 매달려 강물로 떨어졌다. 원자의가 잡고
있는 횃대가 먼저 아래로 떨어졌기 때문에 역길이 묶여있는 굵은 돛대가 덮친다
면 목숨이 위험했다. 호비는 즉시 배를 끌때 사용하는 밧줄을 집어들고 원자의
에게 던지며 외쳤다.
[잡으세요!]
밧줄은 기다란 연편처럼 즉시 날아갔다.
원자의는 밑으로 떨어지는 순간 무척 당황했다. 그녀는 물론 헤엄을 칠 줄 알
았지만 여러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는데 물에 옷이 흠뻑 젖어 여인의 굴곡을 그
대로 드러낸 채 기어나온다면 그것처럼 창피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밧줄이 날아드는 것을 본 그녀는 재빨리 움켜잡았다. 호비가 밧줄을 잡
아당기자 원자의는 그 기세를 빌어 몸을 솟구치며 가볍게 뱃머리로 내려섰다.
그녀의 두 발이 막 뱃머리에 닿는 순간 풍덩! 하는 커다란 물소리와 수화(水花)
를 사방으로 흩뿌려 물방울이 그녀의 얼굴과 머리를 적셨다. 역길이 부러진 돛
대와 함께 물에 빠진 것이었다.
물에 있던 사람들은 고함을 지르며 첨벙! 첨벙! 물로 뛰어들었다. 역길은 헤
엄을 칠 줄 몰랐기 때문에 구룡파의 십칠팔 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사부를 살리
려고 앞다투어 물속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원자의는 호비에게 방긋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호 오라버니, 고마워요!]
호비는 웃었다.
[나의 이 호자를 풀면 월심구(月十口)라는 세 자가 되는데 보아하니 나는 한
달에 아홉흡 번이나 칼을 맞겠구려.]
원자의는 조금전 역길의 이름풀이하는 것을 모두 다 듣고 있었구나 생각하며
방긋이 웃음을 띠우고 입을 열었다.
[다행히 이름 중에 아닐 비(菲)자가 있으니 '아니로소이다'예요. 아홉 번 칼
을 맞을 흉사를 만난다 하더라도 길한 것으로 변할 거예요.]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소저의 금쪽같은 말에 사의를 표하오.]
원자의는 그와 다시 만나자 속으로 매우 기뻤는데 더구나 그가 손을 써서 구
해주기까지 하여 그와 잘 지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의 비자는 우아할 비자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게다가 아닐
비자 아래에 깃털 우(羽)자를 보태게 된다면 구슬 비(翡)자가 되니 주로 금옥비
취를 얻게 되는 것이고요, 초두변을 더하면 향기로울 비(菲)가 되니 언제나 향
기롭고 화사하고 아름답다는 뜻이
되고요. 실사변을 보태면 붉은 비단비(緋)자가 되니 홍포옥대(紅袍玉帶)라 주
로 큰 벼슬을 한다는 뜻이 되겠군요.]
호비는 그 말에 웃으며 혀를 낼름 내밀었다.
[벼슬도 오르고 재물도 오르게 된다니 정말 대단하구려!]
두 사람은 주위을 아랑곳하지 않고 뱃머리에서 웃고 떠들었다. 그때 갑자기
나루터가 소란스러웠다. 구룡파의 제자들이 역길을 부러진 돛대와 함께 역길을
떠매고 뭍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역길는 나이가 많고 뚱뚱한데다가 헤엄을 칠
줄 몰라 물을 많이 먹고 기절해 있었다.
원자의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속으로 놀라 생각했다.
(사람이 죽으면 일이 더 커지겠다.)
그녀는 나직이 호비에게 말했다.
[호 오라버니, 우리 빨리 가도록해요!]
훌쩍 몸을 날려 물으로 내려가 부러진 돛대 위의 은사연편을 집어들었다. 구
룡파의 제자들은 분분히 노갈을 터뜨리며 예닐곱 대의 연편을 일제히 그녀에게
후려쳐왔다. 순간 쨍그랑! 창창! 하는 소리가 잇따라 퍼지며 일곱 자루의 연편
이 서로 부딪치며 쇠그물처럼 덮어씌우듯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은사연편을 휘둘러 비껴내며 동시에 몸을 비스듬히 날려 뼈져나왔다.
그리고 힐끔 역길을 쳐다보니 그의 뚱뚱한 몸뚱아리는 땅위에 옆으로 나자빠져
꼼짝을 하지 않는 것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호비는 몸을 솟구쳐 말에 오르며 오른손으로 원자의의 백마를 끌며 부르짖었
다.
[구룡파의 장문인은 불길할 것 같으니. 구룡파 장문인 자리는 포기합시다.]
원자의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분부를 듣겠어요.]
그녀는 몸을 솟구치더니 말등에 올라탔다.
구룡파의 제자들은 소리를 질러대며 다투어 막으려고 했다. 두 자루의 연편이
땅을 쓸듯이 말다리로 날아들었다.
원자의는 몸을 돌려 채찍으로 맞섰다. 어느덧 그녀의 채찍이 두 자루의 구룡
연편과 서로 엉키자 원자의는 오른손으로 고삐를 잡고 쏜살같이 백마를 앞으로
몰았다. 갑작스레 말이 앞으로 뛰쳐나가자 채찍을 뻗쳤던 두 대한은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이러한 변고는 느닷없이 일어난 것이라 두 명의 대한은 육칠장이나 끌려가게
되었다. 두 대한은 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백마의 기세가 너무나 신속해
상반신을 쳐들자마자 다시 쓰러졌다. 경황이 없는지라 구룡연편을 놓으면 되는
것도 모르고 죽어라하고 채찍의 손잡이를 움켜잡고 있었다.
원자의는 말 위에서 그와 같은 광경을 보자 웃음이 절로 나와 갑자기 말고삐
를 당겨 두 대한이 몸을 일으키도록 기다렸다.
몸을 일으킨 두 사내는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멍이 들고 콧등은 부어올랐으며
손발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마저 땅바닥에 긁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원자의는 넌즈시 질문을 던졌다.
[아니, 당신들의 연편 안에는 보물이라도 들어있나요. 어째서 손을 놓지 못하
는 거죠?]
두 마디 질문을 하고 그들의 대답하기도 전에 발꿈치로 가볍게 말의 배를 눌
렀다. 그러자 백마는 앞으로 와락 뛰쳐나갔으며 두 사람은 다시 쓰러졌다.
이때 두 사람은 가까스로 깨달았는지 채찍을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 순
간 그들의 귓가에는 깔깔거리는 원자의의 웃음소리가 들렸으며, 이윽고 정신을
차리게 되었을 때는 그녀가 호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멀리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때서야 역길은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제자들은 중구 난방으로 위로의
말을 하고, 원자의가 간교한 속임수를 썼다며 쑥덕공론을 벌였으나 그 누구도
그녀의 내력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구룡파에서는 그녀를 배후에서 사주한 사
람이 호비라고 생각하며 그를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다.
원한이냐? 애정이냐?
한참 동안 달린 후 뒤돌아보니 역가만(易家灣)이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그제
서야 원자의는 빼앗은 구절연편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눈을 돌려 호비
를 바라보니 호비는 시골 농사꾼 옷차림을 하고 있어 엉성하고 멍청하게 보여
그만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조금전 그가 돕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자기
는 역가만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으리라는 것을 생각을 하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두 사람은 말고삐를 나란히하고 한동안 달렸다. 호비가 문득 물었다.
[원소저, 천하의 무림에는 몇 개의 문파가 있는 거지요?]
원자의는 웃었다.
[몰라요. 그대는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나요?]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모르기 때문에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것이외다. 그대는 이제 위타문,
팔선검, 그리고 구룡파 세 문파의 대장문인이 되셨는데 또 몇 개 문파의 장문인
이 되셔야 만족할 수 있겠소?]
[호호! 역길을 이기긴 했지만 그의 제자들이 승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룡파
의 장문인은 억지로 된 것이예요. 그리고 소림이나 무당, 태극과 같은 대 문파
의 장문인 자리는 감히 빼앗을 엄두를 낼수 없지요. 앞으로 별볼일 없는 열 개
문파의 장문직만 빼앗는다면 충분할 것 같군요.]
호비는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무림 십삼 문파의 총장문인 된다니, 위풍이 당당하겠구려.]
원자의는 웃었다.
[호 오라버니, 그대의 무예도 매우 고강한데 몇 개의 장문인을 차지하는 것이
어때요? 우리 같이 길을 가면서 당신 한 번, 나 한번 번갈아 장문직을 거두어들
이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북경에 도달하면 내가 열세 문파의 총장문인이 될 것
이고, 그대도 역시 열세 가문의 총장문인이 될 거예요.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복
대수의 천하장문인 대횐가 뭔가 하는 것에 참여한다면 재미있지 않겠어요?]
호비는 연신 손을 내저었다.
[나로서는 그럴 용기가 없소. 더군다나 소저처럼 훌륭한 무예도 갖추지 못하
고 있소. 십중팔구 반 쪽의 장문인도 빼앗기 전에 상대방의 여동빈추구(呂洞賓
推狗)에 걷어차여 냇물로 떨어져 진흙탕에 범벅이 된 꼴사나운 강아지를 면치
못할 것이오. 단지 니추파(泥鰍派)의 장문인만 된다는 것은 별로 영광스럽지
못할 것 같군요.]
원자의는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깔깔거리고 웃더니 포권을 했다.
[호호호! 호 오라버니 소매가 사과를 드리지요.]
호비는 포권으로 반례를 하며 점잖게 말했다.
[삼대 장문인 나으리, 불초는 그야말로 감당할 수 없소이다.]
원자의는 그가 얌전하게 생겼지만 말하는 것이 재미있어 속으로 더욱 좋아하
게 되었다. 그녀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반산이란 늙은 녀석이 그대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것도 과연 무리는 아니
었군요.]
호비는 조반산을 잊지 못하고 있던 터라 재빨리 물었다.
[조 셋째형은 어떻게 되었소? 그 분은 그대에게 무슨 말을 했지요?]
원자의는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나를 쫓아온다면 이야기 해드리지.]
그리고는 발끝으로 가볍게 말을 걷어찼다.
호비는 백마가 달리면 도저히 쫓아갈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백마가 앞발을
쳐들고 막 달리려고 할 때 잽싸게 몸을 솟구쳐 백마 위로 올라타며 원자의의 등
뒤에 앉았다.
백마는 한 사람을 더 태웠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고 네 발굽을 마음껏 떼어놓
으며 바람을 가르고 번개와 같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청마는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지만 사람이 타고 있지 않은데도 삽시간에 백마로부터 수십 장이나 떨어지
는 것이었다.
원자의는 등뒤에 앉아있는 호비의 몸에서 은은히 풍기는 남자의 체취를 맡게
되자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녀는 입술을 움직여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
다.
한참 동안 달리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치며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하늘
에는 먹구름이 어느덧 반쯤 뒤덮고 있었다. 여름철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이 비
구름이 몰려와 소나기를 뿌리는 법이었다. 그녀가 말고삐를 당기자 백마는 더욱
더 빨리 달렸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서풍이 몰아치며 콩알같은 빗방울이 뿌려지
기 시작했다. 큰길 옆에는 인가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다만 왼편 산골짜기
중턱에 누런 담장 한 모퉁이가 보일 뿐이었다.
원자의는 말을 몰아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오래된 사당으로 다 깨어진
편액 위에는 <상비신사(湘妃神祠)>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금칠이 떨어져
나간 것을 보면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것 같았다.
호비는 말에서 뛰어내려 사당의 문을 열어 젖히고 살필 겨를도 없이 우선 백
마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늘에서는 번개불이 번쩍이며 요란한 천둥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예가 고강한 원자의마저도 하늘을 쳐다보며 겁에 질린 어린
소녀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호비는 후전(後殿)까지 돌아가 안을 살펴보았지만
사당에는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전전(前殿)으로 돌아와
말했다.
[후전이 비교적 깨끗한 것 같군요.]
그들은 후전으로 갔다. 호비는 마른 볏짚을 찾아 한쪽을 깨끗이 청소하며 말
했다.
[오래갈 비는 아닌 것 같으니, 비가 그친 뒤에 떠난다 하더라도 오늘 안으로
장사(長沙)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외다.]
원자의는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금전만 해도 두 사람
은 웃고 떠들었지만 함께 말을 타고 오는 동안 원자의는 마음속 어딘가에 야릇
한 느낌이 들어 호비를 보자니 수줍어지고 약간 쑥스러워졌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다 서로 시선이
마주치면 빙긋이 웃고는 다시 똑같이 고개를 돌렸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호비가 물었다.
[조 셋째형은 별고 없으신가요?]
[네. 그 분한테 무슨 일이 있겠어요?]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당장이라도 달려가 만나보고 싶은 심정이외다.]
원자의는 가볍게 받아 넘겼다.
[그렇다면 회강(回彊)으로 찾아가면 되잖아요?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서로 만
나 볼 수 있을 거예요.]
호비는 웃었다.
[그대는 막 회강에서 오는 길이오?]
원자의는 옆으로 돌아보며 미소를 띠었다.
[그래요. 이 차림새를 보면 그런 것 같지 않아요?]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모르겠구려. 나는 회강에는 그저 사막와 황무지만 있는지 알았소이다.
소저같은 미녀가 살고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구려.]
원자의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치! 그대는 무슨 터무니 없는 말씀을 하세요.]
호비는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속으로 약간 후회를 했다. 남녀가 외떨어진 황
량한 사당에 단 둘만 있으니 경박한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즉시 화제를 돌려 물었다.
[복대수가 무슨 목적으로 천하장문인 대회를 개최하는지 소저께서는 말씀해
주실 수 있소이까?]
원자의는 호비의 어조가 갑자기 정중해진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그를 힐
끗 바라보고는 설명했다.
[그는 왕공귀인(王公貴人)이라 밥을 먹고 할 일이 없어, 무림 고수들을 모아
놓고 닭싸움이나 귀뚜라미 싸움을 구경하듯 심심풀이로 그러는 것이겠지요. 천
하의 수많은 무학 고수들이 그에게 농락당하고 있는데도 모르고 있으니 정말 통
탄할 노릇이지요.]
호비는 무릎을 탁치며 큰소리로 말했다.
[소저의 말이 틀림없소이다. 그와 같은 고견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구려. 그
러고 보니 소저가 길을 오면서 줄곧 장문인 자리를 빼앗는 것은 바로 복대수의
대회를 훼방놓으려고 하는 것이군요.]
원자의는 웃었다.
[우리 두 사람이 합심협력 한다면 천하 장문인들의 자리를 반쯤은 차지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렇게 된다면 복대수의 장문인 대회는 보나마나 흥미가 없어
지고 말 거예요. 그런 후 우리가 다시 대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앞으로는 감
히 천하의 무림인사를 얕보지 못하도록 그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는 거예요.]
호비는 연신 손뼉을 치며 말했다.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소저가 앞장서시구려. 나는 소저를 따라 미력이나마
힘을 다하겠소이다.]
[그대의 무공이 나보다 훨씬 뛰어난데 무슨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세요.]
두 사람은 기분이 좋아서 한동안 말을 주고 받았다. 내리는 비는 시종 그칠
줄 모르고 있었고 빗줄기가 점점 세차지고 있었다.
사당 옆 골짜기로 흐르는 개울에서는 물이 계곡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파도소
리처럼 들려왔다. 사당은 수 년간 돌보는 사람이 없어 도처에서 빗물이 스며들
었다.
호비와 원자의는 한쪽 귀퉁이에 웅크린 채 점점 어두워지는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먹구름이 머리 위에서 내려 누르는 듯 짙게 깔려있어 오늘은 도저히 출
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호비는 부엌으로 가서 나뭇가지를 구해와 바닥에 불을 지피며 말했다.
[비가 멈추지를 않으니 오늘 밤은 어쩔 수 없이 굶어야 하겠구려.]
불꽃이 원자의의 얼굴을 비추자 발그레한 그녀의 얼굴은 더욱 요염하고 화사
하게 보였다. 그녀는 회강을 떠나 만리 먼길을 무릅쓰고 달려오는 동안 황량한
산속이나 들판에서 노숙을 하는 것은 밥먹듯 했지만 이렇게 젊은 남자와 단둘이
밤을 지샌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녀는 형용할 수 없는 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혔
다.
호비는 짚단을 찾아 신단(神壇) 위에 깔고, 신단과 멀리 떨어진 곳에 짚단을
깔고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동빈은 하늘에서 주무시고 물에 빠진 낙수구(落水狗)는 땅바닥에서 자야
하겠지요.]
그리고 땅바닥에 있는 짚단 위에 몸을 뉘이며 얼굴을 벽쪽을 향하고 눈을 감
고 잠을 청했다.
원자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비는 정말 예의를 지킬 줄 아는 군자라고 생각하
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낙수구, 그럼 내일 봐요.]
그리고는 그녀도 신단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자리에 누웠으나 설레이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웬지 모르게 뒤돌
아 누운 호비의 넓은 등으로 자주 시선이 돌아갔다. 귓가에는 비가 지붕을 두드
리는 소리가 후드득 후드득 마구 일고 있었다. 반시진을 넘게 뒤척이다가 겨우
몽롱한 잠속으로 빠져 들었다.
한밤에 은연중 어디선가 말발굽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듯 했다. 그 소리가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원자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호비 역시 그 소리를
들은 듯 나직이 말을 걸어왔다.
[여동빈, 사람이 오고 있구려.]
말발굽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며, 수레 바퀴가 삐그덕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이 비는 오후부터 계속 내리고 있었는데 누구길래 이 비를 무릅쓰고
밤길을 재촉하고 있는 것일까?)
수레와 말들이 사당 밖에 도착해서 일제히 멈추는 기척이 들렸다.
원자의는 나직이 말했다.
[그들은 사당 안으로 들어올 모양이예요.]
그녀는 신단에서 내려와 재빨리 호비 곁에 앉았다.
순간 사당의 문이 삐그덕! 하고 열리며 수레와 말을 앞쪽 대전의 낭하에 세워
놓고 두 명의 마부가 손에 횃불을 들고 후전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호비와 원자
의 두 사람을 보자 나직이 중얼거렸다.
[여기는 사람이 있으니 우리들은 전전(前殿)에서 쉬도록 합시다.]
그들은 곧바로 앞으로 돌아갔다. 전전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미루어 볼
때 대략 이십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나무를 패고 쌀을 씻어 밥을 짓는 소리
가 들려왔다. 그들의 말투는 모두 광동 사투리였다. 한동안 소란을 피우더니 이
내 조용해졌다.
그때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잠자리를 마련할 필요는 없네. 식사를 마치면 비가 오든 말든 길을 재촉해야
할 걸세.]
호비는 그 음성을 듣고 속으로 흠칫했다. 그들 곁에 피워놓은 모닥불이 꺼지
지 않은 상태라 호비는 원자의의 안색 역시 미미하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
다.
선전에서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나으리께서는 너무나 소심하군요. 이렇게 큰 비에......]
빗소리가 요란스러워 다음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먼저 말한 사람은 기가 충만하고 음성이 우렁차 비 소리에도 불구하고
꽤 먼 거리에서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어두운 밤이고 더구나 큰비가 쏟아지고 있으니 길을 가기는 안성마춤이네.
일시의 안일을 추구하다가 전 가족의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일일세. 이곳은
큰길과 멀지 않으니 우연치 않게 그 좀도적 놈의 손에 걸려들지두 몰라.]
거기까지 듣던 호비는.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지라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정말 네 말대로 공교롭게도 나와 맞부딪치게 되었구나.)
호비는 나직이 원자의에게 말했다.
[여동빈, 밖에 또 다시 한 분의 장문인이 도착했구려. 이번에는 내가 빼앗도
록 해 주시오.]
원자의는 음! 했읕 뿐 말하지 않았다.
호비는 그녀가 기뻐하지 않자 내심 이상하게 생각하며.
허리띠를 조여매고 칼을 허리춤에 찬 채 성큼성큼 전전으로 나아갔다.
전전의 동쪽에 칠팔 명의 사람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체구가
우람해서 바닥에 앉아있는 데도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그는 바깥
을 향해 앉아있었다.
호비는 그의 옆모습을 보자 그가 바로 불산진의 대악패(大惡覇)인 봉천남인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황금곤을 몸에 기대어 놓은 채 멍하니 하늘을 바
라보고 있었다. 불산진의 그 엄청난 재산을 아쉬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적을 해치워 옛날의 위풍을 다시 떨칠 궁
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호비는 신감(神龕) 뒤쪽 으슥한 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전전의 사람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서쪽에도 커다란 모닥불이 피어 있고, 불 위에는 커다란 솥이 매달려 있었다.
한창 밥을 짓고 있는 모양이었다.
호비는 앞으로 걸어와 발로 솥을 걷어찼다. 그러자 그 솥은 발길에 걷어차여
쩡그렁! 꽈당! 하는 소리를 내면서 마당으로 굴러 떨어졌다.
뭇 사람들은 깜짝 놀라 일제히 고개를 돌렸고, 봉천남과 봉일명 부자는 그를
보자 대뜸 얼굴색이 변했다. 맨손인 사람들도 서둘러 무기를 거머쥐었다.
호비는 봉천남의 희고 포동포동한 얼굴을 대하자 북제묘에서 몰살당한 종아사
식구들의 처참한 모습이 떠올라 극도로 분노했지만 오히려 웃으면서 입을 열었
다.
[봉나으리 이곳은 상비묘(湘妃廟)라 하는데, 봉나으리는 정말 우아한 취향을
지니신 것 같구려.]
봉천남은 종아사 일가족 세 명을 북제묘에서 죽인 이후 즉시 집에 불을 지르
고 불산진을 떠났다. 길을 오는 동안 밤에는 길을 가고 낮에는 잠을 잤으며,
될 수 있는 한 황폐하고 외진 소로길을 골라서 오고 있었다. 사실 봉천남은 일
처리가 완벽해서 호비가 총명하다고는 하
지만 강호의 연륜이 낮은 편이라 실오라기 하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만
약에 큰 비를 만나 이렇게 일이 공교롭게 되지 않았더라면 결코 사당에서 마주
치지 못했을 것이다.
봉천남은 호비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보아하니 이 상비묘는 봉모가 하늘로 돌아갈 장소인가 보구나.)
그러나 얼굴에는 여전히 참착한 빛을 띠우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
키며 아들에게 옆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호비는 칼을 비켜들고 사당의 문을
가로막으면서 입을 열었다.
[봉나으리, 뭐 당부할 것도 없소이다. 당신이 종아사 일가족을 몰살했으니
나도 봉나으리의 일가족을 모두 죽여야겠소이다. 우리 결코 얼버무리지 맙시다.
당신 봉나으리야 다른 사람과 다르니 마지막까지 남겨두겠소. 그래야 그대가
가족들 때문에 안절부절하는 일이 없을 것 아니오?]
봉천남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눈 앞의 이 젊은이가 이토록 잔인하리라고는 생
각지 못했다. 봉천남은 황금곤을 쳐들고 입을 열었다.
[사내 대장부라면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당연히 책임져야 하는 법, 무슨 말
을 더 하겠소. 당신이 이 봉모의 목숨을 빼앗으려 한다면 재주껏 앗아가도록 하
시구려.]
말을 마치자 봉천남은 한 걸음 내딛으며 누두개정(樓頭蓋頂)이라는 일초를 펼
쳐 호비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그러면서 뒤로 손짓을 하여 아들에게 빨리 떠나
라는 시늉을 했다. 봉일명은 부친이 결코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
지만 살겠다고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모두들 덤벼들도록 하시오!]
봉일명은 사람의 숫자로 이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칼을들고 호비의 왼쪽
으로 달려들었다. 봉천남을 따라 도망친 가족과 심복들, 그리고 제자와 문인들
까지 모두 합쳐 십 육칠 명이나 되었다. 그 가운에 태반은 대체로 무예를 익힌
적이 있었다. 봉일명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자 팔구 명의 사람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호비를 에워쌌다. 봉천남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음! 정말 옳고 그른 것을 모르는구나. 사람이 많다고 이길 수 있다면 불산진
에는 더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어찌 고향을 떠나 수천리 머나먼 길을 도망
쳐 왔겠는가?)
봉천남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른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오직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
천남은 호비와 동귀어진할 생각을 하고 손을 썼기 때문에 손씀씀이는 오히려
침착해졌다. 황금곤을 뻗쳐내더니 초식을 바꾸어 비스듬히 휘두르다 곧장 옆으
로 쓸어갔다.
호비는 이 사람의 죄가 크고 고약하니 한칼로 목숨을 빼앗는다면 그가 지은
죄를 앙갚음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비는 황금곤이 쓸어오는 것
을 보자 칼을 위로 던지고 손을 뻗쳐 맨손으로 황금곤의 아랫부분을 잡으려 들
었다. 그것은 적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였다.
봉천남은 평생을 강호에서 떠돌아 다녔지만 이토록 무시를 당한 적이 없었다.
그는 이 녀석은 나를 완전히 바지 저고리로 보는구나 하고 노기가 충천했다.
하지만 불산진에서 손을 써본적이 있어 결코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었기 때문에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봉천남은 급히 황금곤은 거두어들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적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 않
을 수 없었다. 그 소리는 호비가 던진 칼이 서까래에 꽂히는 소리였던 것이다.
호비는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별안간 무리들 가운데 뛰어들더니 두 팔을 휘둘
러 천장을 올려보던 봉천남의 팔구 명이나 되는 제자들과 문하의 사람들의 혈도
를 모조리 봉쇄하고 발로 걷어차 하나씩 하나씩 양쪽으로 내던졌다.
삽시간에 대청 안은 텅비게 되어 봉씨 부자와 호비 세 사람만 남아있었다.
봉천남은 이빨을 깨물며 나직이 호통을 내질렀다.
[명아야, 너는 아직도 가지 않고 있느냐? 정말로 너는 봉씨 집안의 대를 끊을
셈이냐?]
봉일명은 칼을 들고 앞으로 나서며 협공을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살 길을
찾아 도망쳐야 할 것인지 망설이고 있었다.
호비는 몸을 흔들하더니 어느덧 봉일명의 뒤로 돌아갔다.
봉천남은 일성을 대갈하며 황금곤을 휘둘러 앞으로 나아가 막으려 들었다. 호
비는 머리를 숙여 봉일명의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가 손바닥으로 가볍게 봉일
명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자 봉일명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몸이 뒤로 젖
혀지며 황금곤을 향해 부딪쳐 가는 것이 아닌가? 봉천남은 당황하여 황급히 황
금곤을 거두었다. 다행히도 그가 수십 년간이나 황금곤에 정성을 들인 보람이
있어 가까스로 아들의 머리가 바스라지고 뇌수가 뿌려지는 것은 피할 수 있었
다.
호비는 그 일초가 성공을 하자 이러한 방법을 써서 상대하면 봉천남이 안절부
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비는 봉일명이 미처 제대로 서지 못했을때 다시 오
른손으로 그의 뒷덜미를 잡고 왼손으로 그의 정수리를 내려치려했다.
봉천남은 혼비백산했다. 북제묘에서 돌로 만든 거북이의 머리를 잘라낸 장력
을 본 봉천남으로서는 그 일장이 아들의 정수리에 떨어진다면 자기 아들이 절대
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봉천남은 황급히 황금곤으로 호비의 왼쪽 옆구리를 맹렬히 찔러 호비가 손을
멈추게 하려고 했다.
황금곤이 자기 허리 가까이 다가오자 호비는 봉일명의 머리통을 움켜잡고 황
금곤을 향해 내밀었다.
봉천남은 화급히 초식을 바꾸어 도포요의(桃袍 衣)를 펼쳐 아래에서 위로 비
스듬히 올리면서 적의 하반신을 공격했다.
[훌륭하군!]
호비는 소리치며 왼손으로 봉일명의 등을 살짝 밀어 그의 몸으로 황금곤 초식
을 막으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몇 초를 겨루자 봉일명은 호비의 손에 들린 완벽한 방어 무기로
변했다. 호비는 그의 머리통을 가지고 황금곤과 맞부딪히도록 하거나, 그의 사
지를 이용해서 황금곤을 막는 것이었다.
봉천남이 조금이라도 공격을 누그러뜨리거나 그만두려고 하면 호비는 냅다 손
을 쳐들어 봉일명의 급소를 내려치려는 자세를 취했다. 따라서 부득이하게 구하
려들지 않을 수 없었고, 구하려고 하면 호비가 아들의 몸을 들이대 그가 아들을
격살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시 몇 초를 더 싸우자 봉천남은 탈진 상태가 되어 별안간 뒤로 세 걸음 물
러서며 황금곤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창! 하는 커다란 음향이 울려 퍼지며 바
닥의 푸른 벽돌이 바스라지며 조각이 튀어올랐다.
봉천남은 참담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비는 냅다 호통을 내질렀다.
[봉천남! 자기 자식은 그렇게 사랑하면서 당신은 남의 집 자식을 어떻게 대했
소?]
봉천남은 흠칫 놀랐으나 다시 오기가 치밀어 큰소리로 말했다.
[이 봉모가 영남을 주름잡고 오호파의 장문인이 될 때까지 한평생 죽인 사람
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소. 또한 나의 아들도 삼사삽 명이나 되는 목숨을 해쳤
으니 오늘 당신의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대수로울 것이 뭐 있겠소? 당신은 손
이나 쓸 것이지 웬 잔소리가 그렇게 많소?]
호비는 호통을 내질렀다.
[그렇다면 당신 스스로 해결을 짓도록 하고, 이 도련님이 더이상 쓸데없이 손
발을 놀리지 않도록 하시오.]
봉천남은 황금곤을 집어 들더니 껄껄 웃으면서 자기의 머리를 내려치려고 들
었다.
돌연 은빛 광채가 번뜩이는 가운데 기다란 연편이 호비의 등뒤에서 날아와 황
금곤을 휘감아 바깥쪽으로 끌어당겼다.
봉천남의 팔힘이 강하고 경공(硬功)에 뛰어나기 때문에 연편에 황금곤을 빼앗
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머리를 내려치지는 기세는 중도에서 저지당하고 말았다.
채찍으로 황금곤을 휘감아 빼앗으려 한 사람은 다름아닌 원자의였다. 그녀는
다시 힘껏을 끌어당겼으나 봉천남의 황금곤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원자의는 웃으며 말했다.
[호 오라버니, 우리는 장문인 자리만 빼앗으면 되는 것이지 사람을 죽여서는
아니되어요.]
호비는 이빨을 갈며 말했다.
[원소저는 잘 모르오. 이 사람은 극악무도한 자로서 일반 장문인들과 같이 논
할 수가 없소.]
원자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장문직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을 사부님이 아시면 한번 웃고 말겠지만,
만약에 인명은 살상했다면 크게 벌을 내릴 거예요.]
[이 사람은 내가 죽인 것이고, 소저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외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장문인의 자리를 빼앗자는 것은 나로부터 비롯되었어
요. 이 사람은 오호파의 장문인인데 어째서 나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어
요.]
호비는 급히 말을 계속했다.
[내가 광동에서 이곳 호남까지 곧장 내려온 것은 바로 이 악랄한 도적을 찾기
위해서 였소. 이 자가 장문인이건 아니건 상관없소. 나는 이 자를 반드시 죽여
야겠소!]
원자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호 오라버니, 내가 그대에게 정중히 말을 하겠는데 그대는 잘 들어봐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원자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우리 사부님이 누구신지 모르지요?]
[나는 모르오. 소저의 솜씨를 미루어 볼 때 존사께서는 틀림없이 강호에서 명
성을 떨친 대협일 것이오. 실례하지만 그 어른신의 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원자의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사부님의 함자는 차차 알게 될 거예요. 지금은 다만 그대에게 내가 회
강을 떠날 때 우리 사부님이 저에게 하신 말씀을 들려주겠어요. 사부님은 이렇
게 말씀하셨지요. '네가 중원으로 들어가서 어떤 소란을 피우던 간에 나는 관여
하지 않겠다. 그러나 다만 네가 한 사람이라도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면 나는 즉시 너의 목숨을 거두어 들일 것이다.' 우리 사부님은 언제나 하나라
고 말하면 하나이고, 둘이라고 말하면 둘이지 결코 반푼도 에누리가 없어요.]
호비는 그 말을 받아 물었다.
[설마하니 극악무도하여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나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이
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는 것이오?]
원자의는 냉랭히 대답했다.
[맞았어요. 그때 나 역시도 사부님에게 그런 질문을 했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죠. '나쁜 사람은 본래 죽여야 하지만 이세상의 상황이라는 것이 변화
가 많아 일 개인이 궁극적으로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은 너와 같이 어린 나이에
똑똑히 분간할 수 있겠느냐? 이 세상에는 웃는 얼굴을 한 호랑이도 있는 법이
고, 호랑이 얼굴을 가진 보살도 있는 법이다.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
는 법, 한 사람을 잘못하여 죽이게 된다면 한평생 한을 남기게 되는 법이니
라!']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틀림이 없소이다만 이 사람은 친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스스로 시인하고 있소. 또한 나는 그가 불산진에서 선량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은 똑똑히 목격했소이다.]
원자의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사부님의 명령에 어쩔 수 없어서 이러는 거예요. 오라버니, 그대는 나
의 얼굴을 봐서 그 고귀한 손을 더럽히지 말고 이만해 두시도록 하세요.]
호비는 그녀의 말이 너무나 간절하여 진심으로 부탁하는 말임을 알 수 있었
다. 그녀를 알게 된 이후 한번도 이와 같은 어조로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들어 보
지 못한 터라 마음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지만, 곧 종아사 부부와 아들이
죽어 쓰러져 있는 참상이 머리에 떠올랐다. 북제묘의 신상의 돌 위에 어린애가
배를 가를 때 흘린 핏자국을 상기하게 되자 치가 떨리며 피가 끓어올라 큰소리
로 말했다.
[원소저, 이곳의 일을 그대는 못본 척하고 먼저 떠나도록 하시오. 우리는 장
사(長沙)에서 다시 만납시다.]
원자의는 안색을 굳히더니 성이 나서 말했다.
[나는 아직까지 한번도 이처럼 애원하며 부탁을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대
는 저의 부탁을 들어주려하지 않는군요. 이 사람과 당신은 아무 원한이 없고,
그대는 다만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의협심을 보이려는 것 뿐이예요. 이 사람
은 당신을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 집도 버리고 도망나와 낮에는 누가 볼까 두려
워 밤에만 나다니는 형편이예요. 호 오라버니! 사람을 그렇게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넣을 수 있나요? 인의(仁義)를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삼 푼 정도의 여지
를 남겨두어야 해요!]
호비는 낭랑히 말했다.
[원소저, 나는 이 사람을 반드시 죽여야 하오. 먼저 그대에게 잘못했다고 사
과를 드리겠소. 이후 존사께서 만약에 꾸중을 하신다면 내 기꺼이 혼자 처벌을
받겠소이다.]
그리고 나서 땅에 닿도록 읍을 했다.
순간 착! 하는 소리와 함께 원자의는 은사연편을 휘둘러 지붕서까래 위에 꽂
혀 있던 호비의 단도를 뽑아 채찍 끝에 감긴 칼을 호비에게 던지며 말했다.
[받아요!]
호비가 손을 뻗쳐 칼자루를 쥐자 원자의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호 오라버니, 그대는 먼저 나를 물리치고 다시 이 사람의 전가족을 죽이도록
해요. 그때는 사부님도 나를 탓하지 못할 거예요.]
호비는 화를 버럭냈다.
[그대는 굳이 이 한가운데 뛰어들어 저지하려 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어떤
사정이 있는 것 같구려. 존사께서는 당당한 대협이시고 선배 고인이신데, 설마
하니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단 말이오?]
원자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호 오라버니, 그대는 정말 저의 체면을 조금이라도 세워주시지 않겠어요?]
불꽃 아래 그녀의 간드러진 얼굴은 꽃과 같았다. 아련한 목소리로 나직이 부
탁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호비는 그만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가 애원하
면 애원할수록 이 가운데는 틀림없이 어떠한 음모가 숨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속으로 생각했다.
(호비야, 호비야! 네가 미색에 현혹되어 대의를 돌보지 않는다면, 정말 헛되
이 영웅호걸이 된 것이다. 너의 아버지 호일도는 한평생 호걸로 살다가 가셨는
데 어찌 너와 같은 못난 자식을 둘 수 있겠는가?)
지금 상황에서는 무력을 쓰지 않고는 도저히 간악한 자를 추살하기 어려운지
라 호비는 부르짖었다.
[그렇다면 실례하겠소!]
그는 칼을 들고 대삼박(大三拍)이라는 일초를 펼쳐 칼 빛을 번득이며 원자의
에게 덮쳐들며 왼손을 쳐들어 문은(紋銀)을 봉천남의 명치를 향해 날렸다.
원자의는 그가 멍하니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자기의 부탁을 들
어 줄 것처럼 느껴지자 속으로 매우 기뻤다.
그런데 갑자기 호비가 손을 쓰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고 대삼박이라는 일초가 너무나 맹렬하고도 거
세게 뻗쳐오고 있었다. 원자의의 은사연편은 길고 부드러워 막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그가 왼손으로 던진 암기가 세찬 바람을 일으켜 지극히 매서운 힘이
실린 것을 알고는 도저히 봉천남이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원자의는 속으로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결코 나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할 것이다!)
곧장 기다란 채찍을 떨쳐 팅! 하고 문은을 떨어뜨리며 호비의 칼은 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호비는 그녀의 무공이 자기에 못지 않기 때문에 일단 손을 쓰게 된다면 쉽사
리 승부를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봉천남 부자가
도망칠 기회를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공격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몸
에 지닌 암기라고는 고작 금전표로 사용할 수 있는 동전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동전으로는 봉천남과 봉일명을 적중시킨다 하더라도 치명상을 입힐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다섯 냥 무게가 나가는 문은을 내던진 것이었다. 호비는 사력을 다해
절기를 펼쳤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그러나 뜻밖에도
원자의가 자기를 몸을 돌보지 않고 봉천남을 구하려고 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칼날을 그녀의 머리에 닿기 직전에 가까스로 멈추고 호통을 내질렀다.
[도대채 무엇 때문이오?]
[부득이한 일이예요.]
그녀는 재빨리 몸을 뒤로 날리더니 은사연편을 되돌려 떨치며 부르짖었다.
[받아요?]
호비는 칼을 들어 막았으며 기회를 노리고 봉천남을 다시 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원자의는 초식마다 살수를 펼쳐 부득이 호비는 온 정신을 가다듬고 원자
의의 초식을 해소시켜 나가야만 했다.
연인(戀人)과의 결투
대전에는 오직 원자의가 휘두르는 연편만이 커다란 은빛의 원을 그리고 있었
고 호비의 칼은 그저 조그만 은빛 원을 그려 내고 있었다. 두 개의 은빛 원이
맴돌며 서로 엇갈렸고 이리저리 불을 번득이며 간혹 칼과 채찍이 맞부딪치는 소
리가 대전에 울려퍼졌다.
이런 식으로 몇 차례 겨루던 원자의는 갑자기 연편을 옆으로 휘두르며 신단
위에 켜 놓았던 촛불을 꺼뜨렸다. 호비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촛불을 꺼뜨려 봉가 놈을 도망치게 하려는구나!)
그녀의 의도를 알았으나 일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몰랐다. 호비는 별수
없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호가 도법의 정묘한 초식을 펼쳐 그녀를 향해 공격
해 들어갔다.
[훌륭한 도법이군요!]
원자의는 외침과 동시에 채찍을 옆으로 스치며 호비의 칼을 밀어냈다. 곧이어
채찍의 끝으로 바닥에 피워 놓았던 불붙은 장작을 휘어감아 호비에게 던졌다.
밥을 짓고 있던 솥은 호비의 발길에 차여 뒤집어졌으나, 밑에 타고 있던 이십
여 대의 장작개비는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았던 것이다.
호비는 원자의가 채찍으로 불붙은 장작을 던지자 감히 단도로 막을 수가 없었
다. 단도와 부딪히면 불똥이 사방으로 튀어 자기의 얼굴을 상할 우려가 있기 때
문에 부득이 뒤로 물러나며 피할 수밖에 없었다.
원자의는 불에 타고 있는 장작들을 하나씩 하나씩 말아 계속해서 던졌다. 한
줄기 도도한 불꽃이 어두운 대전을 잠깐씩 밝혀주며 잇달아 허공을 갈랐다. 호
비는 부득이 경신법을 펼쳐 대전을 맴돌며 피했다.
봉천남의 가족이나 자제들 그리고 마부나 하인들은 이미 하나같이 후전으로
뺑소니를 쳤다. 다만 그에게 혈도를 짚힌 사람들만 얼굴을 일그린 채 한켠에 서
있었다.
호비는 봉천남이 도망 칠 것을 대비하여 불붙은 장작을 칼로 막으며 시종 별
당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날아오르던 불붙은 나무가 점차 줄어들었고, 땅바닥에 떨어
진 장작들도 거의 다 꺼져갔다.
원자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 오라버니, 오늘 어렵게나마 흥을 돋구었으니, 내친 김에 우리 누가 강한
지 승부를 한번 내는 것이 어때요?]
이윽고 연편을 휘둘러 호비의 가슴팍을 후려치는 척하더니 방향을 바꾸어 오
른쪽 옆구리를 찍어왔다. 호비는 칼을 들어 첫번째 초식를 밀어낸 뒤 괴이하게
변하는 두번째 초식을 보자 재빨리 바닥에 몸을 굴려 겨우 피했다.
원자의는 웃으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나는 그대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않을께요.]
그 한마디에 호비는 오기가 생겼다.
(설마하니 내가 너에게 질 성싶으냐?)
호비는 도법에 더욱 힘을 주어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대전에
는 오직 나무토막이 하나만 불타고 있었다. 원자의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편법(鞭法)은 초식이 기이하니 그대는 조심하도록 하세요!]
별안간 천둥번개가 치듯 우르릉 쾅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연편이 어
떻게 해서 이렇게 괴이한 소리를 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호비는 부르짖었다.
[훌륭하군!]
호비는 자신의 문호를 지키며 그녀의 편법을 간파하고 공격을 취할 생각이었
다. 순간 타닥! 하는 소리가 나면서 대전 한가운데 타고 있던 나무가 터지면서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삽시간에 대전은 칠흑같은 어둠에 휩싸였고 세찬 빗줄
기가 기왓장을 때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원자의의 채찍 소리도 빗소리에 섞여
거세게 귓전을 때렸다.
호비가 대담하다고는 하지만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자 위급하다는 것을 느끼
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어떤 생각이 전광석화같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날 불산진의 북제묘에서 봉천남이 자살을 하려고 했을때, 한 여자가 반지
를 날려 봉천남의 칼을 떨어뜨렸지. 그 여자의 신형이나 수법으로 보아 원소저
가 틀림없구나!)
그런 생각이 스치자 호비의 가슴은 더욱 싸늘해졌다.
(그녀가 나와 함께 동행한 것은 바로 나를 방해하려는데 있었구나!)
호비는 두려움이 아니라 웬지 모를 실망과 처량함에 사로잡혔다. 정신이 혼미
스러워지자 손놀림도 해이해지게 되었다. 칼이 은사연편에 말려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을 느끼고 호비는 급히 전력을 돋구어 끌어당겼다.
원자의 역시 여자였기 때문에 초식이 정묘하기는 했으나 팔힘은 호비를 당해
낼 수 없었다.
호비가 와락 잡아당기자 원자의는 손과 팔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며 즉시 칼
을 놓는 동시에 채찍으로 호비의 무릎에 있는 음곡혈(陰谷穴)을 후려쳤다. 호비
는 몸을 날려 피하며 반격을 했다.
두 사람은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상대방의 무기가 일으키는 바람소리만 듣고
막을 뿐이었다. 호비는 온 정신을 모아 경계를 하면서 생각했다.
(원소저 한사람만 해도 이기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봉천남 부자가 그녀를 도
울 것이 아닌가?)
호비는 원자의와 봉천남이 함께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
했다.
호비는 칼을 휘두르며 급히 내려찍었다. 원자의는 몸을 급히 뒤로 젖혔다. 순
간 싸늘한 바람을 일으키며 칼날이 얼굴을 스칠듯 지나갔다.
원자의는 호비가 사정을 두지 않고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입을 열었
다.
[호 오라버니, 그대는 정말 성이 났나요?]
그러면서 은사연편을 가볍게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호비는 대답하지 않고 온
정신을 기울여 봉천남 부자가 있는 곳을 알아내려고 했다. 호비는 그들의 암습
을 우려하고 있었다.
원자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는군요? 정말 자신만만하네요.]
원자의는 갑자기 은사연편을 뻗쳐 그의 발목을 감으려고 했다. 이번 채찍은
기척도 없이 날아들어 호비가 몸을 솟구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부득이
호비는 칼을 땅바닥에 세워 은사연편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런데 은사연편은 칼
을 휘감아 앞으로 잡아당기는 듯 하더니 옆으로 끌어당겨 호비의 움켜잡는 힘을
해소시키는 것이 아닌가?
칼을 빼앗는 초식이 교활하고 또한 실린 기운도 교묘해서 호비는 그만 당황
했다. 무기를 놓친다면 이 낡은 사당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즉시, 호비는 앞으로 몸을 날려 그녀의 목을 움켜쥐려 했
다. 이 일초는 응조구수(鷹爪鉤手)라는 초식으로 지극히 매서운 것이었다.
그는 권경도보에 따라 이 일초를 수없이 연마했지만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
었다.
원자의는 세찬 기운이 비호처럼 자기 목에 뻗치는 것을 느꼈으나, 은사연편은
바깥쪽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연편으로 되돌려 막는다는 것은 도저히 시간
적으로 불가능했다. 원자의는 별수 없이 은사연편을 놓고 몸을 뒤로 젖혔다. 쨍
그랑 창창! 하며 칼과 채찍이 동시에 땅바닥에 떨어졌다.
호비는 응조구수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차 제 이 초인 진보연환(進步連環)
을 펼치며 공격했다. 원자의는 본능적으로 일지를 뻗어 호비의 오른팔을 찔렀
다. 하지만 칠흑같은 어둠속이라 상대방의 혈도를 똑똑히 볼 수 없었다. 원자의
는 상대의 두툼한 근육을 찔렀고 손가락이 구부러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행히 어두워서 그녀가 혈도를 똑똑히 볼 수 없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
다면 나는 그 일지에 요혈을 짚히고 말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어둠속에서 맨손으로 싸우게 되었다.
자연히 서로 수비에 치중했으며 한편으로 기회를 보아 땅바닥에 떨어진 무기
를 집어들려고 했다. 원자의는 상대방의 초식이 점점 매서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모습은 단순히 무공의 고하를 구분하는 초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갈수록 두려
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 이가 어째서 갑자기 이토록 강하게 나오는 것일까?)
그녀는 회강을 떠나온 후 적지않은 고수들을 상대해 보았지만 오늘처럼 악전
고투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신법을 일변시켜 사방을 신속하게 맴돌
며 호비가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다.
호비는 상대방이 공격하지 않자, 즉시 문호만 지키며 귀를 기울여 봉천남 부
자의 행방을 알아내어 두 사람을 먼저 쳐죽이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원자의가
맴돌며 옷자락으로 바람소리를 일으키거나 장력을 끊임없이 펼쳐내 봉천남 부자
의 기척을 들을 수가 없었다.
호비는 속으로 한가지 계책이 떠올렸다.
(그녀가 사방으로 맴돌며 지구전을 벌이고자 하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구나!)
이내 호비는 동서남북의 커다란 사상방위(四象方位)에 따라 옆으로 오락가락
하다가 갑자기 돌진하며 아무 곳이나 쉴새없이 장력을 쏟아냈다.
봉천남 부자가 맞게 된다면 죽지는 않는다 해도 중상을 입을 것이 틀림없었
다. 설령 맞지 않는다해도 그들이 장력을 피할때 위치를 알아낼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했다.
두 사람은 몸을 가까이 하고 육박전을 벌리다시피 하였는데 지금은 서로 마구
잡이로 어둠속에서 주먹을 내지르고 장력을 내쏟아 서로가 상관하지 않고 따로
따로 싸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서로 무기가 떨어져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려고
하면 즉시 달려들어 막으려 했다.
호비는 대전의 주위를 한바퀴 돌았는 데도 봉천남 부자의 종적을 발견할 수
없자 속으로 생각했다.
(어느새 후전으로 뺑소니 친 것이 아닐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은 그
쪽 편이 강하고, 내가 궁지에 몰린 형편이라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
달려든다면 충분히 나를 죽일수 있다. 틀림없이 봉천남 부자는 어둠 속에서 어
떤 함정을 파놓고 나를 유인하려고 할 것이다. 대장부라면 상황을 보며 옳고 그
름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오늘은 일단 여기를 빠져나가고 훗날을 도모
하는 것이 낫겠구나!)
이윽고 천천히 대전의 문쪽으로 다가서며 몸을 날려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별안간 휙! 하는 소리가 나면서 맹렬한 바람이 얼굴로 덮쳐왔다. 어둠 속에서도
어렴풋이 체구가 우람한 사람이 덮쳐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호비는 기뻐하며 소리쳤다.
[좋다. 오거라!]
그는 일제히 두 손을 뻗쳐냈다.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은 정확히
그 사람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이 일장은 그가 십성의 공력을 실은 것이라 봉천
남은 당장 그 자리에서 등골이 부러져 절명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손이 막 그 사람의 몸에 닿게 되었을 때 속임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손에 느껴지는 촉감은 딱딱함과 차가움 뿐이었다. 십성의 공력을 들여 쏟아낸
장력이라 거두어 들이기가 힘들었다.
순간 횟가루가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기를 덮쳐든
것은 사당의 신상이었다.
신상이 곧장 날아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원자의는 웃으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대단한 장력이군요!]
그 소리는 문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곧이어 챙그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그녀가 은사연편과 칼을 모두 낚아챈 것이었다.
호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기를 그녀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니 계속 싸워야 할 지,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지 모르겠구나.)
상대가 아무리 묘령의 낭자라고 하지만 무공이 고강하여 추호도 가볍게 볼 수
없었다. 각기 무기를 들고 싸울 때도 강약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그
녀에게 연편까지 쥐어져 있으니 맨손으로는 결코 그녀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그녀에게는 도움을 줄 사람들까지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면서 원자의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
다.
[이봐요. 남패천! 어째서 이대로 달아나는 거예요. 정말 의리가 없군요.]
빗소리 가운데 말발굽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아마도 그녀가 말을 타고 쫓아
가는 것 같았다.
호비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만두자. 그만둬!)
정말 완전한 참패를 당하고 만 것이었다. 봉천남의 가족들과 제자는 아직 멀
리 달아나지 못해 화풀이를 하려면 쫓아가서 한 두 명쯤 죽일 수도 있겠지만 죄
를 지은 괴수가 이미 도망가고 없는데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를 한다는 것은 영
웅호걸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호비는 품속에서 화접자를 꺼내 나뭇가지에 다시 불을 피우고 대전 안을 살펴
보았다. 상비신상(湘妃神像)은 머리와 팔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쌀과
짚단이 사방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
다.
호비는 이러한 격전의 흔적을 바라보며 조금전 아슬아슬했던 장면을 떠올리고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넋을 잃고 불꽃만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원소저과 봉천남은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남패천은
그녀와 같은 강력한 후원자가 있고 또한 불산진에도 따르는 사람이 많아, 나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텐데 어째서 불을 지르고 도망을 친 것일까? 그들은 그녀
와 짜고 이 사당에 매복한 셈이고 나는 오늘 그 계책에 말려든 꼴이다. 만약
그들이 일제히 협공을 했다면 나는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헌데 어째서 그
들은 우세를 차지하고도 오히려 물러난 것일까? 그러나 봉천남이 나와 대결하며
스스로 자결하려 했던 태도는 조금도 거짓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원소저가 암
암리에 돕는다는 것을 사전에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녀의 본심은
무엇일까?)
호비는 다시 원자의의 무공이 심오하고 지략이 뛰어나다는 것을 상기했다. 매
번 그녀가 기선을 제압했던 것이다.
조금전 결투를 벌일 때는 참배를 당할까봐 그녀를 악랄한 수법으로 대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자신이 부끄러워지며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마음속으로 그
녀가 귀엽게 느껴졌다.
호비는 자기 자신에게 반문했다.
(내가 그녀와 악투를 벌일 때 나는 정말로 그녀를 죽이려 했을까?)
그 자신도 뭐라고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전력을 다한 것은 틀림없지만 진정으
로 살수를 펼치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녀가 짓쳐 들어오며 장력을 뻗었을 때 나는 왜 그 무서운 천심추(穿心錐)
라는 살수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상마도(上馬刀)라는 일초를 찍어낼 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피하였는데, 그때 어째서 바로 패왕사갑(覇王 甲)이라는 일초를
펼치지 않았을까? 호비야! 호비야! 너는 그녀에게 상처를 입힐까봐 두려워 했
구나!)
그러다가 갑자기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가 채찍으로 나의 어깨쭉지를 칠 때 다시 채찍을 거두어 갔는데 그것은
일부러 양보를 한 것일까, 아니면 공교롭게 그렇게 된 것이었을까?)
호비는 그녀가 펼친 초식들을 하나하나 돌이켜보자 마음속으로 달콤한 감정이
우러났다.
(그녀는 나의 목숨을 해치려고 하지 않았어. 설마하니.......설마하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감히 그 다음을 상상할 수 없었다. 호비는 갑자기 뱃
속이 허전함을 느꼈다. 조금 전에 걷어찼던 솥을 들고 보니 솥안에는 아직 쌀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이윽고 땅바닥에 쏟아진 쌀을 몇 웅큼 줏어 흙을 씻어내고
밥을 짓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나자 솥에서 구수한 밥냄새가 풍겨 왔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생각을 했다.
(지금 그녀와 나란히 앉아 밥을 짓고 있다면 얼마나 멋진 그림이 될까? 하필
이면 봉천남같은 개자식이 뛰어들게 뭐람.)
그러나 곧 돌려서 생각했다.
(봉천남과 정면으로 부딪힌 것은 좋은 기회였다. 내가 쓸데없이 공상을 하다
가 잘못된 길로 빠져들면 안되겠지!)
호비는 경각심을 높였지만 원자의의 간드러진 웃음을 머금은 귀여운 모습이
뇌리에서 맴돌며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밥이 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바로 이때 사당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문이 가볍게 열렸다.
호비는 놀람과 기쁨에 몸을 일으키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 그녀가 돌아왔구나!)
그러나 불빛은 전혀 다른 두 사람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한 사람은 오십
세 정도의 늙은이로 얼굴이 싯누렇고 몸은 비쩍 마른편이었다. 바로 형양의 풍
엽장에서 본 적이 있는 유학진이었다. 다른 사람은 이십 세 남짓한 젊은 부인이
었다.
유학진은 한쪽 팔을 청포(靑布)로 감아서 목에다 걸치고 있는 것이 상처를 입
은 것 같았다. 젊은 부인은 다리를 절룩거리며 걷는 것으로 보아 역시 상처가
가볍지 않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비에 흠뻑 젖어 매우 낭패한 몰골을 하고 있
었다.
호비가 입을 열고 아는 체 하려고 했을 때 유학진은 그저 그를 묵뚝뚝하게 한
번 바라보곤 젊은 부인에게 말했다.
[자네는 안쪽으로 가서 살펴보게나.]
젊은 부인은 대답했다.
[네.]
그녀는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들고 후전으로 들어갔다. 유학진은 신단에 기
대어 몇 번 가뿐 숨을 몰아쉬더니 갑자기 풀썩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 표정은
사당 밖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호비는 그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
자 속으로 생각했다.
(풍엽장에 있던 사람이라면 무예를 겨루던 이 사람과 원소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나야 사람들 틈에 섞여 있었고 시골뜨기 같았으니 이 사람이 나를 알
아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무심결에 솥뚜껑을 열어보니 밥이 타는 냄새가 코를 찔
렀다. 밥이 모두 새까맣게 타버린 것이었다. 호비는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덜
탄밥을 한 주먹 움켜쥐고 입안에 넣었다. 이렇게 투박스럽게 밥먹는 꼴을 유학
진이 본다면 더욱 자기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젊은 부인이 후전에서 불이 붙은 나무 막대기를 하나 들고 걸어나오
며 유학진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무도 없어요.]
유학진은 그 말에 조금은 안심한 듯 눈을 감고 신단에 몸을 기댄 채 양신(養
神)을 했다. 그의 옷에서는 빗물이 계속 떨어져 바닥에 조그만 물줄기를 그려내
고 있었다. 그 빗물에는 피가 섞여있어 불그스레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젊은 부인 역시 지칠대로 지친 듯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행동으로 보아 부부 같았지만 남편은 나이가 많고 처는 젊
어, 나이로는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았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유학진의 무공이라면 무림에서 적수가 될만한 사람이 그리많지 않을텐데 어
째서 이토록 낭패한 모습으로 패배를 당한 것일까? 강호에는 실로 하늘 위에 하
늘이 있고, 사람 위에 사람이 있으니, 결코 소홀히 생각할 수 없구나!)
이때 은연중 멀리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유학진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허리춤에서 무기를 뽑아들었다. 바로 연자단
창(鍊子短槍)이었다.
[중평(仲萍), 자네는 어서 떠나게. 나는 여기에 남아서 그들과 결단을 내겠
네.]
그는 품속에서 한 자 길이나 되는 물건을 꺼내 젊은 부인의 손에 쥐어주며 나
직이 말했다.
[자네가 이것을 갖다드리게.]
젊은 부인은 눈시울를 붉히며 말했다.
[아니예요. 죽더라도 함께 죽겠어요.]
유학진은 노해 말했다.
[우리가 천신만고 위험을 무릎쓰고 부상을 당하면서까지 싸운 것은 무엇 때문
이었는가? 만약 우리가 이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
을 것이니, 자네는 빨리 뒷문으로 도망치도록 하게. 나는 적들을 붙잡고 늘어질
테니.]
젊은 부인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떠나려 하지 않고 울먹이며 말했다.
[나으리, 그대와 내가 이렇게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전 한번도 그대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유학진은 다급한 듯 말했다.
[자네가 이 일을 해결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나를 위한 일일세.]
그리고 손을 급히 내저으며 말했다.
[빨리 가게. 빨리 가.]
호비는 그들 부부의 정이 애틋하여 좀처럼 헤어지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안스러
운 생각이 들었다.
(유학진같이 올바른 사람을 누가 괴롭히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이 일을 목격
한 이상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바로 이때 말발굽소리가 문밖에서 멈추었다. 그 기척을 미루어 모두 세 필의
말인 것 같았다.
두 필의 말은 문앞에서 멈추고 다른 한 필은 사당의 뒷쪽으로 달려가는 것 같
았다. 유학진은 얼굴에 노기를 띠우고 입을 열었다.
[뒷문을 지키고 있으니 이젠 달아날래야 달아날 수도 없겠군.]
젊은 부인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남편을 부축해서 신단 위로 기어오르더니
신주를 모시는 다락 안으로 숨으며 애절한 표정을 띠우고 제발 못본 것같이 말
해달라고 호비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애원하는 눈길을
보내며 다락에 누런 휘장을 다시 내려뜨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대전의 문안으로 걸어들어왔다. 호비는 여전히 땅바닥에
앉아서 손으로 밥을 움켜쥐고 먹으면서 힐끔 두 사람을 곁눈질했다.
강호를 떠돌며 호비도 수많은 괴상한 사람들을 보아왔지만 지금은 그들의 모
습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눈썹이 밑으로 축 쳐진데다 세모꼴로
생긴 눈이 한쪽은 크고 한쪽은 적었다. 게다가 코는 크면서도 납작해서 콧구멍
이 하늘을 향해 벌름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추악한 얼굴은 실로 보기 드물었다.
두 사람은 호비를 한번 쳐다보더니 아랑곳하지 않고 각기 좌우로 흩어져 후전
으로 돌아가더니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돌아 나왔다.
갑자기 한 사람이 지붕 위에서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그 사람은 두 사람이 대
전과 후전을 수색할 때 뒷문을 지키다가 지붕 위로 올라가 주위를 살폈고 있었
던 모양이었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의 경신법은 정말 대단하군!)
그림자가 번득하더니 어느새 그 사람이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그 사람의 생
김새는 먼저 들어온 두 사람과 별 차이가 없었다. 첫눈에 세 사람이 친형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 사람은 몸에 걸치고 있던 기름을 먹인 비옷을 벗었다. 호비는 다시 한번
놀랐다. 세 사람은 모두 상복을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거친 배로 만든
상복의 허리춤에 새끼줄을 두르고 있었으며, 삼베로 목을 두르고 있어 얼마 전
에 부모를 잃은 사람 같이 보였다.
대전에는 오직 한 개의 나무만이 불타고 있었다. 주루주룩 비가 내리며 썰렁
한 비바람이 몰아쳐 불빛이 갑자기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곤 했다. 세 사람의 그
림자가 벽에 비치자 갑자기 커졌다 적어졌다 하는 것이 마치 귀신과 같은 음산
한 느낌을 주었다.
맨 나중에 들어온 사람이 입을 열었다.
[큰형님, 두 사람 모두 상처를 입었고 말도 타지 않았으니 멀리 달아나지는
못했을 겁니다. 이 근처에는 인가도 없는데 도대체 어디로 숨었을까요?]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 말했다.
[십중팔구 동굴이나 풀더미 속에 숨어 있겠지. 귀찮다고 생각지 말고 밖으로
나가 찾아보게. 그들은 팔과 다리를 다쳤지만 상처가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닐세.
그 늙은이는 솜씨가 대단하니 조심들 하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걸어나가는데 그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호비에게
물었다.
[어이, 소형제. 늙은이와 젊은 여자를 보지 못했는가?]
호비는 일부러 밥을 씹으면서 망연히 고개만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 큰 형
이라는 사람은 사방을 한번 살펴보더니 어지럽게 상자와 옷가지들이 널려져있
고, 신상이 박살이 난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는지 사방에 찍혀있는 발자국
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유학진 부부도 비를 맞고 사당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의 발자국
에도 흙탕물을 묻어 있었다.
호비가 힐끔 곁눈질하여 신단을 바라보자, 발자국이 신단 위까지 찍혀져 있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이곳에서 몇 사람이 싸움을 벌였습니다.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고, 늙은이, 젊은이 다 있었소이다. 그들이 싸우는 바람에 이 상비낭낭(湘
妃娘娘)까지 땅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리고 말았지요. 어떤 사람들은 도망치고,
어떤 사람들은 쫓아갔는데, 그들은 글쎄 이렇게 해놓고 그냥 떠나지 뭡니까? 아
마, 멀리 못가서 벼락을 맞고 죽을 겁니다.]
셋째 동생인 듯한 사람이 낭하로 걸어가 수많은 발자국과 수레바퀴의 흙이 아
직도 마르지 않는 것을 보고는 호비의 말이 틀림없다는 것을 믿은 듯 되돌아와
서 물었다.
[그들은 어느 쪽으로 갔는가?]
호비는 말했다.
[아마 북쪽으로 가는 것 같더군요. 소인은 탁자 밑에 숨어서 자세히 보지를
못했죠...]
셋째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그는 사오 전 정도 나갈 것 같은 조그만 은자를 호비 곁에다 던지고 말했다.
[자네에게 주지.]
호비는 연신 사의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호비는 은자를 얼른 주어 어루만지며 횡재를 한 것처럼 기쁜 표정을 띠우고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이 세 사람은 아귀같이 생긴 것이 무공도 약하지 않겠구나. 만약에 봉천남
일행을 만나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겠다.)
둘째가 입을 열었다.
[큰 형님, 셋째야! 그만 가세.]
세 사람은 비옷을 걸치더니 문을 나섰다.
호비는 여렴풋이 한 사람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기에는 분명히 무서운 간계가 숨어있을 거야. 어찌됐든 간에 그가 우리를
앞지르는 것은 막아야 할 것일세.]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만약 막지 못한다면 빨리 달려가서 전갈을 하는 것이 낫겠소이다.]
먼저 번 사람이 말했다.
[아! 우리가 하는 말을 그가 어찌 믿으려 하겠는가? 더군다나......]
세 사람은 빗속으로 걸어갔기 때문에 이후의 말은 빗소리에 파묻혀 더이상 들
을 수 없었다.
호비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떤 무슨 간계인지 모르겠구나. 또 누구에게 알려준다는 이야기지 ?)
이때 다락 안에서 바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젊은 부인이 유학진을 부축해
서 신단 밑으로 내려왔다.
전에 풍엽장에서 원자의와 무공을 겨룰 때는 이 유학진의 솜씨가 매우 민첩했
는데 지금은 나지막한 신단 하나 내려오는 데도 혹시나 떨어질까봐 부들부들 떨
고 있어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이 이토록 무거운 상처를 입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구나. 세 명의 악
귀같은 자들이 손을 맞잡고 공격을 한다면 정말 대적하기 어려울 것이다.)
유학진은 신단을 내려오더니 호비에게 절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도령, 목숨을 구해준 큰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호비는 재빨리 답례를 했다. 호비는 자기의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여전
히 시골 농사꾼처럼 행동하며 웃었다.
[그 세 녀석들은 정말 무지막지한 흉신악살(凶神惡煞) 같았습니다. 입을 벌리
자마자, 이 녀석, 저 녀석하여 저는 정말로 말해 주고 싶지가 않았습죠.]
유학진은 말했다.
[나의 성은 유씨이고 이름은 학진일세. 그리고 이 여자는 내 안사람인데, 도
령은 성씨가 어떻게 되는가?]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이 나에게 진짜 이름을 말한 이상 나도 당신을 속일 수는 없지. 그러나
나의 이름은 시골 농사꾼같지 않으니 아마도 조금은 바꾸어야 겠군!)
이윽고 호비는 말했다.
[나의 성은 호씨인데 성명은 호아대(胡阿大)라고 하지요.]
호비는 부모가 자기 한 사람만을 낳았으니 스스로 아대(阿大:맞아들)라고 칭
한다고 하더라도 거짓말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학진은 말했다.
[도령의 마음씨가 좋으니 장래에는 틀림없이 무궁한 복을 받게 될 것이
며......]
유학진은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며 고통을 참기가 어려
운지 이빨을 깨물었다.
젊은 부인은 급히 물었다.
[나으리, 어떻게 된 거예요?]
유학진은 고개를 흔들어 보이며 신단에 몸을 의지한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
다.
호비는 속으로 그들 부부가 분명히 무슨 할 말이 있을 것이고, 자기가 옆에
있으면 거북하리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열었다.
[유나으리, 저는 뒤에 가서 자지요.]
호비는 나뭇개비에 불을 붙여들고 후전으로 갔다.
호비는 신단 위에 깔려 있는 짚더미를 바라보며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얼
마 전까지만 해도 원자의가 이 짚단 위에서 자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멀리 떠
나가 버리고 황량한 산중의 처량함만 남아 사당은 적적하고 썰렁하기만 했다.
언제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을런지 알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들고 있던 나무에서 불똥이 튀는 바람에
정신이 들어 새삼스러운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권경도보를 그녀가 훔쳐갔으니 어쩐다? 지금도 겨우 그녀와 막상막하인데 그
녀가 권경도보를 보게 된다면 나의 모든 초식은 그녀가 훤히 알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격에 나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지 않겠는가?)
호비는 가슴 가득히 넘쳐흐르던 달콤한 생각이 대뜸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호
비는 불타던 나무개비를 팽개치고 맥없이 짚더미 위에 몸을 던졌다. 문득 자기
등밑에 푹신한 커다란 물체가 있는 것을 느꼈다. 자기의 보따리는 이렇게 크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것을 집어보니 자기의 보따리였다. 원래 그는 보따리
를 배개로 삼고 있다가 봉천남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뛰쳐나가며 보따리를 건드
리지 않았다. 그런데 보따리가 커져있고 또한 자기 허리춤에 깔려있는 것이 아
닌가?
호비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유학진 부부와 그들 삼형제가 모두 이 후전으로 왔다 갔었는데 그렇다면 그
들이 나의 보따리를 건드린 것일까?)
이윽고 불씨가 남은 나뭇개비를 다시 흔들어 불을 붙이고 보따리를 펼쳐 보았
다. 거기에는 겉옷과 속옷, 바지, 버선과 신발이 한켤레가 곱게 개어져 있었
다. 이 옷과 신발, 버선은 본래 그의 것이었다. 원자의에게 떠밀려 진흙창에 빠
져 몸을 씻을 때 원자의가 가져간 그 옷이었다. 그러나 지금 깨끗하게 빨아져
있었으며 더구나 앞섶자락에 난 두 개의 구멍도 말끔히 기워져 있는 것이 아닌
가?
옷을 뒤적거리다 보니 권경도보도 바로 그 아랫쪽에 있었다. 그 도보옆에는
세 치 길이나 되는 벽옥(碧玉)으로 된 봉황이 놓여져 있었다.
이 옥봉황은 매우 정교하여 무늬가 세밀하였고, 수정과 같이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호비가 손을 가볍게 갖다 대자 은은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호비는 멍하니 옥봉황을 바라보다가 보따리를 다시 챙기고 옥봉황을 손에 꼭
쥐고 짚더미 위에 누웠다. 갑자기 하나의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나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왜 봉천남을 구하려고 나와 결사적으로 맞
선 것일까? 만약 나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다면, 옥봉황과 깨끗하게 빨아 말끔히
기워놓은 이 옷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호비는 어둠속에서 눈망울을 커다랗게 뜬 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강호풍파악(江湖風波惡)
갑자기 입구쪽에 불빛이 어른거리더니 유학진의 손에 불타는 나무개비를 들고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후전으로 들어 오면서 말했다.
[여기서 잠시 눈을 붙입시다.]
그러면서 곧장 신단 쪽으로 다가가더니 방금전 원자의가 누웠던 짚더미에 누
우려는 듯 신단 위로 오르려했다.
호비는 아직 소년의 풋풋한 마음이라 그 모습을 보고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유나으리, 몸이 불편하셔서 올라가기가 거북할테니 밑에서 주무시는 것이 훨
씬 편할 거외다. 내 자리를 양보해 드리지요.]
호비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보따리를 들고 신단 위로 올라가 짚더미 위에 몸
을 뉘였다. 유학진은 사의를 표했다.
[도령은 정말 마음이 착하시구려.]
호비가 짚더미에 몸을 눕히자 은은한 향기가 코에 와닿는 드시 느껴졌다. 그
것이 자신의 상상때문인지 아니면 원자의의 체취가 남은 것인지 분간할 수는 없
었다. 호비는 달콤한 기분을 느꼈지만 웬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한구석에 남
아있었다. 그는 품안에 있는 옥봉황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상념이 머리를 맴돌고 있을 때 갑자기 유학진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
다.
[중평, 저 도령은 정말 사람이 좋구려. 우리 부부는 그에게 톡톡히 보답을 해
야 할 것이네.]
[그래요. 그가 우리를 감싸주지 않았다면 우리 두 사람은 이 사당에 시체가
되어 누워있을 거예요.]
유학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금 전에 나는 정말 발각되는 줄 알았소. 종씨 삼형제가 만약 저 도령을 못
살게 굴었다면 난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구할 작정이었소.]
[그야 당연한 말이지요. 다른 사람이 의협심으로 우리를 대해주는데 우리들도
당연히 의협심으로서 보답을 해야지요. 저 도령은 무공은 모른듯 하나 위인됨은
강호의 호걸보다 더 나은 것 같네요.]
유학진은 나직이 말했다.
[소리를 좀 낮추게. 저 도령의 곤한 잠을 깨우지 않도록 말일세......]
그리고 유학진은 나직이 호비를 몇 번 불러 보았다.
[도령, 도령.]
호비는 잠이 들지 않았으나 그들이 자기를 입이 달도록 칭찬하고 있는데 자기
가 깨어서 옆에서 듣고 있었다면 쑥스러울 것 같아 일부러 깊이 잠든 척 하고
있었다.
중평이 나직이 말했다.
[잠이 잠들었나 봐요.]
유학진은 음! 하더니 잠시 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중평, 방금 전 당신에게 혼자 도망치라고 했는데 어째서 가지 않았소?]
그의 말투는 그녀를 몹시 책망하는 듯 했지만 정감이 담겨있는 말투였다.
중평은 차분히 말했다.
[아, 그대의 상처가 이토록 깊은데, 내 어찌 그대를 혼자 내버려두고 떠날 수
있겠어요?]
유학진은 다소곳이 물었다.
[나는 나의 늙은 할멈이 죽은 후 한평생을 외롭게 지내리리라 생각했었는데
그대가 이토록 보살펴주는데 내 어찌 그대와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겠소.
그러나 당신도 알다시피 이 편지가 얼마나 중대하오? 만약에 그걸 금면불 묘대
협에게 직접 전달해주지 못한다면 어질고 의리깊은 수많은 인사들이 비명횡사
할 지도 모르는 일이라오......]
호비는 금면불 묘대협이라는 여섯 자를 듣는 순간 흠칫 놀라서 하마터면 아!
하고 소리를 지를뻔 했다.
호비는 묘인봉과 자기 부친이 생전에 커다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강호의 소문에 의하면 자기의 부친은 바로 묘인봉의 손에서 죽었다는 소리
도 있었다. 하지만 자기를 어릴적부터 돌봐주었던 평사숙(平四叔)은 언제나 그
일은 전혀 그런것이 아니라고 했으며 훗날 네가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말해 준
다고 했었다.
호비는 예전에 상가보에서 묘인봉을 한번 만나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늠
름한 위풍을 보고 어린 마음에도 그를 흠모하는 마음이 일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인물 중에서 진정으로 존경하는 사람은 오직 조반산과 묘인
봉, 두 사람 밖에 없었다.
조반산은 그와 인연이 닿아 의형제를 맺게 되었으나, 묘인봉과는 한마디의 말
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묘인봉 역시 호비에게 눈길 한 번 던지지 않았다. 그런
데도 매번 떠올릴 때마다 사람됨이 마땅히 그래야만 영웅호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평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조용히 해요. 이 일은 매우 기밀을 요하는 일이니 사람이 없는 곳이라 하더
라도 더 말해서는 아니될 거예요.]
유학진은 말했다.
[알겠소. 우리들이 이렇게 쫓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의 사리사욕 때문이
아니라, 오직 수많은 의사(義士)들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겠소? 그러니 하늘인들
어찌 우리를 도와주지 않겠소.]
이 몇 마디의 말은 매우 의연하여 호비는 속으로 탄복했다.
(이것은 협의를 위한 일이니 묘인봉이 나에게 은호를 베풀었던 원한이 있든
간에 나는 반드시 유학진을 도와 이 편지가 묘대협에게 전해지도록 해야 할 것
이다.)
두 부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호비는 한참 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결에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어렴풋이
울려왔다. 세 필의 말이 오는 기척으로 보아 종씨 형제가 되돌아 오는 모양이었
다.
호비는 놀라서 생각했다.
(저들이 다시 이 사당으로 들어온다면 이번에는 정말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사당 밖으로 미리 나가서 쫓아보내자. 설사 내가 막지 못한다 하더라도 유
씨 부부가 그 사이에 빠져나가서 그 중요한 서찰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해야겠
다.)
호비는 즉시 보따리를 등에 짊어지고 살그머니 신단을 내려와 사당 문을 나섰
다.
비는 멈추어 있었고 땅에는 물이 한 자나 고여 있었다. 호비는 물구덩이를 무
릅쓰고 걸음을 재빨리 옮겨 달려갔다. 삽시간에 어둠속에서 세 필의 말이 줄지
어 달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길 한복판에 서서 양팔을 벌리고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 산은 내가 개발한 것이고, 이 나무는 내가 가꾼 것이외다. 여기를 지나가
고 싶으면 통행세를 내시오.]
앞장을 섰던 종노삼(鍾老三)은 아연 실소하더니 호통을 내질렀다.
[어디서 굴러먹던 좀 도적이냐!]
그는 즉시 말고삐를 당기며 호비의 몸을 덮쳐 들었다. 호비는 왼손을 벼락같
이 뻗쳐 말고삐를 잡았다. 말이 달려오는 기세는 적어도 수백 근의 힘이 실려있
었다. 하지만 호비에게 고삐를 잡히자 대뜸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호비는 곧이어 차력타력(借力打力)의 재간을 펼쳐 말이 뒤로 물러서는 기세를
빌어 한 번 밀고 뒤집자 그 거대한 말은 땅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종노삼은 매우 기민한 사람이라 재빨리 몸을 날려 내려섰다. 종씨 삼형제는
모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노대(鍾老大)와 종노이(鍾老二)는 말에서 내리는 동시에 각기 다른 괴상한
무기를 저마다 꺼내들고 있었다.
천지는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동틀 무렵이었으나 하늘엔 온통 먹구름으로 뒤
덮여 있어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세 사람의 수중에 있는 무기가 어떤
무기인지 똑똑히 볼 수 없었다.
이윽고 한 사람이 거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악북(鄂北)의 종씨 형제가 귀하의 땅은 통과하면서 미처 찾아뵙지 못하고 인
사드리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겠소. 실례하지만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그들 세 사람은 호비의 음성이 아직도 애띤 것을 듣고 그의 나이가 많지 않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일장을 뻗어 준마를 땅에 쓰러뜨리는 재간
이 실로 엄청난 것이라 예사롭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큰 형 종조영이 나서서 이름을 밝혔고, 그의 말투는 무척 예의를 차리고 있었
다. 호비는 본래 장난기가 많고 남을 골탕먹이기를 좋아했지만, 성격은 결코 경
박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방이 깍듯한 말로 대하자 정중히 입을 열었
다.
[불초는 성이 호씨인데 세 분의 대호(大號)를 아직 가르침 받지 못했구려.]
종조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종씨 삼웅(鍾氏三雄)은 천하에 널리 알려져 무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너는 <악북의 종씨형제)라는 말을 듣고도 명호를 묻다니 견식이
짧은 탓이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종조영은 대답했다.
[불초의 이름은 조영이라 하는데 이 사람은 우리 둘째 조문, 셋째인 조능이라
한다오. 우리 세 형제는 급한 볼 일이 있으니 호형께서는 길을 비켜주시구려.
호형이 이곳에 산림을 개발하셨다면 우리들은 돌아올 때 반드시 찾아뵙고 사의
를 표하겠소.]
그러면서 종조영은 두 손을 마주잡아 보였다. 강호에서 명성을 떨친 그와 같
은 인물이 후배에게 이토록 겸손하고 깍듯이 말을 한다는 것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물론 호비의 고강한 무공을 목격한 것도 있겠지만 본래는 어린 나이에 이런
짓을 혼자서 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만약 옆에 스승이나 친구들
이 도사리고 있다면 더욱더 일이 꼬이고 지체될 것 같아 정중히 대했던 것이다.
호비는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종노사께서는 지나치게 겸손하시군요. 혹시 세 분께서는 유학진 부부를 찾는
것이 아니오까?]
날이 점차로 밝아왔다. 종씨 삼형제은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조금전 상비묘
에서 본 그 시골뜨기 젊은이인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삼형제는 서로 쳐다보며 똑같이 생각했다.
(우리가 완전히 당했군. 이 녀석은 본래 유학진 부부와 한 패거리였구나!)
희뿌옇게 밝아오는 새벽빛 아래 호비는 종씨 삼형제의 손에 들린 괴상하게 생
긴 무기를 볼 수 있었다.
종조영의 손에는 한 자 정도의 길이가 되는 철령패(鐵靈牌)를 들고 있었으며
거기에는 어렴풋이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둘째인 종조문은 곡상봉(哭
喪棒)을 들고 있었다. 셋째 종조능의 손에 들린 무기는 더욱더 이상야릇하여 마
치 죽은 사람의 영패 위에 꽂아놓는 초혼번(招魂幡)같았다. 더구나 새벽 바람
에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은 말할 수 없이 괴이했다. 세 사람은 용모가 추악할
뿐만 아니라 옷차림도 괴이하였고, 게다가 세 가지의 흉칙하게 생긴 무기를 들
고 있어 싸우기도 전에 상대방을 주눅이 들게 만들고 있었다.
호비는 괴상하게 생긴 세 가지 무기를 모르기 때문에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경계했다.
종조영이 입을 열고 물었다.
[귀하는 유학진 노사와 어떻게 되는 사이요?]
호비는 대답했다.
[불초는 오늘 유노사와 두번째로 만났으며 아무런 관계도 없소이다. 다만 세
분이 너무나 사람을 핍박하기에 내 스스로 나서서 그 분의 사정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 뿐이외다. 흔히들 손을 놓을 때는 놓아야 하고 사람을 용서해야 할 때
는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소이다.
유노사 부부는 이미 중상을 입었으니 세 분이 조금 양보를 해주시는 것이 어
떨런지요?]
종조문은 속으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다가는 유학진이 이 기회를 빌어 도망
을 치지 않을까 초조하게 생각하며 즉시 큰형에게 눈짓을 해보이고 천천히 호비
의 옆을 돌아가려 했다.
호비는 양팔을 벌리고 입을 열었다.
[세 분이 유노사와 어떤 원한이 있는지 불초로서는 전혀 사정을 모르오이다.
그러나 유노사는 중요한 볼일이 있는 모양이니 그가 일을 마친 이후에 다시 그
를 찾아 앙갚음을 하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그때는 불초도 외람되이 폐를 끼치
지 않을 것이외다.]
종조문은 노해 말했다.
[우리들은 지금 그가 이번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것이외다. 당신은 도
대체 길을 비키겠소? 못비키겠소?]
호비는 유학진 부부가 주고 받던 말을 떠올렸다.
그 서찰은 의리깊은 수많은 인사들의 목숨과 관계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씨 형제가 이렇게 흉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나쁜 짓을 많
이 한 것 같았다. 손을 쓰지 않고는 좋게 일이 해결되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생
각이 들었다. 호비는 껄껄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하하, 길을 비키는 것은 어렵지 않소. 다만 통행료로 은자 삼백 냥을 내놓
아야 할 것이오.]
종조문은 대노하여 곡상봉을 흔들며 앞으로 뛰쳐나오려 했다.
종조영이 왼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둘째, 잠깐만!]
종조영은 품속에서 원보(元寶) 네 개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이거면 은자 삼백 냥은 족히 될 것이오. 가져 가시도록 하시오.]
종조문은 부르짖었다.
[형님, 지금 뭐하는 겁니까?]
종조문의 생각은 종씨 삼웅이라면 형초(荊楚) 땅을 주름잡고 있는데 어찌 보
잘 것 없는 후배에게 이토록 약하게 보이느냐는 말이었다. 그러나 종조영은 사
태가 급박한 만큼 우선 유학진을 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에는 완급(緩急)이 있고, 경중(輕重)이 있는 것이다.
물론 호비와 같은 무명의 젊은이를 상대로 세 형제가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대사를 그르치는 것이
라 호비가 통행료를 내놓으라고 하자 삼형제는 서슴없이 원보를 꺼내준 것이었
다.
이와 같은 행동은 호비로서는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호비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 뿐 받지 않고 입을 열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종노사께서 그 원보가 삼백 냥이 넘는다고 했는데,
하지만 이 후배가 정한 가격은 한 분에 은자 백냥 씩이고 세 분이니 모두 삼백
냥이외다. 이 후배가 더 많이 가져간다면 너무나 불공평한 일이 아니겠소이까?
그러니 이렇게 하지요. 우리들은 함께 고을로 내려가 금은방을 찾아가 정확하게
저울에 달아보도록 하지요. 이 후배는 삼백 냥만 가져가면 되는 것이지요. 무릇
장사를 하는 사람이란 한 푼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것이외다.]
종씨 삼웅은 그의 말을 들을수록 밑으로 쳐져 있던 눈썹을 점점 치켜 올렸다.
종조영은 원보를 품속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
[둘째, 셋째, 자네들 먼저가게......]
그리고 나서 호비를 향해 부르짖었다.
[무기를 뽑도록 하시오. 불초가 노제의 고명한 초식을 가르침 받도록 하겠소
이다.]
호비는 그의 신형이 견고하고 품세가 여유있는 것을 보고 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호비는 자기의 칼을 원자의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아무래도 맨손으로
세 사람을 상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원자의를 떠올리자 야릇한 달콤함이 가슴속에 북받쳐 올랐다. 그러나
곧 입술을 깨물며 원자의가 자기의 무기를 가져가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위험한
경지에 몰리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호비는 종조문과 종조능 형제가 옆을 지나치려 하자 어떻게 저지할까 생각했
다.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벼락같이 두 걸음 옆으로 내딛으며 주먹으로 종
조영이 타고 있는 노란 말의 콧잔등을 내질렀다.
이 권법은 중수법(重手法)을 사용한 것이었다. 바로 호가권보에 실려 있는 권
법 중에서 최고로 무서운 살수였다. 노란 말은 즉시 뇌골이 깨지면서 맥없이 땅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죽어갔다.
이와 같은 기선을 제압하는 행동에 종씨 삼웅은 모두 당황했다. 호비는 그 기
세를 빌어 노란 말의 안장을 움켜잡고 살짝 힘을 가하자 말의 배에 두른 가죽끈
이 끊어졌다. 호비는 말안장을 집어들고 가슴을 막으며 양손에 말 등자를 하나
씩 움켜잡고 말했다.
[죄송하게 되었소이다. 불초는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부득이 말안장을
빌려서 사용할 수 밖에 없었소이다.]
호비는 곧장 왼손에 잡고 있던 등자를 휘둘러 종조문의 안면을 공격하며, 오
른손 등자로는 종조문 오른쪽 옆구리를 후려쳤다. 이와 같이 양손으로 등자를
뻗쳐내자 두 사람의 앞길을 막을 수가 있었다. 종씨 삼웅은 놀람과 분노에 얽히
게 되었다.
삼형제는 모두 판관필을 사용했었으나 팔 년 전 묘인봉에게 무참히 패한 것을
한평생 치욕으로 느끼고 그때부터 판관필을 꺽어버리고 각자 괴상하게 생긴 무
기를 가지고 연마했다. 팔년 동안 고된 공력을 쌓아 무공이 크게 증진되어 이번
에야말로 묘인봉과 다시 자웅을 겨룰 수 있으리라는 신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시골 벽촌에서 무명의 젊은이에게 굴욕을 당한 것이었다.
종조영이 큰소리로 외치자 종조문과 종조능은 일제히 휘파람 소리로 대답했
다. 그 휘파람 소리에는 몹시 음산한 분위기가 서려있어 호비는 흠칫 놀랐다.
세 사람은 각기 철령패, 곡상봉, 초혼번을 쳐들고 삼면에서 호비를 공격했다.
호비는 즉시 말안장을 방패로 삼아 양손으로 등자를 휘둘렀다. 그 모습은 마치
한 쌍의 유성추(流星鎚)를 쓰는 듯, 공수(功守)가 출중했다.
호비는 권각법과 도법에는 정통했지만 원자의처럼 각 문파의 무공에 정통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 유성추를 쓰는 무공은 한번도 익힌 적이 없었다. 다
만 임기응변의 재치와 무학에 대한 조예가 남달리 뛰어나기 때문에 간신히 적을
막아낼 수 있었다.
옛말에 한 가지에 통하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무학이 고강한 인사
는 설사 대나무나 나무토막을 하나 들었다 하더라도 이를 사용하여 적을 제압하
고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었다.
종씨 삼웅 역시 일류 고수이고 그들의 공력은 호비보다 심오한 편이었다. 다
행히 그들은 호비의 세력을 초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호비는 삼 형제
와 가까스로 이삼십 초를 겨루고도 패하지 않았다. 종씨 삼웅은 역시 견문이 넓
었다. 그들은 호비가 말등자를 유성추처럼 사용하자 즉시 그의 무공 가수(家手)
를 판별해 보려고 했다.
호비의 오른손에 들려진 등자가 옆으로 공격해 오는 것을 보자 이 초식은 산
동 청주(淸州)의 장(長)씨 집안의 유성추법 중 백홍관일(白虹貫日)이라는 일초
라고 판단하며, 왼손에 있는 등자는 반드시 그 기세를 따라 옆으로 공격해오리
라 생각했다.
하지만 호비는 종조문이 곡상봉을 휘두르며 머리에 빈틈을 드러내는 것을 보
고 즉시 말등자를 떨치며 머리를 내리누르 듯 공격했다.
순간 종씨 삼형제는 모두 어리둥절했다.
(아니, 이건 어떤 문파의 수법이지 ?)
호비는 종조문이 곡상봉을 들고 막으려 하자 오른손의 등자를 곧장 종조능에
게로 쓸어쳐 갔다.
삼형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했다.
(그렇구나. 이 녀석은 원래 섬서연주(陝西延州) 도십추( 十鎚)의 문하였구
나. 지금 네가 양미토기(揚眉吐氣)라는 앞의 반초를 펼쳤으니 이어지는 나머지
반초는 틀림없이 두 등자를 한꺼번에 가슴으로 공격해 올 것이다.)
세 사람은 호비가 말을 후려치는 힘이 지극히 웅후한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두 개의 등자가 가슴으로 공격해 들어온다면 방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
었다. 즉시 세 사람은 각기 무기를 가슴앞에 세우고 진력을 끌어모아 그의 일격
을 힘으로 맞받으려고 했다.
사실 호비는 양미토기라는 것이 어떤 초식인지 알지도 못했다. 세 사람이 가
슴을 보호하자 두 개의 등자를 벼락같이 아랫쪽으로 휘둘러 하반신을 공격했다.
세 사람은 깜짝 놀라 생각했다.
(어째서 번천복지(飜天覆地)라는 초식을 펼치는 것일까?)
종조능은 상대의 공격을 막으며 외쳤다.
[이것 보시오! 태원부(太原俯) 유성간월(流星 月) 동노사(童老師)와는 어떻
게 되는 사이요?]
태원부의 동노사 동회도(童懷道)는 유성쌍추(流星雙鎚)를 즐겨 사용했기 때
문에 사람들은 그를 유성간월이라 했고 종씨 삼형제와는 막역한 사이였다. 번천
복지라는 초식은 그의 문중에서만 전해지는 절기였으며, 유성추를 쓰는 다른
문파나 가문에서는 전혀 사용할 줄 몰랐다.
되는대로 휘두르는 호비의 일초가 어렴풋하게 그것과 비슷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질문을 한 것이었다. 호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동노사는 나의 사제이요.]
그리고 두 등자를 휘둘러 내밀었다. 종조능은 퉤! 하고 침을 뱉으며 욕을 했
다.
[정말 곱게 봐주니까, 이 녀석이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세 사람은 그의 말등자를 휘두르는 초식이 신출귀몰하자 그의 무학의 사승(師
承) 을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들은 수십 년 동안 천하를 두루 돌아다녀 유성추라면 어느 가문이나 문
파를 막론하고 모두다 보았는데 이 녀석의 것은 정말 요상하구나.)
원래 무공을 겨룰 때 상대방의 무공수법을 식별해 내면 어느 싸움에서나 기선
을 제압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종씨 삼웅은 몇 번씩 호비의 무공수법을 가
늠해 보았는데 번번히 틀리자 마음은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대응하는 초식도 별
쓸모가 없어 졌다.
이것은 모두 호비가 신권(神券)으로 말을 때려눕혀 싸움 초반부터 세 사람의
심기를 흐트러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호비의 가문이나
문파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직 본래의 실력대로 각기 절초를 전개
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호비는 벌써 패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십여 초가 지나자 종씨 삼웅은 비로소 호비의 등자를 휘두르는 초식이 기이
하고 독특하기는 했지만 위력은 별것이 아니는 것을 알아 차렸다. 세 사람은 팔
년 동안 피나는 노력으로 연마한 철령패와 곡상봉, 초혼번 세 가지 무기의 기이
한 초식을 끊임없이 뻗쳐냈다.
종조영의 철령패는 전적으로 강공을 구사하며 호비의 공격을 그대로 맞받아치
는 수법을 썼다. 호비는 그제서야 그 철령패에 쓰여진 것이 일견생재(一見生財)
라는 네 글자임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종조능의 초혼번은 전부 유공(柔功)이었다. 그의 초혼번은 천으로 만든 것 같
지도 않았고, 가죽으로 만든 것 같지도 않았다. 호비가 말 등자로 힘껏 때려 보
았지만 초혼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초혼번이 몸을 스치기만 해도 오싹 할 것
같았다.
셋째 종조문의 곡상봉은 강하면서도 유연했고, 대채로 봉(棒)의 수법을 따르
고 있었지만 연편(軟鞭)의 수법도 섞여 있었다.
세 형제의 무기는 각기 달랐지만 무기의 자루는 여전히 판관필을 사용하고 있
었고 세 병기는 굳건함과 부드러움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상보상성(相補相成)하
고 있었다.
호비는 암암리에 보통 실력이 아니라고 여기며 더 싸웠다가는 반드시 패할 것
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갑자기 두 손을 안으로 끌어모아 말안장에 갖다 대고 바
깥쪽으로 급히 밀어냈다. 순간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말안장은 쏜살같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종씨 삼웅은 급히 몸을 날려 피하며 그가 어떤 초식을 펼칠 것인가 궁금하게
생각했다.
호비는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불초는 본래 좋은 뜻에서 싸움을 말리려고 했을 뿐, 세 분과 손을 쓸 의사는
결코 없었소이다. 때문에 무기를 지니지 않고 맨손으로 상대한 것이오. 내가 이
말안장으로 어찌 당금의 세 분 영웅호걸과 싸울 수 있겠소이까? 오늘은 내가 패
배를 인정하겠소.]
그러면서 길가로 몸을 날려 길을 양보해 주었다.
종씨 삼웅은 호비가 비아냥거리는 말로써 자기들을 자극하려 한다는 것을 알
고 있었지만 중요한 볼일이 있는 몸이기 때문에 더이상 그와 다툼을 벌이고 싶
지 않았다. 종조능이 입을 열었다.
[좋아. 다음에 자네가 무기를 지니고 있을 때 우리들은 다시 자네의 절초를
가르침 받도록 하지.]
그러면서 바삐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호비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다음이라...... 정말 핑계가 좋군. 알고보니 종씨 삼형제도 그저 그렇고 그
런 인물이었군.]
종조문은 노해 물었다.
[뭐가 그렇고 그렇다는 것인가? 자네 스스로 무기를 지니지 않은 것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겠다는 것인가?]
호비는 빙긋이 웃었다.
[나에게 좋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 아무래도 당신네들이 감히 나와 겨루
어 볼 용기가 없을 것 같아 걱정이 되는구려.]
종씨 삼웅은 그가 두번 세번 자극적인 말을 하자 일제히 말했다.
[그럼 자네가 조건을 말하게!]
종조영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리 두 아우는 이곳에서 가르침을 받겠지만 불초는 이만 실례하겠네.]
그러면서 몸을 솟구쳐 그 자리를 뜨려고 했다.
호비는 덩달아 몸을 솟구치며 허공에서 두 팔로 가로막았다. 종조영은 호비의
수법이 이토록 신속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터라 철령패를 흔들며 후려치려고
들었다.
그러나 호비의 권각법은 그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피하지 않았다. 호비는
땅바닥에 내려서기 전에 즉시 오른손을 회전시키면서 종조영의 오른 손목을 움
켜잡고 비틀었다. 그 바람에 종조영은 들고 있던 철령패를 하마터면 빼앗길 뻔
했다.
종조문과 종조능은 깜짝 놀라 좌우 양쪽에서 협공을 하여 큰형을 도왔다. 호
비는 껄껄 웃으며 일 장 정도 뒤로 물러서서 옆에 있는 소나무 가지를 꺽어들고
입을 열었다.
[세 분은 감히 나의 도법을 시험해 보겠다는 것이오?]
종조영은 철령패를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호비가 움켜잡았던 손목이 은연중 아
파오자 속으로 약간은 의구심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 젊은이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내가 혼자서 유학진을 쫓고 두 아우를 이곳
에 남겨둔다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부득이 한꺼번에 힘을 합쳐 이 녀석을 일
단 처리해야겠구나. 설사 늦어진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종조문은 호비가 넉 자 길이의 나무가지를 꺽어 든 것을 보고 그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몰라 형을 바라보며 어떤 결정을 내려주기 바랬다. 종조영은 성
질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귀하께서 도법으로 겨루고 싶어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칼을 지니지 않았
구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도 기꺼이 당신을 상대했을 것이외다.]
호비는 넌즈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고 깊은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외다. 무공을 겨루되
상대방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고 단지 무공의 고하를 겨루면 될 것 아니겠소?]
종조영은 대답했다.
[좋소.]
호비는 소나무 가지의 잔가지들을 잘라 밋밋하게 만들며 말했다.
[이 소나무 가지가 바로 한 자루의 칼이니 세 분은 일제히 덤벼들도록 하시
오. 미리 약속했듯이 이 소나무 가지가 어디를 내려치든 간에 강철칼에 적중된
것으로 하겠소. 당신들은 스스로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소?]
종조영은 호비가 그토록 오만하게 나오자 화가 나서 큰소리로 말했다.
[종씨 삼웅의 신의가 높다는 것은 이미 강호에 널리 알려진 일, 그때는 자네
와 같은 소형제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네.]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매우 좋소. 자, 칼을 받으시오!]
호비는 소나무 가지를 들고 휙! 하니 일초를 펼쳐 옆으로 베어 갔다. 종조문
은 뒤에서 달려들며 곡상봉을 들어 후려쳤다. 순간 호비는 비스듬히 몸을 날려
피하면서 소나무 가지는 어느덧 종조문의 목을 베어가고 있었다. 종조능은 초혼
번의 자루를 거꾸로 들고 소나무 가지를 후려쳤고 동시에 종조영의 철령패 역시
호비에게로 들어닥치고 있었다.
호씨 집안의 도법은 귀신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변화를 지니고 있었다. 호
비가 소나무 가지를 칼로 사용하며 즉시 세사람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이리 찍
고, 저리 찍고, 이리 베고, 저리 베는 등 조그만 나무가지로 무궁한 변화를 나
타냈다.
종씨 삼웅은 싸우면 싸울수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나무가지가 결코 자
기들의 세 가지 무기와 결코 맞부딪치지 않았으며, 빈틈이 있는 곳이면 예리하
게 그곳을 뚫고 들어와 요해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소나무 가지에 격중된다 하더라도 별 지장은 없겠지만 미리 약속한 바가 있기
때문에 나뭇가지가 몸에 닿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종조능은 초조한 듯 초혼번을 마냥 휘둘러대며 맹렬히 호비의 경골(脛骨)을
치려고 들었다.
그들 삼 형제의 매 일초는 모두 짜임새가 있었다. 호비가 몸을 솟구쳐 종조능
의 일초를 피하면, 종조문의 곡상봉이 호비의 머리 위를 공격했고, 종조영의 철
령패는 맹렬하게 그의 오른쪽 옆구리를 후려치려고 했다.
하지만 호비는 몸을 솟구치는 시늉만 했을 뿐, 솟구치지 않고 오히려 종조문
의 가슴 앞을 파고들며 나무가지로 종조문의 왼쪽 어깨를 격중시켰다. 강철칼이
었다면 종조문의 왼팔은 즉시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소나무 가지의 일격은 물
론 그에게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않았지만 종조문은 안색이 변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만 둬! 그만두자.]
종조문은 곡상봉을 땅바닥에 팽개치더니 손을 내리고 뒤로 물러섰다.
순간 종조영과 종조능 형제는 흠칫 놀라면서도 철령패와 초혼번을 더욱 맹렬
히 휘두르며 살수를 펼쳐 종조문이 당한 수모를 만회하려고 했다. 그러나 몇
초가 다시 지나자 종조영의 목덜미에 소나무 가지에 한번 스쳐갔고, 종조능의
오른쪽 다리도 나무가지에 긁혀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참담한 얼굴로 서로 쳐다보더니 일제히 무기를 내팽개쳤다. 별안간
종조영이 왁! 하니 선혈을 한모금 토해냈다.
호비는 그들이 약속한 바를 지키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이 삼형제가 생김새는
험악하지만 신의를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호비는 종조영에게 상
처를 입히지 않았던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종조영이 선혈을 토해내는 것
은 노기가 끓어올라 급한 성질에 견디지 못해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오죽 노기
가 끓어올랐으면 그랬을까 생각을 하자 미안스러워 몇 마디 체면치레의 말을 하
려고 했는데 종조능이 싸늘히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귀하의 무공은 놀랍구려. 탄복했소이다. 탄복했어. 다만 젊은 나이에 올바른
길을 걷고 있지 않으니, 그 몸에 지닌 재주가 참으로 아깝구려!]
호비는 아연해졌다.
[아니! 내가 어째서 올바른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것이오?]
종조문은 노해 말했다.
[셋째, 그런 자와 무슨 할 말이 더 있는가?]
그러면서 종조영을 부축해서 말등에 태워 고삐를 잡고 떠나갔다. 그들의 기이
한 무기들은 모두 물구덩이에 버려져 있었지만 아무도 다시 집으려고 하지 않았
다.
호비는 세 사람이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윽고 쓰러져있는 말과 버려진 무기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무엇인가 모를 느낌
을 받고 한동안 묵묵히 서있다가 다시 낡은 사당으로 돌아갔다.
사당 안으로 들어가 보니 유학진 부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두
사람이 자기가 종씨 삼웅과 싸우는 기회를 틈타 멀리 떠나간 모양이라고 생각했
다.
호비는 자기가 방금 좋은 일을 한가지 했다는 생각이 들어 약간 의기양양해졌
다.
[묘인봉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 사람을 타편 천하무적수라고
말들을 하는데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군!)
호비는 묘인봉이 세상을 등진 자기 부친과는 상당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
각했다. 옛날 상가보에서 묘인봉을 만났을 때 자기의 권경도보 전반부 두 장을
그의 위세를 빌어 염기의 손에서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종종 그의 모습을 떠
올리게 되었다. 호비는 유학진 부부와 함께 묘인봉을 찾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봉천남이 도망쳤지만 그리 멀리가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원한을 갚지 못한다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도대체 누구를 쫓아가야 좋을지 일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빠져 다시 돌아왔던 길을 따라 나갔다. 조금 전 종씨
삼웅과 싸우던 곳에 이르자 땅바닥에 버려진 무기들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
았고 노란 말만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호비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내가 갔다 돌아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고...... 더구나 새벽녁이라 길가던
사람이 주어갔을 리도 만무한데...... 종씨 형제가 다시 되돌아 온 것일까?)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호비는 그 길을 따라 살
피며 나갔다. 그러자 싸우던 곳에서 십여 장 떨어진 커다란 나무줄기에 흙탕물
이 묻어있는 발자국을 하나 발견했다. 이 발자국은 땅바닥에서 일 장 석 자쯤
되는 나무줄기에 찍혀 있었다. 발자국이 찍혀있는 곳은 도로 바깥쪽이라 세심하
게 살펴보지 않았더라면 결코 발견할 수 없었다.
발자국이 진흙에 젖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얼마되지 않은 것 같았고 발자국의
조그만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여자의 발자국이었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하니 그녀란 말인가? 종씨 삼웅과 겨룰 때 그녀가 이 나무 위에서 구경
을 했었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즉시 몸을 솟구쳐 나무가지를 잡
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 과연 옆으로 뻗은 가지 위에 또 다시 나란히 찍혀진 자
그마한 흙발자국을 볼 수 있었고 그 옆에는 방금 부러뜨린 듯한 굵은 나무가지
가 하나 있었다.
호비는 곧 자기 짐작이 틀렸다고 느꼈다.
(만약 원소저라면 절대로 이 나무가지를 부러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호비는 다시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다른 가지 위에 두 개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순간 의문이 모두 사라지며 웬지 모를 실망감에 사로잡혔다.
(유학진 부부가 이곳에서 훔쳐보고 있었구나.)
한 가지의 의문이 풀리자 두번째의 의혹이 바로 꼬리를 물었다.
(그들은 분명히 중상을 입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까? 어째서 나는 그들이 나무 위로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리지를 못했을
까? 종씨 삼웅이 이미 떠났는데 그들은 왜 또 나를 부르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렇구나. 그들은 내가 무공을 모르는 줄 알았는데 내가 종씨 삼웅을 격
퇴하는 것을 보고 나를 의심한 것일게다. 아마 내가 그들에게 화를 입힐까봐 감
히 얼굴을 내밀지 못했을 것이다. 강호의 풍파가 이토록 험악하니, 어디서나 조
심을 하는 것이 선배들의 지혜가 아니었던가? 더군다나 그들은 중요한 볼일이
있는 몸인데 어찌 소홀하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자 석연치 못했던 점이 모두 풀어졌다. 두 쌍의 진흙 발
자국은 풀밭을 따라 동북쪽으로 뻗쳐가고 있었다. 호비는 호기심이 일어 그 발
자국을 쫓았다. 밤새도록 억수같은 비가 쏟아진 이후라 땅바닥은 온통 진흙탕과
두 남녀의 발자국은 선명하게 찍혀있어 수월하게 그들을 따라갈 수 있었다.
두 쌍의 발자국은 시종 길을 피해 풀더미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고 있었다.
한 시진 가량 따라가자 조그만 고을에 당도했다. 그러나 이곳은 왕래하는 사람
이 많아 더이상 그들의 발자국을 분간할 수 없었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하룻밤을 꼬박 굶었을 것이니 지금 틀림없이 식사를 하고 있을 것이
다. 혹시 그들이 요기거리나 사서 때우고 마을을 떠나갔다면 정말 찾기가 쉽지
않겠는걸.)
호비는 이윽고 고을 어귀의 잡화상점에서 도롱이와 삿갓을 사서 얼굴을 가린
채 고을에 있는 반점과 나귀나 말을 빌리는 곳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느 곳에
서도 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고을은 별로 크지 않아 눈깜짝할 사
이에 다 훑어 보았지만 허사였다.
호비는 자신도 요기를 해야겠다고 몸을 뒤로 돌리려는 순간 나지막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주머니 바늘과 실 좀 빌려주세요.]
바로 그 젊은 부인의 음성이었다. 삿갓 밑으로 곁눈질하여 바라보니 말소리는
어느 민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들 부부는 적이 뒤따를까봐 감히 반점에 머무르지를 못했구나......)
한편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들이 이와 같이 엄히 방비하는 모양을 볼 때 종씨 형제들 말고도 다른 무
서운 적들이 그들을 노리고 있는 것 같구나. 어차피 내친 걸음이니 끝까지 그들
을 보호하여 서찰이 묘대협의 수중에 들어가도록 해주자.)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않은 곳에 객점이 있었다. 호비는 방을 빌려 유학진이
머물고 있는 민가를 주시했다. 해질녘이 다 되어도 유학진은 시종 얼굴을 내밀
지 않았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유학진은 정말 매사를 꼼꼼하게 처리하는구나. 틀림없이 날이 완전히 어두워
진 이후에 출발할 것이다.)
얼마나 되었을까? 이경 쯤 되었을 때 유학진 부부는 민가에서 나와 재빨리 고
을 바깥쪽으로 나아갔다. 발걸음이 신속한 것으로 보아 상처를 입지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상처를 입은 것처럼 가장하고 있었구나. 종씨 형제만 속인 것이 아니
라 나마저도 속였구나.)
호비는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어 창문으로 뛰쳐나가 그들의 뒤를 밟았다.
유학진은 겨드랑이에 기다란 보따리 같은 것을 하나 끼고 있었는데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호비의 경신법은 유학진보다 훨씬 고명하기 때문에 살그머니 그들의 뒤를 따
르면 그들 부부가 알아차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을 따라 오륙 마장
을 나가자 외땅 조그만 집 앞에 당도했다. 유학진은 손짓을 하여 자기 부인을
풀더미 속에 숨도록 한 후 집 앞으로 몇 걸음 다가서더니 낭랑히 입을 열었다.
[금면불 묘대협은 안에 계십니까? 친구가 멀리서 찾아 왔소이다.]
집안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느 친구분이오. 이 묘인봉이 견식이 부족해 전혀 알아보지 못하겠구려. 용
서하시오.]
말소리는 결코 우렁차지 않았다. 호비가 듣기에는 은근하면서도 웬지 모를 처
량함이 서려있는 것 같았다.
유학진은 입을 열었다.
[소인의 성은 종씨라고 하오. 악북의 귀견수 종씨 형제의 명을 받고 묘대협에
게 전달할 서찰이 있어 찾아왔소이다.]
호비는 놀라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그 서찰을 종씨 형제의 것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그들이 왜 막으려고
했을까?)
묘인봉이 천천히 말했다.
[아무쪼록 들어오시구려.]
집안에서 등불이 켜지며 삐그덕! 나무문이 열렸다.
호비는 키가 매우 크고 깡마른 사람이 문틈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머
리가 거의 문 위에 닿을 정도였고, 오른손에는 촛대를 하나 들고 있었다.
유학진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올리더니 집안으로 들어갔다. 호비는 두 사람
이 집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살그머니 창문가로 다가가 몰래 안을 엿보
았다.
묘인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른 두 분께서는 왜 들어오지 않는 것이오?]
유학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에 또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인가?)
유학진는 의아해하면서 대충 얼버무렸다.
호비는 묘인봉은 밖에 두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묘인봉이 무섭기는 정말 무섭구나. 나의 발걸음 소리가 가볍기는 하지만 벌
써 모두 세 명이 온 것을 알고 있었구나.)
호비는 자신이 이곳에서 훔쳐보고 있다는 것도 묘인봉이 분명히 알고 있으리
라는 생각이 들어 흠칫 놀라며 물러나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유학진이 입을 열
었다.
[종씨 형제는 팔 년 전에 묘대협의 고명한 초식을 가르침 받 탄복해 마지 않
았지요. 지금은 다른 세 가지 무기를 가지고 절치부심하여 무공을 연마하였습
니다. 따라서 그들은 소인을 시켜 묘대협에게 미리 통보하라고 하였지요. 나중
에 겨룰때 이상한 무기 덕분에 이겼다는 말을 듣기 싫어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보따리를 풀자 쨍그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세 가지 무기가 탁
자 위에 놓여졌다.
호비는 그의 거동이 갈수록 기이하다고 생각하고 창문 틈으로 안을 살폈다.
탁자 위의 세 가지 무기는 바로 철령패와 곡상봉, 그리고 초혼번이었다. 무기는
진흙이 그대로 묻어있는 상태였다.
묘인봉은 싸늘히 코웃음치며 무기들을 한번 바라보더니 아무말도 하지 않았
다. 유학진은 품속에서 서찰을 한 통 꺼내 두 손으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묘대협, 뜯어 보십시요. 소인은 편지를 전달했으니 이만 작별을 고하겠소이
다.]
그리고는 두 손을 맞잡아 보이고 물러나려고 했다. 묘인봉은 편지를 받아들고
입을 열었다.
[잠깐 기다리시오. 내가 편지를 다 본 후에 수고스럽지만 당신께서 한마디 전
해주셔야겠소이다.]
이 편지가 틀림없이 전서(戰書)라고 생각하고 즉시 봉투를 뜯었다. 호비는 편
지를 읽는 묘인봉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는 수 년전 상가보에서 만났을 때
보다 휠씬 늙은 것 같았고 안색도 초췌했다. 묘인봉은 편지를 읽다가 두 눈썹을
곤두세우며 극도의 분노에 찬 눈빛을 쏘아냈다. 그 표정을 보자 두려운 마음이
생겨 물러서려고 했을때 묘인봉이 갑자기 두 손으로 편지를 북! 찢는 것이 아닌
가? 편지가 찢어지는 순간! 갑자기 묘인봉의 면전에 짙은 황색 연기가 풀썩 피
어오르는 동시에 묘인봉은 아이쿠! 부르짖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학진은 급히 몸을 뒤로 날려 일 장 남짓 물러섰다. 이러한 변고는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났지만 호비는 이미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처음부터 저 유학진은 편지에다가 독약을 숨겨 묘대협의 두눈을 노렸구나!)
순간 호비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이 개도적! 도망칠 생각마라!]
그러면서 몸을 날려 유학진에게 덮쳐들었다.
유학진은 무릎을 구부리고 팔굽을 내려뜨리며 허리에서 연자창( 子槍)을 뽑
아들더니 뒤로 돌며 찔러왔다.
호비는 수치와 분노에 얽혀 몸을 옆으로 기울여 피하고 손을 뻗쳐 연자창을
빼앗으려 했다. 그런데 별안간 등뒤에서 세찬 바람이 일며 강맹한 장력이 자기
등으로 뻗쳐오는 것을 느꼈다. 호비는 부득이 두 손을 되돌려 상대방의 힘을 해
소시키려고 했다. 그 장력은 극도로 화가 난 묘인봉이 뻗쳐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맞받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호비는 즉시 조반산이 전수한 태극권의 묘술(妙術)인 음양결을 전개하여 상대
방의 장력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상대방의 장력과 두 손이 부딪히자
대뜸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숨이 확 막혀 뒤뚱거리며 연거푸 세 걸음이나 물러서
야 했다.
묘인봉의 장력을 겨우 절반만 해소되었을 뿐 나머지 절반은 호비가 맞받은 셈
이었다. 호비는 부르짖었다.
[묘대협, 나는 당신을 도와 저 도적놈을 잡자는 것이외다!]
두 사람이 일장을 주고 받는 사이에 어느새 유학진은 그 틈을 타서 뺑소니쳤
다.
묘인봉은 두 눈에 수십 대의 금침을 한꺼번에 찔러오는 듯한 격렬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묘인봉은 호비와 일초를 교환하였지만 호비의 무공이 고강한
것이 강적이라는 것을 느끼며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때문에 호비가 자기를
도와 도적놈을 잡으려 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호비는 유학진 부부가 서쪽으로 도망치는 것을 보고 그들을 뒤쫓아가려고 했
을때 갑자기 큰길에서 세 사람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상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보지 않고도 종씨 삼웅
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진정한 대장부의 기개(氣槪)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묘인봉은 두 손으로 눈을 누르며 매우 고통스러운 듯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생각같아서는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또 다시 장력
을 내쏟을까봐 걱정이 되어 낭랑히 입을 열었다.
[묘대협, 나는 비록 당신의 친구는 아니지만 결코 당신에게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외다. 당신은 믿을 수 있겠소이까?]
이 몇 마디의 말은 지극히 간곡했다. 묘인봉은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호비의 말이 지극히 완곡하여 이 젊은이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실로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는 말이 있듯이 몇 마디 말에 서로 의기투합하게
된 것이었다. 묘인봉은 입을 열고 말했다.
[자네는 내 대신 문밖에 있는 간악한 자를 막아주게나!]
묘인봉은 호비의 물음에 답변도 하지 않고 그에게 대뜸 간적(奸敵)을 막으라
고 했다. 이는 바로 호비를 절친한 친구로 여긴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었다.
호비는 가슴이 뭉클했다. 이 한마디는 호기가 구름을 찌르는 듯 했다. 결코
흉금이 넓은 대영웅, 대호걸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백발이 성성하도록 오래된 친구라도 새로 사귄 사람같고, 잠깐 마차의 문을
열고 인사를 나눈 사이라도 오래된 친구같다는 말이 있듯이, 그 한마디에 호비
는 기꺼이 그를 위해서 끓는 물속이나 세차게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호비는 종씨 삼형제가 집과 아직 이십여 장쯤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즉시 촛
대를 들고 뒷부엌으로 달려가 항아리에 있는 물을 한 바가지 퍼서 묘인봉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빨리 눈을 씻으십시요.]
묘인봉은 눈이 아프기는 했으나, 여전히 냉정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정면에
있는 큰 길에서 세 사람이 달려오는 기척을 듣고 있었고, 또 다른 네 명이 집뒤
에서 지붕위로 올라가고 있다는 기척도 알고 있었다.
묘인봉은 바가지를 받아들자 내실로 들어가 침대에서 어린 딸을 안고 그제서
야 비로소 고개를 숙이고 바가지에 있는 물로 눈을 씻었다. 이 독약은 정말 극
악하기 이를데 없어 물로 독기를 씻어내자 고통은 더욱더 뼈에 스며들고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았다.
어린 딸은 잠꼬대같은 말로 묘인봉에게 말했다.
[아빠, 란이는 아빠하고 같이 놀래요..]
묘인봉은 다독거리며 말했다.
[음, 착하지 란아. 아빠가 너를 안고 있을 데니까 눈을 뜨지 말고 잘 자거
라.]
[그 늙은 늑대는 하얀 새끼양을 잡아 먹지 않았나요?]
[물론 잡아먹지 못했지. 사냥꾼이 오는 바람에 그 늙은 늑대는 그만 도망을
치고 말았단다.]
그러자 그 어린 딸은 안심한듯 한숨을 내쉬더니 작은 얼굴을 아버지의 가슴에
기댄 채 다시 잠이 들었다.
호비는 그들 부녀가 주고받는 말을 듣고 약간 어리둥절했으나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린 딸은 잠들기 전에 아버지로부터 아마 늙은 늑대가 하얀 새끼양을
잡아먹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잠결에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
었다.
이 무렵 종씨 형제는 대문에서 십여 장도 되지 않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순
간 쿵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사람이 지붕에서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호비는 대문을 걸어잠그고 탁자를 끌어당겨 문에다 받쳐 놓았다. 종씨 형제가
즉시 집안으로 달려들어와 협공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계산에서였다. 집안의
불빛이 꺼지자 감히 뛰어들지를 못했다. 묘인봉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사람을 모두 들여보내게.]
[알겠습니다.]
호비는 즉시 부싯돌을 꺼내 불을 밝히고 촛대를 탁자 위에 놓았다.
순간 대문 밖에서 종조영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악북 종조영, 조문, 조능 삼 형제가 묘대협에게 급히 전할 말이 있소이다.]
묘인봉은 싸늘히 코웃음치더니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당에 뛰어내린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칼을 들고 다른 사람은 삼절곤(三節棍)을 쥐고 있었다. 묘인
봉이 두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을 보았지만 타편천하무적수라는 위명에 눌려 감히
경솔하게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칼을 든 사람이 지붕을 향해 손짓하더니 부르짖었다.
[묘인봉의 눈이 멀었다!]
지붕의 두 사람은 와! 하고 기뻐하며 일제히 뛰어내렸다. 호비는 그들 두 사
람의 솜씨가 먼저 두 사람보다 훨씬 민첩한 것을 보고 즉시 몸을 날려 두 사람
의 등뒤로 가서 밀어대며 호통을 내질렀다.
[들어가!]
힘은 강맹하기 이를데 없어 두 사람은 감히 힘으로 맞서지 못하고 앞으로 급
히 고꾸라지듯 몇 걸음을 내딛어 문지방을 넘어 객당(客堂)으로 들어섰다.
호비는 문 바깥쪽에서 숨을 들어마셨다가 맹렬히 내뿜었다. 그러자 픽! 하며
일 장 밖의 촛불이 대뜸 꺼지고 말았다. 객당안은 다시 칠흑과 같은 어둠에 휩
싸였다. 순간 습격해 온 네 사람은 깜짝 놀라면서도 각기 무기를 쳐들고 묘인봉
을 공격했다. 어린 딸은 묘인봉의 품속에서 몸을 뒤척거리더니 물었다.
[아빠, 무슨 소리예요? 늙은 늑대가 왔나요?]
묘인봉은 나직이 말했다.
[늙은 늑대가 아니라 네 마리의 쥐새끼란다.]
순간 무기가 바람을 가르며 머리 위로 공격해오는 소리를 들은 묘인봉은 오른
손을 벼락같이 뻗쳐내면서 삼절곤의 머리쪽을 붙잡고 한 번 떨치자 그 사람은
악!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 자는 손과 팔이 시큰거리고 마비되어 삼절곤을 놓치고 말았다. 묘인봉은
이어서 일장을 휘둘러 퍽! 하는 소리가 나도록 그의 허리를 후려쳤다.
그 사람은 즉시 숨이 막혀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나머지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칼을 쓰고 있었고 한 사람은 쇠로 된 채찍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소리도
내지 않고 삼면으로 나뉘어 일제히 공격을 해왔다. 그들 세 사람은 묘인봉이 이
미 시력이 상실하여 단지 청각만으로 적을 판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공격했다. 어린 딸은 다시 중얼대듯 입을 열었다.
[아빠, 이 쥐새끼도 사람을 무나요?]
묘인봉은 다소곳이 말했다.
[쥐새끼가 몰래 숨어들어와 사람을 물려고 하지만 큰 고양이를 만나면 쥐새끼
는 별 수 없이 도망치게 된단다.]
[무슨 소리예요. 거센 바람이 부나요? 아빠, 혹시 비가 내리려고 하는 거예
요?]
묘인봉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단다. 잠시 후에는 천둥번개까지 치게 될거야.]
어린 딸은 응얼거리듯 말했다.
[천둥번개님은 나쁜 사람만 때리고 좋은 사람은 안때리죠?]
묘인봉은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대답을 했다.
[그래, 천둥번개님은 착한 애를 좋아하신단다.]
묘인봉은 한 손으로 세 자루의 무기를 막으며 입으로는 딸과 일문일답을 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세 명의 적을 전혀 마음에 두지않은 것 같았다.
세 사람은 잇따라 수십 초의 초식을 펼쳤으나 묘인봉이 오른손을 뻗쳐내서 해
소시키는 바람에 공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자 칼쓰는 자가 두려움을
느낀듯 부르짖었다.
[사태가 긴박하니 일단 물러섭시다!]
그러면서 도망치려고 문앞으로 뛰쳐나오자 호비는 왼쪽다리를 휘둘러 그를 땅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곧장 칼을 빼앗아 들었다.
묘인봉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착한 우리 보배야. 들어보아라. 이제 곧 번개가 칠거야.]
그러면서 주먹을 내지르자 철편을 쓰는 자의 아래턱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나
더니 마당으로 나가떨어졌다.
칼을 쓰는 다른 한 명은 무공이 제일 강한 듯 몸놀림이 민첩했다. 묘인봉이
잇따라 두 대의 주먹을 내질렀지만 모두 피해내는 것이었다. 묘인봉은 행여 어
린 딸이 놀랄까봐 의자에 앉아서 공격을 할 뿐 몸을 일으켜 쫓아나가지는 않았
다.
그 자는 비로소 묘인봉의 눈이 멀기는 했으나 자기로서는 도저히 그를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문입구를 지키고 있던 호비의 발놀림을 보고 호비
도 묘인봉처럼 지극히 무서운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 자는 자기가 독안에 든 쥐꼴이라는 것을 느끼고 순순히 죽을 때까지 기다
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별안간 그는 묘인봉에게 맹렬히 칼을 내려치며 묘인
봉이 몸을 피하는 순간 침실로 몸을 날렸다. 그러더니 그는 부싯돌로 불을 켜서
침대 위의 휘장에 불을 당기고 창문으로 뛰쳐나가 지붕 위로 올라갔다. 불이
붙은 휘장은 빠르게 타올라 눈깜짝할 사이에 짙은 연기가 방안에 가득찼다.
종조영이 문밖에서 부르짖었다.
[묘대협, 우리 삼형제는 당신과 무공을 겨루려 이렇게 찾아왔지만 결코 위태
로운 틈을 타서 습격을 하지는 않을 것이니 당신은 안심을 해도 좋을 것이외
다!]
종조문은 창문쪽에서 불길이 뻗쳐나오자 부르짖었다.
[아이고, 불이야. 불이 났어!]
종조능은 부르짖었다.
[비열한 놈들! 큰형님 우선 불부터 끄고 봅시다!]
삼형제는 일시에 지붕 위로 올라갔다. 호비는 종씨 형제의 무공이 뛰어나 방
금 네 명의 침입자보다 무공이 고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비는 묘인봉의
재간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이고, 품속에는 딸을 안고
있어 대적하기 힐들 것이니 자기가 침입자들을 쫓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윽
고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 몰염치한 간악한 자들아. 어디 한번 들어와봐라!]
어린 딸은 말했다.
[아빠! 더워요.]
묘인봉은 탁자를 밀어젖히고 발로 문짝을 걷어찼다. 문짝은 사오 장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리고는 딸을 안고 성큼성큼 문밖으로 나와 지붕 위에 있는 종씨 형제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내려와서 손을 쓰도록 하시지!]
묘인봉은 딸이 놀랄까봐 종씨 형제를 향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팔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역시 종씨 삼웅과 대적했었고, 상처를 입고 있었으며 오늘처럼 불이 났
었다. 다만 자기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딸이 아니고 처가 된 소저였다. 그녀는
위급해지자 먼저 도망쳐 나가고 말았으니.......
호비는 불길이 점차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을 보고 묘인봉은 한동안 지탱할 수
있을테니 불을 끄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부엌으로 달려들어갔다. 부뚜막
옆에는 큰 항아리가 세 개 나란히 놓여 있었고 마침 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호
비는 물항아리를 하나 끌어안고 대갈을 일성했다.
[이얍!]
오륙 백 근이나 되는 커다란 물항아리가 들려졌다. 물항아리가 너무 무거워
일류 고수의 경지에 도달한 호비라 하더라도 발걸음을 제대로 떼어놓을 수 없었
다. 그는 호흡을 멈추고 있는 힘을 다해 항아리를 안으로 던졌다.
불길은 커다란 항아리의 물이 끼얹어지자 사그러 들었으나 불길은 여전히 잡
히지 않았다. 다시 한 항아리의 물을 가져와 침실로 내던지려는 순간 갑자기 등
뒤에서 휙! 하는 소리가 일며 누군가 압습을 해왔다. 먼저 그에게 발로 차여
쓰러졌던 사람이 땅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어들고 그의 등을 내려친 것이었다.
호비는 양손으로 물독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칼을 막거나 피할 수가 없
어 급히 뒷발질로 걷어찼다. 이 발길질은 괴이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는 과거 염기가 마행공과 같은 유명한 무사를 제압할 때 구사했던 일초였
다.
호비는 뒷발질로 정확하게 그 사람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쿵! 하는 소리와 함
께 그 사람은 허공으로 솟구치며 호비의 머리를 지나 안고 있던 항아리 안으로
떨어졌다. 항아리만 들고 있어도 매우 힘겨웠는데 갑자기 백 오륙십 근의 무게
가 더해지자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순간 호비는 앞으로 항아리를 내던졌다. 물항아리가 깨져 그 사람은 온몸에
상처를 입었지만 다행히 불길이 잡혀 불구덩이 속에서 생화장 당하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불을 끄고 나서 묘인봉을 도와주려고 달려갈 때 갑자기 집 뒤에서 큰 소리로
외치며 욕하는 소리가 들렸고, 다시 주먹으로 치고 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
가 두 사람이 치열하게 결투를 벌이는 것이 분명했다.
호통치고 꾸짖는 소리는 바로 유학진의 목소리 같았다. 그는 악을 쓰듯 외쳤
다.
[이 간악한 도적같으니, 나를 그와 같은 속임수에 빠뜨리다니!]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누구하고 손을 쓰고 있는 것일까? 이 사람은 이번 일의 원흉이니 어찌 되었
든간에 그를 잡아야 한다.)
호비는 집뒤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유학진과 한 사람과 서로 치고받으며 맨손
으로 얽혀 싸우고 있었다. 그 사람의 신형으로 볼 때 바로 불을 지른 사람 같았
다. 호비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오늘 일은 정말 요상하구나. 이들 두 사람은 분명히 한 패거리인데 어째서
서로 치고받고 하는 것일까? 좌우지간 두 사람 모두 좋은 사람은 아니다.)
즉시 몸을 날려 대금나수법을 펼쳐 두 사람의 등뒤에 있는 요혈을 움켜잡았
다. 두 사람은 한창 결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호비에게 대항할 여지가 없었
다. 그렇지 않았다면 단 한번에 잡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문밖이 조용하여 혹시나 눈이 불편한 묘인봉을 종씨 형제가 독수를 펼쳐 화
를 입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비는 양손에 거머쥐고 있던 유학진과 그 사람을 옆에 있는 우물안에 던져넣
고 부엌으로 가서 커다란 항아리를 안아다가 우물위에 눌러놓았다. 그제서야 이
원수들이 꼼짝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앞쪽으로 달려갔다.
종씨 형제는 묘인봉과 칠팔 장의 간격을 두고 땅바닥에 내려 서서 마주보고
있었다. 각기 손에 판관필을 들고 있었으나 달려들어 손을 쓰지는 않았다.
호비는 급히 입을 열었다.
[묘대협, 제가 대신 아이를 안고 있죠.]
묘인봉은 자기의 눈이 이미 장님이 되어 버렸고 설사 눈앞의 종씨 삼형제를
물리친다 하더라고 대평천하무적수라는 별호로 인하여 원한을 맺은 사람들이 많
았기 때문에 자기의 눈이 멀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강적들이 다투어 달려올 것
이니 그때는 어떻게 다 대항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생
명을 부지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딸아이였
다.
묘인봉은 귀로 눈을 대신하고 있었지만 호비가 적을 제압하고 불길을 잡은 행
동이 날렵하고 깨끗한 것을 보고 누군지 모르지만 지혜와 용기를 고루 갖춘 사
람이라고 생각했다. 묘인봉은 이 사람과는 일면식도 없지만, 의리가 있는 사람
이니 그에게 딸을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물었다.
[실례하지만 자네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는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
호비는 지금 자기 부친이 정말 묘인봉의 손아래 죽었는지 아닌지 들먹인다는
것은 거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사내 대장부가 사귐에 있어서 중시하는 것은 의리이지요. 서로 마음과 마음
이 통하여 의기투합을 한다면 이름을 들먹이고 성을 들먹일 필요가 어디 있겠습
니까? 만약 묘대협이 나를 믿을 수만 있다면 불초는 몸이 가루가 나는 한이 있
더라도 영애(令愛)를 안전하게 보호하도록 하겠소이다.]
묘인봉은 힘주어 말했다.
[좋아! 이 묘인봉이 살아 생전 혼자서 왔다 갔다 했지만 한평생 사귄 친구는
꼭 두 사람이 있지! 한 사람은 요동대협 호일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성명을 알
수 없고 얼굴을 마주친 적도 없는 소형제, 바로 자네일세.]
그리고는 딸을 안아 내밀었다.
호비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었지만 혹시나 그가
부친을 죽인 원수라면 은호와 원수의 갈림길에서 실로 난처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자기 부친과는 한평생 사귄 유일한 친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호
비는 너무 기뻐서 두 손을 벌려 아이를 안았다.
그 여자애는 예닐곱 살 정도인데 무척 갸날퍼서 손에 안아도 편안히 잠이 들
어 있었고, 쎄근쎄근 나직이 숨소리를 내며 입가에는 하나 가득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종씨 삼웅은 호비가 이곳에 있고 또한 묘인봉과 주고받는 말을 듣자 모두 이
상하게 생각했다.
묘인봉은 옷자락을 찢어 눈을 싸매더니 뒷짐을 짚고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
었다.
[염치없는 간적들 같으니. 한꺼번에 덤비시지. 내 딸은 깊이 잠들었으니 큰
소리를 내서 깨우는 일이 없도록 하게.]
종조영은 한걸음 내딛더니 화를 삭이지 못한 음성으로 부르 짖었다.
[묘대협, 과거 내 제자가 당신의 손아래 죽었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당신에
게 따졌으나, 나중에 제자가 다른 사람의 무기를 욕심내어 좋지 못한 행동을 하
여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따라서 그 일에 대해서는 당신이 문호를
정리해 준셈이니 매우 고맙게 생각하는 바이오.]
묘인봉은 싸늘히 코웃음치며 말했다.
[말을 작게 하시지. 내 귀는 아직 멀쩡하오.]
종조영은 더욱더 노기가 끓어 올라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형제들은 그대가 다리에 상처를 입고 있었는데도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을 매우 원통하게 생각했었소. 그렇기 때문에 팔년간 고된 무공을 갈고 닦아
오늘 다시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것이오. 그런데 도중에서 간악한 사람이 당신
을 암산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형제들은 급히 달려와 전해주려고 했던 것이
오. 간악한 자들은 이미 떠나고 없으니 당신이 우리를 상대하던 안하던 그것은
당신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지만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욕을 하고 또 두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오? 설령 우리 삼형제가 아무리 못났기로서니 쳐다볼 가치도
없다는 것이오? 아니면 당신은 눈을 감고도 우리 세 형제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이오?]
묘인봉은 그의 말투로 보아하니 사정을 모르는 것 같아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눈이 멀었소.]
종조영은 깜짝 놀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럴 수가? 그렇다면 우리가 오해했었구려. 우리 형제들은 당신에게
가르침 받겠다는 일을 더 들먹일 필요가 없게 되었구려. 당신은 혹시 위타문의
유학진이라는 사람을 아시오? 좀 전에 당신이 물리친 사람 가운데는 그 자가 없
었소? 이 사람은 오늘이나 내일 안으로 틀림없이 찾아올 것이오. 묘대협은 눈이
불편하시니 그 자가 찾아오면 조심을 하셔야 할 것이외다.]
호비는 불쑥 입을 열고 물었다.
[나으리, 유학진이 독을 쓰려던 일을 당신들은 정말 모르고 있었던 일이오 ?]
종조영은 오히려 호비에게 반문했다.
[당신은 도대체 묘대협과 친구인가? 적인가? 우리들이 그 유학진을 저지하려
고 했을 때 자네는 어째서 그를 돕고 나섰나 ?]
호비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 일은 말하자면 매우 부끄럽게 되었소이다. 그 가운데 사정이 복잡하여 소
제로서도 도대체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겠소이다. 다행히 그 유학진을 소제가
붙잡아 우물 속에 가두어 놓았으니 그에게 물어보면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것이
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묘인봉에게 다시 말했다.
[종씨 삼형제는 도대체 좋은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까?]
종조문은 냉랭히 말했다.
[우리들은 의협의 일을 행하지 않았고 또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묘인봉은 그 말을 받아 말했다.
[종씨 삼웅은 결코 비열한 소인배가 아닐세.]
종씨 삼형제는 묘인봉의 말을 듣고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한 마디의 칭찬이
지만 그들에게는 영광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삼형제는 추악한 얼굴에 감격
에 찬 표정을 지었다.
종조문과 종조능 두 형제는 집뒤로 돌아가 우물 위에 올려놓은 항아리를 내려
놓고 호통을 내질렀다.
[썩 나와라! ]
그러자 우물 안에서는 끙끙거리는 두 사람의 음성이 들렸다. 펑! 소리가 나고
또 다시 퍽! 하는 소리가 울리며 첨벙첨벙! 소리가 들렸다. 그들 두 사람은 목
숨을 걸고 서로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우물은 한 사람이 몸을 돌리기도 거북한 형편인데 두 사람이 서로 몸을 맞
대고 손찌검을 하고 있으니 낭패한 꼴은 가히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조문은 두레박을 내려뜨리고 호통을 내질렀다.
[두레박을 잡으시오. 내가 당신네들을 끌어올리지.]
곧이어 줄이 바짝 당겨지자 두레박을 끌어올렸다. 잠시 후 물에 흠뻑젖은 두
사람이 끌려나왔다. 유학진은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일장을 들어 자기와 함께
우물 속에 들어갔던 사람을 후려 쳤다.
그 사람은 유학진에 비하여 무공이 뒤떨어져 우물 안에서 많은 고통을 당해
물을 잔뜩 마신 까닭인지 거의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종조문은 유학진의 일장이 상대의 목숨을 빼앗을 것 같아 재빨리 손을 뻗쳐
막았다. 그러자 종조능은 한쌍의 판관필을 나누어 두 사람의 등에 들이대고 호
통을 내질렀다.
[살고 싶으면 움직이지 마라!]
두 형제는 그들 두 사람을 잡아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호비는 어린애를
묘인봉에게 넘기고 촛불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침실은 불에 타서 엉망이 되어
있었고 곳곳이 물바다라 제대로 발디딜 틈도 없었다.
묘인봉이 딸을 상방(廂房)의 자기 침대 위에 눕혀놓고 되돌아 오자 종씨 형제
가 유학진과 다른 한 명을 잡아 들어오고 있었다. 묘인봉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
며 입을 열었다.
[위타쌍학(韋陀雙鶴)의 명성을 나는 이미 십년 전에 들은 바가 있소이다. 유
사형과 만사형 두 분은 강호에서 명성이 나쁜 편이 아니지 않소 ?]
유학진은 말했다.
[나는 간악한 자의 속임수에 넘어가 후회막급이외다. 당신, 눈에 입은 상처는
심하오?]
종씨 삼형제는 일제히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묘인봉의 눈에 상처
를 입은 것이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인 줄 모르고 있었다.
묘인봉은 대답을 하지 않고 칼을 썼던 사람에게 말했다.
[자네는 전귀농의 제자이지? 천룡문의 무공도 이제는 경지에 이르렀더군.]
그 사람은 혼비백산하며 두 무릎을 꿇고 연신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묘대협, 소인은 명을 받아 심부름을 해야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었으니 어르
신께선 아무쪼록 고귀한 손을 더럽히지 않도록 용서를 해주십시요.]
그러더니 갑자기 왝왝! 하며 물을 토해내었다.
그리고는 욕을 했다.
[이 간악한 도적아. 네가 나를 속였겠다!]
유학진은 다시 달려가서 손을 쓰려고 했다. 종조영이 손을 뻗쳐 막으면서 말
했다.
[좋게 말로 합시다.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오?]
유학진은 다른 사람의 속임수에 넘어가 낭패한 나머지 자제를 하기가 어려웠
던 모양이었다. 종조영이 맘을 가로막자 유학진은 이미 잘못은 저질러졌고 우물
에 던져져 이렇게 낭패한 꼴이 된 것은 평생 처음 겪는 수모인지라 눈앞이 캄캄
해져 땅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만 둡시다. 그만 둡시다. 묘대협, 당신에게 정말 미안하게 되었구려.]
묘인봉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한 사람이 한평생 동안 소인배에게 기만당하는 것은 면하기 어려운 일이며
대수로운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외다. 틀림없이 이 사람이 당신을 속여 나에게
편지를 전달하도록 했겠구려.]
그는 두 눈이 중독되어 멀다시피 했지만 말은 여전히 품위가 있고 여유가 있
었다. 호비와 종씨 형제들은 모두 탄복해마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인품은 어느
누구도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라고 생각했다.
유학진은 괴씸하다는듯 말했다.
[이 자는 풍엽장에서 알게 되었지요. 그는 장비웅(張飛雄)이라고 자칭했으며
이전에 만사제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만사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조의를 표하러 왔다고 하더군요.]
묘인봉은 물었다.
[만학성 노사가 죽었소이까?]
유학진은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이 장가 놈의 말이 간곡하고, 나와 사귀고자 하는 뜻이 간절한
것을 보고 의심하지 않고 두 사람이 짝을 지어 북쪽으로 올라오게 되었소이다.
이 자는 도중에서 종씨 삼웅을 만날 것 같다며 몹시 두려워하면서 어느 날인가
객점에서 같이 묵을 때 그가 잠꼬대로 그 편지를 전해주지 못한다면 무수한 지
사(志士)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는 말을 했소. 나는 이 일을 수수방관 할 수 없
다고 생각하고 슬쩍 그에게 알아보았죠. 그런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었소이다. '유노사, 저는 당신이 조정의 시위를 괴롭히는 것을 보고 대단한 영
웅호걸이라는 생각이 들었소. 그러니 더 이상 속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요.' 그리고 편지 한통을 꺼내더니 필히 금면불 묘대협 손에 전해줘 그가 친히
나서서 대책을 강구하도록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수십 명의 지사들이 조정의 박
해를 받아 죽게 된다는 것이었지요....]
묘인봉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유학진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 장가라는 간적은 다시 종씨 삼웅은 묘대협과 원한이 있으니 반드시 그들
을 중도에서 막아야 한다고 했지요. 자기는 종씨 삼웅의 적수가 되지 못하니
나보고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소이다. 이번 일은 의리로 볼 때 도저히 사양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즉시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소이다. 도중에 종씨 삼웅과 손을
쓰게 되었고, 이 늙은이는 그만 크게 당하고 말았소이다. 나중에 나의 안사람
왕씨가 달려와 도왔으나 여전히 적수가 되지 못했지요. 그러다가 상비신사에서
이 분 소형제를 만나게 되었구려. 나는 풍엽장에서 그에게 도움을 받은 바가 있
고 무공이 고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리하여 우리 부부는 거짓으로 상
처를 입은 척하고 술수를 써서 그로 하여금 종씨 삼웅을 쫓도록 했지요. 이 분
소형제는 나의 속임수에 말려든 꼴이지만, 나 또한 이 간악한 도적의 속임수에
걸려들고 말았구려.]
그리고 나서 두 눈을 부릅뜨며 수염과 머리카락을 부르르 떠는 것이 치미는
분노를 좀처럼 억제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호비는 묵묵히 그의 말을 되새기며 생각해 보았다.
(이 사람의 말은 거짓인 것 같지 않구나. 그렇다면 원소저와 내가 길을 오는
동안 겪었던 일을 유학진이 모두 보았다는 말이 아닌가? )
이러한 생각이 들자 얼굴이 약간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호비는 짐짓 탁자
위에 놓여있는 세 가지 무기를 가리키며 유학진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종씨 삼웅의 무기를 가지고 이곳으로 온것은 무엇 때문이지
요 ?]
유학진은 그 말을 즉시 이어 받아 설명하듯 말했다.
[종씨 삼웅이 달려와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을 묘대협이 알고 있으리라고는
볼 수가 없었소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그에게 전갈을 하여 묘대협으로 하여금
방비를 하도록 할 참이었으며 이 무기를 가지고 온 것은 묘대협에게 믿음을 얻
자는 생각이었소이다. 그리고 이 편지를 종씨 형제가 준 것이라고 말한 것은 소
형제가 들으라고 한 말에 지나지 않소이다. 나는 소형제가 바짝 뒤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형제가 나에게 불리한 행동을 할까봐 그와
같이 말을 한 것이오. 소형제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면 경솔하게 손을 쓰지
못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외다. 어찌됐든 간에 묘대협이 이 편지만 보면 모든
것을 알아차리라고 생각했는데......어처구니 없게도......]
유학진은 가슴이 막혀오는 듯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종조영이 입을 열었다.
[우리 형제들은 우연히 장가의 간악한 계책을 듣게 되었고 또한 유노사가 그
와 궁싯거리는 것이 틀림없이 묘대협을 암산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
력으로 저지했던 것이외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안에 이토록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구려. 묘대협, 당신 두 눈은 정말 상처를 입은 것이오?]
묘인봉은 대답하지 않고 솥뚜껑같은 큰 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과거는 과거! 지나간 일은 더 거론할 필요가 없소이다.]
호비는 눈을 들어 사방을 살피며 묘인봉이 찢었던 편지지를 찾으려했다. 한
모퉁이에 두 조각의 찢어진 종이가 떨어져 반은 물에 젖어 있었다. 아직도 극
독이 남아있을지 몰라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았다. 종이 위에는
호두알 크기만한 글씨가 세 줄 적혀져 있었다. 그의 시선은 찢어진 두 조각의
종이 위를 오락가락하며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인봉형 보시압(...... 영애는 너무나 총명하고 귀엽습니다. 하지만 형은 한
낱 무사에 지나지 않아 서로 함께 지낸다는 것은 불편할 뿐만 아니라, 영애의
교양을 그르칠 우려가 있소이다. 이에 이 아우가 부양할 수 있게끔 사람을 보냅
니다. 아우 전귀농 돈수(頓首).>
묘인봉은 딸을 자기 생명보다 더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전귀농이 그의 처
를 유혹해서 몰래 도망쳤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딸아이마저 빼앗아가려 하는
데 어찌 묘인봉이 노하지 않겠는가? 화가 나서 보자마자 바로 찢어버린 것이었
다.
편지지는 종이를 두 겹 붙여 만든 것인데 그 독약은 종이 사이에 들어있다가
편지가 찢어지자 즉시 날리게 되었던 것이다. 제 아무리 솜씨가 빠른 사람이라
하더라고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전귀농의 이와 같은 계책은 무섭기 짝이 없었다.
호비는 옛날 상가보에서 만났던 묘인봉과 묘부인, 그리고 어린 딸과 전귀농
네 사람 사이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러자 당장이라고 전귀농을 찾아가서 한 칼
에 그를 죽였으면 속이 시원할것 같았다.
유학진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장가야! 네 놈은 사부의 명을 받고 묘대협을 암산하려고 했다면 네 스스로
편지를 갖고 올 일이지 어째서 이 유가를 꼬셨느냐?]
장비웅은 더듬더듬 말했다.
[저는..... 묘대협이 천룡문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 경계를 할까봐......두려
웠지요...... 그리고......묘대협의 위세가 두려워서......]
유학진은 증오에 찬 어조로 말했다.
[너는 간계가 탄로나게 되면 도망치지 못할까봐 나를 끌어들였구나. 아니 이
런, 이런 녀석!]
그러면서 고게를 돌려 묘인봉에게 말했다.
[묘대협, 그는 묘대협에게 부탁할 일이 하나있소. 이 녀석을 나에게 넘겨주시
구려!]
묘인봉은 천천히 말했다.
[유노사 이런 소인배와 똑같이 행동할 필요는 없소이다. 장비웅, 너의 두 동
료가 마당에서 부상을 입고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가도록 하거라. 그리고 자네
는 자네 사부에게 가서 말하게....]
묘인봉은 무슨 말을 할까 생각을 해보는듯 하더니 생각하던 것을 그만두고 손
을 내저었다.
[뭐 달리 할 말도 없구만, 자네는 가 보게!]
장비웅은 묘인봉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리라고 생
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묘인봉이 넓은 아량으로 자신을 용서해주자 감격한 나머
지 즉시 무릎을 꿇은 채 연신 큰절을 올렸다.
장비웅은 원래 세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들의 계획은 묘인봉의 눈을 멀게 한
후 그를 죽이고 그 딸을 잡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호비와 같은 고수가
나타나는 바람에 그들의 독계는 일단계만 성공하고 만 셈이었다.
호비에게 침실로 내던저져 항아리에 상처를 입은 자는 이미 어지러운 틈을 타
서 도망을 쳐버렸고, 묘인봉이 삼절곤과 주먹으로 상처를 입힌 두 사람은 충격
이 매우 심해 한 사람은 아직도 기절해 있었고 다른 사람은 나직이 신음을 하며
몸을 꿈틀대고 있었다.
유학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묘인봉이 이들 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거짓일 것이다. 나중에 어떤 독계를
써서 이 자들을 괴롭히려는 것일까?)
강호의 사람들이 적을 제압한 후 즉시 죽이지 않고 희롱할대로 희롱한 후 죽
지도 살지도 못할 상태에 이르러서야 처치하는 사례들를 많이 보아왔다.
장비웅이 상처를 입은 사제를 부축해 한 걸음 한 걸음 문밖으로 걸어나가 점
차 사라졌다.
유학진은 세 사람이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
을 열었다.
[묘대협, 이제는 잡아오시구려. 그 장가라는 녀석은 몸놀림이 빨라 조금만 더
멀리가게 놓아 두었다가는 정말로 도망치고 말 것이외다.]
묘인봉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용서했는데 그들을 다시 잡아와서 무엇하겠소......]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들은 나와 일면식도 없는 처지이고, 그들은 단지 심부름을 온 것 뿐이외
다.]
유학진은 놀람과 부끄러움에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
[묘대협, 이 유학진은 평소 남을 저버린 적이 없소. 그런데 오늘은 눈이 있어
도 눈알이 없는 꼴로 그대에게 적지 않은 누를 끼쳤구려.]
그리고 나서 왼손을 쳐들더니 식지와 중지를 뻗쳐 자기의 눈을 찔렀다. 호비
는 순간 재빨리 몸을 날려 막으려 했으나 한걸음 늦고 말았다. 순간 유학진의
얼굴에 두 줄기의 선혈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스스로 두 눈을 찔러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광경을 본 종씨 형제는 깜짝 놀라 일제히 벌떡 일어섰다.
묘인봉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유노사, 이럴 필요가 뭐 있소? 불초는 조금도 탓할 마음이 없었다오.]
유학진은 껄껄 웃으며 팔을 휘두르며 큰걸음으로 성큼성큼 문밖으로 걸어나가
나무가지를 꺽어 땅을 짚으며 떠나갔다. 잠시 후 한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
다. 바로 그의 처인 왕씨 부인의 음성이었다.
집안에 있던 다섯 사람들은 모두 참담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유학진이라는 사
람이 이렇게까지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묘인봉은 호비도 자책감을 느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소형제, 자네는 나의 딸애를 돌봐준다는 약속을 잊어서는 안되네.]
호비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가슴을 펼치며 말했다.
[잘못을 저지르면 응당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대책을 세워야 하지요. 유노
사가 스스로 자신의 지체를 훼손한 것은 설사 자기의 마음이야 편할런지 모르지
만 일을 처리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지요.]
종조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기는 하네, 하지만 유노사 역시 쟁쟁한 호걸이라 할 수 있네!]
다섯 사람은 한참동안 말없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한참 후 호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묘대협, 눈은 좀 어떻소이까? 다시 한번 물로 씻어보시지요.]
묘인봉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네. 다만 통증이 너무 심하군.]
그러더니 몸을 일으키며 종씨 삼형제에게 말했다.
[세 분이 멀리서 오셨는데 대접할 것이 없어 정말 소홀한 점이 많소이다. 나
는 안으로 들어가 좀 누워야겠으니 너무 탓하지 마시구려.]
종조영은 입을 열었다.
[묘대협, 편한대로 하십시요. 예를 차릴 필요는 없소이다.]
세 사람은 손짓을 하더니 나누어 앞문과 뒷문을 지켰다. 그들은 전귀농이 이
대로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사람을 보내 습격을 해올 것을 대비했다.
호비는 손에 촛불을 돌고 묘인봉을 따라 상방으로 들어가 묘인봉이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이불을 끌어당겨 그에게 덮어주었다.
그의 어린 딸은 침대 안쪽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밤새도록 집안이 발칵 뒤
집히는 소란이 있었지만 여전히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호비가 상방에서 물러나오는 순간 갑자기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며 그 누가 급
히 달려오는 기척이 들렸다.
종조능이 호통읕 내질렀다.
[이 녀석, 또 왔군!]
곧이어 창! 하는 소리가 나면서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장비웅의 음성이 크게 들렸다.
[나는 묘대협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온 것이고 악의는 없습니다.]
종조능은 나직이 말했다.
[묘대협은 잠이 드셨으니, 할 말이 있다면 날이 밝은 이후에 하게.]
장비웅은 말했다.
[좋소이가. 그렇다면 내가 당신에게 말씀을 드리지요. 묘대협께서 대인대의
(大仁大義)로 나의 목숨을 용서해주셨는데 이 한 마디 말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묘대협의 눈에 들어간 독은 바로 단장초(斷腸草)의
분말로서 저의 사부님이 독수약왕(毒手藥王)에게 얻어온 것이지요. 소인이 길을
가며 생각을 해보니 독수약왕에게 부탁하면 그 독을 해소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렇게 달려온 것이외다. 본래 제가 스스로 그 해약을 구해야겠지만 소인
은 무명소졸이라 결코 해낼 능력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
다.]
종조영은 아! 하고 신음소리를 냈고 곧이어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지며 장비웅
이 몸을 돌려 떠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호비는 그 소리를 듣자 기뻐하며 상방에서 달려나와 큰소리로 물었다.
[그 분 독수약왕은 어디에 사는가요?]
종조영은 대답했다.
[동정호(洞庭湖)의 호반에서 은거하고 있네. 하지만..... 하지만......]
호비는 물었다.
[왜 그러시죠?]
[그 괴인(怪人)에게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노릇이 아닐세.]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모셔와야 합니다. 그가 요구하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면 될 것 아닙니까?]
종조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문제는 그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일세.]
호비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좋은 말로 사정을 해서 않될 때는 완력으로라도 상대를 해야지요.]
종조영은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비는 입을 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으니 소제는 이대로 출발하겠소이다. 세 분은 이곳
에서 적이 다시 침입하면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상방으로 달려 들어가 묘인봉에게 말했다.
[묘대협, 내가 당신을 위해 의원을 모셔오겠소이다.]
묘인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독수약왕을 찾아가자는 것인가? 괜한 헛고생만 할테니 갈필요 없네.]
호비는 힘주어 말했다.
[아닙니다. 세상에 안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호비는 다시 상방에서 달려나와 종씨 삼웅에게 말했다.
[세 분 나으리, 그 독수약왕의 함자는 어떻게 됩니까?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어떻게 가야 하나요?]
종조문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좋아, 내가 함께 갔다오도록 하지! 그 사람에 관한 일은 우리 길을 가면서
천천히 다시 얘기하도록 하세.]
그리고는 종조영과 종조능 두 사람에게 말했다.
[큰형, 둘째와 이곳을 지켜주시구려.]
종조영과 종조능 두 사람은 안색이 굳어지며 두려운 빛을 띠었으나 이윽고 이
구동성으로 말했다.
[부디 몸조심 하게나.]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 호비와 종조문 두 사람은 경신법을 펼쳐 북쪽을 향하여
질주했다.
날이 밝은 이후에 그들은 고을에서 말 두필을 구입하여 다시 끝없는 북쪽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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